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韓國)

이우성(李佑成)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정창렬(鄭昌烈)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

박성래(朴星來)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

임형택 (林榮澤) 성 균관대 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김명호(金明吳)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김문식(金文植)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

김용걸(金容傑) 성신여자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이지형(李親衡)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정윤형 (鄭允炯) 홍익대학교 경재학과 교수

송재소(宋載邵)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중국(中國)

辛冠潔 中國社會科學院 哲學硏究所 敎授

陳祗武 中國社會科學院 歷史硏究所 副敎授

丁冠之 山東大學校 敎授

陳朝輝 山東大學校 中國傳統文化硏 究所

陳之安 山東大學校 敎授

趙宗正 山東社會科學院 學硏究 所

葛榮晋 中國人民大學校 哲學科 敎授

成復旺 中國人民大學校 哲學科 敎授

魏宗禹 山西大學校 哲學科 敎授

董光鹽 中國科學院 自然科學史硏究所 敎授

馮天諭 湖北大學校 中國思想文化硏究所 敎授

步近智 中國社會科學院 歷史硏究所 敎授

韓中實學史硏究

韓中實學史硏究

韓國質學硏究會

민음사

李佑成

이제 『韓中質學史硏究』 1冊이 세상에 나오게 되어, 그동안 東아시아 質學의 國際的 協力 交流와 그 硏究討論의 成果의 一部가 結을 보게된 셈이다. 年前에 刊行된 『中日學史硏究』에 이어서 두번째로 出版된 것이다.

韓國과 中國은 政治的 文化的으로 數千年간 친밀한 관계를 維持해 왔으나 近代에 들어오면서 각기 進路를 달리하였다. 특히 二次大戰後에 두 나라는 體制의 相異 때문에 相當 期間 來往이 끊어지고 서로의 動向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내가 中國本土의 學者들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988년 가을이었다. 그때 나는 成均館大學校 大學院에 在職中이었는데 中國의 辛冠潔 • 葛榮晉 • 步近智 둥 諸敎授가 나를 院長室로 찾아와 歡談하면서 實學울 話題에 올렸다. 辛冠潔先生은 中國에서 文化大革命의 激浪이 가라앉고 改革開放이 本格化하는 한편 質學硏究가 軌道에 오르고 있음을 말하고 質學硏究는 東아시아 三國中 한국이 가장 先細을 잡은 나라이니 한국이 中心이 되어 東아시아貸學國際會議를

해 보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였다. 나는 그 越旨에 共感하였다. 그 길로 나는 大東文化硏究院(院長 李範衡敎授)에게 요청하여 5年마다 開個되는 束洋學學術會議의 次 主題를 質易P에 關한 것으로 定해 두고 그 準備에 着手하였다. 드디어 1990년 5월, 서울에서 「東아시아 三國에 있어서의 學思想의 展I}fj」라는 제목 아래 韓 • 中 • 日 三國의 많은 學者들이 參加한 國際學術會議가 盛況災에 進行되었다. 會議가 끝날 무렵 辛冠潔先牛은 서울에서의 모임을 第1回로 하고 2年마다 三國이 돌려가며 會議룰 開個하자고 提案하여 모두 그대로 贊同하였다. 이리하여 1932년 中國 濟南에서, 그리고 1994년 日本 東京에서 會議를 열어, 三國이 모두 한 차례씩 主하였다. 1996년에는 서울에서 다시 第4回 會議를 가지게 되었으며 98년에는 中國에서 이어서 第5回 會議룰 열기로 하여 지금 이미 準備중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三國의 學者들이 會議롤 거듭할수록 相對國의 學의 歷史와 現狀에 關한 理解가 깊어지고 學者들 相互間의 思想의 接觸이 密度를 加하고 아울러 人間的 情誰도 무르익어 갔다.

이번에 이 『韓中實學史硏究』는 우선 한국과 中國 두 나라 學者들의 硏究論文만을 엮어서 出版한 것이다. 한국과 日本間에 關한 것은 다음 기회에 사정이 허용되는 대로 日本側과의 協議下에 別途로 만들 것을 기약해 두기로 한다.

質學은 形而上學的 思辨的 學風의 非生産的 論爭이 極性化되어 있거나 어떤 理念과 體制에 묶이어 時代現頂'에서 멀어져 가고 있을 때에 그것을 克服하기 爲하여 現實에 卽한, 實際事情에 對한 科學的 抱樞으로 問題解決을 迫求하려는 學問方向올 말한다. 東아시아 三國의 歷史的 社會的 條件이 약간씩 달랐기 때문에 過去 韓 • 中 • 日 三國의 質學의 型態와 내용이 각기 특징을 띠게 되었지만 巨視的으로 볼 때에 커다란 共通點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主로 中

世의 停 또는 解體에 近代를 指向하는 道程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대체로 理念이 體制로 굳어져서 그것이 名分化되고 名分이 에 앞서는 그러한 狀況에서 은 무엇보다 그 시대의 現質性 내지 現買的 意義룰 提供해 주면서 새로운 偵(直體系의 創造를 可能케 해주었던 것이다.

日本은 前世紀末에 진작 近代國家를 成立시켰지만 한국과 中國은 그렇지 못했다. 20世紀에 들어와 두 나라는 荀의 索製과 外勢의 (凌 속에 革命과 獨立을 爲한 堅潔한 鬪爭과 勇政한 抵抗으로 一貫해 왔다. 이제 新世紀의 開幕울 앞두고 아시아의 昭光이 世界의 前面을 빛나게 할 이 時世占에서 韓中 兩國의 知性들에 依한 質學史의 共同編成은 매우 里要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兩國의 執筆者 여러분과 出版 관계로 애쓰신 人士들에게 아울러 感謝의 뜻을 표해둔다.

1997년 9월 20일

서울 實是學舍에서

辛冠潔

오래전부터 계획되어 中 • 韓 양국의 실학연구자들이 공동 집필하여, 두 가지 문자로 출간하기로 한 『中韓實學史硏究』가 드디어 작업을 끝내고 책자로 출판하게 되었다. 본서의 주요 편집자인 步近智선생은 저에게 본서의 서문을 부탁하였다. 본서의 서문은 원래 步선생님이 쓰셔야 한다. 왜냐하면 실학에 대한 학문적 조예로 보나, 본서의 내용에 대한 총체적인 파악으로 보나 步선생이 이 서문을 쓰는 데 더 적격이기 때문이다. 여러 번 사양했지만 들어주시지 않으니 따를 수밖에 없다.

요 몇 년이래 중 • 한 • 일의 실학연구는 활기를 띠고 발전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중 • 한 • 일 3국 실학연구에서 상호간의 교류와 추진은 그 형세가 더욱 우리를 고무시켰다. 1990년 봄, 한국의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이 주최해 서울에서 열린 중 • 한 • 일 3국의 실학연구토론회는 3국의 실학연구가 처음으로 교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어서 3국은 각자 실학연구단체를 건립했다. OO년, 94년, 96년 중 • 한 • 일 3국의 실학학계에

서는 각각 주최국 신분으로 잇따라 중국 • 일본 • 한국에서 제2차, 제3차, 제4차 실학연구토론회를 개최했다. 91년, 중국과 일본의 실학학계에서 중국어와 일본어 두 가지 언어로 『중일실학사연구』를 출판 간행했고, 94년 일본 친구의 요구에 응하여 중국에서 『明淸質學簡史』를 출판했다. 95년에는 李延平 등 교수가 『중국 • 일본 • 조선실학비교』라는 책을 출판했댜 이런 책들은 중 • 한 • 일 3국 실학연구의 역사 • 현황 • 발전추세와 연구내용 • 학술수준 • 각자의 특징 등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총괄과 서술을 하여, 중 • 한 • 일 3국의 실학연구에 대해 유익한 참고자료를 제공했다. 머지 않아 선보일 『中韓質學史硏究』도 중 • 한 • 일 3국의 실학연구발전에 기여가 되리라는 점에 대해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실학연구에 있어서, 중국 측에서 보면 한국이 선구자이다. 한국실학연구회 회장 李佑成선생님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은 18세기 영 • 정조 이후의 新學風을 실학연구의 대상으로 하여 3개의 실학 유파를 형성했다. 즉 “經世致用派" • "利用厚生派'’ • ”買事求是派"가 그것이다. 그리고 본 세기 30년대부터는 실학연구방면의 논저들이 나오고, 60년대에 와서 실학 연구는 한국에서 시대의 조류가 되었다. 중국의 실학연구는 본 세기 80년대부터 시작했는데, 1982년에 중국사회과학원 張顯淸교수가 그의 논문 r晩明心學의 몰락과 실학사조의 興起」에서 실학이라는 개념을 명확히 제기했다. 이어서 1%5년 山東社會科學院 趙宗正교수가 그의 논문 『淸初經世致用簡論」에서 실학에 대해 논술을 했다. 이리하여 중국에서 실학연구의 첫번째 고조가 나타났고, 전국 수십 명의 학자들이 여러 해를 거쳐 공동으로, 3권으로 된 상당한 규모의 『明淸實學思潮史』라는 저서를 내놓았는데, 이로서 중국실학연구는 초보적이나마 그 기초를 닦아 놓았다. 뿐만 아니라 선진적인 한 • 일 실학 학계 친구들의 경험을 빌어 발전하고 있다.

현재 우리 동아시아 중 • 한 • 일 3국은 평화적으로 발전하는 새로운 단계에 처해 있다. 사회는 진보해야 하고, 경제는 발전해야 하며, 과학을 제창해야 하는 현 시점은 실학이라는 학문이 그 역할울 발휘할 최선의 기회이다. 우리는 『中韓質學史硏究』가 독자들의 현실 생활에 유익한 역할을 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박은숙 옮김)

1997년 깊은 가을

不知足齋에서

차례

序—李佑成 • 5

序―辛冠潔 • 9

□ 韓國編

韓國 社會經濟史와實學 ―― 鄭昌烈 • 17

韓國 科學史와實學 ―― 朴星來 • 43

實事求是의 學的 傳統과 開化思想 ―― 林榮澤 • 63

19세기 朝鮮 實學의 發展과 腐齋 朴珪壽 ―― 金明昊 • 77

正祖의 陵行과 首都圈의 成長 ―― 金文植 • 89

星湖 李漠의 哲學思想 ―― 金容傑 • 125

茶山 丁若鏞의 經學 ―― 李隱衡 • 147

茶山 丁若鏞의 井田制論 ―― 鄭允炯 • 175

中國編

明淸 實學思潮와 그 現實 意義 ―― 辛冠潔 • 245

17世紀의 中國實學 ―― 陳祖武 • 257

明淸學者의 "治生”論 ―― 丁冠之 • 297

中國 初期 啓蒙思想家의 土地思想 ―― 陳朝輝• 陳之安 • 319

顔李學派의 實學思想 ―― 趙宗正 • 345

明代의 朱子學과 元氣實體論 ―― 葛榮晋 • 373

人間 解放의 길을 향하여 ―― 成復旺 • 421

一王陽明에서 李貸까지

明淸 諸子學과 明淸思想에 대한 一考察 ―― 魏宗禹 • 465

實學과 科學 ―― 董光鹽 • 505

實學과 儒家의 經世傳統 ―― 馮天諭 • 529

中韓 實學思潮의 異同을 論함 ―― 步近智 • 567

後記— 宋載刟 • 583

筆者 紹介 • 585

韓國編

韓國 社會經濟史와 實學

鄭昌烈

1. 머리말

17세기 후반기에 발홍하여 19세기 중엽까지 전개 • 발전되었던 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당시의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사상적 노력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실학자들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당시의 토지제도와 조세제도에서 비롯되는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구체적 방법을 구상하고 제기하였다. 여기에서는 茶山 丁若鏞이 구상하고 제기한 토지제도 • 조세제도 개혁안을 검토하고자 한다.

"다산은 시기적으로 실학의 제2기와 제3기에 걸쳐 있었다는 시대적 이유뿐이 아니라, 그의 학문이 경세치용학과 이용후생학에 兼長해서 제1기와 제2기의 실학 사조가 다산에 이르러 일대 雅合點울 이루게 되었다’'2)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정약용이 구상한 토지제도 • 조세제도 개혁안을 검토하면, 실학의 토지제도 • 조세제도 개혁사상의 윤곽을 알아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실학

1) 李佑成, 1982(1970), 『貫學硏究序說』, 『韓國의 歷史像』 창작과비평사, 20-23쪽.

2) 위의 글, 22쪽.

의 사회경제사상의 윤곽을 알아보고, 그 결과 한국사회경제사와 실학의 관계의 일면이 부각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2. 地主仰戶制의 확대 • 발전과 自耕農의 側戶에로의 轉落

18세기 말 19세기 전반기에는 농가의 토지소유에서 심한 분화가 전개되고 있었다.3) 즉 소수의 사람들에게 토지소유가 집중되고 대다수의 농민은 토지소유에서 쫓겨나는 추세가 강화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정약용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런데 지금 文武 費臣들과 민간의 富人들 가운데에는 1호가 수천 석의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자들이 매우 많다. 이러한 자들의 전지를 헤아려 보면 매 호에 100結을 내려가지 않으니, 이는 990인의 명을 앗아서 1호를 살찌게 하는 것이다. 나라 안 富人으로서 영남의 崔씨나 호남의 王씨 같은 경우는 만 석의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데, 그 전지를 헤아려 보면 400결을 내려가지 않으니, 이는 3,990인의 명을 앗아서 1호를 살찌게 하는 것이다.4)

100결 이상을 소유하는 지주가 "매우 많다”고 한다. 이렇게 농지소유가 한 쪽에 집중되면 다수의 농민은 토지소유에서 쫓겨나기 마련이었다. 토지소유의 집적은 民田에서만 전개되지는 않았다.

3) 金容傑, 1984(1972), 『18, 9世紀의 亞業質과 새로운 股業經營論』, 『增補版韓國近代災業史硏究』上, 一潮閣, 4-15쪽 참조.

4) 『與猶堂全書』1. 詩文集, 卷 11, 論, 田論 1, 223쪽 上左, 景仁文化社, 1970. 이하에서는 『與猶堂全書』를 『全書』로 略記한다.

宮結 • 屯結은 해마다 늘어나고 달마다 불어났다. (중략) 둔전의 수량은 해마다 늘어나고 달마다 불어나 지금을 100년 진에 비교해 보면 이미 160배도 넘었다.51)

궁방전 • 아문둔전 • 영문둔전에서도 국가소유의 지주지가 크게 불어나서, 농민의 자경농으로부터 전호에로의 전락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를 일러서 정약용은 "농부들은 제 땅이 없고 모두 남의 땅을 경작한다”61)라고 하였다 정약용은 위와 같은 토지 소유의 분화양상을, 호남지방의 경우를 들어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지금 호남의 民이 대략 100호라고 치고 헤아려 보면, 남에게 전지를 빌려주고서 를 거두는 자는 5호에 불과하고, 자경농은 25호이고, 남의 전지를 借하면서 병조를 바치는 자는 70호입니다.70)

지주가 5%, 자경농이 25%, 借耕 관계 농민(순수 전호 + 자경 겸 전호)이 70%라고 파악되었다. 지주전호제 하의 전호의 생활상에 대하여 정약용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생각해 보자. 백성이 견딜 수 있겠는가. 1결의 논에서 수확하는 곡식이 많으면 800두요, 적게는 600두요, 더 적으면 400두일 뿐이다. 농부들은 제 땅이 없고 모두 남의 땅을 경작하는데 1년 내내 고생하여도 여덟 식구의 식량과 이웃에 주는 품삯을 치러야 하는데다가 추수 때가 되면 전주가 수확의 반을 나누어 가니, 600두롤 추수한 농부가 제 몫으로 가지는 것은 300두뿐이다. 종자를 제

5) 『全書』5, 『牧民心書』, 권 4, 戶典, 田政, 390쪽 上左-下右.

6) 위의 책, 권 5, 호전, 稅法 下, 401쪽 上右.

7) 『全書』1, 『擬嚴禁湖南諸邑畑夫輸租之俗節子』, 201쪽 下右.

하고 빚을 갚고 歲前의 양식을 제하면 남는 것은 100두가 되지 않는데, 부세로 긁어가고 빼앗아 가는 것이 이와 같이 극도에 이르니, 슬프다. 이 가난한 백성들이 어찌 살겠는가.8)

시험삼아서 남방 사정을 논한다면, 논에 씨 10두를 뿌리면 대개 곡식 20정를 수확하는데, 그 중 10포는 전주에게 보내고, 2포는 씨로, 2포는 환자곡으로, 2포는 雜賊(자잘한 명목을 지금 다 기록할 수도 없다―원주)로 각각 들어가니, 佃夫(佃戶-인용자)가 먹는 것은 많아도 3, 4포에 불과하다. 先王之法에서는 1/10을 징수했는데, 지금은 7/10, 8/10을 내야 하니, 民이 무엇으로 살겠는가.9)

1결 경작의 佃戶가 自食하는 생산물은 벼 100두에도 미치지 못하고, 논 10두락 경작의 佃戶가 자식하는 생산물은 벼 3, 4포에 지나지 않는 전호들의 생활상은 명줄 이어 나가기가 벅찬 것이었다.

3. 국가재정의 궁핍과 농민의 몰락

정약용은 자신이 직접 목도한 田政의 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날 국가에서 가장 급한 바는 田政이다. 나는 농촌에 오래도록 있으면서 전정의 문란을 눈으로 보고 참으로 울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康津 고울은 漏結이 가장 적다고 일컬었는데, 原田 6천여 결에 漏田이 거의 2천 결이었으니, 公家에서 3/4을 취하고 縣吏가 1/4을 취하는 것이었다. (중략) 海南온 강진보

8) 誌 6)의 글, 400쪽 下左-401쪽 上右.

9) 『全書』5, 『經世迫表』, 권 1, 地官戶 第2, 10쪽 下.

다 땅은 적지만 누결은 더 많고, 羅는 누결이 原結보다도 더 많으니, 天下에 이럴 수가 있는가.10)

현리가 강진에서는 結의 1/4을, 해남에서는 1/4 이상을, 나주에서는 1/2 이상을 누결로 취하고 있었다.

비록 그러하나 특별히 몇 결만을 골라잡아서 누결로 삼는다면 그 害가 그리 심하지는 않다. 지금에는 그렇지 않아서 한 고을 전지를 통틀어 훑어보아서 그 중 납세에 아무 우려가 없는 것 죽 豪民 腕戶 동의 전지롤 잡아서 누결로 삼아서, 錢米를 사사로이 징수한다. 이것이 防納인데, 현리 邸史가 여기에 끼어들어 利를 챙긴다. 이러고는 成川, 股沙, 荀亂 今陳 따위 등 (중략)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전세 납부 능력이 없는―인용자) 따위로써 原結의 액수를 채운다. (중략) 이에 史 猶校는 민간에 휩쓸고 다니면서 檢한다’ 하면서, 隣徵 里徵 族徵 徵하고, 방을 수색하고, 땅을 파며, 목을 달아 매고 결박을 한다. 솥과 가마를 들어내고, 송아지와 돼지를 빼앗으니, 온 마을이 소란하고, 울음 소리는 하늘을 진동하여 天地의 和氣를 해치며, 쓸쓸해진 人家가 비참하다. (중략) 검독하여 빼앗아간 것은 한 톨도 官에는 들어가지 않는다.11)

현리 저리 등에 의한 수탈의 참상이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民에서 낸 것은 3인데 公에서 받는 것이 l이다. 위로는 나라를 削하고 아래로는 民을 하면서 그 중간에서 살찌는 것은 탐관과 활리이다"12)라거나, "지금 이들 下吏가 나라를 3分하여 公家에는 하나

10) 위의 책, 11쪽 上左.

11) 위의 책, 11쪽 上左-下右.

12) 위의 책, 11쪽 下右.

만 바치고 吏가 둘을 먹으니 魯 나라의 三家보다 훨씬 심하다”13)라거나, ”民에서 나온 것이 4라면 公에 납부되는 것은 1이다”14)라고 하여, 民이 公稅로 낸 것 중에서 이서가 그 2/3 내지 3/4을 중간에서 착복하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민간에 있었는데, 향리들의 일을 익히 보았다. 나라를 병들게 하고 민을 해치는 것이 끝이 없었다. ‘鄕史論' 10首를 지어서 그 폐단을 갖추어 말했거니와, 지금이라도 正하지 않으면 바야흐로 닥쳐올 禍이 반드시 입에 올리기도 어렵게 될 것이다. 나라가 망하고 民이 다 죽은 다음이라야 그만 둘 것이다.15)

정약용은 이서의 중간 수탈을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는 망하고 民은 모두 죽고 말 것이라고 하였다. 민이 모두 죽고 말 사태의 예를 보기로 한다.

(강진에서 한해에 加徵되고 있는 쌀이―인용자) 모두 합하면 쌀 5,924두인데, 나라에서는 모르고 있지만 民은 내고 있다. 현령이 原料로 하지 않고 감사가 봉록으로 하지 않으며, 太倉에서 모르고 호조에서도 모르는데, 오직 향리 한 둘이 하늘이 내려준 祿으로 여기니, 고금 천하에 이런 일이 있겠는가. 내가 본 것은 마침 이 1년치뿐이었는데, 만일 평년이어서 災減이 많지 않으면 下下田 2천여 결에서 또 쌀 4천 두를 추가로 얻을 것이니, 그 수를 총계하면 만 두를 넘을 것이다. 내가 본 것은 마침 이 1현뿐이었는데, 호남 53개 고을이 고을마다 반드시 그러할 것이니, 이것을

13) 위의 책, 권 7, 地官戶 田制 8, 131쪽 上右.

14) 『全書』5, 『牧民心書』, 貢納 348쪽 下右.

15) 『全書』5, 『經世迫表』, 秋官刑曹 제5, 32쪽 下左.

총합하면 만 석을 넘을 것이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16)

우리나라 제도는 보통 1결의 전지에 전세 4두, 삼수미 2두 2승, 대동미 12두를 징수하는데, 그것을 조운하는 船價는 그 중에서 나오니, 1결에서 거두는 것은 18두 2승에 불과하다. (중략) 그렇다면 1결에서 거둔 것으로서 國用에 쓰이는 것은 기껏 15두에 불과하다. 그러나 민간에서 세를 거둘 때는 섬[] 같은 말로써 34두롤 거두는데, 이것을 서울 말[斗]로서 말질하면 적어도 45두를 내려가지 않는다. 이 또한 民이 내는 것은 3인데 公에서 받는 것은 1이다. 위로는 나라를 削하고 아래로는 민을 하여 그 중간에서 살찌는 것은 탐관과 활리이다. 어찌 슬프지 않은가.17)

이서에 의한 위와 같은 중간 수탈로 말미암아 국가재정의 상태는, "국가의 세입이 평년에도 12만 석에 지나지 않으니 흉년을 만나는 경우에는 京江으로 실어 나르는 곡식은 매양 수만 석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의 경비는 장차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18)를 걱정해야 될 상황이었다.

4. 농민 부담의 割地的 分殊性

정약용은 자신이 직접 목도한 바 강진현에서의 田結 • 雜役이, 國納과 船給과 邑徵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고 있음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읍징에 속하는 28개 항목의 稅目19)에 대하여 "지금 郡縣에서

16) 위의 책, 制 7, 123쪽 下右.

17) 위의 책, 지관호조 제2, 11쪽 下右.

18) 위와 같음.

19) 抽稿 1984, 『조선후기 농민봉기의 정치의식』, 『한국인의 생활의식과 민중예술』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6-28쪽.

의 所用(支出―인용자)은 도시 國法이 아니다. 그 賊役 • 徵敵은 모두 이서의 腐에 의하여 이루어진다"20)라고 하여, 고을에서의 結役 • 雜役이 이서들의 窓意에 의하여 시행되고 있음을 밝혔다.

지금 우리나라는 祖宗의 법전 이외에 감사가 증액하고 현령이 증액하고 이서가 증액하고 官隸가 증액하고 里正이 증액하여, 명령이 여러 갈래로 나와 바가지를 쪼개듯이 오로지 멋대로 하여 어지럽고 기강이 없으며, 법도가 날로 무너진다. 한 번이라도 개혁하자는 논의가 아래에서 일어나면, 문득 "조종의 법을 가벼이 고칠 수 없다”라고 한다. 속담에 "새 법을 내지 말고 옛 법을 버리지 말라”는 것을, 세상에서는 名言이요 至論이라고 한다. 그러나 국가에서 고치지 않고 답습하는 옛 법은, 고려말의 폐정과 연산군 때의 餘毒과 임진왜란 직후에 임시로 조처했던 것이 많고, 그 나머지는 모두 수령과 이서와 관예가 自制한 것인데, 어찌하여 조종의 구법이라고 일컫는가.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邑各不同'(고을마다 같지 않다―인용자)이라고 하는데, 대저 邑各不同이라는 것은 놀랄 만한 말이다.21)

자의적 수탈 행위는 이서에 국한되지 않고, 감사 • 현령 • 관예 • 이정들도 하였고, 그것이 관행이 되고 있었다. 그 결과로서의 邑各不同의 구체적 사례를 정약용은 다음과 같이 예시하였다.

여러 고을의 稅米의 액수는 고을마다 각기 같지 않다. 남쪽 변두리의 몇 고을을 두고 말하건대, 나주는 전지 1결마다 쌀 45두를 바치고, 강진은 전지 1결마다 쌀 30두(방납의 경우에는 35두이다-원주)를 바치고 해남은 전지 1결마다 쌀 25두(방납의 경우에

20) 『全書』5, 『牧民心書』, 守法, 340쪽 下左.

21) 『全書』5, 『경세유표』, 田制 7, 1刃쪽 上下.

는 30두이다―원주)를 바치고, 영암은 전지 1결마다 쌀 24두를 바치고, 장홍은 전지 1결마다 쌀 28두를 바친다. 대체로 役의 다소에 따라서 그 액수가 오르내리지만 京司에 상납하는 1결마다의 세미 액수는 여러 고을이 모두 같아서 20여 두일 뿐이다(전세가 6두이고 대동이 12두이고 선가 잡바가 또 2, 3두이다-원주).22)

세수 행정 담당의 각급 관리의 자의와 관련되는 것이지만, 그 구체적 요인은 다음과 같은 것이기도 하였다.

지금 남쪽 변두리 여러 고을의 計版에 실려 있는 것이 24, 5두밖에 되지 않는 것은, 그 부세 이외의 잡세를 茨結에까지 고루 부과한 때문이고(해남 • 영암 등이 그러하다-원주) 그 계판에 실려 있는 것이 3, 40두나 되는 것은 부세 이외의 잡세를 모두 原結에만 부과하였기 때문이다(나주 • 강진 둥이 그러하다-원주).23)

5. 間田制와 井田制

1) 間田制

정약용은 그의 나이 38세 때인 1799년(정조 23)에 쓴 <田論>에서 여전제 토지제도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주 4)의 글에 이어서 "그런데도 조정에 있으면서 애쓰고 힘써 富人의 재산을 덜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보태줌으로써 民의 재산을 고르게 하는 데에 힘쓰지 않는 자는, 君牧의 道로써 君主를 섬기는 사람이 아니다"24)라

22) 『全書』5, 『목민심서』, 稅法 상, 395쪽 下左.

23) 위의 책, 稅法 하, 400쪽 下左.

고 하여, 토지소유에서의 분화를 시정하여 均産을 이룩하려고 하였다.

士는 열 손가락이 유약하여 힘써 일할 수 없으니 밭을 갈겠는가. 김을 매겠는가, 잡초를 불사르겠는가, 거름을 하겠는가. 이름이 장부에 기록되지 못하면 가을에 분배가 없을 것이니 장차 어찌 하겠는가. 아아 내가 여전법을 하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대체 士란 어떤 사람인가. 士는 무엇 때문에 손발을 놀리면서 남의 전지를 빼앗아 합치고 남의 노동력으로 밥을 먹는가. 대저 士가 놀고먹기 때문에 地利가 다 개발되지 않는다.25)

정약용은 지주전호제를 타파하기 위하여 여전제를 제기하였다. “間에는 여장을 두고 무릇 1려의 전지는 1려의 사람으로 하여금 공동으로 농사짓게 하여, 내 땅이니 네 땅이니 하는 구별을 없앤다'’26) 라고 하여, 토지사유제를 철폐하고, 토지共有制 • 공동노동제를 실시함으로써 지주전호제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전지는 10頃이고 그 아들은 10인이었다. 아들 1인은 전지 3경을 얻고, 2인은 2경씩을 얻으며, 3인은 l경씩을 얻게 되니, 그 나머지 4인은 전지를 얻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부르짖어 울고 뒹굴면서 길에서 굶어 죽는다면 그 사람이 남의 부모 노릇을 잘한 사람이겠는가. 天이 民을 낳고는 먼저 전지를 두어서 그들로 하여금 살면서 밥먹게 하고, 또 그들을 위하여 군주를 세우고 목민관을 세워서 백성의 부모가 되게 하여, 民의 재산을 均制하여 다 함께 살도록 하였다. 그런데도 군

24) 社 3)과 같음.

25) 『全書』1, 田論 5, 224쪽 上左.

26) 위의 책, 田論 3, 223쪽 下左.

주와 목민관된 사람이, 그 여러 아들이 서로 쳐서 빼앗아 남의 것을 합쳐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팔짱만 끼고, 눈 여겨 자세히 보고서도 이를 금지하지 못하여, 강한 자는 더 갖게 되고 약한 자는 떠밀려서 땅에 넘어져 죽는다면, 그 군주와 목민관된 사람은 남의 군주와 목민관 노릇을 잘한 사람이겠는가. 그러므로 능히 民의 재산을 均制하여 다 함께 살도록 한 사람은 군목자 노릇을 한 사람이고, 능히 민의 재산을 균제하여 다 함께 살도록 하지 못한 사람은 군목자 노릇을 저버린 사람이다.27)

均制民産 = 均産은 ‘天意'라는 파악에 근거하여 토지사유제 • 지주전호제를 그 원천에서 부정하였다. 여전제의 이론적 支柱의 하나가 均産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균산은 기계적 • 도식적인 것이지는 않았다. "대저 천하 사람이 다 농사짓기를 나는 진실로 원하지만, 천하 사람이 다 농사짓지 않아도 또한 허용할 뿐이다. 농사짓는 사람은 전지를 얻고 농사짓지 않는 사람은 전지를 얻지 못하도록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균전법과 한전법은 장차 농사짓는 사람에게 전지를 얻도록 하고, 농사짓지 않는 사람에게도 전지를 얻도록 하며, 工匠 일이나 상업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전지를 얻도록 하는 것이다. 대저 공장 일이나 상업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전지를 얻도록 하는 것은, 이것은 천하 사람을 거느리고서 놀기를 가르치는 것이니, 그런 법은 진실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은 아니다’'28)라고 하여, 모든 사람에게 計口分田하는 균전법을 배척하고 "지금 농사짓는 사람은 전지를 얻도록 하고 농사짓지 않는 사람은 전지를 얻지 못하도록 하려고 한다”2)라고 하여, 濃者得田 不爲農者不得田'의 원칙을 제시

27) 위의 책, 田論 1, 223쪽 上.

28) 위의 책, 田論 2, 223쪽 下右.

29) 위의 책, 田論 3, 223쪽 下左.

하였다. 그리고 "노동을 많이 한 자는 양곡을 많이 얻고, 노동을 적게 한 자는 양곡을 적게 얻는다. 힘껏 일하지 않고서 양곡을 많이 얻고자 노리는 자가 어찌 있겠는가. 사람들이 모두 그 힘을 다하면 地利가 충분히 개발될 것이다"30)라고 하여, 노동량에 따른 분배와 토지생산성의 증진을 연관시켰는데, 治田의 원칙이 맹아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주 28), 29)에서는 皆職의 원칙이 맹아로서 잠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동노동 생산물의 1/10 수준에서의 공세의 정액화로서 "나라에는 고정된 收入이 있고 民에는 고정된 稅가 있다"31) 라고 하여, 均稅의 원칙이 제시되고 있었다.

위에서와 같이 여전제 토지제도 개혁안의 이론적 支柱에는, 토지共有의 원칙 = 토지사유부정의 원칙 = 지주전호제도 폐절의식, 治田의 원칙, 皆職의 원칙, 均稅의 원칙이 공존하면서 구조적 일체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핵심은 토지공유의 원칙 = 토지사유 부정의 원칙 = 지주전호제도 폐절의식이었으며, 그 기저에는 ‘天意의 질서’로서의 均産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天意의 질서’로서의 균산 = 토지共有가 현실 속에서 현실화될 수 있는 계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天意의 질서’라는 초월적 규범만이 前面에 부각되어 있을 뿐이다.

2) 井田制

정약용은 1817년에 현존의 『經世遺表』를 일단 완결하였다. 권 5-9 전체에서 토지제도 개혁안으로서 구상 • 제시되어 있는 정약용의 안을 井田制라고 부르기로 하고, 정약용이 堯 • 舜 • 三王 시대에 실시되었다고 생각하는 토지제도를 井田法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30) 위와 같음.

31) 위의 책, 田論 6, 224쪽 下右.

권 5-9 전체에서 전개되고 있는 정전제론은 내용과 구성이 복잡하여, 정전제의 내용 • 성격 파악에는 크게 보아 다섯 가지 유형의 견해가 서로 엇갈리고 있다. 첫째는, 지주전호제의 폐절에 의한 균산의 실현은 포기하고, 지주전호제를 용인하면서 九一稅法을 실시함으로써, 治田 • 皆職과 均稅를 실현하려고 하였다는 견해이다.32)

둘째는, 九一稅法에 의하여 均眼를 실현하고, 지주전호제의 폐지에 의하여 토지국유화를 일단 이룩하고, 다시 토지를 재분배함으로써 사적 토지소유 • 사적 또는 독립적인 경영을 실현하고(均産), 이상을 기축으로 하여 농업생산력을 향상(治田)시키려고 하였다는 견해이다.33)

셋째는, 현실적으로 확립되어 있는 토지사유제와 지주전호제를 당장 폐지하기는 어려우니까 우선 과도적인 단계에서 구일세법에 의하여 균세와 치전을 실현하고, 이상적 • 종국적 개혁에서 토지국유화 = 지주전호제 폐절을 겨냥한 것이라는 견해이다.34) 현실적인 개혁(<정전의> 중심)과 이상적인 개혁 (<정전론> 중심)을 질적으로 구분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넷째는, 위의 견해를 더욱 철저화하여, 현실론과 이상론의 유기적 연관을 전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정전제론을 이원화하였다. 즉 정전제론에는 ‘정전의’와 ‘정전론’이라는 두 개의 독자적 개혁안이

32) 朴宗根, 1963, 『茶山 丁若鏞의 土地改革思想의 考察』, 《朝鮮學報》 28. 鄭奭鍾 1970, 『零山 丁若鏞의 經濟思想』, 『李海南博士華甲紀念史學論踏』 일조각. 恨鏞底 1983, 『茶山 丁若鏞의 井田制 土地改革思想』, 『金哲峻博士華甲紀念史學論設』 지식산업사.

33) 金容髮, 訪 3)의 글.

34) 成大磁 1987, 『茶山의 四業改革論』, 《大東文化硏究》 21,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鄭允炯 1990, 『出山의 財政改革論』, 『茶山의 探究』 민음사. 姜萬吉, 1990, 『茶山의 土地所有觀』, 『茶山의 政治經濟思想』 창작과 비평사. 安秉直, 1990, 『茶山의 臣業經營論』 위와 같은 책.

별개로서 병립하고 있다는 견해이다.35) 전자에서는 균세만이 겨낭되어 있고, 후자에서는 토지국유화(지주전호제 폐절) • 치전 • 균세가 함께 겨냥되어 있다고 하였다.

다섯째는, 정전제론을 철저하게 일원화하여, 정전제에서는 균세의 원칙만이 관철되고 있다는 견해이다.36)

위에서와 같이 정전제의 역사적 성격 문제에서는 여러 견해들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으나, 정전제의 내용은 정밀하게 해명되었다. 이하에서는 위의 분기화의 고리에 해당되는 점에 유의 • 注力하면서, 정전제의 내용과 성격을 더듬어 봄으로써 정약용의 토지제도 개혁안의 역사적 지향을 가늠해보려고 한다.

정약용이 堯 • 舜 • 三王 시대에 시행되었다고 생각하는 井田法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王土였다. 예컨대 ”先王之時에는 普天 莫非王土요 王土는 莫非王田"37)이었고, "옛날에는 天子 諸侯가 田主였으나, 지금은 온 백성이 전주"38)이며, "요 • 순 • 삼왕의 때에는 천하의 전지가 모두 官田이었다"39)는 데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정약용은 또 왕토주의가 義이고,40) 福이며,41) 天地公理이고,42) 太阿의 칼자루를 바로 잡고 있는 상태이며,43) 전지가 民田 • 私田으로 된 지금의 상태는,44) 義가 아니고, 禮가 아니며, 天地公理에 어긋나

35) 朴質勝 1986, 「丁若鏞의 井田制論 考察」, 《歷史學報》 110.

36) 李榮織 1991, 「丁若鏞의 井田制論의 構造와 歷史的 意義」, 『제4회 동양학 국제학술회의논문집』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37) 『全書』5, 『경세유표』, 전제 4, 109쪽 下右.

38) 위의 책, 전제 1, 정전론 3, 83쪽 下左.

39) 위의 책, 전제 5, 111쪽 下.

40) 注 7)의 글, 200쪽 下右.

41) 『전서』5, 『경세유표』, 전제 8, 133쪽 下右.

42) 『전서』5, 『목민심서』, 세법 하, 403쪽 上左.

43) 『전서』5, 『경세유표』, 전제 1 정전론 3, 83쪽 下左. 전제고 6, 방전의, 120쪽 下右-下左.

고,45) 太阿를 거꾸로 가지고 그 칼자루를 남에게 준 상태라는46) 것이었다. 결국 정약용은 왕토주의를 ‘福 질서’라고 인식하였다. 민전 • 사전으로 된 지금의 상태는 ‘世俗 질서’로 인식하면서, 양자를 對極化시키고 있다. 앞에서 제시한 정전제 연구의 다섯 유형도 결국은 예 질서 특히 토지국유제 질서와 세속 질서 특히 지주전호제 질서의 관계 구조의 파악 문제에서 크게 두 갈래로 갈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양자택일의 파악이었고(첫째, 넷째, 다섯째), 다른 하나는 세속 질서에서 예 질서에로의 이행이라는 형식으로서의 통일이었다(둘째, 셋째).

필자의 좁은 생각으로는, 정전제론 안의 福 질서는 그의 정전제 토지제도 개혁안의 자연법적 정당성의 지표였고, 세속 질서는 그 안에서만 토지제도 개혁안이 실현되는 객관적 조건 • 기반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정전법은 오늘에서 회복될 수 있다. 다만 아득하게 생각하고 마음을 급히 하여, 唐 • 吳 시대와 같게 하기는 기대하거 어렵다고 개탄해서는 안 된다. 우려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죽 옛날에는 천자 제후가 전주였으나 지금은 온 백성이 전주인데, 이것이 정전법의 회복을 도모하기 어려운 점이다. 반드시 수백년을 두고 혼들리지 않고서, 차츰 차츰 회수하고 차례대로 시행한 다음이라야 先古之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처음에 限田法 • 名田法 • 均田法 둥을 하다가, 오랜 뒤에 太阿之柄을 환수하면 병에 담긴 물을 쏟는 것처럼 거의 술술 막힘이 없을 것이다.47)

44) 『전서』5, 『경세유표』, 전재 5, 110쪽 下左. 전제 4, 105쪽 上右.

45) 위와 같은 쪽.

46) 『전서』5, 『경세유표』, 전제 4, 105쪽 上右. 108쪽 上左. 108쪽 下左. 109쪽 下右 전제 5, 111쪽 下左.

47) 위의 책, 전제 1, 정전론 3, 83쪽 下左.

言表上으로는 王土制의 점진적 회복이 전망되고 있으나, 한전법 • 명전법 • 균전법 등은, 정약용이 세속 질서에서의 시행을 명백히 거부하고 있으므로,48) 왕토제의 회복은 사실상으로는 포기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先古之法’의 회복이 ‘수백 년’ 후에야 가능하다는 말도 사실상의 포기를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도 왕토주의를 명언적으로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예 질서이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왕토제는 예 질서일 뿐 세속 질서일 수는 없었다. 현실에서의 왕토주의의 포기는 선행 연구 모두에서 이미 극명하게 밝혀졌다. 예컨대 정전제 토지제도 개혁안은 "사적 대토지소유와 그에 기초한 지주제가 역사 불가역적인 추세로 성립, 발전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에 발을 딛고서, 나아가 그러한 현실을 오히려 개혁의 전제조건으로서 적극 용인하면서",49) 구상되고 제기된 것이었다. 따라서 정전제 토지제도 개혁안에서 토지의 사적 소유권은 철저하게 존중되었다.50)

지금 나라 안 전지는 私田 아닌 것이 없다. 장차 이를 어찌 할 것인가. 장차 크게 함이 있게 하려는데 자잘한 절차에 구애될 것인가. 무릇 정전으로 할 만한 곳은 그 긍정 여부에 관계없이 井으로 획정한 다음에 땅 값을 알아보아서 公田 1區는 官에서 그 값을 지출하는데, 대략 후하게 하도록 한다. 사전 8구는 時占(모든 전지는 왕전이다. 私主를 田主라고 할 수 없으므로 時占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하 모두 이와 같으니 읽는 자는 살필 것이다-원주)에게 알아보아서, 그 8구가 모두 한 사람의 전지인 경우에는, 이 井 저 井으로 쪼개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 이전의 상태대로 한다. 다만 시점으로 하여금 8夫룰 엄선해서 8區를 갈라주

48) 証 52), 53), 54) 참조.

49) 証 36)의 글, 224-225쪽.

50) 『전서』5, 『경세유표』, 전제 9, 정전의 1, 140쪽 上左.

는데, 1夫가 2福(200敵)에는 이르지 않게 갈라 주면 이것이 井田이다.51)

지주의 사적 소유권과 지주전호제 경영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존중되었다. 정약용의 토지제도 개혁안에서, 왕토제는 예 질서에서만 존재하였을 뿐, 세속 질서에서의 관철은 거부되었다.

정약용의 정전제에서의 均田의 문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인구라는 것은 워낙 변동이 심하여 기술적인 점에서도 計口分田하는 균전법은 시행될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 "요 • 순 • 삼왕 때에는 천하의 전지가 모두 官田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게 할(계구분전의 균전법 - 인용자) 수 없었"52)으며, 따라서 "균전은 선왕의 법이 아니었다”53)라고 하였는데, 말하자면 균전법은 요 • 순 • 삼왕의 법=선왕의 법=예 질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균전법은 옛날부터 여러 번 시행되었다가 여러 번 폐지되었다. 비록 밤낮으로 생각하고 천 가지 방법 만 가지 계책으로서 시행해 보았지만, 마침내는 무너지고 갈라지고야 말았다”54)라고 하여, 균전법은 세속 질서로 될 수도 없었다고 하였다. 죽 계구분전의 균전법은 예 질서도 아니었고 세속 질서도 될 수 없었다.

정약용의 정전제에서의 均産의 문제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정약용은 ‘‘先王이 民을 골라서 전지를 주는 (중략) 分田之法에서는 更點이 治田에 있었지 制産에 있지 않았다”55)라고 하고, 또 "진실로 한갖되이 制産(均産-인용자)으로써 마음먹었다면 식구가 적고 경작 능력도 약한 자는 마땅히 上等地롤 얻어서 그 노고를 덜게 하

51) 위의 글, 139쪽 上.

52) 위의 책, 전제 5, 111쪽 下左.

53) 위의 책, 전제 4, 109쪽 下右.

54) 위의 글, 100쪽 下左.

55) 위의 글, 104쪽 下右.

였을 것이요, 식구가 많고 경작 능력도 강한 자는 마땅히 下等地를 얻어서 그 부지런함을 나누어 주도록 하였을 것이다. 지금 그 分田法이 이처럼 상반되니 뜻이 치전에 있었지 制産에는 있지 않음이 이미 명백하지 않은가”56)하고 하여, 先王之法 = 예 질서에서는 制産= 均産에 里開이 있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러한 균산 인식은, <田論>에서의 균산 = 天意라는 인식57)과는 극히 대조적인 점이 주목된다.

한편 정약용은 ”太阿之柄이 여전히 거꾸로 民에게 쥐어져 있는 이때에 계구분전함으로써 均萬民之産業(균산―인용자)하려는 것은, 필연코 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58)라고 하고, 또한 ”이러한 계책(九一稅法의 정전법-인용자)으로 나아가지 않고 먼저 下民之産業을 엿보아서 損富而益貧하려는 것은 무익한 虛務이다"59) 라고 하여, 均萬民之産業 = 損富益貧 = 均産은 세속 질서가 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均産은 예 질서도 아니었고 또한 세속 질서로도 될 수 없었다.

정전법의 제2원칙은 治田이었다.60) 치전이란, "적합한 사람을 얻어서 전지를 맡기고, 그가 힘을 다하여 농사지으면 곡식 소출이 많아질 것이고, 곡식 소출이 많아지면 民食이 족하다. (중략) 이것이 聖人의 뜻이다"61)라고 하듯이, 토지생산성의 증진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禮 질서의 핵심적 기둥의 하나였다.

정전법에서의 치전의 원칙에 의한 구체적 분전법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는 계구분전하는 것이 아니라62) ‘災者得田 不爲戱者不得

56) 위와 같은 쪽.

57) 注 27)과 같음.

58) 『전서』5, 『경세유표』, 전제 5, 111쪽 下左.

59) 위의 글, 110쪽 下右.

60) 注 55), 56) 참조.

61) 위의 책, 전제 4, 104쪽 下左.

田'62) 하는 것이었댜 둘째는 ‘以口而爲主' 하지 않고 '以田而爲主'하여,61) 먼저 전지의 총수를 헤아리고 그 다음에 경작 능력이 많은 자를 엄선하여서 능력의 많고 적은 순서에 따라 ‘計敵而授之(묘를 계산하여 준다)’ 하여 나가는데, 다 배분되어 더 나누어줄 전지가 없게 되면 전지 배분을 종결시켜 버리고 다시 더 배려하지 않는 것이었다.65)

셋째 '계묘이수지’의 원칙은, "古法에서는 一家에서 一畉를 專治하였는데, 지급은 그렇게 될 수 없다”66)라거나, ”先王之法에서는 (중략) 一家에 100묘이고 加滅이 없다"67)라고 하듯이, 者 1家에 一畉 = 100묘씩을 획일적으로 배분하는 것이었다. 넷째 배분되는 농지의 넓이에서는 농자 내부에서 차등이 없었으나, 농가의 경작능력에 따라 上地 • 中地 • 下地 즉 不易田 • 一易田 • 再易田으로 3구분하여 배분하였다.68)

정약용은 ‘‘지금의 急務는 條賊를 가볍게 하여 民을 휴양케 하고 牛息케 함으로써 현재의 전지의 地力이 다 개발될 수 있게 함에 있을 뿐이요, 전지 개간은 급한 바가 아니다”69)라고 하여, 禮 질서에서의 治田의 원칙을 세속 질서에서도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전지는 天子와 제후의 소유였다. 천자와 제후가 이 전지를 가지고서 농부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지금의 富人이 자기의 전지를

62) 社 52), 53) 참조.

63) 위의 책, 전제 5, 110쪽 下右.

64) 위의 글, 11쪽 下右.

65) 위의 책, 전제 4, 104쪽 下左.

66) 위의 책, 전제 10, 정전의 2, 145쪽 下左.

67) 위의 책, 전제 5, 111쪽 下右.

68) 위의 책, 전제 4, 104쪽 上左.

69) 위의 책, 전제 12, 정전의 4, 158쪽 上左.

佃夫(佃戶- 인용자)들에게 나누어 맡기는 것과 같다. 富人이 전부에게 전지를 나누어 맡길 때에는 반드시 건장하고 부지런하며, 농사일을 도울 수 있는 아내와 자식과 머슴과 노비가 있는 자를 택해서 맡긴다. 천자와 제후가 농부둘에게 전지를 나누어주는 방식이 富人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70)

지금 富人들이 佃作(借耕- 인용자)을 나누어줄 경우, 반드시 노동력이 많고 소도 가진 자를 골라서 기름진 땅을 맡기고, 쇠약하여 경작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척박한 전지를 맡긴다. 先王께서 民을 가려서 전지를 준 방식이 富人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71)

현실에서 존재하는 지주전호제 경영에도 치전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는 경우가 있음을 목도, 체험하였기에, 정약용은 치전의 원칙울 세속 질서에서도 관철시키려고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禮 질서에서는 철저히 부정되었던 지주전호제가 세속 질서에 용인될 수 있었던 것은, 현실에서의 역사 불가역적인 추세로서의 지주제의 성립이란 조건도 있었지만, 지주전호제경영에도 치전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었던 역사 불가역적인 추세가 진전되고 있었다는 객관적 조건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禮질서에서는 부정되었던 지주전호제가 세속 질서에서 용인될 수 있었던 접점 • 매개는 치전의 논리였다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禮 질서에서의 왕토주의와 世俗 질서에서의 지주전호제 • 사적토지 소유는 치전의 원칙을 접점 • 매개로 하여, 정전제 속에서 유기적인 통일구조 = 일원적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정전제에서의 치전의 원칙에 의한 分田法의 구체적 내용을, 정전법에서의 분전법과 다른 점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기로 한다. 첫

70) 위의 책, 전제 1, 정전론 3, 83쪽 下右.

71) 위의 책, 전제 4, 104쪽 下右.

째 정전제에서의 분전은 토지소유의 재배분이 아니라 田地耕作의 재배분이었다. 둘째 정전법에서는 일률적으로 모든 농민이 100묘 = l區씩을 분배받는 것이었으나, 정전제에서는 경작 능력에 따라 농부를 原夫와 餘夫로 나누어서 각기 100묘 • 25묘씩을 경작 배분하는 것이었다.72) 같은 原夫 안에서는 경작 능력에 따라 上地 • 中地 • 下地로 나누어서 경작 배분하였다.73)

셋째 自耕其田者(自耕此 = 자작농-인용자)의 경우이다. 정약용은 "자기 땅에서 스스로가 농사짓는 경우는 官에서 금단할 수 없다”74)라고 하여, 자경농은 능력에 따른 기준 면적을 초과하여 경작하더라도 그대로 허용된다고 하였다. 자경농의 자경지 면적이 능력에 따른 기준 면적에 미달인 경우에는 당연히 伯作地가 그 미달량만큼 배분되는 것이었다. 넷째 전호와 일부 자경농(가준 면적 미달의-인용자)의 경작지 재배분은 官에서 조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私田 8區가 한 지주의 전지로 집중되어 있는 경우에는 그 사적 지주가 佃夫를 선정하였다.75)

정전제에서의 治田의 원칙에 의한 分田法은 경작 재배분이었다. 능력에 따른 기준 면적 미달의 自耕과 전체 佃戶를 대상으로 하는 경작 재배분이었지만, 특히 전호 농민을 대상으로 한 경작 재배분에 重心이 있었다. 따라서 정전제에서의 치전의 원칙은, 경작 재배분에 의한 佃戶경제의 안정과 지주경영의 생산력 증진에 그 과녁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바꾸어 말하면 정약용은 지주경영에 치전의 논리를 관통시킴으로써, 현실의 지주전호제 • 지주경영을 치전적인 것으로 전환시켜 나가려고 기도하였다고 생각된다.

72) 위의 책, 전제 3, 96쪽 下左,

73) 위의 책, 전제 4, 104쪽 下右.

74) 위의 책, 전제 10, 정전의 2, 145쪽 下左.

75) 注 51)과 같음.

다음 皆職의 문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先王之意는 天下之民이 다 같이 得田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天下之民이 다 같이 受職케 하려는 것이었다. 으로서 受職한 자는 전지를 경작하고, 工으로서 수직한 자는 器를 제작하며, 商者는 治貨하고, 牧者는 짐승을 키우며, 具者는 材木을 다스리고, 嬪者는 배를 짜며, 各自가 그 職으로서 먹고 살 수 있게 하였다.76)

先王之法에서는 9職을 萬民에게 맡겼다.77)

정약용은 선왕지법 = 禮 질서에서는 皆職과 사회적 분업이 이룩되어 있다고 인식하였고, 사회적 분업은 9職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구체적으로는 三, 園團, 漠衡, 販牧, 百工, 商賈, 嬪婦, 臣妄, 民 둥 9職이었다.78)

정약용은 "어떤 부모에 열 아들이 있으면, 농사지을 만한 아들은 농사짓게 하고, 工匠 일 할 만한 아들은 공장 일을 하게 하고, 장사할 만한 아들은 장사케 한다. 그 職가 이미 나누어져 그 살림살이도 넉넉해진다”79)라고 하여, 세속 질서에서도 皆職은 가능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세속 질서에서의 9職을 士, , 商, 工, 團, 牧, 處 嬪 走로 구상하였다.80) 禮 질서의 9직에서 臣妄이 탈락되고 대신에 士가 들어간 것이 세속 질서의 9직이었다. 예 질서 = 周而5에서는 士가 9職 밖의 특권적 위치였으나, 정전제에서는 士가 民職 = 9職의 하나로 새로이 편입되고 있다. 정약용의 9직의

76) 위의 책, 전제 5, 110쪽 上左-下右.

77) 위의 책, 전제 5, 111쪽 下左.

78) 위의 책, 권 10, 地官修制 賊貢制 1, 九賊論, 184쪽 下右.

79) 위의 책, 전제 1, 정전론 3, 83쪽 下左.

80) 위의 책, 전제 12, 정전의 4, 159쪽 上左.

독창적 견해였다고 생각된다.81) 皆職의 원칙은 斜 질서와 세속 질서 모두에서 관철되고 있었고, 또한 治田의 원칙과 유기적으로 유착되어 있었다.

정전제에서의 均稅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정약용은, 食官猶吏가 위로는 국가를 削하고 아래로는 民을 刻하면서 중간에서 살찌는 것을, ‘‘옛날 聖人은 그리 될 줄을 알고 井田法을 제정하여 미리 그 부정을 막았다"82)라고 하여, 정전법에서의 均稅의 원칙은 聖人이 제정한 것 즉 禮 질서라고 파악하였다. 그는 또 "貧官과 猶吏가 농부를 침해하는 것(앞의 주 10) - 17)의 사태-인용자)을 금단하려면 井勘 九一之法을 시행하지 않고서는 어쩔 수가 없다. 요 • 순이 다시 등장하더라도 필시 이 방법 밖에는 없다"83)라고 하여, 세속 질서에서 농민경제의 안정과 국가 재정의 충실을 기하기 위해서는 정전제에 의한 均稅가 유일하고도 가능한 방법이라고 강조하였다. 균세의 원칙은 예 질서와 세속 질서 양쪽에 모두 관철되고 있었다.

정약용은 주 21), 22), 23)에서와 같은 ‘邑各不同’의 현상에 대하여 주 21), 23)의 기사에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一王이 위에 있는데 어찌 감히 邑各不同인가. (중략) 一國은 一身과 같다. (중략) 一國은 一軍과 같다. (중략) 邑各不同이라는 것은 亂亡의 방법이다.84)

지척에 있는 고을끼리 賊稅이 판이하게 다르니 이러고도 나

81) 金泳鎬, 1985, 『丁茶山의 職業觀』, 『千寬宇先生還曆紀念韓國史學論』 정음문화사, 734쪽.

82) 『전서』5, 『경세유표』, 권1, 지관호조 제2, 11쪽 下.

83) 위의 책, 전제 8, 132쪽 上左.

84) 위의 책, 전제 7, 127쪽 下右.

라에 법이 있다고 하겠는가.85)

위에서와 같은 邑各不同의 사태를 시정하기 위해서도 九一稅의 정전법을 시행함으로써, 金石같이 劃定되고 衡尺같이 公平한 ‘一王之制'86), 一王之國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一王之制’87), 남과 북에서 다르게 관행되고 있는 井租法도 쇠를 자르듯이 남북의 습속이 통일되어야 할 ‘一王之制'88)를 확립해야 한다고 정약용은 강조하였다.

정전제에서 경작 농민의 公稅 부담은 경작 규모에 정비례하는 것이었다. 상인과 수공업자도 그 경영 규모와 수익 수준에 비례하는, 영업세 내지는 수익세89)를, 근대적인 성격에 거의 접근된 소득세90)를 부담하도록 구상되고 있었다.

9職의 하나를 職事로 하는 民은 직사 활동의 규모 또는 수익, 소득 수준에 정비례하는 公稅룰 부담하였는데, 이것이 均稅의 핵심 내용이었다. ‘一王의 一國으로 一統된 國家 體制' 하의 위에서와 같은 民은 ‘均民’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지주는 구일세와 병역 의무에서 면제되어 있었고, 농민만이 병역의 의무를 짊어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정약용의 均稅 • 均民 원칙의 허점이었다.

6. 맺음말

『經世迫表』의 원명은 『福本』이었다. 그 머리말인 ‘引'에서 정

85) 『전서』5, 『목민심서』, 세법 하, 400쪽 下左.

86) 『전서』5, 『경세유표』, 전제 11, 정전의 3, 153쪽 上左.

87) 『전서』5, 『목민심서』, 平賊, 427쪽 下右.

88) 위의 책, 세법 하, 403쪽 上左.

89) 姜萬吉, 1990, 『丁若鏞稅制改革論』, 『茶山學의 探究』 민음사, 131, 140-141쪽.

90) 鄭允炯 1990, 『茶山의 財政改革論』, 위와 같은 책, 311쪽.

약용은 "禮는 天理에 合하고 人情에 協하며, 法은 두려워 할 것으로써 위협하고 슬퍼할 것으로써 협박하여 民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조심해서 감히 犯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先王은 禮로써 法을 삼았는데, 後王은 法으로써 法을 삼았다. 이것이 體와 法이 같지 않은 것이다"91)라고 하여, 『경세유표』에서의 논의의 차원은 禮가 아니라 法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先王의 禮의 질서와 後王의 法의 질서가 대극화되어 있다. 정치 • 경제 • 사회를 파악 • 인식하는 ‘이론 틀’의 두 기둥이 禮 질서와 세속 질서임이 드러나고 있으며, 『경세유표』에서의 개혁안은 세속 질서에서의 실현을 전제로 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정약용은 정전제론에서도 사회경제현상을 禮 질서와 세속 질서를 기축으로 하여 분석하고 또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정전제 토지제도 개혁안에서 논의된 핵심 이념은, 均産, 均田, 王土制, 治田, 皆職, 均稅 등이었다. 균산과 균전은 禮 질서와 세속질서 모두에서 부정 • 거부되었다. 王土制는 禮 질서에서는 긍정되었으나 세속 질서에서는 부정되었으며, 治田 • 皆職 • 均稅는, 禮질서와 세속질서 모두에서 긍정되었다. 정전제에서의 治田 • 皆職 • 均稅는, 정전법의 것에서 역사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들이었다. 治田은 맹아적인 잠재에서 뚜렷한 自立化에로, 전면적으로 開{t되었고, 皆職에서는 士의 民職 • 九職에로의 편입이라는 역사적 발전이 있었으며, 均稅에서는 均民이 새롭고도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특히 治田의 뚜렷한 自立化는, 지주전호제 내부에서 ‘坐收的' 지주제에서 ‘治田的' 지주제에로 전환시킬 수 있는 내재적 요인을 창출할 수 있는 것으로서, 동태적 지주제에로의 전환 가능성을 전망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되며, 따라서 治田의 뚜렷한 自立

91) 『전서』5, 『경세유표』, 권 1, 引, 1쪽 上右.

化는 사실상 재래의 정태적 지주전호제 • 지주경영을 객관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여기에 均民의 이념이 동반되는 정전제는, 治田을 매개로 하여 禪 질서에 일정한 내적 변용을 가하여, 세속 질서에 根着시킴으로써, 미래에 ‘一君,菓民의 一國體制92) = 國民國家' 수립을 지향하는 정치 • 경제 • 사회 개혁안이라고 생각된다. 質學의 사회경제사상의 역사적 성격도 같은 궤도의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정약용은, 18세기 말 19세기 전반기의 조선의 역사 현실이 내장하고 있는 역사적 가능성 즉 생산력에서의 발전적 동태를 남달리 예리하게 그리고 현실주의적 인식 방법으로 摘出하여, 그것에 바탕하여 미래 지향의 현실적 개혁안을 제기하였다고 생각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사회경제사와 質學의 관계의 일면울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92) 金泰永, 1900, 『茶山의 國家改革論序說』, 『茶山의 政治經濟思想』 창작과 비평사, 83쪽 참조.

韓國 科學史와 實學

朴星來

1.

한국 근대사의 思想的 특징을 ‘質學'으로 부르는 것은 이제 한국사 서술에서는 널리 인정되어 있다. 中國과 日本에서도 '實學'이란 용어는 사용되지만, 그것은 한국사에서처럼 한 시대의 知的 특징을 가리키는 역사 용어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역사서술에서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는 ‘實學’이란 용어보다는 좀 더 제한적 용어를 쓴다. 일본의 경우 蘭學과 洋學, 그리고 중국의 경우는 考證學 등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한국사에서도 實學이란 표현을 좀 더 한정해서 北學이란 말이 쓰여지기도 하지만, 아직 北學은 質學의 극히 일부 성격을 가리키는 말로 여겨질 뿐이다.

한국의 實學은 그 내용 속에 근대 서양 과학의 영향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국의 實學이 같은 시기의 중국이나 일본의 새 학풍보다 더 풍부한 서구 과학 내용을 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본과 중국의 당대 학풍에 비하자면 한국의 質學이 담고 있던 과학의 내용은 훨씬 빈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責學 속의 과학의 비중은 상당하다. 특히 중국

淸代 實學 속의 과학의 비중보다는 상대적으로는 더 무거웠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국 실학사에서 과학사를 뻘 수 없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최초로 한국사의 과학사적 전개를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해 낸 洪以裝은 그의 『朝鮮科學史』에서 조선시대 후기의 과학사를 서구 과학의 수입으로 특징짓고 있다. 그리고 당시 중국을 찾아가 서구 과학을 배워 오던 실학자들의 여행길을 "조선 근대 과학 사상에 있어 동트는 새벽녘의 하얀 모랫길'’로 비유하고 있다.1) 그만큼 근대서양 과학의 수용은 조선 후기의 실학 사상의 형성에 절대적 중요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국사의 실학은 그 시작이 서양 과학에서 비롯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倭亂과 胡亂을 거치고 난 조선 지식층 사이에 17세기 후반부터 자연스럽게 새로운 知的 몸부림이 일기 시작했고, 그것이 마침 새로 들어 오기 시작한 서구 사상에 자극받았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거의 2세기 동안 지속된 性理學的 질서에 대한 반작용 역시 새로운 思潮의 등장을 재촉해 준 요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어느 의미에서는 한국 실학사에서 서구과학이 차지하는 위치는 그 독자적 중요성보다는 그것이 실학의 존재 이유를 보강해 주었다는 측면에서 찾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사에서 실학자로 분류되는 학자들의 수는 아주 많다. 그런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학자들을 들면 그들은 거의 모두가 서양 근대과학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는 공통된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오늘날 역사가들의 기준에 따라 한국사에서의 실학이란 정의는 그 범위룰 조금씩 달리할 수 있지만, 그 모두가 공인할 정도의 대표적 실학 사상가들은 모두 과학의 문제

1) 洪以, 『朝鮮科學史』 (서울: 正音社, 1946) 235쪽.

에 일정한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한국 실학에서 근대 서양 과학이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두드러진 실학 사상가 몇 명의 경우를 들어 그들이 서양 과학을 어떻게 수용했고, 또 그것이 그들의 사상 형성 과정에 어떤 몫을 했던가를 생각해 보는 일에서 시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연구되어 있는 대표적인 실학 사상가들로 과학사에서도 뺄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진 대표적 학자들로는 李瀷, 洪大容, 朴齊家, 丁若鏞, 崔漢綺 등 5명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적지 않은 저작을 후세에 남겨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 작품 속에 상당한 서양 근대 과학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말고도 특히 조선 시대에 중국에 다녀 온 많은 학자들은 중국을 방문하는 동안 그곳에 살고 있는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가는 등 여러 가지로 서양 과학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이들 燕行使들의 서양 과학에 대한 관심 역시 한 가지 홍미 있는 과학사의 연구 분야가 될 것이기는 하다.2)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들 비교적 이름 없는 燕行使들 보다는 널리 알려진 실학자 가운데 대표적 인물 5명의 과학 사상에 대해 살펴보는 것으로서 質學 속의 西洋 科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2.

가장 대표적인 초기의 실학자로 근대 과학 사상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경우로는 우선 李瀷(1682-1764)을 들 수 있다. 그가 평소에 썼던 글을 모아 놓은 『星湖傳說』에는 적지 않은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여러 사람 서양 인물의 이름이 등장하고,

2) 朴星來, 『韓國 近世의 西歐 科學 受容』, 《束方學志) 20(1978).

또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책 이름이 나오는가 하면, 실제로 그 책울 읽고 그 내용을 자기 말로 기록한 것들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이들 책은 서양 책을 직접 볼 수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中國에서 번역되어 나와 있던 漢釋 西學書를 가리킨다.

그가 실제로 읽고 또 그의 글에 인용한 과학기술 관련의 책들을 들면 다음과 같다.

『職外紀』 1623 文儒略(Julius Alleni); 『천학초함』에 포함

『天文略』 1615 陽耶諾(Emmanuel Diaz); 『천학초함』에 포합

『主制群徵』 1610 湯若望(Adam Schall)

『幾何原本』 1607 利i閉~(Matteo Ricci): 『천학초함』에 포함

『平儀說』 1611 熊三拔(Sabbatin de Ursis); 『천학초함』에 포함

『說』 1674 南懷仁(Ferdinand Verbiest)

『蓋通』 1607 李之의 『揮蓋通志說』이 확실

『七克』 1614 廊迪我(Didacus de Pantoja); 『천학초함』에 포함

이들 이외에도 그가 실제로 본 책은 더 있을 것이 확실하다. 예를 들면 그는 마테오 리치가 쓴 『天主質義』에 대해 跋文을 쓴 일도 있고, 그 밖에도 몇 가지 책을 더 본 것으로 여겨진다.3)

李瀷은 이들 漢譯된 서양 과학서를 읽고 또 당시의 학자들과 토론함으로써 서양 과학이 전해주는 새로운 내용을 받아들이고 있다. 가장 그에게 설득력 있게 보였던 부분은 서양 과학 가운데 특히 曆算學 부문이었다. 아담 샬[湯若望]이 만들어 놓은 새 역법 『時憲曆』을 들어 그는 ‘역법의 으뜸'(曆道之極)이라면서 만약 孔子가 다시 태어난다면 기필코 이 역법을 쫓으리라고 말하고 있다. 또 그는 땅덩이가 평평한 것이 아니라 둥글다는 확실한 말을 역시 서양 과

3) 朴星來 『星湖懷說 속의 서양 과학』, 《店檀學報》 59(1985).

학이 처음 분명히 전해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둥글게 생긴 땅 위에서는 사람들은 각기 자기 사는 곳이 가장 높다고 믿을 뿐이지, 중국을 세계의 가운데에 있다고 여길 것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 宜學의 한 가지 특성이 바로 慕華思想의 극복이었다면, 李瀷의 이와 같은 태도는 아주 대표적인 例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서양 천문학 지식으로부터 중국 학문보다 앞선 서양 학문을 발견했고, 그의 나라인 朝鮮이 中國보다 지리적으로 편벽된 자리에 있지도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이다.

李瀷은 12重天이나 9重天 등 서양인들이 알려 온 우주관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고, 우주의 크기 둥에 대해서는 몇 가지 자료를 소개하기도 하지만, 특히 이 분야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또한 땅이 둥글다는 데에는 깊은 관심을 보이지만, 땅이 自轉하여 낮과 밤이 생긴다는 地動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별로 동의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또 기하학 그 가운데 원근법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그 밖에도 李瀷은 서양의 안경이나 의학, 그리고 화약 무기 등에 대해서도 아주 적은 정도이기는 하지만 지식을 얻고 그것을 기록해 남겼다.

그러나 막상 李瀷의 思想에서 서양 과학이 차지하는 무게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이르면, 우리는 곤혹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가 남긴 『星湖僕說』은 3,057건의 기사로 짜여져 있는데, 이 가운데 서양 과학을 내용에 다루고 있는 기사는 60건 미만에 불과하다. 물론 이 백과전서처럼 꾸며진 책 속에는 天地, 萬物, 人事, 經史, 詩文의 5개 부문이 들어 있어서, 이 가운데 서양 과학을 내용으로 삼을 만한 부문은 天地와 萬物 두 부문밖에 없다. 이 두 부문의 기사는 547건이므로 서양 과학 관련 기사 60건이란 바로 547건 가운데 그만큼의 분량이라는 뜻이 된다.

여하튼 李瀷은 나름대로 서양 과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지만, 아직 그 관심은 아주 개인적인 것이고, 또 그의 사상 체계 전체에서는 적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정도였다고 판단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은 李瀷의 경우보다 洪大容(1731-1783)에 이르면 그 비중은 한결 커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4) 1세기 이상의 시간이 지난 다음이라는 두 사람 사이의 시간 차이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도 분명해 보인다. 바로 그 시간 동안에 훨씬 많은 淡譯 서양 과학서들이 국내에 도입되어 읽혀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사이에도 해마다 적어도 한 번씩 北京에 파견되었던 燕行使行에는 언제나 호기심 많은 학자들이 끼어서 그 가운데 일부 인사들은 서양 선교사들을 직접 만나거나 그들의 저서를 구해다가 읽었기 때문이다.

이런 열성은 바로 洪大容에게서 놀라운 정도로 강하게 드러난다. 李淡과 달리 洪大容은 北京울 직접 가서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학자이다. 그는 1766년 이른 봄 北京에 도착해서 60일 동안 그곳에 머물렀는데, 그 시간을 4일이나 쪼개서 南天主堂에 살고 있던 서양 선교사 = 과학자 두 사람을 찾아갔다. 당시 淸朝의 천문관서 欽天監을 총책임 맡고 있던 두 사람은 각각 欽天監의 監正과 監副였던 할러스타인[劉松齡〕과 고가이슬[範友管]이었다. 洪大容은 이들과 세 번이나 만나 오랜 시간 동안 筆談울 나눠 여러 가지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 보고 토론했다.

北京에서의 洪大容은 이렇게 서양 선교사 = 과학자들과의 직접 접촉을 통해 서양 과학 지식에 대해 유난스런 관심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여러 가지 서양 과학 문물을 직접 구경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들 선교사들을 찾아갔을 때만이 아니라 귀

4) 朴星來, 『洪大容의 과학사상』, 《한국학보》 23집(1981).

국 길에 競象를 찾아 들어가서도 다시 여러 천문기구들을 직접 관찰할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그가 직접 만져 보고 또 구경했던 것들 가운데는 자명종과 뇨종 등 여러 가지 시계가 있었고, 망원경과 안경, 풍금 등과 여러 종류의 천문 기구들이 있었다. 實學者들 가운데는 洪大容 만큼 여러 가지 서양 과학 가기들을 널리 구경한 학자는 다시없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다.

이처럼 실학자 가운데 가장 널리 서양 과학의 실물을 구경할 수 있었던 洪大容은 또한 가장 중요한 주장을 처음 내 놓은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즉 그는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분명하게 地球의 自轉說을 주장했던 것이다. 물론 그의 地轉說은 완전한 그의 독창이라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17세기에 나온 서양 선교사들의 漢譯서양 과학서 가운데에는 이미 옛날 서양에는 地球의 自이나 公轉을 주장하는 이론이 있었다는 사실을 소개해 놓고 있었고, 洪大容은 이런 글들을 읽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서양 선교사들의 책은 모두 地轉說을 잘못된 假說로 소개했을 뿐이지, 그것을 옳다고 지적한 것이 아니었다. 洪大容은 그릇된 說로 소개된 地轉說을 읽고, 오히려 그것이 옳을 것이라고 자신의 독자적 판단을 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洪大容의 地轉說은 그 자체 과학적으로는 그리 중요한 說이 되지 못한다. 서양의 知的 풍토와는 달리 동양에서는 地動說은 별로 혁명적인 학설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한가한 학자들의 상상력의 유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서양의 기독교 전통은 그리스의 자연 철학을 바탕으로 그 위에 神學 체계를 쌓아 갔기 때문에 地動說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地動說은 서양의 기독교 체제 안에서는 높은 革命性을 가지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달리 동양의 지적 전통(유교 또는 다른 사상적 틀을 포함하더라도) 속에서는 지구의 운동이란 아무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땅이 움직인다고 儒敎의 가르침에 충격을 줄 까닭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洪大容의 地轉監은 과학적 이론의 참신성이나 혁명성 때문에 중요하다기보다는, 그것이 상징하는 실학 사상의 자유분방함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한국 실학의 한 이정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다른 실학자들과 달리 홍대용은 주로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한 편의 긴 科學 논설을 남기고 있다. 1만여 자로 되어 있는 이 논설 「山問答」은 그의 물질과 우주에 관한 생각을 모두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전통적인 五行 사상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의문을 던지고 있다. 홍대용은 上下之勢란 말로 지구 둘레의 물체가 지구로 떨어지는 현상을 설명하고 지구 둘레의 공기충을 말했으며, 땅은 둥글어 하루 한 번씩 자전할 뿐 아니라 宇宙는 無限하며 그 무한한 우주 속에는 지구와 같은 천체들이 더 있을 수 있고, 그 천체 가운데에는 지구에 있는 인간같이 지능을 갖추고 있는 ‘우주인’도 있을 수 있다고 상상하고 있다.

洪大容의 이와 같은 상상은 대체로 과학적 근거가 없이 내세운 상상력의 산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은 그가 중국에 소개된 책들을 읽고 얻어낸 지식을 반영하고 있을 것으로도 생각된다 그러나 1760년대까지 그에게 주어진 정보의 질과 양이 지극히 제한된 것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창의적인 사고는 높이 평가할 가치가 충분하다.

그는 또한 당시에 이미 서양 과학의 특징이 親測 기구와 數學的접근 방법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의 문집에는 그가 집필한 수학 책으로 『節解需用』이 남아 있으며, 또 그는 자기 집 뜰에 있는 호수 안에 籠水閣이란 전각을 짓고 그 안에 여러 가지 천문 관측기구들을 만들어 보관했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그는 근대 과학의 특징 가운데 두 가지라 할 수 있는 수학적 방법

과 실험 관찰의 방법을 모두 꿰뚫어 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서양 과학의 특징에 대한 파악이 그대로 그 자신에 의해 실천에 옮겨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籠水閣에 軍天儀, 候鍾 統天儀, 測管儀 勿股儀 등을 만들어 두었다고 기록은 전하지만 그 관측 장치를 그가 실제 관측에 활용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또 아직 자세한 연구는 되어 있지 않지만, 그의 수학 책 『解需用』은 서양 수학의 수준을 깊이 있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3.

洪大容이 사상가로서 서양 과학의 정체에 어느 정도 접근한 認識에 도달하고 있었다면, 朴齊家(1750-1805)는 그에서 한 발을 더 내디뎌 서양 과학 특히 실용적인 서양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장하고 나섰다.5) 그가 莖商主義的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학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財物을 샘물에 비유하면서 朴齊家는 적당한 소비가 생산을 자극한다고 강조하면서 국내의 교역을 중요시함은 물론이고 해외 무역의 중요성까지 강조했다.

그의 主著가 『北學議』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朴齊家는 北學, 죽 당시 조선 사대부들이 경멸하고 가까이 하기조차 꺼려하던 오랑캐가 지배하는 중국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워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러 차례 중국 사행을 따라 북경을 방문한 일이 있었던 그에게는 중국의 앞선 기술 수준을 하루 속히 배워들이지 않고서는 나라의 발전이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5) 朴星來, 『박재가의 기술 도입론』, 《災植》 52(1981).

따라서 그의 기술 수용론은 주로 중국으로부터의 기술 도입을 강조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중국에서 기술을 배워 오는 길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우연히 생긴 기술 습득의 기회를 잘 활용하자는 주장이었다. 당시 중국의 배들은 끊임없이 조선 해안에 표류해 오고 있었다. 이렇게 표류해 온 중국의 선박과 인원을 조선 정부는 즉시 중국에 보내 버리는 관습이 있었다. 朴齊家에 의하면 이렇게 표류해 온 중국의 선원들이나 중국인 사이에 선박 기술자는 물론이고 다른 기술자들이 있을 수 있으니 그들을 송환하기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잘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을 중국에 송환하기 전에 그들로부터 배워 얻을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모두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물론 朴齊家가 추천한 제일 보편적인 선진 기술 습득의 방법으로는 책을 수입해 와서 연구하는 길이다. 그는 농기구의 개량을 위해서는 徐光啓의 『政全書』를 참고하라고 권하고 있으며, 자신은 중국에서 漢譯되어 나온 서양 의학서를 볼 수 없었다고 한탄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책을 통해 새로운 과학기술을 배우자는 생각은 당시의 학자들 사이에 상당히 널리 퍼져있던 보편적 태도였다.

그가 세번째로 주장한 방법은 상당히 새로운 주장이었다. 해마다 10명 정도의 전문성 있는 인원을 선발해서 中國에 파견하여 선진기술 둥을 배워 오게 하자는 것이었다. 경륜과 재능을 갖춘 사람을 10명 정도 해마다 中國에 파견되는 使行便에 함께 파견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기술에 대한 지식이나 기계 장치 동을 배워 오게 되는데, 이들이 배워 오는 지식을 국내에 보급하기 위해서는 담당 기관을 두자고 건의하고 있다. 이들은 한 번 선발되면 3회 파견되는데 이 과정에서 공을 세우면 상을 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처벌하자고 주장했다. 이런 기술 도입 방법을 시작하면 10년 안

으로 중국의 앞선 기술 수준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朴齊家가 내세운 마지막 네번째 기술 도입 방법은 앞의 어느 것보다도 참신하고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이기도 하다. 죽 그는 중국에 와서 활동하고 있던 서양 宜들을 직접 초빙해다가 그들로부터 서양 선진 기술을 배워들이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선교사들은 기하학에 밝고 온갖 이용후생의 기술에 능통하니 그들을 경비를 들여 초빙해다가 젊은이들을 교육하여 서양 기술을, 습득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천문학, 관측 기구, 천문 계산 등은 물론이고, 股桑, 醫藥과 건축, 광물, , 교통 수단 등등 모든 기술이 몇 년 안으로 크게 일어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그의 技術入論 4개조는 2세기 전의 조선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특히 서양 선교사들을 초빙해다가 그들이 보급하려는 기독교는 막고 그들로부터 기술만 배워 들일 수 있으리라고 상상했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단순한 생각일지도 모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유분방한 주장은 당대 買學者들, 그 가운데도 특히 北學派 학자들 사이에 퍼져가고 있던 지적 분위기를 어느 정도 대변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농기구와 건축 기술을 비롯한 일상 생활과 관련된 온갖 분야에서 그는 중국이 당시의 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술 수준에 앞서고 있었음을 주목하고 있다. 그의 이런 관찰은 물론 그의 여러 차례에 걸친 중국 방문을 통해 체험에서 얻은 관찰 결과였다.

하지만 朴齊家의 이와 같은 적극적 技術 導入論은 홍대용에 이어 직접 중국에서 발전된 과학기술 수준을 경험한 한국 실학자들이 보여줄 수 있었던 가장 강한 열망 그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박제가의 주장을 정점으로 한국 실학사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

이 차지하는 관심은 현격하게 줄어들고 말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그 직접적 원인을 1801년의 辛酉박해로 잡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기독교는 이 사건을 전기로 조선 사회에서 본격적인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이런 기독교에 대한 태도는 즉각 중국을 방문하는 당시의 조선 사신들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해마다 실시되는 使行 가운데 몇 학자들이 서양 선교사를 만나려 하거나 또는 북경의 천주당을 찾곤 했지만, 그런 호기심이 눈에 띄게 쇠퇴해 버린 것이댜 박제가가 주장했듯이 서양 선교사를 초빙해다가 서양의 과학기술까지를 배우자고 나서는 학자가 나올 리는 없었다.

한국 실학의 가장 뛰어난 인물로 꼽히는 丁若鏞(1762-1836)은 그가 젊었을 때에는 서양 책을 읽는 것이 젊은이들 사이에 일대 유행이었다고 회고한 일이 있다. 정확히 어느 때를 회상한 말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대체로 1780년대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때는 또한 朴齊家가 서양 선교사를 초빙해다가 서양 과학기술을 배우자고 나선 시점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박제가는 1786년초에 그의 선교사 초빙론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오늘 남아 있는 정약용의 방대한 문집 가운데에는 실제로 서양 과학기술을 소개하거나 다룬 글은 별로 많지 않다. 1801년의 기독교 박해 과정에서 한 兄이 사형 당하고 다른 형과 함께 유배길에 들어갔던 그에게는 西學을 함부로 다루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그는 30대 후반의 나이에 있었고, 이미 적지 않은 글도 썼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가 이미 썼던

글 가운데 상당 부분은 지금 전하지 않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가운데에는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글도 적지 않게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가 형의 墓誌銘으로 쓴 글 가운데에는 1790년의 과거에서 그의 형 丁才銓이 五行에 대한 시험 문제에 대해 서양의 四行로 대답하여 장원급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글을 사실로 소개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자기가 四行說울 지지한다고는 말하지 않고 있다. 이런 모호한 태도는 서양의 우주관이나 지동설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모호한 태도로 나타난다.

더구나 그가 牛親에 대해 취한 태도는 그가 보여준 서양 과학에 대한 그의 모호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저서 『麻科會通』 끝에는 서양의 우두법이 아주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지만, 그는 이에 대해 아무런 논평도 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李圭慕이 뒤에 쓴 기록을 보더라도 丁若鏞은 이미 우두법을 시험해 본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그는 9명의 자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6명이 요절했다. 혹시 이들 자녀를 天然痘로 잃고 그의 우두에 대한 집념이 높아졌던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두 문제에 대해서도 아주 간략하게 청나라에서 들여 온 우두에 관한 정보를 그의 책 끝에 부록하고 있을 뿐, 그 이상을 말하고 있지 않다. 이런 서양 과학에 대한 일관된 ‘무관심하기’는 분명 위장된 태도라고 판단할 수 있다. 카톨릭 집안으로 그 자신이 한때는 분명히 천주교에 기울어졌거나 신자가 되었던 그는 1801년의 유배를 분수령으로 그의 西學的 과거를 정리하고 온건한 전통주의자로 처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글 가운데 서양 과학기술을 적극 옹호하고 또 받아들이자던 그의 글들은 사라져 버리고, 서양 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였던 실상도 극소한도로 기술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그는 기술의 발달이 인간 문명의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一般論을 펼쳐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남겼다. 또 같은 맥락에서 그는 利用監이란 관청을 두고 해마다 과학기술자와 중국어 통역을 중국에 파견해서 그곳의 앞선 기술을 배워 오자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에서 기술 배워 오기를 강조하면서 朴齊家의 글에서 자극 받았음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북학론은 서양 과학기술을 꼬집어 배우자고 말하고 있지도 않고, 또 朴齊家처럼 서양 선교사를 초빙해서 그 기술을 배우자고 말하는 법도 없다. 丁若鏞의 서양 과학기술 및 서학에 대한 위장된 ‘무관심하기’의 發現이다.

崔淡綺(1803-1877)는 丁若鏞이 세상을 떠난 그해 1836년에 그의 첫 저서를 낸 것으로 밝혀져 있다. 그해에 낸 그의 두 가지 책 『神氣通』과 『測錄』은 뒤에 한 권으로 묶여 『測體義』란 책이 되기도 한다. 철학자 朴鍾何의 높은 평가 이후 최한기에 대한 철학사 내지 사상사 측면의 연구는 계속되고 있지만, 과학사 측면의 관심은 아직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1836년 작품의 개괄적인 연구만으로도 우리는 그 내용이 거의 다 당시 중국에 소개되어 있던 서양 과학을 그대로 소개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오목 렌즈와 볼록 렌즈를 비롯한 광학 현상에 대한 설명이 있고, 대기의 굴절 현상에 대한 글도 나온다. 소리와 색깔 냄새 둥의 전달은 근대 과학의 파동 이론을 동원해 설명하고 있고, 온도계와 습도계도 설명되고 있다. 또 그는 지구의 圓形을 설명하고, 그것은 하루 한 번씩 自轉한다는 사실도 주장하고 있다. 1836년의 책에서는 아직 지구의 自轉만을 주장하던 崔漢綺는 1848년의 『地球典要』에서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함께 주장하고, 또 이와 같은 自轉公轉說이 코페르니쿠스의 것임을 밝히고 있다.

지구의 自轉說에서 自轉公轉說로 바뀌는 1836년과 1848년 사이의

崔漢綺의 지적 변화가 어떤 것이었을까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英綺라는 실학 사상가에 대해서는 어느 다른 실학자보다도 알려져 있는 것이 적기 때문이다. 그의 가정이나 交友 관계 등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적지만, 그의 글이 아주 많이 남겨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그는 분명히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었거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자료들을 활용해서 그의 작품을 써 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崔漢綺의 책들은 거의가 당시 중국에 들어 와 있던 서양 과학가술 또는 지리적 지식을 그대로 번안해 국내에 소개한 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그의 대표작인 1848년의 『地球典要』는 그의 서문에 밝혀져 있는 것처럼 거의 중국에서 나온 魏源의 『海國圖志』와 徐繼의 『嵐環志略』을 간추려 정리한 것이다. 또 1867년의 『紋[化』는 영국의 천문학자 월리엄 허셸[候失勒]의 책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그 대본은 중국에서 번역되어 나온 허셸의 『談天』이었다. 이 책은 중국에서 활약하던 알렉산더와 일리[烈亞力]가 중국 최초의 근대 수학자 李善蘭과 함께 번역한 것으로 1858년 처음 출간되었다. 또 1866년의 『身機錢驗』은 역시 당시 중국에서 활약하던 영국 출신의 선교사 = 의사 벤자민 홉슨[合信]이 50년대에 중국에서 여러 권으로 출간했던 근대 서양 의학을 다시 나름대로 정리해서 국내에 소개한 것이다.

대체로 그의 중요 작품은 거의 淡譯 서양 과학서의 編著 정도라고 생각되는데, 1836년의 작품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다. 그렇다고 1836년의 『氣測體義』가 그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안에 실려 있는 물리학 일반의 내용은 분명히 당시 중국에 소개되어 있던 지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 그 책의 지식을 최한기는 어떤 책에서 구했으며, 얼마나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소개한 것인지가 연구되어

밝혀져 있지 않을 뿐이다.

1876년 나라의 문이 열리기까지 조선시대 실학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마지막 실학자였다고 불러도 좋을 최한기의 작품 세계가 대체로 중국에서 나온 漢譯 서양 과학기술서의 번안 소개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최한기의 시대에 이르면 이미 조선의 실학자에게는 중국에 들어 와 있는 새로운 서양 과학기술의 지식이 이미 분량에 있어서 쉽게 소화하기 어려울만큼 많아지고 있다는 자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최한기가 손에 닿는 것이라면 모두를 그 나름으로 정리해서 그의 글로 발표하게 된 까닭은 바로 그런 조급함을 반영하고 있다. 이미 시간은 흐르고 이웃 중국의 서양 과학기술 수준은 간단히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만 가고 있음을 알게되면서 崔淡綺는 그 수용에 조급해졌다고 생각된다.

崔漢綺의 質易에서 드러나는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높은 관심과 그 조급한 소개 노력은 다름 아닌 당시 조선의 지식충의 의식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거나 그들은 이웃 일본의 서양 과학기술 수용 과정까지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고, 중국의 서양 과학기술 서적은 상당히 많이 들여다가 읽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실학적 취향의 학자들이 조급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5.

19세기 중반의 조선 실학자들 사이에 조급한 危機意識이 높아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던 근

대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1876년의 개국과 함께 한국사의 서술에서 實學은 開化사상으로 탈바꿈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리고 개화 사상가들의 노력은 조선의 정상적 역사 변환을 가져오지 못한 채 곧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역사를 불러오게 된다. 흔히 한국사 서술은 개화기의 실패를 개화기의 정치적 실패에 큰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설명하기 쉽지만, 그 실패의 원인은 바로 실학 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한국의 식민지 경험은 실학 시대에 그 뿌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실학 시대의 조선이 이웃 니라들에 비해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에 크게 뒤져 있었다는 사실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미 앞에서 간접적으로 시사한 바와 같이 조선의 실학자들에게는 서양 과학기술을 접할 기회가 절대 부족하였다. 16세기 말부터 중국과 일본에는 끊임없이 서양 선교사들이 드나들며 서양 과학기술을 전수해 주고 있었다. 이에 비해 조선에는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서양 선교사가 일부러 찾아 온 적이 없다. 朝鮮 實學은 서양 과학을 중국에서 번역된 漢譯 科學習를 수입해다가 공부해서 습득해 갈 수밖에 없었다.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이 저절로 强하게 直接 접할 수 있던 서양 과학을 朝鮮의 實學者들은 間接으로 弱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 예로 든 李瀷에서 崔漢綺까지의 경우가 이런 경향을 잘 보여준다.

중국과 일본이 직접 서양 과학에 접할 수 있었던데 비해 조선이 간접적 접촉밖에 할 수 없었던 원인은 朝鮮의 지리적 위치가 서양 사람들의 항로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있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간단한 이 지리적 조건이 동아시아 세 나라의 실학의 위상을 크게 달라지게 만드는 직접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중국, 한국, 일본의 實學은 그 특징적 경향을 들어 각각 考證學, 北學, 實學이라 부를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세 마디 역사적 용어는 세 나라에서의 실학이 과학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특징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처음부터 서양 과학의 流入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대범한 태도를 보였다. 초가의 천문역산학 소개가 일부 중국인 천문학자들의 반발을 사기는 했지만, 머지않아 서양 천문역산학은 중국의 궁정 안에서까지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여 서양 선교사들의 腦點이 되었다. 그러나 차츰 서양 과학의 우수성이 인정되기 시작하자 중국인들은 우수한 서양 과학 내용을 하나 하나 들어 그것이 원래는 고대 중국에 있던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梅文鼎(1633-1721) 이나 阮元(1764-1849) 등이 바로 그런 서양 과학의 中國源流說울 주장한 것이다.

서양 과학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 없을수록 중국인들은 더욱 더 그들의 전통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의 실학은 考證學으로 특징을 삼게 된 것이다. 고증학은 그것대로 훌륭한 학문적 경향이지만, 그것이 서양 과학을 받아들이는 데 효과적 대응은 아니었고, 또 그것이 과학을 직접 산출할 수 있는 학문적 방법도 아니었다. 中華의 자존심 속에서 중국의 실학은 전통의 재평가에만 눈을 돌릴 수 있었을 뿐이지 새로운 학문을 수용하는 일에는 극히 소극적이었다.

비슷한 정도의 직접적 자극을 받은 일본의 경우에는 그 실학이 정반대 경향으로 나타났다. 역사상 언제나 외래 문화의 수용에 적극적이었고, 또 외래 문화에 대한 갈증 속에 빠져 있던 鎖國 속의 德川시대 일본 지식충은 적극적으로 서양 과학을 배우려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17세기 초 한 때 鎖國을 강행하던 일본은 곧 九州서쪽 끝의 長崎에 중국인과 和閩人만의 常住롤 허가하고 그들과 교역을 계속했다.

1740년에 이미 德川幕府는 유학자와 의사를 지명해서 和蘭語를 배우게 했고, 재야 지식층 사이에 화란어를 배워 서양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은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1774년 杉田玄白(1733-1817)등이 화란어 해부학 책을 직접 번역해 낸 『解體新書』는 일본 역사상은 물론 동양 역사상 최초의 서양 과학서 번역이다. 중국인으로서 직접 서양 언어를 배워 서양 과학서를 번역한 일은 19세기 후반에나 시작되었고, 한국의 경우에는 20세기에 들어 올 때까지 그런 일은 일어난 적이 없다. 동양 3국 가운데 實學 시대에 서양 언어를 직접 배워 서양 과학을 습득한 나라는 일본뿐이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시작된 일본의 實學인 蘭學은 19세기 초까지는 서양 과학의 상당 부분을 이미 일본인들의 번역과 번안을 통해 습득해 둔 상태였다. 뉴턴의 근대 물리학을 소개하는 책이 일본 蘭학자에 의해 19세기 초에 이미 나왔고, 라부아지에의 근대 화학 역시 1839년에는 책이 나와 소개되었다.

蘭學을 가르치는 학교로 번성했던 閩學은 1853년 미국 해군 페리 제독의 동경만 침략 이후에는 洋學熟으로 바뀌어, 서양을 배우는 길을 영국과 미국 등으로 바꿔갔다. 1854년의 개국과 함께 상당한 사회적 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의 서양 과학 수용은 蘭學 이후 아주 순탄하고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이미 실학 시대에 근대 과학의 대강이 모두 부문 별로 전공 서적이 되어 일본 학자에 의해 출간되어 있었고, 이제 근대적 대학이 설립되기만 하면 그대로 근대 과학은 제도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정도였던 것이다. 1877년 정식으로 일본 최초의 근대 大學으로 문을 연 東京大學은 그 前身이 서양 과학책 둥을 일본어로 번역하던 기관이었다. 즉 일본에서는 양학 기관이 근대 교육 기관으로 그대로 간판을 바꿔 달 수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일본의 실학이 그대로 근대 과학으로 이어지는 모습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한국, 중국, 일본의 實學 속에서 근대 서양 과학의 수용 노력은 크게 다르게 전개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큰 차이가 세 나라의 최근세사를 갈라준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實事求是의 學的 傳統과 開化思想

林榮澤

1.

