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파트남

파트남은 일찌기 UCLA 에서

H. Re i chenbach 로부터 科 8벤 t[상응 배우고 하바드의 W. V. 0. Qui n e 으로부터 現代論理 를 사사받았다. 그- 노스웬스턴대 합 - 프 릭 -스 강의 를 하였으며 , 1 96 1 년부터 .I. T . 에 서 科 學 哲 學 1 965 년부터 학교수로 1) M , 山 ( 1 9'/5) (19 75) , (19 78) 1)

이성·전리•역사

이성•전리·역사

Reason, Truth and His tor y 힐러리 파트남 지음 金峴明 옮김 民音社

책 머리에 파트남의 『 이성 • 진리 • 역사』의 번역작업은 번역을 한다는 것이 얼마 나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둥 재삼 인식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왜 번역이 힘든지에 대한 이유는 익히 알려져 있겠지만 역자 나름대로 는 두 가지로 요약해 본다. 그 첫째 이유는 역자가 원저자의 글에 담겨 있는 생각이나 의도 를 정확하게 추적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요(경우에 따라서는 정녕 불가능하다는 생각까지 들 때도 있다), 두번째 이유는 번역을 하는 것도 일종의 창작활동이기 때문이다. 원저자의 생각이나 의도를 또 다른 언어로 옮겨 놓는다는 것은 재조립 내지는 재생산과 갇 은 작업일 것인 바, 이러한 작업이 창작을 하는 작업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여하튼 파트남의 이 저서는 역자로 하여금 사고의 한계, 이해의 한 계, 창의성의 한계 동 여러 가지 면에서의 한계를 철저히 깨닫도록 해 준 셈이다.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어설 수 있는 길은 독자들로부터의 비판과 질책을 감수하는 길밖에 없으리라 생각되기에 오역이나 미진한 부분에 대한 독자들의 아낌없는 많은 지적이 있을 것을 기대해 본다. 끝으로 이러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해준 대우재단축에 십심한 사의를 표한다. 1987. 7. 역자 김효명

이성·진리·역사

차례

책 머리에 1

서문 5

제 1 장 통 속의 두뇌

제 2 장 지시의문제 35

제 3 장 두 개의 철학적 관점 65

제 4 장 정신과 신체 95

제 5 장 합리성의 두 개념 125

제 6 장 사실과 가치 153

제 7 장 이성과역사 183

제 8 장 합리성의 현대적 해석에 끼친 과학의 영향 207

제 9 장 가치, 사실 그리고 인식 235

부록 255

역자해제 258

찾아보기 265

서문 철학자이든 철학자가 아니든간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버릇 중에는 수많은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있는데, 이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타파하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이분법 중에 가장 주된 것이 진리와 이성에 대한 객관적 관접과 주관적 관정간의 아분법이다. 이 이 분법과 관련하여 필자가 지금 고려하고자 하는 접은 다음과 같은 현상 이다. 즉 ‘객관적'-‘주관적'간의 이분법이 단순한 두 짝의 범주로 그치 지 않고 관점들을 유형화시키거나 틀이 짜여진 사고를 규정하게 되면 사람들은 이 이분법의 양극을 거의 이데올로기화시켜 보게 된다는 접이 다. 오늘날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진리문제에 관하여 일종의 ‘모사 co py' 설을 지지하고 있다. 진리모사설에 의하면 모든 진술 s t a t emen t은 그것 이 (마음으로부터 독립된) 사실에 부합될 때, 오직 그때에만 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류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진리의 객관성을 부인하고 일체의 사고방식과 일체의 관접이 모두 주관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복종 하는 길만이 진리모사설에 대한 유일의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감한 대안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한데 이들은 (푸꼬 M. Foucaul t와 같은 몇몇 이름난 대륙의 철학자들과 파이어러벤트 P . Feye r abend,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쿤 T.K 따 m 도 이에 속한다) 진리모 사설과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이들은 모두 사고의 체계나 이데올로 기, 그리고 심지어는 과학이론까지도(쿤과 파이어러벤트의 경우) 주관 적인 것으로 간주해야만 소박한 진리모사설이 극복될 수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으며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인 입장을 강력 하게 제창하고 있다. 철학적인 논쟁이 이데올로기적인 논쟁의 성격을 미리 띠고 있다는 사 실 자체는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가장 정 밀한 과학에 있어서 조차도 새로운 생각들이 마치 어떤 정당을 지지하거나 반대할 때와 마 찬가지의 강도로 지지되거나 공격당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정치 에서조차도 한쪽으로 치우치는 태도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열망은 어떤 문제의 도덕적인 심각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때때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는 중에서도, 철학에 있어서도 그렇고 정치에 있어서도 그 렇지만, 새로운 생각들은 다시 낡은 생각들로 화해 버리고 한때는 도전 적이었던 것이 쉽게 예견될 수 있거나 싱거운 것이 되고 말며, 또 한때 는 당연히 주목받아야 할 것을 주목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던 것이 새로 운 방안을 고려하는 데에 방해요소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 이 바로 지금 진리에 대한 대응적 입장 corres p ondence v i ew (I)과 주관주 의적 입장간에 일어나고 있다. 이 책의 처음 세 장에서 필자는 객관적 요소와 주관적 요소를 동합하는 진리개념을 설명해 보겠다. 객관적 요소와 주관적 요 소가 동일된 진리개념의 기본방향은 이미 칸트의 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입장에 의하면 진리의 문제가 결국은 시대정신 Ze itg e i s t이나 ‘형태전환 ge sta l t swi tch es' 또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일 뿐이라는 주장을 펴지 않고서도 소박한 진리모사설을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0 진리대웅설은 초기 (논리적 원자론)의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한 것으로서 진리모 사설과 동일한 내용의 것이다. (이하

매우 개략적으로 말하여 진리개념과 합리성 ra ti onal ity의 개념간에는 아주 밀집한 연관성이 있다는 점이 내가 지금 옹호하고자 하는 견해의 기본주장이다. 좀더 개략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것이 합리적으로 받아들 여질 수 있는가 하는 접이 사실 또는 비사실을 분간해 내는 유일의 척 도이다. (이 말의 의미는 글자 그대로이다. 죽 어떤 그림이 아름답다는 점이 합리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면 그것은 동시에 하나의 사실이 된 다.) 진리개념을 이와 같이 파악하면 가치사실 value fa c t s 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진리개념과 합리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는 개념간의 관계 는 서로 상이한 두 개념간의 관계이다. 죽 어떤 진술이 어느 순간에 합 리적으로 수용된다고 해서 반드시 참인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실재론 적인 경향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진리문제에 관한 필자의 견해를 설명해

나가겠다. 그렇다고 합리성이 일련의 불변적 ‘법규'나 ‘원리’에 의하여 정의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방법론적인 원리들은 우리들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보는 우리의 시각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 천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합리적인지를 규정해 줄 어떤 초 역사적인 원리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관주의적 철학자들의 주장 에 필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성의 개념이 역사적으로 변천된다는 사실로부터 이성 그 자체가 아무 것이라도 될 수 있다는 결 론은 나오지 않는다. 프랑스 철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문 화적 상대주의와 ‘구조주의'의 이상야릇한 혼합이 내 이야기의 결본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역사를 초월한 붕변의 철칙을 인정하든가 아니면 문화적 상대주의를 인정하든가 둘 중의 하나만 옳다는 태도는 시대착오적인 이분법의 결과이다. 합리성은 실험과학에만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며 실험과학이 실험과학 이 아닌 것과 기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 내가 옹호하고자 하는 견해의 또 다른 특징이다. 실험과학과 실험과학이 아닌 것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접이 있다고 보는 견해는 실중주의가 남긴 유산이다. 죽 과학이 제시한 세계는 결국 ‘감각자료 sense da t a’ 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 실험과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은 단지 ‘조작적으로 정의된 ope rati on ally defi ne d' 것일 뿐이라고 보는 견해의 유물이다. 이 책에 서는 조작주의적이고 실중주의적인 과학관을 비판하는 데에 많은 시간 을 소비하지는 않겠다. 실증주의적 과학관은 과거 20 여 년간 철저히 비 판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각자료'가 적어도 일부의 우리 지식에 대한 객관적인 ‘기반’을 마련해 준다는 경험주의적 견해만큼은 진리와 합리성에 관하여 우리가 앞으로 말하고자 하는 접과 관련하여 재음미될 것이다. (3 장) 요컨대 필자는 마음이 세계를 단순히 ‘모사'하여 세계가 하나의 참된 이론에 의해 기술될 수 있다는 견해를 배격하겠다. 그렇다고 마음이 세 계를 꾸며낸다 make u p는 견해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또는 마음이 세계를 ‘방법론적인 규약'이나 마음에서 독립된 ‘감각자료'에 구속시켜 만들어 낸다는 견해도 나의 견해와는 다르다. )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마 음과 세계가 공동으로 마음과 세계를 구성한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또는 이 비유를 좀더 헤겔철학의 냄새가 나게 표현한다면 우주가 우주

를 구성한다고 할 수 있으며 이때 마음은 집단적으로 특별한 역할을 수 행하게 된다.) 합리성에 대한 내 설명의 마지막 특징은 다음과 같다. 합리성이란 그 근본에서 살펴보면 인간의 번영, 죽 善의 개념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다. 진리의 개념은 최근 ‘가치 ’ 라고 불리워지는 것에 크게 의존하고 있 다. ( 6 장) 합리성과 역사에 관하여 위에서 언급한 바가 .::z.대로 가치와 역사에도 적용된다. 죽 인간의 번영이 과연 무엇인지 를 단 한 번에 규 정해 줄 수 있는 초역사적인 ‘도덕원리'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 고 하여 도덕의 문제도 단순히 문화적 현상이고 따라서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뜻은 아니 다. ‘사실'과 ‘가치 '간의 그 악명 높은 이 분법 이 생 긴 이유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진리모사설과 주관주의적 진리설간의 이분법 때문이기에 사실과 가치간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진리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을 고치는 길뿐이다. (인습적으로 이 해된 이분법은 일종의 상대주의와 관련되는 것 같으나 그것은 다만 그 렇게 보일 뿐이다.) 작금의 상황과 같이 진리 를 모사론적으로 보거나 아니면 주관주의적으로 해석한다면 우리들 스스로와 세계의 어느 한 부 분을 잃게 된다. 즉 세계는 단순히 공간을 떠도는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거나(세계를 과학적으로 기술하면 결국 하나의 참된 이론으로 수령된 다고 보는 ‘물리주의적’ 입장) 아니면 단순히 ‘사실적인 그리고 가능적 인 여러 감각자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되며(전통적인 경 험론의 입장) 또 아니면 우리가 여러 가지 (주로 무의식적인) 이유로 꾸 며내는 참다한 이설들과는 정반대로 세계의 존재가 아예 부정되어 버린 다. 이와 갇이 진리를 이분법적으로 보는 견해와 반대되는 견해의 기본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1979 년 옥스포드 대학에서 ‘철학자와 인간이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한 적 이 있는데 (Herbert Sp e ncer Lectu r e) 이 강연은 이 책의 집필 중 에 나온 것으로서 이 책의 일부 내용과 중복된다. C ritiq ue(1980) 지에 실린 ‘Si Die u est mort , alors tou t est pe nnis ' … … (refl ex io n s sur la ph il os op h ie du lang ua ge ) ”라는 논문도 마찬가지 이 다. 이 책은 19乃 년에서 1980 년까지 국립과학재단th e Nati on al Sc ien ce Found (lti on” 에서 나온 보조금으로 이루어진 연구와도 연관된다. 국립 1) 국립과학재단의 지칭 연구과제는 ‘과학이론의 평가 : 역사적인 방법과 형식걱인 방법' (Ag ree ment No. SOC 78-04276) 이었다. (이하 l) 2) 3) ·… ••온 원주임)

과학재단의 보조에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토마스 쿤과 루스 앤나 파트남이 이 책의 초고를 읽고 날카로운 비판 과 현명한 충고를 해주었다. 불락 N.Block, 헬만 D.Helman, 라이버 J. Leib e r 등과 같은 동료들, 그리고 하바드 대학에서의 여러 강의와 세미 나에 참석하였던 학생들로부터도 많은 충고와 비평을 받았다. 이 책의 몇엿 장은 1980 년 봉 리마에서 행하였던 강연에서 읽었던 것 이고(리마에로의 여행은 풀브라이트 연구보조비로 가능하였다) 실지로 재 2 장은 리마에 체재하는 동안 탈고된 것이다. 리마에 머무르는 동안 치 아포 L.C hia p po , 레카 A.C .L e cca, 훼르난데즈 H.Fernandez, 케사다 F.M. Qu esada, 세카다J .Secada 등과 많은 토론을 하였는데 이에도 도 움받은 바 크다. 그리고 이 책의 전체 내용은(초기의 원본) 1980 년 봉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강의된 바 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있었던 나의 동료들(특히 W ilhe lm Essler 와 Rain e r Tra pp)과 학생들, 그리고 그 외 의 다론 친구들 (특히 Diet e r Henric h , Manon Fassbin d er, Wolf- ga ng S t e gm uller) 도 많은 격려와 토론을 해주었다. 이들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한다. 하바드 대학 철학과에 있는 동료들 개개인에게도 또한 감사를 해야 하겠다. 최근 굿멘 N.Goodman 과 나는 서로의 의견에 일치점이 있다 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초고는 내가 굿멘의 Ways of Worldmak in g을 읽어 볼 기회도 갖기 이전에 씌어졌지만 그 후 이 책 을 읽고 여 러 가지 문제를 그와 토론하였는데 이 것도 나에게는 큰 도움 이 되었다. 편집을 말았던 마이노트J .M y no tt의 격려와 충고에도 깊이 감사드린 다.

제 1 장 통 속의 두뇌 한 마리의 개미가 모래 위를 기어가고 있다. 개미가 기어감에 따라 모래 위에는 하나의 선이 생긴다 . 개미가 모래 위에서 방향을 이리저리 들기도 하고 가로지르기도 하여 형성된 모양이 아주 우연히도 윈스턴 처칠의 모양을 풍자한 그림갇이 되었다고 하자. 이 경우 그 개미가 윈 스턴 처칠의 그림 -처칠을 고사 de pict하는 그림 -울 그렸다고 할 수 있는가? 대개의 사람들은 잠시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 다. 즉 그 개미는 처칠 또는 처칠의 사진조차도 본 적이 없고 처칠을 묘사하려는 의도도 전혀 없다. 개미는 단순히 어떤 모양의 선의 자국을 남겼으며(이것조차도 의도적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 선의 모양이 처칠 의 그림으로 ‘간주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보기 때문 이다. 이 점은 선 ‘그 자체’는 어떠한 것도 표상 re p resen t a ti on1) 하지 않는다 는 말로도 표현될 수 있다. 윈스턴 처칠의 모양과 단순히 닮았다고(매 1) 이 책에 나오는 ‘표상 re p resen t a ti on’ 과 ‘지시 re f erence’ 라는 두 용어는 말(또는 기호나 대변)과 실지로 존재하는(즉 단순히 ‘사고의 대상'만이 아닌) 어떤 것 간의 관계 윤 항 상 뜻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지시도 ‘지시’라는 말의 뜻에 포합되나 여기선놉 그러한 뜻은 무시하겠다. 내가 ‘대변'이나 ‘지시’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옛 표현은 외연 deno t a ti on 이 다 . 또 현대 논리학자들의 관습을 따라 ‘존재한다’는 말을-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한다' 는리 는뜻 그으운로 ‘사지용시하하겠고다' .‘ 대따변할라'서 수 윈 있스다턴. 처칠이 죽온 지 오래지만 그래도 ‘존재하며' 우

우 복잡한 류의 닳음이지만) 해서 그것이 바로 처칠을 대변한다거나 지 시한다고 할 수는 없으며 또 반대로 어떤 것이 처칠을 표상하거나 지시 한다고 해서 반드시 처칠의 모양과 닮았다고 할 수도 없다. 처칠과 회 화적인 유사성운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처칠을 대변하는 데에 사용되 는 것 중에는 활자화된 ‘윈스턴 처칠', 또는 입으로 말해진 ‘윈스턴 처 칠' 등 허다하게 많다. 만일 유사성 s i m il ar ity이 어떤 것이 어떤 것을 표상하는 데에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라면 이러한 목적에 맞는 필요조건이나 충분조건이 또 어디 있을까? 도대체 어떤 것이 다른 어 떤 것을 어떻게 표상(또는 ‘대리')할 수 있단 말안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온 쉬운 것 갇아 보인다. 문제의 개미가 윈스턴 처칠을 칙겹 보았고 또 처칠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지능과 재능을 갖 추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 개미가 의도적으로 처칠의 풍자화를 그렀다고 가정해 보자. 다른 한편으로 개미가 그린 선이 WINSTON CHURCHILL 아란 굳 자 모양을 이루었다고, 그것도 아주 우연적으로(그렇게 될 확률은 매우 낫겠지만 이 점은 무시하고) 이루었다고 가정해 보자. ‘활자화된 모양' WINSTON CHURCHILL 이 어 느 책 이 든 책 에 나타날 경 우에 는 처 칠 을 대변하겠으나 개미가 우연히 그린 모래 위의 WINSTON CHUR- CHILL 은 처칠을 대변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의도 i n t en ti on 라는 것이 무엇이 무엇을 대변하는 데에 필요조 건으로서 꼭 따라야 하겠다. 그러나 어떤 것이돈, 사적 언어까지도(밖으로 크게 말해지지 않고 내 마음 속에서 말해진 ‘윈스턴 처칠'이란 말까지도), 그것이 처칠을 대변 여하. 도생.록 각. 할.하 는수 의있도어를야 가할지 기것이 다위.해 서만는약 우모선래 무위엇에보 그다려 내진 가선 처이칠라에든 가관 하소 리 등등이 ‘그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대변할 수 없다면 어떻게 사유의 형식 ‘그 자체가’ 어떤 것을 대변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정말 대변할 수 있단 말인가? 사유가 어떻게 밖으로 뻗어 외부적인 어떤 것을 ‘파 악'할 수 있는가? 과거에는 이러한 식의 생각으로부터 비약하여 마음은 본질적으로 비 옹걸격인 것임을 증명하려 한 철학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논법은 그다 지 복참하지 않다. 위에서 본 개미의 경우를 그대로 몰리적 대상에도 적용시키기만 하면 된다. 그 자체로서 어떤 것을 지시할 수 있는 물리

적 대상이란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마음속의 생각은 분명히 어떤 특칭 의 개체를 지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생각(따라서 마음)은 본질적으로 물리적인 대상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다. 사유의 독성에는 치향성 i n t en ti onal ity이란 것이 있다. 다시 말하여 사유는 무엇인가 다른 것을 지시할 수 있다. 그런데 물리적 대상은 그것이 어떤 마음과 관련하여 이차적이고 파생적인 의미에서 지향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경 우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것도 지향성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주장 은 퍽 성급하게 내려진 결론이다. 마음이 어떤 신비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고 해서 어떤 문제가 정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향 성, 그리고 지시, 이러한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문제는 매우 실질 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아칙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마술적 指示이론 우리는 위에서 개미가 그린 ‘그링'이 윈스턴 처칠과는 아무런 필연적 연관성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았다. 그 ‘그림’이 처칠과 ‘유사'하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 그것이 정말 처칠을 그린 것이고 처칠을 표상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 개머가 지능을 가지고(사실은 가지고 있지 않은데) 처칠에 대하여 알고(사실은 알 수가 없는데) 있지 않다면 개미 가 그린 모양은 그 어떠한 것의 그림도 표상도 아니다. 옛날 원시인들 은 예컨대 이름 names 이 이름의 소지자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죽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물의 ‘진정한 이름'을 알면 그 사람이 나 그 사물에 대하여 권능을 갖게 된다고 믿었다. 왜 그러한 권능을 갖 마게. 술.된적.다 고연 관보성았 m는a가g i c하a l면 c on이n름e ct과i o n이 이름 의있 다소고지 자믿간었에기 는때 어문떤이 다알. 수그 러없 는나 이름과 이름의 소지자간의 관계가 단지 문맥적 conte x tu al, 우연적 conti ng e nt, 그리고 규약적 conven ti onal 일 뿐이 라는 접을 깨닫고 나면 왜 이름에 대한 지식이 어떤 신비적인 의미를 가져야 되는지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여기서 꼭 알아 두어야 할 접은 위에서 언급한 물리적 그립에 관한 이야기가 십상 men t al im a g e 과 정신적 표상 일반에도 적용된다는 점이 다. 죽 물리적인 것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것의 경우에도 표상 과 표상된 것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 연관성도 없다. 그러한 연관성이

있다는 가칭은 마술적으로 생각해 온 습관의 잔재뭄이다. 이 접은 아마도 심상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가장 쉽게 포착될 수 있 을 것이다. (이 접을 처음으로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그 중대성을 처음으 로 파악하고 있었던 사람은 아마 비트겐슈타인이었을 것이다.) 우주 어 단가에 인간들이 살고 있는(또는 외계인에 의하여 인간들이 투여된) 어 떤 혹성 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혹성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모든 점 에서 우리 인간과 같지만 다만 한 가지 다른 접이 그들은 나우를 한 번 도 본 적도 없고 나무룹 한 번도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다고 가정해 보 자. (그 혹성에 식물이 있기는 하지만 단지 곰팡이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고 생각하자.) 어느날 한 우주선이 그 혹성의 사람들과 아무런 연락도 없이 단순히 그 혹성을 지나가면서 우연히 거기에다 나무를 그린 그림 하나를 떨어뜨렸다고 하자. 이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하고 그들은 그 그림을 두고 의아해할 것임은 틀림없다. 건물, 천개, 일종의 동물 둥 여러가지 추측을 해 보겠지만 결코 알아맞히지는 못할 것아다. 그 그럼이 우리들에게는 나무를 대변하지만 그들에게는 성질과 기능 을 전혀 알 수 없는 이상한 물건을 대변해 줄 뿐이다. 그들 중에 누군 가가 내가 그 그림을 본 후 나무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바와 정확하게 동일한 정신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가 가진 이미지는 나우의 효장이 아니고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어 떤 낯선 물체의 표상일 따름이다. 어떤 이는 마음 속에 그러한 이미지를 일으킨 .::z. 그링 자체가 우선 무엇보다 먼저 어떤 나무를 표상하고 있는 한, 문제의 이마지도 사선장 그 나무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즉 실재의 나무 와 마음 속의 이미지 사이에는 매우 독이한 인과적 관계마저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주선에서 떨어진 그 ‘나무의 그림’이 사실은 나무를 그린 그림이 아니고 물감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을 뿐인데 그것이 국 히 우연하게도 나무의 형상을 이루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형상이 나무 의 모양과 정확하게 동일하다고 할지라도 사실상 나무를 그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치 개미가 우연히도 그린 그림이 처칠의 모양 을 닮았다 하더라도 처칠의 그림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그립’을 떨어뜨린 우주선이 나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떤 혹성에서 온 것이라고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렇더라도 그 혹성의 사 람들이 그립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심상온 내가 내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나무의 이미지와 질적으로 동일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 는 그와 같이 동일하다 하더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마지는 나무를 대변하는 이미지는 아닐 것이라는 접아다. 낱 .;.!words 에 관해서도 위와 동일한 논의를 전개시킬 수가 있다. 종 이 위에 적혀진 말들이 어떤 나무를 완벽하게 기술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그 말들이 예컨대 원숭이들이 몇백만 년을 두고 타자기룹 아무 렇게나 두들겨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말들이 무엇 을 지시한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말들을 마음 속으로 기억 하여 무슨 뜻인지도 이해하지 않은 채 속으로만 되새기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마음 속으로 생각되어지기만 하는 말들도 아무 것도 지시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 속으로 그러한 말을 하는 사람이 최면에 길렀다고 상상해 보자. 그리고 그 말이 일본말이고 최면술에 의하여 그가 일본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해졌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하여 그가 그 말을 생각할 때 ‘이 해하는 느낌 fee li ng of unders t and i n g'을 가진다고 가정해 보자(물론 누 군가가 그의 생각을 방해하여 그가 생각하고 있는 말들이 무엇을 의리 하는지 묻는다면 그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음을 알아차리 게 되 겠지 만). 아마 최면술에 의한 이 환상이 정신감옹을 하는 일본인 도사까지 도 속일 정도로 완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 말들을 올바 론 문맥에서 사용하지 못하고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그가 그 말들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말한 몇 가지 공상과학적인 이야기들을 종합한다면 어떤 사 람이 생각하고 있는 말들이 사실상 어떤 언어에서 나무를 기술하는 말 도둘 이그고는 이결에코 따그라 말그들의을 마이음해 하속지에도도 못.적하.합.고한 나이무미가지 가무 엇생인겼지다도고 알하지더 라못 하는 경우가 있다. 단순히 흉어진 물감에 의해서도 심상은 생길 수 있 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 (최면에 걸린 사람이 그 심상이 최면 속에서 스스로 생각한 바에 적합한 심상이라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이 무엇이냐 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 사람이 최면 속에서 생각하는 언어가 최면을 거는 사람도 또 최면에 걸리는 사람도 모두 알지 못하는 언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아주 ·우연하게도 최면 속대 의최 그면에 ‘ 무걸의린미 한그 문사장람’이의 일마본음어 속로에 된 지 나나무가의는 기모술든일 것수이도 정.있 말.다 로.. 요나컨무

에 대하여 생각하는 어떤 일본인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것과 질적으로 동일한 것일 수도 있으나 전자의 그 어느 것도 나무를 지시한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이 사실은 불가능함은 물론이다. 그것은 마치 원숭이들이 타자기를 두들겨 우연히도 『행릿 Hamle t』의 사본 하나를 만들어낼 수 있음이 사실은 불가능함과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너무 높아 사실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때 불가능하다 함은 논리적으로 불가 능하다는 뜻도 아니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뜻도 아니다. 즉 논리 적으로나 물리적인 의미로서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한 일들의 발생이 물리적 법칙과 양립될 수 있으며 다른 혹성들에도 인간 과 같은 지능을 가진 생물들이 많다면 그러한 일들의 발생은 우주의 현 실적인 상태와도 양립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 다면 이것은 우리들의 개념구조의 한 중요한 국면에 관한 진리를 중명 해 주는 셈이 된다. 어떤 진리인가 하면 언어적이든 시각적이돈 우리들 이 가지고 있는 복잡다단한 표상체계는 표상되는 것과 어떠한 마술적인 • 연관성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죽 표상체계와 표상되는 것간의 연 관성은 표상체계가 어떻게 생겼으며 또 말하는 자나 생각하는 자의 성 향이 어떤 것인지 하는 문제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이 접은 표상체 계가(위의 예의 경우에는 말과 이미지들) 물리적으로 형성된 것이든 ―즉, 문자화되거나 발음된 말들과 물리적으로 그려진 그림들­ 아말니과면 마 음단 지속 의마 음그 림속은에 서그만 말형과성 그된립 것이 이나든타지내간고에자 사 하실는이다 바.와 생 본.각질. 적속.의.으 로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통 속의 두뇌의 경우 철학자들에 의하여 그 가능성이 많이 논의되는 과학적 공상의 예 하 나를 들어 보자. 어떤 인간이(당신 자신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사악한 과학자에 의하여 수술을 받았다고 하자. 그 사람의 두뇌가 육체에서 분 리되어 두뇌를 계속 살아 웅칙이게끔 해줄 영양분이 가득 담긴 동 속에 옮겨졌다고 하자. 신경조칙은 그대로 초과학적 컴퓨터에 연결되어 이 컴퓨터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것이 완벽히 정상적인 듯이 보이는

환각을 일으키도록 한다고 하자. 사람들, 사물들, 하늘 등등이 모두 있 어 보이지만 그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것은 컴퓨터로부터 신경세포에 로 이어지는 전자자극의 결과이다. 컵퓨터는 그 사람이 손을 올리려고 한다면 손이 올려짐이 자동적으로 ‘보이고' ‘느끼게' 되도록 교묘히 장치 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사악한 과학자는 여러가지로 프로그램을 변형시킴으로써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과학자가 원하는 어떠한 상황이나 상태일지라도 ‘경험'하도록(또는 환상을 일으키도록)할 수 있다. 과학자 는 또한 두뇌수술을 하였다는 기억을 삭제해 버림으로써 그 사람이 항 상 그러한 상황에 있어온 ` 것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다. 심지어는 그 사 람으로 하여금 그가 의자에 앉아 어떤 사악한 과학자가 사람들의 두뇌 를 때내어 두뇌 물 계속 살아 움직이게 할 영양분이 담긴 통 속에 집어 넣는다는 재미나면서도 불합리한 가정을 기술한 굴을 읽고 있는 것 갇 은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신경세포는 그 두뇌의 주인공으로 하여금 이러처러한 환상을 일으키도록 하는 초과학적 컵퓨터에 연결되어 있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가능성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는데 이 가능성이 인 식론의 분과에서 언급될 때 그 목적은 물론 외부세계의 존재에 관한 회 의론이라는 고전적인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해 보고자 함이다. (당신 스스로는 이와 같은 어려옹에 빠져 있지 않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 그러나 이 어려움은 또한 마음과 세계의 상관관계 문제를 제기함에 있어 유용한 한 방책이 되기도 한다. 두뇌 하나가 아니라 모든 인간(또는 아마도 모든 감각기능을 가진 생 물)이 동 속에 들어있는 두뇌(‘감각'이라는 최소한의 신경조직만 가진 생물의 경우에는 신경조직)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뭉론 그 사악한 과 학자는 동 밖에 있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꼭 그렇게 밖에 있어야 할 것인가? 아마도 사악한 과학자란 존재하지도 않고 (좀 무리한 이야기 이지만) 우주는 온동 두뇌와 신경조직으로 가득찬 동만을 만들어내는 자동기계로 구성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리되이어번 에있는는 그환 각자들동이기 계아가니 라우 리하로나 의하 여집.금단. 적.서인.로 환연각관을성 이일 으없키이도 록각각 만 들분 어져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리하여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럽 내 스스로에게 보일 때, 당신에게는 당신이 나의 말을 듣고 있는 것처 럼 보인다. 물론 이때 나의 말이 당신의 귀까지 실지로 다다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실지로 귀가 없고 나에게는 입과 혀가 없

기 때문이다. 내가 말을 내뱉을 때 정말로 일어나는 일은 나의 두뇌에 서 발생한 전자자국이 컵퓨터로 나가서 나는 나 자신의 음성을 ‘듣고' 내 혀의 움칙임을 ‘느끼게' 하고 당신은 내 말을 ‘듣고' 내가 말하는 것 울 ‘보게' 함이다. 이 경우 어떤 의미로서는 당신과 나는 실지로 의사소 동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이 정말 존재한다는 나의 생각은 들릴 수 없다. (이때 당산의 존재란 두뇌와는 상관없이 ‘외부세계'에 있는 당신 육체의 존재를 말한다.) 어떤 관접에서 보면 ‘전세계’가 하나의 집단적 인 환각이라 할지라도 하등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말하고 듣는 기계적 과정이 우리가 평소 생각하는 바와는 다를지라도 내가 당 신에게 무엇을 이야기할 때 결국 당신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아니고 두 연인이 칭사를 할 경우에는 동 속에 있는 두 두뇌가 그렇게 할 수 있다 고 생각하기는 힘들지만). 이제 매우 어리석고도 자명한 것 같아 보이지만(적어도 이론적으로 무장된 몇몇 철학자들의 눈에는) 정말 깊이 있는 철학적 문제에로 보다 직접적으로 인도할 질문 하나를 제기하겠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전 부 사실이라고 가정해 보라. 정말 우리가 통 속에 들어 있는 두뇌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사실을 우리가 말하겨나 갱각한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사실 나는 우리가 정말로 동 속에 있는 두뇌에 불과하다는 가정이 물리적 법칙과 위배되지 않고 우리가 경험해 온 모든· 것과 전혀 모순되지는 않더라도 철대 참이 될 수 없는 가정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왜 그것이 절대 참이 될 수 없는 가정이냐 하면 그것은 스스로를 논파하는 가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제시하고자 하는 논의는 일반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성질 의 것이 아니다. 이 논의가 정말 옳다는 것을 내 스스로에게도 확인시 키는 데에 수 년이 걷렀다. 이 논의가 좀 특이해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몇 개의 가장 십오한 철학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논리 의 어떤 정리, 죽 ‘스콜렘―뢰벤하임의 정리'(I)를 생각하고 있을 때 이 ® 스콜렘一되벤하입 정리 : 1915 년에 되벤하임 Lowenhe i m 이 증명하였고 그 후 1920 년에 스콜렘 Skolem 이 일반화시킨 형식이론의 모델에 관한 정리로서 완전성 정리 Comp le te • nessTheorem 에서 칙겁 도출되는 한 결과이다. 이 정리의 요정은 어떤 형식언어 (l 차 술어논리)가 그 체계 속에 이항술어기호 ‘='룹 갖추고, 또 그 제계의 모델이 정상적일 때 (축 ‘='이 도·과 동일한'의 뜻으로 해석될 때) 그 체계의 모델수는 denumerable 하 다는 것이다. ('denumerable' 하다는 것은 어떤 집합의 구성원이 자연수와 1 대 1 의 대웅 관계에 놓여질 수 있다는 뜻이다)

러한 발상이 처음 생겼으며 대번에 이 정리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Phil o sop hi c a l Inves tig a ti ons 』사이에는 어 떤 연관성 이 있음을 알아 차렀다.) 스스로를 논파하는 가정이라 함은 그것이 참이면 또한 거짓도 함축되 어 있는 가정을 말하다. 예컨대 오은 일반격 친충혼 겨것이다라는 명제 륭 생각해 보자. 이 명제 자체가 일반적인 진술이다. 따라서 그것이 참 이라면 또한 거짓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z. 명제는 거짓이라는 결 론내. 이심. 으.나 로.온 다생.. 각 . 되때. 거로. 나는. 밖어. 으떤. 로 .명 언제. 표가.될. 거경짓우을에 함도축 ‘하스고스 로있를음 논에파도한 다불’구고하 고불 리운다. 예를 들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나(어떤 ‘나'라도 좋다)에 의하여 생각되어졌다면 스스로를 논파하는 격이 된다. 그리하 여 (데까르뜨가 이미 말하였다시피)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존재에 대하 여 생각할 수 있는 한,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지금 밝히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동 속에 들어 있는 두뇌라는 문제의 그 가정이 바로 위에서 말한 그러한 성질을 가진 가칭이라는 점 이다. 이 가정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 .:::z. 가 정은 참이 될 수 없다. (이 점은 곧 밝혀질 것이다 . ) 따라서 그 가정은 거짓이다. 나의 논의를 제시하기 이전에 그와 갇은 논의가 제시될 수 있다는 사 실이 왜 이상해 보이는지 (적어도 진리‘모사'설을 지지하는 철학자들의 눈에는)부터 고찰해 보기로 하자. 감각을 가전 모든 생명체가 동 속의 두뇌 형태를 떤 어떤 세계가 있을 수 있음이 물리적 법칙과 어긋나지 않음은 이미 인정한 바 있다. 철학자들이 자주 언급하듯이 감각기능을 가진 모든 생물이 동 속의 두뇌로 생존하는 어떤 ‘가능세계 po ssib l e world'(%) 가 있을 수 있다. (‘가능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마치 어떠 한 모순적 명제일지라도 참이 될 수 있는 어떤 실재의 장소가 있는 돗 이 들리는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가능세계 이야기는 철학에서 쉽게 오 도되기 쉽다.) 그 가능세계에 사는 인간들은 우리와 정확히 동일한 경 험을 갖고 있으며 우리와 칭확히 동일하게 생각을 한다. (적어도 동일한 말, 동일한 이미지, 동일한 사고형식 동등이 그들의 마음에서도 일어난 ® 가능세계 개념은 라이프니쯔가 필연적 진리군 정의할 때 도입하였던 개념으로서 현재 는 양상논리 modal lo gi c 의 의미론 seman ti cs 윤 고찰할 때 널리 원용되고 있다. 양상논 리에서 필연적 진리는 비단 이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가능한 어떤 세계에서도 창일 수 밖에 없는 진리 라고 정의된다.

까? 그리고 왜 정말 동 속의 두뇌인 그 가능세계의 사람들은 그러한 논의 를 전개시킬 수 없을까?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통 속의 두뇌가 아님을 밝힐 수 있는 논의가 가능하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어떻게 그러한 논의가 가능할 이에 대한 답변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갇다. 즉 그 가능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생각하고 우리가 사용하는 어떤 말 이라도 ‘발언'할 수 있지만 적어도 우리는 지시할 수 있는 반면 그들은 지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특히 그들은 그들이 통 속의 두뇌라는 사실 을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 튜링의 검사 누군가가 (지적인 인간이 다룸직한 많은 문제에 관하여) 지적인 대화 를 실지로 나눌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고 가정해 보 자. 그 컵퓨터가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 까? 영국의 논리학자 앨런 듀링 Tur i n g은 다음과 같은 검사를 제안하였 다 .2)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컵퓨터와 대화를 나누게 한 다음 그가 알 지 못하는 어떤 인간과도 대화를 하게 하자는 제안이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자가 컵퓨터인지 인간인지를 분간하지 못한다면(이러한 시 험이 대화자를 여러번 바꿔가면서 수차례 반복되었다고 가정하자) 그 컵퓨터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만약 컵퓨터가 ‘듀 링검사'롤 동과하다면 의식을 가진 것이 된다 .O( 물론 이때 대화가 서로 2) A. M . Turi ng , 'Comp u ti ng Machin e ry and Inte l l ige nce', Mi nd (1950), rep r in t e d in A. R. Anderson(ed.) , Mi nd s and Machin e s. ® 뮤링온 원래 이 검사군 일종의 모방놀이 Immi tat i on Game 릅 통하여 가 1 시하였다. 이 놀이는 한명의 남자 (A), 한 명의 여자 (B), 그리고 납자라도 좋고 여자라도 좋은 계 3 의 질문자 (C), 이렇게 3 사람으로 이우어진다. 질문자가 있는 방과 다은 두 사람, 죽 A 와 B 가 있는 방온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이 놀이의 목적온 C 가 질문운 롱하여 A,B 중 누가 남자이며 누가 여자인지운 알아맞히는 것이다. C 는 A 와 B 용 X 와 Y 라는 기호 로 알 뿐이며 놀이의 마지막에 가서 ‘X 가 A 이고 Y 가 B 이다' 또는 ‘X 가 B 이고 Y 가 A 이다’라고 결론운 내리게 천 것이다. 예컨대 C 는 A 나 B 에게 'X, 너의 머리카락의 길 이는 어느 칭도 되는가?'라고 질문운 할 수 있을 것이며, 이 질문에 대하여 A 가 대답 한다면 C 로 하여금 혼동운 일으키도록 유도하는 것이 A 의 입무이므로 ‘나의 머리카락 중 긴 것은 악 25cm 칭도 된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답변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목 소리로 분간할 수 없도목 답변온 서면으로 주어져야 한다. 질문과 답변운 매개시켜 주 는 전신타자수가 있다면 놀이는 더 이상적으로 될 것이다. A 와는 만대로 B 에게 주어

진 임무는 질문자 상 돕는 일이다 . 예컨대 B 는 A 가 대답한 후 C 에게 ‘내가 여자야, 저 친구의 말운 믿지 말게'하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물론 남자도 이와 비슷한 말로 옹 수할 수 있운 것이기 때문에 B 의 노력온 벌.다론 효력운 거두지 못할 것이다• 이상과 갇온 상황에서 뮤링은 다음과 갇온 질문운 던진다. 죽 ’이 눈이에서 기계가 A의 역할을~ 대신한다면 어렇게 왼까?' 기게가 A의 역할운 대신하는 경우에 C 의 오판 운 유도할 수 있운 것인가? 이 물음이 바로 ‘기계도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뭉음운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한 뮤링 개인의 의견은 앞으로 정보저 장 능력이 예컨대 약 10' 쯤 되는 컵퓨터가 개발된다면 그 뭍옹에 대한 해답온 너무나 명백하여 그러한 질문이 더 이상 제기되지도 않윤 것이라는 것이다.

얼굴을 맞대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대화자는 그의 두 상대방의 외적 형태를 알 수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음성도 사용되어서 는 안 된다. 왜냐하면 기계 소리는 인간의 육성과 다룰 것임은 너무나 뻔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화가 전기 타자기로 이루어진다고 상상하는 편이 낫다. 대화자는 그가 말하는 진술이나 질문 등을 타자기로 활자화 시킨 다음 이에 기계와 인간 두 상대방이 전기건반을 통하여 응답하도 록 한다. 컴퓨터는 또한 겨깃밀도 할 수 있다. 예컨대 ‘너 기계인가?' 라는 질문에 ‘아니, 난 이 실험실에 있는 조교야'라고 대답할 수도 있 다.) 이 검사야말로 의식을 가졌는지 여부 를 가릴 수 있는 결정적인 방법 이라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기계도 의식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원 리상 결코 적대적인 태도만을 취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하여 비판받아 왔다. 그러나 이 문제는 현재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와는 상관없 다. 나는 의식의 있고 없음을 대화가 가능한지 아닌지의 여부를 통하여 점쳐 보려는 이 튜링검사를 좀 다론 목적, 즉 겨서 re f erence 의 개념을 밝히려는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상황을 좀 바꾸어 대화자의 상대방이 사람이냐 아니면 기계냐를 결정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대화의 상대방이 지시를 목적으로 말을 사용 하는 데 우리와 갇은 방식으로 사용하는지 아닌지가 문제라고 생각해 보자. 이 문제를 가려냄에 있어서도 우선 대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만약 아무런 문재도 발생하지 않는다면, 죽 대화의 상대방이 갇온 언어 를 사용하면서 보통의 여러 대상들을 지시할 수 있다고 인정된 어떤 사 람과 구별할 수 없다면 그 상대방의 대상을 지시하는 방식을 우리의 것 과 마찬가지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듀링검사의 목적이 방금 지적하였 다시피 (공동의) 지시가 이루어지는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것일 때 나는 이 검 사를 겨 서 예 관한 유밍 검 人.「 Turin g Test for Re fe rence 라고 부르

겠다. 그리고 원래의 튜링검사가 의식이 있고 없음을 가려내는 데에 겅 경척;J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하는 문제, 축 그 검사 를 단 한 번 만 통과한 것이 아니라 항상 ‘동과 ' 한 기계가 과연 필연격스오 의식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 를 철학자들이 다루었다시피, 나도 앞에서 밝힌 지시에 관한 듀링검사가 공동의 지시가 이루어지는지 아닌지 를 가려내는 결칭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지 하는 문제 몰 논해 보고자 한다. 이에 대한 대답은 우선 부정적이다. 즉 지시에 관한 듀링검사는 그렇 게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지시에 관한 듀링검사가 실제상으로는 분명 훌륭한 검사임에는 룰 림없으나 누군가가 그 검사 를 통과하고도 어떠한 것도 지시한 것이 아닌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즉 그러한 일이 (매우 확 률도가 낮을 것임은 분명하나)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앞으 로 밝혀지겠지만 이로부터 말이란(또는 어떤 책의 전체나 논의의 전체) 그 말이 지시하는 것과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가 말 그 자체를 고려하는 대신에 어떤 문맥에서 어떤 말 둘이 적합할지를 결정해 주는 규칙들을 고려할지라도――-컴퓨터 용어 로그램 말 하자여체 가밀 의무. 엇.사 인.용 가에. 언.대 .어한• 의 .프적.로인. 그 것랭을울 지고시려하할지지 않라는도 -한 그말러에 한일 프칭로하 게 붙어 있는 지시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이 동 속의 두뇌들만 사 는 세계에서는 외적인 것은 전혀 지시될 수 없다(따라서 그들이 동 속 의 두뇌들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데에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바로 듀링검사를 시행하는 자로서 (듀링 자신의 말을 빌리면 ' 모방놀이'를 하는 자로서) 나의 상대방이 정말로 어떤 기계라고 상상해 보자, 그리고 이 기계가 그 놀이를 이길 수 있고(죽 그 검사에 ‘동과'하고), 또 영어로 표현된 진술이나 질문 동등에 대하여 역시 영어 로 표현된 보기 좋은 답변을 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지만 감각기관이나 (전기타자기와 정속되어 있는 부분 외의 감각기관) 동력기관(그 전기타 자기륭 제외한)은 일체 가지고 있지 않다고 가정해 보자. (내가 이해하 기로는 듀링은 감각기관이나 동력기관을 가침이 의식이나 지능의 소유 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라고 가정하지는 않았다.) 그 기계가 전기로 된 눈이나 귀 동을 가지고 있지 않음은 뭉론 모방놀이를 할 수 있거나 감각기관에 들어오는 것들을 동합시킬 수 있거나 또는 어떤 신체를 조

정할 수 있는 프로그램 상의 아무런 준비도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상상 해 보자. 그러한 기계에 대하여 우리는 과연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는 가? 이러한 기계가 지시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됭 은 분명한 것 갇다. 그 기계가 예컨대 뉴잉굳랜드의 풍경에 대하여 아 름다운 말로 지껄일 수 있음은 사실이나 사과, 사과나무, 산, 소, 둘 동을 인식할 수는 없다. 그 기계는 주어진 문장에 대답하여 다른 문장을 만들어내게 되어 있 는두는는.. 데 짓기것 .. 이계거그..다 는렇리... 게 를 .설 . 이 .혹산영. .러. 원출 .한이.. 히된 . 세기..계문 . 계계 ..속장 .를가.. 할은 . 두없..그것. 어. 이 개. .져어다. . .느만 .버 . 들 .그린것. 어 . 다도 . 기 서.계사할. 로. 가지실 . 라세모..사 도방계..과 놀와.에서 .이는 . 로 . 관 를하전..하 연게.여바 . 관보한..말 련로다..한 이 면.다만 . 고드그없. 해서 그것아 바로 사실세계의 사과를 지시한다고 할 수 없음은 개미가 모래 위에 우연히 그린 처칠의 그림이 바로 처칠 자신을 지시한다고 할 수 없음과 마찬가지 이 다. 왜 기계도 지시를 할 수 있고 의미를 가지고 있고 또 지능도 가지고 있는 듯한 환상이 생기는가 하면 사과, 교회의 뾰족탑 동동에 관한 기 계의 말도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표상의 관습에 비추어 받아들여지 기 때문이다. 개미가 실지로 처칠의 모양을 그렀다는 환상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과나 들판 같은 것을 지각할 둘수의 있 고말 은취 급말.이 이. 나아. 매닌. 매사도과 할와 수들 판있에다 . 밀사접과히나 연 들관판되에어 대있하다.여 사하과는에 우 리대 한 경험에 입각하여 ‘나는 사과를 본다’와 같은 발언을 할 수 있게 해주 는 ‘언어유입규칙 lang ua g e entr y rules’ 과 언어의 형 태로 표현된 결정 (‘나는 사과를 몇 개 사려고 한다')에 근거하여 말하는 행위 이외의 다 른 행위를 유발시키는 ‘언어방출규칙 lang u age exit rules’ 이 있는데 만 약 이 두 규칙 중 어느 하나만이라도 없다면 문제의 기계가 수행하는 대화(또는 서로 모방게임을 하는 두 개의 기계의 경우에는 두 기계간의 대화)는 단순한 문장론적인 놀이 이상의 것일 수 없다. 그 문장의 놀이 가 지적인 대화와 분명 유사하긴 하지만 그것은 개미가 모래 위에 남긴 모양이 어떤 실재물의 그립과 유사한 것과 다를 바 없다. 개미 예의 경우 설혹 윈스턴 처칠이 생존한 적이 없는 인물일지라도 그 개미는 동일한 그림을 그렀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기계

의 경우에는 이와 비슷한 말을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만약 사과, 나 무, 들판 등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아마도 그 기계의 프로그램을 짜는 사람들아 사과, 나무 등이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짠 프로그램과 동일한 프로그램을 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계는 사과, 나무, 들판 동을 지각하지 못하지만 기계의 제작자들은 그러한 것들을 지각하 고 있다. 기계와 실재세계의 사울돌간에는 기계제작자의 지각경험과 지 식에 의하여 매개되는 어떤 인과적인 연관성은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희미한 연관성이 있다고 해서 기계에도 지시행위가 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다. 실재세계의 사물들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그 기 계가 존재할 수 있음이 상상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을 듯하지만 논 리적으로는 가능할 뿐더러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 기계가 사과, 들판, 나무 동과 갇은 사물의 지속적 인 존재에 대해서는 전연 무감각하다는 접이다. 모든 사물들이 사라져 버린다 하더라도 기계는 어느 때와 마찬 가지로 계속 잡담을 늘어놓을 수 있다. 기계가 지시행위를 할 수 없다 고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의 핵심은 듀링검사로서는 모방놀이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기계를 배제시길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모방놀이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기계는 분명히 마치 축음기와 도 갇이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는다는 접이다. 통 속의 두뇌 再論 가상의 그 ‘동 속의 두뇌'와 위에서 소개한 기계를 비교해 보자. 양자 사이에는 분명히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동 속의 두뇌는 감각기관을 가 지고 있지 않다. 대신에 감각기관에 대한 선비는 갖추고 있다. 죽 받아 돌이는 말초신경 조칙과 이 말초신경 조직으로부터 들어온 것들이 있으 며 이 렇게 들어온 것들은 우리 두뇌의 프로그램에서와 마찬가지 이고 동 속의 두뇌가 가진 ‘프로그램’에 나타나게 된다. 통 속의 두뇌는 우뇌일 뿐더러 기등운 가친 두뇌로서 실재세계의 두뇌를 웅칙이는 규칙과 마찬 가지의 규칙에 의거하여 작용한다. 그러기 때문에 통 속의 두뇌에는 의 식이나 지능이 없다고 한다면 잘못된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동 속의 두뇌가 의식과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 사실이 바로 동 속의 두뇌도 지시기능을 가진다는 점을 뜻할 수는 없다. 우리가 현재

관심을 갖고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갇다. 죽 통 속의 두뇌들이 내뱅는 말 들, 예컨대 ‘나무'라는 말이 정말 실지의 나우를 지시하는가? 더 일반 적으로 말하여 동속의 두뇌들도 (자동기계에 의하여 생성된 이미지 속 의 대상과는 반대되는) 회척 대상을 지시할 수 있는가 ? 자동기계가 일종의 우주적인 사건으로 극히 우연하게 생겨났다고(또 는 있어 왔다고) 가칭해 보자. 이와 갇은 가상의 세계에서는 그 자동기 계를 설계하고 만들어낸 지적인 존재는 없다고 가정된다. 이 장의 서두 에서 이미 말하였다시피 사실상 우리는 감각기능을 가진(아무리 그것이 미소한 것일지라도) 모든 생물체는 통 속에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동 속의 두뇌가 사용하는 ‘ 나무'라는 ;갈과 실재하는 나무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 기 때문이다. 실재의 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동 속의 두뇌는 ‘나무'라는 말을 사용할 것이고 나무에 대한 생각과 이미지도 가질 것이 우다. 리.. 의.나 무세에계 에대 한있 는두 뇌나 무속의를 표이상미해지 와주 는두 뇌이가미 지사와용 하말는 등‘과나 무질'라적는으 로말는은 동일하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다시피 (다시 개미의 경우를 생각해 보 라) 어떤 것이 실재의 대상(윈스턴 처칠 또는 나무)을 표상해 주는 어 떤 것과 질적으로 유사하다고 하여 바로 그것이 무엇을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다 . 요컨대 통 속의 두뇌가 ‘내 앞에 나무가 한그루 있다’고 생 각할 때 그것이 실지로 생각하는 것은 실재하는 나우가 아니다. 왜냐하 면 그 두뇌가 생각하는 ‘나무'가 사실적인 나무를 표상한다고 간주할 아 무런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론이 너무 성급한 결론이라고 여겨지면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말이란 설혹 그것이 실재세계에 있는 나우에 대한 말과 동일하게 배열되었음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실재세계의 나 무를 지시한다고 볼 수 없다는 접은 이미 지적하였다. 두뇌의 언어행위 가 일정한 규칙과 일정한 성향에 따라 행해지도록 ‘프로그램’을 짠다 하 더라도, 그리하여 말과 말 사이에 또는 ‘언어적' 암시와 ‘언어적' 반옹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설정된다 하더라도 그 프로그램이 필연적으로 나 무를 지시하게 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두뇌가 만약 동 밖에 실재하 는 나무를 생각하고 지시하고 표상한다면 그것은 ‘프로그램’이 비언어격 입력과 출력에 언어체계가 연결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 속의 두 뇌만 있는 세계에서는 정말로 그러한 비언어적 입력과 출력(방출하는

신경과 받아들이는 신경)이 있다. 그렇지안 이미 보았다시피 자동기계 에 의하여 산출된 ‘감각자료'는 우리가 보는 실재의 나무와 정확하게 유 사하다 하더라도 바로 그 나무를(또는 어떠한 외적인 사뭉도) 표상하지 는 않는다. 단순히 물감을 홈뿌린 것이 실재의 나무 그림이 아니면서도 나무의 그림과 유사할 수 있듯이 ‘감각자료'도 실재 나무의 이미지가 아 니면서도 ‘나무의 이미지’와 질적으로 동일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통 속의 두뇌의 경우 내재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나무 를 표상하지 않는 감 각자료에 언어가 결부되도록 프로그램이 짜여 있다면 도대체 외부적인 어떤 것을 지시하거나 표상하는 언어체계가 과연 두뇌에 형성될 수 있 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부칭적이다. 감각자료, 방 출 신경에 대한 작동신호, 그리고 입력으로서의 감각자료에 ‘언어유입규칙'에 의하여 연결되고 출 력으로서의 작동신호에는 ‘언어방출규칙 ' 에 의하여 연결된 언어 또는 개 념체계 동으로 이루어진 동 속의 두뇌가 가진 전체계는 개미의 그림과 윈스턴 처칠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나우와는 아무런 관련도 가 지지 않는다. 통 속의 두뇌가 가진 생각과 실재세계의 인간이 가진 생 각간에 질적인 유사성 qu alit at i ve s i m i lar ity(질적 동일성이라 해도 좋 다)이 있다고 해서 양자가 동일한 지시기능을 가지고 있다고는 결코 말 할 수 없음이 밝혀진 이상 통 속의 두뇌가 외적인 사물을 지시한다고 간주할 수 있는 어떠한 근거도 있을 수 없음은 자명해졌다. 논의의 전제 동 속에 든 두뇌둘은 왜 그들이 동 속에 든 두뇌둘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할 수 없는지에 대한 논의는 이제 주어진 셈이다. 남은 문제는 이 논 의를 좀더 분명하게 하고 그 구조를 좀더 면밀하게 살피는 일이다 . 이미 밝혔다시피 통 속에 든 두뇌가 (감각기능을 가진 모든 생명체는 몽 속에 든 두뇌인 세계에서) ‘내 앞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라고 생 각할 때 그의 이러한 생각이 실지로 나무를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앞 으로 고찰하겠지만 동 속의 두뇌가 이미지 속에서의 나무, 나무 경험을 일으키는 전기충격, 또는 그러한 전기충격을 일으키도록 한 프로그램의 여러 특칭 동을 지시할 수도 있다고 보는 이론들도 있다. 이러한 이론 둘이 지금까지 우리가 살핀 논의에서 배제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동

속의 영어로 사용되는 ‘나무'라는 말, 이미지 속에 있는 나무, 일정한 형태의 전기충격 등과 그 기계의 프로그램에 있는 일정한 특 징 사이에 는 매우 밀접한 인과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론에 의하면 ‘ 내 앞에 나무 한 그루가 있다’는 두뇌의 생각이 옳은 것이지 틀 린 것은 아 니다. 이러한 이론 중에 옳은 이론이 하나 있다고 가정하고 만약 통 속 에 영어에서 ‘나무'라는 말이 지시하는 것이 있고 ‘앞에'라는 말도 지시 하는 바가 있다면 ‘ 내 앞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는 동 속 말의 진위 를 결정할 수 있는 조건도 주어질 수 있다. 죽 이미지 속의 나무가 이 미지 속의 ‘나'의 ‘ 앞에 ' 있다는 것, 그러한 경험을 야기시키는 전기충격 이 그 자동기계에서 나온다는 것, 또는 ‘누구 앞에 있는 나무'라는 경험 을 일으킨다고 생각되는 기계의 어떤 특징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 등이 그러한 진리조건에 해당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조건은 분명히 이행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동일한 논법에 의하여 '통’이라는 말은 동 속 영어로 이미지 속의 통 또는 그와 관련된 어떤 것(전기충격이나 프로그램 상의 어떤 특징)을 지시하지 실재의 동을 지시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통 속 영어로 ‘ 동'이라는 말의 사용은 실재의 동과 아무런 인과관계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두뇌둘 이 들어앉을, 적어도 한 개의 특수한 통은 있어 야 할 것이니 이러한 의미에서는 실재의 동과 일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 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동, 죽 두뇌가 들어앉을 동이 만약 없다면 통 속의 두뇌둘은 '동'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 수나 통이 와사 같이의은 관관계계는이 지통 ‘속통 ’영이어라는로 개된.별 .모적.든인. 말말의의 사사용용과과 그실 재하 나통의과 의득 관계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영양애'도 이미지 속의 액 또는 그와 관련 된 어떤 것을 지시할 뿐이다. 따라서 문제의 ‘가능세계’가 정말 현실세 계라로는 되말어로 우의리미가하 는실 지바로는 우동 리속가의 이두미뇌지라 속한의다 면동 에‘ 우들.리 어.가 있통. 는 .속 두의 뇌두라뇌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지 속의 통에 돈 두뇌가 아니라는 점 도 우리는 동 속의 두뇌라는 가정의 일부를 차지한다. (다시 말하여 우 리가 지금 ‘환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우리는 통 속의 두뇌라는 사실 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동 속의 두뇌라 한다면 ‘우리는 동 속 의 두뇌이다’라는 문장은 거짓이다. 따라서 그 문장은(필연적으로) 거 짓이다.

통 속의 두뇌에 관한 가능적인 이야기가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라 고 생각함은 두 가지 찰못에서 기인하다. 죽 뭉리적 가능성 ph y s ic a l p oss i b ility을 지나치게 심각히 받아들이는 찰못이 그 첫째요, 두번째 찰못은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마술적 지시이론, 죽 정신적인 표상은 필연적으로 어떤 외적인 것을 지시한다고 보는 이론에 있다. 동 속에 들어 있는 두뇌만 존재하는 '물질적으로 가능한 세계’가 있다 는 말은 뭉리적 법칙과 양립될 수 있는 사태 a sta t e of a ff a i rs 에 대한 기문술화 전de동sc에r i p(t1i7 o 세n 기이 있이래다)는 물.것리. .학외 을에 형또이 무상엇학을에 의대미치하시겠키는고가 ?정 밀우과리학의만 이 ‘진정하고 궁극적인 우주의 알맹이’를 기술할 수 있다고 보는 경향아 있돗이 이로부터 나온 직접적인 결과로서 '물리적 가능성’을 정말로 현 실화될 수 있는 것을 가늠하는 시금석으로 여기는 경향도 있다. 이러한 경향을 쫓는 견해에 의하면 진리란 물리적 진리, 가능성이란 물리적 가 능성, 그리고 필연성이란 물리적 필연성을 말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안해낸 예에서 보았다시피 그러한 견해는 잘못된 견해이다. 우리가 단순히 동 속의 두뇌일 뿐인 ‘물리적 가능세계’가 있다고 해서 바로 이 것이 우리가 정말 동 속의 두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 는다. 우리가 통 속의 두뇌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시키는 작업 은 따라서 물리학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학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 그들의 칙업적인 소리를 드높이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 국소화시키고 자 하는 몇몇 철학자들은(대표적인 예는 20 세기 영미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래, 당신이 지금 밝힌 것은, 물리적으로 가능해 보이는 것 이 사실 개념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이야. 그런데 그게 무슨 대수로 운 일이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관인. 한나.활 의 동탐 . 논을구. 의가 단가 철순 학히‘개적 념' 적개활인념동’적 의인논 ’의전 진임부리은인의 두것탐말처구럼할로 여여만겨지 생지가각기 없 한다쉽다.다 면.그 러우말. 의나리. 가의철. 학미지.적에금. a까b지우ou 리t,논 가의무 해지엇 금을온까 표지목• 상 적• 다하은• 루고 • 어말 re 의 p온 r e의 se문미n t제를i n는 g ,캐 -무또보 . 엇 자.지 에는. 시 대하것하만는여은 r e f생결e r각코ri하n 고g아 t니동h다동i.의 n k i n활 g 동에 대한 선행조건p recond iti on 들이 무엇일까 하는 접이다. 우리는 말 이나 어구의 의미를 캐냄으로써가 아니라 (예컨데 언어학자들은 그렇게

할 것이다) 선험적으로 추. 리. 함. 으. 로. 써. reasonin g a pr io r i© 그러한 선행 조건들을 찾아보려고 하였다. 우리의 이러한 노력은 옛날의 ‘철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왜냐하면 우리는 마술적인 지시이론이 선험적으로 a pri o r i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일정한 일반적인 전제를 합가.정리.하적.거으. .로나 또가는능 할매지우를 폭탐넓구은한 다이는론적 의 미가에정서을 전이루제어로졌 다하.였 을이 러때 한무 엇탐이구 과정은 ‘경험적인’ 것도 ‘선험적인’ 것도 아니고 양 요소를 모두 포괄하 고 있다. 나의 탐구과정이 오류에 빠질 수도 있고 또 ‘경험적'이라고 불 리워질 수도 있는 가정들(이를테면 인간의 마온은 감각에 의하여 제공 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결코 외적인 것에 접근할 수 없다는 가정)에 의 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칸트의 소위 ‘선험적인 tra nscendenta l ' 탐구 와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다시 말하거니 와 나의 탐구는 지시와 사고의 선행조건들, 죽 경험적인 가정들과 전적 으로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칸트가 주장하였듯이) 우리 마음의 본성 자체에 부착되어 있는 선행조건들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아다.

© 'a p r i or i’라는 말이 ‘선천적'이라 번역되기도 하고 ‘선협칙'이라 번역되기도 하는데 양 반역이 모두 걱합한 것이라 보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진자보다는 후자가 원뜻에 조금 더 가깝다고 생각되기에 후자운 대하였다. 그냥 '아프리오리’라고 표기하자는 안도 있 지안 그렇게 표기한다면 번역기술상의 문재(예컨대 ‘a p r i o rity’는 번역불가능하다) 때 문에 채택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나 ‘선험적'으로 번역하는 데에도 문제는 따른다. 칸트의 용어 't ranscenden t al' 도 '선험적'으로 번역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천학에서 'a p r i or i'와 'tr anscenden t al’ 이라는 두 말은 서로 밀정히 연관되어 있다. 칸트에 있어 서 ‘t ranscenden t al’ 이라는 말은 경험운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나타내는 뜻도 있지만 인식에 있어서 ‘a p r i or i'한 요소윤 지칙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역자는 양자 윤 모두 '선험적'으로 번역하기로 하고 양자욥 구별하기 위해선 원어릅 병기하도옥 하 였다.

나의 논의가 전제하고 있는 것 중에서 적어도 하나는 분명한 것이다. 죽 마술적 지시이론은 뭉리적 표상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표상에 있어서 도 찰못된 이론이라는 전제가 그것이다. 또 하나 확실히 해두어야 할 전제는 예컨대 나무 또는 나무를 기술할 수 있는 어떤 것과 인과적인 상호작용이 없이는 결코 나무를 지시할 수 없다는 접이다 .3)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러한 전제들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전제들은 나의 논의의 대체적인 뼈대를 이루고 있으므로 이제 이 전제들을 좀더 상세히 검토

3) 만약 동 속의 두뇌가 미래의 나무와 인과관계문 맺운 것이라면 몽 속의 두뇌는 ‘미래의 어떤 시각에 내가 “나무”라고 지시할 어떤 것'이라고 기술합으로씨 지금 나무윤 지시하 는 데 성공할 수도 있웅결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상상적은혼 다우고 있는 겅우에 서는 동 속의 두뇌가 결코 몽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따라서 결코 나무와 갇은 외적 사 물과 인과관계를 맺을 수 없다.

해 보아야 하겠다. 표상과 그 지시물간의 필연적 연관성을 부인하는 근거 인간의 마음이 치 A.] 할 수 있는 능력, 즉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 장하는 철학자(가장 유명한 철학자로서 브렌타노를 둘 수 있다)도 있었 다는 점은 앞서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주장이 아무런 해결책도 마련 할 수 없다는 접도 물론 지적하였다. 그런데 나의 이러한 지적이 올바 른 것인가? 혹시 너무 성급한 지적은 아니었던가? 지향성을 주장한 철학차들이 우리가 표상을 전연 사용하지 않고서도 외적인 사물이나 외적인 성질을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시각적 감각자료와 개미의 ‘그림’을 비교함으로써 제시한 나의 논의는(물감이 흩어쳐 생긴 그리하여 우리의 ‘시각적인 나무의 이미지' 와 질적으로는 유사하지만 나무의 개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감각자료 륭 일으키는 나무의 ‘그림'예 관한 공상과학적 이야기를 동한 논의) 。: 1 미지가 필연적으로 무엇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접을 밝혔다. 필연 적으로 (외적 사물을) 지시하는 정신적 표상이 있다면 그러한 표상온 ;.~념의 성질을 띤 것이지 이마지의 성질을 떤 것은 아니다. 그러나 7.l 념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내성을 할 때 우리의 마음 속으로 흐르고 있는 '개념들’ 그 자 체를 지각하지는 않는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우리의 생각의 흐름을 중지시켜 보라, 그때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말, 이미지, 감각, 강정 갇 온 것뿐이다. 내가 내 생각을 밖으로 크게 이야기할 때 그 생각을 반복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상대방이 나의 말을 듣는 것처럼 나도 나의 말을 듣는다. 내가 믿고 있는 말을 발언할 때와 믿지 않는 말을 발언할 때는 확실히 서로 다르게 느껴진다. (그러나 때로는 초조할 때라든지 나 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청중 앞에 섰을 때 사실은 내가 진실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도 마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 리고 이해하고 있는 말을 발언할 때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발언할 때 도 역시 다르게 느껴진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러한 말들을 단순히 생각 만 하고(마음 속으로 말한다는 뜻에서) 따라서 이해하였다는 느낌만 가 지고 있다가 얼마 후에(또는 최면술에서 깨어난 후) 그의 마음에 방금 스쳐간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러한 말들을 가능케

한 언어마저도 이해하지 못했음을 뒤늦게야 알아차릴 수도 있을 것임은 별 어려웅 없이 상상될 수 있다. 이러한 일이 칭말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그러한 일을 전혀 상상 해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접이다. 그럼으로써 밝혀지는 것은 개념 이 말(또는 이미지, 감각 둥)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개념'이나 '생각'이 누구에게 있다 함은 그에게 어떤 정신적인 ‘표상’ 갇온 것이 있다고 하 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이다. 개념은 정신적 표상이 아니라 는 바로 그 결칭적인 이유로 해서 외적 대상을 지시하게 되어 있는 정 신적 표상과는 별개의 것이다 . 개념이란 일정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기 호와 같다. 이러한 기호는 공적인 것일 수도 사적인 것일 수도 있으며 정신적인 것일 수도 물질적안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호가 ‘정신적'인 것이고 ‘사적'인 것일 경우라도 기호의 사용을 떠난 기호 자 체는 개념이라 할 수 없다. 기호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이 접은 생각에 관한 매우 간단한 실험을 해 봉으로써 확인될 수 있 다.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느릅나무와 너도밤나무를 분간하지 못한다 고 하자. 그래도 내가 말한 ‘느릅나무'란 말의 지시물은 다른 사람이 말 한 '느릅나무'의 지시물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모든 너도밤나무 의 집합이 당신의 말과 나의 말에 공히 쓰인 다도밤나무'란 말의 외연 (다시 말하여 ‘너도밤나무'란 말을 술어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의 집 합)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느룹나무'가 지시하는 것과 ‘너도밤나무'가 지시하는 것과의 차이점이 정말 우리들이 가진 개념상의 차이 때문에 생긴 것일까? 느릅나무에 대한 나의 개념은 너도밤나무에 대한 나의 개념과 정확히 동일하다(말하기 좀 창피하지만). (이 점은 다시 말하여 지시물이 사회적으로 결칭되는 것이지 개인적으로는 결정되지 않음을 말해 준다. 당신과 나는 모두 양 나무를 분간할 수 있는 전문가에 복종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사용하는 말 중에 나오는 ‘느릅나무'라는 말의 지시물과 ‘너도밤나무’라는 말의 지시물간의 차이점은 나의 심리적 상태 의 어떤 차이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려는 용감한 사람이 있다 면 말들이 전도되어 사용되는 쌍동이 지구를 상상해 보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쌍동이 지구는 지구와 매우 비슷하다. ‘느듭나무'와 '너도 밤나무’라는 두 말이 서로 바뀌어 사용된다는 것 이외에는 지구와 정확 히 동일하다. 분자구조까지 나와 동일한(두 개의 넥타이가 ‘동일하다’고

할 때와 같은 뜻에서) 닮은꼴의 인..간 Do pp el g an g er 이 쌍동이 지구에 산다고 가정해 보자. 이원론자들은 이 경우 그 닮은꼴의 인간이 나와 동일한 생각, 동일한 감각, 동일한 성향 등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의 심리적 상태도 나의 심리적 상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느릅나무'는 너도밤나무를, 그리고 내가 말하는 ‘느릅나무'는 느릅나무를 지 시 한다. (마찬가지 로 만약 쌍동이 지 구에서 사용되는 ‘물'이란 말이 H20 가 아니라 다른 액체, 예컨대 XYZ 룰 지칭한다면 그 말이 지시하는 바는 지구의 경우와 쌍동이 지구의 경 우가 서로 다르다.) 17 세기 이래로 지지되어 왔던 이설과는 반대로 의 이반 러리 속에 있은 것이 야니다. 개념을 가진다는 것은 이미지 (예컨대 나무의 이미지, 또는 문장이나 문장집합에 관한 ‘시각적' 또는 ‘청각적' 이미지까지도 포함하여)룰 가진 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떠한 체계의 이미지 도 임의로 가질 수 있지만 문장들을 상황에 적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응리온 가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갖가지 이미지들 을 마음대로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면전에 놓인 나무를 보고 누군 가가 ‘나무룹 지적해 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해할 수도 있다. 마땅히 해야 할 것에 관한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무엇을 실 지로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일정한 방식으로 행 동할 수 있는 능력이 따라붙지 않는 이미지는 단순한 그럼에 붕과하며 그 그립에 맞추어 행동한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이 가질 수도 안 가질 수도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무를 지적해 보시오'라고 말 한 후에 一―·이 말은 이미지만 가지고 있는 사람에겐 무의미한 소리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데 一一;그 사람이 나무를 지적하게 됨이 논리적으로 는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나무를 지적하기 위해서는 어 떻게 해야 할지를 모를 것이며 ‘나무를 지적한다’는 말조차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일정한 문장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의 있고 없음이 완벽한 개념 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를 판가름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 말은 쉽게 약화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연언어적인 말들로 구성되지 않고 다른 요소들로 구성된 상칭체계도 문장 대신으로 사용될 수 있겠고 또 이미지나 그와 비슷한 형태의 내적 현상 갇은 정신현상도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러한 것들도 자

연언어의 문장과 동일하게 사용되려면 자연언어의 문장과 동일한 복잡 성, 동일한 결합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접이다. 왜냐하면 어떤 구체적이 고 개별적인 현상-이를테면 푸른 섬광 갇온 것 __」 이 어떤 수학자 가 소수정 리 the Prim e Nwnber Theorem 를 완전히 증명할 수 있는 내 적인 동찰을 갖는 데 이바지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 수학자가 그가 받은 ‘푸른 섬광’을 여러 단계로 분할하고 분할된 것들 서로간의 논리적 연관 성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위와 같이 말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거짓이 될 것이다.) 어떠한 종류의 내적 현상일지라 도 그것을 생각이 요강된 것으로 집주한다 할지라도 앞서 제시된 것과 정확하게 동일한 논법에 의해 이해를 구성하는 것은 그러한 현상 자체 가 아니라 그 현상을 바론 상황에서 바르게 적용시키는 사유자의 능력 이라는 접이 밝혀질 것이다. 위의 논의는 『철학적 탐구 Phil o sop hi c a l InvesHg a tio ns 』에 나오는 비 트겐슈타인의 논의 를 매우 간략히 줄인 것이다. 이 논의가 옳다면 사고 룰 소위 ‘현상학적' 탐구에 의하여 이해하려는 시도는 근본적으로 오도 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상학자들은 그들이 기술하고자 하는 것은 사고의 내적 표현일 뿐이라는 접, 그리고 그 표현에 대한 이 해 _一-자신의 생각에 대한 자신의 이해 __- 는 발생되는 현상이 아니 라 일종의 흥리이라는 점을 간과하였기 때문이다. 。: 1 -a,l l 의 문제를 밝히 는 데에 현상학적 접근방법 이 소용없음은 일본어로 생각하는 체하는 사 람의 예에서도 이미 밝혀졌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정말 이해할 때, 오 사칙 실그은때 에거만짓인 어데떤) 내그적 성인질 성은질 이이 해마와음의 속상.에관. 관.일.계어 를난 다맺 음하으더로라도써(만이 생것길은 것이고 일본말을 아는 체하는 그 사람이 사실은 일본말을 한 마디도 이 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러한 성질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내면적 독백'을 전혀 가지지 않은 사람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은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지만 그리고 주어진 주제 에 관하여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장황하 게 늘어놓을 수 있지만 밖으로 크게 말하지 않을 때는 생각도 하지 않 울 것이다. 밖으로 소리내어 말하지 않는 경우에는 그의 주위에서 얻어 지는 동상적인 감각인상과 일반적인 ‘이해의 느낌' 이외에는 ‘그의 머리 속에 스쳐가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타자를- 친다거나 상접에 물건을 사러 간다거나 할 때에도 그는 내적인 ‘ 생각의 흐름'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분명히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고 사적인 행위라고 불리울 수 있다. 누군가가 ‘자네 지금 무얼하나?'라고 물었을 때도 앞뒤가 툴리지 않는 대답을 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사람도 있을 수 있음은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그가 밖으 로 소리내어 말할 때를 제외하고는 어떤 생각도 가지지 못한다고 해서 그가 의식도 가지고 있지 않고 록앤롤 음악을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둥둥의 이야기도 할 수 없다고 주처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 라. 이로부터 귀결되는 접은 다음과 같다. (a) 어떠한 정신현상일지라도 ―이미지나 좀더 ‘추상적인' 정신적 현상이나 성질 _―-그것이 이해 롤 구성한다고 할 수 없다. (b) 어떠한 정신현상일지라도 그것이 이해 하떠는한 종데류에 의필 정수.신적.적.인 대것상은과 아도니 다동.일 시특될히 수강 조없되다어는야 점 이할다 .접 은왜 개냐념하면은 어이 미 밝혔다시피 정신적 대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되돌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였을 때 그것이 무엇이든 적합한 말(따라서 완벽 한 개념)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개념을 전혀 가지고 있 지 않는 사람에게는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마술적 지시이론에 대한 비판의 문제(비트겐슈타인도 이 문제로 고심한 바 있다)로 다시 돌아가자. 여기서 두 가지 결론을 얻었는데 첫 째는 우리가 내성에 의하여 발견해낼 수 있는 ‘정신적 대상'_-말, 이 미지, 느낌 등등――-은 마치 개미의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결코 어떠한 것도 지시하지 않는다는 접이요, 두번째 결론은 특수한 정신적 대상, 죽 ‘개념'을 인위적으로 설정하여 그것이 마치 지시물과 필연적으로 연 결되어 있고 그것을 찾아내려면 오직 매우 숙련된 현상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논리적인 실수를 저지른다는 접이다. 왜냐하면 개념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동리 ab ility이지 나타나는 현상 갇은 것 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외적 대상을 지시하는 정신적 표상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은 개념적 혼돈에서 기인한 찰못된 과학, 잘못된 현상학이다.

제 2 장 지시의 문제 동 속의 두뇌에 관한 가설이 결국 앞뒤가 맞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었 는데 이 사실을 놀랍게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평소 우리가 말의 의미나 말이 지시하는 바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머• 리• 내• 부• 에• 서• 일• 어• 나• 는• 것• 이 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 아차리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나, 여기, 지금 같은 말들이 그 비근한 반례를 제공해 준다• ‘나는 오늘 출근이 늦었다' 고 생각할 때의 나의 정신 상태는 헨리의 정신 상태와 같을 수 있다. (헨리와 내가 쌍동이라고 상상해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 생각 속 에 일어나는 ‘나'라는 말의 개별자t oken 는 나를 지시하고 헨리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나'라는 말의 개별자는 헨리를 가리킨다. 또 내가 ‘나는 오늘 출근이 눗었다’고 화요일에 생각할 경우와 수요일에 생각할 경우 그 정신 상태는 동일할 터이지만 시제동사가 가리키는 시간은 두 경 우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자연종 natu ral k i nd 울 가리키는 말의 경우 1) 적어도 나는 그러한 생각운 하도록 한 심리적 과정에 포합된 매개변순홉-.이 동일가운 가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동일한 정신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인 나의 정 신 상태는 분명 다르다. 왜냐하면 화요일에·뉵 '온눈이 화요일이다’라고 믿지만 수요일 에는 그렇게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제적인 나의 칭·신· 상태가 변할 때마다 말 의 의미도 번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에 의하면 말이란 걸코 한번도 동일한 의미문 가질 수 없으며 따라서 말의 의미라고 ' 하는 개념 .자체가 파기되어야 할 것이다. 그뿐만 아 니라 나와 나의 닳온꼴 인간이 동일한 전체적 정신 상대에 있으면서도 ‘ 나'와 ‘지금 ' 이 라는 두 말이 지시하는 바는 서로 다운 수 있다. (쌍동이 지구에 있는 달력은 우리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도 반중이 되는데 이 경우는 좀더 미묘하다. 앞장에서 언급한 바 있는 그 쌍동이 지구에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가칭해 보자. (일종의 기적과도 갇은 우연적인 힘에 의하여 그들 이 우리와 유사하게 진보하였고 곧 언급될 차이점을 제외하고는 한 200 년 전에 사용되었던 영어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고 가정하자.) 그들 은 달돈 Dal t on 의 화학이나 닫돈 이후의 화학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 른다고 하자. 그리하여 특히 그들은 예컨대 ‘H20’ 와 같은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하자. 그리고 쌍동이 지구에 있는 모든 강과 호수들은 겉 으로 보면 물과 비슷하지만 사실은 H20 가 아닌 액체들로 가득 차 있 다고 상상해 보자. 그렇다면 쌍동이 지구에서 사용되는 ‘물’이라는 말은 물을 지시하지 않고 다른 엑체 (XYZ 라고 하자)를 지시하는 셈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쌍동이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 상태는 두 경우 에 있어서의 지시의 차이점을 설명할 수 있는 지구인 (1750 년 경의)들의 정신 상태와 다르지 않다. 두 경우 지시가 다른 이유는 단순히 지시되 는 것 s t u ff이 다르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구체적인 상황을 떠난 칭신 상태 그 자체로서는 지시가 고정되지 않는다.

