뽈아자르
Paul Hazard, 1878-1944 빠리대학교수를역임했고 아카데미회원이었다. 저서로 『프랑스 혁명과 이탈리아 문학』 (1910) 『유럽에서의 의식의 위기』 (1935) 『18세기 유럽의 사상』 (1946) 등이 있으며, 특히 18세기 문학과사상사에 주요한 업적을 남겼다.유럽 의식의 위기 Ⅰ
La crise de la conscience europeenne
Paul Hazard유럽 의식의 위기 I
뽈 아자르 지음조한경 옮김民音社유럽 의식의 위기 I
차례일러두기 8서문 9제1부 재건의 시도제1장 록크의 경험주의 17제2장 이신론과 자연종교 29제3장 자연권 43제4장 사회적 도덕 63제5장 지상의행복 71제6장 과학과 진보 83제7장 새로운 인간의 전형을 찾아서 97제2부 상상력과 감성제1장 시 부재의 시대 113제2장 삶의 정경 135제3장 눈물과 웃음, 오페라의 승리 147제4장 국민적 요소, 대중적 요소, 본능적 요소 165제5장 불안의 심리학, 감정의 미학, 실체의 형이상학, 새로운 과학 179제6장 열성신도들 195결론 215역자 해제 227사항 색인 235인명 색인 247작품 색인 255일러두기
* 뽈 아자르의 『유럽 의식의 위기』는 4부 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책이다. 먼저 번역 • 출간되는 『유럽 의식의 위기 I 』은 원서의 3, 4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I, 2부 또한 『유럽 의식의 위기 II』라는 제목으로 곧 번역 • 출간될 예정이다. ** 본문에서 원주는 아라비아 숫자로 역주는 알파벳으로 표기함을 아울러 밝혀 둔다.서문
이보다 더 큰 전환 더 갑작스런 변화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기존적인 체계, 17세기인들이 그렇게도 견고하게 지키던 삶의 원리 ―예컨대 통제, 권위, 도그마 등등-를 그 후 세대둘은 조롱하고 무시하기에 이르론 것 이다. 이전 세대들이 기독교를 절대 원리로 떠받들었다면, 이후 세대들은 그 것의 적이었다. 이전 세대들이 신의 원칙을 신봉했다면, 이후 세대들은 자연의 원칙을 신봉했다. 이전 세대들이 불평등한 사회적 체계에 순응했다면, 이후 세대들은 평등의 실현을 제일의 목적으로 삼았다.물론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에 대해 언제나 비판적이다. 세상은 그들을 기다려 왔고, 더 나은 세상, 더 행복한 세상을 그들이 가꾸어야 한다고 젊은 세대들은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고찰하려고 하는 시기는 그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단순한 폭풍노도 정도로 생각할 수 없었다. 모든 프랑스인들이 하루는 보쉬에의 사상과 보조를 같이 했는가 하면, 다른 날은 볼테르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그것은 단순한 단전자 운동과는 다른, 혁명이었던 것이다.과연 그러한 새로운 물결이 어디에서부터 홀러들어왔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좀 낯선 땅을 찾아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17세기는 연구해 불 만한 가 치가 충분한 시대였다. 오늘날에는 18세기에 연구가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두 시기 사이에는 우리가 예상도 할 수 없는 비밀을 숨기고 있으며, 아직 사람의 흔적이 없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그 길은 탐험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두 시기를 연결시켜 주는 1680년에서 17I5년까지의 영 역을 선택해서 조망해 보기로 했다. 우리는 여행하던 중에 위기를 처음으로 감지할 수 있게 한 스피노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그 지역 어 디에나 유령처럼 따라다니는 데카르트는 말할 것도 없고, 유명한 사람들만 을 꼽자면 말브랑쉬, 퐁뜨넬르, 록크, 라이프니찌, 보쉬에, 펜느롱 등을 만 날 수 있었다. 이 지성의 거인들은 실존의 문제, 신의 문제, 현상과 실제의 문제, 자유의지와 예정조화의 문제, 신권의 문제, 사회의 문제 등등을 온통 자기 혼자 떠맡은 문제인 양 열심히, 심각하게 다루곤 했다. 그러한 문제들 중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없었다. 인간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그들이 따 라야 할 행동 지침은 무엇인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미 해결되었다고 믿은, 전부한 문제 중의 문제 〈진리란 무엇인가?〉의 문제가 새삼스럽게 다 시 대두되었다.
얼핏 보면, 위대한 세기 고전주의는 온통 절대권위에 의지한 시기처럼 보 인다. 사실, 사상가들과 작가들은 대부분 과거의 위대한 고전 작가들이 꽃 피운 걸작들을 모방하고 재생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고, 또한 그렇게 실천했다. 라신느의 비국, 몰리에르의 희극, 퐁뗀느의 우화 의에 그들은 다 른 것을 몰랐고, 그들에게서 다른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비평가들은 서사시의 도덕성과 어떻게 하면 기독교의 기적을 예술 세계 예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장황한 토론을 거듭하곤 했다. 그들은 예술의 황금률처럼 떠받든 삼단일의 법칙만을 침이 마르도록 반복하고 있 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 노인의 신소리와는 다른, 어린아이의 유치한 말 장난과는 다른 전지한 문제가 여기저기서 논의되고 있었다. 『신학정치론』. 『에티카』, 『인간오성에 관한 시론』, 『신교의 변천사』, 『역사사전』, 『어느 시 골 사람의 의문에 대한 답장』 등등은 그런 진지한 토론의 대표적인 저서들 이었다.온통 인간이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믿지 않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 문들이었다. 전통은 아직도 복종의 대상인가? 아니면 그것은 바다에 띄워 보내 마땅한 것인가? 과거의 안내자들을 믿고, 그들이 안내하는 대로 조상 들의 발자취를 그대로 답습해야 하는가? 아니면 낡은 옷을 벗어던지고 약 속의 땅을 찾아 나서자고 의치는 새로운 안내자들을 따라야 하는가? 삐에르 벨르의 세계에서는 이성의 깃발 아래 모인 지휘자들과 종교의 깃발 아 래 모인 지휘자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 으려는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조금씩 조금씩 공격의 포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제 이단자들은 더이상 의롭지 않았으며, 은밀한 집단일 수 없었다. 시대의 이단자둘은 영역을 넓 혀 갔으며, 제자들을 확보했다. 넘치는 긍지와 자부심으로 그들은 경기장에 내려가 보아야 할 모든 것을 보고, 대적해야 할 모든 것과 대적했다. 이성 은 더이상 냉정한 상식이나, 다정한 지혜와 동의어일 수 없었다. 이성은 이 제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것이 되었다.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던 문제, 예컨대 보편적 동의사항으로 간주하던 신의 실존문제, 또는 기적의 역사적 근거 등에 대한 문제들이 공개적으로 제기되었다. 신은 이제 우리의 능력권 밖에 있는 하늘 나라 한쪽에 내던져져 버렸다. 인간만이 모든 것의 유일한 척도로 여겨졌다. 인간만이 유일한 존재이유였다. 인간이 절대의 자리를 차 지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오랜 동안 너무 오랜 동안 사람들은 성직자들의 말에 순종해 왔다. 성직자들은 선한 마음과, 정의와, 사랑이 세상을 다스릴 날이 오게 되리라고 예언했지만, 그러나 그들의 예언은 빗나가고 말았다. 전 리와 행복이 우승컵으로 제시된 시합에서 그들은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일은 경기장을 떠나는 일이었다. 그들이 경기장을 옷으 면서 떠나 주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할 수 없 는 노릇이었다. 인류에게 보찰것없는 움막을 지어 주고 큰소리 치던 과거의 위인들은 이제 무대의 전면에서 사라질 때가 왔던 것이다. 맨 먼저 할 일은 그 초라한 가건물을 때려부수는 일이었다. 그런 다음 사람들이 할 일은 새 로운 집을 짓는 일이었다. 미래의 도시는 튼튼한 기초를 필요로 했다. 무엇 보다도 인류가 회의주의라는 죽음의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일이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인류를 샛길로 잘못 인도해 온 형이상 학이라는 괴물을 버리고 인간에게 가능한, 인간이 풀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목적을 제공하는 철학 체계의 건설이 시급한 문제였다. 신의 위임과는 무관 한 정치체계, 신비와는 무관한 종교, 도그마를 벗어난 도덕 등등이 인류가 새롭게 건설해야 할 건물이었다. 과학은 이재 단순한 지적 십심풀이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과학은 이제 자연의 힘을 인류가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했다. 과학은 마침내 행복의 열쇠가 되기에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 다-이르렀다. 물질에 내재한 에너지는 인류의 이익과 인류의 영광과 자 손의 행복을 위해 안류의 지배를 받기에 이르른 것이었다.
18세기의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점을 예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여 기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여러가지 본질적인 요소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 보다 훨씬 전부터 이미 싹트고 있었으며, 심지어 그것들은 왕권이 그 절정 에 이른 루이 14세의 치세 기간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1760년을 전후한, 또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지칭하는 소위 혁명적이라고 하는 모 든 사상들은 이미 r680년대에 일반적인 것이었었다. 이미 그때부터 어떤 정 신의 종이 울리고 있었다. 그것의 모태가 되고 있는 문예부흥과 나중에 프 랑스 혁명에 무기를 제공한 1680년의 의식의 전환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 는 역사적 에포크였다. 신에 대한 의무, 절대군주에 대한 의무 등등의 의무 위에 세워진 문명은 언론의 자유, 인간과 시민으로서의 인간의 권리, 개체 로서의 권리 등등의 권리에 근거한 새로운 철학자들의 문명에 자리를 내주 지 않을수없게 되었다.사실 역사의 한 조각에 해당하는 35년 동안의 지적 변화를 가지고 유럽 에 있어서의 의식의 위기를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후에 이 어지는 역사적 변화, 그리고 그보다도 더 중요한 그 이전까지의 역사적 흐 름을 의면한 채 그것만을 따로 떼어 역사를 평가하려고 하는 일보다 위험 한 일은 없다. 인간은 그가 원죄를 안고 태어났는지 결백하게 태어났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그의 행복이 이 지상에 국한되는지, 아니면 저 세상 에 다른 행복이 마련되어 있는지 알기 위해 법정에서 순번을 기다리는 피 고인처럼 초조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자문해 왔다. 삶의 문제는 잠재적이고 강력한 너무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그러한 여러가지 문제에 대한 논의는 끊이지 않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도 사실은 이미 태초부터 문 제로 제기되었고, 아직까지 해결을 보지 못한 종교, 철학, 정치, 사회 문제 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그렇다면 완벽한 형태의 당당한 업적 못지않게 풍 부하고도 적확한 수많은 논의들, 신학과 철학을 다루는 난해한 논문들, 나 라와 나라 사이에 이루어전 무수한 교류들, 여러가지 방식의 혼합과 침투들울 고려하지 않은 채 어떻게 역사의 단편을 따로 떼어 당시의 분위기와 현 상을 단칼에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사실은 수많은 구릉으로 이루어진 그곳 의 탐사를 위해서는 온갖 길을 더터야 했고, 여러가지 다른 방향의 경사를 가늠해야 했고, 지세와 샛길과 골목까지도 하나도 빼놓을 수 없었다. 거기 에 살았던 사람들의 표정 -때로는 찌푸려 침울한 표정, 또 때로는 상냥 하고 사랑스런 표정 -까지도 우리의 소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 게 복잡하고 방대한 작업은 말할 나위도 없이 끔찍하도록 힘든 작업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일을 시도한 데 대한 변명을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비록 우 리의 작업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수정을 가하고 싶은 생각도 없 다. 물론 누구나 알고 있듯이, 나무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의 뿌리와 가지를 조심스럽게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길도 없는 빽빽한 밀림을 탐험할 때는 그러한 방법이 소용 없음도 시인해야 할 것이다.
초기의 아름다운 시에는 막간이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다가 아름다운 선 율에 몸을 싣고, 파도를 타고 솟아오르듯이 창공에 솟아울라 향기를 홈뻑 마시는 기쁨울 어떻게 말로 형언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순간에는 땅이 하 나의 웅장한 찬송을 둘려준다. 그러나 우리가 다룬 시대는 그러한 시대는 아니었다. 오직 리듬과 운율이 양념처럼 끼어들 뿐이었다. 그 시대는 시를 찰못 이해한 시대였으며, 언어에 깃든 주술적인 매력을 모르던 시대였다. 그 러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시대는 감성과 상상력이 완전히 사라전 시대 였다거나, 그 시대의 사람들은 감각과 열정에 전혀 혼들리지 않는 무쇠 같 은 사람들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래서 우리는 순수 이성적인 형태만을 존중하는 업적들과 색깔을 담은 다른 업적들이 어떻게 나란히 존재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인간의 가슴은 얼마나 우리에게 귀를 열어 들어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는지를 밝히려고 했다.이성으로는 갈증을 채울 수 없어, 목마른 가슴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찾으 려고 한 정적주의와 경건주의가 우리에게 당대의 열망을 미미하게나마 보 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신비주의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시대의 특징이라 고 할 수 있는 도덕적 지적 위기에 박차를 가한 요인 중의 하나였었다. 신 비주의는 종교와 교권의 관계를 부인했으며, 교권의 구속을 무시하는 종교만이 인간의 영혼을 신께 다가가게 하는 유일한 것으로 간주했다. 신비주의 자들은 나름대로 개혁에 일조를 했던 셈이다. 종교계에서 이렇게 새 바람이 일고 있을 때에, 나머지 세계에서 전반적인 개혁의 바람이 불지 않을 리 없 었다. 한 손에는 미개인의 미덕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문명의 오류와 죄 악을 든 사람둘에 의해 무정부주의를 향한 문이 열렸던 것이다.
그 시기는 거칠고, 무차별한 시기였으며, 사건과 싸움이 너무 많고, 사상 이 물밀 듯 밀려온 시기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대로의 아 름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방대한 물결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밀 렸다가 부서지고, 부서지는가 싶으면 다시 합해져서 다른 양상을 보이고 새 로운 규칙으로 나타나는 그 다양한 사상의 체계들을 바라보면서, 결코 어떤 난관에도 바틀거리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멀고 먼 등대를 향해 끗끗이 항 해하던 우리의 형제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그 피나는 항해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찬사와 연민이 뒤섞인 어떤 드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불굴의 두지와 꿋꿋함에는 어떤 위대함마저 있었다. 전라와 행복을 향한 이 뭇끗한 행전은 유럽인에게서 뗄래야 뗄 수 없는 특징이며, 거기에는 우리가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비장미마저 감돈다. 그뿐만 아니다. 숱한 사상 의 탄생과정을 연구하다 보면, 아니 단순히 그것들의 다양한 변화들만을 더 터 보더라도,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보잘것없이 시작해서 얼마나 힘차고 당 당하게 걷는지를 보게 된다. 그들의 승리의 월계관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고 확신한 것은, 그들의 승리는 결코 물질적 축복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인도한 지적 정신적 힘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뽈아자르제1부 재건의 시도a)
a) 〈일러두기〉에서 밝혔던 것처럼 『유럽 의식의 위기』는 4부 2권으로 구성된 책이다· 이 역서는 원서의 후반부인 3, 4부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역서의 제1부 「재건의 시도 」와 제2부 「상상력과 감성서본 원서에서의 3, 4부 임을 양지해 주기 바란다.제1장 록크의 경험주의
인간에게 새로운 여행의 필요가 생겼다. 그것은 인간이 새로운 길과 새로 운 목적을 향할 필요가 생겼다는 말이다.우선 급한 일은 회의주의를 피하는 일이었다. 회의주의는 벨르 자신도 두 려워하던 것이었다. 〈어떤 문제에나 끼어들면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회의주의〉는 무기력과 사망에 이르는 길 의에 다름 아니었다. 인간의 정신 에 선택권을 부여하려고 했던 회의주의는 마침내 선택의 가능성과 의지를 짓뭉개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더이상 궤변도 아니었고, 찬반논의도 아니 었다 오직 행복과는 무관한 먼 곳으로 인간을 끌고 갈 따름이었다.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던 퐁뜨넬르는 후작부인에게 철학에 대해서 말하기 를 〈철학이란 호기심 많은 정신과 그릇된 눈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철학자들이 눈에 보이는 것은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추 측해내는 데 일생을 허비한 것은 바로 거기에 연유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추측하는 일보다 견딜 수 없는 일이 또 있을까? 차라리 보이지 않는 것에는 마음 쓰지 않은 채, 보이는 것만을 믿는 쪽이 훨씬 마음 편할 것이다.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 줄 세계관은 없을까?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며, 인류를 의혹의 질곡에서 건져 줄 것이 다.
록크가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그 시점이었다.그의 출현은 은혜와도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사실의 가치와 사실 의 존엄성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록크가 가치를 부여하고 존엄성을 확립한 새로운 사실들은 이미 고발당하고, 비난받고, 폐기된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것이었다. 우리는 그 이유를 길게 설명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이유는 명백 하댜 회생의 가능성을 박탈당한 역사적 사실들은 우리가 아무리 그것들을 잘 되살려낸다고 해도 왜곡될 수밖에 없으며 거짓에 물들 수밖에 없으며 잘 못 받아들여지고 잘못 해석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 면 역사적 사실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제 무언가 다른 확신이 필요한 때였 댜 바로 그때 록크가 나타나 그것을 가져다 주었다.그것은 다름 아닌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영혼의 소유자들이 보여주 는 심리적 현실이었다. 게다가 이성이 그 심리적 현실을 도와 인도했다. 물 론 이성은 본디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이성은 비평의 손이 닿지 않던 자료를 기억에 담아 둘 뿐만 아니라, 비평과는 달리 지금까지 비평이 들여다보지도 못하던 영역들을 드러내는 장점이 있다. 18 세기의 정신은 그것의 뿌리를 17세기에 두고 있는 만큼 본질적으로 합리주 의적이며, 경험주의적이다.록크는 타고난 철학자였던 것 같다. 우선 그는 영국인이었다. 그의 사고 는 깊이가 있었다. 형이상학의 연구에 만족할 수없던 그는 경험과학과 의 학에 정진했다. 그는 영혼에 관심을 가지기에 앞서 육체의 인식에 몰두했다. 형이상학자들은 꿈도 꾸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공무에 종사한 적이 있었다. 샤프스베리 백작 에슈리 경의 신임을 얻어 그의 비서관을 역임한 바 있었 지만 실총하였고, 그 후 네델란드에 망명하였다가 기욤 도랑쥬와 함께 금의 환향하기에 이른다. 그는 영광스런 새 영국의 건설에 나선다. 그러나 신중 을 기하기 위해 그는 뒷전에 물러나 있었다. 그는 뒷전에서 사람들의 술책울 관찰할 뿐이었다 허약한 체질 때문에 그는 건강한 사람들의 활동현장에 기꺼이 뛰어들 수가 없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소심한 성격의 소 유자였다 다행히도 여행이 그를 거기에서 건져줬다. 프랑스 남부 지방에 상 당 기간 머물면서 그는 기이하지만 불쾌하지는 않은 종족이랄 수 있는 프 랑스인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프랑스인들의 풍속과 의석 주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그는 사상가들의 사고방식과 노동자들의 노동방 식을 지켜보았다. 영국에서는 볼 수 없던 기름과 포도주의 생산과정도 지켜 보았다. 농부들은 왜 비참한 생활을 해야만 하는가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파리에서는 의사, 석학, 천문학자, 연구가 또는 호사가들과도 친분을 맺었 다. 거칠고 힘든 것이 망명생활이지만 망명지만큼 훌륭한 학교가 없다는 말 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네델란드는 그에게 다른 어느 곳보다도 유익했다. 추 방당한 후, 망명지를 전전하던 그는 신교파, 반대파, 이교파들을 전전하다가 바로소 사상의 학교에 들어간 셈이었다. 그는 그의 후원자 중의 하나였던 에슈리 경의 아들을 가르치면서 공부를 계속했다. 가르치는 일도 그에게는 하나의 공부 방식이었다. 그러나 록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리를 어떤 ,신철학의 거장에게 빼앗겼다. 록크는 현학적이지도 않았으며, 교만하지도 않 았으며, 꾸밈이 없었으며, (감정적인 폭발이 없진 않았지만, 그것을 제의한다면) 지혜로왔고, 그의 작품으로 보나 삶으로 보나 사랑스럽고 정중한 신사였다. 그에게서는 사각모를 쓴 박사의 면모나 법복을 입은 사제의 면모는 전혀 찾 아볼 수 없었다. 그의 가슴은 강단 위에서 소리치기에는 너무 빈약했다. 평 범한 사람들의 철학자랄 수 있는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부드러웠으며, 나지 막했다. 이제 철학과 철학자는 범인의 것이었다. 사제들, 교황청의 고위 성 직자들 소르본느와 사피엔자의 교수들은 몇몇 예의를 제의하면 철학자의 대열에서 밀려나기에 이르렀다. 이제 삶과 어우러져 삶을 인도하는 사람이 철학자였다
록크는 옥스포드 재학시절에 소요학파b)와 접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것에b)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를 지칭하는 이 이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제자들과 산책을 하면서 철학을 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베이컨, 가쌍디, 데카르트 등을 두루 섭렵하면서 방 황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가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뿐이었다. 1670년 겨울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던 중에 그는 불현듯 어떤 확고한 규칙 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도덕작 종교적 원칙들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그 에 앞서 〈무엇이 우리의 능력 밖의 것이고, 어떤 것이 우리의 이해 대상인 지? 우리의 능력을 가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은 오성의 힘을 가늠하는 일아였다 다른 사람의 견해에 적당히 기대거나 구결하지 않은 채, 플라돈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대가를 등에 업고 큰소 리치는 사람들을 떠나, 오직 진리만을 유일한 목표삼아 검토정신으로 진리 에 이르는 일이 중요했다. 록크의 초기의 지성은 바로 그러한 독립에의 의 지, 쇄신에의 욕구, 자립적인 사고에의 열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초기의 그 의 지적 활동은 의식의, 불씨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일은 고독한 삶을 줄기는 사람의 일이 아니 댜 확신에 찬 대답을 듣고 싶어서 그에게 질문울 던지는 천구둘의 목소리 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그의 친구들은 그들을 의혹에서 벗어나게 해줄 철학을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가장 마땅한 사람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리고 록크는 시대의 부름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수련기간 동안 동시대인들과 거 리를 둔 적이 한시도 없었다. 전통적인 철학의 석연치 않은 답변으로 더욱 날카로와지기만 하는 〈진리의 문제〉c)를 그는 주의 깊게 새겼다. 그 진리를 새롭게 이해시켜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그였다. 1671년부터 그는 그의 견 해롤 기록해 나가기 시작했으며,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것이었 기 때문에 그대로 출판해도 무난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비교적 사교적인 그의 친구들에게 보여주면서, 거기에 가필하는 데 무려 20년을 바 쳤다.c) 원서에 표기된 Quid est Veritas?는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라틴어이다.
프랑스의 뒷골목 여관에서, 런던의 정권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옥스포 드의 아늑한 그의 거처에서, 로트르담에서, 암스데르담에서, 끌레브에서 사 색하고 공부하면서 그는 그의 이론을 서서히 완성시켜 나갔다. 마침내 그의 이론이 발표되었다. 그에게는 모든 문제에 활기를 불어넣는 능력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했다 그는 순수철학에 그치지 않고 종교, 정치, 교육 에 관해서까지도 기꺼이 그의 의견을 개진했다. 그가 책을 출간하면 그의 책은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록크는 본질적이지 않은 것은 결코 쓰지 않는 작가였다 나는 루소 의에 그런 작가가 다시 없었다고 생각한다. 종교, 정치 또는 교육을 디룬 루소의 저서 중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루소에게는 가까이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을 화끈하게 달아오르게 하는 열정이 있는 반면, 록크는 은근한 횃불이었다 반면 그는 루소에 앞서 의식의 외침을 깨달았으며, 거기에 부 응했다. 그의 힘은 거기에 근원을 두고 있었다. 그의 담화는 궁지에 몰린 독 자가 설득당하지 않고는 떠날 수 없게 했다. 그는 끝없는 반복으로 독자를 설득하며, 끈기 있게 독자를 사로잡았다. 그의 문장은 독자를 감쌌다. 그의 문체는 세련된 데다가 여유로우며 매끄럽기까지 했다. 알쏭달쏭한 난삽함이 랄지 지나친 억제랄지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십오성은 그의 체질에 맞지 않았다. 그는 이해가능한 것만을 인정했다. 말브랑쉬와 같은 형이상학자를 대할 때면 그는 괴로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내게 아무런 명료한 개념 울 전달해 주지 못하는 신소리와 한줄기 빛도 비쳐 주지 못하는 표현들로 꽉차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기에서 더욱 질은 어둠 에 싸일 뿐이다……〉 〈모호한 글을 쓰려고 아무리 의도적인 노력을 해도 말브랑쉬만큼 모호한 글을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모호한 글 은 록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저서를 출판할 때의 내 의도는 적어도 그 것은 나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명료해야만 하고, 내가 하는 말은 어떤 독 자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삽한 사변에 익숙지 않은 사람은 물론이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나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나는 그보다는 차라리 사려깊고 통찰력 있는 사람의 비판을 기꺼이 받겠다…….〉
그는 글을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은 전문적인 철학자들과 사변론자들에 대한 선전포고에 다름 없었다. 록크는 그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삶의 규칙을 요구하는 동시대인들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다.1690년 마침내 『인간 오성에 관한 소론』d) 이라는 소박한 제목의 책이 출d)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간되었다. 철학에 있어서 큰 승부만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뭐라하든 그 책은 새로운 방향 모색에 결정적인 전환점, 신기원을 마련해 주었다. 이제 아무 리 퍼내도 마르지 않을 인간의 정신이 연구대상이 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형이상학적 가정을 버리라고 록크는 의쳤다. 그것으로는 성공할 수 없음을 우리는 이미 확인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이미 공허한 질문에 지칠 대로 지 치지 않았던가? 영혼의 본질과 특성을 누가 명확하게 딱 잘라 대답해 준 적 이 있던가? 우리의 감각과 사고가 신체기관에 어떤 변화와 충동을 가할 때 비롯되는 것인지를 명확히 파헤친 사람이 있었던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육체와 영혼이었다. 형이상학이 끼어들면 그것은 미스테리가 되어 아 무리 훌륭한 석학들마저도 질은 어둠 속울 헤매게 할 뿐이었다. 그는 형이 상학이 이제 더 이상 간여하지 않기를 바랐다. 우리둘의 밖에 어떤 실체가 있다고 한다면 (물론 그러한 것들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들 의 소관이 아니었다. 〈왜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는 그것에 연연하는가? 이제 그 가당찮은 노력은 그만두자.〉
우리에게 어떤 확신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영혼 안에서 찾 아야 한다. 그 영혼을바라보자. 무한한 공간 저 너머에 있는 환영에서 눈을 돌려 이제는 우리의 영혼을 바라보자. 우리의 오성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았 으니, 그것을 인정하자. 그 테두리 안에서 인간의 오성을 연구하고, 그것의 활동을 알아보자. 그 테두리 안에서, 우리의 사고는 어떻게 형성 결합되는 지, 기억장치는 그것을 어떻게 보존하는지 관찰해 보자. 그것만 해도 엄청 난 일이다. 거기에도 관점이 너무 다양해서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세월이 주어진다고 해도 이루 다 조망해 볼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우리는 아직 그 일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일하게 확실하고 참된 인식은 사실 거기에 있다.〈그러한 점에서 볼 때, 우리는 바다를 항해하는 항해사와도 같다. 모든 대양의 깊이를 완벽하게 측량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심을 측량하는 끈의 길이가 어느 정도나 되는가를 아는 일은 필요하고, 유익할 것이다. 항해의 방향을 정하고, 배를 좌초시킬지도 모를 암초를 피하기 위해 꼭 필요한 몇군데를 확인하기에 끈의 길이가 넉넉한가 그렇지 못한가를 아는 일은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일은 모든 것을 아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생항로이다. 합리성에 바탕을 둔 피조물이랄 수 있는 지 금 상태 그대로의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조종하는 규칙을 찾을 수 있다면, 요컨 대 우리가 거기에 이룰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다른 많은 것에 대 해서는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1)
1) 삐에르 꼬스트의 번역본. 『인간 오성에 관한 소론』의 서문에서.
또는 다른 말로 하자면 (록크는 반복을 서슴지 않는다), 피조물에 대해 알 수 있는 만큼 알고,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신을 이해하고, 우리의 의무를 배우고, 물질적인 면에서 필요한 것들을· 구비하는 의에 다른 무엇을 인간이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능력은 비록 미약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 는 감당할 수 있다. 그러니 능력을 벗어나는 것들을 완전하고 철저하게 알 려고 하지 말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데에 만족하고, 알 수 있는 것을 아는 데에 만족하고, 우리의 현재에 만족하자…….
우리가 한계를 모르고 원인을 찾아 거슬러울라가면 어려운 문제만 쌓인 다. 우리는 그 추구가 헛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한 헛된 추구는 우 리의 정신적인 눈이 얼마나 근시안적인가를 새삼 알게 할 뿐이다. 우리는 질은 어둠의 벽에 부딪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겸손한 탐험가처럼 주어진 영역에 만족한다면, 우리는 경이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지혜와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택을 주저할 필요가 있을까? 불가 능한 것은 포기하자. 비록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잡을 수 있는 확실한 것들을 단단히 붙잡는다면, 깊은 계곡에 빠질 염려는 없을 것 이다.록크의 독창성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받아들인 형이상학의 파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시선을 호리는 대양에서 하나의 조그만 섬을 경계짓고 보호하는 데에 있다.게다가 그는 이 땅을 의혹에서 해방시켜 거기에 유기적 형태를 부여하고 자 한다. 선험적인 것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얼마나 엄청난 변화인가!철학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이제 다른 차원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여 기에서 말하는 철학이란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철학자들에서부터 출발하 여, 캠브리지 학파의 신풀라톤주의 철학자들과 이데아를 부활시키려는 커즈 워즈 등 기타 철학자들의 철학을 일컫는다. 천부적인 관념은 이제 없다. 영 원의 관념, 무한의 관념 등을 천부적으로 타고날 수는 없다. 동일성의 관념, 전체에 대한 관념,부분에 대한 관념,경배의 관념, 산의 관념 등도 천부적으 로 부여받을 수는 없다. 만약 그런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주장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것들은 그리이스, 스콜라, 근대 철학을 거쳐 오면서 여러가 지 형태들을 취했지만 말만 무성한 사변적 사고의 속임수들에 지나지 않았 다. 정신은 글자가 인쇄되기를 기다리는 백지와도 같다. 정신은 햇빛을 기 다리는 어두운 방이다.
전체적인 재구성을 위해 필요한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감각이었다. 감 각은 밖에서 정신을 두드려 깨워, 그것을 가득 채운다. 감각은 중첩과 결합 으로 점차 복잡하고, 추상적인 개념들, 즉 영혼의 작업에 의해 비롯되는 개 념들에 이르른다. 직관적 인식이든, 명시적 인식이든, 확고한 인식론을 세우 는 데에는 감각이면 충분했다. 아제 주체와 대상간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 와 주체간의 문제가 되었다. 이제 착각에 대한 싸움은 내부의 문제가 되기 에 이르렀으며, 따라서 신중을 기하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이제 우리의 정 신은 오직 자신의 사고 의에는 다른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볼 수 있 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것뿐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인식은 거기에 기원한 다……따라서 인식이란 우리 자신의 두 가지 서로 다른 견해 (그것들의 조 화와 부조화) 에 대한 인지 의에 다름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인문과학은 가 능할뿐더러 무한하다.그의 감각의 원리가 인정받자 록크는 지체하지 않고 모랄을 재건한다. 그 에 의하면 인간은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동물이다. 때문에 유익한 개념, 해 로운 개념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허용과 금지의 개념도 거기에서 비롯된다. 사실 확실성이란 것도 우리의 생각이 편안하게 느껴지는가 그렇지 못한가 에 기인하는 것이고, 증명이란 것도 다른 중간 개념을 이용해 그 적철성을 인지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면, 우리의 도덕적 개념이란 것도 수학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정신적 추상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둘은 서로 다른 것들이 아니며, 둘은 공히 확실한 것들이다.
이제 점차 독단주의가 물러나고, 모든 심리현상을 드러내 기억에 담아 두 는 경험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언어는 어디에 기원을 두고 있는가? 언어, 그 경이로운 표현 수단은 신의 의지가 우리에게 불어넣어 준 것인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는 인간에게는 분절음울 발음하기에 아주 적절한 신체기관이 있다는 사실밖에 모른다. 그 분절음을 통해서 인간 은 맨먼저 감각의 변화를 표현한다. 단어는 개별적인 기호의 총체이다. 그 런가 하면 그것들이 모아지면 개념의 총체가 되기도 한다. 그러한 것들이 글쓰는 기법이고, 수사학이다. 이러한 간단한 관찰에 근거하지 않은 문체론 이나 시학은 이제 우리의 시야를 벗어났으면 좋겠다. 단어의 기능과 역할을 아는 작가는 명백한 개념이 담겨 있지 않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개념을 혼동하지 않는 작가라면 단어를 담백하게 사용할 것이다. 그러한 작 가는 교활한 어휘구사, 과장, 반역을 피할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다른 사람 에게 가장 신속하게 전달하는 데에 언어의 목적이 있다면, 눈 앞의 그 목적 에 충실한 문체를 구사하는 사람이야말로 글을 잘 쓰는 사람이고, 말을 잘 하는 사람일 것이다. 문법은 불쌍한 학생들에게 멋대로 변덕을 부리는 현학 자들의 업적일 수는 없다. 나름대로의 내적 논리를 지니는 것이 문법이라면, 그것의 내적 논리는 감각에서 출발할 때 재구성이 가능할 것이다.인간 사고의 형성과정을 지켜보고, 인간에게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해주 는 학문, 도덕, 예술 등의 성장과 확산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흥미가 있고, 재미있으며, 심지어 긍지마저 느끼게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긍지는 신에 게 도전함으로써 얻어지는 그것이 아니다. 여기에서의 긍지는 실체에 대한 무지를 인정하고, 엄청난 포기를 각오하고, 희생과 굴욕을 감수한 비전전수 자의 그것이다. 먼 바다에서 난파의 위기를 벗어나 겨우 해안에 당도한 사 람은 맨손으로 집을 짓는다. 그 사람의 기쁨을 한번 생각해 보라. 록크가 그 의 책에 붙인 제목은 매우 겸허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에세이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에세이는 인간의 오성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경이로운 것 중에 경이로운 것이 아니던가? 인간의 오성은 두 가지 원칙이 적용된다. 하나는 의적 사물이 우리의 감각에 미치는 영향이고, 다 른 하나는 그 영향에 의한 영혼의 활동이다. 그 원칙들의 작용을 연구하고파악하고 분석하는 일은 우리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것들 은 기적을,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기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의지, 기억, 이미지 등이 무엇인지 알기까지는 수많은 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 이다. 그것들은 순도 높은 금광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서 채취하는 금의 순도는 우리를 속이지도 실망시키지도 않는다. 〈밑도 끝도 없는 대양에 몸 을 던져서 능력이 못미치는 것을 잡으려고 안달한다면, 인간은 명백히 해결 할 수도 없는 문제를 붙잡고 어려움만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고, 인간의 의혹을 심화시켜 인간으로 하여금 철저한 회의주의에서 벗어나지 못 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 줄 뿐이다.〉
진리를 추구하다가 빠지곤 하는 무관심이나 회의주의를 모면하기 위해서 는 차라리 우리의 정산적 역량과 그것의 한계를 인정하는 편이 낫다.『인간의 오성에 관한 소론』의 불어본e) 제2판의 서문에서 삐에르 꼬스트 는 은사의 성공적인 이 저서에 대한 격찬을 서슴지 않는다. 〈이 저서는 어 제의 영국이 낳은 가장 훌륭한 천재적 걸작이다. 저자의 생전에 영국에서 불과 IO여 년 만에 4판이 거듭 출판되었으며, 1700년 나의 초판 불어 번역 본은 네델란드, 프랑스, 독일, 이태리 등지에 그것을 보급하는 계기가 되었 으며, 영국뿐 아니라 그 의의 여러 나라들에서 그것이 호평을 받게 만들었 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주목을 받아오고 있다 영국안은 그 책의 해 박성, 심오성, 정확성, 간결성에 대해 찬사를-멈추지 않는다. 특히 영광스러 운 것은, 그의 이 저서는 정신울 교육시키고, 인식을 정리 확장시키는 데 중 요하고도 적절한 교재로 캠브리지와 옥스포드에서 선정되어, 읽혀지고, 해 설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록크는 오늘날 유명한 양대 대학에서 아리스토 텔레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e) Essai philosophique conscernant l'entendement humain, 1729.
철학작품의 보급은 사실 언제나 큰 어려움이 따른다. 그런데 록크의 그것 은 빠르고 무난했다. 유럽의 전반적인 대변혁이 그의 활동을 어렵지 않게 했다. 영예의 횃불을 든 최초의 주자들은 네델란드 기자들이었다. 쟝 르 클
레르크가 『세계의 도서』에 소개한 대목을 보자. 〈아직 출판이 된 것은 아니 지만 『인간의 오성에 관한 소론』이라는 제목이 붙은 영국의 저서. 그 저서 는 인간의 인식의 폭을 가늠하게 해주며, 우리가 거기에 이를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 …… .>그리고 우리가 잊울 수 없는 록크의 분신이 있으 니, 다비드 마젤과 삐에르 꼬스트라는 망명객들이었다. 그 중 다비드 마젤 은 록크의 정치적 사상에 주석을 달았고, 삐에르 꼬스트는 록크의 철학에 주석을 달았다. 록크는 1704년 죽었다. 1710년에는 전집이 불어로 번역 소개 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글 중 중요한 것들을 불어권 독자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기 회를 제공했다 독일에서는 토마시우스가 1700년경 록크의 『인간 오 성에 관한 소론』을 읽었다 그것의 독서는 그로 하여금 계몽주의의 선구자 가 되게 하였다 말하자면 록크는 새로운 세기를 향한 전환점을 마련한 셈 이었다.
물론 그가 몇 차례 변신의 과정을 겪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철저한 경험주의자이자 감각주의자였지만 그는 의의로 이상주의자 중의 하나였던 버클리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철학이란 그것의 출발점보다도 내적 관계가 중요한 〈관계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변신을 비논리적이라고 매도할 수 없다. 유물론자들과 한패가 되기를 거부한 그는 슬기롭게도 사고의 근원이 되는 절대자의 존재를 결코 부정하지는 않았으 며, 물질과 철대자는 결코 공존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2) 그의 논 증은 집요한 데가 있었고, 경건성마저 보였다. 그러다가 그는 전지전능한 신 의 포로가 되기라도 한듯 이렇게 선언하였다. 〈결국 신은 신이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물질 덩어리에 인지능력과 사고능력을 부여했을 것이다.〉3) 신학자 들에 의해 반박을 받고, 볼테르의 눈에 띄어 악용되어 세속화된 그의 이 말 은 그의 저서 전체에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즉 록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물론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크리스천이기를 원했다. 그는 이성과 신앙을 구분하고 싶어했다. 그것은 그가 가장 몰두한 일 중의 하나였다. 이성이란 〈감각과 성찰이라는 천부적 능력을 통해서 습2) 『인간의 오성 에 관한 소론』, Ⅳ. 10.
3) 같은 책, Ⅳ, 3.득하고, 개념의 연역을 통해서 인지된 명제와 진리가 틀림없는 것인지 아닌 지를 가름하는 데 소용되는 것이라면〉, 신앙이란 〈이성의 연역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특별한 은총에 의한 신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는 것이다. 인간 에게 드러내는 신의 이러한 진리를 우리는 계시라고 부른다〉. 그는 계시를 믿었으며, 예수의 사명을 믿었고, 복음의 권위를 믿었고, 기적을 믿었다. 그 는 아무리 섬세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회의주의에 깊이 빠진 사람이 라고 할지라도 성서의 계시는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는 신앙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회개로 극소화시켰으며, 구원을 받으려면 선한 삶을 살면 그뿐이라고 믿었다. 게다가 그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인간의 조상 아담이 지은 죄 때문에 인간이 영벌을 받을 수는 없다고 믿었다 결국 그는 똘랑과 함께 이신론자의 f) 하나로 간주되었다. 사 람들은 그의 〈합리적 기독교〉를 기적을 부인하는 기독교와 동일선상에 놓 았다. 그는 괴로웠다. 그는 기계적인 예배철차, 번거로운 교의, 잡다한 교파 등 때문에 교회에서 멀어진 사람들을 귀의시키려면, 자연종교 자체로는 충 분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계시를 인정치 않는 이신론자들을 합리적 인 근거를 들어 꼼짝 못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f) 신의 계시나 종교적 도그마를 인정치 않은 채 신의 존재를 믿는 철학자를 이신론자라고 할수있다.
반박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소리를 치면서도, 일관성의 결여 때문에 불편한 결과가 그의 발을 붙들어매곤 했다. 그러나 잘못된 해석에도 불구하 고, 일탈과 역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서는 파악이 어렵지 않은 한 방향을 향한다. 록크는 오직 주어전 땅을 일구는 삶을 살라고 권유한 철학자였던 것이다. 우리가 일굴 수 있는 한 뙈기 땅보다 더 나은 낙원이 있을까? 그 것보다 더 나은 삶의 명분이나, 더한 위로가 있을까? 특히 록크는 가장 절 실하면서도 달콤한 놀이라고 할 수 있는 심리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인 철 학자였다. 그는 인간의 정신영역울 관찰하고, 판단하고, 그리고 그것을 단죄 하는 일보다는 그것을 연구해 보려고 했다. 꽁디약에 의해 가다듬어지고, 관 념론자들에 이어 뗀느에 의해 정치된 그 정신영역은 이제 우리에게 하나의 줄거운 숙제가 되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이르렀다.
제2장 이신론과 자연종교
문예부흥기와 우리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는 시대를 잇는 끈 중의 하나는 이신론이다. 이신론도 문예부흥과 마찬가지로 이태리에서 건너왔다. 이신론 이 프랑스에 건너와 자리를 잡은 것도 16세기였다. 그런데 이신론이 확실한 명칭을 얻은 것은 프랑스이며, 수정에 수정이 거듭되던 그것에 대한 정의가 모호성을 탈피해 확실한 터를 잡은 것도 프랑스이다. 이신론은 17세기 전반 기에도 가끔 표면에 드러나긴 했었지만 사실상 그늘을 벗어나지는 못했었 다.그런데 프랑스의 줄기는 이미 영국에 곁가지를 뻗치고 있었다. 쳐베리 남 작 에드워드 허버트는 1624년 파리에서 부정이나 모독과는 거리가 먼 경건 성과 신앙심 그리고 거의 신비까지도 담긴 이신론의 신앙고백을 써냈던 것 이다. 〈친애하는 독자여, 여러분에게 미리 밝혀두건대, 나는 지금 신앙의 전 리가 아닌 오성의 전리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오성이 인정하는 신앙 의 전리가 없지 않을 것이다. 허버트의 교리는 거기에 근거한다. 그는 어떤 절대자를 인정한다. 따라서 신에 대한 경배는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런데 그에 의하면 도덕의 실천도 신에 대한 경배의 일종이라는 것이었다. 부정과 죄악은 속죄의 고행을 치러야 했다. 이승이 끝나면 저승에서 우리는 상을 받든지 벌을 받든지 할 것이다.이신론은 영국이라는 새로운 땅을 만나 번창하기에 이르렀다.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이신론은 제 세상을 만난 것이었다. 이신론에 대한 지지자와 반대자들간의 열띤 토론이 공개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중에도 톨랜드가 가장 열렬한 지지자였다. 벤틀리, 버클리, 클라크, 버틀러, 워버튼 등은 그와는 반 대의 입장에서 천계종교를 a) 떠받들었다. 간단히 말해서, 〈영국에서만큼 자 연종교가 잘 정의된 나라도 없었다 ……. 〉1)
a) 신의 계시를 믿는 기존적 인 종교를 일컬음.
1) 『영국 총서』, 1717, I , 318.새로운 사상이 끊임없이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중에 프랑스에서는 전혀 다 른 성격의 이신론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볼테르는 그의 종교철학을 이 신론에서 빌려 오며, 에드워드 봄스톤의 영향을 많이 받은 루소도 유물론적 인 동시에 도덕적이고, 그리고 이상론적인 이신론을 감동적인 필치로 묘사 한다. 그러나 아직 이신론이 절정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신론이 자 리를 잡아가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신론이 무엇을 부정하는가는 파악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강요였다. 〈강요당할 수는 없다. 그것만큼 금세기 취향에 어긋난 것은 없다.〉2) 가톨릭이든, 기독교이든, 유태교이든 종교는 강요하는 구석이 있었 다. 이제 그 억압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권위만을 내 세우는 사제도 목사도 랍비도 더이상 없었다. 영성체 의식도, 예배도 더이 상 없었다. 더이상 금식도 없었으며, 더이상 금욕도 없었다. 더이상 교회나 성당이나 유태교당에 나갈 필요도 없었다. 성서가 더이상 초자연적인 가치 를 지닐 수도 없었다. 율법도 계명도 더이상 없었다. 이신론은 편의를 찾는 시대적 요구와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신을 다시 만들어내기 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신의 복수도, 신의 분노도, 더 나아가서 인간사에 대 한 간섭마저도 더이상 원치 않게 되었다. 너무 멀리 있어 눈에 띄지도 않 는 신은 더이상 우리를 성가시게 할 수도 없었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를 그토록 불안에 떨게 했던 원죄의 의식, 은총의 기다립, 구원에 대한 의혹은 더이상 인간의 아들을 괴롭힐 수 없었다.2) 뷔삐에, 『형이상학 강론』. 1725, p. 92·
그러면 이신론은 무엇을 긍정하고 있었는가?
이신론은 이스라엘의 신, 아브라함의 신, 야곱의 신을 부정했지만, 신의 존재마저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이신론은 천계종교를 부정할 뿐이지, 하늘나라가 비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이신론은 인간을 우주의 유일한 척도로 삼지도 않았다. 가톨릭 교도들, 위그노 교도들 또는 영국 정교도들 이 이신론을 비난했지만 그들의 비난이 결코 신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 에 의하면, 이신론자들도 신을 믿었으며, 따라서 그 점에 있어서는 궁극적 으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리챠드 시몬의 이신론적인 태도에 분개하 여 『전정한 종교에 관하여』(1688)라는 책을 써낸 오라토리오회파의 신부 미셸 르 바쏘르의 일절은 그런 점을 잘 알게 해줬다. 〈아카데미 회원이나 에피큐리언보다 합리적이고 판단이 정확한 오늘날의 몇몇 이신론자들은 자 연종교와 자연도덕의 원칙을 내세워, 인간은 오직 그것만을 따르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연종교와 자연도덕 의에 다른 원칙은 필요 없다고 말한 다. 신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계시와 계율이 가르쳐 줄 수는 없으며, 인간은 이성으로 잘 처신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이 우리의 영혼에 각 인해 놓은 종교적 의식과 도덕적 의식을 따르면 신은 언제나 만족해 할 것 이라는 것이다 ……. 〉3)이 가톨릭 옹호론자는 몇몇 이신론자들 (몇몇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왜냐하면 종은 상이한 많은 유를 내포하기 때문이다)에 대해서는 전적인 형오감보다는 약간의 반감밖에 보이지 않는다.
3) 『진정한 종교에 관하여』, I권,Ⅱ장.
신교도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자. 석학 로베르 브왈은 무신론에 젖어 헤어 나지 못하는 시대를 개탄한 나머지 영국에 있는 저택의 세입을 연례종교회 의b) 기금으로 내놓는다. 그의 이름을 붙인 그 종교회의는 종파간에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신앙의 일반원리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 었다. 그 종교회의의 목적은 〈기독교의 진리를 명확하게 하여, 그것을 무신 론자들, 이신론자들, 우상숭배자들, 유태교도들, 마호메트교도들 등 비기독 교도들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려는 것이지, 상이한 기독교 단체들의 논쟁을 조정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기증자의 뜻에 따라 〈브왈 강연회〉라는 이름이 붙은 그 강연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영국에서 내노라 하는 신학자들과 웅 변적인 선교사들이 그 강연회의 연사로 초빙되었다. 그 중에도 당시 노어위 치 교구 전속신부였던 사무엘 클라크는 1704년과 1705년 등 2회에 걸쳐 연 사로 초빙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에 의하면, 이신론자는 네 가지 형태로 분
b) 이 연례종교회의는 기금기부자의 명칭을 따 〈브왈 강연희〉라는 이름이 불여졌다.
류된다. 어떤 사람들은 영원무한하고, 전지적인 그러나 그러면서도 독단적 인 신의 존재를 믿는 체하면서, 신의 섭리는 부정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 신론자는 신의 존재와 신의 섭리는 인정하지만, 그 신이 인간의 도덕적인 문제를 관여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이신론자에 의하면 선과 악은 인간이 제정한 임의적인 규칙에 의존할 뿐이다. 그런가 하면 신의 존 재를 믿고, 신의 섭리를 믿고, 신의 도덕성까지도 믿지만 영혼의 불멸과 내 세만은 믿지 않는 이신론자도 있다.
〈그리고 끝으로 위에 예를 든 이신론자들과는 다른 일단의 이신론자들이 있는데,그들은 신과 신의속성에 대해 모든 면에서 건전하고 울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철대성인, 우주만물의 창조주, 보전자, 유일절대 군주로서의 무한 영원하고 전지전능한 신을 믿는다고 공언한다…….〉사무엘 클라크의 이러한 분석은 미셸 르 바쏘르의 그것과 멀지 않다. 어 떤 이신론자들은 실종종교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다만 애석한 점이 있 다면 그들이 계시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만약 우리가 지금 종교와는 무관한 속인, 가령 유연하고 섬세한 드라이든 같은 시인에게서 대답을 들으려고 한다면 잘못된 것일까? 그의 시에서도 이 신론자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종교성을 읽을 수 있으므로, 그의 바난은 비난이로되 완화된 비난이라고 보면 잘못 보는 것일까?드라이든은 절대선을 천착하는 철학자들을 탐독하던 중에 이신론을 접한 다. 드라이든에 의하면 이신론자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이신론자는 스 스로 단단한 땅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이신론자는 ‘유레카! 위대한 비밀을 드디어 찾았다’고 의친다. 이신론자도 신을 절대선의 근원으로 본다. 우리는 신을 섬기기 위해 태어났으며, 신을 섬기는 일은 곧 우리의 행복이다. 그렇 다면 하늘이 우리에게 지시한 어떤 보편적안 예배규칙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신은 편파적 인 존재로 전락하여,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거부 당할 것이다. 온전한 신이라면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예배방식을 주었을 것이다. 그 보편적인 예배방식이란 신을 찬양하고, 신에게 기구하는 데에 있 으며, 우리가 신의 은총을 받았듯이, 신을 찬양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우리 가 나약하여 죄악에 빠진다면, 우리는 희생과 고해성사로 그것을 속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신의 섭리는 인류에게 미치지 않으니, 이세상은 온통 악이 창궐하고 덕이 시련을 겪는다. 그 상처는 어떤 명의도 치 유할 수 없는 상처이다. 결국 이성은 이 세상의 운명이 다하면 우리를 부르 는 절대자의 세계를 향한다. 공명정대한 하나님의 길이 분명히 드러나는 그 곳은 악한 이는 벌받고 착한 이는 상급을 받는 곳이다. 인간은 산의 특별한 은총에 의지하지 않은 채, 오직 인간의 노력만으로 하늘나라에 오를 수 있 는 것이다.〉4) 드라이든이 여기에 묘사한 이신론자는 종교에 대한 향수를 버 리지 못한 합리주의자임을 알 수 있다.
4) 『속세적 종교』(1682) 중에서 42-63 행을 인용했음.
이처럼 당시의 이신론은 신을 약화시키기는 했지만 신을 말살시킨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이신론에 있어서 신은 막연한, 그러면서도 긍정적인 신앙 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 당시의 이신론이었다. 당시의 이 신론자들은 타락한 형제인 무신론자들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 시의 이신론자들은 신께 기도하고, 신을 경배했다. 그들은 의롭고 타락한 고 아가 아니었다. 속세의 신부인 그들은 동념하늘에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면 서, 감동을 억제치 못하고 눈물을 홀리면서 신을 부르곤 했던 것이다. 〈무 신론자가 되어 신을 부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신론자가 훨씬 쉽다. 전적안 부정, 전적인 반항은 특별한 기질을 요구한다.〉 〈엄격히 말하 자면, 무산론자와 이신론자 사이에는 거의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벨르는 말한다. 그렇지만 그것울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거의〉라는 어휘에는 얼 마나 많은 뉘앙스가 스며들어 있는가! 보날드에 의하면, 〈이신론자란 아직 시간이 없어서 무신론자가 되지 못한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차라리 이신 론자란 무신론자가 되기를 꺼리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 같 다.
이신론이 영국에 터를 잡은 것은 헛된 일이 아니었다. 영국인은 더이상 필요치 않은 사상은 즉시 버릴 줄 아는 민족이었으며, 국민도덕을 저해하는 학설은 과감히 수정하거나 파기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블랙모어의 증언 울 들어보자. 〈영국인들은 종교와 미덕을 항상 떠받드는 민족이다. 만약 그 들이 불경과 악덕이 만연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생각지 않는다면, 그 현 상은 환절기 감기쯤으로 생각하면 틀림없다. 그런 태도는 영국국민의 기질과는 너무 대립된 것이기 때문이다.〉5) 영국국민은 어느 정도의 불편에는 아랑 곳하지 않는다. 모순도 그냥 보아 넘긴다. 계시를 인정치 않는 종교도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한다. 계시는 버리되 종교만 지키면 통과였다. 영국국민에게 있어서 사상은 논리의 문제인 동시에 의지의 문제이기도 했다.
5) 리챠드 불랙모어, 『몇 가지 주제에 관한 소론』, 1716, I, 서문.
이신론자들에게 있어 두번째로 중요한 법칙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자연법칙이었다.
사실은 가톨릭 신도들이 자연법칙의 존재롤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성 토 마스 아퀴나스도 〈인간에게는 어떤 자연법칙이 있으며, 인간은 그 영원한 법칙에 따라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한 바 있었다6) 합리주의의 변 경에서 철학자들과 보조를 같이하던 신교도들도 호교를 위해서는 시대와 공동보조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무신론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이신론자들의 지원을 받는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그것은 무신론 자들을 당황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6)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체계』 문답, 91조 2항, 94조 4항, 6항 참조.
그러나 자연이 주제넘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면서 분열은 시작되었다. 자연은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인정할 수 없는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자연은 가톨릭 신도도, 신교도도 인정할 수 없는 무례한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신의 손에 의해 빚어전 자연이 겸손한 피조물의 상태에 만족지 않 고, 무에서 그 아름다움을 건져내 주신 신에게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점점 창조자의 자리를 넘보기 시작했다. 자연은 신의 중재자가 되려고 했으며, 심 지어 신의 행세를 하려고 했다. 자연은 신을 복종시키려 했으며, 최고질서 를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자연은 이제 신이려고 했다. 가톨릭 교도도 신교 도도 그것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스피노자의 사상이 매도당한 이유는 거기 에 있었다.이신론자들에게 있어서 자연은 일종의 도덕적 본능이자, 종교였다. 그들 에게 있어서 종교는 인간과 자연법칙과의 관계일 뿐 그 이상이 아니었다. 신자들은 이신론의 그 점을 인정할 수 없었다.세번째로, 만약 (라옹땅이 말했듯이) 자연은 〈선한 어머니〉여서, (샤프스베리의 말마따나) 〈자연에는 악의가 있을 수 없다〉고 한다면, 그래서 자연법칙 만 따르면 선행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원죄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어찌되는가? 지상의 삶은 하늘나라에 이르기 위한 고난 의 정거장이 아니란 말인가? 하늘나라의 상을 받기 위한 속죄의 과정이 아 니란 말인가?
자연은 과연 무엇일까? 당시 어떤 진영에 속해 있건, 구실과 협잡을 허용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의문에 붙이던 용감한 사람들은 자연에도 똑같은 질 문을 던졌다. 그들은 진리를 갈구하고, 광명을 위해 투쟁했다. 문제가 어려 우면 어려울수록 그들은 그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조여들어갔다. 도대체 자연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곧 그 단어가 여러가지 의미로 쓰이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연이란 〈유식한 사람의 말에서나 무석한 사람의 말에서 나 엄청난 혼란을 야기시키는 단어〉였다. 그들에 의하면 자연이란 단어는 대체로 디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자연은 쓸데없는 것은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 자연은 결코 도를 넘지도 않는다. 자연은 언제나 최선을 다 한다. 자연은 언제나 지름길을 간다. 자연은 결코 필요 없는 것을 더하지도 않고, 필요한것을 덜하지도 않는다. 자연은 자기보존적이다. 자연은 항상 우주의 보전을 돌본다. 자연은 악을 치유한다. 자연은 공허를 두려워한다 ……. 그러나 얼마나 앞뒤가 맞지 않는 경구들인가! 동일한 하나의 대상에 대한 해석들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자연은 창조주인 동시에, 사물의 본질이 며, 사물의 질서인 동시에, 섭리라는 말인가? 7)7) 로베르 브왈, 『자연에 대하여』, 론디니, 1686.
사람들은 거기에 대한 답을 찾아내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결코 명확한 답 울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로베르 브왈 은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자연에 대한 표현들의 애매성을 지적한 후 그것 들의 가닥을 잡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단호한 정의를 찾기보다는, 자연 과 신을 혼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교회의 입장에서 논리를 전개시켜 나 갔다. 또한 삐에르 벨르는 인간이 천부적으로 선하게 태어난다고 하는 어처 구니없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에 대단한 호응을 얻은 성선설에 대해 크게 반발한다. 자연, 그것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아무도 관찰한 적이 없었다. 〈자연이란 단어보다 막연하게 사용된 어휘가 일찍이
없었다. 그 단어는 모든 종류의 담화에 어떤 때는 이런 의미로, 또 어떤 때 는 저런 의미로 끼어들지만, 사람들은 그것에 정확한 개념을 부여한 적이 없었다.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자연이 우리에게 무엇을 불어넣었는지 알고 싶으면,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어린 아이가 자연적인 어떤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교육을 받지 않은 사 람의 정신에 관해 실험을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만약 어떤 아이를 전 혀 교육시키지 않은 채 오직 먹을 것만을 주어서 길렀다고 해보자, 우리는 자연의 결과가 어떠한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사 람들은 요람에서부터 길들여지고, 믿으라는 대로 믿어 온 사람들뿐이다.〉 뿐 만 아니다. 눈을 들어 주변을 한번만 둘러보면 우리는 자연과 선이 동의어 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는 인류에게서 아주 나쁜 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자연에서 비롯된 것임에랴 …… 신앙심이 깊 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부모조차도 복수의 욕심, 명예를 향한 욕심, 두기의 욕망, 불순한 사랑에 대한 욕망 등등 욕망의 찌 꺼기를 버리지 못한다.〉8) 또는 〈셜록씨는 인류의 보편적 동의가 곧 자연의 소리이며, 틀림없는 진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논리이다. 오 히려 자연의 소리는, 허기를 채우고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고, 음란한 욕망 울 충족시키고, 복수의 칼을 휘두르는 것이다…….〉9) 그러므로 인간의 선 과 덕에 관한 한 자연의 언급만으로는 충분할 수가 없었다.
8) 삐에르 벨르, 『어떤 시골사람의 의문에 대한 대답』' II, CV장 〈자연에서 비롯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그것이 선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알려면 자연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만 파악하면 그만이다.〉
9) 위의 책, Ⅱ, CVI장.그러거나 말거나 우주를 보전하고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는 어떤 막연한 자연의 힘을 믿는 이신론자들은 자유롭게 행동했으며, 거기에 만족했다. 그 둘은 자연신을 섬길 때, 실증 규칙을 지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에 의하 면, 진정한 신을 해롭게 하는 것은 오히려 미신에 의지한 기만적인 사람들 의 천계종교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연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인위적인 성 상을 진정한 신의 이데아와 대체시키려고 했다.
이신론자들 중에도 유파가 갈라졌다. 그 중 하나는 〈강한 정신의 소유자들, 즉 자유롭게 사고하는 사람들의 집단〉이었다.10) C)
10) 안토니 콜린스, 『자유사상에 관한 대담』, 런던, 1713.
c) 강한 정신의 소유자들 또는 자유롭게 사고하는 사람들이란 당시의 자유사상가들을 지칭하는것이다.그들의 사고방식을 살펴보자. 그들에 의하면 자유사상이란 〈제시된 명제 가 어떤 명제이든지간에 찬반의 논리를 충분히 가늠해서 그것의 의미를 명 명백백하게 드러내기 위해 주어전 정신의 역량을 자유롭게 행사하는 것〉이 라고 한다. 그러나 이 양심의 법정은 반드시 처벌을 전제하지는 않는다. 다 만, 어떤 증언이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인정하고, 또는 어떤 사실이 명중의 규칙에 들어맞으면 그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자유사상가란 거짓된 것을 물리치고, 진실된 것을 간직하는 사람이다. 회의주의자와는 거 리가 먼 이 자유사상가는 전리와 정의의 토대가 되는 이성의 능력을 믿고, 이성의 대열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자유사상가의 강인한 내적 힘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명백한 진리의 뿌리 를 붙잡고 있다고 믿는 자유사상가는 자신이 발견한 진리보다 밝은 전리는 더이상 없다고 호언한다. 말하자면 자유사상가는 허약한 정신의 소유자는 결코 찾아낼 수 없는 위대한 비밀을 찾아냈던 것이다. 자유사상가는 〈나는 자유롭게 사고한다〉리는 마법적인 표현을 황홀한 듯아 반복하면서 인간과 사물 앞에서 그 힘을 과시해 보였다. 이제까지 속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러나 이제 자유사상가는 속지 않겠다는 것이다. 자유사상가는· 눈 앞에 제시 되는 모든 것과 정신 앞에 나타니는· 모든 것을 엄격히 검토하여, 진리와 선 울 밝혀낸다. 그것은 미신을 벗어나기 위해 그가 보여준 오만한 태도에 대 한 보상과도 같았다. 이성에 의지한 자유사상가의 확신은 열성신자가d) 누리 던 평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자유롭게 사고합시다. 그러면 나 머지는 부수적으로 여러분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자유롭게 사고합시다. 그 러면 여러분은 인식의 열매맛이 얼마나 달콤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소 심한 자들과 맹종하는 자들이여 끝내 낙원의 바깥 암혹에 머물지니 ... …> 기존사상을 검토하는 일을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처럼 비합리적d) 당대는 역설적이게도 자유사상가의 시대이자 열성신도들의 시대였다. 우리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열성신도들의 태도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인 것도 없다. 또한 그러한 자유를 행사하는 사람의 선의를 의심한다면, 그 것처럼 비합리적인 것도 없다. 이성보다 훌륭한 안내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는, 인간은 이성의 빛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자유로운 사고는 그 자체로 행복이며, 인생의 배를 행복의 항구로 향하게 하는 방향타였다. 인간의 삶을 속속들이 알게 하고, 미덕은 기쁨과 행복을 낳고, 악은 불행을 낳는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도 자유로운 사고였다. 키 케로는 자신의 의무를 기꺼이 이행하는 사람, 자신의 모든 행동을 조심스럽 게 조절하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웅변했는데, 그 찬사도 사실은 자유 로운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유사상가는 오직 명철한 의지의 소리와 이성에 근거한 논리에 귀기울였다. 자유사상가는 이제 우주의 주인이 되었 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지배자가 되기에 이르렀다.자유사상에 대한 그러한 정의들을 세상에 처음 공표한 사람은 안토니 콜 린스였다. 그는 처음에는 논쟁적인 글들을 통해, 그리고 이어 1713년에는 『자 유사상에 관한 담론』이라는 보다 상세한 그의 논고를 통해 자유사상을 소 개했다. 이제 자유사상가라는 단어는 비로소. 시민권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록크의 소개에 의하면, 그는 이튼을 거쳐 캠브리지에서 수학한 자 유사상가이자 신사였다. 시골에 집을, 도시에 서재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 니라, 어디나 친구가 많았던 그는 말하자면 삶에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는 영국인들이 제일의 사회적 덕목으로 꼽는 존경을 한몸에 받은 사람이 었다. 그 신사는 무신론자들과 이신론자들의 난삽한 유산을 이어받아, 그것 들이 내포하는 뜻과 원리를 정확히 추출해냈다. 바로 그때부터 자유사상가 는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그리고 수적으로 우세한 신자들에게 동정과 함께 조소를 보넬 수 있게 되었다. 안토니 콜린스는 사무엘 쿨라크를 무시했다. 〈사무엘 클라크는 지나치게 관례적인 사람이다! 이 말 한 마디면 충분하다.〉 그는 판결을 받은 셈이었다. 〈내가 사무엘 클라크에게서 가장 놀란 것은, 도 저히 그롤 믿을 수 없는 것은, 그가 나를 의심 많은 사람으로 추측하기 때 문이다.〉 나는 그의 『호교론』에서 그 사실을 발견했다. 〈물론 그런 추측과 판단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작가의 명예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공명하고 현명한 독자라면 그러한 말에 솔것하지 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런 억측을 부정하려고 애쓰지는 않겠다. 다만 나는그의 관례주의를 지적한 다음 그와 작별을 하겠다. 그는 완전하고도 철저한 관례주의자여서, 지나치게 믿는 법도 없고, 덜 믿는 법도 없다. 그는 영원히 그럴 것이다.〉 관례주의자는 자율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무능한 지진아로 간주되기에 이르렀으며,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독소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반면 자유사상가는 합리적인 사고로 사회선에 기여하는 사람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자유사상가를 더이상 경박한 무신론자들, 에고이스트들, 향락주의 자들이라고 매도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더이상 상스러운 패거리들도 아 니었으며, 더이상 건달이나 낙오자들도 아니었다. 순수하고 품위 있는 행동 으로 자유사상가의 본보기를 보여준 콜린스는 수많은 반대파들에게서조차 추앙을 받았다.
