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비이료집자출준을、다간한관 o화 에」南남문지覽碑충토族總地향 開등方방忠「 忠南 地方」「요민집남충으며의등냈、을책「 名郡의土史鄕南忠 『』전집설충남다중활동이。『 표로 化硏究所대은충남、鄕지土文며으금지냈화장을 양·홍원성문·청공주교학사、교고등 하고、 대학예창작과예를문졸순업저라는벌서자 』
표지자도 / 혼淸南違古地同
충남토속지명사전
충남토속지명崔사文전輝
民音社
19275
책 머리에 누가 시작하돈 우리 가 살고 있는 忠淸南道의 內歷이 그 나름대로 整理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지도 어언 30 년이 넘은 것 같다. 더구나 무수히 쏟아져나오는 역사 書 籍을 대할 때마다 역사의 照明이 빠진 곳이 있는 것 같고 歷史는 百姓의 숨소리를 간직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지도 오래 다. 나는 어렀을 때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다니는 官吏의 아들인 탓에 이어 스스로의 방랑벽으로 인해 충청남도 여러 곳을 옮겨다녔다. 때로는 고등 학교 敎師로, 그것도 싫어서 各文化院의 客員, 이어 30 고비를 넘기면서 放送局에 籍을 두고 나름대로 자료를 정리하였다. 이때 발행한 10 여 권의 質錄 山河 따위의 책자가 나로서는 나름대로의 피와 땀으로 엮은 충청남 도의 역사적 기록이다. 그리고 이미 빛을 본 『忠南傳說渠』과 발행을 서두 르고 있는 (忠南民話集』 및 『忠淸南道內 忠臣 孝子 烈女의 碑 解釋』 등은 앞으로 충청남도의 史蹟과 口碑文學을 연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 다. 이번에 발행하게 되는 『忠南土俗地名辭典』은 大宇財團의 주선으로 오랜 獲集描에서 얻은 지명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여 햇빛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츠음 나는 나의 연구를 확장시키기 위하여 忠淸南道鄕土文化硏究所라
는 간판을 걸고 행정적으로 또는 학술조사면에서 여러 곳의 도움을 받아 散在된 충청 남도 문화권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그 결과가 좋은 결실을 맺든, 연구중에 좌절하는 경우가 생기든 재료를 수집하여 사라져 가는 역 사룰 기록에 남기는 데에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r 忠南土俗地名辭典』을 엮으면서 충청남도에서 碩學으로 불리우는 故池 憲英先生의 존경스러움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학창시절의 기억이나 낡은 륙색을 메고 地官을 앞세워 집을 떠나서는 며칠이고 산과 들을 헤메고 돌 아오시 던 모습뿐만 아니 라 아무도 관심을 가지 지 않던 鄕土史의 중요성을 깨달으시고 바른 역사기록을 위해 지역에 따른 역사보전의 필요성을 역설 하시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훈을 간직하고 있음에도 그 작업을 다 감당하지는 못할 것 같다. 바른 조명이 필요한 시대에 태어나서 그 바른 조명을 이룩하기 위해 노 력하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 自問自慰해 본다. 이 책이 충청남도의 역사 를 연구하는 여러 사람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더이상 영광이 없겠다. 끝으로 이 사전이 나오기까지 3 년여의 긴 시간을 나와 함께 연구해 온 本 硏究所 專門委員 韓敬惠 峨의 勞苦와 책 이 나오게끔 도움을 주신 大宇 財團 理事長 李用熙博士께 감사를 드린다. 1988 년 7 월 崔文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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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책 머리에 一 5 일러두기 一 8 충남토속지명사전 一15 부록 : 市 • 郡別 충남토속지명도 一 221[일러두기】 이 사전은 충청남도 내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지명 가운데서 토속적이고, 특색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풀이한 것이다. 이 책을 우리 고장의 토속적인 지명의 鄕超와 이에 錄由된 문화적, 역사적 의의 를 새겨 보자는 데에 뜻이 있 다. 어느 고장이고 그 고장 나 름 의 독특한 문화가 있는 만큼 그곳의 지명 을 통 하여 그 고장의 뿌리 를 살펴보자는 데에도 의의가 있음은 물론 이다 . 필자는 1963 년부터 충청 남도 내 所地名에 따 른 조사 를 해 왔으며 , 1975 년부터 는 각 군별로 所地名의 풀이룰 묶어서 발간한 바 있는데, 이 사전은 그 가운데 서 발췌한 것도 포함했다. 지형변화에 따라서 지명이 소멸되어 비린 지역도 있으나 몇몇 지명은 그대로 수록하였다. 금강변에 大n 將 I 가 조 성되면서 지명이 물과 함께 호수에 잠긴 것 둥이 그 예이다. 이 사전은 가나다’順으로 지명 을 풀이해 나가는 한편 그 지명의 所在確認을 하 기 위하여 현행 지역명을 함께 적어넣었다. 그리고 所地名의 행정구역은 구체 적인 위치표시 룰 위하여 行政派]보다는 法定派]에 따라 표기하였다. 지명의 풀 이 에서도 그 지명으로 부르게 된 綠由 를 중접적으로 기술하였으며, 같은 지명일 지라도 그 지명의 유래가 각각 다 른 것은 따로 수 록 하였다. 지명의 구별은 다음과 갇이 略 I’i 로 표시하였다. 回 : 강, 하천(江, iiiJ/1 1) @I : 목 回 : 개, 포, 포구(海邊. mi, m i口) 回:물길(水道) 回 : 고개(時, 嶺, 峴) 回:바위(岩) 園 : 골짜기(谷) 園:산(山) 園:곶(串) 卽:섬(島) 園]:굴(窟) oo : 못(池), 소(jg) 딴 l: 나루터(津) 回:여울( 湜 ) 탄]:다리(稿) 떤: 마을(部落 村) 回 : 들(平野), 논(Iii) 田 : 우물, 샘(井, 泉) 回:만(잽) 回:항구(港) 固:모롱이 부록으로 실린 충남토속지명지도는 토속지명에 대한 공간적인 이해에 도움 을 줄 것이다. 市 • 郡별로 나누어 사전의 가나다순 지명번호로 위치 를 표시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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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가경주佳原) · I i回 1 瑞山郡 古南面 古南里 주변이 바다로 트인 절승지로서 밀물 때에 배를 띄우고 풍류를 즐기 는 곳이라 하여 가경주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곡祠谷回 2 舒川郡 板固面 卜大里 마을에 가래나무가 많다 하여 가곡, 가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구전加龜田回 3 瑞山郡 高北面 加口里 마울앞 들에 거북을 닮은 바위가 있다 하여 가구전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가그말 回 4 保후郡 蒸 1|| 面 烏浦里 마을 지형이 까마귀처럼 생겼으며 옛부터 까마귀가 많이 찾아돈다 하여 가그말이라 부르며 오촌烏村이라고도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가금내 回 5 論山郡 論山邑 大橋洞 두 냇물이 합하는 냇물가에 있는 마을이어서 가름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가금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나물 回 6 ~夜郡 全義面新井里 침 덩굴이 우거진 숲속에 우물이 있는 마을이 라 갈우물이라고 부르다 가 변하여 가나물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가을정처加乙井處라고 부 르는 관아가 있었다• 가나실 回 7 舒川郡 華陽面琴堂里
마을이 한일자로 길게 늘 어섰다 하여 가나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남바위 回 8 舒川郡 韓山面院山里 옛날에 한산군韓山郡과 임천군林川郡의 경계 를 가늠하던 바위라 가늠 바위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가남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낭골 回 9 唐津郡 石 r·1 面 長古項里 마을로 들 어가는 길목이 가는 골짜기로 되어 있다 하여 가는골이라 고 부르다가 변하여 가낭 골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누골 回 10 꿉陽郡 南賜面 大鳳里 마 을 이 가는 0毋 ] 골짜기 에 있으므로 가는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가 누 골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느니 回 11 公州郡牛城面 上西里 마 을 이 가는 〔細〕 골짜기 에 있으므로 가느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늠자골回 12 論 山郡 可也 谷面 陽村里 마을 뒷산 중턱에 관음사라는 절 이 있어서 관음사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가늠자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능골回 13 舒川郡 文山面 九洞里 마 을 이 가늘게 늘 어져 있다 하여 가는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가 능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다리 回 14 天原郡 城南面 新德里 마 을 이 처음 생겼을 때 덕망 있는 사람이 살았으며 그 후에도 덕을 쌓는 사람이 많이 사는 마 을 이 라 하여 가덕加 德 이 라고 부르다가 변 하여 가다리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가동 佳洞 回 15 燕岐郡 錦南面 鳳起里 산수가 수려한 마 을 이라 가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등거리回 16 牙山郡 仙 常 面 新聖里 신라新 羅 때 이곳 초정t叔井을 찾아온 왕자가 갓과 동거리 를 벗어 놓 . 고 물을 맞으러 다녔다 하여 갓동거리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가둥 거 리, 각상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라기 回 17 牙山郡 仙 ft 面 佳山里 옛날 마 을 이 생길 때에 마 을 주변에 가라지풀(강아지풀)이 많이 있 었다 하여 가라지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가라기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가라티 回 18 論山郡 腸村而居士里 옛날에는 마을 주위가 갈밭 이었으므로 갈밭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가라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랏 回 19 公川郡 寺谷面佳梧里 마 을 부근에 갈대가 무성했다 하여 가랏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래 回 20 大田市 中區 中村洞 옛날부터 농기구인 가래 없이는 생계 를 지탱하기가 어려운 마을이라 가래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가래미 回 21 瑞山郡 近興面 程竹里 임진왜란 때 한 선비가 왜적 을 피하여 갈대숲에 숨었는데 왜구가 갈 대숲 을 뒤지다가 선비 를 못 찾고 갈대소리만 난다고 하며 돌아갔다 하여 가래 미 , 갈음葛音 노음盧音이 라고도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가로림만園 22F却 山郡 泰安邑 八峯面 梨園面 大山面 충남 서 산군 북쪽 해안에 있는 만으로, 북쪽으로는 트였으나 동남쪽 으로는 반도에 연연한 육지로 서쪽으로는 가느다란 곶 원이반도遠梨 半島로 가려져 있다. 백제百 濟 때부터 중국과 왕래가 있어서 중국에 서 정착해 오는 사람 둘 이 많았다. 태안 泰安 은 중국의 소주蘇 111 와 그 경치가 비교된다 하여 신라新羅 때는 소주蘇 1 · l1 라 불렀었다. 그리고 소주 북쪽의 만 축 가로림만加 露林腐 은 소주호蘇 ) · I1 湖라고 부르다가 그 후 황해와 내 륙지 방보다는 이슬이 많이 내리는 호수라 하여 가로 립호加露林湖라고 불 렀는데 조선시대 이후부터는 가로림만加露林 源 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수군영水軍 營 인 만호영萬戶 營 도 있었 다. 가롱고지 回 23 唐津郡 唐津邑 彩 雲 里 마 을 지형이 갯가에 곶을 이루었으므로 가롱고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룡 佳龍 땐 24 天原郡 成歡邑 安宮里 마을 지형이 가인佳人이 용 龍을 타고 하늘을 나는 형국이라 하여 가 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루개 回 25 舒川郡 板稀面 馬袋里 군계郡界에 있는 가루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고개이 름 에 연하여
가 루 개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 가름내 回 26 論 山郡 論 山 邑大 梧洞 한 냇 물 이 갈라져서 두 냇 물 로 흐르는 유역에 자리한 마 을 이라 가 름 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름자골回 刃保 率 郡 熊 Ill 面 坪 里 전에 작은 암자庵子가 있었던 마 을 이 라 가암자 골 이 라고 부르 다가 변 하여 가 름 자골이라고 분르게 되었다 한다. 가릇매 回 28 舒川郡 舒 ll| 邑 三山里 산둥성이 룰 가로질러 마 을 로 들 어가는 길 이 마치 여인의 가리마처럼 생겼다 하여 가르마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가 롯 매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가리산이 回 29 天原郡 笠楊面 延谷里 마을 뒷산에 침넝쿨이 우거져 있으므로 갈산 葛 山이라고 부 르 다가 변 하여 가리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리 정골 回 30 扶餘郡 外山面 佳 德 里 옛날에는 마을 주변에 나무가 많아서 가리막(나무 바가지) 을 만 들 어 팔던 집이 있었으므로 가리점 골 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가리정골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마골 l 回 31 기 錦山郡 濟原面 龍化里 고려시대에 그릇 을 굽던 큰 가마가 있었다 하여 가마골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가마골 2 回 31- 2 훤皮郡 西面 釜洞里 고려 충렬왕 17 년에 여원연합군 礎 元聯合軍이 합단哈丹의 군사가 쳐들 어 왔을 때 이곳에 큰 솥 을 걸고 군병에게 먹 을 것을 끓여 주었다 하여 가마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마못 回 32 唐津郡 松嶽面盤村里 옛날에 마치 가마처럼 생긴 못이 있었다 하여 가마못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마울 回 33 公州郡 鷄龍面 花 隱 里 마을 지형이 가마솔처럽 생겼다 하여 가마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막골 回 34 錦山郡珍山面 浮岩里
마 울 쥬변에 서 그릇을 굽 는 분 토粉 土 가 나와서 그 롯을 구운 때 산막 山慕 을 치음 지었던 마 을 이라 가막 골 이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 가무정이 멘 35 天原郡 東面 廣德里 절골 뒤에 있는 산으 로 옛날 기우재 祈市祭룰 지낼 때 무당 들 이 춤 을 추 었다 하여 가무정 이라 고 부르 는 산이다. 이곳 낙수암落水岩에서 놀 던 사람 들 이 돌 아 갈 때 이 곳 에서 노래와 춤을 추게 된다 하여 가무 정이라 고 부르는 산이다. 가삿골 回 36 [g津郡 松山面 佳谷里 마 을 지형 이 ·가 사 衆装처럼 생겼다 하여 가삿 골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승구지 回 37 保寧 郡 정{ J II 面 永 保 里 옛 날 에 는 섭 으 로 드나 들 던 나 루 터였으므로 진곶 津串 이라고 부르다가 곶 안팎에 마 을 이 있으므로 가슴구지라 하다가 변하여 가승구지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 가시내 回 38 瑞 山郡 遠 北面 防 葛 里 마 을 앞으로 냇 물 이 흐 르고 가시나무가 많은 마 을 이라 하여 가시내 라고 부 르게 되 었다 한다 . 가시티 回 39 扶 餘 郡 林 )II 面 껍 校里 가시나무가 많은 가시티고개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가시티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가암 回 40 天原郡 並JI|面 佳田里 마을 앞에 운치 를 돋구는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가암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가야골 回 41 論 山郡 可也谷面 六谷里 백제 때 산골을 지키는 관아가 있었던 마을로 당시의 기와가 많이 나 오는 마 을 이므로 기와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가야꿀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가야구 回 42 扶餘郡 良化面 岩l! I 里 마을에 개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으며 마을 지형이 또한 개처럽 생겼 다 하여 개아구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가야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가얘 回 43 牙山郡新昌面 佳 德 里
마을 지형이 가위 모양이라 가위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가애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가오리 回 44 洪城郡 堡項面 胎封里 마 울 지형이 가오리 같다 하여 가오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오티 回 45 洪城郡 葛山面 孟谷里 마 을 에 다섯 가호家戶가 넘으면 마 을 에 천재天災가 따 른 다 하여 다섯 가호만 거주하는 마 을 이라 가오티可五時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울말 回 46 天原郡 笠楊面獨井里 마 을 앞에 냇물이 흐르므로 개울말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가 울말 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음말 回 47 扶餘郡 世道面 領認院里 옛날에 가락을 잘 타는 가인 歌人 이 살았다 하여 그때부터 가음말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의도 賈諒島 맵 48 瑞山郡近興面 買諒島里 황해 바다로 나와서 그 가에 있으므로 가의도, 가외섬 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장골 回 49 大田市 西區 佳壯洞 마을 뒷동산을 허물 때 땅속에서 가재가 나왔다 하여 가장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재물 回 50 洪城郡 않項面 .長 楊里 마을에 좋 은 우 물 이 여 러 개 있는 마 을 이 라 가정 佳:jt 이 라고 부르다 가 변하여 가재 물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재웅 回 51 洪城郡 洪城邑大岳里 마을에 좋은 우물이 있어서 조선 선조 때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이 홍주성 왼쪽의 좋은 우 물 이라 하여 가좌정佳左 井 이라고 부르게 한 마 을로서 뒤에 변하여 가재 울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정 阿 亭 回 52 論 山郡 可也谷面 賜村里 지금으로부터 약 300 여 년 전에 고산현감 高 山 縣監을 지낸 조씨趙氏가 처음 이 룩 한 마 을 로서 마 을 에 당시부터 좋은 느티나무 정자가 있었 다 하여 가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가증 回 53 扶餘郡 扶餘邑 佳增里 동쪽에서 흉 러오는 냇물 가징개 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가증佳增, 죽
냇 물 이 름을 따서 그 리 부 른 다. 가지내 圈 54 靑陽郡 ~扶 餘 郡 칠 갑산에서 발 원하여 금 강으로 들 어가는 냇물로 여러 곳에서 냇 물 이 홀 러 한 냇 물 이 되 므로 가 지내라 하고 변하여 까치내라고도 부른 다. 가지 막 回 55 唐津郡 貞 美 面 *孟 山里 옛 날 에 가 씨 賈氏가 술 막 을 짓 고 주막 을 운영하던 마 을 이라 가씨막이 라고 부 르 다가 변하여 가지막이라고 부 르는 마 을 이다. 가지울 回 56 洪城郡 結城 面 城谷里 조 선시대에 장정승張政丞 이 벼 슬을 버리고 이 곳 에 머무르면서 서당 올 짓고 후진을 가르친 마 을 로서, 학문이 가지 를 쳐서 나간다 하여 서당에 연유 하여 가 지울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추개 맨 57 舒 川 郡板橋 面 右羅里 산에 특 히 까치 가 많이 사 는 데 그 아래에 마 을 이 있으므로 까치고개 라고 부르 다가 변하여 가추개라고 부르는 마 울 이다. 가추리 回 58 唐津 郡 松 山 面m r9 里 마 을 지형이 까치집 처럼 생겼다 하여 까치울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가 추 리 라 고 부르 게 되 었다 한다. 가출미 回 59 洪城 郡 銀河 面 花峯里 마 을 이 가차산加次山 아래에 있으므로 처음은 산 이 름을 따라 가차산 이라고 부르 다가 변하여 가 출 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까치내 回 60 靑賜 郡 大時 面 il ll JI I 里 마 을 이 칠 갑산七甲山 지천구곡之JI I 九曲에 흐르는 까치내 강변에 있으 므로 냇 물 이 름을 따서 까치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학이 回 61 燕岐 郡 南 面 陽 化里 마 을 지형이 학 鶴 의 형국이라 하여 가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향리 佳鄕里 回 62 牙山郡 道高 面 鄕山里 들 가운데에 있는 마 을 로서 물이 좋 고 땅이 비옥하여 살기 좋 은 마 을 이 라 가향리佳鄕里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가홍回 63 公 州郡 長 岐面 東 峴 里 마 을 이 아 름 답고 비옥하여 이 마 을 에 자리 를 잡으면 사람 들 이 모두 홍해진다 하여 가 .:홍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각등 回 64 舒川郡板岳面 後洞里
옛날에 갓점이 있었던 마을이라 갓동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각둥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각시 배 回 65 扶餘郡 世道面 長山里 옛 날 에 시집가던 각시가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 다 고 하는데. 그 바위 릅 각시바위라고 부르고 마을은 각시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깍지 밥골 回 66 音陽郡 長坪面 倭谷里 마 을 지형이 마치 소牛가 콩깍지 를 먹 는 형국 이라 하여 깍지밥골 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각 홍 재 回 衍公州郡 維崩 面文 58 里 산이 거하고 고개가 오똑하니 가파 른 고개였다 하여 각 홀 재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간동 討淸 ] 回 68 洪城郡 洪城邑 大稿里 예전에 대간 臺 練 벼슬을 지낸 사람이 살았던 마 을 이라 간동 또는 대 간동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간두문 干杜門 回 69 荷陽郡 木面 池谷里 옛날에는 여러 사람이 드나들었으나 절개節介 룰 지키는 한 선비가 끝내 지조 를 지키기 위하여 문을 닫고 살았다 하여 그 마 을을 간두문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간드리 回 70 保 寧郡 熊JI|面 冠 堂 里 옛날 벼 슬 에서 그만둔 사람이나 병 을 얻어 고생하던 사람도 이 마 을 에 들 어서면 편안하게 살게 된다 하여 간입 看入 , 간드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간리 良里 回 71 扶餘郡 世 道面 良大里 마 을 이 이십사 방위方位의 하나인 북동의 간방間方에 위치해 있으므 로 간리 良里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간월동 看 月 洞 回 72 瑞山郡大山面 雲 山里 마 을 앞에 개가 벌처럼 펼쳐져 있는데 옛날에는 마을 사람 들 이 생업 인 제염 製藍을 할 때에 달을 보고 일할 만큼 부지런한 마 을 이었다 하 여 간월동이 라고 부른다. 간지동干支洞땐 73 論 山郡 恩津面龍山里 옛날부터 물이 좋은 우물이 있어서 이 우물을 간지정干支井이라고 부 르고, 이 우물이 있는 마을 을 간지동干支洞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
다. 간평 間坪 回 74 保후郡 周浦面 臣浦里 마을과 마 을 사이의 들 에 마을이 있다 하여 간평間坪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갈고지 텐 75 扶除郡 襄岩面 菌 1E 里 마 을 지형이 갈고리처럽 생겼다 하여 갈고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갈때기 回 76 扶除郡 玉 山面 佳德里 마 을 과 마을 주변에 갈대가 많이 있었으므로 노덕亞德, 가덕加德이라 고도 부르고 갈때기 라고 부론다. 갇마무시 回 77 保寧郡蒸川面 永保里 마 을 에 갈마움수형漏篤飮水形의 명당이 있다 하여 갈마무시라고 부 른 다. 조선시대에 수사영水使 솽 의 형장刑場이 있었으며, 현재 천주교 인순교비天主敎人狗敎碑가 · 있다. 갈매 지 回 78 錦山郡 秋富面 備禮里 마을 뒷산의 형국이 갈매기처럼 생겼다 하여 갈매기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갈매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갇몰 回 79 舒川郡 馬山面 芝山里 마 을 지형이 갈증을 느끼는 말.%이 대천大川의 물을 먹는 형국이라 갈 물 ,변하여 갈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갈미 回 80 論 山郡 光石面 葛山里 마을에서 침이 많이 나온다 하여 갈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깔판 回 81 唐津郡 新平面 梅山里 산을 깎아서 마을을 이 룩 하였다 하여 깔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감계 甘溪回 82 洪城郡 洪城邑 月山里 마을이 곶으로 되어 있으며 옛날에 관아官街가 있었던 마을이라 감 계라고 부른다. 감꿀 回 83 瑞山郡 浮石面 松柚里 마을에 감나무가 줄비하게 많았고 또한 그 감 맛이 꿀맛과 같다 하여 마을을 감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감독굴 回 84 舒川郡 華 H塀 面 大等里
마윤에 돌샘 이 있는데 그 물맛이 좋 아서 감독정甘石.:J I: 이라고 부르 다 가 변하여 감독굴이 라고 부르는 마을이 다. 감동 甘洞 回 85 舒川郡 板稿面 板橋里 옛날에 한 스님 ( 답 이 지나는 길 에 이 곳에서 하룻밤을 쉬어 갈 때에 잠이 들었는 데 꿈에 도승道(竹이 나타나 말하기 를 , 이 곳에 단 음식을 뿌리면 마 을 이 크게 도움을 받을 것이라 하여 감 , 고구마 , 강낭콩 등 의 씨 를 뿌리자 크게 잘되 어 마울이 부유해졌으므로 그후 감동甘洞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 곳 감[柳]은 진상품進上品으로 유명 하다. 감찰언 監察樞 回 86 唐津郡 牛江面 江「 ' l 里 지금으로부터 270 여 년 전에 감찰監察 벼슬울 한 사람이 언 樞을 쌓고 마을을 이 룩 하였다 하여 감찰언監察J區 또는 감찰원監察院이라고 부른 다. 감타기 回 87 牙山郡 排芳面 新典里 산의 형국이 감투 모양을 한 감투봉 아래에 마을이 있다 하여 감타기 라고 부른다. 감두봉 園 88 天原郡 廣德面 大平里 산 모양이 감투처럽 생겼다 하여 감투봉이라고 부른다. 조선 선조宣 祖 때부터 광해군光海君에 걸쳐 의적義賊 안수安 壽 의 누이동생이 진 을 쳤던 산이다. 갑골 回 89 公州郡 鷄龍 而 中壯里 마을 가까이에 갑사甲 寺 라고 부르는 절이 있으므로 갑골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감동甲洞땐 OO 大田市 西區 甲洞 옛날에 갑산소甲山所라고 부르는 소所가 있었던 마울이라 갑동甲洞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갑파 甲坡 回 91 靑陽郡 大特面上甲里 지 형 이 몹시 가파 른 곳에 마을이 있으므로 갑파甲坡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갓개 回 92 扶餘郡 良化面 笠浦里 마을 지 형 이 갓처 럽 생 겼으며 금강錦江가에 있으므로 갓개 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갓다머니 땐 93 禮 山郡 昞峯而 笠沈里 옛 날 대 홍현大興縣 이 있 을 때 대 홍 고을 에서 북쪽 가장자리에 있던 마 을 이므로 갓뜸 이라 하다가 변하여 갓담 이라 부르고 , 다시 갓다머 니라 고 부른 다. 강경골 回 94 公 川市 中洞 옛 날 에 이 마 을 에서 경서經따 를 강 i , Y'i.하던 사람이 살았 다 하여 강경講 經골 이라 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강금달 回 % 洪城郡 金馬 面 德) t里 마 을 에 비치 는 달 이 강에 비 칠 때 는 더욱 아 름 다우며 풍류 를 즐 기는 마 을 이라 하여 강금달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강령 江領 回 % 扶餘郡 湯岩 而 北 泉里 마 울 앞으 로 강i I 이 호르고 마 을 뒤로는 고개가 있다 하여 강령江嶺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강문 江門 回 97 f吾津郡 牛iI面 따 “I 里 마 을 이 법근내 입구에 있으므로 강문iI P1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강상굴 回 98 扶餘郡 石城面 鳳 亭 里 옛 날 에 하 늘 에서 신선神仙 들 이 자주 찾아와 놀던 곳이라 하여 강선 동降{山洞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강상 굴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강성기미 回 99 公州郡 正安iiii -長 院里 마 을 근처에 글을 읽는 강당 講堂 이 있어서 그 강당에서 글 읽는 소리 가 이곳까지 들 린다 하여 마을 을 강성기미라고 부르개 되었다. 강장 康蔣 回 100 牙山郡 松嶽iiii iI 長 里 이곳에 마 을 이 생기면서 강씨 li l t.!.'\: 와 장씨蔣氏가 많이 살았다 하여 강 장康蔣이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강정께 回 101 靑陽 郡 靑南 面 東江里 마을 앞으로 금강$f(ii I 이 호르고 그 금강변에 백인정百忍 亭 이라고 부 르는 정자가 섰으므로 강정江 亭 , 강정께 라고 부르는 마 을 이 다. 정자 백인정百忍 亭 은 효자 우윤항禹允恒이 지은 정자로서 이 정자에서 도 의道義 룰 강의하고 정자 옆에 단培 을 만 들 어 칠 성신七 星神을 모셨었 다. 그후 우씨禹氏 문중에서 오효자 五孝子 가 나왔고 문사文士도 많이 배출하였다 한다.
강참봉굴 姜參奉窟 回 102 錦 山郡 秋 富 面 聖堂里 서대산西袋山에 있는 굴이다. 엣 날 에 강참 봉姜參 奉 이란 사 람 이 이 곳 에서 공부 를 하며 도 道 률 통 하여 요 술을 부 리 곤 하 였 다. 그는 요술 로 농부 들을 희 롱 하고 주모 酒母 룰 놀 라게 하기 위하여 이 무 기가 되어 주모에게 대 들 다가 주모에게 술 벼락 을 맞고 환신遠身 하 지 못하 고 이 굴에 들 어가서 살게 되었다 하여 강 참봉 굴 姜 參 奉 窟 이라 고 부른 다. 강척골回 103 牙山郡 藍特 面 iI i꿉 里 돌 이 많아 영인산 盛 仁山의 물 이 흘 러서 이 곳 에 이 르 면 건 천 이 되어 항상 냇 물 이 말라 있으므로 마 을을 건천 동 이 라고 부르 다가 변 하여 강척골이라고 부 른 다. 강텃골回 104 大田市 中 區 龍頭洞 옛날에 유성장 儒 城 場을 보고 옥천장 沃 }ll J:易을 보러 가 는 장꾼 들 이 백 운동白 雲 洞의 팻집거리가 아니면 이 곳 강텃 골 에서 쉬어가 곤 하였다 한다 . 장꾼 들 이 쉬어가는 마 을 이라 장텃 골 이라고 부 르 다가 변하여 강텃 골 이라고 부르 는 마 을 이다. 개굴봉 園 11:6 保 寧 郡 藍 浦面 邑內 里 산 모양이 개구리처럼 생겼다 하여 개굴봉이라고 부 른 다 . 장사추와 형 長 蛇追珪形의 명 당이 있다는 산이 다. 개모기 回 1 따 天原郡 北面 梅 松里 옛날에 술 에 취한 주인이 장터에서 돌 아오다가 쓰러져 자게 되었 을 때 마침 산 불 이 나서 불 에 타 죽 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따라오던 그 사람의 집 개가 주인 을 살리기 위해 고개 아래 냇 물 에 가서 몸 을 물 에 적시고는 주인 곁 에 타오르는 산 불을 끄느라고 몇 번이고 됩굴 며, 냇 물 에 몸 을 적시곤 하여 산 불을 끄고는 마침내 주인을 살라고 개는 불 에 타 죽 었다 한다 . 그래서 그 언덕에 개 를 위로하는 뜻에서 의구비 義 狗碑 률 세우고 그 아래에 있는 마 을을 개모기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 .l 에 따르면 이곳에 도기 소陶器所가 있었다 한다. 개목 回 107 保 寧 郡 藍 浦面 梁項 里 마을 지형이 개미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개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개복이 回 108 ~ 山郡 新陽面 晩士里 마 을 지형이 마치 개가 엎 드려 있 는 형국이라 하여 개복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 다. 개사리 回 109 扶餘郡 石城面 ,炳 亭 里 마을 동남쪽으로는 석 성천石 hk J I1 이, 서쪽으로는 금 강$li',i I. 이 마 을을 두르고 있으므로 개사리라고 부른다. 개월 뗀 110 겁t h t R[ 洪東面 月언里 마 을 전체가 달맞 이 를 하듯 훤히 트 인 지대에 마을이 있다 하여 개월 이라고 부 른 다. 개티 回 111 論 山郡 上月面 酒谷里 옛 날 에 이 지역에서 이 름 난 효자 박장손朴 長孫 이 고개 아래 마을에 살면서 좋은 물건 이나 좋은 술을 구하면 개의 둥에 실려서 고개 너머 아버지에게 보내곤 하여 효자의 개가 넘어다닌 고개라 하여 개티라 고 부른다. 개화내 §1 112 溫開市 草步洞 마 을 지형이 삼태기처럼 아 늑 하여 꽃이 일찍 피는 마 을 이라 개화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갯골 回 113 天原郡 廣德 面 芝長里 개티고개 입구에 마 을 이 있으므로 갯골이라고 부 른 다. 또한 조선朝 鮮 세조世 祖 가 온양 온천에 거동하여 이곳을 지날 때에 이 마을에 사 는 우덕화라는 사람이 세조에게 팥떡을 바쳤다는데 그후에 그가 판 관判 官 에 올랐다 하여 왕승리王升里라고도 부른다. 거로동回 114 瑞山郡 遠 北面 東海里 옛날부터 장수 長面 하는 노인이 많은 마을이라 거로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거무내 圈 115 礎 山郡~洪城郡 푸른 산과 계곡 둥을 누비고 흐르는 냇물로 냇물 주변이 숲으로 우거 져서 냇물이 검어 보인다 하여 거무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거문녀 回 116 瑞山郡 浮石面 ilii馬里 빛이 겁다 하여 거문바위라고 부르다가 거문녀라고 부르게 된 바위 다. 60 여 명이 앉을 만한 바위로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다 하여 부암 浮 岩이라고도 부른다. 부석면浮石面이란 명칭도 이 바위에서 연유된
호칭이다. 거범고개 띠 117 天原郡 東面 長松里 고개 주변에 큰 호랑이가 살았다 하여 거범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한 다. 거변 回 118 ~ 山郡 新賜面 b11 支里 마 을 지형이 가지처럼 생겼다 하여 가지라고도 부 른 다. 고려 시대高 iJ-(1時代에 거 질물소巨呢勿f 9 t라고 부르는 향소부곡lfl l ; 所部 1 1J 1 에 따 른 소 가 있었다. 변하여 뒤에 거변소居邊 H t라고 불렀는 데 변하여 다시 거 변 居j상 이 라고 부르게 된 마 을 이 다. 거사리 回 119 牙山郡 (Ill':t~ i hi 新聖里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왕자가 이 곳 부 근 에 있 는 초정 t R :) ! : 울 찾 아왔 을 때 머 물 렀던 마 을 이라 한다. 그후 초정에 많은 인사 들 이 물을 맞으러 왔다가 쉬어가는 마 을 이라 거사리 居士里 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거사막 回 120 公州郡 i開龍面 箕山里 옛 날 에 세상 물정 에 어두웠던 마을에 한 처사 處士가 나타나 마을에 움막 을 짓고 살면서 마 을을 깨우치게 하였다 하여 거사막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거아도떠 121 瑞山郡 南面 居兒島里 섬이 마치 거위처럼 생겼다 하여 거아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거재 回 122 天安市 淸堂洞 마 을 앞에는 아홉 용il'l 이 꿈 틀 거리는 구룡봉九龍 峯 이 있고, 마 울 뒤 에는 일봉산日 峯 山과 원봉산月峯山이 마을 을 밤낮으로 비추이서 이 마 울 에서는 많은 인재가 난다 하여 거재라고 부르게 되었다. 전냇담回 123 錦山郡 演原面 水塘里 거북이가 살고 있다는 토성봉 아래 한 연못 을 건너서 마 울 이 새로 생 겼다 하여 건냇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건드래 땐 124 扶餘郡 良化面 碧龍里 마 을 에 호르는 내 가 돌이 많아서 항상 말라 있으므로 그 냇물을 건조 내, 마을을 건드래라고 부르게 되었다. 걸매 回 125 牙山郡 仁)서面 傑梅里 들 가운데에 새로 마을이 개척될 때에 매우 넓은 황무지에서 또렷한 매화처럼 환환 피어오르라고 마을을 걸매라고 부르게 하였다 한다.
걸치기 §1 126 祖山郡 新視面 西界陽里 풍수설에 따르면 해복형 8,( 伏形의 명당이 있다는 마을 로 서 예로부터 이 곳에 정착한 농부 들 이 들 에서 격 양가 ! 쌉f. P와 k 를 소리 높여 부 르 며 태평을 누렸다 하여 격양이라고 부르 다가 변하여 굴 치기, 이어 걸 치 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검상골回 127 公 州市 槍 詳洞 나 루 가 먼저 생기고 나 루 터가 생기면서 그 나 루블 금 상진 今 尙津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그후 나 루 터에 마 을 이 생기면서 금 상 골 이라고 부 르다가 변하여 검상 골 이라고 부 르는 마을이다. 검새울回 128 天原郡 城 南面 新 沙 里 운파산 아래에 있 는 마 을 로서 산세가 칼날 같다 하여 김자 G ij字 률 따 고 마 을 앞 냇 물 에 맑은 모래가 있어서 사砂자 를 따서 검사울아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검세 울 이라고 부 른 다. 검조도. 멘 129 瑞 山 郡 浮 石面 倉 里 육지 가까이에 있는 섭으로서 큰 바위로 된 섬이다. 바다 사람 들 은 물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조수의 표준을 이 섬 바위가 잠기는 것으로 밀 물 과 씰물의 표준 을 잡는다 하여 김조도檢潮島라고 부르게 된 섬 이 다. 검한 回 130 錦山郡 秋富面要光里 예로부터 부지런하게 일하느라고 땀 을 홀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 울 이 라 하여 검 한(幻 汗 또는 겁 한리 ( 幻 汗里라고 부른다. 격렬비도園 131 瑠山郡 近興面 買証島里 충청남도 황해안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섬으로서 재비가 강남 으로 떠날 때나 돌 아올 때나 육지에 다다르기 전에 제일 먼저 쉬어가 고 쉬어오는 섬이라 격렬비도格列飛島라고 부른다. 또한 물치라고도 부르는데 물의 끝이 라 하여 그리 부론다. 경 당리 61 132 錦山郡 富利面 賜谷里 옛날에 한양에서 내려와서 정착한 선비 한 사람이 집을 짓기 전에 강 당講堂부터 짓고, 여러 사람을 가르치며 정착한 마울이라 경당리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경운리 回 133 論山郡 회g面 丁壯里 마을에 운중반월형 冥 中半月形의 명당이 있다는 마을이다. 옛날에 한
도승이 지나면서 이 마을 사람들에 이르기 를 구름이 낮게 깔려서 흐 르면 마을에 인재가 탄생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갔는데, 그후 구름이 낮게 깔리면서 인재가 나왔다 한다. 구름이 때 를 기다리게 하는 마을 이라 하여 경운리 1 정꼬 里라고 부 른 다. 계룡댕이 回 134 扶餘郡 恩山面洪山里 마을이 마치 계룡산 산줄기에 매달려 있는 것처럽 보인다 하여 붙여 진 이름이다. 옛날에 신당神堂이 있어서 계룡산의 산신 윤 위 한 마을 이라 전한다. 계룡산回 135 公州郡 鷄龍面 충청남도 5 개군에 걸쳐 있는 산이다. 옛날에는 구룡산九龍山이라 하 여 아홉 마리의 용이 꿈 툴 거리는 산이라 하였다. 그후 산 모양이 닭 의 벗과 같다 하여 계룡산이라 하였으며, 또한 사방에 계곡과 용추龍 澈가 있으므로 용산龍山이라고도 불렀다 . 신라新 羅 때는 오악五岳의 하나인 중악中岳이라 하여 중악단中岳i있 을 설치하여 춘 추로 제사 를 지내어 조선시대 말기까지 2,000 년을 이어왔다. 조선 태조가 신도내 에 궁궐을 짓고 왕도 를 옮기려 하다가 중도에서 중단하였다. 그리고 는 상봉인 연천봉連天 O -, ft에다 절을 짓고 계룡산 정씨鄭氏의 800 년 왕 운王運을 누르기 위해 압정사壓鄭寺 를 지었으며 동학사 및 갑사, 신 원사의 큰 절을 비롯하여 수십 개의 암자와 그밖에 동서양의 온갖 교 敎가 모여 그야말로 r 정감 록 鄭鑑錄』을 신봉하는 신의 천국을 이 루었 던 산이다. 계봉回 136 靑腸郡 木面 本義里 계 봉산 & g鳳山 아래 에 마을이 있으므로 계 봉이 라고 부른다. 백 재 시 대 이전부터 계봉산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계봉마을 사람들은 그 후손들로 맥을 잇는다 한다. 백제 멸망 후에도 반드시 백제가 부 흥하여 닭과 봉의 울음에 따라 백재 천하가 온다고 믿고 백제 유민으 로서의 궁지 를 높혔던 마을이라 전한다. 계봉산 回 137 탐陽郡 定山面 白谷里 산의 형국이 두루미처럽 생겼다 하여 계봉산鷄瓜山이라고 부른다. 또한 두루미재, 두룽산성豆陵山城이라고도 부르는데 백제 멸망 후 오 랫동안 백제부흥군百演復興軍이 저항하던 산과 성으로서 신라의 김 유신金庚信이 이끄는 신라군과 혈전 끝에 백제부흥군이 모두 옥쇄玉
粹한 산이라 전한다. 계족산回 138 大德 郡 新 追津邑 산 봉우리가 독 이하게 뛰어났으며 그 봉우리 를 중심으로 뻗친 산령 이 닭 다리 같 다 하여 계 족 산 的足 山이라고 부 론 다. 또한 봉수대가 산 봉에 있 으 므로 계룡 산봉수, 박 달 나무가 많으므로 박 달 산이 라고 부르 다가 백 달 산 白達 山이라고 도 부르 며, 우 술 성 雨述城 이라고 불 렀다고도 한다 . 한 재 가 심할 때 이 산이 울 면 비가 온다 하여 비수리라고도 부 른 다. 고갈回 139 扶餘郡 外山面 葛 山 里 마 을 이 꾀 깔봉 아래에 있 으므로 처 음 에는 꾀까리라고 부르다가 변하 여 고 갈i邪3 , 이어 갈 산 葛 山이라고 도 부른 다. 고개 정 回 140 rg 津郡 高大面 大 村里 마 을 에 개 물 , 개정이라고 부르 는 우 물 이 있으므로 고개정 高蓋 井이라 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고곡回 141 rift 山 郡 古 德 面 大 川里 삼한시대 三韓 時代 이전부터 마 을 이 있었다 하여 고곡古谷이라고 부른 다. 삼한시대에 는 감계국 感笑國 의 큰 마 을 이었다고 전한다. 고단평 回 142 公 州郡 寺谷 面古 堂 里 조선시대朝 鮮時 代 초기부터 단평역丹 坪驛 이 있었던 마을로 뒤에 역이 우성牛 城 땅으로 옮겨 가자 구단평 역 이 라 부르다가 변하여 고단평 이 라고 부르게 된 마 을 이 다. 고도실回 143 禮 山郡 鳳 山面 古 道 里 마 을 이 높은 골짜기에 있으므로 고도실 또는 고도촌이 라고 부른다. 또한 일설로는 마한馬韓 때에 부 족 의 족장族 長 이 거주했던 옛고을이 라 고도실이 라고 부른다고도 한다. 고두머 리 땐 144 保 寧 郡 藍 浦面 鳳 德 里 마을 지형이 고리처럽 생겼다 하여 고리머리, 환리環里라고 부르다 가 변하여 고두머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고등산땝 145 公州郡 正安面 北 溪 里 산이 높아서 작은 산을 거느리고 있다 하여 고등산 高登 山이 라고 부 른 다. 또한 고등산봉수, 봉수대라고도 부르는데 고려 때부터 봉수대가 있어서 남쪽으로는 공주 월성산月城山의 봉수대와 북 쪽으로는 쌍령
迎嶺 봉수대에 응했던 봉수대가 있었다. 고락回 146 옹f /1 1 郡 板橘面 板橋里 옛날에 마을에 고락사古樂 寺 라는 절 이 있었으므로 이에 연유하여 고 락이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고래원 回 147l ;!f津郡 牛江面內諒里 약 270 여 년 전에 고래 L諒 ]가 조수 를 따라 들 어왔다가 이 곳 에서 물 러가 지 못하고 죽었다 하는데, 그후 그 부근에 언Ji맑 을 쌓고 마을 아 들 어 셨는데 고래가 죽은 곳 에 마을이 생겼다 하여 고래원 또는 경원諒元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고려산回 148 天 原郡 木 )II 面 所仕里 고려 때 홍건적紅 市賊이 침법해 오므로 이 지역 사람 들 이 이 산으로 피난을 하여 머무르게 되었다. 당시 홍건적은 쉽게 물러가지 않아 산 에 피난한 사람들은 산에서 물 이 떨어지자 〈 아야 목아〉하고 울부짖 었다고 한다. 고려 때 백성들이 피난을 ' 하여 고생한 산이라 후손 들 은 고려산 高麗山 , 고려성高麗城이라고 부 론 다. 고루골 回 149 大川市 花山洞 마 을 에 큰 괴목이 있다 하여 괴동 1 鬼洞이라고도 부 른 다. 마 을 사람 둘 이 매년 정월 보름 날 괴목에 재사 를 지내면서부터 마 을 에 굶는 사람 없이 고 루 살게 되었다 하여 이웃에서 고루골 이라 고 부러워하는 마 을 이라 한다. 고류동 回 150 祖 山郡 大興面 炭坊里 옛 날부 터 마을에 비드나무가 많 아서 청풍명월로 통했던 마 을 이다. 늙은 버드나무가 척척 늘 어진 마을이라 고 류동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고린장굴 回 151 舒川郡 華賜面 t秋洞里 옛날부터 마 을 에 고려장 高麗葬울 하던 무덤(굴)이 있어 고린장곡,이 어 고린장굴로 부르는 마 을 이다. 고마 回 152 舒川郡 華陽面 卯馬里 마 을 지 형 이 말이 달리는 형국이 라 고마 nn 馬라고 부른다. 고만回 153 保 寧郡 周浦面 高亭里 마을 을 벗어나서 강가로 굴을 따러 갈 때에 골짜기가 열두 개나 되어 아낙네들이 가도가도 골짜기가 끝이 없다 하여 그 안팎에 있는 마
을을 고만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고만산 덴 154 保 寧郡 周 nI i面 高꾸里 산에서 바라다보이는 곳에 고만도?국만島가 있어·서 산형이 그쪽과 비 슷하다 하여 고만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조선시대의 석학 이 치 * 1 片: 와 그의 아 들 이지 무李之茂, 이지번 李之蕃 , 토정土 卒 이지함李 之函 과 이지무의 아 들 명곡鳴谷 이산보 李山t H 의 묘가 있는 산이다. 고말개 回 155 舒川郡馬西面 桂][里 마을 지형이 게의 발처럼 생겼다 하여 게발개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고말개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고무렁 이 回 156 洪 h t R[ 洪城邑 古岩里 마 을 언덕에 울 라서서 마 을을 내려다 보면 지형이 마치 어미 를 돌아 다보 는 용의 형국 이라 하여 고모령顧毋碩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고 모랭이, 이어 고무령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고무리 回 157 禮 山郡 大述 面 花山里 옛 날 에는 마 을 에 곰 이 자주 나타났다 하여 곰리, 옹동熊洞이라고 부 르던 마 을 로, 그 지명이 변하여 고무리로 부르는 마을이다. 고분내 回 158 牙山郡 藍止雅面 曲橘里 냇물이 호르는 중요한 지점에 곱은 다리가 있으므로 고분내 또는 곡 교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고분장승이 回 159 論山郡 練武邑高內洞 마을에 굽은 장승長丞이 있다 하여 고분장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고비을回 lOO 公州郡 寺谷面 富谷里 마을 부근의 골이 가 늘 며 긴 여울이 굽이져 있으므로 곱여울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고비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고빛 回 161 瑞山郡 災 山面 高폈里 마을이 있는 곳의 지대가 높아서 고비가 많다 하여 고비실, 고색이라 부르다가 고빛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고살매 땐 162 舒川郡 舒川邑 三山里 옛날에 큰 비가 왔 을 때 지금의 전라북도 옥구군 개정면의 고살뫼라 는 큰 산이 강 물 이 법람한 이곳까지 밀려 떠내려와서 쌓이게 되어 전 라도에서 조곡과 세금을 받아갔다는 비지飛地로 고살뫼라고 부르다
가 변하여 고살매 라고 부른다 한다. 고순개 回 163 舒川郡 長項邑 元水洞 마을 지형이 고슴도치처럼 생겼다 하여 고슴개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고순개라고 부른다. 고욧골 回 164 瑞山郡 高北面 長要里 마을의 삼면이 삼준산三峻山, 연암산燕岩山으로 둘러싸 여 있으며, 난 세에도 마을에 피해가 없게 지명을 지어 고요 골 아라고 부르다가 변 하여 고욧골이 라고 부른다. 고용산回 165 牙山郡 盜仁 面 城內里 산에 초목은 없고 큰 돌만 많이 쌓여진 산이다. 산봉우리가 들 가운 데 높이 솟아서 사방을 내 려 다 보는 웅장한 산이 라 하여 고용산高i勇 山이라고 부른다. 병자호란丙 子胡亂 때에는 호병이 이 곳 에 침입해 오 자 백성들이 고용산으로 피난하여 쳐들어오는 호병을 단숨에 물리쳤 다는 산이다. 또한 토정土 亭 이지함李之函이 아산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어서 백성 들을 무마할 때에, 하루는 통 인通引 울 한 사람 데리고 이 산에 올라와서 통인을 시켜 여러 바위 를 살피며 그 바위 속에 금 은金銀이 가득하므로 잘 보관하여야 한다고 하자, 통인은 그 바위 속 에 있는 금은이 욕심이 나서 이토정이 가끔 생지네즙 울 마시고 생률 을 먹어 지네의 독을 제거하는 것을 보고, 이 기회에 그 를 죽이고 금 은을 혼자 독차지 하여야겠다는 생각에서 생 률 대신 버드나무 를 생 률같이 쳐서 먹게 하여 그 를 죽이고 이 산에 혼자 와서 바위 를 건드 리며 속을 살핀죽 금은은 하나도 없고 헛일이 되어 버렀다 한다. 이 로 인하여 우리나라 아전 중에서 아산 아전이 가장 천대받았다고 하 는데 정신적인 금은을 사물로 오인한 한 통인의 슬픔이 가려져 있는 산이다. 고윤돌回 166 洪城郡 洪東面 求精里 마을에 고인돌이 있으므로 고인돌이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고윤돌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고잔 回 1fi1 瑞山郡 浮石面沿馬里 마을이 곶으로 되어 있다 하여 고잔高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고정 回 168 洪城郡 金馬面龍興里 옛날 주씨朱氏들이 처음 정착하여 이룩한 마을로 주씨의 시조 주고
정朱高亭의 이 름을 따서 고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고주개 땐 169 公州市 月尾洞 마을 뒷산이 배의 형국이라 하는데 고적한 배처럼 의따로 둘레 를 긋 고 태평을 누린다 한다. 외로운 배가 태평을 누린다 하여 고주孤舟개 라고 부른다 한다. 고지미 回 170 論 山郡 論 山邑 芝 山洞 마 을 뒷산이 들쪽을 향하여 뻗어 내려와서 곶을 이루는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곶지 미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고지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고집팽이들回 171 舒川郡馬山面 梨寺里 옛날 한 농부가 가난을 이기기 위하여 먹지도 쉬지도 않고 들을 개간 하여 끝내는 부자가 되었다 하는데, 고집으로 이 룩 한 들이라 하여 고 집팽이들이라고 부른다. 고청봉回 172 公川郡 反浦面 孔岩里 옛날 서고청徐孤 꿉 이 이 부근에 살았으며 그의 산소가 있는 산이라 고청봉孤 靑峰 이라고 부르는 산이다. 고파도 ml 173 瑞山郡 八峰面 古波島里 · 고려 때부터 수군만호영水軍蒸戶 쌍 이 있었던 섭이다. 가로림만加露林 껍의 파도 를 헤치는 군선이 많이 드나 들 던 섬이라 고파도古波島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고혈내 回 174 禮 山郡 古德面 石谷里 옛날에 덕산현 德 山縣의 동헌東軒이 있었던 마을이라 고현내古縣內라 고 부르다가 변하여 고현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곡고리 回 175 牙山郡 堅特面 曲稿里 고분다리내의 고분다리가 있다는 마을이다. 다리가 휘어져 유선형으 로 놓여있다 하여 곡교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꼭두실 回 176 天原郡 廣德面大德里 옛날에는 마을 부근에서 곱둘이 많이 나왔다 하여 곱도실이라고 부 르다가 변하여 꼭두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곤 ,, 동 回 177 扶餘郡 九龍面 玄岩里 넓은 들에 자리한 마을로 그리 혼하지 않은 곤昆g이라는 새가 목 히 많 이 드나들던 마을아 라 곤유동混&遊洞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골내미산回 178 錦山郡 福海 面 谷 南里 산이 골짜기 가운데에 외따로 서 있다 하여 골 내미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곰실 回 179 唐津 郡 汚 Ill 面 大時 里 옛날에는 곰이 살 았던 지역에 후 미진 나무숲이 우거져 있었다. 그 지 역에는 특 히 곰이 많이 살았다 하는데, 그 곳 에 마 울 이 생기면서 곰실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곱쟁이텃골回 180 天 原 郡 廣 德 面 貸 山院里 옛날에 욕심이 많은 한 수전노가 있어서 보리고개에 돈과 물 품 을 빌 려주고는 가 을 에 가서 곱쟁이로 받아갔다 한다. 그 수전노가 어느 늦 가을에 곡식과 돈 을 소에 싣고 이 골짜기 를 넘다가 도적때에게 대 앗 기게 되자 곡식을 담은 쌀가마 를 껴안고 그 대로 죽었다 한다. 물 건을 곱쟁이로 받는 욕심 많은 수전노가 넘어다니던 골 짜기라 하여 곱쟁 이텃골이라고 부 른 다. 곱철 回 181 扶餘郡 良化面 時 音 里 백제시대 고 을 이었던 마 을 이라 고읍古邑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곱 절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곱절골 回 182 ~ 山郡大 述 面 方山里 옛날에 큰 절이 있었던 마 을 이라 고절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곱 절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공동원 回 183 唐 津 郡 牛江面 富長 里 지 금으로부터 350 여 년 전에 마 을 에 서 공동으로 뚝 을 막고 새 터 전을 마련한 마 을 이라 공동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공뜸 땐 184 保 寧 郡 靑 羅面 長 峴里 마을이 처음 생길 때에 공씨孔氏 들 이 많이 살았다 하여 공뜸이라고 부른다. 공산 園 185 公州市山城洞 산 모양이 공公자처 럼 생 겼다 하여 공산이 라고 부른다. 또한 이 괄의 난 때 한양에서 이곳에 피난온 인조仁祖가 쌍나무에 의지하여 한양 에서 좋온 소식이 오기 를 기다렸다 하여 쌍수산성雙樹山城이라고도 부른다. 공세 回 186 唐 津 郡 新平面 및 井里조선시대 조창租倉이 있었던 아산만牙山 潟 가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에 조창이 있어 서 조창이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공세 라고 부르게 되 었다. 공수동 回 187 洪城郡 裂項 面 公里 조선시대에 공수전公須田 이 있었던 마 을 이라 그때부터 공수동이라고 불렀다 . 조선 세조世祖 때 한성부溪城府 판윤判尹을 지낸 황효공 黃 孝 恭 과 그의 사돈인 공조판서工曹判맙 조계은曹磁殷과 아우되는 대사헌 大司憲 조계상팹 繼 商이 낙향하여 산 마 울 이다. 공숫골 回 188 天原郡 豊歲面 南館里 조선 중종中宗 때 효자 유언 겸兪彦겁t 이 시묘侍 墓 로 묘 근처에 사는데 항상 법이 그 의 시막 근 처에서 그 를 지켜 주었다 한다. 이 룰 알게된 충청감사忠淸監司가 그 를 나라에 천거하여 벼슬을 내리게 하여 호조 정랑 戶曹 正郞이 되었다. 공사貢士가 난 마을이라 공사골이라고 부르 다가 변하여 공숫골이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공시미 回 189 天原郡 並川面 梅城里 마 을 이 풍류 를 타고난 지역에 자리하여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청정 하고 공정하게 산다 하여 공심公心이라고 부르던 마을인데 변하여 공시미라고 부르개 되었다. 공판들 回 19: ) 牙山郡 仁川面 新城里 옛날에 나뭇꾼 들 이 모여서 공 을 차던 들 이 라 공찬 들 이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공판 들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공포回 191 F! f津郡 牛江面 孔浦里 지금으로부터 400 여 년 전에 공씨孔氏 성 을 가진 사람이 갯둑을 막아 농지 를 개척한 지역에 마 울 이 생겼으므로 공포 1L 浦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꽃단봉回 192 牙山郡 新昌面 佳內里 봄에는 진달래꽃이 많이 피는 꽃단봉이라고 부르는 산 아래에 마 울 이 있으므로 꽃단봉이 라고 부르는 마 울 이 다. 꽃미 땝 193 論 山郡 彩雲 面 花山里 백제 말엽 궁중에서 이곳 낮은 산에다 꽃 과 대나무 룔 심고 궁중의 유 원지 를 만 들 어 왕과 왕족 을 이 놀이터로 사용하였던 들 에 마 을 이 있 으므로 꽃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꽃창이 回 194 靑賜郡 化城面花岩里 들에 꽃이 많이 피는 곳으로서 그 꽃밭 가운데에 사창社요이 있었던 마을이라 꽃창이라고 불러오던 마을이다. 과녁둘回 195 扶餘郡 팬山面 北村里 옛날 이 부근에 사정射 亭 이 있어서 이곳에 과녁을 박아놓고 화살을 날렀다 하는데 그 과녁이 박혀 있는 마을이라 과녁 들 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과례 回 100 大田市 中巨 文化洞 옛날에 예 학禮學에 밝은 우씨禹氏 문중의 학자가 낙향하여 살던 마을 로서 그를 따라 마을 사람들이 다례茶綾 를 정성껏 드리는 마을이라 하여 과례果體라고 부르게 된 마울이다. 과목골 回 197 靑腸郡 定山面 松訪里 마을에 과일발이 많으며 또한 과일이 잘되는 마을이라 과목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과성 回 198 燕岐郡 西面 性齊里 마울 지형이 새의 둥우리처럼 생겼다 하는데 둥우리재 마을과 혼돈 을 피하기 위해 과성菓城 또는 봉촌이 라고 부르는 마을이 다. 관대 回 1913 牙山郡 屯浦面 館袋里 예전에 모산부곡毛山部曲의 관아와 모산면청의 관아가 있었던 마을 이 라 관대館袋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관불산 園 200 公州郡 維鳩面 鹿 )II 里 산의 모양이 부처 를 닮았다 하여 관불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관저리 땐 201 大田市 西區 關誰洞 옛날 관아官街가 있었던 지접에서 그 아래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관 저리라고 부른다. 또한 일설에는 서승지徐承旨가 살면서 시전詩傳의 관관저구關關誰鳩에서 이름을 따 그렇게 부르게 하였다는 설도 있다. 관청동 回 202 牙山郡 仁州面觀岩里 마을 앞에 들을 끼고 있는데 이 들을 개척하기 위하여 마을이 처음 생겨 간척동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관청동觀淸洞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광대을 回 203 劑湯郡 저南面 光大里 옛날부터 남사당男寺黨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으므로 광대울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광덕산떠 204 天原郡 廣德面 산이 비옥하고 풍후豊厚하여 덕이 있어 보이므로 덕을 후하개 풍기 는 산이라 하여 광덕산廣德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광생 리 回 205 舒川郡 華陽面 南星里 넓은 둘을 끼고 있는 마을로서 햇빛과 달빛이 특 히 밝게 비치는 마을 이라 광생리光生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광수回 200 論山郡 豆磨面 金岩里 옛 날에 광소부곡廣炤部曲이 있었던 마을이라 처음에는 광소라고 부 르 다가 변하여 광수라고 부르게 된 마 을 이다. 광시 回 207 禮 山郡 光時面 光時里 고려시대에 광세역光世驛이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광세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광시光時라고 부르게 된 마 을 이다. 광제 回 200 洪城郡 長谷面廣城里 넓은 들 에 마 을 이 위치해서 이곳에 사는 사람 들 은 선량한 백성뿐이 며, 덕 을 많이 베푼다 하여 광제廣 濟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괘경 回 209 扶 餘郡南面 松訪里 마 을 의 지형이 거울 을 매단 것 같이 생겼다 하여 괘경掛鏡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괴납回 210 公州郡 利仁面 龍城里 용이 여의주如意珠 를 물고 있다고 하는 용주산龍珠山 아래에 위치하 여 큰 괴목이 남쪽에 서서 마 을을 지켜주므로 괴남魄南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괴정동回 211 大田市 西區 棟亭洞 마을에 늙은 괴목이 있어서 괴정동이라고 부 른 다. 괴목은 느티나무 정자 역할을 하며, 이곳에서 청동기시대 靑銅器時 代의 유물이 많이 출 토된댜 괴화산 回 212 쩐렀括 錦南面 盤谷里 산 꼭대기에 큰 느티나무가 하늘을 찌르듯이 서 있으며 산에는 괘둥 형掛燈形의 명당이 있다는 산이나, 남쪽에서 산을 바라보면 산이 환 하게 불이 켜져 있는 것 같다 하여 괴화산이라고 부른다. 구강펄回 213 論山郡 論 山邑 登華洞
옛날에는 강줄기가 이 들로 홀러서 많은 상선商船 들 이 출 입하여 장 이 섰으므로 큰 부락이 형성되었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에 큰 장마가 있을 때 강줄기가 다른 곳으로 호르게 되어 이 곳은 육지가 되 어 버렸다. 옛날에 강이 홀렀던 들 이라 구강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구고운 땐 214 論山郡 伐谷面 賜山里 마을에 신라시대 문호文奈 최치원崔致遠이 창건했다 는 고운사孤雲寺 가 있었는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소실되었다 한다. 그래서 그 절에 연유하여 이 마 을 은 구고운舊孤 袁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구골미 回 215 公州郡 儀堂面 柳溪里 마을 앞으로 흐르는 냇물이 아홉 구비가 되어 호른다 하여 구골미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구노현 回 216 論山郡 可也谷面 陽村里 마 을 지형이 마치 개 아홉 마리가 밥을 먹는 형국이라 하여 처음에는 구 른 개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구노현九老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구덕 回 217 扶餘郡 世道面 降德里 마을 지형이 구덕(대바구니)처럼 생겼다 하여 구덕, 귀덕婦 德 이라고 부른다. 구도문이 回 218 大德郡 山內面 九到里 조선시대의 유명한 성리학자 송국보宋國前 I i가 이 곳 에 정착해 살면서 그 가문에시 과거科 毋 에 급재하여 홍패紅牌 룔 타 가지고 도문至 l j門한 사람이 아홉 사람이나 된다 하여 구도문九至 I J P1 이라고 부르는 명문의 마을이다. 또한 일설로는 냇물이 아홉 개가 합치는 곳에 마을이 있다 는 설도 있다. 구도실 땐 219 天原郡 東面 求道里 조선 연산군 때 문장, 절 의節 義 로 유명한 탁영福環 김일손金망 9 孫이 처 가인 이곳에 살면서 학문에 마음 을 썼다 하여 구도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는 천재 적 힘을 구심求心과 구도求道로 스스로 길을 선택한 양심적인 선비였으므로 그의 정성에 따라 그가 공부하던 마 을을 구도실求 道室 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한다. 구두따뜸 回 220 論山郡 論 山邑 登華洞 옛날에는 마을 이 름 이 없었는데 일제시대에 구두따라는 사람이 이곳
에서 농사 를 지으며 살게 되자, 그 성姓올 따라 구두따뜸이라고 부르 게 된 마을이다. 구둘뜨리 回 221 瑞山郡 所遠面 嚴項里 마을에서 옛날부터 구 들 돌이 많이 나온다 하여 구둘뜨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구등재 回 222 論 山郡 城東面 定止里 마 을 이 깊 은 산중에 있어서 옛날에는 마을을 찾으려면 아홉 둥성이 룰 넘어야 하므로 구등재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구란이 맨 223 公 州郡 利仁面 九岩里 마 울 이 거북바위 안쪽에 자리해 있으므로 구암이라고 부르다가 변하 여 구란이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구렁이回 224 九 靈 里 牙山郡排芳面 마 을 지형이 구렁이처럽 생겼다 하여 구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구레실 回 225 公州郡 長 岐面 臣 龍里 마을 지형이 굴레처럼 생겼다 하여 구레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구로지 回 226 唐津郡 高大面 玉峴里 조선시대 강빈 姜 嬪의 난 때 한양에서 그 화를 피하기 위해 명문의 가 문 아홉 노인이 이곳으로 숨어서 목숨을 구했으며 이곳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아홉 노인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여 구로지九老地 라고 부른다 한다. 구룡실回 끄 7 洪城郡 廣 )|I 邑 災 龍里 마을에 명당자리가 있는데 구룡쟁주형九龍爭珠形이라 한다. 그래서 구룡실이 라고 부르는 마울이 다. 구를 回 228 껍佐 郡 定山面 馬特里 마을로 들어서는 데에는 을자乙字형의 모퉁이 를 아홉 구비 지나야 마을에 들어선다 하여 구을九乙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구 를 이라고 부르게 된 마을이다. 구름쟁 잇둘 回 229 劑場郡 長坪面 美堂里 들이 넓고 물이 좋은 지대로서 아무리 가물어도 하 늘 에 구 름 만 끼면 물이 저절로 생길 정도로 물이 많은 들이라 구름쟁잇 들 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구례 땐 230 錦山郡 福 흙 面 九 禮 里 옛날에는 마 을 부근에서 구리 H 미가 많이 나왔다 하여 구리라고 불렀 는데 변하여 구례九 禮 라고 부르는 마울이다. 구마니 回 231 大田市 東 區 大禾洞 마을 앞에 큰 내가 굽이져 있으며 마 을 의 지형이 거북이가 엎드려 먼 곳 을 바라다 보는 형국이라 구만鑑 混t 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구마니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구물 回 232 唐 津 郡 唐津 邑 柚 谷 里 마을 모퉁이에 우 물 이 있는데 마을에서 거북이가 우물로 들 어가는 지형이라 하여 구정 龜 井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구 물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구버배 땐 233 瑞山郡 所遠面 波 퍄 里 마을에 굽은 바위가 있어서 처음에는 마울 울 구버바위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구버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구봉산回 234 大田市 西區 關唯洞 산에 높은 봉우리 아홉 개가 수려하게 솟아 있어서 그 경치가 매우 아 름 다우므로 구봉산九峰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구사산 rm 235 公州郡利仁面 木洞里 산의 지형이 아홉 마디로 되어 있으며 또한 옛날에는 산에 아홉 개의 절이 있었다 하여 구사산九寺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구수리 回 236 公州郡 寺谷面 花月里 마을에 갈마음수형海馬飮水形의 명당이 있다는 산으로 마울 지형이 구유(구수)처럼 생겼다 하여 구수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구수매 §1 237 扶餘郡 石城面石城里 마을 지형이 구슬처럼 생겼다 하여 구수매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구시 랑이 回 238 天原郡笠坦面侍壯里 백제시대에 시랑侍郞 아홉 사람이 살았다는 골짜기이며 또 옛날에 구실향救實鄕이 있었던 마을이라 구시랑, 구실향이라고 불러오다가 변하여 구시 랑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구시울 回 239 洪城郡結城面衡山里 옛날에는 무당들이 굿을 하며 천지신명을 위하던 곳이라 굿시울이라
불러오다가 변하여 구시 울 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구신 回 240 扶餘郡 外山面 文臣里 백제 멸망 후 아홉 신하가 이곳으로 피난 을 와서 정착하여 살았다 하 여 구신九臣이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구양섬 땐 241 唐津 郡 合 待 邑 玉琴 里 마 울 지형이 섬처럼 되어 있는 마 을 이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유배지 로 지목되어 많은 . 사람 둘 이 귀양살이 를 했던 지역이다 . 유배 죽 귀양 살이 하 는 마 을 이라 구양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구옥동 回 242 大德 郡 祀城面 t鬼 谷 里 옛날 마 을 에 집이 많았으므로 구옥동이라고 부른다. 고려시대에는 큰 장터였다고 한다. 구완전 回 243 大한. 郡 山內面 舊完里 임진왜란 때에 이곳으로 피난을 온 사람들이 모두 무사하였는데 정 유재란 때 이곳에서 남동쪽으로 4km 쯤 되는 곳에 있는 소호리所好里 에서도 피난했던 사람 들 이 무사하였다 한다. 그래서 이곳에 피난 온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 를 구완전이라고 부르고 정유재란 때 피난했던 소호리 를 신안전이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구잠재 回 244 錦山郡 濟原面水塘里 마을 지형이 마치 거북이가 잠 을 자는 형국이라 구잠재라고 부른다 한다. 구정골 回 245 論山郡 連山面 松山里 마을에 샘이 있는데 항상 샘뚜껑을 덮어 두는 샘이라 개정蓋井이라 고 부르다가 변하여 구정, 구정골이라고 부르게 된 마을이다. 구지 섭 園 246 唐津郡 松嶽面 井谷里 섬이 곶으로 되어 있다 하여 고지섭이라고 부른다. 조선 명종明宗 때 아산만이 크게 터졌는데 그때 생긴 섬이라고 한다. 변하여 구지섭이 라고 부른다. 구항멘 247 洪城郡 龜項面 內峴里 마을 지형이 거북이 목처럼 생겼다 하여 구항龜項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국마골 땐 248 靑陽郡 南陽面 溫直里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게 되자 사비성에 있던 많은 말들이
이곳까지 달려와서 방황하는 것을 마 을 사람들이 먹이룰 주고 키웠 다 하는대 백제의 국마 를 키운 마 을 이라 하여 국마골이라고 부론다 한다. 국사봉 떠 249 大德郡 東面 維 l11 里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벼슬을 하다가 시골에 묻혀 살던 한 선비가 날 마다 이 산에 올라와서 한양쪽을 바라보며 망배 를 한 산이라 국사봉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군간 땐 250 舒川郡 馬山面 軍干里 옛날에 군사들이 군기 를 휘두르며 주둔하였던 마 울 이라 군간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군관도 回 251 保寧郡 蒸}||面 元山島里 섬이 바위로 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때 충청수군영忠淸水軍 퓰 이 있던 오천蒸 }|I 의 전초기지로서 항시 군관과 수군이 파수 를 보던 섬이라 군관도軍官島라고 부론다. 군단이 回 252 天原郡 北面 袁 龍里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위례성썬綾城에 도옵을 정하고 그 방위 책으로 이곳에 군단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하여 군단이라고 불러 전 해오는 마을이다. 군두리 맨 253 大川市新黑洞 고려 말기에 왜구들이 황해안 일대를 침범하여 백성을 괴 롭힐 때에 장군 김성우金成雨가 군사를 몰 고 왜구를 몰 아쳐서는 이곳에 머무르 게 하고 단숨에 섬멸시켰다 하여 군입軍入, 군두리라고 부 른 다. 군둘재 回 254 保寧郡 周浦面買倉里 조선시대 말기 동학군이 벌때처럼 일어났을 때 이 지역의 동학군이 진을 쳤던 고개라 군 둘재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군량골 맨 255 公州郡 牛城面 束谷里 조선 인조仁祖 때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공주로 파천하였을 때 이곳 사람 노숙盧璃이 군량 300 석을 바친 마을이라 군량골이라고 부 른다. 군문안 回 256 錦山郡 福닳面 新袋里 임진왜란 때 이치대첩에 참전하기 위하여 쌍령재 雙嶺時 의 의적義賊 안수安좌의 후예들이 부름도 없이 이곳에 들어와서는 주둔하였다가
이치대첩에서 모두 전사하게 되는데 대첩이 일어나기 전에 진을 쳤 던 마을이 라 군문안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군신봉 圈 257 錦山郡 f k?J 面 西袋里 서대산西袋山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서 그 산봉의 형국이 여러 신하를 거느리는 모습이라 하여 군신봉君臣峯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군장동 回 258 扶餘郡 石城面 額山里 부여에서 논산으로 가는 큰 길 에 인접한 골짜기로 서 신라군이 사비 성으로 쳐 들 어 올 때 백제 장수가 군사 를 은닉해 둔 마을이라 하여 군간동이라고 부르다 변하여 군장동軍藏洞이라고 부른다. 굴머 리 回 259 唐津郡 松嶽面 伏 袁 里 마 을 에 구름이 자주 걸친 다 하여 구름머리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굴 머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굴포 回 260 瑞山郡 泰安邑 仁坪里 島內里 八峰面 r秦 瑞里 漁松里 충남의 해안 태안반도泰安半島 를 따라 남쪽에서 북쪽으로 배로 오 를 때에 는 파도가 심하였으므로 배가 다닐 수 있도록 운하運河 룰 파다 가 그만둔 곳을 굴포#패 nI i라고 부른다. 고려 제 17 대 인종仁宗 때 일부 지역의 조세 를 배로 운반하는데, 안홍목安興項의 파도가 심하고 암초가 많아서 파선하는 배가 많았으므로 잔잔한 천수만을 지나 적 돌강을 거쳐 가로립만으로 통하면 400 리가 단축되고 또한 배가 안전 하게 갈 수 있으므로 정 습명鄭製明을 보내어 부근 사람들을 뽑아서 이 개 를 파다가 이 루지 못하고, 그후에도 종실宗室 왕강王康의 건의 에 의해 다시 파는데 밑에 돌이 깔리고 조수가 밀려 들어서 중단하였 다. 운하運河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시작해 만든 운하라 한다. 굴포원장 回 261 牙山郡 仙 掌 面 蔡新展里 굴포에 뚝을 쌓고 그 안쪽으로 마을을 조성하였으므로 이 마을을 굴 포 원장이라고 부로게 되었다 한다. 굴항리 回 262 舒川郡 長項邑 元水洞 왕재산 아래에 굴이 있고 그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구렁멀이라고 부 르다가 굴항리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그 굴에 신선이 살았다 하는데 그굴 을 위 하며 살아오는 마울이 라 한다. 궁곡 回 263 舒川郡 板縣面 興林里 옛날에 장자가 궁궐 같은 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궁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궁리 回 264 礎山郡 德 山面 屯里 조선 선조宜祖의 첫째 딸인 정신옹주貞愼翁主가 임진왜란 때 이곳으 로 피난을 와서 살았다 하여 궁리宮법 1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궁말 回 265 唐津郡 合德邑 大典里 조선시대 제 5 대의 문종文宗의 왕비 현덕왕후顯德王后가 이곳에서 태 어나서 열네살에 동궁束宮의 비가 되고 24 살에 단종端宗을 낳고 그 이 튿날 죽었는데 왕후 권씨權氏가 태어난 마을이라 궁말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궐곡 回 266 ~山郡 大述面 股谷里 마을 안팎으로 고사리 가 많으므로 궐곡族谷 또는 고새 울 이 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귀되말回 巧 7 天原郡 聖居邑 茅田里 마 을 에 굴피나무가 있어서 굴피말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귀되말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귓골 回 268 天原郡 木川面桃長里 조선 광해군光 海君 때 의 정승政丞 박승종朴丞宗의 묘가 있으며 또한 그 자손들이 부귀를 누린 마 을 이라 귀 골 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귓 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네 回 269 瑞山郡 安眼邑承彦里 마을 부근에 게 園 0 가 많으므로 게내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그네 라고 부르게 된 마을이다. 금강 回 270 全羅北道~忠淸南道 요수요천 堯水堯 )II 300 리 죽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全羅北道 長水郡長水邑水分里 신무산神舞山 옆 딴봉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300 리 홀러오다가 서쪽으로 700 리 를 훌러서 황해로 들어가는 그 물줄 기 가 비단과 같다 하여 비 단강으로도 부르는 강물이 금강錦江이다. 속 설에『정감록鄭鑑錄』과풀이하는 강으로서, 발원지인 딴봉 겉으로는계 룡산鷄龍山의 작은 산으로 불리우는 팔공산八公山이 있으며,북쪽으로 머리 를 돌리고 흐른다 하여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십훈요十訓要에 지 적된 강변이 펼쳐진 강이라고도 한다. 금강이 回 271 扶餘郡 恩山面 琴公里
옛날에 금강사 金 剛 寺 라고 부르는 큰 절이 있었으므로 금강金剛이라 고 부르다가 변하여 금 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금계동 回 272 論 山郡 豆居面 龍洞里 마 을 에 금계포란형金 鷄 抱卵形의 명당이 있다 하여 금계동金 갭 洞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금동回 'lJ3 論 山郡 上月面 新忠里 마 을 에 선녀탄 금 형仙女彈 琴形 의 명당이 있다 하여 금동 琴 洞이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금병산 回 274 大德郡 炭洞 而 높은 산이 병풍처 럼 둘 러 있으므로 금병산金群山이라고 부른다. 비 단 같 은 초목 색이 운치 를 돋구는 산수화 같은 산이다. 산 남쪽에는 수운교 水雲敎 의 천 당天 堂 이 있으며 북쪽에 는 금강대 도교金剛大 道 깝k 의 대법전이 있 는 산이다. 금성산 圈 275 扶餘郡 扶除邑 舊 而里 백제 때 삼령산 三盛 山의 하나로서 신령한 사람이 살아서 날마다 이웃 인 오산 吳 山과 부산浮 山에 있는 신령한 사람과 조석으로 날아다니면 서 놀았다 한다. 경치가 좋은 산이라 금성산金城山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금정 回 276 꼽限 郡 南 陽 面 金井里 백제 때 의자왕義慈王이 이 물을 길어다 마셨다 하여 금정金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기로촌回 刃 7 天原郡 笠場面 耆老里 마을 주변의 산수가 좋아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장수하여 비교적 노 인이 많다 하여 기로촌耆老 H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기름재 回 278 公州郡 寺谷面 油龍里 옛날 마곡사麻谷寺에서 사용하는 기름을 무역하던 고개라 기름재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기지시 回 279 唐津郡 松嶽面 機池市里 마을에 틀 처럼 생긴 못이 있었으므로 기지시機池市 들모시라고 부른 다. 민속놀이인 기지시줄다리기로 유명한 마을이다. 기충골 回 280 扶餘郡 世道面 水古里 옛날에는 부자집이 많아서 집을 몇 충의 축대를 쌓고 지었다 하여 기
충 골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기포 回 281 瑞山郡 高 北面 機浦里 마 을 의 지형이 베 틀 처럼 생겼다 하여 기포 機 浦 또는 들 개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길유지 回 282 瑞山郡 安眼邑 中 場 里 마 을 에 자연적인 못이 하나 있었는데 이 못은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농사 를 짓는 데에도 큰 도움 을 주어 다 른 마 을 보다 항상 부유하 게 사는 마 을 이었다 한다. 길 한 못이 있는 마 을 이라 길 유지라고 부르 는 마 을 이라 한다. 김복선이논다랭 이 回 283 唐津 郡 新平面 金 )1| 里 옛날 주로 손바래기산에서 은거 隱 居하고 살 면서 예언가 또 는 이인으 로 불 리었던 김복선 金福善 이 농사 를 지은 논이라 김복선 이 논 다랭이 라고 부르는 논이었다. 그는 이 율 곡 李栗谷 과 이토정 李土 亭 이 손 수 찾 아 올 만 큼 도학자 道學者 로 유명하였으며 천 인 賤 人이었으나 앞 을 내 다보는 예언자로서 학자 들 이 자문 을 받기도 하던 기인 奇人 이었다. 김성어대 回 284 天原郡 北面 典 谷里 큰 바위가 냇가에 솟아 있는데 예전에 김씨 金 氏 들 이 이 바위에 앉아 서 고기 를 낚았다 하여 김성어대金姓漁 盜 라고 부 른 다. 조 선 영조 英 祖 때 학자 오오재五 吾齊 유 철 한柳喆 漢 이 바위에 어은 漁倭이 라고 크게 새기고 그 옆에 칠율 시 를 새겼다 .
