조셉 애거시 Jos eph Ag as si 저자는 현재 캐나다의 요크 대학교와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초빙되어 기술사회학 및 기술철학 강의를 맡고 있다. 애거시 교수는 이 책 의에도 이미 Faraday as a Natu r al Ph il oso p her(l971) 와 Scie n ce and Socie ty : Selecte d Essays in the Socio lo g y of Scie n ce (1981 ) 그리고 The Gentl e Art of Phil oso p hi c a l Polemi cs (1986) 등의 저서를 통하여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우리의 반성과 자각을 일깨우1 주고 있는 석학이다.
현대문명의 위기와 기술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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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편집자 서문 • 9 감사의 글 •11 저자 서문• 13 서론 - 21 1. 통제 일반 • 22 2. 일반적인 민주적 통제 • 26 제 1 부 : 기술과 문화 • 31 제 1 장 기술과학문 - 33 1. 기술과 과학 • 34 2. 비누적적인 기술 • 41 3. 기술을 정의하는 일 • 49 4. 기술사회를 대비한 교육 • 56 5. 맺는말 • 62 제 2 장 기술과 예술 - 63 1. 보증 • 64 2. 직관 • 71 3. 반복성 • 75 4. 사회적 기술 • 80 5. 맺는말 • 89제 3 장 기술과 사회 - 91
1. 민주주의는 진정으로 필요한가? • 92 2. 대규모적이고 장기적인 기술연구 프로젝트 • 98 3. 단기 인공두뇌공학 • 109 4. 기술관료주의의 추악한 얼굴 • 118 5. 맺는말 • 124 제 2 부 : 기술과 철학 • 127 제 4 장 미신적 기술과 과학적 기술 - 129 1. 과학적 견해 : 베이컨주의 • 129 2. 인류학적 견해 : 기능주의 • 135 3. 형이상학적 견해 : 신앙주의 • 142 4. 역사적 견해 : 과학적 혁명 • 148 5. 맺는말 • I53 제 5 장 합리적 인간의 이상 - 155 1. 베이컨적-데카르트적 이상 • I56 2. 이상화 대 이상 • 163 3. 합리적 인간을 위한 교육 • 170 4. 합리적 인간의 개인주의 • l76 5. 맺는말 • 182 제 6 장 실용주의자들의 혼돈 - 183 1. 관용의 이론과 실제 • 184 2. 관용의 철학적 기초 • 189 3. 진리의 정의 • 194 4. 이상으로서의 진리 • 199 5. 맺는말 • 206제 7 장 실용주의 철학과 기술과의 관계 - 208
1. 생활철학 • 209 2. 전통적 철학 • 216 3. 실용주의 과학철학 • 221 4. 실용주의와 의미 • 225 5. 맺는말 • 231 제 8 장 명상철학과 기술과의 관계 - 233 1. 과학과 합리적 기술 • 234 2. 반복성 대 신뢰성 • 241 3. 과학과 상식 • 244 4. 형이상학적 체계 • 250 5. 맺는말 • 258 제 9 장 사회철학과 기술과의 관계 - 261 1. 행위에 있어서 환원주의 • 262 2. 오류, 죄, 그리고 낙관주의 • 270 3. 사회이론과 사회행동 • 277 4. 과학과 기술의 사회적 구조 • 283 5. 맺는말 • 289 제 10 장 정치철학과 기술과의 관계 - 290 l. 행위에 있어서 정치학의 정당화 • 291 2. 현대 자유주의의 정치적 부적합성 • 296 3. 정치이론과 정치행위 • 305 4. 괴물로서의 기술관료 • 310 5. 맺는말 • 315제 3 부 : 인간의 행위에 대한 반성적 고찰 • 3l7
제 11 장 보다 나은 미래의 모습 - 319 1. 실제적인 문제의 이론에 대하여 • 320 2. 민주주의, 대화와 책임 • 328 3. 준(準) 이상향의 모습 • 337 4. 평화로운 세계의 모습 • 342 5. 맺는말 • 347 제 12 장 급속한 민주화에 대한 기술 - 348 1. 사회기술과 기술윤리 • 349 2. 연구 유인책과 평가이론에 대하여 • 355 3. 민주적인 대중운동의 이론에 대하여 • 362 4. 책임 있는 민주적 지도력 이론에 대하여 • 370 5. 맺는말 • 382 역자 해제 • 385 역자 후기 • 393 찾아보기 • 395편집자서문 이 책은 기술철학 및 기술사회학t he phi l os op hy and socio l og y of tech nology 분갸 선구자들 중의 한 사람에 의한 이 분아의 빛나는 업적이 다. 기술철학 및 기술사회학은 비교적 새로운 분야로서 아직 충분히 활성화 되고 있지는 않다. 18A i l 기 중반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아직도 · 결코 끝나지 않았다. 기술이 자본과 더불어 산업혁명의 원동력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우리에게 놀라움을 안겨다준다. 기술철학 및 기술사회학이 소홀히 되고 있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주요 한 요인에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많은 학자들이 과학과 기술을 혼동함으로써, 이것들 중의 어느 하나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두 가지를 다 다루고 있다고 믿고 있다. 둘째,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술이란 용 어의 개념이 다양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죽, 그들은 전통적인 수괴는 달리 현대 기술은 과학을 전제로 하며, 홍미를 끄는 개념적인 문제들을 제시하는 연구, 설계, 그리고 계획둘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해하지 못하고 있다. 셋째, 육체노동의 성격을 갖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학 자들의 전통적인 경멸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지난 수년 동안에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변화는 부 분적으로 이 책의 저자인 애거시 Ag ass i 교수의 여러 저술의 영향 때문이다. 또다른 면으로 기술은 홍미있는 많은 철학적인 문제들을 전제로 하며 또한 그러한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 그리고 기술자들은 기초과학자들과는 달리 그들의 고용주와 일반시민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역설해 오고 있는
다른 몇몇 학자들의 영향 때문이다. 사실상 기술철학 및 기술사회학 분야는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이 분야의 전문적인 학회들과 학술지들이 생겨났 고,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약 2000 개 정도의 강좌가 전 세계적으로 개설되어 있다. 기술철학 및 기술사회학에 대한 강의에서 교수나 학생들이 당면하고 있 는 주된 문제는 이 주제에 관한 좋은 교과서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 책은 세계의 여러 곳에서 지난 20 년 동안 연구하고 강의한 결과의 산물로서, 기 술의 철학적 • 사회학적 측면에 관한 어떤 강의에도 적절한 교과서이다. 또 한 명료하고 정확한 태도로, 그리고 전문적인 학술용어를 가능한 한 피하 면서도 기술의 철학적 • 사회학적 측면을 광범하게 다루고 있다. 애거시 교수의 이 책은 인간 창의성의 산물이며, 지구를 좋은 방향으로 또는 나쁜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인 현대 기술에 대한 충 실하고 분명한 상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비록 반대 감정이 병존 하기는 하지만, 결코 사회적으로 중립적일 수는 없는 하나의 문화적인 힘, 죽 〈기술에 대한 민주적 통제只룹 옹호하는 하나의 감동적인 탄원이기도 하 다. 캐나다 맥길 대학교 과학철학과 마리오번지
감사의글 나는 주디스 부버 애거시 Ju dit h Buber Ag as si 와 함께 이 책의 주제와 이 것에 관련된 주제들에 관하여 많은 토론을· 하였다. 그녀가 나에게 노동의 사회학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감히 여기에 제시된 개요의 중요한 일부분 울 만들 수 있었다. 그녀는 또한 마리오 번지 Mario Bung e 와 잘비 I. C. Ja rvie 가 했던 것처럼 부족하기 짝이 없었던 이 책의 초고를 읽고 많은 격려의 논 평, 수정 그리고 여러 가지 제안을 해주었다. 마크 그린버트 Mark A. Greenber t도 초고를 자세히 읽고 매우 가치있는 편집수정과 제안들을 해주 었다. 이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의 제 3 장 3 절은 『 헤브류백과사전 』 에 있는 〈인간두뇌공학 cyb e rneti cs > 의 항목에 근거한 것이고 그 글은 내가 고집해서 내 서명 없이 출판된 것 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그 백과사전의 한 편집자가 유명한 어떤 철학자에게 서 따온 유익하지도 않은 인용구 하나를 저자의 승락도 없이 삽입했다는 사 실을 밝혀둔다(유감스럽게도 유명한 사상가들에 관한 인용은 단순히 정당 화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제 9 장은 Meth o dolog y and Scie n ce 17, pp. 1-24 에서 발표한 글을 재수록한 것 0] 다. 제 10 장은 Research in Phil oso p hy and Technolog y 7, 1984, pp. 193 - 210 에 발 표된 글이다. 제 12 장 3 절은 10 장과 같은 학술지의 제 1 권(1 978) 의 pp. 53-64 에 근거하
고있다. 재수록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이 학술지의 편집자들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 조셉 애거시
저자서문 어느 사회든지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수단과 다양한 사회 • 정치 적 기관의 도움을 받아서 그 기술을 통제한다. l 앙1 l 기 계몽주의 사상가들~본 기술을 자연과학의 특이하게 수준 높은 한 응용 형태로 간주하였으며 공교 롭게도 기술에 대한 여러 전통적인 사회통제를 포함하여 모든 전통을 무시 하였다. 아담 스미스가 각 기업들이 (정부가 아니라)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기 계를 통제해야만 하며 그리고 상품의 전반적인 통제가 자유시장 개방원리 를 통해 소비자들 각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그 당시 의 시대정신을 표현한 것이었다. 19 세기에 계몽주의 운동에 반대하는 사상 가들은 산업화가 야기하는 부정적 측면들을 강조하였으며, 전통과 자치적인 공동생활의 존속을 요구하였다. 칼 맑스는 한 사회의 기술발달 단계는 곧 그 사회의 정치적 • 사회적 구조를 결정짓는 유일한 기본 요소.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는데, 이것은 곧 대부분의 현대 사상가들의 견해보다 더 영향력 있 게 되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사회적, 물리적 기술을 다양한 만족의 정도에 따라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보는 하나의 새로운 견해가 나타나고 있다. 이 책도 이러한 새로운 견해를 더욱더 체계화하는 데 일조를 하기 위하여 집 필되었다. 인간과 기계를 만족할 만한 정도로 통합하기 위하여 우리는 사회 적 • 물리적 기술을 대등하게 조정하고 조화시키는 새로운 종류의 기술을 필 요로한다. 여러 가지 기술들, 특히 농업과 관계된 기술들은 그 기술을 적절하게 동 제할 수 없었던 그러한 사회들을 파괴시켰다. 오늘날 기술은 인류를 파괴하
려고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새로운 기술은 중요하고 긴급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이 책이 가장 중점적으로 디루고자 하는 것은 기술에 관련된 정치적 측 면이다. 우리는 기술 사용의 정책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단행하여야 하 며, 앞으로는 기술의 물리적인 측면에 대한 강조를 줄이고 이것의 사회적인 측면에 대한 강조를 보다 강화해야만 한다. 바꾸어 말하여 어떤 새로운 종 류의 기구를 새로이 도입하는 것보다 기존 체제의 조직을 변화시키는 것을 더 선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술혁신이 사회에 미치는 부작 용을 연구해야만 하고, 그 기술혁신이 바람직한 것인가 아닌가를 연구하여 바람직하지 않다면 그것에 관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한다. 그러한 결정들이 바로 정치적인 것이다. 따라서 주요한 정치적인 질문은 어 떤 정치적 기구가 그러한 통제력을 행사해야만 하는가이다. 이 책에서 밀하는 정치란 솔직히 민주주의적 정치 형태를 말한다. 여기서 는 민주적인 통제를, 그리고 더 나아가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대중의 폭넓은 참여를 선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당면한 과제는 때가 너무 늦 기 전에 (만약 이미 너무 늦지 않았다면) 특제의 민주화를· 실현시켜야 한디는 것 0] 다. 이 책에서 말하는 민주화란 어떤 다른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드시 교 육을 통한 민주화를 말한다. 죽, 교육을 능가할 수 있는 더 빠른 지름길은 없다. 정말로 아득한 옛날부터 기술의 주요한 공헌은 더 많은 여가시간과 여러 가지 교육적인 기회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반(反)기술적인 경향을 가진 사상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 사상이 반동적일 뿐 아니라 비실제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존하는 기술의 재난 과 싸우는 데 있어서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새로운 것을 필요로 한다. 대중 매체 수단의 이용을통하여 대중f동을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민주주의를 위한 신속한 대중교육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입법부에 압력을 가하여 기 술을 민주적으로 통제할·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입법화하게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일단 민주주의를 보다 많은 시민들이 교육을 통한 정치적 과정에 참여하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정치에 관한 지식과 정보의 보급이 민주주의
에서는 필수적인 것이며, 동시에 정보(지식 )의 보급과 이것에 대한 민주적 인 통제를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즉시 현대 정치생활의 무서운 위기, 소위 말하는 신뢰의 결여, 즉 거짓말쟁 이가 되지 않고는 정치에서 성공할 수 없디는 만연된 가치관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민주주의를 소중히 하고 인류의 미래를 만주적인 생활방식의 생 존에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의 최우선의 관심사는 신뢰성의 결 여 0] 다. 이 책의 주요 내용예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두겠다. 이 책에 있는 논의는 이러한 주요 내용과 이것에 관련한 역사적 • 철학적인 배경에 관한 것이고, 그리고 우리 사회에 있어서 부적절한 연구로 민주주의의 장점을 평가절하 하는 연구가 어느 것인지를 토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대규모의 기술을 디루는 여러 기관의 조직에 관한 것이다. 기술조직 분야t he field of the orga n i za ti on of t echnolo gy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은, 이 분야 안에 있는 여러 질문들에 관한 어떤 편견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복잡함을 피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이 분야에 대한 조악(祖惡)한 묘사와 이것의 현재 주요 활동들을 제시하고 그런 다음 자신의 좀더 세련된 견해로 옮겨갇 것이다• 이때 만약 그 조악한 묘사가 피 해질 수만 있다면 그 견해가 포함하고 있는 여러 편견들은 좀더 명료해질 수도 있을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기술철학에서의 논쟁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기술 적안 사회에 관한 것이다. 현재의 기술철학은 다음과 감은 질문들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기술은 어느 때 과학적인가? 기술은 어느 정도 자연과학 에 의존하는가? 어떤 주요한 기술적인 문제들의 해결에 최상으로 도움이 되 는 사회적 조직은 무엇인가? 오히려 현재의 기술철학은 다음과 같은 질문 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기술은 인류에게 좋은가 아니면 나쁜가? 우리가 우리의 여러 기구에 대한 통제를 상실한 적이 있는가? 기술이 번성하도록 만드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대체로 현재의 기술철학은 찬성파와 반대파, 죽 낙관주의파와 비관주의파 의 두 파로 나뉜다. 나로서는 이 두 학파 모두 이론적인 질문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유해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인류는 모든 기술을 절대적으로 포기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포가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그리고 분명히 일부 기 술들은 모든 사회에서 금지되어 있다. 그리하여 문제는 어디에, 어떻게 경 계선을 그어야 하는가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대체로 두 가지의 지배적인 진보주의적 견해가 있는데, 둘 다(우연히도) 극도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고, 정치적 무기력의 철학에 바탕을 둔 반감에서 비롯된 자신의 정치학을 선전한다. 여기서 정치 적 무기력의 철학은 사회적 또는 기술적 역사결정론이라고 하는· 사변적 생 각(역사적 불가피성의 원리 )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그룹(학파) 중 한 그룹은 기술을 꽃 피우게 하기 위한 체제로서 지본주의체제를 찬양한다 . 자 본주의체제는자유롭고경쟁적인시장경제에 대하여 최대로지지해 주는것 울 선호한다.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우익 급진주의자라고 알 려져 있다. 다른 한 그룹은 자본주의체제와 반대적인 맑스주의를 찬양한다 . 맑스주의자들은 좌익 급진주의자들로 알려져 있다. 두 집단 모두 소위 말하 는 군산복합체 the mi litar y- ind ustr ial comp le x 형태로 그리고 다국적기업 형 태로 부의 집중을 통하여 거대한 정치적 영향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선언한다一一이 대규모조직(기업)들은현대의 산업화된 세계를지 배하며, 분명히 정치적인 행동을 위해서 설립된 것은 아니면서 그 일에 종 종 달갑지 않게, 그리고 근시안적인 생각을 가지고 간섭한다(비록 이 대규모 기업들에 대해서 비록 한 집단은 숭배하고 다른 집단은 증오하고 있는 것이 사실 이지만). 이 두 사상은 그들이 현대사회의 강력한 전통적인 사상들에 의해 키워졌 고 매우 잘 알려져 있으며, 그리고 그들은 확실히 전 세계적인 위험을 만들 고 가까운 미래에 인류를 파괴하는 과정에서 도구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 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의심할 바 없이 반(反)기술적인 학파 인 비관주의자들의 세계는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로 나뉘어 있고, 환 경의 오영, 인구폭발(특히 가난한 나라에서 ), 핵무기의 증가(특히 산유국인 가 난한나라들의 독재정권에서) 등의 위험을우리에게 상기시켜 줄때 그들은매 우 옳다〔 Pove rty(가난), Pollu ti on( 환경오영 ), Po p ula ti on -e xp los i on( 인구폭발),
Proli fera ti on of wea p ons( 무기증가), 이 네 가지의 첫 글자인 터춘 따서 4P 라 고 함) . 이러한 위험들에 관해 세계적인 규모로, 효과적으로 그리고 조속히 어떠한 대책이 취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파멸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 고 그러한 당면 문제들에 관한 현재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논쟁은 우리의 지 적 공간(우리의 이성)을 오염시키고 있다 ― 一아마 실패를 보장하는」 데 충 분할 정도로. 이 조악한 모습은 이 정도로 해두자 . 우리가 이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경제학자들이 거의 모두 급전 우익편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급진 우익편에 있다는 이러한 사실 때문에 실상 서양에도 급 진 우익 ―— 케인즈주의자들(이들은 급진 우익보다는 좀 덜 급진적인 것 같 아 보이기는 하다)-에 반대하는 한 강력한 경제학파가 존재하디는· 것이 가리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급전 우익에 반대하는 이들도 지유개방시장의 이상, 소비자기호이론, 그리고 이와 유사한 개인주의적인 경향들에 대한 이 상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에서 바로 이러한 경제적 이싱들을七(좌 익파의 경제적 이상이 아니라) 공격할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이상들은 어쨌든 모호한 생각이어서 분병하게 말해지기가 어려우며, 누군가가 그 생각들을 분명히 말하려고 할 때 그것들은 너무나 환상적일 정도로 낭만적이게 들려 서 사람들은 오히려 분명히 하려고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어쨌든 전적 인 좌익 경제이론은 없다. 세계의 안전에 대한 문제는 조직에 관계된 orga n i zat io n al 것이며, 그리고 조직 이론의 전문용어로 나터내면 현상 유지와 조정간의 균형의 문제 the pro blem of balance betw e en ma inten ance and adju s tm e nt 이다. 세계의 안전 유지를 위해서라면 산(山)도 움직일 수 있다. 세계의 안전은 가만히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극소(極小)의 조정과 더불어 움직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 로를 벗어났을 때에는, 심지어 아주 작은 영향을 주기 위한 조정에도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그 체제는 조정이 가능하지만 업청난 노력을 요하며 더욱 이 그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커다란 모험까지도 따른다. 똑같은 주장이 대규모조직(기업)에서도다갇이 적용되며 특히,모든군대조칙에는더욱그 러하다. 따라서 군산복합체는 역시 조정보다는 유지 쪽에 더 치우친 균형의
문제이다. 그러나 기업들은 경쟁을 하기 때문에 어떤 사회주의 정부보다 더 많이 조정해야만 한다. 이 점은 일본 기업의 성공에 의하여 예증되었다. 그 리고 일본 기업은 서양보다 훨씬 덜 개인주의적이지만 균형보다~ 조정을 더 많이 성취했다. 일본은 여러 수단들 중에서 성공적이지 못한 관리자들을 공공연하게 모욕하는 가장 비일본적인 제도적 기법들을 발달시켰던 것이다. 본 난(關)은 유지와 조정 사이의 더 나은 균형의 가능성을 토의하는 곳 은 아니다. 그러나 산업체 조직(기업)은 양 국단적인 체제에서보다는 혼합 형의 체제에서 더 잘 조정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절대적으로 필요한 유 지는 어떤 특정한 조직에서가 아니라 생태계에서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 할 것이다一―벅크민스터 풀러가 말한 것처럼 우주선 지구호는 유지되어 져야만 한다. 이것은 모든 가치있는 기술철학의 핵심적 주제이다. 이 책에서 대부분의 관심은 기술에 대한 낙관주의 대 비관주의 논쟁과, 경제에 대한 우익과 좌익의 모든 급진적인 견해를 피할 수 있는 중도적 견 해가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고찰과 일반적 개요에 주어질 것 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제시된 가장 주요한 반대는 그들 모두가 본질적으로 반정치적이러는 사실과 정치적인 나태함을 선전하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그둘은 모두 무력함과 반민주적인 경향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의 논쟁은 대체적으로- 광범위하고 일반적인데, 그 이유는 여기서 는 가능한 한 전문적 사항은 피하고 피할 수 없는 전문적 사항 - 그것이 과학이론 분야(아를 meta - sci en ce, 죽 초과학이라고 함)에 관한 것이든 또는 정 치적 이론 분야에 관한 것이든간에 ――만을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때 때로 불가피하게 경제학적인 논쟁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극우인 신고전경제이론의 사이비 과학적인 요소p seudo-s ci en tifi c part s 를 밝혀내기 위해서였다. 신고전경제이론의 사이비 과학적인 요소는 적어도 산업사회에 서는 모든 경제학 입문 분야의 주요 강의과목들이다• 이 책은 경제학 이론 예 공헌하고 있다고 가장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소위 말하는 경제발전의 〈빅 푸 big -pu sh 〉이론을 지지하며 그 이론을 상당히 종합적인 지적 체계로 이 용하였다. 경제학에서 급전 우익인 신고전경제학 이론은 침몰하고 있는 배 와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그 배를 떠날 때까지 기다릴 만한 시간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늘날 무분별이 난무하는 국제정치에서 경제자문위 원, 공보관, 그리고 보도기관의 대변자 등으로 채용되어 있으므로 갑판 위 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인센티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짧고 해야 할 과제는 방대하다.
서론 이 책은 다음의 잘 알려진 두 가지 사실에 근거를 둔 절박한 메시지를 독 자들게게 전하기 위하여 씌어졌다. (1 ) 현대 기술은 오늘날 알려져 있듯이 인류가 지구의 생명체를 파괴할 수 있는, 또는 적어도 인간 존재를 종식시 킬 수 있는 수단들을 만들어냈다. (2) 인류의 현 정치지도자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무시하고 있고, 그 대부분의 사람들을 제외 한나머지 사람들중의 대다수만이 이 사실을오직 단하나의 수단_죽 위기감을 만들고 퍼뜨리는 수단-에 의하여 정치의제화하려고 할 뿐이 다. 이제 이 수단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즉 그 위기감은 기술에 대한 적대감을 갖게 하지만 사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많은 기술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기술이 초래할지도 모르 는 환경오염, 인구폭발, 원자핵에 의한 참사 등과 갇은 여러 가지 재앙둘을 예방하는 데 요구되는 정도로까지 기술을 통제하기 위해서 통제수단(이것도 하나의 기술임)을 창안하고, 개발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그리고 의십할 바 없이 이러한 기술 죽, 기술통제수단은 본래 정치적이다. 따라서 이 책이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부문은 기술에 대한 정치적 측면이다. 그리고 정
치 형태 중에서도 민주주의적인 정치 형태를 선호하고 있다. 요컨대, 이 책의 목적은 기술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위한 더 나은 도구를 찾기 위한 대대적 운동에 대한 하나의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하는 데 있다. 1 통제 일반 사람들은 자각과 예견을 갖고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훈련을 받았거나 그 렇지 않았거나 상관없이 어떤 특수한 또는 일반적인 행동노선을 따라 일을 한다. 우리는 우리가 구별할 수 있는 일반적인 행동노선을 기법 tec hniq u e 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가지 기법에 대한 이론을 기술t echnolo gy 이라고 부른다. 기술철학t he phi l os op hy of t echnolo gy이란 일반적 또는 특 수한 기술에 대한 여러 태도의 총합이며 그에 대한 평가이다. 또한 기술의 출현과 함께 우리들 주변에 나타나고 있는 문제들― — 특히 우리가 우리의 기구들을 통제하는 것을 어떻게 하면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문 제들을 포함하여 그러한 평가를 위한 기준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매우 단순한 기술적인 문제가 일반화되어 철학적인 문제로 된 예이다. 기술 자는 기계의 이 부속 저 부속에 대한 통제를 매우 염려한다. 정치가는 그의 일반대중에 대한 통제를 매우 염려한다. 유명한 시인 괴데는 그의 어휘들에 대한 통제를 염려 ――그가 이러한 걱정을 폴 두키스와 월트 디즈니의 〈환 타시아 Fanta si a 〉에 의해 잘 알려진 마술사의 견습공에 관한 우화로 상칭화 했던 그 염려 一―했다. 철학의 문제인 일반적인 통제의 것과는 달리 앞서 언급된 다른 개개의 것들은 특수한 기법, 방법, 또는 방식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는 어떤 하나의 특수한 기술적인 문제를 말한다. 어떤 단순한 하나의 기계를 통제하는 것과 전쟁기계 a war - mac hin e- -장군과 그의 부하—— 를 통제하는 것은 크게 다를 수 있으므로 전자는 물리적 기술이라는 제목 아래, 후자는 정치적 기술이러는 제목 아래 두는 것이 유용하다. 우리는 또 한 생물공학(생물기술), 사회공학(사회기술), 유전공학과 예술적인 기법들과 관련된 기술 등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여기서 예술적 기법과 관련된 기술
은 작가가 그 기술을 통하여 자신의 어휘에 대한 통제를 확보해야 하는· 그 러한 기법을 포함한다. 작가들이 자신의 어휘를 통제하는 것 자체는 작가들 이 종종 그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자신의 소망을 잊어버린다는 것과 단어들 이 단지 생각의 전달도구 또는 단지 예술적인 구성요소가 된다는 것을 그 만두는 바보 같은 상태를 즐긴다는 사실을 제의하고는 정말로 매우 쉽다. 그러나 이것 또한 약간의 심리적인 가술을 필요로 한다. 물론 여러 가지 이 미 알려진 심리적인 기법들 ― ―자기통제기법이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 는 기법이건, 또는 모든 종류의 기쁨의 순간을 연장하는 기법들이전간에 ― ―이 있다. 이러한 기법들이 기술로 발전될 것인지는 특수한 조건들, 특 수한 기법들의 축적, 또는 아마도 특수한 철학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이다. 우선 하나의 중요한 부정 (否定)을 제의하겠다. 우리가 대개 기법울 기능 공이나 기술자에 의하여 좌우되고 있는 환경울 통제하는 수단이라고 보고, 기술을 기술자에 의하여 좌우되고 있는 기법들에 대한 연구와 통제라고 본 다면, 사람들은 이론이 실천을 인도해야만 하기 때문에 기술자~ 당연히 기 능공의 감독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결론을 즉시 내릴 수도 있다. 그렇게 유 추하면, 기술철학자는 기술자들의 감독자가 되기를 갈망하는- 사람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후보자가 된다. 철학자들이 감독자가 되기를 갈 망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___ 그리고 이것은 플러톤의 전 설적인 철학자 왕은 물론이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많은 철학자들과 현재 도 활발하게 권력을 추구하는 우리의 많은 동료 철학자들이 감독자가 되기 를 갈망한디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들 중 일부는· 감독자가 되는 것 울 항상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기능공의 관리자가 되는 것은 기술자 의 권리에 해당하지 않는다. 기술자들이 경영진에 속해 있고 기능공을 관리 하고 있는 공장이나 발전소의 경우에 있어서도, 기술자가 관리자가 되는 상 황은 건전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판단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인간의 계급체계에 대한 어떤 이론도 철학 안에서는 전혀 용 인될 수 없다. 즉, 이론과 실제는 항상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둘을 명확 히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모든 기능공들은 어느 정도 기술자들의 역할을 수행하고, 반대로 모든 기술자들은 어느 정도 기능공의 역할을 수
행한다 . 분명히 사유하는 모든 인간은 그 가 철학을 잘 하든 잘 하지 못하든 관계없이 의식적으로 철학을 하든 의 식적 으로 철학을 하지 않든 한 사람의 철학자.o l 다. 합리적 철학은 더욱더 우호적으로 기술지들과 기능공들에게 어떤 제안을 제시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감독자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 명령보디는· 비평과 대안적인 제안들을 제시해 주는 우호적인 이웃 같이 밀하는 그러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철학이 현대의 기술자들과 기능공들에게 제시 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비평은 그들의 조직체계와 관련된 방법이다. 즉, 그들의 조직은 너무나 위계질서가 집혀 있어 불필요한 감독을 초래한다. 철 학이 제안하는 대안들은 다양하지만 그들 중에서 중심점인 것은 우리 모두 가 비평가들과 우리가 비평하는 사림들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발달시키 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자세한 제안들로 표현될 수 있다. 중요한 예들이 여기에 있다. 첫째,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 이야기와 업 무에 관한 이야기를 세일즈 토크 (sales- tal k : 자기합리화적인 말두)와 혼돈한다. 이것은 끔찍한 일이다. 당신 자신의 말에 귀를 귀울이고, 세일즈 토크식의 말을 줄이는(아마도 심지어 제거해 버리기까지 ) 실험을 해보고 그리고 이렇게 해도 당신이 당신 자신을 더 좋아하지 않는가를 점검해 보아라. 세일즈 토 크가 사회환경을 오염시키는 한 가지 일은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를 그들의 세일즈 토크에 맞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분위기가 우호적일 때 기술자들은 모든 실험이 어떤 수준이건 바람직하고 실용적인 정도로 정확 하게 반복될 수 있다고 자랑하지만, 방어적인 분위기일 때 그들은 어떤 실 험도 적절하게 반복되는 것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종류의 비일관성은 사리에 맞지 않고 사람들로 하여금 빈약한 관점을 갖게 한다. 둘째,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의 전문성에 집착하는 것을 책임 있 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다. 이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많 은 분야에서의 전문성에 대한 주장이거나, 책임이 없는 것, 또는 둘 다인 것 처럼 들린다. 이것은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물리적 기술의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의 관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아직까지 우리 주위에는 제대로 자격을 갖 춘 사회기술자 so ci al t echnolo gist들이 너무나 부족한 실태이고, 그들 중 일
부는 정말로 형편없는 사람들이다. 책임 있는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 둘을 제기하면서 자신의 무지를 분명하게 고백한다 - _ 一 특히 실제 생활에 서 너무나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 문제가 자신의 전문성이 아니라 자 신의 직업과 관련이 있을 때는 더욱더 그러하다. 합리적 철학의 주요한 관심은 아마도 개개인의 인간존재에 관한 것이 되 어야 한다. 즉, 오직 개인 각자만이 고통을 받고 있고, 문제, 열망, 희망을 가지고 있다 —— 심지어 개인 각자가 그 집단 안에서, 그리고 집단적으로 고통을 받을 매조차도. 그러나 개인 각자가 집단으로서 고통을 받을 때, 그 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원하는 사림들은 그 집단이 국가이건, 억압받는 소수 이건, 혹은 특혜를 받지 못하는 것이건간에 그들에게 집단으로서 말을 해야 만 한다. 그리고 기술은 거의 항상 집단의 일이고 사회적인 측면을 갖고 있 다. 특별히 문제가 있는 측면들은 슬프게도 무시된다. 공적인 일을 보면, 실 행될 수 있는 많은 간단한 개선도 재난이 닥치지 않는다면 재난이 닥칠 때 까지 수정되지 않고 있다. 우리가 그 이유를 알 때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정상인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불이 날 경우의 안전을 생각해 보자. 가 장 비용이 적게 들면서도 가장 분명한 개선은 비상구의 문이 안쪽으로 열 리게 하는 것보다 바깥쪽으로 열리게 만드는 것이며, 이것은 국장 같이 사 람등기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는 특히 중요하다. 이런 곳에서 불이 나면 놀 란 청중들은 문에 몰려들 텐데 만약 문이 안쪽으로만 열린다면, 가장 긴급하 게 열어야만 할 때도 계속 닫힌 채로 있을 수 있다. 이 분명한 사실은 사 전에 생각되어 그렇게 되어졌다기보다는 오히려 아주 지독한 경험에 의해 서 발견되었다. 아무도 이 일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 가능한가? 분명히 어떤 사람이 이것에 대해 생각했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재난이 닥 쳐올 때까지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천만의 사람들이 관람한 영 화 「죠스J aws 」에서는 재정적인 이유로 상어에 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해변 휴양지 마울 책임자의 커다란 무책임성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한 이 야기들이 어떻게 사실일 수가 있을까? 아칙까지도 우리는 모를 뿐이다. 비 행기 조종사들도 할 말이 있다. 즉, 그들은 활주로에 피가 호르기 전에는 어 느 비행장도 개선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문제는 검토되어야만 하고 만약
사실이라면 정치적인 행동을 요구해야만 한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철학자를 기술자 위에 두지 않는 한 우리는 일반적 인 가술통제의 문제와 일반적인 통제에 관한 상황의 확인 - 기술을 찬성 하거나 또는 반대히는 선전들에 의해서 비롯된 확인이 아니라 단지 현재의 상태가 어떠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가장 잘 개선될 수 있는가를 밝혀내려는 욕구게 의해 비롯된 확인 一― 을 포함해서 통제의 문제가 어느 곳에나 있 디는 것울 인지하게 될 것이다. 더 야단 법석할 것도 없이 우리는 여기에서 인정된 일반적인 대답을 조 사할 수 있다. 특정한 통제들에 관한 문제들이 특정한 기술들에 속해 있고 그러한 문제들은 이러한 기술에 대한 연구자들에 의해 가장 잘 해결될 수 있다. 반면에 일반적 기술통제에 대한 철학적인 문제들은 일반적으로 철학 자왕등계 의해 가장 잘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문제들은 적절한 민주적 통제수단의 발달을 필요로 한다. 만약 사람들이 이 책에서 제의된 제안들과 건의안들을 실행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단지 그들의 (진정으로 또 는 남이 보기에 ) 우월한 지식의 덕택으로 통치에 대한 면허를 가지고 있는 시 민으로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으로서 행동해야만 할 것이다. 현 재의 위급한 상태가 민주적인 통제의 정지를 요구한디는· 핑계는 심각하게 결함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급박한 요구는 정확히 모든 수준――지 역적, 국가적, 세계적 ―一에서 새로운 통제수단들을 필요로 히는 1 것이며 그 리고 이것들은 오직 민주주의 국가에서만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일반적인 민주적 통제 학문은 전통적으로 특수한 연구 분야별로 나뉘거나 또는 주제별로 나뉜 다. 이것들은 그들의 역사 이전 그리고 역사의 초기에 유기적으로 발전되었 다. 분야나 주제는 쉽게 특칭지어질 수 없다(그리고 전통적인 수단, 말하자면 소크라데스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본질적인 정의(定義)의 이론에 의해서는 특 정지어질 수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는 있다. 죽, 어떤 분야 또
는 주제에 대한 생각은 대부분의 것들처럼 직관에 의해서 발전되며 그리고 또한 대부분의 그것들처럼 이론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와 엄격한 계통적인 형식호봐 통해 구체화된다. 따라서 학문 분야들은 전통적인 사회적 관례이 다. 학문을 분야나 주제별로 니누는 것은 두 가지 기능, 죽 연구를 촉진하기 도 하고 제한하기도 하는 기능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두 가지 기능은 제한 을 통해서 촉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는 이 두 가지 기능이란 촉 전하고 따라서 새로운 사상의 통로를 열어 주면서도 제한적 기능을 갖는 것 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이러한 제한이 학문과 연구를 촉진시키는 목적을 위해 인정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손쉽게 둘 수 있는 한 가지 예는 물리학자들은묵시적 ta c it
의 하나이지만 국민의 복지에 관한 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이다. 사 우디아라비아에서의 교통수단 수준은 매우 낮고 여성이나 외국인들의 권리 가 무시되는 곳이다 一 ~ 현상은 분명히 정치적이다. 그리고 대부분- 서 양 기술자들에 의해 선택된 어떤 정책에 의해서 이 모든 것들은 기술 분야 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선언된다 . 기술에 대한 어떤 일반적인 연구를 통 해서 즉각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정치적인 관심들은 대개 산 업화된 나라의 특징과도 같은 것이다. 정치적 관심은 주로 서방국가들의 생 태계 또는 지구 전체의 일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 기술이 가난한 나라들에 게 끼찬 생태학적인 영향은(만약 우리가 거기에 관한 연구를 해보면) 가난한 나라들이 인구과잉과 그 결과로 나타니는 빈곤의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 중 일부는 국가의 재원을 그들의 지배계층을 위한 사치와 가장 복잡한 병기류 제도에 헛되이 쓴다는 사실 ― 一 이것은 기술에 대한 특별한 연구의 관심과 정책 밖에 위 험스럽게 팽개쳐져 있다. 여러 가지 기술적인 혁신들이 사회체제에 도입되면 , 결과적으로 사회체제 가 변화하기 때문에 이것은 필연적으로 그 체계 안에서 새로운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시킨다. 이렇게 되면 기술자들은 당연히 더 많은 기술을 적용하 여 이 새로운 것들을 해결해야 한다. 이 과정을 보다 합리적이게 하기 위 해, 솔직히 사회적 • 정치적 기술을 포함하기 위해 우리의 기술에 대한 개 념을 확대해야만 한다. 만약 사회적 기술이 앞으로 몇 십년 내에 물리적 기 술이 과거에 이루었던 것만큼의 성공을 거두게 된다면, 우리의 지구는 곧 초기 이상주의지들이 단지 유토피아라고 생각했던 모습과 닮게 될 것이다. 정말로 이 분명한 제안은 연구와 기술혁신이 과거와는 달리 쓰이도록 방향 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 우리의 제한된 자원이 물리적 • 생 물학적인 기술에는 더 적게 쓰이도록 하고 사회적 • 정치적안 기술, 특히 민 주적 통제와 민주주의를 위한 훈련에 관한 것에는 더 많이 쓰이도록 해야 한다. 이것을 막는 두 가지 요인들이 있는데 그들은 서로기· 서로를 강화한 다. 첫째, 물리학적 • 생물학적 통제와는 달리 사회적 • 정치적인 것은 인간 울 조종하는 것과 인간의 자유에 구속울 가하는 것을 포함할 수도 있다. 그
러므로 사회적 • 정치적 기술은 불가피하게 사회적 • 정치적 통제를 포함한 다는 것이다. 둘째, 사회적 • 정치적 기술과 통제는 정치인들과 사회 활동가 들을 포함하는데 이들은 종종 상충되는 견해와 관심을 보이며, 아직까지 합 리적인 반대와 타협 이론이 없기 때문에 따라서 이들의 세계에는 전통적으 로 합리적인 통제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치적인 현실에 있어 가장심각한위협은신뢰성의 틈이 계속벌 어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 톰 뒤에서 자리는 것은 정치적인 무책임성과 인 구폭발, 환경오염, 핵전쟁 등에 대한 무시뿐이다. 따라서 정치적인 신뢰성을 다시 회복하지 않고는 우리의 생태계를 통제하는 방법이 없다 . 기술철학, 기 술 관계자들, 생태계를 염려하는 시민(아직도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 둘), 자기 조국과 세계의 책임 있는 시민들 모두가 해야만 하는 가장 긴급 한 과제는 현재의 섬뜩할 정도로 낮은 정치적 신뢰성의 수준에 대한 연구 와 이것을 관리 (통제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울리려는 시도를 해야 하는 일이다. 분명한 사실은 수백만의 목숨이 걸려 있는 매우 위급한 상황에서는 책임 있는 사림들조차도 안정감을 갖기 위하여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 고 있을 당시의 사회에서 학습된 도덕률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엄청난 압 력을 받는디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잔악하게 보이는 많은 것들이 엄청난 긴장하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마치 몇 명의 젊은 병사 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것보다는 한명의 포로를 고문히여 명확한 사실 을 부인하는 것이 보편적인 도덕성에서 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거짓말하는 것과 군사작전, 둘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는 거짓말을 하고자 하는 유혹은 엄청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뢰성의 간격을 넓히는 균열이기 때문에 치명적인 오류이다. 해가 갈수록 지구상의 생태학적인 재난의 위협은 커지고 있지만 이것에 대하여 아무런 조치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유는 분명한 것 갇다. 지구상의 생태학적인 재난의 위협을 충분히 인식하게 되는 사람들은 그들 의 시간을, 적어도 그들의 자유시간을 대부분 지구상의 여러 가지 문제 해 결에 할애하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사람들은 주로 생태학자들이다. 문제의 급박함에 대한 압력 때문에 그들은자신의 연구결과와 문제의 긴급성을 홍
보해야만 한다고 느끼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당연히 과장하는- 경향이 있 다. 우리는 지금 급강하하고 있는 정치인들의 신뢰성 의에도 이보다 더 빨 리 급강하하고 있는 생태학자들의 산뢰성을 목격하고 있다. 따라서 합리적 인 대화가 위태롭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생존의 희망마저도 위태롭게 되었 다. 즉, 우리는 무력감 속으로 침몰하고 있다. 그래서 신뢰성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전제하에 이것을 가장 높은 규범으로 생각하는 사회적 • 정치적 규범을 수립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 다는 요청으로 이 서론 부분을 끝내고 싶다. 여기서 신뢰성이란 거짓말, 은 폐, 자기 기만, 최악의 경우인 절반의 자기 기만은 말할 것도 없고, 오류, 의도적 과장까지도 제거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 책의 서두르지 않는 전지한 자세에 대해서 그리고 취지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사림들은· 누구든지 이것 이 완전한 절망으로부터 증류된 위기감에 의해 씌어전 것이러는· 것을 기억 하게 될 것이다. 만약 누군가 이 주장에 동의할 만하다고 생각되면 그도 이 책을 분별력 있게 읽고-물론 서두르지 않고 당연한 배려와 함께 ——- 이것의 실수를 개선하려고 노력하기를 원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할 시간 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즉, 거북이는 항상 토끼와의 경주에서 이기지만 토끼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왜 자기가 계속 지는지를 곰곰이 생각하지 못한다. 시간은 짧다. 시간은 정말 짧다. 우리는 지금 당장 멈춰서서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수정해야만 하는데 이것은 멈추어서서 생각하기를 요구한다. 시간은 너무나 짧기 때문에, 아마 지금 당장 어떤 기법들과 신뢰성 있는 비판적인 사상들을 발전시키는 것을 시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개인적, 국가적 차원에서 그리고 전 인류적 차원에서 긴급히 요구되고 있는 우리들 자신울 통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모든 희망울 잃어 버리게 될 것이다.
제 1 부 기술과문화 우리는 기술에 대하여 지금까지와는 디른 차원의 좀더 통합적인 모습의 새로운 방향 모색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상적인 방향을 찾는 일이 너무 지 나친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의 주 과업은 오히려 현재 과학작 근거가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해롭고 만연된 두 가지의 오류를 제거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 두 가지 오류란 첫째, 과학적 기술이 예술보다는 과학과 더 유사하다는 오류이다(실제로는 과학적 기술은 과학과 유사한 정도가 아니라 과학의 본질적인 부분이며 요접이다). 둘째, 기술은 엘리트들이 지배하 는 정부를 필요로 한다는 오류이다(실제로는 기술은 관료적이며 권위주의적안 엘리트가 지배하는 정부가 아니라
제 1 장 기술과 학문 우리가 어떤 분야에 대하여 연구할 때는 통상적으로 연구에 대한 개념 정 의 (定 義 )가 선행되고 시작하는 것이 관례이다 .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기술 철학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기술에 대한 정의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 가 지로 정의될 수 있으며, 정의를 선택하는 것은 무해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 지만, 그러나 어떤 정의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편견(견해) 울 나타내기 마련이다. 서로 다른 정의나 혹은 상황은 서로 다른 편견을 초 래한다. 그러므로 아마도 반대로 시작하는 것이 -어떤 정의를 선택하여 견해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견해를 선택하여 그것을 뒷받침하는 정 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그 견해란 인 류의 생촌은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이며, 인류의 생존은 민주주의에 의하여 가장 잘 유지될 수 있고, 민주주의에 의하여 정치에 대한 보다 나은 기술, 죽 보다 많은 대중이 정치(통치와 동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발 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기술에 대한 사고는 지금까지 반민주주 의적 기술주의를융성하게 하였으며 앞으로기술주의에 대한민주주의적 해 독제가 만들어지는 것을 촉진할 수 있도록 더 발달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
서 기술은 ―一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 어떤 것(어떤 현상)에 대 한 모든 사회적 통제(조절) 수단 〉 으로 정의할 수 있다• 1 기술과 과학 기술철학에 대한 연구의 적철한 출발점은 기술에 대한 사고가 학문의 세 계에서 차지히는 위치부터 찾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그리고 가능한 한 기 교를 배제하고 구분해 본다면 학문의 세계는 예술과 과학으로 구분되고 기 술은 그 중에서 과학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H. G. 웰즈의 과학소설인 「미래의 사태요근 이미 과학과 예술의 구분에 대하여 예리하고 명쾌한 묘사 를 하고 있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에는 먼 미래의 과학자들이 예술계로부 터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달나라로 로케트를 발사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댜 웰즈의 초기 작품인 「타임머쉰」에서는 이 점이 더욱 적나라하게 표 현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인류를 두 종족으로 나누고 있다. 즉, 예술 적 감각을 가지고 살도록 진화했지만 지금은 모든 과학을 상실한 연성파 the so fti es 와 너무 기계적으로 치우쳐 즐거움을 위해서도 기계적으로. 움직일 정 도가 되어 모든 미적 감각을 상실한 경성파t he hard i es 가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인간들이 과학과 심지어 기술의 장점까지도 잃게 되 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있다. 오늘날 학문을 예술과 과학으로 구분히는· 것은 매우 단순한 사고이다. 이러한 구분은 한쪽에 언어, 문학, 순수예술, 음 악, 역서를 두고, 디른 한쪽에는 물리, 공학, 생명과학과 의학을 둔다. C. P. 스노우 경은 그의 유명한 강의인 「두 개의 문화」에서 명백하게 사회과학을 빼버리고 예술과 과학 사이의 소원함에 대한 그의 관심을 설명했다. 그는 과학이 딱딱하고 수학적이며, 사실적이고 냉정한 논리를 채택하는 반면, 예 술은 심미적이며 감각적이고, 직관적이며 부드럽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그로 하여금 사회과학을 약간은 부드럽고(예 : 예술) 딱딱한 것(예 : 사회통계학)으로 보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리가 놓여지지 않 은 균열에 대해서 언급한 셈이었다. 경성과학 hard s ci ence 의 예로서 그는
열역학의 제 2 법칙과 기계도구를 예로 들었다. 전자는 이론물리학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매우 기술적인 것이다. 이 두 가지가 그에게는 한 분이낀 것 처럼 보였다. 이것은 위험한 신화이다. 사림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를 공격할 수 있다. 창의성은 예술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수학과 과학도 예술 못지않게 창조성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또한 훈련과 기법은 예술에 국 한된 것이 아니며, 수학과 과학도 예술 못지않게 그것들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또다른 사람은 훈련기법이 과학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예 술과 순수예술도 과학 못지않게 그것들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 다. 말하자면 과학과 예술 모두는 기법과 창조적 직관 모두를 요구한다(여 기서 전정한 기술자들은 예술가들이 그들 자신의 작품 재료를 대하듯이 기계에 대 해서도 부드럽고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지금까지 간과된 분명하고도 고정적인 사실 울 여기에 끼워넣고 싶어하지만 이 정도에서 그치기로 하자). 우리는· 마치 예술· 과 과학 모두에 있어서 순수 분야와, 기술t echnolo gy과 기법 t ech niq ue 을 포힘하는 응용 분야로 니누는 것처럼 모든 사고를 명상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서 기법은 포도원을 기름지게 하는 일로부터 맛좋은 포도주를 익히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일을 포함하는 양조 기법과 같은 것을 포함해서, 우아한 생활을 위한 사치품들은 물론이고 음식 과 집 같은 기본 필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기법을 총칭한다. 여기에는 분명 히 두 가지 공격 방향이 있다. 하나는 지적인 직업과 사무적인 직업 모두에 필요한 연성적 직관과 경성적 훈련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과 과 학 둘 다에 공통적이며 또한 기술은 예술과 과학을 결합한다는 것이다. 이 두 공격 방향은 모두 너무 쉽고도 매우 치명적인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어느 공격도 확신을 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신화는 매우 견고해 보 이기 때문이다. 예술과 과학을 구분하고 기술이 과학의 한 분야라는 신화가 견고한 이유 는 앞 단락에서 논의된 두 공격 방향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 영역 어딘가에 놓여 있다. 그 신화는 서구문명을 다른 어떤 문명과 매우 구별하여 만드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서구문명을 타 문명보다 뛰어나게 만든 것은 분
명히 서구의 기술 ― ― 대량수송수단과 매스 미디어, 큰 기계들과 작은 기 계 부속품들, 복잡한 의과 의술, 효능 높은 약 등 ―― 이다. 이것들은 모두 과학에 근거한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작은 기계에 의하여 대체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들도 많기 있다. 인공심장은 부분적으로 이미 사용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계 획되고 실험하는 단계에 있는데 우리 모두는 가능한 한 대용품보다는 실제 심장을 선호한다. 서양 방식의 근육 대용품 一 ~ 동력엔진, 발전 소-둘이 아무리 우수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근육을 잘 유지하기 위해 캐 나다 공군 체조와 달리기, 빈번한 요가수업 등을 시도한다. 요가는 전형적 인 비서구적 기술이다 . 요가의 대용폼이 있는가 아니면 요가 없이 지낼 수 있는가? 요가를 기술로 간주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요가가 기술인가라는 질문은 위에서 언급된 공격 방향들처럼 치명적이 면서도 확신을 주지 않는 질문이다. 건축이 통속적 의미에서 예술인 동시에 과학이라는 사실, 피아노연주는 음악이면서 다섯 손가락 연습이라는 사실, 요가가 정련된 미학과 종교 그리고 그 이상의 것임은 물론이면서 좋은 신 체 상태와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기법이라는 사실과의 사이에는 근 본적인 챠기가 없다. 그러나 서구 용어인 기술은 적어도 처음 보아서는 과 학에 근거를 둔 듯한 데 비해, 인도에서는 서구적 범주의 것들을 무시할 만 큼 매우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인도에 대해서 전혀 걱정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다. 즉, 현대 인도사회는 서양이 인도문화로부터 획 득하고 있는 어떤 것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서구문명의 설비들을 받아들이 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기술이 과학의 일부라는 신화가 혼들리지 않는 강한 이유가 있으며 그것은 다음과 갈이 설명될 수 있다. 서양은 인도가 자신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 이상으로 인도에게 영향을 주 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우월하다는 증거는 아니다. 인도는 살아남기 위해 서양으로부터 배워야만 하고,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 생긴 손실은 불가피 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서양에서의 정신적 손실은 장기적으로- 볼 때 파멸적인 것으로서 동양적 영향의 격려와 증진에 의해서만 다시 얻어질지 도 모른다. 이 논의는 매우 호소력이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는 그 신화를
지지하는듯하다• 이 논의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고 가능한 한 올바른 정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지지하고자 하는 견해를 전적으로 뒷받침하지는 못한· 다. 서구문명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서로 비슷하여 하나로 간 주되고 있다. 한 견해는 서양이 지나치게 전문화되고 다양한 전문분야로 서 로 동떨어져 있어 재통합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술을 발달시 켜온 서양세계는 너무 전문화되어 물질주의적이 되고 정신적인 것을 상실 한 반면, 동양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확실히 우리 모두는 서양의 예술과 과학이 서로 더 가까워지기를 원하며, 동시에 서양과 동양이 서로 가까워지 기를 원한다. 그러나 동양이 서양에 비하여 기술적으로 퇴보해 있다는 것을 보상하기 위하여 동양을 지나치게 찬양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통합이 단일성과 획일성을 초래하고 결과 적으로 억압을 불러일으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디원주의 (Plural ism : 한 국가 °\...너 여러 민족이 사는 사회)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만약 우 리가 다원주의 사회를 원한다면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시기하고 경 멸하거나 열등에 대한 보상(값싼 수단에 의한 비교적 낮은 보상)을 요구할 것 이라는 계속적인 불안감을 배제하고 다양성을 수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다양하면서 지구촌적이고, 다수이지만 하나의 통일체이고, 국가 다원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전체 인류가 하 나의 공동체인 새로운 문명을 원한다는 것은 의십할 바 없다. 국가다원론에 대한 가장 유명한 변호는 종종 미국의 사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실용주의 철학이다(그러나 원래 발생지는 독일이다). 실용주의는 전리에 관한 가장 중요한 이론 중의 하나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견지할 가치가 있 는 믿음이면 어떤 것이든 참된 것이다. 실제로는 전리만이 전실로 믿을 만 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실용주의는 터무니없는 이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만약 내가 전리는 하나라고 주장한다면, 나 의 믿음이 당신의 믿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말해서 내 믿음이 전실이고 진리는 하나라는 믿음은 나로 하여금 타인의 그것을 인 정하지 않겠다는 것이 되므로 그러한 것은 믿음의 소유자를 독단적으로 만
들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실용주의는 다원주의(다민족사회)를 허용키 위해 인정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술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수단이며 따라서 실용적이다. 전리를 매우 소 중한 것으로 보는 많은 철학자들은 과학에는 전리가 없다고 생각하기를 소 망하며 그리고 그들은 과학을 기술과 동일한 것으로 봄으로써 그 소망을 성 취하기를 원한다. 물론 이것은 문화와 문명의 구분을 확대하여 예술과 과학 의 구분에까지 적용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렇게 구분함으로써 과학이 기 술과 같아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순수예술과 응 용예술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전리 못지않게 문제가 많 기 때문에 순수예술과 같은 것이 존재한디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다. 그렇 게 되면 예술과 과학은 모두 기술의 일부가 될 것이다. 따라서 기술은 우리 문화 전체를 포함하게 된다. 그렇게 하여 종교나 역사는 단순히 정부의 정 치적 선전수단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정부의 정치적 선전은 국가를 위해 필요한 진리이고 따라서 내부로부터의 비평은 무엇이든간에 신성모독이며 반드시 거짓이 될 것이다! 이것은 사실 하나의 수단인 기술울 목적으로 생 각할 때 그 결과로부터 초래될 수 있는 악몽이다. 골렘의 신화®나 프랑켄슈 ®골렘 g olem 은 원래의 의미에서는 유대 민속에서 생명을 부여받은 상({條 im a g e) 을 말한다. 골렘에 관한 초기의 이야기는 보통 골렘을 주인의 명 령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마치 소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마법의 램프 속의 거인과 같다고 하겠다. 1~- l 1 기에 나타난 이야 기 속에 묘사되는 골렘은 유대인 박해에 대해 그들을 보호하는 성격을 지녔고, 한편 공포적 대상으로서의 측면도 갖고 있었다. 골렘과 관계되 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1~- l 1 기 프라하 Pra gue 의 랍비 Ja dah Loeben Bezulel 에 의 해 창조된 것이다. 이 랍비의 이야기는 Gusta v Mey rink 의 소설 Der Golem( 1915) 의 바탕이 되었으며, 이 소설은 192 0','l에 영화화 되어 독일 무성영화의 고전이 되었다. 이 영화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전 괴물들의 공포적 행위들을 자세히 묘사했다. 골렘 문제란 어떤 대상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그 대상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났을 때 생길 수 있는 엄청난 문제를 의미한다.
타인 괴물의 신화 ® 는 우리가 과학을 진리에 대한 탐구로 보는 한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기술은 상관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러나 유일한 참전리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는 것은 기술을 과학과 똑같게 만 드는것이다. 실용주의자는 전리가 하나이며 독선적이고 관용을 허락치 않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에 대해 공격한다. 이 공격에 대해서는 실용주의가 널리 알려지기 전에 이미 답이 제시되었다__사실은그대답자체가실용주의를부각시 키게 하였다. 200 년 전 철학자이며 정치평론가이고 극작가인 고트홀드 에프 래임 레씽은 다음과 같은 우화로 그 공격에 답하였다. 어떤 아버지가 세 아 들에게 세 개의 반지를 주었다. 그중 하나는 진짜였고 두 개는 가짜였는데, 아무도 어떤 것이 진짜인지를 몰랐다. 그 세 개의 반지는 서양의 세 가지 종교를 나타내고 있었다. 레씽이 연극과 우화를 사용한 이유는 그 자신에게 과학적 전리가 종교적 진리와 동등한 것인지의 여부가 전혀 분명하지 않았 기 때문이다. 진리는 하나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또한 과학이 (아마도 또는 확 실히) 진리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보통 덧붙인다 . 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과 학에도 다양성이 있다(그렇지 않다면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보충된 뉴턴의 경우 갇은 사례가 없었을 것이다)고 말히는- 사람들은 종교와 과학 둘 디에 어느 정 도 실용적 전리가 있다고 말한다. 이들 좁은 한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비 록 우리가 대립되고 있는 과학적 이론들을 서로 비교할 수는 있지만 다른 종교들간의 진리에 대한 주장은 비교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살펴보자. 전 리는 하나이지만, 과학에 있어서 전리가 하나라는 것은 단지 이상일 뿐이 다. 죽, 진리에 보다 더 가까운 과학적 이론이 그렇지 않은 과학적 이론들 울대치한다.
® 프량센슈타인의 괴물신화도 골렘신화와 마찬가지이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영국의 여류 작가 셸리부인의 괴기소설에 나오는 것임은 잘 알 려져 있다. 소설 속에서 이 괴물은 제네바의 한 물리학자에 의해 만들 어졌는데, 그 후로 사람의 통제를 벗어나 엄청난 공포 행각을 벌인다. 이때 프링켄슈타인은 괴물을 만든 물리학자의 이름인데, 괴물의 이름이 프링켄슈타안인 것으로 찰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견해가 반드시 독단적일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이것은 너무 다원적이 지 못하다. 모든 물리학자들이 고전적 이론보다 현대 물리이론을 선호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지만, 이것은 모든 물리학자들이 모든 물리적인 문제에 대 하겨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욱이 과학 내부에서보다는 의부 에서 더 많은 불일치가 존재한다. 도대체 어떻게 합리적 불일치가 가능한 것인가? 그러면 현재의 기본적인 가정을 간략히 살펴보쟈 전리는 하나이지만 그 것은 하나의 이상일 뿐이다. 때때로 그 이싱을 현존하는 불일치에 적용하기 는 쉽지만 그 적용은 거의 대부분 논쟁거리가 된다. 일부 불일치는 명백히 합리적이고, 다른 일부는 분명히 비합리적이며, 불일치의 대부분은 그 중간 에 있다. 특히 어떤 논쟁은 이성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기도 하는데 그 때 문에 한쪽이 더욱더 두드러지게 패하게 되는 수도 있다. 계속 패할수록 점 점 더 비합리적인 것이 된다• 과거의 기술에 대한 전통적 견해는 탁월할 정 도로 합리적이었지만 그러나 지금 그것들은 지구상의 삶을 위험에 빠뜨릴 정도로 점점 더 비합리적인 것으로 되어가고 있다. 이는 기술적인 일안 경 우 근본적이고 개념적인 일들에 대한 합리적인 논쟁의 여지가 거의 없어왔 기 때문에 더욱 놀라운 것이다. 즉, 기법은 실험에 의해서 쉽게 검증될 수 있기 때문에 기법들의 전리 여부에 대한 주장들은 쉽게 결정될 수 있다• 그 러므로 기법을 성공적으로 적용하기 위한 통일된 기법 이론에 대한 필요성 이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기술이 추상적으로 개념화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이 마침내 위기를 유발한다. 즉, 우리는 다양한 기법들과 이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적용할 수 있는 자유를 원하면서도 한편 으로 지구의 재난을 피하기 위해 모든 기술(기법)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 울 원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기술적 전보와 국제적인 교류를 위해 노력하 지만 그러면서도 사회적 기술과 물리적 기술이 통합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다양성은 물론이요 전리 및 세계의 안전을 포함하여 인류 공동의 목표들을 위해 노력하기를 원한다. 이 갈등은 과학이 어느 의미에서는 누적적 0 이지만 기술은 비누적적이기 때문에 이것이 과학보다 더 많은 다양성을 허용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쉽
게풀릴수있다. 2 비누적적인 기술 「로빈슨 크루소우」이래로 소설과 다양한 종류의 토론에서 고정적인 주제 로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독창성에 의존한 내용들이다. 주레스 번의 「산비 한 섬」 이래 생존을 위한 과학의 가치는 위의 말을 더욱 고무시켰다. 이 소 설의 주인공들은 불을 만들기 위해 렌즈를 만들고, 절벽의 높이를 측정하 기 위하여 삼각법을 이용하였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매우 인기 있 는 텔레비전 시리즈 「질리간의 섬」에서 섬의 과학자들은 전기를 발전시켰 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전리는 아마 1909\ i_ E. M. 포스터의 고전 작품인 「기계는 멈춘다」에 더 잘 나타나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기술의 상실로 사 회가 붕괴되는 것을 묘사하였다 . 심지어 크라이돈까지도 그의 고립된 회사 를 과학적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지도력과 실무에 대한 기술로 구 하였다 . 이러한 우리의 생활과 동떨어전 사막의 섬과 갑은 유형의 모든 소 설들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과학은 대부분의 사람이 아직도 믿고 있는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누적 적이 아니다. 죽, 과학은 단단한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 지어전 집이 아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학적인 업적들은 완전 거부되지 않는다면 수 정된다. 뉴턴 이후 코페르니쿠스주의는 근본적으로 수정되었다. 아인슈타인 은 고전 물리학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였고 새롭고도 놀라운 구조로 변화시 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더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과학은 누적적이다. 즉, 과학에 대한 공헌들이 늘어나고, 반박되며, 수정되어 색깔을 바꾸기 때 문에 누적적이다. 전기와 자력에 관하여 200 년 전의 책 속에 실려 있는 어 ® 과학에 있어서 누적적이라는 의미는 과학의 성장은 기존의 과학발전의 토대 위에서 가능함을 의미한다. 죽, 이제까지의 과학적 성과에 바탕하 여 과학은 계속 커간다는 것이다.
먀거마한 양의 정보자료들이 현대 물리학책에는 빠져 있다. 그러나 그것들 은 개선된 형태로 수정된 것이지 없어전 것은 아니다 . 과학적 정보가 상식의 도움을 얻어 기술적으로 적용이 가능하게 되는 한 도 내에서는 그 결과로 빚어진 기술 역시 누적적이다. 공상과학소설의 작가 들은 이러한 사실을 임의로 변경한다. 예를 들어 널리 알려진 「레이오위츠 를 위한 찬가」에서 미래의 원자핵무기에 의한 파멸과 뒤이어 일어나는 제 2 의 중세시대 이후의 전자기의 재발견은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노력 없이도 전자석과 발전기를 설계할 수 있도록 해준다. 역사적 인 사실에서 보면 전자력으로부터 오늘날의 발전기에 이르기까지, 아니 뉴 욕시 전체의 전구를 밝혀준 에디슨의 발전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동안의 힘 든 변천과정이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술은 비누적적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동력 선의 출현 때문에 대양을 범선으로- 항해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나 해양 소년단, 스포츠 클럽과 해군에 의해 일부 돛단배 사 용을 계속적으로 유지함으로써 이 위험은 부분적으로나마 방지되고 있다. 이것은 그 항해기술이 모두 보존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 니다. 물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그것은 대양횡단 범선이 국제조직에 소속 되어 있기 때문에 국제법과 관습의 적용을 받고 있으며, 죠셉 콘라드의 독 자동가 쉽게 잊어 버리지 못하는 선원들의 이야기도 관련되어 있는 복잡한 것이다. 기술역사학자인 영국의 도널드 카드웰은 초기의 뉴코멘 증기기관을 재건 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과 연구가 투입되었는지를 다음과 걷이 말하면서 그의 보고서를 끝맺었다. 〈나는 물리학 박사학위와 그 후의 실제적 경험에 도 불구하고 단지 1712 \:! 철도기관사 정도의 자격만을 갖추었을 뿐이다〉 (『기술의 역사와 철학』, 1979, p. 9, G. Bug liare lo 및 D. B. Doner 編). 물론 이는 20 떠 전의 기관사가 오늘날의 물리학 교수보다 과학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기관사에게 전통적으로- 전수되던 유용하고도 상세한 경 험적인 지식의 대부분이 완전히 잊혀졌기 때문이다. 칼 포퍼가 「전통에 대 한 합리적인 이론을 향하여」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모짜르트의 소곡을 노
래하는 데 있어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The Rati on alist Annual, 1945, 또 한 그의 작품 「추측과 반박」). (이것은 물론 부력에 관한 아르키메데스의 책을 읽 는 데 요구되는 노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느 정도 과학에 있어서 사실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기술에서보다는 과학에서 훨씬 덜 두드러지는데 그것 은 과학이 대체로 누적적인 반면에 기법은 __ _뉴코멘 기관을 만드는 것이나 모짜 르트의 작품을 노래하는 것 ―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잊혀진 기술에 대해 낭만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술들은 더 좋 은 것에 의해서 대치되거나 보다 풍부해지게 마련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에 의해 완성되었던 미이러를 만드는 기술은 잊혀졌지만 분명히 오늘날에는 더 새롭고 더 좋은 기법들로 미이라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과거에는 유행하 였으나 지금은 없어전 기술들을 우리가 잊어 버리는 이유는 찌그러지고 상 처 자국이 난 인간의 육체(특히 얼굴)를 매력적인 의모라고 여기던 어리석 은 생각을 이제는 떨쳐 버릴 정도로 우리가 성숙했기 때문이다(상처난 얼굴 을 만들었던 독일 대학에서의 펜싱 전통이 없어전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옛날 양식들을 잊는 것은 대부분 보다 나은 것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원시 토착민들이 지역 특유의 식물을 항독소로 사용하 는 것과 같은 훌륭한 기술은(실제로 과학자도 잘 모를 수 있는) 적철한 순간 에 재발견되어야만 한다. 물론 이러한 자세한 것들이 일반적으로 진부한 것이거나 혹은 강조되는 순간에만 매우 중요한 것이 되더라도 그들은 요점 울 지적하고 있다. 즉, 어떤 기술은 진보됨에 따라 잊혀질 수도 있으며, 새 로운 기술이 옛것을 대치하여 그것을 잊게 할 수도 있다. 얼마나 많은 전문 야금술사들이 원시적인 용광로를 짓고, 주변지역에서 금속 원광석을 발견 하고, 기본적인 금속제 연장을 만들 수 있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우리 모두는 노련한 야금술사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이 일에 능숙하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들의 기술에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과학적 지식이 포함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지식의 일부는 상식만으로도 적용 가능하고, 또 일부는 높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독창성 있는 수준으로 적용이 가능하다. 이것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현대 야금술서들에게 원시적 용광로를 만드는 데 있어 처음부터 도움이 될 것이며 따라서 현대의 이들보다는 그 일에 더 능
숙할 것이나 아마도 원래의 원시적 야금 술 사들만큼 능숙하지는 못할 것이 다. 아마도 아무리 무식하더라도 문명세계에 살고 있는 어떤 사립이 금속을 사용할 줄 아는 문명세계와 전혀 접촉한 적이 없는 사람보다는 무인도에서 원시적 금속용광로를 만드는 일을 훨씬 더 잘할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은 현 대의 야금술사가 원시적 용광로를 만들기 위하여 그가 필요한 모든 것을 알 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얼마나 많이 필요로 하느냐 하 는 것은 실제의 문제이지 이론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 나 본래의 과학적 지식에 비추어 볼 때 그 문제는 이론적으로 결정될 수 있 으며, 비교적 쉽게 결정될 수 있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과학과 기술의 차 이를 원리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복잡한 기술로부터 원시적 기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변천에 관련된 두 가지 주요한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개인적인 것이고 디른 하나는 사회 적인 것이다 . 개인적인 문제는 어려움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재적응하는 것 이다 . 이는 번의 작품인 「로빈슨을 위한 학교」, 잭 런던의 「바다 늑대」, 포 스터의 「기계는 선다」에 찰 묘사되어 있다. 사회적 문제란 전문화되고 복 잡해진 기술을 지탱해 주고 있는 사회체제와 조직을 폐지하자는 것을 극복 하고 또 원시적인 기술에 오히려 적합한 그러한 사회체제는 새로운 방향으 로 개발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복잡한 것부터 원시적 기술로 변천이 일어날 때 그것이 엄격히 개인적인 면에 국한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여기에는 복잡한 사회적 조직과 재조직을 포함한다. 대규모의 복잡한 기술의 붕괴로 인하여 야기되는 혼란 이 어떠하며, 개인적인 수준 또는 핵가족이라는 가장 원시적인 사회조직의 수준게서 원시적 기술을 재창조해야만 할 때 개인(인류)이 그 혼란을 과연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가? 여기에 대해서 공상적인 이야기 의에는 지금까지 철저한 연구를 하고 있지 않다. 이 모든 이야기 속에 많은 전리가 내포되어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사실 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다. 비록 현대의 관심이 대규모의 복잡한 체 제들의 붕괴와 칙면하게 되는 문제에 관심을 갖는 방향으로 치우치고 있지 만 그 관십이 사고실험 th ou g h t-e x p e rim en t©에서 보여주듯이 충분히 진행되
지 못하고 있다. 만약 원자핵전쟁이 시작되었다 하면 즉각적으로 원자 무기에 의한 대파 멸이 일어날 것이다 一 一 전 세계에서 소수의 도시만이 공격을 받고, 하루 나 이틀 군사적이거나 외교적 측면의 조치가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가 정하자 . 누군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발견하기 이전에 세계 주요 도시들로부터 즉각적으로 다두어 달아나려는 일이 피할 수 없이 일어날 것 이다. 놀라서 우르르 도망치는 것 자체가 엄청난 피해와 인명의 손실을 야 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야기시킬 주요한 재난은 현대 도시를 · 현재 모습대로 만드는 사회적이고 기술적 인 복합체의 기능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 괴된다는 것이다. 죽, 전기, 물, 우유, 빵들의 공급과 주요 서비스들은 모두 일시에 전혀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다 . 비록 기계들이 그때까 지 최상의 상태로 보존되어 있고 연료, 물, 식량과 갇은 자원들이 아직 공 급 가능할지라도(우리는 암소들이 훨씬 더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있 다), 공급에 필수적인 사회 형태를 재조직할 필요 7}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앞 디두어 탈출한 후 정상적인 도시 생활에 필요한 많은 수의 노동력이 피해 를 회복하기에 충분하리만큼 빨리 회복될 수 없기 때문에 엄청난 작업이 될 것 0] 다. 이런 방향으로 생각을 계속해 본다면 이러한 상황을 마음 속에 그렸던 사 람은 우루루 도망침으로써 야기될 혼란에 맞서 싸울 수 있고, 그리고 그는 홀로 그의 핵가족과 함께, 때로는 나중에 가까운 친구, 이웃 또는 동료가 될 수 있는 일단의 사람들과도 함께 그것을 견뎌야만 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수있다.
® 사고실험이란 기계나 장치 등을 직접 가져다 놓고 실제로 행하는 실험 이 아니라 순전히 머리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실험을 의미한다. 사고실 험은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실험적 제약을 피하게 하며 사고의 폭~ 넓 혀준다는 효과가 있기는 하지만, 과학사를 통해 볼 때 일부 과학자들이 가상적 실험을 근거로 새로운 과학을 만들어낸 것처럼 날조하는 데 일 조하는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이러한 상황보다 심한 예가 있다. 죽, 한쪽 끝 에는 현재의 복잡한 현대 사회적 • 기술적 조직이 있고 다른 한쪽 끝에는 이 조직의 엄청난 폭발적 붕괴에 의해 일어난 완전한 혼란이다. 그러나 도시 근처 해변가와 떨어전 섬 사회 같은 중간지대가 있을 법하다. 이 사회는 보 동 만을 건너 해변가의 대도시와 연결되어 있지만 앞에서 묘사했던 폭발 상 황하에서는 과도기간의 며칠 동안 비교적 찰 고립되어 유지될 수 있다. 대 규모 지진과 같은 지역적인 재난, 전쟁, 내란, 혁명들로 인한 지역의 사회 적 • 정치적 붕괴나 재편성, 또는 심지어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의 전쟁, 하 롯밤 시이에 지역의 수출산업을 붕괴시키는 먼 지역에서의 대체자원의 발 견, 그리고 많은 다른 홍미있는 사실들에 대한 사회적 실험들이 현존하고 있다. 실제를 가정해서 만든 사고실험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두자. 그러나 그 것은 물리적 • 사회적 기술이 거의 통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를 보여 준다. 바누적적인 물리적 기술은 사회적 관 점이지만, 사회적 조직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있는 과학이기 때문에 앞서 말한 종류의 인류의 생존에 관한 연구는 확실히 필수적이기는 하나 시실상 거의 전무한실정이다. 그러나 분명히 비상사태시 생존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원시적이고 물리 적인 사회적 기술의 재현과 창조가 불가피하다고 전제될 때 분명 우리는 사 회적인 측면에서 급격한 변화, 심지어 비상사태와 감은 정도의 어떤 변혁을 지금 도모해야만 한다. 그러나 사회적인 면이 매우 원시적일 필요는 없으 며, 문제는 그러한 위급시에 대비하여 우리가 얼마나 않은 계획을 세울 수 있느냐의 정도이다.I)
1) 그것은 가능한 비상사태들이 무시된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미국 핵규제위원회 NRC 와 국가기술정보국 NTIS 이 준비하고 NR~ 연방비상사 태관리본부 FEMA 가 1980년 에 Cri ter i a for Prep a rati on and Evaluati on of Radio l og ical Emerge n cy Resp o nse Plans and Prep a redness in Supp o rt of Nuclear Power Plan t sO] 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문서(미국 GPO 판매프로그램에서 구 매 가능함)도 있다. 이것은 원자력 발전소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는 사
우리가 위급상황을 막기 원한다면 그것에 대비해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 하다. 또한 우리가 위급한 비상상황하에서의 사회적 • 정치적 재편성에 대 해 연구하고, 훈련하며, 그리고 그 모험이 완전한 실패로 끝날 것 갇지 않 다면 우리의 노력과 그 연구결과는 인류의 비상사태를 막을 수 있는 주요 한 기능을 할 것이다 . 왜냐하면 그 연구결과에 의해 일반 대중들은 몇몇 정 치가들의 어리석고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자신들이 그 대가로서 무엇을 치 르게 되는지를 상세히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The At om i c Cafe 참 조). 기술이 과학과는 달리 왜 비누적적인가를 말하기는 어렵다. 갖은 수단으 로 어느 정도까지는 이들을 체계화하고 여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이론 울 제시하는 노력은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더 복잡한 기술들은 이러한 효 과에 대한 여러 가지 예를 보여 준다. 예를 들어 컴퓨터 기술의 전전으로부 터 컴퓨터 과학 분야, 약학 분야의 발달, 특히 해독학 분야, 그리고 생화학 적 과학지식 자체의 발달 등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기술은 부분적으로는 훈련 문제이다. 그러나 훈련은 단지 개선되거나, 이전되거나, 강화될 수는 있으나 결코 제거될 수는 없다. 물론 일부 일시적인 기술(기법과 절차들)은 체계화가 가능하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기술은 우리가 발견해내는 것 (심지어 때로는 그 체계화의 부산물로서 )이기 때문에 완전함이 있기 어렵다. 어떤 기법 람들이 발전소의 재난에 대바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내 용이다. 가장 중요한 항목은 대중교육과 홍보에 관계된 것인데 ( pp. 49-51 ), 그것은 실제에 있어서 거의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다 . 즉, 이것은 이따금 정보를 전달하는 것 같은 현재의 몇몇 출판수단 목록을 제시할 뿐이다. 대 부분의 문서둘은 재난이 일어날 경우 재난이 일어나고 있는 곳에서 사회적 이고 법적인 구조의 혼란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 이것은 그럴듯해 보인다. 단, 원자력발전소가 미사일에 맞을 가능성 또는 천 재지변과 같은 경우를 제의하면(그 문서의 pp. 1-10 에 포함되어 있듯이) 다음의 세 가지 점들은 함께 공존할 수 없을 것이다. 죽, 자료에 묘사된 대 중홍보(드리마일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사건처럼 ), 미사일이 원자력발전소 롤 공격해도 사회구조들이 동요되지 않고 본래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 그 문서에서 분명하게 토의된 많은 구조들은 즉각적으로 주위에서 사라질 것.
둘은 어쩔 수 없이 소멸되었다. 그중 일부 기술 내지 기법은 부분적으로 과 학과 더 복잡한 기법들에 의해 나중에 다시 되찾아질 수 있다. 그러나 되찾 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어떤 점에서는 잃어버린 것이다. 일단 우리가 이것 울 깨닫고 또한 각각의 기술이 여러 가지 사회적 조건과 조직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기법들을 더 잘 붙잡을 수 있을 것이며 그 기법들을 우리의 삶의 방식의 일부로서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마치 사회인류학자들이 어떤 원시적인 기법들을 처리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 기 술과 기법들을 더 잘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된 기법들을 보존하는 능 력은 인류가 큰 재난을 맞이하는 경우에 생존을 보장하게 함은 물론 큰 재 난을 미리 예방하는 길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어떤 통일된 기술체제는 그것이 그 기법들이 사용되고 있는 사회적 환경에 대한 자세한 사항들을 포함하지 않는 한 불충분한 체제에 불 과하다. 일단 우리가 이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비교적 쉽게 고정된 조립생 산 라인, 고정된 근무시간, 인종과 성, 그밖의 지속적인 사회적 병폐들에 따 론 차별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종류의 기술적 개선을 위해 보다 더 나은 사회적 환경을 설계할 것이고 또한 그 개 선된 사회적 환경을 가난한 나라뿐만 아니라 부유한 나라의 경제 낙후지역 에까지 확대 실시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의 이러한 측면 죽, 사회적 기술 은 노동자와 기계가 조화롭게 일하는 장소(이상적인 일터 )를 설계하려는 정 치가들과 노동조합 지도자들, 사회학자들, 십리학자들, 공중보건 종사자들, 산업체 및 컴퓨터 기술자들뿐만 아니라 개발경제학자들 및 경영가들 그리 고 노동 생활의 질의 변화에 대한 연구에 종사하는 전위파적인 사상을 가 진 일부 연구자들 사이에서까지도 매우 인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 지 거의 연구되지 않고 있다. 사회적 환경에 대한 다양한 기법에 관한 이론들을 통합하거나 창조하는 일 그리고 통제이론과 이들의 기술적 응용의 가능성을 고안하는 일은 분명 히 가능하다. 산업체를 통제하는 기관들은 이미 일부 존재하지만 아직은 지 극히 초보 단계에 있다. 우리는 대규모의 기술에 접근해야 하며 통제에 필 요한 모든 조처를 취해야만 한다.
3 기술을 정의하는 일 〈 기술 〉 이라는 용어는 상황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애매하게 사용되어 왔 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분명하 지 않다. 과학 분야들은 전통적으로 교과서에 의해 정의된다. 전통적 정의 들은 정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부적합하다. 왜냐하면 전통적 정의는 시대에 따라 교과서가 겪게 되는 변화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개선하기 위 해 어떤 분야를 그 속에 속하는 교과서와 거기에서 제기하는 문제로 생각 할 수도 있다. 이때 교과서에 있는 그 문제들은 이 분야의 연구가들에 의해 연구되며 해결된 해답들은 이것의 증보판이나 개정판에 첨가된다. 이 개선 된 정의는 현재 토마스 쿤의 용어 정의에 의하면 〈 통상 과학 normal scie n ce>® 이라 불려진다. 그러나 그가 정확히 관찰했듯이 과학적 탐구 분야는 혁명 ® 쿤 Thomas S. Kuhn 은 미국의 과학사(科學史)학자이다. 그는 과학사의 면밀한 연구를 바탕으로 혁명적 과학관을 주창하였다. 죽 그는 누적적 과학관에 반대하여 과학의 발달은 비누적적이며 비연속적이며 혁명적인 것으로 보았다. 새로운 과학이론은 기존의 과학이론의 연속적 발달선상 에서 누적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과학이론을 혁명적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그의 견해에 대해서는 Thomas S. K uhn ; The Str u ctu r e 아 Scie n ti fic Revoluti on s(Ch ica g o Un iv. Pr., 1970), 2nd ed. 를 참조할 것. 우리말로 된 번역서도 나와 있음. 통상과학(通常科學, normal s ci ence) 은 쿤의 과학론에 나오는 개념이 다. 쿤은 패러다임 p arad ig m 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는데, 패러다임이란 하 나의 완성된 과학이론을 의미하며, 이 개념에는 과학이론뿐만 아니라 과 학활동을 하는 과학자사회의 규범 등도 포함된다 . 과학혁명 sci en ti fic revolu ti on 은 한 패러다임이 이 다른 패러다임으로 대체되는 과정이다. 과학혁명은 한 패러다임이 지배적이다가 이 패러다임 내에서 설명되지 않는 변칙적 요소들 anom ali es 이 쌓여서 기존의 패러다임이 이 변칙들 울 도저히 소화해내지 못할 때 일어난다• 그런데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한 패러다임 내에서 그 패러다임에만 충실하며 그 패러다임 자체
이 계속 진행되고 있고 그후에는 보통 문제들이 다시 새로운 문제로 된다. 물론 이러한 변혁둘은 새로운 과학 분야를 창조하기도 하고 또는 어떤 분 야를 파괴할 수도 있다. 한 과학 분야가 언제 변형되고, 다른 것으로 대체 되는지는 밀하기 어렵지만 이는 거의 홍미없는 일이며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기술의 경우에는 과학과는 달리 그 모습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기법의 전 분이라고 할 수 있는 기법에 대한 연구와 개발은 전부한 것이 되 어 새로운 것에 자리를 내놓을 수도 있다. 범선이나 마차가 기선이나 지동 차로 급전적으로 대치되면 우리는 범선이나 마차를 계속적으로 이용하고 있 음에도 불구하고 범선 기술을 마차 교통수단만큼이나 쓸모없는 것으로~ 여 긴다. 교통망은 말이 끄는 것으로부터 동력화된 교통수단으로 바뀜에 따라 변형되었고, 이에 따라 교통행정과 관리도 변화되었다. 범선과 역마차는 변 형된 것이 아니라 대치된 것이다. 밀이 없는 수송수단이 처음에 말이 끄는 것과 닮았다는 사실에는 사회적 이유뿐만 아니라 기술적 이유도 분명히 있 었다. 즉, 말이 끌지 않는 마차의 기술자들은 엔진에 관심이 있었고 옛 모 습의 마처를 이어받는 것을 기뻐했다. 또한 마차에 익숙했던 사림들은 무엇 보다도 말이 동력으로 대치된 것을 기뻐했다. 그러나 상상할 필요도 없이 사람들은 자동차 정비공장이 마굿간의 대치물이라기보다는 마굿간의 변형 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변형과 대치 (변형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수준) 서이의 치이를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 할 수 있다. 왜? 구분할 수 있는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를 말해 주는 분 류기준은무엇인가? 우리는 하나의 기법이나 다수의 것을 총체적으로가 아니고 상황이나 관 심 분야에 따라 매우 타당하게 다른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의 기술 울 목적에 따라, 일련의 수단으로서, 그리고 여러 개의 기법으로 분류할 수 에 대해서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으며 그 안에서만 과학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이 있는데 이 과정을 바로 동상과학이라고 한다. 혁명 revoluti on 이란 여기서는 바로 위 문단에서 이야기한 과학혁명을 의미한다.
있다. 목적으로 분류하면 마차와 자동차는 모두 교통망의 일부분이다. 수단 으로 분류하면 모든 자동차들은 다같이 동력기관으로서 분류된다. 기술로 분류하면 석탄과 액체 연료가 다르듯이 내연기관과 의연기관은 서로 다르 며 화석 연료를 이용하는 기관과 원자력을 이용하는 기관은 서로 다르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엔진의 금속 부분은 한 범주 안에 둘 수 있다. 그러면 다양한 연료를 사용하더라도 금속제 엔진들은 함께 분류될 것이고 금속엔 전은 세라믹이나 다른 재료로 만들어전 엔진과는 구별될 것이다. 심지어 강 철로 된 모든 종류의 비행기들은 비금속 재료나 경금속 또는 합금으로 만 들어전 비행기들보다는 강철로 된 자동차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 모두는 우리가 기술을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있 음을 보여 준다(상세한 것은 Paul W. Devore 의 Technology : An Intr o ductio n , 1980 참조). 이 모두를 기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성가시게 여기는 사람도 있 울 것이다. 그들은 모든 기술을 인공품의 제조와 관리리는 범주 아래 함께 분류하려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실들을 모호하게 하지 않는 한 기술을 이런 식으로 보는 데에 반대할 수 없지만, 어떤 명백한 사실들이 그러한 분류방 법에 의해 종종 모호해치기도 한다. 즉, 인공품을 사용하는 목적아 기술을 그런 식으로 정의할 때는 무시될 수도 있다. 원시적 기법과 진보된 기법이 같은 목적으로 이용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는 원시적 기법이 정말 더 좋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될 때에 우리는 보다 원시적인 기법의 이용 가능성에 대해 알기를 원할 수도 있다. 매우 중요한 예를 들어보자. 군인들의 상처에 서 유탄을 뽑아내기 위해 강력한 자석을 사용하는 기법이 훨씬 더 강력한 X 선 촬영기법과 현대 의과술로 대치되었다. 원시적 기술은 매우 빨리 잊혀 졌지만, 전쟁터에서의 비교적 작고 얕은 유탄 상처에는 더없이 알맞은 것으 로 재발견되었다. 같은 예가 교통수단의 동력으로서 말을 사용하는 것과 갇 이 가공품을 쓰지 않는 기법에 대해서도 언급될 수 있다. 물론 말타기조차 인공품을 쓰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환자의 가슴 속에 심장박동기를 삽입하여 심장 고동을 조철하는 것과 갑은 복잡한 인공품을 사용하는 기법 은, 약을 먹는 것과 같은 덜 복잡한 인공품이나, 혹은 치료 성분이 함유된 음식물을 먹거나, 운동울 많이 하는 생활방식, 혹은 자기최면 또는 자신의
뇌파조절과 같이 전혀 인공품을 사용하지 않는 것과 같은 식의 똑같은 목 적을달성하는거법으로바뀌어갈가능성이 클지도 모른다. 다이어트 d i e t음 식과 그러한 삶의 방식을 준비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것을 요구할 수도 있 지만, 그러나 그것들을 적용하는 것은 덜 복잡한 것을 요구한다. 자기최면 과 뇌파조절기법은 그 반대다. 죽, 계획을 세우는 데는 복잡한 것이 거의 없 지만 적용에서는 훨씬 복잡하다. 농업에서 가족계획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 술들은 전체적으로 상당히 복잡한 것으로 발전되어 왔는데, 이는 주요하고 놀랄 만하며 존경할 만한 질의 개선 문제가 그 계획 속에 둘어 있기 때문 이다. 죽, 기술은 사용자들이 가장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 다. 피임약을 사용하는 데는 복잡하지 않지만, 바로 이 복잡성조차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나친 것이어서 ― _부작용은 별도이고 —사용자에게는 적당하지 않게 된다. 불임시술은 피임약을 제조하는 것 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지만, 그것을 시술하는 사람에게만 그러한 것이지 시 술받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불임시술 기법은 다시 임신할 수 있게 되살려내는 기법이 함께 고려되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는 결함이 있 는것이다. 피임약 사용자들은 때때로 인구의 규모와 성장을 조절하는데, 평소에는 가족의 규모와 성장을 통제하며, 마침내는 자신의 신체를 통제하는 것이다. 상상력이 있으면 누구든지 이들 세 가지 목표 중 하나는 요구되지만 나머 지 둘은 요구되지 않거나, 혹은 둘은 요구되지만 세번째는 요구되지 않는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델을 설정함으로써 쉽게 발견할 수 있듯이 이들 세 가 지 목표는 각각 전혀 다르다. 그리고 인구에 대해 언급한다면, 피임 정제가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만드는 한 가지 중요한 사항은 교육의 부족 으로 자신들을 위해 그 정제롤 효과적으로 쓰지 못하는 젊은 여성들에게 약 간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일반적으로 기술은 명확하게 정의될 수 없다. 사회인류학자 들이 찰 알듯이, 원시사회에서 사용된 기법들을 묘사하는 것은 적어도 그 사회의 가치나 구조에 대한 어느 정도의 설명이 없이는 전혀 적절하지 못 하다. 더 복잡하고 규모가 큰 사회에서도 이 공리가 또한 적용되고 있으며,
더 강력하기까지 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림들이 이 공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것은 매우 많은 사람들을 혼란하게 한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지적인 체계가 질서정연하게 정돈되기 를 바라기 때문에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 어떤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아마 현대의 서양 혹은 서구화된 사회가 어떤 점에서 디른 사회보다 우수한가? 라는 질 문]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이미 대답 이 준비되어 있다. 즉, 그 우수정은 단순히 보다 니온 물리적 기술 때문이 라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맞다면 다이어트 음식물에 어떤 화학적 첨가제가 (정제 혹은 조리되지 않은 채 날것 상태로) 들어 있을 수도 있디는· 사실, 또는 자기최면이 치료수단으로서 쓰여질 수 있다는 사실들은 별로 호기심을 가 질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겨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면에서 다 그렇 지는 않더라도 대체로 신체의 정신적 통제는 요가나 선불교 등의 동양적 전 문가에 의하여 더 찰 성취되고, 약이나 의과수술 혹은 기타 다론 방법을 동 한 신체의 물리적 통제는 전형적으로 서구적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어떤 한 가지 측면에서 동양이 서양보다 우수한 한 가지 예를국들면 인간의 통일성이다. 죽, 동양은 서양으로부터 물리적 기술을 배울 수 있고, 서양은 동양으로부터 요가를 배울 수 있다. 어떤 요가 기법들이 목표가 같다고 하 여 어떤 심장박동기 기법들과 함께 분류하는 것은 이러한 양상을 망치는 것 이며 왜곡시키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어떤 기법을 실행하는 것이 그 사 회의 가치나 관행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회인류학자들의 ~ 말에 동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면에 만약 우리가 복잡한 수단(기술)에 관한 연구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고자 할 때는 인류학자의 그러한 주장을 무시하고 싶어진다. 앞 단락에서 말한 반론들은 서구의 자유주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우리가 정신적 통제가 아닌 (우리 이웃의 동제는 더욱 아니며 ), 물리적 • 생물 학적 환경을 통제하는 것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것은 매우 권장될 만하다. 존 듀이는 〈사회적 기술〉과 〈사회적 공학〉이라는 용 어를 도입했을 때 이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는 사회적 기술과 사회적 공학을 가지고 있고, 우리 자신을――개인
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도 -·—-- 통제하고 있으며 게다가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 이웃을 통제하는 것이 사실이다 . 만약 가치를 배제한 기술과 공학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이상이 최대로 추구되고 자기 자신과 이 웃을 통제하는 기술도 유용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목적이 수단을 합리 화하는 그러한 것도 기술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반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가치를 배제한 기술이 완전히 가능한 것이라는 견해를 가질 필요는 없지만 자유주의자라면 가치를 배제한 기술의 가치도 상당한 정도까지 인정해야만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기법들을 연구하고, 발전시키 고, 완성시키고, 묘사하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한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올더스 헉슬리의 『 멋진 신세계 』 속에 그려진 바와 같이 전 통적 자유주의자들이 가치를 배제한 기술을 고수하기 원한다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전통적 자유주의자의 제안인 사회적 기술을 기술에 서 배제하자는 주장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실 현되지 않을 것이다. 노예 만드는 것을 하나의 기술로서 받아들이는 편이 차라리 더 낫다. 특히 노예로 만드는 기술이 복잡한 기술적 • 과학적인 지 식 (『멋진 신세계』에서 언급된 흥분제, 전기충격, 조전형성 등의 사용과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인간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기술을 기 술이 아닌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그것을 교묘히 피하기보다는 기술로 정의 하여 현재의 문제를 정면으로 맞서는 편이 더 낫다. 그리고 노예 만드는 기 술의 지식에 반대하는 것은 기술을 목적에 따라 분류한 것이며, 따라서 이 러한 반대는 감옥 건설, 수갑 제조, 또는 채찍을 만들고 다루는 것에 대한 지식에 반대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목적이 아니라 기법과 수단을 연구하려는 우리의 소망은 가치를 배제한 기술에 대한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 가치를 배제한 기술의 목적은 자유주의 자의 철학의 목적과 갇다. 그러나 가치를 배제한 기술은 가치에 구애되지 않기 때문에 비자유주의자의 철학의 목적에 공헌할 수 있다. 이는 억지 주 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비자유주의자들이 대개 자유주의자들을 관대히 다를 준비가 되어 있어서라기보다는 자유~ 비지유주의자들을 관 대히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찰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
들의 가치배제적 태도는 기술이 그 목적에 따라 분류되어야 한다는 것을 허 용해야만 한다. 목적에 따라 분류하면 말이 끄는 교통망과 자동차~ 이용하 는 교통망은 목적에 있어서는 같다. 관리기법에 따라 분류하면 그것들은 마 굿간과 자동차 수리공장이 디른 것과 같이 서로 다르다. 행정적으로 분류하 면 그것들은 일면 유사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직관 은 마치 같은 재료의 종류라도 상황에 따라 매우 다르게 변하는 것과 마찬 가지로 상황에 따라 매우 다르게 변한다. 따라서 우리는 적어도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활동들을 포함하는 그 어떤 기법도 그 실시방법에 대해 주목해야만 한다. 예를 들면 말이 없는 수레를 만드는 것처럼 어떤 물리적 성질의 기술혁신울 꾀하는 것이 전국적으로 주 유소가 급증하는 것과 같은 사회적인 측면(주유소를 개업하려면 법적인 절차 를 밟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당연하게 물리적 기술로만 생각되고 있 다. 물론 예를 들어 의무교육을 입법화하는 것과 같은 사회적 기술의 모든 행위는 학교건물과 안전횡단보도의 급증과 같이 실행에 있어 물리적인 면 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리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이다. 그런 까닭에 극단적 인 경우라 하더라도 기술은 물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공유영역을 가져야만 한다. 즉, 순수한 경우란 존재치 않는다. 이것은 l~i l 기 고전적 자유주의 사고, 즉, 전통적으로 현대 서구기술을 만 들어온 사고에 대한 광범위한 비평의 길을 열게 된 혁명적 결과를 초래한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순수한 물리적인 기술의 이상을 발견한 것은 바로 이 사고였기 때문이다. 피터 코스는 기술, 〈t echnolo gy)eH:근 단어 는 〈 어떤 종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어떤 방식〉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수 도 있는 그리스어 〈 t echne 〉 이란 단어에서 유래되었고, 따라서 성교의 방식 이나 기법울 의미하는 그리스어인 〈 ero ti ke t echne~ 柱근 단어는 놀랄 바가 못 된다고 일찍이 지적하였다. 그러나 기술이란 단어가 물리적 기술만을 의미 하는 l 앙1 ] 기적 의미만을 사용하는 데 익숙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4 기술사회를 대비한 교육 고전적 자유주의 철학자들은 교육, 교육과정, 혹은 전문적 훈련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지 않고 과학이 교육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평범한 시민들도 상당히 잘 교육되어야 하고 그런 까닭에 과학적으로 능력을 갖추 어야 한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은 과학적으로 능숙하면 기술적 으 그렇게 되고, 평범한 시민이 기술적으로. 능숙하면 그 사회는 기술 적 사회러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결론 : 초 • 중등교육에 있어서 교육프로그램 (교육과정 )이 합리적으로 수용 될 수 있는 것이라야만 만족할 만한 기술적 사회가 구현될 수 있다. 이 철학은 자리를 박탈당한 지 오래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교육과정의 재 검토를 포함하여 우리의 반성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자들은 오히려 의관상으로는 아직도 수용될 수 있는 것 같지만 낡아 버린 철학 부 스러기를 고집해 왔다. 그 주요 결과로 평범한 학생들에게 어떤 과학과목이 강요되어 그 학생들이 그 과목을 더욱더 증오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갖고자 하는 또다른 두 가지 결과는 전문화된 과학 계열 학과에서 과학이 종종 공학의 시녀로 가르쳐지고 있다는 것, 공학은 사회적 측면이 전혀 없는 것으로서 가르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세 가지 결과는 오늘날의 과학교육의 중심 문제이다. 그 결과 초래 되는 상황은 우리의 사회적 삶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것이다• 고전적 자유 주의 철학의 오류는 과학적 능숙함과 기술적인 능숙함이 동일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며,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대중을 기초수학-미적분, 행렬 대수, 분석 기하학-을 전혀 모르는 대디수 의 대중과 그 나머지 대중으로 양분할 때, 그 나머지와 과학자들은 오직 그 들이 기초수학을 안다는 것 때문에 서로 비슷하다. 그러나 기초수학은 기본 적이다. 과학자들과 모든 기술자들이 모두 기초수학을 알기 때문에 서로 비 슷하다는 견해는, 모든 음악가들이 음악책의 악보를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서로 비슷하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과학의 정치적 영향을 무시하면서 사 희를 과학자와 비과학자로 나누는 것은 기술주의나 과학 엘리트주의 또는
서구 민주주의로 대체하기 위해서 또다른 형태의 능력주의를 초래하는 것 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기술 중심의 능력주의가 우리 문화 와 환경에서 과학과 기술의 고유한 위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러는· 헛된 희망으로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는 위험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준비성은 전문가들을 불신하며 우리 사회에서 자신의 전문가로서의 가치를 과장하는 경향을 견제해 주는 민주주의적 전통과는 모순된다 . 만약 우리가 견제하지 않으면 기술주의지들은 사회 전체를 기술적 통제하에 두게 할지 도 모른다. 비록 우리는 기술주의자들이 예술을 적대시하지 않으며, 과학적 또는 기술적 교육 이의의 디론 교육을 적대시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지만 의 문은 여전히 남을 것이다. 현재의 상황이 지속된다면 기술이 어느 정도까지 확장될 것인가? 물리적 • 생물학적 기술이 얼마나 발전될 것이고 사회적 기 술은 얼마나 무시당할 것인가? 사회적 • 정치적 지침이 없는 기술주의사회 에서 그러한 경향은 끝이 날까? 가끼운 장래의 기술주의자들은 모든 기술 적 전보가 일반 대중에게 이용 가능할 것이러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까? 유전공학기술은 개발되어 대중이 이용할 수 있도록 될까? 범죄자들이 탐내 는 기법들도 대중아 이용할 수 있게 될까? 사회적 • 정치적 통제는 존재하 지 않을까? 이 질문은 본질적인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인 것인가? 만일 사 회과학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사회적 기술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사회적 기 술은 기술주의자들에 의해서 관리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어떤 민주체제에 의 해서 관리되어야 하는가? 애석하게도 질문의 여지없이 이 질문들은 대중적인 대답을 얻고 있다. 과 학과 기술은 요즈음 함께 나아가기 위한 조직화가 이미 마련되었다. 그들은 공통적인 풍조를 가지고 있댜 새로운 풍조를 특칭짓는 단어들인 〈융통성 없고 넌센스를 허락하지 않는 풍조〉 〈공식화 아니면 폐기해 버리는(죽, 흑 백논리 ) 풍조〉와 같은 말은 이제 새로울 것이 없다. 실제로 풍조 그 자체도 하나의 에토스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학파의 사상기나 지적인 지도력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시대의 정신과 갇은 풍조로서 새로울 뿐 이다• 〈융통성이 없는〉 일에는 즉시 가시적 인 보성이 있다. 그러나 식견 있 는 사람이 무식자에게 어떤 교육을 받도록 도의주어야 할 때, 식견 있는 사
람이 무식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경멸이다. 따라서 이것은 지적 중추를 굳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현재의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 것은 융통성이 없디는 것을 끌어내는 데 목적이 있다. 대중의 무식함에 의 존하는 전문가의 고지식함은 융통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융통성이 없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깨를 으쏙하면서 나의 비난을 잊 어버릴 것이고 융통성 없는 논리로 다음과 같이 논쟁할 것이다. 융통성이 없다는 위험은 오래 전에 인식되었다. 경제학자 라이오넬 로빈스 경은 경제 학을 무시하고 생산공정에 집중하면 시장이 붕괴되어 결국 생산을 시작하 지도 못할 일급 공장을 짓게 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물 론 오늘날 융통성이 없는 경제학이 현존하고 또 지속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 다. 우리는 이제 무역과 산업이 대처할 수 없는 커다란 시장 변화가 갑작스 레 일어나는 것을 더이상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일반화될 수 있다. 즉, 융통성 없는 과학과 기술이 뜻하지 않게 부딪칠 장애가 무엇이든간에 그들 은 융통성 없는 방법에 의해서 그 장애물들을- 극복할 수도 있다. 이러한 방 법둘은(사실은 이것이 그 핵심이지만) 효율성을 재빨리 시험해 보고 그 결점 이 발견될 경우 교정되거나 대체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융통성이 없는 것 이다. 그런고로 이러한 방법들은 위험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완 고함이 위험하거나 제한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기 위한 현재의 완 고함(융통성 없음)의 한계나 위험에 대한 확실한 예가 필요없다. 그외는 정 반대로 이것은 오히려 다시한번 완고함의 적용범위를 넓히기 위한 하나의 도전으로서 이바지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완고한 방법을 효율적으로 시작해 야 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이곳이 바로 정확히 우리가 우선적으로 주의 를 기울여야 할 곳이며, 동시에 신속하고 급박한 개선을 필요로 하는 곳이 다. 그런 까닭에 완고함은 분명히 정확한 태도이다! 결론 : 그러므로 명문 우수대학에서 새롭고 융통성 없는 전문 분야를 개발하고 이를 위한 학과를 개설하여 젊은이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간에 융통성 없게 되도록 교육해야 하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앞단락은 하나의 교육철학을 포함해서 사회철학과 정치철학을 대변해 주 고 있다. 이 교육철학은 매우 중요하며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사회
적인 일들을 실용적으로 고찰한다. 이것은 유명한 실용주의 철학자이며 교 육학자인 존 듀이에 의해 만들어전 용어로 표현하면 사회공학이다. 그리고 현 시대의 가장 유명한 방법론자인 칼 포퍼 경에 의해 사회공학에 덧붙여 진 형용사를 사용하여 표현하면 이것은 점진적 사회공학 ® 이다(그러나 포퍼 는 민주적으로 수행된다는 조건하에서 점진적인 사회공학을 옹호한다). 알아아: 할 중요한 점은 융통성 없는(단편적인) 사회공학의 발생이다. 우리는 자연과학 만을 기술적 사회의 중심으로 생각한 고전적 지유주의와 더불어 시작했으 며 동시에 모든 사람을 위한 과학교육과 함께 시작했다. 그 다음에 과학교 육을 보편적인 것과 전문적인 것으로 나누었는데, 여기에서 전문가는 자연 과학자와 공학자였다. 자유시장을 통제할 필요성은 최소의 융통성 없는 사회공학과 전문적 사회과학교육을· 어느 정도로 허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타난 현상은 모두 누덕누덕 끼워 맞춘 것이다. 그러므로 전반적 인 개정이 필요하다 . 현대교육의 주요한 결함은 너무 일찍 전문화하는 데에 있다. 전문화교육 에 반대하는 불평의 주요 핵심은 조기 전문화의 기초가 약하여 넓게 뻗어 나가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 불평은 매우 심각한 것은 아니다 —이 불평은 산만하고, 구체적이지 못하다. 물론 모든 교육은 한계가 있 고 불충분하다. 아무리 잘 교육된 사람조차도 자기의 시야를 넓히기를 원하 고 또 넓힐 수 있다. 더 심각한 불평은 사람이 경성과학에 일찍 그리고 충 분히 전문화된 방식으로 훈련되지 않으면 그것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 다. 과학적 기술에 의해 지배되는 현대사회에서 더욱더 수많은 사람들이 현 대사회의 대부분이 자신에게 닫혀져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컴퓨터기술이 점점 더 보편화되어감에 따라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까지도 접촉을 상실한 채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만다. 그 융통성이 없고 전혀 넌센스를 허락하지 않는 접근방법 a pp roach 은 이 ® 이 개념은 포퍼 Karl Po pp er 가 제창한 사회철학으로서 일체의 혁명적 방 법에 의한 사회의 변혁에 반대하며 조금씩 조금씩 사회를 변화시켜 나 가는 것이 더 나은 사회 개량의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신화도 포함한다. 어떤 수학자가 3 伊1 ]( 또는 25 세 심지어 20 세) 때까지도 전문화를 이룩하지 못하면 그는 절 망적이고, 수학이 많이 요구되는 모든 전문 분야나, 경성 분야에서도 마찬 가지 주장이다. 공연예술에서도 유사한 신화가 적용된다. 이제 이러한 신화들은 잘못된 것이다. 교육은 전문가들의 이해를 방해하 는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하여 개조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경성과 연성으로 양분하는 것의 거부를 필두로 하여, 전문가와 비전문가로 양분하는 것도 거부하여, 전면적인 재조정을 해야 한다. 평범한 교육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기술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교육을 개혁할 수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독자의 심각한 의심을 가라앉히기 위한 시도로서 어떤 저자는 이의 구체적 세부사항을 조사해야만 할지 모른다. 만 약 그것을 한다면 학교교육에서 그의 책은 기술교육에 대한 하나의 논문집 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 그러나 몇 가지 암시를 통하여 우리는 여러 문제점과·여러 기회를 발견할 수 있음을 예시할 것이다. 이 예시의 목적은 아마도 이것들 __- 문제점들과 기회들 ――이 잘못된 것 갇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기회들이 교육체제 속에 내재해 있다는 것과, 문제점들이 현대의 젊은 아이들의 제한 된 능력 및 짧은 시간과 홍미로부터 파생된다는 것을 유치원 교사로부터 의 과대학 교수에 이르는 모든 교육자들아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 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자신의 이름을 딴 학교체제를 설립하는 데 작은 변혁을 시도한 교육자인 마리아 몬테소리를 생각해 보자• 그녀는 아주 놀랍게도 아이가 홍미를 가지 고 있으면 매우 건 시간 동안 어떤 일에 전지하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의 변혁을 시도했다. 이 발견은 아직도 일반적으로 이용되지 않고 있다. 게임을 이용하자는 몬테소리의 제안도 채택되지 않았다. 컴퓨터 는 놀라운 도구이고 이것을 이용하여 확률을 계산하면 취학전 아동들로 하 여금 산수셈을 자율적으로 훈련할 수 있도록 함은 물론 확률을 하나의 놀 이로서 재미있게 학습할 수 있게 한다. 언어교사는 의국어에 대한 아이의 지식이 ―—아이가 단지 끄덕거리는
지식만으로도 ---- 그뒤 언제라도그언어에 대한습득을촉진시키는데 충 분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유사한 사실은 어린 시절의 기계류에 대한 훈련도 비슷한 효과를 갖는다는 것이다. 즉, 어린 시절의 기계류에 대한 훈 련은 종종 어떤 연장(도구)을 손에 잡지도 못하거나 또는 간단한 장치 안 의 고장난 곳을 찾지도 못하는 무능력을 영영 그 어린이에게 가져다 준다 는 것이다. 탁자를 대패질하는 것을 일단 어느 정도 잘 배운 아이가 그 기 술을 과도한 훈련과 괴로움 없이 배우기만 했다면 요즈음 대부분 사람들보 다 손 기술면에서 이미 더 좋은 훈련을 받은 것이다. 많은 교육자들은 앞단락에서 말한 사실에 대해 의심한다. 이 사실은 추구 되고 격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누구나 앞단락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것 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앞단락의 내용들이 조사되었는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게 된다. 교육제도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은 왜 몬테소리를 따르지 않는가? 물론 어 느 정도 그들은 따르고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이며, 그 이상은 아니다. 왜 그런 것일까? 그리고 교육자들은 몬데소리보다 더 급전적이고 중요한 버 트랜드 러셀 경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사상가들의 제안들을 검토해 보았을 까? 그 주제에 관한 문헌이 어디에 있을까? 그렇게 많은 교육 전문가들이 교육에 대해 그렇게 거의 알지 못하는 것은 어찌된 것일까? 이러한 모든 질문들은 미래의 세대를 맡고 있는 교육자들이 너무도 자주 자신들의 의무 를 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두 하나같이 태만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비록 이 막중한 책임으로부터 면제될 수 있는 사람도 많이 있겠지만, 그 복잡한 서구의 교육체제는 어느 부분도 이 책임 이 면제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즉, 아이들로 하여금 어리석은 성차별 장난 감을 가지고 놀도록 하는 유치원 체제에서부터 사범대학, 공과대학, 의과대 학 또는 대학의 어느 교육들도 책임이 면제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장 나 쁜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일류대학교의 사범대학들이다. 세부적인 사항에 관심이 있는사람은아무리 사소한교육적 혁신――특 히 총명하다 할지라도 평범하고 비전문화된 학생들의 기술적인 능력을 향 상시키는 교육적 혁신 -울 실시하기 위한 시도가 어떤 문제성이 있는지
알기 위하여 카렙 가테그노와 같은 교육공학자들의 책을 읽어야 한다. 이는 문제의 그 능력이 언어, 작문, 수학, 예술, 혹은 모든 종류의 기술과 관계있 는 것인지에 상관없이 비전문가의 기술적인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모든 시도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장애물들은 점점 자란다 ― ― 장 애물들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비전문가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보다 전 문가의 능력을 향상시키도록 짜맞추어전 우리의 사회체제 속에 내재하고 있 다. 이것은 실제로 전문가의 언어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게 만드는 목적을 받아들임으로써 바꾸어져야만 한다. 5 맺는말 과학적 기술은 현대 생활의 거의 모든 부분과 모든 양상에까지 파고들었 다. 그러나 교육은 받았지만 기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보통사람들은 기술 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고, 대수와 드라이버조차도 두려워하고 있다. 이는 매우 심각하게 위험한 상태이고 유치원 교육에서부터 그 위의 모든 교육에 이르기까지 개혁에 의해 개조되어야 한다. 현재의 사태에 이르게 된 이유, 죽 적어도 현 상태를 부득이한 것으로서 정당화하는 이 보편화된 신화는 곧 과학과 기술을 〈융통성 없고 넌센스를 전혀 허락하지 않는 딱딱한 것 〉 또는 그 정도의 것과 동일시하는 것에서 바롯된다. 이 생각들은 심각한 피 해를 야기시킬지도 모르는 과오들이다. 이러한 과오는 서양의 교육체제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종교적 신조에서 비롯되어 현대사회 속에 깊게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교육체제의 결함 뒤에 숨을 수는 없다. 그들이 초래 한 세계적인 재앙들은 우리 모두를 똑같이 강타할 것이다. 우리의 교육체제 의 결함에 대항하기 시작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기술적인 부적절함 을 인정하거나 기술적 재능을 예의적 탁월성의 표시로 간주하는 교육자들 울 우리 사회에서 추방해야 한다. 기술은 저령한 가격으로 일반인들에게까 지 이용 가능하도록 하는 도구적 역할을 하게 함으로써 그 신비로움을 벗 어야만한다.