표현의 차이에 구애받지 않고, 반대자의 논리에 빠지지도 않은 채, 오직 앞만 보고 걷어가는 콜린스의 『자유 사상에 관한 담론』은 긍정과 부정으로 가득했다. 그는 긍정의 자리에 부정을 부정의 자리에 긍정을 대체시켰다. 그 에 의하면 정신에 승리를 가져다 준 것은 유물론이며, 이제 우리에게 필요 한 것은 자유주의 였다. 루이 14세가 아직 살아 있던 1714년경부터 콜린스의 불어 번역본이 나돌아다녔다. 그의 책은 대단한 호응을 얻어 1717년에 재판 이 나올 정도였다. 사람들의 말로는, 그 책은 오직 영국인들을 위해서 쓰여 진 것이고, 주석이 없이는 의국독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 정 도의 산만한 번역이 불가피한 저서였다. 그러나 통념과는 달리, 그 책의 번 역자는 그 책을 세계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통념은 증명의 필요가 없는 오류라는 것이었다. 〈전리, 사상, 그리고 이성이야말로 범세계적인 것이 아 니던가!〉 〈이 책의 주제야말로 모든 나라 국민의 관심거리가 아니던가!〉 우 리의 관심을 끄는 것 중의 하나는, 자유사상가들이 그들의 성전을 그들의 성인들로 축성했다는 점이다. 이제 이성의 신도들은 이 새로운 신앙을 위해 공헌한 사람들을 경배하기에 이르렀다. 소크라테스, 풀라톤, 아리스토텔레 스, 에피쿠로스, 플루타크, 바론, 로마의 카톤, 유티카의 카톤, 세네카, 솔로 몬, 선지자들, 역사가 죠셉, 오리제니우스, 미니시어스 펠릭스, 베이컨, 홉스, 그리고 아프리카의 주교 시네시오스., 대주교 틸롯슨까지 …… . 그런데 틸 롯슨은 사실을 말하자면 호교론자 중의 하나였지만, 그의 설교는 종교와 도 덕에 그치지 않고 자유사상까지도 포괄하는 설교였다. 그는 자유사상의 실천만이 사회선과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설교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 나친 장황스러움을 피하기 위해 콜린스가 이름만을 든 다른 영웅들 중에는 에라스무스, 몽테뉴, 스칼리제, 데카르트, 가쌍디, 그로티우스, 허버트 드 처 베리, 밀튼, 마샴, 스펜서, 템플, 록크 등이 있었다. 그는 결론지어 말하기를, 결국, 양식과 미덕으로 이름이 높은 사람치고, 훌륭한 족적을 남긴 사람치 고, 우리에게 사상의 자유를 입증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 다. 그와는 반대로, 그의 말에 따르자면, 어느 대열에 끼어 있건 어떤 명사 의 대접을 받는 사람이건 자유사상을 매도하는 사람은 두뇌를 다친 광신도 가 아니면, 추악한 악덕과 비인간적인 야망으로 배를 가득 채운 사람이 아 니면, 교회와 신의 영광이라는 허울 좋은 동기로 무슨 일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무지에 의한 폭력을 서슴지 않고 휘두르는 사람 이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사제, 여자, 운명의 노예가 그들이었다.
중요한 것은 속세의 성인을 기리는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사상의 교단을 개혁하고, 신입회원을 영입하여 예배를 드리는 일이었다. 자유사상 은 최종적으로 그것을 소망했다.만약 톨랜드에게 그의 유일한 주제인 기독교에 대한 증오가 없었다면, 누 가 그를 철학자라고 불렀을 것안가? 기독교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는 교회 단체에 대항할 단체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신에게 바치는 찬송가 대 신 철학에 바치는 찬송가를 작곡했다. 오 철학이시여 ! 모든 악을 추방하고 우리를 덕으로 인도하는 우리의 삶의 안내자이신 철학이시여 ! 당신이 없었 다면 우리 모든 인간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도시를 꾸며 흩어진 인간을 한데 모아 살게 하신 이, 당신이십니다 …… 규칙을 만드시고, 우리의 행실 과 계율을 가르치신 이, 당신이십니다…… 우리는 당신을 의지하나이다. 원 컨대, 영원 불멸의 삶보다는 당신의 율법을 좇아 하루를 사는 우리 되게 하 옵소서 …… 우리에게 삶의 평화를 주시고,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건져 주시는 당신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했을까요? ……인간이 가르친 모든 유의 예배방식을 드러내놓고 저주하던 그였다. 그러 던 그가 이제는 인간을 보다 선량하게 해주고, 보다 지혜롭게 해주고, 인간 에게 항상 기쁨과 만족을 줄 새로운 단체를 결성하자고 촉구했다.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그는 소크라테스풍의 단체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그리고 나서 그는 그 단체의 품성, 계율, 계시, 그리고 철학의 초안을 기초 했다. 이 단체의 회원들도 비밀집회를 가졌다. 찬송가를 부르고, 세례와 성 찬회식도 베풀었다. 그들도 교독문을 낭송했다. 사회자가 한 절을 낭송하면, 신도들이 화답했다. 죤 톨랜드의 안내를 받아, 새로운 교파의 신도들과 형 제들이 모인 방으로 들어가 보자 …….
사회자 : 복되고 복될지어다 회중 : 소크라데스 교단을 이룩한 이들이여. 사회자 : 철학이여 활짝 필지어다. 회중 : 자유사상과 함께. 사회자 : 침묵할지어다 ·… .. 회중이여 전리, 자유, 건강 삼위일체께 기도하는 마 음으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할지니. 회중: 영원무궁토록 함께 할지어다. 사회자 : 우리는 위도 아래도 없는 형제들이니. 사회자 : 또한 우리는 한 울타리의 형제들이요, 친구들이로다. 결국 교회를 파괴하려고 설치던 사람들이 우리의 목전에서 예배당을 세 운 것이다. 우리가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빠뜨릴 수 없는 사실 하나는, 영국의 비밀결사대는 1717년 발족되었으며, 프랑스의 비밀결사대는 1725년 결성되었다는 사실이다.제3장 자연권
이전에는 신권이 있었다.a)a) 역자는 droit naturel을 자연권이라고 옮겼으며, droit divin을 신권이라고 옮겼었다.
종교 때문이었는지, 모든 것은 단순하고도 웅장했다. 정치도 복음서에 의 존했다. 그보다 확실한 것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듣거라 이스라엘이여, 우리 구주 하나님은 유일한 신이시니, 너희는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너희 주 하나님을 섬길지어다.〉 신에 대한 사랑은 인간을 서로 사랑하게 했 고, 사회는 거기에서 비롯되었었다. 그러다가 가부장적 군주제도가 들어섰 다. 신권정치에 이어 등장한 가부장적군주제도는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역 사가 깊고, 가장 자연스러운 정부형태 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 은 태어나자마자 신민이었고, 부권국가의 지배 아래서 복종만을 유일한 덕 으로 알았기 때문에, 유일한 절대 군주에 익숙해 있었다. 당시에는 군주정 부가 최선의 정부형태였고, 군주정부 중에서도 장자로 계승되는 군주제도가 가장 최선의 것으로 여겨졌다.1)
1) 『성서에서 비롯된 정치 형태』, 1709.
황태자의 선생이었던 모Meaux 주교가 왕의 신변을 보호하는 천개를 손 수 만들 정도였다. 왕은 신성한 존재여서 이 세상 누구도 함부로 그의 권위 를 침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왕은 어떤 율법으로부터도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세상의 비참한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엄
격하고 무거운 짐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람이었다. 왕의 권위는 신성한 반면, 가부장으로서 신민울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왕의 권위는 절대적인 반 면 합리적이어야 했다. 왕의 권위는 변덕이 아니라 보편적 의지에 의해서 행사되어져야만 했다. 만약 절대 권력을 부여받은 자가 그것을 잘못 사용할 때는 최후의 심판에서 벌을 면제받을 수 없었고, 그는 그 벌을 두려워해야 만 했다. 따라서 왕은 신민에 대한 책임은 면제될지언정 신에 대한 책임은 면제받을 수 없었다. 왕은 신민의 의견이나 충고를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 었다. 신권을 부여받은 왕에게 신민이 권력을 행사한다면 그것보다 더한 모 순과 불충이 없었다. 이 원칙은 어떻게나 뿌리깊은 것이었든지, 설령 군주 가 무신론자라고 하더라도, 더 나아가 왕이 신민을 박해한다고 하더라도, 백성은 복종해야만 했다. 백성은 군주의 폭력에 대해 불평을 할 수도 없었 고, 폭동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오직 가능한 것은 회심을 간구하는 기도뿐 이었다. 신은 하늘 높은 곳에서 모든 왕국의 고삐를 쥐고 있었으며, 왕들은 은밀한 신의 뜻을 따라 백성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아무 런 불평 없이 복종해야만 했다. 물론 조화로운 관계를 의심케 하는 사건들 이 없지 않았지만, 그러나 육적인 근시안을 버리고 바라다보는 순간 사람들 은 그것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 들도 나름대로 제몫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자 이제 그런 휘황찬란한 허영과 거의 초인적이라고 할 만한 위엄을 과 시하던 얼굴을 한번 떠올려 보자. 우리의 뇌리에 맨 먼저 떠오르는 얼굴은 루이 14세의 b) 얼굴이다. 왕으로서의 그의 형상은 그 광휘와 함께 우리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으며, 아직도 우리에게 다가와, 여기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짐은 곧 국가니라〉라는 그 태양왕의 말은 지금도 우리의 귓가에 쟁 쟁하다. 그는 왕도 하나요, 신앙도 하나요, 법도 하나라는 그 유명한 금언 을c) 문자 그대로 실현시키려고 한 왕이었다. 그는 모든 저항을 물리쳤다. 그 는 교회라는 〈선박〉의 조종사인 교황으로부터 선박의 안전을 책임지는 선 장의 권리를 지켰다. 선장은 바로 그였다. 그는 군주국가의 영웅이었다. 베b) 태양왕으로 지칭되던 프랑스의 절대군주로 그는 1643-1715년까지 프랑스를 지배했다.
c) un roi, une foi, une Ioi …….르사이유 궁전의 홀과 궁정의 여기저기로 그를 찾아가 보자. 그를 수행하는 조정의 만조백관들은 그의 몸짓 하나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는 그 런 만조백관들의 시중을 받으며 거울에 둘러싸인 방울 거닌다. 폐하의 뜻으 로 닦아진 길을 거닐다가 저녁 무렵 성관에 돌아오면 우리는 라 브뤼예르 가 불러낸 망령을 금방이라도 사방에 둘러싸인 겨울에서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감히 말하건대, 왕은 국무담당 장관이시다. 어떻게 하면 민생고를 해 결할까를 겨정하는 왕은 잠시도 쉴 틈이 없으며, 특권을 누릴 톰은 더욱 없 다. 벌써 밤이 깊어, 궁전의 초소에서는 위병들이 근무를 교대하고, 하늘에 서는 별들이 반짝이며 떠간다. 천지간 만물은 어둠에 묻혀 고요한데, 비천 한 우리마저 휴식을 취하는데, 왕만은 백성과 나라를 보살피기 위해 난간에 기대어 잠을 아루지 못하고 계신다…….〉
뿐만 아니었다. 군주의 절대권을 보호하는 끔찍한 이론이 있었으니, 인간 은 수단으로 취급하지 않으면 지배할 수 없다는 이론이었다. 그 중에도 마 키아벨리의 이론은 벌써 오래된 낡은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것 울 기억하고 있다. 가깝게는 홉스의 이론이 있다. I642년에 초고가 쓰여진 그의 무서운 이론은 I65I년 『리바이어던』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구체적인 형 태로 세상에 공표되었던 것이다. 홉스의 이름은 그 이후의 유명한 책들이 얼마나 많이 인용했던가! 그의 사상은 얼마나 숱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던가! 그리고 얼마나 감동적인 메아리를 불러일으켰던가! 그의 이론은 반박을 위 해서라도 한번쯤 접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이론이었다.홉스는 인간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당산들은 천부적으로 악하게 태 어났다. 당신들은 이익이라는 고지 점령 의에 다른 목적이 없으며, 열정의 발산 의에는 다른 자유를 모른다. 당신들은 쾌락 의에는 다른 선을 모르고, 고통 의에는 다른 악을 모른다. 따라서 당신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어 떠한 정신적 원리도 존재치 않는다. 생명보존의 법칙도 이기주의에서 비롯 된 것이며, 개체는 그러한 생명권을 서로 방어한다. 자연상태는 늑대 같은 인간들의 두쟁의 다론 표현일 뿐이다. 〈그러한 자연적인 자유 속에서의 인 간의 상태는 전쟁 그것이다. 말이나 행동을 통해 공격 또는 방어의 의지를 표명하는 순간 전쟁은 시작되며, 자연은 언제라도 그것을 부추기기 때문이 다. 전쟁이 사라전 시기를 우리는 평화의 시기라고 부른다.〉 평화가 도래치않으면 인류는 파멸하고 말 것이다. 만약 인간이 어떤 인위적인 방법을 통 해 자연상태의 악을 치유치 못한다면, 만약 인간이 유일하게 인간을 보존할 수 있는 어떤 불평등한 제도를 인간 사회에 도입하지 못한다면, 인류는 틀 림없이 파멸할 것이다. 군주로 대표되는 정치집단과 제도는 바로 그 때문에 도입된 것이며, 그 군주는 반드시 유일 절대군주여야 한다.
규약과 서약은 인간의 평화를 유지시킬 수 없다. 인간은 규약과 서약을 어길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직 권력과 권력이 고취시키는 공포 만이 그러한 원시적 본능을 진압할 수 있다. 모든 절대권력은 왕에게 집중 되어야 하며, 전쟁의 칼과 정의의 검은 왕이 쥐어야 한다. 어떤 민주적 제 도가 왕의 권위를 제한한다면, 무정부상태가 도래할 것이며, 자연상태의 카 오스가 도래할 뿐이다. 왕은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고, 아무것에도 구속받 지 않는 전권을 쥐어야 한다. 아마 국민은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자유를 어 느 정도 희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화해 불가능한 것이 자유와 생명이라면, 생명을 택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인간의 지혜는 놀랍다. 인간 은 걷고 앉고, 머리를 움직이고 입을 벌리고 눈을 깜짝일 줄도 아는 특별 한 동물을 마침내 제조해내기에 이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사회를 창조해내기에 이른 것이었다. 자연사회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와서 정치를 하는 흉칙한 로보트의 이름은 리바이어 던이었다. 〈자연인보다도 크고 힘도 센 소위 리바이어던이라는 인위적 인간 은 원래의 자연인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이다…….〉발생지는 다를지라도, 권위주의라는 점에 있어서는 다를 것이 없는 그러 한 이론들에 대한 반대 이론들이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다. 양 진영에서 전 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쌍방간의 제거를 위한 투쟁은 비장미마저 보였다. 몇몇 사상들이 조심스럽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가 하면, 어떤 것들은 넓게 확장되어 나가기도 했다. 대부분 그것들은 하나같이 그것의 발상지에 갇혀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날아다녔다. 오히려 그것 들은 다른 나라에 가서 활력을 얻곤 했다. 이상하지만 그것이 그것들의 생 리였다. 새로운 사상들은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으며, 끊임없이 방어하고, 기 반을 다지면 원기를 회복하여 공격을 재개하곤 했다. 힘을 키워 과거를 지 배하던 원칙들을 몰아내서 인간을 더 나은 미래로 안내하고자 했다. 자연권의 개념은 신의 행위와 의지를 부정하고, 다시 말해 신과 초현실을 부정하 고 그 자리에 자연의 내재적 질서를 대체시키려는 데서 비롯되었다. 자연권 개념은 또한 사회질서에 뿌리를 내린 합리성――인간은 누구에게나 인간 이라는 말에 합당한 능력이 있으며, 그 능력을 행사할 의무가 있다는 합리 주의 ―― 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을 부추긴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안으로는 군주와 신민의 관계를 독단적으로 규정하고, 밖으로는 전쟁만을 부르는 권 위주의는 이제 인간을 행복하게 해줄 새로운 권리에 그 자리를 내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새로운 권리는 인간들의 관계를 조절하되, 각자에게 운명의 결정권을 부여하는 정치적 권리였으며, 그것은 다름 아닌 주권재민 사상이었다…….
물론 주권재민의 원리는 삶의 철학, 사회적 가치, 실용가치, 뿌리로서의 권리, 무성한 곁가지로서의 권리 등등의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 변신을 겪어 야 했다. 전투적인 대저서둘이 이정표 구실을 한다. 그것들이 쓰여전 연대 를 짚어가면서 그것들이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과 정에서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1625년, 위그 드 그로티우스. 『전쟁과 평화의 권리』d)d) De jure belli et pacis, 1625.
위그 드 그로티우스는 프랑스 파리에 망명한 네델란드인으로서 출발신호 롤 울린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감성이 풍부하고, 지성과 지식을 겸비한 그는 전 유럽을 초토화시키는 정치적 소용돌이와 종교적 공방의 와중에서 애통함을 금치 못했다. 〈나는 기독교 국가들이 비기독교 국가들마저 수치를 느껴 차마 자행하지 못할 전쟁을 일삼는 것을 보았다. 별것도 아닌 이유로, 또는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그들은 무기를 집어들었다. 일단 무기를 들면, 그들은 신에 대한 믿음도, 인간에 대한 도덕도 더이상 지키려 들지 않았다. 마치 그둘은 죄악의 길을 춤추며 휘돌아가는 미천 사람들 갇았다 …… .>그 로티우스는 사상 때문에 박해를 받다가 두옥되었는데, 소설적인 탈출에 성 공하여 파리에 당도한다. 그는 1625년 루이 13세에게 그의 대저서 『전쟁과 평화의 권리』라는 책을 헌정한다. 그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
었던 그의 대부분의 다른 저서들과 마찬가지로 그 책도 대중에게 발표되지 는 않았다. 국민들간의 관계와 국가 원수간의 관계를 조절하는 그러한 권리 에 당시의 누가 관심을 기울였겠는가? 저자인 그로티우스마저도 자신의 이 론에 관심을 가질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하기 를, 전쟁의 권리는 다른 권리와는 양립 불가능한 권리이며, 마키아벨리가 가 르쳤듯이, 국가를 위해서는 국가의 배신이나 폭력은 모두 이해되어져야 한 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티우스의 생각은 달랐다. 전시에도 전쟁을 지배 하는 천부적인 권리가 머리를 쳐든다는 것이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로 태어났다. 그것은 인간의 가슴 깊이 새겨진 것이었다. 명문화된 규칙은 아니 었지만 그 생존권을 능가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었다. 〈정의의 분 배에 있어서만큼이나, 전쟁에 있어서도 종교성은 필요한 것이다.〉 〈전시에 는 시민법이 침묵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명문화된 법은 없지만 자연 의 명령마저 입을 다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로티우스는 신권을 떠받드는 것인가? 그로티우스는 신권을 지 키려고 한다. 그는 공언하여 말하기를 만약 산이 존재치 않고, 따라서 인간 사가 신의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죄악이다) 자신의 사 상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신과 신의 섭리를 믿는다. 인간의 권리는 자연과 신의 의지에서 발원하는 것이었다. 〈자연권 자체가 이미 신 의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이미 그러한 원리들을· 우리의 내부에 각인 해 놓으셨기 때문이다.〉신의 법칙, 자연의 법칙 …… 그러한 표현들을 처음 쓴 사람은 그로티우스 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그로티우스보다 훨씬 전에 사용된 표현들이었다. 이 미 중세에 그것들이 사용되었었다. 그런데 왜 그로티우스에 이르러 그것들 이 혁신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을까? 왜 그로티우스는 많은 학자들로부터 비난과 비판을 받아야 했고, 그는 왜 그토록 물의를 일으킨 사상가가 되었 을까?세 가지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용어들이 그로티 우스에 의해 분리되고 대립되었다. 그 용어들이 명백해지기 시작한 것은 그 로티우스 이후였다. 그로티우스는 일단 그것들을 분리시킨 다음, 그것들을 화해시켰다. 거기에 둘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 이유는 우리가 이미위에서 본 아주 강한 그의 감정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세상의 악은 신도 전압하지 못한다. 아니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신은 그것을 묵인하 고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인간의 법으로 전쟁과 폭력과 무질서 등등의 악을 근절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로티우스가 특히 혁신적이었다면, 세번째 이유에서처럼 그는 우리를 부지불식간에 신의 질서 에서 인간의 질서로 인도한 데에 있었다.
그의 저서는 17세기 내내 대학의 법학 강단에서 번역되고, 해석되고, 주 석되었다.1670년, 스피노자, 『신학과 철학』e)e)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1670 .
1677년, 스피노자, 『에티카』f)
f) Ethique, 1677 .
스피노자가 강조하는 중요한 하나의 사상은 왕은 종교를 이용하여 그의 부당한 권력을 확보한다는 것이며, 못지 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사상은 모 든 존재는 필연적으로 자기보존을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것이다.
『에티카』 3장 6절은 그 점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존 재하는 한 자기보존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증명 一존재들이란 신의 속성을 드러내는 특별한 방식들이라고 할 수 있 다……다시 말해서, 신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통해 그의 권능을 나타 내기도 하며,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존재하기도 하고 행동하기도 한다. 이 세 상에 존재히는 모든 것은 자기의 존재를 파멸시키거나 실존을 멈추게 할 만 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몰거나 그것에 저항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 든 것은 존재하는 한 자기보존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것은 증명 되었어야 하는 것이다.1672년, 사뮈엘 퓌펜도르프, 『인권과 자연권에 대하여』 전8권g)g) De jure naturae et gentium, 1672.
1673년, 사뮈엘 퓌펜도르프, 『자연법칙에 의거한 인간과 시민의 의무』 전2권h)
h) De officio homonis et civis juxta legem naturalem, 1673,
스웨덴에서 강의하던 사뮈엘 퓌펜도르프는 당시의 사상에 쐐기를 박는 불 후의 족적을 남긴다. 독일인 사뮈엘 퓌펜도르프 교수는 하이델베르그 대학 에서 인권과 자연권에 관한 한 제일인자였다. 그는 1670년 스웨덴 국왕 샤 를르 II세의 초청으로 스웨덴 룬트 대학에서 교환교수를 역임한다. 인간과 시민의 의무라는 제목은 당대의 사람들을 얼마나 놀라게 했는가! 그것이 어 느 시대의 것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프랑스 혁명가의 그것이라고 대답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퓌펜도르프는 적어도 백년은 앞선 것 같다. 위 대한 정신의 소유자를 통해 계승된 계몽주의 정신이 이미 백년 전부터 싹 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태초의 인간도 오늘날의 우리와 마찬가지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을 인정한다면 중요한 것은 역사가 아니라 철학적 상 상이다. 사회적 도덕과 의무란 엄격한 규칙들에 의거한 인간의 행동을 말한 다〉.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협약이다. 결혼제도, 가족구조, 정치집단의 구성 예 의해 자연상태를 벗어난 시민사회는 필연적으로 관습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각 개체들은 협동하여 하나의 집단을 구성하고, 합의를 통 해 그들의 안전과 공동의 이익을 조절하려고 했다. 절대권력을 쥔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공공의 이익과 안전을 지키려고 했을 것이며, 반면 나머지 사 람들은 거기에 대한 대가로 권력을 쥔 사람들에게 충성을 다짐했을 것이다.
자연권은 점차 강력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자연권은 전쟁중에도 엄정한 지위를 확보했으며, 어떤 정치제도 안에서도 그것의 정당한 지위를 요구했 다. 또한 자연권은 사회생활을 관장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자연의 〈법칙은 인 간의 사회적, 합리적 특성과 너무 잘 일치하기 때문에, 자연 원칙의 준수 없 이는 정직하고 평화로운 인간사회를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퓌펜도르프는 신의 권능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다른 차원에 위치시킨다. 굳이 구 분해 보자면 우리는 순수 이성의 차원과 계시의 차원, 다시 말해 자연권과 신학을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어떤 의 무사항들은 합리적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했다. 반면 다른 어떤 의무사항들 은 신이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부과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다른 차원의 것 들은 서로 배반적일 수도 있고, 서로 일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둘이 일치함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듯했다. 그러나 기실 그의 노력은 그 둘의 깊은 불화를 반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학은 하늘과관계하고, 자연권은 땅과 관계한다. 그런데 퓌펜도르프가 즐겨 시선을 준 곳 은 오직 땅이었다. 하늘은 그에게 너무 멀게 느껴졌던 것이다.
스웨덴의 목사들은 그러한 이분법,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한 편애의 위 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권의 이론가 퓌펜도르프에게 비난을 퍼 부어댔다. 퓌펜도르프는 추방을 당하지 않으려면 세속적 권력에 구원을 요 청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놓였다.승리는 그의 것이었다.I672년, 리챠드 컴버랜드, 『철학적 탐구로서의 자연법』i)i) De legibus naturae disquisitio philosophica, 1672.
그는 영국의 보배였다. 신학박사로서, 후일 주교직을 서임받게 되는 리차 드 컴버랜드 경은 흉칙한 홉스의 이론을 논박한다. 그는 자연법에 근거하여 『리바이어던』의 작가를 공박한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합리적으로 살아가 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너그러울 것을 가르친다…….〉
영국은 정치적 논쟁과 국민의 지적, 도덕적, 종교적 삶이 무관하지 않은 땅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17세기 내내 문제가 되고, 뒤집어졌다가 엎어지고, 엎어졌다가 뒤집어지는 가운데 본질적인 수정을 피할 수 없었던 왕권에 대 한 논쟁이 부르즈와 시민과 귀족, 시인과 철학자들, 심지어 왕 자신들에 의 해서까지 활발하게 전개된 땅이었다. 그렇게 유서깊은 영국이 바야흐로 영 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론 것이다. 그러나 사태가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어 서 때를 기다려야 했다.1685년 낭트칙령의 철회 J)j) I685년 IO 월 18 일 루이 14세에 의해 발표된 낭트 칙령의 철회 명령은 앙리 4세에 의 해 신교도들에게 주어졌던 모든 특권을 박탈하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사원의 철폐와 신도들의 탄압은 루이 14세를 파멸의 길로 이끌어가고 말았다.
의국에 터를 잡은 망명객, 말하자면 프랑스의 밖에서 프랑스를 일군 망명 객들로부터 반란의 함성이 일기 시작했다.물론박해를받다가추방당한신 교도들이라고 해서 왕에 대한 충성의 서약을 파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군주에 대한 복종의 의무는 신이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군주에게 실수가 있더라도 신권에 근거한 왕의 권위에는 변함이 있을 수 없 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폭력에는 역시 폭력으로 항거해야 한다고 소리높이 의치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1686년에서 1689년까지 약 4년 동 안에 걸쳐 쥐리의는 『바빌론에 갇혀 신음하는 신도들에게 시골에서 보내는 편지』를 쓴다. 그는 거기에서 반란의 권리를 주장한다. 〈군주의 검은 양심 까지 찌를 수는 없다.〉 검으로 양심을 찌른 루이 14세는 왕권을 빼앗기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왕권에 대한 항거의 권리는 합법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한 주장을 들은 보쉬에는 분개한다. 그는 쥐리의를 공박하기 위해 1690년 〈열왕기에 정면으로 도전한 쥐리의 목사의 편지를 읽고 신교도들에 게 보내는 다섯번째 경고〉를 보낸다. 그는 그 목사 때문에 제국의 토대가 무너졌다고 개탄한다. 〈쥐리의는 선동적인 말들을 퍼뜨려 제국 전체의 전복 을 기도할 뿐더러 신의 권능을 훼손시키려고 하고 있다.〉 초대 기독교 교회 는 박해를 받아도 반항하지 않았었다. 신교도들조차도 과거에논 왕권에 결 코 도전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날 쥐리의 목사가 자기를 다스리는 왕과 자기가 태어난 조국에 선전포고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 것은 끔찍한 반항 정신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이룩한 종교개혁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님울 증명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것은 왕과 조국을 배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싸움은 신교도와 구교도간의 문제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싸움에는 자 연권이 끼어들었던 것이다. 쥐리의는 그로티우스의 이론에 힘입고 있었다. 그로티우스라면 보쉬에도 잘 알고 있었다. 보쉬에에 의하면 그로티우스에게 서 악의를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로티우스는 신과 인간을 혼동하는 소 시니 학설k) 신봉자가 아니던가? 그로티우스가 말하는 자연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로티우스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절대권을 가지고 태어 난다고 한다. 통치자의 절대권은 국민이 위임한 권리 의에 다른 것이 아니 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그로티우스와 쥐리의k) 소시니 학설을 세운 사람은 취리히 출신의 레리오 소시니 Lelio Socini, 1525-1562였다. 예수의 신성과 성삼위 일체설을 부인하는 그의 교리는 그의 조카 파우스토 소시니 Fausto Socini에 의해 계승발전되며, 그것은 다시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티즘으로 발전 한다.
는 용어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도 못하며, 문제의 근본도 모르고 있다. 착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원래 인간은 거칠고 야생적인 무정부주의 상 태에서 살았다. 태초의 인류란 그들이 짐작하는 국민이 아니었다. 그것은 길 들여지지 않은 떼거리에 불과했다. 그때에 정부형태나 절대권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당시의 집단은 절대권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그런 집단을 국민이라고 부르는 일은 더욱 터무니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 직 통치를 모르고, 따라서 아직 안전을 기할 수도 없는 가족들은 있었을 것 이다. 또한 때거리, 집단, 난삽한 군중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격한 의 미에 있어서의 국민은 아직 없었다. 왜냐하면 국민이란 일사불란한 행동노 선과 실정법을 결합한 어떤 것을 이미 전제하기 때문이다. 무정부를 벗어나 지 않고는, 불행한 원시사회를 벗어나지 않고는 거기에 이룰 수 없다.〉 보 쉬에에 의하면 절대권은 무정부가 양보하는 것일 수 없었다.
그런 중에도 절대군주 루이 14세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이 미 앙시엥 레짐의 대명사였다. 프랑스내에서조차도 〈신의 권한울 대행하는 절대 유일한 왕권〉의 원리에 얼마나 심한 반발이 일었던가! 강력한 반대 자들은 절대군주제도에 관한 낡은 서류들을 뒤져서 절대군주는 일종의 찬 탈자라고 주장했다. 집요한 왕당파들은 온갖 궤변을 동원하여 그들의 대권 울 옹호했다. 귀족들은 프랑스 조정의 중신으로서의 특권을 주장했다. 그러 나 피지배 계급이건 지배계급이건, 부르즈와건 귀족이건, 혁명가건 기회주 의자건, 제정신이 든 사람이건 미친 사람이건, 모든 사람들은 네델란드에서 발행되는 잡지를 통해, 또는 옷 속에 숨겨 가지고 다니는 팜플렛울 통해 속 박에 대한 분노와 불만을 터뜨렸다.그러나 결국 루이 14세는 추방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목도했다. 물론 법 의 관점에서 보면 보쉬에의 이론에도 정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자연상태의 인간이 정말 떼거리에 지나지 않았고, 거기에 오직 무질서뿐이 었다면, 법은 정말 달리 가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1688년, 영국혁명신의 권능으로 왕의 자리를 지키던 작끄 2세가 추방당하고,I) 기욤 도랑 쥬가 들어섰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1689년 4월 11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I) 챨스 1세의 아들이었던 그는 찰스 2세의 대를 이어 영국 왕위에 오른다(1643), 그러나 후일 그는 그의 사위인 기욤 도랑쥬에 의해 추방당하고 만다(1688).
대관식을 가진 새로운 왕은 〈모든 주민이 자기들의 대의원을 선출할 수 있 는 권한이 있다고 인정했으며,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법에 의한 지배를 실 천했다〉. 왕은 의회의 통제를 인정했으며, 군주와 신민 사이의 계약관계를 인정했으며, 그리고 거기에 근거한 의회정부의 성립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교수들이 교단에서 보호해 오던 사상, 학생들이 물려 받은 사상, 전통적 신문들이 주지시키고 숙지케 한 사상, 오랜 논의를 거쳐 오는 동안 반박을 당하기도 했지만 끝내는 옹호되기에 이론 사상, 그로티우 스 이래로 두 세대 동안이나 강력한 발돋움을 해온 사상, 교회측 박사들에 의해 발표되고, 법률학자들에 의해 해설된, 그리고 꾸준히 그들이 가르쳐서 나름대로 오랜 전통을 수립하기에 이른 그 사상이 이제는 사라진 것이란 말 인가? 전 유럽을 휩쓴 역사적 대사건은 반론의 절호의 기회를 부여했는데 도, 그 사상은 절제만 취하고 있을 것인가? 그렇지는 않았다. 흔들리는 스 튜어트 왕가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즉시 여러가지 이론들을 제기했 다. 절대왕권을 옹호하는 글 중에는 특히 로버트 필머가 단연 으뜸이었다. 용감한 논전자 로버트 필머는 순종과 복종을 강조했다. 그는 절충식 정부는 무질서를 부를 뿐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신민에게는 결코 항거의 권리가 있을 수 없었다. 그는 홉스를 지지했다. 홉스는 원리에 있어서 착각했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인 측면에서는 옳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에 의하면 왕의 절대권력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필머의 이론이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 다. 필머의 대저 『가부장적 권위』는 1680년의 초판에 이어, 몇 해 동안 재 판을 거듭할 정도였다. 그의 저서는 왕의 권위가 가부장의 권위를 계승하던 시대가 있었음을 주장한다. 신을 섬기고 인간을 무서워할 줄 아는 사람이라 면 누가 아버지에게 반항할 수 있었겠는가 ... ….그러나 현실은 야곱파의 주장을 맹종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누 군가가 나타나 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일반 원리를 제공하기를 기다렸다.1689년, 죤 록크, 『정부에 관한 두 가지 이론』m)m) Deux traites de gouvernement, 1689.
이 책의 1부는 로버트 필머 경과 그의 추종자들의 이론적 근거가 거짓임 울 드러내고, 그것들을 파기한다. 2부는 시민 정부의 기원, 확장, 그리고 그 것의 긍정적 목적을 다룬다.
기욤 도랑쥬룰 싣고 네델란드를 떠나 영국, 더 정확하게 말해서 혁명을 향해 항해하던 배는 새로운 시대의 철학자 죤 록크를 태우고 있었다. 왕정 주의자들에게 정면으로 선전포고를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록크였다.사실 그의 이론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의 사상은 이미 여러 차례 전 개되어진 사상의 재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새로운 것이 있었다면 그는 기 존의 사상을 훨씬 과감하게 밀고 나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혁명권의 정당성 을 논리적으로 입증한 데 있었다. 퓌펜도르프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당 시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록크도 자연에서 출발했다. 그에 의하 면 자연상태는 홉스의 주장처럼 폭력이나 무자비 상태와 동의어일 수는 없 고, 그렇다고 해서 자연이 완전무결한 것일 수도 없었다. 인간은 불완전한 자연을 보충하기 위해 사회를 수립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필머의 주장 처럼 가부장제도에 의지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퓌펜도르프가 제시한 계 약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록크는 독자에게 주지시킨다. 〈각 개인이 천부적 권리를 자전해서 사회의 손에 맡길 때 비로소 정치적 사회는 가능하다. 그 럴 때에 비로소, 사회는 그 구성원의 주장과 욕구를 수령할 수 있을 것이 고, 사회구성원은 그 안에서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법에 호 소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절대왕권은 시민사회와 결코 양립할 수가 없다. 가톨릭 교의에 비쳐 본다고 하더라도, 신은 사람 위에 사람을 세우지 아니 하셨다. 대영제국이 수범을 보이고 있듯이, 입법권과 행정권은 분리 통제되 어야 한다. 행정권이 본래의 취지를 벗어나 국민의 자유를 구속한다면, 국 민은 권력을 장악한 사람의 손에서 그것을 빼앗아와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전제군주가 백성을 예속시키기 위해 어떤 장치를 한다면, 백성은 그것을 사 전담지해서, 공개적인 항거를 통해 전제군주의 못된 의도를 사전에 저지해 야한다.록크는 그의 경험에 근거하여 논리를 전개시켜 나갔다. 그는 문명의 개념과 자연의 개념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그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전에 보쉬에 에게 답한 셈이다. 자연상태가 불편한 요소를 지니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정지을 수는 없다. 초기의 역사는 만족할 만한 정보를 제 공해 주지도 못하며, 확실한 예를 전해 주지도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만 그럴 듯한 가정을 내세울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인간이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를 어떤 과정을 통해 위임하기에 이르렀을까 하는 것 을 상상해 보는 일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상상해 보자. 인간은 천부적으 로 자유롭게 태어났었다. 그들은 자유를 주창하는 당사자인 동시에 재판관 아기도 했다. 인간은 동등하게 태어났다. 그것을 보호받기 위해서는 누구에 게 호소해야 하나? 혹시 있을지도 모를 침해로부터 그 동등권을 지키기 위 해서는 누구에게 의뢰해야 하나? 그들은 그들의 권리를 정부에 위임하여 동 등권의 보호를 요청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전쟁 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원래 떼거리였던 것이 아니라, 자칫하면 떼거리로 전락할 뻔했을 것이다. 정치는 천부적 권리를 침해할지도 모를 요 소를 미리 방지하는 자연의 아들이다.
지혜로운 록크는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현명하게 헤쳐나갔다. 예를 들어 신과 인간의 중간자인 동시에, 왕권의 초기 형태인 가부장의 개념을 그는 전적으로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록크는 이렇게 설명했다. 어린아이는 동등 권을 부여받고 태어나지만 동등한 상태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부모 (아 버지뿐 아니라 어머니까지도)는 어린아이에 대해 일종의 재판권을 갖는다. 그 러나 반면 부모는 성년에 이를 때까지는 어린아이를 자유로운 삶에 대비시 킬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부권은 존재하되,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권리라기보다는 차라리 의무이다. 부권은 법을 제정할 수 없다. 그리고 만 약 역사의 초기에 가부장적 권리가 있었다면, 그것은 어린아이의 무언의 동 의가 있을 때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을 것이다.심각한 문제의 하나로는 소유권의 문제가 있다. 소유권은 천부적 동등권 과 썩 어울리는 개념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계시에 의하지 않더라도 우리 는 신이 우리에게 공동의 땅을 주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공동재산 이 합법적으로 개인들의 소유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을 설명하기는 쉽지 가 않다. 록크에 의하면, 개인 재산은 노동으로 설명된다. 〈땅과 하등동물은모두 인간이 소유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각자 어느 누구도 그 권리를 주장 할 수 없는 고유한 권리를 가진다. 각 개인의 육체와 노동과 수공품은 각 개 인의 자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의 노동과 수고로 얻어전 자연 상태의 모든 것은 그 개인의 것이다…….〉 시내를 흐르는 물은 지나는 모 든 사람의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 물을 내 항아리에 가득 채웠다면, 그 항아리의 물은 나의 물이다. 누가 감히 내 항아리에 담긴 물을 나의 것 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순수법학자와 보편대중의 중재자로서, 구시대와 새로운 시대의 중재자로 서, 록크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언짢지 않게 하면서, 그러면서도 참신한 방 법으로 구식 사고에 비판을 가했다. 아제 더이상 신권은 없었다. 정복의 정 당성도 사라졌다. 〈한 집을 파괴하는 행위가 거기에 다른 집을 지을 수 있 는 권리를 부여하지 않듯이, 나라의 정복이 국가의 기원이나 이유가 될 수 는 없다.〉 빛나는 영국의 헌법에 자연권을 반영한 사람은 바로 록크였던 셈 이다. 그의 덕택으로 자연권은 영국 헌법의 근거가 되었으며, 국민의 의지 에 의한 왕과 의회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자연권을 그의 시대, 그의 국가, 그의 민족과 정치, 그리고 더 나아가서 종교에까지 흘러들어가게 했다. 신 권은 더이상 철대군주의 빌미가 될 수 없었다. 군주의 절대권은 자연과는 너무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신의 의지에 의한 절대주의는 오 늘날 신학자들이 지어낸 변명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최근의 신학이 나타 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런 바슷한 말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1699년, 『펠레마끄의 모험 』n)n) Les Aventures de Telemaque, 1699.
엄격히 말하자면, 펜느롱은 신권의 원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 나 어린애, 어른 할 것 없이 당시의 수많은 독자들에게 더할 수 없는 호응 을 얻은 이 유명한 책은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어떤 감정과 사상을 담고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감정 -루이 I4세에 대한 증오와 전율.그것은 이론적인 대립과는 다른 복받치는 감정, 민중적 격분 같은 것이었다. 〈당신은 기탄없이 당산에게 항변하는 사람을 곁에 둔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욕심없이 행동하고 말하는 사람을 찾은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당 신의 잘못된 말과 행동과 열정을 질책하는 사람에게 말할 기회를 주셨습니 까? 아첨배들을 멀리 하고, 그들을 경계하셨읍니까? 아닙니다. 당신은 그러 지 못하셨습니다. 당신은 진리를 사랑하고 행하는 사람으로서의 직분을 결 코 행하지 못하셨습니다 …… 아직 안정을 찾지 못한 당신의 왕국을 노리는 적들이 밖에 전을 치고 있는데, 당신은 당신의 도시를 화려하게 지울 궁리 만 하고 계십니다…… 당신은 국고를 당진하셨습니다. 당신은 국민복리 정 책이 무엇인지 농경정책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 당신은 허영 심 때문에 이제 벼랑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위대해 보이려다가, 당 신의 진정한 위대성마저도 파멸시킬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사상-국민의 용기.〈신이 어떤 사람을 왕으로 세운다면, 그것은 왕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왕 은 국민의 편에 설 때에만 비로소 왕일 수 있습니다. 왕은 그의 모든 시간 과 정성과 애정을 오직 국민에게 쏟아야 합니다. 국민을 위해 자신을 희생 하고, 자신을 잊울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진정한 왕일 수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디스릴 국민이 있을 때에 비로소 왕일 수 있디는· 사실을 명 심하셔야 합니다 …… .>억압받는 국민은 왕에게 복수할 생각밖에 하지 않 는다. 그러면 혁명의 깃발이 펄럭이게 된다. 〈절대권력은 백성을 온통 노예 로 만들 뿐입니다. 백성들은 절대권력을 쥔 왕에게 아첨하고, 공경하는 척 하고, 그의 눈치를 보면서 벌벌 떨고 있지만, 혁명의 기미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폭력적이고 잔인한 권력은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결코 민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권력은 국가 단체마저도 자국해서 피곤하 게 합니다. 심하면 국가 단체를 구성하는 공무원들마저 변화를 갇구하기에 이릅니다. 그러한 권력은 한 방이면 산산조각 파편이 되어 짓밟히고 말 것 입니다.〉2)2) 『텔레마끄』,10권
프랑스는 비참 그 자체였다. 라 브뤼예르가 무대에서 묘사한 농민의 비참 한 상황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상황을 묘
사했지만, 그 중에도 록크의 편견 없는 관찰은 특히 우리의 폐부 깊숙이 파 고든다. 그에 의하면, 굴 속 같은 집에 사는 농민들은 입을 것도 먹을 것도 없었다. 농민들은 비참할 대로 비참한데도 세리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을 쥐어쌌다. 이제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어서 농토는 황무지로 변해 가고 있었다. 노동의 대가란 압박뿐이니, 농부들은 노동의 의욕을 잃 었다. 산업도 기울 대로 기울었으며,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조국을 빠져나 가 다른 나라에서 장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입구마다 통로마다 물샐툼 없이 목을 지키고 있는 세관들은 그나마 가능한 교역을 마비시켰다. 콜베르 생전에 이미 보이기 시작한 정치적 실패는 그가 죽자 더욱 심화되어갈 뿐 이었다. 1694년은 대기근이 있었다. 비참은 말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일단의 선량둘이 나타나 불만을 수령하여, 불행을 막아 보려 고 했다. 많은 책들이 궁핍과 곤궁을 구구절절 담았다. 매해 5-6천만 프랑의 세입이 줄자, 세계 제일을 자랑하던 프랑스가 허덕이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브와길베르는 아무런 기교도 없이 서툴게 그러나 나름대로 끈질긴 정확성으로 비참한 프랑스를 묘사해 감동을 주었다. 프랑 스의 적자는 갈수록 늘어났다. 부자는 조세에서 면제받았는가 하면, 가난한 사람만이 더욱 심한 조세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그러한 공정치 못한 조세제 도는 가난한 사람을 더욱 가난하게 할 뿐이었다. 나라 전체가 파멸로 치달 았다전 보방도 조세제도의 개선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특 혜자가 없는 조세제도만이 백성의 부담을 줄이는 반면, 세입을 늘이는 첩경 이라고 주장했다. 국가 재정을 정화하고, 왕에게 재원을 확보해 주려고 했 던 브와길베르와 보방은 반란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자인 셈이 되었다. 왕실특권자에게 부과된 십일조는 화형에 처해졌다.4)3) 삐에르 르 쁘장 드 브와길베르, 『프랑스의 세부 묘사』, 1695,
4) 보방, 『왕실 십일조에 대한 검토』, 1707.그들에 비해서 펜느롱은 얼마나 과감하고 신랄했던가! 펜느롱은 멜레마 끄가 이도메네에게 던진 질문을 그대로, 갇은 어조로, 왕권을 이어받게 될 그의 제자 부르고뉴 공에게 던진다. 왕정제도에 대해 아십니까? 왕의 도덕 적 의무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셨읍니까? 백성이 편하게 사는 방
법을 생각해 보셨읍니까? 절대주의, 전쟁, 못된 행정이 야기한 재난을 수습 할 방도를 생각해 보셨읍니까? 1711년, 부르고뉴 공은 황태자가 된다. 그러 자 그는 황태자의 즉위에 대비해 그에게 개혁백서를 제출한다.
펜느롱의 개혁백서에서 우리가 특히 기억에 담아 두어야 할 것은 인류의 권리에 대한 그의 옹호이다. 〈하나의 가족은 한 국가의 일원이듯이, 그에 못 지않게, 하나의 민족도 인류라는 전체 사회의 일원입니다. 개인은 누구든 자 기가 태어난 조국보다도 인류라는 보다 큰 조국에 더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민족간의 정의에 상처를 입는 것은 가족간의 정 의에 상처를 입는 것보다 훨씬 치명적인 것입니다. 인류애를 무시하는 것은 예의를 모르는 야만성을 드러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가장 사악한 폭도들의 맹목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 행위를 자행하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식인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5)5) 『사자와의 대담』, 1718.
1705년, 토마시우스, 『자연권의 기본원리와 천부적 인간』o)
o) Fundamenta juris naturae et gentium ex sensu communi deducta, 1705 .
1708년, 그라비나, 『시민권의 기원, 시민권의 발전, 천부적 인간에 관한 개 요』p)
p ) Origines Juris civilis, quibus ortus et progressus Juris civilis, jus naturale gentium et XII Tabulae explicantur, 1708 .
자연권의 개념을 역사에 소개한 사람은 지안 빈첸쪼 그라비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연이라는 그 애매한 단어가 언제나 야기시키곤 하던 모순을 해결하려고 한 사람이었다. 자연의 법칙은 이성을 벗어나지 않는다고들 말 한다. 그러나 언제나 미덕을 추구하는 것이 이성인 데 반해 미덕과는 무관 한 여러가지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 자연이 아니던가? …… 그는 이렇게 대 답한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마음과 영혼이 동시에 참여하는 일반규칙이 있 는가 하면, 그 의의 규칙, 아니 그것과는 대립적인 규칙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고유한 규칙이 있는데, 전자의 공동의 규칙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 재를 포괄하는 규칙이며, 후자는 인간에게만 고유한 정신적 규칙, 합리적 규 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후자의 규칙에 의해 자신의 이성에
복종하게 되며, 따라서 인간은 이성이 제도화시켜 자신의 행동을 재판하고 자신의 관능을 감시케 한 사법관에게 복종하듯이 미덕의 원리에 순종하는 것이다…….
자유사상가들의 노력과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그 여파를 미친다. 특히 고 비는 17세기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권의 권리론, 민족의 권리 론, 그리고 여러가지 권리론들이 그 시가에 맞물렀었기 때문이다. 그로티우 스나 퓌펜도르프보다는 훨씬 덜 힘차고, 덜 심오하고, 비논리적이기조차 한 록크였지만, 그는 마침내 그러한 권리들을 세상에 널리 보급하기에 이른다. 그의 아론은 자유와 평등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 도였다. 〈자연의 상태는 그것을 통제하는 자연의 규칙을 지니고 있으며, 누 구나 그것을 따르고, 거기에 복종할 의무를 진다. 자연의 규칙 중의 하나라 고 할 수 있는 이성은 관심을 가지고 귀기울이는 모든 이에게 가르친다. 인 간은 누구나 평등하고, 자주적이기 때문에, 아무도 다른 사람을 해쳐서 자 신의 삶, 자신의 건강, 자신의 자유, 자신의 재산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이라 고…….〉 6)6) 『정부론』, 다비드 마젤 역, 암스테르담, 1691, 제1장.
제4장 사회적 도덕
종교와 도덕의 독립을 어떤 선배보다도 더 힘차게, 더 명확하게 주장한 사람은 삐에르 벨르였다. 그는 그의 「사전」의 여러 항목에서, 그리고 「어느 시골 사람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그 문제를 다루고 또 다루었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인 그는 때로는 여유를 가지고, 때로는 흥분에 휩싸인 채 온 갖 수단을 동원하여 종교와 도덕의 분리를 증명하는 대장전 『혜성에 관한 성찰』을 써내기에 이른다.무신론자들이 차라리 우상숭배자들보다는 인간의 정신과 마음에 덜 해롭 다는 말로 그의 논리를 부드럽게 제시한 그는 무신론자들이 기독교 신자들 보다 사악한 것은 아니라는 논리로 말머리를 돌린다. 그는 어떤 다른 세상 의 사람을 가정하여, 그에게 말한다. 〈이 세상 사람은 지성과 양식을 가지 고 있고, 그래서 사후의 세계를 믿고 신을 두려워하며 하늘나라의 상과 벌 울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세상을 사는 지구인들이라고 … …. >그러 면 다른 나라의 사람은 지구의 인간에게 자선사업을 기대할 것이며, 이웃과 의 사랑과 용서를 기대할 것이며, 한마디로 영생을 위한 인간의 노력을 기 대할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 않은가! 뻔한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믿음과 행함 사이의 괴리는 엄청난 것이다. 교 리는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공허한 메아리를 울릴 뿐이다. 말 로만 경건할 뿐 행동은 불경스럽다. 우리 인간은 신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기실 이익을 추구하고 욕정을 따를 뿐이다. 〈해로울 것 없으니 인정하되, 나쁜 짓은 여전하다〉는 속담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의 생활을 보 자. 그들은 예배서를 읽지만, 읽자마자 잊어버린다. 십자군은 얼마나 음탕하 고 상스러웠던가! 그들은 적국과 우방국을 가리지 않고 약탈해 갔다. 그들 은 한치 앞도 보지 못하고, 교회전, 수도원이건, 성당이건 닥치는 대로 불태 웠다. 십자군! 이론상으로는 얼마나 근사한 사업이었던가! 그러나 얼마나 많은 홍정, 부정, 배반, 그리고 죄악이 그들을 동반했던가! 신을 믿는 부인 들은 경건한가? 그렇지 못하다. 얼마나 많은 부인들이 예배시간이 끝나기 무섭게 정부를 찾아 달음질쳤던가! 창녀들, 도둑들, 살인자들이 성모 마리 아에게 더욱 경건한 예배를 드린다. 촛불 하나만 켜면, 또는 성상 앞에 엎 드리기만 하면 동정녀 마리아는 창녀와 악인조차 용서해 주신다는 간증서 가 나돌아다니지 않는가? 그래서 쟝세니스트들은a) 예배를 반대한다. 왜냐하 면 그들은 성전에 자주 드나든다고 해서 사악한 사람이 착한 사람으로 변 할 수는 없디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신앙은 행동과 도 덕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벨르는 말한다. 오히려 신앙은 못된 열정 만 부채질하고, 다른 생각을 가전 사람을 더욱 증오하게만 하고, 겉치레뿐 인 예배에 대한 열성과 위선만 키우고 조장할 뿐이라는 것이다.
a) 쟝세니즘은 그것만 따로 떼어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현상중의하나이다. 이미 1550년 경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은총에 관한 문제는 유럽을 지배한 문제 중의 하나였다. 오직 신의 은총에 의지할 때 하늘나라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바이우스(Baius, 1513-1589)파와 산의 은총은 언제나 가득하며, 인간은 안간의 의지에 의해 그것을 자 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고 믿은 루이스 모리나(Luis Molina, 1536-1600)파 사이에 일대 접전이 벌어졌다. 양파는 해결을 보지 못하고 마침내 로마 교황청에 중재를 요청했다. 중재에 나선 교황청은 1611년 은총에 관한 글을 교황청의 허가 없이 발행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성 오귀스땡 사후 2년 만에 그의 글이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며, 그것은 제주아트파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네델란드 태생의 쟌센(Cornelius Jansen, 1585-1638)이 바이우스의 바돈을 이어받아 싸웠다. 쟌센 파와 몰리나 파의 일진일되를 거듭한 싸움은 17세기의 프랑스와 유럽의 싸움으로 발전한다. 쟌센의 뒤를 이어 그의 교리를 이어간 대표적인 인물로는 뽀르-루와이얄의 개혁자였 던 앙겔리끄 수녀와 그의 동생 쌩 -씨랑, 그리고 아르노 주교, 그 외에 두 번의 회심으 로 유명한 파스칼과 비극작가 라신느 등이 있다.
그러다가 벨르는 기독교인과는 정반대의 사람들을 예로 든다. 독실한 믿 음을 가지고도 올바르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히듯이, 성실한 삶
울 꾸미는 자유사상가들이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디아고라스, 때오도르, 니 카노르, 에베메르, 히폰 등 고대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훌륭한 성품으로 영 원한 칭송을 받아 부족함이 없는 로마의 프리네, 훌륭한 삶으로 세상의 귀 감이 되어 마땅한 에피큐로스에 이르기까지 ……. 또한 근대인들울 보자면, 드 로삐딸 수상은 무신론자의 협의를 받았지만 그보다 인자한 사람, 그 사 람보다 더 고상한 한평생을 살다가 간 사람은 짝을 찾기 어렵다. 그리고 스 피노자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스피노자처럼 상냥하고, 친절하고, 정직하고, 절도 있는 사람도 드물었다. 바로 그러한 스피노자도 무신론자였다. 무신론의 사회와 우상숭배의 사회는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우 상숭배의 사회와 기독교 사회도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왜 무신론자의 항변 울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무신론자들도 기독교도들 못지않게 명 예, 멸시, 보상, 고통을 중시한다.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명예 를 돌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박해 끝에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 교리라면, 무신론의 교리도 그에 못지않게 박해를 받아왔다. 가령 바니니도b) 무신론을 위해서 죽었다. 더 최근에 신의 존재를 부인하다가 처형을 당한 사람으로는 콘스탄티노플의 마호메트 에펜디라는 사람이 있다. 〈만약 잘못을 시인하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으면, 그는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b) Lucilio Vanini(1550-1585), 뚤루스의 사제였던 그는 영혼의 불멸에 대하여 회의를 재 기하였다. 그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마법을 행사하는 사제라는 죄목으로 산 채로 화 형에 처해졌고, 그의 저서 『자연의 비밀』은 소르본느에서 금서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후의 어떤 보상도 약속받지 않은 전리를 위해서, 오직 전리 를 사랑하기 때문에 박해를 견딜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끈질기게 신을 거 부하고 모독하다 죽어갔다.〉
그러한 모전 박해 끝에 벨르가 나타난 것이다. 벨르에 의하면, 종교와 도 덕의 관계는 결코 불가분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독립적인 관계에 있다고 한 다. 인간은 종교와 무관하게 도덕적일 수도 있으며, 도덕과는 무관하게 종 교적일 수도 있다. 고결하게 사는 무신론자가 결코 자연을 무시하거나 초월 하는 괴물일 수는 없다. 〈온갖 죄악을 저지르며 사는 기독교인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면, 고결하게 살아가는 무산론자도 이상할 것이 없다.〉 터어키 의 무신론자들, 중국의 무신론자들의 품행이 로마나 파리에 사는 기독교도들의 품행보다 얼마나 단정한가…….
아니 오히려, 무신론자의 도덕은 아무런 상을 기대하지 않는 반면, 기독 교 신자들은 지옥과 천당을 머리에서 떨쳐 버리지 못한 채 그것이 무서워 서 덕을 행하니, 기독교도의 도덕은 결코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톨랜드는 언제나 그렇듯이 그 점에 있어서도 과감하다. 〈아무리 지독 한 무신론도 그 잔인하고 야만적인 미신보다는 국가와 사회에 해를 덜 끼 쳤다. 그 잔인하고 야만적인 미신은 번창하는 국가들을 얼마나 분열시키곤 했던가! 위대한 왕국들을 얼마나 피폐케 하고 심지어 망하게 했던가! 아버 지와 아들을 가르고, 친구와 친구를 가르고,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어야 할 많은 것들을 얼마나 난도질쳤던가! …… >1)1 ) 『아데이시다에몬』, 1709.
그런데 종교적 차원의 도덕을 파괴한다면, 그후 인간적 차원의 도덕을 어 떻게 수립할 것인가가 의문이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되돌아가서, 고대로 되돌아가서, 고대인들을 지도자로 삼을 것인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들 중에 누구를?…… 에피큐로스를? 에픽데트를? 그러나 그들은 서로 상반된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독창적인 학설을 창안해 내지는 못했을지라도, 가장 훌륭한 도덕을 위해 고심한 철학자를 내세울까? 로마의 웅변가이자, 『의무에 관하여』의 저자인 키케로에게 물을까? 일찍이 키케로의 위대한 생애와 성스러운 애정을 찬양한 사람이 없지 않다. 에라스 무스가 그를 높이 찬양했다. 그러나 사실 고대세계는 〈인간을 명예롭고 완 벽하게 해줄 어떤 관용의 원칙도, 도덕, 자유, 조국, 인류에 대한 사랑을 고 무하는 완벽한 아무것도 우리에게 물려주지는 못했다〉.2)2) 미들튼의 『키케로사』에서 재인용, 런던, 1741.
기독교도들에게는 호재가 주어전 셈이었다. 사실 재건을 위한 새로운 원 리들은 이미 1700여 년 전에 기독교가 쓸어 없앤 것들이 아니던가! 대수롭 지 않은 표본들에 불과할 뿐이던 부루투스와 카토스는 거창한 어휘들, 큰 몸짓 그리고 연극적인 태도들을 취했지만, 결국 망하고 말지 않았던가? 그 러한 파탄에서 인류를 구한 것이 바로 기독교가 아니던가?
이제 양자의 접점에서 교양인의 극히 근대적인 도덕이 등장할 때가 되었 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심리적 차원의 도덕이었다. 근대적인 도덕은 비교적 기독교보다는 고대 쪽에 경사되었으며, 고대의 샘에서 물을 걷는 일을 게을 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근대의 도덕은 무엇보다도 이성을 내세웠다. 그 러나 그 이성은 예전의 거칠고 엄격한 이성과는 구분되는, 따라서 딱딱한 고전적인 성격을 탈피한 개화된 이성이었다. 〈오늘날의 가치는 예의와 친절 이다. 근엄하기만 하면 도덕적인 것으로 착각하던 시절은 이제 우리의 머리 속에서 지워 없애야 한다.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 사악한 행위는 혐오받아 야 한다. 거칠고 투박한 사람들이 폐습이라고 부르던 것을 섬세한 사람들이 즐거움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자. 그러나 그렇다고 해 서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는 어떤 야만적인 천성이나 낡은 생각으로 우리 의 도덕을 만들어 내지도 말자.〉3)
3) 귀스타브 랑송의 『도덕관념의 변화』에서, 쌩 때브르 편, 1910.
근대적 도덕은 관능과 정영까지도 배제하지 않았다. 그것이 완화되고 조 절된 것인 한에서 …… 그러나 근대적 도덕은 구속력이 없었으며, 보편성은 더욱 없었다. 근대적 도덕은 어떤 때는 쌩 떼브르몽의 도움을 받았으며, 어 떤 때는 윌리엄 템플의 도움을 받았으며, 또 어떤 때는 핼리팍스 경의 도움 을 받았다. 귀족, 세련된 사교인, 또는 초탈한 사람의 도덕이라고 할 수 있 는 근대적 도덕은 적절한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타협의 결정이라고도 할 수 도 있었다. 거기에는 응용이 있을 뿐 지배적인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고매하고도 엄격한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적 도덕을 받아들이기도 여간 어 려운 일이 아니었다. 인간의 풍속이란 얼마나 다양한 모순 덩어리인가! 시 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공통된 기준, 일반 규칙을 찾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어떤 곳에서는 짐승에게 아이들을 먹이로 던 져 주고, 다른 곳에서는 자식들이 늙고 힘없는 부모들을 내다버리는데, 거 기에 가족의 의무라는 일반론이 적용될 수 있겠는가? 〈아시아의 어떤 곳에 서는 환자의 회생을 더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면, 땅에 구멍을 파고 환자를 거기에 갖다 버린다. 그러면 환자는 모진 비바람을 맞으면서, 아무것도 먹 지 못한 채 처참하게 죽어간다. 다름 아닌 기독교를 믿는 맹그라리아인들이비일비재하게 저지르는 일이다. 그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자식들 을 생매장시킨다. 또 다른 어떤 곳에서는 부모들이 자식들을 잡아먹는다. 카 리브족들은 자식을 잡아먹기 위해서 거세시켜 살찌게 한다. 가르시라소 드 라 베가의 보고에 의하면, 페루의 어떤 종족들은 여자들을 잡아 첩을 삼으 며, 거기에서 난 자식들을 열세 살까지는 잘 키우다가 열세 살이 되는 해에 잡아먹는다. 그들은 더이상 생산능력이 없으면 여자들도 잡아먹는다.〉 이렇 게 세상의 정경을 전체적으로 두루 살펴보면 도덕관념이란 것이 얼마나 가 변적인가를 알수 있다. 〈지구상의 여러 종족둘의 행동을 객관적인 눈으로 관찰해 본다거나, 인류사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본다면, 아마 우리는 놀라 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안류사회의 보존에 필수불가결한 의무 (그나마 그것도 이미 보았듯이 다른 사회에 의해서 위반되기 일쑤인)를 제의하면, 인간에게는 다른 도덕적 원칙이 없다는 사실이다. 어떤 도덕 원칙도 다론 사회에 의해서 무시되거나 부인되지 않는 것은 없다.〉4)
4) 『인간 오성에 관한 소론』, I권, 2장.
인류사회의 보존에 필수불가결한 의무……. 그렇다면 한 가지 가능성은 찾은 듯하다. 그것은 선이나 악의 개념 같은 어떤 내재적인 개념을 전제하 지 않는 도덕관념이다. 그것이 만일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 리의 집단적 삶의 유지를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 이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종족의 파멸을 초래하는 무정부상태뿐이다. 그 래서 인간은 무정부상태를 모면할 방도를 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존본능 의 섭리를 법규화시킨다. 에고이즘은 집단생활의 유지롤 가능케 하는 합법 적인 것이다. 그러나 에고이즘이 만약 집단에 위해를 끼친다면 또는 그 집 단의 구성원에게 위험을 초래한다면, 그것은 해로운 것이 될 것이다. 그러 므로 도덕적 선은 명예나 부나 쾌락 등과 같은 견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 은 생사가 걸린 필연적인 것이다. 도덕적 선은 안류의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이러한 도덕론은 주창자들에 의해 전에 없이 우월한 것으로 받아들여졌 다. 그것은 증명도 가능한 도덕론이었다. 그 도덕론은 선험적 가정이 아니 라 오직 분석 가능한 현실에 근거한 도덕론이었다. 우리의 내부를 한번 들여다보자. 사실 우리는 우리의 쾌감을 생산, 유지, 증가시켜 주는 것을 선이 라고 부르고 있으며, 반대로 불쾌감과 고통을 생산, 증대, 지속시키는 것을 악이라고 부르고 있지 않은가. 무엇이 이롭고 무엇이 해로운지를 알고도 시 민법을 따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시민법을 따를 때 우리의 재산 과 자유를 보호받을 수 있으며, 바로 그럴 때에 우리는 지속적이고도 안전 한 즐거움 속에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시민법을 지키지 않 는다면, 우리의 사회는 무질서가 만연하는 끔찍한 사회가 될 것이고, 고통 없이는 살기가 어려운, 아니 그저 살기조차 불가능한 무정부상태에 이르고 말 것이다. 평판의 문제도 이제 다르지 않다. 미덕은 존경을 받게 해줄 것 이며,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해준다. 반면 악덕은 비난, 비판,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며, 따라서 그것은 고통을 안겨 줄 것이다.5)
5) 『인간 오성에 관한 소론』, Ⅱ권, 28장.
그런데 과연 사회적 선이 유일하고도 순수한 미덕일 수 있을까? 의무를 빈톰없이 이행하는 공동체는 과연 그덕분에 살아남아, 번창할 수 있는 것 인가? 록크는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서 회의를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영국에 귀화한 네델란드인 베르나르 만드빌아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에게서 오직 관용과 친절과 이타심만을 찾으려 하는 모랄리스트들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권위, 관습, 평판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사상을 자유롭게 주장한 점에서 그도 철학자 그룹에 속한 다 할 수 있었다. 과감하고 거친 그는 역설을 좋아했으며, 그의 역설은 세 상을 떠들썩하게 하곤 했다. 사실 세상이 떠들썩하게 된 것은 그의 우화가 발단이었다. 그는 전에도 이솝이나 라 퐁뗀느를 흉내내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우화는 이솝의 우화나 라 퐁뗀느의 우화처럼 아이들을 위한 것 이 아니었다.