남당 回 200 洪城郡 西部面 南塘里 조선 영조英祖 때 성리학자 남당南塘 한원진韓元 能 이 이곳에 은거하 여 학문을 닦았으므로 그의 호號 를 따라 남당이 라고 부르게 된 마을 이다. 남방재 回 291 牙山郡 新昌面 南城里 마을이 남쪽으로 향한 재 위에 있으므로 남방재 라고 부르게 되 었다. 남삼산 回 292 禮 山郡 鳳山面 鳳林里 옛날에 효자 이후직李 厚稙 이 남쪽에 있는 햇빛이 잘 스며드는 이 산 에서 산삼山 흥을 구해서 불치의 병으로 신음하는 어머니 를 구했다 하여 남삼산南 夢 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납다리 回 293 公州市 菓m洞 혈혼천血與川이 흐르는 마을에 높은 다리 를 놓았는데 이 다리 를 건널 때는 노인 들 이 현기중이 나서 허리 를 구부리고 원숭이처럽 기어서 건너다녔다 한다. 납작하게 숙이고 건너다녀야 할 다리가 있는 마을 이 라 납다리 라고 부르는 마을이 다. 납은둘 回 294 牙山郡 道高 面 R 隱里 넓은 둘을 앞에 두고 마을이 있으므로 처음에는 넓은들이라고 불렀 는데 변하여 납은들이 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납탑골 回 25 瑞山郡 近興面 程竹里 옛날에 원숭이가 살았다고도 전하며 마을에 납〔申〕 모양의 돌탑이 있 었다 하여 납탑골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너더리回 척녀牙山郡 仙掌面 竹山里 널로 놓은 다리가 있는 마을이라 널다리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너더 리라고 부르는 마을이 다. 넘골 땐 297 牙山郡 新 昌 面 杏木里 골이 깊으며 풀이 우거져서 풀을 넘어 드나드는 마을이라 넘골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노고산 園 298 扶餘郡 忠化面 支石里 산 봉우리가 늙은이처럼 굽어져 있다 하여 노고산老姑山이라고 부른 다. 꼬부랑산이라고도 부르는데 늙은 선녀가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 산이다. 노래골 回 299 牙山郡 仙掌面君德里
고려 공양왕 恭浜王 3 년 (1391) 에 장곶에 성 을 쌓 을 때 노루가 놀라서 이 마 을 앞의 깊 은 내 에 빠져 죽 었으므로 노 루골 이 라고 부르다가 변 하여 노래 골 이라고 부르는 마 울 이다. 노루지 回 300 牙 山郡 仙 掌 面 障串 里 마을 지형이 노 루 의 머리처럽 들 가운데 깊이 들 어가서 갯가에 임해 있으므로 노 루 고지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노루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노성 천 ill] 301 論 山郡 魯 城 面 계룡산에서 발 원하여 논산천으로 들 어가는 냇물로서 노성평魯城坪울 흐른다 해서 노성 천 이라고 부 른 다 . 이 냇물에는 연산連山의 닭과 함 께 그 맛이 좋 아서 조선시대에 진상품이었던 게가 나는데 연계노해 連鷄 魯 盤 라 하여 유명한 게[M'.] 산지가 있다. 노은동 回 302 洪 城 郡 洪北面魯恩里 조선시대 재 19 대 숙종 肅 宗 때, 성삼문成三 |L1 이 태어났던 곳이라 하여 우암尤 庵 송시열 宋 時烈선생이 노은동 · 창怒派]이라고 고쳐 부르게 한 마 올이다. 옛날에는 금곡金 谷 이라고 불렀었다. 고려 무장 최영崔釜과 사육신의 성삼문成三 rp 1 이 태어났으므로 적동지무赤洞之武, 금곡지문 金谷之文의 마 을 이라 하여 유명한 마 을 이다. 노태산回 303 天安市 聖城洞 산 중턱에 공자 1L 子의 사당을 지었는데 노魯나라의 태산과 같다 하여 노태 산魯 泰 山이 라고 부른다 한다• 녹간산 園 304 洪城郡 西部面 新里 산의 형 세 가 사슴뿔과 같다 하여 녹간산鹿 看 山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녹도 맨 았지 保후郡 蒸f||面 鹿島里 섭의 지형이 사슴처럽 생겼다 하여 녹도鹿島라고 부른다. 초분草慣이 있었던 섬이다. 누른드리 回 꼬 5 扶餘郡 場岩面下黃里 마을 주변의 산과 들이 모두 흙빛이 누렇다고 누른드리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눈다리 回印 7 論山郡恩津面 南山里 마을 앞에 냇물이 흐르는데 그 냇물에 놓은 다리가 누운 다리이므로
이에 연유하여 마을도 누운다리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눈다리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느랑이고개 回 300 那起t 南面 訥旺里 고려 충렬왕忠烈王 17 년(1 291) 에 고려 장수 한희유 韓希 兪와 김혼金祈 이 원나라 장수와 함께 원수산元帥山과 청주 경계에 있는 정좌산正左 山에 옹거하였다가 침입하는 원나라의 합단哈丹 올 맞아 싸워 이 고개 에서 대승리 를 거두었는데 그때 공주쪽으로 도망가는 합단 족을 추격 섬멸할 때에 적의 시체가 30 여 리에 널려 있었다 하여 그 첫 승리를 거둔 이 고개 를 느랑이고개, 죽 적의 시체가 널려 있는 고개라 그렇 게 부르게 되었다 한다. 느리울 回 309 大田市 西區 開誰洞 늘어진 골짜기에 마 을 이 있으므로 느리 울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마을에 노서하전형 老鼠 下田形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능골 땐 310 天原郡 城西面 大興里 조선시대 중기에 한 왕 王 과 인연을 맺었던 신처녀의 묘 가 있다 하여 능골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늪구례 回 311 燕 媒 t 束面 老 松里 예 전에 들에 늪이 있었다 하여 늪구례 라고 부르는 들 이 다.
【기 다그니 回 312 扶餘郡 世道面長大里 마을 앞으로 금강이 흐르는데 마을 쪽으로 여 러 개의 바위 가 물속에 잠겨 있어 돌뿌리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다근리多根里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다그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다라미 回 313 牙山郡 松岳面 坪村里 달빛이 비치면 그 정경이 아름다운 월라산月羅山 아래에 마을이 있으 므로 다라미 라고 부르는 마울이 다. 다락공땐쳅 314-1 錦山郡 錦城面 色庶里 산 계곡에 있는 마을로 다래덩굴이 많아서 마을에 집을 지을 때는 다 래덩굴을 뚫고 지었다 하여 다래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다락골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다락골익 괜 314-2 瑞山郡 古南面樓洞里 지대가 높은 곳에 마을이 있어서 다락골이라고 부른다. 개화기開化 期에 천주교天主敎가 일찍 포교布敎된 곳으로 박해가 십할 때도 굴속 에 촛불을 켜고 예배를 본 마을이다. 다래울 回 315 牙山郡 鹽特面 白岩里 다래가 많았다 하여 다래울이라고 부른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 臣의 사당 현충사顯忠祠가 있다. 본래 상주 방씨尙州方氏들의 기지基 地인데 그 사위 충무공에게 물려 주어서 충무공이 살게 되고 그 자손
들이 이어 살면서 충신과 효자가 많이 나온 마을이다. 다몽고개 回 316 舒川郡 馬山面 新場里 옛날 새장터로 장보러 가는 장꾼들이 쉬어가는 고개라 하여 다롱고 개라고 불렀다. 장꾼들이 쉬면서 그날의 신수를 점치던 고개라고도 전한다. 다른고개 回 317 論山郡 上月面 石宗里 이 고개에 치국산성恥國山城을 쌓을 때는 많은 백성들이 다른 고장에 서 불려와서 땀 홀리는 사역使役으로 성을 쌓았으나 한번도 싸워보 지 못한 산성 이 있는 고개 라 다른고개 라고 부른다 한다. 다름고개 回 318 公州郡 長岐面鳳安里 고개의 형국이 달과 같이 둥글다 하여 달고개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다름고개 라고 부르게 되 었다. 다리성@l 319 論山郡賜村面梧山里 산이 우뚝 솟아 사방이 절벽으로서 천연적으로 고리와 같은 성이 있 는데 고려 때 토적 달리達里가 이 곳에 옹거 하여 노략질을 하던 산이 라 하여 달리산성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다리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시 고려의 관군이 이 성을 함락하기 위하여 산울 포위하고 한 해를 넘겨서야 겨우 도적을 소탕하였다는 천연의 요새지라 한다. 따붕 回 320 保寧郡 靑所而 野峴里 마을에 따비 발이 많이 있으므로 따비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따불이 라 고 부론다. 옛날에는 진당산 당각시 를 위하는 산제당이 있었다. 다오개 回 321 論山郡 夫赤面 夫皇里 마을에는 다섯 개의 고개가 있고 마을에서는 감, 대추, 밤, 호도, 은 행 둥 다섯가지 과일나무가 잘 자란다 하여 다오개多五介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단백동 땐 322 瑞山郡 安眠邑 黃島里 마을에 동백꽃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많은 꽃이 피는 마을이라 단백 동이 라고 부른다. 이곳 사람들은 바다로 고기 잡이 나갈 때 동백꽃을 보고 액운을 점쳤다 한다• 단평 §] 323 公州郡 牛城面 丹芝里 조선시대 초기에 역말인 단평역丹坪驛이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으므로 단평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달가마 回 324 大德郡 東面內塔 里 마 을 뒤로는 바위가 연이어 두르고 마 을 앞으로는 확 트였고 또한 냇 물 이 호르는 데 달 이 비 치 면 한폭의 동양화와 같다 하여 달가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달북재 回 325 天安市 白石 洞 고려 태 조太祖 가 삼국 통 일 을 할 때에 이곳에 북 을 달 아놓고 군사 를 훈련하였다 하여 달북 재라고 부르는 산이다. 닭매 回 326 扶餘郡世道面 菊浦 里 옛 날 무 학 대사 無學大師 가 이 곳 을 지나며 금계포란형金 鷄 抱卵形의 명 당이 있다 하여 닭 매 라고 부르게 한 마 을 이 라 한다 . 담배 산 젠 '32] 論 山 郡練武 邑 東 山 洞 옛 날 에 는 이 산에 담 비가 많이 살고 있다 하여 담비산이라고 부르다 가 변하여 담배산이라고 부르는 산이다. 당구지 回 328 保 寧郡 JI I 北面 洛 東里 마 을 사 람들 이 특별 히 신당 을 위하는 마을로 곶이 높고 긴 마을이다. 옛 날 에는 군마 를 조련하였다는 마 을 로도 불 리우는 이 마 을 은 당제가 잦은 마 을 이라 당 곶 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당구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당마루 回 329 論 山郡 上月面 節堂 里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버의 사당이 있는 마 을 이라 당마루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당진포回 330 唐津郡 高大 面 唐津 浦里 백제 때부터 당나라로 건너다니는 포구가 있었다 하여 당진포라고 부 른 다.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수군영의 수군만호水 軍 萬 戶 가 주둔하 였던 포구다. 맞개 §.I 331 瑞山郡 遠 北面 幡 溪 里 옛 날 에는 마 을 앞까지 바닷 물 이 들어오는 큰 포구였으므로 배가 들 어와 덫 을 내리는 마 을 이라 낯개라 부르다 변하여 맞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대계 回 332 禮 山郡 光時面新興里 마 을 복판에 큰 개울이 있으므로 대계 갚溪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대궐터 回 333 論 山郡 豆磨面 夫 南 里
이태조李太祖가 등극 후 무학대사無 學大師 의 말 올 높이 사서 이곳에 국도 를 정하려고 역사 를 시작하였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그만두었는 데 그 국도 를 정하고 역사 를 시작하였던 마을이라 이 마을을 대궐터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대둔산 ffil 334 論山郡 伐谷面 높은 산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깊은 동학洞鉛 올 이루었으므로 백성들 이 크게 자리할 곳이라 하여 대둔산大屯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대마굴 回 335 舒川郡 舒 /I| 邑 花城里 마을에 연꽃이 물에 뜬 연화부수형蓮花 浮水形 의 명당이 있다고 알려 진 마을로 연꽃이 가득히 피어 있는 마을이라 담화골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대마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대마동마괜 336-1 扶餘郡 玉山面 大德里 옛날에 말 을 방목하던 큰 마을이 라 대 마동大馬洞이 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대마동 이 깬 336-2 靑陽 郡 大時面 上甲里 조선 세조世祖 때부터 서울과 지방 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휴식처였 던 인의원仁義院에서 쉬어가는 관마와 인마人 ,% 가 쉴 때 이곳에 큰 말우리 를 만들어 놓고 먹이 를 준 곳이라 대마동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대문다리 回 337 論山郡 魯城面松堂里 옛날 마을 입구에 큰 대문이 달려 있었던 마을이라 대문다리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대문다리고개 回 338 扶餘郡 場岩面 元門里 산 양쪽을 깎아서 길을 내서 마치 대문처럽 생긴 고개라 대문다리고 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대문동 回 339 禮山郡 德 山面 上加里 조선 세조世祖 때 벼슬을 버린 참의參議 한 사람이 관직을 버린 후 홀가분하게 여러 선비와 교유하여 그 이름이 여러 곳에 알려졌는데 그가 죽은 후에도 여러 선비들이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며 이곳을 찾 곤 하였다 . 항상 여유있게 살던 그의 뜻을 따서 이 마을을 대문동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대밑 回 340 論山郡 練武邑 竹本洞 옛날에는 바다로 통하는 강가였는데 어느 해 비바람이 몹시 내리치 던 날 대나무 를 가득 실은 배가 파도에 밀려 이곳에서 파선되고 그후 그 자리에 대나무 밭 이 되었다 한다. 그 자리에 마 을 이 생김에 따라 대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대아동 回 341 禮 山 郡 大興面 大也里 조선 연산군 燕山君 때·연산군의 폭정에 벼슬 을 버리고 아곳에 정착한 한 선비가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 으나 따르지 않고 대쪽 같은 마음으 로 백성을 도우며 도량을 넓게 살았다 한다. 그후 그 선비의 거룩한 뜻을 높이 사서 마 을을 대아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대우기 回 342 論 山郡 彩 困 面 禹基里 옛날부터 이 부근을 이 르기를 임금터라고 불 러왔는데 이곳 농부들이 두레 를 할 때는 용기 를 중우기, 소우기보다 높게 달고 대우기 를 승앙 한다 하여 대우기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마을이다. 대 차골 回 343 唐津郡 唐津邑邑內里 옛날에는 역마의 수레 를 이곳에 머물게 하였다 하여 대차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대 청도 回 344 保 寧郡 蒸川面 外煙島里 황해 외연도外煙 島 북서쪽에 떠 있는섬으로서 푸른 돌이 많은 섬이라 청도 靑島 라 부르며 크고 푸른 돌섭이라 하여 대청도大 靑島 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대초 回 345 天原郡 城南面 大花里 마을이 처음 생길 때 한 노부부가 처음 집을 짓고 살면서 부부의 정 이 하늘과 같아 관아官街의 초청을 자주 받았다 한다. 여러 사람의 귀감이 되므로 관아에서 그들이 사는 이 마을을 대초大招라고 부르 게 하였다 한다. 대추울 回 346 靑陽郡 靑南 面 大興里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로서 대추나무가 무성하며 대추가 많이 생산되 는 마을이라 대추울이라고 · 부르게 되었다 한다. 대동매 回 347 舒川郡 馬固面長善里 마을에 왕대나무가 많으므로 대통매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대포 回 348 唐津郡 牛江面大浦里
옛날에는 큰 포구였으므로 대포大浦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대 학동 回 349 公州郡 利仁面 草鳳里 마을 지형이 마치 큰 학'fil'.l 이 날개 를 펼치고 여러 마을 을 포옹하는 형 국이라 대학동大鶴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대화동回 350 大田市 東區 大禾洞 넓은 들 에 자리한 마을로서 들 에 벼가 잘되는 마 을 이라 대화동大禾洞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대홍마세 §I 351 禮 山郡 光時面 馬沙里 옛날부터 한 고을에 딸린 마을로서 그 고을의 말을 먹이던 마을이라 대홍마세라고 부 른 다. 대홍군大興郡에 딸린 마을이었다. 댕굴 回 352 洪城郡 西部面 中里 고려 초기에 왕의 태 를 묻었던 산이 뒤에 있으며 그 태 를 묻은 후부 터는 큰 들에서 장자가 속출하므로 대홍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댕굴이라고 부른다 한다. 더운들回 353 論山郡 光石面 光里 가뭄이 들 때에도 이 마을에는 물이 풍부하며 다 른 지방에서 구걸을 와도 이 마을에서는 더운 밥과 더운 물을 주며 따뜻하게 대해주는 마 을이라서 더운 들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더퍼리 回 354 大田市 東藍 出湯洞 벌판에 자리한 마을로 주변에 숲이 우거져서 마을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한 마을이라 더퍼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덕골 回 355 大德郡 新酒津邑 三政里 고려 25 대 충렬왕忠烈王 때부터 조선시대 재 7 대 세조世祖 때까지 160 년 동안 합덕현合德縣의 고을이었던 마 을 로 덕망있는 사람들이 많 이 사는 마을이라 덕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덕신回 356 天原郡 並J Il 面 桃源里 벌판에 자리한 마을이라 처음에는 벌터라고 불렀는데 조선 인조仁祖 때에 학자 이효법李孝範이 서당을 짓고 후진들을 가르치면서 덕을 더 욱 새롭게 이웃에 퍼지게 했다 하여 덕신 德 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덕암산回 玉 7 天原郡 城南面 新沙里 산에 바위가 많으며 수석을 겸비한 산으로서 덕에 쌓인 산이라 하여
덕암산德岩山이라고 부론다. 옛날에 참판參判을 지낸 안중필安重弼이 란 사람이 이 산 바위 에 곡수유상曲水流月硏이 라고 글씨 를 새 겨 산을 예찬하였으며 산 아래에는 유명한 청류강사淸流講舍가 있었던 산이 다. 덕풍골 園 358 唐津郡 牛江面 松山里 높은 골짜기이나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떨어지지 않고 물아 혼하며 흉년에도 풍년이 들 어 여러 사람에게 덕을 배푸는 골짜기라 덕풍골 이 라고 부 르 는 골 짜기 다. 펫짱거 리 回 359 牙山郡 排芳而 北水里 예전에 경상도 사람 들 이 이곳에 와서 팻장으로 집을 짓고 살았으므 로\텟짱거리라고 부른다. 도고머 리 回 360 公) {it[ 牛城面 道 )II 里 마을 지형이 도 투 마리처럼 생겼다 하여 도투마리라고 부르다가 변하 여 도고머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도낙이 回 361 瑞山郡 安眼邑承彦里 옛날에 마을이 부유해서 풍류 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마 을이라 도락道樂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도낙이라고 부르게 된 마을 이다. 도담 回 362 論山郡 可也谷面 斗月里 마울로 들어가는 동구에 큰 연못이 있어 그곳에는 연꽃이 화창하게 피었다 한다. 옛날 전주에서 한양으로 여정에 오른 배진성裵振成이 란 사람이 이곳의 마을 풍경을 보고는 경탄하여 도담道 b 민의 운치라 하였다 하는데 그후부터는 도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도두음곶 回 363 舒川郡 西面 都屯里 마을 지형이 곶으로 되어 있어서 도둔곶都屯串이라고 불렀는데 군사 가 주둔하였다는 곶이었다. 조선 세종世宗 원년(1 419) 에는 왜구의 선 박 50 여 척이 도둔곶으로 쳐둘어오므로 장수 김성길金成吉과 그 아들 김윤金倫이 군사 를 거느리고 싸우다가 김성길은 머리 룰 맞고 전사하 였으며, 그의·아들 김윤도 싸우다가 전사한 곳이다. 도무재 回 364 扶餘郡 襄岩面 新里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義慈王 20 년 (660) 7 월에 나당연합군에게 멸 망을 당한 후 남은 군사들이 사비성을 빠져나와 이곳의 병력과 합세
하여 나당군에게 저항을 하자 그 해 11 월 5 일에 신라 무열왕武烈王이 군사 룰 이끌고 계탄往j湘을 건너 공격하므로 7 일간이나 싸우다가 성 을 빼앗기고 무열왕이 700 여 명을 참수하는 도륙을 했으므로 도륙재 라고 그 후손들이 부르던 산으로 그 뒤 변하여 도무재로 불리우는 산 이다. 도문이 땐 365 唐津郡 松山面 道門里 예전에 덕수 이씨 德水李氏들 이 정착한 마울로 과거에 급 재하여 마을 에서 도문到門 잔치가 대 를 이으므로 도문이라고 부르게 된 마을이 다. 명문의 마을로 인 물로는 조선 중종中 宗 때 좌의정 左 議政에 오른 용재容齋 이행 李菩과 많은 인물아 있다. 도비산 回 366 瑞山郡 浮石面 大頭里 옛날에는 담비가 많이 산다 하여 담비산이라고 부르다가 봉수대가 생기면서부터 도비산이라고 부론다 한다. 조선시 대 봉수대가 있어서 동쪽으로는 홍주洪) II 의 고구현高丘縣 성산봉수와 북쪽으로는 태안군 泰安郡 의 백화산봉수와 응했던 봉수대가 있었다. 도산 回 3fil 論山郡 伐谷面 道山里 고려 때부터 공주, 경천, 진산, 무주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서 도산道 山이라고 불렀 다. 도승지핏골 園 368 뀜陽郡 大特面 開谷里 산 록 이 대大자형이고 들 이 기형奇形을 이 룬 명당지로 옛날 도승지都 承旨를 지낸 사람의 묘가 있다 해서 도승지핏골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도장골 回 369 公州郡 儀堂面 月 谷里 조선 경종係宗 때 충민공忠愍公 윤각尹;;;g이 이 마 을 에서 도장을 열고 무예를 가르쳤다 하여 도장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도청 땐 370 챔岐郡 全東面 컵f松里 전의 이씨와 거창 신씨가 서로 의좋게 지내는 도회청을 두고 약칭 도 청都 聽 이라고 불렀는데, 그 도청이 있었던 마울이다. 이에 연유하여 마을을 도청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도청都꿈이라고 쉽게 글씨를 썼다. 도파 回옛 날37부1 터錦 山큰郡 길窟利이面 있水어通서里 이곳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에 이르면 물살
올 헤치고 건너가는 냇물이 있으므로 도파渡波라고 부르다가 뒤에 도파道波라고 고쳤다. 도화담 回 372 保 寧 郡 t깝 山面 桃花潭里 지형도 복숭아꽃 을 닮았으며 또한 산아래 들 에는 복숭아꽃이 만발한 다 하여 도화담tJt 1E 潭이라고 부르개 되었다 한다. 독귀 미 땐 373 洪城郡 金馬面 長城里 옛날부터 광산 김씨光山金氏들이 자리를 잡고 살아서 다른 성씨姓氏 가 발을 붙이기 어려워 독금潟金이라고 부르던 마을인데 변하여 독 귀 미 猫貸美라고 부르게 된 마을이 라 한다. 독뱅 이 回 374 論山郡 伐谷面 晩木里 마을에 선인독서형仙人 h천 간形 의 명당이 있으므로 독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돌못 回 375 論山郡 夫赤面 阿湖里 조선시대 말에는 돈 많은 사람이 산다 하여 전당錢塘이라고 불렀었 다. 그리고 이어 돈당이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변하여 돌못이라고 부 르는 마을이다. 이곳에서 발견하는 농기구에 전당이란 글씨가 새겨 져 있는 것으로 보아 큰 농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들뿐이 回 376 論山郡 뤽距面 華寺里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신도내 를 답사할 때에 두계천豆溪 ]|l 을 보고는 물 이 많이 호르지 않고 모두 자갈로 노출되어 있어서 이 마을에 이르자 각석촌各石t : t이라고 말한 것이 변하여 돌뿐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라 한다. 돌안산 回 377 靑陽郡 南陽面 金井里 산세가 금정金井을 향하여 돌아앉은 것처럽 보인다 하여 돌안산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돌저루 回 378 洪城郡 葛山面 吹笛里 옛날에 돌부처 를 모신 절이 있었다 하여 돌절, 석사石寺라고 부르던 마을인데 변하여 돌저루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돌채 回 379 牙山郡 仙掌面新門里 채로 그릇을 만드는 누운버들이 많으•므로 돌채 라고 부르는 마을이 다. 동덕봉 園 380 天原郡 束面 花溪里
산을 두른 마을과 들에 덕을 누리게 하는 산이라 하여 동덕봉이라고 부 론 다. 조선 영조英祖 4 년(1'1 28) 무신란戊申亂 때 윤이관尹以寬, 윤이 오尹以五, 윤이천尹以天, 윤병尹柄, 윤거尹桓, 윤두尹科, 김홍운金弘 運 둥 16 의사가 이곳에서 적장 안후기安厚基 를 염탐하여 사로잡았다 고 한다. 동상골 回 381 論 山郡 楊村面盤谷里 뒷산이 높지 않으며 산수화처럼 아 름 다운 곳 으로 액운이 끼지 않는 피난처로 알려졌다. 동쪽에 명당자리가 있어 그 형국이 신주님을 모 신 재상과 같다 하여 동상골이 라 부른다. 동수 回 382 錦山郡 南一面上桐里 옛날에는 마을에 오동나무숲이 있었다 하여 동수桐阪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동아시 1 回 383-1 扶餘郡 九龍面九鳳里 마 을 뒷산 꼭대기에 성터가 있는데 먼데서 보면 동아줄을 두른 것 같 다 하여 동아새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동아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동아시 2 땐 383~ 2 舒川郡華賜面花村里 백재 멸망 후 부홍군이 일어났다가 다시 망하고 그때 백제의 유민들 이 주류성을 버리고 동쪽에 마을을 새로 이 룩 하였다 하여 동아시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동이골 回 384 大 德郡 山內面 大別里 조선시대부터 마을에 찬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어서 마 을 아낙네들이 물동이를 이고 줄을 섰다 하여 동이골이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동자북 回 385 舒川郡 韓山面 童山里 마을 지형이 동자가 북을 치는 형국이라 동자북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 한다• 동지갱이回 386 大田市 束區 紫陽洞 한 겨울에도 눈이 녹아서 작은 계곡으로 물이 흐르는 언덕배기에 마 을이 있으므로 동지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동해배기 回 387 瑞山郡 遠北面東海里 조선시대 초기부터 수군절제사가 있었던 수군영인 소근포所斤浦에 서 보면 동쪽으로 바다 를 막은 듯이 앉아있는 마을을 동해배 기 라고
부로게 되었다 한다. 돛다랭 이 回 388 瑠山郡 近 興面 賈証島里 가의 도賈諒島 동쪽에 있는 섬으로서 섬 모양이 돛을 단 범선처럽 보 인다 하여 돛 다랭이라고 부 로 게 되었다 한다. 팻박굴回 389 唐津郡 貞美 面 山城里 땅이 비옥해서 땅에 곡식을 한 되박을 뿌리면 백되가 더 생기는 비옥 한 땅에 마 을 이 있으므로 팻박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되재 回 3OO 公 ) ` l lflf, 正安面 沙屯 里 조선시대 중기에 한양에서 널리 알려진 지관地官 한 사람이 묘자리 률 찾기 위해 차령산맥 ir!嶺 山脈 줄기를 따라 오다가 지금의 정안면 사현리正安面 沙峴里 에 이 르 러 광정廣 亭 쪽을 바라보고는 지형이 정안 천正安 /II 으로 인하여 뚝 끊어진 것을 보고 그대로 한양으로 되 돌 아 갔다 한다. 그때 남쪽 을 살피던 지접이 이 마 을 이므로 되재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두강이문 回 391 論 山郡 可也 谷面 野村里 마을 뒤에는 높은 산이 둘 러있고 동쪽과 남쪽으로 깊은 골짜기가 있 으며 좌우로 산이 둘 러 싸고 북쪽으로 앞이 ‘조금 퇴 었으나 양쪽 산이 앞 을 가려 주어 서 분지 를 이 루 었으므로, 동쪽 골짜기와 남쪽 골짜기 가 지켜주는 마 을 이라 하여 두강이문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두내바지 땐 392 靑陽 郡 南賜面 大鳳里 당산 근처에 있는 여울로 두 냇 물 이 합치는 곳에 여울이 있다 하여 두내 바지 라고 부르개 되 었다 한다. 뚜두렁 이 맨 393 舒川郡 鍾 川面 堂寸里 옛날에는 마 을 에 신당이 있어서 굿 을 하느라고 날마다 뚜드럭거렀다 하여 뚜두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두란 回 394 保 寧郡 珠山面珠野里 옛날 중국의 선비 두보杜甫가 세상풍파 를 버리고 난초 를 가꾸며 놀 던 중국의 신선계곡과 닮은 마 을 이라 하여 두란杜蘭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두러미回 었 5 大川市 束袋洞 산 모양이 둥글고 마을이 들 가운데 있어서 두리미라고 부르다가 두 러미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두리 回 396 김 t城郡 長谷 面 上松里 마 을 의 앞과 뒤 를 가로막는 산의 머리 쪽에 마 을 이 있으므로 두리 頭 里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두리봉 園 397 扶 餘 郡 忠化面 靑 南里 산 모양이 둥 글 다 하여 두리봉이라고 부 른 다. 가 뭄 이 심 할 때는 산에 서 무재 를 지낸다 하여 무우재봉이라고도 부 른 다. 또한 산에 는 상제 봉조형上帝 奉 朝形의 명당이 있다 하여 상제산上帝山 성 주봉 이라고도 부 르는 산이다. 두명골샘 rn 398 天 原 郡笠 場 面 市 場 里 마 을 지형이두멍回:]처럽 생겼다 하여 두명 골 이라고 부 르는 마 을 에 샘이 있으므로 두명 골 샘이라고 부 른 다. 샘에는 옛날 흰여 우 가 샘 을 지키고 이 곳을 찾는 아낙네 들을 여러 모로 놀 렀다는 전 설이 전해 오 는 샘이다. 두모실 回 399 瑞山郡 地 谷 面 舞將 里 옛날 마 을 에 정착한 어느 모자 毋子 가 정성껏 터 를 잡고 부 지런히 일 을 해서 끝 내는 아 들 로 하여금 장자 長者 가 되게 한 모자의 정성이 서 린 마 을 이라 두모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두못치 回 400 舒川 郡 馬西面 堂 仙里 옛날에 마 을 앞에 두 못이 있었으므로 두못 치 또는 쌍연 斐株l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두문동 回 401 唐津 郡 貞美 面 鳳生里 조선 세조世 祖 때 왕위에 오르기 위해 선량한 선비들 을 많이 죽아고 또 친구인 성삼문, 박팽년 등이 충의에 죽자 눈뜬 봉사라 자처하고 책도 팽개진 채 바깥 출 입도 금하고 지낸 구인문 具 人文이 살던 마을이
라 두문동杜 I'1 洞, 두문골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두물 땐 402 靑賜 郡 定山面大朴里 마 을 주변이 산으로 둘려 있으므로 두문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두 물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두미 回 403 公州郡 正安面 仁登 마 을 이 산의 꼬리부분과 머리부분에 위치해 있으므로 두미라고 부르 는 마 을 이다. 조선시대에 행인의 교통 편의 를 도와주는 인저원仁 偉 院이 있었던 마을이다.두연이 回 404 禮 山 郡 新賜 面 西界陽 里 마 을 에 연화 부 수 형蓮 花 浮水 形의 명 당이 있으며 두견새 가 자주 찾는 마 을 이라 두연이라 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 두지골 回 心 5 洪城 郡 結城 面 龍 湖里 지형이 두지 처럼 생겼다 하여 두지 골 이라고 부 른 다. 김유신金庚 信 의 후손 들 이 많이 사 는 마 을 이 다. 둔곡 回心 6 大德郡 九 UI J面 屯 谷里 신라의 장 수 김 인 문金仁 r버 이 신라군 삼만 을 이끌고 와서 백제부흥군 이 웅거한 소문성蘇文城을 치기 위해 군사 를 주둔시켰던 곳이라 둔곡 屯 谷 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둔군봉 回 407 唐津 郡 合德邑 道谷里 조선 말 고 종高宗 31 년(1 895) 갑오 동학운동 束學 運動 때 충청도 서쪽 에서 봉 기한 동학군 東學軍 의 북진 을 제지하기 위해서 관군이 진을 쳤 던 산이다. 후 삼국시대에는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자주 싸운 전장터 라고도 전하는 산이다. 둔포 回 • 400 牙山郡 屯浦面屯浦里 옛날 청일전쟁 淸 日 戰爭 때 군사가 주둔하였던 포구라 둔포屯浦라고 부 른 다. 조선시대 전기 이전부터 소금이 저장되어 내륙지방으로 옮 겨자는 포구였다 한다. 둥덩골 回 409 論 山郡 光石面 泉 洞里 마 을 에 옥녀탄금형玉女접修 判 % 의 명당이 있어서 달빛이 밝은 날에는 둥덩둥덩하고 거문고 튕기는 소리가 들 려온다 하여 둥덩골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 뒷목 回 410 論 山郡 陽 村面 山 直 里 마을에 수백 년 된 떡갈나무가 있어서 나라가 어지러울 때가 오면 미 리 소리 를 내어 알려주므로 덕목 德 木이라고 부르던 나무인데 변하여 뒷목이 라고 부르게 된 마 을 이 다. 드르니 미 괭 411 기 瑞山郡 南面 申溫里 물 이 들어 을 때와 나갈 때가 확실하여 시간 을 재던 지역에 자리한 마 을 이나 포구여서 여러 사람 들 이 들어왔다가곤 하는 마을이라 드르니 라고 부 른 다 한다. 드르니 익 괜 411-2 禮 山郡 視 山邑 新 禮 院里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할 때는 이곳에 와서 구름을 얻어 그 구름을 타고 승천하므로 득운得 雲 이 라고 부르다 변하여 드르니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득락이 回 412 舒川郡 文山面 文 章 里 세상을 탓하지 않고 마을사람들은 일을 열심히 하여 낙 올 얻는다 하 여 득낙이 라고 부르다가 득락이 라고 부르게 된 마을이 다. 뜬바위 回 413 錦山郡 珍山面浮岩里 큰 바위 위에 작은 바위가 얹혀 있는데 이 바위 를 뜬바위라고 부른 다 . 긴 실을 마주잡고 바위 튬에 가로넣어 당기면 그 실이 걸리지 않 고 빠져 나가는 바위다. 옛날에 물길을 내느라고 이 바위 를 부숴 버렸 는데 그 후부터 마을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잇달아 일어나므로 마을 사람 들 이 원모양대로 다시 만 들 어 놓고 위하는 바위다. 뜸옥골땐 414 !r.~郡 西面 月下里 마 을 한편에 연안 이씨延安李氏의 원조묘 遠 祖 墓 가 있는데 그 묘 밀 에 옥玉이 말로 담을 정도의 명당자리가 있다 하여 옥마을이란 뜻에 서 뜸옥골이 라고 부른다 한다. 등전말回 415 保寧郡 川北面 新 德 里 마울에 추야괘동형秋夜掛燈形의 명당이 있어서 둥 촉을 밝히는 등잔 말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둥건말이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등칠回 416 舒川郡華陽面 大等里 마을 뒷산에 등성이가 일곱 개 있다 하여 둥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2.> 락동回 417 論 山郡 上月面新忠里 약초가 우거 진 노성산魯城山의 약초물을 식수로 하는 관계로 무병하 고 장수하며 신병이 있는 사람도 이 마을에 들어와서 살면 장수한다 하여 락동이 라고 부른다.
【미 마가번던 Ell 418 公州郡 寺谷面 雲 岩里 마씨馬氏들이 만든 마을이라 마가번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가산回 419 扶餘郡 忠化面 영산으로 꼽는 산으로서 옛날에 한 늙은 선녀가 하늘에서 가마 를 타 고 땅에 내려와서는 말로 갈아타고 꼬부랑산老姑山에 들 어가서 그곳 의 늙은 선녀와 놀았다 하는데 가마 를 타고 내려와서 말을 갈아랐던 산이라 마가산馬熟山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마금 回 420 瑞山郡 近典面磨金里 높은 산이 사방으로 둘러 있어 마금磨金이 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마달산 園 421 大 德郡 山內面 三棟里 산의 형국이 달리는 말처럼 생겼다 하여 마달산 馬達 山이라고 부른 다. 이 산에 그 유명한 머들령이라는 고개가 있다. 마도 @l 422 瑞山郡 近興面 新津島里 섭이 기암절벽으로 되어 있는 섬이다 . 안홍팔경安興八景의 하나인 마 도기암馬島奇岩의 경치 좋은 섭이다. 마래 回 423 扶餘郡 扶餘邑 東南里 백제 30 대 무왕武王이 어렸을 때는 서동왕자, 마동왕자라 불렸는데 그가 신라의 선화공주를 업고 와서 이곳에서 살았다 하여 마래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루미 回 424 牙山郡陰峰面 小東里 마울 뒷산이 바리처럼 생겼다 하여 바리미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마 루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분평 回 425 論 山郡 上月面 寒泉里 전에 몽고풍 蒙古風 인 큰 무덤이 있어서 마분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사 回 426 fi1:: 山郡 光 1 南面 馬沙里 마을 부근에 숲이 좋고 풀이 좋아서 말을 먹 였다 하여 마사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마새 미괜 427-1 公) · I1R t 新豊面 永井里 골짜기에 마 을 이 있는데 이곳까지 오려면 말도 숨이 차서 곤욕을 치 러야 하며 옛날에는 깊은 산중의 마을이었다. 갈마음수형湯馬飮水形 의 명 당이 있다는 마을로 마수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마새 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마새 키괜 427-2 唐津郡 大湖芝面 馬中里 마을에 천마시풍형天馬商風形의 명당이 있다 하여 마새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이산 園 428 錦山郡 南二面 石洞里 산이 말의 귀처럼 생겼다 하여 마이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전 回 429 錦山郡秋富面 馬田里 조선시대에 말을 사고팔던 시장이 있었다 하여 마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막을모시 땐 430 瑞山郡 高北面 新松里 약 330 년 전에 복씨 卜氏 한 사람이 마을 앞에 큰 못을 파고 뚝울 쌓 았다 하여 이 마을을 막을못이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막을모시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만가대 回 431 靑陽郡 飛鳳面長在里 마을과 그 부근의 터가 넓고 비옥한 땅이어서 만가萬家가 들어앉아 도 넉넉히 살 수 있는 마을이라 하여 만가대菓家袋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만궁암 回 432 洪城郡 長谷面 天台里 산의 형국이 활을 당겨 쏘는 형국이라 만궁암f삿弓岩이라고 부른다.
팔병사八兵使가 나을 명당자리가 있다 한다. 만길동 回 433 唐t l t 郡 高大面 唐津ii!i里 고려 때부터 수군 당진포영唐津浦 짧 이 있을 때 만호萬戶가 이곳에 살 았다 하여 만길동萬吉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만댓봉 回 434 瑞山郡 瑞山邑 石林里 고려 고종 高 宗 때 송나라 절강浙江 사람 정신보鄭臣保가 황해 를 건너 천수만淡水 隅 에 있는 간월도 看 月 島에 망명 해 와서 고창高敗 사람 오 영로吳永老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정인경鄭仁 9t 0 을 낳아 서산 정씨 瑞山鄭氏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늘 이 산에 울라와 고향을 그리워하 였다 하여 처음에는 망향대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만댓봉이라고 부르 는 산이다. 만선동 回 435 大 德 郡 炭i曜i 秋木里 1927 년 수운교주水 雲 敎主 이상룡李相it이 수운교의 대법당을 짓고 장 차 이곳에는 착한 마을을 이룩할 것이라 하여 마을을 만선동滿善洞이 라 부르다 변하여 만선동滿仙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만성리 回 436 論 山郡 上月面 寒泉里 옛날에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이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을 보고 앞으 로 만가萬家는 들어서겠다고 하여 그로부터 만성리 K5 城里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만세봉 園 437 禮 山郡 光時面 瑞草井里 1919 년 3·1 운동 때 이곳 사람들이 산에 모여 만세 를 불렀다 하여 만 세봉菓歲峯이라고 부르는 산이다. 만월도 園 438 瑞山郡 近興面 賈證島里 섭 의 모양이 보 름 달처 럼 바다에 떠 있다 하여 만월도滿月 島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만인산 @I 439 大德郡 山內面 錦山郡 福 t 踊j f)( 富 面 산이 가파르고 천야만야하게 생겼으므로 만인산萬初山이라고 부른 다. 조선 태조太祖의 태 를 묻었다 하여 태봉산이라고도 부르게 되었 다 한다. 만자골 回 440 窓皮郡 南面 松院里 옛날에는 암자가 있어서 아들 얻기 를 원하는 아낙둘이 길을 가득 메 웠던 마을이라 만자골萬子洞이라고 불러온다.