實事求是는 오늘날 학계에서 실학의 성격을 대변하는 개념 내지는 실학의 한 유파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실학이란 학문의 전체를 포괄하거나 부분 적용이 되거나 어쨌건 이 개념은 실학의 학적 성격 및 그 발전 과정을 이해함에 있어 매우 긴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실사구시라는 이 말을 원용하여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 자신이 수행하는 학문이나 실천에 대해 반성과 지향을 제기하기도 한다. 특히 1980년대 후반이래 급전한 세계 정세와 국내 상황을 경험하면서 실사구시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실학 그 자체는 過去時制 속에 머물러 있는데 반해서 실사구시는 엄연히 현존적 의미를 띠고 있는 사정은 여러 가지로 생각케 한다.

나 또한 실사구시를 언급한 사람 중의 하나다. 대개 주지하는 대로 실사구시란 원래 중국의 고대 문헌에서 유래했고 淸代의 학풍과 연관해서 학술 용어로 부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일찍이 실사구시를 해야 한다고 역설한 학자가 있었거니와, 청대 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실사구시를 표방한 학문이 발전하여 상당한

성과를 남겼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정신사 • 학술사에서 실사구시의 의의를 중시하고 나름으로 거론해 보기도 했던 것이다.

지금 「실사구시의 학적 전통과 개화사상」이란 제목은 나 자신의 실사구시로 향한 관심의 연장인 셈이다.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맥관계는 학계에서 한때 쟁점 사안으로 다루어진 바 있었다. 대개 실학과 개화사상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런데 정작 학문 내용에 있어서 상호 연관성은 뚜렷이 잡혀지지 못한 것 같다. 바로 이 점을, 나는 실사구시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한다.

19세기 중반 무렵 실사구시 정신으로 수행된 학문적 성과둘을 전부 파악하여 분석하는 작업은 결코 만만치 않다. 게다가 수학이나 천체 물리에 해당하는 내용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과학사가의 몫임이 물론이다. 여기서는 그 학술이 지닌 사상적 의미를 설정한 문제의식에 따라 해석해 보는 데 그친다.

2.

실사구시란 말은 어떤 특정한 시기에 처해서 그 사회의 俗尙, 학술의 풍토에 대응하는 논리로서 반성의 정신을 고도로 축약한 형식인데 거기서 우리는 이상과 현실에 기초한 사고의 발전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실사구시’ 4글자의 어구풀이룰 하자면 실제 사실로부터 진리를 추구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그 이상의 확정된 의미를 고유하게 내포한 형식은 아니니, 요는 각기 대옹하는 데 따라서 ‘실사’의 내용이 부여되고 ‘구시’의 성격이 형성되는 그런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역사상에 실사구시로 문제제기를 처음 한 것은 18세기

초의 梁得中(1665-1742)이다. 그는 隱의 학자로서 국왕 英의 부름을 받게 되자 실사구시 4자를 요체로 들어 누차 진언을 했던 것이댜 그보다 1세기 정도 앞서서 相己(1570-1622)라는 재야 학자가 "每事必求是"를 제창한 바 있다 당시 고식과 미봉으로 떨어진 정치풍토에 대한 처방으로 '구시’를 내놓았다는 점에서 서로 기맥이 통하는 것이다. 더욱이 상황논리의 일색으로 시비가 온통 헷갈려버린 오늘의 세태에 비추어서는 "매사에 당해 옳은 방도를 찾으라”는 그 말은 더없이 좋은 깨우침이다. 권득기의 발언은 경구적 차원인 것이다 뿐 아니라, ‘매사필구시’는 논리 석으로 ‘실사’의 전제가 아직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양득중에 있어서 ‘실사’는 ‘‘義理를 假托하고 허위를 崇飾함으로 해서 오늘날 국가 형편이 亂亡의 지경에 빠졌다”는 정히 심각한 현실 인식에 근거하여 제출된 대안이다. 그 1세기 앞서 학술이 당쟁의 도구로 이용되고 진실을 호도하는 풍상이 확대 발전하였기에, 이제 대응책 또한 보다 구체성을 띠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무엇보다 ‘실사’를 강조하게 된 양득중은 ”의리를 내세우면서 천하를 어지럽힌다(以義理而亂天下)"라고 통탄하고 있다.

나는 양득중의 이 발언을 주목하여, 중국의 비판철학자 戴裝(1723-1777)의 "후세의 유자들은 理로써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以理殺人)”라는 유명한 말과 견주어 논하기도 했다. ‘以義理而亂天下'와 ‘以理殺人'은 文義와 함께 語句까지 서로 홉사하다. 양득중의 문제적 발언이 나왔을 때 대진은 아직 유년기였으므로 양자간에 직접적 관련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 우연의 일치에서 역사적 상통성을 감지할 수 있겠거니와, 상호의 차이점 또한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대진은 程朱理學이 인간성을 말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酷吏가 法으로 살인을 하듯 후세의 유자(성리학자)는 理로써 살인을 저지른다고 공박을 한 것이다. 어디까지나 학적

지평에서 떠오른 철학적 문맥이다. 반면 양득중의 발언은 다분히 정치적 • 현실적인 차원이다. 그는 당세를 주도하는 의리를 가리켜 人心을 훼손하고 世道를 파괴하는 偶鬼라고까지 매도하면서도 의리 그 자체에 대해 철학적(근본적) 반론을 제기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速炤 또한 오직 성실한 자세로 돌아가는 데 있었으며, 학문의 방법론은 아니었다.

하지만 양득중의 ‘救料의 실사구시’가 실학과 무관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초기 실학의 위대한 업적으로 손꼽히는 柳馨迪의 『確溪隨錄』은 전혀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오래도록 사장되어 있었다. 이 대저를 국왕에게 추천하여 공간되게 한 것은 양득중이었다. 『반계수록』은 군주로서 모름지기 옆에 비치해 둘 만한 책인 바 그 내용을 儒臣들이 玉堂에 모여 講論 解明하여 차례로 시행하게 되면 더 없는 다행이겠다고 그는 간곡히 건의하고 있다. ‘구폐’의 구체적 방도가 『반계수록』에 담겨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양득중에 있어 실사구시의 정신이 『반계수록』을 발견한 것이다.

이후 실사구시를 학문적 차원에서 제기하고 실천한 것은 다시 한 세기를 지나 金正喜(1786-1856)에 이르러서다. "실사구시 이 말은 학문의 가장 긴요한 길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 중간에 발홍했던 실학의 여러 위업은 양득중이 제기했던 그 문제의식의 학적 실천이었던 셈이다. 종래 실사구시를 실학의 대명사처럼 인식하기도 했던 데는 까닭이 없지 않았다. 범박하게 보면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엄정히 따져 보면 학문의 방법론으로서 실사구시를 표방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상호간에 변별성이 없지 않은 것이다.

김정희의 바로 앞에 丁若鏞(1762-1836)의 학문이 있다. 정약용이 서거한 후 그 아들이 김정희에게 『與猶堂集』 편찬의 일을 청탁했다 한다. 김정희는 유고를 전부 검토하고 나서 "선생의 百代의 대

업은 참으로 위대하다. 하지만 그 作家에 있어 나는 실로 감히 알지 못하겠다. 내 어찌 능히 取捨를 할 수 있겠는가?”라 대답한 것으로 기록이 전하고 있다. 김정희는 정약용 經學의 위대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방법론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은 것이다. 김정희는 정약용에게 "자기 견해를 세우고 자기 說을 만들어내는 것은 說經에 있어 감히 해서는 안 된다”고 직접 반론을 제기한 바도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다름 아닌 실사구시의 방법론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양자 모두 ‘성현의 도’를 최종의 귀결처로 삼는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댜 문제는 거기를 어떻게 도달하느냐는, 방법론에 있댜 김정희는 진리의 전당은 바른 길을 찾아 정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訓誌學—考打影學이다. 훈고학—고거학이 목적은 아니지만 목적에 올곧게 당도하자면 필수불가결의 요소댜 이때 ‘실사'는 ‘l情埋’에 대비되는 객관적 • 구체적인 증거를 뜻한다. 청대 학자 凌廷의 말이지만 의리와 같은 ‘허리’를 앞에 놓고 주장하면 남도 얼마든지 딴 것을 제시하고 우길 수 있으나 ‘실사’가 앞에 있으면 강변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적인 실증의 정신이댜 이 방법론은 주로 경전의 해석에서 도출되었던 한편 金石學을 파생시켰다. 모두 현실과는 동떨어져 옛을 더듬는 것이 특징이다. 요컨대, 김정희의 실사구시 정신은 주로 考古룰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그가 수용했던 청대 학술의 일반 경향이기도 했다.

3.

1850년을 전후한 시기에 동아시아 세계—한자문화권은 서양의 경제적 종교적 침투와 함께 무력적 침탈을 전면적으로 받게 되었

다. 내부적으로도 체제의 牙硏 離反현상이 극에 달해서 금방 붕괴뭘 지경이었다. 중국 대륙이 혼란과 위기에 빠져들었거니와, 한반도를 바롯한 日璃 越南이 각각 운명이 같지 않게 전개되긴 했으나 유사한 처지에 놓여졌다. 물론 왕조체제가 일정한 단계에 이르러 멸망하는 현상은 거의 주기적으로 일어났다. 종전과 달리 이때는 ‘문명적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한반도의 학자 지식인들은 중국 대륙에서 腸片戰爭(1840년)으로부터 英佛聯合軍의 北京 占領(1860년)에 이르는 경천동지할 사태의 진전 및 太平天國이 발흥했다가 좌절한 推移를 바라보게 된다. 결코 강 건너 불구경이 될 수 없었다. 저 불이 옮겨붙을 위험도 없지 않으려니와, 당장 이쪽에서도 서양의 선박들이 근해에 빈번히 출몰하는가 하면 안으로 천주교도는 織하고 농민반란은 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일단의 학자 지식인들 사이에서 반성적 사고와 함께 학술적 대응이 진지하게 추구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주시하는 바 실사구시의 방향이 선회하고 있었댜 길을 처음 연 것은 김정희 그 자신이었다. 그는 지구 전체의 지리학적 지식을 담고서 서구열강에 대한 대응방도를 강구한 저작인 魏源의 『海國圓志』를 접하고 위원의 학문 자체를 "話의 空言을 지키지 아니하고 오로지 庭(實)事求是룰 위주로 하고 있다”고 논평하였다. 아울러 위원과 함께 今文學派를 대표하는 학자 自珍의 학문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김정희 자신 今文學으로 경도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그가 위원의 학문을 "실사구시를 위주로 하고 있다”고 지적한 문맥에서 실사구시는 실제현실에 유용한 것임을 뜻하고 있다. 김정희는 『해국도지』가 필수의 책'임을 인정하고 그러한 학적 노력이 우리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음을 대단히 안타까워한 것이다.

김정희가 학문 방법론을 실사구시로 확립한 것은 그의 젊은 시

절이었다. 그가 「貸事求是說」을 집필한 시점은 밝혀 있지 않으나 거기에 閔魯行이 後敍를 붙이고 있는데 이 연도가 1816년이다. 『해국도지』는 초판이 1842년, 증보판이 1852년에 출간되었다. 김정희에 있어 考古의 실사구시로부터 전환함에 있어 상당히 긴 시간을 경과했던 바 ‘현실 적용의 실사구시’는 그의 노경의 귀착처임을 알 수 있다.

김정희는 학문의 새 길을 제시하긴 하였으나 그 방향에서 스스로 학적 성과를 남기지는 못했다. 그의 다음 세대의 몫이 되었다. 그 위기의 시대를 담당하여 가장 선봉에 서서 풍부한 업적을 남긴 학자를 들자면 응당 崔漢綺(1803-1877)를 손꼽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최한기의 경우 실사구시를 직접 표방하지 않았으므로 일단 접어두고 보면 朴珪海(1809-1876), 그리고 南秉哲(1817-1863)이 중요한 존재로 떠오른다.

박규수는 실학과 개화사상의 架橋者로 지목을 받아온 인물이다. 그는 와 地勢儀(일명 地球儀) 같은 천문 지 리 에 관계된 儀器를 손수 제작했던 바 지세의란 魏源의 『해국도지』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고안된 기구다. 박규수는 그것에 관한 해설적인 글에서 『海國志』의 算海 審賊의 의미를 특히 주의하고 있댜 남병철은 또한 그것을 두고 「地球儀說」이란 제목의 글을 지었는데 박규수가 제작한 이 의기는 전의 儀器의 미비점을 여러모로 보완했음을 밝혀, “우리 東國 안에서 實地之學의 훌륭한 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라고 그 독창적 수준을 국제적 지평으로 끌어내고 있다.

박규수는 顧炎武의 학문 자세를 평소 홈모해 마지않았거니와, 顧炎武의 盡論에 붙인 題跋에서 “山水는 물론 人物 • 樓盜 • 城市 • 草木 • 蟲魚에 이르기까지 오직 眞境의 質事여야 하니 필경 質用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 연후에라야 비로소 畵學이라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회화의 실용적 기능에 치중해서 사실성을 강조한 미학이다. 傾境水)(와 風俗가 이미 퇴색하고 나서 일어난 19세기의 반사실적 화풍에 대한 경종적 발언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는 顧炎의 論을 빌어서 자기의 미학적 견해를 펼친 셈이다. 주장이 미학에서 그치지 않고 학문 일반에까지 미쳐서 “學이란 모두 實이다. 천하에 어찌 實이 없이 學이라 이를 수 있겠는가"라고 역설을 한다.

박규수는 물론 미학 전공자가 아니다. ‘실사’의 주장은 기실 학문 연구에서 발전하여 미술 영역으로 전용된 것이리라. 그의 충실한 제자 金允은 그의 문집 서문에서 박규수의 학문 세계를 총괄하여 실사구시로 특징짓고 있다. 박규수의 학문은 요체가 실사구시에 있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박규수의 학문은 門戶를 특별히 세우지 않고 두루 수렴하고 종합한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학문의 내용이 그렇고 인맥의 관계가 그러했다. 그 자신 박지원의 손자로서 利的 학술을 가정적 淵源으로 물려받은데다 김정희로부터는 동시대 후진으로서 계발받은 바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학문의 근본은 經世學에 있었다. 이 경세학에 있어서는 주로 顧炎에 기대고 있는데 丁若鏞으로부터의 영향도 없지 않았을 터이다. 門戶에 집착하지 않고 공정하게 수용하는 그것이 실사구시의 자세이기도 하려니와, 마침 처한 상황이 앞의 여러 학술을 수렵해서 어려운 현실에 적용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였다.

4.

南秉哲은 박규수의 학문적 반려자였다. 박규수는 남병철의 문집

에 붙여서 "글이 經術과 政理(治)에 관련되지 않으면 족히 할 것이없다”는 顧炎武의 말을 인용하고 "그와 나는 일찍이 이 말씀에 깊이 감복했다"하였고, 남병철 또한 박규수가 제작한 儀器에 해설을 붙여 "이는 나의 친구 朴桓卿이 제작한 것이다”라고 정답게 쓰고 있는데 儀器들은 두 사람이 궁리를 같이 하거나 생각을 보태서 만들기도 혹은 했던 것 같다. 남병철의 학문 경향에 대해 尹定鉉은 일생 경전 연구에 주력하여 자못 妙解를 얻었음을 지적한 다음,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일찍이 이르기를 古今의 婆注들은 저마다 자기가 옳다는 설을 세워 爭이 분분하다. 算數 또한 經書 중 하나의 문제인데 「典」의 曆象, 『春秋』의 日食을 추리하여 알 수 있고 또 지금 測驗을 할 수 있다. 七政의 行는 부합하면 맞고 부합하지 않으면 틀려서 시비가 금방 가려져 틀린 자는 저절로 굴복하게 된다. 이에 먼저 여기에 從事했던 것이다. 저서에는 『距器』『社鏡細判解』『步紹解』의 3종이 있는데 정신을 다 쏟아서 은미한 데 들어가 未有를 얻은 것이다

남병철은 經學에는 오히려 흥미를 잃고 ‘산수’에 매력을 느껴 그쪽 공부에 종사해서 학적으로 미중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經典의 婆注가 부질없이 爭踊만 불러일으키는 ‘能理'이며, 그에 반해 관측 실험이 가능하고 맞고 틀림이 명백히 가려지는 ‘算數'는 '實’로 의식되고 있다. 남병철에 있어서는 ‘산수’의 탐구가 실사구시인 셈이다.

‘산수’란 數學, 曆算 象數 등의 용어로도 일컬어졌다. 오늘날 개념으로는 天文 曆學과 수학을 아우른 내용이니 자연과학에 속하는 것이다. 남병철의 아우 南秉吉(1820-1869)이 『海鏡細卿解序』에서 썼던 문자를 빌어서 표현하면 ‘格致의 質學’이다. 뒤에 물리학을 格致

學으로 번역한 바도 있듯, 이때의 격치는 사물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뜻하는 말이다. 이 단계에서 실사구시는 자연과학적 합리성에 접근하고 있댜 다음에 이러한 학적 지향에서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추출해 보기로 한다.

1) 數에 대한 인식

남병철의 『海鏡細判解』는 수학의 저작이다. 왜 이런 데 관심을 쏟아 책을 지었을까? 이 물음에 저자의 아우 南秉吉이 대신 답을 하고 있는데 "천지 사이에 눈으로 보는 바, 귀로 듣는 바, 손으로 만드는 바, 마음으로 사고하는 바 모든 것에 다 자연의 數가 있다”고 한다. ‘자연의 수’란 주관과는 분리되어 우주 자연에 自在하는 무엇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남병철의 견해를 들어본다.

"天이 무슨 말을 하는가? 大象은 寒(광원하여 가시화할 수 없다는 의미 : 인용자)하고 천체들은 參差한데 中西롤 가리지 말고 오직 관측을 정밀히 하며 계산을 공교히 해야 합치할 수 있다. 저 日 • 月 • 五星이 어떻게 세간에서 논하는 尊華揮夷의 의리가 있는 줄 알겠는가!" (「書步紹解後」)

曆數에 국한된 논리다. 저 우주 공간의 천체들은 인간의 尊華推夷의 논리가 있는 줄 알지 못한 채 그들 나름으로 존재하고 운행한다는 것이다. 이 곧 ‘자연의 수’인데 오직 관측, 계산을 통해서만 인지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하필 尊華撰夷롤 들먹이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하겠거니와, 요는 자연에 自在한 객관적 이법을 數라는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무릇 數란 안도 바깥도 없고, 적재할 수도 파괴할 수도 없는

데, 크게는 천지를 經緯하며 작게는 米鹽 凌(섬세 혼란하다는 의미 : 인용자)하여 오직 변하는 대로 적용되어 이용이 무궁하다.”

(『海鏡細解序』)

이렇듯 數는 순수 추상의 개념이지만 오히려 이용의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것이다. 동양 전래의 학술 체계에서 數는 六藝(禮樂射御害數)의 마지막에 놓여 있었다. 南秉吉은 수의 긴요성을 강조하는 논리로 五의 信에 비유하고 있다. 일찍이 朴源은 信이 五倫의 끝에 놓인 까닭은 信의 위상을 격하시킨 것이 아니고 후위에서 전체를 統攝하는 의미라고 해석을 내렸다. 이 해석은 朋友의 윤리룰 가장 중시하는 윤리관의 반영임이 물론이다. 五倫에서 信과 유사한 기능을 六藝에서 數가 맡고 있다는 것 또한 數를 중시하는 논법이다. 그는 수학을 여러 학술의 기초일 뿐 아니라 "천하 국가의 경제와도 관계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수학은 ‘‘格致의 質學이며 家國의 實이니 經世를 담당한 자 먼저 힘써야 할 바라”고 결론울 내렸다. 근대 학문에서 수학을 중시하는 것과 통하는 발상을 보여주고 있다.

2) 서양의 과학기술의 수용梁啓超는 『淸代學術槪論』에서 실사구시의 학풍을 두고 ”이 정신은 기껏 考古에 응용이 되었을 뿐 自然科學界에는 응용되지 못했으니 그 시대가 이렇게 만든 것이다"하고 자못 애석한 논조로 말한 바 있었댜 그런데 남병철의 『書推步續解後』라는 1편의 논문을 보면 淸朝 2백 년의 학술 전통에서 실사구시와 관련하여 六慕가 개발된 것으로 보고 특히 算學의 성과들을 들어 논평을 가하고 있다. 두 사람의 견해는 분명히 상반된다. 우리가 보기에도 양계초의

주장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양계초가 今文學派의 후계자로서 청대 학술을 정기하는 과업을 훌륭히 수행한 인물임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실사구시의 정신이 자연 과학 분야에 응용된 성과는 양계초에게 무시될 만큼 뚜렷하지 못했고 기여도가 높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남병철도 기실 祐의 曆學을 논함에 있어 江永(字愼修)만을 높이 평가하고 다른 여러 학자들에 대해서는 문제를 지적하는 데에 강조점이 쳐져 있었다.

남병철의 「書步紹解後」는 英聯合軍에게 北京이 점령당한 소식을 접해서 중국의 비운을 탄식하고 문명적 위기를 느끼며 씌어진 것이다. 이런 지경에 이론 소이연을, 학술적 측면에서 중국을 위해 반성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동시에 자기 반성의 뜻도 담겨 있댜 이 글에서 器械와 數術이라는 용어를 쓴다. "여기에 서양인들은 전심전력을 바치고 오랜 연구의 축적을 거쳐서 ‘器湘의 精利' • 敷術의 微妙'는 실로 놀라웠으니, 당시 중국이 바야흐로 낭패를 당하는 것도 주로 이에 요인이 있었다”고 설도한 것이다.

서양의 과학 기술이 우수하다는 것은 당시 이미 명백히 드러난 사실이었다. 이에 남이 잘하는 것은 잘하는 대로 솔직히 인정하고 겸허하게 배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 주장을 세우기 위해 앞서 살폈던 尊華揮夷의 논리가 동원된 것이다. 曆算을 두고 말하면 "天에 測驗이 되는가 여부만 따질 일이요 인간의 華夷는 논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한다. 그렇다고 華夷의 인간적 구분을 부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말하기를 "저들은 周公 • 孔子의 道도 알지 못하고 단지 아는 것이라곤 輪船과 火砲 뿐이다. 어찌 저들과 長短울 겨루어 善惡올 논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서양인을 도덕적으로는 야만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을 배척한다고 그의 所能까지 아울러 배척할 것은 아니라”고 했으므로, ‘推夷'는 과학기술적인 면과는 구분해서 도덕적으로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던 셈이다.

그렇지만 尊華推夷를 꼭 주장했다고도 볼 수 없다. 요컨대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하는 데 장애물인 이념의 질곡을 제거시키는 데 뜻이 있었다고 보겠다.

당시 서양의 과학 기술을 보다 폭 넓게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학자는 崔淡綺였다. 그는 서양 학술을 수용하고 학습하는 문제를 기정사실로 인정한 차원에서 "중국을 배우는 자는 西法을 배우려 하지 않고 西法을 배우는 자는 중국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경계성 발언을 하고 있다. 中西腐學의 접목이 일찍이 그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시도된 사실 또한 흥미로운 점이다.

남병철은 과학기술의 측면에 있어서는 서양에 대해 개방적이었댜 역사적 난관으로 다가온 개국 통상의 문제에 당해서 그는 어떻게 사고했을까? 尊華의 논리로부터 해방시켜 놓은 곳은 과학기술의 측면에 한정되어 있었다. 정신적 측면, 이데올로기 자체는 건드리지 않았는데, 그의 태도가 애매하다. 한반도 상에 개국 통상의 압력이 무섭게 닥친 것은 그의 생에가 마감된 이후의 일이었다. 바로 그 상황에서 활동했던 박규수에게서도 자기 글로 개국 통상의 주장을 표명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신뢰할 증언으로 金允植의 기록이 전할 뿐인데 박규수는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탁견을 가지고 약소한 우리나라를 보전하기 위한 의교전략을 개진했다고 한다.

5.

갑신정변이 일어난 그 무렵 문명 개화를 주장하는 개화파의 논설 속에 실사구시의 개념이 구사되고 있다. 金玉均이 자기의 政論 • 政策을 개진한 「治道略論」, 漢城句報 창간호의 「地球論」이 그것이

다. 실사구시는 개화사상의 논리에서 눈동자처럼 보인다.

이 점을 주목했던 千寬宇 선생은 "이 시기에 실사구시라는 슬로건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라 하고, 그 사례를 소개한 다음 "실사구시는 考證學의 특징으로 흔히 쓰이는 말이지만 위의 몇 가지 例는 고증학풍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었고, 실사와 구시의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고 보았댜 개화논리에서 실사구시는 내용을 담지하지 않은, 슬로건에 지나지 못한 것처럼 간주하였다. 개화운동의 직전 단계에서 구현된 실사구시의 내용을 살피지 못한 데서 내려진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추구된 학적 전통은 ‘救時l序의 실사구시’에서 발단하여, '考古의 실사구시’로, 다시 ‘致의 실사구시’로 발전해서 드디어 개화사상의 실사구시로 이어진 것이다.

19세기 朝鮮 實學의 發展과 腐齋 朴珪壽

金明昊

1. 머리말

18세기에 顯著한 발전을 이룩한 朝鮮의 貸學은 19세기에 들어와 丁若鏞(1762-1836) 등에 의해 그 학문적 성과가 渠大成되는 한편으로, 金正喜(1786-1856) 이후 考證的 學風으로 轉換되어 갔다는 것이 通說이다. 이러한 인식 아래 지금까지 19세기의 實學에 대한 연구는 丁若鏞과 金正喜, 李三(1788-?), 崔漢綺(1803-1877) 등 몇몇 인물들에 渠中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朝鮮質學史에서 그들에 못지 않은 중요한 존재로 腐齋 朴珪壽(1807-1877)를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朴珪는 18세기의 대표적 實學者인 燕巖 朴址源(1737-1805)의 孫子이다. 그는 哲宗 • 高宗 年間에 右議政 둥 고위 관직을 두루 지내면서 1876년 韓日修好條規(江華條約)의 諦結과 같이 韓國近代史의 向方을 결정지은 주요 사건들에 깊이 關與했으며, 金玉均(1851~1894)을 비롯한 開化派에게 커다란 사상적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는 주로 開化思想의 先賜者로서 學界의 관심을 끌었으며, "北學派와 開化派를 結節시킨 중심 인물’1)로 敬되는 경우에 있어서도 前代의 質學을 적극 발전시킨 인물로는

1) 姜在彦, 『韓國의 開化思想』, 鄭昌烈 譯, 서울: 比峰出版社, 1981, 129쪽. '北學派'는 朴源을 중십으로 한 18세기 朝鮮 實學의 一派룰 가리킨다.

평가받지 못하였다 즉, 朴亨가 家學을 통해 祖父 朴晶源의 實學을 계승했으리라고 보면서도, 사상적으로는 18세기의 買學派보다 오히려 後退하였다는 주장조차 提起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종래의 실학 연구에서 朴가 별반 주목을 받지 못했던 데에는 그의 著述들이 철저히 수집, 검토되지 못한 사정이 적잖이 작용했을 듯하다. 朴烽의 文集으로 그의 門人 金允(1835-1922) 이 1913년에 간행한 『鹿齋』이 있으나, 이는 그의 사상의 全院를 파악하기에 충분한 자료라 하기 어립다. 이 글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그의 저술 三種을 중심으로 朴의 買學思想을 살펴보고자 한다. 『尙古脂博文義例』와 『居家友』, 그리고 『衛新編評語」는 대체로 朴珪의 초기 저술에 해당하는데, 지금까지 본격적인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2) 이들을 綿密히 검토해 보면, 그의 官學者로서의 面院와 아울러 19세기 朝鮮 實學의 發展樣相이 確然히 드러나리라 본다.

2) 이 三의 저술에 대한 筆者의 상세한 논의는 『固의 "尙古區]會文義例"에 대하여』, 『竹夫李災衡敎授 停年紀念論策』; 『齋 朴珪 硏究(2)-范通期의 朴珪磁 上』, 《民族文學史硏究》 6호, 民族文學史硏究所, 1994, 44-60쪽; 『祖璋 朴造 硏究(3)-邸週期의 朴珪 下』, 《民族文學史硏究》 8호, 民族文學史硏究所, 1995, 144-159쪽 參照 바람.

2. 『尙古圖會文義例』와 地圓地動說의 계승

1827년에 완성된 『尙古個博文義例』(16권 16책)는 弱冠時節 朴珪壽의 사상과 학문 수준을 잘 보여주는 저술이다. 그러나 그간 「尙古圖接說十則」(『球』 所收) 둥과 같이 原著의 극히 一部 내용만이

세상에 알려졌는데, 최근 成均館大 大東文化硏究院에시 간행한 『齋盜』를 통해 처음으로 그 全軟이 공개되었다.

‘尙友古人' • ’以文會友’의 뜻을 함축한 題目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朴가 평소 崇慕하여 벗삼고 싶어 한 古人들의 行에 관한 글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즉, 淡 이후 明末까지 歷代중국의 뛰어난 인물들에 관한 故事롤 史傳과 기타 子渠類로부터 널리 拔莘하고, 이를 80로 나눈 뒤 다시 隱(逸), 文(文治), 武(武略), 節(節義), 直(正直), 詞(詞溪)의 6目으로 분류하여 總 480개 항목으로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 船論된 인물들과 典로 구사된 광범한 文戱들을 통해, 당시 朴珪의 사상적 志向이나 탁월한 학식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에는 항목마다 빠짐없이 朴珪의 接이 덧붙여져 있는데, 이는 그의 초기 사상과 문학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자료라 생각된다.

『尙古會文義例』의 接說들은 우선, 朴珪가 사상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祖父 朴足源의 영향을 다분히 받았음을 보여준다. 士란 특정한 身分이 아니라 "生人의 大本”이라 하여 士의 覺龍울 촉구한 論議(8部 文目), 兵論에서 ‘法古’와 아울러 ‘知堤'을 강조한 점(8部및 63部 武目), 巫俗에 대해 비판적이자 寫質的으로 描寫한 文體(71部 直目) 등은 그 현저한 例라 할 수 있다. 또한 박규수는 ”如農田 • 水利 • 錢幣 • 莊 • 帝 • 役民 • 征椎之類, 皆學者所當抄究而商論者也"(19部 文目)라 하면서, 刑政 • 財賊 • 祐論 • 兵論 등 經世的방면에 대해 깊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음악과 繪畵와 天文曆法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방면에 걸쳐 빼어난 식견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或人論天體』(16部 隱目)라는 글이다.

「或人論天體」는 제4권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異例的으로 길 뿐더러, 고도의 전문적인 수준을 보여주는 글이다.3) 여기에서

3) 朴珪志의 先距로 當代의 著名文人인 洪吉周(1786-1841)는 이 글에 대해 ”不料妙少年紀有此許大見識. 談天說地, 若是平, 如手摩而目視, 專門者皆當口去"라고 評하였다.

朴는 蓋天說 • 揮天說 • 宣夜說 • I析天說 • 宮天說 • 安天說 등 宇宙의 構造에 관한 종래의 6大 천문학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가운데, 地圓地動說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지구는 彈丸처럼 둥근 球體이며, 해나 달 • 별과 마찬가지로 하늘 한가운데에 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가 추락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은 氣가 이를 에워싸고 돌기 때문이다. 하늘이란 바로 지구를 에워싸고 回轉運動을 하는 氣의 總體 즉 ‘氣'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하늘과 지구는 上下關係에 있는 것이 아니라 內外關係에 있으므로, ‘天篠地卑'나 ‘天毅地'라는 관념은 잘못된 것이다. 또한 하늘에 떠 있는 해 • 달 • 별이 모두 回轉運動을 하는데, 지구만 정지해 있을 리는 없다. 지구가 한번 自轉하면 하루가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지구의 自轉을 느끼지 못하고 해만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해가 지구 주위를 도는 속도보다 지구의 自轉速度가 더 빠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地[I]地動說은 自轉하는 지구를 중심으로 해와 달이 公轉하는 構造로 본 티코 브라헤(Tycho Brahe)式 宇宙勸을 前提하고 있는 점에서, 일찍이 洪大容(1731-1783)과 朴源 등이 주장했던 學說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朴珪席는 地動說을 논하는 대목에서 "洪氏實言有論地轉之說”이라 하면서 홍대용의 학설을 적극 수용하고 있다. 여기에 거론된 『實言』이란 저술은 ‘實翁'과 ‘虛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홍대용의 『山問答』을 가리킨다.4) 또

4) 朴珪의 表叔으로 그의 학문을 지도한 李正觀(1792-1854)도 이에 대한 評語에서 “洪軒翁 學有淵源, 精於數理 其所著貫言云云"이라 하여, 『實言』이 홍대용의 저서임을 밝혔다. 또한 朴珪面의 藏만目錄으로 추정되는 『錦菌藏弁錄(後孫家 所藏)에 ‘醫山貫'이라는 書目이 있음을 보아도, 『實言』은 『登

山問答』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한 朴珪海는 지구가 허공 중에 떠 있는 球體라는 증거로 서양이 중국과 지구상의 정반대 편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 論로서 역시 "의 『實言』”을 인용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은 『尙古鬪會文義例』가 朴源과 洪大容을 비롯한 18세기 實學者들의 經世的 學風과 그 自然科學的 成就를 綿綿히 계승하고 있는 저술임을 입증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3. 『居家雜服敦』와 衣冠制度改革論의 완성

『居家雜服敦』(3권 2책)는 兩班士大夫가 평상시 집에서 입는 각종 衣服을 중심으로, 古福와 符合하는 理想的인 衣冠制度를 논한 저술이다. 그 汶:에 의하면 朴珪는 아우 朴珠(1816-1835)의 提案과 協助로 이 저술을 1832년에 脫稿하였으나, 그후 부모가 下世한 데 이어 아우 珠가 天折하는 불행을 겪게 되자 오랫동안 放假해 두었다가 1841년에야 서문을 붙여 세상에 공개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사대부 남성의 服飾을 논한 「外服」篇과 사대부 여성의 복식을 논한 「內服」篇, 그리고 男女 兒의 복식을 논한 「幼服」篇으로 이루어져 있다. 「外服」篇은 이 책의 절반 가량 되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玄端과 深衣를 중심으로 그 製作法과 着用法을 記述한 것이다. 「內服」篇은 衣와 領稚의 제작법과 착용법뿐 아니라 各種 首飾에도 祖하여 記述하고 있으며, 「幼服」篇은 남녀 아동의 首飾인 雙粉와 童子服인 四揆杉을 중심으로 簡略하게 논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에서 朴珪席는 『儀福』와 『記』의 淡 • 唐 注疏 司馬光의 『書儀』와 朱의 『家體』를 주로 참고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문헌으로는 趙憲(1544-1592)의 『東迫封事』와 아울러, 宋時

烈(1607-1689)과 그 門人들의 저술(李綿의 『四綴便賢』, 宋文欽의 『婦人服飾政』 등)을 비교적 자주 인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居家祀及』는 朝鮮時代 服飾史硏究의 資料로나 거론될 뿐, 사상적인 저술로서는 거의 無視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시 衣冠制度의 買相을 記述한 것이라기보다 그에 대한 改革方案을 提示한 것으로서, 士大夫社會의 風紀를 革新하고자 하는 강한 問源意識과 종래의 前混에 대한 치밀한 학문적 검토에 입각하여 이루어진 저술이다.

이 책에서 朴珪는 古代 中國의 服制룰 推論하면서 철저히 經에 依製하고자 하는 ‘實事求'의 자세를 堅持하고 있으며, “大抵聖人制作, 莫不先實而後文"이라 하여5) 무엇보다도 實을 重視하는 服飾親을 피력하고 있다. 또한 그는 玄端이나 深衣룰 ‘君子의 道’를 具現하고 있는 옷으로 理想化하면서, 天子로부터 下士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근본은 ‘士’이므로 玄端과 같은 ‘士服'이야말로 衣裝의 근본이 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祖父 朴의 士論을 禮說과 結付하여 한층 발전시킨 것으로, 兩班士大夫들이 時俗에서 벗어나 玄端과 深衣롤 着用함으로써, ‘道룰 實戈하는 士'로서 스스로를 再認識하도록 足求한 것이라 하겠다.

5) 『居家雜服政』 권1, 『外服』. (『朴珪海全渠』 下, 亞細亞文化社, 1233쪽)

6) 『家雜服收』 권2, 『內服』 序. (『朴珪壽全集』 下, 1388쪽).

思想史的으로 볼 때 『居家雜服敗』에서 주목되는 것은 朴珪의 衣冠制度改革論이다. 예컨대 그는「外服」篇에서 道抱 대신 玄端과 深衣를 입고 갓 대신 玄冠울 쓸 것을 주장했으며, 「內服」篇에서는 무려 16條에 걸쳐 당시 유행하던 服飾과 首飾을 비판하고 中國의 古制룰 따를 것을 提案하였다. 또한 「幼服」篇에서도 ‘胡俗'인 辯嬰을 雙粉로 바꿀 것 등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遠而服先正用華之苦心, 近而念王考未就之遣志'’라 述懷하였듯이,6) 17세기

朝鮮朱子學의 大家인 宋l1寺烈과 祖父 朴源의 持論을 계승한 것이다.

일찍이 宋時烈은 趙의 論議를 이어 高麗時代의 荀習인 갓을 폐지하고 中華의 制度인 冠을 쓰자고 주장하였으며, 그의 집안에서 婦人네의 首飾으로 時俗인 辯炭 대신 나라 窮人의 作 제도를 施行하고자 하였고, 子와 門들에게는 雙統를 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宋舒이 尊의 大義를 실천하기 위한 방도의 하나로 衣冠制度의 改革을 提한 이후, 이러한 주장은 李縮(1680-1746)와 宋文欽0710-1752) 등 老論係 朱子學者들을 통해 連綿히 이어져 왔다.

한편 朴源도 高麗末 이래 蒙古의 風俗을 따르고 있던 당시 조선의 婦人服飾을 古禮에 의거하여 개혁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자기네의 衣冠이 中華의 造制를 道守하고 있다는 朝鮮人들의 自負心을 풍자하면서 조선의 의관제도 역시 ‘夷俗'을 전적으로 탈피하지는 못했음을 비판하였다.7) 또한 그는 古의 平服을 만들어 입기도 하고, 子弟나 侍으로 하여금 雙粉룰 하고 揆杉을 입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朴止源의 門人인 李德想(1741-1793), 朴齊家(1750-1805), 李喜經(1745-?) 둥도 婦人의 服과 首飾, 갓 따위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7) 抽著, 『柏河日記 硏究』, 創作과批評社, 1990, 128-130쪽 參.

요컨대 『居家防文』는 宋時烈 이후 老論 學界에 계승되어 온 衣冠制改革論과, 그 영향을 다분히 받은 것으로 보이는 朴晶源을 비롯한 北學派의 衣冠制度改革論을 思想史的 背禁으로 하여 이루어진 저술이다. 이 책에서 朴珪는 斷片的으로 提起되어온 前代의 論議룰 綜合하고 학문적으로 深化함으로써, 마침내 衣冠制改革論을 완성하기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다.

4. 「鬪衛新編評語」와 東道西器論의 萌茅

「鬪衛新編評語」는 1840년대 이후 朴珪의 사상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남을 보여주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는 글이다. 이는 그의 知友인 尹宗儀(1805-1886)가 天主敎를 비판한 床邪論과 海外事情 및 海防策에 관한 글들을 모아 편찬한 『|胡衛新編』(7권)을 평한 것이다. 1848년에 일단 완성된 『鬪衛新編』에 跋文으로 수록된 점으로 보아, 이 評語 역시 그 무렵에 씌어진 것으로 推定된다.

尹宗儀의 『鬪衛新編』은 1827년 魏源이 淸初 이후의 時務論을 共大成하여 편한 『皇朝經世文編』을 가장 중요한 典打로 삼은 것이었다. 『昇經世文編』은 考證學이 主하던 당시 중국 학계에 經世學의 新屈을 일으킨 저술로서 近代的 襲革運動의 발전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는데, 朝鮮에는 朴珪의 表叔인 李正版(1783-1843)에 의해 처음 流入되었다. 李正履는 1839년, 1840년의 燕行을 통해 제1차 邪片戰爭의 急迫한 海外情勢에 접하고 이를 國內에 최초로 알렀을 뿐더러, 床邪論과 海防羽을 위한 文戱으로서 『皇經世文編』을 소개하였던 것이다.

「鬪衛新編評語」는 13으로 된 全文 1700餘字의 비교적 짧은 글이지만, 東西古今울 通貫한 朴珪壽의 학식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名文이다.8) 여기에서 그는 천주교를 지극히 未開한 迷信的 宗敎로 비판할 뿐 아니라, 西洋諸國이 역사적으로 宗敎룰 侵涼의 道具로 활용하였음을 폭로하면서, 그 對策의 하나로 床邪害의 대대적 간행과 보급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의에서 서양의 基督敎가 천주교 • 改新敎 • 그리스正敎

8) 1860년 北京에서 朴珪忠와 交分을 맺은 沈秉成은 이 글에 대해 "文槿數, 而上下數千年, 縱橫二萬里, 無不森然在目"이라 평하였다. (『朴邸齋文』, 《朝鮮學報》 87輯, 日本 天理大, 1978, 253쪽).

의 三大 敎派로 分裂 • 對立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第8則), 『四洲志』를 引用한다던가(第9則), 官曲을 特設하여 西學를 隱譯할 것을 提案한 점(第12則) 등은, 당시 朴珪孟가 魏源의 『海國圖志』에 접하고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음을 示峻한다. 『海陵志』는 출간 직후인 1845년 조선에 流入되었으나, 1850년대 초반 무렵까지는 金正喜 • 崔漢綺 등 極少數의 人士들만이 이에 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처럼 「鬪彬衛新編評語」에서 이미 『海國圖志』를 援用하고 있는 사실은, 朴珪壽가 이룰 국내에 流入된 가장 이른 시기에 읽고 그로부터 영향받은 先的 人物에 속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울러 주목할 것은, 朴珪가 西洋에 대한 東洋의 문화적 우월성을 확신하면서, 東西交涉을 통해 장차 西洋人들이 東洋文化에 感化되는 날이 오리라는 展을 피력한 점이다. 그는 서양의 曆算이 중국보다 발달하였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실은 고대 중국에서 起源한 것이라는 梅文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서양인들이 '智巧’가 뛰어날지언정 결코 동양의 ‘大道'를 알지는 못한다고 본다(第5). 또한 改新敎 宣敎師들이 싱가포르와 말래카 等地에서 중국의 經他들을 魏譯 • 學習하고 있다는 『海國圖志』의 情報에 근거하여, 朴珪壽는 한편으로 서양인들이 높은 수준의 中國文化를 흡수해서 더욱 교묘한 敎理를 개발할 것이라 우려하면서도, 다른 한편 中國文化에 오랫동안 접한 결과 그에 感化되어 동양의 ‘道'에 歸依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본다(第13則).

朴珪가 이러한 樂觀的 展을 하게 된 데에는 中國에서 돌아온 李正履로부터 廣東에 진출한 英國人들이 中國의 文字와 衣冠制度를 익히고 따른다는 정보를 접한 사실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듯하다. 여기에 더하여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海國圓志』였으리라 생각된다. 이와 같이 ‘東道'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 위에서 西洋과의 交涉을 회피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對處하려 한 姿는 후

일 朴의 사상과 政治活動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데, 바로 이러한 姿勢에서 開化思想의 한 형태인 이른바 ‘東道西器論’의 萌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5. 맺음말

『尙古會文義例』와 『居家尉枚』, 그리고 「岡衛新編評語」는 각각 1820년대, 1830년대, 1840년대 朴의 사상 발전을 잘 보여주는 저술이다. 이 글에서는 그에 대한 분석을 통해 18세기의 實學的學風이 19세기 이후 朴珪와 같은 인물에 의해 꾸준히 계숭 • 발전되어 갔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우선 『尙古腦l會文義例』는 朴珪가 祖父 朴址源의 士論과 洪大容의 地圓地動說 등 前代의 質學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나타난 士論과 而制에 대한 관심이 결합하여 『居家雜服收』에서 兩班士大夫의 衣冠制度改革論으로 具體化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후일 朴珪가 地球를 製作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일찍부터 地圓地動說과 같은 進步的 天文學說에 대한 깊은 素殺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尙古圖會文義例』는 朴珪壽의 초기 사상뿐 아니라, 그후의 사상적 발전을 究明하는 데 있어서도 關鍵이 되는 저술이라 할 수 있다.

『居家雜服改』는 宋時烈에서 비롯된 老論 學界의 주장이자 祖父朴址源의 持論이기도 한 衣冠制度改革論을 학문적으로 완성한 저술이다. 따라서 이는 朴均源과 朴珪푼#의 학문적 傳承關係룰 뚜렷이 입증해줄 뿐 아니라, 實學과 朱子學의 關聯樣相에 대해서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端緖를 제공한다. 朴珪壽의 衣冠制度改革論은 尊明排淸의 大義를 부르짖은 北伐論과 先進的인 中華文物의 積極 受容

을 주장한 北學論이 그 外見上의 對立에도 불구하고 內面的으로는 일정하게 聯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鬪衛新編評語」는 1840년대 이후 朴珪의 사상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남을 처음으로 感知할 수 있게 하는 글이다. 여기에는 天主敎와 西祥에 대한 批判的 關心과 아울러, 東道西器論의 萌身가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朴는 李版의 燕行과 『海國鬪志』의 영향으로, 從前의 『居家回收』와 같은 復古的 體學硏究로부터 ‘西勢束’의 世界史的 激堤에 대처하기 위한 經世學으로 轉換하게 되었던 것 같다. 제1차 犯片戰爭이 터진 1840년 전후의 시기는 束아시아가 자본주의 世界盟제개에 包攝되어 가는 分岐札으로서, 그때부터 중국과 일본에서는 강렬한 對外危機意識 속에 海防과 內政改革울 추구하는 思潮가 대두하였다. 朴는 같은 시기의 朝鮮에서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보여준 先園的 인물로, 「鬪周衛新編評語」는 祖父의 實에서 출발한 그가 새로운 時代的 與件 속에서 이를 발전적으로 극복하여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正祖의 陵行과 首都圈의 成長

金文植

머리말

17세기 후반이래 서울은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도시였다. 17세기 小氷期 현상의 영향으로 전국의 流民이 서울로 몰려들어 都城 밖에 자리를 잡으면서 서울의 인구가 증가하고 漢城府의 관할 구역이 확대되었으며, 유통 경제의 활성화에 힘입어 전국 규모의 시장권이 형성되고 국제 무역이 성행하면서 서울은 상공업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서울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이들에게 식량과 연료를 공급하는 서울 근교의 군현들이 상업 도시로 성장하였고, 한강을 교통로로 이용한 한강변의 상업 취락도 발달하였다. 18세기에 있어 중앙의 서울[京都]을 중심으로 4[開城, 江華, 華城, 廣州]로 둘러싸인 首都圈 지역은 인구와 경제력이 꾸준히 성장하는 추세에 있었다.

正祖는 왕위에 즉위한 이듬해부터 사망하기까지 경기도 일원에 흩어져 있는 王陵을 참배하는 陵行을 계속하였다. 본고는 정조가 방문한 왕릉이 바로 성장일로에 있던 首都圈에 집중적으로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하고자 한다. 정조는 陵行을 통해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효과를 얻었지만, 상공업의

발달을 통해 사회 변동이 심하던 수도권 지역을 국왕이 직접 방문하여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고, 士 • 民들의 사기를 북돋우며, 수시로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전략적 요충지를 보강하는 등 수도권의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데 이 首都圈 지역은 바로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인 京畿學人들이 世居하던 지역으로,1) 이들은 수도권의 발전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土 • 民의 갈등과 이를 해결하려는 정조의 조치를 보면서 각자의 개혁안을 구상하였다. 정조의 陵行과 수도권의 성장을 촉진하려는 조치는 이곳에 거주하던 경기 학인들에게 강력한 왕권에 기반한 군주 주도의 개혁 정치가 가져오는 실질적인 효과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본고는 정조 능행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陵行日誌와 빈도수, 陵行 중에 실시한 각종 조치들의 내용을 살펴보고, 정조의 능행이 首都 의 성장에 끼친 영향을 검토하려 한다.2) 자료는 『朝鮮王朝買錄』을 주로 이용하였고 『日省錄』 『承政院日記』의 자료를 보조적으로 활용하였다.

1) 朝鮮後期 京畿學人의 등장과 그들의 학문교유에 대해서는 졸저, 『朝鮮後期經學思想硏究』(一, 1996), 1-19쪽.

2) 正祖의 陵과 그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에서 다뤄진 바 있다.

韓相權, 1993, 『朝鮮後期 社會問題와 訴究制度의 發達』(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6, 『朝鮮後期 社會와 訴究制度』 一潮閣 재수록)

李泰鎭 1995, 『18-19세기 서울의 근대적 도시발달 양상』, 『서울학연구』IV

原武史, 1995, 『朝鮮型 ‘一君万民' 思想(/)系譜』, <社會科學硏究> 제47권 제 1호

1. 正祖의 陵行日誌

正祖가 재위 24년 동안 都城울 벗어나 경기도 일원에 흩어져 있

던 王陵을 방문한 횟수는 총 66회였다. 정조의 능행 횟수에 대해 기왕에 발표된 논문에서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3) 필자가 관계 기록을 대조 확인한 결과 정조가 도성 밖의 陵 • 園 • 墓를 방문한 것은 66회로 나타났다. 다음의 表 1 ‘正祖의 陵行日誌'는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3) 李泰鎖은 68회, 原武史는 王宮에 인접한 殿 都城 안에 있는 왕족의 廟 둥을 포함하여 70회 이상이라고 하였다.

표 1에서 보듯 정조는 1777년 2월 永陵 • 弘陵의 방문을 시작으로 사망하기 3개월 전인 1800년 3월까지 陵行을 계속하였다. 정조의 능행 횟수는 연평균 3회에 달하는데, 이를 先王의 陵行 횟수가 통상 연 1회, 많아야 2월과 8월에 1번씩 연 2회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한다면 정조의 능행 횟수가 매우 잦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정조의 능행 기간은 東九陵(당시는 東七陵임), 西五I俊, 西三陵 등 대부분의 왕릉들이 서울 근교에 있었으므로 당일에 참배를 마치고 還하는 경우가 전체의 58%(66회 중 38회)에 달했지만, 7박 8일, 4박 5일, 3박 4일과 같이 數日을 도성 밖에 머물 때가 있었고, 이런 경우에는 방문 지역의 行宮이나 陵 • 園 • 墓의 齋室을 숙소로 이용하였다.

정조는 30개의 陵, 4개의 園, 6개의 墓를 방문하였는데, 다음의 表 2는 陵 • 園 • 墓별 방문 횟수를 정리한 것이다. 표 2에서 보듯 정조의 陵별 방문 빈도수는 18회에서 1회까지 상당한 편차를 보였는데, 永祐園 • 顯隆園 • 明陵 • 健元陵 • 元陵 • 弘陵 둥의 방문 빈도 수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이 중에서 永祐園과 顯隆園은 정조의 生父인 思悼世子를 모신 園이고, 明陵은 肅宗과 두 腦妃(仁顯王后, 仁元王后)를 모신 陵이며, 健元陵은 太祖, 元陵과 弘陵은 英祖와 두 王后(元陵에는 繼妃 貞順王后 합장, 弘陵은 貞聖王后)를 모신 陵이었다.

이처럼 정조가 太祖, 肅宗, 英祖의 王陵을 자주 방문한 것은 先王에 대한 효성의 표현인 동시에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었다. 明陵 • 弘陵이 있던 西五陵과 健元陵 • 元陵이 있던 東九陵에는 다수의 왕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태조, 숙종, 영조의 왕릉을 자주 방문한 것은 太祖에서 시작된 왕위가 肅宗 • 英祖룰 거쳐 자신에게 이어진다고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조는 전체 능행 횟수의 절반에 육박하는 31회에 걸쳐 永祐園과 顯隆園을 방문하였는데, 이는 권력투쟁의 와중에 희생된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伸究하고 자신의 혈통을 대외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내려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4) 표 1에서 보듯 정조의 永祐園 방문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잦아졌고 1789년 水原으로 移葬한 이후에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顯隆園을 방문함으로서 生父에 대한 끝없는 추모의 정을 표현하였다.

4) 정조는 즉위한 날 발표한 給音에서 '자신이 思悼世子의 아들임’을 대외적으로 천명한 바 있다.

『正祖貫錄』 권1, 正祖 즉위년 3월 辛巳. 44-561-라(44는 영인본 『朝鮮王朝責錄』의 권수, 561은 해당 권의 페이지를 표시한 것이다.)

”召見大臣于門外 下給音曰 鳴呼 人 思悼世子之子也 先大王爲宗統之重 命予嗣孝世子 鳴呼 日上章於先大王者 大可見不成本之予意也 禮難不可不嚴 情亦不可不伸 妻祀之節 宜從祭以大夫之體 而不可與太廟同"

2. 陵行時 내려진 조치의 분석

1) 先王 업적의 계승과 王室 권위의 과시

정조는 자신의 陵行이 先王의 뜻을 계승하는 繼志述事의 일환임을 강조하고 각종 조치를 내릴 때도 역대 선왕들의 행적을 참고하

였다. 1779년(정조 3)에 腐의 寧陵을 방문했던 정조는 자신의 능행은 列聖朝가 실천한 사례를 따른 것이며, 선왕들이 능행을 할 때마다 特恩이 있었던 것을 따라 民을 위로하는 조치를 실시한다고 밝혔다.5) 또한 정조는 1792년(정조 16)에 光陵룰 방문하여 楊州 • 抱川 지역 民人의 민원 사항을 해결하면서 자신은 聖祖의 陵을 방문하고 聖祖의 사업을 계승하며 聖祖들의 心을 자신의 心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6) 정조는 1799년(정조 23)에 戱陵을 방문하면서 32년 전(1768, 영조 44)에 英祖룰 모시고 함께 참배하던 때를 상기하였고,71 1797년(정조 21) 章陵을 방문할 때에는 1734년(영조 10) 영조가 장릉에 행차할 때 내렸던 조치를 영조를 수행했던 備遊司堂上 李古넷에게 확인하고 이에 상응하는 지시를 내렸다.8) 정조의 이러한 처신은 능행 중에 내려지는 조치들이 자신의 독단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역대 선왕들의 업적을 계승하는 차

5) 위의 책, 권8, 正祖 3년 8월 庚申 45-117-라~118-가

“今者動篤 寫媒列聖朝(戊行之例 程路近百餘里 日字爲七八日 百官軍兵之賜勅勞 實爲弁盧 至於三邑民人 其關念 尤非 旦願之餘 若無質忠 則可以慰民情而安予心平 列聖行幸 皆有特恩 予亦迎德意"

6) 위의 책, 권35, 正祖 16년 9월 丁未. 46-333-라

”諭楊 父老民人曰 … 予小子 拜聖祖之陵 述聖祖之業 以聖祖之心爲心者 其惟在於愛我元元平哉 祀低成將遠 至維楊 駐篤野次 召兩邑父老 先農形 次問民隱 勉之以務本力作之方 申之以忠致懷保之政"

7) 위의 책 권52, 正 23년 8월 乙巳. 47-203-가

"在先戊子(1768년) 倍大篤行禮於本陵 今三十有二年之後 始復吏油仙旋又行的 周旋象設之 況若勤進昴於親視工役之II寺 其詳必在於記注 此時猛慕 益如新"

8) 위의 책, 권47, 正 21년 8월 辛 47-37-라~38-가

"上間九曰 先朝甲寅(1734)京陵行幸II寺 沿路如 習九 沿路邑 則井減大同米二斗 本地方 則其年春大同停退者 特命落減矣 大同園減 固是大忠而無之民 不能均蒙悳 臣意 則或函役 或函荀遠 可爲之道 敎曰 秋幸之祗盟章陵 盜欲仰述我寧考甲寅聖蹟也 賤位行 巳不勝炳興減"

원의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조는 능행을 통해 역대 선왕의 행적과 관련이 있는 해를 기념하고 그들의 치적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였으며, 능행 중에 있었던 故에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앞서 표 1에서 보듯 즉위 초년에는 선왕들의 행적을 기념하는 능행이 잦았는데, 1778년에 英I의 牛母인 淑嬪崔氏의 사망 60주년을 맞아 昭引을 방문하거나, 1779년에 효종 사망 120주년을 맞아 玲池을 방문한 것, 1781년에 영조의 王世弟 책봉 60주년을 맞아 元陵을 방문한 것 등은 그러한 예에 속한다. 정조는 자신의 능행을 선왕들의 치적을 적극 선양하는 기회로 활용하였는데, 1779년 世宗의 英陵울 방문하면서 “우리 나라의 예악문물은 세종의 제도가 아닌 것이 없으니 웅장한 규모나 아름다운 법도를 지금까지 준수하고 있다. 어찌 성대하지 않은가? 세종과 효종의 盛과 大業을 어찌 말로서 형용할 수 있으랴"라고 하였고,9) 1792년에 世祖의 光陵을 방문했을 때는 "훌륭하신 우리 聖祖 光陵廟께서는 武로 大略을 정하고 文으로 태평을 이룩하시어 신령한 공덕이 팔도에 퍼지고 큰 음덕이 萬世룰 보호하였다”고 하였다.10)

정조는 英祖와 思悼世子의 능행시 행적에 관심이 많았다. 1781년에 정조는 世弟로 있던 英祖가 1721년(경종 원년) 明陵을 참배할 때의 事을 기록한 紀碑를 玲裁에 세우고 영조의 世弟 시절 사적을 기록한 延l署碑閣을 방문하였으며,11) 1789년에 長陵울 참배하면서 1731년 영조가 長陵을 遷封할 때 심었던 찻나무 세 그루의 주위에 銅 울타리를 치고 ‘手植'이란 두 굴자를 새겨 후세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조치하였다.12) 또한 1790년에는 華城의 顯隆園을 참배

9) 위의 책, 권8, 正祖 3년 8월 丙辰. 45-114-가

10) 위의 책, 권35, 正祖 16년 9월 丁未 46-333-다

11) 위의 책, 正 5년 8원 乙酉 45-259-다 • 라

하고 秀山山城에 올랐는데, 1760년(영조 36) 思悼世子가 온천을 갈 때 숙소로 사용했던 蓮堂에서 山城의 父老들을 불러 당시의 행적을 전해들었고, 鎖南樓에서는 사도세자가 했던 것처럼 활을 쏘아 네발을 명중시키기도 하였다.13)

정조는 능행을 통해 大君 • 嬪 • 翁 등의 를 참배하고 그 후 손들을 관리로 등용함으로써 宗室의 화목을 도모하였다. 종실에 관한 조치로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1786년 太祖의 繼妃인 神德王后의 貞陵을 방문했을 때이다. 정조는 인근에 있던 惠愼翁主의 墓에 직접 祭룰 올린 다음 신덕왕후의 부친인 象山府院君(姜允成) 夫女의 墓와 자손을 찾은 뒤 墓에 致祭하도록 命하고, 신덕왕후의 소생인 撫安大君(李芳蕃)과 宜安大君(李芳碩)의 墓를 지방관리에게 관리하도록 하였다.14) 또한 태조의 비 神懿王后의 소생인 益安大君(李芳毅)에 대해 숙종과 영조가 네 차례에 걸쳐 내렀던 조치들을 상기하면서 그 祀孫 李齊白울 불러 옷과 식량을 하사한 뒤 관리로 임용하고, 1746년(영조 22)에 영조가 세운 影堂을 관찰사가 수리하고 지방관이 5년에 한 번씩 돌보게 한 다음 承旨를 보내 祭를 올리도록 하였다.15) 이외에도 1789년 永陵 인근에 있던 月 山大君의 祠宇에 승지를 보내 致祭하게 하고 貧잉접한 후손에게 경기도가 음식물을 지급하도록 하였으며,16) 1792년 光陵을 방문하는 길에 燕山君

12) 위의 책, 권27, 正祖 13년 2월 庚子. 46-2.8-가

13) 위의 책, 권29, 正祖 14년 2월 辛酉 46-90-나

14) 위의 책, 권22, 正祖 10년 9월 丁酉~戌戌. 45-596-다~597-나

15) 위의 책, 권22, 正祖 10년 9월 丁酉. 45-596-라

”益安大君 卽齊陵誕生 而爲開國定社元勅 列聖加裂崇之學(1693) 先庚申(1740) 丙寅(1746) 乙未(1775) 賜祭本家 御題迫像 命立石神道 給田守護 在予小子追述之道 宜卽審所 又致祭 而尙今未逸今地方官墓地看審 孫來待"

16) 위의 책, 권27, 正祖 13년 2월 己亥. 46-27-라

• 光海君 • 麟坪大君 • 靜嬪 • 仁城君 • 和協翁主 • 恩信君의 菜에 致祭하도록 하고, 異腹弟인 은신군의 묘소에는 특별히 御製街]筆碑區을 세우도록 하는 등, 능행로 주변에 있던 종실의 묘에 祭를 올리고 자손을 등용하는 조치가 여러 차례 내려졌다.17)

이상에서 보듯 정조는 자신의 능행과 각종 조치들이 역대 先王들의 업적을 충실히 계승하는 織志述의 일환임을 강조하였고, 선왕들의 행적과 관련이 있는 해를 기념하고 그들의 치적을 적극 평가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룰 과시하였다. 또한 大君 • 嬪 • 翁主 등의 墓를 참배하고 그 후손들을 관리로 등용함으로써 宗室의 화목을 도모하였다. 정조의 이러한 조치들은 왕위 계승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왕권 강화의 발판을 마련하는 의미가 있었다.

2) 功臣 • 文臣의 表章과 文士의 선발

정조는 陵行을 통해 방문하는 王陵과 연고가 있거나 陵行路의 주변에 있던 功臣 • 文臣의 墓 • 祠에 祭룰 올리고 그 자손을 관리로 임용하는 조치를 내림으로써 그 공적을 表章하였다. 정조는 1786년 孝陵을 참배하면서 中宗의 國毋인 坡平府院君 尹汝弼의 집에 승지를 보내 致祭하게 하고, 윤여필의 孫子로 李造의 난 때 軍功을 세운 尹廷俊에게 내릴 贈職을 의논하도록 하였으며, 윤여필의 奉祀孫과 인종의 國인 錦城府院君 朴의 봉사손을 관리로 등용하였다. 동시에 인종 때의 文臣이었던 金麟厚의 思日에 맞춰 致祭하게 하고 그 자손을 효릉의 參奉으로 임명하였는데,18) 이것은 방문하는 왕릉과 연고가 있는 경우였다.

17) 위의 책, 권35, 正祖 16년 9월 丁未. 46-334-가

18) 위의 책, 권21, 正祖 10년 2월 己亥~庚子. 45-555-다~라

능행로의 주변에 있는 功臣 • 文臣의 墓所와 祠에 치제하는 경우는 많은 사례가 보이는데 1791년 思陵에 참배할 때에 정조는 仁祖反正의 功臣인 海平府院君 鄭眉의 묘에 치제토록 하고, 사릉을 참배할 때 그 자손들을 함께 참여시켰으며, 鄭氏 집안의 譯가 있는 지역을 보호하고, 후손 鄭運者 등을 召見하여 慰諭하는 등 다양한 조치를 취하였다.19) 또한 1790년 顯隆園을 방문할 때에는 연행로의 부근에 있던 鄭太和 • 李福男 • 李尙香染의 墓와 李之의 祠堂에 祭를 올리게 하고, 墓가 果川에 있던 車天格의 문집을 內園]에서 인쇄하도록 하였으며, 차천로와 이복남의 자손들을 방문한 뒤 그들의 近況을 보고하도록 하였다.20) 그리고 1789년 長陵을 참배하고 坡州에 행차하였을 때는 李와 成揮의 墓에 정조 자신이 지은 祭文을 보내 제를 올리도록 하였고,21) 1796년에는 趙光祖의 祠版이 華城行宮 인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승지를 보내 思日에 맞춰 치제하고, 그 봉사손 趙國仁을 관리로 등용하며, 지방관에게 토지를 구입하여 제사에 소용되는 물품을 공급하게 하였다.

정조는 방문지에 있는 四院이나 鄕校에 祭룰 올림으로써 그 지역에 연고를 가진 文臣의 學을 기리고 儒牛들의 학문을 권장하였다. 정조는 1784년에 紫袁召院(李)과 坡山書院(成禪),22) 1792년에 道峰院(趙光祖 • 宋時烈),23) 1795년에 忠貸害院(姜郡贊) • 梅谷院(宋時烈) • 明院(趙翼),24) 1797에는 牛猪院(趙盛) • 書院(朴泰輔)에 승지를 보내 치제토록 하였다.25) 정조는 주로 水原에서

19) 위의 책, 권33, 正祖 15년 9월 丙申~丁酉. 46-244-다~라

20) 위의 책, 권29, 正祖 14년 2월 矣亥. 46-90-다

21) 위의 책, 권27, 正祖 13년 2월 辛丑. 46-28-가

22) 위의 책, 권18, 正祖 8년 8월 庚子. 45-464-나

23) 위의 책, 권35, 正祖 16년 9월 戊申. 46-334-나

24) 위의 책, 권42, 正祖 19년 윤2월 辛. 46-557-가

25) 위의 책, 권47, 正祖 21년 8월 辛亥 47-38-다 ; 21년 8월 乙, 47-40-가

鄕校룰 방문하였는데 1789년에 수원의 향교에 이르러 마중나온 유생 10여 인에게 학문을 권장하고 향교의 官을 위문하였고,26) 1795년에는 華城의 聖險를 참배하고 새로 인쇄한 四三經을 하사하였으며,27) 1798년에는 華城의 향교에 禮曹判를 파견하여 孔子에게 釋菜綴룰 거행하게 하였다.28)

정조는 능행을 통해 현지의 山林을 방문 또는 초빙하거나 文土를 현지에서 직접 선발하는 조치도 실시하였다. 山林을 초빙하는 조치는 아직 王이 제자리를 잡지 못했던 1779년 8월, 腐州룰 방문한 正祖와 金亮行이 대면하는 자리에서 이뤄졌는데, 국왕의 정중한 초청을 받은 김양행은 정조의 遠宮 행렬을 따라 입궐하였다.29) 또한 1792년 光陵을 방문하는 길에 長水院에 이르렀을 때에는 鄕里로 물러나 있던 金鍾秀에게 史官을 보내 안부를 묻도록 하였다.30)

현지의 文를 別試를 통해 선발하는 조치는 수시로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1797년 章陵과 顯隆園을 참배하는 길에 거쳐갔던 10邑의 儒生을 선발한 행사이다. 당시 정조는 4박 5일의 陵行을 마친 이후 諸 • 賊 • 論 • 銘 • 碩 • 贊의 試題 30道를 내려주고 沿路 10邑의 수령에 각각 3道씩의 제목을 걸고 試券을 수합하게 한 다음 자신이 직접 채점을 하였다. 그 결과 각 體별로 수석자를 뽑아 生員 • 進士는 文科 殿試에, 幼學은 監試 會試에 응시할 수 있

26) 위의 책, 권28, 正祖 13년 10월 庚申 46-65-나

”至水原鄕校前 情生十餘人祗迎 召見勸學 入水原行宮 命畿伯本府使 率父老校屈來待 命戶判徐有隣 勞問存植"

27) 위의 책, 권42, 正祖 19년 윤2월 矣巳. 46-557-나

28) 위의 책, 권48, 正祖 22년 2월 乙未. 47-67-다

釋菜는 孔子에게 을리는 제사인 釋莫의 일종으로 소나 양의 회생이 없이 채소만으로 간단하게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29) 위의 책, 권8, 正祖 3년 8월 丁巳 45-114-다~라

30) 위의 책, 권35, 正祖 16년 9월 丙午. 46-333-나

는 자격을 주었으며, 나머지 선발자에게는 『五倫行f[』 『史記英選』『陸奏約墨 『奎章全』 등의 서적을 하사하였다.31) 정조의 이러한 조치는 동일 시기에 지방의 儒牛을 발탁하기 위해 실시한 賓典科와 동일한 방법으로 진행된 것이었다.32) 다만 1791년 嶺지역에서 시작되어 1798년 西지역에서 마감된 賓興科의 경우 그 대상이 주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이 경우에는 국왕이 직접 현지를 방문했던 서울 근교의 10邑이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이외에도 정조는 1779년 廣州에서 閔泰婦 등 3인의 文士롤 선발하였고,33) 1787년에는 製述에서 수석을 한 高陽幼學 趙喆과 楊州幼學 崔版을 文科 殿試에 응시하게 하였으며,34) 1793년에는 華城儒牛 尹持을 文에 급제시키는 등 능행지의 文土들을 적극적으로 선발하였다. 정조가 해당 지역의 院 • 鄕校에 重臣을 파견하여 제사를 올리게 하고, 別試룰 통해 文土롤 선발하는 조치는 그 지역 유생들의 士氣를 크게 고양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정조는 陵行 도중에 느낀 감회를 詩로써 표현하고 수행 관료들에게 같은 韻字를 사용한 應製詩를 짓게 하여 君臣간의 화합을 도모하였으며, 능행에 참여한 신료나 陵官에게 상을 내리거나 승진의 혜택을 주었다, 능행을 수행한 관료들에게 상을 내린 대표적 사례는 1799년 顯隆園을 방문한 것인데, 戱官 李秉模와 李時秀에게는 熟馬 l四을 面給하고, 贊綴 徐龍庫는 熟馬 1필을 賜給하였으며, 禮房承旨 1인, 大祝 3인, 訓鍊大將 1인에게는 加貸의 조치가 내려졌

31) 위의 책, 권47, 正祖 21년 9월 戊寅. 47-42-가~나

32) 正祖가 추진했던 인재 양성의 범위와 방법, 典錄 계열 저술의 내용에 대해서는 졸저, 1996, 『朝鮮後期 經學思想硏究』(一潮閣), 28-42쪽을 참조.

33) 위의 책, 권8, 正祖 3년 8월 己未 45-116-라

34) 위의 책, 권24, 正祖 11년 8월 辛亥 45-663-라

다.35) 또한 陵官으로 있다가 승진되는 경우도 자주 있었는데, 1789년에는 弘陵의 陵官을 六品으로 올려 보직을 변경시키고 達成府院沿의 후손을 그 자리에 임명하였고,36) 1790년 東九陵을 방문하였을 때는 일부 陵을 6품으로 승진시키고, 나머지에도 1品 加資하거나 上弦弓을 하사하였다.37)

이상에서 보듯 정조는 능행지에 연고가 있는 功臣이나 文臣의 묘소 및 書院 • 鄕校에 제사를 지내고 그 후손들을 관리로 임용하며, 명망 있는 山林을 조정으로 초청하거나 유생들에게 학문을 권장하고 현지에서의 시험을 통해 文士룰 선발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君臣간의 화합을 도모하고 해당 지역의 士氣를 크게 고양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3) 군사훈련과 武士의 선발

正祖의 陵行은 국왕이 王陵을 직접 참배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의 군대가 동시에 이동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수행하는 군사들을 서로 충돌시켜 武熟龜를 겨루는 군사 훈련의 기회로 활용되었다. 정조는 궁궐을 출발할 때부터 戌服을 갖춰 입고, 궁궐이나 도성을 벗어난 이후에는 반드시 말을 타고 이동하였으며, 陵의 입구에 도착한 이후 로 갈아타고, 齋室에서 翼善冠 • 務抱로 갈아입고 酷獻禮률 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였다.38) 따라서 이동

35) 위의 책, 권52, 正祖 23년 8월 乙巳 47-203-나

36) 위 의 책, 권27, 正祖 13년 2월 壬寅. 46_28-다

37) 위의 책, 권31, 正祖 14년 10월 己酉. 46-175-가

38) 『日省錄』 正祖 2년 8월 18일(乙亥). 3-977다~라

”具戒服 由萬安 出仁政 乘馬 出崇禮 ••• 諸明陵洞口 降馬乘輿 脂齋室改具冀善冠• • 烏岸帶 出齋室 乘輿脂版位 行四拜"

『正貫錄』 권7, 正祖 3년 2월 乙丑. 45-91-나

”服元陵 上具戒服乘馬 至元陵 改具冀善冠• 針 奉審陵上丁字閣 • 碑 行酷獻禮"

하는 도중 국왕의 모습은 戰楊에서 군사를 지휘할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정조는 능행 도중에 의도적으로 수행 군사들을 충돌시켜 武松를 시험하였는데, 1785년 康陵과 泰陵의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沙河里에서 실시한 훈련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훈련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39)

1. 帳殿 앞에 龍兎의 招稀를 세우자 禁別將(李得濟)이 금군을 거느리고 달려왔다. 정조는 馬兵別將(曹學臣)에게 밀령을 내려 關後別隊룰 거느리고 맞받아 치게 하였다가 징을 울려 陣울 파하였다.

2. 藍色 招稀胤를 세워 흔들고 북을 치자 禁衛大將(徐有大)이 기병 50명을 인솔하여 서쪽에 진을 쳤다. 정조가 禁別將에게 기병 50명을 인솔하여 동쪽에 진을 치게 하였다. 북을 치고 天胎을 불며 초요기를 왼쪽으로 혼들자 금위영 진이 고함을 치면서 금군의 진을 향해 공격하였다. 정조가 다시 馬兵別將에게 휘하의 기병 50명과 武藝출신으로 奇兵을 만들어 양쪽 진영 사이를 공격하도록 밀령을 내렸고, 篤前別와 熟後別招에 게 그 동쪽을 포위하게 하였다. 얼마 후 말이나 사람을 사로잡은 자에게는 말을, 깃발을 빼앗은 자에게는 면포를, 마병별장에게는 內底馬를 하사하였고, 大吹打를 불어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게 하였다.

3. 熟前 • 篤後別招와 무예출신, 別隊馬兵 둥에게 圓個을 치게 하고 大旗織로 4邊門을 만든 다음 금위대장과 금군별장에게 원

39) 위의 책, 권19, 正祖 9년 2월 庚與 45-496-가~나

진 안에서 말을 타고 채찍과 몽둥이로 서로 공격해 상대방의 무기를 빼앗게 하였다. 정조는 宣傳官(金)에게 명하여 진에 들어가 어명을 전달하는 척하다가 금군별장의 手旗를 빼앗게 하였다. 선전관이 수기를 빼앗아 돌아오자 凱歌를 연주하고 6品으로 승진시켰다. 수기를 빼앗긴 금군별장이 금위대장의 수기를 뻣으니 금위대장은 이를 다시 빼앗아 말을 타고 진을 빠져나왔다. 금위대장에게는 約皮를 하사하고, 금군별장은 功過가 같았으므로 論하지 않았다.

이상에서 정조는 능행 도중에 의도적으로 수행 군사들을 몇 개의 단위로 나누어 陣을 치고 상호 공격하도록 하여 부대의 전투 능력과 武將들의 武와 통솔 능력을 시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보다 앞선 1781년에는 서울 근교의 沙에서 武 행사가 있었다. 永祐園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정조는 兵曹判(洪樂性)에게 禁軍울 인솔하여 먼저 사아평에 가서 陣을 치게 하고, 4訓鍊大將(具善復)에게 步을 인솔하여 도로변에 주둔하게 하며, 左右將(李明運 • 申大謙)에게 馬兵을 인솔하여 禁軍의 서쪽에 陣울 치게 한 다음에 幕次에서 대신들을 불렀다. 당시 禁衛大將(李敬想)과 御營大將(李柱國)은 각각 標下의 兵馬을 인솔하여 동쪽과 서쪽에 진을 쳤고, 병조판서가 인솔한 금군은 중앙에, 좌우별장이 인솔한 馬兵은 동남쪽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정조는 중앙의 금군은 鶴冀陣을 이루고 동남쪽의 마병은 方을 이룬 뒤에 戰陣을 짜서 서로 공격하게 하였으며, 수차례의 충돌이 있을 연후에야 징[金]을 쳐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게 하였다.40)

이처럼 이동 중의 군사 훈련은 불시에 정조의 密命으로 실시되는 것이라 능행을 수행하는 五軍營(訓鍊都監, 禁衛營, 御營廳, 守御

40) 위의 책, 권11, 正祖 5년 4월 壬子. 45-233-다

廳, 抱戒廳) 및 해당 지역의 군사들은 항상 이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했다. 훈련 장소로는 梁鐵坪(현재 은평구 역촌동 일대)이 자주 이용되었는데, 1786년에는 이곳에서 軍戰를 행하고 전쟁 상태를 전개했으며,41) 1786년에는 각 營의 軍器를,42) 1792년에는 關武 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였다.43) 또한 1792년에는 漢江 渡江훈련이 있었다. 정조는 梁의 亭에 있으면서 먼저 禁에게 를 건너 북쪽 언덕의 양편에 정렬하게 하고, 이후 宣傳官들이 각 부대를 인솔하여 주교를 건너는 과정에서 대열의 정돈 상태를 점검하였다.44)

이러한 군사 훈련이 끝나면 그 결과에 따라 을 시행하였는데 1792년의 훈련에서 성적이 좋았던 將臣들과 京畿監司 • 開城留守및 坡州牧史는 을 받았지만,45) 1786년의 훈련에서 陣을 이루지 못하고 旗甲을 갖추지 못했으며, 국왕이 있는 쪽으로 총을 쏘았던 책임을 물어 禁衛大將(徐有大)이 죽시 파면되기도 하였다.46)

능행 중의 군사 훈련은 宿所나 山城에서도 실시되었다. 1784년 정조가 坡牧에 숙박했을 때에는 갑옷을 갖추어 입은 뒤 訓鍊大將(具善復), 御營大將(徐有大), 京畿監司(沈願之), 開城留守(鄭昌聖), 江華留守(嚴), 德戒使(李昌運), 禁軍別將(趙圭鎭) 둥에게 깃발을 흔들고 북을 울리며 자신을 영접하게 하였고, 羽的에서 이들의 軍福룰 받았다.47) 또한 정조는 1779년 壤州行에 머물면서 淸心樓에 올라 信砲의 성능을 본 다음 陸上과 水上에서의 군사 훈련을

41) 위의 책, 권21, 正祖 10년 2월 己亥. 45-565-라 ”至梁鐵坪 受軍禮 令諸軍作合戰狀"

42) 위의 책, 권24, 正祖 11년 8월 壬子. 45-664-가

43) 위의 책, 권34, 正祖 16년 2원 乙丑. 46-278-다

44) 위의 책, 권34, 正祖 16년 1월 丙車. 46-274-나

45) 위의 책, 권34, 正祖 16년 2월 丙寅. 46-278-다

46) 위의 책, 권21, 正祖 10년 2월 庚子. 45-555-라

47) 위의 책, 권18, 正祖 8년 8월 己亥. 45-464-가

실시하였다. 정조는 먼저 營旗를 점검한 다음 각 영문의 대장에게 휘하의 군대를 인솔하여 언덕 위에 陣을 치게 하였으며, 京畿監司(鄭呂聖)와 廣州牧使(朴師)에게 명하여 南漢江에 수백 척의 선박을 정렬시키고 청심루에서 올린 烽火를 따라 일제히 鼓樂으로 응하게 하였다.48) 또 환궁하는 길에는 南淡山城에 머물면서 鍊兵館에서 성내에 거주하는 僧들이 方陣 • 圓陣을 이루는 것을 관람하고 紅夷砲의 일종인 埋火砲룰 설치하였으며, 西將登에서 병자호란 때 겪었던 고초를 상기하고 城操를 행하였다.49) 또한 1795년에는 새로 건설된 華城의 西將에서 城投와 夜操를 검열하였고,50) 1796년에는 화성의 東將에서 군사들의 武藝를 시험하고 埋火砲의 발사 광경을 관람한 다음에 군사 조련의 공로를 인정하여 華城留守(趙心泰)에게 馬룰 하사하였다.51)

정조는 전 군대를 동원한 훈련 이외에 수시로 활쏘기를 통해 수행 신료들의 武座를 시험하였고, 방문 지역에서 別試를 실시하여 武士를 선발하였다. 정조의 활쏘기 시험은 자신이 먼저 쏘고 난 다음에 수행한 신료 및 武將 둥에게 쏘도록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787년 정조는 高陽行宮의 郡園射附에서 활을 쏘았는데 小布에 10발을 모두 맞추는 성적을 올렸다. 그리고 수행한 신료들에게 돌아가면서 활을 쏘도록 하였는데, 성적이 좋았던 경기감사(徐有防)와 광주부윤(李泰永)에게 말을 하사하였다.52) 또한 1792년에는 楊州의 岡에서 貫革에 2巡을 쏘고 수행한 近臣 引臣 • 地方에게 돌아가며 1巡씩 쏘게 하였고,53) 1797년에는 華城의 訪花隨柳亭에서 小

48) 위의 책, 권8, 正祖 3년 8월 丙辰. 45-114-나~다

49) 위의 책, 권8, 正祖 3년 8월 己未~庚申. 45-116-라~117-가

50) 위의 책, 권42, 正祖 19년 윤2월 甲午. 46-557-나

51) 위의 책, 권44, 正祖 20년 1월 己巳. 46-627-나

52) 위의 책, 권24, 正祖 11년 8월 辛亥. 45-663-라~664-가

53) 위의 책, 권35, 正祖 16년 9월 丙午. 46-333-나

的에 3巡을 쏜 다음에 臣 』臣들에게 연이어 쏘게 하고, 이를 구경하던 民庶들도 활쏘기에 참가하게 하여 최우수자에게는 武科殿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54)

武士의 선발은 통상 文士의 선발과 동시에 이뤄졌다. 정조는 1779년에 南漢山城 鍊兵에서 李尙淵 등 15인을 선발하였고,55) 1787년에는 高陽과 楊州의 무사 74인에게 무과 전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56) 또한 1792년에는 楊와 抱川의 무사를 선발하였는데 최우수자 1인은 무과 급제, 나머지는 武科 會試에 응시하게 하였으며,57) 1795년 華城의 洛南軒에서 金寬 등 56인의 무사를 선발하였다.58) 정조가 지방의 인재를 선발했던 賓興科의 경우 武士의 선발은 단 2회에 그쳤음에 비해,59) 陵行을 통한 首都圈 지역의 武士 선발은 그 실시 지역이 광범위하고 선발 희수와 인원이 훨씬 많았다는 특색이 있다. 그리고 정조는 능행을 수행한 軍士들에게도 別試룰 통해 승진의 기회를 주었는데, 1783년 永祐園의 방문을 수행한 將士 • 軍兵에게 別試射룰 실시한 것과 1788년 靖陵 • 宣陵의 방문을 수행한 軍兵에게 遠宮 즉시 營中句試를 실시한 것 둥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60)

이상에서 보듯 정조는 능행 도중이나 宿所, 山城과 같은 전략 요충지에서 행렬을 수행하던 전 군대를 동원하여 현지에 적합한 군

54) 위의 책, 권46, 正祖 21년 1월 庚午. 47-6~가

55) 위의 책, 권8, 正祖 3년 8월 己未. 45-116-라

56) 위의 책, 권24, 正祖 11년 8월 辛亥. 45-663-라

57) 위의 책, 권35, 正祖 16년 9원 丁未. 46-333-라

58) 위의 책, 권42, 正祖 19년 윤2월 矣巳. 46-567-나

59) 興科의 경우 1793년에 제주에서 10人, 1795년에 함흥 • 영흥에서 25人이 선발되었다. (졸저, 1900, 『朝鮮後期 經學思想硏究』 34-36쪽)

60) 위의 책, 권15, 正祖 7년 4월 甲子. 45-363-가

위의 책, 권26, 正祖 12년 9월 乙丑 46-6~나

사 훈련을 실시함으로써 武將들이 군대 통솔릭을 갖추고 군대는 일정한 전두 능력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또한 국왕과 신료가 함께 활쏘기를 합으로써 君臣간의 화합을 도모하는 동시에 신료들의 武를 시험하였으며, 현지의 文士와 武士를 선발합으로써 일정한 능력을 가진 首都段]의 인재들이 관리로 발탁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4) 對民접촉과 民究의 해결

정조의 陵行은 국왕이 다수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王陵을 참배하는 것으로 그 행사의 규모나 복장 및 의장의 화려함, 국왕을 가까이에서 직접 대면한다는 점 등에서 民人에게는 좋은 구경거리였다. 실제로 정조가 행차할 때 능행로 주변에는 그 壯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는데 慣錄에서는 이들을 ‘競光民人'이라 표현하였다. 1779년에 정조가 綴州 淸心樓에서 군사 훈련을 할 때에는 여주의 남녀노소 수만 명이 南淡江 강변에 나와 관람하였으며,61) 이튿날 利川行宮에 행차했을 때에도 수많은 인파가 몰리자 이를 본 정조는 ‘저들이 모두 나의 赤子이므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돌보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였다.62) 또한 1792년에 楊州의 祝石에 이르렀을 때는 觀光하는 民人이 산과 들을 가득 메웠고 정조는 이들을 직접 불러 民究 사항을 두루 물었다.63)

61) 위의 책, 권8, 正祖 3년 8월 丙辰. 45-114-다

62) 위의 책, 권8, 正祖 3년 8월 丁巳. 45-115-라

”上曰 今番禁路 觀光民人之多 可謂初見 彼林林惡慈者 皆予赤子也 何以則使無一夫不獲之軟平 一有不獲 是何異於’推而納諸溝中也"

63) 위의 책, 권35, 正祖 16년 9월 丁未. 46-333-다

”迫至祝石嶺 民人之觀光者 玲迫山野 上過問疾苦 民人對以一戶受躍 或至十餘石 人人盡納軍布"

국왕과 民人이 직접 접촉하면서 정조에게 무엇인가를 주려는 사람도 나타났다. 1784년 永陵을 방문하고 환궁하는 길에 의 民으로 떡을 바치려는 자가 있자 경기감영에서 무엄하다고 죄를 다스리려 하였으나 정조는 ‘물건을 좋지 않지만 정성은 가상하다’고 잘 타일러 보내게 하였다.64)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자 1786년에 捕盜大將(趙圭鎭)은 경호상의 난점을 들어 競光하는 사람들을 금지시킬 것을 건의하였고, 정조는 이들이 모두 자신의 赤子이며 이들로 부터 民柚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강한 어조로 거부하였다.65) 심지어 정조는 競光을 나섰던 民人들이 통금 시간이 임박해 서둘러 邑城으로 돌아가느라 생기는 혼잡을 예방하기 위해 방문지의 夜禁을 임시로 완화하기도 하였는데, 1792년에 高陽과 1794년에 果川에서 통금을 늦추어 競光人이 모두 돌아온 뒤에 城門을 닫도록 조치하였다.66)

정조의 이러한 배려에 보답하듯 民人들이 능행의 편의를 위해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경우가 나타났다. 1788년 宣陵을 방문하려는 정조의 행렬이 西氷津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강물이 불어 선창이 물에 잠기자, 果川 • 廣州의 民人과 좌우의 截光人, 행렬을 따르던 軍兵들이 자진해서 몰려들어 물이 솟는 곳을 배로 막고 그 위에다

64) 위의 책, 권18, 正祖 8년 8월 辛丑. 45-464-나

65) 위의 책, 권21, 正祖 10년 1월 丁JIJ. 45-551-다~라

"(捕盜大將 趙)圭鎭又言 '陵幸Il寺 民人之緊會朋仰 不是 而樹林化雜 山麗辻回之地 雜人 處處屯緊 全無嚴良之意 近來 亂逆生 刻幾迷發 不可無不漠之慮 自今以後 女[外幸行時 人小觀光雜人 一切那然痛禁 以示淸道之意' 上曰 '忘矣 追山如培者 敦非吾赤子平 來拓羽施 民可見 設禁遠逐 萬萬可當 至於該機二字 尤登可語 到處誠如卿 何異於認子爲賊平"

66) 위의 책, 권34, 正祖 16년 2월 甲子. 46-278-다

”命回時 强夜禁 爲念觀光士女 爭先入城雜之舒也"

위의 책, 권39, 正祖 18년 1월 染卯. 46-439-나

“至果川行宮 命今夜至明夜他禁 命城門 待觀光人入後下篇"

가 배에 있던 기물을 깔아 길을 만들기도 하였다.67)

능행길에 民人과 직접 대면하고 民究을 청취한 정조는 민원을 해결하기 위한 각종 조치들을 시행하였다. 정조는 먼저 京畿監司와 방문 지역의 지방관, 방문지의 民情 파악을 위해 사전에 현지에 파견했던 暗行御史의 보고를 따라 민원 사항을 처리하고 지방관은 功過에 따라 인사조치하였다. 정조는 1779년 揚州의 沼에서 경기감사(鄭一祥)와 泣使員을 불러 民幣를 물었고,68) 1792년 2월에는 파주목사(李敏)의 건의에 따라 50결에 달하는 無土有稅地의 세금을 완전히 감면하였으며,69) 9월에는 양주목사(李敏采)와 경기감사(徐鼎修)의 건의에 따라 양주와 포천의 民이 부담하는 守慕廳 牙兵米를 作錢할 것을 허락하였다.70) 또한 1779년에는 利川行宮에서 경기 암행어사의 보고에 따라 치적이 좋은 陰竹縣監(李普軌)에게 말을 하사하고, 민폐를 끼친 楊州牧使(嚴), 腐州牧使(朴師福), 楊根縣監(金載華), 果川縣監(李義和)를 파면하였다.71) 1791년에는 노량진에서 수원까지의 新作路 개설을 맡았던 4邑(果川 • 裕川 • 水原 • 廣州)에 능행을 떠나기 전날 암행어사(鄭東親)를 파견하여 那換울 살피게 하고, 별도의 암행어사(趙鎭宅)에게는 새로 조성된 水原의 民情울 살피게 하였으며,72) 1797년에는 미리 파견된 암행어사(金履永)의 보고를 따라 민원 사항인 陽川의 量田을 하게 하고, 폐단이 없어지지 않는 富의 量田을 담당한 실무자 명단을 보고하도록 하였다.73)

67) 위의 책, 권26, 正祖 12년 9월 甲子. 46-5-라~6-가

68) 위의 책, 권7, 正祖 3년 2월 乙丑. 45-91-나

69) 위의 책, 권34, 正祖 16년 2월 矣亥. 46-278-나

70) 위의 책, 권35, 正祖 16년 9월 丙午. 46-333-나

71) 위의 책, 권8, 正祖 3년 8월 乙卯. 45-114-가

72) 위의 책, 권32, 正祖 15년 1월 庚寅. 46-197-가

73) 위의 책, 권47, 正祖 21년 8월 甲寅. 47-39-라

정조는 또한 民의 입을 통해 직접 民免을 듣고 이룰 처리하였다. 1779년 정조는 利川行宮에서 경기감사(鄭昌聖) • 이천현감(李端會)에게 민인을 인솔하여 나오게 하고 다음과 같이 諭示하였다.

“먼길을 행렬이 움직이느라 숙박하는 날이 많으니, 列邑의 民人들이 勞役할 일이 많음에 내 마음의 걱정스러움을 잠시도 잊을 수 없다. 이미 諸置米를 감면하고 가을의 大同을 감면하여 조금이나마 구제하려는 방책으로 삼았으나 이외에도 어찌 고통스럽고 근심스런 단서가 없겠는가? 나 과인은 너희들의 부모라. 밤낮 일념으로 자식 기르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궁핍하게 만드는 환난을 면하지 못할까 늘 걱정이 되어 비단 보배조차도 편안하지가 않다. 지금 능행의 행렬이 지나감에 너희들이 노약자를 부축하여 도로변에 모여들기를 마치 赤子가 慈에게 나아가는 것과 같은 것을 보니, 내 마음이 부끄러워짐을 더욱 이기지 못하겠다. 지금 너희들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한 것은 그 那疾울 묻고자 함이니 너희들은 모든 것을 陳達하여라."74)

정조의 유시에 따라 民人의 다양한 요구사항이 나왔는데, 1780년에는 행렬 전면에 서있던 坡州 父老들의 호소를 듣고 파주와 고양의 還穀 이자와 군역의 부담을 탕감하였으며,75) 1792년 포천의 祝石嶺에서는 民人의 건의에 따라 1년치의 환곡 이자를 감면하고 감면의 선례가 없는 勅와 罪館도 특별히 면제해 주었다.76)

이처럼 民人이 정조에게 직접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은 즉석에서 처리 결과를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그 수혜자와 숫자가 극히 제한적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한 것이 바

74) 위의 책, 권8, 正祖 3년 8월 丁巳. 45-115-나~다

75) 위의 책, 권10, 正祖 4년 9월 己卯. 45-181-라~182-가

76) 위의 책, 권8, 正祖 16년 9월 丁未. 46-333-다

로 上言 • 擊靜제도의 활용이다. 民意,의 수렴을 위해 對民接觸을 본 격화한 것은 이미 英祖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正의 대민접촉은 즉위 초부터 보다 적극적이고 자연스럽게 이뤄졌다는 특징이 있는데, 특히 陵行時 행렬의 앞에 엎드려 上言울 올리는 ‘悲前上言'이나 징 • 북을 두드려 억울함을 호소하는 ‘外擊靜’이 발달하였다.77) 表1에 따르면 정조의 능행 중에만 총 3,555건의 上言 • 擊靜이 있었고 (上言 3,232건, 擊鍾 123건), 정조는 還宮하는 즉시 이를 처리하여 담당 관서로 내려보냈다. 이제 首都協]의 民人들은 정조의 능행 중에 상언 • 격쟁의 형식을 통해 부세 수탈, 토지 침탈, 상공업 이익의 침탈 등 民仇 사항을 정조에게 알리고 이에 대한 조치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78)

정조의 능행 중에 民人을 위해 내려지는 조치는 주로 遠穀과 軍布 등 경제적인 혜택 내지는 폐단의 제거가 주종을 이루었다. 정조는 陵行을 ‘行幸'이라 하는 것은 '莘' 즉 ‘恩澤'이 있기 때문이라 해석하였는데,79) 실제로 방문 지역의 민인에게 경제적 혜택을 주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하였다. 1792년에 정조는 楊州와 抱川의 民人에게 7가지 조치를 하였는데 민인에게 직접 혜택을 돌아가는 조치는 다음 5가지였다.80)

1. 朝官으로 나이 70인 자와 士庶로 나이 80인 자는 모두 영 조 병진년(1736) • 을해년(1755)의 행차와 지금의 행차를 본 자이

77) 韓相權 1996, 『朝鮮後期 社會와 訴願制度』, 48-57쪽

78) 正祖대 上言 • 擊靜의 民究의 내용에 대해서는 韓相權, 앞의 책, 182-247쪽

79) 위의 책, 권24, 正祖 11년 8월 乙巳. 45-663-라

”敎曰 駐篤之地 必有恩澤 行幸之稱 亦出此意"

위의 책, 권35, 正祖 16년 9월 丁未. 46-333-라

"之 熟臨曰幸云者 民엎其幸而幸之之謂也"

80) 위의 책, 권35, 正祖 16년 9월 丁未. 46-333-라

니 資品 하나를 더해준다.