제 2 장 기술과 예술 기술은 종종 도구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된다. 또한 어느 정도 예 술적인 가치도 가지고 있다고 인식된다. 아 두 상반된 견해가 되풀이하여 표현된다면, 어떤 것은 없어지게 되겠기에 따라서 주의를 기울여야 되는 것 같다 . 기술이 단지 도구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는 이러한 특정한 맥락 속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사실 어떤 것도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 은 명백하기 때문에 이 용어 속에 있는 부정 (否定)들은 전후 관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기술이 도구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는 보통 기술의 예술 적 가치가 아니라 기술의 형식적인 가치, 죽 지식으로서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 살펴보면, 부정되고 있는 것은 지식으로서의 기술의 가 치가 아니라 그의 기법이 왜 유용한가를 이해하거나 설명해야 하는 기술자 들의 요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단어들이 종종 다른 부정으로 사용 된다― ― 기술의 아름다움을 부정하기 위해서. 그 부정은 분명히 잘못된 것 이다. 그러나 그것도 기술이 보기 흉할 필요도 없고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그러나 보기 흉할 때조차도 기술은 유용하다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 여질 때는 정당화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사소한 문제이다. 여기에서 기
술에 대한 언급은 이 쓸모없는 오해의 주제에 대한 문헌들에 대하여 관심 울 갖는 수고를 덜어 주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제시된 것이다. 1 보증 의학이 예술인가 또는 과학인가에 대한 의문은 여러 세대에 걸쳐 조사되 고 다루어져 왔다. 또한 질문의 의미조차도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다. 특히 현대 작가들은 〈 예술 a rt ).g. 라틴어에서, 〈 기법 t ech niq ue~ 폰 그리스어에서 왔으며, 그리고 그 두 단어의 어원이 동의어임을 무시해 왔다. 따라서 의학 이 예술인지 과학인지 물을· 때, 그것은 의학이 기술인지 또는 과학인지 물 어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기술과 과학은 겹쳐지지만 똑같지는 않다. 즉, 과학은 실용적인 응용성과 아마도 응용 가능성이 없는 것이 특징이고 기술 은 그 반대이다. 기술에는 항상 주먹구구식이거나 일시적안 점이 있으며 비 누적적이고 과학에 근거하지 않으며 과학적인 고려가 거의 없는 부분이 있 다. 따라서 의학을 예술(여기서 예술은 기법을 의미함)로 또는 과학으로 생각 할 때, 우리는 의학적 예술과 의학적 과학이 존재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건축에서 배관까지, 그리고 자동차 디자인에서 자 동차 정비 및 수선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기술에 똑같이 적용된다. 의학이 예술이냐 과학이냐 하는 토론이 모호하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그 이상의 어떤 무엇이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특히 개인의 전문적인 일은 과학이라기보다 예술이라는 주장이 다소 빈약한 부정이어서 보통 변명조로 주장된다. 따라서 많은 돈을 아무 쓸모없이 음악회장의 음향효과를 높이기 위해 두자할 때, 음향기술자는 음향학이 과학이 아니고 예술이라고 말한다• 만약 그가 정직하다면 미리 그의 소비자에게 그 투자가 아마도 완전한 손 실이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할 것이다. 음향기술자가 그 일을 맡기 전에 음 향학은 과학이라고 주장하다가, 실패할 때에는 음향학을 단지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롤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를 용서할 수 없고 과학이라는 그의 주 장은 겁열을 받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음향기술자는 사이비 과학자일 수도
(그럴 필요는 없지만) 있다. 선전사회에서는 그러한 사람이 잘 처신할 수 있 는 유인책이 마련된다. 이러한 것은 어떤 비교를 해보면 더욱더 선명하게 알 수 있다. 즉, 의사 가 급성 맹장염의 증상이 있는 어떤 환자를 수술할 때, 자신이 정상적인 맹 장을 제거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는 기술이 아니라 과학에 호소하고 있 는 것이다. 즉, 급성맹장의 증상 중 약 1/10 이 잘못 전단될 수 있다고 과학 적으로 입증되었기에 위와 같은 의사들은 변명할 수 있는 안전한 쪽으로 실 수를 하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맹장수술이 정당화될 수 있다 거나 그의 실수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에 호소하는 의과의사이면 누구나 용서를 받는다고 말하고자 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왜 의학적인 실수에 대해 통제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 수하는 그 의사가 어떤 경우에는 정직하게 과학의 뒤에 숨기도 하지만, 다 른 경우에는 예술의 뒤에만 숨는다는 바로 이 사실은 문제점이 있음을 보 여 준다. 즉, 의학 , 음향학, 또는 디른 기법들이 과학이라기보다 예술이라는 주장은 종종 보증(保證)에 관해 부정하는 것이다. 즉, 과학은 보증되지만, 예 술은 보증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사림이 타당성 없는 보증을 제 의하면 그는 서이비 과학자이며 옳지 않은 것이다. 과학은얼마만큼 보증할수 있으며, 예술은얼마만큼 보증할 수 없는가? 우리는 마침내 핵심적인 문제에 이르렀다. 이것들이 정말로 전통적인 철 학의 핵심적인 문제점들이다. 참으로 과학철학은 전통적으로 우리가 어떤 기준에 의하여 타당한 보증과 타당하지 않은 보증을 구별하는가? 하는 질 문을 제기한다. 이것이 과학과 비과학의 구획 0 에 대한 전통적인 문제이다. 잠시동안 이 문제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 보자. 이 문제는 예술이 아니라 과학 그 자체와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전동들은 아인슈타인의 영향과 그 ®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는 어떠한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구획설정이다. 포퍼는 과학과 비과학의 구획기준으로 〈반중가능성 (反證 可能性, f als ifi ca ti on) 났t 제창한 바 있다. 포퍼의 이 기준에 따르면 반증 에 견디는 이론만이 참된 과학으로 입증된다.
리고 주로 칼 포퍼 경의 아주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저술들을 통해 변화되 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혁명은 과학에서 〈 보증과 같은 어떤 것冷全 발견하려는 모 든 희밍을 없애 버렸다. 즉, 만약 뉴턴의 이론이 다른 이론에 의해 대치되 었다면, 대치된 그 이론이 또디론 이론에 의해 대치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앞 문장은 어떤 사람에게는 명백히 참인 것 같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명 확히 거짓인 것 같이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심각한 불일치나 오해 (또는 둘 다)가 있디는 표시이다. 뉴톤의 이론이 대치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그것이 항해사에서부터 인공위성 발사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과학자 들과 기술자들에 의해 아직도 사용되고 있디는 분명한 사실과 함께 저명한 과학자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지지되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오래된 이론 들 중 일부는 아직도 사용되고 있고(갈릴레오나 뉴턴의 이론), 일부는(아리스 토텔레스, 프톨레마, 풀로지스토의 이론) 쓰이지 않는다. 따라서 대치된 이론들 중 일부는 기술적으로 다른 이론들보다 더 낫다(뉴톤의 이론은 프톨레미 이 론보다 더 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으로 그것들은 같은 운명을 나누 고 있다. 죽, 이것들은 〈우주에 대한 보다 나은 견해〉로 대치되었다. 그 이 론은 모두 단지 옛 이론이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과학의 구획기준에 대한 포퍼의 이론은 뉴턴과 아인슈타인을 과학 쪽에 놓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미는 점성술 및 마법술과 함께 비과학 쪽에 놓았다. 그는 말하기를 과학적인 이론들은 그 이론이 데스트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 이론에 근거한 예측®이 거짓으로밝혀질 수 있는 경우를 우리 가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반박될 수 있는 반면, 비과학적인 이론은 그 이론에서 실험과 상충할 수 있는 예측을 아끌어낼 수가 없다. 과학과 사이비 과학에 대한 포퍼의 구분은 훌륭하다. 왜냐하면 이 구분은 사이비 과학의 경우는 경험적으로- 비판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 ® 과학에 있어서 예견 또는 예측이란 앞으로 있게 될 현상에 대해 마리 이 야기함을의미한다.
기 때문이다. 이론은 그 자체가 타당성이 있거나 잘 둘러대기 때문에 바판 을 견딜 수 있다. 포퍼와 그보다 먼저 윌리엄 훼웰이 이 점의 중요성을 강 조했다. 포퍼가 보여준 것처럼 이것들은 계략적이 될 수 있다. 즉, 만약 그 것이 거짓이면 실험에 의해 근본을 훼손딩하지 않고, 참이면 실험으로 지 지될 수 있다는 생각을 주장하는 것은 가능하다. 기술에 대한 예를 하나 둘 어 보면 매독, 암, 또는 다른 질병, 혹은 모든 질병에 대한 어떤 화학적 치 료법이 있다는 이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단 매독치료법이 발견되면 이 생각이 증명되겠지만, 우리는 600 가지의 화학물질을 시도해 보고 실패하면 서도 그 생각을 반박하지 못한다. 정말로 폴 얼리취는 그의 매독치료약을 606 이라고 불렀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606 번째 시도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조수가 실패하는 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서 그는 그 발견을 주시하 지 않고 지나쳐 그것이 거의 사라질 뻔했다. 매독을 치료하는 605 개의 화 학물질의 효능에 관한 각각의 가정은 분명히 논박할 수 있고 또 논박되었 지만 전체적인 가정이 논박된 것은 아니었다. 이 예는 또 포퍼의 구획기준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얼리 취의 믿음은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믿음이 사 이비 과학이라고 말할 근거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샤기비 과학적 주장들은 현저하게 반박되었다. 예를 들어 파라데이는 매우 재미있는 실험으로 많은 강산술사들의 주장을 논박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과학과 기술간의 구분에 있기 때문에 아 점에 충실하겠다. 포퍼의 구분은 우리에게 예술과 과학을 구분해 주지 못하였다. 얼리취가 했 던 것처럼 화학적인 수단으로 매독울 고치려고 시도하는 것은 예술이지만, 그것을 위해 약을 사용하거나 항생물질을 사용해서 치료하는 것은 과학이 다. 얼리치 같은 어떤 연구자가 연구계획을 착수한다면 그가 반드시 성공하 리라는 보장은 없다. 반면에 초기 단계의 매독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오늘 날의 환자는 일단 훌륭한 의사를 만나면 치료될 수 있다는 확신을 다소간 갖고 있다. 따라서 포퍼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어느 이론도 최종성이나 대치될 가능성이 보중 될 수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약간의 이론도 보증될 수 있다.
당구가 예술이러는 생각은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과학철학자들에 의해 반 박되고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 경은 설계자의 기술이 과거에는 예술이였지 만 콤파스와 자를 쓰기 시작하면서 과학이 되었다고 말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술적인 설계자들은 성공이 보장되지 않지만, 과학적인 설계자는 성공이 보장된다. 그리고 베이컨은 탐구가 예술이었다고 말했다. 즉, 연구에서 발견 된 것들은 보장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발견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베이컨 이 아주 멋지게 지적했던 것처럼 연구자는 콤파스와 자가 주어지면 〈냇가 에서 물통으로 물을 퍼내듯이〉 발견을 풍부히 해낼 것이다. 과학적인 발견 에서 이 콤파스와 자에 해당하는 것은 곧 귀납적 방법이다. 칼 포퍼가 말했 듯이 이 방법은 과학을 만드는 소세지 제조기계와 같다. 즉, 입력은 사실적 자료이며, 기계의 손집이가 시동이 걸리고 나면 출력되는 것은 과학이다! 꼭그와같은현상이다. 포퍼는 과학을 만드는 소세지 제조기계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요 즈음 대부분의 과학철학자들은 아주 일찍이 이에 대해 말한 아인슈타인의 권위 때문에, 또는 포퍼가 지신의 논쟁을 뒷받침하는 강한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포퍼의 의견에 동의한다. 위대한 발견을 한 많은 위대한 과학 자들도 여러 해 동안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보낸다. 그러나 약 150 년 전 윌리엄 훼웰도 또한 과학을 만드는 기계는 불가능한 것이라고-과학 적인 연구에서 성공하려면 직관과 행운이 필요하다 말했다. 그리고 존 스듀어트 밀은 훼웰이 직관주의자이고 패배자라고 주장하면서 지금은 귀납 법을 위한 밀의 네 가지 기준으로 알려져 있는 과학을 만드는 기계 scie n ce- makin g machin es 를 묘사함으로써 자기가 훼웰울 반박하였다고 생각했고 그 렇게 선포했다. 이 네 가지 기준들은 아직도 많은 대학에서 가르쳐지고 있 다. 밀의 이 기막힌 생각 중에서 정말로 어리석은 것은 사실 지금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만약 밀이 과학을 만드는 방법을 진정 안다면, 왜 그는 우 리가 그를 신용할 수 있는 적어도 하나의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법칙을 만 들어내지 못했단 말인가? 우리의 고민으로 돌아가자. 포퍼는 과학자들은 위험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그들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면 그 오류가 밝혀지는 것이 그들
이 감내해야 할 위험이다. 그는 과학적인 연구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그러 나 왜 우리는 음향기술자들의 〈 보증浮븐 받아들이지 않고 다리를 건설하는· 사람들의 보증은 받아들이는가? 어디로부터 과학의 보증은 오는 것인가? 포 퍼는 이 질문을 간과했다. 과학에 대한 윌리엄 훼웰의 이론은 포퍼의 용어들을 빌려 표현되어질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오히려 포퍼의 것보다 더 선명하고 자세하다. 따라서 과학적 이론은 사실과 더 오래된 이론들에 대한 설명이다. 과학적 이론은· ( I ) 어떻게 해서 발견된 가설이며 (2) 적절히 테스트된 가설아며 (즉, 새로운 실험으로 이 발견을 반박하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진) (3) 그 데스트.를 통과한 하 나의 가설이다. 훼웰은 데스트를 통과한 가설은 영원한 성공을 보장받았다 고 말한 반면 포퍼는 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즉 데스트를 거친 이론은 결 코 논박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훼웰과 달리 포퍼는 동의하지 않는다. 훼웰은 더 나아가 거친 이론은 승인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포퍼가 이 점 에 동의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과학은 · 어떠한 승인과도 관계가 없기 때 문에 이러한 질문은 오히려 피하는 것이 좋겠다. 아인슈타인 이후의 관점이나 포퍼의 관점에서 본 과학-즉, 과학자들 이 제시하고, 이 이론이 타당하게 설명될 수 있는 힘과, 시험가능한 예측둘 이 맞는가 틀리는가를 조사하는 이론들, 바로 이런 관점에서의 과학은 승 인, 보증, 신뢰성, 예측 등과 관계가 없다. 그러나 기술은 그렇지 않다• 예술 대(對) 과학이라는 관점에서의 과학, 죽 기술자들의 예술과 과학간의 대비 에서의 과학은 〈 보증〉이라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지적 활동으로서의 과 학은 〈 보증 〉 이란 것이 없다. 뉴턴의 이론조차도 대치되었으니 말이다. 그러 나 공학(기술)으로서의 과학은 모두는 아니지만 일부 연구과제는 보증이 된 댜 이와 마찬가지로 과학적인 의학에서 어떤 치료법들은 성공할 수 있다고 보증되며, 다른 것들은 성공할 수 없다고 하고, 또 다른 것들은 아직 성공 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고 가정된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보증〉인가? 우 리가 〈과학〉의 두 가지 면을 정확하게 구별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문제 에 관해 분명하게 다룰 수가 없게 된다. 과학철학자들은 보증이란 것은 가설에 들어맞는 예들을 되풀이하여 얻게
되는 〈 가설의 확증 〉 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각각의 하얀 백조는 모든 백 조가 희다는 가정을 조금씩 확증 저 처 한다. 훼웹과포퍼는, 우리는 예들을 찾지 않으며 흰 백조를 찾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으로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 히려 우리는 반박을 시도하며, 흰색이 아닌 백조를 추구한다. 그리고 한 이 론은 그 이론을 반박하려는 시도가 실패하면 그때 비로소 확인되어지는 것 이다. 훼웰은 〈 확증된 이론只본 진리로 보장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포퍼는 이 론이 아무리 확인됐다 할지라도 그 이론이 다음 번에도 맞으리러는 보장은 없다고말한다. 우리는 〈 확인 〉 이란 시험의 결과이며 예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에 동의해야만 한다. 또한 과학에는 보증이 없다는 것에도 동의해야만 한 다. 그러나 기술의 경우는 다르다. 기술은 많은 경우 보증이 요구되고, 발 달된 나러에서는 나라의 법으로 그것이 요구된다. 그것이 없으면, 운항면허 도 없다. 보증이 없으면, 새로운 디자인의 비행기와 새로운 약품을 투약할 수 있는 면허도 없다 . 광고하는 데 있어서의 전실은 단지 광고가 사실이라 는 보증을 의미한다. 지금은 무엇이 보증이고 무엇이 면허를 필요로 하는지 전혀 분명하지 않다. 음향기술자들은 보증 없이 설계하도록 허가되어 있다. 보증 없이 고충전물용 엘리베이트를 설계하는 것이 대부분의 발달된 국가 에서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그 보증은 얻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무엇에 보증을 요구해야 하는가에 대해 서로 일치된 의견을 갖지 못한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차나 트랙터를 운전하는 것 은 면허를 받아야 되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 반면에 비행기를 조정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면허증이 요구된다. 면허증은 어떤 보증이 확인 되면 주어진댜 라첼 칼슨은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 없이는 산업공장들을 인가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함으로써 환경보촌 운 동 을 시작하 였다(「침묵하는 봄」 참조)• 그녀가 옳았을까? 그러한 보증들이 필요한가? 어 떻게 그 보증들을 확인할 수 있을까? 입법자들은 그녀의 충고에 주의를 기 ® 어떤 이론이 주는 설명이 실제와 완전히 부합하는가를 확인하는 것울 말한다.
울이기 전에 알아야만 한다. 즉, 법률제정 과정에서 보증을 획득할 수 있는 과정에 대한 토의와 결의를 거쳐야 한다. 칼슨은 이런 면에서의 적절한 제 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따라서 어떤 기술은 법적 정의의 측면에서 보면 과학이다. 즉, 이 기술은 법적으로 규정된 시험들에 합격한 것이다. 또 어떤 기술은 그렇지 않은 것 도 있다. 무엇이 기술을 과학으로 만들고, 무엇이 어떤 일을 법적이게 만드 는지, 또는 그렇지 않게 만드는지, 무엇이 입법자들의 결정을 현명하게 만 드는가를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때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2 직관 직관은 명확히 정의하기가 어렵다. 기술이 예술이냐 과학이냐라는 문제로 되돌아가 보자. 그리고 이것이 어떤 면에서는 예술이고 어떤 면에서는 과학 이리는 것에 동의하자. 또한 이것은 부분적으로 정말로 순전히 우연적이기 도 하다. 즉, 어떤 사람이 주어전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어떤 기법을 필 요로 하는데, 그 요구된 과제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바로 그 기계 부속품들 이 일에 꼭 알맞게 바로 눈앞에 있음을- 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그는 자 신의 일과 자신의 생각을 관련짓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지식과 사고가 필 요하다. 그 요구된 일을 하기 위해서 어떤 기계의 자동적 기능이 아무리 훌 륭하다 할지라도, 그리고 바로 눈앞에서 그 기계가 기능을 발휘할 때 무슨 일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아무리 쉽다 할지라도, 그리고 또 심지어 그 기계가 주어전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 대한 사례들을 낱낱이 기 록했다 하더라도, 그러나 그 관찰자는 사실들을 인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때 로는 여러 부 속 풍들이 서로 분리되고, 또 어떤 일에는 맞지 않아서 찰못된 기능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그저 우연히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기도 한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기술주의자들이 인위적으로. 수행하려고 하는 것 이지만 사실은 자연적 기능을 자연스레 수행하고 있는 살아 있는 생물체일 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실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우리
는 우연을 무시하고 그 발견자나 발명가의 칙관에 집중할 수 있다 - · - 우 리가 말하고 있는 것이 어떤 단순한 관찰이든, 또는 어떤 설계와 어떤 관찰 을 통합한 것이든 관계 없이. 우리는 직관이 과학과 우연 사이에 멋지게 앉아 있는 것을 즉시로 알 수 있다. 따라서 발명가와 발견자의 일 ―― 간략히 말해 연구자의 일 - 은 과학이 아니다. 만약 그들의 일이 과학이라면 우리는 과학을 만드는 소세지 기계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들의 일은 단순한 행운이 아니다. 만일 그들의 일이 행운이라면 그 일은 영원한 일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직관을 정 확히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헛수고이며 결코 연구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기술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전설적인 황금손을 가전 기술자를 생각해 보-A}. 황금손에 대한 정의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황금손은 모든 기술에서 나타난다. 황금 손을 가진 연구자, 의과의사, 자동차 기술자, 디자이너 혹은 제도사들이 있 다(베이컨의 바유는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과장이었다. 콤파스와 자가 모든 제도 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황금순냑중은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우리는 사물들의 체계에서 그 황금손들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를 모른다• 황금손은 일반적으로 보증될 수 없는 것을 행한다. 그러나 그들은 행하도록 보증된 사람둘이고 훌륭하게 수행하기까지도 한다. 이것은 단지 감각적 재주만은 아니다. 의과의사가 심장전문의이든 뇌전문의이든간에 황금손을 가진 예술 가라면 단순한 감각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확실히 이들은 전설적인 음향 기술자나 배관공들처럼 기회를 여러번 갖도록 허락되지 않는다. 음향기술자 나 배관공은 법정으로 끌려가 손싱에 대한 배상을 하도록 판결될 수도 있 다. 그러나 뇌전문의사가 법정에 끌려가면 손상 이상의 것이 문제가 된다. 죽, 외과의사들은 환자의 생명을 가지고 실험하도록 허용되지는 않는 것이 다. 그러나 단지 다른 뇌전문의사이면 누구나할 수 있는 것울하는 의사는 당연히 황금손을 가진 자로 평가되지는 않는다. 이 계략을 어떻게 다물수 있겠는가? 어떻게 의과의사들은 그들의 황금손을 사용하도록 허락되는가? 황금손을 가전 의과의사에게는 어떻게 다루는지보다는 무엇을 다루는지 롤 아는 것이 더 쉽다. 우리가 기억하기로 수술에 있어 실패에 대한 표준
바율이 허용되고 있다. 이 기준은 법아나 관습에 의해 규정된 바와 같이 환 자의 상태에 따라 다양하게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황금손을 가진 의과의 사는 이 기준을 넘어선다. 이 때문에 이것을 가진 의과의사들은 그 기준을 넘지 못하는 다른 의과의사들이 손댈 수 없는 경우에 수술을 할 수 있는 사 람]다. 이것은 비열한 계략이 전혀 아니다. 그 계략을 우리가 어떻게 처리 해야할까? 어떤 사람은 손재주가 좋은 손을 가졌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정 말로 솜씨 좋은 손을 가졌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의 솜씨는 정말로 그 사 . 람의 손에 있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는 신비스럽지는 않더라도 드문 경 우이다. 손재주가 좋은 손은 의과의사에게는 매우 긴요한 것이다. 그러나 일 반적으로 손재주가 없는 사람은 어쨌든 의과의사 자격이 없다. 그러나 손재 주가 전부는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 직관저러는 단어는 원인, 이유, 방법, 혹은 체계는 알 수 없지만 통계 적으로 〈 확률적으로 기대했던 것보다 더 잘한다고 묘사된 일의 질 〉 에 대한 이름에 불과하다. 설명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간에 직관은 아니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직관에 의해 생긴 것으로서 이해되는 것은 더이상 직관이 아니 다. 따라서 대부분의 공식들과 심지어 전체 수학 분야나 주제들은 단순한 직관에 의해, 다시말하자면 어떤 비상한 생각이긴 하나 정상적인 방법의 도 움을 빌려 정상적인 정신에 의해 이해될 수 있는 그러한 비상한 생각에 의 해 생겨난댜 이것은 또한 실제로 비상한 생각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반복적으로 흉내내어지는 많은 예술 또 는 예술적인 사고의 경우에 들어맞는 말이다. 이것으로 문제가 끝나지는 않는다. 오직 천재들만이 이룰 수 있는 것과 범인이 할 수 있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황금손들은 그 중간쯤 에 속한다. 그리고 또한 그 중간에는 부분적인 방법들이 있다. 부분적 인 방법 Pa rtial meth o d 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역시 말 하는 것보다는 예를 드는 것이 쉽다. 사람이 풀기는 쉽지만 컴퓨터가 풀기 는 매우 어려운 문제를 생각해 보자. 고등학교 기하교과서에 있는 거의 모 든 문제는 이러한 것이다. 확실히 우리는 교과서의 문제를 프로그램화할 수
있고, 그러면 컴퓨터는 그 문제를 해결하여 우리가 말을 하는 것보다 더 빨 리 답을 찍어낼 수 있다. 그러나 기하학의 형식화(프로그램화하는 것을 말함), 또는 어떤 오래된 기하교과서에 나오는 어떤 오래된 문제조차도 형식화하 는 것은 쉽지 않으며 전문가의 도움을, 아마도 황금손을 가진 전문적인 프 로그래머의 도움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그런 때 보통 또는 중상위 수준 에 있는 고등학교 학생들은 이것을 손으로 풀려고 노력할 수 있고 또 그렇 게 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 남녀차별을 하는 교사들은 여자들이 직관적이 니까 대수보디는 기하를 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대수에서는 어 디든지 방법이 있지만, 기하에는 완전히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발견적 지 도법 ―― 이 단어는 발가벗은 아르키메데스가 길거리를 달려가면서 〈 유레 카 Eureka 〉라고 소리치며 자신의 해결책을 발견했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해 결책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법칙들을 의미한다――이란 것을 가지고 있 는데 이 지도법은 손가락을 가지고 장난하는- 식의 상당히 주먹구구식 눈어 림 침작으로 되어 있다. 손가락을 가지고 장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방법은 아니지만 도움이 될 수 있다. 더욱이 대개 좋은 발견적 지도법을 가지고 노 는 일은 한 방법으로서 간주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도움이 된다. 체스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대표적인 예이지만 여기에서 그것을 이야기 할 필요는 없다. 체스를 잘 아는 사람은 누구나 체스의 예술과 과학은 물론 과학과 예술간의 그 중간 부분도 안다. • 이것이 전부는 더더욱 아니다. 직관은 수용할 수 있는 보증과 수용할 수 없는 보증으로 나누도록 요구되었으므로 그래서 이것은 매우 복잡한 일이 되었다.이 결과많은사람들은직관은一―적절하게 사용되기만하면_ 상당히 확실한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만약 직관이 보증의 타 당성을 판단하지만 직관 자체가 틀리면, 우리는 보증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직관의 타당성을 판단할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부 사상가들 로 하여금 직관이 가끔 틀린다는 이유로 모든 직관을 얕잡아 보게 만들었 다. 따라서 수학에서는 각 단계마다 확실성이 보장되어야만 하고 직관은 틀 릴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수학자들은 수학적인 직관은 가치가 없 다고 주장했다. 작퀴스 하다마드(『수학분야에 있어서 발명심리학』, 1948) 는 직
관기 없는 수학적인 증명은 말이 안 된다고 반대한다. 그러면 직관적인 실 수는 무엇인가? 하다마드는 이 질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수학은 보증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명과 논박이 필요하다 는 혁명적인 말을 이므레 라카토스( 『 증명과 논박 j , 1963, p . 64) 가 말했다. 그 러므로 우리는 증명을 만들어낼 때 틀릴 가능성이 있는 직관을 사용하는 일 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직관은 찰못된 것일 수도 있고 따라서 고쳐질 수 도 있다. 우리는 우리의 직관을 양육할 수 있다. 라카토스는 우리가 우리의 직관을 교육할 수 있다는 말로 새 시대를 열 었다. 물론 똑같은 말이 부분적 방법들에 대해서도 말해질 수 있다. 즉, 부 분적인 방법들은 툴릴 수도 있고 고쳐질 수도 있다. 더욱이 그것들은 보통 일반적인 원리, 또는 지적인 골격, 또는 그둘이 속한 분야의 형이상학에서 나왔고 따라서 결함이 있는 방법을 야기시키는 그 일반적인 원리둘은 고쳐 져야만 할 것이다(J. 애거시, 『 과학적인 문제의 본질과 그 문제의 형이상학적 뿌 리, The natu r e of scie n ti fic pro blems and the ir roots in me t a p h y s i cs 』 , 1964). 그러나 직관 및 부분적인 방법들이 수정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모든 보증을 걷어치우는 것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이다. 왜 수학에는 보증이 없고, 수학적인 연구가 모험적인가를 리카토스는 아주 아름답고, 영감적이 고, 혁명적인 자세로 논의했다. 그러나 수학적인 모험은 기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죽, 기술자들이 다리를 설계할 때 자신들의 수학을 믿을 수 없다면, 그들에게 일이 맡겨지지 않든가 다리가 붕괴되어 감옥에 가게 되었을 것이 다. 잘못된 다리를 설계하고 만드는 기술자들은 감옥에 가는 것으로 끝나게 되고, 그들은 이므레 라카토스 뒤에 몸을 숨길 수는 없다. 3 반복성 우리는 천천히 예술 자체에 접근하고 있으며 말하자면 예술감상의 미묘 한 목적, 미적인 질의 목적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보증, 칙관, 독창성에 대한 토론을 위해서 미적 기준은 말할 것도 없고 미적 고려를 기술에 도입
하는 것이 요구된다. 어떤 경우에도 약간의 분명한 사실을 확인한 것 의에 는 그 주제에 대해서 거의 말해진 것이 없다. 즉, 너무나 자주 기술과 그 생 산물들은 죄악만큼이나 보기 흉한 모습이다. 때로는 그둘의 아름다움은 신 성하기도 하다. 이것은 특정한 목적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전통과 생활방식 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젊은이들이 낡은 자동차를 고치며 홍국손하는 아름다 움은, 기술을 비웃으며 비올라의 D 음을 위한 비발디 협주곡, 또는 슈베르트 의 아르페지오 소나타의 가장 철묘한 연주를 가장 최신의 디지탈식 돌비 재 생기를 켜면서 자기 녹음데이프를 준비하는 심미가들에 대항할 만한 충분 한논쟁거리인 것 같다• 예술작품의 재생산 가능성은 이것을 예술에서 과학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경성적 사실이다. 이것은 모든 심미가들과 순수 예술전문가들을 괴 롭히는 것이다. 그 유명한 예술사학자인 에른스트 곰브리취 교수는 재생한 작품은 그것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좋은 원본만 못하다고 말했다. 곰브리 취 교수는 심지어 一—자신의 열정적인 찬양자인 예술역사가이며 사전사인 칼 카렌자가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리고 글렌 굴드의 평생 업적과는 반대되 게도 ——사전과 축음기조차도 예술이라고 보는 것을 거부했다. 따라서 앞 문단의 마지막 문장의 모순은 카렌자와 굴드에게는 말이 될지 모르지만, 곰 브리취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며, 그는 돌비든 아니든, 비발디나 슈 베르트(그는 로버트 코간의 것도 여하튼 듣기 원치 않을 것이므로, 어떤 음악을 고려한다고 하여도)의 어떤 재생도 경멸할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이것을 들으 러 음악회에 갈 것이다. 곰브리취의 〈재생에서는 무언가 잃어 버린다났근 주 장은 옳다. 그러나 카렌자와 굴드를 살펴보면 거기에도 또한 얻는 것이 있 다——기술적인 것뿐만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엔지니어들조차도 역시 곰브리취 같은 사람들 때문에 괴로움을- 당한다. 곰브리취 경은 한 우수한 현대의 바이올린과 스트라디바리우스와를 비교한 음질검사 결과 답신서, 전자 울 7센 과 목제 울갠의 음질검사 비교결과 답신 서, 또는 원음과 비교한 4 채널의 돌비 재생음 등의 음질겁사 비교결과 답 신서를 수락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비평적인 태도를(칼 포퍼 경의 제자요 천 구로서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가질 것이다. 이 기술자들은- 어떤 경우라도 전
문가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재생음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할 것 이다. 그러나 그들은 중요한 어떤 것을 간과하고 있다. 음악회에 가서 생생 한 공연현장을 보는 홍운녓 7 분명히 재생산될 수 없다. 방영되기 전의 헐리 우드 영화를 보는 홍옵 F 감이나, 심지어 뉴욕, 런던, 파리 등에서의 영화제에 대한 흥분감도 재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얀 잘비가 강조했듯이 동네 시골극장에서 개봉영화를 보는 것이 TV 에서 심야방송 시간은 물론이고 심 지어 예술극장이라 하더라도 재상연을 보는 것보다는 훨씬 더 재미있는 일 o] 다. 예술은 신선한 것이다. 예술을 재생하는 것은 그것을 과학으로 만드는 것 이며, 반복가능한 것으로 그래서 결국은 죽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가치가 없게 되며 더이상 예술이 아니다. 그러면 곰브리취의 반대자들의 입 장은 어떤 것일까? 가능한 입장이란 무엇일까?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입장 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이번 러운드에서 승리하기까지 했으니까. 아 근원을 찾기 위해서는 좀더 세밀히 살펴 가야만 한다. 연주회는 4 채널 돌비 재생음이 아니며, 게다가 연주회는 프로그램의 첫번째 연주를 재 생하는 것이 아니다. 곰브리취 교수는 베토벤의 9 번 교향곡의 첫 연주를 감 상하는 청중에 합류하기 위해 비엔나에 갈 수 있다면 너무나 기뻐할 것이 고, 어떻게든 그러한 교통수단이 제공될 수만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것 울 이용할 것이다 . 만약 기술이 그 연주를 재생산할 수 있다면, 그는 그 연 주회 자체를 목격하는 대신에 첫공연의 재생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기뻐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곰브리취 교수는 모나리자의 제막식에 참석하지 않 았다. 복제품보다는 제막식에 있었던 원본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비록 그 원본도 진짜 원본의 일차 복제품이고 진본과 바교하면 못하다는 것을 알지만). 증거 : 만약 타임머쉰이 있다면 곰브리취 교수는 원화의 제막식 보기를 좋 아했을것이다. 수준 높은 기준에 의하면 (어떤 맛있는 요리나 고대 이집트 조각품처럼 재생 샨!o l 불가능한 것을 제의하고는) 재생산이 불가능한 예술은 그 어떤 것도 예 술이 아니다. 이집트의 조각은 장례식에서 장식으로- 쓰인 뒤 죽은 사람이 다시 깨어날 때까지 다시 볼 수 없도록 피라미드의 어둡고 깊숙한 곳에 묻
혔다. 그러나 맛있는 요리는 이 것 의 개념에 대한 전설 적인 창안자의 생각이 주방장의 기준에 의해 복제된 것 이며, 고대 이집트 동상은 작업장에서 출발 한 것이다 . 간략히 말해 어떤 것이든 기준에 따라 재생 가능히기도 하고 불 가능하기도 하다. 오늘날 야금술은 의심할 바 없이 기술이며, 보통 예술이라기보디는 과학 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야금술 발달과정의 모든 단계가 예술이라기보다 과 학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숙련된 솜씨가 중요한데, 손꼽 히는 야금술 역사가인 시릴 스텐리 스미스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생산 품은 쓸모있는 가공품이라기보다는 보통 장식품이었다. 이것은 예술가들아 나 장인들의 작업장에서 발달되었다. 주조하고, 합금하고, 용접하는 과정들 은 보석과 조각을 만드는 일에서 시작되었다고 스탠리는 말한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 누군가가 이론적인 사고를 가지고 이것을 적용하기 시작했던 1900 년 전에는 야금술이라고 할 것이 거의 없었다 汗 근 점이다. 실 제로 과학을 예술의 결정체 cr y s t a lli za ti on 로 보는 생각은 시릴 스탠리 스미 스의 아주 홍미있는 저술에서, 특히 그가 동양의 예술이 서양의 그것과 과 학에 끼찬 영향에 관해 말할 때 나오는 핵심적 주제이다 . 그는 동양과 서양 의 진짜 차이룰 만드는 것은 예술 자체가 아니라 결정화의 과정에 대한 동 양과 서양의 차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것은 과학철학, 특히 사회과학 그리고 기술철학 모두에 매우 중요한 일 이다. 깨끗이 해결되어야만 하는 끝없는 갈등은 우리 각자가 어떤 뜻에서는 아담과 이브의 재생산이라는 사실, 따라서 (과학적으로) 재생산이 가능하면서 도 또 어떤 면에서는 우리 각자가 진정한 예술작품처딥 독특하고 재생 불 가능하다는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클로닝 (Clonin g : 미생물의 유전자를 다 른 미생물에 전이하는 것 )을 발견한 사람들은 아갈은 사실에 의문을 품고, 원 칙적으로 유전 〈정보注근 재생될 수 있고 또 우리 각자는 유전적 부호로 우 리의 DNA 분자에 대하여 〈적혀 있는 메시지〉에 의해 묘사될 수 있기 때 문에, 우리 각자는 재생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보이론은 우리에게 반 대로 말한다. 정보이론에 의하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어떤 메시지도 정확히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샤논의 법칙 ; 정보이론의 핵
심적 가 정 ). 그리고 우리는 유전적 〈 메시지 〉 가 전적으로 유전 인자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다는것 을 안다.그리고우리는유전적인 〈 메시지 〉 가,다른환 경적 인 조 건에서는 다르게 〈 해석 〉 될 것이라는 것을 안다. 쿨로닝은 일란성 쌍병이를 재생하는 방법이 결코 아니다 _ 만약 조건이 거의 이상적으로 갖추어 진 다면, 클로닝은 기 껏 해야 거의 똑같은 정도의 쌍둥이를 낳을 수 있 을 뿐이다. 어떤 쌍둥이도 똑같아 태어나지 않으며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우리가 여기에서 너무 까다롭게 구는 것은 아닌지? 차이점이 무시할 정 도로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동일성에 가까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곰브리취 교수나 다른 전문가 그리고 심미가에게 그 문제에 대해 물어보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재생산의 기준은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일 단 편견 없이 채택되고 적용되었을 때 그 답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첫사랑이 재생될 수 있는가? 과연 사랑이? 위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이 것은 재생 가능성의 기준에 의해 좌우된다. 어떤 방법으로는 정말로 첫사랑 의 재생이 가능하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는 안 된다 . 똑같은 주장이 예술 적인 모험과 과학적인 실험 모두에 공통으로 적용된다 . 그러나 과학적 실험 울 재생하는 것과 예술작품을 재생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과학적인 실험의 재현 가능성의 기준은 그 실험의 묘사 속에서 정해진다. 이것이 정말로 과학자들이 왜 곰브리취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가에 대한 답이다. 죽, 모든 가정 하나하나는 명료하게 규정된 어떤 조건에서만 재현 가능한 것으로 분명히 전술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과학적 실험 과 과학적 기술 양자 모두의 절대적인 특칭이다. 미술의 원화나 교향곡의 악보, 음식요리법의 경우는 다르다. 즉, 이것들 은 우리에게 무엇이 원품의 좋은 복제품인지 말해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은 남아 있다――언제 재생이 옳은 것인가? 때로는 그와갇 은 질문이 현학적이고, 상당한 홍미가 있다. 글렌 굴드가 바하의 원작을 재 현하는가, 아니면 바하의 새로운 각색인가? 진짜에 더 가까운 것이 현재의 햄릿인가 또는 19 세기의 것인가? 아니면 영화 햄릿은 세익스피어인가? 이 러한 재미있는 질문들이 공개되어 있다. 과학에서는 모든 것들이 명쾌하다. 즉, 어떤 것이 에르스테드의 실험의 반복이고 핼리의 혜성 관찰의 반복인지
그 질문에 대해 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것들은 알려진 조전하에서는 원칙적으로 반복 가능하다. 이러한 점은 상당히 분명하면서도 종종 간과되고 있으나 예술에 있어서 는 매우 중요한 관계를 갖고 있다. 레코드에서 나오는 음악은 예술이고, 레 코드 자체는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좀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 다. 녹음기술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예술이고, 얼마나 많은 부분이 과학인 가? 전문가둘은 모두 이러한 질문을 하기 싫어한다. 결과적으로 녹음 자체 의 예술적인 질, 즉 황금손을 가진 녹음기술자를 요구하는 그러한 정도의 질이 전문가에 의해 너무 자주 무시된다, 만약 그들이 전지공학적으로 앰프 룰 서용했거나 또는 재생한 음악에 헌신한 전문적 예술가가 아닌 한. 그래서 우리는 평범한 솜씨에 의해 명곡의 수준 높은 연주가 녹음되는 반면, 높은 예술 수준의 녹음기술이 형편없는 음악을 녹음히는- 데 너무 자주 낭비되고 있는상황을목격한다. 따라서 재생 가능성이란 기준 정밀성의 문제이며 반면에 예술은 과학을 보완할 수 있는 것으로~ 즉, 예술은 어떤 황금손에 의하여 만들어전 재 생 불가능한 부분의 일부로서 — ― 생각하자. 그러나 지금은 당분간 재생 가 능성에 대하여 집중하자. 왜냐하면 유감스럽게도 전문가들은 자주 그리고 좀 거만하게 과학과(과학적인) 기술을 재생 가능한 것으로 보는 것을 반대 하고 예술의 핵심인 독특성을 옹호하기 때문이다. 4 사회적 기술 사회적 기술은 겉으로 보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사실은 이 것이 존재하고 있지만 대부분 과학 이전의 것이다. 왜? 사회적 기술을 과 학적이 되게 하기 위해 적용하는 적절한 사회적 과학이 거의 없기 때문이 다. 이 대답은 너무나 복잡하다. 다음의 대답은 도움이 될 것이다. 죽, 사회 적 기술은 아직까지 재생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따라서 보증도 없는 것으 로알고있다.
사회과학자들이 사용하는 글의 대부분은 비과학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매우 환영을 받는다. 어떤 생각을 비과학적이라고 비평하는 것은 종종 전혀 비평하는 것이 아니다. 때때로 책의 저자는 엥겔스가 그의 유명한 책 인 『 사회주의의 발달 ―― 유토피아에서 과학에 이르기까지 』 에서 한 것과 프로이트가 그의 모든 저술에서 한 것처럼 과학을 왜곡시킨다. 이 주장들은 포퍼의 분노를 샀다. 그는 이러한 주장들이 왜 그렇게 큰 문제인지 거의 설 명하지 않았다. 물론 누구나 다 알아야만 하듯이 맑스주의자들, 프로이트 추 종자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길거리 설교자들과 약식 연단의 선전가들이 그 둘이 말한 것에 대한 신뢰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종종 과학적인 자격을 주 장한다. 이것은 마치 포퍼가 과학은 마땅히 신뢰성을 요구한다고 말하는 것 · 처럼 들린다. 즉, 이는 뉴톤과 아인슈타인은 과학적인 자격을 받을 만하고 프로이트와 맑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가 뉴돈과 아인슈타 인, 두 사람을 동시에 믿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전적으로. 비 실용적이다. 따라서 최고의 과학이란 신뢰성의 현존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는 포퍼의 주장은 옳다. 즉, 지난 세기에는 뉴톤에 대해 산뢰성을 인정하였 으나 금세기에는 아니며, 오늘날에는 아인슈타인에 대해 신뢰성을 인정한 다. 그러나 왜 뉴톤과 아인슈타인이 신뢰성을 얻어야만 하는가? 내가 뉴튼 이나 아인슈타인을 믿는다는 것을 참으로 결정할 수 있는가? 이것이 중요 한가? 그렇지 않다. 파라데이와 아인슈타인은 뉴톤을 거부했으며 로렌스와 마이클슨, 또다른 사람들은 뉴톤에 집착해서 아인슈타인 쪽으로 옮겨가는 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훌륭한 과학자들이었다. 신뢰란 모두 너무 불합리한 것이다. 당신이 믿는 것을 믿되 다음의 질문 은 남겨두라 : 당신의 믿음은 과학적인가 또는 과학적 일관성이 있는가? 그 러나 과학적인 사실이 존재하며 만약 〈과학적〉이라는 단어가 너무 건방전 것이라면 〈반복성이 있느냐〉라는 단어로 충분하다. 대부분의 사실들은 반복할 수 없다. 또한 어떤 사실이 반복될 수 있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실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 과학의 일 반적 인 전통은 영국 학술원 the Roy al Soc iet y of London 의 설립 이래 반복 가능성의 법칙을 인정하였다. 어떤 사실에 대한 검증된 보고서는 반복 가능
한 것으로 발표된 보고서이고 또한 적어도 두 개의 독립적이고 수용할 수 있는 증거에 의해 반복적으로 보고된 것이다. 과학적인 것으로서 간 주 하기 위해서 관찰은 두 가지 사항들을 포함해야 한다. 첫째, 보고서 내용의 전술 은 특별한 장소와 시간에 제약성이 없이 일반화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보 고서 내용의 전술은 특별한 장소와 시간에 관찰된 것으로서 독립적인 증거 들에 의해 표현된, 적어도 두 개의 독립적인 보고서를 포함해야 한다. 따라 서 과학적인 관찰보고서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즉, 어떤 관찰 가능한 조 건 아래서 어떤 관찰 가능한 결과가 일어난다고 말하는 일반화일 것, 어떤 일정한 장소에서 어떤 일정한 시간에 한 관찰자에 의해 모두 관찰된 조건 과 결과에 대한 보고서일 것, 그리고 다른 독립적인 관찰자에 의해 독립적 으로 관찰된 보고일 것, 이상 세 가지이다. 과학적인 연구의 실재에 대한 규칙과 방법에 관해서는 거의 합의된 것이 없지만, 과학적인 관찰에서 재생 가능성에 대한 규칙은 과학의 범위 안에서 신앙처럼 준수된다. 그러나 임마누엘 칸트와 칼 포퍼의 유명한 예외가 있다 해도 전통적인 과학철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이른바 반복 가능 한 사실의 예보디는 관찰된 사실둘은 어떤 것이든 과학적이라고 받아들인 다. 특히 대부분의 20 세기 중반의 과학철학자들은, 〈 모든 백조는 희다〉와 같 은 일반화의 예들은 검증을 필요로 한다는 칼 행펠 및 루돌프 카냅의 주장 에 대하여 언급하고 그 이유와 까닭, 그리고 확인의 정도를 토론한다. 흰 백 조를 관찰했던 적어도 둘 이상의 사람이 실제 그렇다는 것을 보고하는 한 〈모든 백조는 희다 〉 라는 것은 과학적인 자격을 갖춘 관찰보고서이다. 즉, 두 사람이나 또는 더 많은 사람들기 반복 가능한 관찰을 〈 모든 오스트레일리 아 백조는 검다〉라든가 〈모든 브라질 백조는 목이 검다 〉 처럼 반대로 보고 할 때 이것들도 또한 과학적인 자격을 얻게 된다. 따라서 과학적인 자격이 전리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요구되는 것은 어떤 과학적 관찰이 진실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또한 (o ptic ks 란 그의 글에서 뉴턴에 의해 처음 관찰된 것 같고 피에르 더행 에 의해 자세하게 토론된 것처럼) 우리가 과학적인 관찰을 뒤엎을 때-전 에 맞다고 주장되었던 것을 툴리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그것이 고쳐지
기를 원한다. 예를 들어 〈 백조는 모두 회다 〉 라는 것이 거부되면 〈 유럽의 백 조들은 모두 희다 〉 로 대치된다. 비슷하게 〈 해가 동쪽에서 뜬다 〉 라는 것은 〈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 같다 〉 로 대치된다. 저항에 관한 움의 법칙은 임퍼던스에 대한 파라데이와 맥스웰의 법칙으로 대치되었다. 그리고 〈영소 원자의 무게는 35.~ 이다 〉 가 〈 지구상에 있는 염소 원자의 평균 무게는 35. 5 아다 〉 로 대치되었다. 그밖에도 여러 예가 많이 있다. 이 모든 것은 많은 문제들을 노출시키지만 기술에 관련된 것을 제의하고는 그러한 문제들을 여 가에서 토론할 필요는 없다. 기술은 어떤 사실에 입각한 주장, 어떤 관찰 가능하고 반복 가능한 사실 적 주장들이 반복적으로 검증을 받아야 함을 요구한다. 우리는 인체에 대한 의약품이나 비행기의 항공 가능성을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검증하는 것을 허 락하지는 않는다. 인체에 두입하는 의약품 경우에는 동물에게, 비행기 항공 기능성의 경우에는 풍동(風洞 : 항공기의 모형을 매달아놓고 바람을 맞혀 풍압 따위를 실험하는 것) 실험이 각각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실패가 지적된 후에 야, 그리고 죽음이 임박한 환자들이나 시험 비행조종사들 같은 특별한 종류 의 지원자들에게 특정한 실험이 각각 허용되고 난 후에야 실제로 실시 가 능하게 되었다. 종종 죽음이 임박한 환자나 시험 바행조종사는 법적인 소정 의 절차 없이 실험대싱이 기꺼이 되고자 한다 . 그러나 대부분의 선전국가에 서는 법 절차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알약의 안전성, 식품 첨가 색소, 비행기의 재료의 강도, 브레이크의 신뢰 성 같은 물리적 • 생물학적 기술을 의미하는(과학적인) 기술도 일반적으로 거의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교과서를 보급하는 것에서부터 저 유명 한, 그러나 지금은 고맙게도 현존하지 않는 영국의 일레븐 풀러스 시험을 관리히는 것에 이르기까지 어떤 교육적인 기법들과 시험들을 관리하는 것 과 같은 사회적 기술도 갖고 있다. 우리의 도시계획, 학군 구분법, 건축허가 등의 기술은 대부분 시대에 뒤져 있다. 우리는 정신병원 입원 여부를 위하 여 정신이 정상적인가 검사를 받고 이어서 의미 없고 종종 야만적인 정신 병원에서 퇴원하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공무원 임용시험과 개업을 위한 법 적 절차들이 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사회적 기술들 중 대부분은 반복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솔직히 충격적이지만 이것 을 알기 위해 사회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벅크민스터 풀러는 그가 미 해군에서 보았던 선박건조오柱근 반 대로 지상의 건축기술이 뒤떨어진 데 대하여 충격을 받았다. 그가 그의 자 서전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이 오늘날 그를 혁신적인 기술자로서 훌 륭한 경 력을 쌓기 시작하도록 했던 것이다. 반복컨대 과학적인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주장은 곧 반복 가능성 에 대한 주장이다. 우리는 기술이 부분적으로는 예술이지만 주로 과학이라 는 것을 기억한다. 일레븐 플러스 시험 eleven-pl u s exams 이 과학의 자격이 있느냐에 대한 주장도 있다. 일레븐 풀러스 시험이란 I I 살된 학생들을 대상 으로 기술교육이 필요한 학생과 일반교육이 필요한 학생을 변별해내기 위 한 시험제도를 말한다. 또한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정신병자를 골라내도록 고안된 검사의 과학적인 자격에 대한 주장도 있다. 이 주장들은 반복 가능성에 대한 주장이다. 그것들은 사이비 과학 Pseudo-sc i en tifi c 이다. 좀더 심한 말을 하자면 그러한 것들은 대단치 않으며 단순한 모조품이다. 그들은 아무 흔적도 남기지 말고 사라져야만 한다. 허위가 난무하고 있다. 간(肝) 알약이 있고, 화힉물질로 모든 정신분열을 치료하고, 손상된 머리카락과 늙어가는 피부를 홀몬치료로- 아름답게 만들 고, 침으로 마취를 시키는 것과 같은 주칭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간 알 약이나 안정제 또는 호르몬을 먹으면 좋아전다. 이것들의 효용성이 과학적 으로 증명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이것을 뒷받침하는 반복 가능한 관찰보고 서가 없기 때문에 거짓말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반복 가능성의 기준은 생물 기술에서보다 물리적 기술에서 더 잘 관찰되고, 사회적 기술에서보다 생물 기술에서 더 잘 관찰된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반복성에 대한 거짓 주 장은 의약, 건물, 생산공학과 관계되는 실제적인 일에서보다 사회적, 정치 적, 행정적인 일에서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새로 지은 다리가 무너지는 것 은 물론 어쩔 수 없는 물리적 상황——보통은 지전 ――에 의한 것일 수 도 있지만 물리적인 조건들을 잘못 조절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보통 행정 적 관리 소홀 때문인 경우가 많다. 이것은 기술자, 건설업자, 그리고 의사들은 신뢰할 만하디는 것을 말하고
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그들은, 특히 의사들간에는 가술적으로 덮어 두자는 전문직의 결탁, 잘 속음, 그리고 특히 의과대학 시절 인턴과 레지던 트 시절의 기술적인 훈련에 대한 두려움 등의 이유 때문에 너무나 자주 무 책임하다. 우선 첫째로 제약산업과 의학연구소들이 주장하는 반복성에 대한 신뢰성은 실제로 분명히 낮은데도 불구하고 현재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신뢰성의 수준에 있어서 교육, 행정 그리고 정신병 분야와 비 교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둘째로 의사들은 행정관료들보다 훨씬 더 신뢰할 만하다. 병원행정은 교사, 교장선생님들, 그리고 교도관들과 행정가 들보다 덜 잔인하고, 덜 범죄적이며 사회적으로 덜 해롭다. 간단히 말해 오 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통제하는 것보다도 일을 더 잘 통제한다. 도대체 사회과학적인 사실이 있는가? 대부분의 사회과학의 본질에 관한 현재의 토론은 바로 이 질문을 은폐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사회적인 사 실들이 너무나 복잡하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충분히 준비하기 만 하면 아무리 복잡한 사실조차도 과학적으로 잘 다룰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복잡함은 이것과 전혀 관계가 없다. 죽, 반복 가능성의 조건들이란(그것이 간단한 것이든 복잡한 것이든) 소위 모든 반복 가능한 관 찰들게 대한 전술 속에 다 들어 있다――죽 이런저런 조건하에서는 이런 저런 것이 발생한디는 것이다. 많은 관찰들(간단한 것이든 복잡한 것이든)은 중요하며 또한 반복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은 인정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과학과 사회기술의 중요함 및 가능성에 대한 토의와는 전혀 관 계가 없다. 반복 가능한 사회적 관찰들이 있는가? 경제학자들은 쉽고 분명한 예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즉, 다른 모든 조 건이 같다면 사람들은 적은 돈을 내고 더 많은 것을 살 수 있기를 선호한 다는 것이다. 이것은 관찰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이것을 단순한 상식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부적철한 표현이다. 이것은 사실일 수도, 허 위일 수도 있으며, 너무 모호해서 어느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다. 이것이 그 경제학자가 조사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그 러나 〈모든 조건이 같다〉라고 하는 것은 관찰할 수 없다. 일단 우리는 (l) 우리가 언급하고자 하는 것을 구체화하고, (2) 관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이로써 문제의 그 진술을 관찰이 되게 하는 것이며, 또 이것이 정말 로 반복 가능한 것이며 심지어 진실이라고까지 주장될 수도 있고,그리고는 적절한 검증을거쳐 기술에서 사용되도록 허락된다.다른 예들이 있는가? 이 단계에서는 반복 가능성과 진리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매우 나쁜 이유들 때문에 우리가 너무나 종종 비웃는 일이지만 아주 유명한 고 전적인 관찰보고가 하나 있다. 이 보고는 〈 정숙한 여인들은 성생활을 즐기 지 않는다 〉 라고 말한다. 지금은 정숙함이 도대체 관찰할 수 있는 성질의 것 인지 의아스러워할지도 모르지만, 19 세기 영국인 의사들의 관찰보고에서 〈 정 숙한片본 우연하게도 도덕적인 개념이 아니라 19 세기 영국에서의 사회적 지 위를 뜻했던 것이었다. 물론 〈정숙한 여인들은 성생활을 즐기지 않는다〉라 는 것은 관찰보고이며, 따라서 과학적인 자격을 요구한다. 정숙한 여인들은 성생활을 즐기지 않는다는 진술은(이 진술이 19 세기 영국 사회에 대한 묘사가 관찰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되도록 요구되고 있다는 접을 제의하면 ) 〈 해가· 동쪽: 에서 뜬다〉리는 전술과 크게 다룰 바가 없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될 수 있 댜 죽, 꽤 유복하고 잘 안정된 사회라는 것이 영국 빅토리아 시대 (또는 그 냥 〈빅토리아〉 사회라고 해도 좋다. 왜냐하면 빅토리아적이란 말이 하나의 속명 (屬 名)이 되었기 때문에)의 특칭을 묘사하는· 말로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 면 〈빅토리아 시대의 상류계층 여인들은 비교적 성생활을 즐기지 않는다〉 라는 것은 〈해가 동쪽에서 뜬다〉라는 것과 같다. 둘 다 반복 가능하고 과 학적이며, 물론 의심할 바 없이 들린 것이다. 거부된 하나의 관찰보고는 수 정을 요하며 더 나은 개선된 대치물을 요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 다• 이 모든 것은 단지 어떤 과학적인 관찰이 전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우 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이고, 과학적이 고, 그리고 또 분명히 틀린 많은 관찰들을 설계할 수 있다• 〈어른들은 모두 결혼했다 X 근 것은 결혼상태가 관찰 가능할 때만이지만 다른 어떤 것보다도 좋은 예이다. 그러나 기술에 관해서는 확실히 반박되지 못할 확실한 관찰들 이 필요하다. 그러한 관찰들에 대한 예를 찾기 위해 우리는 보통 심리학 쪽 으로 가며 사회기술에 대한 현재의 토론에 적합하지도 않은 심리학적인 관
찰에 매달린다. 그러면 어떤 확실한 사회과학적 관찰들이 있는가? 사회적 기술에서도 물리적 기술에서의 확실성에 대한 기준과 유사한 확실한 기준 이 있는가? 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 인데 그것은 첫번째 질문이 대 개 엉터리로 부정적인 답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에도 확실한 일반화가 있는가? 그렇다. 예를 들면 모든 사회마다 결혼제도, 여러 가지 기술, 교육제도가 있다 . 또한 사회마다 많은 법률이 있 다(비록 법률은 흔히 모호한 언어로 전달되고는 있지만 자구 하나하나가 조심스 럽게 표현돼야만 한다). 사형언도는 억제책이 아니지만 이것을 하나의 적절한 관찰보고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억제에 대해서는 물론이요 사형언도가 전 혀 억제수단이 되지 못하는 여러 사회에 대해 주의 깊게 명료화해야만 한 다. 왜냐하면 어떤 사회에서는 일부 사람들은 사형언도제도가 분명히 개인 적으로 억제책이 된다고 생각하며, 또다른 사회에서는 사형언도가 모든 종 류의 반목(反目)의 형태로 억제수단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감 옥은 범법자들을 위한 학교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감옥이라는 말은 현대 서 양사회의 감옥 곧 우리와 같은 사회 안에서의 감옥을 의미하는 것으로 제 한되어야 한다. 그래서 의미는 관찰 가능한 형태로 구체화되고 명료화되어 야만 한다. 예는 풍부하지만 그러나 그 예를 표현하는 용어는 아직도 부족 하다. 이 모든 것들이 순수예술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모든 예술은 기법과 동 일하다. 곰브리취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순수예술은 단지 그것과 관련된 기 능들의 자연적인 발달의 산물이다. 그는 천재들에게만 붙여준 대문자 로 시작하는 낭만적 예술이론 roman ti c the ory of Art을 거부하며, 르네상스 전성기의 훌륭한 대직들은 작업장에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중세의 계약에 의하면 예술가들은 적어도 이미 알려진 마돈나보다 더 높은 질의 또디론 마돈나를 만들어내야만 했다고 주장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 예 술가는 처음부터 장인(匠人)이고 또한 아마도 황금손을 가전 사람일 것이 다. 소위 예술 또는 순수예술-유화, 조각, 음악, 덧붙여 응용예술(목공품 이든 광고든) ――은 모두 기술이며 그리고 모든 기술과 마찬가지로 예술은
과학 이전의 것일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예숨은 과학이고 따라서 얇 은 그러나 때로는 훌륭하고 예술적인 베니아판(합판)과 같은 것이다. 그러 므로 곰브리취 교수가 재생산은 예술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와, 모든 예술은 조금씩 변화시킨 재생산이리는 그의 견해(이것은 그가 자신의 견해라고 말한 것임) 사이에는 일관성이 없다. 사회기술은 기교를 다루지 않기 때문에 과학 이전의 것이다. 죽, 사회기 술의 관찰들은 반복 가능한 관찰들로 표현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진지하 게 검증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더욱 나쁜 것은 아직도 야만적인 형벌 법규 롤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서양 선전국가들의 사례에서 충분히 예증되듯이 관창기 검증되고 논박을 당할 때 그 논박들이 단순히 거부된다는 것이다. 일단 우리가 사회기술을 과학이 되도록 허용하기만 하면 이것은 발달하여 예술이 될 수도 있다. 사회적 기술이 과학적이 되면 그 예술성을 잃어 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잘못된 것이다. 사실 사회기술은 과학적이 된 후예 야 예술성을 획득할 것이다. 예술이론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더 재미있는 결과를 갖고 있다. 곰브리취 는 예술이 비누적적이고 바반복적이면서 동시에 누적적이며 반복적이라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는 아무리 최고의 장인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황금손을 뜻밖에 그리고 어떤 일관성 없이 빼앗기는 점으로 보아, 기법은 예술적인 것이 아니라 누적적이고 과학적이리는 결론을 내렸다. 예술과 기 교는 부분적으로는 독특하고 비누적적이면서, 부분적으로는 누적적이다. 예 술을 과학으로 만드는 재생산 가능성은 기술공에게는 말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전문적 사항이다. 이것은 곰브리취 자 신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갇이 (물론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무능계 대하여 시인하지만) 왜 스타일(양식)이 변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말해 준다. 양식(스 타일)은 그 자체의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고, 이것들은 처음에는 예술적으로 그 다음게는 과학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옛 양식을 되살리려고 하는 예술 가는 과학적으로 재생이 최대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예술을 재생하고 있는 것이다. 죽, 그 재생예술 속에는 어떤 새로운 시도나 감홍이 없다. 또한 이 것은 아마도 곰브리취의 이론(『예술과 환상』 참조)과는 반대로 새로운 기법
(죽 어떤 일을 재생 가능하게 만들거나, 새로운 종류의 과학적인 것을 만드는 것) 을 발전하는 사람과, 이것을 잡 사용하는(실제적인 문제와 심미적인 문제 모 던 l 있어서) 사람이 왜 동일할 필요가 없는가의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 모든 것들은 예술철학과 기술철학에서 말하는 많은 부분들이 재조정 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며, 특히 사회기술철학에서 가장 심각하게 요구된다. 사회적 기술을 하나의 예술로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과학으로서의 사회기 술을 무시해야만 한다고 흔히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 즉, 우리의 활동에 있어서 우리가 사회기술에서 과학적인 것을 당연한 것으 로 받아들일 때에만, 그리고 우리가 이 기술의 과학을 숙달했을 때에만 우 리는 사회적 기술을 더 발전시키고 그것을 예술로까지 만드는 시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5 맺는말 직관, 발명, 자발성, 예리함 등은 소중히 다루어져야 하는 우리 능력의 복 합체이다. 다론 어떤 사회와 마찬가지로 현대사회는 이 복합체를 위협하는 자체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예술에 대해 만연된 교육적 태도(가치관)는 직 관, 발명, 그리고 특히 자발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엘리트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성은(일부 고도로 선택된) 젊은이들을 평범한 삶의 단조 로움으로부터 격리하고, 평범한 무리들로부터 멀리 거리를 두게 하고, 그들 의 뛰어난 재능들이 일상적인 일을 통해 둔하게 되는 것을 막고, 그리고 거 의 접근하기 어려운 것을 쉽사리 접근할 수 있게 하고 반복할 수 있도록 만 들 수 있는 기술(기법)로부터 그 엘리트들로 하여금 회피하게 만드는 훈련 울 시키는 것이다• 반복적인 일을 반대하는 이 엘리트주의에 대한 설교는 다섯손가락의 끝없는 훈련과 더불어 아주 심각할 정도로 반복적인 예술적 훈련과 결부되어 있다. 이 태도는 자멸적이다. 그렇게 훈련된 젊은이들은 지국히 우둔하고 자기 중심적이다. 분별 있고 예리한 영재아(英才兒) 교육을 위해서는 순수수학이
모델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수학은 많은 직관, 창조성 그리고 이해력을 요 구하기 때문이댜 수학자들은 가능한 것은 무엇이든 일률화하여 일상적인 모든 일을 모두 로보트에게 위임하려고 노력한다. 모든 것이 일상화되었을 때 상상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은 커트 괴델에 의해 완화 되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지금 인류가 직면한 커다란 위험을 극복할 능 력만 갖추고 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우리 호기심의 고갈과 어리석은 기계화 에 의한 부족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괴델에게 알려야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예술과 기술은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 다.
제 3 장 기술과 사회 서양의 민주주의 철학은 다방면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위협을 받아왔 다.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일부 비평들은 과거에는 물론 현재에도 수용되고, 인정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개선하기 위 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론 대안들도 제시되고 있다. 민 주주의에 대한 대안들 중에서 어떤 것은 전지하게 비평할 만한 가치가 없 는 것도 있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민주주의에 대하여 대안적인 제안들은 모두 기술관료주의적이다. 즉, 일 부 기술관료주의자들은 레닌과 모택동 같은 인민당원이며 평등주의자이고, 일부 다른 사람들은 기술관료주의적 엘리트주의자들이다. 이 기술관료주의 적 엘리트주의자들은 스탈린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와 같이 원칙적으로. 평 등주의자이지만 일시적으로는 엘리트주의자이거나 또는 미국에서 〈무정부 주의자 〉 또는 〈 급진적 우익〉 〈자유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개인주의적 국단 주의자와 같은 엘리트주의자 둘 중의 하나이다. 기술은 엘리트들이 지배하 는 정부를 필요로 하는가? 민주주의란 국가를 통치하거나 운영하는 과정에 대중이 침여하고 전반적으로 국가가 지적인 것을 기초로 정치적인 의사결
정을 하는 것인데 바로 이 민주주의가 현대의 과학을 기초로 한 복잡한 기 구를 이렇게 시대에 뒤떨어지고 낡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는가? 1 민주주의는 진정으로 필요한가? 민주주의는 진정으로 필요한가? 이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어떤 대 가를 치르더라도 방어해야 하는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민주주의의 이상 을 포기하도록 만들 것인가? 민주적으로 야만인이 되기로 결정한다면, 분명 히 우리는 대안적인 정치형태를 찾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우리는 한때 민 주주의는 결코 야만주의에 자리를 내놓지 않으리라고 느꼈울 만큼 우수한 집단이었댜 독일 민주주의가 과거에 가장 사악한 종류의 동물들, 가장 정 교한 기술을 이용한, 즉 가장 정밀한 장비를 총망라한 기술로 무장한 짐승 둘 수준의 정부에게 길을 내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 자신감 있게 확신 할수가없다. 우리는 2000 년 전에 이미 경고를 받은 적이 있다. 즉, 풀라톤은 민주주의 는 전체적인 무질서를 이끌고 이 전체적인 무질서는 전제정치를 이끌게 된 다고 말했다. 플라톤은 단지 우리들을 위협하기 위해 유령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그는 무질서를 알았고 아데네 민주정치의 황금시대에 뒤따~ 전제 정치를 알았다. 역사는 같은 일을 한두 차례 반복해서 보여 준다. 죽, 민주 혁명은 러시아에서는 물론이고 프랑스에서도 전제정치로 이끄는 폭력을 가 져다 주었다. 독일에서는 더 최악의 상황을 보았다. 우리가 민주주의와 더 나은 민주화를 주장할 때 불장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플라톤은 민주주의에 대하여 특별한 장점이 없다고 말하기 위해 고대 철 학자 트라시마크스를 인용하였다. 즉, 우선 강한 자들은 약한 자에게 그들 의 의지를 강요하고, 약한 자들은 강하게 되어 자신들의 뜻을 강요하기를 원한다. 때때로 그들은 그들이 단결할 때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 한다. 약한 자들이 단결하여 통치할 때 바로 그러한 그들의 통치가 민주주 의리는것이다.
올바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며 편견이 얼마나 쉽게 평범한 생각을 방해하는가는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플라몬은 트라시마크스가 반민주주의 자였고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트라시마크스가 정치적 일들에 냉소적이었다는 것 이의에 풀리돈은 트라시마크스보다 더 반 민주주의자였다. 플라톤은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힘센 자들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지혜로운 자들이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냉 소적이건 아니건간에 트라시마크스의 주장이 사실이었울까? 가장 훌륭하고 지혜로우며, 모든 민주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사람 중의 하나인 벤 프랭클린은 그렇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악당들의 집단으로 보았다. 즉, 우리는 한꺼번에 목매달거나 그렇지 않으면 따로따로 목매달아야만 한 다고 즐겁게 비꼬았다. 그의 소박한 마음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일이다 그러나 일이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트라시마크스에 반대하는 주장은 전통적으로 민주주의적 신념의 도덕적 충동에서부터 오며, 이 민주적 신념 은 기 껏해야 지배계급이 뽐내기 위하여 갖고 있었고 l 앙1 l 기 중엽 프랑스 귀 족 미라뷰에 의하여 상정화된 민주주의적 경향성으로- 묘사되어 있다. 미라 뷰와 도덕적 충동은 둘 다 부적당하다. 즉, 냉소주의는 비냉소적인 프랭클 린이 주장했던 것처럼 민주주의를 지지할지 모르며, 도덕주의는 비도덕적인 플라론기 주장했던 것처럼 민주주의를 반대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민주 주의의 지지자들이 얼마나 정칙한가가 아니고 그 민주주의 정권이 얼마나 선한7 }-o l 다. 역시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트라시마크스의 견해는 냉소적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하나의 논쟁거리이다. 즉, 그는 민주주의란 밑바닥에서부터 꼭대기로 움직이고자 하는 바람의 산물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민주적 충 동 뒤에 숨겨진 동기에 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는 종종 중산 지식충과 형편이 나은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여론에 대 한 통계적 방법은 미숙하고 그 결과는 트라시마크스에게 동의를 표하지 않 는다. 또한 우리는 억압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상향 이동하는 많은 탁월 한 사람들의 경우를 본다. 사회적 계층 이동을 장려하는 민주주의에서는 이
러한 사립들이 민주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상황은 변하고 있다. 먼 옛날부터 사회적 신분의 상향 이동의 중요한 수단의 하나는 교육아었고, 교 육이 교회에서 이루어졌을 때 교육받은 사람들은 교회를 지지하였고 교회 를 사회적 상승을 위해 이용하기조차 했다. 이제 〈 경성 〉 과학과 기 술 이 유 행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 경성 〉 에 대하여 말하게 되며 간단한 일을 분 명한 방법으로 말하려고 수학적인 상형문지를 이용하고, 소위 교육의 수월 성을 칭찬하고, 기술관료주의로 기우는 경향아 있으나 나중에 돌이켜 보고 기술관료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적이라는 것을 발견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아는 바와 같이 트라시마크스가 옳다면 전통적으로 민주주의를 창조한 것과 같은 동기에서 이제 기술관료주의가 창조될 것이 다. 스노우 경은 일찍이 이것을 인식함 없이 같은 생각을 주장하였다. 스노우 경의 성실성과 민주적 확신들은 의심할 바 없다. 그가 두 가지 문화론에 대 해 깅연하였을 때, 그는 예술가를 전통지향적인 사람, 즉 〈 연성 So ft 〉 적이라 고 이름 붙였고, 기계사용을 방해하는 노동자들을 〈 경성 hard 〉 적 인 과학자 에 반대되는 의미로서 급진주의자요, 기술지향적이고, 따라서 낙관적이며, 〈미래지향적〉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그는 여러 깅연을 했으나 만주주 의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민주주의의 방향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는 두 문화를 연결짓기를 원했지만, 분명히 〈 미 래지향적〉인 급진주의자 편이었다. 그러한 다리를 놓기 위한 그의 주요 제 안은 교과과정을 과학지향적으로 개편하여 보다 많은 개인들이 과학기술적 이고 낙관적인 공동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의 모 델은 현재의 러시아 교육제도였다. 그의 모형은 급진주의적이고 낙관적인 러시아정부 발행 소개 책자에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후에 전통주의자이며 비관주의자인 솔제니친의 『퍼스트 서클 Fi:s t Cir c le 』 에서는 다르게 기술되 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급진주의지들조차도 솔제니친을 러시아정부 홍보담 당 공무원보다도 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스노우 경에 의해 시 작된 논의는 아직도 강하게 계속되고 있다. 지금은 이 논의가 얼마나 쓸데없는가를 인식해야 할 때이다. 과학은 결코
기 술 이 아니다. 기술은 책 임이 있 어야만 하고 낙관 적 이어서 는 안 된다(낙관 주 의 는 장 래 를 위한 책임 있는 계획 과 는 거리 가 멀다). 〈 경 성 〉 과학과 기 술은 전 혀 경 성이 아니며 오히려 엉망진창이고, 혼란스럽고, 비접하고, 반동적인 一 정말로 하나의 폐쇄된 사회일 뿐이다. 경 성과학과 기 술 을 운운하는 것은 어떤 기술적인 훈련을 통해 얻은 알량 한 수박 걷 핥기식 지식을 가지고 수학 기호나 들먹이면서 예술에 취미를 가 진 사람 들 을 침묵하게 하고, 과학에 대하여 호전적인 비평가들을 공격하고, 그리고 사회, 진보, 긍 정적 이고 좋은 모든 것에 대한 개인의 중요성과 공헌 울 감히 의심하는 모든 사람에게 어떤 청사전을 보여 주는 그러한 류의 무 식 한 사람의 소치이다 . 따라서 〈 경성 〉 과학이란 용어의 사용은- 비록 물리적 이라기보다 심리학적이라서 다소 덜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따라서 신체적 인 폭력보다는 조금 덜 비겁하지만 그러나 교육받은 사람이나 지성인이 할 짓 이 결코 못 되는 일 종 의 폭력에 불과하다. 스노우 경이 주장한 바와 같이 〈 경성 〉 과학이 존재하며 또한 〈 미래지향 적 〉 이라고 하는 그의 말이 맞는가? 얼마나 많은 〈 경성 >과 학자들이 〈 미래 지 향적 〉 인가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이 중 일부는 때때로 스탈린식의 정 부에 의해 통제되는 연구를 옹호하고, 민주주의를 공격하고, 그리고 엘리트 에게 기 술교 육을 가르치기 위해 조직화한다. 왜 급진주의는 기술주의 옹호 론자들을 끌어들이는가? 조지 오웰은 스탈린 시대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스탈린이 인기를 끈 것은 그들의 권력에 대한 숭배의 결과라고 설명하였다. 물론 일반적으로 지식인 들은 정치적으로 뽐내는 사람보다는 지적으로 뽐내는 사람을 더 경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때때로 예술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마음을 가진 지식 인들은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마음을 가진 뽐내는 자들을 두려워하며 그리 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한 집단에서 열등감을 느끼는 자들, 특히 그들 가운데서 사회적 야심가들은 뽐내는 자를 지지하고 그들 자신이 감히 뽐내는 자가 될 정도로 대담하게 되기까지 한다. 그리고 양쪽 진영에서 뽐내는 자들, 즉 예술적 • 인본주의적 허영으로 뽐내는 자들, 과학 기술적 허영으로 뽐내는 자들은 겁쟁이들이고, 그 자신의 소속집단에서 주
변인물이 되며, 폐쇄된 사회의 감시원이다 . 바꾸어 밀하면 그러한 양다리를 걸치는 자들은 회원제 클럽의 문지기나 경비원과 같은 집단이다. 그러나 이 러한 사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는 것 대부분기 실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단지 물거품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거품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 거품은 홍미와 관심을 바꾸어 주기 때문에 一 ― 그 시대의 실제 문제와는 별 개로-중요하다. 왜냐하면 뽐내는 자들은 받이들여전 기준을 이것이 허 술할 때조차도 굳게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올더스 헉슬리의 『 지 난 여름 갑자기 백조가 죽었다』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과학적 • 기술적 인 전 문가들이 이 불명료함 속에서 가질지도 모르.는 오만함이 언제나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불명료한 자들아 자산들의 약함을 강한 것처럼 보이려 하는 데 반해서 소수의 명료한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지신들의 강함 울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과 학과 기술교육에는 명료함에 대한 최상의 훈련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런 교육적 결핍의 희생자들은 교육에 관해 불평하고 그것을 변경시키기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용기는 없으므로, 그들은 자신이 덫에 치어 꼬리를 잃어 버린, 꼬리 없는 여우라는 사실을 천하가 다 아는데도 불구하고 꼬리가 없 는 것이 오크리치로부터 수입된 최신 유행이라고 애절하게 변명하며, 그 뽐 내는 자 뒤에 숨어서 나서지 않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상황은 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술에서도 같다. 즉, 예술적으로- 으스 대는 사람은 과학적으로 그러한 사람과 비슷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과학적으로 뽐내는 자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사람이 민 주주의를 기술관료주의로 대치시키자는 제안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기 때 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뽐내는 사람들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을 개발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기술적 뽐냄에 복종하는 것 중의 하나를 선택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논쟁이 되지 못하며 단지 기술적 뽐냄에 대한 민주적인 반응일 뿐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뽐 내는 자가 권력을 잡도록 허용된 제도라고 풀라톤에 의해 비판되었고, 이 비판이 경험으로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은 민주적인 여론은
정부로 하여금 통 제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할 수도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대중의 눈이 어두워지고, 바보가 되고, 좌절할 때 사람들은 모두 민주주의 를 싫 어하게 된다 . 그들은 민주주의가 대중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대중을 교육하는 것임을 거부하게 된다 . 그들은 대중이 민주적 통제를 실행하는 것 을 배울 때까지 현명한 통치자가 임명되어 정치를 해야만 한다고 계속 제 안한다. 이것은 디소간에 철인(哲 人 )의 안내가 필요한 민주주의 gui d e d democracy 에 대한 풀라본 철학의 현대적 변형이었다. 이 변형은 현명한 동 치자에게 정부가 자신의 것인 한 대중들이 아직도 정부를 조절하는 것을 배 울 능력이 없다고 선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주 기능을 발휘하지 못 한다. 기술관료주의가 재능이 낮으나 그 부족한 재능을 〈 경성 〉 과학으로 옹호함 으로써 기술면에서 지신보다 덜 복받은 다른 사람들, 그러나 교양면에서는 더 복받은 사람들에게 월등하게 보이려는, 주로 교육받지 못한 사림들에 의 해 주창된 이유는 민주주의가 교육적이고, 평등주의적이며, 침여적이기 때 문이다. 〈 경성 〉 과 〈 연성 〉 이 서로의 활동에 아무 관계가 없디는 결과와 함 께 그들은 자신을 각자의 전문 분야로 재한하는 것을 옹호하면서, 전문적 통치자에게 정부를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는 데 동의하는 체한다. 이러한 체제가 가능하다 해도 어떤 가혹한 통치자가 인수하지 않는다면 총체적 생 존계획의 미비로 해체될 것이다. 이 논쟁은 치명적이다. 물론 이것은 새로 운 것이 아니고, 반응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 반응은 사회를 유지할 수 있 는 장기적인 대규모의 계획을 전문적 통치자에게 공급하기 위해 장기적인 대규모 계획에 대한 기획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최고 의 전문가라야만 전정한 통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롤 최고의 전문가(대규모의 계획 수립자)에게 장기적으로 맡기기 전에, 우리는 계획이 얼마나 찰 세워질 수 있는가를 알고 싶어한다. 계획 입안자 들의 도움이 없다면 동치자가 얼마나 형편없이 통치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 러면 계획 입안자들을 살펴보자. 그리고 기술관료주의 (민주주의에 대한 오 직 유일한 경쟁상대 )를 지적으로. 정당화하는 그 마지막 희망을 살펴보자.
2 대규모적이고 장기적인 기술 프로젝트 기술관료주의사회에 대한 생각은 기술주의가 이미 전개되고 있고 우리는 이것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알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비교적 쉽게 비판적 으로 고찰해 볼 수 있다. 기술주의는 점차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 이유는 현대 기술의 발전과 기술이 휘두르는 정차권세, 그리고 기술주의의 위험과 발전하는 물리적 생물학적 기술에 적합한 사회적 기술 개발의 필요성에 대 한 어떤 사회적 이론 또는 심지어 연구의 부재 때문이다(맑스가 사회적 • 정 치적 사고의 성장을 기술적 성장에 대한 뒷궁리로서 본 것은 옳았지만, 그가 이것 이 필연적이고, 미래를 위한 성공적인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 은 잘못이었다). 기술관료주의자들-은 새로운 기술의 시행을 위해 필요한 사 회적 • 정치적 단체를 창조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보통 그들아 시행하는 과 학적 기술에 대한 걷핥기식 지식만을 가전 비과학적 조직자이다. 그래서 그 들은 곧 전문가들을 고용해야만 하였다. 그 새로운 전문성은 금세기 초부터 과학적 관리로 일려져 있다. 이것은`과학적인 사회적 기술―一물리적 기 술의 대응으로서 -의 혁명을 가져왔고, 그 결과로 대학 안에서 상경대 학이 짧은 시일 안에 공과대학과 같은 지위를 차지하게 만들었다. 상경대학 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공과대학을 모방하였다. 과학적 관리 는 어쩌면 처음 시작부터 사이비 과학적인 사회공학t echnolo gy@이었다. 경영학이 모든 행정을 포함하는 경향을 띠기 시작했을 때 사태는 통제하 기 어렵게 되었다. 과학적 기술이 아주 대단히 중요하게 되고 모든 것을 포 함하기 시작할 때, 그 경향은 정말로 그러했다. 기술을 정의에 대한 무능력, 단지 환경을 조절하기 위한 물리적 • 생물학적 도구를 제공하는 것으로 제 한하는 무능, 그리고 이러한 무능에 대한 적철한 고려의 부족 등이 어쩔 수 없이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 혹은 여러 가지 면을 관리하거나 조정하는 기 @ t ech nic 이라는 말이 기술을 뜻한다면 t echnolo gy는 기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학은 기술에 대한 학문적, 체계적 고찰을 의미하는 것으로이해할수 있다.
술전문가 집단의 성장 을 초래하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체제 ( 특 히 교 육 체 제)를 급격히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국민에 의해) 선출된 관리들 이 그들의 세력을 잃고(국가에 의해) 임명된 관리들의 말을 들어야 되도록 그들에게 실권을 넘기면서 민주주의가 기술주의로 바뀌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관리들이 높은 자리로 울라가는 길은 기술적인 업적 혹은 그러 한 것을 가장한 것으로 포장이 될 것이다. 이미 점차적으로- 우리의 공공생 활의 많은 부분이 전문가들에 의해 설계되고, 계획되고, 수행되고 있으며, 전문가들의 권위는 훌륭한 기술적 업적에서 온다. 파킨슨법칙 ® 이 여기에서 는 거의 맞지 않는다. 즉, 위원회는 단지 계획에 대해 지적으로 논의할 능 력이 없기 때문에, 전문가들에 의해 설계된 수천만 달러의 원자력 발전소를 세우는 계획의 〈 경성 〉 적인 면을 논쟁하는 데에 불과 몇 분을 쓸 뿐이다. 파 킨슨은 또한 그러한 위원회가 값싼 자전거 창고를 세우는 계획을 논의할 때 는 〈경 성 〉 적인 면에 대해 여러 시간을 소비하는데 그 이유는 위원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위원회 기능의 이러한 면은 쉽게 개선될 수 있다. 문제는 전문가들이 一一위원회는 단지 그들을 따르 기 때문에 -원자력발전소를 세우는 계획을 어떻게 결정하는가이다• 그 대답은 소위 기술적 예견에 달려 있다. 기술적 예견이 적절한 기술적 계획수립 및 평가의 핵심적 부분이라고 보는 것은 중요하다• 띠리서 기술적 예견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들면 인구의 증감 경향을 평가하려 고 노력하지 않는 현대 정부는 · 책임 있게 계획을 세울 수 없다. 그리고 물 론 그러한 평가는 흔히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쉽게 판명된다• 기술자들이 나 기술주의자들이 책임 있는 계획 수립이라는 도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 7}?
@ 파킨슨 C. North c ote Parki nso n( 190~ 영국 출생 )은 역사가이며 저술가 이다. 파킨슨의 법칙은 〈 일은 그 일의 완성에 필요한 시간을 채우기 위 해 확대 된다 Work exp an ds to fill the time ava ilab le for its comp le ti on > 는 것이다. 파킨슨은 후에 두번째 법칙을 고안했는데 그것은 〈지출은 수 입을 만족하려면 상승된다 Ex p en ditur e ris es to meet in come~ 든 것이다.
당장의 문제는 장기적인 대규모 계획에 대한 신뢰성이다 . 말하자면 신뢰 성의 판단기준은 무엇이며, 신뢰할 만한 기준이 부재할 때 신뢰할 수 없는 기준(그리고 계획)울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것이다. 장기적인 대규모 계획(간 단히 말해 거시적 계획의 신뢰성과 예견의 신뢰성 )은· 서로- 얽혀 있다. 즉, 예를 운] 우리가 효율적으로 재난을 예상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대책을 세우고 그것의 효력을 효과적으로 예상한다. 거시적 예견들이 너무 자주 허술하다 는 것은 역사가 잘 증명해 주고 있다. 1959 년 10 월 미국의 국가기획협의회 Nati on al Plannin g Assoc i a ti on 는 「경제성장을 위한 장기계획 : 1970년 의 미 국경제 Long -R ang e Proje c ti on s for Economi c G rowt h : The Americ a n Economy in 1970 」라는 내막을 폭로하는 제목으로 위성턴에서 국가계획 수립 안내서 107 번이라는 참모보고서를 발행했다. 수년 후인 1966 년에 E. K. 웨렌은 그 의 「장기계획, 최고관리자의 관점 Long -R ang e Plannin g , The Executi ve V i ew p o i n t」이란 보고서에서 경험적 관점에서 이 안내책자를 찬양한다. 더욱 이 그 목표시기의 절반 가량 지나면서 예견들이 아직도 그렇게 나쁘게 되 지는 않았을 때, 그때 다시 정밀하게 그 예견을 충분히 평가하여 그 보고서 의 유용성을 검토할 수 있다. 그 보고서가 이용되었고, 그것을 이용했던 사 람들기 그것을 믿어서 손해나 이익을 보았는가? 비록 우리가 알고 있다 할 지라도 우리는 성공이 지혜에 의한 것인지 운이 좋아서인지, 또한 실패가 우둔해서인지 운이 나빠서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상황에 서 예견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완전 히 확률게임이며, 단지 가능성의 나래이고, 공상의 날개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언급된 회의주의가 철학자들이 심지어 자신들에게 손이 나 발이 있는지조차 의심하려들 때 전문적으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빠져드 는 종류의 철학적인 방식의 것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철학자의 의문점이 어떻게 판단되든 우리는 확실히 현재의 상황에서 우리의 손과 발의 실재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기획에 대한 의문은 대개 다양하다. 그러므로 아론 윌 다브스키가 『더 퍼블릭 인터레스트 The Public Inte re st 24 』 (1971, pp. 95-104) 에서 〈기획은 효과가 있는가?〉라고 물으면서 다음과 같이 답한다 :〈계획에 대한 기록이 훌륭한 적은 거의 없다.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몇몇 명
백한 성공들도(있다면) 우연히 일어난 것에 불과하다…… 〉 또한 똑같은 구절을 E. S. 콰드는 그의 『 대중 결정의 분석 』 (1 975, p. 251, 뉴욕)에서 이의 없이 인용했다. 거시적 예견에 대한 급전적 변화는 소위 석유 위기 및 에너지 절약 프로 그램과 함께 197N 에 일어났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물론 그 위기가 모든 현존하는 거시 예견들을 너무나 부정확한 것으로 만들어 무효화했다는 사 실이다. 둘째로 그 위기는 이로 인한 타격이 미국보다 일본에서 더 커서 일 본의 섬유류와 다른 상품들이 미국시장으로 밀려 들어오는 것이 끝날 것이 라는 희망을 가전 무책임하고 무력한 미국 행정부가 석유회사들로 하여금 멋대로 행동하도록 허용하여 인위적으로 생긴 것이다. 계속되는 혼란 속에 서 많은 거시 예견들이 일부는 공식적으로 비록 그것들은 비밀이었지만(권 위 있고 과학적인 예견으로서, 정부의 예견으로서, 혹은 기업의 후원을 받은 예견 둘로서 ), 또 일부는 비밀리에 언론으로 흘러나와 유포되었다. 그 이후로 거 시 예견들을 정기적으로 평가해야만 하고 또 그것들을 정기적으로 수정해 야만 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러한 절차는 표준적으로 관행이 되어야만 한다. 에너지 소비에 대한 거시 예견의 가장 최근 수정은-특히 유럽경 제공동체 ECC 에 의해, 매우 짧은 기간 동안에 급격히 수정되었다. 이제 거 시 예견은 극단적으로 신뢰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으로 중 요하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과거의 모든 거시 계획들에 대하여 아주 부 정적인 태도가 존재하는지에 대하여 의아해 한다. 참깐 동안 부분적으로 성 공한 프로그램을 살펴보자. 그런데 현존하는(성공적인) 프로그램을 고찰하 는 데 있어서의 충고는 대부분 지금까지 거시 예견의 대가인 허만 칸의 방 식이다. 왜냐하면 허만 칸은 계획 입안자들에게 항상 기존의 프로그램과 계 획들에 대해서는 이미 자산아 연구해 오고 있는 분야인 체해야 하며 단, 그 계획과 프로그램들이 정말 기존의 것들과 달리 훌륭할 때만 새로운 것이라 고 말할 것을 충고했기 때문이다 (On Thermonuclear War, 프린스몬 대학 출판 부, 1960). 여기에서도 역시 어떤 참신한 기준이 없다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우리는 새로운 도시계획과 감은 명쾌한 새로운
제筑} 기술과 사회 IOI
거시 계획을 예로 들 수 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것들은 심지어 고 계획의 초기 목적에 대해서조차 평가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___ - 물론 하우스만의 파리 시와 영국의 신도시 계획과 같은 예의는 있지만. 그러나 하우~객}의 파리와 영국의 신도시에 관한 것조차도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현대화되고 있는 파리 시가 장애물들을 막는 주요 군사적 목적과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 한 경제적 목적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직장을 제공하기 위한 당면의 목적과, 수도에서의 생활의 질을 변화시키려는 전반적인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 기 때문이다. 정말로 단순하고 혁신적인 거시적 계획으로서 우리는 중국 만 리장성과 하드리안 장벽, 수에즈와 파나마 운하, 돈 도니퍼 운하 또는 도나 우 메인 운하와 같은 예를 들어야만 한다. 이러한 거시 계획들이 제국(帝 國)의 미래, 산업과 무역로의 미래, 수송수단의 미래 등의 보다 더 큰 거시 예견 안에 포함되어 있디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러한 경우에 그 거시 예견들은 생활의 모든 측면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강조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우리 모두는 내일 태양이 떠오 를 것이라고 가정한다.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이 가정이 어떻게 과학적으 로 정당화되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 래플레이스는 이 예견의 안정성에 대한 두 가지 증명을 제시했다. 하나는 오래된 과거의 과정에서부터 짧은 과정의 계속성에 이르기까지 두사하는 래플레이스의 법칙과, 또다~ 하나는 태양계 전체의 안정성에 대한 래플레이스의 증명이다. 두 가지 증명 모두는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문제성이 있고 따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의심할 것 도 없으므로 대부분의 독자들은 적어도 증명을 기초로 해서가 아니고 믿음 으로 그것들을 택해야만 한다. 종종 많은 교과서들은 증명의 개요조차 없이 단지 그 최종 결과만 제시하면서 토론 없이 증명들에 대해 언급한다. 래플 레이스 시대에 칸트는 태양계의 불안정성을 증명하였다. 그 증명은 쉽다. 즉, 에너지는 태잉케에서 없어전다-예를 들어 조수의 간만 때문에 - 그런고로 그 태 oJ ;,;J]는 변화 없이 지속될 수 없다. 이 증명은 태양에너지의 원천이 더 잘 이해됨으로써 분명해졌다. 즉, 이제 태양의 연료는 원자핵이 고, 그런고로 하나의 원자로인 태양은 언젠가 폭발할 것이다. 그것은 내일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작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한다. 그러나 만약 내일 폭발할 가능성이 크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까? 우리가 오늘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가정 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다. 즉, 그렇지 않다면 계획 (미시적아든 거시적이든)은 전혀 의미가 없다. 이것은 선험적인 증명을 초월하는 것 같이 보인다. 즉, 우리에게는 이러 한 가정들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며 그러므로 그것들은 사실인 것처럼 보인 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들이 모두 허위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사결정이론은 만약 내일이 오지 않는다면 우 리가 오늘 계획을 세우건 그렇지 않전간에, 얻거나 잃는 것은 적고, 반면에 내일이 온다면 계획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잃는 것은 많고, 또한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얻는 것이 더 클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러 므로 우리는 무엇이 울지라도 계획을 세우는· 것이 더 낫다. 네빌 슈트는 「해 안가에서」란 작품에서 계획 없는 인생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계획의 특성으로서 일반화될 수 있다. 즉, 우리는 우리의 계획에 필요한 가정을 찾을 수 있고, 또 그 가정이 허위라면 계획을 시도하는 바 로 그것을 무효로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들은 탁월한 총괄적인 가정들이 다. 내일 태양이 떠오른다는 것이 총괄적인 가정의 아주 훌륭한 예인 이유는· 바로 우리(종족이나 개인이나)의 생존이 이 가정과 직접 연결되어 있고, 생 존은 우리의 모든 계획의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 어떤 궁극적 목적아든지 약간의 총괄적인 가정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가 일단 어떤 궁극적 목적을 만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대 규모 계획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할 때, 이 대규모 계획의 최소한의 성공 가 능성에 대한 가정들을 그 계획에 따른 모든 소규모의 하위 계획들에 대한 총괄적인 가정이라고 부른다. 이차적인 목적은 궁극적 목적에 따라 좌우된 댜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그 이차적인 목적은 궁극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 한 세부적 계획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므로 어떤 계획이 살아남게 되는 방 법은 같은 그 계획을 보다 더 전체 계획 속에 포함시켜 그 계획의 총괄적
인 가정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 일반적으로 말해서, 전술들은 전략 에서부터 그 중요성이 부여되며 그 반대는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태양이 내일 떠오를 것이다라는 어떤 총괄적인 가정 이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디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총괄적인 가정을 나러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심지어 개인에 대해서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독재자들은 산아제한을 반대하는데 20 년 후의 병사를 양성하려 고 계획하기 때문이다. 즉, 완전히 성장한 병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그만 큼의 시간이 걸린다. 이것은 독재자의 깊은 신념에 기초를 둔 것이다. 특히 이것은 그의 나라가 자신과 20 년 후일지라도 병사들을 전쟁터로 이끌 수 있 는 이 위엄 있는 독재자를 필요로 할 것이라는 것에 대한 깊은 신념에 기 초를둔것이다. 이 모든 것은 장기적인 계획과 예견에 대한 연구에서 우리의 궁극적 목 적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바로 총괄적인 가정을 조사하는 것이라는 것을 매 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생태학적 운동에 원동력울 가져다 주었다. 즉, 이 운동은 몇 십년 동안 총괄적인 가정들이 가 장 명백한 방법으로 경험적으로 논박되자 겨우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계속하면 우리의 모든 자원(특히 신선한 물 과 신선한 공기를 포함하여)을 · 곧 다 써버리게 될 것이리는 것을 많은 사람들 이 분명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지구는 이제 충분히 오염되었다. 거시 예견 들과 거시 계획을 아주 절박하게 만드는 것은 실제로는 지구가 파멸한다는 예견들이 우리가 바라못기 신뢰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다. 열, 핵 전쟁, 인구폭발, 그리고 생태계의 회복할 수 없는 오염 등은 심각한 위험이 다. 이들의 결합은 우리들이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거의 피할 수 없는 재난이 된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지금까지 여기에서 제시되었던 초기의 궁극적 질문들은 멀리 뒤로 젖혀 져 있다. 그 질문들은 계획의 신뢰성에 대한 기준은 무엇인가? 이었고 우 리의 계획이 대단히 신뢰스럽지 못할 때 우리가 할 것은 무엇인가? 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현재의 판단은 우리에게 국제적인 계획이 없는 반면, 가장 안전한 계획은 더 큰 계획 속에 있다리는 분명한 관찰로 끝났다. 그러나 이
러한 결점은 관련문헌에서 매우 보편적이다. 왜 이 불완전은 무시되는가? 어떤 계획이든지 거의 모두 총괄적인 가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우리 는 항상 신뢰성의 수준이 지극히 낮은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결점쯤은 중요하지 않디는 관점을 고려해 보자.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세계 적인 기도와 단식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하여 세계를 구원하려는 계획 과 같은 것을 예로서 고려해 볼 수 있다. 이 계획은 단지 너무나 신뢰성이 없고 우리에게 홍미롭거나 유용한 총괄적인 가정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실한 신뢰성을 가전 전반적인 계획을 요구한다. 그러면 우리는 단순히 첫인상에 의해서보다는 더 나은 방법으로 그 신뢰성을 살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계획들은 손쉽게 우리들의 소유가 되지 않 는다. 따라서 이것은 상황의 분석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난 1()l; j_ 혹은 20 년 전에 생태학자들이 전체 인류의 복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 는 데 실패한 것을 검토해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이 특정한 총괄적인 가 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만약 그들이 대부분의 사람들 에 의해 거부된 총괄적인 가정들을갖고있지 않는한) 우리는·특정한총괄적인 가정 없이 일할 수 있을까? 특정한 총괄적 가정 없이 일하려는 시도는 많이 있다. 그들의 결과는 무 서울 정도로 형편없다. 분석해 보면 이러한 빈곤은 우연이 아님을 쉽게 알 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첫번째 서실은 대형차를 만드는 것을 고집한 디트로이트의 결정과 같은 대규모의 결정을 고려할 때조차도 그러 한 일이 너무나 미시적 계획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 그 계획 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계획수립은 계획 입안자들이 관성이 규칙적으로 틀릴 때조차 관성의 힘 을 믿고 너무 많은 총괄적 가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보 통 미시적이다. 비평도 없이, 순전하게, 그리고 생각 없이 그렇게 많은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은폐되고 있다. 이 은폐는 소비자와 시장조사, 그리고 컴퓨터, 체제 분석, 가장 정교한 종류의 통계 그리고 그 이상을 포함한 고성능 수학적 도구의 도움으로 자료를 분석하는 것과 갇은 다양한 기술적 수단에 의해 지지되는 세부적인 연구에서의 기교를 포함하
는 막대한 양의 정보이다. 이 은폐가 보증하는 것은 디트로이트의 한 경쟁 자가 다른 경쟁자보다 우세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디트로이트 전체 가 파산할 수도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리고 정말로 크러이슬러가 망했을 때 크라이슬러의 경쟁자들이 잘 되리라고 확신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반대였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계획 입안자 둘기 그렇게 편협하지만 않았더라면 보다 우슈휴} 기술이 디트로이트를 구 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히 자동차산업이 점차 다국적화되어 간다는 관점에서 볼 때 국내이건 국의이건 어느 경쟁자도 승 패가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서구세계의 거의 모든 산업이 함께 망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안적인 계획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은 소위 말하는· 시 나리오 이론에 따라 종종 대답된다. 즉, 당신이 생각하기에 현존하는 계획 이 없다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을 적어 보는 것 (시나리오 적어나가듯)이 다. 우리는 어떤 기법을 갖자마자 그에 대한 대안을 고안할 수 있다. 그 시 나리오에 대한 표준적 대안은 사실 조작적인 게임 op er ati on al g am i n g을 하 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언어적인 글이라기보다 어떤 수학적인 기법과 예 중들에 특별히 강조를 두면서 시나리오 쓰듯이 적어 보는 것이다. 예를 들 어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리러는 희망 아래 어떤 집단으로 하여금 자발적으 로 이야기하도록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자극하는 매우 최근의 기법인 브레 인스토밍 bra in s t orm i n g을 들 수 있댜 반대로 델파이 기법은 익명의 많은 전문가들로부터의 반응을 서면상으로 받아 통계적으로 분석하여 뚜렷한 반 옹을끌어내는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 몇몇 안 되는 원시적인 기법들이 중요한 기법으로 인 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디어의 빈곤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질문지를 개 발한 것을 기본 골격으로 사용하는 델파이 기법은 특별히 무익한 것이다. 질문지 자체는 별개의 문제로 치더라도 응답에 임하는 전문가들이 어떤 기 본 골격을 갇이 공유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란 어렵다• 만약 자문을 받은 전문가들 중의 한 사림이 골격을 무시한다면, 그는 연구자의 관심을 받기는 커녕 잘못 이해하여 그 기본 골격 속에 짜맞추어지거나 또는 단순히 무시
되기가 쉽다. 여러 통계적인 방법들은 이것을 확실히 보증해 준다. 결국 통 계란 차이점을 해소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왜 주목을 끌 어야만 하는가? 골격을 깬 사람의 대다수는 정말로 변덕스럽거나 종종 어 리석다. 예를 들어 결과의 재순환인 피이드 백은 너무나 기계적이어서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델파이 방법에 관하여 가장 믿을 수 없는 사실은 이 방법을 쓰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한 결과가 나타난다~ 점이다. 일부 정보(이론적인 것은 물론 사실적인)는 상당히 믿을 만하다. 전문가의 의견이 좋을 때만 그 방법은 효과가 있다. 그러므로 믿을 수 없는 사항을 없애고 신뢰할 만한 전문가들을 이용할 수 있을 때만 델파이 방법은 편리한 방법 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어떤 계층의 전문가들, 또는 어떤 분야의 전문 성이 신뢰할 만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데 있다. 전문성을 확립하기 위해 서는 실제로 델파이 방법을 성공적으로 사용한 후에리야, 우리는 신뢰성이 없는 항목들을 배제하기 위해 같은 방법으로 전문가들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이 방법으로 전문성이 확립되면 이 방법은 거의 필요없게 된 다. 즉, 전문가들기 동의만 하면 2~3 명의 전문가들이 얼굴을 맞대고 상의 해도 똑같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델파이 방법을 사용하여 일부 총 괄적인 가정들이 모든 전문가 또는 디트로이트에 있는 모든 전문가들에 의 해 공유될 때마다 질문지가 지역의 현인(賢人)들에게만 시행되어 감추어지 는것은비극이다. 과드는 1975 년도 책에서 과거의 모든 계획수립 기법들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콰드 자신은 개선되기를 바란다. 그는 아주 분명한 제안으 로 충고를 한다 (275~277) : 〈 정책분석은 정책수립을 잘하는 명성 있는 곳 에 의뢰할 것 〉 〈 훈련을 시킬 것 〉 , 그리고 〈 정책분석 능력을 지원하고 관리 할 것 〉 . 의심할 바 없이 이것은 시대를 초월한 뛰어난 충고이다. 그러나 이 것은 전혀 오래 지속되지 않고 있다. 즉, 우리가 훈련을 시키기 전에 훈련 울 위한 좋은 계획과 미래의 성공을 위한 높은 가능성이 필요하다. 그 시나리오 방법은 논평이 필요 없다. 그것은 새로운 것도, 대단히 유용 한 것도 아니다. 브레인스토밍 방법에 대해서도 이것이 재미있고 그래서 모 두가 유익하다는 것을 제의하고는 똑같은 식으로 이야기될 수 있다. 이것은
많은 미신적인 전문가들이 과학적인 방법에 관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방 법론적 금기사항과 위배되며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는 것과 위배된다. 이것 이 바로 〈 당신이 니를 거짓말쟁이라고 부를 때 미소를 지어라! 〉 와 같은 유 명한 원리에 따라 그 회의가 왜 우스꽝스럽게 조직되었는가에 대한 이유이 다. 과학계에서 현재의 과학적안 방법에 대한 견해는 매우 권위적이면서도 지 나치게 고지식하다. 기술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즉, 과학은 엄청난 양의 정보로 시작하여 여러 가지 사실들로부터 과학이론들을 천천히 발전시킨다. 과학은 보다 많은 이론들, 보다 많은 사실들을 기초로 해서 발전된다. 그러 므로 대중은 총괄적인 가정에 대한 연구에 대해서 형오한다. 학문적으로 저 개발 분야에서는 총괄적인 가정들이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비평도 받지 않 고 슬며시 들어가 있다. 발전된 학문 영역에서는 총괄적인 가정들이 일부 지적이고 대담한 사상가에 의해 소개된다. 여기에서 문제되고 있는 영역은 저개발 분어이다. 더욱이 서양의 과학계, 특히 서양의 기술계에서 현재 과 학의 사회적인 기초에 대한 견해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서양은 기술을 가능 한 한 빨리 발전시키며 러시아가 바로 그 뒤를 따라간다는 것이 그 견해이 다. 이것은 분명히 지나치게 단순한 견해이다. 즉, 생태학적 위기, 인구폭발, 핵무기의 급증은 우리가 급격한 기술적 전보에 대해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다소 홍미가 있어 보이는 문제가 숨겨져 있 댜 현대 기술의 성공은 단지 물리적 기술이 기존의 사회체제 속에 통합되 면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산업혁명 중에 기술은 사회체제를 뒤흔든 나머 지 찰스 디킨스가 묘사할 수 있었고 칼 맑스가 합리적으로 분석할 수 있었 듯이 사회체제의 긴장을 가져왔다• 칼 맑스는 기술이 많이 발달하면 사회체 제를 강제적으로 붕괴시킬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그 결과로서 혁명이 이루 어질 사회를 예상했다. 그러나 내재적 붕괴는 사회조직을 재편하는 시작이 되었다. 여러 가지 단기 계획수립 기법들이 고안되었다. 이 기법을 장기적 인 문제들에로 확장한 것은 인류의 소멸이라는 가장 큰 대가를 치를지도 모 르는대 실패이다.