만자실땐 441 扶餘郡 內山面 栗岩里 조선 세조 때 정승을 지낸 홍윤성洪允成이 만석을 하며 산 마을이라 만자실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만화동回 442 天 原郡 劃 ||面 龍頭里 지대가 높아서 멀리까지 앞이 내다보이는 마 을 이다. 마을 흙이 분처 럼 곱다고 하여 일명 분토골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숙종肅宗 때의 학 장 유비柳 IE 가 살면서 온갖 꽃을 심고 만화당菓花堂올 지어 후진을 가르쳤으며 그 아 들 유광천柳光天과 유광익柳光翼과 사위 납세강南世 綱이 속속 등과하여 동구에 솟대 셋을 세웠다 하여 솟대배기라고도 칭찬을 하는 마 을 이다. 또한 종손인 유진한柳振 范은 영조英祖 때 문 장가로 호천R 를 만화재晩華齊라 하였다. 꽃을 심고 명문을 이룩한 마 을이 라 만화동晩華洞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말골비 알 回 443 天原郡 修身 面 海亭里 조선시대에 고마청 屈馬聽 의 말을 길렀던 골짜기로 말의 고삐를 매달 아 길렀다 하여 말골비알이라고 부르는 골짜기다. 망경대 回 444 天原郡 並 )II 面 龍頭里 조선 정조正祖 때 백의처사白衣處士 유영일柳榮日이 정조의 국상을 당하여 3 년 동안 조석으로 이 산에 올라와서 한양을 바라보며 곡하였 다 하여 망경대望京 盜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망경산 땝 445 天原郡 廣德面 옛날에 한 처녀가 한 마을에 사는 조趙도령과 사랑을 속삭이다가 조도령이 군문에 뽑혀 들어가 한양으로 올라간 후 삼 년이 되어도 돌 아오지 아니하므로 처녀는 날마다 사랑을 속삭이던 넙디고개 를 지나 이 산봉우리에 올라와 한양 쪽을 바라보다가 그만 애가 타서 죽어서 그 넋이 꾀꼬리가 되어 이 산에서 살면서 북쪽을 바라보며 늘 도령을 못 잊어 〈고개 고개 넙디고개 담배밭에 조도령〉 하고 우는 산이라 하 여 망경산望京山이라고 부른다 한다. 망국재 떠 446 강城郡 洪北面 石宅里 조선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마을 사람들이 이 산에 올라와 망곡望突 을 하였다 하여 망곡재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망국재 라고 부르는 산 이다. 망배산回 447 扶餘郡 良化面 內城里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義慈王이 여러 백성들과 함께 당나라에 포 로로 끌려갈 때 백제의 이곳 사람들이 산에 올라와서는 울면서 슬퍼 한 산이라 하여 망배산望拜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망북 回 448 論 山郡 恩津面校村里 마 을 지형이 제비 새끼가 둥우리에서 북쪽을 바라보는 형국이라 하 여 망북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망월산 땝 449 靑陽郡 長坪 面 樂只 里 해마다 정월 대보 름날 밤에는 마을 사람 들 이 이 산에 올 라와서 달맞 이 룰 한다 하여 망월산望月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망진산 回 450 扶餘郡 九 龍面 玄岩里 옛날에 한 충신이 간신에게 몰려 이곳에 숨어살면서 날마다 이 산에 올라가서 한양 쪽을 바라보며 조정을 근심하였다 하여 망진산望 符 山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망해산回 451 天原郡 並 Ill 而 鳳項里 멀리 서쪽으로 바다가 보이므로 망해산望海山이라고 부른다. 임진왜 란壬辰倭爵 L ' 때 이 부근의 아낙네와 아이들이 이곳으로 피난해 와 있 는데 왜병 들 이 습격해 오므로 마침내 16 세 되는 이용이 아낙네 들 로 하여금 모두 돌을 산 아래로 딩굴리게 하여 적을 몰살시켰다는 산이 다. 매곡 回 452 天原郡 成歡邑 梅珠里 마을에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이 있다 하여 매곡梅谷이라고 부 르는 마을이다. 매봉 回 453 天原郡 並JII面 龍頭里 산이 매의 형국이라 하여 매봉이라고 부른다. 3·l 운동 때 유관순柳買 順이 이곳에 올라와서 사홀 밤을 기도하여 영감을 얻고 봉화 를 들었 던 산이다. 먹 벵 이 回 454 大德郡 鎌복面 l1!li同里 옛날 숯을 굽던 마을이라 먹뱅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먹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멱시 땐 455 牙山郡 松岳面 講堂里 마을에 미역 같은취가많이 있었다 하여 멱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면우지 回 456 옹- f J||郡 힘!山面 月岐里 옛날부터 목화 물 많이 심었던 마 을 이라 면우지라고 부르개 되었다 한다. 면학골回 457 瑞山郡 高北面 加口 里 골짜기 지형이 마치 학鶴이 졸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면학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명가을回 458 公 ) · II ti 寺谷面 月阿里 마 을 에 명개나무가 많이 있었다 하여 명가울이라고 불러오는 마을이 다. 명고동 回 459 錦山郡 南 二 面 大陽里 마 을 뒷 쪽 에서 가끔 장구소리가 들 리면 마을에 길한 일이 생긴다 하 여 명고동鳴鼓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명당골回 4fi(J 公 川郡 寺 谷面 1E 月里 마을에 와우형臥牛形, 장사축와형 長蛇逐珪形 , 잠두형蠶頭形, 금오탁 시형金 烏塚院形 둥 여러 명당자리가 있다 하여 명당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명지개미 回 461 牙山郡 松岳而 首谷里 마 을 에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의 명당이 있다 하여 명주개미라고 부 르다가 변하여 명지개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명천포 回 462 瑞山郡 聖淵面 鳴 II| 里 마을 앞에 있는 냇물이 여울져서 늘 소리 를 내는 개[浦]이므로 명천포 鳴 II| 沮i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모가을 回 463 扶餘郡 良{t面 碧龍里 지형이 목처럼 생겼으며 모과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모가울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모군리 땐 464 舒川郡 馬西面 道 三里 옛날 나라에서 군사 를 모집할 때 이곳에서 군사 를 뽑았다 하여 모군 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모란땐 465 公州郡儀堂面 五仁里 냇물 안쪽으로 자리 한 마을이 라 물안이 라고 부르다가 마울에 목단꽃 이 많이 피어 모란毛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모래장불回 466 舒川郡 馬西面 竹山里
모래가 좋은 마을이라 여 름철 에 모래찜질을 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 이 모여드는 마 을 이라 모래장벌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모래장불이 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모리 回 467 大田市 東 區 龍 겁겁 同 임진왜란 때에 다 른 마을은 모두 피해 를 입었으나 이 마을은 피해 를 입지 않았으므로 다 른 마을사람 들 이 부러워하던 마을이라 모리慕里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모산回 468 唐津郡 貞 美 而 稅坪里 마 을 앞에 못이 있어서 처음에는 못안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모산 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모산포 回 469 洪城郡 西部面 新里 풀숲 으로 우거진 산 아래에 하얀 백사장이 깔려 있고 바다로 변한 마 을 이라 모산포茅山!iIi라고 부 른 다. 조선 태종太 宗 8 년(1 409) 3 월에 왜 구가 이 곳 에 침략해오자 현감縣監 김비金批가 일격에 물리친 포구다. 모시울멘 470 舒 川郡 版橘面 뚜 山里 마울 부근에 엣날부터 삼밭이 많아서 모시 풀 이 많았다 하여 모시울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모실 回 471 公 ) · I iii I; 新豊面 百it里 옛날에 한 어머니가 아 둘 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마을 뒷산 에 신당을 짓고 정성껏 기도하여 마침내 아 들 의 병을 고쳤다 하여 모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모찻굴 回 472 洪城郡 結城面 城谷里 옛날에 이곳에는 어느 모자가 사는집 한집밖에 없었으므로 그 후 집이 들 어서면서 모잣굴이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모정 回 473 大田市 西區 三JI I 洞 마을이 처음 생길 때 맷집부터 들 어서기 시작하였다 하여 모정이라 고 불렀 다. 그후 마 을 에 팻집 정자가 있어서 모정 茅 亭 이라고도 불렀 다. 모청 回 474 論 山郡 練武邑 金谷洞 마 을 이 한쪽에 있으므로 모퉁이 라고 부르다가 조선 인조仁祖 때 충 신 만치당菓fi 堂 김수납金秀男이 강당을 짓고 글을 읽는 소리가 어둠 이 깔릴 때까지 들려 왔다 하여 모청 暮聽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모홀 回 475 扶餘郡 玉 山面 中陽里 마 을 이 사방으 로 뾰죽한 산으로 둘 러 싸인 그 안쪽에 자리 해 있다 하 여 모 홀 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목도 回 476 保寧郡 .1 /;~)I\ 而 孝子島里 옛 날 에 는 섬에 나무가 많아서 목도木島 , 나무섬이라고 부르던 섬이 다. 지 금은 목도終島 라고 쓴 다. 목바리 回 4Tl 祖 山 郡 德 山面 怖染里 옛 날 에 주막을 경 영하던 한 노파가 이곳에 다시 목로술집을 만들고 주막을 시작한 것이 처움이라 목바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목빈고개 回 478 컵;陽郡 長坪面赤谷里 조선 선조 宣祖 때 홍산에서 반란 을 일으킨 이몽학李夢苗r ) 의 조상의 묘 가 있 는 데 그를 치형한 후 다시 조 상의 묘가 있는 이 고개의 목을 잘 랐다 하여 목 빈고개라 고 부로 게 되었다 한다. 몰니산回 479 瑞山郡 大 山面 大 山里 산에 금구몰 니 형 金떨沒泥形 의 명 당이 있다 하여 몰니 산沒泥山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몸티 回 480 公川郡 儀常 面 松節里 마을에 우산형의 큰 향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조선시대 초기에 사 창社 倉을 짓고 기념으로 심은 나무로서 마을 사람 들 이 이 나무 를 위 하면 아들을 낳는다 하여 나무 를 위 하는 산골짜기 마 을 이므로 몸티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몽대 回 481 瑞山郡 南面 夢山里 전에 이곳에 집을 짓고 싶어 하는 사람이 집터 를 잡 을 때 현몽을 하 고 집을 지었다 하여 몽대夢袋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몽대 蒙袋 라고 쓴 다. 뫼 갓 回 482 洪城郡 西部面 上黃里 산줄기가 흐르다가 야산으로 낮게 이어지다 꺾이는 산의 가에 마을 이 있으므로 뫼갓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무곡고개 回 483 꿈陽郡 靑隔 邑 淸水里 고개가 험하고 도적들이 들 급공고 있어 날이 어두워지면 고개 를 넘지 못하고 고개 아래 주막에서 묵고 낮에만 넘어다니는 고개라 하여 무 곡고개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무데기 回 484 論山郡 練武邑 金谷洞 마 을과 마 을 주변에 돌무더기가 많이 쌓였으무로 무데기라고 부른 다. 또한 무동武洞이 라고도 부르는데 무인武人이 많이 나오는 마을이 다. 무드리 땐 485 天原郡 並 J II 面 龍頭里 마 을 앞으로 냇물이 호르는데 물 이 빙 글빙글 돌 아 호르는 곳에 마을 이 있으므로 물도 래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무드리라고 부르는 마을이 다. 무라니 回 486 公川郡 新豊面 花興里 마을 앞으로 내가 호르고 그 내가 마을을 감싸고 다시 흐르는데, 내 안쪽에 마 을 이 있으므로 물 안이 라고 부르 다가 변하여 무라 니 라 모 부 르는 마 울 이다. 무루내 回 487 扶餘郡 鴻山面 鴻良里 마 을 앞으로 두 냇 물 이 호르므로 무루내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무루실 回 488 公州郡 新豊面 大龍里 골 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마 을 이 아늑하고 풍류적이며 마 을 에 무릉도 원武 陵桃源 의 명당이 있다 하여 무릉곡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무루 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무마도 맵 489 保寧郡 tt ll1 面 外팹島里 섭의 형국이 말처럽 생겼다 하는데 또한 오천蒸 Ill 에 수군영水 'IT[ 世이 있을 때 말을 싣고 가던 배 들 이 쉬어가던 섬이라 무마도貿馬島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무봉산 ml 49'. l 公州郡 利仁面 伏龍里 산의 모양이 봉황이 춤을 추는 형국이라 무봉산舞鳳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무석 回 491 瑞山郡 瑞山邑石林里 마을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사람이 춤을 추고 있는 형 국이라 하여 무석舞石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무성 리 回 492 ~山郡 大述面 店 田里 냇물이 성처럼 마 을을 둘 러싸고 있다 하여 무성리武城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무성산回 493 公州郡 寺谷 面 正安面 牛城面
산 꼭대기에 석성이 있는데 나무에 가려진 석성이라 하여 무성산 茂城山이라고 부른다.조선 선조 宣祖 때 쌍령斐出의 의적 안수安 席 가 이 곳까지 나타나서 이 지 방의 탐관오리 와 토호土交 들을 견제 하여 가 난한 백성 들을 구하곤 하였다 한다. 무수리 멘 494 論 山郡 隔 村面 林花里 마 울 에 선인무수형仙人舞抽形의 명당이 있다 하여 무수리無悠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무술 回 495 扶除 R fl 外山面 水新里 마 을 지형이 마치 선녀가 춤을 추는 소매자락 갇다 하여 무수舞抽라 고 부르다가 변하여 무술이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묵지 回 4% 祖 山 郡 大述 面 花山里 옛날에 먹을 만드는 흙 이 나온 마 을 이라 묵지 思 地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문곳이 回 497 瑞 山郡 地 谷面 現城里 지형이 곶으로 되어 있으며 그 곶이 문기둥처럼 생겼다 하여 문곶이 라 부르다가 변하여 문곳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문다라니 回 498 天原郡 北面 上東里 마 을 사방으로 산이 둘 러 있으므로 문을 단 대문안처럼 아늑하다 하 여 문다라니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문안 回 499 牙山郡 湯井 面 梅谷里 전에 부자 윤씨尹氏가 살 때 담 을 넓게 둘러싸고 대문을 달았는데 그 안이 지금에 와서는 한 마을을 이루었으므로 문안이라고 부르는 마 을이다. 물굴 回 500 錦山郡 南二面旦谷里 석굴로서 지상에서 10m 쯤 들어가면 넓게 파진 곳에 물이 괴어 있고 그 아래에서 물 이 호르는 소리가 들리므로 물굴이라고 부른다. 그 깊 이는 알 수 없으며 이곳이 영검하다 하여 한재가 있으면 기우제 를 지 낸다. 굴 위의 지형은 호롱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에 묘 롤 쓰면 시 체는 용龍이 되어 승천하고 그 집안이 잘된다 하여 몰래 묘 륜 쓰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그 반면에 이 곳에 묘 를 쓰면 비 가 오지 않는다 하여 가뭄이 계속되면 주민 들 이 모여 묘 를 찾아 나선다고 한다. 물미 回 501 溫陽市 信 仁洞
산 골 의 맑은 물 이 호르는 마 을 이라 물미라고 부 르 세 되었다 한다. 물안주回 502 i:l llrfi 金鶴i ! 5 ] 마을의 지형아 기러기가 나 르는 형국이라 하여 무안 · ii冊 I 이라 고 부르 다가 변하여 물 안주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물과라지 回 503 瑞山郡 南面 元荷里 마을에는 물 이 혼해 서 십한 가뭄에도 물 걱정을 하 지 않 는 마을이라 물 파라지라고 부르개 뫼었다 한다. 물한이재回 504 論 山郡 伐谷面 ~i谷里 고개가 가파 르고 길 어서 한 겨울에도 땀 융 홀 리지 않고는 못넘는 고 개이며 가도가도 한이 없 는 고개라 하여 무한이재라고 부 르 다가 변 하여 물한이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미 당 回印 5 淸 f 8 t r, j 狂 FL 面 美党里 옛날에 마 을 에 미 목 당이 있었으므로 미 룩 당이라고 불러 오다가 변하 여 미 당 美堂 이 라고 부르는 마 을 이 다. 미명골回 500 舒川郡 華 tl~面 竹山里 조선시대에 면산지로 유명하여 목화가 많이 나왔으므로 무면골이라 고 부르다가 변하여 미명 골 이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미암산챕 507 公 ·J l i郡 混 JI I 面 見東里 산에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서는 아래 절 간에서 먹 을 만 큼 쌀이 나 왔다 한다. 쌀은 날마다 그날 먹 을 만 큼 나왔다 하는데 쌀이 나오는 바위가 있다 하여 미암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미어실回 500 洪城郡 銀河面 德箕里 옛부터 곡식 이 잘되 는 들을 끼 고 있는 마 을 로 황금벌판에 있는 마 을 이라 미어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민개 回 509 牙山郡 屯浦面 新南里 냇가 옆에 자리한 마 을 로 찬 물이 쭉쭉 빠지는 냇가변에 마을이 있으 므로 민개라고 부 른 다. 민어루 回 510 瑞山郡 遠北面 防葛里 섬의 지형이 물고기인 민어처럼 생겼다 하여 민어루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밀두 땐 511 牙山郡 仁 ') · Il 面 密頭里 밀물이 들어오는 머리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밀두密頭라고 부론다.
비류백제佛流百 濟가 건국될 때에 세운 미추홈이 이곳의 밀머리였다 는 설이 있다. 밀무리 回 512 禮 山郡 新陽面 ?t谷里 옛날에 황해의 밀물이 이 곳 까지 들 어왔는데 그 포구였다 해서 밀무리 라고 부론다. 이 고장에서 가장 뛰어난 해복형 8f · (犬形의 명당이 있다 는 마 을 이다.
마 을 서쪽의 산이 주발을 엎어 놓은 형국이라 바리미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바리미 이 팬 518-3 洪城郡 長 谷面 天台里 마 을 에 바리 처 럽 생 긴 발 이 산鉢伊 山이 있으므로 바리 미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바미 回 519 ~ 山 郡 大典而 大栗 里 마 울 주 변에 밤나무가 둘 러 싸여 있으므로 바미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바이 아워 땐 520 扶 Lt t I 나衍j而 大船 里 논 가운데 배 처럼 생긴 바위가 있 는 마 을 이라 배아구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바이아 워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바전이 回 521 大 田市 西 區 德 I IJ) 洞 옛날 지관地 官 한 사람이 묘자리 를 찾을 때 이곳 을 좋은 밭으로만 보 았다 하여 소전所田 이라고 부르 다가 바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바타니 回 522 天原郡 東而 德 星里 마 을 주변에 높은 산이 사방 을 둘 러 있으므로 박달안이 라고 부르다 가 변하여 바타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바탕골땐 523 公 )1 1 郡 長岐面 隱 龍里 옛 날 에 나무꾼 들 이 산에 가서 나무 를 해 가지고 산 을 내려와서는 이 곳에 모여 쉬며 놀 던 곳 이라 그 들 이 바탕이 되는 곳이라 바탕골이라 고 부른다 한다. 박샌 回 524 唐津郡 牛江面 1L Ii n 里 마 을 이 처음 생길 때 박생원朴生 員 이 뚝 을 막고 그 위에 마 을 이 생겼 다 하여 박언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박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박성미 回 525 靑陽郡 飛臥面 龍 )|l 里 박씨가 묘 를 쓰면 후환이 없고 다 른 성씨가 묘 릅 쓰면 후환이 따 른 다 는 산 아래에 마 을 이 있으므로 박성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박재오땐 526 錦山 郡 秋富面 要光里 마 을 지형이 선비 다섯 사람이 한 우물을 파는 형국이라 박재오라고 부른다 한다•
박철 回 527 洪城郡 結城而城谷里 고려 말엽에 불 사이군不 事二君 의 신조에서 이 곳 에 낙향한 고려 충신 장씨張氏가 서당을 짓고 서생을 가르치다가 마침내 박철 루爾鐵 樓라 는 정자 를 짓고 세상 을 소요한 마을이라 박 철爾鈴t 이라고 부른다. 반계 I, 땐 528-1 天原郡 劃 I| 面 挑源里 조선 선조 宣祖 때의 학자 한웅기i紅 『箕 . 한옹남韓應南 형제가 살면서 한웅기 가 호 를 반계幡 溪 라고 하고 마 을을 찬하며 자기 의 마음에 비 유한 데서 그 선비 정신 을 높이 사서 마 을 지명으로 썼다고 한다. 반계 2· 回 528-2 洪城郡 長谷 面山 城里 마 을 뒷산에 돌 이 많으며 마 을 앞으로는 맑은 시냇 물 이 흐른 다 하여 반계確 #표 라고 부 른 다 한다. 부근에 마한시대의 부락 사회 국가 인 사로 국酒盧國이 있었다 한다. 반룡 回 529 論 山郡 魯城面 孝竹里 이무기가 터 를 잡고 백 년마다 한 번씩 용 Wt 이 되어 승천하는 마울이 라 반룡半 n 방 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반상 回 530 公 ) · I · I tt 長岐面 錦岩里 마을에 반송盤松이 있으므로 반송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반상이라 고 부르는 마울이다. 반석 回 531 牙山郡 松岳面 外岩里 바위가 내 바닥에 깔려 있고 마울 쪽으로 또한 바위가 많이 누어 있는 데 그중에서도 윗쪽에 있는 큰 바위에 의암동천底岩洞天 넉자의 대 자와 그 옆에 이용찬李用贊 서의 작은 자 를 새겼고, 아래 바위에는 동화수석東華水石이란 대자와 이백선서李伯 智첩 란 소자 를 새기었는 데 이 바위글은 모두 이 마 을을 예찬한 글들 이라 반석이라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반야산 回 532 論 山郡 論 山色 湘閑洞 산 아래에 미 륵불 彌勒佛이 있으므로 반야산般 若 山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반여울 回 533 靑陽 郡木面 新典里 금강가에 있는 마을로서 금강에 호르는 물의 반 이상이 여울을 이루 는 뒤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반여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반원回 534 論 山郡 光石面 恒月里
마 을 에 운중명월 零中 明 月 의 명당이 있으며 반월은 항상 반월이라서 온달이 될 수 없다 하여 항상 10 여 호가 사는 마 을 이 다. 온달이 될 수 없는 명당자리라 반 월 이라고 부 른 다. 반정터 回 535 唐津郡 貞美面 下城里 옛날 권씨 權氏 한 사 람 이 이 곳 에 낙향하여 99 칸이나 되는 집을 짓고 반월정 半 月 亭 이라고 부르 게 하였 는 데, 그후 마 울 도 반정터라고 부르 게 되었다. 반조원 回 536 扶餘郡 世道面 領 s g院里 지형이 곶으로 되어 있으므로 곶 지라고 불 렀었다. 그후 고려시대 고 다진古 多津 이라고 부르는 나 루 터가 고다진소로 되고 조선시대에 이 르러서는 반 조 원이란 원이 있었으므로 반조원 領諾 院이라고 부르게 된 나 루 터가 있 는 마 울 이다 . 반촌回 537 論 山 郡 豆 磨面 旺袋里 산세가 풍요로운 곳 으로 광산 김씨光山金氏, 죽 양반 들 의 마을이라 반촌이라 부르개 되었다 한다 . 발군산回 538 錦 山 郡 郡 北 面 天乙里 조선 영조 英祖 4 년(1 728 ) 에 의병대장 義 兵大將 나후명 羅厚 明이 이곳에 서 의병 을 모아 안음 安陰 에서 일어난 정희량鄭希亮 올 쳐서 영남 일대 를 평정시켰었다. 의병 을 모아 토벌에 출 발한 산이라 발군산發軍山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발화지 回 539 論 山郡 鍊 武 邑 陽 地 洞 마 을 지형이 마치 매화 꽃 이 활 짝 핀 것처럼 생겼다 하여 발화지發花 枝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 밤실 回 540 公州郡 長岐 面 大橋 里 마 을 지형이 좌청룡우백호左 靑龍 右白虎가 길게 뻗어 청룡날이 지네형 으로 되어 있는 형국으로 만약지네가남쪽 들 로나오는경우는김장군 金將軍 후세들의 명당자리가 없어지게 되므로 어귀에 밤나무 를 십고 지네가 들 어가지 못하게 하여 밤나무 를 많이 심은 마울이라 밤실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밤정굴 回 541 唐 津 郡 新平面新堂里 옛날에는 마을 앞 개에 배가 드나들어서 장삿배가 닿으면 밤을 새워 가면서 성황을 이루었다 하여 밤정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밥산 園 542 꿉陽郡 化城面 長 溪 里 홍주사람 이희돈李希敦이 이 산에 부모의 묘 를 쓰고 그후에 천석千石 을 했다 하는데 이렇듯 산에 부자가 되는 명당이 있다 하여 밥산, 식 산食山이 라고 부르는 산이 다. 밥전말 回 543 扶餘t I; 忠北面 福 金里 토지가 토박하여 농사가 잘 되지 않는 밭이 있는 마울이라 밥전말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밥준논 回 544 論 山郡 可也谷面 江검i里 옛날 가뭄이 심할 때 이곳을 지나가던 사람이 허기졌을 때 밥 한 그 릇을 얻어 먹고 그 후에 그 은혜 를 보답하기 위하여 너 마지기의 논 을 사서 밥 준 사람에게 주었다 하는데, 그후 밥준논으로 불리운다. 방계 땐 545 唐津郡 松嶽面 芳 溪 里 마을이 수려 하고 마을 냇가에 밤나무가 많이 있으므로 밤개 라고 부 르다가 변하여 방계芳溪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방교 回 546 瑞山郡 浮石面芝山里 옛날에 한 선비가 이 곳 에 정착하여 살면서 향나무다리 를 놓고 고고 하게 사색 을 일삼았다 한다. 그의 뜻 을 가리는 의미에서 마윤 이 름 을 방교라 부 르 게 되었다. 방돌구지 回 547 洪城郡葛山面 因 谷里 옛날 밤에 집마다 컨 둥잔불이 꽃과 같이 곱다 하여 방화실이라고 부 르다가 변하여 방돌실 이어 방돌구지라고 부르게 된 마을이다. 방등 回 548 大 德 t I; 新范 t l t邑 上 맙 里 옛날에는 이곳에 호수가 있어서 연꽃이 피곤 하여 아름다왔는데 그 래서 그 호수 를 방호芳湖라고 불렀다. 그후 호수가 메워지고 마을이 들어서자 방동, 이어 방동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방머리 回 549 公州郡長岐面 松仙里 조선 세종世宗 때 누에치기 를 장려하였는데 그때 이곳에 누에 치는 집을 두었다. 누에는 방에서 치게 되므로 방 머리에서 누에를 친다 하여 방머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방선 回 550 舒川郡 板橘面 後洞里 들과 산이 기름져서 또한 선계仙界 룰 이루돗 아름다운 곳이므로 신 선들이 가끔 찾아드는 마을이 라는 뜻에서 방선訪仙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방아고지 回 551 論山郡 光石 面 栗 里 옛날에 물 방아가 있어서 여러 사람 들 이 모여 들 었던 마 을 이라 방아 고지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방우리 땐 552 錦 山郡 富 利 面 方 佑 里 마 울 이 금 강 錦江 가 모 퉁 이에 있으므로 방 울 처 럽 매 달려 있다 하여 방우리 라고 부르 게 되 었다 한다. 밭두문이 回 553 舒 川 郡 텁! 山 面 斗南里 백제가 망한 후 많은 유민이 자리한 마 을 바깥쪽에 위치해 있으므로 밭두 문이라 고 부른 다. 밭을 가는 사람 들 이 나 들 이 를 좋아하지 않는 바 깥쪽 의 마 을 이 라 밭 두문이 라고 부른 다. 배고개 回 554 扶餘郡 扶餘邑 뽑 北 里 고개 아래에 냇 물 이 홀 러서 운하 運 河와 같이 배 를 드나들게 하였다 하여 배고개라 고 부 르 개 했다. 지금은 교육청이 서 있는데 앞길을 5m 정도 파 면 참나무와 오리나무의 잎과 나무등걸이 나오므로 뱃터 였음 을 알 수 있다 한다. 배꽃 回 555 論 山郡 彩柔 面 禹 基 里 마 을 의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 형태가 배꽃이 활짝 핀 것 같다 하여 배꽃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이화낙지형梨花 落 地形의 명당이 있다는 마 을 이다. 배너머고개 回 556 論 山郡 上月面 山 城 里 『정감록 鄭 鑑 錄 』에 따르면 신도안〔新都內]에 도읍을 하면 이곳으로 배 가 넘어다니는 강물이 생긴다 하여 배너머고개라고 부르는 고개다. 배논 回또 7 禮 山郡 新岩面 宗敬里 백제百 濟 때 중국에서 수도하고 돌아오는 의각선사義 梵 禪師가 돌배에 다 부처 천 개 를 싣고 강물따라올라와우선 이곳 논에 옮겼는데 그 옮겼던 장소 를 배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배매산回 558 論 山郡 恩 津 面 侍慕里 옛날에는 이곳이 바다가 되어서 배가 드나들었으며 배 를 매었다 하 여 배매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배못이 回 559 瑞山郡 瑞山邑石林里 옛날부터 마을에는 배처럽 생긴 못이 있었다 하여 배못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배미실回 560 保 寧郡 )II 北面 鶴城里 마을에서 배 를 만들어 바다에 밀어내곤 했다 하는데 배 를 만 들 던 마 을 이므로 배미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배바위 回 561 大田市 東區 邑內洞 갑천甲川 냇가에 있는 바위로 예전에 는 갑천의 물 이 깊어서 배가 이 곳까지 드나 둘 어 이 바위에다 배 를 매었다 하여 배바위라고 부른 다. 바위에 현감한공성보물세縣監韓 公 聖軒 I i沒世란 큰 글 씨와 경술이월 일 庚 戌二月 日이란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배방산 回 562 牙山郡 排芳面回龍里 들 한가운데에 높이 솟은 산으로 이 부근에서 뛰어나게 아 움 다운 산 이라 배방산排芳山이라고 부 른 다 . 또한 기러기가 지나가는 형국이라 서 과안산過雅山이라고도 부론다. 고려 태조太 祖 때 장수 유금필庚酷 弼이 명을 받아 이곳에 성을 쌓고 진을 치고 있는데 꿈에 어떤 큰 사 람이 나타나 말하기 를 서원西原-지금의 청주-에 큰 변이 있 으니 빨리 가서 구하라 하므로 곧 군사 를 이끌고 청주에 가니 후백제 後百濟의 장수 김훤金효과 애식 哀式 , 한장漠丈 둥이 3000 명으로 서원 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 룰 본 유금필은 공격하여 적을 무찌르고 서원 을 구했다는 기 록 이 따 른 산이다. 배실 回 563 公川郡 f' l j仁面 梨谷里 산이 마을 을 사방으로 둘러싸 고 있어 그 안에 분지盆地처럽 마 을 이 놓여 있으므로 마치 배 안 같다 하여 배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배 암성 回 564 d t城郡 洪城邑 松月 里 마을 뒷산이 장사추와 長 蛇追珪의 형국이라 하여 배암성이라고 부르 는 마을이다• 배양골回 565 洪城郡 金馬面 竹林里 옛날에는 이 곳에 백 양나무가 많아서 백 양골이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배양골이라고 부르게 된 마 을 이다. 옛날에는 많은 안재 를 양성한 배 양학당培련~t}! 1 설 이란 서당이 있었다. 배우니 니 맨 566-1 大田市 西區 揮 뚜 洞 마을 지형이 바구니처럼 오목하게 생긴 마을이라 바구니라고 부르다
가 변하여 배우니라 고 부른 다 . 백운白 雲 이라고 부 를 때도 있다 . 배우니 익 괜 566-2 大德郡 山 內面 大 ~l j 里 옛 날 에 는 마 을 앞에 큰 연못이 있고 그 못 속에 큰 자라가 살고 있어 서 자 라가 물 위 로 나와 놀 때는 흰 구 름 이 그 자라 를 보호하여 연못 에 구름 이 떠다녔다 하여 백운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배우니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 배 일 回 567 燕岐郡 全}1!iiii ?邦松里 임 진 왜 란壬辰倭亂 때 이 곳 에 사 는 학자 권주 權柱 가 의병 300 여 명 을 이 끌고 조중봉趙班峰 이 이끄 는 금 산싸움에 임하여 모두 전사하였다. 그후 전 사한 의 병들 의 가족들 이 철 저하게 왜구 를 싫어하는 배일사상 에 젖 게 되었으므 로 배 일 排日이라고 부르게 된 마 을 이다 . 배철 回 568 舒 川 郡 馬 山 而 梨寺里 옛 날 에 는 배나 무 에 둘 러 싸 여 있는 절 이 있었던 마 을 이라 배 절 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 다. 배지울回 569 瑞 山 郡 雲 山 面 除美里 마 을 이 생기면서 부 터 배씨 裵 氏 들 이 많이 살던 마 울 이라 배씨울이라 고 부르 다가 변하여 배지 울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배추간이 回 570 論 山 郡 可 也 谷而 菩 田 里 마 을 뒷 산에 호랑 이 가 웅 크 리고 있 는 것 같 은 명당자리가 있 는 데 그 칸 수 가 백 칸이 넘는 명당자리라 이 곳 에 마 을 이 생기자 백호간이라 고 부르 다 가 변 하여 배 추 간이라 부른 다. 배티재固 571 錦 山 郡 珍 山 面 器 山 里 고개에 큰 돌 배나무가 서 있으므로 배티재라고 부르는 고개이나 임 진왜란 때 권율장군權 探將軍 이 왜군 을 크게 무찌 른 이치대접 梨 時 大 捷 의 고개다. 백가골 回 572 扶 餘郡 世道面 佳槍 里 백씨白氏 들 이 집단 적 으로 거주하는 마 을 이라 백가 골 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백강回 573 扶 餘 郡 璟岩面 津邊里 조선 효종 孝宗 때의 석학 이경여 李 敬與가 살던 마 을 이다• 백마강白 馬 江 근처에 마 울 이 있으므로 백강白江이라고 부 른 다 한다. 백고개 回 574 公川 郡 酒 /I| 面 三 角里
옛날에는 고개에 호랑이가 살고 있어서 가끔 사람 을 해쳤다 하는데 그뒤 사람 들 이 이 고개 를 넘 을 때는 백여 명이 모여서 집단적으로 고 개 를 넘어다녔다 하여 백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백골산 떠 575 大 德 郡 東 面 新 下里 산 꼭대기에 산성이 있는 산이다. 삼국시대에 백제군과 신라군이 처 절한 싸움 을 하여 많은 군사 들 이 죽 어서 뒤에 그 전사자 들 의 백골이 산에 됩구는 처절한 산이라 하여 백 골 산 白骨 山이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백마산이 젭 576-1 扶 餘郡 外山面 萬 海 里 옛 날 에 주인 을 잃은 백마가 북 쪽 전쟁터에서 남 쪽 으로 내려와 이 부 근 산하에서 살고 있었 을 때 그 백 마는 가끔 산과 산 사이 룰 높이 뛰 어 날으는 일이 많았다 한다. 그 백마가 뛴어내린 자리 는 천 하의 명 당자리였다 한다. 그후 그 앞산에서 어느 아기가 태어나자 백마는 건너편 산으로 뛰어 넘어가서 크게 울 부짖으면서 하 늘 로 올 라 갔다 한다. 백마가 명당자리에서 새로 날 장수 를 기다리며 뛰어넘었던 산 이라 하여 백마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백마샨 기 쳅 576-2 錦山 郡 珍 山面 浮巖里 옛날에 산 아래에 있는 마 을 에서 장차 장수가 될 어린애가 태어났는 데 어린애가 장수 될 여지가 많으므로 나라에서 알면 집안에 크게 화 가 미 칠 것 을 두려워 하여 그 아이 를 죽였는데 이때 별안간 산속에서 말의 울 음소리가 들 리면서 땅속에서 백마가 튀어나와서 그 아이의 집을 여 러 바퀴 돌 며 주인 을 찾다가 다시 산으로 올 라가더 니 하늘 을 향하여 크게 울부짖고 죽었다 한다. 이 백 마가 죽은 산 을 백 마산白 馬 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백사수도 園 5T7 瑞 山郡 安眠邑~南面 황해안의 서산군 남면과 안면옵 사이에 뚫 려진 물 길 을 백사수도白 沙 水 道 라고 부 른 다 . 본래 남면반도南面半 島 와 안면도安面 島 는 연 륙 되어 곶 을 이 루 었는데 조선 인조仁祖 때 태안 사람 방경 잠 房泉복 이 알기 를 안홍목[安興項]에서 조곡미 를 실은 운반선이 자주 파선을 하여 국가적 으로 많은 피해 를 입을 뿐만이 아니라 적들강積 쯔 江에서 가로립만加 露 林 問 으로 통하는 운하 를 시공하여 세 차례나 고려 때부터 실패하므 로 지금길 을 모색하게 되었다. 여기 물길만 뚫어도 많은 도움이 된다
고 충청감 사忠 活監司 김유金盟 에게 여러 차례 건의하여 김유가 나서 서 이 곳을 끊고 배 를 통하 게 하여 많은 배의 파선을 막았다 한다. 동 백꽃이 많이 피 는 백사장 부근에 있는 수도라 백사수도白沙水道라 부 르게 되었다 . 백석탄 뗀 578 天原郡 並U II 面 桃源里 냇 물 에 크고 흰 바위가 있는데 여 울 이 있으므로 백석탄白石灘이라 부 르게 되었다. 백시동 回 579 扶餘郡 핸 山面 井洞里 옛 날에는 마 울 에 잣나무가 많았다 하여 백시동梧市i빠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백자동 回 580 論 山郡 城東 面 花 亭 里 마 을 에서 태어나 는 사내아이는 모두가 기운 센 장사가, 여자 아이는 백이면 백 모 두 미색으로 태어났으며 뛰어난 사람이 많았다 하여 백 자동 百子洞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백저봉 園 581 扶餘郡 扶餘邑 中井里 백제 때에 산 꼭 대기에 정자나무가 있었고 이 나무 아래에서 선녀들 이 모시 들 로 모시 를 짜서 하얀 물감으로 표백 을 하여 널어 놓은 산이 라 백저봉白 쭈峯 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 백제고개 回 582 保寧郡 b립 山面 都典里 백제 때 많은 사람이 사비酒批로 통하는 이 고개 를 지나다녔다 하여 백제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백조개 回 583 舒川郡 밉( 山面 慕洞里 마을이 생기면서부터 백조白 鳥 가 많이 날아와서 길吉한 일만 생긴다 하여 백조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백호날땐 584 論 山郡 可也谷面 斗月里 마을 주위의 산세가 성난 호랑이의 지세라 하여 백호날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백화산園 585 瑞山郡 泰 安邑 束門里 산이 흰 바위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백화산白華山이라고 부른다• 산 에 봉수대가 있어서 동쪽으로는 서산군 북산北山의 봉수대와 남쪽으 로는 도비산都飛山 봉수대에 옹했었다. 뱃섭모랭 이 固 586 舒川郡 長項邑 長岩洞
옛날에 배로 곡식을 실어 나 른 모퉁이라 뱃섭모랭이라고 부 른 다. 옛 날 백제 때부터 군사가 주둔하였던 모퉁이다. 뱃챙이 回 587 舒川郡 華陽面大等里 마을의 지세가 배의 믿창처럼 되어 있어서 땅을 팔수록 물 이 고인다 고 하여 뱃창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뱃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뱅고지 回 588 公) · I · IR[ 牛城面 上西里 마 을 뒷산의 지형이 뱀처럼 생겼으므로 뱀고지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배양고지 이어 뱅고지로 부르는 마 을 이다. 버드내 回 589 大田市 中 區 柳 II 洞 수양비 들 이 우거진 냇물 버드내 근처 에 마 을 이 있으므로 버드내라고 부르게 되었다. 버미 回 5~ 牙山郡 湯井面 虎山里 마 을 뒷산이 범과 같은 지형이므로 범미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버미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버시니 回 591 公川郡 新豊面 仙節里 높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임진왜 란 때 이곳으로 피난을 한 사람들 은 모두 무사하였다 하여 보신保身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버시니라 고 부르게 된 마을이다. 번개 回 592 天原郡 東面 1E 溪 里 우암尤庵 송시열宋時홍 !l 이 반계幡溪 이윤伊尹의 뜻을 따서 이곳에 사는 윤씨 를 위하여 반계幡溪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번개라고 부르게 되었 다. 번거못 땐 593 靑 陽郡 木面 新輿里 옛날 번개가 치고 천둥이 치며 비가 몹시 내리던 날 땅이 가라앉으며 연못이 생긴 마을이라 번개못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번거못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벌굽이 땐 • 594 舒川郡 鍾川面 長久里 벌판이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벌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벌문이 回 5ff i 公州郡利仁面 發揚里 마을 앞에 큰 들 이 있는데 그 들로 들어가는 대문처럼 마을이 놓여 있다 하여 벌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벌정자땐 5% 保 뿌 郡 갑' t /i ti 姑坪 里 저수지가 생기면서 수 몰 된 마 을 로 연안 이씨延安李氏가 세운 큰 정자 가 있었던 마 울 이라 벌 정자라고 불 렀었다. 벌초막 回 597 꿉 [ 鬪[ 定 山面 썬城 Ill 옛 날 부터 벌초伐草 하 는 산지기 집이 있었으므로 벌초막이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범나미 回 598 論 山郡 連 山面 林里 조선시대 초 기 광산 김 씨光山 金氏 김문金 rp 1 이 일찍 죽자 17 세에 상부 룰 한 허씨 부 인이 그 친 정에서 개가시키려 하자 어린 아 들을 업고 개 경에서 시가 로 가 는 데 한 밤중에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안내하여 여 러 날 걸 려서 이 곳 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한 다음 호랑이가 돌 아서서 사라진 고개라 범너머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범나미라고 부르는 마을 이다 . 법덕골 回 599 公 州 郡 牛城面 龍 鳳 里 마 을 에 복호 형伏 虎 形의 명당이 있고 후덕한 사람이 옛날부터 많이 사 는 마 을 이라 범덕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범배 回 600 舒 JI IRI ; 幹 山 面 虎 岩里 마 을 에 법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법배라고 부른다. 범우기 回 601 公 川郡 正 安 而 內 r'l 里 옛날에 마 을 뒷산에서는 쌍령에서 내려오는 범이 밤마다 크게 울다 가곤 하였다 하여 범 울 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범우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범지기 回 602 燕岐 검 [ 南 面 高 亭 里 마 을 뒷산이 범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형국이라 하는데 법이 나타나 서는 마 을 을 지켜주는 듯이 밤이면 산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하여 법지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법 황골 回 f)()3 扶 餘 郡 忠{t面 支 石里 옛날에 마 을 에 범황사梵 皇 寺라는 큰 절이 있었으므로 법황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법공산回 604 ~ 山郡 古 德 面上 宮 里 옛날부터 공자 1L 子의 사당이 있었으므로 법공산이라고 부른다. 사당 은 해방 전에 없어졌다.
벗고개 固 605 錦 山郡 郡 it iiii . r,` 亭 里 산이 높고 험악하여 누구든지 이 고개 를 넘 을 때는 옷 을 벗지 않고는 넘 을 수 없는 고개라 벗고개라고 부 르 게 되었다. 또한 일설 로는 볕 이 찡찡 쬐는 고개라 볕고개라고 부르다가 벗고개라고 부르 거) 되었다는 설도 있다. 벗듬말 回 1300 洪城 郡 西部 面 於沙里 옛날 마 을 앞 바닷가에서 소금 을 구었다는 염전이 있었다 하여 벗듬 말이라고 부르개 되었다 한다. 베두실 回 fi07 牙 山 郡 盛 仁 面 上 星里 마 을 지형이 벗과 같 다 하여 베 두 실이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베짱굴 圈 印 8 公川 郡 影皮而壯岩里 옛날 난리가 났 을 때 이 굴 로 피난온 사람이 배 틀 을 놓 고 베 를 짜던 굴 이라 베짜던굴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베짱 굴 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1970 년 이 굴에서 구석기시대의 유 물 이 발견 되었다. 벼돈여울 回 印 9 公 州 郡 牛城 面魚 )|l 里 여 울 진 물 이 햇 빛 에 맑게 감 돌 고 청백하기로 소문난 인 물들 이 많이 모여사는 마 을 이라 벼든여 울 이라고 부 르 는 마 을 이다. 벽오소 回 610 舒 川郡 馬 山面 碧 梧里 물 가에 마 을 이 있으며 옛부터 봉황새가 마 을 벽오동나무에 앉아 마 을 의 운치 를 돋운다 하여 벽오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병락정 回 611 大 田市 西 區 葛馬 洞 마 을 에 약수가 있어서 옛날부터 많은 환자의 병 을 고쳐주는 우 물 이 . 있다 하여 병락정病落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병마산圈 612 燕岐郡 全 東 面 松谷里 고려 충 렬 왕忠烈王 17 년(1 291) 에 고려의 장수 한희유韓希兪, 김혼金 析 둥이 원나라 장수 설도간薛 OO 干과 함께 이 산에 진 을 쳤다가 침 략 해 오는 합단哈丹 군사 를 단숨에 무찔렀던 산이라 병마산兵 馬 山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병부 回 613 論 山郡 iI셨邑 西 倉 洞 조선시대에 소금장수들이 모여살며 조기 를 소금에 절여서 장사 룰 하여 부자가 된 마을로서 그뒤 이번에는 부자가 될 꿈을 안고 이 마을 에 정착한 사람들이 간수 장사 를 시작하여 병에다 간수 를 가득 채워
서 장사 를 시작하여 많은 부자가 나왔다 하여 병부라고 부르는 마을 이다. 보각골 回 614 扶餘郡 草 村面 新岩里 마 을 에 보검장갑형 貸 ~ I J 藏血形 의 명당이 있다 하여 보각골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보검동回 615 保寧郡 珠山 面 野龍里 마 을 지형이 장 갑형藏座形 , 출 갑형出血 形 이라고 하며 고려 때에도 군 사 들 이 주 둔 해 있었던 마 을 이라 보검동貸劍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보냇다리 回 616 論 山 郡 論 山 郡 it I 澤 i ifri l 옛날에 는 현계 縣 界가 되 는 다리로서 관원이나 사람 들 이 건너갈 때에 는 많은 사람 들 이 사 람을 보냈다 하는 다리라 하여 보냇다리라고 부 르게 되 었다 한다. 또한 보 i t k 에 다리 가 놓여 있으므로 보냇다리 라고 부 른 다는 설도 따 른 다. 보두막재 回 617 舒 川郡 馬西 面 南 田 里 옛날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 초까지 왜구들이 자주 침범해 오므로 우 리 군사 들 이 왜 구 를 무찌 르기 위 하여 보루 를 쌓았던 고개 라 보두막 재라고 부르는 고개다. 보리실 回 618 公川郡 維 鳩面 立石里 산속에 큰 둘 이 있고 그 들 에 마울이 있으므로 벌실이라고 부르다가 보리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보리 [麥]가 잘되는 들을 끼고 있는 마을 이기 때문에 붙여졌다 한다. 보리원 回 619 牙山郡 仁州面 牟元里 들 과 갯벌에 둑을 막고 그 안쪽에 마을이 생겼으므로 벌안이라고 부 르다가 변하여 보리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보목 回 620 公州郡 鷄 龍面 下大里 봇물의 목이 되는 곳에 마을이 있으므로 보목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보문산 땝 621 大田市 中區 大寺洞 옛날 보문대사普門大師가 산속 한적한 곳에 절을 세우면서 보문산普 門山이 라고 부르다가 그후 산에 보물이 묻혔다는 전설과 함께 보물 산貸物山, 보문산貸文山이 라고 불러오는 산이 다. 보물 回 622 公州郡正安面 甫勿里
옛날부터 소 를 많이 키우는 마을이다. 마 을 에 보狀가 있어서 깨끗한 소 를 이 보에서 키웠으므로 보물이라고도 부른다. 예로부터 백로가 찾아드는 느티나무가 있는 마 을로 여러가지 전설이 얽혀 있다. 보종들 回 623 論 山郡 豆磨面豆溪里 광산 김씨光山金氏의 대종가 大宗家가 이 안에 있어 그 종가 를 보호하 기 위하여 이 둘을 차지했으므로 보종保宗 들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보패고개 回 624 洪城郡 洪北面 中 溪里 옛날에 마음씨가 고왔으나 가난에 시달리던 한 나뭇꾼이 이 고개에 서 보 물을 발견하고 부자가 되었다 한다. 보물고개라고 부르다가 변 하여 보패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보평골回 625 瑞山郡 遠 北面 大基里 고려 때 복평향福平鄕이라는 향이 있었으므로 복평골이라고 부르다 가 변하여 보평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복골 回 626 錦山郡 珍 山面 烏 項里 가난한 사람도 이 마 을 에 와서 살게 되면 복을 누리게 된다 하여 복 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복구미 回 627 牙山郡 松岳面 坪村里 마 을 로 들 어서는 입구에 거북바위가 옹크리고 있으므로 복구미伏龜 尾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복너머 땐 628 舒川郡 馬山面 梨寺里 옛날 이곳을 지나던 한 도승이 이르기 를 묘 를 마을 뒷산에 잘 쓰면 복이 넘치고 묘자리 를 잘못 쓰면 불길 이 따 를 것이라 하였다는데 그 명당자리가 있는 마을이라 복너머라고 부른다 한다. 복다위 回 629 天原郡 並J II ffii 卜 多@里 마 을 지형이 복般처럼 생겼으므로 복다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복독갇 回 630 錦山郡 郡北面內釜里 마을에 재물이 파묻혀 있다 하여 복독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복 독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복병재 回 631 天原郡 成歡邑 大弘里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장수 양동산 梁登 山과 해생解生이 이곳에 복병하였다가 왜군을 크게 쳐부셨다 하여 복병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복와대 回 632 論山郡 魯城面 丙舍里 복호형(犬虎形의 명당 이 있어 복호재라 하던 것이 복와대伏姓袋가 되 었다 는 설과 유봉酉峯의 닭과 유봉 남쪽에 있는 매봉재의 매에 놀란 개구리가 엎드리고 있는 형국이라 복와대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본궁回 633 保寧郡 J II 北面 洛東里 옛날부터 전해오는 속 요俗 話 에 사궁팔포四宮八 i I i가 이 고장에 전해지 는데 지 형 이 금쟁 반과 같다 하여 반궁이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본궁 이라고 불려지는 마 을 이라 한다. 본말 回 634 大田市 西區 福守洞 이 부근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마 을 이라 본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 본음지 回 635 舒 川 郡 馬西面道三里 마 을 에 평사낙안형平沙落雅形의 명당이 있다 하여 본음지라고 부르 • 게 되었다 한다 . 봉강 回 636 燕波郡 西而 起龍里 옛날 참의參議에 오 른 홍연경洪延度의 세째 아 들 이 처음 정착한 마을 로 마 을 의 형국이 문경조령聞慶烏嶺의 봉이 날으는 산과 같다 하여 봉강鳳岡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한다. 봉곡 回 637 公) · Il 郡 獅頭 箕山里 마 을 뒷산에 부엉이가 살고 있어 봉곡鳳谷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봉근리 回 638 舒川郡 長項邑 玉山洞 마을에 보금 출 갑형貸金出回形의 명당이 있으며 무인武人이 나올 마을 이라 봉근리峯根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봉기 리 땐 639 那皮郡錦南面鳳起里 마을 뒷산에 비봉귀소형飛鳳歸j l 形의 명당이 있으므로 봉기리鳳起里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봉동 땐 640 瑞山郡 浮 石面 馬龍里 옛날 서씨徐氏 묘 를 옮길 때 봉鳳이 나와서 마 을 뒷산에 떨어졌다 하 여 봉동鳳洞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봉정 回 641 論 山郡 連山面 花 嶽 里
봉황이 춤을 추는 명당자리가 있다는 마 울 이다. 처음 이 마 을 에 정착 한 이봉무李鳳舞라는 학자가 정자 를 짓고 서생 을 가 르쳤는 데 과거에 급재하는 자가 많이 나오므로 널리 알려진 마 을 이 되이 갔었 다. 인재 가 많이 나오는 정자가 있다 하여 봉룡정鳳龍 2 꾼 이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봉명산回 642 公川 郡 利 仁面 發 揚里 산에서 눌 부엉이가 울고 있다 하여 봉명산鳳鳴山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봉소산 땝 643 唐i 1 t I}1; 順城 面 白石里 산이 아홉 마리 봉이 깃 들 은 형국이라 봉소산鳳県山이라고 부 른 다 한 다. 산 줄 기에 만대영화지지萬代 榮華 之地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봉지 回 644 洪城郡 製項面 五鳳里 예전에 연안 이씨延安李氏 한 사람이 이 마 을 에 정착하기 위해서 마 을에 들어서니 나무가지에 많은 새 들 이 앉아 있어 그 운치가 매우 아 름 다우므로 마을 이 름을 봉지鳳枝라고 부르도록 한 데서 붙 여진 지 명이라 한다. 부개촌 回 645 扶餘郡 玉山面 加 德 里 마을을 중심으로 넓고 비옥한 둘 이 있는 마을이라 부개촌 富 IJil H 이라 고 부른다. 부거실 回 646 뿐岐 郡 全義面 達田里 옛날 나라에서도 몇 째 안가는 부자 한 사람이 늙어서 산수 좋은 곳 을 찾아 다니다가 이곳을 선택하여 살다가 죽은 마을이라 하는데, 부 자富者 · 가 살던 마을이라 부거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부곡 回 647 唐津郡 高大面 項谷里 마을 지형이 오리처럽 생겼다 하여 부곡亮谷이라고 부른다. 오리골 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한다. 부금재 固 648 瑞山郡 地谷面 桃星里 옛날 막심한 가뭄으로 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에 떨고 있을 때 이곳에 사는 덕이 큰 한 사람이 이 고개에다 부금을 권하는 정자를 짓고 많 은 부금운 얻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하여 부금재라고 부르게 된 고개다. 부니티 回 649 洪城郡 結城面琴谷里
마을 뒤의 고개에서 분토가 나온다 하여 부니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부대동 땐 650 天安市 富袋洞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삼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이곳 왕자산에 진을 쳤을 때 이곳에 북을 달고 군사 를 훈련시켰다 하는데, 기름진 땅이라 부대동富袋洞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부도골 땐 651 公州郡反浦面 上莘里 옛날에는 구룡사九龍 寺 라는 큰 절 이 있었는데 절은 없어지고 부도浮 屠만 남아 있는 마 을 이라 부도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부동리 回 652 燕岐郡 西面 釜洞 里 옛날에 큰 그 릇 가마가 있어서 그 가마 를 묻었던 마을이라 부동리釜 洞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루니 回 653 꿉隔郡 却衡面 i ·간 대! 마을에 약수로 알려 진 옻샘 이 있는데 이 옻샘물을 마시 면 장수한다 하여 처음에는 불노정不老jt 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부루니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부리기 回 654 牙山郡 湯井面 鳴岩里 산 부리가 마 을에 쑥 들 어와 있으므로 부리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부사리 땐 655 大田市 中區 英沙 洞 마 을 지형이 꼭 모래사장에 부용꽃이 핀 것처럼 생겼다 하여 부사리 英沙里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부산 園 656 扶餘郡 襄岩面 津邊 里 백마강 가에 외따로 떠 있는 산이라부산浮山이라고 부른다. 이 산은 어느 해 ` 비가 쏟아져서 금강g n i'I이 법람하자, 금강의 상류쪽에서 이 곳으로 떠내려온 산이라고 한다. 부소문이고개 回 657 天原郡 北面 雲 龍里 백제의 시왕始王 온조溫祚가 위례성慰忍馮:올 세우고 이곳에 문을 세 웠다 하여 처음에는 부소문령扶蘇門닳1 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부소 문이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부소산回 658 扶餘郡 扶餘邑 雙北里 백제 말기의 진산이라 왕궁도 이 산에 있었으며 절경을 이부는 산이
다. 부여에 있는 진산이라 부소산扶蘇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부어쟁이 回 659 洪城郡結城面 橋項里 임진왜란 때 평택 임씨平澤林氏 가문의 선비인 임식林植이 이곳에 부 해정浮海亭이라는 정자 를 짓고 살았는데, 그래서 마 을을 부해정이라 고 부르다가 변하여 부어쟁이라고 부르게 된 마 을 이다. 부여머리回 忠)扶餘郡 襄岩面 扶餘頭里 옛날부터 부여, 홍산, 임천의 세 고을 경계가 되는 지점에 마을이 있 어서 이곳으로부터 부여로 들어가는 머리쪽이 되므로 부여머리扶餘 頭里라고 부르게 된 마을이다. 부장골 回 f,61 瑞山郡 地谷面 葬將里 풍수설에 따르면 무장이 나올 명당자리가 있논 마을이라 부장골이라 고 부르는 마을이다. 부창동 回由 2 洪城郡 銀河面 錦菊里 이 nH 끝에 창녕 조씨 昌寧 팹氏인 매계梅溪 조위曹偉의 후손 들 이 대를 이으며 사는 마을이라 부창동扶 昌 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부챙 이 回 鉛 3 天安市 鳳 鳴 派) 옛날에는 이 지방에 사는 장자 죽 부자富者의 창고가 있었다 하여 부 챙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부해평 回 fi64 靑 陽郡 靑 南面 仁良里 장마 때 홍수가 나면 금강 물이 밀려 들어오는 들이라 부해평浮海坪 이라고 부르는 들이다. 북계 回 665 論 山郡 連山面 松 亭 里 지형이 마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한다. 검은 닭이 많은 마 을이 라 먹 계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북계北鷄라고 부르게 된 마을이 다. 오골계烏骨 鷄 가 많은 마을이 다. 북넘기 回 666 唐津郡 牛江面 松山里 마을이 고을이었던 읍내 북쪽 너머에 자리해 있으므로 북넘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북두무니 回 由 扶餘郡 外山面 萬困里 옛날에 연못이 있었는데 용이 동자童子로 변하여 성주산 성주사에 가서 주지와 내기 를 하여 이기고서는 북을 메고 돌아오다가 많은 중 이 쫓아와 급한 대로 북을 멘 채 못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는데 북을
맨 체 들 어간 못 이라 북두무 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북배섭 맵 668 保 寧 郡 .r 산 1| 面 初成里 처음에는 아 름 다운 미인이 많이 나오던 섬이라 미인도라 불렀다. 그 러나 그 미인 들 은 성장해서는 시집가지 전에 죽는 사람이 많았으므 로 이 를 이상하게 여기던 도승 한 사람이 이 섭에 이르러서 하늘 을 향 하여 서서 〈 미인이 나면 불문에 주시오〉하고 외치니 하늘에서 〈북쪽 을 향하여 불 공 을 드려라〉하고 대답하므로 그때 도승이 북쪽을 향하 여 불공을 드린 후부터는 섬에서 미인으로 태어난 여인들이 죽지 않 게 되었다 하여 북 베 섬北拜島 이라고 부르는 섬이라 한다. 북새기 回 鉛 9 扶( ; tt I ; 苑岩面 內里 마 을 에 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북석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북 새기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분구덕 回 670 祖 山郡 盜 山邑 山城里 분토가 많이 나오 는 마을이라 분구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불근댕이 回 o/1 保 寧 郡熊 ) |l 面 L平 里 옛날에는 마을 옆에 연 못 이 있었고 그 연못 옆에 정자가 있어 그 정 자 를 부근당 富 近堂 이라 불렀는 데, 그 정자의 이 름을 따서 부근당이 라 부르다가 변하여 불근 댕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 불대산 回 672 天安市 九星洞 일제 때 비행기 길을 알려주는 불 대가 세워져 있었으므로 불대산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불무산回 673 公州郡 酒JI |面 大t떄里 산의 모양이 마치 부처가 춤을 추는 것 같이 생겼다 하여 불 무산佛舞 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불이동 回 o/4 錦山郡 富 利面 不 二 里 고려시대의 성리학자性理學者 길재吉再가 자란 마을이다. 불사이군 不事二君의 높은 뜻을 따서 그가 자란 마 을을 불 이동不二洞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불란개 回 675 瑠山郡 安眠邑 倉基里 조선시대의 조세租稅 창고가 있었는데 큰 불이 나서 그 창고가 불 타 버렀으므로 그 창고가 있었던 개 부근에 있는 마을을 불 탄개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붐밖이 回 fil6 舒川郡 韓山面 城外里 성문 축 북문 밖에 마을이 있으므로 북문밖이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붓뚜 7 回 町 7 瑞山郡 安眠邑 倉基里 옛날에 소금 을 굽는 화염소火鹽所가 있어서 보i伏 를 쌓고 해수海水롤 안으로 끌어들이는 보뚝 부근에 마 을 이 있으므로 보뚝이라고 부르 던 마 을 인데 변하여 붓뚜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비계실回 fil 8 公川郡 儀堂面 月谷里 세종世宗, 단종端宗 때의 충신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 皇 甫仁과 이어 정분鄭芬 둥 세 정승이 살았던 마 을 이다. 기 름 진 땅이라 하여 비계실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비끼내 回 679 ) ’陽郡 大止유面 柚田里 마을 앞의 냇물이 마 을을 비껴서 흐르므로 비끼내라고 부른다. 고려 때 횡천소橫 /II 所가 있던 마 을 이다. 비대 回 680 舒川郡 板橋面 馬堡里 지형이 떠 있는 것 같은 영역 을 이루었다 하여 비대飛堡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비들목재 回 681 錦山郡 郡北面 杜斗里 고개의 지형이 비둘기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비들목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비랭이 回 682 扶餘郡 林)||面 飛亭里 마을이 벼랑 곁에 있으며 새가 특 히 많이 숨어드는 마을이라 비랭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비렁잇들圈 683 天原郡 聖居邑 쭈里 들에 모래가 많아서 흉작이 잦으므로 이 들에 있는 논 한 마지기와 찰밥 한 그릇과 맞바꾸기까지 하였다는 들이므로 비렁잇둘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비롱재 回 684 훤皮郡 全義面 西 亭里 산의 봉우리가 뾰죽해서 처음에는 뾰룡재라고 불렀으며 비룡상천형 飛龍上天形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오는 산이다. 변해서 비롱재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비룡소 回 685 쩐皮郡 錦南面 龍泣里
마을에 못이 있는데 옛날에 이 못에서 백 년 동안 승천을 기다리던 이무기가 마침내 용이 되어 하 늘로 승천하였다 하여 비룡소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비봉골 回 686 靑賜郡定山面 松訪里 마을에 비봉포란형飛 屈抱卵形 의 명당이 있다 하여 비봉골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비애미 回 687 錦山郡 福 L 검面 白岩里 마 을 주위의 지형이 뱀처럽 생겼다 하여 배암이라고 부르다가 변하 여 비애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비 얏둘 回 688 保 寧 郡 ?i. J 1 f面 野坦里 마을 앞산이 춘안북귀형春雅北歸形 이고 마을은 평사낙안平沙落雅으 로 기러기가 내리 는 형국이라 비아둘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비얏들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비조재 땐 689 天原郡 修身面 海꾸里 마 을에 비좁은 재가 비봉귀소형기t li 妙굼菓形의 형국이라 비조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비촌말回 600 瑞山郡 海美面 休岩里 옛날에 사회계 급 이 낮은 백정白丁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라 비촌말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비학산 回 691 켄泊支 RI i g{i前面 大平里 산의 모양이 학이 나는 형국이라 비학산이라고 부른다. 이 산에는 천 송이의 꽃과 천 필의 비단이 깔려 있는 명당지가 있다고 전한다. 비홍산 回 692 扶餘郡 朋山面 햄良里 산의 모양이 날으는 기러기처럼 생겼으며 산에는 비홍합로飛鴻含蘆 의 명당이 있으므로 비홍산飛應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빌여울 回 693 錦山郡 秋富面 備禮里 마을이 벼랑 아래의 여울 근처에 있으므로 벼여울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빌여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빗가리 回 694 天原郡 笠場面獨井里 마을 앞에 큰 들이 있어서 벼가 잘되므로 벗가리 를 쌓아 놓았던 마을 이라 벗가래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빗가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빙곳재 回 磁 5 꿉陽郡 靑陽邑 邑內里
옛날에 얼음을 저장해 두는 빙고氷 庫 가 부근에 있었으므로 빙곳재라 고 부르는 마 울 이다. 빙도 園 696 保 寧 郡 )II 北面 洛 洞里 섬에서 아 름 다운 미인이 많이 나온다 하여 처음에는 미인도 美 人島라 고 부르다가 변하여 빙도라고 부르게 된 섬이라 한다. 빛고개 回 697 舒 川郡 밉t山面 光岩里 옛날에 방랑길에 나섰던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이곳에 이르러 지형을 살핀 죽 빛이 잘 쬐이고 땅속에 빛이 서린 땅인 이곳 을 보고 놀라 이곳을 빛고개, 광현光峴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한다. 고려시대 말기 삼은三隱 중의 한사람인 목은牧 隱 이색李稿의 부모 묘가 있는 마 을 이 다.