2) 나의 책 Mi nd , Langu age, and Reali ty (Phil os op hic a l Pap ers, vol. l), Cambrid g e Univ e rsit y Press, 1975 에 나오는 논문 ‘The Meanin g of Mean ing에 이 문계 가 좀 더 상세히 개진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갇온 예에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철학자들도 있다. 이들 은 만약 그러한 쌍동이 지구 갇은 혹성이 발견된다면 ‘두 종류의 뭄이 있다’라고 말해야지 우리가 사용하는 ‘물’이라는 말은 쌍동이 지구에 있 는 그 액체를 지시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한친다고 주장한다. 또 이들 의 주장에 의하면 쌍동이 지구에 있는 강과 호수가 물과 비슷하지만 H20 는 아닌 다른 액체로 되어 있다면 ‘모든 물은 H20 이다’는 진술은 거짓말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와 갇온 반대를 피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예를 약간 수정하기만 하 면 된다. 우선 쌍동이 지구의 그 액체가 지구의 물과 그 정도로 유사해 야 할 필요는 없다. 그 액체가 실지로 80% 의 물과 20% 의 곡식에서 나 온 알콜로 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럽에도 불구하고 쌍동이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그 액체를 마시고 취하기는 커녕 신체의 화학적인 구조 상 그 액체와 H20 간의 맛의 차이조차도 모르게 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한 액체는 물과 여러 측면에서 다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

도 쌍동이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그러한 차이점을 알지 못하고 따라서 1750 년 경 지구에 살았던 사람과 정확하게 동일한 정신 상태를 가질 것 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그 쌍동이 지구의 ‘물'과 지구의 물은 맛이 다르 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노응에게는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두 물질을 꿇였을 때 나타나는 양상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영어를 말 하는 사람일지라도 정확하게 어느 때 물이 끓으며, ‘몽'이란 말에 비교 적 표준적인 개념내용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정확하게 어떤 일들이 일어 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해 본 적이 있겠는가? 다음과 갇은 반대가 또 있을 수도 있다. 죽 쌍동이 지구에 '물’에 관 하여 많은 것을(예컨대 그것이 두 개의 액체가 혼합되었다는 사실) 아 는 전문가들이 있을 수 있으며 반대로 지구에 사는 우리는 물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1750 년에 우리는 물을 믿지 않았다. ) 따라서 쌍동이 지구에서 영어로 말하는 자들의 김만격 정신 상태는 지 구에서 (1 750 년에) 영어로 말하는 사람들의 집단적 정신 상태와 다르 다. 한 개인이 사용하는 용어의 지시는 그 개인의 정신 상태에 의하여 고정되지 않을지는 몰라도 어떤 언어집단의 견제 구성원이 가진 총제적 정신 상태는 그 용어의 지시를 고정시킬 수 있다. 이와 갇은 반대 견해가 가지고 있는 한 가지 난점은 지구에서든 또는 쌍동이 지구에서든 1750 년에 화학이 과연 물의 성분을 분석할 정도로까 지 발전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물·'이라는 용어가 화학이 발전하기 이전의 지구에서 오늘날 통용되는 바와 동일한 의미와 동일한 지시를 갖는다면, 그리고 또 그것이 화학이 발전하기 이전의 쌍동이 지 구에서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바와 동일한 의미, 동일한 지시를 갖는다 면 바로 그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그 때에도 지구인들의 집단적 정신 상태가 ‘물'이라는 말의 외연을 고정시키는 데에 관련된 모든 접에서 쌍 동이 지구인들의 집단적 정신 상태와 홍;J하였지만 그 말이 지시하는 바는 여전히 서로 달랐으며 따라서 집단적인 정신 상태에 의해서도 지 시는 고정되지 않는다고 반박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화학이 발전함에 따 라 지시도 변한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그 용어가 두 가지 종류의 뭉 을 모두 지시하는 데 사홍되다가 (우리에게는 맛의 차이가 나는데도 붕 구하고) 화학이 발전한 후에는 다른 종류만 지시한다고 해야 할 것인 가? 만약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가 지시하는 바 또는 우리가 사용하는 용

어가 지시하는 바가 그들 또는 우리가 화학을 발전시킨 후에 (액체를 증류시킨다거나 물과 알콜이 혼합되어 있다는 접둘을 말할 수 있는 정 도로) 변한다면 거의 모든 과학적 발견은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들의 지 시룹 변경시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접에서는 울(과학 이전 적 의미로서의)이 H20 라는 접을 우리가 방경한 것이 아니라 초척한 sti pu late 것이 된다. 이것은 분명 찰못된 견해이다. 우리에게 물이 의 미하는 바는 그 말에 의하여 선별된 어떤 것으로서 그것이 무엇이든간 에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물이 H20 란 것을 우리가 발견하였다. 또 쌍 동이 지구인에게 ‘뭉'이 의미하는 바는 그 말에 의하여 선별된, 그들 주 위의 어떤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물’이 두 개의 엑체가 혼합된 것이 라는 사실을 그들의 전문가들이 발견해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전문가들이 ‘물은 H20 이다' ‘물은 두가지 액체의 혼합물 아다’ 동과 갇은 발견을 하였을 때 ‘울'이라는 말의 희급]가 (지구 언어 에서든 쌍동이지구 언어에서든) 변하지 않는다고 동의한다면, 또는 그 말의 일상적인 의미와 지시가 변하지 않는다고 동의한다면 (물론 그러 한 발견의 결과로 그 말의 전문적인 사용은 더 발전되겠지만), 그리하 여 지구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물’이라는 말의 의미와 지시에 알콜 과 물의 혼합물이 라는 뜻이 포함되 지 않는다고 동의 한다면 전문가들의 지식으로는 지구에서의 ‘물’의 의미와 쌍동아 지구에서의 ‘물’의 의미가 시가.상지.의.는 회차너이장접회도 물차론이 점설은명 될설 명수될 없수다 .없 다왜고냐 하말면하 지물 이않 을또 수다 른없 다혼.합 물치 을 지시하고 전문가들의 지식은 첫번째 쌍동이 지구의 전문가들이 가지 고 있는 지식과 동일한 또 다른 제 2 의 쌍동이 지구를 상상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는 쌍동이 지구와 지구에 모두 전문가들이 없다고도 가상 상동할일 수하 다있 기할 지때라문도이다 서. 로‘ 물다’른이 라것는 을말 은지. 시.두한 다혹.성 의사 람검들단의격 머정리신 속상에태 일어나는 것이 용어의 지시를 고정시켜 주지는 않는다. 밀J .S. M ill의 말을 빌리면 용어의 외연을 고정시켜 주는 작업을 완수하는 것은 ‘실체 자체 the substa n ce it se lf'이 다. 정신 상태(개별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에 의해서는 지시가 고 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한 이상, 동 속의 두뇌둘이 외적 사물을 지 시할 수 없고(우리와 동일한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라서 그들을 동 속의 두뇌라고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는 사실온

이제 별로 놀라운 일이 못된다. 내포, 외연, 그리고 ‘관념의 세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지시가 단순히 우리의 정신 상태에 의하여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고정되는지 하는 문제를 식시하기 위해 서는 몇 가지 전문적인 용어들을 사용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논리학에서는 어떤 용어가 참되게 적용되는 사물들의 집합을 그 용어의 회연 ex t ens i on 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고양이'라는 말의 외연은 고양이 둘의 집합이다. 만약 하나의 용어가 한 개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면 (사 실은 한 개의 말이 아니라 두 개의 말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 말의 밑 부분에 숫자 를 붙여서 사용한다. 이를테면 ‘토끼 1’ 의 외연은 토 끼들의 집합이고 ‘토끼 2’ 의 외연은 검장이들의 집합이다. (엄밀히 말한다 면 자연 언어에서의 용어들의 외연은 그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항상 좀 막연하고 흐리다. 그러나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범위의 경계선상에 놓 여 있는 경우들은 일정한 방식으로 제거되었다고 가정하겠다.) 상이한 경우에 따라 상이한 사람을 지시하는 ‘나'와 같은 말은 외연을 가진 다기보다 외 연함수 ex t ens i on- fu nc ti on 를 가진다. 외 연함수란 각각 의 사용 맥락에 따라서 외연을 결칭하는 함수를 말한다. ‘나'라는 말의 경우에는 외연함수가 비교적 간단하다. ‘나'의 외연함수는 임의의 화자 x 에 대하여 오칙 X 로만 구성된 집합을 그 값으로 가지는 함수 f (x) 이 다. 맥락(이 경우에서는 화자)을 기술하는 데 합당하게 사용되는 매개 변수들을 그 영역으로 가지는 독립변수 ‘X’ 는 의미론에서 지표기호 i ndex 라고 일컬어진다. 의미론이 충분히 다루어지려면 시간, 논중적으 로 지시된 것들, 그리고 그 외 다른 맥락의 특칭들에 대한 지표기호도 필요하다(상세한 것은 여기에서 생략하겠다). ‘고양이’의 외연을 이루는 집합은 가능한 상황 또는 ‘가능세계’가 달라 짐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예컨대 고양이가 존재하지 않는 가능세계 M 에서는 ‘고양이’의 외연은 공집합이다. 내 고양이 엘자가 만약 새끼를 낳았다면(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고양이’의 외연에 실재세계에는 있지 않은 적어도 한 마리의 고양이가 포함된다. (엘자가 새끼를 낳은 각 가 능세계 M 에서 ‘고양이’의 외연은 실재세계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고 양이들을 포함한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

어떤 용어의 외연이 가능세계 M 에 따라 달라지는 방식은 함수를 사 용한다는 점에서 ‘나'의 외연이 말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방식과 동 일하다. 여러가지 다양한 사태 또는 가능적 세계사들을 나타내기 위하 여 ‘가능세계'라는 추상적 대상들로 구성된 집합을 가정한 다음 ‘고양이' 라는 말에 각각의 가능세계 M 에서 그 세계에서의 가능한 대상들, 죽 그 세계에서의 고양이들의 집합을 그 값으로 가지는 함수 /(M) 을 관련 시 킨 다. 이 와 같은 함수를 나는 몬테 규 Mon t a gu e 와 카르납 Carna p의 말을 따라 ‘고양이'라는 말의 내포 i n t ens i on3) 라고 부르겠다. 마찬가지로 이항술어 ‘건드린다'는 말의 내포는 임의의 가능세계 M 에서 서로를 건 드리는 가능적 대상들로 구성된 일련의 순서짝 ordered p a i r 둘을 그 값 으로 가지는 함수 /(M) 이 되겠다. 삼항술어의 경우 예컨대 ‘X 는 y와 z 의 사이에 있다’는 말의 경우에는 임의의 가능세계에서 x 가 y와 z 의 사 기에 있게 (x, y, z) 의 형태로 순서지어진 집합을 그 값으로 하는 함수 가 내포가 된다. 어떠한 세계에서든 말이 주어지는 맥락에 따라 외연이 결정되는 ‘나'와 같은 말의 내포는 맥락을 표시해 주는 지표기호와 가능 세계, 양자 모두를 독립변수로 가지는 좀더 복잡한 함수가 되겠다.

3) Monta gue , R., Formal Phil o sop hy , Yale Univ e rsity , 1974. 여기서 말하는 ‘i n te ns i on' 온 나의 논문 ‘Th e Meanin g of Mean ing'에서 논의된 바 있는 전봉걱인 의마로서의 i n t ens i on 과는 다르다.

내포가 하는 역할은 어떻게 외연이 각 가능세계에 따라 다르게 고정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따라서 내포는 우리의 관심의 대상인 어떤 말의 외연을 매우 완벽한 방식으로 대변해 준다. 왜냐하면 어떤 가능세계에서 무엇이 외연이 될지를 말해 주는 것이 내포이기 때문이 다. ‘내포'(이러한 의미로서의)가 의마 mean i n g와 동일시될 수 없는 이유 는 논리 적 으로 동치 인 log ica lly eq u iv a lent 임 의 의 두 말은 모든 가능세 계에서 동일한 외연, 따라서 동일한 내포를 가지게 되는데, 동일한 의 미를 가진다는 것과 논리적 또는 수학적으로 동치가 된다는 것을 구별 못하는 이론은 회ti. 1 에 관한 이론으로서는 적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육면체'라는 말과 ‘6 개의 정방형으로 된 다면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동치이다. 따라서 이 두 말의 내포는 동일하다. 어떠한 가능세계에서든 그 세계에 있는 칭육면체의 집합을 그 값으로 가지는 함수가 두 말의 내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말은 ~;1 상으로는 차이가 나며 만약

의미가 위에 언급한 함수와 동일시되면 그 차이접은 사라져 버릴 것이 다. 가능세계, 집합, 함수 등이 이 이론에 의하면 추상적인 정신의적 존 재로 간주되어야지 추상적인 존재들을 표상하거나 기술한 것과 혼동되 어서는 안된다는 접을 강조해야 하겠다. 프레게 Fre g e 는 어떤 표현의 의미 S i nn 는 마음에 의하여 어떤 식으로 든 ‘파악'될 수 있는 정신외적인 존재 또는 개념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러한 이론은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내포의 문제에는 도움을 줄 수 없다. 이미 밝혔다시피 우선 내포로서는 잡히지 않는 의미상의 차이점 둘이 있기 때문에 어떤 말을 이해한다는 것이 그 말에 어떤 내포를 관 련외적시인키 는존 일재과들 을같 을직. 접.수적. 없.으다.로. 지이각보할다 수더 중있는요,한 또접는은 이만와약 유우사리한가 정어신떤 역할을 할 수 있는(예컨대 ‘직관'할 수 있는) ‘제 6 의 감각'을 가지고 있 지 않다면 프레게가 말한 내포나 정신외적 존재에 대한 소위 ‘파악'은 어떤 식으로든지 표상에 의하여 매개되어야만 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접은 적어도 나에게는 내성적으로 분명한 것 갇다 . ) 그러나 표상이 어 떻게 우리로 하여금 마음 밖의 것을 지시할 수 있게끔 하는가 하는 것 이 우리가 지금 탐구하고 있는 문제이다. 마음의 외부에 있는 어떤 X 룹 ‘파악한다’는 개녕을 미리 가정함은 논점선취의 오류(l)를 범하는 격 이 된다.

O 논점선취의 오류란 예컨대 명계 P 가 참입운 밝히기 위한 논증이 P 운 미리 전제하고 있운 때 생기는 오류윤 말한다.

내가 누군가를 두고 그가 ‘탁자 위에 한 찬의 물이 있다고 믿는다’라 고 말할 때 나는 그가 옹을 지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 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미 지적하였다시피 물을 지시할 수 있으려 면 칙접 또는 간접으로 실재의 물 H20 과 접할 수 있어야 한다. ‘죤은 그의 앞에 한 잔의 물이 있다고 믿는다’는 진술은 죤의 머 리 속에 일어 나고 있는 것에 관한 진술만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죤이 처한 외적 상 황 또 죤과 그 상황과의 관계에 대한 진술이기도 하다. 죤이 만일 쌍동 이 지구에 사는 사람임이 밝혀진다면 죤이 ‘탁자 위에 한 잔의 물이 있 다’고 말함으로써 그가 믿게 되는 것은 뭉 H20 이 닥자 위에 있음이 아 니라 사실은 물과 곡식으로 만든 알콜로 구성된 한 잔의 액체가 탁자 위에 있음이 될 것이다.

훗설 Husserl 은 우리가 지시된 실재사물의 존재나 본성에 관해서는 할어넣. 떠는.때.한다 이b가r에a정c k도유e t 용i n하한 업지) 는방않 안방고을안 이머하었리나다 .속제 에안만서한약 일바우 어리있나가다는. ‘ 죤그것이것만 은을탁 자즉이 위야괄.에기 호 .하 한고속. 에자잔. 의 웅이 있다고 믿는다’고 말할 때 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 을 ‘괄호 속에 넣어 버린다'면 남는 것은 실재적인 사람이든 가능적인 사람이든 탁자 위에 한 잔의 뭉이 있다고 믿고 있는(‘괄호 속에 넣기 이전의' 일상적인 의미에서) 사람의 겅신격 강대일 뿐이다. 그리하여 만약 죤이 쌍동이 지 구에 살면서 울과 .:z. 혼합체 (죽 물과 알콜의 혼합 체)의 미각적 차이를 알 수 없다면 그는 실재적인 지구인이 ‘타자 위에 한 잔의 물이 있다'고 말할 때 가지는 정신적 상태와 동일한 정신적 상 태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그가 물이라고 지시하는 것이 하이 보〔탁웅자® 일위 에수 도한 잔있의다 는물 이사 실있에다도〕 는불 구괄하호 고속 에타 당넣하.어다...진 이믿때음 을우 리가는지 고그 가있 다고 말할 것이다. 사실상 괄호 속에 넣는다는 훗설의 방안을 사용하면 외부세계나 사유자의 정신 외부에 있는 것을 함축하는 일체의 것이 일 상적 인 믿음을 표현하는 어구에서 제거된다. 최근에 다니엘 데넷 Danie l Denne tt은 ‘관념의 세계 noti on al world’ 라 는 어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도 훗설의 ‘괄호 속에 넣는다’는 말과 연관성이 있다 .5) 한 사유자의 괄호 속에 넣어진 모든 믿음을 합친 것 이 데넷식으로 표현하자면 그 사유자의 ‘관념의 세계'를 기술한 것이 된 다. 그리하여 쌍동이 지구인들의 관념세계는 대체적으로 우리의 관념세 계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단지 그들이 사는 걸 x·사 의 장소가 우리의 그것과 다룰 뿐이다. 그리고 앞 장에서 말한 동 속의 우리들이 가진 관 념세계도 아주 미세한 데까지 우리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단지 통 속의 두뇌둘이 사용하는 용어들은 하나같아 외적 세계를 지시 하지 않는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전동적인 의미론에서는 어떤 사유자 가 사용하는 말의 내포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유자의 관념세계라고 여 겨진다(그리고 이러한 내포가 어떤 개별적인 가능세계 M 이 현실세계 4) Husserl, Ideas; General Intr o ducti on to Pure Phenomenology , Allen and Unwi n, 1969. (Orgi na lly ap pea red in 1913). 5) Dennett , D. 'Beyo nd Beli ef , ' in Though t and Obje c t, Andrew Woodfi el d (ed.), Oxfo r d Univ e rsit y Press. ® 위스키, 브랜드 등에 소오다수나 새앙윤 섞어 만든 술.

라는 사실에 바탕하여 그 말의 외연과 또 모든 문장의 진리치를 결정한 다). 이 전동적인 , 의미론이 옳지 못하다는 접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오늘날 왜 ‘의미'의 개념이 동일되지 않고 여러 가지 다은 개념 (예컨대 ‘ 내포', ‘관념세계' 동)으로 사용되는지에 대한 이유도 잘못된 의미론에 서 찾아질 수 있다. 말하자면 ‘의미'가 산산조각이 나고 만 셈이다. 이 조각들을 다시 주위모아 하나로 만드는 작업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 다다.면 만어.약떻. 게내 포확와정 되외는연가이? 관념세계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확칭되지 않는 기존의 언어해석관 우리의 언어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결정되는가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견해에 조작적 속박 op e rati on al cons t ra i n t과 이론적 속박 th eoreti ca l cons t ra i n t이라는 두 개념이 연관되어 있다. 최초의 조작적 속박은 비 교적 소박한 것이었다. 죽 어떤 문장(예컨대 ‘이 전선에 전기가 흐르고 있다')이 참일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일정한 검사 결과가 관찰되는 것(전량계의 바늘이 움직였다, 또는 현상론적으로 말하자면 전량계의 바늘의 움직임에 대한 시각인상을 내가 가졌다)이하고 추척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 이와 같은 종류의 소박한 조작주의를 옹호하는 사람 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이유는 첫째, 이론과 경험의 연결이 확 물적인 것이지 완벽한 상관관계로 정확하게 형식화될 수 없으며 (지금 전선에 전기가 호르고 있을지라도 전량계의 바늘이 움직이는 것을 방해 할 수 있는 사건이나 조건이 있을 확률은 적으나마 언제든지 있게 마련 계이다마)저, 도둘 째단,순 한이 론의.과마. 론.경적.험 의상 관관계관가계 가확 률아적니인라 관언계제라라도고 하수였정는될데 수 이있 관는 경험이론에 의존하고 있다는 접이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소박한 조작주 의에 의할 것 갇으면 어떤 것이 정말 금인지 아닌지를 검사하는 새로운 론방의법 이겁 고중도안될 그 때이마론다을 ‘금이'두의 고의 미있와는 지문시장도들 을변 화하.를나.씩 .겪 는검다사.함 으그로리써고 이이 루어진다(개별적 문장들의 조작적 의미가 이론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 몰 말해 준다). 더 최근에 나온 조작주의는 콰인이 말한 대로 ‘하나의 전체적인 체계로서 경험적 겁사에 부합되는' 것이 이론이라고 주장한 다.

그러나 우리는 조작적 속박이라는 개념을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반대 륭 국복하거나 통과할 수 있도록 좀 약화시킬 수 있다. 죽 '대부분의 경우 문장 S 는 경험적 조건 E 가 갖추어질 때 참이 된다'(또 ‘대부분의 경우 문장 S 는 E 가 갖추어질 때 7.1 것이 된다')는 형식에 의하여 인정 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도록 해석 (어떤 언어의 술어들에 내포를 부여 하과 는경 험것)간을의 제관한계할가 수확. 률있.다.적. 이 라이는와 생같각은이 제 한툴에을 잡의게하 여된 다문.장 의그 리참고 • 거이짓러 한 제한은 이론이 발전해 감에 따라 수정될 수 있다는 견해를 취할 수 도 있다. 즉 그러한 제한을 소박한 조작주의에서처럼 의미조작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인정될 수 있는 해석에 대한 시험적이고 임시적인 제한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브릿즈만이 ‘조작주의’ 를 선포하기 50 년 이전에 이미 이러한 견해 를 제시한) 퍼어스 Pe i rce 를 따라 이상적인 조작적 속박이란 것이 우리가 경험적 탐구를 해 감에 따라 접차적으로 접근해 가는 것이지 그냥 단순히 조작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취 할 수도 있다. 요컨대 합리적인 탐구자가 충분히 관찰하고 실험하고 추 리하였다면 일종의 ‘반성적 균형 refl ec ti ve e q u ili br i um' 의 상태에서 부 여할 속박이 조작적 속박이며 이에 의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대한 해석이 결정된다고 보는 견해를 취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여 주어진 일정한 시간에 우리가 받아들이는 속박은 합리적 평가 내지는 계산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이론과 경험의 연관성이 우리의 지식체계의 어느 국면 과도 마찬가지로 언제라도 변경될 수 있다는 콰인의 주장과 양립될 수 있다. 그러한 변경이 바로 ‘의미의 변경'이라고 보는 것은 아니다. 그것 은 우리가 이미 이야기해 온 바가 정말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려는 노력 일 수 있고 또 실지로 그러할 경우가 가끔 있다. 초기의 조작적 속박과 이론적 속박도 이 접은 알아차렸었는데 다만 부적철하게 알아차렀을 따 름이다. 조작적 속박에 의거하여 인정할 만한 해석의 영역을 제한하는 것(또 는 퍼어스의 이상적인 조작적 속박에 점차적으로 접근해 가는 것) 이외 에도 이론의 형식적 성질들을 가리키는 속박도 또한 가질 수 있다. ‘인 칭할 만한 해석을 함에 있어서 이러저러한 결과는 반드시 이러처러한 원인을 가침이 참인 것으로 판명되도록' 하는 속박이 그러한 예에 속한 다. 그러한 ‘이론적 속박'도 합리성 그 자체의 일부라고 칸트는 주장하

였다. 즉 칸트에 의하면 결정론의 원리가 발견된다기보다는 우리 스스 로 그러한 원리를 세계에 우과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속박은 분명 지나치게 강하다. 다시 말하여 결정론을 위와 갇이 생각하면 우리 의 전 지식체계가 지나치게 복잡하게 된다는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그 러나 이 속박도 마치 조작적 속박이 그러했듯이 약화될 수 있다. (예컨 대 한 이론의 다른 부분이 복잡해지는 정도가 지나치지 않는 범위내에 서 결정론을 유지하도록 요구할 수도 있을 것아다. 이러한 형태의 속박 은 우리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갇다.) 이론적 속박은 이론을 해석할 때라기보다는 이론을 수용할 때 가해지 는 속박이라고 주장되는 경우도 있다 . 그러나 전자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도록 쉽게 재해석될 수.'i. 있다. 그리하여 만약 어떤 저자가 ‘보수주 의’ 또는 ‘보존주의’의 속박을 이론의 수용에 관한 속박으로 서술한다면 (예컨대 ‘기존의 많은 믿음들을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관찰의 결과와도 일치되는 제 2 의 이론-문제의 이론과 똑같이 ‘단순한'-이 만약 있다면 그러한 믿음들을 포기하도록 요구하는 문제의 그 이론은 수용하 지 말라') 이러한 속박은 다음과 갇이 해석에 대한 속박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 죽 ‘인정될 수 있는 해석은 오랫동안 수용되어 왔던 문장들을 참(眞)으로 만드는 해석이다. 단 .::z. 해석 하에서 참이 되는 문장들로 이론을 구성함에 있어서 부당한 복잡성이나 조작적 속박의 과도한 변경 이 요구되는 경우는 제외하고’ 구체적인 관찰자료가 주어졌을 때 받아 들여질 수 있는 가설들에 어떤 선험적인 a pr io r i 순서 (‘단순성의 순 서', ‘현실화 가능성의 순서’라고 불리우는)를 우리가 부여하지 않는다 면 어떠한 귀납논리도 성립할 수 없다는 접은 널리 주장되어 왔다. (이 때 순서 그 자체가 상이한 실험, 상이한 관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인정될 수 있는 해석하에서 참이 되는 문장들의 집합은 동일한 관찰 또 는 실험의 결과를 낳는 다른 어떤 집합보다도 그 단순성의 순서에 있어 서 뒤져서는 안된다는 속박은 관찰의 결과와 불가양립적이 아닌 가설들 중에서 가장 단순한(또는 가장 ‘있을 법한') 가설만 수용해야 된다는 귀 납논리에서의 속박과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여러 종류의 이론적 속박둘이 과학철학의 문헌에 제시되어 왔다. ‘단순성’ 같은 인정된 문장들의 성질에 관한 속박도 있고 그러한 문장들이 인정되게끔 한 탐구의 역사에 관한 속박도 있다. 그러나 여기 서 그 상세한 대목에까지 주목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언어에 대한 인

정될 수 있는 해석 (용어에 대한 인정될 수 있는 내포 부여라는 뜻에서) 이 조작적 속박과 이론적 속박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주장이 관심을 끄 는 이유는 명백하다• 죽 누가 일정한 종류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 아 닌지는 마음이 판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떤 이론이 확률적인 것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종류의 것이든 어떤 종류의 조작적 속박에 의하여 어떤 경험 E 와 연결된 문장을 함축하거나 포함 하고 있다면 사유자는 그가 그 경험 E 를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관찰 함으로써 그 이론의 적용여부 를 할 수 있다. 이론을 검증하는 데 우리 가 사용하는 속박이 용어의 외연도 효한 경정하기 때문에 그 이론의 ‘적용’ 여부에 대한 평가는 동시에 그 이론의 진위에 대한 평가도 된다. 화자가 그러한 속박둘을 안다는 것은 용어들의 내포 를 안다는 것과 마 찬가지이므로 올바른 의미론이 파악된다면 세계에 관한 어떠한 이론이 제시되더라도 그 이론이 참이 되기 위해서는 세계가 어떻게 생겨야 할 지도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일 사유자들이 서로에 대하여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소 위 '완벽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현상적인 가정을 한다면 각각의 사유 자는 수용된 이론 T 의 형식적 구조, 그 이론을 형성시킨 과거의 연구 프로그램, 그리고 그 이론에 보존되어 있는 또는 보존되지 않은 종전 의 여러 믿음 등동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각 사유자는 이론적 속박들 이 이루어졌는지 아닌지를 앙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만약 이와 같 이 완벽한 정보를 가정함으로써 이상적으로 생각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사유자들을 총관시킨 집합체가 그것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고 도 말할 수 있다.) 요컨대 만약 기존의 언어해석관이 옳다면 우리는 내포와 외연이 어떻 게 결정되는지에 대한 훌륭한 설명 (물론 원리적인 설명을 말한다. 지금 의 방법론적 지식으로서는 상세한 점까지 설명할 수 없다)을 가지게 되 는 셈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존의 언어해석관은 올바론 견해가 아 니다! 기존의 언어해석관이 옳지 않은 이유 문장 전체의 진리조건을 결정함으로써 각각의 개별적인 용어들의 내 포와 외연을 결정하려고 하는 것이 기존의 언어해석관의 난점이다. 이

미 언급하였다시피 정동언어관에 의하면 조작적 속박과 이론적 속박이 (일종의 이상적 탐구영역내에서 합리적 탐구자가 받아들일 속박) 어떤 문장들이 갑인지 를 결정해 준다. 그러나 이 접이 옳다 하더라도 그러한 속박들이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들이 무엇을 치시하는지는 결정할 수 없 다. 왜냐하면 조작적 또는 이론적 속박이라는 개념에 지시를 직접적으 로 결정할 수 있는 아무런 요소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인 문장들 웅 선별하는 속박둥을 명기한 다음 전체 문장들의 진리치를 결정함으로 고써 생그 각문하장는들 에간. 접.나.적오 인는 방 용법어도들 이동하 무지엇 않을는 다지.시 하는지가 결정될 수 있다 간접적인 방법도 동하지 않음은 콰인이 이미 밝혀두었다 .6) 나는 콰 인의 소위 ‘불확정성 ind ete r mi na cy ' 이론을 좀더 강하게 확장시키겠다. 나는 우리가 어떤 언어의 모든 문장의 진리치를 어느 가능세계에서나 결정해 주는 속박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개별적인 용어의 지시는 여 전히 불확정적이라는 접을 논해 보겠다. 사실 언어 전체를 각 가능세계 에서 각 문장이 가지는 진리치가 구체적으로 밝혀질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종래의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해 석할 수도 있다. 요컨대 기존의 언어해석관뿐만 아니라 문장 전체의 진 리치를 결정할 수 있으면 지시도 결정될 수 있다고 보는 견해까지도 모 두 옳지 못하다.

6) Onto l og ica l Relati vit y and Oth e r Essays , Columbia Univ ersit y Press, 1969 에 나 오 는 그의 논문 ‘Onto l og ica l Rela ti v ity'윤 분 것.

이 접에 대한 상세한 증명은 전문성을 요구하기에 부록에서 밝히는 것이 적철하리라 생각한다. 이 자리에서는 자세한 중명보다는 중명의 방법만 예시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다음의 문장을 생각해 보자. (1) 고양이 한 마리가 침대 위에 있다. (여기서 ‘위에 있다’는 말에는 시제가 없다. 죽 ‘있다, 있었다, 있을 것이다’를 모두 의미한다.) 표준적 해석에 의하면 이 문장은 과거, 현재, 또는 미래의 어느 시접 에서 적어도 한 개의 침대 위에 있는 적어도 한 마리의 고양이가 존재 하는 가능세계에서 참이 된다. 그뿐만 아니 라 ‘고양이’라는 말은 고양이 를, 그리고 침대'라는 말은 침대를 지시한다. 내가 지금 밝히고자 하는

접은 문장 (1)의 어떤 가능세계에서도 문장 (1)의 진리치에 변화를 주지 않고도 현걸세계에서 ‘고양이’가 버찌 를 , 그리고 침대'가 나무를 지시하 도록 재해석될 수 있다는 접이다. (‘위에 있다’는 말은 원래의 해석을 보 존시킬 것이다.) 재해석의 기본발상은 다음과 같다. 문장 (1)이 (a) 고양이* 한 마리가 침대* 위에 있다. 룹 의미하도록 새롭게 해석되고 (a) 에서 고양이·의 성질(또 침대·의 성 질)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에 의하여 주어진다. (a) 어떤 고양이가 어떤 침대 위에 있으며 어떤 버찌가 어떤 나무에 있다. (b) 어떤 고양이가 어떤 침대 위에 있으며 어떠한 버찌도 나무에 있지 않다. (c) (a) 도 아니 고 (b) 도 아니 다. 이제 두 성질의 정의는 다음과 같이 내려질 수 있다. ‘고양이의 정의 (a) 가 적용되고 X 가 버찌일 때, 또는 (b) 가 적용되고 X 가 고양이일 때, 또는 (c) 가 적용되고 x 가 버찌일 때, 오칙 그 때에만 x 는 고양 이·이다. 침대*'의 정의 (a) 가 적용되고 X 가 나무일 때, 또는 (b) 가 적용되고 X 가 침대일 때, 또는 (c) 가 적용되고 x 가 쿼크입자 0 일 때, 오칙 그 때에만 x는 침 대*이다. (a) 의 경우에 해당되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침대 위 ® 네크’라는 이 름 은 미국의 물리학자이며 워크가설 입안자의 한 사람이었던 겔만 M. G인e l성lm져an윤n 에벗 어의나하지여 못불여하졌고다 .있 는러 입크자는이 다현.재 ‘기본입자’ 중의 하나로서` 아칙까지 가설칙

에 있다'도 참이고 ‘고양이* 한 마리가 침대.위에 있다'도 참이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세계에서 버찌가 나무에 있으며 모든 버찌는 고양이· 이고 또 모든 나무는 침대·이기 때문이다). 현실세계에서 버찌가 나무 에 있으므로 현실세계도 그러한 가능세계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 ‘고양이*'는 버찌 를 지시하고 ‘침대*'는 나무를 지시한다. (b) 의 경우에 해당되는 모든 가능세계에서도 ‘고양이 한 마리가 침대 위에 있다'와 ‘고양이· 한 마리가 침대· 위에 있다'는 모두 참이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세계에서는 ‘고양이'와 ‘고양이*', 그리고 ‘침대'와 ‘침 대”는 서로 동일한 외연을 가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해 두어야 할 접은 (b) 에 해당되는 가능세계에서는 고양이가 고양이·이지만 현;김세 계에서는 고양이·가 아니라는 접이다.) (c) 의 경우에 해당되는 모든 가능세계에서는 ‘고양이 한 마리가 침대 위에 있다'도 거짓이고 ‘고양이• 한 마리가 침대* 위에 있다'도 거짓이 된다요.약 (컨왜대냐 하모.면 든. 버가.찌 능.가세. 계쿼.에.크서.입 자고에양 이있 을한 수마 리없기가 때침문대이 다위)에. 있을 경우, 오직 ..:z. 경우에만 고양이* 한 마리가 침대* 위에 있다. 그리하여 ‘고양 이라는 알에 부여한 내포를 ‘고양이'라는 말에도 부여하고, 동시에 '침 대라는 말에 부여한 내포를 ‘침대'라는 말에도 부여함으로써 ‘고양이 한 마리가 침대 위에 있다’는 말이 ‘고양이* 한 마리가 침대· 위에 있 다’는 말과 동일한 뜻을 가질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갇이 함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침대 위에 있다’는 문장의 진리치가 결정되는 방식과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 이와 갇은 종류이면서 좀더 복잡한 재해석 작업이 한 언어의 문장 전 체에 관해서도 이행될 수 있음을 나는 부록에서 밝혀 두었다. 어떤 언 어가 가진 술어들에 무한히 많은 다양한 해석들이 가해질 수 있으며 각 진각의리 치해가석 은어. 떻.모게.든 결가정능되세든계간에에서, 문부장여들한다에. ‘올콰바인론'도 진『리말치과를 ,대 상‘ 홍W마o흔r’d and Obj ec t』이라는 책에서 이와 유사한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과인의 예(영어에 적용된)에 의하면 ‘저기에 토끼 한 마리가 있다’는 문장은 ‘저기에 한 개의 토끼 조각이 있다'(여기에서 토끼 조각이 란 사차원의 시공적 존재인 토끼를 공간적으로 자론 삼차원적 횡단면을 가리킨다)는 뜻으로 재해석된다. 또는 ‘저기에 토끼의 추상적인 성질 rabb it hood 이 실지로 현실에 나타나 있다’는 뜻으로도 재해석된다. (이 후자의 경우에

는 그 문장의 구문론적 형식, 또는 적어도 논리적인 형식까지도 재해석 된다.) 즉 문장의 진리조건이 될 지시는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과인의 주장은 필자가 방금 지적한 바와 동일하다. ‘토끼의 조각들 rabbit -sl ic e s' ‘토끼의 추상적 성질 rabbit ho od', ‘미분된 토끼의 부분들 undeta c hed rabbit -pa rts ' 등은 모두 토끼와 밀집한 연관성을 가지므로 우리는 콰인의 『말과 대상 Word and Obj ec t』을 읽을 때 문장의 진리치 룹 변화시키지 않고 내려지는 모든 재해석은 적어도 표준해석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토끼의 부분들과 토끼의 추상적 성질이 토끼와 연관되어 있는 방식으로)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 장에서 예시된 논의의 자세한 접은 부록에 나와 있는데, 이 논의의 요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침대 위에 있다’는 문장의 진리조건이 ‘고양이’라는 말이 버찌 믈 지시할 가능성조차도 매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본질적', ‘비본질적' ‘고양이’를 고양이·로, 그리고 침대’를 침대·로 해석하는 비표준적 해 석을 접하였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아마 그 러한 해석이 중요하지도 않은 역설을 낳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하지 않 겠느냐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역설이 참다운 역설이라면 결코 중요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진짜 역설은 우리가 생각해 온 방식에 무엇인 가 찰못이 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떠오를 생각은 아마 도 뇨향이·와 침대·라는 것이 좀 ‘괴상한' 성질의 것이라고 항의하고 싶 은 생각일 것이다. 분명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들에 해당되는 성질들은 (뇨향이밍과 침대엉 둥과 갇온) ‘상식적인’ 것들이지 그러한 ‘우스꽝스 러운' 것들은 아닐 것이다. 사물들을 ‘면밀히 살펴보고’ 그것들이 고양 이인지 아닌지를 ‘말해 줄' ‘어떤 기계는 만들 수' 있지만(인간이 바로 그러한 ‘기계’ 중의 하나이다) 어떤 것이 고양이·인지 아닌지를 말해 줄 기계는 (우리의 세계와 닮은 어떠한 가능세계에서도) 만들 수 없다는 접을 지적함으로써 왜 고양이•?J- 것이 우스꽝스러운 성질의 것인지를 이밝 힐고 양수이도 도있 을아 니것고이 다버.찌 도만 약아 님그을 기 안계다(면또는 그 사것람이) 가고. 양.무이.엇· 을가 보아고님 을그 것말 그할 기수 계있가을 고 .것양.이이.다겨 .t 그보러고나 있 만는지약 그아것닌이지 를고 결양정이하이기든 가위 해또서는는 버 ‘찌고라양면이

한 마리가 침대 위에 있다 ' 와 ‘버찌가 나무에 피었다’는 문장의 진리치 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진리치는 단순히 목전에 나타난 대상 을 검사함으로써만 알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본다’는 말을 재해석하여 (예컨대 혼다·로 해석하 여) (3) 죤 (또는 누구라도 좋은 어떤 사람)이 고양이를 본다와 (4) 죤이 고양이나 t 본다*는 두 문장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부록에서 밝힌 방법 에 의하여) 동일한 진리치 를 가지도록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어 떤 사람이 고양이 룰 볼때마다 그가 고양이나t 보고* 있는 것이 될 것이 며, 우리가 고양이 를 볼 때 가지게 되는 경험은 우리가 고양이다룹 볼* 때 가지게 되는 경험이 된다. ‘면밀히 조사한다’는 말과 ‘말한다’는 말도 이와 비슷하게 재해석될 수 있겠다. 그리하여 어떤 기계가 고양이를 떤 밀히 조사한다는 것은 그것이 고양이겨t 면밀히 조사하는• 것이 되고 어 떤 것 이 고양이 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것 이 고양이 ·라고 말한다*는 것 이 될 것이다. 하나의 예증으로서 (이 예증은 노칙 Noz i ck 이 암시해 준 것인데) 인 구의 철반(여자들이라고 해도 좋겠다)이 ‘고양이'가 ‘고양이*'를, ‘침대' 가 ‘침대”를, ‘본다 ' 가 ‘본다”를, ‘말한다'가 ‘말한다*'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또 다른 철반(남자들) 이 ‘고양이’가 고 양이들을, 침대’가 침대들을, ‘본다’가 보는 행위를 지시하는 것으로 사 용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는 것을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 가 ? ”(한 남자한테 ‘고양이’가 무엇을 지시하는지 묻는다면 ‘고양이’가 지시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는 ‘물론 고양이들이지요’라고 대답할 것이 며것., 이필 . 또자고. 가 양여. 이자말. 인들하.지도 고. 자그아. .렇 하닌.게 는지. 물.대핵 답심말.할 해은. 것줄우.이 리다수.가) . 있 어는떤 기것계을를 면.만 밀.들히. 수검 사있하다여는 .사::z. 실이 면밀히 검사한다'와 ‘말한다’는 말이 면밀히 검사함과 말함을 지시 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면 고양이와 고양이.를 구별해 준다는 접이다. 7) 여뒤자가의 맞 . 지경 우않 그는녀 i 가nc oh‘e고r양e이n t'( 용不 整말合할的 ).때 . 가.지정 시이되라는고 것대이답 할고 양수이도· 일있 다것 ,이 (라왜 는앞 뒤가가정 은맞 지앞 않는가 하면 그녀가 사용하는 언어내에서는 ‘고양이’라는 말로 그녀가 지시하는 정윤 그것이 무엇이돈 고양이일 것이기 때문거.다: ) 그러나 그렇게 대답한다 하더라도 그녀 가 고양이라고 부르는 것이 남자둥이 고양이·라고 부로는 것과 갇운 가능성이 배재되 지는 않는다. 그리고 또 그녀가 고양이·라고 부르는 것이 남자둥이 고양이라고 부르는 것과 갇웅 가능성도 마찬가지로 배제되지 않는다. 바로 이 정이 노직이 지적하고자 한 정이다.

면밀히 검사한다'와 ‘말한다’는 말들의 지시가 어떻게 결정되는지 말하 기란 '고양이’라는 말의 지시가 어떻게 결정되는지 말하기만큼이나 쉽지 않다. 혹자는 내가 어떤 것을 보고 그것이 고양이라고 생각할 경우 나 의 ‘정신적 표상', 시각이나 촉각에 나타난 이미지, 언어화된 ‘고양이' 등등이 치시하는 것은 고양이임 (고양이의 추상적 성질)이나 그 밖의 다 론 여러 가지 물리적 또는 생물학적 성질들(모양, 색깔, 종 등)이지 이 와 반대되는 것들은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말은 사실이 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우리가 설명하고자 하는 주제, 죽 지시가 왜 저런 식으로가 아니라 이런 식으로 결정되는지 하는 접을 단순히 되풀 이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고양이·와 침대·의 정의가 지시하는 것은 문제의 대상이 아 닌 다른 것들(나우 위의 버찌와 침대 위의 고양이들)이며, 따라서 그와 같은 성질들을 가진 대상들의 비본질적 extr i n s ic 성질들을 나타내 준 다. 현실세계에서는 모든 버찌가 고양이·이지만, 버찌가 어떠한 나무에 도 없다면 버찌의 본질적인 성질들이 정확하게 동일한 것으로 남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고양이·가 아닐 수도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떤 것이 고양이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오직 그것의 본질적 성질들에 달 려 있다’고 항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구별이 본질적인 성질과 미혼절격인 성질간의 구별인가? 그리하여 그 구별에 의하여 우 리는 그 '괴상한' 해석을 배제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제안에는 ‘고양이'와 ‘고양이”, 그리고 침대’와 침대*'간에 각 각 일종의 대칭적 관계가 성립한다는 문제점이 따른다. 앞에서 말한 경 우 (a) 가 성립하는 가능세계에서는 버찌·가 고양이이고 나무·가 침대가 되도록, 경우 (b) 가 성립하는 가능세계에서는 버찌·가 버찌이고 나무·가 나무가 되도록, 그리고 경우 (c) 가 성립하는 가능세계에서는 버찌·가 고 양이이고 나무·가 光子가 되도록 ‘버찌•’와 ‘나무·’라는 말이 정의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고양이’와 침대'라는 말은 ·에 의거하여 다음과 갇이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a*) 어떤 고양이·가 어떤 침대• 위에 있으며, 어떤 버찌·가 어떤 나 무• 위에 있다. (b.) 어떤 고양이·가 어떤 침대• 위에 았으며, 어떠한 버찌·도 나무· 위에 있지 않다.

(c*) (a* )도 (b이도 아니 다. 이상스럽게도 이 세 경우가 앞에서 언급한 (a), (b), (c) 의 세 경우를 새롭게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따라 ‘고양이’와 침대’라는 말을 칭의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양이’의 정의 (a 기의 경우 x 가 버찌·이거나, (b*) 의 겅우 x 가 고양이·이거나, (이c.가 )의 고.경양.우.이 가x 가됨 을버찌 주.목라하면라 )X 는 고양이이다. (이 모든 경우에서 고양 침대'의 정의 (a* )의 경우 x 가 나무·이거나, (b*)의 경우 x 가 침대*이거나, (c.) 의 경우 X 가 국七간일 때, 오직 그때에만 X 는 침대이다. (쿼크·가 (c.) 와 같은 모든 경우에서 경대가 되도록 정의된다고 가정한다면, (a), (b), (c•), 그 어느 경우에서든 침대는 겅 대가 된다. ) ‘고양이·', 침대” 등을 원초적인 성질들로 여기는 언어의 관접에서 보면 ‘비본질적' 성질들, 죽 x 가 아닌 다른 대상들을 언급함으로써 정 의되는 성질들을 지시하는 말이 ‘고양이'와 ‘침대’가 되겠지만, ‘고양이' 와 침대’라는 말이 고양이와 침대에 관한 추상적인 무엇 cat ho od, ma t hood 을 지시한다고 여기는 언어에서는 ‘비본질적’ 성질들을 지시하 는 말이 ‘고양이.'와 침대·’가 된다는 것이 논의의 핵심이다. 다시 말하 여 어떤 성질이 ‘본질적 ' 이고 또 어떤 성질이 ‘바본질적'인지 하는 문제 는 어떤 성질을 우리가 ‘기본적'인 것으로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그 자체 본질적 또는 비본질적이라 할 수 있는 성질은 없다는 것이 필 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 다. ‘생존'과 진화 진화과정 자체가 우리의 말이나 정신적 표상과 외적 사물간의 대옹관 계를 만들어 내었다는 주장이 오늘날 유행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러한 대웅관계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생존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이 대옹관계

가 적어도 원초적인 방식으로는 바로 지시의 관계라고 말한다. 그러나 ‘대응관계'와 ‘지시 ’ 가 갱촌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와 관련 하여 또 진리는 생존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에 대한 견해는 각자 다르다. 만약 우리의 믿음들이 갑이 아니라면 우리가 생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자들도 있고, 가장 잘 확 중된 과학적 믿음들조차도 참이 아니며 또는 적어도 그 믿음들이 참이 라고 생각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도 있다. 토 머스 쿤 T. Kuhn 은 우리가 가진 믿음들이 대상들을 ‘지시'하는 것은 다 만 그 믿음들 내우에서일 따름이라고 주장하였다. (행릿'이라는 말이 단 지 극중에 나오는 한 인물을 지시할 따름이듯이.) 과학이 성공을 거둔 이유는 과학의 대상이 실지의 대상과 대응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 아 니라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쿤의 생각이다. 반 프라센 B. van Frassen 은 최근에 출간된 저서에서 성공적인 이론은 반 드시 참일 필요는 없고 단지 ‘관찰상으로 적 합하면 observati on ally adeq u ate ' , 즉 관찰을 칭확하게 예측하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프라센도 과학의 성공(또는 ‘관찰상의 적합성')이 시행착오의 결과라고 설명한 셈 이다. 이러한 철학자들의 생각이 옳다면 지시의 관계를 객관적인 관계라고 생각하는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진화를 사용하는 주장은 꺾인다. 쿤이나 프라센의 도구주의적 관접에서 보면 진화는 관찰용어와 ‘영구적 감각가능성'간의 대응관계만 수립시켜 줄 따름이다. 이러한 대응관계는 우리가 만약 외적인 사물(관찰 가능한)들이 감각으로부터 구성된 것 이 상이라는 생각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면 지시의 관계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는 다른 철학자들(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들 중에 많은 것들이 참이 아니라면 우리는 생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철학자 들)이 옳다고 믿는다. 필자가 그렇게 믿는 이유는 시행착오로만은 이론들이 왜 ‘관찰상으로 적합한지’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왜 시행착오가 성공적인 지를 설명해 주는 인간과 환경간의 상호작용의 특징들을 지시함으로써 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시행착오가 고은 작업에서 전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환경간의 상호작용이 우리의 마음 에 거짓 이론들을 만들어 내어 이 이론들이 우연히 성공적인 예측을 할 따름일 것이라고 가정함은 전적으로 불가해한 일련의 우연척 힐치를 가

정하는 것과 다룰 바 없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들이 (근사치적으로) 참 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우리의 생존을 설명해 줄 것인가? 우리의 믿음들 중에는 행휘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들도 있다. 내 가 만약 ‘저 버돈을 누르면 내가 매우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얻을 것 이다’는 문장을 믿는다면(내가 정상적인 방식에 따라 이 문장을 이해한 다고 가정하고) 나는 내 손을 뻗쳐 그 버튼을 누를 것이다. ‘내가 만일 x나 를타 내한는다 면알 이… …들을어 간얻다을) 는것 이형다식'을( …가…진에 는믿 각음 을행 위지.자 향.가 적. 바믿.라 음.는 d i r목ec표 ti 를ve be li e f이라 부르자. 우리가 가진 지향적 믿음 중에 거짓인 믿음이 너무 많다면 우리의 행위가 정공을 거두지 못하는 행위도 너무 많게 될 것이 다. 따라서 우리들의 지향적 믿음들의 대부분이 참이어야 함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런데 지향적 믿음들은 그 자체 또 다른 많은 믿음들, 외적 사물들 의 특성과 인과적 힘 causal p owers 에 대한 믿음들, 우리들 자신의 독 성과 힘에 대한 믿음들로부터 나온다. 만약 이러한 믿음들이 대부분 거 짓이라면 그러한 믿음들이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참된 경험을 예측케 하 고 참된 지향적 믿음을 낳는다면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대부분의 지향적 믿음들이 참이기 때문에, 그리고 지 향적 믿음들이 참이라는 사실이 그 외의 다른 많은 믿음들(우리의 ‘일 점상에세 계의에하 여대 한가. 장이. 론찰’. 을설 명구되성기해 때주문는에 믿일음들상)세이계 에적 어대도한 참우에리 의가 깝이다론이는 적어도 참에 가깝다는 믿음, 그리고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생존하지 못 하였을 것 이 라는 믿음이 정 당화된다. 이제 비표준적 해석 J(부록에 기술된 바대로)에 의하여 이름지어진 사뭉둘을 실지로 지시하는 사람들이 우리 중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 이 해석은 우리의 개념적 세계, 우리의 감각, 우리의 의욕 동등을 지시하 는 말들에 관해서 표준적인 해석과 일치한다. 그리하여 ‘내가 버돈을 누르는 것 갇온 생각아 든다’는 문장은 ‘괄호쳐진 의미'로 이해될 때 (내 가 의도적으로 그 버돈을 누른다는 주관적 경험을 가진다는 의미로) J 에서나 또는 I 에서나 단순히 동일한 진리조건을 가질 뿐만이 아니라 동일하게 해석되기도 한다. ‘내가 기대하였던 만족을 얻은 것 갇다'는 문장도 그러하다. 만약 우리들의 지향적 믿음 중의 대부분의 것들이 비표준적 해석 J

에서 참이 된다면 우리는 분명히 성공적이 될 것이고 분명히 갱촌할 것 이며 (왜냐하면, 우리가 만약 살아 있지 않다면 그러한 목표도 달성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손들도 갖게 될 것이다(왜냐하면 자손 둘이 살아 있지 않다면 그들도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기 때 문이다). 요컨대 (충분히 많은) 우리의 지향적 믿음들이 J에서 가지는 참은 I 에서 참이 되는 ‘진화적 성공'에 결코 못지 않는다. 사실 f에서 의 지향적 믿음들의 참은 I 에서의 참과 갇다. 왜냐하면 오은 문장의 진리조건은(지향적 믿음들의 진리조건뿐만 아니라) I 에서나 f에서나 관동적일 하경기험 과때문 결이합 다되. 어나 의있 을지 향뿐적만 믿아음니들라은 그 I 에진.서리. 건조. .건] 까에지서 도건 동동일일하한다 .주 한‘진 화믿’음의 들관과점 (그또에는 적무합관접한) 행에서위 들본을다 면연 결대시부켜분 의주 는우 리어.의떠. .한믿 음해들석이에 서그러도 참이어야 한다는 조건만으로 충분하다. 진화에 의하여 나는 (일정한 종 류의) 참된 믿음을 가지려는 경향을 갖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화가 일정한 진리조건(그리고 일정한 행위조건, 또는 ‘언어표출규칙') 을 가진 문장 또는 문장에 유사한 것들로 구성된 표상체계를 우리에게 심영어향 을주 미는친 경다향는을 점 흥을하 뜻여할 언뿐어이적다.으 로그 러또나는 이개미념 적밝으혔로다 시매피개 된문. 장.생 존전.에 체. 의결. 정..해..; J리주를지 겅 경않는해다 .추 (은‘ 언초어건표이출 규운칙장들'희을 우여분기을에이 첨우가혓하홍여 도겨 서도하움은이지 은되 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해석 ]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이 는다. )특 . 이따. 한라. 서 대 웅진관화가계 를지 시결정하해는 표준현다고과 생외적각 한대다상면간 에찰 못성이다립.한 다고 여겨지 순수志向과 비순수志向 우리의 말과 외적 대상간에 1 대 1 의 대응관계가 자연적으로 드러나도 록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금까지 살펴보았다. 우리가 대부분의 지향 적 믿음들이 참이 되도록, 그리고 대부분의 행위들이 우리의 ‘전체적인 유전적 적합성’에 보램이 되도록 말이나 생각의 기호들을 사용하는 것 이 자연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지시문제는 계속 불확정한 것 으로 남게 된다. 지시란 사실상 불확정한 것이라는 접이 바로 콰인이 강조하였던 바이다. 우리의 말들이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확정되어

있고 잘 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단순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콰인은 생각한다. 그래서 콰인은 다음과 갇이 이야기하고 있다. 해석된 술어들의 목록과 고정된 양화변수의 값의 영역을 가지고 있는 표 준적 기호체계물 생각해 보자. 이 기호언어체계에서 참이 되는 문장들은 그 술어들이 수없이 재해석되고 그 변수들의 값이 수없이 수정되더라도 여 전히 참이 된다. 동일한 크기의 어떠한 영역이든 술어들의 재해석이 적합 하다면 그 체계의 영역이 될 수 있다. 만약 값의 영역이 무한하다면 어떠 한 무한영역이라도 그 제계의 영역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스콜렘 • 뢰벤하 임 칭리이다 ® . 참인 문장들은 모든 그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참임에는 변 함이 없다.

® 계 1 장 pp.1 8-19 참조.

그렇다면 아마도 말들의 지시보다는 문장들의 참과 참이 될 수 있는 조 건들이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되겠다. 지금까지 이 장에서의 토의의 전제가 되어 온 주장, 즉 말과 대상간 에 일종의 1 대 1 의 대응관계가 있다는 주장을 포기하고 그 주장에 대안 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주장을 다음 장에서 찾아볼 작정이다. 그러나 그 러한 주장을 국복하는 데에는 그보다 훨씬 더 7· J-단한 방법이 있을 법하 기도 하다. 죽 말의 지시를 결정해 주는 것이, 밖으로 표현되었던 안 되었던, 우리의 志向i n t en ti on 이라고 말하면 안 되겠는가? 앞 장에서 우리가 이러한 토의를 처음 시작할 때 필자는 지향을 가진 다는 것이 지시할 수 있는 능력을 미리 전제한다는 근거에서 이와 갇온 간단한 방법이 정보내용이 있는 실질적인 대답을 못 준다고 거부한 바 있다. 이 시점에서 이 점을 좀더 확대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갇 다. 이 방법에서의 문제는 ‘지향'이라는 개념, 그리고 ‘심리상태 menta l s t a te’ 라는 개념이 좀 애매하다는 접이다. 어떤 심리상태의 있고 없음 이 말하는 사람의 심리 ‘내부'에 무엇이 일어나는지에 달려 있을 경우 그러한 심리상태를 순수 심리상태라 부르자. 그리하여 내가 지금 고동 울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는 오직 나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달려 있으나 눈(雪)이 희다고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 하는 문제는 나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눈이 회다고 믿거나 확신하는) 눈이 정말 흰지 아닌지, 죽 나의 신체와 마음의 ‘밖에서’ 일어나는 것에

도 말려 있다. 다시 말하여 고통 같은 것은 순수 심리상태인 데 반하여 앎은 비순수 심리상태이다. 앎에는 (순수한) 심리상태적 요소가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심리적이라고 할 수 없는 요소도 있다. 우리가 믿는 것이 강이 아닐 경우 우리의 믿음이 앎이 될 수 없다는 조건과 연관된 요소가 그러한 요소이다• 내가 만약 어떤 적합한 순수 십리상태에 있지 않다면 눈이 희다는 앎의 ‘상태'에도 있지 않을 것임은 물론아나, 적합 한 심리상태에 있음이 눈이 희다는 앎에 대한 충분조건은 결코 못 된 다. 앎이 형성되기 위해선 세계로부터의 협동도 있어야 한다. 믿음에 관해서는 어떤가? 우리는 〔책상 위에 물이 있다〕는 데 대한 광호겨친 믿음, 또는 책상 위에 물이 있음을 포함하는 관념상의 세계룹 가진다는 것이 순수 심리상태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앞서 말했던 바 에 따른다면 책강 휘해 옹이 었다은 믿흥( ‘괄호치 지 않은')이 ‘뭉 ’ 이라는 말이 정말로 물을 지시한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으며, 지시문제는 일정 한 ‘패러다임'들과 그러한 패러다임들과 우리가 칙접 또는 간접으로 가 지는 인과관계 둥에 의존하여 있다. 내가 책상 위에 물이 있다는 믿음 을 가지고 있을 때 닮은꼴 지구에 사는 나와 닮은꼴의 인간이 가지는 믿음이 괄호쳐진 경우에는 나의 믿음과 동일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 는 나의 믿음과 다르다. 왜냐하면 그는 ‘물'이라는 말을 물이 아니라 알 콜뭉이을 지있시다하는는 믿 것음으은로 비 .사순.용.수하 기심 리때상문태이이 다다.. (말동하 속자에면 이있 는경 우두 뇌책들상은 위 ‘에괄 호쳐진' 심리상태로 말하자면 우리의 심리상태와 비슷할 수 있겠지만 비순수 심리상태를 가질 수는 없다.) 하는믿 음순에수 관심한리 위상의태 는이야_기예는컨 대지향 ‘에물도' 이그라는대 로말 이적 용관.된 념.다 상..의 . 무세.엇 계.을 에 서지의향 울을 지시하도록 지향하는 심리상태 __- 실재세계에서 무엇을 지시하는 지 결코 결정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지향의 비순수 심리상태는_예 컨(실대지 의물)' 이물라을는 지말시아할 실수지 있의는 물 능을력 을지 시전.하제.도한.록다.. 지 향하는 심리상태_ 믿음이 필자가 ‘괄호쳐진 믿음'이라고 부론 것과 지시, 이 양자에 의 거하여 정의될 수 있다고 제안한 철학자들도 있다. 그리하여 죤온 눈이 회 다고 믿는다=죤은 〔.눈 이. 회. 다.고 .〕 믿. 으.며 . (죽 눈은 죤 의 관념상의 세계에서 회다), 촌회 생• 각• 속• 에• 서• ‘•눈 '• 이•라 는• 말• 과• ‘회

말다.. ’이..라든 .는). 말눈.. 은 과..( 또희.. 는 다.. 는.이. 성.믿. 질 .음. 을 을.. 각.표. 각 현.. 하지.. 기시 ..한 .다휘... 하. 〉 여. 그. 가. 사. 용. 하. 는. 어. 떠.한. 이와 같은 분석을, 눈이 희다고 믿는다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올바 접르,고 즉완 벽믿. 한는. 다.분 는.석 으것. 로이. 서지 . 시받. 할아. 들수.일 있.수는.는 능없력겠을지 만전 제적한어다도는 한접 을가지 지 적옳은한 것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다. 이와 정확하게 동일한 방식으로, 지향한다 는 것도 지시할 수 있는 능력을 전재한다 ! 지향을 일종의 심리적 사건 으로 보아 이 심리적 사건으로 민하려 말들이 무엇을 지시하게 된다고 본다면 잘못이다. 지향 (일상적인 ‘비순수적' 의미에서) 이란 지시를 필 수적인 구성요소로 가진다. 지시문제를 (비순수적) 지향에 의거하여 설 명한다면 순환논법에 빠진다. 그리고 믿는다든지 지향한다든지 하는 것 과 같은 순수 심리상태가 어떻게 지시를 만들고 지시를 야기시킬 수 있 는지(그 적합한 인과적 연관성에서) 하는 문제는 우리가 방금 보았다시 피 매우 난해한 문제이다. 이 난제의 원천 언뜻 보면 우리의 말과 심리적 표상들이 우엇인가를 지시한다는 접보 다 더 명백한 것이 없어 보인다. 내가 ‘그 고양이가 방금 밖으로 나갔 다’고 생각하거나 말할 때 나의 생각은 보동 그 고양이에 관한 것임은 물론이다. 내가 생각하거나 말한 그 문장에서 ‘고양이’라는 말은 그 고 양이를 한 요소로 가지는 한 집합을 지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에 밝힌 바와 같이 지시하는 관계의 본성이 무엇인지 하는 문제는 쉽 게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문제이다. 세계가 사실세계와 관념상의 세계로 구분된다(그리고 이와 연관하여 믿음으로 구분된다)는 사실 자체가 부분적으로 지시의 문제가 난해함을 설명해 준다. 우리의 언어에 대해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인정될 수 있는 해석들'(여기서 인정될 수 있는 해석이란 단순히 적정의 조작적이 고 이론적인 요구조건을 만족시키는 해석을 뜻한다)이 있다는 접을 발 견한 것이 놀랍고도 다루기 힘들게 여겨지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그와 갇은 ‘불확정성’이 말하는 사람의 ‘관념상의 세계’에서 생긴다는 접에서

찾아질 수 있다. 나의 '관념상의 세계’에서 고양이와 고양이.는 전적으 로 다르다(사실상 나의 관념상의 세계에서 고양이.는 너 ~l 이다). 침대 위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와 침대. 위에 고양이• 한마리가 있다'는 두 문장은 논리적으로는 동치일지 모르지만 두 문장에 나오는 용어들이 관념적으로 ;l 서하든 바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한 믿음이 실재세계에 서 지시하는 바와 또 다론 믿음이 실재세계에서 지시하는 바가 서로 혼 돈된다는 접은 정말 이상하게 보인다. 그러나 만약 고양이들의 수와 버찌둥의 수가 우연히도 일치한다면 모 델이론의 정리들로부터 (앞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과인이 지적한 바와 같이) ‘고양이’라는 말과 '버찌'라는 말의 외연은 치환되지만 모든 문장 둘의 진리치에는 변화 를 주지 않고서도 언어 전체 를 재해석할 수 있다 는 사실이 도출된다. 이와 갇은 방법으로 그러한 재해석들은 모든 조작 적이고 이론적인 요구조건둘을 유지시킬 수 있도록 구성될 수 있다(.::::z. 세리계고에 ‘서고의양이 /외고연양뿐이·만’ 의아 니예라에 서모 든밝 힌가 .기능.술세.적계. 에.방서.법의.으 로외 연재까해지석도들 은결 칭실해재 줄 ‘내포' 또는 함수를 제공해 줄 수 있도록 확장될 수도 있다). 이 접 온 ‘관명의 세계', 또는 주관적인 믿음체계에 관하여 방금 우리가 말한 바와 모순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믿음체계나 ‘관념의 세계’에서 어느 고양이도 버찌가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될 수 있 는 그 믿음체계의 모든 해석에서 (말, 이미지, 심리적 표상 둥에 외적 세계의 지시물들을 할당시키는 모든 해석에서) ‘고양이’라는 말이 지시 하는 집합과 ‘버찌'라는 말이 지시하는 집합이 서로 중복되어서는 안 된 다는 점을 의마한다. 그러나 두 집합이 중복이 안 된다는 사실은 하나 의 인정될 수 있는 해석에서 ‘고양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집합이 다른 (그러나 인정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는) 해석에서 어찌'라는 말이 지시하는 집합과 갇을 수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과 비교될 수 있 다. 관념상의 고양이들이 관념상의 버찌들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사실로 부터 도출되는 것은 오직, 인정될 수 있는 해석이 정확하게 하나뿐이라 면, .실 .제 .의 고양이들이 실제의 버찌들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접뿐이다. 인정 가능한 해석의 수가 하나 이상이라면 그 해석들의 전체를 고려할 때 각각의 해석에서 서로 중복되지 않는 집합들을 지시하는 두 용어가 동일한 참재적 지시물을 가질 수 있다. 관념상의 고양이들이 관념상의 버찌들과 다르다는 사실로부터 고양이들 그 자체의 집합과 버찌둘 그

자체의 집합이 각각 독립하여 고칭되어 있다는 사실이 도출되지 O口J .T~ 다. 이 점이 곤혹감을 준다면 그 이유는 조작적이고 이론적인 조건들이 자연적인 방식으로 주어져 우리의 표상체계에 대한 안정할 수 있는 해 석(또는 해석들)이 실제의 경험적인 맥락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 한 조건들은 어느 정도 하나의 언어에서 어떤 문장들이 참이고 또 어떤 문장들이 거짓인지를 결정해 줄 수 있다. 결정되지 않고 납아 있는 것 은 진리조건과 지시간의 느슨한 관계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다시피 콰인은 이 관계의 느슨함을 그대로 받아들여 단순히 지시는 불확정적이라고 인정하였다. 최근에 젊은 철학자 필드 H. F i eld 는 이와는 다른 견해를 피력하였다 .8) 필드의 견해에 의하면 지 시는 일종의 ‘물리주의적 관계', 죽 말이나 심리적 표상들과 대상들이나 대상들의 집합들간에 이루어지는 복잡한 인과관계이다. 그 물리주의적 관계가 어떤 것인지 발견해 내는 일은 경험과학의 할 일이라는 것이 필 드의 생각이다.

8) Fie l d, H., 'Tarski' s Theory of Truth ', TIi e Jou rnal of Plli/o s op lly , vol. 69 . 필드의 견해 자는세 히필 자다의우 어책졌, 다.M eanin g and Moral Sdences, Routl e dg e and Ke ga n Paul, 1978 에서

그러나 필드의 주장에도 문제는 있다. 필드가 주장하듯이 지시에 관 한 자연주의적 또는 물리주의적 정의가 가능하다고 가정해 보자. 죽 1) 시i.가한. .다R 이라는 관계를 y와 가질 때 오칙 그때에만 i는. t를. 지. 여기서 R 은 어떠한 의미론적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서도(즉 ‘지시한다' 는 말과 또는 그 외의 다른 말들을 사용하여 순환론적인 정의가 되어 버리는 일이 없이) 자연과학적 용어로 정의될 수 있는 관계를 말한다. 만약 (1)이 참이고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하다면 (1) 은 그 자체 지시가 조 작적이고 이론적인 조건들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이론에서조차 참이 되 는 문장이다. 그렇게 되면 (1)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반성적 평형' 또는 ‘이상적 한계’이론에 속하는 한 문장이 될 것이다. 다면그 러‘나X 는 지y시와가 R 오의직 관조계작를적 가이진고다 ’이의론 적지인시 는조 건그.들 에자. 체.의 해불서확정만적 결 이정 다된. 그래서 (1) 이 참이라는 것을 알아도 별 도웅이 못될 것이다. 대상언어의

가능한 각 모델은 문장 (1)을 성립시키는 에타언어의 모델에 상응할 것 석이며에, 의‘X하 가여 y결를 정지될시 한것다이'다의. 해그석러은나 ‘X이 가 관y계와 는R 의단 지관 계가.를 능. 한.가 진각.다 ’모.의델. 에.해 서의 관계일 따름이지, 가능한 모델의 수를 줄이는 데에는 아무런 도웅 도 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 것은 필드가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르다. 필드가 주장하는 바 는 (a) 말과 사물간에는 확칭된 독독한 관계가 있으며, (b) 이 관계가 문 장 (1)에 진리치를 부여할 때 지시관계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드러 가나 주이 장러 하한 고주자장 이하 는그 냥바 를(1 )우을 리맡가합 오어오떻女게 1 만표 .나 현.타 할.나 수는. 있것을은 지아는니 하다.나 의필 문제이다. 이 문제는 제쳐두고 필드의 주장대로 이해된(죽 말과 대상간의 확정 된 독특한 관계를 기술하는 것으로 이해된) 문장 (1)이 참이라는 견해를 고게 찰하.해는. 가.보자? . 말만과약 사그물렇간게에 이여해러된가 지(1 )이‘ 대참옹이관라계면'들 아무 엇있이다 고(1 )을한 다참이면 무되 엇이 독수한 대응관계 R 을 가려내는 일을 하는가? 경험적으로 (1) 이 옳다는 사실이 R 을 가려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경험적으로 옳고 그 름은 조작적이고 이론적인 조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미 보았다시피 우리의 지향도 R 을 가려내지 않는다(오히려 R 은 우리의 지향이 무엇 울 나타내는지 결정하는 과정 중에 생간다). R 이 지시관계라는 사실은 형이강하척후i 선덩횔 수 없든, 일종의 원초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실 갇아 보인다. 이러한 종류의 원초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참은, 만약 그러한 것이 있 다면, 최근 크립키 S. Kr ip ke9) 에 의하여 소개된 ‘형이상학적으로 필연 적인’ 참과 혼동되어서는 안 되겠다 .0 9) S. Krip k e, Nami ng and Necess ity, Harvard Univ . Press, 1980 참조. @ Nami ng a11d Necess ity에서 진개되고 있는 크립키의 이론은 인식론이 형이상학에 선행 하고 우위에 있다고 보는 경험주의칙 철학의 전몽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천 수 있으며. 그러한 비판은 형이상학적 팔연성’이라는 개념을 중십으로 수행되고 있다. 전몽적으로 핑연칙인 창 necessa ryt ru th은 선험적인 앎 a priri knowled g e 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여겨겨 왔는데, 전자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아고 후자는 인식론적인 개념이므로 서로 분리될 수 있으며 또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크립키의 주장이다. 다시 말하자면 필연칙인 참이 경힘걱으로 발견킬 수 있고, 또 우연걱인 참이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필연적인 참도 경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다는 주장의 한 예문 둘어 보 자. i )다 이음되과계 같는은 이 두되 계문이장다윤. 생각해 보자.

ii) 이황은 이되계이다. i )은 논리작으로 참이며, 따라서 경험과는 무관하게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다. 그러 나 ii)의 경우는 종 다르다. 이도 1 계가 이되계입운 부인할 사람온 없겠지만 이황이 이되 계입운 부인할 사람은 (아마도 무지로 인하여) 있윤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i )과 ii)는 인식론적으로 서로 다르다. i )은 우리가 선험적으로 참임운 알 수 있지안 ii)는 경험적으로 알려진다. 선험적인 것은 팔연칙이고 경험칙인 것은 우연칙이라는 전 통구 1 인 도식에 의하면 문장 i )은 핀연적으로 창인 문장이지만 ii)는 그렇지 않다. 그 러나 이러한 결과는 우리의 상식에 어긋나고 우리의 칙관에 매치된다. 고유명 pr op er name 이 사실온 기술적 표현 de fi n it edescr ipti on 과 7같 다는 입장운 가졌던 프레게는 이 문계윤 의미 sense 와 지시 re fe rence 문 구별합으로써 해결하려 하였지만, 고유명도 정말 이름이고 따라서 칙겁 지시적인 기능을- 한다고 본 크립키는 i)과 ii)가 모두 핀연적인 참이 된다고 주장합으로써 그 문제군 해결하였다. 죽 이황이 이되계입운 우리는 겅힘 적으로 알지만 형이상학걱으로는 역시 i )과 다롭없는 필연적인 창이라는 것이다.

크립키가 지적한 접도 앞에서 우리가 자연종을 나타내는 말(예컨대 동물, 식물, 광물 등)이 지시하는 바에 관해서 지적한 바와 밀접히 연 관되어 있다. 크립키에 의하면 사실이 그렇듯이 (2) 물이 H20 이고 (즉 실재세계에서 (2) 가 참이고), 말하는 사람이 ‘물'이 라는 말로 표준이 될 만한 여러 가지 실지의 물의 예들과 동일한 구조와 동일한 행태를 가진 것들을 지시하고자 한다면(즉 말하는 사람이 가설적인 경우나 ‘가 능세계'에 관하여 말할 때에도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2) 는 모 돈 가능세계에서도 참이 틀링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나 H20 는 아닌 가설적인 액체를 기술한다는 것은 다만 물 과 답은 액체를 기술하는 것일 따름이지 물이 H20 인 어떤 가능세계를 기술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물이 H20 임은 '형이상학적으로 필연적인'(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인) 것이다. 그러나 이 '형이상학적 필 연성’이 일상적으로 이야기되는 화학과, 말하는 사람들의 지시의도에 관한 평범한 사실에 의하여 설명되고 있다. 만약 확정된 물리주의적 관계 R 이 있고(그것이 유한한 수의 말을 가 전 자연과학적 언어로 정의될 수 있든 없든간에) 또 그 관계가 바로 지 시라 한다면(우리가 그 관계를 어떻게 기술하고 또 기술할 수 있는지 없는지와는 무관하게) 。: 1 리한 사실은 그 자체 지시하고자 하는 우리의 지향이 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 수가 없다• 오히려 앞에서 여러 번 주 목한 바 있듯이 그 사실은 우리의 지향이 지시하는 바가 무엇을 나타내 는지 결정하는 과정 중에 생긴다. ‘물은 H20 이다’라는 명제가 가능한

모든 세계에서 참이라는 크립키의 견해는 실재세계에서의 지시가 오칙 조작적이고 이론적인 조건에 의해서만 고정된다 하더라도 옳을 수 있 다. 크립키의 견해는 지시개념을 미리 전제하고 있으며, 지시가 결정되 었는지 아닌지 또는 지시가 무엇인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 지 않는다. 필자가 보기에는 지시 룹 근본적으로 일종의 대응관계로(우리가 정한 조작적이고 이론적인 조건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어떤 순욱격산 형이상 학적 사실로서) 보는 견해는 마술적 지시이론과 다 를 바 없다. 그러한 견해에 의하면 지시란 그 자체 록크가 ‘실질적 형식 ' (일정한 이 름 에 혼 걸척후후 속하는 실재물)이라 불렀던 것과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지 시문제를 그러한 설명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사실로 사변해 불 수는 있 다 하더라도 그에 따르는 인식론적인 난제들은 국복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그리고 우리의 언어로부터 독립 되어 존재하는 것들로 되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형이상학적 견해가 바 로 그러한 가칭을 하고 있다) 지시관계의 가능한 후보가 될 수 있는 ‘대응관계'란 수없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만약 이 우주에 있는 것들의 수가 무한하다면 대웅관계도 무한할 것이다). 형이상학적으로 고정된 ‘실재의’ 지시관계에 대응되는 어떠한 진리개념으로도 (1)이 참이어야 한 다고 요구하더라도 만약 (1)이 그 자체 경험칙쇼호 받아 들 여질 수 있다 면 지시관계의 가능한 후보들 중 단 하나의 후보도 배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면 ' R 은 걸재의(형이상학적으로 가려내진) 지시관계이다' 는 형식을 가진 가능한 서로 다른 ‘불합리한 형이상학적 진리 ' 들이 무한 히 많이 있게 된다. 이 견해 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만약 그들의 견해가 전화.정적..적으 이로지 옳 지않 고않서을도 수형도이 상있학다적는으 접로을 가 승려인내하질고 수 또 있 지다(시형가이 전상체학적적으으로로 가려내진 R 은 다수의 인칭할 수 있는 해석을 허용할 수도 있다)는 접 도 승인한다면 지시가 조작적이고 이론적인 조건에 규제를 받는다는 견 는해. 까적.지 어.도 도. 결한.국 은개. 의.형 이선. 상겅. 한학. 적수.으 로있. 는.옳 은모. 델.견 해M일 에 서수 y있를다 .지 시지하시는관 계관가계 라i 고 한다면 이것도 하나의 불합리한 형이상학적 사실일 수가 있지 않겠 는가, 이와 같은 무한히 많은 형이상학적 이론들이 오우 홍일한 참 문 장들, 동일한 ‘세계이론', 그리고 참의 발견을 위한 동일한 최선의 방법 론과 양립될 수 있음을 주목하라 !

제 3 장 두개의철학적관점 지금까지 논의해 온 문제들로부터 자연적으로 두 개의 철학적 관접 (또는 이미 서문에서 언급하였다시피 두 개의 철학적 기질)이 야기된 다. 필자가 이 장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바는 철학의 거의 모든 문제가 이 두 가지 관접과 결부되어 있다는 접이다. 또 그러한 관접을 취함으 로써 어떠한 결과가 초래될 것인지도 고려할 것이다. 앞에서 논한 소위 ‘통 속의 두뇌'에 얽힌 문제도 그것이 두 가지 철학적 입장간의 차이접 을 아주 국명하게 드러내 주기 때문에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이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문제는 일종의 논리적 역설이라는 점 말고는 별다 른 관심을 끌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두 가지 철 학적 관접 중의 하나는 형 이 상학적 실 재 론 met a p h y si - cal rea li sm 이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관접에 의하면 세계는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일정하게 고정된 양의 대상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세계에 대한 참되고 완벽한 기술은 오직 하나뿐이며 진리 는 말이나 생각을 나타내는 기호와 외적 사물간에 성립한다는 일종의 대응관계에서 찾아진다. 나는 이러한 관접울 외적 exte r nal 관점이라 부르겠다. 왜 외적인가 하면 그것은 바로 유일한 신의 눈에 비친 관접 과 같기 때문이다. 내가 옹호하고자 하는 관정은 무어라 이름짓기가 다소 애매하다. 이 관접은 철학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생긴 것이며 오늘날에도 그것과는 전 혀 성질을 달리하는 다른 관점과 쉽게 혼돈되고 있다. 이 관접을 대격

i되nt어 e r n있al는 관가접 하이는라 고물 음부이르 겠오는직데 어그떤 이이유론는내. 에.어서.떤 만 대의상미들 로있 는세 계물는음 이구 성될 수 있다는 주장이 이 관접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내적' 관접을 취하는 철학자들은 한 개 이상의 세계에 대한 ‘참된' 이론 또는 기술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관점에 의하면 ‘진리’라는 것은 일종 의 (이상화된) 합리적 수용가능성 rati on al acce pt ab il ity이다• 즉 진리 라는 것은 마음에서 독립되어 있는 ‘사태'들과의 대응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 상호간에 또는 믿음과 믿음체계 속에 구현된 경험간에 성 립되는 일종의 이상적 정합성 ide al coherence 에 있다는 것이다. 신적 관접과 같은 유일의 관접이란 있을 수 없으며 오직 다양한 관심과 목적 울 가지고 세계를 기술하고 이론을 창출해 내는 실지 인간들의 여러 관 점이 있을 뿐이다. (‘진리정합설', ‘비실재론', ‘검증주의', ‘다원론', ‘실 용주의’ 등의 이름은 모두 내적인 관접에 적용되어 왔던 이름들이다. 그러나 이 이름들은 하나갈이 역사적으로 다르게도 적용되었기 때문에 내적인 관점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내적인 관접의 철학자들에게는 ‘동 속의 두뇌' 가설이 성립되지 않는 다. ‘통 속의 두뇌세계'란 단지 °.]O.F7. ]에 불과하며 단순한 언어적 허구 에 지나지 않는다. 죽 그것은 결코 가능한 세계일 수 없다. 이 이야기 가 어느 우주에서인가 참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유일한 신의 관접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왜냐하연 ‘동 속의 두 뇌' 이야기는 분명 세계 속에 있는 어떤 피조뭉의 관접에서 나온 것노 아니고 그렇다고 이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다른 세계의 어떤 관찰자의 관점에서 나온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만약 당선이 통 속의 한 두뇌가 아니라 동 속의 두뇌둘을 들여다보는 관찰자라 한다면 이 세계 는 지각을 가진 오은 존재가 동 속의 두뇌인 세계와는 다를 것이다. 그 러기 때문에 지각을 가진 모든 존재가 통 속의 두뇌인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은 애초부터 신적 진리관을 전제하고 있다. 반면에 외적인 관접의 철학자들에게는 우리가 모두 동 속의 두뇌라는 가설이 그렇게 간단히 파기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한 이론이 참인지 아 닌지는 그것이 어떤 관찰자에게 비친 대로의 세계에 들어맞느냐 안 맞 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이러한 의미에서라면 진리는 ‘관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 자체와 대옹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적 관점을 취하는 철학자들에게 제기하

고 싶은 문제는 진리와 지시 를 고정시키고 결정시킨다는 바로 그 대응 관계라는 것이 만약 외적 관접을 취하는 철학자마저도 동 속의 두뇌라 면 논리적으로 그에게는 해당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접이다. 그리하여 만 일 우리가 모두 통 속의 두뇌라면 우리가 바로 그렇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가 없다. 만약 생각할 수 있다면 단지 〔우리는 통 속의 두뇌이다〕라 고 괄호천 의이로서밖에 할 수 없는데 이러한 괄호쳐진 생각엔 그것아 참인지 아닌지 를 결정해 줄 지시조건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결국 우 리가 모두 동 속의 두뇌라는 가설은 성립될 수가 없다고 하겠다. ‘마술적 지시이론’이 맞 다고 가정해 보자. 예컨대 어떤 이상스런 빛이 있어 一-―‘순수지성의 빛 'I) 이라고 부르자_-―이 빛에 의하여 말아나 생각을 나타내는 기호가 그것이 가리키는 지시물에 연관된다고 가정해 보자. 이런 식으로 가정한다면 문제가 생길 리 없다. 통 속에 있는 두 뇌는 '나는 몽 속의 두뇌이다’라는 i같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생각할 때 ‘통 ’이라는 말은 (순수지성의 빛의 도움으로) 외부의 실지 통 과 대응되고 ‘속에'라는 말도 (순수지성의 빛의 도움으로) 공간상의 어 떤 실지의 관계에 대응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잘못되었음은 명백하다. 현재 이와 같은 견해를 지지하는 철학자는 없을 것이다. 통 속의 두뇌의 경우가 현대의 철학자에게 더욱 당혹스러운 까닭은 현대의 실재론자는 소위 ‘순수지성의 빛’을 믿지 많고오(또는 스스로 무엇인지 화인되는 대상이 즉 저 말이 아니라 반드시 이 말에 내재적으로 대응 되는 대상을 믿지 않고서도) 진리대응설을 견지하고자 하기 때문이 다. 이상에서 보았다시피 지금 우리가 당연한 문제는 다음과 갇다. 여기 에 지금 스스로 무엇인지 확인되는 대상들이 있다. 그리고 생각하고 계 산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마음 또는 두뇌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연 어떻 게 생각하는 자의 기호(또는 생각하는 자의 마음이나 두뇌의 기호)가 밖에 있는 대상들과 각기 독특한 대옹관계를 맺게 되는가? 답은오 늘이날 대외상적이 관아접니을라 취반하드는시 철저학 자대들상에에게 필서.연 .흔적.히으. .로찾 아대볼응 되수는 있기는호 란대 물론 없지만 그래도 지시의 본성이 기호와 외적 사물간의 맥락적 관계 (특히 인과적 관계)에 의하여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 1) ‘ 순수지 성 의 빛 noeti c ra y s’ 이 라는 용어 는 Zemach 의 암시 에 의 한 것 이 다. 2) ‘스스로 무엇인지 와인되는 대상 sel f-i den tifyi n g ob j ec t’이라는 용어는 D. W iggi ns 의 Subsla11ce and Sa1neness (Blackwell, 1980) 에 서 빌 어 온 것 이 다.