I705년 4월 2일 저자가 밝혀지지 않은 『벌통이야기』라는 26페이지 정도의 조그만 책자가 나왔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인간의 사회를 닮아 규칙으로 다 스려지는 어떤 벌통이야기로 그 우화는 시작된다. 그런데 그 벌동에도 인간 사회와 마찬가지로 건달이 있었다. 사기꾼도 있었고, 못된 의사도 있었고,못된 사제도 있었고, 못된 군인도 있었고, 못된 각료도 있었고, 여왕도 있 었다. 그 벌통 안에서는 매일 사기가 횡행했으며, 부정을 다스려야 할 사법 권은 정의롭기는커녕 매수당하기 일쑤였다. 간단히 말해서, 각계각충에 부 정부패가 그득한데도, 국가는 부강해져만 갔다. 각 개인의 부정부패는 공공 의 복지에 기여했고, 또한 공공의 복지는 각 개인의 행복에 기여했던 것이 다. 부족 중에도 가장 간악한 이들이 공공의 이익에 기여한 바가 가장 컸다. 그러다가, 정직과 도덕만을 강조하는 이상한 사상의 소유자들이 나타나 일대 개혁울 단행했다. 그 벌들은 일대 혁신을 요구했다. 가장 게으르고 교 활한 벌들이 가장 아우성치며 저항했다. 쥬피터는 이 불만의 집단이 곧 타 락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오직 선을 지향하는 마음만이 벌들의 가슴을 채우게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개혁은 벌통국가를 파멸로 인도하기에 이르렀다. 방탕도 병도 없 으니 더 이상 의사가 필요 없게 되었다. 분쟁이나 소송이 없으니 더 이상 법 관이나 변호사가 필요 없게 되었다. 모든 벌들이 절약하고 철제하는 경제생 활을 하니 더 이상 소비도 없었다. 사치도, 예술도, 교역도 더 이상 없었다. 마침내 국가 전체가 황폐화되기에 이르렀다.이웃나라에서는 그 나라를 공격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평화 롭던 벌통국가는 총력을 기울여 침략자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전쟁의 승리 는 많은 대가를 요구하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남은 벌들 중에도 많은 벌들 이 타락한 생활에 다시 빠지지 않으려고 다른 보금자리를 찾아 날아가 버 렸다. 이제 그 벌통 안에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미덕과 불행뿐이었다.〈철없는 사람들아 이제 불평일랑 그만 거두어라! 너희는 헛되이 국가의 영화와 미덕을 일치시키려고 하고 있다. 도덕적인 삶을 살면서, 지상의 행 복을 누리려 하고, 전쟁에서 명예를 얻으려 하고, 일신상의 안락을 꾀한다 면 그것처럼 터무니없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이제 망상을 버려라! 달콤한 열매는 사기, 사치, 허영의 나무에서 열리는 법이다.〉얼마나 많은 공박과, 얼마나 많은 논쟁이 거기에 잇따랐던가! 그러나 베 르나르 드 만드빌은 이빨이 워낙 튼튼해서 결코 공격을 당하고 앉아 있지 만은 않았다. 그는 오래 살았다. 그리고 그의 우화는 아직까지도 살아서 우 리의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제5장 지상의 행복
행복을 저승에 기대할 수 있을까? 저승의 행복은 너무 막연해서 기대할 수 없다. 그것의 형체는 너무 약하다. 아니 그것은 형체조차 없는 것이며, 있더라도 분명히 잡히지 않는 어떤 영원한 허상인지 모른다. 훈영, 하프, 천 상의 노래는 꿈나라 이야기이다. 그러니 우리는 행복을 이승에서 찾을 수밖 에 없다. 서둘러 찾아야 한다. 우리에게 내일이란 없다. 오늘이 있을 뿐이며, 중요한 것은 오늘이다. 내세에 희망을 두는 일만큼 무모한 일은 없다. 인간 적인 복락을 찾아 누리자.현세의 행복을 추구하는 모랄리스트들의 생각은 그러한 것이었다.행복한 삶은 우선 순수지성에 의한 냉정한 이성이 필요하며, 불행을 과장 하는 일은 더더군다나 삼가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종종 불행 앞에서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져서, 불행을 과장하곤 하며, 그것을 나만의 것으로 상상하 곤 한다. 그러다가 우리는 위로받지 못할 상태에 빠지는가 하면, 심지어 고 통을 사랑하고, 애무하기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런 왜곡된 상상은 심하면 우리를 엄청난 환영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우리는 환영을 좇다가 기만당하 기 일쑤이며, 매번 기만당하다 보니 이제 더이상 그것에 불만을 가지지도 않게 된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웅시하자.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자. 구차한 삶의 조건에 대해 불평하기보다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의 역사를 한번 생각 해 보자. 우리가 당할 수도 있었던 불행한 재앙들을 역사는 얼마나 견뎌왔던가! 우리는 그 불행의 역사 앞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 불행 의 역사를 간발의 차이로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 치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이 아닌가? 〈예전에는 많은 인간들이 노예신분을 벗 어나지 못했으며,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거나, 이마에 땀을 흘려도 겨우 연 명할 정도였으며, 언제나 풍수병에 시달려야만 했다. 하마터면 우리도 그 불 행을 면제받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일은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가! 그러나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사실 하나는 역사적 불행을 면제받 았다고 해서 우리에게 이제 아무런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1)
1) 퐁뜨넬르, 『행복에 대하여』·
그러니 올바른 시각으로 우리의 행복을 지혜롭게 가꿀 생각을 하자.a) 그 것은 소박하지만 극히 현실적인 문제이다. 격렬한 충동과 열정은 오직 동요 와 슬픔을 가져다 줄 뿐이다. 충동과 열정을 피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자. 주 변에서 사람들이 안정은 따분한 것이라고 해도, 한귀로 듣고 한귀로 버리 자. 〈평안한 삶에 불평을 한다면, 그런 사람은 인간의 조건을 잘못 파악하 고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조그만 돛단배를 타고, 평화의 항구로 노저어 가는 여행자들이다. 대중의 이목이 집중되는 자리, 스캔들, 야망 등은 평화 로운 항해를 방해하는 요소들이다. 그러한 위험한 것들은 조심스럽게 피하 자. 그 항해에서 믿을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뿐이다. 자신만이 유일한 피난 처임을 다함께 인정하자. 수전노처럼 아무리 세심하게 우리의 보물을 지킨 다 해도 초라한 우리의 보물은 잠깐만 방심하면 혼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 다. 그러나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그것을 지키기만 한다면, 그리고 우리 가 현명하게 대처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것으로 남을 수도 있다. 인 생의 장본인은 다름 아닌 우리가 아니던가!
a) 작가는 퐁뜨넬르의 행복론을 그대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룰 수 없는 행복을 꿈꾸지 말자. 그보다는 유쾌한 대화, 독서, 사냥 등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자그마한 행복에 만족하자. 불확실한 것에 기대를 걸기보다는 확실한 기쁨을 즐기자. 〈현재는 우리의 손 안에 있지만 일종의 협잡과도 같은 미래는 우리의 눈을 현혹시켜 눈깜짝할 사이에 그나마 손안 에 든 현재마저 숨겨 버리기 때문이다.〉 평범한 행복을 누리자, 은혜란 변
덕스러운 내일이면 그것을 우리에게서 되걷어가 버릴지도 모르지 않는가? 쾌락의 호기를 놓치지 말자. 〈언제나 치밀한 계산이 중요하며, 현실을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 ... ….〉
도박판에 끼어들어, 여유 있는 도박을 하는 능숙한 노름꾼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런 능란함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태도는 남다 론 명칠성과 냉정한 지성을 요구한다. 노름꾼에게 있어서는 열정이란 극복 하려고 생각만 하면 극복되는 간단한 것이며, 상상력이란 아주 말 잘 듣는 노예처럼 다루기 쉬운 것이다. 편안한 마음가짐과, 자유롭고 한가로운 심성 의 소유자가 아니면 진정한 노름꾼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에고이스트적인 행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불편하게 하는 비극적 실존 감정이다. 우리는 그것을 멀리해야 한다. 비극적 실존 감 정은 우리의 삶을 전생애를 통해서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게다가 임종이 가까와 오면 우리는 새로운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저승을 두려워하게 된다. 이 세상을 유쾌한 기분으로 하직할 수 있는 사람은 전정으로 행복한 사람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전 그런데 오히려 종교와 무관한 사람들이 이 세 상을 유쾌한 기분으로 하직한다. 그들은 음울한 종교적 열정과는 거리가 멀 다.종교적 열정은 마음의 평화를 해치는 적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마 음에 들러붙어 그들을 불안하게 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빠진 광신도들은 주변 사람들까지 괴롭힌다. 한시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 지옥과 영벌에 대한 음울한 환영, 공포, 열광, 은총…… 어떻게 하면 그러한 모든 것들을 떨쳐 버릴 수 있을까?2) 데글랑드, 『즐겁게 죽어간 위대한 사람들에 관한 성 찰』, 1712.
유모어와 편안한 마음가짐이 유일한 길이다. 장미빛 안경을 한번 써보자. 아마 모든 사물이 갑자기 환하고 유쾌한 색조를 띠고 나타남을 보게 될 것 이다. 모든 인류가 웃음을 머금고 언제라도 웃을 준비를 하게 되면 불행을 일구던 가시돋친 마음은 봄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유모어의 약효를 과소평 가하면 안된다.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정신치료제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이, 《구경꾼》b)씨는 잡지를 통해 당대인들에게 아주 사랑스런 교훈을 처방하 곤 하던 인물이다. 그에 의하면 유모어는 우리가 입고 다니지 않을 수 없는 옷과도 같은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유모어의 옷을 입고 다닌다면 이 세상 은 얼마나 아름답고 화기애애한 세상이 될 것인가!
b) 리챠드 스틸과 죠셉 에디슨이 1711년부터 발행한 잡지. 《구경꾼》은 당대의 사회를 가장 잘 풍자한 잡지 중의 하나였으며, 이미 그보다 전에 시작된 《수다쟁이》와 함께 《구경꾼》은 영국 사회의 변화를 가장 잘 반영한 거울이었다.
아직은 막연한 이 유모어 감각이 프랑스에서는 낯설었던 반면, 영국에서 는 강한 효력을 나타내고 있었다. 유모어는 당대의 유행병이었던 우울증과 지나친 청교도적인 열정을 치료하는 치료제였으며, 더 나아가서 안토니 애 슈리 쿠퍼, 샤프스베리 백작은 몸으로 그것을 실천한 세련된 대변자였다. 잠 시 샤프스베리 백작에게 눈을 돌려 보자. 샤프스베리 백작은 낙천주의자가 될 소지가 있었다. 그는 록크를 후원하던 한 저명한 정치인의 아들로 태어 났다.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게다가 록크의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 다. 정치에 별 매력을 못 느낀 그는 사상과 예술에 경도했다. 부유했기 때 문에 그는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었고, 명화와 양서에 묻혀 살았으며, 데 메 조, 벨르, 르 끌레르크와 같은 궁핍한 문인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는 건 강 하나를 제의하면, 온갖 행운을-타고 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 은 한 가지를 빠뜨렸던 것이다. 그는 지병인 폐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성과 영지와 친구들과 조국을 떠나 몽벨리에, 나폴리 등으로 전지요양을 다 녔다. 그러나 정성어린 치료와 전지요양에도 불구하고 그는 42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에게는 낙천가가 될 소지도 많았지만, 인생을 저주할 만 한 결정적인 이유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아름다운 인생을 노래했다. 지병 에도 불구하고 그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울 예 찬했으며, 그의 어조는 언제나 감동적이었다. 그는 유쾌했다. 수백년 묵은 거목들이 우거진 영국의 공원이든, 지중해의 찬란한 태양 아래든 관계 없이 샤프스베리는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기를 즐겼다. 그의 대화는 전혀 현학적 인 부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없었다. 언제나 정겹고 쉬웠다. 결점이 있다면, 그의 대화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 그의 성격 탓에 장황한 데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이스 철학자나 라틴 시인들의 훌륭한 사상이 그의 이야기를 예 쁘게 장식하는가 하면, 당대의 사건이나 생존인물이 불쑥 뒤어나와 그의 이 야기를 시사적인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의 대화 취향은 시시때때로 변했 다. 약간의 아이러니와 유모어가 가미되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러니와 유모 어라고 했는데, 그것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서로 다른 것들이다. 아이러니가 프랑스인의 것이라면, 유모어는 영국인의 것이기 때문이다.C) 그러나 굽이굽 이 돌아가는 고갯길 같은 그의 대화에 방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대 화는 언제 어디서든 한 가지 중심주제를 떠나지 않았으니, 그것은 어떻게 하면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c) 역자는 ironie 아이러니로 humour를 유모어로 번역했다.
행복과 조우하기 위해서는 우선 위선과 가식의 껍질을 벗어 버리고, 진심 을 알 수 없게 하는 열광을 씻어내 버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되어야 한다. 오늘날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그의 『서한 』3)에서 샤프스베리가 그렇게도 공 격의 시위를 늦추지 않은 적은 열광이라는 적이었다. 물론 그가 그렇게 공 격한 것은 천재의 열광이 아닌 광신도의 그것이었다. 슬픔과 우수, 이국취 향, 무기력, 자만심, 허영심 등과 같이 인간의 악취미가 만연할 대로 만연한 상황 속에서조차도 광신도는 신의 은총이 충만하다고 열광한다. 뿐만 아니 다. 열광적인 광신도는 타인의 사생활을 간섭하려 들며, 양심을 억압하려 든 다. 열광적인 광신도는 증오심과 잔인성이 습관처럼 배어 있다……. 광신도 의 열광에 대항하여, 양식과 자유정신의 무기를 들자.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익살이라는 무기를 들고 나아가 깜짝 놀라게 해주자.
3) 『열정에 관한 서한』, 1708.
웃음을 배우자. 그보다 나은 정신치료제는 없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사람 앞에서 마주 화내고 있을 것인가?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 차라리 웃자. 거만한 자를 맥빠지게 하고, 우수에 젖은 자를 늘려 주고, 열광적인 광신도 들을 비웃어 주자.
프랑스 세벤느 지방의 열광적인 신교도들이 런던에 망명한적이 있었다.d)d) 세벤느 지방의 칼빈주의자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밤에 서로를 오인해서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하얀 신발을 신고 다녔는데, 그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하얀 신
그들은 예언을 하는가 하면 정신착란 상태에 빠지기도 하는 심한 광신도
발을 신은 사람들〉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낭트 칙령이 철회된 뒤, 그들은 종교적 탄압을 피해 각지로 피난을 갔다.
들이었다. 법정은 그들을 잡아들였다. 그들을 감금해 둘 것인가? 교수형시 킬 것인가? 그렇게 그들을 순교자로 만들 것인가?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던 중, 그들은 인형극을 통해 희화화된다. 그들은 놀림받음으로써 자존심을 상 실하게 된 것이었다. 어떤 병이 발진성 병이거든 발진이 끝날 때까지 내버 려 두자. 그냥 웃자, 미소 지으며 바라보자. 언젠가 세력이 다하면 병도 나 을 것이 아닌가? 태초 이래의 종교분쟁에 대해서도 그렇게 대처했더라면, 그토록 많은 사람이 화형장의 불길 속에 사라져 가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 가?
종교는 예배를 먼저 없애야 한다. 예배를 없앤다면, 선한 마음은 경건한 신앙심으로 기울 것이고, 악한 마음은 무신론으로 기울 것이 아닌가? 하나 님이 선하다고 하는데, 진정으로 선하다면 공포와 슬픔의 도가니에서 하나 님을 부를 일이 아니라 편안한 마음 상태에서 찾을 수 있어야겠다. 불행을 당하거나 불안하고 억울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데,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내 생각에, 종교가 그렇게 비국적인 것이 된 이유는, 그리고 이 세상에 그토록 비참한 일들을 야기시킨 이유는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종교를 다루는· 방법이 잘 못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종교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종교의 선의 를 결코 악용할 수도 없을 것이고, 지나치게 무람한, 또는 지나치게 버릇없는 해 부를 일삼을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종교가 순수하고 올바른 것이라면, 종교는 시련을 견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서 더 큰 영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만약 종교가 협잡이라면, 그 협잡은 조만간 폭로되어 공개적인 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실존적 비극을 가장 강렬하게 드러낸 파스칼과 샤프스베리의 일전은 너 무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이었다. 샤프스베리는 내기의 속성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기를 거절한다. 종교에 내기를 건다면, 그것은 길거리에서 동 냥을 구하는 거지의 교활한 태도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신이 존재한다 면 모든 것을 딸 수 있지만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결코 잃지 않는 내기인 셈이다. 거지들도 마찬가지다. 거지들은 길거리를 지나가는 모든 행인들에게 선생님 한푼만 보태줍쇼 하고 구걸한다. 행인이 귀족이라면,그 귀족은 귀족 신분의 자신을 몰라보는 거지에게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는 거지의 굽실거립에 기분 나쁠 일은 없을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행인은 거지에게 돈을 던져줄 수 있다. 그런 계산으로 신을 믿는다면, 그것처럼 신을 모독하는 일이 어디 있는가?
신은 비극적인 존재일 수 없다. 신은 결정론을 믿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부당한 존재일 수도 없다. 신은 영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생각하 는 것처럼 복수를 준비하는 한많은 처녀귀신일 수도 없다. 신은 내세의 보 상을 기대해서 덕을 행하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이해관계에 빠른, 위선적인 존재일 수는 없다. 신은 우주 어느 곳에서나 그 숨소리를 둘을 수 있는 선 과자비 자체이다.민중을 사랑하고, 보편선에 기여하고, 세계의 이익울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가능한 최고의 선이며, 문자 그대로 신적인 선을 실현하는 행동이다.무관심과 의혹을 두려워하여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이 시대를 살 면서 우리가 확인한 것이라고는 공박과 싸움, 분쟁과 법석뿐이었다. 누구보 다도 그 시대를 잘 이해하고 있던 샤프스베리는 그래서 비교적 덜 신랄한 어조로 자신을 이해시키려고 애썼다. 그의 부드러운 세련미, 귀족적인 아취, 따뜻한 호의와 애정과 더불어 애롯한 감정의 토로처럼 보이는(자신은 합리 적인 주장울 한다고 믿지만) 그의 이론은 바로 그러한 점들 때문에 세상 사람 들의 심금을 울렸다. 더욱 훌륭한 일은, 그는 결코 사람을 미워한 적이 없 었으며, 결코 인간에게 비판을 가한 적도 없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그 는 그가 사는 시대를 나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무분별한 짓들과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만연한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시대를 탓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시대를 자유비판이 가능한 복된 세계의 출발점 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그의 처방울 너무 단순한 것으로 치지도의하건, 그가 제시한 행복의 비결을 불완전한 것으로 의면하건, 그의 철학을 안방 철학아라고 매도하건(샤프스베리도 자신의 철학을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평범한 도덕, 가정적인 철학〉이라고 한 서한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땅에서 발을 떼지 않은 채, 지상의 아름다움을 통해 천상의 복락을 누릴 수 있다고 믿은 그였다.
샤프스베리에 의하면 선과 미는 하나이다. 우주는 조화 자체이며, 따라서 거기에는 불협화음이 있을 수 없다. 도덕이란 것도 우주적 조화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도덕도 우주적 질서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악 은 심미안의 결핍에서 온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미학을 무시하는 일은 논리와 도덕과 취향을 어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질서정연한 이데아의 세계를 눈부시게 아름다운 감각의 세계로 재현해 내는 것이 다름 아닌 예술이다. 인간은 이데아의 세계가 지니고 있는 도덕적 비너스와 도덕 적 은총을 예술로 재현하려고 하는 존재이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자신 을 빛어내는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올바르게 사고하고, 도덕적으 로 행동해서 아름다운 자신의 형상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 그러한 창조에 매달릴 때, 인간은 행복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신론자는 우주적 질서를 의면한다. 따라서 무신론자는 모르는 사이에 인간에게 해를 주고 있 으며,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추악하게 만들며, 자신도 모르게 불행에 빠진 다.이상은 인문주의의 거장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샤프스베리의 사상이다. 그러나 도덕의 사회적 필연성을 강조할 때의 그는 록크의 제자였으며, 행복 에 대해서 말할 때의 그는 스피노자의 제자였다. 스피노자는 죄악의 개념을 거부한다. 그는 달콤한 향기, 아름다운 수목, 음악, 놀음, 연극 등 인생의 쾌 락을 기꺼이 누리라고 권유한다. 신은 인간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게 하는 적개심이 가득한 존재일 뿐이다. 스피노자 해석에 의하면, 환희란 존재를 한껏 실현시킬 때 주어지는 것이고, 슬픔이란 존재가 움츠러들 때 엄습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은밀하고 깊은 환희에 흠뻑 젖어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철학적인 의미까지도 부여했다. 샤프스베리는 그를 본받은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최선을 선택하곤 하는 샤프스베리는 플라톤을 놓치 지 않았다. 여러가지 점에서 르내상스와 유사한 시대를 살던 샤프스베리가 어떻게 플라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사실 캠브리지의 교수들은 여전히 플라톤을 경배하고 있었다. 플라톤 숭배자 중에는 세계를 이데아의세계와 삼라만상을 이루는 조형적인 자연계로 구분하는 커스워스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샤프스베리는 세상이라는 벽에 여울지는 신의 그립자를 즐겨 바라보곤 한다. 그에 의하면 비탄의 소리와 의마디를 듣고 싶지 않으면 세 상의 조화로운 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행복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불행을 의면하거나 견디는 스토이시즘에 e) 있 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억누르고, 고행을 수행할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눈물 홀린 만큼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로 불행 을 일부러 자초하는 일처럼 가당찮은 일은 없다. 이 땅은 결코 연옥이 아니 다.4) 이제 믿음이 바뀌었다. 이제 사람들은 인류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스런 형상에서 눈을 떼고 싶어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무언의 호소를 더 이상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행 복은 이제 우리 자신의 문제였다. 그것은 우리가 조절하는 힘을 키우기만 하면 언제나 가능한 것이었다. 고통과 희생을 기꺼이 참아내는 일이나, 본 능을 억누르고 십자가의 영광에 매달리는 일은 이제 판단착오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적어도 못된 관습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e) 제논(Zenon, 기원전 335-264)에 의해 주창된 철학. 그의 주장에 의하면 행복은 감각 적인 모든 것에서 초탈하는 데 있으며, 불행과 고통을 견딜 줄 아는 데 있다.
4) 보쉬에, 『마리 때레사 도트리쉬의 장례기도』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기독 교인은 결코 지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상에서의 그의 삶 은 고행의 삶이며, 고행이란 다름 아닌 죽음의 예행연습이자, 훈련과정이기 때문이다〉이성적인 신은 이제 지상의 삶을 내세의 준비단계로 생각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올바른 지상의 행복관을 위해서는 새로운 도덕이 필요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관용이었다.그러나 관용은 적어도 처음에는 아름다운 도덕으로 간주되지 않았었다. 그것은 허약한 정신과 비겁한 태도의 다른 말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형 제의 잘못된 사고를 용서하자. 그 형제의 잘못된 사고가 나의 영혼을 타락 시킨다고 해도 용서하자. 거짓 예언자와 위선자도 용서하자. 관용으로 용서 할 때 오히려 그들은 거짓과 실수를 깨닫고 사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회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해주고, 길을 잘못 들어선 사람에게 바른 길을 안내해 주는 것이 인간의 도리 아닐까? 물론 잘못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거칠게 다루어서도 안되겠지만, 그러나 그들을 그렇 게 버려두는 것이 인간의 도리인가? 진리는 하나가 아니든가? 영원한 행복 은 바로 그 전리의 터득에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그러한 의무감은 관용과 자비를 몰랐다. 관용주의자들은 교회적인 것을 철저히 배제해서 어떤 이단 자도 배척하지 않는 소치니 학파를 위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종교를 의면한회의주의자들인 한편, 강한 정신의 반역자들이었다. 시대의 관용주 의자는 보쉬에도아니었다. 프로테스탄트를 로마정교로 개심시키기 위해 라 이프니찌와 협상을 벌였던 벨리쏭도 관용주의자는 아니었다, 1692년에 라이 프니찌에게 보낸 그의 편지는 우리에게 좋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내 생 각에는 소치니 학파 지지자들과 소위 이신론자들과 그리고 스피노자 지지 자들이 이 이론의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고 봅니다. 그 이론은 그들 모두와 아주 잘 어울립니다. 그들은 법의 저촉을 받을까봐, 그리고 세상에 받아들 여지지 않을까봐 모든 박해를 고행자처럼 견뎌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일컬어 관용주의는 거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새로운 용어 가 등장하고 있는데, 로마교 배척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대세는 기울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변화가 일고 있었으며, 자신도 그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관용주의는 수십년의 노력과 많은 수난과 고통의 대가로 그간의 휘장을 바꾸고, 하나의 덕목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관용주의는 정 치싸움과 종교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국왕의 주장에 의하면 길을 잘 못 들어선 고집불통들을 제길로 들어서게 하기 위해 왕은 권력을 사용할 권 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네델란드 관료들의 주장에 의하면 권위를 인정치 않 음으로써 국가의 존립을 위해하고 평화를 위태롭게 하는 사람은 일자리를 주는 대신 감옥에 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영국왕은 시민권 대신 로마의 지배권을 주장하는 고약한 카톨릭 교도들에게서 권익을 박탈 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 디에도 없다는 반대 의견이 대두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신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어둠과 빛의대립 이상으로 박해와 복음은 대립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아야 했다. 따라서 기독교 국가의 왕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백성들이 그의 정치적 권력을 인정 하고 존중하는 한 모든 백성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독 교 사가들에 의하면 기욤 도랑쥬가 그러한 정치를 실현한 최초의 왕이었다. 〈그는 신교도임을 선언한 왕이었으며, 개혁종교를 유지시킬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 왕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단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말의 의미 영역이 정확히 어디까지 확장되는지를 알 수 없다고 고백한 왕이었으며, 그래서 그는 종교적인 이유로 자행되는 박해는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 왕이었다. 그는 오직 복음을 통한 설득의 방법 의에 다 른 개종의 시도를 허용하지 않은 왕이었다.〉5) 1690년 기욤 도랑쥬는 낭트 칙 령 철회에 대한 반론으로 관용의 법칙을 조심스럽게 제시한다.
5) 다비드 뒤랑, 『로마시대 이래의 영국사』, 1724-1736, 제XI권, p, 48.
종교논쟁은 점차 뜨거워져 갔다. 1670년 우주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신 앙의 채택을 위해 모든 종파에 휴전을 제기한 위쏘 목사가 출발신호를 울 린 셈이었다. 쥐리의는 『종교에 관한 관용의 이론』이라는 책에서 흥분하며 위쏘를 공격한다. 〈이교도에 대한 관용이라는 도대체 가당치도 않은 말이 내게 불러일으키는 형오감은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니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형오감은 더 짙어져만 간다.〉 망명지에서의 싸움은 더욱 처참했다. 끊임 없는 공방이 오갔으며, 설에는 설, 이론에는 이론이 맞섰다. 앙리 바나쥬 드 보발, 제데옹 위에, 엘리 쏘랭 등 식견 있는 목사들은 정신에 죄악을 저지 르는 것은 관용주의가 아닌 배척주의라고 주장했다. 결국 그들은 카톨릭이 나 기욤 3세와 결별한 후, 자유정신에 충실한 네델란드의 길버트 쿠퍼, 아 드리엔 페이츠, 누트 등과 같은 석학들과 동맹을 맺는다. 그들은 합심하여 새로운 도덕의 도래를 준비한다. 때로는 모든 것을 뒤죽박죽 만드는 풍랑이 일기도 했다. 가령 가톨릭교도뿐 아니라 개신교도들의 배척주의에까지 비난 을 서슴지 않는 〈망명객들에게 주는 경고〉로 벨르는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 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폭풍우가 지나자, 이제 관용주의는 화해의 상칭이 된다.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사람은 록크였다. 그가 쓴 많은 글 중, 1689년에 쓰여져서 그가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그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던 『관용주의 에 관한 서한』만큼 품격 높고, 웅변적인 호소는 없었다. 관용주의는 기독교 의 본질임을 그는 소리높이 의쳤던 것이다. 〈자비와 친절과 호의가 없다면, 어떻게 기독교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칼이나 불로 살 찌는 것이 아니라 자비로 살찌는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이 있는 그날까지는 아무도 잘잘못을 가릴 수 없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견해 차이로 형제 롤 화형시켜 죽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열성 신도들이여, 어디엔가에 쓰이 기를 원한다면, 다른 신도들이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타락과 죄악을 물리치 는 데 힘쓰시오. 신도의 타락과 죄악은 차라리 신앙의 포기보다 말할 수도 없이 해로운 타락과 죄악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속계와 영계는 서 로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종교사회와 시민사회가 서로 다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행정으로 정신을 다스리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행 정은 사원을 침범할 수도 없습니다. 관용이 철대명제입니다. 관용주의는 예 수의 복음이며, 모든 인간의 양식입니다. 그것을 인정치 않는 사람은 인간 의 탈을 쓴 짐승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에서 라틴어를 쓰면 어떻 고 그렇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무릎을 꿇고 기도하든 서서 기도하든 엎드 려 기도하든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카톨릭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여러 분, 제네바 교파 여러분, 개혁파 여러분, 신개혁파 여러분, 재침례파 여러분, 아르미니우스파 여러분, 그리고 소치니파 여러분! 영혼을 강제하려 들지 마 시오! 여러분에게는 그럴 권리도 그럴 권력도 없습니다. 관용을 베푸시오! 선행에의 의지로 단결하시오! 서로 사랑하시오!〉
제6장 과학과 진보
한적한 공원에서 두 남녀가 담화를 나눈다. 여자는 후작부인이고, 남자 는 친구나 애인일 듯싶은 사교계의 신사이다. 밤이 깊도록 그들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천문학에 관한 이야기 를 하고 있었다. 〈별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 .>퐁뜨넬르는 자연을 품 위 있고, 우아하고, 세련된 것으로 묘사한다. 퐁뜨넬르의 자연은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그는 그의 책이 아무에게도 거절당하지 않기를 바라며, 무식한 사람들에게조차도 홍미 있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는 가볍고도 매 력적인 터치로 그의 글을 시작한다. 그것이 지나쳤더라면 그의 책은 천박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책은 아기자기한 그것의 형태 에도 불구하고 웅장한 빛을 발한다. 신사와 후작부인이 고대 바빌로니아 칼데아 지방의 목동들 이야기를 하고 있울 때는 질은 어둠이 사위를 덮고 있었다. 그들은 천체를 관찰하고 있었다. 마치 태초의 인간처럼 그들은 태 양과 별에 보내는 경탄의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그들은 미천한 눈으로나마 천체를 관찰하는 한쌍의 인간들인 것이다.후작부인은 무식하다. 퐁뜨넬르는 모르는 것이 없다. 퐁뜨넬르는 얼핏 보 기에 그토록 신비로운 천체의 운행에 관해 말한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태 양이 지구 둘레를 도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 오류는 다른 많은 오류들을 낳았다. 그러나 마침내 코페르니쿠스라는 사람이 나타나 오류를 바로잡았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라는 독일인은 그동안 고대인들이 믿고있던 천체와 우주를 때려부췄다. 그는 어떤 것은 부수고 또 어떤 것은 가루 를 만들었다. 그 천문학자는 호통을 치면서 지구를 집어들어 밖으로 내던진 후 그 가운데에 태양이 자리잡게 했다…….〉 고대인과 고대인을 추종하던 사람들의 잘못된 사고를 그가 바로잡은 것이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리 고 있었다. 이성과 관찰에 의해 태초의 시행착오를 바로잡았던 것이다. 〈하 늘과 땅은 뒤바뀌었다〉고 과학은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새로운 발견은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어떤 광 인은 삐레의 항구에 정박중인 모든 배를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다는데,a) 후 작부인은 우주가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진리 앞에서 후작부인은 놀람과 실망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거리와 전쟁과 놀라운 것으로 꽉차 있던 지구가 이제 약하고, 먼지만도 못하고, 누 에껍데기만도 못한 보잘것없는 존재로 바뀐 것이다. 새롭게 드러난 무한의 우주 공간 앞에서 어떻게 전율과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a) 아테네의 항구였던 삐레는 그리스 해상교역의 중심지였다. 작가는 거기에 얽힌 에피 소드를 후작부인의 자기 중심적 사고와 비교하고 있다. 옛날에 배를 여러 척 소유한 어떤 선주가 있었는데, 그는 그의 배를 한 척도 남김없이 태풍에 날려 보냈다. 그 사 고로 미친 아데네의 선주는 하루도 빠짐없아 항구에 나갔으며, 귀항하는 모든 배를 자 기 배라고 우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비전전수자의 희열과 자부심에 가슴이 부풀어오름을 느꼈 다. 그녀는 혁신적 학문을 접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녀는 착각 속에 빠져 진 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단자나 우상숭배자의 집단을 탈퇴하여 진리의 집 단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그보다 더한 궁지가 있을까? 퐁뜨넬르는 추상적 인 것을 구체적이고도 경쾌한 이미지 (예컨대 강물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돛단 배, 대양을 헤쳐가는 선박, 골목길 위를 구르는 공)로 설명하곤 하는데, 그의 비 교를 예로 들어 우리의 이해를 쉽게 하기로 하자. 자, 오페리를 한번 생각 해 보자. 태양신의 아들 빠에똥이b) 지상에서 하직하는 장면이 있다고 하자.
b) 태양신 헬리오스와 바다의 여신 크리메네 사이에 난 아들. 신화에 의하면 아버지 헬 리오스로부터 아버지의 마차를 하루 동안 사용하도록 허락받은 그는 천상의 말을 타 고 하늘을 날아다녔다. 그러나 마차의 조종법을 잃은 그 신은 너무 낮게 내려가 산을 태워 버리게 될지 너무 높게 올라가 천체에 부딪히게 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제 우스가 우주를 수호하기 위해 그에게 벼락을 내려 죽게 했다.
그는 바람에 휩쓸려 간다. 그는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피타고라스, 아리 스토텔레스, 플라톤 등 우리가 귀에 따갑도록 들어온 위대한 석학들이 그 장면을 보았다고 하자. 그들은 그 장면을 보고 무슨 말을 할까? 하나는 〈빠 에똥울 날아오르게 하는 힘은 다름 아닌 숫자〉라고 할 것이다. 또 하나는 〈빠에똥을 날아오르게 하는 힘은 미덕〉이라고 할 것이다. 마지막 사람은 〈빠 에똥울 날아오르게 하는 것은 지붕에 남겨둔 우정 같은 것〉이라고 할 것이 다. 고대인들에게 해석을 맡기면 가지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어찌 딱 한 일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데카르트를 위시한 근대인들이 등장해서 오류 를 바로잡았다. 그들은 〈빠에똥이 울라간 이유는 더 무거운 무엇인가가 도 르래 원리를 이용하여 그를 끌어올렸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는 아무도 무대 뒤를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대장치를 확인하고 난 다 음에야 사람들은 비로소 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전리를 바로 알기 시작했 다. 발견보다 더한 기쁨은 없다. 그 중에도 전리의 발견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이다.
과학적 지식은 독특한 매력을 지닌다. 지극히 복잡해 보이지만 기실은 너 무 단순한 경제적인 원칙과 동기에서 바롯되는 이 세상은 철저하리만큼 찰 정돈된 세상이다. 그러한 세상을 바라보는 일보다 우리의 지성을 황홀하게 하는 것이 있을까? 우주는 태영시계와도 비슷하다. 우주가 기계적이기 때문 에 싫증을 느끼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후작 부인은 기계적인 우주롤 기계적이기 때문에 더욱 좋아한다. 그 정확성, 그 경제성, 그 단순성 ……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자연의 법칙에 새로이 눈 울 뜬 그녀는 미묘하고도 짜릿한 지적 관능을 느낀다. 〈이 기쁨은 몰리에르 의 코메디를 보고 느끼는 기쁨과는 다릅니다. 이 기쁨은 정신을 흐뭇하게 하는 지적인 어떤 것입니다.〉이제 과학은 편재하는 것이 되었다. 칠판을 숫자로 가득 채우는 사람들, 망원경만 들여다보는 사람들, 인간과 동물을 해부하는 사람들 등 훌륭한 석 학들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으며, 그들과 가까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퐁 뜨넬르의 초대로 우리는 출입제한 구역에 들어온 것이다. 퐁뜨넬르 갇은 사 람을 철학은 〈불만이 많은 사람〉으로 부르고, 과학은 〈호기심 많은 사람〉으 로 부르지만 기실 감은 말이다.C) 세상 사람들이여, 두려워하지 말자, 두려움c) 역자는 inquiet를 〈불만이 많은 사람〉으로, curiex를 〈호기심 많은 사람〉으로 번역했 다.
을 버리고 선악과 나무에 가까이 다가가 보자! 전리는 정신을 비쳐 주는 횃 불이 아니던가! 1686년의 『세계의 다양성에 관한 대담』은 우주에 대한 새 로운 해석의 문을 연 아름답고도 심오한 서곡이었다.
당시에는 기하학적 정신과 함께 기하학이 유행했다. 이전에는 높이 떠받 들어지던 것이 이제는 보편인들의 취향이 되어 버렸다. 많은 보편 교양인들 이 명강의로 이름을 떨치던 죠셉 쏘뵈르라는 교수의 강의를 들으려고 앞다 두어 달려왔다. 연애를 하려 해도 고차원 수학문제를 푸는 능력이 필요했다. 여자들은 구애하는 남자에게 고차원 수학문제를 풀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멋쟁이 메르쿠리》d)는 당시의 풍습을 이렇게 조롱하고 있다. 〈수단 좋은 수 학자들이 여자들의 규방에까지 침투해 들어갔으니 이제 연애는 끝났다. 여 자들이 명제가 어떻고, 정리가 어떻고, 직각이 어떻고, 둔각이 어떻고, 마 름모꼴이 어떻고 하는 소리들만 지껄이고 있으니 연애세상은 끝난 것이 아 닌가? 특히 최근에는 파리의 아가씨들이 온통 수학으로 머리가 돌았다. 게 다가 〈멋쟁이 메르쿠리〉가 소개해서 이제는 귀에 따가운 안경 만드는 법을 모르면 청혼조차 어려운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미 약혼한 사람조차도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한다는 이유로 파혼당하는 세상이 되었다〉(1686년 3월 4일.) 이제 물질은 체적이었고, 물리학은 기하학이 되었다. 기하학은 물질과 언어 의 영역까지 침범해 들어왔다. 아편의 수면효과는 약효 때문이라는 긴 이야 기가 필요없었다. 수학 공식 하나면 족했다. 사람들은 수학자들을 환호했다.d)
그들 덕분에 우주의 열쇠를 손에 쥘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환호의 기분이 모든 사람들을 지배한 것은 아니 었다. 고통스럽기까지 한 다른 요구가 있었던 것이다. 수학은 과연 지식의 유일한 형태인가? 추상의 방법이 인식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가? 수학이 철 정에 달했을 때조차도 수학은 사실 길을 헤맨 셈이었다. 그 예로 수학의 대 가 데카르트롤 들 수 있다. 물리학 방면에서 길을 잃고 헤맨 데카르트였다.새 시대의 철학은 새로운 것을 요구했으니, 관찰과 실험이었다. 〈관찰과 실 험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는가?〉라는 갈릴레이와 베이컨의 외침을 잊을 수 없다. 베이컨에 의하면 무엇보다 선행해야 할 것은 관찰이었다. 〈인간은 감 각기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사물을 이해할 수 없다. 합리적 판단의 자료 는 감각이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성은 감각의 도움으로 얻어진 감각적 이미 지들을 선별하고 교정할 뿐이다. 〉 그러므로 진정한 철학은 감각에서 출발해 야 하며 바로 그것만이 오성에 확실하고도 직접적인 길을 열어 줄 수 있었 다. 지금까지는 전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기하학자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실험을 중시하는 다론 학자들은 실험의 결과 전공이 존재한다고 주 장했다. 실험을 중시하는 학자들은 현실 연구를 위한 전정하고도 새로운 열 쇠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현상이었다. 그들은 현상에의 순응을 그들의 의무로 생각했다.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흐름의 방향을 바꾸기를 요구하는 정신의 명령이었다. 땀을 홀리고, 고통을 견디면서 실증적 결과를 찾아내야만 했다. 확실성의 대명사인 수학의 도움을 받되, 존재를 메마르게 하지 않은 채 복잡한 존재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다른 인식의 형태에 손 울 뻗쳐야 했다. 유럽 전체가 협력하여 추구해야 할 것이었다. 이태리 플로 렌스의 씨멘토 학회 회원들을 한번 살펴보자. 그들은 어떠한 자연 현상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학지들이었다. 왜 과일 속에는 벌레가 있을까? 나 무줄기나 나뭇잎의 옹이는 왜 생기는 것일까? 물 속에서는 형광을 발하던 물고기가 왜 뭍에서는 그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일까? 실험실과 실험도구 도 없었지만 그들은 열십히 연구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옷도, 모자도 벗지 못하고, 일을 하기 위한 기본자세도 아직 갖추지 못한 채 연구에 몰두했던 것이다. 그런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그들은 도구를 만들어 냈고, 실험을 반 복했다. 그들은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물론 이상적인 인식의 형태는 기하 학이다. 그러나 기하학은 우리를 버리고 무한대의 공간 속으로 사라져 버렸 다. 그래서 우리는 전리에 이르기 위해 실중과 반중이라는 실험의 길로 돌 아선 것이다.〉 1667년경 씨멘토 학회는 해체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태리의 정신은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이태리의 실험정신은 마르시글리, 발 리스니에리, 구알티에리, 클라리치, 미 셸리, 라마찌니 , 포르티스 등 이루다 열거할 수 없는 이태리의 학자들을 거쳐 18세기로 계승된다. 1704년, 지 오반니 마리아 란치니는 의술에 있어서의 철학적 사고방식에 대한 담화를 『미네르바의 회랑』에 싣는다. 그는 합리적인 의술을 위해서는 실험철학을 원용할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브왈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로얄 소사이어티〉의 활동도 눈에 띄게 활발 한 활동을 한 단체 중의 하나였다. 〈로얄 소사이어티〉는 전 유럽의 홈앙의 대상이었다. 〈바르고 정교한 사고를 하는 ‘로얄 소사이어티'의 회원들은 논 리를 전개함에 있어 재치나 기억력을 과시하기보다는 확실한 결과를· 중시 하는 과학에 의지한다. 그래서 그들은 우선 귀납이 가능한 가정들을 점검하 며, 그 일 의에 다른 일에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 그런 다음 그 들은 새로운 실험과 추리를 통해 원인을 찾아낸다. 실험과 추리의 그 위대 한 자연과학자들은 데네리프 산 꼭대기까지 울라가 온갖 실험을 하며, 무한 한 시험 끝에 마침내 기발한 기계를 창안해내기에 이르는 것이다.〉1)1) 아스콜리, 『프랑스의 견해에 대한 대영제국의 입장』, 1930, Ⅱ권, p. 42.
실험 분야에서는 네델란드의 학자들이 으뜸이었다. 네델란드의 의학자들, 식물학자들, 박물학자들은 앞다투어 그들의 업적들을 발표했다. 대표적인 인 물로는 스왐메르담, 휘겐스, 보에르하베, 그라베산데 그리고 로이벤호엑크 등을 들 수 있는데, 그 중에도 특히 주목을 받은 학자는 로이벤호엑크였다. 섬세한 손과, 날카로운 눈과, 참신한 정신의 소유자인 그는 오늘날의 표현 을 쓰자면 소위 기술의 혁신자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현미경을 제작하곤 했는데, 마침내 그는 지금까지 나온 어떤 현미경보다도 훌륭한 현미경을 만 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가 개발한 현미경은 사물을 270배로 확대해 볼 수 있는 현미경이었다.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거기에는 하나의 세계가 살아 숨쉬는 것이었다. 미생물체들이 양분을 찾아 분주히 움직이면서 생존두쟁을 하는 것이었다. 그 물방울의 세계는 커다란 대양에 비기지 못할 바가 없었 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생명체들이 거기에서 살아 숨쉬는 것이었다. 그는 혈액이나 정액 같은 다양한 액체들에 대해서도 같은 실험을 해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실험을 통한 그의 발견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 듯이 논쟁과 반박이 뒤따르고, 크고 작은 책자들이 쏟아져나왔다. 두 눈으
로 확인한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가 발견한 진리를 보급시키기까지 는 엄청난 땀을 다시 흘려야 했다.
오라우스 로메에르, 토마스 바르토린, 닐스 스텐센 등 스칸디나비아 학자 들의 해부학에 있어서의 발견은 의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오토 폰 게릭케를 위시한 독일 과학자들은 계속해서 진공에 관한 실험을 한다. 독일 의 학자들은 특히 공동연구에 업적이 많은데, 그들은 공동 연구결과를 그들 의 물리 의학 잡지에 발표한다. 벨르는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 마지않는다. 그에 의하면, 물리 의학 잡지의 저자들은 그 창의력과 천재성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일에 대한 그들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과학계에 불후의 업적 울 남긴 위대한 인물들이다.프랑스인들도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지기에 이른다. 파리쟝들이 뒤베르네 교수의 해부학 강의를 듣기 위해 강의실에 운집했다. 당시의 프랑스인들이 궁지를 가지고 자랑하던 과학자는 니꼴라 렘므리였다. 약사로 출발한 니꼴 라 렘므리는 후일 볼테르에 의해서 소위 최초의 합리주의적 화학자로 칭송 받는다. 그리고 마리오뜨는 당시에 유명한 또 하나의 물리학자였다. 〈새로 운 자연과학회가 빠리에 설립되었다. 학회장인 아베 비뇽은 그들이 말하는 자연이란 아주 단순한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자연은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 들에게서 결코 아무것도 빌려오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는데, 그들은 옳았 다.〉2)2) 『유럽의 추세』, 1699, p. 25.
스페인도 탐험대열에 동참한다. 1697년 실험물리학회가 세빌랴에 결성된 다. 다양한 사상은 문학과 철학 분야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과학 분야 에서는 더욱 심했다. 토스카나의 유명한 의사 프란체스코 레디는 극미동물 에 관한 개론을 통해 파리가 쉬술지 않으면 물질은 썩지 않는다고 주장했 다. 그의 발견은 유럽학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당대의 정신적 공감은 특 히 번역을 통해서 나타난다. 삐에르 꼬스트라는 프랑스인은 이태리에서 출 간된 그 책을 번역하여 네델란드에서 출판한다. 파울로 싸로티라는 어떤 베 네치아인은 런던의 과학자 로버트 브왈과 가까이 지내다가 과학에 매료되 어 〈실험기계 조작에 능한 영국의 젊은이들을 동반하여〉 베니스로 돌아온
다. 과학은 당대의 지배적안 현상이었다. 띠샤르 신부가 샴에 두번째 여행 울 할 때였다. 때브노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산꼭대기에 조개껍질이 있을 수 있는가?〉를 물으면서 기이한,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그 현상을 명 쾌하게 해명해 줄 것을 요구한다. 르 블랑 신부와 베즈 신부가 따블 산꼭대 기까지 올라가 그것을 확인한다. 유럽의 주요 잡지들이 고차원 수학문제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지만, 사실은 자연과학 분야에 그보다 더 많은 지면이 돌아가고 있었다. 특히 독자란은 신비한 자연현상에 대한 당대의 관심을 여 실히 드러낸다. 〈아직 한 번도 알을 난 적이 없던 어떤 암탉이 기이한 소리 로 울면서 소란을 피우더니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혜성무늬의 알이 아니라, 수많은 별무늬가 박힌, 보통 알보다 훨씬 큰 알을 하나 낳았습니다.〉 〈어린 아이의 머리를 영락없이 닮은 머리를 단 나비를 한 마리 잡았습니다.〉 〈어 떤 소녀는 거미, 송충이, 굼뱅이 등등의 곤충을 토해냈습니다.〉 …… 그러한 기이한 현상들은 사람들을 홍미롭게 했다. 그리고 같은 페이지에 각국 과학 자들의 호기심과 열성의 결정체인 연구업적들이 나란히 실려 있었다. 수액 은 어떻게 전달되는 것인가? 시나시나는 정확히 어떤 약효가 있는 것인가? 효모의 발효과정에 대하여? 눈의 해부에 대하여? 위의 해부에 대하여? 인 간의 심장에서 발견된 새로운 혈관에 대하여? …… 만약 괴물같이 생간 고 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고 하자, 이제 사람들은 그 기적에 놀라거나 소리 롤 지르는 대신 해부를 준비했을 것이다.
위대한 시대는 영웅울 부른다. 철학이나 비평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 분 야에서도 분위기가 고조되자 과학의 영웅 뉴턴이 나타났다.비코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두 천재〉로 떠받든 라이프니찌와 뉴턴은 시대를 특징짓는 미적분을 거의 동시에 발견했다. 그들이 발견한 미적분은 자연현상을 불연속적인 것이 아닌 연속적인 것으로 볼 때 발견가능한 것이 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미적분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 이 인간의 사고방식과 사고의 발전에 끼친 영향은 과소평가될 수 없는 것 이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하나의 수학 원리는 제반 현상들에 대한 새로운 학설을 낳곤 했다. 피타고라스 학설이 정수론에 근거한 것이고, 스피노자 철 학이 기하학에 근거한 것이었다면, 라이프니찌 철학은 미적분에 근거한 것이었다3) 라이프니찌에게 있어서도 철학의 으뜸가는 보조자는 수학이었으며, 스스로의 고백처럼, 만약 그가 운동의 법칙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그는 조화 의 원리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뉴톤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은 바 로 그 미적분에 힘입은 바 크다.
3) 레옹 브륀쉬빅, 『수리철학의 발전단계』, 1912.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대저서가 출간되었다. 그런데 거기 에 발표된 원리는 발표 직후에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것이 반응을 얻 은 것은 다음 세대에 가서였다. 철학과 비평 등 모든 분야에서 18세기는 17 세기 말의 업적에서 그 양분을 섭취했다. 다만 그 양분이 소화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데카르트에게서와는 달리 뉴턴에게서는, 수학은 더 이상 물리학의 전적인 근거가 아니었다. 이제 그것은 단지 물리학적 발견과 검증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뉴턴의 명저는 관찰과 실험에 그것들 본래의 위엄과 가치를 되돌려 준 셈이었다. 천재 뉴턴을·특칭짓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면, 현상에의 관심, 현상에의 복종, 현상 앞에서의 겸손, 실험에 의해 입증되지 않은 것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등이었다. 우 주의 발견은 밀하자면 그가 제시한 원리의 입증이었으며, 그의 고집에 대한 보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사과나무 밑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뉴 턴을 떠올리곤 한다. 만약 그 모습이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우리 인간의 사 고방식을 상징한 것이라면 뉴턴의 그러한 모습은 결코 오도된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뉴턴의 끈질기고도 열정적인 작업방식은 우리가 이미 위에서 언급한 어떤 과학자의 그것보다도 훌륭한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 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사례가 있으면 그것을 인정하고, 그 다음합리적으 로 해석하고, 그 해석을 다시 구체적인 사례를 동해 검증하는 원칙은 당시 의 과학자들이 막연히 희구하고 있는 사이에 요지부동의 원칙이 되기에 이 르렀다.
과학 아카데미의 종신 서기인 퐁뜨넬르는 아이작 뉴턴에 대한 찬양의 글 을 썼는데, 아이작 뉴턴에 대한 그의 명료한 견해는 아이작 뉴턴의 발견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를 잘 알게 해준다. 마치 영감을 받은 위대한 창 조자처럼 그는 날렵하고 명확한 글로 뉴턴을 찬양해 마지않는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웅변적 미사여구에 그치지 않고 데카르트와 뉴턴을 구체적으로 비교했다. 그의 그 방법은 바람직한 것이었고, 옳았다. 스승인 데카르트에 대한 개인적인 편견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 고 두 사람의 정신적 태도의 차이,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 사람간의 정 신적 경계를 분명히 밝힌다.
이 두 위인들은 아주 대립적이면서도, 상당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 은 둘 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그리고 제국을 세울 수 있을 만한 천재 로 태어났습니다. 기하학에 뛰어난 그들은 둘 다 물리학에 기하학을 적용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그들은 기하학을 공히 물리학에서 출발시켰습니다. 다른 접아 있다면, 데카르트는 과감한 비상으로 가장 높은 곳에 울라가 어떤 기본적인 명중을 통해 근본원리의 거장이 되려고 했다가 결국 자연현상으로 하강해서 그것 울 마치 필연적인 결과로 여겼다면, 훨씬 겸손하고 조심스럽기까지 한 뉴턴은 자 연현상에 근거하여, 그것들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미지의 근원적 원리 로 거슬러 울라간 데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오성에서 출발하여 현상의 원인을 찾 아갔다면, 뉴턴은 현상에서 출발하여 현상의 원인을 찾아갔습니다 …….또한 퐁뜨넬르는 뉴턴이 1704년 발표한 『광학론(빛과 색채론)』에 대한 치 서를 통해 실험의 역할, 가치, 그리고 그것의 어려움과 거기에 깃든 아름다 움까지 드러낸다.어느 수준 이상의 실험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비 록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고도의 섬세한 기술이 아니고는 거 기에 스며든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으며, 고도의 섬세한 감각이 아니고는 거기 에 스며들 수 있는 모든 것을 감지할 수 없습니다. 실험을 하려면, 문제의 현상을 일단 분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해된 많은 부분들은 분해되었다고 해서 결코 단 순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복합물입니다. 따라서 길을 잘못 들어서게 되면, 미로를 헤맬 뿐 빠져나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현상 들은 조물주에 의해서 창조의 동기와 함께 철저히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그보다 더한 장관이 어디 있겠습니까?실험물리학은 새로운 정신상태의 확립을 가능케 했으며, 많은 결과들이거기에서 비롯되었다. 퓌펜도르프가 법에서, 리차드 사이먼이 성서의 주석 에서, 록크가 철학에서, 그리고 샤프스베리가 도덕에서 이룬 업적(초월로부 터 실증으로의 이행)을 뉴턴은 물리학에서 이루어낸 셈이었다. 그는 파멸 위 기에 있던 이성을 구해서 제자리에 위치시켰다. 그는 사람들이 그동안 도저 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일, 즉 비판과 실험의 결합을 실현시킨 사람이었다. 이제 인간은 새로운 우주 탐험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1715년 2월 8일, 의사 보에르하베는 라이데 아카데미에서 〈물리학의 확실 한 이해를 위하여〉e)라는 제목의 강연회를 가졌다. 그 발표는 그때까지 발 표된 물리학적 업적들의 요약발표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지금 까지의 사물의 실재에 대한 모든 연구는 공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들 은 사물의 근본 원인과 실체는 포착하지 못한 채, 단어, 원자, 단자의 되풀 이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발견은, 내일이면 번복된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하면서 뉴턴이 벗어나기를 선언한 것은 스콜라f)철학의 오류였 다. 왜냐하면 스콜라 철학은 이해가 안되는 것들은 무조건 신비로 돌렸기 때문이다. 뉴턴은 모든 물체에 끌어당기는 힘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가 의 도한 것은 왜 물체들은 서로 끌어당길까 하는 의문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 는 촉지가 가능하고, 분명한 현상들만을 검증했으며, 그 결과들을 비교측정 했다. 구는 그 이상 원치 않았다. 이제 많은 철학자들로 하여금 길을 잃고 헤매게 한 형이상학은 금지구역으로 정하자. 이제 실험에 의해 얻어전, 그 리고 검증된 결과에만 집착하자. 이제 형이상학을 버리고 물리학에 고개를 돌리자.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자연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e)" De comparando certo in physicis."
f) 형식과 논리와 전동을 중시하던 중세 철학.서로 무관한 것은 없다. 이제 극단적 회의주의는 패배했다. 아니 보헤르 하베의 말대로 〈물리학적 회의주의가 시작된〉 셈이다. 그의 발표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과학적 변천과정이 없었다면 물론 불가능했을 것이다. 네 델란드의 명의 보에르하베는 록크가 이미 그 본질을 설명한 바 있는 보편 철학과 근대적 지혜의 원리를 잘 요약했다고 볼 수 있다. 잡히지도 않는 어
떤 실체를 찾아 헤매다가 진력이 난 사람들은 이제 그들의 능력이 미치는 땅을 찾아나선 것이었다. 덜 수고하면서도 더 많은 수확을 가져다 줄 수 있 는 그 땅을 찾아, 거기에 안락한 거처를 마련하려고 했다. 그러면 날이 갈 수록 행복해지리라! 그런데 누가 그들을 거기로 안내할 것인가? 그들은 다 름 아닌 과학자들이었던 것이다. 이제 과학자는 군주나 정복자들보다 더 높 이 떠받들어졌으며, 아카데미는 전에는 작가에게만 베풀던 찬양을 과학자들 에게도 베풀기에 이르렀다. 과학자들은 그런 대우를 받아 마땅했다. 국가의 대소사를 조정하고, 정치적인 난국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과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의회 의원으로서의 뉴턴이 일반인에게 나쁜 인상을 주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역사가는 하나의 국가를 탄생시키 는가 하면 그것을 멸망시키는 역사적 파란을 조망하면서 긍지를 느낀다. 그 러나 그 기쁨은 과학자에게 주어지는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 로 섞이면 불이 붙는 용액, 자석에 의해 그려지는 그 희안한 형상, 실험기 법의 발달이 드러낸 무궁무진한 자연의 비밀, 유황과 인의 작용 …… 등등 은 어떤 역사적 사실보다도 홍미진전한 것이었다…….〉4) 현미경, 배기 펌 프, 기압계 등이 시로 노래되었으며, 혈액 순환, 굴절 등이 시의 찬양을 받 기에 이르렀으니, 가히 놀랄 일이 아닌가? 시는 새로운 정신에 찬사를 보내 기 시작했다.
4) 이 표현은 퐁뜨넬이 『왕립 아카데미의 변천사』에 붙인 서문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지식의 영역은 자꾸만 확장일로에 있었다. 오늘은 만유인력의 법칙이 밝 혀지는가 하면, 내일은 다른 천재가 나타나 다른 비밀을 밝혀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거의 아무것도 모르던 그 기계의 모든 신비로움을 알게 된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지식은 우리에게 힘을 주었다. 과학이 비록 겉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도, 그래도 그것은 여전히 소용이 있었다. 엄정한 과학적 정신을 함양시키고, 정확하고 공정하게 사고 하는 방법을 익히는 일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이론은 언 제나 응용을 낳는 법이다.〉5) 〈포물선에서 접선영은 가로 좌표의 2배이다라 는 지식은 그 자체로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5) 라이프니찌의 표현.
그러나 그러한 기하학적 지식의 사전 단계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치의 빈 틈없는 포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7세기의 기하학자들이 이 새로운 곡 선, 소위 그들이 패선이라고 부르는 곡선울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연구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서 단전자에 응용되기에 이르렀고, 완벽에 가 까운 박자측정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활동은 끊임 없이 발전을 거듭할 것이며, 그러면, 언젠가는 인간이 하늘을 나는 날도 오 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보조날개의 도움을 받아 나는 시험에 성 공한 바 있다. 〈비행기술이 더욱 개선되면, 인간은 멀지 않아 달나라에 갈 수도 있을 것이다 …… .〉〈우리의 노동을 더욱 간편하고 신속하게 해줄 새 로운 기계의 발명을 가능하게 하는 지식,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상품의 개발에 필요한 지식, 우리를 풍요롭게 하고, 우리의 생활필 수품의 생산중대를 가능하게 해주는 지식 …… 등 이 땅의 우리 인간에게 유용하고도 유익한 지식의 영역은 .끝이 없다 …… .〉지상은 낙원이 될 것이 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죽음을 잊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더이상 뮤 즈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 강력한 기계학, 기하학, 수학, 해부학, 식물학, 화 학 등등의 과학적 형제들의 업적이다.
과학의 형제들이여, 나의 예언, 나의 시에 귀기울여다오! 수많은 아름다움이 너희에게서 비롯되니 그 예술로 우리를 장식해다오 너희의 배려로 우리는 살 같은 세월의 무한한 확장을 보나니 요단강 저편의 염라대왕은 하릴없어 하품만 하고 운명의 여신은 베틀에 끼울 실을 찾지 못하누나 …… 6)6) 우다르 드 라 모뜨, 『과학 아카데미 회원 비뇽 씨에 대한 찬가』·
발전이라는 어휘보다 기대와 승리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던가? 발 전이라는 어휘는 우리의 삶을 받쳐 주는 긍지를 가져다 주며, 미래에의 기 대로 현재를 부정하기는커녕, 현재를 보완하고 장식하게 해준다. 우리의 방
법론은 발전한다. 우리의 과학은 발전한다. 우리의 활동능력은 증대되고 있 으며, 우리의 정신적 자질도 개선일로에 있다. 〈2세기 전에 발전을 거의 완 전히 멈췄던 과학과 예술이 새로운 발전의 도약을 하기 시작했다. 바꿔 말 하면, 새 삶을 개척하기 시작했다.〉7) 〈이제 우리는 나날이 밝아지는 새 세 계를 살게 되었으며, 오늘날의 세계와 비교해 보면, 전에 우리가 살던 세계 는 암혹에 지나지 않는다 ……. 〉8)이제 근심과 걱정은 땅에 묻어 버렸다. 태 초의 황금기를 연연할 수도 없고, 내세에 대한 이렇다 할 확신도 없는 인 간은 이제 자신이 누리는 이 땅과, 그리고 자식들이 살아갈 가장 가까운 미 래에 대한 겨정 의에 다른 걱정이 없었다 …… .
7) 퐁뜨넬의 위에 든 서문의 일부.
8) 삐에르 벨르, 《문예공화국 소식》, 1684년 4월호.과학은 이미 우상, 아니 신화가 되었다. 사람들은 철학과 종교의 자리를 이제는 과학이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학은 인간정신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발이 없었던 것 은 아니다. 과학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과학이 본령을 모르고 오만방자한 지 경에 이르렀다고 개탄했다. 그들은 갓 싹이 돋기 시작한 과학의 신화를 서 둘러 짓밟지 않으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 서 그들은 과학의 파산을 선언하고 나섰다.
제7장 새로운 인간의 전형을 찾아서
이태리식 기사가 스승과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한 후 물러나자, 이제 신사 가a)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아직 미몽을 벗어나지 못한 젊은 세대에게 삶의 지혜를 계시해 준 전형이 신사였다. 어려운 시련과 고통을 뚫고 마침내 자 리를 잡은 종교, 정치, 사회의 제 양상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 그리고 모 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려면, 아니면 적어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만족한 삶을 살게 하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신사는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a) 17 세기에 있어서 신사Honnete homme는 절도를 벗어나지 않고 예의를 잘 지키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종교, 정치, 사회의 제 양상은 처음에는 상호대립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잘 조정된 끝에 마침내 완벽한 조화를 이루기에 이르렀다. 고대의 속세적 예지 와 기독교적 미덕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졌고, 사상적 요구와 삶의 요구 사 이에 조화가 이루어졌고, 영혼과 육체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졌고, 일상적 삶과 고상한 삶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졌다. 신사는 그 중에도 미덕 중의 미 덕인 예의를 가르쳤다. 예의란 자신의 기쁨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기쁘 게 하는 미덕에 다름 아니었다. 신사는 또한 좋은 일에 있어서조차 결코 지 나침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으며, 명예 의에는 결코 어떤 일에 있어서 도 화를 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신사는 오직 끈질간 노력과 훈련, 그리 고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 의지만이 가능하게 하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나
를 평범한 인간으로 머물게 하는 일만큼 어려운 일도 없었다. 그것은 말하 자면 겸허한 영웅주의를 요구했다. 의유내강으로 내적 힘과 낭비를 조화시 킬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신사는 가능했던 것이다.
세기말에 이르자 신사의 이미지는 더욱 강력한 빛을 발했다. 사람들은 신 사의 이미지를 신앙처럼 경배하면서, 그것을 젊은이들에게 인생의 귀감으로 가르치기까지 했다. 선조들의 인생담과 충고가 귀에 따갑도록 반복되었다. 그러한 주장을 펴는 사람들에 의하면, 신사는 재치 있는 작품을 식별할 줄 아는 감식력이 있어야 하며, 결코 편견이나 시기에 근거하여 그것을 언급하 거나 비판하지 않아야 했다.그러나 이 때늦은 충고들이 상투적 인 반복에 지나지 않는 시기가 오고 말 았다. 이제 중요한 것은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훌륭한 삶의 단순한 수용 이 아닌 전적인 개혁이었다. 이제 정치, 사회와의 타협이 아닌, 전적인 개조, 그것도 가능한 한 최단 시간내의 개조가 문제였다. 이제 더이상 범국가적인 종교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새 시대의 사람들, 유행의 선구자들, 특히 딸 에게 인생의 교훈을 남긴 해리팍스 감은 사람은 후손들에게 온화하고, 아늑 하고, 쾌적한 종교, 고통과 슬픔에서 벗어나게 해줄 후손들만의 종교를 만 들어 가지기를 바랬다. 이제 신이 피조물을 지배하던 시대는 끝나고, 오히 려 피조물이 신을 요리하는 시대가 도래하기에 아르렀다. 마침내 신사도의 모든 원칙들이 깨지고, 아름답던 동상도 산산조각 나 버리고 말았던 것이 다. 신사도와 이성은 쌍동이 자매처럼 여겨졌었다. 그러나 이성의 의미는 변 하기에 이르렀다. 중재 능력, 또는 화해의 질서와 이성은 서로 다른 것이었 다. 이성은 검토정신과 비판정신의 다른 말이 되었다. 불만에 가득· 찬 이성 과 신사는 어울릴 수 없는 짝이었다.신사가 자신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신사도는 이미 오랜 동안 인 간을 지배해왔기 때문에, 신사도적인 삶의 메카니즘은 당대의 삶의 양식에 배어 있었고, 어떤 사람들에게 그것은 모방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어떤 사 람에게는 그것은 삶의 방식이 아닌, 목적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 의 신사도에서는 아무런 도덕성을 찾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서 신사도는 자기를 변장시키는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라몽 기사는 아카데미에서 배운 병법을 친구 마타에게 이렇게 전한다. 〈자네가 알다시피, 나 는 프랑스에서 제일가는 무사일세, 게다가 나는 카드놀이와 주사위놀이를 포함하여, 아카데미가 가르치는 모든 것을 배웠네, 그러니 나는 젊음과 신 사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배웠다고 자부하지 않을 수 없네 …….〉1)그는 쭉정이룰 알곡으로 여겼으며, 모임의 자리에서 단순한 여흥에 불과한 게임 울 신사도의 모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좀더 읽어가다 보 면, 우리는 그가 약삭빠르게 놀음꾼을 등쳐먹는 장면까지 목격하게 된다. 따 라서 우리는 18세기초에는 신사도와 정직성이 아직 일치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신사는 그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었으며, 시대는 인생을 안 내할 새로운 인간전형을 요구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I) 해밀턴, 『그라몽 백작의 삶에 대한 회고록』, 1713, 제Ⅲ장.
스페인에서 하나의 전형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스페인식의 영웅은 당대의 소산이 아닌, 기존형태의 부활이라는 점이었다. 예수파 신부 발타자르 그라씨안은 1637년에 『영웅』을, 1640년에 『정치 』를, 1646년에 『신 중한 태도』를, 1647년에 『신탁』을, I65I년, 1653년, 1657년에 『비평』을 출간 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의 이 저서들은 인간의 탐구였으며, 그것들은 모두 어떤 인간의 전형을 찾는 데 바쳐졌다는 것이다. 사실 그의 저서둘은 사상이 급변하던 당시의 통념에 비추어 볼 때, 당대의 취향에 상당히 어긋 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발타자르 그라씨안 신부는 17세기말에는 그토록 각광을 받았으며, 도처에서 번역되었을까? 물론 그는 무명인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만년에 영예를 얻었던 셈이다. 1684년, 암물로 드 라 우 쎄는 그의 책을 불어로 번역했는데, 그는 그라씨안 신부의 저서에서 느낄 수 있는 약간 기이하고 독특한 맛을 없애는 대신, 거기에 없었던 보편적인 유럽의 맛을 고상하고 매끄러운 필치로 가미시키는 데 성공했다. 아마 그라 씨안 신부의 책이 많이 읽힌 첫째 이유는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두번째 이 유는 예수파의 기여에 있다. 예수파는 저자와의 열띤 논쟁을 잊고 그가 죽 자 그의 성공을 위해 정성을 다했던 것이다. 세번째 이유는 대중에게서 찾 아져야 할 것이다. 대다수의 대중들은 새로운 경향에 적응하지 못했고, 스
탕달의 표현을 발리면, 그들은 여전히 스페인 취향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 던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그 의의 많은 이유들을 전부 파 악할 수는 없으며, 파악한다고 해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1685년에서 1716년 사이에 그의 작품이 프랑스에서만 15권 정도 번역출판 되었다. 독일도 예의일 수 없었다. 토마시우스는 그의 유명한 취임강의에서 프랑스인들의 맹목적인 모방취향을 매도하면서, 독일안의 올바른 품행을 위 해서는 그라씨안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그라씨안을 독일 인의 스승의 한 사람으로 꼽았다. 그는 강의를 시작할 때나, 강의를 끝낼 때 나 그라씨안을 자랑스럽게 인용했다. 뿐만 아니었다. 그라씨안은 영국과 이 태리 등에서도 높이 평가되었다.그라씨안의 말에 따르면, 범상한 자질에 만족하는 사람은 이상적인 인간 이라고 볼 수 없다. 잡다하게 주워모은 평범한 덕은 결코 이상적인 인간을 만들 수 없다. 이상적인 인간은 더 높은 야망에 불타며, 탁월한 인간을 꿈 꾼다. 이상적인 인간은 뛰어난 지성과 확고한 식견, 그리고 열정적 정신을 지니며, 정열에 불타며(감정적 열정이 아닌 지성적 열정도 열정이 아니던가?), 운명을 직관으로 믿고 이겨내며,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며, 역량을 한껏 발휘하여 어느 분야에 있어서건 최상의 수준을 지향 하고 제일인자가 되려는 야망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이상적 인 인간은 때를 기다릴 줄 알고 속셈을 감출 줄 알고, 은밀하고 산비로운 데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무궁무전한 비밀을 점차 벗겨 보여줄 때에 많 은 감탄을 자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식의 영웅은 고통을 잘 참으며,. 굴욕을 잘 견딘다. 견디지 못할 굴욕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양심에 비추 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굴욕뿐이다. 그러나 승리는 목적이 아니다. 세계 의 지배는 수단에 불과하다. 이상적인 영웅은 오직 신께 영광을 돌리기 위 해서 지상 최고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그가 정복한 정신의 왕국을 신께 바친다. 이상적인 영웅의 초상을 그리자면, 어떻게 그려질까? 신비하 게 보일 정도로 교묘한 수법을 쓰는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박한 자존 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의 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는 동시에 황당 무계한 구석이 있으며,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가 하면 지극히 현실 적이며, 어려운 것을 오직 어렵기 때문에 그만큼 더 좋아하는 열성신도이다.얼마나 모순적인가? 그러나 반면 어떻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은근하고 부드러운 회색빛 일르 드 프랑스의 풍경에나 어울리는 프랑스의 신사는 스페인의 영웅 앞에서 초라하게 보인다. 정의와 자비와 사랑의 열정 으로 동키호테를 뜨겁게 불태운 카스틸랴 거리의 태양이 스페인의 영웅을 불태우는 듯하다.