2. 나이 백세를 넘긴 자에게 米肉을 추가 지급한다.

3. 民에게 일년 동안 復戶(戶에 부과되는 役을 면제)를 준다.

4. 금년의 菌設과 遠穀의 이자를 면제한다.

5. 토지세[田種]는 편의에 따르되 收米하거나 희망에 따라 作錢한다.

이외에도 1788년에 정조는 交河의 民人에게 당해년 田租의 절반을 감면하고, 坡州의 민인에게 곡물 6천 石을 f節앞에 첨가하며, 高陽의 민인에게 곡물 5천 石을 환곡에 첨가하고, 3邑 모두에 1782-1783년 이전의 荀遠을 蕩減하는 둥 능행 중 방문하는 지역의 민인에게 경제적 혜택이 돌아가는 조치를 계속 실시하였다.81)

이상에서 보듯 정조는 능행을 통해 民人을 대면하였고, 경기감사나 지방관, 방문지역에 파견된 암행어사의 보고를 받거나 직접 민인의 입을 통해 民斑 사항을 청취하고 이를 해결하였다. 정조는 민인이 자신에게 직접 접근하는 것을 개방하고 또 조장하였으며, 특히 상언 • 격쟁을 통해 민원을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이를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유교 정치의 본령이라 할 여론 정치의 수렵 범위를 극대화하였다.

3. 首都圈 成長의 촉진

17세기 후반 이후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서울은 급속하게 상업 도시로 발전하였고, 농촌에서 유리된 인구의 유입으로 서울의 인구가 급격히 중가하였다. 새로 유입된 인

81) 위의 책, 권27, 正祖 1년 2월 庚子~辛丑. 46-27-라~28-가

구는 대부분 都城 밖에 거주하였는데, 특히 漢江의 京江(廣~楊津) 지역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났다. 이들은 대부분 貧民들로서 유통 경제의 발달 과정에서 파생되는 일거리로 생계를 삼았고, 18세기의 서울은 전국적 시장권의 중심으로 인구 30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서울의 성장과 함께 서울에 이웃한 군현들의 도시화도 진행되었다. 서울의 商堡과 연결되면서 서울의 배후도시로 성장한 洲城과 水原, 상품 유통의 새로운 거점으로 성장한 廣州의 松坡場과 楊州의 樓院店 둥이 새로운 상업 도시로 성장하였다.82) 서울 근교의 군현들이 도시화됨과 동시에 경기도의 인구도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17세기 후반 이래 경기도의 인구 증가율은 서울의 층가율에 비해 현격하게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는데, 특히 大邑인 水原 • 楊州 • 開城 • 江華, 한강과 바닷가에 연한 南陽 • 楊根 • 安山 • 通津 • 陽川 • 始典, 大路를 끼고 있는 竹山 • 龍仁 • 安城 • 抱川 등의 인구 증가율이 높았다.83)

그런데 정조의 陵行지역은 이처럼 도시화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던 경기도 군현과 대부분 일치하였다. 정조의 陵行路와 宿所를 조사한 결과, 정조가 능행을 통해 楊州 • 陽 • 坡州 • 交河 • 金浦 • 賜川 • 平 • 始興 • 安山 • 果川 • 廣州 • 水原 • 利川 • 隔州 둥지를 거쳐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중에서 楊州 • 陽川 • 始 • 安山 • 水原 둥은 인구 증가율이 높은 지역이었고, 廣州 • 壤州는 인구의 규모가 3만을 훨씬 상회하는 大邑이었다. 또한 정조의 능행 지역은 1788년까지 34차례의 능행 중에서 한강의 남쪽을

82) 高東煥, 1993, 『18 • 19세기 서울 京江地域의 商業발달』(서울대 박사학위논문) 9-59쪽

83) 楊姚幽, 1994, 『서울의 공간확대와 시민의 삶』, <서울학연구> 창간호, 61-68쪽

방문한 것은 단 2차례(1779년의 寧陵 • 英陵, 1788년의 站陵 • 宣陵)에 불과할 정도로 江北 지역에 편중되어 있었으나, 1789년 사도세자의 園을 水原으로 옮긴 이후로는 매년 顯隆園을 방문함으로써 방문지의 지역적 균형을 회복하였다.

정조가 陵行을 통해 인구의 규모가 크거나 증가율이 높던 서울 근교의 군현을 방문하고 士 • 民을 격려한 것은 이처럼 성장일로에 있던 首都腦의 발전을 더욱 촉진시키는 의미가 있었다. 17세기 후반 이후 조선 사회는 유통 경제가 활발해지면서 지방 중심지의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士族支配體制가 동요함에 따라 士族들은 향촌에서 公論을 형성할 능력을 상실해 가는 반면에 성장하는 民人들이 경제력을 갖추고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갈등과 분쟁이 늘어나는 추세에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정조는 성장 속도가 빨랐던 首都圈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현지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는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정조는 방문지의 士 • 民을 직접 접촉하면서 士人에게는 역대의 功臣 • 文臣의 공적과 학덕을 추숭하고 그 후손들을 위로하였으며, 방문 지역의 文士 • 武士룰 현지 시험을 통해 선발함으로써 수도권의 인재를 관리로 발탁하였다. 또한 民人들의 民究을 청취하고 현장 또는 환궁 후에 그 처리 방안을 해당 관서에 지시함으로써 새롭게 생겨나는 갈등과 분쟁을 조정하였다. 정조의 이러한 통치 방식은 유교의 이상인 民本정치, 여론 정치를 실현하려는 것으로 민인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정조는 陵行路의 건설과 유지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정조는 능행 중에 道路 및 橋梁의 건설과 보수에 공로가 많은 지방관에게는 상을 내렸지만, 도로가 미비하거나 民那룰 유발한 지방관은 즉시 파직하였다. 1783년 정조는 元陵으로 가는 길에 있던 松溪橋의 보

수에 공로가 많은 양주목사(兪彦鉉)와 광주부윤(金宇眞)을 칭찬하였으나,84) 1788년에 西氷의 선창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경기감사(洪秀) • 광주부윤(李泰永) • 양주목사(朴天行)를 현장에서 파직하였고,85) 1797년 에서 安山까지의 도로 건설을 잘못하여 멀리 돌아가게 함으로써 民力을 낭비하고 民幣를 끼친 경기감사와 지방관을 처벌하였다.86)

정조는 능행로 건설에 참여한 민인에게 暗偵을 하고 수시로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폐를 감시하였다. 1792년에 정조는 梁에서 水原에 이르는 新作路 건설에 참여한 田夫와 民戶에게 1년간의 환곡 이자를 면제하였고,87) 永陵에 이르는 도로를 보수한 交河의 민인에게 穀物을 제공하였다.88) 또한 1791년 鄭東親을 果川 • 裕川 • 水原 • 廣 지역의 암행어사로 파견하여 도로 건설상의 폐해를 조사하게 하였고,89) 1796년에는 金沮의 章陵을 방문하는 길에 京畿都事 柳을 암행어사로 파견하여 도로를 보수하고 교량을 건설하는 과정에서의 민폐를 감찰하도록 하였다.90) 이 중에서 1791년에 건설된 露梁鎭-果川-裕川--水의 新作路는 이후 10大思6에 포함되는 幹線道路로 승격하였다.91)

84) 『省錄』 正 7년 8월 25일(甲中) 8-336-가

”至松溪橋 住 命牧史兪彦鉉 • 廣州府尹金宇鎖進前 敎曰 ‘地橋修改 役巨殷 而其成也速而完 此皆地方官誠心董工之效 予嘉乃"

85) 『正祖錄』 권26, 正祖 12년 9월 甲子. 46-6-가

86) 위의 책, 권47, 正祖 21년 8월 矣丑. 47-39-다

87) 위의 책, 권34, 正祖 16년 1월 丙車. 46-274-나

88) 위의 책, 권34, 正祖 16년 2월 甲子. 46-278-나

89) 『遊司附錄』 178책, 正祖 15년 1월 21일 17-712-나~라

"(果川 • 裕)|I • 水原 • 廣州等地 暗行御史) 鄭東觀所啓 臣伏奉治道邑廉察之命 自果川附露梁津 至水原府 新潛行 詳脫事情 諸邑守宰 母皆仰長不違之天威"

90) 『正祖貫錄』 권45, 正祖 20년 9월 己酉. 46-671-다

91) 高東煥, 1993, 위의 글, 64-65쪽.

정조는 淡江 渡江의 어려움 때문에 능행에 차질이 생기고 많은 민폐가 일어나는 사실을 주목하고 舟橋의 건설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정조는 1789년에 능행의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 『幸定』의 규정을 만들고 능행시 주교의 건설에 동원되는 京江의 商人들에게는 外方畿邑의 稅穀 운송권을 주었으며,92) 1790년에는 『舟橋指南』을 만들어 온천행이나 宣陵 • 靖陵 • 章陵을 방문할 때에는 露梁律울 이용하고 獻陵 • 英陵울 방문할 때에는 廣을 이용하도록 규정하였다.93) 여기서 정조는 성장하던 京江 지역 중에서도 유통이 활발하던 노량진과 광진을 능행로로 이용하였고, 능행에 동원되는 경강 상인에게 경제적 특권을 줌으로써 京江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이외에도 정조는 1779년 器州룰 방문했을 때는 사전에 邑誌와 『輿地勝麟』 둥을 통해 지역의 현황을 파악하였고,94) 廣州의 南漢山城을 방문하였을 때는 守禦使(徐命開)로부터 山城의 규모와 연혁, 軍伯의 비축량과 장소 등 防 시설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표시하였다.95) 또한 1789년 水原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결단을 내렸던 정조는 1790년 顯隆園을 방문하면서 신도시를 육성할 수 있는 방안을 수행 관료들과 의논하였고,96) 1793년의 능행에서는 水原을 華城으로 改號하고 水原府使를 華城留守로 승격하는 조치를 내렀다.97) 정조의 華城 육성에 대한 관심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1797년 1월의 능행에

92) "正祖實錄』 권28, 正祖 13년 9월 中五. 46-53-다~라

93) 위의 책, 권30, 正祖 14년 7월 己卯. 46-151-다~라

94) 위의 책, 권8, 正祖 3년 8월 丙辰. 45-114-가

95) 위의 책, 권8, 正祖 3년 8월 戊午. 45-116-가~라

96) 위의 책, 권29, 正祖 14년 2월 壬戌. 46-90-나~다

97) 위의 책, 권37, 正祖 17년 1월 丙午. 46-372-나

”改號水原府爲華城 御節撮額于壯南軒 陸府使爲留守 兼勇外使 行宮整理史四判官一員佐之 改壯營兵房爲壯勇使 都提洋 以屈衛大將 合底屈之“

서 華城 民人의 人利를 위해 당해년의 館穀 • 還穀을 면제하면서 다시 화성의 육성 방안을 물었는데,98) 그 결과는 2월에 『華城慕節目』으로 나타났다.99)

이상에서 보듯 정조는 17세기 후반 이후 성장 속도가 가장 빨랐던 首都圈 지역을 능행이란 형식을 통해 방문하였고, 그 곳에서 발생하는 官과 民, 士와 民 사이의 갈등과 분쟁들을 해결하는 조치둘을 시행하였다. 또한 능행로의 건설과 유지, 廣州 • 華城 등 거점도시를 육성하는 데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상업 도시로 성장해 가던 서울 및 근교 군현의 성장을 촉진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廣州 • 華城에 대한 정조의 꾸준한 관심은 1793년 華城留守의 설치를 이어 1795년 廣州留守府의 설치로 이어졌는데,100) 이는 서울 [京都]과 4各[開城, 江華, 華城, 廣州]로 둘러싸인 18세기 후반의 首都圈 지역을 확정하는 조치가 되었다.

맺음말

정조는 재위 25년 동안 66회의 陵行을 하였으며 그 대상 지역은 역대의 王陵이 위치한 首都圈 지역이었다. 정조는 왕릉의 방문을 통해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과시하는 효과를 얻었지만 정조의 陵行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본고에서는 정조가 능행 중에 내린 조치들을 분석하여 정조의 陵行이 가지는 의미를 확인하고, 이를 先王 업적의 계승과 王室 권위의 과시, 功臣 • 文臣의 表章과 文士의 선발, 군사 훈련과 武士의

98) 위의 책, 권46, 正祖 21년 1월 庚午. 47-6-다

99) 위의 책, 권46, 正祖 21년 2월 矣巳. 47-10-다~라

100) 위의 책, 권43, 正祖 19년 8월 丙申. 46-594-나

”次對 冊守耕京條 煙廣州府爲留守"

선발, 對民접촉과 民의 해결 등으로 정리하였다. 정조의 이러한 조치들은 수도권 지역의 도시화와 더불어 나타나는 다양한 계층간의 갈등과 분쟁을 국왕이 직접 나서서 조정한 것이라는데 그 의미가 있었댜 또한 정조가 능행 중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陵行路의 건설과 보수, 廣州 • 華城과 같은 거점 도시들의 육성 등은 수도권의 성장을 촉진하였고, 능행 도중이나 宿所 • 山城에서 거행된 군사 훈련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안정을 보장하는 조치가 되었다. 수도권 지역 士 • 民에 대한 정조의 관심과 조치들은 이 지역 거주민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으며, 그 결과는 다시 王의 안정과 강화로 연결될 수 있었다.

정조가 수도권 일대를 방문하여 현지 文土 • 武士들의 활로를 터주고 民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民究사항을 해결하는 방식은 수도권에 거주하던 京畿學人들에게 유교의 爲民政治가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典範이 되었다. 18세기 이후 官制 • 科仕制의 개혁, 조세의 경감과 상공업 육성책 둥을 제기했던 京畿學人 중에서 다수는 이러한 정조의 개혁 정치에 칙접 참여했거나 이룰 목격한 학자들이었고, 陵行 중에 취해진 정조의 조치들은 이들 개혁안의 원형이 되었다.

본고는 정조의 陵行이 首都圈의 성장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데 초점을 두었으므로, 수도권의 성장에 영향을 미친 정조의 제반 정책을 검토하지는 못하였다. 이는 수도권 내의 각 군현에 대한 정조의 조치들을 분석한 이후에 정리할 수 있는 문제로 이를 추후의 과제로 남겨둔다.

表 1 正祖의 陵行日誌(1776-1800)

年·月 H 기 간 拜陵園慕 j- I t停所 宿所 上 言 座鈴 기타

1777. 2 무신 ~ 기유 1 박 2 일 永陵. 弘陵 弘陵齋室 正祖 1 년 1778. 3 계유 1 일 健元陵, 元陵 明陵, ;《陵, 昭 \ \{園 1778. 8 병자 ~ 무 인 2 박 3 일 敬隨 IIB 썩i|섭, 高賜郡 사망 緩吉園 60 주년 177 9 . 2 을축 1 일 元陵, 健元陵 1779. 4 정묘 1 일 永祐園, 束 IMJ 王廟 1779 . 8 갑 인 ~신유 7 박 8 일 寧訖英陵 廣津 , 利南 淡)I I 1行T宮'g ,, 종寧)陵사(효망 慶安驛 緊州行宮 1 20 주년 1780 . 2 임자 1 일 明陵 1780. 9 정축 ~ 기묘 2 박 3 일 永陵 高腸, 浮舒 9 坡州 元陵 元歲 健元陵 , (영조) 1781. 1 경자 1 일 穆隨 徽陵, 王世弟 崇陵, 惠陵 책봉 60 주년

1781. 4 임자 1 일 永祐園 , 沙阿坪 擊W 13 沙阿坪

關王廟 關武 明 陵 敬陵 , 1781. 8 a0 T0 「 1 일 ’託陵, 昌 陵 , 擊W 7 弘陵, 順懷墓 1782. 2 정유 1 일 弘陵. Jj陵 擊上tJ言l 274 1782. 4 병자 1 일 永祐園, 安樂峴 擊 W 14 束腦王廟 1782. 9 경신 1 일 永祐園 뽀鈴 7 1783. 4 갑 자~ 을축 1 박 2 일 東永關祐王園,廟 永齋祐室園 追景上갑類尊 'g 號 1783. 8 갑신~ 을유 1 박 2 일 元顯磁殿 徽健陵元,陵 , 元陵齋室 上擊言靜 216 穆磁懿陵

年.月 日 기간 拜陵園墓 , !t停所 宿所 上 言 座舒 기타

健元陵, l領 陵, 1784. 2 을해 1 일 穆隨崇陵, 楊州 擊上 評言 61 惠陵 元陵 1784. 8 기해~신축 2 박 3 일 永陵順 , 陵恭 陵, 高賜郡 坡高州賜牧깁, h 擊上 評답 7275 178 4. 9 정축 1 일 永祐 I 섭 上擊 담W. 481 60英죽 주위祖년 1785 . 2 겨0 이,.__ 1 일 康陵. 泰陵 沙河里 上 言 71 178. 5. 4 비0 시>.! 1 일 永祐 I 섭 上 답 32 17& 5. 8 갑신 1 일 永祐園 上擊i 言爭 3148 明陵, 災陵, 178 5. 9 경술 1 일 敬陵 昌陵, 上 言 80 弘陵 順ti墓 1786. 2 기해 1 일 孝隨禧陵 上 言 152 1786. 永祐園, 永祐固 3~4 계유~갑술 1 박 2 일 東關王廟 齋室 上 言 21

慕華館,

懿昭墓, 1786. 9 빙자~정축 1 박 2 일 義烈墓, 孝呂墓 上 言 72 孝,납墓, 范室 慶熙宮 1786. 9 정유 1 일 貞陵 永td i幽 上 言 53 元隨 健元陵, l'o1 8 . 2 갑진 1 일 顯微陵陵,, 穆忠陵陵,, 上 言 86 崇陵 17'ir 7. 4 신축 1 일 永祐園 上 言 10 17'o 7. 5 정묘 1 인 魂'' g , 孝뀝갑t 上 言 29 ff)J賊敬陵, 冀陵, 順t腐샤, 17fi l. 8 경술~임자 2 박 3 일 昌昭陵i ,g 園弘,陵 , 際巖 高賜行宮 上 肖 132 梁'.11鐵 1. ~坪 緩吉園

年 • )·I 日 기간 拜陵 I 섭墓 i I tp1,所 宿所 上 긁 · 擊靜 기타

178 8 . 4 비° 시` 1 일 東永關祐王園 l O, j 上 言 166 1788. 9 갑자 ~ 을축 1 박 2 일 靖陵, 宜陵 , 宜陵齋室 上 言 133 孝呂墓 171818 . 계 해 1 일 慶孝熙昌宮墓, 永陵, /I 偵陵 , 178 9. 2 무 술 ~ 임 인 4 박 5 일 恭昌陵 跋, 長弘陵 陵,, 坡州 交高河陽郡f行.宮:f,, 上 言 147 行宮 明 陵 , 冀陵, 弘陵齋室 順 1 1~ 1);. 敬陵 1789. 4 임 진 1 일 永祐園 上 言 19 炭!판'g, 1789. 4 신해 1 일 孝昌墓 , 宜嬪墓 1789. 8 병진 1 일 永祐園 1789. 8 을축 1 일 永祐園安樂峴 啓園禮 거행 178 9. 8 계유 1 일 永祐園 新園셔t 路결정

1789. 9 신축 1 일 永祐園

171809 . 계 축 ~정사 4 박 5 일 永祐園永깝祐室園 永遷祐奉園 水原 府, 1789. 顯隆 I ~ 永祐園 10 무오-신유 3 박 4 일 顯隆困 果 川 縣 齋室 , 遷奉 果 川行 宮 1790. 2 기미~계해 4 박 5 일 顯關隆 王 廟l 십, 果 ) 1I 縣 水果原 )II 府縣, 上 言 업 0 懿昭墓, 1790. 3 을 미 1 일 宜禧墓, 上 言 39 孝昌慕 元隨 健元陵 , 171900 . 기유 1 일 顯徽磁磁穆崇陵陵, , 上 言 126 悳 陵 1791 . 1 신묘-계사 2 박 3 일 顯隆困 ' 水 原 府 上 꿈. 1Cf 7

年 . 月 日 기간 拜陵 K並 墓 ; 1 ~ 停所 宿所 上답 陀舒 기 타

1791 . 2 신 미 1 일 弘陵, t, 1陵 , 上言 40 明陵 179 1. 9 정 유 1 일 思陵 上言 24 179 2. 1 갑 오 ~ 병신 2 박 3 일 斯隆 1 4 ~ 水原行宮 上 굵 129 179 2. 2 계해~옹축 2 박 3 일 永陵 交tiiJ境 坡州牧 , 上 · 급 71 染鐵坪 梁鐵坪 高賜 1m 1 씨 武 179 2. 9 병 오~ 무신 2 박 3 일 關 主廟, 光陵 樓 院, 楊州牧 上言 80 祝石fii 179 3. l 빙 오 ~무신 2 박 3 일 關干廟 , 果 J II 水原行 宮 上 言 39 µh 隆 I 섭 1 사j干. I iij, 元陵, 179 3. 9 갑 오 1 일 健µ元船文陵 , , 惠微陵陵,, 秦洞口陵 上 言 66 崇陵 水原 果 川 1 i'g, 179 4. 1 경자 ~ 계 묘 3 박 4 일 關 王廟 , 行宮 , 顯隆 l 섭 上 言 87 顯隆l\'il 沙 川 范室, 行宮 水原行宮

1794 . 9 임자 1 일 冀明 跋陵 敬昌隨陵 , 梁鐵坪 上 담 53 梁싸!鐵 陣坪

弘 陵 , 順懷墓 開駿 惠 慶宮 17925 . 윤 신묘~무 술 7 박 8 일 華顧城 隆聖 園廟 , 鳳E죠 I·! 뾰亭, 始華興城行 f f 宮'g , 上 言 1'2 :/ 愍進理個 儀 行宮 軌 .1 71905 . 무자 1 일 宜懿秘昭墓墓 , 第西 一 江樓 上 言 55 1796. 1 정묘~신미 4 박 5 일 顯隆困 交華 龜 城亭 華 城 行 宮 上 首 36 莊辰祖日誕 始興 117~972. 경오~임신 2 박 3 일 關顧 王隆廟 園, 行華 宮城 , 華城 行 宮 城 陸 山

年 • J1 日 기간 拜陵園墓 i1 t停所 宿所 上 言 擊坪 기타

賜 川 n/ 一 · ,白i구, 富平 幸行 1797. 8 신해-을묘 4 박 5 일 關 干顯. /y隆/ j, 困章 陵 , 行水宮原 , 金安i'山il行i行宮宮, 上 言 84 1행0 렬邑이을 鷄t, I i, 거침 始興 行宮 1798. 2 을 미~기해 4 박 5 일 顯隆園 華城行宮 上 言 73 敬跋 呂陵 , 1798. 8 경신 1 일 明 陵, 翼陵 , 上 참 42 弘陵, l1 I[ii'i&墓 1799. 8 을사 ~정미 2 박 3 일 獻歲關µJ王i |Y~iI 섭J J, 郞行뾰宮,坪 果華川城行行宮宮, 上 言 114 1800. 1 기사~신미 2 박 3 일 顯隆 Rd 始行興宮 顯范隆室園 上 言 39 世책f봉· 元歲 健元陵, 1800. 3 계유 1 일 穆顯陵陵,惠 徽陵陵, , 上 肖 133 崇陵

表 2 正祖의 陵 • 園 • 墓벌 방문 회수

〈방문희수 陵(회) 園(회) 慕(회)

明陵 (10), 永祐國(1 8), 9 회 이상 健元陵 (9), 元陵 (9), 弘陵 (9) 顯 | %園 (13) S 한陵 (8), 5~8 穆敬陵陵 (( 67)), , 徽昌 陵陵 (( 76)),, 崇陵 (6), 顯陵 ( 6) , 忠陵 (6), 順孝 1昌 災 墓墓 (( 65)), 永 ~&:(5) 恭陵 (2), 順陵 (2), 懿昭墓 (3) , 3 회 이하 寧陵(1), 英陵 (1), 懿陵(1), 康陵(1), 泰陵(1), 昭;点園 (2), 宜嬪墓 (2) , 孝陵(1), 秘陵 (1), 貞陵 ( 1), 靖陵 (1), 宜陵 ( 1), 緩吉園 (2 ) 義烈墓 (1), 長陵(1), 思陵(1) , 光陵 (1), 章陵 (1), 獻陵 (1) 宜 禧墓 (1)

星湖 李漢의 哲學思想

金容傑

1. 序言

조선조 후기 貸學思想에 대한 연구는 中世的 思惟로부터 近代的思惟로의 전환과정을 검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意味 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근대적 사유에 관한 검토는 근세적 사유체계로서의 性理學을 매우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식해 온 우리 학계의 상황에서는 적극적인 연구태도를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에 있다. 특히 중세적 해체기에 처해서 능동적 대처방법을 제시하지 못한 성리학은 日帝에 의해서 강점을 당하는 시기를 거치면서 더욱 냉소의 대상이 되었고 심지어는 근대화의 저해요인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선조 性理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植民史學에 의하여 더욱 강화되었지만, 광복 이후 植民史學에 대한 비판과 극복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性理學에 대한 연구는 상당 기간 연구 자체가 기피되거나, 방치되는 실정에 이르렀다.

1930년대부터 일부 民族主義 史學者들에 의해 조선조 후기 실학사상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고,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사회경제사적 연구에서 실학사상의 형성배경을 ‘內在的 發展'으로 정리하였

지만, 이와 같이 內在的 發展論으로 실학사상의 태동을 규정할 때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전기 성리학과 연관관계의 설정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전가 성리학과 어떠한 사상적 연관관계를 가지고 전개 또는 변용된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과제로 제기된다.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조선시대 성리학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서는 성리학과 실학사상과의 연관적 탐색은 매우 접근하기 어려운 상태이며, 실학사상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평가도 유보상태로 남겨 둘 수밖에 없다. 그 동안 몇몇 학자들이 ‘內在的 發展論'에 근거하여 실학사상을 사회 구성사적 해명이나, 근대화론적 관점에서 연구한 예는 있으나, 조선조 전기 성리학과 구체적으로 검토한 예는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본고는 그간 기피되거나 방치되었던 조선조 전기 성리학과 실학사상과의 사상연관성의 문제를 星湖 李演(1681-1762)의 철학체계를 중심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17세기 조선조 사회는 壬辰 • 丙子 兩亂을 겪으면서 각 분야에 걸쳐 중세 말기적 징후를 보였는데, 이러한 중세 말기적 사회에 직면하여 星湖는 중세적 사유로부터 어떻게 근대적 사유로 전환하려고 하였는가, 바꾸어 말하면 星湖의 철학체계 속에 근대적 사유를 발견할 수 있는가, 만약 근대적 사유특성이 있다면 어떠한 체계연관을 가지고 근대적인 사유체계로 변용 • 전개하고 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이러한 사상내면에 관한 검토는 철학사상의 논리체계와 사회 역사적 현실을 整合的으로 구성해 보려는 시도의 하나라 할 수 있다.

2. 星湖의 生珪와 學問

1) 生淮와 現實 認識

星의 姓은 李요 名은 粉이다. 字는 子新이며, 星湖는 그의 號이다. 그는 1681年(肅宗 7年) 10월 18일에 태어나서 1763年(英祖 39年) 12월 17일, 83세를 一로 牛珪를 마쳤다.

그는 政爭이 激化된 17세기 후반, 南人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생울 초야의 학자로서 독서와 저술 그리고 교육으로 생에를 보낸다. 그가 초야의 학자로 여생을 보내는 데는 정치적 좌절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

그가 태어나기 1년 전 이른바 庚申大關賊이란 禍가 그의 부친 李夏鎖에게 미쳐 와서 대사헌의 관직을 박탈당하고 이어서 平安道袁山으로 유배된다. 星湖는 바로 유배지인 雲山에서 태어났다. 그는 다음 해에 그곳에서 부친마저 잃고 모친을 따라 京畿道 廣州側星里에 移하여 일생 동안 이곳 농촌에서만 여생을 보낸다. 그가 농촌사회에 대하여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농민의 절박한 삶을 알게 된 것도 그의 농촌생활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淸는 10세를 지나 중형 李潛을 따라 글을 배웠는데 자라면서 스스로 분발하여 널리 강학에 힘쓰고 종일토록 앉아 책읽기를 쉬지 않았다.1)

그런데 星湖가 26세 되던 해에 중형 潛이 元世子 보호를 위해 상소한 글이 정치적인 문제를 일으켜 杖殺을 당한다. 중형 李潛은 星湖에게 글을 가르쳐 준 스승으로 星湖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다.

1) 『星湖全書』 2(여강출판사, 1984, 976쪽, 上左), 『行狀』 : 先生 自幼天姿類悟 提拔 絶人 稽長知學不待課竹刻意 自密群居講學 衆或在傍座戱 而常默坐 手卷終日不徹.

界湖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세상을 등지고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게 된다. 그는 후일 당시의 심경을 희고하여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世俗에 따라 求名에 雍走하던 중에 禍을 당하여 도모할 것을 잃으니, 곧 과거공부에는 뜻이 없게 되었다 그 형세가 장차 문을 닫고 엎드려 날로 속세와는 어그러지게 되었으며, 집에 있는 수천 권의 장서를 가지고 때때로 이를 꺼내 읽으며 소일거리로 삼았다.2)

昆洞는 처음부터 출사에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댜 중형의 참화가 그로 하여금 일생 동안 초야의 독서인으로 머물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독서인으로서 초야에서 사는 데는 가장되어 온 수천 권의 장서에 힘입은 바 큰 것을 알 수 있다 가장되어 온 서책은 그의 부친이 일찍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청나라 왕으로부터 받은 韻賜銀으로 사온 것이다. 이 장서는 그의 학문세계를 넓히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星湖의 노년생활은 경제적 곤궁과 가내의 우환으로 평탄하지 못하였다. 35세 때 모친이 사거한 후에는 가전되어 오던 捨器一切를 본가에 돌려 보내고, 노비를 풀어주고 평범한 농촌생활을 시작하였다.

星洞가 살았던 17세기 후반은 壬辰, 丙子 兩을 겪은 지 1세기롤 경과한 시기로서 양난의 피해가 어느 정도 회복되어 가는 시기이댜 거듭된 정변에도 불구하고 신속하게 大同法과 鑄錢事業을 통하여 국가재정이 확보되었으며, 號牌法, 五家作統法의 강화에 의하여 향촌질서가 어느 정도 회복되는 시기였다.

2) 『星湖』 1, 114쪽 上左 『答息山李先生』 : 拜走於應俗求名中 羅禍難限獲失圖 便無意於母業文字 則其勢將杜門給伏 日與世凱顧 家有藏합數千 以時絲關爲消造之貸.

특히 이 시기에 주목되는 사회현상은 농업경작 기술의 발전이다. 壬辰亂 以前부터 미미하게 발전되던 농업경작 기술은 이 시기에 오면서 크게 진보되어 생산력을 증가시키고 농산물을 상품화시켜 유통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肅宗 34년(1708)에 거의 전국에 실시된 大同法이나, 英祖 26년(1749)에 실시된 均役法도 기본적으로 농업생산량의 증가에 기초한 제도의 개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농지경작에서 移秋法의 발달로 인한 遊休勞動力의 발생은 큰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죽 종전에 直播法에서보다 농업노동력이 80%나 감소된 반면, 소출은 두 배로 증가한 사실이다. 이와 같은 노동량의 감소는 광범위한 농민층의 변화를 야기했다. 즉 이들 농민들은 농토를 떠나 도시나 광산에 유입되어 貨金勞動者가 되거나 거리의 流浪가 되었지만, 대부분의 농민이 농업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貨幣流通은 業勞動者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화폐의 유통은 도적의 만연을 돕고 관리들의 탐학 도구가 되어 농민들을 파산으로 몰고 가는 직접적인 요인이 된 것이다.3) 그뿐만 아니라 昆禍는 당시의 奴碑制, 科片制, 門岡制둥 사회제도에 대하여도 농업생산과 관련하여 비판적 의견을 제시한다.

奴牌룰 대대로 전하는 것은 古今을 통하여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없던 일이다. 科學보는 선비는 孝怖에는 게으르고 生業을 버리고서 1년 내내 하루 종일 붓이나 빨면서 종이나 消하니 사람의 精力울 소비하는 技術에 지나지 않는다. 腐關이란 원래 자기 자신이 국가에 功이 있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風俗에는 兩班子孫

3) 『星湖』 1, 584쪽 上右, 『均[IJ論』 : 余見平民破産 或有以無恒心者 或有以稱貸滋益者 凡官府之浚削 制里之染橫 皆足以沿之也.

을 이라고 混稱하여 과 구별한다. 비록 자기 조상의 財産을 다 費하고, 재주도 없이 不當하게 생을 구하면서도, 장사를 부끄럽게 여기고 굶어 죽어도 천한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4)

성호는 이와 같이 사회 전반에 만연된 비생산적이고 퇴폐적인 생활의식을 먼저 자신으로부터 비판하고5) 당시 정치 •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근원적으로 검토하기 위하여 철학의 기본체계로부터 사회제도의 문제를 재검토하여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였다.

2) 開放的 學問態度

洞의 학문 태도는 극히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학문을 실천적 관심에서 시작한다. 배운다는 것은 실제생활에 있어서 대처방법 또는 대처능력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지식을 탐구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 자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생활에 활용하기 위한 材具로써 탐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경전을 연구하는 것도 致用을 위해서이며, 경전에서 얻은 지식은 구체적 현실에 활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이와 같은 실천적 관심은 전기 성리학자의 실천적 관심과 다르다. 그의 기본생각에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죽 星湖의 기본시각은 埋에 의한 절대적 기준에 따라 현상이나 사물을 보려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현

4) 『星湖』 5, 410쪽 下右, 『六磁」 : 奴碑傳世 互古今 通四海 無有者也 …… 應保儒士 緩於孝節持棄生業 克歲終日 含産費)沒 不過斷喪心術之使 …… 曲閩者 身有功伐之謂也 今俗指衣綾家子孫 混稱 而區別於庶珉 難使先業託盡 才藝不速 非理求生 恥事錢錬 寧峨死 不肯賤.

5) 『星湖』 5, 621쪽 上右, 『食少』 : 余性喜 難終日哈 一樓一粒 皆非吾力所出 登非所謂天地計.

상을 경험 또는 사실의 세계로서 보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昆淸의 이와 같은 경험 또는 사실의 세계로서 현실을 파악하려 는 태도는 그의 哲學思想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생각으로는 안다는 것은 장차 그것을 행하려는 것이다.6)

무릇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장성해서 행하려는 것이다. 평소에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나, 내가 알려질 수 있도록 반드시 材의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니, 바로 이것이 質學이다.7)

星湖는 당시의 학문 풍토가 학문 본래의 목적을 벗어나 실제생활에서 유리되어 학문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을 깊이 우려하였다. 그는 경전의 연구도 반드시 쓸모 있는 것이어야 하며, 쓸모를 위한 材具의 지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8)

星는 경전에서 얻은 지식은 실제생활에 활용되는 지식이어야 하며, 비실제적 학문은 독서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시 선비들의 학구태도를 비판하여 "겸손하고 교만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지식이 전혀 없는 것은 같다"9)고까지 혹평한다. 星湖는 당시의 폐쇄적인 학문풍토를 개탄하면서 당시의 朱子學에 대하여도 맹목적 독경태도를 비판한다.

6) 『星湖』 6, 698쪽 下左, 『懷說』 『性理學』 : 余知者將欲行之也.

7) 『星胡』 2, 1096쪽 上右, 『答趙正叔』 : 夫幼學欲壯行 居曰不吾知 我爲可知 必有材具準備 方是實學.

8) 『星湖』 2, 753쪽 上右, 『面詩』 : 窮經 將以致用也 說經而不借於天下萬事是徒能碩耳.

9) 『星湖』 5, 472쪽 下右, 『塞說』 『永康』 : 謙德其與誰炤玲伐 差等不同其爲全無識知則均矣.

한 글자만 의심하여도 망녕된다 하고, 찾고 대조만 하여도 범죄라고 한다. 朱子의 글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고경전에 있어서랴,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의 학문은 고루하고 무덤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10)

그는 朱子에 대하여 맹목적인 신봉태도를 경계하고 학문의 폐쇄성을 깊이 우려하였다. 그러나 星湖는 朱子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여 말한 곳도 적지 않다. 그는 “朱子의 학문은 가장 바르고 가장 옳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11)라고 말한다.

星湖]의 이러한 평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星湖는 朱子學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전후 상반된 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星湖는 다른 인물에 대하여도 이와 같이 말한다. 즉, ‘터계는 동방 유학을 대성한 祖, 철학의 근본문제, 도덕의 실천문제에는 힘썼으나, 정사에는 未及하였다"12)고 말한다.

星湖의 이와 같은 태도는 老 • 佛과 基督敎에 대한 평가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백성들을 평안히 살지 못하게 하고 생업에 힘쓸 수도 없게 하며, 또 힘써 얻은 곡식을 마음놓고 먹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 노불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13)

다만 천주귀신설이 섞여 있는 것만이 괴이할 뿐, 그 이설만 제

10) 『星湖』 6, 763쪽 下左, 『德說』 『門禁網』 : 一字致疑妄也 考校參互則罪也 朱子之文尙如此 況古經平 東人之學難免魯拜矣.

11) 『星湖』 6, 626쪽 上左, 『朱子問學』 : 朱子之學 可謂大中至正也.

12) 『星湖億說類選』, 10 上 361 : 今退溪之書 專功於本源倫行之間 未及於政.

13) 『星湖』 5, 496쪽 上左, 『懷說』 『異端』 : 不得炎居 不得用力 又不得自食其力之所出 與佛老何干.

거하고 명론만을 채택한다면 바로 유가의 설과 같은 것이다.14)

이단을 전공하면 해로울 뿐이라고 하였지만, …… 오히려 (이단도) 참고할 만한 소도가 있다.15)

星의 老 • 과 基督敎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태도는 당시 사회에 있어서 획기적인 견해라 할 수 있다. 그는 서양의 자연과학사상을 수용하고 소개하는 데 있어서도 개방적이며 합리적인 수용태도를 보인다.

대개 災異에는 하늘에 속한 것, 땅에 속한 것, 사람에 속한 것이 있으니, 이를 분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늘은 쉬지 않고 움직이며, 일월과 오성이 교차하는 데는 일정한 궤도가 있다. 그런데 일식이나, 월식이 어찌 한 작은 나라나, 하찮은 일 때문에 옮겨지거나, 바뀌겠는가? 군주의 말 한 마디 때문에 별이 3사(1사는 30리)를 물러났다는 따위의 이야기를 나는 믿지 않는다.16)

이 글에서 星의 지식 섭취가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星湖의 지식탐구가 전기 성리학자들의 지식 탐구와 다르다는 점이다. 星湖의 기본 생각에는 객관세계에 대하여 理에 의한 당위 규범적 기준을 설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그는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있어야 할' 당위 규범적 기준을 전

14) 『星湖』 5, 371쪽 下左, 『懷說』 『七克』 : 但其雜之以天主鬼神之說 則駿焉若刊法沙礎抄採名論 便是儒家者流耳.

15) 『慣湖』 5, 496쪽 上右, 『莖說』 『異端』 : 功平異端斯害也已 …… 猶在小道可觀之內也.

16) 『星湖』 5, 20쪽 上左, 『停說』 『災異』 : 蓋災異 有祐天者 有屈地者 有屈人者 不可不辨 天行不息 二曜五緯殿有常度 其薄仙凌犯 岩因一國之小事之微而有所移易哉 如君一言 星退三舍之類 吾未之信也.

제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경험의 대상 또는 사실의 세계로 보려는 인식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屈淸의 이와 같은 사유특성은 星湖가 중세적 사유로부터 어떠한 형태로 근대적 사유로 전환하려고 하였는가 하는 사유의 변용과정을 볼 수 있는 점이다.

3. 星湖의 理氣 心性說

고려말에 도입된 朱子學은 16세기 조선조 사림파에 의하여 학계에 널리 보급되었고, 16세기 후반 退溪(1501-1570) • 栗谷(1536-1584)에 의하여 조선조의 철학사상으로 체계를 갖추게 된다. 退溪와 栗谷의 사상은 朱子哲學의 조선조 토착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理’ '' 개념의 추출과정과 그 해명과정에서 상호 대립적 관계를 가지며 전개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조선조 사회는 임진 • 병자 양란을 거치면서 중세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대응책으로서 사상적 변모를 몇몇 지식인에 의하여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조 후기의 대응체계로서의 사상적 변모는 退溪 • 栗谷 사상에서 제기된 논의를 주제로 하고 있으면서도, 근원적으로는 중국 朱子哲學의 형성과정에서 제기되었던 미해결된 사항들을 재검토하면서 새로운 체계를 형성하여 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星湖는 退溪 • 栗谷 사상에서 제기된 四端 • 七情의 문제를 소재로 하면서도, 朱子哲學의 형성과정에서 내포되었던 '' ‘氣' 개념을 다시 검토하여 새로운 理氣 • 心性說 體系를 구성한 것이다.

1) 氣의 大小說

星淸l의 理氣論 體系의 성격 변화는 氣의 성격을 전기 성리학자와 달리 규정한 데 있었다. 즉 昆淸l는 氣에는 外形的인 꼴을 가진 氣(形), 外形的인 꼴을 이루지 못한 氣(實)가 있으며, 그 氣를 경계로 流行하는 氣(運行)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 종류의 氣, 즉 形體의 氣, 形買의 氣, 運行의 氣는 氣의 질적인 차이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니라, 氣의 형태적인 차이룰 두고 말한 것이다. 星湖가 이와 같이 氣룰 형태상의 기준에서 구분하는 것은 전기 성리학자의 氣과 구별되는 점이지만, 星沼의 ‘氣 大小說'에서 주목되는 점은 ‘運行의 氣'를 기준으로 氣의 운행범위에 따라 존재사물의 단위성 또는 개별성을 구분하고 개별성을 근거로 각기 다른 理룰 분석해 내려는 생각이라 할 수 있다. 昆禍에 있어서 이와 같은 氣 개념의 새로운 해석은 ‘理’와의 관계구조를 변화시켰으며, 연쇄적으로 다른 연관체계를 변화시켜 갔다고 할 수 있다.

사람 몸 가운데에 있는 氣(運行)가 四股와 百體에 유행하는 것은 몸 가운데에서 형질을 갖추지 않은 것이다. 心臘과 麻은 곧 한 몸 가운데서 형질을 이룬 것인데, 각각 퍼지고 모여드는 氣(運行)가 있어서 動하더라도 그 집을 비우고 나가는 것이 아니며, 靜하더라도 다른 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이 氣(運行)는 이 집 속에 갇히지 않고 이 집에 主(뿌리)하여 한 몸을 두루 돌아다니는 것이다. 다만 心藏뿐 아니라 모든 器官이 다 그러하다.17)

17) 『星湖』 2, 1041쪽 上左, 『上李良』 : 人之一身之氣 流行於四股百體者卽一身中不具]核質者也 其心殺탭磁之類 乃一身中各具形質者 而亦自有陰陽舒翁 動未空舍而出 靜未쌉寄腐於他也 難然其氣也 原主平此 而返通

於一身 非特心 衆臘皆然.

星湖는 이 글에서 사람의 육체 안에는 그 안 전체를 돌아다니는 氣가 있으며, 또한 육체 안에서 고정되어 자리바꿈을 하지 않는 形質로 굳어진 氣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형질로 굳어진 氣, 즉 육체의 각 기관은 그 형질 속에서만 운행하는 다른 氣가 있는데, 이 氣 역시 형질 안에 갇히는 것은 아니며, 그 기관을 뿌리로 하여 온 몸을 돌아다닐 수 있으며, 아무리 온 몸을 돌아다녀도 다시 자기 기관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바유하면, 자석에서 보면 N극에서 나온 자력선은 S극으로 모여들어 다시 자석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氣에는 연장 범위에 따라 大 • 小의 구분을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氣에는 온 몸 전체를 流行하는 氣도 있고, 心藏을 유행하는 氣도 있다. 비록 같은 氣이지만, 大小의 구별이 있다. 심장뿐만 아니라, 머리와 눈 같은 것들도 그러하다. 陽으로 퍼져 나가고 陰으로 모여 들 때에 제각기 스스로 머리는 大腦로 모여 들고, 눈은 눈동자로 모여 든다. 만일 온 몸을 유행하는 氣가 퍼져 나가고 모여 들 때에 (각 기관의) 뿌리에 함께 모인다고 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18)

星湖는 유행하는 氣에는 운행의 범위가 각각 있는데 그 운행의 범위를 가지고 大小를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한 몸 전체를 운행하는 氣는 크며, 심장을 운행하는 氣는 작은 것이다.19) 그러나 이러한 氣는 그 형체 안팎에서 단순한 운행만을 하고 있는 것

18) 『星湖』 2, 1100쪽 下右, 『答李汝謙』 : 氣者有一身混論之氣 有心固運用之氣 難同一氣也 而有大小之別 不但心也 凡頭目之類皆然 其陽舒陰翁也自是頭敏於腦 目敏於晴 不成說與混論者舒翁同歸也.

19) 『星湖』 2, 1100쪽 下右, 『答李汝』 : 大以一身言 小以心言.

이 아니라, 이 氣의 운행으로 인하여 그 외적인 꼴을 유지하고 내적인 성장을 돕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운행의 氣는 이들 형체, 형질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어린이와 어른을 비교해 보면, 어린이의 형체는 작으나, 그 속에 있는 氣의 운행은 왕성하며, 어른의 형체는 크지만, 그 속에 있는 氣의 운행은 미약하다20)는 것이다.

20) 『星湖』 5, 142쪽 下左, 『懷說』 『元氣』 : 形小氣小 形氣井長 氣充於形形大氣哀 則遊氣雜樣 形未有空缺 而元氣之分數 無補於消滅也 天地亦然.

星淸 氣說에서 중시하는 바는 첫째, 운행의 氣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 모든 氣는 연장 범위에 따라 大小로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星淸가 이와 같이 운행의 범위에 따라 氣의 大小룰 말한 것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존재현상은 각각 하나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그들은 독립적으로 個別性, 또는 個體性을 가지고 유지한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그러므로 星沿에 있어서 氣의 大小說은 전기 성리학자들의 ‘屈全 • 通塞 • 濁 • 粹駿'의 질적인 차이를 근거로 存在事物을 구별하는 것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昆湖에 있어서 氣 大小說은 촌재현상의 개별화 또는 개체화를 통하여 理를 분석해내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氣의 운행 범위에 따라 理도 또한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이와 같은 氣의 성격변화는 ‘理'와의 관계구조를 변화시키는 발단이 된다.

2) 性의 欲求說

星湖는 氣에 운행 범위가 있는 것과 같이 理에도 또한 운행 범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星湖는 理에 있어서도 氣의 小

와 같이 일정한 범위에 따라 차별성이 있다고 파악한다. 죽,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각기 경계를 가지고 個別性을 유지하며21) 이 범위 안에서 理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軒는 먼저 理의 개별성을 理와 性의 구별로부터 시작한다. 星湖는 理란 公共의 명칭이며, 性이란 形伐에 떨어진 존재22)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性은 인간의 形氣 속에 품부된 하나의 속성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인간의 속성으로서의 性은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善을 지향하는 특성도 있지만, 이러한 특성은 인간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星湖에 있어서 理와 성에 대한 이와 같은 구별은 性卽理의 체계에서 性울 本然之性으로 파악하고 모든 만물에 대응하는 근원자로서 기능하지 못하며, 나아가서 의물의 理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性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만일 理와 氣는 서로 相須하고 있으면서, 氣에 이미 大小가 있다면, 理도 또한 마땅히 그와 같(이 大小가 있)다. 귀, 눈, 입, 코가 비록 心에 달려 있기는 하지만, 心이 귀로 하여금 보게 하고, 눈으로 듣게 하고, 입으로 냄새 맡게 하고, 코로 씹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은 바로 한 몸의 여러 기관이 각각 하나의 자기 性울 가진 (때문이 )다.23)

星湖는 氣가 뿌리와 연장 범위에 따라 大小의 구분을 가진 것과

21) 『星湖』 6, 792쪽 上左, 天下之物萬殊也 木之理別於金之理 水之理別於火之理 又松之理別於柳之理 鐵之理別於鉛之理 又父子別於君臣 兄弟別於夫婦.

22) 『星湖』 4, 618쪽 上右, 『中庸疾書』 : 理是共公之名 性是租在形氣者.

23) 『星湖』 1, 267쪽 上左, 『答愼耳老』 : 若曰理與氣相須 氣低有大小之別 則理亦宜然 如耳目口鼻 難緊于心官 心不能使耳見而目聽 口唄而鼻座 這便是一身之中 衆體各一其性也.

같이 理도 뿌리와 연장 범위에 따라 대소를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大氣는 大氣의 性을, 小氣는 小氣의 性을 각각 가진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理氣는 相須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주목되는 점은 사물에 내재된 性은 아무런 主宰力이 없으며, 또한 나의 性은 外物의 理와 회통되어 있다고 보지 않는 점이다. 표면적인 면에서 보면, 전기 성리학자들의 견해와 차이가 없는 듯하지만, 星湖에 있어서의 理와 氣의 관개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星湖의 大氣는 小氣를 관통하여 운행하며, 서로 包攝關係에 있지만, 星湖의 性은 다른 理와 서로 포함관계에 있지 않으며, 또한 개별적 제한적 속성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다음 性과 理의 구별에서 잘 나타난다.

내가 생각하건대 氣가 품부된 이후로부터 말하면 이미 하늘에 있는 理는 아닌 것이다.24)

理가 사물상에 있는 것으로부터 말하면, 오직 반드시 氣質之性이라고 말해야 한다. 理는 作爲를 가졌으나, 형질이 각각 같지 않다. 그러므로 (理가) 물(水)에 있으면 물의 性이 되고, 불에 있으면 불의 性이 되고, 소는 소의 性, 말은 말의 性이 된다. 비유하면, 물은 같은 물이라도 붉은 물감에 섞이면 붉어지고, 먹물에 섞이면 검어지는 것과 같다.25)

屈禍는 理와 性의 관계를 사물상에서 볼 때, 理가 사물에 들어온

24) 『星湖』 4, 788쪽 上左, 『近思錄疾』 : 愚謂從氣梁以後說 已不是在天底理.

25) 『星湖』 1, 173쪽 下左, 『答洪亮卿』 : 從理在物上說 則只須言氣質之性 理自有爲而質各不同 故在水爲水之性 在火爲火之性 牛爲牛性 馬爲馬性 比如水一也 和丹則混然 和墨則移然.

것이 性이며, 이 性은 氣와 함께 항상 氣質之性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星湖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性은 사실상 사물의 속성을 지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물 속에서는 항상 속성으로서의 性 이외에 또 다른 性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星湖가 여기에서 주목하는 점은 사물에 내재된 性은 아무런 主宰力이 없으며, 또한 나의 性은 外物의 理와 회통되어 있다고 보지 않는 점이다. 즉, 本然之性으로서 만물에 대응하는 출발점이 되지 않고 의물의 性과는 별개의 性으로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星湖의 性개념이 새롭게 규정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음 글에서 이를 말하고 있다.

中人의 性은 본래 정해진 것이 아니다. 대개 사리와 명예로 인하여 점차 그곳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이다. 혹 우연히 한 가지 선행을 하면 곧 스스로 즐거워하는 마음이 생기고 또 납도 추겨세워 칭찬한다. 이로 인하여 자극되어 접점 선행을 더하게 된다.26)

또한 우연히 한 가지 악행을 하게 되면 남들의 비난을 받게 되고, 자기도 선행하려는 마음이 적어져서 점점 악하게 된다. 27)

星湖는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性을 곧 理라고 하지 않고 인간의 形氣 속에 품부된 하나의 속성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선천적으로 性온 정해지는 것이 아니며, 속성

26) 『星湖』 5, 454쪽 下左, 『懷說』 『善惡未定』 : 中人之性 非有以素定 率因利 與名而殷殷入也 或偶行一善 便起自好之心 人亦推而揚之 囚以與動稽稽增頂.

27) 『星湖』 5, 454쪽 下左, 『懷說』 『善惡未定』 : 又或偶犯不迷 人亦之 於是向意意激怒 遂非則稽稙爲惡.

으로써 여러 종류의 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星湖는 인간의 성은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인간의 성도 善이 될 수 있고 惡이 될 수 있는 앙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性에는 선과 악의 경향성이 존재하지만, 후천적인 환경과 노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파악한 것이다. 따라서 星湖의 이와 같은 性해석은 本然의 性을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지만, 星湖는 특히 善惡 이전의 性에서 性의 기능적 특성을 중시한다.28) 따라서 전기 성리학자와 같이 가치실현의 근거로 서 性이 되지 못하고 개체사물의 욕구 실현의 근거로서 역할을 한다고 파악한 것이다. 다음 글을 보기로 한다.

무릇 혈기와 心思가 있는 자는 욕이 없을 수 없다. 생명욕, 식욕, 색욕, 오성(성색천미신)욕, 재물욕, 명예욕 둥은 좋아하는 자가 가지고 있으며, ……의리욕은 군자만이 가지고 있다. …… 이러한 것들은 욕에 구분이 있음을 뜻한다.29)

사람은 欲이 없을 수 없는데, 欲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고 星湖는 생각한다. 즉 육체에 해당되는 생명욕, 식욕, 색욕과 감성에 속한 五官欲, 소유에 속한 재물욕 둥은 모든 사람이 가지는 반면 의리욕은 오직 군자만이 갖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欲올 가진 것이며, 이 욕은 단순히 惡이라 규정할 수 없다30)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星湖는 인간의 모든 행동의 동기

28) 『星湖』 7, 12쪽 上右 『四七新編』 : 吾性感於外物而不與吾形氣相干者 廊之理發.

29) 『星湖』 5, 221쪽 下右, 『懷說』 『欲』 : 未凡有血氣心思者 莫不有欲 其生與飮食陰賜之欲 五性之欲 富之欲 名之欲 惟自好者有之 義理之欲 惟君子有之 此欲之有支流也.

30) 『星湖』 7, 7쪽 上右 『四七新編』 : 夫七情 不學而能 不싸而能者 未必皆

惡 但出於形氣之私 故易至於惡也 若乃四端非不學也.

와 원인을 欲에 두려는 생각이다.31) 즉 그는 公欲(義理欲)이나, 사욕을 막론하고 欲은 形氣的인 뿌리로부터 일어난 것이므로,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며,32) 이들 欲의 능동적인 면을 통하여 속성으로서의 性이 실현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性이 인간과 모든 사물의 속성으로 주어질 때 屈湖의 性은 제한적 성격을 갖기 때문에 전기 성리학자의 性과 같이 보편적 性으로서 다양한 외물의 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 따라서 모든 인간과 존재사물에 대한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항상 대상사물의 속성을 파악하고33) 축적하며, 주어진 대상에 대하여 항상 대처방안을 강구해 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 星湖의 욕구개념이 그의 심기능과 어떻게 연계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3) 心의 活物說

전기 성리학자들의 心은 性을 본질요소로 내재시키고 있다.31) 또한 性은 곧 理이므로 心이 知하는 일은 외물의 理를 궁구하여 내 속에 있는 理를 밝히는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心의 역할이란 性울 따라서 수행하는 일뿐이다. 다시 말하면 心은 性의 주재를 받아 그 性대로 할 뿐이므로 心의 선택권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엄격히 말하면 心은 선택권이 없으며, 性대로 할 수

31) 『星湖』 1, 174쪽 上右 『答洪亮卿』 : 外感內應 四七同然 故赤子入井 則側隱之心生 外物觸形氣 則七情出也 以內應言 理動而氣順 亦四七同然故感於物而動 性之欲也.

32) 『星湖』 4, 671쪽 上右 : 李貸曰離身別無正心之術 此語可商量也 喜怒級鼎 卽所謂人心之所生也.

33) 『星湖』 4, 658쪽 上右 : 究牛性而後 知其可使引重 究馬性而後 知其可使致遠 凡大而父子君臣 小而肉獸草木莫不如此.

34) 『朱子語類』 卷四 : 未有此氣 已有此性 氣有不存 性却常在.

있는 수동적인 기능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

町는 이러한 性을 중요 문제로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재해석함으로써 자신의 사유체계를 재정립하려고 한다. 星湖는 理와 性을 구별하고 性의 주재적 역할도 부여하지 않고 性울 대신한 心의 기능을 새롭게 강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居洞]는 속성으로서 의 性이나 心은 근본적으로 외물의 理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므로 존재사물의 인식의 근거는 바로 心의 활동성에 있다고 파악한다. 다음 글에서 心의 기능을 살펴보기로 한다.

外物이 다가오면 바추고, 사라지면 비운다. (外物이) 고우면 곱게 비추고, 酸하면 酸하게 비춘다. 그 변화는 外物에 있으며, 거울이나 물의 함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心의 本體를 논하면, 아직 다가오지 않아서는 마중하지 아니하고, 바야흐로 다가왔을 때는 모조리 비추며, 이미 가버리면 (殘像을) 남기지 않는다. 이 점은 아마 거울이나 물과 서로 유사한 것 같다.35)

35) 『星湖』 5, 508쪽 下右, 『德說』 『心體』 : 物來(物去空 硏則媒 其變在物 不繁於鑑水之坂也 今論心之體 則曰未來而不迎 方來而必照紙去而不留 此疑若與鑑水相似.

星湖는 외물이 來觸해 왔을 때는 둥글고 모나고 희고 검은 속성에 따라 외물의 차이를 그대로 비추어 낸다고 생각한다. 또 외물이 눈 앞에서 사라졌을 때는 다시 원상태로 회복하여 고요하게 되며 마음에 찌꺼기를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현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모두 같은 것으로 외물을 외물로서 그대로 반영할 뿐 나의 주관이 개입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거울이나 물에 心을 비유하는 것이 매우 타당하다. 그러나 星湖는 사람의 마음은 거울이나 물과 다른 점이 있다고 말한다.

心은 活物이라 비유할 만한 물건이 없다. 겨우 거울과 같다고 하고, 물과 같다고 한다. 거울이나 물은 외물의 來觸을 받을 수 있으나 영명하게 감웅할 수는 없다.36)

星湖가 心을 거울이나 물에 비유하는 것을 부족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능동적으로 寂應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心은 외물이 내촉하여 왔을 때는 내촉해 온 그 순간 혼연히 능동적으로 감응한다. 그런데 거울이나 물은 오히려 心의 體에 대해서는 유사한 비유가 되지만, 心이 감응할 때는 합당한 비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울이나 물은 자기의 주체적인 판단의 일을 하지 못하며, 내촉해 온 외물을 그대로 반영하는 일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의) 空處는 거울에 비유하고, 活處는 물에 비유하고, 知覺處는 원숭이에 비유한다. 여기에 磁明함을 보탠다면 좋다. …… 動靜의 행위와 말함에 주장함이 있기 때문에 君(主管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37)

星湖는 心의 기능적 특성을 크게 두 기능으로 나눈다. 거울과 물에 비유한 것은 감각적 기능을 말한 것이며, 원숭이는 대처의 기능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星湖는 磁明한 心기능이 또 있다고 말한다.

사람이 10여 년 후에 서로 만나서도 문득 그 얼굴을 알아보고, 그 이름을 들으면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안다. 이것은 (찌꺼기를)

36) 『星湖』 5, 508쪽 下右, 『懷說』 「心體』 : 心活物無可取比 不過曰鑑曰水鑑與水可以受物之來而不足以寂應也.

37) 『星湖』 6, 662쪽 下右, 『懷說』 『心』 : 空處兪鑑 活處哈水 處哈猿 加之以則得矣 故以人哈心亦可 人居室中 如心在身內也 動靜云爲 主張有在故曰君.

남기지 않는 가운데 남기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나 눈이 이미 접촉되면 문득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應이다.38)

星는 십 년이나 지난 뒤에 사람을 만났을 때 기억울 잘하는 것은 반사적 작용만을 하는 거울이나 물로서는 비유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남기지 않는 가운데 그 知梵내용을 모아서 안에 축적하고, 그것을 밖으로 내보내는 측면을 星는 心의 應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星湖의 應이란 心의 고유기능으로서 知覺내용을 축적하여 신속하게 판단에 활용하는 인간만이 가진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命獸에게도 이러한 심은 있지만, 命獸는 己私를 떠나지 못하므로 그 작용이 사사로운 일에 국한될 뿐이다. 星湖가 특히 거울이나 물그리고 廊獸를 부족한 비유로 생각한 것은 應의 근거가 되는 경험지식의 축적이 불가능한 점이며, 이러한 경험지식을 통하여 사물을 변별하거나 是非善惡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星湖가 心기능을 單純反應 또는 反射作用만을 하지 않고 感應의 주체로서 기억과 판단을 수행하는 중요한 기능으로 강조함을 알 수 있다.

4. 結論

지금까지 昆湖의 사유체계로서 이기 • 심성설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中世 말기적 사회에 직면하여 星湖 李은 中世的 思로부터 어떠한 형태로 近代的 思惟로 전환하려고 하였는가, 즉 전기 성리

38) 『星湖』 5, 508쪽 下右, 『情說』 『心體』 : 然有人相逢於十年之後 便識其面聞其名而知其爲何人 是不之中 留者存 故耳目低接 便能識認 方是爲孟應也.

학적 사유체계에서 어떻게 근대적인 사유체계로 변용하려고 하였는가 하는 점에 유의하여 검토하였다. 여기에서 논의된 점을 정리하면 세 가지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星淸는 전기 성리학에서 理와 氣의 성격을 새롭게 규정한 데 있었댜 죽 界禍의 理와 氣는 각각 동정의 능력, 정추의 특성, 大小의 범위가 있다고 상정한 점이다. 특히 星湖는 氣說에서 氣룰 大小로 구분하고 大小의 氣가 각각 자기의 뿌리를 중심으로 일정한 운행범위를 가지고 있다고 파악한 점이다. 이러한 氣의 大小說은 性卽理의 체계를 변화시켰으며, 모든 존재사물을 개별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둘째, 星湖의 理令這에 있어서 理 • 令의 성격 변화는 그의 心性說에 있어서도 心과 性을 구별하고 性을 배제한 心의 지식축적 기능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였으며, 格致說의 전개에 있어서도 知識論的 方法으로 확대 해석하게 하였다.

셋째, 星湖의 이와 같은 심기능의 확대는 존재사물의 인식과 사회현상에 대한 인식 즉, 정치 경제 사회 둥의 인식에 있어서 ‘있어야할 당위적 기준'에서 관찰하지 않고, 經驗的 對象으로 관찰하게 하였다. 이 점은 星湖의 ‘近代的 思’ 로의 한 변화라고 볼 수 있다.

茶山 丁若鏞의 經學

李照衡

1. 머리말

經學이라는 것은 四占五經울 중심으로 한 原初儒家의 經典울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 舜 • 禹 • 易 • 文 • 武 • 周公등 孔子가 숭배하는 인물과 孔子 • 曾子 • 子思 • 孟子 등 原初倫家가 남겨 놓은 말들을 명분상 至上의 진리로 하되, 그 남겨 놓은 말들은 시대와 학자에 따라 그 해석이 다르며, 經典의 출현 연대와 眞僞 문제도 이와 관련하여 그 說이 구구하다. 그러므로 先秦時代에 는 원초유가의 洙酒學的인 經典世界가 있고 淡唐時代에는 訓話學的인 경전세계가 있고 宋明時代에는 性理學的인 경전세계가 있고 淸朝時代에는 考證學的인 경전세계가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高麗末에서 朝鮮朝 전기의 성리학적인 경전세계가 있고 朝鮮朝 후기의 實學的인 경전세계가 있다. 이처럼 그 시대의 학문적 경향과 학자의 자기 입장에 따라 같은 경전을 놓고도 그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각기 성격을 달리하는 경전세계가 전개되어 온 것이다.

茶山 丁若鏞(1762-1836)은 우리나라가 낳은 위대한 사상가이다. 역사를 전진시키려 했던 진보적인 사고가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등 여러 방면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그는 위대한 사상가

인 것이다. 여기서는 그의 진보적인 사고 가운데서도, 경전세계에 있어서 어떤 진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를 論하여 보기로 한다.

2. 朝鮮後期社會와 丁若鏞

茶山經學의 성격을 논하기에 앞서 우선 茶山이 살고 간 그 시대룰 중심으로 하여 朝鮮王朝의 발전과정 및 다산의 實學과 經學의 관계에 대해 一해 봄으로써 그의 경학을 이해하는 데 一助가 될 것 같아서 여기에 잠시 언급해 본다.

조선왕조가 건국되면서 儒敎를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표방하였다. 건국 초기를 지나 15세기 중엽까지는 封建秩序의 재정비를 통한 일련의 개혁이 진행되어 前 王朝에 비해 일정한 발전을 가져 왔다. 그러나 封建社會 그 자체의 내재적 모순에서 慈起되는 필연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15세기 말부터 16세기에 이르러 王位筑奪에 동원된 功臣을 중심으로 한 권력의 핵심관료인 소위 動荀派에 의해 大土地所有의 兼供이 격화하였는데, 그들의 의 축적은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게 하였다. 그 한 단면이 齋 李彦(1491-1553)의 『一綱十目命』1)에 잘 나타나 있으며, 『成宗質錄』에는

世宗朝에는 재상으로서 高利貸롤 놓아 富하게 되는 자가 적었다. 그러나 지금은 高官祿者가 모두 고리대를 놓아 富를 더하니, 園田이 山野에 널려 있고 축적이 州縣과 유사하다. 부귀의 세

1) 李彦延, 『每齋全』(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刊) 103쪽, 『一綱十目』.

“民不受惠 割斜無改於前 , 窮盛有基於換時, (中略) 稅敏緊, 而無一分之寬, 流亡歲 而無存撫之策, (中略) 頃者權好拉政, 專務刻深, 屈起大獄, 極其怒酷.”

력을 타서 菜한 奴俊들을 分造하여 小民을 文하니, 小民이 어찌 빈궁해지지 않겠는가?2)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무제한적으로 土地兼을 자행하면서 權에서 전횡을 일삼는 훈구파에 대해 그 세력을 제약하면서 등장한 것이 士林派이다. 사림파는 新興中小地主府 출신으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유교국가로서의 이념을 착실히 수행해 보고자 하는 一念에서 ‘幻齊治平'이라는 유교의 근본이념에 입각한 ‘仁政'의 제창은 현실문제를 중시하고 民에게 일정한 양보를 가져온 양심적인 학자적 관인들이었으나 四大士禍의 유혈적인 비극을 겪었고, 그 뒤 역사의 필연적인 전진에서 오는 것이라 하겠지만 반전하여 사림파가 중앙정부의 權府를 차지하면서 당분간 王朝가 안정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말에 와서 中世哲學인 성리학의 규범화가 강화되고 권력내부의 臣僚들의 土地兼但이 다시 일어나 王朝社會의 내재적 모순이 심화되어 갔다. 이때의 경제적 실정을 栗谷 李(1536-1584)가

먹는 것은 배를 불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床에 가득 채우기를 서로 자랑하며, 입는 것은 몸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치함을 서로 경쟁한다. 한 床의 음식값은 굶주린 사람의 수개월 양식이 되며, 한 벌의 衣服 값은 추위에 떨고 있는 열 사람의 의복 값이 된다. 열 사람이 농사하여 한 사람을 먹 일 수 없는데 농사하는 사람은 적고 먹는 사람은 많으며, 열 사람이 천을 짜서 한 사람을 입힐 수 없는데 짜는 사람은 적고 입는 사람은 많으니, 어떻게 民이 굶주리지 않으며 추위에 떨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3)

2) 『成宗錄』 (國史編篠委員會刊) 卷44, 5年 6月 甲辰條, 122면. ”世宗朝, 宰相之有長利, 以富稱者, 盜 今高官厚祿者, 皆有長利, 以益其, 園田返山野, 菩牟縣, 乘富之力, 分造찼奴伴模, 侵刻小民, 民安序不至於貸敷.”

3) 李, 『栗谷全害』(大東文化硏究院刊) 제1책, 106쪽, 『萬言封事』. ”食不爲充腹, 盆案以相臨 衣不爲阪體, 華美以相競, 一卓之費, 可爲凱者數月之種, 一襲之, 可爲寒者十人之衣, 十人耕, 不足以食一人, 而耕者少, 食者多, 十人織布, 不足以衣一人, 而織者少, 衣者多, 奈之何民不凱旦寒哉."

라고 한 것을 보아도 당시 통치계급의 토지겸병에서 오는 사회적 모순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7세기에 朝鮮王朝는 두 번의 외침을 당하게 된다. 日本이 ‘假道入明'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침공한 壬辰倭得과 淸이 ‘崇明'의 조선왕조를 자기들 영향권 속에 집어넣기 위해 침공한 丙子胡亂을 겪고 나서 王朝政府는 경제적 고갈과 民으로부터의 신뢰 상실이 極에 달하였으며, 여기에다 통치계급의 지배충 내부에는 집권층과 失廉의 정치적 암투가 가속화되고, 따라서 성리학은 鬪年의 이론적 武装化의 도구로 전락하여, 비생산적인 '理氣'의 시비와 ‘服喪’의 禮松, 그리고 ‘北伐論’의 명분 등은 사회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茶山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을 살다간 實學의 大家이다. 그는 前時代와 자기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상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壬辰倭冠가 있은 다음부터는 온갖 制度가 해이해지고 모든 사업이 뒤죽박죽 되었다. 兵營은 자꾸 증설되어 국가의 財政이 고갈되고 토지제도가 문란해져서 賊稅의 징수가 공평하지 못하였다. 생산의 源은 극력 막아 버리고 낭비의 구멍은 마음대로 뚫어 놓았다. 여기서 다만 部署의 개편과 人員 축소로써 구급책을 삼은 결과 한 줌의 이익이 있는 반면 손실은 산더미와 같다. 있어야 할 百官이 구비되지 못하고 定規官負에게 봉록이 없는 결과 食悠의 페습이 크게 불고 백성들은 궁핍에 빠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하나하나 털끝만한 것까지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 지금 곧 개혁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나라를 망치고야 말 것이니,

이것이 어찌 忠臣志士들의 柚手傍親할 일이겠는가?4)

茶山도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社會構成에서 보면 통치계급에 속하는 中小地主府 출신으로 그의 사상에 일정한 한계는 있으나 그러나 그는 민중과 거리를 두지 않고 현실에 눈을 돌려 救國의 의지로 국가행정과 田制룰 위시하여 사회전반의 개혁을 구상했던 시대적 양심을 가진 학자였다.

3. 丁若鏞의 實學과 經學의 關係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의 모든 사회현상은 일정한 역사적 조건과 환경의 産物이다. 하나의 사상도 역시 그래서 발생하게 되고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기존의 사상은 反動化되고 새로운 사상은 進步的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이조사회는 한 마디로 말하여 성리학으로 규범화된 봉건적 中世社會이다. 이러한 중세사회가 壬辰倭亂과 丙子胡亂의 두 외침을 계기로 在野의 양심적인 학자에 의한 민족적 자각이 고조되었고, 18세기를 전후해서는 中國과의 빈번한 왕래로 서양문물에 대한 견식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 넓어짐에 따라 사고의 개혁과 제도의 개혁 및 기술의 혁신 둥을 통한 ‘富國裕民’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역사발전에 前進的 역할을 담당한 새로운 思想家群이 형성되었으니 이들이 바로

4) 丁若鏞, 『與猶堂全』(原仁文化社影印本) 제5책, 2쪽, (『與猶堂全』에 한해서는 以下 『書』 5-2식으로 표시함) 『經世遣表』 卷1. ”一自壬辰倭裁以後, 百度原城 庶良, 軍累갭 國用落翊, 田助素亂 賊敍偏個 生財之源, 盡力杜塞, 費財之夜, 隨意麥盤 於是, 唯以革署減員, 爲救急之方, 所益者升斗, 而所損者丘陵, 百官不, 正士無祿, 貧風大作, 生民卒, 麻思之, 蓋一毛一遊 無非病耳, 及今不改, 其必亡國而後已, 斯益忠臣志士所能抽手傍設者哉.”

李朝後의 官學者들이요, 이들의 사상이 ‘實學'이라고 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역사적 내용을 가진 명사로 정립된 것이다.

우리나라 사상사에 있어서 이조 후기의 實學은 사상의 내재적 발전에 일대전기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조사회의 封建體制를 규범화하였던 성리학에서 오는 事大的인 中國 中心主義세계관을 부정하고 愛國的 • 주체적 입장에서 우리나라의 역사 • 지리 • 언어 • 문학 • 풍속 등의 연구에 관심을 가울이는 한편, 정치 • 경제 • 사회 등 현실문제에 눈을 돌리고 官用 • 買證을 唱羽했기 때문이다.

茶山 丁若鏞은 이조 후기 실학자 중에서도 經世致用派의 宗인 星湖 李(1681-1763)의 학문을 계승 • 발전시켜 經世致用學을 大成한 위대한 학자요 사상가이다.5) 다산이 이조 후기의 中世封建社會 붕괴기를 살아가면서, 정치 • 경제 • 사회 등 현실문제에 오로지 눈을 돌려 그 구체적 대안을 제시한 그의 실학사상의 대표적 저술이 一表二書(『經世造表』 • 『牧民心書』 • 『欽欽新書』)라고 한다면, 이러한 그의 실학적 저술이 나오게 된 데는 이것을 뒷받침하는 그의 經典社釋에 나타난 독창적인 經學思想이 토대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一表二書의 저술연대가 儒敎經典을 해석한 經學에 관한 저술보다 뒤에 나온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고, 다산 자신이 쓴 「自撰墓誌銘」에

六經四書는 修己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고 一表二書는 天下國

5) 『丁茶山全書』(文編委員會刊), 5-6쪽, 『年譜』. “時一世後學, 莫不祖述李先生(昆湖)之學, 公(茶山)亦以爲準, 常語子姓曰, 余之大夢, 多從星湖私淑中來"

『全書』, 1-330, 『自撰墓誌銘』(集中本). "時李公家煥, 以文學, 聲振一世, 妹夫李承范, 又筋射勘志, 皆祖述星湖李先生之學, 鏞得見其迫習, 狀然以學問爲意."

家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니 本末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6)

라고 한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여기 다산의 六經四書를 통한 '修己'는 종래의 전통적인 ‘修己'와는 質을 달리한다.

참된 儒學이란 본래 나라를 다스리고 민생을 편안히 하며 외적을 물리치고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하며 학문과 군사기술에 능통하여 무엇이든 담당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어찌 章句룰 찾아내거나 벌레와 물고기 따위를 주석하고 소매 넓은 옷을 입고 禮親만 익히는 것이 학문이겠는가? (中略) 뒷세상의 儒者들은 聖貸의 본뜻을 알지 못하고 仁義와 理氣 이외에는 한 마디 말이라도 입밖에 내면 이를 雜學이라고 지목한다.7)

그는 옛날 옷을 입고 禮院만을 익히며 仁義와 理氣 이외는 한 마디 말도 못하게 하는 그런 ‘修己'가 아니라 外敵을 물리치고 국가의 財用을 풍부하게 하며 文武에 두루 능통하게 하는 그런 실력의 배양이 바로 ‘修己'이며, 이것이 六經四書에 내포된 참된 儒學으로 보았댜 경전주석을 이러한 각도에서 전개하였으므로 그의 경전주석에 나타난 經學思想은 바로 一表二書를 중심으로 한 그의 實學을 뒷받침하는 토대가 되어 있다. 다산은 그가 쓴 『家誠」에 대개 책을 저술하는 법은 經籍이 宗이 되고, 그 다음은 經世澤民의 학문이어야 하며, 外敵울 막을 수 있는 關防과 器具 같은 것을 마련하는 것도 또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8)

6) 『書』, 1-337, 『白撰慕地名』(朱中本). ”六經四混 以之修己, 一表二書, 以之爲天下國家, 所以備本末也.”

7) 同上, 1-243, 『詩文集』 卷12, 『俗偏論』. ”傾偏之學, 本欲治國安民, 抵夷秋裕財用, 能文能武, 無所不常, 鉉摘句, 注蟲釋魚, 衣逢液習拜掛而已哉, (中略) 後偉不達聖之旨, 凡仁義理氣之外, 一言發口, 則指之謂雜學.”

라고 하여 經籍을 으뜸으로 한 經世澤民의 학문을 말한 것을 보더라도 그의 實學과 經學은 本末表襄의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丁若鏞의 經典世界

1) 經典社釋의 諸著述들

茶山이 남긴 500여 권의 저술 가운데 그 태반을 차지하는 것이 經染이다. 그의 「自撰墓誌銘」에 보면 『詩經講義』 12권 • 『詩經講義補』 3권 • 『梅氏書平』 9권 • 『尙書古訓』 6권 • 『尙書知迪錄』 7권 • 『喪體四婆』 50권 • 『裵福外編』 12권 • 『四福家式』 9권 • 『樂書孤存』 12권 • 『周易心婆』 24권 • 『易學緖言』 12권 • 『春秋考徵』 12권 • 『論語古今注』 40권 • 『孟子要義』 9권 • 『中自談』 3권 • 『中恥』 6권 • 『大學公議』 3권 • 『熙政堂大學講錄』 1권 • 『小學補婆』 1권 • 『心經密驗』 1권 등 경집이 모두 232권이다.9)

8) 『丁茶山全書』, 151쪽, 『年譜』. “大紋著習之法, 經籍爲宗, 其次經世澤民之學,若關防器用之制, 有可以御外梅者, 亦不可少也.”

9) 『全書』, 1-334. 『自撰墓誌銘』, 渠中本에 나와 있는 經渠의 總 卷數는 232卷으로 되어 있으나 回甲 이후의 저술까지 합치면 실제로 250여 권이 된다.

이것을 저술 연대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805年 『裵體外編』 12권 『裵綴外編』은 원래 「檀弓筑誤」(1803) 6권 • 「弟莫考」(1803) 1권 • 「古禮零言』(1804) 1권 • 『正體傳重辨』(1805) 3권인데, 1821년에 『禮考害頂』 1권을 여기에 합편하였음.

1808年 『祭禮考定』 2권.

『周易心婆』 24권 일명 『周易四婆』이라고 하며, 「祖易要旨」 • 「易例比釋」 • 「春秋官占補土」 • 「大象傳」 • 「待卦傳」 • 「說卦傳」 등이 여기에 편입되어 있음. 『周易心婆』은 1804년 甲子本 8권의 저술을 시작으로, 그 뒤 乙五本(1805) • 丙寅本(1806) • 丁卯本(1807) 등 여러 차례의 改修룰 거쳐 1808년에 완성하였음.

『易學緖言』 12권 일명 『周易緖言』이라 함. 『易學緖言』은 1808년에 저술되었으나 여러 차례의 改修를 거쳐 1821년에 완성되었음.

1809年 『詩經講義』 12권 1791년 정조의 「經條」 800조에 대해 답변한 것을 한 책으로 편집해 두었다가 이때에 와서 剛錄한 것임.

1810年 『詩經講義補』 3권. 正祖의 「寺經條問」에 해당되지 않는 부분을 주로 하여 『詩經』의 주석을 보충 정리한 것임.

『樣酷儀』 1권 冠綴와 婚綾에 대한 槪存禮制와 이에 대한 다산의 견해를 수록한 것임.

『梅氏『平』 9권. 梅腐의 『古文增多』 25편이 僞作임을 밝힌 것임.

『尙書古訓』 6권. 古文에도 있고 今文에도 있는 『尙書』 28편에 대한 古副을 수집해 수록하고 간간이 다산의 견해를 밝혀 놓은 것임. 一名 『尙曺古訓菓略』이라고도 함.

1811年 『尙書知遠錄』 7권. 古文에도 있고 今文에도 있는 『尙書』 28편에 대한 종래 주석가들, 특히 梅'1J'l과 蔡沈의 주석을 古訓과 비교하고 이에 다산의 견해를 밝힌 것임.

『喪體四婆』 50권. r喪儀匡」(1803) 17권 • 『表具訂」(1807) 6권 • 「喪服商」(1809) 6권 • 「喪期別」(1811) 21권을 합본한 것인데, 1811년에 와서 『喪期別』이 탈고됨으로써 저술 書名

울 『豊四溪』이라고 하였음.

1812年 『春秋考』 12권.

1813年 『論語古今許』 40권.

1814年 『孟子要義』 9권.

『大學公議』 3권.

『 熙政堂大學講錄』 1권. 1789년 正祖가 熙政堂에서 茶山을 비롯한 抄啓文臣을 불러 놓고 『大學』을 講論하게 하였을 때의 그 강론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이 『熙政堂大學講錄』이며, 1814년 다산이 康津 유배지에서 다시 補完 정리한 것이 『大學講義』이다. 그런데 「自撰墓誌銘」에는 『熙政堂大學講錄』으로 되어 있음.

『中自歲』 3권.

『中庸講義』 6권 1784년 正祖가 질문한 「中紅서」 70조와 이에 대한 다산의 답변을 기록해 놓은 것이 『中講義』이며, 1793년에 1차로 剛削增補하고 1814년에 2차로 剛削增補하여 완성한 것이 『中孟情』임.

1815年 『小學枝言』 1권.

『心經密驗』 1권.

1816年 『樂害孤存』 12권.

1817年 『喪儀節要』 6권. 「喪儀節要」(1815) 4권 • 「禮筋記』(1816) 1권 • 「五服沿革表」(1811) 1권을 合本하여, 1817년에 6권의 『炅儀節要』로 箕庫하였음.

『自撰墓誌銘』에 나오는 經染 중에 『表禮外編』 12권은 『檀弓筑誤」6권 • 「弟災考」 1권 • 『古禮零言』 1권 • 「正體傳重辨」 3권 • 「禮考頂」 1권만을 가리키고, 現行 新朝鮮社本과 필사본에 「喪禮外編」에다 편입시켜 놓은 1818년 여름에 완성한 『國朝典禮考」 2권은 『自撰墓誌

銘」의 문집 중에 나오는 「典體考」 2권에 해당되는 듯하며, 『四體家式』 9권은 『祭綾考足』 2권 • 『村傾豊酉』 1권 • 『房越儀節要』 6권을 가리키고, 『小學補婆』 1권은 『小學枝言』 1권으로 대치된 듯하다. 『梅氏平』은 다산이 解配 후 2차에 걸쳐 剛削增補하였는데 그 2차의 마지막 산삭증보의 완성이 1834년이며, 『尙古』과 『尙占知遠錄』도 1834년에 合本增補하여 21권으로 改修하였다.

다산은 「自撰墓誌銘」에 經渠으로 수록해 놓은 것 이외에도 1805년의 『疑問答』 3권과 1810년의 『小學珠串』 3권과 1827년 洪奭周(1774-1842)의 『尙書補傳』과 洪顯周(1793-1865)를 통해 입수한 閣若(1636-1704)의 『尙占古文疏證』을 읽은 후 『尙補傳』 1권과 『氏古文疏證 紗』 4권을 저술하였다. 『樂習孤存』은 樂에 관한 것이며 『炭福四婆』 • 『四綴家式』 • 『春秋考徵』 동은 冠婚炭祭와 禮의 範凡합로서 국가의 典章制度에 관한 腐說인데, 다산이 예설에 관한 저술이 많은 것은 古代帝王의 造制를 토대로 現制度룰 발전적으로 개혁해 보려 한 그의 깊은 의지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禮說에 관한 그의 저술은 그의 經典社釋書의 중심이 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는 四書三經의 주석을 중심으로 그의 경전세계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2) 茶山經學의 實學的 世界

茶山의 경전주석에는 크게 세 가지 면에서 그 특징을 논해 볼 수 있다. 하나는 反性理學的인 면이요, 다른 하나는 사고의 合理的인 면이며, 또 다른 하나는 주석의 質學的인 면이라고 할 수 있다.

反性理學的인 面

다산이 경전의 주석서에 부분적으로 朱子의 견해를 얼마간 승인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그의 儒敎的 제약성에서 오는 필연적인 것이기는 하나 그러나 朱子의 성리학적 해석은 거의 비판 분석하였다. 다산이 경전주석 이외의 다른 논문 「五學論」에서 이미 성리학의 空理空論과 이를 권력투쟁과 格의 무기로 한 당시 성리학자들의 타락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여,

지금 성리학을 하는 사람들은 理니 氣니 性이니 이니 體니 用이니 하는가 하면, 本然이니 氣質이니 理發이니 氣發이니 已發이니 未發이니 單指니 兼指니 理同氣媒니 氣同理異니 心善無惡니 心善有惡이니 하여, 줄기와 가지와 잎새가 수천 수만으로 갈라져 마치 터럭을 나누고 실오리를 쪼개듯이 세밀히 분석하면서 서로 꾸짖고 서로 야단치며, 눈을 감고 묵묵히 연구하다가 대단한 것을 깨달은 것처럼 핏대를 올려 목줄기를 붉히면서 스스로 천하의 高妙한 이치를 다 터득했다고 떠들어댄다. 그리하여 동쪽으로 부딪치고 서쪽으로 들이받으며 꼬리만을 잡고 머리는 버리고 門마다 하나의 旗織를 세우고 집마다 하나의 보루를 쌓아서 한 세대가 끝나도록 그 是非를 해결하지 못하고 代를 전해 가면서까지 그 원한을 풀지 못한다. 자기편에 들어오는 사람은 이를 존대하고 나가는 사람은 이를 천대하며, 자기와 학설이 같은 사람은 이를 떠받들고 다른 사람은 이를 공격하면서 스스로 자기의 주장이 지극히 올바르다고 여기고 있으니, 어찌 학문과 거리가 먼 것이 아니겠는가?10)

10) 同上, 1-231, 『五學論』 1. ”今之爲性理之學者, 曰理, 曰氣, 曰性, 曰情, 曰體, 曰用, 曰本然氣質,理發氣發, 已發未發 單指兼指, 理同氣異, 氣同理異, 心善無惡, 心善有惡, 三幹五桓, 千條萬葉, 速分樓析, 交唄互, 冥心默硏, 盛氣赤頭, 自以爲極天下之高妙, 而東振西觸, 提尾脫頭, 門立一, 家築一母, 畢世而不能決其, 傳世而不能解其怨, 入者主之, 出者奴之, 同者戴之,殊者伐之, 籍自以爲所操者極正, 岩不疏哉"

라고 한 것은, 바로 성리학 자체가 지니는 그 觀念性과 이를 통치 이념으로 합으로써 야기되는 제반 폐단에 대해 논급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反性理學的인 주석이 그의 경전 주석에 한 기본 방향이 되어 있다.

朱子는 ‘性則'라고 하여 ‘性'을 바로 ‘埋’로 보고, 天은 陰賜五行으로써 만물을 化生한다. 氣가 形을 이룸에 理도 또한 부여된다. 사람과 사물이 태어나면서 각각 부여하는 바의 理를 얻기 때문에 그것으로 健順五常의 德을 삼으니, 이것이 소위 性이다.11)

라고 하여, 사람의 性만 理로 보는 것이 아니라 物의 性도 동일하게 理로 보는 人物同性을 논하고, 이에 人과 物을 구별하는 데 氣菜의 通塞正偏으로써 하고12), 또 人과 人을 차등하는 데 氣質의 淸濁으로써 하여13) 그 논리를 전개하였다. 朱子學에서 性울 理로 하고 人과 物을 同性으로 한 것은 理가 만물의 始元이요 그 所以然이며, 이것은 절대적인 것으로서 自然法則的인 필연성이라고 하는 그 세계관에서 도출된 理에 대한 합리화이다. 그래서 주자학은 성리학을 規範化한 中世封建社會의 모든 제도와 질서를 자연법칙적인 필연성으로 합리화하는 데 그 이론적 支柱가 되었다고 하겠고,

11) 『中章句』, 首草注 "天以陰賜五行, 化生萬物, 氣以成形, 而理亦服焉, 人物之生, 因各其所賊之理, 以焉健}1傾五常之德, 所謂性也.”

12) 『朱子語類』 卷4. ”二氣五行, 交感萬嬰, 故人物之生, 有打將之不同, 自一氣而言之, 則人物皆受是氣而生, 自精租而言之, 則人其氣之正通者, 物其氣之偏旦塞者, 惟人得其正, 故是理通而無所幽 物其偏, 故是理塞而無所久.”

13) 『洙子文菓』 卷74. ”氣之爲物, 有淸濁之不同, 渠其明之氣 而無物欲之累, 則爲聖, 菜其淸明, 而未純全, 則未免微有物欲之累 而能克去之, 則爲, 菜其香濁之氣 又爲物欲之所薇, 而不能去之, 則爲愚爲不肖, 是皆氣梁物欲之所爲 而性之善未符不同也.”

그 일환으로 人性問題에 있어서도 인간의 性울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으로 갈라서 理의 절대성과 보편타당성을 표면에 내세워 이것을 本然之性이라고 해두고, 실질적으로는 氣質之性을 설정하여 봉건사회의 현실적인 인간의 신분적 차등을 합리화하는 데 그 의도가 있었다고 하겠다. 다산은 朱子의 이러한 성리학적인 해석에 반박하여,

五行도 만물 가운데 五物에 불과하니, 다 같이 이는 하나의 물질인데 이 五로써 萬을 生하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中略) 이제 사람들의 혈기 같은 것을 분석해 본다 하더라도 金 • 木과 같은 따위를 볼 수 없으니, 장차 어디에 근거하여 이런 이치를 증험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性의 物된 것이 無形無質이니 만약에 性이 質에 기탁하여 있다고 하면 可하거니와, 만약에 天命之性 밖에 따로 氣買之性을 내세운다면 이런 것은 옛 經叫에서 찾아볼 수 없다.14)

라고 하여, 陰陽五行으로 만물을 化生시킨다는 신비적인 이론과, 인간의 性을 本然之性 이외에 氣質之性을 설정하여 인간의 불평등을 선천적인 것으로 합리화한 朱子의 성리학적 이론에 대하여 그는 자기의 비판적이며 독창적인 학설을 孔 • 孟의 옛 경전에 권위룰 빌려 이룰 논박하였다. 다산의 人性에 관한 견해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朱子가

인간은 기질이 서로 가까운 가운데도 美와 惡이 一定해서 ‘習'

14) 『書』, 2~62, 『中講義』 卷1. "五行不過萬物中五物, 則同是物也, 而以五生菓, 不亦難 (中略) 今夫血氣之倫, 而視之, 不見金木等物, 將於何驗此理, 況性之爲物, 無形無質, 若云性萬於質則可, 若於天命之外,別立氣質之性, 則在古無徵."

에 의해 옮길 수 없음이 있다.15)

라고 하여, 人性論에 있어서는 사실 唐나라 韓應의 ‘性三品說'을 게승해서 중세적 인간관을 바탕으로 한 신분적 게급사회를 합리화시킨 결과를 초래했지만, 다산은 이러한 중세적 인간관을 극복하고 근대적 인간관에 입각하여 ‘性三品說'은 千古의 큰 폐단임을 말하고,16) 따라서 인간의 性은 본래 같은데 ‘上智’가 되거나 ‘下悲'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오직 후천적인 실천을 통한 그 습성에다 강한 의미를 부여하여17) 중세적 當爲論과 운명론적인 봉건적 지배논리를 타파하려고 하였다.