【시 사껏동트기 園 698 洪城郡金馬面鳳樓里 골짜기 가 삿갓 모양이 고 동쪽으로 터 져 있어서 삿갓동트기 라고 부르 다가 변하여 사캇동트기라고 부르는 골짜기다. 구전에 따르면 후삼 국시대에 후백제 군사들이 복병하고 있다가 고려군을 크게 무찌른 골짜기라 한다. 사고개 回 磁 9 洪城郡 洪東面 新基里 마을에서 사방으로 가는 고개 가 있는 마을이라 사고개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사고시 回 700 天原郡 北面 沙面里 조선시대에 사기소가 있었던 마을이라 사기소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사고시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사곡 回 701 論山郡 上月面 新忠里 옛날에는 뱀이 많았던 마을이라 사곡蛇谷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사공뒤 回 702 扶餘郡 林川面飛 亭 里 전에 배질을 찰하는 뱃사공이 살던 마을이라 사공뒤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사나물 回 703 唐津郡 新平面 道城里 마을 뒷산에 좋은 우물이 있으므로 산우물이 라고 부르던 마을인데
변하여 사나 물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사당골 땐 704 扶 餘 郡 fiiiiii 金 )II 里 마 을 에 사당이 있었으므로 사당 골 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사덕골回 705 公 州郡 長岐 面 錦岩 里 옛날 국난이 있었 을 때 네 사람의 선비가 국난 을 피하여 이 곳 에서 무 사히 피난 을 하였다 하여 덕 을 입은 마 을 이란 뜻 에서 사덕 골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사들고지 回 7~ 瑞 山郡 泰 安 邑 松巖里 선비 들 이 낙향하여 지내던 마 을 로 곶에 마 울 이 있으 므로 사 곶 지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사 들 고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사라니 回 707 論 山郡 陽 村面 中山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 사이에 자리한 마 을 이라 산안이라고 부 르다가 변하여 사라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사랑말 回 700 論 山郡 蓮 山面 1 f i욥 ]里 마 을 뒷산에 묘 를 쓸 때에 그 묘터에서 학이 날 아갔다 하여 학낙말아 라고 부 르다가 변하여 사랑말이 라고 부 르게 되 었다 한다. 싸래기내 回 709 洪 城 郡 洪~t而 內 德 里 싸리나무가 많은 냇물이 마을 을 적시고 호르므로 싸래기내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사러 리 回 710 大德 郡 東 面 新 下里 마 을 뒷산에 옛날에는 이리가 많아서 사람 들 이 많은 불 편 을 겪었다. 이리가 많은 마 을 이라 산이리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산언리, 이어 사 러리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사려울 回 711 燕岐 郡錦 it i面 瓜 起里 마 을 앞으로 여울이 호르므로 새여울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사려울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사룡골 回 712 公川郡 牛 城 面 鳳 峴 里 마 을 에 당집이 있었는데 당집 안 벽에 사룡四 l iil을 그린 그립이 있었 으므로 사룡골이 라고 불 러오던 마을이다. 사루개 回 713 天 原 郡 東面 杏 嚴 里 마 을 에 큰 살구나무와 바위 가 많으므로 사 루 개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사루지 回 714 洪城郡 I .3 山 面 基 山 里 마 을 앞 냇 물 에 모래가 많으므로 사천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사루 지 라 고 부르 게 되 었다 한다 . 싸르메 §) 715 舒 川 郡舒 JI! 邑 台月里 쌀 이 많 이 나오 는 마을 이 라 쌀 미 라고 부 르다가 변하여 싸르매 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 다 . 사리울 回 716 燈 山 郡 吾 可面 新院里 마 을 앞에 물살 이 빠 른 여 울 이 있으므로 사리 울 이 라고 부 르게 되 었 다 한 다. 싸리티 回 717 김 ; p. lJ; tt ifj賜面 溫直里 고 개에 싸리나무가 무성하게 있다 하여 싸리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사마리 땐 718 大 田市 西區 挑馬洞 조선 시 대에 사마 시司馬試 에 합 격 한 사람이 사는 마 을 이라 사마리라 고 부르개 되었다 한다. 사마산 園 719 公川 郡 牛城而 龍鳳里 산 모양이 상여와 같 다 하여 사마산이라고 부른다. 일설로는 옛날 사 마장 군司馬將軍 이 놀 았다 하여 사마산 司馬 山이 라고 부른다 한다. 사봉 回 7'2!J 公州郡 反!l l i面 溫泉里 산의 꼭 대기가 뱀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사봉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사선지 回 721 瑞 山 郡 古 南 面 長谷 里 옛 날 에 하 늘 에서 네 신선 神 仙이 내려와 바둑 을 두고는 하 늘 로 올 라 가곤 하였다 하여 사선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사성골 回 722 洪城郡 洪城邑 新 城里 뱀과 같은 산이 마 을을 두르고 있다 하여 사성골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사송재 回 723 論 山郡可也 谷 面 限 村里 조선 단종 端 宗 때 세조世祖의 동극 을 반대하던 사육신死六臣의 한사 람인 성삼문成三 IL1 이 죽 입 을 당하고 그의 시체 를 한양에서 멀리 버리 라하므로 한 망난이가 그 시체 를 지고 남쪽으로 가다가 이곳에서 잠 시 쉬게 되었는데, 쉰 다음 다시 시체 를 지고 일어서려 하는데 그 집
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으므로 이곳에 묘 를 쓰게 되었다 한다. 성삼문 成띄버의 대쪽 같은 충의를 사모하여 이곳 사람 들은 그 무덤이 있는 곳을 사송재[四松時]라고 부르고 있다 한다. 또한 성삼문재[r戊 三 問時] 라고도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사송정 81 724 公川市 月 松洞 마 을 이 있는 금강가에 큰 소나무 정자가 네 그 루 서 있으므로 사송정 이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사수대 回 725 검it島郡 大唄面 [q 111 里 마 을 사방으로 물 이 흐르므로 사수대四水 袋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사수막回 726 扶餘郡 良化面 碧龍里 마 을 부근에 모래가 많으며 마 을 뒤에는 토성이 있 는 데, 백제 때에 그 토성 을 지키는 막이 마 을 에 있었다 하여 사수막이라 고 부르 게 되 었다 한다. 사양티 回 刀 7 荷賜郡 ifjt凡 而 溫直里 백제 때에 의자왕義 慈王 이 사양티 고개 너머에 있 는 금정金井의 물을 꼭꼭 길 어다가 먹었는데 금 정 사람 들 이 물을 길어가지고 사비성 궁중 에 바치고 돌 아 을 때는 꼭꼭 이 고개에 이 르 러 해가 기우 는 것을 보 았다 하여 사양티 우j協時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사우말 回 728 公州 郡 儀堂而 台山里 전에 조선 정종 定宗 의 열째 아들인 덕천군 德泉君 의 사당이 있었던 마 을 이라 사우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사음말 땐 729 唐津 郡 高大面 瑟項里 마 을 뒤 산마 루 에 암자가 있었으므로 사암 舍 庵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사음말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사자봉 回 乃〕 扶 餘郡 恩 山面 新大里 산에 사자가 하 늘을 우러러보는 사자앙천형獅子仰天形의 명당이 있 다 하여 사자봉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사제 回 731 隨 山郡 !點바通 面 後寺里 전에는 마 을 뒤 산 골 이 깊어서 홍수가 나면 전답을 휩쓸게 되므로 모 래로 보 i伏 륜 쌓았던 마을이라 사제砂堤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삭대을 回 732. 公·川郡 利仁面 盤松里 마을에서 삿대(화살대)가 많이 나온다 하여 삿대을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삭대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산고래 回 733 保 寧 郡 ,i1 i l ji面 松鶴里 마 을의 돌 산에 서 사람의 뼈 가 상했을 때 사용하는 산 골 이 라고 부르 는 약재가 나온다 하여 산 골 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산고래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산디골 回 734 1 \ 州郡 消 l|| 而 光明里 마 을 이 산 둥 성이에 자리해 있으므로 산둥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산디 골 이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산방이 回 735 公州 郡 正安面 山 城里 높은 산이 마 을을 둘 러싸고 있어서 마치 방과 같은 마 을 이라 산방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산아실 回 736 瑞 山郡 !'Ji遠iifi 法 山里 산 아래에 마 을 이 있으므로 산안실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산아실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살꼬지 땐 737 瑞 山郡 梨많面 堂 山里 마 울에 살촉처럼 생긴 곶 이 있으므로 살꼬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살목골 回 738 ~ 山郡 光時面 大 里 산으로 둘 러싸인 오목한 지역에 자리한 마 을로 , 마울에서 화살을 만 드는 화살나무가 많았다 하여 살목골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쌀씩은여 回 739 瑞山郡 安眼邑 新野里 조선시대에 조곡을 실어나르던 배가 마을 앞 암초에 부딪쳐 파선되 면서 쌀이 많이 쏟아져서 썩은 바위 근처에 있는 마을아라 쌀씩은여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살포장이고개 回 740 洪城郡 알項面 꼬谷里 옛날에 이 고개에서 죄인이나 가축을 죽였다 하여 살포장이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삼가동 回 741 錦山郡 珍 山面 三佳里 이 마을을 기점으로 경치가 아 름 다운 세 마을로 들 어가는 세 갈래 길 이 있다 하여 삼가동三佳洞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삼계 回 742 大田市 西區 ,魚t 8. i 何 옛날 조정의 당파싸움에 휩쓸리지 않고 각각 다 른 스승 을 모신 세 선
비가 대쪽 같은 정성으로 오순도순 잘 지낸 마을이라 삼계三溪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삼곶 回 743 唐津郡 石門面 三花里 마을이 세 군데의 곶串으로 되어 있으므로 삼곶三串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한다. 삼도回 744 瑞山郡 海 美 面 石浦里 밀물이 들어오면 세 섬으로 되는 마을이라 삼도 三島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삼도암 @II 745 天原郡聖居邑天典里 마을 길 앞에 커다란 바위가 길게 가로 누워 있는데, 이 바위에 는 세 줄기의 냇물이 홀러와서 각기 이 바위 를 적시게 되어 있다. 그 냇 높 들이 이 바위 를 스칠 때 위쪽으로 얼음이 많이 얼면 다음 해에는 경 기도에 풍년이 들고, 가운데가 많이 얼면 충청도가, 아래쪽이 많이 얼면 경상도가 풍년이 든다고 점친다 해서 이 바위 륜 삼도암 三道 岩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삼맛꿀 回 746 燕岐郡 錦 南 面 永袋里 삼발이 많으므로 삼밭골이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삼맛골이 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삼선댕 이 回 747 唐津郡 汚JII面 城下里 옛날부터 마을에 삼승당三僧堂이 있었으므로 삼승당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삼선댕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삼성 回 748 天原郡 並川面 鳳項里 옛날에 효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부모가 돌아가시자 하루에 세 번씩 묘를 찾아가 성묘 를 하였다 하여 한때 효자의 마을이라 불렀었 다. 효십이 지극한 마을이라 삼성三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삼성벌 땐 749 唐津郡 貞美面 德三里 마을에 삼상팔판三相八判이 나올 명당이 있다 하여 삼성벌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삼승이 땐 750 禮山郡 德山面 大特里 마을이 세 중이 염불하는 형국 같다는 삼승산三僧山 아래에 자리해 있으므로 삼숭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삽시 랑당굴 園 751 保寧郡 周浦面 保寧里
고개 아래 북쪽의 골짜기에 옛날부터 삼신을 모시는 신당이 있었으 므로 삼신당당굴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삼시랑당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삼정골 61 752 *德 郡 新范津 邑 三 政里 마 을 이 처음 생겼 을 때는 마 울 사람들이 산전山田올 일구며 산다 해 서 산전곡山田 谷 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삼정골三政谷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삼정승바위 回 753 錦 山 郡 南 一面 草峴 里 마 을 한 민가에 바위가 셋 나란히 서 있는데 이 집에서는 삼정승이 나 올 것 이라고 어 느 도승이 말하였으므로 그 민가에 있는 이 바위를 삼정승바위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 삼청동 回 754 公 州 郡新豊 面 淸興里 골짜기에 있는 마 을 이라 산과 그 아래에 펼쳐지는 들과 물이 맑고 깨 끗하여 삼청동 三淸 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삼태 回 755 天 原郡 豊歲 面 三臺 里 고려시대 정승 김성안金成安, 이숭인李 崇 仁, 김윤장金允藏 둥 세 정 승 을 낸 마을이라 삼태三太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삼한 回 756 天 原 郡 東 面 松 蓮 里 조선 명종明宗 때의 학자 취부醉夫 윤결尹潔이 을사사화乙已士禍에 화 를 당하고 그 아우 윤혼尹混이 형 의 죽음에 슬픔 을 견디지 못하고 이 곳에 내 려 와 살면서 삼안三安이 라 붙여 두문불출의 생활에 묻혀 있었다. 그 후 우암尤庵 송시열宋時낀{이 그의 거 룩 한 넋올 추모하기 위하여 이 곳을 찾았다가 감격 한 나머지 삼한三閑, 운한 翼 閑, 인한人 閑으로 고쳐 부르게 하여 삼한三 E1 으로 부르게 된 마을이다. 삼호 回 乃 7 唐津 郡 合 德 邑 大合 德里 마을에 합덕연지의 물과 백미저수지, 삽교천 둥 세 곳에서 홀러오는 물이 있으므로 그 마을을 삼호三湖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삼죽골 回 758 扶餘郡 外山面 盤授里 마을에 약수로 통하는 샘과 절이 있어서 샘절골이라고 부르다가 변 하여 삼죽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삽다리 回 759 禮山郡 括岳邑 括括里 옛날에는 강을 건너다니는 다리 를 싶으로 놓았으므로 싶다리라고 부
르다가 변하여 삽다리 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삽시도園 7f,()保 平 郡 蒸J I| 面 括矢島里 섬 모양이 마치 화살 을 꽃은 것처럽 생겼다 하여 삽시 도揮矢島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쌍령고개 回 761 天原 郡 廣德 面 鮮刻 里 고개가 험준하고 쌍으로 되어 있다 하여 쌍령고개라고 부 른 다 . 조선 명종明 宗 때부터 선조 宜祖 때까지 충청도 홍길동 洪吉童 으로 불 리우던 의적 義 賊 안수安 휴 가 도적 질 하던 본고장으로 통했 던 고개다. 상비 回 762 扶餘郡 外山面 芝 {UI 里 마 을 에 비안낙지형飛雅 落 地形의 명당이 있다는 마 을 이다. 기러기가 나는 지형이라 상비上 飛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상사봉 回 763 保 際 郡 蒸 JI|面 防距 里 산이 뾰죽하고 우아한 모양 을 하고 있으며 남근 男 根의 산이 라고도 부른다. 앞에 보이는 미인도 美 人 島 의 미인 을 연모하는 산이라 상사 봉相思 峰 이라고 부르는데 미인도의 미인이 죽 는 날에 는 산이 운다고 전해진다. 상소전 回 764 大 德 郡 山內面 上所里 전에는 하소下所라고 불 렀는데 이곳에는 양반 들 이 많이 살았으며 윗 마을인 상소上所에는 서 민 들 이 많이 살았었다. 그 후 하소에 은진 송 씨恩津宋氏 둥이 많이 살게 됨에 따라 한양에 가까운 이곳 을 상소上 所라 고치고 옛날 상소上所 룰 하소下所라고 고쳐 버렸다. 그리고 양 반들이 많이 사는 상소 륜 상소전上所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쌍오도@] 765 保 寧 郡 蒸J II 面 蘇城里 까마귀 를 닮은 섬 이 항구에 두 개 떠 있다 하여 쌍오도 雙烏島 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상지 回 766 洪城郡 廣 )II 邑 湘井里 고려 때 중국으로 건너가 벼슬을 하다가 돌 아온 선비 한 사람이 나라 에 돌아와 벼슬을 하려다 조정의 어지러움을 보고는 벼슬길에 오 를 것 을 단념하고 이곳에 살게 되었는데 그가 사는 마 을 이 마치 중국의 상주와 비슷하므로 상지湘地라고 부르고 살게 되었다 한다. 상무봉 땝 7fil 牙山郡 鹽 時 面江 淸 里 산 꼭대기가 상 투 처럽 생겼다 하여 상투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상풍 回 768 洪城郡 長谷 面 新豊里 마을의 땅이 기 름 져서 매년 풍년이 들므로 상풍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쌍효동 回 769 瑞山郡 仁旨面 成里 옛날에는 마 을 에 이씨 李氏 로 불 리우는 부자 효자가 살았었다. 그 효 자의 효심은 누구도 따 를 수 없었으므로 이웃 마을 사람들이 그들 효 자 부자가 사는 마 을을 쌍효동 雙孝洞 이라고 부르고 길이 빛나게 하였 다. 새낭굴 回 770 洪城郡 廣 J I1 邑 廣川里 옛날에는 사랑채가 딸린 집 한 채가 있었던 한적한 마 을 이었으므로 사랑골이라고 불렀는 데 변해서 새낭굴이라고 부르게 된 마을이다 . 새미레 回 771 大德郡 炭洞面案山里 세상에 인심 좋 기로는 새미레라는 속담이 있듯이 산 좋고 물 좋고 인 심이 좋은 마 을 이라 세미레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새미레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새 뻣뚝 回 772 瑞山郡 梨많而 官里 새로 뻘을 막아서 뚝을 쌓았는데 그 뚝 안에 마을이 있으므로 새 뻣뚝 이 라고 부르는 마울이 다. 새야回 73 舒川郡 板梧面 典林里 산과 산 사이에 마 울 이 있으므로 새야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새 약골 回 774 唐津 郡 松 嶽 面 佳訪里 옛날부터 학 鶴 이 많이 날아와 살았다 하여 새학골이라고 부르던 마 을인데 변하여 새약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새울 땐 775 靑陽郡 定山面 南泉里 높은 산과 들로 이어지는 마을로 많은 새들이 살고 있으며 새소리 들 으며 아침 이 오고 새소리 들으며 밤을 보낸다 하여 새울 또는 조곡鳥 谷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새창머 리 回 776 唐津郡 新平面 草袋 里 옛날에 사창社倉이 있었던 마을로 그 머리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새 새푸르창기머 回리 라m고 瑞부山르郡게 商 北되面었 다草般 한里다.
새초가 무성한 들을 끼고 마을이 있으므로 새푸르기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생교골 回 778 保寧郡藍浦面 玉東里 향교가 있으므로 향교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생교골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생송 回 779 燕岐郡 全義面新興里 마을에 오래된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노송老松이지만 항상 생 긋한 나뭇잎이 핀다 하여 생송生松이라고 불러오는 마 을 이다. 생적골回 780 扶餘郡 湘 山面 校院里 마 을 에 향교가 있으므로 행교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생적골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생천 回 781 照皮郡 西面 登流里 임진왜란 때 이곳에 약 천여 명의 피난민이 모였으나 한 , 사람도 피해 를 입지 않고 무사하였다 하여 생천生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서강回 782 牙山郡 仁)사面 貢稅里 옛날에 이 부근에는 공세창이 있어서 많은 배가 출 입하였으며 강물 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그 공세창 서쪽으로 강가에 마 을 이 생김에 따라 서강西江이라고 불렀었다. 서개 정 回 783 唐津郡 高大面眞館里 옛날에는 좋은 우물이 동서로 있었는데 서쪽에 있는 좋은 우 물 근처 에 마을이 생김에 따라 그 마 을을 서개정西蓋井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서근밤 回 784 天原郡 並川面 鳳項里 밤이 잘되는 마 을 로 옛날에 밤 하나가 어찌나 큰지 서근이 나갔다 하 여 서근밤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서두물回 785 唐津郡 汚川面 自開里 마울 서쪽으로 좋은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 서우물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서두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서리실回 786 天原郡 廣德面 芝長里 마을에 낮은 산이 서리어 있으므로 서리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서립산回 787 天原郡 朗面 松蓮里
옛날에 서립장군徐林將軍이 옹거하였던 마 을 이라 서림산徐林山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서빠랭 이 回 788 扶餘郡 石城面 縣內里 마을 주변에 싶이 많이 있었으므로 서빠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서송정 멘 789 唐津郡 高大面傾館里 마을 서쪽 솔밭 속에 청룡샘이라고 부르는 큰 우물이 있는데 청룡이 우물에서 승천하 곤 하여 마 을 에서 위하는 샘이다. 신성한 샘이 있는 마을이 라 서송정西松 亭 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서우내 回 乃 3 扶餘郡 內 山面 袁 特里 마을 뒤로는 구 름 이 서리는 산이 있고 마을 앞으로 냇물이 푸른 물결 을 수놓는 그 한가운데에 마을이 있으므로 서우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서우물 回 791 唐津郡 新平面 巨山里 마을 지형이 마치 쥐가 물을 먹는 형국이라 서우물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서주골 回 792 公川郡 鷄龍 面 錦帶里 서씨徐氏가 집성부락을 이룩하였다 하여 서주골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서창골 回 793 天原郡 城南面 大井里 조선 세종世宗 27 년(1 444) 에 이곳에 있는 초정取井에 거동하기 위하여 창고 를 지었다가 세종이 민페가 심하다 하여 거동이 중지됨에 따라 창고 를 짓다 말았는대, 초정 서쪽으로 창고 를 짓던 골짜기라 서창골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석문봉 回 794 瑞山郡 雲 山面 院坪里 가야산 북쪽 골짜기에 있는 산을 석문봉石門峯이라고 부른다. 산에 석문이 서 있기 때문인데 옛날에 한 늙은 할미가 남매 를 데리고 사는 데 두 사람이 힘 자랑을 하게 되었다. 오라비는 굽이 한 자나 되는 쇠나막신을 신고 한양에 갔다 오기로 하고 누이는 이 산에 돌문을 달 기로 하고 내기 를 하는데 막상 내기 를 하자 아들보다 먼저 딸이 돌문 을 달게 되 었으므로 딸에게 과실을 먹게 하는 동안에 아들이 돌아와 약속대로 딸은 돌문을 달지 못하고 죽었다 하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석탄 땐 范 5 扶餘郡 扶餘邑格石里 큰 돌이 금강에 잇대어 있어서 여울이 되는데 이 여울 을 석탄石灘어 라고 부른다. 또한 돌 여울이라고도 부른다. 고려 31 대 공민왕恭愍~王 때 정언正 言 이존오李存吾가 글을 올려 신돈辛 0 향의 잘못을 평론하다 가 유배되어 귀양살이 룰 한 후 이 석탄 여울 위에 정자 를 짓고 살았 다 한다. 선더기 回 泊 5 公州郡 酒 Ill 面 松訪里 마을에 선인포덕형仙人布 德形의 명당자리가 있으므로 선더기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선돌 回 797 錦山郡 南二面 大隔里 옛날에는 마을에 선 돌 이 서 있었으므로 선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선머 리 61 798 唐津郡 松山面明山里 마을이 서원의 머리쪽에 있었으므로 서원머리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선머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선무니 땐 799 타島 市 豊基洞 옛날에는 마 을 앞으로 성문이 있었으므로 성문이라고 부르다가 변하 여 선무니 라고 부르는 마을이 다. 선식이자리回 800 舒川郡馬西面 道三里 조선시대에 배 를 만드는 선소船所가 있었던 자리다. 당시 선식이라 는 선공船工이 있었다 하는데 그가 배 를 잘 만 들 었다 하며 이 자리는 그가 배 를 만 들 던 자리라 선식이자리라고 부른다 한다. 선유동 回 OO1 公州郡 鷄龍面 上城里 마을이 아늑하여 옛날부터 신선들이 놀던 마을이라 선유동仙遊洞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선촌回 802 保寧郡 蒸 II| 面 元山島里 섭에 있는 마을로서 배가 출입하는 마을이라 선촌般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선팽 이 回 003 舒川郡 板橘面 萬德里 옛날에 신선이 바람을 타고 내려와 마을터 를 잡아 주었다 하여 선풍 仙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선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선학골 回 804 保寧郡 川北面 沙湖里
마을의 지형이 마치 신선이 학을 타고 노는 형국이라 선학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설곡 回 印 5 瑞山郡 梨 젊面 內里 마을 뒤에 있는 산이 높아서 겨울에 눈이 쌓이면 봄철이 되기까지 눈 이 녹지 않는다 하여 그 아래 마을을 설곡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설렁바위 回 800 天 原郡 東 面 長松 里 냇가가 패어 소沼가 되어 있는 곳에 서 있는 바위다. 이 바위에 오르 면 마음이 늘 설렁설렁하다 하여 설렁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또한 일설로는 『대 록 지 大麗 誌』에 따르면 동쪽에서 한 선랑仙郞이 이 바 위 를 타고 이곳까지 와서는 버리고 갔다고도 한다. 설매 回 807 論 山郡恩 津 面防 築 里 마 을 에 매화낙지형梅花 落 地形의 명당이 있으므로 설매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설목멘 800 大 田市 西區 新城洞 마을이 처음 생길 때에 설목이라는 사람이 개간하고 집을 지었다 하 여 설목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섭돌이들 圈 809 ~ 山郡 古 德 面 四里 들 에 선들이 서 있으므로 선 돌 이들이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섬들이들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섭박골 回 810 公州市 武 陵 洞 마을에 큰 선바위가 있는데 이 선바위는 옛날에 어느 여장부가 이곳 에 세우고 그 바위 를 위했다. 그래서 선바위골이라고 부르다 7}- 변하 여 섭박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섭골 回 811 ~ 皮郡 鳥 致院邑 新安洞 숲이 우거졌던 지역에 마을이 생기면서 섭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옛날 숯을 굽던 자리에 마을이 생김에 따라 숯골이라고 부르다 가 변하여 섭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섭원回 812 唐津郡 牛江面 成元里 마을이 생길 때 여러 사람이 협력하여 뚝[JI]을쌓고 마을을이룩하였 다 하여 협언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섭원이라고 마을 이름이 붙여 졌다고 한다. 섯바랭 이 回 813 保 후 郡 蒸JI I 面 永保里
마을 주변에 돌이 많으므로 석 바탱 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섯바탱 이 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성거산園 814 天原郡 聖居邑 산꼭대기에 오색 구름이 엉키어 있으므로 신령 神盤 이 사는 산이라 하여 성거산聖居山이라고 부른다 . 조선시대 태조太 祖 와 세종世宗도 신령이 머무는 곳이라 하여 제사 를 지냈었다. 성겁들回 815 論 山郡 恩 津 面 城德 里 큰 들인데 장마가 지면 물 이 범람하여 전답 을 메우므로 이 곳 사람들 이 뚝 을 성과 같이 쌓고는 들 을 보호하였다 하여 성 겁들 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성계동回 816 公州郡 維鳩 面 萬 )1| 里 마을 양쪽으로 내가 흐르는데 그 물이 성수처럽 깨끗하다 하여 성계 동聖溪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성구미 回 817 唐津 郡 松山面 佳 谷里 마 을 지형이 마치 성처럽 굽이 룰 이 루 었다 하여 성굽이라고 부르다 가 변하여 성구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성동 回 818 論 山郡 魯 城 面 蓋特 里 마울 뒷산에 절이 있어서 중 들 이 많이 출 입하였으므로 승동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성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성안回 819 天原郡 廣 德 面 算 刻里 사방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안에 작은 들이 열려 있으므로 조선 명종 明宗 때 의적 義 賊 안수安 홉 가 이곳에 성을 쌓고 옹거하면서 성안이라 고 불 렀다. 안수는 그후 그 롤 토벌하는 유의신柳 義 臣에게 잡혀 죽게 되는데, 안수가 쌓은 이곳을 안수성安 困 城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성양回 820 天原郡城南面 花 城 里 산의 남쪽 성안에 자리한 마을로서 양지바른 곳이라하여 성양城 陽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성재 回 821 扶餘郡 康 岩面 新城里 산 모양이 시루처럽 생겼다 하여 중산성甄山城이라고도 부른다. 산 위에 돌 로 쌓은 성이 있는데 조선 선조宣祖 때 홍산핸山에서 반란 을 일으킨 이몽학李夢節이 이곳에서 몰래 군사 률 양성할 때 성을 쌓았다
하여 성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성전回 822 싼岐郡 南面 眞儀里 조선 철종 때의 석학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晴가 꿈을 꾼죽 갑자기 갈 매기때가 자기집 앞 들에 있는 갈대밭에 내려 앉으므로 이룰 계기로 이 마을 을 성 전星田이 라고 부르게 하였다 한다. 성지물땐 823 牙山郡 hll 掌面 大與里 마을에 큰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에서 목욕을 하면 신병이 고쳐진다 하여 이 우물이 있는 마을을 성지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싶문이 回 824 牙山郡 仙 掌面 莊門里 마 을 주변에 풀싶 이 무성하여 이곳에 마을이 생기므로써 문을 여는 것 같다 하여 싶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싶포 땐 825 論 山郡 恩津面城德里 옛날에는 싶나무가 무성하였던 마을이라 싶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세거름 回 826 扶餘 R[ 世道面 長大里 마을이 세 고울로 가는 분기접에 위치해 있으므로 삼거리라고 부르 다가 변하여 세거 름 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세결이 回 827 r.fl 山郡 古德面 九萬里 논이 걸고 곡식이 잘 되어서 조선시대에 다른 논의 수확에 비하여 세 곱의 조세곡을 낸 논이라 세결이라고 부르는 논이다. 세계다랭이논回 828 洪城郡 洪城邑 古岩里 조선시대에 이 부근의 관아에서 표준을 잡던 논으로서 이 논에 모를 심게 되면 풍년이 틀 림없으므로 조세비율이 오르고이논에모 를 못심 게 되면 흉년이 들어서 조세비율이 내린다 하여 세계世系다랭이논 이라고 불렀다. 세나리 回 829 牙山郡 排芳面世出里 마을에 세 출 장상지지世出將相之地라는 명당이 있다 하여 세출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세나리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색길이 回 &刃 錦山郡秋富面馬田里 마을에 돌이 많아서 마을 길도 돌길이었으므로 석길이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섹길이 라고 부른다고 한다• 소곡 땐 831 論山郡魯城面 松堂里
옛 날 에는 마 을 에 아흔아홉 칸의 집이 있어 작은 나라 같 았다 하여 소국 ' j 욜 l 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소곡小谷이라고 부 르 는 마 을 이다. 소골 回 832 錦 山郡 福 흙 面 홉 永里 옛 날 에는 효부가 살았다 하여 효 골 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소골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소곶 回 833 瑞 山 郡 泰安邑 松 !f생 里 마 을 이 곶으로 되어 있으며 소나무가 많은 마 을 이 므 로 소 곶 또는 소 고지 라고도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소근이 回 834 瑞 山郡 所遠 面 所 斤 里 조선 세조世祖 12 년 (1466) 에 소근포진所斤浦鎖 울 두고 좌 도수군첨절 제사左 道 水 軍奴 節制使가 있어서 당진포 唐津 消i와 파지도 波知島 의 수군 영 을 관할하던 곳 이다. 처 음 에는 황해의 후미진 곳 을 지 킨 다는 뜻에 서 소근포라 하였다. 그 후 변하여 소 근 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소금번지 回 835 論 山郡 陽 村 面 新與里 옛 날 에 강경江 gt 이 수산 물 시장으로 번창할 때 소 금 장수 들 이 이곳에 서 하 룻 밤 을 묵어 가 곤 하 는 주막이 있었으므로 소 금 번지 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소금산 回 836 牙山 郡 鹽 U罪 面 菌星里 마 을 뒤에 있는 산의 돌 이 모두 희고 또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말 기에 이르기까지 황해안에서 소금배 들 이 고분다리내로 거 슬 러 올 라 와서 소금 을 쌓아온 곳 이었다 한다. 내 륙 지방으로 소금장사 룰 하게 되었으므로 이곳 을 소금산 또는 엽티頂 柚 寺]라고 부르 는 마 을 이다. 소금터 回 837 論 山郡 江禁邑 藍 l11 洞 전에 강경시장의 소금창고가 있었던 자리에 마 을 이 생겼으므로 소금 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소눈골 回 838 洪城郡 金馬面 華陽里 마 을 지형이 마치 소가 누운 것 같다 하여 소눈 골 이라고 부 르게 되었 다 한다. 소댕 이 回 839 天 原 郡 聖居邑 松 南 里 마 을 지형이 마치 소댕(솔뚜껑)처럽 생겼다 하여 소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소란 回 840 &~ 山郡 鳳 山面 沙 石 里
마을에 못이 있어서 소말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소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소래재고개 回 841 燕岐郡 全義面 西亭里 임진왜란 때 명의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이곳에 이르러 산세 를 살피고 산맥이 이대로 이어지다가는 큰 인물이 나을 것 갈다 하여 산맥의 줄 기 를 끊었다 하는데, 끊올 때에 땅속에서 소리가 났다 하여 소리재고 개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소래재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소룡골 回 842 公 州郡 j'. J.l龍而 乃典里 마을에 용龍으로 승천할 이무기가 도사리고 있는 지형이라 하여 소 룡골具t龍谷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소루지 回 843 唐津郡 石「 'l i面 t?.j路里 지금으로부터 150 여 닌 전에 임씨 문중의 사람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소요하였다 하여 작은 누각의 마 을 이라는 뜻으로 소루지小樓地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소리섭 回 844 瑞山郡 遠北面 防葛里 섬의 지형이 옥녀가 장구 를 매고 소리 를 내는 형국이라 소리섬이라 고 부른다. 소마담산 回 845 洪城郡 龜項面 支井里 옛날에 는 말과 소 를 방목하며 기 르던 산이 라 하여 소마답산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소문성 回 846 大 德 郡九 Hl ffii 新東里 금강 $B iI 가에 있는 산으로서 산꼭대기에 연개소문이 쌓았다는 성이 있으므로 소문성蘇文城이라고 부른다. 이 산에 백재 를 부흥 시키려는 군사와 신라의 김 인문金仁 IL1 이 이 끄는 삼만의 군사가 끝까지 저 항한 산 성이 있다. 소물 回 847 公川郡牛城面 木泉里 조선 인조仁祖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공주로 피난할 때에 타고 가던 소가 기갈이 심하여 이곳에서 물을 마시고 갔다 하여 소물이라고 부 르게된 마 을 이다. 소미 回 848 大川市 大 )|1 洞 옛날에 한산 이씨韓山李氏와 고령 신씨高盆申氏가 한 마을에서 서로 의좋게 살던 미덕을 이웃 마을에 보였다 하여 소미小 美 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소바리 回 849 扶餘郡 世道面 水古里 마을 부근에 마치 소의 발처 럼 생 긴 산이 있으므로 소발이 라고 부르 다가 변하여 소바리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소반뫼 回 850 扶 餘 郡 亂岩 面 盤 山里 산의 모양이 소반처럼 생겼다 하여 소반뫼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소반챙 이 回 851 論 山 郡 連 山面 沙 浦里 마을에 금반형金盤形의 명당이 있으며 뒷산의 모양이 소반처럼 생겼 다 하여 소반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소사들 回 852 天原郡 成 歡 邑 大 弘里 위례산 慰福 山 아래 펼 쳐져 있는 넓은 들 인데 모래와 흙 으로 된 들 이 라 소사들이 라고 부 른 다. 조선 선조 宜 祖 30 년(1 597) 에 명 明 나라 장수 마귀 麻 貸가 왜적 을 크게 무찌른 들 이기도 하다 . 소새마 回 853 扶 餘郡 扶 除邑 松 谷里 마 을 에 솥 처럼 생긴 샘이 있으므로 솔 샘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소 새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소소동 回 854 唐津 郡 合 德邑 素素 里 합덕못[合 德 池]에 흐르는 작은 냇물로 농사 를 짓는 마 을 이라 소소동 素素 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소송 回 855 唐津 郡 唐津邑 大德 里 마 을 에 솔이 많아서 관에서 그 소나무 를 보호하기 위하여 산지기 를 두고 지키게 하였는데 항상 감시 를 하니 소나무가 크지 않고 작은 소 나무로만 남아 있었다 하여 소송小松이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소스랑날 땝 856 훈改 郡 東 面 ! 麻訪 里 산의 모양이 마치 쇠스랑의 날처럼 생겼다 하여 소스랑날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소은곡 回的 7 保 寧 郡 藍 nll 面 県松里 마 을 지형이 새의 둥지처럽 아늑하다 하여 소은곡菓 應 谷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소정 이 Bl 858 天原郡 並川面 卜 多台里 마을에 소나무정자가 있으므로 소정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조
선 선조 때 이곳 사람인 죽계竹溪 김계종金溫宗이 마을 이 름을 송정 이라고 부르기 1 하고 피난처로 삼았다. 또한 그는 군량을 가지고 의주 義 )11 에 가서 큰 공을 세 웠다. 소제 回 859 大田市 東區 蘇堤洞 중국의 소호蘇湖에 버금가는 방죽이라 하여 소제照堤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석학碩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살던 마을이다. 소학도 回 昭〕 公州市 Jllit!'lifiiJ 북쪽에 금강錦江, 서쪽에 혈류천 血流 )11, 동쪽에 왕촌천旺村 )II 이 흐르 고 있는 곳 으로 마치 학이 깃든 섬과 같다 해서 소학도it鶴島라고 부 르는 마 을 이다. 속사 回 861 唐津郡 高大面 城山里 옛날에 무당들이 모여 춤을 추고 활을 쏘던 곳이라 속사束射라고 부 르는 마 을 이다. 속은 回 862 洪城郡 長谷面 杏亭里 벼슬길에 오 르기 위하여 열심히 글을 읽던 선비 한 사람이 중종반정 中宗反正이 일어나자 책을 버리고 다시는 글을 읽지 않았으며 농사룰 지으며 속인(谷人올 자처하고 묻혀 살았다 하는데 그의 덕이 컸으므 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마을로 드나들었으며 그룰 은자라 하고 그가 사는 마을을 속은(谷隱이 라고 불렀다 한다. 손독골 回 863 大田市 西區 挑馬洞 마울이 생길 때에 손씨孫氏들이 정착하여 개간해 갔으며, 그후 손씨 들이 많이 사는 마 울 이 라 손독골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손바래기산回 864 唐津郡 新平面金川里 조선 선조宣祖 때의 기인奇人 김복선金福 善 은 도학道學에 깊은 연구 가 있었으나 천민賤民이므로 모든 사람들이 업신여기었다. 그러나 율곡栗谷 이이李펴와 토정土 亭 이지함李之읊은 그의 높은 학식과 숨 은 재주 를 높이 사서 가끔 그 를 찾아와서 세상사 룰 상의하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해 율곡과토정이 함께 그 를 다시 찾아와서 앞으로 닥칠 임진왜란壬辰倭jq L 을 걱정하면서 한탄하자 김복선은 율곡과 토정을 번갈아 보면서 〈인신년상사寅申年喪 ZF 에 왜 임진년壬辰年을 걱정하십 니까〉하고 돌아앉았다 한다. 김복선은 어지간한 사람은 찾아와도 문 밖에 나오는 일이 없었는데 율곡과 토정이 찾아왔다가 돌아갈 때는
이 산에 올라 그 들 이 돌아가는 것이 보-이지 않 을 때까지 전송을 하였 다 하여 손바래 기 산이 라고 부르며 또한 망객산望客山이 라고도 부르 거) 되었다 한다. 손바래티 回 865 保 寧 郡 Ill 北面 鶴城里 옛 날 수영水 짧 으로 동하는 오천나루[' a; J ll i度]의 길목 이었으 므로 이 곳 에 서 손을 맞이하고 손을 보냈다 하여 손바래기라고 부 르 다가 변하여 손바래티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솔례 回 8E36 瑞山郡 聖it1 iffi 礎싼 里 소나무가 무성한 곳에 마을이 있으므로 솔 례라고 부 른 다. 조 선시대 말에 동학운동이 일어났 을 때 동학군과 관군이 대치했던 마 을 이다. 솟대배기댄뀝 Bfil-1 天原郡 木Jl l ifii t!l H 里 조선 철종 때 이 마 을 사람 이수회 李守會 가 과거에 급 제하 고 솟 대 를 세웠는데 그후부터는 솟대배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솟대매기 시 편 867-2 公 J II t I ; t1 t M} 而 維 M'j lli. 전에 이 마 을 의 한씨십t Lt 가 과거에 급재하고 솟대 를 세 운 후부 터 솟 대배기라고 부 르 게 되었다. 송복동回 868 瑞 山郡 ? 沮 山面 13 山里 옛날에 송씨宋氏가 세운 보i (k 가에 있는 마 을 이라 송보동이라고 부르 다가 변하여 송 복동키히jtili,J 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송충재 回 869 牙山郡 쩝 仁面 龍단 L 마 을 뒷산의 지형이 송 충 이처럼 생겼다 하여 송 충 이 또 는 송충재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솔동매 回 870 舒 川郡 鍾 )|l ifii f!I I J~連 마 을 부근에 복종형(犬鍾形의 명당이 있다 하여 솔 동매라고 부르기 1 되 었다 한다. 쇠깨 回 871 웅f l11 郡 .l. ½ i'!i面 月 n I i里 옛 날 에는 금 이 많이 났다 하여 쇠깨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쇠머리논 回 872 天原t I i 廣 德 面 梅 堂 里 조선 숙종 肅 宗 때 천안군수 송치중宋致中이 나라의 죄인을 잃고 고민 하던 중 영밀공 유청신 ”o n입 표 의 선몽으로 그 죄인을 잡게 되었으므로 그 은덕에 보답하려고 쇠머리논 일 곱 마지기 률 유청신의 재사답으로 재공하였으므로 지금도 쇠머리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쇠머리산回 873 論山郡 連山面 高井里 산의 모양이 소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쇠머리산이라고 부른다. 고려 광종光 宗 때 이 산에 있 는 돌로 은진미 록을 만 들 었다 한다. 쇠파닛골 回 874 牙 山 郡 仙掌面 君德里 예전에 금광 이 있이서 쇠 를 파냈던 골짜기 라 하여 쇠파닛 골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수골 回 875 洪城郡 洪東 面 大英里 물이 혼 해서 가뭄이 있을 때에도 물 걱정을 하지 않고 사는 마 을 이라 수 골 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수구동 回 876 燕岐郡 全東面 3 孫谷 里 임진왜란 때 이 곳 에 피난왔던 많은 사람 들 이 왜적에게 피살되어 시 체로 산 을 이 루 었으며, 피가 내 를 이 루 었다 하여 피숫 골 이라고 부르 다가 그 이 름 이 흉하 다 하여 수구동水口洞으로 고겨 부르게 되었다. 수근대 回 877 唐津郡 大湖芝面 調琴里 갑오년 甲午年 동학운동東學運動 때 사람 들 이 이곳으로 숨어 피난하였 다 하여 수은대水 隱袋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수근대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수담 回 878 扶餘郡 忠i t而 五德里 물 이 고이 는 소류지 가까이 에 있는 마을이 므로 수담水 b핀 이 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 수당골 땐 879 扶餘郡 草村面素沙里 마 울 앞 들 에 수령이 많으므로 수렁 골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수동 回 880 牙山郡 陰峯 面 新 腐 里 옛날에는 부근에 참나무가 많아서 숯윤 굽던 마 을 이라 숯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수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수룡구지 回 881 洪城郡 西部 面 板橘里 조선시대에 배 를 만드는 조선소가 있었으므로 수룡구지라고 불 렀으 며 조선시대 수군의 선창기지였다. 수리나미 回 882 天原郡 東面 닳南里 옛날 이곳에 사는 장자長者 조씨가 수레 를 타고 다니던 마 을 이라 수 레너머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수리나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수머굴回 883 唐津郡 松山面 梅谷里
조선 선조宣祖 때 의 학자 구봉龜峰 송익 필宋}超;움이 이 곳에 살던 김 진 려金進隅의 집에 은거하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하여 수머굴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수문여 回 884 瑞山郡 八峯面 虎里 가로림만加露林 灣 에 있는 바위섬으로 예전에 마 을 의 부녀자 20 여 명 이 굴을 따러 이곳에 갔다가 풍랑을 만나서 모두 죽었다 하여 스물녀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수문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수선동 回 885 公州郡 新豊面 龍水里 마을을 둘러싼 계곡과 냇물이 맑고 깨끗하여 수려함 을 자랑하는 뜻 에서 수선동水仙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수소 回 886 舒川郡 鍾 l11 面 支石里 마을에 큰 못이 있는데 그 못이 아름다와 수호綠湖라 부르다가 변하 여 수소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수십대 回 887 錦山郡 福 席 面 谷南里 마울 가까이에 호르는 냇물에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서 조중봉趙 頂峰이 낚시질을 하였다 하여 수심대水心疑라고 부르는데 그 바위 부 근에 있는 마을도 바위의 이 름을 따서 수심대라고 부 른 다. 바위에는 수심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 한다. 수정골回 888 論 山郡 上月面 上道里 마을에서 수정水晶이 많이 나온다 하여 수정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수현 回 889 保寧郡 循山面 龍水里 마을 뒤로 산이 있는데 어디서인지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하여 그 아래에 있는 마을을 수현水弦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수회 리 땐 祖) 大德郡 初成面 元 亭 里 냇물이 마을 앞을 굽이 쳐 돌아 흐른다 하여 수회 리水回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쑥댕 이 回 891 瑞山郡 仁旨面 文井里 고려시대 말기에 근근히 광우리 장사로 생계 를 이어가던 한 아낙네 가 아이 룰 뱃는데 산월에도 장사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어서 장사길 에 나섰다가 옹크리고 앉은 채 아이룰 낳았다. 아낙은 그 자리에다 쑥으로 덮어 놓고 다시 장사길에 나섰다가 돌아와 보니 학鶴이 아이
룰 품고 있었다 한다. 그 래서 그녀 는 그 아이 를 무학 無學 이라 이 름 짓 고 키웠는데 마 침 내 무학대사가 되었디 한다. 그 아이 룰 학이 품고 있던 자리에 당 을 짓 고 쑥 당이라 고 불 렀는데 나중에 마 을 이 생기자 당의 이 름을 따 서 쑥 당, 쑥댕 이라 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숙호지 回 892 瑞 山 郡 大山面 大竹里 마 을 지 형 이 범이 자 고 있 는 형 국이라 하여 숙호지宿 虎 地라코 부르게 되었다 한다, 순촌 回 893 論 山 郡 彩있面 龍 .( E 里 백제 의자왕 義慈王 때 대나무 를 많이 심었다 하여 순촌荀村이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술골 回 894 꿉陽郡 大特面 酒亭里 가파 른 고개로 넘어가 는 길 목에 있는 마 을 로 행인 들 이 쉬어가는 주 막이 있으므로 술골 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숯가마터 回 895 錦 山 郡 濟原面 大 山 里 옛날에 숯을 굽던 가마가 있었던 마을이라 숯가마터라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쉴바위 @!J 876 天原郡 廣德面 貸 山 院里 조선 세조世 祖 10 년(1 465) 에 세조가 동창을 고치기 위하여 속리산을 거쳐 온양온천으 로 갈 때에 전의全 義 에서 자고 3 월 1 일 온양으로 가는 길 에 이 바위에서 쉬었다 하여 쉴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쉴천골 回 897 t卽 山郡 新 賜 面 車洞里 골짜기가 험하여 이 골 짜기 를 넘어갈 때는 쉬어가는 곳이라 하여 쉴 천골이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스무고개 回 898 保 寧 郡 淸路 面昭 陽 里 고개가 높고 험하여 예전에는 도적 들 이 많아서 이 고개 를 넘 을 때는 장정 들 20 명이 모여야만 함께 넘었다 하여 스무고개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슬항回 磁) 唐津 郡 高 大面 瑟 項里 마을 지형이 비아(비파)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비아목 또는 슬항瑟項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슴갈목 回 었) 舒川郡 馬 西面 松石里 지형이 갈매기의 목처럽 생겼다 하여 승갈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승당이 回 앗 1 保 썩[ 郡 ,h·i;f rI T ii 器淵 里 골 짜기에 깊숙 이 있 는 마· 응로 서 조선 철 종哲 宗 때 도학 에 능했던 정 혁신 鄭 赫臣 이 이 곳 에 살았 는 데 그 의 호가 성당 聖'ilt 이라 하였으므로 그 의 호 를 따서 성당이라 부 르 다가 숭당이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 다. 승상동 回 002 大 rc. WI 가 란} t 11 i Iii til l. 고려시대에 왕승상 于. 丞相이 이 곳 에 살았다 하여 숭상동 이라고 부르 개 되었다 한다 . 승선동 回 앗 3 lJii 1: R I: 大 lJ I 芝 ill i 松 I Hll! 선녀가 목욕옹 하고 하 늘 로 옹 라갔다 는 숭선샘 이라 는 샘이 있 는 마 윤 이라 하여 승 선 동J4 (Ul i信) 이라고 부르개 되었다 한다. 승지 물 回엇 4 t?I 1 I1}1; ! 짠\ ,1;i面 乾芝 ( 태! . 옛 날 에 중 이 빠져 죽은 우물이 있 는 마 운 이라 승지물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승친 回 앗5 ·샤 [ hI i iiI;;; 磁澤 ) • 마 운 에 불 이 차고 약수 로 통 하 는 샘이 있었는데 옛 날 에 이 샘에서 이 무 기가 용이 되이 승찬昇天하였다 하여 승천 이라 고 부르는 마을이 다. 시 재 배 미논 回 안 6 錦 山郡 f t t . : H 而 白岩里 물옹 마 음 대 로 델 수 없는 논 이 있 는 데 이 융 시계배미논이라고 부른 다. 이 논 에 모 릅 십게 되면 그 해에 는 모든 논에 모 를 심을 수 있 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논이라 하여 시개매미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시나무니 回 ~7 公 川郡 正安面仁豊里 조선시대에 인저원 仁 섭 料운을 경영하던 신암사申庵 寺 가 있었던 마 을 로 서 변하여 시 나무니 라고 부르 게 되 었다 한다. 시 남 回 ~ rk( i令 t [ 忠(t ifi i 갑ijfj里 큰 산 아래에 있 는 마 을로 서 지형이 마치 신하가 상재上帝 룰 우러러 보 는 형국이라 신앙(,i (/)1 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시남時 南 이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시동뎃쳅 !m-1 瑞 山郡 if·石面 i I 堂里 옛날부터 굴을 잘 짓고 굴 을 잘 읊는 시인 詩 人 들 이 많이 나왔다 하여
시 동詩洞 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시동刊맨 WJ-2 礎 山 R I ; l 秋山面 f #洞 里 조 선 인 조仁 祖 때 야 곡 治 谷 조국 선 趙克善 이라는 동자가 있어서 12 살 에 어머니 상 을 당하 여 눈 이 오나 비가 오나 어머니 묘 근 처에서 시막 을 짓고 3 년 동 안 시 묘 살이 를 하 자 효 성이 지극하여 온 천 하에 알려 져 모두가 그 가 사 는 마 을 을 시동 (寺 洞 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시렁골 回 910 治 山 郡 光 E i fi i r, ’! 寺 里 마 을 앞에 옥녀봉이 있 는 데 이 옥녀봉 에 는 옥녀탄 금 형 玉 女 彈琴 形의 명 당 이 있다 는 산 이 다. 이 산 에서 밤이 되면 거문고 를 타는 소리가 들 려 온 다 하 여 시렁 공 이 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시루지回 911 lfa lt nl : 松 山 面 t I 浴 里 여 울가 에 온화한 날 에 는 신루( 신 기 루 ) 가 잘 나타나 는 모래 톱 이 있 으므 로 시 루 지 라 고 부 르 는 마 을 이 다 . 시 름 세 回 912 天 原郡 稷 山 而 悠 8 백 고려시대에 이 곳을 지 나 던 태 조 왕 건王建 이 잠 깐 쉬면서 성거산 을 바라보니 오 색 구 름 이 감싸고 있 는 것을 보고 신선이 사는 곳을 그냥 지나 칠 수 없다 하여 하루 릅 쉬 면 서 온갖 근 심 을 풀 었다 한다. 오색 구 름 이 없어 지 자 이 곳 을 떠났다 하 는 데 잘 쉬어 간 자리라 시 름 세라 고 부 른 다 한다. 시못골回 913 燕 峻郡 西面 起it里 조선 숙종 肅 宗 때의 효 자 홍 우구 洪 禹九가 부모상 을 당하여 이곳에서 시 묘 를 하는데 범이 와서 밤 마다 호위 를 하여 주었다 한다. 또한 마 을 우 물 이 부 글 부 글 꿇 면서 솟 아오르다가 시묘가 끝 나자 법도 사라 지고 샘물 도 말랐 다 하여 효심에 가득한 곳 이라 시못 골 이라고 부르 개 되었다 한다. 시성산回 914 天原郡城南面 1E 城里 조선 고 종 31 년(1 894) 갑오 동 학운동 東 學 運 動 때 동학 접주接主 김봉 용이 동학도 들 을 이 끌 고 이 산에 옹거하면서 교도 들 에개 쪽지 를 주 어 눈 을 가리고 주문만 외우고 있으면 관군의 총대에서 물 이 나오며 비 록 총 탄이 비오 듯 하더라도 맞지 않는다 하여 관군이 산 을 점령하 고 사람이 한없이 죽 어 넘어지는데도 교도 들 은 눈을 가리고 주문만 외우므로 이 광경 을 본 관군대장 이두황 李斗 Fk 이 크게 놀 라서 총 쏘
는 것 을 중지하고 남은 교도 들을 일일이 일깨워 화 를 면 하게 하였다. 그때는 이미 이곳에서 죽은 동학도만 수백 명이 넘어 시체로 산 을 이 루었다 하므로 이 산 을 시 성 산 展城 山이 라고 부르 게 되 었다 한다. 시악시골 回 915 牙山 郡 道高 面 新樞里 마 을 에 늙 도 록 시집 을 가지 않고 홀 로 살 던 늙은 색 시 가 살 던 마 울 이 라 시악시골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시정골回 916 論 山 郡 連 山 面 松 亭 里 백제가 멸망할 때 황산 벌 [黃山 原 ]에서 죽 은 백 제 군사 들 의 시 체 를 이 곳에 모시고 장사지냈다 하여 시정 골 이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 시진포回 917 論 山郡 論 山 邑 登華洞 옛날에 장사베 들 이 모여서 풍선 風 船이 가 득 하였으 며 큰 시 장 이 섰던 개라 시진포市 津 沮i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식송 回 918 扶餘郡 핸 山面 島峴 里 옛날에 고 을 원님이 수해 를 막기 위하여 많은 소 나 무 를 심 게 하여 소 나무가 무성한 마 을 이라 식송 植 松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식장산回 919 大德 郡 山內面 大 成 里 산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 하여 식장산 食藏 山이라고 부른 다. 백제 때 는 탄현炭 峴 이 라고 불 렀다 한다. 신궁리 回 920 牙山郡 仙 掌 面 宮坪里 고려 제 23 대 고종 高宗 43 년(1 256) 에 몽고의 침입 을 피하여 강화도江 華 島 에 가 있던 왕이 다시 피난지 를 물 색중 섬과 같 이 된 이 곳을 피 난처로 작정하고 새 궁 궐을 지어 두었다. 천안부 사람 들 이 이곳으로 피난 왔다가 고종 46 년(1 259) 에 돌 아갔다. 새로 궁 을 지었다 하여 신 궁리新宮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신동 回 921 牙山郡 靈 仁面 荷峯 里 마을에 싶나무가 많으므로 신동 新 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신라리 回 922 牙山郡 仙 掌 面新 聖 里 신라新羅 때 태자太子가 초정淑井에 왔다가 이곳에서 유숙하였다 하 여 신라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신례원回 923 禮 山郡 盜 山邑新 租 院里 조선시대에 길 을 안내하고 행인의 편의 를 도모해 주는 신례원新 禮 院 이라는 원이 있었으므로 신례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무산 圈 924 瑞山郡 瑞山邑 良袋里 산의 모양이 마치 무당이 춤을 추는 것 같다 하여 신무산神巫山이 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신봉샨P 땝 925-1 瑞山郡 所遠面 新德里 신나무가 많은 산으로서 세조世祖 때 소근포所斤浦에 주둔하였던 수 군첨절제사水軍致節制使가 신나무로 돛대를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는 나무가 있는 산이라 신봉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신봉산기챕 925-2 牙山郡 盛仁面 月船里 옛날에 공세포貢稅浦로 드나들던 뱃사람들이 뱃길을 떠날 때 순풍을 빌어 제사 를 지내던 신봉사信鳳祠가 있었던 산이라 신봉산信鳳山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신진도 멤 926 瑞山郡 近興面 新津島里 전에 중국으로 건너다니던 새로운 나루터라 하여 신진도新津島라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신터러니回 安 7 禮山郡 吾可面 五村里 땅이 질퍽거려서 항상 신을 털고 다니는 마을이라 신터러니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신터 리봉 回 928 扶餘郡 恩山面琴公里 백제시대 이곳에 금강사金剛寺라는 절을 짓는데 절의 규모가 대단하 여 일하던 일꾼들의 신에서 묻은 흙을 이곳에 털은죽 큰 산이 되었다 하여 이 산을 신터리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o> 아가미 回 929 大 德 郡 東面 新上里 산의 형태가 물 고기의 아가미처럽 생겼다 하여 아가미라고 부르는 산이다. 아개울 回 930 論 山郡 夫赤 面 新 橋里 옛날에 한 중 기 빛 이 흘 러 갈라지는 현상이 일어나면 비가 많이 내려 홍 ’ 수가 난다는 아곡방죽이 있어서 아곡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아개울 이 라고 부르는 마 을 이 다. 아구내 回 931 唐津 郡 松 嶽 面 金谷里 옛날에는 벙어리가 많이 살았으며 불 구자가 많이 산다 해서 아구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아냇벌 回 932 天原郡 修 身面 長 山里 아오내 장터의 앞에 펼 쳐진 둘 이라 아오냇 벌 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아냇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도화상토굴 園 933 公州郡 鷄龍 面 中壯里 백제 구이신왕 때 아도화상阿 道 和尙이 수도한 굴이다. 아들바위 回 934 錦山郡 珍 山面 石 幕 里 바위에 구멍이 뚫 려 있는데 임신한 여자들이 막대기 를 어림잡아 잘 라 가지고 그 막대기 를 구멍에 넣어서 길이가 똑같으면 아 들을 낳는 다고 아 둘 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아리 랑고개 回 935 論 山郡 賜村面 新基里 해방 전에 이곳에 금광으로 번창한 안심금광安心金鑛이 있었다. 그때 이 금광에서 일하던 광부 들 이 이 고개에 즐비하게 차려진 술집에서 술을 마시면 그 한 을 달래기 위해서 아리랑노래 를 목이 터지도록 부 르곤 하여 이 고개 를 아리랑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미산 ml 936 保 寧 RI; ~,1] 山面 龍水里 산의 지형이 누에의 눈썹처럼 생겼다 하여 아미산峨眉山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아산뜸回 937 牙 山郡 仙 掌面 i;재串里 예전에 천안과 아산으로 땅이 갈라졌는데 이곳은 아산땅이었으므로 아산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아산만回 938 牙山郡 영인 靈 仁의 아가미산에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바다 룰 아산만牙山祖t 이라고 부른다. 전설어 k 따르면 아산만은 한 개에 지나지 않았는데 조 선 선조 宜祖 때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華이 아산현감이 되어 민정을 살 피느라고 · 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지형이 이상하여 수차에 걸쳐 영인 산 북쪽을 살피고는 지함地炤될 것 을 예견하고 이 부근 사람들이 피 난갈 것을 종용하였으나 아무도 그 말을 . 믿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 나 이토정李土 亭은 땅이 가라앉는 지형의 변화가 바로 시작될 것이라 고 한탄하면서 할 수 없이 부근의 망해산望海山으로 올라가서 땅이 무너지는 광경을 살피려 하는데 한 둥집장수가 이토정을 따라오더니 이토정이 앉은 아래쪽에 옹기집을 받쳐놓고 앉으므로 이토정이 〈그 쪽은 위험하니 여기까지 올라오라〉라고 말하자 그 둥집장수는 웃으 면서 〈겁쟁이구만 ! 그렇개 모르고서야 무슨 고을 원이람 ! 〉하고 그 대로 앉아 있는데 과연 천지가 진동하더니 땅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둥집장수가 받쳐놓은 작대기 끝부분까지만 땅이 가라앉고 바다가 되 었다 한다. 조수潮水의 차가 우리나라에서 으뜸이며 조선시대에는 삼도三道 죽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공세창 貢 稅倉이 있었으며 물이 깊어서 어 지간한 군함도 드나 들 던 만이나 조선시대 말기에는 청군과 일군이 큰 싸움을 한 갑오년甲午年 아산만 사건이 있었던 지역이 되기도 하 다.
아야목 回 939 燕岐郡 全義面 高登里 고려 홍건적紅市賊의 난 때 고려성에서 피난하는데, 먹을 물이 떨어져 견딜 수가 없어서 〈아야 목아〉 하고 울면서 산 아래로 내려왔다 하여 아야목我也目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아오내 땐 940 天原郡 並JI I 面並 l|| 里 찻밭내와 치랏내가 합하는 곳으로 이곳에 장이 서므로 아오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아포回 941 保寧郡 JI I 北面 長갑 함 里 해변에 연한 산줄기가 마치 상어의 어금니와 같다 하여 아포라 부르 는 개가 있는 마을이라서 아포牙浦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아홉사리고개 回 942 扶餘郡 朔山面 土 亭里 아홉 굽이의 고개라 아홉사리고개라고 부른다. 조선 선조 宣祖 때 이 몽학李夢鶴의 난 후 지역적으로 핍박을 받을 때 홍산햄山을 떠나는 사대부士大夫와 백성이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슬픔에서 지어진 이름 이 아홉사리고개라 한다. 백성의 한恨만큼 굽이가 아홉 개나 되므로 아홉사리고개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안골내 미 땐 943 錦山郡 郡北面上谷里 마을이 골짜기 안쪽에 있으므로 안골내 미 라고 부른다. 안마도 回 944 瑞山郡 南面 申溫里 섬의 모양이 질마(길마)처럼 생겼으므로 안마도跋馬島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안무동 回 945 靑陽郡 定山面 南泉里 기러기가 춤을 추는 형국이라 안무동屈舞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안뱅 이 回 946 舒川郡 華陽面 保縣里 옛날에 안보향安保鄕이라고 부르는 행정구역이 있었으므로 안뱅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안섭 1311 947 唐津郡 松嶽面 古袋里 아산만의 안쪽에 있으므로 안섭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홍주목 洪州牧에 딸려 있었으므로 홍주안섬 이 라고 불렀다. 안영 回 948 大田市 西巨 安永洞 조선 세조世祖 때 그의 등극을 반대하고 목숨을 끊은 박심문朴審問의
후예들이 모진 세파에도 초연하고 절개있는 명문으로 살아온 마을 이라 안영安永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안장곰 @] 949 瑞山郡 古南面樓洞里 섭의 모양이 장구처럼 생겼으므로 장고도, 장곰, 안장곰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안재웅 回 950 扶餘郡 恩山面 쫑公里 옛날 안직이란 사람이 이곳에 정착한 후 부자가 되었지만 태생이 인 색해서 망하였 는 데 그후 후덕한 사람이 많이 배 출 되어 안재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안질고개 回 951 舒川郡 I ft仁而 城 北里 백제시대 어떤 사람이 앞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인생의 무 정함을 느끼고 이 고개에 주저앉아 실의에 빠졌다가 앉아 죽은 고개 라 하여 안전고개라 부른다 한다. 안파 回 952 瑞山郡 近 興而 都瑾里 마을 앞이 바다인데 산 줄 기가 바다쪽으로 뻗어내려 파도가 일지 않 는다 하여 안파安波라고 부르게 되 었다. 안홍목 ~ 953 瑞 山郡 近 興面 程竹里 안홍항과 신진도 사이에 있는 목을 안홍목이라고 부른다. 물결이 험 해서 배가 자주 파선하므로 난행목이라고 부르다가 안홍항 앞에 있 으므로 안홍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알미 回 954 錦山郡 錦城面道谷里 마을 앞에 알처럼 생간 산이 있고 마울 지형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의 명당이 있다 하여 알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암용추 困 955 論 山郡 豆磨面 龍洞里 물이 매우 깊은 산속의 바위못으로 옛날에 이 못에서 암용이 나왔다 하여 암용추라고 부른다• 서쪽에 숫용이 나왔다는 숫용추가 있다. 압수 回 956 靑陽郡 南陽面 新旺里 마울 앞에 소沼가 있고 그 소는 물이 맑아서 오리가 날아와 놀던 곳 이었다. 맑은 물과 오리에 연유해서 마을을 압수円勤 k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애고다리 回 957 天原郡 成歡邑安宮里 다리가 좁고 길어서 처음 건너가는 사람은 저절로 애고소리를 낸다-
하여 애고다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애기업은바위回 958 牙山郡 藍時 面 맙 院里 바위의 모양이 아기 를 업은 것처럼 생겼다 하여 애기업은바위라고 부 른 다. 아산군의 군명이 이 바위에 연유하여 지어졌다. 0 성시동回 959 扶餘郡 핸 山面 井洞里 옛날에는 마 을 과 마 을 주변에 꾀꼬리 둥지 가 많다 하여 앵소동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앵시동이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0 성화동回 960 靑陽 郡 長坪 面 花山 里 마 을 뒷산에 꾀꼬리봉이라고 부르는 봉우리가 있고, 개 울 과 벼랑으 로 된 바위에 꾀꼬리 소리가 잘 들 리는 마 을 이라 하여 앵화동 :盆 花洞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 야화리 回 961 論 山郡 彩 雲 面 野花 里 백제 말엽에 사비성 궁중의 소요지로 들꽃을 가꾸어 꽃밭을 만든 지 역 으로 그후 들 꽃이 좋아서 야화리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약산땝 %2 公州郡 寺谷 面 花月里 산에 채약은사형採 藥亞士形 의 명당이 있다 하여 약산 萊 山야라고 부르 는 산이다. 약현 回 %3 保 宇 郡 멈湘 面 長峴 里 옛날부터 약초 를 많이 재배하던 지역이며 유명한 한의 漢 참가 늘 딸 려 있었다 하여 약현 栗 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양곡 回 %4 캠泊支 R[ 東 面 發랐 里 덕을 쌓도록 가르치고 용 勇을 배우는 곳이라 하여 양곡 森 谷이라고 부 른다. 조선 선조 宣祖 때의 충신 박천붕朴天鵬과 그의 아 들 들의 무용 을 비는 충신문이 있는 마을이다. 양양산 回 %5 公 mll11 長岐 面 沼 JI I 里 양양부사襄 陽 府使 률 지 낸 임목林穆의 산소가 있는 마을이 라 양양산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양정고개 回 %6 論 山郡 豆 磨面 華 寺 里 백제 말엽 나당연합군의 침략이 있을 때 백제군과 신라군이 크게 싸 웠던 고개다. 앞으로 신도안에 운이 돌아오면 두 정씨가 이 고개에서 최후의 결전을 하리라는 정감록에 따른 양정고개다.
