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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茶山과 그 時代

丁茶山과 그 時代

鄭奭鍾 姜萬吉 金仁杰 崔奭祐

姜在彦 (논문계재順) 民昔社

책 머리에

이 책은 1985년 8월에 출간된 「丁茶山硏究의 現況」에 이온 大宇學術叢書 중의 茶山學硏究 小시리즈의 제 2 권이다.

82년 전남 광주에서 가졌던 茶山學 學術會議를 시발점으로 하여 매년 다산학 관계 연구를 지원해 오고 있는 大宇財團에서는 83년에 위크샵 「丁茶山과 그 時代」를 지원하였다. 이해 8월 서울의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1박 2일의 일정으로노 진행되었던 이 워크샵에는 10여명의 학자들이 5개 분야로 나뉘어 발표 및 토론을 가졌다. 이 토론을 참고로 다시 다듬어진 글이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이며 이때의 토론은 각 논문의 말미에 함께 실었다. 아울러 권말에는 82년 다산학학술회의를 위해 준비되었던 茶山硏究著作目錄을 부록으로 첨가했다.

「丁茶山과 그 時代」에 이 어 다산학연구 시 리 즈로 출간되 게 될 대우재단 지원의 각종 연구에는 「丁茶山傳」, 「茶山과 中國經學」, 「朝鮮後期의 西學」, 「茶山經學硏究」, 「政治學的으로 본 丁若鏞」 등이 포함되어 있다. 금년으로 茶山逝世 I50周忌를 맞아 이들 업적들이 속속 출간됨으로써 다시 한번 다산선생에 대한 추모의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1986년 7월

*워크샵 개회 인사말

丁茶山과 그 時代

작년 1982 년에 저희 大宇財團이 주최했던 茶山學 學術會議는 1930 년대 중반 일제 치하에서 치러졌던 茶山逝世 IOO 년 기념행사 이후 근 50 년 만에 처음 있었던 다산학 관련 학술행사가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학술회의를 마련했던 의도가 지난 40 년동안의 茶山學연구를 중간점검해 보자는 데에 있었던 만큼 학술회의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다산학 중의 어느 분야가 공백으로 남아 있는지를재단으로서는 說意 검토하였읍니다. 이때 연구되어야 할 과제로서떠오른 것들이 인간으로서의 다산의 생애에 관한 연구, 茶山思想의전체적인 규명, 이와 관련한 茶山經學연구, 당대 주변사회에 대한다산의 인식 등등이 었는데 이번 워크샵의 제목이 된 「丁茶山과 그 時代」도 그 중의 하나였읍니다.

다산과 그의 사상을 그가 살았던 시대 속에서, 그 시대와 관련하여 유기적으로. 파악하려는 연구는 어떻게 보면 다산연구의 전제가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본격적인 연구가 시도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저희 財團에서는 이를 우선적인 연구과재로 삼아 이 분야를 전공하는 몇분께 상의를 드렸읍니다. 이에 다산이 살았던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조선조를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분야로 나누어 또 사상에 있어서는 經學, 佛敎등과 함께 西學을 별도로 취급하기로 워크샵의 골격이 마련되었읍니다.

한편 재단에서는 당시 우리의 주변사회에 대한 다산의 인석이 어

떠했던가 하는 문제도 연구되었으면 하고 있던 터에 마침 일본에 계신 姜在彦교수께서 茶山의 日本觀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오고 계시다는 애기를 듣고 이 워크샵에 함께 참여해서 발표해 주십사 부탁을 드려 오늘 이 자리에 모시게 되었읍니다.

이번 워크샵의 주제가 개척적인 면이 많은 만큼 부분부분에서 열떤 토론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모쪼록 좋은 건과가 나와 앞으로의 다산학 연구에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이만 인사말을 줄이겠읍니다.

I983 년 8월 26일

대우재단 이사장 李用熙

丁茶山과 그 時代 • 차례

5 책 머리에

6 「丁茶山과 그 時代」 개회 인사말

鄭奭鍾

11 正祖 • 純祖年間의 政局과 茶山의 立場

41 토론개요

姜萬吉

47 丁若鏞時代의 經濟事情

金仁杰

71 조선후기 鄕村社會構造의 변동

101 토론개요

崔奭祐

105 丁茶山의 西 學 思想

139 토론개요

姜在彦

145 丁茶山의 日本觀

161 토론개요

165 종합토론개요

169 茶山硏究著作目錄

* 茶山의 思想에 대한 고려대학교 尹絲淳 교수의 발제논문과 이에 대한 동국대학교 宋述球 교수의 토론애용 요약은 필자의 사정으로 인해 싣지 못했음을 밝히며, 준비가 되는 대로 재판시 보완할 것을 알립니다.

正祖• 純祖年間의 政局과 茶山의 立場

鄭奭鍾

조선후기의 사회와 사상을 이해하는 지름길로 우리는 茶山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가 실학사상의 집대성자이기 때문이요 백과전서적인 그의 저작 속에는 18·19세기 당시의 조선사회의 신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그에 대한 처방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 다산은 조선시대 최대의 개혁사상가로서의 면모를 가지기 때문에도 그의 사상에 대한 관심은 구한말 이래 일제시대에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사회적 모순의 해결을 위한 한 전범으로서 연구되고 있으며 실학사상 연구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소고에서 필자는 다산사상에 대한 평가를 위하여 그 기초작업의 하나로 당시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의 그의 정치적 입장을 밝히는 작업을 시도하고자 한다. 다산사상의 위대성으로 하여 다산의 모든면이 지나치게 신성시되는 경향에 대하여 반성하고자 하는 까닭에서이다.

다산도 하나의 인간이다. 그도 당시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뛰어

넘을 수 없는 고뇌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고뇌가 당시의 어떠한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는가 하는 면이 밝혀져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당시의 객관적 정치현실이 어떠하였는가 하는 점이 다산사상연구의 전제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산사상의 위대성을 예찬하는 것은 좋지만 다산교도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2

다산의 생애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762~I80I, I80I~1836). 그 전반기의 시기는 英• 正年間에 해당하며, 후반기의 시기는 純祖年間에 해당한다. 純祖元年에 해당하는 1801년은 〈辛酉邪獄〉이 발생하여 그의 18년에 걷찬 유배생활이 시작되던 해이므로 그 이전과 이후의 구분이 다산의 생애와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불가피하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나누는 것이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도 편리한 구분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이곳에서 검토하게 되는 시기 가운데 전반기는 다산의 정치처 활동기에 해당하는 정조년간의 정치적 상황이 되는 것이며 후반기는 다산의 이후의 생활에 결정적 변화를 주는 〈신유사옥〉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이 그 중심이 될 것이다.

먼저 조선후기 숙종년간부터 격화되는 당쟁의 이해 없이 정조 • 순조년간의 정치적 성격도 이해될 수 없으므로 이를 개관하고 정조 • 순조년간의 정치적 상황을 설명키로 한다. 이른바 宜祖年間의 동·서 분당으로 당쟁이 시작된 이래 최초의 큰 사건은 바로 선조년간의 〈己丑獄事〉가 될 것이다. 『東史拓實』에 따르면 수백 명의 동인측 인사가 서인측에게 일망타전되었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큰 사건이 이른바 肅宗年間의 〈庚申大出陟〉인데 남인축이 서인축에 의해서 除당한 이 換局은 대외정책의 當否가 정권의 향방을 결정한 주요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남인측에서는 이른바 〈吳三桂亂〉으로 중국천하가 양분되는 시기에 白湖 尹 를 중심으로 한 北伐論이 대두되고 있었으며 康熙帝가 중원을 재통일하

는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시기에 숙종은 왕권의 안정을 위하여 서인과 제휴하여 남인을 제거하고 있는 것이다.1)

숙종 15년의 〈己已換局〉은 남인의 재등장인데 이때에는 譯官을 중심으로 하는 중인충의 지지 속에 남인의 집권이 가능하였으며 이른바 己已換局으로 등장하는 장회빈의 正妃로의 책봉도 그녀의 삼촌이 역관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2)

肅宗20년의 〈甲戌換局〉으로 少論이 등장하는 정 치 변화에 는 소론 측이 역관과 商賈들로부터 정치자금을 공급받고 있으며 庶 의 세릭과 奴婢들의 힘도 이용하고 있음이 드러난다.3) 이제는 하층 사회 세력의 움직임에 따라 정권이 교체되는 그러한 시기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숙종이 재위 46년 만에 去하고 왕자 昀이 군왕의 자리에 앉게 된다. 이가景宗이다. 그는 병약하였으므로 노론측에서는 왕제인 연잉군 昑을 추대하여 世弟 건저를 제의하였으며 소론측은 이를 탄핵 하였다. 世弟 立에 가담한 金昌 등 노론 四大臣의 逆謀罪로 처형당하는 이른바 〈辛壬士禍〉를 겪고 노론의 지지 속에 왕위에 나아간 昑이 바로 영조이다.

영조는 탕평책을 추전한 군주로 지목되고 있고 영 • 정년간을 우리 나라의 르네상스기에 비유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영 • 정년간에 이루어전 문예진홍의 기운과 그 업적 때문이라고 생각되며 임진 • 병자 양란을 겪은 후의 사회의 제반제도가 改되고 사회의 저변이 격동하던 것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재조정된 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표면적인 일정한 안정만을 보고 당시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표면적인 현상만을 본 피상적인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영조. 4년 (1728)의 이론바 李麟佐난은 종래까지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갈등 속에서 소론측이 집권 노론측을 축출키

1) 稿「肅宗朝의 社會動向과 彌」, 『朝鮮後期社會變動硏究』 , 1983, pp. 35~44.

2) 「宗朝의 甲戌換局과 中人• 商人• 動向, 같은 책 pp. 80~94.

3) 같은 글, pp. 94~130.

위해 일으킨 무력봉기라는 면에서만 파악하는 것이 학계의 통론이며, 그것도 근래의 개설서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 난은 현존하는 관련 金石文만도 〈平嶺南碑〉를 위시 하여 모두 셋이 나 되 며 난에 관련된 공식 편찬기록만도 『 義昭鑑』『勘亂錄』 같은 것이 있으며 供招記錄만도 『戊申逆獄推案』10册이 있으며 당시 지방수령들의 보고서類를 모은 『英祖戊申別勝錄』5册이 있다.

星湖의 『門族登科記』에 의하면 戊申逆亂後에는 大家• 名族• 聞人• 顯士• 達官• 를 물론하고 서로 이어 하였으며 連累者가 나라 안에 편만하였다. 그리하여 수년 동안에 기상이 꺾이고 무너진 것이 劫火가 지나가고 桑田이 벽해가 된 뒤와 같다.

이같이 이 난의 걷과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이 난이 준 충격이 얼마나 컸으며 그것이 정치 • 사회 제반에 준 영향이 얼마만한 것이었는지 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4) 이 난이 있은 지 I 백여 년이 지난 정조 말년에 영남지방 인사들이 이 난으로 말미암아 중요한 정치적 지위를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른바 남인 • 소론· 소복은 이 난을 계기로 완전히 정계에서 제거되어 갔다.

다음과 같은 여러 사건들이 모두 이 戊申亂과 관련되어 취급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영조 6년 壬戌(1730)에도 천여 僧軍과 九月山도적 이 남인과 연결하여 서울을 방화하고 남인이나 宗室중에서 군왕을 추대하려는 역모가 이 戊申亂과 관련된다고 하여 남인이 제거되고 있으며, 영조 9년 癸丑(1733) 에로 戊申亂때의 를 轉寫하였다는 접과 璋谷書堂의 逆謀사건으로 양반이 明火賊으로 활약한다하여 〈戊申餘黨〉을 철처히 색출하고 있다.5)

4)) 〈 庚李 戌E 逆佐예 〉銘은案 집』 판12자 객 의참 조다 음. 작업이 된다. 後 稿 에서 자세히 언급한 예정이다.

영조 10년 甲寅( 1734) 에도 〈戊申餘黨〉들이 船商富人과 嶺南의 諸人들과 함께 通文을 말하여 역모를 꾀한 사건이 있었으므로 그 색출이 있게 된다.6)

영조 24년 戊辰(1748) 에는 〈남쪽에서 나오니 산에 가는 것이 불리하고(不利於山) 물에 가는 것도 불리 하며 (不利於水) 弓弓에서만 이롭다(利於弓弓)〉는 유언비어사건도 戊申亂과 연결시키고 있다.7)

영조 31~32년에는 李匡師• 柳 垣• 朴文秀둥 소론계 인사들이 역모사전으로 제거되거니와 이것도 戊申亂과 관련시키고 있다.8)

영조. 39년 (1763)에도 戊申亂 후예가 海西의 彌勒信仰者와 관련된 사전 때문에 처형되고 있다.9)

영조 44년 (1768)에도 忘 堂, 徐花 의 사상과 계보가 닿는 자들이 金秘錄에 가탁하여 戊申亂과 관련이 있는 南亂을 계획하다 처치되고 있다.10 )

이같이 영조재위 52 년 전기간 동안 노론 집권당은 戊申年의 李 佐亂과 관련시켜 남인 • 소론 등 반대 色을 철처히 제거하고 있는 것이다.

영조년간에 취해진 일련의 시제들도 저같은 사회 • 정치적 격변 속에서 하충농민과 사회 여타세력의 끊임없는 항거에 대처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생각된다.

戊申亂 다음 다음 해 인 영 조 6년 (1730) 에는 公私賤가운데 良妻所生은 母役을 따르게 한 것이라든가 영조 26년 5월의 일이지만 均役廳을 설치하여 하충농민의 부담을 경 감케 한다든가 영 조 45년 IO월의 隸院 혁파도 여러가지 원인이 있는 것이지만 하층 천인 농민의 이해에 일정하게 접근하는 방책이었다.

정조년간도 저같은 영조년간의 정치적 성격의 연장선상에서 이해

6) 『推案及 』제169책 참조.

7) 『戊辰罪人之 推案 』 참조.

8) 『乙亥二月日 逆賊尹志等推案』, 『乙亥五月日 逆賊沈弼衍等推案二』· 『乙亥五月逆 案三』 등 참조

9) 『 未逆賊來復等推案 』 참조

10) 『戊子罪人黃應直等推 』참조

되어야겠지만 당색간의 쟁권을 둘러싼 두쟁은 보다 치열한 것이라 생각된다.

3

『 全書』 二十七 渠八 墓誌銘 秘本11) 중의 「 菴墓誌銘 附見開話條」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당시 黨色間의 관계가 어떠하였나를 극명하게 나타내 주는 실례가 될 것이다.

幅巾은 失制하여 朱子所論의 橫 之法과 같지 않기 때문에 남인들은 幅市을 쓰지 않는다.

丙辰(정조20년, 1796) 겨울 上께서 廷臣들에게 이르기를 한 조정에 함께 있으면서 巾服의 制가 다른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蔡左相• 李家煥• 李基讓• 丁若鏞 네 사람이 쓰면 남인은 반드시 모두 쓸 것이니 내일 4人이 모두 入 하고 또 幅市울 쓰도록 하고 金虎門 밖에서 벗도록하라 하니 이에 4家에서는 밤 가는 것을 잊고 殿을 샀으나 婦人들이 이제는 製法을 몰라서 편지를 보내 西人의 巾을 빌려서 밤새도록 綠造하여 아침에 맞추어 대궐에 나아갔으니 역시 盛世의 일이었다.

이때에 노론은 일컬으면 반드시 禪巾이요 少論온 일컬으면 반드시 袷巾이었다.

내가 承政院에 도착하니 서로 다투어 물었다.

내가 웃으면서 속담에 물리려면 차라리 큰 호랑이에게 물리라고 하였다고 말하였다.

4人이 모두 禪巾을 쓰니 老論諸人이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袷巾은 少論의 制이며 老論온 禪巾이다).

星湖의 「朋黨論」에 묘사되고 있는 黨人들의 모습이 거의 그대로

11) 安春根편집으로 다산의 親筆初節本이라 생각되며 현재 정신문화연구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내용은 新朝鮮社版의 그것과 같다. 初節本이라는 과 표지에 秘本이라 적여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재현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같이 당시의 黨色間에는 외형상으로도 幅巾과 같은 것으로 구별할 수 있었을 분 아니라 언어 • 행동거지가 모두 달랐던 것이다. 이같이 확연히 갈려진 黨色間의 相爭이 정조 전기간 동안 계속되거니와 노론의 경우에도 時•僻 양파로 크게 나뉘었으며 南人의 경우에도 정조 I4년경부터 양파로 나뉘었음이 『 菴墓誌銘』과 『黃嗣 』12)에서 각각 확인된다.

정조는 영조 38년 壬午(1762)에 노론벽과에 의해 비명횡사한 부친인 莊 世子(속칭 뒤주대왕)13)에 대한 원한으로 卽位年에 벽파의 金龜桂(영조의 妃 金氏의 오라비 父 金漢考의 子)를 黑山島에 귀양보냈다가 賜死케 하였다.

정조12년 봄 蔡 이 右議政으로 入相할 때까지 노론에 의한 집요한 공격으로 남인의 領首인 체제공은 계속 정권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조의 왕권강화가 비교적 이룩된 정조 I2 년 이때부터 노론 쪽에서도 왕권에 대응하는 태도 때문에 時派• 의 分黨이 공공연히 운위되고 있었다. 그것은 남인의 둥장에 대한 대웅방법이 강·온의 입장으로 갈리기 때문이었다.

李命植• 徐有隣 등 일대의 인물들을 時派라 칭하고 金鍾秀• 沈煥之둥 일대의 인물들을 僻派라 하였으며 서로 공격하고 있었다. 14)

정조 I4 년에 체제공이 좌상의 몸으로 水原울 新都로서의 면목을 갖추도록 啓言하였는데 15) 노론측은 채제공에 대한 공격으로 실효를 거둘 수 없도록 하였다.

이같은 노론측의 공세에 대한 남인축은 그 대응태세 때문에 정조 14년에 두 파로 갈리게 된 것이라 생각되거니와 그것은 천주교를 둘러싼 입장 때문에 특히 그러하였다고 생각된다.

12) 『黃 』는 「邪學罪人 永等推案」에도 그 내용이 거의 동일한 것이 수목되어 있다.

13) 金用淑, 『 中錄硏究』, 韓國硏究院, 1983 참조.

14) 『正祖實錄』「正祖 12年4月 乙卯 校理 鄭萬始上 」

15) 『正祖實錄』 「正祖 14年 2月 庚午條」

나의 知告가운데에는 邪學을 攻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둘로 나뉘어서 서로 攻하니 (……)매번 이때문에 하였다. 16) 는 이기양의 증언(罪人 李基識等推案三)에서 이를 확인할수 있거니와 어찌하여 이기양이 〈 〉하기에까지 이르렀을까. 그것은 천주교에 대한 입장이 극단에까지 이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우려하였기 때문이었다.

庚戌年(正祖14년, 1790) 에 諸議가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福小하기 때문에 神父를 할 수 없으며 神父는 끝내는 統露날 것이니 만약 大 을 請出하면 일은 풀릴 수 있다. 17) 는 극단론이 남인 내부에서 우세하여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적극 주장한 인물들은 李家煥• 李承 • 洪樂故 등이었으며 그들은

神父를 데려오고 이어 정하여 西洋의 大 이 우리나라에 出來하는데 만약 順受치 않은즉 一場判決토록한다• 18) 는 것이었다.

이같은 극단론이 우세하자 이를 반대하는 입장 때문에 남인 내부에서 이미 떨어져 나간 睦萬中• 洪樂安• 李基 등은 오히려 노론벽파측에 보다 밀착되었다고 생각되며 다산과 이기양과 같은 인사들이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고 생각된다.

다산은 이미 천주교에 대해서는 확연한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고 생각되거니와 그것은 정조의 총애를 독차지하다시피 하였기

16) 『辛酉邪斌 罪人 李基讓等推案三』, 「同日3月6日 推考次 罪人 李基韻年五十七史推白等」〈供曰矣身知 中多有攻 邪 之人 故分爲兩 互相攻 而矣身則 杜門 初不干殿而每以此 〉

17) 『純祖辛酉推 及 』 「同日9月ll日推考次罪人柳 位年三十四白等」 〈庚戌年諸諾以爲我國 小 不可 神父 神父畢 露若出大 則事可 矣〉

18) 『同上 』「同日罪人 年三十四矣結案白等」〈 來神父 罪西洋大般出來我國而若不 受則一 判決)

때문이었다.

정조의 은고를 각별히 입고 있기는 이가환도 다산에 못지 않은 터인데 어찌하여 그가 이같은 국단론에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까.

그것은 노론을 제압하는 방책으로 천주교를 이용한 군대 및 대포를 장치한 서양 선박의 出來를 구상한 것이라 생각되며 은밀히 정조에게 건의하여 정조의 승인까지 얻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를다. 그것은 이가환의 이후의 행적 속에서 천주교를 반대하는 입장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조 재세 52년간의 정치적 행태가 노론 중심이었으므로 당시 노론의 세력은 막강한 것으로 정조도 이률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같은 극단론에 적어도 동정적일 수는 있었다고 생각된다.

정조 15 년(辛亥年) 초에도 체제공의 이른바 通共政策19) 이 실행되고 있거니와 이것은 六腦外는 亂盛 納의 권리를 맷은 것이었다. 노론의 정치자금 공급원을 차단하고 뺏은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노론을 근처에서부터 붕괴시키려는 조치였으므로 노론측으로서도 반격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이해 (辛亥) 겨울 湖南의 邪獄을 일으킨 것이 그것이다. 20) 사상논쟁으로 몰고 가는 것으로 남인측의 공세에 대처한 것이라 생각된다. 洪 運은 체제공에게 上書하여 다음과 같이 공격 하였다.

로 무릇 聽明才智한 者는 모두 西敎에 빠졌으며 장차黃巾• 白蓮의 亂이 있을 것이라.21)

이것은 바로 이가환 • 정약용 • 이기양 등을 지목한 것으로 그들은 정조의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남인축 인사들인 것이다. 노론과 남인벽파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주동이 된 반격이었다.

19) 『正祖實錄』「正租15年正月 」

20) 『正沮實錄』「正祖15年10月丁已條」 및 「正祖15年10月甲子 」

21) 『正祖實錄』「正沮15年10月甲子條」, 甲子 』 : 誌銘 秘本「貞軒 誌名」 〈 甫 凡 才智者 咸 西敎 將有黃巾白蓮之亂〉

정조 16년에도 노론과 남인의 정치적 반목과 두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가환이 成均館 大司成이 되어 開 課케 되었는데 그가 李潛 (星湖의 兄)의 孫(星湖의 兄으로 諱가 沈인 분이 李 家 煥의 祖父 이다) 이라 하여 當路子弟로 李 을 싫어하는 자들이 모두 入場치 않았다. 일종의 데모인 폭이었다.

이가환은 이들을 하려 하였고 정조는 그의 이같은 태도를 강력히 지지하였으므로 그는 課試를 실행하였다.

이에 대하여 노론들의 반발이 거세어지자 정조도 이가환을 開城留守로 좌천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은 정황 속에서 이가환은 정조 17년에 上 로서 李 에 대한 울 하기에 이르며 이에 대하여 노론벽파의 當路大臣들인 右議 政 金履素 • 大司成 沈煥之 • 判中樞 金鍾秀 등이 집중적인 공격을 하게 되며 閔鍾顯 • 李書九 등의 老論系 찬우들도 이로부터는 자리를 같이 하지 않고 말도 같이 하지 않게 된다. 22)

李 은 金春澤이 世子를 謀危케 하려 하여 張希載의 妻와 하여 계책을 꾸몄음을 조정대신들이 알면서도 이를 저지하지 않았으니 모두 世子를 謀害하려는 것과 갇다고 당시 숙종년간의 노론대신둘을 공격하는 격렬한 上疏를 올렀다가 18차 5백 40度의 곤장을 맞고 物故하였 었다(丙戌九月 一七日 罪人 李潛推案 單 . 李潘은 노론측에서 보면 逆賊이며 실제로 伸寬되지 않은 채로 정조년간까지 내려오고 있었으므로 이잠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정치적 금기를 犯한 것이되므로 이가환이 異端視되고 배척받은 것은 당연한 결과인 셈이다.

이해 여름(정조 I7 년)에 채제공이 영의정으로 발탁되자 23) 노론벽파의 김종수가 이를 십하게 공격하고 나섰다 .24) 남인의 등장에 대한 노론의 거센 반발 때문에 정조도 부득이 莊 世子의 壬午事件을 해명치 않을 수 없었으며25) 노론의 끈질긴 남인에 대한 공격에 대

22) 『同上書』 「貞軒墓誌名」

23) 『正沮實錄』「正祖17年5 月丙辰條」

24) 『正祖實錄』「正祖17年6月壬戌條」

25) 『 水全書』 八 墓誌名秘本「自 墓誌 」(集中本)

하여 이를 비호치 않을 수 없었으나 끝내 정조 자산이 노론축에 양보치 않을 수 없었다.26 ) 체제공의 영의정으로의 발탁은 9 일 정도 (5 월 25 일 ~6 월 4 일) 의 짧은 시 일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가환 • 이승훈 둥은 다시 천주교를 통한 서양大 의 지원 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甲寅(正祖18년, 1794) 년 여름 別使行때에 家煥• 承薰 등이 다시 有一과 池을 중국에 治送하여 神父롤 토록 하고 이어 大 을 하였으며 (……) 一湯判決하려 하였다.27) 는 것이 그것이다. 남인축이 노론의 공세 속에 휩싸이고 있을 때에 천주교를 통한 대의적인 지원으로 정치적 곤경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경주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체제공이 영상의 지위에서 물러서는 시기는 전해의 여름이요 지원요청으로 중국에 사람을 보내는 시기는 다음해 여름인 것이고 보면 정조 I7년의 상황이 18년에도 계속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이로보면 정조의 암묵적인 승인으로 이 지원요청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정조 I8년에는 華城(水原)의 役 가 시작되고28) 정조 19년 봄에는 정조는 이 가환을 正卿으로 발탁하고 정약용과 함께 華城整理通考룰 撰하도록 하였다. 29) 이것은 華城으로의 천도가 임박하였고 이가환· 정약용 등이 크게 쓰여 남인의 집권기가 다가온다는 우려를 불가피하게 하였다고 생각된다.

이해 여름에 捕將 趙圭鎭이 敎徒인 金如三의 발고로 周文謨 入者인 池 • 尹有一• 崔仁吉 등 3인을 잡아 정조의 지시로 殺한 사건이 있었는데 노론측에서는 大司 權裕가 上를 올려 이를 탄핵

26) 『正祖實錄』「正祖17年6月乙丑條」

27) 『純祖 辛兩 推案及駒案』「同日推考次 罪人柳 儉年三十四白等」 〈甲寅年夏 別使行時 家煥承薰等 更爲治送有一及池瑾於中國 逆來神父 仇請大 (…) -揚判決〉

28) 『日省錄「正祖 甲寅年 正月 4日條」

29) 앞에 제시한 다산의 「自撰 誌銘」( 中本) 참조

하였다.

그 내용은 捕將이 너무 빨리 죄인을 살해한 죄를 논한 것이었다 (달레의 『조선교회사』에 의하면 그들은 6월 27일에 잡혀 그날밤 안으로 곤살되고 그들의 시체는 다음날 강에 던져졌다).30)

이 뒤를 이어 少北의 副司直 朴表은 이가환이 亂義理(李 을 한 일)하고 但立邪 하여 吾道에 하고 이승훈을 놓아 보내 邪書를 사들이고 富人을 誘引하여 財物을 하여 自作敎主하고 術을 廣張한다는 上疏31)를 올려 또다시 사상논쟁으로 정조의 측근을 망타하려 하였다. 이것도 노론들이 뒤에서 사주한 것이라고 보인다.

다산은 「貞軒墓誌銘」「 菴墓誌銘」「梅丈墓誌銘」「鹿菴墓誌銘」 「先仲氏墓誌銘」「自撰墓誌銘」(城中本• 中本) 등에서 이들을 惡 이라는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의 陰 는 집요하고 조직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信徒들 중에서 포섭한 인물로 하여금 신도들의 동정을 살펴서 刑 에 보고토록 하고 있었으므로(罪人 李家煥等推案一) 南人들의 동정을 어느 정도 정확히 탐지하고 있었다고 보이며 상기 權裕·박표설의 상소는 다분한 근거가 있는 셈이었다.

정조가 지황 • 윤유일 등을 별로 취조도 하지 않고 裕의 지적대로너무 빨리 根殺한 것은 다분히 혐의스러운 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천주교도를 통하여 중국에 西洋大 의 往來를 요청한 저간의 사정이 공개되는 것을 미연에 막아 보려는 행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황 • 윤유일 등이 大 出來를 요청하러 간 장본인들이었으므로 그들의 죽음으로 일단은 입을 막을 수는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 사건으로 보더라도 정조의 大 出來요청에 대한 개입이 어느 정도 확인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정조는 노론들의 저같은 공격 속에서 이가환을 忠州牧使로 정약

30) 앞에 제시한 茶山의 「貞軒墓誌銘」참조. 샤르르 달레 原著 安應烈• 崔 , 天主敎會史』 上, 분도出版社, pp. 380~81 참조.

3l) 『正祖實錄「正祖19 年7月丙辰條」 앞의 「貞 慕誌銘」참조

용을 金井道察訪으로, 좌천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32)

金井은 洪州地에 있는 곳으로 驛 이 많이 西敎를 習하므로 다산으로 하여금 이룰 금지케 하여 보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정조가 노론측의 공격을 靜하고 분운을 멈추게 하려는 뜻도 있는 것이었다.

이해 겨울에 다산도 소환되고 이가환도 內移케 되었으나 노론측의 공격이 위험하여 정조는 그들을 그의 측근에 두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이 되자 노론측은 또다시 語를 만들어 채제공이 이가환을 하고 수용치 않으려 한다는 반간계를 조작하여 이 소문이 삽시간에 여항에도 퍼지고 조정대신들에게도 전달되었으며 정조도 의십하는 지경이 되어 갔다.

정조 20년 丙辰겨울의 일이었다. 체제공의 현명한 처사로 이 는 일시에 없어졌으나 이가환에 대신할 인물을 정조는 물색중이었다.

이해 겨울에도 주문모가 주동이 되어 大舶을 請來하는 일이 실행되었다.

丙辰年(正祖20년, 1796) 겨울 사이 에 黃信巨가 入送할 때에 柳 儉 형제나 尹持 등이 함께 列名 裁書하여 文謨處에 直送하였는데 文謨가 말하기를 描語가 좋지 않다고 하고 그 스스로 다시 써서 보냈으며 大舶을 一 한 후에는 마땅히 그 出來를 기다려야 할 뿐이지 여러번 번거몹게 하면 不可하다고 하여 戊午年(正祖22년, 1798)에 金哥를 入送할 때에는 내가 다시 付書치 않았읍니다 (純祖辛酉推 及 ).33)

이 기록으로 저간의 사정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32) 『正祖實錄』「正祖19年7月 甲戌」 앞의 「貞軒墓誌銘」 참조.

33) 『純祖 辛酉 推案及 』「罪人柳 儉年 尹持 年 更推白等」 〈丙辰年多間黃信巨入送時 儉矣身兄弟及 矣身等 同爲列名送於文謨處矣 文謨描任自改構以送是平筋大 之後 只當待 出來 已不可 故金哥入送時 矣身 不付 是去平〉

정조 21년 丁已(1797) 10월에 이기양이 義州府尹이 되었는데 그것은 남인이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작업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象譯과 灣商이 貨타가 被執된 것을 전부 돌려주고 추호도 취하지 않았으므로 〈歡 이 우뢰와 같아 京師를 殷動하였는데 생각컨대 古今에 없던 일이라〉고 묘사될 정도였다.

그는 I 년간의 임기 동안 府財를 80 만 냥이나 축냈다는 것인데 이것은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간 것이 거의 틀림이 없다고 생각된다. 34)

그것은 이같은 財缺이 있었음에도 정조 23년 己未(1799) 에 그가 호조참판으로 발탁되고 있는 정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80 만 냥의 정 치 자금 유출과 그의 호조참판으로의 등장은 〈辛亥通共〉에 못지 않은 조처라고 생각되며 그것은 노론측을 견제하기 위한 정조의 방책이 공공연히 시행되고 있는 한 가지 예가 되는 것이겠다.

이같이 정조는 그 말년에 와서 지나치리만치 공공연한 노론측에 대한 적대표시를 하여 노론들을 자국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다음과 같은 「華城日記」의 기록은 그 같은 분위기를 잘 나타내는 것이다.

聖上이 오시는데 黃金갑옷을 입고 華城留守 趙心泰로 하여금 入軍케 하고 節次에 軍 를 받으시니 위엄이 가지런하고 군대의 列이 분명하여 장관이로되 (……) 本 앞에 있는 군사의 진을 물리시고 환궁하여 오는데 聖上이 軍服을 입으시니 軍服에 金으로 龍을 그렀으니 금빛이 하여 날빛이 찬란하더라(……).

一 上에서 放砲하고 天 가 있을 때 군사를 모으는데 부는 나팔소리)을 불고 청룡기에 청룡 둥을 내어 세우니 束 에서 應砲하는 소리에 현무기에 현무 둥을 내어 부르니 北에서 應砲하는 소리에 일시에 하는지라(……) 龍珠寺의 總攝이 旗 와 僧

34) 『 水全 』 八 墓誌銘秘本「沃菴墓誌銘」〈 巳...十月大臣又 爲義州府尹 上欲驛用公 之卿相 故其無 如此(……) 象譯及潟買消貨之被執者 皆庫磁 使臣行 遠 以 犯者 秋 無所取 磐如雷 股動京師 以爲古今未之有也 居歲餘將歸 府財缺八十 (······) 己未入爲戶 判〉

軍을 거느려 送하니 중이 軍服울 하고 아희와 兩房旗手들이 天然하여 旗手나 다름 없더라. (……)

慈宮 惠敬宮洪氏의 迫甲을 기리고 청명 한식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수원성에 입성하였다가 서울로 돌아가는 동안의 정경을 묘사한 내용이지만 그것은 事装에 대응키 위한 시위로 보지 않을 수 없는 정경이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정조 23년에는 수원성이 完役되고 있다. 수원성은 北門이 天安門이요 南門이 八達門35)인 것을 보면 새로운 수도로서 이곳으로 천도하려는 의지가 뚜렷한 것이 사실이다. 정조 자신도

생각전대 이 華城은 곧 아버님 莊獻世子의 衣冠이 보관되고 있는 곳이다 . 금년 봄(정조 19년) 내가 母를 모시고 가서 幽宅을 둘러보았다. 後10년이면 내가 장차 늙은 나이가 될 것이다. 때문에 간 華城은 老來의 이다. 36)

이 같이 천도의사를 분명히하고 있는 것이다.

노론축에게는 수원으로의 천도는 곧 그들의 생활기반이 한양이므로 정치적 기반이 와해되는 것을 의미한다. 수원성 완역 다음 해에 정조가 사망하거니와 이것은 노론측에서 그들의 정치적 이해를 위하여 정조를 살해한 것이라는 남인측 이야기가37)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정조는 끊임없이 庶 疏通을 지지하여 그들의 환심을 사기에 노력하였으며 38) 辛亥通共을 통하여는 特市商人들의 都에 반대하였었다. 이것은 소상품생산자적 생산과 유몽을 장려하며 그들

35) 1983 년 봄에 필자가 답사하고 확인함.

36) 앞의 「貞軒 」 〈上召臣家煥 臣 之曰惟炫 城 獻衣冠之 也今年 毋 往 幽宅 後十年 將老 故華城有老來之堂〉

37) 李佑成교수와 故 成樂 선생의 교시에 의함.

38) 裵在弘, 「朝鮮後期 庶 許通」, 1984 년도 경북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의 환심을 사는 시책이었다. 이같은 입장이 확대되어 府에서의 商을 인정하는 결과로까지 가게 된 것이라 보인다.

이같은 정조는 特權商人의 활동을 저지하는 입장에서 소상품 생산과 그 유통을 지지하고 그들 생산자와 유동상인을 그의 왕권강화의 토대로 삼고 있는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는 선상에서 그의 정치적 진로를 모색하였다고 보안다.

이러한 입장은 중소지주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보이는 남인의 미호로 그의 정치적 기반의 또 다른 면모를 확립하는 것과 궤도를 같이하는 것이다.

이같은 입장은 대지주와 특권상인을 그 정치적 기반으로 삼는 노론 세력의 封建反 의 그것과는 크게 차이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막강한 노론세력의 견제를 위하여 심지어는 천주교도를 이용한 〈西洋大 의 來〉라는 외세의 힘까지도 빌리려는 방책을 취하게 한 왕권강화책은 그가 기반으로 삼고 있던 사회세력의 힘과 그 경제적 기반의 취약으로 그의 죽음과 함께 수포로 돌아가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보인다.

4

정조의 죽음은 노론벽파의 정치적 등장을 가져오게 된다. 그것은 왕세자가 너무 어렸으므로 영조의 繼妃 貞純王后 金氏가 大王大妃로 정권을 장악하고 垂 聽政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조가 재세시에 그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기 위하여 비호하여 성장시켰던 정치세력의 시련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貞純王后 金氏의 대권장악으로 이제 李秉模,金觀柱, 沈煥之 등의 노론벽파가 老論時派를 배제하고 정권을 독차지하게 되었으며 정조가 비호하던 정치세력은 더욱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노론벽파에서는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일차적으로 제거하려 서두르게 된다.

이러한 준비가 진행되는 중에 I2 월에 천주교도들(崔必.吳玄遠· 趙 • 李箕延 등)이 서울과 楊根•忠州 등지에서 잡히게 되자 노론

벽파에게는 남인을 제거할 명분이 생겼던 것이며 드디어 大王大妃인 貞純王后 金氏의 邪 禁壓下敎가 辛亥 (1801) I월 II일에 내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이른바 邪學은 아비도 없고 임군도 없으며 人倫을 하여 교화에 배반하여 夷 獸에 돌아가니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誤에 潮染 되는 것이 마치도 赤子가 우물 속에 빠지는 것과 같다. 이것이 어찌 側然하고 상심케 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監司 • 守令은 상세히 하여 邪을 하게 된 자로 하여금 然히 개혁하게 하고 邪 을 하지 않는 자는 然히 경계하여 我先王 位 의 豊功盛烈을 저바리지 않도록 하라. 이같이 엄금한 후에도 아직도 不 하는 무리가 있게 되면 마땅히 逆로시 從 하여야 할 것이다. 各邑 守令은 각기 그 경내에서 五家의 法을 修明하여 그에 邪의 무리가 있게 되면 統首가 告官 하여 治토록 하라. 그러고도 오히려 不俊하게 되면 나라에는 法이 있는 것이니 珍하여 滅之하여 種을 없이 하도록 하리라 .39)

이같은 邪 下敎로 천주교도들의 수색이 시작되자 이 환란을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증거가 되는 물건들을 비장시키는 과정에서 정약용의 冊籠이 한성부의 포교에게 압수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辛酉, 正月 , 19 日).

이제 남인의 시련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冊 에는 敎理 • 聖具 • 神父와의 交換 札 • 5, 6인의 往復 札들이 들어 있었으며 이 중에는 다산집안의 도 들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이른바 〈辛亥邪獄〉으로 사건이 확대되었던 것이다. 40) 이재 남인의 제거를 위한 명분이2월 뚜9 렷일에해 전는 것OO이 命다;. . 掌 令 尹行直 • 趙台榮, 持平 李毅采 등의 이

39) 『純祖實錄』 「純祖元年 正月 丁亥條」 朴錫武, 「 丁若鏞, 그의 시 대 와 사상」 , 《 한국사회 연구 》 2, 한길사, 1984, 2 참조.

40) 丁 英 ,『俊菴先生年 』「 皇帝元年 辛酉 公四十 」 참조. 尹앞在에 제 和시 , 한『 錫,] 同 底「明史會紀 表行 丁참조 定 」 正 音社 , 1975, pp. 38~40.

가환 • 이승훈 • 정약용을 三因으로 지목하는 탄핵상소가 있게 되었다. • 林의 근십이 호흡간에 임박하였다는 것 이며 정약용의 兄弟 • 叔姓 의 往復 札 이 狼 히 現發하였으니 그 妖 은 萬目을 케 되었다는 것이며 이 三因이 邪學의 根抵라는 것이었다.41)

이날에 大王大妃殿의 傳敎로 嚴 之道는 조금도 늦출 수 없다 하고 義禁府로 하여금 그날 안으로 設 케 하였다 . 判義禁으로 새로이 兵判徐鼎修를 除授하여 사건에 대비하고 있었다. 42)

상기 3인은 즉시 잡혀 왔으며 국문이 시작되었다. 이가환 (60세)은 인 이승훈이 그의 아버지 故 參判 李 이 狀官으로 北京에 갈 때에 따라가서 서양인이 주는 책을 받아왔는데 그는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7,8 권의 그 책을 보았으나 그 가운데 神主를 不拜하고 제사를 행하지 않아야 된다는 구절을 읽고는 놀라서 그 부분을 칼로 도려내고 그후에는 다시는 천주교관계 책을 보지 않고 그 책들 온 이승훈에게 들려 주었다는 것이며 辛亥年에 慶州府尹을 제수받고는 향교에 帖을 내려 正學을 숭상하고 異端울 하라는 뜻을 누누이 효유하였으며 각 面里에 傳令하고 市에는 撮하여 邪을 禁하였으며 이해 12월에는 邪學者 4, 5인을 하여 監에 보고하여 刑推토록 하였다. 忠州牧使時에는 邪學者 I 인을 周형으로 다스렀으며 乙卯年에는 邪을 지었다고 하면서 邪學과 관련 없음을 변명하였다 .43)

이승훈 (46세)은 그의 아버지가 乙已年 (1785)의 秋曺査를 듣고 族人올 불러 모아 놓고 집 뜰에서 책을 불사르고 그 자신은 의 글과 시를 지었다는 것이며 辛亥年후에는 아버지가 그에게 효유하기를 邪學은 吾家의 원수이니 이를 믿는자는 칼로 찔러도 可하다고 하였으니 자기가 無父 • 無君 • 倫 • 亂常의 학을 어찌 할 수가 있겠는가고 변명하고 乙卯年 山居適時에는 惑文을 지었으며 그

41) 『罪人李家煥等推案一』 「純祖元年 二月初九日 閔命 掌令尹行 趙台榮 持平 李毅采等所啓」

42) 『同上 』 「大王大妃殿傳」

43) 『同上 』 「同日 (2月 9日)推考次 罪人李家煥年六十白等」 및 기타 更推.