답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예를 들어 전자가 존재한다고 내가 믿고 있음 은 아마도 내가 읽은 여러 교재 덕분일 것이다. 이때 전자라는 말은 이 러한 의미에서 내가 읽은 교재와 아주 밀접한 연관성은 있다고 할 수 있어도 교재를 지시한다고는 할 수 없다. 어떤 기호와 관련하여 나에게 어떤 믿음을 심어 준 주된 원인이 되는 대상은 그 기호가 지시하는 지 시물이 아닐 수도 있다. 으로이 에연 관대되하어여 외있적다 고관 접할의 수 철있학으자나들 은이 때‘ 전이자 ’인라과는적 말 이연 관교은재 와적. 합인한과 적유 형의 것이 아니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이미 지시 할 수 없다면 어떠한 인과적 연관이 ‘적합한 유형'의 것인지 어떻게 결 정할수있단말인가?) 나 를 포함한 내적인 관접의 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사정이 전혀 달라 진다. 내적인 관접에 있어서도 기호가 누구에 의하여 어떻게 사용되는 지와는 관계없이 대상에 내재적으로 대응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특 사정의용 자사들용의자 개.집념.단적.에.인 의구하조여 내특에정서의 특방정식의으 로대 상싣에지 대사응용될되 는수 기있호다.는 ‘i대 상’이란 개념적인 구조나 도식과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무엇 이 아니다. 우리가 이런 또는 처런 도식으로 세계를 기술하려 할 때 여 러 가지 대상들이 비로소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생긴다. 어떤 것이 어떤 것과 일치된다 또는 대응된다고 말할 수 있음은 대상과 기호가 공히 세 계를 기술하는 도식 내해서 이우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말이 그 말이 속해 있는 언어 내에서 무엇을 지시하는지를 바로 그 말을 사용함으로써 묻는다는 것은 하나마나한 질문이다. 예컨대 ‘토 끼'라는 말은 토끼를 지시하고 ‘외계인'이라는 말은 (만약 그런 것이 있 다면) 외계인을 지시할 것임은 물론이다. ‘토끼'라는 말의 외연은 토끼들의 집합이고 ‘외계인’이라는 말의 외연 은 외계인들의 집합이 될 것임은 외적 관접의 철학자들도 물론 부인하 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초 ‘토끼'의 외연이 토끼들의 집합이라고 해서 바로 이 말이 ‘토끼'의 지시물이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고 보지는 않는 다.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는 지시물이 무엇인지, 죽 말과 사물간의 ‘대응관계’의 혼성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일이다(이 문제가 열마나 중요한지는 앞 장에서 이미 보았다). 그러나 하나의 개념체계 내에서 지시물이 무엇인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동어반복 외에는 별 할

말이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말과 사물간에 인과적 연관성이 필연 적으로 있다는 주장은 예컨대 ‘외계인’이라는 말이 우리가 실지로 어떤 외계인과 인과적인 관련을 맺든 안 맺든 분명 외계인을 지시한다는 접 만으로도 쉽게 반박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외적 관점의 철학자들은 우리가 어떤 외계인과도 인과적 인 관련을 맺지 않았다 하더라도 외계인을 지시할 수 있다고 반박할 것 이다. 이들이 외계인의 지시도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까닭은 우리가 치 구인들과 상호 연관을 가져왔음은 기정사실이고 ‘지구와는 다론 혹성으 로부터'라는 관계와 ‘지능을 가진 존재'라는 성질의 실례들을 경험해 왔 음도 기정사실이기 때문에 외계인을 지구와는 다른 혹성에서 온 지능을 가진 존재라고 경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구와는 다른 혹성에서’라는 관계는 ‘다른 곳에서’와 혹 4 성’으로 분석될 수 있다(뭉론 이있 는분 석모. 든은. 더것. 과진 행‘실될재 의수 r도ea l'있 다연)관. 성그을리 하갖여고 있이어들야은 할우 리것가이 라지는시 할생 각수 을 포기하고 실재의 연관성을 가진 종류의 것들을 지시하는 것은 오칙 기본적인 bas ic 용어들뿐이라는 생각으로 후퇴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실재의 연관성이 없고 따라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예컨대 외계인 둘) 종류의 것들의 지시문제에 관해서는 기본적인 용어들을 복잡하게 조합시켜 사용함으로써 기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안을 말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말'이나 ‘토끼' 같은 단순한 말일지라도 그 말의 외연에는 우리 가 인과적으로 관련을 맺지 않은(예컨대 미래의 말과 토끼, 또는 인간 과 한 번도 관련을 맺은 바 없는 말과 토끼들) 많은 것들이 이미 포함 되어 있다. 우리가 ‘말'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실재의 연관성을 가진 말 들뿐만 아니라 그와 갇은 종류의 모든 것들까지 지시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갇은 종류의’라는 말이 어떤 성질들을 유사한 것으 로 간주할지를 말해 줄 어떤 법주체계를 떠나서는 의미가 없다는 접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떤 의미로서는 결국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갇은 종류의' 것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O 이렇게 볼 때 어떤 것들은 0 유사관계 resemblance 는 모든 관계둘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관계라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문제는 유사관계가 가장 기본적인 것인 동시에 또한 지나치게 인만적인 것이라 , 는 데에 있다. ‘지나치게 일반각이라는 말은 파드납이 지걱하였다시피 어떤 의미에선 모지 돈않 다것이는 것모은든 누것구과나 유가사 인하정다합고 것봅이 다수. 있그다러는나 뜻어이떤다 .측 면예컨에대서 · 하보면눈 과유 사바하다가다 고유도사 하분

수 있다. 이문테면 둘 다 모두 ‘무르다’는 정에서는 유사하다고도 말한 수 있다. 때문 에 ‘유사하다’는 말에 아무런 제약운 두지 않는다면 유사관계가 철학칙 논의에 아무런 도웅도 중 수 없운 것이다. 근세 경험은자 흉 D. Hum e.{는 인과개념운 유사관계에 기초 하여 칭의하였는데 이 칭의가 크게 설득력이 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유사관계에 칙합한 계한옵 두는 데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우리와 적합한 인과관계’에 있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지시되고 또 어떤 것들은 그것들이 우리와 적합한 인과관계에 있는 것들과 ‘7같 은 종류의’ 것들이라는 사실에 의거하여 지시되고, 또 다른 어떤 것들은 '기술’에 의거하여 지시될 수 있다는 이 복잡한 주장은 거짓이라기보다 는 차라리 쓸모없는 주장이 라 하겠다. 나와는 상호 관련성 이 없는 말도 나와 상호 연관을 맺은 바 있는 말과 ‘같은 종류의’ 것임은 전자의 말도 후자의 말과 같이 말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들은 마치 애 초에 대상들 자체가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내가 그 대상들 중의 몇 개에(이를테면 적합한 인과관계’에 의하여 나와 ‘실재의’ 관련을 맺게 되는 말(馬)들) 일종의 그물을 치게 되는데 이때 내가 그물로 건질 수 없는 것들은 시간 • 공간상으로 나와 너무 떨어져 있기 때문에 또는 그 바슷한 이유 때문에 내가 사용하는 말이 어떻게 그물에 건져지는 것뿐 만 아니라 건질 수 없는 것에까지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이와 같은 사이비 문제에 대하여 형이상학 적아 니실라재 그론와자 들같은은 말종.이류.라의.,는 죽것 이그 자자동체적 으같로은 그종류뭉의로 대건져상에지도는 대적상용뿐된만다 고 말함으로써 ‘해결'된다고 주장한다. 이 해결에 의하면 결국 세계는 스스로 무엇인지 확인되는 대상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 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대상들을 여러 종류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계 겨]가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세계가 ‘스스로 무엇인지 확인되는 대상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의마는 외적 관접의 철학자들이 그 렇게 말할 때의 의미와는 다르다. ‘대상들' 자체가 발견되었다고 할 수 있는 만큼 만들어졌다고도 할 수 있으며 우리의 의지나 경험과는 독립 된 ‘7석 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 우리의 개념적 발명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인데 만약 그렇다면 대상들이 원래부터 일 정한 부호에 귀속되어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부호몰 와도. 구갇.로 온. 하종여류 의그 부‘호스스에로 속무하엇는인 지대 상확들인로되 는세 계대를상 ’각은색 하마기음 에때서문 이독다립.되 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외적 관점을 취하는 철학자들은 세 계를 마음에서 독립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스스로 무엇인지 확인되는 대상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자 한다. 이러한 입장은 지지될 수 없 다. 내재론과 상대론 내재론 In t ernal i sm 이 곧 ‘무엇이든 옳다’는 식의 피상적인 상대론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 내재론이 우리의 개념화 작용에 전혀 물들지 않 은 어떤 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들에 대응되는지 아닌지의 물음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이 주장이 바로 어떠한 개념체계라도 좋 다는 식의 상대론적 주장과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누군가가 정말 이런 식의 상대론을 신봉하여 개넝의 자유로운 비상을 허용하는 어떤 개념체계에 따라 그 체계의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본다면, 그리하여 그 럼에도 운 좋게 살아 남는다면 이런 식의 상대론이 가진 취약접을 그의 우의 둔지함식에에도 경불험구으하로고부 터대의번에 입.알력. 아i n차pu릴 t 도수 있있다을는 것접이을다 .부 인내하재지론는은 우않리는 한다.다 .죽 그지러식나이 려대요격 인겅 도정 합우성리으가로 만가 친성 립개되딩는에 것의.은하. 여.아 니형라성는되 었접다을고 인 정볼 수어 떤없 는개 념입적력 이선 택있과다도는 무 . 점관.은 한. 부오.인 직.한 다단. 하나다시의 말기하술여만 내인재칭론하에는 의입하력이면 란 있을 수 없다. 인식론자들에 의하여 지식의 출발점이라고 그렇게도 강조되었던 감각조차도 우리가 그것을 기술하려 할 때는 여러 가지 잡 다한 개녕적인 선택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죽 우리의 ‘지식'의 기초 라고 여겨지는 감각적인 입력조차도 말하자면 개념적으로 오영되어 있 ® 우리의 많은 기조적인 개념 윤 아 감각칙인 경험에서 형성된다는 깅협주의의 주장이 너 무 소박한 주장이고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은 파트남뿐만 아니라 많은 현대철학자 문 의 공동된 지직이다. 예컨대 냉·음'이라는 개념이 어멍게 얻어지는지 운 소박한 깅협주의자 둘은 다음과 간이 설명할 것이다. 삼은 대상운 관찰하는 관찰자의 많은 시각경험에는 어떤 공동칙인 요소가 있으며 관찰자는 이 공동칙인 요소 운 구빈해 내어 그것이 '상음' 이라는 것운 알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꼽·옹'이라는 개념이 감각깅힘 을- 동하여 형성 된다는 것이 경험주의자둘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밍은 ‘붉은' 시각깅힘운 관찰 자 스스로가 미리 선택할 수 있다는 가칭운 내포하고 있다. 다시 안하여 위의 선명은 남·음'이라는 개념아 미리 습득되어 있음운 전재하고 있다. 이 사살은 깅힙주의자 듄 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이론이나 개념이 감각경험에 전재되어 있고 선행한다는 집운 안해 준다.

다. 그러나 오염된 입력은 오영되지 않은 입력보다는 더 나은 것이다. 어떤 진술, 또는 진술들이 모인 체계 ——-이 론이나 개념적 도식 一 __ 가 합리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대체로 그 진술이 나 체계의 정합성 coherencea> 여부에 달려 있다. 죽 ‘이론적인’ 믿음 상 호간의 정합성, 경험적인 요소가 적은 믿음과 경험적 요소가 많은 믿음 간의 칭합성, 그리고 경험적인 믿음과 이론적인 믿음간의 정합성 등이 믿음의 합리적 수용 여부를 가려준다. 내가 앞으로 개진하고자 하는 입 장에 따르면 정합성의 개념과 합리적 수용가능성의 개념은 우리의 심리 작용과 아주 깊이 밀착되어 있다. 이 두 개념은 우리의 생물학적 구조 f와re e문 ' 화것적이 구아조니다에. 의그존것해들 있은는 우 .것리.으의.로 서개 념결이코며 소무위엇 인‘가가치 실중재립적적인인 va것l에ue 관한 개념이다 이 두 개념에 의해서 객관성이 정의될 수 있는데 이때 의 객관성은 후리해 대한 객관성이지 신의 눈에 비친 형이상학적인 객 관성은 아니다. 객관성과 합리성이란 인간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바로 우리 자신들에 속하는 것으로서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는 성질 의 것아지 어떤 절대적인 성질을 가진 것은 아니다.

® 어민 믿음 be li e f이 어떤 체계에 칭합적이라는 것온 첫째 그 믿음이 그 제계내의 다른 믿움문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뜻이요, 두번째 그 믿음이 다른 믿음둥과 필연걱 함축관 계 내지는 상호설명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거부모한든 다관고찰 자해들서 로진부리터를 독합립리하적여 수‘용그 가자체능’성 과참 인바 로이 론동.이일. .시있 한다다는 는주 장뜻을은 아니다. 진리가 합리적 수용가능성과 동일시될 수 없는 까닭은 진리는 기본적으로 상실될 수 없는 진술의 속성인 반면 합리적 정당화는 상실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구가 평평하다’는 진술은 아마도 3000 년쯤 전에는 합리적으로 수용되었을 것이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지구가 평평하다’는 진술은 3000 년쯤 전에는 참이었다고 말한다면 이것 은 찰못이다. 찰못이 아니라면 3000 년 전의 지구 모양이 지금의 지구 모양과 달리 평평했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합리적 수용가능성은 시간과 인간에 상대적인 개념이다. 게다가 이 개념은 또 컨정다)대도 를이우 리허경용는우한 에‘다 지.사구 용가진되 리둥.는도글. 다 .‘때’정 도는로’ 는는전 술진정은술도 의문진 제리정.라에확.고 .도근 를말사 해하말지다하기고는도 말 것하할이지 지때만 도 수 (용있예 가능성이나 정당화의 칭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가 이강와조 갇하이고 자말 한하다는고 해것서은 외진적리 는관 점합이리 적결 국 수옳용다성는을 뜻이은. 상 . 아화.니 시.다 킨.. 내것. i dea li za ti on 이라는 접이다. 우리는 마치 인식의 이상적인 조건 갇은 것 이 있는 듯이 생각하여 그러한 조건에서 어떤 진술이 정당화되면 ‘참'이 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식의 이상적 조건'이란 마치 '굴곡 없는 평면'과 갇을 것임은 물론이다. 우리가 그러한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기란 실지 로 불가능할 것이며 그러한 조건에 충분할 정도로 근접해 본 적이 있는 지조차도 불확실하다. 굴곡 없는 평면을 만든다는 것도 사실은 불가능 하다. 그렇지만 굴곡 없는 평면에 관하여 이야기함은 그래도 ‘현실적인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최대한도로 접근은 할 수 있 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이상적인 조건 아래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함은 마 치 명확한 개념을 불명확한 개념에 의거하여 설명함과 갇아 보일지도 모이른라다는. 개그념러도나 그 ‘다눈지은 희명다백’한와 개갇념은이 고아정.님.된이. 단판골명예된로다부.터 여 벗하어든나 나면는 ‘참지' 금 진리의 형식적 정의를 내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비형식적으로 진리 개념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굴곡 없는 평면에 비유된다는 점은 제쳐두고 이상적 진리론의 핵심적 인 내용을 말한다면 다음과 갇다. (l)전리가 당장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정당화와는 무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정당화와 무관한 것은 아니 다. 어떤 진술이 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 전리는 불변성 또는 ‘수령성’을 가져야 한다. 만약 어떤 진술이 그 진술의 부정과 동시에 ‘정당화'될 수 있다면 최대한의 이상적인 조건이 갖추어졌다 하더라도 그 진술이 진리치를 가 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유사’이론 진리대옹설은 분명 자연스러운 이론이다. 칸트 이전에는 진리대옹설 을 최지근지 하더지밋 M않.은 D u철m학me자 t는t은 아비.무 실.도 재. 론 없. 적었다 .견 해 (소위 ‘내적 관장과 동일 함)와 환원론적 견해를 구별한 바 있는데 3) 이는 환원론자들이 형이상 3) 더잇의 이 견해는 'What is a the ory of Meanin g I , II' in Truth and Oth e r Enig mas

(Harvard, 1980) 에 · 개진되어 있다. 앞으로 출판될 윌리암 제입스 강의 (1976 년에 Harvard 대학에서 있었음)에서 이 견해는 더 상세히 계시되어 있다.

학적 실재론자, 즉 진리대응설의 지지자들이 될 수 있다는 접을 지적하 기 위해서였다. 일군의 주장들(예컨대 정신적 사건에 관한 주장들)과 관련하여 환원론자들이 취하는 입장은 그러한 군에 속하는 주장들이 그 군의 밖에 있는 사실에 의하여 ‘참인 것으로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어 떤 환원론에 의하면 정신적 사건에 관한 주장이 ‘참이 되는' 것은 행위 에 관한 사실에 의거해서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든다면 ‘정말 있는' 것은 마음과 마음속에 있는 감각뿐이라는 버클리의 견해도 환원론에 속한다. 왜냐하면 버클리의 주장에 의하면 의자나 책상과 같은 일상적인 ‘물리 적 대상’에 관한 문장의 참 또는 거짓은 감각에 관한 사실들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이다. 환원론적 주장을 취하는 견해일지라도 환원과 관련된 문장에 대해서 진리대응설을 주장한다면 그 근저에 있어서는 형 이상학적 실재론과 다 룹 바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처하게 비실재론적인 입장을 취해야만 참다운 비실재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원론자들을 비실재론자로 간주하는 잘못이 자주 실범.해지.진.로다 .있 는환가원 론하자는와 문 다제른에 철관학해자서들이간지의 진의리견가의 무불엇일인치가는 하경는맡 우문럿제이에 트관 해이서전가에 아그니가라 는기. 본.더적.밀.인의 또지는적 은환 원옳다불.가 능이 한잘 주못을장 들피이할라 수여 겼있던다 면것 에칸 관하여 형이상학적 실재론자가 아니었던 철학자는 한 사람도 · 없었다는 애초의 나의 견해가 더 그럴싸해 보일 것이다. 약 2000 년 칭도나 지속되었던 가장 오래된 형태의 진리대옹설은 아리 스토텔레스에서 나왔다고 여겨진다. 고대나 중세의 철학자들이 아리스 토텔레스가 최초로 진리대응설을 주장하였다고 여겼는데 정말 그가 진 리대웅설을 주장하였는지 나로서는 확인할 도리가 없으나 적어도 그가 사용한 언어를 보면 그러한 접이 엿보인다. 이 이론을 나는 유사 겨서 기 론 the sim i litud e th eory of re fe rence 이 라고 부르겠 다. 왜 냐하면 이 이론은 우리 마음속의 표상과 외적 대상간의 관계는 문자 그대로 유사 관계 s i m il ar ity라고 보기 때문이 다. 이 이론도 현대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표상이라는 개념을 도입 한다. 외적 대상에 대한 마음의 표상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십상

p han t asm 이라고 불렀다. 심상과 외적 대상간의 관계는 동일한 형식을 가지는 관계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였다. 심상과 외적 대상이 유사 하기 때문에(죽, 동일한 형식을 가지기 때문에) 마음이 심상울 가진다 는 것은 마음에 외적 대상의 형석이 떠오른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이다 .4)

4) Aris t o t l e, De Anim a, Book III, ch. 7 and 8 참조.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일감관에 의하여 지각될 수 있는 대상의 성질들, 예컨대 붉음 같은 것까지 우리의 심상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우리 마 음속에 있는 붉음은 대상으로서의 붉음과 정말로 갇은 성질의 것은 아 니다) 심상이 대상과 공동으로 같이 가질 수 있는 것은 한 개 이상의 감관으로 지각될 수 있는 길이 len gt h 나 모양 sha p e 갇은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유사설에 대한 이와 같은 제한은 17 세기의 철학자들에 의해서도 주장 되 었 다. 록크 J. Locke 나 데 까르트 R. Descar t es 는 색 깔과 같은 ‘제 이 secondary' 성질의 경우에도 우리 심상에 나타난 성질이 물리적 대상의 성질과 정말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록크는 입자론자 Cor p uscula ri an 이었다. 즉 원자론적 물질관의 옹호자 이었다. 현대 뭉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록크도 붉은 헝짚조각과 관련하 여 나의 심상에 감각적으로 나타난 붉음은 그 헝짚조각에 속하는 단순 성질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종류의 감각(정신물리학적 용어를 빌린다면 ‘주관적인 붉음’을 표출시키는 감각)을 일으키는 힘'으로 보았다. 이 힘 은 복잡한 구조물 가진 일종의 성 향적 dis p o sit ion al 성 질 ® 로서 록크가

® 우리는 우리둥 자신이나 뭉리칙 세계 운 기술할 때 다양한 방식으로 성향 d i s pos iti on 을 나타내는 술어둘을- 사용한다. 예컨대 어떤 사웅운 두고 그것이 두듣기면 퍼진다든가 웅이나 공기가 스며들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운 두고도 그가 관대하다, 과민하다, 사려깊지 못하다 등의 맏운 할 수도 있다. 포퍼 K. Po ppe r 는 모든 성질들이(뭉리적인 것이돈 십리적인 것아돈) 전부 성향칙인 성질이라고 말한 바 있으며, 굿맨 N. Goodman 도 일반걱으로 사물의 객관적 성질운 기술한다고 여 겨질 수 있는 대부분의 술어들이 모두 성향을- 나타내는 술어라는 장운 지적하였다. 또 최근에 하레 H.R. Ha rf e 는 옛날 영국 경험론자둥아(흉윤 제외한) 즐겨 사용하던 힘 p owe r'이라는 개념이 실재론적 과학철학의 형이상학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는데 이때 힘'이라는 것이 바로 성향과 동일한 것이거나 아니면 매우 밀접히 연관 된 것이다. 그러나 성향적 술어룹 정화하게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지는 아칙도 문제거 리로 납아 있다. 가정이나 조건, 그 중에서도 북-히 소위 ‘반사실적 가정 counte r - fa c t uals’ 이라는 것과 관련하여 성향걱 술어훙 이해하려는 것이 가장 일만적인 정근방 식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어떤 대상이 물에 용해천 수 있는 성질윤 가지고 있다고 말합은(이 예는 카르납이 돈 예이다) 그 대상이 물에 넣어졌윤 때 항상 용해된다는 것 만을 의미하지 않고, 실제로는 물에 넣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만약 뭉에 넣어진다면

용해륄 것이라는 뜻도 합께 포합하고 있다. 그러나 성향긱 성질에 대한 이러한 이해방 식도 완벽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선 반사실칙 가정이라는 것 자세부터 가 어떤 논리적 성져의 것인지 해명되지 않았고, 더 근본적으로는 성향적 성질운 반사 실걱 가정으로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유사하다’는 개념과 '자연종 na tur al k i nds’ 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미리 전계되어 있어야 말 것인데 이 두 개념에 대한 철학걱 해명 부터 아칙도 하나의 숙제로 납아 있기 때문이다.

살았던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예의 헝짚조각과 관련하여 말한다면 그 헝짚조각의 어떤 특수한 미시적 구조가 여러가지 파장의 빛을 선별 적으로 흡수하거나 만사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힘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갇은 총유의 설명은 이미 뉴돈이 제시한 바 있다.) 그 헝짚조각의 미시 구조 자체에 ‘붉다'는 성질이 들어 있다면 내가 주관적인 붉음의 감각을 가질 때 내 마음(또는 두뇌) 속에 일어나는 사건에 바로 그 ‘붉다’는 성 질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없다. 물리적인 붉음과 같은 물리적 대상의 성 헝질 은짚 조주각관과적 인붉 은붉 음잔과상 같a f은t er -정 i m신a g적 e인 이 사정 건말과로 전유혀사 한별 개것의 은 것아이.다니.. .다 . 붉은즉 이 양자는 동일한 형식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록크는 그의 입자론적 철학에서 기본적이고 불가환원적인 것 으로 간주되는 성질들(모양, 운동, 위치 둥)에 관해서는 유사 지시이론 을 견지하고자 하였다(록크 전문가들 중에는 이 접에 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고 있으나 분명 록크는 제일차 성질의 경우에는 관념과 대상 사 이에 ‘유사성’이 있고 반면 붉음이나 따뜻함의 관념과 대상의 붉음이나 따뜻함 사이에는 유사성이 없다고 말하였다 .5) 이러한 식으로 록크를 해석함은 록크와 동시대 철학자들이나 그 후 18 세기 철학자들에게 보편 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5) Locke, An Essay Concernin g Human Understa n din g , Book n , Ch. YI-참 조•

버클리의 솜씨 버클리는 유사 지시이론에서 매우 달갑지 못한 결과가 초래된다는 점 을 발견하였다. 죽 유사 지시이론에 정신적인 것들(‘정신과 관념들', 죽 마음과 마음에 일어나는 감각들)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 는다는 접이 함의되어 있다는 것이다. 버클리 철학의 전제 __- 유사론 ―는 그가 록크로부터 단순히 전수한 것이 아니라 버클리 이전에도 그리고 버클리 이후 한 100 년간 정동 지시이론으로 여겨졌다는 접은 일 반적으로 널리 인지되어 있지 않다. 이 이론이 실제로는 얼마나 그 근

거가 박약한지는 이미 지적하였다. 버클리의 강의는 매우 단순하다. 제 2 차 성질에 관해서는 유사이론이 맞지 않다고 하는 동상적안 철학적 논의(지각의 상대성에 의거한 논의) 는 옳다. 그런데 이 논의가 재 1 차 성질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길이, 모양, 운동 같은 제 1 차 성질도 상이한 지각자에게 각기 상이하 게 지각되며 또 동일한 지각자에게일지라도 지각하는 경우가 다름에 따 라 상이하게 지각된다. 어떤 책상이 그 책상에 대한 나의 像과 동일한 길이풀 가졌는지 또는 니의 상과 동일한 길이룰 가졌는지의 여부를 묻 는 질문은 당치 않는 질문이다. 그 책상의 길아가 예컨대 3 f ee t이고 그길이 책 룰상 에가 진대 하심여상 을내 가가 지명고확 한있 다상고을 할가 지수고 있 겠있는다가고? 해 서길 이내는가 물.3 리.f e적.e t 인의 것아고 상은 정신적인 것인데 어떻게 정신적인 이미지가 물리적인 길이 룽 가질 수 있겠는가? 말하자면 정신적 이마지는 파리의 표준자에 비 교하여 측정될 수 없다. 울리적인 길이와 주관적인 길이는 물리적인 붉 음과 주관적인 붉음만큼이나 서로 다른 것이다. 고 버할클 리수의 었 결은 론것을은 다다르른게 감.표각.현이.한.나다 면심 상어일번 뿐강이가고이 나그 밖겁에강는에 아유무사 하것다도 없다. 그렇다면, 그리고 우리의 ‘관념'(죽 이미지나 ‘심상')과 관념이 대 표하는 것 사이의 유사성에 지시문제의 관건이 있다는 가정이 옳다면 ‘관념'(정신적 이미지)은 또 다른 관념이나 감각 이외에 어떠한 것도 지 시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대상을 생각하고, 인지하고, 지 시한다고 생각하는데 생각되고, 인지되고, 지시되는 대상은 사실 현상 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실지의 대상을 생각할 수 없다면 그것이 존재 한다는 것도 물론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물리적 대상에 관하여 이야 기하는데 이것은 사실은 우리의 감각의 규칙성에 관한 이야기에서 파생 된 것에 불과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물리적 대상에 관한 우리의 이 야기는 전혀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버클리가 살았던 당시나 .::Z. 이후 그룹 거의 정신도착자 또는 뛰어나 긴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는 데 이는 그가 내세웠던 전제에 어떤 기이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물질 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감각의 구성물로서만 존재한다)는 그의 결 론이 도대체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사 지시이론에 서 그러한 당치 않은 결론이 나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철학온 일종의

위기를 맞이한 셈이다.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을 따르기를 거부한 철 학자들은 지시문제를 전혀 다론 각도에서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식과 진리에 대한 칸트의 설명 칸트 스스로는 그의 철학을 내재론이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내재론’ 또는 ‘내재적 실재론’의 진리설을 최초로 제안하였다고 보는 것 이 칸트에 대한 가장 정확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칸트는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으로 간주하였다(이 접을 그는 분명하게 표명하였다)는 점은 명백 하다. 또 그는 인과적 실재론-우리가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감 각뿐이고 뭉리적 대상은 추리된 것이라고 보는 입장 __- 도 받아등일 수 없다고 보았다.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을 때 내 바로 앞에 책상이 있다는 것은 매우 의심스러운 가설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는 칸트가 보기에는 하나의 대단한 철학적 ‘물의'였다. 두번째 나는 칸트가 버클리의 논의의 핵심이 무엇인지, 즉 버클리의 논의가 유사 지시이론에 의거하고 있다는 접과 버클리의 논의를 반박하 려면 유사 지시이론을 반박해야 한다는 접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칸트가 이러한 용어로 이러한 식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 다. (정신적인 기호와 그 기호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하는 문제는 오래된 문제이지만 그 관계를 ‘지시’라는 말로 표현하기는 매우 최근의 일이다.) 그러나 곧 밝혀지겠지만 칸트가 실지로 말한 것에 토대를 둔 다 하더라도 그가 유사 지시아론을 거부했음이 틀림없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칸트에 대한 옳은 해석으로 향하는 첫 근사치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 을지라도 칸트를 유익하게 해석하는 방법 한 가지를 제시하겠다. 칸트 가 지각의 상대성에 근거한 강의를 제 2 차 성질뿐만 아니라 소위 ‘제 1 차' 성질에까지 적용하는 버클리의 주장을 받아들였으나 그 주장에 대 해서 버클리와는 다론 반옹을 보였다고 생각해 보자. 제 1 차 성질과 제 2 차 성질의 구별을 폐기하고 록크가 ‘단순한' 감각성질이라고 불렀음칙 한 것만을 기본적인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 버클리의 반응이었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록크는 제 2 차 성질도 물리적 대상의 성질로서 대상으로 하여금 일정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감옹을 주도록 하는 성질

__그 혼성흔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은-즉, 힘과 같다고 하였다. 어서 떤그 렇것이다 는붉 다것이거 나아 니따고뜻 하우.다리.거.와나 관보련드하람여다 고그 렇말다하는는 것것이은다. 신 의 관접에 록크가 제 2 차 성질에 관하여 말한 것이 그대로 오은 성질一一」단순 성질, 제 1 차 성질, 제 2 차 성질 동을 모두 합쳐서 (이렇게 구분할 만한 뚜렷한 근거도 사실 없다) -에 관해서도 적용된다고 말하는 것이 칸 트를 유익하게 해석하는 한 방법 (칸트에 대한 최초의 근사적 해석의 하 대나상로반에서야 ) 모관.이 든하라. 여고성. 질우나. 이리는. 가생2. 차 각무.. 적한엇.. 인다.을. .6것).말 이하.라.는면. 그 어것떤은 결그과 가대상 나이오 겠이는러가저?러 한어 떤방 식으로 우리에게 감응을 준다는 형식을 띠게 될 것이다 . 다시 말하여 대상이 이성을 가지고 일정한 생물학적 구성을 이루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기술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또 대상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하는 문제가 그 대상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마음과 독립되어 있 는 어떤 실재적인 것과 유사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대상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마음으로부터 독 립된 어떤 것의 모사가 아니다. 이상이 대충 칸트가 의도한 바이다. 칸트는 마음과 무관한 어떤 실재 가 있으리라는 접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이 점은 그에게 있어서 는 이성의 한 요청이었다. 그는 이 마음에서 독립된 어떤 것은 물 자체 D여i ng본 . a체.n세. s계i.c h , 동본의체 여적 러대 상가지 또 는용 어본를체 사no용um하e여na , 표혹현은하 였집다 합.적 그으러로나 말 하이 본체적인 어떤 것에 관하여 아무런 사실적인 개념도 우리는 형성시킬 6) 칸트는 자신의 입장운 Prole go mena 에서 칭와히 다음과 갇이 요약하였다. 외적 사물에 관한 많은 술어들이 사뭉 자제가 아니라 현상에 속하며 그 사물에 대한 우리의 표상운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칭은 그렇다고 해서 의적 사물의 존재 에 손상운 입히지 않고서도 Locke 이전에, 그리고 더 분명히는 Locke 이후에도 널 리 인정되어 왔다 . 예컨대, 뜨거웅, 색깔, 맛 등이 그러한 종류의 것둥이다. 이제 좀더 나아가 외연, 위치, 더 일반적으로 공간, 또는 공간에 속하는 것둥(불가칭무 성, 모양 등)과 갇온 소위 1 차적인 성질돌마저도 단순한 현상에 불과하다고 하더라 도 이에 반대할 이유문 계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운 것이다. 색깔이 사물 자체에 속 하군 는관 념성론질이자 라아고니 못라. 박.시운.각 수의. 없한..다 변시형피에 .어붕렵과 학물.세다에곤 대준한장 학칙늘관 운. 사수람이성 해있 다수고은 해노서은 그경 질들이 단순히 그 뭉재의 현상에 불과하다는 나의 주장 때문에, 단순히 이 이유만으 로, 나의 철학도 관념론이라고 부문 수는 없을- 것이다.

수가 없다. 본체세계라는 개념마저도 명확한 개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사유의 한계개념 Grenz - Be griff에 지나지 않는다. 이 본체세계의 개념 이 칸트철학에 있어서 불 필요한 형이상학적 요 소 라고 오늘날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칸트가 아마 옳았는지도 모 론 다. 즉 마음으로부터 독립된 어떤 경험의 ‘근거 ' 에 관한 어떠한 이야기도 넌센스에 빠지고 만다고 하 더라도 우리는 어떻든 그러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 을 수 없을 듯하다.) 동시에 일상적인 ‘경험적 ' 대상에 관한 언급도 사물 자체에 관한 언급 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것에 관한 언급일 따 름 이다. 참으로 묘한 것은 칸트가 이상의 모든 논 의 를 외적 대상에뿐만 아니 라 감각( ‘ 내적 감각의 대상')에까지 적용시키고 있다는 접이다. 이건 좀 이상하게 보인다. 어떤 관념이 감각에 대응하는지 아닌지도 문제가 될 까? 그러나 칸트는 여기서 무언가 심오한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내가 감각 E 를 가지고 ‘E 는 붉음의 감각이다’라고 주장함으로씨, E 를 기 술한다고 가정 하자 . 만약 ‘붉음'이 단지 이 와 같음 like t h i s 만을 의 미 한다면 ‘E 는 붉음의 감각이 다'라는 주장도 단지 ‘E 는 이 와 같다' (E 에 임하여), 즉 ‘E 는 E 와 갇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 이며 따라서 사실 아무런 판단도 성립되지 않는 셈이다. 그것은 비트겐 슈타인의 말대로 꿀꿀거리는 돼지의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만약 붉·음'이 칭말 어떤 일정한 부류 를 구획짓는 말이라면, 그리하여 지금 이 감각 E 가 다은 때에 내가 붉음’이라고 부르는 감각과 홍인한 부류에 속한다면 나의 판단은 칙집적으로 주어진 것, 즉 ‘단순한 저것' 이상의 것을 포함하게 되며 이러한 판단에는 내가 이 순간에 겪지 않고 있는 다른 감각들과 서간(칸트가 보기에 시간이란 본체세계에 속하는 어떤 것이 아니고 현상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형식이다)에 대한 언급이 암암리에 내재되어 있다.” 붉음의 감각이라고 분류되는 감각들 이 서로 상이한 시각에 생기더라도 모두 ‘정말' (본체적으로) 유사한지 아닌지는 초점을 잃은 질문이다. 그 감각들이 서로 유사해 보인다면 (죽 앞서 가졌던 감각이 지금 겪는 이 감각과 유사한 것으로 기억하고 7) 여기서 나는 좀 시대착오칙으로 보일지라도 일부러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P슈h타il o인so이 ph i 돈c a l 예In의ve s십 ti충g a t에io n는s 』칸에트서 걱따인온 발예상로이 칸무트리의박 혀견 해있 윤다. 설 명칸하트였의다 .이 론실운지 로십 분비 트이겐해 학무 있었던 혜겔도 어떤 판단이 그것이 섣혹 감각인상의 판단일지라도 정말 판단이 되기 위해서는 칙겁 ‘주어진' 것 이상의 것운 담아야 한다는 겅운 지적하였다.

또 지금 겪는 감각이 다시 기억된 감각으로 되어 미래의 감각도 이 기 억된 감각과 유사하리라고 예견한다면) 우리들에 상대해서 유사한 것이 다.칸 트는 내 적 감각의 대상이 초월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 니.고. ‘ 초월 적 으로 관념 적 인 tra nscendenta l ly i deal' 것 이 며 , 소위 ‘외 적 ' 대 상과 마 찬가지로 직접적으로 알려질 수 없는 것이라는 접을 여러가지 표현을 사용하여 여 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붉음’이 라고 불리우는 감각도 혼성 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를 알아보기 위해서 그것을 본체적인 대상과 직 접적 으로 바 교할 수 없음은 ‘금'이라고 불리우는 대상도 본체 적인 속성 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를 알아보기 위해서 그것을 본체적인 대상과 직접 비교해 볼 수 없음과 마찬가지이다. 은최.초 ‘.모2의. 든차 적근성이사질다치은'에( 즉2불 차모과적든하인 다 성것.고 질이. 은생다. 각 ' 라힘.되 는이.는 다. 주) 이장는유이 는주 칸장다트에음의 과 의견 하같해면다에. 어로‘떤 모다 든책가 가상성질을는 두고 그것이 이 를 테면 소나무로 만들어졌다고 말함은 본체적 대상에 어 떤 힘 (우리에게 소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게 하는 성향)을 부여하 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또 그 책상이 갈색이라고 말함은 바로 그 홍힐 한 본체적 대상에 다른 힘을 부여함과 마찬가지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각각의 본체적 대상은 칸트가 ‘표상'이라고 불렀던 것에 의거하여 각각 의 현상(우리에 상대하여 있는 것)에 대응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접 때문에 칸트는 밖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진리대웅설을 포기하고 말았다. 칸트는 분명 진리대응설을 포기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 로 그는 진리란 ‘판단과 대상간의 대웅'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칸트가 일컬었던 이른바 ‘진리의 명목상의 정의’에 불과하다. 칸트의 이 말과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들이 말하는 ‘진리대응설’을 동일시함은 중대 한 오류라고 나는 생각한다. 칸트가 정말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들이 말 하는 ‘진리대응설’을 지지하였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선 그가 경험적 판단의 소위 ‘대상’이라는 것을 실재론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는지 아닌지 를 알아보아야 한다. 칸트의 견해에 의하면 외적 또는 내적 대상(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에 관한 판단에 의하여 기술되는 본체세계는 이성을 가진 존재자에 의하여 구성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판단도 결국은 힘에 기인한다.

그러나 힘은 본체세계 전체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의 표상에 책 상과 말(馬)과 감각이 나타났기 때문에 이들에 각각 대응하는 본체적 책상, 본체적 말, 본체적 감각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들에 강대하려 었忘 것과 사옹 자제강에 i더 l i의 대흥관계초차오 없다. 칸트 는 관념과 뭉 자체간의 유사성의 개념은 뭉론, 추상적인 구조적 동일성 의 개념마저도 포기하였다. 이것은 다시 알하여 그의 철학에 진리대응 설이 설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참다운 판단이란 어떤 것인가? 칸트는 우리가 객관적인 지 식을 갖고 있다고, 죽 수학의 법칙, 기하학의 법칙, 울리학의 법칙, 그 리고 그 외에 많은 개별적인 경험적 대상에 관한 진술들을 우리가 알고 있였음다을고 믿보었면다 .그. 래.그.도가 진‘리지식의' 이개라념는이 용 어암나암리 ‘7에비 관전적'제이되라고는 있용는어 를것 사갇용다하. 그러나 대응관계가 아니라면 진리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칸트의 저서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죽 지식(‘참다운 판단')이란 이성적 존재자가 이성을 갖춘 어떤 존재자일지라도 가질 수 있는 충분한 경험에 근거하여 받아들이는 ‘진진술리을’는 말우한리다가는 점 것근이할 그수의도 대인답지이할다 .수 도이 것없다 .이 외진.의 리. 는.다 른적. 합.의 한.미 에궁.서 극.의적. 선과 간다. 경험주의의 대안 지금까지 논의된 바에 의하면 진리대응설과 유사 지시이론을 감.각..과 심상에만 관련되는 것으로 국한시킴으로써 양 이론을 포기하는 것만큼 은 피할 수 있다. 칸트 이후에도 유사성에 의하여 관념은 우리 자신의 (좀 더 문제성이 있지만 다른 사람의 감각까지도) 강가을 지시하게 되 고 바로 이러한 지시가 인식론적인 견지에서 가장 원초적인 지시라고 믿는 철학자들은 많았다. 왜 이러한 이론이 타당하지 못한가는 어떤 ‘관념'(감각 또는 이미지) 을 닮을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관념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다, 죽 정신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사이에는 아무런 유사성도 없다는 버클리의 논의의 핵심을 상기해 보면 알 수 있다. 버클리에 의하면 우리가 가진 관념들은 다론 정신적인 것과는 닮을 수 있어도 ‘물질'과는 닮을 수 없

다. i사실은그 러두것나 은 사 이물모와이든 같닮것은을과 주수유장. 사.이있하. 는.다중 요측고한면 할 은 점 수에무. 서한.있 히 다.거 . 짓많예을임컨 을것대 이알 며지아 금차그 려런이야 접순한에간다서에 . 히가 지나는의 타과.자 거기 행에동 의대 한결 과나의로 간감주각될과 수호 주있머는니 에성 질있들는( 그동 전감각은이 양 자지가금 공일 어나고 있다는 점과 그 동전이 지금 내 호주머니 속에 있다는 점)을 가 지고 있다는 접에서 서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즉 만약 내가 타자를 치기 위해서 착석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감각을 가지지 못할 것이며 또 내가 호주머니 속에 동전을 넣어 두지 않았다면 동전이 호주머니 속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감각과 그 동전이 모두 20 세기에 존재한다든 지 또는 모두 영어로 기술되었다 둥둥이 모두 양자가 공동으로 가지는 성질들이다. 엉의의 두 대상간에 발견될 수 있는 유사접의 수가 제한되 어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우리의 지력과 시간상의 제한 때문일 따름이다. 물론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는 ‘유사성’이 좀더 제한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유사성을 문제삼고 있는지를 밝히지도 않고 ‘A 는 B 와 유사한가 ? '라고 묻는다면 이 질문은 공허 한 질문이 되 고 만다. 이 간단한 사실에서부터 지시문제의 내적 핵심이 유사성에 있다는 주 장은 무한소급의 오류에 빠지고 만다는 결론이 추출될 수 있다. 비트겐 슈타인 아 든 예 를 사용하여 누군가가 ‘사적 언 어 pr iv a te lang u ag e' , 축 자신에게 직접 주어진 감각만을 지시하는 언어를 고안해 내려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어떤 감각 X 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X 와 질적으로 동일한 감각에만 적용되는 기호 E 를 창출하였다고 하자. 이때 그가 사 실상 의도하는 바는 X 와 유사한 감각들에만 E 를 적용시키려는 것일 것 이다. 이것이 그가 의도하는 바의 전부라면 __g 두, 어떤 것이 E 라는 부류 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위해서 어떤 면에서 X 와 닮아야 하는지 를 밝히지 않는다면 이미 언급하였다시피 그가 의도하는 바는 공허한 것이 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어떤 면에서는 X 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기 때 문이반다면. 그가 어떤 접에서 유사한지를 밝힌다면, 죽 어떤 감. 각. 이. R. 이.라.

는 접에서 X 와 유사 할 경우 오직 그• 경• 우• 에• 안• E• 이• 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0.l 口. l E 라는 용어 로 표현 하고자 하는 감 각과 그 감 각 에 적 합한 성 질들 을 지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어 떻 게 해서 이 것 o.l 가능하게 될 까? ( ‘ 두개의 다 론 감 각 Z 와 W 에 관 심을 집중시키 고 두 감각 이 Z 그 리고 W 와 유사할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R 이라 는 접 에서 유사하다고 생 각 함 으로써 ’라고 대 답한다면 무한소 급 의 오 류 에 빠지 게 된 다. ) 유사 지시이론이 가진 이 난접 은 앞서 언급한 ' 적합한 종류 의 인과관 계’와 결부된 난접과 동일하다. 만약 내가 ‘'' 말 이라 는 말은 어떤 경우 에 나로 하여금 내 앞에 알 이 한 마 리 있 다”고 발 언하 도록 해 주는 성 질을 가지고 있는 대상 을 지시한다 ’ 고 말한다면 이때 생 기는 난정은 그 러한 성 질 이 너무 많다는 접이다. 예컨대 H - A ( ‘ 말 모 양'의 약자) 룽 정 상인으로 하여금 ‘여기 내 앞에 말이 한 마리 있다’ 고 발언하도록 하는 총체적인 지각상황이라고 하자. 성질 H-A 가 나타 날 때 나는 ‘내 앞에 말 한 마리가 있다’고 말하개 된다(설혹 내가 환상운 경 험할 때라도 마 찬가지이다). 그러나 ‘ 말'은 그러한 성질을 갖 춘 상황 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동물을 지시한다. 독정한 자연종에 속하는 성 질 을 갖춘 동 뭉과 H-A 라는 성질 을 갖춘 지각상황이 ‘모두' 인과적 연쇄관계에 의하 여 ‘내 앞에 말 한 마리가 있다’는 발언과 연관되어 있다. 사실 ‘내 앞 에연 쇄말에 한의 하마여리 가관 련있되다’ 어는 있발다언. 에유는사 성석 기이 시너대. 무의. 다.알 양.의 하 . 고출. 현많.까 기.지 도때 문인에과 적지 시지.나문.치재..게가 많단기순 히때 문유에사 의지 시문의제 로문 제간가주 될단 순수히 없인듯과이적 인연과쇄적관 계연의쇄 관문계제도로 도 간주될 수 없다. 반면 지나치게 많은 인과적 연쇄관계 를 제한하여 ‘ 말 은 내 앞에 말 한 마리가 있다”고 발언하도록 해 주는 성질을 가진 대상을 격합한 유형의 인과관계에 의하여 지시한다'고 말한다면, 내가 무엇이 적합한 유형의 인과관계인지 를 밝힐 수 있다고 가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유형의 인과관계를 구성하는 사물이나 성질들을 0.l 口. l 지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문제로 남는다. 즉 문재는 그러한 성질들을 미리 지시할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이다. 결론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유사 지시이론에 의하여 지시문제가 해 명될 수 있는 용어란 하나오 없다는 것도 아니며 또 독정한 인과적 연 쇄관계에 의하여 우리와 연관된 것들을 지시하는 용어란 하나도 없다는

것도 아니다. 유사관계나 인과관계 그 어느 것도 지시문재의 유일한 또 는 가장 기본적인 해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규칙준수' 두 개의 사물이 Z 그리고 W 와 유사할 경우 오직 그 경우에안 R 이라 는 접 에 유사하다고 말하거 나 생 각함으로써 R 이 라는 접 (감각 들 이 E 라 는 분류에 속 하 는 것으로 웅바르게 분류된다면 그 감각 들 은 바로 이 접 에서 X 와 유사할 수 밖에 없는)을 밝히려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뭉론 이러한 시 도는 실 패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Z 와 W 가 닳은 방식 은 한 가지 이 상 (사실은 무한히 많은)이기 때문이다. 유한한 수의 예 를 듦으로써 유사관계 륭 밝히려는 시도는 최초의 1,000( 또는 1,000,000) 가 지 값 을 줌으로써 자연수에 대한 함수 를 밝히려는 시도와 마찬가지이 다. 유한한 수의 값에 관해서는 주어진 임의의 표대로 작용하지만 그 표에 실리지 않은 값에 대해서는 다르게 작용하는 함수는 무한히 많은 법이다. 이 접은 비트겐슈타인이 『 철학탐구』에서 제시하였던 문제와 연관이 있다. 1 장에서도 언급하였다시피 어떤 개념과 관련하여 내가 어떤 기 호 또는 어떤 표상응 생각해 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개념의 내 홍을 밝히거나 구성할 수는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점을 '규칙을 따 른다fo llow i n g a rule’ 는 문제 를 다운 그 유명한 철에서 밝히고 있다. 예컨대 ‘하나를 추가한다’는 규칙을 생각해 보자. 두 가능세계에 있는 두 종이 (나는 지금 가장 非바트겐슈타인적인 방식으로 논의 를 소개하고 있다) ‘하나를 추가한다’는 언어적 공식과 관련하여 동일한 정신적 기호 를 가진다 하더라도 그들이 그 공식을 걸iJ으로 옮길 때는 달라질 수도 있다. 그 공식이 실천을 동하여 해석되지 공식이 그 스스로 를 해석하지 는 않는다. 누군가가 ‘A 는 B 의 다음에 오는 수'(즉 A=B+l) 라는 관 계를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 그대로 생각하여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아주 많은 경우에(예컨대 2 는 1 의, 3 은 2 의, ….. . 그리고 999, 978 은 998, 977 의 다음에 오는 수라는 접에서) 우리와 동일한 견해 룹 가진다 하더라도 ‘다음에 오는 수 successor’ 에 대해서 그는 우리와 다른 해석 을 가질 수도 있다(그가 도·의 다음에 오는 수’에 관하여 말하는 바, 죽 그의 ‘이론’에 있어서 우리와 의견을 갇이 한다 하더라도 스콜렘一뢰벤

하임의 정리 ® 가 입증해 주듯이 전체 이론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우 리와 의견을 달리할 수도 있다).

® 계 1 장 역 주

이 접은 즉각 언어철학뿐만 아니라 수리철학에도 관련된다. 우선 수리 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유한추의 fi n iti sm 이다. 유한주의에 의하면 현실적인 것뿐만 아니라 가능적인 것까지 합쳐도 인간의 실천이 뻗칠 수 있는 범위는 유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 다수다.의고 만순알.약열은. 까 우.지하.리도지.의-만 다 샘실른하천 는방적 신실으으천로로이 쟁해다하석른는될 방 작수식용 으었을로다 . 무 연한자장히연될 수 계에수.속 '있대할다한 면 수우 는리자 의연없 실천이나 표상 등과 관련하여 말한다면 자연수의 순열에 대한 유일의 ‘표준적 모형'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 는 계속 셈할 수 있다’는 것과 '이상적인 기구는 계속 셈할 수 있다'(또 는 ‘이상적인 마음은 계속 셈할 수 있다')는 것을 쉽게 혼동하기 때문이 다. 그러나 이상적인 기계 (또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는 런걸격인 기계 나 인간에 대한 이야기와 큰 차이가 난다. 이상적인 기계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는 수학의 형대에서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것 이 수학 자체를 해석할 수는 없다. 경험비'트 둥겐에슈 타관인한도 이이야와기 는비 슷심하리게학 적‘ 유사이성론',내. 에.‘서.동 일의한 이감야각'기, 이또므는로 ‘심동리일학한 적 이론에 관한 해석은 내릴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 심리학적 이론과 용어에 관한 해석은 우리가 실지로 행하는 실천, 죽 올바름과 올바르지 않음을 결정하기 위하여 우리가 실지로 사용하는 표준에 의하여 결정된 다. 『세계형성의 방식 Ways of Worldmak i ng』 8) 이라는 책에서 굿맨 N. Goodman 도 이와 밀접히 관련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지각의 사실들을 개념화하게 되며 또 어떻게 그 사실들을 기술하는지와 는 무관하게 지각의 사실 자체가 ‘정말 무엇인지’ 알아보려 한다면 쓸모 없는 짓이 되고 만다는 것이 굿맨의 지적이다. 정말같이 보이는 운동, 죽 두 개의 접이 상이한 장소에서 계기적으로 빛을 발할 때 마치 하나 의 접이 웅칙이는 듯한 현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 특히 공학자나 내과의사들이 많다는 심리학자 콜러스 P. A. Kolers 의 발견을 검토한 후

8) N. Goodman, Ways of Worldmakin g , Hackett . 1978,

굿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두 개의 다른 붕빛의 시간적 그리고 공간적 간격이 너무 짧아 많은 사람들은 마치 한 개의 불빛이 이동하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만약 이 경우 두개의 불빛을 관찰하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두 개 운 보았다는 그의 말이 뜻하는 바는 아마도 우리가 책상을 들여다보면서 한 덩어리의 분자을 본다고 말한다든지 또는 둥근 책상을 비스듬히 들여다보면서도 둥근 책상 을 본다고 말할 때 뜻하는 바와 다를 바 없다. 거짓 움직임과 진짜 움직임 을 구별하는 데 숙달된 관찰자는 마치 우리가 책상이 비스듬히 보았을 때 달걀모양으로 보이더라도 사실은 도형임을 알듯이 하나의 불빛이 웅직이는 것같이 보아더라도 사실은 두 개의 불빛이 계기적으로 빛을 발한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관찰자가 그의 눈에 보이기에는 책상이 달걀 모양 이더라도 그것이 사실은 도형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가 시각의 오류를 범 했다고 할 수 없다. 그가 그렇게 말함은 보이는 것만 말하라는 지시를 잘 못 이해하였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그러한 ‘오류'가 생기지 않도록 지시 를 개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경험은 사용하지 말고 일재의 개념화도 피하라고 지시한다면 이러한 지시 는 분명 그를 벙어리로 만들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도대체 무언가 말하기 위해선 개념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形相'파악과 경험적 연상 풀라돈주의자나 신풀라몬주의자라면 이 문제를 훨씬 더 간단한 방식 으로 해결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철학자들은 우리가 감각을 가질 때 보 편자 또는 형상 Form 도 동시에 지각한다, 죽 우리의 마음은 추상적인 성질들이 현실화된 것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성질들 자체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하였을 것이다. 또 이들은 비트겐슈타인이나 굿맨 이 유사론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는 이유는 그들이 유명론자들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형상에 대한 직접적인 파악은 물론 형상과의 어떠한 거래도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형상파악’이라는 신비스러운 힘을 가정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리 는 없겠지만 그 힘과 비슷한 것이 우리에게 있는 것 갈기도 하다. 사뭉 의 성질도 인과적 곁덩의 한 항으로 될 수 있다. 죽 내가 어떤 감각을 가침으로해서 ‘이것은 붉음에 대한 감각이다’라는 반옹이 나타났을 때

이러한 반응의 원인은 부분적으로 그 감각이 어떤 성걸을 가지고 있다 는 사실에도 있다. ‘성질' 같은 것의 존재물 전적으로 부인해 버리는 유 명론들도 있지만 과학 자체가 주저없이 성질에 관한 이야기 물 자유롭게 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사적 언어 ® 사용자가 X 에 임하여 'E' 라고 말하였다면 이때 ‘E' 라는 반응을 일으킨 선민이 어떤 성 컬을 포함한 인과적 상호작용일 것이며 X 아닌 다른 감각도 E 에 속하 는 것으로 분류되기 위해선 X 와 적합한 ' 유사성’을 가져야 하 는 데 이 유사성이 바로 i러한 성 질 이라고 말할 수 없을까?

® ‘사칙 언어 pri v a te la ngu a g e' 란 어민 망의 의미가 그 말운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관념일 따옵이라는 Locke 의 경험론에서 유래한 알이다. '복동', '치동' 갇은 말 둔 이 그 대표적인 예문이다. 비트겐슈타인온 그러한 사적 언어가 과연 가능한지에 대하 여 논의하면서 사적 언어란 다온 사람에게 가르칠 수도 없고 이해시킬 수도 없기 때문 에 분가능하다는 걷온운 내 렀다.

‘성질’에 관한 이야기도 과 학 적으로 합법적이라는 주장은 옳다. 그러 나 그렇다고 하여 플라돈주의가 다시 살아난다고는 할 수 없다. 우리와 실지로 관련을 맺는 것은 성질들 자체가 아니라 성질 들 이 구체적으로 현실에 나타난 걸태들뿐이며 이 실례들은 동시에 여러 가지 많혼 성질 둘이 합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감각과 인과적으로 연관된 성질들에 대 한 언급이 풀라돈철학에서 감각의 형상이 해내는 역할 을 그대로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이 점을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기 위하여 지금 내가 푸른 감각을 가진 다고 해 보자. 이때 나는 부 흥 에 대한 감각을 가질 것이며 동시에 여러 가지 복합적인 성질도 함께 감각할 것이다. 바로 °.l 감각에만 단순히 임한다고 해서 성질들 중의 하나가 ‘파악된다’고 할 수는 없다. 성질이 나의 감각 또는 내가 사용하는 언어적 기호와 결합되는 방식은 다양한 데 그 중 하나의 방식으로만 결합된 성질을 뽑아낸다면 소위 적합한 유 형의 인과적 관계에 얽힌 문재가 다시 대두될 것이다. 내가 어떤 총체적안 지각경험을 한 후 '나는 지금 푸른 감각을 가지 고 있다'고 반응한다면 이 반옹은 항상 훑혼 것은 아니다. 나는 ‘무른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지시하는 경험을 그 옷이 사실은 푸르지 않고 초록이라고 누군가가 지적해 주기 이전에 두세 번 가졌었다. 내가 ‘푸 론 옷을 입은 사람’을 보고 푸름의 감각을 가진다고 말할 때 그 옷이 푸르게 오렀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지적해 주는 순간 내가 그 옷을 찰못 기술하였다는 점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지금 푸른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기회를 자주 가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러 한 기회를 가졌다면 누군가가-분명히 초록색의 옷을 보고 왜 푸른 감각을 가진다고 말하는지 의아해 하면서 ――-나에게 질문운 던질 때까 지 아마도 두세 번 그러한 말을 하였을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나는 자지금체 와푸 른같 은감 성각.질을.의. 가것지이고 아있님다’을 또알는 수 이 있에다 .상 응하는 보고가 푸른 감각 철학자들은 종종 '실언’과 같은 경우가 있음을 언급한다. 나는 이 말 은 적 당치 않다고 생 각한다. 말하자면 나의 혀 끝에 는 ‘초록'이 라는 말이 있었는데 말은 ‘푸르다’고 이야기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이 실언의 예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기술할 경우 누군가가 나의 보고에 대하여 의문을 재기하기 전까지는 내가 잘못 기술하였다는 점을 알아차리지도 못할 수 있다. 내가 푸르다’고 말했을 때 희너한 바는 초록이라는 설명도 가능하다. 그러나 내가 ‘의미한' 바는 초록이라고 말함은 즉각 나의 잘못을 인칭한 다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그리고 내가 그러한 식으로 말한 데 대하여 이상하게 느낄 것이다). 따라서 이 설명은 진짜 설명이 아니라 단순히 일어난 사실을 되새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설명이야 어떻든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몇 페이지 앞에서 언급한 H-A 성질로부터 ‘내 앞에 지금 말 한 마리가 있다’는 보고가 그 주위에 실은 말이 한 마리도 없는 경우에도 나올 수 있듯아 내가 지금 푸른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도 내 마음의 전체적 구조가 가진 복합적 성 진로 부터 '나는 지금 푸른 감각을 가진다’는 보고가 나올 수 있다는 접이나. 경험적 연상만으론 이 점을 완벽히 설명할 수 없다. 내가 푸른 감각을 가진다는 보고를 차아내은 감각을 가질 때마다 나는 푸른 감각을 가지 게 된다고 우리끼리 약정한다면 민속 십리학상으로 또 과학적 십리학상 으로 보아도 그 감각의 내용이 푸르지 않음에도 붕구하고 약정된 기준 에 의해서만 내가 푸른 감각을 가진다는 것이 참이 될 경우가 있을 것 하이다면. 무그엇뿐이만든 아나니에라게 비옳트게겐 슈보.타 이.인 는.도 것 .지 은.적 옳하. 게였. 다된.시다 ..피 다그시러 한말 하기여준 에내 가의 감각한 것을 정말을·바르게 보고하는 것과 옳게 보이기만 할 뿐인 보고 룽 하는 것의 차이접이 없어진다. 아마도 우리는 그 차이접을 폐기해 버리든지 아니면 적어도 어떤 재한을 두어야 할는지도 모른다. 굿맨도 이러한 접을 암시한 듯한데 우리가 ‘정말로' 우리가 생각한 대로의 감각

을 가지는지 아닌지 하는 물음은 질문을 받고서는 보고를 취소하는 것 과 같은 특수한 경우를 떠나서는 무의미한 물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들은 이 차이점을 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사실 자 체와 우리가 사실이라고 판단하는 것을 엄밀히 구별하는 것이 바로 형 이상학적 실재론의 이론적 초석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가졌던 감각의 질에 관해서 우리는 언제라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가? ‘과거에 가졌던 감각에 대해서도 우리는 잘못을 저지 를 수 있는가?' 이 질문을 고찰해 보는 것도 우리 논의에 얽혀진 문제 륭 밝혀 내는 한 방법일 수 있다. 유사 지시이론에 의하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분명 히 ‘그렇다’이다. 왜냐하면 이 이론에 의하면 내가 과거에 가졌던 감각 은 붉은 감각', ‘고동' 등등의 여러 가지 말로 겨옵 기술하는 감각과 유 사하든가 아니면 유사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 유사한지 아닌지의 물음은 내가 쇼터] 그러한 감각을 지금 사용하고 있는 언어적 분류대로 구별하 였는지 아닌지 하는 물음과는 전혀 별개의 물음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세계가 기원 초부터 짝수 시간에 '붉은 감각'이라고 불리워지던 것이 훈 수 시간에 '초록색의 감각'이라고 불리워지던 것과 사실상 유사한데 단 지 우리의 기억이 항상 우리를 속여 그러한 접을 한 번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만들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붉은 감각'이라고 1 시간 전에 이름붙였던 감각이 동일한 이름으로 지금 분류한 감각과 유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계가 상기한 바와 갇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가능성에는 매우 이상한 접이 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내가 한 번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는 말의 의미가 너무 강하다. 만약 내가 ‘붉은 감각'이라는 말을 서로 다른 시각에 여러 가지의 서로 연관된 물리적 현상(불, 정지 신호 둥과 같은)을 알려주는 믿을 만한 기호로 간주한다면 그러한 물리 적 현상과 관련된 나의 모든 행동.이 . 어. 긋나지 않을 것이다. ‘찰못된' 유 사집합(내가 ‘붉은 감각'이라고 부르는 모든 감각을 그것들이 ‘사실은' 동일한 ‘장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덩어리로 묶는 집합)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나의 활동과 관련하여서는 더 찰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것이 정말 찰못된 유사집합일까?

만약 유사성이 스스로 해석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그러한 독수 경우를 우리에게 말해 주는 외적 관찰자가 부르는 ‘유사성’이 가졌 던 감각에 대해서 ‘정말' 잘못을 우리가 부르는 ‘유사성’과 갇지 않을 것 을이다 .저 지이를렇 게수 본있다다면는 우가리설은가 과무너거진에다 .가 졌즉던 내.감재.각론.에적. 대관해접서에 서‘칭 말보' 면찰 못서 로 다른 시각에 얻어진 감각들간의 유사성은 어떤 것을 합리적으로 받 아들일 수 있는지를 결칭해 중 우리의 기준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는 개녕이다. 진리대응설 재고 독자들은 이제 유사 지시이론이 완전히 사장되었다고 확신할 것이다. 그러나 왜 우리는 진리대응설도 또한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야 하는가? 개념들과 개념들이 지시하는 외적 사물 사이에 ‘유사성’이 있 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치더라도 양자 사이에 일종의 추상적인 구조적 동일성 갇은 것은 있지 않을까? 구조적 동일성이 아니라면 양 자를 묶어 주는 일종의 추상적 맺음 ma ppi n g갇은 것이 있지 않을까? 진리도 그러한 구조적 동일성이나 맺음에 의하여 정의될 수 있지 않을 까? 이러한 제의에도 난점은 따르는데 그 난접은 말이나 개념과 나른 존 때재문웅에간 에생 긴대다응.관 그계 가중 에없 기단. 때하.문 나.이의. 대아웅니라관 계너를무 찾많아은내 려대 옹하관더계라가도 우있리기 는 이미 마음에서 독립되어 있는 존재물에 지시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 야 할 것이다. 두 개 중에 하나만 쥐어짠다고 해서(또는 그 외 무엇을 하든) 양자간의 대웅관계가 드러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자 면 개념들과 개념들에 상응하여 있다고 생각되는 본체적 대상간의 대옹 관계는 우리가 그 본체적 대상에 접근해 보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가 없 다. 왜 그런지를 알기 위한 한 방법으로서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 보 자. 불가양립적인 두 이론이 실지로 상호 번역가능한 수가 가끔 있다. 예컨대 뉴돈의 물리학이 만약 참이라면 모든 개별적인 물리적 사건은 두 가지 방식으로 기술될 수 있다. 입자들이 진공을 넘어 원거리에서도 서로 작용한다는 사실에 의거한(뉴돈은 이에 의거하여 동력 작용을 기

술하였다) 기술이 그 하나요, 입자들이 작용하는 장이 다른 장(도는 갇 은 장의 다른 부분)에 영향을 주고 이 장은 결국 또 다른 장에 ‘부분적 으로' 영향을 준다는 사실에 의거한 기술이 그 두번째이다. 이를테면 전자장의 형태를 기술하는 맥스윙~ Maxwell 의 방정식은 입자들간에는 반제곱의 법칙에 따라 서로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면서 빛의 속도에 따라 움직이는 원거리 작용 ac ti on-a t -a-d i s t ance 밖에 없다는 이론(‘감속전위' reta rded p o t en ti als 아론)과 수학적으로 동치이다. 맥스웹의 전자장이론 과 감속전위이론은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본다연 서로 양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분리되어 있는 입자들의 작용을 서로 매개시켜 주는 인과적 힘 (‘장') 이 있든가 아니 면 없든가 둘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이론은 수학적으로는 상호 번역될 수 있다. 그리하여 만약 본체적인 것과의 ‘대응'관계에 의거하여 그 두 이론 중의 하나가 참이 된다면 우리는 다른 이론도 참이 되도록 다른 대응관계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론을 참 또는 거짓되게 만드는 것이 만 일 추상적인 대응관계(어떤 대응관계이든 상관없다)뿐이라면 양립될 수 없는 두 개의 이론이 동시에 참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접을 내재론자는 반대하지 않는다. 우 리의 일상적 믿음에 동시에 찰 들어맞고 또 동시에 정합적이면서도 서 로 양립될 수는 없는 두 개념체계가 전혀 없으란 법은 없지 않는가? 만약 진리가 대응관계에 있지 않다면 일종의 다원론의 가능성이 열린 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신재론은 신적 관점, 죽 하나의 침흰 이론을 고 수하고자 한다. 대상과 (우리가 생각하기로) 불가양립적인 이론들간에 대응관계가 성 립될 수 있운 뿐만 아니라(즉 동일한 대상들이 불가양립적인 두 이론의 ‘모형'이 동시에 될 수 있다) 설혹 하나의 이론이 고정되고 효 그 이론 에서 요청하는 대상들도 고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 대상들이 고정된 무이론한의하 다모면형 을방 식만도드 는무 한데히에 많이다용)될 다.수양. 하.있다.는. 방수식학은적(인만 약언 어대를상 들사의용 하수여가 이 접윤 직관적으로 표현하자연 다음과 갇다. 즉 두 영역 doma i n 간의 대응관계를 찾아내기 위해선 우리가 두 영역 모두에 개별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오직 하나의 참된 이론만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은 2000 년을 넘게 지속 되어 왔다. 이 주장이 처음부터 내적인 모순과 불명확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가지 형태로 지속되어 온 이유는 신적 관접을 가지려는 사람들의 욕망이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또 강렬하 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망이 결코 성취될 수 없다는 접을 처음으로 간파한 칸트도 그 욕망이 우리의 합리성 자체에 이미 것들어 있는 것이 라고 생각하였다. (칸트는 이 욕망을 도덕적 인 질서와 현실적 인 질서의 조화를 완벽한 사회제도와 개인간의 관계에서 찾음으로써 ‘세상의 최고 선’을 실현시키고자 ‘총력을 기웅이는' 힘으로 승화시킬 수 있음을 제의 하였다.) 우리의 문화사에 거짓 일원론과 거짓 이원론이 그토록 번창해 온 데 대한 가장 깊은 원인은 바로 이 자연적이지만 결코 성취될 수 없 는 충동이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하돈 이재 우리는 신적 관접을 취하지 않아도 되게 된 셈이다.

제 4 장 정신과 신체 평행설, 상호작용설, 동일설 17 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데까르뜨,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는 모두 정 신과 신체의 관계에 모종의 심각한 문제가 개재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 에았다게.도 물문론제 이칭긴신 과하 신였체으의나 관본계격가적 으풀로라 돈문이제나시 되그기 이는후 근의대 많 물은.리 .철학.학 이자 들발 달하기 시작한 이후부터였다. 17 세기 사람들은 물리적 세계가 인과격호 로 닫혀 있다 causall y closed (l)는 점을 인식하였다. 뉴몬의 물리학이 바 로 이 접을 찰 표현해 주고 있다. 죽 모든 물체의 웅직 임은 어 떤 힘 fo rce 이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힘은 수에 의하여 완벽하 게 기술될 수 있다. 힘의 방향은 세 개의 수에 의하여 결정되고 또 힘 의 크기는 하나의 수에 의하여 기술될 수 있다. 힘에 의하여 형성된 가 속은 그 힘과 정확히 동일한 방향을 가지며 가속의 크기는 뉴돈의 제 1 법칙 F=ma 에 의하여 물체의 질량과 힘의 크기로부터 연역될 수 있 다. 하나 이상의 힘이 물체에 작용할 경우 그 결과로 나타나는 힘은 평 행 4 변형 법칙에 따라 계산될 수 있다. 수를 사용하고 계산을 위한 정화한 연산법을 강조하는 이와 갇은 뭉 리학이 기본적으로 양보다 질을 중심으로 하는 중세의 사고방식과 얼마 © 뭉진리적칙으 로세 인계과가을 인 또과는걱 으인로과 원닫리혀에 있따다라 합설은명 천뭉 리수칙 있 세고계 또에 서이 해일륄어 수나 는있 다모는든 뜻현이상다둥.이

나 판이한지를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중세 사람들은 어떤 것이든 다 른 어떤 것에 ‘영향i n fl uence’ 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인플루엔자' i라nf 는l u e 말nc도e —이와이 갇태 은리 중말세로적 q u사 es유ta 방 in식f l의 ue n유za물 ―이―다거.충 악주령어이 이공 기공기에 가영 향다 시 병자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였다.) 정신이 신체에 ‘영향'을 중 수 있다는 주장도 이러한 사고방식의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17 세기에 들어와 수학적인 사유가 싹틈에 따라 그러한 사유방 식도 점차 되색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사고방식이 뉴돈 이전까지는 완전히 꽃을 피우지는 못하였지만, 럿몇 독수한 경우에 현대 물리학에 서 이야기되고 있는 점이 이미 제기되기도 하였다. 데까르드와 레오나 르도다빈치의 힘의 평행 4 변형이 그 예이다. 이들은 물리학에서 다루어 지는 것이 힘과 운동이라는 점을 이미 인식하고 질적인 설명방식을 거 부하였다. 그들은 기계적 세계가 그 자체의 논리, 말하자면 그 자체의 ‘프로그램’을 갖고 있으며 세계는 다른 방해요소가 없는 한 그 프로그램 대로 운행된다고 생각하였다. 17 세기 철학자들은 다음의 두 사항 중 하나륭 할 수 있는 것이 정신 적 사건 menta l even t이 라고 보았다. (1) 정신적 사건은 물리 적 사건, 죽 두뇌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평행한다p arallel. 동일한 시각을 가 리키도록 맞춰진 두개의 시계가 이 평행의 모형이 될 수 있다. 죽 신체 는 감겨진 태엽이 다 풀려 끝날 때까지 행 또는 불행의 길을 가고 있는 시계와 갇다. 세계 전체도 이와 마찬가지로 창세에서 최후의 심판 때까 지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동력이 붕괴될 때까지) 행 • 불행에 관계없이 자기 갇 길만 돌고 도는 시계와 같다. 정신적 사건도 이와 마찬가지이 다. 감각 S 가 생길 때마다 바로 그 순간에 두뇌의 사건 B 도 갇이 생기 도건일록 신것이적다인. 계(2시) 정갇신은적 것사에건 의은하 물여리 조적정 되사어건 과움 직상. 호이. 작는.용 .것i 이 n t er정a신c t적할 사수 있다. 정신적 사건이 아마 실지로 두뇌의 사건을 야기시킬 것이며 또 그 반대로 두뇌의 사건이 원인이 되어 정신의 사건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질이 매우 미세하고 가벼웅 때 정신은 물질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데까르뜨의 상호작용설은(데까르뜨는 정신이 실지로 송과선에 있는 뭉 질과 접촉한다고 생각하였다) 당치도 않은 사변의 결과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은 몇 가지 중세의 이론에서 나온 유산이다.” 중세

사준다람들고 은생 각정하신였이다 .‘氣 t 이spi들 r i에t’게에 영있향어을서 주기고는 기전.는적. .으다 로시 비‘물물질질'적에 인영 향것을은 아니었다. 중세 철학자들은 존재하는 것들을 종류별로 차례대로 놓을 때 이 웃하는 두 종류의 사이 에 중간적 인 것 i n-be t weens 울 상정 하는 겅 향이 있었는데 ‘기'도 바로 그러한 중간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기는 약 간의 힘을 가진 가스 갇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한 ‘기’를 생략해 버 리고 전적으로 비물질적이라고 간주되는 정신이 송과선에 있는 매우 가 벼운 뭉질에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하니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어 떻게 칭신이 뭉질에 영향을 주게 되는지 마음속에 그려 볼 수조차 없 다. 가장 단순한 상호작용설은 정신을 여러 신체로 옮겨다닐 수 있고(그 러나 환생이나 ‘전생에 대한 기억'에 관한 수많은 잡서에서 주장되다시 피 생각하고, 느끼고, 기억하고, 인격을 나타내는 방식에는 변함이 없 이) 또는 신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그러면서도 생각하고, 느끼고, 기억하고, 인격을 나타낼 수 있는) 일종의 유령 같은 것으로 본다. 통 신과 별다 룰 바 없는 이 상호작용설은 생각하고, 느끼고, 기억해 내는 기능이 본질적으로 두뇌와 연관되어 있다는 확고한 중거(이러한 중거는 이미 17 세기에 부분적으로 제시되었다) 앞에 맥을 출 수가 없을 것이 다. 상호작용설에 따른다면 정신 이외에 왜, 무엇 때문에 우리는 또 복 잡미묘한 두뇌라는 것을 가져야 하는지는 전혀 불분명하다. 정신의 존 립운 위하여 필요한 것이 ‘타윤'과 갇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두뇌보다도 훨씬 더 작아도 될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반대를 피하기 위해서 데까르뜨 갇은 철학자들은 좀더 세뇌련는 된본 . 질상. 적호. 으작. 로용. 설동.을 일. 체제.이 시다하.게 생되각었하는고,데 느데끼까고르,뜨 에기 억의하하고,면 인정격신과을 두나 타내는 것은 다름아닌 바로 이 정신과 두뇌의 동일체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여 우리가 일상적으로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정신이 아니 라 칭신과 두뇌의 동일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동일체란 무엇을 뜻하 는지, 죽 서로 전혀 다르다고 여겨지는 두 개의 실체로 구성되어 있으 면서도 본질적으로는 통일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는 매우 불분명하다. 1) C해. S주.L고ew i 있s 의다 . Th묵-e 히D icshca arpd teedr \I1m, asgeec .(Fc. a문m b참ri조d g하 e라 , .19 64) 가 중세 의 여 러 이 온운 간 서 순

이에 대한 대안으로 나온 평행설도 또한 매우 이상한 이론이다. 정신 적인 사건이 두뇌의 사건에 수반한다는데 무엇이 들어 그렇게 만드는 가 ? 17 세기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정신적 사건은 실제로 두뇌의 사건에 다 다른 울리적 사건을 합친 것과 동일하다는 과감한 주장을 피력하였 다. 이 주장을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어떤 경우에 내가 고동을 느낀다 는 사건은 바로 그 경우에 나의 두뇌가 어떤 상태 B 에 놓여 있다는 사 건과 동일하다는 뜻이 된다. (이 주장은 또한 일정한 류의 고통을 가진 다는 성질과 두뇌상태 B 에 있다는 것은 동일하다고 표현될 수도 있다. 이런 식의 표현을 나는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현재로선 사건 even t보다 는 성질 p ro p er ty을 다루는 것이 논리적으로 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 러나 기본적인 주장은 그 어느 쪽으로 표현되어도 관계없다. 후자로 표 현하자면 어떤 사람이 감각 Q 를 경험한다는 성질은 두뇌상태 B 에 있다 는 성질과 갇혼 경절이다.) 18 세기에 이미 디드로Di dero t가 이런 식으 로 표현하였고 그 후 이것은 1940 년과 1950 년대에 ‘주류' 를 형성하였다. 이 시기에 유물론과 동일설이 처음으로 심각하게 논의되기 시작하였고 스피노자의 견해와 비슷한 것 (또는 스피노자의 견해에서 신학칙 이고 형 이상학적인 각색을 멘 것)이 옳다는 제의가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이 제의에 의하면 정신과 신체의 두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세계가 있을 뿐이며 우리가 과학아 상당히 발전하기 이전까지는 고동을 느끼고, 소리 를 듣고, 시각경험을 가지는 둥의 사건이 두뇌의 상태와 사실상 동일한지 알 수 없다고 해서 그 양자가 동일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최초의 현대판 동일설이 몇몇 학자들에 의하여 제안되었는데 그 중에 서도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철학자 스마트J.J .C. Smar t이다. 스마트가 제시한 최초의 제안은 감각, 이 를 테면 푸르름에 대한 개별적인 감각은 일정한 신경생리학적인 상태와 동일하다는 것이 었다. 그 다음에 이 제안에 약간의 변화를 준 기능주의 fun cti on ali sm 2> 라는 것이 나왔는데 이것은 필자가 최초로 제안한 것이다. 기능주의는 칭말로 동일성이 있다고 본다. 그런데 .스마트는 동일성의 한 항인 두뇌 2) 기능주의에 관한 좋은 논문들은 N.Block 가 편집한 Readin g s in Phil oso p hy of A찌 10/og y (Harvard, 1980) 에 수목되어 있다. 이곳에 실린 나원 논문은 .Mi nd , Lang uage and Reality , Pli ilos op liica / Pa per s, Vol 2 (Cambrid g e , 1975) 에 재 수목되 어 있 다.

의 속성을 잘못 본 것 같다. 기능주의에 의하면 두뇌의 성질은 어떤 의 까미?에그 서렇그 다것물면리은 적두.두 인뇌.뇌 가의것 이비.성 물.질아 리니이적다 인.물. 리.성적.질 을도 운가 지화고학 적있인다 것함을은 언무급엇하을지 의 미않할는 맡오 경희철 수 었다는 뜻이다. 물리적인 체계가 물리적인 것이 아닌 성질을 가진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면 전자계산기 를 생각해 보라• 전 자계산기는 여러가지 물리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일정한 무 게를 갖고 있으며 또 일정한 수의 회로판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것은 가격과 갇은 경제적 속 :3, 일정한 프로그램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기능 그적전.. 혀것인.. 이.속관 . 성계형.. 도없이.. 이 상..가 학.지하 .적. 고나 .으. 의 .로있. 다 체..또. 계 는.. 그에 .런 존.의 데재.. 하 론..여 이 적. . 으마.현. 로지 실.. 막 화이.. 될 멍성.. 질겨 .수,. 1 구.있즉. 성 .다 . 되기 .는. 어능 . 적의.있 .인미. 는.에 .성지.서.질와. .은는비 울리적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신체에도 구체화되지 않은 氣 도 일정한 프로그램을 가질 수도 있을지 모르며 두뇌와 기계도 일정한 프로그램을 가질 수 있다. 이 세 가지 것은 그것을 이루고 있는 구성분자는 서로 전혀 다르지 만 칭 확하게 동일할 수도 있다. 심리적인 성질도 이와 같은 성격을 나타낸다. 죽 갇온 심리적인 성질 이(예컨대 화냄) 물리적으로 그리고 화학적으로 서로 전혀 다른 수천 가지 종의 성질이 될 수도 있다(외계인이나 로보트도 어느날엔가 화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신과 뭉질을 서로 다른 종류의 실체 또는 서로 영역이 다른 성질의 것으로 보지 않고 양자를 ‘일원론적’으로 해소 하려는 20 세기의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은 심리적인 성질이 기능적인 성질과 동일하다고 보는 이론이라고 기능주의자들은 주장한다. 나는 아칙도 이 이론이 옳고, 또는 적어도 이 이론이야말로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가장 자연스럽게 기술할 수 있는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주의적 menta l is t i c' 기술도 옳다고 할 수 있지만 이 기술은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세계상과는 거리가 멀다(사실 ‘합리성'이니 ‘진리'니 ‘지시깔은 것이 모두 ‘정신주의적’ 기술에 속한다). 이 접에 관해선 차 후에 (6 장) 좀더 언급하겠다. 이 사실 때문에 내가 당혹해 하는 것은 아 니다. 왜냐하면 굿멘도 강조하였다시피 실재론적 세계해석과는 다르면 서도 올바론 세계해석을 내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비실재론이 가진 장점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의 형식, 심상, 감각 등이 모두 그 기능적인 성격으로 보아 물리적인 사건이라고 보는 자연

주의적 세계해석도 옳은 해석의 하나라는 주장에 매력을 느낀다. 내가 지금 여기서 논의하고 싶은 것은 럿 년 전에 생각이 난 것인데 기능주 의도 감각의 성격과 관련하여 어떤 난접을 가지고 있다는 접이다. 소위 ‘괄호쳐진' 믿음과 갇은 비교적 추상적이고 순수한 심리상태를 생각할 때, 즉 생각을 순전히 그 ‘관념적인' 내용만 분리하여 고찰해 볼 때, 또 는 질두라든가 분노 같은 혼돈된 감정상태를 고찰해 볼 때 이러한 상태 와 기능적인 상태 를 동일시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목수한 푸른 색조 갇은 것을 경험할 경우에는 그러한 동일시가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이에 대한 예로서 나는 ‘도착된 잔상'현상과 비슷한 것을 수차례 여러 강의에서 언급한 적 이 있다. 도착된 잔상의 예는( 록크 의 처서 3) 에서 나 온다) 푸른 것이 붉게 보이고 붉은 것이 푸르게 보이도록 사울을 보면 서 돌아다니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를 접한 사람의 첫 반응은 아마도 ‘이 불쌍한 사람아, 다른 사람들이 자네 를 일마나 가련하게 생 각하겠는가'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색깔을 전도해서 본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가 푸른 것을 볼 때 그에게는 붉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Z.는 어릴 때부터 바로 그 색깔(붉게 보이는)을 푸르다고 부르도록 배워 왔다면 누군가가 그에게 그것이 무슨 색깔이냐 고 물었을 때 그는 믈림없이 ‘푸르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그가 색깔을 우리와는 거꾸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 이다.

3) J.L ocke, A11 Essay Concer n in g Human Unders/a n din g , Book I , chap ter 32 (sec. 14).

이 예들 나는 다음과 갇이 변형시켜 보았다. 당신의 잔상이 당신 생 애의 어떤 시기에 갑자기 전도되어 버렀다고 가칭해 보자. 그리고 당신 은 전• 도• 되• 기• 이• 전• 엔• 세• 상• 이• 어• 떻• 게• 생• 겼• 었• 는• 지• 를• 기• 억• 하• 고• 었다고 가정 해 보자. 여기에서 ‘검증'에 관한 인식론적인 문제가 제기되지는 않는 다. 어느날 아침 깨어 보니 평소 푸르게 보이던 하늘이 갑자기 붉어졌 고 평소 즐겨 입던 붉은 스웨터가 푸르게 되었으며 뭇사람들의 얼굴이 온동 괴상스런 색깔로 변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당신은 아마 평 소의 일상용어들의 사용법을 바꾸어 이를테면 지금 당신에게 붉게 보이 는 것울 이제는 밖으로는 ‘푸르다’고 부르는 법을 익혀야 할 것이다. 그 리하여 누군가가 입고 있는 스웨터가 무슨 색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당신은 ‘정상적인’ 대답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밤이 되면 당신

은 ‘도대체 색깔이 평소와 갇이 보이지 않는다. 제발 색깔이 이렇게 되 기 이전으로 복귀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단할 것이다. 이러한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말하자면 두뇌 속의 어떤 ‘선'들이 ‘어 긋나 버린'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푸른 빛에서 나온 입력이 평소 에는 두뇌의 어떤 선으로 들어가곤 했는데 이젠 다론 선으로 들어가게 되고 대신에 붉은 빛에서 나온 입력이 전자의 선으로 들어가게 되는 경 우와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하자면 두뇌의 웅리격 상태에 무언가가 전 주환는되 었기다능는적 뜻역이할다.을 하전던에 는뭉. 리그.적 .주 위상에태 가' 객이관제적는안' 주푸위르에름 이'객 관있적음인을’ 붉알려음 이 있음을 알려준다. 이제 우리가 주관적인 색깔에 관한 다음과 갇은 ‘기능주의적' 이론을 채택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즉 ‘어떤 감각은 그 감각(또는 이에 상옹하 는 두뇌 속의 물리적 사건)이 주위에 객관적인 푸르름이 있음을 알려 주는 역할을 할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푸르름의 감각(즉 내가 겨옵 그러한 식으로 기술하는 걸척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이 이론은 ‘푸르 름의 감각'이라는 구절이 뜻하는 의미의 한 부분을 밝히기는 하지만 그 이론이 목표한 바 소위 ‘질적인’ 의미는 밝히지 못하고 있다. 만약 이 기능적 역할이 문제의 질적 성격과 동일하다면 우리는 그 감각의 질이 변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접이 불분명하다면 잔상이 뒤바뀐 후 그 리고 이 변화에 적합한 언어적 대응책을 익힌 후 평소에 가졌던 색깔에 대한 기억을 송두리째 말살해 버리는 기억상실중에 걸렸다고 상상해 보 라. 이 경우 당신이 겨옵 ‘푸르름의 감각'이라고 부르는 감각이 당신이 평소 ‘푸르름의 감각'이라고 부르던 감각과 거의 동일한 기능을 가지는 것 같으면서도 그 성격면에서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러나 질은 변 하렀다. 。: 1 리한 경우 질은 7.l 응격 상태가 아닌 것 갇다. 만약 그러한 경우가 정말 가능하다고 한다면 이에 대한 기능주의자의 가장 그럴듯한 반응은 ‘그래, 그러나 소위 질적 성격이란 것도 물리 적 현실화에 지나지 않는다'일 것이다. 그리고 또 기능주의자는 그 특 수한 종류의 심리적 성질, 죽 질에 관해서는 낡은 형식의 동일설이 옳 다고 말할 것이다. 만약 독자가 상당히 유물론 쪽으로 기울어진 사람이 라면 아마 감각을 가진다는 성질도 두뇌의 어떤 성질이라고 생각할 것 이다. 그러나 유물론에 찬동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감각을 가진다는 성 질이 두뇌의 어떤 상태와 장관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

마 대개의 사람들은 이 두 견해 중에서 하나를 택할 것이다. 죽 감각의 상태가 두뇌의 상태와 상관관계 를 가지고 있다고 보든가 아니면 두뇌의 상태와 동일하다고 볼 것이다. 이 문제도 다른 여러 문제가 그러하였듯 이 동일한 방식으로 여러 차례 반복하여 논의되어 왔다. 그 동일한 방 식이란 대충 다음과 갇다. ‘B 가 Q와 상관관계 속에 있다 하더라도 B 가 Q와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는가?' 또는 이 감각상태가 이 두뇌상태와 보의간평인가에행다 는한.계 다 속적손상.되어 관.면도치.관 더.계될상라 가수관도 록관 별 계‘로상양. 관자.정문가관.도제 .계는시동 라 되일있는지한다 개고않것념 은는누에. 구이아.점닌.나유접가 는 ?생 '더감각 각하이별상고 러문태 한제와있 기가 식두 으뇌때없로상문어 이태져논 다념.이 다문.제 가그 러되나고 필그자리는하 여상. 관.자 관주계 의논 의부의재 에대 상대이한 되증는 명 이것 은있 다홍는일경 의의미 에개 서가 아니라 반야 상관관계가 있다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인식론적인 의미에서 상관관계라는 개념에도 문제가 있다는 접 울 밝혀 보려 한다. 이 문제는 유물론을 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가 감각상태와 두뇌상태 사이에 적어도 상관관계만은 있다고 생각한다 는 사실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동일설과 선험성 동일설과 여타 ‘일원론적’ 이론에 관한 관심이 1960 년대부터 다시 일 기 시작하였는데 .::z. 주된 원인은 당시의 인식론적 경향의 변천아었다. 동일설은 철학자들이 그것을 거짓으로 ‘알았기’ 때문에 1960 년대 이전에 는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철학자들이 그 당시 동일설을 거짓으 로다 르보다게는 된접 을근 거보는여 줄경 험수적 있인는 중 경거험가적 아중니거라가( 감있각겠상는태가가? )두 뇌선.상험.태적.와인.는 a pr io r i 것이었다. 죽 감각상태가 두뇌의 상태가 될 수 없다는 접은 죽 각 선험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또는 감각상태가 두뇌의 상태와 같다고 말하는 것은 숫자 3 이 푸르다고 말하는 것과 관계없이 알 수 있 물다리는적 것인이 다것.일 19수.5 0 년없. 음.또 을는 그19냥60 년알 고이 전있에다는고 많생은각 하사였람다들.이 물감론각 상이태렇게가 생각함이 찰못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들간에 논쟁은 불가 능하였다. 대다수 사람들은 다음과 갇이 말하였을 것이다. ‘감각상태가

신경생리적 상태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중명해 보일 수는 없다. 그 러나 그것은 마치 어떤 수이든 그 수 다음에 또 다론 수가 따른다는 점, 또는 숫자 3 이 푸르지 않다는 접을 증명해 보일 수 없는 것과 갇 다. 이런 것들은 증명은 할 수 없지만 우리가 그냥 알고 있는 것으로서 이성적 진리이다. 우리는 감각상태가 신경생리적인 어떤 상태일 수 없 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다'. 감각상태가 두뇌의 상태일 수 없다고 아 는 사람들은 대다수이었고 이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이 잘못이라고 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그러나 이때 안다고 하는 것은 양측 모두 신협척.;J a pri o r i 것이었다. 따라서 이와 같이 대립이 굳어 버린 상황에서 정말 의미 있는 논의가 가능했을 리가 없다. 1951 년에 콰인은 「경험론의 두 독단 Two Dog ma s of Em pi r ici sm 」,) 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이 발표된 이후부터 ‘신협겨 a pr io r i' 진리의 개념에 대한 철학적 확신이 접차로 침식되어 왔다, 콰인 은지 우않리다가는 선접험을적 지으적로하 a였p 던r i o r i것 이안다다.고 예생컨각대한 누많군은가 것가들 이유. 클.사리.실.드은 E u그cl렇 i d 에게 두 칙선이 제 3 의 직선에 수직으로 만나면서도 두 직선은 서로 만 낱 수도 있음을 시사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유클리드는 이러한 일이 일 어날 수 없음은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대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의 뭉리 이론에 의하면 그러한 일이 실지로 발생한다 . 죽 태양 주위를 지나치는 빛은 휘어 가는데 그것은 빛이 곡선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 아니고 빛은 여전히 직선을 그리는데 칙선이 비유클리드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4) 이 논문은 치음에 The Phil o sop hi c a l Re 떠e w (l 951) 에 실렀다가 그 후 과인의 처서 From a Log ica l Poin t of Vie w (New York, 1961) 에 재 수목되 었 다.