그라씨안은 유럽에 단비를 내린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지속적인 것일 수는 없었다. 유럽인들은 그라씨안의 책을 읽고 거기에서 교훈과 흥미를 느 꼈고, 그리고 거기에서 재미와 공감을 얻기는 했지만 스페인식 영웅이 유럽 의 결정적인 안내자 노릇을 할 수는 없었다. 이미 굳어진 유럽인들의 결심 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라씨안은 너무 늦게 나타났던 것이다. 신사에게 벌써부터 불만을 느끼고 있던 차에,신사보다도 덜 세속화된스페인식 영웅b) 을 따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b) 스페인식 영웅은 스페인의 피카레스크 소설Roman picaresque 통해 구체화된 인물이다. 우리는 피카로Picaro라는 이름으로 그를 알고 있으며, 그의 미덕 중의 미덕은 꽁포르미다드Conformidad, 즉 잘 참고 인내하면서 세상을 관조하는 정신에 있었다.
당시에는 상이한 영상들이 겹쳐진 불투명한 시기였다. 하나는 주춤거리면 서 사라지는 데 시간을 끌었고, 다른 하나는 아직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은 채 시야를 어지럽게 했다. 그러다가 신사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부르 즈와의 형체와 색채가 차츰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때까지 세상을 지배하던 귀족주의를 배척하기에 이른 것이다. 군인들의 무훈, 도시의 점령, 당당한 승리,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패주하는 적들, 그리고 승리의 월계관 울 쓴 승자에게 찬사를 보내던 시대는 이제 조종을 고했던 것이다. 무사여 안녕! 쌩-페브르몽은 그 무적의 오깽꾸르 원수를 조롱한다. 펜느롱의 주인 공 뗄레마끄는 스승 이도메네로부터 호전적인 왕을 존경할 일이 아니라, 지 혜로운 왕을 사랑하라고 배운다. 또 퐁뜨넬르는 이렇게 조롱하고 있다. 〈대 부분의 무사들이 아주 대단한 용기를 그들의 직업으로 삼지만, 거기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무사는 드물다. 그들의 머리는 때없이 쉬다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싸움을 걸고, 그러면 그들의 팔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힘차게 움직인 다.〉 또한 벨르는 명예만을 생각하는 〈야망에 찬 무사들의 허영 〉은 광란이 아니면 허약함에 기인하는 행동이라고 비난한다. 쟝 바티스트 루소도 비슷
한 말을 한다. 정복자란 극악무도한 대죄인에게 상급을 내리는 여신이 선택 한 총아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당신의 영웅들이 치렁치렁 달고 다니는 찬란한 휘장들 이성으로 하여금 판단하게 해보자 그들에게 미덕이 있는가? 내가 그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엉뚱한 허약함, 부당함, 오만함, 배반, 광분, 무자비뿐이니 가장 혐오스런 죄악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기이한 덕이라…… 이제 그렇게도 오랫동안 칭송을 받아오던 영웅들에게서 그 칭송을 거둬 들일 때가온것이다. 오호라! 잿더미 된 로마, 이태리가 나로 하여 실라를 경배하게 할 것인가! 아띨라를 혐오하는 내가 알렉산더를 찬양할 것인가! 내 피로손을물들인 살인마의 용기를 미덕이라 부를까! 인류를 불행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철면피 영웅을 찬송하여 내 입을 더럽힐까! 정복자란 무엇인가? 정복자란 인류가 세운 왕국을 파멸시키기 위해, 인간 의 세상에 공포와 재난과 절망을 만연시키기 위해, 인류를 자유인과 노예로 분열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파견된 분노한 신의 사자에 다름 아니다. 그토록 칭송을 받아 오던 정복자는 이제 한낱 범람하는 하천과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범람하는 하천은 도도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단지농업 용수를 공급하는데 그쳐야 할 강이 범람하여 옥토를 초토로 만든다. 이 비교는 펜느롱의 『뗄레마끄』 제8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명예? 사람들은 거기에 지나치게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것은 되돌 아가기에는 너무나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결두, 그것은 미친 짓 중에도 미친 짓이며, 그것은 명예의 미신에서 비롯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귀족들이 습관적으로 고상하다고 떠벌리던 퇴폐풍조, 악습, 열광적인 놀음, 결두 전의 모욕 등은 영국의 청교도와 프랑스의 합리주의에 의해 철저히 배 척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맹렬한 공격을 견딜 수 없던 신사도는 마침내 자취를 감추기에 이르렀다. 이어 부르즈와가 미소를 머금은 채 으스대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재치롭 고 예지로운 스틸과 에디슨이 부르즈와의 대부였다. 그들에게는 혁혁한 용 기 같은 어떤 응집력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형태의 인간을 썩 잘 묘사해서 많은 독자들에게서 호응을 얻었으며, 영국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 독자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어떤 문학적 성공도 사회적 동기를 그 뒤에 숨기고 있다〉라는 말을 인정한다면, 여기에서는 그러한 동기를 〈수다쟁이》 와 《구경꾼》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수다쟁이》와 《구경꾼》은 시대적인 도덕률을 찾던 당대에 하나의 인간전형울 마련해 줬기 때문이다. 스틸과 에 디슨은 인간을 묘사하는 자체에서 기쁨을 찾았으며, 그들은 세상의 관찰을 넘어서 개조까지를 시도했다. 인쇄물이 런던의 까페에 유포될 때마다, 그리 고 좀더 후에는, 인쇄물이 전 유럽에 소개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은 예 의, 예절, 그리고 의무에 대한 원칙을 사회에 제시했으며, 〈수다쟁이〉의 말 처럼 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인간성의 회복을 꾀했다. 풍자문, 공박문 할 것 없이, 그들은 글에서 거짓과 오류를 꼬집었으며, 그들은 무엇을 피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고대에 정통한 그들은 고대인에게 경의를 보내 마지않았으며, 그들은 몽테뉴, 쌩-떼브르몽, 라 브뤼이예르 갈은 모랄 리스트들의 글을 섭렵했으며,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사, 군자, 멋쟁이, 선생, 재사 등 근래의 여러가지 인간 유형에도 통달해 있었다. 그들은 변화무쌍한 인간의 십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정성껏 마음을 다스리 는 일이라고 설파하고 다녔다. 바야흐로, 카스틸리아니, 베닌카사, 니콜라스 파레, 그리고 슈발리에 드 메레 등의 시대는 가고, 이제 스틸과 에디슨이라는 두 영국인의 차례가 왔던 것이다.
《구경꾼》의 주변사회는 법률가, 성직자, 상인 프리포트, 군인 센츄리, 속 물인간 호니코움 등등의 인물로 이루어진다. 백작 코벌리 로저 경을 제의하 면 《구경꾼》의 사회는 온통 부르즈와들뿐이다. 그러나 극히 솔직담백하고 합리적인 로저 경은 다른 귀족(그의 형제)들과는 아주 대조적인 생활태도를 보여준다. 게다가 그는 아주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데다가 섬세하고 호의적 이기까지 해서, 그는 과거에 활개를 치던 신사신봉자들과는· 어느 모로 보나 같은 구석을 찾아볼 수 없다. 《구경꾼》이야말로 순박한 사람 중에도 순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재산이라고는 600여 년 동안 대대로 이어받은 땅이 전부 다. 그는 아는 것이 많지만, 결코 지식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을 두 루 여행했지만, 결코 거기에 자만하지 않는다. 진지하고 과묵해서 고독을 즐 기며, 친구 또는 친척과의 교제도 별로 없는 그는 아무도, 심지어 여관 여 주인조차도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극장, 카페 등 런던의 공공장소를 배 회하는 그의 모습이 보일 때면, 어떤 사람은 그를 예수파 수도사라고 하는 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를 스파이라 추측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 를 모사가라고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를 그저 괴짜라고 부르기도 한 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억측에도 불구하고 나는 슬프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런 편견 없이 맑고 고요한 눈으로 인간의 천성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지배하는 사리사욕과 열정에서 벗어나자 인간의 재능과 결함을 들여다볼 수 있는 예리한 눈이 내게 주어졌다.〉 《구경꾼X븐 그의 순진성과 유유한 예지로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말보다는 행동으로 사는 사 람이었다. 결두만을 강조하다가 명예는 정도를 벗어났고, 고리에 재미붙인 상습적인 놀음꾼들에 의해 정의는 탈선할 대로 탈선했으며, 그래서 이제는 고귀성이 러는 단어도 그 현주소를 잃어가고 있었다. 운좋게 귀족 가문에 태어나 명 예 운운하는 사람들은 《구경꾼》에 의해 조롱당한다. 예의와 세련된 품행을 존중하는 《구경꾼》은, 극장 안에서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 술 담배를 즐기 면서 천박하게 수다를 떠는 여자들에게 경멸을 보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 서 겉만 번지르르하게 예절을 앞세우는 삶이 인생의 전부일 수는 없다. 그 는 무개성보다는 확실한 개성을 선호한다. 그래서 그는 허례허식을 혐오한다. 인위적인 모습보다는 본래의 자기 모습이 아름다운 것이다. 지금까지 사 람들은 남자의 유일한 미덕은 용기이고, 여자의 유일한 미덕은 순결이라고 잘못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편견이 빚은 오류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 다. 그것들은 여자가 남자의 용기를 가장 높이 사고, 남자가 부정한 여자를 가장 혐오하는 데에서 비롯된 가치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지금까지 비교적 사회적 성품은 대우를 받았지만 도덕성과 천성은 얼마나 무시당해 왔던가! 그러나 이제는 쾌락보다는 유용성을 우위에 둬야 한다. 선악을 무시한 채, 화려하게 차려입기 좋아하는 여자들, 여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남자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멋만 부리는 재사들은 말하자면 안류를 불행하게 만드는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사교계인들이 그토록 애호 하는 농담, 익살, 풍자 등은 순전히 사악한 소치이다. 아니 도대체 사교계란 것은 뭐하는 집단인가? 남자들 하는 짓이 겨우 사람들 모아 놓고 젊잔 빼 는 일이란 말인가? 전정한 행복은 사교계의 사치나 소란에 있지 않다. 진정 한 행복은 은둔에서 얻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진정한 행복은 자족에 있으며, 또는 몇몇 가까운 천구들과의 우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전정한 행복을 아 는 사람은 그늘과 고독을 줄기며, 숲과 샘, 산과 들을 찾는다. 전정한 행복 을 아는 사람은 자립정신이 강하며, 증인이나 구경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망상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시선을 의식하며, 찬사만을 기 대한다. 그런 사람은 궁전, 국장, 야회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전전하 다가, 더이상 쳐다보는 사람이 없으면 행복도 찾지 못한다. 행복? 너무 거. 기에 연연하지 말자! 인류에게 있어서 더욱 절실한 것은 행복의 추구보다 는 불행과 시련 속에서도 뭇끗하게 자기의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힘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혼의 위로이다. 우리의 야망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시련과 고통을 벗어날 수 없다. 지상에 서의 조용한 삶과 내세에서의 행복한 삶을 위해 우리의 학문적 노력을 바 치자 ….. 등등 《구경꾼》은는 결코 새로운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데마들을 약간 변경시켜 다시 다루고 있다. 그러나 비록 그가 고전적인 것처럼 보인 다고 할지라도 그는 신사의 전형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귀족주의에서 부르 즈와지로, 의부에서 내부로, 사회적 쾌락에서 사회적 유용성으로, 그리고 예 술에서 도덕성으로의 이행을 위한 개화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수다쟁이》는 말만 앞세우는 귀족이나, 무식한 사람을 무시하는 학자보다 는 오히려 상인이 신사의 칭호를 받아 마땅하다고 한다. 《구경꾼》도 같은 주장을 했다. 우리는 상인을 전적으로 공경해야 한다. 왜냐하면, 새 시대의 사원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은행을 그렇게 명예로운 자리에 울려 놓은 장 본인은 다름 아닌 상인들이며, 세계 각국 사람들로 하여금 협력하게 하고, 세계의 복지에 눈부신 기여를 한 사람들도 상인들이기 때문이다. 상인은 모 든 인류의 친구이다. 영웅이 막연한 명성에 만족할 뿐이라면, 상인은 신용 이리는 훨씬 섬세하고도 정교한 평판을 요구한다. 만약 한마디만 잘못 돌아 다니거나, 헛된 소문 또는 험담이 홀러다니는 날이면, 상인의 신용은 손상 울 입게 되며, 그러한 상인은 결국 망하고 말 것이다. 어떤 신사의 말을 빌 리면, 신사에 대해서는 험담을 함부로 할 수 있지만, 상인에 대해서는 함부 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험담이란 본인의 뜻을 묻지 않은 채 단죄하며, 그것처럼 상인에게 치명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상인의 명예는 새로운 형태의 명예로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인물의 성격을 두드러지게 하는 예술 양식은 연극이다. 신사와 상인이 얼 마나 대립적인가에 대해서는 스틸이 잘 묘사하고 있지만, 묘사에 만족할 수 없던 그는 마침내 그것을 무대에 울린다. 『양심적인 연인들』은 상인을 주제 로 한 그의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은 죤 벨빌 경의 딸과 서인도 교 역에서 치부를 한 상인 씨랜드 씨의 아들과의 혼담을 주제로 하고 있다. 죤 벨빌 경과 씨랜드 씨가 서로 다툰다. 상인 씨랜드 씨는 신사를 우습께 여긴 다. 비록 하나의 상인에 지나지 않지만 씨랜드 씨도 쟁쟁한 가문의 출신이 다. 고드 후과, 에두아르, 프톨레메우스, 크리수스, 리챠드 백작, 헨리 후작, 죤 공작… … 등등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씨랜드 씨의 조상들이다. 씨랜드 씨는 죤 벨빌 경에게 영국에서의 경제적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졌 는가를 상세하게 설명해 준다.우리 상인둘도 이미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 새로운 형태의 귀 족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신네들은 지주들만을 귀히 여기지만, 우리네 상 인들은 그들과는 다른 명예를 지킵니다. 사실 되비나 쌓고 잔치나 벌이는 일 의 에 당신네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당신네들은 한심한 게으름뱅이 의에 별 게아닙니다.
이보다 오만한 태도가 어디 있겠는가! 완벽한 상인은 나라 안의 가장 훌륭한 신사보다 낫습니다. 지식에 있어서나, 예 의범절에 있어서나, 판단에 있어서나 상인은 귀족을 능가합니다. 한마디로 혁명은 완수된 셈이었으며, 그것의 원인과 결과를 문학이 확인 하고 보급시킬 뿐이었다. 이해에 밝고 장부 정리를 잘하는 상인들에게 유산을 양도해야 할 신사들이 하 나 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땅의 소유권은 게으름을 피우다가 그 땅을 잃은 사 람보다는 근면하게 일한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 니까?2)2) 《구경꾼》, No. 174.
그렇게 부상되기 시작한 영국의 새로운 인간 형태는 유럽 전체에 아주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일기, 기행문, 연극, 소설 등이 영국의 상인을 소개한다.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은 벌써 영국 상인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수수한 의관, 소박한 옷차림, 비단이 아닌 거친 천으로 만든 옷, 칼 대신 지팡이 등이 유 행한다. 순진한 마음, 가혹할 정도로 거짓말을 혐오하는 솔직한 성격, 양식, 현실적인 문제를 소중히 아는 정신 등이 유행하게 된다. 《구경꾼》이 물었듯 이, 언제까지 문예나 예술에만 매달릴 것인가?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그 어 느 때보다도 노동, 거래, 교역, 절약, 그리고 일상생활에 유익한 기술 등에 쏠리게 된다. 삐에르 꼬스트는 1695년 죤 록크의 『자녀 교육에 관하여』라는 책을 번역하면서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실, 이 책의 저자 죤 록크는 이 책을 젊은 신사들에게 바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 사람들은 여 기에서 사용하는 신사라는 단어를 오해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신 사라는 단어는 귀족을 지칭한다라기보다는 남작보다 하위계급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어휘이며, 소위 프랑스에서 말하는 부르즈와를 지칭하는 어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사들을 겨냥해서 쓰여진 이 교육론은 그 단어를 영 국적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아주 보편적인 대중을 위하여 쓰여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삐에르 꼬스트의 말을 들으면, 영국의 부르즈와는 유럽 전체 부르즈와의 온상인 듯하다.
그러나 이 보편적 유형의 새로운 인간 형태는 어떤 한 나라가 패권을 쥐 고 탄생시킨 것이 아니었다. 물론 새로운 인간 형태는 너무 복잡해서 쉽게 윤곽이 드러나지 않았었다. 그 새로운 인간 형태는 결코 고전주의의 단순한 형태로 제시되지 않았던 것이다. 프랑스도 나름대로 새로운 인간 형태의 모 색을 지속해 왔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는 프랑스인들을 합리성과 정신적 자유로 인도해 줄 안내자를 필요로 했는데, 그것은 프랑스인의 기질인 동시 에 의지였다. 프랑스는 마침내 이상적인 인간 형태를 제시하기에 이르렀으 니, 다름 아닌 철학자였다. 그것은 영국의 달인과 프랑의 사상가가 결합하 여 만들어낸 새로운 인간 형태였다.초기의 철학가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을까? 1694년의 아카데미 사전을 참조해 보면, 철학가란, 〈과학을 연구하고, 원인과 원칙을 토대로 과 학적 결과를 규명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철학가란 복잡한 세상사를 떠 나 조용한 삶을 영위하는 지혜로운 사람을 일컫는다……때때로 철학가라 는 이름은 일상적 삶의 책임과 의무를 무시하는 자유사상가에게 붙여지기 도 한다…….〉철학가는 이제 잡다한 특성을 부여받기에 이르렀다. 우선 철학가는 더이 상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만을 늘어놓는 현학자가 아니라, 직업인, 전문 가, 달인 등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요컨대 형이상학을 하지 않고도 철 학가가 될 수 있었다. 또한 철학가는 기억이 아닌 이성에 의지하는 학자를 지칭하는 어휘였다. 그래서 천문학을 연구하며, 다양한 세계에 대해 논하며, 지구가 왜 태양의 주위를 회전하는가? 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지 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어떻게 도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면 합 리적인 철학가였다. 또한 철학가란 어휘는 현자를 지칭하는 어휘이기도 했 다. 예를 들어 세인트 제임스의 오리들을 관리하는 집사의 자리 이상을 바 라지 않는 사람, 오칙 남자 친구들, 또는 여자 친구들과 어울려 편안한 삶 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철학가였다. 또한 철학가는 본질적으로 자유사상가였다. 그는 모든 것을 완전히 자유롭게 판단하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랑베르 부인도 말했듯이 철학가는 이성에 이성의 권위를 회복시켜 준 사람 을 지칭하는 어휘였다. 아카데미 회원들은 철학가를 일컬어 일상적 삶의 책 임과 의무를 무시하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그들이 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했거나 또는 적어도 앞을 내다 보지 못한 소치였다. 사실은 그것이 아 니라 철학가는 일상적 삶의 책임과 의무를 개혁하려고 한 사람이었기 때문 이다. 개혁의지가 없는 철학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철학가 는 열정의 소유자를 지칭했다. 물론 그것은 훨씬 뒤에 부여된 의미여서 철 학가에게 불이 붙기까지는 반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철학가와 천계종교는 처음부터 적대관계에 있었다. 중국의 철학가를 비교 해 보자. 중국의 철학가들은 황제의 총애를 받곤 했지만, 대철학가 공자를 위시해서 그들은 대개 속세의 현자들이었다. 그들의 도덕과 박학한 지식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면 알테지만, 그들의 도덕은 종교와는 무관하다. 그들의 지식은 신성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의 것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철학가로 살다가 철학가로 죽었다면, 여러분은 그 가 무신론자로 죽었다고 믿어도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은 쉽게 무너 지지 않는 법이다. 1696년, 르재 신부는 〈만약 철학가가 지배한다면〉이라는 제목의 연극을 학교 무대에 울렸는데, 그 연국의 주제는 만약 무모한 철학 가에게 패권을 빼앗긴다면, 철학가는 금방 세상을 뒤집어엎을 것이라는 것 이었다.그들의 철학은 형이상학을 거부했으며, 인간의 정신 중에서도 즉각적인 것만을 다루는 데에 그쳤다. 아직 반론의 여지를 남기고 있지만, 그들의 철 학은 자연을 절대 선으로 생각했고, 전능하고 질서정연하면서도 이성과 일 치하는 것이 바로 자연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종교, 천부의 권리, 천부적 자 유 등의 개념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나의 도덕이 여러가지 도덕으 로 분할되다가 사회적 유용성에 호소하는 하나의 도덕을 선호하기에 이르 렀다. 행복에 대한 권리, 지상의 행복에 대한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그것을 가로막는 절대주의, 미신, 전쟁 등등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 개시되었다. 인간에게 무한한 발전과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과학뿐이라 고 믿었다. 철학은 인생의 안내자 구실을 했다. 대체적으로 변화의 큰 줄기는 위와 같았다. 17세기말부터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위와 같은 사상과 의 지가 발전하여 상대주의와 인문주의를 구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거기에 이 어 볼테르가나타났다.
제2부 상상력과 감성
제1장 시 부재의 시대
합리주의 운동은 『백과전서』, 『풍속연구』, 인권선언, 그리고 오늘날의 우 리에게까지 미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렇다면, 리차드슨, 쟝 작끄, 그리고 『폭풍과 노도』는a)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열정의 강을 흘러 넘치게 한 어떤 숨은 근원을 우리는 찾아야 한다. 우리는 사실 오늘날까지 인생의 무대에 오직 합리주의자들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18세기는 물론 합리주의자들이 무대의 전면을 차지했 고, 그들이 주역을 맡아 판을 친 시대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 다고 치더라도 그들 의에 아무도 없었다고 판단하면 그것은 오류이다. 이제 다른 류의 사람들을 들여다볼 시간이다. 그러나 그쪽 방면의 조사는 쉽지가 않았으며, 드러난 모습은 실망을 안겨 줄 뿐이었으며, 차라리 부정적이었음 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a) Sturm und Drang.
사실 우리는 시의 연구에 역점을 두었었다. 왜냐하면 시는 우리가 기대하 는 상상력과 감성을 숨기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18세기는 산문의 시대였다. 스위프트의 산문보다 더 풍요롭 고, 확고하고, 훌륭한 산문이 있는가? 쌩-데브르몽의 산문보다 더 부드러운 산문이 있는가? 퐁뜨넬르의 산문보다 더 섬세한 산문이 있는가? 벨르의 산 문보다 더 열정적인 산문이 있는가? 벨르는 비교와 판별에 능한 변중론자 였지만, 그의 문체만큼 생기넘친 문체의 산문을 다시 보기 어렵다. 그는 화를 내기도 하며, 분개하기도 했다. 그의 글은 그래서 불길 같았다. 일상언어 에 만족할 수 없을 때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해서 개 념을 알맹이까지 정확히 표현해낼 수 있었다.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우리는 비록 서명이 없는 글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글을 보면 단번에 그의 글임을 알 수 있다.
프랑스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인들도 전두적이고 공격적인 산문에 사상 을 담아서 새로운 효과를 얻어냈다. 그들은 도덕과, 종교와, 철학을 에세이 에 실었고, 서간문에 실었고, 대화체 작품에 실었다.그들은 시인이 아니었다. 그둘의 귀는 섬광처럼 빛을 발하는 어휘나 달콤 한 말을 듣지 못했다. 그들은 신비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그들은 날카로운 빛으로 현실을 조명할 뿐이었다. 그들은 감정의 분출조차 질서정연하고 명 쾌한 한에서만 용인했다. 시가 기도라면, 그들은 기도를 하지 않았다. 시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이르르려는 시도라면, 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 는 것을 부정했다. 시가 음악과 감각 사이의 망설임이라면, 그들은 결코 거 기에 빠지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명증과 정리밖에 몰랐다. 그들이 시 를 쓸 때는 단지 시에 기하학적 정신을 담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1)1) 리자몽 드 쌩 디디에, 『빠르나쓰로의 여행』,1716, p 258.〈갑자기 커다란 소리가 들렸 다. 수십 명의 시인들이 목소리를 높여 한꺼번에 아폴로신에게 그들의 시를 들어 달라 고 외쳤던 것이다. 하나가 소리쳤다. ‘전능하신 신이시여 나는 지구의 자전에 대한 시 를 하나 썼습니다.’ 다른 하나가 의쳤다. ‘신이시여 나는 대수의 원리를 찾아냈습니다’ ....... >
시는 그렇게 임종을 맞았다. 아니면 시는 그렇게 죽어가는 듯했다. 건조 하고 기계적인 지성에 흠씬 젖은 시는 그래서 그것의 존재이유조차 잃어버 렸다. 물론 당시에도 시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라 뗀느의 사망 이후에 전정한 시인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고전주의가 만개한 영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시인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2)
2) 아스콜리, 『프랑스의 견해와 대영제국』, 1930, II권, p. 119 참조.
게다가 천재의 길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적이 있었으니, 말하자면, 기성 세대가 엄청나게 쏟아놓은 걸작들에 대한 찬양이 그것이었다. 꼬르네이유, 라신느, 몰리에르의 주위에는 지나치게 많은 지지자와 신봉자들이 모여들었
다. 그들은 꼬르네이유, 라신느, 그리고 몰리에르만을 유일하고 영원한 모방 의 대상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꼬르네이유, 라신느, 그리고 몰리에르만이 예 술의 비결과 기법을 터득한 유일한 대가들로 간주했으며, 따라서 불후의 걸 작은 그들의 비결과 기법을 터득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편견과 미신을 배척하고, 아무것도 믿지 않는 용감한 정신의 소유자임을 자처하던 그들은 문학에 관한 한 순한 양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우상을 경배했으며, 그들은 쟝르의 구분법이나 삼단일의 원칙에는b) 감히 손댈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그들은 천사는 믿지 않으면서도, 핀다로스, 아나크레온, 테오크리투스 같은 시인들은 신봉했다. 그들은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신봉했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자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닌 『시학』의 저자로서의 아리스 토텔레스, 그리고 거의 신에 가까운 존재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를 신봉했던 것이다.
b) 장소의 일치, 시간의 일치, 행위의 일치를 요구하는 고전 규칙은 규칙 중에도 으뜸 가 는규칙이었다.
라신느를 신봉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리스는 그 자체가 감동적인 한 편 의 시였다. 페드라가C) 신의 딸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렇게까지 고통의 화 신으로 그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c) 미노스와 파시파에 사이에 난 그리스 여신 중의 하나인 그녀는 운명의 여신 아리안느 와 자매간이었다. 태세우스왕의 왕비가 된 그녀는 의봇아들 이틀리뜨에게 연정을 느 껴 그의 사랑을 얻으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치 그가 그녀를 겁탈하려고 한 것 처럼 테세우스왕에게 고해 바친다. 화가 난 테세우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부탁 하여 아들 이뿔리뜨를 파멸케 한다. 그러나 이쁠리뜨의 죽음에 슬픔을 견디지 못한 페 드라도 결국 자살하고 만다. 이러한 신화를 작품화한 라신느의 『페드라』는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져 있다.
나의 조상은 신의 아버지시요, 신의 지배자시니
하늘과 우주가 나의 조상으로 가득하나이다 나 어디 숨을까요? 칠흑 같은 밤에 숨을까요? 나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께서 운명의 실타래를 쥐고 계신데 •••••• 잔인한 아버지의 손에 그 끈이 쥐어졌으니, 내 어찌하리요 지옥의 신 미노스는 창백한 인간들을 온통 지옥에 부르니 아! 아버지시여, 당신의 딸이 지옥에서도 들어보지 못한죄악과 숱한 범죄를 저질렀음을 아신다면
당신은 무슨 말을 하시겠습니까? 딸의 모습에 얼마나 몸서리를 치시겠습니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성공에 의해 배반당한 셈이 되고만, 그리고 잘못 이해되곤 하던 그리스는 이제 더이상 그리스가 아니었다. 그리스는 이 제 자발성과, 신선함과, 생기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리스는 이제 비석만 즐비한 공동묘지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스의 작품들은 교활한 성공을 가 능하게 하는 일람표나 법전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스를 현 재로 데려온 사람들은 율리시스와 아이야스를d)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율 리시스와 아이야스의 가발을 쓰고, 단검을 착용한 채 환상에 사로잡혔던 것 이다.d) 율리시스와 아이야스는 『일리아드』의 인물이다. 이따끄의 왕 율리시스는 그의 인간적인 면과 모험으로 우리의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인물이며, 아이야스는 아킬레스 이래로 그리스에서 가장 용맹스런 장수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1715년 무렵은호머에 대한 찬사가 무성하던 시기였으며, 신구논쟁에서 구 파가 신파에게e) 반격을 개시하던 시기였으며, 알렉산더 포프가 일리아드를 영어본으로 번역해내고, 그것의 서문이 다시 불어와 독어로 번역된 시기였 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그리스에서 추구한 것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포 프에 의하면, 호머는 창의적인 면에서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천재였다. 호 머는 자연의 신봉자인 예술을 비옥하게 하고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창의 성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창의력으로 호머는 아리스토텔레스 가 소위 서사시의 영혼이라고 극찬한 그 유명한 우화들을 창작해낸 것이다.
e) 1687년 「루이 대왕의 세기」라는 뻬로의 시가 아카데미 회원들 앞에서 낭송되면서 발 단이 된 신구논쟁 La Querelle des anciens et des modernes은 그 후 약 10여 년 이상 프랑스를 논쟁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다. 병을 않다가 회복된 왕을 축하하는 축하연에 서 낭송된 빼로의 시는근대시인이 고대의 희랍또는로마의 시인보다우월할수도 있 디는 선언적인 성격을 지닌 시였다. 거기에 브왈로가 정면 도전함으로써 치열한 공방 전의 불길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호머의 우화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있음직한 이야기들이고, 또 하나는 시인으로 하여금 삶의 지혜와 비결을 은밀히 드러내게 해주는 알레
고리이고, 마지막 하나는 초현실, 즉 신들의 세계를 다루는 신비이야기들이 다. 〈호머는 시를 통해 신들의 세계를 하나의 기계적인 체계로 환원시킨 유 일한 시인일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를 위대하게 하고 품위 있게 하는 것은 세번째 부류의 우화들일 것이다…….〉 그러나 포프는 비판을 덧붙인다. 호 머의 담론, 묘사, 이마지, 비유, 문체, 시구 둥은 창의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신비이야기는 창의성은 있지만 지나친 메타포와 지겨운 반복에 의해 사실 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읽은 마담 다시에가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호머를 제 대로 읽지도 못하고 호머를 번역한 포프는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 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포프에 의하면 『일리아드』는 질서도 체계도 없이 막연한 것들을 모은 것에 지나지 않으며, 완벽한 아무것도, 그 리고 형체를 갖춘 아무것도 없는 하나의 초안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여겨 진다. 뿐만 아니라 불후의 가치 있는 작품들을 질식 또는 왜곡시키는 작품 이 『일리아드』인 듯하다. 따라서 『일리아드』는 이제 이 땅에서 추방해야 할 작품처럼 보인다. 호머의 어떤 적도 이보다 더 모욕적이고 부당한 비난을 하지는 않았다. 호머가 그런 작가인가? 『일리아드』는 손질되지 않은 거친 정원이기는커녕, 질서와 균형에 있어서 일찍이 그 짝을 찾을 수 없는 정원 이다. 사계의 권위자였던 르 노트르 씨조차도 그의 정원을 호머의 시에서처 럼 완벽한, 그리고 홈없는 정원으로 가꾸지는 못했다 …… .>그 무렵에 사태는 전정되어 가고 있었다. 이따끄 섬 대신 베르사이유 궁 이 들어선 것이다.사람들은 시를 얼마나 잘못 다뤘던가? 사람들은 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차 몰랐으며, 아예 시를 이해할 줄도 몰랐다. 사람들은 시를 그것과 가장 거리가 먼 하나의 웅변술 정도의 예술 양식으로 환원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제 시는 인간의 영혼 깊숙한 곳을 파고들어가는 것이기보다는 그와는 정 반대의 의향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논쟁과 증명과 해결을 일삼았 다. 이제 상상력은 하나의 저급한 재능에 불과했다. 조심스럽게 이름붙인 상 칭들조차도 허식에 지나지 않았다. 시구들은 난관을 극복한 후에 얻어지는 단조로운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시는 오직 거기에 만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플뢰리의 아카데미 입회연설에 대한 답변에서 (1717년)발랭꾸르가 말했 듯이, 뮤즈는 더이상 빠르나스에f) 거주하는 여신이 아니었다. 그에 의하면 뮤즈는 인간의 이성을 돕는 여러가지 수단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f) 그리스의 신으로서, 고대인들은 빠르나쓰에 디오니소스와 아폴로 신을 모셨다가, 나중에는 예술의 신 뮤츠를 봉헌했다.
당대의 탈선이 어디까지 갔는지를 알려면, 퐁뜨넬르가 목가에 대해 쓴 글 과 우다르 드 라 모뜨가 오드에 대해 쓴 글을 한번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 하다. 우다르 드 라 모뜨는 어느 정도 논리적인 데가 있다. 그는 아무런 두 려움 없이 논리를 추구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시처럼 불편한 것도 없 다. 산문을 쓸 일이다. 시가 표현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산문도 표현해낼 수 있다. 게다가 시는 명료하고, 간편하고, 간명하다. 산문은 시와 달리 운 율이나 리듬으로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다. 이제 선택의 시간은 왔다. 이제 시가 아닌 산문체 오드를 쓸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우다르 드 라 모뜨가 자유시를 생각하거나, 시적 영감에 걸맞는 시적 형태를 생각하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직 오만하기 그지없는 시적 리듬을 부정하기 위 해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사실 우다르 드 라 모뜨에게서는 웅변이 시를 압도하는데, 우다르 드 라 모뜨가 「자유로운 웅변」이라는 제목의 오드를 썼을 때만큼 웅변이 승리를 거둔 적도 없었다. 운율, 리듬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전 셈이었다.괴팍스럽고 오만한 운율이여, 폭군적인 각운이여! 언제까지 나의 사고를 그대의 노예로 묶어 두려 하는가? 언제까지 이성의 왕국을 짓밟으려 하는가? 정확성, 두 명성은 음절과 박자의 밀에서 희생양처럼 신음만 해오지 않았던가? 내가 너희의 뜻을 거역하고 명료성, 정확성, 두명성을 지키려고 하면, 너희는 온갖 고문으로 나 의 저항에 보복을 가하지 않았던가? …… 그래서 나는 이성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다루던 그 멍에를 벗어던지고, 이제 나를 거기에서 해방시켜 줄 자유와 독립의 웅 변에게 말기려고 한다.『일리아드』를 12장의 노래로 재구성한 우다르 드 라 모뜨는 라신느의 비 극울 산문체로 고쳐 쓴다.우다르 드 라 모뜨와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친구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사실과 진실임을 강조한다. 사람들이 진실만을 말하는 날이 오게 되면, 듣기는 달콤하지만 불편하기 짝 이 없는 언어를 버리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던 것이다. 시인들도 이제 철학가가 될 것이다. 시인이 철학가가 될 때, 시안도 유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3) 〈이성이 가다듬어지면 가다듬어질수록. 사람들은 상상력보다는 판단력을 선호하게 되고, 거기에 따르는 당연한 결과이지만 시인은 점차 의 면당하게 될 것이다. 초기의 작가는 시인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나도 거 기에는 동감한다. 그러나 그들은 시를 쓰는 일 의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었 기 때문에 시인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작가는· 철학가가 될 것이다.〉4)
3) 퐁뜨넬르, 『시에 대하여, 총론』, Ⅷ권, 1751.
4) 아베 트위불레, 『문학과 도덕에 관한 소론』, l735·미구의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무익하고, 고집스럽고, 기만적인 한 집단 을 경계해야 한다. 쟝 르 끌레르크의 정의에 따르면, 시인이란 부분적으로 든 전체적으로든 주제를 꾸며대는 사람이며, 독자를 사로잡기 위해서 자기 의 사상을 교묘히 은폐하는 사람에 다름 아니다. 또한 시인이란 운율과 문 체를 위해서 일반적인 표현을 버리는 사람이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는 그 것이 거짓말장이의 작품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거짓말장이는 우리를 망 상에 젖게 하며, 또는 적어도 우리로 하여금 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 게 한다. 시인이 사용하는 화려한 표현들은 대부분 우리의 이성을 당혹스럽 게 하는 것임을 기여해야 하며, 시인이 사용하는 운율은 우리의 귀몰 간지 럽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를 찬미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몰 높이 평 가하게 하는 술수에 지나지 않음을 주목해야 한다. 나의 이러한 생각은 올 바른 판단력을 지니고,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에게는 유익할 것이며 시에 빠져 혼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해독제 역할을 할 것이다.〉5)
5) 쟝 프 끌레리크, 1699.
가장 주목받던 합리주의자 중의 하나였던 쟝 르 끌레르크의 시에 대한 이 러한 혐오감은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시는 거짓이라는 확 신에서 오는 것일 것이다.
어쨌든 알게 모르게 당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를 그렇게 취급했다. 당 대인들에게 있어서 절실한 문제는 『나무르 점령에 붙이는 오드』와 핀다로스를 개작하는 일이었다. 당대의 가장 위대한 서정시인이었던 쟝 바티스트 루소는 이렇게 말했다. 〈발군의 시인이 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우리를 앞서 간 훌륭한 작가들을 모방하는 데 ’있다고 나는 믿는다.〉 위대한 시인은 위선 적인 의문과 감탄과 열광이면 족했다. 무엇이 들리는가? 무엇이 보이는가? 태초에 하늘은 어떻게 열렸는가? 이러저러한 공주의 결혼, 이러저러한 왕자 의 탄생, 이러저러한 왕의 서거 등등의 신화로 시가 이어졌다. 그런데 그렇 게 시작된 오드는 비유로 끝나기도 하고, 묘사로 끝나기도 하고, 또는 기발 한 필치로 끝나기도 한다. 따라서 오드는 논리적, 구조적 메카니즘을 결여 한 채, 어떤 현학적 무질서가 시의 완성인 양 호도했다. 〈이 무질서는 나름 대로 규칙과, 기법과, 방법을 지니는데, 매듭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잘 감추는 수법이 그것이다. 마치 한시도 쉴톰 없이 지껄여대는 사람의 수다와도 다르 지 않은 그 무질서는 말하자면 무기력하고 무거운 기하학적 사슬에서 벗어 나기 위해 광기라는 교묘한 옷을 입은 하나의 기법이라 할 수 있다…….〉6)
6) 『브르따뉴 공의 탄생 에 붙인 찬가』, 1707.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여기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한 시의 입장을 변 호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엄청난 폐허 속에서도 살아 남은 몇몇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그것의 가치를 논해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순수시에 대한 꿈만큼 아름다운 꿈도 없을 것이다. 순수시만을 시라고 할 수는 없다. 합리적 사고의 유령에 홀려서 시를 거짓 기만술이라고 매도하긴 했지만 사람들이 거기에 전혀 매력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시를 완 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시는 여전히 살아 있는 셈이었다. 음악과 리듬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면 시는, 그리고 시적 조화에 대한 환상은, 미 미할지언정 완전히 사라전 것은 아니었다. 순수시는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 른다.그러나시에 대한요구가전적으로사라진것은아니었다.알렉산더 포 프는 천재 시인으로 보였다. 천재 시인으로 비친 포프는, 바로 그렇기 때문 에 천재 시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시대적 요구 이상으로 시대를 만족 시킨 사람 중의 하나였다.물론 메마른 시대였음에는 부정의 여지가 없었지만, 시가 부재한 것은 아니었다는 주장이 전혀 억설일 수만은 없었다. 독일인에게는 카니츠라는 시 인이 있었다. 카니츠는 프랑스인에게도 시인이었다. 왜냐하면, 나중 일이지 만, 독일적인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을 그는 그들에게 맛보게 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태리의 시인들은 유럽 전체의 찬사를 받았다. 가히 기적에 가까운 일은, 그들의 시대는 보잘것없는 것들을 써낼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남긴 시는 하루를 풍미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일년, 일세기를 넘어 오늘날의 우리들에게까지도 매력적인 시로 보인다는 점이다. 사실 이태리의 시인들은 차가운 불길, 불 같은 냉기, 가혹한 친절, 유쾌한 냉대 등만을 노래하는 마리니즘의g)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한 것은 그들은 고대인들에 대한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인 데, 아나크레온을 모방하지 않을 때는 핀다로스를 모방해야 한다는 강박관 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또한 그들은 그들의 시에 과학을 모셔다가 그것 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겉만 번지르르한 어 휘의 나열과, 아름다움을 가장한 무질서에 치중한 그들의 오드는 어설프고 어색한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란체스코 레디가 나타 났던 것이다. 물론 그의 시도 핀다로스 체를 흉내지만, 그는 적어도 주신 바 커스를 토스카의 동산에 끌어내려, 잔뜩 술을 마시게 했다. 비틀걸음을 걸 으면서 횡설수설하는 바커스를 보자.
g) 스페인의 공고리즘Gongorisme, 이태리의 마리니즘Marinisme과 프랑스의 프레씨오시 떼 Preciosite는 문체와 수사학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17세기적 취향을 지칭하는 동일한 뜻의 다른용어들이다
창백하고도. 슬픈 빛의 술을
입술에 대는 사람은 요절을 하든지 아니면 드물게는 노망에 이를 것이니 지하가 그리운 이는 죽음이 그리운 이는 영국산 ;금주를 마시고 북유럽 술을 마시자불결한 술이름만을 나열하는 주신 바커스는 불경죄를 저지르고 있음에 틀 림없다.
그토록 찬란하게 빛나는, 산소비노의 부드러운 포도주가 넘치는, 잔 속에 잠겼다가 떠오르면, 세상은 온통 순결하게 ……7)7) 「토스카나 동산의 바커스」, 1685.
비록 주신을 예찬하는 시 같지만, 투박한 듯하면서도 꽉차고, 독창적이면 서도 풍치 있는 시들이 이 시 이후에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프란체스코 레 디 의에 감동적인 비탄의 시를 남긴 다른 시인이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조국의 굴욕을 상기시킨 빈젠쪼 다 필리카자라는 시인이었다.
오! 프랑스여 무기를 들어라 칼을들어 술잔밖에 들고 있지 않은 나를, 유물이 되어 버린, 과거의 명예에 매달려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내리쳐다오!8)8) 「이태리여 프랑스로.」, 1700.
게다가 이태리인들은 겉치레, 부풀릴 대로 부풀린 메타포, 뒤틀릴 대로 뒤틀린 수식 등을 그들의 시에서 추방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반란을 일으 켰던 것이다. 시에 과장은 더이상 필요없었다. 단순성과 자연스러움이 필요 했다. 시는 마치 대청소를 필요로 하는 어지러운 집을 연상케 했다. 어디 그 뿐인가? 집은 무슨 필요가 있는가? 벽, 지붕은 무슨 필요가 있는가? 진정한 시는 이제 맑은 공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1690년, 시인과 현자들이 로마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푸른 하늘 밀, 숲속에서 회합을 가지기로 결정했다. 그 들은 바람결에 시를 느끼던 시절, 목동들아 풀피리로 천상의 멜로디를 불어 대던 시절, 고대의 무릉도원을 재연하려고 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 계획 은 우스꽝스러운 짓으로 끝나고 말았다. 거기에 모인 무릉도객들은 그들이 가장 염려한 것 중의 하나였던 규칙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인들을 모방하여 그들이 사용하던 목동들의 이름을 사용했다. 그들은 이태리 전역에 고대 로마의 무릉도원보다도 현학적인 무릉도원을 건설해 나 갔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처음에 추방한 시보다도 더 조잡한 시를 낭송 하는 데 정력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들은 고대의 무릉도원 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들의 시는 고대의 시를 답습하는 데 그치고 말았 다. 그들의 시도는 한마디로 실패였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파산이었다. 그 러나 원한다면 적어도 그들의 시도만큼은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었다고 말 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영국의 들판에서도 시의 이삭을 주워모아 볼 수는 있다. 프라이어의 시를 생생한 색채의 거대한 벽화로 볼 수는 없을 데지만, 그러나 적어도 그의 소 품은 매력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의 시를 힘찬 오케스트라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의 멜로디는 부드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리스 라틴 시인 들에게서 배운 세련된 기법은 그에게 제2의 천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원래의 천성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호라스와 아나크레온을 가 장 존경했고, 그의 재능도 그들에게 빚전 바가 많았지만, 그러나 그들이 그 를 창조해낸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열정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늑한 휴 식과, 회한의 삶과, 살 같은 시간 그리고 지는 꽃잎에 눈물을 홀리는 클로 에를h) 노래한 시인이었다. 분노, 멸시, 폐부 깊이 파고드는 슬픔이라기보다 는 우수에 젖은 멜로디와도 같은 그의 시는 오히려 그 때문에 우리의 가슴 울 저미게 하곤 했다. 친구 쟝과 함께 여행을 하던 그는 어느 날 이미 전에 도 한번 들른 적이 있던 여인숙에 둘렀다.h) 그리스 신화에 나타나는 꽃의 여신. 로마의 신화에서는 폴로라로 불려진다.
이리 와보세요 주인 아주머니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그 깔끔하던 쎄실, 프뤼당스 그리고 수지는 어디 갔나요?
그리고, 저 밑에 살던 과부는 어디 계신가요? 팔년 전이던가? 피리를 불던 마부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 있는가요? 아참, 그리고, 나팔소리처럼 목소리 괄괄하던 당신의 그 상냥하고 마음씨 좋은 여동생은 지금 어디 있는가요?9)9) 마튜 프라이어, 「여관에서」, 1723,
영국의 정경을 이보다 잘 그릴 수 없다. 시골의 여인숙, 식탁의 손님, 그 여인숙 여주인……
그녀 대답하기를, 당신은 의려 젊어지셨군요 선생님 술은 뭘루 드시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니 늙은 내가 저주스럽습니다. 선생님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 자연스럽다. 격앙된 어조는 보이지 않는다. 옛날, 과거 언젠가 쏟아 져 내린 겨울눈을 떠올리면서 회상에 젖은 여인의 감정이 대답 속에 잘 스 며 있다. 선생님께서 떠나신 후에, 세상 많이 바뀌었습니다. 마부는 교수형을 당했고, 과부는 재가했습니다. 프뤼당스는 신부의 아이를 낳은 후 사라졌고, 쎄실은 어떤 손님의 돈지갑을 훔쳐 달아났답니다. 상냥하고 마음씨 좋은 나의 여동생은 벌써 수년 전에 딴 세상 사람이 되어 지하에 묻혀 있습니다. 시인은 프라이어 하나뿐이 아니었다. 이 시는 처음 읽는 사람에게조차도 감동적인 작품이다. 비록 세월에 찌들었을지언정, 그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옛스러운 정취를 풍겨 주고 있다. 그러나 그런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우리는 시를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18세기처 럼 비서정적이고, 척박한 시대도 없었다는 키두치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 지 않을 수 없다. 당대의 제일가는 시인들조차도 단테나 셰익스피어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문학 분야에서 같은 변화가 일고 있었다. 창조적 가치와 의미는 자취를 감추었으며, 글을 쓴다는 것은 모방과 순종에 다름 아니었다.비평가들은 작가들이 한치도 한눈을 팔지 못하게 길목을 지킨 채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또는 이따금 작가들이 샛길로 빠져나가면, 그들을 즉 시 제자리에 되돌려 놓곤 했다. 토마스 라이머는 셰익스피어를 전혀 작품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작가라고 했지만, 비평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는 작가는 그런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비평가들은 부지기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호라스, 비록 한 번도 높이 떠 받들어전 적은 없었지만 롱전 등등 이미 죽어 없어진 비평가들과 더불어 부 우르 신부, 라뺑 신부, 르 보쉬 신부 등등 눈을 시뻘겋게 뜨고 지켜보는 비 평가들이 즐비했다. 그들은 창작에 필요한 사고방법, 담론과 시구의 조절방 법, 서정시의 배열 방법 등을 가르쳤다. 영국에는 회초리를 휘둘러대는 훈 장 같은 제랄드 란베인, 에드워드 비쉬, 레너드 월스데드, 죤 데니스 등등의 비평가들이 있었으며, 이태리에는 완벽한 시, 완벽한 비극의 본질을 분석하 곤 하던 무라토리, 크레침베니, 그라비나 갇은 비평가가 있었다. 완전무결을 지향하는 독일의 비평가로는 크리스챤 베르니케가 있었다. 그는 프랑스 문 학의 우수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프랑스는 비평가의 손을 거치지 않 는 작품이 없다. 프랑스 문학이 그토록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렇게 열성일 수 없었다. 그렇게 권위적일 수 없었다. 그때 만큼 비난과 논쟁이 많은 시대도 없었다. 어떻게 작가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그들은 시종 질책과 비난을 이기면서, 시대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큰소리로 거만하게 답변하는 기쁨과, 복종의 편 안함을 동시에 누린 것이다.노후에 이른 브왈로는 1701년 그의 문학 이론들을 자신의 작품집 서문에 아주 힘찬 어조로 요약 발표한 뒤 은퇴를 선언했다. 〈이번 내 작품집은 나의 마지막 출판이 될 듯하다. 예순셋의 나이인 데다가 몸도 성치 않아서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겠다. 독자들은 내가 지금 정식으로 은퇴선언을 한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더불어 나는 그만큼 찬사받을 만한 가치가 없음에도 불 구하고 매번 내 책을 사서 읽어 주신 독자 제위께 이 지면을 빌려 감사드 리고 싶다…….〉 독자들은 아직도 브왈로를 선호하고 있었다. 그 은퇴한 후 에도 그가 쓴 『시학』은 엄청나게 읽혔다. 브왈로는 에리쎄라 백작에게 이런 감사의 편지를 쓰고 있다. 〈나의 『시학』을 당신이 포르투갈어로 번역 출판 하여 주신 데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더욱 고마운 것은 편지와 함께 동 봉해 보내 주신 당신의 시였습니다 …… .〉『시학』은 번역 출판되지 않은 나 라가 없을 정도였다. 『시학』은 만국 공통의 규범전서였다. 물론 오늘날에는 그를 비난하는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다. 따쓰를 변죽만 울리는 겉치레뿐인 브왈로라고 비웃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국수주의에 빠져 내 나라 것밖에 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만한 프랑스인, 아제는 청산해야 할 권위주의자, 빠 르나스의 법령제정가라고 브왈로를 매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대는 달랐다. 그는 단순한 하나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 의 제도였다. 그는 오뙤이유에서 I) 마치 루브르 궁의 주랑 같은 존재로 떠받 들어졌다. 당대에 이름이 높던 몬따귀리는· 여류 문인을 예로 들어보자. 그 녀는 콘스탄티노플 주재 영국대사인 그녀의 남편에게 터어키어 시를 한편 읽어 준다. 그런데 그 시를 낭송하는 그녀는 머리속에서 브왈로를 지우지 못한 채 시를 낭송하는 것이다. 〈이 시에는 참 아름다운 데가 있네요. ‘사 슴의 눈을 지닌 왕비’라는 표현에서 ‘사슴의 눈’이라는 수식어는 영어로는 대단찮지만 여기에서는 아주 아름답게 느껴지거든요. 이 수식어는 아무것에 도 관심을 가지지 못하던 왕비의 눈에 어리는 어떤 불길 같은 것을 아주 분 명하게 느끼게 해주네요. 브왈로가 잘 지적했듯이, 우리는 어떤 표현이 고 귀한 품격을 지녔는지, 또는 그렇지 않았는지를 결코 알 수 없죠 …… 고대 인들이 아주 즐겨 쓰던 언어가 이따금 우리 귀에는 천박하게 둘리거나 거i) 불로뉴 숲과 쎈느 강 사이에 있는 파리 근교의 조그만 마을. 그런데 그 조그만 마을이 17세기에는 성지처럼 떠받들어졌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브왈로가 사는 마을이었고, 몰 리에르와 퐁텐느가 자주 방문하던 마을이기 때문이었다.
슬리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봐져요…….〉11)
11) 『앙드리노플』, 1717년 4월.
물론 브왈로는 천재가 아니라도 작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한 적은 한번 도 없다. 그러나 그는 천재를 떠받들고, 천재의 유산을 이어받기를 강조했 다. 천재의 상속자들은 당연히 방법을 선호할 것이다. 그들은 아름다운 시 는 〈규칙에 대한 취향이면 족하다〉고 할 것이다. 브왈로는 누구보다도 장르 를 엄격하게 구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내세운 원칙처럼 보잘것없는 것이 어디 있는가! 고대 문학이 하나의 영혼이자 의지였다면, 17세기의 사 이비 고전주의는 하나의 형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볼품없는 상속자들이 자위의 수단으로 강구한 것이 도덕성이었다. 서사시 는 어떤 경우에도 도덕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 서사시는 풍속의 개혁을 그 목표로 삼아야 했다. 서정시도 마찬가지로 도덕적이어야 했다. 서정시는 종 교적 진리를 교시해야 했다. 서정시는 하나의 윤리학, 신학과 다른 것일 수 없었다. 그들의 주장을 둘어보자. 〈유용성과 유쾌함을 동등한 위치에 울려 놓는 시인, 가르치면서 즐겁게 하고, 즐겁게 하면서 가르치는 시인만이 훌 륭한 시인일 수 있다.〉 〈시란 유익한 미술이며, 광기가 제거된 망상이다.〉 특히 연극은 학교와 같아야 한다. 미덕을 희화화하고 악덕을 미화하는 작가 가 있다면 그는 마땅히 추방당해야 한다. 그러나 이단이 있었다. 아주 특이 한 형태의 영국 코메디가 그것이었다. 영국의 코메디는 프랑스 작가들, 특 히 몰리에르에게서 그 전형을 빌려왔지만, 거기에 적당히 양념을 섞어 특별 한 맛이 나게 했다. 영국의 코메디는 투박한 언어와 위험한 상황을 즐겨 삽 입시켰다. 그리고 영국의 코메디는 비도덕적인 데가 있었으며, 외설에서 희 극성을 추구했다. 콘그레브, 반브러그 등의 그러한 코메디둘이 런던의 무대 에서 각광을 받았다. 그러다가 제레미 콜리에라는 어떤 성직자가 거기에 반 박의 포문을 열었다. I698년 그는 『영국 연극의 비도덕성에 대한 소고』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한다. 그는 도덕성을 역설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도 덕성이다. 연극은 아무리 위대한 업적도 한낱 티끌에 지나지 않으며, 운명 의 여신은 언제 우리를 찾아울지 모론다는 진실을 가르쳐 줘야 한다. 폭력과 불의, 오만과 위선이 어떤 불행한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를 가르쳐 줘야 한다. 그런데 영국의 연극적 현실은 어떠한가? 영국의 연극은 오히려 그와 는 정반대의 일을 하고 있다! 영국의 무대에서는 정직한 사람이 조롱당하 며, 욕설과 저주와 의설이 들끓는다! 영국의 코메디는 서슴없이 성직자를 희화화시키고 있다! 이렇게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 수 있다는-말인가?〉
이상한 일은, 제레미 콜리에는 격렬한 논쟁을 야기시켰으며, 그 결과 청 교도 정신과 의고전주의의 모랄리즘이 마침내 영국의 코메디를 개조해내기 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형태로는 더이상 살아 남을 수 없음을 절 감한 영국의 코메디는 섬광과도 같은 스틸의 작품을 끝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이태리에서도 코메디아 델 아르트가 공격받고 있 었다. 이태리도 이성과 풍속을 존중하는 코메디를 추구했던 것이다. 지금 우 리는 플로렌스나 로마가 아닌 나폴리의 경우를 이야기하고 있다. 나폴리의 아멘타라는 작가는 열정, 혈기, 익살, 기상천외한 장면 그리고 향락과 쾌락 을 무대에서 끌어내렸다. 이제 더이상 비도덕적인 인물은 무대에서 사라졌 다. 더이상 투박한 표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더이상 음란한 행동도 없었다. 추잡스런 하녀도, 게걸스런 하인도 없었다. 난삽한 줄거리도 없었으며, 오직 있는 것이라고는 규칙과 도덕뿐이었다.언어의 문제에 있어서 아름다운 어법에 대한 판결이나, 문학의 문제에 있 어서 훌륭한 취향의 보호에 관한 제도를 국가적으로 시행한 나라는 질서와 규율을 추구하던 프랑스 의에 다른 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이웃나라들도 프랑스의 아카데미를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아카 데미 프랑세스는 점차 의전적인 성격을 띠기에 이르렀으며, 그것은 다른 어 떤 기관보다 앞선 특권을 누렸다. 아카데미의 시상식, 입회연설 등 아카데 미 프랑세스의 모든 행사는 일대 사건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민족 이라고 자부하던 영국인들조차도 프랑스의 아카데미를 시샘했다. 만약, 영 국에도 아카데미가 있다면, 프라이어는 대영제국의 라 퐁뗀느가 되어 아카 데미의 한 자리를 찬란하게 빛낼 것이고, 브왈로의 자리를 포프가 지킬 것 이고, 영국의 몰리에르 콘그레브도 회원으로서 영국에 영광을 안겨 줄 것이 다.l2) 예속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스위프트조차도 그 일에는 찬성할 것이라12) 볼테르, 『철학서한』, xxⅣ권, 「아카데미에 대하여」.
고 영국인들은 생각했다.13) 그러나 사정은 달랐다. 오랜 논쟁 끝에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영국을 제의한 다른 나라에서는 아카데미가 속속 구성되었다. 1700년 베를린 아카데미가 설립되었으며, 1713년 스페인 왕립 아카데미가 설립되었고, 오지 러시아에서조차도 1725년 아카데미가 발족을 보았다 ...... .
13) 스위프트, 『영국어의 교정과 개선방안 ... …』,런던, 1712.
종교와 정치를 공격하고 구제도를 일소하는데 전력을 다하던 비평이 이 제는 오히려 보수적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일찍이 고대인들을 질타하던 비평이 이제는 고대인들을 마치 신처럼 떠받들었다. 아카데미 비평은 한 개 인의 판단을 모든 것의 척도로 삼았다. 아카데미 비평은 규칙의 준수 의에 다른 것을 몰랐다. 아카데미 비평은 경험을 절대명령으로 바꿔 버렸다. 스 물네 시간, 궁전의 거실, 연애, 의무, 그리고 장중한 몇몇 인물이면 한 편의 비극은충분했다.
1711년, 영국인들도 그들 땅에서 햇빛을 보게 된 『시학』에 자부심울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빠르나스의 법률제정가라고 할 수 있는 포프에 의 해 쓰여진 『시학』이었다. 연약하고, 세십하고, 날카로운 성격의 포프는, 바 로 그 때문에 사소한 것에까지 지나치게 민감한 약점이 없지 않았지만, 여 러가지 점에서 브왈로의 후계자라고 지칭해서 손색이 없었다. 그가 『비평시 론』을 쓰던 해, 그의 나이는 약관의 나이였다. 따라서 그는 바평계를 오랫 동안 지배하리라고 예상되었다.일순간에 당대의 제일 유명한 책이 되어 버린 그 책은 최후의 일전을 방 불케 했다. 왜냐하면 『비평시론』에는 결코 화해가 불가능해 보이는 두 사 람이 나타나 서로 반론을 폈기 때문이다. 그 둘은 종종 대립적인 데까지 있 었다. 하나는 개인의 기질울 열렬히 대변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질서와 규율을 대변했다. 그러나 승리는 언제나 질서와 규율의 것이었다. 비평가들 에 대한 작가들의 은근한, 또는 표면적인 반발을 대변하는 전자는 그의 감 정을 거침없이 토로한다. 그는 비평가에게 도전장을 던진다. 〈비평가의 비 난을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작가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제일의 포프는 비평가를 혹평한다. 〈그 사람들이 무슨 권리로 내 작품의 결점을 둘춰내고,나를 검열하고 판단한단 말인가? 물론 비평가임을 자처하는 그들이 비평을 직업으로 선택한 이상, 비평을 그만둘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이 결코 우월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무게만 잡는 바보가 나를 비 판할 자격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실패한 시인이 나의 시를 비판할 자격 이 있을까? 달걀세례를 받은 극작가가 내게 코메디 작법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비평가들이 전실을 인정할 그때가 왔다. 이제는 작가가 비평가들을 비평할 차례다. 못된 시인이 하나 나타나면 비평가들이 때거리로 몰려와 법 석을 떠는데, 거만한 태도가 자격증을 부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판결을 내리기 전에 우선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편협한 정신의 소유자는 작가의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보지 못한다. 공정한 비평가는 그에 상응하는 자질을 요구한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비평가들이 엄정하고 확실한 판단을 내 릴 만큼 경험이 풍부하고 공부를 많이 했는가? 그들은 과연 유연한 정신력 과 직관을 겸비하고 있는가? 그들은 과연 질투와는 무관한 겸허한 비평가 를 자처할 수 있는가? 그들은 과연 옥의 티 같은 사소한 결함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장점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가? 그들은 돈만을 세는 수전노와 달 리 솔직한 찬사를 보내 줄 용기가 있는가? 그들은 공정한가? …… 그러나 사 실을 말하자면, 슬픈 일이지만, 그들은 권력과, 명예와, 종파의 시녀에 지나 지 않은 집단에 불과하다…….〉
제일의 포프가 터뜨리는 분노는 아직은 날카로운 데가 있는 영혼을 잘 드 러내 주고 있으며, 재미마저 있다. 그러나 제이의 포프가 제일의 포프를 어 떻게 설득하는지를 보면 더욱 홍미롭다. 전자는 너무 쉽게 설득당하고 만다. 그는 사이비 비평가를 매도했을 뿐이다. 거기에 합리적인 포프는 계율과 도 그마를 내세운다. 그는 순수 광명, 신의 계시라고 할 수 있는 자연, 어김없 는 자연에 순종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성의 안내를 받는다는 전제하에 서이다. 〈페가소스는 방향을 잡아 줘야지 박차를 가하면 안된다. 오히려 페 가소스는 i〉 가속보다는 억제가 필요한 말이다. 날개를 단 그 말에게 중요한 것은 속력을 조절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예술도 자연이다. 그러나 예술 은 완성을 지향하는 자연이며, 질서와 조화를 추구하는 자연이다. 그러므로j) 날개를 단 전설적인 말. 페가소스는 영감의 상징이기도 하다.
시인들은 고대의 시인들에 의해 발굴된 자연의 규칙에 순응해야 한다. 시인 들은 우리의 상상력을 적당히 억제하기도 하고, 거기에 비약의 기회를 부여 하기도 하는 현명한 그리스 시인들의 계율을 터득해야 한다. 물론 비르질리 우스도 자기 자신의 천재성에 전적으로 의지하려고 한 때가 있었다. 그러다 가 그는 결국 호머와 자연이 하나임을 깨달았다. 깜짝 놀란 그는 그의 건방 진 야심을 버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후로 그는 작품을 쓸 때마다 마치 한 구절 한 구절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에 비쳐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아 주 엄정한 규칙을 준수하며 글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시인들은 이제 작품 울 다듬고 또 다듬는다. 진정으로 읽기 쉬운 문체야말로 결코 우연의 산물 이 아닌 예술의 산물인 것이다. 가벼운 발걸음은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지 지 않던가!〉
포프가 고전주의자로 지칭되는 이유는 바로 포프의 이러한 측면에 기인 한다. 포프는 그가 가장 숭배하는 선조들의 작품들에 온통 젖어 있었다. 아 리스토텔레스, 호라스, 드니 다리까르나스, 페트로니우스, 퀸틸리언, 론전, 그리고 중세의 미신을 이겨낸 에라스무스, 레옹 10세 때 이태리의 영광을 노래한 비다, 브왈로 등이 그가 섬긴 조상들이었다. 그렇게 쟁쟁한 조상들 에게 제사를 울린 그는, 이제는 동시대의 작가들에게 눈을 돌려서 그들을 지배하려고든다.이론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한 작품을 몇 개 가지고 있는 일은 괜찮은 일이다. 그리고 사실 그것보다 쉬운 일도 없다. 서사시를 쓰는 방법만 익히 고 있다면, 더 기다릴 것이 없는 것이 그것이다.만토바의 그것보다, 그리스의 그것보다 뛰어난, 짝을 찾을 수 없는 서사시, 안나의 검보다, 말보로의 불보다 값진, 아름답고, 강하고, 정확한 서사시를 우리의 시인이 쓴다…… 만토바와 그리스를 뛰어넘는 전대미문의 서사시, 한치의 어긋남도 없고, 아름답고 힘찬, 그래서 안나의 검에 필적할 만하고, 말보로의 폭죽 세례를받아 마땅한 시, 우리의 시인이 온 힘을 모아 쓰려는 시는 바로 그런 시였 다. 리챠드 블랙모어는 영국인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다. 시의 목적은 정신 을 교육시키고 풍속을 교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라고 그는 역설했다. 도덕적 서사시가 가장 품격 높은 시로 인정을 받았다. 종교, 도덕, 예지 그리고 열 정의 자제를 가르쳐 주는 것은 도덕적 서사시의 인물밖에 없었다. 따라서 서사시는 우리의 의무였다. 그러나 호머와 비르질리우스를 제외하면 아무도 그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만약 서사시에 실패한 시인이 있다면, 그것은 그 시인에게 천재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가 규칙을 무시했기 때문일 것이 댜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아리스토텔레스와 호라스 의 에도 라팽, 다시에, 르 보쉬, 라이머 같은 훌륭한 안내자들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훌륭한 서사시를 쓰는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이제 시작해 보자.