때의 邑伴는 洪百 •朴究 인데 자신이 지어 바친 惑文을 한글 로 번역하여 檢 으로 하여금 各面里에 일일이 효유하였으므로 福 山一境이 다시는 邪 에 물들지 않게 되었다고 변명하고 있다. 그 러나 다른 증거로 그후에도 믿었다는 것을 자백하고는 있으나 邪學 을 믿지 않는다는 사설을 증언부언하고 있다. 44) 다산 (40 세)의 경우는 兄弟叔 의 往復 이 現發되었으므로 몹 시 난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정조로부터 生死骨肉之恩을 입었 으므로 先朝 ( 정 조) 에게 바친 疏狀(正祖 21 년丁已 1797,6월)에서 진심 으로 邪學에서 떠났음을 밝혔으며 정조의 恩批를 받은 다음에 一 의 邪心이라도 내에 가졌거나 一 의 邪奎 ( 子)이라도 천지간 에 가지고 있었다면 千 萬 하여도 애석하지 않겠다고 하고 매번 邪學의 일이 생길 매마다 전부터 하던 마음이 다른 사람들보다 배나 더하였기 때문에 부자지간에 혹 相戒하는 말이 있었다고 하 였다. 45)허다한 서찰은 고사하고 近峽의 邪 가 다산 집에 綱 往復한 사 실과 다산을 令이라고 일컬은 것은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하는 문 초에 대해서는 令이라고 稱한 것은 누구를 일컫는 것인지 알 수 없 으며 자신의 人 가 되 는 서 찰은 보기 를 원한다고 하였 다. 거 듭되는 令字는 누구를 가리키고 이 서찰은 누구의 것이냐는 문초 에 대해시는 〈위로는 임금을 속일 수 없고 아래로는 형을 증거 할 수 없으니 나는 오늘 오직 一死가 있을 분이 라〉 46) 는 供辭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거듭되는 공초에서도 〈형제지간은 天倫이 이미 무거운데 어찌 감 히 홀로 하다고 하겠는가 오직 함께 죽기 를 바란다〉고 대 답하였

44) 『同上 「同日 (2 月 9 日 ) 考次 罪人李承 年四十六白 및 기타 .

45) 『同上 』 「同 日 (2月 9日) 考次罪人丁若細年四十白等」 〈矣身亦人耳 誰不彼國恩 而矣身 生死肉骨之. 矣身耳目口鼻 與人同 忍信人 所不爲之 矣身所陳於 出勉 出於至時至以智端之 然若春磁物苗此恩批之後 一點邪心 留着於壯之內 是白去乃 一點邪 占 留四於天 地之間是白平 則矣身罪狀 千副萬硏 史無所t距矣 (····…) 恨於邪出 則自 之心 倍於他人 故父子之 或有相戒之語矣〉

46) 『同上 』 同上條 < 不政j共君 下不能證兄 矣身今 日 維有一死而己〉

다. 47)

이것은 천주교인의 혐의가 짙은 若鉉 • 若 • 若鍾 둥 三人의 형들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는 이야기이다.

2월 II일에는 崔昌顯 (43세), 權哲身(66세) 등이 잡혀오고 다산은 更에서 刑 一次의 杖 三十度를 맞게 된다.

2월 12일에는 丁若 鍾 (42세), 任大仁 (28세), (62세), 洪 (51세) 등이 공초를 받으며 이 중 정약용은

내가 만약 邪學인 줄 알았으면 어찌 감히 믿겠는가. 그것이 大公至正하고 극히 진실된 道 인 것 을 알기 때 문에 연전의 邦禁후에도 처음부터 개혁할 마음이 없었으며 비록 만 번 刑 을 받드라도 조금도 悟 치 않겠다. 48)고 증언하였으며

丙午 3월에 과연 이 學을 仲兄(若 )에게 들었으며 나는 지금도 이 學에 沈되어 있으나 은 근래에 과연 不旨한다. 49) 고 증거하여 兄을 罪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있다.

2월 13일에는 정약용 ·최창현 · 정약종 · 조동진 · 홍낙민 둥의 更推와 이승훈 • 최창현의 面質과 金伯淳 (32세)의 공초가 이루어진다. 이때부터 다산은 앞에서의 형들과 함께 죽게 하여 달라는 태도를 바꾸기 시작한다.

〈崔昌顯은 都 首이며 黃嗣永은 죽어도 不 할 것이니 비록 婚이나 곳 仇誰이다〉거나 〈李伯多는 李承薰이며 權沙 勿은 權 日 身>

47) 『同上 同上條. 〈兄弟之間 天倫狼 惟同死矣〉

48) 『同上條』 「同日 (2月 12日) 考次 罪人丁若十二白答」 〈矣身若爲邪然之平 知其爲大公至正 板屈之道 故年前邦禁之後初無 改革之心 迎淡被默 少祭梅悟〉

49) 上』 同上條 〈矣身於丙午三月 果間此於矣仲兄 而矣身至今沈沼此仲兄近渠不符〉

이라고 하여 서찰에 쓰인 세례명을 일일이 증거하고 있으며 신자들을 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까지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商窟을 窮하는 길에 이르러서는 또한 方略이 있다. 崔昌顯 • 黃嗣永는 비록 날마다 하여도 결단코 치 않을 것이다. 그 奴 과 의 染不深者를 잡아와서 물은 연후에야 혹 그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50)

이같은 태도의 변화를 보고 推大臣들은 당일의 議啓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罪人 丁若 은 (……) 이제 更推의 言語氣 色을 본 즉 그 家의 將亡을 하고 若鍾을 態 한 窓主 보기를 仇 같이 하여 반드시 指名하여 告하려 하나 知得할 수 없다 하니 그 정상은 아마도 진정인 것 같다.51)

이로 보더라도 다산의 태도가 更推時에는 크게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월 14일에는 大司課 申鳳朝의 上 가 있게 되며 이곳에서 吳鉛 忠 • 兪理煥 • 李 學奎 • 榮이 지목되고 李承• 金白淳 • 李家煥 등이 推되고. 洪敎 (64세) • 丁若 (44세) • 吳錫忠 (59세) • 洪榮 (22세) 등이 잡혀와 공초를 받게 된다.

2월 15일에는 兪現煥 (26세) • 李學奎 (32세) • 李 (75세) 등의 供招와

50) 『同上 』 「同日 (2 月 13 日)推考次 罪人丁若鏞年四十史推白等」 〈崔昌顯爲都退首 黃四永至死不臣 雜是匡硏使是〉 〈李伯多郞 李承蒸 權 沙勿 日身 而伯多 沙勿 西洋之號也〉 〈至於窮賊窟窟之道 亦有方略 如崔 呂傾 黃i 永掌 難日 日屈刑 決不吐賞必也提來 其奴屈 學童之源染不 深者然後 或可以化其縱緖矣〉

51) 『同上 』 「二月十三 議啓」 〈議啓 罪人丁若鎖初低 迷結於邪 以若鍾爲兄則 固無足情 而第以今番史推時 百語 之 家 之將亡 視 悠央若 鍾之窟主如必欲指名以告 而慕以知 之狀似是頂 不必加〉

李家煥 • 李承薰 • 丁若 • 洪賊榮 • 金伯淳 • 등의 更推가 있게 된다. 李學奎의 供招에서 睦萬中과의 관계가 이야기 되는 것이 15일 공초의 중요 대목이다.

2월 I6일에는 정약종 • 최창현 • 이준의 更推와 李存昌(43세)의 供招가 이루어지거니와 李存昌은 신도 중에서 형조에 선도의 동정을 보고하는 세객임이 드러난다.

2월 17일에는 이가환 • 이존창 • 최창현 • 정약용 • 오석충의 更推가 있게 되는데 이곳에서 다산의 更推와 이날의 推關大臣들의 議啓 중의 다산에 대한 기록을 검토키로 하자. 다산의 更目 중에

너는 前後의 辭에서 國,恩에 惡激하여 氏族을 보존하려는 뜻이 없지 않아 온화한 기색이 面目에 自發하고 있다.52) 는 내용에서 그가 씨족의 보존을 위하여 종전의 태도를 바꾸어 천주교도의 색출에 적국 협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대신들의 議啓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정약종의 문서 가운데서 서양인에의 往復과 이른바 神父의 내역을 次第 推出하였는데 약종은 오로지 혀를 묻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으로 주의를 삼고 있으니 물어도 무익하기 때문에 죄인 丁若處에서 반복하여 究 하니 그의 納供한 바가 문서 의 現露한 것과 節節이 相符하고 磯損의 方略도 그가 밀고하였아온 바 팔경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에게 분부하여 設計 하삽오며 그의 供한 바가 이미 모두 質心을 토로한 것이니 형을 받고 오래 갇혀 병세가 바야흐로 하니 짐짓 을 풀어주어 병이 차도나기를 기다리기를 청합니다 .53)

52) 『同上』 「同日 (2月 17日) 考次罪人 丁若鏞年四十更推白等」 〈矣身前後招辭 無非感激國恩 保存氏族之意 然之色 自發於面目〉

53) 같은 책의 「二月十七日 議啓」 〈議啓 丁若鍾文 中 西洋人往復 及所 神父來 次第出 而若鍾則唯以結舌爲 主 間之無益 故罪人丁若鏞處反復究間 則其所訥供 與文 之現露者 節節相符 之 方 又密告是白平所 未知畢 而分付捕將 設計眼捕爲白平 染之所供 皆心吐露•受刑久囚 病勢方 姑解伽任 以待病差〉

다산의 이같은 태도와 입장은 다음과 같은 기록들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黃嗣永 」에 의하면 李家煥 은 文이 蓋世하고 丁若鏞은 才機가 過人하다. 乙卯(正祖 19, 1795) 이전에는 先王이 龍任之 하였으며 乙卯 후에는 점차 감정하는 바가 되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派가 심히 꺼리는 바가 되어 반드시 해를 입히려고 하였다. 家 煥 등은 비록 背敎 • 敎하였으나 派諸人이 항시 邪이라 指하고 讚政이 備至하였으나 先王이 매번 護하여 가 할 수가 없었다.54)

이곳에서 이가환은 背敎하고 정약용은 害敎하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侯菴先生年謂」에서도 獄中에 들어가서는 다음과 같이들 이야기하였다. 丁令(茶山)의 말은 도시 공갈이니 動心할 것이 못된다. 또는 丁令이 알면 반드시 큰일이 생간다고 저들이 몰래 서로 왕복하는 편지를 썼다.

信徒들이 다산의 증언으로 動心하게 된 사실과 다산에게는 신도들의 실정을 토설치 않도록 서로 경계하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거니와 이것도 위 공초문목의 내용과 議啓내용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다산이 이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그가 이미 신도가 아니기 때문이며 그의 형들의 안위를 더 이상 고려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이같이 봉건정부에 협력하여 정약종 문서 중의 편지에 적힌 세례명의 인물둘을 일일이 지고하고 신도들의 색

54) 『辛酉十月 邪學罪人 永等推案』 「黃永 中 李家煥 • 丁若鏞에 관한 언급〈李家煥文盜世 丁若錦才機過人 乙卯以前 先王龍任之 乙卯後新見疏菜 然此二人僞辭 派之所深 必欲中家 煥等難背敎宙敎 諸人 常指爲邪 穀至先王每護之 派 不得 〉

출방략까지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도 사형이라는 국형에서 변할 수 있었으나 보다는 그가 그의 형 若鍾 에게 보낸 편지 까닭으로 사형을 면한다고 생각된다.

禍 色이 박두하니 邪學을 믿으라고 , 하면 내가 장차 손수 칼로 찌르겠다.55) 는 것이 그것이다.

그는 이 편지 덕분에도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며 그것은 그가 이미 신도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그러하다 하더라도 이같이 신도들을 〈密告〉한 사실은 그가 이전에 교우하던 이들 을 死地로 보낸 결과를 초래하였다. 저같은 丁若 鍾 • 金伯 • 崔昌顯 • 崔必恭 • 洪敎萬 등은 앞 정약종의 공초에서와 같이 천주교가 사학이 아님을 당당히 주장하면서 죽음으로써 절조를 지켰던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密 告 〉로 살아 남은 茶山은 이후 평생토록 회한과 고뇌에 싸이게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산은 형 丁若銓과 함께 死地에서 벗어나 귀양가게 되었다.

약전은 康津縣 新智 로 다산은 영 남의 表 縣 으로 정배가게 되었던 것이다 (2월 26일).

그해 9월에 黃嗣永이 체포되고 이른바 「 嗣 永 」가 적발이 되어 다산이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와서 국문을 받게 되기까지에도 〈辛酉邪獄〉은 계속되었다. 여러 인물들에 대한 국문은 계 속 되고 새로운 사실들이 계속 밝혀졌던 것이다.

3 月 의 중국인 신부 周文 謨 (50세)의 自首가 〈辛酉邪獄〉을 새로운 국면으로 몰고 가게 된다.

그는 3월 I2일에 자수하고 3월 I5일부터 그에 대한 국문이 시작되어서는 그가 의주로부터 입국하여 서울에 들 어오고 이어 전국으로 포교하고 다닌 지역이 세세히 들어나고 金建淳과 같은 인물들을

55) 앞의 侯菴先生年請』 「公四十歲 」 〈 色迫頭 爲此 吾將手 〉

만난 전말이 밝혀지게 되었다. 丁已年(정조 21년, 1797) 가을에 만난 金建 에 대한 그의 供招를 보면 내가 奉敎하기를 권하니 그는 言論 中에 내가 협객이라고 의십하면서 나에게 敎友數十家를 모아서 海에 들어가 임의로 行敎할 수 있음을 권하였다. 또 말하기 를 나도 역시 海島 에 도착하여 軍器를 하고 大艦을 作하며 감히 본국을 해할 마음은 없고 오로지 他 에 直到하여 先 를 雪하겠다 하였다. (……) 나는 인하여 耶 敎要理를 告하니 그는 심히 기뻐하며 아침에 돌아갔다.56)

이같이 군함과 군기를 마련하여 중국에 직도하려는 김건순이 耶 敎要理 만으로 승복되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周文謨가 〈洋 請來〉 의 사실을 이야기하였으므로 승복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 생각되므로이다. 그가 이미 전해(정조 20年, 丙辰,1796)에 〈洋 訪來〉를 주선하였기 때문이다.

海島에 들어가 經營 한다는 사실은 노론벽파에게 일충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사실이어서 이와 관련되는 인물들이 차례로 잡혀오게 된다. 李喜英 (45세) • 金履白 (28세) • 金 (36세) • 金 (30세) • 姜 天 (33세) • 金 信國(49세) • 金伯 (32세) • 李述 (29세) • 李周(29세) • 金宗低 (58세) • 金廷臣 (41세) • 崔遇文 (37세) 등이 차례로 잡혀와서 국문을 받게 되며 이중 金伯淳 • 李喜英 • 金建淳 • 金履白 등이 사형에 처하여진다 .57)

周文謨가 廢宮에 은익했던 사실이 밝혀지고 廢宮의 宋氏와 申氏가 邪學敎徒인 것이 드러나 3월 17일에는 江華府安置罪人 妻 宋姓과 그 아들 妻 申姓은 姑 가 모

56) 『辛酉邪默 罪人李基讓等推案三』 「同日 (3 月 15 日)推考次 罪人周文謨 五十白等」 〈談論伐半夜 矣身 勸之 奉 敎 而彼論 中多有疑矣身爲俠客 者 因勸矣身敎 友 數十家入海島可任店行敎中之我亦招人到 海 島 稽 軍 器 作大非政爲 密 於本 國 惟欲直到他邦以先恥耳 (······) 因以耶鮮敎要現告之 彼基於蜀去〉

57) 『辛酉邪 罪人 李基等推案三』 『辛酉邪獄 罪人 姿薛天守推案 四』. 辛酉邪 欲 罪人 金江等推案 五』 등 참조.

두 邪學에 빠져 外人 酸와 往來相見하고 邦禁이 至嚴한 것을 두려워 않고 히 家中에 藏 하였으므로(……)賜死한다.58) 는 전교로 그들이 이날에 賜死된다.

周文謨의 자수는 그 까닭이 당로자들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대왕대비는 周文謨가 自現한 뜻이 종내 의심스럽다. 그가 만약 진실로 이국인이라면 다시 入送하거나 죽이거나간에 장차 양국의 疑端을 만들려고 그러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指을 받아 邪을 하려는 계책 인가. 59) 이같이 傳敎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주문모는 辛酉邪 獄 자체가 노론의 정적인 남인의 제거에 그 목표가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남인 중 신도가 아닌 자들을 지고하여 노론의 목표를 달성시켜 줌으로써 천주교신자들을 보호하려는 것이 그가 自 現한 목적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그가 김건순과의 面質에서 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그것을 간접적으로 전하여 주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老論은 나에게 무슨 원수가 되어 꼭 해치려 하겠는가 내가 이 곳에 와서 南人의 덕을 입은 것이 없고 7년이나 하고 不安한 것은 전혀 南人의 所致이다. 60)

58) 『辛酉邪獄 罪人李基筑推案 三』 〈十七日 (……) 傳 江華府安置罪人稱要宋姓 其子莊妻申姓等段 姑婦但沼於邪學 與 外人酸 往來相見邦 禁之至跋 陣然版匠於 家中 (……) 並賜死爲只爲義禁府 傳敎爲良如敎〉

59) 『辛酉邪獄 罪人金等推案 五』 「辛酉四月初一日 大王大妃殿傳」 〈周文謨自現之意 終是疑端 旦渠若是臼節異國人 迫爲入送昧之之問將欲兩國 端之事敗 仰受人指弦 欲沿湘邪獄之計軟〉

60) 『辛酉邪 罪人 李基這等推案 三』 「同日 (3月 17日)罪人金建淳與罪人周文 成 面 令是白平矣」

〈老於矣身 何其仇而必欲若之 矣身來此 未受南人之 七年拜走不安 全由南人所 致〉

또 한 가지 는 黃嗣永을 시켜 중국의 천주교회 당에 〈西洋大 의 請來〉를 부탁한 일이 차질이 없도록 하려는 양동작전 때문이라고도 생각된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와 함께 그것을 증명한다고 보인다.

黃嗣永은(……)만약 敎中家에서 求하려 한다면 得하기가 萬不可할 것이며 마땅히 그 親友로 奉敎치 않는 視友로 혹 서울이거나 혹 시골이거나 혹 開城府에 있는 사람에게 물으면 가히 그 종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61)

한편 〈大船淸來〉의 사실을 은휘키 위하여 앞에서 이야기 한 海島에서의 軍器와 大艦의 축조와 그 경영을 이야기한 인물들을 지고하였다고 보인다.

이같은 그의 의도와는 달리 교도들은 계속 박해를 받게 되었으며 그는 4월 19일에 御營에서 示케 되었으며 62) 9월에는 黃嗣永이 잡히게 되었던 것이다.

9월 25일 黃 (45세)은 捕將에게 황사영의 거주처를 自願直告하여 9월 29일에 충청도 제천에서 그가 사로잡혀 의금부로 이송되었던 것이다.63)

그와 함께 압수된 이른바 「黃嗣永 也」는 당로자들에게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 내용 중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大 의 請來〉 부분이다.

지난 해의 諭帖에 수년 후에 大 을 差送하겠다는 분부를 받았

61) 『同上 「同(3月 15日)推考次 罪入周文謨年五十白等」 〈黃嗣永(……) 若欲於敎中家求之 則萬不可 宜間其親友 有何不 羽敎之現友 或京 或邸或開城府 則似可以掛其縱跡矣〉

62) 『辛酉邪獄 罪人金笠推案 五』 〈同日 (辛酉四月十九日) 罪人周文 謨 片i示次 出府御廳〉

63) 『辛酉十月 日邪學罪人閉永等推案』 〈十月 初三日 左右捕廳啓 邪學亡命罪人黃嗣永 九月二十九日 捕提於忠情道堤 川地 移送義禁府之炫 政啓〉 〈同日 (10月 10日)推考次 罪人黃心年四十五白等〉

읍니다만 지금은 勢가 이미 변하여 무턱대고 와서는 성공을 바라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에 한 계책이 있읍니다. 가히 조선인으로 하여금 어찌할 수 없이 束手하고 從命토록할 수 있는 것입니다만 단치 행하기가 자못 어렵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청컨대 자세히 아뢰겠읍니다.

본국의 병력은 본래 屈 하여 만국의 이 됩니다. 게다가 이제 2백년간이나 昇平한 속에서 지내왔으니 백성들은 兵이 무엇인지 아지 못하고 위로는 長君이 없고 아래로는 良臣이 없어서 만약에 불행한 일이 있게 되면 土 瓦解를 곧 맞이하게 될 것 입니다.

만약 海 수백 와 精兵 5,6만을 얻어 대포 등 利 의 병기를 많이 싣고 겸하여 글에 능하고 일에 밝은 중국인 선비 3,4인을 대동하고 곧바로 海濱에 이르러 국왕에게 致 하여 이르기를 우리들은 서양의 傳敎하는 배이다. 子女나 玉 때문에 온 것이 아니고 敎宗에게서 명을 받고 이 一 의 生을 구하러 왔다.

귀국에서 한 사람의 傳敎士를 용납하기를 긍정한다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며 반드시 一 • 一矢도 放치 않을 것이며 반드시 티끌 하나 풀 한 포기도 건드리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和好를 맺고 복치고 춤추며 돌아갈 것이다.

만약 천주의 사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마땅히 主罰을 奉行할 것이며 죽어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왕께서는 한 사람을 받아들여 전국의 벌을 면할 것인가 아니면 전국을 잃고 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왕께서는 청컨대 선택하십시오. 天主聖敎는 忠孝와 慈愛로 工務로 삼고 있으므로 온 나라가 欽崇하면 실로 王國의 무강한 복이 될 것이며 우리에게는 이익이 없읍니다. 왕은 청컨대 의십치 마십시오라 합니다 (……) 만약 힘이 모자라면 數十와 五, 六千人이면 역시 可히 쓸 수 있을 것입니다. 64)

64) 『同上 』 黃 永 」 부분 참조.

이 이야기는 정조년간부터 천주교도들이 〈西洋大 의 請來〉를 북경 천주교회당에 요구하여 온 것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를 국명하게 밝혀 주는 것이며 그 내용이 보다 상세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黃嗣永事件으로 종전에 귀양갔던 인사들도 다시 잡혀오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茶山도 서울에 압송되어 왔다가 형의 사실이 없음이 드러나 이번에는 으로 定配 가서 이후 l8년간의 유배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5

집권 노론벽파에서는 정조년간 정조의 비호로 성장한 남인세력을 이로써 일망타진하였으며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남인세력분 아니라 정조의 비호로 어느 정도 신장된 庶 勢力까지 도 除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니 그것이 8월 28일부터 시작되는 任時發 (38세) • 尹必基 (32세) • 尹可基 (55세) 등의 이다.

그들의 죄목은 대왕대비가 임의로 爲政한다는 이야기를 한 것과 仕官이 泥峴 의 金判 에게서 나온다든가 沈政丞節이 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한 것이 전부이며 尹行이 서얼을 위하여 상소한 것에 대하여 감격하였다는 것 등이다.

억지로 尹行을 賜死시키고 大逆不道罪로 任時發과 尹可基를 凌 와 處斬으로 다스리는 것으로 庶 勢力의 기세를 꺾는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또 한편 尹可基의 子婦가 朴齊家 (52세)의 女라는죄목으로 박제가도 곤장 20度를 맞고 咸鏡道 鍾城府로 定配가게 되었던 것이다 .65

이같이 하여 정조년간에 어느 정도 성장한 세력으로 노론측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세력은 완전히 뿌리가 뽑히게 되었던 것이다.

65) 『辛酉八月日 逆賊時發可基等推案 참조.

이제는 대토지 소유자 및 득권상인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보이는 봉건반동의 세력이 군림하여 하층의 중농 및 소농과 빈농 私商의 이해와는 반대되는 시책을 시행하여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니 이로부터 IO년 후가 되는 I8II년의 서북지방에서의 이른바 〈洪 來亂〉은 저같은 정세 속에서 폭발한 하층민중의 저항인 것이었다.

「正祖 • 純祖年間의 政局과 茶山의 立場」 토론 개요

발제자 鄭奭鍾 교수의 「正祖 • 純祖年間의 政局과 茶山의 立場」은 茶山이 정치적 활동을 하였던 正祖時代를 비롯한 조선후기를 파악함에 있어 당색을 부각시킨 발표였다. 따라서 이 토론에서 가장 쟁접이 되었던 것도 그 시대의 제사건과 당색의 연관성 문제였다. 두번째로 자연스럽게 제기된 것이 당쟁 자체에 대한 인석문제였으며, 이와 관련하여 당쟁과 사회세력의 관련문제도 제기되었다. 그리고 꾼으로 정조의 탕평책에 대한 이해문제가 거론되었다.

첫째 문제에 있어서, 참석자들은 당쟁을 정책대결로 보려는 시각에는 대체로 긍정적이었지만, 제시된 여러 중요정책을 당색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질문들을 제기하였다. 첫 질의자인 姜 吉 교수는 당색으로 구분할 수 없는 예를 조목조목 들면서 좀더 해명되어야 할 문제들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먼저 北伐論은 仁祖반정으로 집권한 西人이 자신들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내놓은 것으로, 庚申大을 王權과 西人의 결탁세력이 북벌론을 수장하는 南人을 친 것으로 해석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하면서, 己已환국 역시 남인과 노론의 싸움을 넘어서 역관 • 상인 • 서얼 • 노비 등의 세력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만 이들은 세력이라기보다는 개인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또 발제자는 수원성 축조를 남인의 정권구축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당색을 초월하여 실학적인 사상으로 유대를 맺고 있는 정치세력으로­ 보아야 하며, 노론의 정치자금원 봉쇄를 위한 것이타는 신해통공이 신유사옥 이후 노론이 재집권했을 때도 유지되고 있음은 역사적 흐

름, 즉 일반 상인제급의 압력에 의해 가능했던 것으로 당색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움을 지적하였다. 뿐만 아니라 만상이 의주부윤인 남인에게 정치자금을 대주었다면 그것은 인척 • 교우관계를 넘어서 정치적 • 사회경제적 배경이 제시되어야 하며, 남인을 중소지주충의 대변자로 보는 것 역시 그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것 같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답변에서 정석종 교수는 조선후기 자료들은 당색을 고려하지 않고 해석 • 평가해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전제하에 제사건에서의 각 당색의 입장을 해명하였다. 즉 경신대출척은 강희제가 중국 재통일을 이루리라는 것이 확실해진 肅宗 6년에 북벌론으로 왕권의 존폐가 문제되기에 이르자 왕이 서인과 결탁하여 남인을 몰아낸 것으로 孝宗年間의 북벌론과는 구별되어야 하며, 노론 집권 후에도 통공정책이 계속되는 것은 이들이 노론 시파로 正祖年間의 노론 벽파와는 달리 신축성이 있었기 때문이타고 하였다. 수원성 축조에서도 實學的 유대보다 당색이 더 심각했던 바, 당시 당색은 복색 • 언어 • 동작들 모든 것에서 확연히 구별될 정도였음을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또 대부분의 실학자가 토지문제를 거론하면서 중소지주충의 몰락을 억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에 근거하여 남인이 중소지주층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생각했으며, 이것은 1801년 이후 안동 김씨를 주축으로 한 노론세력이 대개 대지주나 특권상인과 연결을 가지면서 정책을 펴나가는 것과 대비된다는 답변도 있었다. 끝으로 대개 I7세기 말엽부터는 자본축적문제 못지않게 축적된 자본의 정치자금화라는 문제도 함께 거론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덧붙였다.

당쟁과의 연관성 문제에서 천주교 박해에 대한 최석우 교수의 의견도 제시되었다. 천주교 박해는 儒敎의 政敎合一主義에 의한 정치우위의 결과로 보는 게 당색으로만 설명하는 것보다 좀더 합리적이지 않느냐는 그의 의견에는 발제자도 동감하였다.

두번째 문제는 최석우 교수가 당쟁 자체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발단되었는데, 즉 당쟁은 과거 식민사관에서 이용된 것으로 당쟁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좀더 높은 차원에서 극복되어야 한다는 견해였다. 이 문제에 있어서 당쟁을 학맥 • 인맥만으로

파악하려는 식민사관적 편견을 불식하고 좀더 합리적 • 객관적으로 여러 사회세력과 연관시켜 연구해야 한다는 정석종 교수의 답변에 참석자들 모두 공감을 표시하면서 나름대로의 방법론들을 제시하였다. 먼저 신일철 교수는 당쟁에 대한 새로운 개념설정이 필요함을 지적하면서 당쟁은 모든 사회에 공동된 정치결집의 현상이며 우리 나라는 단지 선생의 학설에 따라 제자들이 뭉치는 유교적 결집모델을 따른 데에 특징이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강만길 교수도 당쟁의 새로운 인식 의 필요성에 수긍하는 한편, 다만 국리민복과 관련시키는 것은 오늘날의 정책정당적인 면을 너무 강조하는 것으로, 이는 피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이상에서 석민사관에서 이용되었던 당쟁에 대하여 선입견을 버리고 새로운 틀에 의한 새로운 평가가 팔요함에는 모두의 의견이 모아졌다.

세번째 당쟁과 사회세력간의 관련문제는 발제자인 정석종 교수가 당쟁의 새로운 인식에 대한 답변에서 당쟁이 사립 내부의 인맥 • 학맥만을 통해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회제력과의 관련하에 전개되는 것이라고 한 말에서 발단되었다. 즉 이에 대해 강만길 교수는 여타 사회세력의 요인을 당쟁의 설명에 끌어넣으려면 政 에 따른 정책변화에서 어떤 사회세력에게 유리한 혹은 불리한 방향이 나타나야 하는데, 노비를 정치 쿠데타에 이용하는 경우 노비는 이용될 뿐이지 노비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이나 노비해방에 대한 인식이 과연 있었겠는지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문제제기의 깊이를 심화시켰다. 정석종 교수도 당쟁을 어떤 사회제력을 위해서 전개될 정도까지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고 하여 강만길 교수의 의견에 일단 동조논 하면서 당쟁이 지배충 내부의 권력쟁탈전이긴 하지만 여타 사회제력의 움직임과 밀접히 연결되어 전개되었다는 견해는 그것과 다르다고 해명하였다.

이러한 두 사람의 입장을 종합한 김인걸 교수의 발언으로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김인걸 교수에 의하면, 사회세력 각 계층의 이해가 당쟁과 밀접히 연관된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으나, 이 경우 당쟁과정에서 거기에 참여하는 세력들이 점점 늘어나고 또 그러한 세력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책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

러한 것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폭넓은 사회계층을 정치에 포용하지 못하는 중세정치의 한계 때문으로 보이며, 당쟁의 발전과정과 그 한계에 대한 연구가 좀더 진척된다면 해결의 가능성은 있을 것이라는 발전적 의견을 제시하였다.

네번째 문제인 正祖의 탕평책을 당쟁과의 연관하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최석우 교수가 제기한 문제였다. 그는 정조가 발탁한 인재들은 당색을 초월하려고 무척 애썼지만 당쟁관계에 얽혀 결국 초월하지 못했는데, 결국 이 때문에 신유박해가 터졌고 이러한 西學에 대한 박해로 인해 근대로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었던 계기가 사라진 게 아닌가 하였다. 정조시대의 탕평책을 통해 당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는 금장태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英正時代에 탕평책이 시행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당쟁의 기능과 성격이 부정적으로 변질된 것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이때에는 당쟁이 정책적인 대결을 떠나 특정 혈연집단에 의한 세도정치로 바뀐 것 같으며 영정시대의 당쟁과 숙종까지의 당쟁은 그 성격을 달리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탕평책에 대한 정석종 교수의 견해는 이들 질문자들과는 그 인식의 차가 상당히 있는 것이었다. 즉 탕평책은 당색들의 묵시적 합의에 의해서 여러 모순에 대처하는 차원으로 본다는 게 기본적인 그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탕평책에 의해 당색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면서 영조 전 기간에 걸쳐 노론이 거의 전적으로 정권을 독점하였지만 남인이나 소론은 그에 굴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고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영정시대의 당쟁도 그 이전의 당쟁과 다를 바 없으며 英正年間이 결코 안정의 시기가 아니었음도 아울러 밝혔다.

이 외에 언급된 것으로는 조광 교수가 제기한 정조의 왕권강화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발제자에 의하면 정조 12년의 정약용 • 蔡濟公의 등용이 왕권강화의 계기가 된다고 하는데 과연 반드시 연관이 있을까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에서 정석종 교수는 수원과 광주(남한산성)는 수도권 방위의 가장 중심지역이었으며 정조가 전기간을 통해 자주 수원에 있는 장헌세자의 능을 찾아갔던 것은 단순한 효성 때문이 아니라 왕권의 친위권력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는 일반론을 근거로, 蔡濟公이 화성성역을 언급했을 때의 노론의 집중적 공격을 지적하였다. 이를 통해 화성성역은 정조의 왕권강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노론의 반격으로 실행되지 못했지만 천도까지 예상된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 발제자의 견해였다.

이상의 토론에서 당쟁이 조선후기 정치사 연구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선정되는 데에는 참석자들이 대체로 의견을 같이했으나, 당쟁에 대한 기존의 연구성과가 전무한 상대에서 당쟁과 조선후기 사회의 정치 • 사회 • 경제적 문제가 연관되고 있음으로 해서 여러 다른 의견들이 나온 것 같다• 따라서 토론과정에서도 이미 지적되었다시피 정치사에서의 당쟁연구가 이루어지려면 그 인식의 틀을 새롭게 규정하는 작업이 우선적으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정리 :노재봉〉

丁若鏞時代의 經濟事情

姜萬吉

1 머리말

정약용이 산 I8세기 말에서 I9세기 전반기에 걸치는 시기는 전체 우리 역사를 통해서 하나의 특징 있는 시기였다. 그가 관직에 나아가 있던 18세기 후 반기는 우리 역사상 中世的 歷史矛盾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 있던 시기였고 이 때문에 그 체재를 변혁시키려는 논리도 가장 날카로워진 시기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革論 理가 날카로워졌다는 사실은 이 시기의 집권세력, 보수적 정치세력 에게 주는 위기의식도 그만큼 증대되어 갔음을 말하며, 따라서 변혁세력의 정치적 성장이 불충분한 경우 보수세력의 역사반동­은 나타날 수 있었다. 1801년의 辛酉迫害는 천주교 탄압과 함께 진보적 사상가 및 정치세력을 숙청하고 19세기를 이른바 勢道政治 시대, 철처한 國主義시대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I8세기 후반기에서 19세기 전반기에 걸치는 시기의 이와 같은 역사 일반적 성격은 이 시기의 경제져 조건에도 그대로 나타나지 않울 수 없었으며, 이 시기의 전보적 사상가로서의 신학자둘의 경제이론은 역시 이와 갇은 현실적 조건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18세기 후반기에서 l9세기 전반기에 걸치는 시

기는 경제적인 면에서도 조선왕조적 • 중새적 체제모순이 가장 심화된 시기였으며, 그것을 밝히는 일이 곧 이 시기 實學論의 역사적 성격을 부각시키는 중요한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약용의 경계이론은 대단히 광범위하고 또 특징적이지만 그것을 토지개혁론, 상업발전론, 수공업 및 기술발달론, 광산경영론 등으로 요약하고 그것이 도출된 이 시기의 경제사정 일반 을 밝히려 한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2 營 法의 발달과 民分化

(I) 營股法의 발달

조선왕조의 농촌사회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크게 황폐했으나 17•18 세기에 걸친 복구과정을 통해 그 영농법을 개선함으로써 生産性울 높여 갔다. 移 法 및 廣作 業, 상업적 농업의 발달은 조선왕조 후기 영농법 발달의 두드러진 점들이다.

왕조의 전기에는 早田이나 水田을 막론하고 대부분 直播法으로 벼농사를 지었고 이앙법은 3남지방의 일부에서만 실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왕조의 후기로 오면서 논매기 회수가 줄어서 노동력이 적게 드는 이양법은 널리 보급되어 갔다 .1) 조선왕조의 전기에도 〈慶尙 之民 當夏月 移種稱苗 若値早乾 全失 業 自明年一禁〉 2)이라 한 것과 같이 경상도지방의 일부에서는 이앙법이 나타나고 있었지만, 왕조의 후기, 특히 I8세기에 와서는 〈湖南之民 以注秩爲事 其所謂 播種 乾付 爲百之一焉〉3) 〈 今 若爲十分 則移秩幾過七八〉 4)이라 한 것과 같이 거의 일반화하고 있었다.

벼농사에서의 이앙법의 발달은 농민들에게 크게 두 가지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첫째 노동력을 철약할 수 있었고 둘째 생산성이 높아질 수 있은 것이다. 종래의 직파법에 의한 벼농사는 세

l) 朝詳後期 移秩法의 발달에 관해서는 金容斐, 『朝鮮後期 業史硏究 菜 思想 __ 』, 一潮 , l97l, l장 참조.

2) 『太宗實錄 卷 27, 太宗 l4 년 6월, 國 本 2 , p. 22.

3) 『日省錄 正祖 23년 5월 7일.

4) 『正祖實錄 卷 5, 正祖 2년 1월, 編本 45 ,p.2.

번 내지 네 번의 제초작업을 해야 했지만 이앙법에 의한 농사에서는 두 번 내지 세 번만 제초하면 되어 노동력을 크게 절약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른바 廣作을 할 수 있었고5) 이 때문에 농가마다의 경작가능 면적이 늘어난 것이다.

18 세기 말엽에는 〈付種法으로는 IO도 농사짓지 못했던 농가에서 이앙법으로는 족히 l•2 石 이나 농사지울 수 있으니 광작하는 농가가 많아졌고 이 때문에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은 매양 농토 얻기가 어렵다〉 6)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앙법의 발달로 노동력이 적게 들게 됨으로써 일부의 농가는 경작면적을 넓혀 소득을 증대해 가는 반면 아 때문에 농토를 잃어 가는 농민들이 증가해 간 것이다.

이앙법으로 농사를 짓는 경우 노동력은 절약되고 벼가 튼튼히 자라서 〈 付 生 穀 少 而注 生穀 注 功力者半 而付種 功力倍〉7)라고 한 것과 같이 그 수확이 많아지기도 했지만, 그 위에 이모작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농가의 소득을 증대시켰다. 모자리에서 모를 키우는 기간을 활용하여 논보리를 경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南中民 水田中種秋難 熟 去 移 一年兩根 功省利基多〉 8) 라고 한 것은 이앙농법의 발달로 이모작이 가능해지고 그 때문에 농민소득이 증대한 실정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 후기의 농업경영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여 역시 농가의 소득을 높여 간 점이다. 상업적 농업작물로는 쌀, 직물류의 원료, 채소, 약재, 담배 등이 그 중요한 것이었다. 쌀의 경우 18세기에 〈 • 利川之間 種 先熟 得錢 多〉과 한 것과 같이 상품화되고 있었으며, I9세기에 씌어진 『林園經濟志』에는 그 상품이 조사된 3I6개 場市 중 253개 장시에 出市

5) 조선후기의 作 발달에 대해서는 宋의 「朝 後期 있어서의 廣作連, 『史學一湖 1970 참조.

6) 『日省錄』 卷 600 正祖 22년 5월 22일 〈附種之不過十斗落名 移 足可路一二石落 廣作名紙多 貧殘 類 田土之難

7) 『日省錄 正祖 23년 3월 19일.

8) 『增 山林 15 「四時箕要」.

되었고 콩은 163 개 장시, 보리는 160 개 장시에 出市되었다.9)

이 시기 농민의 소득증대에 큰 몫을 다한 담배는 특히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지방에서 많이 재배되었다. 18세기 전반기의 전라도지방에서는 〈 沃良田〉이 모두 담배밭이 되고 한 고을이 모두 담배를 심는 경우도 있다 했고 10) 평안도지방에서도 〈南草多種於西路 品亦絶佳 故名之爲西革 西路之良田美土 太半入於種革〉 II)라 하여 그 재배 면적이 확대되어 갔음을 말해 주고 있다. 앞의 『林 經濟志』에서논 163개 장시에 담배가 출시되었다.

한편 면화 역시 소득증대를 위한 중요한 작물이었다. 왕조의 후기에는 이미 전국적으로 재배되어 있었고 정약용이 〈木 之田 利倍於五穀也〉12 )라 한 것과 같이 곡물재배보다 이익이 많았다. 따라서 『擇里誌』가 〈專業 花者 絶不 種〉 13) 이라 한 것처럼 면화 재배를 專業으로 하는 농가도 있었다. 『林園經濟志』에서의 면화 出市 楊市는 127개소다.

18세기경에는 또 도시주변 농가들의 경우, 배추, 파, 마늘, 오이, 미나리 등의 채소를 재배하여 큰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정약용은 〈서울· 안팎의 큰 도시에 파발 마늘밭 배추밭 오이발 등은 I0의 땅에서 萬錢을 얻을 수 있다〉 14) 했고 정약용과 같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산 禹夏永도 〈도시 주변의 농민들이 두 마지기 땅에 미나리를 심으면 벼농사 열 마지기 땅에서 얻는 소득을 얻을 수 있고 채소 두 마지기를 심으면 보리농사 열 마지기에서 얻는 만큼의 이득을 얻을 수 있다〉15)고 했다.