일단 이 경을 받아들이는 철학자들은 ‘그러면 선험적 a pri or i이라고 콰할 인수도 있바는로 것이은러 한무 엇질인문가?을' 제하기는하 였질다문.을 ( 과하인지은 않또을한 수선. 험.없 성을. ap것 r i이o r 다it y. 에 대한 경험론자들의 대표적인 설명-이를테면 ‘관습적 진리’ 갇온 개념―~이 정합적이지 못하다는 접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였다. 이 점 은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 내 생각으론 어떤 면에선 콰인의 주장은 좀 지나치다. ‘모든 진술에 관해서 그것을 합리적으로 부인할 수 있는 상황은 있게 마련이라는 점 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점은 분명히 거짓이다. ‘모든 진술이 다 참인

것은 아니다'물 부인하고도, 즉 ‘모든 진술은 참이다’를 인정하고도 합 리적이 될 상황이 도대체 있겠는가 ?5) 선험성 a p r i or ity에 대한 과인의 반대는 좀 지나치다 하더라도 다음의 접에서는 콰인이 옳았다. 즉 합리성이나 합리적 수용가능성의 개념이 어떤 불변의 규칙에 의하여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칸트가 생각 하였다시피 우리의 선험적인 tra nscendenta l 본성에 영구적으로 기입되 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과인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혼체격 쇼오 noumenall y 가지고 있다는 선험적인 본성이란 인간의 역사적 또는 생뭉학적 조건을 떠나서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합리성 또는 합리적 수용가능성의 개념도 국히 제한된 우리의 경험과, 또 쉽게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우리의 신체구조의 산물이기 때문에 '선험적 a pri o r i' ‘개념적' 동동으로 불리우는 원리조차도 때로는 예기하지 않았던 경험이나 이론 주이 장나이다타.납 에그 러따한라 수수정칭이되 어무야제 한할적 일필 요수가는 있없을다. 수그 있렇다지 는않 것다이면 콰합.인리.의성. 이라는 개념조차도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한계가 무엇 인지는 우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사소한 경우(예컨대 '모든 진술이 주다되 참는인( 그것리은고 아주니어다진’ 와맥. 락갇.은에.)서. 를 그제렇외게하 고간는주 함‘이필 연정적당으한로)' 참어이떤 라진고술 을간 포기하는 것이 어느 맥락에서도 합리적일 수 없다고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단순성, 전체적 인 효용성 등을 고려하여 전에 는 선험겨 a p r i or i이라고 여겨지던 것을 포기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척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하혼 이재 반선험적 an ti -a p r i or i s tic이 되어 버렀다. 우리가 선험적 a pr io r i 진리라고 여겼던 많은 것이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대성을 떤 도것 이포라기는하 지점 을않. 을알. 아수.차 린없다 .한, 동겅일선설과을 신주체장의하 는홍 일철선학해자 들대이한 휴지일적한한 점반혼도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정신과 신체의 관계문제에 관한 상황은 이제 바 뀌었다. 나는 경절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왔는데 ‘성질'이라는 말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뜻이 있는 것 갇다 .6) 하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왔 5) 선험성의 개념에 대한 콰인의 공격운 나는 'Analyt icity and Ap ri o r ity : Bey o nd W ittgen s tei n and Qu in e ', Mi dw est Stu d ie s in Phil oso p hy , vol IV, 1979 (Mi nn esota ) 에서 6) 논1나9의의75하 ) 의지였 다서19. 장M a'Oth ne mPartoic pse,r tMi eas’t t운 er 참a11조d 할M e것th. o d, Phil o sop hi c a l Pape n , vol. 1 (Cambrid g e ,

는데 ‘술어 p red ic a t e’ 라는 말로 표현되어 왔다(예컨대 ‘ 존재는 술어인 가?'라는 유명한 질문에서처럼).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가 오 늘 날 ‘물 리적 성질', ‘기본적 크기’ 둥둥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 개념이 댜 철학자가 성질에 대한 옛날의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 성질에 관한 언급이 7.~ \l conce pt에 관한 언급과 상호교환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철학자에게는 성걸을이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특 히 이돌은 일정한 질적 성격을 가진 감각을 경험한다는 경걸이 일정한 두 뇌상태에 있다 는 성 질 과 동일할 수가 없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양 성질 에 상응하는 술 어 들 이 동의어 ( ‘분석적으로 동치’라는 넓은 의미에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술 어에 관한 개체화의 원리t hePr i nc ip leo f In­ d i v i dua ti on 를 이 들은 다음과 같다 고 생각한다. 즉 P 와 Q가 ‘P 이다'와 ‘Q이다'가 동의어일 경 우 오직 그 경우에만 동일한 술어이다. 그러나 과 학 자가 기온은 평균치의 분자운동 에너지이다라고 주장할 때의 상황을 생각해 보라. 이 주장은 엑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성질들 의정 한동 일분성자을운 동주 장에하너는지 가진 술있이다다는. 성즉질 기괴온 정이.말 .로어.( 떠어어떤떠 하의다미는에 서성의질 은‘ 칭일말 로의' ) 분동자일운한동 성에질너이지라와는 ,동 일또한는 물.(리더. 적.일 반크적기으륭로 가 지말하고여 )있 다기는온 은주 장평이균다치. 이것이 옳다면 ‘X 가 그러그러한 평균치의 분자운동 에너지 를 가지고 있다’는 말과 설혹 분자운동 에너지의 ‘그기그러한' 값이 기온의 ‘이러이 러한' 값과 대응된다 하더라도 동의어일 수는 없기 때문에 물리학자들 이 ‘물리적 크기'라는 말로 뜻하는 바가 철학자들이 ‘술어'나 ‘개념'이라 는 말로 뜻하는 바와 전혀 다론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차이점을 좀더 자세히 말하자연 술어 P 와 Q가 ‘동일'하기 위해선 ‘X 는 P 이다’라는 표현과 ‘X 는 Q이다’는 표현이 동의어이어야 하지만 성질 P 와 성질 Q가 동일한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성질들은 말하자 면 술어와는 달리 ‘· 종합적으로 동일할' 수 있다. 만약 성 질들간에 종합적 동일성 syn the ti c i den tity이 라는 것 이 있다면 일정한 두뇌상태에 있다는 것과 일정한 질적 성격을 갖춘 감각을 가진 다는 것이-비록 이 양자가 동일하다는 것이 개념적인 전리도 아니 고 선험적으로 a pr io r i 거짓인 것 같을지라도-동일한 성질의 것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는가? 이 논의는 실지로 제시되었던 논의 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이제 반선험주의 an ti -a p r i or i sm 라는 새로운

물결과, 성질들간의 종합적 동일성이라는 새로운 장치를 맞게 되었다. 이 두 가지 새로운 도구로 인하여 동일론자와 특히 기능주의자들은 지 금 한창 성업중인 것 같다. 이제 상기한 두 가지 도구에다 제 3 의 요소를 첨가하면 어떤 일이 일 어날지 한번 생각해 보자. 다시 말하자면 어떤 철학자가 (1) 반선험적 자연주의자이고, (2) 종합적 동일성이란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접을 인정 하며, 또 (3) 강한 실재론적 진리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 까? 내 생각으로는 이러한 철학자는 틀 링없이 심각한 인식론적 난접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투뇌 분열 신경학자들이 지난 20 여년간 해 왔던 특수실험을 고찰해 보자. 유명 한 ‘두뇌 분열'에 관한 실험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실험아 동일설에 어떻 게 연관되는지, 그리고 지금까지의 논의 전반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 졌던 상관관계라는 개념에 어떻게 연관되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두뇌의 모형을 컴퓨터와 유사한 인지체계로 간주한다면 두뇌도 내적 언어(이 언어는 선천적인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선천적인 ‘ 언어' 또는 표상체계에다 공적인 언어를 합친 것일 수도 있다) 륭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설적인 두뇌의 언어 를 ‘정신어 men t aIese’ 라는 이름 을 붙여 사용하는 철학자들도 있다. 이와 갇은 모형에서 시각을 가지면 이떤 일이 발생할 것인지 고찰해 보자. (신경에 관한 가능한 아야기를 꾸며 보겠다. 신경학에 관해서 나는 충분히 알지 못하지만 정말 충분히 아는 사람은 아마도 없으리 라 생 각한다. ) 우리가 어떤 감각을 가질 때 ‘판단’이 이루어진다. 축 감각을 가질 때 예컨대 '12 시에 표상된 붉음'으로 표현될 수 있음직한 어떤 것이 두뇌에 말하자면 ‘각인'된다. 그래서 감각의 질은(Q라고 부르자) 우선 무엇보 다 정신어로 된 보고에 대응한다. 또한 이 감각의 질이 말을 만들어 내 는 센터에 입력되어 두뇌는 공적인 언어로 ' 지금 붉은'이라는 보고 를 할 수 있게 된다. 정신어로 된 ' 판단이 말을 만들어 내는 센터에 입력되기 이전에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되어야 할는지도 모른다. 또 시각 피질에서도 사건들이 발생할 것이고(이 접은 신경학자 후벨과 비젤이 연구한 바 있는데 내가 상상컨대 ‘정신어로 된 보고’에로 가는 도중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리라) 말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도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보고' ‘입력',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사건들 이 두뇌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葉에서 발생할 것이다. 만 약 corpu s collosum 이 분열되어 있다면 인간의 오른쪽 葉(언어기능을 가지지 않는 葉)은 붉음을 볼 수 있을 것이고(또는 그 엽에만 보여질 수 있도록 쓰여진 질문에 적어도 긍정적인 신호 를 보낼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만약 그 카드가 무슨 색깔이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는 ‘카 드가는서 는보 이기지억 의않 는형다적 ’도고 형대성답될할 것것이이다다.( 이그것리을고 단마기지기막억으과로 장.어기.느기. .억시 점으에로 나누어 볼 수도 있다). 기억의 형적이 직선적인 인과의 연쇄형태를 떨 것이 아님은 거의 확실하다. 대신에 갈라지고 다시 만나곤 하는 복잡다 단한문 제그는물 의우 리형의태 를정 신떨에 서것 이다일.어 나는 사건들이 상당히 불. 연.속..적 인 방식 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접이다• 구체적인 감각은 시작과 끝이 있게 마련 이다. 그러나 사건 들을 잇는 인과적 그물은 불연속적인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감각의 상관자가 될 물리적 사건은 단일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동일설이 옳다면 감각상태 Q는 어떤 두뇌상태와 동일할 것이 의다.적 인형 이결상정학의적 문실제재로론 간자주는할 이 수접 없을다 .어 떠동한일 설방의식 으입로장든은지 우 관리습가이 실.나지. .로임 살고 있는 세상온 다음과 갇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죽 우리가 감각의 질적 성격으로 경험하는 것이 두뇌에서 일어나는 울리적인 사건의 성질 과 동일한 성질이라는 것이다(또는 일정한 질적 성격을 가진 감각을 경 험한다는 성질은 일정한 두뇌상태에 있다는 성질과 정말로 같다는 것이 다). 여기서 참시 멈추어 이 견해가 칭말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 지 살펴보자. 웅홍이 주관적인 성질로서(말하자면 초록색의 음반을 보 고 있다가 그 음반이 사라진 후에 남게 되는 잔상에서 생긴 주관적인 붉음) 우리의 경험에 나타난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내가 이 웅흥을 로경 험묶할은 때것 내과 가동 일처한하 다감고각 상가정태해가 여보자러. 두나뇌의상 태감들각을상 태선가언 단d i s j 하u.n 나c. t 의i. o n 으국 대화된 두뇌상태와 동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임의의 신경세포 하나 를 제거해 버린다 하더라도 경험을 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 문이다. 그러나 붉음을 경험한다는 성질은 선언적인 성질, 예컨대, 어

소러수이 러번.한 호 의우 운신에경 세었포든가 라 자수국 을번 호받회는 다선는겅 세성오질가일 자수숙도홍 있 다받.은 가사 실하은니 면이 보다 훨씬 더 긴 선언일 수도 있다. 신경세포의 상태들은 다 모으면 거 대한 집합이 될 터인데 이들을 선언으로 연결한 것이 붉흥을 경험한다 는 성질일 수도 있다. 만약 짝수 번호를 가진 신경세포가 자극을 받는다면 나는 옹흥을 경 험한다. 만약 대뇌가 ‘아니야 자국을 받은 것은 소수의 번호 를 가진 신 경세포야'라고 말한다면 그래도 나는 붉음운 경험할 때 그 중에 어느 두뇌상태에 있는지 말할 수가 없다. 여하튼 그 둘 중의 하나에 있는 것 만큼은 들림없지만 두개의 두뇌상태 를 수면할 수는 없다. 국수 번호회 신경세포가 자극을 받는다는 것은 관찰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동일 설이 옳다는 지식을 갖고 있더라도 내가 이러한 성질을 감각함으로써 호갖. 의게. 된신. 다경. 는세. 포.접 가.을 자.말 국.할 을 . 수받.가 는 .없다.다 는. 성이질 성을질 ‘을P2 ’ 라‘P1고’ 이 부라르 자부.르 고이 때홀 수감 각번 상태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P1 도 P2 도 아니고 제 3 의 성질인 R 과 P2 의 선언

동일설을 취하고서도 외적 관접에 빠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 한 예 로 물리적 대상에 관한 언어는 감각에 관한 언어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 카르납은 (어느 때인가 적어도 한 번쯤은) 특정의 두뇌상태가 감각상태 Q와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은 물리적 성질에 관하여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개념을 변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음 직하다. 물리적 대상과 물리적 성질에 관한 언어가 감각에 관한 언어로 환원 될 수 있다면 규칙도 수정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입장이 적어도 물리적 대상과 울리적 성질과 관련하여서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입장은 아니 다. 그러한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강각에 관해서는 형이상학적 실재 론자일 수도 있으나 옹리척 대강에 관해서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자가 아 니다. 그러한 사람은 또 단순히 ‘나는 동일설을 일종의 관습이나 의미 약정으로 여긴다’고 말함으로써 동일설을 채택할 수도 있다. 동일설에 서 말하는 동일성의 의미가 사전에 완전히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감각상태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성질과 동일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는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동일하다는 성질이 무엇인지 모 호하다면 동일성을 단순히 의마를 설명해 주는 것으로 요청할 수도 있 다. 그러나 지금 나는 밖에 정말 물질적 세계가 있고 물질적 세계에 관 한 언어가 단순히 감각에 관한 언어에서 고도로 파생된 것만은 아니라 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은 정말 물리적인 성질이 있다고 생각하며, ‘어떤 부분의 신경세포가 자국을 받는다’와 갇 은 표현이 우리 몸이 가지고 있는 일정한 물리적 성질을 나타내는 술어 이고 그러한 성질들은 이 감각상태와 동일하든가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 한다. 이와 유사하게 데넷 D.Dennett: 갇은 철학자도 감각언어는 매우 모호 하다고 생각하며 이러이러한 감각상태에 있다든지 이러처러한 질적 성 격을 가진 감각을 한다는 주관적 성질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가능하다 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데넷도 동일설을 물리적인 대상에 관한 용어 의 의미가 아니라 십리적인 용어의 의마를 결정해 주는 의미약정으로 채택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철두철미한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입장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로 철두철미한 실재론자는 다음과 갇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심리적 속성(이 감각상태)이 무엇인지 나는 안다. 나는

그것을 가져 본 적이 있고 또 인지할 수 있다. 뇌가 감각을 할 때 이 감각 또는 저 감각이라고 지시하는 것이 어떤 확정된 심리적 성질이라 고 생각한다. 나는 R과 P2 가 무엇인지 따라서

는 셈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아니오, 그 이론은 그렇다고 반박되었다 고뇌 가봉 둘수로 없분소.열 되왜어냐 하있면지 그않 소감’각라의고 반주대체할자 는수 도보 통있사다.람 과정.는 상. 적다. 인르. 게조 . 건두. 에 있는 관찰자에게는 Q가 시각피질의 성질과 동일할 것이다. 그런데 정상적인 조건에 있지 않은 관찰자는 여기서 고려의 대상이 안 되고 또 찰이.퇴 己다자문.”들 수·제 . 의도 는· 이 . 없경여말 .다험러은· 과 가다 지관시 련동말하일하여 여설서 들는여 이 러 동 관일동찰한일로 설예서 들측는 이을 서 .정 낳.로 상게. 조구.한 건별.다 에될.는 수 있.뜻 는.이없 다다모.. 는든 . 접관 언어중추에 입력이 없다면 붉음에 대한 감각도 가지지 않는다는 견해 를 생각해 보자. 이 견해 를 증명 또는 반박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두뇌는 분열되었지만 말로 표현되지 않는 기억이 있다면 한 방법이 있 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 을 지 모르겠다. 즉 우리가 문제의 그 사람에게 붉음에 대한 감각 을 가지고 있는지 묻는다면 그는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다시 쪼개진 두뇌를 다시 붙여(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한 속임수이겠는가 ! ) ‘붉음에 대한 감각을 하였 소?'라고 묻는다면 그는 다음과 갇이 대답할 것이다. ‘그렇소. 그런데 참 이상하오. 내가 이 감각을 경험하였고 또 당신이 나에게 그러한 경 험을 하였는지 를 물었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 내 스스로는 당신에게 그 러한 경험을 하지 않았다고 진지하게 말하는 것을 또한 들었으니 말이 오.'(실지로는 환자들이 이러한 종류의 상황을 내가 상상한 바대로 기 술하기 보다는 ‘화해시키거나' 합리화시키는 것이 더 혼하다는 이야기를 나감각는이 들 었있.다었...다) 는이 사러실한을 보 고말해가 주언는어가중추 ? 에 입력이 없는데도 붉음에 대한 그렇지 않다. 만약 다니엘 데넷(감각은 언어중추에 들어가는 입력이 라는, 또는 이와 근사한 견해를 한때 견지하였던 8)) 이 이 사람의 보고 7) ‘관찰적 불가구빌성 Observati on al lnd i s ti n g u i shab ility ' 개념은 시공이온에 관한 C. Glym our 와 D . Malamen t의 논문에서 소개되있다. Foundati on of Sp ac e-Tim e Tlzeor- Siecs ,ie ne cde,, vbyo l.E Va1r1m1 a{Mn,i nGn leysm o toa u rU, n ainv de rsSitta yc h1e9l7,7 )M. 시i n공n e이so론ta 에 S서tu d ie생 s 기i1는I lit또e Plz하il나 o s의op lzy 이 o와f 비슷한 문제는 그 전세칙인 위상의 성질에 있어서는 서로 차이가 나지만 관찰자 둥 에게 는 동일한 경험운 가지게 하는 ‘가능칙' 시공( 즉 상대성이론에서 말해지는 시공)의 존 재문계이다. 이러한 가능적 시공의 존재는 소위 '단순 사고 s i m plicity consid e rati on s' 에 의하면 우리가 어떤 시공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근거로 종 종 우시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도가 가지는 문제정은 (Malamen t가 지적하였다시피) 문리이온(일반 8) 상데대넷성이이 그론)린이 의 우식리의가 모 가형장온 단‘T순o한wa r시ds공 a에 C o살g 고ni ti있ve 다 th고e or말y 하 o지f C는o ns않c 는 i o u다sn는es s정’ 이라다는. 논문

예 계 시 되 어 있다. 이 논문온 그의 지 서 Brain s lonns (Bradfo r d Books, 1978) 에 재수 옥되어 있다.

와 그의 이론을 화해시키고자 하였다면 그는 '앞서 있었던 감각운 기억 해 낸다는 심리적 사건이 그 후에 발생하였음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을내 가수 부없인을하 는것이 다것.은 두감 각이이론 에앞서서 모발두생 하앞서였 다가는졌 던접 이감다각’ 라을고 옳 .말게.하.든 지 또 는않 그르게든 기억해 내는 경험은 차후에 생긴다. 여기서 생기는 의견의 불일치는 실제적인 것이다. 대개의 신경학자들 은 ‘분열된 두뇌' 를 가진 환자의 경우 오른쪽 엽이 ‘ 의식' 을 가지고 있다 고 믿는다. 실지로 이 말은 언어중추에 입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때로 는 붉음에 대한 감각이 생긴다고 말함과 마찬가지이다. (의식이 위치하 는 곳은 두 곳이다’는 식의 표현이 자주 쓰인다.) 그러나 적어도 한 사 람의 유명한 신경학자, 죽 에클리스J ohn C. Eccles 는 분열된 오른쪽 엽은(또는 오른편에 언어중추를 가진 환자의 경우에는 왼쪽 엽) 의석을 가지지 많은다고 주장한다. 에클리스의 견해에 의하면 의식은 단,;길하 다. 죽 분열된 오른쪽 영이 의식이 있는 듯이 흉내는 낼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제 2 의 ‘의식의 위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방법론적으로 ‘더 단순한 이론을 택하라’는 격언에 호소한다 하더라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단순한 이론이라고는 하지만 양 견해 중 한 쪽에만 해당되는 그러한 목수한 ‘단순성’이란 있을 것 갇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의 거처가 두 개 있다는 ‘두 위치’이론이 아마 어떤 접에 서는 더 단순할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어떤 행태를 유발시킬 수 있 는 잠재능력 (오른쪽 엽이 구비하고 있는)만으로도 의식이 있음을 충분 히 알 수 있으며 또 이 접은 우리가 보통 동뭉둘의 의식이라 부르는 것 과 일치한다(왜냐하면 오른쪽 엽도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언어 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언어도 가지지 못하고 또 분열된 두뇌의 한 수쪽 도있 는없 어두졌뇌음와에 도동 물불 사구이하에고는 그 많래은도 차‘.동이.일점.된 이' 체있계다.를 만가약지 고이 있경다우고가 그할 렇게 친밀하게 우리에게 연관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리고 우리가 감 각에 관한 형이상학적 실재론으로 기울어지는 강한 경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러한 경우를 논쟁되어야 할 경우라기보다는 제정되어야 할 경우로 간주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최상의 방법론적인 칙관에 맞는 것 이 아닐까?

요컨대 관찰로서는 서로 구분될 수 없는 여러 개의 동일설이 있다. 만떤 약감 동각일상설태이가 옳어다느면 두어뇌떤상 태망와시 으동로일 한그지것(이또 옳는은 지상 관알관 계수 를 있 는가.,지 .는즉.지 .)어 알 수 있는 길은 도대체 있을 것 갇지 않다. 이 접은 매우 중요하기에 좀더 고찰되어야 하겠다. 네이질 T.Na g el9) 은 박쥐가 된다는 것이 이번 것힐 ;l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 나 이 주장은 그럴듯한 주장인가 ? 떳 년 전 나는 그리핀 D.Gr iffi n 이 쓴 박취에 관한 재미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읽고 박쥐가 다른 포유동물과 기본적으로 다 몰 바가 없 다는 접을 알게 되었다. 우리들은 대부분 우리가 개와 고양이가 어떤 감각을 갖고 있는지 상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박쥐의 경우는 왜 어려움이 생기 는 가 ?

9) T.Nage l , 'What is it like to be a bat ?' in N. Block's Readin g s in Phil o sop hy of Psych ology (Harvard 1980).

박쥐는 인간이 둘 을 수 있는 것보다 떳 옥타브 더 높은 음을 들을 수 있다. 반향위치감각이 어떤 것일지 상상한다는 의미에서라면 박쥐가 된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쇼렇게오 어렵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내가 중년에 둘을 수 있는 ' 최고 음보다 한 옥타브 더 높은 음을 둘을 수 있곤 하였다. 그러나 주관적인 음의 높낮이는 변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여 내가 지금 둘을 수 있는 최 고음은 객관적인 높낮이로 말하면 내가 10 살 때 둘을 수 있었던 최고음 보다 한 옥타브 낮을지도 모르지만 너무 높아서 거의 들을 수 없을 정 도로 가늘고 뻑뻑거린다는 주관적인 측면에서는 지금 듣는 최고음이나 10 살 때 둘을 수 있었던 최고음이 나 마찬가지 이 다. 짧고 가늘면서 높은 음의 뻑뻑거리는 소리, 이것이 아마도 박쥐가 둘을 수 있는 다섯 옥타 브 높은 음일지도 모른다. 두 철학자 또는 두 심리학자간에 다음과 같은 논쟁이 붙었다고 상상 해 보자. 그 중에 한 사람은 인간과 질적으로 비슷한 박쥐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죽 박쥐의 질적 구성은 인간의 그것과 전적으로 다르 다. 따라서 박쥐 (또는 개나 고양이라도 좋다)가 되면 어떤 감각운 가지 게 될지 우리로서는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다론 한 사람은 ‘그건 말도 안 돼 ! 물론 박쥐가 가진 감각 중에는 내가 상 상해 볼 수 없는 것도 있을 것이야. 그러나 다른 인간의 감각 중에서도

(예컨대 이성의 감각 갇은 것) 내가 상상해 볼 수 없는 것도 있지 않는 가.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인간들의 심리적 공간이 나의 것과 전적으로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예컨대 박쥐의 시계가 나의 시계 와 매우 바슷하다고 생각해서는 왜 안 되는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 와는 반대로 박쥐도 잘 봉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하라.) 박쥐의 시력이나 청력의 범위 를 나의 시력이나 청력의 범위와 중첩되도록 약간 조정한다 면 박쥐의 청력은 나의 청력과 비슷할 것아고 또 박쥐가 겪는 고동도 내가 겪는 고통과 비슷해질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양자간의 논쟁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겠는가? 신경세포도 서로 다르고 또 신경세포의 배치도 다르기 때문에 (박쥐 두뇌에서 청각과 관계되는 부분은 전체 두뇌의 8 분의 7 정도 만큼이나 크다) 만약 동일설이 옳다면 완벽하게 세분화된 신경학적인 차원에서 박쥐의 어떤 질과 동일한 성질들이 인간의 어떤 질과 동일한 성질들과 문자 그대로 갇을 수는 없다. 아니면 갇을 수 있단 말인가? 박쥐가 (붉은 대상을 봄으로써) 어떤 시각을 갖게 될 때 박쥐의 두뇌는 (Pl or P2) 라는 선언적 성질을 가지게 된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서 P1 과 P2 는 최대한으로 세분화된 박쥐의 두뇌상태이다. (0.l 선언적 성질은 경우가 많아짐에 따라 훤씬 더 복잡해지겠지만 여기선 단순한 것으로 가정하 자.) 그리고 내가 (붉은 대상운 봉으로씨) 어떤 시각을 갖게 될 때 나 의 두뇌가 가지게 되는 선언적 성질이 (P; orP; )라고 가정해 보자. 여 는기질적 에적 서성어 격도다 음(상.붉과.음관 . B관같 라은계고 를 두부 르가이지자론고)이)은 나인선올간언 의적수 성감있각질다 이. ( P(가,1 )o진 r박 P쥐질2)의적 와 성감동격각일 (이하.붉고 .음(가. ,1 또진 라 고 부르자)은 (P; orP;) 와 동일하다(또는 적어도 상관관계를 가진다). (2) 박쥐의 감각이 가진 질적 성격은 나의 감각이 가진 질적 성격과 동 칠(P하,o러r P(2즉o r옹P;홍or戶P;붉) 홍와 1.,)동 일이 하두다 (질또적는 성적격어은도 또상. 관.보 관.다 계. 를더. 가복.진 잡.다.)한 . 성질 첫번째 이론에 의하면 박쥐와 나는 서로 다른 경험을 하는 것이 되고 두번째 이론에 의하면 동일한 경험을 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두 이론 이 모두 정상적이돈 비정상적이든 인간이 무엇을 경험할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동일한 예측을 한다. 다시 한 번 언급하지만 두 이론은 관찰의 측면에서는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방법론적인 격언(‘더 단순한 이론을 택하라')을 따르면 무슨 도움이

될까? 이 문제도 역시 확실하지 않다. 블록 N.Block 은 첫번째 이론이 어떤 접에서는(우 경우 모두 걸이 더 단순한 뭉리적 성질과 동일하다는 접에서) 더 단순하지만 또 다른 접에서는(두번째 이론에 의하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질이 반드시 우리의 물리적 구성에 근거하고 있을 필 요는 없다) 두번째 이론이 더 단순하다고 지적하였다. 다시 한 번 말하 거니와 여기에서 어느 이론이 더 낫다고 결정할 수 있는 어떤 원리도 없다. 그러한 원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여유가 있는가? 비트겐슈 타인이 한때 충고하였다시피 감각과 ‘동일한'(감각에 적용하여)이라는 말에 관하여 형이상학적 싣재론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마지막으로 모두 거짓이라고 화신하지만 만약 형이상학적 실재론이 옳다.다 면U) 붉제.음거.. 하II 는 기 가경 국힘은 들 거어나떤 불기가능적능 한( 또세는 준가기지능 적이)론 을상 태소, 개하즉 고객자관 적한 인 붉음이 있음을 알려 주는 기능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당신 생애에 있 어서의 초기의 물리적 상태와 동일하다. (2) 돌들도 걸을 가지고 있다 (즉 시각과 질적으로 유사한 사건들이 돌에서도 발생한다). (3) 국가들 도 의식을 가지고 있다. (1) 부터 고찰해 보자. 붉음 II 가 기능적 상태일 수 없음을 증명하기 응위태. 하(晶.예여 컨 .객.대.사 관 .용 적두.하 뇌인.였상 던붉태. 음).논에 이.의 있를있. 다음.우 는운.선 기정.상능 상.기적 적.해 으. 상 로보.태 자 와.할. 려.동그 일주것.시 는은.한 다우어. 떤리면. 가 물나 질만는적약 분 광붉상 도착현상이란 것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적어도 ‘기억상실중'의 겅우에) 는 논증이 있다. 왜 분광도착현상을 겪지 않았을 것이냐 하면 내가 분 광도착 천에오 또 후에도 객관적인 붉음을 보게 될 때 바로 그 기능적 상태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입장에 따 른다면 내가 분광도착현상운 겪었을 것임은 믈립없이 가능하다(비록 기 억상실증으로 인하여 내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기억상 실증에 걸리지 않고 분광이 도착되었다는 접을 상기한다면 그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이 경우에서조차도 만약 언어적인 조정이 자동적으로 이 루어진다면 ‘초록에 대한 감각'이라고 알려졌던 것이 이제는 ‘주위에 객 관적인 웅흥이 있음을 알려주는' 기능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논증은 오직 붉음 H 가 문제의 기능적 상태와 동일하지 않다는 접 만 밝혀 준다. 붉음,,가 좀더 복잡한 기능적 상태, 이을테면 당신 생애 의 초기에 상기의 기능적 상태를 실현시켰던 어떤 물질적 상태에 있다

는 기능적 상태와 동일하지 않다는 접은 밝혀 주지 못한다. 이와 같이 복합적인 기능적 상태는 좀 이상하고 우스운 성질이 아니겠느냐고 반대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웅홍 1., 가 복잡한 물리적 성질들의 선언과 동일시될 수 있다면 기능적인 성질들의 논리적 기능이 아우리 복잡하더라도 봅홉;’와 동일시될 수 없으란 법은 없지 않겠는가? 세계 가 기능적 성질들의 연언보다도 물리적 성질들의 선언을 더 좋아한단 말인가? (2) 는 어떤가? p 3 를 돌이라는 성질이라 하고 융홍;,가 선언적 성질 (P1orP2orP;orP;orP!) 와 동일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돌이 성이 격선이언 적항 시성 질돌을에 서항 상발 생가한질다 (것돌임이은 붉물음론을이 다경.험 한그다래고서 할융 %;때1 라기.는능. 적.질적인. 의미에서 경험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붉음의 감각의 기 능적 역할을 하는 사건의 질적 성격은 항상 돌에서 발생한다). 또는 돌 이 상이한 시각에 각기 상이한 걸을 가진다는 좀더 복잡한 가설들을 세 위 보자. 이 러 한 가설들 중에 하나만 옳다는 가설로도 족하다. ‘이 러 한 가설들은 정말 이상한 가설들이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사실은 정말 그렇다. 그러나 그러한 가설들 각각은 모든 인간의 관찰과 관련하여서 는 ‘이상하지 않은' 이론과 마찬가지의 예측을 한다. 관찰이나 실험에 근거를 둔다면 그러한 가설들 중에 어느 것도 배제될 수 없다. 왜냐하 면 각 가설들은 관찰적으로는 좀더 표준적 인 견해와 구분되지 않기 때 문이다. 서. 는이. 러안.한 된. 다.가 는설 들방은법 론야적우인란 원이리유에 없 호이소 어함떤으 로대씨강 에재 거려될면 수정 절있홍다 고우 려생해각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원리가 그 가설들이 7.1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때로는 우리가 믿을 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음에도 불 구하고 참인 것들이 있다) 적어도 우리가 그 가설들을 거짓으로 여기는 것이 겅당하다는 말은 해준다. 그러나 그러한 이론들 중에서 가장 덜 세분화된 것을 주장할 이유가 정말 없는가? 만약 우리가 질을 갖고 있 고 물리주의가 참이라면(뭉리주의물 받아들일 만한 충분한 이유는 많다 고 생각하는 철학자들도 적지 않다) 질적 성격을 갖춘 사건들이 발생하 는 물리적 대상이 적어도 하나는 있다는 논의는 어떤가? 왜 그러한 사 건들이 모든 물리적 대상에 발생한다고 보아서는 안 되는가? 만약 질 그 자체에 그것이 인간의 경우에 하는 바와 같은 특수한 ‘역할'을 하도

록 요구하는 무엇이 있다는 접을 밝힐 수 있다면 위의 논의는 차단될 것이다. 그러나 걸을 형이상학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이라고 믿는 사람들 온 우리가 그러한 점을 밝힐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3) 을 고찰해 보자. 고동이 유기체나 국가에 의하여 칭시될 수 있는 적합한 기능적 상대와 동일하다는 가설을 생각해 보자. 다른 말로 포현하여 예컨대 미국이 ‘미국은 …로 인하여 고동을 받고 있다 ’ 고 공언할 때 정말 고통을 받은다고 가정해 보자. 물론 정말 그런 지는 우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아마도 독자는 정말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이 고동 을 느낄 때 행동하는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어떤 집단도 고 동 을 느낀다는 주장을 재미있고 홍미롭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미국이 실제로 고통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가설에 의하면 독자들이 잘못이다. 가설에 의하면 소위 국가정신 또는 혼이 정말 고통을 느낄 수 있으니까 말이 다. 이 가설은 심성철학에서의 한 재미난 문제와 연관된다. 다음과 갇은 논의 를 기능주의자들(나 를 포함하여)은 즐겨 사용한다. 죽 원리적으로 (그 조직의 기능적인 측면에서) 로보트와 인간의 차이접은 물리학과 화 학의 미세한 차이점으로 환원될 수 있다. 신경세포의 차원에까지 우리 와 유사한 로보트 롤 만들 수 있다(로보트는 두뇌는 물론이고 ‘살과 피' 까지도 가질 수 있다). 그 미세한 차이점이란 우리는 탄소와 수소와 단 백질 동등으로 이우어진 신경세포로 되어 있는 데 반하여 로보트의 신 경세포는 전자로 되어 있다는 점뿐이다. 그러나 신경세포보다 단위가 큰 조직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일치한다.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의식을 부여하는 것은 수소와 탄소라고 생각하는 ‘탄소-수소에 집착된 사람'이 아닌 이상 이 로보트가 수소와 탄소의 양은 보통보다 적고 대신에 금속 이 좀더 첨가된 두뇌를 가진 인간이라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 는가? 이와 같은 논의는 다음과 같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인간의 신경세 포와 비슷하게 장치된 전자 부속품이나 전자 신경세포 대신에 축소된 인간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축소된 왜소인간들이 어떤 전체적인 음모에 가담되어 있는지 알고 있다고 가정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그들 이 서로 노트를 건네고 받는 불빛의 희미한 방을 제외하고는 무엇이돈 지 볼 수 있다고 상상할 필요도 없다(뭉론 그들이 노트를 건네고 받는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비교하여 매우 빠를 것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소외된 노동자들이라 봉 수 있다. ‘자, 이 왜소한 인간들이 ”의식한다 고 부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알다시피 이 자들은 단순히 신체 를 이리 저리 움직이고 있을 따름이니까. 따라서 어떤 조칙체가 정확한 기능을 (우리의 것과 유사한)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의식한다”는 술어 를 분이기에는 불충분하다'. 이러한 반응에 대한 한 대답은(이 대답은 실지로 내가 내놓았다) 그 ‘머리룹 많이 가진 로보트’가 우리와 마찬가지의 기능적 조칙을 가지고 었다는 접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보다 더 근본적인 대답이 가능 하다. 죽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도 있다. ‘그 머리가 많은 로보트가 의 식을 가지고 있다고 불러서는 안 되는가? 만약 첫째 논의가 옳다면(나 는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양전자 두뇌를 가진 로보트도 의식을 가지 고 있다면 머리륭 많이 가진 로보트의 신경세포는 종 더 의식을 가지고 있고 로보트 전체는 의식을 댑 가지고 있다고 말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 가. 결국 우리도 어떤 의미에서 미세한 동물들로 이우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우리들의 세포는 어떤 의미에서 개별적인 동물과 갇이 각자가 개체이다. 그리하여 각 세포는 후리가 갖는 감정 이외에 각자 조금씩의 감정운 갖고 있을지 누가 아느냐?' 이런 식으로 대답한 다면, 즉 머리 물 많이 가진 로보트도 의식을 가진다고 결정한다면 미국 이 의식을 못 가지라는 법은 없지 않겠는가? 미국도 인간과 동일한 기능적 조직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물론 아니 다. 그렇지 않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사접은 많다는 말이다. 미국도 방어하는 기관을 가지고 있으며 섭취하는 기관, 기름이나 동전을 먹는 기관 둥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방대한 양의 배설(오영)도 한다. 미 국도 그 기능적 인 조칙의 측면에서는 꿈 틀 거 리는 파리와 마찬가지로 포 유동물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파리도 고동을 느 낄 수 있다고 생각하듯이 미국도 고동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 지 않겠는가? '질적 성격'이라는 말은 얼마나 잘 정의되었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개의 감각이 동일한 ‘질적 성격'을 가진다 또는 안 가진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

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성적인 차원에서조차도 그 말은 분명하지 않다. 한 사람의 경험이 그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그 사람이 사전에 형성해 있 는 개별구조에 달려있음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둥근 책상을 비스듬히 봉 때라도 마치 바로 위에서 보는 것처럼 둥글다 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둥근 책상의 경우 심리학자와 철학자들은 19 세기부터 우리가 가지는 감각자료는 ‘타원'인데 둥글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둥근 형태 Ges t al t'인 데 시각이론 때문예 타원적이라고 생각할 뿐인지에 대하여 논쟁해 왔 다. 우리는 두 이론에 모두 들어맞는 경험을 가질 수 있으며 두 기술 중에 어느 한 쪽에만 들어맞는 경험은 허다하다. 신경이론이 이 논쟁을 해결지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죽 망막에 나타나는 타원의 이미지 는 분명 두뇌 자체에 사건을 만들어 낼 것이며 이 사건을 ‘시각'과 동일 시한다면 ‘타원형의 감각자료에다 무의식적인 추론을 합한' 고전적인 이 론 비슷한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경험의 판단적 요소(‘나 는 둥근 책상을 본다')에 해당되는 것은 두뇌의 ‘보고'와 ‘입력'일 것이 며인 다이고러 한판. 단.것하.들지.을 않시는각 과이 상동 일타시원한형다의면 감 우각리자가료 를무 엇가인질가 수가 타없다원는으 로이 론보 이 성립될 것이다. 이 두 이론이 모두 합당하다고 할 수는 없는가? 가 상의 웅직임을 기술하도록 요청을 받은 사람에 관하여 굿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가 본 것을 뭉리적인 용어가 아니라 지각적 또는 현상적 용어로 기술해 보도록 이야기하면서 그가 어떤 종류의 용어를 사용할 것인지를 밝히는 일이다. 이러한 작업에 대한 반응이 서로 를리든 아니든 실지로 일어나는 일을 바라다보는 시각은 전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사실을 주조해 내는 데 사용되는 도구들로부터 밝혀져야 한다는 접을 염두에 둔다면 물리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그리고 지각적인 것과 단 순히 가상적안 것간의 어떠한 동일화도 무의미해지고 만다. 물리적인 것이 지각적 사실을 고도의 인공을 가미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봅 수 없듯이 지각적인 것도 물리적인 사실을 약간 곡해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봅 수 없다 .10) 10) N.G o odman, Ways of Worldm aking , pp. 92- 3.

내가 만약 붉은 책상보 룹 시간차 를 두면서 두 번 쳐다볼 경우 나는 붉음에 대한 홍칠한 감각을 갖게 되는데 다만 그 상이점을 (내가 화가 가. 특아 히닌 당이혹상스) 런알 아경차우리가지 있 는못데할 그뿐것인은가 ?생 리학에서 말하는 눈. 의. 조. 절.작. 용 accommoda ti on 의 경우이다. 어떤 사람이 상을 전도시키는 안경을 끼었는데 한참 후에는 사물들이 다시 그에게 정상적으로 보인다고 해 보자. 이때 감각자료가 다시 ‘뒤집혔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가 변경 된 감각자료에 익숙해져서 ‘위'와 ‘아래’룬 재해석하고 있다고 해야 할 까? 아마 그 스스로는 이 양자 중에 어떤 것이 맞는지, 그리고 어떤 시접에서 사물들이 정상적으로 보이게 되었는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와 같이 초점이 두 개 있는 원근 양용의 안경을 낀 사람은 시계의 밑 반쪽이 · 우리가 그 차이점을 주목하지 않을 때에도 다르게 보이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 문제의 그 사람이 자기의 눈을 결코 변화에 따라 조철한 수 없은 변형 아 있으며 (사실 인간의 눈의 조 절을 허용하는 변화란 비교적 단순한 종류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 나는 우리가 색깔도착현상에는 우리의 눈을 조절할 수 없으리라고 가정 하였지만 이 눈의 조절작용이란 현상이 ‘동일한 진적 성격'이라는 개념 이 어느 정도 잘 정의된 개념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던졌음은 분명한 사 실이다. 실재론 우리는 지금까지 일군의 회의적인 난점들을 고찰하였다. 이러한 난접 둘을 고찰함으로써 밝혀진 것은 동일설이 틀렀다는 것이 아니라(또는 상관이론이 를렀다는 것이 아니라-지금까지 고찰한 난점들은 동일 설뿐만 아니라 ‘상관’이론에도 해당되는 난접들이다) 만약 동일설이 참 이라면 동일설의 상세한 주장들까지 세분화시키는 방법들이 상당히 많 아 어느 것이 참인지 결코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어느 것이 참인지 결 코 알 수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하여 돌이나 여타 무생물도 걸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박취와 같은 것도 우리와 같은 종류의 절을 가지고 있는 지, 또는 국가와 갇은 집단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 등등의 수많은 전 동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어떤 철학자들은 돌도 고동을 느낄 수 있다(다시 말하여 인간의 고통

과 동일한 질적 성격'이 돌‘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갇은 형이상학적 실 재론이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 럿셀이 한 단서를 재공해 준 것 갇다. 럿셀은 ;길에 관해서도 ii巨 l 보편자에 관해서도 실재론자이었다. 더구 나 그는 걸을 보편자 중에서도 모범적인 것으로 여겼다. 보편자란 무엇 보다 우선 사물 들 이 서로 휴사할 수 있는 방식이다. 럿셀은 ‘사물들이 유사할 수 있는 방석들' 중에서 인식론적으로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 보인 편것자이 중감에각서들도간 의탁. 월.질.한적 보유편사자이성다이.라 고 보았다. 럿셀에 의하면 걸이란 그러나 전동적인 실재론자들은 보편자가 완전히 정의된 것으로 생각 하였다. 죽 맡 word 은 모호할 수 있지 만 보편자 자체는 모호할 수 없 다고 보았다. (괴델은 언젠가 대화중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죽 말 이 모호한 주된 이유는 그 말이 지칭하는 개념들의 집합이 모호하기 때 문이다. 그러나 개념들은 완벽하게 정의된 것들이다.) 만약 걸들도 보편자아고 보편자는 완벽하게 칭의된 것이라면 어떤 사 뭉 또는 사건이 ――-분열된 두뇌의 반쪽이나 그 반쪽에서 일어나는 사 건도 포함하여, 또한 돌이 나 돌에서 일어 나는 사건, 국가나 국가에서 발생하는 사건들도 포함하여 ――-어떤 문제의 걸을 정시하는지 안 하는 지도 완벽하게 정의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기능적 역할과 무관하다고 생각된다면, 그래서 붉음의 감각이 가지는 질적 성격이 바로 그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어떤 것의 질적 성격과 동일한 것아 국히 우연으로 생 각된다면 분열된 두뇌나 돌도 그 걸을 갖게 됨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가능성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그 중에 는 의미있는 것도 있겠지만-분열된 두뇌의 오른쪽 엽을 ‘의식의 장 소’로 여기려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경향이 부당한 것은 아니라고 나 도 암시한 바 있다) 주장하는 철학자들은(나를 포함하여) 그렇게 주장 함으로써 일종의 행태주의륭 지지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화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질'이라는 것이 잘 정의되지 않은 존재물이라고 말 하는 것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행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 는 것과 다르다. 모호하지만 분명한 지시물을 갖는 개념은 많다. 예컨 대 검이라는 개념은 이글우나(이굴루가 집인가?) 호건의 경우에는 잘 못 정의된 것이다. 그런데 이글루가 집인지 아닌지를 결정해 줄 사실적

인 무엇이 없다고 해서 이글루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마 찬가지로 오른쪽 엽이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사실적으로 알 수 없다는 접이 의식을 가진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 는다. 감각의 질적 유사성은 어느 정도까지는 정의될 수 있다. 만약 내가 붉음의 감각을 가진 다음에 초록의 감각을 가진 다면 내 가 유사하지 않 온 두 감각을 가졌었다고 알 것이며(나는 이 접을 두 감각의 기능적 역 할을 비 교해 보지 않고서 도 안다) 만약 붉음의 감각을 가진 다음에 또 ‘동일한' 붉음의 감각을 가진다면 내가 유사한 두 감각을 가졌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적' 진리관을 가진 사람에게는 두 감각이 (임의의 두 사 건은 뭉론이고) 질적으로 유사한지 아닌지 물 매 경우 결정해 줄 사실이 있다는 결론은 성립되지 않는다. E 를 내가 어느 목정한 시간에 특정의 감각을 갖는 사건이라 하고 E' 룰 돌에 발생하는 어떤 물리적 사건이라 하자. E 의 질적 성격 (예컨대 흙홍,;)이 (P, orP2orP J)와 같은 성질과 동일하거나 상관관계를 가지 고 있다는 주장은(여기에서 P3 는 응럽 bein g a rock 의 성질이 다) 인간 의 건전한 감성능력을 위협하는 주장이다. 그리고 E 와 E' 가 ‘질적으로 유사하다’는 주장은 불합리한 주장이다. 왜 이 주장이 봉합리한지에 대 해서는 이미 설명을 한 바 있다. 죽 그러한 주장은 ‘어떤 대상에 아무 런 근거도 없이 성질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방법론적인 격언을 어겼 기 때문에 불합리하다는 설명이었다. 이러한 설명이 동한다 하더라도 설명의 결과는 돌이 컬을 가질 수는 전혀 없다는 주장보다는 훨씬 약하 다. 만약 돌도 질을 가지고 있다는 ‘가설'에서 잘못된 점이라고는 이것 뿐이라면 우리는 옹오 걸홍 가치고 었다은 것이 우리가 할뇨 있은 한 가등혼 하치만 선협척요오은 매우 파휼 o.] 닷혼 o.1 야기이다라고 말해야 할 입장에 처하게 될 것이다. 사실 돌도 질을 가지고 있다는 가설은 통 속의 두뇌 가설만큼이나 부 조리하다. 이 가설도 후자의 가설과 마찬가지로 마술적 지시이론을 암 암리에 전제하고 있다. 정신이상이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E 와 E' 를 유사한 것으로 보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이들에게는 ‘유사성’의 문제(두 감각이 질적으로 유사하다는, 죽 동일한 방식으로 느낀다는 뜻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들도 이 점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E 와 E' 를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미친' 짓일지라도 유사할 수도(논

리적으로 가능하다는 뜻에서)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왜 이렇게 생각 하느냐 하면 질적 성격, ‘느끼는 방식', 기능적 역할, 수반되는 사고와 판단 등을 갖춘 문제의 감각을 가짐으로싸 그들은 ‘이 감각이 느끼는 방식'이라는 표현(전문적으로 말한다면 ‘이 감각의 질적 성격', 자붉 음 II', ‘이 질' 등의 표현)이 특정한 한 개의 ‘보편자', 절대적으로 잘 정 의된 형이상학적 개체의 한 성질을 지시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환 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말 우리와 기능적으로 유사한 로보트들이 있어 우리가 그들과 함께 일하고, 토론하며, 친구로 삼았다면 우리는 분명 로보트들도 의식을 가 지고 있다고 쉽게 확신할 것이다. (물론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 ;l 의 걸을 가지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회의적이겠지만 우리는 박쥐나 개도 우리와 마찬가지의 질을 가지고 있을지 하는 질문을 그렇게 자주 생각 하지 않듯이 이 문제도 그다지 자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머 리가 많은 로보트의 경우는 어떤가? (이들이 마치 동물들이 지구상에서 공생관계로 진화하듯이 어 떤 생물학적 인 철차에 따라 실지로 진화하였 다고 상상해 보라.) 이응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느낄 것인가? 이와 같이 괴상한 경우에 우리가 정말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지만 이 경우에서조차도(만약 우리가 대개의 경우 로보트 전체와 상대하지 로보트의 의식을 가진 ‘신경세포'와는 좀처럼 상대하지 않는다면) 우리 는 의식을 부여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 점에 관해서는 우 리의 의견이 항상 양분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머리를 많이 가진 로보 트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면 미국과 같은 국가도 그러 리라고 생각하게 될까? 이 정은 필자도 모르겠다. 이 모든 경우와 관련하여 제시하고자 하는 나의 관접은 어떤 것이 정 말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또는 질들이 정말 동일한지 아닌지 하는 문제에 어떠한 숨겨진, 본체적인 사실도 없다는 점이다. 분명한 것은 경험적인 사실이 있다는 것뿐이다. 돌과 국가는 인간이나 동물과 는 크게 다르며 , 여 러 가지 종류의 로보트들이 중간적 인 대 상들이 라는 등등의 경험적인 사실만이 분명한 것으로 남는다. 돌과 국가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점이 우리가 실지로 가지고 있는 의식이라는 개 념에 관하여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러한 입장이 좀 당혹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이 입장에 의하면 합리 적 수용성, 정당성,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진리의 척도를t . 우리의 생물학

적 그리고 문화적 유산에서 나온 유사성이라는 척도에 의존해 있는 것 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 ‘집', ‘눈', ‘갈색' 둥과 갇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대개의 언어와 관련하여 이 접은 옳다. 걸의 문 제에 얽힌 여러가지 난문들을 이러한 식으로 해결하려는 실재론자는 질이 정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든가 또는 질은 우리의 ‘제 2 차 개념 집합'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예컨대 겁도 미촌 x·사 의 군에 속하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존재'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었 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인간의 세계이다. 무엇이 의식을 가지 고 있고 또 무엇이 의식윷 가지고 있지 않은지, 무엇이 감각을 가지고 무엇은 감각을 가지지 않는지, 질적으로 유사한 것은 무엇이며 유사하 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둥둥의 모든 질문들은 결국 궁극적으로는 같음 과 다름에 대하여 내리는 우리 인간의 판단에 의존해 있는 것이다.

제 5 장 합리성의 두 개념 지금까지 논의한 중에서 합리성과 ‘합리적 수용가능성’에 관하여서도 언급한 바 있는데 합리성이란 쉽게 설명되지 않는 개념 중의 하나이다. 다른 영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문제가 있다. 몇 년 전에 자연종 natu r al k i nd 을 나타내는 말, 예컨대 금g old 의 형태를 연구한 바 있는 데 그때 내린 결론은 말의 외연이 단순히 ‘일련의 의미규칙'이나 제도화 어된 떠규어범떠에한 의대하상여들 이결 정금되의는 모.것 범.은 적. 아예.니 가라 는되 는접지이는었 다결.정 해규 범줄이 나수 규있칙어이도 금이라는 말의 외연을 전반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규범이 단순히 금 이란 무엇인지를 정의해 주는 것일진대 모범적인 예조차도 사실은 알고 보니 금이 아니라고 밝혀지는 경우도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보통 어떤 것이 어떤 종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그것이 그 종의 모범적인 예와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또는, 좀더 모호하 게 말하자면 ‘충분히 유사한지 ’ 아닌지 ) 에 따라 결정 하려 하는데 물론 어떤 종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결정적으로 밝히기에는 현재 행하는 겁사 만으로는 불충분함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서 본성이 란 무엇인지, 또는 어떤 경우에 충분한 유사성이 있다고 볼 것인지 하 는 문제는 자연종과 맥락 양자에 달려있다(냉차는 어떤 맥락에서는 ‘물' 이라 여겨질 수도 있고 또 다른 맥락에서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금을 금으로 여기게끔 만드는 것은 금을 이루고 있는 궁 국적인 구성이다. 고대 회람시대부터 이 궁극적인 구성이 금과 같은 사

물리의소스 (법금칙)적를 행두태고를 모결범정적한 다예고와 동생일각한되어 본져. 성 . 을왔. 다 .가. 진.고 대것. 을희 랍의인미들하이지 뇨않 았다면 가짜 금을 가려내는 새로운 방법의 탐구(아르키메데스의 농도검 사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도 울리적인 것에 대한 여러 가지 사색도 모 두 무의미한 것일 것이다. 이와 동일한 논법을 합리성에도 적용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떤 믿음이 합리적인지 아닌지룽 결정해 주는 것이 이 문화 저 문화 둥의 개별적인 문화에서 내놓은 합리성의 규범이 아니라 합리성에 관한 어떤 이상적인 이론, 즉 어떤 믿음이 어느 가능세계에서도 합당한 상황 이 주어졌을 때 합리적 이 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제공해 주는 이론 이라고 말해진다. 이러한 이론은 무엇이 모범적인 예인지 설명해 주어 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상적인 이론은 이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현재 로서는 접할 수 없는 경우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줄 기준을 제공 해 중 수도 있다. 예컨대 금에 관한 이상적 이론은 가장 뛰어난 고대의 희랍인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경우들까지도 우리들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합리성' ‘이성적' ‘정당화된' 동동의 말들도 자연종을 가리키는 말로 취급하자는 제안이 가진 일반적인 난접은 합리적으로 수 용될 수 있는 믿음들을 모두 묶을 수 있는 강력한 일반화를 실지로 것 아델 전망이 매우 희박하다는 접이다. 금과 같은 경우는 이것이 가능하 다. 즉 금의 예라면 모두가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강력한 보편법칙이 있 으며 어떤 것을 금이라고 기술할 수 있음은 그것이 이 보편법칙을 따르 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리적으로 정당화된 믿음의 경우에는 그러한 믿 음의 모든 예들을 묶을 수 있는 강력한 보편적 일반화가 가능할까? 후자의 경우 일반화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데 그렇다고 해서 금의 성질에 관한 과학적 탐구와 도덕적 탐구나 철학적 탐구간에 아무런 유 사접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예컨대 윤리학에서 우리는 개별적인 행위 의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말하자면 ‘관찰보고')에서 출발하여 그러한 판단들에 기초한 도덕적 규칙들을(예의없는 일반화는 아니지만) 점차적 으로 형성해 나간다. 예컨대 ‘이방인들에게 천철하라. 왜냐하면 당신도 만약 이집트에 간다면 어떠한가 당신 스스로도 알지 않는가'(‘저차원의 일반화') 갇온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규칙들이 다시 개별적인 경우들 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또 변경시키기도 한다. 그럼으로 써 종전의 규칙들을 보완하거나 개조시킨 새로운 규칙들이 나올 수도

있다. 도덕적 격언들과 개별적인 도덕판단간의 이러한 변증법이 수천 년간 계속된 후 철학자들은 격언들과 개별적인 판단둘을 모두 변경시컬 수도 있는 도덕적 개념화 작업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도덕이론 을 산출해 낼 것이다. 바로 이와 동일한 절차가 철학의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진다(여기에서 철학이란 그 외연상 합리성의 이론과 거의 동일하다). 나는 수년 전 어 느 논문에서 그라이스 Gr i ce 와 베이커 Baker 를 쫓아 도덕적 체계에 필 수적인 사항둘을 기술해 본 적이 있다. 그때 내린 결론은 (1) 적어도 기 본가정들은 광범위한 호소력을 지녀야 한다 (2) 도덕체계는 합리적 비판 에 견디어 낼 수 있어야 한다 (3) 도덕은 삶에 보댐이 되고 보람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 'Li ter atu r e, Sc ien ce, and Refl ec ti on ', N ew Li ter ary His tor y , vol. Vil, 1975-76, 이 논문 온 나의 저서 Meanin g and tlze Moral Sc ien ces(Routl ed g e and Keg a n Paul, 1978) 에 재수목 되어 있음.

합리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하여 좀더 나은 이해를 갖기 위한 방법도 —우리가 아는 유일한 방법인데 ――-이와 비슷하게 합리성에 대한 철학적 개념을 개발시키는 길이다(이 작업은 끝이 없을 터이지만 그렇 게 되지 않을 수 없다). 놀라운 접은 하나의 도덕체계가 성립되기 위해 서 필요한 사항들이 (앞서 내가 기술한 바대로) 그대로 인간이 간여하 는 어느 영역에서건 방법론이나 합리적 절차의 체계를 위한 필수사항도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합리성의 개념을 좀더 찰 이해하기 위한 시도가 분석철학내에서는 주로 과학철학자들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시 도의 결과로 두 개의 주요 철학적 흐름이 생기게 되었다. 논리적 실증주의 지난 50 여년간 소위 ‘합리적 정당화’의 방법들을 마치 어떤 법전과 같 은 것에 의해서 주어진 것으로(물론 과학철학자들도 그러한 방법들을 완벽하게 형식화시키는 작업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을 자인하지만) 생 각하는 경향이 논리적 실증주의라고 알려진 철학운동에서 가장 분명하 게 나타났었다. 논리 실중주의자들은 ‘과학 논리학자들'(실중주의자들의 철학자들을 이렇게 불렀다)이 언젠가는 합리성의 법전을 명기할 수 있 으리라고 믿었는데 그들은 이 법전이 ‘과학적 방법’을 빈듬 없이 기술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학적 방법’이 합리성 자체운 납김 없이 구명해 주고 그 방법에 의한 검증가능성이 의미 있음을 구명 해 중 것이기 때문에(‘어떤 문장의 의미는 그것의 검증방법이다 ' ) 어떤 것이 인식적으로 의미 있는 진술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도 이 법전에 의 하여 가려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법전에 있는 방법(수학, 논리학, 경험과학의 방법들)에 의하여 검증될 수 있는 진술은 의미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그 외의 모든 진술은 ‘사이비 진술’ 또는 의미 있는 듯이 위장 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실증주의자들은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가장 혼한 응답은 논리적 실중주의자들의 의미기 준은 스스로 논파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실중주의자 들의 의미기준 자체가 (a) ‘분석적'인 것도(‘분석적'이라는 말은 설중주의 자들이 논리학과 수학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한 알이다) (b) 경험적으 로 검증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상스럽게도 이 비판이 논 리실중주의자들에게 마친 영향은 국소하였고 논리적 실증주의의 발전을 크게 저해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비판에 실증주의자들이 주의 깊게 귀 물 기울이지 않았음은 철학적으로 큰 잘못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 냐하면 내가 보기에는 그 비판은 옳은 비판일 뿐만 아니 라 단순히 논리 적 실중주의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깊은 교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재와 관련하여 내가 지금 개진하고자 하는 접은 다음과 같은 관 찰현에대 사근회거에할서 것제.이도.다.화. 된죽 형 논태리의실 검중중주이의다자.들 실이중 말주한의 적‘ 검의증미 ve에r 서ifi ca껌 ti중 on'’ 은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경우에 따라(철학 이전의 또는 비철학적 의미에 서) 옳은 것으로, 옳을 화물이 높은 것으로, 또는 성공도가 매우 높은 과학으로 검증될 수 있다. 그러나 옳음, 확률적으로 가능성이 높은 옳 음, 또는 ‘성공도가 매우 높은 · 과학이론' 등을 일반대중이 공적으로 인 식하고 있다는 사신이 이미 우리 문화가 지켜온 지식과 합리성의 규범 의 산 중거이며 또 지식과 합리성의 규범은 그러한 인식으로 인하여 더 욱 공고해진다. 시초에 실증주의자들이 생각하였던 검증의 원형은 액면 그대로 보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공적으로 제도화된 것은 아니었다. 카르납의 『세계의 논리적 구조 Der Logi sch e At ifba u der We lt』에서 언급된 검증 은 .::z. 질이나 ‘내용'이 밖으로 ‘전달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주관적인 감 각에 기초한 것으로서 궁국적으로는 사적인 것이었다. 물론 그 후 카르

납은 노이라트 Neura t h 의 충고를 받아들여 좀더 공적이고 ‘간주관적인 int e r subje c ti ve ' 검중개념을 내놓았다. 포퍼 K. Po pp er 는 과학적 예측에서 문제삼는 것은 ‘기본문장 basic sen t ence' 들이 라는 접 을 강조하였는데 ‘저 저 웅의 오른쪽 접 시 가 내 려 간 다’와 갇은 문장이 그와 같은 문장으로서 이러한 문장들은 회의론자들 이 만족해할 수 있을 정도로 ‘층명'될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공적으로는 받아들여진 것 들 이라는 것이 포퍼의 생각이다. 여기에서 포퍼는 그가 사용하는 언어 가 규약주의 적 conven ti ona li s tic이 라는 비 판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어떤 기본문장을 받아 들 이고 안 받아들이는 문제가 마 치 규약이나 사회적인 결 단의 문재인 듯이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 는 포퍼의 언어에 관습주의적인 요소가 있어 보이는 까닭은 단순히 그의 주장에 우리가 일상적인 지각판단을 할 때 암암리에 기대 게 되는 규범이 제도화된 성격을 띤다는 인식이 들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지금 마우 위에 서 있다’와 갇은 문장을 ‘중명'해 보라는 회 의론자의 도전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응답을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적합한 상황에선 그러한 문장에 동의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규범이 존재한다는 접을 알 수 있다. 비 트겐슈타인은 한 집 단이 공유하고 있는, 그럼으로써 그 집 단의 ‘삶 의 형식 for m of lif e’ 을 구성하고 있는 공적인 규범이 없다면 언어는 물 론이고 심지어는 사고 자체까지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논한 바 있다. 비 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앞에서 내가 언급한 바 소위 제도화된 검증이라는 것이 ‘정말 '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인지 묻는다는 것은 어리석고 불합리한 짓이다 . 그는 『확실성에 관하여 On Cer /ai n ty』라는 책에서 철 학자들은 예컨대 ‘고양이는 나우에서 자라지 않는다’와 갇은 문장에 대 하여 수많은 인식론적 정당화웅 제공할 수 있으나 그 중에 어느 것도 고양이가 나무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더 화실한(제도화된 의미 로서의 ‘확실한') 것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회의론자들은 지각판단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귀납까지도 문제삼았다. 합리적 ra ti onal 이라는 개념과 사리에 맞는 reasonable 이라는 개념을 구 사별해실( 보아았마던 눈 이흄 D올. H확u물me이 은 높예다컨는대 사오실는까 지겨도웅) 에미 국대에한 눈합.이리. .적올 인 것 증이명라은는 있을 수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그러나 그는 눈이 올 것임을 의심한다는 것은 매우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부언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는 겨

울에 미국에 눈이 울 것임을 ‘중명'해 보라는 회의론자의 도전에 우리는 사회적인 규범이 있어서 이에 따라 일상적인 지각판단의 경우에서와 마 찬가지로 그러한 귀납에도 동의하게 된다고 응답할 수 있다. 정밀과학에서 볼 수 있는 고차원의 이론의 경우에는 사람에 따라 반 옹이 조금씩 다르다. 일상적인 사람들은 특수 상대성이론을 검증'할 수 없다. 이들은 그 이론을 심지어는 배우지도 않은 경우가 많으며 또는 그 이론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수학(미교적 초보적인)조차도 배우지 않은 사람이 많다. 이 이론은 이제 럿떳 대학의 뭉리학 초보과정에서 가르쳐지기 시작할 따름이다. 이러한 종류의 이론에 대한 상세한(그리 고 사회적으로 인정된) 평가는 과학자들에게 맡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 런데 과학자들은 과학이론들이 가지는 가변성 때문에 상대성이론같이 성공적인 이론일지라도 그것은 단순하게 ‘참'이라고 말하기를 꺼린다. 그러나 상대성이론도――」전에 없이 성공적이었던 양자전력학과 마찬가 지로一―-‘성공적인 예측'울 하고 ‘광범위한 실험에 의하여 지지불 받는' 성공적인 과학이론의 하나라는 것이 과학자 집단의 판단이다. 이러한 과학적 판단들은 과학자 아닌 다른 집단들이 과학자들에게 위임한 것들 이다. 이 경우와 앞에서 언급한 제도화된 검증규범의 경우간의 차이접 은 전자의 경우에는 전문가들이 목별한 역할을 맡고 있고 또 이 전문가 들에 대한 신임이 재도화되어 있다는 접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적 노동 아 분할되어 있는 예에 지나지 않는다. 목수 상대성이론과 양자전력학 이 현존하는 뭉리이론 중에서 가장 성공적'이라는 판단은 사회에서 지 명된 전문가들에 의해서 내려진 것이고 이 전문가들의 권위는 여러 실 천적 측면에서 인정이 되고 있으며 그런 뜻에서 제도화된 것이다. 최근에 우연히 알게 된 것이지만 비트겐슈타인도 그러한 ‘제도화된' 의미에서 겁중될 수 있는 진술만이 참(또는 옳다든가, 아니면 칭당화 된)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 말이 실지로 어느 철학자가 우 리 사회에서 정당화'된 것이면 무엇이든 칭말 다 그렇다고 주장하였다 는 뜻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철학자들은 우리의 개념 자체를 구성해 주 는 제도와 이와는 다른 역할을 하는 제도를 구분해 본다. 물론 그러한 구분이 과연 어떻게 이우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많은 논쟁이 있긴 하 지만, 여기에서 내가 지시하고자 하는 바는 비트겐슈타인도 우리가 행 하는 제반 '언어놀이 lang ua g e g ame’ 에서 무엇을 두고 옳고 그르다고 말할지를 결정해 주는 것은 앞에서 언급된 재도화된 검증의 일종이며

이것을 떠난 객관적인 옳고 그름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리라는 접이다. 비트겐슈타인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그가 실지로 말한 바와 一예컨대 우리가 도대체 개념이란 것을 갖기 위해선 ‘우리들의 판단 에 있어서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접을 그는 강조하였다_들어맞을 지라도 과연 이러한 해석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선 본인도 확실히는 모 르겠다. 우선 비트겐슈타인이 ‘우리의’ 판단이라고 말했을 때 ‘우리'란 누구를 말하는지 매우 모호하다 . 그리고 그가 말한 소위 ‘삶의 형식'이 내가 앞에서 언급한 제도화된 규법과 일치할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 나 나는 이와 같은 해석을 비트겐슈타안의 『강의와 대화 Lec t ures and Con versa ti ons 』라는 책을 읽는 도중에 하게 된 것이다 . 이 책에서 비트 겐슈타인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다윈의 진화론을 모두 거부하였 나다.오 (는비 트말겐 들슈 이타 인무.이의. .이실 하증다주고의 자여들기과지 는않 다았르으게며 정오신히려분 석프학로이이나트 의진화 ‘론영에리 함'을 높이 샀음에도 그러하다.) 비트겐슈타인이 정신분석학을 어떻게 보았는지 (그는 정신분석학을 일종의 ‘신화’라고 불렀다)는 별로 중요하 지 않다. 왜냐하면 정신분석학이 헛소리에 가깝다는 견해_나는 이 견해가 잘못되었다고 보는데_ 륭 피력한 사람은 비트겐슈타인 외에 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화론에 대한 그의 반론은 매우 괄목할 만하다 .2) 바트겐슈타인은 다윈의 이론을 물리학의 이론에다 비교시킨 다. (‘과학적 설명에 관하여 가장 중요한 사항 중의 하나는 설명이 맞아 2) 진화에 관하여 미 트겐슈타인이 한 안은 다움과 갇다. '사람윤은 지극히 미약한 근거에 서 사신운 하곤 하었다. “나 는 모르겠어. 그것은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와중이 원 수도 있 운 하나의 홍미로운 가선인 것 갇아 ”라 는 태도 문 취한 수는 없었운까?' 'Lectu res on Aesth e ti cs ', p.2 6 in Cy r il Burrel (ed.) , L. W. Wi llg c 11slci1 1 : Lcc/11res and Co11versa- lio n s, Berkeley, Univ e rsity of Califo r nia Press, 1967. 진화가 마중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미트겐슈타인은 아우 압도 하지 않았으나 앞에 인용한 구절로 이우어 보아 개체화가 일어나는 것운 실지로 봉 see i n g운 뜻한다고 하겠다 . ('이러한 과칭이 일어났음 운 누군가가 보았는가? 아니다. 그 과정이 지금 일어나고 있웅운 누군가가 보았는가? 아니다. 번식과칭이 진행된다는 중거는 극히 호 1 막하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의 태도 용 오노드 Monod 의 다 움과 7같 은 태도와 미교해 보는 것 도 좋겠다 : 다원 자신도 말하였다시피 자연도태의 진화이론은 멘델의 유전학의 밥진운 핀요로 하였다. 이것은 한 이온의 내용이 무엇윤 의미하는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예가 된 다. 좋은 이온은 그 이온운 창안해 낸 사람이 당시에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넓 고 더 풍부해질 것이다. 좋은 이론은 선훅 예측할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김집 더 많 은 것이 그 이론이 알하는 바대로 되어갇 때 바로 이러한 유형의 맏전 때문에 좋다 고 판단원 수도 있다. (J. Monod, 'On the Molecular Theory of Evoluti on ', in Harre, R. (ed.), Problems of Sc ien ti fic Revoluti on : Pro g r 죠 in the Sc ien ces, O xfo r d, 1975).

들어가야 한다는 접, 즉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예측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접이다. 물리학은 공학과 ‘무관하지 않다. 다리가 무너 져서는 안 된다 ' )('Lec t ures on Aesth e ti ce ', p.2 5 .) 비트겐슈타인에 의하 면, 인간들은 ‘ 지극히 미약한 근거로’ 설복된다. ‘결국 우리는 검증에 관한 모든 문제들을 완전히 잇어버리고 그냥 그와 같이 될 수밖에 없었 다고 생각할 뿐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1950 년대에 있었던 ‘분석성 anal yti c ity’에 대한 위대한 논쟁들도 내가 보기에는 철학자들이 그들의 논의의 객관적이고도 돈쟁의 여겨가 없은 기반을 찾으려는 움직임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갇다. ‘ 분석성', 다시 말하 여 분석적인 참은 말의 의미만으로 결정된다는 이론은 바로 그것이 철 학자들에 의하여 과홍되었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왜 철학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언어규칙'이나 언어규칙의 결과라고 볼 수 되값었은는 많가은? 것일들정이한 분언.석어.적규. 칙.또 이는 확‘정개되념어적 으있로으 며필 연또적 '이이 라언고어 규공칙언들하에게 끔의 하여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의 구분이 가능하다는 생각에는 철학 자들이 생각했던 바와 갇이 두 가지 이접이 있다. (1) '언어규칙'은 제도 화된 실천(또는 그러한 실천의 매경에 있는 규범)으로서 그 자체 ‘공적 인’ 지위 륭 갖는다. (2) 동시에 철학자들이 주장하였다시피 언어규칙과 같은 신비스러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철학자(언어학자가 아니 라)뿐이다. 이러한 생각이 그대로 지속되는 동안만큼은 괜찮은 생각으 로 여겨졌지만 계속 지속될 수는 없으며 또 실지로 붕괴되었다. 다는합 리생적각으을로 합수리용성될의 수기. 준있.적.고 c없rit음e r 을ia ! 정개의념해이 라주고는 부재르도겠화다된 . 규확범실이한 해있 석은 아니지만 내가 해석한 대로의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옥스포드의 몇몇 ‘일상언어’ 철학자들 3) 은 검증될 수 없는 진술들을 ‘무의미'한 것으 3) 만약 우리가 신천적 언어완동 운 지매하는 규법 들 이 일상적인 겅험적 답구로 발견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운 발진시키고 지지할 수 있다면, 찬학칙 주제 들 에 대 한 공직이고 ‘기준칙인’ 겁중과는 관계가 없는 '일상언어 '천 학 운 발 전시킬 수도 있운 것 이다. M11SI We Me a1 1 Wlui t We Say 라는 색에서 캐이상 S. Cavell 은 그러한 규법 들 이 일종의 '자기인식'과 갇온 것에 의하여 알 러질 수 있다고 논하면서 그러한 방향으로 나 아강 수 있는 한 초석운 마련하였다. 캐이상온 '자기인식'운, 요법운 동 하여 이 우 어질 수 있다는 몽찰 력 에 비유하기도 하였고 또 현상학에서 말하는 선험칙 지식에 비유하기 도 하였다. 맏운 어떻게 사용하면 규범에서 벗어나는지 또는 벗어나지 않는지에 대한 지식이 ’의적'인 귀납칙 지식은 아니라는 집에서는_내가 사용하는 영어에서 사람둥 이 'm i ce’ 라고 말하지 'mouses’ 라고 말하지 는 않는다는 것운 나는 아무런 경 험 걱 중거 도 없이 알 수 있다-;-:재이산의 견해에 나도 동의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말의 사용의 옳운과 그 S· 에 대한 인만화로까지 와대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캐이같

이 그러듯이) X 에 관하여 우엇인가 ‘수상한' 것이 있다는 것이 X 는 고의적이다 volun t a ry라는 말의 바은 사용운 위한 규칙의 일부라고 만한다면 나는 개.!.칙인 경우 둥에 관한 나의 겁광둥운 단순히 보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칙관들운 선명까지 하 기 위한 하나의 이돈윤 게시하고 있는 셈이다, 정신요법에서도 이와 유사한 과칭이 진 행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자기인식이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어떠한 비판일지라도 그 비판에 연재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인 그러한 비판의 합법성운 인 칭한다면 그러한 규법둥운 발견하려는 l1.!- 동은 마치 사회과학이나 역사와 갇아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사회과학이나 여사, 이 두 분야에서는 이미 논하였다시피 진몽적인 의 미로 해석된 소위 ‘과학적 방법’이란 것이 빈다온 여한운 하지 못한다. (나의 지서 Meanin g and /he Moral Sc ien ces, Routl ed g e and Keg a n Paul, 1978 참조), 여하돈 나는 언어사용윤 위한 규법문의 지위가 무엇이돈, 그것문이 바로 '합리칙으로 수용가능한', 정당화된', '잘 와중된' 동등의 안의 외연윤 겅칭한다고 믿어야 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고 본다.

로 불러야 할지, 윤리적인 명제 중에 개념적으로 필연적인 명재도 있을 수 있는지 등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 를 가졌었지만 합 리성을 기준적으로 파악하였다는 접에서는 모두 동일하다. 내가 처음에 언급한 비판, 즉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의 검증원리뭉 논 파하는 비판은 바로 그것이 합리성의 기준적 개념을 옹호하는 모든 논 의를 논파하기 때문에 겅오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왜 그것이 합리성 의 기준적 개념을 옹호하는 모든 논의 를 논파하게 되느냐 하면 그것이 어떠한 것도 기준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합리적으로도 검증될 수 없다는 주장 을 논파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 는 점은 나의 논의에서 자주 언급되는 철학자들이 마치 철학적 강의도 수학적인 중명이나 뭉리학에서의 강의적 방법에서 봉 수 있는 바와 같은 종류의 경경성 fi na lity을 가진 듯이 이야기하더 라도, 논리 실 증주의자 등 이 그들의 작업을 과학의 온리라고 불렀더라도, 비트겐슈타인의 추종자 들 이 비트겐슈타인 이전이나 반비트켄슈타인적인 모든 철학적 활동이 헛소리에 불과함을 ‘보지’ 못한 철학자들에 대해 엄 청난 오만을 부렀다 하더라도, 그리고 일상언어철학자들이 다른 사람들 의 논의나 비일상언어철학자들의 논의를 짐승 소리'라고 공박하였더라 도(아들은 철학적 오류가 마치 산수시험에서 저지르는 오산과 갇은 돗 이 말한다) 결정적으로, 그리고 앞에서 서술한 바 문화적으로 인지된 방식으로, 검증될 수 있는 철학적 입장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요컨대 기준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진술들만이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진술이 참이라면 이 진술 자체는 분명 기준적으로 검중될 수 없으며 따라서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없다. 만약 도대체 합리성 이란 것이 있다면-우리는 말하고 논쟁하고 하는 활동을 함으로써

일종의 합리성의 개념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합리성아 어떤 문화에서 제도화된 규범에 의하여 합리성의 예라고 간주되는 것과 동일 하거나 그 규범 속에 포함된다는 입장을 홍호한다는 것은 스스로물 논 파하는 짓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러한 옹호 자체가 규범만으로는 옳 다고, 또는 거의 옳다고 확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에서 합리적인 논증이나 합리적인 정당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철학자에게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일상인에게는 거의 명백한 어떤 것을 인식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철학에 서 무엇이 합리적으로 논의되고 정당화된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우 리는 홍격인 규범에 호소할 수는 없다는 접이었다. 철학은 ‘개녕분석'이 다, 즉 어떤 철학적 논의가 옳은지는 개념들 자체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주장은 아직도 종종 둘을 수 있는데 이러한 주장이 개녕이란 홍격인 언 어실천의 기저에 깔려 있는 규범이나 규칙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론과 결합된다면 철학에서 모든 합리적 정당화는 기준에 의거하며 철학적 진 리는 (‘짐승 소리’를 금지시키면서) 과학적 진리와 마찬가지로 홍척쇼i 검증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암암리에 맥을 갇이하게 된다. 이 와 같은 견해는 최근을 포함한 전지성사를 돌이켜볼 때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철학적 논의에 적용되는 것은 종교나 통속적인 이데올로기에 관한 논 의에도 꼭 같이 적용된다. 자유주의자와 맑시스트간의 논쟁은 철학적인 논의보다는 더 많은 경험적 사실들이 개입되어 있겠지만 종국에 가서는 철학적인 논쟁의 성격을 띠게 된다. 우리는 모두 종교나 정치나 철학에 관하여 일정한 관점을 갖고 있으며 이 관접들에 관하여 논의도 하고 다 론 사람의 관점을 비판도 한다. 우리는 또 정밀과학 외의 ‘과학', 이룰 테면 역사학, 사회학, 임상심리학 등에서도 바로 이러한 성격을 떤 논의 룰 한다. 논리실중주의자들이 ‘과학적 방법'을 아주 넓게 기술하여 정밀 과학 이외의 과학들도 이 범주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그들의 ‘과학적 방법'의 기술이 너무 광범위하여 도대체 어떤 것이 그 기술에서 분명하 게 재외될 수 있을지 알기 힘들다( 8 장윤 보라). 논리실증주의자들도 그들의 검중원리가 ‘인식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접 을 시인하였다. 그들은 검증원리가 하나의 재안에 불과하지 그 자체로 서는 참도 거짓도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럽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 의 제안을 옹호하는 강의를 하였기 때문에 4) 검중원리가 무의미하다는

비판요은약 전여대전 히합. 리.입 적.론 될철. 학.수 행 . 위있.다 를•. 할. 수. 있. 는. 여. 지. 를. 허. 용. 하. 지. 않. 는. 철. 학. 을 만들어 내었다는 점이 논리적 실증주의자들과 비트겐슈타인(그리고 아마도 후기의 콰인까지 포함하여)의 철학적 공헌이라면 공헌이다. 그 둘의 철학적 견해가 스스로 논파되는 것이라 보는 이유도 바로 그들이 만들어 낸 철학이 합리적 철학행위 룰 할 수 없도록 한다는 접에 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그 조그만 비판이 별것 아 닌 것 같아도 사실은 철학자들이 소위 ‘선험적 논의 tra nscendenta l ar gu men t’라 부른 의마십장한 철학적 논의와 연관이 있다고 보는 이유 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합리성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밝 혀 보려는 철학적 논의는(이것이야말로 철학의 최우선적 과업인데) 실 증주의자 들 이 생각한 합리성, 즉 제도화된 기준에 맞춰진 합리성보다 더 넓은 합리성의 개념을 전제하고 있는 활동이다. 합리성에 관한 무정부주의도 스스로 論破된다. 었는지데금 까이지 경논 향의은 한 쿤바 와T는. K uh아n주 의 다『른.과 학. 혁철. 학명. 적의. 구경. 조향. 이T h최e 근S에tm ct대u r 두e 되of 4) 검증원리가 하나의 재안이라고 보는 견해 운 옹호하기 위하여 재시되었던 논의 들 중에 가장 약한 논의는 검증원리가 '분석 이전의 pr e-analyt ic' 의미 있움의 개념운 ‘해설 ex pli ca t e' 해 준다는 것이었다(이 주장에 대한 자세한 토의는 펀자의 다음의 논문에 나 s되와op 온h 있 i c 다의a ,l미 P상a‘pH의e or sw,모 VN든ool .t 2 차.,t o이C. T정a.ma물.lb·kr. 운iad b g o e보u U존t nM하iv e는ea rn siint 형 yg 식 ',P 의irne s Ms,검 i 1n증9d 7,원 5L)리 a, 1 1용라g 1이 za옹g 센 e호 바a하n호d였는 R다 e행 a(.lE i위t .xyp 에, .e rPi.h 관eni.l계c oe - and Pred i cl i o11 에서). 너무나 뻔한 만대(죽 신성에 대한 미경험적 믿음도 행위용 변화 시킬 수 있다는 만대. 라이헨바흐는 고양이 운 숭매하는 에집트사람둥의 예용 사용하고 있다)에 대하여 라이덴마흐는 '고양이문은 신성한 동웅이다'용 ‘고양이듄온 고양이 숭배 자둥에게 경외의 감정운 일으킨다’로 번역하면 된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대치 시킨다 하더라도 고양이 숭배자의 경우에 행위가 전혀 변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카르납의 견해가 가장 홍마로운 것이었다. 카르납에 의하면 모든 합리적 재구성 rati on al recons t ruc ti on 은 하나의 재안이다. 실계적으로 물어야 할 유일한 질문은 이 합리칙 재구성 또는 저 합리직 재구성운 받아 들 입으로씨 어떠한 논리직 그리고 경험적 건과둥이 나운지 하는 점이다. (카르납은 합리칙 재구성의 ‘선택'운 비행기의 엔진윤 선 택하는 것에 비유하였다.) 카르납이 여기서 내린 결론은 천학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합리적 재구성둥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르납의 이 관용의 원리 princ iple of t olerance 는 그 자제 검증원리윤 미리 전·제학고 있다. 왜냐하면 사웅들의 실재적 모습에 유일하게 대응되고 따라서, 유일하게 옳다고 합 수 있는 합리적 재구성 이란 있운 수 없다는 이온, 측 모든 ‘ 의적 질문둡- ex t ernal q ues ti ons’ 은 아무런 인식칙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는 이론온 그 이론 자제가 바로 겅중원리이기 때문이다. 관용의 원리문 검증원리에 적용하는 것 자제가 순환온칙이다.