茶山은 성리학자들의 경전해석이 宗敎로서의 佛敎의 이론을 많이 도입하여 ‘聖人之心이 明鏡止水와 같다’고 하여 佛敎의 明鏡止水를 끌어와서 ‘動'보다는 ‘靜', ‘心知思'보다는 ‘無思無慮'를 소중히 하고18), 인간의 性에 이라는 佛敎의 문자를 빌어 와서 佛敎에서의 ‘新薰'이 성리학에서 ‘染'으로 탈바꿈하여 더욱 더 관념화되어 나간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19)

15) 『論語集』 卷17. "人之氣質, 相近之中, 又有美惡一定, 而習之所能移者.”

16) 『書』, 2-338, 『論語古今主』 卷9. ”智愚者, 謀身之工, 登性之品平, 性相近, 只是一等而已, 安有上中下三等平, 上中下三等之說, 爲千古之大, 不可以不辨.”

17) 同上, 2-340, 『中命語古今注』 卷9. "聖之性, 本只相同, 克念而習於沿, 則升而爲聖, 岡念而習於惡, 則降而爲惡, 其不肯升者, 名曰下, 其不肯降者, 名曰上智.”

18) 同上, 2-64, 『中講義』 卷1. “程子曰, 聖人之心, 如明鏡止水, 今接, 明鏡止水之說 起於佛家, 謂心體之虛明靜寂如水鏡也, 然此須無思無廊不戒不一商不動, 而後有此光姬 聖人於未發之時, 戒恨恐, 慮窮埋, 至有終日不食,終夜不腐 以爲思, 如孔子者, 安爵以明鏡止水之平.”

19) 同上, 2-6, 『大學公議』 卷1. "朱子所云切染者, 非梅氏所云荀染汚俗咸與惟新之但染也,乃氣梁人欲之所染,所謂上知之不能無者,投切嚴經曰,如來藏性淸淨本然, 此本然之性也, 本然之性, 爲新范所染, 乃失之本體, 般若起

論中, 瓜言複語之說, 謂之新蒸者, 本體虛明, 而新被氣質所f也染也, 然則新蒸卽荀染, 荀染卽新流 娘本然而言之, 則謂之新, 見在而言之, 則謂之范染, 此難至理所幽 而此經之親民新民, 必非此義.”

思考의 合理的인 面

다산의 경전주석은 경험적이요 과학적인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재래의 신비주의적이며 비과학적인 中世의 관념에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朱子를 비롯한 宋儒들이 ‘仁義禮智’에 대한 訪困으로 ‘仁者愛之理 心之성’이니, ‘談惡辭讓是非 情也 仁義禮智 性也'니 ‘仁者天地生物之心也20)니, ‘上天이 仁義禮智의 네 알맹이를 人性 속에 부여하였다'등 그들의 중세적 思辨哲에서 오는 觀念一淡伴의 주석에 대해 다산은 ‘仁'을 해석하여,

옛 篠에 仁字는 人과 人을 포개 놓은 글자이다. (中略) 무릇 두 사람 사이에서 그 本分을 극진히 하면 그것을 일러 仁이라고 한다.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남의 자식된 이가 그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을 ‘天地生物之心으로 어버이에게 효도했다’고 한다면 이것은 아마도 豊上에서 볼 때 다소 損이 있을 것이다.21)

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茶山이 仁을 해석하면서 인간의 자주성을 강력히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朱子가 仁을 우주의 생성원리로 신비화시킨 해석에 대비해 보면 경험적이며 과학적인 合理的 해석이라고 하겠다. ‘仁義禮智’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그는 中世의 관념적인 해석과는 전연 그 軌를 달리하고 있다.

20) 『子文』 卷77, 『克齋記』 所收.

21) 『全書』, 2-78, 『中情義』 卷1. ”古策仁者, 人人文也, (中略) 凡二人之間,盡其本分者, 斯謂之仁, 天地生物之心, 于我莊, 爲人子者, 孝於其親, 曰我以天地生物之心孝於親, 恐於事體, 有多少損.”

‘ 仁義禮智'의 이름은 도덕적 행위가 있는 뒤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사랑한 뒤에 仁이라 하고 납을 사랑하기 전에는 仁의 이름이 성립되지 않는다. 자신을 하게 한 뒤에 義라고 하고 자신을 善하게 하기 전에는 義의 이름이 성립되지 않는다. 客과 主人이 예의를 배푼 뒤에 禮의 이름이 성립되고 사물이 分辨된 뒤에 智의 이름이 성립되니, 어찌 仁義禮智의 네 알맹이가 복숭아와 살구의 씨처럼 사람의 마음속에 潛在해 있겠는가?22)

仁義而智를, 天으로부터 부여받아 桃仁과 杏仁처럼 인간의 性에 내재한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주체적으로 도덕적 행위의 실천을 통하여 성취하게 되는 德으로 본 것이다.

다산은 ‘仁義禮智'와 ‘側隱蓋惡辭誤是非之心'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면서 朱子學을 神聖視하고 이 학문이 지배하던 중세의 관념적 思辨哲學에 대해 중대한 선언을 하게 된다. 그는 『論語古今注』에서 仁義禮智는 비유하건대, 꽃과 열매 같은 것이니 오직 그 근본은 마음에 있다. 側隱蓋惡之心이 안에서 發하여 仁義가 밖에서 이루어지고, 辭讓是非之心이 안에서 발하여 禮가 밖에서 이루어진 다. 지금의 信者들은 仁義禮智의 네 알맹이가 뱃속에 五臘처럼 있고 四端이 다 이로부터 나온다고 알고 있으니,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23)

22) 同上, 2-105, 『孟子要義』 卷1. ”仁義禮智之名, 成於行事之後, 故愛人而後, 謂之仁, 愛人之先, 仁之名未立也, 善我而後, 謂之義, 善我之先, 義之名未立也, 賓主拜損而後, 禮之名立, 事物辨明而後, 智之名立, 登有仁義祀智四開, 福孫落落 如桃仁杏仁, 伏於人心之中者平.”

23) 同上, 2-157, 『論語古今注』 卷1. ”仁義禮智, 円則, 惟其根本在心也, 側隱盜惡之心,發於內而仁義成於外,辭讓是非之心,發於內而祀智成於外,今之儒者, 認之爲仁義體智四甄 在人腹中, 如五麻然, 而四端皆從此出, 則誤矣.”

라고 하였다. 이것은 ‘仁義綜智'를 人性에 내재한 선천적인 本然之性으로서 性의 근원으로 보고 여기에서 발한 현상적인 한 모습이 ‘側隱蓋惡辭誤是非之心'이라고 하는 성리학의 극히 관념적인 非合理的 사고에 대해, 다산은 이와는 정반대로 ‘仁義綜智’는 후천적인 것이며 ‘側隱筋惡辭讓是非之心'이 근원이 되며 이것이 발하여 ‘仁義祿智'가 성립된다고 보는 견해이다. 다시 말해서 朱子를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자들은 ‘仁義綜智’에서 ‘側隱蓋惡辭誤是非之心'이 생긴다고 한 데 대해, 다산은 ‘側隱蓋惡辭誤是非之心'에서 ‘仁義線智’가 생기기 시작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仁之端’의 해석도 전연 다르게 된다. 性理學 쪽에서는 ‘仁'이 밖으로 나타나는 ‘端緖' 즉 실끝으로 본 데 대해 다산은 ‘仁'이 비로소 생기기 시작하는 始初―‘始起'24)로 본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思考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天地方說’에 대해 '地圓地動說'을 주장한 것과 같은 사상의 大轉回라고 할 수 있다. 500년이 넘도록 우리나라와 中國을 지배해 온 中世의 성리학의 권위에 큰 충격을 加한 사고의 一大轉換으로, 그야말로 中世 스콜라哲學에 대한 코페르니쿠스的 轉回가 아닐 수 없다.

사실 다산은 그의 저술 論文인 「地球圓說」과 「地理策」에서도 주장하였거니와 『中』의 ‘振河海而不'를 주석하면서 ‘天圓地方說'의 비과학성을 부정하고 '地圓說'을 주장하였다.25) 경전주석에 ‘地圓說'올 내세운 것은 큰 意義가 있다. 茶山 이전의 실학자인 星湖 李漢(1681-1763) • 混軒 洪大容(1731-1783) • 燕巖 朴止源(1737-1805)

24) 同上, 2-105, 『孟子要義』 卷1. ”端也者, 始也, 物之本末, 謂之兩端, 然猶必以始起者爲端 故, 中曰, 君子之道, 造端平夫婦, 及其至也, 察平天地, 端之爲始, 不親明平.”

25) 同上, 2-86, "中閑義』 卷1. ”單居離問於曾子曰, 政問天圓而地方有諸, 曾子曰, 若天而地方, 是四角之不俺也, 是與周牌之說合矣, 然地之理莊確, 與此章載華級振河海之說, 相爲券契, 地何浮于水哉.”

등이 '地說’을 주장한 것도 놀라운 사실이지만 이 ‘地說’을 경전주석에다가 活用한 것은 더욱 놀라운 創見이 아닐 수 없다.

茶山時代에는 天主敎를 통해 서양의 自然科學이 우리나라에 소개되기는 하였지만 역시 그 수준은 중세적인 것을 넘어서지는 못하였고, 또 이 시대까지는 아직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이 소개되지 않았던 시대인데도 그가 '地說’을 경전주석에서 다루었다는 것은 그의 사고의 과학적 합리성을 평가하기에 충분하다. 茶山의 경전주석에는 여기저기에 이러한 사고의 합리성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 그 하나만을 더 들어 본다면 『孟子』의 ‘萬物皆備於我'장이다. 朱子는 이 章을 해석하여 ‘萬物之理 具於吾身'이라고 한 데 대해 다산은

천지만물의 理는 각각 그 萬物에 있는 것이니, 어찌 다 나에게 구비되어 있겠는가? 개에게는 개의 理가 있고 소에게는 소의 理가 있다. 이것은 내게 없는 것이 분명하니, 어찌 큰 소리로 다 내게 구비되어 있다고 하는가?26)

라고 하여, 朱子의 비합리적인 관념적 해석을 반박하면서 자기의 인식론적 견해를 밝히고 있다. 여기 ‘具於吾身'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女色과 財貨와 安逸을 좋아하면 남도 마찬가지로 여색과 재화와 안일을 좋아하는 그러한 공통된 '耆'가 나에게 갖추어 있다는 말로서, 사람에게는 이러한 好가 있으므로 ‘强怨而行’을 실천해야 한다고 하는 도덕적 실천을 강조한 ‘一忠怨'의 장구라고 보는 것이 다산의 견해이다.27) 그의 경험적이요 합리적인

26) 同上, 2-145, 『孟子栗義』 卷2. "天地萬物之理, 各在萬上, 安皆備於我, 犬有犬之理, 牛有牛之理, 此朋我之所無者, 安强爲大談, 曰於我."

27) 同上, 2-145, 『孟子要義』 卷2. "此, 乃一忠怨之說 我好色, 便知民亦好色, 我好貨 便知民亦好貨, 我好安逸, 知民亦好安逸, (中略) 日用常行萬事萬物

之情之悠, 皆於我.”

사고가 여기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社釋의 實學的인 面

위의 실학과 경학의 관계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다산의 실학과 경학은 표리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그의 경전주석은 一言以之하면 實學的 殷라고 할 수 있다. 반성리학적인 면과 사고의 합리적인 면도 크게는 이 실학적인 전개에 내포된다.

다산은 그의 논문 「俗儒論」에서,

속된 者는 時를 모른다. 어떻게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 (中略) 참된 誌의 학문은 본래 나라를 다스리고 민생을 편안히 하며 外賊을 물리치고 국가재정을 넉넉하게 하며 학문과 군사기술에 능통하여 무엇이든지 감당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 것인데, 어찌 옛 사람의 글귀를 따서 글이나 짓고 벌레나 물고기 따위를 주석하며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예모만 익히는 것이 학문이겠는가? (中略) 뒷세상의 信者들은 聖貿의 본뜻을 모르고 仁義와 理氣이외에는 한 마디 말이라도 입 밖에 내면 이를 雜學이라고 지목하여, 申不와 韓非 같은 자라고 하지 않으면 곧 孫와 吳起 같은 자라고 비난한다. 이 때문에 名만 높아지기를 힘쓰고 道統만 엿보려 하는 자들은 차라리 케케묵은 이론과 고루한 학설을 주장하여 스스로 어리석게 될지언정 이 한계를 한 걸음이라도 넘어서려고 하지 않고 있다. 이리하여 儒者의 道는 다 망하고 당시의 君主들은 날로 偉者를 천대하게 된 것이다.28)

28) 同上, 1-243, 『寺文集』 卷12. 『俗偉論』. ”俗儒不達寺, 何足委任, (中略) 眞之學, 本欲治國安民, 撰夷秋裕財用, 能文能武, 無所不當, 登章摘句, 注蟲釋魚, 衣逢被習拜損而已哉, (中略) 後儒不達聖賢之旨, 凡仁義理氣之外, 一言發口, 則指之謂雜學, 不云申, 便道孫吳, 由是, 務名高規道統者, 寧爲腐論隱說以自愚 不欲踏此幽一步, 於是, 儒之道盡亡, 而時君世主, 日以賤儒者矣."

라고 하여, 眞의 본래적인 학문과 俗儒가 추구하는 학문의 座落된 현실상을 말한 것을 볼 때, 그의 학문의 목적은 ‘沮裕民’을 위한 실용에 있다. 그래서 그는 절박한 현실에 입각하여 학문을 실용적인 면으로 전개시켰으니, 이것이 바로 그의 實學상이다. 그러므로 그의 경전주석도 실학적인 면으로 전개시켜 자신의 創意的인 경전세계를 형성하였다. 그는 『中』의 제 일장에 나오는 ‘致中和 天地位惡 萬物育惡’이라는 구절을 주석하여,

聖人이 한 칸의 방안에 앉아서 喜怒哀樂의 발현이 모두 절도에 맞았다 하더라도, 治者의 지위를 얻지 못하고 政事를 도모해 나가지 않으면, 천지가 반드시 자리잡힐 수 없고, 만물이 반드시 육성될 수 없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君主의 자리를 얻어 堯 • 舜이 되고, 卿朴의 자리를 얻어 虫陶 • 弱 • 后稷 • 契이 된 뒤에라야 南正인 重에게 天文을 맡게 하고, 北正인 黎에게 땅을 맡게 하고, • 에게 曆象을 맡게 하고, 禹 • 稷에게 水土롤 다스리게 하고, 益에게 불을 맡겨 及官이 되게 함으로써 山澤을 불살라 태워서 산천의 초목과 寫獸를 사람들에게 利롭게 한다. 이렇게 된 뒤에라야 천지가 자리잡히고 만물이 육성된다.29)

라고 하였다. 이것은 다산이 경전주석을 실학적인 면으로 전개시킨 것의 대표적인 一例라고 할 수 있다. 朱子는 이 대목을 해석하여, 천지만물은 본래 나와 일체인 것이다. 내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고, 내 氣가 순하면 天地의 氣도 순할 것이다. 그

29) 同上, 2-65, 『中講義』 卷1. ”聖人坐於丈室之中, 喜怒哀樂發皆亂 而不其位, 無獄爲 則天地必不得位 萬物必不育必也, 人主之位, 爲堯舜, 卿相之位, 爲血陶俊稷契 然後南正預司天, 北正黎司地, 淡和倭象, 禹稷治水土, 使益火作裏 烈山澤而禁之, 以若予上下草木鳥獸, 然後天地位焉, 萬物育焉.”

러므로 그 효험이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른다.30)

라고 하여, 성리학으로 규범화하고 이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天人合一論을 도출한 中世哲學의 관념적인 해석과 대비해 볼 때 너무나도 거리가 있다. 다산은 原初儒敎인 孔孟儒學에 그 권위를 빌려 성리학적 주석을 반박하였으나, 그러나 이것은 그 목적이 孔孟儒學에로의 복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中世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孔 • 孟에 의지하여 자신의 創意的인 실학적 세개관을 전개시키는 데 있다. 그는 통치자가 자신의 수양완성을 토대로 하여 이 토대 위에서 국가행정을 경영함에 있어, 人材룰 능력별로 적재적소에 기용하여 天文 • 地理 • 學을 비롯해 治水 • 治土 • 山林川澤 • 章木 • 危獸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이에 대한 기구를 설치하고 관리하여 정치의 목표인 富國裕民이 실현되었을 때 오는 그 효험이 바로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이라고 보았다.

그는 또 그의 경전 주석서 중에 가장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論語古今注』에서 그 성격을 더욱 뚜렷이 하였다. 다산은 『論語』를 다른 어떤 경전보다도 정치사상적으로 실학적인 면에서 주석하였다.

『論語』 「先進』 의

魯人爲長 閔子商曰 切舊貫如之何 何必改作

이라는 글에 대해, 다산은 ‘長府’가 정부의 財라면 재고가 허물어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그것을 改作해서는 안 될 것이겠는가? 이 글은 그런 경우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고 보고 전연 새로운 각도에서 주석하여,

30) 『中沼句』, 首章注 "天地萬物, 本吾一體, 吾之心正, 則天地之心亦正矣, 吾之氣順, 則天地之氣亦順矣, 故其效驗, 至於如此.”

‘長府’라는 것은 錢名이요, ‘'은 串錢을 말한다. ‘花負'은 新錢이 舊錢보다 크고 무거우나 백성에게 賊敵할 경우에는 荀錢과 같은 貝數로 함을 이름이요, ‘如之’는 우려하는 말이다. 錢을 새로 고쳐 만들 당초에는 백성들이 모두 이것을 편리하리라고 생각하지만 子은 이미 이룰 우려하여, 지금은 錢의 무게를 가산해서 그 競의 數룰 줄일 것이나 후일 반드시 대로 그 貫數롤 같이할 것이다. 백성은 이렇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하겠는가?31)

라고 하였다. 이것은 朱子의 해석과는 전연 다르다. 다산의 이러한 주석은 『論語』의 原意와는 좀 거리가 있다고 하겠다. 孔子 당시는 이미 書銅器時代가 지나고 初期 鐵器時代로 이행된 시가이기는 하지만 行의 貨幣經濟가 성장하고 있었는지 당시 실정에는 의문이 갈 뿐만 아니라 이 주석에서 보면 다산의 경전주석은 ‘洙四’에로의 回阮는 아니다. 그는 『論語』의 이 글에서 자기 나름으로 創意的으로 해석하여 봉건적 中世社會의 붕괴기에 처한 18세기 이후 우리나라의 사회적 모순과 화폐경제 대두의 社會相을 강하게 반영한 것이 엿보이는 실학적 해석이다. 이러한 類例는 『中』의 ‘來百工'울 주석한 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百工울 오게 한다는 것은 技術이 정교한 이를 간택하여 그들에게 대우롤 잘하면 사방의 機巧한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 와 百工의 居所에 있기를 원하는 것을 이름이다. 器가 편리하면 힘을 적게 들이고도 곡식이 많고, 織器가 편리하면 힘을 적게 둘이고도 布用이 족하고, 舟車의 제도가 편리하면 힘을 적게 들이고

31) 『全書』, 2-256, 『古今注』 卷5. ”長府錢名, 串錢曰, , 謂iIi政於舊錢 而其所以賊於民者, 同舊錢之數也, 如之何者, 盧患之辭, 方其改鑄之初, 民皆便之, ,子商及曰, 今難增其重, 而減其, 他日必將, 民將如之何."

도 먼 데 물건이 막히지 않고 잘 유통될 것이다. 무거운 것을 끌어올리고 들고 하는 法이 편리하면 힘을 적게 들이고도 도랑과 堤防이 견고해지니, 이것이 百工을 오게 하면 財用이 족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풍속에 匠人과 鐵工들로서 나무와 쇠를 다루는 법을 조금 아는 자가 官聽役에 고용되면 품삯은 주지 않고 매질만 자주 하기 때문에 팔을 자르고 손가락을 끊어 그 자식에게 경계하여 못하게 하니 다시 百工이 있겠는가? 殷器 • 織器 • 舟車 둥은 오히려 오랜 옛날의 를 그대로 지니고 있고 田野는 날로 황폐해지며 財은 날로 위축되어 한 번 水災와 早災를 만나면 하늘만 원망할 뿐이니, 백성은 수척하고 나라는 가난하여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모두 『中』의 뜻을 아는 것이 분명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다.32)

이것은 茶山 당시의 우리나라의 기술적 후진과 절박한 사회적 모순을 토대로 하여 ‘來百工’을 현실과 관련해서 실학적으로 주석한 것으로, 마치 그의 「技藝論」을 축소하여 여기에다 옮겨 놓은 듯하다.

다산經學의 실학적인 면을 언급함에 있어, 여기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그의 考證學的 태도이다. 그는 경전내용의 眞僞와 자구의 의미분석을 경전주석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는데, 그것은 반드시 實事求是의 정신에 입각하여 하나하나 고증해 나가는 태도를 취하였다. 다산의 경전주석서 속에 '考誤' • ‘考異' • ‘考證 ‘考汀 ‘考辨'이라

32) 同上, 2-80, 『中講義』 卷1. ”來百工者, 謂簡其精巧者, 增其條峯 則四方機巧之人, 聞風來集 願居百工之也, 災器便利, 則用力少而穀栗多, 織器便利, 則用力少而布用足, 舟車之制便利, 則用力少而遠物不淸, 引頂遠之法便利, 則用力少而溝渠堤防堅 此所以來百工則財用足也, 我邦之谷, 粹匠鐵治, 租知斯殿之法者, 官長役使之, 屈不, 而額駐數及, 故斷腕裂指, 戒其子孫, 而復有百工者平, 亞器織器舟車之等, 猶守燈人之術制, 田野日荒, 財用日縮, 一遇水早, 怨天而已, 民威國食 無可奈何, 皆坐中之義認不淸楚也.”

고 표시되어 있는 것은 모두 그의 經典 연구방법에 있어서 고증적인 학문태도의 한 斷而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러한 고증적 태도는 字義를 밝히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독서하는 방법은 반드시 먼저 訥을 밝혀야 한다. 古이라는 것은 글자의 뜻이다. 글자의 뜻이 통한 후에 구절을 이해할 수 있으며, 구절의 뜻이 통한 후에 문장을 분석할 수 있고, 문장의 뜻이 통한 후에 그 篇의 大義가 나타난다. 내가 우선적으로 話에 치력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후세에 經典을 이야기하는 선비들은 글자의 뜻이 완전히 통하지 않았음에도 논쟁을 먼저 제기하고, 미묘한 말만 더욱 장황하게 늘어놓아 聖의 본뜻이 더욱 희미해져 아주 작은 차이도 燕나라와 越나라의 사이처럼 심해지고 마니, 이는 經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큰 방해물이다.33)

여기 話은 다산에 있어서는 考證을 통한 話이다. 이와 같이 경전의 眞意를 파악하기 위한 자구의 話은 바로 그의 고증적인 학문태도이며, 이러한 경전 연구방법을 통해 그는 재래에 많은 의문을 재기해 왔던 현행 『尙書』 58편에 대한 眞僞문제를 세밀하게 분석검토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今文'에 없고 ‘古文’에만 있는 25편은 위고문으로 東晉의 梅衍의 僞作임을 밝히는 『梅氏書平』 전9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이 『梅氏書平』은 조선 후기 質學派 經學의 한 寶典을 점하였다. 이렇게 경전의 眞僞문제와 字義分析에 있어, 고증적인 학문태도는 시종일관 實事求是의 정신에 입각하여 고증을 위한 고증의 流那룰 국복하고 經學의 실학적 세계관을 형

33) 同上, 2-481, 「尙古序」. "之法, 必先緯, 益者, 字義也, 字義通而后句可解, 句義通而后章可析, 印義通而后篇之大義斯見, 余所以先致力於話者, 此也, 後世談經之士, 字義未了, 議論先起, 微危長, 聖旨彌目, 際低差 燕越遂分, 此經術之大也.”

성한 것이 茶山經學의 특징이다.

5. 맺음말

근세 초 西歌의 계몽주의자들이 中世의 스콜라哲學을 부정하기 위해 고대 希臘 사상을 부르짖은 것과 같이 다산도 동양 중세의 思辨的인 성리학의 관념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原初儒學인 孔孟儒學을 내세웠다. 朱子를 비롯한 성리학자들의 경전해석에 대해, ”洙의 가 아니다(非洙酒之初)"든가 ”洙泡의 論과는 어긋난다(具與洙酒之論 或相祗梧)"든가 ”古經에 는 전연 이런 말이 없다(在古經絶無此語)"든가 하는 말을 경전의 주석서에 여기저기 많이 언급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洙酒學에로의 回面로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주자학을 표면에 내세워 권력유지의 도구로 하고 있던 당시 사회에서 ‘斯文亂賊'의 鐵桃를 맞지 않기 위해서는 孔 • 孟의 권위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원초적인 孔孟儒學이 실천적인 행동주의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에 ‘洙酒學'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경전주석의 모든 저술을 볼 때, 그는 孔 • 孟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創意的인 경전세계, 즉 經學의 실학적 세계관을 형성하여 그의 實學의 토대를 삼았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經學觀은 그의 실학과 함께 우리나라 근대화의 내재적 발전에 一冀을 담당한 것이 사실이다.

서구에서도 근대시민사회의 자유주의사상이 발전해 나간 것은 聖經에 대한 中世의 절대적 권위를 탈피하여 이것을 새로운 시각에서 과감히 해석한 것이 그 발전에 크게 작용한 것과 같이 다산이 儒敎經典을 실학적인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한 것은 조선 후기

사회발전에 있어서 그 意義가 크다고 하겠다. 孔 • 孟에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사상적 발전에로의 전진에 고민하면서 經學을 연구한 것이 茶山經學이 아닌가 생각된다.

茶山 丁若鏞의 井田制論

鄭允炯

1. 머리말

茶山 丁若鏞은 조선 봉건사회 해체기를 대표하는 사상가이다. 그는 전통적 가치를 존중하는 양반계급 출신의 지식인으로서 한 때는 관직에 나아가 왕의 총애를 받으며 정치 개혁에 헌신하였으며, 관에서 밀려나 오랜 기간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저술 속에 사회적 현실 개혁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일생동안 실로 놀라울 만한 양의 저술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는 당대의 정치, 경제, 군사,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다양한 개혁 구상들이 들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田制나 井田制로 대표되는 토지 개혁 사상은 당대의 통념을 크게 뛰어넘는 것이었다.

다산의 사회경제 사상은 1930년대에 이미 한 선구적 실학 연구자에 의해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의 맹아형태’로 성격지워진 바 있다.2) 다산을 진보적 사상가로 보는 이러한 문제의식은 실학연구가 본궤도에 오른 1960년대에까지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것은 1962년

1) 이 연구는 1992년도 홍익대학교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해 이루어졌음.

2) 白南雲, 『丁若鏞의 思想』, 《東亞日報), 1935.7.14. 『茶山先牛避世百年紀念』報道, 《茶山學》, 第2輯 附錄 211쪽.

다산탄생 200주기를 기념하기 위한 북한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모은 『정다산 연구』3)에 典型的으로 나타난다. 이 논문집의 필자들은 「田論」, 「湯論」, 「監司論」, 「原牧」 등에 들어 있는 진보적 내용에 주목하였는데, 예컨대 金洗鎖은 특히 다산의 閣田論이 갖는 혁명적 성격을 부각시켰다 .4) 이런 생각은 그 뒤 남한에서도 金容斐, 李佑成, 成大慶, 姜萬吉, 愼負, 鄭奭種 등 많은 다산연구자들에 의해 공유되었다.

1960년대에 납북한의 학계에서는 다산사상의 중요성이 인식되면 서 그의 사회경제사상 전반에 걸쳐 그러한 문제의식이 지배적인 흐름을 형성해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5)

3) 과학원 철학연구소(평양) 편, 『정다산연구』 한마당에서 복제한 북한연구총서 11, 1989.

4) 김광진은 다산의 개혁안을 '농민들의 혁명적 지향을 뚜렷하게 반영한 사상’이라고 규정하였다. 『다산 정약용의 사회경제사상』 1965, 위의 『정다산연구』 83쪽 참조.

5)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김광진 둥이 다산사상의 진보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의 가장 진보적 견해를 담은 여전론 둥의 저작을 다산의 『經世遺表』 『牧民心書』, 『欽欽新書』 둥 이른 바 政法3集보다 뒤늦게 쓰여진 것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판단은 다산이 유배 생활을 통하여 더욱 진보적 사상가로 변모하였다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그 뒤 남한에서는 『田論』의 초기 저작설이 널리 유포되면서(김용섭 교수 등의 1799년 著作說 및 정석종 교수의 1804년 저작설. 김석형은, 비록 그 근거자료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1962년의 연구에서 전론을 유배 초기의 저작으로 보았다), 후기 저작설은 사실상 패기되기에 이르렀다. 필자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산이 처했던 시대적 상황과 관련된 관심의 추이나 저술 순서로 미루어 볼 때, 사환기 말 또는 유배 초기, 늦게 잡아도 정법3집 이전의 저술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어떻든 이런 사실들로 인해 論의 후기 저작설에 근거한 해석도 얼마간 손상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다산의 사회경제 사상이 진보적이라면, 그것은 그의 개혁안을 최종적으로 집대성한 『경세유표』에서 추출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여전론의 의의나 평가도 경세유표의 정전제론과의 관련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1960년대에 남북한의 학계에서는, 다산사상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그의 사상 전반에 걸친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田制改革에 관한 많은 연구가 축적되었으며, 특히 정전제론에 관한 연구성과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정전제론에 관한 연구에서는 개혁 이론의 이해, 성격규정 및 평가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들이 야기되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다산의 토지개혁론에 관한 저술이 비교적 많을 뿐만 아니라 얼핏보아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다양한 논의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논란의 밑바닥에는 연구자들의 시각의 차이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여전제론과 정전제론이라는 두 가지 개혁론 사이에 개재하는 모순은 해석상의 차이와 논쟁의 원천이 되기에 충분했다. 현실적 여건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은 이상적 제도로서의 여전제론과 현실적 제약들을 고려한 정전제론 사이의 괴리를 합리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이는 것은 불가피했다. 이런 문제들을 둘러싼 논의의 과정에서, 다산사상의 다양한 측면들에 주목하게 되고 이에 따라 다산사상의 진보적 측면만 강조하던 경향을 벗어나면서 그것을 새롭게 평가하려는 시도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새로운 茶山이 형성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다산에 관한 기왕의 연구 경향에 대한 반론은 1970년대부터 이미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다산이 가진 봉건적 한계를 명백하게 제시한 학자로서는 먼저 북한의 정성철을 들 수 있다. 1974년에 발행된 저술6)에서 그는 다산사상의 혁명적 또는 진보적 성격을 분명한 어조로 문제 삼았다.

다산사상의 역사적 진보성을 부정하거나 완화하려고 하는 시도

6) 정성철, 『실학파의 철학사상과 사회경재적 견해』, 한마당 출판사의 복제판(북한연구자료선 12) 1989, 472쪽.

는 남한에서도 간헐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실학의 원천을 율곡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으려고 한 韓祐勅 교수의 시도나, 실학을 정통 유학의 계승 또는 그 발전된 형태로 파악해야 한다는 최근의 논의들이 그것인데, 어떤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든 그것들은 결과적으로 실학 또는 다산의 역사적 진보성을 부정하거나 완화하는 논의로 귀결된다.

茶山에 새로운 성격을 부여하려는 이러한 시도들은 그동안 축적되어 온 연구의 구체적 성과라는 측면이 존재한다. 조선 사회의 停瀋性을 암암리에 강조해 온 식민지 사학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문제의식이 강하게 대두된 60년대의 분위기는 연구자들로 하여금 실학사상의 진보성을 일면적으로 강조하게 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필요에 쫓긴 초기의 연구 결과들이 그 실증적 연구가 축적됨에 따라 결함들을 여저저기서 드러내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문제제기들은 본질적으로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나타나고 있는 신보수주의의 흐름, 국내 진보적 사회운동 및 사회과학의 쇠퇴와 궤도를 같이하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다산 연구와 관련된 최근의 문제 제기들을 염두에 두면서 다산의 사회경제사상의 중심적 위치에 있는 井田制論을 검토할 것이다. 또 하나의 토지개혁론으로 이야기되는 閣田論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며, 여기서는 정전제론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발전 과정을 추적하는 가운데 정전제론과 관련되는 한에서 간단히 언급하려고 한다.

2. 茶山 土地改革思想의 發展

어느 경우에나 들어맞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다산의 정전제론에

관한 논의에서도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본적 개념 또는 범주들에 관한 정의를 내려 둘 필요가 있다. 우선 정전제의 개념부터가 문제인데, 우리는 그것이 함축하는 내용이 너무 포괄적이라는 데 착안하게 된다. 최근 다산의 정전제론 연구에서는 그의 정전제의 범위를 축소하여 井助法, 또는 九一稅制로 환원해 버리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범주 또는 개념을 규정해 둘 필요가 있다.

다 알다시피, 井田制란 중국 고대사회에서 실시되었다고 하는 이상적 토지제도이다. 그리고 그것은 흔히 王道政治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라고 알려져 왔다. 원리적으로는 일정한 면적의 정방형 토지(9百敵)를 井으로 9등분하여, 그 중 중앙에 있는 한 구역을 公田으로 삼고 주변 8구역을 8夫의 농민에게 私田으로 나누어 주는데, 사전에서는 8夫의 농민이 각자 농사지어 생활하고, 공전에서는 8夫가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울 官에 바치게 한다. 그러므로 정전제의 범주 속에는 기본적으로 (1) 농경지를 구획하는 경지정리(經界) 및 그것을 기초로 한 국토계획 또는 행정구역의 설정 (2) 농지의 소유 및 농업경영의 방식(노동력의 동원과 배분) (3) 위의 경지 구획 및 토지소유제도에 기초한 조세제도 또는 수취체계 등이 포함된다. 그런데 다산은 때로는 그 의연을 확장하여 정전제에 기초한 군사제도를 정전제라고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인민을 가르치는 것이 정전제의 목적이 교육에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경우 물론 군사제도나 정전제의 관련제도이며 인민의 교육은 그것을 통해서 추구하는 목적의 하나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든 다산이 「정전론」이나 r정전의」에서 실제로 다루는 범위는 매우 넓어서 국가 및 사회체제 전반에 걸친다.

이처럼 다산의 정전제 개념은 1) 농경지 정리 및 관개사업(생산력) 2) 토지소유와 노동 및 경영조직(생산관계) 3) 전세제도 둥 국

가의 수취방식(上部構造) 등을 포괄한다. 농업생산을 둘러싼 사회경제적 제도를 총체적으로 정전제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 중에서도 핵심적인 부분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토지소유와 노동조직 및 경영방식 등을 규정하는 두번째 요소이며 그 본질적 내용은 생산관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학계에서는 이를 이제까지 흔히 농지제도 및 농업 경영 형태라는 개념으로 파악해 왔다.

「策」에서 농업문제 전반에 관심을 최초로 표명한 이래 다산은 여러 저작에서 토지개혁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견해를 표명하였다. 그의 토지개혁 사상을 담고 있는 주요 저술은 다음과 같다. 이제이 저술들을 중심으로, 우선 정전제론이 어떻게 형성, 발전되어 왔는가를 검토할 것이다.7)

7) 여기서 인용되는 텍스트는 金誠鎭 編, 鄭寅 • 安在鴻 校關 『與猶堂全書』 新朝鮮社(1934-38)본이다. 인용 쪽수는 예컨대 『與猶堂全書』 第五 政法染『經世遺表』 卷1 十五帳 앞(뒷)쪽을 經世迫表 卷1-15a(b)로 표현하는 방식을 취한다. 한글 번역이 있는 경우는 연구 편의를 위해 역서의 쪽수를 괄호 안에 부기하되, 그 번역 서명은 뒤 참고 문헌에 일괄 표시한다. 번역문은 번역서가 있는 경우 가능한 한, 그것을 참조하였으나 필요한 경우에는 필자가 적절히 가필 수정하였다.

1) 策(1790) 『與猶堂全書』, 第1渠 第9卷 詩文集 策問

2) 西巖講學記(1795) 同全書, 第1渠 第21卷 詩文集 附雜邸渠

3) 應旨論災政陳(1798) 同全書, 第1渠 第9卷 詩文集

4) 田論(1799) 同全書, 第1渠 第11卷 詩文集 論

5) 孟子要義(1814) 同全書 第2渠 經渠 其三

6) 經世迫表(1817) 同全書 第5染 政法集

7) 牧民心書(1818) 同全書, 第5渠 政法集

1) 仕官期의 토지개혁 사상

다산은 1789년에 浮製에 합격하여 1700년에 예문관 검열로 첫 관

직에 올랐으며 1799년 정조가 사망할 때까지, 결코 편했다고만은 할 수 없으나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로서 관리 생활을 하였다. 「災策」으로부터 「田論」까지의 저작은 대체로 이 시기에 쓰여진, 말하자면 사환기의 저작이다. 「농책」부터 「전론」까지의 이들 저작은 우선, 체계적으로 토지 개혁안을 연구한 결과라기 보다는, 관리 생활을 하는 가운데 보고 느낀 것들을 그때그때 정리해 두거나, 왕에게 보고할 일시적 필요에서 농업 및 토지에 관련된 문제들을 단편적으로 검토한 것들이다.

農策

「농책」은 농민을 잘살게 하고 나라의 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한 농업부흥책을 제시한 글이다. 왕에게 바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글에서 다산은 우선 토지겸병과 관리들의 수탈, 잘못된 정책 때문에 겪는 농민의 괴로움을 지적하면서 농민을 우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형적 중농주의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주로 문제삼는 것은 농업생산의 증대방안이다. 그는 농지개간, 파종법의 개선, 잠업, 우량종자의 선택 둥 농업생산력을 기술적으로 높이는 방안들을 제시하는 데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물론 그는 菌江各의 限田論, 張橫渠의 井牧, 그리고 慮渠의 水田, 貞明의 路水 등 전제와 관련된 논의들을 거론하고는 있으나, 그것들을 가능한 田制改革 방안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두 군데서 정전제에 대해 의미 있는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무릇 백성의 근본을 세우는 일은 오직 均田이라는 두 글자에 있습니다. 아아, 井地룰 마련하여 농사일을 돕게 하는 법은 비록 지금 세상에 거론할 수는 없으나, 밭두둑 모양에 따라 기름지고 메마른 地品을 요량하여 농지의 많고 적음을 제한하며, 부유하고 빈

한한 것을 균평하게 하는 것은 오직 손에 版圖를 쥐고 잠자코 神機를 옮기는 바에 달려 있습니다."8) 이것은 다산이 정전의 개념을 아직 막연하나마 농민들의 麻 또는 산업을 평등하게 하는 것, 이른바 均産論的 관점에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또한 정전 설치의 목적이 "농가에서 사람의 힘을 단속하는 것"9)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정전제의 목적의 하나가 노동력의 합리적 이용에 있다는 생각 죽 治田論的 관점이 자리잡고 있다.

다산은 또한 전제와 밀접하게 관련되는 전세제도를 검토하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 형성될 전제 개혁론의 향방을 짐작케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는 토지에 대한 과세방식으로써 助法과 徹法의 장단점을 대비하였다. 그는 "(백성의) 힘을 빌어 公을 돕는 것(昔力助公)”이 조법이고, "힘을 합쳐서 수입을 가르는 것(通力分收)"10)이 철법이라고 하는 해석과 함께 이 두 가지 세법 중에서 전자가 옳다는 孟子의 견해에 동조한다. ‘昔力助公’이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정전제에서 여덟 구역의 농민들이 한 구역의 공전을 함께 농사지어 그 수확을 公家에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전세제도의 형태로 잠재해 있던 정전제론의 맹아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그는 이 단계에서는 전세개혁 또는 토지개혁의 필요성을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한 명확한 의견을 표명하지 않은 채, 농업생산력의 향상을 위한 농정의 개혁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8) 羽, 『與猶堂全書』 詩文集 I集-9卷-16, 李冀成 譯 『茶山論淡』이하 『논총』 이라 약함)1972, 183쪽.

9) 策 I渠-9卷-10(『논총』 162).

10) 策 I渠-9卷-12(『논총』 168).

西巖講學記

「策」보다 5년 뒤에 씌어진 「西巖講學記』(1795)에서는 정전제에 관한 孟子의 견해를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그는 맹자가 ‘野에 九一, 國中에 仕一'이라고 말한 것이 단순한 田稅率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소유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九一1十 一은 역시 地勢를 따라 말하는 것이며 穀眼의 많고 적은 숫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九一一 亦從地勢而言 非穀之多之數也)."11) 여기서 九一制가 실시된 野는 鄕外로서 王都 밖 封疆까지의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는 정전제를 실시하여 "1井 91嘉를 만들어 8家에서 助耕하도록 하여 해마다 공전의 수확을 거두어 들였다”. 그런데 그는 “九一은 井을 아홉으로 나누어 그 하나를 취하는 것이고, 一은 ii仇를 열로 나누어 그 하나를 취하는 것이다(九一者 九分井而取其一也 一者 十分敵而取其一也)"12)라고 말하고, 公田 안에 殿舍가 있기 때문에 九分에서 하나를 취하는 것이나 十分敵에서 하나를 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였다.13) 여기서 구분정, 십분묘가 모두 토지구획과 관련된 것임은 틀림이 없지만 십분묘에 공전이 있다는 암시는 어디에도 없다. 그는 은나라와 주나라에서 각각 70묘, 100묘의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고 각각 그 10분의 1의 수확을 賊稅로 내게 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전을 두는 농지제도로서의 井田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의 생각은 평양 왕궁좌우의 토지에 대해서 “一 自하였으며 井地룰 구획하지 않았다"14)라고 말 가운데서도 반영된다. 따라서 여기서 ‘地勢룰 말하는

11) 西巖講學記, 『與猶堂全書』, ,寺文染 書 I渠-21卷-30.

12) 西巖講學記, II-21卷-31.

13) 鄭玄 둥에 의해 널리 보급된 바, 公田에 麻舍가 있다는 견해는 『迫表』에서 비로소 극복된다.

14) 西巖講學記, II-21卷-31.

것’이라고 한 말은 주로 정전구획과 관련된 것이다.

應旨論農政疏

「悲旨論災政疏」(1798)는 다산이 실제로 제안한 최초의 사회 개혁안이라고 할 수 있는 글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농업진홍 정책이념을 광범위하게 제시하였다. 물론 정전제에도 언급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遠上이나 군역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자신의 지방관으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구체적 개혁안들을 제시한데 반하여, 정작 농업문제의 핵심인 농지제도에 대해서는 분명한 견해를 밝히지 않았다. 「西巖講學記」의 정전제 검토를 감안하면 그것은 이상스럽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옛날에 장횡거는 정전제도를 시행할 만하다 하였고, 주자는 만약 시행하고자 하면 모름지기 기회가 있는데 태평한 세상에는 시행하기가 진실로 어렵다."15)

정전제를 시행할 수 있다는 장횡거의 주장과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朱子의 견해 중 다산이 어느 편을 지지하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논의를 더 이상 진행시키지 않은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그는 이른바걸주자의 井田制可論16)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이때까지의 정전제에 관한 그의 관심은 경전연구의 단순한 부산물이거나 우연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따라서 정전론이 사회 개혁론의 영역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15) 應旨論災政疏 『與猶堂全書』, 詩文渠 I集-9卷-54(『논총』 245).

16) 金容, 『朝鮮後期 土地改革의 推移』, 《東方學志》 62, 1989.6, 58쪽 참조.

田論

혼히 여전론이라고 불리는 「田論」(1799)에서는 토지겸병에 의한 토지소유의 불균등을 중요 사회문제로 제기하고 그것에 대한 구체적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우선 ‘災者得田'의 원칙에 입각한 전제개혁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대략 우리나라 농지면적을 60만 결, 인구를 800만 명으로 계산하고, 10명 단위의 1호에 농지 1결을 분배해야만 "인민의 생업이 고르게 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정전제나 균전제 또는 한전제는 모두가 이 균산을 위한 것이면서도, 기술적 또는 물리적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에 시행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다산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다른 방법 죽 농지의 구획이나 토지소유의 규제에 집착했던 기존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찾았는데 그것이 田制이다. 여전제는 ‘농자득전’의 원칙을 관철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이었다.

"지금 농사짓는 사람은 농지를 갖도록 하고 농사짓지 않는 사람은 농지를 가지지 못하도록 하려면 여전하는 방법을 시행해야만 나의 뜻을 이룰 수가 있다"17)

여전제에서는 일정한 지역에 경계를 긋고, 그 안에 대체로 30호 단위의 사람들이 모여 를 이루어 살면서 농사짓는데 구성원들의 투입 노동량을 기록해서 그것을 분배의 기준으로 삼는다. 閣長 지휘하에 모든 여 구성원이 전 농지를 공동으로 경작하는데, 수확은 公家의 稅를 바치고 여장의 녹봉을 제한 뒤, 구성원들에게 노동 투입량에 비례하여 각 농가에 분배한다. 경작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지주나 상인 등은 물론 분배에 참여할 수 없다. 이것은 竝作 즉 地主戶制를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농지의 공동 소유(社會的 所有)와 공동 노동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협동 농장’ 또는 ‘집단 농장’18)과 유사하다.

17) 田論三, 『與猶堂全書』 詩文集, l-l1卷-4(『논총』 19).

공동 노동에 기초하여 균등 분배하는 여전제 구상은 비록 참신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다산의 천재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런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원리는 이미 잘 알려진 경전 해석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법의 해석과 관련하여, 毛奇麻이 朱子에게서 인용했다고 한 구절에는 "경작할 때는 힘을 합쳐 함께 농사짓고, 수확할 때는 敵를 계산해서 균등하게 나눈다"(耕則通力合作 收貝幻均分)고 한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여전제와 완전히 합치한다. 다산이 이 구절을 처음 인용한 것은 『맹자요의』에서 처음이지만, 그것은 이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19) 그러므로 여전제의 모델 자체는 기발한 것이라고 할 수 없을런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가능한 토지제도 또는 사회구성 원리로 재구성해냈다는 데 다산의 천재성이 있다. 여전제는 농민을 단순한 통치대상으로 삼는 전통적 사고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며, 농민의 자치역량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 비로소 나올 수 있는 구상이다. 이 점이야말로 사회적 位階를 불변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봉건적 思考의 틀을 벗어나는 하나의 뚜렷한 조짐이라고 생각된다.20) 그런 의미에서도, 여전론이 「」 이후의 사상적 추이에서 ‘돌출된 부분'21)이라고 한 지적은 타당하다.

18) 愼鏞廈 교수는 여전제를 協同戱場 (『다산학의 탐구』), 金容 교수는 渠團農場的 大農을 指向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19) 『與猶堂全』 第-第5卷, 經集 其三, 『孟子要義』 卷1-40, 李策衡 譯社, 『茶山孟子要義』(이하 『요의』라고 약함) 153쪽. 다산 자신은 『맹자요의』에서 비로소 이 문장을 인용하였지만, 그가 익히 알고 있었던 柳磐遠의 『番溪隨錄』에는 이미 '徹是 八家皆通力合作九百敵田 收計敵均分 民其九 公取其一'이라는 구절이 주자의 말로 인용되고 있다. (『番溪隨錄』 卷5-34) 10분의 1세를 규정한 뒷부분을 때어내고 앞부분만 보면 철법은 공동노동=균등분배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20) 鄭允炯 『茶山財政改革論』, 『茶山』의 探究 民音社 1990.1, 316쪽.

21) 李榮, 『丁若鏞의 井田制論의 構造와 歷史的 意義』, 第4回 東洋學 國際學

術會議 論文, 成大 大東文化硏究院, 1991.1, 참조.

여전론은 정전제, 균전제, 한선제 어느 것도 현실적 개혁안으로서 도입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나온 대안이다. 정전제, 균전제, 한전제를 부정한 점에서는 앞서 검토한 논저들에서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균전제와 한전제에 대해서는 이 논고에서 특히 강조하게 된 ‘농자득전’의 원칙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그 실질적 규제가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고 있으며, 토지의 균평한 분배(즉 均産)를 지향하는 정전제 역시 수시로 변동하는 인구 때문에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그 실시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22)

者得田의 원칙에 기초한 한전제 및 균전제의 비판은 확실히 이 시기 다산의 전제개혁에 관한 생각에 한 단계 진전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여기서 제시한 여전제의 구상은 그 이념 자체로는 매우 혁신적인 것이면서도 그 실현방안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현실적 정책대안으로 제시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아직은 관념적 또는 공상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론의 원리들은 다음의 사상 형성에 일정하게 작용한다. 여전론 논의에 담겨 있는 사상의 단편들은 앞으로 나타날 정전제론의 기초가 되며 또한 그 성격을 규정하게 된다.24)

22) 田論2, 與猶堂全書 詩文集 論 -1卷-11(『논총』 17).

23) 필자는 다산이 그것을 실시가능한 현실적 대안으로 고려했을지 의문이라는 점만을 지적해 둔다.

24) 죽 여전론에서 전면에 부각된 농자득전의 원리는 정전제의 구상에 그대로 계승되며, 공동 노동의 원리도 비록 『경세유표』에 명시적으로 설명되지는 않았지만 公田 경작에 환용될 수 있는 방식이다. 또한 실제로 井田議의 공전 경작방식에 관한 서술에서는 여전론의 잔영이 느껴진다. 여전제 자체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며 여기서는 정전론의 형성, 발전이라는 맥락에서 간단히 언급하는데 그친다.

2) 『孟子要義』에서의 井田觀

다산의 저술을 검토해 보면, 그는 유배생활을 시작한 1800년 이후에, 특히 유배 초기에는 천주교와의 관련으로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는 처지에 있어서안지 주로 粉 및 周易 동 현실 개혁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문제에 몰두하였다. 예에 관한 관심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經傳 연구도 『주역』에서 『詩經』으로 그 폭을 넓혀 갔다. 그렇지만, 1811년의 『我邦疆域考』에 이어 1812년에 『民堡議』를 저술한 것을 보면 이때를 고비로 관심의 초점이 현실개혁 쪽으로 점차 옮아가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민보의』의 저술이 보여주듯이, 홍경래난의 발발은 그의 관심을 현실 문제로 돌려놓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기사(1809)년과 갑술(1814)년의 대흉작이 그의 현실 인식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을 것임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25)

25) 그는 1800년과 1814년의 흉년에 그가 본 농촌의 참상을 『經世迫表』와 『牧民心書』에서 거듭 언급한 바 있다. 또 1800년에는 金候에게 보낸 편지에서 호남지방의 위기상황과 관련, '걱정스러운 것은 백성의 동요와 아전들의 탐학’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與猶堂全書』, 詩文渠, 書 與金公候, I渠-19卷-15.

그런데 이 시기에 그가 經{硏l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시작하고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주역』에서 『시경』으로 눈을 돌린 그는 다시 1813년에 『論語古今証』를 저술하였고, 이어 1814년에는 『孟子要義』 및 『大學公義』 둥을 내놓았다. 이때의 경전 연구는 곧바로 『경세유표』의 저술로 이어진다.

『맹자요의』에서 다산은 정전제를 재검토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다산은 지난 날 정전제를 실시할 수 없는 것으로 믿고 있었으며, 『맹자』를 검토하면서도 이 생각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정전은 지금 행할 수 없다. 다만 균전의 법은 임금이 결단하여 행한다면 시행할 수 있울 것이다(井田今不可行 惟均

田之法 在上者斷而行之 斯可爲矣)26)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는 오히려 정전제보다는 균전제에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7)

그러나 『요의』에서는 비록 명시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정전제에 대한 합리적 해석을 통해서 왜곡되고 폐기되었던 정전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원해 내려고 했던 다산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는 우선 정전제도가 은나라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자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것이 2帝 3王의 시대에 일관되게 지속되어 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28) 토지를 구획하여 정전을 만드는 일이 한 두 세대에 이룩될 수는 없으며, 따라서 皇帝 神씨 이래로 토지를 구획하여 정전을 만드는 일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는 것이 다산의 생각이다. 은나라와 주나라에서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정비한 데 불과하다. 여기서도 우리는 그가 정전제를 매우 폭 넓은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는 箕子가 말하는 洪範九도 정전 구획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론하였다. 하나라 때에 이미 정전제가 시작되었으며, 당연히 公田도 있었다고 판단하였다. 정전론의 명분과 그 당위성을 훨씬 강화하는 이러한 견해는 정전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 위에서 비로소 성립한다. 『맹자』에 나오는 “夏后氏五十而貢 殷人七十而助, 周人百敵而徹"이라는 구절을 정전제와 양립시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즉 주나라의 100敵는 정전제의 1夫의 토지에 해당하지만 하나라의 50敵와 은나라의 70敵는 정전제 구획과는 합치하지 않는다. 더구나 貢法은 10분의 1의 정률세인 徹法과 마찬가지로, 정전제하의 조법(助法 즉 9분의 1稅)과

26) 『與猶堂全書』 第集-第5卷 經 孟子要義 卷1-49, 李策衡 譯社 『孟子要義(이하 『요의』라 약함)』 195쪽.

27) 그러나 다산의 정전재 개념이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 않은 상태였음을 감안한다면, 그가 호의를 표명한 균전제가 기실 정전재와 얼마나 다른 것이었는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28) 『孟子要義』 卷1-38(『요의』 148).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夏后氏 五十而 貢者"를 “1 구역 100묘를 매양 2夫를 써서 경작하고 도합 16인(2夫 X 8區=16人, 私田 8區의 존재와 夫=人이 전제되어 있음 : 인용자)이 공전을 함께 경작한다"29)고 해석함으로써 하나라에서도 100敵 1夫로 井字구획을 하고 공전을 둔 것으로 간주하였다. 또한 "다만 관에 바치는 법은 田分九等하여 여러 해의 평균을 헤아려서 恒例로 삼았다"30)고 해석함으로써, 그것이 貢法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공전 구획과 공법이 병존하는 셈이다.

은나라의 ‘七十而 助者'도 "800敵를 통틀어 사정에 맞게 농지를 나누어, 10夫는 각각 70묘, 2부는 각각 50묘를 얻으며, 도합 12인이 함께 공전을 경작한다."31)라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풍흉을 불문하고 공전의 소출을 관에 바칠 뿐이며 공가에서 비는 것이 民力뿐이기 때문에 助라고 부른다고 말하였다.

이처럼 다산은 50묘, 70묘, 100묘를 토지 구획의 단위로 해석하지 않고, 농민 1부에게 분배되는 토지 면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정전 구획과 양립시킬 수 있었다.32) 결국, 100묘 단위로 구획된 정전의 수가 적었던 하나라에서는 1부에게 50묘만을 분배할 수 있었고, 은나라에서는 70묘, 그리고 주 나라에서는 구획된 토지가 많았기 때문에 1부 즉 한 농가당 100묘까지 분배할 수 있었다고 해석하였다.33)

29) 『孟子要議』 卷1-38(『요의』 49~50).

30) 『孟子要議』 卷1-38(『요의』 149).

31) 『孟子要議』 卷1-38(『요의』 149~50).

32) 이렇게 함으로써 50과 70의 숫자는 7X7=49, 8X8=64와 달라 方型의 면적 단위로서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난점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하나라와 온나라에서도 정전제가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孟子要義』 卷1-39(『요의』 151).

33) 물론 이때에 1夫에게 분배된 50敵 또는 70敵의 토지가, 1부가 농사짓는 전농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전으로 구획된 토지 중에서 분배받은 것, 죽 정전 안에서 분배된 것이 그렇다는 것이며 그 밖에도 농민은 따비밭(萊田)

등을 추가로 분배받았다는 것이 다산의 해석이다. 『孟子要義』 卷1-39(『요의』 150).

이런 방식으로 다산은 정전제 구획을 둘러싼 논란을 벗어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하나라에도 정전 구획이 있었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1夫에 대한 농지 분배 면적도 흔히 생각되어 온 것처럼 食口 즉 인구에 비례한 것이 아니라 방금 제시한 예에서 보듯이 노동 능력에 따라 차등을 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것은 확실히 새로운 관점이다. 이런 해석을 통해서 다산은 좁은 땅에 비해 인구가 많다든가, 변동하는 인구에 맞춰 토지를 어떻게 재분배할 것인가 하는, 정전제에 대해 있을 수 있는 상투적 반론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은 다산의 정전제 이념이 형성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는 일찍이 「腦策」 때부터 공법과 조법의 질적 차이에 유의하였으며 후자를 선호해 왔다. 이와 관련하여 그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단순한 세액이나 세율의 차이는 아니었다. 일정한 토지에 일정한 세액을 부과하는 공법보다는, 공전 소출을 왕에게 바침으로써 풍흉에 따라 조세 부담이 달라지고 따라서 왕과 농민이 고통을 함께 나누는 정전제하의 조법이 왕도 정치의 이념에 맞을 뿐만 아니라도 관리들의 조세 수탈로부터 농민의 경영을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전제에 기초한 세법이 九一세제이므로, 趙岐가 정전제하의 一세제를 이야기한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34)

한편 다산은 흔히 10분의 1세로 간주되는 철법에 관하여 주목할 만한 설명을 남겼다. 즉 그는 徹과 관련하여 ”渠曰 耕通力而作收計敵而分 故謂之徹"는 주자의 『맹자집주』의 말과 함께 毛奇齡

34) 『孟子要義』 卷1-42(『요의』 164).

의 인용문 12자 즉 "耕則通力合作, 收則計軌均分(경작할 때는 힘을 합쳐 함께 경작하면서도 수확할 때에는 敵수를 계산해서 균등하게 나눈다)"35)라고 한 구절을 제시하면서, "여덟 구역에서 수확한 것이 400곡이면 여덟 가구가 고르게 나누어 50곡씩 갖는 것이다"36)라고 해석하였다. 그런데 다산은 이와 관련하여, 여덟 집의 人口, 人力, 勤慈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경지 면적을 계산해서 분배하는 방식은 均平해질 수 없으며 따라서 시행하기 곤란하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여전제론의 근거를 허무는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다산의 관심이 단순한 분배의 평등에서 생산의 합리적 조직으로 옮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조짐으로 보인다. 이렇듯 다산은 왕도 정치의 이념을 분배의 산술적 평등에서 찾는 전통적 견해의 좁은 테두리를 점차 벗어나면서 정전제의 새로운 地平을 열고 있었다.

『孟子要義』에서의 정전론은 토지 분배의 방식과 田稅制度(貢法과 助法)를 분명하게 결부시키고 또한 노동력의 배치를 비롯한 토지경영 방식까지 구체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한 단계 발전된 것이다. 그러므로, 정전제를 비록 명시적인 개혁안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의 머리 속에는 이미 정전제 구상이 현실적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經世遺表』에서의 井田制論의 成立

『孟子要義』의 저술은 곧바로 『經世迫表』의 저술로 이어진다. 종래 『訪表』는 흔히 1817년 한 해 동안에 저술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1814년에 저술된 『孟子要義』와 『經世迫表』 사이에는 2년 내지 3년의 시간적 간극이 있는 셈이다. 2-3년이

35) 앞의 주 19) 참조.

36) 『孟子要義』 卷1-40(『요의』 154)의 주.

결코 긴 세월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다산이 단 기간에 놀라울 정도로 많은 양의 저작을 한 학자라는 점, 그리고 경서에 관한 그의 집중적 연구가 주로 1810년부터 14년 사이에 이루어진데 반하여 일관된 政法渠 체계이며 그의 대표적 저작이 된 1표2서가 1817-19년의 3년 동안에 집중적으로 저술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맹자요의』와 『경세유표』 사이의 시간적 간극은 그의 사상에 얼마간의 단절이나 비약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朴贊勝 교수는 정전제론의 성립과정에서 『요의』가 갖는 의미를 중요시하면서도 이 단계에서는 균전제에 호의적이었다고 보아 정전론은 그 이후 어느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간주하였다.37) 사실 『맹자요의』와 『경세유표』에서는 정전제에 대한 이해의 수준에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정진제가 현실적 개혁안으로 되기 위해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정전제의 많은 문제점들이 『요의』에서는 분명하게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음을 둘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요의』에서의 정전론 검토가 단순히 경전 해석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요의』의 정전제 검토과정에서 다산의 머리 속에서는 정전제적 개혁론이 잉태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쩌면 『요의』의 집필 중에 이미 『경세유표』의 정전론이 일부 집필되고 있었거나, 늦게 잡아도 『요의』의 집필이 끝난 뒤 곧 이어서 『경세유표』의 집필에 착수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경세유표』는 1815년에 이미 집필되고 있었다.38)

37) 朴費勝, 『丁若鏞의 井田制 考察―『經世遺表』 『田制』를 中心으로」, 《歷史學報》 110, 1986 참조.

38) ‘經世遺表 1817년 저작설’은 그동안 별다른 이론 없이 받아들여져 왔는데, 그것은 1817년에 『유표』의 저술을 "시작하였으나 미완성인 채, 『女民心書』의 저술에 들어갔다”는 侯菴先生의 서술에 근거롭 두고 있다. 安秉直교수는 이를 근거로 『表』가 1년 동안에 집필된 것으로 해석하여 그 집필 행위 자체를 ‘영웅적 투쟁’에 비유했다. (『丁若山硏究의 現況』 51쪽). 그러나

『譯』에는 郡縣分隸 12省의 州郡縣의 총수를 적어놓고, “嘉慶 丙子(1816) 8월 23일에 시험삼아 기록했다”는 주를 달아 논 것이 보이고 (天官修制 郡縣分隸 經遺表 卷3-48a, 유표I-266), 또 본문 중에는 "남쪽 지방에 떠돈 지 17년(臣流落南土十有七年)" (地官修制 田7, 經世遺表 7卷-3a, 유표II-164)이라는 구절과 함께 "남쪽 지방에 15년 살았다(臣居南土十五年)"(天官修制 郡縣分抽 經世遺表 卷3-35a, 유표I-239)고 한 구절도 보인다. 이로 미루어 집필기간이 1815년부터 1817년까지 적어도 3년에 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연보의 『經世迫表』 저술에 관한 기술은, “그 이전의 어느 시접에 시작은 하였으나 1817년에 완성하지 못한 채, 『牧民心古』의 저술로 넘어 갔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 같이 『맹자요의』에서의 정전제 검토가 곧바로 『경세유표』의 정전제론으로 이어졌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산의 정전제론이 『요의』에서 확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전제를 현실 개혁의 분명한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유표』에서였기 때문이다.

다산은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정전제는 왕도 정치의 기본이며 그것 없이는 仁政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제도가 갖는 현실적 제약 때문에 현실적으로 실시할 수 없다는 통속적 견해를 바판함으로써 그것을 현실적 개혁안으로 재생산해 내었다. 다산은 많은 유학자들이 지나치게 이상화함으로써 사실상 유토피아의 세계로 추방되어버린 정전제를 합리적으로 재해석해 냄으로써, 자신이 살고 있던 당시의 정치적 비리나 사회의 총체적 모순을 개혁하는 핵심적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정전제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는 地官修制 田1, 井田論1의 첫머리에서 다산은 정전제에 대한 확신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정전은 聖人의 經法이다. 경법이라면 예나 지금이나 통용될 수 있는 것인데, 예전에는 시행하기가 편리했고 오늘에는 불편하다고 한다면, 필시 법을 밝히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천하의 이치가 예

전과 지금에 달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39)

39) 田1 井田論1, 『經世遺表』 卷5-1a(유표II-7). 다만 『經世迫表』의 서문에 해당하는 『邦』에서는 다산이 시급히 개혁해야 할 열네 가지 과제 중의 하나로 정전제를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이 글이 나중에 全書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쓰여졌다는 사정과 관계가 있고, 또 정전제를 국가체제의 일부를 구성하는 田制, 좁게는 田稅制度로서 다루는 『유표』 성격에서 비못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정전제가 오늘날에도 시행될 수 있다는 확신을 피력한 뒤, 그는 그것을 부정하는 기존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첫째는 ‘지세가 불편하다(地勢不)’는 것이다. 죽 정전을 구획하려면 도랑을 파고 길을 내는 등 경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구령을 메우고 언덕을 깎아내는 등 엄청난 노력과 비용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제대로 이루려면 천하의 인력을 동원하고 천하의 양식을 털어서 하더라도 수백 년이 걸릴런지도 모른다고 蘇賊은 말했다. 이에 대해, 만약 정전제가 정말 그런 것이라면 "소씨는 수백 년을 기약하였지만 나는 천년 만년이라도 할 수 없다”,40)고 다산은 말한다. 죽 산천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요순 3왕의 시대에 정전제도가 실시되었다면 오늘 그것을 실시하지 못하는 이유가 자연조건 때문일 수는 없다. 따라서 고대에 정전제가 실시되었다면 그것은 실시가능한 방식으로 고안되었음에 틀림없고, 지세가 불편해서 정전제를 실시할 수 없다는 견해는 경전의 잘못된 해석에서 나온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백성의 수효가 일정치 않다’(民數不恒)는 것이다. 정전제는 농지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것인데, 한번 균평하게 분배했다고 하더라도 인구가 변하면 다시 농지 분배가 불균등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정전제를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농지를 농민에게서 빼앗고 다시 나누어주는 번거로움은 피할 수 없다. 인구의 증가

40) 田1 井田論1, 『經世迫表』 卷5-1b(『유표』 II-8).

에 따라 "농지가 모자란다’'든가 "인구가 항상 넘친다’'든가 하는 것도 같은 문제이다.41) 그런데 다산에 의하면 인구가 변동하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며 따라서 그것이 정전제를 실시할 수 없는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농지를 주는 것이 정전제가 아니라 농지를 농사 잘 지을 수 있는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정전제이기 때문이다. "백성은 서로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이다(民者資以牛者也)"42)라는 말이 암시하듯, 분업이 발전한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다.43) 따라서 천하의 모든 인민에게 농지를 분배할 필요가 없고, 농민에게 농지를 분배하는 것은 卒를 뽑아 軍에 배속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찌 일찍이 천하의 모든 인민이 다 1백묘의 토지를 얻어서 각자 먹을 것을 도모하도록 했겠는가?"44) 이런 생각은 소박한 중농주의자가 쉽게 체득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다.

41) 田1 井田論3, 『經世遺表』 卷5-4b(『유표』 II-14).

42) 田1 井田論3, 『經世遺表』 卷5-4a(r유표』 II-13).

43) 농업은 九職 중의 한 가지일 뿐이며, 정전은 농민에게 농지를 주어, 생계물 꾸려 나가게 하는 여러 방법 중의 한 가지일 뿐이다.

44) 田1 井田論3, 『經世迫表』 卷5-4b(『유표』 II-14).

이처럼 다산은 경전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정전제의 난점을 논리적으로 극복하였다. 그러나 정전제가 현실적 개혁안이 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한층 더 중요한 현실적 제약이 존재한다. 그것은 토지의 私的 所有가 정전제적 토지 분배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전제를 주장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부닥치는 사적 토지소유의 문제를 회피함으로써 그 당위성만을 내세우거나 왕의 결단을 촉구하는데 그쳤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45)

45) 이러한 주장의 밑바탕에는, 모든 土地는 왕의 소유이며 따라서 그 권위에 의해 토지를 재분배할 수 있다는 왕토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이 대부

분의 개혁론을 공상적인 것, 관념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다산 역시 관념적 수준에서는 왕토 사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그것은 소유권적 개념과는 별개의 것이다. 그는 농민적 소유의 현실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토지사유의 제약에 대한 다산의 생각은 다음 구절에 잘 나타나있다.

“그러므로 정전법은 오늘날에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염려되는 것이 한가지 있으니 즉 옛날에는 천자와 제후가 농지의 주인이었으나 지금은 온 백성이 주인이 되었으니 이것이 도모하기 어려운 것이다. 반드시 수백년을 두고 흔들림 없이 차츰차츰 회수하고 차례대로 시행한 다음이라야 선왕의 법을 회복할 수 있다. 그 처음에는 限田, 名圓 均田 같은 법으로 하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太阿의 칼자루를 돌려 잡으면 병에 담긴 물을 쏟듯이 거의 술술 막힘이 없을 것이다."46)

이 구절은 다산이 비록 수백년이라는 기간을 기약한 것이긴 하지만, 그의 정전제가 궁극적으로 사회적 소유(천자나 제후로 인격화된 사회의 소유)를 지향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즉, 비록 점진적 방법이기 하지만 천하의 토지를 회수하여, 토지의 사적 소유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정전제는 완성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사유토지의 회수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모든 토지의 사회화 즉 사적 所有의 완전한 배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47)

46) 田制1 井田論3, 『經世遺表』 卷5-4b(『유표』 II-14).

47) 그렇지만, "태아의 칼자루를 쥔다’'든가 "병에 담긴 물이 술술 쏟아진다”는 비유는 천자로 표현되는 공권력이 적어도 사적 소유의 제약윤 극복할 수 있는 상태를 상정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규정에는 실현과정상의 점진성이라는 점에서 타협이 존재할지언정, 궁극적 상태에서의 사적소유 또는 地主戶制를 받아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3. 다산 정전제론의 구조

정전제를 다루는 『經世迫表』 권5, 地官修制 田制 편은 다음과 같이 열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經世迫表 地官修制 田制의 構成

田制1 (井田論1. 井田論2. 井田論3) 田制2, 田制3, 田制4, 田制5, 田制考6-田議, 田制7, 田制8, 田制9―井田議 1, 田制 10-井田議2, 田制11-井田議3, 田制12-井田議 4

田制別考1(結負考辨, 諸路量田考, 步敵考, 方田始末)田制別考2(魚隣圖說), 田制別考3(魚隣圖說)

이 중에서 전제를 다루어 나가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나타난 문제들을 다룬 「관전별고」(전제5), 그리고 결부제, 보묘, 어린도 등을 다룬 「전제별고」1, 2, 3을 제외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맥락을 이룬다.

정전제에 대한 다산의 기본사상을 다룬 것은 전제1부터 전제4의 周禮地稱人 부분까지이다. 이 부분은 다시 다음과 같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전제1의 정전론1, 정전론2, 및 정전론3의 周體小司徒 앞부분까지이다(V-5-la~5a).48) 여기에서 다산은 정전제가 이상적 제도

48) 종래의 연구에서는 전재1 즉 정전론1~3을 정전론이라고 불러서 전제9~12의 정전의 1~4와 구분하였다. 李榮蒸 교수는 정전론에 전제 2~5까지를 포함시키는 새로운 독해 방식을 제안하였는데, 그 이유는 양자간에 논의의 차원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필자 역시 이런 독해법에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나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보면, 여기서 제시한 것처럽 정전론3의

주례소사도이하는 전제 2로 넘기는 것이 체제상 맞는다고 본다.

일 뿐만 아니라 실현가능한 제도라는 확신을 표명하고 정전제의 골격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물론 『周福』를 비롯, 『書』 『詩經』 『孟子』 등의 經書에 나와 있는 정전제 논의를 그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구성한 것이다. 여기에는 다산의 기본적 관점이 잘 정리되어 있다.

둘째는 정전론3의 주례소사도부터 전제2, 전제3 및 전제4의 地官稱人 부분까지이다(V-5-5a~V-6-9b). 여기서는 주례, 시경, 맹자 등 경서에 서술된 정전제의 내용을, 후대 유학자들의 주해와 곁들여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특히 『주례』는 그의 정전제 논의를 뒷받침하는 기본적 텍스트로 활용되고 있으며 그 해석을 통해서 정전제의 구체적 내용을 밝히고 있다.

전체로 보아 셋째 부분에 해당하는 전제4의 나머지 부분 通考부터 끝까지 그리고 전제5에서는 정전제가 무너진 秦나라 이후 宋나라 때까지 중국의 전제가 변천해 온 과정이 검토되고 있다. 다산은 여기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전제 및 전세제도가 정전제에서 후퇴하고, 따라서 고대 왕도정치가 붕괴해 가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王葬이 왕위를 찬탈하여 경전들을 불사르고, 扶害律을 적용했던 암흑의 시대였던 만큼 정전제가 허물어진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본듯하다. 다만 송나라의 方田法에 대해서만은 그것이 정전제의 정신을 계숭한 것으로 보아 예외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넷째, ‘전제고6-방전의'부터 전제8까지인데, 여기서는 우리나라의 전제, 전세 및 그것과 관련된 여러 제도의 역사적 추이를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방전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이 부분49)은 논의의

49) 邦田議라는 부제가 달린 田制考6에는 考라는 글자가 들어간 것이 이색적이다. 田制7과 田制8에는 邦田議라는 副題가 붙어 있지 않지만 그 연속으로 보인다. 이것은 편집상의 부주의 때문에 생긴 것으로서, 그 내용으로 보아

이 세 부분을 통틀어 邦田議로 보아 무방하다.

순서상 중국제도를 다룬 앞부분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다음의 정전의를 서술하는 논리적 토대가 된다. 우리나라 토지 및 전세제도 중에서 정전제와 직접 관련된 부분은 적다. 그러므로 방전의에는 협의의 정전론 즉 經界나 分田法과 관련된 내용은 많지 않지만, 정전의가 경계나 분전법 보다는 전세개혁에 치중한 논의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토대 또는 전제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섯째, 전제9로부터 전제12까지로서 정전의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정전의로 통칭되어 온 이 부분은 앞에서 재구성된 정전제론을 현실에 적용한 것이다.

이상에서 개관한 다산의 『經世迫表』 전제 열두 편의 內容을 재정리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이 다섯 부분으로 구성된다.

1) 정전제에 대한 기본적 관점

2) 재구성된 정전제

3) 중국의 전제 및 전세제도에 대한 비판적 검토

4) 조선의 전제 및 전세제도에 대한 비판적 검토

5) 정전제의 구체적 실현방안(정전의)

1) 재구성된 井田制(「정전론」)

(1) 井田制의 원리와 구획(經界)

정전제는 方 1里의 토지룰 井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그 가운데 중앙의 한 구역을 公田으로, 나머지 여덟 구역을 私田으로 삼는 것이 그 기본모형이다.

"정전법은 복판이 공전이 되고 4방이 8夫의 사전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변할 수 없는 뜻이다(井田之法 中爲公田 四風半爲八夫之

私田 此不易之義也)."50)

그리고 그는 정전의 구획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평탄한 곳에다 땅을 구획하여 井을 만들고, 여기에 법을 정해서 6尺이 1步, 100보가 l묘(原訪 : 가로 세로가 10보씩이다), 100묘가 1夫(原証 : 세로 가로가 10묘씩이다) 3부가 1屋(原訪 : 3칸 집과 같다), 3옥을 1井(原辻 : 그 모양이 井字와 같다)으로 하였다."51)

흔히 이야기하듯이 정전제에서는 농민들이 공전을 경작하여 그 수확을 국가에 바치며, 사전은 농민들이 각자 경작하여 그 수확을 차지한다. 따라서 여기서의 8夫는 정전 한 구역에 포섭된 여덟 농부라고 생각하기 쉽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해 왔다.

그런데 여기서 다산은 이 경우의 夫가 농부(또는 농가단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농가단위가 차지하는 농지면적, 즉 1묘의 토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래야만 8夫가 아닌 9夫가 井이 되는 것이다. 이때 토지단위의 부를 다산은 라고 써서 구별한다.52)

50) 田制1 井田論3, 『經世遺表』 卷5-8a(『유표』 II-21).

51) 田制1 井田論2, 『經世遺表』 卷5-2b(『유표』 II-10).

52) 그는 그러한 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夫가 원래는 토지를 나타내는 缺였다고 해석하였으며(田制1 井田論3, 『經世迫表‘, 卷5-8a, 『유표』 II-21), 정전의에서는 "앞으로는 토지단위를 이야기할 때에 농부와 구별하기 위해 이자를 쓸 것이니 유의하기 바란다”고 언급함으로써 사람단위로서의 夫와 井에, 耕作地單位로서의 와 屈을 대응시킨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전통적인 해석과 정면으로 대립된다. 公羊學派에서는 8夫를 경작지의 단위가 아닌 농부 또는 농가단위라고 해석하였다. 이런 해석은 문맥상으로 보더라도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즉 ‘8夫의 私田'은 여덟 농부가 경작하는 사전이라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鄭玄은 이렇게 夫를 농지의 단위가 아닌 농가의 단위로 보아 井田 9夫를 아홉 농부가 농사짓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이런 해석에 기초하게 되면 공동경작지로서의 공전은 설 자리가 없으며, 정전제는 아홉 가구가 각기 한 구역을 농사짓고 각기 9분의 1에 해당하는 王稅를 부담하는 제도로 귀착되고 만다.53) 정현은 “아홉 농부가 한 정을 농사짓는다(九夫治一井)” 또 "왕세만 있고 공전은 없었다”53)고 분명히 말했다. 정현의 이런 견해는 賈達에게서도 변형된 형태로 재생산된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공전은 존재하지 않으며 설사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전과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된다. 따라서 정전제는 농민들에게 경지면적을 균등하게 분배하여, 국가에 9분의 1세(또는 10분의 1세)를 내도록 하는 전세제도일 뿐이다.

정현을 비롯한 공양학파의 이러한 견해를 다산이 바판한 것은 공전의 존재가 정전제의 핵심적 요소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공전에 대한 노동력 제공의 대가로 사전을 정치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킴으로써 사전에 대한 국가적(봉건적) 간섭과 수탈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고자 하는데서 정전제의 본질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거기에 공전확보의 제1차적 당위성이 있었다. 다산이 정전제론의 전편에 걸쳐, 공전의 확보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러면 정전의 실제 구획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정전구획이 현실적으로 어려우며, 그 어려움이 정전제를 실현할 수 없는 논의의 중요한 근거로 제시되어 왔음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댜 그는 『周禮』의 예에 따라 토지의 종류를 아홉 가지로 구분하고 그중 "오칙 평평하고 기름진 땅이라야 정전을 만들었다”라고 하였으며 따라서 "혹 몇 리에 1정을 만들 수도 있고 혹 10정이 잇달아 있기도 한다”54) 죽 모든 토지를 정전구획하는 것은 아니라는

53) 田制1 井田論3, 『經世遺表』 卷5-8a(『유표』 II-21).

54) 田制3, 『經世迫表』 卷5-29a(『유표』 II-58).

것이다.

이렇게 구획된 정전을 획정이라고 불렀고, 다산은 이것을 모델로 삼고자 하였다. 이 획정은 농민들에게 권장하고 설득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정전제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기준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종종 그것을 음악에서 기준음이 되는 黃鐘에 비유하였다.

이처럼 눈에 분명하게 보이는 획정은 지형상 정전 구획이 어려운 곳에서 정전제의 원리를 적용하는데 기준으로서 원용할 수 있다. 예컨대 길기도 하고 짧기도 비스듬하기도, 타원형이기도, 뾰족하기도, 뭉툭하기도, 조각나기도, 비뚤어지기도 한 땅에서도 ‘정전하는 비율을 이용해서 乘除 絶補하여 정전 총수로 묶는' 방식 죽 打해서 정전을 만들 수도 있다. 또 井자 모양으로 구획할 수 없는 홑어진 땅도 모아서 정전을 만드는데, 그는 이것을 衆井56)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공전만큼은 가능한 한 반듯한 것으로 선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다산은 본래의 정전구획 방식인 획정 외에 취정의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정전제에 대한 중요한 반론 하나를 극복할 수 있었다.

"어찌 반드시 산을 무너뜨려서 구링을 메우고 고개를 깎아 늪을 매워서 천하의 땅을 다 정전으로 만든 다음에라야 마음에 통쾌히 여기겠는가?"57)

온 천하의 토지에 정전제를 실시했다는 聖의 주장은 이처럼 취정의 방식을 도입할 때에 비로소 타당성을 갖게 된다는 게 다산의 주장이다.

정전 1/9제는 정전제의 원형이다. 그는 『周體』에 의거해서, 정전

55) 田制1 井田論2, 『經世遣表』 卷5-2b(『유표』 II-10).

56) 田制4, 『經世迫表』 卷6-6a(『유표』 II-94).

57) 田制1 井田論2, 『經世迫表』 卷5-3a(『유표』 II-11).

제(1/9제)가 시행된 지역은 遠鄕 밖이며, 六遂에서는 遂田法이 시행되었다고 보았다. 즉 왕도 주변 10리까지는 六鄕으로서 농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4방 50리까지의 6遂 지방에서 비로소 수전법(또는 有法)이라는 농지제도가 시행되며, 50리 밖 원교로부터 500리 疆畿까지의 지역에 시행된 것이 정전법이라고 본 것이다. 이 경우 정전법과 수전법은 구획하는 방법부터 다르다. 전자가 9부의 토지를 井자로 구획하여 복판이 공전이 되는데 비하여, 후자는 곧바로 연달아 있는 10부의 토지 중에서 맨 앞머리가 공전이 된다.(그림 참조)

公 田

禾L 、 田 公田

이렇게 육수와 원교 밖에서 각기 상이한 구획방법을 쓴 것은 수취율의 차이와 관계가 있다. 원교 이외의 정전에서 수취율이 1/9인 데 비해 육수에서 수취율을 상대적으로 낮게 1/10로 정한 것은, 전통적 견해에 따라, 이 지역이 왕도와 가까워 농민들의 부담이 추가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전법과 정전법은 농부들이 각기 100묘의 사전을 경작하면서 公田을 공동 경작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 다산의 생각이었다.58) 다만 정

58) 鄭玄 등은 井田法에서는 公田의 일부인 20묘에 죽 10분의 2에 농민둘의 祝舍가 지어져 있기 때문에 공전(경작가능한 80묘)의 수확은 실질적으로는

遂田法을 쓰는 육수의 그것과 같다고 해석한다. 다산도 한 때 이런 견해를 갖고 있었다. 예컨대 『西巖講學記』 (詩文 I-21卷-31)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九一者 九分井 而取其一也 一者 十分敵 而取其一也 難然 公田之內 又有舍占媒 故難曰九一 實亦十分敵而取一 不然 孟子何以有其皆一之也.” 그렇지만 『世遺表』에 이르면 그러한 견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전법에서는 8부의 농민들이 공전 1부의 농지를 공동 경작하는데 비해, 수전법에서는 9부의 농민들이 1부를 공동 경작하는 점이 다르다.

(2) 농지의 분배와 경영

이렇게 구획되거나 타량된 정전에서 사전 여덟 구역은 당연히 농민들에게 분배된다. 공전 한 구역은 물론 사전을 분배받은 농부들에 의해 공동으로 경작된다. 그러면, 이들 농지는 어떤 방식으로 분배되는가?

사전 한 구역 즉 100묘의 농지를 1夫가 분배받는데, 夫는 노동력을 기준으로 하는 농가단위이다. 물론 이 경우의 夫는 앞에서 언급했던 농지단위의 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1부도 흔히 (鄭玄 등) 생각하듯이 농부 한 사람 또는 농가 한 가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일정한 노동력 단위59) 라는 것이 다산의 해석이다.

59) 愼鏞皮 교수는 다산이 경작의 효율성을 중시하였음을 부각시키기 위해, 경지배분의 기준이 되는 노동력 단위에, 농민이 가지고 있는 생산수단(자본)의 양을 고려하였다고 해석하였다. 이것은 다산이 말한 "其額之多 程其力之强弱”의 ‘其額'을 ‘그 人員'이 아닌 ‘자본액’이라고 독해한 결과였는데, 이는 誤에 기초한 과잉해석으로 보인다. 恨, 『朝鮮後期 貫學派의 土地改革思想』, 『韓國社會經濟思想大系』 II, 387쪽.

"정전이란 농가의 陣法이다. 호구를 계산해서 농지를 분배했다는 것은 망령된 말이다. 천하의 농부를 여덟 사람씩 묶어서 한 오(五)

로 만들어서 100묘를 경작하도록 하였는데 8인이 1로 된 것을 1夫라 한다."60)

이처럼 농가의 조직에 있어서는 8口가 1夫를 구성하고 3부가 1대(隊 : 8口 X3=24口)로 되며 3대가 1기(旗 : 8口 X8=64口)로 된다. 이것은 각기 농지단위의 1, 1屋, 1에 대응하여, 8구가 100묘를, 1夫가 1를, 1隊가 1屋을, 그리고 1瑾가 1을 각각 경작하게 된다. 이와 같은 농지의 경계와 농민의 사회적 편성간의 대응관계는 아래 표에 나타나 있듯이 계속, 확장되어 행정구역 및 군사조직에 그대로 적용된다.

배수 X3 X3 X10 X10 X10 X10

경계 100 = 1 1屋 1 1通 1成 1終 1同

사회편성 8口= 1夫 1隊 1旗(井) 1肖 1司 1部 1營

이러한 견해는 토지분배를 규정한 『周福』 小司徒의 내용을 해석하는 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즉 소사도에서는 "상등전은 7인 중에 일할 만한 사람이 3인, 중동전은 6인 중에 일할 만한 사람이 2.5인, 하등전은 5인 중에 일할 만한 사람이 2인인 집에 준다"61)고 하였는데, 이 토지분배 규정을 정현은 ‘計口分田’ 즉 먹여 살리는 식구를 기준으로 분배한 것이라고 보았다.62) 이에 반하여, 다산은 토지분배의 기준이 되는 것은 식구가 아니라 노동력이라고 보았으며, 식구를 나타내는 7인, 6인이라고 한 것도 최소한을 말하는데 지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토지분배 방식을 그는 지주가 소작인들에게 농지를 나누어주는 것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

60) 田制1 井田論3, 『經世迫表』 卷5-3b(『유표』 II-12).

61) 田制4, 『經世迫表』 卷6-3b(『유표』 II-89).

62) 田制1 井田論3, 『經世這表』 卷5-4a(『유표』 II-91).

다.

"농지를 분배하는 법은 중점이 농지를 다스리는 데 있고, 백성의 재산을 규제하는 데 있지 않은데, 누가 식구를 헤아려서 농지롤 분배한다고 하는가?"63)

이처럼 다산이 농지를 분배하는 데 노동력을 기준으로 한 것은 농지분배의 목적이 백성에게 재산을 고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농지의 경작 즉 ‘治田'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것이다. "농사짓는 사람은 땅을 가지고, 농사짓지 않는 사람은 땅을 갖지 못한다”(藍者有田 不魏影者 不得田)64)고 말한 본뜻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많은 유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던 개혁안들, 더구나 그가 존경하는 幡溪의 公田論이나 星湖가 개혁안으로 내세웠던 均田論 그리고 限田論을 거부한 것도 바로 이 원칙에 벗어나기 때문이었다. 이들 제도는 비록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가 농지의 균등한 소유를 표방한 것이다. 그렇지만 농민 이외의 사람들에게도 농지를 나누어준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者得田'의 원칙에 어긋난다.

그렇다면 다산의 정전제하에서 농사를 짓지 않는 관리나 군인, 상인, 匠人 그리고 생계수단을 갖지 못한 사궁민(四窮民 : 즉 孤獨蝶)의 생계는 어떻게 보장되는가? 모든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하는 것이 왕도 정치의 이상이며 그 밑바탕에는 평등의 이념이 엄연하게 자리잡고 있다. 다산 역시 본질적으로 왕도 정치의 신봉자였다.

우선, 그는 관리 즉 왕으로부터 수령, 아전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공공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을 통틀어 선비(士)로 규정하면서, 그들의 생계는 정전의 공전수확 또는 전세에 의해 유지되는 것으로 책

63) 田制4, 『經世遺表』 卷6-4a(『유표』 II-90).

64) 田制5, 『經世遺表』 卷6-16a(『유표』 II-116).

정하였다. 따라서 농사짓지 않는 사람들이, 농지를 소유하여 수취한 地代로 생활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 원칙은 군인의 장관(將官 : 즉 將校)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병사들은 兵四合一制에 따라 정전에 편입되어 농사짓는 농민으로서 軍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상인이나 장인 등 농업 이외의 생산적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소득을 가지므로, 농민과의 교역을 통해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댜 그들에게 농지를 분여하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농민에게 맡겨 농사지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바로 정전제가 해소하고자 하는 竝作 즉 지주전호제의 존속을 의미하게 된다. 그것은 또한 비농민들 죽 이미 보수를 받고 있는 관리나 다론 수익이 있는 상인 또는 장인 둥에게 2중의 수입을 보장하는 것이 된다.

‘'백성은 서로 물자를 교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民者賀而牛者也)라고 하였듯이 사회적 분업이 확립된 사회에서 모든 사람에게 농토를 주어 생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사궁민과 같이 생계를 스스로 꾸려갈 수 없는 사람들을 토지분여의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治田’을 중요시한 결과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들의 생계문제를 외면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는 수많은 빈민시를 써서 그들 ‘小民’에 대한 남다른 연민을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經世迫表』의 전편이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충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생계대책은, 필경 병작제도로 이어질 농토의 분배에서 찾지 않고 별도의 구제책룰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는 販他制度룰 개혁함으로써 이 문제룰 해결하려고 하였다.65)

65) 鄭允炯 『茶山의 環上 改革論』, 弘大 《經濟論范》, 1989 참조.

(3) 助法=九一稅制

토지에서 생산되는 가치 중에서 다른 계급에 무상으로 이전되는 잉여는 본질적으로 封建地代이다. 봉건국가로 이전될 때 그것은 田稅가 된다 그러므로 봉건사회의 전세제도는 근본적으로 그 토지소유 제도를 반영한다.

정전제에서는 공전의 수확이 국가(또는 군주)로 이전되기 때문에 국가의 수취율은 당연히 1/9이다. 다산은 이를 흔히 ‘井田 九一'이라고 말하였는데 이때의 1/9은 앞에서 언급한 공전의 비율과 함께 세율로서의 9분의 1을 지칭한다. 1/9세는 물론 공전수확이 1정의 총수확에서 차지하는 비율인데, 그것이 단순한 세율이 아니라 공전에서 8부의 농민들이 서로 도와서 공동경작한 수확을 대표하기 때문에 이 세법을 특히 助法이라고 부론다. 이 경우에도 다산은 정전의 특수용어로서의 助를 來로 쓴다.

맹자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라에는 貢法, 은나라에는 法 그리고 주나라에서는 徹法을 썼으나 모두가 1/10세였다고 말하고 또한 龍子의 말을 빌어 토지에 대한 賊稅로서 가장 좋은 것은 조법이며, 가장 나쁜 법은 공법이라고 하였다. 다산도 용자를 俗儒로 보긴 하였지만, 조법 우위론에는 동조한다.66) 그는 조법을 정전제에 의거하여 공전 소출 1/9을 국가에 바치는 제도로서 엄격히 이해하였으며, 공법이란 여러 해의 수확을 비교하여 평균한 定額稅라고 보았다. 그런데 주나라에서 채택하였다는 또 하나의 稅法인 徹法은 여전히 그 내용이 불분명하다. 「모두가 1/10稅」라는 지적이 있을

66) 『策』에서는 세윤의 차이에 주목하면서 은나라의 助法(1/9세)과 주나라의 徹法(1/10세)을 대비하였는데 반해, 『孟子要義』에서는 하나라의 定額稅인 貢法이 은나라의 助法에 비해 나쁘다고 말하였다. 또한 徹法도 公田윤 경작하여 그 소출을 바친다는 점에서 조법과 같다고 보았다. 『孟子製義』 卷1-39(『요의』 150) 참조.

뿐이다. 그런데 만약 모두가 1/10이라는 맹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정전제의 1/9세와는 분명히 합치하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양학파가 지어낸 것이 ‘2묘반의 학설’이었다. 그들은 앞에서 보았듯이 두 세제의 세율이 같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공전 100묘 가운데, 여덟 농부가 각기 2.5묘의 집터를 장만하여 집을 짓기 때문에 (즉 2.5묘X8=20묘) 실제의 공전 경작면적은 80묘가 되어, 1정 8부의 경지인 800묘의 1/10에 해당한다고 설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정전 1/9세를 1/10세로 통합하였으며, 결과적으로 1/10을 정전제의 세법이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이런 견해는 公羊에서 穀梁으로, 다시 孔預辻, 賈公彦, 孫奭으로 이어졌는데 이것은 결국 정전제를 왜곡하는 것이라는 것이 다산의 생각이댜 "정전은 1/9이지 1/10이 아니다"67)라고 되풀이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편 馬端臨은 "맹자에, 野에 1/9이라고 한 것은 전지를 주는 제도이고, 國中에 1/10이라는 것은 백성에게서 받는 것이다”68) 라고 해석하여 그것들을 각각 전제와 세제로 분리하고, 국중의 1/10을 단순한 조세로 환원해 버렸다.

그런데 다산은 "조법에는 공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여, 조법의 기초가 정전제임을 분명히 하고, 또 "1/9이나 1/10이 모두 조법이 될 수 있는데 어찌하여, 필경 一에 貢은 있지만 는 없다고 말하는가?”69)라고 반론을 제기하면서 공양학파의 정전=단순세제설을 비판하였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다산은 육수에서 田稅가 1/10인 것은 이 지역 농민들에게는 다른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데 대한 배려일 뿐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67) 田制3, 『經世迫表』卷5-33b(『유표』 II-68).

68) 田制3, 『經世迫表』 卷5-34b(『유표』 II-69).

69) 田制3, 『經世迫表』卷5-34b(『유표』 II-70).