리챠드 블랙모어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 뮤즈여 내게 말해다오 …… .> 그렇게 뮤즈의 영감을 받은 그는 영웅시 「아더왕자」와 「아더왕」을 쓰며, 서 사시 「앨리사」, 「알프레드」, 그리고 철학시 「창조」를 비롯해서 수십 편의 시 와 수천 행의 시를 써낸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리챠드 블랙모어는 시 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훌륭한 의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서사시를 감명 깊게 읽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면 비극 분야에서는 어떠했는가? 유명한 법률가 지안 빈첸조 그라비 나가 그 분야의 선봉이었다. 프랑스 고전주의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르네상 스기의 작품에도 만족할 수 없던 그는 가장 본래적인 동시에 진정한 비극 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비극에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그후 그리스 비극은 그에게 둘러붙어 한시도 그에게서 벗어나지 않는다. I7I2년, 나폴리에서 출 판한 그의 다섯 편의 비극 작품집 서문은 그와 그리스 작품과의 대화로 이 루어져 있다. 그리스 비극이 나 여기 있도다! 라고 소리친다. 〈그렇게 오랜 동안 지하에 잠들어 있던 나 마침내 나의 본래 모습을 드러내는도다. 법학 자, 웅변가, 철학자의 안내와, 합리적인 제규칙의 호위와, 비평이라는 횃불을 따라 나 마침내 여기에 이르렀노라! ……>뮤즈는 우리에게 유창한 연설을 늘어놓지만,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비나의 비극은 지겹게 느껴졌다. 유럽 전체가 비극으로 치달았다. 많은 나라들이 서로 월계관을 쓰려고 앞다투어 겅쟁했다. 도처에 반장화를 신은 비극작가들이 들끓었다. 크레비용 이 라신느와 경쟁했다. 그러나 그는 라신느에 훨씬 못미쳤다. 각국의 비극 작가들이 프랑스의 비극에 도전했고, 그것을 앞서려고 했다. 적어도 비극에 바친 시간이나, 작품수에 있어서는 어느 나라도 프랑스에 뒤지지 않았다. 그 러던 중 시피오네 마페 후작이 베로나에서 『메로프』를 초연하기에 이르렀 다. 그러나 약간 앙상한 듯한 그 작품이 초연되던 1713년6월 12일은 가히 기 념할 만한 날이었다. 약간 앙상한 데가 있긴 했지만, 그 작품은 프랑스의 가 장 고전적인 작품보다도 더 고전적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고향 베로나에서뿐만 아니라 이태리 전체의 환영을 받았다. 얼마나 대단한 성공 이었던가! 그 끓어오르는 감정의 분출, 그 웅변적인 대사, 그 한치의 어긋 남도 없는 12음절의 시행들 ……에 사람들은 얼마나 찬사를 보내 마지않았 던가! 그 작품은 세계 도처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각국에서 번역, 토론되었으며, 모두의 격찬을 받았다. 그 작품은 볼데르를 거쳐 레씽울 거 쳐 나중에는 괴테에게서까지 칭찬을 받았다. 영국인들도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세익스피어류의 지나친 파격을 추방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희극과 비극의 동화를 경계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전투, 법석, 기 다란 행렬의 효과 그리고 약간의 고급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도저히 참 아 줄 수 없는 북, 나팔, 살해장면을 무대에서 추방할 필요성을 느꼈다. 간 단히 말해서 영국인들이 원한 것은, 공포와 연민이 적당히 섞이고, 웅장하 되 절도 있고, 장엄하되 열광치 않는, 규칙이 잘 지켜진, 잘 재단된 비극이 었다. 영국인들은 심혈을 기울였다. 나타니엘 리는 그러한 의도에서 「네로」, 「소포니스베」, 「그로리아나」, 「질투하는 왕비들」, 「미트리다트」, 「의디푸스」, 「부르투스」 등등의 작품들을 썼다. 그의 작품에서는 불필요한 삽화가 사라 지고 한 사건만이 다루어졌다. 시간의 일치, 예의, 고상하고 무게 있는 어휘 의 선택 등이 지켜졌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이따금 성공하기도 했지만, 그러 나 그는 사실 그가 우상처럼 떠받드는 규칙 이상의 것에 이를 수는 없었다. 그의 재능은 규칙에 억눌렀던 셈이다. 그의 작품보다는 차라리 오트웨이의 「베니스의 기수」가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규칙과 더불어 비장미를 겸비한 영국 작가의 가능성을 시사해준 작가는 오히려 오트웨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1713년에 무대 에 올려진 에디슨의 「카토스」 가 각광을 받았다. 에
디슨의 「카토스」는 지체 없이 불어로 번역되었으며, 영국은 그를 런던의 브 왈로라고 칭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위대한 「카토스」의 영광이 시작되 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반세기에 걸친 노력의 결과였다. 영국의 거찬 부 분을 다듬어 그런 정도의 수준에 이끌어 울리는 데 반세기의 세월이 필요 했던 것이다.
독일아 가장 뒤처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꾸준히 그 뒤를 추격하고 있 었다. 그 중에도 독일 연극의 후진성에 개탄을 금치 못한 사람은 고츠셰드 였다. 그래서 그는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주석본들을 쉬지 않고 읽었다. 그는 고대작가들의 연극과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들을 서문까지도 빼놓지 않고 답파했다. 마침내 눈을 떠 이해의 경지에 도달한 그는, 드라마 예술이란 이성에 근거한 절대적이고도 필연적인 규칙 울 준수하는 예술이며, 따라서 만약 독일인들이 규칙을 의면한다면 독일은 영원한 미개 상태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백방으로 연극에 대해 연구하던 고츠셰드는 1732년 드디어 「죽어가는 카토스」를 써내기에 이 른다. 그의 해설에 의하면, 그의 작품은 에디슨의 「카토스」를 독일어로 옮 긴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실 고츠셰드의 작품은 규칙을 철저히 지키지 도 못했고, 털어낼 것을 털어내지도 못해서 여기저기 격에 맞지 않는 군더 더기가 보였다. 다행한 것이 있다면, 그 작품은 유티카 성의 단 하나의 방 에서 전행되며, 줄거리가 정오에서 시작해서 해질녁에 끝난다는 점이다.그런데 이상한 것은, 볼테르 같은 작가조차도 오드나 비극 작품을 쓸 때 는 알게 모르게 자신의 재능은 억누른 채 꼬르네이유, 라신느, 브왈로만을 모방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 이후로 오랜 동안, 말하자면 근대적인 새로 운 집단이 나타나기까지, 소위 의고전주의의 집단은 아무런 발전을 하지 못 했다. 슬프게도 우리는 신선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너절한 이야기 들, 진실과는 거리가 먼 비국들, 시성과는 무관한 시구들을 그저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고전주의가 우리에게 던져준 시의 대가 였다. 아류들은 거의 절정에 이론 현란한 프랑스 고전주의의 모방만을 그들 에게 남겨진 유일한 길로 여겼다. 간편한 것을 좋아하는 속성을 지닌 아류 둘은 그렇게 모방만을 일삼았던 것이다. 기하학적 정신은 부드러운 형태와 활기찬 색채를 의면했으며, 이성은 꽃을 그냥 꽃으로 인정할 줄을 몰랐다. 서정성은 점차 메말라 갔고, 시성은 무기력한 늪에서 헤어날 줄을 몰랐다.제2장 삶의 정경
인위적인 냄새만 가득한 들판에서는 신기루를 볼 수 없다. 다른 데로 가 보자·…예지와 절도를 강조하던 《구경꾼》은 훈계를 멈춘 채, 상상의 기쁨울 노래 하는가 하면, 눈을 즐겁게 하는 일이 지적인 즐거움에 못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는 또한 셰익스피어의 황당무계한 장면에 찬사룰 보내 기도 한다. 그에 의하면, 이태리 이론가들은 규칙의 엄수를 강조했지만, 그 들에게 창조적인 면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의 탈규칙이 오히려 그들의 창조적 재능이자 권리였다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주장일까? 그러나 얼마나 다행스러운 모순인가! 모든 것을 엄정한 자로 재단질하는 프랑스인 둘은 제쳐두자. 기하학적 구도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그 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들은 세기말에 이르자 쇠락의 기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비평시론들은 사라지고, 위풍당당한 작품들이 선을 뵈기 시 작했다. 시대는 새로운 유행을 요구한 것이다. 전열강에는 어떤 책들이 진 열되기 시작했던가? 다름 아닌 요정이야기들이었다.후기 루이 14세 시대의 사람들은, 심지어 그렇게도 독실한 합리주의의 대 명사였던 마담 드 맹트농까지도 어린아이들에게 들려주는 할머니의 이야기 에 홍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데카르트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루 아침에 서양호박이 금마차로 바뀔 수는 없으며, 게으름뱅이가 마당쇠로 둔감할 수는 없는 법이다. 프랑스에서 프랑스인 고유의 합리성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 비논 리성 또한 얼마나 무성했던가? 화려한 궁전이 보인다. 온통 금은 보화로 뒤 덮인 궁전이다. 석류석으로 만들어진 문, 사슴발 모양의 다이아몬드 문고리 …… 동물들이 말을 한다. 숲속을 지나는 암염소, 부뚜막의 암코양이는 마 술에 걸린 여인들이다. 그리고 파랑새는 왕자님이다. 온통 꽃과 보석 그리 고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장식이 가득하다. 4백 온즈의 옷감이 좁쌀만하게 말아지는가 하면, 활짝 펴져 바늘 구멍을 통과하기도 한다. 태양, 달, 별과 함께 지상과 바다와 하늘의 모든 동물들이 묘사된다. 우리는 아카데미의 말 보다 더 높이 뛰고, 더 잘 달리는 말을 타고 숲을 가로질러 가기도 하고, 모 르는 길이 없는 거대한 염소의 마차를 타고 여기저기 다니기도 하고, 초스 피드의 사슴썰매를 타고 달리기도 한다. 날개 달린 개구리가 우리를 의자에 태워 날아다닌다. 용이 마차를 끌고 하늘 위, 구름 위로 난다. 이제 세상의 기존 법칙은 사라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모든 것을 뒤엎는 마술뿐이었다. 몸 은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오직 꿈이 전실이었다. 덕은 보상을 받았고, 악 은 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요정이야기에서 시선을 돌려 현실을 보면, 그것은 무미전조한 고난의 삶이었다.
낮과 밤, 봄, 여름, 가울, 겨울,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마술로 보는 이 요정이야기, 태초의 영혼의 속삭임에 빠진 사람들은 여자들이었다. 본능에 충실한, 그리고 감수성이 예민한 여자들이 아니었다면 상상력은 지켜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샤를르 뻬로였다. 왕궁의 총감독관이기 도 했던 그는 섬세한 요정이야기로 불후의 걸작을 빚어냈다. 나비, 거미줄, 달빛 …… 미녀가 숲속에 잠들어 있다. 움직이는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몽 상까지도 …… 날아다니는 요정도 없다. 쥐죽은 듯 고요하다. 베르사이유 궁 정, 궁정의 뜰, 도시 전체가 슬픈 듯 고요하기만 하다. 그러다가 감자기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인댜 부엌데기 하녀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하인들이 뛰어 다니기 시작하고, 말들이 뒷받질을 시작하고, 새들은 가지 위에서 노래를 부른다. 이어 공주가 깨어나 왕자에게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건넨다. 왜 이 렇게 늦었느냐고, 아주 오래전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었노라고…….반면 진짜 여행객들의 이야기는 요정이야기와는 달랐다. 그들이 그토록 먼 곳까지 여행을 했던 것은 미지의 땅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영혼을 적시기 위한 것도 아니였고, 미지의 땅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기 위한 것도 아 니었다. 사상이 세계를 지배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여행객들은 정신적 존 재라고는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삶의 전경 앞에서 비로소 눈을 떠, 지성에 물린 시대에 매력적인 이미지를 제공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유럽의 바다 한가운데에 새로운 섬이 마치 신비의 땅처럼 발견되었다. 그 것은 다름 아닌 어둠 속에 솟아오른 라포니였다. 여행가 프랑스와 베르니에 가 말했듯이, 라포니족은a) 참 이상한 종족이었다. 〈그들의 코는 납작했으며, 키는 땅딸막했다. 장딴지는 펑퍼짐하고 어깨는 딱바라졌다. 목은 짧고 얼굴 은 길어서 흉칙한 곰울 닮은 그들은 물고기 기름을 마시고 살았다…….〉 그곳은 이상한 나라였다. 그곳은 여름에는 해가 지지 않았으며, 겨울에는 해 가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다녔다. 예 아니오만 말 하는 마법사들도 있었다. 너무도 기이한 것들 두성이어서 〈그곳은 유럽 대 륙의 한 부분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묘사〉인 듯했다.a)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북부에 위치한 지역.
해상 모험, 포로로 잡혔다가 탈주하거나 구출된 이야기, 이별했다가 다시 만난 연인들의 이야기, 박해와 변절의 이야기들이 미개한 나라들에서 전해 들려오는 이야기들이었다. 함장과 근위병, 후궁에 갇힌 아름다운 미녀들의 눈물, 그 눈물에 반역울 저지르고마는 부하들, 노를 젓는 도형수와 그들을 감시하는 간수들, 온갖 고난을 헤치고, 엄청난 몸값을 치르고 돌아온 프랑 스 또는 스페 인 선교사들 …… 끊임 없이 반복되는 듯하면서도, 그때마다 더 욱 아름답게 꾸며지곤 하는 이 이야기들은 새로운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거 기에는 코메디가 있었으며, 연애이야기도 있었다. 따라서 그것들은 현실임 에도 불구하고 소설보다 더한 소설적인 즐거움을 줄 수 있었다.
예루살렘 성지가 한번쯤 서정시의 주제가 될 법한 시기였다. 오! 불행의 도시, 무덤의 도시, 예루살렘이여! 해골, 흩어전 뼈들, 부서진 뼈 조각들이 〈명상〉을 꽉 메운다. 음산한 기분이 들게 하는 시이다.슬플진저 ! 저것이 그렇게도 허영에 차 있던우리들의 모습이더란 말인가! 한때는 세도가 드높았을 저 해골둘저 꼴로 변할 줄 모르고 권세를 탐했단 말인가!
허무할진저 권세여, 너 얼마나 초라한가? 황제도 집어삼키는 이 무덤 앞에서 ·…. . 여기에서 이렇게 비탄에 젖은 시인은 『밤의 애가』를 쓴 영도 아니고, 『묘 지의 애가』를 쓴 허베이도 아니다. 여기 이 시를 쓴 비탄의 시인은 낭만주 의자이자, 성지순례자인 아론 힐이었다. 만약 프레마르 산부가 광동에서 라 셰즈 신부에게 보낸 편지를 루이 14 세가 읽었더라면, 루이 14세는 네델란드의 그립에 그려진 사람들보다 더 기 이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광동이 얼마나 기이한 도 시였는가 한번 보자. 좁은 거리가 사람들로 꽉 찼다. 짐꾼들은 맨발로 다니 는데, 그들은 비뿐만 아니라 햇빛도 가려 주는 이상하게 생긴 밀짚 모자를 쓰고 다닌다. 그들은 마차 대신 이상한 의자를 타고 다닌다. 프레마르 신부 도 예닐곱 명의 장정이 어깨에 매는 그 의자를 타고 산책을 나선다. 더 이 상하게 보이는 것은 그 지역을 관리하는 군수는 이백여 명의 수행원이 없이 는 외출을 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들은 파리와는 딴판인 어떤 도시에 대해서이다. 오직 있는 것이라고는 집들뿐인데, 창문도 나 있지 않은 그런 집들이 죽 늘어선 거리를 한번 상상해 보기 바란다. 그리 고 게다가 초라한 누옥들에는 대문 대신 대나무 빗장만이 하나씩 걸려 있 다…….〉1)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해가 지면 승려둘의 사원과 거리의 문이 동시에 닫힌다. 강 위를 보면, 그것은 하나의 떠다니는 도시이다. 가족들을 태운 나룻배들이 강위를 빽빽이 떠다닌다. 시골에는 논들이 즐비하다…….1) 고아동에서 프레마르 신부가 라 셰즈 신부에게 보낸 1699년 2월 17일자 편지(『의국선교를 위한 교육용 서한집』, I권, 1703).
땅 위, 또는 바다 위, 어디에서도 이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던 모험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동인도제도와 서인도제도로부터 흘러 들어왔다. 그런 기상 천의한 모험가들에 대한 이야기는 쌩 도맹그 섬과 아주 가까이에 있는 토 르뒤라는 섬이 본거지였다.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규칙을 지키며 사는 그.사람들은 다름 아닌 산적과 해적들이었다. 산적들은 가죽을 얻기 위해 소를 사냥했고, 고기를 얻기 위해 맷돼지를 사냥했다. 디에프나 낭트에서 특
별 주문해 만든 무기로 무장한 그들은 사냥개를 데리고 다니면서 사냥했다. 그들에게는 그들을 돕는 노복들이 딸려 있었다. 삼년 정도의 수련과정을 거 쳐 강인성과 용감성을 인정받으면, 노복들도 그들 중의 일원으로 승격되곤 했다. 짐승이 잡히면, 대장은 짐승의 뼈를 부러뜨려 아직 식지 않은 골을 빨 아먹었다. 그것은 아침식사였다. 그들은 활로 오렌지 열매를 다치지 않게 떨 어뜨릴 수 있는 명사수였다. 달리는 황소의 뼈를 부러뜨릴 만큼 날멘 자도 그들 중에는 있었다. 용감하고, 강인하고, 다루기 힘들고, 난폭할 뿐만 아니 라, 피를 보기 좋아하는 용사 중에 용사인 그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남다른 우정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해적이란 바다의 사냥꾼이었다. 그들은 대양의 파도 위를 넘실거리다가 대형선박 특히 동인도제도로부터 금을 가득 싣고 항해하는 스페인 선박을 탈취하곤 했다. 그들은 항해중인 선박에 침입하여, 선원들을 학살해서 선박을 차지하곤 했다. 그들은 싸움에서마다 승리했으며, 거기에서 얻은 전리품은 하나도 빠짐없이 쌓아 두었다. 그러다가 육지에 상 륙하는 날, 그들은 마치 승전한 프랑스 병사들이 보르도 항에서 횃불 축제 를 벌이듯 축제를 벌였다.
해적들은 그들의 용감성과 잔인성 때문에 서사적인 위대성을 획득했다. 그들은 알렉산더라고 불리어지기도 했으며, 또는 그들의 인상적인 팔찌 덕 분에 강철의 팔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어지기도 했다. 〈고대의 알렉산더 대왕 이 정복자 중의 정복자였다면, 그들은 해적 중의 해적이었다.〉 그들의 이름 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디에프 태생의 삐에르 르 그랑, 그로냉그 태생의 록크, 그리고 모르강 르 갈로아, 신스페인, 카르타고, 멕시코, 풀로리다, 뉴 욕, 카나리아 제도, 베르트만 등을 두루 섭렵하며 이십 년 이상의 항해 경력 이 있는 몽토방 선장 ...... 우리는 그 중에도 뿌와투 태생의 오로노아에 대 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는 쿠바 근해에 정박하고 있었다. 그는 배 한 척 울 포획했는데, 그 배에는 스페인의 왕명으로 해적들을 사형집행하기 위해 스페인에 가는 사형집행인이 타고 있었다. 〈사형집행인〉이라는 말과 교수 형이라는 말을 둘은 오로노아는 격분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그는 갑 판의 승강구를 열도록 명령한 뒤 스페인인들을 하나씩 하나씩 올라오게 했 다. 그는 스페인 사람들의 목을 하나씩 하나씩 울라오는 대로 쳐없앴다. 그 러나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오직 살육뿐이었으며, 죽는 날까지 그가 한 일은 오직 살육뿐이었다.〉 오로노아는 베네수엘라의 마카라이보라는 시골 마 을과 지브랄타를 약탈했다. 〈엄청난 돈이었다. 금, 은, 보석을 파운드당 십 만 에퀴씩만b) 잡아도 26만 에퀴 정도가 되는 물건에다가, 약탈해간 돈만 해 도 1O만 에퀴에 이르렀다. 폐허가 된 교회, 부서전 건물, 불타 없어진 선박, 그리고 그들이 탈취해간 1O만 에퀴에 호가하는 담배를 선적한 선박까지를 포함한다면 손실은 100만 에퀴를 웃돌았다.〉 그러나 오로노아도 나중에는 비 참하게 죽고 말았다. 〈소위 인디오스 브라보스라고 하는 야만인들에게 잡혀 불고기로 먹혀 버리고 말았다.〉2)
b) 에퀴는 5프랑에 해당하는 옛날 돈이다.
2) 오엑스물랭, 『아메리카 탐험기』, 암스데르담, 1678.특히 홍미있는 이야기들은 주로 동방의 이야기들이었다. 〈신기한 이야기 에 관한 한 동방을 능가할 나라가 없었다.〉 『천일야화』를 번역(1704-1711)해 낸 사람은 앙뜨완느 갈랑이었다. 아라비아와 시리아의 꿈을 먹고 자란 셰라 자데는C) 상상에 끝이 없었다. 그녀는 동방의 풍속과 관습, 동방의 종교적 의 식, 가정적 윤리, 잡다한 생활 전반에 걸친 이야기를 끝도 없이 펼친다. 게 다가 그녀는 남자를 사로잡는 방법을 알았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현학자적 인 연역적 사고나 추론과는 다른 우화와 아름다운 필치가 전부였다. 그녀가 밤의 이야기를 시작하자, 유럽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 였다. 이제 터어키 황제와 터어키 대신, 마호멧교 성직자, 그리스 의사들, 혹 인 노예들이 카라보스의 선녀나 오로라 선녀를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가볍고 변덕이 심한 건축물, 분수, 육중한 사자가 지키는 연못, 메카의 비단 천이 도배된 널찍한 방이 마술에 걸려 짐승으로 변한 공주와 궁전을 대산 하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유행이 풍미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c) 『천일야화』의 서술자 이름이 셰라자데이다. 〈왕비의 부정한 행위에 철망한 나머지 왕 비를 처형한 후, 매일 처녀를 들여 하루밤을 지낸 후 그 여자를 죽이는 왕이 있었다. 나라 안의 아름다운 여자는 매일 하나씩 죽어갔다. 셰라자데는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왕비를 자청하여 둘어간다. 왕비가 된 셰레자데는 왕과의 잠자리에서 밤새워 이야기 를 들려준다. 왕은 셰레자데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마저 듣기 위해 그녀의 처형을 하 루 연기한다. 그렇게 연기되고 또 연기된 그녀의 이야기는 천 하고도 하루 동안 계속 된다. 그러는 사이에 왕자와 공주가 태어나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차츰 분노를 전정 시킨 왕은 셰레자데를 왕비로 삼는다. 『천일야화』는 바로 셰레자데가 왕에게 l001일 동안 들려준 이야기이다.〉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이야기에 이은 이야기, 몽상에 이은 몽상의 끝없는 추구가 그것이었다.
몽상의 이미지들·… .. 여행가들의 이야기에는 중국의 사원, 샴의 뿔뱀, 긴 꼬리 원숭이, 말라비르의 신기한 나무들이 등장했다. 만다랭의 의상을 판화 제작한 부베 신부는 프랑스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프랑스 궁전대사 드 페리울은 100부 한정판 판화를 제작주문하여 파리쟝들에게 보급했다. 여행 가들은 그림을 통하여 독자에게 이국적 향취를 직접 느낄 수 있게 하기도 했다. 그러한 그림들의 예를 들자면, 한 미개인이 애인의 침실에 성냥을 가 지고 들어가는 장면, 수천 년의 신비에 싸인 피라미드의 무덤둘을 횃불로 들여다보는 장면 등이었다. 낡은 전형들만을 모방하다가 신선함을 잃은 예 술가들은 거기에서 충격을 받았다. 그런 점에서 낯선 땅, 미지의 땅은 대단 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말보다는 그림이 신선한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안 작가들은 이따금 화가로 변신하기까지 했다. 코르넬리우스 반 브륀은 진리 를 전달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과 의무감으로 충실한 재현을 위해 최선 을 다한 작가 중의 하나였다.그런데 문제는 책만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동인도제도, 방콕, 북 경에서 온 많은 이국인들이 친숙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프랑드르의 양탄 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세계인의 각광을 받았으며, 오직 오페라와 연극의 소품으로만 등장하는 줄 알았던 중국산 도자기들이 일반 가정의 병풍과 벽 난로 위에 놓이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공자의 사상 못지않게 빠른 속도 로 도자기와 중국산 염료가 도입되기에 이른 것이다.스피노자, 말브랑쉬, 라이프니찌가 있었지만, 강철 팔뚝의 알렉산더와 셰 레사데도 한몫씩을 차지하던 시대였다. 이성에 근거한 체계적인 형이상학의 언저리에는 꽁트나 요정이야기를 지배하는 상상의 세계, 코뿔소와 해태를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몽상적 감성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 를 깊이 있게 설명하려는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그 위로는 몽상과 상상의 물그림자가 여울지고 있었던 것이다.그뿐 아니었다. 그 시대는 무심돈담한 건달들도 있었다. 탕아, 주정꾼, 협 잡꾼 등등의 건달들은 자연의 섭리가 무엇인지, 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고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마련된 유일한 예정조화가 있다면, 그것은 목구멍과 포도주의 조화뿐이었다.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어디로 가는지를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직 앞에 길이 있으니 갇 뿐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먹는 일이었다. 그들은 죽은 철학자 한 사람보다 살아 있는 개를 중히 여겼다. 눈 앞의 현 실, 그것이 그들의 영역이었다. 그들은 멍청하고 둔한 사람들을 이용할 대 로 이용해서 잘 먹고 마시면 그만이었고, 배 부르면 휘파람과 노래를 부르 면서 인생을 구가하면 그만이었다. 못 즐기고 저 세상에 간 사람만 불쌍할 뿐이었다.
그러나 탕아, 부랑아, 협잡꾼 등의 건달들에게도 어떤 심리적 전실과 상 징적 의미는 있었던 듯하다. 그들은 온갖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즐겁게 하 는 영원한 피카로였던 듯하다. 구즈만 델 알파라체와 라자릴로 델 토르메스 의 후손들이 빠뉘르쥬와 메리톤 라트룬의 후손들과 함께 세상을 활보하고 다닌 점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신풍물과 함께 피카레스크적 인물도 하 나의 유행이 되었다. 런던의 술집 경영자 네드 워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는 거위고기, 송아지 머리, 체스터산 치이즈, 반주로 마시려고 예비해뒀던 백맥주, 식후에 마실 양주 등등이 가득한 식탁과 친구들을 빠져나온다. 거 기를 빠져나온 그는 가다가 록크, 사무엘 클라크, 브왕, 뉴톤 등을 두루 만 나며, 거리와 광장을 마구 쏘다닌다. 그는 소위 휴머니즘을 간직한 인간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면 술집, 교회, 은행, 박물관 등 어디든 안 가는.곳이 없 다. 그는 그들을 충동적인 이미지로 재치 있게 묘사해 낸다. 그가 쓴 『런던 스파이』는 장장마다 유모어와 아이러니가 넘쳐서 가히 사실주의 코메디의 칭호를 부여받을 만했다. 사실주의적이면서도 홍미진전한 그의 작품은 그가 이룬 하나의 기적이었으며, 그는 기적을 나날이 새롭게 창조해 내는 사람이 었다. 그에 못지 않은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그는 언제라도 돈을 벌게 해 주는 펜에 대한 끝없는 찬사와 펜으로 번 돈의 아낌없는 낭비로 도시의 광 란에 동참한, 보헤미아 중에 보헤미아, 풍자가 중에 풍자가 톰 브라운이었 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야망을, 어떤 사람은 돈벌이를, 또 어 떤 사람은 그 어처구니없는 열정과 사랑을 즐긴다. 또 어떤 사람은 사소한 일상생활의 안락에서 즐거움을 얻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일대를 풍미하는영화를 누린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즐기고 누리는가?〉 ... … 나는 그런 모 든 것이 그저 오락거리에 지나지 않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즐기 는 사람이다.
그 반역적 모랄리스트는 술과 사랑과 빚더미를 질머지고 감옥생활을 하 던 끝에 41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의 파리에서는 절름받이 악마가 그와 비슷한 삶의 방식을 즐기고 있었다. 정문 출입보다는 지붕을 열고 들여다보기 좋아하는 그는 물질에 묻혀 사는 반형이상학자들, 반주인공들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의 인물들은 결코 현실에 불만이 없는, 아예 아무런 사고도 하지 않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말하자면 실존에 만족 하는 사람들이었다. 〈인생은 걱정과 근심과고통으로가득 차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가능한 한 유쾌하게 그려야 하지 않겠는가?〉3) 그 이상 아무것 도 없다. 저 너머의 세상에 대해서는 고통스러워할 것도 궁금해할 것도 없 다. 그렇다면 그가 들춰내 보여주는 현실을 한번 들여다보자. 온통 추한 현 실뿐이다. 추한 영혼, 추한 육체 의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아주 재미 있는 장면이 둘 있다. 한쪽에 늙은 창녀가 보이는데, 그녀는 가발과 속눈썹 과 틀니를 화장대 위에 가지런히 놓은 채 잠이 들었다. 다론 한쪽에는 금방 계집질하고 돌아온 60대의 호색한이 개눈, 가짜 콧수염, 그리고 대머리를 감 추기 위해 쓰고 다니던 가발을 벗은 다음, 하인이 의수와 의족을 벗겨주기 를 기다린다.〉 아름다움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 가서 아름다움을 찾 아야 한단 말인가? 참발로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눈을 의심할 정도로 키 가 크고 아름다운 여인을 저 집에서 보았다.〉 그러자 절름발이 악마가 말한 다. 〈자네를 놀라게 한 미인은 금방 잠자리에 든 늙은 호색한의 누님이라네, 그녀야말로 호색한이 동거하고 있는 늙은 창녀와 단짝이지 …… 자네가 감 탄을 했지만, 구 큰 키는 굽 때문이고, 풍성한 가슴과 엉덩이도 솜뭉치라네 …… 그런데 그녀가 젊은 여자 행세를 하고 다니니까 두 젊은 친구가 그녀 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녀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닌다네 …… 그들은 다두다 가 급기야는 주먹질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싸우고 있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 면, 마치 뻑다구 하나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개들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3) 알랭 르내 르 싸아쥬, 『절름발이 악마』, 1707
네.〉 『절름발이 악마』에 사상은 없다. 오직 기괴하고 암울한 상상이 전편을 지배할 뿐이다. 르 싸아쥬는 『질 브라스』(1715년에 1부가 출간됨)를 통해 피 카로 소설의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었다. 더욱 섬세하고, 더욱 재치에 넘치 고, 더욱 복잡한 인물이 질 브라스였다. 그의 관찰은 더욱 예리했으며, 그의 행동은 더욱 자연스러웠다. 피카로들은 형이상학적 비극과는 정반대편에 있 는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후위부대가 있었다. 집단생활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거만한 얼굴의 신사둘이 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결코 도덕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 으며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의 결정적안 단점이었다. 그들은 그 점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여관 주인 아미엥은 마농 레스꼬와 데 그리의에 대해 〈그들 에게 매력은 있지만, 그들도 어느 정도는 탕아이다〉라고 말했는데, 아미엥 의 그 말은 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들은 오직 모험 과 여행과 놀음과 사랑을 위해 살았다. 그들은 함부로 칼을 휘둘렀고, 그러 다가 칼에 맞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칼에 맞았다고 해서 즉시 죽지는 않 았다. 누군가가 그들을 병상에 데려가 간호해 주었으며, 그러면 그들은 일 주일 후에는 회복해서 다시 전과 같이 어지럽고 방탕한 생활을 재개했다. 안락한 삶을 사는 부르즈와들이 즐길 만한 이야기가 아닌가? 세계 도처에 피카로를 있게 한 가르티엥 드 쿠르틸즈라는 이름은 아무나 도용한 이름이 었다. 누구나 아자르라는 기사의 이름을 도용할 수 있었다. 얼마나 재미있 는 삶인가! 얼마나 자유롭고도 새로운 리듬의 삶인가! 〈아자르 기사는 어 머니도 아버지도 본 일이 없다. 태어나자마자 강보에 싸인 채 교회 앞에 버 려진 그는 교회에서 자란다. 어느 날 그는 행운을 찾아 떠난다. 그는 어떤 금은방의 귀부인 밀에서 견습사원으로 일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주인을 떠 나 군에 입대한다. 그는 에티스 경의 해병연대에 배치를 받는다. 그런데 그 가 복무하던 군함이 파선당한다. 그는 같은 함대의 다론 한 친구와 함께 기 적적으로 살아나서 보스톤에 상륙하기에 이른다. 그의 친구는 거기에서 어 떤 싸움에 말려 죽는다. 그는 친구의 죽음을 앙갚음해 준다. 그는 어떤 소 녀에게 애를 배게 했다는 죄목으로 고소당하게 된다. 그는 다른 여자와 서 둘러 결혼을 준비한다. 그는 길거리에서 기습을 당한다. 그는 총상을 입는다. 그의 상처는 심각한 정도에 이른다. 그러는 사이 그의 결혼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방해를 받게 된다. 그를 고소했던 소녀가 그와 결혼하겠다고 호소 한다. 그녀의 오빠는 그를 죽여버리겠다고 벼른다. 그는 다시 한 번 피습을 당한다. 이번에는 네 발의 총상을 입는다. 상처에서 회복되고 보니 그의 애 인은 마마에 걸려 있다. 그의 애인은 마침내 죽는다 ……>4)이렇게 바삐 돌 아가는 이야기에서 어떻게 생각할 여유가 있겠는가?
4) 『아자르 기사』, 꼴로뉴, 삐에르 르 쌩쎄르 출판사, 1713.
많은 모험가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도 매력 있는 모험가는 몽브렁 후작이 었다. 당대의 사람들은 불행한 왕자 로앙 기사나, 아니면 150년 동안의 긴 잠을 자다가 뜻밖의 행운을 얻기에 이르는 달타냥보다는 그라몽 백작에게 홍미를 느꼈다. 그의 화려한 생애를 책으로 펴낸 사람은 안토니 해밀턴이었 다. 프랑스 문학에 영국인이 준 귀중하고도 찬란한 선물이었다. 견습시절의 그라몽, 삐에몽 산간지방에서의 그라몽, 영국 망명 시철의 그라몽을 세세하 게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대부 마타의 묘사, 쌩제르맹양과 쎄낭뜨 후작 부인에 대한 묘사, 그리고 거기에 스며든 익살에 웃지 않은 사람이 없 었다선 자유분방한 이야기, 화려한 장면들, 예리한 필봉, 힘찬 필력, 그리고 유모어에 찬사를 보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해밀턴은 도덕보다 성격을, 선 악의 문제보다 인생유람을, 한마디로 철학보다 삶을 강조했는데, 왜 그랬울 까? 그의 말을 들어보자. 〈결점을 상쇄시켜줄 만큼의 강한 성격의 소유자를 그릴 수 있어야 한다. 미덕과 악덕이 한데 어울어져, 대비효과에 의해 더욱 빛을 발하는 인물을 그려낸 수 있어야 한다. 전쟁중에도, 사랑할 때도, 놀음 에서도, 또는 그 길고도 긴 인생의 여정에도 불구하고 그라몽 백작이 빛을 잃지 않은 것은, 그리고 당대의 열렬한 찬사를 한몸에 받은 이유는 그의 이 해할 수 없는 변화무쌍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라몽은 바로 생명력의 화신 이었고, 그것을 해밀턴이 번역해 냈던 것이다.
5) 『그라몽 백작의 삶』, 꼴로뉴, 삐에르 마르또 출판사, 1713.
순진한 사람은 문학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득실거릴 수도 있나 하고 놀 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고상하고 높은 것만을 바라보다가 우리는 인간의 그러한 측면을 잊고 있었을 뿐이다.
제3장 눈물과 웃음, 오페라의 승리
나는 무서운 대주교와 교회의 치열한 싸움을 노래부르네 그 고집불통의 무서운 대주교는 불굴의 두지로 마침내 한 이름이 높은 교회의 성가대에 보면대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네 …… 〈에네이드〉를 왜곡시키지 않은 채, 서사시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 시는 쌩뜨 샤벨의 재무담당 주교와 성가대원 사이의 싸움과 갈등을 노래하고 있 다. 난투, 논쟁, 묘사, 몽상이 가득한 이 시는 장엄해야 할 대서사시에 익살 적인 면을 가미시키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 시는 아직도 웃음을 자아내는 가? 사실, 〈보면대〉는 아직 정신적으로 미숙하기만 하던 학생시절의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한 시 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시는 우리보다 200년 전 의 유럽, 신사들의 유럽, 고전주의의 유럽에 웃음을 선사한 것도 사실이다. 풍자가 브왈로의 이 작품을 유럽의 꽃으로 칭송하지 않은 나라가 없었고, 그것을 번역 모방하지 않은 나라가 없을 정도였다. 사무엘 가르트라는 런던 의 한 유명한 의사는 시가 영광을 누리려면 브왈로의 주제를 다루어야 한 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보면대>를 〈무료진료소〉로 개칭한 동 시에, 수도사를 의사로, 성가대원을 약사로 대체시킨 시를 한편 썼다. 그의 시는 주사기, 약주발, 절구 등이 교회의 도구들을 대신하는 시였다.뮤즈여 말해다오 태초부터 결속하여 저항하는
인류에 대한 의사와 약사의 투쟁을…… 신은 왜 우리를 선택하여 인류의 적으로 만들었는가? 왜 인간들은 환자를 돌보지 않은 채 다른 사람들을 공격해야만 하는가? 왜 인간들은 모자 대신 투구를 쓰고 있는가? 왜 인간들은 주사기 대신 대포를 사용하고, 알약 대신 포탄을 사용하게 되었는가? 서로 다두고 죽이는, 영광을 위한 그들은 그렇게 그들의 인생을 낭비했고, 우리의 인생은 우리에게 이렇게 덩그마니 남았으니 …. .. 1)1) 불데르. 『철학서한』의 「부퐁」에 발췌된 사무엘 가르트의 『의료원』·
밀턴의 명시를 희화화시키고 있는 죤 필립스의 다음 시를 보자.
천상의 뮤즈여 지금까지 산문도, 시도 다루지 못한 것을 노래해다오 일 실링이 ……2)2) 죤 필립스, 『찬란한 일 실링』, 1701.
이렇게 시작하여 밀턴은 일 실링, 번쩍거리는 예쁘고도 귀여운 일 실링을 가진 사람의 행복을 아주 엄숙한 어조로 노래한다. 그 일 실링을 손에 쥔 사 람에게서는 이제 더이상 창백한 얼굴도 궁핍한 모습도 찾을 수 없다. 그는 이제 어떤 선술집이건 들어가서 거품이 이는 맥주와 신선한 굴을 주문할 수 도 있다. 슬픔은 이제 그만이다. 슬픔이 밀려들라치면, 그는 어떤 수를 써서 라도 그것을 몰아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는 한 편의 코메디인가? 사실, 그렇다. 《수다쟁이》조차도 영어로 쓰여전 가장 아름다운 시가 있다면 그것 은 죤 필립스의 〈찬란한 일 실링〉이라고 서슴없이 주장하고 있다.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포프도 책상 앞에 앉아 씨름하던 끝에 『잘려진 머 리카락』을3) 쓰는 데 성공한다. 브왈로가 색다른 작품을 프랑스 문학에 보탠3) 『열쇠도둑』, 1712.
데 대해 긍지를 느꼈다면, 포프는 포프대로 색다른 것을 찾아낸 데 대해 긍 지를 느꼈다. 포프는 기존의 시에서는 아무것도 빌려오지 않기로 작정한다. 그가 쓰려고 하는 시는 술책을 배제한 시였다. 시의 술책은 행위를 조종하 는 신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시적 신비감은 술책에 달려 있었다. 그 러나 그는 너무 자주 사용해서 이제는 전력나 버린 천사나 악마 대신 공기 의 정령, 땅의 정령 그리고 불도마뱀을 사용해 불 생각을 한다. 그는 그것 들을 마술의 세계에서 빌려온다. 문제는 빌려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먼저 빌리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 다음 그는 아주 색다론 생각을 또 하나 해낸 다. 시의 세계에 끌어들일 수 없는 어떤 것, 가령 카드놀이 같은 것을 시에 끌어들여 묘사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아주 기막힌 작업이 될 것 같았다. 각 고 끝에 위대한 예술이 탄생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랑에 빠진 어떤 귀족이 짝사랑하는 여자의 머리를 잘라 간직한다. 그녀 는 화를 낸다. 사람들과 요정들이 난리를 친다……. 아주 잘 수놓아전 꽃송 이를 방불케 할 만큼 그의 시는 재치가 있다. 그러나 고대의 가벼운 줄거리 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의 시는 우리에게 큰 웃음을 선사해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보다 큰 웃음은 이태리에서 들렸다. 토스카나 들판을 뛰노는 이태리의 뮤 즈는 훨씬 자유롭고도 경쾌했다. 토스카나의 뮤즈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은 뮤즈였던 것이다. 더이상 태양신의 딸이기를 거부한 나의, 나만의 뮤즈여 흑단으로 수놓아진 칠현금을 켜 지 않는 그대는 두박한 시골의 처녀 청량한 바람을 가르며 뛰놀고 노래부르는 그대는 아름다워라 물론 토스카나의 뮤즈에게서 영웅담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것은 아니 다. 그러나 거기에는 격식이 없다. 토스카나의 뮤즈는 먹이 앞에서 쩔쩔매는 개미처럼 들판을 가로지르며 마냥 즐거워할 뿐이다.
그녀는 오직 줄거움에 겨워 노래를 한다. 그리고 오직 듣는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 노래를 한다. 규칙을 모르는 그녀는 아무것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녀에게서는 주저하는 빛을 볼 수 없다. 이제 더이상 요정의 사랑은 없 다. 이제 명예도 없다. 이제 기사도 정신도 볼 수 없다. 기사는 게으름뱅이, 호색한, 주정꾼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롤랑은 르노와 더불어 취토록 술을 마셔댔다. 이제 마법, 마술, 기마여행, 대추적, 함정, 결두, 저주의 성, 장엄한 죽음 따 위는 조롱거리가 되어 버렸다. 모든 이야기를 희화화시킨 이태리의 뮤즈는, 어디를 향해 가는지, 또는 제대로 가고 있는지조차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현학자들을 비웃어 주고, 그들로 하 여금 비웃게 하는 일이었다. 사실 코메디아 델 아르트의 이태리 배우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이미 1697 년 추방당했었다. 그들은 지나치게 쾌활하고 대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살아 남은 사람이 있었으니, 레냐르였다. 더군다나 파리쟝들은 기 질적으로 메랑꼴릭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레냐르에게 특별한 구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바꿔치기와 기대된 기습에 능했다. 그의 국에 등 장하는 인물들도 사실은 닳아빠진 인물들뿐이었다. 그의 극에는 일가족을 살해하는 고리대금업자가 등장하는가 하면, 돈을 갈취당하는 돈많은 과부, 사랑에 빠진 처녀, 방탕한 젊은이, 그리고 혼하디 혼한 하인들이 등장하곤 했다. 그런데 기적처럼, 아니면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는 그의 능변, 풍부 한 재치, 상황에 따른 특별한 언어 감각, 대단한 유모어를 통해 그 낡은 챗 더미에서 새롭게 느껴지는 동시에 재미있는 코메디를 길어내곤 했던 것이 다. 그의 『무심한 사람』은 얼마나 쉽게 쓰여진 듯한 인상을 주는가? 그 작품의 내용을 보면 대충 다음과 같다. 주의심이 부족한 레앙드르는 구두를 잃어버린다. 그는 그것을 찾기 위해 피카르디가에서 루앙까지 길을 거슬러 울라간다. 그는 계란 반숙을 먹다가 손을 데인다. 손가락을 반숙인 줄 알고 피가 나도록 깨문다. 그는 실수로 남의 방문을 연다. 그러다가 그는 결혼예 물로 받은 시계를 잃어버린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구분하지도 못한다. 그는 그런 식의 실수를 약 십여 차례 거듭한 다음· 결혼 식 당일, 결혼한 사실조차 까먹는다. 그러나 얼마나 혼한 이야기인가? 이보 다 더 자주 써먹은 스토리가 어디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진부하기 이 를 데 없는 이야기이다. 이 연극은 라 브뤼예르의 작품을 5막으로 늘여 뺀 것에 지나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레앙드르를 보면서 눈물이 나도록 배를 움켜쥐고 웃지 않을 수 없다는 점 이다.
레냐르에게서는 심리적인 문제가 심층적으로 파헤쳐지지 않아서 자신 있 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어떤 작품, 어떤 장면에서는 몰리에르의 우수 와는 다른 어떤 우수가 느껴지기도 한다. 레냐르는 인간의 결점과 악습뿐 아니라, 부패한 사회에서의 돈의 위력까지도 모르지 않는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기침 한 번에 틀니가 달아나 버릴 것만 같은 노쇠한 노인, 열병환자, 간질환자, 중풍환자, 천식환자, 수종환자, 마름병환자 등을 주저하지 않고 무 대에 등장시킨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나이어린 소녀를 탐내는 것이다……. 『유산상속인』은 음산한 분위기가 감돈다. 그러나 레냐르의 연극에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다. 그의 연극을 전체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슬픔이 아닌,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그의 연국과 인물들은 관객을 한순간이라도 줄 겁게 하고, 유쾌하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민첩하 고 가볍다. 그들은 마냥 즐겁게 뛰놀 뿐이다. 죽음을 포함하여, 세상의 어떤 병도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거기에 서 벗어나려는 모든 노력을 헛된 일로 간주한다. 질두를 하던 인물과 탐욕 에 눈이 먼 인물이 충분히 조롱당하고, 사랑하는 연인들이 결혼에 성공하 고, 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이 인사를 하고 물러나고, 무대가 내려지면, 연극 울 관람한 관객들의 머리에 남는 것 한 가지가 있다.인생살이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우습도다!4)4) 『무심한 사람』, 1막 6장.
표면적인 웃음 밑에 스민 어떤 우수를 의면할 수 없다. 톨랜드에게서도, 콜린스에게서도 웃음은 없었다. 퐁뜨넬르에게서는 가볍고 아이러닉한 웃음 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쟝 르 끌레르크는 근엄하기조차 했다. 쥘 리의는 비극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했었다. 노년의 보쉬에는 〈웃음이 헤픈 자여 불행할지니, 언젠가 울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까지 말했다. 펜느롱도 웃음을 단정치 못한 것으로 간주했다. 루이 14세는 사시사철 웃음울 모르는 왕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인류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절름발이 악마처럼, 우리는 다른 곳을 기웃거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러면 우리는 어릿광대, 술주정꾼, 피카로, 건달, 협잡꾼, 부랑아와는 다른 사 람을 만나게 된다. 비인간적인 합리와 이성을 의면한 채, 눈물과 우수에 젖 어 사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여기에서 문제삼아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눈물을 홀렸는가 가 아니고, 그들이 마음껏 눈물을 홀릴 수 있던 시기가 언제였는가를 아는 일이다. 여기 라 포스 도비니의 연극의 한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깃털장식의 투 구를 쓴 위풍당당한 로마풍의 기사가 다른 기사에게 사랑의 아픔을 고백하는장면이다. 쎄르빌리우스 아아! 이내 슬픈 처지여 답답한 이내 마음 누구에게 하소연하리 아리따운 그녀가 내 사랑 몰라 주니 나는 기력을 잃고 말았다네 용서해 주게 이 비겁한 나를이렇게 허약한 나인 줄은 몰랐는데
어쩌겠나, 자네의 너그러운 가슴으로 내 눈물을 감싸 주게나 울음을 울다니! 갑옷을 입은 기사가 무대 위에서 눈물을 보일 수 있단 말 인가? 상대방은 감동하기보다는 분개한다. 만리루스 아니 ! 이 눈물은 ·… 차라리 자네의 그 용맹스럽던 손을 저 비겁한 로마인들의 피에 적시게나 아니, 이 눈물은 …… 슬픔이 그렇게도 크더란 말인가!5)5)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 도비니의 비극인 이 비극은 1698년 1월 18일 왕립 코메디언들에 의해 초연되었다.
무대 위에서의 웃음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었던 반면, 눈물은 수치스러 운 것이었다. 관객들은 그 이유를 몰라 의아해했다.6)
6) 라 브뤼예르, 『성격에 관하여』·
삐에르 벨르의 방에 한번 들어가 보자. 그는 그의 형 자콥에게 편지를 쓰 고 있는 중이다. 그들의 어머니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 그런 상황이라면 애도의 눈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는 형의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형의 눈물 도 인정합니다. 형이 내게 아무리 눈물을 훌리게 한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나쁘 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 어떻게 극기주의가 적용되겠읍니까? 인간으 로서 어쩔 수 없는 시련을 당하면 우리는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강인함보다는 온화한 마음이 요구됩니다. 신은 우리의 눈물을 축복하실 것이며, 우 리의 비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실 것입니다. 잠시 망설인 다음 벨르는 말을 잇는다. 〈사람들은 아무때나 울 수는 없을것입니다. 그러나 이따금 울 권리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형이 언젠가 말했던 사소한 일에도 눈물을 펑펑 쏟는 다 정다감한 사람에게 내가 찬사를 보내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런 기질을 싫어합 니다. 그런 기질은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자에게서조차 용서할 수 없는 기질입니다. 인생의 모든 일을 대함에 있어서, 남자는 적어도 남자다운 데 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다가 벨르는 형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나 저어하는 마음 에서 말을 번복한다. 〈아! 그러나 형님이 울고 싶으면 우십시요!〉 형님의 그 큰 슬픔을 제가 모르지 않습니다. 나는 형의 그 지나치게 다정다감 한 기질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지만, 이번만큼은, 형의 심기를 생각하면, 형아 홀란 그리고 아직도 홀리고 있을 눈물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기가 주저스럽기만 합니 다. 사실은 남자도 남자의 신분을 벗어나지 않는 정도의 눈물은 홀릴 수 있다고 봅니다. 무대의 주인공들도, 위대한 성 인들도 눈물은 홀렸습니다. 눈물은 마음 약 한 여자의 전유물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 …. 7)7) 『삐에르 벨르의 미출간 서한집』, 《토마 리뷰》, 1932년 8~9월.
마음이 약한 여자…… 한 부유한 부르즈와 가정의 가냥픈 여자를 예로 들어보자. 그녀는 눈물을 홀리면서 세상에서 가장 멋있게 보이는 브르되이 유 남작에게 연애편지를 쓴다. 그러나 그 남작에게 부인이 있음을 안 그녀 는 절망한 나머지 집을 뛰쳐나가 수녀가 되려고 한다. 그러나 수녀원에 채 당도하기도 전에 그녀는 붙잡혀 오게 되고, 집안에서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의 의사와 무관한 결혼을 시킨다. 안느 드 벨린자니는 페랑 부인 이 된다. 그런데 페랑 부인은 결혼 후에도 남작을 만난다. 그녀는 지금까지 있었던 어떤 연애편지보다도 아름답고 감동스러운 연애편지를 쓴다. 세상 아무도 모르는 사랑의 기쁨, 그녀만의 비밀로 남아 있기에 더욱 값전 사랑 …… 그러나 그 사랑이 활짝 펴서 향기를 발해야 할텐데, 그러지 못하는 데서 오는 슬픔…… 점점 높아만 가는 장애물 앞에서의 분노…… 모성애
와 연정의 갈등 ……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그녀의 육체가 거부하는 남편에 게 돌아갈 때의 참담한 그녀의 심경 .. …· 그녀의 감각은 명석하며 (… ... 네,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나는 당신을 흠모합니다……), 그녀의 사랑은 불행을 아 랑곳하지 않는 사랑이다(나는 우리 집안의 총애를 잃었습니다. 나는 증오해 마 땅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집안을 지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더욱 비 참한 것은 나는 그를 증오할 수도, 경멸할 수도, 협오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나 는 그를 혐오할 수 없음을 마음 깊은 곳에서 느끼고 있습니다). 이 천성적인 연인 페랑 부인은 140년 뒤에나 오게 될 낭만적 기질을 이미 보여주고 있다. 이 보다 불행한 여인이 어디 있는가! 사랑의 아픔이 사랑을 더욱 깊게 한다고 생각하는 이 여인은 사랑의 멍에를 쓰고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녀는 큐피트 의 화살을 가슴에 품은 채 태어난 여자였다.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 지 못한 그녀였다.8)
8) 『젊은 벨리즈와 끌레앙뜨의 사랑이야기』, 1689. 『브르되이유 남작에게 보낸 페랑 부인의 편지』, 외젠느 아쓰 출판사, 1880.
사실 사회가 부패해 있었다. 사치병이 만연했다. 사치는 돈을 필요로 했 다. 투기, 복권, 카드, 똥띤느가 유행했다. 그러다가 1709년 『뛰르까레』라는 작품이 세상에 나왔다. 일개 천민에 불과하던 뛰르까레라는 인물이 징세청 부업으로 떼돈을 번다. 졸부가 된 그는 돈이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뛰르까레』의 작가 르 싸아쥬는 그가 야유와 멸시를 받는 장면으로 작 품을 끝맺고 있다. 그러나 그 작품이 돈을 만능으로 묘사한 작품은 아니었 지만 그 작품은 적어도 돈이 많은 것을 부패시켜 버린 사회를 드러내 보여 주고 있었다. 하인 프롱땡과 하녀 리세뜨의 대화는 그 점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나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찬양한다. 우리는 바람난 여자의 등 을 쳐 먹고, 그 여자는 사업가의 등을 쳐 먹고, 사업가는 다른 사람의 돈을 사기쳐 먹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재미있는 협잡놀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당꾸르의 연극도 세상의 일면을 잘 반영한 하나의 조그만 거울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작품에 의하면 예쁜 얼굴을 하고, 순진과 명예를 가장한 채, 돈밖에 모르는 타락의 대명사는 여자라는 것이었다.
물론 여자도 철학과 과학을 할 수 있다. 해리팍스와 퐁뜨넬르는 여자의 재능을 인정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여자들이 전적으로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에 의하면, 남자들은 여자 를 구속하는 법을 만들었고, 힘을 함부로 사용해 왔다. 남자들은 여자들에 게 천한 일을 맡겼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은 관습이 되어 버렸고, 더더 욱 나쁜 것은 그것이 폐습으로 뿌리를 내렸으며, 뿐만 아니라 교육까지 합 세하여 여자의 처지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제 는 이 모든 것이 개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논리적으로 보나, 합리적으로 보나, 여자가 열등한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여자도 남자와 동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여자도 남자처럼 행정관청, 교 육기관, 군대, 그리고 더 나아가 교회에서 똑같이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 장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똑똑한 여자들』을 잊지 않고 있는 브 왈로는 다론 의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똑똑한 여자, 젠 체하는 여자, 음탕한 여자, 태깔부리는 여자, 환상에 빠진 여자 등등을 거침없이 조롱했 다. 그는 약간 아이러닉한 어조로 행복한 결혼을 권했다. 그러나 뻬로는 달 랐다. 그는 여자를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나섰다. 뻬로에 의하면 브왈로는 구 시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었다. 〈호라스와 쥐베날의 주제 를 벗어나지 못한 브왈로는 구식 사고방식을 털어내지 못한 채 여자들을 풍 자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올바로 세상을 볼 줄 알고, 올바론 판단을 할 줄 아는 근대인이라면 고대와 오늘날의 풍속은 상이함을 알아야 한다. 여지들 은 이제 찬양받아야 한다.〉 이태리의 철학자 파올로마티아 도리아도 뻬로와 같은 말을 했다. 〈어떤 덕에 있어서도 여자가 남자에 결코 못 미치지 않는 다.〉
여자들은 구습이 안겨 준 멍에를 벗어내기에 이르렀다. 구습에서 벗어난 여자들은 금방 물의를 일으키고 다녔다. 여자들은 뻔뻔스러워졌고, 탐욕스 러워졌고, 끈질겨졌다. 이제는 정념이 네 활개를 치기에 이르렀다. 정영은 봇물처럼 흘러넘쳤다. 흐느낌과 의마디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것은 온통 정영이 지배하던 다음 세기를 부르는 호출신호와도 같은 것이었다. 몇 사람이 감성을 억누르려고 했지만, 그것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감성의 탄성은 영국의 콜리 싸이버라는 연극배우에게서 터져나오 기 시작했다. 그는 당대에 깊이 스며 있는 그 감성에의 은밀한 취향을 탐지해 냈던 것이다. 자유사상이 만연했고, 방탕한 귀족은 어디에서고 볼 수 있 었다. 영국의 문학에 예의와 도덕을 회복시켜 줄 때가 왔다고 의친 제레미 콜리에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도덕의 문제는 감성의 문제 와 동반관계에 있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 못된 남편이 있다. 그는 아내를 버리고 젊은 여 자와 놀아난다. 그는 그런 사람들이 언제나 그렇듯이 술과 계집으로 전재산 을 날린다. 그는 알거지가 되어 영국에 돌아온다. 그는 세상을 여전히 조소 하며 산다. 다름 아닌 로브리스가 그 주인공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 다. 그의 부인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아만다이다. 그녀는 불한당 같은 남 편을 잊지 못한 채, 그를 회심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그녀는 도 덕에 호소해서 그를 돌아오게 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도망친 다. 감정에 호소한다. 그는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꺼져가는 애정에 호소하는가 하면, 관능에 호소하기도 한다. 마침내 잘못을 뉘우친 로브리스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한 다. 〈오! 당신은 나를 악의 늪에서 건져 주었소 …· 내가 무릎 꿇고 당신 에게 감사할 수 있게 해주오. 고결한 당신의 미덕은 마침내 나를 굴복시키 고 말았소. 나 여기 이렇게 엎드려 나의 수치스런 과거를 용서받고 싶소. 쏟아지는 이 눈물에 나의 과거를 씻게 해주오.〉 로브리스는 감정의 학교에 합격한 셈이다. 콜리 싸이버의 위의 도덕국 「사랑의 마지막 술책표븐 1696년 런던의 왕립 극장에서 막을 울려 대단한 갈채를 받았다. 그 작품이 성공하자, 전지 희극, 부르즈와 희극, 도덕 회국 등의 여러가지 회국들이 선을 보였다. 그러나 그 것들은 여전히 바도덕성을 탈피하지 못한 작품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거기에는 주벽과 계집질을 일삼는 인물, 정숙한 여자를 함부로 농락하 는 인물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몇몇 새로운 기법이 보이지 않 는 것은 아니었지만, 낡은 방식의 기법들이 더 많았다. 예컨대 변장, 가면무 도회, 주소가 잘못된 편지, 오해 등에 의존하는 방식둘이 그런 것들이었다. 콜리 싸이버도 그 중의 하나였다. 콜리 싸이버는 로브리스가 그의 부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를 마마자국 때문인 것으로 처리한다. 장면장면마다, 또는 막이 끝날 때마다 장황하게 펼쳐지는 도덕적인 대사들은 어색하고 부담스럽다. 도덕적인 대사들은 그것 자체로는 결코 아름답지도 못하며, 자연 스럽지도 못하다. 그러나 만약 그의 도덕적 대사들이 용서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양심을 대변하는 동시에 동일한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전체적인 대 사에 의해서이다. 도덕의 개혁은 다른 것과 달라서 권위나 물리적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영혼의 동의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도 덕의 개조를 위해서는 영혼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개조는 성급 하게 의지에 호소하기에 앞서, 감정으로 영혼을 일단 뒤흔든 다음, 그리고 나서 고치려고 시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가 방탕한 부 인에게 수치심과 후회만을 안겨 주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그는 아내에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아내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남편은 연 출가가 되어야 한다. 거짓 난봉꾼과 그 난봉꾼으로부터 보수를 받는 꼭둑각 시를 상상해 내서 그녀에게 이야기 해준다. 그러면 그녀는 과오를 느끼기에 이를 것이고, 그녀는 거짓과 배반, 그리고 불륜을 혐오하기에 이룰 것이고, 그녀는 마침내 도덕적인 정숙한 본래 모습을 되찾게 될 것이다.
1722년에 무대에 울려 성공을 거둔 스틸의 『진정한 연안들』이라는 작품의 줄거리를 한번 살펴보자. 사람들이 서로를 측은하게 여긴다. 개보다도 충실 한 늙은 하인들은 그들의 주인이 베푼 은혜에 늘 감사하며, 주인이 곤궁에 처하면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한다. 방탕한 여자들은 방탕한 생활을 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자들은 정숙하고 다정하다. 바록 마음이 한 때 비뚤어졌다가도 때가 오면 되돌아온다. 어떤 시련에도 불구하고 성실한 사랑은 반드시 보상을 받는다. 아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아버지는 찬양받 는다. 그리고 그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란 아들은 그의 아버지 못지 않게 정이 많은 사람으로 자라나게 된다. 정이 많은 아버지의 정이 많은 아 둘은 닿자마자 달라붙는 미모사처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하든 악의 존재를 믿지 않는 순수하고, 천진난 만하고, 매력적인 아이는 그런 아버지 밀에서 태어나 자러는· 것이다. 동정 심이 없는 사람, 달리 말하면 거친 성격의 소유자, 질투를 감추지 못하는 사 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질투와 거친 성격도 애정과 사랑으 로 감싸안으면 감화를 받는다. 오해는 차츰 풀리게 되고, 이제 모든 사람들 이 눈물을 홀리면서 서로서로 포옹한다.간단히 말하자면, 이제는 문학의 상당 부분아 〈휴머니티를 위해 봉사하는 경향〉을 보여주기 에 이르렀다.9)
9) 스틸, 『사랑스런 남편』, 1705년에 상연된 코메디 .
오페라,
오페라보다 이성에 어긋나는 것이 있던가! 눈과 귀를 즐겁게 할 뿐 정신 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반란이었다. 처 음부터 끝까지 온통 노래뿐이었다. 사랑의 고백만이 아니라, 대사, 메시지, 명령, 욕지거리, 고해성사, 비밀 이야기 등 모든 것을 노래로 해댔으니 얼마 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주인이 노래로 하인을 불러서 심부름을 시킬 수 있는가? 노래를 부르면서 친구에게 괴로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가? 노 래를 부르면서 토론을 할 수 있는가? 노래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가? 노래 를 부르면서 싸우고, 노래를 부르면서 상대방울 칼과 창으로 찌를 수 있는 가?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 아닌가?〉 〈만약 당신이 오페라가 무엇인지 알 고 싶어 한다면, 나는 오페라를 이렇게 말해 주겠다. 오페라란 시인과 음악 가가 만나서 행하는 아주 야릇한 작업이라고, 그러나 그들은 서로서로에게 장해가 되어 결국 음악도 아니고 시도 아닌 아주 못된 작품을 하나 생산해 내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오페라라고…….〉오페라의 무대 장치 또한 희안하기 짝이 없었다. 심리적인 요소는 간데 없고, 오직 깜짝 쇼가 무대를 지배할 뿐이었다. 나는 마차, 승천하는 신, 마 법에 걸린 괴물 등 기상천의한 장치들 일색이었다. 얼마나 벗어나 버렸는 가! 전리, 사실임직함, 논리, 질서 등을 존중하던 쌩 떼브르몽, 브왈로, 라 브뤼예르, 에디슨, 스틸, 그라비나, 크레침베니, 마페, 무라토리 같은 사람들 은 비합리적인 오페라처럼 천대받아 마땅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음악, 춤, 장치, 장식 등으로 아무리 무대를 화려하게 꾸민다 해도 오페라는 여전 히 어리석은 짓에 지나지 않는다.〉10)10) 쌩떼브르몽, 『오페라에 관한 서한』·
물론 오페라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톨린 견해일 수만은 없었 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페라는 사람들을 즐겁게 했으니 …… 그것은 아 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고전주의 신봉자들을 분노케 하는 뜻밖의
사실이었다. 오페라는 어디에서든 승리했다. 플로렌스, 베니스, 로마, 나폴 리 등 오페라는 이태리의 모든 도시를 정복했으며, 드레스데, 라이프치끄 등 독일 음악의 요람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오페라는 특히 비엔나에 서 대환영을 받았다. 왕이나 대공은 극장, 무대장치가, 작곡가, 안무가, 아름 다운 프리 마돈나를 개인 소유하려고 할 정도였다. 파리는 륄리와 끼노를 유명하게 했다. 런던은 헨델을 유명하게 했다. 늦은 감이 있었지만 마드리 드도 예의는 아니었다. 1691년에 출간된 마담 도누아의 『스페인 여행기』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오페라가 아직은 초라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 다. 그녀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대장치는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신 이 강림할 때면, 극장을 가로질러 있는 대들보를 타고 내려오게 했다. 태양 이 비치는 장면에서는 열두어 개의 지등을 한데 모아 비쳤다. 알선느가 주 문을 의워서 귀신을 부르면, 그들은 지옥으로부터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왔 다…….〉 그러나 스페인도 변화의 물결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태리의 한 극단이 거기에 상륙했던 것이다.
오페라에 대한 대환호는 어디에 연유한 것이었을까?사람둘은 감동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방을 벗어나지 못한 채, 메카 니즘에 얽매여 있던 고전 비극은 그들의 욕구를 채워 줄 수 없었다. 사람들 은 음악이 그 빈틈을 메워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한 심리적인 요구는 예술 에 변화를 가져오게 했으며, 예술의 새로운 형태를 가능하게 했다.오페라는 종합적인 예술 형태라고 할 수 있었다. 소리, 색채, 동작, 눈, 귀 …… 육체를 빠져들게 하는 오페라는 감각적이고도 달콤한, 분석을 허용하 지 않는 아주 새롭고도 감동적인 예술 형태였다. 오페라는 신비로울 정도로 매력적이었고, 기쁨을 주었다. 오페라는 설명할 수 없는 깊고도 오묘한 관 능을 품고 있었다. 오페라를 매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그 소리는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매도를 일삼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착각 한 채, 이미 고개를 쳐든 어떤 욕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관객은 신비, 감동, 그리고 애정을 원하고 있었다. 영혼은 정복당하기보다는 〈뜻밖의 것〉 울 원했다.1l) 변화는 거기에 있었다.11) 마담 드 쎄비녜의 1674년 1월 8일자 편지.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럽 전체는 이태리의 오페라를 열렬히 환호했 다. 오페라의 정수를 보여준 이태리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았다. 이태 리는 오페라와 더불어 연주자까지도 공급했다. 뿐만 아니었다. 이태리의 멜 로드라마는 주변국가들을 잠식해 들어갔다. 파리가 저항했다. 그러나 이태 리에 저항하는 프랑스의 선봉장도 이태리인이었다. 게다가 저항하는 프랑스 인들은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 절반은 이미 정복당하고 난 뒤였다. 독일음악을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던 함부르크도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 이태리는 오페라의 세계를 식민지로 거느린 셈이었다.
그러면 오페라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으 며, 그 과정에서 빚어진 주도권 쟁탈전은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를 한번 살 펴보기로 하자.사실은 오페라 극작가들도 처음에는 합리성에서 출발하려고 했다. 그들은 합리성을 존중함으로써 비평가들의 날카로운 예봉을 피하면서, 고전 비극 작가들과 작품으로 한판 겨루고 싶었다. 그러한 작가들의 예가 적지 않았다. 오페라계의 꼬르네이유가 되겠다고 선언한 왕궁 출입상인 아포스톨로 제노, 베네데토 마르첼로 등은 극본을 규격화하고, 불일치를 없애고, 필요없는 부 분을 가능한 한 삭제하려고 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가능한 한 비극에 가까 운 오페라를 쓰려고 했던 것이다. 또한 메타스타세는 멜로드라마를 아리스 토텔레스의 시학의 이름으로 정당화시키려고 한 작가였다.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서사시나 비극만을 인간의 유일 최고의 창작 으로 알고, 오직 거기에만 매달려 문학적 환상의 제물이 되어버린 많은 사 람들은 기실 문학도 음악적 규칙에서 비롯된 것이며, 문학은 음악에 순종하 는 하나의 충실한 시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음악은 어떤 곳에서는 선율을 요구했고, 다른 곳에서는 듀오를 요구했으며, 또 다른 어떤 곳에서는 합창을 요구했다. 음악은 어떤 리듬과 어떤 대사는 테너에게 맡기고, 다른 것들은 베이스에게 맡겼다. 모든 것을 요구하는 것 이 음악이었다. 심지어 쉽게 또는 하모닉하게 발음할 수 없는 어떤 어휘를 요구하기도 했다. 반면 오페라 작가가 되기는 쉬웠다. 유연하고 민첩한 재 치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작곡가, 지휘자, 프리마돈나의 요구대로 가능한 한 그들의 연기를 편하게 해주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어휘가 풍부하고, 소리가 부드럽고 조화로운 이태리 언어는 사상을 표 현할 때와는 다른 장점이 있었다.