3 단기 인공두뇌공학 본 논의의 목적은 기 술 의 물 질 적 성취와는 관계가 없으나 인간 대 기계 체제 man-machin e sys t e m s 나 또는 그와같은 체제와 관련이 있는 기술의 새 로운 분야 를 묘사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이러한 종류의 성취는 기 술과학자들이 국민을 통치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취향을 왜 개발하는지에 대 한 이유를 제공하고, 소위 〈 경성 〉 과학으로부터 이러한 취향을 갖고자 하는 龜 구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종류의 성취는 기술과학자들 에게 〈 경성 〉 기술은신뢰할만하며 평범한사람들이 접근할수없다는것을 이용하여 민주주의를 불필요하고 불가능한 것이 되도록 만들어 버리는 〈 경 성 〉 기술 hard t echnolo g y® 에 의해 정부가 운영될 수 있다는 희망울 주기 때 문 O] 다. 공교롭게도 인공두뇌공학, 체제이론, 게임이론, 의사결정이론 등은 보통사 람이 접근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서양 고등학교의 유클리드 기하학 과 대수보다는 수학과 수학적 사고에 대한 개론으로서 보다 더 많이 쓰여 질수있다. 인공두뇌공학의 역사는 공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인공두뇌공학 아 성립하기까지의 역사는 복집하며 아직도 홍미 있는 연구주제로 남아 있 기 때문이다. 두뇌공학의 출생일은 2 차대전이며 이때 인공두뇌공학, 게임이 론, 의사결정, 0R(Op er ati on al Research) 모두가 개발되었다. OR 연구는 전방의 작전지역, 그리고 군대 인력 등 간의 전반적인 계획수 립과 조정의 필요를 느낀 사람들에 의해 영국군에서 만들어졌다. OR 연구를 하는 연구자들은 2 차대전 후에 단순히 직업을 얻기 위해 이것을 전문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후에 그들의 결과들은 체제분석 연구에, 그리고 이어 두 @ 여기서 hard t echnolo gy란 그것을 사용했을 때 사람들을 동제하기가 좋 아 민주적인 요소가 불필요하거나 주어지기가 불가능하게 되는 종류의 기술을 의미한다. 이때 사람들은 꼼짝없이 기계에 얽매이게 된다. soft tec hnolog y 란 그 반대의 경우를 말한다.
뇌공학에 통합되었다 . 인공두뇌공학이란 용어는 로버트 위너에 의하여 만들 어졌다. 그가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이지만 두뇌공학이란 단어는 라틴어의 통치 g overn i n g란 뜻의 그리스어판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1948 년도 책 『 인 공 두뇌공학 Cy berne ti cs 』 에서 두뇌공학을 정보와 통치에 대한 학문으로 광 범하게 정의했고 그리고 후에 게임이론과 그가 덧붙일 수 있었던 모든 것 울 다 두뇌공학에 덧붙였다. 어쨌거나 여기에서는 〈 OR 〉 과 〈 체제분석 〉 이라 는 용어들을 가능한 한 피할 것이며, 또다론 용어들은 후에 설명할 것이다. 두뇌공학의 주요 특징은 이것이 의관상 〈 경성적 (딱딱한)인 것처럼 보인 다났큰 것이다. 경성적으로 (딱딱하게 ) 보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째로, 두뇌공학의 활용은 높은 수준의 수학적 지식을 사용한다. 높은 수준 의 수학을 포함하는 지적 활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관련된 수학을 훤히 알 고 있을 필요는 없으며 계산능력은 더욱 그러하다. 즉, 일단 관련된 생각을 파악하게 되면 수학전문가(보통 많지 않은 돈을 지불하고도 부탁할 수 있는 정 도의 전문직 종사자)의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규칙은 아주 일반적이고 전통 적인 것이다. 심지어 고전역학에서의 가장 간단한 종류의 문제(모든 물리학 자문기 당연히 알아야만 하는)조차도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의 이해를 넘어서는 정도는 아니지만 평균 수준을 넘어서는 수학적 기법을 포함한다. 두뇌공학 을 〈어렵다〉고 보이게 만드는 두번째 이유는 가장 간단한 문제들도 일단 복 집해지면 쉽사리 다루기가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이 문제들이 반복됨에 따 라 더욱 빠른 속도로 복잡해진다는 것이다. 간단한 도로의 지도를 집어들 고, 운전자들이 보통 생각하는 일상적인 제한사항들이 주어전 가운데 도로 망과 규칙들을 어떻게 다루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뇨. 가는 길을 선택하 는 문제를 고려해 보자. 이것과 관련될 수도 있는 모든 것을 적어보는 것만 으로 빠르게 해결된다. 운전자는 하나씩 그러한 문제를 고려하고, 만약 어 려움에 부딪치면 자동차협회의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한다. 전문가들도 역 시 하니씩 문제를 고려하지만 일부 해결책들은 보다 더 전문적인 전문가들 에 의해 쓰여졌으며 이들도 또한 이 문제들을 하니씩 고려할 것이다. 그러 나 이들 상위의 전문가(대가)들이 체계적으로 문제에 접근할 수도 있다. 체 계적인 접근에는 보통 운전자들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의 것은 없지만 그것
은 매우 두려운 것일 수도 있다. 차량의 흐름에 대하여 많은 문제들이 그림 에 입력될 수도 있으며, 특히 문제의 해결방안에 부여된 조건이 운전자로 하여금 출퇴근 시간의 교 통 량이 폭주하는 가운데를 지나야 할 때는 더욱 그 러하다. 컴퓨터의 발명이 없었더라면, 차량의 흐름에 대하여 해결된 많은 문 제들이 대부분 원칙적으로는 아주 간단하지만 실제적인 세세함에서는 너무 나 복잡하거 해결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문제를 풀려고 처음 시도했을 때, 컴퓨터는 그때까지만 해도 희귀했고, 따라서 교통 문제의 대 부분은 해결되지 않은 채 그냥 방치되었으며, 그들 중 일부는 후에 컴퓨터 를 더 쉽게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해결되었다. 우리는 복잡한 문제들을 고려하는 데 있어서 확률성에 대한 문제까지 도 입함으로써 일들을 더 복잡하게 만둘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문제 를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으므로 이것 모두를 파고들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 말해전 것이 원칙적으로 진부하며 상식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이 것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복잡하고 홍미 있는 고도의 수학 및 수학문제와 관 련되어 - 원칙상의 해결 가능성에 대한 한계와 실제상의 해결 가능성에 대한 한계를 포함하여 一 ~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그러한 문제들에 당면한 사람이, 운전기사, 경영자, 혹은 동치자로 서, 적은 돈을 들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울 수학자에게 이 문제를 맡길 수 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그 수학자에게 별도의 어떤 과제를 맡길 수도 있다. 즉, 그는 그 수학자에게 원 자료를 주고 그에게 지침을 요 청할 수도 있다. 공정한, 편견이 없는 수학자는 그의 의뢰인이 원하는 바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는 대안적 방법으로 수학자는 의뢰인에게 무엇 이 좋은가를 결정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어느 경우든 이러한 추가된 과 업을 하게 되는 수학자는 그 자신을 〈 OR 연구가〉 또는 〈체제분석가〉 또는 〈 과학적 행정의 고문 〉 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기술주의자가 되는 길을 가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해서 심지어 처음에는 예비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당신의 일을 처리할 것이다• 간단한 원칙으로 돌아가자. 금세기의 가장 놀라운 수학적 혁신 중의 하나 는 공정흐름표fl ow ch art이다. 이것은 런던 교통국이 가전 것과 갇온도식
적인 지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A 에서 B 로 가고, B 에서 C 로 가라는 등의 것 을 말할 수 있다. 또는 B 에서 CA 와 CB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고, X 인 경우에는 CA 길을 택해야만 하고 Y 인 경우에는 CB 를 택해야만 한다고 말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A 공장에 어떤 주어전 속도로 에너지와 인력을 투 입할 뿐만 아니라 원료 a,b, c-를 주어진 비율로 투입하고, 그 공장에서 완성 품 d 와 e 가 주어전 비율에 따라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공 장 가동을 계속 권장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들어간 비용(두입량)과 생산 된 제품(생산품)으로부터 얻어진 수입을 계산할 수 있다. 물론 공장은 다른 제품을 생산할 수 있거나, 생산품을 다른 비율로 만들 수도 있으며, 또한 생 산품은 반제품이나 디론 어느 곳에서 원료가 되어야만 하는 제품일 수 있 다. 이 모든 것은 너무도 간단명료하여 도대체 이것을 말하는 것이 무슨 쓸 모가 있는가 하고 의아해할 것이다. 이 질문을 무시함으로써 많은 양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음은 놀라울 정 도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일단 알려지기만 하면 명백한 일이지만, 그렇 지 않으면 우리는 이 질문으로 인해 정말로 당황하거나 혼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공정흐름표의 좋은 점은 무엇인가? 이것은 두 가지 좋은 점이 있다. 첫째로 복잡한 흐름은 흐름표의 도움을 통해 가장 잘 이해된다는 점이다. 공정흐름표의 작성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 다. 즉, 우리는 공정흐름표를 그리지 않고도 공정흐름표의 각 단계를 연구 할 수 있고, 그리고 일반적인 개념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공정흐름표를 그려 보면 실제로 어떤 사업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엄청나게 늘어 난다. 둘째로 공정흐름표의 유용한 기능은 생산공정을!수립하고 조정하는 것을 쉽게 만드는 점이다. 특히 공정흐름표는 매우 혁명적인 조정수단, 즉 두뇌공학의 핵심인 피드백 메카니즘 Feedback mech ani sm 의 설계에 유용하 다. 환류기제(피드백 메카니즘)는 원리가 아주 간단하며, 그리고 현대의 일부 자동제어장치 (로보트)에서는 고도로 복잡할지도 모른다. 같은 환류과정이라 하더라도 다양한 종류의 기제들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환 류기제의 일반화된 정의는 어렵다. 그러나 피드백에 의한 통제체제라고 볼
수 있는 피드백 과정 그 자체는 대단히 쉽게 정의된다. 즉, 조정하려는 목 적 으로 출력(생산품)의 일부가 입력( 원 료)으로 사용될 때 이것이 환류과정 아다. 가장 잘 알려진 환류기제는 온도조절장치이다. 이것은 가열기가 생산하는 열의 일부를 소모한다. 따라서 이것을 가열기의 일부로 보면 생산품의 일 '-j.· ( 열 )가 가열기로 다시 공급된다. 열이 너무 많이 생산되면, 이것은 가열기에 의해 소 모되는 연료의 공급을 차단하거나 줄인다. 일단 온도가 떨어지면 다 시 열 을 증가시킨다. 많은 종류의 온도조절장치가 있고 , 각각의 온도조절장 치 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열에 의해 영향을 받는 메카니즘을 이용한다. 그 리고 이 방법들은 통제방법으로 이용된다. 〈 환류 fe edback 〉 라는 단어는 종 종 통제( 조 종)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그래서 회사가 생산을 조종하기 위해 사용하는 정보의 흐름은(그 정보가 경제에 관한 것이고 해의시장에 관한 것일 때 조차 도 ) 종종 환류라고 불린다. 노동지들이 품질을 검사하기 위해 생산한 식 품을 먹으면 그 행위는 문자 그대로 피드백이다. 소비자에 관한 정보를 수 집 하기 위한 회사의 시장조사에서 소비자들이 연구를 위한 견본품을 먹 울 때는 거의 피드백이라 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느 직원이 자기 회사 생산 제품의 일부를 먹을 때도, 음식에서 나온 에너지가 입력으로 투입되지 않 는다면 그것은 전혀 피드백이 아니다. 한 공장의 품질관리 부서가 그 공장 의 제품을 사용하면 그것은 거의 틀림없는 피드백이다. 품질관리자가 기계 로 대치되면 피드백 조절은 자동이 된다. 이제 우리는 환류기제에 대해서 올바르게 말할수있다. 온도조절기는 낮은 온도는 올리고 높은 온도는 낮추므로 온도를 안정되 게 유지한다. 환류조절방식으로 어떤 것을 안정되게 유지하는 장치를 안정 기 Homeosta t e 라 부른다. 안정기는 파동을 역류시켜 그것을 조정하고 그 기 계의 안정을 유지하기 때문에 단순한 음성적 nega ti v e 환류기제장치이다. 양 성적 pos it ive 환류기제장치는 변동을 증가시켜 폭발적이거나 내파(內破)적 경향을 야기시킨다. 이러한 복잡한 일련의 피드백 메카니즘을 서보 기구 servo-mechanis m s 라고 부른다. 복잡한 자동화 또는 반자동화 공장은 공정흐름표의 도움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이 공정흐름표는 대체생산 프로그램, 통제, 피드백, 입력 -― 출력 보조체제, 입력 一― 입력의 흐름, 배열과 저장기법, 그리고 그 이싱을 보여 준다. 또한 각각의 세부사항이 단순화된 방정식으로 묘사될 수 있고 그 해 결방안들은 전체 체제 - 이익이나 손실 등에 관련된 체제에 대한 제약조 건들을 포함하여 ―― 를 프로그램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여러 분야의 새로운 기술 ― ― 산업공학, 배열과 저장이론, 선형계획, 그리고 더욱더 중요한 의사결정이론 등――울 통합시킨다. 의사결정이론은 대안적인 가정들을 제시하고 어떤 가정에 따라 행동할 때 생기는 유리한 결과와 불리한 것을 짝지어서 제시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 는 가정이 참이거나 또는 거짓이더라도 거의 손실만 없으면 그 가정에 따 라 행동하는 것은 이익이 된다. 또한 이익은 크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이 낮 거나, 손실이익은 작지만 그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경우도 있다. 첫째와 같은 경우 문제가 될 것은 거의 없고, 둘째와 같은 경우에는 정책이 요구된다. 죽, 우리는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하는가 아니면 손실을 극소 화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하는가? 의사결정이론에서 알려진 대부분의 문제들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아마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가장 초기의 발달은 너무나 강 력해서 의사결정이론의 전 분야는 2 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미국의 군사 당국에 의해 군사비밀로 유지되었다. 특히 통제방법은 의사결정이론과 가장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다. 품질관리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주어진 품 질이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것, 즉 품질관리비용과 이로 인한 이익은 상 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 죽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의사결정이론을 사용할 수 있다. 일 반적으로 통제는 어쨌든 이런저런 방법으로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다• 우리 가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를 가질 때마다 우리는 〈현재의 대등한 가정들에 대해 중요한 실험을 할 가치가 있는가?〉 하고 물을 수 있다. 전시에는 이 것이 〈작전 전에 정찰병을 보낼 가치가 있는가?〉라는 것을 의미한다. 강조되어야만 할 것은 여기에서 이제까지 말해전 모든 것들이 단기적이 고 특정한 전후관계 속에 묻혀 있디는 것이다. 전후관계, 주어진 체제, 체제
의 원리들은 여가에서 문제삼지 않겠으며 또 그것들을 질문할 여지도 없다. 이것은 의사결정이론에서 특히 분명하다. 의사결정이론에서는 대등한 가정 들과 각각의 가정들이 참일 때와 거짓일 때 이것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발생 가능한 추정비용과 이익은 전후관계에 고도로 의존한다. 두뇌공학의 경우에 주거지는 경제학과.기술도 그러하다. 전후관계가 없는 두뇌공학은 있을 수 없으며, 전후관계가 없는 의사결정이론도 없다. 그러나 이들 두 이론은 불 분명한 방법으로(즉 전후관계를 전혀 구체화하지 않음) 전후관계를 나타내기 때문에, 초심자들을 당황하게 한다. 이것이 명확하게 말해졌다면 초심자들 이 쉽사리 당황하지 않을 것이나, 그러나 거의 그렇지 않다. 왜? 절대적인 전후관계의 의존성은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는가? 아마 교 과서가항상 강압적이고 설명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기술주 의자들이 실제로 그들이 하는 것보다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하 고 싶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기술주의는 거시 계획이 기술자들이 손댈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기술주의자는 거시 예견둘과 계 획들을 가지고 있는 척하며, 전후관계를 독립적으로 통제하면서도 전후관계 가 의존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척한다. 몇몇 경우에는 이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 저수지에서 쏟아내는 물의 속도 를 계산하기보다는(사실 이것은 전혀 어려움 없이 우리가 풀 수 있는 문제이다) 저수지의 물이 모두 빠져 텅 비는 데 요구되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을 만 큼 큰 배출구를 만드는 것이 쉽다. 얼마나 무거운 중량의 화물차이어야 다 리를 건너도록 허용할 것아냐를 묻기보다, 우리는 비교적 싸게 지금까지 요 구되었던 강도보다 더 세게 다리를 보강할 수 있다. 다리를 더 세게 보강하 는 경우와 하지 않는 경우의 건설비용 차이는 그 다리가 지진(지전이 일어 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할지라도)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느냐 그렇지 못하게 하느냐의 경우의 건설비용 차이보다 훨씬 적다. 조금만 생각하면 이것이 모 든 상황에서 실현될 수는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어떤 상황에 서 말뚝인 것이 다른 상황에서는 단검이 된다. 월터 스코트 경이 쓴 r 부적 Talism an~ 근동(近東)의 타오르고 있는 태양 아래서 싸우고 있는 중세 영 국의 기사의 갑옷이 죽음의 함정으로 되는 묘사로 시작하고 있다.
이 토론은 이미 주어진 정보만으로도 너무 짐스럽지만 아번에는 한 가지 더 자세한 것을 정보이론으로부터 덧붙이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는데 이것 은 철학적 홍미 때문이 아니고, 현대의 복잡한 기술의 일부분 또는 대부분 아기 때문도 아니며, 단지 종종 전후관계가 없는 것으로 제시되기 때문이 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분명히 전후관계가 없지만, 전후관계를 벗어난 이 것의 신뢰성은 위험하며 어리석기조차 한 것이다. 원칙적으로- 어떤 정보라 도 원하는 대로 정확하게 재생산될 수 있다는 것은 실제로 정보이론의 중 요한 전제조건의 하나이다. 즉,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정보(심지어 옛날 대가의 어떤 그림조차도)라도 재생산이 가능하다. 이것은 생각컨대, 만약에 우 리가 정말로 비용 문제를 무시하고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았지만 성공적으 로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해결책을 풀기 위한 연구비용을 허락한다면 어떤 면에서 재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신호 sig n als 의 교신 communi- cati on 을 다루는 이와같은 정보이론이 어떻게 전후관계가 없는지 혹은 장 기 계획 수립과 관계되는지를 아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언어 에 속해 있는지에 대한 문제, 또는 어떤 교신 채널에서 메시지가 전달되는 지에 대한 문제를 무시하면서 교신에 대해 토론하도록 허용하는 정보이론 의 교묘함은 인상적이다. 이것이 행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예상되지 않았던 여러 가지 방향에서의 일반화와 추상적 개념 gen erali za ti on and abstr ac ti on 의 힘을 보여 주며, 이 힘은 어떤 것에 대해서든 질서 있는 통제를 할 수 있는 기술주의자의 약속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충분히 인상적일 수도 있다. 실제로 프레드 호일의 과학적 낙원을 그린 『검은 구름』은 국제적 인 정보처리센터를 고안해서 이것의 도움으로 지구 전체를 통제하는 거대한 힘 울 얻은 일단의 과학자들에 의해 예견되는 인류 파멸에 대한 이야기이다. 정보이론은 전후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고 전후관계가 불분명하게 언급되 어 있다. 따라서 정보이론이 성공적으로 적용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점들이 명백하게 보완되어야만 한다. 어떤 언어든 단어와 단어의 사용빈도에 관하 여 말하고(정보이론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 그리고 사용빈도가 낮은 단어들은 잘못 교신되는 것을 줄이기 위해 반복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 다(전체 메시지의 반복이 더 좋기는 하지만 그 단어의 의형적인 면에서 볼 때, 잘
못된 교신 을 피하 고 자 할 때 비용이 더 든다. 즉 , 우리가 어떤 책의 복사판 원고 를 더 많이 가지고 있으 면 있 을 수록 원본과 똑감 은 것 을 다시 만들기가 더 쉽다 . 그러 나 다른 면으로 보아 잘 안 쓰 는 단어 를 되 풀 이하여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반면 , 서 로 다른 복사물들은 구하기나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결정이론은 이 시접에 서 다시 그 그립 으 로 둘어간다) . 그러나 우리는 이 지식을 어떻게 해서든 적용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어떤 확실한 언어와 함께 그 언어에서 주어전 여 러 단어들마다 상대적인 빈도수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정보이론이 통계학 없이는 적용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통계적 가 정들은 변경할 수 있는 전후관계 속에서 (전후관계 를 무시하거나 없는 게 아니 고) 만 들 어진디는 것이다. 따라서 전후관계가 더욱 구체적일수록 그 정보이 론은 더욱 유용하다. 구체적인 전후관계와 정보이론의 광범위한 사용은, 하 나는 훌 륭하고 하나는 무서운 두 가지의 분리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 훌 륭한 결과는 정보의 흐름을· 부드럽게 조작하는 것이다. 즉, 소음, 잘못된 교신, 방해들이 최소한의 수준으로 줄어든다. 훌륭하지만 소멸되어 가는 르 네상스 프레스코 화법의 재생과 같은 기적들은 정보이론을 분별 있게 사용 하기만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여기에서 〈 분별 있는 〉 이란 단어의 사용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훌륭한 결과는 경 의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야만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특수하고 홍미 있는 메시지는 쉽사리 다소 왜곡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그런 류의 메시지는 관례적이고 상식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소음을 줄이는 방법은 홍 미 있는 메시지를 왜곡시키는 방법과 아주 똑같다. 즉, 통계적으로 특수한 것은(그것이 소음이거나 하나의 기술혁신이거나간에 ) 특수한 것에 지나지 않는 다. 따라서 르네상스 프레스코 화법을 재생하는 데 있어서 정보이론을 지나 치게 적용하면 오히려 이 화법을 전부한 것으로 만들 뿐이며 이것의 독특 한 특성들이 희석되고 말 것이다. 죽, 이 화법의 신비는 영원히 사라질 것 01 다. 여기에 심오한 교훈이 있다.
4 기술관료주의의 추악한 얼굴 기능사, 기술자, 과학자, 또는 과학교사가 민주주의에서보다 기술주의에서 더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아 반드시 기술주의의 매력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 직장조직 (공장, 회사, 연구소 또는 대학이든지간에 )이 민주적으로 운 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는 과학적 • 기술적으로 전보되어 있 는 이 조직체들이 국가 전체, 국가의 정치적 조직체, 또는 민간 또는 상공 단체들보다는 더 잘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이스라엘에서 가장 잘 조직된 기구는 의회가 아니라 군사적으로 통제된, 국영의 항공기 산업이 다). 1930 년대에 정칙하고 상당한 수준급의 지식인들이 불행하게도 스탈린 의 잔인성은 기술주의로 가는 지름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리라 는 희망으로 스탈린주의자가 많이 되었다. 기술주의에는 서로 전혀 관련성은 없으나 나약하며 현실적인 두 가지 모 습이 있다. 나약한 모습이란 사회를 과학적으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운영하 는 측면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부적인 계획을 세워서 하지 않으면 실증적으 로 비평 가능한 것은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실증적으로기- 아니라 도덕적이고 미학적인 측면에서 비평할 수 있다. 현실적 모습이란 갈등적인 관심에 대한 해결방안에 대한 여러 생각을 포함한다. 만약 선의로 제안한다 면 이것은 비평이 가능하다. 선의가 없다면 그것은 오해하기 쉽고 또 그런 논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에 비평할 수 없다. 이제 기술주의의 두 가 지 모습을살펴보자. 기술주의의 나약한 면은 민주주의의 병폐를 노출시키고, 이것이 대중의 무지에 뿌리를 둔 것으로 분석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민주주의 그리고 유사한 다른 체제에서 거짓말과 음모와 비열을 통하여 최 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망을 가진 무례한 자들과 어리석은 자들과 더불 어 계속된다• 지금까지는 좋다. 다음으로 오는 것은 과학자들이 꿈꾸는 이상화된 모습 인데, 그 모습은 거짓이 아니고 단지 실수와 과장일 뿐이다. 이 이상화된 모 습에서의 과학자란 기술자와 과학자를 합쳐놓은 사람을 의미하며, 그리고
그의 동료들의 가치와 능력을 알고 있는 고결한 마음과 비평적인 마음을 가 진 전문가를 의미한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우리가 이제 추가로 필요한 모든 것 은, 학문사회에서 시행되는 그 높은 수준을 모든 직업에 도입하기 위한 준 비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것은 학문사회가 모든 사회적 역할을 다 의미하 고 모든 사회적 활동이 과학적 기술이 되도록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다. 여 기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핵심은 민주주의 폐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민주주의만큼이나 잘 할 수 있었던 정부도 없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모든 행위를 교육과 연구 모든 분야에서 과학적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곧 사회가 과학적 산 업, 과학적 경영, 그리고 과학적 대학의 거대집단이 될 것이리는` 것을 의미 한다. 따라서 정치적 논쟁은 과학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실증적인 관찰 결과 하나를 보고하자면 이러한 생각은 교육기관을 포함 한 각종 기술적 전문적 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최고 수준의 사람들 사이에 굉장히 인기가 있다. 이것은 지적인 엘리트주의로서 인정되고 있으며 우리 가 학생들로 하여금 대학을 운영하게 할 수 없고 노동자들로 하여금 직장 울 운영하게 할 수 없다는 등의 이유에 기반을 두고 옹호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엘리트주의를 단지 기회의 평등이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기술주의도 기초가 올바르게 세워져야 하므로 만 약 우리가 그러한 기술주의적 경향을 극복하기 원한다면 대학, 직장, 그리 고 공공 서비스를 먼저 민주화해야만 한다(헤롤드 라스웰은 심지어 정신병자 수용소조차 민주화하려고 시도했다. 교도소를 민주화하기 위한 시도들도 있었다. 그 러나 이 두 가지가 모두 방대한 개혁을 요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그것들에 관해 언급하지 않겠다). 엘리트주의에 대한윤리적이고미학적인비평에 대해서 성술할필요는거 의 없다. 일부 사람들은 의서들이 자신에게 어떤 정보도 전달하지 않고 단 지 처방하고 치료해 주는 것을 좋아하기도 한다. 이것은 건강과 복지를 어 떻게, 그리고 얼마만큼의 대가를 치르고 유지해야 하는가 하는 것과 같은 결정들을 포함하여 자신의 건강과 복지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전문가에게 맡
기는 것이다. 물론 사려 깊은 환자 들은 의사 를 의사결정자가 아닌 전문적인 조언자로 그리고 그러한 역할을 위임받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자기 자신의 전문성에 관한 것은 예의로 하고 자신의 삶의 모든 면이 다른 사람들에 의 해 운영된다는 것을 가정해 보자. 이러한 경우 어떤 전문가의 판단은 현재 자기 직업의 관점을 반영할 것이다. 더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다. 즉, 그렇게 되면 상상컨대 아마 누구나 개인마다 기술적으로 통제된 완전히 타율적인 생활방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상력은 순식간에 소멸될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생활의 모 든 면이 이 그림(이러한 기술적인 사고)에 의하여 좌우되고 정치 ___ 민주주 의건 다른 주의전간에 ―一 가 발휘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개인생활의 일부분은 예를 둘어 그 사람의 결혼 여부, 혹은 국적 변경의 여 부에 대해 결정할 수도 있는 모든 종류의 공공 행정관리자( 정 부의 행정 책 임자)들에 의해 좌우된다. 정치는 그 그림(기술주의적 사고) 속에 들어갈 수 가없을것이다. 정치는 무엇이고 전문적인 정치인은 누구인가? 우리가 어떤 정치적인 전 문성을 발견하고 이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그 전문성은 이미 행 정적인 전문성이 되고 우리는 그것을 과학적으로 만든다. 사회적 또는 정치 적 조직체를 통치하는 기술로서의 정치는 더이상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공 공 행정이다. 정치는 의사결정의 기술일 수도 있다. 우리는 분명히 모든 결 정들을 정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정치적인 조직체가 없이는 어떤 결 정도 정치적이 아니다. 죽, 바로 이것이 행정적 의사결정과 정치적 의사결 정 사이의 차이이며, 동시에 공공 행정과 정치적 조직의 차이이다. 기술주 의의 나약한 모습은 어떤 정치적 조직도 인정하지 않으며 또한 정치 자체 도인생 완이전다히. 만배약제한에다 .여 러정 치전 문없가는들 생끼활리은 전 전문문성가에들 에대 한의 해전 해조가화 롭다게르 다통면치 —되—는 그들이 상충하는 견해를 갖고 있건, 싱충하는 지역에 관계된 이해를 갖고 있전간에 一 ―그들은 아마 더 높은 수준의 초(超)전문가에게 호소할지도 모 른다. 그 초전문가는 전통적으로 어떤 고유한 이름을 하나 갖고 있다. 즉, 플라론키 공화국계 나오는 고대신화의 철학자왕이 바로 그것이다. 일부 사
람들은 플라톤의 〈 공화국 X 즌 실제적인 계획이 아니고 꿈에 불과한 것, 즉 단지 나약한 사고(생각)의 실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 러면 잠시 동안 풀라톤을 무시하고 기술주의의 현실적인 모습으로 가보자. 기술의 현실적인 모습과 나약한 모습은 둘 다 이상적인 조화와 과학적인 기술수단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현실적 모습은 이해관계의 상충과 의견 차 이가 곳곳에서 일어나게 되어 있디는 점과 또한 그러한 것들이 통제되지 않 으면 파멸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나약한 모습과는 다르다. 현실적 모습은 제도적으로 성장된 지도력에 의해 운영되는 제도적 연합체 로서의 여러 직업을 의미한다. 정치는 직업들간의 조화를 유지하는 기술로 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며, 또 정치는 민주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도 있다. 기술주의는 엘리트주의의 응용을 요구한다. 즉, 정치는 직업적인 전문 정치인들을 위한 것이고, 이것이 정확하게 플라톤의 〈 공화국 〉 이다. 기술주의사회 속에서 민주주의의 부분적인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20 세기 중반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하나이며, 그의 명성이 당당하게 날 로 울라가고 있는 마이클 풀라니는 과학기술적인 사회를 엘리트들에 의해 서 운영되는 전문적 길드의 병합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견해를 옹호하였다. 그의 생각은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과학철학자들 중의 하나인 토마스 쿤 에 의해서 대중화되었다. 쿤은 이 연합된 길드사회의 폭넓은 배경에 관해서 논의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상당한 논의를 하고 있다. 그는 분명히 민주주의 자이다. 또한 폴라니는 민주적 성향을 가전 사람은 누가 보더라도 아주 충 분할 정도의 어떤 주장을 근거로 해볼 때 너무나 민주주의자이기 때문에 그 길드사회의 힘을 평가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것은 만약 사회가 민주적이지 않는 한 그 정부는 그 길드의 자치권을 간섭할 것이라는 관점이다. 폴라니가 그리는 사회 모습에서의 길드는 연구길드이다. 길드는 교육기관 을 통해서, 그리고 길드들이 대가라고 칭하는 특별한 재주를 숙달한 개인들 에게 면허를 발급해줌으로써 사회 속으로 파고든다. 그러나 풀라니는 그밖 의 모든 것은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전문인력 확보와 그 연구길드를 위한 재원의 유통도 역시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문인력 확보와 연구재원의 유통이 전문가의 손에 달
려 있다는 사실과 상충된다. 폴라니가 생각하는 길드가 있는 민주주의의 모습은 이 둘 사이에 어떤 선 을 긋지 않고서는 지지할 수 없다. 어떠한 데마가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으 며, 어떠한 것이 민주적 정부에 속하며, 무엇이 전문가의 조정을 요구하며, 따라서 무엇이 엘리트들의 행정을 요구하는가? 폴라니 자신은 예를 들어 종 교가 전문가들에게 개방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가? 선을 그어야 할 곳은 어 디인가? 한 가지 단순하고, 미혹적이며 그리고 잘못된 해결책은 단기 목표들은 전 문가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제일 좋고 장기 목표들은 정치적 토론과 의사결 정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남편은 보수주의자이고 자신은 급진주의자라는 사실을 제의하고는, 성차별주의자인 남편이 시키는 모든 것을 하고 남편의 의견에 간접적으로- 동의하는 부인과 같다. 더욱이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기술주의자는 이들 둘 다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 해야 한다. 죽, 보수적인 정치와 급진적인 정치 둘 다 양보하고 새로운 정 치적인 전문적 의견을 받아들여야 한다. 정치적 활동에 있어서 연간예산 같 은 단기 결정은 의의 있는 정치를 위해 절대적 요소라는 것이 명백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결정들은 어떤 장기 결정들에 의해 제한되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는 왜 〈철학자인 왕只t 갖지 말아야 하는가? 반복하건대 철 학자 왕은 장기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울 수가 없을 것이다(우리가 만약 운 이 좋다면 생존할 수 있디는 것을 제의하고). 그러므로 그는 무엇이든 가장 비 효율적인 것의 효율을 증가시키는 공리주의®의 안경을 통하여 전체 사회를 바라볼 것이다. 바로 여기에 모순이 있다. 풀리톤은 이것을 돼지의 국가로 보았고 이를 반대하였다. 죽, 풀라돈은 정의 (正義)란 곧 엘리트주의자를 의 미하는 국가, 죽 철학자 왕에 의해 정의롭게 운영되는 국가(이러한 국가에서 의 정의는 더 가치 있는 자가 그의 가치에 비례해서 더 많이 갖는 것이다)를- 반대 했다. 마침내 기술의 융성과 함께 엘리트주의가 기술주의 형태로 실제 이용 되어지는 때에 그러한 기술주의가 로보트처럼 사용되는 국가를 의미하게 된 @ 공리주의는 공리와 효용을 모든 가치의 원리로 간주하는 것을 말한다.
다. F. G. 융거가 쓴 『 기술의 실패 : 목적 없는 완성 』 이라는 책은 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제목에서 언급된 실패는 사실상 기술이 아니라 기술주의를 향하여 표류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민주주의는 그 실패를 정확하게 규명하 고, 분석하고, 개선하기 위하여 노력해야만 한다. 그 실패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과학과 기술이 인류가 당면하 고 있는 절박한 문제들을 의심할 여지 없이 모두 처방할 수 있는 최적의 해 결방안으로 보는 것이다. 이 관점은 실패가 계속되는 사실이다. 이것은 아 주 중요하지만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 이유는 과학이 아직도 우리의 문제점 에 대해 대부분 대답해 주지 못하고 있고, 또한 과학적 기술의 응용 분이: 가 아직도 국부적이기 때문이다. 즉, 대부분의 기술적 문제들, 특히 대부분 의 행정적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았으며 해결된 문제들은 종종 재래식의 또 는 임기응변적인 수단에 의해 처리되고 있고 그 해결방안들도 독특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기술은 법적으로 동의를 구해야 한다. 즉, 우리는 면허나 공공기관의 승 인 없이는 어떤 새로운 고안, 약, 기계, 또는 방법도 시장에 내놓는(상품화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의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단지 승인 또는 면허만 있으면 된다. 기술주의 국가란 면 허를 의무화하는 국가이다. 고전적인 과학철학과 그리고 고전기술철학(과학철학을 확대 해석하면)에서 는 과학을 합리성의 최고봉이라고 보는데, 여기서의 합리성은 이성의 관점 에서 본 행위로서 의무가 따르고 합리적 행위를 말한다. 이것은 의무가 따 르고 합리적 행위의 일치를 말한다. l 料]기에 과학이란 모든 합리적 존재 (죽, 모든 보통사람들)의 것이라는 신화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이 신화는 인민 주의®를 낳았다. 물론 그 신화가 극단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사람들을 제의하 고 모든 사람들을 정부에 참여 가능하게, 그리고 심지어 의무적으로까지 만 든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적이긴 하지만 이것은 195M, 당연하게 그리고 발 ® 〈민중주의 (民衆主義)〉라고도 한다. 인민 속으로 들어가 그들로부터 배 우며 그들을 위하고 그들을 어떤 일의 중심으로 삼는 태도를 말한다.
간 즉시 명저로 명성을 얻은 제이콥 몰몬의 저서 『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의 기원 』 에 놀러울 정도로 잘 묘사되어 있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리차드 호 프스타터의 19 세기 미국의 인민주의에 대한 홍미 있는 연구 또한 참조하기 닙}란다. 이것 모두는 고전과학철학에 대한 논박으로서 충분하다. 그러나 철학자들 은 과학철학의 가장 약한 점 (과학적 합리성을 면허보다는 의무로 보는 것 )을 포기하기보다는 과학철학의 가장 강한 점 (과학적 합리성을 만인에게 공개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들은 과학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 니고 전문가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따라서 그들의 인민주 의는 엘리트주의가 되었고, 그들의 민주주의는 사라졌다. 그리고 이성을 의 무적인 것으로 본 민주주의적 democrati c 견해 때문에 고통을 받았던 고전 과학철학은 이성을 의무적인 것으로 보는 엘리트주의적 eli tist 견해로 전환 했다. 그렇지만 아직 구원의 은총이 있다. 즉, 민주주의적 이론과 민주주의 적 실제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발전되었고 이러한 민주주의에서는 관용 과 반대의 권리가 침해당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합리성을 관용에 대한 생각 및 반대할 수 있는 권리에 통합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즉, 민주주의와 합리주의는 인간에 대한 자유주의 철학 안에서 통합되어야 한다.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사성의 자 유와 행동의 자유를- 구분하는 것이다. 죽, 사상의 자유는 무제한적이어야 하 고 과학을 지배해야 한다. 그러나 행동의 자유는 우리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러나 최소한 범위 내에서 제한되어야 한다. 그리고 행동의 자유를 책 임지고 있는 사람들도 감시되고 제한되어야 한다. 5 맺는말 기술주의는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고 있다. 노련한 여행안내자는 매우 쓸 모 있으며, 여행자가 가고자 하는 곳을 어떻게 가는지 또는 여행자가 찾는 것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을 찾기 위하여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충고할 수 있
다. 이제 그 여행자가 추구하는 것은 그 자신에 관한 일, 즉 자신의 목표 혹 은 먼 장래의 어떤 목표를 이루가 위한 수단들이다. 여행안내자가 제시하는 것은 어떤 주어진 단기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가능한 길을 제공해 주는 것 이다. 이 간단한 비유가 민주주의 지향적인 한 개인이 우리의 현 사회 속에 서 직면할지도 모르는 위험과 그리고 기술주의 지향적인 사고방식에 아무 런 비평 없이 빠져드는 위험을 방지하는 수단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우리 는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정치적 지도력이 여행 안내에 비유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 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행계획을 선택하는 것과 정치적 선택을 하는 것 이 모두 시민 각자의 책임이러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가들이 국가적 목표와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위한 우선순위를 제안할 때, 민주적 정 책을 제안할 때, 조정할 때, 그들은 기술관료도 여행안내자도 아니고 단지 그중간에 있는것이다.
제 2 부 기술과철학 제 2 부에서는 계몽사조에 관한 고전철학의 모습을 자세하게 논의하겠다. 이 계몽주의 철학은 지난 3 세기에 걸쳐 일어난 과학과 과학적 기술의 획기 적 성장에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과학에 충실하다는 것은 종종 계몽주의 철학에 대한 승인, 즉 이 철학의 대중성, 이 철학에 대한 교조적인 집착과 이 집착 때문에 생긴 정치적 • 사회적 • 기술적인 손성을 요구하고 있는 듯 하다. 전통적인 과학철학과 기술철학의 이론적 장단점울 상세히 알아 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장단점이란 과학과 기술에 관련되어 생 겨나는 좋고 나쁜 결과들을 말한다. 또한 전통적 철학의 이론적 • 실제적 장 점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이론적 • 실제적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떤 대안 을 찾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보다 나은 대안은 활기찬 사회적 • 정치적 기술로 이르는 길을 제시하여 보다 계몽된 사회로 나아가고, 궁극적으로 국 민의 효율적 참여가 아로거지는 민주주의의 발전과 효과적인 민주적 통제 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제 4 장 미신적 기술과 과학적 기술 누구든지 자신의 문화적 환경에 대하여 무엇이 가장 명확하고, 가장 특 징적이며, 또 가장 전형적인가를 알 수 있다고 단언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서구 현대사회의 거의 대부분~ 사람들의 생활이 기계와 기계장치로 가득 차 있다고 특칭짓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다음 사항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현대적 (과학적 ) 기술은 세계의 일부 지역에만 보급되어 있으나 일반 기술은 가장 원시적인 사회를 포함하여 모든 인류사회 속에 퍼 져 있다. 더욱이 가장 잘 알려진 사회에 있어서조차도 기술은 미신으로. 동 하고 있다. 미신이 너무나 잘못 이해되어 있기 때문에 미신과 기술이 같다 고 하는 등식은 서양에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1 과학적 견해 : 베이컨주의 현대사회에서 미신에 대하여 알려져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말하기 어렵다. 성서를 읽도록 만드는 어떤 종교든 그 종교에 십취한 사람들은 그
들 나름대로 하나의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이와 마찬가지로 기술자들은 다 른 하나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인류학에 많은 연구를- 기울인 사회인 류학자들도 또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서로 불일치하는 세부 사항들 속으 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되도록 피상적이고 무지한 채로 있 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신의식의 갖가지 방법을 묘사하기란 너무나 쉬운 일 이며, 미신관계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것도 매우 용이한 일이지만, 미신 에 관한 몇 가지 포괄적인 관점들을 제시하고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실 례들을 적게 인용하는 것이 오히려 더 유익할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림들에게 미신, 요술, 마법 등의 단어는 같은 의미로 이해된 다. 그러니 우리도 이것들을 구분하지 않기로 하자. 또한 약간 복잡해지기 는 하지만 점성술, 두시안, 예지, 또는 예언적인 능력 등은 모두 미신 속에 포함될 수 있다. 이 복잡성을 참시 미루어둔다면 우리들은 대부분의 사람들 에게 있어서 미신은 단지 일단의 헛된 믿음으로서 〈 허황된 일 〉 이라든가 〈 주 문(呪文)〉이라는 이름하에 일률적으로 처리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은 미신을 어떤 말들이 전해지는 바에 의해 효능이 있다고 믿는 것으로 파악한다. 죽, 〈 열려라 참깨 〉 하면 보물이 가득 찬 동굴 로 들어가는, 바위벽에 있는 보이지 않는 돌문이 열리는 것으로 안다. 하지 만 알리바바 이야기에서는 이런 식의 것들이 비교적 단순하다. 즉, 누구든 〈열려라 참깨〉 하는 비밀암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지유롭게 그 동굴에 둘 어갈 수 있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이와같이 알리바바 이야기는 미신에 관한 믿을 만한 안내자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미신 이야기들이 근본적으로 최근 과학의 업적보다 결코 신비스러운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안다. 과학에서는 바로 알리바바의 이야기에서처럼 일을 해결하는 방법이 매우 직선적이다. 누구든지 어떤 미신공식을 사용하는 법은 배울 수 있으나, 실생활에 있어서 허황된 일이라는 점에서는 과학과 다르다. 간단히 말해서 과학은 분명하나 미신이란 온갖 종류의 헛된 믿음둘을 뒤 섞어서 뭉뚱그려 놓은 것이라는 것이다. 〈열려라 참깨〉라는 주문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서실은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대로 열릴 것이 라고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약(婚葉), 현자의 돌, 젊음의 샘, 또는 홀
겨보거나, 거울이 깨지거나, 소금접시가 엎어지거나, 사다리 밑을 걸으면 불 행이 닥친다 하는 따위의 허황된 말들은 단지 실증되지 않은 단순한 미신 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아 혼란에 빠져 그러한 미신들은 모두 거짓 이라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최근의 한 예를 들어 보면, 빨강머리를 가진 사람은 알콜중독 -층에 걷리지 않는다는 미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즉, 그들은 알콜 음료를 지나치게 마 셔도 안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믿음은 통계학자에게 검토될 가치가 충 분히 있다고 생긱이 둘 정도로 널리 퍼졌다. 결과 : 부정적이다. 질문 : 그러 면 왜 이러한 생각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널리 퍼졌을까? 대답 : 알콜중독과 빨강머리는 아주 드물어서 그들이 통계적으로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 문제가 주의 깊에 검토되기 전까지 불분명한 채로 남아 있었다. 질문 : 모든 전기한 특성들 가운데 왜 하필 빨강머리인가? 대답 : 성질이 급하고 위험을 감내하려는 기질, 그리고 보통보다 낮은 대가를 치르고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같은 모든 종류의 지독한 특성들과 빨강머리가 관련이 있다는 미 산이 있다. 질문 : 이 미신도 논박되는가? 대답 : 아니다. 질문 : 왜 ? 대답 : 이것은 너무 막연한 일이기 때문에 어려워 검증할 수 없으며 또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겨정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신에 대한 모든 것인가? 어떤 사람은 그렇다고 한다. 그들은 베 이컨학파의 사림들인데 이들은 근대 세계의 아마도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 며 윌리엄 세익스피어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프란시스베이컨 경을 추종하는 사람들이다. 베이컨에 따르면 마술은 그것이 실행되는 것으로 보이는 경이 로운 사건 때문에 나쁜 것이 아니라(물론 과학은 언젠가는 미신을 능가할 것 이지만) 미친 것 같고, 혼란스럽고, 헛된 것이며, 그리고 분명히 거짓이기 때 문에 나쁜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컨학파의 사림들에게 물어 보아야 할 두 가지 명백한 의문점이 있다. 첫째, 당신들은 모든 미신을 똑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과학이 아닌 것 은 모두 미신이라고 간주하는가? 둘째, 그렇다면 그 마법사의 입장은 무엇 인가? 베이컨의 대답은 매우 분명하다. 죽, 과학이 아닌 것은 모두 사이바 과학이며 미신이다. 그리고 미신을 지지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들이 연금술
사, 사제, 교수, 헤브류 신비철학자, 그리고 마법사이든지간에(그의 견해에 따 르면 심지어 의사들까지도) 허풍쟁이이며, 보잘것없는 부랑자들이며, 사기꾼들 (즉, 믿을 수 없는 술책자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고지식한 다론 사람들을 이용 해 먹는 자들)에 불과할 뿐이다. 특히 종교는 사실적인 주장을 해서는 안 된 다. 종교가 어떤 사실적인 주장, 예를 들어 천문학적 주장이나 또는 어떤 순 례성지에서는 병이 고쳐진다는 것과 같은 주장을 할 때 종교는 다른 속임 수들보다 더 나울 것이 없는 속임수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조금 전에 미해결인 채로 남겨둔 문제점으로 돌아갈 수 있 다. 그 문제점이란 예지나 예속을 말한다. 우리는 두 종류의 예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베이컨학파의 관점에 따르면 과학적 예지와 미신적 예지를 말한다. 베이컨학파의 사람들에게는 이 두 예지 사이에 오직 단 하나의 차 이점이 있다. 즉, 미신적 예지가 아닌 과학적 예지만이 신뢰성이 있다는 것 이댜 미신이 신뢰성을 주장한다면 이것은 사이비 과학이다. 어떤 예언자가 다른 예언자보다 더욱 신뢰할 만하다고 하는 모든 말은 미신적인 어리석음 이며, 속임수에 빠져든 것이다. 또한 그러한 모든 말은 그 종교 대변인적 입 ·장을 취하는 사람들의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며, 대개 그 종교 사원의 성직 자등기며 이들은 작은 의미의 범법자이다. 또한 베이컨학파 사람들의 견해 에 따르면 신과 교통하는 체하는 무당이나 천리안을 가전 척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그들이 집시의 대상(隊商) 속에 있거나 TV 스튜디오의 번쩍거리는 조명 앞에 있건 상관없이 범법자라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일부 독자들은 언짢은 기분을 느끼기 시작할 수도 있다. 베이컨주 의의 이론적 문제점은 너무 무미건조하다는 데 있다. 마음이 삐뚤어전 마권 (馬券)영업자를 예언자와 비교한다거나 또는 마권영업자와 예언자를 어떤 선 지자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사실 그렇다. 그러면 선지자는 어느 위치에 있 는것일까? 여기서 베이컨주의자들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다• 베이컨주의자들 중에 는 그들 스스로가 어떤 예언들과 기적들을 믿는다는 관접에서 종교적인 사 람들기 있다(종교적이냐 아니냐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이것은 현 재의 논의에서는 주관십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종교들의 사실적인 주칭을 배
척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종교에 의하여 만들어진 사실적인 주장을 고려할 수도 있다. 그들의 나약함이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하려고 하는 방법은 홍미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자신 의 그 나약한 믿음에 집착한다면 그들을 성득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안적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주장이 논리 혹은 사실에 의해 과학적 으로 증명되었다고 선언할 수도 있다. 그것은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의 믿음은 생각보다 더 깊다. 또다른 대안으로, 그들은 그들의 종교가 어떤 사실적인 주장을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도 있다. 이러한 부안(否認)을 이름하여 유헤메리즘 Euhemer i sm 이라고하는데 이것은그리스종교의 신화 들은 실제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할지라도 다만 우화에 불과하다고 말 했던 고대의 그 저자 이름을 딴 것이다. 오늘날 유헤메리즘은 성서의 이야 기들 역시 우화라는 견해를 다 받아들인다. 이러한 보다 새로운 관점은 몇 몇 독실한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제안되었다. 만약 베이컨 자신이 기독교인 이었다면 그도 이 제안자에 포함되었을 것이고, 영국 학술원의 창설 멤버 였고 지도적 인물이었으며 보일의 법칙으로 유명한 그의 추종자 로버트 보 일도 분명히 여기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성서의 이야기들을 전통적으로 전 해오는 우화에 불과한 것으로 제안하는 것(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역사를 왜곡 시키는 것임)과 성서에 대한 새로운 접근울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성서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접근은 이미 탈신화화 demy tho log iz- atio n 란 새로운 이름을 갖고 있다. 이 이름은 2M] 기의 신학자이며 철학자 인 루돌프 불트만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마지막으로 앞에 설명한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견해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는 베이컨학파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후에 언급될 것이다). 2 어]기 중반의 가장 저명한 미국의 종교 철학자인 찰스 하트손까지도 이 모든 것들을 혼동하였다. 따라서 모든 종교 적인 베이컨학파 사람들, 말하자면 모든 비과학을 하나로 뭉쳐서 생각하는 베이컨의 견해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그러나 자신들의 종교적 교파의 사실 적인 주장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오직 전정한 탈신화주의자들 만이 사리에 맞다. 즉, 자신들의 종파를 역사적으로 서실적인 모든 주장으 로부터 파헤치기를 제안하는 사람들만이 사리에 맞는다. 그들이 사리에 맞
는가 아닌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들의 견해는 한때 보일 이래로 높은 평 판을 유지했다. 오늘날 그들의 종교적 동료들과 과학적 동료들은 그들의 가 치를 인정하지 않으며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그들을 함께 공격한다. 즉, 왜 다른 종파에 충성하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종파에만 집착하는가? 이 문제는 미해결인 채로 남겨두고, 이제 디른 - 베이컨주의자들에 대해 생 각해 보자 . 디론 베이컨주의자들 중의 일부는 솔직히 반종교적이며, 그들은 종교에 반대하는 것을 베이컨주의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 나 대부분의 베이컨주의자들은 이 문제에 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하는 것을 피하려 한다. 사실 영국 학술원에서는 과학계에서 종교적인 문제를 토론하 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이것은 천체 역학에 관한 그의 위대한 저서 속에서 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고 니폴레옹이 꾸짖었을 때의 대답으로 유명 한 반종교적 과학자의 래폴레이스의 경우에 있어서조차도 사실이다. 그는 즉석에서 반박하였다 . 즉, 그 대답은 〈 각하, 저에게는 그러한 가정은 필요하 지 않습니다 〉 라는 것이었다. 또한 이론 물리학자로서 또 수학자로서도 유명 한 라그랑쥐의 대답은 유명하다. 그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 그러 나 그것이 얼마나 멋진 가정인가? 〉 라고 말했다. 이 응수에서 놀러운 것은 이것이 그렇게 간결하면서도 상대를 압도한다는 점이다. 죽, 신자인 라그랑 쥐도 이교도인 래폴레이스도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 다. 과학계에서 종교에 대한 토론을 금기시한 것은 정치적이었다. 죽, 과학계 에서는 정치에 대한 토론 역시 금기시되었으며, 종교는 과거나 지금에 있어 서도 국가정치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요인이다. 그래서 과학은 미신과 사교 (邪敎)로 가득 찬 사회 속에서 성장하였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이다. 이 금기 사항은 다윈주의의 등장으로 깨져 버렸다. 다윈은 이 금 기사항을 지키려고 상당히 노력하였으나, 그렇게 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 러나 놀랍게도 다윈의 저서 『 종의 기원표는 정작 인류발생의 기원에 관한 논 의는 피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누구도 속이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몇년 후에 『인류의 혈통』이라는 저서를 내었다. 전통적인 서양 종교에 대 한 이 첫번째의 공격이 나오자 과학은 종교에 대하여 공개적인 공격을 하
게 되었다. 공격의 구실이 되었던 것은 성서의 이름으로 다윈주의를 공격했 던 옥스포드 대학의 한 목사 때문이었다. 추측컨대 그는 과학으로. 하여금 그 주장에 대하여 책임을 지도록 강요하였고 그래서 그 금기는 더이상 지 켜지지 못하게 되었다. 바보스럽게도 과학으로 하여금 종교를 공격하도록 강요한, 한 미미한 목사에 관한 이러한 신화는 깜짝 놀랄 정도로 어리석은 것이다. 아직도 많은 영리한 사람들이(다윈학파를 포함해서) 받아들이는 그 속기 쉬움은 정말 놀랄 만하다. 분명 그 산화는 사실이지만 상당히 관련성 이 없다. 죽, 과학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으로 서양 종교를 거역했다. 왜냐 하면 의심할 바 없이 성서 속의 천문학(비록 빈약하기 짝이 없지만)은 태양 중심설이나 또는 다른 모든 천체계 학설에 반대되는 지구중십설을 유리하 게 편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 천문학자들은 우리가 믿고 있었 던 성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계산한 우주의 나이를 부인하였다. 그러므로 과 학이 종교를 공개적으로 공격하든 안하든 그것은 별 문제가 아니다. 그 결 과는 다만 이것이다. 즉, 우리가 종교적인 사람들이 성서를 바탕으로 내세 우는 사실적 주장을 검증하고 이것들을 과학과 비교하면 할수록 모순은 더 욱 명백해지고, 또 분명히 과학이 항상 승리자라는 것이다. 이 꾸밉없는 견 해는 2 떼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인 버트랜드 러셀에 의해서조차도 표현 되었다. 2 인류학적 견해 : 기능주의 버트랜드러셀과같은시대 사람이고선배인제임스프레이저 경은그스 스합} 러셀 못지않게 전통적 종교의 적대자이었고, 여러 면에서 러셀과 마 찬가지로 확고한 베이컨주의자였으며, 새로운 사조(思潮)를 주도하였는데 이 것은 그가 미신을 사이비 과학적 기술로 보는 베이컨주의자들의 견해를 발 전시켰기 때문이다(그는 기독교 신앙이 옛날 이방 종교의 미신들을 혼합시켰다 는 것을 발견하였고, 그가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기독교 신앙을 포함하여 미 신을 뿌리째 뽑아내는 일에 과학이 실패하는 이유를 밝히기를 원하였다).
이제 예언들과 기적들에 관한 것으로 돌 아가 보자. 선지자의 예지와 과학 의 예지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즉, 과학자와 과학적 기술지는 - 자 연법칙의 힘에 바탕을 두고 예언하지만, 이에 반하여 선지자의 능력은 초자 연적이다. 질문 : 이교도의 예언자 oracle 는 선지자나 과학적 기술자와 비슷 한가? 프레이저는 이교도의 예언자가 주기적으로 과업을 받는 면에서 영감 울 받았을 때만 이야기하는 선지자보디는 과학적인 기술자와 더 비슷하다 고 주저없이 대답했다. 이교도의 예언자는 신뢰성이 없다는 점에서 과학적 기술자보다는 예언자와 비슷하다• 그러므로 이교도 예언자는 사이비 과학기 술자이다. 이것은 특히 일기예보관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일기예보 관은 확실성이 없고 선지자라기보다는 마술사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식 소련문제 전문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부활의 기 적 -선지자 엘리야가 부활시킨 아이라든가, 예수가 살린 나사로라든가, 예수 자산의 부활 등――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처럼 한번 일어나고 마는 이 기적들은 순례자들이 새로이 몰려울 때마다 반복되어 일어나는 루르드 의 기적과는 다르다. 루르드에서의 병 고치는 능력은 미신적이지만 예수의 병 고치는 능력은 그렇지 않다(우리가 예수를 체계적인 병 고치는 사람으로 보 지 않는 한). 아마도 이 모든 것은 프레이저의 견해를 너무나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 일 게다. 죽, 이것은 분명히 이 일에 대한 사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 다. 왜냐하면 제시된 바로 그 문제, 미신이 자연적인가 초자연적인가가 이 미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이며 하나의 속임수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큰 발견인데 미 신주의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한다(그리고 모론 채로 그냥 있기를 선호한다). 그러면 왜 그들이 그들 자신의 견해가 자연주의자적 입장인지 초자연주의 자적 입장인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하는가? 그리고 만일 그들 자신이 둘 중의 어느 쪽인지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사실을 왜곡시 키지 않고 우리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있는가? 2 (),ll]기의 위대한 힌두교 철학자이며 쉬뢰딩거 방정식으로 유명한 어윈 쉬 뢰딩거는 『자연과 그리스인 』 이라는 짤막하면서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책
을 하나 썼는데 (그의 책들은 모두 짤막하고, 깊이가 있으며, 아름답다) 그는 그 책 속에서 자연주의를 발견한 그리스인의 위대함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의 책을 공정하게 평가해 볼 수 없다 하더라도, 프레이저 경이 매우 방대한 저 서(그의 대표작은 미신에 관한 고전이며 12 권으로 되어 있는 『 황금가지 』 이다) 에서 이미 언급한 것, 즉 전통적 종교를 제의한 근세 과학 이전의 모든 사 상은 물활론적이고 미신적이라는 것을 인지할 수도 있다 . 뭉활론이란 나우 이든, 책이든, 산이든, 심지어 목초지이든, 자연 대상물에 있는 영혼에 대한 찬미이다. 영혼은 좋건 나쁘건 의지를 가지고 있다. 원시적인 사람들은 (이 표현이 정확하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 문제는 당분간 따지지 말자) 대상물· 들과 심지어 자연의 힘까지도 인간에게 유익하거나 또는 해로운 존재로 여 긴다. 이러한 인식은 물활론에 대한 당연한 결과인 듯하고, 물활론을 구성 하는 이 인식은 미신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심지어 종교조차도 인간중심 주의 (anth r op oc entr ism : 하나님이 모든 만물들을 인간에 봉사하도록 창조하였다 는 교리 )의 형태로 이러한 인식을 갖고 있다. 인간중심주의는 아리스토텔레 스와 성서의 견해가 일치하는 한 사례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성서 는 자연의 힘을 우호적이라거나 또는 적대적인 것으로도 나타내지 않는다 (이것은 확실히 틀린 주장이다. 왜냐하면 예의적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 요한 예의는 무지개인데 성서는 무지개를 항상 우호적인 것으로, 그리고 인류 전체 를 위하여 있는 것으로 말한다. 베이컨학파요 자연주의자들이었던 데카르트와 스피 노자는 무지개가 어떤 자연의 법칙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 이 유는-그 〈 이유 〉 라는 말에 주목할 것 -무지개가 전혀 우호적인 것도 인자한 것도 아닌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물활론은 미신에 내적 논리와 설득력을 부여한다. 왜 〈열려라 참깨〉 하 고 말할 때 바위덩어리가 움직이게 되는가? 돌에게는 이해력이 없다! 자연 주의자는 돌에 기계장치가 되어 있어서 그 말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소리의 형태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몇 가지의 공상과학 이야기들은(한 예로 「별나라 여행」 이야기) 이러한 자연주의적인 생각을 추종한다. 미신주의 자는 비록 돌이 이해력은 없다 하더라도, 그 돌 속에 있는 영이 작동하여 움직일 수도 있으며 아주 잘 순종할 수도 있다고 말할 것이다!
바위의 영은 매번 〈 열려라 참깨 〉 라는 명령이 떨어질 때마다 그 명령에 복 종해야만 하는가? 바위에게는 선택권이 없는가? 말하는 사람이 천구인가 아 니면 적인가 하는 것에 상관이 있는가? 이것들은 위험스러운 질문들이다. 만일 대답이 〈 네 〉 라면, 우리는 여기에서 (제멋대로의 ) 어떤 자연법칙을 가진 것이 된다. 만약 대답이 〈 아니오 〉 라면, 우리는 아마도 여기에 초자연적인 힘 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나 으며, 더 좋은 방법은 아예 묻지 않는 것이다 . 2 ) 그리고 만약 질문을 했다면 대답을 회피한다거나, 그것은 영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대답 할 수도 있다. 만일 그것이 강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항상 우호적으로 반응한다면, 그것은 역시 자연적이다. 그것이 종교적 신앙심을 가진 남녀에 게만 항상 우호적으로 반응하면 아마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미신에 대한 어떠한 분석도 그 미신이 동양 것이돈 서양 것이든, 옛날 것 이든 현대의 것이든 상관없이,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모호함을 입증할 것이 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신이 기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기술이란 순 전히 자연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프레이저가 이 점에 동의했는가? 어떤 점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다만 어떤 한 관점에 있어서만 그렇다. 미신 이 물활론적인 존재냐 하는 것에 상관없이, 또는 물활론이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든 없든 상관없이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미신을 하나의 기술 로 보는 시각에 보다 근접하게 한다. 이 점을 천천히 생각해 보자. 프레이저는 미신적 인 주장의 모호함에서 융통성 (사정에 따라 변함)이 있 다는 것을 알았다. 브로니슬로 말리노브스키는 이 점을 더 강조했으나 다른 목적을 위해서였다. 죽, 미신이 기술로서는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그는 미신의 가치를 다른 데서 구했다. 말리노브스키는 그것을 에밀 뒤르깽이 제 안했던 설명의 톨 속에서 구했다. 이론으로서의 종교적 교리와 미신적 교리 2) 모든 사회에서 의문은 대개 일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에 일반 사회에서는 의문은 보통 허용되고 있다. 그러나 오직 과학적인 사회에 있어서만은 의 십을 표현하고, 건방전 질문들을 하는 것을 금기로 취급하지 않는다(단 부 분적으로).
들은 베이컨주의자들에게 당연히 무의미하게 비쳐진 것만큼이나 프레이저 와 말리노브스키에게 있어서도 무의미한 것으로 비쳐졌다. 프레이저는 전체 적으로 그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이런 무의미한 견해가 왜 유행하는가를 섣 명하려고 노력하였다. 뒤르깽의 뒤를 이어 말리노브스키도 반대하였다. 즉, 그는 그 견해들을 그들의 조건에 관하여 실행자들의 깨달음에 대한 상징적 인 표현으로 간주하였으며, 특히 사회적 응집과 통합에 대한 그들의 필요를 그렇게 간주하였다. 뒤르깽은 원시사회를 발달된 사회보다 유기적인 짜임아 덜한 것으로 보았으며, 미신을 종교보다 결합력이나 통합력이 약한 것으로 말하였다. 말리노브스키는 이 점에 동의하지 않고 미신도 역시 고도로 통합 력이 있는 것으로 말하였다. 사람들은 질병과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 건강온 천에 간다. 대부분의 온천에서 나오는 물이 질병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온천에 가서 물을 많이 마시고 돈을 많이 낭비 하는 것을 미신이나 어리석은 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할 수 있다. 혹은 온천에 가는 것을 휴일에 부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온천 에 목욕을 하러 가는 이유와 기능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복집해지면 질수 록, 환자들이 온천수의 치료효과를 상상으로 혹은 실제로 믿는가? 라는 질 문은 점점 더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면 다른 예인 캠핑을 들어 보자• 사람 둘은 일년에 며칠 동안 힘들고 거친 생활을 하고자 하는 선호 pre fe r ence 에 대하여 그 이유를 거의 제시하지 못하는 데 반하여 사회학자들은 이들의 행 위에 대하여 어떤 설명을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어떤 나라의 경우에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있어서는, 캠핑이 국가적인 단결의 표현이다. 다른 나라 의 경우에, 특히 젊은이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국가이념에 대한 저항의 표 현일 수도 있다. 캠핑 가는 것을 국가적 단결과 연관짓는 그 어떤 견해도 (실제로 그럴 수도 있지만) 그 행위의 중요성에 대한 과학적 • 미신적 또는 상 칭적인 표현으로 보아야만 할 것이다. 근·러므로 말리노브스키에게는 미신과 종교의 통합적 가치는 물론이고 상징적 가치도 경우에 따라 변할 수(죽, 융 통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사회들은 특히 기술적인 면에서 꽤 원시적이다. 죽, 대부분의 사회들은 산업화 이전 사회로서 수렵과 채집생활(찾아다니는 것),
또는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미신 의식들은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이다. 그 개인적 의식들은 생의 여로 __덕 중생, 성년식, 결혼, 병, 죽음과 그리고 개인의 행복 또는 불행과 관련되어 있다. 사회적 미신과 구복적 ( 求福 的) 미신은 경제, 특수한 사냥, 전쟁, 혹은 씨뿌리기나 심 는 행동들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행동들과 관련이 있는 미신 의식들은 많 이 있다. 정말로 이러한 의식들은 이러한 행위의 일부분이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대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미신 의식들은 그 의식들이 포 함하고 있는 그 기술의 중요한 한 부분이기도 하다. 의식이 중요한 문제인 가? 아니다. 즉, 이 의식둘은 새로 건조한 배의 전수식에서 술병을 터뜨리 는 것, 집들이 축하파티, 그리고 기술적으로 발달된 서양사회에서 흔히 있 는 그밖의 다른 여러 가지 의식들과 유사한 것이다. 앞 문단에서 서술된 모습은 틀림없이 의심의 여지가 있다. 죽, 물활론은 어떻게 되었나? 하는 것은 그 그림 (묘사)에서 모두 빠져 버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죽, 물활론은 거짓이며,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물활론을 인 류의 대부분의 사람에게 인정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문명에 대해서는 울 바르게 평가하면서 세계의 나머지 다른 문명둘은 잘못 평가하는 것이기 때 문이다. 이것은 대단히 불쾌해 보인다(I. C. 잠비의 『 인류학에서의 혁명 』 참조). 그래서 베이컨주의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베이컨은 그의 원대한 계획을 시작할 때 〈 세상에는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림들이 별로 없으며, 모든 사 람들이 편견과 미신에 너무 빠져 있다 〉고 말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들 이 과거에 배운 모든 것을 논박할 것이 아니라 완전히 버리라고 가르쳤다. 그 이유는 논박하는 것은 낭비이고 그렇게 노력할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 문이라고 했다. 독자들은 빨강머리에 대한 여러 가지 미신들과 그리고 그것 둘 중 어느 한 가지조차도 검증하고 논박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기 억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베이컨의 요구를 충분히 정당화 시켜줄 수도 있다. 여하튼 지식충은 적어도 전위적인 것에 있어서나 또는 자연적인 것들과 관련된 것에 있어서는 베이컨의 주장을 인정하였다(비록 초쟈연적인 것들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i러나 베 이컨의 요구를 받아들였던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까지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 베이컨의 견해는 점점 더 인기가 울라갔고, 추종자들은 소 위 철학자들이 되었고, 그 철학자들은 실험과 기술에 그들의 노력을 기울 였다. 그들은 서양세계를 과학적이며 기술적인 사회로 만들었다. 베이컨과 그의 제자들 一 — 데카르트, 스피노자, 록크, 뉴턴은 현대 기술세계의 성장에 직 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들은 간접적으로 모든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적어도 베이컨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뒤 르깽과 말리노브스키는 정말로 베이컨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서양이 세 계의 다른 곳보다 지적으로 뛰어나다는 주장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을 거부 했다. 이것은 상당히 놀랍고 매우 당황하게 하는 일이다. 이것은 특히 베이 컨주의자들을 당황시키는 것이나, 심지어 비베이컨주의지조차도 이에 반대 할 것임에 틀림없다. 호전적 인 과학 militan t scie n ce 은 가장 과감하게 우월 성을 주장하나, 반면 의기양양한 과학tri um p han t s ci ence 은 너무 편협한 것 을 거부하듯이 우월성 또한 거부한다는 사실은 약간의 혼란을 일으킨다. 뒤르깽 • 말리노브스키 이론은 하나의 일반화된 유헤메리즘이다. 이 이론 은 모든 만연된 미신을 하나의 일반화된 사회적 표현인 것으로 주장하며 모 든 만연된 미신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시한다. 이것은 따라서 뒤르깽이 강조한 것과 같이 모든 종교_우리들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一一에 적용된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자들이 건강온천을 믿지 않으며, 온천이 가지 고 있는 사회적인 중요성이 무엇이든간에 그들은 거의 거기에 가지 않으며, 루르드(그곳의 물은 병을 고친다는 곳) 같은 곳에는 더욱더 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왜 우리는 이것을 믿음의 표현으로서는 합리적인 견해를 가져야 만 하고, 단순히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식으로서는 비합리적 견해를 가져야 만 하는가? 이것이 ·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만드는가? 이것은 과학지들이 루 르드를 피한다는 주장과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것 은 과학은 대단히 유별나다는 것이다. 무엇이 과학을 그렇게 특별하게 만드 는7 }?
3 형이상학적 견해 : 신앙주의 반베이컨주의자들을 살펴보자. 그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들로는 영국 고고학의 창시자이며 철학자인 R. G . 콜링우드, 말리노브스키주의자이며 사 회인류학자인 에반스프리차드 경, 자연과학자요 사회학자이며 철학자인 마 이클 폴라니가 있다. 이들의 모든 견해는 어떤 지적인 구조i n t ellec t ual fram ework 의 툴 속에서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지적 구조란 의 심되지 않는 믿음에 기초하여 얻어진 일련의 절대적인 가정이다. 과학 역시 그 자체의 전제(조건)들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것들은 변할 수도 있지만 그 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단계에서는 믿음에 기초하여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 므로 모든 선입견을 없애라고 한 베이컨의 충고는 과학에 있어서조차 불가 능하다. 더욱이 각 가정의 타당성은 그것이 놓여 있는 지적 구조의 내부적 틀에 의존하기 때문에, 각 구조의 틀은 서로 완전히 독립적이다. 즉, 그들은 서로 비난할 수도 있으나, 어떤 한 가지 주어진 틀에 대한 비난을 수용하는 것은 몇몇 다른 틀을 수용한 후에만 가능하다. 지금까지 소개한 것은 신앙주의 fide is m 로 알려진 전통적인 종교철학의 현 대판 변형이며, 여기에서 어간
시인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완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 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주저없이 말해질 수 있다. 즉, 과학에 대한 한 가지 전제는 자연주의리는 점이다. 따라서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지 만 과학에 대한 전제는 우리의 경험은 자연법칙의 수단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자연은 의지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법칙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하는 하나의 신조이다. 이것은 또하나의 놀라운 일이다. 베이컨주의 사회학자들과 사회인류학자 운] 미신은 근거없는 것이라는 베이컨주의자들의 생각을 포기하려고 `; 상당 히 노력하던 때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베이컨주의 철학자들은 과학은 인간 의 이성이 낳은 유일한 합리적 산물이라는 베이컨주의자들의 생각을 포기 하였다. 그 대신에 그들은 신앙에 기초한 과학을 받아들였다. 인류역사의 과 정 속에서 그렇게 많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종교적 ) 체제가 수용되고 주 창되었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 심지어 과학적 가치관의 대들보인 자연주의 조차도 현대의 과학적 기술이 가장 깅력하다는 실용주의적 이유에서 이제 는 신앙에만 바탕을 두고 취해지고 있다! 여기에 모순이 있다. 즉, 실용주 의는 물활론과 더 잘 어울린다. 왜냐하면 물활론은 모든 것아 우리에게 유 익한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우리 에게 좋은 것이며 반물활론적이다. 그러므로 실용주의는 찰못된 것이다. 그 러나 실용주의자들은 반물활론적인 과학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며 따라서 옳 다고 판단하는 것이 더 낫다고 그들의 물활론적인 사고방식으로 단순히 결 론짓는다. 기술에 대한 믿음은 자연주의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신앙주의는 이제 과학을 강요해야만 하지 않는가? 이것은 어려운 질문이다. 남태평양에는 연속성 없이 반복적으로 소생하는 새로운 미신적 혹은 종교 적인 종파들이 있다. 이들은흔히 카고사이비 종교 car g o -c ul t s 라고불리는 미신적인 혹은 제사의식과 같은 관습 내지는 사이비 종교로 알려져 있다(제 사의식적인 것에 대한 강조는 사이비 종교를 보고하는 인류학자들 때문이지 사실 이 그러하기 때문은 아니댜 여기에 대해서는 잘비의 『인류학에서의 혁명』 참조). 카고 사이비 종교의식은 현대기술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구성되었다. 이 카
고 사이비 종교의석이 무엇이냐는 별로 상관이 없다. 그것은 비행장의 건설 이거나, 또는 나무로 만든 장난감 비행기의 건설이거나, 또는 다른 어떤 미 신적인 의식일 수도 있다. 베이컨 경은 실험이 대 자연으로 하여금 비밀을 드러내도록 강요하는 의미의 종교의식이라고 제안했다. 아마도 자연주의란 철학이 아니고 미신적 물활론적 자연숭배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2 伊 11 기 유명한 생물학자인 찰스 셰링톤 경이 그의 고전적안 저서 (Man on Hi s Natu r e 참조)의 서두에서 제안했다. 사회인류학자인 에반스프리차드경은미신도과학만큼정당한하나의 지 적 구조의 틀이라고 주칭하였다. 그는 미신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잘 속으며 쉽사리 믿는다고 밀하는 것은 거짓 주장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미 신적인 경향을 가전 사람들은 이교도의 계시를 시험한다. 그것은 미신적인 마음을 가진 사림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교도의 모든 계시는 잘못된 것이 라는 생각과 같은 것이다. 즉, 〈 어떤 미신은 옳은 것이다 〉 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지적 체계의 일부분이다. 더욱이 이교도의 예언자는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을 설명할 수 있고 또 종종 그렇게 한다. 과학의 경우에 우 연의 일치는 거의 설명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우연의 일치가 설명될 때는 그것들은 다른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일치의 결과로 간주된다. 일반적으로 과학은, 우연의 일치를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죽 순전히 우발적 사건으로 서, 또는 무의미한 것으로 남겨둔다. 그러나 미신적인 사람들은 그러한 주 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그둘은 모든 우연을 좋은 또는 나쁜 의도를 가진 의미 있는 것으로 본다(알리바바가 아주 우연한 기회에 도둑 두 목이 〈열려라 참깨 !〉라고 하는 주문을 들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에반스 프리차 드는 이 이야기를 미신에 대한 형편없는 설명으로 볼 것이 틀림없다). 흉안 e vil e y e 이 농사를 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흉안을 막아 내는 기술이야말로 온갖 해충을 막아내는 기술이나 심지어 씨뿌리는 기술 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문제는 흉안의 영향이 있는가 하는 점과 이런저런 의식이 흉안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을까? 하는 점 이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질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이런저런 약물치료가 사태를 호전시킬 것인가 아니면 악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과 같다. 선교사
들은 원주민들의 예상과는 반대로 돌아가는 사건들을 원주민들에게 설명하 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매우 자주 발견했다. 베이컨주의자들은 월식을 예인함으로써 목숨을 구한 한 여행자 ―― 쿠크 선장 자신이었던가? 아니면 라이더 하가드가 꾸며낸 이야기 속의 주인공 알렌 쿼터메인이었던가? —— 의 이야기를 좋 아한다. 사실들은 더욱 복잡하다. 누가 감히 흉안은 없는 것 이며, 또한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기술적으로 우월한 데에 숨겨진 비 법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분명히 기술적으로 우월한 측은 이 사실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미신적으로 우월한 측은 다른 설명을 한다. 기 술적인 우월성은 과학적인 설명을 수반해야만 히는가? 높은 수준의 기술은 과학, 자연주의 그리고 그런 모든 것들을 수반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만 약 그렇다면 그것이 가치가 있는가? 근대 중국의 아버지인 선 얏 센 박사는 그렇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중국 의 문화가 기술적 인 면을 제의하고 유럽의 문화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 는 것을 알았다. 그는 서양의 고도 기술, 특히 고도의 군사기술을 받아들이 면서 중국의 문화가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실패하였다. 그 가 성공할 수도 있었홀까? 그가 실패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을까? 아 니면 흉안 때문이었나? 아니면 그가 실패할 운명이었는가? 만일 그가 실패 할 운명이었다면, 중국은 총이나 디른 방법보다는 훌륭한 유교문화를 선호 했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 을까? 서양학자들은 중국은 물론 인도와 일본도 서양문화와는 다른 높은 수준 의 문화물 보인다는 것에 상당히 폭넓게 동의한다. 동양문화에서 교양 있는 사람의 중요한 관심사는 힌두교식이건, 도교식이건, 또는 다른 방식이건 개 인적인 구원이다. 이것은 막스 베버가 신비주의자가 바라는 목적은 마음의 평화요 그리고 그 신비한 기법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특 칭지었을 때 주장했던 것처럼 그 신비주의자들을 이기적으로 만든다. 이것 은 신비주의적인 수련을 기술에 대한 연구자들이 주목할 만한 종류의 기법 으로만들지 않는가? 흔히 〈기술〉이란 단어는 물리적 공학에 적용되며, 때로는 생물학적 기술,
특히 의약과 농업 분야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교육 또는 정신분석, 행동치 료 동과 같은 다른 분야에는 거의 적용되지 않는다. 아것을 우리가 독단적 으로 시인하기보다 검토해 보는 편이 더 나을曺 것이라는 베이컨주의적인 편 견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기술이란 제목하에 교육적인 것이 든, 조직상의 것이든, 또는 심리적인 것이든, 모든 종류의 인간적인 기법을 포함시키는 것에 관해서 동의한다면 우리는 요 7 陸동도. 역시 포함시켜야만 할 것이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인간 기술이 사람들을 조종하기 때문에 비 도덕적이라고 인간 기술을 전체적으로 반대할 수도 있다. 또한 일부 사람들 은 요가를 허황된 것으로 여겨 반대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별도의 연 속적인 논의를 하기 위한 적절한 주제이다. 하지만 먼저 군사기술과 요가운 동이 기술로서 원칙적으로 공존할 수 있겠는가 라는 점이 결정되어야만 한 다. 우리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다음 질문들을 생각해 보자. (1 ) 그 동안 요가 수행자 중에 전쟁을 벌인 사람이 있었는가? 이 질문은 논 란의 여지가 있는 대답을 끌어낸다. 그러나 더욱 잘못된 점은 이것이 논란 의 여지가 있는 질문이라는 점이다. 즉, 사림들은 이 질문을 현대적 배경에 보다 더 적절한 질문, 죽 요가 수행자나 불교 수도승이나 도교 수도승들을 배출해내는 문화에 알맞은 질문으로 대체시키기를 원할 수도 있다. 그러면 다음 질문을 살펴보자. (2) 이러한 문화 역시 전쟁기술을 만들어내는가? 이 질문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답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음과 같 은 일반적인 사회적 사실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죽, 전쟁 기술을 갖지 않은 문화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개인적인 것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사고를 전 환해 가고자 원할 때 질문 (1 )을 질문 (2) 로 대치시켜서는 안 되지만, 아 마 다음 질문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죽, (3) 요가 기술을 만들어내었던 문화 가 고도의 전쟁 기술(핵무기를 포함하여 )을 창조해내면서 동시에 요 7} 기술 울 계속해서 만들어내는가? 일견하여 볼 때 이것은 어리석은 질문처럼 보인다. 왜 활과 화살보다 마 음의 평안을 갈구하는 요가 수행자가 총으로 괴로워야만 하는가? 그러나 이 것은 오해다. 요가를 만들거낸 그 문화는 또한 전쟁에도 관여한다. 총과 핵
무기를 수반하는 과학적인 문호柱곤 허황된 것을 수반하는 문화를 아마도 축 출할 것인데, 요가라는 것도 아마 상당히 허황된 것이다. 그래서 총과 원자 폭탄을 수입하는 것은 요가를 축출할 것이다. 정말 그럴까? 이것은 베이컨주의자의 고전적인 문제제기 방식이다. 앞에서 한 것처럼 가정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베이컨주의는 과학과 교리를 대비함에 있어서 꽤 독단적이다. 신앙주의 타입의 베이컨주의자들은 아마 디음에 동의할 것 이댜 즉 , 그들은 베이컨주의를 자명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높은 생존가치 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관찰된 사실을 기초로 해볼 때 과학과 허황된 일이 서로 양립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 어 반베이컨주의 신앙주의자들까지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동감할 것이며, 더구나 그들은 과학과 힌두교는 서로 분리된 두 개의 체제이며 같은 표준 으로는 잴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기까지 할 것이다. 일부 반베이컨주의 신 앙주의자들 특히 에반스 프리차드 경과 마이클 폴라니는 다른 의견을 가졌 을 것이다 그들은 동일한 사람이 과학자이고 또 동시에 천주교 교인이어야 만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비록 폴라니는 유대인이면서 감리교도였고, 에반스 프 리차드는 영국 국교 카 톨 릭교회 신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세계의 가장 위 대한과학자들이나철학자들의 일부는신앙심 있는사람들이었고심지어 경 건한 천주교도였디는 분명한 사실을 지적할 것이다. 이 모든 학파들이 너무 분명히 틀리기 때문에 이렇게 전부한 토론에 두 자된 엄청난 자본에 대해 사람들은 의아해 할 수도 있다. 실천적인 천주교 도가 되는 것과 암울 치료하기 위하여 루르드에 가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 제이다 그리고 학식이 더 많고 교육을 더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더 나은 -―― 육체적 질병의 치료를 위해 루르드에 갇 가 능성이 적다. 그러므로 질문은 이것이다. 죽, 필요한 요가 수련이 반드시 허 황된 일과 관련되어 있는가? 지금까지 서양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요가 수행자인 마하트마 간디의 일 생을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 알고 있듯이 이것은 대단히 어 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질문을 쉽게 회피할 수 있다• 죽, 사실상 오늘날 인도에서 실행되고 있는 요가 방법은 복집하고 허황된 제도의 한 부
분일 뿐이다. 그것이 정화(淨化)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살아 남기 위해 미신적인 것으로 남아 있어야만 할까? 4 역사적 견해 :과학적 혁명 말리노브스키 방식의 사회인류학자들은한농부의 제사의식의 어느한부 분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고 그리고 다른 부분은 과학적으로 무의미한 것 이기 때문에 그 부분은 제사의식의 상칭적인 의미에서 그 가치를 찾이아 : 만 한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점에 있어서 초베이컨주의자이다. 이 점 에 있어서 그둘은 찰못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농부는 하나의 복잡한 작업 을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활동을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도 없고 그리고 과학자에 의해 증명된 활동과 상징적인 활동으로 구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농부는 단지 상칭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어느 한 부 분을 포기할 수도 없다. 그가 과학적인 의식을 발전시킨 뒤라면 그는 그렇 게 할 능력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그의 제사의식의 상칭적인 부분을 단지 상칭적인 행위로서 계속할 수 있을 것아다. 또한 새로 건조한 배를 진수시킬 때 축하행사로 포도주 병을 터뜨리는 일이 아무 의미가 없 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분이 좋아서 그렇게 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게 될 것 01 다 .3) 베이컨과 모든 계몽주의 운동은 모든 잘못을 미신으로 보고 근본적으로 포기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과학의 전보로 향하는 첫걸음이라고 주장하였다 . 우리들 자신이 역사적 의식을 갖고 있는 금세가 에 있어서조차도 과학을 미신의 발달 결과로 · 보는 철학자들이 점증하고 있 다 . 비록 과학과 미신 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는 순수한 형태로 볼 수 있디는 것을 부인한 3) 다음 문헌 참고. J. Ag as si and I. C. Jarvie, edit ors , Rati on ality , Dordrecht, Martinu s Nij ho ff , 1986.
다. 그리고 이 운동은 베이컨주의적 급진주의, 베이컨주의적 신앙주의, 반베 이컨주의적 신앙주의를 초월한다. 즉, 이 세 가지는 모두 역사 속에 있는 실 제 과학의 모습이 아니라 과학의 이상적인 모습이다. 이것은 원시적인 사고에 대한 클로드 레비 AE 쿠 A의 이론을 그 당면한 문제에 적용한 것이다. 레비 AE 루 A 는 신화 - 원시적인 사림들의 모든 종류의 미신들이 이야기식으로 전해지든 일반적인 서술로 전해지든 또는 종 교와 관련되어 있든 아니든 간에 그 원시적인 사람들의 모든 종류의 미신 들에 대해 그가 붙인 이름이다-는 단지 짝을 이루는 대상과 정도만 달 리하여 혼합되어 전해온다고 말한다. 밀하자면 순수한 신화란 거짓이며, 그 리고 그 반대의 극단도 거짓이다. 즉, 전실은 그 중간지점에 있으며, 그러므 로 경우마다 양극단으로부터의 거리가 다른 것이다. 과학자는 상반되는 두 개의 신화가 어느 만큼 서로 섞였는지 가름하는 척도가 무엇이며 어떤 조 건에서 그 비율이 달라지는가를 질문하고자 할 것이다. 야만인은 질문을 하는 대신에(송씨 좋은 요리사와 같이) 상황에 따라 신화를 다른 비율로 섞 울 것이다. 우리가 즉각적으로 이것이 그의 사고를 비과학적이고 무비판적 인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우리의 경우에 적용해 본다 면, 베이컨주의는 순수한 과학의 신화이며, (실용주의자의 ) 신앙주의는 반과 학의 신화이댜 과학은 그 중간 어딘가에 속한다. 일단 우리가 베이컨주의를 거부하면, 우리는 또한 사회에 대한 계몽주의 의 견해와 그 사회 속에서의 기술의 위치에 대한 견해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2 伊1 ] 기의 역사적 접근법과 조화를 더 잘 이루는 기술에 대 한 견해로 어떻게 대치할 것이냐 하는 것이 지금 연구하고자 하는 문제이 다. 현대 과학의 발생에 대한 베이컨학파의 견해는 중세와 현대를 가르는 하 나의 분수령을 제시한다. 과학적 혁명기로서의 현대는 17 세기 중엽 영국 학 술원 설립과 함께 선포되었으며 이 학술원이 베이컨주의의 사상을 체계화 하였다. 과학혁명 이전에도 선구자들이 몇 명 있었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과학 분야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파, 철학 분야에 있어서 베이컨학파, 그리 고 베이컨 자신보다 앞선 몇 명의 선구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
으로 대중들은 무지하였고 학식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야 허황된 것을 수 행하는 사람들에 불과했다. 급진주의에 대한 최근의 비판은 역사적 관점이다. 즉, 각 사상가에게는 자 신이 빚을 지고 있는 선구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베이컨주의자들은 베이컨 의 선구자들이 베이컨주의의 발생에 중요한 공헌을 한 사람들이었다는 주 장을 일축해 버렸다. 그 이유는 모든 선구자들은 미신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것인지 그리고 과학자가 미신을 배제하고 자기의 마음을 순수하게 유지하 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급진주의에 대한 이러한 바판이 특히 정반대의 극단적 입장을 취하게 될 때(피에르 더헴 참조) 지식의 성장에 대한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 다(즉, 어떠한 변혁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오직 계속적인 성장만을 인정하는 견 해를 말함). 진리는 중간에 있다. 더욱이 우리는 선조들에게 빛지고 있으며, 그 선조 둘 가운데서도 미신을 믿었던 사람들에게도 빚을 지고 있다. 과학적 혁명에 앞서 르네상스시대에는 대학교수 중에 교회의 지도자,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 합리주의자, 보수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고, 연금술사, 점성가인 사람들도 있었다. 또 때로는 반학문적이며 미신적인 마음을 가전 신앙주의 자도 있었는가 하면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믿음, 즉 간단히 말해 미산적 인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진 비합리주의자들도 있었다. 양쪽 사람들은 지혜와 지식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의 의미는 상실되었지만 그러나 그 지식과 지혜 는 고대 문헌 속에 있었다는 점에 동의하였다. 고대 메시지의 의미를 팀구· 하는 전통은 궤변주의적인 대학교와 신앙주의적인 이교도들에 의해서 발전 되었다. 죽, 미신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교도들은 비밀이 오직 교인에게만 계 시될 수 있는 것으로 믿었다. 그들은 고대의 숨겨진 지식을 이해하는 열쇠 를 종교적으로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이교도들은 반합리주의적 신비 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신비주의는 자신의 마음의 평안을 추구했던 동양의 신비주의자들과 달랐다(그리고 그 이교도들의 신비주의는 막스 베버와 여러 세대에 걸친 서양 사상가들에 의해 이기적이라고 비난받았다). 서양의 신비 주의자들은 실질 지향적이었으므로 고대의 과학과 종교의 황금기를 부활시
키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병자도 치료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문헌에 나타난 숫자의 가치를 연구하여 고대 문헌 속에 숨겨진 비밀들을 풀려고 노 력하였으며, 고대 문헌 속에 있는 단어와 문자를 여러 번 재결합해 봄으로 써 비밀을 풀어낼 수 있는 암호문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고대 그 리스의 신비주의적 교리를 여러 성서적인 교재에 적용하였다• 그들 중의 일 부는 헤브류 신비철학지들이었고, 점성가들, 연금술사들, 의사들이었지만 이 들 그룹간의 구별은 상당히 의심스럽다 .4) 현대 과학철학의 선구자는 기오바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였는데 그는 신 비주의자였으며 매우 젊은 나이에 죽었다. 즉, 혁신을 부르짖은 그의 주장 은 그의 유명한 저서인 『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연설 』 속에서 발견된다. 아 마도 그가 현대 과학철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유는 그 책의 제목이 인간 울 단지 벌레로 여기는 중세의 인간관과 대조를 이루기 때문인 것 같다(만 물은 인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레비 스트로스의 주장과, 인간은 단지 벌레에 불 과하다는 것은 얼마나 대 조 적인가를 생각해 보라). 그-는 매우 젊은 나이에 사망 했기 때문에 그가 언급했던 말은 거의 없다. 그는 자신을 명백히 기독교 헤 브류 산비철학지라고 보았던 귀족이었다. 그를 성자로 여기는 것은 헤브류 신비철학을 합법화하는 것이었다. 성서가 미신을 죄로 여기기 때문에 미란 돌라는 그의 책에서 미신에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재천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떤 미신은 좋다고 말한다. 좋은 미신이란 말은 곧 〈자연 적인 미신 〉 으로 바뀌었는데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과학적인 기술 4) 영국 학술원의 원로 회원인 Ravert Bo y l e{폰 그가 연금술, 신비철학 그 리고 점성학을 연구하는 학회인 Sancta Sacraqu e Soc iet a s Caba list ic a l Ph il oso p horum 의 회원이었디는 사실을 숨기려고 매우 애썼다. 점성학은 학 문의 세계에서 Ke p hler 에 의해 쫓겨났지만, 중세의 신비철학과 연금술은 보 일과 뉴턴의 주의를 끌었댜 연금술은 결코 죽지 않았다. 금속들을 변형시 키려는 희망으로서 연금술은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공유되었고, 18lsid , W illiam Prou t에 의해 공식적으로 존중받게 되었으며, 지금은 과학적인 사 실로서의 지위를 줄기고 있다. R. E. W. Maddis ion 's Lif e o f Robe rt Boy le , Lodon, 1969. p. 170. 참조 .
sci en ti fic tec hnolog y 을 의미한다. 미란돌라의 수제자는 로이칠린이었다. 그는 그들의 활동에 대한 이름을 헤브류 신비철학에서 피타고라스주의로 바꾸었는데, 그 이유는 수론 numerolo gy과 완전한 비율에 대한 탐구가(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모세 의 수제자였던 피타고라스에게로 거슬러 울라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피 타고라스는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내려온 직후에 모세로부터 창조에 대한 모 든비밀을배웠다. 1600 년 경에 뛰어난 사상가들-브루노, 케플러, 길버트, 갈릴레오, 하 비 -은 모두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이다. 이들 중 아무도(물론 브루노는 수 도승으로서, 갇릴레오는 대학교수로서 봉직한 때도 있었지만) 대학에 재직하였거 나 교회 조직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믿었는데 그것은 천문학에 있어서 앞 서의 것들과 비교해 볼 때 이 주장이 단순성 ® 그자체이기 때문이었다. 또 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 빛의 상칭, 왕권, 황금, 하나님 아버지 등으로 여겨졌던 태양을 그것이 본래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인 중 심에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둘은 모두 수학, 비율, 그리고 역학으로- 알려져 있던 조합에 관한 과학을 믿었다. 그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아주 격렬하게증오했다. 그러나 디른 점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인 갈릴레오는 첫번째 저 서 『두 개의 대 우주체계에 대한 대화』의 서두에서부터 공격적인 말로 시 작한다• 그 말은 번역한다면(원어로 읽는 것이 아름답고 상당히 권할 만한 일 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인 갈릴레오는 〈너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허황된 말을 많이 한다고 비난하지만, 너희들은 이 점에서 더욱 나쁘다〉라고 밀한다. 그리고 갈릴레오의 대변자는 그 비난울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갈릴레오는 자기 자신이 분명하게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것을 다침한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했다.
® 일반적으로 과학이론은 현상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할수록 그리고 그 이 론 자체가 단순할수록 받아들여지기가 쉽다고 말하여진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갈릴레오가 더이상 피타고라스주의자 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종교 재판소 는 그를 고소할 때에도 그리고 판결할 때에도 그를 피타고라스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들을 따를 필요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법적으로 보장된 범 인들이었다. 브루노( 1600 년에 이 문제로 화형을 당했다)에 대한 법적 살인 을 부추겼으며 101d 후에 갈릴레오를 위협하였던 종교 재판소장 성 로버트 카디널 벨라만은 위협의 내용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시편 19 장의 〈 하늘 은 주의 영굉을 말하고 해와 별들은 그들의 궤도에 있다 〉 라고 한 부분의 전정하고 깊은 의미에 관하여 갈릴레오와 논쟁하였다. 시편 19 장은 미란돌 라의 저서 『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연설』의 원전이기도 하다. 5 맺는말 미신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둘을 개관해 본 결과 무엇을 얻게 되었는가? 무엇보다도 미신은 비과학적인 기술이지만 허황된 것이 아니라 디소간 근 거 있는 지식의 혼힙물이며, 우리가 온갖 종류의 미신이라고 배척해 버리는 것들과 융합되거나 혼합되어 이루어전 것으로서 우리가 시인할 수도 있는 것이다. 미신들은 주로 선과 악의 세력들에 대한 관점인데 그 세력들은 전 적으로 자연적인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초자연적인 것도 아니며 사건의 과 정을 통제하고 조종하며, 우연의 일치처럼 보이는 것의 원인이 되기도 한 댜 미신의 주장들은 주로 사실적이지만 그렇게 분명하게 사실적인 것은 아 니며 또 항상 분명한 것도 아니고, 또 그렇게 분명할 때라도 충분히 명쾌 한 것은 아니며 쉽게 시험해 볼 수 있게끔 간단한 것도 아니다. 특히 미신 적인 견해에 따르면 미신의 힘은 어떤 우연의 일치를 일으킬 수도 있으나 또다른 어떤 우연의 일치는 이 힘을 무기력하게 할 수도 있다. 어떤 방법으 로 일이 진행되는가 하는 것은 주어진 미신의 참재력의 정도에 달려 있다. 부언하면, 미신은 상당한 신통력을 가졌거나 혹은 순수한 마음을 가전 마술 사에 의해서 행해질 때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술사의 능력은
어떤 외부적인 힘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만화 를 보는 독자들은 이 모든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미신적인 주장을 과학적인 언어로 바꾸어 놓았을 때 그 효력이 지속될 것 인지 아닌지를 사전에 말할 방법은 없다. 번역에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지는 분명치 않다. 이 점은 오늘날 실용적인 면에서 중요성이 거의 없으나, 아마도 미신적인 기술의 보급에 대한 통찰과 과학적 기술의 특성에 대한 통 창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 전통적인 의학은 미신과 유사할 정도로 비과학적이며, 이와 반대로 예방의학과 미신적 약물치료 - 주로 항생물 질학_에서는 미신적 약물치료기 5 斗학이 될 정도로 분명한 것이라고 주 장을 한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은 쓸모가 있다. 무엇보다도 미신에 대해서 십사숙고해 보는 것은 과학을 신봉하는 우리의 입장으로부터 우리를 혼들 어 일깨워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미신에 동의하는 것은 과학을 신봉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은, 보다 정확히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과학적 기술은 순전한 서양인들의 미신이다.