전세를 경감한 것이 아니라, 토지구획 방법도 달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공동경작에 기초한 공전수세라는 정전제의 원리는 여기서도 관철되는 것이다. ”助栗은 공전에서 생산된 1/9속이다"70)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1000묘의 농지를 9인이 농사지어 그중 100묘의 소출을 公家에 바치는 것도 조법이다”71)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4. 정전제의 실현방안

1) 국가체제 개혁안으로서의 「井田議」

지금까지 검토한 바, 「田論」1-4에서 재구성된 정전제는 『주례』 등 경전의 합리적 해석에 의거하여 정전제에 관한 기존의 證見들을 비판합으로싸 그 실현 가능성을 한 단계 높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농지의 소유권이 전적으로 국가(군주)에 귀속되어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하게 실현 할 수 있는 제도이다. 농지의 상당부분이 사유화되어 있는 조선왕조 후기의 사회현실에는 원천적 제약이 존재한다. 다산은 이 사실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당시의 토지개혁 논의는 대체로 이러한 현실적 제약 때문에 정전제를 실현 불가능한 제도로 치부해버렀으며 정전을 주장하는 논자들조차도 왕의 결단에 의해 모든 토지를 몰수해야 한다는 비현실적 주장을 함으로써 사실상 정전제론을 기각하고 있었다. "만약 시행하고자 하면 모름지기 기회가 있는데, 태평한 세상에는 시행하기가 진실로 어렵다”72)고 한 주자의 말은 그것이 井田不可論으로

70) 田制3, 『經世迫表』 卷5-34b(『유표』 II-70).

71) 田制34, 『經世遺表』 卷6-1a(『유표』 II-84).

귀결되든 않든 당시의 지배적인 견해였다고 보아 크게 틀림이 없을 것이다.

다산 역시 임진왜란의 직후처럼 시행하기 좋은 시기를 놓친 데 대해 아쉬움을 표현한 바 있다.73) 그러므로 정전제를 실시하기 위해 왕의 권위를 빌어 사유지를 몰수하는 방법이 자연스럽게 머리에 떠오르지만 다산은 이를 분명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농민의 자진헌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방법으로 모든 私田을 官田化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소박한 생각을 가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래서 대두된 것이 점진적인 개혁방식이다. 「정전의」는 이런 점진적 방법을 국가체제의 개혁 차원에서 제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점진적 개혁의 방식은 「응지론 농정소」에서부터 구상하고 있던 것74)이며 『경세유표』에서는 그런 방식의 필요성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었다.

"옛날에는 천자와 제후가 농지의 주인이었으나 지금은 온 백성이 농지의 주인이 되었으니 이것이 도모하기 어려운 점이다. 반드시 수백 년을 흔들림 없이 차츰차츰 회수하고 차례대로 시행한 다음이라야 선왕의 법을 회복할 수 있다. 처음에는 限田, 名田, 均田같은 법으로 하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태아의 칼자루를 돌려 잡으면 병에 담긴 물을 쏟는 것과 같이 거의 술술 막힘이 없을 것이다."75)

다산이 자주 인용하는 "태아의 칼자루를 돌려 잡는다”는 말에는 그의 정전론에서 현실적 제약을 충분히 고려하면서도 모든 토지의

72) 應旨論四政疏, I集-9卷-54a(『논총』 245).

73) 田制4, 『經世迫表』 卷6-12b(『유표』 II-108).

74) 應旨論四政疏, I集-9卷-54(『논총』 245).

75) 田制1 井田論3, 『經世迫表』 卷5-4b(『유표』 II-14).

관유화 즉 국가적 지배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암시가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농자득전’의 원칙과 어긋나는 것이면서도 관전확보의 수단으로서 균전제나 한전제가 유용하다고 안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뿐만 아니라 다산은 현실적 제약 속에서도 정전제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현실적 개선의 가능성과 관련하여 차선책 또는 점진적 개혁방안을 찾는다. 그는 後魏의 균전법을 논평하는 가운데 "천하의 농지를 다 빼앗아서 농부에게 갈라준다면 이것은 옛법이고, 능히 그렇게 못할 것 같으면 천하의 농지를 다 계산하여 우선 1/9을 취해서 공전으로 만드는 것도 옛법의 절반은 된다"76)고 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전을 일단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地主田戶制 또는 私的 地의 지대수취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곧 이어 균전제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농사짓지 않는 백성이 하나라도 농지를 가졌다면 벌써 옛법이 아닌데 고르게 해서 장차 무얼 하겠는가? 비록 크게 고르게 되었다하나 농사짓지 않는 사람이 앉아서 10분의 5를 거두어들이고 몸소 농사짓는 사람은 그대로 10분의 6을 바치게 되니 선왕의 법이 진실로 이와 같았던가?"77)

스스로 옛법의 절반’이라고 한 공전 9/1법을 논의하면서도, 농자득전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사적 지대의 수취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원칙은 현실의 구체적 개혁안을 논의하는 정전의에서 어떻게 관철되는가를 보기로 한다.

76) 田制5, 『經世迫表』 卷6-16a(『유표』 II-116).

77) 田制5, 『經世迫表』 卷6-16b(『유표』 II-116).

정전의 1~4에서는 조선왕조 후기의 현실에서 정전제를 실시하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한다.78)

78) 과학원 고전연구소(평양)판 한글번역본 『경세유표』에서는 『정전의』를 『정전 실시를 위한 제안』이라고 번역하여 이러한 독해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학원 고전연구소, 고전연구실 역, 『경세유표』 과학원 출판사(평양) 1963, 504쪽 참조.

다산은 정전의의 첫머리에서 정전론의 논의를 재론하면서 정전제는 오늘에도 시행할 수 있는 제도임을 재확인하고, "정전을 회복함이 마땅하다”고 말한 다음 그 실시를 알리는 의식과 절차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마땅히 한 두 대신과 그 논의를 흠정(欽定 : 잔주 생략)한 다음, 사흘 동안 齋戒하고 태묘에 들어간다. 이에 우리 태조, 태종, 세종, 세조 등 열성 선왕에게 밝게 고하기를 ‘이제 경계를 다스려서 위로 왕도에 따르고, 아래로 민생을 편안하게 하여, 만세에 經法을 세우고 紀律을 베풀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에 돈화문에 나아가 문무백관과 六部 八道의 백성을 모아놓고 큰 호령을 포고하는데, ‘내가 너희 슬픔을 없앨 것이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한다.”79) 곧 이어서 다산은 정전제 실행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한다.

2) 관전의 확보와 정전구획

(1) 관전의 확보를 위한 재원조달

정전제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우선 많은 관전을 확보해야 한다. 또 경지를 정리하여 구획하는 데도 여러 가지 비용이 든다.

그는 우선 이런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조정에서 다음과 같이 재원을 마련할 것을 제의하였다.80)

79) 田制5, 『經世迫表』 卷7-2.8b(『유표』 II-217).

80) 田制5, 『經世遺表』 卷7-29a~33a(『유표』 II-218~226).

1) 서울과 지방 관아의 留硏을 계산하여 그 일부만 남기고 公田 매입에 쓰도록 한다.

2) 서울과 지방의 감사, 병수사 및 수령 둥의 奉錢과 收入을 보고토록 해서 그 10분의 2만 남기고 役를 돕는데 쓴다.

3) 여러 도의 금은광 중 가능성 있는 곳에 경차관을 보내 금은을 채굴하고 주조하여 재원을 마련하게 한다.

다산은 이렇게 동원할 수 있는 재원을 따져 본 결과, 4 8道의 유고전 총계 1백만 2천 350냥과 감사, 병사, 수사 등의 봉름(예컨대 평안감사의 연봉은 24만 냥, 황주 목사의 연봉 3만 냥) 및 규정 외 수입의 10분의 8 정도라고 판단하였다. 이렇게 마련된 재원은 우선적으로 공전을 매입하는데 사용되는데, "공전 한 구역은 후하게 값을 쳐서 반드시 관에서 매입해야 한다”.81)

물론 이렇게 관아의 유고전을 털거나 관리들의 봉름을 줄여서 公田을 매입한다면 각 관아경비와 관리들의 지출에 차질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다산의 생각으로는, 그러한 재정상의 차질은 일시적 현상이며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보댐이 될 것이라는 계산이다. 즉 새로 확보된 공전에서는 매년 확실한 수입을 보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방관의 봉름을 줄이는 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낭비를 줄이는 점에서도 바람직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또한 금광, 은광, 동광, 철광 동을 적극적으로 개발하여 그 수익을 재용에 보태야 하며 이를 감독하기 위해서 어사룰 파견할 것을 주장하였다. 당시의 광산으로는 강계의 銀坡洞 銀店, 수안의 彦傾山 金店 둥이 유명하였다. 그 밖에도 谷山, 星州, 昌原등 많은 지역에서 광산개발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런 유망한 광산들이 개발되지 못하는 이유를 다산은 산업에 대한 편견

81) 田制9 井田議1, 『經世迫表』 卷7-35a(『유표』 II-230).

에서 찾았다. 즉 “興利하는 자는 모두 小人이다”라고 하는 편견과 金銀店 때문에 "농가에서 일손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잘못된 생각82)이라고 지적하였다.

(2) 사유지의 정전편입

그러나 위의 같은 재원만으로 공전의 확보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관에서 돈을 내어 공전을 산다는 앞서의 말은 곧 준비하기 위함이고, 반드시 낱낱이 돈을 주고서 구한다는 것은 아니다"83)라고 하여 그 의미를 한정하였다. 그리고 다른 대안들 즉 농민들의 사유지를 자진 헌납하도록 하는 방법과 무주전, 진전 등을 개간하여 정전으로 구획하는 방법 등을 강구한 다. 특히 戶絶된 농민의 토지에 대해서는 현행 제도에서도 개간을 장려하기 위해 일정기간 면세해 주는 규정이 있으나 실제로는 전세를 부과하기 때문에 땅을 묵히는 경우가 많다고 보아 이를 개선, 관전화할 것을 주장하였다.84) 또한 罪人에게서 沒入한 토지 등도 하사하지 말고 관전화하며, 마찬가지로 호절된 농지는 마땅히 정전으로 구획해서 軍田으로 만들고 9분의 1을 거두어 군량에 보탠다.85) 또 땅을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권유하여 농지를 자진해서 바치도록 하는 방법을 무게있게 다루었다. 그리고 이룰 권장하는 의미에서 농지를 바치는 사람들에게 田監 동의 관직을 주어 보상할 것을 제안하였다.86) 이 방법은 얼핏 비현실적이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다산은 그것에 대해 낙관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정전제를 실시할 경우에 지주들이 감격해서 농지를 자원하여 바칠 것이라고

82) 田制1 井田論1, 『經世迫表』 卷7-31b(『유표』 II-222).

83) 田制9 井田論1, 『經世迫表』 卷7-34b(『유표』 II-228~9).

84) 田制8, 『經世迫表』 卷7-23a(『유표』 II-206).

85) [I)制8, 『經世迫表』 卷7-23a(『유표』 II-200).

86) 田制9 井田議1, 『經世迫表』 卷7-35b(『유표』 II-227).

믿었고87) 실제로 농민들에게 자신의 정전제 구상을 설명한 결과, 농민들의 호의적 반응을 얻었다는 경험담을 늘어놓기도 하였다.88) 이런 대안은 당시의 전세수탈이 농민의 토지소유를 사실상 허구적인 것으로 만들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다면, 일면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다산은 그것을 확신했던 것 같다.

다산은 또한 민유지로서 주인 없는 땅과 주인이 있더라도 개간할 능력이 없는 땅을 개간하도록 하여 그 중 1/9을 공전으로 삼는 방법89)을 제시하였으며, 서원, 묘지, 사찰 등의 토지에 대해서 면세하는 것은 명분이 옳지 않으므로, 타량하여 정조(井助)에 편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90).

(3) 궁방전 및 관전의 개혁

이 밖에도 왕실이나 각궁에 소속된 궁장토들이 있고, 중앙 및 지방의 관아 및 군영에는 屯田 및 여러 가지 명목의 관유지들이 존재한다. 이것들은 어떻든 명목상으로는 국가의 통제하에 있는 공적 토지이며, 따라서 현행 제도하에서도 운영을 개선한다면 정전에 편입시킬 수 있는 것들이다. 다만 이런 토지들은 원래 왕실이나 관의 需用을 충당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기 때문에 이 토지들을 정전에 편입시킨다면 그에 따른 재원의 보상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그때의 재원은 공전의 수확 죽 1/9 정조에서 마련되어야 한다.

궁방전에는 原田울 하사한 有土免稅田, 原稅를 하사한 無土免稅田 그리고 각궁에서 매입하거나 개간하여 토지를 소유하게 된 宮屯土 죽 永作宮田 등 세 가지 종류가 있다. 다산은 어느 경우를 막

87) 田制9 井田議1, 『經世迫表』 卷7-35b(『유표』 II-227).

88) 田制9 井田議1, 『經世迫表』 卷7-33b~34a(『유표』 II-228).

89) 田制10 井田議2, 『經世迫表』 卷8-3b(『유표』 II-245).

90) 田制11 井田議3, 『經世迫表』 卷8-~b(『유표』 II-276).

론하고 이들 궁방전을 모두 정전으로 묶어, 그 1/9의 조(來+)를 京司에 바치게 하고, 소속 궁에 필요한 비용은 경사에서 지급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91) 그리고 앞으로는 여러 궁에 토지(또는 井助)를 절수하는 경우에도 해마다 고을을 바꿔가며 이획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어떤 토지가 한 궁방에 계속 절수할 경우 궁방의 사유로 전화할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며 또한 농민들이 두 곳에 소속됨으로써 침학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92)

또한 왕실이나 관의 수용을 위해 여러 縣에 설치한 衛祿田, 公須田, 內孟司田 동도 마찬가지로 정전에 편입하고 공수와 아록은 정조(井來+) 1/9에서 취해서 쓰도록 하고93), 여러 驛의 공수전은 모두 혁파하여 軍田으로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주례』의 士田과 官田도 토지를 관리들에게 급여한 것이 아니라 1/9 정조(井/助)를 거두어 祿으로 삼은 것이라고 해석하였다.94)

그 밖에도 관의 기능을 보조하는 지방 하위기관 및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생계를 마련해주기 위해 토지를 급여한 驛位田, 馬位田, 牧位田, 渡田, 津夫田, 急走田 등이 있는데 이것들도 마찬가지로 정전으로 묶고, 공전에서 나오는 수확을 가지고 비용을 충당하도록 하였다.95) 특히 이들 역위전, 목전, 도전, 站田 둥 하위행정을 보조하는 기능에 대해서는, 1/9 井가 모자랄 경우 몇 묘의 토지를 더 주어 충당하도록 배려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는 또한 牧者

91) 田制12 井田論4, 『經世遺表』 卷8-28b~29a(『유표』 II-292~3).

92) 田制5, 『經世遺表』 卷9-28b~29a(『유표』 II-293).

93) 田制12 井田議4, 『經世遺表』 卷8-32b(『유표』 II-300).

94) 田制12 井田論4, 『經世遺表』 卷8-29b(『유표』 II-294).

95) 田制8, 『經世遺表』 卷7-23b~24b(『유표』 II-207~8).

나 상인에게 토지를 賜與한 것으로 흔히 간주되어 왔던 牧田이나 賈田도 사실은 "농지를 하사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9분의 1을 하사한 것이었다"96)고 해석하였다.

이처럼 다산은 당시의 제도하에서도 관전의 확보를 통해서 정전제를 실현해 나갈 여지가 상당히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五營에서 군비를 마련한다는 명분하에 여러 도에 설치한 둔전과 근교의 둔전들은 폐지하여 본래의 軍田으로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97) 이런 생각은 농민은 자기 농지에서 농사지으면서 틈틈이 군사 훈련을 하여 나라를 지키는, 이른 바 兵災合一制를 전제로 한 것이다. "삼대의 법에 천하의 토지는 모두 둔전이었다"98) 고 그는 말한다. 즉 둔전은 원래 정전제 위에 편성되었다는 말이다.

이상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다산은, 한편으로는 조정에서 마련한 자금으로 사전을 매입하거나 無主田이나 陳田을 개간하여 왕전으로 만들고, 농민들이 농지를 바치게 하는 둥 다양한 방식으로 관전을 확보하여 그 중에서 공전을 마련하고 정전을 구획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왕실과 관에 소속되어 있는 농지를 개혁하여 정전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이렇게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여 관전 확보에 힘쓰더라도 물론 거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확보되는 국가의 토지 죽 궁장토, 둔토 둥 면세전만을 그 개혁 대상으로 잡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적지 않은 면적이 된다.99) 그밖에 다른 관전이나 진전, 무주전으로 확보되는 땅, 조정

96) 田制8, 『經世遺表』 卷7-23b(『유표』 II-207).

97) 田制12 井田議4, 『經世遺表』 卷8-29b~30(『유표』 II-295).

98) 田制12 井田議4, 『經世遺表』 卷8-30b(『유표』 II-296).

99) 당시 국가에서 지배할 수 있는 이런 농지는 총 농경지 면적의 약 2.5%를 넘었을 것이다.

에서 마련한 자금으로 매입하는 농지를 보태고 또한 다산이 낙관적으로 보았던 헌납토지 동을 고려에 넣는다면 그 면적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조치들만으로 대부분의 土地를 관전화할 수는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제 남은 방법은 몰수인데, 이미 언급했듯이 그는 이 방법에 대해 분명히 반대하였다. 따라서 이 정전의에서의 논의는 상당 부분의 사유 토지의 존재를 전제로 하며, 당연히 정전 구획도 사전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4) 井田區劃

정전제 실시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요건인 어느 정도의 관전의 확보를 전제로 정전을 구획하는데, 그 방법을 보기로 하자. 우선 정전 구획이 용이한 평지로부터 經界를 시작한다. 정전제의 원형을 그대로 지키는, 평지에서의 정전 구획은 앞서 지적했듯이 농민들에게 보이는 ‘模衍’가 된다.

"여러 도에 신칙해서 무릇 평평한 들판, 넓고 기름진 땅에는 먼저 정전을 구획하여 혹 3 里에 1井을, 혹 5리에 1을 만드는 것이 마땅하다.”100)

그리고 정전 원리에 따라 평지 논의 경우 方 1里인 곳은 1井으로 만들고 방 2리의 땅은 4정으로 구획한다. 그러나 방 1리에 미치지 못하는 땅에서는 1부만 공전으로 구획한다. 그러나 정을 만들지 않았거나 만들 수 없는 곳에서는 타량해서 실제 면적을 계산하는데, ‘4방 6척이 1步, 10보가 1능, 10능이 1敵 10묘가 1 10견이 1부’101) 가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정전 구획이 가능한 평지에서는 농민이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

100) 田制9 井田議1, 『經世遺表』 卷7-35a(『유표』 II-230).

101) 田制9 井田議1, 『經世追表』 卷7-38b(『유표』 II-237).

는지’를 묻지 않고 반드시 정전을 구획을 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국가의 주요 세원이 되는 공전은 수령이나 어사가 巡審하여 그 경작과 수확을 살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네모 반듯한 땅(10묘X10묘=100묘=1부)으로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만 산골짜기의 비좁은 땅에서처럼 타량 또는 衆井의 방식으로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곳에서는 공전도 반드시 100묘 한 필지, 네모 반듯한 땅일 필요는 없다. 예컨대 너비가 5묘이고 길이가 20묘인 밭 1부 한 필지이거나, 혹 너비가 5묘, 길이가 10묘인 0.5부의 밭 두 필지, 또는 너비 5묘 길이 5묘인 0.25부의 밭 네 필지를 모아서 공전 1부로 삼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102) 그러나 이 경우에도 공전은 사전과는 달리 네 모가 반듯하고 비뚤어지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방식은 一易田 再易田의 예를 들면서 "모두가 다 井자 모양일 필요는 없다(不必皆井形也)"103)라고 한 정전론 논의를 구체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산이 정전의 구획 특히 공전 구획에도 그 형태에 집착하지 않는 융통성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적 제약이 많은 토지들의 경계가 가능해지는데 이것은 "정전의 형체가 없으면서도 정전의 실효가 있다(無井田之形 而有井田之質)"104)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경계가 끝나면 魚隣個를 작성한다.105) 어린도는 대략 4方 1里의 지역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리는데, 남북과 동서로 經緯線울 그어서 그 안에 농경지뿐만 아니라 산림, 川澤, 人家, 황무지 둥을 표시한다. 농경지는 각각 境界룰 표시하여 字를 매기고, 그

102) 田制9 井田議1, 『經世迫表』 卷7-39b(『유표』 II-239).

103) 田制4, 『經世迫表』 卷6-6a(『유표』 II-94).

104) 田制3, 『經世迫表』 卷1-16b(『유표』 I-74).

105) 田制10 井田議2, 『經世迫表』 卷8-4a(『유표』 II-247).

림 끝에다가 농지 소유주별 소유 면적을 표시한다. 일종의 地圖 겸 土地帳이다. 따라서 이것은 농지의 소유, 전세의 부과 등을 둘러싼 분쟁의 소지를 없앨 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 전반에 편의를 제공할 것이다.

3) 公田의 경작과 경영

일단 정전 구획이 끝나면 농경지에 맞추어 村里를 조직하는데 그것은 행정 조직인 동시에 사회 조직이기도 하다. 그 방식은 다음과 같다.

“그 촌리를 설정함에 있어서 농지를 기준으로 하는데, 무릇 4井을 村으로, 4촌을 里로, 4리를 坊으로, 4방을 部로 삼는다. 촌에는 村監 한 명을, 이에는 里尹 한 명을, 방에는 坊老 한 명을, 부에는 部正 한 명을 두어, 仁義로 인도하여 공전을 농사짓게 하고 孝游로 깨우쳐서 사전을 농사짓게 한다. 갈고 씨뿌리는 것을 감독하고 모심고 김매는 것을 독려하며, 베어서 수확하는 것을 보살피며, 정성껏 방아찧고 키질하도록 하여 들에서 거두어 公倉에 바친다."106)

여기서 조직의 최소 단위는 村으로 되어 있다. 가장 낮은 행정단위인 촌이 등장하고 井의 하위 조직 단위인 각 부의 대표 죽 首가 촌감의 직접 지휘하에 들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국가체제의 구상이라는 『經世造表』의 성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107)

촌감은 ‘士族이나 良民을 불구하고 청렴하고 신중하며 本末을 따

106) 田制10 井田議2, 『經世遺表』 卷8-6b~7a(『유표』 II-251).

107) 앞의 井田論에서는 10進法에 기초하여 정(田井),通, 成, 終, 同이 된다고 하였는데 반해 여기서는 4但法에 따라 井, 村, 里, 坊, 部로 정한 것은 현실의 鄕村構造를 감안한 변용이다.

져서 일을 아는 자’108)로서 선임되어야 한다. 즉 신분을 떠난 촌감의 선발을 강조하고 있다.

촌감은 촌 즉 4井에 속하는 농민들을 동원하여 공전을 경작한다. 그런데 이때의 役丁 동원은 인구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소유 농지를 기준으로 하지만, 본디 勞動力에 따라 농지가 배정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인구나 호구가 아닌, 노동 능력에 따라 부과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역정을 동원하는 방식도 촌감이 직접 뽑지 않고, 사전 각 1부마다 경작 농민 중에서 公論을 모아 首를 한 사람 뽑고, 그로 하여금 역정을 뽑아 내도록 하고 있다. 여기에는 봉건적 노역 동원 방식에 대한 비판의식이 나타나 있다. 신분을 초월한 촌감의 선임, 농경지 또는 노동력 기준, 농민의 자발적 노역 동원 방식 등 濃民自治主義'의 표방은 비록 村里 수준의 제한된 것이긴 하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109)

다산이 누누이 강조하듯이 정전제의 실시는 농민을 위하고 동시에 정부의 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한 이중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전제개혁이 농민에게 단순히 혜택을 베푸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결코 王政의 폐지론자가 아니었다. 다만 그는 농민의 수탈을 줄이기 위해서 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을 뿐이다. 공전 경작을 우선적으로 하여 확실한 세원이 확보되어야만 재정 수입 부족을 구실로 한 관리들의 수탈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는 거름주기, 고무래질, 물대기로부터 김매기 및 수확에 이르기까지 경작의 모든 과정에서 공전을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110) 또한 개인의 이익을 위해 공전 경작에 지장을 주는

108) 田制10 井田議2, 『經世迫表』 卷8-8a(『유표』 II-253).

109) 여기서의 공전 경영방식은 의 그것과 유사하다.

110) 田制10 井田議2, 『經世迫表』 卷8-8a(『유표』 II-253~4).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경계하였다. 농민들은 우선적으로 공전 경작을 한 다음에라야만 사전을 돌볼 수 있다.

공전의 수확이 끝나면, 그 ‘‘곡식을 8등분해서 首들에게 갈라주어 정하게 찧어서 봄을 기다리게 한다".111) 이것은 이듬해 봄에 국가에 바칠 助栗 즉 전세 몫이다.

4) 井勘法-公田收稅

정전제는 8부의 농민들이 공전을 경작하여 그 수확을 국가에 바치도록 할 뿐 그 밖의 부담을 지우지 않는다는 데 그 근본 취지가 있댜 그러므로 정전제하에서 국가의 수입은 주로 공전 수확에서 나오는 助栗 즉 井勘이다. 물론 정전제 체제하에서도 1/9정조가 유일한 국가 세원은 아니다. 농민 외에도 상인이나 어민 등 모든 九職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정조에 맞먹는 조세를 부담한다. 또한 농민들은 정조 1/9稅 외에 호구 단위의 貢와 壯丁단위의 力役을 일정하게 부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112) 그러나 다산이 살았던 사회는 본질적으로 농업사회이며, 따라서 국가수입의 중요한 몫을 하는 조속히 풍흉에 따라 증감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국가체제의 유지를 위해 곤란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조속에도 일정한 기준을 마련한다.

정전 구획이 끝나고 公田이 확정된 다음, 공전의 조속을 산정하는데, 우선 經田御史가 3년 동안의 기록(文簿 죽 공전 수확에 관한 보고서 또는 장부)을 가지고 현지에 내려가 里尹 및 村監과 협의하여 토지의 등급을 매기도록 한다. 물론 이 등급은 공전에 한정된 것이다.

111) 田制10 井田論2, 『經世迫表』 卷8-9b(『유표』 II-256).

112) 鄭允炯 『茶山의 財政改革’紀, 『茶山學의 探究』 民音社, 1990 참조.

공전의 地品을 3년 동안의 평균수확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는데, 벼 한 알을 심어서 수확하는 양이 최고 100알이 되는 논을 상지상(上之上, 1마지기에 100말 수확)으로 삼고 차례로 그 등급을 낮추어 최저 15알을 수확하는 논가 하지하(下之下, 1마지기에 15말 수확)가 되도록 등급을 매긴다. 이렇게 해서 일단 등급이 정해지면 ‘助栗 몇 말'이라고 일정한 액수를 정한다.113) 그리하여 공전 1 마지기(즉 2半)에 대해 내는 助栗은 다음과 같이 정해졌다.

113) 田制10 井田論2, 『經世遺表』 卷8-11a(『유표』 II-259).

토지 등급 빌 助 栗 (l\' 1( 立 : 斗)

~a '-=- ' 1 2 3 4 5 6 7 8 9 a) 1 마지기의 생산량 100 80 60 50 40 30 25 20 15 b) 공전 1 부의 생산량 4000 3200 2400 2000 1600 1200 1000 800 600 c) 1 가구당 전세 (b/8) filO 400 300 250 200 175 125 100 75

但 : 1 마지기=2.5. 100=1부

그러므로 1부=40마지기이다. 따라서 9부=1井=360마지기

이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1/9세이다.114) 이 경우, 토지 등급별

114) 그런데 田制別考2 『個l說』-『經世遺表』 卷9-19b~20b(『유표』 II-351~2)에는 이와는 다른 기준의 또 하나의 전세 체계(1/20세)가 나와 있다.(아래 표 참조) 이것은 井田論의 井勘法에 기초한 개혁안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전세개혁안도 보인다. 이것은 다산이 극히 다양한 수준에서 다양한 개혁안을 수시로 구상했음을 보여주는 예이고, 따라서 이러한 다양한 개혁안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그 개혁안들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만 그의 사상의 총체적 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0 마지기당 조속(전세) (단위 : 말 ~ 斗)

별전 외전 수전확세량 11 1등60답0 2 1등4답00 3 1동20답0 I 1 1등0답00 2 등90답0 …… 9 등20답0 1I 1 등1답80 …••• 6 등8답0 80 70 60 I 50 45 ••• 10 I 9 … 4

助栗 즉 1부의 산출액(8부의 조속 부담액 즉 전세 합계)은 쌀 농사를 짓는 평지의 논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다산은 이 기준을 여러가지 곡식을 재배하는 밭의 경우에도 적용하였다. 그는 "발도 또한 9등으로 나눈다”고 말하고 나서 밭에는 각기 土品에 맞는 곡식을 심도록 하되, 봄과 가을의 2모작으로 수확한 곡식들을 벼(쌀)로 환산하여, 벼 100말과 비길 만한 수확이 나는 밭을 1등전으로 하고, 그 수확이 벼 15말과 비길 만한 것을 9등전으로 한다고 하였다.115) 이 경우의 밭은 평지의 밭을 지칭하며, 그 예로서 서울을 비롯한 큰 도시 주변의 파발 마늘 밭 배밭, 황해도의 담배밭 함경도의 삼받, 寒山의 모시밭, 전주의 생강발, 강진의 고구마 밭, 황주의 地黃밭 둥을 들었다. 이 밖에도 인삼, 잇꽃[紅花], 大, 木花 등은 높은 소득이 있는 작물이 많기 때문에 이들을 재배하는 토지에는 높은 등급을 매겨 조속을 징수할 뿐만 아니라 貢도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116) 산간 火田에 대해서는 새 井助法의 예외로서, 공전 收稅보다 낮은 세율을 적용하도록 규정하였다.

"무릇 평야의 농지는 모두 井勘에 묶어서 8부가 공전 농사를 돕도록 하고, 화전은 모두 仙口로 묶어서 8口가 100묘의 토지를 경작하는 것으로 했다."117)

즉 공전을 두는 평지의 논밭에서와는 달리 화전에서는 정전 구획이 어렵기 때문에 공전을 두지 않고118) "口로 묶어서" 즉 "농부로서 묘를 계산"119)하여 8口가 100묘의 토지를 경작하도록 해서 1/10세를 거두도록 한 것이다. 농지분배 방법은 평지에서와 마찬가

115) 田制11 井田論3, 『經世遺表』 卷8-17b(『유표』 II-269).

116) 田制11 井田論3, 『經世迫表』 卷8-17a(『유표』 II-270).

117) 田制12 井田論4, 『經世迫表』 卷8-26a(r유표』 II-287).

118) 토지 생산성이 지극히 낮고 인력도 부족하며 농지들이 넓은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화전지대에서는 공전의 공동경작이 어려울 것이다.

119) 田制11 井田論3, 『經世遺表』 卷8-22b(『유표』 II-280).

지로 1夫 1婦로 구성된 餘夫에게는 25묘를, 장정이 4명인 가구에는 50묘를 그리고 장정이 8명인 가구에는 100묘의 토지를 분배한다. 그리고 평지의 전답 5등급을 기준(1200묘 당 1600말 수확)으로 하여 각각 1/10세(벼로 160말, 쌀로는 어말)를 내도록 하였다.120)

그런데 화전에 적용되는 5등급 기준 10분의 1세는 滿河省와 같은 변경이나 생산성이 지극히 낮은 특수한 작물에 대해서는 그 실정에 따라 세율을 더 낮추고, 내는 곡식 종류도 현지의 생산물을 내도록 하는 등 특별히 배려하였다, 즉 "만하성의 六鎭, 三水, 甲山, 長津, 陶와 廢四郡 및 강변 7읍 등지에는 20분의 1 또는 30분의 1세"로 하며 곡식도 귀보리(영당맥)로, 쌀을 좁쌀로 대납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收稅방법과 세율을 변경하면서도 "호남, 영남의 예와 함께 털끝만큼도 다름이 없게 하였다"121) 고 주장하였다. 이는 정전제 원리의 보편적 적용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海西의 旅田 여러 田, 漆田, 松田, 竹田 동은 아예 田籍에 넣지 말고, 貢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하여 특수한 사정을 배려하고 있다.122)

이상에서 요약한 바, 새로운 井助法온 농민의 전세부담을 일정하게 고정시킨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기존 전세제도나 貢法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助法의 정신과 어긋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산은 다시 새로운 年分法을 도입한다. 논의 경우, 대풍년에는 농지 각 등급마다 일정하게 세율을 올려 세액을 정하고, 대흉년에는 災의 정도에 따라 세액을 감면하며, 평년이나 풍흉의 정도가 심하지 않은 해에는 일정률의 災減

120) 田制11 井田議3, 『經世迫表』 卷8-22b(『유표』 II-280).

121) 田制12 井田議4, 『經世遺表』 卷8-26a(『유표』 II-287).

122) 田制12 井田議4, 『經世迫表』 卷8-27a(『유표』 II-289).

을 인정하는 방법이 그것이다.123) 이러한 연분법은 貢法의 폐단을 줄이면서도 損質을 일일이 조사하여 풍흉을 9등급으로 나누는 현실적 損質踏驗法의 폐단을 줄여서 助法의 정신을 살려 보자는 의도에서 마련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새로운 연분법을 적용하는 경우에는 年分이 세 등급뿐이며 災減率도 일률적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전답에 따라서는 공전 수확으로 조속을 내는 데 모자랄 수도 있다. 이에 대해 다산은 분명히 서술한 것이 없다. 다만 "조속을 충당하고도 남는 경우는 9등분하여 1을 촌감이, 나머지 8을 여덟 농민이 나누어 갖는다"124)고 한 것으로 보아 부족한 경우에도 8부의 농민들이 추가로 모아 내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정조법은 정전제하 공전수세의 원형을 수정하였지만 그 기본 정신만은 살리려고 하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結負法 위에 세워진 기존의 전세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가변적인 수확량을 기준으로 삼은 결부법은 토지면적 단위 자체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농민에 대한 부당한 착취의 길을 터놓는데 비해, 정전제에 기초한 새 정조법은 과세대상 토지가 일정하다는 점, 전세를 공전 수확에 한정하여 그 부담이 私田으로 전가될 수 있는 길을 봉쇄했다는 점 동에서 분명히 장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농민 수탈을 억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수의 중간 漏出을 방지함으로써 公家의 수입을 보장한다는 효과도 있다. 다산은 새로운 정조법의 장점을 기존의 결부법에 비해 "公家의 稅入에 보태는 것이 많으나 백성은 공전 농사를 도울 뿐 다시 쌀을 바치지 않으니"125)라고 요약한다.

123) 田制10 井田論2, 『經世迫表』 卷8-14b(『유표』 II-265).

124) 田制11 井田論3, 『經世迫表』 卷8-19b(『유표』 II-273).

125) 田制10 井田論2, 『經世迫表』 卷8-11a(『유표』 II-259).

그리하여 그는 경기도와 전라도 각각의 중등전과 메마른 땅(薄田)에 대해 井勘와 기존의 전세를 비교하고 있는데, 경기도 메마른 땅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126)

*경기 메마른 땅

가) 기존 제도 80마지기 1결(21부) 전세 결당 쌀 214말 4.5결(91부) 전세 쌀 108말 나) 새 정조법 11井(91부) 공전 助栗(하지하) 벼 6010말 =쌀 240말 다) 방세(坊稅) 0.5결(11부)當 벼 100말 4.5결(91부) 벼 450말 軒(私主에게 바치는 것) 0.5결 400말(20섬) 합계 850말

즉 경기도의 매마론 땅은 結負法에 따르면 80마지기가 1결이 되며 그에 대한 전세가 쌀 24말이다. 80마지기는 정전제의 21부에 해당하므로 9부=1井에서 부담하는 전세는 도합 쌀 108말이 된다. 새 정조법에 따르면 1정(9부) 가운데 1부의 공전 조속이 下之下 기준 벼로 600말이며 이를 쌀로 환산하면 240말이 된다. 이 둘을 비교하면 새 정조법의 시행으로 1정 9부(360마지기의 경지)의 전세액은 쌀 140말이 중가하는 셈이다. 그러나 전세 결당 24말은 공가에 바치는 전세일 뿐 농민들이 실제로 부담하는 것 죽 防稅額은 1부(0.5결)당 벼 100말이 며 1정 (4.5결)당 벼 450말이 된다. 그리 고 공전 1부(0.5결)에 해당하는 토지에 대해 지주에게 바쳐야 하는 私租가 벼 400말이다. 따라서 농민들은 농지 11부에 대해 벼 8.50말의 부담을 지고 있다. 그러므로 새 정조법에 따른 1부의 조속 벼 600말은

126) 田制10 井田議2, 『經世迫表』 卷8-11a(『유표』 II-259).

현재 농민의 실제부담보다 벼 250말 줄어든 것이다.127)

127) 여기서는 공전에 해당하는 1부에 대해서만, 과거 전주에게 바치던 諸租를 공전이 되면서부터 부담하지 않게 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에 따라, 나주의 총 전세부담의 변동액을 계산하면 다음과 같다. 나주의 原田은 2만 결인데 중등전 기준으로 하면 1결이 20마지기이므로 총 40만 마지기가 된다. 40마지기가 1부이므로 이것은 1만 부에 해당한다. 이 중에서 공전은 1/9에 해당하는 1,111부 11묘(4444.44마지기)이다. 그런데 5등급의 조속은 1마지기에 40말이므로 나주의 총 조속은 벼로 1,777,776말이며 이를 쌀로 환산하면 47,407섬이 되고 곡(10말=1)으로는 71,111곡이다. 그런데 당시의 防稅의 예는 원잔부전 20,000결에 대해 1결당 벼 100말을 기준으로 총 200,000곡이며 쌀로는 80,000곡, 그리고 공전에 대한 私가 벼로 88,888곡, 쌀로는 35,555곡이 된다. 이 둘을 합하면 농민의 총 부담은 쌀로 115,555곡이 된다. 그러 므로 새 법에 의한 조속 71,111곡은 현재의 방세 및 私租額보다는 44,444곡이 줄어 든 것이다. 과거에 사전이었던 것을 매입했든 증여를 받았든, 공전이 되었으므로 그 토지에 대한 사적 지대(즉 私租)를 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만 국가에 의한 수취액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종전의 전세(80,000곡)에 비해서 새로운 정조(71,111곡)는 8,889곡 줄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반면, 농민부담이라는 관점에서 사조까지를 고려하려면 정전 중 사전 8區에서 지주에게 바치는 地代도 포함시켜 고려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전의에서는 사전 8구에 대해서는 현재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전에 있어서도 과거의 관전을 공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면 농민의 사조부담이 새로 생긴 것이라고 볼 이유가 없다.

5. 맺는 말

이상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다산은 정전의에서, 상당 부분의 관전을 확보하여 정전을 구획하고, 사전 농민들을 동원하여 공전을 경작케 하며, 거기서 나오는 수확을 일정한 기준에 의거, 公家에 바치도록 하는 井助法을 제안하였다. 여기까지는 정전제의 원리가 그대로 관철된다. 다만 사전 81區의 완전한 관전화가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서 기존의 사적 소유권이 생산관계에 어떤 작용을 할 것인지 불분명한 채 남아 있다. 그런데 이처럼 사적 토지소유의 폐지가 불분명한 채, 전주는 그 토지를 여덟 농민에게 균등하게 분배하게 하여 농사짓게 하고 또 공전 농사에 필요한 노력을 동원하는 책임을 맡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공전 1부에 관한 한 토지소유 및 생산관계가 어떤 것인지는 명백하다. 그렇지만 사전 8부에서의 그 관계를 정전의에서는 적극적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다. 이 점이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사전 8부에서 사적 토지소유의 성격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다산 정전제 전체의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적 문제이다.

그러면 사전 8부의 농지에서의 토지 소유관계는 어떠하며 그 제도하에서의 지주와 생산자의 관계 및 분배관계는 어떠한가?

사유토지 위에 구획된 사전 8부에 대한 다산 자신의 언급을 우선 보기로 하자.

“사전 여덟 구역은 時占에게 물어서(주 생략), 만약 그 여덟 구역이 모두 한 집 농지로 되어 있으면, 또한 예전대로 해서 갈라 쪼개는 일이 없도록 하되 다만 시점으로 하여금 8부를 엄선해서 여덟 구역을 나누어주어, 1부가 두 구역을 얻지 못하도록 하면 이것이 바로 정전이다. 이에 이 8부에게 공전을 함께 농사짓도록 하되

한결 같이 옛법대로 한다. 가을이 되면 공전 곡식을 수확하여 이것을 공가에 바칠 뿐이고 조세와 雜料가 이 8부를 다시 침해함이 없으면, 이것이 바로 九一이다.128)

여기서 여덟 구역의 사전은 각기 한 가구의 사유지129)이다. 그런데 이 時占 죽 전주가 8부의 농지를 본래의 정전제에서처럼 여덟 농부에게 균등하게 나누어 주면130) 이것이 곧 정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時占의 토지 소유권에 대해 일정한 제약(이용 및 처분권)을 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시점은 소유권자로 擬制되어 있지만 사실 완전한 소유권자라고 보기 어렵다. “모든 토지는 王田이니 사사 주인을 田主라 할 수 없다. 그러 므로 時占이라고 부른다"131)라고 했을 때의 시점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한편 이 전주에게서 균등하게 토지를 분배받아 농사짓는 8

128) 田制9 井田論1, 『經世遣表』 卷7-35a~b(『유표』 II-230~1).

129) 우리는 이재까지 정전재와 관련하여 토지소유의 개념웅 공전과 사전의 두 가지로 구분하여 사용해 왔다. 그리고 흔히는 사전을 농민의 사유지라는 뜻으로 사용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 공전윤 당시의 개념인 왕전, 관전 때로는 公有 또는 공전 심지어는 共有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또 때로는 근대적 개념으로서의 국가적 소유 또는 사회적 소유 둥의 개념도 사용되었다. 이런 용아들은 각기 태어난 시대적 배경이 있고 또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이런 용어의 부정확한 사용으로 말미암아 불필요한 논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사전을 농민의 사유지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 그것은 정전재에서의 8부의 사전과 혼동을 일으킨다. 마찬가지로 공전을 共有地 또는 국가 소유지로 이해하는 경우에도 문재는 있다. 사실 다산 자신도 그러한 개념상의 혼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다산 스스로 왕토 사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본질적으로 당시의 소유권의 성숙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논문에서도 이재까지는 다산의 용법에 따름으로써 결과적으로 부정확한 용어를 사용해 온 셉이지만 문맥상으로 큰 오해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130) 여기에는 소작지의 균등한 분배라는 개념이 들어 있는데 그것은 갑오 동학농민들의 分作要求와 맥을 통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131) 田制9 井田識1, 『經世迫表』 卷7-35a(『유표』 II-230).

부의 농민들도 정전제하의 사전 8부의 농민들과 같은 것일 수 없다. 그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준 것은 국가가 아니라 지주로서의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경우의 시점과 경작농민 사이의 관계는 당시의 지배적 생산양식인 地主戶制의 그것과 동일한가? 즉 시점은 소작료(도조)를 받을 수 있는 명실공히 토지소유자이며 경작 농민은 시점에게 도조를 바쳐야 하는 客인가?

이에 대한 다산의 확실한 대답은 없다. 다만 개간하거나 뚝을 쌓아 만든 궁방전의 예132)를 들면서 1/9稅 즉 구실133) 외에 5/10의 私, 租를 받는 것을 인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특수한 경우가 되겠지만, 정전제에 따라 軍田을 분배할 때, 騎士와 騎兵에게 분배된 농지에서는 "사람을 빌어 농사지어서 그 10분의 5를 수취한다(昔人田作 收十五)”고 하여 井作半收制를 인정하고 있다.134) 농지의 사적소유를 현실적으로 인정한 위에서 정전제 논의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이러한 언급둘을 관련시켜 보면, 정전제가 전반적으로 시행되더라도 사적 지주소유의 농지 위에서 정전에 편입된 대부분의 농민들은 井/助 외에 5/10의 私를 부담한다든 해석이 가능해진다.135) 이것은 필연적으로 다산의 정전제론이, 적어도 정조법은 지주 전호제를 그대로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 그렇다면 그것이 개혁론으로서 갖는 한계는 분명해진다.

132) 田制12 井田論4, 『經世遺表』 卷8-29a(『유표』 II-293).

133) 원래 九一의 음이 구실로 변했다고 해석하였다.

134) 田制12 井田論4, 『經世遺表』 卷8-36b(『유표』 II-300). 기사와 기병의 경우는 군의 직무상 노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방법여하를 막론하고 목별히 배려할 수밖에 없다는 사정이 존재한다.

135) 이 경우에 여덟 농민은 공전을 공동경작하여 1/9을 공가에 바친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일반적으로 정전론보다 후퇴하였다고 간주되는 정전의에서조차 위의 두 언급을 제외하고는 5/10의 사조를 언

급한 곳이 없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136) 그뿐만 아니라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조법에 의한 조세부담과 기존의 전세부담을 비교하면서 과거에는 사조를 부담하였으나 새 제도하에서는 그것을 부담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 사례(위의 주 참조)는 사전 8구에서도 私租를 부담하지 않는 것으로 암암리에 상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時占은 자신의 토지 소유권을 田監 자리와 바꾼 셈이 된다.

136) 이것은 아마 『經世追表』가 국가체제의 서술이기 때문에 지주와 경작농민 사이 죽 농민 내부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농자득전의 원칙, ‘태아의 칼자루'에 비유하면서 모든 토지의 관전화를 강조한 점, "5/10를 받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는 강한 주장 등 정전론과 정전의에 일관되게 흐르는 믿음과 합치한댜 또 공전의 매입, 농민의 토지현납 등 관전 확보의 노력에 대한 극단적 낙관의 결과일 수도 있고, 지주 전호제와 자작농 체제가 공존하는 현실에서 후자의 우위를 암암리에 전제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에도 문제는 있다. 즉 공전을 위해 농지를 내놓는 사람이 代土를 마련하면, 실제로는 이익을 보게 된다는 계산이 그 반증이 된다.

이처럼 사전의 존폐 및 그것이 정전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다산 자신의 불명확한 설명, 이것이야말로 다산 정전제론에 대한 논란의 근원이며, 정전제론의 함정이 거기에 도사리고 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다산의 정전제론을 총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재구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정전론과 정전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 양자간에는 질적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별개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 연구경향이다. 金

容斐 교수는 정전론과 정전의의 관계를 추상적 원리와 구체적 실천방안으로서, 전자를 후자의 논리적 기초로 보는가 하면, 북한의 정성철, 남한의 愼, 朴贊勝 교수 둥은 그것을 대체로 이상적 목표와 현실적 대안의 관계로 보아 후자가 현실적 제약에 부닥쳐 타협 또는 후퇴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렸다. 한편 姜萬吉 교수는 최선책과 차선책(때로는 최소강령)의 대립으로 설정하였다. 이런 해석은 대체로 다산 자신이 말한 정전의 절반, 차선책 또는 점진적 실현방법과 합치되는 것처럼 보이며 필자도 이런 견해에 공감하지만 양자간의 관계는 추상수준 또는 개혁의 수준에 있어서의 차이에 앞서 정전론과 정전의의 포괄법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자 한댜 즉 정전론은 經典을 토대로 재구성해 낸 전제개혁의 일반론인데 반해 정전의는 정전제론이 『經世迫表』의 총체적 국가체제 안에 편입된 것이라고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정전의는 정전론의 논의에 기초하여, 또한 부분적으로는 보완되어야만 완결성을 갖는 국가체제 개혁론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137)

137) 이런 관점에서 보면 『經世追表』에서의 본래의 개혁안은 정전의이며 정전론은 정전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구성한 정전제론이다. 그러므로 정전론이야말로 농지제도론의 완성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經世迫表』의 기본 틀로 보아서는 정전론(본래의 井田論과 田論2~5를 포함)은 정전의의 논리적 전제로서 제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 필자는 정전제론을, 전론(여전론), 정전론, 정전의는 물론 『목민심서』의 田政 稅法까지도 포함하는 그의 총체적 전제개혁론의 일부로 파악하되, 이 모두를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들 개혁론은 각기 상이한 수준에서 제기된 것이기 때문에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을 대립적인 것 또는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파악해서는 안 되며 이런 이해방식에 따를 때 다산의 전체적 면모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138)

138) 전론(여전론)의 초기 저작설의 근거가 된 精神文化硏究院 所藏本 여유당집에 나와 있는, 1799년의 저작이라는 追은 다산의 의견이 바꾸었다는 암시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론의 원리는 현실적 개혁안의 구상에서 패기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로 살아 남는다. 여전론의 원리는 정전재론에도 스며들어, 묵히 전감과 8부 농민들로 구성되는 하부단위의 생산 및 분배관계를 중요하개 규정한다고 본다. 따라서 다산의 토지개혁론은 명확히 구분짓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1) 전론-여전론(사회제도적 관계를 사상한 수준에서 본 생산양식) 2) 정전론(실현가능한 재도로 재구성된 정진제의 일반적 규정) 3) 정전의(19세기 초 조선조 국가체제 개혁의 일환으로 하는 정전론의 실현방법) 4) 목민심서의 전정, 세법(당시의 사회구조와 조선왕조의 제도를 그대로 둔 채 목민관의 수준에서 정전재론의 목적을 달성하는 방빕)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서로 대립되며, 따라서 양자택일적이며, 시기에 따라 견해가 바뀌어 어느 하나를 포기하여 다른 개혁안으로 넘어 갔다고 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산사상을 동태적 관점에서 총체적,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관점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토지개혁론의 위와 같은 구성은 대체로 보아, 환자개혁론의 1) 환자론 2) 환향의(단순한 형태) 3) 경세유표의 창름지저(발전된 형태) 4) 목민십서의 곡부에 대응한다.

다산의 정전제론에서 자원의 합리적 배분을 중시하는 이른바 치전론적 관점을 두고, 朴宗根139)은 다산이 평등주의를 이탈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한편 李榮薰 교수는 근년에 사적 토지소유의 인정과 관련하여 정전론과 정전의의 개혁수준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것은 정전의가 정전론에서 후퇴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유효한 반론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그는 다산이 사적토지 소유를 숭인한 점을 중시하면서 그것을 다산 정전제론의 진보성의 주요 근거로 내세웠다. 다산이 사적소유의 장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는 사유지의 몰수나 8부의 토지를 매년 10월에 농부들에게 바꾸어 준다는 당나라의 제도(十

139) 朴宗根, 『茶山 丁若鏞의 토지개혁사상의 고찰』, 『봉건사회해체기의 사회경제구조』 청아출판사, 1982, 232쪽.

月改授法)를 가소롭게 보았다.140) 그는 또한 "백성은 이 농지가 永業으로 된 것임을 안 다음에라야 자갈을 치우고 잡초를 없애며, 밭도랑을 단속하고 거름을 많이 하게 될 것이다"141)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다산은 사적소유의 장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가적 토지지배로부터 농민의 토지에 대한 권리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지 지주전호제로 발전할 수도 있는 사적 토지소유권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편 池斗煥교수는 최근 산업화가 곧 근대화라는 관점에서 다산 사상의 북학파적 요소만이 근대적이라고 보는 견해를 제시하였다.142)

140) 田制5,『經世迫表』 卷6-18a(『유표』 II-120).

141) 田制3, 『經世迫表』 卷5-33a(『유표』 II-67).

142) 池斗煥, 『朝鮮後期 質學硏究의 問題默』 참조.

다산 사상의 기저에는 근대적 합리주의 정신이 튼튼하게 잡고 있고, 그것이야말로 그를 정통유학자들로부터 구분해주는 특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본질로서의 이익의 추구욕, 사적 소유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도 그러한 합리주의 정신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해석들이 전면적으로 부당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강조가 농지의 절대적 사적 소유권, 나아가서는 지주전호제까지도 지지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지주전호제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다산 농지 개혁론의 바탕을 부정하는 결과가 된다. 뉘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결과적으로 근대화론과 맥을 같이하는 이러한 문제제기가 사적 소유권의 절대성, 시장의 만능 동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만연된 사조와 무관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물론 이런 언급은 기존의 연구관점과 인식방법에 근본적인 반성이 전제될 때에 비로소 의미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산 정전제론, 그리고 그의 경제사상의 진보적 성격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그의 몸에 밴 유학의 전통, 그리고 그의 개혁안들이 고대 중국 고대사회의 왕도정치를 모델로 하고 있다는 점 의에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봉건정부의 수호자로서의 그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 『민보의』의 저술 등은 그의 보수적 면모를 입증해 주는 데 부족함이 없는 요소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이 정통유학을 단순히 계승하는 데 머물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구는 바록 유학을 옹호하였지만, 그것은 기존의 유학 특히 性理學的 전통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그는 유교 경전의 전통적 해석에 반대하였으며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고, 그것을 그의 새로운 세계관에 기초하여 재구성하였다. 그는 불변의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던 정통적 유학자들의 경전해석을 비판한 혁신적 유학자였다. 그는 이들 정통적 유학자들을 俗라고 매도하였다.

물론 정전제를 통해서 이룩하고자 하는 사회는 형태상으로만 보면 중앙집권적 고도의 官僚的 統制國家와 유사한 것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그의 사상의 進步的 性格을 추출하기는 어려울런지도 모른댜 그러나 외견상 왕도정치를 지향하는 것이며 따라서 일종의 復古主義라고 부를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전제를 통해서 다산이 추구했던 바는 단순한 王道政治로의 회귀는 아니었다.

이제까지 다산의 정전제론 또는 사회경제 사상의 진보적 성격을 흔히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근대지향적 성격'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이 경우 근대 지향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매우 모호하게 처리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다산사상의 진보성의 근거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湯論」에 나타난 민주주의, 「田論」(田制)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이다. 그런데 다산의 토지개혁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생산양식은 무엇인지 즉 지주경영 또는 경영형 부농의 형성인지, 자작농의 창설인지, 유토피아 사회주의인지, 그리고 그것들은 각기 역사발전에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분명하

게 밝혀지지 않았다.

서민지주에 의한 것이든 양반지주에 의한 것이든, 지주의 토지집적에 의해 經營形 沼을 지향한다는 논의는 지주에 의한 자본주의적 농업의 창출 즉 위로부터의 개혁의 길을 암암리에 상정하고 있다. 그런데 다산이 개혁하려고 했던 바, 지주전호제에 기초한 토지의 집적 즉 소작지의 확대재생산이 되풀이되는 역사적 추세에 비추어 볼 때, 토지겸병에 기초한 경영형 부농의 성장을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과 연결시키는 데는 많은 의문이 남는다.

한편, 소작농으로부터 자작농으로의 전화는 예속농민의 봉건적 지주의 토지지배로부터의 해방, 나아가서는 봉건적 地稅수탈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다산의 정전제 하에서도 물론 8부의 농민들은 공전에서 노역을 부담한다. 이는 노동지대가 그대로 존속하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들이 사전의 독립된 경작자가 되었다고 해서 봉건적 토지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왕토사상에 기초한, 즉 上級 所有才에 의거한 국가의 자의적 조세수탈의 가능성이 남아있는 한, 그 봉건성이 청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국가체제의 전반적 개혁 특히 신분제, 전세제도 둥의 개혁을 수반한다면, 정전제에서의 自作의 성립은 비록 公田에서의 노역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봉건제의 해체를 수반할 것임에 틀림없다. 봉건제가 해체된 다음에라야 그 해체된 공간에서, 그것이 자본주의적인 것이든 아니든, 근대적 요소가 싹틀 수 있는 것이다. 정전제론에서 다산은 독립적 자작농의 창설을 중요한 목표로 설정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본주의의 맹아를 위로부터 창출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정전제론에는 여전히 대지주에 의한 地主經營의 여지가 남겨져 있으며, 그리고 토지의 공동체적 소유와 토지의 반복적 재분배를 함축하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적 요소도 여전히 남아있다.

지금까지 조선 후기 경제사 연구에서는 토지집적에 의한 경영규모의 확대를 역사적 추세로 보고 그것을 經營形 이라는 범주로 설명하는 흐름이 있어 왔다. 이런 논의는 자본주의적 借地의 발전을 염두에 둔 것이지만, 지주에 의한 토지의 집적이 지주경영이 아닌 병작제의 확대 재생산으로 이어지는 것이 역사적 대세였으며, 다산의 여전제론이나 정전제론은 병작제의 그러한 모순을 개혁하는데 제1차적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다산의 정전제론을 토지집적에 기초한 부농의 성장=자본주의적 발전의 길과 결부시키는 것은 역사적 현실과 들어맞지 않는다.

한편, 다산 토지개혁의 진보적 성격을 자작농의 창출 그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농민에 대한 토지분배는 토지를 매개로 한, 봉건적 지주에 의한 농민의 지배, 그들의 봉건적 田稅수탈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물론 다산의 정전제 하에서도 8부의 농민들은 公田에서 노역을 부담한다. 이는 노동지대가 그대로 존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왕토 사상과 그것에 가초한 상급 소유권에 의거한 국가의 자의적 조세수탈의 여지가 남아있다. 따라서 8부의 농민들이 독립된 私田경작자가 되었다고 해서 봉건적 토지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봉건성이 완전히 소멸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런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제개혁과 관련, 국가체제의 전반적 개혁 특히 신분제, 전세제도 등의 개혁을 수반한다면, 정전제하의 8부의 농민은 自作股에 가까운 존재로 전화할 것이다. 또한 그 잉여노동의 비율은 1/9에 불과하다. 더욱이 收稅룰 위한 공전 경작이 8부 각자의 사전 경작에서 완전히 단절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농민 스스로 경작하여 전세를 충당하기 때문에 관리들의 전세를 빙자한 농민 침해를 막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이 경우 사전 농민의 사회적 지위는 중세 서유럽의 농노나 예농의 그것과는 분명히 구별되며, 따라서 그들의 전세는

근대적 형태의 단순한 토지세, 그들 농민은 독립적 자영농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이렇게 해서 정전제의 실시로 자작농 체제가 정착되어 간다면 그것은 봉건제의 해체에 기여할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낮은 생산력과, 영세농지에 얽매어 있는 한, 이들 자작농민들에게서 이윤범주가 성립하기까지에는 상당한 기간과 그들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조건의 성숙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 자체를 자본주의적 또는 근대적 생산양식의 창출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봉건적 속성을 떨쳐버린 자본주의의 맹아이며, 따라서 그 성장은 점차 봉건제를 해체시키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봉건제에서 벗어나는 과도기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것 자체가 자본주의적안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봉건제가 해체된 다음에라야 그 해체된 공간에서, 그것이 자본주의적이든 아니든, 근대적 요소가 싹틀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사회로의 이행기에 다양한 형태로 출현한 유토피아 사상은, 넓게 보아 공동체적인 삶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지만, 그 내용은 지극히 다양하였다. 토지(생산수단)의 소유의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공동체적 소유 또는 균등한 분배 둥 다양한 형태의 요구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시민혁명기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토지의 사회화 또는 균등한 분배 등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민중적 요구로 구체화되었다. 토지의 사회화 또는 재분배를 요구하는 민중운동은 시민혁명을 이끈 중요한 사회적 동력의 하나였으며, 사회주의라고 하는 위대한 사상적 유산을 후대에 남겼다.

다산의 유토피아적 이념은 여전제론에서 뚜럿한 형태로 표현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유토피아적 이념은 정전제에서 소멸한 것이 아니라 변형되고 완화된 형태로 여전히 살아 남았다. 비록 왕토적

이념 하에서이긴 하지만 정전제서 추구한 腹民像은 자작농 체제이며 정전제하의 자작농의 創定 구상 아래 깔려 있는 균등한 토지분배, 농민적 자치 및 자주적 경영의 이념은 유토피아 사상의 한 형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상이 실현될 때 그것은, 주관적으로는 왕도정치의 부흥을 꿈꿨던 다산 자신이 의식하고 있었든 그렇지 않았든, 봉건제의 해체로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정전제로 실현되는 사회는 기존의 봉건사회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 될 것임은 자연스럽게 기대할 수 있다.

다산의 정전제 논의는 왕의 결단에 기대했듯이 근본적으로 위로부터의 개혁안인만큼, 봉건적 지배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릴지도 모르는 그러한 개혁이 가능했겠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것은 단순히 제도개혁의 차원을 넘어서는 매우 본질적이며 근본적인 물음이다. 그것은 농민의 밑으로부터의 요구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실현 불가능한 대안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갑오농민전쟁에서 그 농민적 요구의 실체와 그 역동성을 확인한다. 그러나 다산 자신은 밑으로부터의 근본적 변혁의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의 계급적 한계이기 이전에 역사적 한계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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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編 • -_ _- ----=:.-::-==--: __ :__ _ _,

明淸 實學思潮와 그 現實 意義

辛冠潔

명 중엽부터 청 중엽사이에 강대한 실학사조가 나타났다. 이 사조는 倫家經世明을 계승하여 중국 봉건사회의 말기에 나타나 明 • 活 초기 ’天崩地解'하는 시기에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는 사회의 각 영역에서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여 새로운 사회의 면모를 이룩하였다.

1. 明淸 實學思潮의 表現과 特色

이 사조의 선명한 특색은 우선 문예예술(문학 • 소설 • 희곡 • 음악 • 회화 등)이라는 제일 민감한 영역에서 나타났다. 문학 면에서 현실주의 계열의 작품들이 대량으로 나타났다. 이 작품들은 암혹시대의 흉악함과 잔폭함, 그리고 서로 속이고 속고하는 어두운 면을 무정하게 폭로하고, 인민들의 반항투쟁과 아름다운 염원을 노래하였으며, 情悠울 고양하고, 道理를 타기하면서 시민의식을 뚜렷이 반영하였댜 그들은 인민들을 참해하는 봉건제도 • 봉건예교와 사람을 질식시키는 사회를 풍자하고 멸시하였으며, 인도주의정신과 낙관적이고 적극적인 정서를 펴면서 낡은 사회의 멸망과 새로운 사

회의 도래를 명시하였다.

문학영역과 같이 예술영역에도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 원래 현실과 이탈하고, 민중과 이탈해 있는 융통성이 없는 무거운 그런 분위기를 타파했다. 그리하여 淸藤(徐消), 白(陳道復), 石(原沿), 八大(朱育)와 揚八怪(金此, 鄭斐, 李魚, 任士愼, 黃愼, 羅期, 高翔, 李方應), 그리고 그 이후의 鄧石如, 陳必牛, 包世臣 등 뜻을 이루지 못한 一群의 문인 • 서민출신의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풍격으로 崇하고 보수적이며, 독선적인 옛 법을 타파하여 '昔古今'의 슬로건을 내걸었다. 뿐더러 ‘師造化' • '自家’ 등 일련의 현실주의 주장을 제기하여 사람들에게 ‘耳目祐新'하고 ‘朗倫快'한 느낌을 주는 대량의 ‘不任輯' • ‘筆意縱窓'하고 우수한 작품을 창작하였다. 이런 작품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생활에 임하는 새로운 풍모를 여실히 반영하였으며 一代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 놓았다.

문예는 역대로 새로운 사회풍기를 형성하는 선도자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현상도 情雨計처럼 새로운 시대의 폭풍의 도래를 게시하고 있다.

이 사조의 또 하나의 특색은 중국 전통 자연과학이 새로운 형세 아래서 근대의 서양 자연과학과 결합하여 이룬 새로운 발전이다. 중국 자연과학은 고대에는 서양세계의 전체 문화재부를 소유하고 있는 아랍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으며, 기원 3-13세기 사이에는 줄곧 서양에서 도저히 따라오지 못할 수준으로 내달렀다.” 그러나 훗날의 理學 말류가 性命을 공론하고, 실제 사업에 힘쓰지 않는 虛無的 학풍의 영향하에 점차 낙오하였다. 明 중엽이래 일부 자연과학가들은 각성하기 시작했으며, 原始的이고 經驗型의 낡은 형태를 타파하고 과학기술의 새로운 국면의 개척을 시도하였다. 의학가이

1) 李約瑟. 『中國科記述史』 序言.

며 의약학가인 李時珍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人의 사유작용을 발견하고 "뇌는 元神之府이다”라는 과학적인 관점을 제기해 ”心之官則思" 즉 心이 사유의 기관이라는 원시적인 관념을 교정하였다. 특히 장기간의 관찰 • 고증 • 실험을 거쳐 『木草綱目』이라는 과학저작을 내놓았다. 이 저서는 약물학 뿐만 아니라 박물학 방면에도 아주 높은 과학적 가치가 있어 후세, 나아가서 세계에 심각하고도 광범한 영향을 끼쳤다. 李時珍과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多學科學家朱載拍은 다년간의 연구를 거쳐 많은 선진적인 과학성과를 획득했으며, 서로 다른 進位f1개의 數의 환산문제를 解決했는데, 이는 라이프니츠의 二進法과 十進法의 數의 환산보다 백 년 이상 앞서며, 더 의의 있는 것은 그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수학에서 12평균율의 이론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는 것이다. 서양 선교사들의 서양과학지식의 전파에 따라 중국의 과학은 현대과학의 큰 흐름에 합류하는 추세가 나타났다. 그래서 현대 과학적인 의식을 가진 과학가들이 많이 출현하였다. 徐光啓, 徐弘祖, 宋店星, 博, 方以智, 王錫, 梅文, 劉戱廷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天文曆算 • 지학지리 • 의학약물 • 기술과학 등의 방면에서 새롭고도 거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들은 대개가 선교사들과 학술교류를 하여 중국과 서양의 문화가 융합하는 시대정신을 구현하였다. 그 시대적 색채를 띤 자연과학 저서들이 끊임없이 나왔는데 『本華綱目』 • 『樂律全』 • 『農政全』 • 『徐露客游記』 • 『天物』 • 『物理小識』 • 『羽庵新法』 • 『幾何通解』 • 『廣陽雜記』 등이 그것이다. 이 모든 저서들은 원시 • 고전과학으로부터 근대과학으로 연변하는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기의 과학 진홍은 "經世致用"의 정신을 띠고 있으며 실천 • 고찰 • 검증을 중요시하는 새로운 학풍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사조의 또 하나의 다른 특색이라면 ‘史學經世' • ‘通經致用'이다. 理學 말류의 허무학풍의 영향하에서 明代 前의 史學과 經學

은 항상 현실을 이탈하고, 국가의 경제와 국민의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았댜 명 중엽이래 학술에서는 점차로 ‘六經皆史'2) • ‘史學經應' • '通經致用'으로의 추세를 보였다. 羅欽順은 경학의 속박을 벗어나 '經世宰物'이라는 관점을 제기했으며 黃館은 章句守經의 곤경에서 벗어나 ‘經理世務'의 天地로 들어섰으며, 王良은 경학을 버리고 학문을 강의했다. 張居正은 사회에서 ‘內聖’에 편중하고 '外王'을 홀시하는 경향을 바로잡았으며, 李는 ‘書奴'를 배척하고 ‘章句話'하고 ‘傍人師堡'하는 사람을 미워하면서 의심을 가지는 정신과 ‘學必經世’의 學風을 제창했다. 그들은 주장만 제기하고 이론만 천명했을 뿐만 아니라 친히 행동에 옮겨 후세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黃宗羲에까지 와서는 더 체계적으로 학문은 “本之經以窮其原 • 參之史以究其委"(「沈昭子嚴草」 • 「文足後染」1)해야 한다고 하면서 經史로 하여금 經世하는 經史가 되고 실용에 통일하는 經史觀을 주장하였다 황종희는 鄕文戱과 時人文을 중요시하는데, 『四全書總目提要』에 의하면 황종희는 『明文海』를 쓰기 위하여 “明人의 文渠 이천여 개를 열독했다"고 한다. 그는 바로 여기서부터 經과 史의 통일, 특히 經 • 史와 經世의 통일규칙을 찾으려 했다. 全祖은 그를 평가해서 "선생은 처음부터 주장하기를 ‘학술은 반드시 經術에서 출발하여 허무하지 않으려면 史籍으로 증명해야 하며, 나중에 충분히 실제에 옹용하고 의거할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結埼亭渠外編』권16). 황종희는 자신의 經世의 經術 • 사학으로 청대의 浙東史學新風울 열었으며 淸代의 ‘史學之祖'(梁啓超의 말)가 되었다. 黃宗羲의 계몽 아래 萬斯回 全祖望, 章學誠 둥의 걸출한 사학가들은 중요한 역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浙東史學派룰 형성하여 실학사조의 시대정신을 뚜렷이 체현하고 체계

2) ‘六經皆史’라는 명재는 王隔明, 王世貞, 李鈴, 潘南山 둥이 모두 사용한 적이 있으며, 章學誠부터 완비화되기 시작했다.

적인 사학과 經術이 經世하는 관점과 이론체계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明末淸初의 절개지사와 저명한 학자들을 표창하고 그둘을 위해 전기를 남기며 碑를 세우는 등 "學問所以經世 • 文章丁斯明道"라는 주지에 도달하였다. 이 학파는 그들의 현저한 실학 특징으로 역사철학의 높이로 한 걸음 나아갔다.

이 사조의 마지막, 그리고 제일 중요한 한 특징이라면 통일적인 철학기초가 있고 일종의 理論指迫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학 • 예술·경학·사학·자연과학의 활동이 모두 社會人와 밀접히 관계되며 모두 經國濟世룰 근거로 한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인정세태를 내용으로 하고 진실한 감정을 담은 희곡 • 소설 • 시 • 회화와 기타 예술 작품은 인간성을 속박하는 정통사상 • 도덕관념 • 허위풍습을 부정한 산물이다. 자연과학 방면의 新成果는 守苗自滿하고 국민들의 질곡을 무시하는 것을 반대한 결과이다. ‘六經皆史' • ‘史學經世' • 通經致用' 등 관점의 제기와 절개를 표창하고 流波룰 평론하고 뾰哲을 묘사하며, 明이 멸망한 교훈을 총괄하는 史論의 출현은 ”言性命者不究於史" • ”舍人事而言性天"과 같은 性理를 공담하는 풍조에 대한 편달이다.

철학은 시대정신의 정수이며 시대의 영혼이다. 명 중엽으로부터 청 중엽에 이르기까지 이런 정신풍모를 대표할 수 있는 것으로는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은 시민의식을 반영하고 공허한 학풍을 반대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실학이다. 하지만 실학의 영혼은, 인간의 가치에 대한 긍정과 발전이며, 인간의 개성해방, 인간의 사회 욕망에 대한 만족이다. 이 시대적인 과제는 당시의 사상가들이 줄곧 고민한 것이며 두 가지 체계로 반영되었다. 첫째는 治世의 강조(현재의 사회와 국가를 잘 다스리는 것)를 위주로 하는 사상가이고, 둘째는 사람들의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새로운 天地룰 창조)을 위주로 하는 사상가이다. 첫 번째 계열에 속하는 사상가들로는

주로 羅欽順 王廷相, 黃縱 崔銃 高机 張居正, 陳子, 張履祥, 李閩 顔元, 李慮 阮元 둥이다. 두번째 계열에 속하는 사상가들로는 王長, 何心, 李, 黃宗羲, 唐瓦, 戴 등이다. 물론 이런 구분은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야기한 것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첫째 계열에 속하는 사상가들은 正統을 반대하지 않거나, 혹은 그다지 반대하지 않았다. 아니, 혹은 너무 상궤를 벗어나 도리를 어기는 것이 아니라, 실제와 민생을 중요시한다. 두번째 계열의 사상가들은 정통을 반대하고 민주색채를 띤 媒端 혹은 이단적인 성격을 지닌 학자들이다 이 두 계열의 사상가들은 차이가 있지만, 봉건을 반대하고 사상속박을 반대하는 면에서는 대체로 일치하여 공동으로 실학사조의 발전을 추진시켰다. 다만 제2계열 사상가들의 영향이 더욱 폭 넓고 심각하여 사람들의 자각성과 민주정신을 깨우치고, 그들은 정치 • 경제 • 학술 특히 문학예술에 대하여 더욱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실학의 정수이다.

2. 명청 실학사조의 시대구분과 기본내용

위에서 명청실학은 유가의 경세전통을 계승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것은 유가의 경세치용사상이 나타나자 실학이 생겨났다는 것은 아니며, 실학의 핵심과 주류가 경세치용학이라는 것도 아니다. 만약 경세치용이 실학의 핵심이고 주류라면 그것(경세치용)은 유가의 전통이며 또한 유가의 핵심이자 주류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유학과 실학을 혼동하는 폐단이 있으며, 실학의 제기도 불필요할 것이다. 하물며 이것은 사실에 부합되지도 않다. 우리의 연구에 따르면 실학은 하나의 특정한 역사적 범주이며, 일정한 역사시기의 산물이다. 그것이 존속한 시기도 일정 기간인데, 그 기

간은 명 • 청시기, 즉 명 중엽부터 청 중엽(기원 1465-1850년)이라는 이 역사시기이다. 그 사조는 아마 明 正德부터 萬曆 전기의 산생과 발전단계(명대의 사회모순과 정치위기의 초보적 전개 단계를 반영함), 明 萬曆 중기부터 活 康熙 중기의 고조단계(명 • 청 교체기의 사회적 대동란 상황을 반영), 淸 康熙 중기부터 아편전쟁 전기의 쇠퇴단계(청 통치자들이 문화적 전제통치를 강화하고, 제국주의 세력이 침입하며, 자본주의적 맹아는 박해를 받는 상황을 반영)이다. 실학이 명 중엽에 산생해서 청 중엽까지 존속한 데에는 사회 • 역사적 근원이 있다. 그 사조의 산생은 사회의 일종 잠재적인 大嬰革의 요소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명 중엽부터 산생한 자본주의 맹아이다. 이런 맹아가 성장하자면 여론의 지지와 이론의 지도가 필요하며, 적합한 환경을 필요로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務慣的 풍토이다. 동시에 이런 맹아상태는 원래의 사회기초를 위협하고 王点가 바뀌는 위험을 부를 수 있는데 이것은 통치계급 내부의 선각자로 하여금 일어나서 비평과 자아비평을 하여 자아조절을 진행하도록 한다. 이런 상황에서 실학이 시대에 순응하여 나타났다 그러나 비교적 낮은 발전수준에 있는 민족이 中原으로 쳐들어오고 또한 제국주의의 침입으로 중국은 봉건사회로부터 봉건 • 반봉건 • 반식민지로 전락되는 둥 여러 가지 조건의 제약으로 자본주의적 경제맹아는 자본주의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맹아상황을 반영하는 상부구조도 의미가 없어졌으며 실학 사조도 쇠퇴했다.

명청시기의 실학사조는 객관적으로 중국이 봉건사회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과정에 교량적 역할을 했어야 했지만, 운명은 그 사조로 하여금 마땅히 했어야 할 역할을 하지 못하게 했다. 실학사상의 산생 • 발전 • 쇠퇴는 모두 시회 • 역사적 조건이 결정한다. 그 사조는 하나의 특정한 역사적 범주이다. 실학은 명 중엽부터 청

중엽사이에 산생할 수밖에 없었다. 실학은 명 중엽 전에 산생할 수 없었다. 비록 先秦 때 이미 經世致用이라는 사상이 있었고, 송대에는 이미 陳亮 • 葉適의 事功學派가 있었으며, 程願 • 朱는 모두 ‘실학’이라는 명사를 썼지만 그때부터 이미 전문적인 실학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때의 경세치용은 事功을 논했는데, 이는 유학에서의 주장하는 내용이고 또한 유학이라는 체계 안에 속해 있었는데, 이것은 유학 ‘內聖’之道의 外化이다. 즉 ‘外王’의 공이다. 목적은 유학과 적응하지 않은 사회질서를 수호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실학은 淸 중엽 이후까지 존속할 수 없었다. 비록 戊戌堤法 • 日維新이 모두 실학자의 思想武器를 사용했었지만,3) 그 시대 사조의 주류가 아직 실학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때는 이미 근대 자본주의 학설이 산생하였으며 실학은 이미 하나의 사조로 시대로부터 버림을 당했다. 우리가 실학이 하나의 역사적 범주라는 것은 그 내용으로부터도 증명받을 수 있다. 이 사조의 기본 내용은 1) 경세치용 전통의 발양, 2) 물욕의 안정과 근대의식의 계몽, 3) 공상무역의 제창과 자연과학의 발전이다. 위의 이 내용들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실학사상은 경세전통의 지양이다. 일정한 정도에서 실학은 경세치용에서 기원하였으나, 그 본질은 전통에 대해 반역하고 낡은 것을 탈피하며,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맹아가 순조롭게 발전해 나갈 수 있다면 계속 지양하여 자본주의의 무기로 변신할 수 있지만 조건을 구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도에서 요절했다.

3) 무술변법시기 諒嗣同, 梁啓超 둥 유신파 수령들은 황종회의 『明夷待訪錄』을 대량으로 인쇄하여 발행했다.

3. 명청 실학사조의 가치와 현대적 의의

명청실학사조의 가치와 현대적 의의를 분명히 하려면 먼저 이런 사조가 산생할 수 있었던 사회적 사상근원을 밝혀야 한다. 명청 실학사조가 산생할 수 있었던 하나의 직접적 원인은 나라의 부강을 모색한다는 염원하에서이다. 중국봉건사회는 대개 南宋시기부터 이미 末로 들어섰다. 그 후의 긴 발전과정에서 봉건사회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하여 통치계급은 여러 가지 사상 무기를 사용하였다. 그 사이 비록 여러 차례 진홍이 나타났지만 최종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농민 봉기와 왕조의 교체에 따라, 이런 사상의 속도와 그 깊이는 강화되었다. 명 중엽 특히 중엽의 말기쯤, 농민봉기 • 청군의 진입 • 통치계급내부의 모순은 大明江山으로 하여금 아주 위태로운 경지에 처하게 하였다. 이것은 깨어 있는 사상가둘로 하여금 그렇게 된 상황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원인도 알 것을 요구하였다. 비록 그들은 사회발전의 규칙으로는 그 원인을 밝히지 못하더라도, 경험으로 미루어서도 탐색을 해야 했다. 그들은 꾸준한 노력을 거쳐 점차, 국가의 패망 원인이 ‘讀書靜坐' • '空談性天'에서 초래된 것이며, 오칙 공허 • 무지를 극복하고 실학 • 실습 • 실험 • 실행 • 실사구시 해야 나라와 민족이 다시 진홍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실제에 입각하고 현실을 직시해야만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앉아서 道룰 논하고 希聖 • 希天의 큰 소망을 지껄이며, 誠意 • 正心 • 修 • 齊 • 治 • 平의 방략을 얘기한다고 해서 실제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무슨 일이 생기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이런 사고가 비록 주관의식에 대한 역고민이고 근본 문제점을 건드리지 못했지만 여기에는 풍부한 역사적 교훈이 것들어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깊이 사색케 하였다. 그래서 이것이 실학의 산생을 추동하였으며 후세에도 계몽적 역할

을 하였다.

명청실학사상이 나타날 수 있었던 두번째 원인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맹아와 시민계층의 점차적인 각성이다. 새로운 시민계층과 그들의 기초-수공업 • 상업의 발전과 확대, 노동력 고용의 점차적인 발달은 모두 실천을 필요로 하였다. 이는 본심과 절조를 지키고, 性을 함양하며, 양심을 발견하고, 삼강오륜을 실행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새로운 경제사회관계는 새로운 사상무기로 자신을 위하여 앞길을 개척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실학이 본질적으로 반전통적이고, 자신의 前道를 새로움의 창조에 걸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이 바로 실학의 가치이다. 또한 이런 본질이 문학 • 예술 • 과학 • 기술 • 정치 • 철학 동 광범한 영역에서 새로운 국면이 나타나게끔 했다. 이런 변혁은 그 규칙을 찾을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응당 이러한 것을 잘 정리해서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파악해야 한다.

명청실학사조가 나타난 세번째 원인은 시대의 大璃과 大堤革이다. 명 중엽이래 농민은 봉기하고, 변방의 위기는 날로 극심해졌으며, 통치계급 내부는 자신들의 알력으로 정신이 없어 內及外患에 대처하느라고 바빴다. 이런 상황에서 276년간이나 통치룰 해왔던 大明王는 드디어 농민봉기에 의해 전복되었으며, 잇따라 淸의 귀족들이 中原으로 들어왔다. 정치에서 경제까지, 내부에서 외부에 이르기까지 온 중국은 한 차례의 사회적 대동란과 역사적 대변혁울 치렀다. 중국 역사상에서 사회적 대동란 • 대변혁이 있을 때마다 의식형태의 대변혁 • 사상체계의 대변혁이 있었다. 실학사조는 바로 이런 대동란 • 대변혁의 과정에서 형성되었으며 고조되어 갔다. 중국 수천 년의 역사에서 몇 차례의 대동란 • 대변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새로운 思想武器가 나타났다. 戰國은 한 차례의 대동란이었는데, 秦의 통일에 이르러 한 차례의 대변혁이 있었다. 이 한 차례

의 동란과 변혁은 諸子百家 學說을 산출했으며, 중국 민족정신의 사상을 풍부히 하였다. 秦의 멸망은 한 차례의 大動亂이었고, 漢의 통일은 한 차례의 대변혁이었는데, 여기에서는 獨篠儒術과 天人관계를 중심으로 한 天人惡應 • 天人合一사상이 나타났으며, 봉건통치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하고 儒家思想 2천 년의 정통적 지위를 확립했다. 漢 • 兩晉 • 南北朝 사이에 있었던 대동란 • 대변혁을 거쳐서는 ‘本采' • ‘體’ • ‘自然無爲' • ‘名敎自然' 등을 기본 범주로 하는 玄學이 나타나게 하였다. 이 현학의 출현은 중국 민족의 추상적 사유수준의 대폭 진보를 표명했다. 隋唐 사이에 있었던 대동란 • 대변혁은 釋家禪宗 및 佛家와 대립적 위치에 있는 儒家道統論을 산출했다 宋元 사이에 있었던 대동란 • 대변혁은 新儒學, 죽 理學과 心學을 산출했는데, 이것은 유가학설이 최고봉에 달했음을 표명한다. 明 중엽과 明 • 사이에 이르는 대동란과 대변혁을 거치면서는 質學을 산출했다. 실학은 근대 자산계급 철학과 혁명학설의 육성자이며, 동시에 어떤 차원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 전파되는 교량이기도 하다. 그것의 실험 • 실행과 실사구시를 중요시하는 품격은 오늘날의 중국 사회주의 新文化 건설을 위하여 경험을 제공하고 있댜 사회의 대동란 • 대변혁을 거쳐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사상무기를 산출한다는 것은 규칙이다. 明 • 실학사조 역시 이런 규칙의 산물이다. 명청실학사조의 발전과정 중에 얻은 경험과 교훈은 우리가 이런 규칙을 인식하고 우리의 사유능력을 제고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위의 명 • 청 실학사조의 세 가지 근원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명 • 청 실학사조의 진정한 가치를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제창하는 실학 • 실습 • 실험 • 실용의 학풍과 실사구시의 정신을 통하여 중국 고유의 개성과 사상을 속박하는 질곡을 타파할 수 있었다. 명 • 청 실학사조는 본질적으로 낡은 관념 • 낡은 도덕 • 낡은

예교 • 낡은 습관을 타파하고, 개성을 해방하며 생산력을 해방하여 중국 역사상에서 새로운 발전시기의 도래를 맞이하기 위하여 앞길을 개척하는 任을 맡고 있다. 비록 조건을 구비하지 않아 끝까지 나아가지 못했지만, 실학의 모든 성과를 말살할 수는 없으며, 실학사조가 後世에 남긴 사상적 財富는 아주 풍부하여 총괄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박은숙 옮김)

17世紀의 中國實學

陳祖武

중국의 학술발전에 있어서 17세기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는 바로 중국역사상 明에서 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해당하며, 명말에서 청초까지 근 백년 간에 이르는 역사의 대혼란은 왕성한 質學思湘l를 잉태하였다. 본고에서는 陸世儀 • 黃宗羲 • 顧炎武 및 顔李學派 등 대사상가들의 質學思想에 대하여 살펴보고, 나아가 17세기의 중국실학에 대한 미숙한 견해를 제기해 보고자 한다.

1. 陸世儀와 『思辨錄』

陸世儀(1611-1672)는 江蘇省 太倉人으로, 字는 道威이며 號는 剛齋이다. 明朝가 망하자 號를 粹亭이라 바꾸어 학자들은 그를 符亭先生이라 높여 불렀다. 明末 王學 후예들의 병폐를 감안한 육세의는 학문을 시작한 초기에 東林學派의 迫風을 계승하여 王學을 바로 잡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일생 동안 학문을 함에 있어서 經世에 뜻을 두었으며, 宗旨룰 표방하지 않았고 門派를 세우지도 않았다. 단지 朱生가 제창한 ”敬에 거하여 이치를 궁구한다'’”라는 가르침을 治學의 입문방법으

로 삼아, 몸소 실천하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널리 天文 • 地理 • 水路 • 兵法 등을 두루 섭렵하여 뛰어난 대유학자가 되었다. 저서로는 『思辨錄』과 『論學酷澤』, 그리고 시문과 잡문 등 40여 종, 100여 권이 있다. 그 가운데 『사변록』은 평생에 걸친 그의 학문 정수를 담고 있는 저서로써 가장 유명한 것이다.

『사변록』은 明 崇禎 10년(1637)에 저술하기 시작하였는데, 『中庸』의 "신중하게 생각하고(愼思)", "올바르게 변별한다(明辨)”는 취지에 따라 학문적으로 체득한 바를 매일마다 기록한 것이다. 당시 사회위기가 날로 심각해지는 것을 목도한 육세의와 그의 동향 친구인 陳胤 盛敬 江土部 등은 서로 뜻을 모아, ‘修己治人'의 ‘體用之學(실체와 응용을 중시하는 학문)’을 제창하였으니 그 당시 ”婁東四君子'’라 일컬어졌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육세의와 진호 등은 벼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오로지 학문연구에만 마음을 쏟았다. 그후 12년이 흘러 順治 5년(1648)에 이르자, 육세의는 뛰어난 재능으로 "추우나 더우나 쉬지 않고, 개인의 실의나 득의에도 개의치 않으며, 나라가 혼란하나 안정되나 끊임없이"2) 『사변록』을 집필하였으니, 그 원고가 "책상자에 가득하고 광주리에 넘칠“3) 정도였다. 이 원고는 하루하루 생각한 바를 수시로 적은 札記이기 때문에 체계가 정연하지 않아 盛敬 江士部 두 사람이 내용의 종류에 따라 정리 • 편집하여 『思辨錄輯要』라 하였다. 順治 16년 겨울, 이 책은 江西省 安義縣의 知事 毛天盟의 원조를 받아 간행되었다. 출판하기 전에 江, 盛, 陳의 세 사람은 다시 육세의가 順治 5년에서부터 17년 사이에 저술한 것을 보충시켰다. 이 책이 발간되자 날개돋친 듯이 나갔다. 同時代의 巨儒 顧炎武나 顔元 또한 육세의에게 편지를 보

1) ”居敬窮理"

2) 『思辨錄輯要』 卷首 『思辨錄輯要序』 : “無間寒, 無間窮達, 無間治亂."

3) 『思辨錄輯要』 卷首, 『思辨錄輯要序』 : ”充簡滿"

내 진심으로 찬사를 표시하였다. 고염무는 편지에서 円에서 『사변록』을 읽고 금세에 선생같은 진정한 유학자가 계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읍니다. 맹자께서 ‘뜻을 얻지 못하였을 때에는 자기 자신을 수양하고, 득의하였을 때에는 널리 천하를 구제한다’고 하셨는데 당신께서는 이 內聖外王의 道를 겸비한 분이십니다.4)

라고 하였댜 顔元은 『사변록』이 "언어가 매우 참신하여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5) 점을 좋아하였다. 따라서 그는

선생께서는 孔孟 學의 宗旨를 터득하였을 뿐 아니라 아울러 孔孟 本性의 요체를 깨달으셨으니, 이미 저의 마음을 사로잡으셨습니다 今世에 있어서 유가의 道를 올바르게 계승한 자는 선생이 아니면 누구이겠습니까?6)

하며 육세의를 推하였다. 육세의가 서거한 뒤에, 이 책은 다시 宋榮, 張伯行 등에 의하여 再刊되었다. 張刻本은 初刊의 前 • 後 2집을 하나로 합하여 35卷 14門으로 만들고, 順治 18년 이후 육세의가 계속 기록한 부분을 증보하였다. 장백행은 당시의 유명한 理學家였기 때문에, 그에 의해 정리된 육세의의 저서는 일세를 풍미하게 되었다. 乾隆 연간에 편수된 『四庫全書』에 수록된 『사변록집요』는 바로 장각본이다. 道光 17년(1837), 安徽省의 提督學政 沈維短가 初刻完本을 구하여 張本과 비교 • 교정하여 再刊하였다. 光緖 3년(1877),

4) 『亭林餘 • 與陸粹亭札』 : ”於禎『思辨錄』, 乃知當吾有眞偉如先生者, 孟子所謂窮獨善其身 達兼濟天下', 具內聖外王之事者也.”

5) 『存學編』卷1, 『上太倉陸符亭先生書』 : "殊新奇該人"

6) 『存學編』 卷1, 『上太倉陸符亭先生書』: ”先生不惟孔孟學宗, 兼悟孔孟性旨, 已先待我心矣 當今之世, 承情道摘派者, 非先生其誰?"

江蘇書局에서 다시 沈本울 저본으로 삼고 張本과 비교 • 교감하여 小學 • 大學 • 立志 • 居敬 • 格致 • 誠正 • 修齊 • 治平 둥의 8 類를 前渠 22권으로, 天道 • 人道 • 諸儒 • 異學 • 經子 • 史籍 등 6 類를 後渠13권으로 하고, 類別로 구분하여 요지를 설명한 방식은 盛敬과 江士部 두 사람의 예전 편집방식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변록집요』에는 깊은 의미가 매우 많이 담겨 있지만, 그 요점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 宗旨를 표방하지 않고 門派를 세우지도 않은 점이다. 육세의는 비록 朱子롤 숭상하고 육상산이나 왕양명의 학술에 대하여 비판하였으나, 무의미한 문파의 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廣서의 논쟁에서 주자와 육상산이 서로 다른 점과 같은 점에 대하여 분별하였는데, 古今의 분분한 논쟁으로 그 여파롤 다시 일으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7)

라고 하였고, 또한 "근대의 儒者들은 각자의 宗旨를 확립하고 각기 門派를 나누어, 서로 치켜세우기도 하고 서로 헐뜯으며 배척하기도 하니 古人을 대하기가 정말 부끄러워 죽을 정도이다"8)라고 하였다. 그리고 陸九淵에 대하여 언급할 때에는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육상산의 인물됨은 심히 위대하다. 그 어록의 의론은 매우 고매하며 기상은 심히 광활하여 初學者가 읽으면 마음을 넓힐 수 있다.9)

7) 『思辨錄輯要』炤渠 卷8: ”朗湖之會, 朱陸異同之辨, 古今衆談, 不必更揚其波.”

8) 『思辨錄輯要』後渠 卷8 ”近代偉者, 各立宗旨, 各分門戶, 互相標傍, 互相抵排, 以視古人, 眞情死.”

陸子社(육상산)은 진실로 만 길이나 우뚝 선 바람벽 같아서 그 사이로 부는 바람소리를 들은 자는 청렴하고 굳세며 나약함을 없앨 수 있다. 더욱이 총명한 자들을 잘 고무하므로 총명한 자들 역시 그에게로 나아가기를 좋아한다. 만약 말단으로 내려가 사람들에게 공부하는 것을 가르치려 한다면 그 학문이 어찌 주자만 못할손가?10)

王守仁의 學術에 대해서도, 그는

왕수인은 ‘致女’ 가운데에 ‘良’이라는 한 글자를 덧붙여 새롭게 만들어 후세 학술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사람들이 세속적인 영리함을 '’라고 여길까 걱정하였기 때문일 것이다.11)

라며 역시 적절한 평가를 하였다. 그는 또한 "程 • 朱의 ‘居敬窮理',…… 왕양명의 ‘致良知'는 모두 소위 治學의 입문수단으로 모두 道에 이르게 할 수 있다"12)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학문의 宗旨를 물으면, 육세의는 간단명료하게 "정말로 宗旨가 없다”13)고 대답하며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9) 『思辨錄輯要』後染 卷1: ”陸象山人物. 其語錄議論高, 氣象桂, 初學者讀之, 可以拓心胸.”

10) 『思辨錄輯要』後染 卷8: ”陸子靜眞是壁立萬例 其風者可以廉碩去信 尤善鼓舞聽明人, 故聽明人亦喜起之. 若下村和敎人韻, 其學: 遜朱子?”

11) 『思辨錄輯要』後染 卷3: ”工新建於’致知中用一字, 函有功於後學, 蓋恐人以世俗乘巧爲知也.”

12) 『思辨錄輯要』後染 卷2: "程 • 朱之‘居敬窮理'…… 王月之’致良知', 皆所謂入門功夫, 皆可以至於道.”