9) 『林園經硏志』 「保圭志j 八域場 .

10) 『承政院日記』 英祖 8년 7월 21일 〈以敬差官 往復湖南見之 所耕處 皆是菅沃良田 至如長水 • 安等邑 一槪之土盡種南臣所未見處 如等地 亦皆全一島種之云〉

12) 迫 地官 制 田制 II 井田 3.

13) 『 里 八道總 忠淸道.

14) 『經世 表』 地住官制 田制 II 井田 3. 城內外 通邑大都 田 • 森田 • 森田 • 瓜田 十敵之地 算錢數菓〉

15) 『 』 ”稅勸氏之策」. 〈 大技名都 人多地扶之 則其所利之方 自有許多股 水田種相十斗之地 種芹二則可援稱田十斗之利 早田種麥十斗之地 種菜二斗 麥田十斗之利〉

I8세기와 I9세기를 통해서 농업경재 부분에 일어난 두드러진 변화는 이앙법과 같은 영농기술의 발달 및 상업적 농업의 발달로 농업생산력이 향상되고 농가의 소득이 증대되어 가고 있은 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농가소득의 증대는 곧 농촌사회의 財富의 편재를 더욱 촉진하는 결과를 가쳐왔고,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함께 토지의 상품화를 촉진하여 농민분화를 가속시켰다.

따라서 정 약용의 토지 및 농업개혁론은 이와 같은, 농업생산력의 향상으로 인한 財富 및 토지의 집중화와 그 결과로 나타난 無土農民의 증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2) 農民의 分化와 抵抗

I8세기와 I9세기에 걸치는 시기의 조선왕조 사회는 농민분화 현상이 급격히 진행된 시기이며 그 원인은 역시 생산성이 높아져 간 농토가 양반지주층 서민지주층, 그리고 부농층에게 집중되어 가는 한편 종래의 영세한 自營農層이 몰락하여 無土農民化되어 간 데 있었다.

I846년(憲宗 ,2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경상도 晋州 奈洞里의 案을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16) 이 지역의 토지 I 結이상울 가진 지주층 • 부농층은 전체 농민의 5.8퍼센트이며, 50 負이상을 소유한 중농층은 전체 농민의 9.7퍼센트, 25負이상을 가진 소농충은 2I.7퍼센트, 25 負이하를 가진 빈농층은 62.8퍼센트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지주층 • 부농층이 소유한 농토는 이 지방 전체 농토의 44.3 퍼센트이며 중농층이 가전 농토는 전체의 I7.5퍼센트, 소농층은 I9.9퍼센트, 빈농충은 I8.3퍼센트이다. 결국 전체 농가의 6퍼센트밖에 안 되는 부농층이 전체 농토의 44.3 퍼센트를 가졌다는 사실은 토지가 그만큼 소수의 부농층에게 집중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한편 정약용도 19세기 초엽 호남지방의 농지소유관계를 말하면서 100호 가운데 농토를 빌려 주고 地代를 받는 자가 5戶자기의 농토

16) 金容 , 『朝鮮後期 業史硏究__ 村 • 社 動』__ 「晋 奈洞里大帳의 分析」참조

를 自 하는 자가 25戶, 남의 땅을 빌어 겅작하는 자가 70戶라 하여 자작농을 25퍼센트로 잡고 있지만 17), 朴 源은 〈有田自耕者十無一二〉18) 라 했고, I9세기 전반기의 학자 李圭 도 농토의 IO 중 8·9는 지주의 땅이고 농민들의 땅은 10결 가운데 1결도 되지 않는다 하여19) 지주층 및 부농층에의 토지집중이 접접 심화되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 시기에 와서도 대지주는 역시 양반층이었다. 정약용에 의하면 〈文武의 貴臣과 市 의 부자들은 한 집 에 서 수천 석을 거두는 자가 많은데 그 농토를 계산하면 100결을 내리지 않는다〉20) 했다. 그러나 양반층이타고 하여 모두 지주인 것은 아니었고 양반층의 분화도 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晋州奈洞里의 경우를 예로 들면 양반층의 지주 및 부농충이 7.1퍼센트, 중농충이 II.3퍼센트, 소농충이 25.6퍼센트, 빈농충이 55퍼센트였던 반면 평민 · 천민층의 부농 및 지주층이 2.9퍼센트, 중농층이 7.6퍼센트, 소농층이 17퍼센트, 빈민층이 72.5퍼센트로 나타났다. 21)

한 지방의 경우를 일반화시키기는 데는 무리가 있겠지만, 양반층의 소농층과 빈농층이 80퍼센트를 넘은 반면 평민 · 천민층의 지주부농층이 3 퍼센트였다는 사실은 이 시기에는 도지와 신분과의 상관성이 상당히 희박해지면서 일부의 양반층과 소수의 부유한 평민층에게 토지가 집중되는 반면 양반과 평민을 막론하고 토지를 가지지 못하는 인구가 급격히 중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왕조 후기, 특히 18·l9세기를 동해서 농업생산력의 향상,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한 토지상품화의 촉진 등으로

17) 『茶山全 』 詩文渠「擬跋禁湖南諸邑 夫翰租之俗削子」. 〈今 湖南之民大約百戶則授人田而收其租者不過五戶其自耕 者二十有五 其耕人田而徐之租者七十〉

18) 『燕岩 』「限民名田識」.

19) 『五洲衍文長 稿』 <租均役符 說」. 〈我國ll開兩班林立各有土地兼 之家宜多十之八九以百結之地言之民田不能爲結〉

20) 『茶山全 』時文菓田論.〈今文武 臣及 人 一戶栗千石名莊衆計其田不下百結〉

21) 16)과 같음.

종래의 小 經營아래서의 自營 이 무너지고 토지가 일부의 지주충 부농충에게 집중되어 갔지만, 이와 같은 財富축적의 배경이 권력보다는 오히려 경제력에 있었고 따라서 토지소유와 신분적 특권이 분리되면서 지주의 농민에 대한 수탈이 경제외적 수탈보다 경제적 수탈로 강화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다. 정약용의 토지 및 농업개혁론은 이와 같은 농업경제상의 번화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이 시기는 토지집중의 결과로 토지에서 이탈된 농민이 급격히 증가해 가고 따라서 국히 일부의 농민이 富 , 上戶로 상승하는 반면 대부분의 농민들이 下戶• 貧戶• 殘戶• 獨戶• 乞戶등으로22) 하향분화해 가던 시기였다. 대지주와 부농충에게 집중된 농토는 그 借 에 있어서도 地代수납에 지장이 없을 만한, 自• 小作營 家나 순전한 借地營 家라 하더라도 大의 경우가 借耕地를 얻기에 유리했고23) 나머지 농민들은 借耕地마저 얻지 못한 채 부농 • 대농등에게 고용되는 농업노동자가 되거나 아니면 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의 기록들이 〈부자들은 넓은 땅을 차지하고 빈민둘을 종같이 부리면서 일하지 않고 호사롭게 살지만 빈민들은 땅 한 치 없이 부자의 땅을 빌어 힘껏 농사지어도 겨우 소출의 절반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그렇지도 못하면 농사일에 품을 팔아 하루하루 살아갈 분이다. 품팔아조차 얻지 못하면 거지가 되어 떠돌아 다닌다〉24)한 것이나 〈夫 夫 八口之家 至於三裝 劇之 必須屈人屈人一夫仮過十文鎖砲三時 然後可以得治〉25)라 한 것은 농촌에서의 貨勞動관계 발달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 시기의 농촌에는 토지집중, 無土農民 및 농업노동자의 증가현

22) 金容 「18·19 世紀의 業 과 새로운 經 論」, 『19世紀의 韓國社 』大 文化硏究院, 1972.

23) 위와 같음.

24) 李大圭著, 答』 「均田. 〈其富者地大業廣 連接 民有若奴伐不坐享富 之樂 其貧者無立維之地只貨富人之田而槿其半 不然月松計日如直而己又不然則祭可負之田無可之家 而或乞焉或流 焉〉

25) 『日省錄』正祖23년 3월 28일.

상 이의에도 借耕地나마 일단 확보한 농민들이 地代납부의 거부 등을 통해 지주들의 수탈에 저항하는 일이 두드러지게 나다나고 있었다. 농민들이 地代의 高率化에 반대하면서 半打作制를 실제로 불가능하게 했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지주들은 打租制를 租制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지만 租制아래서도 농민들의 抗租運動은 계속되어 지주들이 몇 년씩 지대를 못 받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었다.26)

토지가 집중되면서 농토를 잃고 농업노동자로 전락하는 농민이 증가하는 한편 借耕地를 확보한 농민들은 강화되어 가는 지 주들의 경제적 수탈에 대항하여 抗租, 죽 지대 납부 거부로 맞서 가던, 그리고 그것이 곧 전국적인 민란으로 나타날 조침이 커가고 있던 시기가 곧 〈丁若 의 時代〉였던 것이다.

3 都賈商業의 발달과 反撥

〈정약용의 시대〉인 I8세기 후반기와 I9세기 전반기에는 상업면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都賈商業 즉 매점 및 독점상업의 발달과 그것에 대한 소상인층의 반발로 요약될 수 있다.

조선왕조 본래의 상업정책은 이른바 商政策이었다. 官府의 팔요에 의해 설립한 및 개 도시의 市 제의하고는 상설시장이 없었고, 농촌지역의 정기장시가 상설시장화하는 것도 철저히 저지하는 한편 외국과의 무역도 이른바 使行貿易 이외의 민간무역은 일체금지되었다.

이와 같은 조선왕조의 商主義 國主義상업정책도 왕조의 후기에 와서는 상당히 변해 갔다. 17세기 경에는 의국무역도 어느 정도 발달해서 開市貿易이 後市貿易으로 변하면서 밀무역의 성격으로나마 상당한 발전을 보았고, 시전상업계에서도 상업인구의 증가, 상품경제 발달의 결과로 성장해 오는 私商人層의 압박을 저지하기 위해 그 禁 을 강화해 갔다. 다시 말하면 市盛商人둘이 禁亂 權으로 私商人 울 누르면서 특권상인화해 간 것이다.27)

26) 22) 와 같음

27) 姜 吉, 「都買商菜 의 形成과 解體」, 『19世紀韓國社舍』, 大同文化硏究院,

l972.

18세기 전반기까지도 사상가들 중에는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대자본을 성립시켜야하고 그것을 위해서는상인들의 금난전권과 같은 특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28) 그러나 시전상인들의 금란전권은 소상인증 및 소생 산자충의 활동을 크게 억제하여 자유상업의 발전 및 자유수공업의 발전을 저해했을 뿐만 아니라 도시소비자층, 특히 빈민층의 생활을 크게 압박했다.

이 때문에 조선왕조 정부측에서도 금난전권에 의한 都賈商業을 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18세기의 중엽부터 이미 나오기 시작했다. 〈5.6년 이래 서울 안의 遊衣遊食하는 무리로서 平市署에 出願하여 새로운 시전을 설립한 자가 대단히 많다. 이들은 상품을 판매하는 것보다 난전 잡는 것을 일삼아서 심지어는 채소나 기름 젓갈 같은 것도 그것의 전매권을 가진 시전이 새로 생겨 마음대로 사고 팔 수 없다(……) 들 중에는 난전이 난잡함을 염려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시전의 금난전권행위로 일어나는 패단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29) 한 것이 그 한 예이다.

금난전권으로 인한 都賈商業의 폐단이 지적되면서 조선왕조 정부의 상업정책은 都賈商業體를 해소시켜 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그 결정적인 정책전환이 辛亥通共으로 나타났다. 1791년에 실시된 辛亥通共은 모든 일상생활품의 전매화로 빚어진 소상품생산자 소상인층 도시소비자층의 피해를 덜고, 금난전권 강화로 나타난 물가고를 해소하며 유동질서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실시된 획기적인 상업정책으로서 30년 이내에 설치된 시전을 패쇄하고 六矣 이외 시전의 금난전권도 폐지한 것이다.30)

辛亥通 에서도 육의전의 금난전권은 그대로 남았고 이후 다른 시전들도 일부 다시 금난전권을 가지는 경우가 있었으며, 또 많은

28) 姜萬 「實卑者의 商業 」, 『朝鮮後期 商架資本의 發達』, 高大出版部, 1973.

29) 司騰錄』108책, 英祖17년 6월 10일. 〈特進 李普赫所啓(……)京中遊衣遊食輩昆于市崩出新也者五六年內其數 多此類專以掛提亂協爲 至於杜菜 斑亦不任自交易 祈盛人之所校困 外方民人之持來産者市中之以此湖者亦彼征吸之密不訪其苦交易之路將紹招帥之間或以亂盛之亂雜爲慮亦由於不詳知此製而然也〉

30) 『正祖 22, 正祖15년 1월 庚子.

시전들이 금난전권을 가지기를 원했지만 이에 대한 조선왕조 정부의 기본정책은 금난전권을 계속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예를 들면 1810년에도 綿子 등 14개 시전들이 〈一自通共以後 皆失業 將至 散 市之境特復亂盛 蒙生活〉31)하고 요구한 것을 비롯하여 많은 시전들이 금난전권의 부활을 요구했으나 조선 왕조 정부는 그때마다 〈都買之法 質非衆民共之禾Il〉32) 〈都民之以通共 爲使者十居八九〉33) 등을 내세워 이를 거부했다.

이와 같이 18세기 후반기에서 19세기 전반기에 걸치는 시기는 특히 도시상업에 있어서의 특권성이 해소되어 가던 때였으며 정약용의 상업관도 이에 합치되고 있다. 그는 蔡濟이 주동한 辛亥通共을 이렇게 평했다. 〈서울의 시전상인들이 그것을 반대하기 위해 公( 蔡濟恭)의 집 앞울 메웠고 원망이 분분했다. 사람들이 모두 그것의 시행이 옳지 못하다 했으나 1년쯤 지나고 나니 物貨가 모여들어 백성들의 생활품이 넉넉해졌고 백성들이 크게 기뻐했다. 전에 원망하던 사람들도 모두 公의 정책이 옳다 했다〉34) 그도 역시 反都賈論的 입장에 있은 것이다.

(2) 私商都賈의 발달

18세기 후반기에서 19세기 전반기에 걸치는 〈정약용의 시대〉에는 시전상업계의 금란전권을 배경으로 한 都賈商業이 가지는 폐단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이 때문에 都賈商業體를 해소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은 때였지만, 한편으로 私商人들의 자본력과 영업규모가 늘어나면서 그들의 특권이 아닌, 경제력에 의한 도고상업이 발달해 가고 있는 때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私商都賈로 활동한 상인들은 서울의 江商을 비롯하여

31) 司 錄』200책, 純祖7년 7 월 29일.

32) 司 錄』 199책 , 純祖9년 3월 14 일.

33) 같은 책 , 正祖24 년 1 월 7 일.

34) 『茶山 詩文 「契翁 事」. 〈辛亥公t衍市民都佑法(......) 上從之 於是 市民號訴公者 損門唄悲而怨ill 朋與難凡民皆 令不使行之歲除物貨淡渠民用以裕百姓大脫難前之怨組右皆言公奏 也)

松商 北商등이 대표적인 상인들이었다. 1793년의 한 기록에 의하면 마포에 사는 吳世萬 등 7명이 〈三江無 〉70여 명을 규합하여 한강변에 魚物울 만들고 각처에서 오는 상품을 매접하니 이것이 곧 都買라 했다 .35) 정부가 득권을 인정한 이외에 私商人들에 의한 魚物買占商이 새로 생긴 것이다.

1806년의 기록을 하나 더 들어 보면, 서울의 뚝섬에 사는 鄭大彬과 往十里에 사는 金聖珍등이 富 과 결탁하고 막대한 자금으로 원산에 가서 상품을 매점해 두고 가격을 조종함으로써 서울시내에는 상품이 고갈되었으며 魚物들이 그들의 換錢去來帳를 조사해 보았더니 1개월간의 거래액이 4,5천 량이나 되었다 한다 .36)

이 기록들은 대제로 京江商人의 私商都賈활동울 말해 주고 있지만 城商人 義州商人 東萊商人의 경우도 같았다. 1848년의 한 기록에 의하면 동래상인과 의주상인이 결탁하여 牛皮를 매점하고 개성상인이 삼남지방과 평안도 황해도지방을 연결하면서 도고상업을 벌이고 있었다 .37) 이런 경우는 흔히 있었는데, 개성상인이 중심이 되고 동래상인과 의주상인이 연결되어 국제무역을 벌이고 있은 것이다.

이 시기에 와서는 市鹿 에 정체적인 제약이 가해지는 대신 私商都賈의 활동이 더 활발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시전의 도고활동이 정부로부터 받은 금난전권을 배경으로 한 특권적인 것이었으므로 특권 자체가 제약되면 도고활동도 위축되기 마련이었지만, 私商都

35) 『各盛記事』地卷 丑 2월. 〈外臨等狀內(···…)) 吳世萬 • 李東石• 車天拔• 林蕃李批 • 李次萬• 姜世柱 政生無順之心 三江無傾七十除人 自作名成 又出行首者所在質設江上都執各處魚商之物謂之都 有如許無平〉

36) 『各臨記事』人卷嘉皮II 년 9 월. 〈內外 人等狀內(……)近者 大杉• 洪汝心瓦署居 心• 孫往十里居金聖珍等綿結商興阪萬金財力虹入元山各種之物日夜伯來或中或沼於操縱淡處 窓慈亂 勞操縱 以致京城絶種之 探 染之 取考換錢去來之常冊 朔所魚物 至四五千金年去來或至屈菓金世 許股法操縱之漢平〉

37) 『 及司脫錄』235책, 宗I4 년 1월 20일. 〈昌臨市民等以爲京外牛皮之並. 鳩矣盛以役 自式而萊丙商 掃結邪執每患絶之貿遷無路三南兩西松都私商都買之契一切跋禁 〉

賈의 경우는 그들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매점활동이기 때문에 정부의 직접적인 제약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시전의 도고활동이 通共政策으로 제약된 이후에는 이들 私商都賈의 활동이 더 활발해져 가고 있었다 . 18세기 말 이후 19세기 전반기에 걸치는 시기의 상업계의 일반적인 추세는 시전 등의 官商都賈가 제약을 받는 한편 私商都賈의 활동이 활발해져 가고 있은 것이다.

그러나 私商都賈의 매점상업 역시 군소상인층과 소상품생산자층, 그리고 영세소미자층에게 경제적 타격을 주는 것은 官商의 경우와 같았다. 따라서 〈都賈之笑無論盛民與私商法在當禁〉38)이라한 것과 7같이 私商都賈의 활동에도 법제적 재약이 가해져야 한다는 의견도 일부 나타나고 있었다.

I8세기 후반기에서 I9세기 전반기에 걸치는 〈정약용의 시대〉는 상업면에 있어서 특권을 바탕으로 하는 시전 등의 官商都賈가 소상품생산자층 군소상인층의 압력으로 인한 정부의 제재로 특권성이 재약되어 가는 한편 私商都賈의 성장으로 경제적 위협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官商都賈가 제약되고 私商都賈가 대신 소상품생산자층을 압박해 가던 시기였으며 정약용의 상업론도 이와 같은 시대적 조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정약용이 官商都賈, 시전의 금난전권을 배경으로 한 도고상업에 반대한 것은 蔡濟恭의 通共論을 찬성하고 있는 데에서도 나타나고 있지 만, 한편으로 그는 이른바 〈豪商猶賈〉의 매점상업을 철저히 반대함으로써 私商都賈를 제약하고 소상인층을 보호할 것을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豪商賈를 王者가 반드시 금하는 것은 그들이 아래로는 백성의 재물을 박탈하고 위로는 국가의 권리를 나누어 가기 때문이다. 후세의 논자들이 利를 일으키고 害를제거하는 일을 두고 與民爭利라 하여 財賊가 나오는 일을 모두 商賈에게 맡김으로써 그들이 조종하고 신축하게 하여 가난한 백성의 賊欽만 증가시켰으니 이것은 모두 세상 일에 어두운 선비들의 淸議가 그르친

38) 司’奭 226책 , 宗4년 2월 14 일.

것 〉39) 이었다.

정약용의 경우 상업발전을 억제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역시 상업발전론자였지만, 그의 시대에 나타나고 있었던 특권상업 매점상업을 반대하면서 소상품생산자층 소상인층을 보호하는 이론을 펴고 있었던 것이다.

4 民間手工業의 발달

(1) 都市手工業

조선왕조 후기에는 수공업 부분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우선 왕조 전기의 관청수공업 조직에 묶여 있던 工匠둘의 많은 부분이 그것에서 해방되어 私營手工業者가 되었고 이들이 도시수공업자로써 상품생산에 종사하게 됨으로써 도시수공업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와 같은 도시수공업, 민간수공업의 발전이 곧 官需品의 시장조달을 말하는 大同法의 실시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민간수공업의 발달은 수공업자와 상인 사이에 새로운 경쟁관계를 야기시켰다. 새로이 상품화한 이들 수공업제품의 판매권을 둘러싼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예를 들면 匠들이 新鐵을 설립하고 周皮匠이 紙床을 개설하고 刀子匠이 刀子을 설립했는데 40) 工匠들이 그 제품을 스스로 판매하기 위한 시전을 모두 개설하게 되면 기성의 시전들은 자연품이나 농민생산품밖에 상품으로 확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도시민의 好가 발달하면서 가공품의 상품성이 높아 가는 추세 아래서 수공업제품을 工匠이 칙접 판매하는 일은 상인들, 특히 시전상인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사태에 대응하는 상인들의 대책은 대체로 세 가지 단계로 나타났다. 우선 상인들은 자본력이나 금난전권 등을 통해서 工匠들의 원료를 매점

39) 世造 表 』 권 10, 地官住制試貢 〈夫商附買者 王者之所必禁仰僞 上 割國構 也 後批之 凡典利 除密 之政 亦之與民爭利 凡財狀之所出 一委之菜 商使縮唯於下戶夜珉 增 其試欽 皆近儒之所誤也〉

40) 姜萬吉, 「市忠商人의 工匠支配 『朝鮮後期商染衣本의 發迎 참조

겠고 다음에는 같은 조건으로 工匠둘의 제품을 매점했으며 마지막으로는 그 우세한 자본력으로 工匠둘을 先貸로 지배해 갔다.

治匠둘의 原料鐵의 경우를 예로 들면 본래 철광에서 생산되면 중간상인들에 의해 서울로 반입되었으나 서울에서는 아직 그것을 전매물로 확보한 시전이 없었고 따라서 治匠들이 자유롭게 사서 사용했다. 그러나 I8세기 후반기에 와서 雜鐵脫人이 그것을 전매품으로 만들었고 治匠둘은 이후 雜鐵炭울 통해서만원료 철을 구입할 수 있었 다. 분만 아니라 雜鐵吸人의 주장에 의하면 治匠둘은 雜鐵에서 원료철을 구입해서 만든 철기를 다시 잡철전에게 팔고 잡철전이 그것을 일반 소비자에게 판매했다고 한다 .41 ) 이 경우 원료철의 전매권, 금난전권을 잡철전 상인둘이 확보함으로써 그 제품까지 매접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지만, I8세기 말기에 오면 수공업자들의 제품판매권이 시전상인들에 의해 침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기에 수요가 높았던 物의 경우를 예로 들면 匠들이 오랜 동안 제조 판매하고 있던 驛製品울 雜貨이라 할 수 있을 床 이 그들의 전매품으로 허가를 받아냄으로써 製匠과의 사이에 분쟁이 생겼다. 이 분쟁은 정부에 의해 製匠과 床盛이 모두製物울 매매할수 있도록 결이 났지만, 42) 이 경우 이 판매하는 物은 匠들의 제품을 매접하거나 그들을 先貸 로 지배합으로써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상인자본이 생산자층을 先貸 로 지배한 예는 널리 구할 수 있으며, 상인자본에 의한, 혹은수공업자자본에 의한 공장제수공업도 일부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예를 들면 1799년에 화재를 만난 紙 이 〈最可 者 名紙正草浮盤者 蓋爲來式年所用者 而被 與

41) 『 司裕錄』173책 , 正祖12년 11월 25일. 〈鉉跋盛市民柳宗郁等惑坪於荷外故取考其原情 以爲中方鐵以外邑鐵店所産主管無血故染等拔錄市案而治匠 於渠盛 打造成器則采等迫爲tt掛於治匠處各專其業彼 生矣〉

42) 『日省錄』正祖12년 8월 18일. 衣院均匠 智 以爲 外方認物主管買 至於屈百年之久床盛市民忽生稚利兼並之 辛丑年沿自快 於平市署市案 視若自己之菜(……)炫事月前認匠輩與盛人相松於本 而今若專店於匠人則市民以失利焉苑故前判植金鐘秀決辭中 無論總匠與盛人隨硏行 無相禁託當 而今此塾匠』政生利之 有此傾 原情勿施>

油濕居多(……) 目下修房舍浮出紙之物 茂 旅出43 )이라 했는데 이 경우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紙災이 직접 종이를 〈浮出〉겠다고 볼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 紙匠에게 〈物力〉을 주어 〈浮出〉하게 하는 先貸制的지배의 단계에는 갔다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1777년에 작성된 어느 器店의 매매문서에 의하면 270兩에 팔린 이 유기접은 草家391의 공장에 器機 49台가 있었고 원료로 백철 126근, 동철 123근, 황철 273근이 있었다. 44) 이만하면 상당히 규모가 큰 공장제수공업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 밖에도 造紙署 와 分院등 관청수공업장이 이 시기에 와서는 상업자본가인 物主들의 투자와 경영참여에 의해 민영화되어 가고 있었다고 논증되고 있다.45)

18세기 후반기와 19세기 전반기를 통한 이와 같은 도시만간수공업의 발달은 어느 정도의 공장제수공업을 발달시킬 수 있는 단계에까지 갔으나 그것은 아직도 생산규모에 있어서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수공업의 기술적 발전이 부진한 데 있었고 그 원인은 또 淸國과의 교류가 제한된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이와 같은 사실을 지적하면서 〈우리나라의 각종 수공업 기술은 모두 옛날에 배워 온 중국의 방식인데 수백년 이래로 끊고 다시는 중국에서 배워 올 계획을 제우지 않았다. 중국에는 새로운 방석과 교묘한 제도가 계속 발달하여 수백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46) 하고 利用監이란 새로운 관청을 두어 〈專以北學爲職〉47)할 것을 제

43) 備滋司困錄189 正祖23 년 12월 17일.

44) 日本京都大學所藏文 〈成文乾隆四十二年丁未五月十六日金生貝重玉 文記右明文 緊用處故九山里所在f斜 占 器殿四十九坐白鐵一百二十六斤銅鐵一百二十三斤黃鐵二百七十三斤草家三十九 乙價折錢文武百染捨兩依數棒上白迫衍文記瓜文新文記 文求久放之意如是成 日後或有史言是去等此文記磁 店主都 春 策崔重盜〉

45) 宋貸植『李 後期手工業에 관한 硏究 韓國文化硏究所, 1973 참조46) 茶山全古』詩文 技狂論 〈我邦之有百工技藝皆 所學中國之法 數百年來截然不復有往學中國之計而中國新式妙制日沿月衍非復數百年以前之中國〉

47) 『經世迅表』卷2, 多官工 第6 利用監.

의했다. 병자호란 이후의 북벌론적 정책 및 인식 때문에 선전기술의 유일한 수입로인 중국으로부터의 기술도입이 부진했음을 지적하고 北學을 통해서 낙후한 국내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2)農村手工業

조선왕조의 후기로 오면서 織業 麻織業 織業 綿織業 등의 농촌부업이 점점 專業化하는48 ) 한편 여타의 농촌수공업도 농업에서 차차 분리되어 가고 있었다. 앞에서 『林園經濟志』의 湯市調査에 의하면 出市商品이 명시된 324개 장시 중에서 유기는 79개소에서 판매되었고 철기는 9I개소에서, 자기는 90개소에서, 토기는 94개소에서, 는 80개소에서, 솥(釜)은 20개소에서 판매되었다.49) 농촌수공업의 상품생산이 그만큼 활발해져 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들 농촌수공업제품이 생산되는 곳은 전국의 농촌 각처에 형성되어 있던 店 혹은 店村이었다. 〈店은 鐵器 傾鉛器 陶器 둥을 제조하는 장소에 부쳐지는 명칭이다〉50)고 한 것과 같이 농촌지방의 각처에 발달하고 있었던 일종의 私營수공업장을 말하며 그곳이 곧 농촌지역에서의 수공업 상품생산의 중심지였다.

유기의 경우는 예를 들면 徐有가 〈우리나라의 풍속은 유기를 가장 귀하게 여겨 아침 저녁으로 밥상에 오르는 그릇은 모두 器이다.(……) 옛날에는 권세가나 부잣집에서만 유기를 썼지만 지금에는 荒村의 초갓집이라도 놋사발이나 놋주발 서너 개가 없는 집이 없고 곳곳에서 匠들이 를 설치하여 만들고 있다〉51)고 한 것과 같이 이 시기에는 전국의 벽지에까지 수공업장이 설치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48) 金泳鎬, 「朝鮮後期手工業의 發展과 새로운 經形態紀의 四國社』, 成大大束文化硏究院, 1972.

49) 『林園經紗志』保圭志第 貨邱八域

50) 淡川巧, 『朝洋園磁名考., p. 248.

51) 『林園經硏志』齡用志권4 〈 谷最追鉛器朝夕표盤之器 皆用占 器(……)古 唯組穀奈富之家 如用鉛器今 戶之中無不鉛孟鉛腕數三四鉛匠l迫鼓治)

그러나 이들 농촌의 자영수공업장은 곧 지방 수령이나 아전들의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정약용도 이들 店村의 성장에 주목하면서도 〈店村을 비호해 주는 것은 수령의 탐욕 때문이다. 鉛器鐵器磁器瓦器竹器柳器 등을 함부로 거두어 와서 그 힘을 고갈하게 하고 대신 그들의 役을 가볍게 감해 주어 보상해 주니 이는 백성의 役을 훔치는 일이 아닌가〉52) 하여 그것이 地方官의 수탈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18세기 후반기에서 19세기 전반기에 걸치는 문호개방 직전의 시기까지도 도시수공업이나 농촌수공업을 막론하고 공장제수공업에 의한 생산이 일반화하지 못했다. 다만 도시수공업의 일부에서 주로 상업자본에 의한 생산의 先貸制的 지배가 이루어져 가고 있었으며, 농촌수공업에 있어서도 직물업이 끝까지 가내부업으로 남아 있는 한편 다른 부분에서 자영수공업이 어느 정도 성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같은 시기의 실학사상가들의 수공업 부분에서의 관심은 北學派의 이론에서 보는 바와 갇이 중국의 선진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국내의 낙후한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있었고 또한 농촌에 서 성장하고 있는 자영수공업의 발전문제에 있었다.

5 鑛業의 발전

(I) 設店收稅制 成立

조선왕조의 후기에 와서 그 광산정책상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I65I년에 設店收稅法이 실시된 일이었다. 銀鑛山에 실시된 이 제도는 광산개발을 촉진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민간자본이 광산개발에 참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정부에서 광물산지에 제련장과 부대시선을 마련해 주고 광물 채취에 필요한 재목 연료 등의 채벌을 허용하고 또 노동자도 마음대로 고용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채취하는 광물의 일부를 稅로 바치게 한 것이다.

52) 『牧民心 』 平試上. 燁村之底官之 也 泣器• 鐵器• 磁器• 瓦盤• 竹器• 柳器之守取用無節以翊其力輕許困稀以塞其孔非紹民試平〉

조선왕조의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 같이 중국측과의 朝貢關係 등으로 광산개발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왕조의 후기로 접어들면서 描에서의 銀의 수요가 높아지고 銅錢의 사용, 무기의 銃砲化등으로 鐵物의 수요가 급격히 높아침으로써 적국적인 광산개발정책으로 전환했고 그 방법의 하나로 실시된 것이 設店收稅法이었다.

광업정제의 設店收稅 로의 전환은 1788년에 禹禎圭가 말한 것과 갇이 〈정 부가 銀 에 設店하면 富商大買가 각기 物力을 내어 노동자를 고용할 것이며, 광산노동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그곳에 모여들어 銀을 채굴하고 제련하여 戶와 지방 관청에 稅를 바치고 나머지는 物主에게 돌아갈 것아다. 농토를 못 가진 백성들이 이로써 살아갈 수 있을 것아니 公私양편이 이롭다 할 것이다. 어찌 민폐가 된다 하겠는가〉53) 한 것과 같이 民 衣本에 의한 광산개발, 정부의 稅收증대, 無土 民의 고용증대 등 여러가지 이점이 있었고 이 때문에 〈自今貢銀 永爲革開 銀 幻 任其私商之採取〉54) 라고 한 것과 같이 광산개발을 민간자본에게 맡기자는 주장이 계속되었다.

設店收稅法의 실시로 銀생산량을 크게 증가했고 이 시기에 어느 정도 열려 가던 對淸貿易자금에 충당되었다. 그러나 設店收稅制에는 문제점도 있었다. 설점수세제에 의한 銀店은 당초에는 戶曹와 五軍營및 각도 怨邑이 모두 설치했으나 I8 세기 이후에는 모든 銀店을 戶曹에서 관리하게 되었고 戶曹에서는 別 을 두어 設店의 收稅를 관장하게 했다. 이 別將들은 대개 서울의 富商大賈들이었고 그들은 〈高官大府의 私人〉으로 출입했다. 그리고 이들 別將둘은 設店收稅業務를 代行하는 대가로 銀店총생 산량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몫을 차지했다.55)

鑛山稅 收稅請負業者로서의 별장들의 이와 같은 橫 은 많은 폐

53) 禹植圭, 『 細 野』 店禁之議. 〈(家許 有銀盧 設 店 商大買 各出物力 得 人 而無土不 之民 爲店恨 榮 居堀士銀 訥稅於 部與邑 困其所除 歸於物主 而無土之民 亦頓而貸生 則 可公私兩使 何爲民 契平〉

54) 司困錄 』 206책, 純祖 17년 4월 5일.

55) 柳承宙•「朝鮮後期 匠形熊에 관한 -硏究」, 《底史敎》 28호, pp. 86~88.

단을 낳았고 이 때문에 호조에게 設店收稅을 빼앗긴 각도의 營邑이 호조에 別將에 의한 設店收稅制를 반대 방해했다. 田稅의 경우는 戶曹가 각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收稅하여 上納하게 하면서 같은 토지에서 나는 鑛山稅를 벌장으로 하여금 收稅하게 한 것은 지방관의 반대를 살 만한 일이었다.56)

I8세기 후반기에 와서 각 지방의 營邑이 別將制에 의한 戶曹의 設店을 적극 반대함으로써 新 은 증가하지 않았고 告鎖은 광맥의 단절로 폐쇄되어 갔다. 1700년에 호조가 관장하는 銀店이 있는 고을이 68개 邑이었으나 1775년에는 14개 邑으로 줄어들었다.57) 그리고 반면 각 고을에 潘採가 늘어나고 있었다. 〈國內金穴無處不有而最多於黃平兩道及北路故民 甘]之潛採其來己久矣〉58) 라 한 것과 같이 設店을 하기 이전에도 이미 민간에 의한 採가 횡행하고 있었지만, 〈一自設店之後好民乘時爭利私自沿採難非設店之邑無邑不然〉59)이라 한 것과 같이 設店여부를 막론하고 이 시기의 광산에는 만간자본에 의한 淸採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設店收稅 가 실시되고 난 다음에도 각지방의 광산지역에서 潛採가 성행한 아유는 바로 지방수령들이 그것을 비호한 데 있었다. 즉〈營邑의 수령들은 管內의 銀店에서 收稅上의 이득을 취하기 위하여 私採業者들을 비호하고 사사로이 私採를 허가하였지만 호조에 발각될 때는 私採者만 처벌되고 손해보도록 한계선을 그어 놓고 있었던 들이었다〉.60) 다시 말하면 지방수령들은 그 管內에 광산이 있어 設店收稅場이 된다 해도 호조에서 별장을 통해 收稅해 감으로써 아무런 이득이 없었고 이 때문에 오히려 민간인의 採를 조장하고 그들로부터 일정한 이익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2) 鑛山民營化의 진전

17세기 중엽에 실시된 設店收稅法은, 종래의 광산개발이 정부에

56) 柳承宙, 「朝洋後期金銀銅跋業의 物主制硏究」, 《韓國史硏究》36호, p. 1o8.

57) 『度支志』外節版菊司財用部金銀事 .

58) 『日省錄』正祖19년 8월 4일.

59) 『日省錄』純祖8년 2월 5일.

60) 柳承宙, 「朝鮮後期金銅銀鉉業의 物主 硏究J, ((翰 史硏究》 36호, p. 118.

의해서, 농민의 부역노동으로 이루어지던 단계를 넘어서서 정부는 設店만 하고 그 아래서 민간자본이 채광하여 정부가 지정한 別將에게 일정하게 납세하는, 어느 정도 民營性이 높아진 것이었다. 그러나 별장에게 맡겨 진 收稅請負 는 별장의 중간 棋侵만 높일 분 중앙정부의 鑛稅收入은 그다지 확대되지 않았고, 지방관의 경우도 관내에 광산이 있으면서도 지방재정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18세기 후반기에는 광업에서의 別將收稅制가 없어지고 대신 守令收稅制로 넘어가게 되었다. 銀店은 1775년에, 그리고 銅店은 1780년에 金店은 1806년에 각각 守令收稅로 넘어가게 되었으니 ,61) 여기에 광산경영은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別將收稅制 아래서도 지방수령들이 민간자본의 採를 사실상 허가하고 있었으므로 정부가 設店하고 별장이 收稅하던 때보다는 민영화가 더 진전된 것이었다. 그러나 別將收稅 가 守令收稅로 넘어간 후에는 이제 광산의 민영화가 일반화했다.

別將收稅 아래서의 設店은 호조에서 그 경비를 지출했지만, 守令收稅 아래서의 設店은 민간자본가, 물주들이 직접 담당했다. 별장들은 서울의 富商大賈들이 많았던 데 비해 守令收稅制 아래서의 물주들은 富商大賈이외에도 정약용이 〈乃使土奈巨猶自爲磁主〉62)라 한 것과 갇이 지방의 土奈도 있었다. 이둘은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채광 제련에 필요한 시선을 자바로 갖추고 광산노동자를 모집했고 穴主나 德大를 선정하여 채광을 담당하게 했다.

『千一錄』이 〈大抵設店之規非自京司描給物力也故不有物主則無以細紀物主親費許多財力〉63)이라한 것은 종래 정부가 담당한 設店바용을 이 시기에는 물주가 담당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京醫官李行訥作物主黃鐘源爲穴主〉64) 라 한 것은 서울의 醫官이 물주가 되어 채광을 직접 담당할 穴主를 선정했음을 말해 주고 있으며, 〈谷山人金再尙松都人吳時中朴禁禧名不知狼川人南哥同情設店而墓

61) 같은 논문, p. 124.

62) 世迫表 권 7 , 地修官 田制9, 井田議l.

63) 禹표永, 『千一 , 採銀位否說

64) 『日省 正祖22 q년 2 월 6 일.

得鉛軍合力採銀〉65) 이라 한 것은 합자한 물주들이 직접 광산노동자둘을 모집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I8세기 후반기 이후 別將收稅制에서 守令收稅 로 넘어가면서 광산경영은 이제 物主經이 되었고 이 때문에 그것은 크게 활기를 띠어 갔다. 정약용이 遂安金店의 실정을 말하면서 〈産金品이 풍부한 것은 옛날에는 듣지 못했던 일로서 하루에 나는 금이 기와조각이나 돌덩이만큼이나 많다. 물자는 수레로 넘치게 실려 오고 人民이 많아 그들의 옷소매는 장막을 이루고 그들의 땅은 비만큼이나 많다. 비단과 布島생선 • 소금 • 배 • 쌀 등 온갖 생활품이 상접에 전열되어 있어 완연한 도읍과 같다. 産金 이 많음은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다. 稅를 얼마나 내느냐고 물었더니 한 달에 돈 수백량을 바친다고 했지만 度支에서 관리하지 않고 軍門에서 알지 못하니 한 날의 金도 公府에 들어가지 않는다〉66)고 했다.

광산경영이 민간자본으로 이루어지면서 활기을 띠어갔고 따라서 광산 근처가 하나의 도읍을 이루어 가던 실정을 전해 주고 있지만, 〈金• 銀• 銅• 鉛各有産處而一店線開八方盆渠每職所衆始過於幾千之多矣(……) 茅幕土室依山楠比坐賈行商成布交易〉67) 이라 한 기록으로도 이 시기의 광산촌이 얼마나번창했는가를 이해할수 있다.

I8세기 후반기에서 I9세기 전반기에 걸치는 시기의 광산경영은 설정에 의한 別將收稅 에서 守令收稅로 넘어감으로써 物主經營制가 되었다. 그 때문에 광산경영이 활발해져 갔으며, 따라서 광산경영 부문에서 민간자본이 축적되어 가고 있었다.

민간자본과 고용노동에 의해서 경영되고 있던 이 시기의 광업은, 그것이 또 조선왕조의 지배권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전 산간지방의 店마을에서 設店收稅制의 허점을 틈타 발전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왕조 본래의 경제체제를 벗어나 새로운 자본주의적 경영방식이 맹아

65) 『日省錄』正祖22년 2월 19일.