제 5 장 합리적 인간의 이상 베이컨주의의 이념은 많은 변형을 겪었고 크게 발전했다. 많은 대학에서 이 주제에 대한 고급 과정이 교수되고 있고 지금까지 보통 귀납적 논리, 또 는 귀납적 정책, 또는 개연성 ( 蓋然 性)에 대한 철학적 기초 또는 과학철학으 로 알려져 있댜 똑같은 주제가 일부 수학과 또는 수리경제학과에서 종종 게임이론이나 결정이론으로 가르쳐지고 있다. 경제학 이론의 기초에서도 역 시 소비자 기호이론이나 소비자 행동이론, 혹은 심지어 고전적 또는 신고전 적 시장 메커니즘 marke t mecha ni sm 이론이란 과목으로 그 일부가 다루어지 기도 한다. 〈 경성 〉 심리학p s y cholo gy과에서는 이 과목이 학습이론이나 귀 납적 정책으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지금까지 여러 연구가 있었지만 베이컨 주의의 핵심을 다룬 적은 거의 없다. 비록 이 방향의 시도가 일부 있었으나 보통 후생경제학의 일부분으로서 (파레토의 최적이론) 다루어지고 있다. 또는 일부 사회학자들에 의해 시작된 경제학에 대한 비평의 일부분으로서 다루 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경제학에 대한 비평은 보통 경제적 인간에 대한 비 평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서 경제적 인간은 소위 말하는 완전히 합리적인 사람 또는 십지어 일반적으로 개인주의를 의미한다. 철학자 어네스트 겔너
는 최근에 오늘날의 베이컨주의를 3 급 수학과 5 급 사회학의 결합이라고 대 강 처리하였다. 여기서 베이컨주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철학으로서의 베 이컨주의이다 . 철학으로서의 베이컨주의는 이미 베이컨주의로 소개된 그 급 진주의 철학을 말하지만 그러나 겔너가 데카르트주의식 철학(급진 적 인 데카 르트학파 역시 베이컨의 제자였으므로 논쟁의 여지는 없다)으로-서 소개하고 있는 바로 그 급전주의 철학이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다. 겔너의 17 세기의 고전적 급전주의에 대한 찬양은 정당하다. 그는 고전적 급전주의가 과학기술적인 사회와 비과학기술적인 사회 사이의 커다란 차이 롤 구분짓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2 伊1 ] 기에 있어서 그 러한 표현을 대강 처리해 버린다. 어떤 조건하에서 베이컨적 - 데카르트적 이 상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유용한가? 1 베이컨적 -데카르트적 이상 합리적 인간에 대한 신베이컨주의 neo-Bacon i ans 의 개념에 반대하는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바평들이 쏟아졌다 . 그 비평 중의 하니는 이 합리적인 사 람에 대한 신베이컨주의의 개념이 사실이 아니라 기껏해야 단순한 이상화 에 지나지 않는디는 것이다. 신베이컨주의자들은 이런 종류의 비평을 좋아 하고 합리적인 사람의 표준 실례를 발전시키기까지 한다 . 현재 위와 같은 비평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개연성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에 관하여 학 습십리학자(트벌스키와 카네만)들이 보고한 것과 같은 실증적 연구로부터 나 온 비평이다. 죽, 사람들은 흔히 단순한 추정에 실수한다. 그들은 정답을 얻 기 위해서 조금만 인내를 가지면 풀 수 있는 간단한 계산에도 실수한다. 그 둘은 흔히 확률성, 가능성, 그리고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하여 전혀 최소한의 생각도 없이 경마에 내기를 거는 도박을 한다. 그러한 비평을 말할 때 비평을 하는 사람들은 신베이컨주의자들의 주된 주장을 수용하면서도 신베이컨학파에 대해 매우 비평적인 듯이 보인다. 합 리적인 사람에 대한 개념을 정확히 포착했다는 그들의 주장은 비판받고, 그
것으로 합리성의 이상을 정확히 포착했다는 그들의 주장이 용인된다. 자연 히 그들은 이를 일괄 처리하여 아주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더욱이 신베이컨주의 사람들이 그 한 세트의(그 일괄처리한 것의) 비판적인 부분을 쉽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은 좀처럼 신뢰할 수 없으나 사실이다 . 일부 사회학 자들은 이상형에 관한 막스 베버의 이론은 시인하면서도 합리적 인간에 관 한 신베이컨주의의 이상형은 실제적이라기보다는 관념적이란 이유만으로 매 우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 이것은 물론 아주 공정한 비판은 아니다. 즉, 만일 베버학파의 이상형이 받아들여진다면, 신베이컨학파의 이상형도 역시 받아 들여질 수 있다. 더욱이 베버학파의 이상화가 받이들여전다면, 우리는 신베 이컨학파의 이상화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만약 베버학파의 이상화가 정당하 다면 아마도 신베이컨학파의 합리성 역시 정당최된다. 다시말해 신베이컨학 파의 이상화가 모든 베버학파의 이상화에 제시된 것과 다르다면 신베이컨 학파의 이상화는 무엇인가? 막스 베버가 사회과학자들은 관료 또는 실업가의 이상형을 제시해야 한 다고 권고했을 때, 그는 사회과학자들에게 사실과 어긋나게 하라고 권한 것 은 아니었다. 그는 비록 아직도 수정할 것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여러 가지 사실을 대략적으로 정정하는 것은 이미 하나의 커다란 성과임을 솔직히 느 꼈다. 상당히 직관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그가 옳으며, 또한 국가별 또는 조직별 관료제간의 세세한 차이를 떠나서 관료제도의 공동적인 특성들이 존 재한다고 생각한다 . 물론 막스 베버가 제시하는 제안의 주요점은 우리가 세 세한 부분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보다 더 중요하고 보편적인 특칭둘을 파악 하려고 하는 것이다. 즉, 이는 단순히 균형 (비율)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직관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몇몇 주어진 관료집단들의 특성을 연 구하기 전에는 모든 관료들의 특성들을 연구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든다. 그 래서 너무 원대한 포부는 줄이고 일차적으로 보다 세세한 특성들을 연구하 고, 자세한 많은 연구결과둘기 수집되고, 연구되고, 비교된 후에 매우 조금 씩 단계적으로, 그리고 신중히 일반화해 나가는 것이 아마도 훨씬 합리적 이라고생각된다. 합리적 인간에 대한 신베이컨주의 이론에 대해 상세한 비평을 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일반적인 비평을 하는 것이 좋은지를 결정하는 것은 권할 만 한 것일 수도 있으며, 이것은 자세한 바평을 하기 전에 결정되어야만 한다. 신베이컨학파들은 늘 세밀한 것부터 시작하기를 선호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상세한 것에 대해 엄청나게 융통성이 있고 개방적이다. 그들의 독단 주의는 바로 일반적인 것에 있다. 아마도 그들의 가장 나쁜 일반적인 독단 주의는 바로 이것이다 : 보편적으로二 그들은 일반적 인 것보다는 자세한 것부 터 시작하는 것이 더 좋으며 그 반대로 시작하는 것은 독선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선언한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독단주의이다. 신베이컨학파에 대해 퍼부을 수 있는 상세한 비평은 그들의 이상화가 있 는 그대로의 사실을 깎아내고 그 그림을 지나치게 광택나게 만든다는 것이 다. 뿐만 아니라 비평은 가능한 한 가장 일반적인 고찰에서부터, 수학과 심 지어 논리학에서부터 연유했을 수도 있다. 보통 신베이컨학파들은 상세한 비평들을 하나하나, 그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진지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그들이 이것저것 자세한 것을 고려함으로써 그 그림을 완전하게 할 수 있는 한 그들의 마음을 더 일반적이고 더 심각한 비평으로부터 멀어지 게 한다. 신베이컨주의를 가능한 한 가장 적나라한 방법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갇 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신베이컨주의는 일부 사람들에게 매우 자극적 이며 홍미로울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한 풍자일 수도 있다. 이는 실증적인 사실이다. 하나의 서술문에 대해 이런 양분된 독자의 반응을 접하는 작가는 그들의 반응에 따라 독자를 두 집단으로 나누어 다르게 토 론하는 것을 선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실행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는 몇 가지 시장조사가 필요하다. 죽, 그는 독자들의 다른 반응 의에 두 집 단을 특칭짓는 것이 무엇이며, 어떠한 유형의 출간물로 한 독자의 집단에 어떻게 접근하고, 또다론 출간물로 또다른 독자의 집단에 어떻게 접근할 것 인가를 알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말하기보다 실천하기가 더 어렵다. 더욱이 똑같은 독자가 비평의 압력하에서 이론을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의 표현방법을 변경해야만 한다고 느낄 수도 있다. 따라서 우선 합리적 인간에 대한 신베이컨주의자의 이상에 대한 본래 그대로의 표현(입장)을 살펴보기
· 로 한다. 이것을 진지한 제안으로 받아들이느냐 또는 풍자만화로 받아들이 느냐는 이 책의 독자가 결정할 것이다(다른 표현과 입장은 후에 다루어질 것 이다). 합리적 인간을 특정짓는 것은 그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할 때 자 기확신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가설에 대해 얼마나 합리적 선태울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한 세트의 선호하는 것, 선택을 위한 한 세트의 대안적 가설, 한 세트의 사실, 그리고 이상의 세 세 트에 적용할 수 있는 선택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 면, 세 세트(선호, 가설, 사실 )짜리가 수없이 많이 있으나 어떤 주어진 세 세 트의 두번째 세트 내에서 경쟁적인 여러 대안들 가운데 하나의 가설을 고 르는 선택 가능성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다. 일부 사림들은 이것을 다르게 보고, 행동을 위해서 추천할 만한 다른 선택 세트인 네번째 세트를 묘사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무엇아 그 행위자가 선택 가능한 대안(代案)의 길인가 하는 것을 묘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행동에 대 한 선택은 사실과 가설에 의해 묘사되기 때문이다. 한 가설로 어떤 미약(婦 葉 : love p o ti on) 을 복용하는 것이 그 복용자를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 것이 라고 소비자에게 이야기할 수도 있으며, 다른 가설은 별 차이가 없을 것이 라고 이야기할 것이고, 또다른 가설은 첫번째 가설과 정반대의 주장을 할 것이다. 어떤 다섯번째 세트도 개연성, 가능성, 공리성 등과 같은 수학적 체 계로 가정될 수 있다. 이것 역시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며 앞서 언급된 세 트들에 의해서 흡수되거나, 또는 마치 이미 언급된 것처럼 당연한 일로 받 아동겨질 수도 있다. 표현을 논의할 때는, 관습에 따라 많이 좌우된다. 즉, 일부 과학자들은 그들이 자신의 이론에 대한 전제 조건의 일부로서 사용하 는 수학적 기구 ma th ema ti cal a pp ara tu s 를 언급하지 않는 반면, 다른 사람들 은 언급한다. 어쨌든 이는 단순한 표현상의 문제이다. 모두 그렇다고 볼 수는 없으나 지금까지 언급되었던 것에 관련되는 대부 분의 수학은 매우 고급 수준의 것도 아니고 매우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매우 복잡하게 되고 또 아주 문제성 있는 것으로. 된 다. 기호(선호) 이론을 생각해 보자. .아 담 스미스는 이미 우리가 보통 물 한
컵보다 다이어몬드를 더 선호한다는, 그것도 아무 주저함이 없이 선호한다 는 사실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사막에서 목말라 죽어가고 있을 때 우리는 아무 주저함이 없이 선택을 바꿀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 기호가 전적으로 전후관계에 의존하고 있을 때 추상적으로 한 묶음의 기호를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를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 가? 왜 전후관계의 묶음들을 선택이 이루어지는 앞서의 묶음들에 추가하지 않는가? 그 대답은 전후관계의 것들은 사실적인 것들이고, 우리는 문제를 혼동하지 않기 위해 사실과 기호들이 다른 묶음으로- 분류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신베이컨주의자들은 그들이 철대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 엇이든간에 이것이 그들의 철학을 반박하기보다는 오히려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증명되었다고 항상 가정한다).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이미 발견되었다. 정확히 밀하면, 일련의 문제 들에 대한 해결책들이 이미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현재의 일련의 해결책들이 얼마나 성공적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한다. 이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는 해결책으로는 무차별곡선이론이 있다. 이 이론이 합리적 인간 에 대한 신베이컨주의의 이상에 어떻게 통합되는가에 대해 종합적인 도식 이 없기 때문에 이 해결책이 어느 정도나 만족할 만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문헌상으로- 명확하지 않다. 특히 무차별곡선이론은 세계의 모든 가능한 상 태들 가운데에는 순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즉, 어떤 주어전 순간 에 두 개의 상태 모두가 어떤 특정 개인에게 똑같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될 때 그 개인은 전자를 선호하거나 또는 후자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이 가정 은 매우 논리적이고 산뜻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 가정하에서는 어떤 미터법 울 요구하지 않고도(다시말하면 상태 B 보다는 상태 A7}, 또는 상태 O 江다는 상 태 B 가 얼마나 더 바람직한 것인가를 결정하지 않고도) 소비자행동이론에서 너 무나 많은 일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 이론의 다른 부분에서는 소위 유용 성을 재는 척도인 미터법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죽, 어떤 유용성 척도는 바 로그러한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어떤 특정 개인에게 있어서)이기 때문 이다. 유용성 척도가 도입되는 이유는, 어떤 행동의 확률적 결과에 대한 의 존도는 그 결과가 얼마나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것에 많이 달려 있기 때문
이다. 표준 실례를 든다면, 가능성은 더 높지만 수지가 맞지 않는 선택보다 는, 가능성은 더 낮지만 수지가 맞는 선택이 선호될 가능성이 더 큰 것이 다. 이 예에서는 돈이 유용성 척도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굶주려 죽거나 추위에 떠는 극도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의 유용성 가치는 높지만, 너무 부자여서 돈을 셀 수 없거나 그의 재산을 평가할 수조차 없는 사람들 에게 돈의 유용성 가치가 아마도 매우 낮으리라는 것을 안다. 좀처럼 믿기 어렵지만, 사회주의의 주장은 사회주의가 부를 균등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 법이라는 주장과 이것이 돈의 전반적인 유용성을 극대화할 것이라는(돈의 유용성은 항상 감소하기 때문에 ) 주장에서부터 나왔다. 다행히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 그리고 그들의 반대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그 에피소드는 끝났다. 어떤 사람은 신고전경제이론에서의 많은 논쟁둘이 아직도 비교적 어리석다 고 불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중요한 논쟁에 대한 유용성의 기대가 너 무 높아서 여러 논쟁 가운데 바로 그 논쟁의 빈도수가 낮다고 하더라도 여 러 논쟁에서 그 논쟁이 가장 이야깃거리가 될 만하기만 하다면 이것은 그 다지 문제되지 않는다. 개연성이론은 그 합리적 인간으로 하여금 증거에 비추어 어떤 가정을 선 택하도록 하고, 그 선택된 가정은 그에게 예견하도록 강요하며, 이 예견은 그의 선택영역을 좁혀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가정들은 제거 가능 하고, 단지 수학적인 보조물로 보일 수도 있다(그리고 그것조차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즉, 미래의 사실 등을 예언하기 위해 확률론적 미적분학의 도 움으로 여러 사실들이 두사된다. 그러나 데이비드 흉이 200 \1 전에 주장했 듯이 이 생각은 맞지 않는다. 즉, 어떤 미적분학을 사용해도 과거의 사실들 이 미래의 사실들을 결코 결정할 수 없다.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이 정말로 투사적 미적분학――과거의 사실을미래로루사할수있는미적분학―~ 울 가지고 있다면 왜 우리가 그것을 사용해야만 하는가? 두사적 미적분학 을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이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것들 가운데서 어 떻게 선택할 수 있을까? 더욱이 모든 신베이컨주의자들은 사실에 대한 모 든 관찰보고는 모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실 가장 잘 관찰된 최우수 보고서조차도 종종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신
볘이컨주의자들은 이와같은 비평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그들은 단 순한 신앙주의적 주장으로 이 비평을 극복한다. 즉, 우리는 행동해야만 하 며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그리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생존에 이르는 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더 낫다. 이것은 핵심적 논쟁점을 결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핵심적 논쟁점은 〈 무엇이 합리적인가? 〉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안 예를 들 면 사실, 선택, 기호 그리고 필요한 다른 어떤 것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 행 동해야 하는가 아니면 보다 더 숙고해야 하는가 〉 또는 〈 행동을 위해 보다 더 심사숙고할 수 있는 더 나은 위치에 있기 위하여 더 많은 사실을 추구 해야 하는가? 〉 하고 물어볼 수 있다. 이것은 훌륭한 질문이다. 이 질문을 다룰 수 있는 수학이 결핍되어 있는 동안, 바로 언급했던 신앙적 주장에 의 해 이 질문은 억제되었다• 아브라함 왈드와 그의 추종자들은 결정이론을 발 전시켰기 때문에, 그들은 의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기양양하게 대답했 다. 왈드의 대답은 놀랄 만큼 본질적으로 명백한 것이다. 즉, 행동과 숙고 사이에서의 선택, 또는 이들과 보다 많은 정보를 찾는 것 사이에서의 선택 역시 하나의 선택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정이론이 답을 해야 하는 문제임에 틀림없다.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지금까지 관여된 대답 은 매우 단순한 경우에만 효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성공적 이었다. 그래서 만일 결정이론이 신베이컨주의자의 개념과 통합될 수만 있 다면 신베이컨주의자의 개념은 이것에 의해 크게 개선될 것이다. 결정이론이 신베이컨주의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논쟁은 보통 게 임이론이 그들의 저서에 의해 응당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견해와 두 이론이 같다는 그릇된 법칙의 힘에 기초하고 있다(두 이론은 어떤 그럴듯한 상황들하 에서 일치한다). 게임이론은 포카의 이상화이다. 즉, 내기에 건 돈, 상황, 가 능성, 선택, 그리고 적어도 한 명의 상대가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본질적으 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즉, 우리는 여러 세트의 상태, 기호 등을 가지고 있 었으며 또한 그 세계의 어떤 주어진 상태의 일부는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다. 한 대안으로서 우리는 대 자연을 상대로 게임을 펼쳐볼 수도 있다. 그 런데 대 자연이란 예견에 대한 나의 선택에 대해 찬반 양쪽을 모두 대답하
는, 말하자면 나의 선택에 대해 일치와 불일치 모두를 보인다. 물론 이것은 이의를 불러일으킨다. 즉, 대 자연은 아무런 의도가 없다고 정의할 수 있다 는 것이다(우리가 기억하기로는 대 자연은 자연주의의 인격화이며, 자연주의는 자 연을 바인격화한 것이다). 그러나 자세한 것들은 논하지 말자. 즉, 이 비평은 대수롭지 않다. 만일 대 자연이 게임이론에서 묘사된 게임을 합리적인 안간 과 함께 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신베이컨주의자들은 지극히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게임이론의 매우 적은 부분만이 지금까지 맞는 것으 로, 그것의 대부분도 제로 섬 게임 zero-sum g ames 인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제로 섬 게임은 친구들 사이의 포카 게임처럼 전체적으로 득실이 영이 되는 게임 이다). 자연이 게임을 하고 있는지도 모론다. 그러나 만일 자연이 합리적이 고 우리가 얻을 때마다 잃어준다면, 자연은 오래전에 우리들과 게 임하는 것 울 멈추었을 것이다. 물론 이 반론은 답변 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여기에서 단지 명목상의 경고로 언급되었을 뿐이다. 즉, 신베이컨주의자들은 보편적 인 미적분학을 발표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그렇게 했을 것 . 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미적분학을 더 연구하면 할수록 이것의 적용 가능 한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이상화의 문제라기보다는 원칙의 문제이다. 이제 우리는 치명적인 첫번째 비평에 도달했다. 즉, 신베 이컨주의자들은 이상화로서 이상적인 경우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실 의 단순화가 아니라 하나의 유토피아를, 다시말해서 하나의 이상화가 아니 라 하나의 이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2 이상화 대 이상 이상화와 이상의 차이룰 아주 명백히 알아 보기 위해서 틱성}-토우ti c tac -to e , 혹은 노츠엔-크로스 nau g h t s-and-crosses 라는 게임을 생각해 보.,A}. 이 게임은 큰 사각형을 가로 세로 셋씩 나누어 만들어전 아홉 개의 사각형 에서 양쪽에 차례로 하나씩 표시를 하여 가로 세로, 대각선 방향으로 먼저 만드는 사람이 이기면 금방 끝나는 게임이다. 게임은 여러번의 움칙임이 한
번의 움직임처럼 보여질 수도 있기 때문에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어린이들 은 첫번째 움직이는 사람이 틀림없이 이기게 되는 방법을 얼마 안 되어 발 견할 때까지 게임을 할 것이다. 그런 다음 그들은 게임을 하지 않는다. 원 칙적으로 체스도 마찬가지이나, 이 원칙은 적용 불가능하고 컴퓨터의 도움 으로도 안 된다. 따라서 이 두 가지의 게임에 있어서 게임이론은 아무 소용 이 없다. 또 포카게임을 살펴 보자. 이것은 우리를 이미 언급된 심리학적 비 평으로 이끌고 있다. 이 비평은 사람들이 개연성을 적절히 계산하지 않는다 는 관찰된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은 이상과는 약간 어긋난 것일 수 도 있다. 그래서 설득력이 거의 없다. 잘하려고 노력하는 포카꾼들은 확률 성을 계산하는가? 계산은 하지만 가장 최상으로 유효한 정확도는 거의 없 다. 그들이 게임이론을 사용하는가? 아니다. 그러면 소비자를 예로 들어 보 자. 그들은 소비자의 기호이론에 따라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주문하는가? 아니다. 경제학자들이 이 점을 우려하는가? 아니다. 왜? 그들은 단지 총소 파만을 연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그 이론은 전체보다 개개의 소비자를 논의하는가? 이 질문은 중요하다. 경제학자들은 그것을 논의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들 연구의 과학적인 기초와 관련이 있다고 제의한다. 경제 학자들이 자신의 선호이론을 현재보다 더 과학적인 것이 되게 하기를 원할 때, 그들은 단순히 선호보다는 함축적 의미의 선호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서투른 농담이다. 왜냐하면 모든 가시적 행위 behav i or 가 아니라 단지 행동 acti on s 만이 선호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자발적 인 행동과 비자발적 인 행동 의 차이는 선택 사항들에 대해 숙고하고 선택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지, 숙 고와 선택의 최종결과이거나 단순한 자동적 움직임에 불과할 수 있는 행위 는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가 관찰한 사실들로부터 벗어나 이론의 영역 으로 들어서면 우리는 합리적 인간이 얼마나 많은 대안들을 가지고 있고, 합리적 인간이기를 멈춤이 없이 이 대안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을 그가 안전 하게 무시할 수 있으며 숙고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갖고 있고, 이것 에 대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심사숙고해야 하는가 등을 물어 볼 수 있다. 이 주제에 공헌한 책들은 생각이 혼들린다. 때때로 그들은 합리적인 사람 울 하나의 먼 이상으로 묘사하는데, 그 이유는 합리적인 사람은 원하는 대
로의 무제한의 컴퓨터 시간을 갖고 있으며 그 합리적인 사람은 다른 합리 적인 사람의 결정이 그 자신의 선택 사항들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 는 물론, 그 반대의 경우와 그 이상의 것을 계산할 수도 있다는 이상적인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어리석은 농담일지 모르나, 두 주장들 각각은 우리 문화유산의 가 장 값진 보물에 속한다. 이들 두 주장 중의 하나가 풀라돈의 주칭이며 일반 적 합리적 인 행위이론에 있어서 이상의 위치에 관련된 주장들이다. 죽, 합 • 리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싱이 도달 불가능한 것이러는 것을 알 때라도 우리가 얻으려 애쓰는 이상을 상싱해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가 정치권에서 활동하는 것을 원할 때, 우리가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알수록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개방적으로 더 많이 요구된다. 따라서 정치행동 의 목적으로서의 이상적 국가는 그 행동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그것이다. 물 론 신베이컨주의자들은 플라돈의 이상적 국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이상적인 합리적 인간을 원하며, 만약 우리가 합리성의 이상이 무엇 인지 알 수만 있다면 어떤 종류의 정치체제가 합리적으로 이상적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그 논쟁의 두번째 주장이 있다. 베이컨주의의 이상은 처음 에는 단지 이상적인 것을 연구하는 과학자였다. 베이컨 자신도(그의 수필집 참조) 자연에 대한 연구를 위해 그가 권고한 급진주의가 일단 사회에 __ 그가 말한 바로는 소위 법률에 -적용되면 그 급진주의는 국가를 전복하 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경고를 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으로 매우 보수적이기 때문에 급전주의에 반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위대한 베 이컨주의자 존 록크는 달리 생각한다. 록크는 지도적인 베이컨주의자였고 역서를 통틀거 가장 위대한 과학자인 아이작 뉴턴과 가장 가까운 천구였기 때문에 이 일에 있어서는 최고의 권위자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는 정치적으 로 자유주의자였다. 그래서 그는 합리적 인간에게 적절한 이상적인 정치제 도를 제시하려고 애썼다. l 料 l 기의 위대한 많은 철학자들은 그들 자신을 록 크의 철학에 관한 주석자로 보았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조지 버클리 대주 교, 볼테르, 그리고 데이비드 홈 같은 사람들이 해당된다. 홈의 친구인 아
담 스미스는 합리적 인간의 사회에 적합한 경제이론을· 제시했다. 즉, 합리 적인 인간의 정부는 오직 경찰이나 야경원의 역할(야 경 국가)을 수행할 뿐이 다. 왜냐하면 각 개개인은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행동하기 때문에, 정부가 해야만 하는 일은 범죄를 막는 일 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컨대, 어느 개인이 자기의 주어진 상황에 비추 어 얼마나 최선을 다해 행동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각 개개인의 상황이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목표를 포함한다는 사실 때문에 복집하게 된다. 그리 고 바로 이것이 그 그림을 가장 복잡하게 만든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가 주 장한 대로 이러한 계산울 엄청나게 빠르게 촉진시키는 이미 만들어진 컴퓨 터가 있다. 즉, 시장 메커니즘이다. 컴퓨터 용어를 쓰자면, 시장은 아날로그 컴퓨터이고 입력은 상품과 화폐이며, 출력은 예산과 가격이다. 경제의 주요 문제는 전체적으로 총소비의 문제이다. 이것은 〈 보다 더 많은 소비자들이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 원을 얼마나 잘 재분배하느냐? 〉 하는 문제이다. 그 답은 어떤 가격으로 어 떤 것을 사는가 하는 개인 각자의 선택에 의해 주어전다는 것이다. 왜냐하 면 소비자등기 한 상품에 대해 더 많이 지불하면 그 소비자들은 개개의 생 산자에게 그것을 보다 많이 생산하도록 자극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 서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것들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 즉, 경제는 개개인의 합리적인 선택 이의에는 다른 것을 필요로 하 지 않는다. 즉, 각 개개인의 가장 합리적인 행위가 전체 경제를 또한 가장 합리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독창적이며, 현대 자유주의 경제이론이 아담 스미스의 베이컨 주의나 록크의 경제이론의 분파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이론-흔히 미시 경제학, 또는 일반 평등 경쟁 모델, 또는 신고전 모델, 또는 시카고학파 모 델로서 알려져 있다-의 아름다움과 복잡함이 놀랄 만하다는 데에는 의 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경제이론이 아니라, 정부로 하여금 경제를 아주 자유롭게 운용하도록――정치적인 제한 없이 ―一요구하는 정치이론이라 는 것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신고전이론을 마치 경제이론이나 미시경제 이론인 것처럼 제시하는 것은 그 이론을 그것이 본래 꿈꾸는, 또는 추천하
는 이상과 멀리 떨어전 어떤 상황에서 정 치적 인 무기로(그러므로 문제가 되 는 어떤 무기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동정적으로 표현하자면 이 이론을 사 용하는 것은 저속하고 더러운 것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이론이 존재하 지 않는 어떤 이상을 묘사하는 것에 얼마만큼 중요하게 취급되느냐에 달려 있다. 경제학자들은 신고전 모델이 국가를 단순한 경찰관이나 야경원으로 가정 하는 반면에 현재의 산업사회에서는 국가가 경쟁적인 자유시장에서 주요한 경제적 요소리는 것을 재빨리 인지한다. 이것은 만약 국가가(자유경쟁시장에 서의 생산자나 소비자처럼 ) 합리적 개인처럼 행동한다면 크게 문제가 되는 것 이 아니라고 주장될 수도 있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는 국가가 우선 최소 화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경쟁적으로 행동하도록 되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 도 있다. 이 두 가지 요구사항은 조폐국아 국가에 의해 독점되는 한 충족되 는 것이 불가능하다. 일부 철학자들은 이 비평이 사라져야 한다는 희망 아 래 이 비평을 무시하기 위한 시도로서 장문의 글을 쓴다. 이것은 전혀 합리 적인 방법이 아니다. 스미스의 절친한 친구였던 데이비드 흄은 가격이 아니 라 상대적인 가격이 시장을 조절하므로 화폐를 많이 찍든 적게 찍든 자원 의 배분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돈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이 생산과 소비의 유형에 영향을 끼치지 않 는다는 것이다. 이 결론은 모든 사람이 공김하듯이 경험적으로 논박되었다. 홈의 주장은 많은 다양한 방법으로- 개선되었는데 이 방법들은 모두 화폐의 수량이론q uan tity the ory of mone y이라는 집합적인 분류로 알려지게 되었 고, 이 분류는 여기서 논의되거나 해결될 수 없는 실책과 혼동을 일으킬 뿐 만 아니라 갖가지 홍미있는 생긱들을 포함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문제는 아직도 비판의 소지가 있다. 신고전경제학자들은 〈돈을 찍어내는 사림이 단순한 야경원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비평둘을 얼마나 많이 인정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 해 때때로 논쟁한다. 그러나 정부가 가지고 있는 많은 종류의 기능들은 화 폐발행권을 야경원이나 시장에서의 단순한 구매력과는 구별되는 힘으로 만 든다. 이 상황에서 가장 명백한 것은 무기 소비자로서의 정부이다. 분명히
이런 소비는 정치적인 형태에 의존하는 데 반해, 문제가 되고 있는 그 이론 은 정치적인 상황이 전적으로 개인의 합리적인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고 제 안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복잡한 논쟁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 부의 이런 기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여기서는 다른· 여러 요 소들 중 가장 중요하다고 여길 수 있는 기술혁신, 교육, 그리고 이민 이 세 가지만 주의하여 보기로 하자. 아담 스미스가 기술혁신을 간과했다는 사실에 대해 많은 논린이 있었다. 분명히 그의 의도는 정반대였다. 즉, 그는 시장이 기술혁신을 이행하기 위 한 가장 고무적인 메커니즘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시장이 새로 운 발견을 위해 여러 가지 실행울 위한 유인책을 제공할 뿐이라고 주장하 지는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반대로 그는 발견은 게으른 사람둘의 산물기어서 시장은 모든 사람을 일하게 만들 만큼 그렇게 효율적인 것이 되 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견은 그 자체가 홍미를 유발함으로써 보싱이 되며 실행 임금은 개방된 시장에서 가장 잘 결정된다 고 가정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 일부 혁신은 아담 스미스가 그의 이론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상상했던 방법과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실행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아주 뚜렷하고 충분히 경제적인 초기 두자로 실행될 수 있는( 특 허를 얻을 수 있 는) 혁신은 어느 것이든지 가장 초기 단계에서 그의 생각대로 될 수도 있 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아는 바와 같이, 특허를 얻는 것은 스미스의 생각 이 아니고, 어떤 특허를 받은 기술혁신일지라도 작은 회사에 의해서가 아 니라 큰 회사에 의해서만 실행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실행하는 데 초기 투자를 많이 해야 하기 때문이거나, 작은 회사가 대리점을 사용하지 않고는 제품을 시장에 팔 수 없고 또 유통업은 선진국의 많은 산업 분야에 서 대기업이 독점하기 때문이거나, 또는 작은 회사가 특허를 쉽게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합리적인 인간의 이상에 혁신, 과학적인 것, 기술적인 것, 혹은 예술적인 것들을 위한 공백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이상적인 합리적 개인의 이미지란 하나의 독특한 기술혁신을 만들어낸 한 개인에게는 특별
한 의미가 있는 그러한 기술혁신에 대한 논의를 막는 다론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혁신은 집합적이지 않다). 아이디어에 대한 소유권이 베이컨주의 의 이상에서는 가정될 수 없으며, 있다 하더라도 베이컨주의는 여러 가지 사실을 문제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래서 독창성을 위한 기준 즉, 실행할 수 있다면 어떤 발명이 특허를 받을 수 있는가 없는가를 결정하 는 기준 ―— 을 거의 제시할 수 없다. 반베이컨주의이며 신%녁픽 철학자인 마이쿨 폴라니는 아직까지는 충분 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기술혁신예 대한 매우 중요한 단편 논문을 썼다. 그 는 특허 심사자란, 어떤 유용-한 사실이 독창적이고 따라서 특허를 받을 수 있는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허 심사관리들이 실수할 수도 있는가〉 하는 의문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는 독창성에 (물론 독창성이 특허가 될 수 있는 준거이지만) 대한 ( 어떤 기준이 있 거나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부인했다. 그는 특허 심사자의 직관, 극히 공 식화된 지식, 개인적인 지식이 그런 문제의 최종적인 결정자라고 주장했다. 베이컨주의자들은 폴라니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죽, 그들은 사실에 문제가 있을 수 있디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는 그렇게 할 수 없으며, 이것은 그들의 베이컨주의의 기초를 위협하기 때문에 그들이 그러한 인정을 하지 않을것이다. 신(新), 구(舊) 베이컨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사실아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의 기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술혁신에 대한 모든 합리적인 접근을 차단한다• 즉, 이것은 혁신을 위한 유인책에 대 한 준거가 아니고, 주어전 기술을 채택하기 위한 준거를 제공하는 능력을 뽐낸다. 프란시스 베이컨까지도 유인책이 바람직하다는 것에 대해 모르지는 않았다. 베이컨은 인류에 크게 공헌한 사람들을 공헌의 중요도에 따라 금, 은, 기타 금속, 돌, 또는 나무로 동상을 만들어 세워서 그들을 영예롭게 기 억하려는 관습을 권고했으며 이제는 그 관습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판단하여야 하는가? . 지금까지는 관습적으로 새로운 기술적 발명을 물리적이고 공학적인 분야 및 실행을 촉진시키는 데 관련된 사회적인 요인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명백히 하나의 묘 안은 그것이 미래의 사용자의 교육적 수준, 습관 및 취미와 연결되어 있고, 이것들은 특허법과 시장조건 못지않게 사회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 이다. 발명가는 공학뿐만 아니라 시장요인들과 특허법 등도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사회적인 영역으로부터 물리적인 것의 분리는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즉, 산베이컨주의와 의관상 어울려 보이는 만족할 만한 세목들은- 한쪽에 놓 고, 다른 것들은 불가피할 때 실제적으로 고려되도록, 야심적인 신베이컨주 의자들이 이론을 개선시키려는 희망 속에서 행하는 연구주제와 갈이 옆으 로 밀어 놓는다. 다시말하면, 여기에서 신베이컨주의에서 이탈하지 않고는 극복될 수 없는 장애물이 나타나게 된다. 죽, 우리는 어떤 사실들은 문제성 이 있고, 일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영리하며, 자유시장이 제공하 는 것 의의 다른 유인책들이 바람직할지도 모르고, 특허법들이 문제의 소 지가 있어 고전정치경제학에서나 신베이컨철학에서도 설 자리가 없다는 것 울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기술은 신베이컨주의와 일치하 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죽, 이상적인 상황에서는 개선의 여지가 없 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술혁신 측면에서 이것을 보았다. 우리는 이것을 교 육 측면에서보다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3 합리적 인간을 위한 교육 일반적인 신베이컨주의, 또는 신고전적 경제학으로서의 신베이컨주의에 대한 두번째 비평은 이 둘 중의 어느 것에서도 어떤 교육이론도 배제된다 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베이컨주의자들은 그들의 첫번째이며 기본적 인 원리 로서 모든 사립이 아주 합리적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사람들 은 추측컨대 이미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다시말해 그들은 아주 합리적인 결정방법을 알며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어떤 교육을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자주 받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간단히 예를 둘면 어 떤 합리적인 젊은 전문가는 완전히 직업전선에 뛰어들기 위해 교육을 그만
받아야 하는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간을 쪼개어 직업과 공부를- 병행해야 하는지(직업과 공부를 번갈아하기, 시간제 노동, 야간 수업이나 계절 학기), 또.는· 계속 공부만을 하기 위해 직업을 갖는 것을 연기해야 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결정들은(원칙적으로 다른 결정들과 마찬가지로) 결정이 론 또는 귀납적 정책, 또는 그밖에 오늘날 신베이컨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이든지간에 관심을 갖는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서 검토해 볼 수 있는 것 들 0] 다. 교육자는 전통 속에서 그들이 아는 최고의 것을 전하도록 되어 있으나, 그들의 책임에 대한 평가를 거의 또는 전혀 예상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이 유 때문에 교육은 전통주의자들을 제의한 모든 철학자들에게는 문제성이 있 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컨대 베이컨주의는 급전주의 이론이다. 즉, 전통은 제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곤 거의 없고 그러므로 전통적 인 교육은그 파 멸에 가까운 것이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이들인다. 모두 일류 명문대학 울 졸업했던 베이컨과 데카르트는 그들이 받은 교육을 경멸하였다. 스피노 자는 명문대학(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교수직을 거절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가 장 위대하고 유명한 베이컨주의자인 임마누엘 칸트(그의 철학은 베이컨의 귀 납법과 데카르트의 연역법을 종합한 것이고,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에 대한 좌우명 은 베이컨의 작품집 저자 서문에서 따온 것이다) 교수도. ..ii7.육에 문제가 있음을 7 지적했다. 그의 가장 대표적 논제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그는 계몽이 란 자기교육이고 자기결정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교육에 관한 그의 강의에 서 그는一一이미 루소가 지적했던 것이지만_의무적인 교육은 편협하 여 계몽적이 못 되고, 그래서 금지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강제성 없 이 어떻게 교육이 있을 수 있는가를 묻기보다 우리가 어떻게 의무교육을 정 당화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물었다. 왜냐하면 칸트는 자유로운 교육(이것은 루소의 상세한 묘사에도 불구하고)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의무 교육에 대한 그의 정당화는 칭찬과 힐책 둘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잔인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죽, 어린이들은 (강제적으로) 교육되어야 하고 사람들 은 (강제적으로) 교육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린이는 인간이 아니라는 논리이다. 그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자기의사결정을 어린이는
할 수 없으므로 어린이는 인간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덧붙이가를 어 린이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실행할 수 없고 이 의지훈련의 결핍으로 인하여 자기결정을 실행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교육의 목적은 지식을 전달하 는 것이 아니다. 죽, 지식의 습득은 평생동안 이루어지는 독학의 과정이다. 오히려 교육의 목적은 교과를 터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이 교과를 터 득하자마자 그를 가르치는 것은 금지되며 그리고 나면 공부를 계속할 것인 가 아닌가 하는 것은 그의 결정에 따르는 문제가 된다. 교육에 관한 칸트의 의견은이쯤 해두자. 현대인의 귀에 이상하게 둘리는 것은 어린이가 인간이 아니라는 주장만 은 아닐 것이다. 결국 우리가 유산( 流 産)에 대한 논쟁에 빠져들 때 우리는 · 아주 한결같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절망적인 논쟁에 빠진다. 태아도 인간인가? 고대에는 유아살해가 공개적으로 행해졌고 현대사회에서도 거의 은폐되지 않고 행해진다. 단지 최근에 현대세계의 보다 문명화된 지역에서 유이살해가 없어졌을 뿐이다. 유아살해가 남아보다 여아에게 더 많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유아살해는 성 차별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유아살해보다 유산과 피임이 당연히 선호될 것이다. 인구조절을 너그럽게 보거나 옹호하는 사람들은(정 말로 모두 책임감 있고 계몽된 사람들) 〈 한 유기체가 언제 인간이 되는가? 〉 라 는 철망적인 문제를논의하도록 강요받는다. 논쟁아 이런(비합리적인) 선( 線 ) 울 따라 전행되는 한, 〈 어린이가 인간인가? 〉 러는 이 질문은(아무리 이 질 문 이 끔직하다 하더라도)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 수가 없다. 죽, 우리는 이런 끔 찍한 질문에 익숙하며, 심지어 〈 유태인들은 인간인가? 〉 와 같은 더 사악한 질문에도 익숙하다(칸트의 명성이 아직도 절정에 있을 때 헤겔은 원고본에서 인 간이 아니라고 말했다. 즉, 유태인들은 단지 기계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의 반응기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인지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우리가 경건 한 공포심을 가지고 반응하는 것을 멈출 때뿐이다. 하나의 유기체가 어떤 나이가 되어야, 또는 이런저런 발달단계에서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을 법 률(좋은 이유에서든 나쁜 이유에서든)로 제정하는 것과 명확한 규제장치를 위 한 합리적인 이론을 제공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죽, 만일 진정으
로 어떤 어린이가 아직 훈육이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에 인간이 아니라면 미 친 사람도 분명히 인간이 아니며, 아마도 대뇌마비나 파킨스병, 또는 전신 마비로 인해 고생하는 사람들도 인간이 아니며, 술주정뱅이나 심지어 미신 과 편견에 너무 깊이 빠져 그들 자신의 의지를 실행할 수 없는 사람도 인 간이 아닐 것이다. 많은 논리적인 대답처럼 칸트의 대답은 논리의 설득력에 대한 지적 체계의 연약함을 말해줄 뿐이다. 그 문제는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시 정(市井)의 유명한 사림이 얼마나 많이 이 이상에 동조하는가 하는」 질문조 차도 미해결의 상태에 있다. 왜냐하면 문헌들을 살펴봐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모호하기 때문이다. 일부 저자들은 아마도 그 가능성을 개개인의 자 연적인 능력으로 보고, 개개인의 의견 차이룰 각각(타고난?) 초기의 가능성 의 탓으로 둘리든지 또는 다른 축적된 정보의 탓으로 돌릴 것이다(브루노 드 피네티 ). 물론 더욱 복잡한 개성의 차이는 또한 각각 다른 기호와 다른 정 책 (더욱 세심한, 더욱 대담한 등)의 탓으로 돌려질 수도 있다. 일관성을 유지 하자면, 이 관점을 가전 사람들은 이것을 걷지도 못하는 아기에게도 적용해 야만 한다. 그들이 적용하는가? 그러면 그들이 강제성을 어떻게 적용하는 가? 그러나 강제성이 모두 교육적일 필요는 없다. 이것은 정치적일 수 있 고 때때로 정치적이다. 우리는 합리성이란 이름 아래 강제성을 반대할 수도 있으며, 또는 합리적인 인간이 강제성에 직면하여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물 어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양쪽 다 할 수 있다. 따라서 교육에 대한 의 문은 아직도 미결상태이다. 칸트의 논쟁둘은 이것이 신베이컨철학의 지식 범주를 넘어선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신베이컨주의자들은 어떤 핵심적인 질문에 대해 체계적인 해답을 갖고 있 지 않기 때문에 그 질문에 관한 어떤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다. 일 부 신베이컨주의지들은 교육에 관해서는 전통주의자들이다• 이것은 아무런 반응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 중 일부는 당신이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것 울 거절하는 것이 (여기에 숨겨진 부모의 권위를 주시하라) 당신의 유용성을 증 가시킬지는 모르지만, 나는 문명사회에서 살고 싶기 때문예 그것은 나의 유 용성을 감소시킨다는 주장 아래 의무교육법을 정당화한다. 이것은 심지어
신고전경제학자들조차 내세우는- 주장이다. 사람들은 힘을 사용하는 사람이 강제성의 유용성 때문에 강제성을 정당화하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몸서리 를 친다. 그러나 다시말하지만 신고전경제학자들은 강제를 주장하지는 않는 다. 그것은 하나의 변명일 뿐이다. 합리적인 비평가는 누구든지 모든 변명들을 금하려 하는 생각 따위는 조 금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따금 이런저런 진리의 기준으로, 그 리고 이런저런 일관성의 척도로 변명을 한다. 우리 모두가 단호하게 반대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은 어떤 이론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변명이 그 이론에는 당연한 결과인 체하는 것이다. 심지어 분명한 규칙도 예의가 있다. 모든 변명을 정당화하는 것은(특히 중 요한문제에 대하여) 바로실용주의 특히 실용주의적 신앙주의이다.그리고교 육은 분명히 중요하다. 대부분의 신베이컨주의자둘은 실용주의적 신앙주의 자들이다. 그들은 과학의 과실(열매)에 의하여 자신의 과학에 대한 신앙을 정당화한다. 실용주의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다. 신베이컨주의에 대한 주된 바평은, 우리가 기억하듯이, 신베이컨주의가 하 · 나의 비참한 사회정치철학이라는 겔너파의 주장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비평은 신베이컨주의가 신고전경제학자들에 의해 주창된 사회정치철학 으로 확장되었다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회정치철학에 대한 비평은 정부가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한 단순한 경 찰관이나 야경원으로서만 행동할 수는 없다는 주장과 기술혁신, 교육 그리 고 이민 등은 이 철학의 범주 밖에 있다는 주장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기술혁신을 하려면 자유공개시장이 제공하는 것 이싱웍 다른 유인책을 필 요로 한다는 것과 특허법들이 자유시장 메커니즘에서 벗어난 탈선이며 부 적절한 것이라는 것을 목격해 왔다. 우리는 강제적으로 권장되고 있는 의무 교육에 대한 바로 그 개념이 기본적으로 자유론적인 철학에 상반된다는 것 을 보아왔다. 오늘날 이 철학의 일부 추종자들은 정부가 돈을 찍어내지 않 고, 그리고 아마도 엄격하게 치안을 유지하는 것 의의 디른 힘을 행사하지 않거나, 십지어 정부가 전혀 없는 국가와 같은 광범위한 자유주의의 관점을 가지고 장난을 한다. 그런 나라가 어떻게 의국 세력에 대항하여 그 자신을
방어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은 우리를 국제관계 분야에로 그리고 이 분야 에서 〈 신베이컨주의의 위치는 어디인가? 〉 러는 것을 생각궁l-게 한다. 그러나 극단적인 자유주의에 대한 사회정치철학이 발전되고 있을 때조차, 작가들.은 이민에 관한 질문을 회피하려 한다. 일단 상대적으로 부유한 나라의 정부가 이민을 받는 것에 대한 통제를 포기하면, 이 나라는 억압받는 나라나 가난 한 나라로부터 오는 이민자로 넘칠 것은 확실하다. 물론 시장 메커니즘 이 론은 이민에 대한 시장조절을 허용해야만 하고, 또 실제로 자유국가에서의 내부 이동은 거의 전적으로 자유시장에 위임된 요인 중의 하나이다(이주에 대한 정부의 유인책과 일정한 세금면제 등은 제의하고 이 모든 것들은 여기서 무 시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경이 개방되어 왔었다면, 심각한 사회적 격변둘이 기대될 수 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러나 일단 정부가 바람직한 의국인들만 이민 오는 것을 허락하면 다른 문제점이 생긴다. 즉, 두뇌유출현성이 일어난다. 기술혁신을 창조하고 실행 함으로써 자신의 조국을 가장 찰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부유한 나 라로 이민가는 것이 훨씬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기술은 신베이컨 주의의 툴 속에서 가르쳐지기 때문에 기술자들(현대의 산업화된 나라에서 교 육을 받은 사람이건 가난하고 기술적으로 뒤진 나라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이전간 에 )은 산업화된 나라와는 너무나 다론 개발도상국가의 도전에 맞설 수 없 다. 즉, 그들은 현존하는 신베이컨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전 사회의 관행과 가 치관 속에서 훈련을 받게 되며, 이러한 사회는 곧 산업화된 나라를 의미한 다. 그들은 오직 신베이컨주의의 관점으로만 그들의 조국을 볼 수 있기 때 문에, 그들의 조국이 제공하는 기술혁신가들에 대한 도전은 볼 수 없다. 그 리고 이것은 산업화된 나라에서 잘 알려진 장치들을 그들 자신의 나라에 실 행하려고 애쓰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 그들이 가진 계획들은 좌절적인 것 도 도전적인 것도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 상황은 불합리하다. 그러나 그 둘은 무엇이 그들에게 그 불합리한 것을 가져다 주었는지 이해하려고 애쓰 기보다 마술, 미신, 그리고 편견에 대한 전형적인 베이컨주의 방식으로 그 둘의 조국을 비난하고, 그들의 능력이 보다 낫게 인정되고 이용되는 보다 현대화된 나라들로 이민 간다. 이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과학자와 기술
지에 대한 교육은 어디에서나 베이컨주의이다. 바꾸어 말하면 산업화된 세계에서의 신베이컨주의의 바로 그 성공, 그리 고 더욱이 신앙주의적 실용주의자들이 신베이컨주의를 과학기술철학의 기 초로서 시인하는 것은 또한 세계를 미신주의자와 과학자로 양분하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미신적인 부분과 과학적인 부분으로 갈라 놓으며 또한 이것은 현상을 유지하는 두뇌유출 이민을 위한 유인책이 된다. 4 합리적 인간의 개인주의 따라서 이것은 신베이컨주의 (또는 다른 이름으로는 귀납적 논리 또는 급진주 의)를수용히는 사람들에게 자유주의 사회정치철학또는신고전학파또는시 카고학파에 불과한 조각조각 끼워 맞춘 모조품을 시인하라고 강요하는 냉 혹한 논리이다. 그들은 합리적인 인간의 이상화되고 단순화된 이미지와 최 소의 국가 기능을 가전 이상사회를 혼동한다.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 는 〈귀납논리가 다른 사회철학과 접목될 수 있을까? 〉 라고 질문할 수도 있 댜 지금까지 묘사된 사회철학은 개개인 특성의 집합, 또는 단순한 협약, 또 는 이들 양쪽의 혼합 이의의 사회적 실체는 가정하지 않는 극도의 개인주 의적 방법 (방법론적 개인주의 : 심리주의 )에 기초하고 있다. 이 개인주의에 상 반되는 것은 전동적으로 집단주의懿]다. 집단주의자는 개인적인 기호들이 사회적으로一―그리고 교육적으로—一결정된다고 생각하며, 여러 다른 견 해는 전통, 종교, 그리고 국가적인 신화를 통해서 공왕된다고 생각한다. 집 단주의자들은 사회적인 단체들이 개개인의 선택을 제한하고 그들에게 지시 롤 내린다고 주장한다. 이런 모든 집단주의적인 장치들이 귀납적 논리주의 자동개 의해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아니다. 만일 그 사회 단체들이 합 @ 사회 조직화에 있어서 개인보다 국가나 민족, 종족, 사회적 계급 등의 사회적 집단성을 강조하는 몇몇의 유형을 말한다. 예를 들면 사회주의 는 자본주의에 비해 집단성을 강조하는 경향을 띤다.
리적인 검토에 저항한다면, 그들은 합리적으로 정당화되고 그래서 가정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전혀 정당화될 수 없고 그래서 신베이컨주의 귀납론자들은 그들을 부정할 것이다. 특히 왜 나는(여기서 〈 나 〉 는 데카르트 학파 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으로서의 〈 나 〉 이다) 정치의 지배 를 받아야만 하는가? 오직 나의 삶과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논쟁의 끝이다. 위에서 말한 논쟁은 매우 간단하나, 대단한 영향력이 있다. 또한 더욱 중 요한 것은 이 논쟁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타당성 있는 논 쟁처럼 결론을 수립하지는 못하나 표면상으로 자명한 전제들로부터 의심스 러운 결론들을 끌어냄으로써 이 전제들을 더욱 의심스럽게 만든다. 경험으로 보아 베이컨주의자들은 일부 사람들이 자신들의 근본적인 가정 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들었을 때 쉽사리 믿으려 하지 않는다. 〈 당신 이 만일 귀납적 논리를 믿지 않는다면, 왜 당신은 고충건물의 창밖으로 걸 어나가지 않는가? 〉 또는 〈 길을 건널 때 사람들이 단순한 확률성들을 계산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상상할 수 없다 〉 등과 같은 표현은 복잡한 베이 컨주의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물론 나약한 베이컨주의 철학자들 시이에서도 아주 흔히 있는 일이다. 이렇게 쉽사리 믿지 않는 이유 중 한 가지는 매우 간단하다. 베이컨주의자는 어떤 견해의 결점을 발견할 때 이것을 가능한 한 완전하게 그리고 전체적으로 거부하려고 애쓴다 . 즉, 베이컨주의자는 그의 신념체계에 결점의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베이컨 주의자는 어떤 사림이 자신들의 이론을 부인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는, 인간 은 합리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한다는 주장도 포함해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모든 것을 그 사람이 전적으로 부인한다 라고 상상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점에서 베이컨주의자들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즉, 그 이론을 거부하는 것 은 자신들이 너무나 전적으로 완전하게 거부하는 바로 그 점을 거부하는 것 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베이컨주의 의 학문이 현대세계를 이룩하는 데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거짓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로 베이컨주의는 좋든 나쁘든 어네스트 겔너가 말한 것처럼 산업화된 세계의 역사적 신화이다.
베이컨이 모든 연금술사들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 것은 잘못이다. 그러 나 그가 그들의 주장을 믿지 않은 것은 옳았었다. 그는 모든 미신에 대해서 는 지나치게 냉혹했으나, 그의 비난은 옛날부터 전해지고 있는 모든 수수께 끼 같은 전설 속에서 비밀을 찾고자 하는 풍조에 대하여 경고가 되었다. 베 이컨은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도 할 수 없 었다. 그의 위대한 추종자 데카르트는 모든 미심쩍은 주장들이 부인되어야 한다 - 모든의심쩍은주장은명백히 불합리하다 一 ~고말했다 @ 베이컨 과 데카르트는 전통에 대한 안목과 비판적 태도를 높였고 디론 어떤 사람 들보다도 자기신뢰의 전통을 발전시키는 데 공헌했다. 베이컨은 과학적인 학파들을 죽일 수가 없었으며 그 결과 가장 무시무시하고도 명백히 그릇된 과학에 대한 신화(과학에서의 만장일치의 신화)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신화 역시 과학적인 학파들이 과학적인 대중에 의해 허용되는 방어와 궤변 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누구든지 어떤 지적 체계(지적 구조 또는 메커니즘) 없이 시작하는 0 경우에 우주의 신비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모 든 조합과 비교 그리고 대조를 거쳐야만 한다는 베이컨의 신비주의적 생각 은 후세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오직 하나의 참된 지적 체계(메커니즘)를 확고하게 수립하기 위한 데카르트의 요구와 악의(惡意)에 찬 충돌을 했음에 틀립이 없다. 데카르트가 구상하고 있었던 참된 지적 체 계란 세계는 한 개의 큰 시계태엽 장치이며 자연의 서로 디론 현상들은 단 지 주어진 톱니바퀴 세트의 재조합과 다른 조합이라는 철학을 말한다. 그러 나 영국 학술원은 두 사람의 추종자였다. 베이컨의 방법은 비차별적이었지 만 명백히 바교되고, 대조되고, 조합되고, 그리고 재조합되어야만 하는 분 명한 관찰기었다. 데카르트는 방법에 있어서 다른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즉, 먼저 각 부분을 따로따로 연구하라. 그런 후 당신은 그것 모두를 연구 ®의십할 수 없는 지식에 도달하기 위해서 데카르트가 취한 방법. 그는 〈생 각하는 나, 또는 회의하고 있는 나녔t 의십할 수 없는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근본으로 삼았다. 데카르트는 이로부터 출발한다면 의심할 수 없 는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했다는 것을 확인하라. 그러면 분명해지리라. 베이컨과 데카르트는 완전히 일치한 것처럼 보였다. 신비주의자적인 전통 및 베이컨과 데카르트에 의해 시작된 계몽운동 간의 전정한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 신비주의자들 cabba li s ts @ 은 혼란에 빠져 있었고 모든 암시를 따르고 싶어했는 데 반하여 기계론자들 mechan i s~s ~ 達 갈릴레오 갈릴레이룰 뒤따르는 ―― 매우 명 백하고 분명한 주장만을 따랐다. 즉, 베이컨주의의 위대한 발견은 분명한 것 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분명한 것만을 찾고자 하는 이러한 노력이 우둔하고 어리석은 짓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베이컨주의를 확신하 는 2 떼기 철학자들조차도 어리석게 가장 전부하고 문제의 소지가 없는 사 실 속에서 철학의 비밀을 찾고자 한다. 지금은 이 모든 것들에서 나울 것이 거의 없지만 그러나 17 세기에는 사람들이 현인의 돌(비금속을 황금으로 변화 시키는 힘이 있다고 하여 연금술사들이 찾아 헤매던 돌)에 대해서 생각하키보다 당구공동기 충돌할 때 움직이는 방법에 대하여 토의하기 시작했을 때 가장 놀라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베이컨주의의 사회정치철학이 지극히 단순하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인 상적이었는가를 알기는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합리적이며, 합리성은 과학 울, 과학은 새로운 기법을, 기술사회를, 그리고 결핍으로부터 자유를 탄생시 킨다.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홈의 경제이론은 현재 비난과 수정더미들로 덮여 있다. 그들은 그 시대의 단순성의 본보기였다. 스미스는 어떤 경제들 은 노예의 노동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으며, @ cabba li s t는 카발라주의자라고 한다. 카발라 cabbala 는 1 있1 l 기와 그 이후 로 나타난 비전(秘傳)의 유대 신비주의를 말함. 카발라의 교리들과 의 식들의 시작은 신비적 경험 속에 내재하는 위험둘을 피하기 위해 개인 적인 시도에 의해 인도되는데 이런 측면에서 카발라는구비적(口碑的) 인 전통을갖는다. @ mechan i s t란 기계론자(機械論者)를 말한다. 기계론은 자연의 현상들은 물질 ma tt er 과 운동 mo ti on 및 그들의 법칙들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고 설명되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기계론은 낮은 수준의 유물론의 한 형태 로불수있다.
더구나 그는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사람의 죄악에 대해 반대하는 설교가 필 요하다는 것을 지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베이컨주의의 편견과 미신 의 항목 아래 노예제도를 포함시켰다. 즉, 사람을 그가 뜻하는 대로 행동하 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 자기의 이웃을 사슬로 묶음으로 해서 보다 더 많 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마신이다. 따라서 노예제도 는 결코 죄악이 아니며 단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의 가장 유명한 제자는 제레미 벤담이었는데, 일반대중과 전 문가들에게는 공리주의 철학자로, 그리고 형벌로서의 정의에 대한 고전적 인 이론을 폐지하려고 시도했고 , 그래서 형벌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들 을 제안할 수 있었던 사람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벤담은 자신을 뉴턴에 비유했다. 즉, 자기가 사림들은 찬구를 찾는 속성이 있다는 인간중력의 법 칙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 리는 떠돌이를 두려워해야만 하지 않는가? 그렇다. 두려워해야만 한다. 그 러면 우리는 그에게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그를 이웃으로 만들어라. 어떻 게? 그에게 대형 칼라 TV 가 있는 집을 주어라. 이것이 1 -두수난다 비용이 더 둘지 않는가? 더 들지 않는다. 이는 참재적인 범죄자를 보상하는 것이 아닌가? 보상하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이것이 범죄를 조장하지 않을 까? 반대로 이것은 범죄를 예방할 것이고, 법죄자를 갱생시키기까지 하여 범죄를 감소시킬 것이다. 이것이 벤담의 논리이다. 앞의 글이 역설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교육을 잘 받은 사람 은 아니다. 이러한 견해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올바른 지 식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그의 관점은 진실이 아니나, 그것을 역설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전통적인 견해보디는 더 현명하다. 오늘날에는 전통적인 견 해가 이 공리주의적 견해에 대해 부여하는 역설의 충격을 충분히 느낀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더 오래된 견해와 더 새로운 견해를 대비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셀프 서바스 백화점, 셀프 서비스 슈퍼마켓 등을 생각해 보자. 셀프 서비스는 도둑질을 유발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물 론 가난, 실직 등과 같은 다른 것들도 도둑질을 유발한다. 그러나 상점주인 은 그가 가난과 실직에 대한 책임으로 비난받을 수 없는 데 반하여, 그의
상점을 셀프 서비스로 만듦으로써 도둑에게 동기를 제공하는 것에 대해 비 난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낄 수도 있다. 즉, 엄밀히 말하자면 그가 그 렇게 하면 그는 정말로 도둑의 공범자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도 둑에게 동기를 부여할지라도, 그리고 그가 도둑의 공범자가 될지라도 결과 적으로 그가 재정적으로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나아질 수도 있다는 사실은 님아 있다. 경제학자들은 별 어려움 없이 판매원 고용 단가와 도둑으로 인 한 손실을 계산하여 도둑으로 인한 손실비율이 여차여차하여 손익분기점에 (보통 3%) 이르면 이보다 낮은 한도에서 고용원을 고용하지 않고 도둑으로 인한 손실을 감당하는 것이 더 싸다는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기술적으로 진보된 사회와 후진사회 시이의 균열을 본다. 죽, 선진사회는 더 부유하고 그래서 보다 더 편리하며 그들을 보다 더 부유하게 될 수 있도록 하는 셀프 서비스를 감당할 수 있다. 이런 예는 앞에서 말한 명제를 예증하는 데 충분할 것이다. 즉, 베이컨주 의자들은 아무런 이데올로기도 가지고 있지 않기를 주장하면서 인간의 질 병과 시대의 고통이 무엇이전간에 과학적 전보와 기술적 전보를 인간의 질 병에 대한 최상의 치료로서, 시대의 고통을 덜기 위한 최선의 의약으로서 옹호한다. 그러나 베이컨주의는 기술에 대한 하나의 이데올로기요 태도인데 이는 오늘날의 후진국가에서가 아니라 고전적인 산업화사회에서 허용되었 던 식의 특수한 방법으로 기계를 만드는 것과 사회조직을 결합하는 그러한 이데올로기 및 태도를 말한다. 그것은 심지어 산업화된 세계에 있어서조차 그 유용함이 이미 수명을 다했고, 우리로 하여금 세계의 대규모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보다 더 통합적인 접근방법 holi sti c app ro ach® @ 전체론(全體論)적 접근법이라 한다. 전체는 단지 부분들의 총화 또는 그 둘의 산술적 합만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전체는 전체로서 고유한 성질 과 상태 그리고 법칙들을 갖는다는 견해이다. 예를 들어 물은 수소와 산 소가 화학적으로 결합되어 이루어지지만 수소와 산소와는 다른 성질을 갖는다. 이 방법론은 자연과학에서이든 사회과학에서이든 어떤 체계를 전반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이 방법론에 의하면 사 회는 개인을 아무리 합해도 설명이 안되는 부분을· 갖는 것으로 이해 된다.
에 길을 양보해 주어야만 한다. 5 맺는말 우리는 베이컨주의의 엄청난 가치와 성공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단 지 이 이론을 수정하는 것이라고 제안하도록 잘못 이끌려져서는 안 된다. 반면에 이 이론은 어떠한 수정도 허락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세계 를 완전히 과학적인 것과 미신적인 것으로 경직되게 분리하기 때문에, 이것 이 도달 불가능한 명백하고 단순한 이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이것을 있는 그 대로의 복잡한 현실에 적용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것이 인류의 최저한도의 생존을 위협하는 모든 대규모 문제들과 기술과 교육에 대한 어떤 사회적 접 근의 여지도 남겨 주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합리성을 이상으로 하는 베이 컨주의자들의 수중에 남는 것은 베이컨주의를 감당할 수 없는 모든 사람들 에게 비합리주의를 강요하는 것이다. 베이컨주의는 개인에게 너무 급진주의 적인요구를한다.즉,이것은우리를수용할수없는낡은풍조의 사회적 • 정치적 이론으로 이끌고 간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탁월한 합리적 이론으로 서 이것은 또한 대규모의 문제해결 활동에 대한 보다 나은 이론과 새로운 대규모의 해결책들을 실행할 수 있는 관련 기술들에게로 이끄는 것이어야 만한다.
제 6 장 실용주의자들의 혼돈 베이컨주의는 전통적으로 중요했던 것만큼 아직도 강력해 보인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베이컨주의가 실용주의를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베이 컨주의가 실용주의 전영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 다. 오늘날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는 모두 실용주의자들의 논쟁에 의해서 지지롤 받고 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실용주의를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 록 자극한다. 그러나 이 일은 결국 혼란스러운 일로 판명되었다. 왜냐하면 미신과 고전적인 합리주의와는 달리, 실용주의는 훨씬 더 뒤섞인 복잡한 문 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얼마나 골치 아픈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 보기 위 해 우리는 한 예로서 미신과 고전적 합리주의가 모두 실용적인 근거 위에 서 인정될 수도 있고 또 과거에 그러했었다는 사실을 둘 수 있다. 정말로 실용주의는 너무나 모호하여서 실용주의라는 이름을 거들먹거리는 것조차 도 문제가 많다. 그 출발점 자체가 아마도 다른 모든 철학들의 실패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출발점 자체는, 삶은 철학이 죽은 뒤조차도 계속 진행된다 는 절망적 사실을 인식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다른 학파 에서 너무나 위험할 만큼 결핍되어 있는 관용과 상식을 상당한 정도로 가
지고 있는 것 같다. 바로 이 점은 실용주의의 역사적 기원일 뿐만 아니라 실용주의의 장점 같아 보인다. 그러면 먼저 관용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즉, 관용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우며, 또 왜 그렇게 바람직한가? 1 관용의 이론과 실제 관용기 어떤 문화에 의해서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전 적이 있었는지, 또는 불관용(不寬容)도 하나의 규칙인지, 또는 무엇이 관용 또는 불관용의 기본이 되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 관용 또는 관대함의 개념조차도 분명치가 • 않다는 것을 먼저 기억할 필요.7} 있다. 엄격하게 말해서, 우리가 관용에 대 해서 말할 때 우리의 이웃들이 원하는 어떤 종교도 믿을 수 있도록 허용하 는 데 대한 조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불관용은 르네상스시대의 스페인 에서 실행되었는데, 유태인이든 당 노선에서 벗어난 자이든간에 모든 종류 의 이교도인들이 단지 종교적으로 동조하지 않았디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 졌다. 이 정의에 의하면 관용이란 비관용에 대해서는 공포를, 관용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너무나 쉽게 불러일으키는 종교적 의미의 관용을 말하는데 이 정 의조차도 문제성이 있다. 죽, 많은 부모들은 종교적인 이유에서 아이들에게 약을 먹이기를 거절하는데 이것은 과학적 사고를 하는 일반대중의 의견으 로 볼 때는 태만이라는 범법적 행위이며 사람을 살리는 일을 방해하는 것 이다. 어떤 기독교 종파에서는 모든 약에 대해 반대하는 잔인한 경우도 있 는 것이 사실이다. 일부 사회철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기술적인 발전을, 또 는 적어도 사회적인 일에 수학을 적용하는 것을 반대한다. 즉, 그들은 사회 과학에서 과도한 기계화와 수학적인 방법들이 인간의 독특성과 인간에게 있 는 영적 능력의 발현 등을 위험스럽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사회적인 일들에 수학적 방법들을 적용하면 분명히 약을 먹이는 것만큼 이나 사람들을 구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적어도 지도적인 현대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인 마리오 번지는 그들을 같은 종류의 범죄적 무시라고 비난한다(앰 뷸런스 응급차가 달려와야 할지도 모르는 문제들을 생각해 보라). 이 예에서 우리는 기술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잠깐 살펴보았다. 죽, 베이 컨주의자들은 치명적인 질병에 대항할 수도 있는 새로운 합성물질의 발견 이 인류를 공중보건에서 승리로 이끌 것이라고 희망했던 반면, 이것이 틀렸 다는 것이 오늘날 대중이 알고 있는 지식이다. 종종 우리는 약이 필요한 도 시의 항구에 약을, 또는 굶주리고 있는 나라에 구호품을 가져다 줄 수 있으 나, 매번 꼭 필요한 곳에 약 또는 구호식량을 전달하거나 관리할 수는 없 다. 이것은 정치적인 요인들에 기인한다-때로는 전체 생활방식 때문에, 때로는 종교에 기인하기도 하며, 어떤 경우이든 문제의 장애물들을· 극복하 기 위한 시도들이 관용의 이름 아래 종종 방해를 받는다. 우리는 앞서의 정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안 또는 변형을 시험해 볼 수 있다. 즉 관용은 종교적인 신념이거나 다른 어떤 신념이다• 간단히 말해 관 용은 반드시 어떤 행동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확신이다. 이 정의 는 종교교육을 관용하는 것조차 배제한다. 따라서 이것은 러시아정부처럼 정부가 종교교육을 억압함으로써 종교를 근절하려는 바로 그 시도를 종교 에 대한 관용으로서 허락한다. 그러면 이 정의는 명백히 의미가 없다. 어떤 일들이 관용되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법에 의해 허용된 것들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이것은 맞는 대답이지만 쓸모가 없다. 즉 〈법이 어떤 일 둘을 관용하여야만 하는가?〉라는 우리의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잘못 교 육하는 것에 대한 정의는 법, 정부 그리고 사회가 보는 관점이 각각 다르더 라도, 잘못 교육한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정부나 합법적인 체제 에 의해 관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따라서 관대한 나 明託 지구상에 있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거나 불법 적인 어떤 교육적인 실천에 대해서도 관대할 것이다. 다음의 두 가지 예는 매우 분명하다. 즉, 비교종교와 성교육을- 가르치는 일이다. 성교육이라 해야 소위 말하는 인간의 재생식에 관련된 약간의 기초생물학, 기초사회학, 기초 심리학 정도롤 말한다. 이것들은 관대한 정권에서는 합법적이며, 관대한 사 회에서는 긍정적으로 추천되고 있다. 보통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가 적어도
이 두 가지 문제에서는 덜 산업화된 사회들보다 더 관대하다. 이에 대한 이유는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싶어서 그리고 무엇이 자주 주 장되어서가 아니다. 자유주의는 관용을 포함한다는 것을 잠시동안 토론 없 이 받아들이자. 산업화는 자유화를 가져오고, 또는 그 반대로 자유주의는 산 업화를 위한 필수조건이라거나 또는 산업화의 필연적인 결과이거나 또는 유 사한 것들이라고 종종 주장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산 업사회들은 종종 자유롭고 관대한데 이것은 산업화가 역사적으로 - 적어 도 부분적으로-베이컨주의의 결과이고, 그들은 모든 종교적인 문제들 과 모든 금기사항들, 특히 성적인 금기사항, 그리고 종교적인 것이든 성적 인 것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특히 정보에 관한 금기사항들에 대해 관대하 지 않기 때문이다(베이컨주의자인 찰스 다윈의 발견들과 의견들이 제시되기 전 에는). 베이컨주의자들은 누구 못지않게 종종 종교적인 기독교인들이었고, (베이컨주의자이고 다윈주의자인 지그문드 프로이트의 여러 심리학적 발견과 의견 이 있기 전에는) 종종노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 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대한 관용은 베이컨주의자들에게는 양쪽 날을 가진 검과 같았다. 그들은 금기를 단지 미신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것 울 깨뜨리는 사람들을 옹호하였다. 그들은 또한 비슷한 이유로 종종 이교도 둘도 옹호하였다. 모든 베이컨주의자들은 디른 과학적인 의견을 가전 사람 들이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다른 종교적인 종파 집단의 구성원들도 서로를 경청해야만 하고 공개적인 토론을 가져야만 한디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모든 베이컨주의자들은 공개토론이 과학에 유용할 것이라 느꼈지만, 종교에 서도 마찬가지라고 믿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늘날 산소의 발견자로 알 려진 주요한 베이컨주의자인 조셉 프리스틀리 박사 감은 예의적인 경우도 있다. 그는 종교적인 문제에 관한 어떤 우호적인 논쟁에 유태인의 마음을 끄는 책을 한 권 썼다. 그러나 그가 목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또는 전혀 종교적이 아니라고 생 각했다(그는 유니테리언교의 목사였다). 위의 토론들은 우리가 관용의 정도에 대한 예들을 제시할 수 있고, 관용에 대한 적절한 정의 없이도 관용의 문 제에 대한 견해둘을 토론할 수 있다는 것을 예시한다. 정의가 없는 데 대해
서는 간단한 이유가 있다. 우리들 - ― ― 소위 교육을 받은 2 QAJ]기의 사람들 ― 은 가능한 한 많이 관용하기를 바라지만, 비도덕성에는 무디지 않다. 그러나 무엇이 뻔뻔스러운 비도덕성인가는 우리들의 견해에 많이 좌우된다. 우리의 견해 차이는 이미 수용된 생각을 논쟁적으로 만들며 또한 모든 종 류의 이론을 관련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허용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관 용할 필요가 없는 뻔뻔스러운 비도덕성으로 간주되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 의 불일치의 정도에 대해 동의할 수가 없는 것이다. 베이컨주의자들은 반대해야만 한다(그들이 반대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 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들은 과학이 모든 이성적인 사람들에 의해 안정되 는 하나의 유일한 구조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구조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 해야 한다. 죽 과학은 종교, 국적, 당의 제약성을 초월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과학아 뻔뻔스러운 비도덕성에 관한 그 논쟁을 제한할 수 있고 행 복한 결론에 이르도록 도울 수 있다. 이것이 베이컨주의가(심지어 자유주의 베이컨주의조차도) 어떻게 다른· 현대 철학들보다 덜 관대한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하고 전지한 베이 컨주의자들이 어떻게 과학적인 불관용에 관해 겨정하게 되었는가를 보여 준 다. 예를 들어 존 스튜어트 밀과 그의 대자(代子)인 러셀을 생각해 보자. 그 둘은 자신들의 관용과 그들의 과학주의를 조화시키려고 시도했다. 자신의 베이컨주의가 불관용적인 함정이라는 것을 발견한 다른 베이컨주의자들도 실용주의자로 전향했다. 실용주의의 공식적인 창시자는 주요 베이컨주의자 인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이다. 버트랜드 러셀은 그에게 때로는 커다 란 존경을, 때로는 솔직한 경멸을 보이면서 가장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베이컨주의적 자유주의 철학을 고려해 보자 . 이 자유주의는 어떠한 논쟁 도 없이 그리고 이것을 정당화할 필요성이 전혀 없이 어떠한 개인들의 기 호라도 허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말퀴스 드 사드는 이 생각을 아주 만족 스럽게 논박했고 그러므로 자신이 위대한 철학자라고 생각했다. 그의 논의 는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었다. 죽, 이 논의는 심술쟁이로 불린다. 이것에 의하면 베이컨주의자 또는 스미스주의자 또는 벤담주의자의 견해는 이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이상향의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들의 견해가 너무나 자주 한 사람에게는 고가이며 다른 사람에게 는 독이 되며, 또 순전한 우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일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들보디- 우월하기를 원하는 것 등 때문에 사람들의 기호는 본질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가 없다. 사드의 논쟁에 대해서는 확실한 하나의 대답이 있다 : 그 대답이 항상 매 우 설득력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모든 논쟁은 대답이 가능한 것이다. 신베 이컨주의자들이 사드에게 제공하는 그 대답은 인간의 본성에서 출발한 것 이다. 죽, 가학성 변태성욕 sad i sm 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정 치적 견지에서 무슨 의미인가? 신베이컨주의는 (거의 ) 모든 사람들의 기호 가충분히 자연적이고,따라서 고전적인 이론에 아주잘맞을때만적용가 능한 것이다. 이것은 베이컨주의가 비록 상당히 지유스럽기는 하지만 불관 용적이라는 점을 시사해 준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신베이컨주의 철학자 들의 견해에 따라 비자연적인 선호를 제의함으로써 베이컨주의를 강화(아 마 재교육에 의해서)할 수 있는 법이 필요하다. 이것은 참으로 야경국가로서 의 정부로부터 베이컨주의적 합리성이론을 위한 의무적인 재교육으로의 전 환이다. 이것은 베이컨주의가 관대하지도 자유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많은 신베이컨주의자들은 인간본성에 대한 논쟁, 즉 대 경제철학사가 인 조셉 슘페터가 이름 붙인 인간의 성선설에 대한 논쟁을 포기했다. 이것 은 전체 구조를 위태롭게 한다• 베이컨은 인간의 이성은 본래 옳고 따라서 찰못된 이성은 틀린 것 투성이인 미신 때문이라고 가르쳤다 . 이성은 타고나 면서부터 선하고 또 인간의 가장 중요하고도 다른 것과 구별짓는 특징이기 때문에 인간은 본래 선하다. 이것은 존 록크의 결론이다. 만약 이것이 거부 되어야 한다면, 여기서 유도되는 원칙들도 또한 거부되어야만 할 것 같다. 베이컨주의자들이 사드의 논쟁에 어떻게 다론 반응을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경제학에서 노벨상 수상자이며 신고전주의 또는 시카고학파의 거두인 F. A. 본 헤예크는 포퍼의 편을 들면서 베이컨의 합리성이론을 거부했다. 그 는 아직도 시장 메커니즘이 가장 합리적인 사회적인 통제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는 이것이 완전하지 않아 이것울 보호할 입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본 헤예크는 시장 메커니즘이 자유주의적인 가치를 되풀이
하여 깨우치기 위한 최상의 도구이며, 입법은 단지 이것을 보충하고 보완하 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 이것은 분명히 회피적이다. 왜냐하면 입법 은 국가에게 야경원 이의의 다른 기능들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 는 신고전주의 이론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이들은 부정적 대답임) 국가가 경제를 간섭해도 되는가의 여부가 아니고 얼마나 많이 간섭하는가에 달려 있다. 포퍼와 겔너는 이것을 자명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데, 그들이 상당히 옳은것 같다. 그래서 이른바 자유주의자로 일컬어지는 신베이컨주의자는 사라졌다. 이 주장은 모든 사람들의 기호는 주어진 것이고 의심할 바 없으며, 정부가 해 야만 되는 모든 것은 그들을 보호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약속과 계 약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라는 자유주의적인 주장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러 나 이 주장은 벤담이 논쟁했던 것처럼, 우리가 호의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원 칙에 기초를 두고 있다. 국가가 자비심과 합리성을 부여하도록 요구되어야 만 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분명히 자유주의 철학은(베이컨주의 사상가들에 의 해 우연히 제안된) 데이비드 흄의 〈 지적 디원주의 이론 〉 이며, 여러 사상들간 의 경쟁이고, 또한 존 스듀어트 밀의 〈 다수의 억압에 대한 소수의 법적 방 어이론 〉 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불관용에 대한 볼테르의 악의에 찬 강경한 공격은 스피노자에서부터 버트랜드 러셀에 이르는 현대사회를 이 끌었고, 또 이것을 추구했던 베이컨주의자들의 전통처럼 장엄한 현대의 자 유주의적 • 관용적 사회가 생겨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즉, 종교적인 억압자가 비종교적인 사람보다 덜 합리적인 것을 인지하는 것은 많은 통찰 이 필요하지 않으며, 또한 이것은 베이컨주의와 꼭 맞아떨어진다. 따라서 확 실히 베이컨주의의 전통은 부분적으로는 관대하고, 부분적으로는 그렇지 않 다. 이것은 수정을 필요로 한다. 그 제안된 수정안이 바로 실용주의이다. 2 관용의 철학적 기초 실용주의는 관용을 우선으로 한다. 관용계 대한 현대적인 첫번째 논쟁들
은 까다롭지 않았고 실용주의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유럽에서의 종교전 쟁은 사림들로 하여금 올바른 교회에 가도록 만들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 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선언하게 되었다. 매우 일반적으로- 관용은- 고대로부 터 간단한 실용주의적 기반 위에 유지되어 왔다. 모든 원시사회들이 불관용 적이라는 것은(초기 베이컨 추종자들은 미개인들이 종교적인 미신으로부터 소위 자유롭다는 점에서 고결했다고 생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베이컨주의자 들의 이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화들이 자신의 문화가 다른 모든 문화들보다 분명히 우월하디는 독단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러한 주장은 또한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국 과 인도, 바빌론, 그리고 이집트에서 발견된 것 같은 가장 발달된 몇몇 문 화에도 똑감이 적용된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리스에서 이 교리는 적극 거부되었다. 그 이유는 진정한 인간본성은 어느 곳에서나 같은데 단지 인습 에 의해서 차이가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많은 문화들은 우월성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대했으며 그 예로서 전통적인 유대교를 들 수 있 다(지금의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것은 아님). 즉., 비유태인들은 유태인들보다 지 켜야 할 의무들이 적고 따라서 자신에게 손실이 될지라도 비유대교인들이 유대교의 높은 수준의 의무사항들을 지키지 않아도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 든 비난될 수 없다는 것이 유대교의 신조이다. 관용에 대한 이런 드문 예는 미루어 놓고, 관용에 대해 대부분· 알려진 경우들-은 단지 다른 여러 가지 지 적 구조들의 상대적인 타당성에 대한 실용주의자들의 인식에 의해 정당화 된 실용주의적 논쟁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 여러 가지 다른 지적 구조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신을 숭배하여야만 한다거나 또는 모든 사람들이 자 신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신을 숭배해야만 한디는 주장으로 나약하게 표현 된다. 바로 이런 견해의 복잡한 형태는 대개 회의적인 신앙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리고 회의적인 신앙주의는 일부 구조들을 생존할 수 없는 것으로 제의할 수도 있다—―적어도 회의적 신앙주의는 다윈주의가 나타난 이후 그렇게 해오고 있다――그러나 회의적인 신%낙적는 모든 생존할 수 있는 구조가 옳은 것으로 생각한다. 더 복잡한 변형은 생존 가능성을 정도의 문
제로서 볼 것이다. 이것은 다윈주의의 옷차림을 하고 진보주의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종종 행해진다. 생존경쟁은 가장 알맞은 것을 선택하고, 새로운 경 쟁자는 더욱 열심히 투쟁하여야만 한다. 이 다윈주의 신봉지들의 설명은 거 대한 나라의 교육제도의 개혁을 추진하는 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모든 시 대를 통해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인 미국인 철학자 존 듀 이의 이름으로- 통한다. 그러나 다윈 신봉자들의 의관은 분명히 속임수이다. 적자생존이 아닌 종(種), 국가 또는 종교는 모두 똑같이 생존할 수가 있다. 즉, 적자생존을 하는 종(種), 국가 또는 종교만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분 명히 채식동물은 육식동물과 경쟁하지 않고, 사냥꾼은 거리의 청소부와 경 쟁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자(適者)의 척도로 종족, 국가, 종교, 또는 다른 어떤 종류의 체제들을 순위별로 배열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윈주의와 반대 °l 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지향적 실용주의지들은 절대적인 전리를 상대적인 전 있리로는 전바리꾸의기 를등 급원하둘고을, 가우지리고가 있그지들 이않 는주 장한하 이는것 상이대 지적나 진치리게를 자 평유가적할 — 수— 심지어 식인종의 풍습조차관용할정도로-일수도있다고느끼기 때문 에 바로 이 가짜 다윈주의 생각은 현대의 과학지향적 실용주의자들에게는 중요하다. 우리는 이제 모든 진리의 이론들에 공통되는 문제의 지뢰밭에 들어가야 만 한다. 경험에 따르면 이것울 우회하려고 노력을 하면 오히려 조만간 바 로 그 중심으로 곧바로 들어서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먼저 극복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더 좋다. 그러면 무엇이 진리인가? 답은 조금 기다렸다가 듣기로 하고 대신에 이 질문이 왜 압박을 주는가 를 물어 보자. 왜 우리는 이 문제를 우회할 수 없을까? 우리는 전리에 대한 상식적인 개념으로 이것을 메울 수 없을까? 그리고 왜 실용주의자들은 그 들의 철학의 핵심으로서 상대적인 전리론을- 주장하는가? 이것은 말하기 매우 어렵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들 중 일부는 철학자이 고 과학자, 역사가들임 )은 진리이론의 지뢰받으로 들어설 필요기·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실용주의적 정신은 보편적이지만 과학적 정신은
그렇지 않으며, 따라서 과학적 정신은 절대적인 진리가 조금이라도 부족한 것이면 어떤 것이든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그렇다면 실용주 의자들은 분명히 패배를 인정하고 실제적인 성공의 이름으로 완전한 이론 적 체계를 위한 탐구를 권해야만 한다. 이러한 생각은 베이컨이 그 당시의 실용주의에 대한 대 공격에서 처음 표현한 것 같다. 그러나 이 생각은 잘못된 것이고, 전 시대를 통해 가장 훌륭한 실용주의 자인 피에르 더행에 의해 바뀌어졌다. 그는 모든 지적 전통들은 그들의 핵 심으로서 궁극성과 권위의 지위를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웃었다. 자신 이 정통 로마 카톨릭교도인 더행은 과학의 내부에서든 의부에서든 견해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실제로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과학은 주어 전 문제에 대해 주어전 시간 내에서 만장일치를 즐긴다고 말한다. 이것은 형이상학을(물론 형이상학이 전통에 따라 다양성을 갖지만) 과학으로.부터 분리 하여 유지해야만 한다. 그는 이것은 우리가 과학적 진리와 형이상학적 (또는 종교적 ) 전리간에 분리를 유지할 때만 오직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과 학에서 우리는 과학적 이론들이 어떤 주어진 시간에 즐기는 그 만장일치에 도 불구하고 변화를 허용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과학적 진리는 실용적이고, 상대적이며, 변화한다• 대조적으로 전통적인 견해가 주장하는 전리는 형이 상학적이고 절대적이다. 현재까지 관용에 대한 좋은 논쟁거리들은 실제적이거나 또는 회의적이다. 지금 실제적인 논쟁이 설득적일 필요는 없다. 죽, 이는 어떤 더 강한 실용 적인 생각이나 어떤 원리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분명히 설득적일 수 있다. 실용주의는 실용성이 전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을 제의하고는 다른 어 떤 원칙도 생략한다. 만약 단순한 의견들에 대한 관용조차 해로운 것임이 판명되면, 사람들은 이러한 의견들을 억압하는 것이 그것들을 관용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해롭거나, 또는 억압을 권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그들이 그 억 압을 권하는 견해들보다 훨씬 더 의심스러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우리가 지식에 관계없이 관용을 적절하게 공식화할 수 없기 때문에 관용 자 체를 원칙으로 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우리의 견해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있기 전에 -특히 교
육에서 - 우리가 옳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해야만 한다는 것울 주장한 사 람은 바로 버트랜드 러셀(그의 고전인 『 회의적 수필집 』 에서) 자신이었다. 그 러면 우리는 우리가 옳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과학이 자체의 원리들을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할 수 있는가? 과학 자체가 어떤 전제조건 들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러셀 자신은 실용 가능한 하나의 기준을 제시한다. 즉, 모든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것만을 받어들이고 그들 사 이에서 논쟁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간에 의심하러는 것이다. 이것은 고전적인 관용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기억하듯이 관용에 관한 고 전적인 에세이는 레씽의 극작인 『 현인 나단』에서 나오는 우화로, 아버지가 그의 세 아들(세 가지의 서구 종교) 중 하나에게 반지 (전리 )를 주었는데 다 른 두 아들에게도 똑같은 복사품을 주면서 누구에게 진짜를 주었는지 말하 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레씽의 견해는 회의주의와 베이컨주의자의 이성주의를 섞은 것이었다. 어쩐지 그들 모두는 의문만으로는 행동을 위한 안내자로서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죽, 행동은 확신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 서 유태인들, 기독교인들, 이슬람교도들 각자는 자신들의 믿음에 따라 행동 한다. 그러나 적대감이 일어날 때는 의문이 그들을 억제해야만 한다. 그러한 토론들이 보통 수반하게 되는 확신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모두 크게 잘못되어 있다. 독단주의와 회의주의가 섞이지 않는다는· 이유, 그 리고 정말 절박한 질문인 〈우리가 무엇을 관용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이 언급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독단주의와 회의주의 롤 둘 다 추천한다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종교적인 잔학행위 ——식인 • 종적인 종교와 종교적인 목적으로 미망인을 장례의식에서 장작더미에 불태 우는 행위 ――에 대해 관용을 권하는 사람은 확실히 없다. 그리고 이것은 실용주의를 끝내는 것이다! 더욱이 실용주의자들은 과학적인 진리가 실용 적이어야 하고 형이상학적 진리는 절대적이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과학과 종교가 서로 관용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자들이 어떻게 과학 안에서 반대자들을 관용할 수 있는 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유대교인들 또는 브라만교인들을 관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실용주의자들이 반대하고 심지어 화를 내가까지 하는 것은 바로 여기이 다. 그들은 위의 토론이 뒤죽박죽이고 피상적이라고 선언할 것이다. 즉, 만 약 우리가 진리를 정의하기 위한 시도를 먼저 시작했더라면, 우리는 위와 같은 불합리한 결론들에 도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과학적 또는 형이상학적인 논쟁에서 전리의 상태를 주장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 는 것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3 진리의 정의 우리는 전리에 관해 상충하는 직관둘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이런저런 생 각이 사실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것과, 또한 사실을 실재하는 것 이 상의 것으로 가정하는 것은 바보들의 천국(이곳에서는 재난이 올 때까지 보장 되지 않은 안정감을 즐길 수 있음)에서나 거짓으로 살 0}가 는 것이 허용되지 그 의에는 유익할 게 없다는 직관적 통찰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직관에 따라 의견의 전실 여부는- 사실과 일치하고 있거나, 의견과 사실 사이의 합일(혹 은 일치) 속에 있다.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표현하거나, 명료 하게 밝히거나, 정의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다시 한번 고전적 합리주의자의 심리학과는 반대로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매우 잘 알려지고 이해된 한 아이디어의 예가 있다. 그 반대되는 직관은 현대사회에 서 중요하며 동시에 깅하다. 그리고 그러한 직관은 나의 전리가 있고 너의 전리가 있고 그리고 그 사이에 전리가 있다는 혼한 주장 속에 종종 불완전 하게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심리학자가 최근에 『 간디의 진리』라는 제목으로 책을 썼을 때, 독자들은 이것을 간디가 발견한 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간디가 진리라고 믿고 있 었던 것이 무엇이었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그가 믿은 것이 그 사실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는가? 이것은 예비적인 상황에 불과하다. 이 예비적 상황을 부인하는 사람은 누 구든지 그 이유를 말하도록 요구될 수 있다. 그것은 설명력 exp la nato r y
p ower 을 요구하는 어떤 진리이론의 견지에서 봐도 매우 강력한 요구일 수 있다. 확실히 진리에 관한 다른 대중의 의견들로부터 설명해야 할 더 많은 사실들이 있다. 예를 둘어 그 유명한 철학자 헤겔의 모든 추종자들은(모든 정통 맑스주의자들을 포함해서, 여기서 맑스주의자들이란 지구상에 있는 모든 공산 정부의 철학 문제를 담당하는 거의 모든 공식 대변자들이 또한 포함된다) 전리는 자기모순적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예는 그들에게만 있는 것 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모순이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믿는다〉라고 말 울 한 지도적인 기독교 신학자요 교부 Church Fa t her 인 터률리안을 여기에 포함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것이 모순이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믿는다〉는 것은 공식적이고 문제성이 있는 번역이다. 신학지들이 세 개는 하나와 같다는 불합 리한 함축성에 대해 쓸데없이 걱정하였기 때문에 이 불합리성은 신학자들을圖 겨정 하게 하였던 소위 말하는 신성의 삼위일체 문제이다. 그러나 실제로 터률리안은 육 체적인 부활에 관해 말했던 것이었는데 그 믿음이 모순이라고 단순히 인식하였던 것 같다). 진리의 이론이 어떤 사실들을 설명한다고 가정하자. 그럼 만약 설 명이 논리적이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모든 모순둘은 잘못된 것이라는 그 논 리적 명제와 일치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헤겔주의자들의 진리이론을 뒤 섞인 것이라든지 또는 은유적인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을 제의하고는 자기 모순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또한 전리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적절히 설명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전리와 관련된 문제에 관하여는, 특히 지식과 신앙에 관하여는, 대중의 의견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은 논리적 관점에서 (논리적인 역설이든지 다른 문제이든지간 에 ) 일부 사실들울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은 논점울 교묘히 회피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말하자면 논리는 소위 일치이 론 corres p ondence t heor y@의 이익이 되도록 편견적인 것 같다. 이것이 논쟁 @ 인식론에서 전리론의 하나이다. 대웅설(對應說)이라고 하는데 이는 어 떤 이론이나 문장의 참, 거짓은 사실과의 대웅에 따라 판가름난다는 견 해이다. 예를 들어 〈소의 뿔은 두 개이다〉라는 문장은 실제의 소와 비 교해서 뿔이 두 개이면 참인 문장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인 문장이 되는것이다.
울 시작하는 데 있어 너무 권위적이지 않게 들리도록 우리는 즉시 수학적 인 진리는 논리적인 진리와 같지 않고, 전리에 대한 당연히 원초적인 수학 적 직관은 원초적인 논리적 직관들보다 훨씬 더 상대주의적일 수 있으며 심 지어는 실용주의적일 수도 있다고 말해야 한다. 아마도 이것들은 불쾌한 사 실들이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다른 것이었으면 하고 기원한다고 해서 그것 들이 변화될 수는없다. 보다 근본적인 설명으로 들어가 보자. 상반되는 사실들이 전리라고 생각 하는 헤겔주의자들의 생각은 제의하기로 하고 가능한 이론들을 소개 하겠다. 첫째, 일치이론이란 것이 있다. 이것은 위의 두 직관 중의 하나를 전리로 받아들이고, 다른 하니를 잘못된 것으로, 뒤섞인 것으로, 또는 단순한 말장 난인 것으로 거부하는 이론이다. 그 일치이론은 하나의 유일한 전리의 기준 과 일치시킴으로써 모든 진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일치이 론은 전리의 절대주의자이론 또는 진리의 절대적 이론 또는 절대적 전리의 이론으로 일려져 있다. 이 이론을 전리의 절대주의자이론이라고 부르는 것 이 이것을 진리의 일치이론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적절하고 명쾌하다. 그 이유는 사실에 대한 어떤 간단하고 구체적 인 몇몇 진술이 맞다는 사실을(단 그 사실들이 그 진술이 말하는 바대로이기만 하다면) 제정신울 가전 사람이면 아 무도 거부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치는 진리에 대한 모든 이론에 공통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전리의 절대주의자이론은 해가 서쪽에서 뜨전 동쪽에서 뜨건, 우주가 지구중심이건 태양중십이건, 양자에 관해서건 신의 존재에 관해서건, 모든 명제에 대해서 똑같이 주장한다. 따라서 절대주의자 는 해가 동쪽에서 뜬다고 하는 전술은 맞고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하는 진 술은 톨리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실제로 그가 그렇게 말하느냐 안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로 치고). 그는 지구중심이론은 틀린 것이고, 태양은 우주의 중심 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 은하계의 중심에도 있지 않기 때문에 태양중 심이론 또한 틀리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는 또한 한 사람은 신이 존재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 두 가지 신관(兩視) 모두 의심스러운 것이며, 그리고 비록 우리는 둘 중에서 누
가 맞는가 하는 판딘을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는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은 맞고 한 사람은 툴리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전자가 맞다고 하 고, 다른 사람들은 후자가 맞다고 말하며, 또다른 사림들은 증거가 불충분 해서 또는 홍미가 없어서 또는 둘 다를 이유로 판단을 보류한다. 둘째, 진리에 대해 정합설 coherence 이론 ® 이 있다. 즉, 이는 모순이 없 기만 하면 어떤 전술도 지신의 견지에서 보면 맞는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합법적이고 보편적으로 인정된 위치를 가지고 있고, 아무도 이 것에 대해 이 위치 밖에서의 타당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절 대주의자이론과 경쟁하는 이 진리의 정합성이론은 용어가 좀더 세련되어야 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 이론을 제한된 진리의 정합성이론 으로 이름붙이고 지금까지 표현된 말로 그대로 쓰자. 우리는 제한된 정합성 을 그 경우의 픽위크적 의미에서 in Pic k wi ck ia n sense 진리로서 인식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픽위크 페이퍼 The Pic k wi ck Pap er s 또는 심지어 디킨스 의 전체적인 작품세계를 완전히 이해하는 경우에만 픽위크 씨의 어떤 점이 전실이고 어떤 점이 거짓인지롤 말할 수 있다. 디킨스는 픽위크가 총각이었 다고 말했기 때문에 픽위크 씨가 결혼했다는 것은 거짓일 뿐만 아니라, 디 킨스가 명백하게 혹은 암시적으로 부인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 때 비교종교학에 관해, 또는 성교육에 관해 강의를 했었다는 것도 거짓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디킨스 작품에 후속편을 쓰는 사람은 누구든지 픽위크 씨에 관한 사실들을 고안해내야만 할 것이지만, 그 사실들은 모두 그와 맞 는 것이어야만 할 것이다. 이 제한된 정합설이론은 특히 수학에서 중요하다. 수학자는 수학자의 자 격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의 구조에 대해 홍미도 보이지 않으면서 기 하학을 발달시킬 수도 있다. 그가 그러한 관심을 보일 때 우리는 그가 수학 자이기를 그치고 물리학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데이비드 힐버트는 @ 인식론에서 진리론의 하나이다. 정합설(整合說)이란, 대웅설과 달리 사 실과의 대웅 여부에 따라 전리가 결정되지 않으며, 이론이나 문장 자체 의 논리적 일관성에 따라 전리가 결정된다는 견해이다.
그가 유클리드 기하학을 형식화하였을 때는 수학자로서, 그리고 그가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힐버트-아인슈타인의 공식을 개발했을 때는 물리학자로 서 기하학에 관해 썼다. 힐버트를 두 사람으로 나누는 것은 물론 인위적이 고, 심지어 한 연구에 대한 그의 관심으로부터 다른 연구에 대한 그의 관 심을 기술하려는 하나의 은유에 불과하다. 힐버트는 유클리드 기하학에 관 한 자기의 견해를 바꾸려고 했고 바꿀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힐버트 아인슈타인 공식을 개발했을 때는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해 인정했던 진리 는 제한된 일관성의 진리였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그의 견해를 바꾸지 않 고 있었다. 이것은 물론 과학사 전반에서 보면 사실이 아니다. 유클리드 기 하학은 전통적으로 절대적 진리의 위치를 인정받았었고, 이 위치는 최근에 박탈당했다(아인슈타인에 의해). 한 수학자가 뉴턴역학에서의 어떤 한 어려 운 문제를 풀고 있을 때 진리에 관한 한 우리가 그의 일을 수학이라 부르 건 물리학이라고 부르건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최근에 우리가 제한된 정합성의 기준에 의하여 그의 공리를 전리라고 인정하기 원할 때는 그러한 연구자를 명확히 수학자라고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가 아 인슈타인이 뉴턴역학으로부터 절대진리의 위치를 단지 한번 빼앗었다는 사 실의 관점에서 그렇게 인정하기를 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위의 토론은 몇 가지 어려운 점들을 불러일으키거나 몇 가지 엉성한 결 과들을 갖게 한다. 첫째, 이제 뉴턴역학은 제한된 정합성이라는 의미에서 진 리로 인정되고 있고, 마찬가지로 천문학의 태양중심설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해질 수 있고, 심지어 지구중심설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정말로 이 것이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해돋이에 관해서 전혀 이야기할 수 없다! 따라 서 제한된 정합성은 전후관계에 제한되어 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전후 관계를선택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오직 그 답변이 만약 진리의 절대주의지이론을 부 인하는 경우에만 그 제한된 진리 정합성이론을 더욱더 적합한 전리 정합성 이론으로 되게 할 것이다. 이것은 간단하고 분명한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한 사람의 철학자 마리오 번지 교수에 의해 지적되었다• 이 점의 중요 성은 매우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실용주의와 관련된다. 죽, 그러한 실용주의
는 논박될 수도 있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즉, 이것은 전후관계에 의존한다. 실용주의자가 원칙적으로 모든 전후관계는 전리의 지위에 있어서 동등한 권 리를 가전다고 말했을 때 그는 이미 멀리 사라졌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된 지위가 절대적 진리가 아니고 제한된 정합성이라면 비록 실용주의가 별로 홍미없는 것임이 밝혀진다 할지라도 실용주의에 대해서는 반대가 없다. 실용주의자들은 절대적 진리이론의 전리를 부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들은 물론 모든 전후관계에 대한 절대적인 전리의 위치를 부인한다. 이에 대해 베이컨주의자나 고전적인 합리주의자는 반대를 하면서 오직 과학적 전 후관계만이 절대적으로 전리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실용주의자는 그러면 그 룰 독단주의라고 당당하게 비난하면서 아인슈타인도 뉴턴이 그랬던 것처럼 미래의 과학자에 의해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그에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처럼 보인다. 즉, 우리는 과학에 -또는 나 자신의 종교에 ―一절대적 전 리의 위치를 부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각각의 체제는 그 자체 안에 이룩 되어 있는 진리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리는 어떤 하나의 체제 안 에서 단지 정합성에 불과하디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 마지막 이론은 종종 전리의 상대적 또는 상대주의적 이론으로 알려져 있으며, 진리는 각 체제의 전제조건들에 대해 상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고전적 합리주의자들의 독 단적인 절대주의와 실용주의자들의 무차별 상대주의에 대한 어떤 대안은 있 는가? 4 이상으로서의 진리 이것은 2 伐 1] 기 중반의 주요한 철학적 문제이다. 즉, 전리에 관해서 세번 째 대안이 있는가? 그렇다. 고대의 회의적인 선택 一_세 명의 상속자에게 주어전 세 개의 반지에 관한 현자 나단의 이야기에 의해 예증되었듯이 __- 이중에 전리는 하나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 이 이야기는 너무 나 조집하댜 즉, 세 개의 반지 중 하나만이 진짜이다. 어느 하나가 철대적
으로 진리인 여러 가능한 체제들은 무한히 많이 있으나 아마도 이것들 중 어느 것도 전리가 아닐 것이다. 진짜 반지는 우리 눈앞에 있지만 우리는 셋 중 어느 것이 진짜인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모든 체제들 중에서 어느 것도(절대적으로) 진리인 것은 없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실용주의자들은 아마도 우리가 손댈 수 없고, 인간의 언어 안에는 존재 하지 않는 거의 완전한 우주의 체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고 생각한다. 우리는 전리인 광대무변한 우주의 체제를 이해할 수 있을 만 큼 인간의 언어가 풍부한지 아닌지를 알지 못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지적해 야한다. 절대주의자는 반대할 것이다. 두 개의 모순적인 서술들 중에서 _ 말하 자면 위에서 언급한 신의 존재에 관해서 한 사람은 그것을 주장하고 한 사 람은 부인하는 것 _하나는 확실히 맞고 또한 논리의 규범에 의해 절대 적으로그렇다. 상대주의자는 이것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나약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즉, 신성에 대한 개념은 사실상 전후관계에 의존한다. 즉, 같은 전술이라도 힌 두교, 유대교, 또는 스피노자주의 안에서는 디론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절 대적인 진리는 오직 완벽하게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완전한 진리롤가질 수 없다. 이 문제는 아직도 미해결상태로 있다. 실용주의자의 진리이론은 반박할 수 없다. 우리는 이것이 너무나 모호해서 비평조차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이론이 실용주의자들이 원하는 것과~ 다르고, 그들이 주장하는 방법으로는 그들의 문제를 이 이론이 해결해 주지 않는다 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논박이 아니다. 첫째, 실용주의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다른 맥락들의 정당성을 인식하면서 지신의 전후관계에 몰두하는 것을 허용하기를 원한다. 둘째, 실용주의자들은 사람 들에게 종교적인 문제든, 정치적인 문제든, 다론 어떤 문제든, 과학자이면서 다른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을 허용하기를 원한다• 만약 실용주의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이것은 또한 사림들에게 일요일에는 유태인이, 월요일에는 기 독교인이, 화요일에는 이슬람교인이, 수요일에는 힌두교인이, 목요일에는 불
교인이, 금요일엔 도교인이, 토요일에는 신도교인이 되는 것을 허용할 수 있 다. 그러면 그가 죽어 어느 천국으로 갈 것인가? 실용주의자들은 이 비평을 깨닫지 못한다. 독단주의자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지만, 실용주의지들은 대담하게 문제성을 노출시켜 그것을 제거하기보 다는 자신의 체제를 더욱 세련되게 하기 때문에 문제들을.더 복집하게 만 들며 또한 분명히 비평적인 문제를 논쟁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이미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실용주의자들이 자신의 이론을 세련되게 하는 것은 진리의 정 도의 관점에서이다. 위에서 말한 마리오 번지의 견해가 점수를 따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즉, 상대적 진리의 정도는-즉, 절대적 진리에 대한 상 대성 一 ― 상대주의이론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고 절대주의이론의 한 부분 으로서 정의될 수 있다. 절대적 진리의 개념 없이 진리의 정도는 의미가 없 다. 이 마지막 문제는 물질파동법칙과 어윈 쉬뢰딩거와 함께 파동역학(양자 론)을 창조한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철학자 루이 드 브로글리 백작에 의해 이미 제기되었다. 그는 피에르 더행이 주장한 실용주의의 변형에 관히여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더행은 정통 로마 카톨릭교인이었고 그래서 아리스토텔 레스의 형이상학을 지지해야만 한다고 느꼈다. 그는 물리학의 전리의 수준 이 반복해서 향상되면 물리학이 점점 형이상학과 일치할 수 있을 만큼 가 까워지리라는 사치스러운 희망을 가졌었다. 드 브로글리는 이러한 방법으로 더행이 경계선을 가로질러 적의 전영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즉, 그 는 상대주의자가 되기를 멈추었고 절대주의자가 되었다. 이 문제에 필요한 전문적 사항을 덧붙임으로 해서 드 브로글리의 관찰은 이것을 고수하고 또 한 마리오 번지의 토론은 이것을 여러 갈래로 나누었다. 따라서 정말 재미있는 논쟁은 신앙주의적 회의론자(실용주의자들)와 합리 주의적 회의론자 사이에 있다. 즉, 양자 모두 절대적 진리는 아마도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지만, 신앙주의자들은 철대적 진리라 는 바로 그 개념을 포기한 반면에 합리주의적 회의론자들은 이것을 철학의 중심으로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 토론은 신앙주의자들과 합리주의자들 사이의 간격을 거의 좁혀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일단 절대적 진리가 너무 멀고 잡을 수 없는 것이라고 인정
되면 〈 우리가 절대 진리의 개념을 유지하는지의 여부가 무슨 의미가 있는 가? 〉 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실용주의자의 언어로 표현되었고, 그래서 이것은 다음과 같은 실용주의자의 대답을 필요로 한다. 만약 전리에 대한 절대적 개념이 해롭지 않다면 이 개념의 모호성은 부처나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의 모호성보다 더 반대할 만하다! 실용주의자들은 〈 부처나 성 삼위일체는 경쟁체제이기 때 문에 이들을 믿는 것과 절대적인 것과는 별개의 다론 문제이다! 〉 라고 반대 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여러 체제들 중 하나의 체제이다(메타언어적 개당) ! 그러나 이 대답이 실용주의자들에게는 수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대 답은 실용주의 (이것 역시 여러 체제 중 하나의 체제임 )를 파멸시킬 것이기 때 문이다. 불교는 다른 종교들을 관용하고 도교는 디른 종교들을 무시한다. 반 면에 유대교와 기독교는 타 종교를 명백히 거부한다. 물론 이러한 거부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상호 배타적 입칭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 나 선한 기독교인처럼 선한 유태인은 전적으로 이 상대화를 반대할 것이다. 적어도 서양의 세 종교들은 스스로 절대적 진리의 지위를 명백히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극적인 종교개혁이 없이는 상대화될 수가 없다! 따라서 실 용주의는 기독교(단 기독교가 여러 체제들 중 하나의 체제가 아니고 또한 보다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가정한다면)의 관용이 아니라 불교의 관용으 로귀착된다. 모든 권위를 피하기 위해 고전적 회의론자들은 모든 견해를 균형 속에 유 지하도록 권했다. 죽, 그들은 일단 사람들이 어떤 견해에 호의를 가지는 듯 한 경향이 있게 되면, 반대 견해의 주창자들에게 (물론 항상은 아니더라도) 귀 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고 제안하고 있다. 현대 회의론자는 고전적 회의론자 와 손을 잡지 않는댜 즉, 현대 회의론자는 어떤 우유부단한 판단도 권하지 않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독자적인 견해를 가지도록 허용할 것이다. 그 는 또한 독단주의보다는 가설울 권할 것이다. 그러면 궤변적인 현대 합리주 의 회의론자와 궤변적인 현대 신앙주의 실용주의적 회의론자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궤변적인 현대 신앙주의론자는 살며 행동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즉, 우리
는 전리가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의견이 행동 (우리가 확신해야만 하는)의 지침이 되기를 원할 때, 판단해야만 한다. 이것이 신앙주의 실용주의자의 핵 (알맹이 )이다 . 그러나 이 핵은 수분울 함 유하고 있지 않다. 의문도 무력해진다고 반복해서 주장되었다. 그러나 때때 로 믿음도 무력해진다. 모든 것이 때때로 무력해전다. 우리들 중 일부가 무 력하게 되지 않았디는 사실은 우리가 믿거나 의심하는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 확신이 가설보다 더 유용함이 판명된 적은 없었다. 실용주의는 그저 어리석고 단지 하나의 변명이기 때문에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즉, 그 변명 이란 만약 피에르 더행이 로마 키톨릭교인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그의 철학 을 다르게 발전시켰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적 확신을 가진 전 세 계의 사람들에게 다른 세계를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교적 확신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할까? 합리성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며 정의 (定義) _그 정의가 진리, 합리성, 관용 어느 것이든간에 _ 의 문제도 아니다. 합리성은 생각하고 또다시 생 각하는 준비성이다.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신(神)만이 정확히 알 수 있다. 그러나 합리성은 태도의 문제이다. 그것을 실행하기 전에 이것 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려고 하는 것은 자멸하는 길이다. 이것은 비록 우리가 어떤 빵이 자양분이 있는지를, 더군다나 어떻게 자양분을 주는지를 모른다 할지라도 그 빵을 먹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바로 그 실용주의자에 의 해 인정된 것이다. 이제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가 우리의 이성을 모른다 할 지라도 아것을 사용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실상 오늘날의 지도적인 과학 철학자인 칼 포퍼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는 종종 독을 먹고 있 고, 이성을 사용함으로 해서 _ _혹은 잘못 사용함으로 해서 _우리와 지 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파멸시킬지도 모르는,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 는 새로운 세계적인 문제들을 초래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행동이 재 앙으로 귀결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가?〉이다. 신앙주의자는 아 니라고 말하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무기력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투쟁하려고 의도했던 바로 그 독단주의를 추천하는 일을 그만 둔다. 따라서 더 합리적인 대답은 〈그렇다〉이며, 우리는 우리가 재앙을 일
으킬지도 모른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무책임하 게 행동할 것이다. 이 논쟁에서 관용은 있울 자리가 없다. 역사적으로 실용주의의 강점인 관 용이 이제는 실용주의자들과 이성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으로는 너무나 문제 가 많다. 관용은 더 이상 실용주의의 독점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관용은- 합 리성을 구성하고 있는 지식에 대해 과도한 주정을- 하지 않는 합리주의자들 에 의해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성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이성을 믿을 수 있도록 이것 이 잘 정의되어야만 한다는 전제에서는 그렇다. 이 전제는 잘못되었고 지나 치게 합리주의적이다. 실용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우리는 그들아 사적인 여 러 종교적 체제들, 내부의 여러 개념들, 그리고 크게는 하나의 체제 내의 개 념에서부터 전후관계와 전리의 정도의 개념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모 호한 개념들을 허용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반면에 반대자들에게는 높 은 정도의 정확성이 요구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실용주의자들은 어떤 주어진 과학 안에서 더 발달된 이론이 덜 발달된 것보다 더 유용하다 고 보기 때문에, 과학의 진보는 기술적인 도구로서의 진보이다. 이 견해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분명히 잘못되었고, 은유로서 받아들이자면 너 무나 모호해서 쓸모가 없다. 이것은 에른스트 마취, 피에르 더행, 그리고 대부분의 현대 물리학자의 권 위에 의해 용인된 주칭이다. 과학이 더 수학적이고 기술적일수록 일선에 있 는 사람들(실행자들)은 더욱더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주정이 지 금은 도구주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죽, 과학은 진리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 니라 예측을 목표로 한다. 갈릴레오는 중력의 원인을 조사했다기보다는, 탄 도학 등에 적용할 수 있는 정확히 예언이 가능한 공식을 발견한 것이다. 그 리고 물론 예측은 유용성과 똑같은 것으로 가정된다. 이 견해 또한 명백하 게 너무나 잘못되어 있는 것으로서 현재 이것은 전리라기보다 소위 밀하는 유용성 때문에(특히 주창자들에게) 유통되고 있다. 오직 예언 능력만을 가전 공식들이 단지 도구로서 경시되었음은 분명하다. 과학에서 어떤 공식이 왜 맞는가의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는 욕구는 그 공학자들이 공식에 대해 만족
해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거부한다. 오늘날에도 지난 세기에서처럼 뉴턴역 학기 아직도 대부분의 기술자들과 공학자들에 의해 유용하다고― 一 아인슈 타인의 역학보다 더 유용하다고 ―― 알려져 있다. 기술자들이 아인슈타인 역학을 사용할 때,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의 가장 복잡한 이론이 아니라 더 다듬거지기 전의 초기의 이론을 사용한다. 우리는 분명히 과학적으로 높은 가치를 가진 이론과 낮은 기술적인 가치를 가전 이론들(또는 그 반대의 경 우도 마찬가지 )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기술적인 응용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과학적인 생각들과 또는 완전히 기술을 무시하고 개발된 생각들도 . 가지고 있다. 이 두 경우 다 때로는 위대한 과학적, 기술적 가치를 가지기 도 하고 때로는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약간의 통찰 력만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지금 언급한 모든 부류둘의 예를 생각할 수 있 을 것이다. 그러면 궤변적인(복잡하게 사고하는) 사림들이 과학과 기술에 관 해 이야기할 때는 왜 둔하고 미숙한가? 이것은 죄와 과오를 동일시하는 베이컨주의자의 생각 때문인데 이는 데 카르트, 스피노자, 그리고 칸트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 유명한 고전적 철학자 들에 의해 인정되었다. 칼 포퍼가 지적한 것처럼, 일단 우리가 전리와 허위 의 경계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허위의 인정은 불가피하다고 생각되며 그리고 아는 비난받을 만하다고 판단된다. 과학이 전리라는 것과 과학을 생기게 하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이 사람들에 의해 인정되었 고, 그래서 그둘은 과학적인 잘못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침체조차도 비난받 울 만한 것으로 만들었다. 죽, 진리적인 발견을 하지 못하는 연구자는 누구 건 잘못이다. 물론 이 점에서 연구자는 마술사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 리의 기억으로는 마술사가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면 자신이 엉터리 마술사 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며 마력을 가질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 이다. 우리가 모든 잘못이 다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일단 동의하 면, 바난을 퍼붓지 않고 과학적인 잘못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01 다.