이태리 음악처럼 환희에 찬 음악이 있던가! 그 힘찬 용솟음! 얼마나 풍 요롭고, 얼마나 의기양양한가! 무궁무전하고 광대무변한 이태리 음악은 프 랑스 음악뿐만이 아니라 결코 어떤 음악도 이제까지 보여주지 못한 것을 관 객에게 보여주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정열, 활기, 개성이었다. 신중하고 논리적인 전개와 규칙과 화음의 고전주의를 벗어난 이태리 음악은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시도했다. 이태리 음악은 대담하게 영혼을 도취시켰다. 그 런데 이태리 음악의 그러한 특성을 잘 간파한 사람들은 당대의 프랑스인들 이었다. 이태리 음악과 프랑스 음악을 어떻게 비교하고 있는지 한번 들어보 자. 〈프랑스 음악가들은 규칙을 어기면 큰일 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프 랑스 음악가들은 귀를 존중하고 귀를 간지럽히면 그만이었다. 그들은 규칙 을 철저히 지키고도 규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나하는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그런데 대담한 이태리 음악가둘이 나타나 음악의 가락과 양식을 뒤바꿔 버 렸다. 이태리 음악가들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전혀 불가능한 음을 두 곱 네 곱으로 늘여빼곤 했다. 그들은 지속음을 어떻게나 늘여빼는지 거기에 익숙 지 않은 사람은 그 대담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거기에 찬사를 보내 지 않을 수 없었다.〉 간단히 말해서 〈이태리 음악가들은 음악을 듣는 사람 둘로 하여금 음악이 흉칙한 불협화음 때문에 전체적으로 균형을 잃어 망가 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지만, 곧 규칙성을 회복 함으로써 음악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놀라게 하곤 했다. 불협 화음에서 화음이 솟아올랐고 전혀 예기치 않았던 아름다움을 그 불협화음 에서 길어내곤 했다.〉12)12) 라그네, 『음악과 오페라에 대한 이태리 음악가들과 프랑스 음악가들의 견해』, 1702.
성스럽기만 하던 규칙을 깨는 데서 오는 기쁨, 그것은 오직 과감성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즐거움이었다. 바이올린이 활의 움직임에 따라 소리가 울려나오듯이, 우리의 살과 신경은 오페라의 음악에 따라 환희의 탄성을 질 렀다. 이태리 음악가들은 그들의 탁월한 음악적 재능으로 유럽 전체를 매혹 시켰다. 이태리 작곡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 중의 하나였던 스칼라티
에게 제자들이 물었다. 〈선생님은 이러저러한 충고를 어떤 근거에서 하시는지요?〉 그는 간단하게, 〈감각에 근거를 두고 있지〉라고 대답했다.
제4장 국민적 요소, 대중적 요소, 본능적 요소
국민적 요소우리는 비평, 분석, 논리, 합리성 등에 저항하는 어떤 시대적인 힘을 찾아 보려고 했다. 그것은 아직 먼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나중에 오게 될 상상력 과 감성에 앞선 어떤 것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힘들을 구체적이고도 다양한 삶의 형태들 속에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러한 저항의 힘들이 어떤 원리를 중심으로 뭉쳐졌는지 그 중심원리를 좀더 조감해 볼 수도 있 을 것이다.나라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세한 차이는 결코 단순 하지 않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합리성도 여러가지가 있어서 그것을 획일적 으로 정리하기는 곤란했다.물론 어떤 나라에서건 사고방식과 글쓰는 방식이 동일한 방향으로 기울 어지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질서, 정확성, 엄정 한 절제, 뼈를 깎는 인내에 의해 비로소 얻어지는 견고한 아름다움 등이 최 고로 떠받들어졌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은 전리가 있었으니 일반원리에 대 한 해석의 차이에 의한 전혀 예기치 못한 새로운 진리가 그것이었다. 통일 성을 지향하는 전체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해석은 달랐으며, 심지어 대 립적인 양상까지 보였다. 예컨대 고전주의를 수용한 영국이 한편으로는 프 랑스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불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절 대권력을 억제할 필요성에서 고개를 든 개혁에의 내적 욕구가 그것을 요구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영국의 고전주의는 타협에 의해 이루어전 별개의 영국식 고전주의였다고 할 수 있었다.1) 영국의 고전작가 스위프트의 예를 들어보자. 사실 그는 영국의 산문을 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작가 중의 하나였다. 스위프트는 강의실에서 강독되어져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이다. 그의 재능과 천재성은 그를 영국의 가장 위대한 작가 중의 하나로 꼽 게 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의 고전주의란 브왈로를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 고전작가의 눈으로 보면 얼마나 탈선적안 고전주의로 보였을 것인가? 「물 통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1704년의 어떤 작가가 그 작품을 펼쳐 들었다 고 상상해 보라! 그는 얼마나 놀랐을 것인가! 아니 그렇게 아무렇게나 휘 갈건 작품은 일찍이 없었다. 독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사람은 글이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이구만! 이 사람은 단편적인 사고를 이리저리 굴리는 사람이구만! 이 사람은 연결기법조차 모르는 까막눈이구만!〉 그 독 자는 본론보다 서론이 긴 스위프트의 작품에서 변덕밖에 보지 못한다. 〈한 동안 여기저기 더렀으니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서, 특별한 장면이 다시 나타 나지 않는 한, 여행이 끝날 때까지 당초의 주제를 벗어나지 않기로 하겠다〉 라고 말하는 작가는 아무런 형식 논리도 따르지 않는 듯이 보인다. 여담을 위한 여담을 줄기는 이 작가를 어떻게 생긱하면 좋을까? 거기에는 엄청난 이미지와 기이한 상상이 무성하다. 〈지혜란 우리가 찾아다니지만 보이지 않 는 여우와도 같다. 지혜란 질기고 두껍고 맛없는 껍질로 포장된 맛있는 치 즈와도 같다. 지혜란 목구멍 깊숙이 들어갈수록 그 맛이 더 냐는 초콜릿 과도 같다. 지혜란 알을 낳을 때마다 듣기 싫은 소리를 지르는 암닭과도 갇 다. 지혜란 찰못 선택하면 이빨울 부러뜨리든지, 아니면 벌레만 한입 선사 하는 호도열매와도 같다.〉
1) 르구이, 까자미앙, 『영국문학사』, 1924, p. 694.
그는 닥치는 대로 때리고 부수는 괴벽의 소유자 같다. 그는 가톨릭에서 시작하여, 루터파, 칼빈파를 비롯하여, 모든 교파를 공격한다. 그는 살며시 어루만지는 체하다가 물어뜯는 미친 개를 연상케 한다. 광분하여 욕설을 퍼 봇는 그는 마치 미쳐서 다시 태어난 아리스토파네스 같다. 우화와 아이러니 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끔찍한 농담도 서슴지 않는다. 〈나는 지난 주에 홀
라당 벗은 여자의 알몸을 보았네, 자네는 옷을 입지 않은 여자가 얼마나 불 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지를 모를걸세 …….〉
고전주의 규칙을 인정하는 동시에, 고전주의 규칙을 지키려고 노력한 얼 마나 많은 영국인들이 마음 한구석에서 자유를 그리워했던가! 대부분의 영 국인들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호라스로 충분했다. 그래서 그들은 프랑스 의 엄격성과 완고함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은 고급 꿀을 얻기 위 해 벌의 날개를 잘라서 벌이 벌통에서 멀리 날아가게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 벌은 정원을 벗어나 들판을 한껏 날고 싶었다. 넓은 들판을 가 로지르면서 아름다운 꽃의 향기에 묻혀 자유로이 꿀을 채취하고 싶었다.〉2)2) 윌리암 템플 『작품집』 중 『시론』, 1692. 『시에 관한 소고』, 우트레히트 출판사. 1693, 1694.
풍속의 경우에는 문학보다 저항이 더 심했고, 집요했다. 다시 말해 뿌리 깊은 관습, 특수한 존재방식 등이 문제가 되면 싸움은 격렬하기조차 했다. 우리는 영국의 코메디를 접하다 보면 거기에 스며든 강한 반발을 보고 놀 라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는 하나의 파렴치한 속물에 지나지 않았다. 충선 생, 타락한 하인들, 이쪽저쪽 넘보는 하녀들, 옷장사들, 건달둘, 그리고 번지 르르한 의양을 자랑하지만 알고 보면 겁장이, 사기꾼에 지나지 않는 허영에 찬 양반들이 그 속된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것이었다. 영국인들은 그 러한 프랑스 건달에 대해 영국 신시를 내세웠다. 영국신사는 정직하면서도 소박했다. 영국 신사에게 거친 면이 없지 않았지만, 영국인들은 그 거친 면 조차도 미덕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내용 없이 겉멋들려, 마네킹이나 위선자 가 되는 것보다는 솔직한 표현을 하는 사람, 거칠지만 솔직한 사람, 순수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더 높이 평가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영국인들의 많은 작품에서 영국인들을 돋보이게 하는 조역을 맡았을 뿐이었다. 말하자 면 프랑스인들은 영원불멸의 영국적 자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배 경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태리도 프랑스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사실 이태리는 어떤 의미 에서 프랑스의 노예나 마찬가지였었다. 그러나 섣부른 단정은 삼가하자. 왜 냐하면 알프스 너머의 몇몇 시인들에게서는 로마의 전통이 아직 생생하게 지켜지고 있었으며, 그들은 언젠가는 정당한 권리를 회복하게 되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들에 의하면 프랑스는 지각생에 지나지 않았다. 이태리 의 고전주의 이론가들에 의하면 이태리는 고전주의에 있어서 프랑스보다 시 기적으로 앞서 있을 뿐만 아니라, 이태리 고전주의야말로 순수하고 올바론 유일한 고전주의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들은 이태리 고유의 문예부흥을 고집스럽게 추진했다. 누가 그들의 공적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인가? 꼬르네이유와 라신느를 모방하되 그들을 능가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그들은 그리스의 비극 정신에 충실하려고 애썼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리스 비 국정신처럼 중요한 것이 없었으며, 그들은 그것을 바로잡아 보려고 했던 것 이다. 그러면 프랑스는 어떤 일을 했는가? 그들에 의하면 프랑스는 그 고귀 한 모델들을 변질시키고 개악시킬 뿐이었다. 프랑스는 고전비극을 여성화시 켰을 뿐만 아니라, 연애물로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태리 고전주의 이 론가들이 섬기는 가장 위대한 스승은 역시 소포클레스였으며, 그들은 그들 의 시선을 그에게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모든 나라들이 우위다툼을 했다. 모든 나라들이 과거를 내세워 귀족칭호를 차지하려고 했다. 어느 나라치고 언어의 역사가 깊지 않은 나라 가 없었다. 모든 나라가 가장 오래된 산문과 가장 오래된 문화를 가지고 있 었다. 그리고 모든 나라들이 자기네 나라 것만을 최고라고 여기는가 하면, 다른 나라 것을 사이비로 매도해댔다.그러한 면에서는 독일보다 심한 나라가 없었다. 독일은 다른 나라에 비해 그 존재가 너무 미미해서, 언제나 짓눌리기만 했었다.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을 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해 왔던 독일은 언제나 후위자리를 면치 못했었다.그러나 독일은 독일 나름대로 생명을 지키려고 안간힘울 다했다. 독일은 존재확인을 위해서 백방으로 싸웠다. 내적인 개혁으로 통일을 이룩해야 한 다고 퓌팬도르프, 라이프니찌 등이 의쳐댔다. 법? 독일법은 로마법이나 교 회 법규보다도 우위에 서는 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대학에서 로마법과 교회법만을 강의하는 데 대해, 그것처럼 잘못된 것이 없다고 비난울 서슴지 않았다. 이제 로마법과 교회법은 국민법, 또는 토착적인 법에 그 자리를 내 주어야 될 때가 왔다고 선언했다. 언어? 그들은 그리스, 라틴, 그리고 다른어떤 나라의 언어보다 아름다운 언어가 독일 언어라고 생각했다. 그들에 의 하면 독일의 언어는 기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문학? 그들은 독일의 문 학보다 앞선 문학이 없다고 자부했다. 1682년 석학 모르피우스는 그 점을 증명하기 위해 엄청난 자료들을 수집했다. 그의 방대한 저서의 페이지 페이 지는 조국 독일에 대한 사랑을 진지하게 느끼게 했다. 그에 의하면 〈독일은 한스 사하 같은 위대한 시인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스칸디나비아 인으로 오인되고 있는 오라우스 뤼도벡크 같은 시인도 독일 시인이었음을 상기시킨다. 때로는 지나치게 비약적이기는 하지만, 그는 〈독일에 시인의 혼 적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시인의 존재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고 선 언하기도 했다. 어떤 민족에 있어서건 시는 그 민족 최초의 문학 장르였으 며, 따라서 민족이 존재하는 한, 시인은 우리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존재했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부드러운 그리스어, 당당한 로마어, 우아한 프랑스어, 수려한 이태리어, 풍 부한 영어, 위엄 있는 프라망어 등의 장점들을 고루 갖춘 독일어는 유럽이 시샘하는 걸작들을 수두룩히 생산해낼 것이라고 많은 독일인들이 호언했다. 그러다가 1689년 카스퍼스 폰 로헨슈타인의 『아르메니우스와 투스넬다』가 출판되자 독일에서도 드디어 승리의 함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 위대한 작가가 독일 민족의 자존심을 만족시켜 줄 만한 주제를 찾아냈 던 것이다. 로헨슈타인은 쇠락해 가던 시기의 로마가 아니라 아주 번창일로 에 있던 로마를 쳐부순 아르메니우스를 찬양하는 주제의 작품을 썼던 것이 다. 승리의 함성, 환희의 탄성이 독일 곳곳에 메아리쳤다……. 『동경』만큼 영원한 독일을 노래하는 작품도 없었다. 어떤 시대건 어두운 영혼, 몽매한 의식을 깨치려는 계몽주의자는 있게 마련이다. 시인이자 교육 자였던 크리스챤 바이제가 그였다. 그는 매년 그가 지도하는 연극반 학생들 을 위해 작품을 쓰곤 했다. 연극은 무대에 오르는 학생들에게는 큰 기쁨이 었던 반면 부모들에게는 자랑거리였다. 1688년에 무대에 올려진 그 중의 한 작품의 제목은 『불만스런 사람』이었다.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란 베르툼누스는 상식적으로 보면 가장 행복해야 할 사람이었다. 그 러나 그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많은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몰랐으며, 무 엇이 불만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여자를 통해서 그 심적공허를 메우려 했다. 그러나 그것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명예를 추구해 보 가도 했다. 빠르나스의 거장들과 어울려 지내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소용없었다. 절망에 빠진 그는 거의 죽을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죽음 으로밖에 그 공허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인가? 작품은 이 지점에 이르러 갑 자기 심리적인 톤을 도덕적인 돈으로 바꾼다. 콘텐토와 키에데라는a)한 농촌 부부가 등장한다. 그들은 엄청난 불운을 겪는다. 그러나 그들은 인생에서 많 은 것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주어전 삶에 만족한다. 베루툼누스는 그들 의 삶을 보고 그들의 말을 둘은 다음에야 비로소 뉘우친다.
a) 농촌 부부로 등장하는 이 인물들의 이름 콘텐토와 키에테는 〈만족〉과 〈평온〉이라는 뜻 울지니고있다.
물론 그가 하루아침에 대담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긍지와 자신감 을 단 한순간에 되찾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그는 그의 병이 언젠가는 치 유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죽는 그날까지 지겨워하며 살아 가는 사람들, 콘벤토도 키에데도 어쩌지 못히는 제2의 베르툼누스를 하나둘 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아르메니우스와 두스넬다』를 포함하여 크리스천 바이제의 무수 한 시를 찬양해 마지않던 비평가들이 정작 일찍이 볼 수 없던 소설 하나를 눈여겨보지 못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 작품은 다름 아닌 그림멜스 하우젠의 『백치 찜풀리시스무스』였다.b) 집단의식이 적나라하게 표출된 그 작품은 주인공의 역경에 초점을 맞춰 보면 하나의 피카레스크 소설이라고 도 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너무 지방색이강하게 드러나는 그 작품 은 바로 지나치게 강한 그 지방색 때문에 번역이 어려웠으며전 지금도 프랑 스 같은 몇몇 나라에서는 번역하기가 불편한 작품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b) 찜풀리시스무스라는 독일어는 〈순박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c) 사실 강한 지방색은 피카레스크 소설 특칭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백치 찜풀리시스무스』에 대한 뒤에 이어지는 작가의 해설은 피카레스크 소설의 특칭이다.30년 전쟁이 그 작품의 주제이다. 불타 버린 곡식들, 약탈당한 마을, 고문으 로 얼굴이 일그러진 농부 …… 홍건한 피 …… 타오르는 불길 …… 그런데 도 찜플리시스무스는 소박하고 건전한 정신을 잃지 않는다. 부패한 문명의 한가운데 내던져진 주인공은, 많은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고 승리자가 된다.
이 작품에서는 신념의 주제를 읽을 수도 있다. 주인공은 상징의 숲을 헤매 듯이 방방곡곡 가지 않는 곳이 없으며, 영원한 이상향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한 채 현실을 산다. 거기에서는 종교적 주제를 찾을 수도 있다. 주인공은 수많은 시험, 죄악, 회개를 거친 다음에야 영원한 기쁨을 맛볼 수 있다고 믿 는 사람이다. 그러한 주제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면서 나름대로의 고유한 어 조로 아름답고 풍부하게 점증적으로 발전 전개된다. 다른 나라가 독일을 죽 어가는 나라라고 생각하전말건 찜플리시스무스는 더욱 힘차게 솟아오르는 민족의 정기를 서사적으로 노래한다.
아직 누구도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이론을 내세우지는 않 았다. 조국이라는 어휘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한 사람도 없었다. 민족의 개 념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었다. 고향이 무엇을 영혼에 불러 일으키는지 학문적인 설명을 시도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산산조각 난 이태리 앞에 선 이태리인, 양분된 독일 앞에 선 독일인, 조국 폴랜드에 선전포고하는 폴랜 드인, 미몽을 헤어나지 못하는 스페인 앞에 선 스페인인은 무엇인가를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가슴 깊은 곳에서 느끼면 서부터, 간단히 말해서 나라의 명예와 관계한 어떤 것을 느끼면서부터, 분 쟁과 싸움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보편, 합리성 등은 민족 앞에서는 그 빛을 잃곤 했었다.대중적 요소이따금 노래가 들려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간혹 들려오는 그 노래는 오드, 마드리갈, 또는 풍자시도 아닌 거의 미개인의 노래에 가까운 노래였다. 레네 라드브로히라는 중세의 어떤 스칸디나비아 왕은,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독사에 물린 후 독이 온몸에 퍼져 숨이 벚는 순간까지 노 래를 불렀다고 한다3) 그런데 그 노래는 기욤 도랑쥬와 루이 14세 시대의 사 람들조차도 매료시킬 정도로 아름다운 노래였다. 뿐만 아니라 17세기 사람3) 윌리암 템플 『작품집 』중에서 『영웅의 미덕에 관하여』, 재2부, 런던 1690, pp.234 -235.
둘은 라포니라는 북극 지역 주민들의 비탄조의 노래를 홍얼거리기도 했다. 오라 땅을 그리는 노래를 한번 들어보기로 하자.
오 아침해! 그 영롱한 빛으로 들녘의 환희에 내 아름다움을 자랑할 수 있게 해주고, 안개 걷우고, 구름 걷우어 내게 내 사랑 오라를 이끌어 오는도다. 아! 내 사랑하는 그 땅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나는 저 소나무 가장 높은 가지에라도 울라가련만 가볍게 얼굴 스치는 산들바람에 실려 어디든 날아가고만 싶어라 여기 순록을 노래하는 한편의 시를 보자. 순록아 달려라, 더 빨리 달려라 황량한 저 들녘을 가로질러 우리 사랑 여행 떠나자꾸나 달려라 순록아, 너는 어이 그리 걸음이 더디냐 사랑은 섬광 같은 속력을 요구하는데 ……4)4) 《구경꾼》. 366, 406호.
규칙적인 무수한 시와는 달리 형태를 갖추지 않은 무정형의 이 시는 에 디슨이 관심을 표명하고, 그 무정형의 시에 감탄과 찬서를 보내기 전까지는 아무도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다. 체비 체이스의 옛 노래나 숲속의 어린아이를 노래한 부드러운 발라드는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에디슨은 영국을 여행하던 중에 소박한 농부들이 즐기는 노래는 아버지에게서 아들 에게로 구전전승되는 노래들임을 알아냈다5) 에디슨은 구전전승되는 노래들 이 호머나 비르질리우스의 『오딧세이』와 『에네이드』에 뒤지지 않는다고 주 장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그는 그것을 학문적으로 입증하려고 하지는 않았 다. 그는 다만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농부가 콧노래로 부르는 그 시의 소
5) 《구경꾼》. 70, 74, 85호.
박함과, 자연스러움과, 즉흥적인 면을 드러내는 데에 그쳤다. 민족의 혼을 담은 노래들은 바로 농부들의 시였다. 〈이 노래들은 모든 인위적인 장식과 도움을 배제한, 오직 자연만을 옮겨놓은 듯하다…… 자연의 복제에 다름 아 닌 이 시들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아름답게 둘리는 것이다 ……〉
이렇게 삶의 다른 어떤 곳에서는 유일하게 정당한 것은 민중뿐이며, 왕권 도민중의 위임이 아니고는올바르게 행사될수없다는사상이 점증하고있 었다. 일부 프랑스인들은 프랑크 족이 지배하던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프랑크 족들은 샹 드 마르스 회의를 열어 추장을 선출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은 신이 부여한 특권도 아니었고, 로마 식의 전통에 서 오는 것도 아니었다. 권력은 오직 전사들이 자유롭게 선출한 그들의 장 수에게 서임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물론 그 당시의 민중이 민주의 개념을 획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힘에 대한 개념은 차츰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그것의 장래는 전도가 유망했다.본능적 요소본능적인 요소가 아직 크게 확산된 것은 아니었다. 본능은 기독교도들을 불쾌하게 하는 요소였으며, 더군다나 자연을 이성과 결부시키는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철학자들은 자연을 절대선으로 간주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 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능은 당대의 주목거리가 아닐 수 없었 다. 때로는 의사가 의사단과 의료법을 무시하고 본능에 의지한 자가요법과 건강요법을 권장했다. 어떤 괴짜는 시적 영감은 높은 차원의 광기, 즉 본능 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 교육이나 지적 차원을 벗어나면, 합 리적으로 설명이 안되는 불편한 어떤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숭 고한 어떤 것이었다. 우아하고 정확한 표현, 진실, 또는 새로운 사실, 위대 한 사상이 숭고성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진실과는 무관한 숭고성이 있 울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만족스러운 해답을 찾지 못했다. 마침내 사 람들은 고대 그리스의 후광을 업고 숭고성이란 단어를 정의하기 위해 무진애를 썼던 론전에게 반문하기에 이르렀다. 〈숭고성이란 누가 뭐래도 결국 어느 정도 이성을 벗어나는 어떤 것이 아닐까요?〉라고······.
데카르트 이래로 지금까지 온갖 분야에서 논쟁의 불씨가 되고 있는 것은 짐승의 영혼에 관한 논쟁이다. 그것은 비교적 미미한 것이긴 하지만 본능을 천명하려는 노력 의에 다른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말이나 개에게 인간 의 영혼과 판단력을 인정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고통을 겪고, 괴로워하는 그것들의 모습을 의면할 수는 없다. 그 것들은 기계가 아니다. 기계들이란 감각이 있을 수 없다. 동물의 이성을 인 정한 사람은 라 퐁뗀느였다. 그는 마담 드 라 싸블리에르에게 이렇게 말하 고있다.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동물의 이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장님보다 고집이 셉니다. 나는 물질 하나를 예로 들겠습니다. 그것은 빛에서 비롯된 결코 노력이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한 불꽃입니다. 나는 나의 작품으로 하여금 느낄 수 있는 작품, 판단할 수 있는 작품, 그 이상의 작품이 되게 하겠습니다. 비록 불완전하게 판단할지라도 …… 풀로렌스의 박물학자, 씨멘토 아카데미 회원인 마갈로티는 퐁뗀느보다 과 감했다. 그는 〈개, 고양이, 말, 앵무새, 참새, 등의 동물에 대한 우리들의 부 드럽고도 큰 사랑, 종종 지나치리만치 광적인 사랑〉을 이야기한다. 단테와 따스도 똑같은 말울 한다. 우리는 사랑받을 때 사랑을 하리니그렇다면 우리가 동물을 사랑하는 것은 동물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여러가지 목소리들과 상황들로 미루어 보건대, 동물의 감정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연못의 깊은 곳에서 물방울 이 수면에 떠오르면 그 방울은 터지는 법이다.
물가에서 아늑한 삶을 살아가는 님프들과 목동들은 얼마나 행복할 것인 가! 이렇게 메마론 시대에도 그토록 고요한 삶을 살 수 있으니 누가 그들 을 부러워하지 않겠는가? 문명의 껍질을 벗어 버린 채 소박한 삶을 살아가 는 베띠끄의 d) 주민들은 얼마나 행복할 것안가! 자연을 잃어버린 많은 사람 둘이 시샘하도다! 〈베띠끄 주민들의 풍속은 허영이 꽉찬 우리들의 풍속과 는 너무 다르다. 우리는 어떻게나 타락했는지, 그 사람들의 소박한 삶을 믿 으려 들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하나의 옛날 이야기처럼 들을 뿐 이며, 그들은 우리의 삶을 하나의 악몽처럼 바라본다.〉 얼마나 혁명적인 어 조인가! 이보다 더한 야성예찬이 있을까? 이제 완벽한 삶을 추구하는 많은 유럽인들이 위롱을 e) 만들어 가져야 한다고 외쳤다.d) 오늘날의 안달루시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당시에는 스페인에 속해 있었다.
e) 캐나다 온타리오와 미국의 미시건 주 사이에 있는 아름답고 조용한 호수.이제 지성적인 사람들마저도 지성의 파멸을 선언하고 나섰다.
끊임없는 오류의 샘 자연의 올바른 감정을 부식시키는 독기 그리고 우리 가슴속의 진실마저도 파멸시켜 버리는 독기 빛을 발하지만 파괴가 목적인 도깨비불 정신이상자를 홀리는 너, 지성, 내 너를 이제 죽여 이 제단의 제물로 삼으리라 지성, 너는 유혹했고, 사람들은 네게 찬사를 보냈다.그러나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정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가슴에서 우러나는 말이며, 그 말을 하게 하는 가슴이다. 우리의 영혼을 잡아 혼드는 것은 가슴의 말이며,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홀리게 하는 것도 가슴의 말이다. 지성, 너는 그런 능력이 없으니 ……6)6) 쇼리의, 『지성에 반박하는 노래』, 1708.
가장 감정이 무딘 사람들조차도 지성의 패배를 선언하고 나설 정도였다.
모든 것을 굴복시키고 말 것이라고 헛되이 믿게 한 이성 우리로 하여금 거짓 지식에 도취케 하고 우리로 하여금 헛된 명예에 집착케 한 이성 우리로 하여금 사악함에 물들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위선이 가득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궤변을 일삼게 한 이성 광포한 이룰 아킬레스라 부르고 사기꾼을 정치가라 부르고 무신론자를 강한 정신의 소유자로 일컫는 이성 …… 감성은 그러한 이성을 신봉하는 무지한 이들을 한탄한다. 감성은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많고 많은 사람들의 무지를 한탄한다. 누옥에 칩거하며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위롱과 동물을 그들이 어떻게 구분하리요! 감성을 빗나가게 하는 이성이 비인간적인가 감성을 인도하는 본능이 비 인간적 인가?7)7) 쟝 바띠스트 루소. 『드 라 빠르 후작에게 부치는 오드, IX』·
이제부터는 감정을 예찬하는 시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의 어
깨를 짓누르던 위선을 포함한 모든 것에서 탈피할 때가 왔다고 여기저기서 의쳐댔다. 도덕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쓴 인간이 얼마나 악랄한 행동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인물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한 예를 들어보 자. 토마스 잉클은 런던의 한 부호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무역을 위해 동 인도제국으로 항해한다. 항해하던 중에 동승한 승객들이 인디언들의 습격을 받아 학살당한다. 다행히 그는 위기를 모면한다. 그는 목숨을 부지하며 여 기저기 피해 다닌다. 그러다가 그는 아름다운 인디언 여자의 구원을 받는다. 야리코라는 미모의 인디언 여자는 그 불행에 빠진 토마스 잉클에게 연정을 느낀다. 그는 그녀의 보살핌을 받는다. 그녀는 그에게 음식을 날라다 주면 서 그롤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감격한 그는 때가 오면 그녀와 함께 영 국에 가서 함께 살기로 약속한다. 어느 날 그들은 배를 발견한다. 그들의 구 조요청을 목격한 그 배는 천만다행하게도 그들을 배에 태워 준다. 그러나 일단 배에 올라 탄 토마스 잉클은 여자의 처리 문제를 놓고 이런저런 생각 울 한다. 시간과 돈을 잃은 그는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다음 기항지 에서 그녀를 노예로 팔아치우기로 마음먹는다. 인디언 여자는 눈물을 홀리 며 토마스 잉클에게 애원한다. 그의 가슴에 호소해 본다. 그러나 냉혹한 토 마스 잉클은 임신한 그녀를 더 비싸게 팔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기회만 보 고 있다. 개화된 문명인의 사고방식은 그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8)
8) 《구경꾼》, 11호.
어느 날 퐁뜨넬르는 길을 가다가 본능을 만난다. 본능을 만난 그는 이렇 게 말한다. 〈사람들은 본능이라는 말을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는 어떤 것, 우 리를 바론 길로 이끌어 가는 어떤 것,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 어떤 것, 우리 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우리를 유리하게 하는 어떤 것에 갖다 붙이면서, 마치 본능을 신비한 어떤 것으로 간주하곤 한다.〉 그러나 신비를 인정하지 않는 그는 그러한 본능의 지나친 월권도 인정치 않는다. 그에 의하면 본능 이란 아직 망설임 속에 있는 이성이며, 많은 행동 양식 중에 어떤 것을 선 택해야 좋은지 아직 의식하지 못한 이성에 다름 아니라고 한다. 그는 그것 을 입증하기 위해 섬세한 추론을 전개한다.
루소가 말한 〈신적인 본능〉에 이르기에는 한참 먼 본능이다. 그러나 우리 는 적어도 세련미를 추구하는 사교인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투박한 기질의 소유자들을 상대하고 있다. 쟝 작끄 루소보다 먼저 쟝 작끄의 주장 을 한 스위스의 베아뜨 드 뮈로의 말을 들어보자.
인간은 인간의 본분과 위업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을 올바로 볼 수 가 없게 되었다. 오늘날의 무질서는 인간의 위업과 본분을 찾을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회복할 수 있게 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 로 우리의 내부에 내재해 있는 본능, 원시안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왔고, 아직도 우리를 거기로 되돌려 보낼 수 있는 참재력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신적인 본능뿐이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본능을 지닌다. 그것은 속이지 않는다. 그 런데 어떤 생명체보다도 뛰어난 인간에게 인간 고유의 본능이 없을 것인가? 전체 를, 폭넓게, 확실하게 지배하는 인간의 본능! 신이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그리고 당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마련해 둔 유일한 길이자 통로인 인간의 본능 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9)9) 1698년과 1700년에 쓰여져서 1933년 구에 의해 출간된 『여행에 관한 서한』, p. 288에서.
〈원시인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왔고, 아직도 우리를 거기로 되돌려 보낼 수 있는 잠재력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신적인 본능!〉 이보다 더 크 게, 이보다 분명하게 원시를 구가한 적이 있던가?
제5장 불안의 심리학, 감정의 미학, 실체의 형이상학, 새로운 과학
불안의 심리학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죤 록크는 큰 것이 아닌 작은 것에 만족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절대적 전리를 추구하는 대신, 허약한 우리에게 가 능한 상대적 전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에게서 비약적 상상력을 기대하는 사람은 상대를 잘못 짚은 사람이다. 록크는 겸허한 확실성으로 우리를 평탄 하고 굴곡 없는 아늑한 길로 안내한다.〈감각은 영혼의 샘이다〉라는 그의 간단한 말 한마디는 장차 얼마나 큰 결 과를 초래하게 되는가! 잘 생각해 보면, 그의 이 말 한마디는 그때까지 가 장 굳건하던 기존의 가치체계를 완전히 전복시켜 버렸다. 그의 그 말은 고 상한 사상,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사상, 도덕 원리, 영혼의 활동 등등의 모 든 것이 감각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이었다. 감각에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믿 었던 우리의 정신도 이제 한낱 단순한 노동자의 그것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렸다. 감각적인 삶이 없이는 합리적인 삶이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말하 자면 하녀가 여주인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하녀는 상속권과 더불어 귀족칭 호를 획득했던 것이다. 그 하녀의 귀족칭호는 『인간 오성에 관한 시론』에 올랐다.감각을 영혼의 본질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본질을어떻게 파악한단 말인가?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영혼은 사고의 관할은 아니 라는 것이다. 만약 영혼을 사고와 동일시한다면, 영혼도 확고한 고정정복에 서 완전한 소멸상태까지 다양한 변화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사고는 다양한 변화를 한다. 잠에 빠지면 사고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잠자지 않을 때 도 거의 무에 가까운 희미하고 모호한 상태에 이르곤 하는 것이 사고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러한 소멸과 부침을 영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 가? 그것은 차라리 방심한 상태를 간헐적으로 내포하는 행동이라고 해야 옳 을것이다.
좀더 앞질러서 생각하자면, 욕망과 불안의 심리학은 그러한 가치전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그렇다면, 쌩 프뢰, 베르데르, 르네 같은 욕망의 영혼에 길을 터준 사람이 다름 아닌 록크였단 말인가? 물론 그들 모두가 록크의 직접적인 후예들이 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록크의 철학은 차후 세대의 정신 상태를 변화시킨 많은 원인들 중의 중요한 하나였으며, 가슴의 갈증을 풀어 주는 심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이었다고 주저 없이 말할 수는 있다. 록크는 17세기가 아직 채 열리기도 전에 이런 말을 했 다.사람은 있어야 할 어떤 것이 없을 때 불안을 느낀다. 있어야 할 어떤 것이 없어 서 안타까운 마음, 그것을 우리는 욕망이라고 부르며, 그 욕망의 크기에 따라 불 안의 정도도 달라진다. 그런데 그 불안이란 것은 인간의 활동과 근면성을 자극하 는 유일한 자극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주요한 자극제라는 점은 여기에 서 지적하고 넘어가고 싶다 …….1)1) 『인간 오성에 관한 시론』, 1690, II권, XX장.
록크의 책을 번역한 뼈에르 꼬스트는 불안이란 단어를 이탤릭체로 표기 하여 그 단어가 특별하고 새로운 의미를 담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 는 그의 책에서 불안이란 단어를 자주 접하면서 록크가 그 단어에 얼마나 집착했는지를 알 수 있다.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한 번이라도 성찰을 해본 사람이라면, 욕망이란 불안한 마 음 상태와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속담에 의하면 지연되면 지연되는 만 큼 맥빠지게 하는 것이 기대라고 한다. 그런데 욕망이 바로 속담에서 말하는 기 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한 불안은 욕망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어서, 큰 욕 망은 큰 불안을 부르고, 이따금 그 불안이 엄청난 것이면, 불안을 견디지 못한 사 람은 마치 라헬처럼a) 소리지르기에 이른다. 〈제게 아이를 주시옵소서! 제가 욕망 하는 것을 주시옵소서 ! 아니면 저는 죽을지도 모르겠나이다.〉2)
a) 창세기의 인물. 레아에 이은 야곱의 둘째 부안.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아이가 없 던 그녀는 잠자리를 레아에게 뺏기곤 한다.
2) 『인간 오성에 관한 시론』, 1690, II권, XXI 장, 삐에르 꼬스트의 번역본.우리를 행동하게 하는 것은 주어전 어떤 것이 아니라 부재하는 어떤 것 이다.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이며, 우리의 의지를 결정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불안한 마음이다. 불안이 없다면 우리는 아마 무기력 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희망, 우리의 두려움, 우리의 기 쁨, 우리의 슬픔, 그리고 우리의 열정까지도 다름 아닌 불안에서 비롯된다. 불안에 관해서는 록크의 제자들이 더 깊이 다루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 래로 록크를 능가하는 철학자가 없다고 믿은 꽁디약은 그의 스승 록크와 다 른 주장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 남은 일은 증명하는 일뿐이었다. 욕망, 애정, 증오, 두려움, 희망, 의지 등을 포함해서 촉각, 감각, 미각, 그리고 비교, 판 단, 성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원리가 바로 불안 심리라는 사 실을 그는 입증하려고 했다. 그는 심신의 모든 관습이 불안심리에 기인함을 증명하려고 했다. 영혼의 고통과 권태를 명확히 정의하고, 욕망을 찬양한 사 람은 바로 그였다. 그런가 하면 엘베티우스는 꽁디약보다 한술 더 떴다. 그 는 열정의 힘과 그것의 좌절이 가져다 주는 고통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떠 받든다. 그에 의하면 우월한 사람은 합리적인 사람이 아니라 열정적인 사람 이며, 열정이 없는 사람은 바보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록크를 고 려하지 않은 채 낭만주의의 도래에 대해 설명해 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 였다. 그러나 록크를 의면한 채 낭만주의를 설명할 수는 없다. 백과전서파 와 함께 한 관념론의 대표는 바로 그였다. 그것만 해도 벌써 대단한 것이었
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그는 우리를 괴롭히는 어떤 불안이 우리의 영혼 속 에 웅크리고 있음을 간파해 냈으며, 그것을 인간의 의지와 행동의 제일 원 리라고 주장한 장본인이었다.
교육에 몰두할 때도, 또는 선생으로서의 체험과 자신의 철학을 결부시켜 서 인간의 어떤 형태를 찾아내려고 노력할 때도, 그가 인간에게서 찾아내려 고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연의 자발성이었다. 그는 혁명가를· 자임 했다. 그는 기존의 교육방법에 대해 심하게 반발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무 엇보다도 그에 의하면 어린아이들은 결코 그림자일 수 없었다. 어린아이들 도 팔다리가 있고, 가슴과 배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건강하고 활기찬 몸을 위해서는 신체를 건강하게 해줄 수 있는 운동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정신으 로 말할 것 같으면, 인습이 아닌 이성이 지배해야 한다. 아무에게나 무차별 하게 적용되는 규칙이나 물리적인 외적 권위가 정신을 지배한다면 그것보 다 불행한 일은 없다. 어린아이에겐 무시해서는 안되는, 결코 무시할 수도 없는 천부적인 천재성이 숨어 있다. 〈어린아이의 천재성을 가능·한 최대로 개발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데 어린아이에게 그 아이의 천성과는 전혀 무관한 것을 접목시키려 한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억지짓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간에 아주 흉칙한 괴물을 만들어낼 뿐이다. 끔 찍한 형상은 바로 그러한 강제와 겉치레가 만들어낸다.〉 〈인위적 인 못된 작 태가 아닌, 소박한 자연 그대로가 좋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인위적인 것 은 자연을 개선시키기는커녕 자연을 위장시키고 자연을 부패시킬 뿐이다.〉 지식보다는 도덕을 택할 일이다. 왜냐하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 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착하고 선하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록크가 어린아이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마저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아이의 자발성에 의지한 그것이어야 했다. 따라서 교육 은 장소, 시간, 과목 배열, 그리고 학습자의 반응이 중요하다. 짐처럼 느껴 지는 공부, 강제적으로 부과되는 공부는 지겹고 재미 없을 수밖에 없다. 학 습자의 기분을 고려하여 학습자의 호기심을 자국한다면, 학습은 결코 짐이 될 수 없을 것이며, 학습효과는 크게 향상될 것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천부 적인 재능을 드러내서,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치채게 해서는 안된다. 자연스럽게 할 수만 있다면, 속이는 일도 아주 드물게는 용인될 수있다.
록크는 특히 개별적인 교육을 강조했다. 그는 공립학교의 필요성을 부정 했다. 학생에게 모든 것을 베풀 수 있는 아버지 같은 선생이어야 했다. 인 간을 욕되게 하는 체벌은 마땅히 배제되어야 했다. 그는 아주 어린아이에게 가하는 최소한의 제약 의에 다른 체벌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간이 흘러 어린아이가 자라면, 그 아이를 그 최소한의 제약에서조차 해방시켜 줘 야 한다고 했다. 자라나는 어린아이에게는 섬세한 배려가 필요하다. 어린아 이도 설득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설득은 특별한 논리적 추론 을 요구한다. 록크의 교육방식은 아주 단순한 듯하면서도, 기실 복잡하고 당 당하다. 그의 교육방식은 감각적인 모든 것을 허용하여, 오직 거기에 의지 한다. 그의 교육방식은 끊임없이 현실을 말하면서도 꿈이 가득하다. 학생을 가르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그의 교육방식에는 기존의 교육방식에 대 한 록크의 반항이 잘 나타나 있으며, 동시에 어떤 향수와 욕망이 드러난다. 작가의 향수와 욕망이 잘 드러나고 있는 소설로서의 그의 교육방식은 70년 뒤에 나타나는 다른 인물을 예감하게 하니, 다름 아닌 쟝 작끄 루소였다.감정의 미학〈합리적, 논리적 철학정신은 옛날 고트 족과 반달 족이b) 끼쳤던 영향을 유럽 전역에 다시 한 번 끼치게 된다……. 예술이 무시당했으며, 사회의 유 지에 필요한 선례가 폐기되었으며, 실천보다는 사변이 선호되었다. 인류의 스승이며, 인류에게 가장 소중한 경험이 경시당했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조 상들이 만약 그들의 힘과 노력을 오직 사변에 쏟았다면, 우리는 아마 집도 건물도 물려받지 못했을 것이고, 심지어 산에서 집을 지을 나무토막 하나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삶은 후대를 걱정하지 않는 삶이다.〉 뒤보스 신부는 1719년에 빛을 본 『시와 미술에 관한 비평적 성찰』에서 이렇게 과b) 1-2세기경 고트 족과 반달 족은 유럽을 포함한 아시아 전역을 침략하고 약탈했다.
감한 말을 하고 있다.
예술의 문제에 있어서는 양 진영이 대립하고 있었다. 우선 한쪽의 사람들 은 예술을 순수 이성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미란 무엇인가? 고급 취향이란 무엇인가? 고상한 것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아름다운 것을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가? 등등의 어려운 질문들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이 었다. 철학자들이 그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를 물고 늘어지 는 사람들은 철학자들뿐만이 아니었다. 습관적으로, 또는 정말 매력이 있 어서, 아니면 유행에 휩쓸려, 모든 문제를 기하학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 람들도 거기에 가세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 있어서 잘 알고 있듯이, 그 둘은 미란 진실이고, 적어도 진실임직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란 전 실이기 때문에, 도덕과 미덕에 기여해야 했다. 고급 취향도 원칙과 전형에 근거해야 했으며, 따라서 고급 취향의 소유자는 확고한 규칙에 의한, 확고 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했다.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아카데미즘일 것이다. 거기에서는 고 대의 모방 의에 다른 것을 찾을 수 없다. 개인의 재능은 사라지고 기법에 관 한 지식만 남는다. 디테일에서는 변덕과 환상을 어느 정도 수용하지만, 그 들은 궁극적으로는 규격화된 자연 의에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브왈로 가 그의 영역에서 규격화된 전범으로 남았다. 루아 I4세의 치세 기간중에 성공해서 시대의 호평을 받았던 르 브렁은 일종의 제도나 마찬가지였다. 르 브렁은 그 이름만으로도 황금툴 안에 그려진 근엄한 일련의 그림들을 연상 케 할 정도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분노의 감정과 놀란 표정을 어떻게 표현 해 내야 하는지를 가르쳤으며, 존경, 찬사, 경의를 나타낼 때 어떤 점이 아 주 델리케이트한 어려운 문제인지를 가르쳤다. 예를 들어보자. 그에 의하면, 존경과 찬사는 이러한 틀에 짜여져야 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큰 변화가 없다. 변화가 있다면 눈썹이 약간 울라가는 정도여야 한다. 그런데 약간 올 라간다고 했는데, 양 눈썹이 같은 정도로 울라가야 한다. 눈은 평소보다 약 간 크게 뜬다. 눈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동공은 찬사의 대상을 똑바로 옹시해야 한다. 그러나 입을 포함하여 얼굴의 다른 부분은 그 상태에서 변 함이 없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예상되고 분류되고 규격화 되어 있었다. 미란 이성과 합리성의 처방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다른 일단의 그룹이 있었다. 르 브링을 불만스럽게 여긴 몇몇 화가들, 베 르냉의 과장된 고상함 대신에 우아함을 새겨 보겠다고 나선 조각가들, 예수 교회, 또는 베르사이유 궁전 대신 자유사상가와 자유연애가들의 거처를 지 어 보겠다고 팔을 걷어붙인 건축가들, 기성세대, 또는 스승들과의 인연을 끊 고 새로운 비상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그들이었다. 그 의에도 개인적으로 좋 아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면서 전문가들의 아카데미즘에 정면 도전을 선언하고 나선 아마츄어들이 있었다. 과감한 로제 드 필르는 드러내놓고 렘브란트, 루벤스를 좋아했다. 어떤 쪽의 학설도 공박하지 않았 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는 다만 자신이기를 바 라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어떤 측면에서 보면 더 심한 혁명가였다고 할 수도 있다. 그는 오직 자유로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 시고 싶어한 사람이었다.
〈천재성이야말로 화가에게서 기대해야 할 맨 첫번째 것이다. 천재성이야 말로 노력이나 학습으로 얻어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어떤 예술 에 있어서건 파격은 없을 수가 없다. 파격이란 문자 그대로 이해하자면 규 칙의 위반이다. 그러나 그것의 정신을 올바로 이해만 한다면 적재적소의 파 격은 규칙이 될 수도 있다 ……. 〉3)3) 『화가들의 삶에 대한 총론』, 1600.
파격을 부르짖는 사람들 중에 특히 두드러진 사람은 뒤보스였다. 사교인 이자 석학자였던 그는 보기 드문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는 오페라 무대를 자유롭게 왕래했을 뿐만 아니라, 정가를 드나들기도 했다. 그는 섬세하고도 활기찬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극히 프랑스적인 사람인 동시에 세계인이 었다. 그는 행동인인 동시에 철학자였다. 그와 록크를 통해(그는 록크를 런 던에서부터 알고 지냈으며, 삐에르 꼬스트에 의해 거의 완벽하게 번역된 록크롤 읽 었다) 위대한 영국인 록크가 발견한 감성의 샘물을 마실 수 있었다. 뒤보스 에 의하면 당대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어떤 알 수 없는 갈증은 감성의 샘물이 아니면 가시게 할 수 없었다. 감성이야말로 아름다움, 숭고함, 예술 의 샘이었다. 그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이려고 했던 것이다.
많은 체험과 더불어 그림, 희극, 비극, 그리고 오페라를 관람한 뒤보스 신부는 『시와 미술에 관한 비평적 성찰』에 여러가지 사상을 담았다. 그의 책 은 단순한 단어의 나열이 아닌 성찰아었다. 창의적인 그의 책은 풍부한 인 상을 주었다. 기분이 내키면 한없이 길어지다가 어떤 내용에 대해서는 간단 히 넘어가기도 했다. 금방 나타났는가 하면 금방 사라지기도 했다. 어떤 단 락은 짧은 반면 어떤 단락은 길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있었다. 그것은 이미 〈법의 정신〉을 예고하고 있었다. 감 성이 분석의 틈을 뚫고 솟아울라 왔으며, 그것은 다시 전실에 근거한 지성 으로 감싸지곤 했다.
비장미는 얼마나 우리의 영혼을 두드리는가! 이상한 것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시와 그림들이 우리의 감동을 자아낸다는 사실이다. 어린 소녀 가 희생당하는 장면이 아름다운 경치보다 우리의 뇌리에 오래 남는다. 축제 에 모인 사람들이 공주의 죽음을 주제로 한 비극을 관람한다. 〈나는 이러한 역설이 어디에 근거하는 것인지를 해명해 보고 싶다. 그러한 시와 그림들이 왜 우리를 그토록 감동시키는지? 그 근본을 헤아려 보고 싶다.〉사실 인간의 가장 무서운 적은 권태이다. 사람들은 감각에 의지하여, 또 는 성찰에 의지하여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그 중에도 확실한 방법은 감각 이다. 열정은 우리를 온통 사로잡는다. 열정이 우리를 한번 사로잡으면, 그 것은 어떻게나 강한지 그것 의에 다른 모든 것은 모두 우리를 권태롭게 한 다. 그런데 열정은 위험을 안고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과거의 고통을 통해 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한 의문 앞에 예술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열정의 대상을 상상을 통해 흉내내 고 모방해 본다. 예술의 기능은 거기에 있다. 〈시와 그림은 우리에게 거짓 열정의 대상을 제시하지만, 거기에서 비롯되는 열정은 거짓 열정이 아니다.〉 〈예술은 이성에 필적할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예술은 열정과 맞먹는다. 그러나 예술적 열정은 정화된 열정이자 더욱 강렬하게 표현된 열정이다〉, 〈장르의 구분은 열정의 정도로 설명이 되며, 비극은 희극보다 우리에게 감 동적이다〉 등등의 표현이 거기에 보인다. 〈대상의 묘사와 모방을 목적한 예 술은 그 대상을 어떻게 다루었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엘레지나 목가시가 드라마보다 우리에게 매력적인 이유는 거기에 있다.〉 창작과 비평에 있어서의 일대 변혁이 일어난 셈이다.이제는 열정의 표현 자체보다도 열정이 어떻게 표출되었느냐의 문제가 더 욱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뒤보스 신부는 예술의 비결 울 감각에서 찾는다. 지성은 감각에 비교해볼 때 창백해 보이고, 진부해 보 이고, 자연스럽지 못해 보인다. 〈나는 그림이 시보다 훨씬 효과적이라고 본 다. 나의 그런 생각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그림은 시각을 통해 우리를 감동시키며, 뿐만 아니라, 인위적인 기호를 사용하는 시와는 달리 그 립은 자연적인 기호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기호를 사용하고, 자연 을 모방하는 예술이 있다면 그것은 그림이다.〉 물론 그림에 못미치는 것이 긴 하지만, 시적 감각도 뒤보스는 무시하지 않는다. 문체적 효과 역시 감각 적일 수 있다. 시의 내재적 운율 역시 감각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천 재만이 가능한 것이다. 모방이나 훈련으로 얻어지는 재능과 천재성은 구분 되어져야 한다. 천재성이란 천부적인 재능이며, 규칙과 규범을 초월하는 힘 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천재성 은 육체에 것들어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으며, 그것은 신체기관과 피가 조 화를 이루어 분출시키는 열광, 신적인 격정인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 에 의하면 아직은 불완전한 이 설명이 미구에는 확실하게 해명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그렇다면 문학과 예술 의 발전에 물리적인 힘은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태양, 대기, 풍 토는 시인과 예술가의 배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물리적인 의적 환경 은 인간이라는 기계 전체에 어떤 작용을 하는가? 그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 적 기질과 성향은 우리가 어떤 피를 지니고 태어났느냐로 결정되며, 더불어, 우리가 숨쉬는 대기, 특히 우리가 자라나던 어린 시절에 숨쉬던 대기에 의 해 크게 좌우된다는 것이다. 서로 다론 기후에서 사는 사람들이 다른 기질 과 정신적 성향을 보이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뒤보스는 거기에서 멈춘다. 그러나 그는 얼마나 많은 길을 방황했던가? 우리는 그의 편력에서 이중적인 반항을 읽을 수 있다. 하나는 도그마틱한 아카데미즘에 대한 반항이고, 다른 하나는 합리적 추론에 대한 반항이었다. 사실 뒤보스 신부가 그의 사상을 책으로 묶어내기 전까지는 아직 미학이란 용어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었다. 미학이란 용어는 알렉산더 아마 데 바움가르텐이라는 어떤 젊은 독일인의 박사학위논문(1735)에서 처음으로세상에 소개된 용어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와 그림에 대한 비평적 성찰』을 감성에 기초를 둔 하나의 미학적 비평 에세이로 평가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색깔, 소리, 땅, 물, 하 늘 등등, 우리의 감각적인 모든 것, 감정적이고, 동물적이고, 물질적인 우리 안의 모든 것이 이성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것이었다. 순수 이성의 오만 불 손한 태도에 대한 봉기였던 셈이다.
실체의 형이상학우리는 또 하나의 다른 요구를 라이프니찌의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 그 것은 무한히 작은 것, 무의식에 가까워서 감지하기조차 힘든 어떤 것에 근 거한 형이상학, 심적인 역동성에 근거한 형이상학, 자아의 본질, 생명을 향 한 본능적 본질로서의 실체적 실존에 근거한 형이상학적 요구가 그것이었 다.라이프찌니찌는 만능으로서의 기하학을 더이상 믿지 않았다. 그는 데카르 트에게 마음 깊은 찬사를 보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죽기 2년 전인 1714년에, 그의 철학 적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단자론』을 탈고한다. 그러나 그 책은 즉시 출판되지는 않았다. 오히젠느 드 싸브와공은 그것을 보물처럼 내당고에 간 수한 채 몇몇 비전전수자들에게만 살짝 보여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것은 그 두터운 벽과 어둠을 뚫고 나온다. 그의 글에 담긴 정신적 실체는 이 제 하나의 효모처럼 엄청난 작용을 하기에 이른다.그는 데카르트를 지나치게 단순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 는 면적과 실체를 구분할 줄도 몰랐으며, 운동과 힘의 개념을 구분할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영혼의 미묘한 뉘앙스와 큰 것과 작은 것 사 이의 무수한 단계들을 무시하는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지나치게 이분법적 으로 사고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쉽게 감지할 수 없는 모든 것 을 무시하는 태도야말로 데카르트주의자들이 범한 가장 큰 잘못이라고 『단자론』의 라이프니찌는 지적하고 있다. 그는 이미 그보다 10년 전에 『인간 오성에 관한 신론』에서 중요한 발표를 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매 순간 내적으로 변화하고 있는데, 다만 우리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할 뿐이라 는 것이었다. 우리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그 변화가 지나치게 미 세하거나, 너무 수가 많거나, 또는 너무 한꺼번에 발생하기 때문이라는 것 이었다. 풍차가 돌아가고, 폭포가 쏟아진다고 해도, 이미 오래전부터 거기 에 살면서 거기에 익숙해진 경우에는 그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 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감지하지 못한다고 해서 풍차가 돌아가지 않는 것은 아니고, 폭포가 쏟아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해변가에 산다고 가정해 보자. 바다의 파도는 끊임없이 출렁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파도 가 굽이칠 때마다 그 파도소리를 들어야 할텐데, 기실 우리는 파도소리를 의식하지 못하곤 한다. 데카르트는 그러한 미묘한 뉘앙스를 감지하지 못했 던 것이다. 〈지각, 그리고 지각에 관계하는 것은 메카닉한 이성, 다시 말해, 형상이나 양태로 설명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사람을 마치 생각하고, 느 끼고, 감지도 가능한 어떤 기계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기계 다루듯이 분해하고, 마치 기계의 부품들처럼 뜯어서 관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관찰 방법으로는 결코 지각작용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각작용은 기계의 부품이나 기계 자체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실체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c) 라이프니찌의 『인간 오성에 관한 신론Nouveaux Essais sur l'entendementhumain』,록크의 『인간 오성에 관한 시론Essai sur I'entendement humain』을 혼돈하지 않기 바란다.
라이프니찌가 말하는 단자란 사물의 원소이자 진정한 자연의 원자라고 할 수 있는 단순한 실체를 말한다. 삶을 물리적인 차원에서 설명하지 않고 형 이상학적 차원에서 설명한 단자론의 라이프니찌에게 놀라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개체의 물리적 힘에 대한 그의 변호였다. 스피노자가 개체를 우주에 귀의시켰다면, 라이프니찌는 우주의 조화를 추구하되, 개체의 권리를 결코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그렇게 했다. 단자는 의적인 자국에 의해서는 결코 내적인 변화, 변질을 겪지 않는다. 단자는 빠져 나가거나 뚫고 들어갈 틈을허용하지 않는다. 단자는 다른 이웃한 단자들과는 다른 특성을 지닌다. 자
연은 동일한 두 개의 단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피조물이 그렇듯이 단 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단자의 내적 원리에 의한 것이지, 의적인 영향 때문이 아니다.
그런데 보다시피, 단자의 성격을 그렇게 뚜렷하게 정하고 보니 의문이 생 기지 않을 수 없다. 더이상의 첨가를 허용치 않는 단순한 실체가 단자라면, 과연 그것은 고립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단 말인가? 라이프니찌는 그런 것 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예정조화를 내세운다.라이프니찌의 예정조화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그것 에 대해서는 철학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다만 증명을 위해 그가 말하는 무 의식에 의지하기로 하자. 그에 의하면 무의식은 우리의 정신적 실체이다. 모 든 인간은 〈각각 고유한 실체를 가지며, 그것은 스스로 충분하며, 다른 모 든 사물로부터 독립적이며, 무한을 내포하며, 삼라만상의 우주만큼이나 지 속적이며, 실존적이며, 또한 절대적이다.〉 얼마나 무수한 생명체들에 대한 시 적 비전인가!조그만 물질 하나도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공원과 물고기가 가독한 호수를 생 각나게 한다. 조그만 나뭇가지, 짐승의 발가락, 연못의 물방울 하나에서조차도 하 나의 정원과 호수를 떠올린다. 정원의 나무들 사이를 지나는 공기, 연못의 물고기들 사이로 흐르는 물에는 우 리가 감지할 수 없는 다른 나무와 물고기들이 있다. 따라서 우주에는 경작되지 않는 땅, 메마른 땅, 죽은 땅은 없다. 겉으로만 그럴 뿐 혼돈이란 없다 …….4)4) 『단자론』, 67, 68, 69항.
라이프니찌의 예정조화는 거기에서 비롯되며, 예정조화의 미약에 취한 우 리는 순수한 사랑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과학
나폴리! 태양! 삶의 환희! 법석! 아우성! 꾸불꾸불한 골목길에는 세상에 서 제일 활기찬 사람들이 득실거린다. 그 짝을 찾기 어려울 정도의 생동감, 지적 호기십, 문화운동이 넘친다.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대화에 열중하고, 지 식 다발을 들고 와 풀어놓는가 하면, 제반 과학적인 문제와 철학적인 문제 를 논의하고, 모든 교의를 검토한다. 나폴리에는 열띤 집회가 끊이지 않는 살롱이 즐비했다. 나폴리는 유럽의 모든 메시지를 한데 모아 나름대로 응용 할 줄 아는 도시였으며, 독창적인 도시아자 소란스러운 도시였으며, 운동과 생명력의 도시였다. 지암바띠스타 비코는 그러한 도시 나폴리에서 I668년 6 월 23일 태어났다.그에게 제약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용케도 그는 그것들 울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신동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듣 는 착한 학생도 아니었다. 그는 성찰에 장애가 되는 모든 위험을 피했다. 그 중에도 특히 그는 직업을 가지지 않았으며, 철학자에게 있어서 적중의 적이 라고 할 수 있는 편안한 삶을 피했다. 그러한 삶을 선택한 그는 아리스토텔 레스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 작가들과 함께 성 어거스틴, 성 토마스, 가쌍디, 록크, 데카르트, 스피노자, 말브랑쉬 그리고 라이프니찌까지 두루 섭렵한다. 그러나 그가 읽은 작가둘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어떤 특별한 한 작가 에 매이지 않은 채, 플라돈, 타키투스, 베이컨, 그리고 그로티우스 등의 네 작가를 귀감으로 삼는 데 만족한다. 그가 베이컨을 좋아한 이유는, 〈인문과 학과 신학은 연구를 꾸준히 발전시킬 필요가 있으며, 그리고 지금까지의 인 문과학적, 신학적 발견은 수정보완 되어져야 한다났근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로티우스를 좋아한 이유는 그로티우스는 〈모든 철학을 보편적인 법체계 안에 담아 보려고 시도한 사람이자, 신학을 (그것 이 가공의 것이든 아니면 확실성이 있는 것이든) 역사에 근거하여 연구하고, 기 독교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긴 하지만 고대의 가장 학문적인 언어라 고 할 수 있는 세 가지 언어, 헤브라이어, 그리스어, 라틴어로 그것을 기술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들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는 절대적인 영향을 거기에서 받지도 않았으며, 그들의 지식체계를 고대로 답습하 려고 한 적도 없었다. 그는 고통스러우리만치, 그리고 놀라우리만치 자기자 신이려고 했다.
그에게는 두 가지 지성이 있었다. 하나는 이해의 지성이었고, 하나는 창 조의 지성이었다. 그는 성미가 급해서 본론에서 삐져나가기 일쑤였다. 그의 글에는 비유와 이미지가 가득했다. 그는 금방 분석적인 사람인가 싶다가 금 방 직관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논리와 규칙으로 증명하는가 싶다가, 갑자기 주제를 벗어나기도 했는데, 그의 그러한 태도는 그가 자료를 주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의 기질 때문이었다. 그는 고집 스럽게 한 말을 하고 또 하다가, 급할 때는 쏜살같이 변죽만 울리고 지나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아직 원론의 단계를 지나지 않았는데도, 결론을 내 리곤 했다. 그는 새로운 것, 과감한 것, 역설적인 것, 그리고 전실에 열광적 인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한 열광은 그로 하여금 많은 시행착오를 겪 게 했다. 그러나 무수한 시행착오와 오류 끝에 그는 마침내 자기자신을 드 러내기에 이르렀다. 그에게서는 이제 더이상 고전적인 균형을 찾아볼 수 없 었다. 국성스럽고, 신경질적이고, 편집병적이기까지 한 그는 결코 만족을 모 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불충분한 증명, 미진한 설명, 새로운 발견을 시원하 게 설명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안타까움에 언제나 시달렸다. 그의 그런 점 은 그를 집요한 사람이게 했고, 사귀기가 까다로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 는 오만했으며, 화를 잘 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이해해 주려고도 하지 않 고, 인정해 주지도 않는 천재적 재질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괴로왔다. 그는 동시대인들을 이해시키려고 배전의 노력울 기울였다. 그는 동시대인들과 싸우는 동시에 자기자신과 싸웠다. 그는 그가 발견한 위대한 비밀과 새로운 학문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일이 자신의 몫이라고 생 각했던 것이다.비코에게 있어서 새로운 것이란 창조적 상상력이었다. 물론 비평에 그것 나름대로의 역할과 효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비평은 삶의 심오한 의미를 드러낼 수 없었다. 삶이란 단순한 사상이 아닌 끊임없는 창조이기 때문이었다. 비코의 발견은 그의 방법에 있어서 또한 새로왔다. 왜냐하면 그 는 지금까지 배척만 받아오던 역사적 방법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이제 역사는 역사가의 기술에만 있지 않았다. 이제 학문은 인류가 걷어온 모든 발자 취에서 읽을 수 있어야 했다. 초기의 시, 언어, 권리, 제도 등등· 모든 것은 나름대로의 존재방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학문은 그 방향에 있어서 새 로와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래를 향하기보다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인류의 기원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문은 본질에 있어서 새로와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변화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주체와 객체의 일치 속에서 확실성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의해서, 과학은 인류에 의한 인류의 창조에 다름 아닌 것이 되기에 아르렀다. 〈우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그 깊고 깊은 어둠의 심연에서 한 줄기 빛이 보인 다. 그것은 바로 이 세계는 인간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는 부정의 여지 없는 영원한 진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 정신의 변천사를 통해 우주의 원칙 을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 나 사람들은 그를 이 해하려 둘지 않았다. 사람들은 거의 그의 말을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사상은 너무 새로운 것이었으며, 기존의 전 통적인 사고방식과는 너무 디론 것이었다.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추상적 인 사변에 익숙해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의 위인들 앞에서 언제나 부끄러울 뿐 그들보다 앞서갈 수 있다고는 결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리 고 그들에 의하면 역사는 사기, 시는 위선이었으며, 감성과 상상은 추방해 야 할 미친 병이었다. 그러나 그는 인류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끝내 해부대 상으로 보기를 거부한 채, 거기에서 어떤 삶의 약동을 들으려고 했다. 법학, 철학, 이미지, 상징, 그리고 우화의 도움을 받아서 과거와 일체가 된 그는 거의 역사의 밑바닥에까지 거슬러 울라가 인간의 이상적 정신과 그것의 변 천사룰 발견하기에 이른다.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꺾어온 황금의 가지롤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우리 는 아직까지도 『새로운 과학』5)에서 어떤 울분의 소리를 듣는 듯하다. 그는 사상적 무게에 문장이 눌리지 않게 하려고 열정을 쏟은 듯하다. 그러나 너 무 한꺼번에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 한 비코는 독자로 하여금 갈피를 잡지 못하게 했는가 하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당대의 독자들은 그에게 냉담5) 『새로운 과학』, 1725년에 초판이 발행되었으며, 1730년에 재판이 나왔다.
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 놀라운 책이 유럽의 지평선에 떠올라 빛을 발 하기까지는 70여 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제6장 열성신도들
시골 어디를 가나 교회의 뾰죽탑이 즐비했다. 마울의 주택들은 성당 주변 에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성전마다 가물거리는 촛불들, 목회자들의 기도소 리, 신도들의 찬양소리, 사도신경, 마그니피까, 예배 종소리, 향내음…… 등 으로 가득했다. 성당, 유태교당, 회교사원 등 교회는 지천아었다. 사람들은 거기에 모여 그들의 출생과 죽음에 얽힌 비밀울 고백하고, 그들의 이성만으 로는 풀 수 없는 문제를 신에게 의지했다…….종교는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그러나 그 시절의 신자들은 자유사상가들과 무신론자들에 의해 위협을 받 고 있었다. 호교론자들은 위기를 예감했다. 호교론자들 중에 어떤 이는 합 리적인 차원에서의 싸움을 주저하지 않았던 반면, 다른 이들은 무기를 들기 도 했다. 늑대들이 침을 홀리며 양떼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러한 늑대들을 물리치려면 새로운 방어전략이 필요했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드러내는 불 경에는 그보다 더한 경건으로 대처하는 수밖에 없었다. 밤새워 기도하는 사 람들을 자유사상가, 또는 무신론자들이 어떻게 할 것인가?구체제에서의 기독교도들의 생활을 연구한 앙리 브레몽은 당대를 〈영혼 의 세기, 또는 순수한 사랑의 숭고한 세기 ……〉라고 부르고 있다. 그에 의 하면 독실한 신자의 신앙, 전리에 대한 집착, 예배의 열성은 확산일로에 있 던 데카르트주의조차도 약화시키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기· 그의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한 기도문 중에서 소박하고도 아름다운 기도문 하나를 예 로 들어보자. 그것은 1674년에 쓰여진 〈영원한 영성체를 위한 시계〉라는 제 목의 기도문이었다. 성스러운 시계는 위험이 닥쳐오는 시간을 알려준다. 시 계는 사탄의 공격과 신앙을 시험하는 악마의 접근을 경고한다. 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시계는 시간시간마다 특별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자정 …… 암흑 의 왕자들이 그들의 본거지인 동굴로부터 솟아울라와 고뇌의 불길을 뒤집 어쓴 채 먹이를 찾아 방방곡곡 배회한다. 아침 다섯 시 …… 영성체를 개에 게 던져 주는 시간…… 끔찍한 그 시계는 고요한 대낮에 뜸금 없이 어떤 〈내적 열정〉, 또는 전혀 〈새로운 본능〉을 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시계는 악마의 공격 시간에 이어 반드시 속죄의 종을 울려준다.