66) 『茶山全 詩文渠「應旨 巳政疏」. 澤安金店此果迫何法哉産金之也古所未閩日採金如瓦閃貨 之來菜粒福汝人民之衆秩維汗雨錦綺布串魚 稱米 百用之物列吸居貨苑怨都邑産金之 推此可知間稅 何 月納錢政百兩度支不管專門不知一粒之金不入公府此果紅何法也〉

67) 『日省綠』哲宗9년 2월 3일.

적으로 나타날 바탕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광산과 거기에 모인 광산노동자를 하나의 자본이 전체적으로 지배한 것이 아니라 규모가 왜소한 여러개의 자본이 부분적으로 지배한 경우가 많았다. 이 시기 광산의 경영방식이 공장제수공업시대에까지 나아갔는가 하는 문제가 아직 실증되지 못하고 있다.

〈정약용의 시대〉 즉 I8세기 후반기에서 I9세기 전반기에 걸치는 시기의 광업은 設店收稅 의 변질과정에서 민간자본에 의해 비교적 활발하게 발전하고 있었으며 이 부분에서 자본주의적 경영방식이 맹아적으로 발달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광산경영의 추이와 그 방향에 대해 정약용은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광산의 철처한 國盛論을 제시했다.

그는 〈椎鹽者奪民之利妙民之食不可爲也惟金銀銅鐵必當官採不可以許民也〉68)라 하여 소금의 국가생산은 반대하면서도 광물은 국가가 직접 생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金銀銅鐵 不可食寒不可衣〉〈金銀銅鐵必當官採不然寧朗閉爲急若許民私採則好盜相衆造亂以作〉69)이라 하여 그것이 백성의 의식주생활과 직접 관계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洪禁來 과 같이〉 채광을 핑계로 반란을 도모할 위험이 높다는 점 등을 들고 官採를 하지 않으면 차라리 폐광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鑛山國營論의 진의는 각 지방의 금·은·동·철이 나는 곳에 官治수백개소를 설치하고 빨리 광물을 제련하여 그 소득으로써 서울과 지방에서 방출된 留庫錢을 보충하고, 歲出을 모두 鉛 를 쓰되 금 • 은 • 동 등 세 가지 돈을 각각 3동으로 하여 9종의 돈을 국내에 유통시킴으로써 금·은이 중국에 들어가는 길을 영원히 막으며, 公田의 값을 차차 충당하는 일도 중지할 수 없다 .70)

68) 『紅世迫表』권, 地官 試貢制,.

69) 위와 같음

70) 庄世迫表』卷7, 地官住 田 9, 井田議I. 〈臣 諸路金銀伊跋 官治數百所 返行潟店略以所毋補中外留錢出散之欽乃以歲

出全用緖幣金銀銅三錢各具三等以此九幣行於國中永寒走燕之路徐充公田之未可已也〉

타고 한 데서 볼 수 있듯이 첫째는 국고에 충당하고 둘째는 금 은동의 고액화패를 만드는 데 충당하고 세째는 그의 토지개혁법의 하나인 井田制 실시를 위한 公田의 매입 자금으로 충당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뚜렷한 목적이 제시되었다 해도 자본주의적 경영 방식이 발달해 가고 있는 현실적 조건을 반대하여 광산의 국영론을 적극적으로 편 정약용의 광업론을 이해하는 데는 다음의 두 가지 문제가 고려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 첫째 문제는 정약용이 광산의 국영론을 주장했어도 그것이 이전의 官採에서와 같은 부역노동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屈人採金擇根系半 性力l玲者慣差其堀土者百名負土者五十人自本曹另造腹牌明著印人給一枚使之個,持凡無牌者勿許混處每日給屈幾錢(本地風俗各自不同不可一定)〉71)이라 한 것과 같이 임금노동제에 의한 광산국영론이라는 점이다.

두번째 문제는 광산국영론이 그의 토지개혁론의 하나인 間田論的 생각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두 방안 사이에 시간적인 차이는 있지만 토지의 公有制내지 國有制를 전제로 하고 고안된 田論과 광산국영론과는 같은 맥락속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茶山思想의 한 부분을 찾을도 수 있는 것이 아난가 생각하는 것이다.

6 맺음말

정약용이 산 I8세기 후반기에서 19세기 전반기에 걸치는 시기는 문호개방 전 조선왕조 사회의 마지막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는, 앞에서도 지적한 것과 같이 조선왕조적 경제체제가 가지는 모순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 시기이며 그 때문에 그것을 개혁해야한다는 생각이 날카롭게 나타난 시기이기도 했다.

18세기 후반기는 천주교의 전래, 北學論의 대두 등을 통해서 진

71) 『牧民心古』山林條

보적인 분위기가 어느 정도 높았다가 19세기로 넘어 가면서 그것에 대한 반발로서의 세도정치의 반동이 나타났고 정약용은 바로 이 두 시기를 걸쳐 산 사상가였다. 따라서 그의 경제사상도 18세기 후반기적인 전진적, 발전적 분위기와 19세기 전반기적인 좌절과 반동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형성된 것이며, 18세기 후반기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19세기 전반기적 반동에 반대하는 처지에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토지 부분에서는 지주적 소유제가 크게 진전되고 있는 현실적 추이에 반대하면서 농민적 토지소유제를 급진적으로, 혹은 점진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여 이론화하게 되었고, 상업 부분에서는 商主義가 무너지고 일부상인에 의한都買商業이 발전했지만, 정부의 稅收入증대와 연결되지 못하는 반면 그것이 소상인층 소상품생산자층 및 빈곤한 소비자층을 압박하고 있는 현실에 반대하면서 都 商業반대론을 펴고 있은 것이다.

수공업 부분에서도 관청 중심의 체제가 무너지고 도시와 농촌에서 민간수공업이 어느 정도 발전하고 있었지만, 수공업의 기술수준은 향상되지 못했고 그 때문에 그 생산성도 높지 못했다. 그 원인은 17세기 이후의 북벌론적 사고방식 및 의교정책이 중국으로부터의 선진기술의 도입을 크게 제한한 데 있었고, 정약용도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수공업기술의 발전을 위한 적극적인 北學論을 주장한 것이다.

한편 광업 부분은 17세기 이래의 設店收稅 의 실시를 통해 종래의 부역노동계에 의한 官府採取制가 지양되고 民營化가 발전하고 있었으며, 특히 I9세기 전반기에는 민간자본의 임노동제에 의한 광산개발이 활발해져서 자본수의적 경영방식이 이 부분에서 제일 먼저 발달했다고 주장될 정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활발한 광산개발 역시 정부의 稅收入증대와는 연결되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정약용과 같은 실학사상가에게는 부정적인 현상으로 인식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광산국영론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으며 이 점은 그의 田論과 함께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要諦로 남아 있는 것이다.

조선후기 鄕村社會構造의 변동

金仁杰

l 머리말

조선사회는 후기에 접어들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사회문제를 노정시키고 있었다. 현재까지 이루어진 연구성과에 의하면 그러한 문계들은 조선사회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본다면 地主制 전개와 社會身分制동요의 결과로 파악된다.

지주충의 토지집적과 부농충의 농업경영 확대에 따른 영제소농충의 토지에서의 유리, 그와 관련된 抗租運動의 만연 등과 같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 크게 두드러진 일련의 현상은 요컨대 小農經營의 변동과 지주제 전개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기존 중세경제체제에 가져다 준 충격은 심각하였다. 그리고 그 충격은 중세경제체제 위에 구축된 사회신분제의 재편을 강요하였다.

조선후기 사회경제사 연구는 대체로 위와 같은 사회변동에 관한 문제에 초정이 맞춰지는 가운데, 지주제 전개에 따른 농민층 분화와 신분구조변동, 이를 가속화하고 있었던 봉건적 賊稅體制의 모순, 그리고 제반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해 제기되었던 각종 개혁안· 개선론 등과, 농업변동의 배경으로서의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관

련된 상공업의 발전 등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고, 그 상과 또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1)

이제 우리는 그와 같은 사회변동이 기존 사회체제를 어떻게 변모시키고 있었으며, 당시 사회구조는 또 어떻게 파악될 수 있을 것인가, 그 속에서의 각 사회제력의 동향은 어떠했는가, 그리고 또 당시 제기되고 있던 각 改革案들은 어느 정도의 현실성을 갖고 있었을것인가 하는 등의 의문을 갖게 된다. I8세기 말기에 들어와서 근본적인 사회개혁이 요청되고 있었을 때에 이르러서도, 많은 논자들이 각종의 개혁안·개선론을 제기하고 있었지만 그같은 제의는 봉건정부에 의해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중앙관료의 분위기 또한 전혀 새로운 변화를 원하지 않았던 점 2)들을 고려할 때 이와 같은 의문이 더욱 확연해지는 것이다.

본고는 위와 같은 의문하에 茶山時代, I8세기 후반에서 I9세기 전반에 걸치는 시기의 당시 개혁안들의 사회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草해진 것이다. 그것을 위해 특히 향촌사회 사회구조의 변동을개괄적으로 검토하고 사회변동에 따른 사회동제책의 변화모습을 살피게 되었다. 茶山의 각종 개혁안도 바로 그러한 변동과 밀접히 관련을 맺으며 전개되었을 터이나, 그 구체적 관련양상의 검토는 본고에서는 제외되었다.

I8·I9세기 조선의 향촌사회 내부에서는 농민충의 꾸준한 성장이 이루어져 갔던 반면, 봉건지배층의 수탈이 강화되는 가운데 舊來의 질서가 재편돼 나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각 사회계층은 상호 대립 • 연합하면서 재편돼 나가던 질서에 나름대로의 대책을 마련하고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떠한 노력도 봉건정부의 지방정책에 의해

I) 金容 , 『朝鮮後期氐菜史硏究』I • , 1970~1971. _. 『禪版粧國近代 菜史硏究』 上• 下, 1984. 姜瓜苗『朝鮮後期商業貸本의 發述』, 1973. 宋 植, 『李朝後期手工菜에 관한 硏究』, 1973. 鄭奭磁『朝鮮後期社 硏究』, l983·

2) 金容交, 「朝鮮後期의 氐菜 坦 正沮末年의 應旨進巳 의 분석 __ .」, 《韓國史'硏究》2, 1968, 安采 「朝鮮後期民 의 一端과 民의 動向―一正祖代應旨民流 중심으로-―」, 《輯國文化》2, 1981.

일정한 제약을 받게 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본고에서는 따라서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하여 향촌사회에 있어 지주제 전개와 관련하여 신분구조의 변동과 권력구조의 변동, 그리고 향촌사회동계책의 변화상을 추적하면서 조선후기 사회변동·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는 데 중점을 두고자 한다.

2 地主制발달과 身分構造의 변동

I7•I8세기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이 과연 얼마만큼 농민적 토지소유의 발전을 가져다 주었는가, 나아가 그것을 통해서 농민층 분화가 어느 정도 철처하게 진행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상당한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루어진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 시기의 농업경제는 토지소유와 농업경영의 측면에서 크게 동요하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기존의 봉건적 생산관계인 地主 가 질적으로 변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즉 토지소유의 측면에서 본다면 來의 양반지주의에 平·賤民地主가 부상함으로써 지주 성격에 변화가 나타나는가 하면, 농업경영에 있어도 토지소유의 확대에 의한 경영확대 의에 농법의 변동에 따라 借地의 확대를 통해 그 경영규모를 확대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었다.3)

그 결과로 인하여 이제 토지소유관계가 신분관계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게 되었으며, 영세소농민의 경우 그들은 토지의 소유에서 뿐만 아니라 그 경영에서조차 광범위하게 유리되어 屈工• 貨勞動階層으로 전환되게 됨으로써 농촌사회의 계급구성은 재편되게 된다. 이른바 농민층분화가 촉진되면서 농촌사회의 계급구성은 지주 • 부농• 중농 • 소농 • 빈농 • 임노동층 등으로 재편돼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농민충분화가 순탄하게 진행되었던 것만은 아니었

3) 金容姿, 앞의 저서 『朝詳後期氏業史硏究』I • 宋貸植, 「朝i羊後期氏菜에 있어 서 의 廣作運動」, 『李海南博士華甲紀念史洋論 』.1970.

다. 특히 봉건정부의 과도한 조세수탈과 당시 발전하 고 있던 상품화폐경제에의 봉건지배층의 적극적인 참여는 영세농민층의 광범위한 몰락을 초래하였던 것이지만 부농중의 성장에도 커다란 제약이 되고 있었다.4)

4) 李世永, 「18•9세기 改物市의 형성과 流通造의 변동」, 《韓國史 9, 1983. 李潤甲, 「18세기 만의 均並作給 t祀生李光深의 貸田論을 중심으로 _ 」, 《韓國史的》9, 1983.

정부의 조세수탈은 일면 지주적 토지소유와 모순관계에 놓인 것이간 하나, 踏租 下에서의 조세는 일반적으로 作人부담이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라고 하더라도 흔히 지주는 地代를 강화하거나 경작권 경쟁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담분을 作人에게 전가하고도 있었다. 그리고 당시 地主 은 봉건정부에 의해 강력히 뒷받침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현상은 묵인되는 것이 일반이었다. 거기에다 지주충이 토지경영 및 상품화폐경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됨에 이르러서는 농민적 토지소유는 상대적으로 크게 위축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같은 조건하에서도 농민층 분화는 심화돼 나갔으며, 새로이 를 축적해 나갔던 세력들도 어떠한 형태로든 封建官 과 유착관계에 놓이게 된다는 점이다. 이 점은 많은 실증을 요구하는 것이긴 하나 이 시기 사회신분제의 성격변화와 관련지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양반층의 급증과 평민층의 감소로 특징 지어지는 당시 신분구조의 변동은 농민층의 내재적 성장과 봉건정부의 사회정책과의 합작품으로 파악되는 것이다.5)

5) 金容姿교수는 「朝詳後期에 있어서의 身夕의 動 와 良地所有」( 《史 硏究》 15, 1963, 『朝 後期店菜史硏究』1 )에서 〈조선후기에 있어서의 身分 ,1의 동요는 요컨대 이중적인 계기와 성격이 있었던 것으로, 한편으로는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농민층의 내재져 성장으로서 계기되는 封建 의 붕괴과정을 표현 해 주는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위기에 처한 봉건지배층이 그에 대한 대책으로서 어쩔 수 없이 귀하게 된 사회정책의 한 소산이었다고도 하겠다.〉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社 身分 의 질적 변화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당시 사회신분제의 성격변화를 단적으로 설명한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

조선후기 신분구조의 변동에 대한 연구는 戶籍盜帳의 분석, 특히 호적에 기재된 戶主의 役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정부는 신분제에 입각하여 役體制를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役

부과의 기본자료로서의 호적대장은 따라서 당시 신분구조를 파악하는 데 있어 일차적 중요성을 갖는다.

戶主의 職役을 분석의 주된 기준으로 삼는 경우, 그 연구는 대체로 각 신분층 사이의 신분이동이 조선후기에는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었던가, 또 사회신분제가 과연 붕괴되어 나갔던가의 여부 등에 그 초점이 맞춰졌다.6) 이같은 연구에 의하면 조선후기, -특히 I8세기 후반에서 I9세기에 접어들면서 양반 • 평민 • 천민 등 각 신분층간에는 광범위한 신분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양반신분의 격증과 평 ·천민신분의 감소현상이 공통적으로지적되었는데, 이는 경제력의 성장과 신분상승의욕에 바탕한 하급 신분충의 상급 신분층에로의 신분상승의 결과로 이해되었다.

6) 戶籍盜帳에 기재된 職役을 신분판단의 간접적 기준으로 삼는 경우, 그 방법상의 한계는 모든 연구자들에 의해서 연구의 전재로서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帳籍을 이용하여 통계적으로 신분구성비를 계산하는 방법상의 한계는 크게 극복되지 못한 상태라 하겠다. 다음은 당시 신분구조 파악에 호적을 이용한 대표적인 연구들이다. 四方博, 「朝洋人 閑十石身分階級 的段安」, 《朝洋經演 硏究 3, 1938. 鄭奭鍾「朝鮮後期社會身分 의 埃__蔚山府戶籍磁帳을 中心으로-」, 東文化硏究》9, 1972. 韓榮國, 「府의 戶口와 그 構成分布」, 『大邱 史』1, 1973. 金泳成, 「鮮朝後 의 身分構造와 그 炅動」, 《東方 志)) 26, 1981. 武田幸男, 『學習院大學 朝鮮戶籍大帳 基礎的硏究19世紀 追多 祖県 戶籍大阪宅通 』, 1982

이같은 현상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중점적으로 검토되기도 하였는데,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그같은 신분변동이 각 신분충간의 인접 지대에서 더욱 활발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분변동은 경제적 부의 축적 위에서 가능하였고, 이는 또 당시 봉건정부에 의해서 인정 • 조장되고도 있었다는 점도 지적되었다.7)

한편 조선후기 그같은 신분변동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음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즉 기존의 연구가 신분상승의 측면을 주로 강조하였는데 반해 신분하강현상을 주목하는가 하면 ,8) 그와 아울러 상

7) 金容 , 앞의 논문 「朝鮮後期에 있어서의 身分制의 動稀와 巳地所有

8) John N. Sommervi lle, Success and Failure in Eighteenth Centry Ulsan, A Study in Social Mobility, Ph. D. Dissertation, Harvard University, 1974. Suzan Shin, "The Social Structure of Kiimhwa County in the Late Seventeenth Centry", Occasional Papers on Korea ,, 1974-

층양반의 세습적 득권신분으로서의 지위 유지 등과 같은 문제를 주목하기도 하였다.9) 그와 관련하여 帳籍에 기재된 戶主의 職役의 통계적 분석만으로는 신분이동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점에 착안, 古文 를 이용한 家門別사례연구가 이루어지게 된 점도 주목된다.10 )

晋陽鄭氏• 草溪卞氏 두 향리가문의 고문서를 이용한 이같은 논문은 신분변동의 실상에 대한 이해 를 더해 주었을 분 아니라, 방법론적으로도 신분제 연구에 활력을 가처다 주었다. 두 件의 사례는 아직 불충분하여 속단키 어려우나, 조선 후기 향리가문 중에는 신분상승을 꾀하지 않고 계속 鄕吏_戶長的 지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下級兩班―上級鄕吏的 지위에서 오히려 신분을 하강이동시켜 향리신분이 된 가문도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후기 사회신분제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지만, 그러나 아직도 당시 신분변동의 성격에 대한 체계적이고도 실증적인 설명이 충분히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호적에 대한 앞으로의 종합적 연구가 기대된다.

조선조에 있어서의 신분관계는 토지소유관계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양반신분제 사회로 조선의 사회성격을 이해할 때 더욱 그러하다. 우리나라 중세사회 신분제는 크게 국가권력과 혈연관계망 양자에 의해 제약되는 것으로 파악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중앙정권에 의한 계약이 따르긴 하였으나, 어느 정도의 自治가 허용되고 있었던 향촌사회에 있어서는 후자가 보다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것이다.

I6세기 이후 각 郡縣에는 內• 外(本族과 妻族)에 모두 신분적 하자 (예컨대 조상에 賤人이나 藏吏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없어야 그 이름이 기재될 수 있는 在地士族의 명단인 鄕案이 작성돼 오고 있었다. 在

9) 鄭銀煥, 「朝詳後期社會의 身分又動에 關한 一考察__尙州帳箱을 中心으로-」, 서울大 校 碩士浮位論文, 1981.

10) 崔承熙, 「朝鮮後期鄕吏身分移動與否考」, 『金哲浚博士華甲紀念史 論策』, 1983- • 「朝鮮後期鄕吏身分移動與否考(2)」, ((韓國文化)) 4, 1984

地士族들은 鄕 을 중심으로 스스로의 단결을 도모하고 下民을 지배함으로써 一鄕의 상하질서를 유지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11) 그들의 권력기구는 留鄕所로 대표되었으며 사상적 무기는 성리학이었다. 12)

이들 在地士族의 물적 기반은 토지와 노비였다• 따라서 그들이 추구하였던 상하 신분관계의 안정 • 유지라는 것도 이같은 물적 기반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16세기 勅威 淵臣系의 지방사회에 대한 불법적 (수탈적)이며 구조적인 침탈이 만연돼 나가던 시기에 그간 크게 주목되지 못하였던 〈鄕約〉이 적극적으로 士林系에 의해 보급되기 시작했다는 것 13)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반적으로 향약은 在地士族의 향촌사회 통제책으로 여겨지는 터이지만, 당시 향약은 향촌사회에 대한 勅 系의 불법적 침탈에 대한 士林系의 향촌사회 안정책을 대변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오히려 진보적 성격까지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당하게 평가되기 위해서는 농업의 문제와 그 의에도 상업 ·수공업의 문제에 대한 천착이 더 이루어쳐야할것이다.14)

' 16.17세기 在地士族들에 의해 실시되었던 鄕 (洞約)은 비록 그.실시대상의 규모나 실시방법에 있어 다양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하나는 혈연적 측면으로 士族內部의 결속 • 통제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인 문제로 국가에 대한 조세 납부 및 地代에 관한 문제였다. 실제 I6세기 후반 율곡이 구상 • 실시하였던 海州 野頭村의 < 倉契約束〉에서 우리는 사회신분제가 地主• 戶 계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었으며, 〈海 鄕約束〉에서 또한 우리는 당시 향촌사회의 운영이 官(國家)과의 일정한 관련하에 士族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11) 金仁杰, 「조선후기 鄕案의 성격변화와 在地士族」, 『金哲災博士幽甲紀念史浮 殺』, 1983.

12) 李泰 , 「士林派의 留鄕所復立運動」上• 下, (( 祖 報》 34·35, 1972~1973.

13) 李泰 , 「士林派의 鄕約普及運動-16세기의 紅硏炅動과 관련하여-」, 《韓國文化》4, 1984.

14) 李泰鎖, 세기 沿海地域의 服田개발__成臣政治의 紅濟的배경 」, 金哲埃博士華甲紀念史學論竝, 1983 참조

이루어졌던 것임을 알 수 있다. 15)

특히 주목되 는 것은 〈社倉契約束〉에는 신분적 관계인 〈士族―下人: 庶賤〉의 관계가 奴牌主와 노비의 관계 내지 지주와 전호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파악되는 〈上典_下人〉관계가 거의 동질적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다.16) 여기서 하인은 〈良人下人〉과 〈賤人下人〉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으므로, 17) 〈上典―下人〉관계에서 〈下人〉은 실 노비를 지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지라도 仰戶的인 지위를 표현하는 용어로 이해된다. 같은 자료에서 〈士族〉은 타인의 상전, 죽 노비 자신만의 상전이 아닌 他奴牌• 他良人의 상전을 지칭하였던 것임을 볼 수 있다. 17세기 士族과 兩班이 거의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던 시기에 양반은 생산담당자가 아닌 것으로 이해되었던 사정 18)도 그같은 문맥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海 에서의 그같은 신분구조·경제구조가 전국적으로 보편적인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위와 같은 데서 우리는 상 • 하신분질서가 토지소유관계 및 생산관계와도 일정한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할 때 民人을 수직적으로 편제하였던 중세사회신분계는 자연 그같은 토지소유 및 생산관계가 크게 변동됨에 따라 동요를 보이지 않을 수 없었음을 또한 알게 된다. 조선 후기사회에 있어 지주제가 크게 변동하고 토지의 소유 및 경영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을 때 기존의 신분구조가 변동 • 재편돼 나갈 수밖에 없었던 소이도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과연 중세적 사회신분제가 이때에 이르러 붕괴되었는가 하는 데에는 여전히 의문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조선왕조의 최

15) 栗谷의 鄕 에 대하여는 金武亂「渠谷鄕約의 社合的性格」, ((學林)) 5, 1983 참조.

16) 李 , 栗谷全 권 16, 「社含契約束」〈過失相規〉의 내용 중에는 〈下人背逆上典者〉〈下人陵母鼓打士族者〉가 갇이 〈大過惡〉으로 처리되고 있다. 그러나 〈下人於上典] 言辭不恭者〉와 〈士族前下人言辭不恭者〉중 전자는 〈上罰〉후자는 〈中罰>로 처리, 〈下人一上 〉, 〈下人一士族〉관계에 약간의 차이를 두기도 하였다.

17) 같은 책 .

18) 李尙 (1585~1645), 『天稿 권 3, 「玉渠 勘給文」. 〈兩班守靜小民力巨〉 洪汝河(1620~1674), 『木衍染』권6, 「咸亨 院立約文」. 〈我國士夫則不然因有奴 的世傳之法平) 美衣玉食安坐底軒 凡係勞苦之事一切不自身作〉

말기까지도 지방관 및 국가권력에 의해 제반 신분적 특권이 권력체계내의 지배신분충에게 계속 부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이 형성되고 있던 계층구조는 아직 사회적으로 也來의 신분구조를 대치할 만큼 선명하게 성숙한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로 파악된다. 신분제적 측면이 가장 잘 반영되고 있던 軍役制度의 변천에 있어서, 대원군 집정기 戶布制실시단계에까지 이르러서도 大•小, 兩班• 常賤의 구별이 戶布부과에 계속되고 있었던 점, 19) 軍役差定의 여부가 班 의 類微에 따라 수령에 의해 거의 일방적으로 결정되고 있었음이 19세기 지방문서에 흔히 보이는 점 등이 그 예라 하겠다.

이때 물론 국가의 권력체계내에 포함되고 있던 층을 규정하였던 요소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가, 즉 그 요소가 중세적이었던가 비중세적이었던가 하는 것은 그 파악에 있어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기존 연구성과에 의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호적상에 나타난 양반층의 급중현상은 신분적 특권이 배제되지 않았던 데에 그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그것은 중세적인 속성이 더 강했던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아다. 다만 그 결과가 중세사회를 해체시키고 있었다는 점이 실증적으로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축적된 부를 기반으로 하여 상급신분으로 상승하고 있던 부농충이라던가 토지소유·경영에서 소외돼 나갔던 빈농·임노동층이 하나의 사회계급으로서 일정한 계급의식을 가진 계층으로 성장하고 있었을 터이지만, 언급한 바 있듯이 이 시기 농민층 분해는 봉건정부의 과도한 수탈과 지주층의 개입으로 결코 순탄하게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었고 ,20) 일반 영세소농들은 아직도 토지와 봉건정부의 수탈체계에 깊이 긴박되고 있었으며, 새로이 부를 축적하면서 성장하고 있었던 충들도 아직은 정부의 그러한 수탈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일정한 한계내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상승시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19) 金容 , 「軍役制益正의 推移와 戶布法」, 『朝 後期의 試稅制度 正依 , 1982.

20) 李世永, 앞의 논문.

조선후기의 신분구조는 변동하고 있었다. 柳志垣(1694~1755)이 문벌의 패단을 지적하는 가운데,

아 四祖에 顯官이 없으면 軍役에 充定한다는 說이 나오면서부터, 사람들마다 모두 관직은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名賢碩 의 후손이라도 數代동안 벼슬을 얻지 못하면 中微라고 여겨 높은 벼슬자리에 오를 수 없게 되고, 비록 鄕品子枝라고 하더 라도 땅을 뚫고 일어나 豪富가 되어 巨族과 혼인을 맺으면 곧 양반이 된다. (……) 私奴로서 말할 것 같으면 주야로 소망하는 것은 昭身하여 양민이 되는 것이다. 양민은 噴官이나 營軍官이 되기를 구하는 것이고, 營軍官등은 座首나 別監을 구하며, 別監등은 鄕校의 有司나 掌議가되기를 구하고, 掌議는 또 初入仕가 되는 것을 구한다. 初入仕는 素 族이 되기를, 素門平族온 高門大族이 되기를 구하는데 大族은 더 나아가 자신의 부귀를 오래 누릴 것을 구한다. 모두 분수에 넘치는 소망과 정도를 지나치는 소원을 가지고 반드시 等級을 뛰어넘어서 拔身하려하며 편히 자리에 앉아 분수를 지키려 하지 않는다.21 )

라고 한 것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시사받을 수 있다. 즉 당시의 신분결정은 관직의 유무에 크게 제약되고 있었으며 族的결합에 의해 유지되는 바 컸고 상급신분의 보수화 경향이 농후한 가운데서도 신분변동은 꾸준히 일어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 등이 그것이다.

조선후기 신분구조에 대한 한 기준을 보여 준 李重煥은 당시 신분(人品府級)을 크게 양반 • 중인 • 하인의 셋으로 나누고, 양반을 다시 〈士大夫〉〈品官〉의 둘로, 下人을 〈吏 軍戶良民之屈〉과 〈公私賤奴牌〉의 둘로 각각 구분한 바 있다. 22) 茶山도 「庶人服議」23)에서 특정

21) 柳 . 辻 . 〈論 間之幣〉

22) 李 . 里志』· 〈我朝運以名分立國至今士大夫之名莊盛以衆用人 取門問故也 人品府級莊多宗室與士大夫爲朝廷I 州之家 下士大夫 爲鄕曲品官• 中正• 功 之類 下此危士庶及將校• 薛官• 箕員• 醫官• 方外閑敗人又下者爲吏 • 軍戶• 良民之 下此爲公私賤奴牌矣自奴牌而京外吏 爲下人一層也 庶뾰及雜色人焉中人一居也 品官與士大夫

同開之兩班 然品官一府也 士大夫一府也 士大夫中又有大家名家之限..名.目.莊.多..交.遊不相通其拘파提刺如此 不能無盛哀存亡之災故士大夫或夷爲平民平民久遠Ulj或昇而爲士大夫矣〉

한 職役이나 屈處가 없던 자들에게 拔身의 기회를 부여키 위해 〈·環人〉의 대상을 설명하면서 〈士族〉〈中人〉〈凡民〉의 구분을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당시의 향촌사회에 있어 신분구조가 과연 어떠했는가 하는 점에 시사적이라고 하겠다. 즉 상층신분의 분화 및 상 • 하 신분이동이 이루어져 가고 있던 데서 신분층 사이의 중간지대가 형성되고 있었다는 점이 그와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향촌사회에서는 朝官• 士族• 品官• 庶民의 구별을 분명히하고 있었다는 점이 또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正祖代老人敗加貢 대상을 파악해 보고한 기록은 그같은 신분이 品階나 직역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三南의 경우, 정부의 朝官• 士庶중 老戰加貢대상을 파악해 올리라는 지시에 대해 각기 기준을 달리해서 보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속에서도 저같은 기준을 잘 읽을 수 있다. 즉 경상도에서는 朝官• 曾經同樞• 士族• 庶民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인명과 인·원수를 기록하였고, 전라도의 경우朝官·樞卿·士庶의 셋으로, 충청도의 경우 朝官• 曾經同致樞• 士族• 品官• 庶民의 다섯으로 각각 분류하고 있었다. 24)

그런데 문제는 각각의 구분 속에 기재된 인물의 이름 앞에 붙는 직역(品階 幼 . 良人등 호칭)은 품계를 지니면 일단 양반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일반적인 이해방법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士族중에 품계를 가진 자와 忠翊衛• 幼學등의 다양한 호칭을 지닌 자가 있는가 하면, 서민 중에도 품계를 가진 자가 있고 忠義·業武• 閑良• 良人등의 호칭을 지닌 자가 보이고 있다.

23) 若 , 與猶堂全.II 제1집, 권9, 「庶人服議」. 〈何銅料人被成於部縣者科忍人也 中人之 物於召譯肝 曲算政之科者毋人也士族之稽知文字者必爲毋人士族無怨也中人之能杉本染者必乃毋人中人係怨也凡民之俊秀者亦符爲浮人凡民亦無怨也〉

24) 『日省錄』正祖10년 4월 11일 • 25일, 5월 6일.

알기 쉽게 충청도의 경우를 종합하여 간단히 도식해 보면 다음과 같다.25)

구분 직역(호칭) A0 구 며0 朝官 品階•職 0 0 0 曾經同命樞 品階 0 0 0 士族 品階·幼學 0 0 0 品官 品階·幼學 0 0 0 庶民 品階·業武•閑良•良人 0 0 0

여기서 曾經同致樞 老職加 란 문제와 관련된 특수성 때문에설치된 구분이라 할 수 있으므로, 위와 같은 구분 위에 중인의 문제와 천민(노비)의 문제를 더 고려에 넣는다고 한다면, 앞서 언급한 바 李猿煥의 신분분류의 기준과 그가 파악했던 인식이 당시 실정과 큰 차이가 나지 않음도 확인이 되는 셈이다. 당시에는 그와 같은 신분적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또 그같은 구분 • 기준이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흐려지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고 하겠다.

均役法의 시행과정에서 修撰韓光肇는 湖西의 경우 〈別軍官〉의 차출에 있어 수령이 鄕品• 閑散울 禪入하여 폐단을 일으키고 있는사실에 대하여, 臣이 성묘차 湖中에 내려가니 수령으로서 봉행을 잘하는 자는그들(別軍官)로 하여금 帖을 받게끔 하고 있으나, 그렇지 못한 자논 鄕品• 閑散울 아울러 禪入하니 어찌 폐단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읍니까. 各邑에는모두 儒鄕26)이 있는 바, 儒鄕외에 또 閑敗이 있으니 소위 閑散또한 儒鄕을 가벼이 여겨 ( 軍官에) 들어가

25) 같은 책, 正祖10년 5월 6일.

26) 「城主 單子」哲宗13년, 1862. 〈朝廷之兩班文武稱之也鄕谷之兩班儒鄕稱之也〉

지 않으려 하는 자가 있읍니다. 信鄕과 閑散사이에도 역시 대부분 서로 연계가 있는 까닭에 진실로 어려움이 큰 것입니다.27) 라고 한 데서 우리는 향촌사회에 있어 양반신분내의 분화 및 그들과 하급신분과의 界限이 접차 모호해져 가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정조. 10년 〈丙午所恨〉때 別軍職孫相 은, 대저(嶺南) 71州 내에 과거 無班七邑이란 말이 있었는데, 대개 沿海七邑은 본래 士族이 없고 다만 本土의 鄕族만이 있던 까닭에 無班邑이 일곱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中年이래 科이 없고. 또 婚을 잃어 점점 鄕族之邑이 되는 경우가 자못 많아진 까닭에 無班之邑이 오늘날에는 15 余邑이나 되기에 이르렀읍니다. 라고 하면서 安東을 제외하면 나머지 50여 읍에서는 대개가 鄕• 士·族의 구벌이 모호하며 그 중에서도 〈投鄕失婚之人〉이 있으면 一門에서도 또한 간격이 생기고 있었던 사실을 말하고 있었는 바,28) 우리는 이같은 데서 在地士族의 분화에 따른 보수화·몰락의 양측면을 살필 수 있다.

사실 최상급 지배신분충은 더 폐쇠화되어 을 이루면서 갖가지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肅宗代이후 시기가 내려올수록 중앙 政爭의 심화와 집권세력의 경직화로 인하여 대부분 在地士族들은 중앙정계에의 참여가 불가능해져 갔음은 물론 지방에서의 그들의위치도 불안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 중양권력체계내에 속했던 층들은 체제유지와 그 모순을 적절히 해결키 위해 구신분충의 특권을 일부 인정치 않을 수 없었음도 지적되어야 하겠다.

그 과정에서 구신분충의 도태 • 몰락 및 새로운 세력의 신분상승이이루어지고 있었던 바, 조선후기 신분제적 운영원리의 한계와 특징은 이러한 데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27) 『承政院日記』英祖27년 정월 5일.

28) 『正沮丙午所距錄 , 서울大[沮校 古典穀 , pp. ,162~7.

3 鄕府社會 權力構造변동

앞서 언급한 地主 의 전개라든가 신분구조의 변동이 향촌사회 권력구조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었는가의 문제는 아직 밝혀지고 있지 않다. 더우기 이 권력구조의 문제에는 각 지방간의 지역차 및 중앙권력구조와의 관계 등이 아울러 고려되어야 할 것이므로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그러나 이와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향촌사회 권력구조 일반을 살필 때 우리는 후기 사회에 들어와 그것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남을 보게 된다.

宜祖36(1603)년 京在所혁파를 계기로 전기적 지배질서의 매체가 되었던 京在所• 留鄕所체계에서 京在所가 떨어져나감에 따라 留鄕所는 在地士族의 기구로서의 그 기능에 상당한 변화를 맞게 된다. 이후 유향소는 그 본연의 기능을 크게 상실하고 수령의 시녀로 전락해 나가는 추세에 놓이게 되는데, 그러나 17세기까지는 그것이 士族의 통제하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든지 또는 그로 인해 사족의 鄕權장악이 불가능해진 것은 아니었다.

I7세기 在地士族둘은 새로운 권력기구라 할 서원의 건립 등을 통해 자신의 세력기반을 공고히 해나가는 한편, 守令 과의 타협이전제된 것이기논하나 鄕案의 복구와 향회의 장악을 동해 자신들의 결속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동해 吏民을 동제하고 賊役徹汶系에까지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29)

이 때 鄕案은 在地士族의 公論에 따라 복구되고 있었는데, 그 복구의 시기와 방법은 지역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가있기는하였으나, 本族및 妻族에 모두 신분적 하자가 없어야 그 이름을 올릴 수 있는 페쇄적인 것이었다. 말하자면 在地士族의 신분적 권위의 상징이 었으며, 당시 신분제적 운영원리의 일단을 대변하는 것이었다고도 하겠다.

이같은 鄕案을 모태로 하여 在地士族은 鄕會를 구성 • 운영하고 있었는데, 鄕會는 鄕內諸를 지휘 • 감독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었

29) 金仁杰, 앞의 논문. 이하 설명은 대체로 이 논문의 논지를 요약한 것입

다. 鄕會에서는 鄕案入錄者를 결정하고 鄕任 추천하며, 士族支配秩 에서 벗어나는 제반 행위들을 적발하여 鄕所나 수령으로 하여금 처벌하도록 하는 한편 선행자를 포상하기도 하였다. 이 때 鄕會에서는 각종 규재조목(立談 • 約束 • 鄕規 등)을 마련하였던 바, 그 내용에 있어서는 士族울 결속시키는 것, 吏 와 백성을 통제하는 것, 陳役體系의 안정을 강조하는 것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鄕 會 운영 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졌던 것으로 파악된다. 하나는 유향소(鄕所) 기구를 이용하는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鄕所 위에 따로 별도의 조직(예컨대 鄕老 · 鄕長 · 鄕 등)을 갖추어 이를 중심으로 鄕會를 운영하는 형태이다. 전자는 주로 영남지방에서 후자는 주로 호남지방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 양자를 절충하는 형태도 있었다.

그런데 위와 같은 鄕案 • 鄕會를 중심으로 한 在地士族 중심의 지배질서는 향촌사회 자체내의 계층구조의 차이 및 중앙정국의 변화로 인해 많은 위약성을 내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고 또 동요될 소지가 많은 것이었다. 이제 그 동요의 현상은 I8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향촌사회 권력구조의 변동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鄕案과 鄕會에 어떠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는가.

이 시기에 들어와 在地士族의 公論에 따라 작성되어 그들의 신분­적 권위의 상징으로 이해되던 鄕案에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이 보인다. 하나는 肅宗代 후반에서 英祖代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鄕案에의 入錄 이 급증하는 현상이고, 다른 하나는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鄕案追入이 종식되거나 鄕案이 龍四되는 현상이다. 鄕案 入錄의 급증현상은 당시 良役裝通論議의 전개과정에서 所抽處가 없었던 在地力의 鄕案에의 집착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같은 시기 追入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거나 鄕案이 재작성되지 못하고 심지어 官에 의해 파기되는 등 그 기능이 발휘될 수 없게 되는 사실은 在地士族의 분열 및 그들의 鄕權 상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또한 鄕會의 기능변화와도 관련된다. 종래의

鄕會에서는 鄕案에 入錄된 이들이 중심이 되어 鄕任을 차출하고 鄕內의 大小 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鄕案에 처같은 변화가 나타나고 특히 鄕案이 官村에 의해 파쇄되기에 이르러서는 그 본연의 기능을 유지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이후 18,19세기의 鄕會에 대해서는 별도의 검토가 요청되는 것이지만, 19세기 전반 영남永川 鄕會에서 우리는 향회의 성격이 저간 크게 바뀌어져 나갔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수령의 향회에 대한 조처에서 드러난 사실인데, 수령의 조처는 다음과 같다.

금번의 이 鄕會는 學宮之事인가 士林之事인가. (……) 무릇 몇 수 년 사이에 邑俗이 점차 諭薄해지고 士習 이 더욱 어그러져, 한 가지 일만 있으면 모이고 한 가지 令만 내리면 모여 士類를 위협하고 민심을 소란케 한다. (……) 그 所個者 • 所會者는 鄕品은 말할 것도 없고 진실로 爭任의 마음을 가진 자가 아니면 필경 戶首로서 王稅를 끝내 担納하려는 자이니 어찌 한심스럽다고 하지 않겠는가 . 鄕校掌議柳는 우선 澈名하고 一鄕 중에서 談靜한 자로서 대신시킨다. 그밖에 會한자는 모두 귀가하여 각기 그 業에 충실하고 큰 죄에 걸리지 않도록 하라 .30)

30) 『謀移 중, 但南文探, 「永鄕 下帖」, 丁西( 宗 3, 1837). 金仁杰, 앞의 논문(pp. 550~51) 에서는 이 자료를 正租年의 것으로 잘못 파악하였는 바, 『森移 와 『 尙追色誌』(亞細亞文化社 刊)에 의거하여 .( 3년의 것으로 바로 참는다. 그러나 이 기사와 같은 성격의 단서는 이미 18세기 말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이 해 새로 부임한 수령 李寅元은 軍布上納과 관련하여 隣徵 • 洞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一邑의 老成之人의 의견을 듣고자 향회를 소집했는바, 실제 연린 향회에서 논의된 것은 수령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향회에서 중점 논의된 것은 田稅납부와 관련된 것이었고 그에 참가한 자도 鄕品 • 戶首(班民) • 齋 任 등 다양하다. 이 永川鄕會는 그 이전의 鄕案을 모태로 하여 모였던 기존 향회와는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신분제적인 요소는 찾아보

기 어려우며 그 영향력도 관권에 의해 크게 저지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다산이 民庫下記를 재가받기 위해 鄕儒를 초치하는 것은 가 아니라고 하면서, 鄕儒란 어떤 물건들인가. 그 중에 좀 낫다고 하는 자들은 科 詩 • 科 만을 읊으매 項羽 • 市公之句 따위로 머리가 희어지고, 그보다 못한 자들을 모심기 • 보리타작에 매여 모두가 田稅 • 倉穀의 장부에도 까막눈인데, 하물며 귀신의 요술이 붙어서 변화불측한 民庫의 장부에서 그들이 어찌 허위를 적발해낸단 말인가. 또 설사 가슴속에 의심이 연기와 안개처럼 일어난다 하더라도 승냥아와 호랑이가 머리를 대고 있으니 담이 이미 떨어졌을 것이요, 돼지고기와 생선이 입에 들어갔으니 간이 다 녹아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검다거니 희다거니 한마디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대체로 鄕會란 모두 이런 것이니 수령이 만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향회를 열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31)

31) 若 . 『牧民心 권 6, 戶典第五條「平 」.