5 맺는말 진리의 개념은 직접적으로 종교적이며 도덕적인 의미를 갖는다. 고전적인 합리주의자들은 이러한 함축성을 무시하려고 한다. 즉, 그들은 종교를 경멸 하거나,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영혼의 왕국에서의 이류 시민으로 보았다. 그 리고 그들은 도덕성을 합리성의 한 측면으로 간주했고, 그리고 합리성을 자 연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실용주의자들은 전리의 개념에 대해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시작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개념의 실제적인 의미보다 종교 적인 것에 우선적으로-집착한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가 선조들의 종교를 고 수한다는 명목으로 거짓말을 하도록 허용한다. 그들은 이렇게 매달리는 모 습의 한 측면인 무력감에 대하여 가면을 씌운다. 즉, 믿음은 실제적이며 행 동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디는 주장으로 가면을 씌운다. 여기서 신앙과 믿음이란 고립된 의견이 아니라 조직화된 종교를 뜻한다. 이 조직화된 종교 는 인류의 진보에 대한 두 개의 주요한 조직적인 장애물들 중 하나이다(다 른 하나의 장애물은 공산주의자들의 제국주의이다). 그러나 실용주려지들이 자 신들의 종교를 진리의 기준으로- 만들기 때문에 자신의 종교에 매달리기 위 하여 거짓밀히는 것은 기이할 것이 없다. 그들이 기만적으로 지지하는 그 조직화된 종교가 조직화된 과학일 때는, 그 혼란은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과학의 유용성을 운운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왜냐하면 이것은 과학에 대한 기만을 매우 위험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실용주의의 만연된 혼란은, 특히 고급 수준의 과학과 기술을 일선에서 실 행하는 사림들 사이에서 만연되어 있는 혼란은 더 연구할 주제이다. 그러나 이미 지금 우리는 고전적 합리주의와 실용주의가 오늘날 과학의 신화로서 의 두 기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명한 과학자들과 기술지들이 그들의 좌 담]서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고 있지만 죽흥적인 대화들은 탐정가의 단서 와 같다-단서는 증거로서 무가치하지만 때때로 그러한 증거로 이끌어 주는 대단한 정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의 좌담을 주의깊게 경청하는 사람은 중요한 요점과 그렇지 않은 것을 말하는 그들의 능력을 반드시 인지할 수 있다. 그러한 대화에서 보면
주요 요점을 말하는 사람은 고전적 합리주의라고 표현되며 지나친 자기과 신으로 괴로워한다. 중요하지 않은 요점을 말하는 사람은 실용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 소위 자기기만주의자로 표현되며 과도한 패배주의로 괴로워한 다. 이 대가들은 공석에서는 그들이 사적으로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말한 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분명히 아직도 특별 행사의 공개적인 자리에서 많 은 대중들에게 연설할 때의 행동은 작업실에서의 그것과는· 매우 다른· 것을 강요한다. 즉, 이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대가들은 마치 정치가는 시적인 표 현을, 심지어 거짓말까지도 허용하는 면허증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인정하면서 자신들이 대중의 대변인인 양 그리고 정치가인 양 상상한다. 지금까지 토론된 것들은 이 시대에 잘 알려진 철학들, 즉 고전적 합리주 의와 고전적 신앙주의적 실용주의, 그리고 특히 신앙주의적 실용주의자가 합리주의를 하나의 강령으로서 시인한 과학주의에 관한 것이다. 혼히 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이 대표적 철학들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철학들은 전 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 철학들은 필요한 하나의 예비 단계로, 오 히려 그것을 위한 하나의 준비로서 토론되었을 뿐이다. 전정한 의미에서의 깊은 논의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제 7 장 실용주의 철학과 기술과의 관계 기술철학은 기술적인 사실들을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할 수도 있고 또한 기술의 실용화를 어느 면으로든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할 수도 있다• 이 러한 것들이 의아스럽게 들릴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기술적인 사실들을 설 명하는 것은 사회과학 또는 자연과학에 속해야만 하기 때문이고 또 우리는 딩연히 우리의 설명들이 과학적이기를 바라며, 그것의 영역 안에서 어떤 적 절한 설명으로 한계짓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술적인 성취를 증진시키려는 노력은 공학이건, 행정이건, 또는 다론 것이전간에 어 떤 실용적인 분야에 속해야만 한다. 그러면 기술철학은'기술을 설명하고 증 전시키는 주요한 목표와 관련하여 어떤 역할을 갖고 있는가? 이것은 일반 적으로 사람들이 철학에 어떤 역할을 부여하고 기술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 는가에 달려 있다. 철학을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여러 철학 학파들은 본질적으로 우선 무엇보다 정의면에서 서로 크게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우리는 생활철학이 있고, 전통적 철학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 두 개의 철학의 존재와 특성들은 철학에 대하여 알려진 어떠한 광범위한 정
의보다도 훨씬 논쟁의 여지가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선 이 두 철 학으로부터 시작해서, 이것이 기술철학에 대하여 무엇을 ' 요구하는지 살펴 보는것이 좋을 것 같다. 1 생활철학 생활철학은 우리의 일반적인 삶에 대한, 그리고 무엇이건 우리가 삶에서 부딪치게 되는 주요한 요소들에 대한 태도이다. 대부분의 사림들이 모르고 있는 전통철학과는 달리 모든 사림들은 생활철학을 가지고 있다. 일부 소박 한 사람들도 그들 동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철학을 표현하는 데 매우 능숙하며, 일부 순박한 마음을 가전 성직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고취시 키고 싶은 철학을 역설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육자들도 자신의 생활철학 울 전달하기를 바란다. 이들은 대개 학교 교사들이지만 때로는 소크라테스 와 같은 거리의 철학자들일 수도 있고 군대의 하사관이나 초급장교 또는 심 지어 공장의 감독관 간은 사림들일 수도 있다. 그리고 세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어릿광대들도 그의 생활철학의 대변자들로서, 이것은 그에게도 교육 적인 충동이 있음을 보여 준다. 때때로 생활철학은 시적이고 도덕적인 경지 에 달하지만, 그러나 생활철학은 가장 궤변적인 사상가들에 의해 표현되었 울 때조차도 항상 복잡하지는 않다(러셀의 『 자유인의 숭배 』 참조). 이것은 생활철학이 어느 곳에서나 똑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두려워하고, 방어적이고, 어리석은 사람의 그것은 태평하고 개방 된 사람(러셀과 같은 사람)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부 철학 자들은 개인의 생활방식에서 종종 아마도 불완전하지만 그의 생활철학의 예 롤 보고, 다른 철학자들은 사람들의 그것에서 단지 생활방식의 상부구조. 및 불완전하긴 해도 그들의 생활방식을 설명해 주는 하나의 원칙을 발견한다. 생활방식과 생활철학간의 인과관계에 대한 이 견해들은 실증적으로 충분 히 확인되고 있는데, 이것은 또한 이 양자가 실증적으로 논박받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의미한다. 어떤 사람은 그의 생활방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생활
철학을 발달시켰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어떤 내적 신념을 실천하기 위 한 삶을 실아가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즉,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국민의 영 웅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인물이 되기 위해 장애물을 극 복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서양의 경우수근 좀 다르다. 즉, 서양의 영웅들 은 보통 그들이 성취하기 원하는 일을 하려고 시도한다. 현대화의 사도요 민주주의의 전파자인 기술철학자는 이 다른(특별한) 점을 끊임없이 기억해 야만 하며 그 차이점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삶의 발달과 철학의 발달은 뒤엉켜 있고, 그것들이 함께 성장하는 것 또한 때로는 가능 하며 드물기는 하지만 발생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정말로 홍미 있고 도전적 인 사림들로 그들의 삶은 그들의 생각과 함께 자란다. 이러한 예는 반(反) 기독교인인 러셀과 기독교 교인인 마하트마 간디 (그는 힌두교도이고 요가의 실천가로 알려져 있지만, 여기서는 논의하지 않겠지만 토론될 수 없는 고도의 기독 교적 생활철학을 발달시켰음)만큼이나 다양하다. 그들에게는 잘비가 말한 것처 럼 삶 자체가 예술이요 하나의 예술 작품인 사람들이다. 모든 가능한 생활철학의 주요하고 핵심적인 문제들은 삶의 의미와 이것 의 실제적인 함축성에 대한 것이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모든 전통적인 종교는 이 질문에 대한 답과 이것들의 실 제적인 중요성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서양종교들은 인간에게 삶의 긍정적인 의미를 주는 대답을 제공하려고 시도한다. 이것은 이 대답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어도 합리적으로 만족하게 그리고 유용히게 살아가 게 하기 위해 핵심적인 것이라는 가정하에서,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아 그 둘의 지도자들로부터 정기적인 충고를 받아 더 나아질 것이라는 가정하에 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충고는 어떤 종교적인 가르침의 권위 위에서만 가 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서양종교의 생활철학은 그들이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교리 do g ma 가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을 정당화하는 바로 이 가정 (假定)들이다. 이것은 서양종교 지도지들이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서 속기 쉬 운 사람들을 속이도록 용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실용주의이다. 따 라서 이것이 기술로 간주되기 때문에 서양종교들은 동양의 철학과 종교에 비하면 빈약하다. 서양종교들이 일관성이 있다는 데 특칭이 있듯이 동양의
철학과 종교는, 삶은 의미가 없다는 가르침에 특징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또한 약간의 실용적인 충고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이것의 대부분은 선택된 극소수의 사람들 을 제의하고는 효과가 없다. 동양철학은 반기술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단지 기술이 서양에서 잘 알려진 의미로 사용될 때나, 베이컨주의적 합리주의자의 측면에서 보여 질 때만 그러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기술을 더 넓은 의마로 볼 때, 모 든 동양철학들은 실제적이고 삶의 기술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고도로 기술적인 성향을 가진다. 동양철학은 매우 실용적이고 - 실용주의자는 전 혀 아니지만 - 그것은본질적으로그중심 가정의 실용적 함축성에 관심 울 가지고 있으며 생의 주요 목표를 얻기 위한 방법에 관해 실제적인 충고 로 가득 찼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동양철학은 주요 목표가 마음의 평화물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에 의미가 없다고 가정하면서 동양철학자는 세속에서의 행동에 대하여 거의 의미를 두지 않는다. 즉, 그는 세속적인 행동은 오직 혼란과 좌절만을 가져온다고 보고 있다. 그는 마음의 평화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세속적인 행동의 회피로서 명상훈련을 하고, 이것은 좌절과 무력감에서 오는 것이 아 니라 선택에서 온 세속적인 무위를 얻는 것이므로 완전한 체념상태이면서 완전한 통제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체념과 자기통제를 얻으려는 기법들은 서양에 알려진 모든 동양철학의 중 심이 된다 . 그렇기 때문에 기술을 서양의 전통적인 좁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보다 광의의 측면에서 본다면, 동양철학은 많은 기술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있다. 명상, 체념, 그리고 자기통제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는 이론이 동양에 만 있는 것은 아니댜 즉, 이것은 어디에서든지 발견되며 극기주의 asketi cis m 로 알려져 있다. 국기주의적 생활철학은 일반적으로 잘못 어해되고 있고 종 종 자기학대로 인식된다. 많은 자기학대적인 종교 수련은 특히 이것을 지지 하는 사람들에 의해 극기로 간주된다. 크게 회개하는 것에서부터 자기를 채 찍질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신체에 모든 종류의 고통을 가함으로써 육체를 벌하는 시도들이 분명한 예들이다――성과 술 등을 금하는 것은 말할 것
도 없고 __ ― 일생동안 매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무릎을 꿇고 반시간 동안 지옥을 생각하는 예수회 J esu it수련은 자기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된 자기체벌 수련의 극단적인 예이다 . 비생산적이지만 매우 널리 보급 된 이러한 수련은 극기주의가 무엇인가에 관해 많은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 다. 반대로 극기주의는, 고행자들이 육체를 벌함으로써 극복하려고 하는 우 리 주변의 여러 가지 유혹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우리가 평정과 우아함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즉, 사람들을 괴롭히는 유혹이 무엇이든지간에, 고행자들은 그것을 벌하는 반면에 극기주의자들은 그것을 없애거나 통제한 다. 고행자를 피학대 음란중 환자로 간주해 버리기는 쉽다. 죽, 피학대 음란 증 환자나 가학성 변태성욕자 ® 는 지신들의 기호를 거부하면서도 좋아하기 때문에 매우 부자연스럽다는 점과, 그들이 다같이 모호성과 불안전성을 가 지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서로 공통된다 . 프로이트는 불안정성은 보통 있는 일로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것 때문에 우리 모두가 괴로워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도 역시 선호하는 상황과 거부하는 상황들 울 명확히 구분하는 기준을(비록 평균은 아니지만) 정하였고, 이 기준은 획 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그리고 그는 이것을 획득하기까지 했다 一— 이 주장 은 그에 관한 모든 유명한 전기들과 자신의 논문들에서조차도 충분히 논박되었다). 그러나 극기주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우 리는 많이 얻기를 원할지도 모르 고, 적게 얻고 그것에 만족하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 다. 서양의 극기주의치는 물론이고 동양철학자들조차 우리가 적은 것에 만 족하는 것을 배우도록 권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베이컨주의적 계몽주의는 우리들에게 모든 개인의 소원은 운명적이라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가르쳤다는 점도 사실이다. 위대한 사람은 위대한 정열에 의해 움직인다고 @ 가학성 음란증 sad i sm 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성적 충동을 충족시키는 성심리적 무질서를 말함. 반대로 피학성 변태성욕 mesoch i sm 은 자신이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충동을 만족시키게 되는 성심리적 무 질서를이야기한다.
한 헤겔의 감상적이고 잊을 수 없는 격언에서 볼 수 있듯이, 계몽주의에 대 응하는 낭만주의적 헤겔주의자는 국기주의적 철학과 정반대되는 것을 가르 쳤다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들의 선호에 대해 객관적으로 무관심함을 자랑 하는 계몽주의 철학자가 이 세 가지 선택(국기주의, 계몽주의 ® , 낭만주의힉 가 운데서 두번째 수준의 선호에 과연 무관심을 보일 수 있을까? 베이컨주의 적 자유주의의 가장 명백한 표현형태인 현대 경제이론은 소비자의 선택을 운명적인(외부적 원인에 의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면서도 이 첫째 수준의 무관심으로 두번째 수준의 무관심을 주장한다. 두번째 수준의 선택둘은 거 기에서 취급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 관한 판단은 어쨌든 표현되지 않는 다. 아마도 시장의 행동에 대한 이런 문제들을 겨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 시장이론이 극기적 사회에 적용되는가?〉라는 것이다. 그렇다. 그 극 기적인 사회가 수요와 공급에 반응하는(영향을 받는) 자유시장을 가지고 있 다면 적용된다(소위 말하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그 어느 쪽도 통제하지는 않 는다. 이것은 단지 수요와 공급을 함께 연관시켜 보면 이 양자가 평형을 이루는 쪽 으로 ―— 정부의 간섭이 없는 한――자원들의 배분과 일상품의 분배를 통제한다 는 주장일 뿐이다). 정말로 자유주의적인 경제학자는 극기주의 교사의 봉사도 다른 교사와 마찬가지로 시장 메커니즘(교육에도 자유시장이 있다면)에 의해 좌우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우리는 이미 이 주장이 들리다는 것을 목격 했다. 즉, 만약 한 개인이 최소한의 교육만 받으면 계몽주의 운동가들이 생 각하는계몽의 관점에서 계몽된 사람으로자연스럽게 성장한다는가정이 성 @ 계몽주의는 17, ~|기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에서 나타났던 반봉건 적, 반가톨릭적인 사상운동을 가리킨다. 계몽이란 사회의 결함을 바로잡 고 기존의 도덕, 풍습, 정치 등에 비판적, 합리적으로 대처하는 태도와 그의 보급을말한다. ® 낭만주의는 l 어기 말, 19 세기 중반 무렵에 기원했으며, 당시 서유럽에 퍼져있던 전통, 권위 등의 구질서에 반대했다. 합리주의적, 객안적 태도 에 반대하여 개체의 주관, 비합리, 상상적, 감정적인 것과 연계되는 정 신의 상태나 태도를 강조했다. 낭만주의는 19 세기 예술운동의 중요한 하 나로되었다.
립되지 않는다면(말하자면 합리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선호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아성을 사용한다는 가정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교육과 관련한 전반적인 일은 이 러한구도와상치된다. 또한 고전경제학이 국가의 한계를 합리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리고 혁신의 문제 또는 기술혁산을 위한 동기유발의 문제를 잘 디루지 못하고 있 다는 사실을 생긱해 보자. 이 두 가지의 결합을 함께 놓고 보면 한 대륙에 서만 구입 가능한 제품이 다른 대륙의 시장에 나와 있는가의 여부, 또는 그 것들을 수입하는 것이 기술혁신을 구성하는가의 여부를 말하기란 매우 어 렵게 된다. 통속적으로 말해지는 것처럼 먹으면 식욕이 생긴다는 잘 알려진 사실에도 불구하고 고전적 이론은 기술혁신이 선호(기호)에 끼치는 영향을 다룰수가없었다. 이렇기 때문에 개인의 선호가 어떻게 두번째 수준의 선호 위에 모아지는 가를 우리가 알지 못하게 된다. 심지어, 첫번째 수준의 선호와 자유시장경 제, 그리고 현대적 기술이 주어지면 소비자들의 선호도 멋지게 모아져 (역동 적인) 평형상태가 유지되도록 공급과 수요의 법칙을 따르게 된다는 가정하 에서도 그러하다. 다시말하면, 자유주의적인 경제이론이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현대화라고 불려지는 방향으로 기능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소용없 는 일일 것이다. 세계 제끄}대전 후 처음 3() l;j 동안 현대사회에서 국제적 으로 수행된 현대화의 모든 노력은 경제적 원조라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 것은 후진국가에서 산업을 일으키게 하면 현대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일 상제도를 포함한 모든 것의 현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들에 근 거한 것이었다. 이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좁은 마음을 가진 베이컨주의 자들의 편견이며, 이것이 세계은행 World Bank 과 미국의 연방식품 및 의약 처 FDA 와 같은 기술적으로 핵심적인 위치에 놓여 있는 다양한 조직들을 지 배한다. 〈에너지를 절약하자!〉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양의 구호도 베이 컨주의자들의 무분별과 다를 게 없다. 이것은 개인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하 여 그들의 행동이 합일될 것이라는 희망에서, 개인들에게 무엇을 하는 것이 합리적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그러한 구호가 가능하 지 못하다는 한 가지 이유는 아무도 이 구호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디는 것이다. 만약 내가 노력을 하고 절약을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 은 하지 않는다면 냐는 희생을 하는 것이고 여기에서 아무런 이익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에너지를 아끼게 될 만큼 에 너지 가격이 충분히 오른다면 절약은 일치된 행동이 될 것이다. 단, 에너지 가격의 상승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여 절약하기보다 더 쓰게 되는 경우를 제의하고는. 케안즈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현대 경제학의 어리석음은 생활철학 인 경제학을 하나의 과학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아야 한다. 생활철학으로서의 경제학은 단지 많은 가능한 선태들 가운데 하 나일 뿐이다. 따라서 이 안에 내포되어 있는 기술에 대한 태도는 하나의 생 활철학에 오직 하나만 있을 뿐이다. 다양한 생활철학들이 존재하며 그 철학 들은 자체 내에 함축적으로 다른 여러 기술철학들을 가지고 있디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주의가 아니다. 여기에서의 주장은 모든 생활철학들이 옳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쟁하듯이 진행되고 있는 몇몇 생활철학 중에 극히 일부는 맞는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 거의 모두가 잘못되어 있다. 오히려 여 기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베이컨주의의 선호에 대한 허구가-베이 컨주의는 모든 선호들에 공평하고 무관심하다 _ 폭로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에 공평하고, 무관심한가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생활철 학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때때로 비판적인 재평가를 받고 있으며 또한받아야만한다. 따라서 기술철학의 한 과제는 여러 가지 다른 생활철학들과 거기에 내포 되어 있는 기술에 대한 견해둘을 보여 주고, 이것들을비판적으로 연구해 보는 것이다. 반면에 또다른 측면에서 우리는 그 지역의 가치관을 고수하면 서 서양의 기술은수용하기를권하는선얏센 Sun Ya t -Sen 의 동양철학(지금 산유국이나 후진국가에서 실시되고 있다)을 거부해야 하며, 또한 과학과 기술발 전에 대한 갈망을 포함하여 개인주의적인 세계관을 지지하는 베이컨의 계 몽주의 철학들을 모두 논박될 만한 것으로 분명히 거부해야만 한다. 이 둘 은 모두 쉽게 비난받을 만하다. 왜냐하면 이 두 철학은 명백하게 반기술적 인(서구적 의미에서) 생활철학 다음으로 널리 알려진 생활철학들이기 때문
이다. 따라서 적절한 기술철학이 있는 생활철학에 대한 추구는 거의 시작조 차하지 않았다. 2 전통적 철학 생활철학은 잠시 제쳐두고 전통적 철학으로 옮겨가자. 오늘날 전통적 철 학에 대해 어떤 경시를 - 멸시가아니라면 - 보이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경시는 모든 믿음과 희망을 과학에 두고 있으며 또한 과 학철학을 제의한 모든 철학을 과학에 대한 미숙한 경쟁자로 보는, 그래서 미신적이라고 보는 급진적 베이컨주의자의 견해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인 지도 모른다. 또한 이 경시는 몇몇 유행에 뒤떨어전 고풍스러운 바합리주의 의 변형을 제외하고는 모든 철학에서 전혀 환영받지 못한 채 합리주의적이 고 과학지상주의의 위험한 편견을 가진 신(新)비합리주의자의 견해에서 연 유한 것인지도 모른다. 전통적인 철학에는 정말로 합리주의자의 과학을 선 호하는 편견이 있다• 그 원인은 최근의 비합리주의나 후기 합리주의 또는 변형 합리주의를 제의한 합리적이지 않은 디론 모든 철학들이 보통 철학이 라기보다는 신학으로 여겨지고 있는 비교적 간단한(상당히 임의적인) 이유 때문이다(마이클 폴라니 ). 합리주의적인 철학들의 관심은 항상 합리적인 기준 또는 그 기준들의 선 랙에 있다――이러한 기준들은 과학적인 이론들의 적절성에 대한 기준일 수도 있고, 도덕적인 규칙, 정치적인 규칙, 또는 미학적인 규칙 등에 대한 기준일 수도 있다. 바틀리의 노련한 표현을 사용하면, 전통적인 견해는 정 당화주의이다. 측, 어떤 선택도 합리적으로 정당화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다. 이것은 정당화주의의 어려움-고대로부터 -이 밝혀짐으로써 철 학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죽, 정당화는 정당화의 기준에 의하여 합리화되어 야 하며, 같은 논리로 그 기준 자체에 대한 합리화도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 해야만 한다. 이것은 순환적 또는 끝없는 되행적 논리이다. 결국 궁극적으 로는 어떤 기준이 그 자체를 정당화할 수 있거나 이 일을 하는 데 요구되
는 무한한 기준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두 경우 다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이 위기적인 문제가 해결 불능이라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이 바로 회 의론자들이다. 이들의 주장은 의심이 명제를 무력하게 하기 때문에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것처럼 보여졌다. 이것이 실용주의를 낳게 하였다. 그러나 실 용주의는 많은 것을 너무 많이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 정당화주의와 실용주의에 반대하는 이 시대의 유명한 철학자인 포퍼 경 은 과학적인 방법에 관한 그의 강좌에서 호랑이를 신성시하는 부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는 불행히도 그 부족민들이 호랑이에게 집혀 먹혔기 때문에 그 부족은 소멸되었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그 논조에 있어서 실 용주의적이다. 어떤 믿음들은 자연에 의해 효력을 잃게 되고, 다른 믿음은 자연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합법화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이러한 종류의 합법화는 단기적으로는 너무나 관대하고 장기적으로는 아무 런 약속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호랑이를 숭배하는 모든 부족들이 소멸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도는 지금 호랑아가 아니고 소에게, 이스 라엘은 실용주의자의 이데올로기에 정신을 잠식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 모두는 커다란 희생을 치르면서도 생존하고 있다. 더욱이 인도나 이스라엘 또는 인류가 지구상에서 끝까지 생존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러나 일부 신성시하는 소를 도살하면 우리의 생존 확률은 아마도 증가할 것이다. 몇몇 환경론자들에 의하면, 기술은 이러한 신성한 소들 중의 하나로 비유 될 수 있다. 그들은 서양세계에 사는 우리들이 자동차를 사용하는 것에서 말 타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을 배우지 않는다면 인류는 사멸할 것이라고 생 각한다. 즉, 그들은 핵폭발이나 인구폭발보다도 자동차를 더 위험한 것으로 생각한다. 아마도 그들은 우리가 먼저 자동차의 유혹을 국복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먼저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실용주의는 너무나 많은 것을一一생존하여 온 것 이면 어떤 것이든지 ――정당화시키는 반면에, 이제까지 생존했던 것이 미 래에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없다는 것은 홍미로운 관심사이 다. 그리고 이 문제를 취급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합리적으로 토 론하는 것이다. 죽, 기계장치가 지구상에 천국을 가져다 줄 거라는 예측과
그것이 지옥을 가져다 줄 거라는 예언 중 어느 것이 더욱 그럴듯한가러는 것이다. 이것은 실용주의가 결코 회의주의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없다는- 것 울 보여 준다. 베아컨주의와 실용주의는 모두 극단적이며, 이 둘의 (점점 확 산되고 있는) 결합은 어리석기까지 하다. 이것을 결론지울 간단한 주장이 있다. 죽,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모 든 현자(쩐者)들은 마음의 평회를 최상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확 실히 예의는 있겠지만, 우리가 아무런 편견이 없다면 불안한 사람들이 평온 한 사람들보다 더 잘 지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바보 같다고 선언할 수 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주의자들과 독단주의자들, 국기주의자들과 방종주의자들, 공덕심이 있는 사람과 자기중심적인 사람들과 같은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지만, 우리는 어쩌면 그들 모두를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적은 똑같지만 그들의 기법들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 다양한 기법들이 효 과가 있으며 똑같게 잘 기능하는 것일까? 실용주의자들은 한 이론체계 속 에서 도출한 견해를 다른 이론체계 속에 대입하여 논의하는 것이 불가능하 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각각의 이론체계는 그 자체의 가정들을 정당화하 고 또 그것에 의하여 실용적으로 정당화된디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이다. 모 든 이론체계들은 소위 말하는 생존과 마음의 평화로 이끄는 가정들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마음의 평화는 거의 성취되지 않고 있다. 마음의 평화는 어떤 알려진 이론체계 없이 더 잘 성취될 수 있는가? 만 약 그렇다면 그것들은 대치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닌가? 만약 새롭고 더 나은 방법, 또는 그러한 방법을 위한 경쟁할 만한 것이 있다면 두자할 가치 가 있지 않을까? 마음의 평화에 이르는 더 니온 길을 찾으려는 단순한 희 망조차도 하나의 혹은 다른 전통적인 방법을 우선적으로 선호한디는 이유 로간과될 수 있는가? 물론 이러한 공격이 시작된 이유는 안철부철 못하는 악령에 대한 견해 때 문이다.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행복 또는, 보다 더 낫게, 좋은 삶으로 대치 해 놓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고전적인 계몽철학이나 이것의 경쟁자 ――낭만주의 _를 지지할 수도 있다. 계몽주의는 그 안절부절 못하는
악령을 격리시켰다. 즉, 아델버트 채미소의 우화 〈 피터 쉴레밀 〉 이 그의 그 립자를 다시 찾고자 하는 모든 희망을 잃었을 때 그는 한 여행자가 되었고 자연주의자가 되었다. 곧 채미소는 쉴레밀을 따라 방랑자가 되었고 러시아 에서 모은 식물들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 낭만주의 철학자 헤겔에게 있어서 안절부절 못하는 악령은 나폴레옹과 같은 키 작은 사람이었다. 나폴레옹은 키가 크다는 것을 느끼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 위에, 아마도 수천의 죽은 시 체를 밟고 서야만 했던 사람이다. 이 두 철학 중에서 누가 옳은가? 인간의 본성은 무엇이고 우리는 정말로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나치의 철학자 마 르딘 하이데거 @ 가 권한 바와 같이 위대한 공적을 쌓으면서 살아가기 위해 나폴레옹과 같은 사람에 합류하려고 시도하는 대신에 자연에 대한 하찮은 일을 연구하기 위해 우리의 삶을 바치는 것이 진실로 합리적인 것일까? 오늘날의 철학은 이러한 문제들에 집중되어 있다• 철학자들의 분피는· 두 가지 부류로 니누어전다. 즉, 한 부류는 과학 자체와 과학을 합리성의 패러 다임 par adig m 으로 보는 견해를 추종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과 학과 과학적 견해를 너무나 편협한 것으로 간주하고 과학과 기술은 그 중 요성이 지나치게 과장된 것으로 생긱하여 전정한 신앙의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들 °l 다. 과학을 침묵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과학에 대해 실용주의적 견해를 가 지는 것이다. 즉, 과학이 때로는 매우 편리하기도 한 기술적인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유익한 지적 가치는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과학을 지적인 이론체계로 다루는 것은 과학을 괴싱하게 만든다는 주장도 있다. 즉, 현대의 진보 앞에서 이 이론체계의 영원한 원자들은 분열되기 시직하고, 강 화된 고전적 체계는 무너진다는 것이다. 물론 고전적 물리학이 아직도 기술 로서 유지되고 있고, 기술자들은 아직도 이것을 매우 편하게 쓰지만, 고전 물리학의 합리적이고 지적 이론체계에 대한 주장들은 바뀌고 있다. 이것이 실용주의적 반과학성이다.
@ 하이데거는 현대 독일의 철학자로서 실존주의 철학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나치의 지배 기간 동안 이에 협력하여 오점을 남겼다.
과학을 옹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과학의 이론들이 우리가 가전 최상의 것이며 수용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과학철학 자는 모든 비과학적인 철학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이것울 주장한 후에 과학 을 매우 신용할 만하게 만드는 과학의 합리성에 대해 연구한다. 여기에서 전통적인 철학이 또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즉, 합리성은 정당화이고, 정당 화는 증거를 의미한다. 다시말해서 과학이 최종적안 증거가 아니라면 적어 도 최고의 신뢰성이라도, 최고의 확실성이 아니라면 적어도 최고의 확률성 이라도, 객관적안 확률성이 아니라면 적어도 주관적인 확률성이라도, 이것 조차 아니라면 적어도 현재의 그 예측으로부터 기대되는 유용성이라도 있 어야 한다. 한 사람의 일생은 순례자처럼 이 길을 따라가는 데에 바쳐질 수 도 있다. 루돌프 카냅은 그의 성인 시절의 대부분 기간 동안 유명한 과학철 학자로 지냈다. 그는 검증으로부터 시작하여 개연성으로, 또 주관적인 개연 성으로, 그리고 유용성으로 옮겨갔다. 그가 더 오래 살았었더라면 그는 고 전경제학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사회주의자였지만 중세기에 출 판된 개연성에 관한 논리적 기초에 관한 그의 걸작은 합리성에 관한 하나 의 규칙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사업가들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 에서 그는 물론 활동적인 남녀를 의미했다. 그는 과학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시작했지만 바로 그 책에서는 그러지를 못했다. 대신에 그는 과학적인 예언 둘을 옹호하는 것으로 물러섰다. 과학을 하찮게 보는 사람들의 실용주의는 힘찬 반면, 과학을 옹호하는 사도들의 실용주의는 다소 애처롭다. 물론 과학을 하찮게 보는 사람들은 과학적인 합리성을 하찮게 보기 위해 그렇게 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자신들의 편협한 지적 체계들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여 자신들이 단지 신학자들의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 거나, 혹은 철학자들의 높은 지위를 열망하여 자신들의 믿음체계를 정당화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들이 과학적인 합리성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없 기 때문에 그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길은 신앙주의자의 실용주의적 주장 내 에서 (이것은 전혀 소용이 없는 것이건 하지만), 혹은- 그 주장을 통해서만 가능 하다. 이것도 결국은 그들 자신을 애처롭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철학의 특이성은(특히 여기에서) 기술에 대해 죽
각적인 결과들을 가지기 때문에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 비과학적인 지적 체계는 일부 종교적인, 국가적인, 또는 정치적인 일반적 가정들과 타협한다 ( 〈 이데 올로기 〉 라는 단어는 여기에 알맞는 것 같다. 이 용어는 이 세 가지 이상의 것을 망라할 만큼 충분히 모호하며 이 모호성 덕분에 즐겨 사용되어진다). 사람들 은 지적 체계가 주칭하는 것을 쉽게 믿기 때문에 그들의 합리성을 제쳐두 고, 키에르케고르가 주장한 것처럼, 〈 믿음의 도약냈 7 하든지, 바틀리가 말 한 것처럼, 〈 확신 쪽으로 물러선 〉 다는 묵계가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신앙 주의적 철학자가 하나님을 믿느냐 아니면 사회주의 원조(元 祖 )를 믿느냐 하는 문제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그는 충실한 신앙주의자이다. 다시말하자 면 그가 그의 독자에게 하나님을 또는 사회주의 원조를 믿으라고 권할 때 는 문자 그대로 이것을 의미한다. 실용주의 과학철학자는 그렇지 않다. 실 용주의 과학철학자는, 그가 조금이라도 유익한 학자라면, 물리학의 원리들 은 그것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그 원리가 문자 그대 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히는 것을 고통스럽게 애써 설명할 것이다. 이것은 물론 매우 복잡한 문제이고, 게다가 아주 놀라운 것이다. 그러면 이 것을 천천히 살펴보기로 하자• 3 실용주의 과학철학 과학에서 그 이론적 내용을 빼버리는-그럼으로써 순수하게 지적인 가치를 제거해 버리는――데 대한 주된 이점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논하기 전에 먼저 거론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일의 목적이 바람직하면 우리는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최상의 수단들을 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노력할 수도 있으며, 만약 목적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수단이 아무 리 좋다 할지라도 이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신앙주의자의 관심은 더행에 의해 명확히 서술되었다. 죽, 그는 종교적 인 신념을 과학에 조화시키기를 원하여 과학이 지적으로 상당히 덜 유익하 기를 오히려 더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비종교적인 동료들에게 두 개
의 다른 관심을 제공하였다. 첫째, 만장일치에 대한 관심이다. 즉, 과학이 오 직 사실만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어떤 과학자들은 한 이론체계에 대하여, 또 다른 과학자들은 또다른 체계에 대하여 신념을 갖고 있고, 또 어떤 과학자 들은 전념할 만한 이론체계가 없디는 사실은 과학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 된 다. 둘째, 모든 실수를 피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다. 즉, 이론이 정당화될 수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로인해 과학을 당황하게 하 기보다는 과학에서 모든 이론을 없애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문제는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이 대답은 매우 복잡하다. 해답의 실마리는 이미 클라우디우~ 프톨레미가 그 자신의 천문학이론에서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 과학철학의 견해에서 나왔다. 그는 자연이 단순하다고 확신했으면서도 복잡한 이론들을 제시했는데, 이것 이 허구적이지만 매우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 허구주의 >그 리고 〈 도 구주의 〉 라는 용어와, 〈 가정 〉 이니 〈 화술 〉 이니 하는 용어가 생겨났다(기술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가 너무도 기계와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천문학이 기 술에 대단히 중요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만 할 것이다. 천문학은 항해와 실용적인 달력의 계산에도 매우 중요하였다. 오늘날 달력은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러나 단지 기술지향적인 사회만이 그 사회의 종교 지도자들·조차도 그 필요성에 주 의를 기울일 만할 정도로 정확한 달력의 제작에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면 어 떻게 과학에서 이론적 인 내용을- 제거할 수가 있는가? 프톨레미는 이것을 어 떻게 했을까? 형이상학적인 이론(아리스토텔레스의)에 전념했던 프톨레미는 그 자신의 이론은 허구적인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그렇게 궤변이 아니며, 만약 한 사람의 형이상학이 옳다면 왜 이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다른 이론이 이 형이상학의 적용에 있어서 성공적인가라는 당황스런 질문을 던져 준다. 이 질문은 코페르니쿠스가 천문학의 위치를 스캔들 scandal 과 같은 위치로 간 주하게 하였다. 로마교회의 위치가 너무도 약해 저항하여 권위를 세워야만 했을 때 로마교회 역사상 최악의 지도지들 중의 하나인 성 로버트 벨라미 노 추기경은 1600\ 1oJl 지오르다노 브루노를 말뚝에 박아 화형에 처했고, 약 l 떠 후에 갈릴레오에게 허락이 있을 때까지 코페르니쿠스주의가 옳다고 주
장하지 말라고 요구하면서 협박하였다. 예수회 지도자로서의 벨라미노는 코 페르니쿠스주의를 비과학적이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이것을 천문학적 기술 에 도입하는 책임이 있었다. 즉, 과학은 증거를 요구하며 기술은 오직 유용 성만을 요구한다.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코페르니쿠스주의는 철학적으로는 거짓이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 一_- 아니면 현대 용어로는 연구를 위 한 가설 workin g hyp o th e sis 이 라고 하겠다. 이 모든 것은 만족스럽지 않다. 연구를 위한 가설은 보통 연구자의 연구 영역으로 들어온다. 어려운 문제에 몰두히는 과학자는 자신을 도와 줄 수 있으리라고 희망하는 가설은 어떤 것이든 의심 없이 당연한 것으로 수용할 수도 있다. 따라서 〈 연구를 위한 가설 〉 이라는 단어는 관심의 부족과 비판 적 시각의 극소화를 지칭한다. 한꺼번에 모든 가설에 관심울 가지고 비판적 인 마음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어떤 가설에도 전혀 관 심을 가지지 않고 비판적인 마음도 없다는 것은 약간 과장된 말인 것 같다. 벨라미노 후 1 세기 동안에 상황은 변했다. 과학은 승리자가 되었고 실용 주의는 대주교 버클리의 비평과 의미이론에 의해 지지를 받았다. 과학적 사 실인주다의면에 — —대 한기 술그적의으 비로평 엄은청 뉴난턴 성의공 이임론 에이도 _ 불그구하것고을 수 문학자적 으그로대 로많 은받 아문제들 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의 의미이론은 엄격하게 말하면 개념들은 그들의 의미를 경험으로부터 획득하는데, 이것은 뉴턴역학의 주요 개념에 의해서는 얻어질 수 없는 방법에 의해 이루어전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 러면 뉴턴역학은 하나의 고유이론으로서는 의미가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다. 버클리는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단지 한 세트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매우 유용한 주먹구구식의 법칙 에 불과하다고말했다. 버클리의 주장은 아직 그렇게 복잡하지 · 않다. 버클리의 실용주의에 대해 좀더 설명을 하게 되면 그것은 더욱 복잡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순한 접 때문에 당면한 실제적인 일들에 비해 과학연구와 기술투자는 사소한 것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버클
리는 과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과학을 종교적인 기능으로 인정했다. 신의 뜻 울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학을 알아야만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서 와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명령한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님으로부 한터의 책 메B시oo지k 이of다 .Na t이u r 것e —은— 산 에에 대대한한 두르네 권상의스 책아 론의 성다서른 B해 i bl석e 와에 자불연과하에다 관. 그러나 과학을 의미이론과 숭배이론으로서 사용하는 것은 둘 디를- 더 아름 답고홍미있게 만든다. 과학이 곧 증명과 같다는 생각은 보편적인 의견이다. 코페르니쿠스 추종 자, 베이컨 추종자, 데카르트의 추종자 등 증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 던 사실주의자들은 과학을 최고의 지적 의미로 보았다. 허구주의자들- 혹은 도구주의자들은 신앙주의자들에게 회의주의적 곤경으로부터 탈출구를 제공 하며, 과학에 대하여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은 회의주의자들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과학의 이론적인 의미로부터 그리고 과학의 지적인 중요성 으로부터의 탈출구도 제공하였다. 사실주의자들은 조직화된 종교가 투쟁적 이기 때문에 투쟁적이었다. 이들이 투쟁적인 또하나의 이유는, 이성의 한계 내에서는 시실상 종교를 위한 여지를 전혀 남겨 놓지 않고, 이성의 관계 밖 에서는 어떠한 견해나 의견, 혹은 믿음들을 위한 여지도 남겨 놓지 않는 베 이컨주의적 합리주의의 철학을 이 사실주의지들이 곧 지지하게 되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곧 과학은 승리자가 되었고 수학과 물리학은 그 증거가 되었 다. 갈릴레오, 뉴턴, 그리고 마지막으로 칸트의 권위에 의하여 자연에 관한 책은 수학적인 언어로 씌어져야 한다는 것이 신념의 한 조항으로 받아들여 졌다. 일단 수학적 언어를 알고 나면 자연에 관한 책은 쉽게 읽혀질 수 있 다. 따라서 수학적인 공식화가 과학적인 이론에 과학적인 확실성울 제공하 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연구자들의 목적은 공식을 발견하고 그것을 수학적 인 언어로 쓰는 것이다(독자는 여기에서 쉽사리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위장된 논리적 모순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죽, 수학이 언어라면, 발견된 것들은 그 언어로 바꾸거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로 나타내야만 한다). 수학적인 언어란 무엇인가? 이것은 수학의 공리를 적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공리들은 상당히 분명하고도 확실한 전리이다• 그러나 불행히
도 모든 철학자들을 당황하게 할 만큼 혁명적인 새로운 수학이 출현하기 전 에 사용 가능했던 수학의 공리화되었던 부분은 오직 유클리드 기하학뿐이 었다. 그리고 이 기하학은 문제가 많았다. 칸트조차도 비 (非)유클리드 기하 학에 대하여 언급한 바 있었다. 그는 신기원을 이루는 177 0'f_祥] 취임연설 에서 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생각해 봄칙한 것이지만 과학적인 연구를 위 한 도구로서는 영원히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바유클리드 기하학은 발달되었다(칸트에 대한 반응으로서 ; 러셀은 19 세기말 젊은 시철에 쓴 『 기하학 의 기초』에서 모든 19 세기의 기하학은 칸트에 대한 반발로 발달되었다고 말한다). 처음에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의심을 했고, 다음에는 펠릭스 클레인이 수 학자는 개념적으로 어느 기하학이 진리인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즉, 이것은 경험에 의한 판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미 19 세기 초에 가우스는 기하학들을 경 험적으로 검증해야 한디는 생각-기하학들간의 중요한 실험 - 울 제 안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결점이 있다. 즉, 만약 과학이 수학화되어야만 하고, 그리고 수학은 과학적이 되어야만 한다면, 반(反)회의주의적 철학자 는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4 실용주의와 의미 데이비드 힐버트는 클레인의 증명에 만족하지 않았다. 죽, 클레인의 증명 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힐버트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적어도 개념적으 로완전하게 정리가되어 있으며-적어도모순둘이 없다는것을보여 주 려고 노력했다. 19세 기 말엽 러셀은 기하학의 기초에 관한 책을 썼는데 이 것은 그 시대를 요약하고 마감하는 것이 되었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힐버 트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였다. 죽, 그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게임으로-, 한 세 트의 체스의 말〔馬〕로서 보자고 말하였으며 기하학에서 허용된 각각의 단 어들은 체스의 말이고, 각각의 기하학 공리들은 허용할 수 있는 체스판의 형세이며, 각각의 결론은 한 형세의 체스판에서 다른 형세의 체스판으로 이
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떤 허용된 이동이 그 형세로부터 우리가 모순이라고 인식할 형세로 이끌어가는지를 주목해 보자. 만약 그렇게 된다 면 그 체계는 일관성이 없는 것이고, 명백히 그렇지 않다면 결말이 난 것 으로 그것은 일관성 있는 것으로 판명된다. 공리가 그 자체의 의미들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버클 리에 의해 윤곽이 드러났다. 이것은 실용주의 (도구주의 ) 철학자이며 수학자 인 헨리 포인까레에 의해 개발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으로 기하학을 체 계적으로 제시한 첫번째 사람은 힐버트였다. 이것은 어떻게 의미 없는 문장 들이 대담하게 우리의 지적 세계에 밀고 들어왔는가를 보여 주는 방법이다. 그러한 방법의 사용은 혁신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예를 들어 정보이론은 메시지를 의미 없는 체스의 말로 취급한다. 컴퓨터과학도 그렇다. 그러나 이 것을 알아두자. 죽, 힐버트도 다른 사람들도 의미 없는 문장들이 의미를 가 질 수 있다는 권한을 명백히 부인하지는 못한다. 반면에 이론적이건 경험적 이건 정보의 일부인 의미 있는 서술은 그 의미가 손쉽게 조각조각 벗겨져 서 주어진 목적에 대해 의미 없는 문장이 될 수도 있다. 힐버트의 기법이 • 발달된 후에야 겨우 이 생각이 역전되었다. 즉, 우리가 체스게임과 유사한 의미 없는 언어를 만들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기를 원한다고 가정하자. 이 렇게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것은 홍미로운 일인가? 현재 연구의 경향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즉, 먼저 목적, 과제, 문제 점을 가지고 그런 후에 해결책을 찾거나, 또는 아무 해결책도 없으면 해결 책을 만들어내기 위한 도구둘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러한 경향 이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면 이것은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다• 응용쾨 학의 뚜렷한 특징들 중의 하나가 이것을 논박한다. 즉, 순수과학은 보통(항 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문제에서 해결로 나아가는 반면에, 응용과학은 자주 새로운 해결책들이 문제들을 찾아 돌아다닌다!(방사선 추적이 그 한 예가 된 다). 이것이 힐버트의 게임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일단 수학적인 체계들이 그 의미를 빼앗기게 되면, 경쟁하는 체계둘 중 어느 것이 타당하냐에 대한 문 제가 사라지고, 우리가 회의주의자들을 내버려두고도 의미를 되찾을 수 있
을 것인 가 라는 질 문이 생긴다 .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사실과 일치하는 · 가에 대하여 관심 을 둘 필요도 없이 단어들의 상황논리에 의해서 체계 내 에 있 는 일부 단어들에게 의미를 주 고, 결과로서 생긴 문장들이 사실이라 는 조 전하에 체계 속에 있는 나머지 단어들에게도 의미를 줄 수 있다(일단 문장 안 에 있 는 모든 단어들이 의미 를 갖 게 되면, 그것은 하나의 진술문이 되고 따 라서 그 것은 하나의 전 리 값을 갖는 다 . 즉 , 이것은 참이거나 거 짓 이 된다). 디시말 하면 〈 점 〉 〈 선 〉 그리고 〈 사이 〉 와 같은 단어들의 의미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 를 진리로 만드는 어떤 의미이다. 따라서 공리들은 고유한 전술이 아니 고 전 술의 구조인 행렬표 ma tri x 들이다(행렬표란-원래는 자궁이란 뜻인데 ― — 조 각그립 맞추기 장 난감처럼 일정한 간격을 가전 바둑판 모양의 하나의 표를 말한다). 문장 구조는 함축적인 정의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함축적이라~ 말은 명 백한 것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 명백한 정의에는 어떤 정의된 단어 defi nien dum 를 좌변으로 하고 그것을 정의하는 표현 defi떠 ens 을 우변으로 히는 하나의 공식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의하는 표현은 정의된 단어를 포함하지 않는다. 함축적 인 정의들은 의도적으로 순환된다. 즉, 하나의 점은 유쿨리드의 공리를 맞는 것으로 만드는 어떤 것이며, 그리고 유클리드의 공 리들은 점에 관한 서술이다! 또한 함축적인 정의들은 명백한 정의들만큼 완 전하지 못하다. 명백한 정의가 적절히 수행된다면 원칙적으로는 잉여적인 것 이 된다. 즉, 우리는 〈 정의된 단어只춘 〈 정의하는 표현 〉 으로 대치함으로써 〈 정의된 단어汗璋 7 포함하고 있는 문장을 고쳐쓸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엄격한 하나의 법칙이다. 따라서 이 법칙에 따르지 않는 정의는 엄 격히 말하면 명백한 정의가 아니다. 함축적인 정의는 이와는 다르다. 유클 리드 기하학에서 〈 점 〉 이라는 단어는 점을 뜻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 은 또한 일련의 정돈된 두 실수나 하나의 복소수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 고 이것은 다른 것들을 의미할 수도 있다(실제로는 유클리드 평면에 그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역학의 공리는 이제 의미 없는 것으로 선언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리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공식에 의미를
부여하여 그 결과들기 만족스러운 경우에는 ―― 예를 들어 항해에서, 혹은 인공위성, 기상위성을 발사하고 사람을 달에 보내는 것 一一 우리는 주어진 의미를 고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_一 예를 들어 핵무 기를 폭발시키거나 평화적인 목적들을 위해 원자력 발전소들을 계획하는- ~ ― 우리는 그 공식으로부터 가능한 의미를 제거해 버린다. 우리는 또한 계 속해서 다른 의미들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는 계속 융통성을 가질 수 있다. 아브라함 로빈슨의 훌륭한 발견들 덕택에 수학은 최근에는 대안적인 의미 (논리학자들의 용어를 벌린다면 비표준적인 모델들)에 대한 탐구 를 안정했다. 이것은 이제 표준적인 수학적 기법이 되어 있다. 이 훈련의 요점은 역시 회의주의 철학을 타파하는· 것이다. 죽, 우리가 이 게임을 할 때는 그 공식들이 의미가 없거나 참인 것으로 남아 있도록(결코 틀린 것이 되어서는 안 되도록) 한다. 그 결과는 홍미도 신비화도 없는 단지 쓸데없는 자랑에 불과하다• 가령 우리가 조지 루이스 보게스나 솔 스타인버그가 상상했던 그런 유형의 옛날 여권을 수없이 많이 보관하고 있는 어떤 기록보관소에 들어갔다고 가정해 보자• 거기에는 어떤 간단한 공식이 있다. 죽, 여권에는 사전, 이름, 내용, 그 리고 국적이 들어 있다. 그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우리는 모른다. 심지어 노련한 국경 감시자들도 속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들을 마음에 두지 말자. 우리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여권에 있는 모든 사항들에 맞는 청구인이 나타나지 않는 한 어떤 여권도 청구인이 없다고 규정한다. 비록 두 사람의 청구인이 한 여권 에 맞는 경우에 우리는 그 여권이 둘 모두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한 청구인이 그가 설명하는 것과 맞지 않는 여권을 청구하는 것임이 판명 되면 그의 주장을 취소하고 문제가 된 그 여권은 청구인이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방법으로 하면 우리에게는 전혀 잘못이 없게 될 것이 다. 그러나 국경 순찰대에게는 이러한 일이 조금도 이롭지 못할 것이다. 게 다가 누구든지 〈이 모든 여권들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고 물어볼 수 있다. 왜 일부 신청인들은 성공적이고 일부는 왜 그렇지 않을까? 신청인들이 우 리를 정말 속이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보호수단을 사용하여 속
는 것을 방지하는 것인가? 우리가 하는 게임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려 고 시도할 수 있는 능력조차도 배제한다! 실용주의 과학철학이 일관성 있게 증명을 요구하고 이와 결부하여 우리 가 증명을 획득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즉각적으로 알 수 있다. 벨라미노와 데카르트는 증명되지 않은 이론은 거짓이라고 선언 했다. 버클리와 더행은 이 선언을 완화시켜서 그것이 무의미한 것이라고 선 언했다. 이들은 둘 다 신앙주의적 회의주의자이며 과학을 단순한 기술적 도 구로 본다. 그들의 견해는 최초의 요건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즉, 그들은 과 학을 유용한 것으로 보지 않으며, 과학이 지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을 부인하 면서도 단지 이것이 유용할 수도 있디는 가능성만을 인정한다. 또한 이들은 우리가 언제 과학이 유용하고, 언제 그렇지 않은가를, 그리고 왜 그런가를 알아낼 수 있디는 점도 부인하고 있다. 과학이 유용할 수 있디는· 단순한 가 능성에 대한 강조가 과학의 실제적인 유용성을 설명하는 데는 적국적으로 기여하지 못한다. 이것은 유용성을 제의하면 과학이 제공할 주 있는 것이 ·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하나의 혼한 방법에 불과하다. 그러나 과학이 도대 체 왜 유용한가? 왜 여기에서는 유용하고 저기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그들 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투쟁적인 과학자들이 이것을 설명하였다. 즉, 자연에 관한 책은 인간에게 읽으라고 있는 것이고, 이 책에 대한 실마리가 주어지면 읽혀질 수 있을 것 이다. 이 생각이(본래는 중세의 신비주의적인 생각) 너무 단순하고 만족스럽 지 못한 것 같아 보였을 때, 보다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논점이 발견되었다. 헤르만 본 헬름홀츠는 이미 검증되고 또 시련을 잘 견디어온 이론을 택해 야 한다고 말한다. 이 이론의 예측들이 맞게 된 이유는 그것이 진리이기 때 문이거나 우연 때문이었다. 이 두 개의 이유 중에는 아마도 첫번째가 대개 의 경우 맞을 것이다. 헬름홀츠의 주장이 실제적인 일에 성공적인 과학적 이론을 적용하는 것을 충분히 정당화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실용주의자들은 그렇지 않다. 즉, 그들은 일단 과학이론의 적용이 성취되고 나서야 그것의 실제적인 성공을 인정한다. 물론 헬름홀츠는 과학의 예견적인 성공을 당연 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우리가 성취한 성공을 실제적인 적용이라는 관접으
로 설명한다. 반면 실용주의자들은 실제적인 성공 을 과학적 예언들이 한번 에 하나씩 성공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과학적 예언을 한번에 하나씩 받아들 이는 것은 성공과정이 하롯밤 사이에 멈추도록 하게 하며, 이러한 성공이 매일매일 계속됨으로써 하나의 기적을 이루게 된다. 이미 화이트헤드가 지 적했던 것처럼 심지어 해돋이조차도 이것을 설명하는 이론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기적이다. 왜 우리는 이론들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이들 중 일부는 그 검증과정에서 그렇게 멋진 성공을 거두는가. 이러한 문 제는 헬름홀츠조차도 대답을 못하지만, 적어도 이것은 하나의 사실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헬름홀츠의 주장은 타당한가? 따라서 모든 성공적인 이론을 응용하는 것 은 현명한가? 아니다. 헬름홀츠는 엄격한 검증을 성공적으로- 통과한 이론을 보는 데는 두 가지의 주어전 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 즉, 하나는 그러한 성 공은 이론이 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또다론 하나는 우연 때문아러는 것 이다. 그리고 그는 이론의 전실성이 일련의 체계적인 우연들보다 더 타당한 관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예를 하나 들어 보~}. 해는 매일 뜬다• 우 리는 순전히 우연으로 매일 아침 태양이 뉴턴의 이론에 따라준다기보다는 뉴턴의 주장이 옳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해는 매일 아침 뜰 것이다(뉴 턴이 옳다 할지라도 태양이 영원히 똑같은 방법으로 뜰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것 은 여기에서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우리는 오늘날 뉴턴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대체로 옳을 수도 있다.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가전 것은 아 인슈타인 덕분이다. 이것은 기술에 있어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들 면, 이것은 왜 우리가 모든 과학적인 이론을 모두 적용하지 않고 별개의 종 류로 분리하여 따로따로 이론의 적용 가능성을 검증하는가를 설명해 준다. 죽, 우리는 이론의 적용 가능성을 근거로 일반적인 시실들을 따로따로 검증 한다. 우리는 이러한 검증들을 법으로 요구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전통적 인(베이컨주의적) 합리주의와 전통적인(더행주의적) 실용주의들을 반박하기 에 충분하다. 따라서 전통적인 과학철학을 초월해서 새로운 과학철학(그리고 기술철학
이) 우리의 구상 속에 둘어와야 하며, 특히 이것이 과학과 기술간의 상호 작용을 전통적인 과학철학보다 더 잘 설명해야 하고, 또한 희망적으로 둘 의 관계를 증전시키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것은 의심스럽게 들릴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적절한 설명도 과학에 속해야 한다~ 것을 인식해야만 하고 또한 우리의 설명들이 과학적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반 면에 모든 실제적인 전보는 기술에 속해야만 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철학의 사명은 무엇인가? 아마도 철학의 사명은 설명도식 Scheme 과 개선도식울 제 공함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식들이 반드시 무의미할 필요는 없 다. 즉, 도식들은 언어로서만 존재할 수 있고, 따라서 참일 수도 거짓일 수 도 있으며, 따라서 대치될 수도 있다. 5 맺는말 2 떼기의 실용주의는 중세기의 그것과는 달리 세속적이고 진보적이다. 이 것은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분야에 널리 쓰이고 있다. 실용주의는 그 자체의 인상적이고 학문적이고 기술적인 하나의 체계와, 진리이론, 의미이론, 수학 적 가법 등울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결국에 애처로운 패배주의이’ 다. 위대한 전통은 합리적인 정당화라는 견지에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 했기 때문에 그보다 적은 것으로도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용주의자들 은 너무나 많이 포기하려 한다. 실용주의가 개방적 혼합체이기 때문에, 그 것이 주장하는 바에 대하여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어렵다-적어도 실용 주의는 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자체의 주장에 쉽게 덧 붙이는 한은 그러하다. 예를 들어 이것이 신앙주의적이지만, 이것은 신앙주 의의 기초 위에 과학과 과학적 합리주의조차 허용한다. 그러므로 비판하려 는 노력을 포기하고 실용주의를 단순히 무시하는 것이 더 좋다. 이제까지 실용주의에 반대하여 말해졌던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실용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전 비판에는 별 홍미를 느끼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사회에서의 권리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다. 또한 누구든 고전적 합
리주의에서 합리주의적 실용주의에 이르는 길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위의 말은 고전적 합리주의에 아직도 집착하는 사람에게도 똑걷이 적용~ 다. 이유는 간단하다. 즉, 둘 다 회의주의를 피하기 원한다 一― 왜냐하면 의 심은 아무런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무 엇인가? 의심은 무력한 것이라는 점이 과학적으로 증명되는가? 이러한 주 장을 믿음의 한 조항으로 인정하는 것이 실용주의적인가? 물론 일부 사람 둘은 자신이 명백한 회의주의자라고 공언하고, 다른 사람들은 반(反) 회의 주의자라고 공언한다. 어떤 사람들은 영원히 의심하고, 일부 사람들은 자신 김에 젖어 있다. 또 일부 사람들은 활발하고, 어떤 사람들은 무력하다. 이 세 가지 대립은 여덟 가지의 범주를 만든다. 이들 여덟 가지 각각의 범주에 해당하는 예들이 쉽게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회의주의가 무력하다는 주장은 실증에 의해 반박되고 있다. 그러므로 과학기술철학의 활성화는 모든 의심을 인정하면서도 매우 가능성이 있다. 죽, 활동과 개방 적 마음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것이다•
제 8 장 명상철학과 기술과의 관계 명상철학 Con t em p la ti ve Ph il oso ph y이 무엇인가를 말하기는 어렵다. 앞서 몇 번 지적했듯이 동양철학은 실용을 지향하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 한 수단으로 명상을 권하고 있기 때문에 명상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아마도 스피노자를 제의하고는 어느 서양철학자도 이러한 극단적인 방향으로 간 적이 없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견해를 주로 실용적이라고 생각 했다(그의 가장 명상적인 작품의 제목이 「윤리학 E thi cs 」인데, 이것은 삶에 대한 실용적인 안내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그의 처세훈은 배우는- 것보다 더 즐거 운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가장 행복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학자에게 필요 한 것은 오직 마음의 평화, 세속적 무관심, 일용할 양식뿐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상철학은 서민들이 기술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목표, 즉 안락함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것은 명상철학자가 기 술을 평가할 수 없다거나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 댜 명상철학자는 기술의 가치를 인간의 운명을 개선시키는 수단으로, 훌륭 하고 도전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는 물론 자신의 지혜에 도전하는 어떤 항목도-기계부품의 세부적인 것조차도-관찰할 수 있다. 그러
나 이것은 명상철학자로서 그의 활동은 아닐 것이다. 그는 명상철학자로서 기술이 제공하는 적절한 목표와, 문화에 대한 기술의 영향, 그리고 기술을 적어도 가능한 것으로 만들거나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술이 있게 한 물리학적, 생물학적, 사회적 세계의 본질에 관해 숙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러면 위의 마지막 논점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기술은 어떻게 해서 가능하 며, 또 이것은 왜 순수과학과는 다른가? 1 과학과 합리적 기술 출발점은, 명상적 철학자는 활동적인 일반대중의 행동을 명상한다~ 것이 댜 물론 일부 학자들이 가망이 없으면서도 그렇게 되려고 하지만, 어느 누 구도 순전히 명상적일 수는 없다. 아마도 가장 기술적으로 진보된 병원에서 만 갖추고 있는 현대적 의학장비에 의해 생명이 유지되면서 의식만 살아 있 는 사람은 예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그리고 어떤 악착 같은 압제정권은 시도할는지 모르지만 어느 누구도 순전히 활동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도 공상과학 소설의 로보트화된 인간은 예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사회학자 칼 만하임의 말을 빌리자면( 『 이데올로기와 이상향 』 ), 활동적인 사람은 무모하게 로보트가 된 체하고 명상적인 사람은 자유롭게 떠다니는 영혼이 된 체한다. 이 두 극단은 허구적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어떤 것을 이상화시킨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즉, 허구적으로 단순 화된 극단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연구가 홍미있다면 그것을 계속하면서, 지 나친 단순화 때문에 교정이 필요할 경우 그 결과를 고쳐나가는· 것은 바람 직한 방법이라고 하겠다. 명상적인 사람은 활동성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활동성이란 이리저리 서로 충돌하고 분노하여 밀고 당기면서 맹목적인 힘에 의하여 끝없아 소용 돌이치는 과정의 일부라고 볼지도 모른다. 그는 풀라톤과 스피노자가 그랬 던 것처럼 오직 생각하는 정신만이 이 모든 의미없는 소용돌이에 대해서 목 적을 부여할 수 있고, 사물의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이 그 움직임
을 전정한 행동으로 전환시키기 때문에, 오직 생각하는 정신만이 참으로 활 동적인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우리는 여기에 내용면에서는 거의 다를 바가없는 一 一 만약조금이라도다르다면 어조( 語調 )에 있어서 다를뿐 ―― 두 국단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이 두 개념은 하나이다. 즉, 전정한 행위는 명상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생각이 동양적이기도, 서양적이 기도 하다는 것에 주목해야만 한다. 임마누엘 칸트는 이것이 물질과 정신의 두가지 측면에서 상당히 혼란스럽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물리학을 물질세 계의 행위를 완전히 결정짓는 법칙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행동의 여지, 죽 물질세계에는 정신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죽, 사실의 세계에는 가치를 위한 여지가 없디는 것이다. 또한 그는 정신의 활동이 아무리 정교 하고 상세하며 강력하다고 할지라도 정신과 물질세계 시이룰 연결할 필요 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신과 물질 사이의 연결이 어떻게, 언제, 그리 고 왜 일어나는지를 몰랐다. 다원을 보자. 다윈은 하동동물게서 인간이 출현한다는 구도는 물질과 정 신 사이에 간격이 없는 구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윈의 초기 비망록들 이 출판된 지금 , 그가 철학적으로 그리고 형이상학적으로 매우 야심적이었 고 , 그의 견해들이 그 당시 존 록크의 중심사상에 대한 수정에 불과했던 모 든 전통적인 철학둘을 매우 구식인 것으로 만들기를 희망했디~ 의심 의 여지가 없다. 다윈의 계획은 결코 실현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잘못된 계획에 따라서 그 것을 실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전화가 연속적 과정이라는 것을 보 여줌으로써 인간이 몸과 마음으로 분리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그 연속성은 단지 직관적인 대답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연속성은 논리적으로 분열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 분열은 어떤 점에서는 계속적인 과정 의 결과로서 나올 수 있다(한 물질 조각이 분열할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죽, 분자의 두 배열 사이의 거리는 계속적으로 증가하다가 이윽고는 분자력의 한계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디윈의 연속성이론은 돌연변이 (비연속적인 변 화)의 발견에 의해 , 처음에는 지질학자들에 의해서 그 다음에는 신 멘델주 의 유전학자들에 의해서 반박당하였다.
그러나 인간 정신의 진화에 대한 생각, 즉 정산은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 에 대한 바로 이 다윈주의적 해석은 명상주의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 다. 특히 정신의 진화는 뇌의 진화와 동시에 일어나거나 또는 동일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은 정신이 뇌와 동일하디는 형이상학적 이론에 대한 강력한 대 안이 되었다. 이 문제를 결말지어 본다면, 뇌의 진화가 손이 전화함에 따라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는 이론은 이것을 상당히 분명하게 만들었고 명 상적인 사람의 출현과활동적인 사람의 출현을함께 묶었다.즉, 비록그둘 은 다른 것이지만(위에서 언급한 극단주의적 단순한 관점에서 볼 때 특히 그러 하다), 그들은 쌍둥이처럼 진화한디는 것이다. 기술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과학과 기술이 어떻게 다른가? 지금 여 기서 논의되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은, 다윈의 생각이 단지 이론의 윤곽이나 하나의 구상에 불과했지만, 그에 의해 완전히 변형되었다. 왜냐하면 우 4, i 우 리는 명상적인 인간상울 도출하고 그가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가라고 묻지 않았던가. 명상적인 인간상은 이미 변해 버렸고, 그래서 우리는 지금 명상 적인 사람과 활동적인 자림이 어떻게 소원해졌는가를 묻는다. 이 새로운 다 윈주의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노동의 분화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고, 분화 는 분명히 열악한 환경에서 아주 유용한 생존수단이었다. 기술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질문을 더 좁혀보기 위해서 합리적인 기술 이 어떻게 가능한가? 라고 물어보자. 이 질문조차도 너무 광범위하다. 왜냐 하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생각들이 특정한 목적에 너무나 많이 실용화되 고 있는데 이 대부분이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그렇지 않으면 이 실용화는 특허롤 받을 수가 없다). 그러면 도대체 과학적 생각들이 어떻게 기 술적으로 유용한가? 라고 물어보자. 이것은 그 질문에 대한 지금까지의 가 장좋은형식이다• 최상의 대답은 아직도 고전적 베이컨주의적 합리주의에서 찾아야 한다. 과학적인 이론들은 신뢰할 만하고, 따라서 그것들에 근거한 예측들도 신뢰 할 만하다. 이 예측들은 조건적이다. 그리고 기술은 소망하는 예측들의 구 체화된 조건들을 충족시킴으로써 과학적인 예언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기술에 대한 고전적 베이컨주의적 합리주의 철학의 전부이다. 그
것은 자명하며, 단순하고, 거의 문제가 없다. 그것은 아인슈타인의 혁명이 있기 전에는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 즉 기술철학에 관해서 언급할 만한 문 헌이 없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기술철학은 과학철학의 한 부분이었 다. 즉, 과학은 합리적인 믿음을 규정하고 합리적인 행동은 주어진 목표들 을 달성하기 위해서 합리적인 믿음을· 개발하고 아용한다. 우~ 그 주어 전 목표들은 자연에 의해 신성하게 되었다 一一 특히 그 목표들이 다행히 다 윈주의에 의해 향상된 후에. 고전적 합리주의자들의 정치철학은(테레시오, 홉스, 스피노자) 생존을 최상의 자연적인 목적이라고 보았다. 식량과 주거의 확보, 재생식의 가능성, 사춘기의 나이까지 아이를 양육하는 것과 같은 것 들은 자연적인 목적의 일부가 되었다. 다윈은 이러한 가정들을 인정하고 발 달시켰다. 인성론, 죽 동물심리학과 사회학의 발견으로 데이비드 홍, 아담 스미스, 제레미 벤담 등의 철학의 광범위한 윤곽은 과학적인 다윈주의의 이 론체계 안에서 정당화되었다(이것은 가짜 다윈주의, 유사 과학적인 구조이었지 만 이 정도로 해두자) . 그것은 너무도 분명하고 위압적인 하나의 체계였다. 즉, 인간의 본성은 식량, 주거, 친구, 구애, 여성들에 대한 남자들의 경쟁과 여 성들의 복종을(현대 인성론의 성차별자의 기원에서 보는 바와 같이 ) 요구한다 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의하여 설명되어야 할 것은 오로지 명상적이고 활동적인 면이 있는 인간사회에 관한 것이다. 이 두 가지 면은 맑스주의자 (또는 후기 맑스주의자 또는 유사 맑스주의자)의 습관이론으로- 통합된다. 고전적 베이컨주의적 합리주의 기술철학은, 사람들이 목표를 이루기 위하 여 자신들의 노력으로 합리적인 믿음들을 이행하도록 하는 것이 합리적이 라는 가정 아래, 고전적 베이컨주의적 합리주의 과학철학으로 바뀌었다. 그 리고는 목표들이 부여되는데, 그것은 바로 생존이라는 것이다. 이 철학의 두 가지 주요한 논제들, 첫째는 과학이 합리적인 믿음들을 제시한다는 것, 둘 째는 우리 자산의 믿음들의 관점에서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점을 살 펴보자. 여기에서 다윈주의는 단지 고전적인 베이컨주의적 합리주의를 발달시키 고 확립시키는 것 이상의 더 많은 것을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오랫동안 기 대되던 회의주의에 대한 반박과, 합리적인 믿음들과 행동들의 체계로서의
과학에 대한 회의주의의 위협을 다윈에게서 찾은 것 같다. 왜냐하면 다윈주 의는 우리가 행동하는 데 믿고 사용하는 이론들에 적용될 수도 있기 때문 이다. 즉, 최적의 이론만이 살아 남는다는 것이다. 과학에 대한 믿음과 실행 은 생존을 나타낸다(이 견해는 최근에 포퍼에 의해 강력하게 재진술되었고 지 금은 그것을 포퍼의 공으로 돌리고 있지만, 그보다 먼저 실용주의자인 존 듀이 또 는 그의 선배들인 스펜서, 마하, 그리고 볼츠만에 의해서 이미 진술된 바 있었다). 기껏해야 다윈주의는 경쟁이 상당히 격심하다면 똑같은 종류의 범위 안 에서 경쟁하는 여러 이론들 가운데 가장 적절히 살아 남는 오직 하나의 이 론만을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론의 똑같은 종류의 범위가 무엇이며 이것을 위한 격심한 경쟁 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것을 일이야만 한다. 왜냐하면 다른 종류의 범위는 다른 경쟁자들을 다론 방법으로 이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욱이 장기적인 생존과 단기적인 생존 사이의 갈등에서 단기 생존의 승리자는 곧 소멸되어 버릴 수도 있어서, 오히려 그 패배자가 단기간에 소멸되지 않기만 한다면 그 종(種)은 살아 남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들을 생물학 분야에서도 (E. B. 포드의 나비 연구) 그리고 기술 분야에서도(수직베틀이 단기적으로 이겼 으며 수평베틀이 이길 때까지 직조기술의 발달을 막았다) 찾 0H 문 수· 있디 •. 그러므로 회의주의자들에 대한 다윈주의자들의 대답은 실용주의적일 뿐 만 아니라 과학을 기술과 동일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그들의 대 답은 과학과 기술이 분화될 때마다 반박된다. 그리고 실제로 이 둘은 현재 분화되고 있다. 탄성역학, 유체역학, 그리고 비슷한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들 은 물리학에서 관찰된 많은 비연속성들을 상당히 무시용}고 연속성이론을 기 꺼이 발달시켰다. 죽, 그들은 그들이 현대 물리학의 합리성을 위반하고 있 다는 것을 부인하기 위하여 연속성이론을 응용수학이나 공학 또는 어떤 다 른 학문이라고 선언했다. 따라서 탄성역학은 과학과 기술의 분화에 대한 증 거이다. 아직까지 용인할 만한 적용이 되지 않은 과학의 부분들도 이와 마 찬가지 01 다. 기술적인 목적을 위해 연속성이론을 발달시킨 사림들은 물론 옳았다. 그 러나 그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합리적으로 그들의 생각을 실제적인 일에 적
용할 수 있게 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이러한 비판은 모든 합리적인 기술이 합리적인 믿음의 적용은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기술은 어떤 사람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견해의 적용일 수도 있다. 실용주의자들은 뉴턴의 생각이 오늘날에도 기술자들에 의해 아직껏 적용되고 있다는 주장을 통해 그가 정당하다고 입증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 리의 믿음을 적용하기 때문에 아직도 뉴턴을 합리적으로 믿고 있다는 견해 와, 또 과학은 믿음이 아니고 기술이라는 견해에 근거해서 뉴턴을 정당화하 는 것이다. 사이비 다윈주의자들은 믿음에 대한 실용주의이론 ―— 사람들 은 자신들에게 가장 유용한 것을 믿을 때 생존할 확률이 가장 높다는 이론 一一 에서 이 둘을하나로통힙하려고노력했다.그러나우리는사람들이 자 신의 믿음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가장할 때마다(혹은 거짓말할 때마다) 탄성역학의 연속성이론이 바로 그러한 가칭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다. 또한 이제 우리의 질문은 근본적으로 그 성격을 바꾸었다. 그 질문은 과 학기 어떻게 기술적으로 유용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그 대답은 합리적 인 기술을 응용과학과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동일시는 논박의 여지 가 있다. 과학은 뉴턴을 포기하고 아인슈타인과 op 년을· 택했지만 기술은 아직도 뉴턴에 매달려 있다. 따라서 그 질문은 매우 엄격한 의미로 보았을 때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의 합리적 기술에 제한되거나, 또는 어떤 넓은 의미에서 보았을 때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부분의 합리적 기 술에만 제한된다. 아니면 합리적인 기술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과학적이라 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질문을 이러한 방향으로 보느냐 또는 저러한 방 향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사실 우리는 이것을 위 세 가지의 방향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각 방향이 문제에 대해 서로 다 른 정통성과 서로 다른 홍미있는 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에 서는 전통에 관계없이, 우리가 모든 합리적인 기술을 과학적이라고 보든, 또 는 기술의 어느 일부분만을 과학적이라고 보든 그것은 자유이다. 우리가 모든 합리적인 기술을 과학적으로 볼 때,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기술공학자들의 지식이 주로 반복 가능한 관찰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
는 것이다. 우리는 계산을 간단히 하는 데 있어서 가설이나 복잡한 숫자 그 리고 어림짐작을 사용할 수도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설명된 것에서 예언적 해답을 얻으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그 설명된 반복적인 조건에서 그 예언이 반복적으로 얻어진다는 주장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이러한 반복 가능성에 대한 주장을 신뢰하는가? 이것은 회의주의자들의 비판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느냐라는 귀납적인 문제로서, 이 문제는 결국 과학철학에서 기술철학으로 옮아간 셈이 된다. 이 렇게 해서 본래의 과학은 신뢰성에 대한 주장을 할 필요도 없고 따라서 회 의주의자에게 대답해야 할 필요성도 없게 된 것인데, 그것은 그 대답이 충 족된 것이 아니라 소용없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 회 의주의자에게 대답할 필요성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그것은 합리적인 기술 이 도대체 어떻게 신뢰할 만한가라는 질문으로 바뀌게 된다. 이번에는 이 질문을 좁고 엄격한 과학적인 의미로 고찰해 보자. 그것은 도대체 과학을 기초로 한 기술이 어떻게 가능한가리는 것이 된다. 이것도 매우 홍미롭다. 과학이 기술에 공헌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죽, 과 학적인 사실들과,순수한실험과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전 관찰보고서둘은반 복 가능한 것이고, 때로는 필요한 기술적인 함축성을 지니고 있다. 왜 그러 한가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해답이 없다• 이 문제를 광범위한 과학적인 의미에서 보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엄격하게 말하면 오직 현재의 과학적인 실제적 관찰들만이 현재의 과 학이 기술에 공헌하는 내용이고, 이론들은 단지 기술적인 예측의 수단에 불 과하다. 광범위하게 말하면, 때때로 기술에 사용되는 이론들은 현대의 것이 지만, 때로는 시간이 지난 구식의 것일 수도 있다. 때로는 기술자들이 현재 의 이론들을 선호하지만 때로는 구식 이론들을 선호하기도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보편적인 대답이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단지 간단한 기준이 하 나 있을 뿐이다. 죽, 우리는 가장 이용하기 쉬운 이론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론을 사용할 것이냐 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 이론, 계산하는 방법 그리고 그밖의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2 반복성 대 신뢰성 많은 과학 철 학자들은 귀납적 과정이란 일련의 경험들을 일반화하는 과 정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귀납법의 문제는 얼마나 많은, 어떤 종류의 경험이, 또는 어떤 . 조건에서의 경험이 어떤 일반화의 결론을 인정 또는 보 장하는가러는 것이다. 또는 그것은 그러한 결론이 얼마나 확고하며 가능성 이 있고 믿을 만한가, 또 왜 그런가라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학이 일 반화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들은 모두 요점에서 벗어나 있다. 일 반화란 과학이 설명하려고 하는 주어진 명제이다. 어떤 주어전 일반화에 관 해 물어야 할 첫번째 질문은 그것이 참이냐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내기 위 해서 우리는 그것을 실험한다. 불행히도 실험은 단지 반박할 뿐이지 결코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관찰보고를 논박할 때는 그것을 최선을 다해 수정하며, 그리고 수정할 곳을 찾았을 때는 그것을 주어전 것 으로 여기고 이것을 실험한다. 포퍼의 뒤를 따르고 있는 이므레 라카토스는 우리가 논박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설명한다고 말한다 . 아인슈타인의 뒤를 따르고 있는 포퍼는 그 설명이 종종 종래의 설명과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 한다. 따라서 뉴턴은 왜 지구의 중력이 일정한가(이것은 갈릴레오가 주장했던 것이다)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이것이 일정한 상태에 가까운가를- 설명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뉴턴과 갈릴레오 사이에 결정적인 실험이 가능하 고 그리고 뉴턴이 이겼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그후 아안슈타인이 뉴턴을 이겼다. 이렇게 해서 일반화로서 제시된 관찰보고는 항상 증가하며, 끊임없 이 옛것들을 수정하며 새로운 것들을 위한 여백을 만들어 준다. 이 전체적인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이것이 오늘날 철학자들이 고려하고 있는 주요한 문제이다. 이 질문에 대 한 대답은 과학적일 수도, 형이상학적일 수도, 논리적일 수도 있다. 과학은 이 질문에 대해 부분적인 대답만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이 앞으로 전부를 다 대답한다 할지라도 이 대답은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 면, 그 대답이 과학적이라 해도 그 과학적 과정에 대한 설명은 또다시 설명 되어야 할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만약 논리적인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이 논
리적 대답이 확고하게 귀납법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리고(베이컨 주 의) 합리 주의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논리적인 대답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코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대답은 다음과 같은 어떤 것이 될 것이다 ―― 세상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리 인 간은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베이컨은 성서의 권위에 호소했다. 즉, 성서의 권위란 하나님이 노아의 자손들에게 자연을 지배하도 록 약속한 것으로, 진정한 지배는 오직 이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과학의 성공을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현대 베이컨주의자들도 다윈 에 호소하는 것을 제의하고는 유사한 주장을 한다. 이제 이 문제를 떠나서 반복성과 신뢰성의 과학에 대해서 고찰해 보자. 신뢰성이론은 그 이론 자체의 신뢰성을 제의한 다른 모든 것들을 설명한다. 그리고 반복성이론은 그것이 적용되는 관찰보고에 대하여 번복성을 밝혀내 는 이의의 것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연구를 위해 가장 좋은 길이다. 이 길을 열고 이것을 열린 채로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로지 반복성 과 신뢰성에 대한 요구 사이의 차이점을 알기만 하면 된다. 매우 공신력 있는 공장을 예로 들어보자. 공장을 신뢰할 만하게 만드는 것은 우수한 품질관리이다. 개선된 품질관리는 더 높은 기준에 의거하여 더 많은 특성들을 검사하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결함이 있는 제품들이 전 보다 덜 나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산단가를 높인다. 불량제품이 나오 는 확률이 제로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품질관리의 단가는 더 올리칸다. 그러한 공장에서는 어쩌다가 결함이 있는 제품들이 시장에 나가는 것을 허 용하여야만 하는 분명한 손익분기점이 있는데, 이 점을 넘어서면 그 공장은 품질관리를 강화하는 것보다 결함이 있는 상품을 구입하게 된 소비자에게 찰 보상해 주는 것이 더 저렴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제품의 신뢰성, 죽 생산과 품질관리에서 사용된 모든 일반화의 신 뢰성에 대하여 경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뢰성의 기준, 불평과 보상에 대한 규칙 등을 사용하고 있는 사회의 안정성에 대해서도 경탄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결함에 대한一―생산과정에서든품질관리에서든-다 양한 태도들을 접하게 된다. 오늘날 물론 일부 산업체에서는 합격품이 전체
생산품의 5 031-j센트 이상이 되기도 불가능하지만(레이저, 컵퓨터 칩 ), 만약 90 퍼센트까지 만들 수 있다면 그 생산기술자는 행복하다. 만약 품질관리 메커 니즘이 결함이 있는 생산품의 90 퍼센트, 또는 99 퍼센트를 또는 현재의 기 준에서 요구되고 있는 어느 수준이든지 찾아낼 수 있다면 그 생산기술자는 행복하다. 그리고 그 기준이 충족되는 한, 생산기술지는 행복하고 결함 있 는 제품으로 골머리를 않지 않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기술에서의 성공은 완벽한 성공 —— 이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 一一 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기준에 의해 만족할 만한것으로선 언될 수준의 성공으로서 결정된다. 과학에서 성공은 정반대의 방법으로 결 정된다. 과학은 성공적인 예언이 아니라 실패한 예언을 고려한다 . 기술 공 학자들은 결함 있는 제품들이 거부되도록 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과학적인 연구자들은 성공적으로 생산된 물품보다는 결함 있는 제품을 더 홍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점은 단지 간과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시되고 있다. 오늘날 과학과 기술은 실용주의적 이유 때문에 하나의 관심사로 간주된다. 죽, 여기에서 살 펴볼 필요는 없겠지만, 단순히 기존의 이점 때문에 과학과 기술은 동일시되 고 있다. 결과적으로 과학은 잘못된 예언들의 교정에 대한 탐색이 아니라 성공적인 예언들에 대한 탐색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 신을 두려워하는 정직 한 과학철학자들은 그들의 방식을 따라서 가능한 한 성직자다운 진실성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어떤 가정이든 99 퍼센트 옳으면 그것 은 훌륭한 것이며, 어떤 가정을 대치할 것이 없으면 그것을 뒤엎울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가정도 잘못된 것으로 보지 않고, 항상 행동해야만 하기 때문 에 어떤 이론이나 또는 다른 이론을 항상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반복성과 신뢰성에 관한 몇몇 분명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 으며, 과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합리적인 기술의 신뢰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와 같은 질문에 대해 명상적 철학이 제시할 수 있는 종류의 대답 들에 대해서도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다윈주의적 접근은 현대 실용주의 방식이 그것을 감싸 주고 있는 허식울 벗어 버리고 삶을 유지시키는 환경을 묘사함으로써 어떤 이유에서든 모종
의 규칙들을 제시해 주도록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규칙들의 일부는 자 연의 법칙에 근거를 두고 있고, 다른 것들은 단순한 우연이며, 또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환경만이 가진 어떤 우연적인 특성들의 결과들이다. 우리 는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를 알고자 원한다. 특히 우리는 어떤 핵심적이고 우연적인 요소들을 근본적으로 변경시킴으로써 그러한 규칙들을 유지하거 나 대치시킬 수 있으며, 그리고 옛공룡의운명을피할 수있었는가를알고 싶어한다. 소멸 또는 소멸의 위협은 인간에 대한 다윈주의자들의 구도에 어 떻게든 적절하게 포함되어야만 한다. 결과적으로 신뢰성은 논리나 또는 형 이상학의 문제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지엽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안전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자연법칙에 달려 있으며 그리고 또 얼 마나 많은 부분이 우연에 달려 있는가러는 문제는 과학이 연구할 과제로 남 는다. 그러나 다윈주의에 의하면 우리 인지의 각 단계는 또한 그 전(前) 단계 룰 가지고 있고, 그리고 인간의 가장 낮은 인지단계는 유인원의 이해단계 바로 위의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동물심리학과 인간의 가장 단순한 단계 즉, 보통 상식이라고 알려져 있는 모든 인간에게 공동된 이해단계를 고찰해 볼 수 있다. 3 과학과 상식 명상철학은 명상적인 사람들이 우주를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 감 동을 받았을 때 우주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명상철학마다 우주에 대하여 최 상의 가치가 있는 측면들을 보는 관점이 다르고 그리고 그러한 이해를 위 해 제시히는 지적 체계와 도구가 각기 다르다. 이해란 무엇인가? 이것은 상 충하는 대답둘이 나울 수 있는 난해한 질문이다. 이 모든 것을 부차적인 것 으로 간주하고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해에 접근할 수도 있다. 즉, 우리는 무 엇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문제가 툴리든 맞든 언제 해결될 것인가 에 관하여 상식적이고 비교적 문제가 없는 의식을 갖고 있다.
이해에 관하여 또는 어떤 문제의 해결에 관하여 아마도 가장 중요하고 명 백하면서도 종종 가장 왜곡된 공리는 아직도 현대 미국의 철학자 찰스 사 운더스 퍼어스의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 고대의 공리이다. 즉, 연관이 없는 진술에 대한 진위를 심사하지 말리는 것이다. 질문을 하 여 반응이 나왔을 때, 이 반응이 답으로서 자격이 있는가의 여부를- 심사하 는 시도는 논리적으로 이것의 참가치 (즉, 이것이 맞는가 또는 툴리는가)를 발 견하려는 시도보다 앞선다. 즉, 첫번째 단계를 생략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만약 그 반응이 답이 되지 않으면, 적어도 그 반응은 그 질문과 관련이 있어야만 한다. 관련은 무엇인가? 논리적으로 관련은 독립을 제의한 모든 논리적인 관계 를 의미한다. 즉 어떤 두 견해나 진술이 ――그 자체로서나 암시적 내용면 에 있어서 一― 만약 서로 종속되거나 서로 상충한다면 이들은 서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관련을 이러한 견해로 본다면, 이해는 설명으로, 그리 고 설명은 추론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사실 어떤 추론은 설명으로 간주되지 않는 다. 특히 기술공학상의 추론이 그러한데, 예를 들면 원자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가정 아래 기체, 액체 또는 탄성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것은 추론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또한 설명은 종종 관찰된 사실에 대한 의심스러운 전술의 연역이 아니고 약간 다른 진술, 죽 관찰된 사실에 대해 맞게 교정된 전술의 천]다. 모든 물체들은 일정한 가속도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의 일 정한 가속도 〉 로 떨어진다. 따라서 갈릴레오의 법칙에 대한 뉴턴주의자들의 설명은 추론이 아니다. 이렇게 볼 때 관련성에 대한 논리적 타당성은 문제 가있다. 이 비평이 가치가 있는가? 전지하게 고려된 모든 추론기 다 설명적인 것 은 아니고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 반드시 추론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 요한 문제 인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이해나 관련성이 과학철학자들이 전통 적으로 묘사한 방법의 논리만으로는 획득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관련성에 대한 문제를 상식에 맡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아인슈타인과 맥스 본과 같은 과학자들이 과학은
단지 상식의 연장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이유이다 . 그러나 이 견해는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에 대한 견해롤 약간 바꾸어 준 다. 왜냐하면 우선 우리는 상식이란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지식, 이해, 균형 잡힌 감각, 다양한 문제로의 접근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제 상식의 이 러한 성질은 확장될 수 있지만, 이것은 일반에게 즉각적으로 수용될 수 있 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고 그가 굉장히 상식이 많다고 말 할 때, 우리는 그가 보통사람둘보다 더 많은 상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 하는 것이며,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의 충고를 구하게 된다. 즉, 그는 더 많 은 의식을 가지고 있고, 그가 이것을 타인들과 니누어 갖게 될 때 이것은 즉시 상식이 된다. 좋은 충고는 주어진 후에야 분명해지는 것이지 주기 전 에는그렇지 못하다. 이러한 면에서 과학은 상식의 연장인가? 많은 경우에 우리는 주저하지 않 고 그렇다고 말한다. 아주 많은 과학적인 생각들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상식 적인 것으로 생각되어 그것들이 왜 구태여 발명이라고 불렀던지롤 의아해 한다. 역사는 과학적인 생각들이 즉각적으로 수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러나 모든 과학적인 생각들이 노력 없이 수용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베 이컨주의자들의 전통적인 대답이 보여주듯이, 과학지들조차도 편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옳은 말이긴 하지만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다. 과 학지들은 어떤 생각은 분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것은 왜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문제가 남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상식임에 틀림없다. 그 상식적인 대답은 매우 분 명하고, 그리고 어떤 실증적 관찰을 보고하려고 할 때 즉각적인 인정을 얻 는다-특히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상당한 시간을 보낸 사람들에게서는 더욱더 인정을 얻는다. 죽각적인 인정을 받는 그 과학적인 생각은 어떤 기 존의 지적인 체계 안에서 잘통합된다. 기존의 과학적인 체계에 쉽게 통합 되지 않는 과학적인 생각들은 혁신적인 것이다. 혁신인 생각들도, 토마스 쿤 이 말하듯이, 만약 일반 대중들이 혁신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고 이것을 갈 망한다면 빠르게 수용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생각이 과학적인 체계에 통 합되거나, 또는 그 체계 자체에 관한 일련의 높은 수준의 기대에 통합되기
만 한다면 그 생각도 즉각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낮은 수준의 것들도 역시 그 혁신적인 과학적 생각을 상식으로 만들 기 위해 조정되어야만 한다. 보통은 새로운 생각이 오래된 것을 대치한다. 따라서 상식은 증대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변형을 통한 개선에 의해서도 바 뀐다. 그리고 우리는 상식에 의하여 그 대치된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한다. 그밖에 우리가 달리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상식의 변화에 대한 적 절 함을 판단하는 상식적인 기준이 없다면 상식은 자체의 독립성을 잃게 된다. 과학의 기술에 대한 응용 가능성을 다루는 과학이론으로 옮겨가기 위해 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두 가지 양상부터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첫째로 우리는 과학적 이해는 무엇안가? 리는 질문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왜냐하 면 우리는 이 질문을 공격했고 그것에 대해 얻어전 대답을 논박했으며, 결 국 상식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기 때문이 다. 이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마도 상식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방 법을 심사숙고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아마 응용과학에서도 똑 같은 것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상당히 명백해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상식이 순수과학과 응용과학, 그리고 이해와 실제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과 기술에서 가장 상식적인 생각은 양적인 수식들을 찾고 그들을 선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숫자로 나타내는 수식들이 있다는 생 각은 종종 상식적인 것이다. 즉, 심지어 과학조차 전혀 없거나 비과학적인 사회에서 온 보통사람도, 비교적 일정한 불꽃과, 그 위에 물이든 간단한 용 기가 주어졌을 때 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을 끓이는 데 시간이 더 걸린 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선형화의 개념은 어떤 곡선도 선분에 의해 분할될 수 있고 그 선분이 짧으면 짧을수록 근사치가 더 좋아진다는 생각에 불과한것이다. 앞 문단에서 표현된 생각들이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하더 라도 그것이 상식이라는 점을 주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말하자면 그 생각들은 널리 알려져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는 전혀 상식이라고 할 수 없
지만, 그러나 일단 파악되기만 하면 즉시 수용된다는 의미에서 상식인 것이 다. 이러한 종류의 생각은 과학적으로 복잡한 생각들보다 더 신속하게 실제 적인 수용 가능성을 획득한다. 기술자들, 특히 기술 지향적인 사람들은 반 대 방향으로 나아가며 오히려 복잡한 생각을 찾으려 하는 뚜렷한 경향이 있 다. 사실은 이 반대 방향도 성공적인 경우에는 복잡한 과학과 기술의 커다 란 부분을 상식화하는 것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때때로 무한한 가 치가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과학적 상식에 대해 보다 더 나은 안목을· 발달시키 고, 민주적 통제에 필수적인 과학적 지식을 보급시켜야 하는 절박한 필요 성이 더 나은 감각을 발달시키기만 한다면, 우리는 고도로 강력한 과학과 대중 과학 사이에서 편안하게 자리집을 수 있고, 민주적인 사회에서의 생 활수준을 개선하는 데 반복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새로운 분야의 인간지식 울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상식은 문제가 없고 논란이 없는 방법으로- 현존하는 지식울 다양한 상황 (문제가 있는 상황도 포함해서 )에 적용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다. 그러나 이 것이 최종적 결말은 아니다• 상식에는 최종적 결말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 면 상식은 모호하면서도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일반적인 체계를 포함하여 다 양하게 상충하는 생각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식의 체계는 분명 하거나 뚜렷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없다면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융통성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이 와해되어 버릴 것이다. 철학의 초심자들이 많은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바로 이 점에 있다. 상식 은 너무나 많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이들여 탐구할 여지를 거의 남겨 두 지 않는다. 고전적인 합리주의는 무(無)에서부터 출발하려는(베이컨과 데카 르트의) 노력과 함께 시작한다. 이것은 우리를 무능하게 한다. 우리가 무에 서부터 시작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딘가에서부터 시직해야 한다. 그러면 어 디에서 시작할 것인가? 우리는 어떤 지적인 체계를 받아들임으로써 시작한 다. 금세기 중반의 유명한 반합리주의자인 마이클 폴라니와 합리주의자인 칼 포퍼는 이 점에 동의했고 심지어 이것이 상식적인 일이라는 데에 의견
의 일치를 보였다. 그 체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상식인가? 그것은 분명히 표현되었는가? 그것은 합리적인가? 폴라니는 그 체계는 상식이지만 모든 사 람에게 다 공통인 것은 아니고 어떤 분야이든지간에 그 분야의 전문가들에 게만 공통된 상식이며, 이것은 묵시적 지석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퍼 질 수도 없다고 말한다. 즉, 이것은 정확하게 표현될 필요도 . 없고 그럴 수 도 없다는 것이다. 토마스 쿤은 이러한 생각에다 때로는 묵시적 지식이 되 기도 하고 때로는 그 체계가 되기도 하는 패러다임 (이 패러다임이란 단어는 . 주요한 예를 의미한다)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덧붙였다. 왜냐하면 어떤 예들 울 대비시킬 것인가를 우리에게 암시할 수 있는 것은 때로는 바로 그 체계 자체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포퍼는 그 체계가 발견적 지도법 he uri s ti c 으로 서의 효용을 제의한 어떠한 중요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 사 상가의 체계는 그로 하여금 하나의 가설을 제안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포퍼는 193 5\i에 쓴 그의 고 전적 저서 『 탐구의 논리 』 에서 공통된 체계란 공통적 인 견해가 아니라 이러 한 방법의 문제라고 말했다. 즉, 실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가설을 선택하여 이것을 검사하고 가능한 한 이것을 최대로 논박하려고 노력하라는 것이다. 포퍼도 그후 그의 전해를 점차로 바꾸었는데, 그 자신은 그 변화를 한 번 도 평가하지 않았고 아마도 그 변화의 존재조차도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갇 다. 그는 우리가 하나의 가설을 어떻게 검사하는가를 결정하는 방법은 우리 의 공통적인 잡다한 배경 지식의 체계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때 배경 지 식은 상식이다. 따라서 이것을 사용하는 것은 이미 전에 널리 알려진 견해 를 갖고 새로운 과학적인 생각을 바라보는 것이다. 새로운 과학적인 생각이 수용되면 이것은 상식이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어제의 과학의 선구적 지식 이 오늘의 상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상식에 대한 견해는 제임스 클러 크 맥스웰에 의해 제안되었는데, 그는 전자기에 대한 공식으로 더 잘 알려 전 사람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상식체계에 대한 생각의 두 가지 변형을 보게 되는데, 포퍼와 폴라니의 견해에서는 이 두 변형이 혼합되어 있다. 그 한 가지는 과 학적 연구에 적용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로서의 상식체계의 변형이고, 다
론 하나는 과거의 연구에서 온 상식의 축적으로서의 변형이다. 그러나 상식 이 보다 많은 과거 연구의 축적일 필요는 없다. 이렇게 되면 상식은 그야말 로 혁신적인 새로운 원리로 폭발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베이컨의 상식 에 관한 견해와, 이것을 사회적 정치적 분야에 적용한 원리들, 또는 낭만주 의, 맑스주의, 디윈주의, 정신분석학, 그리고 다른 많은 과학적, 비과학적, 반 과학적 사상들과 같은 혁신적인 새로운 원리들이 쏟아져나울 것이다. 그러 나 우리는 상식 없이 일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이것은 항상 혼란에 빠 져 있기 때문에, 상식을 닷소 개선하려는 노력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한 상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우리가 사용할 원 리를 택하고 이것이 과학과 그리고 상식화된 과학적 지식과 무슨 관계가 있 는지를 고찰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원리들은 보통 형이상학이라 고 알려져 있다• 4 형이상학적 체계 버트랜드 러셀은 형이상학적인 체계는 한번 이해되기만 하면 매우 간단 해 보이는 우주에 대한 시각이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가 그것을 비평하려고 할 때, 또는 그 창시자의 의도와는 디론 경우를 포함하여 다양한 경우에 그 것을 적용하려고 할 때, 그러한 시각은 보다 더 복잡해진다. 그러나 분명히 일부 체계들은 적용하기가 극히 쉽다. 우연히 익숙하게 된 마술체계아거나 또는 스스로 발명한 마술체계가 그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포퍼가 인식 했던 것처럼 체계의 적용 가능성 바로 그것은 어디에서나 매력 있는 것이 다. 예를 들어 두 개의 경쟁하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체계인 프로이트의 이 론과 애들러의 이론을 생각해 보자. 프로이트는 모든 행동을 성 충동에 의 해 동기화된 것으로 보았고, 애들러는 사회적인 수용성에 대한 욕구에 의 한 것으로 보았다. 프로이트 또한 사회적인 수용성의 욕구를 인식하였지만, 이것은 성 충동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애들러는 그 순서를 바꾸었다. 즉, 프로이트는 구애를 성적인 만남에 대한 서곡이라고 설명했고,
애들러는 성적인 만남을 구애의 한 부분으로 보았다. 그런데 새로운 인성학 의 발달을 근거로 우리는 지금 이 두 견해를 모두 거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는 고등동물의 구애는 정상적인 성적 만남의 통합적인 한 부분 으로 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구애가 없는 교미는 결과적으로 성 도착이다. 콘 라드 로렌츠가 일부 동성애적인 새들 사이에서 이러한 예를 보았는데, 그는 이 새 들이 구애와 교미를 아주 분리하여 구애는 동성간에, 교미는 이성간에 이루어진다 고 보고하고 있다). 베이컨 이래 정당화주의 철학자들은 모두 경험적인 관찰 속에서 지적인 구조가 하는 역할에 대해 매우 민감했다. 그들이 제기했고 계속해서 제기되 고 있는 것은 합법성의 문제이다. 베이컨은 어떤 지적 체계와 그 속의 항목 들은 악순환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기 때문에 모든 지적인 체계는 참 인 것을 제의하고는 합법적이지 않으며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따라 서 베이컨은 과학은 먼저 어떤 지적인 체계 없이 시작해서 그 지적 체계가 사실을 근거로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단계적으로 진전되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죽, 그 체계는 마지막 단계에 나타나서 과학적 형이상학의 지위 를 가져야만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어떤 지적 체계 없이 순수한 사실이나 정연한 사실 그리고 선입관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자료들을 묘사하려는 시 도는 모두 실패했다. 가장 최근의 이러한 시도는 관찰자가 그의 관찰을 시 간과 공간의 좌표체계 안에서 보고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모두 실패하였다. 따라서 체계는 보고에 선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갈릴레오, 칸 트, 그리고 많은 다른 철학지들과 지각이론학자들에 의해 지적된 점이다. 과 학을 가능하게 만드는 형이상학, 즉 과학을 위한 어떤 지적 체계를 수립하 는 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소원이었다• 문제는 이 형이상학이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대카르트는 명석 (明哲)함과 판명 (判明)함®들이 증거 @ 데카르트는 진리의 기준으로서 명석 cl arity하고 동시에 판명 d istin c t한 인식을 명증적 (明證的)인 것이라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정신에 의십할 여지없이 명확한 인식이 명석이며, 이러한 인식이 다른 것으로부터 확
로서 충분하다고 말했다. 칸트는 어떤 체계 없이 과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체계는 존재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의심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과 학을 가지고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 과 학이 아니고 무엇이냐면서 이 질문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중세 기 또는 지난 세기조차 대학이 세워진 이후 그곳에서 가르쳤던 것은 오늘 날 우리에게 전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자. 만약 과학이 종국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최종적 결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만약 과학이 이미 없어전 생각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된다면, 정당화주 의 철학들 __ 데카르트나 칸트가 제시했던 류의 철학들 一― 은 모두 제외 된다. 왜냐하면 그 철학의 정당성 자체가 최종적인 것이 되고, 그렇지 않으 면 의심스러운 것아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수단으로는 오직 공간과 시간만을 하나의 체계로 가지고 유클리 드 기하학에 의존하는 시도였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견은 불쾌한 것이 었지만 이 계획에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은 유클리드주의로부 터 이탈하는 것보다 우주적 시간에 대한 공동적이고 전통적인 개념으로부 터 이탈함으로써 유클리드주의에 종지부를- 찍었고, 그의 유클리드주의로부 터의 이탈은 소위 참의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하나의 가능한 과학 적 이론으로서 더욱 충격적인 것이었다. 죽, 그는 끝까지 회의적이었으며, 그리고 끝까지 자신의 이론이, 자신의 형이상학적인 이상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예,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공간과 시간과 물질들이 독 립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생각을 거부했다(그리고 이것은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공간――시간의 일부 속성을 물질 一 ―에너지의 일부 속성과 동등하게 볼 때 생기는 가정이다). 죽, 그에게는 이러한 생각이 하나의 미봉책이건 했 지만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 우리는 경쟁하는 체계들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하는가라는 질문이 남아 있다. 우리가 무엇이라 대답하든 그 선택이 신%녁냉의적 입장처럼 완전 히 임의적이든지 또는 정당화주의 입장처럼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에 주 연하게 드러나는 것이 판명이다.