Sc ien ti fic Revolu ti ons 』에 대표적으로 나타나 있다. 쿤은 이 책에서 '전 위 conversio n ', 형태변환 Ges t al t swi tch ' 등의 용어를 사용하연서 흥합 리한 요소인 듯한 것을 어떤 과학이론을 수용하느냐 안 하느냐룽 판가 음해 주는 결칭적인 요인으로 강조함으로써 많은 독자들을 매혹시켰고 또 대개의 과학철학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사실 쿤은 과학아론이란 무 엇이며 과학적 활동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하는 문제에 관하여 럿 가지 중요한 지적을 하였다. 나는 언젠가 쿤이 말한 패러다임 pa radig m, 정 강과하 normal sci en ce, 과학혁 덩 scie n ti fic revoluti on 둥의 개 념 이 얼마 나 중요한 개념인지 언급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는 쿤의 책에 관하여 내가 동의하지 않는 접, 즉 내가 언젠가 ‘쿤의 국단적 상대주의'라는 표 현으로 기술하였던 점에만 논의의 초접을 두겠다. 미숙한 독자둘이 쿤의 책에 매료된 이유는 그가 과학에서 합리척 정 당화란 것은 없으며 오직 형대변환과 전위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하였다 고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쿤은 자기의 책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 는 것을 거부하고 ‘비패러다임적 합리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 개념은 내가 ‘비모형적 합리성'이라고 부론 개념과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봉 수 있다. 대개의 독자들이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찾아내었다고 생각하는 철학적 경향이 파이어러벤트 P. Fe y erabend 의 책 『반방법론 A ga i ns t Me t hod 』에도 잘 나타나 있다. 쿤과 같이 파이어러벤트도 상이한 문화 와 역사적 시기에 따라 합리성의 패러다임도 말라진다는 접을 강조하였 다. 그는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우리회 개념을 결정하는 것이 사실온 우리가 불합리하다고 부를 요소라고 말한다. 그가 바로 이런 식으로 말 하지는 않았지만 근대 과학기술적 합리성의 개념이 그 자체가 설정한 표준에 의하여 기만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고 암시하였다. (푸꼬 M. Foucaul t도 이와 유사한 노선을 취하였다고 생각한다.) 현금의 과학이 가진 과장된 도구적 우월성도 기실 기만적인 것일지도 모른다고 암시하 였다는 점에서 파이어러벤트는 쿤이나 푸꼬보다 훨씬 더 과격하다. 의 사보다도 신앙요법가가 당신의 고동을 훨씬 더 잘 덜어 줄 수도 있다는 것이 파이어러벤트의 주장이다. 이러한 과격한 주장으로 인하여 파이어러벤트는 그의 입장을 ‘무정부 주의’라고 불렀는데 내가 지금 토의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지나치게 과격한 주장들은 아니다. 내가 여기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쿤의 『과

학혁명의 구조』와 그후에 내놓은 논문들에서, 그리고 파이어러벤트의 『반방법론』과 그 외 몇몇 전문적인 논문에서 발표된 하나의 주장으로서 소위 불가공약성 i ncommensurab ility이 그것 이 다. 나는 이 주장도 의 미 와 검증에 관한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논파되 는 주장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20 세기 과학철학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 고 교육을 받은 일반독자이연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 본 적이 있을 이 두 주장이 모두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관심 까지 도 유발시 켰 지만 스 스 로 논파되는 주장이라는 것이 내가 밝히고 싶은 점이다. 물론 나 자신도 과학철학자이기 때문에 과학철학의 그 두 주장 이 모두 스스로 논파된다는 사실에 곤란함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은 아 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상황이 생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고찰해 보기로 하자. 붕가공약성의 주장은 다른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용어들 예컨대 17 세 기 과학자 들 이 사용하는 '기온'이라는 용어가 그 의미와 지시에 있어서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어떤 용어, 어떤 표현과도 동일시될 수 없 다는 주장이다. 쿤이 말하였다시피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가진 과학자 둘은 ‘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셈이다. 1900 년경에 사용된 ‘전자'라 는 표현은 어느 ‘세계’에 있는 대상을 지시했는데 오늘날 그 표현이 지 시하는 대상온 전혀 다른 '세계'에 있다. 이 주장은 또한 소위 ‘이론언 어'뿐만 아니라 ‘관찰언어’에도 적용된다고 한다. 파이어러벤트의 주장 에 따르면 일상언어이론은 단순히 거짓이다. 그러나 만약 불가공약성의 주장이 정말 참이라면 우리는 다론 언어를 ―또는 우리 자신의 언어일지라도 지나간 언어를――」결코 번역해 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유기체들이 내는 소리를 해 석해 낼 수가 없다고 한다면 그 유기체를 사유자나 화자로 간주할 수 없음은 물론 심지어는 사람으로도 간주할 수 있는 근거가 사라질 것이 다. 요컨대 만약 파이어러벤트(그리고 쿤도)가 옳다면 17 세기의 과학자 들까지 포함하여 우리와 다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은 주어진 자국에 대해 일정한 반응만을 일삼는 동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예 컨에 대계 속갈해릴서레 오그.가 개.‘ 념.불 들가. 공을.약 적장.' 황.인 하. 게개. 념기들술을한 다가면졌 었이다것고은 말전하적면으서로 노앞 뒤다가홈 맞지 않는 일일 것이다. 이 문제는 파이어러벤트의 견해에 동감하면서 쓴 스마트J.J .C. Smart

의 다음과 같은 글에 잘 드러나 있다 .5)

5) J.J .C . Smart , 'Confl ict i ng Vi ew s about Exp la nati on ', in R. Cohen and M. Wart of s k y (eds.), Bos/011 Stu d ie s in the Phil o sop hy of Sc ien ce, Vol. II : in Honor of Phil ipp Frank (New York, Humanit ies Press, Inc., 1965).

수성운 관찰하기 위해서 우리가 망원경을 뉴돈이론에서 예측한 대로 처 굴 뚝의 꼭대기로 맞출 것이 아니라 저 나우의 꼭대기로 맞추어야 한다는 사 실은 분명 중립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분명 우리는 뉴돈의 이론웅 택할 것 인지 아니면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택할 것인지 하는 선택의 문제와 관계없 이 나무와 굴뚝과 망원경에 관하여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나 파이어러벤 트는 우리가 망원경에 관한 이론 을 갖추 기 위해서 유클리트의 기하학과 비 상대주의적 광학운 사용한다는 접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망원겅과 나무와 굴뚝에 관한 참된 이야기 는 아닐지라도 일반 상대성이론 을 관찰적으로 시험해 보기 위해서는 이러 한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부당하지는 않다고 말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는 우리가 예측한 것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더라도 아무런 영향 을 받지 않 운 것임웅(관찰의 오류가 생기기 전까지는) 이론적인 근거에서 잘 알고 있 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마트의 이 주장에도 난점이 있는데 그것은 ‘예측들'이 동일하 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 우리가 유클리드적 비상대주의자들이 사용하 는 언어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접이다. 만약 모든 말이 다 론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모든 예측이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 예컨대 17 세기 이태리어와 현대 영어를 연관시켜 주는 번역안내서 갇 은 것이 없다면, 그리하여 17 세기 언어 전체가 그 자체로서나 언어 외 적인 것과의 관계에 있어서나 어떤 체계적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면 17 세기 이태리어에 있어서의 논리적 연결어 (‘만약', ‘그리고' 같은)륭 어 떻게 번역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설혹 (스마트가 생각하듯이) 뉴돈 아론과 아인슈타인이론을 모두 채택한다 하더라도 내가 뉴돈이론에서의 어떤 용어를 아인슈타인이론에서의 어떤 용어와 동일시할 때 이것이 과 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내가 지금 지적하고자 하는 접은 의미와 번역에 관한 과인과 데이빗 슨 D. Dav i dson 의 주장에 적 용해 보면 더 욱 분명 해 진 다. 17 세 기 에 쓰여

진 어떤 책의 경우 그 책 중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번역을 해보려 는 문맥에 ‘활용되는' 어떤 번역의 도식이 있다고 한다연, 그 번역이 원 그래. 의문 . 맥의.내미.에.나서. 지 어시떤를 의‘정미말를로' 가파지악는한 것 것인은가 ?아 니그라것고은 말결하국는 우 리것이가 가마진오 번역의 도식과 그 도식의 경험적 적합성을 위한 명시적 또는 비명시적 조건들과는 무관하게 의미나 지시의 동일성을 위한 기준을 우리가 가지 고 있거나 가지고 있기 십상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번역이 원본의 의미나 지시 를 그대로 파악할 수는 없다는 주장을 지금 가진 번역의 도 식보다 더 나은 도식이 발견될 수도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번역이든 가능한 모든 번역이 '진짜의’ 의미나 지시 물 파 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의미에 대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동의어는 오칙 관계, 또는 관계들의 집합으로만 성립하며 각 관계들을 그 성격이 좀 모호하나 우리가 해석을 하기 위하여 상이한 표현들을 동 일시하려 할 때 이용된다. 상호해석을 할 때 실지로 이용되는 문맥을 떠나서 ‘진짜' 동의어 같은 것이 있다는 주장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 는 접은 이제 널리 인식되어 있다. 누군가가 독일말 ‘Rad’ 가 ‘바퀴’로 번역될 수 있다고 말했다고 가칭해 보자. 그가 만일 계속해서 그의 번역이 완벽하지는 못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연히 그가 어떻게 하면 그 번역아 개선될 것인지를 말할 것이 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Rad’ 라는 말이 진짜 바퀴물 지시하기는커녕 우 리의 개념구조내에서 알 수 있을 만한 어떠한 대상조차도 지시하지 않 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Rad’ 가 '바퀴’로 번역될 수 있다고 고집 한역의다 연신 어빙떻성게을 될우까리?가 A잃 라지는 않말는이 한‘ 바A퀴 가’로 바번퀴역뭉될 지.수시. 한.있.다다 는는 말말과은 번갇 다. 불가공약성의 주장이 왜 그렇게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에 대한 주된 이유는 아마도 그 주장에 개념 conce pt과 심리현상으로서의 개념작용 conce pti oR을 혼돈 내지는 혼합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것 이다. 개념과 단순한 생각간의 구별은 분석과 종합의 구별만큼이나 불 분명하다. 이와 갇은 구별이 해석 자체에 상대적일지라도 모든 해석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어떤 말, 예컨대 기온이라는 말을 번역할 때 그 말의 지시와 번역된 표현의 의미를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기온'이 라는 말의 의미나 지시와 동일시한다. (물론 ‘기온'이라는 말의 사용방식

을 기술하거나 그 한계 를 설정하는 데에는 독수 용어해설과 같은 여러 가지 방책이 있다•) 우리가 문제된 ‘개념'과 우리들 자신이 사용하는 ‘ 개념'을 동일시함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동일 시한다고 해서 예컨대 17 세기 과학자들도 기온에 관해서 우리와 동일한 생각 conce pti on, 동일한 믿음체계 를 가졌었다는 뜻은 아니다. 기온뿐 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문제에 있어서도 17 세기 과학자들은 우리와 는 다른 ‘?k 의 이미지', 다른 믿음들을 가졌을 수도 있다 . 각자가 가진 생가들이 다르다는 사실이 ‘정말로 울바론’ 번역의 불가능성을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만약 우리가 번역을 할 수 없다면 생각들이 서로 다르다는 접과 또 어떻게 다른지 말할 수조차 없을 것이 다. 그러나 만약 각자가 가진 생각들이 항상 서로 다르다면 번역의 도식 이 ‘활용된다'는 접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론 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비꼬 V ic o 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사상가들이 제시하였다시피 원본을 쓴 사람의 믿음이 번역하는 사람의 믿음과 홍일합이 밝혀져야 반드시 번역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며 원본에 나타난 믿음이 우리에게 이해될 수만 있다면 해석상의 성공은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접이 바로 ‘진리를 믿고 선을 사랑하도록 번역하라' 라든지 ‘원본에 나타난 믿음들이 지금까지 배워 왔고 경험해 온 것에 비추어 사리에 맞도록 번역하라', 또는 해석되는 사람의 민간성 hwnan ity을 국대화하라는 비꼬 자신의 말 등과 같은 여러가지 번역상 의 격언들이 갖추고 있는 기본요소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믿음과 바램과 발언 동을 모두 어떤 의미이돈 의이를 가지게끔 해석할 수 있음 은 · 상이한 문화권에서 살면서도 역사적으로 상호작용하고 개별적으로도 빠르든 느리돈 변화를 겪으면서 이루어지는 보편적인 인간경험의 한 사 실이다. 쿤과 파이어러벤트는 과학적인 지식이 수령된다는 어떠한 주장도 거 부한다. 이돌에 의하면 지금의 과학자들의 논의의 대상이 지나간 과학 자들의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것과는 다를 것이므로 미시적인 대상이든 거시적인 대상이돈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 지식이 접접 쌓여져 간다는 일온 있을 수 없다. 쿤온 과학이 ‘진보'한다는 것은 오칙 도구적인 의미 에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죽 과학의 진보는 이를테면 교동수단이 접 점 좋아진다는 것 이외에 다론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도 앞뒤가 맞지 않다. ‘사람들을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옮긴다' 는 말이 어느 정도 고정된 지시를 갖지 않는다면 도구적인 성공이라는 개념조차도 고정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없지 않겠는가? 내가 지금 사용한 논법은 경험적 지식의 선조건에 관한 칸트의 그 유 명한 논의와 관련이 있다. 미래에는 전적으로 법칙이란 것이 없을 수도 있고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해 온 ‘귀납법’이 전혀 동하지 않을 수도 있 다는 주장에 대해서 칸트는 만약 미래라는 것이 도대체 있다면-여 하간 우리에 대한 미래, 즉 우리가 사유자로서 파악할 수 있는 미래, 우리의 예측이 맞을지 안 맞을지를 말하기 위해서 개념화할 수 있는 미 래__많은 규칙들이 사실상 어겨지지 많었흥에 틀림없다고 지적하였 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이태라고 부르겠는가? 예컨대 여러 개의 공들이 항아리 속에서 ‘비규칙적인’ 방식으로 뒤어나 온다고 상상해 볼 때 우리는 여러 가지 규칙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i것 응이 홍인치초차도 망할 수 없뇨 이번 순서오 위석나있은i]도 말할 수 없다는 접을 망각하고 있다. 도대체 비교한다는 것은 불가공약성 이 아 니라 공약가능성이 있다는 접을 전제로 해야만 가능하다. 이와 같은 비판들에 대해서 쿤과 파이어러벤트가 내놓을 수 있는 한 대처방안이 있는데 이 방안을 그들은 그렇게 닫갑게 여기지는 않을 것 이다. 그것은 일종의 관찰과 이론의 양분법을 끌어들이는 방안이다. 죽 그들은 관찰적인 사실에 관해서는 공약가능성, 번역가능성, 그리고 심 지어는 관찰사실들의 수령가능성까지도 인정하고 불가공약성의 주장은 이론적인 용어에만 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문제는 역시 납 는다. (왜 우리는 램지의 의견에 따라 이론적인 용어들의 의미를 그것들 의 관찰용어와 가지는 관계에 의거하여 기술해서는 안 되는가?) 그러 나 쿤과 파이어러벤트는 ’이론적인 언어’에서뿐만 아니라 ‘관찰언어’에서 도 해석상의 관대의 원리가 요구된다는 이유로 이 대안도 거부한다. 예 를 들어 ‘잔디'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장소와 시간이 다름에 따라 잔디에 관해서 서로 다른 지각적 원형을 가질 것이며(잔디는 장소 에 따라 색깔과 모양이 서로 다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질 것이 다. 우리가 잔디에 대해서 서로 다른 개념을 갖고 있다고 말해지지 않으려 고 우리 모두가 잔디가 식물임은 알고 있지 않는가라고 반문한다 하더 라도 이번엔 식물이라는 말이 문제된다. 죽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식 물은 광합성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200 년 전에 생각했던 식물은

그렇지 않았다. 200 년 전의 ‘식물’과 오늘날의 겨울'을 (적어도 일상적 인 맥락에서는) 동일시하게 하고 200 년 전의 ‘잔디'와 오늘날의 ‘잔디'륭 동일시하도록 해주는 해석상의 관대함이 없이는 이 말들이 200 년 전에 는 무엇을 지시하였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다. 자연종에 대한 말만 해석이 되기 위해서 관대의 원리가 필요한 것은 아 니다. ‘U 강’과 같은 인공어도 동일한 문제 를 일으킨다. 관대의 원리가 없 이는 ‘붉은' 같은 단순한 알조차도 사람마다 동일하게 사용되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를 항상 전체적으로 해석한다. ‘이 론적인’ 용어들의 해석이 ‘관찰'용어의 해석에 의존하 듯 이 후자의 해석 도 전자의 해석에 의존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지금까지 말한 나의 논법은 선 험적 인 것이다. 우리가 현재 이 순간의 우리들뿐만 아니라 과거의 우리들, 우리의 조상 들, 그리고 다른 문화권에 살거나 살았던 사람들을 통틀어 모두 하나의 인격, 하나의 사람으로 간주함은 우리가 사용하는 기본적인 생각들 덕 분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여 우리가 그때 그때 가졌던 생각들은 다르다 할지라도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지시, 동일한 개념들을 사용해 왔다는 뜻이다. 상호해석이 가능할 정도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대상과 개념들뿐만 아니라 사리에 맞는다든지 자연적이라는 동의 생각들도 동 일하였다. 해석의 도식이 칭당화될 수 있다면 그것에 의하여 다른 사람 들의 행위가 우리에게 최소한도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앎과 합리 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이 아무리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무엇이 사리 에 맞는 것인지에 대한 기본가칭과 믿음은 서로 동일한 것이다. 이 세 상에서 가장 기이한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의 믿음일지라도 일단 우리가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한 우리의 믿음과 공동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고 하겠다. 상대주의는 왜 모순적인가 (전체적?J) 상대주의가 모순적인 것임은 이미 철학자들에게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어떤 입장을 건치하면서도 동시에 어느 입장도 다른 입 장보다 더 옳거나 더 칭당하지는 않다고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결국 모 순이지 않은가? 가평켈 A. Gar fi nkel 이 이 접을 매우 재미있거 1 표현한 바 있다. 캘리포니아의 대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그는 그들

의 말을 흉내내면서 ‘자네의 출신지는 나의 출신지와 다 를 수도 있어. 그어짓.떤러이. .나라입 고상장 보임대을는주 의입막가장론 에하나도고에 게찰모는못든 은 참입 이없장 지이아 니않다라겠 고옳는 다가생?고각 한한다다’면고 상말. 한대. 주.바 의. 를있. 다거 . 그러나 이와 같은 단순한 논리로써는 상대주의 를 반박하기에 불충분 하다. 그것은 오늘날 제시되어 있는 수많은 상대주의적 이설들을 보아 서도 알 수 있다. (매우 고도의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상대주의적 입장을 제시하곤 하였다.) 지적 능력이 있는 상대주의자가 왜 모든 입 장(이또는 다가 i평켈에이게)은 그참의이 라입고장 이인 정나.해에.야게. .는하 는참가이? 아상니대라주고의(자또는는 설나혹에 게내는가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말하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 상대주 그의기.. 에자.자게가.. 신. 는.의.빈 듬훨개이씬 념 없더보 는다두 드사더러람 진이두다라드면러고 진 대그 에답개게할념 이수참 인있있 을다것. 이 수 어 나떤있에 을게것까 에?참 인관그 해렇것서다보 면다자 강, 겅당화 등등의 개념을 강대격인 개념으로 간주함은 경망 일관성이 없는 일일까?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칭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가평켈의 (우수하지만) 칙설적인 것보다는 좀더 세련된 강의가 필요하다. 중요한 접은 만약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면 상대적인 것도 역시 상대적일 것이라는 접이다. 이 접은 약간의 설명을 필요로 한다. 내가 지금 염두에 두고 있는 논의와 비슷한 논의를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아마 풀라돈이었을 것이다. (상대주의에 깊이 물들었던) 프로타 고라스 Pro t a g oras 는 내가 X 라고 말할 경우 실지로는 ‘나는 X 라고 생 각한다’고 말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예컨대 내가 ‘눈은 회다’고 말할 경우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에 의하연 그 말이 정말 뜻하는 바는 파트남 은 눈이 희다고 생각한다일 것이고 또 그 말을 노직 R. Noz ic k 이 하였 다면 노칙은 눈이 회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그 말의 뜻이 될 것이다. 이 것을 좀더 세련되게 표현한다면 내가 ‘눈은 회다’고 말할 때 나는 이 발 고언 을노 칙눈이이 그희 다발는언 을것 이하 였나을에 게때 는참 이눈.라 이.고 회.주 다.장 는하 기것 이위 해그서에 게사 용참하임을고 주있 장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프로타고라스의 견해에 의하면) 어떠한 발 언도 나와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의미몰 가지는 발언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이 살펴보았듯이 상대주의와 불가공약성간에는 밀접한 연관 성이 있다. 이에 대한 풀라돈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만약 어떠한 진술 이든 진술 X 가 의미하는 바가 ‘나는 X 라고 생각한다’라면 (프로타고라 스의 견해에 의하여) 실지로 나는 (1) 눈은 회 다고 나는 생 각한다고 나는 생 각한다 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생각한다'라는 구철은 이와 같이 계속 반복해서 추가될 수 있다. 그렇다면 프로타고라스의 견해로서는 눈은 희다’는 진술의 궁극적인 의미는 (1)이 아니라 (2) 눈은 희 다고 나는 생 각한다고 나는 생 각한다고 나는 생 각한다…… (‘나는 생각한다’가 무한하게 계속된다) 일 것이다. 플라돈은 이 논법이 귀유댑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의 논법 은 보기만큼 그렇게 씩 좋은 논법은 못 된다. 프로타고라스도 그의 분 석이 그 분석 자체에도 적용된다는 정을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분석 의않 는그다.러 한다 자만 체유.적한.용.한이 수우의한 히자 체계적속용되이어 야될 수한 다있는다 는결 론결은론 만여 기나서온 다나.오 지그 러나 풀라돈은 여기서 매우 심오한 무엇을 간파한 듯하다. 우리가 처음으로 상대주의에 접할 때 상대주의는 매우 단순한 주장처 럼 오인다. 모든 사람은(또는 '사회학적인' 용어로는 모든 문화나 모든 ‘논의'는) 그 자신의 견해와 기준과 전제물 갖게 마련이며 진리는(또는 경당성혼) 。.]리한 것을에 상대적인 것이라는 주장이 상대주의의 자연적 인 최초의 공식이다. 물론 X 가 각자가 가진 견해와 기준과 전제에 상 대적으로 참인지 아닌지하는 문제 자제는 당연히 ‘철대적인’ 것이라고 여기푸고꼬 와있 다갇.은 현대 구조주의자들은 마치 정당화가 각 문화에 따. 라. 상. 대적이라는 사실 자체는 전혀 상대적인 것이 아니고 절대적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X 는 P 라는 사람에 상대적으로 참이다’는 형식 의 진술이 그 자체로서는 절대적으로 참 또는 거짓이라 한다면 결국 나 에 대한 참, 너에 대한 참, 노칙에 대한 참뿐만 아니라 전대적인 참의

개념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에 반해 전.체.적.인. 상대주의자는 X 가 P 에 상대해서 참인지 아닌지 하는 문재 자체도 상대적이라고 말할 것 이다. 바로 이 점에 와서 플라돈이 이미 파악하였다시피 상대주의가 도 대체 어떤 입장을 의미하는 것인지 혼들리기 시작한다. 상대주의에 대한 풀라본식의 공격은 아주 최근까지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최근 비트겐슈타인에 의하여, 특히 그의 사적 언어에 관한 논의 ® 에서 훌륭하게 재현되었다.

0 계 3 장의 여주 참조.

대개의 비트겐슈타인 주석가들은 그의 사적 언어 논의 Priv a te Lang u ag e Ar g umen t룽 단순히 진리모사설’에 대한 반대논의로 해석한 다. 그리고 유사지시이론이 심지어는 감각의 지시문제에 있어서조차도 맞지 않는다는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논증도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대한 그의 줄기찬 공격의 일환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이 논의를 실재 론과 상대론의 우 입장에 대한 전동적인 두 반론(적어도 칸트는 이 두 반론을 모두 안정하였을 것이다)의 한 국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왜냐하 면 사적언어에 관한 강의 전체를 실재론에 대한 반론이라고만 본다면 그 논의 자체에 어떤 책략이 섞여 있는 것 같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공격한 상대주의는 ‘방법론적 독아론’으로 알려져 있 다. ‘방법론적 독아론자’는 일종의 비실재론자 또는 '검증주의자’로서 진 리란 어떤 방식으로든지 합리적 수용가능성과 연관된 것으로 이해되어 야 하지만 모든 칭당화는 궁국적으로 각자가 개별적으로 알고 있는 경 는험 에사 실의을거 해검야중 해한 다중고지 에주 장대한해다 .나 그는리 나.하대.여로. 의.나 의암 을어 떤가 지경고험이 있 고눈 은노 칙희은다 노직대로의 앎을 가지고 있다. 죽 모든 진술은 사람에 따라 그 의미하 는 바가 다르다. 할각이 된 비결수다트.가국겐 은슈상없 타으대단인순며주의히 의이 자논소것.는 리의은. 를는 결.다 국내상시. 는 대옳.. 말 주 다.것하.의 는 .여 또 . 일것 는..주 반.과 장정.에 .옳 하. 신.. 다대거 .적.. 한고.나 인.. a뛰생이s..s 어각 마e..r 난하 지t..i n 는 를 .g.반 론생것만.. 의각이들 어하라구 고는별내 을는생것 것과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이 그의 반론의 요지이다. 바꾸어 말하여 상대주의에 의하면 나는 하나의 사유자라기보다는 단순한 동물에 지나 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대주의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눈에는 일종의 정신적 자살행위를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이 옳았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바트겐슈타인은 물론 부 인하지만 상대주의자들이 어떻게 옳음과 옳다고 생각함을 구별하려고 시도하였을지를 고찰해 보자. 상대주의자들은 진리란 합리적 수용가능성이 이상화된 것이라는 주장 을 원용할지도 모른다. 즉 그들은 내가 주의 깊게 관찰하였고 충분하게 생각하였다는 등등의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X 가 나에게 정당화되었다' 는 명제가 참이 될 터인데 그 경우에 X 가 나에게 참이 된다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경우 또는 만약 내가 ……한다면 나는 ……하 게 생각할 것이다’라는 형식의 가정법은 다론 모든 진술과 마찬가지로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는 가정법적 진술을 우리가 그 진술을 받아들이 거나 거부할 경우 도대체 정당화될 수 있을지 하는 문제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 절대적인 의미에서 참 아니면 거짓으로 간주한다. 만약 상대주 의자들도 가정법적 진술을 이와 같이 실재론적인 방식으로 해석한다면 적어도 한 부류의 절대적 진리를 인정한 셈이 되고 이것은 다시 말하여 상대주의의 입장을 포기한 결과가 된다. 비실재론자 또는 ‘내재적' 실재론자는 가칭법적 조건진술을(다른 모든 진술 들 과 마찬가지로) 그 진술이 겅당화될 수 있는 조건들을 파악함으 로써 이해되는 진술로 간주한다. 이것은 ‘내재적' 실재론자들이 진리와 정당화의 구별을 오기하였다는 뜻이 아니고 진리란 우리가 다른 모든 개념둘을 파악할 때와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 참이라는 말이 합리적으로 수써 용파될악 될수 수있 도있록는 하어는떤 요것소이들라을는 (뜻대이개다의. 경상.우대. 주지.시의.적.자으 도로 )이 상아적해인함 으조로건 아래서 그가 `무엇을 믿을 것안지에 대한 진술들, 죽 가정법적 조건진술 들을 이와 같이 ‘내재적' 실재론의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이미 앞장에서 (제 3 장) 밝혔다시피 비실재론적 입장은 합리적 수용가 능성이 7대 관격인 개념임을 가정하고 있다. 이 입장은 진리가 ‘이미 만 둘어져 있는 세계’와의 대웅이라는 주장을 거부한다. 이 입장을 지지하 는 사람들을 이 (형이상학적)실재론자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진리대웅설을 거부한다는 것과 진리와 합리적 수용 가능성의 개념을 주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전혀 같은 것이 아니 다. 진리와 합리적 수용가능성을 진술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에도 적용될 수 있는 ‘옳음rig h t ness’ 이라는 좀더 일반적인 술어의 일종이라고 간주

하는 굿맨은 이 접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표현한 바 있다. 간단히 말하여 진술의 참, 그리고 기술, 표상, 예중, 표현 등의 옳음 __ 디자인, 회화, 어법, 운율 둥에 관한 __- 은 기본적으로 적합성의 문 제이다• 이때 적합성이란 일정한 방식으로 언급된 것에 대한 적합성, 또는 여타 표현이나 조칙의 방식과 양태에 대한 적합성운 말한다. 어떤 각본이 어떤 세계에 적합하다든지, 반대로 어떤 세계가 어떤 각본에 맞는다든지, 또는 각본들간에 서로 적합하다는 등의 이야기는 각자 다른 이야기라고 봅 수도 있으나 이 차이점들은 세계를 각본에 따라 짜낼 때 각본이 어떤 역할 을 하는지 가 인식된다면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안다든지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참된 믿음을 획득한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여러 가지 종류의 적합성 을 발견해 내고 또 고안해 내는 작업에까지 연결된다고 보아진다. 그러나 어떠한 객관적인 적합함fit’의 개념도 부인하는 것이 상대주의 의 전체적안 혹효이고 또 그 본질적인 특징이다. 그래서 상대주의자들 은 진리를 객관적인 정당화의 조건에 의거하여 논하는 것을 이해할 수 가 그없래다서. 옳. 음. 과 옳. 다. 고. 생. 각. 함.의 차아점을 밝히려고 조. 전.언. condi- ti onals 을 사용하려는 시도는 실패하였다고 보겠는데 그 이유는 상대주 의자들이 다른 진술들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조건적 진술에 대해서도 그 진술의 옳음에 관한 아무런 객관적안 개념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 이다. 마지막으로 만약 오늘날의 상대주의자가 고대의 프로타고라스와 갇이 단순히 ‘나는 옳냐'와 ‘나는 옳다고 생각한다'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말한다면 __- 정당화됨과 정당화되었다고 생각함의 차이접은 자기 차선 의 경우에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__- 사람아 말을 한다는 것이 옳 다않을는 느것이낌다을. 갖그게리 고될 생것.이각.한라..다 바 는라 면것서도 옳단다순히는 주소관리를적 인내 는느 낌것을에 갖지게나 지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단순히 마음 속에 어떤 상이나 문장 비슷한 것을 일 으키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상대주의는 어떠한 생각일지라도 .::z. 것이 생각이라면 실재론적인 의미에서건 비실재론적인 의미에서건 무엇 에 관한 생각이라는 접을 부인함으로써 .::z. 종말을 맞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상대주의는 누구의 생각이 무엇에 관하여 생각함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상대주의자는 어떠한 종류의 것이든 일정한 종 류의 객관적인 ‘옳음’이 존재한다는 것이 인간의 사유 자체에 이미 전제 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였다. 내가 지금 막 분석한 강의 (풀라돈과 비트겐슈타인의 논의)와 내가 콰 인과 데이빗슨의 것이라고 여긴 불가공약성에 대한 반론간에는 홍미로 운 연관성이 있다. 그것은 과인과 데이빗슨은 사실상 상대주의자가 그 일관성을 잃지 않으려면 상대주의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말을 하고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논하였고 플라돈과 비트겐 슈타인은 사실상 상대주의자가 자신의 입장을 일관성 있게 주장하려면 그 자신마저도 말을 하고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논하 였다는 점이다. 결론 지금까지 고찰해 본 논의로 나는 금세기에 가장 널리 알려진 두 과학 철학이 모두 부정합적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물론 두 과학철학이 단순히 ‘과학철학'만은 아니다.) 이러한 결론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적으 로 현재상황의 의미를 반성해 보도록 한다. 어떻게 그러한 견해들이 생 겼는가? 논리적 실중주의는 .::z..에 선행하였던 마흐 Mach 의 실중주의와 일치하 는 점도 가졌고 또 다론 점도 가졌다. 마흐의 실증주의 또는 ‘경험적 비판주의'는 사실상 크게 보아 흉 Hume 의 경험론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흐의 실중주의가 하나의 큰 문화적 이슈로 되었 던 것은 마흐 개인의 탁월함, ..:z.의 독단적이면서도 열광적인 스타일, 그리고 ..:z.가 이목한 과학적 업적 때문이었다. (볼세비키 당원들도 실중 주의로 전향되지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레닌은 실중주의에 대한 반론 을 쓰기도 하였다). 목수 상대성이론을 기본적으로는 조작주의적으로 해석하였던 아인슈타인은(이 점은 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 대한 해석과 아주 대조적이다) 마흐가 특수 상대성이론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데 대 하여 매우 실망을 하였으면서도 동시성의 개념을 비판할 때는 흄과 마 흐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접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논리적 실증주의의 형성에 칙정적으로 영향을 준 가장 특기할 만한 사건은 연역논리의 혁명이었다. 1879 년에 프레게 G. Fre g e 는 오늘

날 표준적인 ‘2 차 논리 second order lo gi c' 라고 불리우는 것까지 포함 한 기계적인 증명철차를 발견하였다. 이 절차는 기초적 연역논리 ('1 차 논리')의 경우에는 한경하다 comp le te . CZ> 1 차 논리의 오온 타당한 공식 둘을 증명하는 기계적 철차를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은―-―이 절차는 인간의 심리 전반을 분석하고 흉내내는 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놀랄 만한 사실이다. 프레게의 이 작업은 소위 ‘귀납논리’에 대해서도 동일한 절차가 발견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_죽 소위 ‘과학적 방법'이 라는 것이 하나의 기계적 증명절차임이 판명될 수 있고 이 두개의 기계 적 절차가_ 연역논리의 기계적 절차(물론 이 철차는 고차 논리에 적 용될 때는 당한건하지만)와 앞으로 발견될 귀납논리의 기계적 철차 ―단순히 과학격 합리성뿐만 아니라 합리성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모든 것을 남김 없이 기술해 주거나 ‘합리적으로 재구성'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일게 하였다.

® ‘연역걱으로 완전하다 dedu cti vel y com p le te’고 할 때 ‘완전성’이라는 개념은 기술적으로 다양한 의미윤 가지고 있다. 본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완전성온 가장 느슨한 의마윤 가 지는 것으로서 모든 타당한 공..-1읍이 그 세계내에서 중명왼 수 있다면 그 연역체계는 완전하다고 정의된다.

내가 프린스턴 대학에서 막 교원경력을 처음으로 쌓기 시작하였을 때 카르납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그때 그 대학의 첨단과학연구소에서 이미 2 년을 보내고 있었다. 기억컨대 어느날 오후 그는 나에게 그가 어떻게 해서 철학자가 되었는지를 상세히 말해 주었다. 그는 물리학과의 대학 원생이었는데 프레게의 세미나에 참가하여 논리학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설(명럿하셀과였 다화.이 트그헤때드의가 교쓴재 가『 수학럿원셀리의』 를『 수프.학레.원.게리 와 P r함 in께c i p 공ia 부 M하a t였 he다ma니 ti c!a )』 였으며 카르납은 이때 기호논리에 매료되었으며 그 당시 그는 또한 특 수 상대성이론에도 이미 매료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학위논문에서 독수 상대성이론을 『수학전리』의 기호를 사용하여 논리적 으로 재구성하고 칭식화해 보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카르납이 철학자 가 된 것은 예나 대학의 물리학과에서 바로 이 논문을 받아들이지 않았 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가 내게 직접 들려준 이야기이다. 굿맨도 강력하게 시사한 바 있지만 귀납논리는 완전하게 형식화될 수 없다는 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의 의견이다. 귀납논리의 어떤 중 요한 국면은 형식화될 수 있지만(이 형식화의 적합성은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긴 해도) 그러한 형식화가 ‘사리에 맞는지 reasonable'

아닌지에 대하여 판단해야 할 필요성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이 필요성 은 그러한 판단들이 용어의 선택을 통해서 이루어졌는지 ( 아니면 좀더 정 확하게 말하여 용어 들을 '두사가능한 pr oje c ti bl e' 술어 와 ‘두사불가능 한' 술어로 나등으로써 이우어졌는지) 아닌지 하는 문제와는 관계없다. 그리하여 오늘날 순수히 형식적인 과학적 방법이 있다고 믿는 사랑은 사실상 아무도 없다(이에 대해서는 제 8 장을 참조하라 ) . 카르납이 나에게 둘려준 이야기에 의하연 논리적 실증주의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연역논리에서의 형식화의 성공이라 할 수 있 다. 만약 형식화의 성공이 논리적 실증주의가 발생하게 된 계기라 한다 면기. 계.귀 적.납 논중. 리명 절를 차형는식 있화을하 는수 데없 다실는패 하접였이기 발때견문되에었,기 즉때 경문예험 과파학이 에어 러대벤한 트의 ‘우정부주의’가 생기게 되었다고 봉 수는 없을까? 물론 나는 반드시 그렇다고 고집하고 싶지는 않다. 여하간에 철학적 무정부주의가 싹트게 된 데에 는 무언가 또 다 른 요소의 작용이 있었을 것이다. 쿤은 접전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완화시킨 데 반하여 파이어러 벤트와 푸꼬는 더 국단적인 데로 흘렀는 데 이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정 치적인 요소도 작용운 하였다. 파이어러벤트와 푸꼬는 우리가 현재 가 지고 있는 합리성의 기준이 자본주의, 노동착취 동의 정치적인 문제와 결탁되어 있다고 보며 심지어는 성의 철제까지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이러한 국단적인 상대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기존의 제도와 전동이 모두 좋지 않다는 생각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다. 과학지상주의 s ci en ti sm 도 사람들이 상대주의에로 쏠리게 된 이유에 든다. 논리적 실중주의가 가진 과학지상주의적 성격은 공개적으로 숨김 없이 나타나 있다. 나는 상대주의의 배후에도 과학지상주의적 성격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무칭부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어느 철학자도 합리성에 관한 모든 사항은 각 지역의 문화가 말해 준다는 이론을 전적 으로 지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는 이들도 환원주의적 경향을 가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합리성이 이상적인 전자계산기의 프로그램에 의 하여 정의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정밀과학에 의하여 고무된 과학지상주의 이고 합리성이 단순히 각 지역의 문화적 규범에 의하여 정의된다는 생 각은 인류학에 의하여 고무된 과학지상주의이다. 총스키 N. Chomsk y의 언어학에 자국을 받은 몇몇 사람은 인지심리

학이 합리성을 정의해 줄 수 있는 인간 본유의 inn ate 기계적 절차뭉 발견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한 고찰은 여기서 하지 않겠다. 다만 내 개인의 생각으로는 이것도 역시 귀납논리 물 형식화할 수 있으리라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기대가 우산되었다시피 경국은 실망 만 안겨 줄 하나의 지적 유행이라고 여겨진다. 지금까지의 모든 논의가 시사하는 바는 결국 19 세기부터 하나의 전통 으로 여겨져 온 과학지상주의도 오늘날의 철학이 안고 있는 문제접 중 의 하나라는 점이다. 이 문제는 단 하나의 지적 분야에만 관계된 문제 가 아니다. 나는 논리학이 중요하다거나 화중이론, 자연언어의 의미론 등등에 관한 형식적인 연구가 중요하다는 접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내 가 강조하고 싶은 접은 그러한 연구들이 차라리 철학의 핵심이 아니라 주변에 해당된다는 접이다. 우리가 지나치게 형식화에만 몰두하다 보면 결국 앞에서 언급한 두 종류의 과학지상주의 사이물 시계추처럼 왕복만 하다 말 것이라는 접이 내가 우려하는 바이다. 이성이 관여하는 영역을 어떻게 하면 건전하고 인간다움게 기술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두 과학 지상주의로써는 해결될 수가 없다. 과학지상주의는 이 중요한 문제를 회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제 6 장 사실과 가치 아주 넓은 의미로 이해한다면 사실과 가치의 문제는 모든 사람둘의 관심사라고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사실과 가치의 문제는 많은 다론 철 학적 문제들과 엄밀히 구별된다. 예컨대 정말로 실재세계가 있는지 아 니면 있는 듯이 보일 뿐인지 하는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 이 제각기 일정한 견해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육을 받은 사람일지라도 대개의 사람들은 그 문제에 관하여 반드시 어떤 의견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언어철학이나 인식론에서 다루어지 는 문제들, 그리고 십지어는 형이상학에서 다우어지는 문제들조차도 그 문재들 자체가 아무리 홍미로운 것일지라도 일반인들의 삶의 관접에서 본다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문제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 실과 가치의 문제만큼은 일반인들에게도 선택을 강요하는 문제이다. 죽 조금이라도 반성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문제에 관하여 일정한 견해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사실과 가치의 문제를 이렇게 볼 때 이 문제에 대하여 정통적인 것으로 여겨져 온 대답이 하나 있는데 사실과 가치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두 개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 서 사실판단과 가치판단도 절대적으로 양분된다는 것이 그 대답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분법은 하나의 문화적 제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사실과 가치의 양분법을 일종의 문화적 제도라고 불렀는데 이 말이 뜻하는 바는 그러한 정동적인 대답이 그 문제에 관하여 철학자들이 각 자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그 정통적인 해답이 옳은지 그론지에 관계없

이 한동안 그대로 정통적인 해답으로 여겨질 것임은 매우 불행한 일이 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일반인돌에게 사실과 가치의 양분법이 아무런 합리적 근거도 없고 따라서 합리적으로 논박될 수 있다는 점을 설득시 킬 수 있다 하더라도, 또는 나보다 더 탁월한 철학자가 절대적으로 결 칭적인 논증으로(물론 철학에서는 그러한 논증이 없겠지만) 이 접을 확 증할 수 있다 하더라도 다음 순간에 거리에 나가 보거나 칵테일 파티나 어떤 토론장에 가 보연 ‘그것이 사실관단입니까 아니면 가치판단입니 까?'라고 질문하는 사람이 틀 림없이 있을 것이다. 사물들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등등으로 말하는 것은 사실에 관한 말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 는 어떤 의미에선 제도화된 견해이다. 내가 지금 말하려는 논의는 전혀 새로운 논의는 아니다. 나는 지금 사실과 가치에 관한 논쟁에서 어느 정도 벌써 신임도 룽 잃은 방향을 재 활시키고자 하는데 사실판단 그 자체, 그리고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사실이 아닌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우리가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과학 적 탐구의 실천 자체가 이마 가치를 전제하고 있다고 논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방향이다. 이러한 방향의 논의가 왜 신임도를 잃었는가 하면 그러한 방향에 대 해선 너무나 뻔한 응답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 가치 룽 전제 하고 있다는 견해에 대한 응답은 일종의 보호적인 양보의 태도 를 취한 다. 사실과 가치가 엄격히 구분된다는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과학 도 어떤 가치를 전제한다는 접, 예컨대 과학도 우리가 참을 찾고자 함 을 전제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들은 과학이 전제하는 가치가 윤반리대닉되 는가 치견해는를 아 논니할라 고때 주과장학한은다. 단 나하.는나. 의앞 으가로치 ,전 술죽 한참 이방향라의는 논가의치에를 전제한다는 비교적 단순한 견해 를 취하는 반대자를 염두에 둘 것이다. 이미 살펴보았다시피 참이란 그렇게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참이란 질지로'(마음이나 마음에 들어서 하는 논의와는 무관하게) ‘거기에' 있 는 것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복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인간 의 사유 속에 아칙도 깊은 뿌리를 거두지는 않고 있지만 칸트나 비트겐 슈것. 타어과.. 인 떤.갇 . 등진다.. 의술 고. 이 .비 하 판참.는 으이 . 로라동.. 고치..이 원 .미말.리. 하 . 붕e 는q.괴 u 되 i것v. 었a 은l.다e n.그c.e p진. r i술 n. c 을i.p le밖. 에 으 . 로호. 소주하. 장여. ,하. 는. 참 as이se라 rt 는 것이 정말 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철학자

들도 있다. 또 어떤 철학자들은 어떤 형식언어 (기호논리물 사용하여 어 떤 진술을 표현하기 위한 형식체계)에서 그 언어에서 사용되는 ‘참'이라 는 알을 더 강한 언어 (소위 ‘메타언어')에서 정의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 타르스키의 업적에 호소하기도 한다 .I)

1) 나의 저서 『의미와 도덕과학 Meanin g and /he Mara/ S ci ences 』의 1 부 1 강에 타르스 키의 업적에 대한 비전문적인 설명이 나와 있다.

것이그었런다데. 타사르실스상키 의P 인 업경적우도, 그그. 리.자 고.체 오.앞 직.에 서그. 경말.우한.에 .동.만치 ‘원P'리 는에 참 근이거다한라 는 형식운 가진 모든 문장, 예컨대 • (T) 눈이 힐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눈은 희다’는 참이다 라는 형식을 가진 모든 문장들을 매타언어 (이 언어에서 P 는 문제의 형 식체계의 한 문장이다)의 정리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참'을 성공적으로 정의하기 위하여 타르스키가 제시한 기준이었다. 그러나 동치원리는 철학적으로는 중립적이고 따라서 타르스키의 업적 도 그렇다. 이번 진리이론에서도 눈은 희다'는 ‘ 눈은 희다”는 참이다' 와 동치이다. 실증주의 철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갇이 대답할 것이다. 죽 위 의에 미언하급는한지 도알식 것(T이) 라를고 ,안 다다면시 ‘말하눈은여 희그다것”은는 눈참. 은이. 다 희'. 라다. 는룰 것의이미 함무을엇 을알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 의하면 만약 우리가 ‘눈'과 ‘희 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말 곤경에 빠지게 될 것이라 고 한다. 그러나 정말 문제는 우리가 ‘눈은 회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 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철학적인 문제이 다. 이 철학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도식 (T) 가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 는다. 그리고 이 접이야말로 진리에 관한 우리의 직관과 일치하지 않는가? ‘당신은 진리를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만약 있 다면 이 사람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매우 의십스러운 사람으로 볼 것이 다. 왜냐하면 그가 어떤 합리적 수용가능성의 표준을 갖고 있는지, 죽 어떤 것이 탐구의 합리적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그 탐구를 끝내는 것이 합리성이라고 생각할 때 어떤 객관성의 표준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어

떤 근거가 이러저러한 판정을 받아들임에 있어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 다고 생각하는지등등에 관해서 우리가 만약 아무 것도 모른다면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알려고 하게 해주고 싶다는 그의 말이 정말로 말해 주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 접을 과학의 경우에 비추어 생각해 보자. 과학은 ‘진리를 발견하고자 한다’는 말은 사실은 순전히 형식적인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자들은 만약 눈이 회지 않다 면 눈이 희다고 주장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든지 또 만약 전자가 전선으 로 흐르지 않는다면 전자가 전선으로 흐른다고 주장하고 싶어하지 않는 다고 말하는 것과 다 를 바 없다. 순전히 형식적인 이 말은 만약 우리가 합리적 수용가능성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따라서 눈이 흰지 아닌 지, 또는 전자가 전선으로 흐르는지 아닌지 를 결정하려는 과학적인 시 도와 다른 방식의 시도룹 구별할 수 없다면 전적으로 공허하다 . 만약 우리들의 개념체계가 개념화되지 않은 실재와 부합되는지 아닌 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양자를 비교해 보려는 노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 다면 과학이 진리를 찾고자 한다는 주장은 과학이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합리적 수용가능성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세계상을 건축하려 한 다는 주장과 다룰 바가 없을 것이다. 과학이 참인 세계상을 건축하려 한다는 진술은 그 자체 참인 진술이지만 그 내용은 거의 공허하고 그 참은 형식적인 참이다. 과학의 목적에 실질적인 내용이 갖추어질 수 있 음은 오직 과학 자체에 내재해 있는 합리적 수용가능성의 기준에 의해 서는일 사 람뿐이들다에. 대과한학 의나 의유 일대한옹 은목 적간은단히 진 리말를하여 발 견진.하리..는가 그것들이이라 고생 생각각하하는 것처럼 그렇게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 진리 자체가 생명을 얻게 됨은 바로 우리가 설정한 합리적 수용가능성의 기준에 의해서이고 이 기준이야말로 우리가 정말로 과학에 내재해 있는 가치를 찾고자 한 다면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라는 것이 나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국단적인 예로서 어떤 문제에 대하여 의견이 를리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내가 지금 상상해 보려는 의견의 불일치는 과학적인 경우이긴 하 지만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경우와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예를 가 지고 내가 바라는 것은 그러한 예를 살펴봉으로써 과학적 가치의 본성 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접이다. 1 장에서 우리는 우리가 모두 동 속에 들어 있는 두뇌라고 해보자는 가설을 가지고 토론하였는데 이 가설과 관련지어 의견의 불일치를 생각

해 보자. 우리는 앞서 이 가설이 결코 참이 될 수 없다고 논하였다. 그 러나 여기선 우리의 그러한 논의가 다른 의견 중의 한 쪽을 회·신시키는 데 실패하였다고 가정할 것이다. (이 가정은 있을 수 있는 가칭이다. 왜 냐하면 모든 사람을 확신시킬 수 있는 철학적 논의란 있을 수 없기 때 문이다.) 요컨대 모든 것이 우리가 앞에서 기술한 방식대로 집단적으로 환각에 빠쳐 있다는 가설을 생각해 보자. 그러한 식으로 모든 것이 집단적으로 환각에 빠져 있다는 가설을 생 각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가설 때문에 무언가 달라진 것이 있다고 느낄 필요가 없는 사람들도 뭉론 있을 것이다. 예컨대 연인들이 그러할 것이 고 2) 또 경제학자들도 그러한 가설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화폐가 전부 뭉질적으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경제학자들이 걱칭할 팔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어떤 경제 이 론에서든 화폐는 물리적으로 현실적인 것이 아니지 않은가.)

2) 그러나 나는 이 가설이 사람들에 따라 어떤 차이정운 가져다 중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선 내 생각운 계속 변경시킬 것이다.

나는 독자들이 우리가 모두 통 속에 있는 두뇌라는 이 이상한 이론 (나는 이 이론이 부정합적인 이론이라고 보고 싶은데)이 홀로 떨어져 있는 어떤 미치광이에 의해서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예컨대 오스트레일 리아 같은 큰 나라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주장되는 것이라고 상 상해 보기 바란다. 다시 말하여 오스트레일리아의 대다수 사람들은 우 리가 동 속의 두뇌라고 믿고 있고 오칙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우리와 갇 온 정상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 보기 바란다. 오스트레일리 아의 대다수 사람들이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음이 있었기 때문이 라고 상상해도 좋겠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그들은 ‘당신도 그 시드니의 도사와 만나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그가 얼마나 선하고 친절하고 지혜로운 사람인지 알게 된다면 당신도 그러한 믿음을 룰림없이 가지게 될 것이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환 각이 당신들이 말하는 바처럼 그렇게 완벽하다면 시드니의 그 도사는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모두 동 속에 든 두뇌라는 것을 알 수 있소?'라 고 묻는다면 그들은 단순히 ‘그 도사는 그냥 알 뿐이오'라고 대답할 것 이다. 앞에서 말하였다시피 이 가설에 관한 찬반은 일상적으로 흔히 보는 의견의 불일치가 아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경험을 예기하고 다

리 를 건설하고 하는 기술이 우리와 비슷하다고 상상할 수 있다. 심지어 그들은 우리가 아주 최근에 이룩한 과학적 발견들까지도-그 발견들 을 참이 아니라 우리의 이미지 속에서 진행되고 있을 법한 것에 대한 올바른 기술로서 ――-기꺼이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아주 먼 미래에 대 한 어떤 예측에 관해서는 그들이 우리와 다른 의견을 가질 것이라고 상 상해 볼 수도 있다(예컨대 그들은 미래에는 언젠가 자동기계가 힘을 잃 게 되고 사람들은 집단적인 환각에 빠져들기 시작할 것이며 그리하여 그들의 견해가 옳다는 접이 확증될 것이라고 기대할지 모른다 ).3) 그러 나 그들이 그러한 예측을 하든 안 하든, 또는 그들이 예측과 다르든 다 르지 않든 냐의 논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내가 상상해 본 경우에 서 문제로 제기되는 접은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믿음체계와는 전적으로 다른 자족적인 믿음체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3) 만약 그둥이 이와 갇온 예측운 한 겅우 다음과 갇은 정도의 차이정은 생길 것이다. 즉 그둥의 견해가 우리가 1 장에서 비판하였던 방식으로는 비판받지 않·운 것이라는 정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그둥의 주장은 (궁국적으로는) 칭당화될 수도 있을· 것이며 따라서 진리 운 ‘초원직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진리관운 요구하지는 않운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 윤 리적인’ 가치에 어떤 불일치가 있는지 없는지 하는 문제 는 재기되지 않는다 . 죽 오스트레일리아인들도 우리와 아주 유사한 윤 리를- 가질 수 있다. (물론 고대 그리스인들은 현명함도 일종의 윤리척 가치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그 후 유태교와 기독교는 구원이라는 특수 개념 때문에 윤리적인 개념의 영역을 사실상 좁혀 버렀다.) 가상의 오스트레일리아인돌에 관하여 내가 우선 말하고 싶은 접은 그 둘의 세계관아 이상하다는 것이다. ‘이상하다’는 말이 긍정적인 뜻으로 사용될 때도 간혹 있으나 여기에서는 그런 뜻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그고 러생한각 한이다상.한 그세들계이관 을이 상가하진다 고사 람여들겨 지모는두 를것 은매 우그 들가의련 하마게음 이볼 것병.이들.었.라 다는 뜻에서이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을 병적인 것으로 특징지음은 일 종의 윤리적인 독징, 또는 윤리적인 특징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바보멍청이라고 부르지 않고서는 어떻게 그들과 논쟁을 할 수 있겠는가? (논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논쟁을 시도해 보 라. 나는 그들이 결코 우리의 논의에 설득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겠 다.) 그들의 견해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한 논의는 우겅합 성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부정합성은 1 장에서 살펴 본

부정합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 장에서 논의한 부정합성은 철학적 (따라서 논쟁거리가 되는)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말하자면 깊혼 뜻에서 의 부정합성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의 견해는 훨씬 더 피상 적인 차원에서 부정합적이다. 우리의 진술들이 참인지를 우리가 어떻게 아는지를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인과적인 지각이론을 발전시킵으로씨 그러한 설명을 부분적으로 나마 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이론내에서 어떻게 지각이 생기 는지에 대한 설명에 의하여 우리의 지각적 지식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게 되는지도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또 부분적으로는 동계이론이나 실험적 인 방법에 의해서도 그러한 과업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씨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실험상의 오류를 제거시킨다고 여 겨지는 절차 들 이 정말로 대개의 경우 실험상의 오류를 제거시키는 경향 을 갖고 있다는 접을 우리의 이론 자체내에서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세계에 관한 우리의 발전적인 이론이 이론 전체로서 볼 때 그 이론이 옳다는 접을 우리로 하여금 알 수 있도록 해주는 바로 그 활동 과 과정에 대한 설명도 포함하여야 한다는 점은 그 이론 자체에 대한 중요하고도 매우 유용한 요구조건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의 견해는 그러나 이와 같은 칭합성을 가지고 있 지 않다. (적어도 우리가 판단하건대 ‘칭합성'이란 계산에 의해서 나오는 어떤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는 말하자면 ‘바지의 엉덩이 부분'의 느낌 으로도 판단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갇이 오스트 레일리아인들이 너무나 완벽한 환각에 빠진 나머지 문제의 그 시드니의 도사가 스스로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가지도록 설득하려는 그 믿음체계가 과연 올바른 믿음체계인지를 알 수 있는 어떠한 합리적인 방법도 없다. 정합성의 개념에 관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표준에 의거 하여 판단해 보연 그들의 믿음체계는 전면적으로 부정합적이다. 그들의 믿음체계에는 여러가지 방법론적인 특징들이 결여되어 있다. 자연의 법 칙이 우리의 이미지 속에선 어떻게 나타날지에 관해선 그들의 믿음체계 와 우리의 믿음체계는 서로 일치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 속에 나타난 자연의 법칙이 통 밖에서 실지로 돌아가는 자연의 법칙과 동일한지 아 닌지에 대해서도 그들의 믿음체계가 무언가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아 무 것도 말해 주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들의 믿음체계에는 우리의 믿 음체계가 갖고자 하는 일종의 포괄성 같은 것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체계는 그들의 용어를 사용해서도 무 엇이 참되고 궁국적인 자연의 법칙인지룽 말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말 하자면 그들의 믿음체계는 오캄의 면도날 Ockham's razor (l)이 하고자 하는 바에 위배된다. 오캄의 면도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한 계산형 식으로 도식화하기란 물론 어렵고 또 불가능하겠지만 동 속의 두뇌이론 이 그 이론 자체의 논리에 따라 우리의 경험을 설명하는 데 아무런 역 할도 하지 못한다고 하는 통 밖에 있는 여러 종류의 대상들도 요청한다 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이론은 명백히 '필요없이 존재뭉을 늘리지 말 정라’신는을 오준캄수의하 는교훈 이을론 을위 반기.하능.였적.다.으고.로 단단정순할한 수fu n c있t다i o.n all오y 캄 si의m p l면e 도이날론의이 라고 부르기로 하자.

® 중세 영국의 찬학자였던 오캄은 중세 실재온의 형이상학칙 그리고 인식론적 가칭운 거 부하.i!. 개빌칙이고 구체칙인 것에 관한 칙겁적인 경험에 모돈 지식의 근원이 있다는 국단적인 겅협주의칙 천학의 기초릅 마련하였다. ‘정약의 원리 princ iple o f econom y’라 고도 °갈려진 '오캄의 면도날'온 설명에 있어서의 방법적인 원리로서 과학적 설명운 할 때 와실한 깅힙칙 중거가 없는 사이비 존재자들운 제거하기 위한 기준이었다.

어떤 과학이론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절차가 그 과학이론이 전체로서 어떤 ‘살만한 접'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건다는립 하것는이 절내차가를 지분금석까함지에 말있해어 온그 바절의차 를요 지과이학다이.론 의나 는문 과장학 하적.나. 하.이.나론 를을 차례로 검중하는 절차로 생각한다면 올바론 분석이 못 된다고 생각한 다. 내 생각으로는 과학에서 검중을 한다는 것은 하나의 전체적인 것과 관련된 문제이다. 즉 경험의 검사를 받아야 하는 것은 하나의 ‘법인단 체’와 갇은 유기적 조직으로서 이론체계 전체이며 그 이론 전체가 어떻 게 잘 경험의 검사를 받는지도 궁국적으로는 직관적인 것에 의거하여 판단되지 형식에 의거하여 판단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제 앞에서 재기되었던 원래의 문제로 되돌아가자. 과학에도 과연 어떤 가 치가 내재해 있는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우리가 앞서 동 속의 두뇌이론가들을 비판할 때 호소하였던 가치들, 그리고 그 밖에도 현재 이 경우에선 문재시되지 않 는 다른 여러 가치들---:예컨대 그들이나 우리가 다같이 추구하는 도 구적 효율성 같은 것-을 놓고 볼 때 우리는 아주 풍부한 가치체계 룹 전제하고 있는 과학상을 얻을 수 있다. 어떤 이론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과학자들과 일상인들이 다같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것인지를 고

찰함으로써 드러나는 합리적 수용가능성의 이상을 생각해 본다면 과학 에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이 도구적으로 효윤적이고, 정합적이고, 포 괄적이고, 기능적으로 단순하다는 등등의 성격을 가진 세계상을 건립하 려는 것이라는 접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재는 왜 그러한 특징을 가진 세계상을 만들고자 하는가이다. 우리가 왜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의 평적' 세계상이나 동 속의 두뇌둘이 가진 이상한 세계상이 아니라 전술한 특징들을 갖춘 세계상을 원하는지 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러한 세계상을 가진다는 것이 그 자체 인간인식 의 번영, 따라서 전 인류의 번영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만약 형이상학적 실재론이 옳고 과학의 목적을 단순히 우리의 시각 속에 든 세계와 세계 그 자체 를 ‘ 조화'시키려는 시도라고 본다면 우리가 정합성, 포괄성, 기능적 단순성, 도구적 효율성들에 관심을 가 지는 유일한 아유가 그러한 것들이 그 ‘조화’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 수 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세계 자체를 초월적인 의미에서 ‘조화'시키려는 생 각은 넌센스에 불과하다. 본체세계와의 그러한 형이상학적 조화를 우리 가 바란다는 접을 부인한다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은 경험적 세계와 의 보통의 경험적 조화(합리적 수용가능성의 기준에 의거하여 판단해 볼 때)라는 접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체세계와 는 반대로 경험세계는 합리적 수용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기준에 의존하 여 있다(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우리는 ‘경험적 세계'에 대한 이론적 상을 수립하기 위해서 그 기준을 사용하며 또 그러한 상이 발전되어 감 에 따라 기준도 계속 수정되어 간다.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이 사실온 우리가 수립한 세계상에 의존한다는 접은 다른 책에서 이미 강조한 바 있다. 여기서는 그러한 의존의 다른 측면, 죽 합리적 수용가능성의 기 준에 대한 경험세계의 의존성을 강조하고 싶다. 다시 말하여 내가 여기 서 말하고 싶은 것은 경험적 세계를 가지기 위해서도 우리는 합리적 수 용가능성의 기준을 가져야 한다는 접이다. 요약컨대 ‘실재세계’가 우리 가 가진 여러 가치에 의존해 있다(여기서도 그 역이 성립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적어도 몇몇의 가치는 객관적인 가치이다. 앞서 과학은 ‘가치중 립적'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윤리적` 가치가 객관적이라거나 또는 윤리학도 하나의 과학이 될 수 있다는 뜻 은 아니다. 사실 실험과학의 의미로서든 또는 연역과학의 의미로서든 윤리학 의 ‘과학’이라는 것이 성립될 전망은 전혀 없다• 오래 전에 아리 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갇은 말을 한 적 이 있다. 4)

4) Aris t o t l e, Eth i c a Ni co 11uzc /1e a, Bookl,ch.3.

우리는 그와 같은 문재들(역주 : 윤리적인 문제들)에 관하여 그와 같은(윤 리적인) 전재들웅 가지고 이야기 할 때 진리물 대충 개관적으로 지적하는 데 만족하지 않운 수 없다. 그것은 개연적인 것들에 관하여 개연적인 전재 에서 출발하 여 이야기한다면 그 결론도 개연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고 만족 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러 종류의 진술을- 받아 들 이 는 것도 이와 마 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각 주재의 본성에 따라 그 주재에 합당한 정밀도룽 요구하는 것이 매운 사람둥의 특 징이기 때문이다. 수학자가 개연적인 추리 운 하는 것운 허용하고 대신 수사가에게 과학적 엄밀성운 요구하는 것은 분명히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정일과학(정밀과학들은 분명히 합리적 사고의 핵심적인 예에 속 하는데)에 있어서의 합리적 수용가능성이 ‘정합성'과 ‘기능적 단순성' 같 은 인식칙 가치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사용하는 사람 들 의 감정만운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실지 성질들을 대변 하는 가치용어들도 적어도 몇 개는 있다는 접을 알 수 있다. ‘정합적' 또는 ‘단순적'이라는 말들이 대변해 주는 것이 이론들의 속성 이 아니라 이론에 대한 몇몇 인간들의 ‘태도’라 한다면 이론을 합리적으 로 수용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정당화된 jus ti fied ', ‘잘 확증된 well confi rm ed', ‘가능한 최선의 설명' 등과 같은 말들도 전적으로 주관적인 태도와 연관된 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합리적 수용가능성 이란 그것의 근거가 되는 매개변수보다 더 객관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 다. 그러나 앞 장에서 이미 논하였다시피 합리적 수용가능성 그 자체가 단순히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는 스스로 논박되는 견해이

다. 그래서 적어도 위에서 언급한 몇몇의 가치용어들은 일정한 류의 객 관적 적용, 일정한 류의 객관적 정당화조건을 갖는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불 수 없다. ‘정합적인', ‘단순한', ‘정당화된' 등과 같은 말들이 가치어임을 부인하 는 길을 택함으로씨 어떠한 종류의 객관적 가치도 인정하지 않으려 하 는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혹자는 그러한 말들도 어떤 성질을 대변 하는데 그러한 성질에다 가치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우리이며 따라서 우리의 가치부여함이 반드시 객관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곧 난접에 봉착한다. ‘정 합적인', ‘단순한' 등의 말들도 다른 전형적인 가치어들과 많은 점에서 공동성을 띠고 있다. 이러한 말들도 ‘친절한', ‘아름다운', '착한' 등의 말들과 아찬가지로 겅찬하든 말로 사용되는 수가 종종 있다. 역사적으 로 규정되었다는 점에서 정합성, 단순성, 정당화동에 관한 우리의 생각 과 찬절함, 아름다움, 착함 등에 관한 우리의 생각은 다를 바 없으며 또 끈질기게 거듭되는 여러 철학적 논쟁에서 공히 사용된다는 접에서도 인식적 용어들과 윤리적 • 미적 용어들은 보조를 같이한다. 뉴먼J ohn C. Newman 이 생각한 합리성과 카르납이 생각한 합리성은 물론 전적 으로 다르다• 이 두 사람이 동시대에 살면서 서로 대화하는 계기륭 가 질 수 있었더라면 아마도 서로가 서로를 설득시킬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떤 것이 합리성 차체에 대한 합리격 생가일까 하는 문제가 가진 난이 도난는이 도어와떻 게정. 확.하히.나 의동 일논하다리.체 계문를제 의정 당해화결할을 수위 해있 을호까소 륭하 는받 을물 음만이한 지중닌립 적 합리성의 개념은 없다. 여러 가지 관습주의에 기대어 문제물 해결하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 겠다. 예컨대 정당화의 경우 카르납이 생각한 정당화(이것을 ‘정당 화 cnrnn p’이라고 부르자)와 뉴먼이 생각한 정당화(‘정당화 Newmon' )는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이며 ‘정당화된'이란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이 ‘정당 화 Carna p’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당화 Newman’ 을 뜻하는 것인지를 결 정할 경우에는 ‘주관적인 가치판단'이 관여되어 있지만 임의의 진술 S 가 카르납의 의미로서든 또는 뉴먼의 의미로서든 정당화되었다는 사실 을 진술함에 있어서는 아무런 가치판단도 개입되지 않는다고 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사실'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이 말이 누구의 관접에서 사용되었는가? 만약 누구라도 객관적으로 가져

야 할 합리성의 개념이 없다고 한다면 ‘사실'이라는 개넝도 공허하다. 정합성, 단순성, 도구적 효율성과 같은 인식적 가치가 없다면 우리에게 세계도 없고 사실도 없을 것이며 무엇이 무엇에 상대적이라는 것에 관 한 사실조차도 없을 것 이 다. 왜 냐하면 이 후자의 사실도 전자의 사실과 공동운명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적 가치들은 인간적 번영이라는 전체적인 개념의 한 부분으로서 임의성을 띠고 있다. 진리 믈 실재와의 ‘대응'이라고 보는 옛날의 실재론적 생각도 그리고 정당화 를 공적인 ‘기준'에 의거하여 고정된 것으로 보려는 현대의 실증주의적 생각도 모두 빛을 잃은 지금 우리는 합리성에 대한 더 나은 생각을 찾 으려는 우리의 노력을 우리에게 내재된 하나의 지향적 황동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은 습관적인 행위나 단순히 기호나 망상에 따르는 행위가 아닌 모든 인간적 활동과 마찬가지로 우 리가 생각하는 대로의 선으로부터 그 지침을 받고 있다. 다른 영역에서의 합리성 만약 과학, 특히 정밀과학에 내재해 있는 가처들이 선에 관한 우리의 생각의 한 부분을 드러낸다면 나머지 부분은 앞의 또 다른 영역에서 우 각리된가다 .세 운그 렇합리지적만 수이 용시가점능에성서의 우표선준 에필 요따한라 것밝은혀 질합. 리수.적. 있 을수 용것가이능라성 의생 표준이라는 개념을 확대시키는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합리적 수용가능성의 표준들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 로서, 죽 어느때 진술들을 수홍해야 하고 또 어느때 수용하지 말아야 할지를 말해주는 표준으로만 생각해 왔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서의 합 뿐리만성의 아 니표라준 은그 러진한술 체체계계들들의의 참적. 합•. 거 성.짓 과을 명 .어 료.떻성.게 을 판어단떻하게 느판냐단 하하는느 냐문 제하 는 문제와도 관계가 있다. 어떤 진술체계가 거짓이면 우리에게 만족스 러운 기술을 제공해 줄 수 없는데 그 밖에도 여러 방식으로_순전히 인식적인 방식으로- __그 러한 기술을 제공해 주지 못할 수가 있다. 나는 이 점을 원하기만 하였다면 이론과학과 연관하여서도 지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죽 정밀과학의 관심사는 찰인 진술들, 그리고 참이고 형며 식적.상합. .한보편 r적el인e(va‘n법 t칙진들술'들)을 진발술견들하까는지 도것 이발기견도하 는하 다것는만 이접 을아 니지라적 할참 이수

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적합성의 개념은 광범한 관심과 가치들을 수 반한다. 그러나 그와 갇이 지적하였다 하더라도 그 지적은 결국 세계에 관한 우리들의 지석이 가치를 미리 전제하고 있다는 접을 논하기 위해 서였을 터이고 무엇이 실재세계로 러거걸치는 우리가 가진 가치에 달려 있다는 좀더 과격한 주장을 펴기 위함은 아니었으리라. 지각적 합리성, 즉 가장 단순한 지각격 사실일지라도 그것에 관하여 누군가가 참되고, 적합하고, 명료한 설 명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룹 우 리가 결정하는 데 기조가 되는 내재적 표준으로 되돌아간다면 여기에는 훨씬 더 많은 요소들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 심 리학자 둘은 가장 단순한 경우의 지각에도 얼마나 많은 이론적 구성이 개재되 어 있는지를 강조하였다. 이 접은 신경생태학적인 차원에서는 물론 문 화적인 차원에서도 참이다 . 가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문화에 사는 사람들은 책상, 걷상, 안락의자 등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기술하는 실내와, 가구가 존재하는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기술하는 실내는 전혀 그 내용 을 달리할 것이다. 그들의 기술도 참인 진술들로만 구성될 수도 있으나 적합한 기술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이 간단한 예가 말해 주는 바는 기술하는 사람이 미리 일정한 7·1]딩 conce pt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기술은 적합한 기술이어야 한다는 조건에 숨겨져 있다는 접이다. 합리적 기술자라면 일정한 개념 둘을 획득할 수 있고 또 그 개념들을 사용할 필요를 느낄 수 있으리라 우리는 기대한다. 만약 기술자가 일정한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바 로 그 사실이 그와 그의 기술을 모두 비판하게 되는 근거가 될 수 있 다. 사람 없는 방안에 있는 책상, 결상 따위에 관한 단순한 차원의 이 야 기에서 참인 것은 사람들 상호간의 관계나 상황을 기술하는 차원에서도 참이 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떠한지를 기술할 때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말, 예컨대 겨각 었든 , 지각 없는과 같은 말들을 생각해 보자. 예의 이 두 말은 물론 칭찬이나 비난을 할 때도 사용될 수 있다. ‘사실과 가치 의 구별'이라는 일반적인 표제와 함께 쉽게 간과되었던 또 하나의 구분 은 칭찬이나 비난웅 하기 위한 언어적 표현의 사용간의 구분이다. 그러 나 이 구별은 사용되는 말로씨는 구분되어질 수 없다. 누군가가 지각이 없다고 판단할 때 이 판단은 비난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기 십상이 지만 단순히 기술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수도 있고 또 설명이나 예측을-

위해서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가령 내가 당신에게 다음과 갇이 말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죽 ‘죤 스가 당신의 감정을 상하게 하도록 두지 마시오. 당신은 그의 말투로 보아 그가 당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기 쉬웅 것이지만 그것은 흔히 있 는 착각이오. 그가 당신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든 그의 말두와 행동거 지가 당신의 감정을 상하게 할 것이오. 그는 그냥 좀 지각이 없는 사람 이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당신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 하지 마시오.’ 이 조그만 예에서 사용된 ‘지각이 없는'이라는 말은 죤스 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죤스의 행태 를 설명하고 예 측 하려는 의도 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그러한 설명과 예측이 완벽하게 훑혼 것 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질두하는'이라는 말도 비난을 위해 사용 되기도 하지만 전혀 비난하려는 의도가 없이도 사용될 수 있다. (질두함 이 때로는 완벽한 권리가 될 경우도 있지 않은가.) ‘지각이 없는'과 갇은 말의 사용은 사실과 가치간의 구별이 실 세 세계 와 언어에서는 일마나 모호한 구분인지 를 밝혀 주는 좋은 예가 된다. ‘지각 없는', ‘전방진', ‘고집 센', ‘짓궂은' 등의 말들이 실지로 도덕적 평가를 할 때 얼마나 중요한지는 어도취 I. Murdoch 의 r 선의 왕국 The Sovereig n ly of 'Good’ 』 이 라는 책 에 서 도 강조된 바 있 다. 죤은 매 우 지 각 없는 사람이다', ‘죤은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죤 은 돈을 위해서 라면 무엇이든지 할 사람이 다’ 둥의 진술들이 각각 가장 실증주의적인 의미에서 참인 기술일지라도(‘죤은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 이든지 할 사람이다’라는 진술에 가치용어가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 음을 주목하라) 이 세 개의 진술을 연언으로 묶어 주장한다면 ‘죤은 그 리 좋은 사람이 못 된다’라는 알을 구태여 덧붙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사실과 가치가 서로 무관한 것으로 생각할 때 ‘사실'은 울리주의 적인 말로 진술되고 ‘가치'는 ‘미', ‘악’ 갇온 아주 추상적인 용어로 진술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동이다. 만약 사실들이 ‘지각 없는', ‘자 신만 생각한다', 돈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한다’ 동의 말과 갇은 차원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가치가 사실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주장은 성 립되기가 힘들다. 하지책 상않이고나 하결는상 이기라술는이 개비념판의받 듯사이용 이누 군요가구를될 두때고도 그그가러 한지. 각개.이 념. 을있. 사다. 용라

든지 자.발..적 이라고 지적할 수 없는 사람도 지각이 예민하지 못하다든가 피상적이라는, 즉 그의 기술이 적합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기 쉽다. 극단적인 벤담주의자들 동 속의 두뇌문제로 되돌아가 이 예 를 약간 수정해 보자. 이 번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거주민들의 문화가 역사, 지리, 정밀과학의 축 면에서는 우리의 것과 같 지만 윤리의 측 면에서는 우리의 것과 다르다고 상상해 보자. 윤리문제 를 생각할 때 일반적으로 극단적인 나찌주의자나 그와 비슷한 경우 를 생각하는 것이 보통인데 나는 여기서 좀더 홍미로 운 국단적인 밴담주의자들의 경우 를 생각해 보겠다. 오스트레일리아인 들이 그 들 이 생각하기에 ‘쾌락주의적 경향을 가진' 것들을 계산해 내는 정교한 과학적 방법 을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그러한 경향을 국대화시키 도록 행위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상상해 보자. 나는 여기서 국단적인 벤 담주의자 들 이 국도로 세련되어 있어서 미래 를 예측하고 행위의 결과를 정확히 평가하는 데 있을 수 있는 모든 난접둘을 충분히 깨닫고 있다고 가정하겠다. 또한 그들은 극도로 무모하고 방자하여 누군가의 행위의 결과가 과연 실지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초래할 수 있을지 합당한 의심이 간다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하여 그 사람을 희생하도록 하 지는 않겠지만 행위의 결과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가져온다고 확신 이 서는 경우에는, 만약 행위의 결과가 궁극적으로 조금이라도 일반적 인 행복의 수준을 중가시킨다면 가장 잔인한 행위라도-어린애들을 고문하거나 무고한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우는 둥의 행위 ――弓자행하려 할 것이라고 가칭하겠다. 국단적인 벤담주의자들의 이와 같은 도덕을 우리는 좋지 않게 생각하 리라 침작된다. 우리들 대부분은 극단적 벤담주의자들이 병적인 가치체 계를 가지고 있고 관료적이며 무모하다고 비난할 것이다. 우리들의 이 러한 비난에 그들은 우리가 어리석고 미신적이며 불합리한 전동의 노예 둘이라고 맞설 것이다. 우리와 국단적 벤담주의자들간의 이러한 의견의 차이는 두 집단의 사 람들이 사실에 관하여서는 의견을 갇이하지안 ‘가치’의 문제에 관해서는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하여 일상적으로 상상될 수 있는 류의 차이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경우를 좀더 면밀히 살

펴보자. 최대다수의 최고만족을 위해서는 때로는 거짓말할 필요도 있다 는 사실온 국단적인 벤담주의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반적인 쾌락의 수준을 극대화시키려는 동기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경멸적인 의미로서 쓰이는 ‘정직하지 못한' 경우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한 동안이 지난 후에는 국단적인 벤담주의자들이 기술적으로 사용하는 ‘정 직한'이라는 말은 우리가 기술적으로 사용하는 ‘정직한'이라는 말과 전 혀 들리게 될 것이다. ‘지각 있는', ‘선량한 시민' 등등의 말에 대해서도 갇은 이야기물 할 수 있다. 사람 대 사람간의 상황들을 기술하기 위하 여 극단적인 벤담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는 동일한 목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와 전적으로 다 물 것이다. 우리가 기술할 때 그 근거로 삼는 많은 기술적 원천들이 그들에겐 없거나 알 수 없게 변경될 뿐만 아니라 우리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예컨대 쾌락주의적 경향을 정확 히 표현하는 어법) 그들만의 새로운 말들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 다. 그렇게 되면 인간세계의 조직은 변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는 사아 그들이 사는 세계와 우리가 사는 세계는 전혀 이질적인 세계로 되 고 말 것이다. 요컨대 우리와 국단적 벤담주의자들간의 관계가 소위 ‘사실의 문제에 서는 의견을 갇이하지만 가치의 문제에서는 의견을 달리하는' 관계의 경우에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에 관계되는 거의 모든 상황에서 사실에 관한 우리의 기술이 그들의 것과 상이해질 것이다. 상황에 관하 여 그들이 만들어 내는 진술 중에 그 어느 것도 7] 것은 아닐지라도 그 둘의 진술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적합하고 명료한 진술에 끼지는 못할 것이며 또 반대로 우리의 기술도 그들이 생각하는 적합하고 명료한 기 술에 들지는 못할 것이다. 요약컨대 ‘가치에 관한 의견의 불일치’를 제 쳐두더라도 우리는 그들이 가진 인간세계에 관한 상을 충분히 합리적으 로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통 속의 두뇌둘이 합리성에 대한 병적인 표준―一-이론적 합리성의 병적 표준-을 갖고 있기 때 문에 제계가 어명계 되어 었든치를 옳게 이해할 수 없듯이 국단적 벤담 주의자들도 인간적 번영에 대해 병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 적 세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에 대해 옳은 이해를 가질 수 없다.