13) 『思辨錄輯要』後染 卷2: "無宗旨"

大儒는 결코 宗旨를 표방하지 않는다. 의사로써 비유를 한다면 나라에서 제일 가는 명의는 정통하지 않은 진료과목이 없고 모든 처방을 구비하고 있으며 사용하지 않는 약이 없다. 어찌 수많은 처방 중 최고의 처방만을 가지고서 득의양양하여 사람들에게 이르길 ‘이 처방 외에 다른 약은 없다’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근자에 宗旨를 논하는 자들은 모두 수많은 처방 중에 奇方을 고집하는 자들이다.14)

둘째, 經世에 뜻을 두었으니 그 포부가 넓고 크며 이치에 밝다는 것이다. 육세의가 일생 동안 학문을 함에 있어서 비록 埋家의 치학방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義理를 강구하는 데 중점을 두기는 하였지만, 그는 학풍이 독실한 학자였다. 제자들을 모아놓고 講學하며 공허한 담론만을 일삼는 明末 理學家들의 오랜 악습에 대하여 層나라 사람들의 淸談"15) • ”處士들의 방자한 의론"16)이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천하에 講學하는 자가 없으면 이는 世道가 쇠한 것이며, 온 천하에 모두 講學하는 자가 널려 있으면 이 또한 世道가 쇠한 것이다. …… 嘉慶 • 乾隆 연간에 서원이 천하에 퍼져 있었고, 學하는 자는 많은 것을 중히 여겨 친지와 친구들을 끌어들이니 걸핏하면 천 명이나 되었다 그림자를 따르고 소리를 좇으며,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일을 그르치며, 심지어는 이를 빙자하여 사사로운 일을 행하는 자도 있었다. 이것이 소위 처사들의 방자한 의론이니 천하 사람들이 어떻게 믿고 의지한단 말인가?17)

14) 『思辨錄輯要』後渠 卷9: “大偉決不立宗旨. 之醫家, 其大醫國手, 無科不精 無方不, 無藥不用. 登有執一海上方而常以語人曰‘此方之外別無藥'? 近之談宗旨者, 皆海上奇方也.”

15) "人淸談"

16) ”處士橫議"

이와는 전혀 다른 풍격의 주장을 제기한 육세의는 "用世에 적절한"18) 六藝乳學울 강구하고자 하였다 그는

옛날의 六는 배우는 자들이 모두 마땅히 배위야 했는데, 이제는 그 법이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 우리들이 만약 마음을 다하려 한다면 옛것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으며 지금의 時宜에 따라 판단하고 옛날부터 전해오는 법을 참조하며 고려하여 행할 것이다.19)

라 하였고, 또한

요즘 사람들이 배워야 할 것은 꼭 六松에만 국한되지는 않으니, 천문 • 지리 • 수로 • 병법 같은 것들은 모두 用世에 아주 적절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俗儒들은 內聖外王의 학문을 모르고 다만 性命에 대하여 高談만 하니 세상에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이라 이것이 이 시대가 암둔하다고 비난받는 까닭이다.20)

라고 하였다. 그는 서양 학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數學으로 세상에 쓰여지기를 특별히 강조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17) 『思辨錄輯要』前集 卷g: "天下無講學之人, 此世道之哀, 天下皆講學之人, 亦世道之哀也.……嘉隆之, 召院通天下, 講學者以多爲貴, 呼朋引類, 動繩千人, 附影逐聲, 廢時失, 莊至有以行其私者, 此所處士橫議也, 天下何類焉?"

18) ”切於用"

19) 『思辨錄輯要』前集 卷18: ”古者六慕 學者皆當學之, 今其法不. 吾荀欲用心, 不必泥古, 須相今時宜, 及參古遺法, 的而行之.”

20) 『思辨錄輯要』前集 卷18: "今人當學者, 正不止六藝, 如天文 • 地理 • 河渠 • 兵法之甄 皆切於用世, 不可不講. 俗個不知內聖外王之學, 徒高談性命, 無補於世, 此當世所以來之請也.

수학은 육예 가운데 하나로 천천히 공부해도 될 것 같지만 사실은 급히 배워야 한다. 무릇 천문·역법·수리·병법·농경 둥은 모두 수학을 사용하여야 하는 것으로, 수학을 모르거나 알기는 하지만 정통하지 못하다면 세상을 위해 유익하게 쓰인다고 말할 수 없다.21)

셋째, 明末淸初의 사회 제반문제에 관한 적극적인 탐구이다. 육세의는 『사변록』에서 前渠 절반 이상의 편폭을 할에하여 소위 ‘修身 • 齊家 • 治國 • 平天下'의 도리를 연구하였다. 그 입론의 근거는 매우 분명하였다. 明朝 멸망 이전에는 사회위기에 대한 강렬한 관심이었으며, 明朝 멸망 이후에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역사적 반성이었댜 그는 ”士人은 변혁을 꾀해야 하니 이미 出仕한 자들과는 다르다”22)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은거하여 道를 가슴에 품고 지조를 지켜 土하지 않으며, 토론하고 저술에 힘써 後[장에게 혜택을 배풀고 萬歲룰 바르게 한다.23)

는 것을 그가 입신처세하는 데 있어 최상의 선택으로 삼았다. 이러한 선택은 바로 청대에 들어선 이후에도 그가 계속하여 『思辨錄』을 저술하게 된 목적을 대변하는 것이다. 육세의에 의해 진행된 탐구에는 봉건정치체제·관료제도·토지조세·화폐법·水利浩運·軍制兵法 • 禮制法律 • 학교교육 동 중요한 방면이 두루 포함되어 있다. 비록 역사적인 한계 때문에 그는 "封建 • 井田 • 學校"를 "정치

21) 『思辨錄輯要』前渠 卷1; "數爲六松之一, 似緩而貫急. 凡天文 • 律曆 • 水利 • 兵法 • 四田之紙 皆須用算學者, 不知, 難知算而不精, 未可云用世也.”

22) ”士人當革 與已出仕者不同.”

23) ”懿居抱道, 守貞不仕, 討論著述, 以惠後學, 以淑萬歲.”

의 大綱"으로 파악하고 “三代의 정치"를 회복하는 데에 희망을 걸었으나,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비난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중에는 적극적인 사회적 가치를 지닌 견해 또한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그는 봉건전제정치체제가 갖는 오랜 폐단을 폭로하고 군주의 전횡을 규탄하여

三代 이전에는 천하가 天子 한 사람이 얻은 사사로운 것이 아니었으나, 秦나라가 봉건제도를 페지하자 천하는 한 사람을 받들게 되었다.24)

고 지적하였다. 그는 봉건제도와 군현제도를 하나로 합하는 방식을 통하여 "양자의 단점을 없애고 장점을 모아"25) 현행 정치체제를 변혁시키고자 하였다. 또 그는 학교교육의 중시와 學官 지위의 제고를 주장하고, 宋人 胡暖의 학교법을 모방하여 經義와 治事 두 가지를 설치하여,

經義는 마땅히 『易』 • 『詩』 • 『書』 • 『禮』 • 『春秋』 동의 科로 나누어야 하고, 治事는 마땅히 天文 • 地理 • 水路 • 兵法 둥의 科로 나누어야 하며 각각 유명 전문가를 초빙하여 그 首長으로 삼아야 한다.26)

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들은 당연히 그 시대에 있어서 충분히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것이었으며, 아울러 黃宗淡나 顧炎武보

24) 『思辨錄輯要』前集 卷19: “三代而上, 天下非天子所私也, 秦廢封建, 而始以天下奉一人.”

25) 『思辨錄輯要』前集 卷18: ”去兩短, 渠兩長"

26) 『思辨錄輯要』前集 卷20: ”經義當分爲『易』 • 『詩』 • 『書』 • 『禮』 • 『春秋』諸科, 治事則宜分爲天文• 地理 • 河渠 • 兵法諸科, 各血專家名士以爲之長."

다 먼저 제창하였으니 그 創始의 공로는 실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2. 黃宗羲의 君主專制 政權體制에 대한 비판

黃宗羲(1610-1695)는 浙江省 餘姚人으로, 자는 太이며 호는 南混 혹은 梨洲라 하며 학자들은 그를 梨洲先牛이라 존칭한다. 劉宗周의 학문을 계승하고 멀리는 王陽明을 종주로 삼은 그는 i恨山學派의 중요한 계승자이다. 黃宗는 비록 王學의 후진학자이지만 시대의 변천에 따라 ‘天崩地解'의 사회현실 속에서 王 • 의 학문을 확대하여 理學의 낡은 규범을 초월하게 하였다. 黃宗羲는 "漏者의 학문은 천지롤 經魚하는 것이다"27)라 여기고 학문과 事功의 合一을 주장하며 "국가의 急難을 구하려고"28) 하였다.

그는 經世에 뜻을 두었기 때문에 국가경제와 民生에 관련된 학문은 두루 섭렵하여, 史學 • 經學 • 天文曆算 • 音樂 • 地理 • 寺文 및 版本目錄學 등 여러 학문에 걸쳐 박학하였다. 그는 일생동안 부지런히 저술하고 끊임없이 제자를 가르쳐 당대의 학술계에 萬斯同, 萬斯大와 같은 저명한 經史學家를 배출하였을 뿐 아니라, 후세에 『明夷待錄』 • 『明儒學案』 • 『明文海』 둥 대량의 저서를 남겨 주었다.

청대학술사상 黃宗羲는 큰 성취를 이룩하였으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걸출한 사상가로서, 그의 이론적 공헌은 특히 군주전제정권체제에 대한 비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중국고대의 君主專制는 明代에 이르러 전례없이 강화되어, 경제 • 정치 • 군사 • 학술문화 동 모든 사회생활영역은 이 政權體制에 의해 심각한 梧浩

27) "者之學, 經緯天地.”

28) 黃宗羲 『南雷文定』 5집 권3 『姜定庵小傳』 : ”救國家之急難"

울 겪게 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명말의 天啓 • 崇禎 년간은 바로 가장 극에 달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환관이 나라를 어지럽히며 熹宗을 그들의 꼭두각시로 부리다가, 毅宗 때에 이르러서는 정권을 독점하고 모든 일에 황제의 칙명을 사칭하니 걸핏하면 죄를 뒤집어쓰는 조정대신들은 풍전등화 같은 처지에 놓였다. 이 지경에 이르자, 정권체제의 암흑상이 여지없이 폭로되어 결국에는 명왕조의 멸망을 초래하였다.

청조에 들어선 이후, 명왕조의 멸망이라는 역사교훈에 입각하여 黃宗羲와 陸儀는 함께 솔선하여 군주전제정권체제에 대한 평가문제를 제기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광범위한 내용의 개혁방안을 내놓았던 것이댜 일찍이 順治 10년 가을, 그는 "다스려짐과 혼란함의 연고"29)를 고구하기 위하여 『留書』 1권을 저술하였다. 본서는 「文箕」 • 「封建」 • 「衛所」 • 「朋」 • 「史」 • 「田脂』 • 「制科」 • 「將」 둥의 8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당시 명조 부홍에 대한 바램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는 본서 중에서 명조를 ‘本'라 칭하였고 ‘戌秋'과 ‘中國'의 경계를 시종 구분하면서 편견을 쉽게 버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고대정권 형식의 변천이나 歷代兵制, 특히 명대 衛所制度의 득실 및 晩의 爭 등에 관한 문제들은 이미 모두 黃宗羲의 연구대상에 속하였다.

康熙 원년(1662), 南의 永曆政權이 붕괴되어 명조 부흥이 물거품으로 변하자, 黃宗羲는 길을 바꾸어 저술을 救世의 수단으로 삼아 매진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그는 이전 『留書』 중의 이론을 심화하여, 다음해에 불후의 명저 『明夷待訪錄』을 완성하였다.

『明夷待訪錄』은 分卷하지 않았으며 「原君」 • 「原臣」 • 「原法」 • 「粧相」 • 「學校」 • 「取士」 • 「建都」 • 「方鎭』 • 「田制」 • 「兵制」 • 「財」 •

29) ”治亂之故"

「史」 • 「窟」 등 13편을 포함하고 있다. 만약 「仇書」의 저술이 명왕조를 부흥시키려는 의도에서 당시의 폐단을 비판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明夷待訪錄』은 ‘一姓의 興亡’이란 차원을 이미 벗어나 군주전제 정권체제를 비판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었다. 『 明夷待訪錄』의 주요 내용에는 다음의 세 가지가 있다.

黃宗는 우선 君臣의 직분을 명확히 하였다. 그리고 똑같이 천하 만민의 樂에 힘을 쏟는다는 전제 아래서, 군주와 신하 두 사람은 "명목은 다르나 실질은 같다"30)는 이치를 논증하였다. 黃宗羲는 秦을 분계선으로 하여 중국고대역사를 두 시기로 구분하였다. 그는 秦 이전의 시대를 ‘古’라 칭하고 奈 이후의 역대왕조를 모두 ‘今'이라 칭하였다. ‘‘옛날에는 천하 만민이 主人이었으며 군주는 客이었으므로, 군주가 일생 동안 經한 것은 천하 만민을 위해서였기"31)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그들의 군주를 사랑으로 받들어 아버지에 비기고 하늘에 견주었던 것은 참으로 잘못이 아니지”32)만 "지금은 군주를 主人으로 삼고 천하 만민을 客으로 삼아 온 천하가 安寧을 얻지 못하는 것은 군주 때문이다"33)라고 그는 생각했다. 또 그는 主客 관계의 전도로 말미암아 군주의 전횡과 독재를 초래하게 되어, "천하 사람들이 그 군주를 원망하고 미워하며 원수같이 생각하여 獨夫라고 부르는"34)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여겼다. 따라서 黃宗羲는 이룰 근거로 "천하 만민에게 큰 害를 끼치는 자는 오직 군주일 뿐이다"35)라는 급진적인 견해를 제기하였다.

비록 秦 이후의 역대 군주에 대해 이렇듯 맹렬히 비판하기는 하

30) ”名異而司"

31) ”古者以天下爲主, 君爲客, 凡君之所畢世以經營者, 爲天下也.”

32) "天下之人愛戴其君, 比之如父, 似之如天, 誠不爲過.”

33) ”今也以君爲主, 天下爲客, 凡天下之無地而得安寧者, 爲君也.”

34) "天下之人怨惡其君, 視之如忘仇, 名之爲獨夫.”

35) ”爲天下之大害者, 君而已矣.”

였지만, 黃宗淡는 결코 君主制度를 부정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三代之治'의 부홍을 동경하였으며 聖明한 君主의 출현을 고대하였다 그의 마음속에는 군주가 될 표준으로서 오직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 개인의 이익을 이익으로 삼지 않고 천하 만민으로 하여금 그 이익을 받게 하며, 한 개인의 해로움을 해로움으로 생각하지 않고 천하 만민으로 하여금 그 해로움에서 풀려나게 한다.36)

는 것이었다. 그의 표현을 사용하여 말하면, 이것을 ‘‘군주로서의 직분"37)이라 한다. 이렇게 직분이 분명한 이상, 수천 년간 전통으로 전해져 온 "신하는 군주를 위해 존재한다"38)라는 편견을 부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黃宗羲는 계속해서 그의 君臣觀을 천명하였댜 그가 보기에는 群臣百官의 出仕 목적도 군주와 마찬가지로 오직 한 가지인데, 그것은 바로 "천하를 위해서이지 군주를 위해서가 아니며, 萬民을 위해서이지 一姓을 위해서가 아니다"39)라는 것이었다. "天下를 위하고" • ”萬民을 위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하여, 黃宗羲는 "천하의 治은 一姓의 홍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만민의 憂樂에 달려 있다”.40)라는 주장을 피력하였다.

바로 이런 점에서 출발하여 黃宗羲는 明代의 재상폐지정책을 부정하고 조정관원을 "군주의 分身"41)이라 부르며 재상으로 君을

36) ”不以一己之利爲, 而使天下受其利; 不以一己之害爲害, 而使天下釋其害"

37) 『明夷待訪錄 • 原君』 : ”爲君之職分"

38) ”臣爲君而設"

39) ”爲天下, 非爲君也. 爲萬民, 非爲一姓也.”

40) "天下之治亂 不在一姓之興亡, 而在萬民之及樂.”

41) ”分身之君"

제한하고자 시도하였다. 그와 동시에 군주와 신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유독 天子만이 확연히 等級을 초월한 존재는 아니다"42)라 지적하고, 나아가 "신하와 군주가 명목은 다르나 실질은 같다".43)라는 그의 이론을 논증하였다.

그 다음으로 黃宗는 "다스리는 법이 있은 후에 다스리는 사람이 있다”이라는 法治主張을 제기하였다. 한 국가는 法治에 의존해야 하는가, 아니면 人治에 의존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관해 중국고대에 한 차례 논쟁이 전개된 적이 있었다. 西淡 武帝 이후, 儒家思想을 존숭함에 따라 소위 ‘君子’가 나라를 다스리는 人治思想이 확립되었다. 이때부터 "다스리는 사람이 있은 후에 다스리는 법이 있다”45)라는 원리가 널리 성행하여 역대왕조가 국가를 다스리는 기본 강령이 되어 버렀다. 이 문제에 관한 黃宗羲의 務思想(실학사상)은 전통편견에 대한 대담한 부정으로 표현되고 있다. 군주와 신하의 직분에 대한 논증과 마찬가지로 黃宗羲는 중국역사상의 법률을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秦 이전의 "天下의 法”이며, 다른 하나는 秦 이후의 ”一家의 法”이다. 즉 秦 이후 법률이 갈림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모든 역대왕조에서 엄정하고 세밀한 法度를 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천하의 亂이 法 속에서 일어나기"46) 때문에 "천하의 다스려짐과 혼란스러움은 법의 有無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47) 기현상을 야기하기에 이르렀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黃宗羲는 전통사상의 속박을 벗어나 대담하게 "다스리는 법이 있은 후에 다스리는 사람이 있다”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던 것이며,

42) ”非獨至於天子遂截然無等級.”

43) 『月夷待訪錄 • 原臣』 : ”臣工與君, 名異而賀同.”

44) ”有治法而後有治人.”

45) ”有治人而後有治法.”

46) "天下之亂于法之中"

47) "天下之治亂不繁于法之存亡"

“三代 이전에는 法이 있었는데 三代 이후로는 法이 없다”48)라고 단언하였다. 그리고 그는 또 군주가 마음대로 법률을 짓밟는 것을 제지하기 위하여 學校와 學官'의 지위를 최대한 제고시킬 것을 주장하고 "학교에서 그 是非를 公論할 것"49)을 제창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天子가 옳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니며, 天子가 그르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그른 것이 아니므로 天子도 감히 자기 마음대로 是非를 결정하지 못하고 學校에서 그 是非를 公論하는 것이다.50)

다음으로 黃宗羲는 ’紙民’을 宗旨로 하는 經濟思想을 천명하였다. 중국고대의 사상가들이 주장했던 전통적인 경제이론은 바로 “富를 백성들에게 비축시킨다”51)라는 것이었다. 경제가 붕괴되어 가는 明末의 냉혹한 현실을 목도한 黃宗羲는 역대 경제정책의 성패와 이해득실을 결산하여 土地制度 • 賊役負擔 • 商業活動 • 貨幣制度 등 국가의 기본경제문제에 대하여 先人의 "麻民"思想을 발전시켰다. 明朝가 멸망하게 된 것에는 정치방면의 원인도 있었지만, 경제방면에서 근본적인 원인 역시 있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던 黃宗羲는, 경제방면의 원인을 두 가지 점으로 결론지었다. 그 중 하나는 "奪田”이고, 다론 하나는 "暴稅”이었다. 土地兼供이란 문제에 직면하여, 그는 三代의 井田制를 부활시켜 "토지를 주어 백성들을 기를 것"52)을 주장하였다. 가혹하고 잡다한 세금의 무분별한 징수를 杜

48) 『明夷待訪錄 • 原法』 : “三代以上有法, 三代以下無法.”

49) ”公其是非于學校"

50) 『明夷待訪錄 • 學校』 : "天子之所是未必是, 天子之所非未必非, 天子亦遂不政自爲是非, 而公其是非于學校."

51) ”藏富於民"

絶하기 위하여, 그는 "천하의 田賊룰 다시 정해야 한다"53)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점에 집중되어 있다.

백성에게 田地를 줄 경우에는 10분의 1 과세를 원칙으로 하고, 백성에게 田地를 주지 않을 경우에는 20분의 1 과세를 원칙으로 하며, 그 戶口 에 出兵 • 兵을 부과한다.54)

賊稅의 구체적인 납부방식에 관해서, 黃宗羲는 "토지에서 생산되는 것에 따를 것"55)을 주장하였으며, 銀을 징수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강요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따라서 그는

百穀을 생산하는 자에게는 百穀을 내게 하고, 桑麻를 생산하는 자에게는 布을 내게 하여, 雜物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생산물을 내게 하면 백성들이 곤궁함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56) 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명대 화폐제도의 폐단을 감안한 黃宗羲는 한편으론 "金銀을 폐지하고 화폐의 가치기준을 모두 錢(銅錢)에 두어"57) 유통을 원활히 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론 풍속의 개혁이라는 근본 취지에서 착수하여 사치를 일소하고 검소함을 따르는 양호한 사회기풍을 배양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黃宗羲의 ‘富民’思想은 工商活動을 경시하는 전통적인 편견에 반대

52) “授田以投民"

53) "血定天下之賊.”

54) “授田于民, 以一爲, 未授之, 以二十一爲, 其戶口以爲出兵兵.”55) ”任土所宜"

56) 『夷待訪錄 • 田制三』: ”出百殺者賊百穀, 出桑麻者賊布用, 以至雜物皆賊其所出, 斯民庶不至困岸爾.”

57) ”廢金銀 使貨幣之衡盡歸于錢"

하며, 봉건국가의 ‘崇本相)末'이라는 경제정책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가하고 있다는 점이 더욱 가치있는 것이다. "무당을 위해 물건을 파는 것"58)과 "진기하고 교묘한 것을 위해 장사하는 것"59)을 제외하면, 그 밖의 모든 정상적인 工商活動을 경제의 末流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여기고 있다. 黃宗羲는 "백성들의 필요에 절실한 것"60)인가의 여부를 중시하였으며, 이런 각도에서 국가경제활동에서 차지하는 정상적인 공상활동의 근본지위를 논증하였다. 따라서 그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세속의 학자들이 잘 살피지 않고 商工業을 末이라 하며 망령된 논의로 이를 억압한다. 무릇 工匠은 실로 聖王께서 오기를 바라는 사람이며 商人도 聖人께서 그의 나라에 나타나기를 바라는 사람이니, • 商 모두가 本인 것이다.61)

『明夷待訪錄』이 출판되자, 淸初의 사상계에서는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顧炎武는 이 책이 나옴으로써 ”百代 君王들의 폐단을 바로잡아 다시 일으킬 수 있으며, 三의 태평성세도 서서히 회복할 수 있을 것"62)이라 찬양하였다. 그후 이 책은 비록 乾隆 연간에 이르러 淸朋에 의해 禁로 취급당했으나 청말에 다시 복간되어, 維新思想의 홍기에 적극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梁啓超가 『明夷待訪錄』을 "청년들을 자극시키는 데 가장 효과가 좋은 홍분제"63)라 하

58) "爲巫而貨"

59) ”爲奇技器巧而貨"

60) "于民用'’

61) 『明夷待訪錄 • 才i十三』 : "儒不察, 以工商爲末, 妄議仰之. 夫工固聖王之所欲來, 商又使其願出于途者, 蓋皆本也.”

62) 『亭林俠文輯補 • 與黃太』 : ”百王之賊可以復起, 而三代之盛可以徐遠'’

63) 『中國近三百年學術史』 : ”刺激年有力之典"

면서 "민주주의를 선전하는 도구로 삼은"64) 것은 결코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3 . 顧炎武의 "明道救世" 實學思想

顧炎武(1613一1682)는 原名이 絡, 字는 忠이었으나 明朝가 멸망하자 이름을 炎武, 字를 寧人이라 바꾸었으며 學者들은 그를 亭林先生이라 존칭하였다. 江蘇省 昆山人인 그는 일생 동안 전국을 遊歷하며 명성을 날렸고, 奇行과 博學으로 세상 사람들의 更읽을 받았으며 "術의 開祖"65)라는 稱을 갖고 있다.

淸初學의 발전과정 중에서, 顧炎武와 마찬가지로 일대의 학술 풍조를 개척한 공로자로서 黃宗羲의 뛰어난 점이 주로 새로운 思想의 제창으로 표현되었다고 한다면, 역사적인 면에서 顧炎의 공헌은 주로 務質學風에 대한 적극적인 但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明淸時代에 있어서는 공허하고 내용이 빈약한 학풍에 대한 변혁이야말로 학술계의 역사적 당면과제였다. 顧炎武는 "道救世"라는 그의 실학사상과 끊임없이 계속된 학술실천으로, 학풍개혁이라는 역사적 과제에 동참한 많은 학자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과거와 미래를 잇는 교량역할을 수행하였다.

顧炎武의 실학사상은 宋明理學에 대한 비판 아래서 건립된 것이다. 그의 청소년 시대는 명조가 멸망해 가던 시기였다. 王學 末流의 ”月心見性”이란 空言의 범람을 목도한 顧炎武는 학문을 시작한 초기에 가문의 學風을 계승하여,

64) 『中國近三百年學術史』 : “作爲宣傳民主主義的工具"

65) 『中國近三百年學術史』 : ”淸學開山"

선비란 偵을 추구해야 하며 天文 • 地理 • 兵 • 및 의 典草制度에 대하여 깊이 考究해야만 한다.66)

라고 교육을 받았다. 사회적 위기가 더욱 심각해지자, 崇禎 12년 鄕試에서 낙방한 그는 "온 나라에 걱정거리가 많음을 한탄하고, 유생의 학문이 부족함을 부끄러워하며",67) 의연하게 과거제도의 極梧을 떨쳐버리고 『天下郡國利病止』와 『肇域志』의 저술에 종사하기 시작하였으며, "國家治亂의 근원과 生民根木의 계획"68)에 대한 탐색을 시도하였다. 이때부터 顧炎武는 왕성한 기세로 홍기하는 學思潮의 시대적 조류에 투신하였다. 그후, 明 • 靑 변환기의 대혼란은 그를 서재에서 몰아내었다. 顧炎武는 우선 저술활동을 중지하고 從軍하여 비밀히 淸朝에 항쟁하였으며 최후에는 멀리 고향을 떠나 가정을 버리고 북방으로 遊歷하였다. 10여년의 동란이 지나 갔을 때는 이미 그의 나이 50 초반이었다. 명조 멸망이라는 충격적인 타격을 경험한 顧炎武는 明末의 空陳한 학풍이 남긴 막대한 害惡을 더욱 절실하게 통감하였다. 따라서 그는 根本과 源流를 탐구하면서, 宋明理學에 대해 더욱 격렬한 비판을 가하였다.

宋明理學에 대한 顧炎의 비판은 王陽明의 心學을 비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晩明時代 心學의 범람을 魏晉玄의 淸談에 비유하여 두 가지의 "죄는 架王 • 討王보다 심하며"69) 똑같이 “나라가 기울어지고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는 것"70)을 야기한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顧炎는 「夫子之言性與天道」라는 글에서 다음과

66) 『林全染 • 三朝紀事幽文序』 : ”士i柏學, 凡天文 • 地理 • 兵腹 • 水土及一代典章之故, 不可不究.”

67) ”感四國之多, 恥經生之"

68) 『亭林俠文輯補 • 與黃太』 : “國家治亂之源, 生民根本之"

69) "深于架討"

70) ”神落覆, 宗社丘"

같이 말하였다.

劉과 石이 中華를 어지럽힌 것은 본래 淸談의 流尸에 원인이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오늘날의 淸談이 前代보다 더 심하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고 있다. 옛날의 淸談은 老을 談論하였지만 오늘날의 淸談은 孔孟을 담론하면서도 그 精聽를 체득하지 못한 채 조악한 점만 남기고 그 근본은 탐구하지 못한 채 말단적인 것만 이야기하고 있다. (또 그들은) 六藝의 文章을 익히지 않고 百王의 典籍울 考究하지 않으며 當代의 힘쓸 바를 총괄하지 않고, 夫子의 論과 論政의 대문제는 일절 묻지 않으면서 ‘一'이 어떠니 ‘照이 어떠니 하고 떠들며 ‘心見性' 따위의 空偵한 談論으로 ‘修己治人’의 學울 대신하고 있다. 그러하니 팔다리가 게을러지고 萬가 황패해지며 一身을 망치고 전국을 어지럽혀 나라가 기울어지고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었다. 예전에 王衍이 玄言에 능하여 스스로 子貢과 비교하더니 石府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죽음에 임박하자 반성하며 말하기를 ‘우리둘은 비록 古人만 못하지만 예전에 만약 浮함을 숭상하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해 天下을 바로잡았다면 오늘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君子들은 그의 말에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71)

71) 『知斜』 卷7 『夫子之言性與天道』 : " • 石亂華, 本于淸談之流, 人人知之. 執知今日之淸談, 有基于麟. 昔之掃, 談老 • 莊, 今之淸談, 談孔• 孟, 未其精, 而已遺其.祖, 未究其本, 而先辭其末, 不習六藝之文, 不考百王之典 不綜當代之務, 學夫子論學• 論政之端一切不, 而曰一賞, 藍言, 以明心見性之空言, 代修己治人之實學, 股)以情而萬事荒, 牙亡而四國亂 神落, 宗社丘. 昔王衍妙前玄言, 自比子貢, 及爲石勒所殺, 將死, 顧而言曰: '吾難不如古人, 向若不祖尙浮虛, 裁力以匡天下, 獸可不至今日’ 今之君子, 不有情平其言?"

표면적으로 보면 顧炎武는 王學을 바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년 陝西省 華陰에 朱子 祠을 수축하여 王에서 朱子易으로 선회하였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性과 天道'는 바로 송명 이학가들이 되풀이하여 논란을 벌였던 핵심문제였다. 顧炎는 이 문제에 대하여 부정적인 異議룰 제기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命’과 ‘仁’에 대해서는 공자께서 말씀을 별로 하지 않으셨으며, ‘性'과 ‘天道’에 대해서도 貢께서는 들어보지 못하셨다. …… 따라서 ‘性'과 ‘命’, 그리고 ‘天'은 공자께서 별로 거론을 하지 않으셨는데 오늘날의 군자들이 항상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며, 出仕와 居 • 辭職과 任 • 거절과 수락 • 받는 것과 주는 것의 분별에 대해 孔了와 孟子께서는 항상 말씀하셨으나 지금의 군자들은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72)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知錄』에서 顧炎는 ‘性과 天道' 대한 탐구를 禪學이라 질책하면서 "오늘날의 군자들은 學問이 煥迎와 司馬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자신들의 학설이 顔淵 • 曾子보다 심오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하루 종일 ‘性'과 ‘天道'에 대해서 언급하며 禪學으로 빠져드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다"73)라고 하였다. 방법론 면에서 이야기하면, 송명이학은 義理에 대한 講述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顧炎의 治學方法은 그것과도 확연한 차이를 보

72) 『停林文』卷3, 『與友人論學』 : ”命與仁, 夫子之所空也; 性與天道, 子貢之所未也…… 是故性也 • 命也 • 天也, 夫子之形, 而今之君子之所恒言也; 出處 • 去就 • 辭受 • 取與之辨 孔子 • 孟子之所恒, 而今之君子所空言也.”

73) 『知錄』 卷7, 『夫子之言性與天道』 : ”今之君子, 學未及平奧迎 • 司馬牛, 而欲其說之高于顔 • 曾二子, 是以終日性與天道, 而不自知其策于禪學也."

이고 있다. 그는 空言만을 늘어놓아 실제로 실천불가능한 공허한 학문을 반대하며, 자료를 중시하고 質證을 중요하게 여긴다. 자료의 수집은 저술하는 데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선행작업으로서, 顧炎止는 이 점을 대단히 중요시하고 있다. 일생에 걸친 그의 저술활동 중에서 "책을 저술하는 것은 책을 베끼는 것만 못하다”74)라는 가정교육이 시종 그의 좌우명이 되었다. 그가 이른 나이에 편찬한 『天郡園利病』와 『肇域志』는 ‘二十一史’와 『一統志』, 그리고 각 省의 府州縣志와 名人文渠 및 기타 저술 중에서 필요한 부분을 抄錄하고 그것을 모아서 이룬 것이다. 顧炎가 그의 만년에 정성을 기울여 『女錄』을 저술하는 동안에도 그는 변함없이 자신의 저술을 "산에서 캐낸 구리"75)로 간주하였다. 그는 이 점에 관해 友人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다음같이 말했다.

나는 일찍이 요즘 사람이 편집한 책은 마치 요즘 사람이 주조한 동전과 같다고 생각했다. 古人은 산에서 구리를 캐내지만, 요즘 사람들은 헌 동전을 구입하여 그것을 廢銅이라 부르며 동전을 주조하는데 사용할 뿐이다. 따라서 주조된 동전은 질이 조악할 뿐 아니라, 古人들이 후세에 전해준 보배로운 물건을 산산이 부수고 깨뜨려서 후세에 전해지지 않게 하니, 어찌 두 가지 손실이 아니겠는가? 『知錄』이 또 몇 卷 완성되었는가 물으셨는데, 이는 아마 廢銅으로 주조한 동전으로 생각하고 기대하신 것일 테죠. 저는 해어져 있던 일 년 동안 아침 밤낮으로 글을 읽고 되풀이하여 깊이 연구하였는데, 겨우 10여조만을 썼을 뿐이지만 이 정도라면 거의 산에서 캐낸 구리라 할 것입니다.76)

74) ”著不如抄."

75) ”采山之銅"

76) 『亭林文渠』卷4, 『與人』: "謂今人條輯之習 正如今人之鑄錢. 古人采銅於山, 今人買荀錢 名之曰廢銅, 以充鑄而已. 所結之錢低已租惡, 而

又將古人世之寶春判粹敗 不存於後, 登不兩失之平? 承『日知錄』又成幾卷, 蓋之廢銅 而其自別來一載 夜面, 反復尋究, 條得十餘條, 然庶幾采山之銅也.”

經典을 통하여 옛 것을 배우기를 주장한 顧炎i랐는, 장기간에 걸친 학술 실천 가운데 “九經을 읽는 것은 문헌 고증으로부터 시작하며, 문헌 고증은 音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77)는 치학의 기본방법을 시종 고수하였으며, 꼼꼼하고 숙련된 비유와 비교분석의 능력을 익혔다. 그는 ‘六經之旨(육경의 내용)'와 ‘當世之務(당세의 실무)’를 하나로 융합시켜 현실사회에서 제기되는 수많은 과제를 문헌에서 일일이 그 의거를 찾아낼 수가 있었다. 이렇개 함으로써 그의 '‘옛것을 인용하여 지금의 것을 개획하는 일"78)은 天衣無絶식으로 조화를 이루었다. 顧炎武의 치학방법론이 이미 송명이학의 義埋에 대한 공허한 담론을 배제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치학방법론은 程 • 朱의 思辨演과는 차이가 있으며 또 陸 • 王의 直覺抽象과도 다른 것으로서, 소박한 唯物主義 색채를 띤 經驗歸荊의 경향을 갖고 있었다.

顧炎는 ‘明道救世'를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았다. 따라서 그는

君子가 학문을 하는 것은 ‘道’을 위한 것이며 ‘救世'를 위한 것이거늘, 한갓 詩文을 위해 학문을 한다면 이른바 離蟲接刻에 불과한 시문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79)

라고 말하였다. 顧炎는 무슨 ‘道'를 밝히려 하였던 것인가? 이 문

77) 『亭林文集』卷4, 『答李子尉』 : ”禎九經自考文始, 考文自知音始.”

78) ”引古訂今"

79) 『林文』卷4, 『與人二十五』 : “君子之爲學, 以明道也, 以救世也. 徒以詩文而已, 所謂離蟲策刻, 亦何益哉?"

제에 대한 그의 해답은 물론 그 시대의 제약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또한 시대의 제약을 벗어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道'란 변함없이 ‘聖人之道'였으며, 바로 ‘孔孟之道'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顧炎는 자신의 학술주장을 근거로 하여 이른바 ‘聖人之道’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내가 말하는 '聖人之'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博學食文(널리 학문을 배우는 것)’과 ‘行己有恥(자기 몸가짐에 부끄러워 할 줄 아는 것)’이다. 一身의 수양에서 天下國家를 다스리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배워야 할 일이요, 자식과 신하 • 형제와 친구로서의 일에서부터 집을 나가서나 들어와서의 일 • 사람들과의 교제 • 거절과 수락 • 받고 주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치와 관계가 있는 일이댜 수치란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중대한 일인 것이다! 나쁜 옷을 입고 나쁜 음식 먹는 것을 수치로 여겨서는 안되며 일반 평민들이 그 혜택을 받지 못함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천하만물의 당연한 도리가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자신을 반성하고 성실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아! 士人으로서 먼저 수치룰 말하지 않으면 근본이 없는 사람이며, 옛것을 좋아하며 견문을 넓히지 아니하면 空庫한 학문인 것이다. 근본이 없는 사람으로서 空虛한 학문을 담론하니, 내가 보기에는 매일 聖人을 뒤쫓는다 해도 성인에게서 더욱 더 멀어질 것이다.80)

'博學於文'과 ‘行己有恥'의 合一은 顧炎가 평생 동안 집착하고

80) 『亭林文』卷3, 『與友人論學』 : ”愚所謂聖人之道者之何? 曰‘博學於文', 曰'己有恥'. 自一身以至於天下國家, 皆學之事也, 自子臣弟友以至出入 • 往來 • 辭受 • 與之, 皆有恥之事也. 恥之於人大矣! 不恥惡衣惡食, 而恥四夫四婦之不被其澤. 故曰: '萬物皆於我矣, 反身而誠’ 鳴呼! 士而不先言恥, 則爲無本之人, 非好古而多, 則爲空船之. 以無本之人而講空比之學, 吾見其日從事於聖人而去之彌遠也.”

제창하였던 新學風이었다. 이러한 학풍으로 추구한 質學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經世致用'이었으며, 바로 顧炎가 말하는 '激世'이기도 하였다.

顧炎는 일생 동안 폭넓게 經學 • 史學 • 音韻 • 文字 • 金石 • 考古 • 地理와 詩文 등의 학문을 섭렵하며, 『日知錄』의 저술에 힘을 쏟았다. 그 목적은 분명 ‘導을 밝히고 人心을 바로잡으며, 亂世를 평정하여 태평성세를 일으키기"81)위해서였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국가와 민족에 대해 공헌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顧炎武는 만년에 재자 潘未에게 쓴 서신에서 다음같이 확실히 밝히고 있다.

오늘날 학문을 하는 까닭은 이익을 위해서 일뿐이니 科片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과거로 관직에 나아가 문장과 저서 등 후세에 전해질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명예를 위해서 일뿐이니, 明代300年 간의 文人들이 바로 이러하다. 君子가 학문을 하는 것은 자신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道理를 밝히고 사람을 善化시킬 마음을 가지며 혼란스러움을 바로잡을 일을 하고, 天下 대세의 흐름이 어찌 극한 상황에 처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알아, 일어나 세상을 구제할 방도를 생각하기 위해서이다.82)

송명이학이 哀微해진 후, 顧炎는 그의 '道救世'라는 실학사상으로, 當世와 後代룰 위해 엄숙하고 건실한 新約을 보여 주었으

81) 『亭林文菓』澄3, 『初刻日知錄自序』 : “學術 正人心, 限亂世以興太平之事.“

82) 『亭林餘渠』 • 『與次耕札』 : "凡今之所以爲學者, 爲利而已, 科糸是也.其進於此 而爲文辭著一切可傳之事者, 爲名而巳, 有明三百年之文人是也 君子之爲學也, 非利已而已也, 有明道淑人之心, 有機亂反正之事, 知天下之勢之何以流極而至於此, 則思起而有以救之.”

며, 학술입문의 관문을 폭넓게 개척하였다. 顧炎의 치학방법을 계승하기도 하고 혹은 그의 치학정신을 발양한 후세학자들은 顧炎武가 개척해 놓은 길을 따라 걸으며, 乾嘉時期 淡學의 홍성을 이룩하였을 뿐 아니라 청대의 학술과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성과를 획득하였다.

4. 顔李學派와 淸初 經世學風의 終結

17 • 18세기의 교체기에 들어 청초의 학술대가들이 연이어 서거한 후, 顔李學派가 새로이 출현하여 근세기 동안 학술계를 주름잡으며 많은 활동을 하였다. ‘習' • ‘才' • ‘’의 ”習行經濟"의 학문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 이 학파는 顔元에 의해 처음으로 偶되었으며 李材에 의해 큰 성과를 이루었다.

顔元(1635-1704)은 河北省 博野人으로, 초기에는 그의 부친이 朱氏에 의해 양육되었기 때문에 姓을 朱라 하고 이름을 邦良, 字룰 易直 號를 思古人이라 하였다. 그후 원래의 姓울 회복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으며, 字를 揮然 號를 習齋라 하였다. 顔元은 젊은 시절에 諸이 되었으나 그후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시골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일생을 보냈다.

그의 학문은 처음에 陸 • 王을 배웠으나 후에는 程 • 朱로 바꾸었고, 최후에는 그들을 모두 배척하고 오로지 經世致用을 추구하며, ‘財' • ‘行' • ‘用' 만을 제창하여 청대학술사에 있어 유명한 顔李學派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의 주요저술로는 『存治』 • 『存性』 • 『存學』 • 『存人』의 41編이 있는데, 세칭 ‘四存編’이라 일컬어진다. 그외의 저서로는 『四習正誤』 • 『朱子語類平』 등이 있으며, 門人들이 그의 傳狀忠札 및 短篇雜著를 모아 『習齋記餘』를 간행하였다.

顔元는 河北의 大儒인 孫奇逢과 同鄕人이었다. 두 사람은 비록 평생 동안 일면식도 갖지 못하였지만 손기봉에 대한 顔元의 존경심은 언제나 한결같았으며, 또 그의 학설이 형성되는 과정에서는 손기봉의 학문으로부터 더욱 깊은 영향을 받았다. 24살 때, 그를 陸 • 王의 학문세계로 끌어들였던 것은 손기봉의 학문을 계승한 彭通이었다. 그후 顔元은 또 손기봉의 제자인 王之徵 • 王餘佑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顔元의 究心兵法과 經世f[學은 王餘佑에게서 도움울 받은 것이었으므로 그는 줄곧 왕여우를 지극한 예의로 섬기었댜 顔元의 人性學說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張羅喆도 학풍이 손기봉과 가까운 理島이다. 따라서 그후로 비록 顔元이 包의 영향을 받아 한차례 程朱 • 陸王의 학문을 배운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학문은 화려함 없이 질박하며 호기가 넘치고 있어 손기봉의 北學계통에 속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顔元은 풍부한 창조정신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현실에 뿌리를 두고 다른 학설의 장점을 두루 수렴하여 동시대의 江南지방 학자인 陸世儀가 제창한 六松質學을 발전시키고 마침내는 北易요의 굴레를 벗어났다.

35살 때에 저술한 『存性』 • 『存學』 2編을 指標로 삼은 顔元은 이로부터 ‘周孔正學’의 회복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 程朱 • 陸王의 학문도 아니고 손기봉의 北學도 아닌 "習行經濟"의 학문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는 "學習 • 身3行 • 經濟는 우리 儒生들의 本業이다. 이것을 버리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자는 宋明의 유생들이며, 唐處三代의 유생들이 아닌 것이다"83)라고 하였다.

康熙 30년, 57세의 나이에 中로 南遊한 顔元온 "사람마다 佛學을 배우고, 집집마다 헛된 문장 뿐"84)인 현실을 목격하고, 理學家들

83) 『習齋記餘』卷6, 『論院講學』 : " • 射行 • 經濟, 吾個本業也. 舍此而習云云, 講云講云, 宋明之偉也, 非唐漠三代之也.”

84) “人人禪子, 家家虛文"

이 공허한 담론으로 국가를 그르치는 것에 대해 통탄하면서 "따로 一派몰 세워 그들에 대항하며",85)

반드시 程朱學을 한치 부수어야 비로소 孔孟에 한치 들어갈 수 있으니, 孔孟과 程朱는 판연히 다론 길이라 굳게 생각하고는 道統 중의 위선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86)

는 뜻을 밝혔다 이후로 顔元은 조금도 타협할 줄 모르는 朱熹學說의 비판자가 되었다.

顔元이 서거한 뒤, 그의 학술 사업은 그의 제자인 李恭에 의해 계승되었다. 恭(1659-1733)의 字는 剛主이며 號는 怨谷으로 河北省 臨縣人이다. 21살 때부터 顔元을 따라 학문을 익혔으며, 康熙 29년 鄕試에 합격한 뒤 여러 차례 會試에 참가하였으나 매번 낙방하였다. 만년에 들어 通州 學政에 제수되었으나, 3개월도 채 안 되어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저술로써 노년을 마쳤다.

일생 동안 顔을 크게 넓히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긴 그는 이 일을 위해 북쪽으로는 京城에 이르기도 하고 中의 막료가 되기도 하였으며, 남쪽으로 浙江지방을 遊歷하고 서쪽으로는 장안 • 낙양을 돌아다니며, 여러 학자들을 만나고 當代의 大儒學者들과 두루 사귀면서 顔李學派의 학설을 선전하기에 힘을 기울였다. 顔元은 저술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李凡은 禮樂兵災 • 經史考證 동 여러 방면에 걸쳐 저술이 매우 풍부한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大學辨業』과 『聖經學規店』 등이 있으며 短篇賤로는 『怨谷後渠』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85) ”別出一派 與之抗衡"

86) 『顔習范年』 卷下 : “必破一分程朱 始入一分孔孟, 乃定以爲孔孟 • 程朱, 判然兩途 不願作道統中鄕應矣.”

早의 李凡은 顔元學說의 독실한 추종자였다. 청년시절 顔元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닦던 초기에 이미 그는

習齋(안원)를 지척에서 섬기게 된 것은 하늘이 나를 이루게 하시는 것이니, 그의 학설을 전하지 않는다면 이는 스스로를 버리고 하늘을 버리는 것이다.87)

라는 결의를 표시하였다. 이후로 李은 顔元의 가르침을 성실히 따르고 顔元을 그대로 본받으며 "경솔하게 尊함과 벗하지 아니하고 경솔하게 富와 사귀지 아니하고, 경솔하게 휴식을 구하지 아니 하였다".88) 그리고 그는

책에서 보고 둘은 바는 많으나 실제로 겪은 세상일은 적으며 筆에 쏟는 정신은 많으나 經世濟民의 정신은 적다.89)

고 생각했다. 그는 顔元의 학문을 있는 그대로 홉수하여 소화시키는 과정을 밟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顔元에게 禮룰 배우고 張而素에게서 琴을 배웠으며, 趙思光, 郭金城에게 騎射룰 배웠고 劉見田에게서 數를 배웠으며, 彭通에게 를 배우고 王餘佑에게서 兵法을 배워 經世質學의 氣象을 물씬 풍기고 있다.

南遊한 顔元이 朱熹學說과 첨예하게 대립하여 "程朱의 道가 사그러들지 않아 周孔의 道가 드러나지 않는다"!90)고 큰소리로 외쳐댔을 때, 李材은 그에 호응하여 "程 • 朱와 陸 • 王은 踊禎하느라 지치지

87) 『李怨谷先生年』 卷1 : “閔尺習窟 天成我也, 不傳其學, 是自棄棄天矣.”

88) ”不輕與交 不輕與富交, 不輕乞假.”

89) 『還谷先生年譜』 卷2 : ‘‘紙上之閩歷多, 則世事之關歷少; 筆墨之精神多, 則經濟之精神少.”

90) 『齋記餘』 卷1, 『未』 : ”程朱之道不 周之道不著."

않으면 禪宗에 빠져버린다"91)고 하면서 "오늘날의 龍學이 극성하였다고 할 수 있으니, 興盛이 극도에 이르러 장차 쇠락해지면 도리어 質學으로 돌아올 것이다"92)라고 단언하였다.

康熙 43년 9월 顔元이 서거하자, 장례를 거행하기 전날 밤 李妹은 고인이 된 그의 스승을 다음과 같이 위로하였다.

제가 참고 견디어 다행이 때를 얻어 관직에 나가면, 하늘 한가운데에 올바른 학문을 세우고 이 세상을 • 夏의 태평시대로 되돌려 놓겠습니다. 설사 뜻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견문을 받아들이고 大道를 고취하여 인재들이 번성하고 聖道가 쇠하지 않게 하겠습니다.93)

이후로 그는 "하늘 한가운데에 올바른 학문을 세울" 조건을 획득하지는 못했지만, 顔學을 전파하여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견문을 받아들이고, 大道를 고취"하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주위에는 顔李學說을 숭배하는 자들이 모여들었는데, 王源, 怖鶴牛둥과 같은 뛰어난 학문을 가진 南北學者들이 顔李學說의 門徒가 되었다 그가 서거하기 전, 북방의 무수한 제자들이 義縣에 道傳祠룰 세워 顔李學派가 대대로 세상에 전해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래 음미해 볼 현상은, 李材이 서거한 뒤 顔李學說은 뜻밖에도 맥이 끊겨버렸다는 것이다. 한 차례 홍성했던 학파가 伏流처럼 땅 속에 숨겨져 흐르다가 末葉에 이르러 戴望 둥의 학자들에 의해 다시 異彩를 띠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의 근본적 원인은

91) ”程朱 • 陸王, 非支離於踊亂 卽混索於禪宗."

92) 『怨谷後渠』 卷1 • 『送黃宗夏南歸序』 : ”今之虛學可盛矣, 盛極將哀, 則轉而返之貫.”

93) 『李怨谷先生年譜』 卷4 : “使迷克濟, 幸則得時而, 母正學於中天, 投斯世於澳夏. 卽不得志, 亦擬周流吸引, 鼓吹大道, 使人才蔚起, 聖道不磨.”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朱子學만을 존숭했던 淸의 정책이 거스를 수 없는 중요한 배경으로서 작용하였으며, 다른 하나는 荷初 학술발전의 內在論理의 제약과 분리될 수 없다. 이 논리의 역 량이 드러내는 막대한 작용은 李의 생전에 이미 구현된 바가 있었다.

康熙 34년, 浙江省 桐鄕 知縣인 郭金湯의 초빙에 응한 李材은 남하하여 그의 막료가 되었다. 그때 李凡의 나이는 37세였다. 그때의 南遊는 그의 학문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江南 지방은 經學이 한창 크게 홍성하고 橫質한 考證學風이 잉태되고 있었다. 毛奇崎, , 姚際恒, 王復鎔, 郡廷采 등은 經籍을 탐구하고 오로지 저술에 힘을 쏟아 마치 百가 그 아름다움을 다투는 듯하였다. 浙江에 도착한 후, 李恭에게 經待표의 考證 방면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王復福였다. 왕복례는 傍證을 두루 인용하고 宋鼻의 잘못을 극력 배척하며 李妹에게

『太極圖』는 본래 道家의 學說이며, 今本 『大學』 • 『孝經』은 朱子가 마음대로 고쳐 聖經의 本旨룰 알 길이 없고, 程朱, 陸王은 모두 禪에 물들었다.94)

라고 말하였다. 동년 9월 李材託은 북쪽으로 귀환하였다. 다음 해, 『太極圖』 • 『河圖』 • 『洛害』를 반박한 毛奇齡의 저술이 보내져 왔다. 36년 李材託은 재차 절강으로 갔다. 그해 쓴 『上顔先生書』에서, 王復禮., 毛奇齡 등의 치학방법을 본받아 宋가 儒學의 옛 法規를 어지럽힌 8개항의 중거를 열거하며 考證學의 노선으로 향하였다. 연말에 李은 특별히 杭州를 방문하여 毛奇에게 樂學에 대해 자문

94) 『李怨谷先生年』 卷2 : ”『太極圓』本道家說 今本『大學』 • 『孝經』係朱子改窟, 梅聖經本旨. 程朱 • 陸王皆染於禪.”

을 구하였다. 이후 그는 모기령을 스승으로 섬가어 樂과 『易』 • 音商을 배워, 『周體』 • 『古文尙』의 傾僞를 분별하였으며 毛奇齡 학설의 영향을 가장 깊게 받았다. 그가 41세에 귀향하였을 때는 이미 옛 것을 考證하고 經典을 궁구하는 강남학자들의 학풍이 깊숙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러므로 毛奇齡이 李塔을 同志로 끌어들여 "천년만에 한 번 나올 사람"95)이라 칭찬하고 “나의 학설이 이제 홍성하리라!”96)고 하였던 것이다.

여러 해 동안 납북의 학술이 교류되는 과정에서 李材烽은 顔을 처음으로 멀리 江南에까지 전파시켰고 또한 다론 것을 모두 수용하여 더욱 확충시키므로써 經學考證와 서로 통하는 바가 있도록 하였다. 모기령과 강남학풍에 서서히 동화되어 가는 상황하에서, 經學考證의 치밀한 방법을 받아들인 恭은 顔學과 經學考證울 통하게 한 결과, 자신도 모르게 考證持의 영역에 발을 들여 놓게 되어 顔易의 본래 면모를 바꾸어 놓았다. 南遊시기 및 그후 한동안, 그가 연속적으로 저술한 「田賊考辨」 • 「帝給考辨」 등은 모두 考證의 색채를 짙게 깔고 있다. 南遊롤 끝내기 하루 전날 밤, 李坊은 고증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모든 경전들을 두루 고구하고, 표준으로 삼아"97) 자신의 명성을 드높인 저술 『大學辨業』을 완성하였다. 이후, 李見은 京城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명성을 크게 날렀고, 公卿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학문이 해박하고 근원이 있으며, 세상에 혼치 않은 뛰어난 사람"98)이라 칭송하였다. 그는 北京에 머물고 있던 江南의 저명한 학자 萬斯回 胡消와 빈번히 왕래하며 經典에 의거하여 『禮』와 『易』을 論辨하였다. 만사동은 李凡討을 고증학의 大

95) ”千秋一人"

96) 『李怨谷先生年』 卷2 : "吾學從此興矣!"

97) ”返考諸昆 以爲準"

98) ”學山文海, 源源本本, 不世之人.”

師 若朗와 經學家 洪慕보다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천하에는 오직 선생과 나뿐입니다. 百詩(염약거)와 洪去(홍가식)도 우리보다 더 뛰어나지는 못합니다.99)

라고 하였다. 만년에 이른 李址은 "이 장차 쇠미해지고 功이 세워지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알고"100) 고대 전적을 탐독하며 많은 經典에 두루 注를 달았다. 비록 顔李學派의 이론에 대한 논증에 뜻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미 고증학과 합류하였던 것이다. 저명한 史學家인 故 錢穆 교수가 일찍이 논한 바와 같이 ‘‘習齋의 학문은 怨谷을 얻고서 커졌으며, 또한 怨谷에 이르러 변화하였던"101) 것이다.

顔元과 李述의 學風이 처음에는 같았다가 나중에 달라진 것은 결코 李述이 의도적으로 스승과 다른 학풍을 고집해서가 아니라 당시의 풍조에 의한 불가피한 현상이었으며 大勢의 필연적인 결과였댜 李述은 만년에 들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顔元 선생은 天下萬의 중대한 임무를 맡으셨다가 돌아가시면 서 그것을 나에게 맡기셨다. (그러나) 나는 그 중책을 맡길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부득이 책을 지어 後人을 기다린다.102)

이렇듯 심각한 당시 상황은, 康熙 말엽에 이르러 淸初의 經世實學이 이미 그 수명을 다하였으며 經史考證學風의 발홍은 어느 한 개인의 의지로 바꾸어 놓을 수 없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顔李

99) 『李怨谷先生年譜』 卷3 : "天下惟先生與下走耳, 百詩 • 洪去燕未爲多也.”

100) ” 自知德之將急 功之不建'’

101) 『淸儒學案序』 : 齋之學, 怨谷而大, 亦至怒谷而堤"

102) 『李怨谷先生年』 卷首, 『李怨谷先生傳』 : "顔先生以身任天下萬世之重, . 卒而寄之我 我未見可寄者, 不得已而著之, 以侯後世."

學派가 결국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은 이 학파의 학자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며, 실질적으로 바로 17세기 中國의 歷史的 悲劇인 것이다.

5 . 17世紀 中國實學의 基本特徵

17세기의 중국실학은 수백 년에 걸쳐 성행한 理學이 쇠미한 후, 격변과 혼란의 시대배경 아래서 이전의 宋理根과 다르고 그 뒤의 乾嘉漢學과도 같지 않은 역사적 특징을 갖고 있다. 그 주요한 특징은 세 가지로 귀납할 수 있다.

1) 經世致用

명말 이래의 사회혼란은 명청 교체기에 이르러서 극에 달하였다. 낡고 부패한 것에 대한 災民軍의 타도, 명왕조의 무력한 붕괴, 중원을 장악한 청왕조의 건국 둥의 대사건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연이어 벌어졌다. 역사의 급격한 변천 및 이에 따라 거듭되는 전란과 경제의 피폐로 인하여, 중국사회 전체는 공전의 위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에 明 萬曆末葉부터 經世致用의 思潮가 왕성하게 홍기하기 시작하여 淸 順治 • 康熙 年에 이르러 공전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자 시대의 부름에 호응하여 분연히 일어난 지식인들은 사회를 위기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고 분투하였으며, "天下의 興亡은 四夫에게 그 책임이 있다"103)는 시대적 구호를 강력하게 부르짖었다.

“나라가 기울어지고 종묘사칙이 폐허가 된"104) 현실 속에서, 17세

103) "天下興亡, 四夫有."

기의 많은 학자와 사상가들은 침통한 歷史反省을 진행하였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空疏한 學風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가하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도, 무관심하게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로 여기는"105)오랜 폐습을 질타하였으며, 혹 어떤 이는 명말 이래의 사회병폐에 대해 호되게 질책하고, 지나치게 집중되어 여러 사람의 비판을 받은 바 있는 阜에 대해서 "天下에 큰 害롤 끼치는 자는 君主일 뿐이며"106), "秦 이래로 帝王이 된 자는 모두가 도적이다"107)라고 과감히 비판하였다. 또 어떤 이는 "稷을 바로잡는 일"108)을 "天下의 公務"109)로 삼아 그 당시 가장 시급하고 당면한 經世學에 정진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어떤 이는 역대왕조의 홍망을 귀감으로 삼아 국가의 政治制度 • 敎育施設 • 租稅財政 • 兵法 • "오랑캐와 중국의 법도"110) 등의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탐구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經世買學은 그 당시 끊임없이 唱源되어 사회의 공감대를 형성하였고 이미 當代 지식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인식되어 17세기 중국실학의 줄기를 구성하였던 것이다.

2) 理學批判

明末 • 油屯에 이르러서 理은 이미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사회의 대혼란과 학술발전의 內在論理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비판의 진행과 總結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제기하였다. 晩明의 天啓 • 崇禎

104) ”神州蕩蹴 宗社丘坡"

105) "天地解, 落然無與吾事.”

106) ”爲天下之大害者, 君而已矣.”

107) ”自秦以來, 凡爲帝王者皆賊也.”

108) ”匡扶社稷"

109) "天下之公"

110) ”夷夏之防"

연간에, 徐光啓는 "힘써 을 추구하는 것"111)을 학술의 宗旨로 삼아 의 기치를 높이는 데 앞장섰다. 崇禎 연간 復社의 모든 학자들은 그가 다 이루지 못한 뜻을 이어받아 “士人에게 이 결핍되어 있는"112) 현실에 대해 맹렬한 질책을 가하였다. 明代 학자들의 실학 제창을 계승한 淸初의 지식인들은 공허한 학술의 배척과 실질적인 학술의 발전을 위한 탐색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수십 년간 이러한 노력을 거친 결과, 學 추구의 풍조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學이란 명칭은 당시 학자들의 모든 저서에 폭넓게 사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도 유행하여 군신간에 질의 • 응답되었던 학술용어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중국 고대학술사에서 ‘劣'은 끊이지 않고 전해져 내려온 좋은 전통이었으며, 學이란 개념의 사용도 명말청초 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늦어도 北宋 중엽 埋易의 형성시기에 이미 출현하였다. 그러나 똑같은 학술개념일지라도 서로 다른 역사시대에 있어서는 그 含義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대사상가 周 • 程이 理學을 창립하고 나서부터 朱가 그것을 집대성한 시기에 이르기까지, 실학은 주로 封建道德에 대한 충실한 실천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며 선명한 도덕수양의 색채를 띠었던 것이다. 그런데 17세기의 명말청초에 들어서 당시 지식인들의 실학제창은 전통적인 도덕수양을 내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보다는 더욱 사회현실에 대한 강렬한 관심을 함유하고 있어, 그 중점은 이미 급박한 經世救時로 전향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宋代에 理學이 홍기하자, 佛老의 공허한 玄學을 배척하기 위해 이란 개념이 출현하였는데, 명말청초의 理學이 공허한 학풍으로 변화된 후에 '性과 天道'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理學 역시 熊學이란 이유로 다시 지식인들의 주의를 끄는 관찰대상이 되

111) ”務求貫用"

112) ”士無買”

었던 것이다.

17세기 지식인들의 埋學에 대한 批判과 總結은 그 시각이 각자 다르고 그 방법도 서로 달랐다. 顧炎武 • 王夫之 등의 학자는 王陽明 心學에 대하여 비타협적인 비판을 가하는 길을 택하였고, 黃宗羲는 학술사의 편찬으로 수백 년에 걸친 埋學發展史에 대한 總結을 통하여 학술 변천의 軌跡을 밝혔다. 孫奇逢, 李, 湯斌 등의 학자들은 朱 • 陸의 학술을 합류시키는 노선을 택하여 조정과 절충으로 학술발전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으며, 錢謙益, 毛奇齒, 胡消 동의 학자들은 송대 유학자들의 經說에 대한 부정과 淡唐 시기 注疏에 대한 表彰에 중점을 두어 埋學과의 결별을 고하였다. 오직 顔元, 恭, 屈密 등의 학자들만이 程朱 • 陸王의 학문 전반에 대해 배격하였고, 따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여 周 • 孔에게서 학문의 원류를 모색하였으며 六慈學을 추구하여 17세기 실학의 理學批判精神을 충분히 구현하였다.

3) 經學의 제창

理學의 쇠퇴와 함께 明代 中이후부터, 經學으로 理學의 병패를 구제하려는 학술조류가 이미 傳統 個學의 母體 안에서 잉태되고 있었다. 이러한 학술풍조는 慕妹 • 慶 연간의 학자인 歸有光에게서 발원되어, 萬曆 연간에 이르러 熙磁 陳第 등의 학자들에 의해 홍성하였으며, 崇禎 연간에 이르러서는 전겸익이 이 학풍을 계승하자 "經典을 벗어나 道를 말하는 것”113) 은 모든 사람들의 비판대상이 되었다. 明代 학자들의 經學 제창을 이어받은 淸初의 지식인들은 "性과 天道"에 대한 논의를 배척한 후 한결같이 經學으로 理學을 대신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顧炎武, 黃宗淡, 王夫之, 李顯, 費密

113) ”離經而講道"

등은 모두 전겸익에게 동조하였다. 그들 중 어떤 이는 “理學은 經學이다"114)라는 명제를 자신있게 제기하며 "오늘날의 소위 理學이란 것은 바로 禪學이다"115)라고 단언하였고, 어떤 이는 埋學을 他統倫學의 범위 안에서 융합시킬 것을 주장하며

道學이란 바로 이며, 儒의 범주 안에 따로 소위 道이란 것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116)

라고 거듭 밝혔다. 또 어떤 이는 儒家의 經典울 표창하며

聖人의 道는 오로지 經典 안에 존재하는 것이니, 경진을 버린다면 소위 聖人의 道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117)

고 강조하였다. 경학의 제창은 경세학풍의 시대적 요구와 서로 결합하여 '通經致用'이라는 新學風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康熙 중엽 이후로는 經典울 窮究하는 박실한 학풍이 이미 성립되었다. 염약거, 호위, 모기령 둥과 같은 당시의 저명한 經學家들은 “한 가지라도 알지 못하는 것을 대단한 수치로 여긴다”118)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받들어, 송대 유학자들의 ‘經禍’를 청산하고 이미 사라져버린 經籍의 옛 모습을 되찾는 것을 '의 大業'으로 간주하였다. 경전연구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九經을 읽는 것은 문헌 고중으로부터 시작하며, 문헌 고증은 音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

114) ”理學, 經學也.”

115) 『亭林文渠』권3 • 『與施愚山』 : ”今之所iI桂理學, 禪學也.”

116) 『二曲集』 권15 • 『授受紀要』 : "道學卽偉學也, 非于個學之處別有謂道學也.”

117) 『弘道幽』 卷上 • 『弼輔錄論』 : ”聖人之道, 惟經存之, 舍經無所謂聖人之道.“

118) ”一物不知, 以爲深恥.”

작한다"119)라는 고염무의 經典 訓話의 방법을 본받아 宋明義理之學의 낡은 관습을 개혁하고 옛 경전을 궁구, 고증(窮經考古)하여 經史를 널리 고찰하는 치학노선을 택하였다. 설사 예전 이학에 종사했던 사람들도 너도나도 窮經考古로써 세상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李光地는 『周易』과 音韻樂律 방면에서, 李光地 • 光坡 형제는 『三福』에 대해, 方舊는 『春秋』와 『周福』 방면에서 모두 이러한 학술특징을 잘 구현해 내었다. 이때에 이르러서 17세기의 중국실학은 經學考證으로부터 출발하여 經世致의 한 페이지를 펼쳤으며 고대학술을 총결, 정리하는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17세기의 중국은 비록 낡은 봉건사회가 이미 엄중한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결코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았으며, 아직도 봉건적인 自然經沿룰 부활시킬 수 있는 활력을 구비하고 있었다. 상처로 만신창이가 된 封建專制 政治體制는 명말청초의 조정 기간을 거쳐 사회유지의 역량을 변함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의 中國大地에는 새로운 생산방식이 아직 지평선 아래에 깊이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중국사회는 아직은 근대역사의 章이 펼쳐지지 않았으며 여전히 봉건사회 단계에 머물고 있었으니, 단지 서산에 해가 기울어 그 晩掛에 접어들었을 뿐이었다. 이같은 사회특성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17세기 中國實烏의 역사적 屈性을 규정하였다. 즉 17세기 中國取은 근대적 의미의 학술도 아니고 반봉건 성질을 갖지도 못하였으며, 단지 중국 전통유학의 한 구성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김경동 옮김)

119) ”韻九經自考文始, 考文自知音始.”

明淸學者의 "治生”論

丁冠之

1.

'治牛'이란 말은 『史記』 「貨殖列傳」의 "治을 잘 하는 자는 사람을 선택하여 시대의 사무를 맡기는 데에 능하다"1)는 대목에 나오는데, 그 의미는 商業經營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元代의 理學家 許衡도 ‘治牛'문제를 제기하였으나, 그 내용과 의미는 『史記』에서 언급된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許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자는 治生을 가장 우선적인 일로 여긴다. 治生의 이치가 부족하면 학문하는 길에 방해가 생긴다. 다른 길을 찾아 아무데로나 들어가려 하거나, 관리가 되어 이익을 탐하는 자는 모두 治生의 이치가 곤궁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諸葛孔明온 將相을 지냈지만, 임종시에는 곳간에는 남은 곡식이 없고 창고에는 남은 재물이 없다고 하였는데, 그가 이처럼 청렴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곤궁할 때를 미리 대비하여 자손들이 먹고 입는데 남음이 있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治生이란 災 • 工 • 商買 • 士君子롤 막론하고 옹당 농업에 힘써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商賈는 비록 가장 末流이

1) ”善治生者, 能擇人而任時"

지만, 역시 할 만한 것이 있으며, 만약 義利를 잃지 않고 잠시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도 또한 하지 못할 것이 없다.2)

이 대목은 『許魯齋先牛年譜』에 실려 있는데, 『宋元學案 • 魯齋學案』에도 같은 말이 있다. 許仇이 말한 ‘治'은 학자의 생계를 지칭한 것이다. 上記한 인용문에는 두 가지의 의미심장하면서도 충분히 전개되지 못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는 학자가 ‘治牛'을 기초로 하지 않으면 학문하는 길에 방해가 있게 되며, "다른 길을 찾아 아무데로나 들어가려 하고", "관리가 되어 이익을 탐하는 것”이 모두 "생계가 곤궁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諸葛亮이 정치를 하면서도 청렴했던 것은 그가 "곤궁할 때를 대비해서", "먹고 입는데 남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말은 곧 인간의 도덕 수양은 물질적 기초를 벗어날 수 없어, "생계가 곤궁하면", "청렴한 정치"를 보장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許衡은 비록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는 그의 治兪에 응당 있어야 할 요소인 것이다. 둘째는 ‘治牛’이란 농업에만 힘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으로, 이는 義理룰 잃지 않는다면 商賈라 해도 못할 바 없는 것이다. 許役은 비록 理學家였지만, 그의 ‘治牛署에 있어서의 두 가지 내용은 모두 理學과 배치되지 않는 것이었다. 理學에서 말하는 를 存하게 하고 人欲을 滅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존조건을 도외시하고서 도덕을 논하는 것으로, 거기에서는 ‘‘굶어죽는 것은 작고, 예절을 잃는 것은 크다”는 것이 강조되었지만, 許衡이 "학자란 治牛을 급선무로 여겨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하였던 것이나, 사대부가 입에

2) ”爲學者治生最爲先務 荀生理不足, 于爲學之道有防. 彼芳求妄進, 及作官利者, 始亦슘於生理之所致也. 諸葛孔明身都將相, 死之曰, 炭無餘栗, 庫無餘財, 其廉所以能如此者, 以成都桑士植利, 子孫衣食有餘賤爾. 治生者, 昆工商賈士君子當以務亞爲生. 商買難爲難爲遂末, 亦有可爲者, 果處之不失義利, 或以姑濟一時, 亦無不可."

담기 부끄러워하는 商를 治'의 수단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던 점은 理學의 宗旨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적 조건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理學家의 宗旨에 대응할 만한 許衡의 治生’論은 충분히 전개되지 못하였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어서 당시에는 주의를 끌지 못하였다가, 明淸 이후가 되어서야 학자들이 보편적으로 관심을 갖는 문제가 되었다.

明代 중엽 이후 중국의 봉건사회는 몰락하기 시작하여, 계급모순 • 민족모순은 나날이 격렬해졌고, 특히 자본주의 맹아와 신홍 시민계층이 봉건적 질서에 충격을 가하여, 明 왕조는 空前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데올로기 영역에 있어 한편으로는 봉건사회의 위기를 구하려 한, 이른바 "인간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邪을 그만두게 한다"3)는 王陽의 心學이 출현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埋 • 心과 대립되는 貸學(시민의식을 반영하는 초기의 계몽사상을 포함)이 홍기하였다. 王陽明은 明代 心의 泰斗였다. 그는 철학 방면에서는 비록 程朱와 달랐지만, “天理룰 존속케 하고 人欲을 滅한다”는 문제에서는 일치하고 있었다. 그는 ”心은 곧 理이다”, "마음에서 私欲으로 가려지지 않은 것이 곧 天理이다. …… 이 마음에서 人欲을 제거하고 天理를 존속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4)고 주장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靜時에도 人欲을 去하고 天理룰 存할 것을 생각하고, 動時에도 人欲을 去하고 天理를 存할 것을 항상 생각하라”5)고 하였으며, 人欲을 제거하면 天理만이 남게 되고, 이것이 바로 성인이라고 생각하였다. 王腸明의 이 주장은 자연히 許衡의 ‘治牛에 저촉되었다. 그래서 그는 "許魯가 個者는 治生을 우선으

3) ”正人心, 息邪說”

4) ”心無私欲之, 卽是天理. …… 只在此心去人欲存天理上用功便.”(『成公全渠』卷1, 『傳習錄』)

5) "爭時念念去人欲存天理, 動時念念去人欲存天理''(同上)

로 해야 한다고 한 것도 역시 사람을 그르치는 것이다"6)라고 하여 許衡을 비판하였다. 인간의 생존권리를 멸시하는 理學의 금욕주의는 이미 사람들을 질식시켰으며, 心學의 출현은 또 다시 새로운 굴레를 씌웠다. 따라서 ‘治牛'의 문제는 200년 동안 침묵한 후, 새로운 역사적 조건 아래서 다시 토론되었다. 明淸 사상가들의 ‘治生'문제에 대한 토론은 許衡보다 훨씬 광범위하면서도 깊이 있었으며, 이론적 색채가 풍부하였다. (1) 그들은 ‘治生'문제의 토론과 理欲관계 문제에 대한 토론울 결합시켜, 天理와 人欲을 절대적으로 대립시키는 오류를 이론적으로 반박하였다. (2) ‘發道'와 ‘身’을 통일시키고, 인격의 독립과 도덕수양은 반드시 ‘治牛'을 기초로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3) ‘治牛'문제를 지식인의 생계문제로부터 “聖人은 天下룰 다스리는 者이며, 그 牛을 다스리는 者이다"7)라고 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民牛.을 계획하는 범위로까지 끌어올렸으며, ‘治生'에 더욱 풍부한 내용과 광범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2.

理와 欲의 구별은 理學의 핵심적 문제로, 자연히 明淸 學, 특히 明淸代 초기의 계몽주의적 학자들에 의해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明淸 사상가들이 理 • 欲문제를 토론하며 涉及한 내용은 매우 많지만, 기본 사상은 人을 떠나 理를 말할 수 없고 欲을 떠나 理룰 말할 수 없다는 것으로, 理欲의 통일을 강조했으며, 天理와 人欲을 대립시키는 데에 반대하였다. ‘治生'의 각도에서 말할 때, 그들은 인간의 물질에 대한 욕구란 人性에 있어 자연스러운 것으

6) "午魯齋謂伯者以治生爲先, 亦誤人.”(『明淵學案 • 姚江學案』)

7) "聖人治天下者, 治其生也."(唐甄, 『潛篇, 『有歸』)

로, 인간의 기본적 물질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治’에 종사하는 것은 ‘天經地義'라 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王陽明의 弟子 王畿가 먼저 돌파구를 만들었으며, 何心 • 李가 충분한 논술을 가하였다. 王畿는 "입의 맛에 대한 관계, 귀의 소리에 대한 관계, 코의 냄새에 대한 관계, 신체의 安逸함에 대한 관계, 이 다섯 가지는 性에 있어서 자기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8)라고 하였고, 何心은 "성이 맛區]을 추구하고, 색[色]을 추구하고, 아름다운 소리[聲]를 추구하고, 安逸을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性이기 때문이다"9)라고 하였으며, 또 "소리[聲] • 색[色] • 냄새[吳] • 맛[味] • 安逸은 그 性의 命에 대한 지극합을 다한 것이다"10)라고 하였다. 李는 더욱 명확하게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이 人倫이며 物理이다"11)하는 주장을 제기하여, 사람을 떠나 道를 말하고, 인간의 가본적 물질요구를 떠나 道를 말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간 밖에 道 없고, 道 밖에 인간 없다” ”道는 인간에게서 먼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을 멀리하면서 道를 말하는 자는 결국 道룰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바로 道이며, 道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 밖에 道 없고, 道 밖에 인간 없다"12)고 하였으니, 李校가 말한 道는 "옷입고 밥먹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입고 먹는 것은 인간의 윤리이며 사물의 이치이다. 입고 먹는 것을 제의하면 사물의 순서를 정할 수 없게 되어, 世의 각종 존재들은 모두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이다. 그러므로 입고

8) ”口之於味, 耳之於聲, 鼻之於吳 身之於安逸, 五者性之不容己者也.”(『王龍溪全』菓3, 『端錄』)

9) ”性而味, 性而色, 性聲, 性而安逸, 性也."(『何心隱 • 125』)

10) "情, 色, 吳, 味, 安逸 盡平其性於命之至焉者也."(『原學講原』卷1)

11) "茅衣座飯卽是人倫物理"

12) “人外無道, 道外無人", 不遠於人, 而遠人以言道者, 是故不可以語范. 可知人卽道也, 道卽人也 人外無道, 道外亦無人."(『李氏文染 • 明燈道古錄』)

먹는 문제를 들어 말한다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자연히 그 속에 속해 있게 되는 것이다. 입고 먹는 문제를 제외한다면, 더욱 더 일반 백성과는 같지 않은 동떨어진 것들만이 있게 된다."13)

李가 말한 "옷입고 밥먹는 것"은 바로 理學家들이 말하는 ‘人欲'이다. 理學家들은 ‘天理'와 ‘人欲'을 물[水]과 불[火]의 관계로 보았지만, 는 "옷입고 밥먹는 것이 바로 人倫 物理이다”라고 하여 입고 먹는 것을 도외시하고, ‘天理'를 말하는 것은 모두 백성과 무관하다고 인식하였다.

李는 또 인간의 "입고 먹는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治産業"에 종사하여야 하며, 治學은 반드시 명확한 공리적 목적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으로, 聖人이라 해도 예외일 수는 없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멀리 날거나 높이 치솟아 인간세계를 버릴 수 없는 바에야, 입지도 않고 먹지도 않는다는 것은, 곡식을 먹지 않고 풀로 옷을 해입으며, 황야로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14) 따라서 그는 市井의 小民에서 聖君賢相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신의 생존을 위해 분투하여야 하며, 어떤 직업에 종사하던 간에 공리적 목적이없을 수 없다고 하였다(李鈴는 이것을 ‘私’라 칭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私란,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은 반드시 私가 있은 후에야 마음이 드러나는 것으로, 만약 私가 없으면 마음이없는 것이다. 밭일을 하는 자가 가을의 수확을 사사로이 한 후에는 반드시 집안을 다스리는 데 힘쓸 것이다. 학문을 하는 자가 나아가 취함을 사사로이 한 후에는 반드시 과거시험 공부에 힘을 기울일

13) ”容衣乞飯卽是人倫道理, 除却究衣座飯無論物矣, 世信]種種, 皆衣與飯耳. 故學衣與飯 而世種種自然在其中, 非衣與飯之外, 更有與所謂種種絶與百姓不相同者也."(『炤』卷1, 『答鄧石賜』)

14) ”匠不能遠飛高璟 棄人間世, 則不衣不食 絶粒衣草而逃荒野也."(『李氏文渠』卷18, 『明燈道古錄』

것이다. 그러므로 官人이라도 祿을 사사로이 할 수 없으면 불러도 오지 않을 것이요, 만약 높은 직책이 아니라면 권해도 오지 않을 것이다. 비록 孔子와 같은 성인이라 할지라도 司敍의 직책이 없고 재상의 일을 맡지 않는다면, 魯나라에 머물지 않고 떠날 것이다. 자연의 이치는 반드시 부합되기 마련이어서, 헛된 억측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죽 사심이 없다는 것은 모두 비현실적인 이야기일 뿐, 다만 현실과 상관없는 것으로서 盤이건 買이건 간에 일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며 총명만 흐릴 뿐이므로, 채택할 수 없는 것이다.15) 사람이 살아나가려면 생계를 유지해나갈 "治生産業"에 종사하여야 하며, "之談(空談)"울 할 수는 없다. "무릇 世의 治生에 종사하는 모든 일들은 더불어 좋아하고 더불어 익히는 것이기 때문에, 더불어 알고 더불어 이야기하는 것이다."16) 그는 ”架空脇說”에 종사하는 正人君子를 매우 허위적이라 생각하였으며, 그들이 “일용하는 모든 것들은 전부 자기를 위해 생각하는 것일 뿐,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입을 열어 학문을 말하면, 너는 자기를 위하지만 나는 타인을 위하며, 너는 자기를 사사로이 하지만 나는 다른 이에게 이롭도록 한다고 말한다."17) 李費는 인간으로서 私가 있는 것은, 자기 자신과 가족을 걱정하여 생계룰

15) ”夫私者, 人之心也. 人必有私, 而後其心乃見, 若無私, 則無心矣. 如者, 私其秋之, 而後治田必力. 居家者, 私積倉之俊, 而後治家必力. 爲學者, 私進取之1俊, 而後學業之治也必力. 故官人而不私其祿, 難召之必不束矣, 荀無高, 則難勸之不至矣. 難有孔子之聖, 荀無司冠之任, 相之攝, 必不能一 安於魯也, 決矣 自然之理, 必至之符 非可以架空脇說也. 然則無私之心, 皆畵耕之談, 場屋之見 但令隔壁聽 不管脚眼, 無益於, 但亂聽耳, 不足采也.”(『藏書』卷32, 『德業偉臣後論』)

16) ”凡世一切治生産業之, 惟其所共好而共 共知而共言者"(『藏書』1, 『答鄧明府』)

17) ”種種日用, 皆爲自家計, 無一人爲人謀者", "及平口講學, 便說爾爲自己, 我爲他人, 爾爲自私, 我欲利他也.”(『禁』卷1, 『答耿司鉉』)

강구해야 하기 때문인 것으로, 본래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정정당당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회피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학자가 治學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생계보장이 되어야 하며, 治生産業에 종사하는 것은 天地의 大義인 것이다.

3.

‘治生'문제에 대하여 토론 형식면에서 보았을 때는 學者가 ‘治生'을 하여야 하는가의 여부를 토론한 것으로, 學者의 생계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도덕과 물질생활 조건의 관계문제, 죽 도덕의 원천문제라고 하는 윤리학에 있어 하나의 깊이 있는 이론적 문제까지 涉及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중국의 古代 思想家들은 이미 광범위하고도 깊이 있게 토론한 바 있는데, 人性문제에 대한 토론은 두드러진 예 중의 하나이다. 많은 사상가들은 人性의 善惡이란 태어나면서 생겨나는 것이라 하여 先驗的 道德論에 빠져 있었다. 理學과 心學온 이 선험적 도덕론을 극도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봉건윤리의 三綱五(‘理')이 天과 心에서 기원한다고 인식하고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 수양을 인간의 물질적 욕구와 절대적으로 대립시켜, 인간의 물질적 요구가 적을수록 修狼은 純正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는 이미 모호한 형태로나마 도덕과 물질조건의 관계를 인식하고, 인간의 물질생활이 사회의 도덕 상황을 제약한다고 생각한 思想家도 있었다. 『管子 • 牧民』에는 "倉가 貸하면 禮節을 알고, 衣食이 足하면 榮辱을 안다”18)라는 구절이 있다. 許衡과 明淸代 진보적 사상가들의 ‘治生'문제에 대한 토론은 이러한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18) "了溫, 則知禮節 衣食足, 則知榮辱."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토론하면서 시종일관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인격의 확립과 도덕수양은 물질적 조건을 벗어날 수 없으며 반드시 ‘治'을 기초로 해야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明祐 학자 가운데 이 문제를 토론한 사람은 매우 많은데, 王良 • 陳確 • 張I段祥 • 唐甄 • 全祖望 • 錢大斬 • 沈莊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 王良의 ‘尊身立本論’과 陳의 ‘治牛爲本論', 그리고 唐甄의 ‘保身, 足食, 立節論’이 가장 精彩하다. 본고에서는 이 세 사람의 학설을 소개하는 데에 중점을 둘 것이며, 다른 사람들의 학설은 중간중간에 삽입하여 소개하도록 한다.

1) 王良의 "尊身立本”論

王良은 王賜明의 大弟子로, 泰學派의 창시인이다. 그의 학설은 王賜明에 대한 계승이지만, 일련의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王陽明과 같지 않다. 인격의 독립과 주체의식을 체현하고자 한 그의 ‘尊身立本論은 王劇의 학설과 다르다. 王長은 製悟장이의 집안에서 태어나 생활이 빈궁하였다. 후에 상업을 하고 의사를 하면서 가계가 점차 풍요해졌으며, 그런 연후에야 학문을 하였으니 그야말로 ”治牛을 급선무로 하고", 그 후에 학문을 하는 길을 전형적으로 걸어갔다고 할 수 있다. 그가 ‘尊身立本'론을 창립한 것은 자신의 경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尊身立本'의 요체는 身이 ‘天下萬物의 本'이라는 것으로, ‘身이란 天下萬物의 本’이며, 사람들은 각자 身울 편안하게 할 줄 알아야 "天下의 本'’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19) 따라서 그는 ‘尊身'과 ‘愛身'을 주장하였으며, 失身하거나 辱身하지말고 "몸을 보배처럼 사랑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王長은 理學家둘이 인간의 기본적 생활욕구를 고려하지 않고 인간을 다만 봉건도덕을

19) 『王心齋先生迫 • 答腦』

실행하는 도구로만 간주하여, 人과는 거리가 있는 도덕적 원칙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무의미한 희생물로 삼는 데에 반대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仁에서 머물고, 慈에서 머물고, 信에 서 머물면서, 만약 安身을 먼저 깨닫지 못한다면, 효에 머물면서 사람의 몸을 삶거나 사람의 허벅지 살을 잘라내는 일이 있게 된다."20) 王良이 말한 ‘安身'이란, 인격과 기본적 생존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며, 인간의 생사를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 도덕 요구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는 沈가 언급한 다음 내용과도 부합된다. ”衣食이 足한 연후에야 예절없음을 하라는 것은 先王의 가르침이었다. 우선 굶어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고 뜻을 세우라는 것은 宋代儒家의 가르침이었다. 峨死라는 두 글자 앞에서 어찌 사람을 責할 것인가? 이는 宋信의 가르침이 先王의 그것보다 고상하고 더욱 人에 근본을 두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宋代에는 먹을 何이 있었기에 이렇게 고상한 말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며, 元代에는 먹을 輯이 없었기 때문에 許魯齋先과 같이 治牛을 급선무로 해야한다는 가르침이 나오게 된 것이다."21) 자기는 '먹을 何祿’이 있어 배부르게 먹고난 후에 다른 사람에게는 굶어 죽더라도 뜻을 세우라고 하는 것은 모든 공허한 이론가와 도덕가들의 공통적 특징으로, 상술한 沈의 언급은 宋 • 明代 理學家들의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王良은 理學에서 尊道와 尊身을 확연하게 대립시키는 관점에 대하여 尊道와 尊身을 상호 통일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즉 尊道와 尊身의 상호 통일이 바로 至善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

20) ”止於仁, 止於孝 止於慈 止於信, 若不先暎껍安身, 止於孝, 克身, 割股有之 矣. 止於敬, 峨死, 有之矣."(『王心齋先生迫集』卷1)

21) ”衣食足責以禮節, 先王之敎也. 先辯一峨死地以立志, 宋信之敎也. 峨死二字何可以責人? 登非宋儒之敎高於先王而不本於人情平? 宋有何祿可食, 則有此過高之言, 元無個祿可食, 午魯齋先生有治生爲急之.”(『落朝樓文渠』卷9)

고 있다. "과 道는 본래 하나이다. 至한 것은 이 道요, 至午한 것은 이 身인 것이다. 尊身하면서 玲道하지 않으면 그것을 料身이라 부를 수 없고, 尊道하면서 身하지 않으면 그것을 篠道라 하지 않는다. 玲身하면서 尊道하여야 비로소 至善인 것이다."22) 王良이 말한 植’는 理學家들이 말하는 ‘天理’가 아니라 ‘百姓들이 日用하는 道'이며, 그것은 주로 인간들의 기본적 물질요구를 지칭한 것이라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서 그 일에 관계하는 것이 학문이요, 그 일에 관계하는 것이 道이다. 사람이 빈곤에 처하여 몸이 얼고 굶주린다면, 그 근본을 잃게 되며 배울 수 없게 된다."23) ”가난하여 몸을 얼고 주리게 하면", 尊身과 尊道는 그 전제를 잃게 되며, 인품과 학문은 물질적으로 기댈 데가 없어지게 된다. 이 점에 대하여 王良보다 뒤에 나온 張腹은 매우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그의 언급을 보자. “한 집안에서 고개를 숙이고 쳐들고자 하거나, 吉凶에 쓰는 데에 있어 남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를 잘 처리하지 못한다면, 이 몸은 종내 올바로 서지 못할 것인데, 어디에서 인품과 학문을 논할 것인가?"24) 그는 학자가 생계를 보장받아야만 "안으로는 자기를 잃지 않고, 밖으로는 사람을 잃지 않는다"25)라고 하였는데, 이는 王良이 말한 바 失身하지 않고 辱身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22) ”身與道原是一. 至尊者此道, 至尊者此身 尊身不竹道, 不謂之尊身, 尊不尊身, 不之尊道 須尊身尊道, 才是至善."(『王心齋先生遺集 • 答眼恥』)

23) "是學, 卽事是道 人有困於貧而凍(倭其身者, 則亦失其本非也.”(『王心齋先生遺集 • 語錄』)

24) “一家附仰之需及吉凶之費不能無所穀靴 若究不爲料理, 此身終亦站不定, 何處可言人品學問平?"(『楊園先生木刻文稿』卷1, 『與吳汝典』)

25) ”內不失己, 外不失人"(同上 卷8, 『子』下)

2) 陳確의 “治生爲本”論

陳確은 明代에 理學에 반대했던 진보적 사상가로, 人性 善惡의 문제에 있어서 理學의 ‘性卽理'라는 관점에 반대하고, 人性 善惡은 후천적 습관의 축적에 의한 것이지 나면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여, ”善惡의 구분이란 습관이 그렇게 한 것이지, 性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26) 라고 하였다. 또, 理欲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는 理와 欲을 대립시키는 데 반대하여, "무릇 天理란 모두 인간의 욕망을 따르는 데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처한 곳이 理이지, 욕망이 없는 데에 무슨 理가 있는가?”27)라고 하였다. 이는 인간의 욕망을 떠나 天理를 말할 수 없고, 天理는 다만 人欲을 따르는 가운데에서 드러난다는 것으로, 욕망과 도덕의 상호관계를 고려하여 일방적인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生이 하고자 하는 바는 義도 역시 하고자 하는 바로, 두 가지가 모두 고려되어야 하지만, 뒤에는 生을 버리고 義롤 취하는 理가 생겨났다."28) 陳確의 ‘治牛爲本論'은 唯物主義的 경향을 내포하고 있는 그의 人性論과 理欲觀의 應用과 發展인 것이다. ‘治牛爲本論’은 陳이 治生문제를 본격적으로 논한 글로, 글의 原題는 「學者以治牛爲本論』이다. 여기에 그 중 일부를 발췌해 보기로 한다.