목하게 된다. 그외에 다른 어떤 선택들이 있는가? 두 가지 다른 선택들이 있으나 위 두 가지의 고찰은 다른 두 가지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이 질문 에 대한 모든 대답들에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더 나아가기 전에 그 이유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바로 우리의 질문(어떻게 우리는 하나의 체계를 선택하는가?)이 정당화주의 적 입장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만큼 이것은 우 리가 오직 유일한 대안으로서 변덕스러운 비합리주의자가 되지 않는 한, 정 당화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질문은 그 전제에 있어서도 정당화주의적 입장이다. 그 전제란 이 질문 자체가 아무런 전제나 사전의 체계 없이 어떠한 체계를 선택하기 위하여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질문은 만약 내가 백지 상태, 즉 깨끗한 석판이라면 어디에서 시작 해야 할 것인지, 또는 어디에서 시작할지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러~큰 형식 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백지 상태가 된 적이 없기 때 문에 그 질문은 다음과 같이 되어야 한다. 즉, 우리의 다음 지적 체계의 선 택에서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들과 도구들이 무엇이든지간에 이것 둘을 어떻게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될 것이다. 배경 지석은 이미 존재하고 있고 형이상학의 선택을 위한 수단으로서 사 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제 새로운 체계나 이것이 포함하는 전제, 죽 형이상 학은 배경 지식과 같지 않다. 배경 지식은 물론 현재 경쟁하고 있는 형이상 학적 체계들과 상충하는 더 이전의 형이상학을 포함한다. 옛 생각의 혼합물인 배경 지식이 우리가새로운체계를선택하는것울도 와줄 수 있는가? 예전 것이 새로운 것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을까? 신앙주 의자들은 이 토론을 문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체계가 일관성 이 있고, 작용 가능하며, 받아등겨지는 한, 그것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염 두에 두지 말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부정적으로 하는 것을 제의하고는 옛것으로 새로운 것을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덧붙일 것이며 그리고 이것을 논리로 증명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한 체계를 그 배경으로., 또는 그 역으로도 시험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이것이 문의한들에 의해 쿤-페예라 벤드 약분불가능 Incommensurab ility@명재라고 현재 널리 알려져 있는 더행
과 에반스 프리차드의 견해이다. 사실들은 이 이론에 배치된다. 유대 주 의와 가톨 릭주의는 말한다. 즉 , 어떤 조건 에서든 무엇보다도 자기를 택 하라고. 그 러고 그들은 오랫동안 병 존 하여 왔다. 뉴턴주의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 다. 그리고 이 점은 커다란 차이를 만들었다. 100 년 전 에 실제적으로 모든 물리학자들은 정통 뉴턴주의자들이었다. 그때의 과학계의 대표자들은 뉴턴 주의는 결코 대치되거나 뒤엎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그들 은 심지어 뉴턴역학은 설명조차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허엘 훼 웰 밀, 포인까레). 그러나 20 세기 초기의 10 년, 20 년 이내에 거의 모든 물리 학자들은 그들의 견해를 바꾸었다. 어떻게 그리고 왜 그랬는가? 일부 사람들은 191 9\'텨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천문학 사이에 중요한 실 험이 있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상대성이론이 많은 분야에서 이겼 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지적 체계에서의 변화를 보고 있다. 아마도 이들 모두는 올바론 설명에 일부 중요한 공헌을 한다. 그 러나 최선의 방법은 이들 모두를 거부하고, 대신에 그 올바른 설명은 이들 중 어느 것도 아니며 이것의 단순한 조합도 아니고, 단지 상식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이클 퐁라니와 토마스 쿤의 견해처럼 둘리지 않기 위하 여, 이러한 생각을 그들의 비합리주의와 구별하고, 또 지적 체계의 변화가 얼 마나 정확하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불가 능하다는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도록 하자• 그러면 이것은 주요한 변화들이 상식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를 정확하게 표현하려는 시도가 될 것이 다. 두가 완전 백지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하나의 체계를 선백하는 @ 아직 이 용어의 완전한 역어에 대한 동의는 없으나 〈 비교불가능성 〉 이라 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쿤의 과학혁명론에 의하면 새로운 이론은 기존 의 이론과 전혀 다른 것이어서 기존의 이론들과 동일한 척도로 비교가 불가능하다. 이에 따르면 고전역학에서의 시간, 공간 개념은 상대론에서 의 시간, 공간 개념과 같은 척도로 비교할 수가 없다 . 시간, 공간이라는 같은 용어를 쓰지만 서로 다른 이론 체계에서 의미를 부여받게 되므로 갈은 척도로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라는 질문은 물론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만약 기초지식이 우리에 게 주어지면 어떻게 어떤 체계를 선택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수정된다. 그러 나 이 질문도 더 깊은 수정을 거쳐야만 한다. 즉,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선 택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선택 방 법을 개선할 수 있는가리는 형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의 기 본원리를 선태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원리들 은 이미 주어진 것이고, 우리는 항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선택 하는 것도 아니며, 때로는 단지 우리의 사고 방식만을 개선할 수 있을 뿐이 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의 기초들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반복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로버트 보일 (Occas i onal Re fl ec ti ons 참조)은 왕자가 자기에게 이것을 또 는 저것을 믿으라고 명령한다면, 자기는 어떻게 그에게 복종해야 하는지 모 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의 대부분은 사람들로 하 여금 믿도록 강요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위 대한 실용주의 철학자인 찰스 사운더스 퍼어스의 주요 저술은 두 개의 논 문인데, 하나는 명료한 사고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의 교정에 관 한 것이다. 그는 그의 친구인 윌리엄 제임스에게 보내는 사적 편지에서 우 리는 우리의 신념둘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조지 오웰은 『목 사의 딸 』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은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그녀 마 음의 심연과 경험으로부터 생기는지를 알지 못하지. 어느날 당신이 일어나 보면 당신의 믿음이 사라져 버린 것과 이것에 대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 은 아무것도 없디는 것을 알게 될 뿐이지.〉 그러면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가? 그들이 항상 먼저 선택하 고 나중에 그것을 시험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그들은 먼저 시험한다. 또 한 그들은 항상 그들이 시험한 결과를 수용하는 것도 아니다. 죽, 그들은 다 시 시험할 수도 있다. 어윈 쉬뢰딩거는 아인슈타인의 체계가 전자의 운동에 관한 유명한 공식을 세운 뉴턴의 체계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인슈타 인의 구조가 옳다고 믿기까지 했다. 실제로 그는 유명한 쉬뢰딩거 방정식을 개발하기 전에 아인슈타인의 체계 안에서 그와 비슷한 것을 개발했다(후에
詞인과 고든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이것이 그의 목적에 맞지 않아서 대신에 그는 더 간단한 뉴턴의 체계를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항상 그의 생각 울 다른 구조에 적용시키려고 노력했다. 아인슈타인이 그의 말년에 그의 일 반화된 또는 통합된 장( 場 )의 이론fi eld t heor y을 발전시켰을 때, 쉬뢰딩거 는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 내가 이것을 믿는가? 내가 이것을 믿을 것을 선택하는가? 〉 따위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이용하여 그 것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만으로나 체계만으로, 또는 둘을 합한 것으로 문제를 항상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지는 못하고, 단지 그것을 과학이란 우 리가 옳을지도 혹은 거의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진리의 길을 가리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내용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그 것은 또한 실상을 잘 공개히여, 우리가 알고 있는 적으나마 모든 지식을 보 여주고 또 우리가 너무나도 적게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것은 순 수한 상식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지 못하면서 결정해야만 할 때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상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정해야 만 할 때 우리는 결정하지만 그것을 믿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는 상식을 분석해 보고, 별 문제 없는 상황에서는 너무나 쉽게 믿으며, 문 제가 있는 상황일 때는 이 방법 저 방법을 사용하여 그 문제로부터 해방되 려고 노력한디는 것을 알 수도 있을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폴라니가 주목 했듯이, 묵시적 가정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 하게 말할 수 없고 후에 언급하고자 한다. 또 어떤 때에는 우리는 전략을 고안하겨 이것을 장기간, 때로는 몇 세대에 걸쳐서 토의하고 그리고는 그 계획을 시행하려고 노력한다. 이 전략은 형이상학을 발전시키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주어진 일련의 문제에 그것을 적용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믿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도 역시 연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들을 복집하게 하는 것은 순수과학이 응용과학이나 기술과는 반대의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연구라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도구둘을 우리 마음대로 적용할 수 있는 활동이다. 왜냐하면 연구기술은 하나의 잡종
이며, 따라서 하나의 새로운 품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체계들에 대한 이 연구는 이처럼 복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믿음과 전리에 관한 문제는 공중에 내버려 둔 상태에 있 다. 진리를 위한 연구, 그것은 고전적 합리주의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믿 음 자체의 문제는 분명히 아니다. 종교적인 연구자와 세속적인 연구자들은 함께 일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이론체계 내에서 연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전리에 있다. 그들은 그들이 그 목적을 전 작시킬 수도 있다는 가정에서 행동한다. 그들은 또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이것들은 때때로 매우 적절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오 로지 구체적 경우들과 그 종류만을 연구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주어전 체계 내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인데, 이러한 방법은 물론 논점을 회피하는 격이 될 것이다. 믿음은 개인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이 스스로 발견하는 의미밖에 갖 고 있지 않다고 가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 또는 우리가 각각의 주어진 문 제마다 경험적인 검증을 가장 잘 거친 단 하나의 가설만을 받아들여야만, 즉 믿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가? 아마도 우리는 행동에 관한 신념에 관심을 갖고서 이 문제 자체를 경험적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은 어디에 서 행동으로 옮겨지는가?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믿음에 따라 행동하 는가? 연구에서도 그렇게 하는가? 연구에서는 어디에서 믿음이 행동으로 바 뀌며, 일상생활의 어디에서 그렇게 되는가?(물론 합리적인 믿음 또는 신뢰성 에 대해서도 믿음과 관련된 똑같은 질문들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질문 공세는 우리를 아연하게 만든다. 폴라니는 이에 대하여 광범위하 고 중요한 하나의 사실을 부각시킴으로써 이 문제들을 쉽게 받아들이고 있 다. 그는 연구에 있어서 믿음은 사실상 교육을 통해서, 그리고 그 결과로 생 기는 과학자들간의 조정을 통해 얻어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끔찍한 생각이다. 왜냐면 폴라니는 과학교육을 이론의 주입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 다. 사실상 대학에서 너무나 많은 과학교육이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 나 적어도 과학에서의 초심자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일 만한 사장된 이론들 에 대하여, 죽시 파기해 버릴 수 없는 그 대안들에 대하여, 그리고 과학계
에서 가장 확고하게 받아들여전 의견들에 관련된 문제들에 관해 들어야만 한다. 그럼으로써 교육을 잘 받은 과학자는 조만간에 자율적이 될 수도 있 고, 그 자신의 마음을 발달시켜, 독립적인 연구자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 조만간 그는 재미있는 연구를 수행하여 그의 동료들에게 주목을 받 게 될 수도 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교육의 개선을 끊임없이 역설해 왔지 만, 과학은, 그가 말했던 것처럼, 교육의 독단주의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장 하고있다. 일상생활에는 공인된 의견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이 반드시 받아들여질 필요는 없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문학적 의견은 공인을 받아서 대학 에서 독단적으로 가르쳐지고 있었던 반면에, 로마교회는 처음에는 프톨레미 를, 다음에는 코페르니쿠스를 순전히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인정해 주 었다. 벨라르미노는 그가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잘못된 것으로 보았을 때 어 떻게 그것을 인정하도록 결정했는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가? 뉴턴역학 과 같은 견해둘이 어떻게 해군사관학교에서 인정되는가? 이것은 옛 문제들 의 새로운 변형아다. 일단 우리가 이것을 잘 다루기만 한다면, 우리는 어떻 게 해군사관학교가 뉴턴주의 형이상학의 부흥에, 과학적인 태도에, 기술적 인 혁신들을 환영하고 시도하려는 경향에 대해 공헌을 할 수 있었는지, 그 리고 그 다음으로는 이것들이 어떻게 인정되었는가? 하고 물어볼 수 있을 것 0] 다. 5 맺는말 현대 물리학의 역사는 몇 가지의 지적 체계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첫째는 고대 소크라데스 이전의 생각들에서 생겨난 피타고라스이론과 원자론으로, 이것은 중세의 신비철학을 통해 역학으로 발달되었다. 둘째는 뉴턴의 이론 이고, 셋째는 장의 이론이다. 최근의 물리학은 새로운 네번째 이론을 찾느 라고 애를 쓰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혁명을 일으 켰다. 그의 과학적인 혁명은 실용주의의 하나의 증거로 간주되었다. 그 경
험 주 의자들이 충격에서 벗어났을 때 그들은 과학적인 이론들이란 확실한 것 이 아니고 가능성이 있는 것일 뿐이며,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뉴턴의 이 론 보다 더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와 동시에 과학철학자에 게 무언가 더 요구되는 것이 있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즉 뉴턴의 패배룰 아 리스토텔레 스 의 패배와 똑같은 방식으로 볼 수 없다는 느낌이었다. 루더포 드 경은 아인슈타인이 뉴턴을 무너뜨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라고 선언했는데, 그는 이 말을 매우 모호한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도 똑같은 용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채플린의 자서 전 에 서 ; 채플 린은 루더 포 드의 원본 을 아마도 읽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유명한· 과학자이면서 형편없는 철학지이었던 워너 하이젠버그는 그가 폐쇄된 이론 에 대한 이론이라고 불렀던 한 도구주의의 변형을 제시하였다. 여기에서 그 는 과학적 이론의 패배란 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주장은 알려진 사실 돌과 배치되는데, 이것은 과학 안팎의 여러 종류의 패배에 대한 혼란에서 비 롯 된다. 과학적 인 이론은 논박 가능한 설명들이라고 한 포퍼의 한계 설정 과, 그의 전리치 접근 정도에 대한 아인슈타인이론의 설명이 당분간은 점점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견해로 인식될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그 이상을 이야기했다. 그는 이론과 실험 사이의 간 격을 메우기 위하여, 그것도 적절히 메우기 위하여 뉴턴역학을 변형하는 것 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에게는 인위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계획에 홍미를 가전 적이 없었다. 칼 포퍼는 이러한 그의 태도 는 임기응변의 가설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하는 데서 오는 것으로 보았 다 . 그리고 그는 이 꺼려함이 단순화의 욕구에서 비롯되고, 단순화의 욕구 는 가장 시험 가능한 이론의 탐색에 대한 욕구로 보았다• 따라서 포퍼가 과 학은 곧 시험 가능한 설명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지 은 것 외에도, 최고 수준의 시험 가능성에 대한 그의 요구는 특별한 의미 를 갖는다. 이 요구는 아인슈타인이 그의 형이상학과 일반 장의 이론, 그리 고 그의 연구에 사용된 지적 체계에 대한 언급 없이는 뉴턴역학을 수정하 기를 꺼려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여기에 포퍼의 잘못과 혼란이 있다. 연구에서 최대의 시험 가능성이라는
요구는 다원론의 여지를 남겨 놓지 않는다. 높은 정도의 시험 가능성은 순 수과학이건 응용과학이건 과학이나 연구에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 인 기술에서, 특히 핵 기술과 우주 · 기술에서 요구되는 것이다. 기술에서는 아인슈타인 갇은 연구자들이 싫어하고 또한 독단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수 정이론(예를 들어 뉴턴역학)이 응용과학자들에 의해 개발되면, 그것은 기술 자들에 의하여 가능한 한 신랄하게 시험되고 또 적용이 된다. 기술에서의 시험둘은 과학에서의 시험들과 다르다. 즉, 그것들은 자연에 관한 오래된 사 실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에 대한 요구를 보장하기 위한 시도들인 것 0] 다.
제 9 장 사회철학과 기술과의 관계 낭만주의 사회철학자들은 물론이고 전통적인 계몽운동 철학자들이 사회 에 관해 이야기한 내용은 사회과학을 위한 지적 체계로서 가장 잘 제시되 고 있다. 그러나 크고 명백한 실수를 피하고자 한다면 하나의 함정을 조심 해야만 한다. 즉, 어떤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 또는 그 체계 안에서 자신 의 생각을 발전시킨다는 것과 그 체계 안에서 조직적으로. 머물러 있다는 것 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 지도 않다. 일부 저명한 철학자들은 이 바람직하지 못하고 불가능한 것을 바람직스럽고 사실인 것으로. 간주한다(문 라카토스). 우리가 사회에 관한 연구를 할 때 그 지적 체계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첫째는 사회과학의 체계가 자연과학의 체계만큼 좋지 않다는 것이며, 둘째는 이 두 분야 모두 실제적인 일들이 사 람들로 하여금 그 체계로부터 이탈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강요하지만, 사회 적 문제에 있어서는 이러한 사실이 보다 더 눈에 띄고, 문제성을 지니고 있 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성은 또한 많은 편협성으로 인해 증가된다. 전동적인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환원주의자 reduc ti o nist@겼다. 즉, 이들은
모든 과학이 궁극적으로는 물리학이라고 믿었다. 물론 생물학이 물리학에만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며, 심리학도 생리학에만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 다. 그러나 사회학과 정치학은 하나의 제약인 심리학의 구조적 틀 속에 짜 맞추어지도록 계속해서 압력을 받았다. 그래서 환원주의는 많은 편견에 사 로잡혔고 지금도 그렇다. 따라서 사회적 • 정치적 문제는 응용과학의 범주 밖에 남겨졌거나 아니면 응용과학에 의해 고도로 제약을 받았다. 그리고 낭 만주의자들은 심리학과 사회학을 정치학으로 환원시키고, 위의 경우와 유 사한 제약을 받았다. 이것은 하나의 축복이면서 동시에 저주이기도 했다. 1 행위에 있어서 환원주의 환원주의는 어거스트 콩트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또한 전통 적이며 고전적인 과학적 개인주의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라틴어의 개인 in d i v i dual 은 그리이스어의 원자 a t om 와 같은데 영어의 분할할 수 없 는 ind iv i s i b l e 이라는 뜻에 해당한다. 이것은 인간본성은 하나로서 어디 에서 나 동일하다는 과학적인 주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우리는 사람을 볼 수 있지만 사회를 볼 수는 없다는 귀납주의의 주장과도 연결되어 있다. 뿐 만 아니라 이것은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어머니로서 의 자연〉에 대한 숭배와도 연결되어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원자론과 개인 주의는 모두가 물활론에 대해 적대적인데, 이 적대감은 그후 이상한 방법을 통해 자연에의 숭배로 이끌어졌다. 인간에 대한 철학의 주된 질문은 두 가지 ―~즉,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환원주의는 어떤 것을 더 단순한 것이나 기본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것. 예를 들면 물체는 원자로 되어 있다고 보아 원자로 물체를 설명하는 경 우 환원주의를 취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생물학이나 심리학 등의 학 문을 물리학 용어로 설명해 내려는 시도 동도 환원주의적 태도라고 할 수있다.
〈 선 〉 한가? 그리고 인간은 〈 신성 처 7 가지고 있는가? ——이 다 . 이 선에 관 한 질문은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선에 대한 것이지 인지된 선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행위에서 선과 악을 모두 인 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 신성 〉 에 관한 질문도 인간이 가장 지 적인 동물이라고 인식되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신성이 아니라 〈 신성이 깃든 영혼 〉 에 대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은 신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선하다든지 혹은 신성이 없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악하다리·고 하 는 견해를 문헌에서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은 이와 다르다. 그러한 문헌에는 유태인과 그리스인의 종교적 전통적인 중 세철학에 대한 저작과, 위 두 질문에 대해 상반된 결론을 피력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지적 유산인 도전적인 저직들이 포함되어 있다. 중세철학자들은 인간이 신성을 지니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모든 자연적 충동 들 역시 악으로 보았다. 계몽운동의 합리주의자들은 인간의 신성을 부인하 고 인간에게 〈 자연 선冷 7 부여하였다. 죽, 그들은 자연 자체는 무의미하고 선도 악도 아닌 것으로 보았으며, 그래서 인간의 자연적 충동등을 모든 행 동의 유일한 지침이며 선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생각하였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사실과 가치의 구분을 주장하였던 홈과 칸트 같은 철학자들은 의지를 자연의 탓으로 돌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자연의 의도에 적합치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계몽주의 운동의 형이상학은 방법론이라는 이름으로 변장되어 도입되었 다. 즉, 〈 신성 〉 의 이론은 형이상학적이라고 생각되었고, 사림들이 그 당시 의 종교적 교리를반박할만큼자주거부되었다-물론다윈의 진화론이 출현하고 나서야 공개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반박되었다. 더욱이 환원주 의 형이상학을 근본적으로 거부하였던 충실한 종교적 사상가들조차도 환원 주의를 하나의 방법론으로 채택하는 데 대해 호의를 가졌다• 그들은 이 환 원주의가 과학을 전혀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생은 의미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이것은 모든 예술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 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경험들은 신에게로 곧장 이르게 하고 인간의 영은 신성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가정에로 이르게 하는 대안적이고도 초과학
적인 방법론을 필요로 한다 . 문제는 신(神)이 계몽운동의 합리주의자들이 말하는 보편적인 신이 되든지, 반계몽주의자들이 말하는 〈 편협한 신 〉 이 되 어야만 했던 점이다. 〈 신성 〉 이라는 것은 보편적 신성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고, 천당이나 지옥에서의 편협한 생활로 갈 수도 있다. 〈 편협한 〉 신은 단 지 보편적인 신을 비유한 것일 뿐이어서 반계몽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는 생각이 그때까지는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이 생각은 오늘날에는 보편적 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불행히도 이것은 단지 편협주의의 새로운 속임 수일 뿐이다. 환원주의는 장황하고 상세한 토론을 요구한다 .5) 여기서 우리는 오히려 사 회과학과 사회기술 양자가 지닌 일부 중요한 결과들을 탐색해 보아이:만 한 다. 과학적인 전통은 자유주의적 전통의 동반자였으며 이 양자는 다소간 의 회민주주의의 동반자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자주 언급되는 말이다. 이 의심 스러운 주장을 일단 사실이라고 수용하기로 하자. 이 사실은 과학과 자유주 의와 민주주의 서이에 어떤 뿌리 깊은 관련이 있음을 가리킨다. 아니면 이 것은 순전히 우연일 수도 있고, 아니면 과학자들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가 진 신념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가? 이 문제 는 특히 기술주의가 대두되는 시점에서, 그리고 민주주의와 기술을 수출해 야 한다는 시급한 과제의 관점에서 특별히 탐색할 가치가 있다. 먼저 관용을 갖자. 그리고 종교적인 관용을 고려하자• 환원주의가 방법론 으로 얄픽하게 가장된 형이상학이라는 사실은 여기에서 논의되지 않을 것 이다. 기존의 종교에 대해 한두 개의 가능성 있는 태도를 환원주의가 규정 하고 있다는 사실아 먼저 논의돼야만 하는데 이것은 환원주의가 그렇게 함 으로써 종교와 관련된 모든 태도에 제한울 가하기 때문이다_특히 사회 적 개인적 문제는 종교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과학과 종교 간의 관계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태도는 이 논의를 방해한다. 그 결과, 애매한논의를필연적으로수반하게 되는혼란이 생긴다. l 앙1 ] 기 이성의 시 5) 다음 문헌과 비교. J. Ag as si, Towards a Rati on al Phil o sop hi c a l Anth r op o logy , The Hag ue : Ma rtinu s Nij ho ff , 1977.
대에 유럽에서 자유롭게 문제믈 논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예를 둘 어 데이비드 홈이나 데니스 디데못은 아주 솔직하고 거의 자유롭게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상례라기보디는 예의였다)과 유럽대륙과 심지어 영국에도 나타났던 이 론과 실제 사이의 거대한 간격은 하나의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게 하는 원 인이 되었다. 환원주의, 특히 기존 종교에 대한 반대로 인하여 형이상학으 로서 크게 퍼졌던 환원주의는 자연을 찬양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환원주의는 향락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래 서 지식을 통하여 인간의 고통을 더는 것이 인간의 주요한 목적이 되었다. 그래서 〈 인류의 은인 〉 (베이컨이 과학적인 이상향을 그린 그의 『 뉴 아틀란티스 .!l 에서 나왔다)과 같은 표현이 가볍게 사용되지 않았다. 즉, 지식을 통하여 지 상에서 인간을 구제한다는 생각은 기독교와의 융화 가능성의 문제와는 상 관없이 계몽주의에게는 종교와 같은 것이었다. 이 융화의 문제는 무엇보다 도 기독교와 자연숭배자의 종교와의 융화 가능성에 달려 있었다. 즉 자연숭 배자가 타협할 수 없을 정도로 옹호하고 있는 자연 선의 원리, 즉 쾌락주의 에 그 관건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융화가 이루어질 수 있든지 없든 지간에 ― ―분명히 융화될 수 없는 것이겠지만― ― 문제는 관용이라는 것 이 행해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답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 쾌락주의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이 둘은 최근에 이루어진 과학과 기술의 통합은 말할 것도 없고 과학기술사회의 출현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첫째로 각 개인의 기호를 있는 그대로 관용하고 수용하고자 하는 요구가 그것이다. 이것은 이질적으로- 혹은 의부로부터 주어전 것으로서의 기호에 대한 이론인데 이는 소비자행동이론, 따라서 시장메커니즘이론의 기초가 된 다. 이 이론은 명백히 결함이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매우 강력한 전통이 었기 때문에, 고전적인 경제학자들이나 금융인들은 사람의 기호가 수시로 변할 수 있고 또 너무 자주 변하면 시장은 어떤 안정도 이루지 못하며 따 라서 스스로 균형도 찾지 못한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가 없었음이 분명하다. 체제를 유지하는 데 얼마나 안정된 기호가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충분하게
연구되지 않았다. 기호는 시장의 시간차ti me-la g보다 훨씬 긴 주기로 변화 해야만 한다. 취미는 의적 원인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과, 시장 메커니즘은 간섭되지 않거나 또는 적어도 재정금융상만으로라도 간섭되지 않는 것이 가 장 좋다는 두 가지 주장으로부터의 가장 중요한 이탈은 존 메이나드 케인 즈의 유동성 선호이론이다. 즉, 주식시장이 어떤 불안정 수준에 도달하면 주 식값이 얼마나 빨리 떨어지든 상관없이 떨어지는 주식값을 멈추게 할 만한 고객이 없다는 것이다. 이 명제는 케인즈혁명으로 알려져 있는 고전경제학 으로부터의 중요한 이탈이다. 둘째로 모든 인간들은 타고난 동일한 기호를 공유하고 있다는 환원주의 자의 쾌락설에 관한 명제가 있다. 이 두번째 명제는 첫번째 것을 수정한 것 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드러난 취미들의 일부는 인간본성보다는 타락에 기 인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말퀴스 드 사드는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 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실제로 좋아한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계몽주의 철 학을 논박해 왔다고 주장했다. 계몽운동에서는 이 주장이 무시되었다. 계몽 주의 운동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해의 갈등 속에 있다는 사실을 디루는· 데 에도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계몽주의를 대변하는 사람들은, 미래에는 과학과 기술이 너무나 풍성해질 것이기 때문에 갈등의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고, 님아 있는 갈등도 매혹적인 합리성이 해소시켜 줄 것이라고 말했 다. 그러나 만약 그 갈등이 악의 없는 욕망에서 연유하여 무의식적으로 해 룰 입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해를 입히려는 욕망에 뿌리박고 있다면 이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남에게 해를 입히려는 욕 망은 대단히 변태적인 것이고, 인간의 본성과는 아주 맞지 않는다는 것이 다. 경제학자들은 이 점을 알고 있었다. 죽, 그들은 인간은 사악하지 않으며 타인이 나쁘게 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선호하지 않는디는 가설의 형태로 이 점을 종종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논의의 중요성은 계몽주의의 가장 위대한 비평가인 헤겔이 바로 이 가 설을 비판하고 이것을 그의 유명한 주인과 하인 이론 doc trin e of the maste r and the slave® 으로 대치한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죽, 두 사람이 있으면 두
사람 사이에서 누가 주인인가를 결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가 설의 가학적 성격은 헤겔학파인 장 풀 사르트르에 의해 분명히 밝혀졌다. 인간본성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서로 친구가 되고 싶어한다는 벤담의 이론과 정반대가 된다. 실제로 벤담은 자기 이론을· 뉴턴 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비견할 만하다고 보았고 스스로를 사회과학 분야의 뉴턴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모든 관찰된 사실들은 그의 주장과는 반대였다.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환원주의는 인간의 내재적인 희망이나 욕구, 혹은 바람이나 충동들을 발견하도록 우리들을 몰아가고 있다. 그리고 다윈 주의는 고전적(데레시오, 홉스, 스피노자) 주장을 지지함으로써 이것을 크게 합법화시켰는데 그 주장은, 생존아 모든 종(種)의 구성원의 주요 목표이며 그렇지 못하면 멸종되고, 생존을 위해서는 식량과 집, 그리고 번식이 필요 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량을 문제성이 없는 것으로 무시한다면(굶주림 은 너무나 흔히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의 이것은 우리의 논의가 얼마나 편협 한가를 보여 준다), 우리는 이제 다시 프로이트와 애들러 사이의 논쟁으로 끌 려들어가게 된다. 프로이트는 성적 동기를 주요 동기로 보았으며, 애들러는 사회적 수용성에의 욕구를 최우선적인 것으로, 따라서 안전에 대한 욕구를 그 주요 동기로 보았다. 성이나 안전에 대한 욕구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논의는 이것들의 욕구에 관한 것이 아 ® 헤겔 G. W. F. Heg el 의 『정신현상학 Phenomenology des Ge i s t es 』(1 807) 에 나오는 주인과 노예에 관한 이야기. 여기서 헤겔은 자기의식이 획득되 는 과정을 다루었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고도 한다. 어떤 두 사람 사이에 지배력과 인정을 위한 투쟁이 벌어지는데 이 두쟁에서 승리하는 자가 주인이 되고 진 자는 노예가 된다. 노예는 일하고 주인은 노예 노 동의 산물을 즐간다. 이때 주인은 노예로부터 인정을 받고 자기의식을 획득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 한편 노예는 노동을 통 해서 자기의식을 획득하게 된다. 주인의 소비는 노예의 노동에 의존하 기 때문에 진정한 자기의식에 도달할 수 없게 되며 간접적으로 자기의 식을 실현할 수밖에 없게 된다. 헤겔은 노동을 통한 자가의식의 획득 과 정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니라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최우선적이냐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인간 이 성적 만족을 달성하기 위해 수용성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였고, 애들러 는 그 역으로 말하였다. 다시 반복하지만, 이 두 견해둘은 구애하는 모든 동 물에게 나타나는 구애, 성교, 그리고 가정형성의 복합을 성이라고 간주히는 로렌츠에 의하여 대치되었다. 이 논쟁은 환원주의가 과학적 연구에 영향을 준다는 이유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프로이트와 애들러는 원칙에 있어서 일 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칙에 따라 환자들에게 동기를 돌리려 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전통적인 오류이다. 계몽시대의 전체 전통이 어 떻게 이것을 관용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것이 오늘날까지 살아남 았는지에 대해 의아해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만약 환원주의를 엄격하게 따르기를 원한다면, 먼저 물리학의 기초를 닦아야 하고, 물리학의 기초 위 에 화학을 발전시키고, 그리고 나서 물리학과 화학의 기초 위에서 생물학 울 발전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단 환원주의를 잠시 제쳐 놓으면, 즉 어느 한 학문 분야는 그것의 선행 학문 분야가 완전하게 발전하 기 전에도 발전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하게 되면, 이 논쟁은 그 직접적인 중 요성을 상실하게 된다. 환원주의의 방법론적인 원칙은 흔히 옥캄의 면도날 ® Occam's razor 로 비유되는데 이것은 설명될 수 있는 실체들을 모두 다 제거 해 버리고 있다. 그러나 수염을 깎기로 결정하기 전에는 수염을 얼마나 길 게 길러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은 없다. 이것이 모든 환원주의자들의 논의에 있는 논리적 결함이댜 일단 우리가 환원주의를 원론상의 문제로만 본다면, 사람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기호와 관련된 쾌락주의적 원칙은 중요성을 갖 @ 경제성의 법칙 law of economy 또는 절약의 법칙 law of par sim o ny 라고 도 한다. 옥캄이 〈존재는 필요 이상으로 수를 늘려서는 안된다 〉 고 한 데 서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옥캄 이전부터 있었으나 옥캄이 이를 본격적으로 사용했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필요없이 많은 전제를 설 정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사고의 경제를 존재의 문제에까지 적용한 유물 론의 격언이다. 옥캄의 면도날은 엄격한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비유적으 로도쓰인다.
게 되고, 반면에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기초에 관련된 쾌락주의적 원칙은 무한정 연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현재의 기호와 관련된 원칙 마저도 적용 불가능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해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키며, 이 웃보다 한 발 앞서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고, 일부는 정직한 일보다는 단 순히 약탈과 좀도둑질, 그리고 절도를 선호하며, 이웃에게 상처입히기를 즐 가고, 자기 아내를 두들겨 괜다. 실제상의 쾌락주의를 교정하는 원론상의 쾌 락주의가 없이는, 실제상의 쾌락주의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기호에 대한 막 연한 암시만 있게 된다. 경제학자들은 오늘날 기호라는 것을 때로는 시장에 서 드러나는 것으로, 때로는 인간본성과 일치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러한 설명의 가변성은 매우 중요하다. 즉, 인간은 선하지 않으나 그 〈본성〉 만은 선하다. 그러므로 인간이 선함으로부터 이탈한 것은 우리가 계몽하려 는 노력을 증가시킴으로써 극복될 수 있는 기술적인 장애라는 설명이 가능 해전다. 이것이 긍정적인, 죽 서술적인 경제학과 규범적인 복지경제학 서이 에 종종 나타나는 경제학상의 통탄할 만한 혼란이다. 이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소비자기호이론을 무시하고 시장에서의 기호(〈집단적 기호〉)에 관 해 말하는 것이 더 니을 것이다. 이 혼란은 발전에 있어서는 중대한 장애물 이다. 이 혼란으로 인하여 국방예산을 포함한 주요 경제적 요인들이 정규적 으로 경제이론에서 빠져나가고, 종교, 맹목적 애국심, 그리고 아것들이 취 미에 미치는 영향과, 이들이 일으키는 국가적이고 국제적인 충돌들과 같은 주요 요인들이 반복적으로 평가절하되고 있다. 국방과 종교 및 기타 유사한 〈의적 효과冷터 만약 묵인된다면 이것들은 스스로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계속 무시될 것이다 .6)
6) 외적인 영향들은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좌우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디른 방법들에 의해 통제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신고전경제학자들은 선 거에 의한 정상적인 민주적 동제(신고전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를 제의하고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A. 0. Hirsc hman 은 신고전경제적 견해란 불만을 품은 소비자들의 존재를 허용함하므로 말만 많고 참여하지 않는(다시말해 시장 메커니즘 이의의 다론 방법에 의해서는 소비자들이 시장에 개입함이 없는) 견해라고 바난한다. 의십
2 오류, 죄, 그리고 낙관주의 성선설도 악이 발생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__ 그 악은 악한 사람이 주 기적으로 행하는 것이거나, 누구든지 범할 수 있는 악이거나, 또는 미신이나 전쟁과 같은 악일 수도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어떤 악도 진짜 악이 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타고난 악의 구렁팅이로부터 끊임없이 고통받 을 것이다. 이미 데카르트는 물론이고, 스피노자는 더욱더 소크라데스의 행 복설을 받아들였다. 소크라테스의 행복설이란 사람들이 의식적인 의도에서 가 아니라 무지로 인하여 죄를 범한다는 견해이다. 이것은 죄가 죄인에게 유해하다는 주장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러한 설명의 논리는 잘못된 것이다. 죄가 죄인에게 유해하다는 주장을 전통적인 서양의 종교보다 더 강조하여 내세우는 교리는 없다. 그러나 서양의 종교들은 모든 죄인은 의식적이고 의 도적으로, 또 악의에서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이성에 반(反)하여 죄를 범한 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죄인은 자신이 지은 죄가 자기를 영원한 파멸로 떨 어뜨릴 것이리는 점을 알면서도 죄를 짓는디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데카르 트, 그리고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즉, 인간은 어떤 행동이 얼 마나 해로운 것인가를 알게 되면 자연히 그것을 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 떤 다른 행동양식이 있다면 그것은 무지나 혼란에 뿌리를 둔 것임에 틀림 없고, 혼란이라는 것은 무지의 심각한 형태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성적이라는 주장, 즉 〈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 라는 정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7)
할 바도 없이 우리가 소바자단체들, 근로현장의 민주주의 그리고 다원 론적 참여적 민주주의에 대한 다른 혁신적 기법들에 대하여 집중하면 할수록 신고전경제이론은 관련이 더욱더 적어진다. 이렇게 본다면, 신고 전경제이론의 영향은, 십지어 이것이 겪울지도 모르는 미시적 케인즈주 의의 수정들에 있어서조차도, 다음과 갇다. 죽, 신고전경제학은 경제에 서 참여적 민주주의의 성장을 막는 하나의 수단이고, 따라서 경제권력 구조의 현싱을 방어하는 것이다.
위의 주장은 낙관주의적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생각을 배경으로 하여 과 학과 기술에 대한 견해를 갖는 것은 실제로 희망적 낙천주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를 현대 과학기술사회에 대한 낙관주의적 공상 가였던 베이컨의 후계자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를 다시 베이컨의 환원 주의 철학으로 되돌아가게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환원주의의 낙관성 을 볼 수 있게 되고, 인간이 가진 현재의 기호 또는 동기와, 전정한 기호 혹 은 동기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한 이후의 경제학이론 정립과정에서 환원주 의 옹호자들이 발휘한 능력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이해를 더 많이 하고 그 리고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으면 있을수록 진정한 본성을 따르게 될 기회는 더 많아진다고 생각되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타락한 취미와 기호는 반대되어질 필요.7} 없다. 전보는 오래된 일들을 앞지를 것이기 때문에 관용 은 가능하고 또 권장할 만한 것이다. 대규모의 기술적 개선을 이룩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중요한 두 가 지 중심사상은다음의 사상노선을따르고있다.즉,하나는고전경제학을따 르고 다른 하나는 칼 맑스를 따른다. 고전경제학을 따르는 사상은 의국원조에 대한 사상이다. 고전경제학은 최 선의 의국원조가 경제원조라고 말한다. 다론 사람의 기호에 간섭하는· 것은 반자유주의적이다. 그것은 또한 다른 사람을 경제적으로 돕는 것이 직접적 으로 그들의 기호를 개선할 것이라는 가정하에서도 불필요하다. 칼 맑스는 종교에 관해서도 바슷한 견해를 나타냈다. 그는 종교라는 것은 물질적 조건 과 교육이 개선됨에 따라 스스로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 두 가지 생각은 논박되어 왔다. 즉, 자국의 가치관 때문에 경제성장을 위한 경제원조를 받는 것을 금할 수도 있다. 또는 계몽의 증가는 전혀 또는 거의 없이 경제성장만 될 수도 있고, 혹은 이성주의 시대의 철학자들이 생 7) 철학에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浮柱근 공식보다 더 인기 있는 말은 거의 없다. 이 공식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이론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계 정 오 동주의 사상가들은 이 말을 규칙적으로 그리고 점증적으로 불신 했다. 그러나 그 공식은 새로운 중요성을 획득했다.
각하겨 칼 맑스에 의하여 인정되었고 현대에 와서 맑스의 후계자인 레닌과 스탈린이 거창하게 떠벌렸던 것과는 다른 계몽의 증가가 경제성장을 동반 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견해를 낳게 했던 전통적 합리주의의 오류는, 옥캄의 면도칼은 수염이 한 치도 자라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 아래 사회과 학은 가능한 한 인간의 본질적 특성에 가까운 곳에서 출발해야만 한다는 생 각에 놓여 있었다. 전통적인 합리주의는 사람들이 적절히 대우받고 발전할 기회가 주어지면 개선되리라는 의심스러운 가정 위에서 선을 인간의 본질 적 특성으로 보고, 그럼으로써 오늘날의 악과 오늘날의 인간 문제에 있어 서의 악의 위력을 과소평가했다. 더욱이 만약 사림들이 개선하는 데 실패하 면 전통적인 합리주의자는 사림들의 무지를 비난하곤 했다. 이 전통적인 합 리주의자는 사람들에게 배울 기회가 주어지면 그들은 열심히 그리고 성공 적으로 배울 것이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발전하리라는 믿음에서 위안을 찾 고 있다. 만약 그들이 그래도 발전하지 못하면, 합리주의자는 사람들이 지 닌 미신이 사람들의 학습을 방해한다고 비난하곤 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우리의 관용과 자유주의,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호의적 견해를 얻을 수 있 울 정도로 사람들을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으로 우리는 그 둘의 종교나 기타 그들아 성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_~매우 불쾌 하고, 매우 불공평하지만 一一맹렬히 공격하게 된다• 우리는 강제적으로 그 리고 값싼 선전으로 그렇게 한다. 이렇게 해서 서두른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형편없는 지성인으로서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죄를 오류로 파악한 계몽주의의 견해는 환원주의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 다. 이것은 인간이 날 때부터 선하고 배우는 데 열심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 는 편견 때문이고, 이 편견은 기존의 종교 때문이다. 자연종교는 그럴지 몰 라도 기존의 종교는 인간본성의 한 부분이 아니다. 심리학이 사회학보다 더 기초적이라는 주장은 사회학 대신 심리학을 연구하는 것이 해결책을 가져 오게 되리라는 찰못된 희망울 가져다 준다. 기존의 종교는 개안적인 문제로 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사회적 기구로서 이성의 적이기 때문에 심리학이 더 우수하다고 볼 수 있다. 사회학을 모두 회피하고 심리학에만 호소하고자 하는 요구는 따라서 인간의 자연선을 확립하기 위한 요구이다. 이것을 보면
역시 심리학도 회피하고 오 직 생리학에만 호소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 렇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으며 파블로프가 나타날 때까 지는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도 없었다. 침 홀리는 개가 결코 하나의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파블로프를 아주 급속 히 유명하게 만들었다. 파블로프의 이론은 스키너의 이상향인 〈 월든 〉 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파블로프의 옳고 그론 것을 논할 필요는 없다. 만약 파블 로프가 옳다면 우리는 또한 생리학을 버리고 곧장 물리학으로 가도록 해야 · 만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하나의 대답이 있다. 즉, 우리는 사회학을 실제로 다룰 수도 있으나, 심리학이 이용 가능하다면 사회학보다 심리학을 선호하며, 그 리고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져 내려간다. 따라서 파불로프가 조건반사는 생 리적이라는 사실을 발표할 때까지 연상심리학을 실행하는 것이 모두 옳았 는데, 이것은 우리가 입에서 침을 훌리도록 훈련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콩팥에서 오중이 생기도록 훈련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 대답을 살펴 보기 위해 우리가 인간행동에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예가 필요하다. 이미 우리는 앞서 살펴 본 간단한 예가 있다. 프로이트는 『심리분석 운동의 역 사 』 라는 책에서, 인간은 수용되고 싶어하고 그 결과로 열등의식을 가질 수 도 있다는 애들러의 이론을 부인하지 않았다는 점을 애써 강조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이론이 사회학적이라고 생각한 반면, 성적 동기에 관한 자 신의 이론과 그 결과로 나타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심리학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후지에 우선권을 부여하였다. 이제 그의 오류는 매우 심각하여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고통을 겪는지 의 여부와는 실제로 관계가 없게 되었다. 애들러는 환자들의 열등감을 치료 하고, 프로이트는 환자들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치료했다. 만약 애들러 의 치료방법이 피상적이지만 성공적이라면, 그것은 프로이트의 심충분석에 비해 애들러의 치료가 기술적으로 더 선호할 만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프로이트는 증상~ l 아니라 질병을 치 료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전통적인 견해는 프로이트 편이다. 죽, 질 병은 항상 무지에서 생기고 치료는 항상 지식의 획득에 의해 이루어전다는
것이다 . 그래서 심리치료에서는 지이에 대한 지식 을 획득 하는 것이 치료방 법이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가 더 나아가 우리 모두는 무 지하게 태어났기 때 문 에 무지는 질병이 아니라고 말했 을 때, 이 견해도 전 통적인 견해와 일치 했다. 질병은 학습, 편견 그리고 미신들에 대한 장애물이다. 정확 하게 말하 자면, 모든 편견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매달려 있는 편견, 이 것 이 사실상 노 이로제라고 프로이트는 주장했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또한 히포크라데 스 의 모든 전통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즉, 의학은 결코 사람을 ·치료하지 않는다. 〈 선하고 찬숙한 어머니인 자연 〉 , 바로 이 자연이 사실상 치료하는 것이고 의학은 기껏해야 치료하는 과정에서 장애물을 제거할 뿐이다. 의사 들이 흔히 질병으로 인해 생긴 고통을 치료하는 동안 악성 질 병이 걷잡을 수 없게 되도록 방치함으로써 형법상의 태만을 저지르는 것이 이제까지는 너무 자주 있었다. 따라서 증상보다는 질병을 치료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매 우 유익한 것아다. 이것은 공포증의 치료를 담당했던 프로이트의 초기 경력 에서 특히 중요했다. 공포증이란 것은 심층의 불안을 어떤 대상에 두사한 것으로 이 대상은 결과적으로 무서운 것처럼 보이게 된다 . 그러나 환자에게 그 대상이 무섭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은 효과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 때는 환자가 다른 대싱에 자신의 불안을 투사하기 때문이다. 환지는- 자신의 불안 자체가 치료되기를 필요로 하는데 물론 이것은 자아에 대한 지식의 도 움으로가능하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여기에서도 중대한 오류를 범하였는데, 이것은 엄격한 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더욱 그러하다. 악성 질병의 뚜렷한 증상을 치료한다 는 것은 분명 수준 낮은 의학으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가볍고 일시적인 질 병의 지극히 위험한 증상들을 찾아내어 치료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댜 인간의 신체조직이 그 증상으로 안하여 죽지만 않는다면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병은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콜레라, 디프테리아 , 일사병 같은 것이 다. 프로이트는 치료가 깊이 둘어가야만 하고 , 그리고 정신분석 치료는 완 벽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 프로이트의 배후에 계몽주의 의 급전주의적 전통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 접에서 그를 바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 나쁘게 그는 계몽주의의 이상들이 너무 높다는 것 을 깨닫고서 그의 이상을 낮추기보다는 조울증에 빠진 위대한 철학자 쇼펜 굼 H 머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우울증의 심연(深淵)에 _ - 정확하게 애들러 의 이론대로 - 一 빠져 버렸다. 인성 (人 性 ) 속에 내재한 복수심리를 신의 저 주로 보면서 계몽주의의 지나친 낙관주의가 깊은 비관주의로 뒤바뀐 것은 오늘날 생대학 운동의 가학적 히스테리성의 묵시적 일부분이다. 이것은 기 술이 계몽주의 사회철학에 미친 중요한 결과이다. 이 사회철학에서는 물리 학적 기술을 응용자연과학으로 보았으나, 사회과학을 심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으로 봄으로 해서 사회적 기술을 위한 여지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 다. 환원은 원칙의 문제요 사회적 기술의 문제였다. 계몽주의 운동은 이렇 게 해서 사회적 기술이 불필요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라는 가정 아래 모든 사회적 기술을 차단했다. 예 : 교육은 복잡한 제도로서 여기에는 사회기관, 심리학 그리고 더 많은 것들이 관련되어 있다.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사회기관은 거의 대부분 다분 히 종교적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세속적인 신념을 공언하는 교사에 의해 교육받은 귀족계급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이런저런 종류의 종교교육을 받기 때문에 종교적 교육기관에 의하여 그의 운명이 좌우되었다. 계몽주려 운동의 원칙들이 실행되리라고 예상했던 미국과 프랑스혁명은 세속적인 의 무교육을 만들어 내었다. 계몽주의 운동은 기존의 교육제도에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도적인 것이 아니라 미신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비 난하였다. 이를 대체하기 위해 독학이리는 이상이 제시되었다. 베이컨과 데 카르트는 자신들이 받았던 교육의 종류를 악이라고 강조하였고 그들의 독 자등게게 교육적으로 자율적이 되라고, 죽 혼자서 각 개인이 스스로 독자 적인 지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되라고 설득하였다. 이 생각은 불합리하였지만 이것은 초보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과학 적 '문헌을 발간한 과학학회의 설립을 가져왔다. 그래서 비록 18 세기 대학은 중세적이었지만, 과학대학 의의 아마추어의 손에서 크게 피어났다. 교육제 도만은 중세 그대로였다. 죽, 개인은 스스로 배운다는 루소의 이상이 교육 개혁에 장애가 되었다. 루소는 스스로 공부하는 그 개인에게 에밀 Emil e 이
러는 이름을 붙였다. 성인이 된 개인은 실제로 명사모임이나 사교클럽에 가 입하여 스승을 찾아낼 수도 있었으며, 재정 지원이 필요하면 후원자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지독하게 시대에 뒤진 교 육제도에 좌우된 채로 남아 있었다. 피어스 윌리엄스 8 까 고전적인 논문에서 말하듯기 프랑스혁명 직후 프랑스 의회는 교육에 관한 토론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강력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 그때까지 종교적이었던 교육제도가 종교적 조직체의 손에서 갑자기 이탈됨으로써 새로운 행정기구를 절실히 필요로 하였다. 둘째, 프랑스혁명의 모든 실패는 대중적 편견, 즉 대중들이 혁명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는데, 이것에 대한 유일한 치료방 법으로서 교육이 요구되었다. 프랑스의 여러 디론 생활 측면과 마찬가지로 교육도 나폴레옹에 의해 개 혁되었다. 그는 학교를 사관학교식으로 전환시켰다. 나폴레옹의 교육개혁으 로 인해 문명세계 전체가 아직도 고통을 겪고 있다. 산업사회 이전의 사회 를 산업사회로 바꾸는 데 있어 교육이 주된 수단이 아니었더라면 나폴레옹 의 개혁은 물론 그렇게 영향력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육은 읽고 쓰는 능력을 표준으로 삼았다. 현재 우리도 그런 표준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했 다. 서양의 보통사람은 안내서롤 보고 기계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 히 교육을 받았다. 오늘날에는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교육제도 의 개혁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형편없는 모든 사회기관과 조직체들을 개 혁하는 데 이르기까지 보다 니은 사회개혁이론과 실제적 개혁을 필요로 하 고있다.
8) 다음 문헌 참조. L. P. Wi lliam s, The Poli tics of Sci en ce in the :Fr ench Revoluti on , Pap er Ten in Marshall Clag ett , Ed., C ri tica l Problems in the His tor y of Sci en ce. Un iv. of W isc onsin Press, Madis o n, 1959.
3 사회이론과 사회행동 오늘날의 사회과학은 여러 가지 사회사상에서 영향을 받아왔다. 이중 가 장 중요한 것은 두 개의 지적 사조로서 낭만주의와 자유주의를 둘 수 있으 며, 또 중요한 정치운동으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둘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매일의 일상 문제와 씨름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몇몇 일 반적인 개념들이 사회과학에서 상호작용한다는 사실은 그 활동 여지를 훨 씬 넓혔지만, 동시에 많은 혼란도 가져왔다. 자유주의자들은 모든 사회적 힘 을 평가절하하려고 시도하였다. 마치 종교와 기타 〈미신n-° l 관용되어야 만 한다고 하는 생각이 그러했듯이, 국가를 야경원으로 보고 시장 메커니즘 울 최상의 경제조정자로 보는 생각이 지유주의의 모형 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 생각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면 자유주의가 그밖에 우리에게 무 엇을더줄수있는가? 아담 스미스의 제자인 벤담은 사회과학이 모든 실제적인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야심찬 생각을 가졌다. 우리 모두는· 친구를 필요로 한다 는 법칙을 만유인력에 비견하면서 자신이 사회과학에서의 뉴턴이라고 주장 했다. 벤담이 친구가 필요하다는 보편적 욕구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러나 영국의 급전주의 사상의 발전에 관한 기념비적인 연구를 수행한 엘리 하레비의 말을 벌리면, 벤담은 그의 급전주의가 요구하듯이 그 러한 생각을 혁명보다는 사회개혁에 적용해야 함을 실례를 들어 주장한 첫 번째 사람아었다. 실제로 벤담의 생각은 문명사회의 자유주의적 법률 개혁 에 있어 지금도 초석이 되고 있다. 죽, 모든 시민 아니면 적어도 대부분의 시민이 준법을 하도록 법을 편리하고 합리적이 되게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 이다. 그러나 벤담의 이론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대단히 부적절하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고전적인 사회적 연구를 개관해 보고 어떤 사상학 파의 구성원이 어떤 공헌을 하였는가를 알아 보며, 이러한 공헌이 반대되는 학파의 구성원들에게 어느 정도 수용 가능했었는지, 그리고 만약 그렇지 못 했다면 반대되는 학파가 그 공헌 대신에 무엇을 기여할 수 있었는가 등을 연구해 보는 것은 이제는 쉬운 일이다• 이것은 낭만주의자들이 계몽주의의
생각을 종종 간단히 뒤집어 버렸기 때문에 특히 쉬운 일이다. 즉, 낭만주의 자들은 심리학보다 정치학을, 개인보다는 전체를 우선시키고 개인을 사회로 환원시켰다(국가형태의 심리학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경향 은 분명하다. 죽, 정치사회학 분야(사회에서의 정부의 역할에 대한 전 분야)가 갑자기 활기를 띠게 되었다. 지유주의자들은 이에 반대하였지만 단지 부분 적일 뿐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그 주도권을 잃고 있었다. 일부 자유주의자 들은 억압적 대책을 자발적 단체로 대치할 수 있었으나 그것도 현명함이 필 요했고 부분적이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민족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그 이상 은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한스 콘과 칼 포퍼와 감은 사상가들은 아직도 모든 민족주의를 낭만주의와 동일시하고, 자유민족주의의 발전을 단순한 혼 란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도 민족주의 운동의 출현을 완전히 규정 하지 못했다. 그리고 낭만주의 철학지들은 민족주의 운동의 성장과 국가 성 립과정 및 이에 수반되는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현성들을- 연구하기보다는 국가는 당연히 주어진 것이고, 정부의 통치권리를 정당화시키는 것으로 보 았기 때문에, 낭만주의 사상가들은 오늘날까지도 기술적 상황들과 민족주의 운동의 성장 사이의 분명하고도 강력한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데 당황하고 있다. 이것은 자유주의’와 전체주의의 양면을 함께 지닌 사회주의에서도 마 찬가지인데, 특히 지금은 거의 전적으로 소멸된 서구의 정통 맑스주의가 그 러하다. 맑스주의는, 로버트 터커가 그의 고전적 연구인 『 칼 맑스의 철학과 신화』라는 책에서 묘사하려고 시도했던 것처럼, 부분적으로 자유주의적이고 또 부분적으로는 낭만주의적이다. 정치 의에도 서양세계에는, 심지어 카톨릭 국가에서도 모든 수준과 형태 의 세속화, 자유화 그리고 반동을 포함한 커다란 변혁들이 있었는데, 이것 은 부분적으로 신교의 종교개혁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산업화가 그 주된 요 인이었다. 산업화는 급속한 경제성장, 인구와 부의 분배, 새로운 교통수단의 개발 등을 가져왔다. 산업화는 이렇게 해서 소수집단의 상호작용에 기초를 둔 많은 전통적인 사회구조들은 물론이고 당시 유럽의 대규모 가족제도의 몰락에 기여하였다. 여기에는 사회적 불안이 동반되었다. 이 사회불안은 사 회사상가들로 하여금 대규모의 소의, 새롭고 잔인한 수단을 이용한 새로운
형태의 착취, 새롭고 홍미로운 노동계충 문화의 발전 등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서구와 기타 국가에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사회조직은 산 업화 시기에 발생한 사회조직이 발전된 것으로서, 전혀 사전 고려가 없이 또는 기껏해야 단기계획에 의한 것으로, 일부는 그 당시 나름대로 기업가 들의 단기적인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일부는 폭발적인 대중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들이었다. 러시 아워의 교통지옥을- 포함 해서 오늘날 사회생활의 가장 중요한 양상은 경영자와 기업가, 그리고 지역 유지들과 기타 유명인사들이 수행한 계획의 결과에서 생긴 것들이다. 이들 은 한때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존재들이었고 지금은 완전히 망각되었지만 생활의 모든 중요한 측면, 즉 연구, 노동, 놀이와 관련된 전통을- 강요한 사 람들기었다. 일부 사람들은 이 목록에 종교도 포함시키기를 원하겠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애매하게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만 말할 것이다. 로마교회나 성공회 같은 거대한 사회기구와 이들보다는 작지만 아직도 큰 사회조직들이 사회생활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태도를 종종 사후에야 발 전시켰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산아제한에 대 한 로마 카톨릭교회의 반계몽주의적 태도와 같은 극히 중요한 원칙상의 문 제조차도 전혀 원칙상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하나의 역사적 우연이거나 사후대책이었을 뿐이다. 성공회의 산아제한에 대한 태도는 멜더스가 영국에 끼친 커다란 영향 때문에 급전적으로 바뀌었다. 만약 이태리에서 그의 영향 력이 영국과 마찬가지였더라면 로마교회에서도 역시 상황이 다르게 되었을 것이다. 성공회는 잔다르크,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불가피할 때는 다윈조차 도 수용했던 교회이기에 멜더스도 무리 없이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사회의 중요한 특징은 현대성에 있다. 이 현대성은 사회적 • 정치적 조직에서보다는 물리적 ·생물학적(농업을포함하여) 기술에서 훨씬 더 현 저하며, 사회적 • 정치적 조직에서 볼 수 있는 그 특이성은 대부분 계획된 과정이라기보다는 계획되지 않은 하나의 결과일 뿐이다. 이것이 문제의 핵 심아다. 여기에서 몇 가지 평범하지만 대단히 중요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 다. 먼저 서양사회는 과학과 기술의 성장을 허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것이 모든 사회에 다 해당되지는 않으나, 오늘날 지구상의 어떤 사회도 사 무엘 버틀러의 심오한 에르혼 Erewhon 의 전통에 따라서 공상과학회들이 하 는 것처럼 드러내놓고 과학이나 기술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둘째로 과 학과 기술의 성장은 때로는 격렬하게 사회적 • 정치적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 이다. 셋째 이러한 변회들은 더욱 나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어서 과학과 기술의 성장을 저해하거나 파괴시킨다고 위협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 문 제에 관한 한 서양사회나 문명사회 혹은 전 세계가 이 단계에 도달하고. 있 는지의 여부는 말하기 어렵다. 우리가 어떤 사회요인이 매우 위험하다고 확 실히 보여 줄 수 있을 때, 우리는 이것을 해결하려는 방안들을 찾을 수도 있다. 모든 종류의 사건아 일어날 수도 있고, 그중 일부는 인류의 생존이나 지구상의 생명체의 생존마저 위협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제 이러한 문제들 은 전 세계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히 세계적인 해결책을 찾 기 원할지도 모론다. 어쨌든 산업화를 예언한 사람들아 사회적 요인을 과소 평가하였기 때문에 산업사회의 사회구조가 형편없이 계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사회를 산업화의 실현에 더 적절하게 만 들기 위해 사회를 재설계하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분 명히 사회철학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사회란 과연 무엇이며, 사회 가 어떻게 조직되고, 그것이 어떤 중요한 사회적 가치를 지닐 수 있는가라 는 문제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러셀의 선구적 연구인 『결혼과도덕』 (1929) 을하나의 모델로서 삼을수 있다. 이 책은 194 0¾반에 뉴욕 시립대학에서 저자의 강의 자격을 박탈할 만 큼 그때까지도 터무니없는 책으로 여겨졌다. 이 책에서 러셀은 가족구조가 계획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러셀은 가족제도의 기원, 시대를 통한 제도 의 변화, 전 세계에 걸친 다양한 출현형태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 그 는 오히려 서양에서 이 제도를 생각하는 데 있어 가장 강하게 반영된 가치 관은 성 바울의 가치관이며, 이것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였 다. 죽 첫째, 성교(性交)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며 둘째, 성은 제거될 수 없으므로 제한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러셀은 성교의 제한이라는 것을 소가족이나 이에 관련된 성 금기와 동일시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러셀은 성
바울의 가치들을 부인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러셀은 성교라는 것은 바람 직스럽거나 그렇지 못한 그런 것이 아니라 사적인 것, 따라서 그는 그 문제 에 대하여 당시의 사회에서 그가 발견할 수 있었던 모든 견해들을 부인하 는 것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아주 혁신적인 운동을 일으켰다. 성교는 결과 적으로 정상적인 도덕적 행위 규범에 의해 제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성교는 가족에게는 그러한 식으로 제한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의 가족제도를 폐지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현 가족제도 가 수행해야 할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는가리는 질문을 제기했다. 그는 현재 (1929 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갑은 가족제도는 폐지되어야만 하며, 현재의 가족제도는 중요한 역할둘을 하도록 설계된 새로운 가족제도로 대 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결혼제도를 만들기 위해서 옛날 제도가 수행해 왔던 역할들과 우리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새로운 역할둘 둘 다를 검토해 볼 필요기- 있다. 옛날 역할들이 수정되어도 좋을 것이다. 러 셀은 이 점에 대하여 명백히 제시하지 않고, 단지 성교를 번식의 수단으로 서 의에는 전적으로 무시하면서 가정의 역할은 어린아이의 이익을 보호하 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물론 이것은 인생의 후반기에도 계속적인 성관계 를 원하는 어른들이나 어린아이를 가질 계획이 없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러셀은 오류를 범했다. 러셀의 기여와 그의 오류는 일단 우리가 그의 성교에 대한 가치관을 문제삼는 것을 중단하고 그의 견 해를 거부하면 쉽게 검토될 수도 있다. 더욱이 1929 1;1 당시보다 우리가 현 재 성과 재생산에 관해서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견해는 당연히 거 부되어야만한다. 그러나 특정한 제도를 재설계한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 라도, 현대 서양사회처럼 많은 새로운'아이디어에 대해 그만큼 개방된 사 회에서만 겨우 가능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아이디어는 다른 사회 제도들 사이에서 새로운 상호작용 수단을 제공하고, 이들 제도들간에 새로 운 조정을 하며, 새로운 제도를 창안하기 위한 필요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족제도의 재설계는 미래와 성에 대한 완전한 평등성을 고려하 여 조정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중요해 보이는 것은 산업화의 과
정에서 새로운 사회제도들이 각각 자체의 지엽적인 논리대로 자체의 노선 을 따라 급격히 발달하면서 생긴 결과가, 과학기술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심 각하게 염려하는 소외현상을 낳았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산업호快근 제도들 울,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사람들을 고립시켰다. 즉, 한 공장의 작업은 그 공장이 속해 있는 지역사회 주민과 유대의식을 가지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지역사회가 그 공장 노동자의 욕구와 상관없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빵을 얻기 위한 노동자의 욕구는 자신의 다른 모든 욕 구들과 분리되었다. 노동자는 임금 이의의 다론 어떤 종류의 만족을 찾도록 공장에 취직된 것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그는 노동에 대해 지극히 도구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강요되었다. 이것은 강요당하는 환경이 아니면 인간은 게 으르고 일하기를 꺼려한다는 가장 사악한 유대교적-기독교적인 종교적 가 르침과 일치하는 것 같았다. 2 伐1 l 기 후반에서조차도 이 게으름에 대한 유대 교적-기독교적인 종교적 견해와 같은 그러한 어리석음이 인정되거나 적어 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져 노동에 관한 야만적 행위를 비호하는 데 사용되어 졌다. 죽 그것은 최대한의 노동분업, 모든 노동자들의 엄격한 출퇴근 시간 의 기록, 계급적이고 철저한 감독, 의부적 품질관리, 그리고 차별대우와 인 종차별에 의한 여성근로자의 잠재노동력의 낭바와 같은 행위를 비호하는 데 사용되었다산 노동에 대한 발전된 사회이론이 없었기 때문에 산업노동을 조 직히는 사람들이 일단 그들의 마음에 둘기만 하면 노동에 대한 최악의 사 회이론을 사용할 수 있었다. 최악의 사회철학은 노동과 놀이룰 분리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철학은 성 바울이 마지못해 성 (性)을 인정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놀이룰 인정한다. 이 철학은 또한 놀이와 노동을 학문으로부 터 분리한다. 왜냐하면 학문이란 성스러운 것이어서 별도로 유지되어야만 하거나 아니면 유익한 것이어서 견습공의 일로서 간주되어야만 하기 때문 이다. 학문이 신성한 것이라는 생각은 계몽주의 운동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 았는데, 이 운동은 학문을 자연종교의 의식으로 선언하고 신에 대한 지적 9) 다음 문헌과 비교. Ju dit h Buber Ag as si, Comp ar i ng the Work At titud es of Women and Men, Lex ington Books. Lexin gton , Massachusett s, 1982.
사랑으로 묘사한 스피노자의 설명을 널리 퍼지게 만들었다. 낭만주의 학파 의 반동주의자들은 학문을 엘리트나 지배계급 그리고 지배자가 될 천재에 게만 적합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2 伊1 l 기에는 특히 학문이 예술과 과학으로 나뉘어지기 때문에 학문에 대한 태도는 아주 혼란스러웠다. 과학은 기술과 동일시되었으며, 기술과 정치가 동일시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기술은 고도 의 권위를 지닌 노동으로 간주되었다. 우리는 일, 놀이, 공부를- 하나의 활동으로 볼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이들 이 각기 상이한 목적에 따라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 중 어 느 한 가지 활동을 다른 두 가지 속에서 볼 수 있다. 심지어 우리는 이들 을 한 활동으로 통합하는 방향으로 상당히 나아갈 수도 있다. 기업체와 대 학의 축구팀이 그러한 예들이며, 모든 종류의 교육적 게임은 물론이고 고용 주의 자금으로 대학을 다니는 노동자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 궁극적 목적은 대학의 벽을 허무는 것에서 시작하여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기술적으로, 가능한 한 자유롭게 만드는 훨씬 더 넓은 의미에서의 통합이 어야만한다. 4 과학과 기술의 사회적 구조 과학과 기술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보편적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전 형적으로 서구적이다. 기술이 거의 없는 사회들의 존재는 이 전자의 견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또한 서구화된 일본과 비서구국가들 가운데도 일급 과학이 있디는 사실은 후자의 견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산업혁명 이래 로, 즉 기 껏해야 200 년 정도 전부터 서구의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했다고 하 는 말은 이싱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증기기관 덕이라는 19 세기에 흔히 있었던 생각이 이제는 거부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산업용 에너지원 의 개념을 더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비록 에너지원들이 증기기관에 비교해서 작고, 심지어 풍차나 수차의 크기 정도로 남아 있었 다 할지라도 산업은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경제규모 때문에 자본의 집중이 필요하다는 맑스의 생각은 지나치 게 단순화된 것이다. 기술을 위한 과학의 중요성 자체도 도전을 받이왔다. 즉 고무를 경화시켜 여러 가지 목적에 사용하는- 것이라든가 또는 지난 수 십년간의 거의 모든 농업의 기술혁신(단 화학비료는 제외)과 같은 기술적으 로 중요한 생각들이 과학에 뿌리박은 것이 전혀 아니었다는· 주장이 그것이 다. 이것은 거의 모든 의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즉 1 세기 전 비타민이 발견되었을 때까지는, 그때까지의 약이 얼마나 효력이 있었던지 의심스럽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과학에 근거를 둔 것으로 생각지 않았다. 이 것은 현대적인 도로와 철도의 발명, 자동직가와, 19 세기 주물공장의 무수한 자동화 사례, 그리고 사진기와 축음기의 발명에 대해서도 말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기술의 과학적 특성은 분명하며, 대단히 중요한 자 극제 같아 보였던 기술의 본질적인 특성 역시 과학의 본질적인 특성의 한 부분으로서 베이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어떠한 사회구조가 이러한 철학이 하나의 운동으로 발전되는 것을 가능 하도록 하였는가는 매력적인 역사적 질문이며, 이것은 우리가 서구사회의 과학적 • 기술적 특성을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무엇을 유지해야만 할 것인가 라는 질문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1, ~} 세계대전 사이에 러시아에서는 새 로운 시민정부가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어 과학을 계획하고자 하는 생각이 시작되었다. 이 생각은 많은 서구의 과학자들을 매혹하였으며 이 결과 이들 은 러시아와 러시아의 공식적인 철학에 대한 지지자가 되었다. 이에 반대해 서 물리화학자인 풀라니는 자유문화위원희와 자유과학위원회의 발전에 도 움을 주었으며,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계획된 과학과는 반대의 뜻을 의미했 다. 풀라니 자신은 사회학 교수가 되기 위해 물리화학 교수로서의 지위를 그만두었다. 이때부터 교수직을 사임할 때까지 폴라니는 과학집단이 지적인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는 필요성에 대해 글을 썼다. 이 목적에 맞는 과학철 학자가 되기 위해 폴라니는 그의 분야를 다시 바꾸었다. 폴라니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지적 자유 를 위한 이 신념은 문제시될 수도 있으며, 또 계획된 과학에 대한 그의 반 대는 그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라고 주장되기
조차 한다. 계획된 과학에 반대하는 그의 논점은 정치가가 아니라 오직 과 학자만이 연구계획을 합리적으로 평가할 수 있고 그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이었다. 러시아의 정치지도자들이 여러 가지 연구계획을 평가할 능력을 가 졌다고는 아무도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비난이라고 할 수 없다. 관심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당시 러시아의 정치지도자들이 자연과학에 관 하여 가장 기본적인 것도 몰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러시아의 정치 지도자들은 적절한 논평은 접어두고라도 러시아에서의 연구활동들에 관한 논평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무지는 러시아의 정치지도자에게만 특이 했던 것이 아니고 또 당시에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스노우 경은 2 차대전 발발 직후에 방사능 낙진의 존재조차 모르면서 영국의 과학지들이 수상으 로부터 원자탄 폭발실험 허가를 획득했다는 것을 듣고 놀랐다고 말했다. 스 노우 경의 놀라움은 그때의 영국 수상의 무지가 아니라 지도적인 영국의 과 학자들이 권력과 명예에 대한 무책임한 탐욕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또 그렇게 했던 그 기만의 정도에 놀란 것이다. 그래서 계획된 과학은 정치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과학 분야의 지도자에 의해서, 말하자면 일반 과학자들의 연구활동을 이끄는 지도자에 의해 계획 되어진다. 이것은 과학이 어떻게 수행되는가에 대한 폴라니 자신의 견해와 잘 일치하는데, 이 견해는 지금 서구에서는 토마스 쿤의 생각으로 널리 받 아들겨지고 있다. 쿤은 그러한 일반 과학자들을 정상적이라고 부르며 그들 의 연구를 단순히 수수께기 풀이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것은 과학계의 지도 자적 과학자의 존재에도 배치되고, 이들의 임무는 패러다임의 형성이나 변 화 그리고 과학적 혁명이라고 보는 견해와도 배치된다. 이것은 마치 밤비의 아버지와 같은 것이다. 즉, 그것은 긴장된 시기에 나타나서 일들이 정상으 로 돌아가는 것 같으면 사라진다. 노예근성이 있는 연구자를 정상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행히도 그 기준을 규정하는 것이 되고, 지도력을 과학적이 라고 부르는 것은 지도자들, 더구나 무식한 지도자들마저도 숭배하여 이들 을 직무상 학식 있는 사람으로 변형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폴라니와 쿤이 말하는 견해는 분명히 입증되고 있다. 러시아식으로 계획된 과학의 주창자 들과 폴라니, 쿤 및 그밖의 서양의 지지자들을 구별짓는 유일한 처이점은
지도자 권한의 원천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뿐이다. 러시아식의 과학에서는 과학자로 하여금 공산당으로부터 권한을 강제로 부여받는 데 반해 폴라니 석의 과학집단은 경제적으로는 그렇지 않을지 모르나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자율적이다. 오늘날은 러시아식 과학자들도, 랜다우 시절의 물리학자들처럼 그들이 특출하기만 하다면, 상당히 자율적일 수 있다. 아니면 생물학의 뤼 셍코 L y senko ® 시절처럼 과학자들은 공산당의 종복에 의해 지배를 받기도 하 나, 보통은 두 경우의 중간 상태이다. 그러나 서구에서도 역시 과학은 자율 적이지만, 폴라니 자신이 고통을 겪었듯이, 정치적 영향과 같은 의부의 영 향에서 완전히 지유로운 것은 아니다. 더욱이 서구와 소위 사회주의 국가들 이 점차 기술주의적으로 지향함에 따라 이러한 차이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 다(제임스 번행, 『 경영의 혁명 』 , 1941). 이것이 없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 면 폴라니는 계획된 과학을 반대할 것인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 냐하면 그때는 그의 모든 비판들이 해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미루 어 볼 때 그의 민주주의는 과학공동체 자율에 대한 그의 견해와는 아주 별 개의 것이라는 것을 시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살펴보자. 그러나 이러한 자세한 것은 그만두고 이 사회의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이상으로 개개의 시만들에게 사회적 압력과 제한울 가하는 사 회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에 관심을 두고, 훨씬 더 어려운 국제적, 세계적인 정책의 분야로 옮겨가 보자. 과학집단의 구조는 무엇인가? 이것이 기술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이 것은 사회적인 질문이며, 과학자들도 명백히 일종의 사회집단이기 때문에 집단의 개념이 무엇이냐에 많은 것이 달려 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이 질 문은 과학자의 개념에 따라서도 그 대답이 달라전다. 우리는 과학집단의 존 ® 뤼셍코는 소련 스탈린 시대의 식물 유전학자. 후천적 형질의 유전을 주 장하는 등 당시 발전하던 유전학 이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을 하 였다• 뒤셍코는 스탈린의 후원으로 문제가 있는 이론을 널리 유포할 수 있었는데, 뮈셍코 사건은 과학의 상대적 자율성과 중립성에 대한 심각 한 문제를 제기해 주었다.
재 를 인정하면서도 진정한 과학지들 모두 그 구성원이 아니라고 선언할 수 도 있다. 예 를 듬 어 나치 독일의 과학집단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해석된다. 그때 독 일의 진정한 과학자들은 모두 추방되거나 고립되어 있었다 . 따라서 그 과학집단은 실제로는 과학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아인 슈타인은 달리 생각했다. 즉 그는 소수를 제의하고는 독일에 있던 모든 과 학자들이 죄수라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견해는, 그와는 반대이긴 하지만, 우 리는 과학집단의 존재를 가정하면서도 모든 훌륭한 과학자들이 여기서 제 의되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모든 훌 륭한 과학자들을 과학집단의 이방인으로 생각하는 견해를 받어들 이기 어려운 것은 과학활동이 연구만을 포함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과, 최소한 과학교육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폴라니는 과 학집단의 이러한 복합적인 면이나 과제를 강조한다. 그러나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이성주의 시대의 과학지들은 기껏해야 반과학적인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둘은 문헌을 통해서나 아마추어들의 과학학회 모임을 통하여 아 마추어로서 과학교육 을 받았다. 대학은 기껏해야 가장 기본적인 수학, 천문 학, 생물학 및 의학 강의를 제공하였을 뿐이다. 리첸버그와 블랙을 제의하 고는 1800 년 이전에 교실에서 실험울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영국 내 대 학에서의 첫번째 실험실은 1871 년에 캠브리지 대학에 세워진 카벤디쉬였으 며, 이것은 맥스웰의 말대로 실제로는 아주 형편없는 것이었다. 전문적 과 학은 19 세기 일반대학의 산물이었다. 산업에서 전문적 과학이 생겨난 것도 같은 시기였다. 군에서의 전문적인 과학적 혹은 기술적 연구는 최근의 현상 이다. 국립과학재단, 원자력위원회, 우주계획연구~ CERN 과 같은 유럽의 이러한 과학기관들은 수많은 과학자둘과 과학적으로 훈련된 기술자들을 고 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기관들이 과학적 직업의 특성을 변화시키고 과학과 기술, 이들간의 관계, 그리고 이들의 사회적 배경과 이들의 사회적 • 정치적 의미에 대해 우리가 지녔던 생각을 바꾸어놓았다. 이러한 과학기관들은 모 두가 너무나 역사가 짧아서 이러한 기관이 없었던 301d 대에 전문적 집단이 일할 수 있는 직업을 고통스럽게 그리고 절망적으로 찾았던 동료들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이러한 기관들은 오늘날 쿤이 정상적인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의 강력한 구심점이다. 폴라니와 쿤이 논의하는 과학집단의 자율성은 어떤 연구를 수행할 것인 가와 관련된 결정권의 자율성이다. 누가 결정하는가? 정부나 기업이 연구에 수백만불을 쓰면서 어떻게 간섭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정부와 혹 은 민간의 계약에 의해 만들어전 특별협정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디는· 것이 다. 그러나 많은 정부와 기업체들은 대학을 매수하여 교수들에게 협력하도 록 압력을 가하면서 기술연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폴라니는 연구자들이 재정상으로 어느 정도 독립되어 있어야 하고, 그들의 내부 모임에 충분히 자유롭게 침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누구도 반대할 수 없다. 그 러나 쿤은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압력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룰 자세히 지 적하였다. 즉, 그 압력은 직장 상실이라는 위협이다. 직장은 소득을 의미하 고, 소득은 대개 재정적인 종속일 뿐이지 압력을 넣기 위해 조작하고 사용 하는 지도자의 전적인 판단에 맡겨진 어떤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리자가 연구자에게 압력을 넣게 된다. 폴라니와 쿤이 원하는 것은 대학이 거대한 재단으로서 연구와 교육에 과학자들을 많이 채용하고, 해고라는 위 협물을 이용하여 그 구성원들이 엄청난 노력을 경주하도록 강요하면서도 일 반사회로부터의 압력은 허용하지 않으며, 또한 그 지역사회로부터도 연구를 통제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폴라니와 쿤에 의해 주장된 과학의 사회철 학은 민주주의적이 아니며, 사회의 요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과학 지도자만이 여기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한다. 과학지도자는 대학이나 연구기 관의 행정자들로서 이들 대부분은 오늘날 과학자로서는 쓸모가 없거나, 매 력이 없거나 실패한 연구자등기다. 요약하면 우리들은 여기에서 대학에 기 반을 둔 연구조직과 자율적인 중세 길드로서의 대학을 지향하는 분명치 않 은 이론을 보게 된다. 이 이론이 〈정상적〉인 과학자들 가운데 인기를 누리 고 있다는 사실은 대학과 대학의 연구활동의 독립성을 반영해 주는 것이 아 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이론이 과학적으로 훈련된 새로운 정치적 수완가, 죽 연구자가 되도록 훈련받았으나 과학 의의 일을 선호하는 새로운 기술관 료를 낳고 대학이 그들의 권력기지로서 이용되고 있음을 반영해 주는 것이 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세와 심지어 19 세기의 대학 행정가들은 시간제 아니
면 임시로 일을 했으며, 이 때문에 그들의 본업인 강의와 연구가 줄어들었 어도 이것들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 5 맺는말 계몽주의 철학은 자유적이고 개인적이며 그래서 매우 매력적이다. 그러나 이 매력적인 특징은 합리적인 사회과학 및 기술적 개념에 의해 지지를 받 지 못했다. 오늘날 가장 간단한 경제계획조차도 금융경제이론에 의해 방해 를 받고 있으며, 이 이론의 매력은 계몽주의 철학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독 립선언서에서 계몽주의 원칙을 표방한 미국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기술사회를 좀더 융통성 있고 인간미 넘치게 만들기 위해 경 제에서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 정치적 제도에서도 계획수립을 요구하 고있다.
제 10 장 정치철학과 기술과의 관계 국제적인 정치생활에 있어서 가장 명백한 사실은 고도로 기술이 발전된 나라들, 즉 산업화된 나라들은 의회 민주주의와 과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고, 또 공산주의 국가들은 기술을 발전시켜 근대화함으로써 고도로 산업화된 의회 민주주의 국가둘을 따라잡으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 다는 사실이다 . 그리고 대체로 국제정치 상황이 그러하기 때문에 거의 아무 도 그것을 감히 평가하려 들지도 않는디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기술의 전보나 산업화를 위해서 필수적인가? 급속하고 성공 적인 기술의 성장, 죽 산업화에 있어서 자본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필연 적인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다 〉 라고 말하지만, 레닌의 영향력을 받은 맑스주의지들은 이 긍정적인 대답을 수정하였다. 그들은 사회주의가 산업화를 앞서갈 수도 있으며, 심지어 자본주의적 의회 민주주의보다 산업 화를 가속화시켜 어린이가 월반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 한다. 대디수 인구가 반 굶주립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가난하고 발전이 뒤전 소위 제꺼 1 계는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 하는 강요로 괴로움을 겪고 있다.
기술철학이 조금이라도 중요한 정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기 술변화의 정책에 대한 기술철학의 견해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매우 명백하 다. 이 문제는 가난한 나라만의 것이 아니다. 벅크민스터 풀러의 뛰어난 표 현을 빌리면 그것은 이 지구라는 우주선을 유지해 가는 문제이기도 하다. 긴급한 세계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확산되어 가~근 진보된 기술을 사 용하는 사람들에게 정치철학은 과연 무엇이라고 이야기해야 하는가? 기술 이전을 위한 적철한 철학이란 무엇일까? 1 행위에 있어서의 정치학의 정당화 전통적인 정치철학은 아직도 대부분의 정치철학자와 많은 정치과학자들 의 주의를 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정치권력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무엇인가리는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에 실용적으로 쓰일 수 있었던 적은 결 코 없었다. 만일 우리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무정부주의가 올바른 정 치이론처럼 보인다. 죽 권력을 사용하는 한 어떤 정부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정부만이 유일하게 인정 가능 한 정부이다. 여기서 〈무정부〉리는 말은 무질서를 뜻하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그 말은 통치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경 찰과 군대를 이용하지 않고도 질서를 유지할 수 있고 자발적으 로 운영되는 적절한 행정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무정부주의자의 견해이 다. 따라서 무정부주의는 평화주의자든가 아니면 전 세계인들이 무정부주의 로 될 때까지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자발적인 국가적 군사력을 유 지하는 데 찬성하는 것이다. 가장 고전적인 정치철학에 함축된 가정은 그것이 무정부주의적이거나 준 (準)무정부주의적이라는 것이다. 즉, 정부권력의 정당성은 정당치 못한 권력 의 사용을 방지하는 것을 제의하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가 야경원이나 경찰과 같은 것이라는 유명한 이론이 준무정부주의의 형태임을 보여준다. 이 이론은 존 록크의 이론을 근거로 했고 이것을 이끌어 간 사람
은 아담 스미스이다. 스미스는 만약 정부가 평화를 유지하고 계약들이 지켜 지도록만 하고 다른 일은 하지 않는다면 엄청난 부가 축적될 것이고 그 결 과 무역과 산업이 번창할 수도 있다고 확고히 믿었던 위대한 정치경제학자 이다. 스미스의 견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즉, 지구에는 정부라고 할 만 한 정부가 거의 없는 지역이 많이 있었음에도 그곳에서는 자본이 축적되지 도 않았고 무역과 산업도 최소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스미스는 이 것들을 모두 알고 있었으며 정부는 최소한도로 작아야 하고 편견은 제거되 어야 하며 과학과 기술이 생활방식으로서 수용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 이것은 진실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지구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 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오늘날 아 주 많은 나라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상은 민족주의 중국과 공산주의 중 국 두 나라의 국부인 선 얏 센의 이상이다. 그는 서양으로부터 문화도, 과 학도, 민주주의도 아닌 총만을 원했다(그는 민주주의를 가지고 실험했으며, 실 험은 실패라고 생각했다). 만악에 아담 스미스가 옳다면, 산업화에 대한 질문 은 이렇게 바뀐다. 죽,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과학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확신시킬 수 있을까? 과학적인 태도에서 자유시장이 유 도된다는 그의 견해도 역시 틀린다. 즉, 중국을 포함한 공산주의 국가들은 과학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나 반자본주의적이다. 우리가 그것을 어떤 방 식으로 보든 아담 스미스의 생각은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실용성이 없다. 정부의 권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생각과 그 결과로서 나타난 준무정부 주의자의 국가에 대한 이론은 이쯤 해두자. 정부권력의 일부가 합법화될 수 있다는 생각은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를 구별할 수 있는 희망을 가져오며, 이것은 좋은 정부의 기준울 찾을· 수 있다 는 희망을 가져온다. 이 기준은 유토피아만을 정당화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 특히 그 정당성이 과학적 합리성에 근거 하고 있다면, 정치철학은 필연적으로 과학적 유토피아만을 정당화할 것이 다. 그리고 물론 과학적 합리성이 필수적이라 생각되고, 또 그것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한에는, 제이콥 몰몬이 말하는 전체주의적 민 주주의, 죽 과학이 지배하는 사회의 인민주의로부터의 탈피는 불가능했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과학적 합리성은 불일치를 인정하는대, 이것은 과학이 명백한 답을 제공하지 못하는 의문들에 관한 경우에만 그러하디~ 것이다. 그와 같은 조건에서 의회 민주주의가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겠는가? 대답은 복잡하다. 합리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의 운동을 인정하지 않았 다. 합리주의자들은 실제적 통치과정이 반동기나 반대자들의 집단 그리고 이익 집단들의 권력두쟁 등과 갇은 것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그렇게 압제 적이 아닌 경우에는 그 통치 과정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서구 정치철학의 많은 부분은 자기들의 생각을 권력의 합법화라는 전통적 문제에만 국한시키지 않았던 소수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견해를 반영한 것 이다. 그들 중 가장 위대한 부류에 토크벌과 밀은 물론이고 마키아벨리, 홉 스, 스피노자, 록크, 그리고 몽테스큐 등이 속한다고 하겠다. 마키아벨리는 진정 르네상스의 계승자이다. 그의 목적은 로마제국의 옛 영광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로마 지배하의 평화가 이것을 충분히 정당화하였다고 생각했으며 정치적으로 행동할 의도는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할 만큼 충분한 동기를 가지고 그의 충고를 받아들 일 수 있는 충분히 지적인 사람을 위한 인도자가 되려고 하였다. 그러한 생 각은 정말로 마키아벨리주의적 생각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충고에 따르면 한 번에 그리고 동시에 두 개의 과업을 수행해야만 했다. 즉 그 충고는 야십적 이고 권력에 굶주린 지도자에게 먹혀 들어가야만 했으며 그래서 그가 발전 하도록 돕고, 또 한편으로는 그의 이익에 덧붙여 마키아벨리 자신의 이익 도 증진되도록 그 사람을 조정해야만 했다. 전체적인 생각은, 한 사람이 이 탈리아를 통일하고 조정하며 평화를 유지하는 데 충분한 정치권력을 계발 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 사람에게는 자기의 직속부하를 공포로써 통제하고 일반국민은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 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영원히 로마 지배하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마키아벨리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와 같이 토마스 홉스도 내란의 압박 속에서 글을 썼다. 그는 독재자가 평화를 유지하는 한 독재정권이 정당화된다고 함으로써, 마키아벨 리의 세심한 생각을 앞질러 재빠르게 그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홉스는
시민들의 개인적 일들은 무해한 것이므로 정부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고충고했다. 다음 단계는 복잡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 영향이 명백하게 평가될 수 없는 스피노자에 의해 인수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태인이었고, 이교도였 으며, 정치적 급진주의자이었다. 분명히 같이 어울리기에는 위험한 동료였 다(그가 죽은 지 1 세기가 지난 뒤, 칸트는 자신이 스피노자 추종자였다는 비난을 거부해야 할 필요성을 일았다. 자신의 중요한 저서인 『 순수이성 비판 』 의 끝부분에 이에 대한 멋진 보충 설명이 있다. 이 책에는 스피노자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 았지만 분명히 그에게 바쳐진 것이었다). 스피노지는곤 자유주희, 관용·, 의회주의 정부--그 당시 쓰이지 않았던 헌법이라는 단어를 비록 쓰지는 않았으나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헌법까지도-를 권고했다(그는 또한 移轉의 자유에 의해 조절된 높은 세금을 권고했다. 이 자유기업 논쟁은 스미스에서 밀톤 프리드만 에 이르기까지 어떤 자본주의 이론가에 의해서도 주목받지 못했다). 어느 정도 요 인 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스피노자가 일부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존 록크는 전통적 방식의 범위 내에 있는 철학지이었고, 정부의 야경원 개념의 창시지이자 옹호자였다. 그의 · 시상과 말이 미국 독립선언서에 영향 울 끼쳤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와 홉스의 사상을 좇아 그 는 전제주의 정부에 대한 통제수단으로서 권력 분립의 중심 개념을 만들었 다. 이 개념은 스피노자의 사상보다 더 실용적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록크의 견제와 균형 없이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키아벨리에 의해 기초가 잡히고 후에 몽테스큐에 의해 발전되었 다. 권력 분립은 완전히 실용적이지는 않지만 견제와 균형의 가능성을 보장 할 만큼은 충분히 실용적이다. 우리가 견제와 균형이 어떻게 야경국가의 형 태로 통합될 수 있는지를 알만큼 충분한 연구가 수행된 적은 없다. 죽, 야 경원은 오직 지키기만 하지 다른 무엇을 할 권력도 견제(그의 지키는 일은 예의이다)도 균형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야경국가가 먼 유토피아적 이상 인 반면에 견제와 균형은 현실화될 수 있다. 스미스가 자본주의 국가의 선 구자였고 대변자였다는 맑스의 주장과는 반대로, 스미스에 의해 묘사된 완 전한 자유 무역주의의 유토피아, 죽 순수한 자본주의 국가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 스 미 스 는 한 자 동 맹이 자기 이 론 에 맞 는 일 종 의 한 모델이었다고 단언 했 다). 자유 주의 의 대변자이며, 특히 소위 자본주 의 시대의 최정점에서 소수 의 권리를 대변하는 토크벌과 밀이 그렇게 중요시했던 것은 다만 이상적인 자유주 의 국가가 결 코 존재한 적아 없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여기서 낭만주의 학파의 전통적 비합리주의, 반자유주의, 반개인주의, 권 위주의와 산성 정치철학을 언급할 필요는 없다. 낭만주의 학파는 물리과학 과 사회과학에 신성주의를 부여했으나, 그것은 또한 개인주의자와 자유주의 자 그리고 합리주의자들에게는 신성주의를 그 기원 때문에 거부하게 만들 었다. 전통적 정치철학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하자. 이 철학이 기술에 관해 말 하는 것은 단 한 가지이다. 즉, 자본주의 시장은 기술혁신을 위한 동기를 유 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명가들의 경제적 문제들을 살펴보았던 사림이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것은 완전히 찰못된 것이다. 발명가들조차 시장에 마 음대로 끼어들 수가 없다 . 반도체, 레이저, 유전자 조작 등과 같은 것이 아 닌 한 오늘날 발명가는 자기의 발명품을 대기업에 팔거나 그냥 두어야만 한 다 ― ~오늘날에는 상당히 가치가 있는 발명품을 가지고 시장에 끼어들 수 없으며 큰 자본의 뒷받침 없이는 돈을 크게 벌 수가 없다(최근 경제학자들 은 스미스의 모델이 혁신조차 허 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가 여기에서 관여할 필요가 없는 전문적인 것이다). 1 세기 이상에 걸쳐 대중문학은 기술과 정치를 연결하려고 시도했고 원자 력 시대의 출현은 대중문학의 두 가지 모델을 강화했다. 이중에서 보다 대 중적인 모델은 한 나라의 합법적인 정부를 강점하기 위하여 하나의 어떤 강 력한 발명품에 관심을 갖는 모형이며 그리고 그 발명품은 그것을 만든 발 명가나 그것을 탈취하는 다른 여러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는 그러한 모형이 다. 소설에서의 이런 구성은 단지 가이 퓌케스의 반란에 대한 실제 이야기 의 변형에 불과하다. 가이 퓌케스와 쥴스 번의 『 선장 네모 』 와 H. G. 웰즈의 『 투명인간 』 이나 『 모레우 박사 』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실제 주인공이 혼 자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대집단의 일부로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 면 이는 음모이론 conspi rac y the ory 의 과장된 형태이다. 그것은 기술과는
전혀 또는 거의 관계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왜나하면 그 구성의 배경이 실 제로 중세로 옮겨져 있기 때문에 이렇다 할 기술 없이도 그 구성은 잘 전 행된다. 다른 모델은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자기의 재능을 활용하는 기술자나 엔지니어 혹은- 의사에 대한 것이다. 자신의 사회적 야망을 더욱 높이기 위해 기술지들이 자신의 조직, 즉 현대식 담배 공장, 병원, 신 정부 기관 같은 것을 만들 때 이 모델은 좀더 홍미로워진다. 여기서도 역시 기술 은 구실에 불과하다. 그 소설의 홍미는 다른 어딘가에 있다. 따라서 고전적 정치철학은 이것이 현대 생활의 다른 면들과 관계가 없는 만큼 기술과도 관계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철학자, 정치 사상가, 시카고 학 파의 금융가들 그리고 디론 사람들간의 대중성에도 불구하고 이 철학은 기 술성장의 연구에 대해 긍정적 기여가 없었다. 유토피아를 수립하기 위해 과학이 어떻게 정부(보통 세계정부)를 인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예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 기의 홍미있는 개작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 나 , 로버트 』 와 _ 여기에서 그 는 컴퓨터에 위탁된 의사결정 과정의 도덕적 가치에 의문을 제기한다 一一 버트랜드 러셀의 『 악몽 』 이라고 하겠다. 후자의 경우는· 미국과 러시아의 기 술자들이 군비경쟁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계략을 꾸미고 협조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공상과학 작가들은 과학에 의한 정부를- 옹호했다. 만일 이것이 실 제 생활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면, 이것은 물리적 기술의 광범위한 사용 이 얼마나 유용한 것인지, 또는 정부를 과학자들에게 이양하여 과학지들이 기술적인유토피아를단번에 창조할수있도록하는것이 얼마나유용-한것 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2 현대 자유주의의 정치적 부적합성 모든 자유주의 철학의 문제는 권위의 합리적 정당성에 관한 문제인데 그 이유는 단지 자유주의 사회철학이 사람마다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철학은 타인에 대한 개인의 권위를 부정한다.
그러나 실제 생 활 에서 이것은 맞지 않는다. 실제 생활에서는 가장( 家長 )들 이 아직도 그들의 책임을 폭력화하여 아내와 자녀들을 때리고 있으며 이것 은 발달된 자유사회의 가장 문명화된 지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 다. 실제 생활에서 고용주와 관리자들은 법과 관습에 의해 정당화되든, 또 는 법에 의해 배척당하지만 관습에 의해 실행되고 있든지, 또는 단지 상황 의 논리에 의해 지지를 받든지간에 종업원들에 대해 엄청난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 법은 수많은 방법으로 각 시민에게 정당한 권 한과 부당한 것을 모두 행사한다. 레슬리 스테픈 경이 자신의 책 『 l 망 1] 기 의 영국 사상사 』 에서 관찰한 것처럼 전통적 합리주의자들의 정치철학의 유 토피아적 편견과, 완전하게 합리적인 인간의 눈을 통해 세계를 보려는 노력 은 그 출발부터 여성과 아이들 하인들, 농사꾼, 고용인 등을 체계적으로 무 시하고 있었다. 정치철학자들은 나 및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현재 너무나 우둔하게 운영되고 있는 실제의 정치기관들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 유에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이 의문에 대해 그들은 수긍할만한 대답을 못했 는데, 그것은 그들이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실제 사람들의 실제 상황과 관련되는 실제 대답을 요한다. 이상화되 고 합리적인 주제들에 제한되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이상화된 합리적 정부 의 관점에서 해답을 찾았던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것이 실제 정치학과 무관· 한 모든 정치사상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이상화된 정치 사실비 현대 정치세계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남아 있다. 그들의 엄청난 대중 성 때문에 우리가 카톨릭이나 맑스주의자들의 정치철학을 무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전적 합리주의자들의 이상화된 정치철학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모두가 현대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양상이 들어있는 거대한 융단 의 중요한 부분들인 것이다. 더욱이 스피노자는 이상적 정부를 거부했지만 합리적 인간의 이상만은 인 정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사람은 정부가 전혀 필요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 히 주목하기까지 했다 . 그는 법이 아직 합리적이지 않은 사람의 교육을 위 해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상적인 합리적 인간은 철학자이고 과학자이기 때 문에 과학자들의 집단에는 정부기관이나 통제기관들이 필요없다. 정치체계
의 이상적인 자유주의 상(像)은 합리적 인간의 이상을 다룬다. 따라서 정치 체제는 다소 무정부주의적이어야만 한다. 다음의 간단한 생각은 이것을 설명한다. 고전경제학은 경제에 대한 통제 가 쓸데없다는 것을 암시해 주었다. 시장 메커니즘은 전체적으로 경제를 통 제하는 최상의 수단이다. 소바자는 가능한 최상의 거래를 선택한다고 믿어 도 좋다. 그는 동일한 성품을 보다 싼 가격으로 살 수 있거나 같은 값에 보 다 나은 성품을 살 수 있을 때 나쁜 상품을 구입하지는 않을 것아다. 이것 은 고전학파의 현대 추종자들의 일부인 신 고전학파 또는 시카고경제학파 들로 하여금 정부의 생산품에 대한 품질 통제와 광고상의 전실 그리고 소 바자에 대한 정부의 유사한 서비스에 반대하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이들 신 고전경제학자들은 계약에 의한 의무의 실행을 강요하기 위한 정부의 책임 을 인식한다. 달리 말하면 소비자가 질 낮은 상품의 구입에 동의하면 정부 의 간섭은 요구되지도 않고, 따라서 허용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소비자가 만 일 양질의 상품을 구입하기로 계약하고도 질 나쁜 싱품을- 받으면 정부의 간 섭이 요구되고 또 간섭할 의무를 전다. 상품게 허위 설명서를 붙이는 것도 구입 계약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논리는 일관성 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전에 있어서 진실을 요구한다. 만약 그렇다면 정부는 품질 통제를 행사하도록 대중에 의해 분명히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 나 이것은 쐐기의 얇은 날과 같은 것이며, 이 점에서 우리는 시카고학파의 극단론자등계 동의해야만 한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해석에 따라서 정부가 일단 간섭을 하도록 요청되면 그것에는 끝이 없다. 만약 사림들이 모든 종 류의 통제를 택하면 문제는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시카고학파 의 일부 과격론자들은 이 논리의 결과를 받아들인다• 그들은 우리가 정부의 간섭이 전혀 필요없으며 계약 위반을 방지히는 것조차도 필요없다고 말한 다. 계약을 위반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거짓말쟁이로 알려질 것이고 다론 사 람들은 그들과의 거래를 회피할 것이다. 시카고학파의 일부 다른 극단론자 둘은 이 구상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말한다. 대규모의 근대 시장에서 우 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계약 의무들을 지키도록 강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러나 그들은 이것을 실행하기 위한 정부는 필요없다고 덧붙인다. 죽, 우리
는 시장 메커니즘을 사용할 수도 있다. 이것은 거래자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진 빚을 갚도록 강요하기 위해 시장에서 경찰을 고용할 수 있디는- 것을 의 미한다(이런 요지는 고리대금업자가 빛을 갚을 수 없는 고객에게 폭력을 행사하 기 위해 폭력배를 고용하는 것을 합법화하도록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 나 그 경찰은 자신이 그 일을 하면 보수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까? 시카고학파는 시장에는 정부의 간섭을 제한할 충분한 합리성이 있다는 이론을 시인하기 때문에 이러한 위치로 몰렸으며,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처 럼 거칠고 괴상한 실제 시장에 그것을 적용하려고 시도했다. 따라서 우리는 고전적 자유정치철학자들은사회구성원들이 합리성의 이상에서 벗어나는일 탈의 정도에 따라 디소간 무정부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 든 것은 그 일탈의 정도가 극히 적다는 훌륭하고도 뚜렷하게 잘못된 가정 에 근거하고 있다. 다른 방향을 보면, 우리는 거의 전적으로 합리적이며, 명료하게 구성되어 있고 일에 대해 토론하기를 줄기며 의좋게 논쟁을 해결하는, 따라서 거의 경찰이 필요없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를 능히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상 상은 유명한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이 쓴 공상 과학소설 『검은 구름』에 나 타나 있다. 이 소설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문헌이다. 이것은 연구를 하거나 산업에 종사하는 과학자와 기술지들 사이에 대단한 인기가 있으며 과학의 사회적 윤리에 대한 입문서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널리 채택된 서구 의회 민주주의 제도들을 솔직하게 그리고 완전히 경멸하고 있다. 즉, 엘리트주의와 민주주의는 실제로 섞이지 않으며 기술주의는 단지 엘리트주 의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갖고 있는 환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학자들과 과학기술 자들이 적어도 민주적 사회에서 준법시민의 본보기이며 자신의 잘못에 대 해 종종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함께 감수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 각자가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의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책임 을 전적으로 지겠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는 그 책임이 전적으 로 대통령 수중에 있다고 인정하기를 거부하면서 개인적으로- 죄의식을 느
낀다고주장했다. 오펜하이머가 느꼈던 죄의식은 합리주의자들의 전통에서 벗어난 것이었 다. 죄의식을 도입하는 것은 게임 규칙의 위반이다. 완전한 합리주의자는 죄 의식이 없으며 그들의 정서적인 구조에는 죄의식을 위한 여지가 없다. 그렇 지만 죄의식을 도입함으로써 게임의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 새로운 체제의 시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구 체제를 살려두기 위한 큰 순 환에 대한 작은 순환의 도입이고 게임에 대한 하위 게임의 도입이다. 일단 우리가 로스 알라모스와 맨하탄 계획의 대가들이 죄가 많았고 죄의식을 느 꼈디는 것을 알면, 우리는 그들의 경우를 정상에서 조금 벗어난 정상에 대 한 수정 사례로서 볼 수 있다―― - 양자 모두 전정한 기술주의의 여명기에 서는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구도를 수정하여 거의 이상주의적 합리적 인간이 며 기술주의자인 오펜하이머를 프레드 호일의 소설로 대치해 볼 필요가 있 다. 그의 공상은 실제로 역사의 잘못을 수정한다. 호일의 소설 속의 과학자 는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세계의 어느 정치가들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옳다는 것을 알 때는 대부분의 친구들에게조차 굴복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능력 있고, 책임성이 있으며, 결단력이 있다. 호일의 공상과 이 공상이 사실이라는 생각이 과학자들과 기술자들 사이 에서 인기가 있는 이유는 그들이 책임에 직면하지 못하는 데 대한 보상이 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과학자는 자기 나라의 법을 따르며, 그가 속한 사 회의 관습에 따라 산다. 그는 법에 아주 예속되어 있지 않지만, 법을 감히 어기려 하지도 않는다. 별차이는 없겠지만 그가 한 나러에서 다른 나라로 도망다니지 않는 한 그러하다. 그는 그의 연구 결과로 살아간다. 그가 성자 다운 기분이 들 때는 그는 자기의 연구가 가져올지도 모르는 나쁜 결과에 대해 걱정을 한다. 그러면 그는 마치 그 책임자나 되는 것 같이 과장된 책 임감을 느끼고, 그런 다음 죄의식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현실감을 다시 회 복하고 예전처럼 계속한다. 이런 냉혹한 구도에 대해 예의적인 것은,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행동이 박 해와 공포의 원인이 되는 상황에서도 민주주의를 전파하고 있는 영웅적인
러시아의 지식인들이다. 오히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이들 러시아의 영웅들 울 지지하기 위한 시위가 일어날 때만 과학기술 집단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감격적 의식이 살아난다는 것은 서글폰 일이다. 왜 이러한가? 서구의 과학기술계의 자유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의 집단들 과 나라들에서 만주주의를 보호하고 중전시켜야 되는 때에는 왜 그렇게 적 절하게 대응하지를 못하는가? 아인슈타인과 러셀이 겨정했던 바와 같이 그 둘은 왜 세계평화와 생촌의 기회를 개선시키기 위해 조직화될 수 없는 것 인가? 그 대답의 일부는 적어도 과학과 기술에 대한 현재의 관념이 혼란되어 있 다는 사실에 있음이 틀림없다. 그것은 고전적 급진자유주의 (소위 우익 급진 주의 )와 고전적 맑스주의자들의 기술주의적 사회주의 (좌익 급진주의 ) 사이에 서 혼란되어 있다(우연히 이 두 철학들에는 전쟁과 평화, 환경과 인구문제는 말 할 것도 없고 국제무역 ――특히 석유에 관한 것 -과 해의원조와 갇은 그런 단 순한 문제까지도 포함해서 국제관계에 관한 생각이 공통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10) 결과적으로 과학이나 기술계의 대부분 지도자들은 거의 정치에 관심이 없 거나 심지어 반정치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의 정치적 활동은 두 개의 합리적 이지만 싱충하는 노선들을 따라 전행한다. 그들은 시민에 대한 정부의 통제 를 극소화하려고 노력하며, 현대의 강력한 기술과 전문기술을 사용하여 통 제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려 노력한다. 두번째 노선은 기술가 정치를 가져온 다. 첫번째 것은 단지 시민들과 국가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에만 10) 신고전경제이론이 모든 국제무역 장벽둘을 가장 일관성 있게 반대했다 는 사실은 무역 장벽둘의 폐지가 야기할 수도 있는 실업에 무관십하다 는 접에서 비인간적인 것처럼 들린다. 신고전경제학자들은 이 변화에 반응들을 하고, 이 반응들의 일부는 홍미있고 심지어 약간의 합리적인 변형만 가해전다면 실행 가능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실제로 전망되고 있는 것은 대기업과 무기생산업체들에게 여러 후진국가의 독재자들로 하여금 휘청거리는 나라의 경제를 훔치고 후진국들이 철실히 필요로 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과 기술교육을 포함한 대중교육보다는 사치 품과 복잡한 무기 제도를 공급하도록 인가해 주는 데 가담하는 것이 다.