타고 하였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일반 鄕術들의 처지는 극히 열악한 것이었고 또한 그들이 중심이 된 향회의 의의도 거의 소멸돼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초래된 것은 일방적인 관권우위의 향촌사회 통계책에 연유한 바 큰 것이지만, 기존 士族의 분열 및 그들의 鄕權상실이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8세기 이래 향촌사회의 실정이 변화하게 됨에 따라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제반문제의 해결을 정부에서도 在地士族에게만 일임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정부는 수령에게 그 전권을 위임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守令權의 우위가 조선 전 시기를 통해 향촌사회에서 부정된 것이 없는 것은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같은 정책 방향은 또한 역으로 향촌사회의 권력구조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됨을 본다.

수령은 당시 재임기간이 거의 2년을 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추세였고, 또 각 邑사정에 밝지 못해 그를 보좌하는 鄕任• 吏 (吏鄕)에게 자연 그 권한이 위임되고 있었다. 특히 郡縣단위로 부과되던 제반 上納의 의무에 대한 수행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여기서 자연 鄕 은 在地士族에게서 守令檔을 배경으로 한 吏• 鄕에게로 서서히 옮겨가게 되는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18•19세기에 특히 好苑該에 대한 비난이 집중되고 있었던 것도 그같은 문맥에서 파악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 • 구세력간의 갈등이 야기되고 있었다. 18세기 중반 이후 사회전면에 표출되기 시작한 〈鄕戰〉은 그 대립을 나타내는 단적인 표현이었는 바, 鄕戰의 양상과그 내용은 각 지역 문제의 소재 및 사회구조적 특성에 따라 다양하였다. 그러나 그 기본 성격은 鄕 의 장악을 둘러싼 在地勢力간의 갇등으로 간주된다. 32)

이 鄕戰의 양상은 儒鄕의 대립, f孟任• 鄕任의 장악을 둘러싼 대립, 鄕案入錄문제를 통한 대립, 그리고 士族간의 대립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이 중 특히 18세기 중 • 후반 가장 문제가 되고 있었던 것온 첫번째 儒• 鄕의 대립이었는데, 이것은 기존 士族의 후예라 할 能林과 守令權의 비호 아래 鄕村을 그들 수하에 집중시키고 있던 鄕品간의 갈등에서 빚어진 것으로서 당시 王權强化시기하의 鄕橫의 추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다음 摘任을 둘러 싼 대립은• 新儒의 갈등 또는 , 으로 표현되고 있었으며 鄕任을 둘러싼 대립은 역시 舊鄕• 新鄕간의 갈등 또는 좁은 의미로의 鄕戰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는데 ,33) 어느 것이나 모두 새로이 鄕權에 접근하고 있는 세력에 대한 구세력의 반발에서

32) 金仁 , 「朝洋後期鄕 의 수이와 지매층 동향_一忠消道 木川縣ljF例-」, 『韓國文化)) 2, 1981. 이하 설명은 대체로 이 논문에 의거함.

33) 李源廊『華海白 권 12, 「我束地間等分關綜今所」 〈至於品官中人輿凶下賤各以所好者爲朋比品官之爭曰鄕 生之爭曰倍戰 自相傾札魚異士大夫偏 〉 이 簿戰이 중앙 정치세력에 의해 일정하게 조정되고도 있었음은 鄭 目, 「英祖.年의 安束金尙院建立是非__苗平下老少給粉爭의 一端-」, 同女大《翰·硏究)〉 1, 1982 참조.

기인하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도 守令柚이 직접 • 간접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鄕案에의 入錄문제를 놓고 일어나는 문제는 三南의 경우 鄕案의 龍 區 및 그 入錄의 종식 후, 18세기 후반 19세기에 특히 서북지역에서 두드러진 것으로서 역시 新鄕에 대한 舊鄕의 반발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는 수령에 의해 조장되기도 하였는 바 溫陸鄕案 • 買鄕의 문제가 바로 그와 관련된 것이다. 三南에 있어 영남의 일부 지방에서는 19세기 전반까지 여전히 鄕案이 문제가 되었던 경우도 있으나 서복의 상황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즉 서북의 그것이 買鄕에 따른 新 • 舊鄕의 대립이라고 한다면 영남 일부지방의 경우에 있어서는 士 族의 분열 • 대립에서 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사족간의 대립은 주로 院 이나 祠宇를 둘러싸고 야기되고 있었는대, 거기에는 중앙정치세력의 조종이 깊이 개재되고 있었다. 그것에 각 가문의 이해가 깊이 얽히기도 하였는데, 사족 내부의 분열을 보여주는 예라 할 것이다. 여기에도 관권이 깊이 개입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실상 당시의 제반 갈등은 향촌사회 지배층 내부의 분열분만 아니라 전체 향촌사회의 분화문제와 관련된 것이고, 또 당시 정국의 변화, 정부의 지방통제책의 변화와도 밀착된 문제였기 때문에 그 양상도 다양하였고 따라서 그 성격도 각양이어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보다 더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같은 갈등이 당시 在地士族들에 의해서 자체적으로 해결될 수 없었으며 관권의 일방적 동제에 맡겨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향촌사회에 있어서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鄕論(鄕中公論)이 공백상태에 놓이게 됨을 볼 수 있다. 아울러 관권 위주의 향촌통제책에 대한 지방민 특히 정권에서 소의된 재지세력의 거센 반발을 예견케 되는데, 그것은 民 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보인다. 地方守令의 무절제한 수탈과 吏·鄕의 발호도 그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4 향촌사회통제책의 변화

지주제 전개과정에 있어 토지소유관계의 변동과 상 • 하 신분관계의 동요로 말미암은 기존 사족지배체제의 동요는 조선후기 향촌사회 질서에 커다란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 사회적 혼란은 在地士族의 입장에서는 물론 중앙정부의 입장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在地士族의 당면 과제가 향촌사회에서 더 이상의 농민층의 유리 또는 저항을 무마하고 안정된 경제기반 위에서 상 • 하 신분질서를 유지 • 고수하는 것이었다고 하면, 변동하고 있던 수취기반의 안정 및 재조정의 문제는 정부측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문제의 해결에 있어 한때 위 양자의 입장의 일치가 이루어진 적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접어드는 시기의 전면적인 사회변동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미 이 시기에 이르면 봉건정부는 더 이상 在地士族만을 그들의 동반자로 삼을 수는 없게 되었다. 在地士族들은 경제적으로 • 정치적으로 향촌사회 지배제력으로서의 한계 를 노정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16·17 세기 이래 그들의 지위가 결코 절대적인 우위를 계속 유지했던 것만은 아니고, 또 자체내의 분열 • 대립에 의해 그들의 이해관계가 반드시 일치했던 것만은 아니라 할지라도 아직까지는 그 한계가 사회전면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는 않았다.

在地士族의 가장 큰 관심은 〈均賊役〉으로 표방되는 경제질서의 안정 위에서 그들 중심의 사회안정을 이루는 것이었다고 하겠는데 ,34) 이는 하층민의 안정 없이는 자신들의 지위도 유지할 수 없다는 경험 위에서 얻어전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향촌사회 운영원리(향촌사회통제책)로 제시되었던 鄕 ( 洞約)에서 가장 문제시하였던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34) 『一 誌 권 1, 「 山地回誌」(成宗 8, 77, 金宗直誌). 〈郞父老之望者 惟在於均試役〉

I6·I7세기의 鄕約(洞約)은 전국적으로 실시된 것은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는 것이었으나, 그 이념과 또 개별적인 실시는 향촌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鄕案 이나 鄕會가 그 기능을 나름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여기서 鄕約 의 기본성격은 요컨대 경제적 안정(지주전호제와 부역체계의 과도한 모순 제거)을 바탕으로 民人을 상 • 하 신분 관계로 결속시키려는 것이었다.

鄕 의 실시과정에서 자연 경제적 여건이 여의치 못한 경우, 士族 간의 이해관계의 불일치가 심한 경우, 또는 士族과 봉건정부(수령으로 대표되며 그 비호하의 吏 • 鄕을 포함한다.)와의 마찰이 야기되는 경우에는 그 실시가 곤란하게 되며 실시했을 때의 영향력 역시 한계가 있게 된다. I6·I7세기에 있어서도 그같은 鄕을 실시하기에는 어려운 여러 상황들이 존재하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관계는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鄕約을 실시하려 했던 在地士族들의 우위가 부정되지는 않고 있었으며 그들의 논리도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在地士族은 守令 과의 적절한 타협 위에서 자신의 힘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한계는 있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I7세기 후반 漢城 府의 啓言은 당시 鄕約이 全 洞民을 규제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香徒를 혁파하고 하나같이 鄕約之規로써 서로 送喪울 돕게 하는 것은 그 뜻은 진실로 좋으나, 各坊各里에는 戶의 많고 적음이 있어서 (鄕約을) 두루 다 설치할수는 없읍니다. 또各里에서 士夫戶가 많고 庶民戶가 적은 경우, 士夫의 喪에는 同里庶民이 당연히 스스로 힘써 奉 行할 것입니다. 그러나 民庶의 喪에 있어서는 士夫家에서 비록 約法에 따라 奴를 보내 준다고논하나 그 중 힘있고 사나운 奴僕은 반드시 約法을 따르지 않고 폐단을 일으킬 것이므로 제압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읍니다. 이것이 실로 백성들이 餘 을) 크게 불편히 여겨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입니다. (……) 대처 大臣의 뜻도 이와 같으니 各坊各里에서 鄕

約으로 서로 돕고자 하는 곳이 있다면 그에 따라 시행할 것을 들어주는 방법만이 실제로 事宜에 합당할 것입니다.35)

이같은 상황은 그 이전이나 이후에 있어서도 큰 차이는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 兩班之村 則不必差定 直月 〉 36)이라든가, 〈村中無常漢 可地爲里正者〉 37) 등과 같은 말들은 향촌사회 의 구조적 다양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아직까지는 그러한 논리가 향촌사회 운영에 상당 부분 반영되고 있었다. I8세기의 향약 중 상당수가 수령에 의해 채택되어진 것이라는 접이 그 한 증거이다. 사족의 입장과 중앙정부의 입장이 비교적 일치되었던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하겠다. 肅宗 37년 (1711) 12월 〈良役裝通節目〉의 반포에 따라 취해진 〈里定 〉 실시에서 〈里內表著兩班〉 중에서 선출한 〈 上位〉에게 里의 운영을 맡기려고 한 것도 같은 예라고 할 것이었다 .38)

이와 같은 관권의 개입은 그렇지만 기존 사족지배질서와 근본적으로는 마찰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같은 관권의 개입 속에서 향촌사회 통제책도 일정하게 변질되게 됨을 본다. 南原人 崔是翁이 鄕 을 실시하는 데 있어서 鄕約 실시하려고 하­면서 환곡문제와 부역의 문제를 제외시킨다면, 결국 목이 막혀 음식을 먹을 수가 없으며 길을 가고자 하지만 다리가 잘리운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상태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39)

鄕約之名은 兩廳 • 情紙 모두 꺼려한다. (……) 사대부 또

35) 『 承政院日記』 肅宗 10(1684) 년 3월 23일.

36) 黃 , 店沿 권 6, 「 社倉節目」, 頂 天 ( 肅宗 43, 1684). 宗 43 년 頂天府使로 부입한 黃 再는 鄕約을 실시 하면서 社倉을 아울러 설치하였는데, 各의 所任으로 社首와 旺月은 양반 중에서 造定토록 하였다. 이때 首는 官에서 差出. 直 月은 〈自各其 從公 議擇 定〉하도록 하였다.

37) 『金 馬 志』, 「鄕里記 」(英祖 32, 1756 ).

38) 『 蒲 沿司困錄』 , 宗 37 년 12월 26 일

39) 崔是翁, 『束 岡 衍』 권 2, 「與李地主 聖淡 」( 宗 38 , 1712). 〈今若有意復古(鄕約) 而先去此兩節(製猫 役) 則是猶因 而 座 食 欲行而足. 也〉

한 그들에게 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시비를 가리려 하지 않으니, 마침내 鄕所와 吏가 聯名作秒정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40) 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在地士族의 鄕權상실과도 관련하여 그들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수령 또한 향약을 동해 在地士 族 에게 바라는 바는 風紀의 문제나 敎化의 문제해결에 국한되었던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l8세기 수령에 의해서 실시되었던 향약은 모두가 그러하였다.

l8세기에 在地士族이 향촌사회의 안정을 위해 기울인 노력은 상당한 것이었고 그 성과도 자못 컸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특히 I8세기 후반 崔典遠이 주도하였던 大邱 〈夫仁洞洞約〉과 安鼎福의 廣州 〈慶安面二里洞 約 〉은 농민층의 유리나 신분질서의 동요에 따른 在地士族의 보수적 입장을 반영하였던 대표적 예라 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주목되는 것은 이같은 洞 의 운영원리가 19세기에 들어오면서 士族 스스로에 의해 부정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이다. 바로 위 夫仁洞洞約 그 목적하였던 바와는 다르게 崔氏 가문의 族的 이해관계가 얽히고 또 洞民들에 대한 통제권을 스스로 포기하게 됨으로써 관권에 의해 破 되었던 예를 보게 된다 .41)

이러한 상황에서 수령이 향약을 실시한다는 것은 이미 허구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 茶山도 이미 향약을 목민관의 한 중요한 사업으로 여겼으면서도 그 실시의 폐단과 불가함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42) 여기서 우리는 향촌사회의 운영이 이제 士族의 주도하에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게 된다.

저와 같이 사정이 변화하는 속에서 자연 정부는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官主導의 향촌사회 통제책이 더욱 부각되게 되는 바, 肅宗代 〈里定制〉의 실시라던가 英祖代 〈比抱制〉의 실시가 주목된다. 이

40) 위와 같음.

41) 이에 대해서는 鄭 英, 「朝洋 後期鄕約의 一考京-夫仁洞 洞 中心으로 , 汶南大 《 民族文化穀論)〉 2•3 合, 1982 참조

42) 앞의 『 牧民心 권 7, 典六條 「敎民」.

러한 일련의 정책은 당시 변동되고 있던 사회경제적 상황하에서 국가가 최소한의 수입을 보장받겠다는 정부의 새로운 지방통제책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고 하겠는데, 문제는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里定制〉의 실시과정에서 在地士族들을 개입시킬 것을 유도하였지만 그같은 노력은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고 하는 점이다. 20년이나 지난 英祖 5년 6월 里定法이 다시 申筋되고 있었던 점 43)이나, 關西의 〈里代定之法〉은 英祖 35년에 비로소 처음 실시되어 〈己戌六十年不易之規 〉가 되었다고 한 사실선44)등을 고려할 때, 同法은 왕권강화체제가 굳어져 나가고 그에 따라 향촌사회가 전반적으로 변동돼 나가던 상황에서 서서히 위로부터 강요되고, 그에 따라 閑丁收括만이 아닌 全收取體系와 관련된 새로운 통제책으로서의 성격만이 남아 이후 더욱 강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이러한 점은 기존 사족이 중심이 되어 실시했던 향약(洞約)이 그 기능을 상실하고, 面 • 里에 있서어까지 힘이 침투하여 洞契자체도 관의 주도하에 놓이게 되는 데서 확인된다. 官主 洞契논 물론 민간에서의 움직임이 그 기반이 된 것이긴 하지만, 주로 洞단위로 부과되고 있던 官役, 특히 각종 雜役(稀役)의 충당을 위해 마련되고 있었다. 그 財源은 官 • 民의 합자에 의해 마련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관에 의해 조달되었던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원형은 이미 I8세기 수령에 의해 실시되었던 鄕約類에 보이고 있다.45) 그러나 그것은 아직까지도 來의 신분제적 운영원리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후의 洞단위로 부과되던 諸役을 해결시키고자 洞內를 結契取殖게 하였던 洞契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林川의 〈立馬大同契〉는 官主母型 洞契의 한 전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46)

43) 『 承政院日記』 英祖 5년 6월 11일.

44) 紋 司困錄』 純祖 11년 3월 15일.

45) 守(1688~1768), 黃i染 권5, 約序. 〈幸今我明府南公 羽 來莊醉邑 (···…) 今春又發近千衍錢 以 送迎之費以回 永世 之醉 (……) 臼與諸公行此鄕約之法 於是領令各里 而里定契長 期至於革維新 移 風俗〉

46) 『大同袁案』 忠淸道林縣, 이하 실명은 이 책에 의거함.

영조. 15(1739)년 충청도 林川縣에서 수령이 주도한 이 〈立馬大同契〉는 당시 의 가장 큰 雜役부담의 하나였던 屈馬價(守令交逸時 소용되는 비용)를 마련하키 위해서 일단 설치된 것이다. 주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官에서 자금 1,000냥을 마련하여 20개 면에 각각 50 냥씩 分給取殖게 한다. 各面에서는 〈多卜有質民人〉을 대상으로 하여 小契를 구성한다. 取殖방법은 1년 내에 再次取殖하여 本箕의 4배 (200兩)를 바치도록 한 가혹한 高利貸였 다.

小契의 단위는 里(洞)이었으며 契員은 신분상 구벌이 없었고 소위 腕戶가 그 주 대상이었다. 契의 운영은 條 • 約正둥 面任과 各洞父老들에 맡겨짐이 표방되었으나 절대적인 官의 동제하에 있도록 하였다. 의 자금운영 역시 高利貸였다.

이와같은 大同契는 물론 洞民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부 面에서는,

무릇 사창의 제도가 우리 백성을 여유 있게 하고 鄕約의 규약이 우리 백성을 계도하였던 것은 대개 時宜를 따라 그것을 참작하였기 때문이다. (……) 우리 一境의 백성을 모두 모아 坊坊曲曲을 契로 묶고 그 재물(契財)을 골고루 나누도록 하라. (……) 그 백성을 여유 있게 하고 계도하는 뜻이 바로 古君子의 社倉 • 鄕 의 뜻과 같은데, (금번 조치는) 양자를 겸해서 하나로 한 것이니 이 어찌 한갖 우리 一面의 편리함에만 그칠 것인가 .47) 타고 인석하고 있었다. 이는 위와 같은 조치가 어떠한 형태로든 전동민에게 영향력을 미쳤던 것임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같은 운영방식은 18세기 후반 거의 유사한 형태로 각 수령들에 의해 채택되어지고 있었다. 그 내용에 있어서 부분적 차이는 물론 있었지만 民庫·補民庫·路賀廳•坊役廳·大同庫.屈馬庫 등등의 운영은 그 방법상 林川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48)

47) 같은 책, 「大洞面立馬稷序」.

48) 金容姿, 「朝洋後期의 民庫와 民庫田」, 《 束方浮志》 23,24 合, 1980 참조.

여기서 고려되어야 할 것은, 위와 같은 운영방식이 역으로 민간의 면 • 동의 운영에도 깊은 작용을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 다. 면·리가 收稅單位로되고面 徵洞徵이 거의 관행이 되고있었던 사실, 〈面債〉 〈里 〉란 표현히 I9 세기에 들어와 각 종 지방관아문서에 자주 보이는 사실 등이 그와 관련하여 이해돼야 할 것이다.

茶山이 호남의 大荒 • 寒, 胡 의 탐학상과 望族 • 의 遷徒 현상을 직적하면서,

그 빈약하여 이사를 할 수도 없는 자는 또 모두 社 錢. 과 門貨몰 穀破하고 다두어 酒肉絲管을 사서 산에 오르거나 배를 띄워 놓고 밤낮으로 술이 취해 소리를 지르며 춤추며 손백치는 것으로 樂울 삼으니, 이는 樂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을 슬퍼하는 것이다 .49) 라고 하여 貧弱者 또한 자포자기하는 상황을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社錢 • 貨는 바로 探錢(面模錢·族稷錢)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官의 高 利貸이면서도 공동체적인 저와 같은 수탈은 洞內 民人들로 하여금 나름대로의 자구책을 강요하고 있었다. 19세기의 각종 洞契 • 洞約類에 있어서의 자구책이라던가, 洞會 • 面會 • 鄕會 등을 통하여 〈等訴〉나 〈議松〉의 형식으로 官에 상달되고 있던 집단적인 의사표시 등은 이 시기에 볼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에 의한 만의 움직임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아직 부분적인 현상에 불과했으나 집단행동에 의해 그들의 의사를 관철시키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었는데, 그것은 불법적인 것으로 결코 용납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같은 판권 위주의 향촌사회통제책의 일방적 강요는 그 체제가 부정되지 않는한, 哲來의 지배신분충이라할 在地士族에 의해서 처 지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었고 또 판권에 기생하는 어떤 세력에 의해 약화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었다.

49) 若鏞, 『與猫堂全 제1집, 권1, 「與金公厚」.

5 맺음말

조선왕조의 지배계급은 그들의 정치 • 사회경계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각종의 장치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장치는 지주제와 신분제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었는 바, 향촌사회에 있어서 그것은 在地士族과 官과의 상호견제 보완하에서 운영되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전반적인 사회변동이 야기됐을 때 기존장치는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지주제 전개에 따른 경제구조의 변동과 그로 말미암은 상 • 하 신분질서의 동요는 향촌사회를 커다란 혼란 속으로 내몰았다. 여기서 기존 지배층이라 할 在地士族온 간단없이 그 안정책을 강구하고 있었으나, 이미 자체분열과 힘의 한계로 인해 향촌사회의 주도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봉건정부는 더 이상 지방지배를 사족의 손에 말길 수만은 없었다. 관권에 밀착된 세력과는 계속적인 유대관계를 맺고 그 특권을 보장해 주는 한편, 새로이 성장하는 세력을 적절히 포섭하면서 이들에게도 일정한 특권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새로이 성장하는 세력으로 보면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수탈이 되는 것이었지만 관권을 배제할 수 있는 힘의 축적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그에 적절히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 신 • 구세력간의 마찰이 야기되고 있었던 바, 왕권강화의 시기에 표면화된 鄕戰은 새로이 鄕權에 참여하고 있던 세력에 대한 기존세력의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在地勢力간의 갇등과 신 • 구 교체는 어느 시기에도 존재하는 것이겠으나, 과거에 문제시되지 않던 사실이 I8세기 이후에 들어와 중앙정부에서까지 거론되게 되는 것은 조선후기 사회발전의 한 단모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이 鄕戰은 향촌사회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해결되지 못하였고, 또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 었다는 접에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鄕戰이 향촌사회 내부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면서도 거기에는 중양권력이 깊숙이 작용하고 있었음을 의

미한다. 이 후 鄕戰온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어 나갔으며 또 한편으로는 〈鄕戰律〉이란 명목으로 철처하게 관에 의해서 응징 • 무마되고 있었다. 鄕戰 자체가 왕권 • 봉건정부의 모순을 드러내고 그에 의해서 중앙정권에 위협이 가해졌던 때문이었다.

따라서 정부는 어떠한 형태로든 저와 같은 변동에 대응하는 새로운 통제책을 마련하게 되는 바, 〈里定制〉나 〈比抱制〉는 그 원형을 이룬다. 이와 같은 조세에 있어서의 연대책임제는 정부의 의도와는 또 다르게 조선후기 향촌사회의 구조를 변모시키고 있었다. 官主導型의 洞契에 民人이 결속되고 있었음이 그것이다.

官主毋型의 洞契는 고리대적이고 수탈적인 성격을 띠우며 위로부터 강요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전도가 밝은 것이 못되었다. 또 영구화될 수 있는 조직(체제)이 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대개 그것에서의 稷錢이 오래 못가 유명무실해지는 경우가 혼하였다. 대안으로 각종 上納을 위해서 보다 확실한 토지를 買得하여 운영하는 방안이 강구되기도 했지만, 이같은 방법 역시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50) 공동의 부담 해결을 위해 마련된 〈公田〉이라고 해도 그것의 무한정한 확대는 결국 농민의 토지에서의 이탈을 강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官主導의 향촌사회통제책은 결국 지방민 모두로부터 반발을 사게 되었던 바, 茶山이 근래에 賊役이 傾重하고 관리가 律虐하여 民이 살아갈 수 없게 됨에 모두가 亂을 생각하고 妖言妄說을 東西에서 唱和하는데, 법에 따라 그들을 죽인다면 民온 하나도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51) 라고 언급하고 있었던 것은 그같은 사정을 반영하였던 것이라고 하

50) 任聖周 (1712~1788), 『鹿門先生文菓』 권 2,, 「補民四節目」. «旦買土之際 個或不 則有名銀實有始無 終 近胎笑於四 隣 遠而招諒於京外 食有司各別留 意 至波紋京 停係-鍊漏者也〉

'I) 앞의 『牧民心 』 권8, 兵典 第五條 「應堅」.

겠다.

여기서 향촌사회에 있어서 각 사회제력들이 어떠한 움직임을 보이는가, 그리고 그같은 상황변화에 당시 지식인들은 어떠한 대응책을 모색하였던가 등의 문제는 l9 세기 경제변동, 아울러 세도정권하의 중앙정계의 동향과도 관련하여 더 깊이 천착되어야 할 문제라고 여겨진다.

「조선후기 鄕村社會構造의 변동」 토론 개요

茶山 丁若 의 著作과 思想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요청된다. 당시의 객관적 社會相에 대한 규명은 다산의 주관적 사회인식과 그 자신이 제시했던 사회개혁론의 이해를 위한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金仁杰 교수는 다산의 사회개혁론을 이해하는 데 전제가 되어야 할 조선기의 향촌사회 구조변동과 향촌사회 동치책의 변화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그리고 이 발표에 대하여 金泳謨 교수, 鄭奭鍾 교수, 姜萬吉 교수를 비못한 몇몇 분들이 토론에 참여하였다. 이때 토론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지주제의 발달파 신분구조 변동

1) 연구의 자료 : 조선후기 신분제의 해체에 관한 연구자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戶籍이다. 호적은 조선시대에 있어서 행정수단으로 이용된 중심적 자료였지만, 洞契·洞約·鄕案을 비롯한 기타 古文 들은 신분문제를 논하는 데 있어서 부차적 성격을 가진 것이다. 또한 조선후기의 法條文도 당시 사회의 실상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지배충이 가지고 있던 理想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법조문에 입각해서 신분변동을 논하는 것에도 무리가 있다. 비록 법조문상으로는 변화가 없다 하더라도, 호적 자료를 분석해 보면 조선후기 향촌사회에 있어서 신분변동의 심각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후기 향촌사회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수 있는 중심적 자료는 호적이며, 호적 이의의 자료를 가

지고 호적 자료에서 드러나는 변화를 부정하는 근거자료로 사용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신분구조의 변동을 논하기 위해서는 호적자료가 좀더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2) 신분구조 변동 : 조선후기 의 법조문 등을 검토해 보면, 표면적으로는 기존의 신분제가 계속 유지되어 오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는 신분제 자체가 내용상 전면적으로 변해가고 있었으며, 종전의 신분관계가 유지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신분제의 질적 변화를 좀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兩班의 개념 자체가 변해 가는 현상이 발생했고, 軍官을 비롯한 중간계충의 사회진출이 강화되었다. 또한 노비제의 붕괴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특히 중간계층의 진출이 사회구조의 변동과 맺고 있는 관계를 규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간계층이 사회제력으로 존재했던 사실은 인정된다 하더라도, 그들이 舊身分制度를 타파하고 새로운 정치권력에 동반자가 될 수는 없었다는 한계성을 인식해야 한다. 조선후기 사회에서 이러한 신분구조의 변동이 발생하게 된 원인으로는 조선 정부가 가지고 있던 통치기능의 타락에 대해서문만 아니타, 民의 富가 축적되고 그들에게서 自意識이 출현한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런데 당시 신분구조의 변동이 對內的 身分制 속에서의 변동인가, 아니면 그것을 뛰어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구별해야 한다. 만일, 그 변동이 신분제내에서의 변동이었다면, 그것은 권력과의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이는 재래적 명분이나 신분구조를 뛰어넘는 것은 아니다. 다산 정약용의 신분만도 이 범위에 속하는 것이었다.

3) 茶山의 신분관 : 다산 정약용의 신분관은 평등한 신분에 관한 주장이라기보다는 능력과 자질에 따라 관직취임의 기회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기회 균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신분관은 기존의 불평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제도를 계승 • 대행시키려 했던 측면이 강하다.

4) 地主制 :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경제적 잉여생산과 관련하여 地主의 私的 利益이 확대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이에 따라 지주의 수탈이 강화되었고 신분제의 동요가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주제의 강화는 신분구조의 변동을 저지하는 결과를 창출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지주의 성격이 변화됨으로 말미암아 지주제의 강화와 더불어 선분구조의 변동이 촉진되어 나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후기 지주제의 강화와 사회신분제의 변동은 상호 모순되는 현상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2 향촌사회 권력구조의 변동

1) 鄕桃 과 庶 : 조선후기 향촌사회의 권력구조가 변화하는 현상과 관련하여 庶 에 대한 문제가 주목되어야 한다. 즉, 향권에 대한 문제를 파악하 기 위해서는 서얼의 전출을 주목해야 한다. 正祖年間 이후 서얼들의 鄕案 入錄에 관한 주장이 강화되었고, 향권을 장악하기 위한 상층인과 하층인의 충돌현상을 좀더 주목해야 한다.

2) 鄕案 入錄節次의 강화 : 조선후기 향안입록절차가 강화된 것은 지방 향촌사회에서의 對裝民統 가 강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향안입록절차의 강화는 鄕 의 강화와 마찬가지로 당시 사회에서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힘에 대한 통제적 여할이 요청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3) 鄕權强 化 : 조선후기 향권이 강화된 것은 하층농민에게서 契조직이나 秘密結社와 같은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는 형태로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므로 조선후기 향촌 강화현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종 하층농민의 조직과 비밀결사의 존재에 대하여 좀더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다.

3 향촌사회 통제책의 변동

1) 鄕約의 강화 : 양반 지배층이 취하고 있던 사회동제책을 파악하기 위해서 향약의 실시를 검토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후기 향촌사회 통제책의 변동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향권에 관한 문제만을 논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며, 양반 지배충에 대응하는 새로운 조직의 존재를 동시에 주목해야 한다. 조선후기에는 각종 結社를 志向하던 농민들의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통제하기 위해서 官主母型 契가 만들어진 것이다. 즉, 官主毋型 洞契 자체는 정부의

새로운 통제방식의 출현에 의해서 나타났다기보다는 농민들의 동향에 대한 정부의 대응책으로 이해함이 정확한 해석일 것이다.

2) 民衆結社 : 조선후기 향촌사회에 있어서 권력구조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官主毋的 성격의 조직과 함께 그에 대칭되는 농민 자체의 새로운 조직을 주목해야 한다. 즉, I7세기의 비밀결사들이 I9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서 어떠한 성격으로 변모해 갔는가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契에 있어서도 지방 통제적 기능을 가진 계와 함께 농민의 自 救 성격을 가진 계를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서 기존 지배층의 사회운영 원리가 일반 농민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남을 밝혀 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조선후기 비밀결사의 성격에 대해서도 좀더 자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조선후기의 비밀결사가 〈불만해소의 방식〉으로 존재했는가, 아니면 〈적극적 처항의 형식〉으로 존재했는가를 구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비밀결사의 존재가 民 의 발생에 미찬 영향에 대해서도 ­검토해야 한다.

3) 守令權의 강화 : 19세기 향촌사회 통제책의 추이와 관련하여 守令權의 강화 현상도 주목된다. 그런데 19세기 수령권의 강화는­ 법제적, 제도적 권한의 강화가 아니라 가렴주구의 강화를 뜻한다. 그러므로 향촌사회 통제책의 실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좀더 면밀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상은 토론과정에서 제시된 질의와 응답의 내용을 함께 요약해 본 것이다. 이 토론 자체는 조선후기 향촌사회의 구조변동과 그 통치책의 변화에 관한 문제의식을 선명히 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정리 : 趙玩)

丁茶山의 西學思想

崔奭祐

1 序言

丁若鏞의 西學思想은 그의 西學的 생애, 다시 말해서 그의 천주교 신앙생활에서 영향을 받고 또한 그것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을 것이 확실하므로 먼저 그의 서학적 생애를 보고 다음 그의 서학사상에 언급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정약용의 서학적 생애의 요정은 그가 천주교도였는가 아닌가하는 문제로 귀결된다고 하겠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두 견해가 대립되고 있는데, 전자는 그 이유로 정약용의 背敎를 내세우고 있고 후자는 정약용이 도중에 背敎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回心한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정약용이 회심한 사실은 교회측 기록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은 교회측 기록에 대한 불신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신은 소위 해당 史料에 대한 내적 • 의적 비판을 거천 역서적 방법에 근거한 불신인 것 갇지는 않다.

교회측 기록에 의하면 정약용이 회심한 데 그치지 않고, 종교적 처술을 남기고 또한 조선에서의 천주교의 기원과 초기역사에 관한

『朝解福音傳來史』도 저술하였 다. 그러나 이러한 정약용의 종교적 저술들이 오늘에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래 서 필자는 달레 (Dallet)가 그의 한국천주교회사1)에서 인용한 『 朝鮮福音傳來史』의 내용과 정약용의 墓誌銘 2 ) 에서 발견되는 유사한 내용들을 대비검토함으로써 『朝鮮福音傳來史』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3) 그후 달레의 한국교회사의 稿本이었던 다블뤼 (A. Daveluy 安敦伊 ) 주교의 備忘記가 발견되고 입수됨에 따라 4) 이 비망기와 정약용의 묘지명들을 대비검토함으로써 정약용의 천주교와의 관계 를 재정립해 보려는 논문을 또 발표하게 되었다.5)

1) Ch. Dallet, Histoirc de lEglisc de Goree, t. 1,2, Paris 1874; 샤문르 달레 原 著 , 安 應 烈 • 崔 奭祐 역주 韓國 天主敎會史』 上 • 中 • 下 분도 순 판사, 1979~ 1980. 본고에서는 한균번역을 인용할 것이고 또 이하 「달레」로 약칭하겠다.

2) 정약용이 저술한 묘지명들은 『堂全困』, 新朝鮮社, 1934~1938, 제1집, 권 15 ~16에 나온다. 이하」으로 약칭한다. 鄭奭鍾 교수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소강의 판사본이 『與猶堂全 』 의 묘지명과 내용이 같다고 하면서 그러나 茶山의 친필 初稿本으로 생각된다고 했는데 필자의 생각에는 親筑本이 아니라 『與常 全만의 간행을 위한 槪本 구실을 한 데 불과한 것 같다. 鄭 II , 「 ~ (1762~18 36)과 正祖 • 純祖年 의 政局」, 『高 柄 先生回甲 紀 念史玲股屈史와 人 의 應』 한울, 1984, p. 596. 11.

3) 崔 「 Dallet가 引用한 朝洋屈音傳 來史」, 作 李海南華甲紀念史 』 . - 潮,1970, p. 205~16.

4) 다붑뤼 주교가 備忘記 저술한 경위와 내용, 입수 경위, 달레의 한국천주교외사 와 底 의 관계에 대해서는, 崔 誘 , 「달레著 翰園天主敎白史의 形成過程 」, 《敎 台史硏究 》 3 한국교외사연구소, 1981, pp .113~59를 참조하기 바란다. 5) 崔 ,「 若 天主敎의 」, 《 茶山 5 茶山 硏究 院 , 1983, pp. 43~ 70.

이제 팔자는 이러한 논문들을 전제로 하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삼되, 좀 견지를 달리하여 정약용의 서학적 생애를活 動期, 背敎期, 回心期 등으로 구분하여 단계적으로 고찰해 보기로 하였다. 이것은 단계적 전개에서 드러나게 될 어떠한 통일성, 즉 신앙의 존속성을 밝혀 보려는 의도에서이다.

다음 본고의 제2부인 정약용의 서학사상에 대해서도 학계 에서는 정약용의 서학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또는 안 받았다는 두 가지 견해로 대립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부정적 견해의 근거는 주로 두 가지인 듯하다. 첫째는 정약용의

背敎이다. 이 문제는 특히 정약용의 서학적 생애와 관련되는 것으로서 만일 그의 배교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앙이 존속되었다면 이 문제는 자연 해결되는 문제이다.

정약용의 서학사상의 영향을 부정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서학사상으로 보이는 것이 실은 先 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약용에게서 서학적 으로 보이는 요소와 古代 의 사상을 판별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마테오 릿치(M. Ricci )를 위시하여 예수회원들의 補問論的 저서에서 참되고 거짓된 先儒思想을 판별하기 어려운 것과도 통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일찍 부터 중국고전에 관한 예수회원들의 해석에 대해, 그것이 옳다 또는 그르다는 찬반론이 나오게 되었다. 그후 조선에서도 일례로 〈天主上帝〉란 릿치의 해석에 대해 유학자들 사이에서 찬반의 논쟁이 엇갈리게 되었다. 당시의 조선 유학자로서 上帝를 만일 人格神으로 받아들였다면 이에 대한 先儒사상과 예수회원의 해석을 구별하기 위해 반드시 上帝가 天主이다 또는 아니다라는 단서를 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정약용의 처서에는 그러한 단서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서학과 先 사상의 구별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유학의 문의 한인 팔자로서 는 先儒思想과 이에 대한 補論 的 해석 사이의 옳고 그른 것을 이론적으로 판단할 능력도 없거니와 팔자가 알기에 이에 관해 참고할 만한 논문도 없다고 생각되어 부득이 견지를 달리하여 이 문제에의 접근을 시도하기로 하었다.

그래서 팔자는 본고에서 먼저 정약용에게서 서학사상으로 보이는 요소들을 간추려 제시하고, 다음 이와 같은 요소들에 대해 그것이 참된 先儒思想이냐 아니냐는 중국과 조선 유학자들의 논쟁을 제시함으로써 정약용의 서학사상의 여부를 간접적으로나마 결론지어 보려고한다.

2 西學的 生涯

(1) 활동기 (1784~1795)

활동기란 정약용이 천주교를 열심히 信奉하면서 선교활동도 하

고, 교회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시기를 말한다.

묘지명에서 서학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으로는 己亥年 (1779) 走魚寺에서 있었던 講學이다.6) 묘지명에는 서학과 관련된 내용은 안보이지만 정약용의 『朝鮮福音傳來史』에서 인용한 의 기록과 대조할 때 부합되는 점이 적지 않은 사실에 비추어 이때 經害만이 아니라 西學 도 講學 의 대상이 되었고, 그 결과 천주교 신앙이 싹트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7)

走魚寺의 강학은 權哲身이 주최하였는데, 참석자는 權哲身의 제자이며 정약용의 둘째형인 丁若鈴을 위시하여 李菜, 金源星, 權相學, 李龍低 등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기록을 남긴 정약용의 참석여부가 우리의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이때 정약용의 나이 겨우 18세였다. 李元淳 교수는 참석하지 않았다 하는 心證은 가는 것이지만 반드시 참석했었다고 보장할 수는 없고, 단순한 傳聞에 의했다기보다는 그 자신이 참석, 목도한 기록으로 개연적 추정이 갈 뿐이라고 하였다.8)

이 강학에 李承薰이 참석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문제의 講學에 관한 기록 직후에 나오는 이승훈에 관한 이야기는 문맥상 강학과는 별다른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또한 1783년 이승훈이 北京으로 떠나기 전까지 천주교 서적을 모르고 있었다는 黃嗣永의 기록 9)으로 보더라도 이승훈이 走魚寺 강학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또한 정약용의 세째형인 丁若鍾도 이 강학에 참석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또한 丙午年 (1786)에 형 若 으로부터 처음으로 천주교 이야기를 들었다는 정약종의 招辭로 미루어 10) 참석자로 간주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정약용이 천주교 서적을 얻어보고 이에 마음이 쏠리기 시작한

6) 「先仲氏丁若 鈴墓誌銘 「鹿菴 哲身 慕誌 銘

7) 說 6~7(말레 (上), pp. 300~2 참조).

8) 李元淳 , 「天虹菴 走魚 寺 講租 台 論 辯 」, 『金哲 埃 博士 華 甲紀念 史 a , 知 磁 怒 社, 1983, pp.7 10~11. 若 鏞 자신도 그의 自明에서 西學 를 본 것이 대개 21세 였다고 (冠之初) 말하고 있다 . 『正祖宜 錄』 , 正祖 21년, 6월 21일.

9) 黃永 」, 43 行.

10) 『純祖辛酉邪獄罪人李家煥等推案』 (이하 『李家煥等推案] 으로 略稱) 2월 12일 若鍾供」.