양청 이 回 967 大德郡 東面龍 溪 里 남쪽에서 흘 러오는 냇물과 서쪽에서 호르는 냇물이 합하여 북쪽의 합류접에 있 는 마 을 이라 하여 양천이라고 부르다가 양청이라고 부르 게 된 마을이다. 어등골回 968 錦 山郡 錦山邑 陰地里 높은 산의 그 북쪽 에 마 을 이 있어서 어두운 시간이 길다 하여 어등골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어렝이 回 969 天原郡成歡邑 .g대만 11 . 마을 지형이 통 싸리로 만든 어랭이 같다 하여 어랭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어 리 回 970 /:Et ItR1 ’, 唐 津邑 牛頭里 옛 날 이곳에 처음 정착한 박씨라는 사람이 고기 를 잡아 생활을 시작 하였다 하여 어리漁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어 리목고개 回 971 牙 山郡 陰峯面 三巨 里 골짜기가 깊고 산이 높아서 짐승이 많으며 도둑이 많아 넘기가 어려 운 고개여서 여러 사람이 함께 고개 를 넘어다녔다 하여 어리목고개 라고 부 른 다. 조선 명종明宗 때 쌍령재 [텐嶺時]의 의적 안수安 흙 ;가이 곳 어리목산성에 옹거하면서 이곳을 지나는 진상품과 보물을 덜었다 고 전해오나 확실치는 않다. 어립굴回 972 瑞山郡 近與面 安基里 지형이 북향이어서 얼음이 늦게 풀린다고 어롭골이라고 부르다가 변 하여 어립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어무실 回 973 公州郡 正安而 /t 7J J里 옛날에는 마을에 큰 연못이 있어서 항상 고기가 뛰어노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였는데 어느 날 한 도사가 지나다가 이곳을 어무실漁舞室이라 고 부르므로 따라 붙여진 지명이다. 어사리 回 974 保 寧郡 川北面 長倭 里 마을에 노옹설망형老翁說網形의 명당이 있다는 어부들의 마을이라 어사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어인포回 975 公州郡 儀堂面 五仁里 마을에 인자仁者가 사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어인포於仁浦라고 부르 게 되었다.
어재동回 976 갑陽郡 化 城 面 九在 里 마을의 지형이 고기가 노는 형국이므로 어재동魚 在洞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 을 앞에 못이 있었 는 데 메워진 것 을 1949 년에 다시 마을 앞에 파 놓았다. 어천 回 977 燕岐 R[ 全 義i1ii I i O III 里 대추나무가 냇 물 가에 많이 서 있었고 여러 갈래의 냇 물 이 이곳에서 합하여 큰 냇 물 로 터지는 곳에 마 을 이 있으므로 어 천於 JI I 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어초리 回 978 保 宰 郡 周 ii !i面 新格里 벼슬길에서 은퇴한 사람 들 이 고기 를 잡고 나무 을 하면서 은거생한울 한 마 을 이라 하여 어초라漁椎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어풍대 回 979 錦山郡 濟原 面 濟原里 들을 끼고 깎아 세운 듯한 앞면에 어풍대御風 잦 석자 를 새 겨 놓은 바 위산 을 말한다. 조선 효종 孝宗 때 미수 眉 秀 허 목許穆 이 재원 찰 방 濟 原 察 訪 이 되어 이곳에 부임 을 하고 보니 마 을 에 화재가 자 주 일어나므 로 방패막이로 이 바위산에 어풍대라고 썼는데 그후로는 화재가 심 하지 않았다 한다. 억대 回 980 瑞 山郡 海Jg i1ii 陀袋 里 마 을 앞의 들 이 넓어서 많은 사람이 땅 을 소유할 수 있는 마 을 이란 뜻에서 억대億袋라고 부르게 되었다. 언정 回 981 瑞 山郡 仁 旨 面 '父 井 里 마을에 여러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좋은 샘이 있으므로 언정 彦 ·1 t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 언터 말 回 982 燕岐 郡 東面 葛 山里 옛날 청주 淸 )사, 공주公 1 서 를 비롯한 사방으로 부임하거나 상경하는 관 리 官 吏 들 이 쉬어가는 자리라 원터말이라고 불 렀는데 변하여 언터말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업전못 回 983 靑賜 郡 木面 新興里 옛날에는 언덕에 밭이 있어서 홍수 때마다 밭이 조금씩 유실되어 지 금은 밭이 없어지고 말았으며 그 주위에 마 을 이 생겼으므로 엄전菴 田이라고 부르다가 업전못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 업정 回 984 天原郡 修 身面 海亭 里
마 을 사람 들 이 위하 는 늙 은 느티나무 정자가 있는 마 을 이라 엄정嚴 亭 이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업정내 圈 985 天 原郡 修身面 海쟈里 마 을 에서 위하 는 늙은 느 티나무 정자 를 지나는 내라 엄정천嚴 亭 )|I, 엄정내라 고 부른 다. 산삼이 많은 망경산이 있으므로 잉어가 오르지 못하 는 내라 전 한다 . 여계수 띠 986 天原郡 廣란面 大德里 소 沼 의 깊이 가 한 길 이 넘는데 조선 명종明 宗 때 쌍령재 를 중심으로 준동하던 의 적義賊 안수 安r.-J 가 성안에서 잡히게 되자 그의 첩 여계麗 桂가 이 못 에 빠져 그 의 뒤 를 따랐다 . 그 후부터 여계수麗桂水라 부 르게 되었다. 여기바위 回 987 天原郡 北面 樹松里 냇 물 가에 큰 반석으로 된 바위가 있었는데 옛날에 관가官家에서 기 녀岐 女들을 데리 고 와서 놀 던 바위라 여기바위라고 부르께 되었다 한다. 여드니 回 988 公川 郡 維鳩 面 新彬里 마 을 북 서 쪽 과 남서 쪽 에 각각 산이 있어서 해가 비치는 시간이 짧은 마 을 이므로 어두니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여드니라고 부르는 마을이 다. 여드재 回 989 김i陽郡 印陽邑 長 承里 옛 날 에는 이 고개에 많은 도적이 준동하였다. 그러므로 고개 를 넘을 때에는 많은 사람 들 이 모여 여든 명이 되어야 고개 를 넘을 수 있다 하여 여드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여무시 回 었 3 牙 山郡 新昌 面 新 谷里 마 을 뒷산의 지형이 마치 소가 · 누운 형국이고 또 소의 여물 통 과 같다 하여 여무 실 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여무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여사동 回 991 公 川 郡 鷄 龍面 花 彩 里 여러 선비의 후손 들 이 낙향하여 마 을 을 이 룩 하였다 하여 여사동餘士 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여수매 回 992 扶 餘 郡 世 道 面 良大里 마을의 지형이 마치 여우가 새끼 를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여수매
라고 부 르 게 되 었다 한다. 여수울回 993 天原郡豊歲而豊西里 앞산이 여우의 목과 같 고 마 을 에 좋은 샘 이 있으므 로 여수 물 이라고 부 르 다가 변하여 여수 울 이라 고 부르 게 되었다. 여승댓챕 994-1 論 LUI{ [ 光石 面 中里 마 을 에 여섯 갈 래의 개 울 이 있어서 여섯 울 이라 고 부르 다가 변하여 여 술 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여술 ’ 2 ' Bl 994-2 牙山郡 湯井 而 慕 山 里 마 을 안 을 호르는 냇 물 의 물 이 맑으므로 여수 脫 7k 라 부르 다가 변하 여 여 술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여술 1 回 994-3 } [陽郡 飛鳳 面 社士 里 옛날 벼슬 길을 단념한 한 선비가 학자의 길을 택하여 살 고 있었 는 데 나 중 에는 벼 슬 에 오 른 선비 들 도 그에게서 가 르침을 받고자 찾 아 든 사 람 이 많았다 하여 여 술 이라고 부 르 개 되었다. 역들 回 995 牙 山郡 仁川 面 新城里 물 이 좋 고 땅이 기 름 져서 가뭄이 십 할 때일수 록 벼농사가 더 잘 되므 로 흉년이 되어 종자 를 구하지 못 할 때 역 들 에 가서 볍 씨 종 자 를 구한 다 는 이토정 李土 亭 의 말대로 풍요로운 곡창지대라 하여 역 들易 坪이 라고 부 론 다. 역서변리 回 996g fll| RI; . 居西 面 玉 北 里 역말 서 쪽 에 마 을 이 있으므로 역서변리라고 부르 개 되었다 한다 . 연갯골 回 997 論 山郡 恩津 面 城德里 옛날부터 연계軟 g9 가 많이 나와 진상품이 되었다 하여 연계 골 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연갯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연도 맵 998 瑞 山郡 遠 北面 防 葛里 소리개가 많이 모인 섬이라 하여 연도 Xt島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연동땐쳅 999-l i 益 山郡 賜 村面 半 岩 里 마 을 의 지형이 제비 를 닮았으며 제비가 많이 날아드는 마을이라 연 동 燕洞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연동 키 괭 999-2 牙山郡 仙 掌 面 仙 倉 里 옛 날 에 권씨權氏가 살면서 마을 앞에 못을 파고 연을 십어 마 을 이 연 꽃으로 환하게 되 었 다 하여 그로부터 연동 蓮 洞으로 불러 왔다.
연모리 回 1000 舒 J Il t I: 長項邑 聖tJ:! [ 페 마을에 연화부수형蓮花 浮 水形의 명당이 있다 하여 연모리蓮毛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연봉 叫 괜 1001-1 論山郡 連 IU 而 松山里 옛날에 어 느 도 인이 마을 을 지나다가 〈지형 이 수려하나 연꽃이 없는 것이 홈 〉 이라 고 하므 로 마 을 사람 들 이 못을 파고 연꽃 을 심은 타음부 터 마 을 이 부유해졌다 하여 연봉述 速 이라 하다가 연봉淵 速 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 연봉 횃 챕 1001 一 2 扶 餘郡 챕j山面 北村里 마 을 에 높은 사람 들을 맞아 둘 이 는 연봉정延注 亭 이 있으므로 연봉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연안골 回 1002 --j溫대 1: 九 111l flii 'gJ-1 連 마 을 에 연안 이씨가 처음 입 주 하여 터 를 잡았으므로 연안 골 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연암산回 1003 瑞 山郡 高北面 長要里 명매기가 깃드는 바위가 있으므로 연암산燕岩山이라고 부른다. 산봉 우리에 는 돌 로 쌓은 성이 있는데 둘 레가 4km 이며 높이가 4m 가량이 나 되는 성이다. 너비가 3m 가량 되 는 이 성은 마한시대 馬韓時代 에 상왕국 象王國 의 왕인 상왕 象王 이 쌓은 것이라 전한다. 연홍 回 1004 錦山郡 福源 面 谷南里 마을 뒷산에 연소형 燕jt形 의 명당이 있으므로 연홍 燕 興이라고 부 로 게 되었다 한다. 열두골들 回 1005 瑞山郡 瑞山邑 吾南里 물 이 열 두 골짜기에서 홀러온 다 하여 열두골 들 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열두칸다리 回 1006 大川市東袋洞 조선 세조世祖 4 년에 한 내에 열두 개의 돌로 다리 를 놓 았는데 이 다 리 를 열두칸다리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다리가 없어서 많은 고충 을 받은 행인들을 위해 길이 1m 세로 4m 두께 50cm 간격의 다리였다. 그후 관리가 소홀하여 다리는 황패하였다. 그러나 그 중 돌 1 개가 대 천시청에 현재 보관되어 있고 또 하나는 천주교인순교비로 세워져 있다.
열문이 回 1007 (泉 寧郡 川北面 沙湖里 마 을 앞이 환히 열려있다 하여 열문이라고 부 르는 마 을 인데, 바다로 열려 있으므로 그리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 엽둔고개 回 1008 天原 郡 笠楊 面 道林里 이 곳 은 옛날에 큰 길이었 는 데 주 로 장꾼 들 이 드나 들 었 던 고 개로 통 하며 도둑이 많아서 엽 전을 많이 털 렀 던 고개이어서 엽 전골 , 둔 고개 라 부 르 다가 변하여 엽 둔 고개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엿바위 回 1009 扶 餘郡 'f야岩 面 苑岩里 바위 앞은 벼랑이며 뒤 쪽 이 산으로 둘 려 있으므로 바위가 마치 눈 치 를 보는 것처럼 머리만 조 금 내 밀 었 다 하 여 엿 바 위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영남촌回 1010 公州 市 中洞 마 을 에 영남 사 람들 이 많이 살고 있었으므로 영남 촌嶺南 村이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영 담물 回 1011 洪城郡 龜項 面 五 耿里 조선 세조世 祖 때 선비 다섯 사람이 서당 을 세우고 성삼 문成三 Ib1 과 같은 절 개의 선비가 되고자 서생 을 따르게 하고 막상 문을 열었으나 홍윤성 임 년 C /j 戈 의 미움 을 사고는 서당이 파괴되었다. 그래도 모두가 이곳에 살며 좋 은 땅 을 개간하고 장자 長者 가 되어 부 로 이 룩 한 마 을 이 라 하여 영 탑골이 라고 부 르다가 영 담 물 이 라고 부 르 는 마 을 이 다. 영실 回 1012 靑陽 郡 雲 谷 面 永陽 里 고려시대에 영수부곡 永홉 部曲이 있었던 마 을 이라 영실이라고 부 른 다. 영안回 1013 唐 津 郡 松 嶽 面 富谷 里 옛날에 군사가 진 을 쳤던 곳의 안쪽에 마 을 이 있으므로 영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영암回 1014 洪 城 郡 洪城 邑 古 岩 里 마 을 앞산에 신령한 바위가 있어서 옛날에는 산신제 를 지내며 위하 던 마 을 이라 영암 盆 岩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영인산回 1015 牙山郡 요 仁面 산이 높고 험준하고 또한 산봉우리에 우물이 있어서 심한 가뭄이 든 해에는 기우제 를 지내면 영험이 있다 하여 영인산이라고 부른
다. 산중에는 납북으로 두 개의 성이 있는데 북쪽의 성은 돌 로 쌓아 그 둘레가 480 척, 높이가 10 척이며, 남쪽의 성은 토성으로 둘레가 480 척 높이 4 척으로서 겹성으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몽고가 침입 할 때 평택 사람 들 이 이곳에 와서 피난을 하였으므로 평택산성이라 고도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영장골回 1016 洪城郡 結城 面 琴谷 里 옛날 신금성 神 冷 城 의 영장 쌍將 이 머물던 곳이므로 영장골이라고 부 른 다. 영전回 1017 瑞 山 郡 大 山面 令塔里 옛날에 전씨田氏가 개간하고 정착한 마을이라 영전令田이라고 부르 며 닥 발 [ 梧 田] 이 많은 마 을 이 다. 오공곡回 1018 論 山 郡 豆 磨 面 光石 里 마 을 에 오공형 蝶 松 形 의 명당이 있으므로 오공곡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오동촌땐 1019 天原郡 北面 梧谷里 옛날에는 오동나무가 무성하였던 마을이라 오동촌悟桐村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오두回 1020 洪 城郡 葛 山面 蒸 頭里 마 을 의 지형이 자라의 머리처럽 생겼다 하여 오두蒸頭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오력도~ 1021 舒川 郡 西面 馬梁 里 이 섭에서 서쪽으로 연도煙 島 가 보이는데 옛날 장수 한 사람이 마량 馬梁 에서 연도로 건너다닐 때 뛰어 다녔다고 하는데 그때 신발 한 짝 이 떨어져서 섭이 된 곳이 오력도라 전한다. 오룡동 미 괜 1022-1 保 寧 郡 川北面 鶴 城里 마을에 오룡쟁주형五 龍爭 珠形의 명당이 있다 하여 오룡동五龍洞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오룡동이괜 1022-2 靑陽 郡 大 崎 面 五龍里 마을 부근에 용내, 용바위, 청룡날 둥 용이 사는 곳이 다섯 군데나 있 다 하여 오룡동五龍洞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오름실 땐 1023 公州郡 新 豊 面 百 龍 里 마을이 산을 한참 올 라가다가 자리해 있으므로 오 롭 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오리곡回 1024 大 田市 東區 加 午洞 옛날에 오리가 많이 모이던 계곡 안 쪽 에 마 을 이 있으므로 오리곡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오리정回 1025 錦 山郡 錦 山 邑 上里 옛날에 오리 정 五 里 亭 이라고 하던 정자가 있었으 므로 이 마 을을 오리 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오매 回 1026 舒 川郡 텁 [山面 斗南里 옛날에는 마 을 에 성이 있었으 며 까마귀가 많은 마 을 이어서 오산 烏 山 이라 부르다 변하여 오매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오미 미 괜 1O 'll-1 公 ) · I JR I ; 鷄龍 面 中壯里 자라 모양 을 한 산이 있 는 데 꼬 리 부분 에 마 을 이 있어서 오미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오미 악 괜 1027-2 洪 城郡 長谷面 道 山 里 마 을 가까이의 외딴 산에 오 동 나 무가 많으므로 오미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오미 이괜 1027-3 唐津 郡 新軒(fi 」 ·· tg I j ! 마 을 이 옥녀봉 기 슭에 였으 므 로 오 미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 오미기 回 1028 天原 郡 東面 肯 자湘 마 을 뒷 산의 형 국이 맵새와 같으며 마 을 지형이 오목하여 오미기라 고 부 르 게 되었다 한 다 오봉산回 1029 燕岐 郡 島 致院 邑 다섯 봉우리의 산이 있 는대 그 봉 우 리마다 신선이 깃든 것 같다 하여 오봉산이라고 부 르 게 되 었 다 한 다. 오봉촛골 回 1030 大 德郡 炭討面 f.l? : i E 옛날에는 호박 받 이 있 었 으 므로 호박 골 이라 불 렀다. 그후 임진왜란 때 권 율 장군이 왜 군 웅 이 : i.'..·까 지 끌 고 와서는 오봉산 촛 불을 끄듯이 도륙을 내어 전 멸 시 켰 다 하 여 오 봉 촛 들 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오봉 촛골이 라고 부르 개 되 었다 한 다 . 오산미괜 1031 기 舒 )1l t I; 底 仁fii i 九 福 里 조선시대에 이곳으로 유배당한 한 선비가 산세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오동나무 릅 십고 일생 을 이 곳 에서 보내며 떠나지 않았으며 조정의
부 름 에도 응하지 않았다 하여 오산梧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오산 익 맨 1031-2 洪城郡 長谷 面 五聖里 오서산 烏 樓山 아래에 마 을 이 있으므로 오산烏山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오샨 차 팬 1031-3 靑 陽郡 木面 華 陽里 마 을 로 들 어 설 때에 는 다섯 군데의 모 퉁 이 를 돌 아야만 들어설 수 있 었다 하여 오 산모 탱이라고 부르 다가 변하여 오산五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오상回 1032 保 寧 郡 珠 山 面東 五 里 조선시대에 정 승 에 오 룰 만한 인 물 다섯 명이 은거하였다는 마을로 독립 투 사 백낙 관白樂 寬의 생지다. 오서산回 1033 洪城郡 廣 川 邑 내포 內 浦 를 막아 주 는 방벽으로 성인이 산다는 산이다 . 성인이 새 를 몰 고 눌 러앉 은 산이라 오성산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오서산烏樓山 이라고 부 른 다. 사실은 충청도에서 제일 높은 산인데 두번째로 지적 되어 가끔 운다는 전설도 전해오는 산이다. 오석산園 1034 扶餘郡 扶 除 邑 陵山里 백제시대에 신령한 사람이 살아서 일산日山과 부산浮山의 선인과 삼 령산으로 통하던 신선산이다. 검은 돌이 많아서 오석산烏石山이라고 불 렀다 한다. 오송정 回 1035 公州市 舟 尾洞 옛날 큰 길이 있었는데 이 길가에 노송老松 다섯 그루가 정자처럼 서 있었으므로 오송정五松 亭 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오수물 回 1036 錦山郡 郡北面虎時里 옻 오른 데 신효가 있다는 찬 우물이 있으므로 오수물이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오실回 1037 公州市梧谷洞 옛날에는 오동나무로 마을이 둘러싸였으므로 오실梧室이라고 부르던 마을이다. 오약골 回 1038 扶餘郡 世 道 面 水古里 옛날에 기와 를 구었던 기와가마가 있던 마울이라 오약골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오이샘 回 1039 天安市 九龍洞 물이 찬 옻샘이 있어서 옻오른 사람들은 이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면 효험이 있다 한다. 옻샘이 변해서 오이샘이라고 부르게 된 마을이 다. 오작실回 1040 論 山郡 伐谷面 檢 JI|里 마을에 까마귀와 까치가 많이 서식하는 마울이라 오작실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오정 回 1041 大田市 東 區 梧井洞 마을에 좋은 샘이 있으며 샘 근처에 큰 오동나무가 있으므로 오정梧 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선산 곽씨 善 山郭氏 한 사람이 이곳에 살면서 오물재五勿 齋 라 하여 오동나무 를 예찬하고 샘 물을 귀히 하였 다 한다. 오지울回 1042 公州郡 正安面大山里 마 을 에 오선위기五仙園基의 명당이 있다는 마울이다. 오학동回 1043 保寧郡 川北面 鶴 城里 마 을 이 오학가련형五 鶴 篤范形의 산세로 다섯 학이 날아와 있는 모습 같다 하여 오학동五 鶴 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오형제고개回 1044 牙山郡 松岳面 江長里 고개 다섯이 있는데 두 고개는 온양쪽에 두 고개는 예산쪽에 있고 가 운데 고개가 우뚝하여 그 중간에서 가장 높은 고개다. 옛날에는 도둑 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이 다섯 고개 를 오형제고개라고 부른다. 이 고개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온양 장날이던 날 밤에 이 고개에서 살인강도 사건이 일어났다 한 다. 한 사람은 온양쪽 첫 고개에서 칼을 맞아 죽었고 또 한 사람은 예산쪽 첫 고개에서 칼을 맞아 죽었으며 두 사람은 고개 한가운데인 고개에서 아무 상처 없이 죽었으며 다만 거기에는 술병과 돈 꾸러미 만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된 온양의 원님은 예산쪽 첫 고개 아래에서 살면서 주막을 경영하는 문첨지 를 용의자로 꼽았다. 그러나 문첨지는 선량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일체 릅 부인하였다. 그때 문첨지의 집에 붙여 살던 단양에 살던 김도령이 연구 끝에 세 도둑이 온양장에서 돈을 가진 사람을 데리고 오다가 온 양 첫 고개에서 죽이고 그 돈을 약탈한 후 세 도둑이 동행하여 이 고
개에서 한 사람을 시켜 주막에 가서 술을 가지-고 오게 한 후 두 도둑 이 합하여 술을 사오는 도둑을 예산 첫 고개에서 죽이고 그 술을 가 지고 이 고개에서 마셨는데 그 술에는 술을 사러간 도둑이 딴 욕심이 나서 술에다 독약 을 탄 것을 마시게 되어 모두 죽게 되었다고 해명하 였으므로 비로소 옥사가 풀렸다 한다. 이 를 오형제 살인사건이라 하 여 전해져왔고, 이에서 오형제고개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옥계 回 1045 大 田市 中區 玉溪 洞 금산쪽 태봉산에서 옥계수가 흐르는 그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옥 계玉 溪 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 옥금回 1046 唐津郡 合랸邑 玉琴 里 조선시대에 귀양 보내는 옥이 있었으므로 옥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옥녀동 回 1047 論 山 郡連 山面 天護 里 고려 태조 왕건 王建 이 후백제 를 멸망시키고 개태사開泰寺의 창건을 명하고 그곳의 고려군과 야영할 때에 군사들이 술에 취하여 잠이 든 뒤 옥녀 들 과 즐 겁게 놀 던 마 을 이라고 옥녀동玉女洞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옥마산 回 1048 保 寧郡 藍 浦面 帝 擇 里 신라가 망할 때 주인 잃은 옥마 한 필이 성주산을 배회하다가 이곳에 서 죽었다 하여 옥마산玉馬山이라고 부른다. 산에 신라 마지막 왕 경 순왕敬 順 王의 사당인 김부대왕사金傅大王祠가 있다• 옥미 回 1049 大田市 中 區 文化 洞 마을이 푸른 들 판에 자리해서 구슬처럽 빛난다 하여 옥미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옥살미 回 1050 大田市 西 區 龍 溪 洞 마 을 에 옥토망 월 형玉免望月形의 명당이 있다 하여 옥살미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옥삼박골 回 1051 扶餘郡 世 道 面 傾認院里 고려 때 고다지소古多 P月 t의 옥이 있었던 자리의 그 바깥쪽에 마을 이 있다 하여 옥삼외곡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옥삼박골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옥화동回 1052 公州郡 維 鳩 面 萬川里
옥녀봉 아래에 있는 마울로 옥녀가 옥녀봉에서 내려와 놀던 터라 옥 화동玉花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온동미괜 1053-1 瑞山郡 瑞山邑 溫石里 마을에 뜨거 운 물이 나오는 곳이 있으므로 온동溫洞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은동익괜 1053-2 舒川郡 板橋面 上佐里 마을에 겨울에도 뜨거운 물이 나오는 샘물이 있으므로 온동溫洞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은동 ° 回 1053-3 洪城郡 造項面磨溫里 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어 따뜻한 마을이 라 온동溫洞이 라고 부른다. 을목 回 1054 論山郡 鍊武邑 東山洞 마을 지형이 오리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오리목이라고 부르다가 변 하여 올목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옹안回 1055 禮 山郡 鳳山面 雍安里 마을 주변에 다섯 개의 바위가 있어서 항상 편안하게 낙樂을 누려왔 다 하여 오암이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옹안甄安이 라고 부르는 마을이 다. 옹암리 回 1056 洪城郡 廣 )II 邑 雍岩里 마을에 독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옹암리甄岩里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옻밭골回 1057 舒川郡 馬西面 南田里 마을 주변에 옻나무가 많으므로 옻밭골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와동回 1058 論山郡 上月面 上道里 기와집이 많은 마을이라 와동瓦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와매 回 1059 舒川郡 板橘面 文谷里 마을에 큰 매가 살고 있어서 기왓장을 물어다가 둥우리 를 만들고 살 았다 하여 와매라고 부른다. 큰 매 를 키우며 살았다는 꼬부랑할머니 의 전설이 전하는 마을이다. 왁새말 回 1060 扶餘郡 場岩面 店上里 왁새(왜가리)가 많이 날아오는 마을이라 하여 왁새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완성 땐 1061 保寧郡 循山面 豊鷄里
옛날에 고을 원님이 앞내에서 빠져 죽게 되어 그 후손들이 귀신을 쫓는 큰 제 를 올렸던 마 을 이라 귀전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원침, 완성 이라고 부 른다 한다. 왕골回 1062 牙山 郡 屯浦面 新旺里 마 을 에서 큰 인 물 이 나온다 하여 예전부터 왕골이라고 부르개 되었 다 한다. 왕대 回 1063 論 山郡 賜村面鳴岩里 왕이 태어날 터가 있는 마 을 이라 왕대王袋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왕동 맨 1064 洪城郡 洪城邑鶴鷄里 통일신라시대에 장자長者인 세도가가 살았다 하여 왕동旺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왕성동땐 1065 論 山郡 可也谷面 釣 亭 里 조선시대 태조太祖가 쉬어갔다 해서 왕성동旺城洞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왕시 랑이 回 1066 瑞山郡 音岩面 道堂里 고려 때 왕시 랑王侍 RB 이 살았다 하여 왕시 랑이 라고 불러 온다. 왕우래 回 1067 論 山郡 上月面 地境里 백제 22 대 문주왕文周王이 사냥을 나왔다가 이곳에서 자는데 좌평 해 구解仇가 살해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원통히 여겨 왕이 또 오면 마을 에서 지키겠다는 뜻에서 마을을 왕우래王又來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왕자봉덴 1068 天安市 留t1i情] 산 모양이 왕王자처럼 생겼다 하여 왕자봉王字峯이라고 부른다. 고려 태조 왕건王 建 이 예방保方의 말을 듣고 이 산에 올라와서 지세 를 살 핀 후 이 곳에 성 을 쌓고 천안도독부天安都督府 를 두어 삼국을 통일하 는 전초기지 를 삼았다• 왕좌산回 1069 大田市 西 區 九岩洞 조선 태조가 신도안을 다녀오는 길에 이 산에 앉아 태종이 이끄는 군 사들이 진터벌에서 군사훈련을 하는 것을 보았다 하여 왕좌산王坐山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왕재回 1070 洪城郡 結城面 星湖里 이 산 명당자리에 묘 를 쓰면 자손 중에 왕이 나온다 하여 왕재臼玉寺]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왕지동땐 1071 洪城郡 洪東面秀蘭里 옛날에 조선 태조가 등극 을 한 다음 이 고장에 낙향해 있던 오경사에 게 출 사出仕하기 를 간청하였으나 오경사가 끝내 거 절 하므로 태조가 그냥 돌아갔다 하는데 왕이 찾아왔던 마 을 이 라 왕지 동 旺芝洞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왕지산圈 1072 牙山郡 陰峯 面 衣食 里 산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옛 날 에 왕이 이 산에서 제 를 올 렸다 하여 왕 지산王池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의암골回 1073 牙山郡 松岳面 外 岩 里 조선시대에 이곳에 역이 있어서 말 을 가두어 먹이던 곳 이었으므로 외양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의암꿀이 되었다. 조선시대 말의 성 리학자 이간李束이 이 곳 에 살면서 그의 호 를 의암絲 岩 이라고 부르면 서 외암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의연도멩 1074 保 寧 郡 蒸川面 外炯 島 里 황해 멀리 떨어져 있는 섬으로서 육지에서 보면 바 깥 으로 연기가 나 오는 곳이 있다 하여 외 연도外 煙島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요동回 1075 論 山郡 t島 村面 半 岩 里 큰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에 위치하여 임진왜란 때는 피난지로 유명하였다. 중국 요동 堯 洞처럼 피난골이라 하여 요동 堯 洞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요란回 1076 牙山郡 陰 峯面 新井里 옛날 요로원이 있었으며 장이 섰으므로 요로원, 요로장, 요로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요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요랑바위땐 1077 公州郡儀堂面 松 먀 里 마을에 요랑바위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로 이어지는 지형이 상 여 喪 與가 나가는 요랑과 같다 하여 요랑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요화리回 1078 燕岐郡 西面 起龍里 옛날에 요화방 堯 化坊이 있었던 마을이라 변하여 요화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욧回 1079-1 公州郡儀堂面 要龍里
마을에 요당 麥塘 이라고 부르는 큰 못이 있어서 이에 연유하여 욧골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욧훈땐 107 9- 2 論山郡 魯城面 竹林里 마을 뒤에 호암산虎岩山이 있으며 마을이 난형체卵形體라 하여 난동 卵洞이라고 부르다가 윤석두尹錫斗라는 유지가 욧골이라고 부르게 하여 그리 불러오는 마울이다. 욧골이괜 1079-3 公州郡 正安面 內門里 옛날 권참판權參判이란 사람이 살면서 상스러운 이름으로 마을 이름 올 부르면 피난을 간다 하여 용동龍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변하 여 욧골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욧골이맨 1079-4 燕岐郡 全義面 小井里 마을에 가기 위해서는 높은 고개 를 넘어야 하므로 마을에 가기가 힘 드는 곳이라 하여 욧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용강回 1080 洪城郡 金馬面 龍典里 하늘로 용이 을라갔다는 용천龍泉이 마을에 있으므로 용강龍尙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용경대 回 1081 論 山郡 江係邑 北玉洞 금강변에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용경대라고 부른다. 바위에는 용 경 대 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강경포江兼浦로 드나드는 사람들 이 이곳에서 용왕제龍王祭 룰 지내는 바위로서 용왕제를 지내지 않으 면 흉조가 따른다 하여 꼭꼭 지낸다. 용곡 回 1082 靑陽 郡 化城面龍堂里 조선시대에 용곡역龍谷驛이 있었던 마울이라 용곡龍谷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용구말 回 1083 大田市 東區 龍田洞 마을 지형이 마치 용의 입처럽 생겼다 해서 용구말[龍口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용구미回 1084 論山郡 夫赤面 德坪里 마을 땅속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꿈 틀 거리고 한 마리의 용꼬리가 마 을의 지형을 이룬다 하여 용구미龍九尾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용당이 EiJ 1085 牙山郡仙掌面佳山里 마을 뒷산에 제사를 지내는 용당龍堂이 있으므로 용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용두원 回 1086 牙山郡 松岳面巨山里 조선시대에 역에 딸린 용두원龍頭院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죽 선조 宜祖 26 년(1 593) 에는 왕세자가 충청도의 상황을 살피기 위하여 온양 에서 공주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접심 을 들 었다 한다. 용두원이 있었 으므로 마을 이 름 도 용두원이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 용마지 00 1087 天原郡 並J I| 面 龍頭里 숙종肅宗 때 참판에 오른 유광익 柳光 ¥k 이 꿈에 이 못에 서 말이 나와 용으로 화化하는 것을 보고 용마지龍馬池라고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자손들에겐 이 름을 지을 때 꼭꼭 용龍자 를 넣게 하여 그 자손들 이 대대로 크게 번창하였다 한다. 용머 리 回 1088 禮山郡 光時面龍頭里 마을의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용머리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용목동땐 1089 公州郡 維鳩面 f k g射里 골짜기에 자리한 마 을로서 마을 주변에 나무숲이 우거져서 어둠침침 하여 마치 용의 안식처처럼 생겼다 하여 마 을을 용목동it木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용문이 Bl 109 <) 公州郡 正安面 內門里 옛날 이곳에 살게 된 윤씨가문에서 한 선비가 대과大科에 급제 하였 으므로 용문에 올랐다 하여 마 을을 그때부터 용문이 라고 부르게 하 였다. 용반回 1091 大田市 西區 lll 鳴派] 용이 땅속에서 따뜻한 기후에 놀다가 이곳에 나와서 는 밥상을 받는 다 하여 이 마을을 용반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용받 回 1092 扶餘郡 扶餘邑 龍井里 백제시대에 의자왕의 폭정이 계속되자 많은 용 들 이 이곳에 모여 꿈 톨- 거리고는 백마강을 올라 다니며 조화를 부렀다 하는데 용이 발을 이 루 었던 마을이라 용전龍따 용받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용배 回 1093 靑陽郡 꼽陽邑 邑內里 마을에 용이 살다가 하 늘 로 승천한 바위 가 있으므로 용바위 라고 부 르다가 변하여 용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용봉산回 1094 洪城郡 洪北面 산이 여덟 봉우리로 되어 있는 산으로 용의 머리처럽 생겨서 용봉산 龍山이라고 부른다. 여덟 봉우리에는 모두 백 년을 수도하는 이무 기가 살고 있으며 백 년이 지나면 용이 되어 승천한다 하여 신성지로 꼽는 산이다. 용산園 1095 公川郡 新豊面龍水里 산이 용의 형국이어서 그 산 속에는 용이 사는 용못이 있다 하여 용 산龍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용소봉回 1096 公州郡 長岐面 壯岩里 산봉우리에 용이 승천하였다는 3 칸 정도의 큰 못이 있으므로 용소봉 龍i B 峯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용수말回 1097 論 山郡 豆磨面 g~所里 지형이 용수와 같으며 석벽에서 솟아나오는 우물이 맑고 신선하여 이 우물이 있는 이 마 을을 용수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용암回 1098 保 寧郡 8멉 山面 龍水里 마을 북쪽으로 용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는데, 바위 앞쪽에 용암 龍岩이란 큰 글 씨가 음각되어 있다. 옛날부터 마울에 길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이 바위에서 용이 승천하였다 하여 바위가 있는 이 마을을 용 암龍岩이라고 부른다. 고려 때의 석학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사우 가 있는 마을이다. 용주산 ml 1099 公州郡 利仁面 龍城里 산의 모양이 용의 구슬 또는 용의 이마와 같다 해서 용주산龍珠山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용지당들回 1100 靑 t島 郡 南 陽 面 白琴里 들에 큰 소沼가 있는데 이 소에는 용이 살고 있다 하여 용제당龍祭堂 울 짓고 매년 제사 를 지냈다. 재사 를 지내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는 들 로 용제 당이 있는 들이 라 용지 당들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용태울回 1101 大 德郡 祀城面 山直里 옛날에 오랜 세월을 수도한 이무기가 용이 될 수 있는 단한 번의 기 회가 돌아왔다. 하늘에서 은하수가 내려오므로 그 물줄기룰 타고 하 늘로 올라가는데 때마침 마을에 사는 임신한 산모가 이무기 륜 보고 는 용이 올라간다 라고 소리치므로 은하수가 끊어지고 이무기는 땅으
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한다 . 이무기가 떨어진 곳에 마 울 이 생겼으므 로 용태 울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용호석 回 1102 錦 山郡 濟原 面 JI I 內 里 강변에 두 개의 바위가 있는데 남 쪽 바위에 는 용상 龍相올 북쪽 바위 에는 호상 虎 相 울 그린 바위다 . 고려 31 대 공 민왕 恭愍王 이 이 부근 영 국사 寧國寺 에 피난 을 했을 때 공주 를 잃고 천 내 뒷산 에 장사 룰 지내 고 들 일 을 하다가 평 란이 되었으므로 그대로 방치 해 둔 것을 부 락민 둘 이 세운 바위 죽 석상이다 . 이 바위 석상 을 용 호석龍虎石 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 용화대 땐 1103 公 州 郡 利仁面 盤 松里 마을에 때때로 용이 승천하는 용화대 龍 化 瑟 란 바위가 있으므 로 그 바 위에 연유하여 용화대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용화산 園 1104 牙山 郡 陰峯 面 山 洞里 산 중턱에 굴이 있는데 24 시간 을 이어 들 어가면 좀 넓은 봇 이 나오나 다시 계속해서 그 굴 이 이어져서 굴의 끝 을 알 수 없 을 정도로 굴이 길다. 구전에 따르면 황해 바다와 통해 있다고도 하고 용이 살았던 굴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이 산 을 용화산 n a 化山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우걱골@1J 1105 天 原 郡 修 身面 長 山 里 마 을 의 지형이 삼태기같이 우묵하게 들 어앉아 있으면서도 숲 속에는 쇠 뿔 같은 형국이라'-하여 우걱 골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우금고개 回 1106 公州市 金 罰洞 옛날에는 이곳에 도둑이 많아서 밤에 소 를 몰 고 가는 것 을 막았다 하 여 우금고개, 우금치 [牛金 時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고종 31 년 (18 94) 11 월에 동학군 東浮軍 이 이 고개에서 패전한 고개라 한다. 우러내 回 1107 洪城郡 長 谷面 月 溪 里 마 을 가 를 흐르는 냇 물 이 급류 를 이루며 그 내 호르는 물 소리가 우뢰 와 같았다 하여 이 곳에임한 마 을 을 우러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우럴목 @B 1108 瑞山郡 泰 安邑 漁 臣 里 바다에 있는 목인데 두 육지 사이에 있어서 조수가 이곳 을 지날 때에 는 소리가 난다 하여 우럴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우렁골 땐 1109 瑞山郡 瑞 山邑 邑內里 울창한 소나무가 많아서 바람이 불면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오는 마 을이라 울음골 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우렁골이라고 부르는 마 을 이 다. 우려울回 1110 燕岐郡 錦南面 永 袋里 마 울 옆의 시내가 여 울져 서 물이 소리를 내며 홀러가는 마 을 이라 우 려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우무도 園 1111 唐津郡 石 1'9 面 i懿芝島里 섬의 모양이 암소가 꿇어 엎드린 형국이며, 맞은 편에 있는 작은 바 위 가 송아지 름 닮았다 하여 우모도牛母 島 또는 우무도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우산봉園 1112 公 州郡 反il1 j面 산 모양이 우산과 같 다 하여 우산봉雨企峯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이 산 을 위하 고는 세 사랑侍郞을 낳았다 하여 때로는 삼시랑봉이라고도 부른다 한다. 우적골回 1113 論 山郡 豆磨 面 龍洞里 옛날 구년지수九年之水에 우임금이 이산에 와서 산재山祭 률 지냈다 하여 우적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운강回 1114 燕岐郡 全義面 災堂 里 구 름 이 항상 산처럼 떠서 마을을 내려다 본다하여 운강 雲 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운정回 1115 公州郡 寺谷 面 雲 岩里 구 름 재 아래에 있는 마 을 인데 마을에 운중반월형 索 中半月形의 명당 이 있다 하여 운정 雲亭 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 운주산回 1116 保 寧郡 周浦面 寬倉里 산이 높아서 구 름 이 항상 머물러 있는 산이라 운주산 困 住山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울모기回 1117 天原郡木川面 新溪里
고개 마루에 찬 우물이 있으므로 우물목이고개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울모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올바위 (I) 回 1118-1 天原郡 並 )|I 面 桃 源 里 바위가 병풍처럽 솟아 있는데 이곳에 굴이 있어서 사람이 말을 하며는 울려나오므로 울바위라고 부 른 다. 『대 목 지 大麗誌』 에 따르면 이 바 위에다 불을 때면 사흘만에 그 연기가 작성산 꼭대기에서 나온다 한 다. 울바위 악 괭 1118-2 公州郡寺谷面 佳稿里 신라新羅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慈 藏律師 가 절 터 를 찾 아 이 곳까지 와 서 본죽 산천됨이 하도 허무하므로 이 바위에 올라 앉아서 한없이 울 었다 하여 울바위라고 부 른 다. 그후 그는 다시 생각하고 서쪽 산으로 올라가서 마곡사터 를 잡았다고 한다. 울바위 이 맨 1118-3 公州郡 反浦面 麟埋. 세조世祖가 동학사에 있는 초혼각招魂 I 싸 l 에 참배하고 돌 아가 는 길에 울바위에 이르러 슬픈 마음 을 금할 길 없어 크게 울며 , 차마 떠나지 못하고 걸음 을 멈추었다고 해서 울바위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웅바위 (j) 回 1118-4 牙山郡 新昌面 昌岩里 옛날에 전염병이 심하여 한 집에서 아홉 사람이 죽 으므로 장사 를 지 내고 오면서 단 한 사람 남은 가 족 이 너무 서러워서 이 바위에 앉아 한없이 울었다 하여 울바위라고 부른다. 지금도 바위 근처 에 아홉 개 의 무덤이 있다. 울안이 回 1119 公州郡寺谷面花月里 마을에 운중반원형 冀 中半月形의 명당이 있다는 마을이다. 마을이 울 안쪽에 위치해 있으므로 울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움골回 1120 燕岐郡 東面 老松里 조선시대 초에 생긴 마을로서 마을이 생길 때 움막부터 시작되었다 하여 움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웅개 回 1121 保 寧 郡 蒸川面 校成里 옛날에 곰이 살았다는 산이 있으며 그 아래에 바다가 펼쳐져서 웅장 하다 하여 옹개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웅도몌 1122 瑞山郡大山面 熊島里 섭의 지형이 곰과 같다 하여 옹도熊島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웅전回 1123 論山郡 恩津面 土良里 이곳에 처음 정착한 사람이 산에 올라가 지형을 살펴본축 곰이 길을 가다가 쉬어갈 듯한명당이 있으므로 여기에 집을 짓고 웅전熊田이라 고 불렀다 한다.