기술주의의 적용 가능성을 한정시킨다. 이것은 정치적 주도권이 없는 정책 Ol 다. 여기서 제시된 〈 과학과 기술 X 븐 널리 퍼진 편견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것은 순수 자연과학과 응용과학 그리고 기술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 회구조와 공공행정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나 순수 사회과학과는 관계가 없 으며 정치과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편견을 고양 하는 것은 과학자들의 정치적 무기력 현상을 증진시킬 뿐이다. 전통적 자유주의에 대한 현대의 독단적인 고집은 자유주의적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을 정치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아다. 그둘 중 일부는, 특히 미 국에서, 그들의 자유주의와 함께 어떤 유토피아적 아상 ——- 보통은 사회주 의 一— 을 지지한다. 굴라그에 대한 폭로로 인해 그들은 공산주의 정권에 덜 우호적이게 되었으나 아직도 그들은 유토피아적 이상 속에 머무르고 있 다. 그들의 유토피아주의는 그들의 정치적 무기력을 증진시킨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그 이상에 견주어 볼 때, 현재와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약 간 나은 미래 사이에는 거의 격차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들 의 노력은 고생의 보람이 없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더 나아가 지금의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현재의 부정적 상태를 증진시키는 데 이바지하는 것 이라고 여겨 노골적으로- 방해했다(허버트 마르쿠제 ). 특히 노동 생활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비난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노동자들과 의 경영의 협동을 초래하고, 이 두 적대자들이 서로 나눌 수 있는 이익은 무엇이든지 증진시킨다. 공장이 문닫는 것을 막기 위해 노동자들이 감봉을 감수했던 시점에서 인간화와 일터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지 않는 것은 순전 히 정치적 무기력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지지하는 이론은 어떤 것이든 환섬b ] 다• 그래서 고전적 자유주의, 사회주의 이상향, 또는 두 개를 결합한 것과 같 은 이론들이 정치적 무기력에 기여하는지 아니면 단순히 그것을 은폐하는 것인지 말하기가 점점 어렵게 되고 있다. 확실히 많은 기술자들은 전혀 변 명도 없이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기술이 목적이 아닌 수단이어서 도 덕적으로 중립적이며, 좋고 나쁜 목적을 위해 좋거나 나쁜 정당에 의해 사
용될 수 있다는 뻔한 변명을 하면서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사실상 이데올로기는 무기력의 원인도 아니고, 이것에 대한 변명도 아니 다. 이데올로기는 일반적으로 행동을 위해서는 부적당하며 이것을 시인하는 것 또한 그처럼 무기력한 것이다.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그것은 적절하고 효능이 있게 되어 권력, 바로 정치권력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맑스가 비록 형이상학적 언어 구사로 그것을 모호하게 했지만 이 점에 관해서는 그가 옳 았다. 그는 이상이 대중들에 의해 받아들여질 때 구체화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긴급한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필요로 한다. 이것을 위해 우리에게는 새롭고 더 적절한 지적인 툴이 필요하다. 각 사회의 중요한 정 치적 목적은 생존이며, 이차적인 목적은 사회의 복지, 평화 그리고 가치의 유지이기 때문에, 새로운 툴을 개발하는 것은 이둘 목적들과 이들이 요구하 는 기술을 토의함으로써 시작해야만 한다. 많은 사회들이 사회의 환경, 내 부구조, 혹은 기술을 통제할 수 없어서 파괴되었다. 기술은 사회에 도구를 제공함으로써 사회가 환경을 통제하도록 도와준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가정 은 현대의 기술로 하여금 도구를 만들게 해서 현대 기술은 사회의 내부구 조를 약화시킬 수도 있다. 이것이 맑스의 모든 정치혁명에 대한 견해이다. 그러나 맑스의 예측과는 반대로 기술통제 능력의 상실은 종종 전체 사회의 붕괴를 가져왔다. 그리고 맑스와는 반대로 사회적 기술이 평화적으로 어떤 필수적인 발전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이것은 전체적인 생태계의 파괴 가~썽 ―오염에 의해서든 핵전쟁에 의해서든――에 관해 걱정하는 사람들에 게 약간의 용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이론체계는 따라서 현재의 위험스런 기술들을 통제하기 위한 기 술의 개념을 포함해야만 한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현재의 기술이 어떻게 통제되어야만 하는가에 관한 오늘날의 견해들을 검토해야만 한다. 기술은 전체적으로 통제되지 못하고 통제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정치철학은 전반적으로 기술적인 힘을 개발하는 것을 멈추고, 이것 울 전체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발전시키기 시작하라고 말한다. 어떻 게 해서, 그리고 왜 기술에 대한 통제가 없어졌는가? 그것은 결코 없어진 것이 아니고 한번도 가전 적이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기술 성장에
두입되는 노력을 줄이고 기술에 대한 전체적인 통제를 증가시키는 데 두업 하는 노력을 늘리기 위해 어떤 제안들이 있는가? 라는 것이 우리의 당면한 질문 01 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기계가 이제는 인간 보다 더 강력하여져서 모두를 파괴하려고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 은 하나의 암시이지만 상당히 위험스러운 것이다. 기계류는 그것 자체의 목 표가 없으며, 우리가 통제할 수 없게 된 유일한 기계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포고는 우리가 적을 찾았으나 그 적아 바로 우리라고 말한다). 헉슬리가- 1930 년 에 쓴 『 포인트 카운터 포인트 Poin t Count er Po i n t 』 와 다른 여러 책에서 제 시한 대답은 기본적으로 도덕적인 것이다. 우리는 정치학을 도덕화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문제는 정치인들이 사림들에 대해 무관심하고 오직 자신들 의 사적이고 즉각적인 이익에만 신경을 쓰며,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때문이 다. 이것에서 그가 도출한 명백한 교훈은 우리가 대중들에게 달려가야만 한 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자못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생태학의 개척자로 서 『침묵의 봄 』 (1962) 을 쓴 칼슨은 처음엔 무시되었으나 후에 칭송을 받았 다. 그러나 대중들은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이것은 대중들의 무관심 때 문이었다. 정치가들처럼 대중들도 소견이 좁다. 따라서 이번의 교훈은 대중 들에게 설명하라는 것이다. 그래도 반응이 없다면 그것은 그들의 상상력이 부족하고 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극적으로- 표현하라, 더욱더 극적으로 표현하라, 무시무시한 시나리오를 자세히 서술하라 하는 것이 우리의 교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반용기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잘못된 것은 정치적 접근이 없다는 점이다. 대중들에게 행동하라고 강요하기까지 했으나 무슨 행동을 하라고 제시하지 않았다. 에너지철약 계획은 실패하였고 또 실패하게 되어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에너지를 절약하게 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에너지 값 울리는 것이다. 정부는 이것을 국내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발견했다. 에너지 수출업자가 에너지 가격을 높일 때 그 결과는 절약이 아 니라 인플레이션이다. 다른 계획은 제시되지 않았다. 이들 모두에 대한 반 대는오히려 명백하다.
자크 울물이 발견한 것처럼 진실은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위험은 문제에 대처하지 못히는- 우리의 무능력, 기능을 발휘할 기 회가 조금이라도 있는 계획을 고안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 뿌리를 두고 있다. 지금 있는 모든 계획들은 임시방편이지만 이 계획둘의 지지지는 이것들이 적절한 것인 것처럼 둘러댄다. 이런 편애는 우리가 변화를 추구한다면 중단해야만 한다. 이것이 변화에의 길로 가는 첫 번째 과제이다. 을룰은 기술적인 과정이 감시될 수 있다거나 인도될 수 있 다고 둘러대는 것은 허영심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과정이 인도될 수 없 다고 둘러대는 것도 똑같은 허영심이라는 사실도 반드시 덧붙여져야 한다. 결국 무지하다는 고백이 적절한 것이며, 가능성 있는 출구는 바로 이러한 고백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론다. 3 정치이론과 정치행위 정치철학은 정부의 정당성과 제한에 대한 전통적인 학문이다. 정치과학의 대부분은 정부의 여러 체제와 정당과 같은 정치기구 그리고 행정기법의 여 러 체제들을 분류한다. 한편 정치행위는 극적인 루울렛 게임 (회전하는 원반 위에 공을 굴리는 놀이 )이며 종종 야심 있는 독선가에 의해 진행된다. 전 세 계에 걸쳐 군사적 반란은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특히 한 나라가 새 로운 통치자에게로 넘어갈 때는 혁명이라는 명예스런 이름이 붙여진다• 루 울렛 게임이 어디 있으며 누가 그것을 가지고 노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예를 들어 국영방송사 또는 통치자의 청사(죽, 권력의 핵심 )가 정치적 루율 렛의 원반, 죽 권력의 온상이라는 것이 판명될 때, 대령급 장교들이 그 권 좌(權座)를 차지하려는 유혹에 저항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그와 같은 전복에 대한 대응책이 발견되었을 때 반란자들도 역시 비슷한 대웅책을 사 용할 수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왜 이런 불안정성이 검토되고, 산업화된 뺑의 안정성과 대조되어 불안정한 국가들이 이와 같은 놀이들을 멈추 도록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이론이 엉망이기 때문이다. 맑스에 의하면 기업을 소유한 부자들은 총기류를 구입할 수 있기 때문에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정치가들은- 매수되거나 총에 맞을 수도 있다. 이 것은 맑스가 적용한 방법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러셀이 맑스의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해석한 것이다. 일단 그렇게 해석되자 러셀은 그것에 대해 단순한 반응을 보였다. 그것은 부자가 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총기 휴대자 가 부자들을 강탈한디는 것이다. 그리고 부유한 기업가가 아니라 강력한 장 군들이 세계를 지배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라이트 밀즈는 맑스와 러셀을 찬 양했다. 그는 여기서 딜레마에 빠졌는데, 왜냐하면 그는 한 사람에게 반대 해 다른 사람 편을 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해결책을 찾 았다. 죽, 그는 기업을 가진 부자와 총을 휴대한 강한 사람들은 한쪽이 다 론 쪽을 지배해야만 하는 서로 디른 집단들이 아니고, 오히려 부자들과 강 자들은 불가분하게 상호관련되고 서로 혼인관계를 맺는 하나의 작은 사회 계층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말했다. 밀은 지금은 유명한 용어가 되어 버린 군과 산업체 복합적 조직 mi litar y- ind ustr i a l com p lex 이라는 말로 그 계층을 불렀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일으키기 마련인 주요한 혼동은 관찰과 이론 서이에 있다. 권력은 분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어떤 이론가들은 그 권 력의 원천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를 들면 그 원천이 관 찰된 분배의 범위보다도 훨씬 더 제한되어 있다는 주칭을 하게 되었다. 그 러면 정치권력의 원천은 과연 무엇일까? 전통적인 자유주의 정치철학은 정부의 합법성에 대한 연구에서 권력의 원 천을 각 개인에게 둔다. 권리상으로 보면 각 개인은 그 자신만을 통치할 수 있는데, 만약 그가 이 권리를 이양하면 이는 정부를 합법화시키는 것이다. 낭만주의 학파는 이것이 너무 개인주의적이라고 도전하였고, 통치권리를 통 치능력에 근거를 두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론적인 원천과 권력의 합법 성을 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두었다. 죽, 힘이 곧 정의이다. 맑스는 보다 냐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권력 엘리트에는 관심이 없 었으며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다. 갈등이 생기면 경제
적 이익이 다른 이익을 압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제적 이익을 맡고 있 는 사람이 권력에 대한 욕망이 없다면, 그는 권력을 휘두르지도 않을 것이 고 우월권을 나타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다른 이익이 그가 맡고 있는 이익을 위협할 때, 그는 마음이 움직이게 될 것이고 반대되는 이익을 억누르려고 행동할 것이라고 맑스는 말했다(「자유무역에 대한 의문에 관해 서」). (러셀이 맑스의 견해를 자기 언어로 해석했을 때, 아마도 무언가를 오해하였음 에 틀림없다. 맑스의 주장은 권력의 문제가 아니었고, 더군다나 권력이 누구의 손 아귀에 있느냐는 데 대한 의문은 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이익에 관한 문제 였다. 즉 누구의 이익이 우선권이 있는가라는 문제였다. 다시말해, 그것은 단순히 러셀이 맑스의 견해를 자신의 견해와 혼동한 것이었다. 러셀은 최고의 이익이 경제 적인 것이 아니라 통제하려는 욕구, 즉 권력이라고 말했다). 맑스주의자들은 만약 사회주의 혁명을 진전시키지 않는다면 어떤 행동도 쓸모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음속으로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있 는 사람들에 의하여 자본주의 국가에서 조직된 데모에서도 그 시위의 목적 이 되어야만 한다. 자본주의자들의 경제적 이익은 생태학의 이익을 압도하 고 승리할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경제적 이익이 이길 것인가는 이차적인 질문이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정부로 하여금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허가와 계획을 취소하도록 강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면 석유 부족이 일어난 다. 이것은 진짜일 수도 있겠으나, 석유회사나 정부에 의해 조작될 수도 있 고 정부의 지지나 부추김을 받은 석유회사에 의해 조작될 수도 있다. 그것 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기 석유 부족으로 고통을 받는 바로 이때가 대중 시위를 조직했던 환경론자들로부터의 압력 아래 보류되었던 모든 종 류의 계획들이 다시 활성화될 수 있는 때일 것이다. 아마도 사정은 아주 다 르게 진행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들은 경제적 이익이 우선 순위를 차지하는 한 생태학자들의 항의는 기껏해야 일시적 효과가 있을 뿐 이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 혹은 사회주의와 조금도 관련되어 있지 않지만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일부 사람들은 환경을 보호하는 이익은 결국 경제적 이익이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맑스는 이 질문에 대해 자본가가 주의를 기울이는 경제 적 이익은 즉각적인 것이라고 대답했다. 장기적 이익과 단기적 이익 사이에 갈등이 있는 한, 장기간의 이익은 밀려날 것이고 체제는 붕괴될 것이다. 그 렇지만 사회주의에서는 단기적 이익과 장기적 이익이 일치한다고 맑스는 보 장했다 . 정치생활에 효과적인 영향을 끼치기를 바라는 사람은 누구나 맑스 이론 의 순수한 부분보다는 오히려 위와 같은 실제적인 면에 유의해야만 한다. 맑스 이론의 약점은 우선순위가 변경될 수 없다고 말히는 데 있다 . 즉, 자 본가가 경제적 이익을 책임지고 있어서 이 이익의 우선순위는 의심의 여지 가 없고 변경될 수도 없다는 것아다. 그러나 어떤 것은 변경 가능하다. 맑 스조차 그렇게 보고 있는데, 예를 들면 계급 이익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익 자체는 바꿀 수가 없으며, 그 우선순위를 다시 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당 신은 지배계급을 바꿀 수는 있으며, 어떤 이익이 우4J 순위를 갖고 있는지 결정히는 것은 바로 이 지배계급이다. 맑스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계급 이익이 있지만, 그의 가르침과는 반대의 국가적 이익도 있고, 심지어 인류의 이익조차도 있 다. 또한 권력을 가진 엘리트들의 이익을 포함해서 모든 사회집단과 계층들 에 부여된 이익도 있는데, 맑스는 계급만이 전정한 이익을 가질 수 있고 진 정한 이익만이 참된 권력을 휘두를 수 있기 때문에, 이의의 이익들은 항상 그리고 본질적으로 무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맑스의 이 심각한 오류조차도 그 속에 지혜를 내포하고 있다. 바 록 직접적인 행동이 자주 요구되더라도, 때로는 간접적 행동이 더 현명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또한 어떤 법률은 사람의 행동양식을 바꾼다. 일반적 인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경제적 변화는 행동양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또한 어떤 법률은 부를 창출하고 축소하며, 심지어 부의 분배를 바꾸기까지 한다. 몰수에 의한 부의 재분배나, 농민들에게의 토지분배(보통은 토지개혁 으로 잘못 불리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높은 싱속세 등을 통한 부의 재분배 와 같은 이러한 모든 것들은 빈부의 차를 줄이기 위한 간접적 행동이다. 이 것들은 모두 실패했다. 전반적 의무교육은 단순히 법률의 통과만으로 실행
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가난한 나라들도 문맹을 퇴치하고 지금은 더 잘 살게 되었을 것이다. 어떤 종류의 입법이 한 나라를 문맹국에서 비문맹국으 로 바꾸어 놓았는가? 이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은 없다. 그렇지만 법적인 혁 신의 성공에 관한 일반적인 명제가 있다. 즉, 만약 어떤 용인된 기성의 제 도가 어떤 새로운 제도를 잘 지지하게 하면(즉 새로운 제도가 실패하면 구 제 도들도 같이 실패한다는 정도로까지 ), 그 새로운 제도는 기반을 잡게 될 것이 다. 이것은 중요한 법칙이다(이것에 대한 예의는 새로운 입법에 의해 야기된 사회적 분열의 경우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맑스가 최우선적인 이익에 기인한다고 생각했던 그런 메커니즘을 모방해서, 어떤 이익을 최우선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일을 전적으로 어떤 기관에 대한 그의 효과. 적인 통제에 달려 있게 만들면, 그는 그 기관을 통제하기 위하여 할 수 있 는 모든 일을 다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의 경고장치에 특별한 소리가 나면 그의 임원들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직책을 그만두어 야 한디는 법을 만든다면, 우리는 문제를 강제로 일으키는 셈이 된다.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사회적 분열을 야기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위험스런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공적으로 디루어질 수 있는 문제들만이 계속 강요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야만 한다. 레닌이 했던 것은 그의 통제권을 벗어나는 문제들을 강요했던 것이었고 그래서 결국에는 필연적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실패를 인정하고 원인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성공한 체했다. 아마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체제가 분열될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던 것 같다. 이런 상황의 논리적인 결과는 스탈린의 이중 체제의 체계적 구축을 가져왔다. 죽, 의형적 전시는 발전적이지만 거짓이고, 내부는 뒤떨어졌지만 사실이었다. 정치적으로 활발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정치적 무기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 는지 모른다. 반면 그외의 사람들은 지나치게 야망적이고, 그것들을 과잉 사 용하려고 해서 불행을 야기시키는 경향이 있다. 불행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 은 무책임한 지도자들의 변덕에 반응하지 않도록 체제를 무겁게 만들려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정치적 행동을 취하는 것은 전보다 그 가능성이 적
어지게까지 만들었다. 어느쪽이든 정치적 무기는 없으며, 단지 정치 엘리트 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놀도록 주어진 덧없는 표면상의 정치권력만이 있을 뿐이라는 인성을 낳았다. 정치적 무기력은 널리 퍼지면서 이상향의 꿈을 키 운다. 정치적 무기력과 이상향의 꿈은 번성하면서 서로에게 자양분을 공급 한다. 정치적 무기력과 이상향의 꿈은 프로이트의 노이로제 이론에서 갈등 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기울이는 자기 강화의 헛된 노력으로 묘사된 개 인적 우유부단함과 동류의 사회적 우유부단함이다. 4 괴물로서의 기술관료 우리는 이렇게 해서 기술주의가 현대 사회적, 정치적 생활에 파고들어와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간단히 말해 기술주의는 관료주의로서 관료주의의 무기력과 그것의 이상주의가 짝 맞추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기술주의의 특 질은 기술주의의 증대된 정치적 무기력과 이상주의가 아니고, 물리적, 생물 학적 기술을 무책임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며, 제멋대로 달리는 가술을 멈추 게 할 충분한 책임이 있거나 지식이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메리 쉘리의 빅터 프링켄슈타인은 그가 책임질 수 없는 괴물을 만들었으 며, 그래서 길들이지도 않고 명령하지도 않으며 만족하지도 않는다. 그 괴 물은 욕구와 욕망, 특히 사랑에의 욕구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인간화되어 있다. 물리적, 생물학적 기술은 욕구도, 욕망도, 의지도 그리고 내적 논리도 없다. 그러나 물리적 기술은 주어졌으나 그것을 통제할 수단이 없는 사회의 내적 논리는 별개의 문제다. 이 사회는 실제로 그 자체의 논리를 가지고 있 으며, 이 논리는 개개 행위자들의, 특히 정치적 행위자들의 상황논리의 결 과이다• 기술주의에 있어서 누가 정치적 행위자들일까? 기술주의 아래에서 국가 적 이익을 책임질 사람은 누구인가? 전문적 관료들로 구성되어 국가의 일 울 운영하는 공공행정부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관료들은 기껏해야 집행 자로서 효율적일 뿐 목적을 결정함에 있어서의 적임자는 아니다. 따라서 목
적은 전문가이든 아니든 특별한 권위자들에 의해 결정되어야만 하~근데, 이 경우는 독재가 생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적으로 결정되며, 이 경우 에 있어서 그 체제든 기술주의라기보다 오히려 효율적인 민주주의이다. 만일 우리가 한스 요나에 동의하여 현대의 기계장치들을 통제되지 않는 프랑켄슈타인 괴물에 비교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자크 울룰에 동의해야만 하며 기계를 관료적이고, 기술주의적이고, 목적이 없는 초현대 국가의 것으 로 보아야만 한댜 이러한 생각은 정말로 일부 어리석은 과학자들에 의해 선호되고 있다. 그리고 과학소설 독지는 호의적이든 비호의적이든 혹은 다 론 면에서건 그것을 환상으로 만드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술주의를 정치적인 힘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심각하고 위험스런 오류일 것이다. 왜냐하면 맑 스의(그리고 엥겔스의) 예리한 인식에 따르면 꿈은 현상을 지키기 위한 강 력한 정치적인 무기이기 때문이다. 요나스와 을룰은 반동주의자같이 보이지는 않지만, 맑스에 의하면 그둘은 반동주의자들이다-그는 그들을 오히려 어리석은 사람들로 보아야만 했 울 것이다. 근대 산업국가에서는 어느 나라에서나 지식의 힘이 거대하여 매 우 엄청날 정도로 그리고 많은 예측 불가능한 방법들로 우리의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지식인들을 정치적으로 활동하지 않게 하고 기껏해야 기존의 정치활동에 대한 보조자로 님아 있게 하려는 것이 권력자, 즉 현재 의 지배자의 관심사이다. 요나스와 을룰의 견해는 지배자들에게 이런 점에 서 유용하다고하겠다. 이 점은 2 似1 ] 기 전반기에 정치 근대화를 위한 두 훌륭한 주창자들인 아 인슈타인과 러셀에 의해 반복적으로 관찰되었다. 그들은 주로 세계의 정치 적 욕구와 현재의 정치적 구조가 이들 욕구들이 주장하는 절박한 문제들을 다루기에는 아주 부적딩하다는 것에 대해 가장 강렬하게 영향을 받았다. 그 들은둘다하나의 세계 정부-이것은실제적으로는세계적인 정치적 협 력에 대한 긴급한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의미하는 구호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지지하였다. 위대한 지성인이자 지식인들인 이들 은 이제는 지구 우주선이라 불리게 된 이 세계의 절박한 문제들에 대해 무
언가를 시도하도록 세계의 지성인들을 움직이게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상당 히 당혹하였다. 그 문제들에 대한 인식이 이제는 행동으로 옮기기에 충분히 적절할 정도로 더욱더 절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행동으로 옮겨지지 않고 있거나 아주 비효율적이고 실망스럽다. 문제의 긴급성은 이제 합리적 행동에 대한 심각한 장애물이 될 정도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무지하고 좌절되어 있어서, 충분히 고려되지도 않은 과 감한 행동노선을 추구할 정도로 무책임한 사람에게라도 기대를 걸고 이들 울 따르려는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든 나러들로하여금 선동 정치를 따르게 만드는 상황논리이다. 그리고 이것은 서구 정치에서 없어진 고전적 자유주의 철학을 부활 가능케 하는 상황논리와 똑같은 것이다. 이것 은 수많은 지식인들로 하여금 모호환 사이비 국가주의나 사이비 민주주의 적 구호 또는 모호한 사이비 맑스주의 그리고 아무데도 특별한 성과를 거 두지 못하는 사이비 사회주의 구호를 의치는 인민주의 지도자들의 뒤를 졸 졸따라가게 한다. 장기 정책의 부재, 장기적인 문제의 해결을 노린 모든 행동을 단기적 행 동으로 오역하는 것, 장기계획에 대한 좌절 -~ 모든 것들은 아직도 선 의의 의지를 잃지 않고 자발적으로 정치활동에 기여하는 사림들로- 하여금 장기적이든 단기적이든 어떤 계발된 정치적 행동을 도출해내는 데 고심하 도록 강요한다. 그들의 이러한 노력도 조만간 더 많은 좌절을 겪게 마련이 고, 대개는 정치적 활동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세계적 문제를 다루 는 모든 자발적인 조직의 개편이 지나치게 많은 실정이다. 이제 이 토의를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는 몇몇 간단하고 명백한 결론으 로 끝맺도록 하자. 첫째,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디는 희망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낙천-침묵주의자와,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영세 -기우주의자, 이 양자 사이에서 중심을 못잡고 혼들리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둘째, 앞의 내용을 달리 말한다면, 단기 적인 이익이 우세할 것이라는 것 때문에 단기적인 이익에만 주의를 기울이 는 것과 단기적인 이익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장기적인 이익에만 주의를 기 울이는 것 사이에서 우리가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기적
인 것은 이것이 현재는 우세하나 결국에는 재난으로 이끌 수도 있으며, 또 기술적으로 뒷받침되고 있는 행정부의 조정에 의하여 개선된 효율성도 단 지 재난을 가속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것은 장기적인 이상적 사 회주의와 단기적인 능률적인 기술주의의 차이점이 단지 현대적 묘안들로 꽉 찬 무책임하고, 능률적이나 목적이 없고, 현대 부숙 품 들로 장치된 관료주의 조직의 장기적인 것과 단기적인 비민주적 꿈들간의 차이점이라는 사실울 대 중탉 l 급속히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얻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은 민주사회 범위 내에서 최악의 비극적 결말들을 상당히 피할 수도 있는 보 다 더 나은 틀 속에 단기적인 이익을 끼워넣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중기적 인 이익에 대한 어떤 구성이다. 더 나아가 모든 정치적 계획의 주된 초점은 정치적 주도권에 생긱이 맞 추어져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결정해야만 하며, 그런 다음 이것 울 진행시키기 위해 우리 각자는 무엇을 할 수 있고, 우리들 활동의 결과 로서 무엇이 기대될 수 있는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합리적으로- 기대 가능한 결과 없이는 우리의 행동들이 해로울 것이라는 방식으로 행동하도 록 목표를 세워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합리적인 위험을 무릅써야만 한다면 우리는 손실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 생각들은 간단 하고 상식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적용은 단순하지가 않다. 유감스 러운 사실은 주도권이 생활의 여러 영역 내에서 상당히 책임있게 행해지면 서도 정치권 내에서는 그런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충분히 고려될 만한 몇몇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행동계획이 없이는 주도 권을 잡을 수 없는데, 무슨 이유에서든지간에 정치생활에 있어서 이것은 드 물고 모든 종류의 직책 담당자나 정부의 계획은 거의 일반적 개요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둘째, 대부분의 합리적 행동이 사회적 구조 속에서 실행되 고 일련의 주어진 요인들이나 규칙과 환경에 의해 제한되는 반면, 정치는 흔히 그 자체의 구조를 다루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쟁의 논리가 정치의 논리보다 극히 단순하다는 것을 제의하고는 전쟁에서도 맞는 사실 이다(전쟁은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더 자주 실패를 하는데, 이것은 장군들이 업 청나고 파괴력이 대단한 무기를 책임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매우 위험해지고 있다).
물론 또한 언급된 두 어려움들이 강력히 상호작용을· 하여 세계적인 정치계 획을 세운다는 것은 더욱더 어렵다. 더군다나 정치적 구조를 바꾸려는 시 도는 대중이 이것에 저항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새로운 구상이 대중에게 설명되지는 않기 마련이며, 따라서 있을 수 있는 결과는 혁명에 의해 강요 된 변화는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변화가 잘못 구상된 것 이거나 국민들이 거기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패한 혁명은 보수적 감 정을 강화하여 변화를 방해하고, 그리하여 변화를 위한 힘은 어떤 새로운 혁명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안정적 민주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내부에서의 변화 를 허용하는 민주주의 구조의 유연성이며 둘째는 구조 자체를 변화시키는 합리적 방법이다. 이것이 헌법 개정의 바팅이 되는 생긱이다. 민주주의의 상 당한 안정성, 변화를 흡수할 수 있는 상당한 능력은 전체적으로 체제를 정 기적으로 재평가하는 어떤 제도적 수단을 요구한다. 이 모든 것들은 누구보다도 을룰-, 요나스, 혹은 마르쿠제의 기술적 사회 의 무목적성에 관한 논의 자체가 무목적적이었음을 명백히 해준다. 그러한 논의는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다. 우리가 구체적인 사회의 범위 내에서 기술을 토의하지 않는다면, 또 만약에 우리가 그 사회에 주어진 목표, 의사 결정 장치 등-위의 사상가들도이 모든것을극히 중시한다 울결 정하지 않는다면 그 논의의 성과는 개선될 수 없을 것이다. 한 사회는, 그리고 전 인류도 주어진 몇 가지의 목표들을 가지고 있다. 그 것은 생존과, 이것에 필수적인 것, 그리고 아마 생존을 가치있게 만들 수 있 는 것들일 것이다. 생존을 가치있게 만들 수도 있는 그 목적을 두고 서로 다른 정치생활 방식이 경쟁한다. 그것은 민주주의나 반민주주의적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일 것이다. 일단 이들 기본적인 것들이 설명된 이상 목적 없는 프랑켄슈타인적 기술괴물에 대한 두려움은 목적없는 정치 적 괴물에 대한 아주 다른 두려움으로 대치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된 다. 그러나 국가 안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은 주어졌으나, 서구 민주주의 내에서의 현상에 대한 평가는 절박해지고 있다. 그렇게 급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미래를 위한 민주주의의 이미지가 요구되고
있다. 우리는 국제적 정치와 국가적 정치에 대한 적절한 재평가 없이 너무 멀리 나아가 있다.11) 5 맺는말 현재의 정치철학과 정치학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최선의 방책과 이용 가능한 지적 도구들을 활용하려고 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상황을 달 성할 수도 있다. 전통적 구조를 평가함으로써 그 구조가 지닌 결점을 찾아 낼 수도 있다 . 단점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루어전 진보를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평가히는 것이 새로운 사고 방식의 열림이 될 수 도 있고, 기술을 더 잘 다룰 수 있는 정치적 사고를 위한 새로운 지적 체 계의 발전에로 이끌 수도 있다. 아마도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그리고 널리 인식되고 있는 사실은 상 황의 불확실성에 대한 문제이다. 정당은 정치적 계획과 정치적 행동을- 개발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딩들은 발전하자마자 곧 그들은 안정을 제공하고 충성을 요구하는 정치적 조직으로서뿐만 아니 11 ) Marshall Macluhan 의 〈지구촌 Global vil lag e 〉 이라는 표현은 홍미롭게 도 Buckm ins te r Fuller 의 〈우주선 지구호 Sp ac esh ip ea rth 〉라는 것과 재 미있는 대조가 된다. 후지는 우리가 전체적으로 인류의 생존에 대해 가 져야만 하는 책임과 관련되어 있고, 전자는 지구 구석구석까지의 모든 문화의 상당히 바람직한 교류로부터 생겼을지도 모르는 완전한 획일성 과 자( 自 )민족 제일주의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다. 인간의 물리적 존재에 대한 위협은 너무나 현실적이며 국제적으로 동합된 적절한 입 법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을 뿐이다. 세계적인 획일성과 자민족 제 일주의의 위협은 아마도 입법에 의해 해결될 수가 없을 것이다. 오히 려 다원적 참여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어떤 운동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참여는 합법적으로 장려될 수는 있지만 강요되어 서는안된다.
라 사회적 조직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경향이 있다. 자동차산업과 같은 경제 적 관심이 발전되자마자 이것은 주요한 정치적 요소가 되어, 정부는 일어날 지도 모르는 대량 실업에 직면하기보다는 오히려 재정 파탄으로부터 회사 를 구하도록 강요받는다. 정치 사회 경제와 기술간의 깊은 상호작용과 관련 성은 오늘날 새로운 유형의통합적인 해결을 요구하는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다. 노동의 분업은 기술을 경제와 동일시하고 기술을 과학과 동일시하는 것 과 함께 전문화를 위한 주요한 동기 유인을 구성한다. 결과적으로 도제의 지위는 매우 급격히 변화하여, 다양한 영향력에 노출되어 다양한 기술을 배 우도록 도전받던 젊은 노동자의 위치로부터, 전문화된 주인의 초전문화된 젊은 보조자러는 위치로 바뀌었다. 도제의 신분은 분명히 사회적이라기보다 는 법적이다. 정부는 오늘날 매우 유행하고 있는 학제적 종합연구소에 적은 돈을 투자할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그러한 연구소가 명성을 얻기 위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전문가둘을 스스로 초빙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이들 정부는 충분한 자금을 가지고, 재교육이나 심화교육 그리고 전문화의 장점에 못지않는 새로운 종류의 다학문간 훈련의 개발 등, 전문화가 되는 새로운 종류의 종합훈련의 발전을 포함하여 새로운 형태의 도제제도를 발 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간단하고 적절하며 비용이 안드는 입법으로- 보호될 수 있으며, 이 법은 현재의 보조금, 세금의 면제 등과 연 계됨으로써 쉽게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은 의심할 바 없이 매우 어둡고, 마치 우리가 모든 싸움에서 지고 있 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장기적인 선택을 열어줄 수 있는 너무나 간단한 일들도 많아서 정치가 앞장서 많은 주도권을 쥐고 그 런 일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주요 행동노선은 그 당시의 핵심적이고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토의할 가능성을 높이려는 움직임을 시작하는 것이어야만 하며, 많은 토의과정에서 다양한 침여자들에 의해 보 다 더 창의적인 것에 대한 보다 더 나은 제안들이 제시될 가능성도 있는 것 이다.
제 3 부 인간의 행위에 대한 반성적 고찰 이 책의 앞 I, 2 부는· 통합된 개념과 통합된 비평을 제시하고자 하는 시 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제 3 부에서는 지나치게 간략하지만 통합된 제안 ― ― 그렇게 많은상세한이론이 아니라행동을위한프로그램의 개략-울목 표로 하고 있다. 제 3 부의 전반부는 · 행동을 위한 프로그램의 총론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 즉, 중기적 목표들과 이것을 현재 진행중인 단기적 목표들과 통합하기 위한 방법들에 대한 필요성이 그것이다. 결론인 후반부는 가능한 빠르게 주된 변화들에 대응하는, 가능한 실행방법들의 여러 문제믈 다루고 있댜 이 책 마지막 부분의 여러 부족한 점들은 너무나 가슴아픈 일이다 . 그 러나 이 마지막 부분은 새로운 노력을 기울이기 위한 또 하나의 시도이기 에 더욱더 홍미있고 · 고무적인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제 11 장 보다 나은 미래의 모습 정치적인 견해에서 이상주의자들과실용주의자들사이에는 전통적으로불 일치가 존재한다. 플라돈에서부터 스키너에 이르는 이상주의자들은 우리가 커다란 캔버스에 이상을 묘사할 때, 우리가 추구하는, 보다 더 나은 이상을 갖는다고 말한다. 스피노자에서부터 포퍼에 이르는 반(反)이상주의자들은 좀더 즉각적 (직접적 )인 것을 원한다. 반이상주의자들이 이상향의 이미지를 유해한 것으로 규정한다는 사실로부터 두 사상 사이에 갈등이 생겨난다. 이들은 이상향의 이미지는 우리들로 하여금 현존하는 사회의 불완전한 점 을, 특히 인간의 약점을 위해 우리의 제도적 기구 안에 어떤 여지를 만들 필요성을 무시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자신들로 하여금, 칼 포퍼가 제안한 것 처럼 현재의 철박한 문제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계획하는 사람들의 가장 중 요한 의제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기초로, 점전적 사회 정치공학에 대한 생 각을 제안하도록 이끌었다. 오늘날 긴급한 문제들이 전 세계적인 문제로 대 두되면서 (빈곤, 인구중가, 환경오염, 핵확산) 각 학파 사이의 거리는 줄어들고 있다. 우리는 어떤 지침 또는 얀서하는 사상에 의해 이러한 긴급한 문제들 이 해결된 세계를 상상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전혀 완전한 것이 아니므로
아직도 인간의 약점을 인정해야 하고 아직도 더 나은 발전을 필요로 한다. 이 상상된 이미지롤 준( 準 )이상사회라고 부르자. 이 연구의 마지막 결론 부 분의 전반부인 이 장은 다음에 언급될 종류의 준이상사회의 새로운 모습 一 즉, 민주적인 사회 그리고 문제에 시달리기는 하지만 그러나 인구증가, 공해, 핵무기를 효과적으로- 조절하는 그러한 사회의 모습 ―― 을 그려보는 데 할애하겠다. 1 실제적인 문제의 이론에 대하여 질문에 대한 논리 the log ic of que sti on s 를 다루는 것은 새로운 탐구 분야 이다. 그리고 이러한 탐구는, 아직은 컴퓨터 기술이 아주 한정된 특정 분야 이의에는 응용 분야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문 제들이 의제로 되는 방법과, 그리고 그 의제에서 문제들에 대하여 우선·순위 가 주어지는 방법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우리들은 우선순위가 낮은 문제들 은 심지어 의제에 붙여지더라도 결코 토론이 되지 않는다는 것 같은, 간단 하고 명백한 사실조차 종종 간과한다. 민주적인 과정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간과함으로써 계속 패배한다. 그들은 어떤 특정 사항을 의제로 상정하는 데 많은 노력을 두자했고 또 이긴 것처럼 보여지지만, 결 국에 가서는 아무런 호소력도 없는 태만 때문에 패배했다는 것을 발견하고 좌절감만 느끼게 될 뿐이다. 이러한 지도자들이 핵심적 쟁점들에 대해 적절 한 투표를 해야 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동의안을 무효로 만들기 위 해서 최대한의 논쟁을 벌아도록 한디는 것을 알게 되면 더 불쾌해진다• 이 것이 폭넓은 대중을 위한 민주적인 과정의 훈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 이다. 이와 갇이 질문에 대한 논리를 연구하는 것은 아마도 그러한 훈련을 개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적인 질문에 대한 논리 분야는 일반적인 질문에 대한 논리보다 백년 이상 앞선다. 통합이 과학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우리 가 어떻게 몇몇 사실들과 과학이론들을 새로운 이론으로」통합시킬 수 있
으며, 어떻게 새로운 이론을 검증할 수 있는가? 하는 두 개의 똑같은 근본 적인 문제에 항상 직면하고 있다고 말한 사람은 19 세기 초기 윌리엄 훼웰 01 었다. 과학에 있어서조차도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주를 이해하려는 과 학의 노력에 있어서, 과학은 훼웰이 묘사한 바와 같이 여러 사실들을 설명 하고 아러한 설명들이 들어갈 수 있는 지적인 구조를 제공해야 하는데 방 법론적으로 귀납적인 방향과 연역적인 방향의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그러나 과제를 포착하고 그것을 요약해야만 하는 두 방향에서의 움직임 (연역법과 귀 납법)들은 서로 잘 맞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이 두 움직임울 어 울리게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 의에도 우선순위에 관 한 문제들이 많이 있다 ― __ 즉, 어떤 문제가 우선인가 ? 혹은 수정할 필요 가 있는 이론의 어떤 부분을 먼저 수정해야만 하는가? 지신의 생각을 먼저 개선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방법 (즉, 수학적 또는 실험적 )을 먼저 개선 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인 문제의 영역은 기술, 법률, 사회적 조직과 비 교하여 작게 세분화되어 있고 고도로 정리되어 있다. 즉, 사람둘이 문제들 을 토론할 때 일반적으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거의 알지 못할 정도 로 그러하다. 그러면 우리는 제시하기에 가장 쉬운 것부터 진행해야 되겠다 ―반드시 실행하기에 가장 쉬운 것부터 진행할 필요는 없다. 가장 간단한 종류의 문제는 어떤 주어진 기준 목록에 의해서 각기 특징 지어전 항목들의 목록으로부터 어떤 기준을 만족시키는 한 항목을 고르는 것이다. 질문지를 생각해 보자. 각각의 질문지에는 사람들의 성명, 생일, 주 소, 직업 등의 난이 있다. 각각의 특성들은성명목록으로부터 그특성을 공유하는 개인들의 성명을 가려낸다. 그리고 이상적으로는 어떤 질문은 〈누가 이런 저런 특성들을 가 지고 있는가?〉일 수도 있다. 또는 〈주어진 목록에 있는 구성원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기 어떤 주어전(세트의 ) 특성 (들)울 공유하는가?〉 일 수도 있다. 이러한 종류의 질문은 가장 구체적인 것이므로 컴퓨터의 도움으로 가장 잘 처리될 수 있다. 컴퓨터의 도움으로 비행기표를 구입하고, 주식을 사고,
구매에 대한 결정을 하고, 저장을 하는 일 등은 모두 질문에 대한 논리와 관계되는 한, 감은 종류의 것으로서 매우 복잡한 일들이다. 수학적으로는 그 일이 서로 다를 수도 있고, 그리고 그 문제들을 다루기 위하여 새로운 분 야의 수학(행렬이론과 선형 프로그램과 같은)이 발전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러한 일들은 일단 한번 다루어지면 우리로 하여금 컴퓨터의 도움으로 질문 을 처리할 수 있게 해준다. 다음은 질문들이 고정된 지적인 구조 안에 있는 것인데 그러한 질문들은 정형 (定型)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컴퓨터로 처리할 수 없다. 우리가 매일매 일 부딪치는 대부분의 문제는 이러한 종류의 것이다. 우리들은 주어전 질문 에 대해 무어라고 대답하는가와, 무어라고 하면 기이한 대답이 되는가에 대 해서 우리 동료들이 거의 논박할 수 없을 정도의 직관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질문들에 관하여 주목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때로는 그 질 문들이 논박되기도 하고, 그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에 관한 합의가 있기도 하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해서 풀리지 않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 나 이렇게 가장 중요한 점이 종종 어떤 기준에 의해서 그리고 〈 해결방안 〉 이라는 단어와 훨씬 더 엄중한 〈 진정한 해결방안 〉 이란 단어에 대한 만연된 혼동에 의해서 무시된다. 그러므로 대개 사려깊은 대학생들도 〈 오늘이 무슨 요일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얼마나 많은 답이 있습니까? 〉 라는 질문에 답 변을 해야 할 때는 시정 (市井)의 일반 시민들만큼 사려깊지 않다. 그래서 그 들은 분명히 옳은 대답은 〈일곱〉인데 옳은 대답은 〈 하나〉라고 생각한다. 죽, 그들은 〈정답〉과 〈답冷t 혼동한다. 그 혼돈가 여기서 쉽게 생기는 이유는 그 질문이 논쟁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질문이 논쟁적일 때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며 다음과 같이 된다. 우리들이 논쟁적인 질문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보통 그것에 대하여 논 쟁적이지 않은 답을 갖게 된다. 이것은 이상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어떤 답 이 논쟁 없이 인정되면 그렇게 대답하는 질문이 비논쟁적이기 때문이다. 그 러나 이것은 답이 논쟁 없이 거부되는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것 은 여러 가지 이유로, 특히 분명히 잘못이라거나 또는 환상적이라고 만장일
치 로 거부될 수도 있다. 어떤 논쟁적인 질문 을 생각해 보자. 앞서 언급된 그 혼 란은 여기서는 좁 혀진다. 만약 우리 들 이 〈 오늘이 무슨 요일인가? 〉 라는 질 문에 논박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날이 평일이라고 가정해 보자. 얼 마나 많은 대답둘이 있는가? 여전히 일곱 개의 답이 있다. 그러나 혼동으 로 아직도 올바른 답 을 찾 지 못한다. 사람들은 〈 답 〉 과 〈 정답 只 끌 아직도 혼 동 할 수 있으며 그리고 〈 하나 〉 라고 말하거나 또는 이 혼 동에 다음 것을 덧 붙일지도 모른다. 올바른 답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시간 이 후 우리는 그 질문 이 논 쟁적 이 아니라고 가 정 한다) 사람들은 〈 답 只 끌 〈 가능한 답 〉 혹은 〈 정 답이 될 자격이 있는 답 〉 과 혼동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그들은 하나보 다 크고 일곱보다 작은 수를 제시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개방된 질문에 대해 심사숙고할 때, 우리들은 먼저 답한 것을 분명하게 틀린 답이라고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거의 모든 경 우에 심각하게 잘못된 것 이다. 매일매일의 질문을 특정짓는 것은 그날의 평 범한 배경이다. 그러므로 몇몇 가능한 답둘을 분명히 잘못된 것으로 만드는 것 은 바로 이 평범한 배경이다 . 이것은 어떤 새로운 기술이 우리의 생활 저 변에 널리 퍼지게 될 때 관찰될 수 있다 . 즉, 새로운 기술은 어떤 분명히 잘 못된 답을 올바른 것으로 만든다(어떤 주어진 정보의 항목에 대한 출처와 이 것 의 통신기술의 성장과의 관련성에 관한 어떤 질문을 생각해 보자). 그러므로i 어 떤 문제(그 문제를 매일매일의 일로 만드는)에 대하여(매일 매일의 배경을 설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문제에 대해 확실히 잘못된 모든 답을 제시 하고 이 잘못된 것들에 대하여 분명히 논박하는 것이다. 이 기법의 장점은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대신에 그 잘못된 대답들도 때로는 분명한 순서로 제시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질문을 하나의 구조나 체계로부터 다른 구조나 체계로 옮길 때 일은 더 홍미롭게 된다. 우리는 그 구조나 체계에 있어서 어떤 경미하나 駒적인 변화가 우리 질문에 대한 가능한 대답둘의 목록예 대 변혁을 일 으킬 수도 있을까? 라고 물어볼 수도 있다. 이러한 종류의 물음은 발명가 들에게는 매력적이고 도전적이다. 어떤 새로운 체계 속에서 이 도전을 제시 하고 지금까지 말해져 왔던 것을 그 도전에 적용하는 것은 때로는 아주 가
능한 일이다. 이것이 가능할 때 우리는 여러 구조나 체계의 위계 질 서를 갖 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또한 질문에 있어서도 위계( 질 서)를 갖게 된다. 우 리들은 이제 그 두 개의 위계 조직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아주 유용한 점 울관찰할수도 있다. 종종 어떤 체계가 확장되면 그 체계는 그에 따라서 질문들을 확장하기 위 한 어떤 방법을 자주 찾게 된다. 많은 기술적인 문제들이 결코 풀리지 않았 던 이유는 그러한 기술적인 문제들은 확장되었는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그 확장된 변인들은 다른 준비된 해결 방안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말을 자 동차로 대치하거나, 피스톤 엔진을 제트 엔진으로- 대치하거나, 또는 심지어 표준 대수를 비표준 대수(아브라함 로빈슨)로 대치해 놓든지간에 어떤 혁신 적 기술이 생겨날 때마다, 인류에게 압박을 가하던 방대한 양의 문제들이 해결된다――비록 그 문제에 이어 나타나는 문제들이 그들의 차례가 되었 을 때는 새로운 특별한 문제점을 야기시키는 더 확장된 문제로 되기는 하 지만. 그러므로 특히 기술에 있어서, 특정한 문제에 집착해서 매달리는 것은 완 전히 시간낭비일 수 있다. 그리고 기술의 역사는 시장에 나가기도 전에 구 식이 되어 버린 독창적인 발명들로 가득차 있다(미숙한 발명도 똑같이 적용 된다)• 더구나 우리가 어떤 구조의 내부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문제들은 더 작 아지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개인 일상생활의 행위에서조차도 같다. 사람들· 은 이 사실을 좋아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한 구조적 틀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이 성가시면 성가실수록, 사람들은 그 구 조적 틀에서 벗어나는 방안을 기대하기가 더욱더 어렵게 된다. 여기에 관 한 예는 많이 있다. 타자기 키 또는 악보를 쓰는 방식의 개혁이 (특히 첼로 를 위한 악보) 그 예이다. 단지 어떤 해결방안이 굉장한 것일 때만(사전 기획 으로 하나의 열쇠장치로 여러 열쇠의 역할을 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 )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문제 이행 pro blem s hift에 관해 첫번째 연구자이었던 이므 레 라카토스가 지적했던 것처럼 값비싼 과학 장비들을 설치하면 이는 과학 적인 질문들의 범위를 그 분야의 전문직 사람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수 있
도록 좁히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어떤 퇴행적인 문제 변화를 규정하는 경 향이 있다. 이것은 장비면에서 대규모의 투자를 하고 미래의 이익을 계산할 때 특별히 주의할 가치가 있다는 경고이다. 즉, 사림들은 그 장바가 아주 빠 르게 고물이 될지도 모론디는 가능성을 고려해야만 한다(마이크로 컴퓨터를 생각해 보라) . 바로 앞의 토론은 구조에 관한 것이다 . 즉, 어떤 과학적이거나 또는 기술 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구조적 틀이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 서 우리는 형이상학에서부터 공상 과학소설에 아르는 모든 종류의 활동 분 야로옮겨간다. 일단 우리가 취사 선택해야 할 여러 개의 고정된 대답둘로 시작하여 새 로운 형이상학적인 전제들을 찾는 것으로 끝을 내고자 여러 종류의 질문들 에 대한 임의적인 위계 질서를 살펴보면, 우리는 매우 다른 여러 종류의 질 문동기 어떻게 서로 상호 작용을 하는가를 재빨리 간파할 수 있다. 즉, 많 은 가능한 답을 저장하고 있는 우리의 컴퓨터에게 다시 프로그램하도록 권 고하기 전에 그 구조가 얼마나 많이 바뀌어야만 하는가? 새로운 전제들의 관점에서 어느 과학이론들이 고쳐 쓸 가치가 있는가? 일반 상대성이론의 언 어로 양자론을 쓰려고 노력할 가치가 있는가? 일반 상대성이론을 양자화할 가치가 있는가? 혹은 이 이론의 일부분을?(그렇다 . 죽 상대론적인 블랙홀이 론이 양자화되었다).공기역학에서 일반상대성이론을사용할가치가있는가? (아니다) 우주항해에서는?(그렇다) 과학자들은 5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 든 실증적인 업적에 관하여 걱정을 해야만 하는가? 등등의 질문들이 어떻 게 상호 작용하는가를 재빨리 간파할 수 있다. 질문에 대한 논리 분야는 유치한 단계에 있다. 문제 변화가 진보적일 수 도 있고 퇴화적일 수도 있디는 생각은 새로운 것이다. 즉, 라카토스는 그것 이 항상 전보적이어야만 하는 것을 당연히 여김으로 해서 기술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졌다. 질문은 발견된다는 사실은 마이클 패러데이에 의해 백년 아상 전에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1 2)
12) 필자의 다음 문헌 참조. Faraday as a Natu r al Phil o sop he r, 1971, p. 162.
질문은 종종 관심이나 상황의 변화 때문에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는다 는 사실 또한 매력적이다. 이것 또한 일부 과학사가들에 의해서 관찰되기는 했지만 연구되지는 않고 있다. 이것은 연구할 여지가 많은 분야이다. 즉, 질문에 대한 논리와 그 논리를 과학적인 연구, 기술적인 연구, 실용적인 일(이것이 본래의 기술임)에 다양하 게 적용하는 연구를 해볼 수 있다. 교육 분야에서도 이것은 오랫동안 필요 했던 개혁 ― ― 즉, 학생들에게 질문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치면 학생들은 생 각이 자유롭게 될 것이라는― ― 을 초래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의 결론으로서 손익 (tR 益) 분석을 언급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손익 분석은 이미 두자된 모든 것과 사업의 부정적인 효과를 비용 으로, 지금까지의 모든 이익과 사업의 긍정적인 효과를 이익으로 하여 두 자한 사업을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평가될 수 없다. 즉, 우리들은 지금부터 10 년 후의 것은 어떤 것이든 비용과 이익이 어느 정도 될지 알지 못한다. 미래의 비용과 이익을 계산하는 방법은 할인율로 계산하 는 것이다. 할인율 계산 방식이란 어떤 예상되는 상품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 상품의 현재 가격이 주어지면 어떤 특정한 미래에 그 상품값으로 얼마 를 지불해야만 하는가이다. 런던의 어느 지하철의 손익 분석은 부정적으 로 평가되었다고 우리는 듣고 있고 지하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수십년 뒤 의 먼 미래의 할인율에 대한 추정가격을 인싱하도록 사림들을 설득시킴으 로서 그 판단을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아마도 이 것이 속이는 것이라는 것을 제의하고는 그러한 절차에 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말하자면 사람들이 서로 다른 방법으로 손익 분석을 하여 어느 방 법에 의한 결과가 긍정적이고 어느 방법에 의한 결과가 부정적인가를 관찰 하면 속이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이러한 연습에서 오는 효력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우리가 손익 분석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어렵게 보인다. 출발점 은손익 cos t -bene fit비용이 아니라기회 o pp o rt un ity비용이다. 기회비용의 문 제는 훨씬 단순하다. 죽, 내게 주어진 선택을 할 때 나는 어떤 선택둘을 포 기하는 것인가? 모든 사람들이 아는 바와 같이 결혼울 하는 데에는――여 러 변수에 따라 일생 동안 또는 참시 동안-결혼 시장을 전적으로 떠나
는 기회비용이 든다. 사람이 자동차를 구입하게 되면 그 대신 무엇을 포기 하는가? 아마 옷의 품질을 디소 낮추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보통은 먹는 음식도 아니고 입는 의복도 아니다. 사람들은 두말할 나위없이 수송수 단에 드는 비용을 절약한다. 그러나 자동차 운영비용과 수선비용은 지불해 야만 한다. 그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계몽적인 아유는 그것은 단지 손익 분석이 기회비용을 평가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주의 : 기회비용은 어떤 사람이 그에게 주어진 모든 자원둘을 이용하고 있 다는 가정에서만 의미가 있다. 또한 어떤 대안의 선택이 자기의 자원을 증 가시키자마자 당연히 사태는 다르게 보인다(전형적인 통속 연속극 주제처럼 돈을 벌기 위해 부자와 위장결혼하는 경우처럼). 이것이 한 회사에 대한 손익 분 석보다 국가적인 손익 분석이 더 이해가 잘 가는 이유이다. 그렇다 하더라 도 우리는 그 모든 선택이 무엇인지를 거의 알 수 없으며, 단지 우리가 어 떤 조잡한 평가를 기초로 한 거의 모든 선택둘을 제거해 버렸을 때만, 그리 고 나머지 몇 개의 선택들에 대하여 보다 더 나은 견해를 갖기를 간절히 원 할 때에만 더 정확한 평가와 비교를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를 숫자로 나타낼 때에 그것이 비로소 손익 분석이다. 즉, 손익 분석은 최대한 할인율의 평가 방법으로 비교 가능한 것이어야만 한다. 손익 분석을 마감하기에 앞서서 중간 단계는 다양한 사고의 방향에 따라 체계성과 정확도에 있어서 다양하게 영향받을 수 있다. 이런 기술적인 문제 에 관해서는 방대한 문헌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들이 있느냐 없느냐의 존재 여부를 아는 것보다 제대로 깊이 있게 아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획득하기를 요구받고 있는 그 기법들의 가치, 그것을 이해하려는 그들의 노력에 도움이 되는 어떤 구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토론은 그러한 구조를 정립하는 데에 대한 하나의 공헌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질문에 대한 논리를 위해 일반적인 지침, 그리고 특별히 실제적 인 질문에 대한 논리를 위한 지침은 다음의 두 가지가 되어야 한다. (1) 합리적인 불일치와 비합리적인 불일치, 또는 지적인 불일치와 그렇지 못한 불일치가 있다. 합리적이거나 지적인 불일치는 한 질문에 대해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합리적이거나 지적인 대답이 존재할 때에 생겨난다. (2)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의 치이는 일반적인 전제조건 여하에 달 려 있다. 이 두 지침으로부터 나오는 핵심적 추론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일반적 인 전제조건들을 명백하게 표현하도록 하고 때때로 그 전 제조건들을 조사하는 것은 매우 유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2 민주주의, 대화와 책임 어떤 합리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행해질 수는 없으나 디론 종류의 정 치체제에서는 행해질 수 있는, 때로는 매우 바람직한 일들이 많이 있다(민 주주의 국가 역시 기회비용을 갖고 있다). 이에 관한 모범적인 경우가 비상시에 는 6 개월 동안 원로원이 어떤 독재자물 임명할 수 있도록 한 고대 로마법 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제~} 세계대전 동안 영국에 있었던 연합정부 같 은 것과 그다지 디를 바가 없다.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가들이 증명해야 할 마지막 것은 오직 비상사태가 예의라기보디는 규칙이며 고별(告別)이러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의 힘은 어마어마하다 . 아데네 전쟁 영웅들의 야전 공동묘지 에서 페리클레스로 하여금 우리는 우리들의 이웃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선 언하게 만들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힘에 대한 인석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한 상황에서 페리클레스의 그 선언은 하나의 상황에 대한 평가로서는 미친 짓이지만, 하나의 정책적인 문제로서는 고상하고 현명한 것이다. 죽, 우리들은 유비무환적 삶의 자세보 다는 오히려 안이하게 살기를 선택한다. 이것이 어떻게 참인가 : 버터 대신 에 대포라는 나치의 구호는 정반대로 바뀔 수 있다-죽, 대포 대신에 우 리의 자녀를 위해서 우유를 생산하고 노동자들을 위해서 빵을 만듭시다라 고. 이것은 무책임한 소리로 들리고, 또 분명히 그럴 수 있다. 때때로 과거 에 실제로 그러했다. 그러나 그 반대 또한 때로는 아주 무책임한 것이다. 그 리고 더 자주 그 무책임한 정치지도자는 어린이용 우유나 버터 대신에 대
포를 더 선호했다. 더욱이 국가가 대포를 가져야 하는 필요성보다는 어린이 둘을 위한 우유의 필요성이 종종 훨씬 더 명백하고 더 긴급하다. 더욱이 모 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처럼 높은 생활 수준은 대포보다 훨씬 더 강한 군사적 무기이다 - 물론 아무리 풍요로운 사회라 할지라도 국방은 여전 히 필요하지만. 우리가 어떤 정권에 대한 찬반토론을 할 때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는 우 리의 교육제도를 통해 영속시키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 체계적인 오류이 다. 그러므로 우리의 민주주의 체제가 존속되는 이유는 사무엘 버틀러가 주 장한 것처럼 (그의 홍미있는 The Way of All Flesh 이라는 책의 결론에서 ), 우코該의 교육제도가 불완전한 데에 기인한다. 바로 이 교육제도가 사람들에게 자신 이 가지고 있는 견해둘을 방어하고, 자신이 거부하는 견해를 공격하고, 자 신이 취하기로 선택한 행동들을 방어하고, 그들이 거부하는 대안적인 행동 둘을 공격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누 구든지 책임있는 태도란 검증(확인)울 필요로 하는 태도이며, 검증은 사람 둘이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이고, 그 가능성을 고려한 디는 것은 자신의 견해에 반대하고 반대자의 견해에 찬성하는 그 최상의 논 쟁을 면밀히 살펴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실증적 연 구 결과에 의하면 사람들이 이러한 것을 말할 때 조급함을 갖게 된다는 것 은 근거없는 주장이다. 그 조급함은, 실증적 연구를 통해서 보면, 반대 견해 를 조사해야 할 필요성에 관하여 전달된 그 요지는 서소하고 잘 알려진 것 이거나 또는 얇게 가려진 설교이거나 또는 양쪽 다라는 주장에 의해서 방 어된다. 아마도 이 방어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증적 연구 결과 에 의하면 심지어 문화 수준이 높은 사회에서조차 반대 견해를 옹호(보호) 하는 습관은 극히 드물다는 것이 여전히 사실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이것은 표준을 실행하거나, 표준의 개혁을 실행하거나, 적어도 현재의 표 준을 개선하는 것에 관련된 문제이다. 분명히 어느 분야에서는 표준들이 매 우 높다. 문명화된 법정과 문명화된 위원회는-다양한 수준의 정부, 공 공행정, 그리고 심지어 자발적인 협회들에 있어서 -반대 견해들이 보호
되기도 하고 공격되기도 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운영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 실들은, 경험적인 관찰을 결론짓자면, 일반대중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학자들에 의해서조차도 충분히 이해되지 않고 있다. 놀랄 만한 예는, 당신은 당신의 부인을 때리는 것을 그만두셨습니까? 라는 유명한 질문이다. 이 질문은 일반적으로 불공정한 것으로 인식된다 ―― 왜 냐하면 이것은 한때 당신이 아내를 때리는 습관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그 질문에 대한 논리의 작자들은 이 견해가 매우 조잡 하고 아주 잘못된 것임을 시인한다. 거의 모든 질문에 대해 대답히~큰 거의 모든 것은, 결코 멈춤이 없는 독창력을 가지고 예시해 주기를 좋아하는 멜 로드라마의 작가처럼 그 대답을 하는 사람을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하는- 태 도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심지어 가장 불쾌한 대답조차도 어떤 고상한 의도를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 고상한 의도는 이야기를 빙빙 돌 려서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점수를 줄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의 부인을 때리 는 것을 멈추었는가러는 질문에서 나타내려고 의도한 것은, 일반적으로 서 민들은 어떤 악의를 그들의 탓으로 돌리려는 것에 대항하기 위해 보호가 필 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개개인이 어떤 동기를 디론· 개인 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은 민주사회와 민주적 생활방식 의 하나의 기본적이고도 성스러운 원칙이다. 또한 성내지 않고, 어떤 자기 방어적 행동도 피하는 것이 공격받는 쪽의 정상적 인 의무이다. 그러나 때로 는 한 개인은 기본적인 의도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없애 버리는 권리의 행 사 기회를――특히 그가 법정에 기소되었을 때 _가질 필요기- 있다. 또 한 개인이 그러한 권리를 갖도록 하는 것이 법정의 의무이다• 만일 그가 그 것을 안다면, 그리고 법원이 그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믿는다면, 그러면 그 는 그의 대답이 악의 있게 해석되리라는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될 것이다. 기 소 심의회가 당신의 아내를 때리는 것을 멈추었느냐? 라고 물으면 피고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 다음은 피고측 심의회의 차례로 당신은 왜 아내를 때 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느냐? 라는 질문을 한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나는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적절한 대답이다. 왜? 왜냐하면 나는 아 내를 때리기 시작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배심원들과 청중들은 안도의 웃
음을 띠게 되고 에피소드는 끝난다. 경험적 사실에 의하면 민주주의를 가장 위태롭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심지어 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개개의 시민들이 반복적으로 (I) 공격 받고 (2)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있고 (3) 그러나 적절히 보호된 자기방어 권 리를 갖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특히 그들이 정당하게 고소당하지 않는 한, 그들은 자신을 방어할 권리가 침해당했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그 둘은 판결에서 법원이 자신들보다 상위 위치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으나, 자 신들의 권리를 위하여 적절한 고려 아래 구성되지 않는 법원은 어떤 것이 든 인정을 거부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방어하려는 시 도를 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의무이다(이 의무는 민주주의에서는 이행하기가 쉽지만, 민주주의가 아니면 어렵다 ――특 히 르네상스 시절의 스페인이든지, 현대 의 러시아에서든지간에 심문 방법들이 실시되지 않은 곳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판단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계명을 위반하도록 유혹하는 것이며 위반에 있어 공범자가 된다. 더욱이 만약 적절 한 방어를 위한 우리의 권리를 먼저 보호받지 않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판단하도록 허용하면, 이는 우리가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임의적으 로 반대하게 행동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협박하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즉, 나를 위해 이것 또는 저것 울 해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당신이 게으르거나, 인색하거나, 무정하다고 판단할 것이라고 우리를 협박하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 국 가에서 대중들이 자신들의 (그리고 공공의) 이익과 반대로 행동하도록 만드 는 가장 보편적인 메커니즘이라는 것은 실증된 사실이다. 추측컨대 우리들은 두 개의 만연된 행동 모형을 서로 상관지울 수도 있 다. 두 개의 행동 모형 중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절대적으로 수용하 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견해는 방어하면서 다른 사앞의 견해는 전 적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적절한 민주주의적 절차에서 두 잘못은 서로를 중 화시킨다. 법정에서 각 집단은 하나의 견해를 변호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법정은 다른 집단들에 의해 변호된 모든 견해들에 대한 공격과 변론을 다 들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에서이다. 불행히도 종종 사림들은 자기 스스로가
재판관이 된 것처럼 그러면서도 피고처럼 행동한다. 왜냐하면 사림들·은 자 신이 재판관처럼 행동해 왔고, 자신이 스스로 결심을 해왔으나 단지 결정 울 잘못 내렸기 때문에 현재 기소되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항소법원이 판사의 판결을 뒤집을 때조차도 항소법원은 그 판사를 거의 고소하지 않는 다는 것을 잊는다. 그렇지 않다면 만약 그가 고소당하면 그리고 그가 실제 로 또 고소당했을 때 그는 자신을 변호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 항소기 간중이 아니고 다른 기간 동안에. 이것은 사람들의 지각, 자아 지각, 그리고 행동 사이의 괴리를 설명해 준 다. 우리가 경쟁하는 견해들에 대해 찬성과 반대의 비중을 재야만 한다는 것을 그들이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말할 때 그들은 실제로는 그들이 이 규칙 을 알고 있고 정말로 언제든지 가능할 때는 이것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 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각자가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해야 하며 그러므로 어떤 합리적인 의견을 가지고 나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 이성적인 의견 은 다른 사람의 이성적인 의견과 법정에서 하듯이 공개적으로 충돌할 수도 있다. 죽, 각자는 지신의 입칭을 방어하고 반대자의 의견을 공격하므로 판 사와 배심원들 그리고 일반대중들은 각각의 찬반양론을 듣게 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의견이 소수 의견일 때 다수 의견의 대변자들은 그 소수 의견을 가전 사람에게 마치 고소(자기들의 과제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고소하는 것 처럼)할 때 하는 태도처럼 도전적일 수도 있다. 만약 그들이 그 관련된 정 보에 더욱 익숙하다면(그들이 감히 반대 의견을 공공연히 말하기 전에 당연히 그래야만 하지만), 그러면 그들은 자신의 의견이 잘못된 것이리는 것을 발견 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 소수 의견을 가진 사람은 어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어떤 특권이 있거나――이 경우 그 정보를 폭로하여 공공연하게 만드는것이 그들의 의무이다――또는그소수의견을가전 사림이 다수 의견을 가전 사람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후자의 경 우에 그 소수 의견을 가전 사람은 다수 의견을 가전 사람들을 마치 고소하 는 태도로 도전적일 수도 있다. 다수 의견을 가전 사람들은 그들의 과제를 하지 않았다고 고소를 당한다. 만약 그들이 입수 가능한 관련 정보에 더욱 익숙하디떤 一—다수 의견의 책임 있는 대변자로서 그들이 그래야만 하는
것이지만 —— - 그들은 그들의 의견이 단지 흔히 있는 편견이라는 것을 발견 하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고소와 맞고소의 반복순환이 계속되게 된다. 이 고전적인 예는 라보이시어가 단지 그들이 제의한 그 교리가 틀렸다는- 이유 때문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들 중 일부를- 의례적으로 불태워 버린 연소 ( 燃素 )에 관한 논쟁이다. 고소들은 허위의 구조적 틀 안에서 시작된다. 즉, 사람들은 법정에서와 같 이 고소되었다고 느끼지만 그러나 법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 왜 사람들은 그 와 갇은 방식으로 느끼는가? 이것은 어떤 오인( 誤認 )과 관련된 심리적인 질 문일 수도 있다. 인식과 오인에 대한 이론은 무시하자. 대신에 이것은 그 공 격에 대한 사람들의 감수성과 도덕적인 지율감에 관한 심리학적인 문제일 수 있다. 이것이 진실이다 .13) 또한 이것은 보다 많은 지율을 위한 교육과 보 다 많은 자율에 관한 위생학을 위한 교육이 우리 사회에서 요구되고 있다 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우리 교육제도의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며, 자율 성 함양을 위한 훈련이 교육적 의제의 주요한 항목이 되어야만 한디는 것 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사회학적으로 고찰하면 그 과정 속에는 비 공식적인 전문적 길드(조합)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구성된 법정 ―— 통속적 으로 캥거루라고 말함-울 종종 볼 수 있다. 전문적 길드는 때로는 그 둘의 구성원들이 조합의 규범에 따라살지 않는다고판단하는권리――중 세 시대 유형의 권리 __ ― 롤 가진다. 어떤 사람이 길드 법정에 의하여 무 지 때문에 고소당했을 때, 그 무지는 무책임에 기인될 수 있으며 동시에 개 인이 그 견해를 수용하지 않는 이유가 그 길드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지지 않 기 때문일 수도 있다. 비록 공식적으로 인정된 길드와 길드 법정이 비민주 적이어서 폐지되어야만 하는 중세의 제도들 같은 것아라 할지라도 이러한 경우 그 기소를 취소하는 것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공식적 길드와 13) 소위 애쉬타입 Asch- typ e 실험이라고 부르는 여러 실험들(이 실험에서 는 사림들이 정직성과 동료 승인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함)이 행해졌다. 거의 대부분 정직성이 열세로 나타난다. 더욱더 고통스러운 것은 설문 답변자들이 정직하지도 않은 그들의 동료들에게 간청하기까지 한다는 사실 01 다.
비공식적인 길드의 법정은 이 점에서 공식적인 것보다 더 나쁘다. 따라서 자신의 견해를 방어하기 위하여 어떤 도전을 택한다는 것은 잘못 된 생각이다. 모든 사람들이 어떤 내용이든지간에 의견을 가질 수 있는 권 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법적이며 도덕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소수 의견을 가질 때 그 사람은 종종 언어상의 투쟁으로 도전 —— 그도전은 지적인 것이 아니고도덕적인 것이다 ―― 을 받게 된다. 그러므 로도덕적인 도전 ―— 무기가 아니라 체스 게임으로 하는 투쟁 ―― 이라기 보다 오히려 지적인 권유로서 다시 제기될 때까지 그 사람은 경멸받으며 거 철당해야만 한다. 이것은 매우 만족스럽게 둘리기도 하고 동시에 매우 불만족스럽게도 둘 린다—― 2 떼기 후반기 서양 세계의 각계 각총의 모든 종류의 지식인(학 생과 교수, 프로와 아마추어)에 관한 또 다른 아주 중요한 실증적인 관찰을 비 교해 보자. 그것의 만족스런 측면은 쉽게 알 수 있다. 즉, 그것은 헌법으로 보장된 민주적인 의견의 자유, 신념의 자유, 설득의 자유 등이다. 이 지유가 언제나 명백하고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에 서 우리 모두는 반과학, 비합리주의, 심지어 지적 무책임을 가능한 한 많이 막기를 원하다. 우리는 비합리적이고 지적으로 무책임한 것은 도덕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허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동의한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우리의 의견에 대하여 정치적인 권리에 도전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의견을 갖는 것이 반합리적인 의견을 갖는 것만큼 도 · 덕적으로 무책임한 것이 아님을 도덕적 측면에서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일을 함에 있어서 그것이 도덕적으로 책임 있 는 행동인지를 확인해서는 안되는가? 이 질문은 앞 문단의 내용에 대해 사 람들이 갖고 있는 불만족의 근원이다. 그들은 오류에 빠져 있고, 이 잘못을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은 그들의 방 식이 반대 의견을 가전 사림들의 도전을 도덕적인 것으로, 따라서 고소로 받아들이는것이다. 요컨대 견해마다 표현하는 행동방식이 다르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어떤 별난 행동방식은 무책임한 것으로 도전받는다. 별난 행동을 무책임한 것으
로 간주하는 것보다 별난 의견들을 무책임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어렵다. 실제로 별난 견해를 가전 자에 대한 고소인들은 그 고소 이유에 대한 설명 을 요구하면 대중을 혼란시키고 잘못 인도하고, 그 나라의 젊은이들을 타 락시키고, 오류를 퍼뜨리고 학문적인 표준을 낮추는 것과 같은 별난 견해 롤 가진 사람의 행동에 대해 언급한다. 별난 행위가 무책임한 것으로 또는 다른 것으로 바난을 받는 경우는 언 제인가? 오직 다수의 행동 방식에 동조하는 것이 의무적일 때만 그렇다. 이 런 경우란 언제인가? 한 가지 경우는 위급시이다. 또 다른 경우는 만약 누 구든지 자기 지신의 과제를 합리적으로 잘한다면 대다수에 의해 채택된 행 동 방식만이 유일하게 옳은 것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 없는 곳에서 그러하 다. 그러므로 의견이 다른 두 집단이 서로를 비난할 때 그들은 자신둘이 동 의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 오직 하나의 책임 있는 해결책이 있다는 것을 암 시하는것이다. 합리적인 사람들 듬에서 논쟁되는 대부분의 문제들에는 하나 이상의 합 리적인 해결책이 나타나며, 놀랍게도 흔히 하나 이상의 허용 가능한 해결책 이 나온다. 그 예로 우리는 19 세기 말엽에 몇몇 뛰어난 사람들 __- 수학자 둘, 논리학자들, 그리고 철학자들-을 당황하게 만든 소위 확률 계산의 역설을 들 수 있다. 어떤 문제의 해결책이 하나보다 많지만 하나의 해결책 만이 있는 것처럼 보일 때, 사림들이 두 가지 해결책을 발견하거나 또는 두 가지 해결책 모두 무방하다는 증거를 대하게 되면 당황하게 된다. 이러한 것은 수학에서보다 실제 생활에서 훨씬 더 자주 일어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독특한 해결책들이 요구되는 것같이 보이는 문제에 자주 부 딪치게 되기 때문이다. 고전적 합리성이론들은 각각의 명백하게 정의된 문제에는 하나의 수용 가 능한 해결책만 있고, 그러한 과제에는 하나의 이상적인 수행만이 있으며 따 라서 수용 가능한 해결책의 분류는 모두가 알 수 있는 명백한 방법으로 경 계가 잘 지어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과학적 기술에는 수용 가능한 해결방안이 여러 개 있다. 왜냐하면 어떤 해결방안이 법으로 구체화되어 책임 있는 실행 기준을 홉족시키면 그 해결
방안은 수용 가능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 문 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도 면허 없이는 항공운항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수락해서는 안되며, 또한 면허가 없 으면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허락되지도 않는다. 항공운항 자격증을 주 는 것은 복잡한 절차를 요하므로 이 자격증 발급에는 어떤 지정된 선체( 船 體 )에 대한 내공성 ( iffi寸空性 ) 증명도 포함된다. 그 증명서가 주어지기 전에 어 떤 몇몇 시험 비행은 의무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험 비행은 분명히 의무 적인 것은 아니다 . 왜냐하면 시험 비행은 높은 위험부담을 요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무책임한 시험 비행은 허용되지 않으며, 어떠한 비행기도 풍동( 風 洞) 시험 같은 얼마간의 지상 시험들을 거치기 전에는 비행 실험이 허락되 지 않는다. 책임 있는 행동의 규칙들은 개인적인 확신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만만하 게 느끼는 비행사가 조급하게 바행기를 기꺼이 시험하려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며, 자신이 없는 사람은 다른 동료로 대치된다 . 그러나 이것은 책임에 대한 규칙들이 완전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규칙에 분명히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별 없이 규칙 뒤 에 숨는다면 우리는 무책임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생태계가 위협받고 있 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누구나 기술적인 행위에 대한 모든 규칙체 계가 매우 불만족스럽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의 규칙들 을 대치할 규칙이 무엇인지롤 알지 못한다. 우리들은 현재의 논쟁에서 아러한 것들을 책임 있게 찾을 수도 있다. 그 러나 토론은, 어떤 문제에 대하여 도전을 받았을 때 우리의 의견들울 방어 할 필요 없이도 현재의 대중의 의견에 책임 있게 반대할 수 있다는 것울 우 리가 깨달을 때에만 활발해전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꼼 짝 못하게 된다. 일단 우리가 그것을 알게 되면, 많은 새로운 문제둘이 일 어난다. 이것들은 해결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 ―심지어 해 결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의심해서는 안된다注근 하나의 전실된 가 정으로 시작해야만 한다. 우리는 책임에 대한 기준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 나 그 기준은 비교적 낮아야만 한다. 합리적인 것은 허용 가능한 것이지 의
무적이 아님을 가정해야만 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희 망해야만 한다. 그리고 의견 을 달리하는 것이 우리가 반대로 결론을 짓도록 강요되는 경우를 제의하고는 합리적이고 책임 있는 것이라고 가정해야만 한 다. 이것은 우리들이 현재의 방대한 전 세계적인 문제들을 헤쳐나가기 위해 필요한 전지한 노력의 기초이다. 3 준(準)이상향의 모습 이상주의는 불일치를 제거하기 때문에 반대가 가능하다. 또한 이상주의는 모호하다. 이상향적인 꿈은 장기 계획이며, 그 계획이 매일 매일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결정들에 주는 직접적인 영향은 분명한 것이 아니다. 이것 은 우리의 이상향에서 우리가 모든 에너지 부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라는 문제에조차 맞는 얘기이다. 오늘날의 에너지 절약이나 또는 에너지 낭비가 이러한 먼 목표를 우리에게 가깝게 다가오도록 도울 것이라 는 점은 전혀 분명하지 않다. 논쟁들은 설왕설래하고 있으며, 더 많은 논쟁 들이 우리들의 오늘날의 에너지 자원을 이용하는 방법이 먼 미래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아라는 견해를 지지하게 된다. 이상향의 에너지 자원은 우리의 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고 전혀 문제가 안될 것이다. 이상향에서 어떤 가치 와 취향이 널리 퍼지게 될지 알거나 상상하기는 특히 어렵다.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의적 조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현재에서조차도 우리의 가치체 계가 일관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상향에서 우리의 후손들 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가치와 취향을 가질 것이라고 상 상하는 것은 나약한 생각이다. 최근의 성 (性) 혁명과 이것이 초래한 가치와 취향의 여러 변화들을 생 각해 보자. 그 중에서도 세 가지의 매우 중요한 요소들에 의해 요구된 부분만을 생각해 보자. 그 세 가지란 첫째, 남녀 평등;둘째, 세계 인구 규모수를 통제할 필요성 ;셋째, 어느 정도 가정의 안정이 있어야만, 가능
한 방법으로 자손을 교육시킬 수 있다는 필요성이다. 지금 이것은 거의 논쟁할 여지가 없으며 또한 너무 복잡하다. 이것은 일의 영역과 가족의 영역을 포함해서 다론 여러 영역들에서 우리의 방식들을 예언할 수 없 게 변화시킬 것이다. 성생활과 재생식을 조절할 수 있는 여성들은 동등 한 직장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족들이 직장에 깊게 연결되어 있 기 때문에, 여성들의 직업적인 일에서의 역할 변화에는 가족구조와 가정 안에서의 역할, 그리고 아이를 돌보는 일의 역할에서의 변화들이 같이 수반되어야할 것이다. 이런 것들보다 덜 강력한 생각들은 칼 포퍼 및 다니엘 벨 등이 이끄 는 전후의 초기 반(反)유토피아주의를 낳았다. 그들은 단기적인 정치적 문 제들이 우리를 충분히 구속하기에 틀림없다고 결론지었다. 포퍼가 사용했던 용어는 점진적 사회공학이다. 여기에서 점진적이란 말은 보통 작은 것을 의 미하지만 반드시 작은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여러 의제 중 항상 가장 긴급한 문제들로 시작하는 단기적인 것을 의미한다. 점전적 사회공학만으로는 일반적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할 수도 있다는 불 만이 팽배해 있다. 그 대답으로 포퍼는 불행을 덜고 시민의 개인적인 자유 를 증가시키는 기회가 충분히 제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모든 시민들의 개인적인 자유의 증가, 또는 일부의 희생 아래 대부분 의 시민들의 자유의 증가는 이상화된 상태에서조차도 불가능한 것으로 증 명되었다(케네스 애로우). 다론 사람들의 자유를- 줄이는 희생을 초래하면서 까지 일부 사람들의 자유를 증가시키는 것은 아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다. 잘비는 이상향을 꿈꾸는 것을 영감의 수단으로, 그리고 목표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보고 더욱 격려되어야만 한다고 제안했다. 그의 생각은 옳으며, 그의 제안이 권고할 만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기조차 하다는 더 강 한 논쟁까지도 타당하다. 죽, 우리가 합의를 이루는 것이 상당히 쉬운 중간 목표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우리는 이상향적인 생각과 함께 또는 그것 없 이 그렇게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그러한 합의를 갖고 있지 않다. 합의가 핵심이다. 죽, 행동의 규모에 따라 국가적으로 또는 국제적으로 사
회적 정치적 행동은 합의를 요구한다. 국민의 소수가 어떤 주어전 계획을 반대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적인 합의는 이루어질 수 있다. 정말로 합의는 국민의 대디수가 동의하지는 않지만 승인 할 때조차 달성될 수도 있다. 즉, 국민의 거의 전부가 의심할 때조차도 사 람들은 지도자로 하여금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 때로는 합리적이고 (윈스턴 처칠), 때로는 비합리적으로(호메이니) ――- 시도해 보도록 허용하기 때문에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 국가적 정치적 중간 목표를 결정하기 위한 목적에 대하여 우리는 다른 종 류의 합의가 필요하다. 일단 우리가 이것들을 결정하면, 우리는 기술이 우 리가 지향하기를 원하는 종류의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물을 수있다. 지구상의 어떤 곳에도 그러한 합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함께 모 여 국가적인 합의를 추구하고 이끌어내는데 어떤 종류의 목표가 합리적인 가를 물을 수 있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내적 논리에 따라 좌우되는 다른 종류의 질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의 일부는 예를 들어 성적 행동의 어떤 개방적인 규범을, 또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아주 엄격한 규범을 상상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지금 쉽게 합의에 이를 수 없을 것이 고 또 긴급하지도 않다는 데 동의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마 사림들은 우리가 합의를 끌어내기를 원할 수도 있는 준이상향 se mi u t o pi a 이 다원적인 성적 규범을 허용할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이 것조차 지나치게 문제성이 있는 것이고 우리는 성적 규범에 관해 너무 많 이 심사 숙고하지 않고 준이상향에 대한 이미지를 발전시키기를 원할 수도 있다. 다른 문제들은 무시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현재의 교도소들은 범죄학교 가 되었기 때문에 교도소는 우리의 준이상향에 있을 자리가 없는 것아 분 명하다. 완전한 이상향사회에는 범죄가 없다. 바꾸어 말하면 완전한 이상사 회에는 범죄가 거의 없고 따라서 범법자들을 다루는 간단한 기법조차도 없 다. 준이상사회는 범죄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전보된 물리적 기술을 갖춘 훨 씬 좋은 교도소를 필요로 할 수도 있고 또는 전혀 교도소를 필요로 하지 않
을 수도 있다(후자는 모든 계몽주의 범죄학자들에게 합리적으로 보인다). 이 일 에 대해 얼마나 빨리 합의를 끌어낼 수 있는가를· 알기는 어려우며, 이 일을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는가를 알기도 또한 어렵다. 그래서 준이상향의 이미지는 이를 염려하는· 시민들이 참여하여 공개적 토 론을 통해 나타나야만 한다. 이것은 이렇게 하여 준이상향이 합의를 얻는다 는 가정에서가 아니라 그와 같은 합의를 이루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하는 것이 가치있고 합리적이라는 가정에서이다. 여기에서는 그러한 이미지에 대한 상세한 제안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 나 그러한 이미지에 대한 하나의 기여만을 하겠다. 예를 들어 준이상향사회 는 철저하게 반기술적이 되지도 않을 것이고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은 모두 에게 분명하다. 확실히 컴퓨터의 사용이 현재 대학 졸업지들과 언론계 종사 자들기 사용하는 타자기보다도 더 보편화될 것이다. 컴퓨터의 생활회는· 이 미 오늘날의 통신체계가 전신을 발명하기 이전의 통신체계와 비교되는 것 이상으로 준이상향의 통신체계를 오늘날의 통신체계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들은 모든 시험이 개인의 컴퓨터 단말기를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치 러질 것이라고 추측해야만 한다. 이것이 그러한 교육제도에서 실행될 때 거 기에 따른 변화는 분명히 엄청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암기는 사멸하게 될 것이다. 죽, 학생들은 전국에서 제일 좋은 강의를 듣기 위해 플러그를 끼울 수 있게 될 것이므로 교사가 강단에 서서 하는 강의로부터의 무의미한 관 습들은 마침내 극복될 것이다. 전통적 강의 관습은 소규모 학급활동, 소집 단 실험, 토론, 그리고 2~3 명 정도의 소집단 수업으로 대치될 것이다. 교사와 학생간 관계의 자유화는 부모와 자녀와의 상호작용을· 즉각 개선 할것이다. 매우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준이상향에서 보게 될 특칭은 자유롭고 민주 적 인 형태와 원칙들에 대한 폭넓은 수용이다. 따라서 금지는 정당화에 대한 이유가 수반되어야만 될 것이고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다양한 계층과 함께 그리고 모든 조직체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들은 역할, 대 중의 참여, 기능에 있어서 거대한 확산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교사와 학생
을 구별하고, 의사와 환자를 구별하고, 노동자와 경영지를 - 구별하는 것이 점차적으로 어려워 질 것이고 그렇게 기대될 수도 있다. 교실과 실험실, 노 조회의와 생산향상위원회를 구별하는 것이 점점 어렵게 될 것이 틀림없다. 일하는 곳과 배우는 곳, 그리고 여가를 즐기는 곳을 구별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될 것이 틀림없다. 적과 친구, 형제와 이방인, 그리고 방문객과 거주자를 구별할 필요, 이러 한 필요들은 매우 강력한 것이고 뿌리 깊은 것이다. 이것들은 공포와 불안 전에 근원을 두고 있다. 안전과 교육의 발달은 이들을 줄일 수도 있다. 어 떤 문화가 튼튼할 때는 __ 그것이 하위문화, 종교적 분파, 또는 국가적인 문화이든지간에 ―一 이 문화에서 떠나는 사람들에 관해서, 합류하는 사람 들에 관해서, 또는 머무르는 사람들에 관해서 걱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러나 어떤 문화가 약할 때, 또는 갑자기 자체의 생존이나 독특한 특성의 생 존, 또는 그 문화의 지속성에 대하여 겨정을 할 때 떠나는 사람들은 이탈자 가 되고 합류하는 사람들은 그 문화를 희석시키거나 전복하는 위협자가 된 다. 일단 이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보존되고 발전될 만한 것이 무엇인가? 왜 약한 문화가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가? 라고 질문할 수도 있다. 그러한 접근은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에 대한 보존을 조금도 보증하지 않 는다. 우리들은 무엇이 보존할 만한 것인가에 대해 실수할 수도 있다. 우리 둘은 보존할 만한 것을 보존하는 방법에 대해 실수할 수도 있다. 우리가 무 의식적으로 폭발물을 디루거나, 또는 우리의 이웃이 그렇게 하거나, 또는 내 일 태양이 전혀 새로운 초신성 (超新星)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우 리가 보호하려고 하는 모든 것과 함께 우리도 사라져 버릴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합리성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직도 시대의 명령이다. 국제 관계에 대한 견해 없이 준이상향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 의 상황에서 생태계나 세계평화에 대한 세계의 정책에 대해서도 갇~ 주장 이 적용된다. 그러나 우리는 준이상향이 얼마나 많은 기술을 포함하고 무슨 종류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지 알기 위하여 준이상향의 내부구조부터 알기 시작해야만한다• 물리적 기술의 성장은 반드시 더 많은 사회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_
그것은 새로운 사회적 기술을 창조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의 준이상향에서 는 사람들이 작업, 또는 작업 시간, 또는 작업에 두자하는 총시간과 노력을 바꾸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쉬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노동조직, 공행정을 가져온다 ―― 특히 위급한 일에 관한 공공업무 에 있어서. 그리고 적어도 한 가지는 준이상향에서 분명히 의심의 여지 없 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된다. 즉, 우리들은 작업의 할당과 그 일에 대한 보수에 관련된 현재의 주제넘은 불공정을 배제하여야만 한다-특히 인 종과 성차별 그리고 인종차별의 불공정성에 있어서. 또한 오늘날의 작업 윤 리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은 사라질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들은 최소한으로 만 일할 권리를 인식하고, 우리의 사회는 완전 고용에 대한 권리를 인식한 다. 준이상향은 둘 다를 지지할 것이다. 일에 대한 보상들은 충분해야만 한 다. 이 조건은 조기 퇴직과 공공 복지가 보편화되어 있는 선진 기술사회들에 서는 거의 성취된다. 복지담당 공무원들은 복지수혜자들을 괴롭힌다 ―― 그 이유는 복지가 경제에 불가능한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여 충분히 많은 사 람들게게 복지보다는 일하는 것을 훨씬 더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직장 생활의 질이 개선될 수 없다는 잘못된 가정 때문이다. 따라서 이 괴롭 힘이 직장 생활의 질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을 방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한 것은 그만두고 이 사회의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이상으로 개개의 시민들에게 사회적 입력과 제한울 가하는 사 회에 대한 일반적인 생긱에 관심을 두고, 훨씬 더 어려운 국제적, 세계적인 정책의 분야로 옮겨 가 보자. 4 평화로운세계의 모습 지구상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이 무엇인가를 묘사하 는 것은 대단히 쉬운 일이다. 그러나 어떤 행동이 의미있게 영향을 받기 전 . 에 행동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국제적인 동의는 고사하고, 도대체 이 안정
이 얻어 질 수 있는 것인지 여부를 아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이 세계가 가 능한 한 빨리 요구하는 것은 인구, 환경, 그리고 핵무기의 저장에 대한 통 제이다 . 그리고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빈부의 차를 없애는 것 이 필요하며, 정치적인 관용이 필요하다. 이것은 엄청난 요구이지만 그 요 구를줄일 수는없다. 우리의 준이상사회는 절대적 빈곤이 없는 비교적 평화스러운 세계 속에 유지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준이상사회는 비교적 효과적이고 전 세계적 으로 통제된 환경과 인구를 유지함과 아울러 정치적으로 관용을 허용하는 그러한 평회스러운세계 속에 유지되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으로 가는 길은 생각하기 어렵다 . 이 길에 포함되어 있는 가장 근본적인 특징들의 일부조차 에도 아직까지 너무나 많은 문제가 있다. 군사적인 면을 상상해 보는 것이 가장 쉬우며, 세계평화로 가는 길의 주요한 특칭들까지도 상상하기는 어렵 지 않다. 긴장을 완화하고 무역과 다론 정상적인 교역들을 증가시키는 것은 점차적으로 거의 완전한 군비축소를 이끌어갈 것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다 음 단계로 이끄는 긴장완화 과정의 각 단계의 안정화에 필수적인 국제관계 의 정상화에 있다 . 정상화는 지금까지 산업화된 민주세계 안에서만 이루어 졌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죽, 산업화된 민주사회는 내적으로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개방적이지만, 내부의 안정성이 덜 발달된 국가에서는 개방성 울 금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머지 세계가 잘살고 안정되게 하기 위하여 산업화되 고 안정된 민주주의 국가들의 관심사인 것이다(J. F. 케네디 ). 그리고 이것은 현대 세계에서 비민주주의 국가이면서 안정된 국가가 있을 수 있는가? 라 는 어려운 질문을 제기한다. 안정된 나라들은 불안정한 나라들을 개선시키 고 안정화리는 희망 아래 불안정한 나라들에 지원을 제공해야만 하는가? 아 니면 불안정한 정권을 막연하게 유지시켜 줄 것인가? 이 해결책은 명백히 뒤바뀐 것이다. 즉, 〈끈 달리지 않은〉 의국 원조의 철학, 죽, 말하자면 무조 건적이고 무간섭적인 원조는 잘못된 이론에 근거한다• 아더 레위스 경이 강 력하게 주장했던 것처럼 의국 원조가 없었더라면 정권이 전복되었을 텐데, 자신이 통제하는 체제 위에서 암적인 존재로 행동했던 썩어빠지고 시대에
뒤떨어진 그런 정권자들을 지원함으로 해서 원조 국가는 피원조 국가의 국 내적 정치문제에 간섭하게 된 결과를 초래하였다. 국제관계에 대한 한 단순한 예는 〈 끈달리지 않은(조건 없 는 ) 〉 정책에 의 하여 부과된 제한들임을 잘 보여준다. 존 포스터 덜러스는 아이젠하워 대통 령 시절 국무장관으로서 러시아에 아부하는 이집트에 무거운 압력으로 대 응하여, 이 결과 이집트는 곧장 러시아의 수중으로 들어갔고, 이집트의 내 • 의적 문제들은 증폭되어 갔다. 결국 굶주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식량의 형태로 이집트에 원조하는 것이 인도주의적 고려와는 별개로 정치 적으로는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 끈 달리지 않은 〉 이라는 조항은, 냉전이 끝나기 전 이집트가 러시아에 아부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미국으로 하여금 이집트를 도울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에 대한 많은 대안들은 분명 히 개방되어 있었다. 물론 냉전이 쉽게 피해질 수 있었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것은 엎질러진 물을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며, 오늘날에도 발 견될 수 있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하나의 예이다. 이 모든 것은 겉만 핥는 정도이다. 평화와 핵무기 증가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상황에서라도 인구와 환경이 통제되지 않는다면 희망은 별로 없다. 국 제적 협조 없이는 이러한 목표들이 성취되기가 거의 어렵다. 인구통제와 가 족계획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철대적으로 그리고 상대적으로 급격 히 늘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어떤 국제적인 보증이 없다면 인구통제와 가족계획을 기꺼이 하려 하는 모든 사람들의 협력을 기대할 . 수는 없다. 예 롤 들어 가족계획을 하지 않는 카톨릭 교도들은 짧은 시간내에 지구 인구 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비카톨릭 교인들에게는 받아들여 질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구조절은 실효를 거둘 수가 없다. 이와 똑같 은 주장이 종교는 물론이고 국적, 문화적 특색, 그리고 피부색갈이 중요하 지 않은 문제에까지도 적용된다. 물론 고전적 계몽주의 철학에 전실이 있는 까닭에 자신들의 문화적,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킬 세계인구의 일부분은 세 계적인 규모의 문제의는 아주 별도로 가족계획, 즉 인구조절을 실천할 것이 다. 그러나 이 경우조차도 단지 소수에 불과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이제 는 알고 있는 것처럼 삐른 인구 성장이 경제적, 문화적 성장을 막기 때문에
어 쨌든 이것에서부터 어떤 해결 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공해의 주요한 원천이 산업국가들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비슷한 논쟁이 공해에도 적용된다. 세계가 전쟁, 인구 과밀, 그리고 안정성과 지구 전체적 인 계획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한 그 상황은 통제될 수 없을 것 0] 다. 따라서 첫번째 단계는 세계의 진정한 긴장완화라는 사실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긴장완화가 어떻게 진행되어야만 하는가를 알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의 상황을 개선하지 않고는 이것을 실행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론 나 라들을 군사적으로 위협하는 것보다 그들을 돕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할 수 있다 - 이것이 50 년대와 60 년대에 미국이 많은 외국원조 프로그램을 수 행하게 했던 주장이다. 이 주장은 아직도 유효하다 - 그런데 이 프로그 램은 실패했다. 왜냐하면 〈 끈 달리지 않은 〉 항목이 있었지만 비밀리에 끈 을 잡아당김 (정치 적 인 암살을 포함)과 그 이상의 것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 이었다. 이러한 태도가 변화될 수도 있다는 조짐도 있지만, 이것은 서구의 나라들이 변화를 실행할 계획을 결정한 후에라야만 가능할 것이다. 특히 피 원조국가에게 그들이 원조를 받는 대신 서양 민주주의의 모델을 따라야 할 . 것을 요구하는 것은 쓸모없디는 것이 인식되어야만 한다. 허울 좋은 민주주 의 입법을 요구하는 것보디는 교육과 복지계획을 도와주는 것이 훨씬 현명 하다. 민주주의 입법은 풀뿌리 민주주의, 죽 일반대중의 민주화 없이는, 그 리고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과 훈련이 없이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하비브 보 르지바). 문제는우리들이 정말로민주화 一_ 생활수준의 향상을통한-에 대 한 하나의 이론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그 이론은 실증적으로 반박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쿠웨이트나 바레인처럼 부유하지만 비민주적인 사회 들의 예에 의해서만 논박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기술의 전보 룰 통해 생활 수준을 높일 수 있지만 전보된 기술은 민주주의 정치 democracy 가 아니라 기술가정치 t echnocrac y로 이끌 수도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반 박된다(제임스 번행). 따라서 우리의 이웃들을 의심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의 생활 수준을 높이
며 의국 원조에 의해 우리 이웃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것이 더 좋다는 생 각에는 결점이 있다. 즉, 이것은 독재 전문가 정치를 만들게 된다. 러셀의 악몽으로 되돌아가자면, 그 전문가들은 군사력을 유지하고 이웃을 의심함으 로 해서 세계가 그들에게 기꺼이 의존하도록 할 것이다. 그 전문가들은 자 신이 아주 질식해 죽을 때까지 환경을 악화시키도록 허용할 수도 있다. 그 러나 그들이 죽을 때는 아마 모든 것이 너무 늦을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 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술이 왜 기술적으로 복잡한 어떤 체제를 민주주 의 정치에서 끌어내어 기술가 정치로 끌고가는가에 대한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특히 철박한 문제이다.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이 쉽지 않더라도 문제가 어디에 놓여 있는 지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민주주의의 위력은 정치적 조직의 지방분권화, 통 제, 힘의 균형 (즉, 권력의 단일화를 방지하고, 서로에 대항해 권력을 고정하는) 등을 통한 권력의 분산에 있다. 맑스, 러셀, 밀에 의해 주목되었던 것처럼 기술의 힘은 효과적인 통제의 부재 때문에 단일화되는 경향이 있다. 미국의 독점 금지법은 충분하지 않다. 디론 나라에서는 그 법이 없다. 지금 점중적 으로 시장을 조절하는 것은 다국적 기업들이다. 그러나 기술적인 집중에 대 한 통제들이 왜 발달되지 않았는가? 그 대답은 법에 대히여 흔히 갖는 태 도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답은 법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제관 계는 국제법에 의해 지배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국제법에 대한 존중이 발달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국법이 존중되지 않는 한, 국제법도 존중될 수 없다. 법의 존중과 법에 대한 태도의 역사는 별도의 연구를 요구한다-특히 민권운동에 대한 최근의 재판이 법에 대한 존중과 법에 대한 태도의 역사 에 끼친 것이 그러하다. 정치가들이 거짓말하는 것을 허용하는 이데올로기 인 현실정치 Real p o litik에 대한 연구도 또한 요구된다. 이것은 겉으로는 어 떤 서방국가의 헌법보다도 더 자유로워 보이면서도 굴래그 아키펠라고를 정 당화했던 러시아 연방의 헌법을 탄생시켰다. 법에 대한 존중을 회복시키는 출발점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파괴된 법들이어 야만 한다. 미국의 교육받은 시민들 개개인은 모두 금주법 시행 시절에 사 람 ~l 법에 도전하여 감히 어기려고 하였으며, 술에 취함으로써 주류 생산
업자의 조직화된 범죄를 후원하였고 법 집행관들을 매수하였고, 니리를- 비 도덕화하였기 때문에 금주법이 재난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 은 도박, 마취, 매음, 속도위반 등등을 금지하는 법들을 지지한다. 지금 하 고 있는 연구는 그러한 일들을 토론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관점에서의 하나의 제안이다. 즉, 모든 법은 실시되거나 아니면 폐지되어야 만 한다. 현재 상황의 손해는 엄청난데 — ― 스피노자에게 동의하면서 ―一 특히 교육 분야에서 손해는 매우 엄청나다. 5 맺는말 중간 목표(준기상향)와 우리가 지금 즉시 할 수 있는 당면과제 (단기 목표), 이 둘 사이의 연결은 이제 천천히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즉, 우리는 아주 커다란 목표를 향하여 직접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과정과 민 주화의 과정을 통하여 다름아닌 지식과 기술에 대한 책임으로 나아가고 있 다. 그리고 우리는 책임의식을 개발하고 이것을 반복적으로 정치, 사회관습, 예술의 표현에 반영한다면 유용한 제안과 기법을 가지고 선도적 역할을 해 나가는 사람이 독재자나 혹은 기술관료가 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할 필요 는 없다. 정확히 어떤 표현인가 하는 질문은 미리 대답될 필요도 없으며, 때 가 오면 토론이 이루어지도록 한 가지 대답 이상이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화의 과정과 교육의 과정에 관해서, 특히 책임에 대해서 그리고 결과의 제도화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시 간이 이미 너무 늦지는 않았지만, 시간은 놀랄 정도로 짧기 때문이다.