것은 甲辰年(1784) 4월(음력)부터이다. 李 과 정약용은 서로 교제하는 친한 사이었고, 1783년에는 『中講義』 80除條에 대해 이벽에게 문의하기까지 했었다. 정약용의 형수, 즉 若鉉의 아내는 이벽의 누이였는데 1780년에 사망했었다.11) 이벽은 1784년 그의 누이의 思祭를 맞아 馬峴에 갔었는데, 思祭를 마치고 4월 15일(음력) 정약전 • 약용 형제와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도중 船中 에서 이벽으로부터 서학적 세계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황홀해지 고, 마침내는 그로부터 『天主質義』와 『七克』등을 얻어보고 천주교에 마음이 쏠리게 되었다. 12)

당시 이벽은 水原橋에 거처하면서 열심히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 무렵 그는 정약전 • 약용 형제를 찾아가 선교의 긴급성을 강조했는가 하면 楊根의 권씨 집안을 찾아가 入敎를 권고하였다. 5형제 중 세째인 權日身은 즉시 입교하였고, 맏이인 權哲身은 처음에는 주처하였으나 결국 입교하였다.9) 이벽은 또한 천주교의 전파를 두려워하며 그것을 처지하려는 李家煥, 李基讓 등 대학자들과 토론을 하고, 그들을 굴복시켰다.14) 한편 정약전 • 약용 형제는 그들의 선교활동으로 서울과 인근지방에 복음을 전과하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되는데 15) 정약전의 외종인 호남의 尹持忠도 정약전의 권고로 미구에 입교하게 되었다 .16)

1784년 9월(음력)에 이승훈이 이벽의 집에서 영세를 주기 시작했는데, 이벽,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 崔昌顯 등이 제일 먼저 영세하였다. 당시 교회에서는 영세를 준 사람을 神父로 부르고, 영세를 준비시키기 위해 교리를 가르친 사람을 代父라고 불렀는데,17) 영세

11) 「先伯氏丁若鉉慕誌銘」.

12) 「先仲氏丁若廷哀誌 『自撰慕誌』 ( 中本), 志記 p. 8( 달레 (上), pp. 302~3 참조).

13) 「鹿菴橫哲身墓誌銘, 備忘記 pp. 15~6 (달레 (上), pp. 310~1 참조).

14) 「貞軒李家煥慕誌銘」, 底 (l pp. 12~3 (달러 (上), pp. 308~10 참조).

15) 備忘記 p. 12, 19 (달레 (上), pp. 307~8, p. 314 참조).

16) 달레(上),, p. 334.

17) 1786년 봄부터 이승훈, 최창현 등 10명이 신부로 선출되어 고해성사, 미사 등을 집전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假聖萩制度라고 부른다. 그러나 偵洗式온 이미 1784년에 시작되었다. 또한 누구나 영세를 줄 수 있었으나 이승훈만이 영세를 집전했으므로 이승훈만은 벌써 그대부터 신부로 불린 것 같다.

식을 거행한 신부는 오직 이승훈뿐이고, 교리를 가르친 代父는 권일신, 정약전 등이었다. 정약용의 대부는 권일신, 최창현의 대부는 정약전이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권일신이 제일 먼저 영세하고, 다음 정약전, 정약용, 최창현 등의 순서로 영세한 것 같다. 이때부터 최창현은 정약전 • 정약용 형제와 서신 왕래를 하며 함께 열심히 守 했다고 하였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약종만은 1786년에 가서야 그의 형 약전으로부터 권고를 받고 입교하게 되는데, 그의 대부 권일신이고, 신부는 역시 이승훈이었다 .18 )

이승훈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한 천주교 신앙공동체 안에는 槿氏, 丁氏 갈은 양반만이 아니라 최창현과 같이 중인 계급에 속하는 중인들도 많았는데 金籠禹, 崔 仁吉, 池 ,金宗敎 등은 그 주요인물이었다. 이 신앙공동체는 이승훈을 領首 로 하여 영세 같은 종교의식을 거행하거나 또는 교회의 중대한 일을 의논하기 위해 자주 모임을 가지게 되었는데, 乙已年(1785) 봄 김범우의 집에서 이런 모임을 가졌을 때 형조의 관리에게 들켜 취조 를 받게 되었다.19) 이것이 〈乙巳秋曹摘 發〉로 불리는 사건이다.

이벽, 이승훈, 권일신 부자, 정약전 • 약종 • 약용 3 형제 등이 이 집회에 참석했었는데, 秋 에서는 이들 양반집 출신들은 훈방하고, 집주인인 중인 김범우만을 붙잡아 가두었다. 그러자 권일신은 그의 아들과 그의 매부인 李潤夏 등 5,6명을 이끌고 형조를 찾아가 김범우와 함께 처형해 줄 것을 요구하고 또한 압수한 聖像의 반환율 요구하기까지 하였으나 김범우만이 유배되었을 분 나머지는 모두 훈방되었다.20)

그러나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같은 해 3월(음력)에 太學生들의 通文이 나오게 되었다. 이 통문은 父兄이 금해도 소용이 없고, 친구가 말려도 듣지 않는다고 하면서 천주교도를 가진 부모들에게 그

18) 『李家煥等推案』 2月 13日 「崔昌頂, 李承蒸 」, 2月 16日 崔昌顔 」, 推潟日記 2月 18日 「李承蒸 」, 若의 세례명은 요한세자였는데, 한자로는 若望으로 표 기했다.

19) 忘記 pp. 24~5 (달레 (上), pp . .31 7~8 참조). 20) 李晩采 『 衛綿, 衛社, 1931, 卷 2 「乙已秋 發」, 『邪 浮惡』 (影印本), 韓 敎史硏究所, 1977, p. .378.

들의 자식들과 인연을 끊을 것을 요구하였다. 동문에는 그들의 성명이 밝혀져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은 이승훈, 이벽, 정약전과 약용을 천주교의 두목이요 전파자로 지목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배교시키고자 이들 가족들에게서 소위 가정의 박해가 일어나게 되 었다. 이승훈은 아버지와 아우의 설득에 굴복하고, 천주교서적을 불사르고, 천주교를 배척하는 글까지 발표하였다. 21) 이벽 또한 그의 아버지의 반대에 못 이겨 굴복하였다.22) 정약전 • 약용 형제도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쳤으나 이때 굴복한 것 같지는 않다 .23)

1786년에 들어서면서 이승훈,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과 그 밖의 유력한 신자들이 미신자들에 대한 천주교의 전파를 더욱 용이하게 하고 또한 새로 입교한 신자들의 신앙을 심화시키려는 의도에서 敎階制度의 설정을 계획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假聖職制度〉로 불리는 것이다. 이 계획에 의해 그간 교회로 다시 돌아온 이승훈이 제일 먼저 신부로 임명되고, 이어 이승훈에 의해 권일신, 洪樂敏, 최창현, 柳恒儉, 이존창 등이 神父로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堅振과 告解 등 七聖 를 모두 집전하였다.24) 천주교의 교리에 의하면 산학을 마치고 사제로 敍品된 성직자만이 聖事를 집전할 수 있으므로 역사에서 그것을 〈假聖職制度〉로 이름하게 된 것이다. 이때 정약전 • 약용 형제가 신부로 선출되어 聖 를 집전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듬해, 즉 丁未年(1787)에는 이른바 〈丁未沖會事件〉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南人이 信西派와 攻西派로 분열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의 경위는 이러하였다. I787년 IO월(음력) 이승훈과 정약용이 沖村에서 科擧文울 공부한다고 핑계하고 西學 를 강습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李基慶이 그 사실을 洪樂安에게 폭로하자 홍낙안은 이기경에게 함께 그들을 성토하고 疏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기경은 〈攻其道〉는 하되 〈攻其人〉할 때는 아직

21) 『李 家 煥 等 推案』 2月 10日 「李承蒸供 .

22) 달레 (上), pp. 320~2I.

23) 『李家煥等 推案』 2月 l4日 「丁若鈴供. 丁若徐은 여기서 부친의 금지로 그만두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또 다른 곳에서는 丁未年 (1787) 에 미혹되었고, 辛亥年 (1791)뒤에는 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24) 달레 (上), pp. 322~3.

아니라고 하며 이에 응하지 않았다 .25) 한편 이기경은 이승훈을 만나 論 했으나 回悟하지 않았고, 정약용의 집을 두 번이나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다고 말하였다 .26) 또한 정약용은 이기경에게 보낸서한에서 그가 浮會 를 폭로한 데 대해 분격해 했는데, 이에 대해 이기경은 丁菜, 李菜라고 말했을 뿐, 성명을 지적한 일은 없다고 回信하였다 .27)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승훈과 정약용의 친구이자 그들과 같이 西學를 보고 또한 西敎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던 이기경이 점차 그들과 사이가 멀어지고 마침내 1788년에는 서학 배격의 선봉에 나섰던 홍낙안 편에 완전히 가담하게 되었다. 28)

1786년에 시작된 假聖職制度는 그간 그것이 불법적인 행동임을 알게 되자 그 대책을 北京의 선교사들에게 묻기로 하고 2년 만에 중단되었다.29) 마침내 1789년과 1790년 두 번에 걸쳐 북경에 밀사를 파견할 수 있었는데, 이 때의 밀사로 尹有一이 간택되었고, 이 밀사편에 이승훈, 권일신, 유항검 등이 북경 선교사에게 서한을 보냈다 .30) 그런데 이승훈과 권철신 등의 招辭에서 정약용과 권철신도이 밀사 파견에 참여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승훈은 1790년 북경 선교사들에게 서한을 보낸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그러나 정약용이 서찰을 위조해서 그에게 推談한 것이고, 자신은 참으로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은 비록 정약용이 借名한 것으로 이승훈은 핑계하지만 이승훈의 말이 아주 군색하다는 판단을 내렸을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밀사 파견에 정약용이 전혀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권철신 또한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윤유일의 북경행을 알고 있었다고 자백하였다 .31) 또한 柳觀儉은 윤유일의 治送費를 각출하는데 이가환과 권철신도 참여한 사실을 폭로하였다.32)

25) 李晩采編, 『 衛編 』 卷 2 「 未浮 事」.

26) 『正祖箕錄』 正祖 15 年 11月 甲申.

27) 李晩采, 『 1 衛播』 卷 2 「 未沖 事」.

28) 『自撰慕誌(梨中本), 備忘記 p. 26 (달레 ), p. 333 참조).

29) 四國天主敎 의 底 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pp. 35~6.

30) 『純祖辛酉邪獄罪人李基 等推案』 3 月 15 日 「周文謨 9」.

31) 『推臼日記』 2月 18日 「李承蒸供」; 2 月 18~19 日 「描哲身供」.

32) 『純祖辛酉推案』 「柳四仮」 「鹿菴描哲身墓誌銘」, 「 軒李家煥 誌銘」.

1791년 죽 辛亥 에 호남의 尹持忠과 權 尙 然 이 조상제사를 거부함으로써 처음으로 천주교인이 사형에 처해지는 이른바 〈 珍 山事件〉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조선천주교회에 아주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니 그때까지 교회일을 주도해 온 양반학자들이 거의 다 교회를 떠나고, 주로 중인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교회일을 맡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달레는, 물론 권철신과 丁氏 집안이 남아있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성격상 교회일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으며 교회를 지도한 일도 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33)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철신과 정약전· 약용 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양반학자 교인들은 辛亥이후 천주교를 끊은 것으로 전술하고 있다. 이승훈은 乙巳年 이후 천주교를 배척했다고 말하였다가 말이 몰리자 辛亥年에 가서야 끊었다고 정정하였고, 권철신도 이 해에 책을 모두 불사르고 천주교를 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조동성, 최창현, 정약전 등도 辛亥年 이후에는 하지 않았다고 전술하였다.34) 정약용 역시 T 未年 이후로 4,5 년 동안은 매우 열심히 西敎에 마음을 기울였으나 辛亥年 이후로 邦禁이 엄해 마침내 천주교에서 마음을 꿇고 말았다고 하였다. 35)

물론 이상의 진술들을 모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진술을 했을 경우도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창현 같은 사람은 1801년에 잡히기까지 배교한 적이 전혀 없다. 어쨌든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는 정약용의 진술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문제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정약용의 냉담한 신앙생활 내지 背敎는 乙卯年(1795) 이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약용은 乙卯年에 潛入한 중국인 周文謨신부의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36) 또한 聖物까지 그의 집에 보관했었다는 사실에 37) 비추어 그때까지 교회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깊숙이 관계한 것으로 생각되고, 그 때문에 비교적 상

33) 달레 p. 372,

34) 『李家煥等推案』 2月 11日~14日: [陶日記』 2月 18日.

35) 『 自探墓誌銘』(城中本).

36 ) 『自援慕誌銘』( 中本).

37) 推腐日記』 2月 18日 「李承蒸供.

세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소위 〈乙卯北山事〉의 경위는 이러하다.

乙卯年 여름 4월에 蘇州人 周文謨가 裵服을 하고 몰래 들어와서 北山 아래 숨어 있으면서 西敎를 널리 펴고 있었다. 진사 韓永益이 이 사실을 알고 李哲에게 말하니 나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 李哲이 蔡相 에게 알리니 蔡相은 임금에게 은밀히 아뢰어 捕長 趙奎鎭에게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周文謨는 놓쳐 버리고 崔 • 尹 등 3인을 38) 붙잡아 杖殺하였다. 39)

이 사건은 睦菓中이 朴長高을 사주하여 상소를 올리게 하고, 捕長이 邪學罪人 3명을 타살한 사건을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등에 게 전가시킴으로써 일약 당쟁으로 확대되었다. 박장설은 이가환을 西敎의 敎主로 지목하고, 특히 이가환이 庚戌年 (1790) 대책 때 五行을 四行으로 제출한 정약전에게 장원을 준 사실을 論罪 하였다. 박장설이 유배되기는 했으나 상소가 끊이지 않자 正祖는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에게 죄를 주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같은 해 7월(음력)에 이가환은 忠州牧使, 정약용은 金井察訪으로 좌천되고, 이승훈은 禮山으로 유배 되 었 다. 40)

忠 ,金井, 禮山이 특히 좌천지 또는 유배지로 선택된 것은 이들 지방에 천주교도들이 많은 때문이었다. 정약용도, 金井에 西敎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 그것을 금지시키려는 데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임금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임금의 의도대로 박해자로 몰변하였다 .41) 이때부터 정약용의 背敎期가 시작된다.

(2) 背敎期 (1795~1811)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은 임지 또는 유배지에 도착하자 임금의

38) 崔仁吉, 尹有一, 池

39) 『自指표誌銘』(祭中本), 備忘『[ pp. 54~6 (달레 (上), pp. 378~80 참조).

40) 『自投墓誌銘』(梨中本), 「貞軒李 家煥墓誌 」.

41) 忘記 pp. 68~9 (달레( pp. 395~6 참조), 『 自援墓誌路 』 (渠中本).

뜻대로 천주교를 배척하고 현지의 천주교인들을 괴롭혔다.

정약용은 金井에 도착하자 그곳의 세력가들을 불러다가 조정의 금령을 거듭 거듭 설명해 주고, 제사 지내는 일을 권고했더니 士林들아 듣고는 사태 를 바꿀 정도로 효과가 있었다고들 하였다.42) 또 이가환은 이미 I791년에 廣州留守로 있을 때 천주교인을 박해한 데 이어 忠 에서도 周 등으로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고 괴롭혔다 .43) 이승훈 역시 예산에서 천주교인들과 완전히 인연을 끊었을뿐더러 천주교를 이단으로 배척하는 글까지 발표하였다. 44)

정약용과 이가환은 이미 같은 해 즉 I795년 겨울에 內職으로 소환되었고, 이듬해 봄에는 이승훈도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다.45) 그런데 정약용이 내직으로 소환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존창을 체포하는 데 협조한 공로 때문이란 말이 나돌았다. 정약용이 내직로 옮길 때 李鼎蓮이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했는데, 전관찰사 柳炯이 이존창을 체포하고 나서 그 일을 정약용과 함께 모의했다고 말하였고, 임금은 이 이야기를 들고 이정운에게 부임하는 즉시 자세히 보고하도록 은밀히 지시했다는 것이다 .46) 備忘記에는 정약용이 천주교인이었던 죄를 일충 보상하려는 뜻에서 천주교인들을 괴롭혔다고 하면서 특히 崔良菜 신부 집안이 그 대상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존창의 생질의 딸이 바로 최양업의 어머니였다 .47)

정약용은 내적으로 옮길 수 있었으나 아직 時論이 험악하다고 했다 .48) 이런 험악한 상황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우리는 교회측 기록에서 좀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정약용은 金井에서 천주교인들을 박해랬음에도 불구하고 반대과들의 계속된 비방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마침내 자기의 背敎를 명백히 밝히는 상소를 임금에게 올리게 되었고, 그러고서야 좀 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49)

42) 『自招蘇誌 』(梨中本).

43) 「貞評李家煥慕誌銘」; 「黃問永」 49~50 行.

44) 『李家煥等推案』 2月 10日 「李承蒸供.

45) 『貞李家煥墓誌』·

46) 『自損墓誌(朱中本).

47) 忘記 pp, 68~9, p. 113.

48) 訂底子李家 煥慕誌銘』

49) 忘記 p. 71 (달레 (..I:), p. 395 참조).

丁已年 (1797) 여름에 자신의 배신과 배교를 명백히 드러내고자 임금에게 울린 이른바 〈自明疏〉에서 정약용은 西를 보고 서학에 미혹됨 으로써 비방울 받게 된 자초지종을 대략 이렇게 밝혔다. 西敎에 빠지기는 天文, 曆象 등에 매혹되고, 死生說에 흥미를 느끼게까지 되었으나, 이색적인 학설을 널리 들고 싶던 성벽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辛亥年 이후부터는 완전히 西敎에서 손을 떼고 뉘우치게 되었다고 하였다.50))

正祖는 정약용의 自明疏를 가상히 여기고 그해 6월(음력)에 그를 谷山府使로 임명하였다. 正祖의 뜻은 당시 세력을 잡은 자로서 참소하고 질투하는 자가 많아 및 년 외직에 근무하도록 하여 그 불길을 식히려 함이었다 .51)

정약용은 2년 후인 1799년 4월( 음력) 兵曹參議가 되어 내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무렵 입금의 보살핌과 관심이 날로 깊어갔고, 그럴수록 반대파들은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이해 여름에 대사간 申獻朝가 台啓로써 권철신을 論罪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정약전과 약종 형제에게까지 미치게 되었으나 임금이 도리어 사건의 거론을 금하고 신헌조를 파면시켰다 .52) 이때 정약종은 서울로 피신해 靑石洞에 거처하면서 그러나 그 거처를 아우 약용에게는 알리지말도록 교우들에게 지시하였다. 그런데 정약전은 결국 그곳을 찾아내고 시골로 같이 내려갈 것을 청했으나 거절당했다는 것이다.53) 1800년 정약용은 처자를 데리고 고향에 내려가 있던 중 6월(음력)에正祖의 운명 소석에 접하게 되었다.

정약용은 禍 의 기미가 날로 급박해침을 느끼고 처자를 고향으로 내려보냈으며 겨울이 되자 자신도 낙향하였다.54) 마침내 辛酉年(1801) 1월 10일(음력) 천주교도를 역적으로 다스려 근절하라는 정부 측의 공식 선언이 있었다. 이어 1월 19일(음력) 뜻밖에 이른바 〈冊籠事件 〉이 일어나게 되니 마치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50) 『 自撰誌銘』 (渠中本); 『正祖宜 錄』 正祖 21年 6月 庚寅.

51) 같은 책

52) 같은 책; 「先仲氏若誌銘」 ; 忘記 p. 76.

53) 『李家 煥 推案』 2月 13~14日 「丁若鏞 • 若鍾 • 若錢供」.

54) 『自撰墓誌 (梨中本).

冊籠事件이란 정약종이 抱川의 에게 맡겨 놓았던 冊籠울 보다 안전한 곳을 찾아 任太仁울 시켜 서울의 황사영 집으로 옮기던 중 漢城府의 취체원에게 발각되어 포청으로 압송된 사건을 말한다. 이 책롱에는 천주교 서적과 聖物, 周文謨 신부의 서한동과 함께 丁氏 집안의 서찰도 들어 있었다.55) 이로 말마암아 2월 9일(음력)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을 붙잡아 問해야 한다는 盛啓가 나오게 되었고 그래서 그 날로 이들을 붙잡아 하옥시켰다. 이어 권철신, 정약종 • 약전 등도 붙잡혀 願의 신문을 받게 되었다.

2월 1O일 (음력) 推 이 시작되었는데, 이날 신문에서 〈책롱의 서찰 중 丁若望이 누구냐〉는 물음에 정약용은 그것이 자신의 세례명임에도 불구하고자기 집에는 그러한 이름은 없다고 대답하였다. 다음날 신문에 서 그는 천주교도를 원수라고 하며 IO일 간의 여유를 주면 그들을 잡아올리겠다고 말하였다. 이 날의 議啓는 정약종의 허다한 장물로 그의 집의 문서임이 분명히 드러나 변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숨기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56)

정약종은 책롱에 대해 압수된 서책은 자기 집에서 나온 것이고 또­ 자기의 것임을 조금도 숨기려 하지 않았다.57) 이어 이 문서 중에서 三仇說이 나오게 되자 罰廳에서는 그것을 천지간에 용납 못할 말이라고 하며 58) 정약종을 시급히 極律에 처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55) 『 李家 煥等推案』 2月 12日 「任太仁 」; 「黃 閔 」 26~7 行.

56) 李 家 煥等推案』 2月 10~11日 「丁若 朗 」.

57) 같은 책 , 2 月 12 日 「 若鍾 」.

58) 三仇란 世俗과 魔丸와 肉身 인데 신앙생판에서 이것들을 대항해 싸워야 한다는 뜻에서 三 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대 안정복은 임금이 통치하는 곳인 世俗과 부모에게서 나온 肉身을 원수로 여김은 곧 반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천지 간에 용납 못할 말이란 바로 안정복의 이러한 해석에 근거한 것이었다. 菴果 卷 17 「天學 」.

계속된 신문에서 정약용은 황사영과 이승훈을 원수로 여긴다고 ­말하였다. 또한 천주교도를 체포하는 방략으로서 천주교에 깊이 물들지 않은 노복을 잡아 문초할 것을 건의했는데, 이 방법은 포청에 시달되어 이후 취조의 요점이 되었다. 이에 따라 정약용에게는 더이상 형벌이 가해지지 않게 되었다. 한편 이승훈은 정약용이 그를­ 원수로 여긴다면 자기도 그를 원수로 여길 것이라고 하며 정약용이

자신으로부터 영세한 사실을 폭로하였다. 또한 이승훈이 정약전을 잡아 신문하면 알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정약전도 붙잡히게 되었다. 정약전은 한때 西敎에 미혹했었으나 辛亥年 뒤로는 하지 않았다고 배교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따라 정약전에게도 刑默이 중지되었다.59)

정약용은 마침내 周文謨 신부까지 밀고 하였다 . 신부가 누구냐는 질문에 다른 교인들은 한결같이 함구하거나 이승훈을 신부로 불렀다고 말했을 분인데, 정약용만은 그의 招辭에서 주문모 신부의 존재를 밀고하였다. 이 때문에 정약용은 保擇이 되고 獄 를 의논하는 일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60)

2 월 26 일(음력) 이승훈, 정약종 등 6 명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특히 정약종에게는 大逆 이 선고되었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그간 옥사하였으며 정약전 • 약용에게는 유배형이 선고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러하였다.

정약전이 처음에는 邪敎에 마졌으나 나중에는 회오한 것이 약용과 같고, 乙卯年間의 因秘한 일은 정약전이 傳 한데 불과하고, 직접 참석한 것은 볼 수 없다. 또한 약종이 남에게 보낸 편지에 얼핏하면 형제간에 同學 못하게 된 것을 한탄한다고 했으니 약전의 회오함이 틀림없는 듯하지만 처음에 멀리 전파한 죄를 전적으로 용서하기는 곤란하다. 처음에 비록 미혹했을지라도 중간에 회오한 사실이 증거할 만한 文跡이 있으므로 次律을 시행하도록 한다.61)

이에 정약전은 新智島로, 정약용은 長磐縣으로 유배되었다. 이들은 황사영의 문제로 그해 10월(음력)에 다시 국문을 받게 되었다. 홍락안과 이기경이 그들을 공모로 몰아 반드시 죽이고야 말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별로 조사할 것이 없어 결국 석방되어 다시

59) 『李京煥 推案』 2月 l3~14日 「 若 , 李承薰, 丁若 供」.

60) 같은 책 , 2月 17日 若 」.

61) 「先仲氏丁若廷墓 誌 銘」.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62) 그러므로 丁氏 집안에서는 정약종과 그의 아들 哲祥 등 2명만이 순교하였다 .63)

(3) 回心期 (1811~1836)

정약전과 정약용은 유배에 그침으로써 그들 자신과 가족의 생명 그리고 재산만은 구할 수 있었으나 정약종의 가족은 家長과 장자를 잃은 데다 집과 재산까지 몰수당하게 되니 이들 가족의 비참함이란 이루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온갖 시련과 어려움 속에 서도 그들은 그들 가장의 신앙의 유산만은 굳게 지켜 나아갔다. 뿐더러 쓰러져 가던 교회를 일으키고 지도하게 될 위대한 인물이 이 집안에서 나오게 되니 그가 바로 정약종의 둘째 아들이요 정약용의 친조카인 丁夏祥이었다.

신앙이 두터운 어머니 밑에서 소년시절을 보내던 중 정하상은 20세가 채 못 되었을 때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일념에서 홀로 서울로 올라왔다. 다음 그는 교회일을 의논하고자 茂山에 유배중인 趙東通을 찾아나섰다. 여러달 동안 그 곳에 머무르면서 그는한문과 교리를 배우고 나서 조선에 선교사를 성입하려는 자신의 큰 계획에 대해 격려를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오자 그는 北京을 왕래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고자 서울의 교우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 다. 그의 호소는 많은 신자들의 반향을 일으켰다. 64)

한편 교회의 재건운동은 당시 영향력 있는 지도급 신자들에 의해 더욱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는데, 李여진, 申太甫, 洪樂敏의 아들인 洪우송, 정약용 등이 이 재건운동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특히 정약용은 박해중에 마음이 약해져 배교했었으나 진실히 뉘우치는 마음이 생겨 온 힘을 기울여 교회의 공동사업에 헌신함으로써 자기의 죄를 속죄하려고 힘썼다. 이들 교회 지도자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점차 신자집단이 다시 조성되고, 많은 배교자들이 교회로 돌아오고, 개종운동도 활발히 전개됨으로써 박해로 인한 공백을 메우고

62) 『自撰慕誌銘』 (渠中本); 「先仲氏丁若盆 誌銘」.

63) 순교일은 4월 2日 · 달레 (上), pp. 468~70.

64) 일기』, 서울 1905, 42장: 달레 , p.4 70, 달레(中), pp.87~8.

도 남게 되었다 .65 )

모든 신자들의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소망은 하루 속히 북경으로부터 선교사를 맞아들이는 일이었다. 이 계획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및 번이고 실패를 거듭했으나 마침내 1811년에 서울과 지방교우들의 협조를 얻어 북경에 밀사를 파견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위에서 말한 사람들 의에도 茂山에 유배중인 조동섭이 또한 이 일을 성취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때 北京主敎 교황에게 보내는 2통의 서한이 작성되었는데, 누가 이 서한들을 작성하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북경여행을 주선한 학식있고 유력한 사람들의 승인을 거쳤을 것임은 충분히 예측되는 일이다. 북경 여행을 주선한 사람들로서는 이미 언급된 사람들 외에 권철신의 조카인 권기인과 그의 찬척인 권노방도 포함되어 있었다 .66)

이처럼 정약용은 이미 유배지에서 과거를 뉘우치고 교회일을 도왔다. 그러나 그가 신앙생활을 완전히 다시 시작한 것은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지 수년 후부터였다. 이러한 경위에 대해 備忘 는 다음과 같은 생생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

정약용 요한은 귀양에서 풀려난지 2,3년 후부터 신앙생활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천주교 전리는 그에게 항상 명백하게 보였다. 그는 늘 외딴 방에 들어박혀 소수의 찬구밖에는 만나지 않았고, 속죄를위해 자주 단식과 그 밖의 고행을 했다. 그는자신이 직접 만든 몹시 고통을 주는 띠를 늘 매고 있었고 또한 몸의 여러 곳을 작은 쇠사슬로 감고 있었다. 그는 또한 오랫동안 묵상을 하곤 했다 .67)

정약용의 이와 같은 철처한 신앙생활의 시작은 그가 1822년에 회갑을 맞아 새로운 출발을 다침하는 것과 이상하게도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것 같다.

65) (忘泥 p. 219 (달레 (中), p.17 참조).

66) 備달레忘 記(中 )p,. 5p, p2.1 19,7 3~490.; (달레 (中), pp. 185~6 참조).

나는 乾隆 壬午年에 태어나 지금 道光의 壬午年을 만났으니 甲子가 한바퀴를 돈 60년의 돌이다. 무엇으로 보더라도 죄를 회개할 햇수이다. 수습하여 결론을 맺고, 한평생을 다시 돌려 금년부터 정실하게 몸을 닦아 실천한다면 明命을 살려서 나머지 인생을 끝마칠 것이다 .68)

나의 사람됨은 착한 일을 즐겨 했고, 옛것을 좋아했으며, 행동으로 실천하는 데 과단성이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는 이런 지경에 이르는 禍亂울 당했으니 운명이었다고나 할까. 무릇 평생 동안 지은 죄가 아주 많아 가슴 속에 후회스러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다시 태어난 것과 같이하여 한가롭게 세월 보내는 일을 그만두고, 아침 처녁으로 성찰하는 일에 힘써 하늘이 내려주신 성품을 회복할 수 있어 지금부터 그렇게 살아간다 해도 큰 잘못은 없으리라.69)

이 무렵부터 정약용은 과거를 되돌아보고 죽음에 대비하고자 자신의 묘지명을 위시하여 권철신, 이가환, 이기양 등 선배와 知己들의 묘지명을 집필하게 된다. 나아가서 그는 종교적 처술도 하게 되는데, 특히 그가 묵상한 일부를 기록해 놓는가 하면 미신을 반박하고 무식한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여러가지 책을 처술하였다. 끝으로 그는 조선 천주교의 기원과 초기 교회사에 관한 처술을 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다블뤼 주교가 그의 備忘記에 안용하면서 『朝鮮福音傳來史』로 명명한 것이다. 정약용은 묘지명을 통해 소수 인물들의 생애를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西敎의 전래와 전파 그리고 탄압과 관련된 모든 인물과 사건 속에서 자신을 조명하는 동시에 西敎와 남인과의 관계, 당쟁 등에 관한 진실을 『朝鮮福音傳來史』를 동해 분명히 밝히고자 했을 것이 분명하다. 정약용의 종교적 저술은 비록 그 일부가 박해 동안 땅속에 숨겨두었던 관계로 썩어 없어 지기는 했으나 그 중 많은 것이 아직 그의 집안에 보존되어 있었고 한다. 그래서 다블뤼 주교는 이것들을 1850년대에 입수할 수 있었던 것 같고, 특히 『朝鮮福音傳來史』는 다블뤼 주교의 조선교회사

68) 『自抗慕誌(渠中本).

69) 『自援墓誌銘』 (城中本).

편찬에 있어서 기본자료 구실을 하게 되었다.70)

정약용은 의술에 밝다는 이유로 I830년 孝明世子의 병치료를 할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입궐을 하려면 관직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에게 副護 의 벼슬을 주어 입궐케 했으나 그가 도착하기 전에 孝明世子는 운명하고 말았다.71) 그 후에도 정약용은 그의 종교적 은둔생활을 계속하였으며, 날로 깊어가는 그의 신앙심은 그를 아는 모든 신자들을 기쁘게 했으며 그들의 좋은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마침내 그는 1835년 조선에서 포교중이던 중국인 劉方濟 신부로부터 聖事를 받은 후 善終하였다.72)

우리는 이상에서 정약용의 천주교 산앙생활을 단계적으로 고찰하면서 중간의 그의 배교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앙만은 존속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실 그의 한때의 배교는 의적인 것이었고, 내적인 것은 아니었다. 정약용의 조카사위인 황사영도 〈정약용이 겉으로는 천주교를 해쳤을지라도 마음속에는 늘 死信을 가지고 있었다〉73)고 증언하였다. 정약용의 배교는 무엇보다도 임금의 총애 앞에서의 일시적인 허약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가 自明疏를 올린 것은 신앙의 배신보다는 임금의 총애를 배신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1801년 그는 임금 앞에서 神을 거부함으로써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강요된 배교이고, 강요된 선택이었다. 만년에 그는 神울 다시 택했다. 이번에는 결코 강요된 선택이 아니었다.74)

3 西學思想

정약용의 사상 중에서 서학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 은 적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서학사상이라기보다는 先儒의 사상으

70) 忘記p.5, 219, pp.340~41: 다분위의 1858년 11월 7일자 서한(파리外邦傳敎古文庫 소장).

71) 李晩采· 『페衛編』 卷5 「 配秩」.

72) 備忘te p, 219, 341 (달레 (中), p. 186 :>).

73) 黃閉永 」 17行.

74) 洪承晩『神이냐 王이냐, 》, 1963, pp. 220~4.

로 해석하려는 견해가 지배적인 것 같다. 물론 그것을 서학사상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없지 않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반적으로 근본적인 입장의 차이가 있다는 단서를 붙이고 있다. 이와 같이 문제가 매우 어렵게 생각되므로 여기서는 그것이 서학사상이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고, 다만 정약용에게서 서학사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들을 먼처 열거하고, 이어 조선에 전해전 서학사상, 죽 릿치와 그후의 예수회원들의 先偉思想에 대한 補印論的 해석을 둘러싸고 일어난 중국과 조선 학자들의 찬반의 의견들을 제시한 다음, 끝으로 정약용의 경우에는 어떠했는가를 고찰함으로써 문제에의 간접적인 접근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1) 西學思想의 요소들

정약용에게서 발견되는 서학사상의 요소들에 대해서는 과연 그것이 본연의 서학사상이냐 아니면 先儒思想이냐는 문제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만 이미 발표된 논문 중에서 서학사상의 요소들로 간주될 수 있는 것들만을 간추려 소개하는 데 그치고자 한다.75)

첫째는 정약용의 神觀으로서 天의 본질적 의미를 主宰之天에서 보고 또한 이러한 天의 主宰者를 上帝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그는 主宰를 의지적으로 다스리는 뜻으로 해석하였고, 특히 天의 운행을 上帝가 말없이 主宰하는 것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天主質義』에서 천주의 존재를 天動에서 증명한 것과 같은 입장이라 하겠다 .76)

정약용은 主宰에 있어서 人格的인 뜻을 명백히 하고자 〈益明主宰〉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 盆明이란 사람의 마음까지 꿰뚫어

75) 주로 다음 두 개의 논문에서 간추렀다. 崔 「天主箕에 대한 碑 儒들의 見解」, 《東亞硏究)) 3, 西江大學校束亞硏究所, 1983, pp, I~23; 琴 泰, 「茶山의 .思想에 있어서 西 의 影 과 慈義」, 《國際大學論文染》3 國際大 人社台科t’硏究所, 1975, pp. 307~40.

76) 『與猶堂全합』(이하 『全 』로 略稱) D-6 「孟子要義」, D-4 「春秋考政」, D-15「 語古今注」; f天主宜義』(影印本), 한국교외사연구소, 1972, .I:, 3~4장; 崔東熙, 의 神四」, ({韓國思想》15, 前國思想硏究 , 1977, pp. 106~34.

아는 앎으로써, 이는 『天主宜義』의 천주의 全知와 상통하는 것 이며, 또한 良能과 상동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77)

릿치는 『中 』의 〈鄕社之 所以事上帝也〉에서 后土즉 地神이 생략된 것이 아니라고 하며 朱子의 주장을 반박했는데, 정약용 역시 릿치와 거의 의견을 같이하면서 上帝와 地神이 동격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78)

둘째는 정약용의 太極論이다. 그는 太極을 無形之天과 동일시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나아가서 太極을 理로 파악하는 것조차 반대하였다. 太極이 有形의 始源일 수는 있으나 無形의 理일 수는 없다고 하며 太極을 生成論的始源으로 보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는 太極을 天地의 主宰로 보는 것을 거부하고, 理를 自立者(실체)가 아니라 依頓者(속성)로 해석한 릿치의 입장과 상동하는 것이다.79)

릿치는 『太極回說』을 평하여 인 虛象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정약용 또한 太極을 奇敷와 偶數의 표상으로 보았다. 80)

세째는 정약용의 理氣論이다. 그는 를 물질의 근본개념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양상으로 규정하였으며 또한 사물의 기본적인 존재양식을 有形과 無形으로 구분함으로써 서학에의 접근을 보이고 있다. 특히 氣를 自由之物로, 理를 依頓之品으로 본 것은 릿치가 만물을 자립자와 의뢰자로 구분한 것 과 상동한다. 81)

네째는 陰陽論이다. 릿치는 『太極圖說』의 비판에서 陰腸兩儀를 奇數와 偶敷에 불과한 것으로 보면서, 埋가 본디 磁 이 없고 자립적인 존재가 아닌 것처럼, 賜陰도 靈 이 없고 따라서 생성능력도 없다고 말하였다. 정약용 또한 陰腸이 생성원리가 될 수 없다고 하며 陰腸의 實在性을 부인하였다. 특히 그는 릿치를 따라 陰陽을 奇 의 표상으로 표현하였다. 82)

77) 『全白』I -8 「中 」; n-3 「中庸自波」; 『天主箕義』上, 3장.

78) 『天主 上, 22 장; 『全 』0 -4 「中 浮義 」.

79) 『全田』0-47 「易 格言」; 『天主貸義』上, 17장.

8o) 『天主貸義』上, 16장; 『全 』 0 -47 「易 言」, 4, 「周易四築」; 李相設「箕 思想의 形成과 展 過程」, 造》 2, 1972, p. 121.

81) 『全 』 0-4 「中庫講義 」; 『天主貸義』上, 17장.

82) 『天主 義』 上, 8, 16~8, 20; 『全 .ll 0-44 「周易四姜」.

다섯째로 정약용은 릿치와 마찬가지로 陰腸五行에 생성론적인 근원성을 부인하였다. 서학의 四行論은 사물의 형성원리에 불과한 것이다. 83) 對等에서 五行을 四行으로 답한 정약전에게 장원을 주었다고 하여 이가환이 미방을 받은 사실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 보았다.

여섯째는 鬼神論이다. 정약용은 귀신을 理氣論으로 해석하는 것을 반대하고, 오히려 귀신을 二氣의 작용을 지배하는 주재적 실재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上帝의 주재적 입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그의 근본 입장이다. 한편 릿치는 귀신의 존재를 회의하는 新情의 태도를 반박하고, 귀신은 無形한 것에 속하지만 다만 天主의 命을 받들어 造化를 관장할 분이고 專橫울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84)

일곱째는 人性論이다. 서학에서는 인간을 육신과 영혼의 이원적결합으로 보고 또한 피조물로 본다. 릿치는 性의 개념을 성리학의 이론과는 관련 없이 사용하였다. 그는 心을 獸心과 人心으로, 그리고 性을 形性과 神性으로구분하였다. 그리고魂은 生弓,登 , 魂으로 구분되지만 이 下位槪念인데 반하여 영혼은 心과 性을 포함하고, 人心, 神性과 통하는 上位槪念에 속한다고 하였다. 정약용 역시 인간을 神(정신)과 形(육신)의 결합으로 보았다. 그리고 心은 원래 심장을 가리키는 말아지만 나아가서는 인간의 내면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 在性을 인정하였다. 그는 性의 개념을 心의 好로 표현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것을 心의 本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心에 부여된 성질, 즉 인간본체의 본질적 속성으로 파악하였다. 정약용은 또 性三品說을 내세우고 있는데, 이것은 서학의 魂三品說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85)

여덟째는 善惡論을 포함한 德行論이다. 릿치는 人性을 추론하는데 있는 것으로 보고, 仁義禮智도 추론의 결과로 보았다. 理는 依頓者이므로 本性이 될 수 없다. 善은 可愛可欲, 惡은 可惡可疾이라고 하며 作用으로 파악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性의 體와 情은 本善

83) 『全 』 0-25 「尙 古 」; 『天主店義』上, 19, 32 장.

84) 『全 』 D -4 「中庸踏義 」; 『天主宜義』43장 •• 85) 『天主宜義』上, 3 , 33 장: 『全 』 D 孟子吸義」.