웅진동回 1124 公 州 市 熊津洞 곰나 루 라고도 부른 다 . 옛 날 암 곰 과 사람이 살 았다는 전설 이 전해오 는 나 루 터에 있 는 마 을 이다 . 백제 百濟 21 대 개로왕 21 년 (475) 9 월에 고 구려 高 句麗 2 0 대 장 수왕이 군 사 3 만 명 을 이끌고 한성에 쳐 들 어 와 서 개로왕 을 피살 하 였으므로 부득 이 그 아 들 문 주 왕文周王이 죽 위하 여 왕도 로 정하 고는 이 곳 으 로 와서 금 강가에 용왕제 를 지내고 용왕 신 을 모시게 한 후 웅진熊깁 t 이라 하였다. 지 금 은 옹진동 熊津 洞이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 다 . 원계산回 1125 大田市 西 區 댔 山 洞 삼한시대에 마 한 馬 십t 의 부 락사회국가 중의 하나인 신혼국이 있었던 빈계산 아래에 있 는 마 을 이었다. 마 을 이 오래된 탓으로 원계산元 鶴 山이라 고 부 른 다 . 조 선시대에 사화 士禍 에 몰 린 선비 들 이 몸 을 감 추 어 살 았던 곳 으 로 첩첩 산중에 있는 마 을 이다.조선시대에 관의 냄새 가 풍기 지 않았던 산나 물 의 마 을 , 성 리 학의 마 울 로 통하는 마 을 이 다. 원골回 1126 論 山 郡 上月 面 山 城里 마 을 에 원님이 살 았다 해서 원 골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원댓골回 1127 燕 岐郡 南 面 訥旺里 조선 영조 英祖 4 년(1 728) 에 신천영申天 永 이 난 을 일으켰 을 때 원님이 이 곳 에서 피난하였으므로 원댓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원두째 回 1128 瑞 山 郡 瑞 山 邑 石南里 옛 날 에 원院이 있었던 집 머리쪽에 마 을 이 있으므로 원두째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원부동 回 1129 燕岐 郡 西面 釜洞 里 옛날에 질그 릇 가마가 있어서 그 가마 를 묻었던 원 마 을 이라 원부동 元釜 洞 이 라고 부르거卜 되 었다 한다. 원산도園 1130 保 寧郡 !lfJ II 面 元 山 島 里 원래는 고만도 高만島 라 불 렀었다. 인류의 정착과정에 대한 연구가 따 를 섭이다. 바다 가운데 원산이 있다 해서 원산도元山 島 라 부 른 다. 고려 제 25 대 충렬왕 때 대사성大 司 成 최해 崔 混 부자가 이곳에서 귀양 살이 를 하면서 시 를 지어 인 물 과 풍습 을 읊 었다 한다. 원성제 回 1131 燕 岐郡 西面性 齊里
명신名臣 홍이경 洪履 慶의 손인 홍우洪禹가 이곳에서 살 았 는 데 그의 호 가 성재性 齊 였다. 명유 名術 성재가 사는 마 을 이라 원 성 재 原 性 齊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원수산떠 1132 燕岐郡 南 面 葛 없 里 산 봉우리가 둘 로 되어 있어서 형 제 봉 이라고도 부른 다. 고려 충 렬왕 忠 烈 王 17 년 (1291 ) 에 한 회 유 韓希應. 와 원나라 장수 설도간薛 OO 干 , 나 만알대왕那 떴万大王 이 삼 군 을 거느리고 이 곳 에 진을 치고 크 게 침 입하 는 합단 哈 丹 군사 를 쳐 서 이겼 는 데 그때 원수 元 帥 둘 이 군 사 를 이끌고 진 을 쳤던 산이 라 원수산 元 帥山이 라고 부르 게 되 었다 한 다 . 원전골 回 1133 靑陽 郡 大特 面 炭井里 옛 날 에 화전火田 울 하며 사람 들 이 살 던 원 마 을 이라 원 전골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원전물@] 1134 保寧郡 蒸 川 面 蘇城里 산에서 나오는 물 로 물 의 원 천 에서 나온다 하여 원 천물 이라 부 르다 가 변하여 원전, 원전 물 이라고 부른 다. 여 름 에는 차고 겨 울 에는 따 뜻한 물 로 조선시대에는 이 곳 바닷가에 진 을 쳤던 충청수 사忠 淸 水使 가 마셨던 물 이라 한다. 원호 回 1135 燕岐 郡 南 面 松院 里 원터에서 멀리 금강 錦 江 가에 있는 마 을 로 마 을 이 마치 먼 곳 에 보이 는 호 숫 가의 마 을 같다 해서 원호 遠 湖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월경 回 1136 天安市 新堂洞 예전에는 이 마 울 이 직산현 稷 山 縣 과 천안군天安 郡 의 경계가 되어 있 어서 한 집이 두 고 을 에 걸쳐 있었으므로 천안의 방에서 자고 직산稷 山 부 엌밥 을 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렇게 경계가 되는 마 을 이라 월 경越境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원계 61 1137 洪城 郡 洪 城 邑 月 山里 홍주의 진산인 일 월 산日月山 계곡의 고운 산수와 함께 자리한 마 을 이 라 월계月 溪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원도rn:] 1138 保 寧 郡 蒸JI|面 孝子 島 里 섭이 반달처럽 생겼다 하여 달월이, 월도月島라고 부른다. 섬에는 밭 이 없고 육수가 없어서 육지에서 길어다 마시는데 섬에 가구가 15 호 이상 살게 되면 불 운이 온다 하여 15 호 이상은 집이 늘 지 않는 섭이
다. 월동回 1139 燕岐郡 西面 月 河里 조선시대 말 에 민씨閔 氏 중의 한 세 도 가가 한양 을 버리고 이 마 을 에 와서 달을 보 며 풍류 를 즐겼던 마 을 이라 월 동月洞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월명산@] 1140 扶餘郡 忠 化 面 五德里 매년 정 월 대 보름날 에 는 마 을 사 람들 이 달 맞이 를 하는 산이라 월명 산月 明 山이라 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월봉산回 1141 天原郡 成歡邑 成 歡里 산의 모 양이 달처럽 생 겼 다 하여 원봉 산 月峰 山이라고 부 른 다. 조선 고종 31 년 ( 1 894) 6 월 에 청나라 제 독 섭지 초葉 志超가 군사 를 이끌고 아 산만으 로 들 어와 성환옵成歡邑 신가리 몰 왜보에서 일본군 송기대위 松崎大尉 부 대 를 섭멸한 후 이 산에 진 을 쳤는데 왜군이 적은 부대로 북 쪽 소 사 들 에다 진을 마주 쳐서 청군 i ~ f'.,JI 에게 허약한 모양을 뵈게 하고 몰 래 밤 을 타서 대군 을 몰 아 동쪽으로 입장면笠 場 面 도하리 산 정리와 남 쪽 매 주 리와 서쪽 우신리 송덕리에 걸쳐 포위한 후 새벽 밥 을 먹는 청군 淸軍을 들 이쳐서 청군이 크게 패한 산이다. 월성산回 1142 舒 川 郡韓 山面 羅稀 里 산에 비치는 달 빛이 중국의 월 성산月城山 을 연상케 할 만큼 수려하다 하여 월 성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월실 回 1143 洪城 郡 長 谷面 大峴 里 옛날 마 을 에는 장래가 촉 망되는 선비가 있어 풍류있고 지조있고 절 개는 하 늘 갇아서 그는 벼 슬길 에서 절 개 때문에 죽었으나 그 롤 따르 는 인 물 이 더욱 속 출 하여야 한다는 뜻에서 이 마 을을 월실月實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월아성 回 1144 舒川郡 西面 月湖里 마 을 의 지형이 기러기의 날개처럼 생겼으며 겨울 달밤이면 기러기의 울음소리도 들을 수 있다 하여 월아성月郞城이라고 부르는 마을이 다 . 월정 回 1145 燕 岐郡 西面 登 流里 조선시대에 판서判 안 에 오른 이승순李承純이 이곳에 낙향하여 살게 되므로 그의 호號 를 따라 월정月 亭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원천回 1146 洪城郡 洪城邑 松月里 마운 앞으로는 내가 호 르 고 마을 뒤에는 달과 같은 산이 있다 하여 원천甲 II 이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위례성 [ill 1147 天原郡 笠楊面 온조溫祚가 처음 나라 를 세운 성을 위례성慰 禮 城이라고 부 른 다. 온조 溫祚가 그의 형 비류 · I1 t召t와 어머니 소서노召西奴와 함께 남쪽으로 내 려와서 비류(1 1; i 1 t는 미추홍, 죽 지금의 밀두천密頭川에 나라 를 세우고 온조는 위례성에 그 를 따라온 조간島干, 마려席黎 둥 열 신하와 함께 나라 를 세웠다. 그러나 비류 갭 t召t는 수토가 맞지 않아 고생 하던중 그 의 아머니 소서노召西奴가 비교적 비옥한 위례성으로 작은 아 들 온조 를 찾아가 비류백제와 온조백제가 합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온조 신 하의 반대로 그의 어머니 소서노가 살해되고, 비류백제와 온조백제 는 전운이 감돌아 온조백재는 북쪽 한성으로 옮기고 비류백제는 남 쪽 옹진態겹t으로 옮겨 각기 다른 나라 를 세웠다. 비류백재는 해양국 으로 발돋음하여 다른 땅의 나라가 되었으며 온조백제는 뒤에 백제 의 명맥을 잇게 된다. 그 온조가 처음 나라 를 세운 산을 위례성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위사티 回 1148 燕岐郡 南面 燕岐里 조선시대에 벼슬에서 물러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라 위사티라 고 부른다. 유독벌 回 1149 唐津郡 貞 美 面 天宜里 마을이 있는 곳의 지형이 꼭 어린 송아지가 노는 형국이라유독벌〔幼 積坪〕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유량동回 1150 天安市 留槿洞 고려 태조太祖 때 후백제군과 싸우기 위해서 군량을 쌓아 두었던 마 을이라 유량동留槿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유부도卽 1151 舒川郡 長項邑 松林洞 임진왜란 때 어떤 부자가 피난을 갔는데 아들이 피난한 섬을 유자도 有子島, 아버 지가 피 난간 섭을 유부도有父島라 하게 되 었다. 유왕골 回 1152 天原郡 木川面 德田里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가 위례성에 도읍을 하고 봄, 여름에는 이곳에 서 지내면서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왕이 머
물렀던 마 을 이라 유왕골담/王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육백고지 回 1153 5t\I U RI: 南 .::::. m i 大 陽里 산의 높이가 약 600m 가 된 다 해서 육백고지라고 부른다. 6·25 동란 후 괴뢰 군 패잔병과 공산분 자가 합동으로 이 산 을 점령하여 약 탈 과 살 상을 일삼던 그 둘 의 소굴로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 많 은 피의 전투 룰 하였던 산이다. 육판재@l 1154 牙山郡 陰峯面銅嚴里 산에 여 섯 판서f 1 J m 가 났다는 명당이 있는 고개라 하여 육판재라고 부르개 되었다 한다. 육폐리 回 1155 論山郡 可 也 谷而 菩 田里 산속에 있 는 마 을 인데 세상살이 하는데 굳이 벼술길을 고르는 것보 다 스스로의 팔 자 를 개척하여 부러울 것 없이 사는 것이 최상이라고 여기던 선바가 모여 살 았던 고향이라 하여 육한 六 閑이라고 부르다가 육페 리 라고 부르는 마 을 이 다. 윤치 멘 1156 扶餘 RI : 世道面花樹里 마 을 뒷산의 지형이 꿩이 몸을 숨기는 형국이라 은치 臣 雄라고 부르 다가 변하여 윤치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은고개 回 1157 燕岐郡 南面 高 亭 里 조선시대 말에 곽정승郭政丞이 이곳에 선친의 묘를 마련하고 집으로 돌 아갈 때 초상길에 따르던 스님이 말하기를 지금 곽정승이 끼고 있 는 은가락지 를 부처님께 시주하면 자손대대 부귀영화 를 누릴 것이라 고 하였으므로 은가락지 를 스님께 시주하였다. 그후 곽정승은 번창 하였고 영화 룰 누렸다 하여 선친의 묘 를 쓴 고개 를 은고개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은동골回 1158 論 山郡 光石面 1.5 山里 파평 윤씨坡平尹氏의 사람 들 이 많이 살던 마 을 이라 윤동尹洞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은동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은룡回 1159 公州郡 長岐 面 隱龍里 옛날 마을에 불길한 일만 일어나므로 지해로운 장부 한 사람이 이무 기가 해 를 주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 래서 그 이무기 를 없앨 양으 로 이무기가 산다는 냇물가에 가서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 이무기가 불길한 일을 시작하려 하므로 격투 끝 에 그 장부는 죽었는데 이무기
도 승천을 못하고 땅속에서 죽었다 한다. 다시 다른 이무기가 그 냇 물에서 살게 되었으나 그 마을에 불길한 일은 없어지고 길한 일만 생 기게 되었다 한다 . 그후 그 마을에 승천할 용이 냇물속에 살고 있다 하여 은룡隱it이 라고 부르는 마 을 이 다. 은석산回 1160 天原郡 並川面並川里 산이 댓순같이 수려하고 수석이 아 름답 다 하여 은석산 5長 石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의동回 1161 天原郡 並 )II 面 冠星里 산의 모양이 마치 옷을 입은 것 같다 하여 의동衣 洞 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의접 回 1162 瑞山郡 古南面古南里 옛날에 이 부근에서 청어가 많이 잡혀서 경기가 좋을 때 뱃사람들의 옷 을 파는 의점衣店이 있었다 하여 의점, 옷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의총回 1163 錦山郡 錦城面 義塚里 임진왜란 때 싸우다가 죽은 700 여 명의 무덤가에 있는 마 을을 의총義 塚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이리재 回 1164 錦山郡 郡北面 外釜里 고개가 매우 험하여 이리때가 많아서 일흔 사람이 모여야 넘어다녔 다 하는 고개라 이리재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배산園 1165 唐津郡 唐津邑 沙器所里 산둥성이가 터져서 이무기의 둥처럽 생겼다 하여 이배산競背山이라 고 부른다. 한재가 심할 때 산동성이에 돼지머리 를 놓고 기우제 를 지 낸 후 그 돼지머리 를 굴려서 아래에 있는 용못으로 떨어지게 하면 비 가 온다고 한다. 이빠진산園 1166 天原郡 木川面 交川里 산봉이 마치 이가 빠진 것처럽 생겼으므로 이빠진산이라고 부르며 두 봉우리가 바위로 되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수리처럼 무섭게 생겼 다 해서 취암산이라고도 부론다. 옛적에 이곳이 바다였을 때 사기그 릇을 싣고 가던 배가 부딪쳐 파선되었는데 산봉에 그때의 사기조각 이 아직도 남아있다 하여 배너머산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성산園 1167 燕岐郡 全東面 松城里 고려 때 태조 를 돕고는 공신에 오른 나루지기였던 전의 이씨全義李氏
의 시조 이도李悼가 살았던 산이라 이성산李城山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이울回 1168 舒川郡 韓山面 竹村里 고려 말기 잡은 三裕의 하나인 목은牧훈. 이색李稿이 태어난 마을이다. 그가 태어나기 삼 개월 전부터 이 부근의 나무는 말라죽더니 그가 태어난 뒤에는 다시 생기 를 되찾게 된 마을이라 고촌佑村이라고 부 르다가 이울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인바위 땐 1169 瑞山郡 았山面 龍합里 사면이 돌로 누벼져 있으며 이끼가 끼어 있는데, 옛날 마한시대馬韓 時代에 상왕 采王 이 말斗만한 인장印 章윤 l:l L 위 속에 감추어 놓았다 하 여 인바위라고 부르는 바위다. 그후 이곳에 보물이 감추어져 있다는 세간의 전설이 있어서 한 원님이 그 보물을 꺼내기 위하여 석공을 시 켜 이 바위 를 떨어내려고 하였는데 석공이 이 바위 근처에 도착하여 일익을 시작하기도 전에 별안간 구 름 이 밀려오고 천둥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퍼부었으므로 돌일을 중지하게 되었다. 그후 지금까지 안 전한 바위로 내려온다 한다. 인산回 1170 舒川郡 舒JI I 邑 郡司里 마을의 지형이 인자仁者가 나을 형국이라 하여 인산仁山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인홍 멘 1171 洪城郡 金馬面 仁山里 옛날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이곳에 살게 된 한 선비가 있었는데 그가 인仁올 강조하며 덕을 쌓아 마을을 홍하게 하였다 하여 인홍仁 興이라고 부른다 한다. 일음골回 1172 論 山郡 連山面 漁隱里 마울의 사방을 산이 두르고 있어서 해가 늦게 뜨고 일찍 넘어가서 햇 빛이 가려지는 시간이 많은 마을이라 일음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임존성 ffiJ 1173 ~山郡 大興面 이 산은 백제百濟시대에 북쪽의 주성主城처럽 높게 솟았다 하여 임존 성任存城이라고 부르는 성이 있는 산이다. 백재부흥군百濟復興軍인 흑치상지黑齒常之와 지수신迎受信 장군을 주축으로 백제부흥을 꾀했 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는 흑치상지는 당나라에 항복하고
당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게 되었으며 지수신은 고구려高句麗로 도주 해 버 렸으므로 결국 군 종 만 남게 되었으므로 군 졸들 은 할 수 없이 싸 울 가력을 잃고 합덕정台從갑平으로 내려가서 둔병屯兵이 되었다. 이들 은 항복을 하지 않았다는 긍지 물 지닌 백성이라고 자랑한 산이다. 산 에는 묘순바위가 있어서 성 쌓기와 철신의 전설이 있으며 백재 이후 는 이곳 대홍군大興郡의 진산이었던 산이다. 입바위 回 1174 天原郡 劃 lh jjj t J t,! ?. 里 바위가 입을 벌리고 마을 을 향하여 서 있으므로 입바위라고 부른다. 풍수설에 따르면 마을의 기운을 빨아버린다 하여 마을 사람들이 날 을 정하여 장차 없애버리려고 하였는데 이때 마침 그 마 을 에 사는 김 도혁金道視이 서산 원이 되어 있었는데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간청 하기 를 나는 입바위 산신인데 마을 사람 둘 이 없애려고 하니 그대가 구해달라 하므로 그 꿈을 꾸고는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곧 돌아 와서 바위 를 부술 것을 중지시키고 글을 지어 재사 룰 지내니 마을에 더욱 많은 길복이 쌓여갔다 한다. 임포回 1175 扶餘郡 l 칼 (t面 筑li I i里 금강가에 있는 마 을 로 지형이 삿갓처럼 생겼다 해서 입포笠沮i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말에 30 여 년간 충남에서 유일하게 해상시장이 열 렀던 금강가의 포구였다. 잉아回 1176 牙山郡 松岳面 i I 長里 마을 지형이 마치 배 를 에 잉아 를 건 것처럼 생겼다 하여 잉아라고 부 르는 마을이다. 잉어못 OO 1177 天原郡 北面 沙 潭里 조선 성종 때 효자 서만徐菓의 이버지가 병이 들었는데 겨울에 잉어 를 먹고 싶다 하였으므로 이 못가에 와서 무 릎 을 꿇고 하느님께 정성 껏 빌었더니 갑자기 얼음이 깨지면서 잉어 네 마리가 튀어 오르므로 이릅 잡아올려 아비지한테 두 마리는 약재로 드렸더니 병이 나았으 므로 두 마리는 도로 못에 넣었다 한다. 그로부터 이 못을 잉어못 또는 이어담煙魚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 자각산 回 1178 瑞山郡 大山面五池里 황해에 있는 마 을 로 해가 질 무렵에는 낙조落照의 보라빛이 아름다 운 마 을 이라 자각산紫閣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짜개봉回 1179 論 山郡 陽村面 梧山里 산봉우리가 쪼개진 것처럼 생겼다 하여 짜개봉이라고 부르는 산이 다. 자경동 回 1180 洪城郡洪北面 新耕里 마울의 지형이 마치 황소가 밭을 가는 형국이라 하여 자경동自耕洞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자고모 回 1181 論 山郡 伐谷面 沙 亭 里 마을에 치독고모형稚積顧母形의 명당이 있다는 마을로 자고새의 목 과 같다 하여 자고모慈顧母라고 부르는 마을이 다. 자릉대 回 1182 公川郡寺谷面古堂里 바위의 크기가 10 여 명이 앉아서 낚시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바위로서, 한范 무제武帝 때 부춘산富春山에서 낚시로 세월을 보낸 엄자릉嚴子陵의 이름에서 연유하여 자릉대子陵잦라고 부르는 바위 다. 자리껄回 1183 禮 山郡 大興面 松池里 옛날에 한 번 매몰되었던 자리에 다시 마을이 생겼다 하여 자리껄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자리골 回 1184 瑞山郡 梨 園面 浦 地里 옛날에는 마을 사람 들 이 자리 를 많이 만 들 었으므로 자리골이라고 부 르는 마 을 이다 . 자모산園 1185 唐津郡 大湖 芝 面 馬 中里 산봉우리가 2 개가 있는데 하나는 높고, 하나는 그보다 낮은데 마치 어머니가 애기 를 데리고 서 있는 것처럽 보인다. 이에서 자모산子母 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자무실 回 1186 天原 郡 廣德 面 梅堂 里 조선 세종대왕 世宗 大王 때부터 이곳에 잠 실蠶室을 두고 누에 치 기 를 장려하였으므로 잠실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자무 실 이라고 부 르는 마 을 이다. 자봉산回 1187 大德 郡 山內面下所里 산 모양이 자색 紫 色의 봉 鳳 처럼 수려하다 하여 자봉산 紫鳳 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자온대回 1188 扶 餘 郡 襄 岩面 襄岩 里 백제百 濟 때 대대의 왕이 왕홍사王興寺로 불 공 을 드리러 갈 때에 먼 저 이 바위에 올 라서 예 를 갖추었다 하는데 그럴 때는 바위가 스스로 따뜻해졌다 하여 자온대自溫 恐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자우리 回 1189 牙山郡 排 芳 面 葛梅 里 마 을 지형이 마치 암소가 누어있는 형국이라 자우리雄牛 里 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자운回 1190 大 德 郡新 灘津 邑 石峯里 조선 인조仁祖 때의 학자 복천 福泉 강학년 姜鶴 年이 이곳에서 태어날 때에 붉은 구 름 이 그 집을 둘 러쌓았다 하여 이 마 을을 자운紫 雲 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자은리 回 1191 天原郡稷山面 自 隱 加里 옛날에 가명加明이란 재상이 스스로 이곳에 와서 몸을 사리며 은거 하였으므로 자은리自 隱 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자천回 1192 唐 津 郡 順 城面 楊 柳里 옛날에는 천인 들 이 살았던 마을이라 자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작교 回 1193 扶餘郡 九龍面 太 陽里 옛날에는 마 을 에 까치다리가 있었다 하여 작교賜橋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작성산@] 1194 天原郡 並川面 挑 源 里 산에 까치 가 많이 날아든다 하여 작성산節城山이 라고 부른다. 임 진 왜란 때 학자 이 복 장 李福長 이 의병 을 일으켜 옹거하였던 산이다. 잔다리回 1195 大 田 市 東區 弘 道 洞 비가 내리면 물 에 잠기는 잔다리가 있으므로 세교細橋, 잔다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잔방이 回 1196 天原郡 稷 山面 三隱 里 조선 세 종 世 宗 때 부 터 잠방蠶 房 이 있었으므로 잔방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잘피탈回 1197 舒 川郡 韓山面 丹下里 마 을 이 비 탈 진 곳 에 자리 해 있으므로 작은비 탈이 라고 부르다가 변하 여 잘 피 탈 이라 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찻정이回 1198 論 山郡 陽 村面林花里 마 을 에 잣나무가 정자처럼 서 있으므로 잣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장각골回 1199 天 原郡 並川面 龍 頭里 골짜기 입구는 좁으나 그 안이. 넓고 아늑한 골짜기이어서 장각골이 라고 부 른 다. 조선 영조英祖 무신년戊申年 난리 때 만화당晩華堂 유진한柳振 范 이 17 세에 이곳에서 피난하면서 글을 읽었다는 유명한 골짜기다. 장개 回 1200 洪城郡 西部面 南塘里 마울 앞으로 긴 개울이 흐르는 곳에 마을이 있으므로 장개 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장고도 @l 1201 保 寧 郡 ,蒸 川面 括矢島里 섬이 장구처럼 생겼다 하여 장고도라고 부른다. 장고항 回 1202 唐津郡 石f 1 面 長古項里 마을의 지형이 장구의 목처럽 생겼다 하여 장고항 長古 項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장곶리 回 1203 牙山郡 仙掌面 障串里
마을 지형이 노루의 머리처럼 들 가운데 깊이 들어가서 갯가에 임해 있으므로 노루고지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노루지가 되고 장곶리璋 串里라고 부른다. 고려 공양왕恭誤王 3 년 (1391) 에 이곳에 성을 쌓고 만호及手 5 를 두어 근옵의 조세租稅 룰 받아 배에 싣고 바다 를 따라 한 양에 을리 다가 조선 초기 에 들어 와서 아산만 공세 창 貢 稅倉으로 조세 창이 옮겨갔다. 장교다리고개回 1204 天原郡 東面 德星里 조선 세조世祖 10 년 2 월 세조가 보은 속리산에 거동할 때 진천鎭 )II 길상산吉祥山에서 충청도 군사 4 만여 명을 모아 훈련을 하는데 목천 木川 서쪽에 있는 각 고을의 군관 장교들이 군사 를 거느리고 이 고개 에서 쉬어갔다 하여 장교다리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장구동回 1205 靑陽郡 木面 松巖里 마을 뒷산이 마치 거북이가 먹을 것을 찾아 옹크리고 있는 형국이라 이 마을을 장구동藏龜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장기대 回 1206 公州市 玉龍洞 옛날에 죄인을 사형하는 장기대가 있었던 마 을 이라 장기대杖基臺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장대문땐 1207 瑞山郡 遠北面 將盜里 철마산에 있는 장대將盜의 입구가 되므로 장대문將盜 r1 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장대봉園 1208 錦山郡 錦城面 義塚里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무찌르는 의병장義兵將들이 이곳에 장대將 恐를 세웠다 하여 장대봉將갔峯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장동 (J) 回 1209-1 大德郡 新浦津邑 長洞里 마을이 긴 골짜기에 있으므로 장동長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장동익팬 1209-2 瑞山郡 瑞山邑 障里 마을 지형이 길기 때문에 늘목이라 부르고, 〈늘〉이 노루로 변하여 장 동障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지형이 노루처럼 생겼다 하여 장동 障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장등개 回 1210 瑞山郡 安眠邑 中場里 마을이 긴 둥성이에 있으며 마을 앞에 개가 펼쳐져 있으므로 장동개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장명回 1211 天原郡 修身 面 長 山里 조선시대에 장명역 長命驛 이 있었으므로 장명 長命 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장명수回 1212 瑞 山 郡 泰安 邑 南山里 엣날에 는 이 지역이 육지여서 장명 張 明이라는 부자가 살았다 하는 데, 매 우 인 색 한 사 람 이어서 시주온 중에게 시주 대신 두엄을 퍼부었 다 하여 벌을 받아 그 집은 없어지고 개가 되었다 하여 장명수張明水 라고 부르는 개다. 장보고니 들 回 1213 牙 山 郡 鹽時 面 白岩里 들 이 매 우 넓어서 들 일 을 하는 일꾼 들 에게 먹 을 것 을 운반하는 아낙 네 들 의 바구니가 줄을 이었다 하여 장보고니 들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장비 回 1214 天原 郡 東面 長 松里 마 을은 잔 산 기 슭 에 있으나 명문 들 이 정착해서 마을을 오래도록 보 존 하고 맥 을 이었다는 뜻에서 장보 長 保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장비라 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장승배기 回 1215 扶 餘郡 世 道 面 花樹里 마 을 에 장 승 이 서 있다 하여 장승배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장수동 땐 1216 靑陽 郡 化城面 農 岩里 마 을 에 장수하 는 사람 들 이 많이 사는 마 을 이라 하여 장생골이라고 부 르다가 변하여 장수동이라고 부 른 다. 조선 세조世祖 때 단종사건 과 관련되어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송현수宋球 潟 가 이곳에 은거하던 마 을 이라 한다. 장수목골 땐 1217 瑞山郡 雲 山面 困 坪里 마 을 지형이 간 뱀처럼 생겼다 하여 장사목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 여 장수목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장아 回 1~18 舒川郡 馬 山面 新場里 마 을 지형이 어금니처럼 생겼다 하여 장아 長 牙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장여골回 1219 大田市 東區 連丑洞 옛날에는 재인才人들f l 많이 살았다 하여 재인골이라고 부르다가 변 하여 장여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장재웅 回 1220 靑 陽郡 飛鳳面 長在里 마을에 옛날에 는 장자長者가 살았다 하여 장재울이 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장중 回 1221 ff/llfil; 韓山面丹下里 마 을 이 이 지역의 중앙에 자리한다 하여 장중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장짓말回 1222 扶餘郡 世道面佳檜里 전에 물건을 팔고 사는 장이 섰었다 하여 장짓말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장 률 回 1223 唐 津郡 汚 Ill 面 城下里 마 을 이 베 틀 처럼 생겼다 하여 장 몰 이라고 부른다 . 장터 回 1224 牙山郡 鹽時面 芳峴里 마을 뒤에 노 루를 닮은 고개가 있다 하여 장티[節時]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장평리 맨 1225 大 德郡 妃城面 黑石里 마을 지형이 마치 새끼노루가 어미노루 를 쳐다보는 형국이라 하여 장평 리障坪里라고 부른다. 장항回 1226 唐津郡 高大面 長 項里 마울이 긴 목[項]으로 되어 있다 하여 장항 長項 이라고 부른다. 재경골땐 1 끄 7 保 寧郡 靑所 面 才井里 마을에 광성부원군光成府院君 김극성金克成의 재궁이 있으므로 재궁 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재경골이라고 부른다. 재빗골回 1228 唐津郡 松嶽面 中與里 연소형燕菓形의 명당이 있는 마 을 로 재 아래에 있어서 제빗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재빗골이라고 부른다. 잿조실回 1229 洪城郡 洪東面新基里 고개 앞에 있는 마 을 로 옛날에는 종이 룰 만드는 지소紙所가 있어서 재조실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챗조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저그물回 1230 洪城郡 廣 )II 邑 湘井里 마을에 샘이 있는데, 샘물은 항시 맑으며 가뭄 때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물이 남아서 들에도 물을 대주는 샘물이라 덕정德井, 덕물이라 고 부르다가 변하여 저그물이 라고 부르는 샘물이 있는 마을이 라 저
그물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저뜨기 回 1231 保寧郡 川北面 鶴城里 오천熟川에 수사영水使 쌍 이 있었던 조선시대 초기부터 이곳에 많은 군선이 드나 들 게 됨에 따라 젓갈의 집산지로 널리 알려져서 젓때기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저뜨기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저르미 回 1232 唐津郡 新平面 新與里 옛날에 절이 있었다 하여 절미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저르미라고 부 르는 마 을 이다. 저우실땐 1233 天原郡 橫德面 舞訪 里 마 을 지형이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되었으므로 자오실이라고 부르다 가 변하여 저우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저잔이 SJ 1234 洪城郡 長谷 面 佳松里 마 을 앞산이 나무가 우거져서 푸르므로 옛날부터 많은 새가 모여든 다 하여 처음 에 는 조잔島殘이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저잔이 라고 부르 는 마 을 이다. 저채 回 1235 扶餘郡 扶餘邑 梧石里 옛날에는 한지韓紙 룰 만드는 닥나무가 빽빽하였으므로 저동猪洞, 저 채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저호回 1236 扶餘郡 世 道 面 沙山里 금강錦江 가에있는마을로 가죽나무가 우거져서 마을을 둘러싼 정경 은 어느 호수에 비길 바 없었다 하여 저호切湖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적들回 1237 瑞山郡 南面 兩情里 마을과 마을 주변에 돌이 많이 쌓여있다 하여 적돌積쯔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적둘강[ID 1238 瑞山郡 南面 넓은 개로밀려나오는 냇물로, 돌이 많은 적돌곶 8 t쯔串울 지나서 천수 만으로 들어가는 강이 라 적들강이 라고 부른다. 적벽강圈 1239 錦山郡 富利面 水通里 강을 이루는 절벽이 붉은 색이며, 그 아래로 강 물 이 호른다 하여 적벽 강赤뾰江이 라고 부른다. 적서땐 1240 唐津郡 大湖芝面 赤鼠里
마을 지형이 늙 은 쥐가 밭에 내려오는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의 형국 이라 해서 붉쥐라고 부르며 적서赤鼠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전기동거리 回 1241 天原郡 稷山面 板井里 조선시대 말기에 이 지역에 사금砂金이 많이 났으므로 사금을 캘 때 에 이곳에 발동기 를 접화하는 발전소가 있었다 하여 전기통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전내 回 1242 瑞山郡 海美 面 前 Ill 里 마을 앞으로 해미천海 美 JI|이 호르므로 전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전라산 回 1243 唐津郡 貞美 面 홉堂 里 산이 바위로 덮혀있는 산으로 마치 달팽이처럼 생겼다 해서 전라산 田螺山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전월산回 1244 燕岐郡 南面 陽(七里 고려시대에 청류부곡 淸 流部曲이 있었던 구을촌仇乙村 앞에 산이 있으 므로 구 을 달이라고 부르던 산인데, 한자로 표기하다가 전원산轉月山 이라고 부르게 된 산이다. 한발이 심할 때 기우제 를 지내면 영험이 있다는 산으로, 산 꼭대기에 우물이 있는데 우물가에 능수버 들 이 있어서 이 능수비 들 이 커서 금강 건너편 금남면 반곡리錦南面盤谷里 룰 넘어다보게 되면, 그 마을 여자들이 바람이 난다 하여 그 능수버 들이 크기가 무섭게 반곡리 사람들이 밤을 타서 베어 버린다고 한다. 전장 回 1245 扶餘郡 外山面 前場里 조선시대에 여러 번 마을 앞에서 싸움이 있었다 하여 전장前場이라 고 부르는 마을이다. 전장매回 1246 舒川郡 棋山面 斗北里 옛날에는 장이 섰던 마을로 고려 때는 왜구가 이곳까지 쳐들어와서 큰 싸움이 벌어졌던 전장터라 전장매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전죽리 回 1247 禮山郡 吾可面 元泉里 전에는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가 많이 나왔다 하여 전죽리節竹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접바우回 1248 錦山郡 珍山面墨山里 마을에 두 개의 바위가 한데 접하여 있다 하여 접바우라고 부른다. 바위 앞면에는 갑암甲岩이란 글씨가 새겨쳐 있어서 갑암이라고도 부
르며, 이 글 씨 는 우암尤 庵 송시열 宋 時 첫 !!의 글씨라 한다. 접소 回 1249 大 田 市 西 區 龍 溪 洞 두 가닥 의 냇 물 이 합하 는 지점에 마 을 이 있으므로 냇 물 이 합치는 지 접 은 마치 소 i B 와 같 다 하여 접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젓막멘 1250 燕岐郡 南 面 Hk 通里 장터가 있었 던 금 강 가의 마 을 로 바다에서 생산되는 젓갈이 주로 거 래되었던 장터 의 마 을 이라 젓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정각 골 回 1251 大 衍郡 紀 城 而 山 直 里 마 울 앞산의 모습 이 바 로 앉아 있 는 소 牛의 뿔 모양이 라 하여 이에 연 유해서 정각 골 正角谷 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정계 回 1252 公川 郡 長 岐面 大橋里 마 을 에 는 계 곡 이 있으며 그 계곡 을 따라 흐르는 물 이 소리없이 호르 고 맑 다 하여 정 계靜 퓰i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정동回 1253 扶餘郡 扶餘邑 井洞 里 마 을 에 큰 샘 이 있으 므 로 정동 井 洞이 라고 부른다. 정랑봉回 1254 天 原 郡 城南 而 石谷 里 조선 세 조世祖 때 정랑正郞 조명趙 j g이 정곡正谷에 은거하였다 하여 이 산 을 정 랑 봉正 郞 峯 이라고 부른다. 조명趙 5 t은 날마다 조석으로 이 산에 올 라가서 남쪽으로는 그의 아버지 조순생趙 順 生이 귀양 간 고성 固 城 과, 동 쪽 으로는 단종端宗이 유패된 영 월 寧越을 향하여 망곡望突 하였다는 산이다. 정방이 回 1255 大 德 郡 祀城面 龍 村里 마 을 이 아늑한 곳에 있어서 안방과 같이 고요한 곳이므로 정방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정삼골回 1256 大田市 西 區 長 洞 옛날부터 r 정감록鄭鑑錄』에 따르면 정승政丞이 세 사람 나을 마 을 이라 하여 정승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정삼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정안땐 1257 牙山郡 新昌面五木里 옛날에 질그릇 을 굽는 사기소가 있었던 자리에서 그 안쪽으로 마을 이 있으므로, 사기점안이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정 안定安이 라고 부르 는 마을이다 . 정지산ffi] 1258 公州市錦城洞
공주의 지형이 배의 형국을 이루고 있으므로 그 배가 떠나가게 되면 공주의 지세가 약해져서 망하므로 이 를 붙 들 어야 하는데 마침 공주 룰 붙들고 있는 산이라 하여 정지산條止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금 강錦江 가에 있는 산이다. 젖밭回 1259 大 德 郡 新演津邑 三政里 조선 임진왜란 때에 이곳까지 왜구들이 쳐 들 어와 마침내 들 에서 일 을 하고 있는 아낙네 를 발견하고는 이리때처럽 덤벼 들 어 아낙네의 젖가슴을 만졌으므로 그 아낙네는 더러운 왜놈 들 이 짖가 슴을 만졌다 하여 칼로 젖가슴 을 오려내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한다. 그 후 이 듈 을 젖받이라고 부른다. 그곳에는 아낙네의 열녀비烈女碑가 서 있다. 제각골回 1260 洪城郡 洪北面 大仁里 한양 조씨淡陽超氏의 재각이 있으므로 재감 골 이라고 부르는 마을이 다. 제기산回 1261 洪城郡 廣川邑 碧 溪 里 산이 영검하다 하여 매년 당제 를 지내며 도액度尼하였다 하여 재기 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제도卽 1262 瑞山郡 地谷面 桃星里 섬이 맷돼지 형국이라 하여 저도猪島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제도라고 부른다. 제비내 回 1263 大田市 西區 桃馬洞 마을 뒷산이 제비 를 닮아서 나는 것 같다 하여 제비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제석동回 1264 保寧郡 藍iili面 帝擇里 신라 말기 쇠퇴하는 국운을 상의하기 위하여 경순왕이 성주사聖住寺 주지 롤 찾아 이곳에 와서 잠시 머물렀다 하여 제석동帝擇洞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경순왕이 죽은 후 이곳에 처음 사당이 섰었으나 뒤에 옥마산玉馬山으로 옮겨갔다. 조개티 땐 1265 舒川郡 馬西面 南田里 마을 지형이 조개처럽 생겼다 하여 조개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조계곡 回 1266 靑陽郡 南陽面鳳岩里 마을과 마을 주변에 계곡이 많아서 새들이 많이 모여 들어 조계곡鳥 溪谷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조내골回 1267 牙山郡 新昌面宮華里 마을 지형이 조리와 같다 하여 조리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조내 골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조라지고개 回 1268 天安市 留밟洞 고개가 몹시 험하며 여러 고개를 돌 아서 올라가는 곳이라서 이 고개 를 넘다 보면 숨이 차고 기진맥진해져서 졸음이 온다 하여 조라지고 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조룡대 回 1269 扶餘郡 扶餘邑 雙北里 부소산 아래 백마강 에 있는 바위인데, 당나라 장수 소정방밝造엽 5 이 사비성 酒洪城을 칠 때 강에 다다르니 갑자기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 므로 백마 을 미끼 로 하여 용을 낚고서 강을 건너갔다 하는데, 그 백 마 를 미끼로 용을 낚은 바위 를 조룡대釣 龍登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 조만터 回 127 아차徐t[ 外山面 盤橘里 조가 만석이나 나 는 큰 터에 마 을 이 있으므로 조만터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조산 回 1271 ~ 山郡 新賜面 新陽里 마을의 물구멍을 가리기 위하여 흙을 모아 산 을 만 들 고 나무 를 심은 마 을 이라 조산造山이라고 부르개 되었다 한다. 조실回 1272 禮 山郡 古德 面 紙谷里 옛날부터 종이 룰 만드는 부락이라 조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조양回 1273 天 原郡 城南面 鳳陽里 봉황산 아래에 정자가 있으며 봉鳳은 아침 벌판에서 운다는 마 을 의 운치 를 높이기 위하여 조양정朝賜 亭 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조양朝 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조왕동回 1274 公州郡 牛城面 東谷里 조선 인조시대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서 인조가 공주로 피난을 했을 때 마을에 사는 노숙底范이 쌀 300 석과 닭 수백 마리 를 인조에게 바치니 인조仁祖는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소원을 물 은죽 노숙이 대 답하기 를 민폐 를 적게 하기 를 원한다 하므로 인조가 더욱 기뻐하며 그가 사는 마을을 조왕동助王洞이 라고 부르게 하였다. 조정공回 1275 公州郡利仁面五龍里
조선시대 인조의 아 들 승선군 崇善君 의 묘가 있으므로 조정 골 이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조정리 回 1276 洪 城郡 廣JI I 邑 佳 亭 里 마 을 에 대추나무가 많다 하여 조정리 감t亭里 라고 불 렀다 . 족골 回 1277 公 川 郡寺谷 面 佳橋里 마 을 지형이 새 둥 지와 같 다 하여 조 실鳥室 이라 고 부르 다가 변하여 족 골 이 라고 부 른 다. 또한 복숭아 꽃 이 많이 피 는 마 울 이 다. 족실 回 1278 洪 城郡 西部面 宮里 조선시대 초기에 고려의 왕족 을 한 배에다 싣고 바다에 버렀 을 때 그 배에는 유능한 뱃사람이 있어서 믿 뚫 린 배 밀 을 수리하여 표 류 하다 가 구사일생으로 천수만 淡 水閑에 올 라와서는 서산 瑞 山 땅 부암 浮 岩에 표착하게 되었다. 그 들 은 이 곳 에서 다시 생기 를 찾고는 먹고 살 기 위 하여 일부는 간월도 갯벌 땅 을 무대로 굴에 고 춧 가 루를 무쳐 서 비비는 어리굴젓을 만 들 어 둥집장수 로 나섰으며, 일부 는 강변 을 따라 남쪽 으로 내려가다가 그 릇을 만 들 기에 알맞은 곳 에서 그중 일 부 는 떨어 져서 그롯을 굽게 되었고, 나머지 일부는 다시 남 쪽 으로 내려가 바다 에 어살 을 매고 고기 를 잡게 되었다. 그때 이 곳 까지 흉 러온 왕족이 어살을 매고 옹기종기 마 을을 이 룩 하고는 왕 족 이 사는 마 을 이라 하 여 족실이라는 마 을 이 름을 붙 이게 되었다. 쪽자머리 回 1279 唐 津 郡 新平面 上梧里 마을 지형이 마치 옥녀가 쪽을 진 형국이라 하여 쪽자머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종곡回 1280 牙山郡 松岳面 鍾 谷里 마을 지형이 북의 모양이라 하여 종곡 鍾 谷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종성동回 1281 燕岐郡 全義面 新井里 이곳에 처음으로 마을을 개척했을 때 사람들이 종소리 를 돋고 마을 을 이룩하였다 하여 종성동鍾聲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종자꼴 回 1282 瑞山郡 音岩面道堂里 왕시랑이 북쪽에 있는 들로서 물이 좋고 논이 걸어서 아무리 흉년凶 年이 들어도 이곳의 들에서는 벼가 잘되므로 종자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종쟁이 回 1283 洪城郡 洪城邑 大校里 마을 지형이 길게 뻗어 있다 하여 종장리從長里라 부르다가 변하여 종 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종현回 1284 洪城郡 洪東面 月縣里 마을 뒷산의 모양이 마치 종을 매달은 것 같은 괘종형掛鍾形이라 하 여 종현鍾언 이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주거리 §l 1285 錦山郡 錦山邑 面仁里 옛날부터 주막 이 있었던 마 을 이라 주막거리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주 거리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주동回 1286f Jfi*1 lli 高大面能頭里 마 윤의 위치가 용이 여의주 를 물고 있을 때의 그 여의주如意珠 자리 에 해당된다고 하여 주동珠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주령 回 1287 祖 山 郡 1應 峯面朱令里 흙빛 이 붉다는 주령고 개 아래에 마 을 이 있으므로 주령朱令이라고 부 르 게 되었다 한다. 주미골땐 1288 公州市 舟尾洞 공주의 지형이 배가 떠 있는 형국이라 하는데 그 중에서 이 마을은 배의 꼬리 부분에 해당된다 하여 주미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주미산回 1289 公州市 金開洞 산 모양이 배의 꼬리처럽 생겼다 하여 주미산舟尾山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주방골回 1 적)唐津郡 新平面寒井里 마 을 에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의 명당이 있다 하여 주방골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주주봉땐 1291 錦山郡 郡北面 鳥亭里 산에 오르면 먼 곳까지 한눈에 보이는 산으로서 예전에는 임금이 이 산봉에 올라와서 백성들의 생활을 두루 살폈다 하여 주주봉主周峯이 라고 부르는 산이다. 죽도땐 1292 保 寧郡 藍浦面 月田里 옛날에는 대나무가 울창하였던 섬이라 죽도竹島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죽아리 回 1293 t益山郡 陽村面 居士里
예로부터 대나무가 우거진 그 안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죽안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죽 아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죽엽 回 1294 瑞山郡 大山面大竹里 마 을 의 지형이 대나무 잎처럼 생겼다 하여 죽엽竹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중군말回 1295 牙山郡鄧輯面 曲抵里 옛날에 중군中기 I 이 주둔하였던 마을이라 중군말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중두무니回 1~ 錦山郡 福휴 而 誘 永里 옛날 선비 한 사람이 사화 士禍로 인하여 해 를 입게 되자 이곳에 은거 하며 눈뜬 봉사 물 자처하고는 두문불출하였으므로 두문동杜 r1 洞이 라 고 부르다가 변하여 중두무니라고 부르게 된 마울이라 한다. 중생골마챕 1297-1 洪城郡 西部面 陽谷里 중이 죽으면 이곳에서 시체 룰 화장하였다 하여 중생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중생골악괜 1297-2 牙山郡 卽時面 山陽里 옛날에는 중들이 많이 살았다 하여 중생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중산성 回 1298 扶餘郡 石城面 甄山里 산이 시루처럼 생겼다 하여 중산성原山城이라고 부른다. 산에 성터 가 있다. 지경 回 1299 扶餘郡 九龍面九鳳里 옛날에 고 을과 고을이 지경을 이 루 던 마을이라 지경地境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지곡回 1300 靑t Mll1I 木面 池谷里 마을에 큰 못이 있으므로 지곡池谷이 라고 부른다. 지네벌回 1301 靑賜郡 共i平面 中t ll 마을 지형이 지네 릅 닮았다 하여 지네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 랑이 回 1302 錦山郡 福潟面 芝良里 마을 지형이 지렁이처럼 생겼다 하여 지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지 태 回 1303 唐津郡 大湖芝面 沙城 里
마을 지형이 거미가 집을 짓는 형국이라 지래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 지레 回 1304 牙山郡 松岳面江長里 마 을 지형이 자라와 같다 하여 지레라고 부른다. 마 을 에 옥녀직금형 玉女織錦形 의 명 당이 있다 한다. 지령리 回 1 印 5 天原郡 並JI |面 龍頭里 마 울 주위 를 산이 에워싸고 물 이 돌아 흐르므로 인걸이 많이 나을 땅 이라 하여 지령리芝 盛 里라부른다 한다. 순국열녀 유관순柳買 順 이 태 어난 마 을 이다. 지룻골 멘 1 있 5 牙山郡 松岳面 巨山里 옛날에 권씨權氏 한 사람이 지루芝樓라는 정자 를 짓고 소요하였는데, 이에 연유하여 지루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저룻골이라고 부르는 마을 이다. 지름뱅이 들回 1307 Fin 山郡 歡峯面登村里 들 에 수원이 좋고 땅이 기 름 져서 심한 가뭄에도 건해지지 않는다 하 여 지 름뱅 이 들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름실回 1308 舒川郡 文山面 支院里 마 을 한가운데에 괘동형掛燈形의 명당이 있다 하여 지름실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지므레 回 1309 牙山郡 湯井面 葛山里 옛날에 김씨金氏가 많이 살면서 열녀 효부가 많이 나오므로 김효례金 孝禮 라고 부르던 마을인데 변하여 지므레라고 부른다. 김리金里,금리 라고도 부른다. 지밭回 1310 論 山郡 夫赤面 夫人里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벌이기 전날 꿈을 꾸 었는데 그가 꿈에 서까래 셋을 짊어지고 깊은 못으로 들어가므로 뭇 닭이 요란하게 우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이곳에 사는 무당 한테 물어보니 서까래 셋을 짊어진 것은 임금이 될 것이고 뭇닭이 우 는 것은 높은 자리 를 찬양하는 징조라 풀어 주니 크게 기뻐하였다. 그 후 삼국통일을 하고는 그 무당에게 후한 상을 주고 무당이 죽은 뒤에 는 부인당夫人堂울 짓고 제전祭田울 주었으므로 이 마을을 지발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지상골 回 1311 舒川郡馬西面 月浦里 마을의 이웃에 큰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에는 술을 파는 기생이 있 었으므로 기생골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지상골이라고 부르는 마을이 다. 지옹구지 回 1312 瑞山郡 大山面 其t츈 里 마을 지형이 긴 곶으로 되어 있으므로 긴곶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지 옹구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장골回 1313 天原郡 修 身面 鉢山里 옛날에 기장을 많이 심었던 마을이라 기장굴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지장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질켕이 回 1314 天原郡成歡邑水鄕里 백제 초기에 호화 를 누리던 별천지로 백제 멸망 후에는 이만하면 족하 다는 안식처로 불리우던 이방지대로 옛날에는 지족향知足鄕이 있었 다. 변하여 지질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청골回 1315 論 山郡 可也谷面 六谷里 황치마산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임진왜란 때 황씨黃氏들이 이곳에서 피난하였는데 치마 를 넌 것이 왜군에게 발각되어 학살 을 당하고 오 직 종형재와 어린 애만 살았다 하는데 치마 를 넌 것을 지청구했다 하 여 지청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다. 지치도團 1316 瑞山郡 南面 居兒島里 옛날에는 섭에 지치풀이 많이 났다 하여 지치도라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지풍굴 回 1317 保寧郡 盤川面 烏 浦里 마을이 깊은 골짜기에 있으므로 깊은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지풍 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프내 回 1318 錦山郡 南二面 石洞里 마을 앞에 깊은 강이 흐르므로 지프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함이고개 回 1319 論山郡 鍊武邑 麻田洞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고개에 지함地路올 파고 왜적을 무찔렀다 하 여 지함이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직동 回 1320 大德郡 東面 稷洞里 마을 뒤에 노고성老姑城이라고 부르는 성이 있어서 백제군과 신라군
이 싸울 때 피바다룰 이루어 이곳까지 혈류가 흘렀다 하여 피골이라 고 부르다가 변하여 직동稷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직언도맵 1321 保寧郡 熊川面 獨山里 옛날에 지나가던 배가 파선되어 시체가 많이 떠밀려와서 지게로 시 체 를 지어서 운반하여 파묻었다 하여 직언이, 직언도直言島라고 부 르는 섬이다. 진관리 回 1322 唐津郡 高大面 傾館里 백제 때 당나라로 통하는 나루터로 가는 길가에 있었던 오래된 마을 이다. 그때 진관眞館이라는 행인을 도와주는 관이 있었던 마을이라 진관리 頂館里라고 불러온다. 진대도멩 1323 瑞山郡 安眼邑 正堂里 섬이 진대(구렁이)처럽 생겼다 하여 진대도眞帶島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진동回 1324 扶餘郡 玉山面 加 德里 긴 동성이에 마을이 있으므로 진동이라고 부른다• 전물 回 1325 扶餘郡 草村面 眞湖里 마을에 긴 호수가 있었으므로 긴물이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전물이 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진미 回 1326 瑞山郡 音岩面 星岩里 마을 가운데 긴 둥성이가 길게 뻗어 있으므로 진미라고 부르는 마을 이다. 진정이 回 13V 大德郡 炭洞面 案山里 마을 전체가 정자처럽 아름답다 하여 진정이라고 부른다. 진터벌 回 1328 大田市 西區 九岩洞 백제百濟 무왕武王 때부터 백제군이 국경을 방비하기 위해서 후방에 진을 쳤던 큰 진영이라 진터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질꾸말回 1329 天原郡 修身面 長山里 마을이 진흙 버덩으로 되어 있으므로 질꾸말이라고 부르는 마을이 다. 질구지 回 1330 舒川郡 長項邑 長岩洞 마을이 닭의 벗처 럽 생긴 계곶이에 자리해 있다 하여 계곶, 변하여 질구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질매 回 1331 舒川郡 理山面 院吉里 조선시대에 신곡역新谷驛에 딸린 길산원吉山院이 있었던 마을이라 길 산, 길매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질매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질패기 回 1332 洪城郡 製項面 麻 溫里 옛날에는 마을에서 질그릇을 구었다 하여 질패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침때울 回 1333 洪城郡 洪城邑 內法里 옛날에 마을에는 집대가 있었으므로 짐때울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옛날부터 물방아가 유명했던 마을이다. 짐한봇이논回 1334 扶餘郡 玉山面 安西里 옛날에 심한 가뭄 때 김 한못과 이 논을 바꾸었다 하여 집한못이논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집포回 1335 保寧郡 )II 北面 沙 湖里 서쪽으로 호르는 모든 물이 합수合水하는 하구에 자리한 마을로 여 러 개울의 물이 모인다 하여 집개 또는 집포集沮i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치 차곡 回 1336 論 山郡 陽 村面 居士里 조선시대에 거부가 된 김씨金氏가 권력을 모아 수레 를 타고휴核양洪陽 둥에 나 들 이 할 때는 동네가 시끄러울 정도로 요란스러웠던 마을이 라 하여 차곡礎谷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차굴 回 1337 舒川郡 板 稀 面 板橘里 옛날에 도승 한 사람이 이곳을 지나다가 앞으로는 이곳에 바퀴 네 개 달린 수레가 다니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다 하여 처음에는 찻굴 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차굴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 차나말땐 1338 牙山郡 仁) 11 面 冷井里 . 마 을 에 약수로 통하는 찬 우물이 있어서 처음에는 찬우물이라고 부 르다가 변하여 차나말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차령고개 回 1339 天原郡 廣 德 面 院 德 里 천안과 공주로 통하는 고개로 북쪽에서 내려오는 고개가 이 고개 를 끝으로 남쪽에서 올라오는 고개에 대치하는 고개다. 우마차가 조곡 미 를 싣고 넘어다니는 고개라 차령고개라고 불렀다. 고려 태조의 훈 요십조訓要十條에 따르면 공주강公州江 죽 금강 밖의 산세가 모두 북 쪽을 둥지고 달아나서 인심의 변란이 많으니 그쪽 사람들은 비록 양 민이라도 조정에 들이지 말라 하였는데 이 고개가 그 끝부분에 위치 한 고개로 남쪽은 이 고개와 대치하는 고개로 봐야 한다.
차일봉 땝 1340 법賜 郡 飛風面新院里 산 모양이 차일처럼 되어 있다 하여 차일봉 追 日峯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 참뱅 이 回 1341 洪城 郡 長谷 面 廣城 里 땅속에 물이 많으며 모두 약수라 하여 이 물이 많은 마 을을 참뱅 이 라 고 불렀다. 가뭄이 있 을 때에도 타격이 없었으며 무서운 전염병이 전 국에 퍼졌 을 때에도 환자 하나 없었던 마 을 이라 한다. 창강나루 땐 1342 꺾[Jj 郡 靑 南 面 束 i里 물이 맑은 금강의 나 루 터다. 조선시대에 곡식 을 쌓 은 큰 창고가 있어 서 군사적으로 큰 몫을 한 나 루 라 한다. 창명 回 1343 大 田市西 區 安永洞 옛부터 대쪽 같은 선비의 마 을 로 들 도 기 름 져서 살 기가 윤 택 한 마 을 이라 창명 昌 明이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창우 回 1344 洪城 郡 洪東 面 秀 i 距 j 里 옛날에 갑자기 나라의 조곡미 를 쌓아두는 사창이 되면서 마 을 이 윤 택해졌다 하여 창우 倉 隅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창째산 園 1345 瑞 山 郡 雲 山而 巨城里 옛 날 에 조세租稅 률 쌓아놓는창고가있었던 산으로 지금은 무너진 사 창터에 주 춧돌 만 됨구는 산이라 창째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창정리 回 1346 牙山郡 盛 仁面 蒼龍 里 조선 효종 孝宗 때 문장가로 알려진 동명東 炭 정두경 鄭 斗 gg o 이 이곳에 창정 蒼亭 이 란 정자 를 짓고 놀 았으므로 그에 연유하여 창정 리 蒼亭里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창칫골땐 1347 公 川 郡 利仁面 伏龍里 조선시대에 영민창 寧 民 倉 이 있었으므로 창칫 골 이라고 부르며 거기에 주막이 있었다 하여 창주막말이 라고도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창댁 回 1348 唐津郡 松山 面 三月里 창택산倉 澤 山·아래에 있는 마 을 이라 창댁 倉i없 이라고 부 른 다 . 조선 중 종中宗 때 좌의정左 議 政 용재容 齋 이행李츄이 살았던 마 을 이다 . 채덕바위 땐 1349 錦 山 郡 珍 山面 石 痛 里 이 바위에 불빛이 비치면 빛이 반사되어 그 불 빛이 오는 곳에 화재가 나므로 이 바위에 불 빛이 미치지 못하도록 주위에 나무 를 심었다. 한
편 어떤 중의 말을 돋고 이 바위 아래에 소금을 묻어 놓은 후로는 그 런 화가 없어졌다고 전해오는 바위다. 채동땐 1350 論山郡 F 8 t 1 面 采光里 옛날 늙올 때까지 자식이 없었던 한 쌍의 금실 좋은 노부부가 하루는 꿈을 꾸니 용암산 할미바위 를 찾아가서 산나물을 먹으며 백 일 동안 기도 를 하면 자식을 얻을 수 있다 하므로 그렇게 해 보았더니 정말 자식 을 얻었다 한다. 그래서 산나물로 자식을 얻었다는 노부부의 거 룩 한 정성 을 높이 사서 체동菜洞이라고 불러왔는데 변하여 채동彩洞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채운고개 回 1351 唐津郡 唐津邑 彩있里 재색구름이 감도는 채운 들 뒤에 있는 고기 L 로 수목이 울창하여 한때 는 도적이 많다 하여 도적고개로 불리웠던 고개다. 채운들 뒤에 있는 고개라 채운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채운산맵 1352 論 山郡 iI梨邑 彩袁洞 백제 멸 망 후 왕 족들 이 집단으로 살기 시작한 곳이며 그래서 채운향 彩았鄕 이 생기고 한참 동안 권력사회의 분포 속에 놓였던 산이다. 조 선 선조 宜祖 때에는 임진왜란이 터지자 중봉頂峰 조헌趙忠이 의병을 거느리고 지나다가 이곳에서 상소하여 둔병한 곳이라 둔병소屯兵所 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한다. 또한 조선 세조世祖 때 충청도 정산현定山縣 해남촌海南村에 사는 황진사黃進士의 아내 이부인이 채운산 북쪽에 있는 용암사箕岩寺에 기도하여 딸 을 낳아 채운산의 이 름을 따서 채운이라 하였는데 채운 이가 여덟 살 때 그 어머니 를 여의고 15 살 때 계모의 모함을 입어 가 죽 주머니 속에 갇혀 금강 5 fd 江에 던져졌다 . 그러나 떠내려 가다가 김 승지金承旨에게 구 출 되어 마침내 그전에 약혼한 전라도 해남 황산촌 黃山村 이진사 집을 찾아 소원을 이루고 남편이 양주목사가 되어 윤 라오는 길에 부모에게는 효성으로, 김승지의 아들도 채운이와 남매 지의男妹之義 를 맺었다는 전설이 있는 산이다• 들 가운데 우뚝 솟은 산으로 항상 자색 구름에 엉 킨 것 같다 하여 채운산彩 있 山이 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채죽산回 1353 公川郡 牛城面 上西里 산에 죽산현감竹山縣監을 지낸 채씨蔡氏의 묘가 있다 하여 채죽산감간
竹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책바위 §J 1354 扶 餘 郡扶 餘邑 龍井里 곧게 깎인 듯한 바위로 바위 중간에 네모진 금이 있는데 백제百 濟 가 망하자 그 기 록을 담은 책 을 이 바위 속에 감 추 어 두었다 하여 책바 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처너물 回 1355 牙 山 郡 新昌面 南城里 찬 우물이 있었던 마 을 이라 찬우 물 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처너물이 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척괴 回 1356 洪城 郡 龜 項面 新 谷里 마을에 오래도 록 한 자의 키밖에 자라지 않는 괴이한 나무가 있었으 므로 그때부터 척괴尺魂라고 불 러 오는 마 을 이 다. 천개동回 1 또 7 大德 郡 東 面 孝坪里 마을을 처음 개척하고 들 어선 정착민 들 이 산 을 깎고 닦은 마 을 로 하 늘과 함께 열리는 마 을 이란 뜻에서 천개동天開洞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천구동 回 1358 禮 山郡 新 陽 面 如 來 味 里 마을에 천씨千氏와 구씨 具 氏가 모여 사는 마 을 이라 처음은 천구동千 具洞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천구동千口洞이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천근回 1359 大田市 中 區 文化洞 마 을 이 푸른 하 늘을 위로 하고 푸른 산에 매달린 것처럼 마치 하늘의 뿌리처럼 매달려 있다 하여 천근千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천마봉圈 1360 靑賜 郡 靑賜邑 軍밟里 갑오년 동학운동束學運 動 때 홍성洪城까지 몰 려 갔던 동학군이 관군 에게 밀려 이곳까지 와서는 관군과 싸우다가 천 명이나 죽게 되어 시 체 를 가매장한 산이라 천마봉天 馬 峰이라고 부른다. 천복동 回 1361 大 德 郡 炭洞面 秋木里 수운교水 및 敎의 교인촌으로 6 • 25 이 후 휴전선 이 북의 교인들이 이 곳 에 와서 정 착한 마을로 하늘에서 복을 주는 마 을 이 라 하여 천복동天 福洞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천봉 回 1362 公州郡 維鳩面 蘆 洞里 산의 봉우리가 수없이 많다 하여 천봉千峯이라고 부르는 산이다. 천석골回 1363 公州郡 維 鳩 面 蘆洞里
옛날 마을에 천석을 하는 부자가 살았다 하여 천석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천수만園 1364 瑞山郡洪城郡 保 寧 [|; 충청남도의 황해에 있는 바다로 남북의 길이 80 리의 안면도安眠島와 남면반도南面半島와의 사이에 있는 만ihll이다. 바다 밑에는 해곡海谷 이 많아서 천수만의 아래쪽으로는 물이 깊은 고랑이 넓게 퍼져 있으 나 대체로 물 이 얕아서 천수만凌水潟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조선시 대에는 안면도 북쪽 육지 를 잘라서 남쪽에서 올라오는 조곡미 운반 선의 풍랑 을 막는 지 름 길도 조성하여 이곳을 판목나루라 하였다. 물 이 얌아서 고기는 많지 않으나 지형을 이용한 소금 산지가 많으며 특 히 굴양식이 적당한 해산물의 수확장으로 알려졌다. 북쪽에 부암浮 岩죽 뜬바위가 있는 만潟이다. 천승回 1365 洪 城郡 洪北面 中 溪 里 옛날 마을에는 큰 절이 있어서 중 천여 명이 살았던 곳이므로 천승 千 (B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천아수공回 1366 論 山郡 魯城面 校村里 마을에 천아탁시형天郞吹尻形의 명당이 있으므로 천아수골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천쟁 이 回 1367 靑 賜郡 定山面 天庄里 마을이 칠갑산 깊숙한 골을 타고 있으며 마을 위치가 천장처럼 높다 하여 천쟁이라고 부른다. 홍주의거겁t 1 · I1 義母로 독립을 외쳤던 의병대 장 민종식閔宗t비이 처음 의병을 모은 마을이다. 천척매 回 1368 舒川郡 CJl1 .1 .Ji1li 辛山里 백재 때에는 이곳이 큰 포구였다. 배 를 천 척 이상 매어 놓았던 부뚜 가 있었던 포구이므로 천척매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천호산園 1369 論 山郡 連山面 산이 용머리처럽 6km 쯤 남쪽에서 북쪽으로 뻗어 갔으므로 누르기재, 황산黃山이라고도 부른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後百濟의 신 검神劍을 일리천一利川에서 크게 이기고 계속 추격하여 이곳에 이르 러 항복을 받아서 마침내 삼국을 통일하여 고려왕조高麗王朝릅 세우 게 되었으므로 이곳이 하느님이 도와주신 산이라 하여 천호산天護山 이라 고치고 산 아래에 개태사開泰寺를 크게 지어서 고려 왕조의 무
궁을 빌게 하였다. 천황봉 回 1370 論 山郡 連 山面 天護里 천호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왕건王建이 후 백제의 군사와 싸울 때 매 들 이 많이 몰 려와서 천황봉 지네 를 모두 잡아 먹고 천하 를 통 일하 는데 기여했으므로 이 봉우리 를 천황 봉天皇峯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천흥 回 1371 天原 R [ 聖居邑 天 典 里 백제 때 세운 천홍사天典寺가 있었으므로 천 홍 天 興 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철마산 回 1372 錦山郡 郡北面 內 釜 里 산 꼭대기에 무쇠로 만든 철마가 있으므로 철 마산 鐵馬 山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철승산回 1373 公州郡 新 豊 面 바위가 많이 있어서 마치 쇠 줄 과 같다하여 철승산 鐵繩 山이라고 부른 다. 또한 부춘산 富春 山이라고도 부르는데 산 골 짜기에 칠 리탄七里 沮 과 자 릉 대子陵 책 가 있어서 중국 절강성浙江 省 동려현桐慮 縣 에 있는 한 范 나 라 때 엄자 룽 嚴子 陵 이 은거하던 부춘산 富春 山처럽 수려하다 하여 부 춘산이라고도 부른다. 철장모랭이 回 1374 牙山郡 道高 面石 堂 里 마 을 에 철장 같은 돌 모롱이가 있으므로 철 장모랭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철쟁이재 回 1375 瑞山郡 浮 石面 芝 山里 옛날에 이 고개에 철장 鈴蛇 t 을 받았던 일이 있었으므로 철쟁이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첨배재 回 1376 大田市 東 區 板岩 洞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아버지 인 송갑조宋甲祚의 산소 를 쌍청당 雙 • 淸堂 산소 아래에 쓰고 이곳에서 매일 조석으로 첨배하였다고 하여 첨배재價’拜峴J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청궁 回 13T / 保 寧 郡 JI|北面 弓浦里 조선 중종中宗의 2 녀 공주가 한경손韓崇孫과 여생을 보낸 마을이라 청궁淸宮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청근이 回 1378 論 山郡 光 石面 要 里 옛날에 흐르던 노성천 8냄 訓 1 가에 땅 을 개간하고 천호千戶가 운집해 사는가 하면 또한 천석千石올 거두는 대농大따이 있는 마을이라 천근 千根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청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청금 回 1379 唐津郡 新平 面 上梧里 산에서 옥녀가 뜯는 거문고 소리가 잘 들린다고 하여 청금 聽~ 이라 고 부르다가 변하여 청금 靑 冷이라고 부르는 마 을 이다. 청당이 回 1380 타尉 市 豊基 洞 마 을 부근에 푸 른 나무숲에 가린 서낭당이 있으므로 청당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청대굴 回 1381 꿉賜郡 似 成 面 新亭 里 마 을 에 청대 靑 竹가 많이 있으므로 청댓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청 대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청룡땐 1382 舒 川 郡鍾 )II 面山 )II 里 마 을 에 용이 되어 승천하려는 이무기가 푸른 강물의 바위 아래에 살 고 있다 하여 청 룡靑 n a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청룡산!ID 1383 洪城郡 結城 面 無臨 里 결성옵내에서 청룡 쪽에 자리한 마울이라 청룡산 靑 龍山이라고 부른 다. 봉수대가 있는 마 을 이다. 청립리 回 1384 論 山 郡 連 山面 長 田里 옛날에 한 스님이 지나다가 정자나무 아래에서 불공을 드린죽 마을 주변이 온통 푸 른 숲이 되어버렸다 하여 숲이 우거진 마 을 이라 청립 리 靑 林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청망평 回 1385 天 原 郡 成 歡 邑 安宮里 고종 31 년 (1894) 6 월 에 청국의 제독 섭지초葉志超가 월봉산에 진 을 치고 새벽 밥 을 먹다가 일본군의 기습 을 받아 이 들에 밀려와서 크게 패하였으므로 이 들을 청망평 靑 亡坪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청수난실 回 1386 公 州郡 鷄龍 面 乃興里 산 중턱에 암석이 있으며 그 암석 아래에 옹달샘이 있는데 옹달샘 근 처에 난이 피는 마을이라 청수난실 범 水蘭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청운동回 1 엿 7 大 언郡 九ff l j面 九龍里
마을의 자리가 안정되고 항상 소원이 성취되는 마을이라 청운동淸 雲 洞이라고 부른다 한다. 청칭연 OO 1 봐 8 錦山郡 珍山面 三佳 里 물이 맑고 깊어서 그 깊이 를 알 수 없다 하며 물에는 청룡 靑龍 이 살 고 있다는 못池이다. 깨끗하기가 이 룰 데 없으며 영겁한 못이라 한재 가 있을 때는 무제巫祭 룰 지낸다. 체마소 回 1389 扶餘郡 扶餘邑 陵 山里 백제 때 말을 갈아타던 체마소速馬所가 있었던 마을이라 체마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체정말回 13 앗 扶餘郡 石城面 紙山里 마 울 이 생기면서 최씨崔氏와 정씨鄭氏가 많이 모여 살았던 마을이라 체정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초락도 園 1391 唐津 RI 니 Tl 而 草落島里 풀이 무성한 섬이라 초락도草落島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초망서 團 1392 保草郡 塾川面 外炯 島 里 섬이 해초海草와 풀로 덮혀 있어서 초망서草뜬頃라고 부르며 간조干 潮의 차에 따라 물위 로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섭 이 다. 초석골回 1393 天原郡 東面 長松里 마을에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중시조中始祖가 옮겨와 살면서 초석을 아꼈던 마을이라 초석골이라고 불러온다 한다. 초숫골(최숫골, 봉기回基) 回 1394 大田市 西 區 下基洞 북쪽에 옥토망월형玉免望月形의 명당이 있고 그 앞에 큰 못이 있는 데, 이름 모 를 풀이 떠 있으므로 초수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초숫 골, 최숫골이 라고 부른다. 초정 [I] 1395 天原郡 城南面 大井里 길가와 논 가운데 우물이 둘 있는데 길가의 우물은 돌로 쌓아 올리고 논 가운데의 샘은 길이 9 척尺 넓이 5 척尺의 굴참나무 널로 쌌는데, 밑바닥에는 큰 나무 둥치 를 베고 그 가운데서 물이 나오게 되어 있는 샘이다. 조선 세종世宗이 한글을 연구하는데, 과로하여 안질이 생기 자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전국 각 지방에 효험한 약수를 물색하는 데 여기 초정被井과 현재 전의全義의 초정 및 청주淸서i의 초정이 물 망에 올라서 세종 26 년(1 444) 3 월에 청주 초정에 거동하는 중, 그 해
4 월에 이 초정을 수축하여 그 다음 해에 거동하기로 하였다가 민폐 를 염려하여 중지하였다. 『대록지大麗誌』에 따르면 옛날 신인神人이 약병 을 가지고 가다가 이 고개에 떨어뜨리면서 이 초정과 전의초정이 되 었다고 한다. 초정골 回 1393 蓋峻郡 錦南面 -k 朴里 마 을 에 초정이라고 부르는 우물이 있는데 약수로 이 름 난 우물이다. 이 물을 마시러 오는 사람아- 많다 한다. 특 히 음력으로 8 월이 되면 많은 사람 들 이 초정 t叔井을 찾는다. 초정이 있는 마을이라 초정골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추원동 回 1397 扶餘 RI 仁만,( tti 天堂里 마을에 옛 날부터 추자나무가 았으므로 추원동t Ik 元洞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축산回 1398 燕岐郡 錦南面丑山里 마 을 이 매가 많이 산다는 수리산 아래에 있으므로 산 이 름을 따라 취 산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축산丑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축융봉 回 1399 扶餘郡 ,만, 山面 존엄한 산으로 알려진 산으로 한재가 심할 때 불을 맡은 신인 축융祝 融에게 제사 를 지내면 비가 온다고 하여 이 산에서 기우제 를 지낸다. 불을 맡은 신인 축융을 모시는 산이 라 축융봉祝融峯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출동산園 1400 燕岐 R[ 東面 龍湖里 산에 장군영 병 출동형 將軍領兵出洞形의 명 당이 있는 산이 라 출동산出 洞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출포 땐 1401 唐津郡 大湖芝面 出浦里 바다에 면한 마을인데 산줄기가 바닷가로 길게 뻗었으므로 출포出浦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충달回 1402 公州郡 寺谷面 佳橘里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절터릅 잡으려고 이 산에 올라서서 북쪽을 바라보니 큰 절터가 있으므로 기뻐하여 마곡 사麻谷寺 터를 잡고 춤을 춘 산이라 하여 춤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충장봉回 1403 論山郡 夫赤面忠谷里
백제百 濟 때 계백장군階伯將軍이 이곳에서 전사하였으며, 성삼문成三 ro1 이 이 산 아래에서 살았으므로 그 들 의 충절에 연유하여 충장봉忠壯 峯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충효산園 1404 天原郡廣卽面 梅堂里 산 아래에 영밀공英密公 유청신柳 淸 臣의 사당과 오세정문五世庭「 1 이 있어서 충효산忠孝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취생 回 14as 洪城郡 慕山面 吹笛里 마을에 선인취적형仙人吹笛形의 명당이 있으므로 취생吹笛이라고 부 르게 된 마을이다. 치더 리 回 1~ 唐津郡 高大面 忍項里 옛날에는 마을에 침으로 놓은 다리가 있었으므로 취다리라고 부르다 가 변하여 치더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 치력굳回 1407 瑞山郡 泰安邑 東「 1 里 옛날에 불행하게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장수 한 사람이 이곳에서 차력借力을 연마하여 많은 왜구 를 무찔러서 공이 있었으므로 그가 살던 이 마을을 차력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치력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치미 回 1408 公州市 雙新洞 산의 모양이 키처럼 생겼으므로 치미라고 부른다. 신라新羅 문무왕 文武王 5 년 (655) 에 왕이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原n 과 백재 왕자 융隆 과 함께 이곳에 모여서 백제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천제天祭 룰 지냈던 산이라 한다. 치 섭 rn:l 1409 靑陽 郡 定山面 驛 村里 섬의 지형이 치(키)처럼 생겼으므로 치성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치 • 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치 암 回 1410 뿐岐郡 西面 釜洞里 마을에 꿩처럼 생간 바위가 있으므로 치암維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칙대 비 回 1411 洪城郡 洪北面 新井里 마을 주변에 침덩굴이 많으므로 칙대비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칙매기 回 1412 劑歸 郡 長坪 面 竹林里 고개에 침이 많으므로 칙매기라고 부르는 고개다•
칠갑산園 1413 •꿈 陽 郡 *呼 面 충청도의 한복판에 자리한 산으로서 이 부근에는 꼭 무인武人의 투 구 를 엎어 놓은 것 같은 산이 일곱 개가 준령을 이 루 는데 그 가운데 서 가장 높으며 존엄한 산이라 해서 칠 갑산七甲山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칠년고라실團 1414 論 山 郡 鍊武邑金谷洞 골짜기의 땅이 기 름 지고 비옥해서 일년 농사 를 지어서 7 년을 먹고 살 수 있다 하여 칠 년고라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칠동 回 1415 店津郡 新平面 華袋里 마 을 에 옻나무가 많았으므로 칠 동 漆 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칠리탄뗀 1416 公 ) · I1 郡 寺谷面 古堂里 마곡사의 맑은 물 이 이 곳 에 이르러 못을 이루고 위 아래로 여울이 되 었는데, 물 이 깊 고 고기가 많으며 골이 깊고 그옥하여 중국 절강성浙 . 江 省 동여현 桐應縣 의 부춘산 富春 山 아래의 칠 리탄七里湜 같다 하여 칠 리탄七里 混 이라고 부른다 한다. 칠백냥 둘 固 1417 舒 川 郡韓 山面 蓮 峯 里 비 록 땅은 버려져 있지만 잘 가꾸고 만지면 곡식이 잘 될 들이라 칠 백 냥 을 주고 사도 해 롭 지 않 을 들 이라 칠백냥들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칠부정 이 回 1418 論 山郡 魯 城 面 堡 岩 里 옛 날 에는 고령 김씨 高盜 金氏 들 이 많이 살던 마을이다• 옛날에 마 을 에 있는 노목老木 느티나무에 병무 를 걸어놓고 칠부정이라 불렀는데 그 느티나무 정자가 있는 마 을 이라 칠부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칠산땐 1419 扶 餘 郡 林J II 面 七山里 넓은 들 녘에 낮은 야산이 일곱 개 뾰죽하게 나와 있는 그 아래에 마울 이 있으므로 칠산七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칠성바위回 1420 保 寧 郡 藍浦 面 U 炫 松 里 바위 일곱 개가 북두칠성처럼 나란히 서 있다 하여 칠성바위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칠천[I] 1421 쩐岐 郡 全 義 面 陽谷 里 피부병에 좋으며 특 히 옻 오른 데 효력이 있다는 약수가 호르는 샘이 라 칠천漆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침산미괜 1422-1 扶餘郡 九龍面 舟 亭 里 마을의 지형이 다듬이돌처럼 생겼다 하여 침산石占山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댜 침산°回 1422-2 燕岐郡 鳥致院邑 Ii占山洞 낮은 산의 모양이 방아처럼 생겼다 하여 이 산이 있는 마울을 침산 5 占 山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기 칼산 回 1423 淸陽郡 雲谷 面 新袋 里 산 줄기가 칼처럼 뻗어 나왔다 하여 칼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큰늑전回 1424 保寧郡 L업 山面 勒 田里 큰 받이 많은 마을이라 큰늑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큰달월땐 1425 保 寧郡 藍 浦面 達 山里 옛날부터 규모가 큰 마을인데 달처럼 생긴 뒷산 아래에 마을이 있으 므로 큰달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큰동내 땐 1426 扶 餘 郡 世 道 面 領認 院里 이 부근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 큰동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큰어못골땐 14 刃 瑞 山 郡 梨 固面 內里 옛날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서 고기때가 많온 앞바다가 있어 서 마을이 크게 발달하였었다. 고기잡이 하는 어촌의 큰 마 을 이라 큰 어못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을 하였으므로 태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태자평 回 1435 牙山郡 仙 掌 面 新聖里 신라시대에 신라 태자가 초정取井의 물을 먹으며 이곳에서 머물렀다 고 하여 태자평太子坪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태천땐 1436 燕岐 EI ; 南面 水山里 물이 곱게 흐르고 비옥한 토지의 곡식이 가계 를 도우며 책 읽는 소리 가 끊일 사이가 없어 튼튼한 인물이 출이어 나온다 하여 태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태포回 1437 瑞山郡 梨園面 社倉里 옛날부터 해초(파래)가 많이 나오는 마을이라 태포苦浦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태호P J -[쳅 1438 天原郡 廣德面 산에 태화사太華寺가 있으므로 태화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터진목§1 1439 公州郡 維鳩面維鳩里 마 을 뒷산이 자라목이 져서 터졌으므로 터진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덕골 回 1440 燕岐郡 南面 方丑里 조선 고종高宗의 스승이었던 한림학사翰林學士 임공任公이 낙향하여 처음 살던 곳이라 턱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데미 回 1441 大田市 中區 大典洞 백제 때에 야산이었던 이 산에 성이 있어서 그 성 주변에 마을이 있 으므로 테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데미산回 1442 瑞 山郡 近JJ1l面 斗也里 산 둘 레에 약 300 칸이 되는 석성이 있는데 그 모양이 테 를 두른 것처 럼 생겼다 하여 테미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토흥산땝 1443 鄧支郡 島致院邑 鳳 山洞 고려시대부터 토흥부곡吐興部曲의 주산이 되므로 토흥산土興山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몰 미 땐 1444 天原郡 笠楊iJii 可山里 마을 뒷산이 토끼의 형국이라서 톨 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동개 回 1445 保寧郡 JIl 北面 沙湖里 갯가에 있는 마을로서 마 을 지형이 동처럽 생겼다 하여 동개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통논回 1446 論 山郡 鍊武邑 莘花洞 땅속에 항상 물이 뱅뱅 돌고 있으며 그래서 비옥한 논이다. 논의 모 양이 통과 같다 하여 통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통동 回 1447 洪城郡 金 馬 面 華 陽里 마을의 작은 능선을 타고 한 쪽은 북으로 한 쪽은 남으로 통한다 하 여 통동通洞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동박골 땐 1448 舒川郡 底仁面 南 塘里 마을에는 매년 박 을 많이 심었으므로 통박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통접 땐 1449 保 寧 郡 珠 山面 金 岩 里 마을에 옛날식 놋점이 있었으므로 통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동포원回 1450 唐 津 郡新 平 面 新興里 마을 앞에 개가 펼쳐지며 조선시대에 통포원通浦院이란 원이 있었던 마을이다. 그 원에 인연하여 지금도 동포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되고개 回 1451 大 德 郡 炭洞面 外三里 고개에 옥토망월형玉免望月形의 명당이 있으므로 퇴고개라고 부른 다. 옛날부터 토끼가 하늘을 우러러보는 명당이 있다 하여 퇴통이라 부르며 이 고개에서는 토끼 를 보호하였다. 양지 바 른 이곳에 묘 를 쓰 고 자손이 번창하여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지금도 수 많은 묘가 있으나 특이한 것은 묘 앞에 비석碑石 또는 석물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 고개에 비석 또는 석물로 묘 를 치장을 하면 토끼가 약해서 그나마 옥토망월형의 명당자리가 허물어지기 때 문이라 한다. 그래서 석물을 사용하지 않는 유일한 장소이며, 그대 신 묘의 봉분을 높게 쌓는 고개다. 아직껏 명당자리는 발견되지 않았 으나, 그 명당자리에 제대로 묘 를 쓰게 되면 천하 를 호령하는 인물이 탄생된다고 한다. 되봉回 1452 瑞山郡遠北面 梨谷里 산에 흙으로 쌓은 성이 있는데, 형태가 마치 테 를 두른 것 같다 하여 퇴봉淮峯이라고 부르는 산이다. 무구리 §1 1453 洪城郡 銀河面 長尺里
마을의 지형이 투구처럼 생겼다 하여 투구리라고부르게되었다한다. 뭉적골 回 1454 大德郡 山內面 大成里 옛날부터 마 을 에는 항상 양반 선비들이 많아서 그들이 이 연못의 경 치에 매혹되어 동소룰 불며 낭만을 새겼던 마을이라 통소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퉁적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툴못이 回 1455 瑞山郡 安眼邑 倉基 里 마을 지형이 베 틀 처럼 생겼다 하여 톨 못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피 파도리 回 1456 瑞山郡 所 遠 面波 탸 里 삼면이 바다에 둘려싸여 있어서 늘 파도 소리가 들 리고 파도가 밀려 오는 마을이라 파도波 라 , 파도리波 沿 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파리재 回 14o / 保 寧 郡 靑 所面 眞竹里 옛날에는 큰 목장이 있어서 그 목장의 중앙에 위치했던 장소다. 넓은 목장을 관리할 때에 이곳에 파루 를 높이 달고 시간을 알렸으며 감독 여덟 사람이 기거하던 곳이라 파루재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파리재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파초 回 1458 錦山郡錦城面 色 蕙 里 마을 앞을 호르는 냇물에 넓은 반석이 있었으므로 반계潘溪 또는 반 석盤石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파초色薰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팔계 回 1459 舒川郡 華限面損洞里 마을이 처음 생기기 시작한 고려高麗 때부터 마을에는 큰 나무 여덟 그루가 기둥처럽 서 있다 하여 팔계八桂라고 불러온 마을이라 한다. 팔구정 回 148) 劑鬪 U 頃面 廣 坪里 마을에 큰 느티나무가 여덟 그루 서 있는 마을이라 팔구정八九亭이라 고 불러 오는 마을이다 . 팔병사묘자리 圈 1461 洪城郡 長谷面 天台里 산에 여덟 고을의 병사가 나올 명당이 있다 하여 팔병사묘자리라고
불러오는 산이다. 팔지 回 1462 舒川郡 馬山面 芝山里 마을 지형은 고리형(現形]이며 피난처로 널리 알려졌으며 선비들의 낙 향지로 으뜸으로 꼽는 신선지라 세상에서 태평한 곳이라 하여 팔지 八芝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팔충리 回 1463 扶 餘 郡 忠化面八忠里 백제 말기의 충신 성충成忠, 홍수興首, 계백階伯을 비롯하여 여덟 충 신이 이곳에서 출 생하였다 하여 팔충리八忠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팔풍정이 回 1464 公州郡正安面 仁 豊 里 옛날에 마 을 에는 팔풍정/\ ff ljt이라고 부르는 정자가 있어서 선비들 이 소요 를 하였다 한다. 그 정자에 연유하여 팔풍정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팽개바위 回 1465 扶 餘郡 忠化面 可化里 바위 높이가 30 자 정도로 길가에 높이 서 있는 바위다. 지나는 사람 들 이 돌을 팽개질하여 이 바위 를 넘기는 풍습이 있으므로 이 바위 부 근 을 지날 때는 돌 을 팽개질하며 그날의 재수 를 접쳤다 한다. 바위를 넘기기 위하여 돌을 팽개질하는 바위라서 팽개바위라고 부르게 되었 다한다. 팽나무배기 回 1466 公州郡 鷄龍面 月岩里 마을에 수백 년 묵은 팽나무가 서 있는 마을이라 팽나무배기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평구 回 1 荀 7 靑 陽郡 南 陽 面 九龍里 마을 뒷산의 형국이 개가 누워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형국이라서 평 구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평량回 1468 唐 津 郡 血 恨 面 芳溪里 마을을 두르고 있는 들 이 운치있고 기름지다 하여 평량坪良이라고 부르는 마울이다. 평 일리 回 1469 公州郡 新豊面造平里 산중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 들이 조금 열려있다 하여 버리실 또는 평활리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평일리平日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평전들 00 1470 牙山混 松岳面 驛 村里
역말 앞에 펼쳐진 들 에 밭이 많으므로 평전평坪田坪이라고 부르고 또 한 평전들이라고 부른다. 조선 고종 高 宗 때 예산 대술 禮 山大述에서 태어난 참판 參 判 수당 修堂 이남규 李 南珪가 을 사보호조약乙已保 護條 約 에 항거하다가 예산 대술 고향에 돌 아와서 쉬고 있 을 때 홍 주에서 의 병 을 일으키고 싸운 의병대장 민종식 OO 宗 植 을 숨겨 준 혐의로 왜경에 게 체포되어 무참한 고문 을 받으면서도 끝 까지 항거하다가 이 둘 냇 가에서 참 혹 하게 피 살 되고, 그의 아 들 이충구 李忠求 와 종 김응 길 金 應 吉도 또한 항거하다가 함께 피 살 된 들 이다. 평창回 1471 牙山 郡 仙 掌面 障串里 고려 공양왕恭 讓 王 때 근읍의 조세租稅 를 받아 쌓아두던 창고가 있었 으므로 평창平 倉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평촌回 1472 論 山郡 彩雲 面 三 巨里 예전에 이 고장의 부호 富萩 김태현金 泰 鉉과 김동광金 東 光, 김동선金 束先이 살던 마 을 로 쌀이 널려있다는 말 을 들을 만큼 논이 펼 쳐지는 들에 있는 마 을 이다. 평화촌 回 1473 禮 山 郡 新岩面 鳥谷里 6·25 사변 후 공산정권 을 피해 월 남한 피난민 들 이 정착하여 이 룩 한 마 을 로 평 화촌平和村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포답回 1474 論 山郡 彩雲 面 花山里 옛날에는 바닷 물 이 드나드는 갯가 벌땅이었으나 전답田崔으로 변하 여 마을이 이룩됨에 따라 포답浦畜으로 부르는 마 을 이다. 포성 回 1475 舒川郡 底仁面 長 浦里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 초기까지 침략해 오던 왜구 들을 무찌르는데 마 을 사람과 이웃 들 이 굳게 뭉쳐 왜구의 침입을 못하게 한 갯가의 마 읍이라 포성浦城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표뜸 回 1476 扶 餘 郡 忠化面 天 堂 里 옛날 백제 때 계백장군階伯將軍이 태어나자 산에서 호랑이가 내려와 젖 을 먹이고 키웠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마을이라 표뜸이라고 부른 다. 또 일설로는 표씨 表 氏 들 이 많이 살았으므로 표뜸이 라고 부른다 한다. 표석골回 1477 훈岐 郡 南面 松 泣 里 마을 뒷산에 입씨林氏 묘소의 표석이 서 있다 하여 표석골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풋사리 回 1478 保寧 郡 綴 JI| 面 元山 島 里 마 을 앞에 마 을 사람 들 이 어살〔漁荷〕 을 많이 매고 고기 를 잡는 마 을 이 라 풋 살, 풋사리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풍경 리 回 1479 ~ 山郡 屈 山面 孝 橋里 마 을 에 부 자 富者 가 많이 살고 있어서 집집마다 풍장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여 풍장리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풍경리風 兼 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풍년동 回 1480 唐津郡 唐津邑 沙器 所 里 땅이 비옥해서 매년 풍년이 드는 것처럼 수확이 오르는 마 을 이라 풍 년 동몄 年 洞 이 라고 부르개 되 었다 한다. 풍방골 땐 1481 洪城郡 金馬面 松江 里 마 을을 둘 러싼 들 이 곡식을 키우는 데에 맞지 않아서 매년 힘들여 농 사 를 지어도 품과 밥만 들 어가고 수확이 변변치 못한 곳이라 품밥골 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풍방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피목 땐 1482 洪城 郡 洪城邑 訪 鷄 里 마 을 에 피목 皮 木나무가 많아서 옛날부터 피목皮木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한다. 피 안말 回 1483 論 山 郡 彩았 面 三巨里 채운 彩雲 의 미내다리에있는미교비 深 橋碑안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비 • 만말이 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피안말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피원 回 1484 唐津 郡 牛江 面大 nl i里 옛날 피씨皮氏가 언樞 을 쌓고 개척한 마을이라 피언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피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피촌말回 1485 牙山郡 新 昌 面 邑內里 옛날에 백정白丁이 살던 마 을 이라 피촌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필당땐 1486 舒川郡 馬 山面 安 堂 里 옛날에는 땅이 질퍽거려서 펄땅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필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또한 일설로는 필방筆 房 이 있어서 필방筆房, 변 하여 필당이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평곳재 ffiJ 1487 公州市 錦城洞 산에 회삼물灰三物로 만든 굴이 있어서 길이가 40 척이나 되고 방이 둘이나 있는데, 옛날에 얼음을 저장하였던 빙고氷庫였다 하여 빙고 재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핑곳재 라고 부르는 산이다.