감정이 점점 생활에 깊이 파고들어왔다. 아마 그때는 전환기였던가 보다. 호교논쟁의 불이 아직 불안정하던 그 시대를 휩쓸었다. 어떤 교회도 계몽주 의를 적대시하지는 않았다. 어떤 교회도 합리주의의 도움을 배척하지는 않 았다. 반면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은 있었다. 극단적인 무신론자들은 차치하 고, 평범한 사람들만울 고려하더라도, 신앙, 또는 종교와는 무관하게 이상적 인 인간이 되려고 하는 지적 인간들이 점증했다. 〈우리들의 시대는 학문과 계몽의 세기임에 틀림없다. 장족의 발전을 거듭한 끝에 이제 학문과 예술은 가장 훌륭한 원칙을 수립하기에 이르렀으며, 가장 견고한 실증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새로운 발견들이 이루어졌으며, 얼마나 많은 실 험들이 행해졌던가! 드디어 우리는 암혹과 야만성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 었다. 종교조차도 거기에서 득을 얻었을 뿐 피해는 보지 않았다…….〉I) 종 교는 반대파들이 무시하고, 의면한 영혼의 능력에 호소하여 잃어버린 땅을 되찾을수 있었다.1) 이삭 작끌로, 『신의 실존에 대하여』, 라에 출판사, 1697년판 서문.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형이상학적인 방법뿐이다. 그 러나 그러한 〈형이상학적 접근 방법은 평범한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 는 난점〉이 있다. 그렇다면 감정에 호소하여 신을 증명하는 방법이 남는다. 신의 존재, 신의 절대권능, 신의 절대선은 자연의 경이가 반증하고 있지 않 은가? 논증보다 감격이 우선하는 이러한 논법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면
서도 일단 거기에 빠지면 그것은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기에 이른다. 그러한 찬탄의 시선으로 자연을 응시하는 사람에게는 이제 설명하지 못할 것이 없다. 숲을 보라! 〈여름이면, 저 나뭇가지들은 그 그늘로 우리를 뜨거 운 태양으로부터 보호해 주며, 겨울이면, 나뭇가지들은 스스로를 태워 우리 를 따뜻하게 해준다. 나무들은 그 불길로 우리를 따뜻하게 해줄 뿐만 아니 라, 여러가지로 우리에게 유용하게 쓰인다. 나무는 견고하면서도 부드러운 재료이다. 그래서 나무는 건물을 지울 때도, 배를 만들 때도 사용되며, 인간 이 원하는 어떤 형태든 드러내는 나무는 훌륭한 조각의 재료로 쓰이기도 한 다. 그뿐이 아니다. 과일 나무는 그 가지를 땅까지 늘어뜨려 마치 우리에게 그 과일을 내미는 듯하지 않은가? ……>물을 보라! 〈물이 증발하면, 일종 의 공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지표면은 메마르게 될 것이고, 우리는 공중에 나는 조류밖에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물 속에 사는 물고기 들은 멸종하기에 이를 것이다. 선박을 이용한 교역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물이 없어지면, 물 위를 떠다니던 배라고 하는 부유체는 하나의 골동품이 되고 말 것이다. 아무리 가벼운 물체도 가라앉을 것이다…….〉 대기를 바라 보라! 불을 바라보라! 천체를 바라보라! 〈수천 년을 하루도 빠짐 없이 아 침이면 여지 없이 떠오르는 저 아침 해를 바라보라! 일정한 장소, 일정한 시간에 단 한 번밖에 비치지 않는 저 여명은 볼 때마다 신기하지 않은가!〉 동물들을 바라보라! 〈몸집에 비해 목이 짧은 코끼리를 보라. 만약 코끼리가 낙타의 목을 가졌다고 상상해 보자. 얼마나 우스울 것인가! 그러나 다행히 도 코끼리는 긴 코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2)
2) 펜느롱, 『신의 실존을 증명하기 위한 자연의 인식』, 1713.
신비한 자연을 들어 신을 증명하려고 한 사람들은 그 후로 계속 나타났 다. 뉴벤티스트, 플뤼쉬 신부가 그들이었고, 베르나르댕 드 쌩 삐에르가 그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샤또브리앙이 그 유산을 이어받은 셈이었다.
고드프리트 아놀드 역시 감성적인 사람이 찬양받던 시대의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언급은 지금이 적당한 것 갇다. 『교회와 이단에 관한 공정한 역 사』가 그의 저서였다. 그는 그의 저서를 공정하고도 일반적인 역사서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결코 어떤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 그는 책을쓰는 데 있어서 신학적 방법을 버리고 역사적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일교를 신봉하지 않는 그는 신과 예수를 믿는 모든 교회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이단에게 영광을 돌리는 역사서를 쓰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사실 이단이라는 말은 오히려 이해받지 못한 채 중 상모략에 시달리는 억울한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이름일 뿐이었다. 이단자라 는 말은 기득권을 차지한 사람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반대편 사람들에게 붙이는 이름일 뿐이었다. 〈기득권을 차지한 사람들은 그들의 정 통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정통성이 신앙과 무슨 관계가 있 는가? 정통성은 신앙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그마와 권위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며, 신앙을 하나의 업적으로 간주할 뿐이다. 따라서 그들이 주장하는 정통성은 결국 종교적 체험도 부활도 모르는, 또는 달리 말하자면 속이 텅 빈 합리주의에 지나지 않는다.〉진정한 신앙을 찾는 사람을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신 의 은총을 거부한 채 이기주의, 교조주의, 불관용주의를 섬기는 사람들이 진 정한 이단자들인 것이다. 고드프리트 아놀드는 석학이었으며, 혁명가이자 신 비주의자였다. 그는 1699년 이런 말을 했다. 〈사실은 우리가 지금까지 이단 시한 사람들은 이단이 아니었다. 전정한 기독교도, 진정한 예수의 제자는 오 히려 그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이단이라는 이름은 오히려 권위와 정 통성에만 메달려 메마를 대로 메말라 버린 사람들에게 줘야 한다.〉그의 안내를 받은 우리는 이제 열성신도들에게 접근해볼 수 있다.뽀르 루와이얄의 마지막 수녀들이 1709년 추방당하고 말았다. 이어 1710 년에는 수도원이 파괴되고 말았다. 쟝세니즘이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그 렇게도 오랜 동안 프랑스의 국교에 저항하던 교파가 마침내 항복하기에 이 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쟝세니즘은 오히려 밖으로 그 영역을 점점 더 확장해 나갔던 것이다. 쟝세니스트들은 루B성으로 몰려가기도 했으 며, 우트레히트의 어떤 교회는 추방된 쟝세니스트들의 은둔처 구실을 하기 도 했다. 비엔나는 그들을 왕궁에 영접하기조차 했다. 삐에몽, 롬바르디, 리 구리, 토스카나, 그리고 로마를 포함하여 독일의 도시둘과 스페인에서 그들은 포교하고 다녔다. 1713년 프랑스에서는 우니게스투스 칙령이a) 발표되었 다. 우니게스투스 칙령의 포고는 초기의 교파 싸움 못지 않은 심각한 싸움 을 유발시켰다. 오라토리오 교파 목사인 께넬이 복음서의 도덕에 대한 책을 발표하자, 교황은 그 책의 백한 군데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그것은 하나 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바야흐로 일대 접전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좌파, 우파, 절충파들의 논쟁과 싸움이 수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열성 신도들이 생겨났다. 예컨대 장례행렬 도중에 기적이 일어났으며, 그 소문은 하나의 소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쟝세니즘은 신학적인 측면과 심정적인 측 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쟝세니즘의 중요한 두 가지 원칙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전자가 약해지는 반면 후자가 강해졌다.
a) 1713년 9월 8일 교황 끌레망에 의해 포고된 칙령의 명칭. 그 포고는 쟝세니스트 중의 하 나였던 빠스끼에 께넬의 『도덕적 성찰』에 실려 있던 101개 조항을 단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니게스투스 칙령은 프랑스 종교계를 양분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영혼의 쓰라림과 고통, 구원에 대한 불안한 기대, 박해받던 과거에 대한 기 여들, 기적에 대한 믿음은 왕의 의지로도, 로마 교황청의 칙령으로도 어떻 게 해볼 수 없는 요지부동의 것이었다.
하물며 신앙상의 이유로 박해롤 받고, 잡히면 사형에 처해지기도 하던 세 벤느의 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병사의 추격에 시달리던 그들은 감정이 격해지면 환각을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벤느 교회의 지도자 중의 하나였던 아브라함 마젤이 남긴 『회고록』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무기를 둘기 몇 달 전의 일이다. 이상한 생각이 나를 산란하게 했는데, 그러던 중 에 나는 양배추를 먹는 이상하게 생긴 크고 검은 소들을 보았다. 어떤 낯선 사람이 그 검은 황소들을 정원 밖으로 몰아내줄 것을 내게 부탁했지만 나 는 거절했다. 그런데 그의 청이 어떻게나 간절하던지 나는 마침내 거절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정원 밖으로 몰아내 주었다. 그 순간, 예수께서 나타나 나 를 붙잡아, 내 입을 열어 말씀을 전하셨다. 내가 본 정원은 교회였다. 검은 황소들은 교회를 갑아먹는 무리들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비유의 완성을 위 해 나를 쓰셨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말씀을 마치신 성령은 다른 영감도 주 셨다. 그 영감에 의하면, 나는 박해자들에 대항하여 싸우려면 형제들과 힙심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로마 교회 사제들에게 철퇴를 쳐서 그들로 하여 금 불의 심판을 받게 하라는 것이었다.〉 숲속에서 집회를 하는 영감과 성령 의 감화를 받은 열성신도들은 어떻게나 용감한지 그들을 지켜본 사람이라 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성령의 감화에 의지하여 무기를 들었고, 행군을 했고, 공격을 했고, 해산을 했다. 그들은 성령의 지시에 따라 성전을 태우고 성직자를 죽인다고 믿었다. 결국 마젤은 에그 모르뜨에 있는 꽁스땅스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는 감옥의 돌을 깨고 탈옥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가 돌을 깨고, 그것을 들어내면서 느낀 느낌은, 영혼은 빠져나갈 수 없다는 느낌이었다〉.
엘리 마리옹의 경우는 더욱 심한 경우였다. 〈1703년 정월 초하루 설날,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성령으로 내게 강림하셨다. 하나님은 나의 입을 통하여 내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엘리 마리옹에 의하면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이 선택한 인간은 바로 그였다. 그의 투쟁담은 제쳐두고, 그가 1706년 망명지 영국에서 어떻게 처신했는지를 간단하 게 살펴보자. 그는 환상을 보곤 했으며, 거기에 따라 예언을 하곤 했다. 하 나님의 성령을 받은 그는 입신을 체험하기도 했다. 그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보다도 미온적으로 믿는 사람들과 미온적인 태도의 목사들을 더욱 바난하곤 했다. 그는 예수의 재림을 믿지 않는 제네바 사람들을 규탄하고 다녔 다. 〈그들은 태양과도 같은 예수님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것이다. 그들은 유태인들이 그랬듯이 예수님의 버림을 받을 것이다.〉 엘리 마리옹은 영 국의 런던에서조차도 프랑스 성직자들과 영국의 국교를 신봉하는 사람들뿐 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비난하고 다녔다. 바야흐로 슬프고도 끔찍한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까미사르의 선지자들-은 교회에서 파문을 당하고, 대중으로부터 야유를 당하고,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유죄판결을 받 을수록 더욱 뜨거운 하나님의 불길을 느낄 뿐이었다. 그들은 영국인들에게 포교하고 다녔다. 일종의 전염병처럼 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것이 종교이다. 영국의 까미싸르가 히스테릭한 단체로 자리를 굳히기 시작했다. 그들은 도시와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불과 유황의 심판을 받을 날이 가까왔다고 예언하고 다녔다. 그들에 의하면 그 심판에서 구원받을 사람은오직 신자들뿐이었다. 그들에 의하면 신자들은 완장이나 초록색 리본을 달아 천사가 그들을 알아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런 예언 을 하기도 했다. 그들에 대한 세상의 박해는 앞으로도 6개월 동안 더 진행 될 것이며, 박해기간이 끝나면 그들의 사명은 전리임이 밝혀질 것이라는 것 이었다. 그들이 예언한 6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들은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겠다고 공언하고 다녔다. 영국인들은 놀란 눈으로 그 열성신도들을 지켜봤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아무것도 보여 주지 못했다. 영국인들은 처음에는 그들의 예언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시 간이 홀러감에 따라 영국인들은 점차 그들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 했다. 마침내 엘리 마리옹은 죄인공시대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머리에 붙 여진 종이 위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엘리 마리옹, 예언을 빙자하여 거짓과 불경을 일삼은 자. 거짓된 성령의 계시와 예언으로 여왕의 신민들을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은 사이비 선지자.〉 엘리 마리몽은 마침내 그를 따 르는 소수의 신도들을 데리고 영국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들은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콘스탄티노플과 소아시아에까지 이르렀다. 그 들은 거기에서도 여전히 예언을 일삼았으며, 여전히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두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언젠가는 그들이 말 하는 불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에 의하면, 〈그 불은 하늘에서 내려와 밤을 바추고, 이 땅의 인간들의 부패한 삶을 드러낼 것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운명론이야말로 엄격한 이성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스피노자의 운명론은 우리를 우주적 존 재로 용해시키는 편안한 철학이다. 스피노자의 운명론은 감각이며, 감성이 다. 세계, 신,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주적 질서에 통합되며, 그 우 주적 질서에의 통합은 그것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의지적이고, 의식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의 본래적인 성격과는 달리, 그것은 수동적 인 집착, 자아의 해탈로 변질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에티카』에 스며든 신비주의, 네델란드와 독일에 번진 『에티카』의 열기에 대해 이상한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스피노자 추종자들의 열광은 다른 종교집단 의 열광에 비하면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카톨릭 교도들뿐만 아니라 루터파 교도들도 똑같이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그들도 예배를 통해 돈을 거두어 들였으며, 그들도 성령보다는 칙령의 예속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들도 돈 으로 속죄케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설교는 진리와 생명의 샘이라기보다 는 단순히 암기해둔 장광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속된 그들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들에 대한 반발로 번진 종교가 가슴으로 느끼는 종교랄 수 있는 독일의 경건주의였다. 경건, 심정 이라는 단어는 필립 쟈콥 스페너라는 사람의 글에서 자주 보인 단어였었다. 그런데 그것들은 그렇게도 오랜 동안 감정의 분출구를 찾던 독일인의 가슴 에 그것을 마련해 주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필립 쟈콥 스페너는 프랑뽀르의 목회자였다. 그러던 그는 1670년 피에타 학교를 설립한다. 그에 의하면 논쟁 과 비난은 성직자의 일일 수 없었다. 성직자의 일은 내적인 삶을 흔들어 깨 우는 일이다. 그는 그와 공감하는 사람들과 일주일에 한두번씩 모여서 성경 울 읽고,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이 그들의 영혼에 역사하기를 기다렸다. 그 것은 말하자면 첫걸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제 2단계 작업은 1675년에 야 완수되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그 해에 『진정한 신앙과 진정한 교회를 위한 경건주의는 신의 뜻과 일치한다』라는 책을 출간했다. 점차 그의 활동 영역은 넓어져 갔다. 그는 많은 목회자들과 신도들에게 설교를 하고 다니면 서, 사제들과 신도들이 사랑에 근거한 신앙, 살아서 움직이는 신앙으로 돌 아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1686년, 그는 궁정 선교사의 자격과, 작 센 지방의 고해신부 자격과, 최고 추기경의 자격을 동시에 갖추고 드레스덴 에 갔다. 그런데 그의 드레스덴 여행이 그에게 안겨준 영예가 얼마나 큰 것 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 성공이었는지를 상기하지 않는다면 별 로 의미가 없다. 학생들과 부인들은 그의 전지하고도 열띤 강연을 귀기울여 들었다. 그의 지도를 받은 사람들은 써클을 만들어 성경공부를 했다. 처음 에는 빈정거리는 투로 사용되던 경건주의라는 단어는 드디어 영광의 자리 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헤르만 프랑케라는 사제도 경건주의자 중의 하나 였다. 그는 믿음의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하다가, 스스로 믿음이 부족함을 절감하고 그 자리에 엎드려 기도했다고 한다. 그는 하나님께 그를 비참한
현재의 상태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기도드렸다. 하나님은 그를 비쳐 주셨다. 그는 깨달았다. 그는 그 후로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 게 하기로 작정했다. 왕이나 귀족들 중에도 경건주의자들은 있었으며, 그들 도 하나님께 구원을 기도드렸다. 경건주의는 부르즈와와 일반 시민들에게까 지 파고들었으며, 독일은 바야흐로 신앙의 눈을 뜨기에 이르른 것이었다.
전염병은 금방 번지는 속성이 있다고 했다. 경건주의라는 전염병도 마찬 가지였다. 스페너는 드레스덴을 떠나 베를린에 돌아가 브란덴부르크를 설득 시켜 할르 아카데미를 대학으로 개조케 하는 데 성공한다(1694). 그렇게 해 서 스페너는 할르 대학의 창설자가 된다. 기독교 서적으로 꽉찬 경건주의의 상아탑은 그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었다. 경건주의자들은 독일에서 이렇게 개가를 올렸는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선 그들의 신비주의는 보헤미아 신비주의의 잔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 속에 솟 아오르는 종교심을 저해하는 모든 요소에 대해 대항했다. 그들은 분석적인 방법과 합리적인 탐구가 전부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명료한 것만이 전리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직관의 자리를 예비해 뒀다. 직관은 생명의 샘 물을 흐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들은 〈나〉, 〈자아〉의 내부에 자 리잡고 있는 독자적이고도 특별한 어떤 내적 능력을 믿었다. 관습에 얽매인 문화가 끈질기게 그들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지만, 그들은 원초적인 어떤 힘을 믿으며, 거기를 끝내 떠나지 않았다.그러나 그들의 감정은 단순한 것일 수 없었다. 그들은 때때로 참담함을 맛보기도 했으며, 절망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들은 물 한 모금 못 마시 고 사막을 헤매는 사람처럼 고통스러워하고, 목말라 했다. 은총을 기다리 는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다가 마침내 기적이, 계시가, 은총이 그들을 감싸안았던 것이다. 고백과 회개의 시간이 왔다. 이 제 인간의 속세는 끝나고 영원불멸의 세계가 도래했다. 오직 신의 무한한 사랑만이 그들을 감쌀 뿐이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는데, 돈을 버는 일 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는데, 철학자 신학자는 무 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는데, 성서해석가는 무슨 소용 이 있겠는가? 그들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기만을 기원했다. 경건주의 자들은 심지어 행동까지도 포기하려고 들었다.프랑스 교회사에 가장 유명한 성직자 둘을 꼽으라면 나는 보쉬에와 펜느 롱울 들겠다. 그런데 그들처럼 상호간에 공격과 비난을 서슴지 않은 성직자 들도 없었다. 그들의 싸움은 치열해서, 교황청에 서로를 제소하기에 이르렀 는데, 그 싸움은 그 중 하나가 처벌을 받고 나서야 끝이 났다. 그들의 싸움 은 시대적인 싸움이었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시대적인 상황울 고려하지 않 는다면 우리는 이 두 성칙자의 싸움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말해 두 자면 경건주의는 감정의 이름으로 기존의 교회를 마구 뒤흔든 신비주의의 한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펜느몽은 몽상가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라도 프랑스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스는 가슴을 열고 그롤 영접했다. 그러나 설 탄은b) 주춤거렸다. 펜느롱에 의하면 동방과 서방은 서로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데 반해 종파는 자꾸만 분리주의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었다. 유프라테 스 강가에까지 한숨을 흘려보내던 아시아도 드디어 그 긴밤의 터널을 벗어 나 여명의 빛을 보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몽상의 세계를 꿈꾸고 있었다. 그 것은 겨울에는 따뜻한 바람이 불고,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부는 동화의 나라 베띠끄였다. 그곳은 봄과 가을이 마치 한쌍의 부부처럼 손을 마주잡고 다정하고도 행복한 산책을 한다. 땅은 다른 곳보다 두 배의 수확울 거둘 수 있을 만큼 기름지다. 석류나무, 월계수, 자스민 등이 길가에 늘어서서 은은 한 향기를 내뿜는다. 또는 그는 손수 싸렌테라는 완벽한 도시롤 설계해 보 기도 한다. 그 도시는 악도 없고, 불행도 없는 도시이다. 어린아이에서 어른 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정도의 행복을 가져다 주는 싸렌테라는 도시에는 오 직 정의와, 평화와, 질서와, 풍요만이 있을 뿐이다. 그곳은 밀물이 풍요로움 을 밀고 왔다가, 썰물이 다른 풍요로움을 위해 자리를 비워 주는 곳이다. 어 떤 어려움도 해결할 수 있는 요술 지팡이는 모든 것을 해결하고, 모든 것 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킨다. 도시민들도 행복할 것이며, 농민들도 행복할 것 이며, 여자들도 행복할 것이며, 아이들도 행복할 것이며, 노인들도 행복할 것이다. 〈노인들은 감히 상상도 못하던 세계를 생전에 보게 된 감격을 억누 르지 못하고 눈물을 홀릴 것이다. 그들은 떨리는 손을 들어올리면서 ……〉b) 터키의 황제.
이웃 나라와는 평화를 유지할 것이다. 적군들도 무기를 던질 것이며, 이제 무기를 버린 적군과 아군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릴 것이다.
펜느롱은 눈물을 좋아했다. 『뗄레마끄』의 안물들은 눈물을 멈출 줄 모르 며, 그래서 그 책은 눈물로 얼룩진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칼립소, 유카리스, 비너스, 펠레마끄, 멘토르, 필로클레스, 이도메네 등 모 두가 눈물을 강물처럼 흘린다. 펜느롱은 자애롭고 다정다감한 사람을 좋아 했다. 『아카데미의 할 일에 관하여』에서도 그가 밝히고 있듯이, 그는 〈놀랍 고 신비한 것보다는 사랑스러운 것〉을 좋아했다. 그는 또한 우리에게 부족 한 것을 언어로 표현해 내고 싶어했다. 그의 그 말에 아카데미 의장도 공감 의 답장을 보냈다. 펜느롱은 자애롭고 관대한 사람이었다. 그를 멀리 하려 고 하는 사람이든,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사람이든, 그는 누구든 매혹시 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펜느롱에게는 다른 면모도 있었다. 그의 상상력은 야심만만하고 까다로운 것이었으며, 그에게는 오만하고 건방진 태도가 없었던 것도 아니 었다. 그에게서 증오심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가 꿈꾸는 완 전한 이상적안 인간과는 너무 멀지 않은가? 그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그는 얼마나 불행했을 것인가? 그의 영혼은 고통을 견딜 수 없었으며, 그의 마음 은 우수를 벗어날 수 없었으며, 그의 가슴은 권태를 털어버릴 수 없었다. 그 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밑바닥을 고통스런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는 불쾌했다. 거기에는 온갖 뱀둘이 득실거렸던 것이다.그는 그를 정화시켜 줄 정갈한 물을 갈구했다. 그는 죄많은 사교계 인사 들, 모사가들, 야망가들, 코메디언들에게 은총을 기원했다. 그는 완전한 인 간, 완전한 세계를 꿈꿨다. 그러나 그것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 능한 것이었다. 그는 불안에 시달렸다. 마담 기용이 그에게 그토록 큰 영향 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의 펜느롱이 그롤 짓누르던 멍에를 신 비의 불, 성령의 불에 태워 없애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 이다. 마담 기용은 이미 쌩-씨르의c) 아가씨들과 마담 드 맹뜨농 같은 부인c) 1686년 루이 14세와 마담 드 맹뜨농에 의해 설립된 여자 학교. 오늘날에는 그 자리에 사관학교가 서 있다.
들을 포섭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들과의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 들은 조그마한 징조에도 금방 정신을 차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 자 마담 기용은 보쉬에를 포섭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어려운 일 이었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수상하고 애매한 도움은 원 치 않는 사람이었다. 마담 기용은 감성이 풍부한 여자였다. 그녀는 예언을 하고 다녔으며, 환상을 보았으며, 기적을 일으키고 다녔다. 보쉬에는 그녀의 그런 점이 싫었던 것이다. 그녀에 의하면 기도는 전적인 해탈이어야 하며, 우리는 신에게 죄사함을 포함하여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것으로 끝이었다. 마담 기용은 이단이었다. 보쉬에는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펜느롱은 달랐다. 펜느롱은 마음이 여린, 그 러나 그러면서도 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결점을 들여다볼 수 있 울 만큼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인 동시에 삶을 버리기에는 삶에 너무 애착 울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한 펜느몽에게 마담 기용은 순수한 사랑의 교리를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마담 기용의 말을 들어보자. 그녀에 의하면 무엇인가가 신과 인간을 가로 막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과 인간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 중에 어떤 것들은 빽빽하고 촘촘한 물질과도 바슷한 것안 반면, 다른 어떤 것들은 아주 섬세 해서 거의 물질을 벗어난 것들이었다. 마담 기용에 의하면 우리는 신과 인 간을 가로막고 있는 그러한 장애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간들 의 의식을 어떻게 하면 깨칠 수 있을까? 오직 그 일에 매달린 마담 기용은 신에 이르는 길은 기도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고도의 정신성은 오직 기도만 이 가져다 줄 수 있었다. 열심히 기도하라! 고 그녀는 의쳤다. 〈여러분은 사 랑과 기도 속에 살아야 합니다. 굶주린 자들이여 오시오. 애통하는 자들이 여 오시오. 병든 자들이여 오시오. 죄전 자들이여 오시오. 와서 우리를 사 랑하는 하나님께 간구합시다.〉하나님 앞에 나와 무릎 꿇고 믿음으로 기도합시다. 성서를 비판적으로 읽 던 과거에서 벗어나 이제 정신을 성서로 바로잡으시오. 그리고 나서 당신의 깊은 곳에 침잠해 들어가 성찰해 보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곳에서 모든 진리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감동이 일면, 그 감동을 조용하고, 평화 롭게 영접하시오. 조금만 움직여도, 그것은 영혼의 양식을 망가뜨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사랑과 믿음으로 그것을 꿀꺽 삼켜야 합니다.
간단한 기도로 구성된 새로운 입문식이 관례가 되었다. 노력이 적으면 적 을수록 신을 영접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 많았다. 노력이 적으면 적을수록 신은 더 쉽게 느껴졌고,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관례가 요구하는 기도 요령 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첫째 영혼의 기도는 모든 것을 탈피한 순수한 사랑, 다시 말해 무사무욕한 사랑을 가져올 수 있어야 했다. 기도는 아무것 도 요구하지 않아야 했다. 신에게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보상을 기대하고 주인을 섬기는 하인과 같아서 상급을 받을 수 없었다. 간 구보다는 기다림이 기도의 미덕이었다. 기도가 필요한 것은 명상을 위해서 였다. 기도는 영혼을 녹이고 용해시키는 뜨거운 사랑 의에 다른 것이 아니 었다.성지를 향하던 기독교도들은 이제 완전한 자아포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근심 겨정 털어 버리고 오직 신이 인도하는 대로 자신을 맡겼던 것이다. 더 이상 따지고 생각하는 일도 없었다. 더이상 아무런 의지도 없었다. 몸? 영 혼? 목전의 이익? 영원한 이익? 그들은 아무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과거는 잊어버리고, 미래는 섭리에 맡기고, 현재는 신의 것이었다. 자아를 포기할 줄 아는 사람만이 가장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이제 모든 악의 근원인 개체적 특성은 사라진다. 신은 안간의 더러운 모 든 것을 태워 없애기 위해 불을 내리셨듯이, 지혜의 신을 내리신다. 불은-모 든 것을 태워 없앤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혜의 신 도 마찬가지다. 지혜의 신은 인간의 더러운 찌꺼기를 태워서 인간과 신이 일체되게 한다. 신과의 일체감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굳이 말로 표현하 자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행복감이 가득 차게 하는 어떤 사랑과도 갇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를 포기하고, 자신을 무한한 존재에게 맡기면, 인 간적인 어떤 쾌락과도 비교할 수 없는 어떤 행복감이 솟는다. 그것은 텅빈 느낌이 아닌, 꽉찬 느낌이다. 포기는, 곧 얻음이다. 버리면 모든 것이 얻어 진다. 사랑해야 한다.마담 기용은 그녀의 이론을 압축하여, 『누구나 실천하면 터득할 수 있는 완성의 길을 안내하는 간단한 기도방법』(1685)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소개 한다. 과감한 모사꾼이라고 할 수 있는 그녀는 종교개혁을 꿈꿨다. 그러나그것은 도피네에서가 아니었다. 또는 그녀를 추종하던 라꽁브 신부와 함께 말리노스 교리를 설교하면서 삐에몽 거리를 돌아다니던 때도 아니었다. 빠 리는 더더구나 아니었다. 빠리에서는 그녀의 정적주의를 소개해 줄 사람을 하나도 찾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펜느롱을 만났다. 그런데 의의로 그는 교 회의 개혁을 위해 열렬히 앞장섰다. 그는 성찬식의 사제를 어떻게 섬기고 악마를 어떻게 물리쳐야 하는지를 몸소 실천해 보였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신의 사랑이 넘치는 나라를 설계했던 것이다. 마담 기용이 다른 사람들에게 는 하나의 모험가였다면, 펜느롱에게는 완성의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였다. 이성을 버리고, 인간적인 지혜를 포기하고, 그의 의도를 그르치는 모든 불 순한 것들을 물리치는 일이 과연 쉬운 일이었을까! 그러나 그녀가 가르쳐 준 신바의 열정은 불순한 모든 것들을 태워 없앨 수 있게 해줬다. 〈주여 오 직 당신만을 섬기며, 당신께 온전히 맡기나이다.〉 그에게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실패를 하고 거기에서 벗어나 보기도 하고, 재시도의 비 상을 하기도 하고, 환멸과 초조를 맛보기도 하고, 높이 울라갔다가 실추하 기도 하고, 메마를 대로 메마른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방향을 잡아 주고, 그로 하여금 질곡을 벗어나 발전할 수 있게 한 사람은 그녀였 다. 그는 어떤 순전 무구함이 그의 내부에 솟아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오!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을 때 느껴지는 그 무한한 행복감이란!〉하고 그는 마 침내 외쳤다.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욕망을 절멸시켰을 때의 상태는 어린 아이의 상태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한 순간을 그는 이렇게 노래 불렀다.
오, 순수한 사랑은 당신의 눈 앞에비치는 남은 모습까지를 마저 없애버리니오직 신의 의지만이 나를 인도하시고나는 나를 온전히 당신에 대한 막연한 믿음에 맡기도다또는 이렇게 노래부르기도 했다.소중하던 나를 파산시키고나의 삶을 포기한 것이 대단한 것은 아니니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할 수 없었다. 지적이고, 형식적인 냄새가 충분히 사 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어린아이의 더듬거림이어야 했다. 그는 그래서 언제 나 어린아이의 옹알이로 되돌아오곤 했다. 그토록 불안에 떨며, 고뇌를 떨 치지 못하고, 비참과 사악함에 젖어 살던 우리가 이제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잠을 자는 어린아이처럼 살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한 기쁨아 어디 있으리! 그녀는 펜느롱에게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 〈당신도 언젠가는 나처럼 단순하 게 되기를 빕니다. 지혜를 얻을수록 당신은 단순하고 어리게 될 것입니다. 어른을 포기하고 어린아이가 되십시오.〉 거기에 펜느롱은 이렇게 답장했다. 〈나는 내 가슴을 신께 열어 그 조그만 정신을, 당신이 말하는 어린아이의 정신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신은 나를 어린아이로 만든 듯합니다. 나는 혼 자서는 한걸음도 뗄 수가 없습니다. 신이 나와 함께 계시면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 박해도 두려울 것 없다. 마담 기용의 교리에 대한 잘못된 해석도 두려울 것 없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의 잘못된 해석을 잘 못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녀에게서 오직 교회가 인정한 위대한 신비만을 보기 때문이다. 그녀를 배척하는 사람은 순수한 사랑의 맛을 모르는 사람이 거나 숭고한 신앙의 여린 꽃을 두박한 손으로 꺾어 버리는 사람일 뿐이었 다. 로마의 파문도 그에게는 하나의 시련에 불과했다. 수모를 당하고도, 파 문을 인정하고, 교구의 신도들에게 편지로 그 내용을 알리는 일은 육체적 인간을 죽여서, 숭고한 희생을 치르고, 마지막 남은 오만의 찌꺼기를 물리 쳐 신 안에서 승리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을 뿐이다. 그는 마침내 문을 발견 한 것이었다. 그는 마담 기용을 만나기 전까지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편 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을 죽을 때까지 지속시키고 싶었다. 그는 과거의 잘못들을 인정했다. 그리고 잘못이 있다면 거기에 대한 벌을 받을 준비도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그의 가슴에는 잘못을 저지를 자 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가슴은 더이상 잘못을 저지를 수가 없었다. 그 는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존재를 태워 소진시키고 마는 열렬한 사랑 으로 타오른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재뿐이었기 때문이다. 순수한 내적 사 랑을 향한 그의 열망이 얼마나 열렬한 것이었는가는 시선을 조금만 돌려보 면 금방 알 수 있다. 보쉬에와의 논쟁, 숱한 편지들, 논박들, 논박에 대한 논박들, 검토, 변호, 결정들…… 속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은밀한 드라마 였다. 인간에서 신으로의 그 변화, 불에 의한 그 정화에 어떻게 비장감이 없 울 수 있겠는가? 〈내가 말하는 순수한 사랑은 오직 사랑에만 매달려, 자신 을 미화시키려는 사람의 타는 듯한 사랑과는 다른 사랑이다. 무지한 사람들 은 그러한 사랑을 가장 성스러운 것으로 보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불완 전한 사랑일 뿐이다. 나는 무자비한 사랑, 파괴적인 사랑을 순수한 사랑이 라고 부른다. 주체를 미화시키고 장식하는 대신 주체에게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다시 말해 주체가 목표에 이르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을 정도로 주체의 모든 것을 철저히 앗아가 버리는 사랑은 오칙 파괴적인 사 랑뿐이다. 순수한 파괴적 사랑은 오직 탈취하고, 파괴하고, 궤멸을 목적한 다. 그것은 파괴를 먹고 산다. 그것은 다니엘서의 금수처럼 닥치는 대로 먹 고 부순다.〉
마담 기용울 추종하는 제자들은 유럽 전역에 퍼졌다. 심정의 신학을 전파 하고 다닌 제자들 중의 하나였던 뿌와레는 저서를 내놓기도 했다. 아무리 그들을 추방해도 소용없었다. 어떤 힘으로도 그들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 들을 설득시킬 수는 더더욱 없었다. 이성을 거부하는 그들을 어떻게 설득시 킬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점점 수적으로 불어만 갔다. 열광적인 그들, 지 나치게 말하자면 병적인 그들은 광적인 스승들의 가르침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 마침내 신경증에서, 정신적 일탈에서, 광기에서 신을 찾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어떤 구속도 원치 않았다. 국교의 구속은 그들에게 감옥이나 마찬가 지였으며, 예배자는 폭군처럼 여겨졌다. 그들에게는 사회적 구속조차도 박 해로 여겨졌다. 그들은 발전을 부패로, 과학을 퇴폐로 간주했다. 그들은 원 죄와 속죄를 인정했지만, 이미 태초의 속죄기간은 다했고, 따라서 재림하는 속죄기간을 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는 진정한 기독교인을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악인의d) 시대였다.d) 악인 antechrist은,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말세 전에 나타나 예수를 자처하고 다니면서 하나님을 선전하고 다니는 사이비 예수를 말한다.
악인의 시대가 도래했도다
벌써 수 해가 흘러때가 이르렀나니
나타나리라 낮같이 밝은 밤에 크게 빛나는 무대 위로 온통 비로도로 수놓은 연분홍 수레를 타고 부드러운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운 지긋한 모습의 악인을 나는보았도다 사람들은 일어나 악인을 찬양하리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비복과 끝도 없는 행렬을 이끌고 오는 악인의 행렬은 개선하고 돌아오는 장수들처럼 나라와 백성을 온통 축제에 젖어들게 할지니 …. ..3 )3) 앙뜨와네뜨 부리농. 『악인의 시대』, 암스데르담, 1681, xxⅢ장.
최초의 재앙은 시작되었다. 최초의 재앙, 전쟁은 다른 재앙들을 부르리라. 페스트, 화재, 기근이 나라와 백성을 유린하는 때에 신은 나타나 당신의 신 자들을 구할 것이다. 화육의, 영혼의, 성삼위 일체의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이다. 그때가 진정한 천년지복의 시대인 것이다.
그들은 이따금 공동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천사의 형제들〉이라는 단체를 결성한 요한 게오르규 지히텔과 그의 제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어떤 일에서 도 벗어나 오직 명상과 해탈에 의지할 때 인간은 천사가 될 수 있다는 것 이었다. 제인 리드는 〈신비의 소피교〉를 결성했다. 비록 지히텔은 그녀의 모 임을 한정되고 완화된 단체로 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단체는 델프 찬양자들의e) 단체로 확산되어 갔다. 그녀는 견신과 예언이면 만족했다. 그e) 델프는 빠르나쓰산 중턱에 있는 아풀로 신전으로서, 그곳은 특히 신탁으로 유명한 곳이 다.
녀의 예언은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아그네스의 책을 덮고 있던 신비한 도장이 뜯어지면서, 위대한 아떨라는 괴물을 물리치고, 델프 찬양자 들은 왕의 이름으로 수놓아진 사랑의 깃발을 흔들고 내려오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리라. 구세주 예수의 손을 벗어나는 곳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리라.〉
그들은 자아를 버리는 일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적, 법열, 해탈을 체험하려고 했다. 그들은 영적인 체험뿐 아니라, 감각적인 체험을 영접했다. 그들은 온갖 형태의 악에 대항하여 도전했고, 치열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 다. 그둘은 예언자였고, 전사였고, 마술사였다. 그러나 그들은 비참한 신세 를 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이는 대로 가두려고 했으며, 어디에 서나 그들에게 돌팔매질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권력을 쥔 사람들의 끈질긴 추격을 피해 이 마을 저 마을, 이 나라 저 나라로 피해다니지 않을 수 없었 다. 그러나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그들은 원망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그 사탄들도 악인의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신이 보낸 신의 도구였 기 때문이다. 그들은 때로는 초라한 침대 위에서, 때로는 참혹한 처형장에 서 비참하게 죽어갔다. 키리누스 쿨만도 그 중의 하나였다. 독일, 홀랜드, 영 국, 프랑스, 이태리, 터어키 등 척박한 땅을 돌아다니면서, 바벨탑이 무너질 때가도래했고, 의인의 시대가 가까왔다고 의친 그는 마침내 I689년 모스크 바에서 화형당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그렇게 죽은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러한 그들간에 얼마나 긴밀한 관계가 유지되었는지는 쉽게 상상이 될 것이다. 그들은 어느 나라에 가서 든 번역자를 찾아냈고, 그들의 신학은 훌륭하게 번역되어 유럽 전역을 뒤덮 었다. 유사한 단체도 한둘이 아니었다. 기적의 적십자 단체, 강신술 단체, 일 원론에 의지하여 화금석을 찾는 비전전수자들…… 등등 우리는 광신의 분 위기가 그 시대에 얼마나 극성을 피웠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은 마침내 이성에 의해 정복당한다. 그러나 감정은 그 패배를 인정하 려 들지 않는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계몽의 빛에 대항하여, 접신자들은 그 들을 비추고, 그들을 태우는 불을 열심히 혼들어댔다. 과학에 대항하여 접 신론자들은 직관을 내세웠다. 당대의 대디수의 사상가들이 〈인식〉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면, 소수의 접신론자들은 〈사랑〉의 깃발 아래 뭉쳤다.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그래서 박해받은 대표적인 인물로는 앙뜨와네뜨 부리뇽이 있 었다. 오직 감정만을 내세운 그녀는 신과 직접 교신했으며, 지식은 지혜를 방해할 뿐이라고 공언했다. 그녀에 의하면, 복음의 시대가 끝난다고 하더라 도, 인간은 전리와 행복의 길을 자기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4) 앙 뜨와네뜨 부리뇽은 어느 날 네델란드의 데카르트 제자들과 논쟁을 벌이게 된다. 〈그너는 어느 날 데카르트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였다. 그녀는 그들의 원리를 끔찍스럽게 여겼다. 그들은 그녀의 논리에 수긍할 수 없었으며, 그 녀는 그들의 논리를 인정할 수 없었다. 데카르트주의자들의 방법은 그녀의 원칙에 크게 위배된 것이었다. 그녀는 이성의 빛에 의지하려고 하지 않는 반면, 데카르트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시금석에 대비검토시켜야 했다. 그녀 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데카르트주의보다 더한 오류를 범하는 집단 도 없고, 더 사악한 이단도 없고, 더 확고한 무신론도 없고, 더 확실히 신 울 부정하는 집단도 없다. 그것은 신이 나에게 명백하게 보여준 바의 것이 다. 그들은 신의 자리예 타락한 이성을 대치시키고 있을 뿐이다.〉 철학자들 에 대한 그녀의 다음 공박과 비교해 보자. 〈그들의 병은 인간적인 이성의 활동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믿는 데에 기인한다. 신의 계시는 우리의 이성과 정산, 그리고 허약한 오성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던가!
4) 『어둠 속에 솟아오른 빛』, 앙베르 출판사, 1669.
신의 계시는 인간적인 모든 활동이 정지될 때 그 빛을 비춘다. 그렇지 않고 는 우리는 신을 알 수도 없으며, 또는 신을 안다고 해도 우리의 타락한 정 신과 이성은 신의 활동을 방해할 것이다. 그것도 일종의 신의 거부이며, 무 신론이다…….〉5)
5) 삐에르 벨르, 『사전』, 부리뇽 편, 주석 참조.
〈엄숙하고도 오랜 작업 끝에 18세기는 마침내 수호신의 성격을 지닌 하 얀 수염을 단 신의 모습을 지워 없앨 수는 있었지만, 종교적인 문제까지 해 결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신비에 대한 기대와 신비의 표상은 서로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비의 표상은 사라졌지만, 신비에 대한 기대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깊은 상처를 아물게 해줄 어떤 절대자의 존
재를 애타게 갈구하고 있었다.〉6)
6) 뼈에르 아브라함, 『발작의 세계에 있어서의 인간들』, 1931, p, 15.
결론
유럽은 어떤 대륙인가? 유럽은 싸움이 많은 대륙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전쟁, 독일 아그스부르크 동맹 전쟁,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전쟁이 잇따랐다. 봄이 오면 전 쟁이 멈추었지만, 휴전은 참정적인 것일 뿐이었다. 계속되는 전쟁에 유럽인 둘은 지칠 대로 지쳤고, 평화를 향수처럼 그리게 되었다.유럽인들의 지칠 줄 모르는 전쟁을 보고 참다 못한 라이프니찌는 전쟁의 욕망을 밖으로 분출시키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자 스웨덴과 폴란드가 시 베리아와 크리미아 반도의 점령에 나섰고, 영국과 덴마크가 북아메리카 접 령에 나섰다. 스페인은 남아메리카를, 네델란드는 동인도를 정복했다. 프랑 스는 바로 눈앞에 있던 아프리카를 정복한 뒤 이집트를 포함한 사막지대에 백합을 뿌리고 다녔다. 이제 모든 전사들과 총기와 대포들이 미개인과 이교 도들의 정복에 쓰여졌다. 유럽 각국의 상충하는 이해와 야망들이 이제 더이 상 충돌하지 않게 되었다.그런가 하면 아베 드 쌩 삐에르는 분쟁을 밖으로 몰아내는 데 만족하지 못했다. 〈프랑스를 포함한 다론 유럽국가돌이 당한 것보다 더 참혹한 참화, 전쟁이 야기시키는 잔인한 살해, 폭력, 방화를 생각해 불 때, 나는 전쟁이 과연 결코 치유가 불가능한 필요악인가? 과연 영원한 평화란 한낱 꿈에 지 나지 않는 것인가?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1) 그렇다 영원한 평화, 항1) 까스텔 드 쌩 삐에르, 『영원한 유럽의 평화정착을 위하여』, 꼴로뉴, 1712, 서문.
구적인 평화를 유지시켜 보자·… 그리하여 유럽의 군주들은 평화조약에 서명한 후, 자신들과 후계자들을 위하여 각국의 주장을 철회하기로 했다. 영 토의 국경은 현재의 상태를 확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떤 국가 도 군대를 유지할 수 없으며, 필요할 경우, 예컨대 만 이천 명 정도의 병사 로 제한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쟁이 발생할 경우에는 평화동맹 이 중재에 나서며, 평화동맹의 규칙과 판결에 불복하는 군주에 대해서는 평 화동맹이 제재를 가하기로 했다. 항구적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전권적 평 화동맹은 그 본부를 자유 중립도시, 예컨대 우트레히트, 콜로냐, 제네바, 엑 스 라 샤벨 …… 같은 곳에 설치하기로 했다. 이상향을 만들기 위해 그들은 세칙을 마련했으며, 그들의 희망을 잘 집약해 줄 수 있는 〈유럽〉이라는 말 을 찾아냈다. 〈유럽 재판소〉, 〈유럽 군대 >,〈유럽 공화국〉… 그러한 제안 은 대환영을 받았다. 마침내 유럽은 전쟁의 도가니를 벗어나 하나의 공동체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40년 전(1672)에 라이프니찌가 프랑스의 동의를 얻으려고 했을 때 프 랑스는 네델란드에 선전포고를 했는데, 그 당시 루이 14세가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찌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짐작할 수 없다. 그리고 40년이 흐른 뒤 다시 아베 드 쌩 삐에르가 신기루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 의 사상누각을 특별히 방해하지는 않았다. 희망에 부푼 그는 지지자를-얻기 위해 그의 계획서를 들고 평화의 노장 라이프니찌에게 찾아갔다. 그러나 놀 랍게도 라이프니찌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의 말로는, 인간이 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 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군주는 기근이나 페스트가 국가에 만연하 는 것을 방지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전쟁은 막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왜냐 하면 전쟁은 한 사람의 의지가 아닌, 왕과 황제들의 합의를 요구하는 것이 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스페인과 동인도 제국의 왕위계승권을 포기하라고 황제에게 충언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스페인 제국을 프랑스 속국으로 만들려고 하던 욕심이 50년 전쟁을 낳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벗 어나려는 노력은 유럽울 50년 동안 다시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것이라 는 것이었다.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러한 운명〉 때문 이라는 것이었다.2)2) 라이프니찌가 아베 드 쌩 삐에르에게 하노버에서 1715년, 2월, 7일자로 보낸 서한. 아베드 쌩 삐에르의 『영원한 평화의 정착을 위하여』, Ⅳ권 참조.
유럽은 어떤 대륙인가? 유럽은 모순 덩어리였고, 불안정하면서도 엄격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어디를 가나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도처 에서 신분증의 제시를 요구받았고, 세금을 물어야 했다. 형제애를 방해하는 요소들은 너무나 많았다. 철책이 즐비한 들판이 경작될 리 없었다. 분쟁을 일으키지 않은 땅은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었다. 지주들은 모 두 자기 땅에 금줄을 둘러놓고 있었다. 규칙과 경계가 족쇄를 채우는 유럽 은 결코 확 트인 공간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어디에를 가나 숨이 막히고 답답함을 느꼈다. 〈나는 집을 지어 살고, 나의 무덤을 장만하 고 죽기에는 이 세상에 너무 늦게 태어났다〉고 하는 말이 들릴 정도였다.3)
3) 마라나, 『어떤 고독한 사람과 철학자의 윤리와 학문에 관한 대담』, 1696, p, 29.
그러나 엄격한 듯한 그 경계선은 항상 불안하기만 했다. 왜냐하면 그 주 변에서는 언제나 분쟁이 있었고, 새로운 조약이 성립되었고, 또는 쟁탈이 있었기 때문이다. 밀고 당기는 게임이 계속되었다. 바리케이트가 왔다갔다 했다가, 없어지기도 했다가, 다시 보이기도 했다. 지리학자들은 끊임없이 새 로운 지도를 그려내야만 했다. 새로운 지도를 완성하면 벌써 그것은 소용없 는 것이 되곤 했다.4) 유럽의 왕국 중에 이웃나라의 계승권을 주장하지 않는 국가가 없었다. 피레네 산맥도 국경선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유럽의 갈등은 거기에 있었다. 유럽은 한시도 갈등을 벗어날 수 없는 복합체였다.
4) 《학술지》, 1693년 4월 13일자. 「유럽의 상황에 대하여」 참조. 〈유럽은 하루도 변화를 걱정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조용한 곳은 유럽의 서안밖에 없었다. 바다를 통해서는 미개의 물결이 넘 실대지 않았고, 침략자가 약탈하러 오지도 않았다. 전쟁이 있더라도 그것은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등의 형제국가들의 전쟁은 아니었다. 지 중해 부근에서 터어키인들이 도발하곤 했지만, 연안에 사는 사람들과 여행 객들과의 싸움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목숨을 건 싸움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 쪽은 달랐다. 과거에는 문명의 개화를 저지하는 군대를 막아내기만 하면 그 만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동쪽의 관문을 괴 롭히며 러시아 황제의 군대가 유럽을 흡수하려고 했다. 그들은 암스테르담,
런던, 파리에 공물을 요구했다. 그들은 수염과 머리를 깍고, 의복을 바꿔 입 고, 독일어를 배웠으며, 귀감이 될 만한 선생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의 복을 갈아입는다고 영혼이 변하는 컷은 아니지 않았을까? 그 지각생들이 고 도의 인문주의를 겸손하게 수용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인문주의를 가져가 는 대신 다른 지혜를 부과하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그것이 지해였는지 광 기였는지는 나중에 제기되는 문제였다. 아무튼, 경쟁과 확장과 모방과 날조 를 일삼은 유럽이 동양에 그 모습을 드러낼 때는 이미 극심한 불균형 상태 에 있었다.
불화와 질두의 땅 유럽! 고난과 역경의 땅이 유럽이었다. 라틴인들은 두 박하고, 둔한 게르만인들을 무시했다. 그런 반면 게르만인들은 게으르고 타 락한 라틴인들을 무시했다. 라틴인들은 자기네들끼리도 분쟁을 그치지 않았 다. 그들은 다른 나라의 우월성을 인정하면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단점만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절름발이 악마 아스모데의 망또 위에 얼룩진 무수한 얼굴들처럼 아름다운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하나같이 일그 러진 표정들뿐이었다. 숄을 걸치고 걷는 스페인 여자는 산책을 하는 신사를 불쾌하게 할 뿐이었다. 프랑스 여자는 붉은 수염의 젊은 사제를 유혹하기 위해 거울 앞에서 교태를 배울 뿐이었다. 술과 담배에 찌들은 독일인들은 옷을 풀어헤친 채, 쓰레기와 방탕을 헤집고 다니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영 국인은 여자에게 우아한 태도로 담배와 술을 권하는 사람들일 뿐이었다…….5)5) 르 싸아쥬 『절름발이 악마』, 제1장.
《구경꾼》이 안내하는 정원을 가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어떤 나라가 어 떤 꽃을 국화로 지정하면 그 꽃은 더이상 아름답지도 않았고, 더이상 향기 도 없었다. 이태리의 국화는 머리를 어지럽게 할 정도로 냄새가 지독했다. 프랑스의 국화는 화려하고 찬란했지만, 그것은 너무 약하고 쉽게 지는 꽃이 었다. 독일의 국화는 아무런 향기도 없었다. 약간 나는 냄새마저도 고약한 냄새일 뿐이었다.6)
6) 《구경꾼》, No. 455·
그러나 그 고난의 땅에서 그칠 줄 모르고 솟아오르던 비탄과 비난의 소
리 가운데 궁지의 소리가 둘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세계 어떤 나라에 비 겨도 뒤지지 않는 유럽의 세력, 지성, 매력, 명예 등등을 찬양하는 소리가 점점 드높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대륙 중에 가장 작은 대륙에 지나지 않은 유럽이었지만 유럽은 어 떤 대륙보다도 아름답고 기름진 대륙이었으며, 사막이 없는 개화된 대륙이 었다. 게다가 유럽은 자유주의와 예술의 꽃이 어떤 땅보다도 활짝 핀 땅이 었다. 중국의 문명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화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 땅 밖으로 새나가지 않은 유럽의 어떤 정수가 있을 것이다. 아마 전역에 퍼지 지 못하게끔 어떤 운명 같은 것이 그것을 제한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그것이 있으니 그것을 향유하자. 과학, 메마른 형이상학적 사변뿐만이 아니 라, 취향에 있어서도 우리를 따를 나라가 없다.〉7) 유럽은 비록 그 안에서는 내분이 있었지만, 다른 대륙과 경쟁관계에 돌입하자, 합세하여 타 대륙을 정 복하고 예속시키는 지혜를 발휘했다. 유럽인들의 정신 속에는 영웅적 모험 과 대륙의 발견, 금은 보화를 가득 실은 보물선과 미개민족을 정복하고 그 땅에 깃발을 세우던 과거에 대한 추억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호전적인 기 질이 아직도 그들에게 남아 있다고 믿고 있었다. 〈유럽은 마음만 먹으면 동 방울 무릎 꿇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그들은 서슴지 않고 의쳤다. 〈아 시아, 아프리카에서는 황금을 뿌려도 또는 명예를 약속하고도 모으지 못할 수많은 병사들을 유럽의 군주들은 명령 하나로 모을 수 있다. 유럽의 백성 둘은 명예를 위해 언제라도 무기를 들 준비가 되어 있는 병사들이다.〉8) 그 러나 기실 거듭된 불행에 의해 찢길 대로 찢긴 그들의 의식에 더할 수 없 는 타격을 준 것은 신앙의 분열이었다. 그들은 더이상 과거와 같은 단일 기 독교 국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유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만 고유 한 어떤 독창성을 주장했다.7) 퐁뜨넬르, 『다양한 세계에 대한 담화』, 여섯째 날.
8) 루이 뒤 메, 『신중한 여행객』, 제네바, 1681 네번째 담론 「유럽에 대하여」.유럽은 어떤 대륙인가? 유럽은 하나의 사상으로 정리될 수 없는 대륙이
었다. 유럽은 두 가지 가치를 추구했다. 하나는 행복을 향한 발돋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히려 행복보다 더 소중하고 필수불가결한 전리의 추구였다. 그러나 그러한 이중적 요구가 충족되는가 싶으면, 유럽은 다시 불안한 상태 에 돌입하였고, 잠정적인 평형의 상태는 깨지고, 유럽은 영광과 고난의 추 구를 재개하곤 했다.
아직 개화되지 않은 주변세계는 많은 사람들이 사고에 시달리지 않은 채 만족한 삶을 살고 있었다. 너무 늙어 지칠 대로 지천 주변 종족들은 피곤하 고 불안한 삶을 기피했다. 그들은 꼼짝하지 않고 사는 것이 지해였으며, 열 반을 완전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창의 성을 의면한 채 모방만을 일삼았다. 그러나 유럽만은 끊임없이 새로운 천을 짜냈다. 유럽은 끊임없이 다른 실을 찾아 다른 천을 쌌다. 아침마다 직조공 둘은 비틀걸음으로 밤새 제조해낸 천을 들고 나오곤 했다.이제 일을 멈추고 쉴 만큼 완전에 가까운 걸작을 생산해낸 직조공이 있 다면 그것은 아마 고전주의 직조공일 것이다. 사실 고전주의의 형태는 어떻 게나 항구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지, 그것들은 오늘날에조차도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에게 모델로 제시되곤 하지 않는가?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 보 면 고전주의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생산해낸 사람들의 어떤 안전장치를 전 제한 아름다움이다. 고전주의는 고대의 지혜를 버리지 않은 동시에 기독교 의 지혜를 실천했다. 고전주의는 영혼의 균형을 유지한 동시에 만족과 찬사 의 고전적 질서를 세웠다. 고전주의는 그 의에도 많은 기적을 이루어 냈다 고 할 수 있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고전주의는 인간에게 어떤 평온한 마 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는 데에 그 비결이 있었다.그래서 유럽은 그 기념비적인 결과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면서 한동안 숨 을 돌릴 수 있었다. 한동안 유럽은 그렇게 절도 있고 장대한 광경 앞에서, 그보다 엄정하고 그보다 찬란한 다른 것을 만들어 낼 수 없으리라고 자족 하고 있었다.그러나 문자 그대로 한동안의 희망은 금방 좌절되고 말았다. 유럽은 거기 에서 멎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유럽은 딱딱한 고전적 규칙에서 거의 한 시도 벗어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한쪽의 이론가들이 고전주의의 규칙을 지유롭게 해석해서 조금만 변형시키려고 해도, 벌써 다른 이론가들이 나서서 그것의 위험성과 , 결점과, 오용을 지적했으며, 끝내 그들의 주장을 거부 하곤 했다. 때문에 탐색작업은 은밀히 행해질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평 온한 듯했지만, 안으로는 불안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론 행복 다른 진리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처음에는 박해와 비난 속에 드러 나지 않던 새로운 관찰자들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서, 지도자의 자리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l7세기와 I8세기 사이에 걷친 유럽에 있어서의 의식 의 위기는 바로 그러한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러한 비평적 사고는 어디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일까? 그 것은 어디에서 그 힘을 얻은 것일까? 또는 어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 일까?우리는 태초로 거슬러올라가 볼 수도 있고, 그리스의 고대로 거슬러울라 가 볼 수도 있고, 중세의 율법학자에게로 거슬러울라가 볼 수도 있고, 아니 면, 다른 어떤 과거로 거슬러울라가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우리는 그 연원을 문예부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문예부흥과 우리가 연구한 시대간에는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유사성이 많이 발견된다. 문 예부흥기와 우리가 연구한 시대는 똑같이 신에 대한 인간의 예속을 과감히 부정했다. 그리고 양 시대는 똑같이 인간(현실의 경계선을 분명히 그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해결할 수 없는 나머지 문제는 능력 밖의 문제로 겸허하게 접어 둘 줄 아는 인간)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리고 양 시대에는 공히 자연(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 특히 인간의 생명력으로서의 분명히 정의할 수 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자연)이 개입했었다. 또한 교회의 분열이 양 시대에 공통적인 것이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17세기말의 교회의 분 열은 I6세기의 분파주의의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양 시대는 특히 마법사들에 대한 논쟁과 연대에 대한 논쟁이 끝이 없던 시대였다. 누구나 자기의 영혼 깊은 곳을 응시한 채, 자신의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싸 울 준비가 되어 있던 두쟁적이고도, 근면정직하던 그 시대 …… 회의주의자 둘이 개종자를 자처하고, 인생의 해석이 가장 중요한 문제임을 모르는 사람 이 없던 그 시대는 누가 보아도 제2의 문예부흥기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제2의 문예부흥기는 그전보다 훨씬 지독하고 신랄하고, 환상이 깨어진,다시 말해 라블레가 없는 문예부흥기였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막연한 유사성에 만족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우리는 그것 들의 역사적 대차대조표를 작성해 볼 필요가 있다. 2절판 책에 매달려 열심 히 일하던 사람들 지칠 줄 모르고 모든 책들을 게걸스럽게 탐독하던 사람 들, 그들이 문예부흥기의 시인들에게서 매력을 발견하거나 그들에게 미소를 주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과감한 영혼, 거침없는 사상이 가져다 주는 기쁨 과 고뇌를 알게 한 문예부흥기의 철학자들에게는 깊이 경도해 있었다. 그들 은 문예부흥기의 철학자들을 읽었으며, 그들에게 찬사와 경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삐에르 벨르도 엄격히 말하자면, l6세기와 l7세기에 걸친 자유사상 가들의 후예였다. 삐에르 벨르는 〈종교와 신의 존재에 대한 과감한 사상을 담고 있는〉 『담화』의 저자 라 모뜨 르 베이예를 무척 좋아했다. 그는 루칠 리오 바니니를 무신론으로 순교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기꺼이 인용하곤 했다. 더 거슬러올라가자면, 그는 쟝 보뎅 샤롱, 미셸 드 로삐딸 그리고 몽 떼뉴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몽떼뉴는 그에게 삶을 유유자적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골로와 기질을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당대의 대부분의 다 른 사람들처럼 지오르다노 브뤼노를 깊이 이해했다. 지오르다노는 〈기지에 번득이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 는 엄청난 파란이 없이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공격할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났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포함하여 신앙적인 가장 중 요한 문제를 공격하고 나선 사람이었다〉. 삐에르 벨르는 또한 〈육체의 죽음 과 함께 영혼이 죽는다고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보다 훨 씬 착한 사람〉이라고 주장한 〈이상한 기질의 소유자〉, 〈가장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 까르당과 뽐뽀나찌에게서도 많은 것을 섭렵한 바 있었다. 그는 또 한 노데 경의 후원으로 이단적인 글을 발표한 빨린지니어스를 포함하여 인 간 이성 의에 아무것도 믿지 않던 모든 사람들을 두루 거친 사람이었다.9)9) 『혜성에 관한 성찰』과 『사전』 참조.
리챠드 시몬도 마찬가지였다. 리챠드 시몬 역시 〈우주 전체를 이성의 진 리에 복종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 선배를 하나도 빼놓지 않 고 거쳤다. 텍스트에 대한 존중심, 그리스 라틴어에 대한 지식, 철학의 발전,
그리고 그 길을 밝혀 준 모든 계몽의 빛은 르네상스에서 온 것이었다. 그는 왕립학교 선생들의 모범을 따른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빠리 신학 대학에 의해 왕실 교수들을 상대로 학교설립 4년 후에 헤브라이어와 그리 스어로 작성된 비난문서가 내 손 안에 있다.〉10)
10) 『발췌된 서한집』 중, 5, 9, 23번째 편지들 참조.
문예부흥기와 18세기의 그러한 부정의 여지 없는 관계는 그들의 생전에 확인된 사실이었었다. 보쉬에도 에라스무스와 시몬을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그들은 〈문예와 언어에 있어서 우월한 점을 이용하여 성 제롬과 성 오귀스 땡과 동열에 서려고 했다〉11)는 것이었다. 삐에르 벨르의 찬양자들은 에라스 무스와 로데르담 동상 옆에 벨르의 동상이 나란히 서야 한다고 주장했다.12)
11) 『전통의 수호와 조상들에 대한 경배』, xx장.
12) 벨르의 『서한집』과 삐에르 취리의의 『로테르담의 철학자』 참조.그런가 하면 철학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교도의 오류들을 재현시키 고, 무신론을 세상에 전파한 이태리 르네상스와 스피노자, 브뤼노, 까르당을 한데 묶어 단죄했다.13)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18세기의 새로운 계몽의 빛은 15세기말과 16세기초의 르네상스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고 말해서 틀림 없었다.14)
13) 존 에블린, 『종교사』, 런던, 1850, 서문, p. XXVI 참조.
14) 『옥스포드로부터 런던의 귀족에게 보낸 두 편의 에세이』, 런던, 1695.18세기의 근대 사상은 거의 거기에서 그렇게 흘러온 것이었다. 창의적 욕 구, 새로운 발견에 대한 열정, 비평적 시각 등등 유럽의 의식을 지배한 특 성들은 르네상스의 유산이었던 것이다. 17세기 중반쯤에 참정적인 단절이 없 었던 것은 아니다. 대립적인 요소들이 당분간 균형을 찾는 듯했다. 대립적 인 세력간에 화해가 이루어지는 듯했다. 문자 그대로 고전주의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는 힘과 냉정한 판단이 미덕이었다. 과거의 혼란을 체험을 통해서 아는 모든 사람들이 질서 를 염원할 수밖에 없듯이, 그들은 열정과 의십을 누르고 의식적으로 안정을 성취해 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검토정신이 완전히 근절된 것 은 아니었다. 그것은 엄청난 인내를 요구하는 불후의 걸작과 완전한 작품에 잘 훈련되고, 잘 순치된 고전주의자들에게조차 살아남아 있었다. 검토정신
은 그늘에서 반격의 시간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살아 남아 있었다. 검토 정신은 인생을 즐길 줄 알고, 사회적 정치적 특권을 안고 태어난 쌩 때브 르몽과 퐁뜨넬르 같은 사람에게도 살아 남아 있었다.
고전주의가 그 효력을 상실하자, 전통과 구석을 벗어나려고 때를 기다리 던 어떤 개혁에의 의지와 성향이 바야흐로 봇물 터지듯 터지기 시작했다. 유럽의 의식은 그 영원한 탐구를 재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나치게 갑작 스러운 뜻밖의 위기였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당혹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수세기 전부터 오랫 동안 준비되어져 온, 사실상 하나의 회복, 또는 연장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I7세기가 끝나기도 전에 밀려온 그것은 18세기 전반에 걸쳐 전적이고 철 저한 운동이 되었다. 사상의 전쟁은 이미 1715년 이전에, 아니 1700년 이전 에 시작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계몽시대 첨병들의 용맹은 사실 스피 노자의 『에티카』나 『정치 신학론』의 그것에 비하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 다. 볼테르나 프레데릭 2세의 반종교적 주장은 똘랑의 그것에 훨씬 못미침 울 부인할 수 없었다. 사실 록크가 없었다면 달랑베르는 『백과전서』에 붙이 는 「권두언」을 써내지 못했을 것이다. 철학논쟁은 네델란드와 영국의 논쟁 에 비하면 훨씬 점잖았다 루소의 자연주의는 반항적 라옹땅이 무대에 울린 인물 아다리오의 그것에 비하면 훨씬 미온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그 시대는 많은 뉘앙스를 담고 있었다. 그러다가 두 개의 큰 줄기로 흐름이 갈라지기 에 이르렀다. 하나는 합리주의적 물줄기였고, 다른 하나는-처음에는 미약했 지만, 나중에는 도도한 흐름으로 강둑을 넘쳐 흐른 감정의 물줄기였다. 그 당시의 중요한 문제는 사상가들의 고유 영역에서 벗어나 대중과 함께 호흡 하고, 그들을 설득시키는 일이었다. 정부의 원리나, 자연권의 개념에 대한 논의를 거쳐 개인의 평등과 자유가 선언된, 그리고 시민의 권리에 대한 요 구가 드높던 그 시대는 한마디로 새로운 태도를 요구한 시대였다. 루이 I4 세의 치세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프랑스 혁명은 고개를 들기 시작했던 것 이다. 1760년대에 이르면 사회계약, 권력의 위임, 군주에 대한 신민 봉기의 권리 등등은 이미 옛날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혁명 전 4반세기 전부터 그 런 이야기들은 공공연한 토론의 주제가 되어 있었다.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우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과거와 현재는 어떤 유사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연결의 고리에 의 해 연결되어 있다. 다만 새로운 것이 있다면(사실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새로 움은 가정하기도 어렵게 느껴진다), 어떤 준비과정과 영원불변하는 어떤 성향, 말하자면 땅 속에 칩거하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작스레 솟구쳐 울라와 무지 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힘과 빛이 그것일 것이다. 만약 새로운 것이 있다 면, 문제제기 방식과 억양, 또는 전동에 있어서의 그것일 뿐일 것이다. 만약 새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보다는 미래를 보려고 하는 의지, 즉 과거 의 도움을 받되 과거를 탈피하려고 하는 의지에 있어서의 그것일 뿐일 것 이다. 만약 새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일상생활에 강력하고도 확실한 중 심개념을 개입시켜 그것으로 하여금 지배적인 것이 되게 하는 활동에 있어 서의 그것일 뿐일 것이다. 우리의 시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어떤 변 화는 스피노자, 벨르, 록크, 뉴돈, 보쉬에, 펜느롱, 그리고 그 의에도 인생의 진리를 찾아내기 위해 의식의 검토를 게을리하지 않은 많은 위인들을 열거 할 필요도. 없이 우리를 앞서간 천재들의 업적인 것이다. 그들 중에 하나인 라이프니찌의 정치에 대한 평을 정신의 세계에 대입시켜 보더라도 마찬가 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17세기가 아직 채 끝나기도 전에 새로운 질서가 움트고 있었다.〉15)
15) 『라이프니찌 총서』, 푸셰 드 까레이유 출판사, Ⅲ권.