無惡으로 거기에는 아직 善惡이 정해져 있지 않다. 따라서 善은 良善과 習善으로 구분되어야 하는 바 전자는 性品의 본래의 善으로서 고유한 善은 아니고, 후자는 행위의 실현인 德의 善이라는 것이다. 仁은 義의 至情한 것으로서 가장 높은 德이며 經傳의 明德과 明命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정약용은 性울 好로 보았는데 그의 이러한 태도는 性의 善惡울 可愛可欲으로 설명한 릿치의 입장에 근사한 것이다. 性은 善울 昭好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처 善할 분이므로, 善惡은 人心에서 논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德 行에 관해 그는 德이 주자학에서 말하는 理나 性과 통하는 本體는 아니고 따라서 실행이 없이 德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德은 선천적이 아니라 후천적인 것이며 실천에서 비로소 功罪가 문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德行論 온 릿치의 良善 • 習善의 개념에 매우 근사한 것이다. 정약용의 仁은 두 사람을 뜻하는 것이 라고 하며 타인에 대한 사랑을 매우 강조하였다. 86)

끝으로 修 論을 겸한 정약용의 事天論이다. 수양의 근거를 도덕적 규범에서만이 아니라 上帝 또는 鬼神이란 초월적 존재에서 찾으려 한 것이 그의 특징이다. 수양에는 戒愼 • 恐 에서 오는 敬長心이 필요한데, 上帝와 귀신의 現存이 이를 위한 확고한 근거를 제공해 준다. 그러므로 정약용은 수양의 극치를 天人合一이란 관념적인 융합으로 보는 것 이 아니라 上帝에 感通하고 天命을 아는 신앙인의 모습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서학 내지 릿치의 신앙적인 입장과 깊은 관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학에서는 신앙과 도덕, 즉 事天과 愛人은 결국 愛主愛人의 실천에서만 완전한 수양 내지는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87)

(2) 補情論的 해석에 대한 貸反論

마테오 릿치에서 시작하여 그후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의 고

86今) 注 天,主 賞澤』 「 孟下,子 要4穀1」~,2 , 44,- 14 8「大浮 公; 義」『 全, --「3中 「中 講庸 義自補茂」」,, - 1「2, ,5 密「森 」5 .語 古

87) 『 全 密』 ll -4 「中 踏 , ll -2 「心亞密 : 2 」.「尙曰古 ,,」 ; 『 天主箕森』 下, ,1~2장; 李相 앞의 논문, p. 122,

전인 經傳을 聖 에 가까운 것으로, 그리스도교에 유리하게 해석하였다. 이것을 補店論的 해석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적응하려는 예수회의 適應主義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릿치의 첫째 관심은 중국의 전동에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일치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는데 있었다. 특히 그는 중국의 天 내지 上帝를 聖 와 그리스도교의 神인 天主와 일치시키려 하였다. 릿치는 그의 유명한 『天主質義』 제2편에서 上帝란 말을 무려 11회나 사용하면서 〈 여러 古 를 보았읍니다만 上帝와 天主는 그 명칭만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읍니다〉 88)고 서슴지 않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중국인들을 그리스도교로 인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603년 마카오에서 개최된 회의는 릿치의 이러한 견해를 시인하였고 그 결과 결정적으로 중국 고전이 그리스도교를 중국에 도입하는 데 유익한 요소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89)

중국의 고전은 매우 모호하여 그 해석이 어렵다. 릿치 자신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런 점을 역이용하여 중국 고전을 그리스도교에 유리하게 해석하여 중국인들을 그리로 인도할 수 있고 또 인도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릿치는 그 한 예로 太極說을 들었다. 이에 관해 중국 학자들 자신도 그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고 하며 그래서 그는 『天主質義』에서 太極說 자체를 공격하기보다는 이 說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해석에 더 중점을 두고, 중국인들을 그리스도교의 神槪念으로 인도하는 데 더욱 노력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90)

그런데 천당 지옥에 관한 말은 경전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왜 경전에 그런 말이 없느냐는 中士의 질문에 릿치는 이런 논증까지 서슴지 않았다.

聖人둘의 傳授와 敎母는 제상사람들이 이어받을 수 있을지 없울지를 보았읍니다. 그러므로 여러 세대를 傳授함에 완전하지 못

88) 『 天主 貿 義 』 23 장.

8909)) JPaacs qq u u e ise r G de'rEnleita,, CFhoinn te i Ret i cCc hia rni se t, i aRno ism m ae , 2 9 1998 2, , np,. 4p0p. . 297~8.

함이 있읍니다. 또 그 일과 말이 있으나 모두 책 가운데 온전히 기록되지 못한 곳도 있읍니다. 기록된 것도 뒤에 유실되었거나 완고한 史家들이 그 사실을 마음대로 삭제해 버 린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항차 사물에 관한 글은 때에 따라서는 변함이 있으니 기록에 없다고 해서 그 일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읍니다 .91 )

뿐더러 릿치 후의 선교사들은 秦 始 皇 이 모든 서적을 불살라 버렸기 때문이라는 논증까지 덧붙이면서 천주교 교리에 관한 중국고전의 결함을 보완하려 하였다. 이렇게 예수회원들은 고대의 유교는 자연종교와 일치하고, 그리스도교와도 일치했었는데, 불교와 후기의 유학자들이 그것을 왜곡시킨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예수회 내에서는 일찍부터 先 와 新 를 대립시키는 관습이 생겼다. 예컨대 노엘 Noel 신부는 유학자를 고대의 정통적인 유학자와 후세의 속된 유학자로 구별하였다. 92)

上帝와 天主를 동일시하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고대 유교의 윤리와 그리스도교의 윤리와의 유사성까지 유추시킨 릿치의 소위 補論的 입장은 그가 1610 년 사망하기까지는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자 예수회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릿치가 자연종교에 너무 양호했다고 생각되어 릿치의 입장의 합법성을 회의하는 선교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롱고바르디 Nicolas Longobardi( 華民) 신부는 처음으로 중국인들이 上帝를 인겨적이고, 유일하고, 전능하고, 창조주인 天主로 알아듣지 않고, 전동적인 고전해석을 따라 우주만물의 근원이오 生成의 근본으로밖에 인식하고 있지 않는데 대해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에 롱고바르디는 신자 및 미신자 유학자들과 함께 중국고전에 대한 중국인들의 지배적인 개념올 연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는 비로소 중국고전에 대해 중국의 전통적인 해석과 다른 해석을 하는 데에서 오는 위험성을 깨달았다. 이에 관한 롱고바르디의 견해는 이러했다 .93)

91) 『天主貸義』 下, 34장.

92) J. Gernet, 같은 책 , pp. 43~4.

93) 그는 1623 년 De Cofucio eiusque doctrina tractatus를 저술했는데, 이것은

중국의 지배져인 개념에 관한 유럽어로 씌어전 최초의 체계적인 연구서이다. 이 책은 파리外邦傳敎白에서 예수회의 입장을 공격하려는 의도에서 1701 년 파리에서 佛譯 간행하였다.

중국고전은 어렵고 때로는 모호하여 주석이 필요하다. 중국인이 주석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 의국인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들 주석서와는 다른 의미로 해석될 경우에 중국인들은 선교사들이 모든 책을 안 읽었거나 아니면 참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天主質義』에서 바로 이런 잘못이 일어났다. 불교학자인 株宏은 릿치에 대해 그가 고전에 참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 것은 무지에 말미암은 것이어서 무리가 아니었다고 비판하였고, 1605년에 영세한 천주교도인 太素도 릿치가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을 시정하였다고 말하였다.94)

補衛論的 해석을 둘러싸고 예수회 안에서 일어난 논쟁은 결국 I628년 上海 부근에서 21명의 선교사와 유명한 개종자 4명이 참석한 모임에서 上帝를 天主와 동의어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댜 여기서 릿치의 저서만은 제외되었으므로 예수회 내에서는 上帝란 용어가 계속 사용되었다.95) 그러나 1742년 中國儀禮가 완전히 斯罪됨으로써 이 낱말의 사용은 완전히 금지되었다.

徐光啓, 李之 , 楊廷綺 등은 물론 예수회원들의 고전해석에 동의를 표명했으나 거기에는 默契 같은 것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 롱고바르디 신부로부터 질문을 받은 徐光啓는 〈上帝는 천주교의 天主가 될 수 없다. 고대와 근세의 유학자들이 天主에 관해 하등의 인식을 갖지 못했음을 확신하고 있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선의에서, 특히 유학자들을 소의시키지 않기 위해 上帝에다 天主란 명칭을 부여하려 한 것은 잘한 판단이다〉고 대답하였다. 李之溪 역시 근세의 학자들이 무신론자이고 모두 주석서에밖에 의지하고 있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에 구애됨이 없이 고전에 대해 그리스도교에 유리한 해석을 하도록 선교사들에게 권

94) J. Gernet, 앞의 책 , pp. 47~8.

95) 같은 책, p.48.

고했다고 하였다.96)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태는 점점 변하였고, 17세기 중엽에는 선교사들에게 가장 호의적이었던 학자들까지도 예수회원들의 고전 해석에 대해 극히 신중한 대도를 보이게 되었다. 또한 불교계와 유교계 학자들이 일찍부터 논쟁에 가담하게 되는데, 上 한 株宏과 그의 제자인 沈油, 그리고 王啓元, 黃貞, 楊光先등 보수적 유학자들의 맹렬한 비판논란의 대상이 되어 否定排床의 반응을 일으키게 되었다.97)

이들은 소위 破邪論98)에서 선교사들의 〈天主 上帝〉 란 주장에 대해 『 詩』 『易』 『中 』 의 上帝를 내세웠고, 릿치가 제시한 天主崇拜는 知天, 事天, 上帝의 說과는 다른 것이고 또한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천주교의 天主崇拜와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유교의 天의 信奉은 반드시 직선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99)

淸初에 이르러 당시 선교사들의 중요한 반대자였던 楊光先이 가장 중요한 破邪渠을 편집했는데, 이것이 「不待己」로 불리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天地가 主宰가 될 수 없다는 『天主質義』 의 주장을 이렇게 반박하였다.

有形의 天은 존경할 수 없읍니다. 하물며 모든 사람들이 밟고, 더러운 것들이 모이는 땅은 더욱 존경할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고 인류의 생존을 주관하는 유일한 天主만을 존경할 수 있읍니다. 릿치의 이와 갈은 말은 人言을 할 수 있는 금수의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天은 菓와 萬物과 菓의 大宗이다. 理가 있는 곳에 氣가 있고, 氣가 있는 곳에 數生이 있으며 敷生이 있는 곳에 象 形이 있다. 理는 無形의 天과 같은 것이다. 形이 極하게 되면 理가 나타난다. (……) 理 외에 理로 불릴 만한 것이 없고, 天 외에 天으로 불릴 수있는 것도 없다. (……)

96) 같은 책 , pp. 50~51.

97) 崔 子, 「明淸時代 西受容에 관한 硏究」, 梨花女子大穆校大院 位論文, 1982, pp. 128~35.

98) 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徐昌治가 8 권으로 편집한 明末 破邪 을 집대 성한 『 聖朝破邪菓이다. J. Gernet, 앞의 책, p.20참조

99) 崔憶子, 앞의 논문, pp. 133~4.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道 이고, 分言 하면 體로서는 天이고, 主宰로서는 帝이고, 功 用 으로서는 鬼神이고, 性情으로서는 이다. 이런 말은 총괄적인 동시에 부분적인 것으로서 主된 것을 말하지 않고서 分한 것을 말할 수 없다. 者는 體이고, 分者는 이 體의 표현에 불과하다. 그런데 天主敎의 주장은 행위에만 집착하고, 程子의 소위 鬼神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어찌 主宰만을 강조하는 가? 朱子는 乾元을 인간의 정신처럼 天의 性으로 표현했는데, 어찌 인간이 정신과 독립되어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정신이 인간과 독립되어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天은 그 主宰 인 上帝와 독립하여 天이 될 수 없고, 天帝는 天과 독립하여 帝일 수 없음이 명백하다. (……) 인간이 머리를 들고 天을 보는 까닭에 天을 上帝로 일컫는 것이고, 天 위에 또 다론 帝가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100)

릿치를 위시하여 예수회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처술하였거나 번역한 이른바 漢譯西學들은 미구에 조선에도 도입되어 중국에서처럼 조선에서도 중국 고전에 대한 예수회원들의 補儒 論 的 해석에 찬반의 반응을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반응들을 여기서 모두 소개할 팔요는 없는 것이기에 다만, 『天主實義』를 중심으로, 그 중에서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약용에게서 서학적 요소로 생각되는 것들만 한해 조선 유학자들의 반응을 소개하고자 한다.101)

『天主質義』는 李粹光의 『芝峰類說』에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1614년 이전에 조선에 도입되어 널리 읽혔던 것 같다. 이수광은 『天主實義 』를 간단히 소개했을 뿐 별다른 논평은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대인인 柳夢寅은 〈『天主宜義』에서 天主라고 함을 上帝를 말하는 것이라〉 102)라고 논평함으로써 처음으로 릿치의

100) 楊光范 「不掛己」, (1659년에서 1664년 사이에 간행), 『天主敎束炤文獻』 (三), 北 1965, pp. 1122~4·

101) 이 문제에 관해서는 무엇보다도 朴鍾鴻 박사의 다음 논문을 참고했다. 「西改思想의 批 弁 攝 取」, 『韓國 天主敎 史文選渠』 1, 泊國敎 史硏究所, 1976, pp.II~107

102) 『於干野談』 卷2, 「西敎」.

補儒論的 해석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李成은 『天主質義』에 관해 跋文을 남길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주로 부정적 반응을 보이면서도 〈天主郞上帝〉에 대해서만은 〈天主은 오로지 天主를 尊崇하는데 , 天主라고 함은 곧 儒家의 上帝요 그 敬長信함은 佛氏의 釋迎와 같다 〉 고 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鬼神에 대해서는 民知가 밝아지면 세상에서 멀어질 것이라고 하며, 그 在性을 부정하였다.103)

이익의 제자인 愼後料은 그의 「西學辨」에서 『天主質義』의 내용을 篇을 따라 비판하였는데, 그에게서 비로소 릿치의 補儒論的 해석이 완전히 부인되기에 이른다. 『天主宜義 』 전반에 관한 그의 비판의 요지는 이러하다. 그 大旨는 天主를 尊 奉 하는 일이지만 그 歸越인 즉 天堂地獄說로 유혹하는 데 불과하다. 릿치 자신의 말과 또한 李之 馮應京 등이 序文을 써서 릿치의 말을 따라 찬란하면서 그 學이 과연 유교와 다를 것이 없고, 불교와는 같지 않다고 하였음은 망령된 짓이다. 천당지옥설이나 영혼불멸설은 분명히 佛氏의 說이고, 일찌기 家의 글에서는 대충이나마 볼 수 없었던 것이다. 佛氏의 것들을 모아 가지고 도리어 佛氏를 배척한다고 하니 릿치 등은 儒家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의 反賊이기도 하다 .104)

또한 신후담은 天主가 천지 만물을 制作하고 主帝 • 安義한다는 주장에 대해 主宰한다는 말은 좋고, 安 한다는 말도 유교의 뜻과 비슷하지만 천지를 制作했다는 것은 妄度에서 생겨난 논리라고 하며 天主의 천지창조설을 일축하였다 .10))

太極을 尊奉한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데, 太極이 만물의 祖가 된다면 왜 그런 일이 없는가라는 릿치의 주장에 대해 신후담은 이렇게 반박하였다. 太極이라는 것은 그 理인즉 寅하고, 그 位인죽 虛한 것이어서 天울 主宰하여 定位가 있는 上帝와는 같지 않다. 그래서 공경의 禮를 베풀 만한 곳이 없다. 그러므로 古人이 上帝는 공경하였으나 太極을 尊奉하는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103) 『 湖菜』 55, 「跋天主宜義」.

104) 李晩采, 衛編』 卷 l, 「西阜洪」.

l05) 같은 책.

못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106)

安鼎福은 『天 主質 義』의 魂三品說에 언급하면서 옛 글에도 氣, 生魂, 知, 義 理 등의 말이 있으므로 그 유사성은 인정하였다. 그러나 영혼의 불멸성은 부인하였다. 107)

李獻慶 은 天主를 崇 하는 데 대해 上帝에게는 형상이 없고, 사물에 있어서는 當行 의 理가 上帝이고, 人心에 있어서는 天賊의 性이 上帝이기 때문에 圖像으로 모시고 집을 지어 공경하는 것은 하늘을 더럽히는 일이라는 바판울 가했다.108)

洪正河는 天主와 上帝는 다르다고 전제한 다음 天主나 上帝가 有의 宗이 되는 점에서는 같으나 天主는 主되는데 마음이 있는 것이고, 上帝는 마음이 없이 자연히 主가 된 것이며, 天主는 自立해서 自稱한 것이고, 上帝는 사람이 이름한 것이라고 하며 上帝와 天主가 동일시 될 수 없음을 단언하였다. 109)

정약종은 옥황상제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천주 상제 오직 하나이시니 어찌 세상사람을 상제라 이름하리오〉하며 天主와 上帝를 동일시 하였다. 또한 그는 〈사람은 짐승과 달라 영혼이 따로 있다. 이는 천주께서 신령한 혼을 붙여준 것이어서 몸은 죽어도 영혼은 따라 죽지 않는다〉 110)고 하며 『天主質義』의 영혼불멸설을 궁정적으로 받아들였다.

(3) 丁若鏞의 경우

정약용이 천주교도였고 또한 천주교 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을 반대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런 사실이 정약용의 저술에서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약용의 저술에 대해 하등의 내적 비판을 고려하지 않고 액면대로 믿으려는 극히 단순한 논리인 것 같다. 어떤 저술의 신빙성을 판단하고 그것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 처자가 말한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서 말하고자 한 것, 솔직이

106) 같은 책.

107) 『順菴 17, 「天浮答

108) 良翁 : 卷 24, 「天學問答」.

109) 「食義證疑」, 《大 路》 ,

110) 『 쥬고요지 서울 , 1897, 13, 28장.

말할 수 없었던 것 등을 고려해야 함은 내적 비판의 기본자세이다. 정약용의 경우에도 그가 정당과 종교를 달리했다는 점만으로도 그의 저술은 반드시 내적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근한 예로 老論 館派의 입장에서 정약용의 당쟁 이야기를 모두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辛酉迫害 때의 冊籠사전을 그의 집안을 역적으로 몰려는 술책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책롱이 그의 兄 若鍾의 것임을 부인했던 정약용은 그의 『朝鮮 福 音傳來史』에서도 부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에 대해 備忘記는 이런 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정부 당국만이 아니고 정약종 자신도 책롱이 자기 것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丁氏의 한 친척의 말에 의하면 정약용이 정치적 이유에서 부인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그것이 정약종의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Ill) 정치적 이유란 가장 큰 이유 때문에 정약용에게 있어서도 역사적 진실이 이처럼 왜곡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약종의 문서 중에서 三仇說이 나오자 이것을 정부에서 역적으로 해석한데 대해 정약용은 〈安鼎福 의 저서에 三仇의 해석이 있으니 우리 집안에서 만든 말이 아니고 보면 그것이야말로 誤告임이 분명하다〉 112)고 했는데, 이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안정복은 三仇說을 제창한 사람이 아니고, 최초로 이 설을 역적으로 해석한 사람에 불과하고, 三仇說은 원래 천주교 교리이고 따라서 정약종이 그것을 안정복의 처서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고 천주교 서적에서 인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약용은 이가환, 권철신, 권일신 등이 尹有一의 北京治送費를 각출했다는 柳恒儉의 밀고에 언급하면서 이것이 乙卯年(1795)이라고도 하고, 庚戌年(1790)이라고도 하는데, 권일신은 1791년에 이미 죽었는데 어찌 1795년의 의논에 참석할 수 있었으며, 周文謨신부는 1795년에 처음 들어왔는데 어찌 1790년의 의논에 참석할 수 있었겠는가라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113) 이것 또한 억지 이론이

111) 備忘記, pp. 99~100, 106~8.

112) 『自撰誌 』(梨中本).

113) 「貞軒李家煥墓誌銘」; 「鹿菴權哲身 誌銘」.

다. 왜냐하면 유항검의 진술은 윤유일로부터 傳 한 것에 기인하고 있다. 114) 그런데 윤유일이 북경에 다녀온 것은 1795년이 아니라 1790년이었기 때문이다.

琴草泰 교수는 정약용의 서학수용의 입장이 유학의 전통을 구명하는 과정에서 서학적 성격을 보여준 것이라고 하며 그 한 가지 이유로서 이렇게 논증하고 있다.

茶山은 西學과 儒學이 對立하였던 논쟁점을 직접 문제삼아 서학을 接護하는 입장에 서지는 않았다. 이러한 점은 그가 자신의 全 著述을 통하여 〈天主> 라는 西學의 絶對者에 대한 號稱올 提示한 일이 없는 데서나, 天堂 地獄 내지 사후 세계에 대하여 肯定 인 言及을 하지 않고 있음에서도 쉽게 엿볼 수 있다. 물론 그가 一生 동안 社會 인 指目을 받고 意識 으로 西學의 系를 직접적으로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하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115)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우선 정약용만은 서학과 유학과의 논쟁에서 어떻게 초월할 수 있었던가를 묻고 싶다. 당시 유교사회에서는 서학이나 서학사상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黑白理論밖에는 용인되지 않았고, 그래서 누구이든 이에 대해 찬성이든 반대이든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체적으로 〈天主 上帝〉라는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이것은 天主가 서학의 핵심적 교리이고 또한 上帝를 天主와 동일시하는 것이 보유론의 근본을 이루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유몽인, 이익, 정약종 등은 〈天主 上帝〉를 시인하였고, 한편 신후담, 李獻鹿 洪正河 등은 그것을 부인하였다. 그런데 정약용의 上帝競이야말로 서학의 天主 개념에 가장 근사한 것이었던 만큼 정약용은 그만큼 더 上帝가 곧 天主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上帝가 天 主가 아니라는 찬반의 태도를 분명히 했어야 했을 것이다.

다음 정약용이 왜 서학과 유학의 논쟁에서 초연할 수밖에 없었던

114) 『純祖 辛酉推案 』, 「 柳恒儉供

115) 琴 泰, 앞의 논문, p. 337.

가를 묻고 싶다. 일생 동안 사회적인 지목을 받고 있어서 의식적으­로 노출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琴草泰 교수의 해석이 바로 그 이유일 것이다. 만일 정약용이 그의 저서에서 〈 天主〉란 말을 노출시켰다면 과연 그와 그의 가족이 살아 남았겠으며 그의 저서가 오늘에 전해질 수 있었을까? 이러한 정치적 이유 때문에 그는 서학의 교 ­리와 역사에 관해서만은 몰래 처술을 하고 또 그것 들을 비밀리에 가족으로 하여금 후세에 전하려 했을 것이다.

4 結語

이 논문의 근본 취지는 정약용이 천주교인이었고, 그의 사상 또한 서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밝히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에 반대되는 주장도 적지 않다. 이러한 주장들은 대개가 정약용의 배교를 그 주요 이유로 들고 있다. 그래서 정약용의 서학사상을 논하기에 앞서 우선 그의 배교와 관련하여 그의 배교가 사실이지만 그것은 진심에서의 배교가 아니었다는 점과 또한 배교 후 회심하고 신앙생활을 다시 한 사실을 밝히려 하였다. 이런 사실은 교회측 문헌에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러한 교회측 기록과 문헌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여기서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한 가지뿐이다. 즉 국내자료가 아니라고 해서 무조건 불신할 것이 아니고 그 자료에 대해 우선 소정의 역사적 비판을 가한 후에 반대이든 찬성이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약용에게 있어서 천주교인으로서의 신앙생활과 서학사상의 영향을 부인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정약용의 저술에 그런 사실이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첫째는 정약용의 저술의 내용을 액면대로 믿기에 앞서 먼저, 특히 저자의 종교성, 정치성과 관련하여 그 내용에 대해 이른바 역사적 내적 비판이 가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을 근거로 하여 필자는 정약용이 정치적 이유에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몇 가지 사례를 지적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는 소위 〈沈默의 論證〉이란 역사의 해석 이론이다. 문헌상의 침묵으로부터 어

떤 암시나 숨은 사실을 해석해내는 이 방법은 물론 아주 신중을 기해야 할 위험스러운 해석 방법이다. 그러나 정약용의 경우처럼 서학에 대해 반대이든 찬성이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경우에 침묵을 지켰다면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침묵이 암시하는 보다 깊은 뜻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약용의 서학사상을 부정하는 또 다른 이유는, 사실은 그것이 서학사상이 아니라 先秦 유교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원시유교 즉 先儒의 사상 및 先儒의 고전에 대한 릿치와 그 밖의 예수회 선교사들의 새로운 해석에서 유래한 서학사상과를 식별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었고, 특히 유학의 문외한인 팔자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팔자는 두 가지 사상을 비교 검토하는 것이 아니고, 先情思想에 대한 새로운 해석, 특히 릿치에게서 나타난 補儒論的 서학사상에 대한 중국과 조선 학자들의 비판의 역사를 고찰함으로써 간접적인 접근을 시도해 보려고 하였다. 필자는 릿치의 여러가지 補儒論的 해석 중에서 〈天主 上帝〉를 가장 중시하였다. 사실 天主야말로 천주교의 핵심 교리이고, 따라서 〈天主郞上帝〉가 릿치의 補情論의 핵심 구실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대해서만은 중국이든, 조선이든, 반대이든, 찬성이든 유학자들이 침묵을 지킬 수 없었다.

그런데 정약용만은 이 점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그의 이러한 침묵은 그의 上帝觀이 서학의 天主觀에 가장 근사한 것이었던 만큼 더욱 이상한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정약용이 그의 上帝를 天主라고 하지도 않았고 또 天主가 아니라고 하지도 않은 것, 그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약용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정치적 이유만큼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丁茶山의 西學思想」 토론 개요

崔신부님의 발표논문에 나타난 기본문제는 茶山이 그의 생애를 통해 천주교신자이었고 또 그의 經學에 보이는 上帝天개념이 천주교의 天主개념과 연관된다는 사실에, 비추어 茶山을 천주교도로 입증하고 西學思想(天主敎敎理)과의 관련 위에서 茶山의 思想을 해명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1 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崔신부님은 茶山과 西學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 해석입장과 부분적 영향만 인정하는 입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1-2 이러한 주장의 입증을 위해 茶山이 背敎한 뒤에도 流配地에 신앙활동에 참여하며 晩年까지 교회의 계명을 지켰으며 최후의 聖事 를 받고 善 終하였다는 사실 등을 교회 쪽 史料로 제시하고 있다. 곧 Ch. Dallet의 『韓國天主敎會史』와 Daveluy주교의 『備忘記』 및 이 문헌들에서 茶山의 저작으로 인용하고 있는 『朝鮮福音傳來史』를 들어 茶山의 천주교 신앙생활을 증거하는 것이다.

1-3 茶山의 神(上帝) 이 唯一神 • 超越者 • 人格神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러한 神觀이 M. Ricci의 『天主宜義』에서 얻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茶山의 「中 講義」가 李 의 영향을 많이 받은 점이나 人格神의 개념이 原始儒敎의 이념에서만 도출될

수 없음을 徐光啓의 주장을 이끌어 증거하고 있다.

2

먼저 茶山의 최후까지 천주교신자이었던가, 또는 청년기에 천주교신앙을 가졌으나 背敎한 다음에는 유교인으로 복귀하였는가, 혹은 양면적인 신념 속에 왕래한 인물이었던가라는 문제가 토론되었다.

2-1 여기서 교회 쪽 사료에 근거 하여 茶山은 脫敎 후에 改하였고 열심한 신도로 일생을 마쳤다는 주장과, 文 을 중심으로 한 사료에 근거하여 茶山은 경학연구와 유교정신의 學的 입장을 제도적으로 구현하려는 유학자이었음을 주장하는 입장이 양극적으로 제기되었다.

2-2 이와 더불어 茶山이 천주교도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그의 개인 내면적 신앙문제이고 그의 思想을 民族史의 視角에서 파악할 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과 茶山의 質學사상의 기반을 西學的으로 해석할 것인가 유학전통의 계승으로 해석할 것인가에 있어서 그의 신앙대상이 무엇이었던가의 사실이 중요한 것이라는 상반된 주장이 제기되었다.

2-3 茶山의 천주교신앙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茶山사상 속에는 佛敎나 陽明學 등 많은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천주교의 비중을 지나치게 높여서 茶山사상을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중도적 주장도 제시되었다.

3

茶山이 천주교신앙을 지녔고 그의 經典해석에서 천주교의 神 을 내포하고 있다는 입장에서도 그가 性理學의 입장을 떠났지만 원시 유교의 개념을 활용하고 M. Ricci의 補儒論的 입장을 받아들였다는 崔신부님의 주장에 대해 많은 검토의 여지가 있음이 토론되었다.

3-1 茶山의 經學이 洙酒學이라 규명되었던 기존연구입장이 있지만 茶山의 天觀이 原始敎의 天 과 꼭 일치 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여 茶山은 개방적인 학문태도를 통하여 원시유교의 개념을 발전시켰다는 주장이 있고, 이러한 발전의 내용이 천주교의 神觀을 받아들여 원시유교에서 미완성된 모호한 人格神개념을 補儒論的으로 완성시켜 천주교적 神개념의 종교성을 뚜럿하게 제시하였다는 주장이 비슷한 방향 속에 엄연한 차이를 드러내었다.

3-2 茶山이 천주교의 神개념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原始유교의 개념을 통하여 제시하고 있는 사실은 물론 시대적 환경 속에서 억제를 받은 측면도 있겠지만, 서양의 神개념이 Euclid의 기하학적 논리 등을 이용해 표현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전통사상적 도구로서 원시유교의 개념을 이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3-3 茶山의 원시유학적 經學개념으로 天命之性을 유학적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지 西學的 개념으로 볼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의 제기에서 崔신부님은 天命을 性理學에서는 理라고 규정짓지만 茶山은 上帝라 규정하는 명백한 차이가 있고, 上帝天은 원시유교의 개념이지만 盛明 • 主宰의 개념을 동해 全知 • 全能과 超越 • 一의 천주교적 神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대답되었다.

4

茶山의 天(神)개념이 茶山사상 속에서 갖는 위치가 특수개념의 문제에 그치는가 또는 茶山사상 전반을 관통하여 근본적 개념으로 서 역할하는가의 문제에 대한 앞으로의 검토가 요구되었고, 또한 茶山의 銀明主宰天이 천주교의 神개념과 얼마나 일치하는가에 대한 엄밀한 검토의 필요성이 토론되었다.

4-1 崔신부님은 茶山의 經學 속에는 本體論的인 철학적 인식을넘어서 있는 西學構造의 宗敎住이 중시되어야 함을 강조하였고, 茶

山은 外船內耶(private Catholic public Confucian)의 입장에서 외형적인 유교적 표현을 넘어서 倫理 • 人間 • 自然의 이해에서 서학적 기본구조가 앞으로 해명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4-2 다른 한편 茶山의 天개념에 내포된 초월성 • 인격성 • 주재성 등의 개념에는 창조자 • 구원자 • 심판자 등의 개념이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西學的 神개념과 일치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또한 茶山은 인간의 原罪 및 來世 의 개념도 결여되어 천주교도의 조건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지적과 함께 茶 山의 사상은 吳經熊이 유교와 천주교의 근원적 접근성 을 지적한 데 비추어 유교와 천주교의 공동기반을 이해한 것으로 볼 것이지 천주교적인 것으로 단정하는 것이 성급하지 않은가라는 경계도 지적되었다.

4-3 茶山의 생활태도가 孝節忠信의 유교적 德目을 실천하는 것이고 啓示를 받으며 기도하는 기독교신앙적 측면이라기보다 居敬의 유교적 수양태도라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라는 지적도 있었다.

5

茶山의 천주교신앙을 입증하는 사료가 교회 쪽 자료에 주로 근거한 사실에 비추어 문집을 중심으로 한 공인된 자료에서 背敎 사실이 강하게 제시되고 있다는 사료의 문제가 토론되었다.

5-1 崔 신부님이 제시한 교회 쪽 사료의 사료적 정당성과 가치를 물었을 때 茶山의 述誌銘과 비교 검토해 보아도 사료적 전실성이 증명될 수 있음과 Daveluy주교의 備忘錄이 茶山 死後 22년 (1858)의 가까운 시기기록임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茶山의 천주교도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교회측 자료밖에 없는 사실은 천주교도임을 확인하는 증거로 객관적 타당성에 취약점이 남아 있는 안타까운 것임을 지적하였다.

5-2 茶山의 방대한 저술에서 예를 들어 『牧民心 』에 보이는 王

에 대한 충성심이나 鄕飮射禮序에서 보이는 上下질서의 중시를 비못하여 유학적 신념의 진지성이 표현되고 있는 사실이 茶山의 이중적 성격을 말해 주는가, 또는 유학적 신념이 없이 이런 저술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심하게는保身策의 기만적인 저술이나 장난으로의 저술인가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한 崔신부님의 대답은 천주교의 신념을 지닌 채 유교에 適應하고 유교를 補完하려는 입장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5-3 茶山의 自撰墓誌銘이 秘本으로 전해졌던 사실은 그 진실성을 말해 주는 것이고 이 慕誌銘에서 스스로 천주교도임을 부정하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사료적 검토가 제기되었는데, 이에 대한 崔신부님의 대답은 秘本의 뜻이 死後 公開라는 뜻일 수 있지않은가라는 반문과 더불어 茶山의 『朝鮮福音傳來史』는 그런 뜻에서 極秘本에 해당하는 진실성이 있는 것이라 지적하였다.

茶山과 西學관계의 문제가 앞으로 자료의 더욱 정밀한 분석과 새로운 자료의 발굴 등으로 해답의 최종적 단정이 유보되어야 할 것이라는 의견과 더불어 茶山과 서학의 문제를 해명하는 방법의 새로­운 시도가 요구됨을 지적하고 있다.

6-1 茶山사상을 전체적으로 천주교도냐 유교도냐에 따라 규정지으려 할 것이 아니라 茶山의 생애 동안에 入敎시기 • 背敎시기 • 流配시기 • 解配시기 등 시기적 단계에 따라 처술의 내용을 통해 西學的 요소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분석하여야 할 것이라는 방법적 시도를 요구하였다.

6-2 茶山의 신앙과 업적을 일관시켜 신앙적 입장에서 업적을 해석하려는 무리를 저지를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의 茶山과 茶山의 학문적 업적을 분리하여 철저히 연구해 가는것이 茶山사상의 올바른 이해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타는 제안도 있었다.

〈정리 :琴 泰>

丁茶山의 日本觀

특히 일본 儒學을 중심으로

姜在彦

1 丁茶山의 일본연구

丁茶山의 학문적 시야는 전 지구적이다. 그는 우리나라 현실을 전 지구적인 시야에서 객관화하고 상대화하여 살피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청나라나 서양나라는 물론이요 일본과 琉球까지 한정된 정보 속에서 알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눈은 중국에서 명나라가 망한 뒤 조선을 자기완결적인 〈小中華〉로 절대화하고 〈 夷 〉의 세계에 눈을 돌리지 않던 俗儒들과 아주 다른 점이라 하겠다.

丁茶山은 各論 의 행간에서도 일본에 언급한 내용이 많지만 일본에 관한 連論만 하더라도 管見한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日日 本本論考」」((『『全與 猶 堂 全 染』 十補二造卷 ,三 ,詩 文國防 篇 論 )

「忽忠錄使 事評 」(『全 』 一染 二十二卷, 詩文渠 • 雜評)

「題盤谷 公亂中 日 記」(『全 一染 十四卷, 詩 文 題)

「跋海樣 見錄」(『全 一染 十四卷, 詩文染 • 跋)

「申靑泉岡見錄」(『全 』 一渠 二十二卷, 詩文菓 • 雜評)

「跋太宰純論語古訓外傳」(『全 』 一染 十四卷, 詩文染 • 跋)

「李雅亭付 l i倭論評」 (『全 』 一渠 二十二卷, 詩文渠 • 雜評)

본고에서는 그가 일본유학을 어떻게 보았고 또 평가하였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1)

2 실학파의 일본유학관

일본유학에 대한 관심은 물론 丁茶山이 처음이 아니다. 일본 주자학파에는 山 (1583~1657) 이후 그 후손들이 江戶의 昌平坂學問所를 거점으로 해서 이어온 官學派가 있었고 山崎闇齋를 鼻祖로 하는 京都의 民間學派가 있었다. 星湖 李漢 (l681~1763)은 일찌기 闇齋學派에 대하여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얻어서 논평한 바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星 湖偏說』 三,人門, 日本忠義).

(日本)立法刻深, 我 無不入者, 其國中之文字, 禁不得出, 令 故也.

近聞, 有忠義之士, 債東武之雄剛, 西京之哀弱, 欲有所爲, 名位 不達, 四夫無所施. 西京者, 倭皇所居, 東武者, 關白所居云.

前此, 有山 齋 , 及其門人淡見齋者, 議論激品, 以許魯齋, 仕元爲非, 盜有爲而發也, 未常應諸侯徵辭.

淡見之門人, 有姓若, 名新燒,字仲淵, 號修齋者. 學問精明, 喜談大義. 自比於岳武穆 • 方遜志, 恒懷興復西京之志. 質奇士也.

이 글을 풀이하면 일본에는 東武=江戶의 關白(征夷大將軍)의 雄剛과 西京=京都의 倭皇의 쇠약을 분개하는 〈忠義之士〉가 있다는 것 , 그러한 尊皇思想을 안받침 하는 것이 山崎闇齋(원문 〈山闇齋〉

1) 丁茶山의 일본판에 대하여 총체적으로 고찰한 논문으로서 河宇 「茶山 丁若鏞의 日本 」(『金哲埃博士造甲紀念史 論竝』, 1983년 7월, 知 泣商 業社)이 있다. 1983년 8월 26~7일 워크샵에 참가한 당시 서울대학교 철학과 李楠永교수가 이 논문의 소재을 알려주셨다는 것을 부언해 둔다.

淡見網齋(원문 〈淡見齋〉)一若林强齋(원문 〈姓若, 名新餘〉名은 新居이다)로 이어지는 闇齋學派라는 것이다.

闇齋 (1618~1683)와 그 수제자 齋 (1652~1711) 는 주자학자 許衡(許魯 齋) 이 元나라에 任官한 것을 옳지 않다고 하고 諸藩主가 부르더라도 임관을 거부한다는 것, 齋의 수제자 强齋 (1679~1733)는 金나라를 반대하여 옥사한 南宋의 충신인 岳飛(岳武穆), 무력으로 惠帝의 皇位를 찬탈한 成祖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여 처형당한 明初의 유학자 方孝武(方近志)와 자기를 비기면서 西京=倭皇을 興復시키려는 뜻을 품고 있는 奇士라는 것이다.

星湖는 〈近聞〉이란 말에서 보는 바와 같이 岡齋學派에 속하는 諸信들의 처서를 통하여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은 그 논평은 아주 정확하다.

闇 는 일본의 대표적인 주자학자이며 우리나라 巨節退溪를 존숭한 근엄한 학자이다. 문인들에 대한 그의 교육태도는 엄격하기가 추상 같았다. 그러나 그의 문하에는 제자들이 운집하여 6천명을 헤아렀다. 그는 그의 만년에 神道思想에 기울어 垂加神道를 창시하였다. 그는 그의 神道思想으로 하여 극단한 일본중심주의자로 되었다.

그에게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만약 孔子 孟子가 일본을 德化시킨다고 쳐들어온다면 그 臣下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 春秋大義이며 그를 맞받아서 싸우고 포로로 하는 것이 일본의 孔孟之道아다, 라고.

閣齋의 문인들 중에서 淡見網齋, 佐藤直方, 三宅尙齋의 세 사람을 崎門의 三傑이라 한다. 그 중 佐腦는 스승의 神道思想을 비판하여 破門당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溫藏錄』 卷之二).

宇宙之間, 一理而已, 固不容有二道矣. 儒道正則神道邪, 神道正則情道邪 (……) 有兩從之理平. 先生之雜信, 吾不識其義也.

보는 바와 같이 그는 闇齋의 神道思想을 信〉이라고 하면서 道는 세계공통한 것으로서 둘이 있을 수 없는데 어찌 儒道와 神道에 兩從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網齋는 처음에는 스승의 神道思想을 비판하여 破 당하였으나 나중에 후회하여 神信兼學의 齋學 으로 돌아갔다. 齋 는 湯武放 伐論을 긍정하지 않은 학자이나 網齋 는 그것을 계승하여 天照大神의 혈맥을 이은 連綿한 皇 統을 세계에 유례없는 일본의 자랑이라고 강조하고 1689년에 저술한 『靖獻迫言 에서 皇的 大義名分을 전개하였다. 若林은 주로 綱齋의 학설을 祖述한 학자였으나 그의 神道思想은 더욱 철저하였다. 말하자면 정주학의 일본화이다.

闇齋學派의 흐름은 明治維新 때 王政復古의 사상적 원동력이 된 것은 물론이다. 星洞가 이미 闇齋學派의 사상적 성격을 정확히 추정하여 일본에서 王政復古가 이루어질 때 征夷大將軍과 대등한 抗禮 관계에 있는 조선국왕은 〈彼皇而我王, 將如何處之〉라고 경고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예언이다. 明治維新 이후 양국간의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일본에서 보내온 문서에 조선 〈王〉의 上位에 일본天皇을 끌어올려서 〈皇〉과 〈勅〉란 용어를 사용한 문제였다.

順菴 安鼎福 (1713~1793)도 일본 유학자의 저서와 소식을 통하여 특히 일본古學派에 대하여 커다란 관십을 돌리고 있다. 『採軒隨筆 』 下( 『順迷 』卷 十三) 日本 學 者條에서 伊藤仁齋 (1627~1705) 의 「 腐子 」 (1707년, 그 문인 林敷范刊本)과 林敷의 跋文을 읽고 그 내용은 비록 〈大抵推 孟子, 而時紙伊川矣〉이나 〈此言莊好,此外, 格言莊多, 不意海島之中, 班額之邦, 能有此 學 人也〉라고 감탄하고 있다.

그는 1634년(仁祖 矣未)에 조선통신사 부사로서 일본을 방문한 趙 網(원문은 〈趙 〉)의 보고에 의하여 林羅山이 〈其人文詞與識見, 雜無可稱道者, 而以文學鳴于一國, 國中文翰, 皆委其手〉라는 사실, 1748년(英 戊辰)에 역시 조선통신사 서기로서 일본을 방문한 柳造 (원문은 〈柳姓人〉)의 보고를 통하여 일본유학계에서의 伊藤仁齋에 대한 평가와 林羅山의 후손들이 〈世執文衡, 國書詞翰, 皆出其手〉라는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보는 바와 같이 〈始見星湖李先生造稿,時一世後學, 莫不祖述李先生之 公(丁茶山)亦以爲準 (丁奎英, 『 侯菴先生年譜』 正祖 元年丁酉,十六歲條), 즉 丁茶山 자신이 자기 학문의 準則으로 삼고 있는 李 翼이나 그 문인 安鼎福이 이미 일본유학에 대하여 비록 일본유학계의

일부 유파에 대하여서나마 비교적 정확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일본 古怨派에 대한 安鼎福의 관심은 丁茶山에게 계승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3 일본 古學派에 대합 丁茶山의 관심

우리나라 유학계에서는 일본은 유학의 후진국으로서 하나도 보잘 것없고 배울 것 없는 나라로 간주하여 온 것이 일반적 경향이라 하겠다. 그것은 조선통신사들의 일본기행문이나 견문록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이러한 편견은 오늘에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한번도 일본을 방문한 바 없는 丁茶山이지만 일본에서 전래된 매우 한정된 서적을 통하여 편견 없는 눈으로 일본의 유학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 가령 그는 〈日本論〉에서 다음과 갈이 언급하­고 있다.