【굴】 하고개 回 1488 洪城郡 龜 項面 언 谷里 옛날에는 홍성洪城에서 해미海美, 서산瑞山으로 통하는 큰 길의 고개 로서 행인 들 이 길 을 가다가 말이나 소에게 물을 먹이며 사람들도 한 숨 을 돌리는 고개라 하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하광 回 1489 靑限 郡 쟈떄i 水石里 마을에는 아래로부터 빛이 새어 들어와서 장차 크게 될 사람이 배출 될 것이라 하여 하광下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하궁 回 14OO 保 寧 郡 )||北面 河滿里 조선 선조 宣 祖의 아우 하원군河原君의 궁이 있었으며, 그가 살던 마 을이 라 하궁河宮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하기들回 1491 論 山郁 豆磨面 光石里 이곳에 살던 전주 이씨全州李氏 한 사람이 죽음을 앞에 두고 아들에 게 유언하기를 〈내 무덤을 쓸 때에는 아무 지관의 말을 듣지 말고 그 대로 묘 를 쓰도록 하라〉고 말하였었다. 그리고 그가 죽자 묘를 쓰는 데, 금조탁시형金鳥暎尻形의 명당을 도사가 지적해 줘서 묘 룝 쓰는 데, 별안간 지관 한 사람이 멀리서 부르므로 얼떨떨하게 마음이 떨려 서 지관 앞으로 가서 그 를 데리고 오는데 그동안 관을 묻던 사람들이 살펴본죽 반석盤石이 나와 그 반석을 들어내려고 반석 한 모통이 뮬 드는데 갑자기 학 鶴 한 마리가 나와서 하기들에 앉았으므로 묘 를 찰
못쓰게 되었고 이 들은 학이 날아와서 앉은 둘이라 하여 하기들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하나샘!TI 1492 天原郡 成歡邑 旺林里 물이 아주 차고 수량이 많아서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물이 줄지 않는 샘이다. 인조仁祖가 이괄의 난 을 피하여 공주로 파천할 때 왕지산旺 池山에서 쉬면서 이 우물물을 길어다 마시고 크게 기뻐하였다 하여 왕지旺池 또는 하나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하루살이번덕지 回 1493 忠 淸南道 洪城郡 結城面 琴谷里 마울에 둠벙이 있는데 하루살이가 많은 둠벙이라 이 둠벙이 있는 마 을을 하루살이번덕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하마비 回 1494 論 山郡 魯城面 丙舍里 전에 성리학자 윤씨尹氏의 묘막을 앞에 두고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어 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하는데 그 하 마비가 있는 마을도 하마비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하봉 回 14% 論 山郡 鍊武邑 鳳洞 봉동鳳洞 아래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하봉下鳳이 라고 부론다. 이 마을 에서는 장사壯士가 나오면 40 세 를 넘기지 못하고 죽으므로 지 관地官 에게 물어본죽 마을이 동향이면 그런 액운이 없어질 것이라 하여 동 향으로 마을을 돌리자 액운도 없어지고 마을이 번창하였다는 마을이 다. 하지랑이 Bl 14% 牙山郡 道高面 回兎里 마을에 옛날 하씨河氏가 살아서 좌랑佐郞 벼슬을 하였으므로 하지랑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하전목고개 回 1497 公州郡 正安面平正里 산의 고개가 너무나 험준하여 가까운 거리로 넘어가지 못하고 늦인 목인 이 고개 를 통해서 산을 넘게 되면 고개를 넘는데 하루 해가 져 서야 넘어갈 수 있다 하여 해진목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하진목고 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학고개 § 14~ 大田市 中區 玉溪洞 옛날 사람이 죽어서 묘 를 쓰는데 광중壤中에 있는 반석을 들어내려 고한귀통이 률들 었을때 그묘속에서 학한마리가날아갔다하여 학고개 라고 부르며 또한 하고개라고도 부르게 되 었다 한다.
학교 回 1499 大德 郡 九則面袋洞里 마을 뒷산의 형국이 학의 형태라 하며 마을 앞에 놓인 큰 다리 를 학 이 많은 냇물에 놓았으므로 학교鶴橋라 하여 이 마을을 학교訪摘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학다무니 回 1500 牙山郡 松岳面 講堂 里 학鶴이 집을 짓는 지역이라 하여 학동鶴洞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학 다무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학당이 回 1501 大 田市 東 區 宋村洞 조선 성종成宗 때 송여집宋汝損이 서당을 짓고 공부 를 하다가 幻세 를 일기로 죽었다 하는데, 서당이 오래 전부터 있었던 마을이라 학당學 堂 이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학당이 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학바위 땐 1502 '/.;-~ ~ 1 l 1\ 定山而 訪 巖 里 옛날에는 바위 아래에 큰 웅덩이가 있었으므로 황새가 많이 모였었 다. 바위에 학암鶴岩이라 두 글씨가 새겨져 있으므로 마을도 학바위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학소回 1503 公) 1i1l1\ 新豊面龍水里 마 을 의 지형이 마치 학鶴이 알을 품고 있는 것처럼 생겼다 하여 학소 鶴媒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강回 1504 舒川郡 時 草 面 仙東里 산세에 비하여 냇물이 특 히 귀하고 냇물이 흐르는 물줄기에 고기가 없어 인심이 박한 것처럽 보여서 인심이나마 후해져야겠다는 중국 시인의 시절時節을 따서 한강范岡이라고 부르게 된 마을이다 . 한곡 回 1 頭 論 山郡 恩津面防築里 마 을 지형이 황새가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이므로 한새실이라 부르다 가 변하여 한샛 또는 한조곡閑 鳥 谷, 이어 한곡閑谷이라고 부르게 된 마을이다. 한편에 방죽이 있어서 그 산수의 수려함을 타고 많은 시인 묵객이 들렀으며 나라에 우환이 있을 때는 더욱 붐비던 마을이라 한 댜 백제 때 토끼재 아래로 득안성tT 安城에서 밀려난 씨족들이 백재 의 망국의 한을 달래며 집단적으로 마을을 이루어 흰 옷을 입고 어울 리는 것이 마치 학과 같다 하여 후세의 선비들의 부러움을 샀던 마운 이며, 성리학性理學이 성행함에 따라 벼슬길에 나가는 것보다 학문 에 열을 올렸던 온사隱士들이 많이 나오는 마을이라 한곡閑谷이라 높
이 샀던 마을이다. 한립봉 回 1 印 5 天原郡 笠場面 良袋里 산에 한림翰林 민복 OO 福 의 묘가 있으므로 한림봉翰林 峯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립정 回 1507 公州郡 鷄龍 面 柳坪里 마을에 한림학사가 세운 정자나무가 있었던 마을이라 한림정翰林亭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버들 回 1500 天原郡 修身 面 白子里 마을에 큰 버드나무가 있다 하여 한버 들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뿌리 回 1 寒 牙山郡 仁)i 1 面 大音里 마을의 지형이 큰 뿔처럼 생겼으므로 한뿌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한산回 1510 公州郡 牛城面 韓川里 마을에 한씨韓氏의 산소가 있는 마을이 라 한산韓山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한새울멘 1511 舒川郡 華陽面箕福里 항상 여유 있는 선비들이 사는 마을로서 마음을 여유 있게, 세상에는 너그럽게 풍류로 사는 마을이라 한새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석골 回 1512 公州郡 新덮面 雙 大里 마을의 땅이 좋지 않고 논이 극히 적어서 전경田耕하는 토지가 합하 여 한 섭밖에 되지 않는 마을이라 한석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성지 回 1513 瑞山郡 瑞山邑 爵 石里 마을 앞에 큰 들이 펼쳐지는데 이 큰 들을 잘 가꾸면 큰 성안처럽 부 유하게 살 수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한성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시랑이 回 1514 公州郡 寺谷面大中里 조선 숙종肅宗 때 한씨韓氏 한 사람이 시 랑侍郞 벼슬을 하였는데 그 가 이 마을 출신이므로 이 마을을 한시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신 回 1515 天原郡 修身面 白子里 옛날에 부귀영화를 버린 양녕대군의 후손들이 이곳에 이주하면서 500 여 년 대를 이으면서 부유하게 살아온 마을이라 한산閑山이라고 부르다 변하여 한신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한양고라실 圓 1516 舒川郡 韓山面 丹下里
한양에 있는 한 들판 같다 하여 한양고라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한양궁回 1517 照皮郡 錦南面 盜谷里 조선 중종中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신준미申避美가 기묘사화己卯士 禍에 몰리어 벼슬을 며앗기고는 이곳에 은거하면서 늘 한양漢陽의 왕 궁을 생각하여 그리움에 살았다 하는데, 마을 지명도 한양궁限陽宮 으로 부르게 하였다 한다. 한양말回 1518 論 山郡 夫赤 面 忠谷里 조선朝鮮 을 건국한 이태조李太祖가 개성開城을 떠나 새로운 도읍을 정하고자 계룡산 鷄龍 山 신도안[新都內]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신하 를 보내어 새로운 왕도 를 물색할 때에 이곳에도 사람을 보내어 지형을 알아본 지역이다. 그때 신하가 이곳을 다녀서 한양에 올라가 상언하 기 를 지형이 너무 협소하여 왕도로서는 부적당하다고 말하므로서 다 시는 거론 을 하지 않았던 지역인데, 왕도로 지목된 마을이었으므로 한양말이 라고 부른다 한다. 한우물 回 1519 扶餘郡 裵岩面 合井里 마 을 에 큰 우물이 있어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 큰 우물물을 마시 는 마 을 이라 한우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운이 回 1520 瑞山郡 所遠面茅項里 마을이 골짜기에 위 치하여 구름이 많이 끼며 마을 사람들이 풍류의 운치에서 산다 하여 한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적골回 1521 大田市 中區 大寺洞 옛날에는 큰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 한절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한적골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한정 回 1522 大 德郡 新 灘津 邑 黃湖里 세종世宗 갑신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안한정이란 선비가 살았다 하 여 한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지미 땐 1523 洪城郡 洪北面大東里 마을에 거미 형국의 명당이 있으며 마을에 큰 연못이 있었으므로 한 지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티고개回 1524 ffl輯 저寺面 지 옛날에는 이 고개를 경계로정산定山쪽은정산마치(定山馬崎],청양꿉
陽쪽은 청양마치(靑陽馬時]라고하여 행정적으로는 청양현靑陽縣과 정 산현定山縣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티고개는 칠갑산七甲山에 가로 놓여 이 부근에는 인가人家가 없어서 고개 를 넘으려면 산고개 첫머 리에 양쪽에서 움막을 짓고 밤을 지새고 왕래했었다 하는데, 그후 차 츰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객청客聽과 주막이 생기고 길을 안 내하는 길잡이까지 생겨서 편리하였으나, 나라의 일이 어지러워짐에 따라 산적 山賊들이 들끓어 살지 못하고 산을 넘는 일도 드물었다 한 다. 한티고개는 고개가 워낙 험하고 가파라서 이 고개 를 넘으려면 말 을 매놓고 하루저녁을 묵은 다음 고개 를 넘는다 하여 마치馬時라 불 렀으며 그 후는 큰 고개라 하여 한티고개 또는 대티〔大時]고개라고부 르게 되었다 한다. 할매고개 回 1525 保寧郡 검躍面 炳坪里 옛날 자식이 없어서 아들 하나 딸 둘을 주워다기론 할머니가-긴자식 들 구박에 고개 를 헤매다가 죽은 고개라 할매고개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할미섭 Q) 멩 152 6-1 舒川郡 西面 扶士里 옛날 한 노파가 효자 하나 를 데리고 재미있게 살고 있었는데 그 효자 가 하루는 고기잡이 나갔다가 풍랑으로죽었다. 할머니는 너무나슬퍼 한 나머지 자식의 넋이라도 위로하여야겠다고 이 섬으로 들어와서 죽었으므로 이 섬을 할미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할미섭익괜 1526-2 大川市 大 )II 洞 옛날 갱구 할머니가 용머리에서 왕대산王萩山으로 바다 를 건너 왕래 할 때에 이 바위에서 쉬어갔다 하여 할미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함독골 땐 15' lJ 瑞山郡 梨固面 堂山里 마을이 처음 생길 때에 초막草버P 부터 시작되었다는 마을이다. 한 선 비가 숲이 우거진 이 마을에 와서 숲을 깎고 초막을 짓고 밤에는 글 을 읽었다 하는데, 그 글 읽는 소리가 이웃 마을에 크게 들려 왔으므 로 이 마을을 함독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함박섭 回 1528 唐津郡 松嶽面 井谷里 마을 지형이 함박꽃처럼 생겼다 하여 함박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함전땐 1529 公 川郡 反 iili面 聖 岡里 마 을 이 고개 아래에 있는데 범이 마을에 자주 나타나므로 마을사람 들 이 마울 주변에 함정 을 파놓았으므로 함정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함전 咸 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함지뱅이 맨 1530 大 田 市 東臣 板 岩洞 마 을 지형이 함지처럽 생겼으므로 함지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합강땐 1531 짠皮郡 南 面 月 山 里 금강이 미호천과 합 치 는 곳에 마 을 이 있으므로 합강合江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합산回 1532 牙 山 郡屯浦面 山田 里 마 을 지형이 조개처럼 생겼으므로 합산始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합전 땐 1533 舒 川 郡 西面 新始里 옛날에는 바닷물이 드나 들 어 썰물 일 때는 조개가 많은 갯 벌밭 이었으므 로 합전始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항각골멘 1534 짠 皮郡 錦南 面 黃龍里 마 을 이 항아리 모양을 닮았다 하여 항각골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 다. 항곡回 1535 唐津 郡 高 大面 項谷里 마을 지 형 이 목[項)처 럼 생 겼으므로 항곡項谷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 다. 해나지 땐 1536 瑞山郡 浮 石面 iI 秀 里 옛날에 마을에는 큰 밭이 있어서 하루종일 김을 매도 김 을 다 못매는 발이 있었으므로 해나지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해남골回 1537 靑陽 郡 定山面 海南里 마을에 회화나무가 있어서 희화나무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해남 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해망산回 1538 大川市 新 黑 洞 바다가 잘 보이는 위치에 산이 있으므로 해망산海望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해상골回 1539 舒川郡 文山面 神 晟 里
마을이 물에 떠 있는 것처럼 생겼다 하여 해상골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해월 回 1540 公州郡寺谷面海月里 냇물이 마을 앞에서 휘어 돌아가므로 휘여울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해월盤越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해지게 回 1541 公州市 金硏洞 사양 노을이 절경을 이루는 일락산日落山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해 지게라고 ·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해촌 回 1542 扶餘郡 世道面 水古里 수령과 물이 많으며 바다처럽 넓은 들에 마을이 있으므로 해촌海村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해태산圈 1543 論山郡 伐谷面 晩木里 산의 모양이 불[火]이 타는 모양이므로 이 부근에 화재 가 잦아서 산 봉 우리에 물독을 묻고 물을 저장하여 해태산海苦山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헵싸리 回 1544 靑陽郡 化城面 新井里 농토가 기름지고 햇볕을 찰 받는 논이 있어서 그해 헵쌀이 가장 먼 저 수확되는 논이 있으므로, 이 논이 있는 이 마을을 헵싸리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행계 回 1545 洪城郡 長谷面 杏亭里 마을 앞을 흐르는 시냇가에 살구나무가 많았던 곳이라 행계杏溪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행랑골이맨 154 6-1 論山郡 光石面 t’尹里 옛날에는 마을 앞으로 큰 길이 있었으며 또한 행인들이 유숙하는 주 막이 줄비하게 서있던 마을이라 행랑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행랑골이괜 154 6-2 論山郡 論山邑 奈洞 옛날에 은진현恩津絲 관아官衛의 심부름과 하인 노릇을 하는 사람들 이 모여 살던 마을이라 행랑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행자막골 回 1547 舒川郡 文山面 金福里 옛날에는 큰 은행나무 정자가 있었으며 학문이 깊은 선비둘이 많아 서 여러 곳에서 학자들이 드나들며 묵어가곤 하던 마을이라 행자막 골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행정 땐 1548 論 山郡可也谷面 六谷里 마을에 늙은 은행나무 정자가 있어서 행정杏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향교말回 1549 洪 城 郡結 城 面 邑內里 마을에 향교가 있으므로 향교말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향산 回 1550 洪城郡 洪 城邑 照香里 마을 한복판에 오래 묵은 향나무가 있으므로 향산香山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향지 回 1551 公 州 郡鷄 龍面 香 芝 里 마 을 에 지초芝 草 가 많았으므로 향지香芝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향효포回 1552 公 州郡 鷄龍 面 菓 鶴 里 신라新 羅 때의 효자 향덕向 德 이가 살았던 마을로 그 를 향모하는 뜻에 서 그가 태어 난 마을을 향효포向孝浦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허구배미 圈 1553 論 山郡可也谷面 江 靑 里 옛날에 어떤 나그네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기진맥진하여 길에 쓰러 져서 이곳에 사는 농부가 그 나그네 를 집에 데려다가 하룻밤을 묵어 가게 하여 생기 를 돕게 하였다는데 그후 그 나그네가 은혜에 보답하 기 위하여 이곳에 일곱 마지기의 전답을 사주었다 하는데 그 전답을 허구배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허둔곡回 1554 語 山郡 伐谷面 水落里 백제百濟 때의 장수 허둔許屯이 백제 멸망 후 나라 를 되찾기 위하여 군사 를 이끌고 진을 쳤던 골짜기라 허둔곡許屯谷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허무니고개 回 1555 天原郡 豊歲 面 寶 城里 옛날에 이무기가 백 년 동안 수도하다가 하늘로 용이 되어 승천할 때 에 이 고개의 한 우물에서 허물을 벗고 승천하였으므로 이 고개 를 허 물고개 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허무니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허문 땐 1556 舒川郡 馬山面 堯谷里 목온牧隱 이색李 稙 이 무학대사無 學 大師와 명당자리 를 찾다가 먼 곳에 서 여기 를 발견하고는 달려왔으나 동북쪽으로 맥이 끊겨 있으므로 〈허문虛 r, 이로다〉 하고 발길을 돌렸다 하여 허문虛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헷고모루 回 1 조 7 牙山郡 陰峯 面 德地 里 옛날에 석희石灰 를 굽던 큰 생산지로 또한 충청도忠 淸 道와 전라도全 羅 일부에서 한양 際陽 으로 올 라가는 큰 길이 있는 마 을 로 주막이 즐 비하게 서 있어서 헷고모루라고 부르게 된 마 울 이 다. 현내 回 1558 錦山郡 富 利面 縣 內里 고려 高 麗 때에 이곳에 있었던 부리현 副 利 縣 의 고 을 이었으므로 현내 縣 內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현미 回 1559 扶 餘郡 忠化面 玄 眉 里 마을 앞에 아 름 다운 산이 외따로 있으므로 현미玄 眉 라고 부 르게 되 었다 한다. 혈혼천 (ID 1561) 公州郡 鷄龍 面 신라 때 효자 향덕向 德 이 피 를 홀 리며 고기 를 잡기 위해 강에 들 어가 서 냇 물 이 피로 물 들 었다 하여 혈 혼천이라고 부르개 되었다 한다 . 형제동 回 1561 牙山郡 鹽 特面 山 陽 里 마 을 이 처음 생길 때에 어느 형제가 처음 정착해서 이 룩 한 마 을 이라 형재동兄弟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호겨니 回 1562 天 原 郡 笠 場 面 虎堂里 산이 험하고 계곡이 험하여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으므로 호계虎 溪 라 고 부르다가 변하여 호겨니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호대골回 1563 大川市 新 黑洞 마 을 에 큰 호도발과 대추밭이 있으므로 호대동이라고 부르다가 변하 여 호대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호도卽 1564 瑞山郡 近興面 都浪里 모양이 여우처럽 생긴 섬이라서 호도孤 島 또는 여우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호동° 回 15 ffi-1 保 寧 郡 川北面 訪城 里 구전에 따르면 임진왜 란壬辰倭亂 후 명 나라의 배가 파선하여 돌 아가 지 못하고 이곳에 정착하게 되므로서 호동胡洞 또는 오랑캐골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호동이괜 1 5ffi- 2 舒川郡 西面 月湖里 마 을 부근에 여우가 많으므로 호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호동이괜 15 ffi-3 牙山郡 鹽 崎面 芳 峴 里
마을 지형이 병처럼 생겼으므로 호동登洞이라고 부로게 되었다 한 다. 호디기 回 1566 天原郡 北面 龍巖里 옛날 마 을 뒷산에 덕을 닦기 위하여 도장을 짓고 많은 사람을 지도하 였으므로 호덕리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호디기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호랑이터거리回 1%7 大 川市 竹 亭 洞 옛날에 호랑이가 이 바위에서 턱거리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바위다. 호랭이코추뱅이 回 1568 舒 川 郡 馬山面三月里 모 롱 이 지형이 호랑이가 엎드리고 있는 형국인데 그 코처럼 생겼다 하여 호랑 이코추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호리동 回 1569 扶餘郡 林 )II 面 郡司里 마 을의 지형이 병의 목처럽 생겼으므로 호리동쥰災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호미동回 1'57 0 錦山郡 南一面 馬壯里 마을에 홈다리가 있으며 그 위로 밤이면 호랑이가 많이 지나다녔다 하여 호미동虎尾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호산回 1'57 1 論 山 郡 光石面 山東里 마 을 가까이 장자못이 있고 그 곁으로 통미가 있으므로 호산湖山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호짜굴 回 1'57 2 保草郡 藍浦面 達山里 옛날 여기에 마을이 처음 생길 때 단 한 사람이 산막山孫올 짓고 죽 을 때까지 혼자 살았다는 마을이 라 호짜굴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호장들回 1573 論 山郡 光石面 中里 들의 지형이 깊어서 물에 잘 잠겼으며 마치 호수처럼 되는 때가 많았 으므로 호장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호젓골 回 1'57 4 保寧郡 蒸JI|面 校成里 마을 지형이 나비 를 닮았다 하여 호젓골 또는 호집동綿蝶洞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호정 땐 1575 禮 山郡 新岩面龍宮里 마을의 집집마다 우물이 있으므로 호정戶井 또는 각호정 이 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호좁은꼴 Im 1576 天 原郡 廣額 面 大德里 골짜기 가 좁아서 겨우 하 늘 만 보이는 좁다란 골 짜기 라 호 좁 은골이 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호탄리 回 177 燕岐郡 錦南 面 찼浩里 마을 앞에 병처럼 생 긴 여 울 이 있으므로 호탄리 夜禪里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혼동이 回 1578 問陽郡 習南面 江津里 마을로 들 어가기 위해서는 여러 굽이 룰 돌 아야 하므로 마 을 이 름 을 회동回洞이라고 부 르 다가 변하여 희동이, 이어 혼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흔천담回 1579 錦 山郡 富 利面 縣內里 고려시대 때 부리현 副 利 縣 이었는데 누에 蠶를 많이 치던 마 을 로 그후 마 을 에 액운이 겹쳐 억 울 하게 죽 은 사람 들 이 많았다 한다. 그 억울 하게 죽은 혼신 들 이 하 늘을 떠도는 지역이라 혼 천 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홉애비쪽부리 00 1580 保寧郡 때 山面 南深 里 이 모롱이에 사람 들 이 집 을 짓고 살기만 하면 아내가 죽 어 나가므로 항상 홀애비들만 사는 마 을 이라 홀애비쪽부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홍가동 回 1581 扶餘郡 世 道 面佳 槍 里 마을에 홍씨 들 이 많이 산다 하여 홍가동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홍거리回 1582 溫陽市龍和同 마을이 홈같이 되었으므로 홈거리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홍거리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홍거미 땐 1583 洪城郡 洪 東 面 洪 元里 마을의 지형이 큰 거미가 기어가는 형국이라 하여 홍거미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홍경 잇들 回 1584 天原郡 成觀邑大弘里 옛날에 홍경사弘慶寺, 홍경원弘慶院이 있었던 그 앞들을 홍경잇들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조선 제 7 대 세조世祖 10 년 (1464) 3 월 17 일에 세조가 온양 온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으며 제 14 대 선조宣祖 30 년(1 597) 9 월 8 일에 명나라 장수 참정 양등 산楊登山과 부총 해생解生이 이곳에서 왜적을 쳐 크게 이겨서 서울에 있던 왜구 를 막은 들이다. 홍도리 回 1585 錦山郡 南 一 面 新井里 마을에 홍도낙반형紅桃落盤形의 명 당이 있다 하여 홍도리紅桃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홍돗골 回 1586 大 田市 東 區 弘道洞 옛날에는 복숭아꽃이 많이 피던 마을이라 홍돗골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홍동 땐 1587 禮 山郡 新 岩 面 中 禮 里 조선시대에 행정구역상 홍성洪城과 . 예산禮山이 이웃이었을 때 이 마 을 이 홍성에 딸렀으므로 홍동洪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홍뭇골 回 1588 天 原郡 木J II 面 西里 옛날에 홍문紅 r~ 이 서 있던 마을이라 홍문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홍뭇골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홍샌 回 1589 唐 r; 1 r r,i 牛江面 1InI i里 옛날에 뚝을 막고 마을이 생길 때에 홍생원이 그와같은 일을 해냈으 므로 홍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홍성골 回 159 :l 公州郡 /lllJ II 面 南山里 마을 산의 모양이 마치 기러기때처럽 생겼다 하여 홍생골이라고 부 르다가 변하여 홍성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홍수동 回 1591 唐津郡 大湖芝面 桃李里 마을에 백일홍百日紅이 많이 피는 마을이라 홍수동紅樹洞이라고 부르 - 게 되었다 한다. 홍안 回 1592 瑞山郡 翼 山面 上城里 마을 앞에 펼쳐진 홍안이벌에서는 농사가 잘 되고 겨울철에는 기러 기가 때를 지어 날아와 앉는 마을이라 홍안鴻雅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한다. 홍주굴 回 1593 瑞山郡 仁旨面山東里 도비산 아래 골짜기에 있는 마을인데 홍주洪州 사람들이 많이 살았 으므로 홍주골, 이어 홍주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홍주청금땐 1594 唐津郡 松嶽面 靑 件里
조선시대에 청금 靑 捨이 갈라져서 동쪽은 면천청금, 서쪽은 홍주청금 이라고 할 때에 서쪽에 있었으므로 홍주청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홍지곡 回 15% 舒川 郡華限 面大 等里 골짜기의 흙이 붉 다 하여 홍지곡紅地谷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홍천 (I) 回 15$ 6-1 瑞 山 郡 音岩 面 上 紅里 여 름 철 장마가 지면 마 을을 스쳐가는 냇 물 은 온 통 홍 색으로 변한다 하여 홍천紅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홍천 0 回 15~-2 天原 郡 笠揚 面 弘泉里 마을 우물가에 붉 은 꽃이 많이 피는 곳이라 홍 천弘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홍축꼴 回 1597 燕岐郡 西面 釜洞里 처음 이 마 을 에 정 착 한 사람의 꿈에 집 부근의 땅에서 광채가 나서 대낮같이 밝은 꿈 을 꾸었다 하여 홍 촉 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희곡 回 1598 fi!f津郡 高大 面 項 谷 里 옛날 이 마 을 에 박선달朴先 達 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항상 벼 를 산더 미처 럼 쌓아 놓고 살았다 하여 이 마 을을 화곡禾谷이 라고 불 렀다. 화란봉!ID 1599 牙山郡 新昌 面 佳內里 산에 아 름 다운 진달래꽃이 많이 피었으므로 화란봉花炯 峯 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 화랑골 回 1600 天原郡 北面 陽谷 里 골짜기에 신라新 羅 화랑花郞의 묘가 있다 하여 화랑골花郞谷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화랑터 回 1001 公州郡 正安面 商聖里 신라新 羅 시대에 화랑花郞이 살았다 하여 화랑터(花郞袋]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화리 回 1 印 2 舒川郡 文山面 文 草 里 마 을 앞의 들 이 기 름 져서 곡식이 잘 되는 곳이어서 화리禾里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화마루땐 1603 公州郡 鷄 龍面 華 軒里 마 을 을 둘러싼 산과 들이 마치 꽃을 펴 놓은 것 같다 하여 화마루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화망 回 1604 保寧郡 熊 川面 九 龍 里 아름다운 꽃이 피는 화락산花落山을 바라보는 마을이라 하여 화망花 望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화방들 回 16a 璃賜郡 있谷面 新袋里 옛날에는 이 들 이 온통 목화밭이었다 하여 화방들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화산땐 1 綴舒川郡 翰山面 龍山里 금강에서 범선을 타고 마을쪽을 바라보면 마치 작은 산이 떨어진 것 처 럼 생 긴 곳 에 마 을 이 있으므로 화산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화양回 1007 洪城郡 長谷面 月溪里 옛날에는 마을에 화양나무가 많았으므로 화양花陽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화전回 1 印 8 公州郡 寺谷面 雲岩里 마 을 뒤의 산이 나지막하며 흙빛이 붉고 산에 꽃이 많이 피는 마을이 라 화전花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화청 回 1 印 9 天原郡 東面 花德里 마 을 에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이 있다 하여 화청花晴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희동고개 回 1610 1::rµ支郡 南 面 方丑里 병자호란 때 명나라의 장수가 이곳을 지나면서 살피니 이곳에서 장 차 장수가 나서 명나라 를 괴롭힐 것 같아서 고개의 맥을 칼로 잘랐다 하여 화통고개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화현 回 1611 禮 山郡 新限面大德里 옛날 대홍현감大興縣監이 이곳을 지나다가 가뭄에 말라가는 전답田音 을 보고 한숨을 쉬며 걱정이 태산 같은데 한쪽을 바라보니 그쪽에는 매밀꽃이 환짝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여 그쪽 마을을 화현花峴 이 라고 부르게 하였다 한다. 환재골 回 1612 쩡岐郡 南面 燕岐里 옛날 춘궁기에 나라의 양곡을 백성들이 빌리고 가을 추수기에 상환 하는 환제제도가 있었는데 그때 창고가 있었으므로 환재골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활골 땐 1613 錦山郡 南二面 上金里
마을 지형이 활 모양으로 꾸부러졌다 하여 활 골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활량골 回 1614 唐津 郡 順 城面 鳳菓里 옛날 마 을 에 활량들이 많이 살던 마을이라 활 량골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활원땐 1615 公州郡 正安面 長 院里 마 을 의 지형이 활처럽 생겼으므로 활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삼남대로에 면하여 길손들의 편의 를 봐주던 궁원弓院도 있 어서 광정나루와 함께 널리 알려졌던 명승지이었다 . 황각골 땐 1616 大田市 西 區 邊 洞 마을 지형이 소 뿔 처럼 생겼으며 옛날부터 한유한 마 을 이라 황각골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황고개 回 1617 論 山 郡 論 山邑 표 山洞 과거 를 보러가는 선비는 황고개 를 넘어가지 말라는 일화가 있는 고 개인데, 옛날 똑똑한 선비도 이 고개 를 넘고 과시장에 나갔다가 두 번이나 실패하였다 하며 세번째는 꿈에 나타난 산신령의 계시대로 눈을 가리고 황고개 를 돌 아서 한양 과시장에 이르러 과거에 급제하 였다한다. 황곡回 1618 論 山郡 恩 津 面 侍 墓 里 0Ht 골짜기가 크므로 한골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황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황도 00 1619 瑞 山郡 安眠邑 黃島 里 적들강積쯔江 가운데에 떠 있는 섬으로서 산과 논이 없으며 수확기에 이르러 보리가 익으면 온 섭이 누렇게 보인다 하여 황도黃 島 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황시동 回 1620 天原郡 東 面 東 山里 옛날에 노론절이 라고 부르던 절이 있었으므로 황사동黃寺洞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황산圈 1621 論 山郡 江 禁 邑 黃山洞 후삼국 시대에 후백제後百濟의 견훤과 고려의 장수 배현경이 싸움 을 하다가는 경치가 아름다움을 보고 휴전을 청한 다음 산을 바라보며 예찬하였다 하는데 누우런 산이 많은 곳이기에 황산黃山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황산벌固 1622 論 山郡 連山面 連山里 백제에 나당군이 쳐둘어 왔을 때 계백장군이 전사한 들이며 후삼국 시대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군과 접전을 하여 후백제 를 멸망 시킨 들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황새골땐 1623 唐津郡 松嶽而 桃源里 마 을 지형이 마치 황새가 우렁을 찍어 먹는 형국이라 하여 황새골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황새부리 回 1624 ~ 山郡 大述 面 山 亭 里 마 을 지형이 황새의 부리처럼 생겼다 하여 황새부리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황새울回 1625 扶餘郡 林 )II 面 舊校里 마 을 에 큰 소나무가 있는데 황새가 많이 깃들므로 황새울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황소매 回 1626 舒川郡 華陽面 玉lili里 숲이 우거지고 소 를 먹이기에 알맞은 들이 있으므로 황소매라고 부 르게 되었다 한다. 황우치 回 1 泣 7 燕岐郡 東 面 鳴鶴里 마 을 에 황우도강형黃牛度江形의 명당이 있으며 장수 황씨長水黃氏가 처음 살았던 마을이라 하여 황우치黃牛時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황조촌 땐 162B 瑞 山郡 海美面 皇洛里 옛날 고려시대에 명나라에서 진씨陳氏가 피난해 와서 살며 그가 사 는 마을을 황조촌皇朝村이라고 부르던 것에서 불여진 이름이다. 황풍리 BJ 1629 錦山郡 南一面 皇風里 고려 제 25 대 충렬왕 31 년(1 305) 에 김신金洗이 원나라에서 벼슬하여 요양행성遼陽行省 참정參政이 되어 고려 를 도와 큰 공이 있었으므로 충렬왕이 기뻐하여 그가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고향에 이르자 왕은 그의 고향을 현條에서 주 1 서로 승격시키는 한편, 이곳에 비碑 를 세우 고 만리황풍萬里 皇 風이라 새겨서 기리었으므로 황풍리皇風里라고 부 르게 되었다. 황화산園 1630 論 山郡 論 山邑 登華洞 백제 30 대 의자왕義慈~ 王이 이곳에 와서 평탄한 큰 바위에 앉아 강을
내려다보면서 놀고 그 바위 를 황화대皇華奈라 불렀으므로 그후부터 는 이 바위 가 있는 산을 황화산皇華山이 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조 선시대에는 봉화대가 있었던 산이다. 희대산園 1631 唐津郡 合 德邑 素素 里 고종高宗 31 년(1 894) 갑오경장 때 이곳에서 봉화 를 들 어 각처에 연락 을 하였으므로 희 대산會장山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희두리 回 1632 大川市 竹 꾸洞 마을 지형이 머리 를 돌 이킨 것처럽 되어 있으므로 회두리回頭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회변 回 1633 保 寧郡 )II 北面 節城里 천수만 바닷물이 안쪽으로 들 어 가는 바닷가에 자리 한 마 을 로서 호수 湖水 가에 놓여 있는 마 을 같다 하여 호변湖값이 라고 부르다가 변하 • 여 회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희사동 回 1634 舒川郡 文山面 金福里 옛날 조선시대의 예론 祖論 에 밝은 학자 한 분이 마을에 거주하였으 므로 여러 곳에서 성리학자 들 이 모여들어 토론과 강론을 하던 마을 이라 회사동會士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희선동回 1635 公州市 舟尾洞 옛날에 선녀들이 만나는 자리가 있다 하여 희선동會仙洞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희음골 回 1636 論 山郡 豆磨面 回所里 높은 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서 이곳에서 소리 를 내는 것은 다른 곳에서 들리지 않는다 하여 회음동會音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다. 희화리 回 1637 牙山郡 松岳面 坪村里 마을에 큰 희화나무 정자가 있으므로 희화리슌花里라고 부르게 되었 다한다. 횟방골 回 1638 論山郡 光石面 栗里 마을 뒷산에서 석희가 났으므로 횟방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횡견도!ID 1639 保寧郡 緊川面 外炯島里 섭의 모양이 누워있는 것처럽 가로로 보인다 하여 횡견도橫見島라고 부른다.
횡천回 1640 靑 陽郡 大 時 面 柚田里 마을 앞으로 흐르는 냇물이 비껴서 홀러가므로 횡천橫川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효고이 回 1641 -1 祖 山 郡 岡 山面 孝橘里 조선 인조仁祖 때의 효자 조극선趙克善이 시묘살이 룰 할 때 건너다녔 다는 효다리 가 있는 마을이 라 효교孝橋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효교악핸 1641-2 ~\ i皮 郡西面 起 龍 里 옛날에 이곳에 사는 홍씨 가문에서 일곱 효자가 났으므로 당시 영조 英祖가 이 마 을을 효교孝橋라고 부르게 하였다 한다. 효실 回 1642 舒川 郡馬 西面 松內里 효자 박수충朴守忠이 살았다는 마을이 라 효실孝賞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효자도리 園 1643 保 寧 郡 燦JII面 孝子 島 里 섭에서 효자가 많이 나왔다 하여 효자도리孝子島里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한다. 효제리 回 1644 靑賜 郡 雲 谷面 孝節里 효자 윤형갑尹衡甲, 윤세옹尹世雄 부자가 살았던 마을이라 효제리孝 佛里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효축동回 1645 論 山郡 鍊 武邑 高 內洞 옛날 효행이 지극하여 조정에서도 그 소식을 듣고 눈시울을 적셨다 는 효자의 효행을 더욱 높이기 위하여 임금이 효행을 · 기리는 깃발을 내려 높이 달게 하였다 한다. 그 깃발 아래에서는 곡식이 안될 정도 로 높은 깃발이었다. 그리고 그 대나무 깃대는 땅속에 뿌리를 내려 살아났으므로 효행의 상징으로 여겨 이 마을은 효죽동孝竹洞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후망봉 園 1646 瑞山郡 近興面 新津島里 안홍팔경安興八景의 하나로 후봉낙조候峯落照라 하여 후망봉候望峯이 라고 부른다. 옛날 송宋나라로 사신使臣이 갈 때는 이곳에서 산재山 祭 를 지내고 일기가 청명하기를 기다렸다가 떠났다고 한다. 후여재고개 回 1647 公州郡 寺谷面古堂里 고개가 높아서 휘돌아 올라가는 고개라 후여재고개라고 부르게 되었 다한다.
휘면동 ®l 1648 洪城郡 洪城邑內法里 마을이 후미진 곳에 자리해 있으므로 휘면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휘유고개 回 1649 保 零郡 靑羅 面 內 峴 里 예전에 한 장수가 바윗돌 을 운반하다가 이 고개에서 쉬었으며 장수 가 자주 찾으며 놀던 고개라 휘유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휴암 回 1650 牙山郡 松岳面 宮坪 里 부엉이가 새끼 를 친다는 부흥바위가 있으므로 휴암制岩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혹도 [ID 1651 瑞山郡 近興面 賈諒島 里 섬의 빛이 검어서 혹도 黑島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흔덕농바위 回 1652 公州郡 鷄龍 面 中壯里 바위가 커다란 바위 위에 얹혀 있는데, 한사람이 혼들어도 흔들리 고, 열 사람이 흔 들 어도 늘 그 정도로 흔들리는 바위라 혼덕농바위라 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훈립골回 1653 大 德 郡 鎭 明 面 南{山里 마을 뒤에 절벽이 있어서 항상 물이 흘러내린다 하여 홀립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흙구덩이 回 1654 大田市 束區 泉洞 옛날에는 집이 없었으나 흙집을 짓는 데 마땅한 진흙이 많아서 흙을 많이 파낸 곳에 마 을 이 생기면서 흙구덩이라고 부르게 된 마을이라 한다. 홍룡골 回 1655 公州郡 鷄龍 面 力庄里 마을에 마화위룡형 馬 化爲龍形의 대지가 있어서 언젠가는 홍해서 널 리 알려질 마을이라 홍룡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홍진 回 1656 大 德 郡 東面 新上里 마을에는 옛날 홍인부곡興仁部曲의 관터가 있었으며 나루가 있던 마 을이라 홍진興津이라고 불렀다 한다. 홍척골回 1 由 7 唐津郡松嶽面 機池市里 옛날에 마을 가까이에 홍척사興尺寺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홍척興尺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홍천골回 1658 瑞山郡 浮石面月溪里
옛날부터 이르기를 〈한 골짜기에 집이 천호千戶가 들어앉아 달을 보 면 홍하리라〉라는 계시와 함께 처음 마을이 생겼다는 마을로서 천호 千戶가 들어앉아 영락을 누릴 마을이라 홍천골[興千谷]이라고 부른 다 한다. 희곶回 1659 牙山郡 藍時面 中方里 옛날에 석회石灰룰 캐내는 광산이 있었을 때부터 희곶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회밭 回 1600 짠皮郡 鳥致院邑 鳳山洞 옛날에 회를 구웠던 마을이라 희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회여미 園 1661 洪城郡 葛山面 吹笛里 수원이 좋지 않으며 흙빛이 희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하얀 먼지가 일 었으며 어지간한 가뭄에도 들에 메밀을 심어 메밀꽃이 하얀 들이 라 들판이 온통 희다 하여 희여미라고 부르는 들이다. 흰마루 回 1662 靑限郡靑南面東江里 옛날에는 일 년 열두 달 백학白鶴이 많이 모이는 마을이라 하여 흰마 루라고 부르게 되 었다 한다.