善에 관한 주관주의 혼이 지 각 있고, 진실하고, 친절하고, 용기 있고, 책 임 감이 있다'로 부터 ‘죤은 도덕적으로 선하다’로 추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개의 증 명되지 않는(그리고 중명될 수 없는) ‘전제', 즉 ‘지각 있음은 도덕적으 로 선하다’는 전제가 필요하다는 접은 종종 지적되어 왔다. 그리고 ‘사 실적' 판단으로부터 어떤 도덕적인 결론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도덕적 인 ‘전제’가 필요한데 이 필요성이 윤리적 판단은 합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접을 증명해 준다고도 주장되어 왔다. 이와 같이 윤리학을 그 첨단(그 스스로는 밑받침이 없는)이 여러 개 의 ‘윤리적 공리’로 되어 있고 이 공리에 근거하여 우리들의 전 도덕적 믿음과 도덕적 사고체계가 성립되어 있는 일종의 전도된 피라밋과 같이 본다면 이것은 소박한 견해이다. 공리적인 뼈대를 가지고 윤리학을 세 우는 데에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앞에서 인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과 같아 우리가 열거할 수 있는 도덕적 공리들은 거의 언제나 단지 ‘대부분의 경우만' 참이다). 사람들은 하나의 사고체계가 좀 의심스럽다 고 생각되면 공리를 마련하여 그 위에 사고체계를 얹어 놓으려 하는 습 성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영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속임수다• 이 를테면 물리적 대상의 존재를 의심하는 회의주의자는 ‘만약 우리의 감 각이 물리적 세계가 있을 경우에 작용하듯이 작용한다면 아마도 울리적 세계는 존재한다’는 원리가 그 자체 다론 것으로부터 합리격 치치를 받 을 수 없는 견제이며, 우리가 어떤 물리적 대상을 ‘관찰한다'고 · 주장할 때, 또는 그 대상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정당화하려 할 때마다 암암리에 그러한 전제가 사용된다고 주장한다. 사실 윤리학과 수학, 그리고 물리 적 대상에 관한 우리의 논의는 ‘공리’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들을 전제한다. 관찰하고 일반화할 때 사용되는 것이 개념들이며 이 개념들 은 우리가 기술하고 일반화할 때 성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정당화된다. 윤리적 객관성에 대한 좀더 세련된 공격이 있는바 이 공격은 우리의 윤리적 믿음들이 임의의 ‘윤리적 공리들'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적인 사례, 직관', 그리고 일반적인 도덕적 격언 등에 근거하고 있다는 접은 인정하지만 윤리적 ‘관찰' 자체가 치유될 수 없는 질병, 죽 심리적 두사p ro j ec ti on 라는 병에 전영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z. 본성상 비록 간헐적이긴 하지만 동정심 울 갖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끔찍한 장면, 예컨대 누군가 가 자신의 가학중적 만족 을 얻기 위해 어린 아이 룽 고문하는 장연을 본 다면 우리는 (때때로) 전융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의 심리는 느낌이 가 진 성질이 마치 행위 ..::z. 자체의 성질인 양 두사하도록 되어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 행위에 대한 나의 반응은 소음끼치는 것이었다’고 말해야 할 경우에 우리는 ‘그 행위는 소름끼치는 것이었다’고 말하게 된다는 것 이다. 이러한 식으로 우리 는 우리가 ‘윤리적 관 찰' 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모아 하나의 체계 를 세우게 되는데 이때 윤리적 관찰이란 사실은 우리 둘 자신이 주관적으로 느끼 는 윤리적 강겅들에 관한 관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보다 좀더 세련된 형태의 주장도 있다. 흄 D.Hume 은 인간에게 '동 정심'이라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는데 이 경향은 문화의 영향을 받아 점 점 더 확장되었다고 한다. 현대의 사회생태학자 들 도 ‘이타주의’라고 부 르는 본능이 인간에게 있다고 보고 있으며 심지어는 ‘이타주의적 유전 자’에 관하여 말하기까지 한다. 이 여러 경우 있는 것은 윤리적 감정뿐 이지 가치의 객관적인 성질은 없다고 하는 핵심적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의 이객러관한적 주가장치이, 잘이못를되테면었 다정.는당. .접화 은 갇 은이미 가 치앞에는서 분 명보았히다 .존 재적한어다.도 그덧래덧 도 인식적 가치는 객관적이지만 윤리적 가치는 주관적이라는 주장이 계 속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객관적 가치가 전혀 있을 수 없다는 주장만큼 은 논박되었다. 도덕적 주관주의를 지지하는 논의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밝히기 위하여 2 장에서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논박할 때 사용되었던 논의를 다 시 상기시켜야 하겠다. 이 점은 좀 기이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 면 주관주의가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반대되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대한 어떠한 논박일지라도 그것은 주관주의는 치치할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동• 일• 한• 논의로 형이상학적 실재론과 주관주의를 모두 논박하려 는 나의 전술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온 형이상학적 실재론과 주관주의가 그렇게 단순히 ‘반대'

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뭉리학에 대해선 지나치게 실재론적 이고 윤리학에 대해선 또 지나치게 주관주의적이 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두 경향은 사실 서로 연관되어 있다. 물리학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기술들에 관해서는 우리는 주관주의로 호르기 쉬운데 그 °.]유는 우리가 물리학을 너무 실재론적으로 보기 때문에, 즉 우리가 물리학(또는 어떤 가설상의 이래물리학)을 일정한 문제와 목표에 적합한, 그래서 합리적 으로 수용할 수 있는 기술로서만 보지 않고 하나의 참된 이론으로 보기 때문이다. 물리학에 관해서 덜 실재론적으로 되는 것과 윤리학에 관해 서 덜 주관주의적으로 되는 것도 따라서 서로 연관이 있는 일이다. 2 장 끝부분에서 제기하였던 논의는 ‘물리주의적' 또는 자연주의적 형 태의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대한 논박이었다. 그 논박을 상기하기 위해 서 표준해석 I( 이 해석에 의하연 ’고양이’는 고양이들을, 그리고 ‘버찌' 는 버찌둘을 지시한다)가 울리주의적 관계 R 과 동연적 coex t ens i ve 이 든가 동일하다고 가정하자. 그리하여 R 은 ‘고양이’의 토큰(또는 누군가 가 그 토큰울 적절하게 사용할 때 생기는 물리적 사건)과 고양이들간에 성립된다. 비표준해석 J도 R, 가능세계, J를 구성하는 데 사용되는 치환(부록을 참조)에 의거하여 정의될 수 있는 관계 R' 과 동연적이다. 그래서 ‘고양이’의 토큰(또는 누군가가 그 토큰을 표준적인 방식으로 사 용할 때 일어나는 뭉리적 사건)과 러겨들간에 R' 가 성립된다. R 과 R' 는 모두 ‘대응' 관계이다. 동일한 문장이 두 대응관계에서 모 두 '참'이다. 어떤 문장이 R' 에서 참이 되거 위해 요구되는 행위들(즉 행위자의 관접에서 ‘성공'할 행위들)은 그 문장이 R 에서 참이 될 때 요 구되는 행위들과 동일하다. 만약 R 이 ‘지시와 동일하다'면, 만약 R, R', 그리고 우리의 이론적 규제륭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우리가 사용하 는 말에 외연을 부여하는 모든 다론 관계가 다 동시에 옳은 것이 아니 라면 R,R', 그리고 다른 여러 관계들이 그 중에 하나, 죽 R 이 지시이 기 때문에 동시에 다 옳은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는 사실 자체마저 물리 주의적 관접에서 보면 선덩한 수 없은i nex pli cable 사실이 되고 만다. 이 논의는 형이상학적 실재론뿐만 아니라 환선추회까지도 논박하는 논의이다. 만약 물리주의적 세계상에 ‘고양이’가 버찌가 아니라 고양이 를 지시한다는 명백한 사실에 상응될 만한 아무 것도 없다면 그것만으 로도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개념들이 물리적인 용어로 환원되어야 한다 는 요구를 결정적으로 거부할 이유가 된다. 왜냐하연 지시와 진리의 두

개념은 우리가 일관성 있게 모순 없이 포기할 수는 없는 개념이기 때문 이다. 내가 ‘고양이 한 마리가 침대 위에 있다’고 생각할 경우 나는 ‘고 양이’가 무엇인가를 지시한다는 믿음과(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지시'에 관한 형아상학적 실재론의 설명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고양이 한 마 리가 침대 위에 있다’는 문장이 참이라는 믿음을(이것이 참에 관한 형 이상학적 실재론의 설명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가지게 된다. 이제 2 장에서의 이러한 논의가 도덕적 주관주의 륭 옹호하는 논의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살펴보자. 소위 ‘두사’이론은 도덕적 경험에 관한 한 설명을 제공해 주었다. 도덕적 경험 말하자연 주관적인 느낌이 엉뚱한 곳에 잘못 놓여 생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 설명이다. 이 ‘두사’이론 을 다음과 같은 설명과 대조해 보자 :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정의감을 갖고 있고 또 미에 대한 생각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이 이집트에 갔을 때 이방인이 된다는 것이 어떠한지 경험해 보았기 때문 에 이방인에게 친절히 대하시오와 갇은 호소에 (간헐적으로) 감응한 다. 우리의 동칭심은 확대되는데 그 부분적인 이유는 그렇게 확대되어 야 한다고 우리가 설득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동정할 수 있는 회생자를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때에도 잔학한 행위는 잘못된 것이라고 느낀다. 우리는 또 타인에게 해로운 것 또는 이로운 것과 나 자신에게 해로운 것 또는 이로운 것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 리는 도덕적으로 관련되는 상황을 기술하기 위한 도덕적 용어들을 고안 하며 이로부터 접차적으로 도덕적 일반화를 표면화시키기 시작한다. 좀 더 세련된 도덕적 개념들도 이러한 일반화에서 나오게 된다.’ 이 설명은 액면 그대로는 두사이론보다 더 간단하고 또 더 세련되어 있다. (적어도 이 설명은 우리가 도덕적 태도를 형성시키는 데에 이성적 논의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인식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많은 지성인들은 징의감’이나 ‘선에 관한 생각'(순전히 주관적인 의미로서가 아닌)에 관한 이야기들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버려야 한다 고 생각한다. 그래서 도덕적 지식이란 것이 과연 지식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때로는 단도직입적으로 지식이 될 수 없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미과학적'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 정의 같은 것이 있다는 믿음은 유령에 대한 믿음과 갇은 성질의 것이 아니다. 또 ‘정의감’이 유령과 갇은 것을 지각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어떤 비과학적

인 느낌인 것도 아니다. 정의란 마치 18 세기 화학자들이 기존의 화학이 론에서 인지된 원소들의 목록에다 ‘연소’를 추가하도록 제안하였듯이 뭄 리학에서 인지된 대상들의 목록에 추가되도록 제안될 수 있는 어떤 것 이 아니다. ‘비과학적'이라는 말이 시사해 주듯이 윤리학이'물리학과 강 충되지는 않는다. 단지 ‘정의로운', ‘선한', ‘정의감’ 둥의 말들이 뭉리적 인 것으로 환인될 수 없는 말들일 뿐이다. 이 밖에도 울리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해서 바로 그 이유로 불합리한 것이라고 여겨질 수는 없는 것들이 또 있다. 정의’에 관한 이야기는 ‘지시’에 관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과학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해서 U.l 과학적이라고 할 수 는 없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는 한 방법으로서 논리학이나 수학에서 사용되 는 기본원리, 예컨대 모든 칭수는 항상 연속될 수 있다(‘모든 수는 .:z. 것에 이어지는 수를 가진다')는 원리라든지 어느 정수의 집합이돈 그 집합이 공집합이 아니라면 그 집합은 최소의 집합소를 갖는다는 원리 갇은 것을 고찰해 보자. 누군가가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고 하 자 : ‘그러한 원리들은 우리가 실천적으로 취급하는 수와 수의 집합에 관하여서는 참이다. 그래서 그 원리들이 필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두 사’라 불리우는 활동에 의하여 우리는 이 느낌 속의 필연성을 그 원리 들에 첨가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진술들이 어떤 신바스러운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는 정당화될 수 없 다. 우리가 아는 한 이러한 원리들은 참이 아닐 수도 있다.’ 이와 갇은 견해에 찬동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모든 수학자들 은 오히려 다음과 갇이 말할지도 모른다. ‘대개의 인간들은 어느 정도 의 수학적 칙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원리들이 필연적 으로 참이라는 접을 직관적으로 ‘보거나' 또는 예들에 의하여 (아니면 풀 라돈의 대화에 다오는 노예아이의 경우에서처럼 질문을 교묘히 함으로 써) ‘보게' 될 수도 있다. 괴델 K. GOdel 은 ‘수학적 직관’이 지각과 유사하다고 믿었다. 죽 수학 적 대상들(괴델은 이것을 ‘개념'이라고 불렀다)이 거기에 있으며 그러한 풀라론적인 대상들을 우리가 지적으로 지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직 관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풀라돈적인 형이상학을 신봉하는 수학자는 별로 없다. 괴델이 수학적 칙관을 지각과 유사하다고 생각한

것은 그가 지각을 지나치게 단순하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 여금 이미 만들어진 세계에 칙접 접근하도록 하는 것은 시각에 의한 것 이 아니다. 그러나 시각은 부분적으로 시각 자체에 의하여 조직되고 구 성된 대상등을 기술해 주기는 한다. 우리가 만약 울리학자등이 설명하 는 무지개 룹 우지개 ‘그 자체’와 동일시한다연 우지개 ‘그 자체’에는 아 무런 출우니도 없게 된다. 즉 붉은, 푸른, 노란 등의 색깔을 가진 중우 늬 둘 이 우지개 물 치각할 때 나타나는 성질들이지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무지개의 성질둘은 아니다. 지각에 나타나는 무지개는 우리의 지각기관 자체의 성격에 의존하고 있으며 굿맨 N.Goodman 이 일한 소위 우리의 시각적 ‘세계만듦 worldmak i n g'에 의존하고 있다. (물리학자등의 ‘대상 들'도 우리의 ‘세계만듦'에 의존하고 있다• 이 접은 ‘동일한 ' 대상운 두 고도 울리학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여러 가지 각색을 만들어 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지개에 중무늬가 나타나는 것 이 시각 때문이라는 이유로 시각을 불완전하고 겅접 이 있다고 생각하지 는 않는다. 차라리 줄무늬룹 훈 수 값은 사람의 시각이 정접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시각은 형이상학적인 사물 자체가 아니라 우리에 대 한 대상들에 맞는 기술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걸접아 없다고 판 정받는다. 시각이 우리로 하여금 세계물 ‘있는 그대로' 봉 수 있게 해줄 때, 죽 부분적으로는 시각 자체에 의하여 만들어진 인간적, 기능적 세 계를 봉 수 있게 해줄 때 좋은, 결점이 없는 시각이 된다. ‘선택공리 Axio m of Cho ic e

적 세계에 있는 대로 볼 수 있게 해줄 때 좋다는 판정이 난다. 시각을 생태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기술한다고 해서 우지개의 줄무 늬룽 봉이 과연 ‘올바론’ 봉인지 아닌지 가 판정 이 날 수는 없다. 마찬가 지로 우리가 수학적 귀남원리 아 ) 를_ ‘파악'할 때 우리의 두뇌가 어떤 과정 과 상태에 놓여 있는지웅 생태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기술한다고 해 서 그 원리가 갑인지 아닌지가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봉 때 우리가 어떤 행위가 부당하다고 ‘불' 때 일어나는 두뇌의 과정에 대 한 기술이 그 행위가 정말 부당한지 아닌지룽 결정해 줄 수 없음은 당 연해진다.

@ Fre g e 의 집합온에서 수학칙 귀남원리는 다웅과 갇이 표현되고 있다. (Vx)( [OEx & (Vy )(yE x-y'E xll-N~x) x 운 {y : ,J,y}로 대치시켜 말한다면, 즉 집합론칙으로 알하지 않고 ¢라는 성질-운 가지 고 말한다면. 0 가 4 은 가지고 있고, 어만 임의의 수 y가 4 문 가진다면 y다움에 오는 수도 4 문 가질 때, 모든 자연수는 ¢ 분 가진다고도 표현원 수 있다. 이 원라는 여러 가지 정리둥운 증명한 때 사용된다.

도덕적 ‘지각'예 관한 이야기는 수학적 직관이나 지시와 이해에 관한 이야기와 아찬가지로 뭉리학적 언어나 물리학적 세계에로 환원될 수 없 다. 이 알이 뭉리학이 ‘붕완전하다'는 것을 뜻함이 아님은 물론이다. 즉 물리학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완전할 수 있다. 물리학에 결여된 완전성 은 모든 개별과학과 이론에도 결여된 완전성이다. 왜냐하면 어떤 이론 도 모든 목적에 다 맞게 완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윤리학의 뭉 리학에로의 환원불가능성이 가치는 두사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증거 된가 된것다이면라 는색 깔결과론 이자 연나수온도다. 두 사이된러 한것 이의고미 로따서라의서 두‘물사리는적 주세.관계.'.적도 이 라두는사 말과 같은 것이 아니다 .6)

6) 우습게 만 둘 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우습개 보이는 우 사이온의 한 예가 우이스 c.s . Lewi s 의 책 『인간캐지론 The Abolit io11 of Man 』 (Macm i llan,1947) 에 인용되고 있다. 그는 한 중학교 영어교과서에서 다웅과 갇은 구잘운 인용하고 있다(어떤 교과서인지 그는 밝히지 않았다). ‘그 당시 두 여행자가 있었다는 것운 너는 기익하지 (우이스는 여기서 목포 앞에서의 그 유명한 윤 리지 Coler i d g e 의 이야기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한 사람은 그 목포 운 보고 장업하다”고 하었고 다른 한 사감은 멋지다”고 하있다. 콜부이인렇리하게지였 는다분 .렀마 다음〕가속는이으 우로이스 에 G첫 a대째 i u 하s 사와여람 티다의티 웅우판과스단 갇운T 온i ti 시u평s인 (운하이 였하교고었과다 서.두 의번" 째첫익 째명사 의갑사 의감지 이자판 단듄장. 은운엄. .하익우.다겁이 고다스 고는말 하였운 때 그가 그 목포에 관한 이야기출 하고 있는 것 갇으나 사신은 그렇지 않고 자 ‘신장의험 한강 ’정o.1 에라 든관 한맡놔 이 연야관기되운 든하 어고민 있 다강.강 운그 가느 컨정다말 또말는하 고더 있간는각 하것게은 나나는는 내장 엄마한유 속감에정 운 느낀다는 것이다 .••

권위주의와 다원론 나는 지금까지 어떤 세계이든 하나의 세계 운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합리적 수용가능성의 표준을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러한 표 준은 세계가 ‘경험적 사 실 '들의 세계이든 아니면 ’가치사실 ' 들의 세계(아 름다움이 있고 비국이 있는 세계)이든 반드시 필요하다. 합리적 수용가 능성의 표준을 설정해 놓고 그것을 받아 들 이지 않거나 거리 을 두고 냉 담한 태도를 취할 수 없음은 뭉론이다. (어떠한 종류의 것아든 일체의 합리적 수용가능성의 표준을 거부하는 회의주의자가 있다면 그가 어떠 한 개념이든지 도대체 개념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시된다. 엠피리쿠스 S . Em pir ic us 가 일찌기 지적하였다시피 그러한 종류의 경험주의는 결국 언어로 표현될 수조차 없다.) 우리가 마음의 ‘인식적' 투 사 물 병적인 것 으로 간주할 수 있듯이 마음의 ‘평가적' 두사도 병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함이 바로 다원론을 거부함과 같은 것이 아니요, 또 권위주의에 찬동함과 같은 것도 아니다. 과학에서조차도 과학이 객관적인 작업(인간중심적이라고 주장되는 ‘7석 관성’의 표준, 그러나 위긴스 D.W iggi ns 가 언젠가 말한 바와 갇이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의 객관성의 표준에 의거한 작업)이라고 주장함은 모든 과학적 질문이 다 확정된 대답을 가진다고 주장함과는 다르다. 객 관적으로 불확정된 대답을 가질 수 있는 과학적 질문도 있고, 죽 이상 적인 과학적 탐구의 범위내에서조차도 일정한 답이 없는 질문도 있으 며, 또 한편으로는 답은 확정되어 있지만 그 확정된 답이 문맥상대적인 경우도 있다(예컨대 ‘죤의 심장마비의 원인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 은 누가 그 질문운 하며 또 왜 그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다 른 대답을 가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윤리적인 탐구가 어떤 ‘가치판단' 은 결칭적으로 참이고 또 어떤 가치판단은 결칭적으로 거짓이라는 뜻에 서 객관적이라는 주장은, 그리고 더 나아가 좀더 일관적으로 어떤 가치 체계(그리고 어떤 ‘이데올로기')는 결정적으로 찰못이라든지 어떤 가치 체계가 다른 것보다 7김 정적으로 못하다는 등의 주장은 불확정한 경우는 전혀 없다는 어 리 석은 주장과 같은 것이 아니 다. (윈리암스 B.W illiam s 는 불확정한 경우들 중에 특히 중요한 경우의 예를 하나 강조한 바 있

는데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전부 끔찍한 것이어서 그 중의 어느 것 도 합리적이고 현명한 이상적 판단에 따른다 하더라도 선택될 수 없는 경우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윤리의 영역에서도 문맥상대성이 있다는 접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오늘날의 우리가 옛날의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론 접이 있다연 그것은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훨씬 더 다원론적이라는 접이다. 아리스토 텔레스도 사람에 따라서 각인에 적합한 행복이나 인간적 번영에 대한 생각도 달라질 수 있음을 안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누구나가 따라야 할 어떤 이상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만인 이 모두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누가 곡식을 재배할 것이며 또 누가 빵을 구울- 것인지 하는 세속적인 질문은 접어두고) 그는 생각한 것 갇 다. 인간적 번영이 우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상이한 재도 하에 사는 사 람에 따라 서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와 의진을 같이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좀더 나아가 이상적인 세계 에서도 제도 들 이 다룹 수 있으며 이러한 다양성이 바로 이상적인 것의 한 부분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아상들간에는 어느 정도의 비국적 간 장이 있게 마련이다. 다시 말하여 어떤 이상이 성취되면 이에는 반드시 다른 이상의 성취가 제외되기 마련이다. 이 접을 좀더 강조하여 말한다 면 다원론적 이상을 믿는다고 해서 이것이 바로 인간적 번영을 괴하는 모든 이상이 다 좋다는 믿음과 같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인간 적 번영의 이상을 잘못되고, 유아기적이고, 병적이며 편파적이다는 등 등의 이유로 배척하기도 한다. 윤리적 객관성에 대한 지지가 윤리적 또는 도덕적 권위주의에 대한 지지와 혼돈되어서는 안 된다. 양자는 전적으로 다른 문재이다. 최근에 뛰어난 한 철학자 1) 가 ‘각자에게 ”가장 충족된 삶”이 무엇인지룽 결정하 는 데에 최종적인 권위역할을 하는 것은 결국 각자 자신임에 돌림없다' 고 말하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혼돈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이치. 적.말 에권서위 풀‘ 최뜻종하적인는 가권 위아'니라면는 최용종어적의인 애인매식성론에적 주권목위하라룹. 뜻 하최는종가적?인 또 아니면 사실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인가?) 어떤 사람이 도덕 적으로 자율적이라고 칭송되려면 그가 어떠한 외부적인 구속에도 관계 7) AD.cWad igemgiyn ,s ,v o'Tl. rLuXth I, I , I1n9v7e6n.t i on , and the Meanin g of Lif e', Proceedin g s of the Br itish

없이 스스로 도덕적인 기준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 정 치적 자유주의의 철학에 따르면 정부가 국가종교나 국가도덕을 설정함 으로써 개개인의 도덕적 선택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모든 형태 의 정치적 • 도덕적 권위주의에 반대한다고 해서 이 반대로 인하여 도덕 적 상대주의나 도덕적 회의주의에 빠져서도 안 된다. 정부가 개개인에 게 도덕을 명령하는 것이 어떤 형식의 삶이 도덕적으로 잘못인지(도덕 적으로 찰못 같은 것이 없다면 정부가 도덕적 선택을 시민들에게 강요 하는 것도 강홋이 아닐 것이다)하는 문제가 사실에 관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만약 어떠한 종 류가의 정 .부도.덕대..적로 생객각관하성는이 돈도 덕도적덕 적객 관객성관을성 을각 자공에개게적 으강로요 하인지정 한않다을연까 걱정정부 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동의하지 않는 도덕적 주관주의 룹 승낙하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 중의 하나임에는 의문 의 여지가 없다.

제 7 장 이성과 역사 과학이 발달함과 동시에 정밀과학적 방법에 의하여서는 해결될 수 없 는 문제들도 많다는 접이 밝혀졌다. 이데올로기에 관한 문제와 윤리칙 인 문재가 가장 두드러진 예이다. 그리고 물리학자, 천문학자, 분자생 물학자에 대한 칭찬과 존경이 증가함에 따라 그 반대급부로 정치학자, 윤리학자, 정제학자, 음악가, 정신과의사 동에 대한 존경은 감소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의 문화적 조류에 휩쓸려 정밀과학의 영역(사회 과학이 정밀과학의 흉내 문 낼 수 있는 한 사회과학도 포함하여)을- 벗어 나는 곳에서는 지식이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실증 주의나 유뭉론, 또는 양자의 혼합물 갇은 것이 이러한 견해 운 가진 사 람들에 의하여 제안될 수 있으리라. 반대로 또 어떤 사람은 과학도 역 시 ‘주관적’이고 임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상당한 성공운 거둔 쿤 T. Kuhn 의 저 서 『 과학혁 명 의 구조 The Stn , clure of Sc ien ti fic Revoir ,- l i ons 』룹 동속적으로 해석하연 이러한 주장과 비슷해진다. 물론 문 스 스로는 이 접을 부인하고 있지만 기술적인 문재들은 정밀과학과 공학에 다 맡기고 또 이데올로기나 윤리의 문제들은 당이나 교회, 또는 유토피 아적 미래에 맡겨 두는 일종의 복식부기의 방법을 채택하는 사람들도 있다(예컨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과 종교철학자 들 ). 그러나 이와 같 은 입장들에 편한 마음을 가질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죽 실증주의 나 유물론적인 형태의 국단적인 과학지상주의, 주관주의와 국단적 상대

주의, 또는 복식부기주의 등에 만족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우리가 이 러한 입장들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영역에 정말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비현실적인 것임은 틀 림없다 . 동일한 로사람는이 자 .신윤.의.리 나윤 리정적치 에• 정관치한적 입입장장은 을 정정당열화적 될으 로수 옹없호다한고다 .하 면흄서은 자한신편의으 서재 로 부터 떠 날 때면 언제나 동시에 회의주의도 벗어났다고 말하였 다. 이 말이 상대주의자 들 이 상대 주 의 뭉 대할 때도 적용될 수 있을 것 이다. 이 말은 결 국 상대주의 를 고수하고서는 아무도 모순 없이 살기 힘든다는 점을 말 해 줄 뿐이다. 상대주의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유일의 대답이 이것이라면 우리는 상대주의에서 1945 년 스 타 일 의 실 존주의(모 든 것이 불 합리하다. 그럼에도 우리 는 선택해야만 한다 ) 에로 복귀하는 셈이 된다. 우리의 입장 운 더 확고하게 만 둔 기 위하여 공리주의 륭 가지고 많은 부분의 상대주의적 주장을 대신하고자 한 지난 세기의 한 철학자의 지 적운 상기해 보자. 내가 지금 염두에 두고 있는 철 학자는 벤담이며 ‘편 보견진다지을’ 는않갖 는고그 다의보면 지 다 압.분않핀.히는놀. 다이.도면 .전가 적압시인핀보 놀다말이 을못도 할 생음 각바악해 이 없보나다. 고 시자와 한동다.일 한편. 견가. 을치. 를갖. 고가. 현대인에게 벤담의 이 말이 충져이 됨은 그것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가치와 크게 배치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예술은 풀라돈 의 시대나 중세 때보다 훨씬 높은 위치로 고양되어 있다. 많은 저술가 둘의 지적처럼 오늘의 예술은 교육받은 일정한 군의 사람들에게는 종교 와 같다. 다시 말하여 가능한 구원에 가장 가깝게 갈 수 있는 것이 예 술이다. 벤담은 사람들이 압핀놀이와 같은 어린애들 장난보다 ‘음악과 시'를 더 좋아함은 마치 쵸몰렛아이스크림보다 바닐라아이스크림을 더 좋아함 과 마찬가지로 주관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벤담이 음악과 시가 압핀놀이보다 더 가치 있음을 부인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편견을 갖고 보지 않는다면'이 라는 구는 매우 중요하다). 그의 공리주의에 의 하면 압핀놀이보다 음악이나 시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 자체가 음악이나 시가 더 큰 ‘유용성', 더 큰 가치가 있음을 임중 해 준다. 그러나 가치란 말하자면 ‘편견'의 소산이다(죽 순수히 주관적

인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들이 압판놀이보다는 시 를 더 좋아한다 는 사실 이외에는 압핀놀이와 시 중에 상대적으로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를 결정해 줄 아무런 사실적인 것도 없다. 우리가 압핀보다는 시 를 더 좋아함은 시가 압핀보다 더 큰 가치 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 다. 벤담에 의하연 오히려 그 반대가 옳다. 죽 사람 들 이 압핀보다 시 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시가 압편보다 더 가치있다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벤담으로 대표되는 이 입장을 상기한 방식으로 그렇게 대담하게 말한 다면 그 말 자체에 이미 그 입장이 지지될 수 없음이 나타나 있는 듯하 다. 잠시 ‘주관적으로 ' 더 좋아함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주관적인 선 호 에 관하여 사람 들 은 때때로 다음과 같은 모델을 염두에 둔다. C 룹 쵸고 랫아이스크림의 맛이 라 하고 V 를 바닐라아이스크럼의 맛이라고 하 자 . 그리고 L 과 D 는 각각 ‘좋아함'과 ‘싫어합'의 느낌이라 고 하자. 바 닐 라아이스크림 을 죤은 좋아하고 스이드는 싫어할 때(그리 고 쵸 코 렛아이스크링 을 죤은 싫어하고 스미드는 좋아할 때)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음 과 같다. 즉 죤이 바닐라 를 먹을 때 V+L 을 경험하고 쵸코랫 웅 먹 을 때 는 C+D 를 경험한다. 반면 스미드는 바닐라를 먹을 때 V+D 룹 , 쵸코렛을 먹웅 때 C+L 을 경험한다. 그러나 쾰 러 W. Kohler 가 오래전에 이미 지적하였다시피 아러한 설 명은 심리학적으로는 소박한 설명이다. 바닐라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죤이 감각하는 바닐라아이스크림의 맛과 그것을 못견디게 싫어하는 스 마드가 감각하는 바닐라아이스크림의 맛은 서로 다르다. 정화하게 말하 자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 즉 스미드에게 느껴지는 바닐라의 성질을 Vs 라고 하자. Vs 는 ‘불쾌한' 맛이다. 물론 Vs 를 느끼면서도 좋 아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설혹 누군가가 실지 로 어떤 것에 대해서 Vs 를 느끼면서도 그것을 좋아한다 하더라도 그것 은 아마 심리적 분열이나 억압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형이상학적으로 는 아니더라도 심리학적으로는 Vs 는 ‘내재적으로’ 불쾌한 느낌이다. 그 리고 스미드가 바닐라를 먹을 때 D 룹 느끼게 됭은 바닐라가 (그에게) Vs 라는 맛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죤이 바닐 라에 대하여 느끼는 맛의 성질을 Vj라고 한다면 Vj는 ‘내재적으로' 유 쾌한 느낌이다(바로 그러기 때문에 죤은 L 을 느낀다). 무어 G.E. Moore 의 말을 빌린다면 죤에게는 Vj가 적국적 가치와 유기적으로 동 일되어 있고 스미드에게는 K 가 소국적 가치와 유기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 현상학적으로 말한다면 ‘Vs+D', ‘U+L' 과 같은 식으로 양자가 정말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심리적 억압이나 분열 같은 특수한 경우 를 제외하고는) 스미드도 그의 입안에 Vs 가 아니라 U 가 생긴다면 바닐라아이스크럼을 좋아할 것이고 또 죤도 그의 입안에 바닐라가 U 가 아니라 Vs 를 발생케 한다면 바닐라룹 싫어할 것임은 거의 확실하 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쵸코렛보다 바닐라 를 더 좋아함을 주관적인 것이 라고 간주하는가?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오은 가치판단이 다 주관적인 것이라 생각하지 않거나 편견 을 없앤다면 시 를 압핀보다 더 좋게 생각 할 이유가 없다고 한 벤담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흥라 ’l1 조 차도 그것을 주관적이라고 여기는가? 우리가 만약 모든 선호가 전부 주관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바닐라와 쵸코랫의 경우도 분명히 주관적이라고 생각할 것 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서 홍미로운 질문은 우리가 스미드도 죤 도 아닌데도 왜 이 경우가 우리에게도 주관적인 것처럼 보이 는 가, 즉 왜 이 경우에서의 선호는 많은 다른 가치판단이 틀 링없이 가지고 있는 그 객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접이다. 쵸코렛이냐 바닐라이냐의 문제는 단순히 의견의 불 일치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가 객관적인(또는 확중된) 가치판단이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고격 렬생한각 하논쟁기의가 대십중상팔이구 다되.는 판단. 지단. 들유. 태중. 에인. 돌.객 의.관 적민. 족으. 적로. 결올. 속바. 른때. 문것.만도.에. 있 다그 렇게 우자비하게 장언한혼 간홋 o.1 라는 판단이 나찌스에게는 문제시되었 다. 그러나 반나찌스는 이 판단에 대하여 나찌스와 의견을 말리함이 ' 주관적'인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동성연애자들도 이 사회에서 모 든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동성연애행위나 동 성연애를 할 수 있는 시민적 권리는 법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의 의견과 정면으로 대립된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자신들 의 입장이 ‘주관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 들 은 자신들의 도덕 적 입장이 정당하다는 믿음을 의견의 불일치 덕분에 더 공고히 하는 수 가 많다. 따라서 스미드와 죤의 기호상의 차이가 주관적인 것인 까닭이 ‘어떤 사람은 쵸코렛을, 또 어떤 사람은 바닐라 를 좋 아한다’는 사실 때 문만은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바닐라와 쵸코렛간에 그렇게 강한 선호 를 가지지 않

을 수도 있다는 점도 우리의 논의의 한 요소이지만 이 요소는 결정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 만약 인구의 절반이 쵸코렛을 매우 싫어하고 바닐 라를 좋아하며 또 다른 절반은 그 반대라면 그래도 우리는 (만약 우리 가 선호문제에 관하여 합리적이라면) 이것을 ‘맛의 문재', 즉 주관적인 문제라고 여길 것이다. ‘중립적인 것'들이 있다는 점은 결칭적인 요소가 못된다. 내 생각으로 결정적인 요인은 어떤 생물학적 또는 심리학적 목이체질 때문에 스미드와 죤의 기호가 그렇게 되었든, 그것은 마음과 성격의 중 요한 특징과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다는 접이다. 만약 이 반대의 경우를 상상해 본다면, 죽 우리가 그 자체로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감정, 느낌, 행위 등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도 좋다고 여 길 수 있는 일군의 성격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그 자체는 물론 그것으 로 인해 생기는 영향 때문에도 나쁘다고 여길 수 있는 일군의 성격이 있어 전자는 항상 바닐라를 좋아하고 후자는 항상 쵸코렛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안다고 가정해 본다면 이 상상의 경우를 좀더 현실화시 키는 데 성공할수록 그러한 세계에서는 첫번째 기호는 ‘정상적'이고 ‘올 바론' 것으로 보여지고 두번째 기호는 ‘도착된' 또는 ‘괴물스러운' 것으 로 보여진다고 우리는 느낄 것이다. 모든 기호가 나타나는 성격적 독징에 의하여 도덕적으로 판단된다는 주장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호'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 청난 중요성을 갖고 있다. 어린 아이들을 단지 재미를 위하여 고문하는 것이 정말 신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러한 태도 하나만으로도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기호의 대상이 그 자체에 있어서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우리가 이것을 기호의 문제로 삼을지 에아 니그면 기‘호맛의가 문무제엇’을로 삼보.을여.지주. 느.하.냐는 에 문달제려는 있일다반. 적으가로치 판우단리은가 뭉생쳐각 하있기을 때가 많다. 가치판단둥의 뭉침은 종종 마음, 개성, 성격 둥의 어떤 지 속적인 특징들을 표현해 준다. 이러한 의미심장한 가치들의 뭉침으로부 터 ‘나는 쵸코렛보다 바닐라몰 좋아한다’는 판단이 독립되 어 있다는 접 이 바로 그 판단이 ‘주관적인’ 판단인 이유이다(뭉론 그러한 선택 자체 에 어떠한 내재적인 중요성도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스미드가 바닐라를 좋아함이 ‘주관적'이라 하더라도 불합리하거나 임 의적인 것은 아니다. 스미드가 바닐라몰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 __- 가

능한 가장 최선의 이유-가 있다. 말하자면 바닐라가 스미드에게 어 떤 식으로든 맛이 나기 때문에 스미드가 바닐라를 좋아하는 것이다. 가 치란 상대적이라는 의미에서 ‘주관적'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일 수도 있다. 스미드에게든 쵸코렛보다는 바닐라가 i1 맛이 좋 다는 사실은 객관적이다. 『선의 왕국』에서 머도취는 볼란서의 실존주의 자둥이나 논리적 실중주의자들같이 서로 다른 여러 철학자들도 가치판 단에 관해서는 공통적인 모델을 가진다고 지적하였다. 이 이성적 모델 은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에게 중립적 ‘사실'들을 제공해 주며 이 중 립적 사실들에 바탕하여 인간의 의지는 임의적으로 ‘가치’를 선택한다. 아때 가치의 선택이 임의적인 선택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바로 ‘사 실'들이 (정의에 의하여) 중립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에 대하여 인간의지에 아무런 단서도 주지 않으므로(이성 이 제공해 주는 것은 오직 ‘사실'들뿐이다) 왜 의지가 임의적으로 선택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0] 유도 없다. 도덕적 선택을 불란서 철학자 들은 ‘불합리'하다고 불렀고 또 자연주의적 경향을 가진 철학자들은 본 능이나 감정(모든 것을 쾌락이라는 다목적적 범주에 환원시키려 한 벤 담의 후계자들)을 도덕판단의 궁국적 바탕으로 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검토한 바닐라―쵸코렛의 경우에는 실존주의 자들과 실중주의자들이 공통으로 가졌다는 그 모델이 맞지 않는다. 이 경우에서의 ‘사실'――랏 그 자체-과 ‘가치'――-그 맛의 좋음­ 는 적어도 심리학적으로는 동일하다. 이 경우에서의 문제의 성질들은 일반적으로 말하여 중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경험하는 사람의 반응과 태도를 요구하는 것 갇다. 이러한 성질들에 대한 요구도 마치 어린 아 이들아 면역주사를 맞을 때 나타날 효과나 혜택을 위해서는 고동을 참 경아야험들 하이듯 이언. 뜻.무 보시. 기될. 에수는 있그다 자고체 주 좋장음할이는나지 는나 쁨모을른 다가.지 고그 러있나는 개것별 적같인지 만 그것은 단지 보기에 그럴 뿐이다. (이 점은 재미있게도 풀라돈과 중 세의 학자들도 알고 있었다-아마도 처음으로 경험을 중립적인 것으 로 보게 된 것은 현대에 이르러서일 것이다.) 경험의 비중립성은 또한 압핀과 시의 경우에도 연관된다. 시를 정말 감상할 줄 알고 진짜 시와 단순한 산문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 시나 음악과 같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예술보다는 압핀놀이와 같은

어시를린애 더 장좋난아을할 더충 분좋한아 할이 유수를도 우있리다는고 가.상지.상고.하. 기있 는으 며힘 들그다 .이 유압는핀 보위다대는한 시에 대한 절실한 경험과 그로 인하여 나타나는 영향에 있다. 죽 시는 다양한 시적 이미지와 시적 은유를 동하여 우리의 상상력과 감성을 확 장시켜 주모로, 그리하여 하나의 시가 수년 동안 우리의 가슴에 납아 있을 때 시적 이미지와 은유들은 세속적인 지각과 태도와 융화되므로 우리는 시를 더 좋아한다. 이러한 경험들도 역시 언뜻 오기에 좋은 것 둘이다――-단순히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옛 문구물 쓴다면 우리를 고 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가치판단에 근거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즉 사람들이 각자대로 가치 판단을 함에 있어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사실이 뜻하는 바가 모든 가치 판단은 합리적이라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사람들은 가치판단에 관하 여 온 정열을 다하여 근심해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이 가치판단이라는 이 몸 아래 죽거나 고문당해 왔다. 그러한 가치판단은 때때로 공격적인 충 동과 자기도취적인 생각들이 혼합되어 내려지기도 한다. 상대주의 역사 학자이자 철학자인 푸꼬가 과거에 관하여 굴을 쓸 때 그와 갇온 불합리 한 생각들이나 가치판단들에 우리의 관심을 자주 환기시켰던 것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왜 그런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푸꼬는 16·7 세기의 이데올로기와 문화일반에 관하여 쓰고 있다. 많 은 전문가들이 푸꼬가 말하고 있는 ‘사실'들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긴 하더라도 사실에 관한 그의 지식의 양은 믿기 어려움 정도이다. 그의 저서 중에는 매우 추상적인 것도 있고(예컨대 『지식의 고고학 The Archeology of Knowledg e 』) 『임상의 탄생 The Bir th oft he Cl i n ic 』 이나 『감옥의 탄생 The Bir th of the P ris on J과 갇은 종 특정한 내용 을 다루는 것도 있다. 아마도 『임상의 탄생』은 푸꼬의 저서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일 것이며 그의 추상적인 이론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푸꼬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점은 ‘임상', 즉 병원이나 기타 의료 제도들이 과학적 지식과 기술의 중가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질병과 건 강에 대한 어떤 이데올로기가·나타난다는 징표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아 이데올로기는 더 광범위한 이데올로기적 변화, 특히 17 세기 개인주 의 발흥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푸꼬는 ‘임상’이 대개의 환자들운 다 두는 방법으로서 그렇게 좋은 방법이 못 되며 그것이 좋은 방법이라는

우리의 일상적 믿음이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편견 때문에 생긴 우상이라 고 본다. 푸꼬의 이 이론을 좀더 확산시켜 본다면 이데올로기적 믿음과 이와 연관된 가치판단은 임의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데올 로기적인 문재에 객관적인 입장이란 있을 수 없다(푸꼬는 ‘지식의 고고 학’을 객관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푸꼬의 신비적인 입장 은 물론 여기서 제외된다).

1) 그리고 우리의 생각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의하여 결정된다. 무꼬는 ‘우리의 가장 친숙한 행위들운 우리가 알지도 못하게 결정하는 숨겨진 체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Sim on. ‘푸꼬와의 대 화'운 참조. Parlisa 11 Rev iew , No. 2, 1971 . P.20 1 ). 무꼬, 알뚜싸 AIIIutS SC r, 라깡 Laca11, 데우즈 De/e1ae 동으로 대표되는 불란서 구조주의는 (1)걷정론. (2) 상대주의, (3) 구조주의는 ‘언어과학'이라는 주장으로 집약될 수 있운 것 같다.

푸꼬의 논접을 파악하기 위해서 좀더 친숙하고 비교적 문제가 없는 예 하나 물 고찰해 보자. 중세에는 군주정체가 자연스럽고 적합한 형태 의 칭부라고 믿어졌다. 이러한 믿음의 근거는 부분적으로는 지금은 보 장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 여러 사실적 믿음들이었고(예컨대 민주주의 는 결국은 무정부주의나 전제주의로 화할 것이라는 믿음) 또 부분적으 로는 교회의 권위였다. 교회의 입장의 부분적안 근거는 정치적인 데 있 었지만(당시 교회는 국가종교이었다) 이 접을 사람들은 교회 자체가 하 늘나라의 영감과 명령을 받아 하나님의 말과 뜻을 해석해 준다고 생각 하였기 때문에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여기서 푸꼬가 지적하고자 하는 점은 최근 세상 사람들이 가졌던 믿음 그리고 이에 따라 오늘날의 우리 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사실은 중세인들의 왕권신수에 대한 믿음과 다를 바 없이 불합리하다는 접이다. 잠시 왕권신수설에 대한 믿음을 고찰해 보자. 만약 우리가 일정한 형 믿태의을 사만회한적 충 . 분형. 한식. 과근. 거구. 조가에 없 다따고라 생살도각한록다 명면령 하이는러 한인 격믿적음 은신 의즉 각존 재불를합 리한 믿음으로 낙인찍힐 것이다(그렇다고 하여 그 믿음이 실제적인 십 리적 요구에 대답을 주었다는 접을 부인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신을 믿는다 하더라도 만약 우리가 교회가 신의 소망에 특별히 가까이 갇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왕권신수설이 불합리한 이론이었 고 또 이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가톨릭신자들조차도 중세교회의 왕권 지지가 계시와 건실한 신학 이외에도 정치적인 고려에도 그 바탕을 두 었다는 접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왕권신수에 대한 믿음에는

적합한 합리적 근거가 없으며 또 항상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믿음이 어떻게 생겼는가? 부분적으로는 정치 • 경제 적 요소 때문에(정치 • 경제적 요인으로 이데올로기가 결정된다는 점을 인정하기 위하여 반드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야 할 팔요는 없다) 또 부분적으로는 심리적인 요소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대답이다. 인격 적 신과 미래 를 믿음으로씨 어떤 위안이 주어질지는 명약관화하며 아마 도 찰못을 저지 룹 수 없는 교회와 신탁으로 결정된 사회질서에 대한 믿 음한 도믿 음위을안 을만 둘줄 어것 아내다는. 결요정컨적대인 자요기인도이취었직다 .만 그족 과믿 음사이회 적칭 조말건 전.이형. .적그 러인 것이고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이데올로기적 ' 믿음들을 정말 대 표하는 것이라면 자기도취직 만족과 사회적 조건은 오은 이데올로기의 결정요인이라 할 수 있겠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등을 그토록 많은 현대 불란서 학자들이 따르는 이유도 바로 이와 유사한 믿음들을 그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 울다. 비.마합.르리.크적.스.인와 것프과로 이계트급,적 그이리해고의 (니마체르는크 스종의교 적경우이)고, 윤무리의적식의인( 관프로념이들 트와 니체의 경우), 권력에의 의지의(니체의 경우) 반영이라고 보는 접 에서 공통접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의 가장 심오 한 정신적 • 도덕적 예지라고 여기는 것의 배후에는 권력에로의 충동, 경제칙 이해, 그리고 이기적 환상 둥이 불같이 들꿉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갇은 견해가 오늘날 상대주의의 칼날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2) 나는 여기서 아르크스, 프로이트, 그리고 니재가 이로부터 상대주의칙 전온운 도순하 고 있음운 탄핵하고자 하는 것온 아니 다.

그러나 ‘비합리적'이라는 말을 내가 지금 막 상대주의적 입장을 설명 하기 위하여 사용한 방식대로 사용할 수 있는 상대주의자는 아무도 없 다. 그러한 사용은 상대주의 그 자체에 의하여 불가능해진다. 내가 지 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 대목을 상대주의자인 나의 친구한테 내보였을 때 그는 왕권산수설에 대한 나의 진술들을 보고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지능이 있는 사람은 모두 철학적 논의에 의거하여 왕권신수설이 옳은 이론임을 믿었고,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한 나의 설명이 너무 값싼 설명이며, 따라서 왕권신수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합 리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합리적 ’이라는 말에는 문화가 공유하고 있는

가정들로부터 지적으로 옹호될 수 있는 견해면 어떤 견해이든지 ‘합리 적 '인 견해라는 뜻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러한 의미가 유일하다거나 규범 적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유태인들은 모세의 설법 이 종교적, 문화적, 국가적 효수 를 사실상 충족시켰기 때문에 그를 입 법자나 예언자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받아들임은 합리적 논의에 의거하 여 확신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 후 예언자들은 유태왕들을 신성시하였 는데 이 접이 그 후의 기독교왕들이 신으로부터 권력을 받았다는 것을 입중해 주지는 못한다. 유태교의 경전을 공유한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로마인인들과 로마왕이 기독교가 참이라는 접을 합리적으로 입증하였기 때문은 아니다. 당시 로마의 왕들도(유태 왕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성시되었다. 기독교가 가칭하고 있는 것들이 받아들여진 후 왕권신수설에 대한 ‘합리적 논의 ’가 바로 그러한 가정들 로부터 주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로마제국 말기 또는 중세에 ‘왕권신수에 대한 믿음은 완벽하게 합리적이었다’는 식으로 말 한다면 이 말은 합리성이라는 개념의 질을 저하시키는 격이 된다. 이성 그 자체가 역사에서 변천한다는 헤겔의 논의에는 두 개의 합리 성의 개념이 작용하고 있다. 죽 합리적인 것은 어떤 역사적 시접에서 절대정신이 발전한 수준에 의하여 측 정된다는 뜻 이 그 하나인데. ‘그 당시 왕권신수선에 대한 믿음은 합리적이었다'고 주장할 때 합리적이라는 말의 뜻이 바로 이 경우이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합리성의 한계개념인데 이러 한 의미로서의 합리성의 개념은 더 이상 넘어선 수 없고 고칭될 수밖에 없는 정신의 최종적 자기인식이다. 오늘날의 상대주의자들이 이 한계개 념운 없애 버리고 해겔철학을 ‘자연화'시킬 때 그들은 헤겔의 이론을 자 기모그순러적나 문어떤화 상상대대주주의의로자 도전 락모.시 든.켜 것.버 에렀 다관.하 여 상대주의자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불란서 사상가들이 그들 자신의 상대주의에다 어떻게 재한을 가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사상가마다 다르다. 알뚜 싸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의 경우에는 일종의 ‘계급이해'이론이 그 대 답이다. 죽 모든 ‘이데올로기 '들이 비합리적인 요소들의 산물이지만 노 동자계급의 이해에서 나온 이데올로기들은 (현대에서는) ‘정당'하고 인 간해방을 증진시키는 데 반하여 착취계급의 이해에서 나온 이데올로기 둘은 ‘부당'하고 인간에게 고동만 준다는 것이 그 대답이다. 그러나 알 뚜싸는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노동계급'의 이데올로기)조차도 유산

계급의 이데올로기보다 참. 에. 더. 가.깝..다 고 말하기륭 거부함으로써 자신 을 그 이전의 계급상대주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과 구별시킨다. 알뚜 싸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란 ‘정당'할 수도 ‘부당'할 수도 있지만 ‘참' 또는 ‘거짓'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3) (알뚜싸는 ‘참'과 ‘거짓'은 ‘실험과학’에 적용되는 말이며 따라서 분명한 경험적 검사조 건을 갖춘 일상적 진술들에만 적용된다고 말한다. ) 푸꼬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최근의 저술에서는 계급이해이론으로 경도되어 있는것 같다. 어 떤 ‘이데올로기 '일지라도 합리적일 수 없다는 극단적 상대주의의 주장 은 보존하고 한편으로는 어떤 이데올로기(알뚜싸의 경우에는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합리적 수용가능성이 아닌 다론 근거에서 좋은 이데올로 기와 나쁜 이데올로기 또는 ‘칭당한' 이데올로기와 ‘부당한' 이데올로 기 를 구획지음으로써 좋을 수도 있다는 주장은 살리자는 것이 알뚜싸와 갇은 과격한 상대주의자들이 제시하는 견해들의 핵심이다. 이들의 생각 으론 모든 이데올로기가 전부 비합리적 또는 반합리적 원인들에 의하여 채택되지만 그 원인들 중에는(노동자계급의 이해) 좋은 이데올로기를 만이다들.어 죽내 는이 데것올도로 기있들고을 나 그쁜 것이들데이올 로어떤기 를합. 당만. 한들. 어이 .유 내(. 는합 리것화도) 를있 다가는지 고것 있느냐에 따라 판단하는 대신에 어떤 원인에서 나왔느냐에 따라 판단해 야 한다는 것이다.

3) 에과알학뚜서적싸와 에 갇증 이명의)이하 면업불 일가‘한능철 학한과직학 한적,명 제논부 둔증정 온이적 으논왼로재 수둥독 이단없다적는. '한 명,제' 청로또학서 -l( 주겅논장힘재원과 둥 학 은수에 서(있와다수 .학갇 이이…나). . . 엄논철.학밀리.적학.한 논계묻은 논중도 안 되고 과학칙으로 증명도 안 되기 때문에 겨}"이라고 말해전 수 없 다(수학이나 물리학에서치컵 논증이나 증명이 찬 수 없다). 그것 문 은 오칙 ~성당하다 고만 말해잘 수 있다. ' Phil oso p hi e el Phil o sop hi e Sp on lanee des Savants , pp. 13-14, Maspe r o (19 67).

이와 갇이 자기 자신의 상대주의에 제한을 가하는 방식은 분명히 이 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노동자계급의 이해'의 승리가 전쟁과 인종문 제가 없는 세계와 같은 눈에 띄게 바람직한 결과 를 가져올 것이고 ‘사 회주의’와 갇은 가장된 전체주의와 제국주의로 나아가지는 않는다는 판 단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전체주의나 제국주의는 ‘참된' 사회주의가 아 니고 ‘참된'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반영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대답이라면 어떤 특정의 제도(예컨대 알뚜싸가 지도자로 있는 불란서 공산당)나 정 책이 ‘진정한'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 ‘진정한' 사회주의를- 가져 다 줄 것이라는 판단은 어디서 나왔는가? 만약 이러한 믿음들이 합리

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면 모든 이데올로기가 전부 비합리적이라는 말 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정당화될 수 없다면 어떤 제도 나 정책이든 그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은 모든 다른 이데올로기적 주장 둘이 그렇다고 생각되듯아 전적으로 바합리적인 것이라 아니 할 수 없 다. 만약 이데올로기에 관한 문제 뭉 대하는 인간들의 생각이 전부 자기 만족적 우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떤 믿음들이 ‘노동자계급의 이해'에서 나왔고 또 어떤 믿음들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한 인간들의 생각도 자기 만족만을 일삼는 한갖 우화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러나 푸꼬로 돌아가서 최근의 그의 저작에서 그도 역시 과격화되고 있다는 조짐들을 우시한다면 그가 선택한 여러 경우들에 관심을 집중시 킨 초기는 겅파하게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적인 입장을 채택할 때 그러한 입장의 손 7.1 라는 것들이 얼마나 반합리적인(그리고 사실상은 비합리적 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를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푸꼬 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의 개념은 매우 넓다. 그것은 지금 논의되고 있는 공산주의, 파시즘, 민주주의, 왕권신수 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누 군가가 평에 걸려' '치료'를 요한다는 믿음, 또 누군가가 ‘죄를 지어' 가 능하다면 ‘7 성생'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믿음 등등의 일상적으로 가 질 수 있는 많은 믿음들도 ‘이데올로기적'이라 할 수 있다. 참으로 마르 크스주의 사회학자나 불란서 철학자들의 날카로운 눈에는 거의 모든 믿 음 들 이 ‘이데올로기적 ' 이다. 아마도 ‘만일 이 컵을 내가 떨어뜨린다면 부서질 것이다'라는 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중립적이라 한다면 이밖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중립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내가 푸꼬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진짜 핵심을 놓쳤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푸꼬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칭말 핵심적인 이야기는 과거의 이 데올로기적인 관점들이 어리석거나 비합리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의 이데올로기까지 포함하여 모든 이데올로기는 매우 넓은 의미에서 문 화상대적이라는 접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모든 문화가 합리적이 아 닌 요인들로 결정되는 일군의 무의식적인 가정들에 의거하여 어떻게 살 고, 생각하고, 관찰하고, 사랑을 나누는지룽 보여 주고자 한다. 이전의 이데운로기들이 지금 보기에는 ‘비합리적'인 듯이 여겨지는 까닭은 우리 가 그 이데올로기들을 우리의 문화에 근거한 합리성의 개념으로 판단하 기 때문이다. 푸꼬의 설명에서 곤란한 접은 그와 다른 불란서 사상가들이 지적하는

그 결정요인들이 우리의 현재 입장에 비추어볼 때 비.합.리..적.이.라 는 접이 다. 만약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쇼 o] 다]홍오기 차체의 관경에入. 1 비합리적인 힘의 산물이라 한다면 우리의 이데올로기는 내적 인 모순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붕란서의 사상가들은 단 순히 문화적 상대주의자들만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합리성의 개념을 내부로부터 공격하고 있으며 바로 이 접이 독자들이 읽을 때 곤란을 느 끼는 점이다. 문화적 상대주의란 새로운 이론이 전혀 아니다. 이 세상에 인류학자 둘이 존재하는 한 그들은 항상 우리에게 상대주의 를 교설하여 왔다. 그 러나 푸꼬의 상대주의를 옛날의 상대주의와 유사하게 생각한다면 찰못 이다. 인류학자가 우리에게 상대주의를 교시할 때 그가 우선 우리가 보기에 는 바합리적이고 충동적인 어떤 색다른 종족의 믿음이나 실천을 인용한 다음 이러한 믿음이나 실천들이 사회복지나 사회적 결속을 도모한다는 접을 보여 주려는 것이 보통이다. 요컨대 그는(그가 든 예가 이해될 만 한 것안 한) 우리의 사회에서 잘못되거나 비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것 이 다른 자연환경이나 사회환경에서는 실지로 이치에 맞고 옳아 보일 수가 있다는 접을 보여 주고자 한다. 물론 인류학자들은 스스로 제시한 예들로부터 종종 잘못된 결론을 도 충해내기도 한다(그들이 든 예들 중에 어떤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 다 덜 분명한 경우도 있다). 인류학자는 흔히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라 고 말하는데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결칭해 줄 어떠한 사실도 없다는 것이다. 보이드R. Bo y d 는 언젠가 나에게 ‘모 든 것은 상대적이다’라는 말의 숨겨진 동기는 정치적인 것이라고, 즉 우리의 도덕과 합리성이 더 우수하다는 우리의 믿음을 공격함으로써 원 시문화를 말살시키는 행위를 중지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러한 말을 한다 고 암시해 준 적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 논점은 매우 혼돈된 것 이다. 인류학자들의 예는(그 예가 좋은 예일 때) 예컨대 옳고 그름이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즉 상황에 상대적이라는 접을보여 주지, 옳고 그 은름이 아 .니어.다.떤. 특문수화한적 상제황국에주서의일에지 라대도한 인있을류 학수자 의없 다반는론 은접 을다 보음여과 주갇온는 것것 이다. 죽 다른 문화가 우리의 문화보다 못하다고 할 때 객관적으로 그 런 것은 아니다(왜냐하면 인류학자에 의하면 객관적으로 더 낫고 더 못

하다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문화도 우리의 것 보다 못할 바 없으며 그들의 문화 를 말살시키는 것이 잘못인 이유도 바 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논의는 모호하다. 논의의 결론에 나오는 ‘못할 바 없다’는 말 은 객관적으로 그렇다(적어도 우리의 관접에서)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부터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못할 바 없다’는 결론이 나울 수 없다. 오히려 ‘못할 바 없다'와 갇은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 만약 가치가 정말 임의적인 것이라면 왜 우리가 마음대로 어떤 문화이든 문화 를 말살해서는 안 된 단 말인가? 다행스럽게도 객관적 가치 를 부인하는 것보다 문화적 제국주의를 비 판하는 데 더 좋은 근거가 있다. 인류학자 들 의 동기도 좋은 것일 수 있 으나 그들이 전개하는 논의는 찰못되었다. 인류학자들이 사용하는 또 하나의 모호한 말은 ‘상대적'이라는 말이다. 그 들 이 재시하는 예들에 의 하여 실지로 화중되는 것은 듀이 J. Dewe y의 객관적 상대주의’이다. 사 물들은 상황에 따라서 옳거나-객관격소i-그 를 수-객관격 소고―있으며 이때 상황이란 문화와 환경을 말한다. 이 점에 있어서 인류학자들은 옳다. 그러나 이렇게 말함이 가치가 단순한 의견이나 취 향의 문제라는 뜻에서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갇지는 않다. 그래도 그 개념적 혼돈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인류학자들의 논의가 문제될 것은 없다. 우리는 그들의 관찰을 환영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 면 그들의 관찰은 우리의 감성을 화대시키고 문화적 우월성을 가정하고 있는 우리의 뽕냄울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논의 를 푸꼬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그들간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드러난다. 죽 푸꼬는 과거의 관습들이 보기보다 더 합리적임을 밝히자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적 행위들이 덜 합리적이며 사실은 주로 반이성적이고 이기적인 충 동에 의하여 결칭된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푸꼬의 이 주장이 다른 옛날의 문화적 상대주의와 유사해 보임은 피상적으로 그럴 따름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토의해 온 입장이 사실은 심리학적 그리고 사회학적 메카니즘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감수성이 중가함에 따라 생긴 지적 요 구에 걸맞는 입장이다. 지식과 감수성은 일면온 가면적이고 또 일면은 사실적 이 다. 이 때 모든 합리 적 논의 는 단순한 합리 화 ra tio na li za ti on 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러한 입장을 합리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만약 모든 ‘합리적 논의’가 단순한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떤 견 해이든지 그것을 합리적으로 논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러한 견해를 치치 하는 것까지도 무의미한 짓일 것이다. 만약 내가 나 자신의 찬성의견이 나 반대의견을 모두 정신나간 행위로 본다고 한다면 나는 찬성하고 반 대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합리적 찬성이나 반대가 있을 수 없고 단지 합리적 토의를 이상스럽게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을 친 술이라고 부를 수 없다. 자신의 회의주의가 하나의 진술로 표현될 수는 없다(왜냐하면 ‘나는 알지 못한다’는 진술마저도 그가 아는 진술일 수 없기 때문이다)고 결론지은 엠피리쿠스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상대주의 자들도 모순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들 자신의 발언들을 결국은 단순한 을감 정넌의센 스발로로에 여 기지나는지 이 론않이는 이것.렇으.게.로 여모순기지없 이않 주을 장수될 없수다 (있무겠모는순가의? )개 념 이와 같이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믿음 중에 려면 것을 비합리 적이라고, 합리적으로 그리고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음을 부인하는 것 은 아니다. 우리가 모두 지적으로 저주를 받았다는 이 주장이 이해될 수 있는 정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접을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예컨대 우리는 푸꼬가 제시한 바와 같은 이론들을 토의하고 설혹 이 이 론에 우리의 견해와 만대되는 접이 있다 하더라도 포퍼가 말한 소위 ‘비판적 태도'룹 채택하여 토의하는 과정에서 편견에 치우치지 않도록 노력하며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중거나 논중을 적국적으로 찾으려 한 다. 이러한 토의와 대화, 그리고 비판과 공정한 태도로 합리적인 믿음 둥이 한꺼번에는 아닐지라도 시간을 두고 접차적으로 제거되고 우리의 최종적인 결론을 임중하는 방향으로 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위에 말 한 여러가지 노력들이 최소한의 의미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합리성이 어떤 ‘규범'이나 일련의 원리에 의거해서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는 모르나 비판과 토론 둥의 인식적인 장접둘은 진보하면서 우리 를-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우리가 크게 나아질' 것도 없다고 반 대할지도 모른다. 카르납과 뉴먼은 모두 매우 주의 깊고 책임 있는 사 상가들로서 앞서 언급한 비판적 태도물 가지고 공평한 토의 를 할 줄 아 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동시대에 살았고 서로 만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설득시키진 못하였웅 것이다. 모든 논쟁을 누

구에게나 만족스럽게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과 논쟁에서 더 낫고 더 못한 경우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다르다. 우리들 대부분은 뉴 먼이 카톨릭교회에 너무 광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철학 자들은 카르납이 뛰어나긴 하였지만 그가 제시한 많은 논의들이 약하다 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와 같은 판단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공칭하고, 주의 깊고, 공평한 지성을 규제하는 어떤 관념이 있음을 입증해 준다. 그리고 우리는 독정의 사상가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관념을 결 여하고 있는지 하는 문제는 실제적인 문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렇 다는 것인가? 그러한 관념을 가지고 싣지의 어떤 논쟁을 해결하려 한 다고 해서 논쟁의 초접이 되는 여러 견해들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합리적 수용가능성의 개념을 전재하지 않고 논쟁을 해결하는 것보다 더 나아질 것도 없지 않는가’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 말은 방금 상상해 본 카르납과 뉴먼간의 논쟁과 같은 해결될 수 없는 ·논 쟁의 경우에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사공평성, 우모순성, 합당성 등과 같은 것들이 실지로 있다는 생각을 버린다 하더라도 그러한 생각을 버 리지 않을 때보다 더 못할 것도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설 혹 우리가 실천적인 삶에 있어서는 그러한 기준들에 근사치로밖에 접근 할 수 없고 따라서 우리들이 가진 믿음들은 오직 주관적일 뿐이며 이 ‘주관적인 믿음들'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를 결정해 줄 어떤 사실도 없 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하더라도 그렇다. 나는 (가끔) 철학적 토의와 정치적 토의간에 유사접을 찾아내곤 하였 는데 이 유사점이 여기서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나의 동료중에 : 복지' 정책을 펴는 모든 정부는 도덕적으로 허용할 수 없다는 견해를 옹호하 는 사람이 있다 .0 그의 견해에 의하면 공립학교체제조차 도덕적으로 ® 곧 밝히지겠지만 Anarchy, Sta t e and U t opia 의 지자 노칙 R. Noz i ck 운 두고 한 말이 다. Anarchy, Sta t e and U t opi a 는 정치철학직인 재반 문재둥운 분석칙으로 다운 타원 한 지서 중의 하나로 알려쳐 있다. 이 저서가 특히 주목운 받게 된 것은 수 세기에 걷 쳐 영이의 칭치 이데올로기로 되어 왔던 공리주의용 진면적으로 재평가하고 비판하였 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칙은 이 새에서 ‘다론 사람의 인겨운 단순히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칙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두번째 정언명법운 중시하는 도덕칙 입장운 고수하고 있다. 일종의 만공리주의적인 도덕원리에 입각하여 각 개인온 타인둥이 다양한 목표용 성쉬하기 위하여 취하는 다양한 행위둥에 최소한도의 제약운 가할 수 있는 권리웅 가 지고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러한 도덕원리가 동용되는 국가운 그는 '최소국가 mi ni m al s t a t e’ 라고 분렀으며. ‘최소국가’의 기능은 각 개인운 목하 질도, 사기 동으로 부터 보호한다는 좁은 의미의 기능에 재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러 유토피아 사 상가들기 외쳤던 다양한 사회칙 이상둘운 실현시킬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 말하자면 '초(소국가'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최소국가'란 여러 가지 사회적 규법이나 이상에 따라 구벌되는 다양한 공동세운 실현시킬 수 있는 기본 뼈대가 되는 셈이다.

잘못이다. 만약 공립학교체재가 의무교육법(이것도 그는 개인적 자유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기 때문에 허용될 수 없다고 여긴다)과 함께 폐지된 다면 가난한 가정에서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없을 것이고 문맹으 로 자라도록 버려두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에 따 르면 개인적 자선에 의하여 해걸될 문제이다. 만약 사람들이 대상적 교 육운 막을 정도로 충부한 자선심을 베풀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매우 나쁜 일이나 그렇다고 해서 정부의 간섭이 합법화될 수는 없다는 것이 다. 나의 견해로는 그의 기본가정들――{예컨대 재산권의 절대성 같은 것 ―이 우리의 직관에 반대되며 어떠한 논의로도 지지될 수 없다고 생 각된다• 그러나 그의 견해로서는 내가 ‘온정주의적' 철학에 사로잡혀 있 으며 이 온정주의적 철학은 그의 생각으로는 개인의 권리에 둔감하다는 것이다. 그와 나의 이 국단적인 견해차는 단순히 '정치적 견해차'만이 아니라 ‘정치 철학 ’에서의 견해차이다. 그러나 많은 정치적 견해차가 정 치철학적 견해차만큼 단단한 것은 아닐지라도 전자는 후자를 많은 경우 포함하고 있다. 그러한 견해차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견해차가 양편에서 지적 으로 조정된다면 견해차의 원천이 민감하게 진단되고 묘사될 수 있다. 견해차가 내가 소개한 것보다 달 기본적인 것일 때는 양편이 그들의 견 해 를 다소간 수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지로 의견의 일치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가능한 화해로 양편의 의견을 좁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에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간에 그 러한 지적인 정치토의를 하는 것을 보기 힘들다. 그러한 토의가 생긴다 면 한층 더 즐거울 수 있으련만, 그와 같은 토의에서 토론상대자에 대 한 우리들의 일반적인 태도는 재마있게도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상대방 의 개방적인 마음의 자세, 논의의 논리를 따르려는 자세, 좋은 비판을 받아들이려는 자세 동과 같은 토의에서 가장 중요한 지적 장접둘을 인 다정.한 다여..기. 에.그서.러 나더 동좋의거할나 수더 없나는쁜 기근본거적와인 견접해에란 가있서을는 수이 야없기다가고 달생라각진하 는 것처럼 하는 것은 매우 정직하지 못한 짓이다. 우리가 재산권보다 공동체가 그 구성원들을 동정심으로 대해야 할 의무가 우선적이라고 생 각하는지 아닌지가 단순한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의 토론상대자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상대방에게 일정한

종류의 감수성과 지각이 모자란다고 생각한다. 좀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서로가 상대방을 경멸에 가까운 감정을 갖고 본다. 이때 경멸은 상대방 의 마홈에 대한 것도 아니고――-우리는 각자 상대방의 마음에 대해서 는 높이 평가한다―—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것도 아니며-왜냐하면 나는 나의 ‘진보적’ 정치입장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보다 나의 상대자 를 그 정직함, 친절함, 성실함 동에 있어서 더 존경하기 때문이다―_­ 상대방이 가진 어떤 복잡한 감정과 판단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좀더 솔직히 말해야 하겠다. 내가 지금 염두에 두고 존경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 라 바로 노직 R. Noz i ck 이 다. 나는 그의 인품 을 존경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 정말 존경한다. 그런데 내가 만약 그 가 가진 어떤 복합적인 감정과 판단에 대하여 경멸감(또는 그와 비슷한 것)을 느낀다면 이것은 결국 그를 경멸하는 것과 마찬가지일까? 이것은 밝히기에 고동이 따르는 일이다. 우리가 사랑하지만 의견은 서로 달리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를 정당하게 검토하기 힘든 까닭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 때문인 것이 보동 대이다한. 모.문 든.제 는것. 을성 인좋인아 하우고리 존들경 중하에는 그사 람누은구 도없 다어는떤 점사이람다이. 돈기 한본 적사인람 에자 기애와 자긍심을 가짐이 스스로에게 어떤 지적이고 도덕적인(또는 감정 적인) 취약접이 있다고 보는 것과 모순이 되지 않듯이 타인에 대해서도 우리가 타인을 기본적으로는 좋아하고 존경하면서 그에게서 지적이고 도덕적인 측면에서는 어떤 취약점을 발견한다고 해서 모순에 빠지지는 않는다. 나는 편견 없는 마음, 이성에 대한 존중심, 자기비판 등의 기본적인 지성을 갖춘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접을 강조하고 싶다. 또한 상당한 양의 적절한 지식을 축적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단순히 감정이나 환상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사람들은 정치 적 토의에서 흔히 이렇게 한다)과 주의 깊게 이성을 따르는 사람 사이 에도 큰 차이점이 았다고 생각한다. ‘존중하면서 경멸하는' 양면적 태 도, 죽 다른 사람의 지적 능력은 존중하면서 그의 지적 또는 감정적 취 약접은 경멸하는 태도는 솔칙한 태도이다. ‘존중하면서 경멸한다’는 말 이 거의 욕과 갇이 들릴지도 모르겠다(특히 이 말을 그것과 전혀 다른 경멸스러운 존중과 혼돈할 때 더욱 그러하다). ‘경멸’이라는 말이 상대 방의 감정이나 판단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것일 때

욕이 될 것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거짓 상대주의, 즉 어 떤 주제에 관해서 이 견해가 합당하고 저 견해는 그렇지 않다고 정말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더 낫거나 더 안 좋은 견해란 있을 수 없다는 듯 이 가장하는 태도보다는 훨씬 더 솔칙 한 태도이 다. 지금까지 우리는 좀 추상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해 왔는데 이제 바교적 단순한 예를 가지고 생각해 보자. 대개의 일상적인 사람들은 보통 평화 가 전쟁보다 더 바람직하다는 판단을 하는데 이 판단을 예로 생각해 보 자. (이러한 판단이 스위프트에 의하여 한 번도 묘사된 바 없듯이 푸꼬 에 의해서도 한 번도 논의된 적이 없다. 동일한 이유로 양자는 모두 흥 ;1-;I-이다. 그둥의 관심을 끈 것은 사회적인 웃음거리들이지 사회적인 건전함은 아니었다.) 어떠한 원천에서 그러한 판단이 나왔는지에 대해 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전쟁의 공포, 전쟁이 전쟁을 하는 사람이든 안 하는 사람이든 모든 사람에게, 또 우리의 땅과 초목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악히 알고 있다. 설혹 그 판단아 부분적 으로는 자기애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그 판단을 비합리적인 판단으로 만 둘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정반대이다. 그럼에도 붕구하고 전인류는 반대의 판단, 즉 정당한 자기방어의 이 유에서라면 몰라도 그것도 아닌데 전쟁이 평화보다 더 바람칙하다는 판 단을 내릴 수도 있다. 침략과 환상은 인간들을 전국가적으로 피를 갇망 하는 방향으로 몰고 갇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이러 한 점들이 우리에게 임중해 주는 것은 오은 가치판단이 전부 비합리적 이라는 접이 아니라 가치판단 중에는 비합리적인 것도 있다는 접, 그리 고 우리가 당파심을 멀리하거나 우리 자신의 믿음들을 비판할 수 없을 때 어떤 것이 합리적이고 또 어떤 것이 비합리적인지 가려서 말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점(우리가 무사공평성과 비판적 태도에 특히 중요성을 부여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이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가치판단이 있다는 말이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권리, 자율 등등에 관한 우리의 추상적인 논의들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일반적인 문제에 관하여 말하려고 하는 것이 옳을 때라도 우리는 자주 그것을 잘 표현하는 데 어려웅을 겪는다. 우리가 추상적인 생각들을 표현하는 훈련을 받지 않았윤 때는 특히 그렇다. 가치가 상황에 상대적이라는 뜻으로 객관적인 가치가 없

다고 말 하 는 인류학자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우리가 말하고 자 하 는 바 뭉 효과적으로 표현하 는 데 성공을 거두 는 때일지라도 우리 의 판단 을 혼 들 어 버리기 쉬운 강력한 반합리적 권력이 존 재한다. 여기 서 내가 목표하는 바 는 우리의 판단이 권력에 유린당하고 자기도취에 유 혹 당 할 수 있다는 점 을 부인하자 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와 같은 강 력한 권력 앞에 너 무 나 우기력해져 지성과 정의로 판단하려 는 시도가 쓸 모없 을 것 ( 그리고 사 실 은 자기기만적안 것 ) 이라 는 접을 부인하자는 것이야 우리가 합 리 적 할 수 있다 는 알은 우리가 전 혀 오 류 를- 범하지 않 는 다 는 알과 다 르 다. 오히려 그 만대로, 머 도 취 가 지직 하 였다시피 합 당하 고 합리적인 자세 웅 찰 구 함은 본질 적으로 진보 적 이 고 ‘ 우 한하게 완 성 될 수 있 는 '4) 어떤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바가 아마 도 어떤 지적인 도 덕상대주의자의 인정 운 받 을 지도 모 풀 일이다. 상대주의자 는 모 든 ‘가치'판단의 합 리성 여부 룹 따지거나 푸꼬의 역사관을 아무런 합리적 근 거도 없이 이어지는 ‘이 데 올 로기' 들 의 불 연속적인 계열로 옹호하는 데 관심 을 기 울 일 팔요가 없다. 좀더 온건한 상대주의자라면 가치 중에 는 객관 적 으로 상대적인 가치도 있다, 즉 가치 용 안 드 는 사람들이 처한 장항, 자연, 그리고 역 사가 추어겼옹 때 객관적으로 합리적인 가치도 있다 는 듀이의 견해 5) 에 기꺼이 찬동할 것이다. 온건한 상대주의자의 주장에 의하면 정말 중요 한 것은 바로 모든 가치 들 의 강대성이다. 상대주의자가 부인하는 ‘7석 관 성’은 듀아가 긍정하는 객관성과 다르다. 듀이가 말하는 객관성은 실지 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보증되는 판단의 객관성일 따름인 데 반하여 상 대주의자가 말하는 객관성은 풀라돈이 주장했을 성싶은 객관성, 죽 모 든 상황으로부터 떠나서 또 모든 상황에서도 타당한, 철대적인 관접에 서 이야기되는 의사객관성(상대주의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이다. 우리가 그러한 온건한 상대주의를 받아들이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듀이 자신의 윤리적 저술을 보더라도 어려운 접을 느낀다면 내 생각으 로 그 이유는 우리가 정말 철대적인 것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가 살인자를 탓하고 무고한 사람이 고동을 받는 것을 아프게 여기면서 4) The Sovereig n ly of Good, p. 23. 5) s'Tith y e oorry C ohif c Va ga olu a(1t9i o3n 9'),. in The Encyc lope d ia of Unif ied Scie n ce, Vol. II. no. 4, Univ e r•

그러한 행위가 잘못이라고 판단할 때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상황에서 다른 심리로 사는 사람들에게도 이 판단이 타당할지 하는 문재에는 신 경을 쓰지 않는다. 만약 고동을 느낄 수 없고 한 개인의 죽음을 아무렇 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말 있다면 '살인과 고동’을 탓하는 우리 의 판단이 그들에게는 한갓 헛소동에 지나지 않을 것임은 뻔하다. 그러 나 그러한 사람들의 삶의 형태가 우리의 그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 다는 사실 자체가 그등이 도덕적 문재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해 준다. 우리 가 말하는 '객관성’이 아무리 인간적 인 객관성 이 라 하더 라도 우리의 문재를 해결해 주기에는 충분하다. 중요한 접은 듀이의 객관적 상대주의’ 이론이 나찌스의 칭우물 다룰 수 없다(물론 듀이는 이 접을 반박할 터이지만)는 접이다. 우리는 나찌 스 들 의 목표가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며, ‘이것은 당신들의 관십에 비주어서는 참이지안 나찌스들의 관심에 비추어서는 거짓이다’는 식의 ‘도덕적 상대주의’에 대해서 우리는 거부감을 일으킨다. 객관적 상대주 의가 도덕과 관련된 많은 징우에 훑혼 이론인 듯이 보이지만 무엇이 옳 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예민하게 드러나고, 옳고 그름, 선과 악 사이 에 선택이 강요되는 겅우에서는 그렇지 않다. 합리성운 현대에 와서는 도구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느 의미에선 객관직 상대주의’ 성향을 띠고 있다. 그러한 생각은 단순한 인기. 만것.적 도 . 이비.분 합.법 리에. 적 .인 근. 거것.하 도.고 아있니다다. (즉모 순‘에목 적빠'이져나서 는‘목 표안' 의된 다선는택 은최 소합한리적의 요어구느조 정건도이 효.충융.족적.되이.었냐.다에. 할따 라경 우합).리 적그 러또나는 비수단합의리 적선일택 수은 있그다것. 이이 러과연한 이분법에 의하면 합리성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붙는 술어이며 효율성 의 개념과 완전히 융합되어 있다. 따라서 죤이 쵸코렛아아스크립보다 바닐라아이스크림을 좋아함은 합리적인 것도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지만 어느 특수한 경우에 그가 쵸코렛아이스크립이 아니라 바닐라아이스크립 을 선택함은 죤에게는 합리적인 행위가 된다. ‘이성은 정념 p ass i on 의 노예이며 노예이어야 한다 'O 는 흄의 언명으로 되돌아가는 이러한 생각 @ D. Hume, A Treatis e of Human Natu r e, ed. by L.A. Selby -B i gge (Oxfo r d. The Clarend on Press). p . 415. ‘이성만이 행동운 유발시키는 동인인 것은 아니다'. ‘의지상 행사합 에 있어서 이성은 걷코 칭념과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명재가 흡이 그의 도덕천 학에서 입중하고자 한 명계이다. 이러한 정에서 본다면 흡은 합리주의 시대에 산았으

면서도 반합리칙인 입장운 취했다고 분 수있다. 인간행위의 기본적인 동인은 이성이라 기보다는 차라리 심성의 어떤 본능적 성향p ro p ens ity이라는 것이다. 이성도 인간의 삶 에 어떤 역할운 수행하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칭념의 한 도구에 지 나지 않는다는 것이 흉의 생각이었다.

은 벤담에게도 크게 영향을 주었는데 현대의 사회과학자들에게도 옳은 것으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컨대 그것은 복지경제 등과 같은 영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현대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빠레또의 최적 조건 Pareto o pti mum 이라는 것도 수단의 효 융 성만 고려 되고 여러 경제적 주체들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 무런 ‘가치판단'도 내리지 않는 경제적 최선을 찾아보자는 시도이다. 이 러한 시도가 현재 관심을 끄는 이유는 수단의 선택은 합리적 비판거리 가 되지만 목적의 선택은 그렇지 않다는 바로 그 가정 때운이다. 아와 같은 생각은 그러나 우리가 그 생각의 근저에 지나치게 단순한 심리학적 이론이 깔려 있다는 점을 알게 될 때 설 득 력을 잃게 된다. 벤 담주의자들의 도식에선 목표, 목적, 기호 등은 고정된 개인적 변수(예 컨대 개개인의 배움은 행위의 결과 또는 가능한 결 과 물 더 잘 평가하고 목적을 더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것을 매우는 과정으로 묘 사되지 새로운 목적운 획득하는 과정으로는 묘사되지 않는다)나. 아니면 실 지로 뇨겅 되지 않고 변한다 하더라도 합리적이라 할 수 없는, 따라서 이론가들이 설명할 수 없는 요소들의 결과로서만 변하는 개인적 변수로 취급된다 . 윌리암스 6) 는 한 개인의 목표를 달성시키가 위하여 선택되는 수단뿐 만이 아니라 그 목표까지도 합리적으로 비판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이 있는데 이 방법들은 우리가 ‘벤담주의자'들의 편협한 심리학을 넘어서는 순간 곧 드러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6) 나는 여기서 원리암스가 1978 년 11 월 하바드 대학에서 가졌던 강연 'Inte r nal and Exte r nal Reasons' 문 요약하고 있다.