학문의 길이란 기이한 것이 아니다. 나라를 가진 자는 그 나라를 지키고, 집이 있는 자는 그 집을 지키며, 선비는 그 몸[身]을 지키는 것에 불과하다. 이른바 몸이란 자기의 一身만을 말하는

26) ”惡之分, 習使然也 與性有哉!"(『陳確集 • 氣栗淸濁說』)

27) "盜天理皆從人欲中見", “人欲當處卽是理, 無欲又何理平?"(『陳確 • 與劉伯繩』)

28) ", 所欲也 義亦所欲也, 兩欲相參 而後有舍生取義之理."(同上)

것이 아니라, 父母 • 兄弟 • 妻子·의 일이 모두 身의 內에 포함되는 것이다. 仰 은 결코 다른 사람을 책망해서는 안되는 것이며, 勤儉治生은 진정으로 학자의 木事인 것이다. …… 와 治生은 학자의 木이지만, 治生이 보다 더욱 절실한 문제이댜 …… 진정으로 학자에 뜻을 두었다면, 도 할 수 있어야 하고 治生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천하에 어찌 白聖과 敗子聖賢이 있겠는가? 세상에 어찌 학문으로는 聖의 경지에 이르렀으되 부모 • 처자를 부양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이가 있겠는가? 의 이 말은 전적으로 학자에 대해서 한 것이다. 고로 그 말에 가 없음을 알고 그 말을 體로 삼으려 한다면 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29)

이 글은 王賜明이 許原의 治生論을 비판한 데에 대해서 쓰여진 것이다. 그는 학자에 있어 治生이 讀와 마찬가지로 ‘學人 本'이며, 治이 記血보다 오히려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는데, 그 원인은 學問을 하는 목적이 ‘守身’에 있는 것이며, 만약 治이 기초되지 않으면 매번 남의 신세만 지게 될 뿐으로 독립적 인격이라 말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陳確은 빈한한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그 부친은 가난하여 혼인을 하지 못하고 잠시 남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정 환경 속에서는 독립적 경제기초가 없었으며, 독립적 인격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다. 陳確에게는 그러한 상황들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錢大은 일찍이 다음과

29) "科鼎之道, 無他奇異, 有國者守其國, 有家者守其家, 士守其身, 如是已, 所謂身, 非一身也, 凡父母兄第妻子之事, 皆身以內. 仰, 決不可責之他人, 則勤儉治生狗是學人本. …… 確以, 治牛爲斑 謂二者眞人本, 而治生尤於禎 …… 唯傾志於學者, 則必能禎, 必治生. 天下有白聖, 敗子聖賢哉 有學爲聖貸之人, 而父母妻子之弗能, 而待投於人哉 許魯衍此, 專爲學者而發, 故知其言之無, 而體其者不能無幣耳.”(『陳確 • 文』)

같이 말한 바 있다. "을 하지 못하여 의롭지 못한 재물을 구걸하기 보다는 차라리 돈벌이에만 급급할지언정 困小에 어긋나는 음식을 사양하는 것이 낫다."30) '之財'와 ‘而之’를 받는 것은 안격을 잃어버리는 것이며, ‘求田問舍'하여 治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오히려 인격을 보전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중국의 우수한 지식분자들의 기질과 절개를 반영한 것이면서 동시에 다음과 같은 하나의 진리를 도출해내고 있기도 하댜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면, 도덕적 수양과 인격적 독립이 모두 의지할 바를 잃게 된다. 錢大斬의 언급은 陳確의 사상과 완전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3) 唐甄의 "保身 • 足食 • 立節"論

唐甄은 淸初의 초기 思想家로, 官路가 평탄치 못하였다. 10개월 동안 知縣을 지내다가 情官되었으며, 그 후에는 경제 상황이 갈수록 나빠져, 농토를 팔고 상업을 했으며, ‘牙'(거간꾼)가 되기도 하여 사대부들의 조롱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唐甄은 君才과 봉건사회의 부패적 정치를 강렬하게 반대하는 진보적 사상을 갖고 있었다. 학자의 治學문제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의 절실한 체험으로 인해 괄목할 만한 사상을 제기하였다. 그 중심사상이 保身 • 足食 • 立節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의 삶에 있어 몸이 중요하다. 天地가 생겨난 이래, 包儀氏는 그물을 만들었고, 神殷氏는 보습과 화폐를 만들었으며, 軒綾氏 • 陶唐氏 • 有處氏는 배 • 수레 • 절구 • 활 • 가옥을 만들었다. 禹는 治水룰 하고, 稷은 농사를 가르쳤으며, 契는 인륜을 밝혔고, 孔子와 孟子는 治學을 드러나게 하여

30) "與其不治生産而乞不義之祐 毋寧求田問舍而却非閃之"(『十篤齋迷新錄』卷18)

德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으니, 이는 모두 몸을 위한 것이라", ”聖人은 牛의 德을 좋아하였고, 인간의 몸을 보전하였으니, …… 道란 이를 말하는 것이며, 學이란 이를 배우는 것이다. 어찌 다른 것이 있겠는가!"31) 인류의 생존에 있어 첫번째 전제는 물질적 생활재료를 생산해내어, 인간의 衣 • 食 • 住 동 생활적 수요를 만족시키는 것이댜 사회생활에 있어 분업이 출현한 이후에 학술활동에 종사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생존문제를 벗어나 空中樓식의 연구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앞서의 인용문으로 볼 때 唐甄은 비록 후대인만이 해낼 수 있는 이론적 개괄은 못하였지만, 그는 古代聖賢의 모든 활동이 전부 ‘保身'(인간의 생활적 수요를 만족시켜주는)을 둘러싸고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이미 인식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는 이러한 전제를 벗어나서 공허하게 도덕을 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추위와 굶주림이 몰려오는데 約룰 논할 수 없고, 부모를 굶겨서 돌아가시게 해놓고 孝룰 논할 수 없으며, 遺風이 끊어진 데에서 울 말할 수 없다. 여기에서 학문을 말한다면 무슨 학문을 말할 것이며, 여기에서 德으로 들어간다면 어떤 道로 들어갈 것인가? 반드시 죽음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 先代의 전통을 끊지 말고 後代로 하여금 계승하게 해야 할 것이다.32)

唐甄은 자식이 없었음에도, 전통관념에 속박되어 “유풍이 끊어진

31) "人之生也, 身爲血 自有天地以來, 包氏爲節, 神店氏爲未, 爲市, 軒報氏, 陶唐氏, 有奧氏爲舟, 爲服乘, 爲臼, 爲弓矢, 爲棟宇, 平水土, 稷敎核稿 契明人倫 孔氏孟氏顯明治學, 開入德之, 皆以爲身也." "聖人生之德, 保人之身, …… 道者, 道此; 學者, 學此; 媒有他哉!"(『潛』下篇下, 『有』)32) ”凍峨返矣 不可以言; 考批嚴矣 不可以孝; 先擇斯矣, 不可以. 於講學, 下學可講? 於進德, 何道可進? 必使不路於死, 不絶於先, 有繼於後.” (『潛點上篇下, 『交』)

데에서 傳을 논할 수 없다”라고 생각했던 것은 가르침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부모와 가족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핍박당하는 데에서 禮와 孝룰 논할 수 없다”고 한 것은 매우 이치에 합당하다. 물질적 생활조건과 인격 보전의 관계에 대해서 唐甄은 『潛 • 篇』에서 두 가지 지식인의 예를 들고 있다. 한 사람은 ”가난해서 妻가 없고", 한 사람은 "부유해서 田園을 갖고 있다”. 두 사람은 똑같이 권력자로부터 부름을 받았고, 貧者는 절개를 굽히고 섬겨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았지만, 부자는 부름을 거부하고 절개를 지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여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자기의 절개를 지킬 수 없는 자는 食이 넉넉하지 못하고 …… 절개를 지킬 수 있는 자는 食이 넉넉하다. 節을 세울 수 있는가의 여부는 食이 넉넉한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33) 따라서 그는 治과 迷節, 그리고 인격의 독립을 간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다. 하지만 또한 그는 足食과 義이라는 것이 말로는 하기 쉽지만, 淸의 부패한 정치현실로 인해 학자들이 정당하게 삶을 영위해갈 길이 거의 막혀 있었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食'을 주장한다.

唐甄은 『潛 • 食難篇』에서 지식인의 사회적 지위와 생활상황의 변화에 대하여 매우 현실감 있게 기술하였는데,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 다음에 옮겨 적어 본다.

上古시대에는 萊賢의 名이 없었으며, 中古시대에 와서야 浪老의 禮가 생겨났다. 狼老란 孝를 가르치는 것이지, 飮食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저 그 시기에는 위로는 풍부하고 아래로는 풍족하였으며, 현자가 모두 在位하고 있어, 養할 것이 없었으니, 이는 盛

33) ”不能守其節者, 食不足也 …… 能守其節者, 食足也. 節之立不立, 由於食之足不足.“

世의 風이었다. 下古시대가 되면서 무기를 사용하며 다투었고, 예의를 숭상하지 않아, 선비는 가난해지고 절개가 없어졌다. 이에 富한 大臣들이 그들을 거두어 에 두었으며, 幾千人에게 고기를 먹게 하여 그 室家를 구휼하였다. 또 關市와 疆의 小史라 하여도 모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末但가 되어서는 또 임관시키기 위해 부르거나 관직에 임명하는 경우가 있었고, 선비 중의 가난한 자는 오히려 여기에 의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두 가지 모두 뜻을 낮추고 몸을 굽히는 것으로, 士道가 쇠락하였음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비가 땅이 없다 하더라도 限峨에 시달려 쓰러지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제도가 있음으로 해서 먹고 사는 방도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박봉의 하급관리라 하여도 모두 조정에서 선발하기 때문에, 비록 현명하고 능력 있다 하여도 등용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옛날에 임관시키기 위하여 불렀던 것은 오히려 盛라 할 수 있었다. 公의 賤라 하여도 선비 중에서 及할 수 있는 자는 없어, 개나 말이 먹는 음식은 감히 바라보지도 못하였고, 거위나 오리가 먹는 음식을 구하려 해도 구할 수가 없었다. 과거에 食客을 招致하던 것은 오히려 盛事였다 할 수 있다. 만약 그 좋아하는 바가 있다면 갖게 되는 것이었다. 장사를 잘하는 무리, 엎드리기룰 잘하는 무리, 명령을 잘 수행하는 무리, 기관과 잘 통하는 무리, 이 각각의 무리들은 모두 그 때문에 부귀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에 재주있는 선비가 能할 수 있겠는가? 설사 能하다 해도 할 수 있겠는가?34)

34) ”上古無穀賢之名, 中古乃有莊老之. 殺老, 所以敎孝也, 非爲飮食之也. 蓋其時, 上富下足, 賢者皆已在位, 無待於, 此盛世之風也 降及下古, 爭用甲兵, 不尙面義, 士乃貧而無節 於是富貴大臣, 收而之下, 肉食者幾千人, 而皆以照其室家 又若掛抽面賜諸小吏 人皆可爲之. 降及末世又有辭召署職之, 士之貧者猶有所籍焉 斯二者, 降志屈身, 士亦段炭矣. 然而士之無, 不至於險峨困卜者, 猶頓有此就食之所也 其在於今, 斗食少, 皆出於朝廷選授 ; 難有

賢能 不爲也 昔之群召, 猶盛. 公卿)段士, 士無及者, 不政其犬鳥之食, 卽求其朗終之食而不可也. 昔之致客, 猶盛. 若其所好, 則有之矣 • 買之徒, 善伏之徒, 善使命之徒, 善關通之徒. 此諸徒者,多因之以得富貸矣. 此其使士能之平? 卽能之, 其可爲平?"

唐甄은 지식인(원문에는 知識)의 지위변화를 다섯 시기로 나누었는데, 이른바 上古 • 中古 • 下古 • 末世와 지금(원문에는 當今)이 그것이댜 다섯 시기의 시간적 경계를 함부로 나눌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관련 자료들을 통해, 중국 지식분자의 사회적 지위가 쇠락하기 시작한 것이 대략 송대 이후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活代학자 沈幸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宋祖는 천하의 利을 모두 회수하여 官에 귀속시켰다. 이리하여 士大夫는 반드시 농업을 겸하여야 집안을 꾸려갈 수 있게 되었으며, 모든 것이 옛날과 달라졌다. 벼슬아치가 이미 小民들의 利에 참여하고, 벼슬하지 못한 사람들도 반드시 농 • 상업에 종사하고 나서야 생계를 잇게 되니, 독서 이외에 다른 일에도 종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貨殖之는 더욱 급박한 것이 되었고, 商의 勢는 더욱 중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父兄이 먼저 사업을 하기 전에는 子弟가 禎를 하여 顯通하게 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옛날에는 四民으로 구분하였지만, 후세에는 四民을 나누지 않았다. 옛날에는 선비의 자식은 항상 선비가 되었지만, 후에 와서는 상인의 자식이라야 선비가 될 수 있었다. 이는 宋 • 元 • 明 이래의 큰 차이이다.35)

35) 洙祖乃盡收天下之利權歸於官, 於是士大夫始必兼四業之業, 方槪家, 一切與古異矣 仕紙與小民之利, 未仕者又必先有店桑之業方得及朝夕, 以專事進取, 於是貨殖之事益急 商買之勢益頂 非父兄先事業於前, 子弟無由韻以致顯通 是故古者四民分, 後世四民不分. 古者士之子恒待士, 後世商之子方能爲士, 此宋元明以來之大校也."(『机樓文渠』24)

沈蟲의 이 말은 비록 앞서 인용한 唐甄의 언급과 각도는 다르지만, 거기에 반영되어 있는 지식분자 지위의 변화는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는 송대 이후, 지식분자가 생활할 길이 점차 兆唱해져(元代에는 ‘九(孟十弓'의 說이 있었다), 반드시 농업이나 상업을 겸해야만 가계를 꾸려나갈 수 있고, 원칙적으로 ‘뜻을 낮추고 몸을 굽혀야만'굶주려 쓰러지지’ 않는 것이었다. 唐甄이 살던 에 와서는 생활이 더욱 어려워져, 권세에 빌붙거나 投機를 하지 않으면 정통파 지식인은 ‘개나 말의 먹이'조차도 얻기 어려웠다. 이상을 통하여 우리는 元代 이후 학자들의 治生문제가 어떻게 사회의 관심을 끌어왔는가를 알 수 있다. 원인은 간단하다. ‘利이 모두 관리에게 귀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박봉의 하급관리'직을 구하려 해도 구할 수 없었고, 이렇게 되자 학자들은 생존과 인격적 독립의 보촌을 생각하게 되었고, 거기에서는 다만 ‘治牛'이라는 한갈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治에 관한 魯齋의 언급대로라면, 儒者의 急務는 다음과 같다. 즉, 몸소 경작할 수 있는 자는 경작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는 한 가지 座能을 골라, 먹고 사는 방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宋代의 儒家가 오늘날에 다시 태어난다해도 이 말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36)

學者의 治牛문제는 王賜明에 의해 ‘사람을 그르친다’고 비판받기도 하였으나, 학자들의 상업행위는 오히려 일반 사대부에 의해 부끄럽게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明代 중엽 이후, 시민계충이 홍기함에 따라 상인의 지위는 계속 높아졌으며 전통적 도덕 윤리관념도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許篠은 治生문제를 언급하면서도 商賈의 문제에 이르면 오히려 本旨를 피하였는데, 다음의 내용에서도 그러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는 비록 하찮은 것이기는 하지

36) ”若如魯齋治生之 則質儒者之急務, 能射耕者射耕, 不能射耕者, 擇一松以爲食力之. 宋偉復生於今, 亦無以易斯言.”(『机樓文染』卷9)

만, 그래도 할 만한 것이 있다. 만약 를 잃지 않거나, 잠시나마 도움이 된다면 못할 것도 없다."37) 하지만 明代 중엽 이후에 오면 많은 학자들이 商賈의 지위를 쟁취하기 위해서 공개적으로 다투기도 한다. 何心은 "工人들은 商가 되려 하고, 商는 선비가 되려 하고, …… 선비는 聖貿이 되려 한다”38)고 하였는데, 反傳統관념이 工商와 선비(土), 그리고 聖의 사이에 있던 이전의 절대적 간극을 매울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李費는 商賈들이 겪는 고통과 굴욕에 깊은 동정을 보냈으며, 黃宗羲는 전통적 ‘重腦仰商 정책에 반대하여 ‘’을 주장하였고, 王源은 工을 장려할 것을 주장하여, 상인에게 녹봉없는 이름뿐인 직합을 주어 사대부의 반열로 올라서게 하였다. 甄은 생활의 핍박으로 인해 한때 장사도 해보았고, 거간꾼이 되기도 하여 사람들로부터 "장바닥에서 스스로를 더럽히는 것은 君子가 할 바가 아니다”라고 조롱을 당하기도 했는데, 唐甄은 이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비판하였다. "진실로 벼슬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祿을 받으면, 그것이 公卿의 敬에까지 미치고, 두루 확산되어 아래로 는 농민이나 상인이 그것을 얻게 된다면, 재물은 구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구한다면 반드시 소인인 것이다. 내가 장사를 해서 살아갈 때 사람들은 몸을 욕되게 한다고 하면서도, 몸을 욕되게 하지 않는 방법은 알지 못하였다."39) 唐甄은 "身하여 小人을 좇는 것"'40)이나, ”殺身하여 小人울 좇는 것"41)은 모두 몸을 욕되게

37) ”商買難爲遂末, 亦有可爲者, 果處不失義利, 或以姑濟一寺, 亦無不可.”

38) "濃工超而爲商買, 商買超而爲士, …… 士超而爲聖賢."(『何心隱渠 • 答作主』)

39) "非仕而祿, 及公卿敬禮而周之, 其下耕賈而之, 財無可求之道. 求之, 必小人矣 我之以賈爲者 人以爲辱其身, 而不知所以不辱其身也."(『潛』上篇下, 紅恥)

40) ”屈身以從小人"

41) “殺身以狗小人"

하는 것이라 하였으며, 권세 있는 자에게 나아가 빌붙는 것이나 던져주는 음식을 먹는 것은 모두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또 治牛 自立하고, 足食 義節하는 것은 몸을 욕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몸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君子의 道는 먼저 자기 몸을 사랑하여, 亂에는 나가지 않고 暗君을 섬기지 않는 것이다. 몸을 굽혀 소인을 좇는 것은 진실로 추하다 할 만한 일이요, 殺身하여 소인을 좇는 것 역시 스스로를 가볍게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義에도 서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며, 勇에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고, 忠에도 이르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詩에 이르기를 "내게 미리 준비해둔 맛있는 음식이 있는데, 이도 역시 겨울을 막을 준비이니라” 하였는데, 기다림이 있어야 하며 군자가 자기의 몸을 사랑해야 함을 이른 것이다.42)

'帝'은 맛있는 것을 축적해 놓았음을 말한 것으로, 唐甄이 말한 ‘羽에 해당한다. ‘기다림이 있어야' 자립하여 인격을 보전할 수 있으며, 아무 직업에나 종사하지 않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그(唐甄)가 종사하는 직업이 낮고 천하다고 여기어 "장사치도 낮지만, 중매장이는 더 낮다”라고 하였지만, 그는 스스로를 呂尙에 비기고 있다. ”呂이 孟에서 밥을 팔았던 것이나, 唐甄이 吳市에서 중매장이가 되었던 것은 모두 한 가지 뜻이다."43) 唐甄의 이 말은 한편으로는 가난한 지식분자의 기백과 절개를 반영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가 자신의 생활적 실천을 거쳐, ‘治生'과 인격독립 및 도덕수

42) “君子之道 先愛其身, 不立亂, 不暗君, 屈身以從小人, 固可峨也 ; 殺身以狗小人, 亦自輕也. 是故義有所不立, 勇有所不爲, 忠有所不致. 詩曰 : ‘我有旨, 亦以御冬', 言有待也, 君子愛身之也.”(『書』上訂下, 『有爲』)

43) "呂尙買飯於孟津, 唐甄爲牙於吳市, 其義一也.”(『書』上訂下, 『有爲』)

양의 밀접한 관계에 대하여 깊이있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여가에서 明淸 學者의 도덕윤리관념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전통적인, 특히 理學의 도덕관념에 의하면, 군자는 利를 말하지 않으며, 특히 商을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었댜 하지만 唐甄은 利와 商을 말하였으면서도 자신을 고대 성현에 비기고, 자신의 도덕관념을 理學에 비기었으니, 이는 같은 시대에 동일하게 논할 것이 아니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明活 思想家들의 ‘治牛'문제에 대한 토론은 許冀의 治牛論의 내용과 비교하여 풍부하고 광범위해졌다. 明淸學者들의 관심은 학자의 治牛문제 이외에도 ‘‘國家治亂의 源, 生民根本의 計",44) 그리고 唐甄이 말한 ”聖人이 천하를 다스린다고 했던 것은 그 生을 다스린다는 것이다"라고 하는 전체 國計民生 문제에 더 많이 집중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논술들이 있기 때문에 다시 중복하지는 않겠다. 다만 학자의 ‘治牛.'문제에 대한 언급들을 개략적으로 정리하여 참고용으로 제공할 따름이다. (김양수 옮김)

44) ”國家治亂之原, 生民根本之計"(顧炎武, 『亭林俠文輯補 • 與黃太沖』)

中國 初期 啓蒙思想家의 土地思想

陳朝陣 • 陳之安

중국에서 封建制가 형성된 이래로, 봉건적 土地私有制는 보편적인 土地政策이 되었고, 地主土地所有制는 봉건사회의 根幹이 되는 제도 가운데 하나였다. 責族이나 蒙强, 富商, 巨賈 등 모두가 더 많은 토지를 차지하기 위해 애를 썼고, 그리하여 심각한 土地兼井 현상이 일어나게 되어 봉건사회에는 週期的으로 위기가 발생하였다.

역사상 수많은 지식인들과 진보적인 정치가들이 토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갖가지 방안들을 제시하였고, 그것을 통해서 사회적인 위기를 가라앉히고자 하였다. 그들이 내걸었던 주장을 종합해보면, 결국은 限田와 均田制, 그리고 丑의 부활’이라는 세가지 방식으로 收敏된다. 그것은 곧 사사로이 占有할 수 있는 토지의 수량을 제한하거나 土地占有이나 利用을 균등하게 분배하기를 요구하는 것이고, 또한 봉건적 土地國有制로써 土地私有制롤 代替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역사적으로 사회모순을 누그러뜨리는 데는 일정 정도 진보적인 작용을 했지만, 봉건적인 土地私有制라는 근본적인 문제까지는 건드리지 못하였다.

明淸時代에 이르러서 새로운 啓蒙運動이 일어남에 따라, 전통적인 封建正統親念과 대립되는 ‘異端'적이고 ‘坂逆'적인 수많은 사상이 출현하였다. 토지문제에 있어서도 수많은 啓蒙思想家들은 중국 역

대의 土地經濟思想에 대하여 총괄적인 평가와 비판을 가하였고, 또한 몇 가지 새로운 思想과 주장을 제기하였다. 그 중 일부 이론은 봉건적 土地所有制의 문제까지를 건드림으로써 사람들의 耳目을 새롭게 하였고 두 귀가 번쩍 트일 만큼 사람들을 각성시키는 작용을 하여, 역대 民主革命에 있어서 토지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이론과 주장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본 논문은 이러한 시기의 啓蒙思想家의 土地經濟思想에 대하여 개괄과 평가를 시도한 것이다.

土地兼現象은 봉건제의 고질적인 병폐로, 봉건제도 그 자체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일찍이 西漢시대에 范仲는 "부자들의 전답은 肝이나 隋으로 연이어져 있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송곳을 꽂을 만한 땅도 없다"1)고 지적하고, "백성들의 이름으로 된 토지를 제한함으로써 부족함을 보충하고, 토지겸병의 길을 막을 것"2) 을 요구하였다. 이는 私的으로 占有되는 토지의 수량을 제한하여, 백성들에게 공평하게 토지를 占有하고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할 것을 건의한 것이었다. 이 건의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土地改革思想이라고 할 수 있으나, 아깝게도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그 후에도 師丹, 孔光 등이 계속해서 限田을 건의하였고, 또한 限田의 구체적인 수량까지도 제시하였다.

이와 동시에,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많은 학자들과 정치가들은 이미 土地兼이 土地私有制의 필연적인 산물임을 인식하였다. 그둘은 단지 限田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先秦儒家의 井田制의 이상을 이용하고자 하였고, ”井田制로 돌아가자’’는 구호 아래서 봉건시대 토지제도의 또다른 기본 형태인 井田의 유형을 제시하였다. 東漢 때의 仲長統은 井田制로

1) 『犯書』, 『食貨志』. “富者連肝l悟, 貧者無立雜之地.”

2) 위와 같음. ”限民名風 以不足, 塞井兼之路.”

돌아감으로써 大地主의 土地兼과 횡포를 막을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지금 태평시대의 기강을 펼치고, 지극한 교화의 터전을 닦고, 백성들의 부의 불평등을 고르게 하고, 풍속의 사치함을 바로잡는 데 있어서, 井田가 아니라면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없다"3)고 하여, '로 돌아가는 것'을 立國의 요건이 라고까지 주장하였다. 限田는 土地私有의 前提하에서 土地兼에 제한울 가하는 것이다. 반면에 '로 돌아간다’는 것은 봉건적 土地國有로써 土地私有制룰 대체하는 것으로, 土地兼의 根源과 단절하는 것이다. 이것은 地主土地私有制가 이미 주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고 지주계급이 封建政의 주요한 사회적 기초가 된 상황 아래서, 필연적으로 地가 蒙强의 반대와 저항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록 수많은 지식인들이나 정치가들이 限田制나 井田制를 주장했지만, 이는 지주계급의 근본적인 이익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결국 실행될 수 없었던 것이다.

南北朝시대에 이르러 北朝의 名臣인 李安世가 또다시 均田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太和 원년(476년)에 魏 孝文帝에게 상소를 올려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臣이 듣건대, 백성들을 헤아려서 토지롤 나누는 것은 나라의 기틀이 되는 중요한 법도이고, 邑地를 고르게 하는 것은 통치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井稅가 시행된 것은 이미 그 연원이 오래되었습니다. 묵히는 땅의 수를 그 법도를 만들어서 제한하는 것은, 헛되이 버려지는 땅을 없애고 헛되이 노는 인력을 없애기 위해서이며, 기름진 곡식과 재산을 권세있는 집에서 독차지하지 못하게 하고 가난한 집에서도 경작할 수 있는 땅을 갖도록 하기

3) 『後淡』, 『中長統傳』. ”今欲張太平之紀制, 立至化之基址, 齊民財之, 正風俗之客佳, 非井莫由也.”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난함을 구휼하고 탐욕함을 억제할 수 있으며, 부귀하고 빈천함의 불평등을 고르게 하고, 집집마다 백성들을 가지런하게 할 수 있습니다. …… 지금 비록 桑井은 다시 회복하기 어려우나, 마땅히 각각 양을 고르게 하고 그 經術을 살펴서 그것을 나누는 방법이 기준에 맞도록 하고 힘써 일하는 것을 권장하도록 한다면, 細人둘은 資의 이로움을 얻을 것이고 豪右들은 여분의 토지가 없게 될 것입니다.4)

그는 농지는 반드시 경작할 능력이 있는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丞强들이 마음대로 좋은 토지를 점유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이것을 ‘통치의 근본’이라고 여겼다. 그는 受을 통하여 國有土地를 노동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장기간 임대해 주고, 遠田을 통하여 土地所有을 국가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건의는 魏 孝文帝에게 받아들여져서 北魏에서 실시될 수 있었다. 이 土地經訥思想의 실행은, 한편으로는 노동하는 이들에게 일정 정도 생산에 대한 의욕과 적극성을 심어주었고, 동시에 封建國家에게 항상적인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또한 이처럼 일부 國有土地롤 가지고 노동력과 토지 사이의 비율을 조절함으로써, 사회적 모순을 완화시킬 수도 있었다. 그것은 이후 천 여년 동안 封建經濟思想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均田사상 역시 역대 지식인들과 정치가들이 그것으로써 토지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중요 사상형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均田

4) 『文獻通考』 卷2, 『試』2. ”臣人細野, 經國大式, 邑地相參, 致治之本, 井稅之興, 其來日久, 田萊之數, 制之以限, 盜欲使土不廣功, 人閔遊力, 雄担之家, 不獨行映之美, 單昞之夫, 亦有頃1敏之分, 所以他彼貧敬, 仰炫食欲, 同富約之不均, 一齊民于偏戶……今難桑井難復, 宜各均, 審其經術, 令分松有準, 力業相稱 細人獲箕生之利, 豪右源余地之盆.”

制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先決條件이 필요하였다. 그것은 국가가 대량의 농지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만 농민들에게 ‘授田’을 할 수 있고, 均田의 시행을 보장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땅은 많고 인구는 적었으며, 게다가 戰亂으로 인하여 황무지가 특히 많았던 상황이었으므로, 이는 매우 적합한 것이었다. 그래서 北魏에서 均田制는 매우 성공적으로 실행되었고, 北와 北, 그리고 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이 제도를 踏裝하였다. 그러나 唐 중엽 이후로는 國有土地가 감소하였고 노동력에 대한 국가의 통제도 약화되었으므로, 均田制는 점차로 무너졌다. 원래 授田을 했던 國有土地들도 私人들에게 井合되고 말았다. 宋明代에 이르러서는, 여타의 國有土地들까지도 (봉건국가가 관할기관울 두어서 직접 경작했던 '' 같은 것들) 私人들의 소유로 넘어가고 말았다. 심지어는 과거에 국가가 통제하고 私人들의 개간울 허가하지 않았던 수많은 농지들까지도 私人들이 開하고 "營業"할 수 있게 허가하였다. 이는 土地兼에 더욱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였고, 土地私有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특히 明 중엽 이후로는 土地兼井과 土地染의 진행도가 더욱 빨라져서, 정치적인 특권을 가진 일부 大官僚地主들의 경우 더욱 극심하게 토지를 兼井하였고, 국가의 대부분의 토지가 극소수 사람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땅이 있는 사람은 농사를 돌보지 않고, 농사를 짓는 사람은 땅이 없는 것이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明末 봉건정부의 賊稅 착취도 아주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다. 토지의 과도한 집중과 잔혹한 賊稅의 착취는, 부자는 더욱 부유하게 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게 하는 극도의 兩極分化룰 초래하였고, 마침내는 明末의 殷民大坂亂까지 일어나게 만들었다. 봉기한 농민들은 ‘均田免' • ‘貸賤均田'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농민들은 平均과 平等에 대한 요구를 토지문제에서 명확하게 표현하였고, 토지

에 대한 근본적인 갈망을 폭력적인 방식을 이용하여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중국 農民蜂起의 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사건이었으며, 어렴풋이나마 封建地主土地所有制에 대해 반대하는 사상을 포함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明 중엽 이후로는 이미 경제가 발달한 일부 지역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萌牙가 출현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萌牙와 당시에 점차로 유입되고 있던 西學의 영향 아래서, 일부 진보적인 사상가들은 이미 당시의 공허하고 내용 없는 學風이 국가경제와 民牛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을 탐구하였고 質際를 숭상하였으며, 經世致用을 주장하였다. 정치 경제 과학가술 군사 등의 방면에서 모두 수많은 새로운 견해가 만들어졌으며, 한 시대 啓蒙思想의 새로운 學風을 열었다. 수많은 啓蒙思想家들이 土地經濟思想에 있어서 이전 시기와 구분되는 새로운 견해를 적지 않게 제기하였으니, 이는 당시 사회의 새로운 특징이 반영된 것이었다.

黃宗羲의 토지제도 개혁에 대한 理想은 ‘丑를 회복하자’는 형식으로 표출되었다. 즉 그는 復古의 外皮를 입고서 近代人의 요구를 제출한 것이다. 그는 土地國有라는 역사적 형식을 보존하면서 토지를 균등하게 나눌 것을 기획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의 聖君은 授田으로써 백성들을 부양하였는데, 지금은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토지를 법으로써 빼앗는다. 授田의 정책은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토지를 빼앗는 일만 먼저 벌어지니, 이는 이른바 不義를 행하는 일이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5)

5) 『 明夷待訪錄』, 『制』. ”古之聖君方授田以從民, 今民所自有之, 乃復以法奪之. 授田之政未成, 而奪田之事先見, 所行一不義而不可爲也."

先王이 를 만든 것은 백성들의 生業에 따라서 그들의 삶을 풍족하게 만둘기 위한 것이었다.6)

그는 백성들을 부양하고 풍족하게 하는 것이 균등한 授田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구상에 따라서 "丑”의 청사진을 그려 냈다. 그는 말했다.

천하의 屯田이 모두 육십사만 사천이백사십삼 頃인데, 6년에 조사된 토지는 모두 칠백일만 삼천구백칠십육 頃이어서, 屯田이 그 가운데 십분의 일이고, 授田의 法이 행해지지 않은 것이 구할이다 일할의 경향을 구할의 경향에 따르게 하는 것은 행하기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없다. 하물며 토지에는 과 民田이 있고 官이라는 것은 백성들이 얻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데, 州縣 안에도 訂이 또한 그 십분의 삼이나 되니, 실제로 토지를 고르게 나눈다면 人戶 일천육십이만 일천사백삼십육에 매호당 授田이 오십 敵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도리어 일억칠천삼십 이만 오천팔백십팔 敵가 남게 되니, 富民이 소유한 것을 내버려둔다 할지라도 천하의 토지는 부족함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하필 限田이니 均田이니 하고 복잡하게 하여 헛되이 富民들을 괴롭히는 일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屯田의 시행에 있어서 로 돌아가는 것이 반드시 필요함을 알겠다.7)

6) 위와 같음. ”先王之, 所以遂民之生, 使其也.”

7) 위와 같음. "天下, 見額六十四万四千二百四十三切, 以万歷六年質在田土七百一万三千九百七十六頃二十八敵律之, 屯田居其十分之一也, 授田之法未行者特九分耳. 由一以推之九, 似亦未爲難行, 況田有官民, 官田者非民而自有者也, 縣之內, 官又居其十分之三, 以質在土均之, 人戶一千六十二万一千四百三十六, 每戶授田五十, 尙余一万七千三十二万五千八百二十八, 以聽富民所占, 則天下之, 自元不足, 又必見, 均粉之而徒爲困苦寫民之平? 故吾于屯田之行, 而知井田之必可復也.”

黃宗는 단지 간단한 통계자료에 의거하여 복잡한 土地分配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단순화의 오류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의 이러한 방안은 매우 많은 결점과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어서, 卓上空論에 불과했을 뿐 어떤 실천적인 의의를 가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안은 새로운 近代思想의 萌牙를 보여준 것이었다. 우선 ‘토지를 균등하게 나눈다’는 그의 발상이 추구하는 전망은 仕의 세계였다. 그는 토지를 균등하게 나눈다고 할지라도 ‘民'의 사유토지에 대해서는 보호해야 하고 發動울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그의 土地思想 가운데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는 여러 차례 걸쳐 私에 대한 徵稅가 ‘不仁'한 것이며, 限田으로써 富民의 토지를 빼앗는 것이 ‘'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土地私有制라는 원칙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토지가 없는 농민들의 토지에 대한 요구를 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富民의 土地所有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그의 이러한 사상은 당시 新興市民階級의 이익과 사상으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사람들 누구나 토지와 기타 생산수단을 소유할 평등한 권리를 갖게 되기를 희망한 것이었다. 이것은 封建統治階級의 이익을 옹호하고 공고히 할 것을 목적으로 한 이전의 토지경제사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濟之' • ‘均之’의 토지개혁론은 근대진보사상의 특징을 지닌 것이었다. 또한 그의 井田制 구상의 강조점은 주로 官田을 농민에게 분배해 주는 데 있었다. 특히 그는 당시의 官田所有制를 비판하고 皇室과 官府가 토지를 대량으로 점유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였다. 明末 官府가 점유했던 대량의 토지가 백성의 생활을 침범하는 병폐를 초래했던 데 대해서 비판한 것은, 皇室이나 官府와 土地所有을 놓고 다투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는 封建專制에 반대하는 투쟁의 또다른 한 가지 형태를 이룬 것이다.

이와 동시에 또다른 啓蒙思想家인 王夫之는 역시 시대의 선두에 서서, 토지가 군주의 소유라는 전통적인 봉건 토지경제사상을 비판하였다. 그는 말했다.

토지는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사사로이 할 수 없는 것이다.8)

땅을 가지고 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은, 하늘을 그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늘을 나눌 수가 없듯이 땅도 가를 수가 없다 왕이 비록 하늘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어찌 하늘과 땅을 사사로이 할 수 있겠으며, 어찌 감히 天地 본래의 두터움을 탐을 내어 그것을 마음대로 나누고 자기의 땅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9)

그는 토지가 자연의 산물이므로 왕처럼 존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사로이 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때문에 그는 줄곧 전설 속의 ‘歸田受田'의 제도를 부인하였고, ”歸田受田은 千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一夫五十軌’라고 한 것은 (세금을 걷기 위해서) 五十敵를 한 사람으로 계산했다는 뜻이고, ‘一夫七十敵'라고 한 것은 七十敵를 한 사람으로 계산했다는 뜻이며, ‘一夫百'라고 한 것은 百敵를 한 사람으로 계산했다는 뜻이다. 이는 取民의 제도를 말한 것이지, 授民의 제도를 말한 것은 아니다”10)라고 여겼다. 이것은 이전의 이른바 井田制가 고대국가의 課稅의 표준이지, ‘歸田授田’의 토지제도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8) 『夢』. ”若土, 非王者之所私也.”

9) 「通院論』 卷14. ”地之不可服爲一人有, 猶天也 天元可分, 地元可四, 王者難爲天之子, 天地岩而私之, 而政食天地固然之博厚以割裂爲己土平?"

10) 『四牌疏 • 孟子』 上篇 "泊田授風 千古必元之. 其言一夫五十敵者, 五十敵而一夫也, 一夫七十敵者, 七十敵而一夫也, 一夫百者, 百敵而一夫也. 此取民之制 而非言授民之制也.”

孟가 臼의 책략을 말한 것은 모두가 取民의 제도를 일컬은 것이지, 授民을 일컬은 것은 아니다. 천하는 왕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으므로, 왕은 천하의 사람들을 신하로 삼고 그들을 보살피고자 애쓴다. …… 天地之에 땅이 있으면 사람이 그 위에서 살게 되니, 그로써 길러지는 것이다. 힘이 있는 자가 그 땅을 다스리게 되는 까닭에 왕조가 바뀌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백성들은 스스로 항상적인 경작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굳이 왕이 授田울 내리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11)

王夫之는 자기 시대의 관념을 가지고 歸田授田의 井田를 단호하게 부정하였으며, 君主나 帝王이 토지를 점유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는 오직 자기의 힘을 가지고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만이 토지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실상 王夫之의 이러한 사상은 이미 봉건토지소유제의 문제를 건드리기 시작한 것이며,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普天之下 莫非王土)”는 봉건관념에 대해서 부정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만 그 스스로 자각적으로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 이론을 가지고 다만 왕의 소유를 부정했을 뿐, 그것을 가지고 봉건토지사유제를 반대하지는 못하였다. 그의 이 관점은 個人財産權 보호를 요구하는 시대적 특징을 체현한 것이며, 당시의 무수한 농민들의 토지균등 분배에 대한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王夫之는 이전에 土地兼을 방지하기 위해 제시되었던 限田이나 均田의 법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는 限田을 통하여 土地兼#을 억제하는 것에 대해서 "뚱뚱한 사람의 살을 베어서 마른 사람의 몸에 붙인다면, 마른 사람은 그것

11) 夢』. ”孟子言井田之略, 皆謂取民之制, 非授民也 天下受治于王者, 故王者臣天下之人而效職焉……天地之, 有土而人生其上, 因以資莊焉. 有其力者治其地, 故改姓受命, 而民自有其恒訪, 不待王者之授之.”

을 받아서 뚱뚱하게 될 수 없고, 뚱뚱했던 사람은 죽어버리게 될 것이다"12)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을 파견하여 均田을 이루는 것에 대하여 "한 사람의 토지를 빼앗아서 다른 사람에게 주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고 원망하도록 하여 분란이 일어나게 만드는 것이다"13)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土地兼井 문제를 限田이나 均田에 의거함으로써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다만 賊役을 경감하고 관리들의 공무집행을 깨끗하게 함으로써만이 "토지를 兼朴하는 이들이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을 더이상 키우지 않게 되고, 사람들이 토지를 갖게 되어 저절로 균등하게 된다"14)고 생각하였고, "兼을 금하지 않아도 저절로 兼이 멈춘다”15)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고 여겼다.

이것을 위해서 그는 한 가지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自耕과 耕을 구별하고, 각 가구의 노동력에 근거하여 각각의 自 作地의 敵數를 조사한 뒤 삼백무(仇)를 초과하지 않게 한다. 自耕農地 이외에는 側耕농지로 간주하여 徵稅를 하는데, 徵稅룰 할 때 "耕此地의 세금은 가볍게 하고, 耕일 경우는 그 두배로 한다"16)는 것이다. 그는 自耕에 유리한 賊稅정책을 이용해서 농민들이 토지를 상실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하였다. 王料의 ‘王田制’가 실패로 돌아간 뒤, 역대의 학자들은 토지제도에 대해서 논할 때 대부분 토지사유제를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토지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제시한 여러 가지 방안들은 모두가 私人占有의 토지를 건드리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均田制도 그

12) 『洙論』 卷12. "割肥人之肉人之身, 腹者不能受之以巳 而肥者矣.”

13) 『紹通窓說』 卷14. ”欲奪人之以與人, 使相傾相怨以成平大亂.”

14) 『宋論』 卷12. ”兼井者元可乘以窓其元服之欲 人可有田而田自均矣.”

15) 『紹通窓論』 卷5. ”不禁兼, 而兼井自息.”

16) 위와 같음, 卷2. ”輕自耕之賊, 而者倍之"

러하고 限田制 역시 그러했다. 王夫之가 限田이나 均田에 대해서 단호하게 반대했다는 사실은, 그가 土地兼井이 국가권력의 힘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인식하고 있었고, 봉건적 생산관계와 봉건정권의 밀접한 관계를 이미 알고 있었음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그는 賊役을 가볍게 하고 賊稅룰 경감해 주는 정책을 통해서, 토지에 대해서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억압하는' 효과를 거두고자 하였다. 이는 비록 土地兼井의 추세를 늦추는 데 있어서 일정 정도의 작용을 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토지가 자연스럽게 均分되기’를 바라는 것은 일종의 공상적인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明의 啓蒙思想家들 가운데서 토지문제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顔李學派였다. 顔李學派의 성원들은 대부분 비교적 농민들에게 접근해 있었고, 그리하여 토지문제를 보편적으로 중시하였다. 그들은 土地兼을 반대했고, 농민들의 경작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비교적 급진적인 요구를 제기하였다. 顔元은 당시사회의 土地兼과 土地渠中 현상을 격렬하게 비난하였고, 土地兼이 이미 "한 사람이 수천 頃의 토지를 가지고 있거나, 수천 명이 일 頃의 토지도 갖지 못한"17)현격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고 지적하였다. 그래서 그는 고대의 ‘井田’을 형식으로 삼아서, 大官僚地主의 土地兼에 반대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均田’의 주장을 제기하였다. 그는 말했다.

天地의 토지는 의당 天地의 사람들이 함께 享有해야 하는 것임을 어찌 생각지 못하는가? 만일 저 어리석은 백성의 마음을 좇는다면 만 명의 재산을 한 사람에게 준다 하더라도 만족함이 없을 것이다. 王道가 人情올 좇는 것이 진실로 이러한 것이겠는

17) 『存治編』 卷1. ”或一人而數十百頃, 或數十百人而不一頃.”

가? 하물며 한 사람이 수천 頃의 토지를 가지기도 하고 수천 명이 일 頃의 토지조차 갖지 못하기도 했으니, 부모된 자로서 한 자식을 부유하게 하고 나머지 자식들을 가난하게 하는 것이 가당하겠는가?18)

이러한 사상은 토지에 대한 농민들의 요구를 표현한 것으로서, 부유한 사람들에 대한 엄중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당시에 있어서 의심할 바 없이 커다란 진보적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그는 토지가 마땅히 共有되어야 함을 지적하였고, 天地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토지를 沿有하고 取하고 占有할 권리가 있어야 함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실로 近代民主主義 정신의 萌牙를 포함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주에게 점유된 대량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한단 말인가? 顔元은 지주들로 하여금 일정 한도 이상의 토지를 포기하게 만들 방법을 구상하였다. 그는 말했다.

만일 趙甲이라는 사람에게 십 頃의 토지가 있는데, 그것을 이십 가구에 나누어준다면 甲에게는 다만 오십 敵만 남을 것이니 어찌 원망함이 없겠는가? 법으로써 열아홉 가구로 하여금 甲의 소작인이 되게 하고, 公田의 반을 甲에게 주어 甲이 죽을 때까지 그 반을 소작료로 가지게 한다. 뒤에 그 자식이 현명하여 벼슬을 한다면 계속해서 그것을 취하게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다만 한 명의 경작인으로 남게 한다.19)

18) 위와 같음. ”不思天地之, 宜天地人共之, 若傾彼廊民之心, 卽令萬人之産而給一人, 所不紙也. 工道之傾人, 固如是平? 況一人而數十百頃, 或數十百人而不一頃, 爲父母者, 使一子富而諸子貧, 可平?"

19) 『顔習齋先生年譜』 卷上 "如趙甲田七頃 分給二十家, 甲止五十敵, 登不怨咨? 法使十九家切爲甲, 給公田之半于甲, 以半上, 終甲身. 其子仕, 食之 否, 一夫可也.”

이는 현재 토지를 점유하고 있는 지주에게는 일정한 地租의 이익을 누리게 하고, 死後에는 그 아들의 상황을 봐서 그 아들이 ‘현명하지 못하여 벼슬을 하지’ 못한다면 다만 한 명의 경작인으로 남기고 그 나머지 토지를 戶들의 소유로 귀속시킨다는 것이다. 이 구상은 매우 큰 及協性을 갖는 것이지만, 또한 지주들이 자동으로 토지를 내놓게 하겠다는 일방적인 바램에 근거한 환상적인 견해였다. 당시의 土地兼井問題는 봉건적 생산관계 그 자체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고 顔元은 자기 시대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천하의 사람들이 함께 토지를 享有해야 한다는 평등의 구호를 제기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진일보한 土地綱領을 제출하지는 못하였다.

건업恭은 기본적으로 顔元의 토지경제사상을 계승하였다. 토지제도에 대한 그의 주장은 ”井田이 가능하면 井田으로, 그것이 어려우면 均田으로, 그것도 어려우면 限田"20)이었다. 그는 均田을 ‘第一仁政'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顔元이 구상한 ‘지주로 하여금 지나친 토지를 스스로 포기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 찬성하였고, 더 나아가서 戶分田의 방안을 만들었다. 그는 말했다.

均田이 아니라면 貧를 고르게 할 수 없고, 사람들마다 恒産을 갖도록 할 수 없다. 均田은 첫째가는 仁政이다. 그러나 지금 시기에 부자에게 빼앗아서 가난한 이에게 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顔先生의 戶分種의 說은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심오함을 알 수 있다. 만일 한 부자가 십 頃의 토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에게 일 頃만을 남겨놓고 나머지 구 頃을 戶 아홉에게 나누어준다. 소나 종자는 戶가 각자 마련하게 하고, 없는 자는 官에서 빌렀다가 추수 때 갚는다. 추수를 하면 사십 敵의 곡식은

20) 『存治編』. ”可井則井, 難則均; 又難則限田.”

지주에게 바치고, 십 敵는 지주를 대신하여 에 납부한다. …… 지주는 지금은 오십 敵를 戶에게 맡겨두는 셈이 되고, 戶는 오십 敵를 거둔다. 삼십년을 한 세대로 하여, 지주가 그 地利룰 향유하는 것은 죽고 나면 그치게 되고 그 땅은 모두 戶에게 귀속된다. …… 만일 지주의 子弟 가운데 농사를 짓기를 원하는 자가 있다면, 이삼 頃을 주어 스스로 경작하게 할 수 있으나, 인력을 고용하여 이득을 얻는 일은 못하게 한다.21)

그의 이러한 새 방안은 顔元의 방법에 비교하여 보다 타협적이지만, 그러나 마찬가지로 현실성이 없다. 그는 또한 「汀」에서 그 토지사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制田의 道는 일곱 가지가 있다. 백성과 토지가 적당하게 부합하는 곳에서는 그대로 시 행하는 것이 첫째이다. 사람이 적고 외진 곳에서는 우선 현재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나머지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나누어준다. …… 이것이 둘째이다. 토지가 많은 사람은 팔 수는 있어도 사지는 못하게 하며, 사는 사람은 일정한 한도에서 그치게 하고, 한 縣 내에서는 혹은 고르고 혹은 고르지 못해서 변화가 잦아지는 것을 막는 것이 여섯째이다. 땅이건 물이건 간에 …… 授田의 범위를 넘지 않게 하고, 매 가구에 대략 오십 敵 정도로 규정하며, 시행할 때 천하의 戶口와 田敵를 서로 掛酷하여 計數, 最하는 것이 일곱째이다.21)

21) 『浪太平策』 卷2. ”非均貧富不均, 不能人人有恒産, 均, 第一仁政也. 但今世衍富與貧, 殊也爲限難 顔先有戶分種之設, 今思之妙. 如一富家, 有園, 爲之留一頃 而令九家九頃, 耕牛子種, 戶自, 元者領于, 秋收還 秋熟以四十敵種交地主, 而以十敵代地主納官. …… 地主用五十敵今日停分畑戶也, 而戶自收五十. 過三十年爲一世, 地主之享地利終其身亦可已矣, 則地全歸戶 …… 若支柱子弟衆, 情應力戱者, 三頃兩頃可以邸其自種,但不得多屈以占地利."

그는 전국적인 범위에서 각 지역의 상이한 구체적 사정에 근거하고, 각각의 대책을 취합하여 점차로 토지의 平均化를 이루어 나갈 것을 요구하였다. 顔 • 李의 이러한 土地平均主義的 사상은 일종의 진보적인 민주사상으로서, "본질적으로는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연 것"23)이었다.

중국에서 봉건시기의 역대 학자들이 토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기하였던 각종 사상 가운데, 王源의 토지경제사상이 가장 철저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 民이 고통에 처하고 社會池이 발생하는 근본 원인을, 대부분의 농민들이 토지를 갖지 못하고 "午하는 자는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고, 토지를 소유한 자는 직접 耕作을 하지 않는"22)현실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농민들이 ‘송곳 하나 꽂을 땅조차 갖지 못하는 것(元立之地)’은 蒙强 地主들이 극심하게 土地兼을 했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었다. 그는 역대의 학자나 정치가들이 제기했던 각종 限田, 均圓 復井田 동의 방안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직접 "토지가 있는 자는 반드시 스스로 경작해야 한다"25)라고 하는 개혁방침을 제시하였다. 그는 말했다.

천하에 制民恒産의 뜻을 분명히 선포해야 한다. 백성이 부양되지 못하는 것은 송곳을 꽂울 땅조차 없기 때문이고, 송곳을 꽂을 땅조차 없게 된 것은 豪强이 土地兼才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 만드는 법에서는, 토지가 있는 자는 반드시 직접 경작을 하게 하고

22) 『平訂』 卷7. “田之道有七, 民與田相當之方, 立行之, 一也 其跋縣人少者卽現在之人分給之, 余招人來授, …… 二也. 令多者可賣, 而不可買, 買者如數而止, 而一縣之內則必不可或均或不均以滋變端, 六也. 或陸或水, …… 不過授之數耳, 每家五十敵亦約略言之, 行時以天下戶口田敵兩對可也, 七也.”

23) 侯外磁 『中園早期啓蒙思想史』 380쪽. “本質上爲資本主義開了道路.”

24) 『文獻通考』 卷1, 『賊』一. "非耕者所有, 而有田者不耕.”

25) 『平訂』 卷7. "者必自耕"

사람을 모아서 대신 경작하는 것을 막는다. 스스로 경작하는 자는 농민이어야 할 것이니, 나 商이나 工으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 …… 농민이 아니라면 토지가 있어서는 안 되고, 士工 역시 토지가 있어서는 안 되니, 하물며 官이라고 토지를 가질 수가 있겠는가? 官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그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모두 토지를 가질 수 없고, 오직 농민만이 토지를 가질 수 있다.26)

近現代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耕'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 노동자 본인이 자기 자신이나 가족 구성원의 노동으로 자기의 토지룰 경작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봉건시대에 있어서 이른바 '耕'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이런 函意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고용인을 모집하여 자기 莊園을 경영하는 지주나 벼슬을 사직하고 낙향하여 鄕생활을 하는 관료 등의 경우룰 모두 포괄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그저 자영농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王源이 제기한 ‘自耕'은 순수하게 노동하는 농민들이 토지를 자유경작하는 것만을 가리킨 것이었다. 그는 "토지가 있는 자는 반드시 自耕을 해야 한다”는 말 뒤에 "사람을 고용하여 대신 경작하는 것을 금한다”고 분명히 덧붙임으로써, 고용경영과 소작을 주는 지주경영의 방식을 완전히 배제하였다. 그는 토지에 대한 지주의 私人 점유권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였으며, 직접 경작하지 않는 지주계급이나 관료집단의 토지점유권을 모두 없애고 국가가 自耕에게 토지를 平均分配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이것은 농민들의 요구를 완전하게 반영한 것이고 농민들의 근본 이익을 대

26) 위와 같음. “月告天下以制民恒産之義. 民之不其投者以元立維之地, 所以元立雄之地者以强兼. 今立之法, 有田者必自耕, 毋人以代耕. 自耕者爲店, 元更爲士, 爲商 爲工. …… 不爲災則元, 士商工旦元田, 況官平? 官元大小, 皆不可以有, 惟災爲有田耳.”

표한 것이었으며, 明末 民大阪亂 때 내걸었던 토지에 대한 주장과 기본적으로 일치하는 것이었다.

王源이 토지에 대한 그의 이러한 구상을 실시하기 위해 마련한 방안은, 토지를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하는 것이다. 한 가지는 ‘民田'으로서 사유토지에 속하는 것인데, 일인당 백 敵를 초과하지 못하게 한정했다. 이러한 토지는 占有者 본인과 그 가족의 노동으로 직접 경작하는 것이다. 원래 부담하던 부세와 요역의 수준에 의거하여 계속적으로 세금을 내야 하며, 나머지 토지는 매각하거나 국가에 헌납할 수 있다. 다른 한 가지는 ‘斑田'으로서 국유토지인데, 길이 육십 敵 폭 십 敵를 일 ‘’으로 계산한다. 그 가운데 일백 硏는 ‘公田'이고, 나머지 오백 敵는 ‘私’으로서 국가가 십 戶의 농민들에게 나누어준다. 십 戶의 농민들은 公田의 경작부담을 공동으로 지고, 그 수확을 국가에 귀속시킨다. 매 戶가 스스로 경작하는 오십 敵 ‘私田'의 경우는, 매년 국가에 내야 하는 組 삼 尺, 綿 일 兩혹은 布 육 尺, 麻 이 兩, 그리고 매년 국가를 위해 服役해야 하는 사흘 이외에, 생산물도 모두 경작자의 私有物로 歸屈시킨다. 王源은 비록 동시에 두 가지의 토지제도를 제시하였지만, 그러나 최종적인 목표는 麗田'을 전면적으로 실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民田의 賊役이 비교적 과중함으로 인해서, 民田의 소유자들이 반드시 토지를 官에 반납하고 官으로부터 受田을 받을 것(歸之官而更受之官)’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으로써 "천하의 토지가 모두 에 귀속될 것임은 의심할 바 없다"27)고 여겼다. 이렇게 되면 전국의 농지는 점차로 盟田으로 변해갈 것이며, 私有되는 民田들은 점차로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처음 授田할 ‘燈田'을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王源은 ‘術로써 유도를 하되 위협하여 빼앗지는 말

27) 위와 같음. "天下之田盡歸諸官元疑"

고, 오랫동안 기다리되 급히 구하지는 않는다(誘之以, 之以威, 需之以久, 求之以速)’는 收田 방침을 제시하였다. 그는 여섯 가지 ‘父田之’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 첫째는 '의 정리이다. 明代에 본래 국가에 속해 있던 互 學田 등을 국가가 철저하게 정리를 하고, 蒙强에게 병탄되어 있던 官田을 모두 철저하개 조사해 내서, 국가에 귀속시키는 것이다. 둘째는 황무지의 개간이댜 즉 민중들을 모집하여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이다. 셋째는 休耕地의 遠收이다. 원래의 주인이 피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아서 주인없는 토지가 된 것을 국유지로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넷째는 賊産의 몰수이다. 王源은 "무릇 賊臣 蒙右들의 토지가 肝과 碩으로 이어져 있는 것을 官田으로 몰수해야 한다"28)고 주장하였다. 다섯째는 토지의 기부이다. 封授나 而祿의 방법을 통해서 지주들로 하여금 국가에 토지를 헌납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토지의 매입이댜 토지를 팔고자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국가가 일률적으로 자금을 내서 사들이는 것이다. 王源은, 국가에서 私人 점유 토지가 百敵룰 넘지 않도록 규정하였고 토지를 가부하거나 매각하는 사람들에게 爵祿을 내리거나 돈을 지불한다고 하였으므로, 토지가 많은 사람들은 반드시 官府에 헌납하거나 매각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게다가 官地를 정리하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휴경지를 거둬들이고, 賊産을 몰수함으로써 만들어진 토지를 가지고 국가는 盟田制의 계획을 실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王源이 설계한 이러한 토지개혁 방안은 비록 하나하나 사리에 맞는 것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공허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방안은 사실상 봉건정권으로 하여금 지주계급의 착취를 소멸시키고자 한

28) 위와 같음. ”凡賊臣豪右田連肝菌者沒之入官"

것이었고, 농업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自耕으로 변화시키고자 한 것이었으니, 자연스럽게 천진난만한 환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가령 국가가 그의 구상에 따라서 私田이 백무를 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명령을 반포한다고 하더라도, 地主나 蒙强들이 그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봉건국가는 강제적으로 집행할 방법이 없고, 그렇게 되면 그 방안은 공문구가 되고 말 것이다. 게다가 더욱이 지주계급의 이익을 대표하고 지주계급을 정치적 支柱로 하는 봉건국가가 그 基本階級의 이익을 해치는 정책을 실시할 리는 만무하다. 그러므로 王源이 제기한, 而이나 재물로써 限田을 유도하려는 방법은 소극적이고 무력한 것이었으며, 지주들의 호응을 얻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의 나머지 收田방침은 기본적으로 역대 上地改革家들이 늘 말하던 것이었으며, 실시를 한다고 해도 효과는 미약했을 것이어서, 그 얻어진 토지를 가지고 授田을 하려고 하면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뿐 근본적으로는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록 王源의 토지개혁방안 가운데 해결하기 어려운 수많은 모순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리고 비록 그의 설계가 봉건사회 속에서는 일종의 유토피아적 이상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토지개혁에 관한 그의 경제사상온 여전히 커다란 적극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며,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 이전에 역대로 토지개혁을 주장한 이들이 제기한 '長田' • ‘均田' • 複升’의 방안들은, 대부분 대지주가 이미 土地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거의 건드리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이는 지주계급의 근본적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었으니, 그 요점은 봉건통치를 옹호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王源은 비록 봉건정권에 대한 환상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했지만, 광대한 농민들의 절실한 이익으로부터 출발하여, 봉건적 土地兼의 병페를 근본적으로 파악하였고, 전국적인 범위에서 지주의 私的인 地租 착취를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토지문제를 해결하려는 원칙은 명확하게 봉건토지소유제를 건드린 것이었고, 실제적으로 이미 봉건지주의 토지소유제에 반대하는 내용을 포함한 것이었다. 또한 그의 ‘농사룰 짓지 않으면 토지를 가질 수 없다’, ‘토지가 있는 자는 반드시 自耕을 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은, 형식상으로 봐서는 관료나 상인들이 토지를 점유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생산관계를 변혁하려는 시도를 포함한 것이다. 王源의 토지사상은 明末 農民大阪의 역사적 배경 위에서 나타난 것이며, 당시 농민들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그것은 봉건시대에 토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출되었던 각종 방안들 가운데 가장 철저했고, 진보적인 민주사상을 표현한 것이었다 게다가 근대 貸産階級革命派의 토지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근대 민주혁명에서 토지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론의 先河룰 이루었다. 孫中山 先이 1905년 同盟會 성립 당시에 어 렵풋이 제기하였던 ‘平均地'의 주장은 그후 30년 동안의 모색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명확하게 토지문제를 해결하는 원칙으로 정립되었다. 그것은 ‘者有’이다. ‘者有田’의 이론은 학문적으로나 원칙적으로나 王源의 ‘有’과 상통한다. 王源의 토지사상은 당시에는 비록 실현될 가능성이 없었지만, 그러나 중국의 土地經節思想史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중국의 啓蒙思想史에 있어서까지도 그 이론적 가치와 의의가 홀시될 수 없는 것이다.

도시지역의 토지문제에 대해서는, 역대로 토지문제에 관해 언급한 봉건시대 학자들도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것은 봉건시대에는 기본적으로 농업생산이 위주였고 자급자족 경제가 주도적 지위를 점하고 있었으며, 도시의 상공업이 홍성하지 못했고 교통도 역시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土地所有權 문제나 賀貸借 상의 분쟁들도 모두 농업용 토지에서만 발생하였다. 도시의 토지문제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주의

를 끌기 어려웠다. 그러나 明淸時代에 들어서면서 상공업이 점차로 발전하게 되었고, 수공업의 생산기술도 더욱 진보하였으며, 분업도 세분화되고, 생산물도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상업과 수공업이 발전함에 따라서 江南地域에는 점차로 자본주의의 萌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萌身의 출현은 商品經柏의 발전을 진일보하게 촉진시켰고, 도시 수공업 규모의 확대는 城鎖 인구의 부단한 증가를 유발시켜서, 도시에 있어서도 토지소유권 문제가 출현하게 되었댜 도시의 토지문제에 대해서도 王源은 자신의 견해를 제기하였다. 그는 말했댜 ”野外에는 사유토지가 없도록 해야겠지만, 城中에는 모두 公有地로 할 수 없다. 사람들이 사사로이 買를 할 수 있게 하고, 건물을 지어서 세를 받기에 편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29) 그는 도시 토지의 경우 농촌의 耕地와는 구별해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즉 농촌 耕地의 경우 私人 점유 한도를 제외한 토지도 사적인 自由買를 허가해서는 안 되지만, 도시의 토지는 여전히 과거의 토지사유방식을 유지해서 각각의 사람들이 자유매매를 할 수 있게 하고, 건물을 짓고 買貸借를 하기에 편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王源이 이러한 건의를 제출했다는 사실은, 그가 이미 농촌의 耕地와는 다른 도시 토지의 특성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분석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도시의 토지에 대한 그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사회적 생산관계가 점차로 변화하고 있던 새로운 상황을 뚜렷이 보여준다.

총괄하면, 봉건적 토지사유제에 수반하여 생겨난 土地兼은 봉건적 생산관계에 붙어 다니는 병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 ‘母體’로부터 생겨났지만, 때때로 그 母體의 건강을 위협한다. 봉건적 생산관계가 확립된 이래로 土地兼을 억제하기 위한 각종 방

29) 『平』 卷10. ”野外不令有私地, 而城中不能盡公. 不如聽人私相買, 建造收其房租爲便.”

안들이 제출되었다. 그것은 마치 氣壓計처럼, 토지문제를 둘러싸고 週期的으로 출현하는 봉건사회의 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역대로 토지변혁에 대해서 토론한 학자들을 보면, 단지 봉건적 생산관계 아래서 고유의 토지제도에 대해 수정하거나 보완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고대 大同思想의 색체가 충만한 國有 井田制를 동경할 뿐이었다. 그들은 생산력과 봉건적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에 대해서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또한 그들은 지주계급의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단지 봉건적 생산관개의 툴 안에서만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이는 필연적으로 그들의 사상이 봉건주의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明 중엽 이후로 商品經摘가 발달한 강남의 일부 지역에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萌가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그것이 여전히 봉건적 생산관계의 엄중한 속박을 받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사회의 미래를 예시하는 것이었고, 봉건적 생산관계가 이미 낡고 와해되는 상황에 처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시의 진보적인 학자들은 이러한 사회변혁의 움직임을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였고, 그래서 그들이 사회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제출한 각종 이론과 주장에는 초가 啓蒙思想의 특징이 분명하게 담겨져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토지경제사상과 관련된 부분은 전통적인 토지사상과 다른 새로운 특징을 표현하였다. 우선 역대로 토지문제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은 대부분 봉건 지주계급의 이익에 착안하였고, 封建의 통치룰 공고히 하는 데 主眼点을 두었다. 하지만 明淸時代 啓蒙思想家들의 토지이상은 시민계급과 농민들의 이익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黃宗羲의 토지이상은 신홍 시민계급의 평등에 대한 요구를 대표하는 것이고, 모든 사람이 생산수단으로서의 토지를 소유할 평등한 권리가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富民’의 토지와 재산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자 한 그의 사상은 개인의 재산권을 보호하고자 한 시민계급

의 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또한 王源의 ‘惟有田' • ‘項江四則無 田’의 사상은 농민들의 토지에 대한 요구를 직접 반영한 것으로, 광대한 自耕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전의 토지사상들이 모두 봉건지주 토지소유제를 건드리지 않는 조건 아래서 일정한 보완과 개량을 합으로써 계급모순을 완화시키려 하였다. 봉건지주의 토지소유제를 소멸시키려 한 것은 아니었던 반면에, 이 시기 啓蒙思想家들의 토지사상은 그 창끝을 봉건적 토지소유제에 겨냥하고 있었다. 土地兼井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봉건적 생산양식의 근본문제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토지를 소유한 자는 반드시 스스로 경작해야 한다”, "농사를 짓지 않는다면 토지를 소유할 수 없다”는 등의 王源의 사상은, 의심할 바 없이 지주토지소유제를 없애고 토지를 마땅히 경작하는 농민들의 소유로 돌려줘야 한다고 선포한 것이었다. 그것은 봉건적 토지소유제를 폐지할 것을 직접적으로 요구한 것이었다. 끝으로, 이 시기의 啓蒙思想家들이 제출한 토지경제사상 가운데는 이미 초보적이나마 근대 민주주의의 요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顔元의 "天地의 토지는 마땅히 천지간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향유해야 한다"는 발언은, 모든 토지에 대해서 세상사람들이 공동으로 향유할 수 있고 각자가 모두 토지를 점유할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王源의 ‘사람을 모아서 대신 경작하는 것을 막는(毋暮人以代耕)’ 둥의 사상은 근대민주주의 정신의 맹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주의해야 할 것은, 비록 이러한 啓蒙思想家들이 급진적이고 의미있는 이론 사상들을 적지 않게 제출했음에도, 정작 토지문제를 해결할 구체적인 방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때때로 나약해지고 심한 모순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급진적인 이론과 소극적인 실시 방안의 대비는 明淸 啓蒙思想家들의 토지경제사상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시대적인 원인으로 말미암

아 생겨난 것이므로, 우리가 이에 대해서 지나치게 가혹할 필요는 없다. 또한 하나의 진보적인 사상이 출현하는데 있어서, 그것이 반드시 자기가 제기한 문제를 정확하게 풀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러한 문제를 제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목해야 할 가치는 있는 것이다. 明淸 啓蒙思想家들의 토지경제사상은 당시의 역사적 조건 아래서는 유토피아적인 환상에 불과했지만, 그러나 그 의의와 작용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강성위 옮김)

顔李學派의 實學思想

趙宗正

顔(元)(述)學派는 명말청초 質根의 전형적 학파로서, ‘葛' • ‘'• ‘用'을 슬로건으로 내세워 程 • 朱 • 陸 • 王의 心性之學과는 확연히 대립하였다. 이 학파는 명말청초의 특수한 역사조건을 배경으로 북방에서 홍기하였으며, 그리 길지 않은 수십 년이란 시간 동안 신속한 속도로 江南 • 江北 전지역에 전파되어 "전국의 선비들이 모두 바람에 쏠리듯 이 학풍을 추종하였으며"1) 따라서 "北方의 强者''2)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正統 理學家들은 顔李學派룰 ‘覇應 또는 覇道'3)라고 매도하였다. 본고는 현재 뜨겁게 토론되고 있는 '中國質學'의 여러 문제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實學의 각도에서 顔李學派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顔元은 河北省 博野人으로 字는 易直, 號는 習齋이며 明 崇禎 8年(1635)에 출생하여 淸 康熙 43年(1704)에 서거하였다. 그는 평생동안 "出仕하지 않는 것을 고상히 여겨"4) 짧은 기간동안 잠시 고

1) 陶甄夫, 『秦關稿序』. ”海內之士, 然從風.”

2) "北方之强者"

3) 張伯行의 『正誰堂文渠 • 論學』 참고.

4) ”高尙不出.”

향을 떠났을 뿐이며, "자력으로 생활할 것"5)을 주장하고 敎學과 노동으로 생활을 영위하였다. 학술사상면에서 몇 차례의 轉堤을 거친 顔元은, 처음에 陸 • 王의 心을 독실히 믿었다가 그후에 程 • 朱의 신도가 되었으며 최후에는 陸 • 王 • 程 • 朱를 모두 배척하고 실학을 제창하였다. 戴이 『顔氏學記』에서, 顔元은 "처음에 陸 • 王 • 程 • 朱로부터 시작하였다가 그 뒤 되돌아와서는 六經과 孔孟에게서 구하여, 그 요체를 터득하고 後儒의 잘못을 바로잡았다"6)고 한 것은 그의 사상변천의 실제상황과 부합하는 것이다. 안원은 經世致用이야말로 孔孟 이래 의 참된 정신이며 儒의 精華라 생각하였다. 그가 제창한 ‘學' • ‘習' • '’은 유학의 정신을 계승 •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程 • 朱 • 陸 • 王의 학문은 心性에 대한 공론만을 일삼고 국가와 백성들을 돌보지 않으며 유가의 전통을 벗어났가 때문에 반드시 반대해야만 했다. 程 • 朱 • 陸 • 王을 반대하고 진정으로 孔孟을 옹호한 점이 顔元思想의 최대 특징인 것이다.

到達 河北省 鎬縣人으로 字는 剛主, 號는 怨谷이며, 淸 順治 16年(1659)에 출생하여 雍正 11年(1733)에 서거하였다. 그는 顔元學說을 계승하고 전파한 중요인물이었다. 顔元이 "하지 않는 것을 고상히 여긴“7) 것과는 달리 李妹은 평생 폭넓게 交遊하고 당시의 公卿名儒들과 빈번한 접촉을 가졌으며, 아울러 여러 차례 江南으로 내려가 스승과 벗들을 방문하고 심지어는 남쪽으로 이사하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또 顔元이 "자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먹지 않음"8)을 주장한 것과는 달리 李址은 "일을 나누어 서로 협조할 것”9)

5) ”自食其力.”

6) ”初由陸王 • 程朱而入, 返求之六經孔孟, 所指歸, 足正後儒之失.”

7) ”高尙不出.”

8) ”非其力不食.”

을 주장하여 시야가 비교적 넓었으며 태도 역시 융통성이 있었다. 비록 그는 만년에 들어 顔元에 의해 ‘紙上功夫’라 비판받았던 考證의 길로 전향하였지만, 顔元에 대해서는 시종 믿음을 갖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顔元의 학설이 당시에 급속도로 전파된 것은 李見의 공로였다. 劉調은 다음같이 말하고 있다.

는 范南 • 梁 • 魏 둥의 지역을 재차 遊歷하며 학문을 논하였으니, 다른 사람 중에서는 이룰 따를 자가 없었다. 그후 안원학설의 이치를 밝히고 그 뜻을 넓히어 천하사방에 널리 퍼지게 하고 소식을 듣고 추종하는 자가 줄을 잇게 한 것은 실로 先生(이공)의 공로이다.10)

유조찬의 이같은 말은 역시 李妹登의 실제사상과 부합되는 것이다. 李凡은 顔元보다 24년 늦게 출생하여 29년 늦게 서거하였다. 근 30년 동안, 淸朝의 정치가 안정됨에 따라 은 좌절을 맛보게 되었으며, 乾嘉 시기에 이르러 고증학의 홍성은 실학의 종말을 뜻하였다. 고증학은 청대학술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성취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또 다른 일종의 學術思潮로서, 이 思潮의 기본정신은 實學의 기본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考證의 極盛은 바로 實學의 종말이기도 하다는 점을 주장하는 바이다. 李址은 마침 명청실학과 청대 고중학의 전환시기에 생활하였기 때문에 그는 전형적인 실학사상을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농후한 고중학의 색채도 갖고 있다. 이 점이 바로 李匡의 思想에 있어서 가장 현저한 특징이며, 李이 顔元과 다른 점이기도 하다.

9) ”通功易.”

10) 『怨谷先生年船』 卷5. ”習齋除璋南 • 梁 • 魏一再游論學, 餘無及者 其後推明衍釋, 廣布四方, 聞而起者接踊, 先生功.”

실학에 관한 顔李의 구체적인 학설을 항목 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社會問題

명말청초의 실학사상가들은 일반적으로 당시 사회의 삼대 문제에 대하여 각자의 의견을 명확히 발표하였으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자신의 대안을 제기하였다. 顔元와 李見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삼대 사회문제란 바로 君柚問題 • 土地問題와 敎育問題이다. 顔元이 그의 『針恥』에서 제기한 "封建制의 부활" • "田의 부활" • "학교의 부활'이란 세 가지 정책은 바로 顔李가 이상의 삼대문제에 대해 내린 체계적인 의견이자 해결방안이었다.

1) 君權問題

명청시기에 君이 무한대로 확대되어 가는 현상에 대하여, 顔元은 周代의 封侯建藩制, 즉 封建制의 부활을 단호히 주장하였다. 顔元은 "封建制가 아니면 天下의 백성들을 다 제대로 다스릴 수 없으며, 天下의 인재들을 다 제대로 쓸 수가 없다”11)고 하며, 봉건제의 부활을 가장 중요한 관건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감히 봉건제에 대해 進言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後世의 사람들은 감히 봉건제에 대하여 진언을 올리지 못하며, 군주 또한 자신이 천하를 개인소유로 함을 즐기고 있다 .…… 이렇게 하여 백성들과 국가가 모두 그 禍룰 당하여 혼란함을 겪으면

11) 『存治編』. ”非封建不能盡天下人民之治, 盡天下人材之用."

서도 후회할 줄을 모르니 어리석은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12)

이러한 비판은 ‘봉건제의 부활'이란 그의 주장이 ‘군주 자신이 천하를 개인소유로 하는' 君主에 대해 제기한 것임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명청시대에는 중앙집권의 봉건전제 제도가 끊임없이 강화되었다. 명대의 재상제도의 철폐, 阪 • 衛特務組織의 출현, 또 청대의 巡撫總督制의 추진 등은 모두 중앙봉건전제의 강화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조정의 권력을 확대하고 지방의 독립성을 약화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바로 아같은 사회현실에 대하여 顔元은 다음같이 말하였다.

이 천하는 • 舜 • 沮 • 周의 모든 聖君께서 서로 卜筑로 길흉을 알아내어 사업을 성취하고 드디어 얽어 만드시어 이루신 것이거늘, 군주만이 그 成業울 향유하고 거꾸로 모든 聖人의 자손들은 손바닥만한 땅도 소유하지 못하게 하였으니……天道가 어찌 이를 용납하겠는가!13)

물론 顔元에게 과학적인 唯物史觀으로 이러한 사회문제를 분석해 주기 바란다는 것은 너무 무리이다. 문제를 분석하는 그의 방법은 당연히 英雄創造歷史의 唯心史親이었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문제는 분명히 ‘成業울 향유하는 군주’가 ‘자신이 천하를 개인소유로 하는 것’었으며, 이것은 바로 ‘가 용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극단적인 전제제도의 조건 아래서, 봉건제 부활의 제기 배후에는 군

12) 『台紅』. "之人不政建言封建 人主也樂其自私天下也 …… 牛. 民社稷交受其, 亂而不梅可矣.”

13) 『存治繼』. "此乾坤乃堯 • 舜 • 夏 • 商 • 周諸聖君相物成, 遂爲諦造成者也, 人主享有成栗 而史諸聖人子孫無尺之土……天道登能容!"

주권력의 약화와 地方을 위한 爭權이라는 정치적 목적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점을 확실히 간파한 예민한 雍正皇帝는 「坂封建論」이라는 글에서 "무릇 阪逆의 무리들이……모두 봉건제의 부활을 논의하고 있다”14)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중국역사상에서는 중요한 전환기에 이룰 때마다 언제나 ‘封建制'와 '郡縣制' 간의 우열에 관한 대논쟁이 있어 왔다. 진보적 사상가들은 봉건제를 주장하든 혹은 군현제를 주장하든 간에, 모두 당시의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한 가지 문제에 집중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君權問題였다. 顔元은 復古形式의 ‘봉건제 부활'을 주장하였는데, 그 핵심은 봉건전제군주를 반대하고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다음에는 李見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李挑도 "天下의 권력이 반드시 한 사람에 의해 장악되는"15) 전제제도를 반대하였지만, ‘봉건제의 부활'이라는 顔元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 원인으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봉건제의 부활’이라는 顔元의 주장에는 농후한 復古性이 깔려 있기 때문이며, 둘째는 李凡이 顔元의 주장에 반대의견을 단호히 제기한 때는 이미 47세인 康熙44년으로서 이때는 청조의 통치가 이미 안정을 찾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22년이 흐른 雍正 7년에, 李妹은 『擬太平策』이라는 책에서 顔元의 ‘봉건제 부활' 주장에 대해 반대한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 해는 바로 옹정황제가 「駿封建論」이라는 글을 발표한 해였다. 이같은 역사조건의 변화는 李凡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李凡은 만년에 考證의 학풍으로 전환하였을 뿐 아니라 청대 황제에게 ‘太平策'을 진언하였다. 우리는 李坡으로부터 특정한 역사시기의 質學思潮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14) 『淸世宗質錄招』卷83, 『雍正7年7月條』 “大凡阪逆之人……皆以復封建爲言.”

15) 『關史邸視』 卷2. "天下之權必欲總稅於一人.”

2) 土地問題

토지의 겸병은 봉건토지제도와 정치제도의 필연적인 결과이며 봉건사회의 치명상이 된다. 명대 중엽 이후로 귀족과 환관들이 정권을 장악하자 정치는 부패하고 토지의 겸병은 유례없이 극심해졌다. 島帝 • 諸王 • 勅咸 • 室이 설치 한 田은 황하의 남북 및 山東 • 湖南 • 湖北 • 炳西 • 廣東 지역에 두루 퍼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지방호족지주도 교묘한 방법으로 토지를 빼앗아 마음대로 겸병하였다. 天啓 • 崇禎 연간을 거쳐 청초에 이르자, 남방은 이미 "백사람 중 者는 한 사람이며, 열 사람 중 貧者는 아홉 사람"16)인 상황에 처하였으며, 북방의 상황은 이보다 더욱 심각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한 顔元은 다음같이 말하였다.

세상의 모든 논밭은 마땅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소유해야 한다. 만약 부유한 사람들 욕심대로 하게 한다면 菓人의 재산을 다 한 사람에게 준다 해도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니, 王道를 펼쳐 人情을 다 베품이 이와 같겠는가? 하물며 한 사람이 수백 頃을 갖게 하거나 수백 사람이 1頃도 갖게 하지 못하는 것은 父母된 자가 한 자식은 부자로 만들고 여러 자식은 가난뱅이로 만드는 것과 같으니 이런 일이 가능한 일이겠는가?17)

李도 "더욱이 안 될 일은 백성들의 논밭을 빼앗아 관가소유로 하는 것이며",18) "농민(地主)도 두렁이 연이어진 넓은 논밭을 소유

16) 顧炎武, 『天下l開國利病』 卷32. “富者百人而一, 貧者十人而九.”

17) "天地, 宜天地人共享之, 若傾富民之心, 卽萬人之産而給一人, 所不眼也, 王泊之盡人情若是平? 況一人而數百頃, 或數百人而不一, 爲父母者使一子富而諸子貧 可平?"

18) 『耕』 卷7. ”尤不可者, 奪民田以入官.”

하지 못하고 있으니",19) "관리는 직위가 높건 낮건 간에 모두 논밭을 소유할 수 없다”20)고 하였다.

그들은 正統儒家이었기 때문에 "백성과 내가 같은 동포"21)라는 博愛精神에서 출발하여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을 모두 한 부모의 자식으로 간주하였으며, 따라서 "세상의 모든 논밭은 마땅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소유해야 한다"22)는 추상적인 원칙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원칙을 근거로 하여 顔元과 李材은 토지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기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三代의 ‘井田制'를 부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古代의 ‘井田制’가 도대체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명확히 설명한 적이 없었다. 顔는 古代法制를 참조하여 ''에 대한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하였는데, 그들의 사상으로는 소위 ‘井田'이라는 것은 바로 均田이었다. 顔元은 任을 시행할 수 있으면 井田올 시행하고, 불가능하면 均田을 시행한다”23)고 하였고, 李述도 "丑을 시행할 수 있는 것은 井田을 시행하고, 어려우면 均田을 시행한다"24)고 하였다. 그들은 모두 "때에 따라 적당하게 조치하고"25) 고대의 制度에 구속받지 않을 것을 주장하였다. 맹자 시대에 井田을 시행하여 이미 윤택함을 누렸으니 현대에는 "똑같이 모방할"26) 필요가 더더욱 없다고 李材은 말하였다.

顔李가 제기한 ‘정전제의 부활’은 고대의 ‘均田制’에 외피를 씌운

19) 『平訂』 卷10. "(地主)不引田連肝.”

20) 『平訂』 卷7. "大小皆不可以有.”

21) "民吾同胞.”

22) "天地, 宜天地間人共享之.”

23) 『存治編』. ”可井, 不可均.”

24) 『存治編 • 後』. “可井者, 難均.”

25) "時而描.”

26) 『益學』 卷1. "一樣荊困也.”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顔는 여러 곳에서 아예 ‘丑’의 탈을 벗겨내고 당당히 ‘均'을 주장하였다. 顔元은 "만약 내가 군주의 신임을 얻으면 첫번째로 추진할 일은 바로 均田이다"27)라고 하는가 하면, 또 "만약 하늘이 나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장차 荒 • 均田 • 興水利 일곱 글자로 천하를 부유하게 할 것"28)이라고 하였다. 李凡은 ”均田이 아니면 貧가 고르지 않아 모든 사람들이 恒産을 소유할 수가 없다. 均田은 으뜸가는 仁政이다"29)라고 하였다.

顔李가 均田과 古代의 ‘井田'을 연계시킨 것은 완전히 형식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의 정치이상은 ‘井田'에 관한 古의 기록과 매우 상통하고 있다. 가령 『韓詩外傳』에는,

옛날에는 여덟 가구에서 井田을 경작하였는데, …… 여덟 가구는 서로 보호하고 출입 시에는 함께 지켜주며, 질병이 있을 때는 서로 걱정해 주고 患災이 있을 때는 서로 도와주었다. 없을 때에는 서로 빌려주고 먹을 것이 있을 때에는 서로 부르며, 혼사가 있을 때에는 서로 의논하고 물고기를 잡았을 때나 사냥을 했을 때는 나누어 가지는 둥, 어진 은혜를 배풀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화목하고 사이가 좋았던 것이다.30)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같은 사회현상은 顔李가 서술한 ‘均田' 후의 상황과 매우 홉사하였다. 顔元은 ‘均田' 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27) 『顔習齋先言行錄 • 三代』. ”使予君, 第一義在均"

28) 『年』 卷下. “若天不I發予, 將以七天下, 荒 • 均 • 興水利.”

29) 『擬太平策』 卷2. ”非均田貧富不均, 不能人人有恒産. 均田, 策一仁政也.”

30) ”古者八家井, …… 八家相保, 出入共守, 疾病相及, 患難相救, 有無相, 飮食相召, 採嬰相謀, 漁臘分, 仁恩施行, 是以其民利l親而相."

유랑민들이 돌아와 흙을 사랑하고 마음을 착하게 먹을 것이며, 을 지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도둑질하는 자가 없을 것이며, 구걸하는 자가 없을 것이고 부유하다고 해서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는 자가 없을 것이다.31)

李材託은 ‘均田' 후에 "먹을 것은 풍족하게 되고 풍속은 순화되며 백성들은 강해지니 세상 또한 태평스럽게 될 것이다”32)라고 하였다.

그러나 봉건사회의 신분차별이 매우 엄격한 상황 아래서, ‘均이라는 총체적인 정책을 통하여 태평성세를 실현한다는 것은 단지 사상가의 理想으로서만 존재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비록 사상사적인 면에서는 진보적인 의의를 갖고 있었으나 현실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3) 敎育問題

교육개혁은 顔李 質學思想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顔元은 ‘학교의 부흥’, 즉 三代의 교육제도를 부활시키는 것을 그의 三大綱領의 하나로 삼을 정도였으며, 李妹도 ‘學校의 올바름'과 ”田制의 균동함"33) 올 함께 거론하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들이 얼마나 교육을 중시했는가 알 수 있을 것이다. 顔元은

옛날 사람들은 근본의 바탕은 조정에 있다고 하였으나, 나는 근원의 바탕이 學校에 있다고 생각한다. …… 學校는 인재의 근원이다.34)

31) ”游碩有歸 而土愛心滅, 不安本分者無之, 爲盜賊者無之, 爲乞弓者無之, 以富凌貸者無之.”

32) 『怒谷先生年譜』 卷1. “食可足, 俗可淳, 民可强, 亦小康矣.”

33) ‘’學校正”, "制均"

라고 하였다. 학교를 중시하고 교육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학술 역시 숭배하였던 顔元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學이 존재하지 않으면 인재가 있을 수 없고, 인재가 존재하지 않으면 政가 있을 수 없다. 政가 존재하지 않으면 태평성세가 있을 수 없고 백성들이 목숨을 유지할 수가 없다.35)

교육 • 학술 • 학교 • 인재와 국가의 태평함 • 백성들의 생명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던 것이다.

顔元과 李材이 교육을 중시하고 교육의 개혁을 요구한 것은, 당시의 ""와 ”八股”에 대하여 그들이 대단한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년시절부터 과거시험을 혐오한 顔元는 "차라리 참된 白丁이 될지언정, 거짓된 秀才는 되지 않을 것이다”36)라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秀才가 되지 못했다고 하여 스스로 쓸모 없는 인간이라며 한탄하자, 顔元은 "당신이 秀才가 되지 못했다면, 단지 八股의 학업만 廢한 것이지 廢人이 된 것은 아니다"37)라고 하였다. 李材은 비록 船人에 급제하였지만, "과거시험을 위한 학문에 똑똑하면 世事에 있어서는 똑똑하지 못하고, 時文(八股文)에 뛰어나면 世에 대해서는 뛰어나지 못하다"38)고 생각하였다.

명청시대에 들어, 科는 이미 인재를 선발하는 기능을 상실하여 버렀으며, 八股文이라는 과거시험을 위한 학문은 완전히 富貸榮達

34) 『令』 卷1, 『送王允德敎諭淸.』 "昔人本原之地在朝廷, 吾以焉本原之地在學校. … ... 學校人才之本也.”

35) 『齋記節』 卷1, 未. "璃學術無人才, 無人才政事; 無政, 則無治平, 無民命.”

36) 『年譜』 卷上 '‘寧僞傾白丁, 不作假秀才.”

37)『 齋先生言行錄 • 吾』· ”若不作秀才, 只廢八股業耳, 未爲殺人.”

38) 『怨谷先牛年船』 卷2. ”毋業應, 則世事不聽明, 時文(八股)不一,府, 世腐"

을 위한 공구가 되어버렀다. 顔元은 봉건 사대부 가운데 "높은 자는 단지 先儒의 저서만을 공부하고",39) "낮은 자는 조정의 과거만을 문의하며",40) 높은 자나 낮은 자를 막론하고 "모두 부귀영달에 힘쓰고",41) ”의 詩를 단지 名利의 수단으로 삼으며",42) 그들은 "어려서부터 오로지 破題에 종사하고 八股文을 지었으며, 형제와 스승과 벗들이 기대하는 것은 入學 • 鄕試 급제 • 會試 합격과 관리로 등용되는 것뿐이다".43)라고 침통하게 말하였다.

이같은 제도에 속박당한 土人들은 목숨을 다해 八股文을 읽고 時文(팔고문)을 지었으니, 元氣는 고갈되고 정신은 마비되어 국가경제와 民牛에 전혀 무관심한, 완전히 쓸모 없는 인간으로 변해버렀다. 顔元은 이같은 상황에 대해 ”八股의 해로움은 화재보다 심하다"44)고 하였으며, 李月도

비록 가슴속이 꽉 차있고 필력이 뛰어나다 해도, 세상에 나와 응대함에 있어서는 글과 책에만 정신이 빠져 있어 冀婦처럼 멍청하다. …… 기개는 부녀자처럼 유약하고 人에는 천치같이 어리석다.45)

며 그들을 비난하였다. 李은 또 이런 상황 때문에 "天下에는 정사를 처리할 관리가 없고, 조정에는 나라를 다스려 백성을 구제할

39) 『存人編』. "上者只學先儒投.”

40) 『存人編』. “下者但朝廷科甲.”

41) 『存人編』. ”皆務富利達.”

42) 『存人編』. ”肥萬卷詩只作名利引子.” 43) 『存人編』. ”自幼惟從事破題, 牌八股, 兄弟師友期許者, 入學 • 中 • 會試 • 敬官而已.”

44) 『習齋先生言行錄 • 不爲』 ”八股之害, 莊於禁火.”

45) 『平訂』 卷6. ”難胸中幽蛇 筆下河惡 而出而應世, 文腐果然如童婦. …… 氣息柔脇如婦女, 人辻關如天甄"

신하가 없어",46) "백성들의 재산이 물고기가 썩어버리고 제방이 터져 강물이 넘쳐흐르듯 손실을 입게 되었다"47)고 하였으니, 八股라는 과거시험을 위한 학문이 국가사회에 얼마나 큰 害를 끼쳤는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顔李는 반드시 그들이 제창한 학교와 학술로 과거와 八股를 대신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顔元은 『編』에서 그가 제창한 學의 本旨를 "과 周公 • 孔子의 三事六 • 六德 • 六行 • 六怒의 道룰 밝히는 것"48)이라고 체계적으로 천명하였댜 이것이 바로 소위 "의 三事六府의 道"49)이며, "公과 孔子의 六德 • 六行 • 六藝의 학문"50)이기도 하다.

소위 “三"란 正德 • 利用 • 厚牛을 가리키며, ”六府"란 木 • 金 • 水 • 火 • 土 • 穀을 말한다. 三事六府에 대하여 李恭은 다음같이 상세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

六와 三, 이것은 모든 일에 있어 백성들을 사랑하는 최선의 길이다. 말하자면 水는 모든 도랑 • 운하 • 治河 • 防海 • 水戰 • 얼음저장 • 소금전매 둥의 제반 사업을 통괄하는 것이며, 火란 산에 불을 놓는 일 • 가을철 북방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 벌판에 불을 지르는 일 • 火器 • 火戰 • 禁火 • 계절에 따라 불씨를 얻는 일 둥둥 불을 다루는 제반 사업을 통괄하는 것이고, 金은 治金과 화폐의 주조 • 병사훈련 • 병법강론 • 大司馬의 법 둥을 통괄하는 것이다. 木은 冬官의 직책 • 官이 관장하는 일 • 후세에 있어서

46) "天下之宜 廟堂無經濟之臣.”

47) ”民物魚閣河決.”

48) ”申明堯舜周孔三事 • 六府 • 六德 • 六行 • 六藝之道.”

49) ”堯舜三事 • 六府之道.”

50) ”周公孔子六德 • 六行 • 六狂之學.”

의 茶의 전매와 抽分(商의 징수) 등의 일을 통괄하는 것이며, 土는 국가의 구획을 나누고 토지를 관리하는 일, 山林 • 川澤 • 丘陵 • 衍 • 限 둥의 다섯 종류 토지의 특성을 구별하는 일, 아홉 개의 를 적절히 다스리는 일, 丑 • 작위와 봉지를 봉하는 일, 山河 • 城池 등 地에 관한 제반사업을 통괄하는 것이며, 穀은 后稷이 經營하던 일, 田千秋와 趙過가 보좌하였던 일, 昴과 臨이 도모하였던 일, 屯田 • 곡식을 귀히 여기는 일 • 벽지를 개간하는 일 • 군량을 풍족히 하는 일 등 腦政에 관한 제반 사업을 통괄하는 것이다. 正은 金 • 木 • 水 • 火 • • 穀의 德을 바르게 하는 것이며, 利은 金 • 木 • 水 • 火 • 土 • 殺의 쓰임을 이롭게 하는 것이고, 은 金 • 木 • 水 • 火 • 土 • 穀의 생산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51)

소위 "六”이란 知 • 仁 • 聖 • 義 • 忠 • 禾를 가리키며, ”六座"는 福 • 樂 • 射 • 御 • • 數룰 말하며, ”六行"은 孝 • 友 • 睦 • • 任 • 을 가리킨다.

이상은 顔元과 李이 제창한 학술의 주요내용이었다. 이러한 내용으로부터 보면 그들은 ”正"을 중시하였으며, 더욱 중요한 점은 그와 동시에 "利用"과 "”을 제창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利用"과 “厚"은 恭의 해석에 따르면 바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전

51) 『隨忘紅』: ”六府三, 此萬親民之至道也. 言水, 則凡溝油 • 泊抱 • 治河 • 防海 • 水戰 • 藏泳 • 維椎諸事統之矣; 言火, 凡徒山 • 燒荒 • 火器 • 火戰, 與夫禁火 • 改火諸理之法統之矣; 言金, 凡治鑄 • 泉貨 • 修兵 • 講武 • 大司馬之法統之矣; 言木 則凡冬官職• 奧人所 • 若後世茶椎 • 抽分統之矣; 言土, 則凡體國經野, 辨五土之性, 治九州之宜, . 封建 河 • 城池諸地理之學統之矣; , 則凡后稷之所經營, 千秋 • 趙過之所補救, 兄鎖 • 劉姜之所謀爲 屯田• 貸栗 • 邊 • 足館諸四政統之矣. 正德, 正此金 • 木 • 水 • 火 • 土 • 穀之; 利用, 正此金 • 木 • 水 • 火 • 土 • 殺之用; 厚生, 厚此金 • 木 • 水 • 火 • 土 • 穀之生也"

형적 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李述이 해석을 가한 水 • 火 • 金 • 木 • 土 • 役은 오늘날 사용되는 말로 하면 실제상으로 自然科學과 社會科學의 兩大 학문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양대 과학의 목적은 하나는 자연을 改造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사회를 개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명말청초 學의 典型이 아니라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顔가 숭배한 학교에 대해서는 顔元이 만년에 운영한 " 院"으로부터 그 대체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璋南"의 개설과목은 일반 서원과는 달랐다. 그 개설과목은 다음과 같다.

文事課 : • 樂 • • 數 • 天文 • 地理 등의 科로 나누어 진다.

武備課 : 帝 • 太公 및 孫 • 吳 五子兵法으로 나누어지며, 아울러 陣營 • 水陸戰法 • 射 • 御 • 技擊 등의 科룰 공부한다.

經史課 : 十三經 • 歷代史 • 誰制 • 章奏 • 寺文 둥의 科로 나누어진다.

課 : 水學 • 火學 • 工學 • 象數 등의 科로 나누어진다.

가장 재미있는 일은 顔元이 학생들로 하여금 "내 학문의 반대파를 알게"52)하기 위해서 對比의 교학방법을 채택하였고, 따라서 “理學齋”와 ”帖括"를 설치 하였다는 것이다. 顔元은 이런 방법을 통하여 학생들이 敎身의 실천 속에서 理學과 科의 無用함을 인식하게 하였던 것이다.

장남서원의 과목개설과 顔李가 제창한 학술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그 시대에 天文 • 地理 • 水學 • 火學 • 工學 등을 정식과목으로 삼은 곳은 아마도 顔元의 장남서원뿐일 것이다.

顔元과 李이 제창한 사항들이 정상적으로 발전하였다면 틀림

52) "見爲吾道之敵對"

없이 근대과학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을 것이다. 명말청초의 실학이 근대과학과 직접 접목되지 못한 것은 照史의 과오이다.