市•郡別 충남토속지【명부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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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시】
94 강경골 忠 淸 南 道 公 州市 中 洞 127 겁상 꿀 槍詳洞 169 고주개 月尾洞 185 공산 山城 洞 293 납다리 菓鶴洞 502 물 안주 金 洞 724 사송정 月松 洞 810 섭박 꿀 武陵洞 860 소 학도 批 n 洞 1010 잉남촌 中 派 ] 1035 오 송 정 舟 尾洞 1037 오 실 梧 谷 洞 1106 우금고개 金 m 洞 1124 웅진동 熊津洞 1206 장기대 玉 龍洞 1258 정지산 얽條 제 미 1288 주미 골 舟尾洞 1289 주미산 金 n 洞 1408 치미 雙 新 洞 1432 태 봉 胎峯洞 1487 핑 곳재 錦城 洞 1541 해 지게 金 刻洞 1552 향효포 県印洞 1635 회선동 舟 尾洞 [공주군) 11 가느리 忠淸南道 公 州 郡 牛城面 上 西里 19 가랏 寺谷 面 佳橘 里 33 가마 울 鎖龍面 花 隱 里 63 가홍 長 岐面 東 峴 里 67 각 훈 재 維ig ilii 文錦里 89 갑 골 쳅龍 面 中壯 里 99 강성기미 正安面 長 院里 120 거사막 鷄it ilii 箕山里 135 계 용 산 鷄龍 面 142 고단평 寺谷面古堂里 145 고등 산 正 安 面 北 溪里 160 고비 운 寺 谷面 富 谷里 172 고청봉 反浦面 孔岩里 200 관 상산 距g ilii 鹿 !I I 里 210 괴남 利 仁面 龍城里 215 구 골 미 儀 堂 面 柳溪里 223 구란이 利仁面 九 岩 里 225 구레실 長岐 面 隱龍里 235 구사산 利仁面木洞里 236 구수 리 寺谷 面花 · 月里 255 군량 골 牛 城 面 東谷里 270 금강 全羅 北 道 ~忠 淸南道 278 기 몹 재 寺谷面油龍里 286 나 뭉 牛城 面 木泉里 318 다 롭 고개 長岐 面 鳳 安里 323 단평 牛 城 面 丹芝里 349 대학동 利仁面 草鳳 里 360 도 고미리 牛城面 道 川 里 369 도장 공 儀堂 面 月 谷 里 390 되재 正安面 沙峴 里 403 두미 正安面 仁 登里 418 마가 번 던 寺谷 而 雲岩里 427-1 마 새 C) 新豊 面 永井里 458 명가 웅 寺 谷面 月阿 里 460 명당 골 寺 谷 面 花月里 465 모란 儀 堂 面五 仁里 471 모 실 新登 面 百龍里 480 몸 티 儀堂 面 松節里 486 무라니 新뾰 面 花卵里 488 무 루 실 新 豆 面 大 龍里 490 무봉산 利 仁面 伏龍里 493 무성 산 寺谷面 正 安 面 牛城里 507 미암산 건 )II 面 見東里 523 바탕 꿀 長 岐面 待. 『d 里 530 반상 長 岐面 銘 岩 里 540 밥실 長岐 面 大橘里 549 방머리 長岐 面 松f山 里 563 배 실 利仁面 梨谷 里 574 백고개 沮 il l 面三 角 里 588 뱅고 지 牛 城 面 上 西里 591 버시니 新豊面 仙 硏里 595 벌 문이 利仁面 發揚 里 599 법덕 골 牛 城 面 龍屈 , ill 601 법우기 正安面 內 r , 里 608 베짱굴 長岐 面 壯 岩里 609 버 든 여 옹 牛 城 面 魚 JII 里 618 보리실 維鳩 面 立石里 620 보목 鷄龍 面 下大里 622 보 물 正 安 面 甫勿里 637 봉 곡 웠龍面 箕 山 里 642 봉 명 산 利仁面 發揚 里 651 부도 골 反浦面 上 莘 里 673 붕 무산 酒 )II 面 大 訪 里 678 비 계신 儀堂面 月谷 里 705 사덕 골 長岐 面 錦岩里 712 사 용골 牛 城面 屈現 里 719 사마산 牛 城 面 龍 屈 』 l720 사 봉 反浦 面 溫泉里 728 사 우 말 儀 堂 面 台山里 732 삭대 웅 利仁面 盤 松里 734 산디 골 건 )|I 面 光明里 735 산방이 正安面 山 城 里 754 삼 청동 新뿡t illi 治 興里 792 서주 골 鷄龍 面 錦帶 里 796 선더기 屈 J II 面 松 m 里 801 선유 동 i川龍 面 上 城里 816 성 계 동 雄鳩 面 萬 !I I 里 842 소용 골 鷄龍 面 乃典里 847 소 물 牛 城 面 木 泉里 867-2 솟대배기® 維鳩 面 維 鳩 里 885 수선동 新 묘 面 龍水里 907 시나무니 正安 面 仁 登 里 933 아도화상토궁 鷄 龍面 中壯里 962 약산 寺 谷面 花月里 965 양양산 長 岐面 濟 川里 973 어무 싣 正 安 面 於 勿 里 975 어인포 儀堂 面 五仁里 988 여드니 維鳩 面 新影里 991 여사동 鷄龍 面 花 隱里 1023 오 릅 실 新 뾰 面 百 龍里 1027-1 오미® 鷄龍 面 中壯里 1042 오지 윤 正安面 大 山里 1052 옥화동 維鳩 面 萬 )1| 里 10n 요랑바위 儀堂 面 松訪 里 1079-1 욧 꿀 ® 儀 堂 面 要 龍里 1079-3 욧 골 ® 正安面 內「 1 里 1089 용목동 維鳩 面秋 鷄里 1090 용문이 正 安 面 內門 里 1095 용산 新 묘 面 龍 水里 1096 용소봉 長 岐面 壯岩里 1099 용 주 산 利仁面 龍城里 1103 용화대 利仁面 盤 松 里 1112 우산봉 反 i,[ 面 1115 운정 寺谷 面 翼 岩里 1118-2 옹- 바위® 寺 谷面 佳 橘 里 1118-3 웅 바위® 反 浦面 訪峯里 1119 운 안이 寺 谷 面 花月里 1159 은 용 長 岐面 隱龍 里 118 2 자 창 대 寺谷 面 古 堂里 1252 청개 長 坡面 大 格里 1274 조왕 동 牛 城面 東谷 里 1275 조정 골 利仁面 五 龍 里 12n 족 골 寺谷 面 佳 倍 里 1347 창칫 꿀 利仁面伏龍里 1353 채 죽 산 牛城 面 上西 里 136 2 천봉 維鳩 面 沮洞 里 1363 천석 꿀 維鳩 面 沮洞里 1373 칠숭 산 新 묘 面 1386 청수난 실 tg1li! 面 乃典 昆 1402 춤달 寺谷 面 佳稅里 1416 칠 리탄 寺 谷面 古 堂 里 1439 터진 목 t밟욥 面 維鳩里 1464 판풍 정이 正安面 仁 밌里 1466 팽나 무 배기 鷄龍面 月岩里 1469 평일리 新 깊 面 造 平里 1497 하진목고개 正安面 平正里 1503 학소 新 묘 面 龍水里 1507 한립정 t90 Bi1 ii 掃坪里 151 0 한산 牛 城 面 韓 )II 里 1512 한석 꿀 新 묘 面 한 大里 1514 한시랑이 寺谷 面 大 中里 1529 합전 反 n I i 面 聖岡里 1540 해원 寺 谷面 海 月里 1551 향지 鷄龍 面 香 芝里 1560 힌혼천 鷄龍 面 1590 홍 성 골 慣 ll! i1ii 南 山 里 1601 화강터 正 安 面 高聖里 160 3 화마구 鷄龍 面 華 軒里 1608 화진 寺 谷面 四 岩里 1615 환원 正安面 長院里 1647 후여 재 고개 寺谷 面 古堂里 1652 혼 덕 농바위 鷄龍 面 中壯 里 1655 홍 용꼴 g龍 面 九旺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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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군] 31 -1 가마골(i) 忠淸南道 錦山郡 濟原面 龍化里 34 가막골 珍山面 浮岩里 78 갈매지 秋富面 썹 렵 102 강참봉굳 秋富面聖堂里 123 건냇담 濟原面 水塘里 130 겁한 秋富面 要光里 132 경 당리 宮利面 限谷里 178 골내 미 산 福困面谷南里 230 구례 福硏面九컵里 244 구잠재 濟原面 水塘里 256 군문안 福닳面 新袋里 257 군신봉 秋富面 西堡里 314-1 다락골(i) 錦城面 色熹里 371 도파 富利面 水通里 382 동수 南一面 上桐里 413 뜬바위 珍山面 浮岩里 428 마이산 南二 面 石洞里 429 마전 秋富面馬田里 459 명고동 南二面 大陸里 500 윤굴 南二面星谷里 526 박 재오 秋富面要光里 538 발군산 郡北面 天乙里 552 방우리 富利面 方佑里 571 배티재 珍山面 墨山里 576-2 백 마산® 珍山面浮巖里 605 벗고개 郡北面鳥亭里 626 복골 珍山面 烏項里 630 복독갈 郡北面 內釜里 674 불이동 店利面 不二里 681 비들목재 郡北面 杜斗里 687 비애미 福 床面 白岩里 693 빌여울 秋富面 備검里 741 삼가동 珍山面 三佳里 753 삼정승바위 南一面 草 頭 797 선돌 南二面 大!§里 830 색길이 秋富面 馬田里 832 소골 福曰面困永里 887 수심대 福t羽面 谷南里 895 숯가마터 濟原面 大山里 906 시계매미논 福困面 白岩里 934 아들바위 珍山 面 石藩里 943 안골내미 郡北面上谷里 954 알미 錦城面 道谷里 968 어등골 錦山邑 陰地里 979 어풍대 濟原面濟原里 1004 연홍 福짜面 谷南里 1025 오리정 錦山邑 上里 1036 오수물 郡 北面 虎時里 1102 용호석 濟原面 川內里 1153 육백고지 南二面 大陽里 1163 의총 錦城面 義塚 里 1164 이리재 郡北面 外釜里 1208 장대봉 錦城面 義塚里 1239 적벽강 富利面 水通里 1248 접바우 珍山面墨山里 1285 주거리 錦山邑 衛仁里 1291 주주봉 郡北面島亭里 1296 중두무니 福店面 困永里 1302 지랑이 福困面 芝良里 1318 지프내 南二面 石洞里 1349 채덕바위 珍山面 石耳里 1372 칠마산 郡北面 內釜里 1388 칭 징연 珍山面 三佳里 1430 탑선이 錦山邑 中島里 1458 파초 錦城面 色 1K 里 1558 현내 窟利面 絲內里 1570 호미동 南一面馬壯里 1579 혼천담 富利面 條內里 1585 홍도리 南一面 新井里 1613 환골 南二面 上金里 1629 황풍리 南-面 皇風 里
[논산군】 5 가금내 忠治南道 論山郡 論山邑大稿洞 12 가늠자골 可也谷面 F8 村里 18 가라티 ’g村面 居士里 26 가읍내 論 山邑大柏 i~ 41 가야골 可也谷面 六谷里 52 가정 可也谷面 賜村里 73 간지동 .만 .~I t面 龍山里 80 갈 미 光石面葛山里 111 개티 上月 面 酒谷里 133 경운리 豆磨面 丁壯里 159 고분장승이 練武邑高內洞 170 고지미 論 山邑 芝 山 洞 193 꽃미 彩및面 花山里 206 광수 豆磨面 金岩里 213 구강펄 論 山邑 登華洞 214 구고운 伐谷面 陽山里 216 구노현 可也谷面 困村里 220 구두따뜸 論 山邑 登華洞 222 구동재 城東面 定止里 245 구정골 連山面 松山里 272 금계동 豆磨面 龍洞里 273 금동 上月面新忠里 301 노성천 魯城面 307 눈다리 恩津面 南山里 317 다 론 고개 上月面石宗里 319 다리성 陽村面 梧山里 321 다오개 夫赤面 夫皇里 327 담배산 棟武邑 東山洞 329 당마무 上月面 印堂里 333 대 귄터 豆磨面夫南里 334 대둔산 伐谷面 337 대문다리 魯城面松堂里 340 대민 練武邑 竹本洞 342 대 우기 彩및面 瓜基里 353 더운 둔 光石面 光里 362 도담 可也谷面 斗月里 367 도산 伐谷面 道山里 374 독뱅 이 伐谷面 晩木里 375 듄못 夫赤面 阿湖里 376 들뿐 이 豆磨面菴寺里 381 동상곧 陽村 面 恒谷里 391 두강 이 문 可也谷面 野村里 409 둥덩 골 光石面 泉洞里 410 뒷목 陽村面 山 直里 417 락동 上月面 新忠里 425 마분평 上月面 寒泉里 436 만성리 上月面 穴泉里 448 망북 .민.tt面 校村里 474 모칭 練武邑 金谷i信 ] 484 무데기 練武 邑 金谷洞 494 무수리 陽村面 林 (E 里 504 문한 이재 伐谷面 砲谷里 517 바랑 골 伐谷面 晩木里 529 반용 魯城面 孝竹里 532 반야산 論 山邑 權因洞 534 반원 光石面 恒月里 537 반촌 豆}gilii 旺袋里 539 발화지 練武邑 賜地洞 544 밥준논 可也 谷面 江活里 551 방아고지 光石面 栗里 555 배꽃 彩, 面 禹基里 556 배너미고개 上月面 山城里 558 배매산 恩津面 侍墓 里 570 배추간이 可也谷面 좡 田里 580 백자동 城東面 花꾸里 584 백호날 可也谷面 斗月里 598 범나미 連山面 林里 613 병부 江꿨邑 西倉洞 616 보냇다리 論 山邑 rm~ 洞 623 보종둘 豆磨面豆溪里 632 복와대 魯城面 丙舍里 641 봉용정 連山 面 花 嶽里 665 북계 連山面 松꾸里 701 사곡 上月面 新忠里 707 사라니 F8H 面 中山里 708 사랑말 連山面 검"月里 723 사 송재 可也谷面 陽村里 807 성매 恩 U tllii 防築里 815 성겁 등 .탄.津面 城德里 818 성동 魯城面 直特里 825 싶포 .뿐.津面 城德 里 831 소곡 魯城面 松堂里 835 소금민지 賜 村面 新興里 837 소금터 江셨邑 鹽 }II 洞 851 소반생 이 連山面 沙浦里 873 쇠 머리산 連山面 高井里 BBB 수정골 上月面上道里 893 순촌 彩및面 龍花ill 910 시렁꿀 光石面 梨寺里 916 시정 골 連山面 松亭里 917 시진포 論 山邑 登華i!ol 930 아개 운 夫赤面 新篠里 935 아리랑고개 陽村面 新基里 955 암용추 豆磨面 龍洞里 961 야화리 彩翼面 野花里 966 양정고개 豆磨面 庵寺里 994-1 여 술 G ) 光石面 中里 997 연갯 골 恩津面城德里 999-1 연동 (i) ,9H 面 半岩里 1001 -1 연봉전) 連山面 松山里 1018 오공곡 豆磨面 光石里 1040 오작실 伐谷面 檢 }II 里 1047 옥녀동 連 山面 天護里 1954 운목 棟武邑 東山洞 1058 와동 上月面 上道里 1063 왕대 賜 村面 떤岩里 1065 왕성동 可也谷面 釣亭里 1067 왕우래 上月面 地境里 1075 요동 'EHi lii 半岩里 1079-2 욧꼴@) 魯城面 竹林里 1081 용경대 江梨邑 北玉洞 1084 용 구미 夫赤面 德坪里 1097 용수말 豆磨面 R 所里 1113 오적 골 豆磨面龍洞里 1123 웅진 .떤.t I t面 土良里 1126 원꿀 上月面 山城里 1155 유페리 可也谷面 흉 田里 1158 은동골 光石面 葛山里 1172 인움골 連山面漁隱里 1179 짜개봉 陽村面 梧山里 1181 자고모 伐谷面 沙亭里 1198 갓정이 賜村面 林 1E 里 1293 죽아리 勘村面 居士里 1310 지밥 夫赤面夫人里 1315 지칭 골 可也谷面 六谷里 1319 지합이고개 棟武邑 麻 田漏 1336 차곡 tj井村面 居士里 1350 재동 HHH 面 彩光里 1352 채운산 iI 菜邑 彩翼洞 1366 친아수꿀 魯城面校村里 1369 천호산 連山面 1370 찬황봉 連山面天護里 1378 칭근이 光石面 栗里 1384 청림리 連山面 長 田里 1403 충장봉 夫赤面忠谷里 1414 칠년 고라실 鍊武邑 金谷洞 1418 찰부정 이 魯城 面 龜岩里 1446 통논 鍊武邑 莘 1E 洞 1472 평촌 彩雲面 三巨里 1474 포답 彩冀面 花山里 1483 피안말 彩雲面 三巨里 1491 하기 듈 豆 磨面 光石里 1494 하마비 魯城面 丙舍里 1495 하봉 鍊武邑 鳳洞 1505 한곡 恩津面 防築里 1518 한양말 夫赤面 忠谷里 1543 해태산 伐谷面 晩木里 1546-1 행랑꿀(i) 光石面 t}尹里 1546-2 행랑꼴® 論 山邑 奈i ~ l1548 행장 可也谷面 六谷里 1553 허구배미 可也谷面 江 靑里 1554 허둔곡 伐谷面水落里 1571 호산 光石面 山東里 1573 호장 들 光石面 中里 1617 황 고개 論 山邑 祖山洞 1618 황곡 .恩津 面 侍慕里 1621 황산 江係邑 黃山洞 1622 황산법 連山面 蓮山里 1630 황화산 論 山 邑 鬪洞 1636 회음꼴 豆磨面 Q所里 1638 횟방 꼴 光石面 栗里 1 어 5 효죽동 鍊武邑 高內洞
(당진군) 9 가낭골 忠淸南道 唐津郡 石門面 長古項里 23 가롱고지 唐津邑彩雲里 32 가마못 松嶽面 盤 村里 36 가삿 골 松山面 佳谷里 55 가지 막 貞美面 大 困 山里 58 가추리 松山面 道門里 81 깔판 新平面 梅山里 86 감찰언 牛iI面 iI門里 97 강문 牛江面 江f 1 里 140 고개정 高大面 大村里 147 고래원 牛江面 內競里 179 곰실 /iljJ II 面 大特里 183 공동원 牛江面 富長里 186 공세 新平 面 雲 井里 191 공포 牛江面 孔浦里 226 구로지 高大面 玉峴里 232 구물 店津邑 怖谷里 241 구 양섬 合德邑 玉琴里 246 구지섭 松嶽面 井谷 里 259 굴머리 松嶽面 伏災里 265 궁말 合 德 邑 大 典里 279 기지시 松嶽面 機池市里 283 김복선이논다랭이 新平面 金 }II 里 289 난지도 石門面 闇 芝島里 330 당진포 高大面 唐津ii 1 j里 343 대차 골 店津邑 邑內里 348 대포 牛江面 大浦里 358 덕몽 골 牛江面 松山里 365 도문이 松山面 道「 1 里 389 캣박 골 貞美面 山城里 401 두문동 貞美 面 鳳生里 407 둔군봉 合德邑 道谷里 427-2 마새® 大湖芝面 馬中里 433 만길동 高大面 唐津 浦里 468 모산 貞美面 模坪里 524 박샌 牛江面 1L ii1i里 535 반정터 貞美 面 下城里 541 밤정굴 新平面 新堂里 545 방 계 松랐面 芳溪里 643 봉소산 類城面 白石里 647 부곡 高大面 項谷里 666 북넘 기 牛江面 松山里 703 사나 물 新平面 道城里 729 사음말 高大面 瑟項里 743 삼곶 石 門面 三 花里 747 삼선댕이 l ilJJ I| 面 城 下里 749 삼성벌 貞美面 德 三里 757 삼호 合 德 邑 大合德 里 74 새약 골 松嶽面 佳訪里 776 새강머리 新平面草袋里 783 서개정 高大面 眞館里 785 서 두물 l iljJ II 面 自開里 789 서송정 高 大面 眞館里 791 서우물 新平面 巨山里 798 선미리 松山面
明山里 812 섭 원 牛iI面 成元里 817 성 구미 松山面 佳谷里 843 소 무 지 石f 1 面 抵路里 B54 소 소동 合德邑 紫素里 855 ~송 唐津邑 大 德里 861 속사 高大面 城山里 864 손바래기산 新平面 金 )II 里 877 수 근 대 大湖芝面 調琴 里 883 수미굴 松山面梅谷里 899 술항 商大面 瑟項里 903 승선동 大湖芝面 松田里 911 시루지 松山面 佳谷里 931 아구내 松嶽面金谷里 947 안섭 松嶽 面 古袋里 970 어리 唐津邑 牛頭里 1013 영안 松嶽面 富谷里 1027-3 오미® 新平面上梧里 1046 옥금 合德邑 玉琴里 1111 우무도 石f 1 面 闇芝島里 1149 유독벌 貞美面 天宜里 1165 이배 산 唐津邑 沙器所里 1185 자모산 大湖芝面 馬中里 1192 자천 頂城面 楊柳里 1202 장고항 石 r, 面 長古項里 1223 장 윤 l iljJII面 城下里 1226 장항 高大面 長項里 1228 재빗골 松嶽面 中興里 1232 저르미 新平面 新典里 1240 직서 大湖芝面 赤鼠里 1243 전라산 貞美面 홉堂里 1279 쪽자 머리 新平面上梧里 1286 주동 高大面龍頭里 1290 주방꿀 新平面 寒井里 1303 지래 大湖芝面 沙城里 1322 진관리 高 大面 眞館里 1348 창택 松山面 三月里 1351 채운고개 唐津邑彩翼里 1379 청금 新平面 上梧里 1391 초락도 石門面 草落島里 1401 충 포 大湖芝面 出浦里 1406 치더 리 高 大面 瑟項里 1415 칠동 新平面 草堡里 1450 몽포원 新平面 新典里 1468 평량 松嶽面 芳 溪里 1480 풍년동 唐津邑 沙器所里 1484 피윈 牛江面 大浦里 1528 함박섭 松臥面 井谷里 1535 항곡 高大面 項谷里 1589 홍샌 牛江面孔浦里 1591 홍수동 大尙芝面 I 兆李里 1594 홍주청금 松 嶽面 靑 杓里 1598 화곡 高大面 項谷里 1614 환량 골 順城面 鳳見里 1623 황새골 松嶽面 桃源JI! 1631 회대산 合 德 邑 素素 里 1657 홍척골 松嶽面 機池市里
I- G,J, 2,5, 9 합 ..
【대덕군) 138 계족산 忠淸南道 大德郡 新洞邑 218 구도문이 山內面 九到里 242 구옥동 祀城面 棟谷里 243 구완전 山內面 밥完里 249 국사봉 東面 細川里 274 금빙산 炭祠面 324 달가마 東面 內塔 里 355 덕꿀 新겸邑 三政里 384 동이끌 山內面 大g 1 J里 406 둔곡 九 II lj面 屯谷里 421 마달산 山 內面 三棟里 435 만선동 炭洞面 秋木里 439 만인산 山內面 錦山郡福흙面 秋富面 454 먹덩이 傾혹面 細洞里 548 방등 新惡邑 上합里 566-2 배우니® 山內面 大別里 575 백골산 東面 新下 里 710 사러리 東面 新下里 752 삼정골 新隨邑 三政里 764 상소전 山內面 上所里 n1 새미레 炭洞面案山里 846 소문성 九則面 新東里 890 수회리 祀城面元亭里 902 숭상동 紀城面 梅老 里 919 식장산 山內面大成里 929 아가미 東面 新上里 967 양청이 束面 龍溪里 1002 연안골 九則面 官坪里 1030 오봉촛골 炭洞面 自 앉里 1101 용태울 祀城面 山直里 1187 자봉산 山內面 下所里 1190 자운 新口邑 石峯里 1209-1 장동 O 新깊邑 長洞里 1225 장평리 祀城面 黑石里 1251 정각골 紀城面 山直里 1255 정방이 紀城面 龍村里 1259 짖밥 新讚邑 三政里 1320 칙동 束面 稷洞里 1327 진정이 炭洞面 案山里 1357 천개동 束面 孝坪里 1361 천복동 炭洞面秋木里 1387 청운동 九 Rl j面 九龍里 1451 되고개 炭i~面 外三里 1454 뭉적꿀 山內面 大成里 1499 학교 九fil l 面 袋洞里 1522 한정 新집邑 黃湖里 1653 훈립꿀 鎭휴面 南仙里 1656 홍진 東面 新上里 [대전시) 20 가래 忠淸南道 大田市 中世 中村洞 49 가장꿀 西匠 佳壯洞 90 갑동 西區甲洞 104 강텃골 中區 龍頭洞 196 과례 中固 文化洞 201 관저리 西區 關誰洞 211 괴정동 西區 棟亭洞 231 구마 니 束區 大禾洞 234 구봉산 西區 關誰洞 309 느리옹 西區 關誰洞 350 대화동 束區 大禾洞 354 더 퍼 리 束뽑 佳限洞 386 동지 갱 이 東區 紫陽洞 467 모리 束區 龍및洞 473 모정 西區 三JII洞 521 바전이 西區 德明洞 561 배바위 束區 邑內洞 566-1 배우니 O 西區 棟亭洞 589 버드내 中 區 柳JII洞 611 병 락정 西區 葛馬洞 621 보문산 中區 大寺洞 634 본말 西區 福守洞 655 부사리 中匡 英沙洞 718 사마리 西區桃馬洞 742 삼계 西區 魚億洞 808 설목 西區 新城洞 859 소계 東 區 蘇堤洞 863 손독골 西區 桃馬洞 905 승천 西區 棟亭洞 948 안영 西區 安永洞 1024 오리 /곡 束區 加午洞 1041 오정 束匡梧井洞 1045 옥계 中區 玉毅洞 1049 옥미 中區 文化洞 1050 옥살 미 西區 龍溪洞 1069 왕좌산 西區九岩洞 1083 용구말 東區 龍田洞 1091 용반 西區 鳳맵洞 1125 원계산 西區 鷄山洞 1195 잔다리 東區 弘道洞 1219 장여골 東區連丑洞 1249 집소 西區 龍溪洞 1256 정삼골 西 區 長洞 1263 재비내 西區 挑馬itl) 1328 진터빈 西區 九岩洞 1343 창명 西區 安永洞 1359 친근 中區 文化洞 1376 첨배재 東區 板岩洞 1394 초숫골 西區 下基洞 1428 탁곤이 束區 佳限洞 1441 테미 中區 大興洞 1498 학고개 中區 玉溪洞 1501 학당이 東區 宋村 洞 1521 한적골 中區 大寺洞 1530 함지뱅이 束區 板岩洞 1586 홍돗꿉 東區 弘道祠 1616 황각 골 西區 邊洞 1654 흙구덩이 束區 泉洞
4 가그말 忠淸南道 保후郡 호 /l1 面 烏 浦里 27 가 릅- 자 골 熊 J Il 面 坪 里 37 가 승 구지 塾 ) 1l 面 永 保 里 70 간드리 熊 /II 面 冠堂里 74 간평 周浦面 倭 浦 里 77 갈 마무사 塾 川面 永保里 105 개 굴 봉 藍 浦面 邑內里 107 개목 藍浦面 梁項里 144 고두머리 藍浦 面 鳳德里 153 고만 周浦 面 高亭 里 154 고만산 周浦面 高亭里 184 공뜸 靑羅 面 長 現 里 251 군관도 宏川面 元 山 島 里 254 군 둘 재 周浦面買倉里 305 녹도 繁 Ill 面鹿 島 里 320 따 불 靑所 面 野唄里 328 당구 지 川北面 洛東 里 344 대칭도 繁 Ill 面 外煙 島 里 372 도화담 衍 山面 桃花 四 里 394 두 란 珠 山面 珠野里 415 동건 말 川北面 新 德 里 476 목도 繁川面 孝 子 島 里 489 무마도 繁川面 外炯島里 516 바 람막기 藍 浦面 玉西里 560 배미 실 /I| 北面 먀 城 里 582 백 재 고개 切 山面 都 興 里 596 벌정자 靑 路面 班坪里 615 보겁동 珠山面 野 龍 里 633 본궁 J I| 北面 洛 東 里 668 북 배섭 塾 川 面 校成里 671 불근 댕이 熊 川 面 坪里 688 비얏 둘 靑所 面 野 現 里 696 빙 토 lii毋面 落 洞 連7 3 3 산고래 周浦面 藍訥 里 751 삼―----、` J시 I| 랑面 당蘇굴 城 周里 浦 n面8保 생 요교里 골 7 6藍0 浦삽面시 도玉 찼東J 里 II 面8 02姉 선矢촌島 里塾 J7I6|3面 상元사 山봉 島 里ru 81| 0面4 校선成학 里골 7川65北 面쌍 오沙도湖 繁里 \ \ I 깅-1드2 01 \ 813 섯바댕이 호 )11 面 永 保里 857 소은곡 藍浦 面 県 松 里 865 손바래티 · 川 北 面 訪城 里 8 효 수훈 도 ~ - __ , -Z ,-. 租 山面 龍 水里 898 스무고개 靑 路面 昭 楊 里 901 숭당이 靑所面聖淵里 936 아미 산 b업 山面 龍 水里 941 아포 川北面 長 t 원 里 963 약현 검 路 面 長現里 974 어사리 川北 面 長t g 里 978 어 초 리 周浦面新堡里 1007 열 문이 川北面 沙 向里 1022-1 오 룡동 O J II 北面 訪城里 1032 오상 珠 山面 것[五里 1043 오학동 川北面 罰城里 1048 옥마산 藍浦 面 帝釋里 1061 완성 b입 山 面 묘 鷄 里 1074 02,. ” 외연도 繁 II 面 外炯 島 里 1098 용 암初 山面 龍 水里 1116 운주산 周ii1 j面 買倉里 1121 옹개 蒸 Ill 삽 A’』 6도 面 校成里 1130 원산도 있 l1 面戶;山 島 里 1134 원전 물 繁 l| 面 蘇城里 1138 원 도 繁 川面 孝 子 島 0
里 1201 장고도 蒸 /II 面 揮矢島連 1227 재경 골 靑 所面 才井里 1231 저뜨기 川北面 罰城 里 1264 재석동 藍浦面 帝 釋 里 1292 죽 도 藍浦 面 月田里 1317 지풍 굴 繁 )II 面 烏 浦風 뉴 321 칙언도 ! i 듄 II| 와 고드 :드노 面 獨山里 1335 집포 )II 北面 沙 湖 里 13 力 청 : :北 面 \?: 1392 조망 서 연훈 므 广胃 門 / /// / ____,-/' • 오 .\ : /:, // 스 2 시 노 · 니tp 1 도 오 1639 으 드석 노 니 노크3 :손 t I h20 칠 : 서 藍浦 面 菓 松里 1424 큰 늑 진 箱 山面 勒田里 1425 큰 달 원 藍 浦面 達 山里 1445 몽 ll~t 沙湖 里 1449 몽 접 珠山面金岩里 1457 파리재 맙 所面 頂 竹 里 1478 풋사리 繁 川面 책 島重 1490 하궁 JI|北面 河 滿 里 1525 할매고개 밤 " 面 錢 坪里 1565-1 호동 O lll 北面 訪城 / f리6 04팠 7화川2 面망호 熊짜孝 J굴子 Il 面島藍里九浦 龍面16 ! 4I!違9. 1 山휘63里유3 고희15개변74 꿉川호稽北첫 面面 골 鶴內繁 成頃 JI 里I里 面 1校63成9 里횡 견15도80 繁훈 애ll 面비 쪽外부炯리 島 里船 1山64面3 南효자深 도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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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서 헌ri
30 가리 정 골 忠淸南道 扶餘郡 外山面佳德里 39 가시 티 林川面 뽑校里 42 가야구 良化面 岩樹 里 47 가음말 世道面 領認院里 53 가중 扶餘邑佳增里 65 각시배 世道面長山里 71 간리 世道 面 良大里 75 갈고지 裵岩面丙花里 76 갈때기 玉山面 佳德里 92 갓개 良化面 笠浦里 96 강령 釋面 北阜里 98 강상굴 石城面瓜亭里 109 개사리 石城面鳳亭里 124 건드래 良化面 碧龍里 134 계룡댕이 恩山面 洪山里 139 고갈 外山面 葛山里 W7 곤유동 九龍面玄岩里 181 곱절 良 化面 時音里 195 과녁 들 鴻山面 北村里 209 괘경 南面 松因里 217 구덕 世道面 歸德里 237 구 수매 石城面石城里 240 구신 外山面 文臣里 258 군장동 石城面恒山里 271 금강이 恩山面琴
公里 275 금성 산 扶 餘 邑 店 荷里 280 기 충꿀 世道面水古里 298 노고산 忠化面支石里 306 누 론드리 場岩面下黃里 312 다그니 世道面 良大里 326 닭매 世道面育浦里 336 기 대 마동 O 玉 山面 大 德 里 338 대 문다리 고개 坦岩面 元門里 364 두무재 康岩面 新里 383-1 동아시© 九龍面 九瓜里 397 두리봉 忠化面 靑 南里 419 마가산 忠化面 423 마래 扶餘邑束南里 441 만자실 內 山面 栗岩里 447 망배산 良化面內城里 450 망진산 九龍面玄岩里 463 모가을 良化面 碧龍里 475 모훈 玉山面 中 限 里 487 무 루 내 鴻山面鴻良里 495 무술 外山面 水新里 520 바이아워 南 面 *OO 里 536 반조원 世道面 領認院里 543 밥전말 忠化面 福金里 554 배고개 扶餘邑雙北里 572 백가골 世道面佳槍里 573 백강 襄岩面 津갚里 576-1 백마산 O 外山面 萬 壽 里 579 · 백시동 鴻山面井洞里 581 백저봉 扶餘邑 中井里 603 법황골 忠化面 支石里 614 보각골 草村面 新岩 里 645 부개 촌 玉山面 加 德 里 656 부산 襄岩面 津邊里 658 부소산 扶餘邑 雙北里 660 부여 머 리 裵岩面 扶 餘 頭 里 667 북두무니 外山面 萬홉里 669 북새기 襄岩面 內里 682 비랭이 林 )II 面 飛亭里 692 비홍산 쳉山面 햏良里 702 사공뒤 林 )II 面 飛亭里 704 사당골 南面 金川里 726 사 수막 良化面 碧龍里 730 사자봉 恩山面 新大里 758 삼죽꼴 外山面 盤橋里 762 상비 外山面 芝 仙里 780 생적 골 湘山面 校院里 788 서타탱이 石城面絲內里 790 서우내 內山面 翼特里 795 석탄 扶餘邑 猪石里 821 성재 裵岩面 新城里 826 세거롭 世道面 良大里 849 소바리 世道面 水古里 850 소반뫼 襄岩面盤山里 853 소새 미 扶餘邑 松谷里 878 수담 忠化面 五德里 879 수당 골 草村面 素沙 里 908 시남 忠化面 靑南里 918 식송 鴻山面島峴里 928 신터리봉 , 恩山面 琴公 里 942 아홉사리고개 鴻山面 土亭里 950 안재웅 恩山面 琴公里 959 앵시동 鴻山面 井洞里 992 여수매 世道面 良大里 1001-2 연봉Q) 鴻山面 北村里 1009 엿바위 預岩面 復岩里 1034 오석산 扶餘邑 陵山里 1038 오약꿀 世道面 水古里 1051 옥삼박골 世道面 傾認院里 1060 왁새말 場岩 面 店上里 1092 용밭 扶餘邑龍井里 1140 월명산 忠化面五德里 1156 윤치 世道面 花樹里 1175 입포 良化面 笠浦里 1188 자온대 襄岩面復岩里 1193 작교 九龍面太陽里 1215 장숭배기 世道面 花樹里 1222 장짓말 世道面 佳檜里 1235 저채 扶餘邑猪石里 1236 저호 世道面 沙山里 1245 전장 外山面前벙里 1253 정동 扶餘邑 井洞里 1269 조룡대 扶餘邑雙北里 1mo 조만터 外山面盤巴里 1298 중산성 石城面 傾山里 1299 지경 九龍面九鳳里 1324 진동 玉山面 加德里 1325 진물 草村面眞湖里 1334 김한못이논 玉山面 安西里 1354 책바위 扶餘邑龍井里 1389 계 마소 扶餘邑 陵山里 1390 체정말 石城面傾山里 1397 추원동 忠化面天堂里 1399 축융봉 恩山 面 1419 칠산 林 )II 面 七山里 1422-1 침산 G) 九龍面 舟亭里 1426 큰동내 世道面 傾踏院里 1429 탑리 왕岩面 長嚴里 1463 팔충리 忠化面 八忠里 1465 팽개바위 忠化面 可化里 1476 표뜹 忠化 面 天堂里 1519 한우물 襄岩面 合井里 1542 해촌 世道面 水古里 1559 현미 忠化面 玄眉里 1569 호리동 林 )|I 面 郡司里 1581 홍가동 世道面佳檜里 1625 황새웅 林 )II 面 舊校里닌 【서산군) 서 • 산Ul i 군 / 1 가경주 忠淸南道 瑞山郡 古南面 古南里 3 :UC국 천 국 뚝北 面내 먀珪몸 -2 L 가래미 려 원興 i ' - 2里2 7가2 로간림원만동 券大安山邑面 八如峯 山面里 梨83園 面감꿀 大 浮山石面面 3 8困 가 r시 『내 五 遠 -4 北굽面 됴 防 굽 葛효 里 玉 4굶8 ;7섭 ° 里도 1近1興6 面거 문쨌녀諒 島浮 石面沿馬里 / 島 里 161 고빛 雲 山面 高 登 里 / 里 221 구등뜨리 所遠面 姬{ '. 282 킬유지 / I / ,: 函 X 배島기里 遠331北 面맞 개東 海遠里北 面38 8幡 동溪·里다 랭3이61 近도興낙面이 買安 譜 뿡島 邑里 承귄 彦的 里 곡 令3닥66! ~도비 谷산面 숫浮감 石집 荷 ~ 大4백1頭1 동 기里 安3드8 眠 7뇨 ,邑 ' 동니<해黃D . II, I / ` 1\! i 0 ·. ·(· 南面 申溫里 420 마금 近興面 磨金里 422 마도 近興面 新 津島里 430 막 운 모시 商 北面 ' 新松里 / ,1 4聖문3곳4淵 이面만 댓,地 0봉 谷J II 瑞面里 山 現4邑7城9 石里윤 林 니5里0산3 4大문38 山과 만面라원 지大도 山南 近 面里興 4元面81 間 買 里몽 館대 5 島 10南 里 面민 4어 5夢7 무 山면 述 里학北 ' 골49 面 1高 防무 北석葛面 里 瑞加 5山口4 6邑里 방石46교 林2 里浮명 石천49梅포i , , \ /·~/J .· \스. _U 芝백山화里산 5泰5安9 邑배 못東이門 里瑞 山6邑25 石보평林 里골 5遠6 9北 面배지 大 울基 災里 山64面0 除봉美동里 浮 5 石 刀面 백馬 사開수里도 64安8眠 부 邑 금~재 南 地面谷炫 面 5 /'\J$n , m ” ‘桃 星 里 661 부장골 地 谷 面 紅 將里 E I 675 불탄개 安眠邑 倉基里 6 刀 붓뚜기 安眠邑 倉基 里 690 비 촌말 海 美面 休岩里 706 / 사 들 고 2 ' ; •• 泰安邑 松 殿 里 721 사선지 古南面 長 谷里 736 산아실 所 遠 面 法 山里 737 살꼬 지 梨固 面 ----,,,,// : 섯 、: ' · Ey 堂山里 739 쌀씩은여 安眠邑 新野里 744 삼도 海美 面石 浦里 769 쌍효동 仁 旨四 成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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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 r ,r , o0`s‘ 0' -(G
【서천군】 2 가곡 忠淸南道 舒川郡 板橋面 卜大里 7 가나실 華陽面 琴堂里 8 가남바위 韓山面 院山里 13 가능골 文山面 九洞里 25 가무개 板樣面 馬袋里 28 가릇매 舒川邑 三山里 57 가추개 板稀面 右羅里 64 각둥 板抵面 後洞里 79 갈윤 馬山面 芝山里 84 감독굴 華陽面 大等里 85 감동 板柄 面 板橋里 146 고락 板括面板樣里 151 고린장굴 華陽 面 l~ i同里 152 고마 華fgil'ii 卯馬里 155 고말개 馬西面 桂東里 162 고살매 舒J II 邑 三山里 163 고순개 長項邑 元水洞 171 고집팽이들 馬山面 梨寺里 205 광생 리 華陽 面 南星里 250 군간 馬山面 軍干里 262 굴항리 長項邑 元水洞 263 궁곡 板橋面 興林里 316 다롱고개 馬山面 新場里 335 대마굴 舒JI I 邑 花城里 347 대몽매 馬西面 長善里 363 도두음곶 西面 都屯里 383-2 동아시@) 華 F9 面 花村里 385 동자북 韓山面
童山里 393 뚜두렁이 鍾 )ll im 堂丁!J.!. 400 두못치 馬 西面 堂仙!J.!. 412 득락이 文山面 文序里 416, 둥칠 華陽 面 大等里 456 면우지 棋山面 月岐里 464 모군리 馬西面 道三里 466 모래장붕 馬西 面 竹山里 470 모시 옹 板橘面쭈山里 506 미 명 골 華限 面 竹山里 550 방선 板稿面 後洞里 553 밭두문이 默山面 斗南里 568 배절 馬山面 梨寺里 583 백조개 默山面 慕洞里 586 뱃섭모랭이 長項邑 長岩洞 587 뱃쟁이 華賜面 大等里 594 벌급이 鍾 )II 面 長久里 600 법배 韓山面 虎岩里 610 벽오소 馬山面 碧梧里 617 보두막재 馬西面 南田里 628 복너미 馬山面 梨寺里 635 본음지 馬西面道三里 638 봉근리 長項邑 玉山洞 676 붕밖이 韓山面 城夕냅! 680 비 대 板橘面 馬袋里 697 빛고개 g!山面 光岩里 715 싸르데 舒川邑台月里 n3 새야 板橘面 興林里 800 선식이자리 馬西面 道三里 803 선팽이 板稿面 萬德里 870 송 동매 鍾川面 朗坪里 871 쇠깨 馬西面 月 n[ 里 886 수소 鍾 )|l 面 支石里 900 승갈목 馬西面松石里 946 안뱅이 華陽面 保縣!J.!. 951 안질고개 底仁面城北里 996 역서변리 馬 西面 玉北里 1000 연모리 長項邑 聖住洞 1021 오릭도 西面 馬 梁里 1026 오매 밈 u 」il'ii 斗南里 1031 -1 오산(i) 底仁面 九 福里 1053-2 온동@ 板橘面 上佐里 1057 옻발굴 馬西面 南田!J.!. 1059 와매 板稿面 文谷!J.!. 1142 원성산 韓山面 罰岳里 1144 월아성 西面 月湖里 1151 유부도 長項邑 松林洞 1168 이웅 韓山面 竹村里 1170 인산 舒J II 邑 郡司里 1197 잘피탈 韓山面 丹下里 1218 장아 馬山面 新場里 1221 장중 韓山面 丹下里 1246 전장매 gt山面 斗北里 1265 조개티 馬西面 南田里 1308 지 름실 文山面 支院里 1311 지상골 馬西面 月 浦里 1330 질구지 長項邑 長 岩洞 1331 질매 默山面 院吉里 1337 차굴 板低面 板稅里 1368 찬 칙매 則山面 辛山里 1382 청룡 鍾)||面 山 )II 里 1417 칠백냥둘 韓山面 蓮峯里 1448 통- 박골 底仁 面 南塘里 1459 팔계 華陽 面 默洞里 1462 팔지 馬山面 芝山里 1475 포성 底仁面 長浦里 1486 필당 , 馬山面 安堂里 1504 한강 時草面 仙東里 1511 한새웅 華賜面 箕福!J.!. 1516 한양고라실 韓 山面 丹下里 1526-1 할미심(i) 西面 扶士里 1533 합전 西面 新始里 1539 해상 골 文山面 神店 里 1547 행자막골 文山面 金福里 1,55 6 허문 馬山面堯谷里 1565-2 호동@) 西面 月湖里 1568 호랭 이코추뱅이 馬山面 三月里 1595 홍지곡 華陽面 大等里 1602 화리 文山面文京里 1606 화산 韓 山面 龍山里 1626 황소매 華賜面 玉ii n !J.!. 1634 회사동 文山面 金福里 1642 효싣 馬西面 松內里
(아산군】 16 가등거리 忠淸南道 牙山郡 仙掌面新聖里 17 가라기 仙掌面佳山里 43 가얘 新昌面 佳 德 里 62 가향리 道高面 鄕山里 87 감타기 排芳面 新興里 100 강장 松岳面 江長里 103 강척골 鹽特 面 江淸里 119 거사리 仙掌面新聖里 125 걸매 仁州面 傑梅里 158 고분내 鹽特面 曲授里 165 고용산 묘仁面 城內里 175 곡교리 恩特面 曲岳里 190 공판들 仁州面 新城里 192 꽃단봉 新昌 面 佳內里 199 관대 屯浦面 館堡里 202 관청동 仁州面觀岩里 224 구렁이 排芳面 九묘里 261 굴포원장 仙掌面 蔡新坦里 291 남방재 新昌面 南城里 294 납온 둘 道商面 貝憶里 296 너더리 仙 掌 面 竹山里 297 넘 골 新昌面杏木里 299 노래꼴 仙掌面 君 德 里 300 노쿠지 仙掌面 障串里 313 다라미 松岳面 坪村里 315 다래웅 藍特面 白岩里 359 뎃짱거리 排芳面北水里 379 둘새 仙 掌 面 新 門里 408 둔포 屯浦面 屯浦里 424 마무미 陰岭面 小束里 455 멱시 松岳面 講堂里 461 명지개미 松岳面首谷里 499 문안 沿井面梅谷里 509 민개 屯浦面 新南里 511 밀두 仁:/i l 面 密頭里 531 반석 松岳面 外岩里 562 배방산 排芳面回龍里 590 버미 沿井面 虎山里 607 베 두실 묘 仁面 上星里 619 보리원 仁州面牟元里 627 복구미 松岳面 坪村里 654 부리기 湯 井面 鳴岩 里 767 상 무 봉 衍 時面 江 淸 里 782 시강 仁州面 只稅里 823 성지물 仙掌面 大興里 824 싶 문이 仙 掌 面 新 F1 里 829 세나리 排芳面 世出里 836 소금산 鹽時面鹽星里 869 송충재 靈仁面 新 里 874 쇠파닛골 仙 掌 面君 德 里 880 수동 陰峯面 新닳里 915 시악시골 道高面新履里 920 신궁리 仙 掌 面 宮坪里 921 신동 잎仁面 症峯里 922 신라리 仙掌面 新聖里 925-2 신봉산@ 靈 仁面 月船里 937 아산뜸 仙掌面 第串里 938 아산만 牙山郡 958 애기업은바위 鹽特面던院里 971 어리목고개 陰峯面 三巨里 990 여무시 新昌面新谷里 994-2 여술® 沿井面 葛山里 995 역 들 仁州面 新城里 999-2 연동@ 仙掌面仙倉里 1015 영인산 靈仁面 1044 오형재고개 松岳面 江里 1062 왕골 屯 h0 ilii 新旺里 1072 왕지산 陰峯面衣食里 1073 의암골 松岳面外岩里 1076 요란 陰峯 面 新井里 1085 용당이 仙掌面 佳山里 1086 용두원 松岳面巨山里 1104 용화산 陰峯 面 山浦里 1118-4 울바위@ 新昌面 昌岩里 1154 육판재 陰峯面 銅巖里 1176 잉아 松岳面江長 里 1189 자우리 排芳面 葛梅里 1203 장곶리 仙掌面第串里 1213 장보고니들 鹽時面 白岩里 1224 장티 鹽 特面 芳現里 1257 정안 新昌面 五木里 1267 조내골 新昌面 宮華里 1280 종곡 松
岳面 鍾 谷里 1295 중군말 鹽特面 曲接里 1297-2 중생꿀® 鹽特面山陽里 1304 지레 松岳面 江 長里 1306 지뭇골 松岳面 巨山里 1309 지므레 沿井面 U 山里 1338 차나말 仁 Hl 面 冷井里 1346 창정리 靈 仁面 蒼龍里 1355 치너물 新昌面南城里 1374 철장모랭이 道高面 石堂里 1435 태자 평 仙掌面新聖里 1470 평전 둘 松岳面 驛村里 1471 평창 仙掌面障串里 1485 피촌말 新昌面 邑內里 1496 하지랑이 道高面 R 憶里 1500 학다무니 松岳面 鑄 堂里 1509 한뿌리 仁 Al ilii 大音 里 1532 합산 屯浦面 山田 .里 1557 헷고모무 陰峯面 德 地里 1561 형재동 鹽特面山陽里 1565-3 호동Q) 鹽特面芳視里 1599 화란봉 新昌面佳內里 1637 회화리 松岳面 坪村里 1650 휴암 松岳 面 宮坪里 1659 회곶 鹽特面 中方里 【온양시】 112 개화내 忠淸南道 溫屈市 草간洞 501 뮴미 信仁洞 799 선무니 뤘꿇洞 1380 청당이 豊基洞 1582 홍거리 龍禾洞
따 서안Q안 96사 13;60'i _! , 입•, 3J1 o5 신-: J’ I1' 리 노
【연기군] 6 가나물 忠淸南道 燕岐郡 全義面新井里 15 가동 錦南面鳳起里 31-2 가마골® 西面 釜洞里 61 가학이 南面 限 1 t里 198 과성 西面 性齊里 212 괴화산 錦南面盤谷里 288 나븐 東面松龍 里 308 느랑이고개 南面 訥旺里 311 늪구례 東面 老松里 370 도청 全東面 靑松里 414 뜸옥꿀 西面 月下里 440 만자골 南面 松院里 518-2 바리미® 錦南面鳳起里 567 배일 全東面 靑 松里 602 법 지 기 南面 高亭里 612 병 마산 全東面松谷里 636 봉강 西面 起 'a m. 639 봉기 리 錦南面 瓜起里 646 부거실 全義面 達田里 652 부동리 西面 釜洞里 684 비통재 全義面 西亭里 685 비 룡소 錦南面 龍潭里 691 비 학산 錦南面 大平里 711 사려운 錦南面 鳳起里 746 삼맛꿀 錦南面
永袋里 779 생 송 全義面新興里 781 생 천 西面 雙琉里 811 섭 골 ,島 致院邑 新安洞 822 성 진 南 面 偵儀里 841 소래재고개 全義面 西亭里 856 소스랑날 東面 鳴刻里 876 수구동 全東面 美谷 里 913 시못 골 西面 起『맙I!. 939 아야목 全義面 高登里 964 양곡 東面 禮茂里 9n 어천 全義面 柳J II 里 982 언터 말 東面 葛山里 1029 오봉산 島致 院邑 全東面 西面 1078 요화리 西面 起龍里 1079-4 욧꿀® 全義面 小井里 1110 우려웅 錦南面 永袋里 1114 운강 全義面 雲堂 里 1120 옹골 束面老松里 1127 원댓골 南面 訥旺里 1129 원부동 西面 釜洞里 1131 원성재 西面 住齊里 1132 원수산 南面 葛 災 里 1135 원호 南面 松院里 1139 월동 西面 月河里 1145 월정 西面 언流 里 1148 위사티 南面 燕岐 里 1157· 은고개 南面 高亭里 1167 이성산 全東面 松城里 1244 전월 산 南面 陽化里 1250 젓막 南 面 狀通里 1281 종성동 全義面 新井里 1396 초정골 錦南面 大朴 里 1398 축산 錦南面 丑山里 1400 충 동산 束面 龍湖里 1410 치암 西面 釜洞里 1421 칠찬 全義 面 限 谷里 1422-2 침산® 島致院邑 Ii占山洞 1434 태우 全義面 텝亭里 1436 태천 南面 水山里 1440 턱골 南面 方丑里 1443 토흥산 鳥 致院邑 鳳山洞 14n 표석골 南面 松값里 1517 한양궁 錦南面 益谷里 1531 합강 南面 月山里 1534 항각골 錦南面 黃龍里 15n 호탄리 錦南面 登灘里 1597 홍촉꿀 西面 釜洞里 1610 화통고개 南面 方丑里 1612 환재골 南面 燕岐里 1627 황우치 束面 鳴 m 里 1641- 2 효교® 西面 起龍里 1660 회밭 鳥 致院邑 鳳山洞
9 、’
(예산군】 93 갓다머니 忠淸南道 禮山郡 問峯面 笠沈里 108 개복이 新限面 晩士里 115 거무내 禮山郡~ 洪城郡 118 거변 新賜面加支里 126 걸치기 新 F§ 面 西界陽里 141 고곡 古德面大川里 143 고 도실 鳳山面 古道里 150 고유동 大興面 炭坊里 157 고무리 大述面花山里 174 고힌내 古德面 石谷里 182 곱절골 大述面方山里 207 광시 光時面光時里 264 궁리 德山面 屯里 266 궐곡 大 述面 萩谷里 292 남삼산 瓜山面 鳳林里 332 대계 光時面新興里 339 대문동 德山面 上加里 341 대아동 大興面 大也里 351 대홍마세 光時面 馬沙里 404 두연이 新陽面 西界限里 411-2 드 르니® 祖山邑 新럼院里 426 마사 光時面 馬沙里 437 만세봉 光時面 瑞草井里 4 刀 목바리 德 山面 怖梁里 492 무성 리 大述面 麻田里 496 묵지 大述面 花山里 512 밀무리 新陽面貸谷里 515 바라티 光時面 光時里 519 바미 大典面 大栗里 557 배논 新岩面 宗敬里 604 법공산 古德 面 上宮里 670 분구덕 亞山邑 山城里 716 사리옹 吾可面新院里 731 사재 屈峯面 後寺里 738 살목골 光時面 大里 750 삼숭이 德山面 大崎里 759 삽다리 姉橘邑 姉橘里 809 섭돌이들 古德 面 四里 827 세결이 古 德 面 九冀里 840 소란 鳳山面 沙石里 897 쉴친골 新限面車洞里 904 숭 지물 固峯 面 乾芝化里 909-2 시동® 鳳山面 侍洞里 923 신례원 禮山邑 新視院里 927 신터러니 吾 可面 五村里 1055 웅-안 瓜山面 雍安里 1088 용머리光時面 龍頭里 1173 임존성 大興面 1183 자리껄 大興 面 松池里 1247 전죽리 吾可面 元泉里 1271 조산 新限面 新 F9 里 1272 조실 古德面 紙谷里 1287 주령 闇峯面 朱令里 1307 지몹뱅이들 屈峯面 登村里 1358 찬구동 新限§面 如來味 里 1473 평화촌 新岩面 鳥谷里 1479 풍겅리 鳳山面孝岳里 1575 호정 新岩面 . 'il宮里 1587 홍 동 新岩面 中祖안 111611 화현 新t園面 大德里 1624 황새부리 大述面山亭里 1641 -1 효교(i) 鳳山 面 孝括里
갑7 lint' 壅6 °나 /詞/때 노 ,.下.
[천안 Al 】 122 거재 忠淸南道 天安市 活堂洞 287 나반 둘 고개 三龍洞 303 노태산 聖城洞 325 단북재 白石洞 650 부대동 富袋洞 663 부생이 鳳鳴i!ol 672 붕대산 九星洞 1039 오이샘 九龍洞 1068 왕자봉 留租洞 1136 원경 新堂洞 1150 유량동 留固洞 1268 조라지고개 留tlili同 1433 태성봉 九龍洞 (천원군】 14 가다리 忠淸南道 天原郡城南面新한里 24 가룡 成歡邑 安宮里 29 가리산이 笠場面延谷里 35 가무정이 東面 廣德里 40 가암 並 Ill 面 佳田里 46 가운말 笠場面 獨井里 88 감두봉 廣德面 大平里 106 개모기 北面 梅松里 113 갯 골 廣德面 芝 . 距 E 117 거법고개 東面 長松里 128 김새옹 城南面新沙里 148 고려산 木 l|| 面 所仕里 176 꼭두실 廣德面 大랸里 180 곱 칭이텃꿀 廣德面 貸山院里 188 공숫골 했歲面 南館里 189 공시미 並 Ill 面 梅城里 204 광덕산 廣德面 219 구도신 東面 求 道里 238 구시랑이 笠坦面 侍壯里 252 군단이 北面 雲 龍里 267 귀되말 聖居邑茅田里 268 귓골 木 Ill 面 1 兆 長里 2 刀 기로 촌 笠場面 耆老里 284 김성어대 北面 典谷里 310 능골 城南 面 大興里 345 대초 城南面 大 1E 里 356 덕신 並 Ill 面 桃源里 357 덕암산 城南面 新沙里 380 동덕봉 東面 花溪里 398 두명골샘 笠場面 市場里 442 만화동 並 Ill 面 龍頭里 443 말골비알 修身面 海亭里 444 망경대 並川面 龍頭里 445 망경산 廣한面 451 망해산 並 Ill 面 鳳項里 452 매곡 成歡邑 梅珠里 453 매 봉 並川面 龍頭里 485 무드리 並川面龍頭里 498 문다라니 北面 上東里 518-1 바리미(i) t多身面 鉢山里 522 바타니 東面 德星里 528-1 반계(i) 並川面桃源里 578 백석탄 並川面 桃i!?.fil 592 번개 東面 花 溪 里 629 복다위 並Jl l mi 卜多 @里 631 복병재 成歡邑 大弘里 657 부소문이고개 北面 雲 龍里 683 바렁잇 들 聖居邑 뚜里 689 비조재 i多身面 海亭里 694 빗가리 笠場面 獨井里 700 사고시 北面 沙값里 713 사 무 개 東面 杏巖里 745 삼도암 聖居邑天典里 748 삼성 並J II ilii 鳳項里 755 삼태 登歲ilii 三蒸里 756 삼한 東面 松蓮里 761 쌍령고개 廣德面 舞먀里 784 서근밤 並 )ll ilii 鳳項里 786 서리실 廣 德 面 芝 長里 787 서립산 東面 松蓮里 793 서창 골 城南面 大井里 806 설렁바위 東面 長松里 814 성거산 聖居邑 819 성안 廣德面 貫円里 820 성양 城南面 花城里 839 소댕이 聖居邑 松南里 852 소사들 成歡邑 大弘里 858 소정이 並 Ill 面 卜多@里 867-1 솟대배기(i) 木川面 校村里 872 쇠머리논 廣德面梅堂里 882 수리나미 東面 흙南里 876 쉴바위 廣德面 였山院里 912 시 롭 세 稷山面 慈跋里 914 시성산 城南面 花城里 932 아냇빌 修身面 長山里 940 아오내 並 Ill 面 並川里 957 애고다리 成歡邑 安宮里 969 어렘이 成歡邑 魚龍里 984 임정 修 身面 海亭里 985 업정내 修身面海亭里 986 여계수 廣德面 大 德 里 987 여 기바위 北面 梅松里 993 여수운 豊歲 面 豊西里 1008 엽둔고개 笠場面 道林里 1019 오동촌 北面 梧谷里 1028 오미기 東面 竹 8里 1087 용마지 並 Ill 面 龍頭里 1105 우걱꿀 修身面 長山里 1117 응모기 木川面 新溪里 1118-1 울-바위(i) 並 Ill 面 桃源 里 1141 원봉산 成歡邑成歡里 1147 위례성 笠場面 1152 유왕골 木 )|I 面 德 田里 1160 은석산 並 Ill 面 並川里 1161 의동 並 Ill 面 冠星里 1166 이따진산 木 lll ilii 交川里 1174 입바위 並川面 桃源里 1m 잉어못 北面 沙없里 1186 자무실 廣 待 面 梅 堂里 1191 자은리 稷山面 自隱加里 1194 작성산 並川面 桃源里 1196 잔방이 稷山面 三隱里 1199 장각 골 並 Ill 面 ffg A 里 1204 장교다리고개 東面 德星 里 1211 장명 修身面 長山里 1214 장비 東面 長松里 1233 저우실 廣 范 面 算訪里 1241 진기 동거리 稷山面 板井里 1254 정랑봉 城南面 石谷里 1273 조양 城南面 回凡냅t 1305 지령리 並川面 龍頭里 1313 지장골 修 身面 鉢山里 1314 지질켕이 成歡邑水鄕里 1329 질꾸말 修身面長山里 1339 차령고개 廣德面 院 待 里 1371 친홍 聖居邑 天興里 1385 청망평 成歡邑安宮里 1393 초석 굴 東面 長松里 1395 초정 城南面 大井里 1404 충효산 廣德面 梅堂里 1438 태화산 廣德面 1444 홍 미 笠租面 可山里 1492 하나샘 成歡邑旺林里 1506 한림봉 笠楊面 良袋里 1508 한버 듄 修身面 白 子里 1515 한신 修身面白子里 1555 허무니고개 잎歲面 寶城里 1562 호겨니 笠粉面虎堂里 1566 호디기 北面 龍巖里 1576 호좁은골 廣德面 大德里 1584 홍경잇들 成觀邑大弘里 1588 홍뭇골 木 )1| 面西里 1596-2 홍천@ 笠場面 弘泉里 1600 화랑골 北面.陽谷里 1609 화청 東面 花店쁘 1620 황사동 東面 東山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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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군】 10 가누골 忠淸南道 靑陽郡 南陽面 大鳳里 54 가지내 靑陽郁~扶餘郡 60 까치내 大侍面 節川 里 66 깍지 밥골 長坪面 던谷里 69 간두문 木面 池谷里 91 갑파 大特面上甲里 .101 강정께 합南 面 束i里 136 계봉 木面 本義里 137 계봉산 定山面 白谷里 194 꽃창이 化城面 花岩里 197 과 목골 定山面 松먀里 203 광대웅 大特面 光大里 228 구릅 定山面 馬特里 229 구름쟁잇들 長坪 面 美堂里 248 국마 골 南~1\il'ii 溫直里 276 금정 南陽面金井里 265 나래미 南!§面 鳳岩里 336-2 대마동@) 大呼面上甲里 346 대추울 靑南面 大興里 368 도승지핏골 大特面 111l 谷里 3n 둘- 안산 南t§面 金井里 392 두내 바지 南陽面 大鳳里 402 두물 定山面 大朴里 431 만가대 飛鳳 面 長在里 449 망원산 長坪面樂只里 478 목빈고개 長坪面 赤谷里 483 무곡고개 靑陽邑 淸水 里 505 미당 長坪面美堂里 513 바닥 골 木面 松巖里 514 바라터 靑南面 仁良里 525 박성미 飛 屈面 龍)||里 533 반여옹 木面 新興里 542 밥산 化城面 長溪里 593 번거못 木面 新興里 597 벌 초막 定山面 德城里 653 부루니 飛屈面長在里 664 부해평 靑南面 仁良里 679 비끼내 大特面 怖田里 686 비봉 골 定山面 松的里 695 빙곳재 靑限邑 邑內里 717 싸리티 南陸面 溫直里 725 사수대 大侍面 itS JI I 里 727 사양티 南限面溫直里 刀 5 새웅 定山面南泉里 894 술골 大崎面 酒 亭里 945 안무동 定山面 南泉里 956 압수 南!函面 新旺里 960 앵화동 長坪面 花山里 976 어재 동 化 城面 九在里 983 엄진못 木面 新興里 989 여드재 靑限邑長承里 994-3 여술® 飛鳳面 接 士里 1012 영실 翼谷面 永限里 1022-2 오룡동@ 大侍面五龍里 1031-3 오산Q) 木面 華隆里 1082 용곡 化 城 面 龍堂里 1093 용배 府陽 邑 邑內里 1100 용지당들 南限面 白琴里 1133 원전골 大時面炭井里 1205 장구동 木面 松巖里 1216 장수동 化城面Q岩里 1220 장재웅 飛鳳面 長在 里 1266 조계곡 南陽面 瓜岩里 1300 지곡 木面 池谷里 1301 지네벌 長坪面 中原里 1340 차일 봉 飛屈面新院里 1342 창강나루 靑南 面 東江里 1360 천마봉 뭡陽邑 軍많里 1367 친쟁이 定山 面 天庄里 1381 칭대굴 化城面新亭里 1409 치섭 定山面 驛村里 1412 칙매기 長坪面 竹林里 1413 칠갑산 大時面 1423 칼산 雲 谷面 新袋里 1460 팔구정 化城面廣坪里 1467 평구 南陽面 九龍里 1489 하광 大特面 水石里 1502 학바위 定山面 精巖里 1524 한티고개 大侍面大特里 1537 해남골 定山面 海南里 1544 헵싸리 化城面 新井里 1578 혼동이 靑南面 江津里 1605 화방 둘 雲 谷面 新袋里 1640 횡천 大特面 柚田里 1644 효재리 翼谷面 孝樣里 1662 흰마무 靑南面 東江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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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군】 44 가오리 忠淸南道 洪城郡 요項面 胎封里 45 가오티 E 山面 雲谷里 50 가재물 龜項面 長楊里 51 가재 울 洪城邑大憶里 56 가지 울 結城面城谷里 59 가출미 銀河面花峯里 68 간동 洪城邑 大樣里 82 감계 洪城邑 月山里 95 강금달金馬面 德井里 110 개월 洪束面 月안里 156 고무령 이 洪城邑 古岩里 166 고윤돌 洪東面 求精里 168 고정 金馬面龍興里 , 187 공수동 龜項面 公里 208 광제 長谷面廣城里 227 구룡실 廣JI!邑 雲龍里 239 구시울 結城面衡山里 247 구항 龜項 面 內峴里 290 남당 西部面 南塘里 302 노은동 洪北面 魯恩里 304 녹간산 西部面 新里 352 댕 굴 西部面中里 373 독귀미 金馬面 長城里 378 돌저루 葛山面 吹笛里 396 두리 長谷面上松里 405 두지골 結城面 龍湖里 432 만궁암 長谷面 天台里 446 망국재 洪北面 石宅里 469 모산포 西部面 新里 472 모잣굴 結城面 城谷里 482 뫼갓 西部面 上黃里 508 미어실 銀河面 德實里 518-3 바리미® 長谷面 天台里 527 박철 結城面 城谷里 528-2 반계® 長谷面 山城里 547 방돌 구지 葛山面 몇 谷里 564 배암성 洪城邑 松月里 565 배양골 金馬面竹林里 606 빗듬말 西部面 於沙里 624 보패 고개 洪北面 中溪里 644 봉지 龜項面 五瓜里 649 부니 티 結城面 琴谷里 659 부어쟁이 結城面橋項里 662 부강동 銀河面 錦菊里 698 사맛동트기 金馬面 鳳樓里 699 사고개 洪東面 新基里 709 싸래기내 洪北面 內德里 714 사무지 葛山面 基山里 722 사성골 洪城邑 新 城里 740 살포장이 고개 욕項面 預谷里 766 상지 廣川邑 湘井里 768 상풍 長谷面 新登里 no 새낭굴 廣 )|l 邑 廣 )II 里 828 세계다랭이논 洪城邑古岩里 838 소눈골 金馬面 華陽里 845 소마답 산 龜項面 支井里 862 속은 長谷面 杏亭里 875 수골 洪東面 大英里 881 수룡구지 西部面 板橋 里 1011 영담물 龜項面 五鳳里 1014 영암 洪城邑 古岩里 1016 영장골 結城面 琴谷里 1020 오 두 葛山面 繁頭里 1027-2 오미® 長谷面 道山里 1031-2 오산® 長谷面五聖里 1033 오서산 廣 J Il 邑 1053-3 온동® g項面 磨溫里 1056 옹암리 廣川邑 雍岩里 1064 왕동 洪城邑 刻鷄里 1070 왕재 結城面星湖里 1071 왕지동 洪東面 秀閔里 1080 용강 金馬面 龍興里 1094 용봉산 洪北面 1107 우러내 長谷面 月溪里 1137 월계 洪城邑 月山里 1143 원실 長谷面 大現里 1146 월천 洪 城邑 松月里 1171 인홍 金馬面 仁山里 ' 1180 자겅동 洪北面 新耕里 1200 장개 西部面 南塘里 1229 잿조실 洪東面 新基里 1230 저그물 廣 )II 邑 湘井里 1234 저잔이 長谷面 佳松里 1260 제각 꼴 洪北面 大仁里 1261 재기산 廣 )1| 邑 碧溪里 1276 조정리 廣川邑 佳亭里 1278 족실 西部面 宮里 1283 종쟁이 洪城邑大校里 1284 종현 洪東面 月想里 1297-1 중생골(i) 西部面 限谷里 1332 질패기 龜項面 麻溫里 1333 집때울 洪城邑內法里 1341 참뱅이 長谷面廣城里 1344 창우 洪東面 秀闇里 1356 칙괴 龜項面新谷里 1365 천숭 洪北面 中溪里 1383 칭용산 結城面 無요里 1405 취생 葛山面 吹笛里 1411 칙대비 洪北面新井里 1447 몽동 金馬面 華閣里 1453 무구리 銀河面 長尺里 1461 팔병사묘자리 長谷面 天台里 1481 풍방골 金馬面松江里 1482 괴목 洪城 邑 則鷄里 1488 하고개 急項面 虹谷里 1493 하루살이번덕지 結城面 琴谷里 1523 한지미 洪北 面 大東里 1545 행계 長谷面 杏亭里 1549 향교말 結城面 邑內里 1550 향산 洪城邑 照香里 158 3'홍거미 洪東面 洪元里 1607 화양 長谷面 月溪里 1648 휘면동 洪城邑 內法里 1661 희여미 葛山面 吹笛里
崔文輝 서라벌예술대학 文藝創作科졸업, 고등학교교사 公州,靑陽 洪城의 各 문화원장을 역임, 대전 KBS 방송국 作家로 있으면서 忠淸南道內 口碑文 學 및 지명의 발굴 • 정리, 詩作, 劇作活動. 著합로는 『忠南傳說集』 『忠南各郡의 鄕土史』가 10 餘卷있으며 『忠南民話集』 『忠南地方族間碑總覽』 『忠南의 各城址』등의 저서를 준비중임.
忠南土俗地名辭典 대우학술총서•자료집回 1988 년 7 월 5 일 1988 년 7 월 20 일 지은이 崔文輝 펴낸이 朴孟浩 펴낸곳 民音社 출판등록 1966. 5.19 계 1-142 호 110 -ll l 서울 종로구 관칠동 44-1 우편대체계좌번호 010041-31-523282 지로번호 3007783 734-4234, 6110( 편집부) 734-2( XX)•2 101 735-8524( 영업부) 값 5, (XX)원 V © 1988, 崔文輝, KDCI()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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