벤담주의자’의 생각에 의하면 한 개인이 합리적 비판에 의하여 자신 의 목표를 포기하도록(또는 목표의 추수를 포기하도록) 설득될 수 있는 경우가 하나 있는데 그가 결과를 목표달성의 댓가 를 지나치게 저평가하 는 (그가 가진 다른 목표에 상대 적 으로) 방향으로 찰못 평 가한 경 우가 그계것가이 다있.는 이문제러,한 죽경 목우는표 를명 제달적성 함지이능 뿐경만험 적아으니로라 정.상 말.상 력어. 과떤. 도 것. 일많.지은. 관하 는 문제를 야기시킨다. 많은 사람들은 달성하는 기쁨을 실지로.가지지 못하거나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오래 또는 많이 즐기지 못할 목표들

을 추구한다. 벤담주의자의 사고구조내에서조차도 여 러 가지 목표에 대 하여 우리가 실지로 갖는 느겅을 잘못 평가할 가능성이 있다는 접을 고 려함으로싸 합리적안 의사결정에 대한 설명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수단뿐만 아니라 목표 자체까지도 비합리적인 것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 는 뜻이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또한 사람들은 생각만 해보면 추구하게 될 목표들을 종종 간과해 버 린다. 또는 생각해 본다 하더라도(또는 누군가가 암시해 준다 하더라 도) 그러한 목표를 달성함이 어떤 것일지 마음속에 그려불 상상력 (여기 서도 상상력 이 다 ! ) 이 없을 수도 있겠다. 목표가 시의 감상력을 발전시 키는 것과 같은 장기적인 성격의 것일 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시보다 압펀놀이 를 더 좋아하는 사람은 시 가 가진 뉴앙스를 알아차리 는 감수성 을 가진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 상상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의 지능이 개발되거나 그의 상상력이 나아진다면 그가 간홋을 저지르고 있 다는 점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의 목표(다른 사람의 목표도)를 합리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능력 이 참된 진술을 받아들이고 거짓 진술은 믿지 않는 능력에만 의존해 있 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상력에도 못지않게 의존해 있을 수도 있다는 접은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리고 한 사람의 목표가 사웅이나 사건이 아 니라 인간의 마음이나 성격에 관한 장기적인 어떤 특성 갇은 것일 수도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한 개인의 목표, 또는 이에 대한 가능한 다른 대안으로서의 목표가 가진 경험적 의의를 잘못 평가하는 것 외에도 목표를 선칭할 때 찰못을 저지를 수 있는 다른 방식도 얼마든지 있다. 윌리암스는 (아리스토텔레 스까지 소급되는 어떤 관찰을 재생시켜) 목표가 보통 일반적인 것일 수 가 많으며(예컨대 ‘오늘 저녁 즐거운 시간을 가질' 목표) 문재는 .:::Z.. ‘목 적’을 달성할 수단을 어떻게 찾느냐가 아니라 그 목적을 세분화할(예컨 대 ‘영화 보러 간다'거나 집에서 책을 읽는다' 동) 전체적인 행동의 유 형을 찾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우리가 우리의 목표를 세분시킬 때 그 것이 새롭고 창조적인 것이 될지 아니면 진부하고 평범한 것이 될지는 명제를 다루는 지능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강조하는데 우리 의 상상력에도 달려 있다. 윌리암스의 지적과 갇이 문제는 벤담주의자의 편협한 십리를 모돈 것 을 공평하게 취급하는 설명으로 대치시킨다 하더라도 역시 일정한 형 태

의 상대주의에 머물 것 같다는 정이다. 윙리암스가 든 예는 군인이 되 기 를 바라는 아버지를 가진 한 젊은이의 경우이다. 아버지는 가족의 전 통(이 집안의 남자들은 대대로 군장교였었다)과 애국심에 호소하였으냐 무위였다. 그 젊은이는 군장교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일지 가능한 한 구 체적으로 머리에 떠올려 보았으나 그의 매력을 끌 구석이라곤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가 장교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 까닭은 지능이 모자라 고 상상력이 빈약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바로 차선희 목적이 아니기 때 문이다. 나찌스의 경우도 이와 같을 수 있다. 나찌스가 전쟁에 이기고 따라서 우리가 나찌스 당원이 되지 않은 실제적인 이유가 독일의 패배 때문은 아니라고 상상해 보자. 아마도 나찌스들 중에는 나찌즘이 실지로 어떤 결과물 초래할 것이며, 어떤 고동이 뒤따륭 것인지 등등에 관하여 알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으리라. 또 그러한 결과를 충분히 침작하고 나찌스 당원이 아닌 삶이 어떤 것일지 확연하게 침작할 만한 지능과 상상력을 가졌었더라면 나찌스가 되지 않았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찌스들은 그대로 나찌스로 남아 있었을 것임에는 의심의 여 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행위가 불러일으키는 고동들을 개 의치 않았으며 나찌스가 아닌 삶이 어떤 것일지 충분히 그리고 확연하 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상상은 마치 윌리암스의 예에서 군인생활이 그 젊은이에게 상상은 되어도 아무런 설득력을 가질 수 없 듯이 .나 .찌 스. 들. 에게는 아무런 현실적인 험도 못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 다. 그들 속에 있는 목적 중에 그 어떤 것도- __ 그것이 현실적인 것이 든 잠재적인 것이든-우리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우 리는 여기서 구태여 ‘벤담주의자의 심리’를 불러들이지 않더라도 다시 도덕적 상대주의의 문제에 칙면하게 된다. 나찌스의 경우보다 더 평범한 경우를 하나 생각해 보자. 어떤 이유에 서인지는 몰라도 예술, 과학(농사를 짓는 데 도웅이 되는 것은 제외하 고), 종교 둥 일체의 정신적 또는 문화적인 것들에는 하동의 관심이 없 는 농민들이 있다고 해보자(이러한 농민들이 정말 있다는 뜻은 운론 아 니다). 이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협 동적이고, 평화를 사랑하고, 서로간에 친절을 베풀 줄 안다고 생각하 자. 나는 독자들이 이 농민들의 관심이 충분히 먹고, 따뜻하게 잠자고, 처녀에 모여 술 한잔 나누는 것과 같은 단순한 즐거웅을 갖는 최소한의

목표에만 국한되어 있다고 상상해 보기를 바란다. 요컨대 그들이 비교 적 ‘동물적인’ 삶 외에 다른 종류의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가정 해 보자. 그러한 사람들이 우오더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삶의 방식에 용납하 지 못할 것이라고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적으로(우리가 윤리적 상 대주의에 빠져 있지 않다면) 그들의 삶의 방식이 여하튼 좀 겅열스럽다 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삶의 방식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소 위 ’고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말하자면 돼지의 삶을 살 고 있다고 하겠다. 그 돼지가 아무리 귀엽고 상냥한 돼지라 하더라도 돼지는 돼지이며 돼지의 삶은 인간의 삶이 될 수 없다. 또한 동시에 우리는 그 돼지 갇은 사람들이 여하간에 비합리적이라고 말하기는 꺼려하는데 이것은 문제다. 우리가 그렇게 꺼려하는 까닭은 오랫동안 ‘합리적'이라는 말과 ‘비합리적'이라는 말의 벤담주의적 사용법 에 길들여져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우리가 그러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 다. 돼지 같은 사람들의 삶이 춤 ;l 않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비합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우리들의 일 반적인 생각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좋은지 나쁜지 하는 문제가 단순히 취향의 문제 에떻비. 게합.지 리.나더 적. 지 이좋 라은않고 는삶 다을말고 할 택 생수하각 는하있 는는것 가은것 은하합. 는리.아 .적니접 다이이.고다 .우더 리 그나가렇쁜 게알 삶 수말을 하 없지택는 하 않.는것 는. 은다.것 는은어 것은 결국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라는 말과 정확하게 갇을 것이다. 그 렇게 되면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땅이 힘없이 무너져 버리는 것과 갇을 것이다. 벤담주의자의 심리학은 윌리암스가 암시한 대로 약간 수정한다면 이 가경진우 에잠 .도재.움.력 이을 될타 고것났이다다.고 그가 정돼하지자 (갇만은약 인그간렇들지이 않정다상면적 인그 들사의람 들삶이이 ‘보기보다 더 나쁜' 것이 아닐 것이며 그들의 삶에 대하여 우리가 느끼 는 경멸의 감정도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축은한 감정 정 도만 허용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이 예술적, 과학적, 정신적인 측면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좀더 진정 으로 인간적인 삶을 살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 중에 누군가가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게 된다면 돼지 갇은 삶보다는 그러한 삶을 더 좋아하게

될 것이다(설혹 재미는 더 없다고 하더라도). 돼지 같은 삶을 사는 사 람들이 좀더 인간적인 삶을 살게 될 때 우쇼리홍을 느낄 것이며 인간적 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돼지의 삶으로 전락했을 경우에는 그들이 인간 적인 삶을 살았다는 데 대하여 수겨겁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 이러한 점들은 그 돼지 같은 사람들이 윌리암스가 말한 바와 같은 종류의 민석 부족에서 기인하는 일종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할 근거를 제공 해 준다. 다시 말하여 그러한 점들은 돼지 갇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이 추구하는 목표와는 다른 종류의 목표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였으며 그 목표를 실현시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를 한 번도 생생하게 머리에 떠올려 보지 않았다고 생각할 근거가 된다. 요컨대 그들이 더 나쁜 삶 을 선택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좋음이라는 개념 울 가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더 나쁜 삶을 선택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면 그들의 삶이 합리 적인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생각이 공격받을 수 있겠지만 이 점을 나찌 스의 경우에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명백하지 않다. (여기서 더 좋 은 삶을 실지로 선대하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나 더 좋은 삶이 무엇인지 적절하게 깨닫지’ 못하였다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치가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돼지 갇 은데. 올.사 로.람 기.들 적.의 으 . 로경. 우광에적서인조 차돼도지 들만이약라 그면들 수이치 단를순 느한낄 돼 것지이들라과는는 지다적르은게 타이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은 경우에는 쇼응의 목적 중에 잠재적 으로나마 우리에게 호소력을 가질 목적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돼지 같은 사람들을 0.l 人. k 이 결핍되어 있다고 비난하기를 꺼리 는 이유는 (그들의 목적 중에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그들이 달성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점을 우리가 지적할 수 없다면) 우리의 문화에서 이 성의 개념이 최근에 많이 변천되었기 때문이다. 고대나 중세의 철학자 둘 중에 만약 A 가 B 보다 더 좋은 삶이라 한다면 B 보다 A 를 선택해야 할 이유――-가능한· 최선의 이유 __- 가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이상스 택럽게함 이여 길어 떻사게람 은합. 리 .아 적.무 인도 것없이었 되을는 것지이를다 .알 아목차적릴이 능선력하을면 우.:::z리. 목는적 상을실 선하 여 버렸다. 물론 왜 그러한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는지는 우리가 ‘선함'을 더 이상 어떤 객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하여 대충 설명되어진

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두 개의 고리로 이루어진 일종의 순환논법이다. 첫째 고리는 현대적인 순환논법인데 그것은 대충 다음과 같다. 도구주의적 합리성의 개념은 선한 목적인데도 그것을 선 택하지 않거나 나쁜 것이 틀림없는 목적인데도 그것을 선택한다고 해서 그 선택이 특별히 비합리적이 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의 밑받침이 되고, 이 주장은 선과 악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의 밑받침이 되며, 다시 이 주장은 도구주의적 합리성의 개념이야말로 우리의 지성으로 알 수 있는 유일의 합리성이라는 주장의 밀받침이 된다. 그리고 두번째의 낡은 고리의 순환논법은 다음과 갇다. 이성은 목적이 신할 경우 그 목 적는 을‘ 성선벽택'에하 는반 대능하력여이)다라(는목 적주을장 은욕 망좋에은 근목거적하을여 선명택령함하이려 는합. 리.‘.정적념 이',라 는또 주장을 뒷받침해 주고, 이 주장은 다시 좋음과 나쁨, 또는 선함과 악함 은 객관적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보수주의자들이 바라는 바가 무엇이든 우리가 단순히 고대나 중세적 세계관으로 복귀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벤담주의자들의 현대적 순환논법에 뛰 어듦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길일까?

제 8 장 합리성의현대적 해석에 끼친 과학의 영향 우리가 지금까지 고찰한 토의는 지난 수십 년간 계속되어 온 토의인 데 이 토의가 어떤 결론에도 도달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까닭은 아마 도 그 토의에서는 합리성이 좋음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라는 가칭이 항 상 전제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좋음이 심판의 대상이고 합리성 이 그것을 심판하는 판관인 듯이 좋지 않은 목적을 선택함을 비합리적 이라고 부르는 데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지가 항상 문제의 초점이다. 특히 합리성에 관한 가정이 주로 잘 검토되지도 않은 여러 가지 문화적 신화와 편견으로 짜여질 때 이와 갇은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가치판단 의 성격에 관한 문제륭 미리 판단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책의 나 머지 부분에서 나는 문제제기를 반전시켜 좋음이 얼마나 합리적인지 묻 는 대신에 합리적인 것이 왜 좋은지를 묻도록 하겠다. 합리성 그 자체 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합리성 그 자체의 본성도 더 명백해질 것임은 물론 합리성에 관하여 우리가 어떤 가설을 만들기 쉬 운지 하는 점도 더 명확해질 것이며, 또한 전술한 그 문제에 관하여 우 리가 생각하는 방식에 무슨 문제접이 있는지도 밝혀질 것이다. 막스 베버 M.Weber 가 사실과 가치간의 현대적 구분을 소개할 때 그 가 가치판단의 객관성을 반박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바로 가치판단의 진리가 가등한 .i은 합리격 인간을이 만족할 수 있도록 수립되기는 불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가치판단의 객관성이 좀 의십스럽다고 판단된 1) Cf. ' Di e Obje k ti vi t at sozia l wi ss enschaft lich er Erkenntn is ', in Arcliiu f ar Sozia /w i ss en-

scha/1 1md Sozia l po l iti k, vol. 19 (1 9 04), pp.2 4 -87, and 'Der Sin n der Wcrtf rei h e it der s'Woz iiso s l eongs icshc hacftn alusn dB eOrukor,n oVmoi srct rh ac gn , 1W91 is9s. cn이s ch3a f논t c문n ',은 i n 모L두og o sT, hVeJ l (M1 9 e1th7 )o ,dpop l.o4g9 y-8 8of atnhde Soc ial Sc ien ces, Glencoe, Illin o is , 1949 에 재 수목되 어 있 다.

것은 처음부터 가치판단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 이거나 또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합리성은 오랫동안 계 속하여 가치를 심판대에 회부하여 왔다. 이 문맥에서 말해지는 합리성 이란 항상 과학적 합리성을 뜻한다 .2) ‘설중과학’의 결과들은 모든 합리 적 인간들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말해진다. 합리성을 존중할 한 가지 명백한 이유가 있다. 과학적 합리성이 우리가 여러 가지 실천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됨은 부인할 수 없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중에 우 리는 단지 기술적 성공을 위해서만 과학을 추구해야 한다는 견해에 승 복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과학이 이룩한 기술적 성공은 문자 그대 로 엄청난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산업혁명', ‘전자혁명' 동의 끊임없어 보이는 기술적 혁명들의 연속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혁명들을 보면 과학이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데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뉴돈뭉리학의 성공은 많은 사

2) 아펜 K. O.A p cl 은 매머윤 나와 동인하게 해석하고 있다. 'The Common Presup po si- lio n s of Hermeneuti cs and 'Et h ic s : Ty pe s of Rati on ali ty Bey o nd Sc ien ce and Tech-nolog y', Research in Phenomenolog y, No.IX,1979 에서 아팬은 다응과 같이 쓰고 있다 (p.3 6). 그러나 베버는 가치중립적 과학과 기승운 넘어선 유형의 합리성이란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나의 질문에 질대 부칭칙인 대답운 재시하있다. 베버의 이 대담이 현대 서구의 이대운로기 세계에서는 모범칙인 대답이 되어 있는 것 갇다. 베버는 방법론적 이해의 잉여운 '가치중립칙' 이해에 국한시켰으며 이 ’가치중립칙' 이해가 '합목적적_합리적 행 위'상 '합목적칙_합리칙으로 이해'하는 이상적인 유형의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합 목적칙_합리칙 행위'는 '도구직 행위'라고 불리울 수도 있다. 이러한 행위가 성공하는 겅우에 '합목적칙_합리적 행위'듄온 법칙과학의 ‘만약 ••• 이 면 ••• 이다’ 규칙운 기술칙 치방의 '만약 …이면 ... 이다’ 규칙에로 성공적으로 전환하는 것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 로위이 용러분 한석넘 되어국거선한(나된가 치재의중조미립칭로칙된서) 의 수 기도합승 리척있성다 .에수 단그대과리한 하 혹여베격 버의베의 버 합는기리 본성방적운법인 적 파 발악이상하해온는가 도데하구는에직 국일합한운리시 성인켰에간다.서행 나그온러 나것이 사다.회 학에 있어서의 합목척척_합리격 이해웅 위해서는 행위자가 법칙걱 규칙 둔운 수단과 방법에 관난 기술적 져언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웅운 와인해야 한다는 최대한의 조건운 곡 이행해야 할 민요는 없다는 김이 지직되었다• 그의 행위윤 그러한 유형의 도구직 합리성에 비추어 아해하기 위해서 행위자가 그의 목칙운 미리 진재하 고, 또 그 목직운 달성하는 데 칙 합한 수단과 방법에 대한 그의 믿음도 진제하고 하는 행위가 합리칙인 행위였다는 김만 와실히 해두면 족하다. 그리하여 그러한 목칙에 대 한 지향과 수단에 대한 믿음운 가설칙으로 발견하고 겁중하는 경험적이고도 치유적인 잉춘 이해가 하게 된다. 행위자의 행위가 기술걱 수단-목걱의 합리성이라는 의이에서 합리칙인 것으로 이해찬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관정에서 이다.

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예컨대 17 세기에 ‘진보'라는 개념이 처음 으로 토의되기 시작하였을 때 진보주의자들은 ‘뉴 몬 이 아리스토텔레스 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는 주장으로 토의 의 결론을 맷곤 하였다. 셰 익스피어가 고대의 어떤 비극작가들보다 더 나은 극작가였다든가 또는 호머보다 더 나은 시인이었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 무도 없 을 것이다. 과학자 뉴돈이 과학자 아리스토텔레스보다는 과학적 지식에 있어서 사실적으로 진보 를 하였다는 접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 다. 백과전서파에 속하였던 사람들이 진보개념을 신속히 일반화시켜 과학 뿐만아니라 정치제도나 도덕에까지 적용시켰지만 19 세기에는 명백한 것 처럽 보였던 그러한 일반화가 20 세기에 와서는 매우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꽁트 (A . Com t e) 는 과학의 성공을 치하하면서 실중주의 철학을 건립 하였다. 꽁트 가 보기에는 인간의 역사는 성공의 역사이다. 원시적 신화 에서 출발 하여 이러한 신화 들 이 세련되고 순화되어 결국은 고동종교가 발생하였고, 고등종교는 다시 풀 라돈이나 칸트의 형이상학적 이론에 자 리 룽 내어주게 되었으며, 오 늘 날에는 결국 형이상학 그 자체도 ‘실중과 학'에 자리 플 양보하게 되었다는 것이 꽁트가 본 대체적인 인간의 성공 사이다. 이와 같은 성공사의 주역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과학이다. 최 초에 과학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이 놀라운 그 지적 성 공 때문이었다면 다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엄청 난 뭉질적―기술적 성공 때문이다. 우리는 기술적 성공이 설혹 우리의 삶을 위 태롭게 할 때조차도 그 성공에 사로잡혀 있다. 실증주의자들이 가치판단을 어떠한 인식적인 자격도 없다고 의심하는 하나의 이유는 가치판단은 ‘과 학 적 방법으로 검증'될 수 없다고 보기 때 문이다. 그리고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푸꼬의 논의에서도 윤리적인 문제에 관하여서는 보편적인 합의, 또는 대다수의 합의라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낙태가 옳은지 그른지 또는 동성연애가 옳은지 그론지는 모든 사람이 만족할 논중적인 대답이 나운 수 있는 문제 같지는 않다. 그 반면 어떤 과학이론의 옳고 그 름 은 만인 이 만족할 수 있도록 논증될 수 있다고 널리 믿고 있다. 우리가 보통 과학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적어도 과학에서 예 측 하는 것들 이 공적으로 논증될 수 있고, 과학이 내놓는 결과에 대해서 모든 사람

이 합의할 수 있고, 또 과학이론에서 예측된 현상들이 실지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물론 순환논법에 빠질 위험은 있다. 즉 만약 우리 룹가 합동.리일.적.시 한철다차면와 윤다리수적의안 동문의제룹에 얻서을는 수모 든있 는합 리결적론인으 로사 람나들아의가 는동 의절를차 얻을 수는 없다는 베버의 주장은 설혹 그것이 옳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동의 뭉 산출하도록 보장되어 있는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동의를 얻 을 수 없 다는 뜻 이 될 것 이 다. 가치판단이 거의 오은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겁증될 수 는 없다는 접을 관찰함으로씨 우리는 가치판단이 모든 합리격 인간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검증될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은 경국 우리가 합리성운 저웅질할 수 있는 어떤 검사기준을 가지 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베버의 주장에 의하면 우선 우리가 어떤 방식 으로든 합리적인 사람들의 여론조사 물 하고 그런 다음 그들이 어떤 가 치판단의 진위문제에 동의할 수 있는지 없는지 를 보면 된다는 것이다. 베버가 들고 있는 모든 예들이(중국의 만다린 같은 예) 결국 보여 주려 고합. 리.하.적는 인 바사는람 들가치과판 결단코이 같교지육 받않고다) 지이 능만을족 가할진 수 모 있든도 사록람 (검이증것될은 수모 든없 다는 점이다. 베버의 논의는 겉으로 보면 대다수에 호소하는 논법이다. 그는 질중과학'에 관하여서는 모든 교육받은 사람들이 합의접에 이물 수 있으나 윤리적 가치의 문제에 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에 호 소하고 있다. 이 입장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비교해 보는 것도 홍 미로운 일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윤리학에서도 물론 항상 대다수의 동의를 얻으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고 말하였다. 현대인들의 귀에는 엘리트주 의를 옹호하는 말로 들리겠지만 때때로 우리는 오직 현명한 사람만이 설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가 현명하고 누가 현명하지 못한 지 가려내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들 자신의 판단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 다. 임의적으로 받아들인 과학이론이 참이라는 데 대하여 만장일치가 가 능하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사실은 대개의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서 놀 라울 정도로 무식하며 많은 이론들, 득히 정밀과학의 이론들을 파악하 려면 수학적 지식이 상당히 필요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해조차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이 물론 이러한 접은 안정하지만 문

제의 핵심과는 관계가 없다고 봉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과학자들 의 기본철학이 되어버린 듯한 약화된 조작주의 o p era ti onal i sm 에 의하 둘면찰. 이가.과며.능학 .한이이 론결결의과과 를들내 은용얻 은을우 리수다 름가.있 이 을이 . 아러.것 니저.이 라러.다 한.는바 로행.형 위.식검 를.의증 될수.전 행.술수 하. 로 면있. 는표이. 현 이러.될 론처. 의수러. 한.결있 기과관.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의 진술들은 만약 참일 경우 적합한 실험을 충분 히 반복함으로싸 참임이 논증될 수 있다. 과학이론에 대한 이러한 설명 에는 많은 난접이 따른다. 실험을 고안하고, 수행하고, 또 평가하기란 비전문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다. 그러나 정밀과학에서의 어떤 이론들이 실험적으로 적합하다는 접에 대해선 실지로 광범한 의견 의 일치가 있어 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비전문가들도 그러한 이론들을 받아 들 일 것인지 아닌지는 그들이 전문가들의 이야기에 따르는지 아닌 지에 달려 있 는 문제일 수 있지만 적어도 전문가들만큼은 그러한 문제 에 관하여 의견의 일치 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도구주의 그 자체에서 합리성이 그렇게 간단히 도출될 수 있 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과학의 결과들이 엄청난 실천적 가치를 가지 고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미 지적하였다시피 교육받 은 사람들 중의 그 누구도 과학이 가치 있음은 오로지 그것이 실천적으 로 응용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설혹 실천적 응용 만이 과학의 유일한 가치라 하더라도 합리성까지도 그 유일한 가치가 실천적 응용에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가 설정한 다양한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주는 도구물 가진 다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무슨 목표를 선택해야 할지 를 아는 것도 또한 가치 있는 일이다. 만약 ‘합리적 검증'이라는 말이 그 정의상 수단과 목적의 연관관계 를 설정하는 데에만 국한된다면 가치 판단들의 참 • 거짓이 ‘합리적으로 논증'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 러나 문제는 우리가 왜 합리성을 그렇게 편협하게 생각해야 하는가이 다 .3) 3) 그러한 편협한 합리성의 개념이 대머에서 미못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아펜은 다운과 갇 이 쓰고 있다(상게서,p ,37) . ‘아해'에 관한 베버의 방법론은 그의 역사찬학과 완비하게 인치하였다. 왜냐하면 서구 문명사 문 나 음 대로 재구성하는 맥락에서 그는 걱어도 이 부분의 • 여사가 '합리화 ra ti ona li za ti on’ 의 부단한 발진으로 파악찬 수 있고 또 동시에 미혹·운 께치는, 또는 그 가 찰 하던 말로 '마법운 무는' 과칭으로도 파악된 수 있다는 치유적 가선에서부터 춘

말하있기 때문이다. '합리화'라는 말운 그는 사회 • 문화칙 재계의 모든 분야에서. 목히 경재와 관료행정 분야에서 과학과 기승의 진보의 끊입없는 잉향 아래 수단과 목칙의 합리성운 환용하는 과칭으로 이해하였다. 만면에 ‘이혼운 깨치거나' ‘마법을 무는' 과정 운 그는 공통구칙으로 받아둔여진 종교적 또는 찬학칙 가치질서나 세개관운 와해시키는 과칭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베버는 그의 개인칙 세계관운 위해서 과학과 기승의 발 전으로부터 실천칙인 건과문운 도춘시키려 하였다. 그라하여 그는 엄밑하고 진지한 사 람은 다음과 같은 봉찬운 받아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합리화'라는 관정에서 인간 둥이 진보하였지만 그 반대급부로 최종의 가치나 규법둥운 합리칙으로 평가하려는 생 각은 포기하여야 하였다. 대신에 가치나 규범둘은 다원직이기 때문에 또는 베버가 말 한대로 ‘다신돈격이기 때문에 인간둘은 가치문계에 관하여는 합리 이전의 궁극걱인 양 심의 걷단에 의존하지 않운 수 없다.

다수주의도 또한 지지될 수 없다. 참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관하여 의 견의 일치를 봉은 분명 신나는 일이다. 그리고 동료와 의견의 상충을 피하는 것도 항상 좋읍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문제에 관해서는 자신의 판단이 대다수 사람들의 판단과 다를지라도 자신의 판단을 고수 해야만 할 때도 있다는 점을 불편하지만 수세기 동안 알면서 살아 왔 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을 고수하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 겨 오기도 하였다. 어떤 문제, 특히 그중에서도 윤리적인 문제와 관련 하여서는 고려해야 할 접둘이 너무 복잡하고 또 너무 부정확하여 과학 적 중명이나 과학적 정의 갇은 데에 기댈 수 있으리라는 희망조차 가질 수 없고 자신의 지각과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이미 오래 된 주장이다. 대다수 사람들아 만족할 수 있도록 ‘중명'하기는 바랄 수 조차 없는 바로 그러한 경우들에 있어서,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능 력이야말로 합리성의 최고구현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있도 록 중명하기는 불가능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러한 것들에 대한 믿 음이 불합리하다는 주장에 대한 논거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게 보인다. ◄)

4) 이미 5 장에서 보았다시피 다수의 합의에 의하여 합리적 수용가능성 여부가 걷정된다 는 이온은 스스로 논박되는 이온이다.

그러나 합리성에 대한 이러한 생각들의 지적 근거가 나약하다 할지라 도 도구주의와 다수주의는 모두 현대인들의 마음에 강력한 호소력을 지 니고 있는 것 갇다. 현대인들은 논증될 수 있는 성공을 좋아하며 판단 과 지혜에 대해서는 그러한 개념 자체에 불편함을 느낀다. 나는 사회학 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형태이든 사회주의의 형태이든 현대 산 업사회가 도구주의적 성공과 다수의 동의라는 테마에 왜 그토록 사로잡 혀 있는지 하는 문제는 탐구하지 않겠다. 그렇지안 이와 갇은 사회학적 사실은 합리성을 과학적 합리성과 동일시하는 생각이 접접 두드러져 가

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으며, 또 과학적 합리성이라는 개념이 그 자체 도구적 성공과 대다수의 (잠재적) 만족이 연관되어 있음을 임중하는 데 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고 보는 경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합리성에 대한 이와 같은 생각, 즉 합리성이 어떤 성격의 방법이든간 에(보동 그 성격은 모호한 채로 남아있다) 효율적인 수단과 방법의 관 계를 발견하게 해주고 그러한 관계를 ‘공적으로' 정립시켜 주는 방법에 있다는 생각이 그 생각대로는 지적으로 지지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지될 수 있도록 보완하려는 떳몇 철학적 시도가 있었다. 록 크, 버클리, 흄 등의 고전 경험론에 근거한 시도도 그 중의 하나다. 이 론고,전 적즉 우경리험가론이 정 말일 에말 할와 서수는 있현는상 론대p상 h들e은no m감e.n각.al si semns 이a t라i o n 불뿐리이우라는는 이이 론으로 굳어져 버렀다. 현상론에 의하면 책상이나 걷상 갇은 일상적인 대상조차도 사실은 인간의 현실적 그리고 가능적 감각에 나타나는 일군 의 객관적 규칙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물리적 대상온 밀이 지적하 다시피 ‘영원한 감각가능성'일 따름이다. 현상론의 주장을 또 다른 식으 로 표현하자면, 물리적 세계에 관한 이야기인 듯이 보이는 이야기는 사 실은 모두 감각에 관한 고도로 파생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0

0 J .s.M i ll 로 대표되는 고전칙 현상론윤 존재론적 현상온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20 세기의 현상온은 분석적 또는 언어적 현상론이라 부산 수 있다. 의미의 기본단위균 관념이나 명사로 보지 않고 문장이나 명계라고 본 20 세기의 경험온자운은 용리걱 대상이 감각의 구성웅이라 본 고전 경험온자둥의 주장운 물리칙 대상에 관한 명계는 모두 감각에 관 한 명계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재해석하였다.

이러한 견해의 장점은 그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과학뿐만 뭉말아. 할니수 .라 수행 . 하인.있 면식게. 적 이해.으 러준로. 저다. 러의는. 미한 . 접 이경있.다 는험.. 을. 모 모든하.든 게. 논 과의될.학의 이것 론이내은용다 이라만. 는 약.무 엇형이.인식 러.의지 저. 를 러.사 한.실명 백들행.히 위을. ‘경제적으로' 진술하는 한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은 과학자들의 유일한 관심은 응용이나 실천적 목표의 달성에 있 지 지식 그 자체에는 무관십하다는 지지되기 힘든 주장을 반드시 옹호 하지 않아도 된다. 현상론자들은 우리가 태양의 혹접이 무엇인지, 인간 의 참된 기원이 무엇인지, 태초에 우주폭발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동동 에 관하여 알고 싶어한다는 접을 반드시 부인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것들을 알고 싶어하는데 그 이유는 반드시 그런 것들을 앎

으로써 더 좋은 기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세면러 나련이 된그러 저철러학러한적한 것 분경들. 석험을이을 안 필얻다요게는하 겠될것지 은것만, ,이그 다 반라안야는다 이는형러 식것저을을러 한가입진 증행 . 하위많.기 은를. 위수사. 해행실.한서들.는.을다 무아러무 는엇한엇 을 。것경 든에좋험 다을모 ·지 고· 든나얻 . 지부게人· 卜 르될실· 않 는는은 .것 다것이.궁· 은다 .국 는우적 반· 리야. 으형가 . 로식아 .을사 러·도 . 실 저· 구가.들 러적 ·진.에 한. o」.1 예 관행.것 측. 심위.을.o을 를 . 다. · 하 가수.는또지 행 .게 한한것. 다과되。. · 면는. 와마 찬이이. 동 가러유A.· 지저가. 어 라는 주장이 입증될 수. 있는 방법은 있을 것 갇지 않다. 이 주장에 의 하면 어떤 것에 대한 좋다는 진술, 또는 나쁘다는 진술은 아무런 인식 적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다시 말하여 20 세기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러한 진술들은 순전히 ‘정의적인 emot ive ' 것들이다. 그러나 현상론은 두 가지 접에서 실패하였다. 첫째 물질적 대상에 관한 진술이 현실적 그리고 가능적 감각에 관한 진술로 번역가능하다는 주장 온 사실상 거짓이다. 1930 년대 비엔나학단과 카르납의 저서에서 시작된 이 주장을 논리적으로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 라는 것을 현상론자들마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적 이론들이 하나의 전체로서는 우리로 하여금 일정한 행위를 수행하면 일정한 경험 을 갖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한다. 그러나 과학적 진술들이 하 나씩 개별적으로 일정한 행위를 수행하면 일정한 경험을 갖게 될 것이 라는 진술로 번역될 수 있다는 생각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환원주의에 불과한 것으로서 이제는 벌써 포기되었다. 둘째로 감각은 필연적으로 사적인 대상이다. 누군가가 어떤 감각을 가졌는지 아닌지는 단순히 그 에게 물어봄으로씨 실천적으로 결정될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이 자신의 감각을 기술하는 방식이 당신이 당신의 감각을 기술하는 방식과 갇다는 것울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면 우리는 즉각 일종 의 인식론적인 난접에 봉착하게 된다. 만약 합리적인 인간이 일칭한 행 위를 수행할 경우 어떤 감각을 가지게 될지를 예측하는 것이 과학의 내 용이라 한다면 내용 그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우리 는 예컨대 외계인들도 우리와 동일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말들저.할·은러 수.과 공학·있의 ·적어야.으 관 .로 찰할 ·적관것찰.예이다和핫.· 한.이 ·누러錢한. o· . 이o· 유일러·.로어저.. 날러.·카•한.르납행.이·과다위.. 를라.포 는퍼 ·수 · 행형갇. 한식은. 다으 · 면로철학. 이표자·현러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수행되어질 행위와 기대되는 관찰가 능한 사건은 감각과 같은 사적인 대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컨대 계량 도수 같은 ‘공적 ' 대상에 의거하여 기술되어야 한다. 요약컨대 고전 경험론, 현상론 동은 의마 있고 없음에 관한 잘 정돈 된 한 기준을 마련해 주었다. 즉 어떤 진술이 감각에 관한 진술로 번역 될 수 있다면 의미가 있다는 것이 그 기준이다. 그러나 여기서 ‘번역'이 라 는 개념이 절 망적일 정도로 모호하거나 아니면 과학적 진술들 자체가 우선 그 기 준을 만 족 시키지 못한다 는 접이 밝혀졌다. 사실판단은 감각 에 관 한 진 술 로 번 역 될 수 있지만 가치판단에 관하여서는 그러한 번역 이 붕 가 능 하다 는 근 거에서 두 판단 을 엄격히 구분지으려는 시도에는 감 각적 진술 에로의 사 실 판만의 번역가능성이 한번도 임중된 적도 없고 또 입 증될 수도 없 다 는 난 접 이 따 른 다. 경험주의적 환원론은 사실적인 것 과 평가 칙 인 것 을 엄격하게 구분시켜 주었지만 그 대신에 사실적인 것 이 전 적 으로 왜 곡 되어 버렀다는 댓가 를 치루어야만 하였다. 그런데 ‘합 리적인 것이 왜 좋은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자는 것이 우리의 원래 목표이었다. 합리성이 좋은 이유는 그것이 수단과 목 적간의 믿 을 만한 관계 를 밝혀 주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우리가 멘 먼저 고찰해 본 대답이었고 곧 그 대답은 너무 편협하다는 이유로 거부되었 다. 현상론도 만약 그 이론이 참이 라고 한다면 도구적 결과 때문에 생 긴 과학이론에 대한 관심과, 과학이론이 자연의 과정에 관하여 말해 주 는 것을 배우기 위하여 생긴 과학이론에 대한 관심, 이 두 관심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충돌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로 고찰되었다. 도 구적 관심과 순수이론적 관심간의 간격은 어떤 의미에서는 기술적으로 좁혀질 수도 있다• 물론 아직도 양 관심간에는 어떤 차이접이 있는 것 은 사실이지만 순수이론적 관심조차도 사실들에 대한 관심일 터인데 사 실들이란 논리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결국 도구적인 성질을 갖고 있음이 드러날 것이다. 모든 지식은 수단과 목적간의 연관성에 대한 지식임이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어떤 목표 륭 달성하기 위하여 수단과 목적간의 연관성에 관심을 갖게 될 때 우리는 그 관심을 ‘실천적' 관심이라 부르 고 순수한 호기심에서 그러한 연관성에 관심을 갖게 될 때는 그 관십을 이론적 관심이라 부를 따름이다. 이미 지적하였다시피 과학의 모든 진 술들을 반야 행휘 A 홍 수행하면 겅과 B 흥 형홉 것이다라는 형식을 가 진 진술로 환원시키려는 이 시도는 실패하였다.

관찰진술은 감각언어가 아니라 물리적 사물언어로 표현된다는 카르납 과 포퍼의 주장은 과학자들이 실지로 하는 실천을 일반화시킨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분명 옳은 주장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식론적인 주장으로 만 내세워질 때는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우선 어떠한 관찰진술일지라 도 감각에 대한 언급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내성은 과학적 관찰의 한 방 식으로 간주될 수 없을 것이다. 내성은 과학적 관찰일 수 없다는 데 대 하여 동의할 심리학자는 많겠지만 철학적 독단과 심리학적 독단의 방해 룹 받지 않고,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내성적 보고에 의존하는 실험둘을 계속 수행해 온 심리학자들이 있음도 사실이다. 사실은 카르납은 행태 주의 심리학자들만큼이나 독단적으로 내성을 금하려 하지는 않았을 수 도 있었다. 카르납은 감각보고들이 관찰보고가 아니라 행태적 자료로 간주되는 한 감각보고의 사용을 허용하였을 수도 있다. 이 때 ‘행태 behav i or’ 라는 것은 언어적으로 보고하는 행위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 나 내성적 보고를 받아들임을 ‘언어적 행태로부터의 추리’로 간주함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치 않다. 감각이 아니라 울리적인 대상에 관한 보 고의 경우, 예컨대 ‘나의 앞에 책상이 있다’와 갇은 보고의 경우에서조 차도 만약 보고하는 사람이 자신이 보고한다는 사실을 관찰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중 어떤 이론이 없다면 그 보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보동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관찰 그 자체도 이론적으로 설명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세계를 정합적으로 해석하는 데 필요한 한 요구조건이 다 . 만일 누군가가 어 떤 장소에 책상이 있었다는 것을 우서 력으로 관찰하였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이 ‘관찰보고'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이론체계와 정합되지 않으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 한 뜻에서 모든 관찰보고는 ‘추리적'이라고 기술될 수 있는 요소를 가지 고 있다. 반면 어떤 의사가 환자로부터 고동을 느낀다는 보고를 받을 때 .::z. 의사가 어떤 ‘과학적 이론’에 근거하여 환자의 언어적 보고로부터 .::z.가 고동을 느끼고 있다고 추리하게 되는지를 알기란 매우 힘들다. 사 람들은 일반적으로 고동을 느끼는지 아닌지를 말할 수 있다는 일반적인 가정이 하나의 이론으로 간주된다면 사람들이 자신 앞에 책상이 있는지 없는지용 말할 수 있다는 일만적 가정도 또한 하나의 이론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신 앞에 책상이 있다고 말함을 받 아들이는 것과 또 누군가가 고통을 느낀다고 말함을 받아들이는 것 사 이에 방법론상의 기본적인 차이접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포퍼와 카르납은 책상이 있다는 진술은 공적으로 점검될 수 있지만 고동을 느낀다는 진술은 그럴 수 없다는 방법론상의 차이가 있다고 대 답할 것이다. 그러나 둘 다 모두 물리적 대상에 관한 관찰보고가 항상 공적으로 접검될 수 있다는 접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 관찰보고들 은 대개 사용하려면 상당한 훈련을 필요로 하는 도구의 도움을 얻어 이 루어진다. (매우 고성능의 현미경을 동하여 ‘보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는 상당한 특수 훈련과 기술이 필요하며 그러한 기술을 모든 사람이 다 획것은득 할합 리수적 있믿는음 것은은 공 .적아.니으.다.로. )접 검아될러 한수 인있식다론는적 합독리단성을의 받칭의아의들 인한다 는부 분을 이운다. 그러한 인식론적 독단의 수용이 합리성의 정의의 한 부분 이 된다는 것은 매우 편리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적으로 접검될 수 있는 것만이 합리적아라는 주장을 지지하기 위한 어떠한 다론 논의를 펄 필요도 없어진다. 그러한 주장의 근저에는 아마도 무엇이든 공적으 로 접검될 수 없는 것에서는 의견의 불일치가 생기게 마련이고 그 불일 치가 어느 쪽으로든지 해결될 수 없는 곳에서는 옳고 그름도 없다는 생 각이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갇은 생각은 내가 다수주의라고 불렀던 주장, 축 합리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은 대다수 사람들이 만 족할 수 있도록 검증될 수 있다는 뜻이 합리성의 개념에 함축되어 있다 는 주장을 가정하고 있다. 논리적 경험주의가 기본적으로는 도구주의와 다수주의로 흐르려는 큰 문화적 물결의 한 세련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접은 논리적 경험주 의의 후기역사물 보면 명백해진다. 논리적 경험주의자들이 1936 년대에 벌써 현상론을 포기하였지만 그 후 20 여 년간 이 철하운동이 와해되고 사라져 버릴 때까지 그 운동에 가담하였던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의 목 표'에 관하여 즐겨 논의하였고 과학의 목표물 예촉(물론 여기에는 더 부가할 것도 있고 제한을 가해야 할 것도 있지만 이 정에 . 대해서는 곧 언급을 하겠다)과 동일시하기룹 좋아하였다. 과학의 목표가 예측이라는 생각은 실중주의의 초기부터, 죽 꽁트의 저술에서부터 있었던 기본적인 발상이었다. 이미 보았다시피 이 생각은 현상론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적어도 심각한 철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현상론이 전제 되어 있는 한 인식적으로 의미 있는 모든 진술은 숨겨진 예측이거나 숨 겨진 예측둘의 무한집합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상론이 포기된 후에도 이러한 이론이 되살아남은 마치 임상환자의 연상 속에서

그의 심리적 '방어’가 모두 제거된 후에는 ‘원초적인’ 것이 드러나는 것 과 갇다고 할 수 있겠다. 과학의 목표가 성공적으로 예측하는 것 (또는 성공적인 예측에다 ‘단순성'이라고 간단히 기술될 수 있는 것을 곁들여) 이라고 말함은 과학은 오직 실천적인 목표만 추구한다고 말함과 비슷한 것 같은데 아와 같은 위험스러운 주장을 하고 싶어하는 철학자는 아무 도 없었다. 과학을 순수히 도구적으로만 생각하려는 철학자들이 그들 스스로가 실천적인 것을 숭상하거나 과학적 지식 그 자체의 추상적 미 룹 감상할 수 없는 편협한 마음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 는 것이 아니라, · ‘인식적으로 의미 있는' 것을 예측하는 데 가치 있는 것과 동일시함으로써 모든 형태의 몽매주의 obscuran ti sm 와 형이상학을 단번에 제거해 버릴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이들에게 형이상학’이란 여러 가지 종류의 초월적 사변에 대한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이 싫어하고 영려한 것은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변들이었다. 우리가 기꺼이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역 밖에서는 지식과 이성 의 가능성조차 인정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학의 성공에 최면화된 철학적 경향이 우리의 문화에 충현하게 되었음은 과학이 우리의 문화일반에서 점접 엄청난 특권운 차지하고 대신에 종교, 절대윤리, 초월적 형이상학 둥리은고 점내차가로 보 그기 에세 력과을학 이잃 어문. 화.감일.을.반 봉에 서때 특당히연 히높 은기 대위되치었뭉던 차바지이하다게. 그되 었음은 종교, 윤리, 형이상학 둥에서나 봉 수 있는 결말도 해결도 없는 논쟁들이 과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듯하다는 사실 이외에도 과학이 도구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문화의 도구주의적 경향을 합리화한 전문적인 철학자들 이 그들 자신은 동속적이거나 순전히 실천적인 사람들만은 아니었기 때 문에 '과학의 목표'를 좀더 넓게 기술하여 단순한 성공적인 예측 외에도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있다는 여운을 좀더 공개적으로 내놓고 말하게 되 었다는 접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1940 년과 1950 년대의 논리적 경험주의자들은 예측 이외의 과학의 목표로서 다음과 갇은 것들 운 열거하였다. 죽 법칙의 발견, 미래사건이 아니라 과거사건에 대한 추축, ‘설명'의 발견 등이 그것이다. '설명'이란 이들에게 있어서 법칙으 로부터 예측이나 추측을 단순히 연역해 내는 것을 뜻하였다. 여기서 홍미로운 일이 발생하였다. 자연의 법칙에서 유도되는 예측만

을 위한 것이 아니라 법칙 그 자제륭 위한 법칙의 발견에 과학이 관심 을 가진다는 접을 명백히 하기 위하여 이들은 ‘과학의 목표는 성공적인 예측'이라는 단순한 공식을 앞에서 열거한 몇 가지 사항으로 대치시켰 다. 이러한 사항들의 목록은 사실상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 다. 자연의 법칙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연의 법칙들, 죽 거짓으로 만들 수 없 는 진술둥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여 러 일반적인 정향 등 을 실지로 기술해 주는 소위 진화론적 이론의 ‘법칙' 둘, 그리고 십지어는 개별적인 집단이나 한 개체가 가지고 있는 순전히 우연적인 성향에 대한 진술들까지도 포함된다. 진화론적 이론의 기조나 경제이론의 기초 를 제공해 준 것과 같은, 오랫동안 타당성을 지녀 왔으 며 또 광범위한 설명적 의의 을 가지고 있는 우연적인 일만명제들까지 포함하여 소위 ‘자연의 법칙'들을 발견하고, 집단이나 개별적인 유기체 둘의 성향 d i s p os iti on 에 관한 의의 있는 진리 룹 찾아내려 하며, 이러한 것 들을 하나의 연역적 (그리고 귀납적) 체계로 조직하려 하는 것이 과학 자둘의 목표라고 말한다면 물론 툴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왜 이와 같 이 특별하게 열거해야 하는가? 그와 같이 열거해야 하는 이유는 과학이 과학자들이 찾으려는 모든 종류의 진리 를 전부 포함할 수 있을 정도로 포괄적이어야 함과 동시에 반대할 만한 것들(‘인식적으로 별 의미가 없는 것들')은 하나도 포함시 키지 않을 정도로 협소하기도 해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어떤 문장은 그것을 김중 또는 반중할 수 있을 때, 오직 그때에만 의미 있 다’와 같은 ‘인식적으로 의미 있음의 기준'운 찾으려는 시도가 이제는 여러 진술들의 유형들을 열거하려는 시도로 대치되었다. 이에 따르면 한 진술은 열거된 유형에 속할 때 받아들여지고 그렇지 못할 때는 거부 된다. 그러나 왜 이러한 시도를 철학자들이 해야 했는가? 설혹-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분야에서 거론되는 모든 진술들이 그러한 유형의 것들일지라도(정말 그러한지도 전혀 분명하지 않다―_-역사적 설명이 과거사건에 대한 추측들을 ‘법칙'에 포섭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을까?) 그러한 유형의 진술들을 검증하는 것만이 과학이라 불리우는 이성의 특 수응용뿐만 아니라 이성 그 자체의 목표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철학자 둘은 물론 ‘과학'이 이성운 남김없이 대변해 준다는 데 대하여 심각한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왜 그러한 의심을 하지 않았는가? 그들이 의심을 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기본적으로 경험적이고 수학적

인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지식체계라는 의미로서의 과학과, 과학의 관심과는 다른 관심들에 적용될 수 있는 방법에 의하여 추진되는 비형 식적 이성간에 대립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본 대립은 오히려 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지식과, 계시라든가 아니면 일종의 이상스런 초월적 능력에 의거하여 진행되는 듯한 사이비 지식간의 대립이었다. 그들에게 이성은 과학과 同延的이어야 했으며 과 하 o.1 회해 나은 이번 것도 철 수 없렀다. 그러나 이성을 과학과 외연상 동일한 것으로 보려는 이들의 주장은 특이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 둘은 예컨대 역사적 지식 갇은 것이 있음운 부인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도 과학이라는 입장, 또는 심지어는 과거에 관한 개별적인 진술들을 댑치에 포섭시키는 일이 역사가들의 할 일이라 보는 입장에까 지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은 액면 그대로 본다면 거짓인 듯하다. 논리적 경험주의가 1950 년경에 와해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 별로 놀라 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실증주의적 경향을 오직 하나의 관점에서만 살펴 왔다. 그런데 논리적 경험주의자들은 상당히 다양한 철학적 관심둘을 가졌었고 또 많은 공적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 리가 지금까지 문재삼아 온 관접, 죽 ‘합리성이 왜 좋은가?'하는 문제 의 관접에서 본다면 합리성은 수단과 목적의 연관성을 발견해 주기 때 문에 좋다는 대답밖에 할 줄 모르는 입장을 철학적으로 옹호해 준 철학 운동이 논리적 경험주의였다. 현상론이라는 철학적 이설이 논리적 경험 주의에 그러한 입장을 옹호할 수 있는 한 홍미로운 방식을 제시해 주었 다. 그러나 현상론이 쇠되하고 그 입장에 대한 철학적 옹호가 단순한 옹호로 대치되었을 때, 그리고 이 단순한 옹호가 여러가지 예외나 조정 등을 허용합으로씨 좀더 ‘합당하게' 되었을 때, 논리적 실층주의의 힘은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예측을 발견하고, 추측과 자연의 법칙을 찾아내며 이렇게 발견하고 찾아낸 것들을 체계화하는 것이 모두 이성 그 자체의 목표라고 보는 입 장이 가진 난접은 단순히 그렇다고 믿어야 할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한 입장이 거짓이라고 믿을 근거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만약 자연 의 법칙이라는 개념이 확대되어 자연의 법칙의 발견이 개별적 유기체들 에 관한 성향적 dis p o s it ion al 진술들의 발견까지 포함한다면, 성향이라 는 개념이 또한 너무 넓어(또는 너무 모호하여) 어떤 과학자가 동료의

명성에 질두심을 느낀다는 진술까지도 ‘성향'을 나타내는 진술로 간주된 다면, 그리고 동료의 명성에 질두를 느낀 그 과학자가 동료를 조롱하였 다는 진술도 ‘개별적인 사건을 법칙에 포섭시키는' 한 사례라고 한다면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은 일반적 법칙에 대한 진술이라든가 아니면 일 반법칙에 포섭시키는 진술로 해설될 수 있게 될 것이다. 누군가가 도너 적으로 선하다는 말까지도 그에게 하나의 ‘성향'을 부여하는 말로 간주 될 수 있을 것이다. 인식적 탐구 일반의 목표를 이러한 종류의 목록을 열거함으로써 밝히려는 시도의 난접은 그 목록 자체가 다소간 문자 그 대로 해석되지 않을 수 없다는 접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 목록에 열거 되는 진술들에 과학자가 발견하고자 하는 대부분의 진술들이 포함되지 조차 않을 것이다. 특히 ‘과학자들'이란 말이 사학자, 정신의학자, 사회 하자 들까지 포함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만약 그 목록에 열거된 용어들을 좀 느슨하게 해석하여 역사가들의 진술들(그리고 일상심리학 적 용어로 된 기술적 진술들)까지도 그 목록에 포함된 유형에 속하는 다것.으 로여 하간돈주 될왜 이수. 러.있 한.다 면종. 류 .사 의실 진상술 그들 만목이록 은합 리가적치 가검 중없이는 될것 이수 되있고는 만것 인지에 대한 인식론적인 설명이 없이는 그러한 목록은 합리적 탐구의 한계에 관한 단순한 가정에 불과할 것이다. 목록의 형식이든 또는 다른 어떤 형식이돈 이러한 형식의 단순한 가설은 논리적 경험주의자들이 소 위 ‘인식적 의미 있음의 기준'에 있다고 믿었던 배제적 힘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방법’ 맹신주의 ‘합리적인 것이 왜 좋은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단순히 합리성 으로 인하여 실천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라든지 수단과 목적 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으므로 여러 시대물 동하여 상당한 호소력을 지녀 왔던 또 다론 가능한 대답을 고찰해 보아 야겠다. 많은 철학자들은 과학이 독특한 방법에 따라 진행된다고 믿어 왔다. 진리의 발견을 보장해 주는 방법이 실지로 있다고 한다면, 과학 의 방법 이외의 다른 어떤 방법도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리고 과학이 업청난 성공을 거둔 반면 과학 아닌 다른 영역에서는 계속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이유가 과학만이 줄기차게 이 방법을 사용하

였기 때문이라 한다면 아마도 합리성은, 그러한 것이 있는 한. 과학적 방법의 획득 또는 사용과 동일시되어 o.F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합리 적인 것이 좋은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우리가 만약 합리적이라면 진 리 물 (어떤 종류의 진리에 관심이 있든) 발견할 수 있고 합리적이 아니 라면 극히 우연적인 경우 물 재외하고는 진리 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을 것이라는 대답이 나울 것이다. 도구주의자 들 의 견해와 마찬 가지로 이 견해도 철학사를 통하여 홍망성쇠를 거듭하여 왔다. 밀의 r 논리학 Lo gi c 』이 발간된 1840 년대부터 카르납의 『 확률의 논리적 기초 Log ica l fou ndati on of Probab i l ity』 가 출 간되 기 까지 영 향 력 있 는 과학 철 학자들은 경험과학들의 가능근거는 일종의 형식적 방법 (‘귀납논리')이 며, 계속해서 노력하면 1879 년 프레게의 저서에서 발단되어 이루어진 연역논리의 형식화에 비견할 만한 귀납논리의 형식화도 이루어질 수 있 으리라고 줄기차게 믿어 왔다. 만약 그러한 방법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연 비목 이 사실이 그대로 방법이 합리성을 모조리 대변할 수 있다는 접에 대한 증명이 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 방법 이외의 다른 방법에 의해서 정당화되거나 합리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진라들이 있다고 주장 한 사람 들 에게 증명의 부담이 상당히 전가되었을 것이다.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소위 ‘배이즈 학파 Bay e sia n School’ 에 따르면 철학자들이 형식화하려고 애써 왔던 귀납논리의 일반적 성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우선 과학의 언어가 형식화되었고 과학자등이 이 형식언 어로 '관찰문장’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일칭한 수의 관찰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가칭한다. 그런 다음 문재되고 있는 여러가지 가설들이 이 성식언어의 공식으로 표현된다고 가정한다. 이때 소위 ‘확증의 기능 confi rm ati on fu nc ti on' 울 어 떻 게 정 의 하느 냐 하는 것 이 귀 납논 리 가 해 결 해야 할 문재로 등장한다. 확증의 기능이 라 함은 관찰적 증거와 상관 관계에 있는 각 가선들의 수학적 확 윤 ,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감각의 가선에 중거가 부여해 주는 ‘지지의 정도 de gr ee of su pp or t’를 결정하 는 확 률 적 기능운 뜻한다. 보동 우리는 각각의 가설이 참이라고 할 때 주어진 중거가 어떤 화문운 가질지 를 알고 있다고 가칭한다. 이것이 소 위 ‘선행화율 for ward pro babil ity', 죽 가설이 주어졌을 때 중거가 갖는 확 률 이다. 우리가 계산하고자 하는 것은 소위 ‘역확률i nverse p robab il­ ity', 죽 증거가 주어졌을 때 가설이 갖는 확률이다. 베이즈의 정리 0 에 ® 와융온에서 P,( q/p)의 값이 주어졌운 때 그 여와웅, 즉 P,( p/q)의 값은 어렇게 계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항상 재기되었었다. A 가 남자일 때 A 가 사람일 와윤은 뭉온 1 이다. 그러나 역으로 A 가 사람일 때 A 가 납자일 와윤은 1 이 아니다. 가선이 주어진 조건와문의 값은 그 여와율의 값만 안다고 해서 전정되지는 않는다. 거기에다 또 다른 와운의 값이 추가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계산천 수 있다. 이러한 계산의 기조성 재공한 것이 바로 베이즈의 칭리이다. 베이즈의 정리 윤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다읍과 같이 나 타낼 수 있다. PAq /p)= P,R(p(P& )q ) = R[(p& Pq,()p v& (pq &) ~q)] =. R(p& qP), (+pR& q(p) & ~q) [P ,(q) x P,(p/ Pq,)(]q)+ X [ PP,,((p~/ q q)) x P,(p / ~ q))

서는 이 '역화웅'이 선행확률과 또 다론 확률, 이른바 ‘선획나 r pr io r p robab i l ity의 함수로 주어진다. 선확률이란 과학자들이 관찰적 증거룹 검토하기 이전에 여러 가지 가설들에 부여하는 확률 또는 ‘주관적인 믿 음의 정도 '물 말한다. ‘선행확 률 '을 계산하기 쉬운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이 두 징우는 매 우 혼한 경우들이다• 죽 (a) 가설이 증거뭉 실지로 함 축할 때(이 정우에 주어진 가설에 대한 증거의 ‘ 선행확률'은 1 이 된다)와 (b) 가설 그 자체 가 증거의 발생확률이 r 이라는 것을 내용의 일부로 하는 동계학적 또는 추정적인 가설일 때이다. 베이즈의 정리 를 적용하는 데 따르는 난점은 —이 난접은 너무 심각하여 이론을 확증하려 할 경우 이 정리가 얼 마만큼 중요하며 또 유용한지에 대하여 철학자와 동계학자들이 크게 양 분되어 있을 정도이다――-선확률의 측정, 데파네티와 쌔비지의 용어를 빌린다면 '주관적 믿음의 정도’에 대한 측정을 필요로 한다는 접이다. 우선 당분간 그 ‘선행확률'이 실지로 계산될 수 있는 가설들에만 우리 의 논의 뭉 한정시키자. 아러한 종류의 가설을 확증하는 방법은 순전히 형식적인 방법이다. 즉 적합한 ‘입력'이 주어졌을 때 여러 가지 가설들 의 확증 정도 루 계산할 수 잇는 컵퓨터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 나 입력은 계산가능한 ‘선행확률' 뿐만 아니라 주어진 문맥에서의 선확 률의 측정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선확률의 측정을 ‘주관적 확융기 능'이 라는 말이 암시 하듯이 세 계 에 관하여 과학자들이 미 리 가지고 있는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 라고 간주한다면 세계에 관한 일 련의 실질적이고 사실적인 믿음들(또는 믿음의 정도들)이 그 방법 자체 에 입 력되어 있는 것처 럼 보인다. 오늘날 많은 과학철학자들이 문재를 보는 방식도 바로 아러한 식이다. 과학의 내용과 과학의 방법 사이에 분명한 구획선을 긋기란 불가능하며 과학의 내용이 변화함에 따라 과학 의 방법도 사실상 부단히 변화한다고 믿게 되었다. 베이즈의 정리가 정

말 이론에 대한 화중의 논리가 된다면 과학내용에 대한 과학방법의 이 의존성을 선확물기능을 동하여 형식화하는 방법을 제공해 줄 것이다. 문제륭 좀더 추상적으로 표현한다면 ‘방법’ 맹신주의자들은 합리성이 형식적인 부분과 비형식적인 부분으로 분해횔 수 없다고 가정한다. 그 러나 베이즈의 정리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죽 이 정리에 의하면 우리 는 심지어 과학의 영역에서조차도, 그리고 선행확률이 계산될 수 있는 이론들을 다우는 특수영역에서조차도 합리성을 두 부분으로 분해할 수 있다. 수학적으로 도식화될 수 있고 컵퓨터의 프로그램으로 될 수 있는 형석격인 부분과, 그렇게 도식화될 수 없고 과학자들이 실지로 가지고 있는 가변적 믿음에 의존해 있는 비형석격인 부분이 그것이다. 그런데 합리성의 형식적인 부분이 확실하게 바람직한 결과들을 낳았다면 얼마 나 좋은 일이겠는가. 만약 우리가 과학자들이 관찰을 주의 깊내 수 ,· 성하 고, 또 충분한 양의 관찰들을 수집하여 베이즈의 정리에 따라 확중도를 계산한다고 할 경우에 비록 시초에는 각자 주관적으로 가지는 믿음의 정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종국에 가서는 의견의 일치점에 도달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 나 바람직한 일이겠는가. 그런데 여기에 두 가지 찰못된 접이 있다. 첫째 찰못은 설혹 결국에 가서는 '선화물기능'이 말소된다는 점을 밝 힐 수 있다 하더라도, 또는 서로 다론 선확률기능을 가진 과학자들이 계속 더 많은 중거둘을 수집하여 베이즈의 정리를 사용한다면 결국 합 의접에 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의견의 수령이 상당히 신속해야 할 것이라는 접에 있다. 만약 서로 다른 선화률기능을 가진 과학자들이 예측된 현상이 발생할 때까지, 또는 수백만 년이 지날 때까지 의견의 합일점을 찾지 못한다면 결국은 의견이 수렵될 것이 수학적으로 보증된 다는 사실온 단기적으로 보아 별 소용이 없게 된다. 장기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그 장기라는 것이 지나치게 너무 길 수도 있다는 난점이 따른 다. 케인즈J .M.Ke y nes 의 유명한 말대로 ‘장기적으로 보아 결국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두번째 난접은 선화융기능상의 차이접이 이론들에 부여되는 실지의 확증도간에 엄청난 차이룰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이러 한 차이접둘이 일반적으로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해당될 수도 있다는 접에 있다. 이 접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만약 과학자들이 ‘합당'한 선확률기 능으로 시작한다면 ‘합당하게' 보이는 가설들에만 확증도를 부여할 것이

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합리성에 대한 형식적인 기술만 따른다면, 그가 논리적인 모순에 빠지지 않고 베이즈의 정리에 따라 화중도물 부여한다 면, 그러나 그의 선확률기능이 상당히 부당한 것이라면 여러 가지 가설 둘이 어느 칭도 중거로부터 지지를 받을 것인지에 대한 그의 판단(과학 자들과 일상인들은 실지로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판단을 한다)은 크게 ‘비합리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과학적 방법의 형식적 측면에 근거 한 형식적 합리성은 사실적이고 실제적인 합리성을 보장해 주지 못한 다. 이 말은 사실상 종 놀라울 칭도로 그 정확도가 높다. 실제로 벅스 A. Burks <3>는 ‘반귀납적 선확률기능'이라는 것까지도 있다는 점을 밝혔다. 죽 선확률 측정 중에는 과학자가 그것을 가졌을 경우 가설에 대한 중거 가 많아질수록(더 많은 중거라는 말의 사용은 우리가 정상적으로 갖는 귀납판단에 의거하고 있다) 그 과학자가 가설에 대한 가중치를 매우 오 랫동안 접접 낮추게 될 그러한 선확률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 벅스는 미시간대학교의 철학교수이자 컵퓨터학자로서 과학방법온 분야에 많온 논문과 저서산 내놓았다. 대표적인 논문으로서는 -The Log ic of C ausal Prop o sit ion s~ M i nd (l 951) 윤 둥수 있는데 이 논문에서 그는 현대 양상논리윤 이용하여 인과논리문 세 계화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대표적인 처서로서는 Chance,_C ause, Reason : An Inq u ir y inl o lhe Natu r e of Sci en li/i c Ev ide nce(The Univ of Chic a g o Press, 1963) 윤 꼽리운와 성수 향있적다 .와 물이론 객윤에 계서시 하그였는다 .귀 납법에 대한 흄의 비판에 동조하면서 새로운 귀납논

어떤 선확률기능이 합당하고 어떤 선확융기능이 합당하지 않은지를 결정해 줄 형식적 규칙을 추가시킵으로써 과학적 방법에 대한 현재의 형식적 설명을 보완하려는 시도도 이 난점을 벗어나는 한 방식이 될지 도 모르겠다. 그러나 합당한 선확률기능과 그렇지 못한 선확률기능을 구분시켜 주고, 이상적인 인간의 전체적인 심리를 완벽하게 기술해 주 는 일보다 더 단순할 일련의 규칙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어떠 한 이유도 있을 것 갇지 않다. 과학의 내용에 대하여 인간들이 실지로 내리는 판단들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치들로부터 완전히 유리될 수 있는 어떤 형식적 방법이 있으리라는 희망은 이제는 사라지고 말았 다. 그리고 설사 이상적으로 합리적인 과학자의 심리작용을 형식화하는 것까지 하나의 ‘방법’으로 간주할 수 있을 정도로 방법의 개념을 화대시 킨다 하더라도 °.1 리한 의미로서의 ‘방법'이 예술, 윤리 등등의 문제에 관한 우리의 판단과는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할 아무런 이 유도 없다. 사람들아 과학적 방법은 윤리, 예술 동등에 관한 믿음에는

적용되지 않거나 또는 그러한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유일 한 이유는 그들이 과학적 방법이란 결국은 하나의 형석격인 방법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 다. 나는 지금까지 과학적 방법을 형식화하는 데 대한 하나의 특수한 접 근방법, 즉 소위 ‘베이즈의’ 접근방법이 옳다는 것을 가정하고 논의해 왔다. 그러나 이 접근 방법에서 야기되었던 문제들과 유사한 문제들이 지금까지 시도되었던 여러 가지 다른 접근방법에서도 발생한다. 비록 귀납적인 방법 중에서 이론을 확증할 때만큼이나 ‘강력'하지도 않을 것 이고 매이컨 F.Bacon 이 말한 소위 ‘귀납법’에 좀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부분융 분리시키려 한다 하더라도, 다시 말하여 여러 가지 실례들을 충 분히 겁토함으로싸 단순한 일반화용 확증하고 그 일반화 물 ‘두사 p ro j ec t'하는 방법을 분리시키리 한다 하더라도 비슷한 문제들이 발생된 다. 귀납적 두사 물 위한 순수 헝석격 규칙 가운데 모순이 없는 것이란 있을 수 없다는 접운 굿멘이 밝힌 마 있다민 굿맨에 의하면 어떤 형식 적 규칙이 무모순적인 결과들을 낳으리라 바랄 수 있기 이전에 속성을 나타내는 술어들을 ‘두사가능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들과 그렇지 못한 것들로 너리 분리해 놓아야 한다. 귀납법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까 지도 비형식적인 요소(즉 두사가능한 술어와 두사가능하지 않은 술어로 의 구분)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베이즈의 정리뭉 토의할 때 암시되었 던 결론, 즉 과학자들이 실지로 믿고 있는 바와 과학적 방법 사이에 분 명한 구회선을 긋기란 불가능하다는 전론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준다. 굿맨은 ‘gr ue’ 라는 술어 를- 새로 고안하여 서기 2000 년 이전에 관찰되었 운 때 g reen 이거나 아니면 서기 2000 년 이전에 관찰되지 않았을 때는 blue 인 사물들에 적용된다고 정의하였다. 그렇게 되면 g reen 이라고 관 찰된 모든 것은 또한 gr ue 라고도 관찰된다. 예컨대 에메랄드가 성질 P 룹 갖고 있다고 우리가 관찰하였운 때 ‘모든 에메랄드는 P 이다’라고 추 리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는 어떠한 두사의 형식적 규칙에 의해서도 우 리는 ‘모든 에매랄드는 gr een 이다'와 ‘모든 에메랄드는 gr ue 이다’라는 상호모순되는 추리 를 할 수 있다. 굿맨은 ‘g rue’ 와 같은 ‘괴상한' 술어 들 을 순수히 형식적인 근거에서 제거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성공할 수 없다는 접을 설득력 있게 임중해 주고 있다 6). 65)) 굿N.맨G oo자d신m의an , 해F a정d ,색 F은ic t추io1리1 에a11 d관 F련or된ec as술t,어 2 ·군 nd의.e d두., 사H울ac k고ett산 (1할9 77때). 그 두사의 형식뿐만

아니라 역사까지도 고찰하는 것이었다. 굿맨의 제안에 의하면 ‘gru e’ 와 갇온 ‘이상스러 운' 술어들-운 한강 무사하여 본 문화에서는 그러한 우사가 완버하게 정당화천 것이고 그러한 추리는 귀납걱으로 타당한 추리가 천 것이다. 과거에 실천해 왔던 바와 조화합이 과학에서 하나의 중요한 원리가 된다는 집에서는 굿맨의 의견과 나의 의견이 일치하지만 이 원리운 보 는 굿맨의 시각은 너무 단순하고 또 너무 상대주의적이다.

굿맨이 본 베이컨의 귀납법에 있어서의 난점과 베이즈의 정리와 관련 한 선확률기능의 필요성간에는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과학자들이 (2000 년 이전의 어느 시접에서) ‘모든 에메랄드는 g reen 이다'와 ‘모든 에메랄 드는 gr ue 이다'라는 두 가설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가정해 보 자. 만약 과학자들이 베이즈의 칭리 를 사용하여 두 가설의 확증도 를 계 산한다면 그들이 어떤 선확률기능을 가지느냐에 따라 정상적인 가설 (‘모든 에메랄드는 g reen 이다')에 훨씬 높은 확증도 를 중 수도 있고 아 니연 비정상적인 가설(‘모든 에메랄드는 gr ue 이다')에 훨씬 높은 확증 도 를 줄 수도 있으며, 또 아니면 두 가설에 모두 동일한 확증도 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의 주관적 확률측정이 비정상적인 . 가설보 다 정상적인 가설에 더 높은 선확 률을 부여한다면 마치 우리가 ‘gr een' 을 두사하지 'gr ue’ 를 투사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매이즈의 관접에서 본다면 어떤 술어들이 두사가능하고 또 어떤 술어들 은 두사가능하지 않은지를 결정해야 할 필요성은 선확률기능에 대한 팔 요성의 한 특수한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포퍼는 우리가 여러 가설들 중에서 만총가등성 fa ls ifi ab i l ity이 가장 높은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반중가 능성의 형식적 계산법은 어떤 술어들을 원초적 (무정의적)인 것으로 하 느냐에 따라 상이한 결과를 낳는다. 우리가 과학자를 포퍼가 생각한 것 처럼 지금까지 반박되지 않은 반중가능성이 가장 높혼 가선을 발견하려 하는 사람으로 보든지 아니면 좀더 관습적인 방식으로 가설들의 화중도 를 계산하려 하는 사람으로 보든지간에 어떤 술어들은 두사가능하고 또 어떤 술어들은 두사가능하지 않다는 굿맨식의 결정방법이나 베이즈의 선확률기능의 수용에 상응하는 비형식적 요소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 시점에서 독자들은 만약 과학적 방법이라는 것이 없다면, 또는 방 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형식화될 수 있는 한 형식화될 수 없는 입 력들에 의존하고 있다면 과학의 성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의아 해할지도 모르겠다. 과학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접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과학이 성공을 거두게 된 이유가 과학자들이 지식을 수집하는 방식과 과학 이전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지식을 습득하던 전동적인 방식간의 차이점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느끼기 쉽다. 이 러한 느낌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문제는 과학이 엄 밀한 형식적 연산법을 따르기 때문에 성공을 거두 는가 아니면 순전히 우연적으로, 즉 운이 좋아 성공을 거두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15 세기부터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새로운 방법론적인 져언둥을 재창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경향은 17 세기에 그 절정에 달 했었다. 그러한 격언들은 엄밀한 형식적 규칙 갇은 것이 아니고, 적용 되기 위해서는 지능이나 상식과 갇은 비형식적 합리성을 필요로 하였 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격언들은 과학적 탐구 를 수행하 였고 또 규정하였다. 요컨대 과학적 방법이라는 것이 있는 것은 분명한 데 이 방법은 합리성의 개념을 미리 전재하고 있다 .7) 그것은 바로 합 리성이 무엇인지 운 정의하는 데 도웅을 줄 수 있는 어떤 새로운 방법인 것은 아니다.

7) 밑 J .S.M ill도 바로 이 정을 (마지못해 하는 어조로) 시인하였다. 그는 ‘만약 우리가 귀 납적 방법에 보편적 대치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방법이 성공을 거둘 것이 라고 기대할 수가 없다고 쓰고 있다. (Ut ilita rian is m, ch.2)

물리학자 보일 Bo y le 은 17 세기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자의 한 사람이 었다. 17 세기 이전의 물리학자들은 실지로 실험을 수행하는 것과 그들 이 선험적인 근거에서 믿었던 이론들을 화중해 중 실험을 단순히 관념 상으로 기술하는 것을 분명히 구분시키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은 실패 한 실험둘을 공개적으로 기술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였다. 요컨대 그 당시 실험은 이론을 확증해 주거나 반중해 주는 중거라기보다는 연역적 이고 선험적인 근거에서 믿어졌던 이론들에 대한 걸터 1 정도로 생각되었 었다. 보일은 실험의 절차를 위한 입문서를 쓸 때 관념상의 실험과 실 지의 실험을 엄격히 구별하였으며, 실패한 실험까지 포함시켜 수행된 모든 실험들을 완전히 기술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보일은 철학 자 베이컨의 제자였었기 때문에 베이컨의 귀납법적 관점에서 이러한 실 험의 법칙들의 중요성을 당연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일이 제시 한 실험의 구체적인 .. 교시들은 베이컨이 말한 더 추상적이고 도식적인 귀납절차보다는 물리학적 탐구의 과정을 결정짓는 데 더 중요한 역할을 했운지도 모른다. 그렇지는 않다 하더라도 적어도 베이컨의 귀납절차만

큼의 중요성을 띠었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론을 선험적으로 수립하려는 노력에서 이론으로부터 검증될 수 있 는 결론을 도출하고 실험을 수행함으로써 이론을 검사하려는 노력에로 의 전환은 분명히 하나의 방법론적인 변천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 다시피 합리격이라돈 것과 o.l 은이 추의깊게 수행전 걸협에 의하여 치치 된다는 이유만으로 이론을 믿는 것은 같을 수가 없다. 과학에서조차도 잘 제어된 실험을 수행하기란 항상 가능하지는 않다. ‘실험'이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는 일종의 능동적인 조정보다는 차라리 수동적인 관찰에 의 존해야 할 때도 있다. 그리고 또 앞에서 보았다시피 이론을 선택할 목 적으로 주의 깊게 실험을 수행하였을 때라도 실험의 결과가 여러 다양 한 이론들을 어느 정도 뒷받침하는지에 대한 평가는 전적으로 비형식적 인 문제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주장해 온 바와는 반대로 포퍼는 과학적 방법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이 있으며 그 방법은 외적으로 진술될 수 있으며, 또 세계의 본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에 의존해야 한다고 누차 반복해서 주장하곤 하였다. 그러나 포퍼도 과학적 합리성보다는 더 넓고, 윤리적인 결정을 하는 데에도 적용되는 합리성의 개념이 있다고 생각한다. 포퍼 는 『과학적 탐구의 논리 The Log ic of Sc ien ti fic I n q u iry』와 그 후의 여러 저서에서 과학적 방법의 생명은 ‘반중가능성이 매우 높은 이 론들, 죽 모험적인 예측을 시도하는 이론들을 수립하는 데 있다고 주장 하였다. 그러한 이론들을 제안한 다음 단 한 개의 이론이 살아남을 때 까지 모든 이론들을 계속 검사하고, 그 다음 그 살아남은 가설을 당분 간 지속되는 가설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이론을 제외한 모든 이론들을 제거하는 작업이 연역법에 근거하기 때문 에 ___ 하나의 이론이 제거되는 경우는 그 이론이 결정적으로 거짓인 예측을 포함할 때이다_一』 ll 이즈의 정리를 사용할 필요도 없고 확증도 를 평가할 필요도 없다고 포퍼는 주장한다. 포퍼의 견해에서 생기는 한 가지 문제점은 반중가능성이 높은 이론들 올 모두 검증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내가 밀가우자우를 머리에 쓰고 책상을 99 번 두드린다면 악마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론은 반중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내가 그것을 검증하려 하지 않을 것 임온 분명하다. 설혹 겁중하려 한다 하더라도 10100 개의 이와 비슷한

이론들을 생각할 수 있고 이것들을 전부 검증해 보려면 한 생애 전체, 또는 심지어는 전인류의 생존기간을 통틀어도 모자랄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적인 이유에서 우리가 실지로 검증하려 애쑬 소수의 이론들을 방법 론적인 근거에서 가려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여 사전의 선 택 갇은 것이 포퍼의 방법에도 내포되어 있음을 뜻한다. 앞에서도 지적 한 바와 같이 반중가능성의 정도륭 측정하는 포퍼의 계산법도 하나의 언어에서 어떤 술어들을 원초적인 것으로 간주할 것인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반중가능성의 개념도 어떤 술어들은 ‘두사가능'하고 또 어떤 술어들은 그렇지 않다는 굿맨의 결정과 유사한 사전의 결정을 필요로 한다. 여하든 이 기술적인 문제는 현재의 논의에 서 우리의 관심의 대상은 아니므로 일단 유보해 두기로 하자. 포퍼의 방법이 불완전하고 현재의 우리로서는 형식화할 수 없는 더 직관적인 방법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충분한 조건은 아닐지 라도 필요조건은 될 수 없을까 ? 요컨대 어 떤 과 학적 이론이 포퍼의 검중을 동과하였다는 것이 그 이론이 이론으로서 수용될 수 있기 위한 필요조건일 수는 없을까? 포퍼의 검증 그 자체가 검증을 위한 이론의 사전선택을 포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 전선택 자체는 비형식적인 것이고 그 선택을 위한 어떠한 연산법도 없 다. 어떤 이론이 가장 반증가능성이 높은지에 대한 계산은 어떠한 연산 법도 없는 비형식적인 결칭에 의거하고 있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반증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일군의 이론들이 애초부터 선택되어 있지 않았다 면, 그리고 우리가 받아들인 하나의 이론을 제외한 모든 이론들이 주의 깊게 수행된 실험에 의하여 결과적으로 반박되지 않았다면 어떠한 이론 도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주장은 그래도 성립될 수 있다. 요컨대 우리 가 과학자들에게 주어야 할 충고가 다음과 갇온 것일 수 없을까? 죽 포퍼가 지시한 대로 진행운 해보라. 그리고 포퍼가 지시한 방법이 형식 화될 수 없는 곳에서는 포퍼의 방법적 격언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지 운 직관에 의존하여 생각해 보라. 포퍼의 방법이 부분적으로 모호하고 비형식적이긴 하지만 과하척 합리성이라는 개념뿐만 아니라 인석척 합 리성에 관한 일체의 것까지 포괄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하여 어떤 진술이 포퍼의 검사에 근거하여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론에 포함될 경 운 오직 그 경우에만 화중적으로 주장될 수 있거나 또는 합리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러한 합리성의 개념은 과학에

서조차도 너무 좀다는 것이 그 대답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선 모든 과 학이론 중에서 가장 성공적이라고 생각되고 널리 추앙을 받는 이론 중 의 하나인 다원의 진화론까지도 과학이론에서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진화론이 과학이론에서 매제되어야 한다는 결론은 포퍼 스스로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이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과학집단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다원의 자연적 선택이론이 반증가능성이 높 은 이론은 아니다. 그 이론에는 확정된 예측이 없기 때문에 예측아 툴 리연 이론이 반박될 수 있다는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가 다윈의 자연적 선택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이론이 포퍼의 기준을 통과하였 기 때문이 아니라 엄청난 양의 자료에 대한 밌홍 덥한 설명을 제공하여 주기 때문이며, 거기서부터 새로운 이론이 많이 나웅 수 있는 암시와 유전학, 분자 생웅학 등등의 발전과 밀접히 연관되는 요소가 다분히 있 기 때문이며, 또 이 이론의 대안으로 제시된 여러 이론들이 모두 반중 되었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현실성이 없는 것들임이 판명되었기 때문이 다. 요컨대 우리는 자연적 선택에 의거한 다윈의 진화론을 퍼어스 c.s. Pe i rce 가 말한 소위 ‘역추리 abduc ti on'(!) 또는 최근에 많이 논의되는 ‘최 선의 설명에로의 추리 inf er ence to the best ex p lana ti on' <5l의 일종으로 ® 퍼어스가 ‘abdud ti on' 운 또 다른 만로 ‘re t roduc ti on’ 이라고도 붕렀다는 집운 감안하여 픽추리'라고 번역해 보았다. 퍼이스 이전에도 많은 논리학자둘은 어떤 가선이 사실을­ 산명해 주리라고 기대되지 않는다면 하나의 가설로도 인정원 수 없다는 정운 널리 인 지하고 있있다. 피어스는 이것도 일종의 추리로 간주하여 ‘abducti on ' 또는 'ret ro duc- l i on’ 이라는 용어 문 붙였다. 이 추리의 일반칙인 형식은 다옵과 같다. '어 만 사신 C 가 관찰되 었는대 이 사실은 의외의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A 가 참이라면 C 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따라서. A 가 참인지 아닌지 충분히 의심해 분 이유가 있다.' (C.S.Peir c e, Phi lo sop h ical Wr ili1 1g s, ed. by ].Buchler, Dover Pub, New York, 1940, P.1 5 1. ) 예컨대 ‘한강이 아마죤강보다 더 긴가?'라는 잘문운 받은 학생이 ‘한강의 길이는 잔 모 르지만, 만약 한강이 아마죤강보다 길다면 내가 모르고 있었운 리가 없다(왜냐하면 그 렇게 된다면 한강이 세계에서 재일 긴 강일 데니까). 따라서 한강이 아마존강보다 길 리가 없다’라고 대답하었다면 이 학생의 추리가 위의 형식과 장와하게 부합되지는 않지 만 그러한 류의 추리에 해당된다. ® 최선의 실명에로의 추리라는 것은 하만 G.Harman 갇은 정합주의자 coheren ti s t둥이 주장하는 것으로서 귀납추리의 지도적 원리로 간주된다. 예컨대 여러 가지 중거상 수

집한 어떤 람정이 작정의 용의자욥 지목하여. 그가 만약 범죄윤 지지온 사람이라 한다 면 수집된 중거가 가장 찰 설명된다는 이유로. 그가 법인입에 윤립없다는 가설운 내세 우는 추리가 바로 그러한 추리이다. (cf.G . H annan, 'Inducti on ', in /nduclio n , Accep tan ce and Rati on al Beli ef, Dordrecht : Reid e l, ed. by M.Swain , 1970, pp.8 3-99).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러한 추리들은 바로 포퍼가 과학에서 옹아내려 한 추리의 일종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어떤 이론이 방대한 양의 자료들 을 잘 설명해 주고 그 설명에 대항할 만한 다른 설명이 있을 법하지 않 을 경우에는, 단지 반중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 이론을 포 기하라는 포퍼의 충고에 설득되려 하지 않는다. 필자가 다론 처서에서 지적하였다시피 8) 포퍼는 고전물리학의 이론둘이 가지는 높은 반증가능 성의 정도를 과장하고 있다.

8) Math e mati cs, Maller and Me t hod 에 나오는 논문 ‘The Corroborati on of Theor i es 훈 참조할것.

이렇게 봉 때 우리는 추리의 결과로 도달된 ‘최선의 설명'이 포퍼가 말한 의미에서 높은 반중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일지라도 ‘최선 의 설명에로의 추리’를 정당한 과학적 추리의 형태로 인정함으로씨 과 학적 방법에 대한 우리의 기술을 더 한층 약화시킨 셈이다. 이제 과학 적 방법은 엄청나게 모호한 것이 되고 말았다 . 9)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우리가 앞에서 귀납논리를 논할 때 도달하였던 형식적인 관점에서 본다 면 그렇게 되리라고 이미 예견되었던 바이다. 이화 간 o.I 모호하게 기술 된 ‘과학적 방법 ’이 충분히 포괄적 이 라고 할 수 있을까 ? ‘과학적 방법 ' 이 그와 갇이 모호하게 기술된다면 그 방법에 의하여 검증되거나 화중 될 수 있는 가치판단이란 하나도 없을 것임은 분명하지 않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만약 과학적 방법이 단순히 ‘가능한 한 주의깊게 관찰하고 실험하여 최선의 설명에 도달할 때까지 추리하고, 결정적인 실험에 의 하여 반중될 수 있는 이론들은 제거한다’는 식으로 기술된다면 어떤 것 이 그와 갇은 방법에 의하여 검증될 수 있을지를 알아내기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죤은 나쁜 사람이다’라는 진술을 내가 검중하 려 한다고 하자. 이를 위해서 나는 다음과 갇은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죽 즌은 지각이 없고, 극히 이기적이며, 매우 잔인한 사람이라는 점은 이미 관찰되었다. 지각이 없고, 이기적이고, 잔인한 사람은 확실히 나

9) Mean i떄 and lhe Moral Sci enc 에서 필자가 말하였다시피 '과학걱 방법’이라는 말을­ 신입과칭의 겨언운 의식적으로 각용하는 데에만 한정시킬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로는 일세의 것윤 모두 망라할 수 있운 정도로 ’과학칙 방법'이라는 말 운 웅용성 있게 이해하러는 노력운 중단해 버립 수도 있운 것이다.

쁜 사람이다. 따라서 죤은 나쁜 사람이다’라고 추리할 것이다. ‘가치판 단'은 ‘과학적으로 검중'될 수 없다고 보는 사람들은 위의 논의를 두 가 지하. 고 .,접 에지.서 각 . 이반. 대없.할고 . , 것이숙.성다 ].. 이.그 기.는 적. 이위. 다.논 라의는의 데마에지서막 죤 . 단은.계 ,나. 쁜.즉 사.촌 람.혼이. .다찬 로민 넘어가는 단계에 우선 반대할 것이다. 이 단계는 개념격 단계라고 주장 할 것이다. 죽 잔인하고,지각이 없고` 이기적임을 도덕적으로 나쁨과 연결시켜 주는 관계가 개념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10) 물론 도덕적 술어 들간에 아무런 개념적 연계성도 없다고 한다면 위의 추리는 부당하다. 그러나 도덕적 술어들간에 아무런 개념적 연계성도 없다고 믿어야 할 이유가 어디예 있는가? 위의 추리에서 ‘개념적'이라고 기술되는 단계를 사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이 있을지도 모르나 과학 에는 그와 같은 추리단계가 전혀 없다고 주장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예컨대 내가 태양계에 관한 뉴돈의 기술로부터 ‘조류의 원인은 달의 중 력이다’라는 진술을 추리해 낼 때 그렇게 추리할 수 있음은 내가 달의 중력과 A 가 B 의 원인이다는 형식의 진술간에 개념적 연계성이 있다는 사실을 비형식적으로나마 알고 있고 또 그 사실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원인’이라는 말은 태양계와 조류에 관한 뉴돈의 설명에는 나오지 않는 다. 그러나 나는 A 가 B 에 입히는 중력이 A( 의 질량) 때문에 생긴 것 이라고 기술될 수 있음을 단순히 뉴돈의 이론을 이해함으로써 알고 있 다.그 . 자. 체. 가. 치. 중. 립. 적. 인. 언. 어. 로 된 ‘관찰적 진술'들로부터 ‘최선의 설명 에로의 추리’를 끌어내는 것이 과학적 방법이라 한다면 즌은· 지각이 없 다'나 ‘죤은 이기적이다’와 갇은 진술은 ‘관찰적 진술’이 아니라는 이유 는로 것배이제 될이 를수테 있면음 은어떤 물 론물이건다이( 연이한러 한자. 주진. 빛술. 인들지에 대아하닌여지 에동 의대를한 얻동는의다운 ... 10) 진리나 추리가 '개념걱'이라고 불리우는 종유에 속한다는 사실온 그것이 순전히 언어각 인 성쳐의 것(즉, 잉회회 언어적 관습에 의거한 진리)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서 로 다른 경향의 철학자들일지라도 개념과 사실, 그리고 관찰이 상호의존적이라는 검에 는 동의하였다• 제 6 장에서 보았다시피 개념은 우리가 관찰하거나 칙관하는 것에 의하 여 형성되며 또 거꾸로 우리가 관찰할 수 있고 칙관할 수 있는 것운 형성시켜 주기도 한다. 이러한 정에서 위에서 말한 ‘좋고' ‘나흉’에 대한 추리는 ’의식 있고' 넋卜압에 관 한 다음의 추리와 정와하게 동일하다고 하였다. 축 준은· 지적으로 말하고, 합당하게 행동하며, 주위에 찰 걱옹한다. 따라서 죤온 의식이 있다'. 이 추리에서의. 개념격 연계 는 마치 지각 없음, 이기적입, 간인합이 도덕적 나훈윤 우칭지어 주는 현상적(걷으로 보기에) 이유가 되듯이 ‘지걱으로 말합', ‘합당하겨 1 행동합', '주위에 찰 격응한’ 동도 의식 있음을 목칭지어 주는 현상각 이유가 된다는 정에서 찾아진다.