日本, 今無 也,餘, 禎其所古學先生, 伊藤氏所爲文, 及萩先生, 太宰純 等所 論, 經義 皆 燦然, 以文由是, 日本, 今無 也, 雜其議論, 間有 辻曲, 其文勝, 則已莊矣.

여기에서 丁茶山온 일본古學派에 속하는 伊藤仁齋를 비롯하여 萩生祖 (1666~1728, 원문은 〈 萩 先生〉)과 그 수제자 太宰春臺 (1680~1747, 원문은 〈太 宰純)들의 經義 가 〈 有 辻曲〉하나 모두 찬연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종래는 침략성이 강한 〈武勝〉의 나라였던 일본이 이미 〈文協〉 함이 이와 같으니 걱정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仁齋와 祖保는 다같이 정주학을 뛰어넘어서 유교의 원초적인 뜻을 고증하기에 심혈을 기울인 古 이다. 그러나 仁齋學派와 祖保學派는 각각 그 유파를 달리할 분만 아니라 때로는 대립적이다

仁齋는 인간 상호관계에서 특히 〈仁〉의 사상을 중시하였다면 祖保는 〈道〉의 이상형을 〈先王之道〉의 실제적인 祿樂 政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전자가 유교를 도덕적인 측면에서 보았다면 후자는 경세적인 측면에서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는 또한 明나라 李學龍과 王世貞의 古文辭學을 일본에서 확충시켰다. 祖保學은 그의 經說과 경세사상을 계승한 수제자 太宰春 의 經義派와 그의 古文辭를 계승한 수제자 服部南郭의 文辭派로 갈라진다.

丁茶山은 「示二兒」(『全 』 一染 二十一 卷 詩文染 • ) 에서도 萩生 祖 에 대하여 〈稱爲海束夫子, 其徒莊多〉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大抵日本, 本因百濟得見籍, 始其蒙昧, 一自 直通江浙之後, 中國佳, 無不講去, 目無科 之累, 今其文學, 遠超吾邦, 棟基耳.

즉 일본은 본래 백제로부터 서적을 처음으로 얻어서 본 몽매한 나라였지만 중국과 직통한 후로는 佳 를 모조리 구입하게 되고 또 그 학문이 科 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우리라를 멀리 능가하고 있으니 부끄러운 일이라 한다. 거기에는 당시 우리나라 유학계의 폐쇄적인 풍조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 있다.

여기서 상론할 여유는 없지만 江戶時代의 일본유학은 우리나라와 같이 朱子學一尊主義가 아니고 朱子 派, 腸明學派, 古學派, 考證學派, 折表 學派 등 다양한 유파가 서로 병존하고 있었고 학과 상호 간에 논쟁은 있었지만 〈共文亂賊〉 이라 하여 정치적 사회적으로 박해하고 탄압하는 경우도 없었다. 우리나라 유학계가 17세기에 尤菴宋時烈과 白湖 尹鎖간의 충돌을 고비로 해서 학문적 논쟁이 당쟁으로 번져 가고 사상 자체의 침체성과 경직성을 초래한 역사적 사실과 아주 대조적이라는 데 주의를 돌릴 필요가 있다.

아마도 宋學=程朱學을 뛰어넘어서 孔子와 孟子에 직결하려는 일본 古學派에 대한 丁茶山의 관심은 그가 「五學論」(『全 』 - 菜 十一卷,詩文渠· 論)에서 쓰고 있는바와 같이 〈 堯 ·舜·周•孔之門〉에 직결하려는 그의 학문적 지향과 비슷한 데서 오는지도 모른다.

寸茶山은 이와 같이 일본유학을 높이 평가한 나머지 〈日本無論〉을 주장하기까지 이르렀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다.

夫, 夷秋之所以難禦者, 以無文也, 無文則無禮義廉恥, 以棟其常發 情之心者也, 無長慮遠計, 以格其貧装 取之悠者也 (……) 文勝者, 武事不說, 不妄動以規利, 彼敷子者, 其談經說益, 如此, 其國必有崇祀義 , 而慮久遠者, 故曰, 日本, 今無甄也.

풀이하면 夷秋은 〈無文〉하기 때문에 〈 開之 心〉을 부끄럽게 생각할 줄 모르고 〈食装抽取之悠〉을 눌러지 못하므로 방어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지금 일본의 몇몇 학자들의 〈談經說 〉를 보니 반드시 그 나라에도 예의를 숭상하고 久遠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일본은 지금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丁茶山의 이와 같은 낙관적인 일본관은 유학자가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나라 문인정치의 척도에서 본 착오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본은 최고 집권인 征夷大將軍을 비롯하여 諸藩의 藩主가 모두 武人이며 당시 일본의 신분제도로서 士 • 裝 • 工 • 商이라 말할 때 통치계급으로서의 〈士〉는 〈사무라이〉(武士)지 우리나라와 같이 〈선비〉가 아니다. 바로 일본은 〈武〉 가 〈文〉을 지배하는 尙武의 나라이다. 여기에 그의 일본인식의 한계가 있다 . 丁茶山은 그 후에 「民堡議」를 써서 〈日本無級論〉을 수정하였다.2)

2) 丁茶山의 「日本論」(「軍器論」, 「地理 策 」운 포함하여)과 「民 堡議 」(「日本考」를 포함하여)간에 나타나고 있는 일본관의 면화에 대하여 前 한 河宇鳳 「茶山 丁若鏞의 日本 에서 상세한 고증을 하고 있다, 결론을 만한다면 전자는 丁茶山이 귀양가기 이전의 저술이고 후자는 귀양간 이후의 저술이란 것, 즉 1800년을 전후하여 본관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丁茶山은 일본의 德 幕府 자재의 交隣정책에 의심하고 있다는 것보다는 에 의한 전국 통제가 해이되거나 허무러진 때 침략의 위기가 있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 떄문에 「日本論」 二에서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일본이 〈 未統合〉였기 때문에 〈亡頓之〉= 倭造의 침략행위가 빈번하였으나 지금은 〈一島_ 頃莫 不統訪於國君 〉이니 일본은 걱정없다는 것이 〈日本 〉의 네번째 이유로 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 國 〉이란 조선과의 文隣文 에서 사용하고 있던 〈日本國大君〉 =征夷大將軍을 말한 것이다.

또 「民堡議」에서도 가령 인본이 침략해올 때 그 상육지정을東萊,統 , 古今島의 세 개 방향으로 상정하고 있는데 그 중 주된 방향을 古今島로 보고 있다. 그 이유로서는〈若其 國困哀諒쵸微板亂, 莊摩,長崎之人,別爲部曲,不迫關白之命令, 欲妹朝詳之財〉에서 보는 바와 같이 硏府의 전국적 통제력이 쇠약해지고 菌摩나 長紗와 같은 西日本의 지방세력이 제멋대로 난리를 일으킬 때를 대전제로 하고 있다.

아마도 丁茶山은 「日本考」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倭 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

는 것 같다. 즉 일본의 室 時代 초기에 皇統을 둘러싼 南朝 와 北朝와의 분연과 내란,그 틈바구니에서 倭志가 발생하였다는 사실이다.

여러가지 우여곡절은있었지만 硏府자체는 1868 년에 天阜에게 大政 을 할 때까지 交 隣 정책을〈 祖宗 之法〉으로서 견지하였다고 본다. 오히려 그 말기에 일찌기 李 이 정당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尊 思想이 대두하여 府의 통제력이 해이된 때 討派 안에서 征韓思想이 대두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丁茶山은 19세기 전반기의 이러한 일본 정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미 보아 온 바와 같이 우리 실학자들은 매우 한정된 범위에서나마 일본에 왕래하는 조선 통신사들의 견문과 그들이 가져온 서적들을 통하여 일본유학에 관심을 둘렀다. 그러나 통신사들은 일본학계의 중요한 새로운 움직임에 주의를 돌리지 못하였다.

그들은 일본 諸藩의 殖産興業에 대한 관찰이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吉宗 이 1716 년에 八代將軍이 되면서 기독교 이외의 서양서적의 수입을 해금하고 1740년에는 靑木昆賜, 野呂元丈에게 네덜란드語의 학습을 명령하였다는 최기적인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 후 일본은 네덜란드를 통하여 서양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서양과 학을 섭취하게 되었고 1774년에는 前野良澤, 杉田玄白, 中川淳庵에 의하여 직접 네덜란드語로부터 解學 『解體新 』가 번역되었다. 나는 한국과 일본과의 근대화의 갈림길이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보고있다.

하여튼 일본에서는 이러한 蘭學(네덜란드語를 통한 서양연구) 운동이 근대 전야까지 지속됨으로 하여 歐米諸國에 대한 開國에서의 사상적 및 외교적 대응에 있어서나 서양사상이나 과학기술의 섭취에 있어서 우리나라에 비할 바 없이 순조롭고 빨리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주의를 돌릴 필요가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나라 俗儒들이 유교 하나만을 붙들고 상대방을 夷秋視하던 사아에 서양 연구의 후전국으로 전락되었다는 말이다.

4 일본 古學派에 대한 비판

이미 본 바와 같이 丁茶山은 일본 古學派의 경학연구를 그 나름대로 높이 평가하고 찬연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저들의 경전 주석에 대하여 전적으로 찬동하는 것은 아니며 많은 경우에 날카롭게

비판적이다. 丁茶山은 견해가 다르다 해서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내려긋는 그러한 도량 좁은 학자가 아니다.

丁茶山은 그의 「跋太宰純論語古外傳」에서 太宰春 의 經說을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太宰純, 日本名儒也, 其所著論語古訓外傳, 祖述皇 抵排朱子 章句, 異哉.

寺風氣 , 如炯 ' 浮霧 , 至及海島之中也, 以論語有牟曰, 忽間二文, 遂 以七 篇爲 出琴原二子之手, 其言之乘巧類, 如此, 其淵源, 盜出於伊腦維禎, 而 轄轉 磯激放 至此.

죽 丁茶山에 의하면 太宰純은 梁나라시대 皇偏의 『論語義]를 祖述하여 『論語古外傳』을 지었는데 그는 『論語』에 대한 朱子 范句를 배척하고 있다. 그는 〈牟曰〉과 〈范 〉의 두 구철을 들고 거기로부터 미루어서 『論語』 의 七篇은 琴牟(子 )와 原忠(子思)이 쓴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과격하고 방자한 견해는 아마도 그 연원이 伊藤仁狩( 顯)에 있을 것이라 하였다.

伊藍은 문헌학적 비판을 통하여 朱子가 체계화하고 중시한 四 의 권위을 부정하고 孔子의 본뜻은 오로지 『論語』에만 있으며 그­ 義 가 『孟子』라 하였다. 『大學』과 『中 』은 후세의 저작이라 하여 완전히 무시한다.

따라서 그는 『論語』와 『孟子』에 담겨 있는 〈古義〉를 밝히기 위하여 『論語古義』와 『孟子古義』, 그것을 정리 집약한 『語孟字義』, 문답식으로 해설한 『童子 의 저술에 심혈을 쏟았다. 일본古學派 가운데서 伊 藤 의 학문을 古義學이라 지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丁茶山은 『論語古今証』(『全二菓 七 十六卷)에서 伊藤의 『論語­古義』에서 〈藤曰〉이라 해서 2개조, 萩生의 『論語幻]에서 〈萩曰〉이라 해서 41개조, 太宰의 『論語古 外傳』에서는 〈純曰〉이라 해서 실로 98개조나 인용하여 논평하고 있다.3)

그런데 丁茶山이 인용한 일본유학자들의 저서가 어떤 경로를 밟

3) 今村與志雄, 「丁若 上 日本 困者」(季刊 《三千 》 16호, 1978년 겨울).

어서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까.

나는 이미 伊藤仁齋의 처서가 전래된 경위에 대하여 밝힌 바 있다.4) 즉 1719년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한 때 記 成 汝 弼 이 伊藤 仁齋의 庶子이자 福山藩의 儒官인 伊藤梅宇로부터 『臨子 「 』을 증정받았다는 것, 또 1748년 통신사 때 記 李鳳煥 이 梅宇의 長男이자 福山藩 儒官인 伊藤慣로부터 『論語古義』 『孟子古義』 『中庸 揮』 『大限定本』 『古學指南』을 증정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萩生祖 나 그 수제자 太宰春盛의 어떤 저작이 언제 누구에 의하여 전래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확연치 않다. 다만 I7II년 통신사 때 江戶에서의 唱訓席에는 당시 接待役을 담당한 新 井白石과 同門인 주자학자 木下 順 庵의 門人들은 물론 祖保 에 속하는 학자들도 많이 참가했다. 그러나 萩生이 『論語徵의 초고를 쓴 것이 1717~I7I8년이요 太宰의 『論語古訓』이나 『 論語古外傳』은 스승의 유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조선통신사가 1719년에 일본을 방문한 이후 당시의 征夷大將軍德川吉宗(在位 1716~l745)이 蘭學을 비롯하여 異을 兼用하였기 때문에 여러 유파의 이설이 범람하였는 바 그 속에서 祖保學派도 일세를 풍미하였다. 그러한 사상적 혼란이 I790년에 官學인 주자학 이외에 災學禁 5)를 발령한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祖來學派가 일세

4) 姜在彦 「朝詳通信使昞兩國文化交 流困」( 『江戶時代朝鮮通信使』每日新聞社 1979, 소재영 • 김대준 편 『旅行과 船驗 의 文 年』 일본 편 에 韓 域 (민족문과문고간행회 , 1985. )).

5) 정주학과 다른 유파를 〈邪學〉이라 하지 않고 〈 學〉이라 한 것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른 점이다.

異學禁制를 발령한 것은 당시의 執 政松平定 이나 그 귀에서 이를 추진한 것은 주자학자 柴野栗 山이다. 異禁制 가 발령된 이후 그 友人 赤松沿洲라는 학자는 柴栗山에게 그를 반대하여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또 묻겠는데 귀하는 混朱를 正 이라 하고 諸家를 媒阜 라고 하는데 란 같지않다는 말이다. 가 程朱와 같지 않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좋다. 하물며 正이란 것은 의 반대다. 程朱를 공부 안하는 자들은 모두 邪라고 하겠는가. 과연 그러한 말이 옳다는 것인가. 다른 諸家는 논외로 하더라도 朝博士家들은 斑을 풀이하는 데 迫用하면서 注疏에는 전혀 程朱에 따르지 않는데 어찌 朝邪平이란 말을 쓸 수 있겠는가. 이러고 보니 다만 宋 의 正 이라 하는 것도 또한 私 不通의 주장아라 하겠다. 나는 묻겠는데 莊原恨窓, 杜羅山은 전혀 程朱에 따랐으나 그 膳 는 이와 같이 偏 하지는 않았다, 라고 (林范宮蘇近世日本國民史』, 「松平定信時代」).

이와 같이 가 있은 이후에도 정주학 이의의 다른 유파를 감히 이라고 지칭하여 철저히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일본유학계의 분위기다. 특히 우리나라와는 달리 朱子 의 권위가 일본 古浮派에 의하여 추락된 것 도 사실이다. 따라서 典禁制도 일로 실효를 얻지 못하였다.

를 풍미하던 1748년 1764년의 조선통신사의 製述官이나 記들은 江戶에 왕복하는 각처의 唱 席上에서 특히 文辭를 자랑하는 祖保學派의 유학자 및 문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이 있었으라고 추측된다.

5 일본 古學派비판의 具盟例

丁茶山의 『論語古今社』는 서명이 말하여 주는 바와 갇이 論語에 대한 漢唐諸 의 訓話限的인 古証와 주자의 를 주로 한 宋儒의 義理學的인 新社를 두루 살피면서 자기의 견해를 전개한 저서이다. 〈아뭏든 그가 漢宋의 古今誌釋에 대하여 모름지기 비판적 태도로 임하면서 새로운 자기의 의견을 발표한 것이 바로 茶山의 洙酒學的 입장아라 해야 할 것이다.〉6)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丁茶山은 특히 太宰春奈의 『論語古 外傳』에서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跋文을 썼다. 그래서 어떤 부문에서는 공명하고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지면상 여유가 없기 때문에 論語社解에 대한 太宰의 견해에 대하여 비판한 고증학적인 혹은 사상적인 비판의 실례를 들어 살펴보기로 한다.

太宰는 그 스승 祖保의 『論語徽』의 미비를 보충하기 위하여 『論語古訓을 저술하였다. 『論語古 外傳』은 『論語古訓』을 저술하는 데 있어서 古本의 본문의 異同이나, 여러 社解家들의 견해들 중에서 취사선택한 근거를 밝힌 처서이다. 처음에 고증학적 비판의 예를 들기로 한다(太宰의 견해는 〉, 丁茶山의 비판은 曰〉).

『論語古今莊』 卷一

學而第一 有子曰, 禮之用, 和爲, 先王道, 斯爲美, 小大由之.

6) 李乙混 『茶山 의 理信』, 玄岩社, 1975, p.11.

有所不行,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

△純曰, 儒行云, 禮之以和爲貸, 正與此同句法, 用字爲句, 非也.

△ , 非也. 體器曰, 怨以多爲 , 禮 禮 以少爲 僞行句法, 與此同也. 登以是並疑此句平.

體用之說, 難出釋氏, 吾家未 不言用. 易曰, 易之用, 二廷可用 享. 洪範曰, 敬用五 , 協用五紀. 綾 之 言 用 有 店 平.

燕義曰, 和寧, 範 之用也. 史記外威世 家 曰, 綾 之用, 唯香姬爲統銃. 低有股矣. 又何疑平.

여기서는 〈禮之用〉의 〈用〉자를 둘러싼 논쟁인데 太宰의 『外傳』에서의 인용이 너무 짧기 때문에 茶山의 반대의견을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茶山이 인용하고 있는 대목의 전문을 『外傳』에서 보기로 한다.

『論語古訓外傳』

學而第一

有子曰, 綾之用, 和爲貴 范

禮之用, 和爲, 六字一句. 用, 猶以也.

儒行云, 禮之以和爲貴, 正與此同句法. 朱熹. 韻至用字爲句, 非也.

拔禮燕義曰, 和寧, 禮之用也. 又史記外威世家曰, 禮之用, 唯婚姬爲統就 由是觀之, 綾 之用爲句, 亦似有抽. 然彼特 言禮 之所用耳.

熹, 乃以爲體用之用. 體用之說, 出于釋氏, 我 經 傳無之. 古人所不言, 故不可從也.

太宰의 견해에 의하면 〈 禮 之用, 和爲貴〉는 六字一句로서 『 禮記』 術行 第四十一에 있는 〈殿之以和爲 〉(用=以)와 같은 句法이다. 그것을 주자가 잘못 읽은 것이다.

생각건대 『禮記』 燕義나 『史記』 外威世家에도 〈禮之用〉이란 句가 있으나 이것은 단순히 〈禮之所用〉을 말한 것에 지나지 않다. 그런데 주자는 〈體用之說〉의 < 〉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불교에서 나온

것이지 유교의 經傳에는 없는 것이다. 古人이 말하지 않는 것을 어 찌 따를 수 있겠는가. 바로 古學派다운 견해라 하겠다. 여기에 대한 丁茶山의 반론는 주자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 다. 『祖記』 祖器第十에도 〈盤以多爲貨,禮以少爲貸〉(원문은 〈 之以 多爲者, 以其外心者也(……)以少爲者, 以其內心者也〉)라고 쓰고있는데 이것은 儒行의 句法과 같은 것이다. 이것과 더불어서 어찌 이 句(〈 租 之用〉)를 의심하겠는가. 〈 臣用之 談 〉은 불교에서 나와서 유교 고전에는 없다고 하지만 『易 經』 (六十四卦 卦交辭)에도 〈易之用〉, 『 經』 洪籠九 距} 에도 〈敬用五 事〉나 〈協用五事〉에서 〈用〉자가 쓰여지고 있는데 〈 禮之用〉을 말하 는 것이 어찌 잘못인가. 『禮 記 』 燕義나 『史記』 外威世 에 보이 는 〈禮之用〉은 이미 유교 고전에 근거가 있는 것이다. 어찌 또 의심하겠는가. 줄여서 말하면 주자가 말하는 〈禮之用〉은 불교의 〈體用之說〉에서 말하는 (用〉이 아니라 이미 古經에 그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사상적 비판의 예를 들기로 한다. 『 論語古今証』 卷四 泰伯下 子曰,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純曰, 夫天下之人, 有君子焉, 然後, 有小人焉. 其必一君子, 治衆民, 然後天下治. 若使天下之人, 家兪 戶暎, 而民咸爲君子. 是天下無民也. 無民, 非國也(節). 故難堯舜之世, 民 自 民矣. 非上之人, 不能서兪之. 如秦人愚開首然, 以其不可故也. 스駿曰, 非也. 孔子親口自旨曰, 有敎無類(衛磁公篇), 而又反之 曰, 不可使知之, 有是理平.大傳曰, 公卿, 大夫, 元士之適 子, 十五入小@. 故說者遂謂, 孟子所云, 槿岸序之敎, 申之以 孝弟之義者, 亦不過族. 然王制曰, 卿大夫, 元士之適子, 國 之俊選, 皆造 焉 . 所謂國俊者,郞朱子所謂, 凡民之俊秀者. 周禮大司徒, 以鄕三物, 敎萬民, 而 興之, 以鄕八 , 料萬 民, 以五禮 , 防萬民之僞, 以六樂, 防萬民之情, 凡萬民之不服

敎者, 歸于士• 名曰萬民, 登復有尊卑 賤於其間平.

聖人之心, 至公無私, 故孟子曰, 人皆可以爲堯舜. 登忍以一己 之私欲, 愚照首, 以自固, 沮人堯舜之路哉.

設欲自固, 亦常敎民以禮義, 使知親上, 而死長, 然後其國可 守. 眞若愚照以 自 固, 則不距 , 其國必亡. 秦其驗也.

寸茶山은 『外傳』에서의 인용에서 약간의 부분을 생략하고 있는데 그 요지를 이해하는 데는 지장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둔다.

太宰의 주장은 요컨대 천하에는 君子와 小人이 엄격히 갈라쳐 있어서 반드시 한 사람의 君子가 衆民을 다스린다. 〈家兪戶暎〉하여 民이 모두 君子가 되어 버리면 民은 없어지게 되고 나라도 없게 된다.

요순시대에도 民은 스스로 民이고 秦나라시대에 衆民(器首)을 그렇게 어리석게 한 것도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民에 대한 〈不可使知之〉를 일면적으로 받아들여 완전히 봉건적인 愚民정치를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太宰의 그러한 사상에 대한 丁茶山의 반론에 는 民本主義자로서의 그의 면목이 역연하다. 그에 의하면 공자는 찬히 〈有敎無類〉, 즉 가르침이 있으면 惡類와 善類는 없다고 말하였는데 어찌 그와 반대되는 〈不可使知之〉라고 말하겠는가.

그래서 『尙 大傳』, 『禮記』 王制, 『周禮』 地官大司徒의 예문을 들어 바로 聖人의 마음은 공평 무사하므로 孟子는 〈人皆可以爲堯舜〉이라고 말한 것이다. 어찌 한 개인의 사욕으로써 衆民을 어리석게 하겠는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그 자리를 확고히 하자면 당연히 예의로써 백성을 가르쳐야 웃사람과 친하고 長을 위하여 죽음도 무릅쓰지 않는다. 연후에야 나라도 가히 지킬 수 있다. 衆民을 어리석게 하여 자기 지위를 확고히 하자면 그런 나라는 반드시 망하는 법이니 秦나타는 그 실례이다.

말할 것도 없이 〈原牧〉이나 〈湯論〉에서 전개되고 있는 丁茶山의 철처한 民本主義사상으로 보아 당연한 비판이라 하겠다.

6 간단한 맺음

하여간 丁茶山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일본연구를 밝히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하나의 측면을 차지할 것이다.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유학사를 연구할 때 오로지 중국과의 연관에만 눈을 돌리고 있는데 조선통신사를 통한 일본유학계와의 관련을 해명하는 것도 우리나라 유학사 연구의 공백을 에우기 위한 중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좀더 넓은 시야에서 본다면 특히 실학사상이나 그를 계승한 개화사상은 전통유교의 교조적인 폐쇄 사상에 대립되는 변통적인 개방사상이라는 데 그의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 유교의 그러한 교조적인 폐쇄적 성격을 규정지은 것 이 유아독존적 인 〈小中華〉 사상이 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도 없다. 이러한 사상적 체질이 〈近代〉에로의 역사적 전환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丁茶山의 일본연구는 그러한 〈小中華〉 사상의 여독 때문에 보이지 않던 〈倭夷〉 또는 〈燈額之邦〉에 공정 한 눈초리 를 돌림으로써 선입적인 편견으로부터 자기를 해방하였다는 것, 그것이 그의 사상형성에 있어서도 적지않게 작용하였으리라고 믿어지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자학만을 옹고집하게 〈正學〉으로 절대화하는 사상적 페쇄성을 극복할 수 있었고 地球大的인 넓은 시야에서 자기 나라를 상대화하여 더 잘 볼 수 있는 안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상이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개국 전야에 우리나라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바꾸어 말한다면 燕巖 朴壯源이 『北學議』 序에서 쓰고 있는 바와 갈이 〈진실로 법이 좋고 계도가 아름다우면 오랑캐타도 나아가 스승으로 모셔야 한다〉는 학문에서 事求是〉하는 정신이 아쉽단 말이다

「丁茶山의 日本觀」 토론 개요

재일 한국사학자 姜在彦 교수의 발표 「丁茶山의 日本觀」은 우리나라 茶山穆硏究에서 거의 문제된 바없는 참신한 주제이며 특히 茶山經學의 脫朱子學的 성격을 이해하는 데 西學의 영향 이외의 또 하나의 중요한 열쇠를 시사한 주목되는 문제 제기로 평가되었다. 발표자는 다산이 가졌던 일본인식이 아니라 일본유학에 대한 다산의 접촉을 살피고, 특히 그 古學派에 대한 다산의 깊은 관심이 다산경학연구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가설을 제기한 데서 토론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다산은 임진왜란 이래의 일본을 오랑캐시하는 항일의식 속에서도 오랑캐 속에 고학파와 같은 훌륭한 작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솔직이 인정하는 학자적 성실성을 엿보게 된다. 발표자는 이런 고학파의 존재를 보고 그 밖에도 日本文物 중의 강점을 인정하는 데 인색지 않은 점에서 기왕의 일본에 대한 棋夷 的 觀念을 많이 완화시켰다고 보는 반면에 토론자들은 다산이 고학파에 국한해서 공감을 보낸데 불과한 것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朱子學 一造倒의 당시 조선의 情學派와는 달리 日本儒早 속에 괄목할 만한 反朱子學的 經學理解로서 고학파, 또는 古文辭浮의 학파에 대해 유독 다산만이 깊은 학적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유배생활 속에서도 학문연구의 폭이 국제적이었고 후진지역으로 간주되던 일본학계의 經學마저 섭렵했다는 것은 우리의 경탄을 살 만하다고 평가되었다.

17세기로부터 18세기에 걸쳐 일본경학에 큰 영향을 끼친 고학파,

또는 고문사학은 伊腦仁稽의 古義學의 영향을 받아 萩生 來가 시작한 학풍이다. 宋明理學에 대한 가열한 비판을 통해 氣哲穆을 제창한 이등인제의 고학파와 적생조례의 고문사학파를 모두 총칭해서 고학파라고 한다.

의 戴露보다 1OO년 앞서 伊藤은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주자 등의 후세의 証釋을 불신하고 직접 공자, 맹자의 原典에 따라 聖人의 道를 탐구하려고 한 것이 이른바 古學이다. 이 학풍은 번잡한 考證을 배격하고 일상의 서민도덕을 孔孟의 원전에 따라 해석하는 입장이었다. 강재언 교수는 이미 李演이 그의 「星湖俊說」(三人 日本忠義)에서 山崎格齊 등 崎門에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崎門派 등 일본유학에 대해 알고 있었고 星湖의 을 존숭한 다산도 여러 방도로 일본유학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며 특히 그의 「論語古今許」에서 언급된 太宰春台는 祖保의 문인인 점에서 적생조래에 대해서도 다산은 그의 고문사학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祖 는 그의 학문이념을 古代聖人의 법에 구하고 益樂政을 그의 학문의 중심으로 삼았다. 여기서 法은 주자학적인 自然法이 아니라 道는 先王의 制作이라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준칙이라고 여기고 質定法 인 福樂刑政에 그 중십을 둔 것이다. 그의 철처한 反朱子學的 立 은 우리의 心性에 선천적 으로 갖추어진 것을 강조하는 宋儒의 心性論을 비난한다. 이처럼 今文을 배척하고 古文辭를 존중하는 그의 經學理解의 방법은 古文辭를 통해 성인의 立名의 本義를 밝힌다는 입장이므로 「中 ]등은 인정치 않게 된다. 조래는 南宋의 功派의 영향을 받아 천지자연의 선천적인 도보다는 인간사회의 현실적인 도를 존중하고 덕보다는 예를 존중하는 것이다. 이는 事功을 존중하여 내적인 心性修義보다 經世致用강조하는 실학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발표자나 토론자들이 우리나라 실학은 물론 다산학에서도 日本古學派의 명백한 영향은 인정하지 않고 다만 다산이 그런 일본 고학파의 입장에 공감을 표시했다는 것뿐이었다. 발표자는 다산이 太宰春台의 저작을 반박하고 있는 부분, 즉 「論語古今注」에서의 「學而第一」에서 〈禮之用〉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 例證도 들었다.

다음 다산이 일본고학파를 알게 되고 그런 저작을 입수하게 된 경로에 대해 발표자는 日本通信使의 往來, 北京을 통한 입수 등을 추정했고 토론에서는 尹善道家의 장서, 그 밖의 康津 앞바다에서의 破船으로 해안에 흘러든 책의 회수 등을 추정했다.

이 부분에서는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우선 다산경학의 고학파적 성격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명백히 일본고학파와는 많은 점에서 다른 다산경학과 일본유학의 상위점에 관한 규명, 그리고 비교적 체계적인 일본유학에 대한 다산의 지식의 수입로를 추적하는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강재연 교수의 이 발표 「丁茶山의 日本觀」은 국내에 이미 발표된 河宇鳳 교수의 「茶山 丁若鏞의 日本觀」과는 전혀 다른 문제 제기로서 우리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특히 다산경학의 특이성을 구명함에 있어서 西學의 영향과 더불어 금후 일본고학파의 관계가 보다 깊이 연구되어야 할 큰 자국을 주게 된 것으로 평가되었다.〈정리 : 申一澈〉

종합토론개요

茶山學워크샵 「丁茶山과 그時代」는 대우재단의 茶山 150 周思紀念年을 준비하기 위한 제2회 학술회의였다. 1983년 8월 26~27 양일간 여섯 가지 과제에 대한 종합토론은 다산선생의 생애와 사상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워크샵을 마무리하면서 앞으로의 다산학의 연구과제에 대한 다각적인 의견이 개진되었다. 아직 연구가 부진하거나 보다 깊이 있고 포괄적인 다산학 이해에 대한 연구의 새로운 시각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86년 다산선생 150주기기념해의 기념사업을 위한 구상도 염두에 둔 종합토론이었다.

李乙浩 교수에 의하면 다산은 일면성을 싫어했기 때문에 다면성과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 다산에 있어서는 心學과 理學이 균형을 잡고 古文學 과 今文學도 동시에 고려된다. 다산에 西學的 요인이 있어도, 그것은 그의 일면성이며 그의 학문체계에서는 다면적 조화가 있다는 의견을 전제했다.

이번 워크샵의 장점은 여사학자와 사상연구가의 대화를 통해 다산을 그 시대인식 속에서 재인식한 점이다. 이번 회의에서 객관적인 壯次으로서의 다산시대는 논의되었으나 다산의 그의 시대에 대한 인식에는 많이 언급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의견도 피력되었다. 다산의 間田制에 대해서 그의 間田 論은 그 시대에서 보면 오히려 이상적이고 그 밖의 實學者들의 田 論들이 오히려 실현 가능한 것이 아닌가. 또한 천주교와 禮의 문제에 관해서 다산은 周禮的(朱子家禮的) 입장에서 西學의 祭毅를 비판한 점도 지적해두고 싶다고 했다. 姜菓吉 교수는 다산연구에 있어서도 각 학문분야의 연구자들의

학제적 연구를 통해 다산학이 보다 높은 단계로 발전할 수 있다고 재언했다.

宋錫球 교수는 다산연구에 있어서 사회경제적 연구와 經學 연구간의 간견이 있어서 그 두 분야의 유기적 연관이 이루어져야 하며 또한 근대화과정에서 정치경제적 근대화의 시각이 많이 있으나 경학 속의 근대지향적 요인에 대한 연구시각이 이약했던 점을 반성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예를 들 면 근대적 서민의식을 정치 • 경제 사상 둥 다각적 관정에서 규명하고 경학 속의 근대적 자각의 맹아도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淸代考 에 대한 다산의 이해도 앞으로 연구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琴范泰 교수는 우선 방대한 처술과체계로 인해 다산 사상체계 전반에 대한 소상한 연구가 缺落되어 있다는 정에서 다산학의 전체상이 들어나게 해야 하며 특 히 兵法 • 과학기술 둥이 보완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金仁杰 교수는 사회사상면에서 다산의 사상이 근대사상이나 전근대적이냐를 해명하는 데 보다 중접이 놓여쳐야 하며 기왕의 사상을 뛰어넘는 면이 있다면 그런 요소들을 보다 분명하게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중세와 근대의 시대구벌이 서양사적 기준인 접에서 이와는 다론 동아시아 고유의 시대구분도 고려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趙 교수는 다산의 학문적 기초가 된 전시대와 주변의 사상 또는 영향을 받은 처작 둥을 검토하는 기초작업에 착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한 準夷觀울 중심으로 정치 • 경제 • 사회 • 역사 • 문학의 각 분야에서 학술적 공동연구를 시도함으로써 다산사상에 있어서 동아시아문화권에서의 보편과 목수의 문제가 어떻개 파악되었는가를 살피는 일, 또 시도해 볼 만한 주제라는 것이다.

尹採淳 교수는 한국사상사연구에서 다산의 경학연구를 위해 미흡하지만 淸代古證學이나 腸明學의 영향 등을 연구해 보아야 하고 다산의 祿論 부분이 그 분량이 방대한 데 비해 이 분야의 연구가 너무 미약하다고 지적했다.

李楠永 교수는 I50 주기의 기념사업으로 다산학의 연구인구가 많지

않은 점을 감안해서 숨은 연구인재를 널리 발굴하기 위한 논문공모도 계회해 보기를 제안했다. 그리고 北韓 의 다산연구동향에 대해서도 주목을 돌릴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盧在 교수는 서양정치사상 전공자로서 爭 등 전통사회의 정치과정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필요함을 전제 하면서 한국사회의 사회과학적 연구의 수준이 보다 높아질 것을 기대했다. 재단의 2회에 걸친 다산학대회와 워크샵을 관찰하고 한마디로 한국연구에 있어서 이론적 파악의 빈약으로 인해 自槪念化의 貧 을 느끼게 한다는 總評的印을 피력했다. 또한 다산 자신도 중국 • 일본까지 포함해서 광법한 학문적 시각을 가진 학문체계였기 메문에 다산연구도 그만큼 넓은 시각을 필요로 하고 비교연구의 차원을 무시할 수 있다. 그리고 인접과학의 유기적 협력이 없이는 다산학의 온갖 문제의 총체적 해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고 보며 다산의 백과전서적 心이 보편적인 것에의 지향을 가진 것이냐가 문제되는데 한국 민족주의의 전개상에서 〈우리의 學問〉의 定礎로서 다산학의 학적 위치를 부여하는 주춧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다산학에서 그 이상주의적 측면과 현실주의적 측면의 구분이 요청되는 것이 아닌가도 고려해 볼 만하다. 예를 들어 閩田 가 실현가능한 것이 아닌 유토피아적인 것이란 의견도 있고 또한 다산연구에 있어서 무엇이 key concept냐가 규명되어야 백과전서적 다산학의 덩어리 속에서 그 줄거리를 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산학의 이론적 구조의 해명이 긴요하다는 것이 노교수의 의견이었다.

姜在彦교수는 西敎와 西學의 구분을 제안하면서 다산은 주로 水利 등 서구과학기술의 도입으로 힘을 기르기를 역설한 점에서 서학 등에 큰 비중을 두었다고 본다고 했다. 또 한 가지 일본의 古學과 다산의 尙古主義的 시각을 관련시켜 볼 때 朱子學的經學의 극복을 위해 孔孟으로 돌아가려는 르네상스적 사상운동의 의의가 있지 않는가 본다고 했다.

과학사상에 관심을 가진 金容駿 교수는 그의 방청 소감에서 본격적인 다산학의 전공자가 적다는 인상을 가지고 다산 저작에 대한 번역을 동한 대중화 노력도 긴요하다는의견을 내놓았다. 그리고 다산

의 전체상의 구성이 선행하지 않고는 현재와 같은 단편적인 부분적 연구만으로는 그 연구의 방향을 잡기 힘들 것 같다는 솔직한 인상을 표명했다.

결론적으로 이번 다산학 위크샵 「丁茶山과 그 時代」는 제 I 회 학술회의에서 우리나라 다산학연구의 현황을 총결산하는 뜻에서 개관하고 뒤이어 이번의 다산학 워크샵을 시행함으로써 다산학연구의 풍성한 과제가 부각되었고 연구가 부진하거나 결락된 분야의 연구가 필요함도 지적되어 1986년 I50주기 다산학회의 또 하나의 디딤돌을 놓게 되었다고 평가되었다. 특히 기왕의 다산학에 대한 연구성과 중에서 진보적인 토지개혁사상 등에 대한 일면적 파악을 지양하고 다산의 시대적 배경에서 그런 사회개혁이 양반 특권충의 부정을 통해 조선조 왕권의 강화에 그 목적이 있었다는 새로운 관점이 부각되었다. 북한 학계가 1960년대에는 다산을 〈空想的此民的 社會主義思想家〉로 추켜올렸으나 閩田 나湯朔 을 혁신적인 정치경제사상이 계몽군주의 왕권강화를 통해 구현될 수 있다는 논점에서 다산학의 성격이 새롭게 부각되기도 했다. 이번 다산학 워크샵을 통해 보다 총체적이고 이론적인 다산학의 전체상 구성의 보다 높은 연구방향이 제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구학문수용 이래의 사회과학을 다산학 등 전통학문과 접목시킵으로써 한국사회과학의 형성에 대한 뜻있는 지향이 표시된 것이다. 〈정리 : 申一 .〉

茶山硏究著作目錄

일러두기

I 본 茶山 丁若鏞 관계 연구 저각목록은 근대 이후부터 1985년 10월까지 국내외에서 간행 발표된 茶山關係의 著 • 論文 • 解題 및 번역까지를 수록하였다.

2 원칙적으로 학술지에 개재된 論文,論說, 紹介 및 硏究著 , 譯困 등을 수목대상으로 삼았고, 기타 원간 교양지, 신문 등에 게재된 논설이나 소개류는 재의하였다(단 해방 이전 신문 등에 발표된 논설 등은 예외로 하였음.)

3 단행본과 논문의 구별없이 전체를 一般, 線 譯 ·解題• 稽 政法.國防, 社會 • 經濟. 哲 • 敎育, 科學 • 美術. 文學 • , 歷史 • 其他 등의 부문으로 나누고, 한국어 • 일본어 • 중국어 는 한글음순으로, 구미어는 영어 알파벳순으로 배열하였다.

4 본 논저 목록은 1982년 다산학 학술회의를 위해 서울대 한영우 교수가 작성했던 것으로, 그 후 1982년 10월 이후 발표된 것에 대해서는 상지대 조성을 교수가 추가 • 보관한 것이다.

5 附錄篇은 茶山知究作目 錄 자료이용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丁茶山 刊本과 知究者別 著作目錄으로 재분류 •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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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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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902년, 『牧民心으로 刊行, 梁在 • 玄采 校 一部節略).

1907년, 『欽欽新古 』 4 으로 刊行.

1911년, 梁 • 玄 校朋節本 『牧民心書』, 日譯本刊行(上 • 中 • 下 . 三 冊), 『 經世造表』(上 • 中 二冊 未完).

1914년, 『 經世造表』(李建, 第一冊 一卷之十六卷以下 未詳), 朝 鮮光文會本 刊行.

I92I년 『牧民心古』(朝鮮硏究會菜 第一卷), 日 本抄譯本 刊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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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년, 『丁茶山全』(全3), 文獻編墓委員會 影印.

1969 년, 『增補與猶堂全見 』(全6 ), 禁仁文化社 影印.

1974 년, 『與猶堂全古 補造』(全 5) , 派仁文化社 影印.

(2) 硏究者別 著作目 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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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茶山과 그 時代

찍은날 -1986 년 8 월 10 일

펴• 낸 날 -1986 년 8 월 15 일

지은이-姜萬吉외 4 명

펴낸이-朴孟浩

펴낸곳――民音社

출판등록 1966. 5. 19 제 1-142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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