제 12 장 급속한 민주화에 대한 기술 이 책의 결론 부분에 해딩히는 이 장의 논제는 생태학자들, 인구통계학자 둘, 그리고 정치분석가들에 의해 예견되는 대변혁과 기술적인 계시를 어떻 게 예방할 수가 있는가에 대한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여기서 는 아무런 해결방안도 제시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어떤 가능한 해결방안의 윤곽에 대한 매우 기초적인 논의만이 제공될 것이다. 어떤 어려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구상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그 해 결방안이 마련되었을 때 그 문제가 근본적으로 뒤바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에 대한 인식은 기껏해야 일부 사상가들로 하여금 그 문제에 대하여 급전적인 표현을 하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죽 일부 사상가들은, 우 리에게 기술은도대체 필요한가? 경제적인 성장까지도필요한가? 성장을제 한할 수 있는가? 과학의 발달을 막을 수 있는가? 또한 이제 과학적 지식의 성장은 어떤 변호인들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이것의 반대자들은 순수한 반 계몽주의자들로서 해고되어야만 한다는 등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러한 기술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단지 그 기술의 복잡함의 수준만이 증 가될 수 있으며 그러한 기술은 현존하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감소될 수 있
다. 급전적인 접근의 결고片근 기껏해야 기술이나 경제의 성장을 멈추게 하라 는 요구이다. 이것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 또한 비합리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경제의 어떤 분야는 개발해야만 하기 때문 이다 _一 적어도 세계의 빈곤이 아주 보편적인 한.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우만리 한는다. 기 그술러의나 어 어떤떤 부 부문문은을 개 _발_해 경야제만나 하 고기,술 의다 른— —어 떤억 제부할문 은때 조억차제도해 우야 리는 어떤 새로운 부문의 기술개발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사회적 기계장치 는 보다 더 나은 가속장치와 제동장치 둘 다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발달시켜야만 하고 그것에 대한 신속한 조치가 필요하다. 특히 우리 는 통제하는 데 대한 기술을 발달시켜야만 한다. l 사회기술과 기술윤리 오늘날 서방세계에서 칼 맑스와 그의 사후 추종자둘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공적인 행동에 대한 태도에 있다. 맑스는 단순노동자들이 성취하고 자 투쟁하는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그들의 시도를 도와중으로써 즉각적으로 누구든 세계의 혁명에 대한 과업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동자들은 기껏해야 보다 더 나은 임금과 더 냐은 작업조건을 위해 투쟁할 것이라고 맑스는 말했다. 그는 만약 그들이 그 목적을 성취하면 아마 만족할 것이라 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오두막집을 가지게 되면 옆 에 있는 궁전이 더 커 보이므로 그 오두막은 더욱더 작게 보인다는 사실 때 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 문제는 이론적이다. 죽,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은 이미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바로 그 소박하고 온당한 개선조차도 성취할 수 없다• 그러한 세계적 혁명을 위해 일하는 선구자인 지식인들은 이런 선 의 (善意)를 대강 처리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소 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조직화하도록 도와 주어야만 한다. 조칙화하 고, 두쟁하여도 성공을 못하면, 노동자들은 자신의 보상 대우를 높이고 그 리고 심지어 세계혁명에 관하여 귀를 기울이고 그리고 심지어 그 혁명에 참
여할 준비를 하는 것이 더 낫다. 칼 맑스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하자. 그의 사후 추종자들은 단순노동자들 이 조직화하도록 돕는 것을 경멸한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단지 소박한 개 선만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즉, 노동자들이 염려하는 것은 단지 더 나은 노동조건과 더 높은 임금뿐이다. 그리고 노동지들은 이 목표를 성취하면 세 계혁명을 위해 일하는 대신에 현 정권의 옹호자가 된다. 반맑스주의적인 이 명제는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이것을 말하기는 어렵다. 레닌은 190 판에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이 명제를인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높은 임금과 개선된 노동조건이라는 그 순박한 목적을 위해 두쟁하는 노동자들 을 선도하기보다는 자기가 그 혁명을 이루어야만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맑 스주의를 국가철학으로 삼는 여러 나라의 맑스 사후 추종자들은 현존하는 체제의 틀린 점을 일일이 열거하고, 현 체제를 멸시하고, 그들의 현 체제로 부터의 소의감을 강화함으로써 세계의 혁명을 기원하고 이에 대한 그들의 신념을 강화한다. 그들은 대체로 정치적으로는 비활동적아다 一 一 비록 그 들의 비평이 종종정당하고이것이 때로는다른사람들로하여금문제를개 선하도록 도와 주지만, 그들 스스로가 때때로 레닌 후계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으면서도 기꺼이 대중운동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조직하기까지 한다. 사람 에 따라서는 정치적인 무력힘이 비활동적인 사람들을 정치 현장 밖으로 완 전히 밀어내기 때문에 그는 그 정치적 활동가에 의하여 무시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그 무력함은 그가 전혀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어떤 중요한 직책을 자신이 차지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해로 운 것이다. 또한 그 무력함은 어떤 변명에 의하여 그의 비활동성을 정당화 한다. 이용할 수 있는 행동은 세계혁명으로- 인도할 수 없기 때문에 쓸모기 없다. 즉, 그 변명은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킨다. 아주 일반적으로 무력함은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무력함은 다론 사람들이 자기 자신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고통, 좌절 그리고 자기경멸을 초래하는 어떤 필요성을 발달시키기 때문이다. 이 필요성은, 오히려 다른 사 람들을 무력하게 함으로써 위안을 바라는 이 희망은, 또는 자기 자신과 마 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행동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이 시도는
곧 그(정치적) 부당함 때문에 불쾌한 공공연한 적을 만드는 것과 같은 짓이 다. 맑스는 사실적 측 면에 있어서는 틀렸지만 정책적 측면에 있어서는 옳았 다. 노동자들은 더 나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조건을 위한 두쟁에서 성공한 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보상을 높이는 데 있어 도움과 지도를 이용할 수 있고,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들의 두쟁에 참여하는 사 람만이 그들의 보상을 높이는 데 있어서 그들을 도울 수 있다. 우리는 모종의 세계혁명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휠씬 더 많이 투쟁해 야만 한다. 그러나 그 혁명은 맑스와 그의 초기 추종자들이 상상했던 사회 주의 이상사회처럼 나약한 것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 맑스를 추종했던 선의 의 사람들이 맑스의 예측과는 달리 노동지들이 더 나은 임금과 더 나은 작 업 조건을 위한 투쟁에서 성공하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바참하게 혼란되 었으며 그두쟁을통하여 이에 대한보상울어떻게 더 인상시켜야할지 알 지 못했고, 그 투쟁이 가져다 줄 수도 있는 정치적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더욱이 그 투쟁이 어떤 세계적인 혁명을 위한 노력과 어떻게 통합 될 수 있는가는 알지 못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아직도 맑스의 전략과 같은 것이다. 즉, (I) 세 계적 혁명을 대신할 수 있는 어떤 장기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중기적 대안 (2) 단순 노동지들이(또는 인구의 대다수) 개선에 대한 투쟁을 함에 있어 서 그 보상을 높일 수 있는 단기적인 대안, 그리고 (3) 이 두 가지를 연결 할 수 있는 전략이 바로 우리가 필요한 전략이다. 특히 우리는 (3) 에서 실패가 아닌 성공이 노동자들의 의식을 끌어올리고 그들로 하여금 다음 단계를 취하도록 준비하게 한다고 희망해야만 한다. 이 것이 맑스의 가르침에 대한 중요한 수정이다. 이 모든 것이 이미 일어나고 있고, 이미 어떤 전기를 마련하고 있다• 그 것은 다양하게 사회기술학이나 작업의 인간화나 노동생활의 질을 개선하거 나 산업의 민주화를 위한 운동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상은 노동자들이 보 다 높은 임금과 더 나은 작업환경(위생학 : h ygi ene) 뿐만 아니라, 직업을 통 해서 자아를 성장시키고(아브라함 매슬로우) · 직무를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하
여 투쟁해야만 한디는 것이다(아더 허즈버그). 이것은 업무조직의 엄격한 계 급조직을 벗어남으로써 (아이나 솔스러드), 그리고 그들 자신이 조직을 돌보 는 자율적인 작업그룹을 조직하면서, 업무에 관하여 배울 기회를 갖고, 의 미있는 제품들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그들 자신의 제품의 품질관리를 확인 하기 위해 순환근무를 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 심지어 가장 말단직에 있 는 노동자들조차도 그들의 일의 의미와 내용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 에(쥬디스 부버 어개시)개선을 위해서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것은 즉시 시작 할 수 있다는 것이 이미 경험적으로 증명되었다. 또한 경영진에 있는 사람 둘 중 상당수가 이 부분에 노동지들과 공동의 관심을 가지고 있고 같은 이 유로 일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것도 이미 증명되었다. 이 운동이 정말로 하나의 큰 운동으로 확산될 때 그 운동은 근로 현장과 대학을 통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운동은 산업혁명에 의하여 생겨났거나 조장된 너무나 많은 장벽들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보다 나은 세계를 추구하기 위하여 정치적인 열망 속에서뿐만 아 니라 국가적 차원에서도 성장할 수 있는 어떤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 0] 다. 그러나 분명히 지금까지 논의된 운동은 모두 근로 현장에 제한된 것이다. 이 모든 운동은 경제가 전체적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면 어떤 방향으로, 그 리고 이 과정에서 생태계가 어떻게 보호되어야만 할 것인가? 등과 같은 매 우 절박하고 중요한 세계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여기에서 그 목 표를 토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바꾸어 말하면 생태계의 균형이 유지되는 한 위에서 말한 그 확장된 경제가 가끼운 칭래나 또는 먼 장래에 정확하게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를 우리는 크게 염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 이 어떻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지, 또는 그것이 구체적인 현재의 정치적인 활동, 집단 또는 국가적인 이익에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한 다. 이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기술윤리학의 개념이 제안되었다(마리오 번지). 현대기술은 인간의 생산능력의 증가는 모두 선(善)이라는 그릇된 생 각에 의하여 지지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러한 생각의 결과가 오늘날 전체
적으로 생태계에 위험할 정도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까지는 포함시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연구자들과 기업인들을 인도하기 위한 기술적인 일상활동에 대한 어떤 새로운 도덕 규범을 필요로 한다. 생태학적인 운동은 실제로 이런 방향으로 일부 일을 시작했다. 따라 서 이 운동은 사람들에게 비료 없이 재배한 식품을 구입하고 일회용 병보 다는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는 병을 구입하고, 재생 수준을 울리기 위하여 품목게 따라 일회용 품목과 재생용 풍 목 들을 분리하도록 충고한다. 일부 서 방국가들의 정부는, 특히 미국의 연방정부는 에너지절약 운동을 시작했고, 연료를 절약하기 위하여 법적으로. 자동차 속도제한과 가정의 난방 수준을 낮추었으며 이러한 노력은 더 많이 있다. 이런 모든 활동들은 지금까지 오 직 한 가지 면에서 유용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즉, 일반대중이 결과적으로 문제를 보다 잘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어떤 해 결책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어떤 합리적인 해결책을 향한 경향으로 발전 될 수 있는 정책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자연식품(예를 들면 화학비 료 없이 재배되고, 아무런 첨가제 없이 생산된 식품)을 먹는 것은 토 0~ 斗 관련 된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으며 또한 소비자가 오염된 물을 마시고 오염 된 공기를 숨쉬는 한 오염으로부터 소비자를 구할 수는 없다. 정말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개인적 차원의 기준들은 전통적으로 아무 곳에나 오물을 버리는 행위를 못하도록 하는 정도의 소극적 규제방식이다. 물론 이것도 전 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정도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오물을 버리는 것, 새치기, 또는 작은 절도에 대한 규칙 수준에서조차도 개인적 윤리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죽, 그러 한 규칙은 그 나라의 국민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지키고, 습관화하여 그 규 칙을 그 나라에서 자율적으로 규범화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때만 강요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안정된 선진국가에서는 한두 사람 정도가 새치기를 하 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 사실에 관용을 베풀거나 싸울지도 모르지만 그 대 부분의 나머지 사람들은 그 줄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참을성 있 게 서 있는 줄이 한 사람의 조급함과 그릇된 행동 때문에 삽시간에 엉망이 되는 것을 많은 나라에서 볼 수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이것은 새로운 규범
의 도입을 특히 어렵게 만든다. 왜냐하면 새로운 규범 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하나의 작은 소수집단으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점 을 그 국 민들이 확신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오물을 아무 데나 못 버리게 하는 기준은 어떤 생태학적인 불가피성 때문에 강화되어 왔지만, 군( 니i )과 산업체가 대규모로 환경을 오염시키는 한, 시민들이 환경정화를 위해 더 잘 협조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절망적인 것이다. 한 대의 전 투기가 한 번의 훈련비행에서 많은 자동차들이 한 달 내내 쓸 수 있는 양보다 훨씬 많은 연 료를 낭비하고 오염을 시키는 상황에서 시민들은 연료를 낭비하고 쓰레기 버리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 윤리는 조직체 _민간 단체든 공영 단체든 간에 __ 一 의 윤리 기준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산업체와 정 부의 윤리도 각 개인의 윤리와 함께 보조를 맞추어 성장해야만 한다고 인 식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기준둘이 서로 다른 데 있다. 죽, 공적인 업무 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개인이 뇌물을 받는 것은 좀도둑과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회사가 정부관리를 매수하는 것은 一 一 국내에서나 의국에서나 다른 면에서 비도덕적이다 . 만약 그 매수 행위가 법령이나 회사정책에 의해 철대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그 정직한 공무원은 더 파령치하고, 충성적이 고, 야망을 가전 사람에 의해서 해를 입게 될 것이다. 따라서 윤리적 문제 와 관련되어 있으나 자기의 해결방안이 조직체의 행동에 의해 제지당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공적인 다양한 의사결정 과정 (예를 들면 회사정책, 입법, 그 리고 그 이상의 것)에 참여히는 것이 의무적이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규범을 위반하는 회사들이나 국가들의 생산품을 불매운동하는 시도가 바로 이런 종 류의 것들이지만 대개는 소용이 없다. 이것은 모든 불매운동이 모두 똑같이 소용없다는 말은 아니다. 마리오 번지는 우리가 먼저 나쁜 목적을 위한 연 구를 거부하면 그것이 나쁜 목적의 기술연구를 피할 수 있는 법률이나 회 사정책으로 발전될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제안했다. 우리는 사회기술과 기술윤리학을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 있다. 자 기 자신의 업무를 좀더 통제할 수 있고 좀더 이해할 수 있는 직원들은 또 한 자기 회사에게 환경을 오영시키지 말라고,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법적으로 또는 비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대학의 다양한 윤리적 측면에 대한 통제는 보통 민주적으로 A1 출된 어떤 위 원회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더 많은 자율과 민주주의가 대규모 작업장에 도 입되면 될수록 그 직원들은 그들의 생산품들이나 서비스가 소비자, 지역사 회, 그리고 환경에 끼치는 나쁜 영향을 감시하는 데 더 많이 참여할 수 있 을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더 많은 연구와, 신중한 계획, 실험, 파이롯 프로그램 그 리고 공개적인 토론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단기 목표와 장기 목표를 연결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단순한 암시이다. 2 연구 유인책과 평가이론에 대하여 연구 유인책과 평가에 관한 문제는 오늘날 과학정책으로 알려진 분야의 논쟁 -기술적인 연구와 기술적인 평가 모두에 관한 논쟁 -에서 매우 핵심적인 주제이다. 그 이유는 기술이 종종 복집하고 과학에 기초를 둔 것 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가장 값비싼 대규모의 실험들――예를 들어 원 자탄제조와 원자력발전소의 성장, 우주 프로그램과 소형 컴퓨터의 개발 등 ――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따라서 수많은 과학과 기술이 충분히 정당 화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오히려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해할 만하 다. 죽, 만약 우리가 큰 연구의 특성을 규정한다면 이에 의해 우리는 또한 어느 정도 모든 연구의 특성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상당히 가정할 수 있다. 우리가 현대의 물리적, 생물학적 기술이 현대과학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도 움을 받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현재의 널리 퍼져 있는 논쟁을 고찰 해 보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논쟁은 둘 사이의 차이접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앞 단락은 기술이 통상과학과 한덩어 리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밀하고, 이 단락은 그들의 차이점에 근거한 어떤 자주 거론되는 한 논쟁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거
의 놀라운 것이 아니다. 죽, 어떤 두 가지 사항도 한 논쟁에서는 함께 한덩 어리가 되고 다론 논쟁에서는 구분된다. 필요한 것은 이 사실을 깨닫고 균 형감각을 유지하는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과학적인 생각들이 이런저런 기술자들에 의해 응용되었느 냐 안 되었느냐 하는 관점에서 과학이 현대기술에 얼마만큼 공헌했는가 하 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전정한 문제는 산업혁명의 기술적인 방식(린 화이트 와 히더 렉트만의 견지에서)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과학혁명의 과학적인 방식 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인가이다. 바로 이 질문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술혁 명 덕분에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과학혁명 덕분에 기술혁명이 일어났다고 보도록 강요한다. 19 세기경의 놀라운 발달 一一 비록 이 발달들이 거대한 규 모의 산업화 과정들이긴 하지만 기술의 덕택은 거의 아니고 과학의 덕은 더 더욱 아니라 할지라도――과학적인 영향과는 별개라고까지 결론지울 필요 는 없다. 산업과 농업을 개혁했던 생각들이 때로는 순전히 조직적인 생각이 기도 했으며, 때로는 어마어마한 조직적인 추론을 포함한 단순한 기술적 생 각에서 비롯되기도 했으며 때로는 고급 수준의 과학을 이용하는 데 대한 관 심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은 항상 서구의 과학적인 풍 토에서 비롯되었다. 많은 현저한 전보는 작은 부품, 대체용 부품의 발명 또 는 단순한 기술적 인 생각의 창안과 같은 순수한 조직적 orga n iz a ti on al 인 생 각보다는 전보된 자연과학 덕분에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핵무기와 우주계획 및 유사한 〈거대한 과학〉 사업의 선택은 실 제로 과학과 기술을 특징짓는 많은 과학적인 방식 scie n ti fic s ty le 을 이용한 다. 대중에게 제시된 그 불균형적 인 그림 (모습)은 온당하다. 이것은 그 그림 이 불균형적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심지어 위험하기까 지 하다. 화학산업에서의 작업공정이 과학적 방식의 덕을 많이 보고 있지 만, 그 작업공정은 아직까지도 여러 가지 일상적인 반복작업으로 나뉜다. 그 일상적인 반복직업은 연구하는 일과는 정반대의 것이며 재설계를 필요로 한 다. 또한 작은 연구계획은 근본적으로 큰 연구계획과는 다르다. 한편으로 연 구는 재정적인 유인책 없이 행해질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순전히 정 치적 이유 때문에 대규모 연구비보다는 한 거대한 연구비 지원기관으로부-
터 소규모 연구비 를 지원받는 것이 더 쉽다. 어쨌든 대부분의 소규모 독립 적인 연구를 포함한 대부분의 연구에서 문제는, 우리가 과학과 기술에 대하 여 균형이 잡히지 않은 그림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모든 연구들이 큰 규모의 연구 방식 ―― 고전적인 확대된 과학 방식 -에 감염되어 있다는 것이다. 과학을 확대시키는 데 있어서 개척자는 가장 먼저 유인책 inc enti ve s 의 확대 방안을 만둘어낸 알프레드 노벨이었다. 그는 그의 발명품(다이나마이트)이 군용으로 대규모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았을 때 고전적인 방식의 부적합 성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대규모의 유인책이 작은 독립적인 연구를 구제할 것이라고희망했다. 우리가 사회적 기술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은 역시 사회과학의 후진성 과 그들의 유익한 적용 가능성에 대한 의심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두 개 의 비교에 의해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첫째, 약국에서 일하든 화학공장에 서 일하든 전혀 과학자가 아닌 그러나 2 伊1 ] 기의 과학적으로 훈련받은 화학 자의 일과, 수세기 전에 약제사이든가 광산기사이든가 또는 어떤 종류의 화 학제품 제조자로 고용되어 있었던 화학자의 일을 비교해 보자. 그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둘째, 재정경제학이 아닌 어떤 사회공학에서의 유사한 비교 룰 해보자. 오늘날의 어떤 경영자도 그 화학자의 기법들과 비교할 만한 복 잡한 기법들을 사용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경영에 컴퓨터를 도입하는 일은(투표 집계에 있어서조차도) 재고를 조사하고, 성품을· 주문하고, 원가를 계산하는 것과 같은 물리적인 문제 이상의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혁신적인 사회조직의 일과 관련이 없어 보이고, 사회적인 문 제둘을 처리하는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내는 것과도 거의 관련이 없는 것처 럼 보인다. 일부 사회적 문제들(예를 들어, 우리는 더 이상 결두를 하거나 린 치를 가하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은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 회적 문제들이 사라전 이유는 사회과학적 생각 또는 심지어 어떤 과학적인 방식의 응용에 기인한 것은 결코 아니다. 적용할 수 있는 사회과학이론은 그 형법전(刑法典) 자체가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라는 견해이다-그것은 부분적으로 과학적 방식의 공리주의 때문에 보편화되긴 했지만 그러나 그 것은 고대 철인들과 종교적인 지도자들에게도 알려져 있었던 하나의 생각
이다. 비록 이 오래된 생긱이 몇몇 중요한 개혁둘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렇게 넓게 적용되고 있지는 않다. 요컨대 어떤 사회적인 연구도 중요한 실제적인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하 고 있다는 것이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느낌아다. 관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연구에 공헌하려고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는 현재 연구의 실제, 이에 대한 비평, 이것을 개혁하 기 위한 제안들에 대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오늘날 주요한 연구비 지원기관들(특히 군대 ), 주요한 연구자들(특히 과학자의 모습울 한 공동 연구 자들), 주요한 상의 수여자(특히 노벨상위원희 ), 그리고 정부와 큰 희사들(특 히 주요한 대학들)에 대한 기술적인 자문위원의 견해들을 연구함으로써 그러 한 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 만약 어떤 한 사람이 연구의 계획, 집필, 평가, 실행, 재평가, 연기, 종료 등의 모든 방법에 관하여 지금 막 언급한 각계 각 충의 사람들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비평할 수만 있다면 이것은 인류의 발전 에 유익한 공헌이 될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비평적으로 토론할 수도 있 는 새로운 종류의 대안들에 대한 길을 열어 줄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학제적 분야의 전문가 팀에게 어려운 과제를 안겨 줄지 도 모론다. 그러나 몇 년 동안에 걸쳐서 어떤 연구기관이 행한 단순한 연구 평가물들에 대한 재평가는 쉽게 이행될 수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한 평가는 고액의 연구과제에서 일하는 팀들이 평가자와 작은 규모의 경쟁자들에게 행사하는 태업을 쉽게 노출시킬 수도 있다(큰 규모의 경쟁자들 은 융합하고, 협동하고, 타협한다). 태업의 기법들은 상당히 단순·하고 쉽다. 그 리고 그 태업을 제지하고 언론과 연구의 자유를- 지키는 반대 기법들도 마 찬가지로 쉽고 단순하다. 또한 그러한 태업은 일을 계속적으로 막는 것이 아니고, 고액의 연구를 수행하는 기간 동안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반 대 기법도 시간을 끄는 것을 취소해야 한다. 어떤 비평은 제도적으로 억제된다. 예를 들어 현대 사회에서조차도 그 중 세적 길드(예를 들면 대학 전체 체제는 물론이고 의료, 법률, 공인회계와 같은 전 문직종)에 대한 비평은 억제된다. 이 길드들(전문직종들)은 우선 무엇보다도 자기 본위의 폐쇄적 집단이다. 그 길드들은 많은 연구나 연구의 결실(제너
의 예방 접종에 관한 것이전 환자에 대한 전찰기록에 대한 이용 가능성의 가치이 건 간에 ) 을 억제한다는 점에서는 유해한 조직이다. 그러한 길드의 베일을 벗 기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연구는 유용한 연구가 될 것이다. 즉, 이러한 연구 는 그러한 길드를 대중의 민주적 통제에 개방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일시적안) 억압의 위협은 또한 물리적인 기술에도 존재한다. 모든 산업 체들은 기술이 그 산업체를 딴 것으로 바꿀 수 있는 대치물을 발견했을 때 쫓 겨나기 마련이다. 산업체 지도자들은 이것을 알고 있어서 연구를 기꺼이 억압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기술혁신으로 이끄는 연구는 억압하지 않 고 오직 기술혁신의 실행만을 억압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억압은 법이나 관 습에 의해 요구되는 검사의 ――기술혁신의 효과성 검사이든지 또는 부작 용 부재 (不 在 )에 대한 검사이든지간에 ―一 기준들을 높임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또는 레닌이 말한 것처럼 한 회사는 그 특허낸 발명품을 억압하기 위한 어떤 특허를 획득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통 서양에서는 산업체가 물리적인 기술을 억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산업체는 그것을 번 창시키고 연구의 새로운 결실에 관여하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면, 새로운 전 자시계가 기존 시계시장의 대부분을 잠식하였으나 대규모 시계 생산회사는 두 가지 종류 모두를 ―― 사실은 많은 종류를 一— 생산한다. 즉, 산업체들 은 적응하게 된다. 한 회사가 적응을- 못할 때는 파산할지도 모르지만 그러 나 대개 그런 회사는 다른 회사들에 의하여 인수되며 적응할 수 있도록 도 움을 받는다. 그러나 한 나라 전체의 산업이 적응하지 못할 때는 정말로 문 제가 야기될 수도 있다-서양에서 19 세기 중엽에 인공물감을 발명하였 을 때 인도의 물감산업이 겪은 상횡이 바로 그 경우이다. 선진국의 경우 나 라 전체의 산업이 적응하지 못할 때는 다른 산업체들이나 그 나라의 정부 가 직접 개입을 해야만 한다. 연료절약형 소형차를 선호하는 전체적인 기호 의 번화를 고려하지 않았던 미국의 자동차산업의 경우가 이러한 예에 해당 한다. 이 실패는 물리적인 기술의 약함 때문이 아니라一―오히려 디트로 이트는(좀더 전보되어 있었던) 유럽과 일본산업보다도 자동차 모델을 더 많 이 변화시키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_바로 사회기술의 낙후성 때문이었 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결점은 무능력에 기인했던 것이 아니라 고전적인
과학방식, 즉 유인책의 결핍 (이러한 결핍은 무책임을 낳음 )에 기인한 것이었 다. 디트로이트의 모든 공장들은 국가가 미국 자동차산업 모두 를 침체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속에서 함께 도박을 했다. 그리고 유사한 경험둘이 다른 곳에서 一— 심지어 영국의 자동차산업에서까지 一一 일어났 기 때문에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지도자들은 성의만 있었더라면 실직된 수 많은 자동차공장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둘의 어려움 그리고 공동사회와 납 세자의 부담을 쉽게 예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국가적인 책임이 결여된 그 와 같은 행동에 관한 연구 그리고 적절한 보호장치를 위하여 필요한 조치 가 무엇인가에 관한 연구를, 정부는 의지만 있다면 구상할 수도 있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 연구에 의해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그 리고 그러한 위협이 생명 (심지어 지구상의 전체 생명까지도)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보고 그 위협에 대항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공감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위협을 제거하 는 일이다-즉, 사람들이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을 제거하여 안전하게 느끼게 할 수 있는 제도적인 개혁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국가에서 비교적 쉽게 행해질 수 있다. 비민주적 국가에서 또는 전통적인 후진사회에 서 그렇게 하는 것은 더 어렵다( 『소 련에서의 자연의 파괴』 참조). 그러나 가장 큰 어려움은 연구에 관한 연구 research about research 를 하 는 데 있어서 관련된 정보의 교환과 유인책을 제공할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하나의 조직을 갖는 것이다. 만약 정말 성공적인 경우에는 그와 같은 조직 은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힘이 될 수도 있고 어중이 떠중이들을 동참 세력 으로 불러 모을 수도 있다. 이것은 모든 민주주의의 일반적인 문제이다. 이 것은 아마도 결코 해결되어서는 안된다. 아마도 그러한 조직을 젊게 유지하 는 것은 이기적인 새로운 회원들을 열광자-즉 새로운 접근, 생각, 열정 울 가지고 있는 활동적인 연구자들 __ 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그 조직의 능 력이다. 조직이 오래되면 새로운 조직들이 설계되어야만 된다(러셀의 Zahato po lk 참조). 여기에서도 인류의 미래와 관련된 모든 것에서처럼 연구에 대한 연구는 주로 교육과 관련된 것이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교육이라 할 지라도 그것은 대중의 교육적인 배경에 많이 의존하기 때문에, 연구의 주된
분臣 교육적인 연구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연구의 악영향 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특히 우리의 점증하는 강력한 현대 컴퓨터기술이 우리의 되보적인 영세적 교육에 미치는 위험을 연구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고등교육을 위한 지도적이고 강력한 힘을 가진 기관(대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 . 이러한 조직둘은 전문직과 학회에서의 모든 보상과 표창둘 을 추구하도록 학생들을 훈련시키면서도 그러나 그 보상과 표장들이 어떤 가치를 나타내는지를 비판해 보지도 않는 맹목적이고 깅력한 교육기관들이 다. 대학은사회적인 개혁과도덕적 원상복구를항상반대하였으며 아마도 대 학은 자신을 민주화하려는 노력에 관하여 특별히 그렇게 활기차게 반대하 도록 놓이두었을는지도 모르겠다. 데이비드 버드워스가 그의 자서전에서 이 미 지적했던 것처럼, 산업체에서의 연구는 가치있는 활동이며, 이것을 위한 훈련은 그들이 상상하고 있는 종류의 것을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다는 것 을(영국) 교수들에게 확신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죽, 교 수들은 대학에서의 연구방식이 가장 최상의 것이며 그밖의 다른 사람들의 말은 둘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다론 사람들에게 해 를 끼치지 않고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고집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의 교육제도에서 대학들이 가지고 있는 독점체계를 깨뜨리는 것이라고 그 는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좀더 단순한 계획울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교육제 도를 개혁하는 것은 실제로 매우 쉽다고 말했다. 죽, 교수의 권한울 없애가 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이 모든 교육개혁의 지침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죽, 개업 면허장을 변호사, 의사, 교사, 기술자에게 주는 권한을 대학으로부터 민주적으로 선출되고 운영되는 조직체에 넘김으로써 충분할 것이다• 그 조직체들은 민영일 수도 있고 정부기관일 수도 있으며 전문가들만이 운영할 수도 있고 전문가들과 아마추어들이 함께 운영할 수 도 있다. 그러한 조직체들은 대학과 독립적인 관계를 가질 것이며 이것은 하나의 커다란 구원이 될 것이다.
3 민주적인 대중운동의 이론에 대하여 고전철학은 사회가 기술에 적응하도록 하기 위한 준비를 하지 않았고, 기 술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수반되었던 사회개혁들을 위한 준비도 하지 않았 다. 비록 이러한 종류의 사회적 변화가 이루어졌지만, 그 변화는 뒤떨어졌 고 임기응변식으로 실행되었다. 이제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 의제 (기술의 발달에 따른 사회적인 변화)에 대하여 〈어떤 사회적인 변화를 도입해야만 하고, 너무나 많은 재난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그 사 회적인 변화들을 신속하게 도입할 수 있는가?〉 등의 너무나 절박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질문을 좁혀 이것에 대한 예비적 토론이 가능히도록 하기 위 해서 급격한 사회변화에 맞서는 최근의 대중운동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배 울 수 있는가를 살펴보자. 우리는 대중훈 동 을 좀더 효과적이고, 좀더 민주 적이며, 좀더 교육적이게 만들 수는 없는가? 좀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는 대 중운동의 기술적 계시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겠는가? 이 문제는 현대 대중운동의 아버지인 러셀의 자서전에서 이미 윤곽이 드 러났고, 아니면 적어도 그 문제가 대중운동의 주요한 요소로 제기되었다. 러 셀은 그 결과와 유사한 그러한 방식으로- 일을 계획하지는 않았다. 그는 핵 전쟁을 폐지하느냐 인류를 멸망시킬 것이냐의 양자택일에 관해, 더욱이 그 것을 지금 실행할 것이냐 아니면 영원히 실행하지 않을 것이냐 하는 식의 절박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 선택은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 의해 합리 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선택이 운명의 손에 괭개쳐져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우리는 오늘날 러셀의 핵폭탄 금지운동이 일종의 실 패로 끝났고, 아마도 기적적으로 어떤 불안정한 균형이 유지되고 있기 때 문에 이것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리고 우리는 원지폭탄과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을 용케 배운 척 가장하고 있다. 러셀은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보통은 대학강의를 통하여, 저 작물을 통하여, 또는 대중강연을 통하여, 일생 동안 정치적인 활동을 활발 히 하였다. 그는 195 7\:텨 미국과 소련의 양지도자들에게 홍미있는 공개서 한울 보냈는데 이 공개서한은 양국간에 일종의 공적인 논쟁의 발단이 되었
다. 그 논쟁 은 금 방 끝 나 버리고 말았다. 그 이유는 소련 국민은 참여할 수 가 없었 기 때 문 이며 미국 국민은 충 분할 만큼의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러 셀 은 대중의 관심 을 고양시키는 데 동참했던 동지들을 규합해서 1958 년 초 에 핵 무기 해체 캠페인 (Cam p aig n for Nuclear Dis a rmament, 약자로 CND) 운 동 을 창설 했다. 그 CND 본부는 1959 년과 196 眼!에 런던의 심장부인 트라 필 카 광 장 과 여러 곳에서 군중 집 회를 가 지 면서 그 유명한 앨더매스톤 마아 취 Alde rm asto n Marches 를 조직하였다 . 1960 년 여름 러셀은 다음과 같이 말 했 다 .
러셀은 은밀히 그들의 뒤이은 활 동들을 기록해 나간다. 그 는 분석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시민 불복종. __ 비록 그 캠페인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 지만 그 캠페인에 있어서 명백하게 새로운 요소였다 __― 에 역점을 두는 관 점에서 기술해 나간다. 그 대중 2 동은 1958 년초에 시작되었다. 숀맨은 1960 년에 뛰어들었다 새로운 형태의 활동들이 1961 년 겨울 갑자기 나타났고, 곧 활성화되면서 거의 1 년 동안 - 1961 년 가울과 1962 년 여름 사이 —— 놀랍도록 절정 에 올랐다. 이 운동은 1963 년 1 월에 모든 일이 끝났다. 러셀 의 이야기와 대중운동에 대한 그의 직접적인 공헌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 두자. 그때 일어났던 것이 아직 충분히 연대기에 따라 정리되지는 못했지만 아 직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그 운동은 대양을 건너 미국에서 학생해방, 흑인 해방, 성해방, 여성해방, 동성연애자의 해방과 같이 다양한 방면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이 모든 운동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마국의 · 베트남참전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대 시위 -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베트남참전 반대운동 에 합류하지 않고는 떳떳한 마음으로. 흑인해방운동을 이끄는 것을 계속할 수 없다고 선언한 그날 이후로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 의해 그늘에 가려졌다• 그 운동들, 특히 학생운동과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은 전 세계에 퍼 졌다. 이전에 있었던 흑인해방운동처럼 그들의 기법들은 시민들의 불복종과 폭동 두 가지를 포함하였다. 학생들이 처음에 도입했던 방법은 티치안t he ·tea ch-in s (사회적인 항의를 위한 대학생의 장시간의 토론집회) 방법이었다. 이 것들은 대단히 인기있고 성공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멈추었는 데, 왜냐하면 그 티치인(학생 토론집회)이 시민운동을 늦추어서 운동의 원동 력을 꺾고 시민운동으로부터 대중적 특성을 빼앗아가는 가능한 수단으로서 형의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직후에 대부분의 원동력은 사라졌다. 그 일부는 새로 운 대중운동-생태계 보호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운동은 자체의 방 향 결여와 에너지 위기로 매우 심각하게 타격을 받았다. 다론 운동들은 어 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통합되었다. 그러나 이 디른 여러 운동들은 그 결 과가 아무리 크고, 강력하고, 유익하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통합되어 · 여러
개의 조직체가 되었거나 또는 그들의 요구가 기존 조직체들에 의해 받아들 여졌다는 이유 때문에 그 운동들은 거의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러셀과 숀 맨식의 대중운동으로 간주될 수 없다. 여성운동은 비교적 바공식적이고 유 동적이지만 항상 제도적인 어떤 새로운 조직적인 도구를 통해서 압력을 보 여중으로써 아직까지도 어느 정도 대중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대중운동의 성공과 실패는 여러 관점에서 평가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여 기서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좀더 각성되고, 심지어 복집하기까지 한 대 중운동의 가능성을 위한 도덕성의 문제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합리적인 교환이 필수적이다. 합리적인 대화와 대중운동 사이에 갈등은 존 재하지 않는가? 다른 정치적 형태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도 어떤 안정된 조직, 어떤 목적 울 전제로 할 수 있는 반면, 모든 형태의 대중운동들은 운동으로서 가져야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질문들이 잘 정의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될 수 있다. 여기에 대하여 어떤 사람의 첫번째 대답은 심지어 가장 무정부적인 조직조 차도(그것이 아무리 느슨한 조직이라 하더라도) 약간의 어떤 진행절차을 가지 고 있으며 그리고 그 규칙과 절차들은 더 민주적일 수도 있고 덜 민주적일 수도 있디라는 것이다. 두번째 대답은 목적에 대해서도 똑같은 주장을 할 수있다는것이다. 러셀도 대중운동은 논쟁을 억압하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자신 의 대중운동에 대한 지지는 편의의 문제러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자서전에 서 자신의 운동의 실패에 관하여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았는데, 부분적으로 는 사소한 말디툼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부분적으로는 바로 이러한 어려움 때문이었다• 이에 비해 미국의 대중운동 지도자들은 덜 곤경에 처해 있었다. N. 촘스키 교수는 〈나는 잔디는 녹색이다라고 말하는 당에 속한다〉 라고 선언했다. 활동이 최전성기였던 동안 보스톤대학 학생들은 텔레비전 카메라의 섬광 아래서 보스톤 대학 캠퍼스 가장자리에 있는 차들의 지붕 위 에 서서 대학 공유지를 가득 메운 수천 명의 그들 동료들에 대하여 확성기 로 큰소리를 질러댔다. 우리는 모든 가능한 평화적인 수단을 시도했고, 그 것들은 실패하였다고 그들은 열렬히 선언했다. 죽, 이제는 혁명을 해야 할
시기라고 주장했다. 일에 대한 이러한 단순한 견해는 맑스와 레닌의 사상노 선에서 나오는 것이며, 하워드 진 교수의 성공적인 강의를 통하여 이 젊은 이들에게 전파되였다. 그 매력적이고, 열성적이고, 진지한 젊은이들은 모든 평화스러운 수단들을 다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 그 당시의 대중운동의 이념은 실로 단순했다. 문제의 제기는 분명해야 하 고, 문제에 대한 인식은 충분해야 하며, 정부는 파라오(고대 이집트의 왕)만 큼이나 완고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조직자가 해야 하는 것은 단지 이스라 엘의 모든 어린이들을 함께 모이도록 불러서 하나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하 여 그들의 방식을 강요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정부 로 하여금 어떤 법들을 통과시키도록 강요할 수 있거나, 또는 대중들로 하 여금 어떤 완고한 태도를 포가하도록 강요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너 무나 확실하여 전복의 가능성은 실질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 이 것은대중훈등을통해서 우리가단지 대중의 지적 수준에 적합한것만을성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주어전 대중의 교 육과 복잡성에는 다른 구성요소들이 있으며, 더욱이 그러한 구성요소들은 발달될 수 있고 그리고 대중운동 속에서는 더욱더 급속하게 발달될 수 있 다. 이런 점에서 급속한 대중교육의 가능성 측면에 대한 맑스의 주장은 옳 았다. 이것은 가능한 것이며 그리고 그가 말한 것처럼 그 투쟁 자체와 투쟁 하는 대중을 교육하는 것의 결합을 통해서만이 성취될 수 있다. 맑스는 아 마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나 후에 중단된 티치인을, 그 일이 그에게 가능할 수만 있었더라면 대찬성을 하였을 것이다. 티치인은 처음에 민주주의 사회 를 위한 학생들 Stu d ents for a Democratic Socie t y 또는 웨더만 Weath e rman 이라고 알려져 있는 그 운동의 국단주의파에 의하여 처음 조직되었고 후에 는 그 운동의 조직자들에 의하여 조직화되었다. 누가대중훈등을 조직하는가?누가그렇게 할수있는권한울가지고있 는가? 언제? 대중운동에 관하여 아마도 가장 놀러운 것은 자신이 충분히 할 수 있고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시도할 수 있다는 점 이다. 대중운동 조직자들을 독단적이라고 대강 처리하는 것은 그둘을 낮추
어 보 는 것 이다. 대단히 인기있 는 영화배우 폴 뉴먼과 마론 브란도는 활동 적으로 대 중 운동에 뛰어 들 었지만 그 들 은 촘스키와 진 교수와 같은 지도자 들은 아니었다. 만약 한 대중 지도자의 성공이 그가 독단적이라는 것을 증 명한다면 그것은 그럴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누구든지 대중 지도자로 서 활 동하도록 허용함으로 해서 최고로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심지어 몇몇 대 중 운동의 주요한 도구는 시민들이 불복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조차도 이 것을 변 화시키지 않는다 . 폭력에 의존하고 폭력을 선동하는 미국의 검은 표범단의 쓰 디쓴 경 험은 폭력이란 민중이 독재정권을 전복할 때만 대중운 동에 기여할 수 있다는 분명한 진리를 비극적 수단에 의해 증명하였다는 것 울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기 술 적인 문제에 대해 가장 훌 륭한 약속을 갖고 있고, 그리고 가장 훌륭 하고 중 요하며 절박한 역할들을 수행해야만 하는 대중 2 동은 이제 생태학 에 관한 운동이다. 이 운동은 다른 운동들만큼이나 빠르게 발달했는데 부분 적으로는대중운동의 공간을메꾸어야하는공백이 있었기 때문이며(공백은 아 직도 여 전 히 있다), 부분적으로는 공해의 수준이 너무나 기준치를 넘어설 정 도로 심각하고, 그 종류가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그 상황은 지금 급속히 악 화 되고 있다). 대중운동으툐i서의 미국의 그 운동은 그 운동 목표의 부적절 성 때문에 좌절되었다. 그 운동의 투쟁 목표는 세 가지 주요한 문제들이었 다. 즉, 알래스카 원유 송유관 문제, 초음속 민간항공 문제, 에리 호수의 오 염문제 , 이상 세 가지였다. 그들은 알래스카 송유관 문제는 매우 분명한 문 제여서 승리했다고 주장했지만, 에너지 위기가 그 결정을 즉각적으로 역전 시켰다― — 공교롭게 이 역전은 많은 생태학자들에게는 다행한 일이다. 그 둘은 상업용 초음속 항공기 운행도 분명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여기에서도 승리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기술은 초음속 비행기 성능의 수 준을 개선하였고 따라서 기술은 그 문제가 전혀 분명한 것도 아니며, 뒤바 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상황의 일반적인 긴급 성과도 연관된 것이 아님 을 오히려 증명하고 말았다. 에리 호에 대한 대중시위는 이것을 어떻게 보 존할까에 대한 결정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그 운동은 많은 대중의 인식을 제고하였고 생태학을 어디에서나 효
력있는 정치적 강령으로 민들었다. 이러한 방법에서 그 운동은 그 호수를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 었다. 그러나 이것이 대중운동의 목적은 아니다. 현대적 방식의 대중은등은 억 압 아래에서 갑자기 솟아난 것이었다. 대중운동들은 그것들이 흔히 그러하 듯이 홍낙回 증가되는 동안 강한 긴장을 수반하면서 왔다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 본질적 속성이다. 따라서 대중훈동은 상당한 정도로까지 자발적으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 시위에 관한 마지막 말은 아직도 레닌의 말이다. 그는 시위를 조직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특히 자발적인 시위논 더 어렵다고 덧 붙였다. 대중은동은 연장된 자발적인 시위이기 때문에 조직하기가 매우 어 렵다. 특히 민주적인 대중 2 동은 조직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대중운동에 대한 관심은 대 중 운 등 을 계속되게 할 것이며 그 운동에서 얻 은 교훈은 미래의 그것의 능력있는 조직자들에 의해 신중히 고려될 것이다. 그리하여 서양사회에 관한 한, 이념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제시하는 대중운 동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 공중도덕, 행정 또는 재판절차, 또는 법 률에서 그러한 변화를 가져오게 영향울 주며, 그리고 그러한 대중오 동은 그 것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사회에서 즉각적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여기에서 공산주의 국가와 다른 나라에서의 대중운동에 대해서 는 더 논의하지 않겠다. 그러나 분명히 폴란드와 이란의 경험은 비록 이것들이 민 주적인 산업사회에서의 대중운동과 아무리 다르다 할지라도-대중운동에 포함 되는 것으로 자격을 주어야 한다). 대중운동의 미래에는 두 가지 주요한 변화들이 무르익고 있는 것 같다. 첫째, 대중운동의 조직자들은 기대된 변화가 왜 일어나고 시대정신이 누그 러진 후에도 왜 바뀌지 않을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명백한 사례와 함께 명쾌한 논리를 제기해야만 할 것이다. 둘째, 명백한 사례들을 꾸며내는 주 요 도구는 토론집회와 대중매체가 될 수 있다. 대중들에 의한 정부는 불가 능하기 때문에 행정적으로 활동하는 대중들은 비난을 많이 받을 수 있다. 대중 재판관들은 야만적이기 때문에 대중들은 사법적으로 행동해서도 안 된 다. 그러나 대중토론집회는 전문가의 증언을 청취할 수도 있고 자원 봉사자 둘을심문할수도있는의회(국회)내의 위원회의 역할에 필적할만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대중매체의 미래의 역할은 사회적 정치적인 변화를 조성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조직자들은 급속한 행동을 규정하는 사건들의 전환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미리 한 걸음 앞서서 여러 가지 조치를 시 작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대중매체가 긴급히 요청되는 주된 이유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에게 그 문제의 어떤 철학적인 측면을 제기한다. 사 회적 혹은 개인적 행동에 대한 실증적 정당화의 문제로서의 귀납적 문제는 해결 불가능하다. 우리는 어떤 기술혁신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너무 느린지 또는 너무 빠른지를 결코 알지 못한다. 사회마다 이 모든 것을 규정 하는 기준은 다르게 가지고 있고, 그것은 정기적으로 검사되고 변경된다. 그 러나 어떤 혁신들은 기준에 영향을 받지 않고, 또 다른 어떤 기준들은 상 황의 긴급성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영향을 받는다. 군대 조직은 준바를 하 지 않아서 생기는 보다 큰 위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기술혁신 울 시험하고 이행히는 위험부담이 더 크다. 시장 메커니즘도 유사한 생각을 기업체에 불어넣는다. 조종사들은 활주로에 피가 흐른 뒤에야만 활주로가· 개선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아마 활주로가 기준은 충족시켜 주지만 그 기준들 자체가 부적당하고 너무 느리게 개선되기 때문이다. 인구 및 환경통제 문제가 긴급하다는 것은 대개 인정되고 있다. 그것들과 관련된 기준들이 매우 부적당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역시 인정되 고 있다. 따라서 대중훈동은 여기에 들어울 수 있다. 대중운동은 다른 운동 과 마찬가지로 실수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쾌히 인정된다면 이것 은 결코 실망스러운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특히 자발적이고 무 정형적 (無定型的)인 대중운동은 다른 어떤 조직체보다 더 융통성이 있을 수 ―단 우리가 병적인 히스테리에 빠지지 않고 그 비상상태를 분명히 직 면할 수 있다는 조건에서 -있기 때문이다. 다가오고 있는 기술적인 계 시의 위험을 합리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떤 대중운동이 기능 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그것에 관해 충분할 정도의 간략 명료한 어떤 의제를 제공할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대중운동은 자발적으로 자라기 때문에, 그것은 명백한 그리고
법적으로도 파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계획되고 조직되어야만 한 다. 그리고대중 2 동은 제시된 해결방안들에 관한 토론을 통해서 많은 대중 에게 새로운 인식을 일깨우기 위하여 주로 교육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리 고 제시된 해결방안들은 명백하고 뒤바뀔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면 우리는 정치적, 의교적 신뢰성에 대한 우리의 기준들을 변화시킨다는 생각을 가지 고 출발하겨, 이것이 평화를 증진시키는 국제기구(들)의 가치를 높이기 위 한 일종의 수단으로서 사용되기를 요구할 수도 있다. 이 제안은 결코 만족 스럽지는 않다. 이것에 중요한 추가 제안들이 있을는지는 거의 예측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협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UN 이 그나마 가지고 있던 얼마되지 않는 가치를 소비에트 동맹과 산유국들이 과괴하는것을서방세계가막고있지 않기 때문에,우리는대중 2 동을통하 여 강대국 정부들로 하여금 협상을 계속하고 그 협싱에 관해 성실하게 보 고하도록 압력을 넣기를 희망할 수도 있다. 그리고 똑같은 주장이 군비축소 회담과 관련된 것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즉, 그들은 가능한 한 개방적이고 솔직하여야만 한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세계의 비상사태를 국복하기 위 하여 UN 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보다 훨씬 새롭고 더 전실되고 더 효과적 인 조정기구가 되기를 희망한다. UN 의 회의에 신뢰성을 부과함으로써 UN 울 회복시키는 필요성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다. 4 책임 있는 민주적 지도력 이론에 대하여 고전적 자유주의 철학은 모든 개인은 자율적이므로 원칙적으로 지도력이 나 법이 필요없다고 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낭만주의는 대중은 타율적 이라서 지도력 있고 자율적인 지도자들――말이 곧 법인 영웅들_~이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자율적으로 법을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자율적인 지 도자 이론 ___ 민주주의 이론――은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 이론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국민들을 때로는 자율적으로, 때로는 비자율
적으로, 때로는 책임있게, 때로는 무책임하게, 때로는 유능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지혜가 풍부한 사람들로 디루어야만 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철학은 권력의 정당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단지 이상적인 국가 만을 또는 이상적인 모든 국가를(존재하는 최악의 것을 포함하여) 정당화했 다. 확실히 스피노자의 철학과 같은 예의들도 있었다. 그도 역시 자율적인 사람들은 지도력이 필요없고, 그들의 행동을 규제할 법률도 필요없다고 생 각했지만 그러나 그는 민주적인 지도자와 법률이 대중을 지율적으로 만들 기 위한 대중교육의 수단으로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조차도 너무나 비실용적이고 핵심을 벗어나는 것이다. 자율과 지도력이 모순되게 보이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즉, 자율적인 사 람은 스스로 결정하고 그래서 지도자나 그 의의 어떤 사람의 안내도 필요 없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자율적인 사람들도 그들의 여행 안내지를· 자유 스럽게 따른다. 여행 안내자는 안내를 받는 사람에 대해 책임을 가지고 있 다. 이때 안내자는 피안내자에게 안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안내를 제공 할 수 있을 뿐이다. 피안내자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안내자의 지시를 따라야 만 하기 때문에 자기의 자율의 일부(또는 전부)를 잃는 셈이 된다. 비록 우리가 이런 모든 것을 발달시켜 하나의 훌륭한 비평이 되게 하고 궁극에 가서는 고전적 개인주의 정치철학을 대치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이런 모든 것이 고전적 개인주의 정치철학에 대한 비평으로까지 이 르고 있지는 못하다. 우선 고전적 개인주의자들은 사회가 조정이 필요하다 는 것과 이 조정은 정치적안 수단에 의하여 효력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 에 대하여 그리고 그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조직이 필요 하다는 데 관해서 의심하지 않았다. 고전적인 논쟁은 정치적인 자유예 중십 울 두었지 조정에 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논쟁은 정치적 조정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을 문제시한 것이다. 어찌된 셈인지 권력과 조정간의 상호관계 는 대개 조사되지 않은 채 남게 되었다 .14)
14)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한 예의가 있었다. 즉, 1 8-'l]기에 경제 발전을 위하여 수임관세를 우호적으로 부과함으로써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중요한 질문은 정치인의 권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가 아니라 권력 없는 조정이 존재할 수 있는가? 이다. 따라서 그 여행 안내자의 예는 만일 그가 조정이 필요한 여행계획을 책임질 수 없다면 부적절한 것이다. 어떤 여행 안내자가 약간의 정치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매우 잘 알려져 있으며 동시에 또한 체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는 것도 사 실이다. 우리 모두는 지방정치는 물론이고 국가정치에 관하여 자유롭게 말 한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회사, 학교, 클럽, 그리고 모든 사회적인 단체 에서의 정치와 구분한다. 우리는 심지어 한 정당의 정치와 그 정당 내에서 의 정치까지도 구분한다. 광의의 정치적인 조직들보다는 조직체들 내에서의 정치에 대한 모든 논의는――회사나 대학교 내의 정치든지, 어느 국가의 정당 내에서의 정치이든지 또는 지방의회에서든지, 전국적인 노조 내이든지 지방노조 내이든지 ――보통 민주화에 대한 요구와 관계가 있다. 2 차대전 이후의 싱아탑을 엄습했던 참여 민주주의 이론은 모든 정치는 민주화되어 야만 한다는 주장으로 전행되어 가고 있다. 여기에서 정치란 전국민 모두에 게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조정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요구되는 권력 을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고전적 개인주의 정치철학과 현대적 개인주의 정치철학 사 이의 대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첫째, 고전적인 이론가들은 국가적 중앙정 부의 권력만을 토론하였다. 그들은 고용주가 직원들에 대하여 갖고 있는 권 력과 같은 보다 더 작고 그렇게 정치적이지 않은 권한을 무시하는 것이 매 우 정당하다고 느꼈울 수도 있다. 여기에는 강력한 이유가 있었다. 즉, 국가 의 중%넷력은 문제점이 더 많이 있었다. 중앙정부권력은 또한 다른 권력들 을 조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피고용인들은 국적보다는 고용주들을 더 쉽게 바꿀 수 있다는 것 등이 그 주된 이유였다. 오늘날까지 고전이론의 개인주 의와 자유주의 때문에 고전주의 이론울 지지하는 경제학자들은 비록 노동 강조했던 경제이론이 있었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가 그러한 관세 방법 울 어리석은 짓으로 〈입증했기〉 때문에 그 논쟁은 끝났다. 오늘날 고 전 경제학은 경제학이라기보다 오히려 경제적인 모습울 한 개안주의적 정치 0l 론 0l 다.
자의 자유가 고용 주 의 과도한 권력에 의해 불필요하게 억제되고 있다는· 것 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업장에서의 민주주의를 반대하고 있다. 둘째, 정치적인 권력의 정당성에 관한 문제는 〈우리가 어떤 조직들과 활 동들을 효율적으로 조정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권력이 필요한가浮柱근 질 문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범죄 를 줄이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경찰권력이 증가되어야만 하는가를 고려할 수 있고, 그러면 완전한 무정부 상태와 전체적인 독재정권 사이의 그 최적 조건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선택이론에서 흔히 있는 것처럼, 준법에 대한 동 기 유발을 목표로 한 법률제정, 교육, 지역경찰과 지역주민(특히 가난한 사 람들) 사이의 좋은 유대관계의 발전 등과 같은 경찰권력에 대한 대안들이 많 이 있다. 우연히도 이 마지막 요지는 참여 민주주의 주제와 매우 관련이 았 다. 즉, 보다 더 많은 대중이 민주적인 과정에 참여하면 할수록 더 좋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참여는 사람들에게 민주적 과정의 규칙과 느낌을 가 르쳐 주며 또한 국민의 정치참여 수준 ―― 현실적이고 잠재적인 _울 높 인다는 것이다. 셋째, 고전적 이론은 잠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정부의 실제적인 권력 을 다루는데, 이 이론은 그러한 정부는- 조정을 거의 하지 말아야 한다고 결 론을 짓는다. 고전적 이론은 정부에 야경원의 역할을 맡겨둔 채 비정치적 조직체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보다는 오히려 조정을 선호한 다. 어떤 조정이건 권력울 요구한다는 바로 그 생각은 마침내 사라져 버렸 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권력은 조정해서는 안 되는 정부에 주어지 고, 그리고 조정은 자발적인 단체, 특히 권력을 부려서는 안 되는 경제적이 고 상업적인 바로 그러한 단체에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을 요구하 는 것은 효과적인 조정을 할 수 있는 효과적 능력이며, 가까운 장래에 그러 한 종류의 정치를 제의하는 것은 바로 그 조정의 정도이다. 권력의 집중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많은 책들이 씌어졌는데 자유주의자, 다원론자 그리고 특히 자유주의적 다원론자들은 조금이라도 가능하다면 지 방분권을 선택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러한 일들을 결정하는가이 댜 중앙집권은 신속하고 통제된 조정의 가능성을 증대시키며, 그리고 심지
어 비효율적이고 비민주적이지만 그러나 중앙집권적인 정부가 때로는 민주 주의 일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는 효율적인 조정을 발휘한다. 그러나 중앙집 권은 또한 중앙에서 누구의 손에 의해 통제되는가에 따라서 비효율적일 수 도 있다. 그러한 일들을 사람들이 어떻게 결정하는가? 우선 무엇보다도 중 앙정치권력의 합법적인 영역은 무엇인가? 국가의 중앙정부들은- 무엇이 그 둘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반복하자면 홉스에서 스미스에 이르기까지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평화 를 지키는 것이 중앙정부의 유일한 기능이며 중앙정부는 시민 개인의 관심 을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게 하면서 단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 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것이 절대적인 독재주의를 추천했던 홉스가 스미 스와 함께 자유전영에 놓이는 이유이며 반면에 각자 개인이 자기 공동사회 의 일에 참여하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토마스 모어가 자유진영에 놓이지 않는 이유이다. 어떤 이상한 의미에서 침여적 민주주의는 비록 개인이 자유 스럽게 정치적으로 비활동적이지만 그러나 그는 자유스럽게 정치적으로 활 동적이어야 하며, 그리고 이 후자의 자유에 대해서는 중앙정부가 만족스러 워해야만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자유주의와 인민주의를 합치려고 시도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국가의 중앙정부의 고유 영역은 무엇인가? 리는- 질 문으로 되돌아오게 한다. 이 질문은 개방된 상태로 있어야만 하며 지방분권주의자의 규칙을 따라 야만 한다. 이 규칙이란 지방에서 합리적으로 잘 디루어질 수 있는 모든 질 문은 지방에서 다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중앙정부는 이 규칙이 적절히 이행되도록 감독해야만 한다. 중앙에서 취급할 필요가 있는 문제는 그것이 국가적으로 절박한 것인 한, 국가적인 문제가 된다. 그리고 물론 의교, 국 방, 그리고 한 나라의 국가적인 통화량 관리는 중앙정부의 문제가 되어야만 한다. 중앙정부가 자신의 통제 아래 군대와 효과적 재무관리가 있어야만 국 방과 경제를 운용할 수 있다고 예상한다면 국방과 재무에 관한 일들은 중 앙정부 통제 아래 남아 있어야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나라들에서는 중앙 정부 통제의 경찰이 필수적인 것처럼 보이고, 다른 나라들에서는 경찰행정 이 지방분권화될 수 있으며 또 종종 그렇게 되어 있다. 신 고전경제학자들
은 그 고전이론이 잠재적인 정치적 필요성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의 통 화관리에 대한 그들의 요구를 설명할 수 없다. 대신에 그 이론은 어상적인 정부의 실제적인 필요에 대해 말한다. 잠재적인 필요에 대한 생각 때문에 정부가 조직될 수도 있디는· 이 생각 은 특히 위험스럽다. 우리 모두는 비상시에는 민주주의가 일시 정지될 수도 있다고 동의한다. 일단 우리가 잠재적인 비상 사태를 어떤 고정된 요인으로 서 허용한다면 민주주의는 영원히 없어지고 말 것이다. 잠재적인 비상사태 에 대한 어떤 협정이 없다면 정부는 무책임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약 어떤 정부가 계속해서 비상사태에 대비하고 있는 것은 비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합리적인 경계선은 어디인가? 이 문제는 어떤 철학자에 의해서도 토론된 적이 없다. 정치적 권력의 정 당화는 민주주의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엘리트주의이든지 인민주의이든지 간에 과학의 권위로 이끌게 된다. 민주주의를 국민의 of the peo p le 정부로 정의하게 됨으로써 민주적인 과정 (비록 이것이 아무리 비민주적아었다 하더라 도)에 의하여 선출된 정부는 어떤 정부이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게 되 었다. 또한 민주주의를 국민에 의한 by the peo p le 정부로 정의하게 됨으 로써 혼란의 결과를 가져왔고, 민주주의를 국민을 위한fo r the peo p le 정 부로 정의하게 됨으로써 자비심을 베푸는 독재정치를 낳게 되었다. 민주주 의를 토론에 의한 정부라고 정의한 어네스트 바커의 정의는 뛰어나다. 특히 그 정의가 참여적 민주주의로서 이해될 때 더욱더 그러하다. 그러나 이것 은 너무나 많은 질문을 미해결된 채로 남겨둔다. 포퍼 경은 민주주의를 피 룰 홀리지 않고 국민에 의해 전복될 수 있는 정부로서, 그리고 그러한 전복 이 제도화 —— 보통 법에 의해 주기적으로 치러지는 총선거에 의해 -되 어 있는 정권으로서 정의했다. 이 정의는 지금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은 분 명히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것이 충분하 다는 주장은 정부를 최소한의 기능만을 갖는 것으로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 은 포퍼의 이론을 고전적 정치철학의 개선된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 유는 매우 간단하다. 이것은 단지 정부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시도들이며 그리고 정부가 특별히 어떤 일을 하도록 권력을 허용하지 않는 이론인 것
이다. 이것은 정부에게 조정하고, 통제하고 또는 국방의 기능을 하도록 허 용하지 않는 이론이다. 더구나 이 이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국민에게 책임있게 제시하지 못하는 정부는 비난하지 않고 국민에게 인기 없는 어떤 일을 하는 정부를 비난할 수 있을 뿐이다 . 더욱이 아 이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정부가 왜 가능한 한 너무 짧은 임기로 선출되지 말아야 히는지, 그리고 정부가 대 중이 원치 않는 일을 시도하려 할 때는 언제든지 왜 교체되어야만 하는지 에 대한 이유가 필요없는 것이다. 이것이 대중들로 하여금 민주주의보다는 전제정치를 좋아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하고 보편적인 원인인, 민주주의의 불안정성을 일으킨다는 것은 상식이다. 분명히 무언가 여기에서 잘못되고 있다. 포퍼의 민주주의 이론은 만일 말 그대로 철저히 이루어진다면 민주주 의 국가에게는 위험스러운 것이다. 정부가 얼마나 안정되어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은 철학적인 질문이 아니 라 실제적 인 질문이다. 여러 가지 민주주의 국가마다 각자 실행하는 절차가 다르고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사이의 만족할 만한 균형을 찾는 방법 들도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이 질문에 대해 일반적인 대답을 기대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다―一기껏해야 우리는 일반적인 기준울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정부는 너무 안정되어서는 안 된디라고만 주장 하면서 민주주의의 정의에 대한 포퍼의 견해를 부정적이라고 고집한다면, 이 주장을 만족시킬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민주주의는 가능한 한 불 안정한 것이 더 좋다라고 말하는 결과가 된다. 우리 모두가 아 대답을 거절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민주적인 정부도 모든 정부처럼 긍정적인 역할을 가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반대자들 은 그 긍정적인 역할이 민주주의 국가가 허용하는 것보다 더 큰 안정을 요 구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잘못이다——단지 반박된 편견일 뿐이다. 그러나 포퍼가 말하고 또 그렇게 행하는 것처럼 철학은 단지 부정적인 면에도 관 심을 갖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즉, 우리는 정부의 긍정 적인 면, 그러한 책임에 관십을 가져야만 한다. 포퍼의 말은 아직도 대부분 옳다__민주주의는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위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고, 그리고 어떤 일반이론이 그 메커 니즘을 명료화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 정부는 그 이상의 것을 해 야만 한다. 바꾸어 말하면 민주주의 정부는 평화적인 국가 의제의 교체를 위한 메커니즘까지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류의 생존은 모든 국가의 의제 중에서 제일 중요한 항목이다. 국가적인 의제에서 평화가 얼마나 높은 위치를 차지하느냐 하는 것은 평화주의자에서부터 공 리주의자에 아르기까지 철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되고 있다. 세계평화가 접 점 인류생존의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에서 이 논쟁은 점점 이론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구조상의 메커니즘과 국가적인 의 제의 교체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한두 가지 추가적인 논평이 더 필요하 다 . 고전적인 합리주의자들은 오류가 전혀 없는 정치학을 발달시키기를 열망 했고 그리고 더 나아가 올바론 의제를 발달시키기를 열망하였다. 고전적인 낭만주의자들은 지도자들이 직관적으로 올바른 국가적인 의제가 무엇인지 롤 안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우리는 오류를 피할 수 있는 어떤 보장도 희망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무책임한 오류는 피하기를 희망할 수 있다• 그 리고 이러한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어떤책임 있는 국가적인지도력을 발 달시키기를 희망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인 · 것으로 선언되었다. 이것이 결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공백을 남겨 놓았다 ―우리는 아직도 민주적 지도력에 관한 어떤 이론도 가지고 있지 않다. 책임 있는 민주적 정부이론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책임 있는 지도력은 무책 임한 지도력을 대치할 수 있으며 (그리고 민주주의의 규칙이 요구하는 바와 같 이 유혈사태 없이 가능할 때는) 심지어 그 정부를- 인계받을 수조차도 있다는 것은 경험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권력을 잡고 있는 무책임한 지도력을 대치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지도력이 없을 때는 민주주의뿐만 아 니라 어떤 체제도 그 국가를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국가가 정부 내부적으로나 의부적으로 공히 책임 있는 지도력을 갖고 있는 것은 물론, 정부가 평화스러운 수단에 의해서 교체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는가? 이것은 민주적 정치철학아 직면 해야만 하는 새로운 문제이다. 이 질문의 중요성은 자율 의에도 책임에 대 해 새로운 강조를 했다는 점에 있다(이 접은 포퍼가 이미 여러 글에서 암시적 으로 지적한 문제임). 이 질문의 또 다론 중요성은 책임 있는 지도력은 집권 당 정부의 손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반대자와 여러 시민단체의 손 안에도 있다는 주장에 있다. 이것은 광의의 정치적 권력이자 하나의 정치적 잠재력 인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여러 정당의 광범위한 여러 조직들, 자발적인 정치 단체들, 그리고 다양한 대중운동과 같은 국회 외부에 있는 훌륭한 여 러 조직들 속에 들어 있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가능한가? 정부와 의회제도 밖에(즉 정부와 의회제도에 대한 압력단체로서) 정치적인 지도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그 이유 는 부분적으로는 정치가국가적 정치제도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 다. 특히 일부 정치적 지도력이 정규적으로 경제적, 산업적, 군사적 그리고 지적인 분야의 지도력으로부터 선출되는 나라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 러나 또 부분적으로는 정치가 비정규적인 형식으로 정치에 관여하는 사람 들의 공적인 책임감과 재능의 발휘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책임감 문제는 단지 2 차대전 후에야 정치철학에 도입된 것이다. 2 차대전 전에는 오늘날보다 더 많은 책임이 있었지만 책임에 대한 논의가 부족했다. 디론 여러 사회의 귀족들은 자신의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이 그들의 당연 한 책임이라고 항상 생각했다. 그것이 그들 귀족의 의무라고 말했다. 그러 나 점차로 이것은 의무를 수락한다는 표현이라기보다도 차별대우에 대한 변 명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민주화가 도입됨으로써 사태를 호전시키게 되었 다. 그리고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귀족주의에 반대하는 민주주의의 옹호자들 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책임에 대해 모순되는 모든 문제를 경시했다.이론적 으로, 그들은 책임이란 것을 자율이라는 것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즉, 책임 은 단지 자기 자신의 것일 수 있으며 또는 한 사람을 정치적인 지위에 임 명하는 경우에는 지율적인 자기 동료의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철학에 대한 반작용이 발전되었을 때, 그 새로운 철학은 지도자는 지율적이지만 그 의 국민들은 타율적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므로 그 철학은 지도자의 자율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책임이 아니고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 국가 또 는 역사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완전히 무책임한 사람들로 하여금 한쪽으로는 깊은 책임감을 표현하면서도 그들 자 신과 역사에 대해서는 자기 실속을 차리고 무모하게 행동할 수 있게 하였 다. 책임 있는 지도력은 모든 사회에서 볼 수 있으며, 또한 개인의 자율이 장 려되지 않는 곳에서 볼 수 있다. 명백히 인류학자들이 관찰한 것처럼(에드 워드 에반스 프리차드 경, 어네스트 겔너), 귀족들은 통치자가 되기 위한 교육 을 받았던 덕택에 종종 자율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율은 그들의 책임감 과 통치자로서의 책임있는 행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그 반대는 결코 아 니다. 또한 정치적으로 책임감있게 행동했으나 반면에 종교적으로 아주 타 율적이었던 통치자들의 예는 많이 있다. 결국 자율은 자발적인 근거에 의한 경우를 제의하고는 책임감을 요구하지 않는다. 즉, 일단 어떤 한 개인이 대 표자가 되는 것에 동의하면, 그는 그의 동료들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것이 다. 그러나 지율에 관한 한, 그 동료들의 봉사는 의무사항이 아니라는 것이 다. 완전히 자율적인 계몽된 사람들로 이루어졌던 사회는 어쨌든 지도자들 울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지도력은 필요하다. 지도력은 국가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주도권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선도하고, 조정하고, 또 중재하기 위해서도 필요하 다. 고도로 전문화된 세계에서 국가적인 지도력은 군대 지도자들, 경제적 지 도자들, 산업 지도자들, 또는 재정적인 부호들에게 나뉠 수도 있다. 이것은 정치적 지도력은 더 이상 필요없다는 인상을 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문 적인 지도자들 사이의 조정은 전쟁을 선포하거나 의국에 원조를 보내는 것 과 같은 중요한 결정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더 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그러 한 것들은 국가적인 정치 지도력의 손에 남아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정치 지도력은 초전문가(철학자 왕)의 지도력일 수도 있으나, 그러나 그것은 반 드시 융통성이 있고 민주적인 지도력이어야만 한다. 누가 이끌어야 하는가? 포퍼는 이 질문에 답하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 답은 철학자 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포퍼 자신의 회의론과 결
부해 볼 때 맞기도 하고 아주 해롭기도 하기 때문에 이 거부는 취소될 수 있다. 즉, 포퍼의 회의론에 따르면 우리는 누가 가장 훌륭 한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포퍼는 우리가 나쁜 통치자 룰 제거할 수만 있다면 그건 상관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통치자들은 자격을 갖추기 위해 거의 할 일이 없다는 가정을 은폐시키는 것으로 포퍼의 견해 를 보수적 __ 고전적 자유주주의의 한 변형 ― — 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 러나 오늘날과 같이 여러 가지 문제와 위험으로 둘러싸여 있는 세계에서는 더 이상맞지 않는다. 포퍼는 새로운 상황과 또한 그 상황이 초래하는 새로운 문제들을 알고 있 었다. 그는 그것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제안까지도 갖고 있었다 . 그는 이것을 격언의 형태로 나타내었는데, 죽 귀족에게 도덕적 의무가 수반 되는 것과 병행하여 현인에게도 도덕적 의무가 수반된다는 것이었다 . 귀족 에게 의무가 수반된다는 것은 결국에는 귀족들이 그둘의 특권을 방어하기 위해 가졌던 미약한 변명이 되었다. 즉, 그들은 귀족 신분이 권리보다 의무 룰 더 수반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것들은 그들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둘 다 없어졌다. 현인들에게 도덕적 의무가 수반된다는 것은 기술관료의 변명과 같을지도 모른다. 오늘날에 있어서 지식은 의무를 수반히는대, 그러나 아마 도 포퍼 자신의 견해에 의하면, 우리는 지자(智者)로 하여금 민주적인 통제 아래에서 그리고 민주적인 합의의 덕분으로보다는 그의 지식의 덕분으로 통 치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포퍼가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들이 통치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들 자신 의 생각을 실행하는 데 의도하지 않았던 여러 가지 결과(특히 바람직하지 않 은 결과)를 연구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한 요구를 강요하는 것은 분명 히 현명하지 않은 것 같댜 죽, 그러한 요구란 대중들이 공공의 책임이 요 구하는 정도로까지 이러한 연구들을 실시할 수도 있다는 요구를 . 말한다• 만 약 어떤 사람이 대중은 지도력을 필요로 한다는 이유로 이 대안을 반대한 디편, 그는 포퍼 경이 현인들의 도덕적 의무라는 격언을 통하여 우리가 과 학자들을 의회 밖의 정치지도자로서 임명하는 것을 추천한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명백히 우리는 의회 안과 의회 밖 모두에서 정치적인 지도력이 필
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포퍼가 반대한 바로 그 질문 一 一 누가 이끌어야 할 것인가? ―― 을 물어보기 전에는 과학자들을 지도적 지위에 임명해서는 안 된다. 포퍼가 과학자들을 지도적 위치에 임명하는 것을 추천했다고 가정하는 것 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가 추천하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 자기 임명 self- a pp o in t m ent, 또는 사회학 용어를 사용하자면 정치적 자기 선발 self- s electi on 이다. 그러나 이것도 의심스럽다. 이 자기 선발은 어느 정도 전문직의 윤리 - 기술윤리(마리오번지) ― ~상의 문제이며 이것은 더 발달되어야 하고 모든 기술적 연구에 그리고 아마 심지어는 직접적으로 기 술적 관련이 있는 모든 과학적 연구에조차도 의무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 책임감은 그것을 넘어서므로 의무적이 되어서도 안 되며 더 욱이 정치적 책임감은 어떤 사회적 집단 내에 남아 있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책임 있는 사람을 선정해야 한다. 그러한 사람이 자발 적으로 나설 수도 있다. 민주주의 국가나 여러 문화권의 영적 지도자들 가 운데에는 스스로 나선 사람이 많이 있다. 정치적인 책임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은 그가 어떤 직책을 갖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어떤 직책을 떠맡고 있다고 해서 항상 지도자는 아니다.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소망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훈련의 문제이며, 어떤 기법을 획득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 훈 련은 보통 대부분의 기능들처럼 견습과정에 의해서 획득된다. 기술적으로 발달된 사회에서 견습과정은 연구를 수반해야만 한다. 지도력은 아칙까지 비민주적인 것같이 들린다는 이유와 지도력은 주도권을 발달시키는 문제이 므로 거의 학습될 수 없다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러한 연구가 오늘날까 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러한 사실에 기초해 볼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민주적인 지도력의 기법들, 예를 들어 논쟁들을 잘 완화하는 것, 위원회 활동 ~l 참하는 것, 의사 결정을 하고 심지어 나중에 회고해보고. 자기의 결정이 실수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결정을 고수하는 것 등 과 같은 기법들이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삶의 모든 분야에서 그리고 모든 조직화된 사회에서 권력정치가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적인 과정에 일반대중이 참여하 는 것이 민주주의를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한( 결 코 충 분한 정도로 보호될 수 는 없지만) 가장 잘 알려진 방법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에 덧붙 여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구조적 틀을 모두 초월할 수 있는 어떤 정치 적인 연구를 위한 지적인 구조적 툴을 발달시키면 이것이 바로 책임 있는 지도력에 관한 연구를 위한 더 많은 여지를 열어 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전파될 수 있고 응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도자에게 요구하 는 것이 무엇인지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가 정치적인 지도력과 민주주의를 조화시키고 더 나아가 지도력과 도덕적인 지율성을 조화시키는 것은 훨씬 쉬워질 것이다. 지금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 더 이상 중요한 요인이 아닌 사 회를 만들어 나갈 때이다. 결국 권력에 대한 욕망은 한때는 그렇게도 강했 지만 지금은 다행히도 대부분 사라져 버린 질투에 대한 욕망과 전혀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권력에 대한 욕망을 제어하기 쉬운(다루기 쉬운) 규모로 줄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비록 애들러와 러셀은 권력에 대한 욕망을 다루기 쉬운 규모로 줄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지만 나는 불가능하다 고보지 않는다. 5 맺는말 현대 세계의 문제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직면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나 다. 이런 관접에서 기술에 대한 모든 반대 의견들은 옳다. 그러나 해결책이 있다면 그 해결방안은 기술을 되보시키기보다는 더욱 더 발전시키고, 이전 보다 더욱 더 합리적이게 함으로써, 그리고 기술가정치 t echnocrac y를 억압 하기보다는 더욱 더 민주화시키는 것에 있다. 우리는 절대로 책임을 전문가 들에게 위임해 버려서는 안 된다. 아마도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다. 아마도 은총의 시기가 실제적으로는 끝났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셀의 지적과는 달리 합리적인 전
환 행동이 사태를 변화시키고 그리고 인류가 파괴되느냐 아니면 미지의 이 상세계에 대한 꿈을 실현하느냐의 양자 사이에 큰 차이를 보여줄 것이라는 점은 불가능하지 않다. 바로 이것이 양자택일을 해야 할 유일한 두 가지 문 제인 것처럼 보인다. 미지의 이상적인 꿈을 가진 새로운 자유사회는 이전보 다 더욱 더 기술적이어야만 하고, 더 지방분권화되고, 더 국제적으로 협조 가 이루어져야만 하는 사회일 것이다. 미래의 사회는 사람들이 더욱더 교육 울 받고, 인구가 제한되고, 평화로우며, 생태학적으로 균형잡힌 세계가 되 어야만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필사적 노력은 인류의 소멸과 생존이라는 양자택일의 문제에서 엄청난 차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역자해제 이 책은 2 伊1 l 기를 사는 지구촌의 현대인들에게 매우 절박한 메시지롤 전 달하기 위해 씌어졌다. 이러한 메시지가 나오게 된 동기는 한마디로 현대 과학문명이 낳은 기술이 지구상의 생태계를 파괴하거나 인간의 존재 자체 룰 종식시킬 수도 있는 무서운 수단을 만들어낸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더욱이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 살면서도 현대 정치지도자를 포함한 대디~ 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무시하거나, 단지 하나의 정략적 위기감을 만들어내 는 수단으로서만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관련된다• 더욱이 시간이 흐를 수록 지구상의 생태학적 재난의 위협은 엄청난 속도로 증대되고 있지만, 이 에 대해서 거의 아무런 대책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매우 다급한 목소리로 현대 문명사회를 기술의 위기 시 대로 규정하고 있다. 고도로 발달된 기술은 이미 지구촌의 생태계를 파괴하 는 흉기로 전락했다. 따라서 인류의 생존 문제는 현대 기술사회가 이제 우 리에게 물려준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되어 버렸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살아 남을 수 있으며, 평화스런 미래의 이상사회를 꿈꿀 수 있는가? 머지 않은 인류의 장래에 예견되는 끔찍한 여러 가지 재 양들을 어떻게 예방할 수 있는가? 저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노력을 이 책을 통하여 전지하 게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은 모두 3 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 1, 2 부가 기술에 대한 개념 정의와 이론적 체계를 위한 역사비평적 탐구과정이라면, 제 PR 근 실천적 행동을 위한 개략적인 프로그램의 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포괄적
이면서도 단계적인 접근을 통해 현대사회와 기술과의 유기적 관계를 철학 적으로 분석하고 그 위상을 극명하게 제시해 줌으로써 문제해결의 실마리 를 찾고자 한다. 저자가 지난 20 년 동안 세계의 여러 곳에서 연구하고 강 의한 내용이 마치 인류 구제를 위한 탄원서처럼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저 자 애거시 교수는 우리의 과제는 인류를 파괴하려고 위협하는 오늘날의 기 술 통제할 수 있는 보다 높은 차원의 기술을 개발하고 새로운 기술의 통 제수단을 창안하여 실천에 옮기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여기에 그의 사 상적 특성을 설명해 주는 기술철학과 기술사회학의 정신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면 현실적으로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인류 구제를 위한 기술철학이 깊이 있게 팀구되고, 그 구제의 방법론이 실천적 으로 제시되어야만 한디는 점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저지는 매우 조심스럽게, 그러나 일관성 있게 몇 단계의 논리를 제 시하고자 노력한다. 이제 현대문명이 낳은 기술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방 안으로 저자가 피력한 기술철학적 방법론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시급한 조치는 기술위기가 몰고 온 당면과 제에 대한 폭넓고 깊이 있는 자각과 인식이다. 그러한 인식이 선행되지 않 는 한 우리의 노력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제기한 현대문명과 기술이 낳은 당면과제는 생태계의 파괴로 집약되는 기술의 부 정적 측면이다. 생태계 자체를 송두리째 위협하고 있는 세계적 문제는 환경 오염과 핵무기 확산, 그리고 기아와 인구폭발 등과 같은 것들이다. 그렇다 고 해서 기술을 포기한다거나 개발을 억제하는 것은 바람직한 처방이 아니 다. 오히려 기술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보다 높은 차원의 기술을 개발하 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모든 기술개발에 있어서 기계의 가속장치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 려 가속장치 못지않게 김속장치나 제동장치도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기술 의 통제장치가 제도적으로 확립되어야 한다는 과제가 성립된다. 기술의 부 정적 결과에 의해 생태계의 파괴라는 세계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현대인 들에게는 기술의 통제나 관리의 문제가 바로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댜 그래서 기술과 사회, 윤리의 문제를 유기적으로 통합하여 탐구하
는 기술철학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현대의 기술철학이 갖는 관심은, 기술이 인류에게 이로운 것인가, 아니면 해로운 것인가? 우리가 우리의 여러 기술에 대한 통제를 상실한 적이 있는 가? 기술이 번성하도록 만드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등이다. 이 에 대해 기술철학은 크게 두 부류의 주장으로 나뉘는데, 이 책의 저자는 기 술에 대한 낙관주의 대 비관주의 논쟁과 경제에 대한 우익과 좌익의 모든 급진적인 견해를 피할 수 있는 어떤 중도적인 견해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 는가를 탐구하고 있다. 벅크민스터 풀러의 지적처럼 모든 가치있는 기술철 학의 핵심적 주제는 지구호라는 우주선이 유지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바람직한 기술의 통제를 위한 철학과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두번째 논리는 그러면 그러한 기술의 통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끌 수 있 는 정치적 제도나 메커니즘이 무엇인기러는 점과 관계된다. 저자가 꿈꾸고 있는 전략은 어떤 세계적 혁명을 대신할 수 있는 중장기적 대안과 대다수 의 사람들에게 개선을 위한 투쟁에 보싱을 높일 수 있는 단기적 대안, 그리 고 이 두 가지를 효과적으로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통제의 행 위 자체가 자발적인 힘과 효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정치적이어야만 하고, 바 람직한 대중의 합의에 의한 것이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철저하 게 민주주의적인 메커니즘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대중의 참여를 폭넓게 선택할 수 있고, 그들의 합의를 창출하여 바람직한 통제의 길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 정자나 국가 행정을 담딩하는 사람들이 과학기술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지 식을 가지고 국가를 통치해 나가는 기술가정치 t echnocrac y가 적극 장려되 어야한다고주장한다. 그러나 현대의 정치적 현실은 만만치가 않다. 왜냐하면 정치가 신뢰성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신뢰성을 다시 회복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기술과 생태계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의 긴 급한 과제 중의 하나는 현재의 낮은 정치적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신뢰성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민주주의의 폭을 넓혀나가는 일이다. 게다가 정치인들
의 신뢰성 못지않게 더더욱 우려되는 것은 생태학자들의 신뢰성과 무력감 이 더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는 점이라고 지적하며, 이들마저 신뢰성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전제하에 신뢰성을 회복하기 위한 사회적 • 정 치적 규범을 수립하는 일에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세번째 논리는 민주적인 기술의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전략적 방법에 대 한 언급이 주어진다. 현존하는 기술의 재난과 싸울 수 있는 무기는 역시 민 주적인 교육의 힘이 밑바탕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란 본래 교육을 통해서 정 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보다 많은 시민을 참여시키는 제도라고 한다면, 교육 은 민주적인 통제를 가능케 하는 필수조건이 된다. 어떠한 경우에도 교육을 능가할 수 있는 지름길은 없다고 믿는다. 교육의 힘은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대중 오 동 을 일으킬 수도 있고, 입법부에 입력울 가하여 기술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입법화하게 할 수도 있다. 또한 노동자 스스 로 자기 자신의 기술과 업무를 통제하게 할 수도 있고, 자기 회사의 생산 품이 소비자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환경오염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데 참 여시킬 수도 있다. 교육의 힘은 이처럼 단기적 전략과 중장기적 전략을 연 결시키는 실질적인 추전력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민주적인 통제의 메커니즘과 교육적 전략이 바람직한 차원 으로 성공을 거두게 된다면 우리는 숙명처럼 다가오고 있는 지구촌의 생태 계 파괴라는 엄청난 위기로부터 탈출할 수 있으며, 자유롭고 평화스러운 미 래의 행복을 꿈꿀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번째 논리는 성공적인 기술의 통제를 통해서 도달하게 될 이상향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단계이다. 저자는 현실적으로 완벽한 이상 사회의 건설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가능한 이상사회의 모습을 현실 과 완전한 이상사회의 중간단계쯤에서 찾고 있다. 이른바 준(準)이상사회 se mi-Ut o pi a 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그가 중장기 적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는 중간단계의 이상향이다. 준이상사회란 완전하지 는 않지만 빈곤, 인구폭발, 핵무기 확산, 환경오염 등으로 상칭되는 절박한 세계의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조절하는 민주적인 미래사회의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준이상사회는 절대적 빈곤이 없는 평화스러운 세
계 속에서 유지되어야 하고, 전 세계적으로 바교적 효과적으로 통제된 환 경과 인구를 유지하면서 정치적 관용을- 허용하는 그런 평화스러운 세계 속 에서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러한 준이상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가? 이 점에 대하여 저자는 선명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대략 다 음과 같은 몇 가지 방법을 찾고자 노력한다. 그것은 바람직한 민주화를 신 속하게 이루어낼 수 있는 어떤 제도적 조처와 함께 교육을 통하여 민주적 인 통제의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이를테면 첫째, 사회기술과 기술윤리학을 통합해야 한다. 둘째, 더 많은 연구유인책에 대한 탐구와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전 세계적이고 민주적인 대중은동 을 전개해야만 한다 . 넷째, 우리를 이끄는 지도자는 민주적인 지도원리를 정치 철학으로 가지고 있는, 지도력과 책임감이 있는 사람을 선정해야 한다. 다 섯째, UN 의 기능을 확대하여 UN 이 가지고 있는 효과적인 조정기능을 부흥 시켜야 한다. 여섯째, 기술은 전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키고 민주화 시켜야 한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앞서 제시한 그런 이상사회는 국제적 합의와 협조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본다. 또 필자는 준이상향이라는 우리의 중간목표의 건설과 현실적인 단기목표인 당면과제 사이를 연결하는 방법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이상사회를 향하여 직접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과정과 민주화의 과정을 통하여 지식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선도적 역할을 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분명 계몽주의적 차원에서 생태계의 파괴라는 인류 최대의 과제 롤 기술철학, 혹은 기술사회학의 관점에서 매우 체계적으로 탐구한 역저임 에 틀림없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 그렇게 절박한 위기의식을 모든 인류에게 심어 줄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만도 이 책은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판 단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미 과학기술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미 래사회가 기술가정치 t echnocrac y를 억압하기보다는 더욱더 장려하여야 한 다는 애거시 교수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실제로 프랑스의 경 우 정부의 행정을 담당하는 공무원은 물론이고 위정자들까지도 대부분· 공
학 eng ine erin g 에 대한 지식과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아 이를 입증해 주 는 한 좋은 예라 하겠다. 그러나 애거시 교수의 계몽주의 철학에 대한 열렬한 옹호론과 현대문명 의 위기와 기술철학의 역할에 대한 뛰어난 탁견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문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 그가 주장하는 민주주의적 기술 democra ti c t echnolo gy이란 것이 실제로 어떻게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인지, 또한 민주주의적 기술은 어떤 종류의 사회적 경제적 질서를 요구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설명을 제시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둘째, 기술적 인 변화 tec hnolog ica l chang e 와 관련하여 개발도상국가가 직 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특수한 문제점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있었더 라면 좋았을 것이다. 다시말해서 개발도싱국가나 후전국가의 경우에 국가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경제발전이 필수적이고, 경제건설을 위해서는 과 학기술의 발전이 선행되어야 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선례에 비추어보면 지동`차와 굴뚝은 매연을 뿜어내야만 하고 공장은 폐수를 내보내야만 한다. 따라서 어느 측면에서 보 면 애거시 교수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환경오염 방지 및 생태계 보 존 문제는 경제 발전과 깊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앞으로 개발 도상국가가 경제를 부흥시키려면 기술개발 내지는 기술변화가 뒤따라야 하 는데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깊은 논의가 있었더라면 하는 것 01 다. 셋째, 가장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이 책이 좀더 근본적인 조치와 처방에 대한 방향모색이 있었더라면 하는 점이다. 물론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완전한 처방을 내리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그리고 현 대의 기술이 몰고 온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어떤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 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러나 근원적 치료와 응급조치를 병행 하는 것이 한층 소망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책 의 논리와 체계가 현상의 당면과제의 인식에서 출발하여 기술철학적 통제 를 통하여 준이상사회에 도달하는 비전을 제시한 뒤, 보다 완벽한 이상사회 를 최종적인 탐구의 목표로 설정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완전한 이상사회의 건설이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인간의 끝없 는 이상추구의 욕망에 철학적 비전을 제시해 주는 것이 보다 철학적이고 인 간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인류가 참다운 인간성을 회복하여 신 의 섭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면서 자연과 같은 심성으로 돌아가는 동양적 심성의 회복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가장 섬뜩하게 둘려 주는 메시지는, 우리는 지금 멸망과 소멸의 길로 계속 질주하느냐, 아니면 인류의 생존과 미래의 이상세계 건설을 위해 국제적 합의를 모으느냐 하는 중대한 양자택 일의 기로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해답은 이미 주어졌다. 방황할 시간이 없다. 어쩌면 신의 은총의 시간이 끝났는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온 인 류의 필사적 노력만이 구원의 조건으로남아있을뿐이라는사실을아는것 이 중요하다.
역자후기 이 책은 현재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물론이고 세계 각국에서 큰 관심을 끌 고 있는 조셉 애거시 Jo sep h Ag as si 교수의 Technolog y-P hil os op hi c al and Socia l Aspe c ts (D . Reid e l Publish in g Co., D ordrecht/ B osto n (L a ncaste r/ Toky o, 1985) 의 완역본이다. 조셉 애거시는 현재 캐나다의 요크 대학교 York Un ive rsity 와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대학교 Tel-Av i v U ni vers ity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 으며 최근에는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초빙되어 기술사회학 및 기술철학 강의를 담당하고 있다. 그밖에도 여러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그리 고 여러 모임과 단체의 초청연사로 활약중이다. 애거시 교수는 이 책 의에도 이미 Faraday As a Natu r al Phil os op he r(i 911 ) 와 Sci en ce and Socie ty :S e lect e d Essays in the Soc iol og y of Scie nc e(1 9 81 ), 그리고 The Gent le Art of Phil os op hi c a l Polemi cs ( 1986) 라는 저서를 통하여 대단히 전 지하고 성실한 자세로 기술사회학 및 철학적 측면에서 과학기술 문명에 대 한 우리의 반성과 자각을 일깨워 주고 있는 석학이다. 이 책은 애거시 교수가 오랫동안 관심을 표명해 오고 있던 과학기술과 철 학, 윤리학 그리고 사회학과의 이론적 접목 문제를 시도한 역작이다. 그렇 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다소 딱떡하고 무미건조한 책처럼 느껴 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의 주제, 죽 물리적 기술과 사회적 기술을 접목 시키려는 그의 시도, 다시말해서 과학기술과 인문사회과학을 전혀 별개의 유리된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동일선상에 놓고 이를 조화 있게 연결하 려고 하는 그의 고뇌는 곧 나의 고뇌요 오늘날 모든 지성인의 고뇌이기도
하다. 과학기술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의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드는 데 있 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만들거나, 인류를 파멸의 구 렁텅이로 빠뜨린다면 그러한 종류의 과학과 기술은 마땅히 폐기되어야만 한 다. 반성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디는 사르트르의 지적처럼 우리는 과 학과 기술의 발전에 앞서 과학기술의 발전이 초래할 수도 . 있는 인간의 도 덕성을 포함한 철학적, 사회학적 문제를 반드시 생각하고 넘어가야만 한다. 만약 철학적, 윤리적, 사회적 기초 없이 과학기술의 발전만을 추구한다면 우 리 모두는 분명히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현재 미국, 캐나다, 일본을 포함한 세 계 각국에서 기술사회학 및 기술철학 분야는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편집 자 서문에서 마리오 번지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현재 이 분야의 전문적 인 학회들과 학술지들이 생겨났고 이와 관련한 2 , 000 여 개의 강좌가 전 세 계적으로 개설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와 관련해 볼 때 이 책이 한국에 이제 야 소개됨은 다소 늦은 감이 든다. 나는 한국의 과학기술 수준이 상당히 급 속도로 발전해 왔고, 또 현재 그렇게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사 회학 또는 기술철학 분야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음을 매우 안타깝게 여겨 왔다. 이러한 현실울 감안해 볼 때 이 책은 이 분야의 개론서로서 좋은 교 재가 될 것이다. 특히 이 책은 과학기술정책과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과학기술정책의 수립, 집행 그리고 평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서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더욱이 이 책은 과학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 두에게 필독 도서가 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폐장(肺臘)을 쪼그리고 앉아서 한 거인의 영혼의 족적 (足跡)을 따라잡느 라고 여러날 밤을 설쳤다. 작가의 정신을 따라잡지 못한 번역은 죽은 번역 이라는 신념이 언제부터인가 내 영혼의 깊은 곳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 고사(古事)에 우행호시 (牛行虎視)라는 말이 생각난다. 범처럼 살피되 소걸음으로 가라는 가르침이다. 참 좋은 말이다. 관찰은 예리하되 서두르지 않도록 나는 더욱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
199 呼 뗀 역자
-, 가이 뭐케스 29s 갈릴레오 66, lj 2 , lj} , 179, 204, 222, 224, 241, 24), Zj I 고든 瑾 고트홀드 에프래임 레씽 39, 193 구스타브 메이링크 38 굴래그 아키펠라고 346 글렌 굴드 76, 79 기오바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Ip , I52, 1 길버트 l L 나단 199 나폴레옹 134, zi9, 276 네빌 슈트 103 뉴턴 39, 41, 66, 69, 8z, 141, 15 I, 165, 180, 198, 199, 205, zz3, zz4, 2~0, 239, 241, 254, 255, 256, 258, 259, 267, 277 C 다니엘 벨 338 다윈 I34, I86, 235, 237, 2}8, 242, 263, 279 데니스디데롯 函 데이비드버드워스 函 데이비드 홈 函, 165, 167, 179, 189, Z37, 265, 265 데이비드 힐버트 I97, 225, 226 데카르트 137, 141, 171, 178, 179, 205, 224 , 229, 248, 2j l, :q2 , 270, 271, 27l 도널드 카드웰 42 디킨스 I97
근 라그랑쥐 134 라보이시어 333 라이더 하가드 145 라이오넬 로빈스 ,8 라이트 밀즈 306 라첼 칼슨 70 랄프 숀맨 363, 364, 365 래플레이스 l02, I54 레닌 91, 272, 290, 309, 3 50, 3 59, 366 레슬리 스테폰 297 로버트 보일 133, 134, Ijl , 2j j 로버트 벨라미노 222, 223, 229 로버트 오펜하이머 299, 300 로버트 위너 110 로버트 카디널 벨라민 1 로버트 터커 278 로스 알라모스 }00 로이칠린 l5Z 루더포드 259 루돌프 불트만 133 루돌프 카냅 82, 220 루소 m, 275 루이 드 브로글리 20I 뒤셍코 286 리차드호프스타터 1 나 리첸버그 287 린 화이트 356 EI 마론 브란도 367 마리아 몬태소리 6o, 61 마리오 번지 18,, 198, 201, '' ”4, 381
마로딘 하이데거 219 마쉘 맥루한 5 마이클 패러데이 P5 마이클 풀라니 27, 121, 142, 147, 169, 216, 248, 249, 254, 256, 257, 284, 285, 286, 287, 288 마키아벨리 293, 294 마턴 루터 킹 364 마하 238 마하트마 간디 147, 210 막스 베버 145, 1)0 , 1)7 말퀴스 드 사드 I87, I88, 266 맥스 본 245 메리 쉘리 310 멜더스 279 모세 1 모택동 T 모짜르트 43, 44 몽테스큐 293, 294 미라뷰 밀돈 프리드만 294 t:f 바울 280, z81, z8z 바틀리 216, ZZI 바하 79 버클리 223, zz6, 229 버트랜드 러셀 61, l}j , 187, 189, 193, 209, 210, 225, 250, 280, 281, 296, 301, 306, 307, 311, 346, 360, 362, 363, 364, 36,, 382 벅크민스터 풀러 18, 84, 291, 3IS, 387 번 베토벤 77
밴 프랭클린 벨라르미노 258 본 해예크 188 볼츠만 238 볼테르 165, 189 브로니슬로 말리노브스키 I38, I39, 141, 148 브루노 드 피네티 173 블랙 z87 비발디 76 人 사무엘 버틀러 280, 329 샤논 캥 선 얏 센 141, 2q , 292 소크라데스 26, 209, 2j 8 , 270 솔 스타인버그 228 솔제니친 94 쇼펜하우어 ' 슈베르트 76 스노우 34, 94, 95, 285 스키너 273, 319 스탈린 91, 272, 309 스펜서 238 스피노자 137, 141, 171, 189, zos, 233, 234, 237, 267, 270, 271, 283, z93, 294, 297, 319, 347, 371 시릴 스탠리 스미스 갭 0 아담 스미스 13, 1!9, 166, 168, 179, 180, 237, 277, 292, 294, 291, 372, 374· 아더 레위스 343 아더 허즈버그 352
아델버트 채미소 219 아론 월다브스키 100 아르키메데스 43, 74 아리스토텔레스 26, 66, I37, 201, 222, 259 아브라함 로빈슨 228, 524 아브라함 매슬로우 }5l 아브라함 왈드 162 아얀 잘비 77, 140, 143, 148, 210, 338 아이나 솔스러드 }52 아이작 아시모프 296 아이젠하워 344 아안슈타인 39, 41, 61, 65, 66, 68, 69, 198, 199, 205, 230, 237, 239, 241, 245, 2j2 , 255, 259, 260, 287, 301, 3lI, 361 알프레드 노벨 }57 애들러 250, 25 I, 267, 268, 273, 382 어거스트 콩트 262 어네스트 겔너 155, 156, 177, 189, 379 어네스트 바커 375 어윈 쉬뢰딩거 q6 , 201, 255, 256 에드워드 에반스 프리차드 142, 144, 147, 254, 379 에디슨 42 에른스트 곰브리취 76, 77, 79, 87, 88 에른스트 마취 204 에밀 뒤르깽 138, 139, 141 엘리 하레비 277 엥겔스 m 옥캄 268, 272 올더스 헉슬리 54, 96, 3o4 요나스 }l4 워너 하이젠버그 259 월터 스코트 l1,
월트 디즈니 zz 웨렌 100 웰즈 34, 295 윈스턴 처칠 339 윌리업 세익스피어 IJ I, 209 윌리엄 프로트 m 월리엄 훼웰 67, 68, 69, 70, 254, 321 융거 123 이므레 라카토스 75, 241, 261, 324, 3'5 그 자크 울룰 JO j, JI I, J1 4 잔다르크 279 장 폴 사르트르. 267 재다 뢰벤 베주렐 캡 잭 런던 44 작퀴스 하다마드 74 제레미 벤담 180, 189, 237, 267, 277 제이콥 톨몬 124, 292 제 임스 번행 z86, 345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83, 249, 287 제임스 프레이저 135, 136, 137, 138, 139 조셉 슘페터 188 조셉 프리스툴리 186 조지 루이스 보게스 228 조지 버클리 165 조지 오웰 95, z55 존 듀이 ,3, 19, 191, 238 존 록크 141, 16i , 166, 188, 1.3 1, 291, .z9 3, 294 존 메이나드 케인즈 zI,, 266 존 스튜어트 밀 68, 187, 189, .z,4, 293, 29 5, 306, 346
죠존셉 포 스콘터라 드덜 러”스 344 주레스 번 41 쥬디스 부버 어개시 75' 148, 264, 282, 2, 39 ° 쥴스 번 295 지그문드 프로이트 186, 212, 250 , 267, 268, 273, 274, 310 지오르다노 브루노 152, 153, 222 天 찰스 사운더스 퍼어스 245, 25 5 찰스 셰링돈 144 찰스 하트손 1 채플린 2l9 촘스키 365, 367 디 카네만 156 카벤디쉬 287 카렙 카테그노 칸트 82, 102, J71 , 172, 173, ZOj , 224, 22,' ', 25 1, 25Z, 263, 294 칼 만하임 버 칼 맑스 I3, 98, 108, 271, 272, 284, 303, 306, 307, 308, 309, 3 I I, 346, 349, 350, I, 366 칼슨 3o4 칼 카렌자 76 칼 포퍼 41, S9, 65, 66, 67, 68, 69, 70, 76, 81, 188, 189, 103, zos, 117, 138, 나 I, 마, 149, 150, 159, 178, 319, 338, ', 376, 378, 379· 380, 381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 m
칼 행펠 82 커트 괴델 90 케네디 543 케네스 애로우 338 케플러 152 코페르니쿠스 135, 152, 222, 224, 258, 279 콘라드 로렌츠 z51, 268 콜링우드 142 과드 101, 107 쿠크 145 클라우디우스 프 톨 레미 66, 222, 258 클라인 256 클로드 레비 人뜨 쿠~ 149, 151 키에르케고르 221 E 터률리안 19! 테레시오 237, 267 토마스 모어 374 토마스 쿤 49, 121, 246, 249, 2!4, 261, 28j , 287, 288 토크빌 295, 29, 트라시마크스 92, 93, 94 트루먼 299 트벌스키 I ,6 포 파라데이 67, 8} 파레토 l S5 파불로프 2.7 3 파킨슨 99 페리클레스 318 포고 3o4
포드 z38 포퐁스 W터 데4보1,르 4 4 “ 풀 두카스 zz 폴 얼리취 67 프란시스 베이컨 68, 7z, 131, 140, 141, 142, 144, lj O , 165,' 169, l7I, 178, 179, 188, 21 j, 224, 248, 2jO , 2jl , 26j , 271, Z75 , Z84 프레드 호일 II6, 299, 300 풀라돈 23, 92, 93, 96, 121, 122, 234, 319 풀로지스토 66 피어스 윌리엄스 276 피에르 더행 82, ljO, 192, 201, 203, ZO4, ZZI, zz9, z53 피피터타 고코라스스 ”I5 2 궁 하비 lj 2 하비브 보르지바 34l 하우스만 102 하워드 진 366, 367 한스 요나 311 한스 콘 278 허만 칸 IOI 허버트 마르쿠제 3oz, 314 허쉘 z,4 헤겔 172, 19i, z13, z19, 266, 267 헤롤드 라스웰 1'1 9 헤르만 본 헬름홀츠 229, 230 헨리 포인까레 zz6, Zj 4 호메이니 339
홉스 237, 267, 293, 294, 374 화이트헤드 230 첼릭스 쿨레인 z2) 히더 렉트만 }56 히어쉬만 269 히포크라데스 174 힐버트 198
李君랐 Kansas Sta t e Un ive rsit y 교육행정학 박사 (Ph. D. ) 한국교육개발원 책임연구원(교육정책연구실장) 한국과학기술원 과학가술대학 기획실장, 교양과정부장, 학생부처장 과학영재교육연구소장 현재 한국과학기 술 원 교수 저서 『영재교육학 』 r 교육심리학 』 대우학술총서 • 번역 33 현대문명의 위기와 기술철학 초 판―― 1990 년 10 월 25 일 재 판 -1991 년 2 월 20 일 지은이__조셉 애거시 옮긴이-李君貸 펴낸이-朴孟浩 펴낸곳一一民音社 출판등록 1966 . 5 . 19 제 1 - 142 호 우편대체번호 010041-31-0 5 23282 은행지로번호 3007783 135·l20 서울 강남구 신사동 506 515-2 0 00~ 2 (영 업부) 515·2003~5 (편집부) 515-2007, 2101( 팩시밀리) Prin ted in Seoul , Korea ® 李君賢, 1990 과학철학, KDC 401 값 11,500 원
대우학술총서(번역) I 興족저닦사 룩 콘텐 • 宋基中 옮김 2 수학의 확실성 뾰 1 스 탉마인·朴世 熙 옮검 3 중세철학사J . R . 와안버그·康英컴 옮김 4 日本居의起源 R.A . 밀러•金芳漠 衛검 5 古代漠居音鼠學 槪릎 버나드 갈그렌불玲愛 옮김 6 말과사을 미셀 푸코·李光來 옮김 7 'r2l철학과 과학철학 헤르만 와일 · 검상운 옮김 8 기후와 진화 로널드 피어슨 · 김쥔민 옮김 9 0 썽·진리·역사 힐러리 파트남·金泰月 읽깁 10 사회과학이 µ1 의 場理編 쿠르트 태반박재호 옮김 I I 영국의 산업혁명 필리스 던튤慶洙쭈廷雨 옮김 12 현대과학철학논쟁 퇴恥나곤 外·조승욱검등식 옮김 13 있왕서써 됨으로 일리야 프시고진 · 이철수 옮깁 14 l:lµi!종교학 요아힘 U 描·김종서 옮깁 15 동물행등학 뢰서트 A . 하인드·장현갑 옮김 16 현대우주론 D . W . 시 OIOl·2R 뾰術 · · 17 시베리아의 샤머나즘 V. 디오세지 外죄길성 옮김 18 조형미술의 형식 힐테브란트·•昌燮 옮김 19 원시국가의 진화 죠1./9 하스·뵐夢廳 율깁 20 힐버트-數學과삶 큰스탄스 리드·이밀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