얻는 것보다 더 쉬울 경우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죤 은 지 각 이 없다', 즌은 이기적이다’와 같은 진술들이 여러 저술, 예컨대 익 사 가들의 저술 속에 끊임없이 나타난다. 역사, 임상심리, 그리고 일상언 어적 기술이 ‘지각이 있는', ‘이기적인’ 등과 같은 말들을 완전히 피 할 수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그리고 가치중립적인지 아닌지 룽 걸정지 운 구획선운 어디에다 그을지도 큰 문제이다. ‘ 고집 센’이 가치중립적인 말인가? ‘화난'이 가치중립적인 말인가? 그리하여 ‘그녀의 팔 을 사납 게 비틀었다'도 가치중립적인 말인가?)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합리 성운 위에서 기술된 바와 같은 과학적 합리성과 동일시한다면 인식적으 로 가치판단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하는 문재가 해결되었다고 전재하 는, 죽 해결해야 할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음을 전제로 하는 순환논증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와 같이 동일시함은 마치 가치판단이 바로 가치판 단이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확증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 떤 합리성온 오직 중립적 관찰로만 구성되고 가치중립적 전재에서만 추 리되는 것이라고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그러 한 합리성의 정의 를 우리가 왜 받아들여야 하는가이다.

제 9 장 가치, 사실 그리고 인석 제 6 장에서 필자는 '모든 사실에는 가치가 실러 있고 모든 가치는 사 설운 싣고 있다’는 말을 하였다• 이에 대한 논거는 간단히 말하여 사걸 (또는 진리)과 합리성이 상호의존적 개념이라는 것이었다. 사실이란 합 리적으로 믿을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사실이란 개념 (또는 참된 진술)은 합리적으로 믿을 수 있다는 진술을 관념화한 것이다.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과 ‘참되다' 또는 ‘진리이다'는 것은 서로 교환될 수 있는 개념들이다. 필자는 합리적임이 합리적으로 수용될 수 있음에 대한 기준뿐만 아니라 적합성의 기준까지 가지고 있 음을 뜻하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가치가 이 적합성의 기준에 포함 관되어접 에있서다 고참이 논라하는었)다 .결 정,세 계그에리 고대 한적• 어합• 떤한• 문묘• 재사• 들가• 에 • 참 이대• 라답• 는을• ( 주또는는( 우우리리의가 그 문재들에 대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결정은 우리가 어떤 가치체 계를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고 또 우리가 가진 가치체계를 드러내 주 기도 한다.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는 사실도 가지고 있지 않웅 것이다. 적합성의 기준이 어떻게 가치를 포함하고 있는지는 적어도 간접적으 로는 가장 간단한 진술을 하나 검토해 봉으로써 밝혀질 수 있을 것이 다. ‘그 고양이가 침대 위에 있다’는 진술을 예로 들어 보자. 누군가가 어떤 상황에서 이러한 진술을 실제로 한다고 할 때 그가 사용하는 개념 둘은――-‘고양이', ‘위에', 그리고 침대'-.::z.가 속해 있는 문화에서

나왔을 것이며 그러한 개념들이 현존하고 편재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 문화의 관심과 가치가 어떠한지를 나타내 준다 . 우리가 ‘고양이’라는 범 주 를 갖고 있음은 우리가 세계를 동물과 비동물로 나누어 봉을 의미 있 다고 여기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문제의 동물이 어떤 종에 속하는지에 도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저 침대 위에 그냥 어떤 것이 아니라 뇨향 o.1 가 있다는 것은 격합한 사실에 속한다 . 또 우리가 침대'라는 범 주 룽 가지고 있음은 우리가 무생물을 인공적인 것과 비인공적인 것으로 나누어 봉을 의미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며 또한 어떤 목적으로 그 인공 물이 만들어졌으며 그것의 본성은 무엇인지에도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 이다. 따라서 그 고양이가 앉아 있는 곳이 그냥 어떤 것이 아니라 침대 라는 것도 적합한 사실에 속한다 . 그리고 우리가 ‘위에'라는 범주 를 가 지고 있는 까닭은 홍간격 관계에도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무엇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지 다시 주목해 보자. ‘그 고양이가 저 침대 위에 있다’와 같은 가장 혼한 진술을 예로 들어서 갱응과 우생을의 수면, 혹척, 홍간 등과 갇은 범주들이 의미 를 갖고 있 음은 이 진술을 어 떤 문맥에서 격 한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이 된다는 점을 알았다. 이와 같은 것들을 격합한 . 범주로 여기려 하지 않 는 사람들에게는 ‘그 고양이가 저 침대 위에 있다’는 진술은 젊은 연인 둘의 사적 잡담에서 나옹칙한 '이 방에 있는 것들 중에 6 각형의 모양 을 가진 것들의 수는 76 이다'와 갇은 진술이 그렇듯이 미합리격인 것이 될 것이다. 용할우 리때가 우세리부의적 인범 주분들류(어인들.공 (.물 ‘.,지 각종.이 에 . 있는관.' 한,. ‘이.이름 .기, 적 인공.’ 간 .등 적.과 관 .갇 계.은 에.) 을관. 한사. 홍어)에 나타나는 것은 가치체계에 대한 매우 일반적인 사실들뿐만 아 니 라 제 6 장에서 보아 온 바와 같이 더 세부적 인 가치들(예컨대 감수성 과 연민 갇은)도 나타난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것이 적합한지 아닌지 의 여부는 우리가 전체적으로 어떤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달려 있으며 그러한 적합성의 기준은 우리가 어떤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는지 도 드러내 준다. 적합성에 관한 이 논의가 앞장에서 제기되었던 질문(합리적임이 왜 좋은가?)에 어떻게 연관되는지 곧 명백해진다. 만약 ‘합리성’이 어떤 걸운이 적합한 질문이고 어떤 대럽이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 는지를 결정해 주는 능력이라면(더 정확하게는 능력의 총체적 체계라

면) 합리성의 가치는 바로 합리성 자체 속에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합 리성에 대한 i러한 생각에도 적합성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가치가 실려 있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 따로 논의를 전개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서로 떨어져 독립되어 있는 요소들을 내가 한 덩어리로 묶 어 일종의 눈가림과 같은 술책을 쓰고 있지 않나 하는 의문도 생길지 모르겠다. 필자가 합리적 수용가능성과 적합성의 두 요소에 관하여 언 급하였다는 사실 자체가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과 갇온 것이 존립할 수 있다는 접을 입증해 준다는 주장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반대 룬 제기하는 사람들이 품고 있는 생각에 의하면 무엇이 화중적으로 주 장될 수 있고 또 무엇이 화중적으로 주장될 수 없는지를 말해 줄 수 있 는 인간이 합리적인 인간이다. 어떤 사람이 홍미롭거나, 중요하다 또는 격합하다고 간주하는 것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정신적 건강을 평가하는 일과는 관련이 있을지는 모르나 그의 민석격 합리성과는 관계가 없다고 반대자는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용성과 합리성은 어떤 문맥이든지 사실적인 문맥에서는 상 호의존적인 관계를 가진다. 어떤 말이든-그것이 ‘좋은'이라는 말이 든 또는 ‘붉은', ‘의식이 있는' 둥의 말이든―-―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말의 사용자가 관찰과 일반화와 실천, 그리고 이론 동의 역사와 전동에 참여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또한 그 전통을 해석하고 그것을 화장시키고 비판하면서 새로 운 문맥에 적응시키는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는 뜻도 함축하고 있다. 우리는 전동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으나 만약 우리가 속해 있는 전동 울 완전히 벗어난다면 하나의 말도 적용시킬 수가 없다. 그리고 어떤 전동 속에 있다는 것은 분명히 어떠한 것을 ‘합리적 수용성’으로 간주할 할것 인수지 있하는는 단문 제한와 개 의연 관방이법 이있다 .있 다만면약 진모술든을 진검술증을하 는검 증능하력는과 데적 . 사합. 한용. 개념들을 익히는 문제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제안이 성립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단 한 개의 방법이 있다는 신화를 받아들여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점은 이미 지적되었다. 두성분이론 합리성에 관한 우리의 현행 칙관들은 서로 갈등에 빠져 있는 것 갇

다. 그리고 이 강등을 해소시킬 수 있는 어떠한 철학이론도 없는 것 같 다. 우리가 목적운 합리적이라거나 비합리적이라고는 겅효 판단하지 않 는다는 말은 물론 믈리 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합리적 나찌스’와 같은 가 설적인 경우에 직면하였을 때 지적으로 정교하게 짜여지고 꾸며진 그러 한 목직체계 뭉 비합리격이라고 하는 미판이, 설혹 그것이 도덕적 반감 울 불러일으킨다 하더라도, 어명개 정당화될 수 있을지 우리는 알지 못 한다. 이 문제 룹 해걸하는 한 방법으로 다음과 강은 것이 제시된 바 있다. 즉 사실과 가치가 엄밀히 구분된다고 가정한다연 어떤 사람의 어리카락 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에만 관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비합리적이라 고 하는 비판이 그가 A. I-;J운 부적당하게 파악하고 있다는(여기에서 적 당한 ade q ua t e’ 이 라는 말이 무엇을 의 미 하는지 도 하나의 문제 이 다 ) 근 거에서 정당화뭘 수 있다는 재안이 그것이다. 나찌스와 우리가 의견의 일치 룬 보지 못하는 문재는 오직 ;1- *l 에 관한 문재일 뿐이다• 나찌스 를 만드시 미합리적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중간 적 위치에 있는 경우 들은 원리암스가 제시한 방식에 따라 처리될 수 있 을 것이다. 그렇다면 복 히 방법맹신주의자들에 대한 우리의 논박, 즉 우리가 ‘죤은 지각이 있다’와 갇은 기술적 판단을 ‘관찰적 중거'로 확인 될 수 있는 영역에서 문아낸다면 순환논증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는 우 리의 논박은 우리의 일상언어에서 도덕을 기술하는 말은 ‘두 가지 성분' 운의 동하시나에는 사가.실진..직다 인는 성이분론이과다 .맛 부예닥컨치대게 지될각 것있이음다에. 그대 한두 일가반지적 으성로분 중받 아 들 여지 는 i춘둘이 있을 것이며 존은 지각이 있다’는 진술은 죤이 그 러한 표준들에 들어맞는다는 점을 말해 준다.” 그러나 도덕을 기술하 는 말에는 사실적인 성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칭의적인 emoti ve 성분도 있다. 죽 ‘죤은 지각이 있다'는 진술은 죤의 행위의 어떤 측면에 대하여 I) 여지기각이시 '있표다준'적는' 이진라승 는이 말말.의하 .는뜻.이 .사 .과감연 대무부엇분인이지 놈죤.은운 재지이각다이. 있만다약고 두웅 의성만분 이겅론우의. 즌오은칙? 그 정운에 기술적으로 감이 된다(즉 ‘사실작 성분'이· 감이다)구 준.장한다면 말하는 사 갑 대부분이 이만 사감운 두고 그가 지각이 있옹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떤 민 갑한 판관은 그가 지각이 있다고 판단할 수도 있운 것이고 또 그 판만이 바론 판단일 수도 있운 터인대 이러한 겅우는 깅코 있운 수 없다는 걷론이 나온다. ‘사실칙인’ 성분 운 이와 칼이 선밍합은 모든 진리는(적어도 '표준'에 관한) ‘공각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다 산 바 없다. 그러나 우리가 다수주의자가 아닌 이상 왜 그러한 주장운 믿어야 하겠 는가? (5 장에시 논하있다시피 도은 진리논 공칙이라는 주장온 스스로 반박되는 주장 이다.)

말하는 사람이 ‘찬동하는 태도 p ro-a ttit ude’ 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 준 사다..실. 적.여.인기 에성서분 을합 리받적아이들라이 는부 를것 일수 있것이는요 ,것 이‘ 찬있동다하면는 그태것도’은를 그보 이진면술서의 정의적인 성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합리적인 것도 비합리적인 것도 아 니다. 여기서 ‘사실적'이라는 개념은 세계 룽 구성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룰 보는 철학자 개개인의 선별된 관접에서 나온 개념이다. 유물론적 관 울접.에리. 학.서적. 있용는어 로철 학표자현들되에어게야는 한어다떤. 진그술러의나 의이이 관에 접있에는서 도‘사 실현적상'론 요에소 는결 정적인 타격을 준 난접과 비슷한 난접이 발생한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안 현상론이란 의미 있는 모든 진술은 하나도 납 김없이 감각에 관한 진술로 번역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이와 비슷하게 '물리주의 p h y s i ca li sm' 란 하나의 진술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사실적' 의미는 하나도 남김없이 울리학적 언어로 번역될 수 있다는 이 론이다. 현상론과 마찬가지로 이 이론도 거짓인 것 같다. 물리주의가 왜 거짓인지를 알기 위해서 십리적인 것을 기술하는 진 술, 이를테면 ‘X 는 비엔나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다’라는 진술을 고찰해 보자. 임의의 어떤 유기체가 비엔나에 관하여 생각하기 위한 두뇌상태 로 표현될 수 있는 필요충분한 조건들이 있다 하더라도 어떤 것이 그러 한 조건인지 알기 위하여서는 완벽한 신칭학적 이론(또는 기능주의적 심리학이론)이 있어야 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 진술이 참일 수 있는 조건들은 문맥과 관심에 의존하고 있으며 또 모호하다. X 가 비 엔나에 관하여 생각하는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X 에 관하여 참이 되 는(어떤 뭉리적 가능세계에서든지) 하나의 유한한 표현이 물리학적 이 론언어에 ‘원리상'으로나마 있다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X 는 비엔나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다’라는 일상언어적 진술에 상응되는 유한 한 울리적 언어의 표현이 있다는 주장은 단순히 거짓임에만 그치지 않 는다. 설혹 그러한 뭉리적 표현이 있다손치더라도 그 표현은 어떤 경험 적 이론에 근거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 자체 알려져 있지 않는(아마도 너무 복잡하여 인간으로서는 겅뇨 한겨 홋한), 그리고 ‘X 는 비엔나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다’라는 진술의 의미의 한 부분이 아님이 명백한 일 군의 이론에 근거하고 있을 것이다. 요컨대 ‘X 는 비엔나에 관하여 생 각하고 있다’는 진술이 ‘X 가 이러저러한(물리적 또는 기능적으로 세분

된) 두뇌상태에 있다’를 의미한다는 주장은 단순한 거짓이다. 'X 는 비엔나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다’라는 진술에 타당한 것은 그 적 용조건이 물리적 개념의 적용조건과 찰 맞아 떨어지지 않는 어떠한 일 상언어적 술어에도 타당할 것이다. ‘X 는 지각이 있다’는 진술은 물론 '이X론 는’ 의갇 색언이다어'로, 번.‘ X역. 는 가. 능지. 진하이지다 '않,다 .‘ X 는이 렇사게람 이말다’함 은둥 의만 약진 술‘X들 는도 지‘각물이리 있다’라는 진술의 의미에 두 개의 성분이 었다면 그 진술이 X 가 치가 O.] 었홍 경우, 오칙 그 경우에만 참이 라고 하는 것만이 그 진술의 ‘사 실적 의미'에 대한 유일한 기술이 될 것임을 뜻한다. 이렇게 되면 ‘사실 적 의미'라는 개념이 사소한 개념으로 전락하고 만다. ‘두 성분'이론이 무너진다고 해서 ‘X 는 지각이 있다’라는 진술이 일칭 한 정의적 힘을 가지는 것이 정상이라는 주장이 부인되지는 않는다. 그 러나 그 전술이 칭의적 힘을 항상 가지는 것은 아니다. 제 6 장에서 지 적한 바와 갇이 우리는 ‘X 는 지각이 있다’라는 진술을 평가하고, 기술 하고, 설명하고, 예측하는 등등의 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 진술이 구별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된다고 해서 반드시 그러한 진술이 존재한다는 점까지 부인할 필요는 없다. 무어와 ‘자연주의적 오류' 사실과 가치의 양분법은 ‘가치판단'이 합리적으로 화중될 수 없다는 베 버 의 주장에 서 비 롯되 었는데 그 후 무어 G.E. Moore 에 의 하여 (그의 본의와는 반대로) 더 공고하게 되었다. 럿셀과 케인즈J . M. Key n es, 그 리고 불뭄즈베리 학파에 속하였던 여러 학자들이 아칙도 젊은 학생들이 었을 때 무어는 좋음이란 ‘비자연적인’ 성질, 죽 자연과학의 물리주의적 존재론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성질의 하나라는 주장을 폈다. 그런데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편 그의 논의는 오히려 역효과를 내었다. 무어의 제자들초? ‘비자연적인’ 성질들이 있다는 무어의 주장에 설득되었을 수도 있었으나(럿셀은 그러한 믿음을 버리게 되었지만) 자 연주의적 경향을 띠었던 그 후의 많은 철학자들은 무어의 논의가 가치 적 성질 갇온 것이 있다는 생각을 반증해 주는 일종의 귀류법 reducti o ad absurdum 을 제공해 주었다고 느꼈다.. 1930 년대에 스티븐슨 C. S t evenson 과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은 ‘정의적 윤리설'.이라는 것을 제의

하였다. 정의적 윤리설이란 ‘X 는 좋다’는 진술이 ‘나는 X 륭 시인한다. 너도 그렇게 하라', 또는 이와 비슷한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이론 이다. 말하자면 가치적 성질들이 인식론적 근거에서 배격되기 시작하였 주는립데될장 하존수였 재다있론시지적만피 , 근 가.거가.치.에.치태. 서성.도질는 같같더은욱은 것배것이격이 되있있었어다다야.는 한생최다각근는에은 말자맥은키연 과자J. 연학M과과ac 학k양과 i e립2 ) 될양가 수 없다. 가치성질이란 ‘존재론적으로 수상한' 것이라고 맥키는 주장한 다. 죽 가치성질이란 과학적으로 계몽된 사람이라면 그 존재를 믿기 힘 든 수상하고 신비스러운 종류의 것이라는 것이다.

2) Eth i c s , Inventi ng Rig hi and Wrong , Peng u in , 1977.

좋음이 물리주의적 성질(‘자연적' 성질)이 될 수 없다는 정을 밝히기 위하여 무어는 다음과 갇은 논거를 재시하였다. 즉 만약 ‘좋음'이 ‘전체 적인 효용성을 극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또는 이 대신에 어떤 자연 적, 울리적, 기능적 성질을 대치시켜도 좋은데) 것과 동일한 성질의 것 이라면 (1) ‘이 행위는 전체의 효용성을 국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만 좋은 것은 아니다' 는 진술은 자기모순적인(단순히 거짓진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 술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자들조차도 (1)과 갇은 진술이 자기모순적인 진술이라 는국 대데화 시동키의는하 지데 에않 을도 움것이이 다.되 는이 것접아만 서 보로아 상도.관. 좋된. 음것과일 전수체는의 있효으용나성 을동 힐할 수는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무어는 주장한다. 그러나 무어의 이러한 논의는 오늘날 필자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언 어철학자들이 찬동할 수 없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선 무 어는 성질들 간에 종합적 홍일성 sy nthe ti c ide nti ty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음을 암암리에 부인하였다. 그러나 만약 종합적 동일성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면 이미 인정되고 있는 많은 과학적 발견들이 발견으로 성 립될 수가 없을 것이다. 예컨대 4 장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기온과 평 균적 분자운동에너지의 동일성도 인정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기온

이 ‘비자연적' 성질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 우어의 ‘증명'을 사용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E 를 기온 T 에 상응하는 운동에너지의 값이라 한다면 'X 가 T 뭉 가지 고는 있으나 평 균적 분자운동에 너 지 E 는 가지 지 않는다' 라는 진술이 설혹 하나의 경험적인 사실로서 항상 거짓이라 하더라도 차기오순격;J 진술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무어는 기온은 평균적 분자운동에너지와 단지 상관관계만을 가질 뿐이라고 결론을 내 릴 것이다. 사실 무어는 성걸과 7· 1 l 님을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두 개념이 서로 다르다(이물테면 ‘기온'의 개념과 ‘평균적 분자운동에너지' 의 개념아 서로 다르듯이)는 사실이 그 개념에 상응하는 성질도 다른지 아닌지 하는 문제를 해걸하는 데 전혀 도웅이 안되는 경우도 있다. (그 리고 기본적인 물리적 성질들이 얼마나 되는지를 발견함은 개넝에 대한 발견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발견이다.) ‘좋음’이라는 개녕과 동의어인 물리주의적 개념은 없을 수도 있다(굿맨에 의하면 도덕적인 것을 기술 하는 언어와 물리적인 것을 기술하는 언어는 전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그더 렇좋다겠고다 )하 여성 질P이 물라 어 할떤 때임 의좋의다 는문 리것주이의 P적. 이 (다또는는 것기과능 주같의은적 이성라질 의함 이것 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어떤 성질에 대한 말을 우리가 지시 적으로 배웠을 때(예컨대 ‘높은 기온을 가진다’와 같은 말) 그 말은 그 말이 지시하는 성질에 대한 이론적 정의와 동의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온이 과연 무엇인지룽 알아보기 위해서는(그리고 충홍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말의 의미만을 고찰하는 언어적 분석이 아니라 경험적 이고 이론적인 조사을 해야 한다. 립 키필 자S.가 K r‘ ip성 k질e 의들 간형의 이종 상합학적적 동필일 연성 성’ 이m라et는a p h 개 y 념s ic을 a l 소ne개ce한ss it몇y ’의년 개후 념 크° 이 언어철학에 등장하여 팔자의 논접을 더 확대시키고 더 분명히 해주 었다. 크립키가 말한 형이상학적으로 필연적인’ 진리란 경험적으로 알 려지는 진리, 그리고 ‘인식론적으로 우연적인 필연적 진리’를 말한다 .3) 크립키의 개념을 이 겅우에 적용시키면 다음과 갇이 되겠다. 죽 만약 누군가가 어떤 논리적으로 가능한 세계를 기술하는데 그 가능세계에서 도 사람들이 뜨거응과 차가옹에 대한 느낌을 가지며, 뜨거움을 느끼는 3) cf. S. Krip k e. Nami t1g at1 d Neces sity, Harvard, 1980 (이 색은 원래 1970 년 프린스턴 ® 새대 학2 에장서 익 주있 있®단 참강조.의 상 중십으로 엮어졌다).

대대한상 들감과각 이차 가평.움 균.을 적. 느분.끼 자.는 운 . 동대. 상에. 들너. 이지. 와.있 는.으 나다. 른.이 러매. 한카. 니.뜨 즘.거 에.응 과의. 하.차 여.가 움설. 에명.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이 기온이 평균적 분자운동에너지가 아닌 대다가. 혼상능. 들세.어 은계.떤 를 차. 에 갑기.카 게술.니 하즘느.였 에껴.다 지.고의.는 하 말여가하 능지어세는떤계 물않대 을상기 등술것은이하 다였뜨.다 겁고오게 히 말려느.할 껴. 그지.것가.고이 다 기.또온 과일어는번단 우리가 기온은 평균적 분자운동에너지이다라는 '종합적 동일명재' 운 받 아 들 였다면 어떤 가능세계에서도 기온이 평균적 분자운동에너지가 °\니 라고 여겨질 수 없다. 전통칙으로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아 되는 진술을 ‘팔연적'이라고 불렀 다. 그리고 하나의 대상이 어떤 가능세계에서도 빼놓지 않고 항상 가지 고 있다고 생각되는 성질이 있다면 그 성질을 '본질'이라고 불렀다. 이 러한 전통적인 용어 들을 사용하어 크립키는 ‘기온은 평균적 분자운동에 너지이다’라 는 진술이 설혹 우리가 그 진술을 신협척오오 할 수 없다 하더라도 필연적인 참아 된다고 말한다. 그 진술은 경험적이지만 필연 적인 진술이라는 것이다. 다 른 말로 표현한다면 평균적 분자운동에너지 임이 기온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기온의 본질이 경험적 탐구에 의하여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크립키의 생각은 언 어철학, 형이상학, 그리고 수리철학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이 영 는향 은전 술무(어1)의이 논단의지와 우 . 관연. 련적. 하으. 여로.서 만.는 거 . 짓거. 의일. 파수. 괴있.적.다인 는 역사할실을로 부히터였다 .어 떤무 어자 연적 성질 P 임이 좋음의 본질적 속성이 될 수 없다는 주장윤 도출하였 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팔연성에 관한 새로운 이론에서는 성립될 수 없다. (1)이 자기모순적인 진술이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정당하게 추리될 수 있는 것은 ‘좋은'이라는 말이 '효용성을 국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 는'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접뿐이다. 그러나 말들간에 이러한 동의어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말들간의 비동의어 관계로부터 좋음의 본질에 관한 어떠한 것도 추리되지 않는다. 좋음이 자연적 성질일 수 없다는 또 다론 주장이 있는데 우스 앤너 파트남 Ruth Anna Pu t nam 은 이 주장도 성 립 될 수 없음을 지 적 한 바 있다 .4) ‘X 는 좋다’라는 진승은 ‘정의적 힘'을 가지며 ‘·… .. 운 좋아하는 4) 'PRheilm o saoprk/ 1ys, oPnro cWeeitdtig,,e c n;s t아e i n/J' sE L4e/hct uI血 r e ?n o1n0 l Eio 1th1 0i/c s 'W, ,itn1g eH1 1aSllleie1r 1 Sely m a/lX(Je5d i1s1.1) n, , LVa 깡i en In IOIaJ,I! ,1 9lc80g.i c, a 뼈

태도를 나타낸다’는 주장이 그러한 주장이다. 우스 앤너 파트남의 지적 에 의하면 이러한 주장의 찰못은 기술적 술어들 중에도 자연적으로 정 의적 힘을 획득하는 술어들이 많다는 점을 간과한 데에 있다. 우리의 문화에서 ‘음식을 옷에 온통 흘린다’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는 하나의 7.l 승사람이들지이만 강소.한중.히 .부( 정또을는 나소홀타-내히)는 여정기의는적 어힘떤을 것가을지 고대 변있해다. 주한는 문모화든에 서말 둘은 자연적으로 정의적 힘을 갖는 경향을 띤다. 좋다’는 말의 도덕적 의미는 많은 것에 적용된다. 그 중에는 좋은 마 음의 상태와 갇이 자연적으로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들도 있다. 그러한 마음의 상태에 있음을 소중하게 여김이 바로 그러한 마음의 상태의 한 부분적 내용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역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즉 이 러한 의미에서 자연적으로 소중하게 여겨지는 어떤 마음의 상태도 좋다 고 한다면 이는 분명히 거짓일 것이다. 자연적으로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아무런 이유도 없을 때(자연적으로 소중하게 생각되는 약뭉중독상태룹 소중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듯이) 그러한 것들이 ‘좋은' 것들이라고 정의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것이 좋다는 진술이 뇨 성걸의 혼성 때운에 ‘정의적 힘'을 가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우리가 결과주의자(즉 충분히 좋은 결과물 가져다 주는 것이면 모두 좋은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가 아닐지라도 어떤 행위를 좋다고 부르게 되는 가장 일반적인 이유는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기 때문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한 결 과들 중에는 자연적으로 소중하게 생각되는 상태나 상황을 궁극적으로 는 중진시켜 주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기술이 왜 ‘적국적인’ 정의적 힘을 가지게 되는지는 바로 그 성질의 본성에 의하여 설명된다. 맥키는 어떤 것에 대하여 ‘좋아하는' 태도를 가지지 않고서는 그것이 좋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없다고 가정함으로써 좋음이란 존재론적으 로 ‘수상한' 것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옹호한다. 이는 다시 말하여 정의 주의 emo ti v i sm 몰 입증하기 위하여 정의주의를 가정한다는 뜻이다. 지 옥에 있는 악마들은 종종 부정적인 정의적 힘을 가지고 ‘좋다’는 말을 사용한다고 묘사된다. (‘그는 도덕적으로 좋은 행동을 하고자 하는 한심 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악마들이나 할 수 있음칙한 말이다.)

맥키와는 반대로 필자는 그러한 사용이 언어학적으로 부적당하거나 모 순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상관하지는 않겠다’고 사람들은 종종 말하지 않는가? 푸트 P. Foo t가 지적하였다시피 '나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생긴 것이 아니다'고 말함으 로다써는 우것리은 는언 어도덕를에 기 . 호술. 적소. 으함. 을로. 사거. 용부.할함. 과수 도지 령있적다 .또 는이 러명한령 적발언으이로 사가홍능하합 은 정말 다르지만 이 다른 접이 밀이 가진 단순한 기능 때문은 아니라 는 접을 시사해 준다. ‘기술적' 말들도 칭찬하거나 비난할 때 사용될 수 있으며 (‘그는 음식을 넥타이에 온통 흘린다') ‘평가적'인 말들도 기술하 거나 설명을 할 때 사용될 수 있다. (다음과 갇은 대화를 생각해 보라. 촌이 그 일을 하는 데에는 비할 데 없이 좋은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아니야, 그는 결코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사람일 수 없었어. 그러나 그 가 우리가 예기치 않았던 자기희생의 능력을 가졌음에는 틀림없어.’ 이 대화에서 도너격 언어는 선덩척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루스 파트남의 지적을 되풀이한다면 ‘……이 좋다’는 말이 명령하는 데 사용된다는 사 실에서부터 좋음이 어떤 성질도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어떠한 논거도 도출되지 않는다. 루스 파트남은 그래도 맥키의 논의에 무엇인가 홉혼 정이 있다고 지 적한다. 도덕적 표현들 중에는 일정한 행위를 유도하는 방향성을 가지 고 있는 것들도 있다. ‘해야 한다', ‘옳다', ‘하지 않으면 안된다’ 등의 말이 그러한 행위유도적’ 말들의 대표적 예이다. ‘이다'와 ‘이어야 한다' 의 구분문제는 ‘사실'과 ‘가치’의 구분문제와 갇온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루스파트남 교수의 지적이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내가 해야 할 것을 하기 위해서 태어 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이상하게 들린다. (그리고 ‘나 는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게 들린다.) 맥키는 어떠한 물리적 성질도 행위와(또는 행위에 대한 시인과) 고정 된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동 과 같은 말은 존재론적으로 수상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맥키 의 이러한 논의는(물리주의적 세계관이 하나의 참된 이론이라는 가정에 의거하고 있다는 점 이외에도) 너무 많은 것을 입증해 준다. 왜냐하면 민석격 술어 중에도(예컨대 ‘합리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이나 ‘정당화된

믿웅 ' 같은) 행위 뭉 유 도 하는 것(하나의 진술 을 받아 들 이 는 것도 행위 로 간주월 수 있도 록 '행위 ' 라 는 말 을 넓은 뜻 으로 이해한다 면) 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X 웅 하 는 것은 좋 은 일이다', ‘Y 에 대한 증 거 가 충 분하다’고 말하면서 도 실 지 로는 X 룰 수행하지 (또 는 명령하 지) 않 을 수 도 있고 또 Y 뭉 받아 들 이지 않 을 수도 있다. 그러 나 ‘X 를 이 상 황 에서 수행하는 것은 옳은 행 위이다’라거나 'Y 룹 믿 는 다 는 것은 완전히 정당 화된다 ’ 고 말한다면 이 말 은 X 를- 하 거나 ( 또 는 명 령 하 거 나 ) Y 뭉 받 아 등 이 는 행위로 이어진다.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옳은 '이라 는 말 에 못지 않 게 ‘정당화된'(믿음의 경우)이라는 말도 행위유 도 적인 성 격을 가 진 말이 다.이 제 우리가 맥키의 논의 웅 흉내내어 정. 당. 화.됨 . 이 라 는 성잘은 없고 다 만 ‘정당화하는 태도'만 있다고 결 론을 내린다연 우리 는 전체적 인 상 대 주의에 빠지고 만다. 이와 같은 바극적인 정론 에 빠지기 이 전 에 잠시 멈추어 행위유도적인 술어들이 예 뭉 리주의자 들 에게 ‘ 존 재 론적 으로 수 상하재 게2 '장 보에이서는 지필 자를는 살 지펴. 시보. 자그 . 자체가 뭄리주의자 들 에게 는 '존 재 론적 으 로 수상하게' 보일 것이라고 논한 바 있다. 존재하는 것이라고 는 오직 물리주의적인 성질이나 관계 들 뿐이라면 지시도 존 재하는 것으 로 간 주되 기 위해서는 하나의 물리주의적 관계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그 러나 그 렇게 된다면 이미 논하였다시피 존재하는 것 들 의 ‘ 후 보자 ' 가 지나치게 많아진다는 문재가 생긴다. 왜냐하면 지시관계는 수적으로 무한 할 것이 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집합혼을 자연주의적 세계관 을 이루 는 한 요소로 간주한다면 모든 지시관계는 뭉리주의적인 것, 또는 적어 도 자연주의적인 것들이다.) 그 무한한 지시관계 중에 지시관계라고 고 유하게 불리워질 수 있는 독칭의 것도 있다고 한다면 그리한 사실 자체 가 매우 이상스런 종류의 궁국적인 형이상학적 사실이 될 것이다. 자그연러은한 일 사종실의이 충 럽이경상,스 럽또게는 보무.이십.는성. m이 i유 nd는le ss우ne리s의s 을 개갖념고체 계있에는 입것력으된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연은 관심도, 의도도, 또는 관접도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옳다면 어떻게 하나 의 인정할 수 있는 지시관계가 형이상학적으로 가려내어질 수 있겠는 가? `……옳다'와 ‘……는 정당화된 믿음이다’ 등과 같은 행위유도적 술어

들이 ‘이상스럽게' 보이는 까닭도 바로 이 자연의 무심성 때문이다. 만 약 하나의 물리적 술어 P 가 도덕적 옳음이나 인식론적 정당화와 옹힐 하다면 ‘이상스럽게' 보일 것이며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는 까닭은 지시 를 물리주의적 관계라 할 때 ‘이상스럽게' 보이는 까닭과 정확하게 동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치 자연 그 자체가 도덕적인 경우에는 가치 를 가지고, 의이론적인 경우에는 지시적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좋은', ‘옳은'(‘정당화된 믿음', ‘지시한다', ‘참 이다’ 등도 포함하여) 등이 어떠한 물리주의적 성질이나 관계와도 동일 시될 수 없다는 무어의 주장이 옳았다고 생각한다(설혹 그의 논의 자체 는 받아 들 일 수 없다 하더라도). 이것은 옳음, 좋음, 인식적 칭당화, 지시, 진리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일원론적 자연주의 (또 는 ‘물리주의')가 직합하지 못한 철학이라는 뜻이다. ‘합리적 나찌스’ 재론 우리는 앞서 가설적으로 생각해 본 ‘완벽하게 합리적인 나찌스’가 어 떻게 바합리적안 목적을 가졌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고심한 바 있다. 아마도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나찌스들이 합리적인지 아닌지 의 뭉음운 나찌스들이 가졌던 목적이 합리적인지 아닌지의 뭉음과 동일 시하였다는 접일 것이다. 만약 나찌스들이 가지고 있는 목적 중에 우리 가 호소할 만한 것이 없다면 상황을 단순히 ‘카알은 비합리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진단하는 것은 이상하게 보인다. 설혹 이 우말이리 가결 국우예선 가말하서는고 자우 리하가는 것내은려 야카 알할이 결 론흉.에악. 한.속 목한표다 를할 지가라지도고 분있명다히는 것이지 비합리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도대체 카알의 합리성 여부를 토의하고자 한다면 정말 고찰되어야 할 문제는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과 논의가 합리적인지 아 닌지 하는 문제이지 그의 목표가 합리적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아니 다. 카알이 (마치 철학자들이 흔히 드는 예에서는 그렇지 않더라도 사실 에 있어서는 .나 .찌 스.가 . 일반적으로 그렇다고 주장되듯이) 나찌의 목표가 도덕적으로 옳고 좋다고 주장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사실상 그

가 하는 이야기는 쓰레기 갇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종류의 거짓된 ‘사실적' 명제들, 예컨대 민주주의는 ‘유대인들의 음모'에 의하여 웅칙여진다와 갇은 명제들을 주장할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아무런 설 득력도 없는 논의를 가지고 도덕적 명제(예컨대 ‘아리안'족은 비아리안 족들을 ‘지배자 종족 ’ 에 종속시켜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와 같은)를 제안할 것이다. 여기서 설득력이 있는, 다시 말하여 ‘좋은 논의'라는 개 념은 일상적으로 하는 도덕적 대화에 내재되어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만약 나찌스가 일상적인 도덕적 대화 내에서 자신을 정당화하려 한다면 이 개념은 적합한 개념이다. 반면 나찌스가 일상적인 도덕적 개념들을 모조리 애격한다고(마치 가 설적으로 생각해 보았던 초벤담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정해 보 자올.로 기필자와는 도 덕앞서에 서보 동도의출 된도 덕개적념 들개로념 들대을치 시배킨격 문하고화 는우 우리리와의는 현다. 재른. 관이. 접데. 해서 혼다면 보통의 인간관계나 사회적 사건, 그리고 정치적 사건들을 적합하고 분명하게 기승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우리의 것과 다른 이데올로기와 도덕이 우리의 현재 도덕체계보다 만 약 나은 것이라 한다면 그러한 개념들의 대치가 나쁠 것도 없고 오히려 도더 덕현이명 할나.쁘 .다수.면도 , 있특을히 것비이다뚤.어 지그고러 나괴 물반과대 갇로다 대고치 한가다 된면 그이 데결올과로는기 와인 간관계의 여러 사실들이 부적합하고 붕분명하게 기술될 수밖에 없을 것 이다. 물론 여기서 ‘부적합하고, 불분명한'이라는 말도 가치판단을 반영 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개념체계의 선택이 필연격쇼호 가치판단을 반영하며 개념체계의 선택이야말로 인식적 합리성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의 모든 것이라는 접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설혹 나찌스 개개인들이 현재 우리가 도덕을 기술할 때 사용하는 용 어들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잃지 않았다 하더라도, 죽 전동적인 도 덕관념을 그의 머리 속 어단가에 보존하고 있다 하더라도(마치 중세의 ‘기사도’ 정신에 아칙도 친숙감을 느끼고 그러한 개념을 사용할 수 있는 학자들이 있듯이) 이러한 것들(죽 ‘지각 있는', ‘동정적인', ‘정의로운', ‘정당한' 등과 갇온,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도덕적 용어들)은 나찌 스가 나찌스의 삶을 살아가는 데 사용되는 개념은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이러한 개념들은 나찌스들의 세계관에는 아무런 작용도 안할 것

이다. 필자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찌스가 되면 비뚱어지고 비합리적 인 믿음들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는 접을 재삼 강 조하고 싶다. 나찌스가 됨이 나쁜 까닭은 나찌스로서 하게 되는 행위 때문이다. 나찌스가 사악하다는 것과 나찌스가 비뚤어진 세계관을 가지 고 있다는 것은 서로 연관성은 있지만 독립된 두 사실이다. 나찌스가 사아니악다하.다 고죽 불나리찌우스는들의 주 된세 계이관유의가 비비합합리리성적이인 악세을계 관구.을성. 한.가.다졌 는기 뜻때이문 은아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혹효를 두고 그것이 합리적이다 또는 비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목표들 중 에는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추구하면 그 목표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괴상스럽고 거짓된 논의를 전개하게 되거나 아니면 일상의 도덕 적 사실들(예컨대 누군가를 두고 그가 동정심이 많다는 사실)을 나타내 기 위하여 정상적인 개념구조가 아닌 다른 비합리적인 개념체계를 사용 하게 되는 목표도 있는데 이러한 목표들은 ‘비합리적인 목표'라 불리워 져 마땅하다. 결국 도덕적으로 합당한 사실들을 지각하고 기술하는 데 사용되는 합리적인 개념체계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목표들의 일반적인 유형 간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나찌스가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말 외에 나찌스가 된 것에 대해 다론 아무런 이유도 제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질문은 국히 자연스러운 질문인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자연스럽게 주어질 수 있으며 또 그 대답은 옳은 대답이다. 죽 그러한 경우에 나찌 스의 행위가 사악하다는 것 이외에도 완전히 자의적이기도 하다는 것이 그 대답이다. ‘자의적'이라는 말이 필자가 지금까지 ‘도덕-기술적'이라 고 불렀던 말들 중의 하나임을 주목하라. 죽 이 말은 외연을 변경시키 지 않고서도 평가할 때(이 경우에는 비난할 때), 기술할 때(‘죤온 매우 자의적으로 직업을 바꾸기로 결십하였다'), 그리고 설명할 때(또는 어 떠한 설명도 주어질 수 없음을 말할 때) 사용될 수 있는 말이다. 내가 나찌스가 되겠다는 카알의 결십이 완전히 자의적인 것이라고 단순히 말 했을 때 이 말은 평가하는 말이 아니라 기술하는 말이다. 내가 일상적 으로 행하는 많은 것들一―-예컨대 학교 정원을 질러가는 데 이 길보다 는 처 길을 택하는 것 __국 논 문자 그대로 자의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자의적인 행동에 무슨 찰못이 있다는 뜻은 아니

다. (이 문제둥은 단순히 너무 사소한 문제둘이다.) 설혹 내가 무엇인가 중대한 것, 예컨대 직업을 바꾸는 일 갇은 것을 ‘자의적으로’ 한다 하더 권라. 리도. 일만 수약도 가 있족다에. 대그한러 나책 임문만제 의없 다행면위 가그 렇정. 게당. 화.하 를.는 요 . 것구.이하. 는 .단 순종한류 의나 의것 일 경우에는 그러한 행위 을 자의적으로 행하면서도 아무런 정당화도 제 공하지 않는다면 도덕적 비난을 연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무런 정당화 도 없이 타인의 삶(어짜면 자기 자신의 삶까지도)에 큰 해를 끼치는 결 칭을 함은 자의적이고 고의적인(이것도 또한 도덕을 기술하는 용어이 다!) 행위와 마찬가지오 비합리성의 모범적인 예에 속하며 비합리적인 것 에 속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종의 도착증에 가깝다고까지 할 수 있겠다. 우리는 7 장에서 ‘편견을 제쳐 두고' 본다면 압핀놀이가(원판던지기 놀이와 유사한 고대 어린이들의 놀이) ‘음악이나 시에 관한 藝 와 技'보 다 못할 바 없다는 벤담의 주장을 논한 바 있다. 벤담의 견해에 의하면 시가 압핀보다 나은 유일한 이유는 결국 시가 압핀보다 더 많은 양의 만족(또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는)을 준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견해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잘못이 있다. 그 하나는 ‘만족'(또는 ‘자기관상) 그 자체가 만족 이외의 다혼 목표 를 가지고 있지 않는 어떠 한 존재의 목표도 될 수 없다는 접이다. 만약 내가 ‘나의 복지’ 이외에 다혼 어떠한 목표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의 ‘복지’는 무의미한 개념이 될 것이다. 이 접은 이미 버를러 주교 Bish op Bu t ler 가 지적한 바 있 다. 더 중요한 문제로서 만촉 중에는 더 좋고 더 ‘고상한' 것들이 있으 며 왜 그러한지에 대한 이유도 있을 수 있다. 시와 음악은 우리에게 위 안을 주며 우리의 감성을 계발시켜 준다. 그리고 인류사에 나타났던 많 은 재능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 는 중요한 방식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어떤 만족을 다른 만족보다 더 가치있는 것으로 보는 까닭이 ‘편견' 때문이라는 주장은 ‘두 성분'이론과 매우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며, 그리고 또 가치성질이라는 것이 ‘존재론 적으로 수상한' 것이라는 주장과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벤담이 생각 한 모델에 따르면 사실들은 ‘중립적인’ 것이고 ‘편견'들은 자의적인 것이 었다. 벤담에 의하면 압핀보다 시를 더 좋아하는 것도 ‘편견' 때문인데 이때 압핀과 시를 비교합에 있어서 자의적이 아닌 유일한 요소가 있다 면 그것은 시가 압핀보다 더 많은 만족을 준다는 사실뿐이다. 벤담의

제 안에 의 하면 한 종류의 만족을 다른 종류의 만족보다 더 좋아하게 됨 온 순전히 자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우리의 개념체계에서 ‘자 의적인’ 선호라는 개념이 실제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생각해 봉 때 단순한 거짓에 지나지 않으며, 만약 ‘자의적'이라는 말이 그것이 속해 있는 개념체계에서 분리되었다면 무의미한 주장이 되고 만다. (마찬가지 로 압핀보다 시를 더 좋아함은 편견 때문이라는 주장도 문자 그대로 거 것이다.) 만숙이라는 것이 있다고 인정함은 존재론적으로 합당하지만 감성의 계발. 의미와 은유의 계발, 자기표현과 자기실현의 방식 동등을 인정함은 존재론적으로 합당하지 않다는 주장도 제시되고 있다. 가치가 세계 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에 속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가치판단'은 ‘편 견'의 표출에 지 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동일한 동전의 양면과 같다. 우리는 지금까지 ‘가치판단’이 합리적으로 지지될 수 있는지 없는지 하는 문재를 고찰하였으며, 이 문제에 대한 여 러 가지의 부정적 답변둘 의 근거가 되고 있는 철학적 가정들이 모두 의심스러운 것들이라는 점 을 살펴보았다. 죽 합리성 자체가 단지 ‘예측'이나 ‘ 합의’를 할 때에만 좋을 뿐이라는 가정,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라는 가 칭 (예측과 합의만이 ‘진리’의 유일한 기준이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가 치판단은 ‘두 가지 의미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가정, 가치성질들은 ‘존 재론적으로 수상한' 것이라는 가정 둥이 그것이다. 어떠한 개념체계를 선택하더라도 그 개념체계는 가치를 미리 전제하고 있으며, 자신의 삶 의 계획에 대한 생각은 차치하고라도 일상적인 개인 대 개인의 관계나 사회적 관계를 기술하기 위한 개념체계의 선택에는 선택하는 사람의 도 너격 가치가 이미 개재되어 있다는 입장이 필자가 지금까지 옹호한 입 장이다. 우리는 사실들을 단순히 ‘모사'하는 개념체계를 선택할 수가 없 다. 왜냐하면 세계를 그냥 ‘모사'한 것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개념체계 란 없기 때문이다. 진리라는 개념 그 자체가 과연 어떤 내용의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것을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고 판정할 때 어떤 기준에 의해서 그러한지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으며 그러한 기준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가치에 근거하고 있으며 또 가치룹 전 제로 하고 있다. 더 간략히 도식적으로 말한다면 진리이론은 합리성의 이론을 전제로 하며 합리성의 이론은 다시 선에 관한 이론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선에 관한 이론’이라는 것도 그 자체 탐구되어야 할 하나의 표제일 뿐만 아니 라 인간의 본성, 사회, 우주 등에 관한 가정들(신학적

이고 형이상학적인 가정들까지 포함하여)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는 우 리의 지식이 중가하고 우리의 세계관이 변화해 감에 따라 선에 관한 우 리의 이론도 계속해서 수정해 오지 않을 수 없었다. 팔자가 옹호하는 입장에 의하면 ‘기초fo unda ti on' 같은 것은 존재하 지 않는다는 접이 이제 명백해졌다. 그런 만큼 또 한편으로 사람들은 ‘정당화된다’는 것이 ‘우리의 관점에서 정당화된다(상대주의)’는 것, 또 는 더 나아가 ‘나의 관접에서 칭당화된다(일종의 독아주의)’는 것과 다 론 접이 하나도 없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되었다. 독아론적 입장은 우리가 합리성의 개념이 속하여 있는 개념체계를 벗 어나고자 하면서도 동시에 더 ‘합리적인' 합리성의 개념을 제시하는 체 할 때 빠져 버리게 되는 입장이다. (전동적인 것보다 ‘더 나은' 도덕을 재시하였다고 하는 니체식의 오류에 빠져 버린 사상가는 지금까지 칙지 않게 있었다. 이들이 제시한 도덕은 기형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가치룬 가치의 맥락으로부터 자의적으로 메어내 버리는 것이 이들이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전동을 벗어나지 않고 전동내에 머뭉면서 바랄 수 있는 것은 단지 더 합리적인 합리성의 개념, 또는 더 나은 도덕의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일 따름이다 (합리성의 경우에는 옛 그리스의 집회, 뉴돈 등의 반향을, 그리고 도덕 의 경우에는 신구약성서, 철학자들, 민주혁명 동동의 반향을 둥으면 서)•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전부 합리적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개개인의 독아론적 함정에 빠 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인간적인 대화, 죽 전체와 개개 인의 책무를 결합시키는 인간적 대화에 참여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은 대화에 이상적인 결말이 있는가? 합리성과 도덕에 관하여 에우 리불가과 하지다금 껏할 지가져라 도왔 던어 떤것 이참 다모운두 합우리리성,가 그생리각고한 참바. 의다. 운.합 리도덕성이과 도있덕는 가? 이 문제에 대하여 철학자들은 철학자 아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 지로 서로 의견을 달리한다. 로티 Ri ch ard Ro rty는 미국철학회의 회장 발제사에서, 있는 것은 오직 대화뿐이지 어떠한 이상적인 목적도 설정 될 수 없고 또 설정될 필요도 없다는 입장을 강하게 지지하였다 .S 》 그 5) 'l'ragm a ti sm , Relati vi s m and lrrati on ali sm ', Proc tt d i땔 and Addnsses of the Amer- ica n Ph i lo 펙p h i ca/ Assoc iation , Au gust 1980. 이 밖에도 로티의 책 PIJilosoph :, and the Mi rr or of Natu r e, Prin c eto n Univ . Press, 1979 도 참조.

러나 '오직 대화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주장이 5 장에서 논의한 스스로 반박되는 상대주의와 어떻게 다론가? 우리가 각자 다른 우리의 생각들 을 합리성에 관한 다른 생각들로 이야기한다는 사실 자체에 이미 한계 개념 Grenzbe griff, 죽 현상적 진리라는 한겨 1 개념이 설정되어 있다.

기\_:: -1,로 재 2 장에서 언급된 바 있는 定理 뭉 여기에 소개한다. 정리 : F1, F2, …… , Fk 등의 술어들(반드시 일항 술 어일 필요는 없 다) 을 가진 언어체계 를 L 이라 하고, L 의 체계 속에 나오는 각각의 술 어에다 하나의 내포 i n t ens i on 를 부여하는 해석 i n t er p re t a ti on 을 1 라고 하자. 만약 1 가 있으나마나한 tri v i a l 것 이 아니 라면, 다시 말하여 적 어 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 공집합도 아니고 전체집합도 아닌 어떤 외연을 가지는 술어가 적어도 한 개는 있다고 해석된다면, 재 2 의 해석 J도 존재하게 되는데 이 제 2 의 해석 J는 I 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I 에 의해 서 참이 되는 문장은 어떠한 가능세계에 있어서나 J에 의해서도 참이 라고 해석된다. 증명 : W1, W2, …… 둥을 자연수와 갇은 질서 well-order i n g 를 가진 가능세계들이라 하고, U j-를 어떤 임의의 가능세계 W1 에 존재하는 가 능적 개체들의 집합이라고 하자. I 에 의하여 WJ 에서 어떤 술어 R 의 외연이 되는 집합을 R, j라고 하자(만약 Fu 가 일항술어가 아니라면 R,.J 는 n1 개의 항을 가진 집합이 될 것이다. 여기서 nI 는 술어 Fi 가 가진 독립변수의 자리수를 말한다). I 에 따른다면 가능세계 WJ 에서 언어체 계 L 의 ‘의도된 모델’은

사성 i somo rp h i sm 을 가지며, 이 구조는 또한 L 의 동일한 문장들(죽 가 능세계 WJ 에서 I 에 따라 참이 되는 L 의 문장들)에 대한 모델이 되기 도 한다. 이제 J를 L 의 해석이라고 해보자. J는 술어 F;(i = l, 2, ……, k) 에 다 다음과 갇은 내포를 부여한다. 죽 어떠한 가능세계 WJ 에서도 그 값 이 PAR, J)가 되도록 하는 함수 J ,(W) 가 그것이다. 다론 말로 표현한 다면 해석 J에 의하여 모든 가능세계 WJ 에서 F, 가 가지게 되는 외연 은 P1(R 1J)로 정의된다.

논평 매 : 문장들의 진리조건은 해석 I 에 있어서나 또는 해석 J에 있 어서나 논리적으로 동일하므로 반사실적 조건언 counte r fa c tu al condi- ti onah 도 표준 ‘가능세계의미론’에 보존될 수 있다.

역자 해제 r 이성 • 진리 • 역사』의 저자, 파트남 H. Pu t nam 은 현대 미국의 철학 운 주도하고 있는 떳몇 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일찌기 그는 과학 철학자 라이헨바하 H. Re ic henbach 로부터 울리학과 과학철학을 사사하 였고, 20 세기 미국의 대표적 철학자인 과인 W .V. Q u i ne 으로부터는 수 리논리, 수학기초론 등을 매운 바 있다 . .::z. 후 그는 MIT 의 촘스키 N. Chomsky , UCLA 의 카르납 R. Carna p과 몬태규 R. Monta g ue 등과 갇 은 미국의 지도급 언어철학자 내지는 분석철학자들로부터도 상당한 영 향을 받은 바 있으며 현재는 미국의 명문 하바드대학의 철학교수로 재 직중이다. 수학, 물리학, 언어학 등의 기초학문 분야에서의 기본훈련을 거친 그 이기에 그의 철학적 시야는 납달리 깊고 넓다고 할 수 있으며, 전통적 인 여러 철학적 문제들에 접근하는 방식과 시각도 새롭다 하겠다. 심리 철학 분야에서의 기능주의 fun cti on ali sm , 언어철학 분야에서의 직접지 시 dir e ct refe r ence 이론, 양자론에 대한 양자논리적 접근방법 둥에서 봅 수 있는 바와 갇아 그의 철학적 관심과 시야의 폭은 매우 다양하다. 최근에는 그의 철학적 관십이 비단 이론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도덕, 정 치, 역사 등의 실천과 관련된 영역에까지 확산되고 있다. 『이성 • 진 리 • 역사』도 바로 그러한 그의 철학적 관심의 화장을 대변해 주는 저서 로서, 이 저서에서 파트남은 이론과 실천의 미묘한 연관성을 다양하고 포판적으로 파해치고 있다. 이 책의 서두에서 파트남은 우선 二分法的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사고 습성에 주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인간은 많은 문제에 대하여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사 고의 습성온 비단 이론적인 문제를 다룰 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에 정할 때에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유물론 아니면 관념

론, 공산주의 아니 면 자본주의 등의 구분에서 우리는 그 단적 인 예 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양자택일적 사고의 습성을 철학에서는 ‘이분법 적 사고’ 또는 ‘양분법적 사고’라고 부른다. 파트남이 보기에는 전통적인 여러 철학적 문제들에 대처하는 방안도 항상 이와 같은 양분법적 현상을 보여 왔는데, 이러한 양분화 현상과 관련하여 파트남은 양분된 두 대립적인 입장들이 단순한 두 짝의 범주 로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사고물 유형화시키고 사고의 툴을 미리 고정 시켜 버 릴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고착된 사고의 풀, 이것은 바로 사고의 ‘이데올로기'화를 가져오는 바, 이러한 사고의 고착화 현상 이 철 학 의 고유한 문제에 대한 여러 입장과 관접간에서도 일어나고 있 다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갇이 ‘ 이데올로기'화한 사고의 유형을 타파하자 는 것이 파 트 남이 이 책에서 의도하는 바 중의 하나이다. 철학적인 논 의가 ‘이데올로기 ' 적인 성격을 띤다고 해서 반드시 잘못되었다고 할 수 는 없음 을 파트남도 인정한다. 가장 객관적이고 정밀하다고 하는 자연 과학에서조차도 어떤 과학이론이 마치 어떤 정당을 지지하거나 반대할 때와 마찬가지의 강도 높은 옹호나 반대는 아니겠지만 원리상으로는 그 와 다 룹 바 없는 지지나 반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적 인 논의가 ‘이데올로기 ' 적인 논쟁의 형식을 띠게 되면 철학적 논의 를 수 행하는 사람들의 철학적 사고 내지는 입장 자체가 유연성을 잃고 고착 되어 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이 파트남의 일관된 염려이다. 이 이분법적 사고의 전형적인 예 륭 파트남은 철학의 중요 영역인 형 이상학에서도 찾고 있다. 『이성 • 진리 • 역사 』 의 중심적 ‘테마’는 두 개 의 대 립되는 철학적 관접, 죽 형 이상학적 실재론 meta p h y si c a l rea li sm' 이라 불리우는 관점과 ‘전체적 상대주의 to ta l rela ti v i sm' 라 불 리우는 관점을 검토 • 비판하고, 이 양자의 중간적 위치 내지는 종합이 라고 봉 수 있는 제 3 의 입장, 죽 ‘내재적 실재론i n t ernal reali sm ' 또 는 ‘내재적 상대주의'라는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파트남의 설명은 다 양하다. 우선 형이상학적 실재론이란 세계가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독립 되어 있는 고정된 수의 대상들로 구성되어 있는 복합체라고 보는 입장 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로서의 형이상학적 실재론은 예컨대 마음과 신 체의 문제에 있어서 마음아라는 것도 물리적 자연세계에 존재하는 것으 로 간주하고, 또 가치와 사실의 문제에 있어서도 가치룹 사실의 세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파트남은 모든 것을 이와 같이 하나의 단일한 세계내에 있는 것으로 몰아 버리는 시도에 반대한다. 그렇게 되 면 감각경험도 일종의 물리적 사건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입장, 또 도 덕과 가치에 관하여서도 상대적이지 않은 사실이란 하나도 없다는 입장 에 빠지게 되는데, 이러한 입장은 파트남이 보기에는 찰못된 입장이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은 또한 세계를 완벽하게 記述하는 체계는 정확하 게 하나뿐이라는 견해로도 해석된다. 파트남은 물론 이러한 의미로서의 형이상학적 실재론에도 반대한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기술이 어떻게 하나뿐일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세계를 기술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개 념들은 철대적인 것도 아니요 꼭 없어서는 안될 성질의 것도 아니다. 인간이 아닌 다론 생물, 예컨대 외계인들은 그 外延이 우리가 사용하는 술어들의 외연과 다른, 따라서 우리의 언어로써 정의될 수 있는 어떠한 것과도 다른 술어들을 사용할지도 모를 일이며, 또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전혀 술어를 가지지 않고서도 세계를 기술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볼 때 외계인들의 언어로 된 세계의 기술이 우리의 언어로 된 세계의 기술과 정확하게 동일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느 냐는 것이 파트남의 지적이다. 역자의 생각에도 세계에 대한 완벽한 기 술이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주장은 너무 국단적인 주장이고, 나아가 찰못된 주장이 아닌가 한다. 세계를 기술하기 위해서 는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들이 ‘완벽한' 세계 기술을 위해서 충분한 것인 지도 문제이고, 또 인간이 도대체 실재세계를 기술하기에 과연 얼마나 정확하고, 얼마나 풍부한 개념들을 가지고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설혹 인간들이 형성시킨 개념들이 모두 정화하고 또 풍부하다 하더라도 기술 될 세계 자체가 그와 같은 정확한 개념들로 가늠될 수 있을지도 의문거 리이다. 세계 자체는 마음으로부터 독립되어 있고, 또 설혹 유일하다고 할지라도, 그 유일의 세계에 대한 인간적 해석이나 이론마저도 유일해 야 한다는 주장에는 찬동하기 힘들다. 세번째 의미로서의 형이상학적 실재론은 진리를 말이나 사고와 외적 대상들간에 성립되는 일종의 대웅관계 corres p ondence 라고 보는 입장이 다. 파트남은 오늘날 많은 철학자들이 진리문재에 관하여 진리를 이와 같온 대웅관계에서 찾으려는 일종의 모사설 cop y th eo ry을 지지하고 있 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모사설이 이론적 으로 지탱하기 힘들다는 접을 지적하고 있다. 모사설에 의하면 어떤 진

술이 참이라고 함은 그 진술이 우리의 마음이나 언어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어떤 객관적 실재에 부합되고 상옹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여 어 떤 진술의 참 • 거짓은 그 진술과 다른 진술들간의 관계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진술과 바깥 세계와의 관계, 죽 사실과의 관계에서 찾 아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최근에는 러셀 B. Russell 과 비트겐슈 타인 L. W ittg ens t e i n 의 소위 ‘논리적 원자론 Log ica l A t om i sm' 에서 제 시된 바 있으며, 더 멀리는 ‘사실을 사실 아니라고 하거나 사실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거짓이요, 사실을 사실대로 또 사실 아닌 것을 사실 아닌 것으로 말하는 것이 참이다’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도 암시된 바 있다. 이와 갇은 객관적 진리설의 배후에는 더 기본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이 항상 일정한 대상에 대응한다는 지칭이론이 깔려 있다고 파트남 은 본다. 그러나 파트남이 보기에는 이때 ‘대응한다 ’ 는 말이 도대체 무 엇을 뜻하는지, 대응하는지 안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또 다른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인데 그 기준은 도대체 무엇이며, 대옹된다는 대상 또는 사실이 과연 우리가 이미 갖추고 있는 개념체계나 구조와는 무관하게 독립되어 있는 것인지 하는 둥둥의 문제가 뒤따른다. 어린아이가 처음 으로 말을 배움 때 어떤 말에 해당되는(죽 대웅되는) 대상을 직접 접합 으로써 그 말을 습득하게 될 것임은 물론이다. 예컨대 ‘밥'이라는 말은 밥을 실지로 어린아이에게 보여주고 또 밥이 정말로 있는 여러 상황에 서 ‘밥'이라는 말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함으로써 습득될 것이다. 그러 나 과연 이것이 언어의 본질적인 측면안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대응되는' 대상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습득될 수 있고 사용 될 수 있는 말들도 많기 때문이다. 언어의 지칭문제가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파트남을 위시한 현대 많은 철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아다. 일찌기 심리학적 방법을 철학에 다분히 도입시킨 영국의 근대 경험론자 흄 D. Hume 도 우리가 인식을 할 때 정 말 대상과 직정 관계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 바 있다. 흄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은 결코 관념을(현대철학적으로 말한다면, 말을) 칙접 대상 과 연관시킬 수가 없고 다른 관념들과 비교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머리 속에 형성되어 있는 관념과 바깥 세계의 대상 사이에 모종의 연관 성이 있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말과 대상간의 연관성 문제, 죽 지칭문제는 현대 언어철학의 한 과제

이기도 하다. 말과 대상 사이에 항상 대응관계가 성립한다고 보는 전통 적인 이론운 파트남은 ‘마술적 지시이론’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 ‘마술 적'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이 이론에서는 말과 대상간에 성립된다는 소 위 그 ‘대응관계'라는 것이 신비로운 것일 수밖에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 이다. 이 마술적 지시이론에 반대하여 파트남은 말과 외적 대상간의 관 계가 우연적이고 인습적일 뿐이라는 점을 여러 가지 예를 통하여 설명 하고 있다. 또 그럼으로써 이에 근거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진 리설도 거부하고 있다. 이와 갇은 여러 가지 의미의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대한 대안으로서 재기된 것이 소위 ‘전체적 상대주의’라 불리우는 입장이다. 전체적 상대 주의의 입장을 제시한 학자들의 예로 파트남은 문화인류학자 무꼬 M. Foucault, 과학철학자 파이어 러벤트 P. Fey e rabend, 그리고 과학사학 자 쿤 T. Kuhn 동을 들고 있다. 상대주의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는 너 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형이상학과 관련시켜 말한다면 단 하나의 세계 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단 하나의 진리만 있는 것은 더구나 아니며, 세계 륭 바라다보는 시각과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세계, 다양한 진리 가 가능하다고 보는 입 장이 다. 파트남은 이러한 상대주의적 입장에도 물론 찬의를 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상대주의의 주장에 따르면 결국 참과 거짓을 구분 할 수 없고, 따라서 상대 주의 의 입 장 자체 가 ‘모순적 인 inc onsis t e n t' 입 장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어느 입장도 다른 입장보다 더 옳거나 더 정당한 것일 수 없다는 전체 적 상대주의의 주장 자체가 결국은 모순적인 입장에 불과하다는 것이 파트남이 보기에 왜 전체적 상대주의가 하나의 입장으로 성립될 수 없 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어떠한 입장임을 막론하고 모든 입장이 다 옳다 고 한다면 전체적 상대주의가 거짓이라고 보는 입장도 또한 옳다고 보 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찌기 풀라돈이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 뭉 공격할 때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고, 뜨 최근에 와서 비 트겐슈타인은 상대주의의 주장에 의하면 주장한다거나 생각한다는 것이 결국은 단순히 소리를 내는 것과 아무런 차이도 없을 것이며 주장을 하 고 생각을 하는 주체자로서의 각자는 하나의 사유자라기보다는 단순한 동물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라고 공격한 바 있다. 형이상학적 실재론 아니면 전체적 상대주의라는 이분법에 만족하지

않고 제 3 의 대안으로 파트남이 제시하고 있는 것이 소위 ‘내재적 실재 론’ 또는 ‘내재적 상대주의’라는 입장이다. 내재적 실재론의 입장에 의 하면 다양한 세계, 다양한 진리가 있음도 인칭되나 거짓도 또한 인정된 다. 다시 말하여 내재적 실재론은 한편으로 하나의 세계, 하나의 진리 만 있다는 접을 부인하고 세계와 진리의 다양성을 긍정한다는 접에서는 형이상학적 실재론과 거리물 취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성을 인 정한다고 해서 참과 거짓의 구별아처 있을 수 없다는 국단적인 결론을 거부한다는 접에서는 전체적 상대주의와도 보조를 달리한다. 내재적 실 재론에 의하면 진리란 실재 또는 사실과의 대응으로 간주될 수 없다. 오히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판가름해 줄 수 있는 유일 한 기 준은 소위 ‘합리 적 수용가능성 rati on al acce pt ab ility’의 기 준이 다. 즉 합리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진리가 결정된다. 그렇 다고 해서 합리적 수용가능성의 기준이 진리을 단순히 상대적인 것으로 전락시킨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합리적 수용가능성의 기준은 비상 대적인 진리의 개념을 합리적 탐구의 理想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내재 적 실재론의 입장은 말하자면 합리적 탐구룽 위한 모종의 기준이 있다 는 뜻이지 ‘어떤 것이돈 좋다 any thi n g g oes’ 는 식의 무기준적 상대주의 와는 다르다는 뜻이다. 파트남에 의하면 우리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에서 말하는 단일한 세계, 즉 우리들의 믿음들이 참이라면 그 믿음들에 그대 로 일치될 동일된 세계를 설정하지 않고서도 진리를 합리적 · 탐구의 이 상으로 삼을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믿을 필요가 있는 세계는 우 리 의 합리 적 탐구에 대 하여 ‘외 적 으로 exte r nally' 있는 것 이 아니 라 ‘내 재 적 으로 int e r nally' 있는 세 계 이 다. 따라서 단 하나의 세 계, 단 하나의 진리만 있다는 생각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 가지 다양한 탐구가 있을 수 있고, 다양한 탐구에서 사물을 바라다보는 우리의 시각도 다양 함에 따라 세계도 다양하고 진리도 다양하다는 것이 내재적 실재론의 기본입장이다. 진리뿐만 아니라 이성이나 합리성의 개념에 관하여서도 파트납은 동 일한 논의를 전개시키고 있다. 파트남은 합리성을 논리적 무모순성 log ica l cons i s t enc y과 갇은 고정된 형식적 원리로 이해하는 데 찬동하 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합리성 자체를 전반적으로 부인하는 듯한 소 위 ‘문화적 상대주의’의 핀에 서는 것도 아니다. 특히 합리성에 대한 문 화적 상대주의로부터의 도전은 십각하다. 합리성이란 우리가 익히 알다

시피 서구문화에서 배태되고 발전된 개념이며, 서구문화의 핵심이 지적 인 전동에 있다고 한다면 합리성의 개념은 그러한 지적 전통, 죽 과학 이나 이론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서구와 같은 지적인 문화전동을 가지지 않은 곳에서는 합리성이 찾아질 수 없다는 것일까? 과학과 이론이 발달하기 이전의 문화, 예컨대 마술이나 접성 울 신봉하는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은 비합리적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상대주의적 도전은 옛부터 있어 왔지만, 특히 최근에는 과학 철학에서도 이와 갇은 경향이 뚜렷이 나타남으로써 상대주의는 생각보 다 훨씬 더 강력하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파트남도 합리 성이 불변의 형식적 원리에 의하여 一義的으로 정의될 수 있다는 견해 에 회의적이다. 방법적인 원리는 세계물 바라다 보는 우리들 각자의 시 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시각의 시간 • 공간적 변화에 따라 원리 에도 변용이 있을 수 있음을 파트남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성과 합리성의 개념의 변용을 인정한다는 것이 이성 자체마저 아무 것이라도 될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못박는다. 역사와 시 공을 초월하여 있는 불변의 원리가 있다고 보든가 아니면 문화적 상대 주의를 인정하든가의 양자택일은 바로 파트남이 우려하고 있는 이분법 적 사고의 한 결과이다. 파트남은 이러한 논의를 또한 도덕과 가치의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시 키고 있다. 그는 합리성이라는 것이 과학에만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라 고 본다. 도덕적 진리도 과학적 진리와 마찬가지로 합리성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파트남에 의하면 합리성의 개념이 그 근원에 있어서는 인간의 번영, 죽 도덕과 가치라는 전체적인 개념의 한 부분에 해당된다. 따라서 파트남은 과연 무엇이 인간의 번영을 가져다 줄지를 규정해 주는 초역사적이고 범문화적인 도덕원리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시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도덕과 가치의 문제도 단순히 각 문화 에 상대적으로 생긴 현상에 불과하고 따라서 극히 우연적이고 인습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상대주의적 도덕관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과 학에서 추구하는 진리가 합리적인 과학적 탐구의 이상이라고 한다면, 합리적인 도덕적 탐구에 있어서도 이상이 있다고 가칭할 수 있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는 도덕적 진리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파트납의 입장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이성과 진리의 초역사성만 강조하는 것도, 그리고

그 정반대로 이성과 진리의 역사성만 강조하는 것도 사물과 세계를 정 확하게 보지 못한다는 것이 파트남의 주장의 요지이다. 파트남이 본 인 간의 이성과 진리는 초월적 의미와 내재적 의마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파트남은 만약 이성과 진리의 초월성, 죽 초역사성을 간과한다 면 푸꼬의 문화적 상대주의, 쿤이나 파아러벤트의 상대주의적 과학관, 벤담 Ben t ham 의 도덕적 상대주의 등과 갇은 잘못된 이론에 빠지기 쉬 우며, 또 그 정반대로 이성과 진리의 내재성을 망각한다면, 죽 이성과 진리가 항상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면 이상언어, 검증원리 둥과 갇은 고정된 기준에 얽매여 있는 실중주의 자들의 철학적 환상(파트남은 ‘철대이성’을 부르짖는 헤겔의 관념론도 바로 이러한 류의 환상에 속한다고 본다)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 고 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펴고 있는 파트납의 『이성 • 진리 • 역사』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보더라도 하나의 중요하고 홍미로운 책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성 • 진리 • 역사』에서 개진되고 있는 파트남의 입장에 난점이 나 무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그의 입장에 따르는 세부적 인 난접이나 의문들을 일일이 논하기는 어렵겠지만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아 한두 가지만 언급한다면 우선 내재적 실재론이라는 입장이 도대체 어떤 입장을 말하는 것인지부터가 뚜렷하지 않다. 이성과 진리의 초역 사성과 역사성을 동시에 인정하려는 입장 자체가 하나의 입장으로 주장 되고 설명되기란 그렇게 용이하지만은 않으리라 침작이 가지만 동시에 그러한 입장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그만큼이나 용이하지는 않은 것 갇 다. 좀더 좁혀서 이야기하자면 내재적 실재론의 중심적인 개념이 소위 합리적 수용가능성’이라는 것인데 이 개념부터가 이해하기에 적잖은 어 려움과 당혹감을 준다. 파트남에 의하면 세계가 어떤 대상들로 이루어 져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과 기술은 다양하다. 따라서 두 개의 이론이 그 존재론, 죽 무엇이 존재한다고 주장될 수 있는지 하는 문제 에 있어서는 서로 다를 수 있으면서도 둘 다 참일 수 있다. 그리고 그 두 이론을 모두 참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합리적 수용가능 성에서 찾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합리적 수용가능성의 개념이 정확히 어떻게 하나의 기준으로서 적용되고 작용될 수 있는지가 명확히 밝혀지 지 않고서는 내재적 실재론의 입장 자체도 명화하게 밝혀질 수 없을 것 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합리적 수용가능성의 개념이 파트남의 설명에

서 그렇게 분명한 것 같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사족을 붙인다면 합리성을 논할 때 파트남은 암암 리에 서구의 문화의 우월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문화적 상 대주의를 논박하면서 서구의 문화와 도덕과 이데올로기를 배격하는 문 화와 도덕은 일상적인 인간관계나 사회관계, 또는 칭치적인 관계들을 적합하고 합리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고 주장한다. 그 러나 파트남이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듯이 과연 서구에서의 인간 • 사 회 • 정치적 관계둥이 올바르게 기술되고 있는지는 자못 의심스럽다• 예 컨대 파트남은 나찌즘을 동박하면서 나찌즘을 사악하다고 보는 이유 륭 무엇보다도 나찌둘이 타인들에 해를 끼쳤기 때문인 것으로 여긴다. 그 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현재 서구의 문명이 타국에 어떤 해 룹 끼치 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는 접이다. 이 점에 관하여 파트 남의 날카로운 ‘비판의 면도날'이 둔해져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것 이 라 생각된다. 독아론적 함정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파트남의 정고는 역설적으로 바로 파트남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하겠다. 왜냐하 연 파트남 스스로도 서구문화 지상주의라는 문화적 독아론의 함정에 빠 져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 기 > 가치 158- 6 1 가 치 의 상 대성 177 과학 에 서 의 가치 158- 6 1 기능적 단순 성 160 도 구 주의 적 효융성 161 윤리적 가 치 170 인 간적 번 영 164 整合性 158-60 포괄성 159 행 복 177 가평 쿨 A. Garfi nk el 142 감 각 71 개 념 30 경 험 론 82- 9 0,1 4 8 공리 주 의 180 과 학 156-64 굿멘 N. Goodman 86-7, 89, 92, 99, 119, 147, 149, 174, 226- 7 귀 납 논 리 149-50, 222-7 그라이스 P. Gric e 127 그리 핀 D. Grif fin 113 국단적인 벤담주의자 등 167-8 글라이머 C. Glym our 111 기능주의 98-IO2 꽁트 A. Comt e 209, 217 내포 39- 4 3 내포와 의미 40 비 표준적 해 석 43-50, '~7 본질적 성질 51-2 내재적 실재론 ; 내적 관접 참조 내적 관정 ;6:; 이하 노이 라트 O. N eurath 129 노칙 R. Nozic k 51, 143-4, 194-6 논리 적 실중주의 ; 카르납 Carnap ,

스 티 븐 슨 Ste v enson, 경 험 주 의 참조 뉴돈 Newt on 76, 91, 95-6, 233, 252 니 체 F. Ni et s c hze 187, 252 다수주의 2IO-II 다윈 C. Darwi n 131, 231 대응관계 54- 6 더 밑 M. Dummett 73-4 데 까르뜨 R. Descarte s 75, 95- 7 데 넷 D. Dennett 42, 109, 111 데 이 빗슨 D. David s on 138, 148 도구주의 2II-3 동일설 97- 1 02 듀이 J. D ewey 192, 198-9 디 드로 Did e rot 98 <2 > 라이 프니 츠 Leib n iz 95 럿셀 B. Russell 121, 240-41 레닌 Lenin 148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 nc i 96 로티 R. Rorty 252 옥 크 J. Locke 64, 75, 78, 213 우 이스 C. S. Lewi s 175 〈 □ 〉 마르크스 Marx 函 마르크스주의 188-90 마흐 E . Mach 먀 맥키 J. L. Mackie 241-7 몬테 규 R. Monta g u e 40 무어 G. E. Moore 240- 4 7 밀 J. S. Mi ll 213,222

〈口〉 반중가능성 꾸 7-32 방법 맹신주의 22I-34, 238 버클리 G. Berkeley 76-8, 82, 213 바며 Weber 207-12 베 이즈의 정 리 Bay e' s Theorem 222-7 베 이 컨 F. Bacon 228 벤담 J. Benth a m 180-81, 200-5, 250, 국단적인 벤담론자들 참조 보일 Boy le 228 불가공약성 '-42 비실재론적 의미론 73, 내적 관정 참조 비 트겐슈타인 W ittge nste i n 14, 19, 33-4, 85-9, 129-33, 135, 145-6, 148, 154 〈人〉 사실 • 가치 이분법 153-78 사적 언어 82-91 상대주의 71, 142-8, 180-92 객 관적 상대 주의 198-9 인류학적 상대주의 191-2 지각의 상대성 77-8 상호작용설 96-7 선험적 102-6 성 질 l04-, 스마트 J. S. Smart 98, 137-8 스티븐슨 C. St ev enson 2.4 0 스콜렘 -되 벤하입 정 리 Skolem- Lt lw enheim the orem 18, 85-6 스피 노자 Sp ino za 95, 98 실재론 ; 진리 대옹설, 외적 관정, 내 적 관접 , 지칭,형이상학적 실 재론 참조 십신론 9,-l2.4

아리스토텔레스 Arist o t le 74- 5 , 162- 7 7, 210 아인슈타인 Ei ns te i n 148 아펠 K. 0. Ap e l 208 알뚜싸 L. Alth u sser 188-9 에클리스J. Eccles u2 오캄 Ockham 160 外延 31-2, 39-43 외적 관접 65 위 긴스 D. W iggins 67 다 76 윌 리 암스 B. A. 0. W illia m s 200- 4 유기적 통일성 18I 유사성 88-9 의미 43 의식 105-24 이성 : 합리성, 합리적 수용가능성 참조 이차성질 75-9 인류학 191- 2 일차성질 7,-9 @> 자연종 35-8, 63 자연주의적 오유 :z4 o- 4 7 적합성 :z3 5-7 지 시 13-6, :z9 , 67 마술적 지시이론 13-6, :z9 , 67 인과적 지칭이론 :z7 , 60-4 지칭과 사용 :z o 가 뮤우링검사 :z0 -4 지향 ,6-8 지향성 13,30 이하 진 리 65-7, 7:z - 3 관념적 진리실 73 同値원리 I,4-, 진리대웅설 -7, 73-87

타르스키의 이론 155-7 진화 53~6,2 〈大〉 처 칠 Churchil l u, 13, 25 촘스키언어학 l50 〈구〉 카르납 R. Carnap 40, 109, 128, 135, J5 0, J6 3, J9 3,. x94, 2J 4 -7, 222 칸트 J. Kant 44, 73, 78-82, 93,104, J4 5' ”54 케 인즈 J. M. Key ne s 224, ·240 콰인 W. 0. V. Qu in e 44, 47, 49, 6o-J, JO 3-4, J3 5, J3 8, J4 8 쿤 T. Kuhn 54, J3 5-4J , J5 0, J7 9 크 립 키 S. Krip k e 62, 242-4 타르스키 A. Tarski 155 두사 9-75 듀링 A. Turin g 20-2 〈포〉 파이 어 러 벤트 P. Feye r abend 135-41_ , 150 파트남 Putn a m 243-5 퍼 어 스 C. S. Peir c e 44, 231 평행론 96-7 포퍼 K. Pop per 129, 193, 214-7, 227-3I 푸꼬 M. Foucault 144, 150, 185-91 프레 거 I G. Frege 41, 148-9 프로이트 Freud 185 풀라돈 Plato 95, 143-4, 148, 185 필드 H. Fie l d 61-2

〈굴〉 합리 성 125~7, 194-5, 207-34 과학주의와 합리성 ’ 148-51 도구주의와 합리성 211-3 일상언어 철학자들의 견해 132 한계개념으로서의 합리성 巧 2-3 합리성과 경험주의 213-21 합리성과 귀납논리 221-7 합리성과 기술적 성공 208-9 합리성과 다수주의 210-11 합리 성 과 독아론 252-3 합리성과 반중가능성 227-31 합리성과 방법맹신주의 221-34, 238 합리성과 전동 237 합리성의 기준 127-35 합리적 수용가능성 125-51 논리적 실증주의의 입장 127-35 무정부주의의 입장 135-42 합리 적 수용가능성 과 가치 164-7 합리적 수용가능성과 경험세계 161 합리적 수용가능성과 과학주의 150-51 합리적 수용가능성과 귀납논리 149 합리적 수용가능성과 상대주의 142~8 합리적 수용가능성과 실재세계 161 합리적 수용가능성과 지각 163 자 해 석 43 국 0, '-7 헤겔 Hege l 188 헤어 R. Harre 131 현상돈 213-8 형이상학적 실재론 160, 171-5 형 이상학적 필연성 63, 242-3

金現明 서웅대학교 첩학과 및 [데 대학원 종업 미국 India n a 대학교 철학과 종업 ( 막사) 한양대학교 교수 역임 현재 서운대학교 철학과 교수 주요논문 Consta n t Conju n cti on and Necessit y 「 必然 .H : 과 4야'i 」 「歸귬'1 (1'. J 說 I I}]에 관한 小考」 며擧과 이데 운로기」 「칸 포퍼의 心身論 批判」 「 [ 지果개념 의 哲學的 分t li . 」 이성·진리·역사 대우 아승총서 번역園 • 초판―― 1987 년 7 원 30 일 2 판 1990 년 8 원 10 일 ■ 지은이_- Hi la ry Putn a m 옮긴이 金 U( i l lJJ 펴 낸이 ―――― 朴 · i k i告 펴낸 X 1 이音ifrl: ■ 충만둥목. 1966. ,. 19 새 1 ~ 142 호 우전대세계좌 1 선호 010041- 3 1- 5 23282 110- 1 11 서웅 종로구 관 청 동 44- 1 515- 2 oor , ,1,-2 000~z( 편 집 부) 7•34 - 2 000, '~8 ,2 4( 잉 업 부 ) 값 ,,000 원 카본 은 바꾸이 도 서나다.

대우학술총서(번역) I 유목罪困|국사 꾹편만宋만中 옮김/값 9.IXXl 인 2 수학의 학실성 모리스 탸마안·If世熙 옮김/값 9.lTu~ 3 중세철학사J . R. 와인버그對 3 8 김/값 5 . 있판 4 日本뜸의起源 R.A . 일라숯芳濱 옮김/값 2. 지훈 5 古代濱居音 11 學槪要 버니드 먼그렌·崔 1$ 愛 읍김/값 2. 었)인 6 말과 사물 이셀 푸코· 李光束 옮김/값 7, om! 7 춰철학과 과학철학 톄란만 91 입· 김상문 옮김/값 9. 따원 8 기후와 진화 로널드 피이슨·김준인 옮김/값 . 8, !ill 인 9 이성·진리·역사 밉러리 피트남숯禎明 옮김/김 5, 00)인 10 사회과약게서의 場理論 쿠르트 태빈박재호 옮김/값 6 . 따흰 I I 영국의 산업혁명 필라스 단町툰 洙· 후H 丙 옮김/김 4,700 인 12 현대과학철학논쟁 토마스 콘 사조승옥·김동식 옮김/값 IUOX) 인 13 있음에서 됨으로 입 2101 프리고진·이질수 옵김/값 7,500 인 14 비교종교학 요 01 집 바하· 김중서 옮김/값 4, 600 인 15 동물행동학 로버트 A . 하인드 · 징면강 옮김/값 6, o:® 16 현대우주론 D.W. AIOl □ f · 앙증인 옮김/값 8 . 았왼 17 시베리아의 샤머니즘 V. C l 오세 XI 91 ·: 신길싱 옮김/값 10. 띠판 8 조성 미 술 의 성식맡(i브란 20 밀 버트 - 畵畢파살 21 畵 文 !Ill ·'乃 鼠 U 信 의 기 원 랠 서 • 2i!률 · 25 일 반안기 티 OI ! 로 민 n 따는卑.:調i1위.f 기 띄 1 !. tm. 따 ·”“11 11 s .•‘ “ ”卑綱튀기 2. 細 刃 簡 0 국灣 配 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