역자 해제
뽈 아자르 (Paul Hazard, 1878-1944)가 지은 「유럽 의식의 위기 La crise de la conscience europeenne」라는 제목의 이 책은 근대 유럽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는 17세기말과 18세기초에 걸친 지적, 사상적 흐름을 개관한 책이 다.유럽의 18세기는 계몽의 시대로 불리어지며, 특히 프랑스 혁명을 전후한 계몽주의 시대는 유럽을 고대에서 근대로 전환케 한 지렛대 구실을 한 중 요한 시대였다. 역사를 시기적으로 명확히 가르는 일이 극히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구체적인 지시기능을 하는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역사적 흐름을 파악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를 가르는 구체적인 지시기능을 하는 유럽의 역사적 사건을 하나 들라면 대부분 프랑스 혁명을 생각해낼 것 이다. 앙시엥 레짐을 무너뜨린 프랑스 대혁명은 누가 봐도 역사적 대사건임 에 틀림없었다. 혁명은 궁정, 정치, 종교 그리고 문학에 대한 인식을 고전주 의 시대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했다. 아무도 궁정에 더이상 매력을 느끼지 않게 되었으며, 국왕은 전처럼 국민의 옹호를 받기는커녕 국민의 적으로 취 급받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인식의 원리로 제시되었던 신앙은 철저히 파 기되고, 오직 이성과 경험이 새로운 인식의 원리로 제시되었다. 그러한 의 식의 전환의 중핵을 대부분의 역사가들과 문학사가들은 18세기 중영부터 프 랑스 혁명까지의 약 30년간에 위치시키고 있다.그러나 뿔 아자르는 입장을 달리한다. 아니 입장을 달리한다기보다는 그는 보통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근원을 파헤친다. 혁명의 빛에 가려 자칫 보 이지 않을 수 있는 과정들을 뽈 아자르는 담담하게 더틈으로써, 유럽에 있 어서의 의식의 위기는 이미 훨씬 전에 시작되었고, 완성에 이르렀다는 결론 에 이른다. 뽈 아자르에 의하면, 유럽에 있어서의 의식의 위기는 논리적 사 고에 절대적인 진위 판별식을 제공한 데카르트, 실증과 경험의 과학적 권위 를 종교적 권위에 대체시킨 록크, 유럽인에게 보편적 인식의 모형을 제시한 뉴턴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루이 14세가 죽은 1715년까지의 18세기초에 그 절정에 이르렀디는 것이다. 뿔 아자르는 이 책의 제목을 「유럽 의식의 위기, 1680년에서 l7l5년까지」라고 붙였는데, 뽈 아자르의 역사적 관점은 그의 제목 이 잘 말해 주고있다고할수있다.
사실 르네상스 이래로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은 오직 고대 문학과 고대정 신의 예찬, 그리고 그것들의 모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엄밀 히 따지면 고전주의가 결코 단순한 발전을 한 것만은 아니었다. 랑송에 의 하면, 고전주의는 두 가지 극히 대립적인 요소들의 갈등을 벗어나지 못했는 데, 다름 아닌 미에 대한 취향과 이성에 대한 그것이었다. 전자가 고대지향 적인 것이었다면, 후자는 미래지향적인 것으로서, 두 요소의 분해작용은 〈신 구논쟁 La Querelle des anciens et des modernes〉을 부르고야 말았다. 싸움 의 발단은 뻬로의 자작시 「루이 대왕의 세기 Le Siecle de Louis le Grand」였다. 그는 국왕의 병 회복을 축하하는 그 시를 아카데미 회원들 앞에서 낭 송했던 것이다.나는 무릎을 꿇지 않은 채 고대인들울 바라본다. 그둘은 위대하다, 그러나 그들 도 우리와 같은 인간들이다. 그렇다면, 루이 대왕의 세기를 아름다운 오귀스트의 세기에 비교해 본다 하여 부당하다는 말울 들을 것은 없지 않겠는가.이 시는 희랍 • 로마 시인에 대한 근대 시인의 우월성을 주장한 최초의 시였다. 거기에 브왈로가 고대의 찬양을 위한 「고대인과 근대인의 비교 Paralleles des anciens et des modernes」를 발표함으로써 신구논쟁은 국가 적인 싸움으로 번지기에 이론 것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새로운 물 결은 뻬로에 의해 갑자기 밀어닥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갈릴레이, 베이컨,데카르트가 닦아 놓은 길을 뻬로가 뒤좇아 간 셈이었다. 뽈 아자르에 의하 면, 그들 위대한 선구자들은 단순한 철학과 순수 과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합리주의자들이었다. 특히 명중의 원칙, 분석의 원칙, 종합의 원칙, 그리고 열거의 원칙 등의 네 가지 사고원칙을 제시한 데카르트는 합리주의적 사고 의 신기원을 이룩한 17세기인이었다. 데카르트는 누구보다도 앞서 라틴어가 아닌 불어로 사상서 『방법서설』을 써서 불어가 얼마나 아름답고 명확하고 쉬운 언어인지를 실증해 보인 철학자였다.
일단 밀려들기 시작한 산사상의 물결은 걷잡을 수 없었다. 프랑스의 퐁뜨 넬르에 이어 영국의 록크가 나타났다. 타고난 철학자 록크는 그의 『인간 오 성에 관한 시론』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인간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잘 깨달은 그는 인간으로 하여금 기존의 형이상학을 탈피하여 경험에 의한 가장 확실한 길을 걷게 했던 것이다. 뉴턴, 삐에르 벨르, 퐁뜨넬르, 라 로쉬 푸꼬, 라 퐁땐느 등등으로 시작된 새로운 물결은 계몽의 18세기로 이어지 며, 그것은 마침내 프랑스 혁명에까지 이르렀다.17세기 고전주의에 의해 그렇게 견고하게 지켜지던 모든 고전적인 원리 들 -예컨대 권위와 도그마 위에 세워진 삼단일의 규칙 -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떠받들어지던 기독교의 절대원리가 무 너지고 자연의 원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섰다. 무조건적으로 받아들 여지던 사회적 질서와 불평등한 체제에 대한 반발이 거침없이 일었다. 물론 그러한 인간의 천부적 권리가 가시적으로 파문을 일으킨 역사적 사건은 프 랑스 혁명이었으며, 평등의 구호가 메아리치던 시기는 혁명을 전후한 18세 기 중반 이후였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고 당연한 일이었지만 고 대에서 근대로의 전환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오직 18세기에 관심을 기 울여 왔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물결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저변의 큰 물굽이가 어디에 그 소용돌이의 꼬리를 감추고 있는지를 파악하 지 못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현상에 몰두한 나머지 본질을 의면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뽈 아자르는 고대와 근대의 두 시기 사이에 가로놓 인 35년(1680-1715)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그 시기는 예상도 할 수 없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으며, 그 시기야말로 진정한 탐험가를 기다린 역사의 계곡이라는 것이다. 그 시기처럼 인간의 본질적인 제반 문제를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문제삼은 시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실존의 문제, 신의 문 제, 현상과 실제의 문제, 자유의지와 예정조화의 문제, 사회문제 ……등등 지금까지 덮어 둔 채 감히 열어 볼 생각도 하지 못하던 수많은 문제들이 햇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한 문제들 중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없었다. 인 간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그들이 따라야 할 행동 지침은 무엇인가? 그 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미 해결되었다고 믿은, 전부한 문제 중의 문제 ‘진리 란 무엇인가?' 의 문제가 새삼스럽게 다시 대두되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간접적인 방법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밖에 없 다. 그 중 하나가 역사를 통한 방법이라면 다른 하나는 현재를 살고 있는 부 정의 여지 없는 자아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고전주의 시 대가 전적으로 잘못된 시대였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얼 핏 보면 온통 절대권위에만 의지한 듯이 보이는 고전주의가 결코 전적으로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의 I7세기는 희랍 의 걸작을 모방하는 데 그 정신을 빼앗겼으며, 그들에게서 라신느의 비극과 몰리에르의 희극 의에 다른 것을 기대하기가 힘들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 러나 그러는 사이에도 시대적 분위기에 대한 회의와 반문은 그치지 않았으 며,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에티카』」루크의 『인간오성에 관한 시론』, 데 카르트의 『방법서설』, 삐에르 벨르의 『역사와 비평 사전』, 펜느롱의 『멜레 마끄』, 퐁뜨넬르의 『세계의 다양성에 관한 대담』 등이 그것의 반증이었다. 역설적이게도 l8세기 정신은 이미 고전주의가 그 절정에 오른 루이 I4세의 치세기간과 일치했다. 혁명을 전후한 혁명적인 사싱들.은 이미 1680년대에 평 범한 사람들의 토론의 주제였고, 이미 그때부터 세차게 울리기 시작한 어떤 정신의 종은 계몽과 혁명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신권에 바탕한 철대군주 는 이미 그때부터 천부적인 인간의 권리와 시민으로서의 인간의 권리에 그 자리를 잠식당하고 있었다.종교의 권위에 과학의 권위를 대체시킨 세기의 이단자들은 차츰 적극적 인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세상이라는 경기장에 내려가 보아 야 할 모든 것을 보고, 싸워야 할 모든 것과 대적해 싸웠다. 따라서 물리적 인 두쟁의 전개가 18세기를 지배했다면, 그것을 낳게 한 정신적인 투쟁은뽈 아자르가 지적한 그 35년에 자리잡고 있다고 해서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역사의 한 조각을 따로 때내어 역사의 변화를 파악하려는 일처럼 어 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뽈 아자르는 좁은 계곡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으려는 지난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은 듯 하다. 서문에 밝힌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사실 역사의 한조각에 해당하는 35년 동안의 지적 변화를 가지고 유럽에 있어 서의 의식의 위기를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후에 이어지는 역사 적 변화, 그리고 그보다도 더 중요한 그 이전까지의 역사적 흐름을 의면한 채 그 것만을 따로 때어 역사를 평가하려고 하는 일보다 위험한 일은 없다. 인간은 그 가 원죄를 안고 태어났는지 결백하게 태어났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그의 행복이 이 지상에 국한되는지, 아니면 저 세상에 다른 행복이 마련되어 있는지 알 기 위해 법정에서 순번을 기다리는 피고인처럼 초조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자문해 왔다. 삶의 문제는 잠재적이고 강력한 너무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그러한 여러가지 문제에 대한 논의는 끊이지 않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도 사실은 이미 태초부터 문제로 제기되었고, 아직까지 해결을 보지 못한 종교, 철학, 정치, 사회 문제롤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완벽한 형태의 당당한 업적 못지않 게 풍부하고도 적확한 수많은 논의들, 신학과 철학을 다루는 난해한 논문들, 나라 와 나라 사이에 이루어진 무수한 교류들, 여러가지 방식의 혼합과 침두들을 고려 하지 않은 채 어떻게 역사의 단편을 따로 데어 당시의 분위기와 현상을 단칼에 이 해할 수 있겠는가? 사실은 수많은 구릉으로 이루어진 그곳의 탐사를 위 해서는 온 갖 길을 더터야 했고, 여러가지 다른 방향의 경사를 가늠해야 했고, 지세와 샛길 과 골목까지도 하나도 빼놓을 수 없었다.뿔 아자르의 『유럽 의식의 위기』는 출판이 된 직후 프랑스에서 선풍적 인 호응을 얻은 책 중의 하나였다. 그의 참신한 관점이 우선 세인의 주목 울 받을 만한 것이었지만, 방대한 작업을 담담하게 헤쳐나가는 그의 태도 또한 새로운 것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역사에서 많은 것을 빌려 오면서도 유럽이라는 큰 덩어리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은 채 이 책을 이끌어갔다. 말하자면 그는 그의 방대한 문화적 지식과 비교 문학적 지식에 의지하여 유 럽을 총체적으로 관찰하고 기술했다는 말이다. 물론 그의 방법이 전적으로 독창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는 비교적 자주랑송에 의지하여, 랑송의 연구결과를 원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 에도 불구하고 이만큼 〈밀림의 유럽〉을 한눈에 굽어보게 한 작가도 일찍이 없었다. 그는 방대한 자료의 그 시대를, 그래서 아직 아무도 감히 탐험 길 에 오르지 않은 밀림을 용케도 헤쳐나갔으며, 그 결과를 한 장의 지도로 작 성하여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 의식의 위기』라는 이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l부:재건의 시도시대적 요구에 상응하는 새로운 사고형태를 제시한 록크에 이어 프랑스 는 이태리에서 흘러들어온 이신론이 풍미하기에 이른다. 자연법칙을 숭배하 고 우주 질서를 신봉하는 이신론자들은 곧 자유사상에 물들게 된다. 우리는 이신론자들 중에 로베르 브왈 삐에르 벨르, 안토니 콜린스, 죤 톨랜드 등 대표적인 이신론자들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시대적인 분위기는 변해 가고 있었다. 루이 14세로 상칭되는 산권사상과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주장한 군주의 절대적 권리는 차츰 그 빛을 잃어 갔고, 그 대신 인간의 권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섰다. 형이상학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과거와는 달리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새로운 지주를 찾아나섰다. 지성의 거인들은 실 존의 문제, 신의 문제, 현상과 실제의 문제, 자유의지와 예정조화의 문제 등 등을 온통 자기 혼자 떠맡은 문제인 양 열심히, 심각하게 다루곤 했다. 어 린아이의 유치한 말장난과는 다론 진지한 문제가 여기저기서 논의되고 있 었다. 『신학정치론』, 『에티카』, 『인간오성에 관한 시론』, 『신교의 변천사』· 『역사사전』, 『어느 시골 사람의 의문에 대한 답장』 등등은 그러한 논의의 대표적인 결실이었다. 그러다가 천부적 인권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두 가지 사건이 있었으니, 낭트칙령의 철회와 영국혁명이었다.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은 성직자들의 말에 순종해 왔다. 성직자들은 선한 마음과, 정의와, 사랑이 세상을 다스릴 날이 오게 되리라고 예언했지만, 그 러나 그들의 예언은 빗나가고 말았다. 전리와 행복이 우승컵으로 제시된 시 합에서 그들은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일은 경기장 울 떠나는 일이었다. 그들이 경기장을 웃으면서 떠나주면 그보다 좋은 일이없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인류에게 보잘것없 는 움막을 지어 주고 큰 소리치던 과거의 위인들은 이제 무대의 전면에서 사라질 때가 왔던 것이다. 맨 먼저 할 일은 그 초라한 가건물을 때려부수는 일이었다. 그런 다음 사람들이 할 일은 새로운 집을 짓는 일이었다. 미래의 도시는 튼튼한 기초를 필요로 했다. 무엇보다도 인류가 회의주의라는 죽음 의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일이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까지 인류를 샛길로 잘못 인도해 온 형이상학이라는 괴물을 버리고 인간에 게 가능한, 인간이 풀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목적을 제공하는 철학 체계의 건설이 시급한 문제였다.〉
도덕과 종교를 독립적인 두 가지 가치로 분리한 최초의 철학자는 삐에르 벨르였다. 그에 의하면 종교와 현실은 무관한 것이었다. 천국의 보상, 또는 지옥의 고통과 무관한 무신론자의 도덕은 종교적 도덕보다 훨씬 순수한 것 일 수 있다는 주장이 벨르의 주장이었다. 신은 하늘나라 한쪽에 마침내 버 려지게 되었다. 피안의 세계에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인간은 이 제 현실적으로 가능한 행복을 찾아나서기에 이르렀다. 이 땅에서 행복을 찾 는 인간의 여러가지 전형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신사, 석학자, 또는 스페인식 영웅… 등등의 이미지가 나타났다가 사라전 후에 부르즈와 철 학가가나타났다.제2부:상상력과 감성물론 시대는 메말라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시대의 감성과 상 상이 철저히 사라전 것은 아니었다. 그 시대에는 순수 이성에 의지한 업적 둘이 풍미했던 반면, 감성적인 작가들이 저류를 흐르고 있었다. 루소와 리 챠드슨이 대표적인 작가였다. 드물게는 우다르 드 라 모뜨, 또는 쟝 바띠스 트 루소 같은 시인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그 시대는 시를 찰못 이해한 시 대였으며, 언어에 깃든 주술적인 매력을 모르던 시대였다. 다만 당대의 상 상력과 감수성은 다른 문학 장르를 통해서 꽃피웠을 뿐이었다. 요정이야기, 여행기가 그 시대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스페인에서는 피카로, 영국에서는 건달, 프랑스에서는 절름발이 악마로 대표되는 모험소설이 삶의 에네르기를자극했다. 그리고 더불어 그 시대의 사람들은 목마른 가슴을 하나님의 사랑 으로 채우려는 시도도 있었다. 정적주의와 경건주의가 우리에게 당대의 그 러한 열망을 미미하게나마 전해 준다.
유럽의 문학을 통해 볼 때 익살적인 요소를 무시할 수는 없다. 데냐르의 코메디를 중심으로 한 익살은 시대적 소용돌이에 휘말린 당대인들에게 커 다란 위안이 아닐 수 없었다. 이태리의 오페라가 유럽 전역에서 그토록 환 영을 받은 것도 갇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민족적 감정이 진하게 스민 작품들과, 루소의 『쌩 프뢰』, 괴테의 『베르테 르』는 이미 그 시기에 낭만주의가 자라나고 있음을 잘 말해 주고 있다.그 시기는 거칠고, 무차별한 시기였으며, 사건과 싸움이 너무 많고, 사상이 물 밀돗 밀려온 시기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없었 던 것은 아니었다. 그 방대한 물결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밀렀다가 부서지고, 부 서지는가 싶으면 다시 합해져서 다른 양상을 보이고 새로운 규칙으로 나타나는 그 다양한 사상의 체계들을 바라보면서, 결코 어떤 난관에도 비틀거리지 않고, 좌절 하지 않고, 멀고 먼 등대를 향해 꿋꿋이 항해하던 우리의 형제들을 지켜보면서, 그 둘의 그 피나는 항해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찬사와 연민이 뒤섞인 어떤 드릴을 느 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붕굴의 투지와 꿋꿋함에는 어떤 위대함마저 있었다. 전리와 행복을 향한 이 꿋꿋한 행진은 유럽인에게서 뗄래야 뗄 수 없는 특징이며, 거기에는 우리가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비장미마저 감돈다. 그뿐만 아니다. 술한 사상의 탄생과정을 연구하다 보면, 아니 단순히 그것들의 다양한 변화들만을 더터보더라도,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보잘것없이 시작해서 얼마나 힘차고 당당하 게 걷는지를 보게 된다. 그들의 승리의 월계관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고, 확신한 것 은, 그들의 승리는 결코 물질적 축복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둘의 삶을 지배하고 인도한 지적 정신적 힘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사항 색인
ㄱ
가부장 43, 44, 54, 55, 56 가치 18, 30, 67, 91, 92, 105, 120, 125, 126, 179, 180, 23 3 가톨릭 30, 3I, 34, 55, 80, 82, 166, 202 감각 13, 21, 23, 24, 26, 87, 92, I 14, I50, l55, 100, 179, I83, 185, 187, 188, 201, 212 감동 33, 45, 74 감성 13, 17, 113, 141, 156, 157, 176, 185, 186, 188, 197, 201, 207, 233 감정 19, 23, 73, 77, 103, 124, 129, 133, 157, 158, 174, 184, 193, 199, 203, 204, 213, 224, 234 개조 98, 103, 126, 156, 158 개혁 14, 40, 165, 224 개화 I05, 177, 219, 220 검토(정신) 20, 37, 98, 191, 210, 213, 223, 224, 225 경건(주의) 13, 29, 63, 64, 76, 142, 144, 147, I 56, 168, 194, 196, 199, 200, 202, 203, 204: 205, 219, 234 경험 (주의) 27, 130, 183, 227, 229 계몽(주의) 27, 49, 196, 212, 223, 224, 227, 229 계시 28, 3l, 32, 34, 41, 50, 56, 97, 130, 203, 213 계율 31, 40, 41, 131 고대 (인) 65, 66, 84, 85, 97, 103, 121,126, 127, 129, 131, 149, 156, 184, 191, 220, 228, 229
고전(주의) 10, 67, 105, 108, 114, 127, 131, 132, 147, 159, 160, 161, 162, 165, 166, 167, 169, 192, 220, 223, 224, 227, 228, 229, 230 과학자 83, 84, 95, 88, 89, 90, 91, 94, 95, 96, 108, 109, 121, 155, 191, 193, 210, 219, 228, 229, 230 관념(론자) 24, 28, 181 관능 67, 85, 16o 관습 50, 69, 79, 140, 167 관용(주의) 69, 80, 81, 82 관찰 68, 84, 87 교육 21, 26, 132, 156, 169, 173, 182, 183 교회 28, 3O, 35, 40, 44, 52, 54, 64, 81, 82, 140 군주 32, 43, 44, 45, 46, 47, 51, 52, 53, 54, 57, 216, 219, 224, 232 권력 44, 46, 49, 50, 51, 55, 58, 80, 81, 130, 173, 212, 224 권리 12, 44, 47, 48, 52, 54, 55, 56, 57, 00, 61, 80, 82, 109,129, 135, 156, 167, 185, 189, 193, 227, 229, 230 권위(주의) 9, JO, 43, 46, 47, 52, 54, 69, 80, 117, 121, 125, 126, 158, 182, 198, -228, 229, 230 귀족(주의) IOI, IOJ, IO5, Io6, 1야 109 157 규칙 20, 21, 23, 32, 38, 40, 48, 69,61, 69, 120, 127, 128, 130, 131, 132, 133, 134, 135, 138, 150, 161, 163, 167, 172, 182, 187, 192, 216, 217, 234
균형 162, 186, 192, 220, 223 기계 (학) 95, l14, l17, 175, 187, 189 기독교 9, 10, 28, 30, 3I, 40, 47, 52, 63, 64, 65, 66, 67. 80, 81, 82, 97, 173, 191, 195, 203, 207, 210, 219, 220, 229 기사 97, 144, 150, 153 기적 IO, Il, 26, 28 기존(적, 사상) 9, 37, 55, 99, 128, 129, 149, 179, 183, 193, 204 기하학 85, 86, 87, 90,92, 95, ll4, 120, 127, 135, 184, 188 ㄴ 낭만(주의자) 138, 155, 181, 234 낭트칙령 5I, 8I, 232 내세 32, 71, 77, 105 내적 원리 I90 논리 (적) 25, 34, 35, 36, 37, 38, 55, 63, 88, l18, 120, 156, 159, 162, 165, 183, 192, 213, 228 논박 209 논법 Il3 논의 54, 70, 191, 224, 23l 논쟁 38, 88, II7, 125, 128, 13l, 147, 175, 199, 202, 209, 213, 221, 224 논증196 뉘앙스 33, 188, 189, 224능금주 121
님프 174 ㄷ 대립 129, 223 대변혁 28, 106, 234 덕 36, 41, 43, 66, 77, JOO, 136, 156 덕목 38,80 델프찬양자 211, 234 도그마 9, 11, 130, 187, 198, 229 도덕(적)11, 13, 20, 24, 25, 29, 30, 3l, 32, 34, 39, 47, 50, 5l, 59, 63, 64, 65, 66, 67,· 68, 70, 78, 79, 93, 1O3 , O9, 114, I28, 132, 144, 145, 157, I58, l70, 177, 179, I82, l99, 234 도덕성 10, 32, 98, 105, 128 도전 109, 212 독단(주의) 25, 32, 47 동등권 56 ㄹ 랍비 30 로마 정신 80 루터파 166 르네상스 132, 223, 228 ㅁ 마그니피카 195 마리니즘 121마법사 137, 150, 218
마술(사) 31, 140, 149, 150, 212 마호메트교도 31 만유인력 91, 93, 94 망명(지) 19, 27, 81 메카니즘 98, 120, 160 메카닉 189 명상 207, 211 명예 65, 70, 97, IOI, IO3, 104, 106, 122, 130, 150, 155, 170, 171, 176, 219 모랄리스트 69, 7I, l03, I43 모방 I20, I25, l34, l4I, l47, I60 모험 (가) 138, 144 145, 162, 208, 213, 219, 233 몽상 136, 141, 147, 204 무사 99, 101 무신론(자) 3l, 33, 44, 63, 65, 66, 76, 78, 109, 195, 196, 213, 222, 223, 233 무정부 46, 53, 68 무정부주의 I4, 53 무정형 I72 무질서 49, 53, 54, 69, 120, 121, 178 무춘 IOI 문예부흥 12, 29, 168, 221, 222, 223 문체 20, 25, II3, II7, I2I, 13l, 234 물리(학) 86, 91, 92, 93, 158 뮤즈 95, I32, I48, I49, I50 미개인 14, 134, 141, 171, 215 미덕 14, 33, 38, 40, 6o, 69 70, 85, 97, 105, 128, 145, 157, 167, 184, 186, 187, 220, 228, 230미신 36, 37, 66, 103, 115, 131
미지 92, 136, 137, 141 미학 78 183, 187, 188 ㅂ 박해 81 반란 159 반론 129 반박 88, 127 반역 234 발견 84, 85, 89, 90, 91, 92, 93, 192, 193, 196, 223 발전 95 96, 109, 132, 208, 219, 224 배척주의 81, 101, 103, 196 백과전서파 I8I 법규(화) 68, 168 법률(제정가) 54, 104, 129 법전 II6 법체계 191 법칙 34, 48, 51, 6o, 81, 85, 91, 93, 136 법학(자) 57, 193 변증론자 Il3 변화 9, 12, 22, 23, 25, 109 125, 16o, 180, 184, 189, 190, 193, 210, 225, 234 보상 77, 79, 91, 136, 158, 207, 233 보편 32, 36, 43, 44, 67, 77, 87, 108, 171, 191, 227 복음(서) 28, 43, 81, 207, 213, 224 본능(적) 34, 46, 79, 91, 136, 165, 173, 175, 176, 177, 178, 188, 196본질 22, 35, 82, 125, 179, 180, 188, 193, 229
부권국가 43 부르조와 51, 53, 101, 103, 104, 107, 108, 144, 154, 203, 233 분리주의 204 불경 (죄) 122, 170 불관용주의 198 불평등 9, 46, 229 불행 38, 70, 71, 72, 73, 76, 78, 79, 105, 128, 145, 155, 182, 205, 219 브왈강연회 3I 비극 73, 76, 77, 104, 125, 129, 132, 133, 134, 144, 185, 186 비논리 27, 61, 136 비도덕 127, 128, 157 비밀결사대 41 비장(미) 133, 186, 210 비전전수(자) 25, 188, 212 비판(정신) 9, 93, 98, 117 비평 (가) 90, 91, 129, 130, 132, 161, 165, 186, 188, 192 비합리 37, 38, 159 人사고 20, 22, 24, 25, 27, 37, 38, 39, 41, 57, 78, 79, 84, 85, 88, 90, II8, Il9, 120, 140, 143, 166, 180, 188, 220, 228, 232 사고방식 19, 37, 88, 90, 91 사교계(인) 67, 83, 105, 178, 185, 205 사변(론자) 21, 183, 193, 219사상(적) 9, 12, 14, 19, 27, 30, 33, 34, 39, 40, 45, 46, 47, 48, 49, 5l, 54, 55, 57, 61, 69, 70, 74, 76, 78, 80, 89, 97, 99, 110, 114, 119, 137, 173, 179, 186, 187, .192, 192, 222, 224, 227, 234
사원 106, I38, 14I 사제 19, 30, 40, 70, 200, 202, 208 사회계약 224 사회선 39, 40 삼단일 IO, 229 삼위일체 4I 삼일치 II5 상대적 125, 179 상대주의 110 상상 135, 136, 138, l4l, l42, 158, 166, 186, 193, 210, 212 상상력 13, 17, 73, II 1, l13, l17, 12I, 131, 136, 165, 179, 192, 205, 233 상징 (적 ) II7, 142, 171, 193 생존권 48 생존본능 68 생존투쟁 88 선 32, 36, 37, 45, 68, 69, 70, 76, 78, 182 선험적 23, 68 섭리 32, 35, 48, 68, 187 성격 145, 158 성령 199, 200, 201, 202, 205 성삼위일체 2Il 성서 28, 30, 50, 93, 206 성선설 35 성직자 I l, 19, I04, 127, 128, I40, 200,202, 204, 228
성찰 181, 186, 191 소요학파 19 소치니파 82 소피교 211 속죄 29, 35, 196, 210 수도회 야 수사학 24 순수이성 183, 188, 233 순수철학 21 시민(사회) 50, 55, 230 시민법 48, 69 시학 25, 134, 161 신 II, 12, 23, 24, 27, 28, 30, 31, 32, 35, 36, 40, 42, 44,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63, 64, 65, 75, 76, 77, 79, 80, 98, 100, 109, II5, II7, II8, 129, 130, 148, 160, 178, 187, 195, 196, 197, 198, 201, 203, 206, 207, 209, 210, 2II, 212, 213, 221, 222, 230, 233 신개혁파 82 신교도 3I, 34, 5I, 52, 8I 신구논쟁 II6, 228 신권(사상) IO, 19, 48, 108, 224, 232 신민 43, 48, 55, 2OI, 224 신비 II, 29, 93, II4, 137, 141, 149, 160, 177, 197, 205, 208, 209, 212, 2l3 신비주의 (자) 13, 14, 198, 201, 204 신사 19, 38, 83, 97, 98, 99, IOI, 103, IO4, IO5, Io6, IO7, IO8, l44, I47, 167, 233신사도 98, 99, 103
신성 109 신앙 27, 28, 29, 31, 33, 36, 39, 44, 76, 81, 82, 98, 195, 196, 198, 199, 200, 202, 203, 209, 219, 221, 227 신플라톤주의 24 신학 12, 27, 31, 50, 51, 57, 78, 127, 19I, I98, I99, 2IO, 2I2, 23I 실재 93 실존 II, 49, 73, 76, 143,. 188, 190, 230, 232 실증 32, 36, 87, 93, 196, 228 실증종교 32 실체 22, 25, 93, 188, 189, 190 실험 36 87, 88, 89, 91, 92, 93, 196 실험기법 94 실험도구 87 실험물리학회 89 실험실 87 십지군 64 씨멘토학회 87 ㅇ아르메니우스파 82 아이러니 75, 142, 156, 166 아카데미 3I, 89, 91, 93, 94, 99, 108, 109, II8, 128, 129, 136, 175, 205 아카데미즘 184, 185, 187 악 32, 38, 45, 46, 49, 68, 69, 136, 157, 158, 207, 212, 216 악덕 33, 40, 69, 127, 145 악습 103, 151악인 64, 210, 21 I, 212
알레고리 117 앙시엥 레짐 205 양식 18, 40, 63, 75, 79, 82, 98, 107, II7, 162 에고이스트 39, 73 이고이즘 68 연례종교회의 31 열광 23, 73, 75, 100, 120, 131, 133, 134, 147, 148, 192, 198, 200, 202, 207, 209, 210, 220 열망 13, 20, 209, 234 열성 64, 90, 125, 206 열정 13, 45, 58, 64, 72, 73, 74, 89, 91, 100, IOI, 104, 109, II3, 128, 132, 142, 181, 186, 187, 193, 196, 208, 223 영감 118, 132, 173, 199, 200 영국혁명 232 영웅(주의) 98, 99, 100, IOI, 106, 149 영혼 14, 18, 22, 24, 25, 31, 32, 43, 6o, 65, 79, 82, 97, 105, II6, II7, 127, 130, 136, 143, 158, 160, 162, 169, 171, 175, 176, 179, 180, 181, 182, 188, 195, 196, 200, 205, 206, 207, 209, 220, 221 예배 30, 40, 64, 76, 82, 195 예술(가) IO, 24, 74, 95, 106, l아 II5, II6, II7, . I3O, 13l, 134, 141, 149, 16o, 184, 185, 186, 187, 196, 219 예의 6o, 67, 97, 103, 104, 107, 133, 157 예정조화 10, 89, IOI, 104, Io6, 109.128, 132
오성 20, 22, 25, 29, 87, 92, 213 오페라 84, 147, 159, 160, 161, 185, 234 왕국 66, IOO 왕권 12, 52, 53, 56, 59 왕당파 53 왕실특혜자 59 왕정제도 59 왕정주의자 55 욕구 20, 161, 165, 205 욕망 36 180, 181, 183, 208, 215 우니게스두스 칙령 199 우상 96, Il5, 133 우상숭배(자) 3I, 63, 65, 84 우주 31, 32, 35, 36, 77, 78, 81, 84, 85, 86, 91, 93, II5, 189, 190, 193, 222, 232 우화 63, 70, II6, II7, 140, 193 운명 40, 47, 95, 100, 127, 201, 216, 219 원리 9, 45, 47, 48, 53, 54, 61, 66, 85, 91, 92, 93, 165, 181, 182, 213, 224, 227, 229 원죄 12, 30, 35, 210, 231 원칙 20, 25, 3l, 44, 46, 50, 57, 66, 68, 85, 91, 98, 103, 108, II5, 127, 184, 193, 196, 199, 21:5, 229 위그노 31 위기 12, 13, I7, 224, 227, 228, 231 위선(자) 64, 120, 128, 167, 176, 177 유모어 73, 74, 75, 142, 145, 150 유물론(자) 21, 30, 3I유용(성 ) 105, 120, 127, 197
유태교 30, 31, 195 율법 (학자) 40, 43 , 221 은총 28, 30, 32, 33, 73, 75, 78, 198, 205 의고전주의 128, 134 의무 12, 31, 38, 50, 51, 56, 61, 67, 68, 69, 103, 108, 109, 140, 141, 169 의식 12, 17, 20, 21, 30, 31, 105, 189, 206, 22I, 223, 224, 225, 227 의전적 128 의지 17, 20, 26, 34, 38, 44, 45, 47, 48, 57, 108, 110, 127, 181, 182, 228, 231 이교도 81, 215, 223 이단(자) I I, 84, 127, 198, 206, 213, 222, 230 이데아 24, 36, 78 이론(가) 45, 46, 48, 5I, 52, 53, 54, 55, 57, 64, 77, 80, 81, 125, 13I, 135, 168, 207, 220, 232 이미지 26, 117, 137, 141, 142, 166, 192, 193 이상(론) 30, 97, 108, 193, 196, 205 이상주의자 27 이상향 171, 216 이성 II, 13, 18, 27, 28, 3I, 33, 37, 38, 39, 50, 60, 61, 67, 72, 84, 87, 93, 98, 108, 109, 118, ll9, 128, 130, 134, 141, 173, 175, 177, 182, 184, 186, 188, 189, 195, 201, 208, 210, 212, 213, 222, 227, 228 이신론(자) 28, 31, 32, 33, 34, 36, 38,80, 232
익살 75, 105, 128, 145, 147, 234 인권 50, 232 인권선언 113 인문주의 78, IIO 인식 18, 24, 26, 27, 37, 86, 87, 227, 228 인위(적) 46, 105, 173, 182, 187 일반원리 3I, 163 일원론 212 ㅈ 자연 9, II, 34, 35, 36, 47, 48, 55, 56, 57, 60, 65, 83, 85, 89, 93, 94, 109, 116, I2I, I22, I24, I28, l3 I, l44, I58, I73, I74, l82, I84, I87, I88, 190, 196, 197, 221, 229 자연과학 89, 90 자연권 43, 46, 47, 48, 50, 51, 52, 57, 60, 6I, 224 자연법 5I 자연법칙 34, 35, 232 자연상태 45, 46, 50, 53, 54, 55, .56, 57 자연인 46 자연종교 28, 29, 3O, 31, l09 자연주의 224 자연현상 90, 92 자유 37, 38, 40, 41, 45, 46, 55, 56, 61, 66, 69, 80, l18, 128, 144, 145, 148, 167, 185, 224 자유사상 37, 38, 40, 41, 61, 157자유사상가 37, 38, 39, 108, 185, 187, 195
자유연애가 185 자유의지 IO, 230, 232 자유정신 75, 81 자유주의 39, 219 재침례파 82 쟝르 ll5, 127, 169, 186, 233 쟝세니즘 198, 199 적십자단체 212 전지전능 27 전통 IO, 20, 54, l09, 167, 173, 193, 224 전형 127, 141, 184, 233 절대 (적) I l, 43, 53, 121, 134, 179, 190, 221, 228, 232 절대군주 12, 53. 55, 230 절대권 45, 53, 57 절대권능 196 절대권력 46, 50, 54, 56, 58 절대권위 10, 230 절대명령 I29 절대명제 82 절대선 173, 196 절대성 32 절대왕권 54, 55 절대원리 9, 229 절대자 27, 29, 33, 213 절대주의 57, 6o, 109 절름발이 악마 233 접신 2I2 정념 156 정신(적) 17, 18, 22, 24, 26, 36, 37,39, 45, 50, 52, 53, 60, 79, 8o, 82, 85, 86, 87, 88, 91, 94, 96, IOO, 105, IO7, IO9, III, Il4, II5, l30, l32, l37, l44, l47, I 50, I 59, I67, l70, I82, I84, I87, I88, l90, l96, l97, 210, 221, 227, 229
정열 IOO, I6I 정의 II, 29, 37, 46, 48, 60, 70, 101, 104, l19, 204, 232 정적주의 13, 208, 234 정통성 I98 제네바학파 82 조물주 92 조화 44, 78, 79, 91, 97, 98, 120, 130, I42, I62, I 87, I 89 존재 23, 27 존재방식 167, 193 존재이유 11 종교 11, 12, 13, 20, 21, 30, 31, 32, 33, 34, 39, 43, 47, 50, 51, 58, 63, 65, 66, 73, 76, 80, 96, 97, 98, 109, Il4, 127, 129, 132, 140, 171, 195, 198, 200, 202, 213, 228, 232 종교개혁 52, 207 종교논쟁 80, 8I 종교분쟁 76 종교성 32, 48 종교재판 200 종교집단 202 종파 3I, 8I, I30, I97 죄악 14, 47, 48, 78, 82, II6, 171 죄인공시대 2OI 주권재민 47중세 48, 131, 221
지각작용 189 지배 45, 54, 98, 100, 101, 109, 129, 131, 137, 141, 144, 151, 156, 178, 181, 182, 223 지배계급 53 지배권 80 지성 10, 20, 47, 63, 73, 137, 174, 176, 186, 187, 192, 219, 232 지혜 II, 23, 40, 46, 56, 61, 73, 93, 97, 108, l16, 192, 207, 208, 209, 213, 219, 220 직관 24, 100, 130, 192, 193, 203, 210 진리 10, ll, 14, 20, 26, 28, 29, 31, 35, 36, 37, 39, 41, 58, 65, 80, 83, 86, 87, 89, 127, 141, 159, 165, 179, 193, 195, 201, 203, 213, 220, 221, 223, 225, 230, 232, 234 진실 I19, 127, 130, 136, 142, 174, 184, 192 질서 35, 36, 47, 78, 98, 109, II6, 128, 129, 130, 165, 201, 204, 220, 223, 225, 232 집단의식 170 ㅊ찬미 II9 찬사 116, 121, 126, 130, 148, 149, 184, 188, 192, 220, 222 찬양 32, 94, 114 154, 156, 158, 170, 195, 197, 2II, 219 찬양자 223찬탄 189
창의력 89 창의성 I16, II7, 220 창의적 116, 186 창작 125, 186 창조(적) 92, 125, 135 창조자 34 창조주 32, 35 천계종교 30, 36, 109 천년지복 2II 천문학(자) 19, 83, 84, 108 천부적 27, 35, 45, 48, 55, 56, 109, 182, 229, 230, 232 천성 67, IO4, l05, I55 천재 (성 ) 89, 92, 94, I l4, 116, l20, ·127, 13 I, 166, 182, 185, 187, 225 천체 83, 84, 197 철학(자) II, I2, I7, I9, 20, 2I, 22, 24, 26, 27, 28, 34, 36, 40, 41, 47, 50, 5l, 55, 66, 69, 75, 77, 78, 85, 87, 88, 90, 91, 93, 96, 108, 109, II4, Il5, Il9, 132, 142, 145, 155, 173, I80, I8I, I82, I83, 186, I88, 190, 191, 192, 193, 201, 203, 212, 213, 216, 222, 223, 229, 23l, 233 청교도 74, IO3, I28 체험 182, 198, 200, 212, 223 초월 93 초인적 44 초자연적 30 초현실 47, II7 최고질서 34 추론 140, 177, 183, 187충동 21, 72, 142
취항 100, 127, 128, 133, 156, 184, 218, 228 ㅋ 카오스46 칼빈파 I66 코메디 85, I27, I28, I30, I37, I42, 148, 150, 167, 234 코메디아 델아르트 150 쾌락 24, 45, 128 ㅌ 탈규칙 135 탐사 231 탐색 221 탐험 9, 12, 89, 93, 229, 232 태양신 84, 149 태양왕 44 통일성 165 통제 9, 54, 55 통치(자) 52, 53 특권 45, 53, 128, 173, 224 ㅍ 파격 185 파문 200, 209 편견 98, 104, IOS, IIS 평등 9, 61, 224, 229 평화 45, 46, 70, 72, 73, 80, 204, 205,206, 213
평화동맹 216 평화조약 216 폭풍노도 9 풍속 18, 67, 127, 128, 132, 142, 156, 167, 174 풍자 105, 142, 147, 156 프랑스혁명 224, 227, 229 프로테스탄트 80 프리마돈나 160, 161 피조물 23, 24, 98, 190, 221 피카레스크 142, 170 피카로 144 ㅎ 합리(성) 23, 60, 108, 136, 161, 165, 171, 184 합리적 28, 31, 39; 44, 47, 50, 51, 77, 85, 87, 88, 91, 108, 119, 120, 127, 132, 156, 173, 179, 181, 183, 187, 195, 203 합리주의 18, 34, 47, 89, 103, 113, 135, 196, 198, 224 합리주의자 ll3, II9, 229 항거 54, 55 해탈 206, 2II, 212 행복 II, 12, 14, 17, .18, 23, 25, 38, 47, 70, 71, 72, 73, 74, 75, 77, 78, 79, 80, 94, 97, 104, 105, 109, 148, 156, 174, 204, 207, 208, 213, 216, 220, 23 I, 232, 233, 234 향락주의자 40혁명 9, 12, 53, 56, 59, 107, 174, 228
혁명가 53, 182, 185, 198 혁명권 55 혁명기 50 혁신 70, 88 현학(자) 19, 25, 74, 108, 120, 140, 150 형식논리 166 형이상학 II, 18, 21, 22, 23, 67, 93, 107, 108, 141, 144, 188, 189, 196, 219, 229, 232, 233호교논쟁 196
호교론자 40, 195 호기심 17, 26, 90, 191 황금률 I84 회의 69, 79, 215, 230 회의적 216 회의주의 11, 17, 26, 28, 38, 80, 93, 221, 233 휴머니즘 I42 희극 133, 157, 185, 186, 230인명 색인
ㄱ
가르트 Garth, Samuel 147 가쌍디 Gassendi 20, 40, 191 갈랑 Galland, Antoine 140 갈릴레이 GaWee 87, 228 게 릭 케 Guericke, Ottovon 89 고츠셰드 Gottsched 134 공자 141 괴테 Goethe 133, 234 구알티 에 리 Gualtieri 87 그라몽 Gramont 98, 145 그라베산데 Gravesande 88 그라비나 Gravina, Gian Vincenzo 60, l32, I59 그라씨안 Gracian, Balthazar 99, 100, 111 그로티우스 Groot, Hughesde 40, 47, 48, 49, 52, 54, 61, 191 그립멜스하우젠 Grimmelshausen 170 기 욤 3세 Guillaume Ⅲ 81 기용 Guyon, Mme 205, 206, 207, 208, 209, 210 까르당 Cardan 222, 223 께넬 Quesnel 199 꼬르네이유 Corneille 134, 161, 168 꼬스트 Coste, Pierre 27, 89, 180, 185 꼴리에 Collier, Jeremy 127, 128 꽁디약 Condillac 28, 181 꽁스땅스 Constance 200 끼노 Quinault 16oㄴ
노데 Naude 222 누트 Noodt 81 뉴벤티스트 Nieuwentijt 197 뉴턴 Newton, Issac 90, 91, 92, 93, 94, 142, 225, 228, 229 ㄷ 다리까르나쓰 d'Halicarnasse, Denys 131 다시에 Dacier 132 단테 Dante 175 달랑베르 d'Alembert 224 달타냥 d'Artagnan 145 땅꾸르 Dancourt 15 5 데 그리의 Des Grieux 144 데 메조 Des maizeawc 74 데카르트 Descartes 10, 20, 40, 85, 86, 91, 92, 135, 175, 188, 189, 195, 213, 228, 229, 230 도누아 d'Aulnoy, Mme 16o 도랑쥬 d'Orange, Guillaume 53, 55, 81, 171 도리아 Doria, Paolo Mattia 156 도비니 d'Aubigny, La Fosse 152 도피네 Dauphine 208 동키호데 Don Quichotte 101 뒤베르네 Duverney 89 뒤보스 Dubos 183, 185, 187드라이든 Dryden 32, 33
디아고라스 Diagoras 65 따샤르 Tachard 90 따스 Tasse 175 떼브노 Thcvenot 90 떼오도르 Theodore 65 땐느 Taine 27 멜레마끄 Telemaque IOI, 205 뛰르까레 Turcaret 155 ㄹ라 로쉬푸꼬 La Rochefoucault 229 라 모뜨 La Motte, Houdard de 233 라 브뤼예르 La Bruyere 45, 58, 103, 151, 159, 229 라 셰즈 La Chaise 138 라 우쎄 la Houssaye, Amelot de 99 라 퐁땐느 La Fontaine IO, 58, 128, 175 라꽁브 Lacombe 208 라드브로히 Ladbrog, Regner 171 라마치니 Ramazzini 87 라블레 Rabelais 222 라뺑 Rapin 132 라신느 Racine 10, 133, 134, 168, 230 라옹땅 Lahontan 34, 224 라이머 Rymer 132 라이프니찌 Leibniz IO, 80, 90, 91, 141, 168, 189, 190 191, 215, 216, 225 라트룬 Latroon, Meriton 142 라헬 Lachel 181란치니 Lancini, Giovanni Maria 88
랑송 Lanson 23 2 레디 Redi, Francesco 89 레스꼬 Lescaut, Manon 144 레씽 Lessing 133 레옹 10세 Leon X 13I 렘므리 Lemery, Nicolas 89 렘브란트 Rembrandt 185 로메에르 Roemer, Olaus 89 로브리스 Loveless 157 로삐딸 I'Hospital 65 222 로앙 Rohan 145 로이벤호엑크 Leuwenhoeck 88 로헨슈타인 Lohenstein, Caspers von 169 록크 Locke, John IO, 17, 18, 19, 20, 21, 23, 25, 27, 38, 40, 54, 55, 56, 57, 59, 61, 69, 74, 78, 81, 93, 179, 180, 181, 183, 185, 191, 224, 225, 228, 230 론진 Longin 139, 175 루벤스 Rubens 185 루쏘 Rousseau, Jean Baptiste 101, 233 루쏘 Rousseau, Jean Jacques 20, 30, 178, 183, 224, 233, 234 루이 I3세 Louis XⅢ 47 루이 I4세 Louis XⅣ 39, 44, 52, 53, 57, 184, 216, 224, 228, 230, 232 뒤드벡크 Rudbeck, Olaus 169 륄리 Lulli 160 르 그랑 Le Grand, Pierre 139 르 베이예 Le Beyer, La Motte 222 르 보쉬 Le Bossu 132르 블랑 Le Blanc 89, 184, 185
르 싸아쥬 Le Sage 144, 155 르 클레르크 25, 26, 74, 152 르네 Rene 180 리 Lee, Nathaniel 21, 13 3 리드 Lead, Jane 211 리바이어던 Leviathan 46 리세뜨 Lisette 155 리 차드슨 Richardson 233 □ 마르시글리 Marsigli 87 마르첼로 Marcello, Benedetto 161 마리오뜨 Mariotte 89 마리옹 Mrion, Elie 200, 201 마젤 Mazcl, Abraham 199, 200 마젤 Mazel, David 26 마키아벨리 Machiavel 45, 48 마타 Matta 99, 145 마페 Maffei 133, 159 만드빌 Mandeville, Bernard 69, 70 말브랑쉬 Malbranche 20, 141, 191 맹뜨농 Maintenon, Mmede 135, 205 메레 Mere, Chevalier de I03 메타스타세 Metastase 161 멘토르 Mentor 205 모 Meawc 43 모로피우스 Morhofius 169 모르강 Morgan 139 몰리에르 Moliere IO, 85, 127, 128, 151, 230 몽브렁 Montbrun 145몽테뉴 Montaigne 40, 103, 222
몽토방 Montauban 139 무라토리 Muratori 159 뮈로 Murail, Beat de 178 미셸리 Micheli 87 밀톤 Milton 40, 147 ㅂ 바니니 Vanini, Lucilio 65, 222 바론 Varron 39 바르토린 Bartholin, Thomas 89 바쏘르 Vassor, Michelle 31, 32 바움가르텐 Baumgarten, Alexandre-Amedee 187 반브러그 Vanbrugh 127 발리스니에리 Vallisnieri 87 버클리 Berkeley 26, 30 베가 Vega, Garcilaso de la 68 베닌카사 Benincasa 103 베르냉 Bernin 185 베르니 에 Bernier, Francois 137 베르데르 Werther 180 베르툼누스 Vertumnus 169, 170 베이컨 Bacon 19, 39, 87, 191, 228 베즈 Beze 90 벤틀리 Bentley 30 벨르 Bayle, Pierre 11, 16, 33, 35, 63, 64, 65, 81, 89, IOI, 153, 154, 222, 223, 225, 229, 230, 232, 233 벨린자니 Bellinzani, Anne de I54 보날드 Bonald 33 보댕 Bodin, Jean 222보발 Beauval, Henri Basnage de 81
보쉬에 Bosuet 9, 10, 52, 53, 56, 80, 152, 204, 206, 209, 223, 225 보에르하베 Boerhaave 88, 93 볼테르 Voltaire 9, 26, 30, 89, 133, 134, 224 봄스돈 Bomston, Edouard 30 부르두스 Brutus 66 부리뇽 Bourignon 213 부베 Bouvet I40, I4I 브라운 Brown, Tom 142 브란덴부르크 Brandenbourg 203 브레몽 Bremond, Henri 195 브뤼노 Bruno, Giordano 222, 223 브륀 Bruyn, Cornelius Van 141 브르되이유 Breteuil I54 브와길베르 Boisguilbert 59 브왈 Boyle, Robert 35, 39, 88, 89, 142, 159, 232 브왈로 Boileau 147, 148, 156, 184, 228 블랙모어 Blackmore, Richard 33, 132 비뇽 Vignon 89 비르질리우스 Virgile 172 비코 Vico, Giambattista 90, 191, 192, 193 빠뉘르쥬 Panurge .142 빠에똥 Paethon 84, 86 빨린지니어스 Palingenius 222 뻬로 Perrault, Charles 136, 156, 228, 229 뻘리쏭 Pellisson 80 뽐뽀나찌 Pomponazzi 222뿌와레 Poiret 210
人사하 Sachs, Hans 169 샤또브리앙 Chateaubriand 192 샤롱 Charron 222 샤를르 11세 Charles XI 50 성 아퀴나스 Saint Augustin, Thomas 34, 191, 223, 228 세익스피어 Shakespeare 133 센츄리 Sentry 104 셜록 Sherlock 36 셰라사데 Scheherazade 140, 141 소치니 Socini 52, 59 소크라데스 Socrate 39, 40, 41 솔로몬 Salomon 39 스왐메르담 Swammerdam 88 스위프트 Swift 128, 166 스칼라티 Scarlatti 162 스칼리제 Scaliger 40 스틸 Steele 103, 128, 158, 159 스페너 Spener, Philippe Jacob 202, 203 스펜서 Spencer 40 스피노자 Spinoza IO, 34, 49, 65, 67, 78, 90, 141, 189, 192, 201, 223, 224, 225, 230 시네시오스 Synesios 88 시몬 Simon, Richard 31, 93, 222, 223 싸렌데 Salente 204 싸로티 Sarroti, Paolo 89 싸브와 Savoie, Eugene 188싸이버 Cibber, Colley 156, 157
쌩 떼브르몽 Saint Evremond 67, 101, 103, 159, 224 쌩 삐에르 Saint Pierre, Bernard de 197 쌩 삐에르 Saint Pierre, abbe de 215, 2I6 쌩 씨르 Saint Cyr 205 쌩 제롬 Saint Jerom 223 쌩 제르맹 Saint Germain 145 쌩 프뢰 Saint Preux 180 쎄낭뜨 Senantes 145 쎄네카 Seneque 39 쎄르빌리우스 Servilius 152 쏘랭 Saurin, Elie 8 I 쏘뵈 르 Sauveur, Joseph 86 ㅇ아놀드 Arnold, Gottfried 197, 198 아다리오 Adario 224 아떨라 Attila 212 아르메니우스 Arminius 169 아리까르나쓰 Haricarinasse, Denys d' 131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 19, 23, 39, 85, 131, 132, 134, 161, 167, 181, 191, 222 아리스토파네스 Aristophane 166 아만다 Amanda 157 아멘타 Amenta, Nicolo 128 아미엥 Amiens 144 아자르 Hazard, Paul 144, 227, 228,229, 231
안나 Anna 131 알렉산더 Alexander 139, 141 알신느 Alcine 160 알파라체 Alfarache, Guzman d' 142 야리코 Yarico 175 야콥 Jacob 30, 54, 153 에디슨 Addison 103, 133, 134, 159, 172 에라스무스 Erasme 40, 66, 131, 223 에베메르 Evhemere 65 에펜디 Effendi, Mahomet 65 에피큐로수 Epicure 39, 65, 66 에픽테트 Epictete 66 엘베티우스 Helvetius 181 영 Young 138 오깽꾸르 Hocquincourt IOI 오로노아 Olonois 139, 140 오리제니우스 Origene 39 오트웨이 Otway 133 우트레히트 Utrecht 198, 216 워드 Ward, Ned 142 워버튼 Warburton 30 위롱 Huron 174, 176 위쏘 Huisseau 81 위 에 Huet, Gedeon 81 유카리스 Eucharis 205 이도메네 Idomenee 59, IOI, 205 이솝 Esope 69 잉클 Inkle, Thomas I77ㅈ
잠발로 Zambullo 143 작끄 2세 Jacques Ⅱ 53 제노 Zeno, Apostolo 161 죠셉 Joseph39 쥐리의 Jurieu 52, 81, I52 쥐베날 Juvenal 156 쥬피 터 Jupiter 70 지히텔 Gichitel, Johann Georg 211 질 브라스 Gil, Blas 144 찜플리시스무스 Simplicissimus 170, 171 ㅊ처베리 Cherbury, Herbert de 40 ㅋ 카스틸리아니 Castiglione 103 카토스 Caton 39, 66 칼립소 Calipso 205 커즈워즈 Cudworth 23, 79 컵버랜드 Cumberland, Richard 5I 코벌리 Coverley, Roger de 104 코페르니쿠스 Copemic 83 콘그레브 Congreve 127, 128 콘텐토 Contento 170 콜리에 Collier 157 콜린스 Collins, Anthony 38, 39, 40, 152, 232 콜베르 Colbert 59쿠르틸즈 Courtilz, Gatien de 144
쿠퍼 Cooper, Anthony Asllley, comte de Shaffsbury 18, 19, 33, 34, 35, 74, 75, 76, 77, 78, 79, 93 쿠퍼 Cooper, Gilbert 8 I 쿨만 Kuhlmann, Quilinus 212 퀸틸리언 Quintilien131 크레비용 Crebillon 133 크레침베니 Crescimbeni I59 쿨라리치 Clarici 87 클라크 Clarke, Samue 30, 31, 32, 38, 142 키에테 Quiete 170 키케로 Ciceron 38 ㅌ 터키투스 Tacite 191 템플 Temple, William 40, 67 토마시우스 Tomasius 26, 60, 100 톨랜드 Toland, John 27, 30, 40, 41, 66, 152, 224, 232 틸로슨 Tillotson 39 ㅍ 파레 Faret, Nicolas 103 피스칼 Pascal 76 페랑 Ferrand 154 페이츠 Paets, adrien 81 페트로니우스 Petrone 131 펜느롱 Fenelon IO, 59, 101, 103, 152, 204, 205, 206, 208, 2야, 225, 230펠릭스 Felix, Minitius 39
포르티스 Fortis 87 포프 Pope 128, 129, 130, 131, 148, 149 퐁뜨넬르 Fontenelle 10, 16, 83, 84, 85, 91, 92, 101, 155, 177, 224, 229, 230 퓌펜두르프 Pufendorf, Samuel 49, 50, 51, 55, 61, 93 프라이어 Prior. 128 프랑케 Francke, Auguste Hermann 202 프레데릭 2세 Frederic II 224 프레마르 Premare 138 프롱땡 Frontin 15 5 프리네 Pline 65 프리 포트 Freeport 104 플라톤 Platen 19, 39, 78, 85, 191 플루타크 Plutarque 39 플뤼쉬 Pluche 197피카소 Picasso 233
피타고라스 Pithagore 85, 90 필로클레스 Philoclses 205 필르 Piles, Roger de 185 필립스 Philipps, John 148 필머, Filmer, Robert 53, 54 ㅎ 해리팍스 Halifax 67, 98, r55 해밀돈 Hamilton, Anthony 145 허버트 Herbert, Edward 29 허베이 Hervey 138 헨델 Haendel 160 호니코움 Honeycomb 104 호러스 Horace 131, 132, 156, 167 호머 Homere 131, 132, 172 홉스 Hobbes 39, 45, 51, 54, 55, 232 휘겐스 Huygens 88작품색인
ㄱ
가부장적 권위 Patriarcha 54 고대인과 근대인의 비교 Paralleles des anciens et des modernes 228 관용주의 에 관한 서한 Eistola de Toierantia 82 광학론 OptiqueI ou Traite de la lumiere et des couleurs 92 교회와 이단에 대한 공정한 역사 Histoire impartiale des Eglises et des Heresies 197 구경꾼 Spectator 74, 103, 104, 105, 106, 107 그로리아나 Groliana 133 ㄴ 나무르 점령에 붙이는 오드 Ode sur la prise de Namur 119 네로 Neron 133 ㄷ 단자론 Monadologie I 89 동경 Sehnsucht 169 똑똑한 여자들 Lesfemmes savantes 156 뛰르까레 Turcaret Issㄹ
런던 스파이 Clrestercheese 142 루이대왕의 세기 Le siecle de Louis le Grand 228 □ 멋쟁이 메르쿠리 Mercure galant 86 메로프 Merope 133 명상 Contemplation 137 묘지의 애가 Tombeaux 138 무료진료소 Dispensaire 147 무심한 사람 Distrait I50 물통이야기 Conte du Tonneau 166 미네르바의 회랑 Galerie de Minerve 88 미트리다트 Mithridate 133 ㅂ 바빌론에 갇혀 신음하는 신도들에게 보내는 편지 Lettres pastorales aux .fideles quigemissent sous la captivite de Babylone 52 밤의 애가 Nuits 138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ethode 229, 230 백과전서 Encyclopedie 115, 224 벌통이야기 La Ruche munnurante, ou les fripons devenus honntfes gens 69베니스의 기수 Venise sauvee 133
베르테르 Werther 234 불만스런 사람 Die unvergnugte Steele 169 브루두스 Brutus 133 비 평 Critique 99 비평시론 Essais de critique 129 ㅅ사랑의 마지막 술책 Love's last Shift 157 새로운 과학 Scienza Nuova 193 서환 Lettre, de Cooper 75 세계의 다양성에 관한 대담 Entretiens sur la pluralite des mondes 86, 230 세계의 도서 Bibliotheque universelle 26 소포니스베 Sophonisbe 133 수다쟁이 Tatler 103, 106, 148 스페 인 여행기 Relation du voyage d' Espagne 160 시민권의 기원, 시민권의 발전, 천부 적 인간에 관한 개요 Origines juris dvilis, quibus ortus et progrssus Juris civilis, jus naturale gentium 6o 시와 미술에 관한 비평적 성찰 Rlflexions critiques sur la poesie et la peinture 183, 186, 188 시학 Poetique 115, 126, 129 신교의 변천사 Histoire . des variations des eglises protestantes IO, 233 신중한 태도 El Discreto 99 신탁 El oraculo manual 99신학과 철학 Yractat11s theologico-politicus 49
신학정치론 Tractatus theologico-politiws IO, 224, 230, 233 쌩 프뢰 Saint Preux 234 ㅇ아더왕 Le Roi Arthur 132 아더왕자 Le Roi Arthur 132 아르메니우스와투스넬다 Arminius et Thusnelda 169, 170 아카데미의 할일에 관하여 Lettre sur les occupations de I'Academie 205 알프레드 Alfred 132 양심적 인 연인들 The conscious Lovers I06 어느 시골 사람의 의문에 관한 답장 Reponse aux questions d'un provincial IO, 69, 233 에네이드 Eneide 147, 172 에티카 Ethique 10, 49, 201, 224, 230; 233 엘리사 Elisa 132 역사사전 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 IO, 63, 230, 233 영국 연극의 비도덕성에 관한 소고 Court Apercu de l'immoralite de la scene anglaise 127 영웅 El Heroe 99 오딧세이 Odyssee 172 완성의 길을 안내하는 간단한 기도방 법 Mayen court et facile pour l'oraison( … ) et pour arriver a une haute perfection 207
의디푸스 Oeuipe 133 유럽에 있어서의 의식의 위기 La crise de la conscience europeenne 227, 231 유산상속인 Le Legataire universel 151 의 무에 관하여 Des Devoirs 66 인간 오성 에 관한 소론 Essai philosophique concernant l'entendement humain IO, 20, 25, 26, 180, 229, 230, 233 인간과 자연권에 관하여 De jure naturae et gentium 49 일리아드 Iliade Il7, 118 ㅈ 자녀교육에 관하여 De l'education des enfants 107 자연권의 기본 원리와 천부적 인간 Fundamenta Juris naturae et gentium 60 자연법칙에 의거한인간과시민의 의 무 De officio homonis et civis juxta legem naturalem 49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rincipes mathfmatiques de la philosophie naturelle 91 자유 사상에 관한 담론 Discourse of .free thinking 38, 39 자유로운 웅변 La libre Eloquence II8 송진 머리카락 La boucle de cheveux enlevie 148 전쟁과 평화의 권리 De jure belli etpacis 47
절름발이 악마 Le diable boitwx 144 정부에 관한 두 가지 이론 Deux traites de gouvernement 54 정 치 El Politico 99 죽어가는 카토스 Caton mourant 144 진정한 신앙과 전정한 교회를 위한 경건주의는 신의 뜻과 일치한다 Pia desideria oder hezlicl1es Ver langen nach gottgefalliger Bessenmg des wahren evangelischen Kirche 223 진정한 연인들 The conscious Lovers I58 진정한 종교에 대하여 De la veritable religion 3I 질 브라스 Gil Blas 144 질투하는 왕비둘 Reines rivales 143 ㅊ 찬란한 일실링 The Splmdid Shilling 148 창조 La Creation 132 천일야화 Les mille et une nuits 140 철학적 람구로서의 자연법 De legibus naturae disquisitio philosophica 133, I34 ㅋ 카토스 Caton, d'Addison 133, 134ㅌ
텔레마끄의 모험 Les Aventures de Telemaque 57, 103, 205, 230 ㅍ폭풍과 노도 Sturm und Drang 113풍속연구 Essai sur les moeurs 113
ㅎ 혜성 에 관한 성 찰 Pensees sur la Comete 63 회고록 Memoires I99조한경
서울대학교 사대 불어과 및 인문대 불문과 졸업 동대학원 석사 및 박사과정 수료 현재 전북대학교 불문과 부교수 논문 「피카레스크 소설과 프랑스 문학」 外역서 『초현실주의』(이본느 뒤플레시스), 『에로티즘』(죠르쥬 바따이유) 유럽 의식의 위기 I 대우학술총서 • 번역 28 찍은날 1990년 3월 10 펴낸날 . 1990년 3월 20 지은이 롱아자르 엮은이 조한경 펴낸이 朴孟浩펴낸곳 民音社출판등록 1966. 5. 19 제 1-142호우편대체계좌번호 010041-31-523282 110-111 서울 종로구 관철동 44-1 734-2000, 735-8524 (영업부) 734-6110 • 4243 (편집부) 733-7010 (팩시밀리) 값4,6oo원 Printed in Seoul. Korea © 조한경, 1990 인문사희과학, 문학사희학 KDC/8oo. 09대우학술총서(번역)
1 遊牧民族帝國史 룩콴텐·床基中 옮김/값 6,500원2 수학의 확실성 모리스 클라인·朴世熙 옮김/값 7,000원3 중세철학사 J.R.와인버그·康英哲 옮김/값 5,500원4 日本語의起源 R.A.밀러·金芳漢 옮김/값 2,200원5 古代漢語音韻學 槪要 버나드 칼그렌·崔玲愛 옮김/값2,500원6 말과 사물 미셀 푸코·李光來 옮김/값 7,000원7 수리철학과 과학철학 헤르만 와일·김상문 옮김/값 7,500원8 이상·진리·역사 힐러리 파트남·金影月 옮김/값 6,000원9 기후와 진화 로널드 피어슨·김준민 옮김/값4,000원10 사회과학에서의 場理論 쿠르트 레빈·박재호 옮김/값 6,000원11 영국의 산업혁명 필라스 딘·羅慶洙·李廷雨 옮김/값 4,700원12 현대과학철학논쟁 토마스 쿤 外·조승옥·김동식 옮김/값 8,000원13 있음에서 됨으로 일리야 프리고진·이철수 옮김/값 7,500원14 비교종교학 요아힘 바하·김종서 옮김/값 4,600원15 동물행동학 로버트 A. 하인드·정현갑 옮김/값 6,000원16 현대우주론 D.W. 시아마·양종만 옮김/값 8,500원17 시베리아의 샤머니즘 V. 디오세지 外·최길성 옮김/값 10,000원18 조형미술의 형식 힐데브란트·曺昌堡 옮김/값 3,700원19 원시국가의 진화 죠나단 하스·崔夢龍 옮김/값 5,500원20 힐버트-數學과 삶 콘스탄스 리드·이일해 옮김/값 10,000원21 商文明 張光直·尹乃鉉 옮김/값 9,300원
22 마음의 생태학 그레고리 베이즌·서석봉 옮김/값 10,000원23 혼돈 속의 질서 I.프리고진·I.스텐저스·유기풍 옮김/값 12,000원24 생명의 기원 밀러·오르겔·朴仁潭 옮김/값 10,000원25 일반언어학 이론 로만 야콥슨·권재일 옮김/값 5,000원26 국가권력의 이념사 F.마이네케·李光周 옮김/값 9,600원27 역사학 논고 F.브로델·이정옥 옮김/값 5,700원28 유럽에서의 의식의 위기 1. 위기의 시대 볼 아자르·조한경 옮김29 유럽에서의 의식의 위기 2. 변화의 시대 근간30 일반 국가학 한스 켈젠·関検基 옮김/값9,7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