2. 學風問題

이란 일종의 학술사조이면서 일종의 학풍이기도 하다. 이 학풍의 핵심은 바로 공허한 담론을 반대하고 을 강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명말청초의 실학사조 중에서 비교적 전형적인 학파는 顔李學派였다. 淸人 戴望은 乃의 학문은 事物을 귀착지로 삼았으며 평생 동안 空言으로 가르침의 방침을 세우지 않고”53) "오직 學 • 質習 • 間의 세계에 마음을 두었다"54)라고 하였다. 이것은 顔學의 내용에 대한 평가일 뿐만 아니라 顔李學風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1) 習行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

顔李學風의 주요내용인 習行에 관하여 顔元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을 하며 책에서 보았다 해도 모두 소용이 없으니, 때에 임박해서는 여전히 평소 익힌 것이 나오게 된다.55)

마음속에서 깨달아 입으로 말하고 글로 쓴다 해도, 직접 몸으

53) 『顔氏學記』 卷1. ”先生之學, 以事物爲歸, 而生平未符以空言立敎.”

54) 『顔氏學記』 卷1. "財學 • 習 • 質用之天下.”

55) 『存學編』. ”心上思過 口上講過, 上見過, 都不得力, 臨時依但是習者出."

로 익히지 아니한 것은 모두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다.56)

그의 결론은 바로 "힘써 행하는 곳에 지식이 생겨나게 된다”57)는 것이었다. 顔元은 한 가지 예를 들어 習行의 중요성을 설명하였다.

또 冠같은 물건은 비록 三代의 聖人일지라도 어느 시대의 冠인지 알 수가 없다. 설사 듣고 보는 것으로써 肅恨에서 만들어진 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해도 그 가죽이 얼마나 따뜻한지를 알수가 없으니, 반드시 손으로 집어 머리에 써봐야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따뜻한지를 알게 된다. 또 服疏 같은 무 종류의 채소는 비록 뛰어난 지혜를 가진 노련한 농부라도 그것이 먹을 수 있는 것인지를 모른다. 설사 형체와 색깔로서 먹을 수 있는 것이라 헤아릴 수는 있어도 그것의 맛이 얼마나 매운지는 알 수가 없으니, 반드시 젓가락으로 그것을 집어 입안에 넣어 보아야 바로소 얼마나 매운지 알게 된다.58)

이같은 인식에 근거하여 顔元은 理學家들이 항상 입에 올리던 “格物致知"라는 命題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가하였다. 그는 ”格"자를 "손으로 맹수를 칠 格이며, 손으로 쳐죽일 格"59)이라 풀고, 그것은 "손을 사용하여 매질하고 만지작거린다는 뜻"60)이며, "손을 사용하여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 것”61)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소

56) 『編』. "女心中混 口中說 紙上嚴 不從身上習過, 皆無也.”

57) 『存學編』. ”力之所至 見斯至矣.”

58) 『四正誤』. ”旦如此冠, 難三代聖人, 不知可朝之冠也; 難以聞見, 知爲愼之冠 亦不知皮之如何援也, 必手取力[I諸尙 乃知是如此援. 如此, 難上智老團, 不知爲可食之物也, 難從形色, 料爲可食之物, 亦不知味之如辛也, 必取 而納之口, 乃知如此辛.”

59) ”手格猛獸之, 手格殺之格.”

60) 『習齋記餘』 卷6, 張氏王學質疑評. "犯手推打接弄之義."

위 "格物致知"란 바로 "손으로 그 사물을 직접 접해본 뒤에 지식이 생겨나는 것"62)이라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지 學風의 각도에서 분석하였는데, 상술한 顔元의 사상은 물론 學風問題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認識論의 중요문제이기도 하지만, 본고는 顔李의 哲學思想을 논술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철학의 각도에서는 논술을 피하고자 한다. 恭도 "실행을 강구하지 않고, 오로지 이치를 밝히는 일만을 거론한"63) 사람의 잘못을 예로 들어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다론 사람과 받을 다투는데, 소송판결관이 예전 계약서를 확인해도 그대의 밭이 아니고, 증인에게 물어도 그대의 밭이 아니며, 밭 경계의 형세를 보아도 그대의 밭이 아니거늘, 그대가 "내 마음의 이치로는 진실로 내 밭이라 생각된다”고 한다면, 이것은 역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억지인 것이다. ‘明理’라는 두 글자는 노인들이 항상 입에 올리는 말이지만 그 패단이 이와 같음을 생각지 못한 것이다.64)

顔李의 학문이 “行 • 質習 • 切”의 학문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그들이 강조한 학풍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2) 事功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

事功의 제창은 顔李學風의 또 다른 중요 항목이다. 戴望은 顔元이 "後儒들이 性과 天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많이 논의하며, 事功에

61) 『顔習齋先生言行錄 • 剛峰』· ”犯手質故其事.”

62) ”手格其物而後知至.”

63) ”不講持行, 專以明理爲言.”

64) 『論學』 卷2. “君與人爭田, 聽松者問衍契非君田, 間證人非君田, 親淵界形述非君. 君曰, ‘吾心之理, 固以爲吾田也.' 此也無如之何矣, 明理二字, 老生常談, 然不意其散如此.”

대해서는 동한히 하기"65) 때문에 "後儒들을 매우 비루하게 보았다”66)고 하였다. 우선 "功利”에 대하여, 顔元은 자기 나름대로의 의견을 갖고 있었다. 그는 漢代의 蓋仲舒 이래로 존재하던 “그 의로움을 바르게 하고 그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며, 그 道를 밝히고 그 功을 추구하지 않는다"67)라는 전통관념에 찬성하지 않고, “그 의로움을 바르게 하고 그 이익을 도모하며, 그 道를 밝히고 그 공적을 추구한다”68)라고 주장하였다. 顔元은 "동중서는 義를 바르게 하고 道롤 밝히어 마치 道를 꾀하고 먹을 것을 꾀하지 않는 것 같다"69)는 의견에 대한 논평에서, 그것은 순수히 • 道의 공허한 담론이며 埋學 腐儒들의 견해라 여겼다.

세상에 농사를 짓고도 수확을 도모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세상에 그물과 낚시 바늘을 갖고서도 물고기 잡을 것을 꾀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 ‘도모하지 않음’과 ‘꾀하지 않음’이란 두 가지 일은 바로 노자의 ‘照’와 석가의 ‘空’의 근원인 것이다. …… 대저 의로움을 바르게 하는 것이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며, 道를 밝히는 것이 바로 공적을 꾀하는 것이다. …… 전혀 이익을 도모하지 않고 전혀 공적을 꾀하지 않는 것은 空虛한 것이며 腐의 태도이다.70)

“功利"에 대한 이같은 견해는 顔가 事功을 제창하는 데 있어

65) ”後儒{多言性天, 薄事功.”

66) 『顔氏學記』 卷1. “故其視諸賢(後儒)莊卑也.”

67) ”正其請不謀其利, 明其道不計其功.”

68) 『四正誤』. ”正其義以謀其利, 明其功.”

69) ”董子正誰道似謀道不謀食.”

70) 『顔習齋先生言行錄 • 敎及』. "世有耕種而不謀收獲者平? 世有荷桐持釣而不計魚者平?……這'不謀' • '不'兩者, 便是老無釋空之根 …… 蓋正部便謀利, 明道便計功 …… 全不謀利功, 是空寂, 是腐.”

주춧돌의 역할을 해주었다.

다음으로, 顔李는 그들 스스로 일을 하는 데 열성적이었으며 事功을 중히 여겼다. 顔元은

사람이 틀림없이 천하를 알선하고 만민을 구제할 수 있어야 비로소 聖賢이다. 그렇지 않으면 설사 거짓으로 ‘性’과 ‘'을 이야기하고 진실로 ‘定’과 ''을 이룬다 해도, 결국은 釋迎와 莊子 같은 사람들이다.71)

라고 하였다. 그는 만약 하루를 산다면 백성들을 위해 하루를 일할 것이며, 결코 구차히 살아남아 安逸을 구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李妹은 宋 • 明 士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후세에는 行하는 것과 배우는 것이 분리되고 배우는 것과 정치가 동떨어졌다. 宋 이후에 二氏의 學이 홍성하자, 孟者들이 그 학설에 빠져들어 靜坐하여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性’과 ’天’에 대해 담론하는데 孔夫子의 말씀과는 일일이 어긋나는 것이었다. 국가의 위기를 구제하는 일과 大經大法에 이르러서 팔짱만 낀 채 눈을 부릅뜨고서는 그 주도권을 武人과 俗土에게 떠맡긴다. 明 말엽에 들어서자 조정에는 의지할 만한 신하가 하나도 없거늘, 大司馬堂에 앉아 『左에 批片울 가하고 敵兵이 도성에 쳐들어 와도 시를 지으며 임금 앞에서 글을 강론한다. 공적을 세우고 이름을 날리는 것을 모두 하찮은 일이라 생각하면서, 밤낮으로 瑞息하며 저서를 집필하고서는 이것이 세상에 전해질 功業이라 말한다. 이렇게 해서 결국 천하가 부패하여 붕괴되고 백성들이 도탄에 허덕이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72)

71) 『顔習齋先生言行錄 • 敎及』. “人必能幹旋乾坤, 利濟蒼生, 方是聖賢. 不然, 難短語性天, 眞見定靜 終是釋迎• 莊周也.”

"공적을 세우고 이름을 날리는 것"을 하찮게 여기고 또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士風에 대한 李凡의 비판은 당시 學風의 병폐를 정곡으로 찌르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事功이라는 관점은 顔李가 역사인물을 평가할 때 적용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顔元은 王安石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혹평에 대하여 왕안석을 다음과 같이 변호하였다.

荊公(왕안석)이 근심했던 바는 모두가 司馬 • • 의 무리들이 근심할 줄 모르는 것이며, 荊公이 본 것은 모두가 周 • 程 • 張 • 都 둥의 무리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또 荊公이 하려고 했던 일은 모두가 당시 은거해 있거나 세상에 나와 있는 모든 舌生들이 하려고 하지 않는 일이자,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이며,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당시에 있어서는 형공의 정치를 어지럽힐 수 있었겠으나 어찌 후세에서 형공의 명성을 평하할 수 있으리요?…… 이 宋 일대의 인물들은 식견이 천박할 따름이다.73)

顔元은 또 왕안석 한 사람의 是非를 따진다면 논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공훈과 업적을 세우는"74) 원칙에 대한 의견과 관련이 있으므로 논하지 않을 수 없는

72) 『怨谷文集 • 與方阜』 ”後世行與學離 學與政離 宋後二氏學興, 儒者沒程其說, 靜坐內視論性談天, 與夫子之言, 一一乘反. 而至於扶危定傾, 大經大法, 則棋手張, 授其柄於武人俗士. 當明季世,朝廟無一可俺之臣,坐大司馬堂批點 『左』, 敵兵臨城, 賊詩進講 覺建功立名, 但屈消府. 日夜瑞息著, 曰此傳世業也. 卒至天下魚炯河決, 生民塗炭.”

73) 齋記節 卷6, 『總平王荊公上仁宗皇帝萬言』. ”荊公之及, 皆司馬 • 韓 • 范租所不知及者也. 荊公之見 皆 • 程 • 張 • 都輩所不及見者也. 荊公之所欲爲 皆常時亞見諸生所不肯爲·不政爲·不能爲者也. 烏得不亂公之政於常時, 股公之名於後世哉? …… 是宋家一代人物, 識見卑耳.”

74) ”建功立業."

것이다. 顔元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한 사람의 是非를 따질 것이 무엇 있겠는가? 한스러운 것은 이 한 사람을 비방하느라 결국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마저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천하의 후세인들은 마침내 구차한 안락과 의기소침을 君子로 여기고, 공훈과 업적을 세우며 천하를 지탱하려 하는 자를 소인으로 여기게 되었다. 荊公의 불행이 어찌 宋만의 불행이겠는가!75)

이렇게 완전히 事功의 각도에서 왕안석의 업적을 평가한 것은 역사상에서 그리 흔치 않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顔元와 李材鬪만이 事功을 제창한 것은 물론 아니었댜 그러나 명말청초의 思潮 속에서 事功을 일종의 학풍으로 삼아 제창한 면에 있어서는 顔가 비교적 특출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3) 創造的인 立言의 제창과 附和雷同에 대한 반대顔元의 後學인 王源은 顔元의 학술을 평가하면서, 그는 "2천년 동안이나 열 수 없었던 입을 열었으며, 2천년 동안이나 들 수 없었던 봇을 들었다”76)라고 말하였댜 이 말은 창조적인 立言을 제창한 顔元의 학술정신을 충분히 평가해 주고 있다. 顔元 자신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75) 『年譜』 卷下. "佳然, 一人是非何足辨? 所恨証此一人, 而遂普忘君父之仇也. 而天下後世, 遂以荀安類爲君子, 而建功立業, 欲招柱乾坤者, 爲小人也. 岩荊公之不幸, 宋之不幸也哉!"

76) 『王源文渠 • 與婚梁仙來』. ”開二千年不能開之口, 下二千年不能下之筑.”

立言하는 데 있어서는 단지 옳고 그름만을 따지고, 같고 다름은 따지지 않는다. 옳은 것은 한두 사람의 의견이라 하더라도 바꿀 수가 없지만, 잘못된 것은 비록 천만 명의 사람이 동의하는 것이라 해도 그 말을 똑같이 따라하지 않는다. 어찌 천만 명의 사람인 경우에만 그러하랴, 비록 천만 년 동안 같은 잘못을 반복한 상황이라 해도 우리는 마땅히 선각자로서 뒷사람을 깨우쳐 주어야 하며, 부화뇌동할 필요는 없다.77)

顔元의 이같은 立言 創造精神에 대하여 당시에 "미친 짓이라 비웃는 자도 있었고, 어리석은 짓이라 멸시하는 자도 있었으며, 세상물정을 모른다고 헐뜯거나 고루하고 완고하다 흉보기도 하고 또는 색다른 것을 좋아한다고 손가락질하는 자도 있었다. 심지어는 보기만 해도 비방하고 면전에서 적대시하며, 서로 작당하여 비웃고 욕하였다".78) 그러나 顔元은 굳건한 태도로 그의 문하생인 李植秀에게 “모름지기 기개를 굳건히 하여 근거 없는 뜬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비웃음과 비방에 좌절하지 않아야 비로소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79)라고 말하였다.

顔元의 이러한 言論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상당한 啓蒙意義를 갖고 있으며, 더욱이 하나의 학풍으로서 제창한 것이니 그 의의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顔元은 학풍변혁의 중요성을 거론하며 자신이 이러한 책임을 맡아야 한다고 여겼다. 또 그는 "학자는 변혁의 권리를 자연의 추세

77) 『顔習齋先生言行錄 • 身』 ”立言但論是非, 不論同異. 是一二人之見不可易也; 非難千萬人所同, 不隨聲也. 登惟千萬人, 難千萬年同迷之局, 我輩亦以先後, 不必附和雷同也.”

78) 『習齋記餘』 卷4, 『初寄王法乾』. ”有笑爲狂者, 有部爲愚者, 有特爲辻 • 目爲古板 • 指爲好異者. 莊至而磯, 迎而担, 呼朋引類而笑之.”

79) 『年血 卷上. ”須堅定骨力, 流言不, 笑不性, 方能有成."

에 맡겨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이 행하면 學術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면 風俗이 되는 것이니, 백성의 고통을 차마 치지도외할 수 있겠는가!"80)하였다. 李述은 顔元의 이 말을 듣자 감동하여 울기 시작했다고 한다.81)

3. 明淸 實學思潮에서의 顔李學派의 位相

지금까지 본고에서는 顔李學派에 대하여 두 가지 중요한 면을 살펴보았다 물론 顔李學說이 이 두 가지에 국한된 것은 아니며, 실학의 내용도 이 두 가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본고에서 이 두가지면 만을 특별히 강조한 까닭은 실학에 대한 필자 본인의 이해와 상당한 관계가 있다. 실학은 한 시대의 社會學術思潮이자, 또한 한 시대의 學風이기도 하다. 사회학술사조로서는, 실학의 사회문제에 대한 견해와 그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이 무엇이었는지 고찰해야 할 것이며, 또 일종의 학풍으로서는 실학이 무엇을 제창하였으며 무엇을 반대하였는지에 대해서 고찰해야 할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의의에서 말하면, 顔李學派가 명청 실학사조의 典型이라 하여도 아마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학파에 대한 분석은 명청실학사조의 실질과 특징을 이해하는 데 틀림없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顔李學派에 대한 近 • 現代人의 평가로부터, 명청실학사조에서 顔李學派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近人 章太炎은 "末世의 大儒로는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80) 『負氏學記』 卷7. ”學者勿以轉移之權委之氣水, 一人行之爲學術, 衆人從之爲風俗, 民之漠矣 忍度外腦之平!"

81) 『顔氏學記』 卷7 참고.

顔元이고, 다음은 戴이다”82)라고 하였다. 청대에는 大가 특별히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장태염이 오직 顔元과 戴 두 사람만을 꼽은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청대 학술사상, 顔元과 戴店이 反理學의 맹장이라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은 顔 • 裁가 “理로써 사람을 죽이는"83) 理學의 본질을 폭로하였기 때문이다. 顔元은

아, 과연 양명학이 사그러들고 주자학만이 홀로 행해진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지 않겠는가? 그러면 과연 주자학이 잠잠해지고 양명학만이 홀로 행해진다고 하여 사람을 죽이지 않겠는가?84)

하고 말하였다 戴의 말에 따르면, 戴災이 理學은 “理로써 사람을 죽인다”고 한 것도 顔元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月氏學記』에는 "乾隆 연간에, 裁店이 『孟子緖言』을 저술하였는데, 애초에 선생(元)의 性에 관한 이 학설을 근본으로 하여 그 뜻을 발양시킨 것이다"85)라고 기록되어 있다.

梁啓超는 "의 學術界에 …… 朱 • 陸과 漢 • 宋諸派에서 근거로 삼는 모든 것들을 깨끗이 일소하여, 2천년 사상계에 대해 매우 맹렬하고 진지한 大革命運動을 벌인 사람이 있었다. 그가 세운 기치는 바로 ‘復古'였으나 그 정신은 순수히 ‘現代的'인 것이었으니 그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顔習齋(안원)와 그의 門人 李怨谷(이공)이다”王)라고 하였다. 顔는 程朱 • 陸王의 理學울 비판하였을 뿐 아

82) 『文錄』 卷1 上, 『說林』. "叔大信有兩人, 一曰顔元, 再曰.”

83) ”以理殺人.”

84) 『齋記餘』 卷6, 『關張氏工學質疑評』. ", 果息工學而朱學獨行, 不殺人?果息朱學而工學獨行, 不殺人?"

85) 『顔氏學』 卷1. ”乾隆中, 戴吉士底『孟子緖』, 始本先.(顔元)此說生, 而暢發其旨.”

86) 『中國近三百年學術史』, 105쪽. ”有淸一代學術 …… 其有人鷲保朱陸淡宋諸派所恐籍者, 一切描廊淸之, 對二千年思想界爲極猛烈誠費的大革命運動,

其所樹的旗織曰‘復古', 而其精神純爲現代', 其人爲誰? 曰顔習齋及其人李怨谷.”

니라, 漢代 이래로 전해져 온 章句訓注의 학풍을 일소하고 ”買學 • 質習 • ”을 강조한 經 世致用의 학문을 창시하여 명청실학사조의 대표자가 되었던 것이다.

杜國辛은 "中國學術史에서, 명말청초 시기(대략 서기 17世紀에 해당)는 주의를 기울일 만한 시대이다. 이 시기가 중요한 까닭은 이 시기에 들어 5백여 년 간 내려온 理學이 총결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임무를 완성한 사람은 바로 黃梨洲, 顧李林, 王船山, 顔習齋 둥이었다. 그들의 비판을 거쳐, 理學은 확실하게 종결되었으며 다시 부활될 가능은 절대로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학술사상", “그들은……古代學羽을 청산할 기초를 다졌던 것이다"87)라고 하였다.

장태입 양계초, 두국상 등은 청대학술사에서 顔李學說이 차지하는 위상을 정확하게 지적하였는데, 이러한 평가는 明學史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실학의 각도에서 보면, 章 • 梁 • 杜 3인의 평가 또한 대단히 정확한 것이다. 그들은 顔와 理學의 대립이라는 면에 초점을 맞추어 顔李룰 평가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였는데, 우리가 말하는 明學은 본질상 理學과 대립하는 일종의 학술사조임이 분명하다.

명청실학은 근대 학술적이며 계몽적인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다. 顔李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명청실학은 중국근대사상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지 않았다고 보여지는데, 이것은 무엇 때문인

87) 『液橋集 • 論理學的終結』. ”在中國學術史上, 明淸之交(約當西曆17世紀)是一個値注意的時代. 這個時代之所以頂要, 是七總決了五百餘年所謂理學, 而完成這任務的, 爲黃(梨) • 顧(亭林) • 王(船山) • 顔(習齋)諸人. 經過他的批判, 埋學是決定的終結了, 絶沒有死灰復燃的可能", ”在學術史上", "也……準了淸算古代學術的基礎."

가? 顔李學派도 몇십 년 동안 홍성하다가 맥이 끊겼는데, 이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이다. 장태염은 顔李學派의 또 다론 일면을 평가하여 "그의 학문은 실재 事物에 있으며, 실재 사물에 따라 그것을 익히니 추상적인 개념의 사용은 적었다"88)라 지적하였다. 顔李는 단지 質用에만 중점을 두었으니 理論思魚의 개발 면에서는 상당히 부족하였다. 買質만을 중시하고 이론사유를 소홀히 하는 학파는 편견과 병페를 바로잡을 수 있으며 심지어는 일대의 학풍을 전환시키기도 하지만, 시대의 변천에 따라 후세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에는 한게가 생기게 된다. 장태염의 이러한 의견은 명청실학사조에 적용할 수가 있다고 생각된다. 한 시대의 사조에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기 마련이다. 명청실학사조의 장점은 실질적인 사회문제의 해결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며, 단점은 埋論思糸의 개발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기타의 사회적인 복잡한 원인을 제외하면, 이것도 이 考證에 의해 그 자리를 빼앗긴 원인 중의 하나이다. 명청실학의 下限에 관한 문제와 그것이 근대사상과 접속되지 못했던 원인에 관해 필자는 다른 글에서 논술하고자 하며, 본고에서는 단지 顔李學派에 대하여 약술하였을 뿐이다.

명청실학문제는 새로운 課題로서 토론의 여지가 상당히 많다. 본고는 단지 顔李學派에 대하여 몇 가지의 의견을 피력하였으며, 잘못된 곳이 있다면 諸의 가르침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경동 옮김)

88) 『顔學』· ”其學在物, 物物習之, 而槪念抽象之用少.”

明代의 朱子學과 元氣實體論

葛榮晉

明初의 주자학은 ‘假와 用,' ‘府와 '’의 통일이었다. 그래서 明 中葉 이후 사회의 정치적 위기가 생겨나고 발전해 감에 따라, 주자학의 사상체계는 부단한 변화를 통하여 元氣質體論을 낳았으며, 그것으로 經世致用的 사회사조의 이론적 근거를 삼을 수 있게 되었다. 明代의 주자학과 元氣買體論의 관계는 본래 대립적이면서도 통일적이기도 한 것이어서, 이 두 가지는 서로 때 놓을 수 없는 것이었댜 明代의 元氣買體論 철학사조의 興起와 發展은 明代 중엽의 주자학 사상체계 속에서 점차 배태되어온 것이다. 주자학 사상체계의 쇠퇴과정은 또한 동시에 元豊論의 탄생과 발전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를 형이상학적으로 대립시키고, 물[水]과 불[火]처럼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일종의 편파적 논리이다.

明初에서 중엽에 이르기까지, 봉건통치자들의 지지와 고무로 인해, 程朱의 理學은 철학계 내에서 독보적 지위룰 차지하고 있었다. 明 왕조는 시작하면서부터 "理學으로 開國한다”는 방침을 확립하였으며, 통치자들은 주자학을 과거시험의 기본교재로 규정하였다. 또, 전국의 학술적 역량을 집중시켜 『四忠大全』 • 『五經大全』 • 『性理大全』을 편찬하였으며, 그것을 전국에 배포하였다. 정권의 힘을

이용하여 程朱理學을 法定的 지위에까지 올려놓아, 학자들로 하여금 程朱의 책이 아니면 읽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官方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程朱의 是가 표준이 되었다. 明初의 주자학을 존숭하던 분위기는 정권을 탄생 • 발전시키고 공고히 하는 데 일정한 작용을 하였지만, 사회적으로는 사상의 경직화와 도덕의 허위화, 그리고 인재의 결핍이라는 폐단을 낳았다. 따라서 明代 중엽에 와서는 왕조의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이 나날이 첨예해져 감에 따라 통치계급 내부의 갈등과 투쟁도 점차 격렬해져 갔으며, 봉건사회 전체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內袋外患의 역사적 배경 하에서 많은 지주계급 출신의 識者들은 이러한 사회적 위기가 형성해낸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 반성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사회적 위기를 해결할 구체적 방법을 토론하였다. 시대적 한계와 계급적 한계로 인하여 그들은 역사발전 법칙과 봉건사회의 본질에서 원인울 규명할 수 없었으며, 다만 程朱理學 및 그 말류인 "空寂之學”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 따름이었다. 王廷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자에 높이 오르기를 좋아하는 어리석고 썩은 유학자들은 국가에서 어진 인재를 양육하여 장차 통치를 보좌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良知를 강구하며 天理의 學을 體認할 것만을 제창한다. 이는 後生과 小子로 하여금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헛되이 좌정하며 머리를 마주하고 공허한 이야기만 나누게 하는 것으로, 종국에는 心性의 幽玄함을 소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道를 홍하게 하고 홉족하게 하는 기술과 권력에 도달하기 위해 임기옹변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지만, 다만 闇然하여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학문을 하고 이러한 사람을 둥용하여 천하와 국가의 임무를 맡게 한다고 했을 때, 갑작스럽게 非常的 변고를 당하게 되면, 평소에 미리 氣를 길러 놓지도 않았고

일을 사전에 대비해 놓지도 않았기 때문에, 가슴이 뛰고 안색이 변하며 들었다 놓았다 당황하게 되어, 다른 나라의 일을 오해하지 않는 자가 몇이나 될 것인가!1)

이 점에 대하여는 王守仁도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대저 오늘날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士風이 쇠락했기 때문이다. 士風이 쇠락한 것은 學術이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2) 따라서 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다만 ”學術울 밝게 하고," ”士風을 변화시켜야"만 明 왕조를 起死回生 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본적 인식에서 출발하여, 그들 중 일부는 朱子에서 분화되어 나왔으며, 理本論에서 氣本論으로 역사적 전환을 이루었던 것이다.

體論 철학체계는 明代 중엽에 생겨난 것으로, 당시 사회의 정치적 위기와 주자학 쇠퇴의 산물인 동시에 주자학의 자체적 모순발전의 결과이기도 했다. 주자학은 ”以理爲本”의 방대한 사상체계로, 각종의 극복할 수 없는 내재적 모순을 포함하고 있었다. 本體論의 면에서 말하자면, 주자학은 ”氣와 理를 둘로 나눈다”는 모순을 포함하고 있었다. 주자학의 사상체계에서 ‘‘이른바 埋와 氣라고 하는 것은 단연코 두 가지 物이다. 하지만 物의 입장에서 본다면 二物은 論되며, 나누어지지 않은 채로 각각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二物이 각기 一物로 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또 理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록 物은 있지만, 物에도 이미 物의

1) 『雅述』 下篇 "近世好高辻腐之低 不知國家發했育才將以治, 乃偏爲講求良知, 體認天理之, 使後生小子澄心白坐, 緊益, 終於心性之玄幽 求之興道致治之術, 達應變之機 則闇然而不知. 以是學也, 用是人也, 以之天下國家之, 卒遇非常嬰故之來, 氣無, 事無津, 心動色, 括船色皇, 其不誤人家國之幾希矣!"

2) 『王文成公全』 卷22. ”今夫天下之不治 由於士風之哀. 而士風之哀落, 由於學術之不明.”

理가 있는 것이다"3) ”理의 입장에서 본다”는 것은 理本論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理와 氣는 서로 나누어지는 두 가지 物이라는 것으로, ”理先氣後", "本氣末", “理主氣從", ”埋存氣滅" 동의 논점을 낳아, 理가 ”加理"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物의 입장에서 본다”는 것은 우주만물의 구성에서 보았을 때, 모든 구체적 사물은 理와 氣의 ”揮論"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이고 상호 의존적인 것이라는 것인데, 이는 의심할 바 없이 氣本사상의 합리적 성분을 포함하는 것이며, 埋가 “理"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明代의 元氣買體論은 바로 ‘‘理와 를 둘로 나누는" 이 내재적 모순을 장악하여, 그 중 “理와 氣는 상호 의존적"이며, “理는 氣 속에 있다”는 실학사상을 드러내었으며, ”理는 氣의 本'’이고, ”埋가 먼저이고 氣가 나중이다”라는 印理說을 배척하였다. 그리고 더욱 진일보하여 朱의 理本論에서 張載의 氣本論으로 轉向하게 된다. 王廷才은 “氣는 埋에 근원을 두고 날마다 생겨난다”는 朱의 說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朱의 이 말은 造化의 무궁함을 엿보아 추측한 것이다. 그는 무엇이라 하였는가? 氣란, 虛에서 노니는 것이다. 理란, 氣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는 비록 양쪽에 흩어져 있지만, 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홑어지지 않을 수 없으며, 太廊가 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理는 氣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神과 性은 모두 氣에 있어 고유한 것이다’라 하였던 것이다. 만약 ‘氣는 理에 근원을 두고 생겨난다’라고 말한다면, 理가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 않겠는가? 어떤 種이 있어 氣가 생겨날 수 있게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거의 헛된 공론을 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것을 나눈다면 다음과

3) 『文公文集』 卷42. "所理與氣, 此決是二物. 但在物上君, 則二物揮論, 不可分, 各在一處 然不害二物之各爲一物也 若在理上看, 則難未有物, 而己有物之理.”

같이 고쳐 말할 수 있을 것이다. 氣 가운데 이미 홑어진 것은 太能의 體로 돌아가고, 천지의 氣가 서로 합한 것이 느껴지고 이긴 것은 진실로 浩然하고 無窮하게 되는 것이다. 張子가 이른바 ‘죽더라도 亡하지 않는 것’은 이와 같다. 造化의 牛息과 人性의 有無가 어찌 여기에 속하지 않으며, 다론 데서 구할 것인가?"4) 그들은 다만 주자학의 "多의 의부에 초연한" “曲理"를 포기하고, 그 중 "는 物의 本”이며 理는 氣와 떨어질 수 없다는 합리적 사상을 벗겨내어, 주자학에서 말하는 "氣는 理에 근원을 두고 날마다 생겨난다”는 논리를 “理는 천지의 氣가 서로 합한 것이 느껴지는 데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날마다 생겨난다”라고 바꾸고, 氣를 우주만물의 궁극적 본원으로 하여야 비로소 진정으로 주자학 내부의 “理와 氣룰 나누어 둘로 한다”는 모순을 극복하고 張載의 氣本論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시대가 理本論에서 氣本論으로 전화하였던 것은 薛瑾, 曹端에서 시작하여, 羅欽順, 王廷相, 崔銃 韓邦奇, 吳廷翰, 高棋 둥에 의해 완성되었다.

曹端(1376-1434)은 “先儒의 正傳울 지켰으며" 사실상 明初 理學의 일인자였다. 朱의 ”太極卽理'’와 ”性卽理"라는 관점을 견지하였고, 天理와 人欲描의 대립이라는 理學의 주제를 견지하였으며, “無欲而靜"이라는 수양방법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理氣의 관계에 있어 그는 주자학의 사상체계에서 하나의 결함을 만들었다. 그는 「說」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語錄』(『朱子語類』를 말

4) 『橫渠理氣辯』. ”朱熹此言翔測造化之不盡者矣. 何以之? 氣, 游於虛者也 理, 生於氣者也. 氣難有散在兩, 不能滅也, 故曰 ‘萬物不能不敗而爲太'. 理根於氣 不能獨存也, 故曰 ‘神與性皆氣所固有'. 若曰根於理而生', 不知理是何物? 有何種子, 便能生氣? 不然 不幾於談熟空之論平? 分爲之改曰 氣之已者低歸於太虛之體矣, 其氣鉉相感勝者固浩然而無窮, 張子 死而不亡者如此 造化之生息, 人性之有無, 又何以外於是而他求也哉."

함)을 보면 太極은 스스로 動靜을 취하지 못하고 陰陽의 動靜을 틈타 動靜을 취한다고 하였으며, 埋가 氣를 타는 것은 사람이 말[馬〕을 타는 것과 같아, 말이 한 번 나가고 들어오면 사람 역시 그것과 함께 나가고 들어오는데, 이로써 氣의 一動一靜에 따라 理도 一動一靜한다는 것을 비유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사람은 죽은 것이 되고,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는 것인데, 理에 어찌 숭상할 만한 것이 있으며 인간에게 어찌 귀하다고 할 만한 것이 있으리요! 지금 산 사람으로 하여금 말을 타게 했을 때, 그 나고 들고, 달리고 멈추며, 빠르고 늦는 것이 말을 부리는 것에서 연유할 따름이라는 것이 된다. 산 理 역시 그러하다. 제대로 살피지 못할 경우, 이것을 믿으면 저것을 의심하게 되고, 저것을 믿으면 이것을 의심하게 된댜 세월이 흐르면 折表되지 않는 것이 없는 법이다. 그래서 r辨反」을 지은 것이다”5) 여기에서 端은 朱의 ”太極은 스스로 動靜을 취하지 못하고 陰의 動靜을 틈타 動靜을 취한다"는 논리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理가 氣에 타는 것이 사람이 말을 타는 것과 같다는 비유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太極은 스스로 動靜을 취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埋氣一潭"을 강조하였고, “理와 氣는 서로 다르지 않고", 理와 氣는 "서로간에 간격이 없으며", "軍融되어 틈새가 없는", ”一體"이지 ”二物"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埋氣가 ”一體”라면, 당연히 죽은 理가 산 氣를 탄다는 설은 성립할 수 없으며, 산 理가 氣를 타고 산 사람이 말을 타며, 氣는 산 理에 이끌려지고 말은 산 사람에 의해 부려지게 되는 것이다.

5) ”及觀『語錄』(『朱子語類』)却太極不自 會動, 乘陰陽之動靜而動靜而, 遂謂理之乘氣 猶人之乘馬 馬之一出一入, 而人亦與之一出一入, 以氣之一力一合爭, 而理亦與之一動一靜 若然, 則人爲死人而不足以爲菓物之原, 理何足尙而人何足貸哉! 今使活人乘馬 則其出入, 行止, 疾徐, 一由平取之何如耳. 活理亦然.不之察者, 信此疑彼矣, 信彼疑此矣 經年累歲, 無所折表, 故爲r辨民』.”

이러한 理氣一體說 혹은 埋가 氣를 부린다는 설은, 비록 본의는 주자학의 理氣이 가지는 결점을 메운다는 것이었고 學的 閃光이 있는 것이었지만, 결국 理와 氣는 "역시 둘이다"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승인하는 것이었으며, 自家摘着的인 것이었다. 이러한 說을 주장한 曹端은 비록 理氣관계에 있어서는 참신함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여전히 程朱理學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薛暗(1389-1464)은 진일보하여 曹端의 理氣一體說을 발전시켰다. 그는 曹端의 ”太極은 스스로 動靜을 취한다”는 설에 근거하여, 理에는 "틈새가 없다”는 설을 제창하였으며, ”埋氣는 빽빽이 땅을 둘러싸고 있어, 정말 터럭 하나의 틈새도 없다"6)라고 하였다. 그는 또 氣는 揮然一體가 되어 사이가 없다"7)라 하였고, “理와 氣는 일시에 모두 갖추어진 것으로, 선후를 나눌 수 없다"8)라 하였으며 頂의 사이에는 터럭 하나의 톰새도 없는데, 어찌해서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나중인가를 나누려고 하는가?"9)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朱의 “理先氣後"情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天地에는 선후가 없지만, 필경 이 理는 앞서 있는 것이다(생각컨대 이 말은 『朱子語類』卷1에 나온다)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 理氣는 선후를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무릇 天地의 說이 없었을 때에도 바록 天地의 형태는 이루어지지 않았었지만, 天地의 氣는 줄곧 크게 흐르며 쉬지 않았으며, 理는 氣 속에 함유되어 있었다. 움직임에 미치어 陽을 낳고, 하늘이 나누어지기 시작하면서, 理는 氣의 움직임을 타고 하늘의 가운데에 드러나게 되었다. 하늘이 나누어지고 땅이 나누어지면서 氣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고,

6) 『韻書錄』 卷8. “理氣密也, 眞無速度之斑獻"

7) 『韻書組錄』 卷1. “理氣炫無."

8) 『韻書組錄』 卷3. “理與氣一時有, 不可分先後.”

9) 『韻書組錄』 卷3. “理氣不容遊 爲何分敦爲先? 執爲後?"

一動一靜에 따라 理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으며, 化하여 만물을 낳게 되었다. 만물은 생생하여 변화가 무궁하고, 무릇 理와 氣라는 두 가지는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인데, 또 어찌 어떤 것이 먼저이고 어떤 것이 나중인지를 나눌 수 있겠는가?"10) 薛瑢이 朱의 "理先氣後"臥을 반박한 것은 “理"의 본원적 지위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理"가 ”氣의 외부에서 허공에 걸린"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보기에 ”이른바 理란, 모든 사물의 자연스러운 맥락이며 조리이다”11) 薛昭은 더 나아가 태극과 음양, 道와도 또한 “떨어져서 둘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太極은 理이며, 陰陽은 氣이다. 埋는 다만 氣 속에만 존재할 뿐이며, 氣의 외부에 허공에 걸린 太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12) "드러나는 것은 器이며, 드러나지 않는 것은 道이다. 器는 道를 떠날 수 없고, 道도 器룰 떠날 수 없다”13) 埋와 氣에는 틈새가 없다. “그러므로 道 역시 器이며, 器는 道이다."14) 그가 道와 器의 合一을 강조한 것은 다만 道와 器를 합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가 실제적이기 때문이며, 道가 "공허함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薛은 비록 理本論에서 氣本論으로 향하는 전변과정에서 일정한 공헌을 하기는 하였지만, 아직 근본적으로 “理"의 절대성과 영구성을 부정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氣에는 緊散이 있지만, 理에

10) 『韻書錄』 卷3. ”或未有天地之先, 商先有此理'(此語出於『子語類』卷一)……. 麻理氣不可分先後. 盜未有天地之先, 天地之形難未成, 而所以爲天地之氣 則揮平未普斯息, 而理酒於氣之中也. 及動而, 而天始分, 則理乘之氣之動 而具於天之中 分天分地而氣無不在, 一動一靜而理無不在, 以至化生萬物, 萬物生而化無窮, 理氣二者蓋無須央相離也, 又安可分執後哉?"

11) 『韻書錄』 卷3. "謂理者, 萬勿自然之脈絡條理也.”

12) 『韻書組錄』卷2. "太理也, 陰陽氣也. 理只在氣中, 非是氣外感空有太極也.”

13) 『韻書組錄』卷3. "者氣 也, 微者道也 器不離道, 道不離器.”

14) 『韻書組錄』卷1. “故曰道亦器也, 器也道也.”

는 없다”15)라고 하였으며, "는 主이고 氣는 客이다”16)라는 것을 강조하여, 理와 氣는 여전히 ”二物“이며 理氣의 사이에는 여전히 "틈새"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薛昭은 비록 주관적으로는 朱熹의 理氣說에서 허점이라 보이는 부분을 보충하려 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모순에 빠졌으며 일관성을 건지하지 못하였다.

羅欽順(1465-1547)은 明 중엽 주자학의 대표적 중요인물이다. 그는 薛瑢을 매우 숭상하였기에, 薛瑢의 글이 맑아서 “君子儒라 할 만하다”고 하였다 그는 薛瑢의 논리를 긍정하여, "鬪에는 틈새가 없기 때문에, 器는 道이고, 道 역시 器라고 한 말은 마땅하다"17) 고 하였지만, 薛이 말한 ”氣에는 緊이 있지만, 埋에는 없다”라는 설에 대해서는 異議를 나타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저 하나는 있고 하나는 없다고 함은 그 틈새가 크다는 것인데, 어찌 '器는 道이고, 道 역시 氣이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무릇 그의 글은 理氣에 맑지만, 시종일관 理氣를 二物로 파악한다면, 그의 말도 때로는 막힘이 있는 것이다."18) 薛范의 理氣說에 있어 위와 같은 내재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羅欽順은 한 걸음 나아가 ”氣에는 緊散이 있지만, 理에는 없다"는 설을 "氣에 있어서의 衆散이 바로 緊散의 理이다”라는 설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찍이 氣의 緊는 바로 緊의 理이며, 氣의 散은 바로 散의 理라고 여겼기 때문에, 緊이 있는 것이 곧 이른바 理인 것이다” 다만 절대적 "理"를 상대적 理로 바꾸는 것만이 ”氣의 理"로 바꾸는 것이며, 程朱 理氣說의 내재적 모순을 철저히 극

15) 『韻書錄』 卷4. "凉[有衆敗 而理無緊散.”

16) 『韻書錄』 卷5. “理爲主, 氣爲客.”

17) 『困知記』 卷下. “理氣亂 '故曰器亦道, 道亦器其言當矣.”

18) 『困知記』 卷下. “夫一有一, 其爲統陳也大矣, 安謂之 ’器亦道, 道亦器'耶? 盜文淸之於理氣 亦始終認爲二物, 故其言未免時有窓周也.”

복하는 것이다.

羅欽頂은 明代의 주자학 사상체계에서 분화되어 나온 최초의 氣本論者이다. 羅欽이 보았을 때, "”는 더 이상 氣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정신적 실체가 아니라, 다만 ”氣의 埋"이며, 가 운동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그것이 왜 그러한 지 알지 못하면서도 그러한"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埋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 무릇 천지에 통하고 고금에 구해 보아도, 하나의 氣가 아닌 것이 없다. 는 本이 하나여서, 一一籠 一往一來, 一岡一, 一一降하여 循環하며 그치지 아니한다. 작은 것이 쌓이면 드러나게 되고, 드러났던 것이 다시 작게 되기도 하여, 계절의 溫凉寒署도 되고, 만물의 성장과 거둠이 되기도 한다. 이 백성들이 할 인륜이 되기도 하고, 인간사의 成敗와 失이 되기도 하여, 천 가닥 만 갈래의 많고 성하던 것이 갑자기 어지러워질 수는 없다. 그것이 왜 그러한지 알지 못하면서도 그러한 것이 바로 이른바 理이다. 처음부터 氣에 의지하여 立하고, 氣에 붙어 행한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19)

상술한 내용 가운데 羅欽順의 理氣論은 다음의 세 가지 중요한 부분을 내포하고 있다. (1) 氣란 무엇인가? 氣는 우주만물의 本體이며 來源이다. "天地에 통하고 古今에 구해 보아도, 하나의 氣가 아닌 것이 없다”, 이는 우주론적 철학으로부터 "는 本이 하나이다”라는 것을 高度로 긍정한 것이다. 공간적으로 氣는 "天地를 통

19) 『困知記』 卷上 '‘理果何物也哉? 盜通天地, 互古今, 無非一氣而已 氣本一也, 而一動一. 一往一來, 一曲一 一升一降, 循環不已, 積微而著, 由著復微, 爲四時之溫凉寒, 爲萬物之生長收藏, 爲斯民之日用(命爲人事之成敗失, 千條菓緖 粉云織 而卒不可亂 有莫知其所以然而然, 是卽所謂理也. 初非別有一物依於而立, 附於氣以行也.”

하고", 시간적으로 는 “古今에서 구한다”는 것은 氣가 처하지 않는 곳이 없고, 존재하지 않은 때가 없다는 것이다. 우주의 만물은 모두 하나의 에 本을 두고 있다. 弁의 무한성과 영구성을 인정하여야 만이, 궁극적으로 氣本體論으로 理本體論을 대체할 수 있다.

(2) 埋란 무엇인가? 羅欽順이 보았을 때는 理는 "처음부터 氣에 의지하여 立하고, 氣에 붙어 행한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朱가 말한 바와 같이 "어떤 物이 있어 그 사이를 주재하거나", “理는 다만 氣의 理"인 것도 아니고, 는 단지 往來, 昇降 운동 과정 중의 “그런 까닭에 그러한" 것이다. 理는 萬事萬物 가운데 “理"이며, 자연계와 인류사회를 초월하여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庫理", ”空理”가 아닌 것이다. 자연계에서의 ”四時의 溫凉寒暑", "만물의 성장과 거둠", 또는 사회에서의 ”이 백성이 日用할 인륜이나 인간사의 成敗와 得失"은 모두 난잡하고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理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어지러워질 수는 없는 것이다”

(3) 理와 氣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는 주자학의 ”埋는 氣의 本이다”는 사상에 대하여, ”氣는 埋의 本이다”라고 주장했으며, 氣가 첫번째 물질적 실체이고, 理는 다만 氣의 일종의 속성이나 규율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가 제기한 “理는 氣 위에서만 인식할 수 있다"는 사상은 다만 그 본원으로부터 입론한 것이고, 氣를 理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氣를 "”라 말하여 양자를 완전히 동일시한 것이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 물질성을 긍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理의 주동성도 긍정하였기 때문이다.

羅欽順은 理氣統一論에서 출발하였으며, 程朱가 太極이 氣롤 타고 주재하는 理라고 보았던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太極圖說」에 언급된 "어리석으면 의문이 없을 수 없다. 무릇 物이 둘인 이후에야 合을 말할 수 있을 것인데, 太極과 陰陽은 과연 二物이란 말인가? 그것이 物이 됨에 있어서는 과연 둘이겠지만, 그것이 합쳐

지기 전에는 각각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朱子는 終身토록 理氣는 二物이며, 그 근원은 무릇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라 여긴다"20)는 부분을 들어, 만약 太極과 陰陽이 과연 二物이라면, ”이른바 太極이라는 것이 어찌 造化의 중심이 될 수 있으며, 品物의 根底가 될 수 있겠는가?"21)라고 하며, 程朱 埋學체계의 자기모순을 비판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程朱가 理와 氣, 太極과 陰賜을 ”二物"로 보는 관점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人性論에 있어서 羅欽은 비록 주자학의 속박을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논리는 程朱 理學의 性二元과는 일정한 차별이 있다. 그는 程朱의 ”一性而兩名"이라는 논리가 人性을 天命의 性과 氣質의 性으로 나누는 것이라고 보아 그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程子와 張子는 본래 子思, 孟子의 性에 관한 말을 가지고 이미 理에 대한 논리를 세웠다. 또, 氣質說을 숭상하여, 특수하게 그것을 나누는데 誠을 다하였다. 하지만 ‘天命之性'이라 함은 진실로 이미 氣質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며, ‘氣質之性'이라 하였을 때, 性은 天命의 그것을 이르는 것이 아닌가? 一性而兩名이라는 것이 또 氣質과 天命으로 말하는 것이라면, 그 말은 끝내 빛나지 않으리라" ”一性而兩名이라는 것을 비록 말로는 ‘둘이면 안 되고,' 하나이면 능하지 못하다고 하지만, 학자의 의혹은 종내 그것을 풀지 못하고, 의론만 분분할 뿐 지금까지도 그것을 천하에서 결론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22) 性二元論에 대한 자신의 모순적 인식에 기

20) "愚不能無疑 凡物必兩而後可以言合, 太極與陰陽果二物平? 其爲物也果二, 則方其未合之先各安在耶? 朱子終身認理氣爲二物, 其源蓋出於此.”

21) 『困知記』 卷下. ”所謂太極者, 又安能爲造化之樞租, 品物之底根耶?"

22) 『困知記』 卷上. "裁 張本思孟以言性, 低專立手理, 復推氣質之說, 則分之殊者誠亦盡之. 但曰‘天命之性', 固已就氣質而言之矣, 曰‘氣質之性', 性非天命之平? 一性而兩名, 旦以氣質與天命對言, 語終未營.” ”一性而兩名, 難曰’二之則不是', 而一之又未能也, 學者之惑, 終莫之解, 則粉粉之論, 至今不絶於天下.”

초하여, "一分殊”로 人性을 논하고자 시도하였다. ”性命의 妙룰 다하여도, 埋一分殊라는 네 글자를 나타내지 못한다” "무릇 인간과 사물이 살아가면서, 를 처음 받을 때는 理가 유일하지만, 형태가 이루어진 후에는 그 나누어짐이 다르다(分殊). 나누어짐이 다르다(分殊)는 것은 자연의 理에 다름 아니며, 그 理가 하나인 것(理一)은 항상 다르게 나누어지는(分殊) 가운데 있다. 이것이 性命의 妙함이다 하나임(一)을 말했으므로 인간은 모두 堯舜이 될 수 있는 것이며, 다름(殊)을 말했으므로 上와 下愚가 옮겨질 수 없는 것이다 聖人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반드시 내 말에서 취할 것이 있으리라"23) 여기에서 그는 비록 공개적으로 氣易효의 性一元論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王廷相, 王夫之 등의 性一元論 사상에 대하여 이론적 선구가 되었다.

羅欽順은 또 그의 理氣說을 理欲 관계로까지 발전시키고 있는데, ”存天理, 滅人欲"이라는 理學의 主旨에 대해서도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가하고 있다. 그는 人欲이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다만 절제할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고 인식하고 있었으며,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程朱는 왕왕 人欲이라는 두 字를 간과했기 때문에, 議論이 한 곳으로 귀결되지 못한다. 天性에는 반드시 欲이 있는데, 이는 人이 아니라 天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 天을 언급한 바에 있어서, 그것을 없앨 수 있을 것인가? 절제(節)여부의 문제는 天이 아니라 人의 문제인 것이다. 이미 人을 언급한 바에 있어서, 제멋대로 내버려둘 수 있을 것인가? 군자는 반드시 혼자있을 때에 근신하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그러한 연고에서 나온 것이

23) 『困知記』 卷上. "窮以性命之妙, 無出理一分殊四字" "人物之牛, 受氣之初其理惟一, 成形之後, 其分殊 其分之殊, 莫非自然之理, 其理之一, 常在分殊之中 此所以爲性命之妙也. 語其一, 故人皆可以爲堯舜 語其殊, 故上智與下愚不移 聖人復起, 其必有取於吾方.”

다."24) "무릇 인간이 욕망을 갖고 있는 것은 하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러하면서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고, 또 당연히 그러하면서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당연한 법칙에 맞는 것이 어찌 때때로 善하지 아니한가? 다만 감정과 욕망을 방종하고 그 반대의 경우를 알지 못하는 때는 이 것이 惡이 될 뿐이다. 先는 ‘去人欲', ‘退人欲'과 같은 말씀을 많이 하셨지만, 그것은 거의가 방종으로 흐르는 것을 막자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嚴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만, 그래도 그 말뜻이 다소 편중된 감이 있다. 무릇 욕망과 怒哀樂은 모두 性이 갖고 있는 바인데, 그렇다면 喜怒哀樂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25) 여기에서 그는 명확하게 인간의 물질욕망의 합리성을 긍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사실상 明洞代 埋欲統一說의 사상적 지침이 된다.

羅欽傾은 朱子를 비판하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하였으며, 理氣統一說로 明代 氣一元論의 先租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明淸代 元氣質體論 철학의 발전에 중요한 이론적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필경 최초로 주자학 진영 내에서 분화되어 나온 氣本論者였다. 그래서 적잖은 이론적 문제에 있어 그는 여전히 程朱의 진부한 관념들을 신봉하고 있었다. 黃宗羲는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선생(羅欽順)의 埋氣論은 가장 정확하다. 하지만 선생의 心性論에 있어서는 자못 그의 埋氣論과 상호 모순되는 바가 있

24) 『困知記三』. ”往往將人欲兩字看過了, 故議論祖)有未歸一處. 天性必有欲, 非人也,天也.低曰天矣,其可去平有節無節,非天也,人也.槪曰人也,其可縱平! 君子必愼其獨, 爲是放也.”

25) 『困知記』 卷下. ”夫人之有欲 因出於天, 盜有必然而不容己, 旦有當然而不可易者. 於其所不容己者而皆合平當然之, 夫安往而非善平? 惟其恐縱欲而不知反 斯爲惡爾 先儒多以 ‘去人欲', ‘過人欲'爲言, 皆所以防其流者, 不得不, 但梧意似偏重 夫欲與喜怒哀樂 皆性之所有者, 喜怒哀樂又何去平?"

다." "선생의 理氣論은 朱子와 같지 않다. 그러나 心性은 朱子와 동일하다. 그래서 그 說이 일관되다고 할 수 없을 따름이다."26) 心性문제를 논함에 있어 羅偵은 비록 일련의 새로운 학설을 내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여전히 程朱의 관점에 서 있었으며, 이것이 그의 氣本論에 있어 불철저성이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이다. 이러한 불철저성이란, 이제 막 주자학을 벗어난 羅欽順의 입장에서 볼 때,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王廷相(1474―1544)은 羅頂과는 달리 비록 "情의 學은 先哲을 篤하며, 아름답다”라는 것을 인정하고는 있었지만, 朱로 대표되는 閩學과 王陽明으로 대표되는 心易이 "포괄하는 내용이 너무 많은 즉, 인용하는 것도 당연히 많게 되었다. 그리하여 생기를 잃은 죽 해석에 精彩을 잃게 되었다. 각종의 다양한 사조를 접촉하게 되어 참위설에까지 섭급했기 때문에, 끝내는 帝强附會하게 되어 聖人이 말한 中의 道를 잘 알지 못하게 되었다".27) 그래서 그는 程朱 理學이 대략 聖人의 말씀에 합당하면 "그것을 믿고 지키며", 聖人에게 죄를 지은 죽 "변론하면서 그것을 바르게 하였다”. 바로 이와같이 程朱룰 과감히 멸시하고 진리를 추구한 대담한 정신이 王廷相으로 하여금 張載의 氣本論울 직접적으로 계승하도록 하였고, 唯物主義 理辻을 크게 발전시키도록 하였으며, 하나의 완성된 元氣質體論 철학사상체계를 건립하게 하였다.

본체론에 있어, 王廷相은 張載의 氣一元論의 계숭자이다. 그는 張載의 『正蔚』을 다음과 같이 평한 바 있다. ”『正蒙』은 橫渠의 質學

26) 『明案』 卷47, 『盆學案 羅欽順傳』. ”先(羅欽順)之論理氣 沮爲精確, 但先牛之論心性, 傾與其論理保(自相牙后.” ”先生之理氣 不同於朱子, 而心 性與朱子同, 故不能自一其說耳.”

27) ”擬議過食, 則援取必廣 性索弗神 玲釋失精 由是芳涉九流, 器及緯術, 卒使率合傅會之妄, 以迷平聖人中用之軌.”

이다"28) 여기에서 이른바 이라는 것은 張載가 『正』이라는 책에서 기술한 元氣質體論을 지칭하는 것이다. 王廷相은 張載의 氣一元論을 기초로, 중국의 전통적 元氣論을 더욱 충실히 하고 발전시켰으며, "元氣 위에 物이 없고, 道가 없고, 理가 없다".29)는 유명한 언급을 남겼다. 이것이 그의 元氣論 철학체계의 대강이다.

1. 元氣는 일종의 물질적 실체이다. 王廷相은 道家에서 우주의 본체를 "無”라 하고, 불교에서 우주의 본체를 "空”이라 하는 관점에 대하여, 명확하게 元氣를 일종의 물질성을 지닌 실체로 규정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沃의 內外에 모두 氣가 있고, 地中에도 역시 氣가 있다. 物이 施하건 하건 간에 모두 氣가 있으니, 이는 極의 上下 造化롤 통하는 인 것이다"30) 王廷才이 보았을 때, 元氣라는 이 물질적 실체는 天地의 萬物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 元氣는 無形無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元가 포함하는 것은 아득하여 조짐이 없다. 象을 구할 수 없는 고로, 太庫라 한다"31) (2) 元保는 기다리는 바도 없고 치우치는 바도 없는, "혼합된 전체를 칭하는 것이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太極이란 元氣의 혼합된 전체를 칭하는 것으로, 만물은 각기 하나의 가지만을 갖추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비록 水나 火가 크게 化해도 한쪽 곁을 건너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는가?"32) (3) 元氣는 무한한 것이다. 王廷相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시간상으로, 元氣는 "시작하는 바도

28) 『愼言 • 魯西牛篇』. ”『正蒙, 橫渠之也.”

29) 『雅述』 上篇 "元氣之上無物, 無道, 無理.”

30) 『恨言 • 道體篇』. "天內外皆氣 地中亦氣 物虛買皆氣 通極上下造化之質體也.”

31) 『答天間』. ”元氣湘, 昧無族. 不可以象求, 故曰太虛.”

32) 『雅述』 上口. ”太極, 元氣混全之稱, 萬物不過各具一支耳. 難水火大化猶涉一偏, 而況於人平!"

없고 끝나는 바도 없이 妙하며, 그것이 이르는 바를 알 수 없다. 그래서 太極이라 하는 것이다"33) 공간상으로, "하고 范范하며 끝이 없다"34) (4) 元氣는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그는 “氣는 시작과 끝이 있다”는 程朱의 사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모이는 가 있고 떠다니는 氣가 있다. 떠다니고 모이고 합하는 것으로써 物은 化하게 된다. 化한 즉 길러지고(育), 길러진 즉 커지고(大), 커진 즉 오래되고(久), 오래된 즉 쇠하여지고 (哀), 쇠하여 진 즉 홑어지고(女), 흩어진 즉 없어지고(無), 이렇게 하여 떠다니고() 모이는(終)것은 일찍이 쉰 적이 없다"35) 비록 그러하지만, 元氣는 "오히려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로, 입으로 빨아들일 수 있고 손으로 혼들어 잡을 수 있는 것이지, 결코 공허하기만 하여 잡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儒家들은 氣의 體가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 본 것이다"36) 元氣는 일종의 형상도 없고, 치우치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으며, 시작도 없고 가도 없고,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물질적 실체이기 때문에, 그것은 程朱의 "理”와 陸王의 “心"이 지니는 절대적 지위를 대신하여, 우주만물의 궁극적 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元氣는 "造化의 本이다” 천지 만물의 생성과정을 보며, 王廷相은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었다.

천지가 나누어지지 않고, 元氣가 혼돈의 상태에 있고, 淸庫의 사이가 없었을 때에는 造化의 실마리가 없었다. …… 二氣(陰과

33) 『愼言 • 道本篇』. “限所始無所終之妙也, 不可知其所至, 故曰太極.”

34) 『答天』. ”太虛范范漁.”

35) 『愼言 • 道體篇』. ”有衆氣, 有氣, 游緊合, 物以之而化. 化育, 育大, 大則久, 久則哀, 哀, 枚. 而緊之本未息賜.”

36) 『零白齋造化論』· ”却是質有之物, 口可以吸而入, 手可以稀, 非史空 冥無索取者 世儒類以氣體爲無, 耿暗誤矣.

賜을 지칭―인용자)가 惑化하고, 群象이 나타났다가 없어지면서 천지 만물은 이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다.37)

만약 상술한 관점을 王廷相이 앞서 말한 元氣論과 대비시킨다면, 王廷相이 그의 선배들과 本元論에 있어 '一(元氣) 一 二(陰賜 혹은 天地) — 萬(萬物)”이라는 공통적 우주생성 모델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으로 말하자면, 王廷相은 前人을 답습하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속에는 새로 더해진 것들이 있댜 그는 程朱 및 陸王과 변론하는 중에 元氣本原,젊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王廷은 당시의 자연과학 지식을 운용하여 五行家와 변론하던 중, ”五行"이라는 개념을 無氣論에 넣어 더욱 완전한 우주생성 모델을 제시하였다. ”一(元氣) 一 二(陰陽 二令, 혹은 傾賜의 氣 眞陰의 氣라고 불리기도 한다) 一 五(火水土木金) — 萬(人과 萬物)” 이는 "一 - 二 ….”의 모델과 비교할 때, 더욱 풍 부한 함의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王廷相은 불교의 "識種子說"을 "元氣種子說"로 개조하여, “나는 일찍이 天地, 水火, 萬物이 모두 元氣에서 化하는 것이며, 무릇 元氣 本體는 이러한 種子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天地, 水火, 萬物을 化해낼 수 있는 것이라 말한 적이 있다”38)고 하였는데, 이는 우주만물이 천차만별인 이유는 元氣 중에 化牛할 수 있는 각양각색의 種子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宇宙本體論의 각도에서 王廷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氣가 이르러 많아지게 되면, 合一의 妙에 뻗치게 된다. 氣가 돌

37) 『祖 • 道體篇』. "天地未, 元氣混源 淸庫無, 造化之無機也 …… 二氣(指賜明―引者)感化, 群象朋沒 天地菓物所由以生也.”

38) 『答何伯齋造化論』. 汗天地, 火水, 萬物皆從元氣而化. 蓋由元氣本體具有此種 故能化出天地, 水火, 萬物.”

아가 홑어지게 되면, 太該의 體로 돌아간다. 이러한 고로 氣에는 모음과 흩어짐이 있을 뿐, 생장과 소멸은 없는 것이다. 兩水의 시작은 氣가 化한 것이다. 불을 켤 때의 불꽃은 다시 끓어 氣가 된 것이다. 초목이 생겨나는 것은 氣가 맺힌 것이다. 불을 켤 때의 그을음은 다시 化하여 연기가 된 것이다. 형태상으로 보았을 때, 만약 有無의 구분이 있고 氣가 太庫에 출입한다면, 처음에는 없어지지 않는다. 물과 바다의 관계를 예로 들어본다면, 추워져 언다는 것은 모임(格)을 의미한다. 녹아서 얼음이 깨지고 물이 되는 것은 흩어짐(女)을 의미한다. 모임(緊)과 흩어짐(散)이란, 얼음의 고유한 有無인 것이며, 바닷물에는 아무런 손해도 없다. 이는 氣의 실마리가 열리고 닫힘, 있고 없음, 생기고 없어짐을 말한 것이며, 세 가지 재주는 실로 極으로 化하는 것이다.39)

이 이론의 기본적 요점은 (1) ”氣"를 우주만물의 본체로 하여 『愼言 • 乾運篇』) ”太虛는 形이 없고 氣의 本體이다.” 이는 無形無象, 無牛無滅의 것이며, 體用一源, 顯徹無의 원칙에 근거하여 ""는 두 가지 촌재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氣가 모여 物이 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物이 흩어져 太虛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氣의 생성과 소멸이 아니라, 氣의 형태가 전화하는 것이다. 太虛는 無形의 氣이며, 萬物은 有形의 氣이다. 그 형태로 말하자면 緊敗 有無 生死의 구별이 있지만, 그 본체로 말하자면 기는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생성도 없고 소멸도 없다.

39) 『愼言 • 道體篇』. ”氣至而滋息, 平合一之妙也 氣返, 伊平太之體也 是故氣有裵敗 無息滅 兩水之始, 氣化也 火之炎, 爲氣 木之, 氣結也 待火之杓, 復化而爲煙. 以形觀之, 若有有無之分矣, 而氣之出入於太廊者, 初未情滅也. 庄水之於海矣, 寒而爲氷, 緊也 融衍而爲水, 敗也. 其緊枚, 氷固有有無也,而海之水無損焉.此氣機開凶, 有無,生死之說也, 三才之質化極矣"

3. ”元氣의 위에는 물도 없고, 道도 없고, 埋도 없다" 元氣가 우주만물의 궁극적 근원이라는 것은 元가 스스로를 本이자 뿌리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의 앞이나, 그것의 위에 어떠한 신비한 존재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王廷相은 "元氣 위에는 물도 없고, 도도 없고, 이도 없다”40)라 했던 것이다. 이 명제에서 출발하여 王廷相은 역대로 존재해왔던, 元氣의 위에 그것을 능가하는 어떤 것을 놓으려는 일체의 관점에 전면적 비판을 가하고 있다.

王廷相은 "太廉는 곧 氣이다”라는 張載의 학설을 계승 • 발전시켰으며, 유한과 무한의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각도에서, ”道體는 없다고 할 수 없으며, 에는 有無가 있다”41)는 명제를 제기하였다. 이 명제에 근거하여 王廷相은 佛家와 老子를 비판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老子는 ‘萬物은 有에서 생겨났다’고 하였으며, 形과 氣는 相禪한다고 하였다. ‘有는 無에서 생겨났다’라 함은 形과 氣의 시초는 본래 無임을 이른 것이다. 하지만 나는 萬物이 모두 元氣가 시작되었을 때 갖추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信家의 道는 質을 本으로 하고 有를 本으로 하며, '無'도 없고 ‘空'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老子가 말한 荷無는, 내가 元氣를 道의 본체로 삼은 것과는 같지 않다. 이는 同論이 될 수 없다."42) ”空"이나 "無"의 문제에서 王廷相은 “空"이나 "無’'가 결코 만물을 초월하는 비물질적 절대의 개념이 아니라, “元氣룰 道의 본체로 삼는" 것이며, 그래서 "을 本으로 하고 有를 本으로 한다”고 한 것이다.

王廷相은 "元氣의 위에는 物이 없다”는 관점에 근거해서, ”元氣

40) 『雅述』 上篇. “元氣之上無物, 無道, 無理.”

41) 『恨言 • 道體篇』. ”道體不可言無 生有有無.”

42) 『答何伯范造化論』. "'有生於無', 謂形氣之始本無也. 愚以爲萬有具於元氣之始, 故曰之道本貫本有, 無, 無‘空'也." ”老氏之所謂虛無也, 非愚以元氣爲道之本體者, 此不可以同論也.”

는 道體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기하게 된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그는 道家의 "道는 天地를 생겨나게 하였다”는 논리에 결연히 반대하였고,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老은 道가 天地를 생겨나개 하였다고 하였지만, …… 나는 天地가 생겨나기 전에는 다만 元만 있었으며, 元氣가 갖추어지자 인간과 사물을 조화하는 도리가 여기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말하겠다. 그래서 元氣의 위에는 物도 없고, 道도 없고, 埋도 없는 것이다"43)

王廷相은 "는 氣의 本이다"라는 程朱의 사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무릇 萬物의 에 있어서, 는 理의 本이며 理는 氣가 싣는 것이다. 이론바 元氣가 있은 즉 動이 있고, 天地가 있은 즉 化이 있고, 父子가 있은 즉 慈孝가 있고, 耳目이 있은즉 總名이 있다는 것이 이를 말하는 것이다. 大設造化와 默契道體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44) “理를 氣의 本으로 한다"는 것을 "供를 理의 本으로 삼는다”고 바꾸고, 이를 그의 元氣體論에 집어넣었다.

王廷相은 朱熹의 "는 氣를 낳는다"는 관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는 氣에 받아들여지는 것이지, 를 낳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理는 氣에 실리는 것이지, 氣롤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儒家가 하는 理가 氣를 생겨나게 할 수 있다는 말은, 老子가 이른 바 道가 천지를 낳는다는 말과 같다".45) 여기에서는 理가 氣룰 낳을 수 있다는 관점이 사실상 老子의 "道生天

43) 『雅述』 上篇 "老莊道牛天地, …… 愚謂天地未, 只有元氣, 元氣具, 造化人物之道理卽此而在, 故元氣之上無物, 無道, 無理.”

44) 『太極』. “夫萬物之生, 氣爲理之本, 理乃氣之載, 所謂有元氣有動靜, 有天地別有化 有父子別有慈孝, 有耳目有見罰是也. 非大觀造化, 默契道體者, 惡足以識之?"

45) 『稽 • 道體篇』, "諺, 非能生氣也. 理載於氣 非能始氣也. 世理能生氣 卽老氏道生天地矣.”

地"사상의 再版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王廷相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太極說은 ‘『易』에 太極이 있다’는 이론에서 시작하였다. 推極造化는 名言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太極이라 한 것이다. 을 구했기 때문에, 天地가 나누어지기 전에 크게 시작한 混施과 淸能의 氣가 이것이다"46) 여기에서의 이른바 ”太極"이란, 두 가지 의의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天地가 나누어지기 전에 크게 시작한 混池과 荊庫의 氣"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는 "造化의 源"을 말하는 것이며, 質體性의 개념이다. 둘째는 元氣 혹은 ”太始 混池 淸能의 氣"의 무한성을 지칭한 것이다. 이는 元氣의 "名이라 할 수 없는", 즉 無形無象, 無始無終, 無牛無滅, 無邊無珪룰 말한 것으로, 描寫性 개념이다. 두 가지를 합하여 말하면, 이른바 “太極"이란 元氣 및 그 無限性이다.

王廷相은 ”太極은 곧 元氣"라는 원칙에 근거하여, 程朱의 “理로 太極을 말한다”는 설법을 비판하며 다음과 갈이 말하였다. ”南宋이래로 理로 太極을 말하며, 氣룰 下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예컨대 ‘天地가 있기 이전에 필경 이 理가 있었다’, ‘원천은 다만 이 理일 뿐이며 動靜으로 하여 陰陽이 생겨나도록 하였다’, ‘天地 만물의 理가 있고 나서야, 天地 만물의 氣가 있게 되었다’ 오호라! 홑어지고 뒤집혀진 것이 어찌 이러하단 말인가? 모든 理는 전부 氣에서 나온 것으로, 공허하고 독립적인 氣는 존재하지 않는다. 造化는 有에서 無로 들어갔고 無에서 有가 되었으니, 이 氣는 항상 존재하여 찢겨 없어진 적이 없다. 이른바 太極이라는 것을, 天地가 나누어지기 전에 氣가 주관하지 않았다면 누가 주관하였을 것인가? 그래서 天地가 나누어지기 전에 理는 太虛에 존재하였던 것이며, 나누어지고 나서는 理가 天地에 실렸던 것이다. …… 만약 이 理가 있어야

46) 『太極』. ”太極之說, 始於『易』有太極之論. 推極造化, 不可名言, 故曰太極.求其責, 故天地未劃之, 大始混池淸虛之氣是也.”

만 動靜으로 하여 陰陽을 낳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 얼마나 통하지 않는 말인가! 理는 荷하여 걸치는 것이 없다. 動靜이란 氣 본연의 感이며, 陰賜이란 氣의 名義이다. 埋가 할 실마리가 없는데, 무엇으로 動靜할 수 있을 것인가? 埋는 庫하여 象이 없는데, 陰이 어떻게 理에서 나온다는 것인가? 이 논리는 막히어 통하지 않고, 소탈하기는 하나 적당하지 않아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오호라! 元氣 밖에 太極이 없고, 陰賜 밖에 元氣가 없도다" “三는 하나의 物이며, 또한 하나의 道이라. 다만 선후의 순서만 있을 따름이다. 氣룰 말하지 않고, 埋를 말하는 것은, 형체를 버리고 그림자를 취하는 것이니, 얻을 수 있겠는가?"47) 五行이란 본래 天地을 유행하는-金, 木, 水, 火, 土-다섯 가 지 물질 재료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宋 이후, ”五行으로 造化를 논하고 인간과 물질을 낳는다고 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王廷相은 "五行으로 造化를 논하는" 설법을 비판하였다. 그는 元氣一元論에 근거하여, 五行이 "모두 元에서 변화하여 나온 것"이며, 그 생성 순서는 ”五行의 性에 따라, 火는 氣가 있으나 質이 없으므로 가장 이르고, 水는 質이 있으나 맺히지 못하므로 그 다음이다. 土는 體가 있으나 굳지(堅) 못하므로 또 그 다음이다. 木은 體가 굳지만(堅) 쉽게 化하므로, 또 그 다음이다. 金은 體가 굳으면서도

47) 「太極辯」. ”南宋以來, 猶以理太極而惡涉於氣, 如曰‘未有天地, 有此理’ 如曰 ‘源頭只有此理, 便會動靜生陰陽’ 如曰 ‘才有天地萬物之理, 便有天地萬物之令'. 座平! 支離碩倒, 登其然? 萬理皆出於, 無戀空獨立之理. 造化自有入無 自無爲有, 此氣常在, 未罰滅. 所太極, 不於天地未判之氣主之而誰主之邪? 故未判, 則理存於太 低判, 則理載於天地, …… 若只有此理便會能動陰陽, 尤其不通之論! 理, 馬着者也. 動靜者氣本之也, 陰賜者氣之名義也. 理無機發 何以能動靜? 理無象, 陰賜何由從理中出? 此論皆窓不 通, 率易無當 可過矣 座平! 元氣之外無太極 陰陽之外無." “三者一物也, 亦一道也, 但有先後之序耳. 不言氣而言理, 是舍形取影, 平?"

(固) 삭지 않아, 제일 끝으로 해야 한다"48) “火-水-土-木-金”이라는 생성순서에 따라, 王廷은 理學家들의 "金牛火,” “水"의 관점을 비판하였다(「答碩華玉雜論」을 보라). 동시에 그는 또한 "天地의 水火가 본체를 造化하는 것은, 모두 기다린 바가 아니라 나중에 생겨난 것이다”라는 明代의 사상가 何塘(伯齋)의 관점을 비판하였다.

宋代의 先天象數學은 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召은 ”太極은 一이며, 움직이지 않는다. 이룰 낳는데, 이는 神이다. 神은 數를 낳고, 數는 象을 낳으며, 象은 氣를 낳는다”49) 王廷才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이는 다만 “聖人이 『』의 原을 그리는 것을 추론한 것일 뿐, 天地造化 本然의 妙한 쓰임을 논한 것이 아니다".50) 召은 象數로 造化를 논하였는데, 王廷이 보기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오류를 범하였다. (1) 元氣와 天地 萬物의 위치를 바꾸었다. 元氣는 본래 象數가 없으며, 象數는 다만 天地 萬物만이 구비하고 있다. 王廷은 말한다. “天이란, 太極이 이미 형상을 이룬(形) 것이다. 형상을 이루었다(多) 함은, 象數가 갖추어지고 八卦가 나타났음을 말하는 것이다. 天보다 앞서는 것은 太極의 氣인데, 形도 없고, 象도 수도 없다. 그래서 太極이라 하는 것이다. 伏羲氏의 그림이 象數가 없이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가? ‘先天’이라고 명한 것은 어디에 居하는가?"51) 召이 말한 바 先天象數는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2) 象數와 器物의 관계를 바꾸었다. 象數가

48) 『愼 • 五行篇』. "五行之性, 火有氣而無質, 當作最先 水有質而不結, 次之土有體而不堅, 再次之 木體堅而易化, 再次之 金體固而不探, 當以爲終.”

49) 『穀物外』. ”太極一也, 不動 牛二, 二神也. 神生數, 數生象, 象生氣.”

50) 『答何伯范造化論』. “聖人推論』之原, 非論天地造化本然之妙用也.”

51) 『雅述』 上. "天者, 太極已形也, 形象數具而八卦章矣. 先於天者, 太虛之冠, 無形也, 無象與數也, 故曰 太極. 伏淡之, 謂無象數平哉! 命之‘先天'何居?”

먼저인가, 器物이 먼저인가? 召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數는 象을 낳고, 象은 氣룰 낳는다”, 즉 象數가 器物에 우선하는 것이다. 그러나 王廷相은 "象이란 氣가 이룬 것이고, 數란 象이 쌓인 것이다"52) 즉, 형상이 있는 기물은 氣가 이룬 것이고, 數는 器物이 쌓여서 되었다는 것이다. 器物은 象數의 물질적 전제이다. 王廷相은 召이 바꿔놓은 元와 天地 萬物, 그리고 象數와 器物의 관계를 다시 바꿔 놓았다.

人性論에 있어, 王廷相은 그의 元氣質體論에 기초해서, "은 氣에서 생겨난다”53)라 하여, 朱의 “天地之性"의 논리를 극력 배척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두 가지 性을 갖고 있는데, 이는 宋代의 個家들이 크게 미혹한 바이다. 무릇, 性이란 生의 理이다. …… 나는 인간이나 사물의 性은 氣質이 만든 바가 아닌 . 것이 없다고 본다. 를 떠나 性을 말한다면, 性은 있을 곳이 없게 되며, 庫와 같이 돌아가게 된다. 性을 떠나 氣룰 말한다면, 性온 있을 곳이 없게 되며, 相와 같이 돌아가게 된다. 性을 떠나 氣를 말한다면, 氣는 살아 움직이지 못하고, 死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 性과 氣는 서로 의지하여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54) 다만 氣質의 性만을 인정하고, 氣 외에 "天地之性"이 있다고 하는 논리는 佛家 性說의 再版이다. 王廷相이 말한 바 ”性"은 인간의 생리 활동의 기초 위에서, 인간의 인식과정을 통하여 획득된 仁義禍智 둥의 도덕 정조이다. 그는 程朱의 "性卽理"라는 주장을 반박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仁義禮智는 能家에서 말하는 性이다. 지금 그것을

52) 『愼言 • 道體篇』. ”象者氣之成, 數者象之積.”

53) 『雅述』 上篇. ”性生於氣."

54) 『答薛君采論性』. “人有二性, 此宋面之大惑也. 夫性, 生之理也....... 余以爲人物之性無非氣質所爲者, 離氣性, 則性無處所, 與同歸 離性氣 則氣非生動, 與死同途 是性與氣相貸而有不符相離者也.”

논하건대, 마음속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 仁이고, 마음속의 마땅함에서 나오는 것이 의이며, 마음속의 경건함에서 나오는 것이 禮이고, 마음속의 앎에서 나오는 것이 智이므로, 이는 모두 인간의 지각운동이 그렇게 한 후에 이루어진 것이다. 진실로 인간이 없으면 마음이 없고, 마음이 없으면 仁義가 무엇이 되겠는가? 그래서 牛이 있은 즉 性을 말할 수 있으며, 이 없으면 性은 滅하는 것인데, 무엇을 취하여 말하겠는가? 이 性의 有無는 氣가 모이고 흩어지는 데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만약 形과 氣를 초월하여 말하고, 모이고 홑어지는 것으로 有無룰 말하지 않는다면, 佛氏가 말한 바 ‘四大의 理에 별도로 眞性이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 어찌 오류가 아니겠는가? 이는 智를 기다리지 않아도 후에야 알게 되는 것이다. 精神과 魂魄은 氣이며, 인간의 牛이다. 仁義屈許는 性이며, 牛의 理이다. 지각운동은 函이며, 性의 才이다 세 가지 物은 일관된 道이다”55)

明代 中葉 王廷이 程朱의 埋本論을 비판한 것은, 孤軍保라 할 수는 없으며, 그를 중심으로 하는 氣論學派가 존재하고 있었다. 氣論學派는, 주로 王廷과 동시의 元氣體論者인 韓奇, 崔銃,楊愼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元氣質體論을 무기로 서로 다른 방면에서 宋明 理學을 비판하였으며 공동으로 싸워나갔는데, 철학 방면에서 풍부하고 다채로운 辯論을 진행하며, 각자 明代의 元氣實體論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55) 『橫渠理§球祚』. ”仁義禮智, 偉者之所謂性也. 自今論之, 如出於心之受爲仁, 出於心之宜爲義, 於心之敬爲禮, 出於心之知爲智, 皆人之知連動爲之而後成 也. 荀無人,恥 則無心矣 無心, 則仁義禮智過于何所平? 故有牛有性可言, 無性滅矣 安取而言之? 是性之有無, 緣於氣之衆敗 若曰超然於形氣之外, 不以緊散而爲有無 卽佛氏所謂 ’四大之外, 別有眞性'矣, 登描幽之論平? 此不待智者而後知也 精神魂魄, 氣也 人之生也 仁義禮智, 性也, 牛之理也 知運動, 也, 性之才也 三物者, 之道也.”

崔銃(1478-1541)은 理氣 관계에 있어서, ”氣는 모였다 흩어지지만, 는 모였다 홑어지지 않는다”는 朱와 薛의 관점에 대하여 비판하여 말하였다. ”文公이 말한 바 ’氣는 모였다 흩어지지만, 埋는 모였다 흩어지지 않는다’는 에 대하여, 崔銃은 잘 알지 못하는 바가 있다. 무릇 造化의 原을 뜻한다고 하면, 埋가 항상 모인다면 氣도 역시 모이는 것이며, 인간이나 사물의 牛에 있어, 氣가 만약 흩어진다면 理도 역시 흩어지는 것이다. 氣가 이미 흩어졌는데, 理가 어찌 붙을 것인가? 이러한 까닭에 天地의 寒暑가 인간과 사물, 그리고 곡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더위가 오면 곡식이 살고, 추위가 오면 곡식이 죽어 다하고 만다. 내년이면 또 그 성기던 것이 무성하게 된다. 그래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을 盛德이라 한다'”고 했던 모양이다.56) 崔銃이 보았을 때 세계만물이 모두 元氣에서 생겨난 것이라면, 元氣가 없다면 인간도, 사물도, 곡식도, 들풀도 없는 것이며, 나아가 인간, 사물, 곡식, 둘풀의 理도 없는 것이다. 氣가 항상 모이고 항상 홑어지기 때문에, 만물은 무성하게 되고 드물게 되는 것이다. 崔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理氣 문제에 있어 "理란 氣의 조리(條)이다”57)라는 것을 인정하여, 理가 氣의 條理이며 規則이라는 것을 숭인하였다. 黃宗羲가 崔銃을 인정하면서 내린, ”理氣는 서로 꿰맨 데가 없다고 하면서, 先生은 스스로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았으며, 朱子의 발 아래를 맴돌지 않았다”58)라는 評語는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

韓邦奇(1479-1555)는 王廷相과 마찬가지로, 張載 氣島표의 직접적

56) 『士冀』 卷1. ”文公所謂 ‘氣有緊散, 理亡緊', 銃所未詳 麻意造化之原, 理常衆而氣亦, 人物之, 氣若散而理亦敗 氣低散矣, 理所安附? 是故天地寒署也, 人物, 禾核也, 署來禾生, 寒來禾死, 盡矣. 明年又藩其鮮者, 故曰‘日新之謂盛德'.”

57) 『士冀』 卷1. “理者, 氣之條.”

58) 『月儒學案』 卷心. ”言理氣無粧合處, 先生自有眞, 不彭朱子脚下轉.”

계승자이다. 韓邦奇는 ”道體를 논하면서 오직 橫渠를 취하였다”59) 그는 『正蒙給造』에서, 張載룰 높이 평가하며, ”孔子이래, 道를 아는 이는 橫渠 一人이다"60)라 했다.

우주관에 있어서, 韓邦奇도 元氣論者의 한 사람이었다. "천지만물의 本은 동일한 氣이다”61)라는 것이 그가 제출한 가본명제였다. 이 명제는 두 가지 의의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는 우주 발생론으로 보았을 때, 元氣는 本이며 천지만물은 末이다. 천지만물은 元氣에서 연변되어 나왔다는 것이다. 둘째는 우주 본체론에서 보았을 때, 氣는 본체이며 氣는 천지만물이 빌리는 존재적 근거라는 것이다.

우주 발생과정에서 보았을 때, 韓邦奇는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었다.

混池의 初에, 一元의 氣는 찌꺼기가 녹아 없어지고 맑고 淸忠하여, 萬象이 모두 一極 중에 갖추어져 있었다. 이른바 太極이란, 天地의 性이다. 그리고 그 動靜이 계승된 후에, 氣가 化하여 形이 생겨나고, 길러지면서(育) 행하여졌으니(行), 이는 天이 天의 性을 좇아 행한 것으로, 天道라 이르는 것이다.62)

一元이 열리기 전에는 混池되어 太極이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했으니, 이는 天의 性이라, …… 一元이 움직이고 二氣가 五行으로 작용하여, 化하여 만물을 낳고 한 순간도 쉬지 않으니, 河岳이 정하여지고 동식물이 성장하여, 一物도 빠짐이 없었다. 이는 天의 사업이요, 天의 道이라.63)

59) 『明傾學案 • 三原學案 • 韓邦奇』. “論道體乃獨取橫渠.”

60) 『正蒙捨迫 • 太和篇』· ”自孔子而下, 知道者惟橫渠一人.”

61) 『正蒙捨遣 • 太和篇』. "天地菓物本同一友.”

62) 『苑洛朱』 卷1, 『正』. ”混池之初也, 一元之氣, 沿浮融盡, 池然淸寧, 而萬象皆具一極中,所謂太極, 天地之性也. 及其動靜繼成之後, 氣化形生,井育井行, 是天率天之性而行, 是之謂天道.”

여기에 묘사된 우주생성 模式은 王廷이 『愼言』과 『雅述』에서 묘사한 것과 완전히 같다. 즉, 우주 만물의 본원으로서의 元氣룰 ”混池되고”, "맑고 한" 물질적 실체(이도 또한 ”太極"이라 부르고 있다)이며, 萬象이 모두 그 속에 갖추어져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 氣’에서 陰少의 二(즉 ”太極이 나누어지며 陰陽이 선다”는 것이다)로 나누어지며, 다시 陰陽二에서 金, 木, 水, 火, 土의 五行이 파생된다. 마지막으로 陰賜五行에서 다시 河岳, 動植物 등 우주만물로 분화된댜 이는 완전히 유물론적 우주생성의 화면이다.

幹邦奇는 王廷과 마찬가지로 "는 氣이며, 無는 없다"라는 張載의 명제를 해석하면서, 자신의 氣本論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太虛는 極이 없지만, 본래부터 空寂인 것은 아니고, 다만 형태를 갖추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일 따름이다. 3곱하기 5는 15이고, 5곱하기 3도 15이다. 3과 5는 같지 않지만, 모두 15이다. 다만 堤易은 같지 않아, 형태를 취하고 있는가의 여부는 다르지만 하나의 氣이다. 단지 모이고(衆) 흩어지는(枚) 것이 달라, 한번 움직이면 한 번 가만히 있고, 한 번 모이면 한 번 흩어지게 되니, 이를 三五斐易라 한다.64)

그는 張載의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더불어 性을

63) 『正蒙招迫 • 太和篇』. ”一元未, 池施 太極之未杉也, 是天之性也. …… 一元低動 二氣五行, 化萬物, 無一息之, 河岳災, 動植遂 無一物之缺, 此天之事業也, 是天之道也."

64) 『正蒙捨迫 • 太和篇』. "太虛無極 本非空寂 只有形不形之. 三五, 五三亦十五, 三五難不, 不過皆十五. 但炭易不同也, 形不形, 難不, 一但崇散不同也, 一動一爭, 一羽一枚, 是參五榮易.”

논할 수 있다”라는 명제를 해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 生의 本은 氣가 모이고 홑어지면서 太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본디 내 것이었던 물건이 돌아오는데, 없어진 적이 있는가?65)

상술한 자료들을 통해 볼 때, 韓邦奇의 氣本論 사상은 王廷의 것과 완전히 같다. (1) 氣를 천지만물을 구성하는 물질적 본체이며, "형태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는", 따라서 절대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2) 그러나 氣의 流行과 作用으로 보았을 때, 그 존재형태는 두 종류가 있다. 그 중 하나는 가 모여 만물이 되는 것으로, 형상이 있다. 다론 하나는 만물이 흩어져 형태가 없어지고, 다시 氣의 본체인 太l信(혹은 太極)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다만 의 형태적 변화일 뿐, 氣 자체의 牛滅은 결코 아니다. 太荷는 無形의 氣이며, 만물은 有形의 氣이다. 그 作用으로 말하자면, 緊散, 牛死, 有無, 幽의 구별이 있고, 그 本體로 말하자면, 氣는 常하는 것으로, “그 항상됨을 잃은 적이 없다"

韓邦奇는 氣本論의 입장에 서서, “無에 이르고 有에 이른다"는 관점으로, “無極而太極"이란 "하나의 氣로 관통한 것"이며, ”氣의 性은 본래 虛하면서도 신비롭다(神). 虛는 無極이 되며, 神은 太極이 된다. 湘와 神은 바로 無極과 太極이다"66) 그는 계란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논증하고 있다.

나는 항상 周子가 말한 “無極而太極"이라는 말에서, 無字와 太字가 중요하고도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며, 無에 이르러 有

65) 『正蒙捨遣 • 太和篇』. ”吾牛本氣之衆, 氣散而歸之太極, 反(返)吾之故物也. 何曾亡平?"

66) 『苑洛渠』 卷18, 『見考隨錄』 1. ”氣之性本虛而神. 虛字爲無極字, 神字爲太極字, 而神, 正是無極而太極.”

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말해 왔다. 極字는 無, 의 두 字를 돕는데 지나지 않는다. 太字는 곧 有字이다. 造化의 거대함을 예로 들어 그것이 멀고 망망하다면, 한 가지 사물이 작은 것은 쉽게 보일 것이다. 지금 하나의 계란을 볼 때, 무릇 아직 탄생하지 않았을 때는 무슨 소리나 움직임이 있는가? 가죽, 털, 피, 뼈가 있는가? 이는 소위 無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皮毛, , 聲音, 運動 어느 것 하나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다만 형태를 이루지 못하였을 뿐이다. 만약 한 가지라도 부족하다면, 接이 될 수 없다. 이론바 太極이란 모두 알[] 속에서 논하는 것이며, 아직 닭[]이 아니다. 造化가 아직 혼돈된 상태에 있을 때, 어찌 인간이 있었겠는가? 어찌 날아오르고 숨는 동식물이 있었겠는가? 어찌 山川과 河海가 있었겠는가? 이른바 無極이다. 그러나 인간과 사물이 모두 그 속에 있어, 한 가지도 부족하지 않았다. 다만 형태를 이루지 못하였을 뿐이다. 이른바 太極이다 이는 橫渠가 이른바 “, 神化, 性命은 通一無二者이다”라는 것이다.67)

周敦願의 ”以無爲本'’을 韓邦奇는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었다. “太極은 없었던 적이 없다. 이른바 無란 모두 갖고 있지만 發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른바 有란, 體가 있되 形이 없는 것이다. 그것을 體라 부르지 않은 적이 없는 것은 太極이다”68) 여기에서 韓邦奇는

67) 『正蒙捨遺 • 太和篇』. “子 ‘無極而太極', 當以無字, 太字爲頂爲字, 謂至無而至有也.極字, 不過費無, 太二字也. 太字卽是個有字.毋造化之大,若胞 卽一物之小, 爲易見 今觀一鷄卵, 方其未生也, 何有於聲音運動? 何有於皮毛血骨?所謂至無也. 然而皮毛, 血骨, 聲音, 運動, 無一不供, 但未形耳. 若少却一住 卽不成鷄 所太極也, 皆在卵中論, 尙未有. 造化方池之, 何有夫人? 何有於飛潛動植? 何有於山川河海? 所極也. 然人物皆具於中, 不少一物, 但未形耳, 所太極也 此橫渠所 ’有無, 神化, 性命, 通一無二者也.'”

68) 『正蒙捨迫 • 大易篇』. ”太極未無也. 所無者, 萬有之未發也 所謂有者, 有是體而無形也. 未無之謂體, 太極也."

周敦願의 "無極而太極"이라는 명제의 唯心主義的 본질을 폭로하였을 뿐만 아니라, 唯物主義的 太極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여 王廷相의 太極說을 풍부히 하고 발전시켰다. 이는 의 중요한 이론적 공헌 가운데 하나이다.

"천지만물은 본래 동일한 氣이다”라는 관점에서, 韓奇는 王廷相의 道倫을 변증법적으로 더욱 풍부히 하고 발전시켰다. 그는 "" 란 만물을 압도하는 바물질적 절대 개념이 아니라, 의 ”流行, 發見"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69)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天이 天의 性울 좇아 行하고, 여러 가지가 化, 流行을 발견하는 것을 道라 한다. 孔가 이른바 "一, 一을 通라 한다”는 언급이 바로 이것이다. 모든 物에 있어서, 알[]은 性이 되고 그것이 發하면 닭[鷄]이 된다. 知梵運動은 이 沿이다. 씨[核]는 性이 되고, 그것이 發하면 나무[樹]가 된다. 꽃피고 시들며 열매가 열리고 딸어지는 것이 이 道이다. 孔가 "避者"라 한 것이나, 가 "소리개는 날고(迷飛)", "물고기는 뛴다(魚)”고 한 것이 모두 이것이다.70)

韓打琦가 ""의 관점, 죽 陰陽二氣 化育流行의 관점으로 ”道"의 물질적 내용을 제시한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유물론이다. 이로부터 그는 宋代 個家가 "道를 太極으로 삼았던" 관점을 비판하고 있다. 아래에 적어본다.

69) 『正蒙捨迫 • 太』.

70) 『正妹迎 • 太和』. "天率天之性而行, 發見諸化育流行爲道, 孔子所謂'公一困之道 是也. 至於凡物, 卵爲性, 發而爲約, 知運動, 是道也 核爲性, 發爲樹, 榮卵鼎, 是道也. 孔子 者如, 子思汀財, ‘魚' 皆爲是也.”

宋孟가 『』에서 인간과 道를 해석한 것을 보면, 『易大傳』에 서 天道률 풀이하면서 陰賜이 중첩되어 운행하는 氣라 하였으며, 그 埋를 通라 하였으니, 이는 孔子의 木指가 아니다. 만약 그리하다면, 적막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을 道라 하는 것이다. 宋는 또 道롤 太極이라 하였는데, 이는 적막하여 움직이지 않는 때의 物인 것이다. 道는 움직이고 賜을 낳은 이후의 物인데, 어떻게 를 太極이라 할 수 있겠는가?71)

韓가 볼 때, 宋儒는 道믈 논하면서 다음의 두 가지 중요한 오류를 범하였다. 첫째는 "道"를 “理"나 “太極"으로 보아, ”고요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이 道이다”라고 한 점이다. 사실상, 道는 氣의 流行과 發育을 말한다. 道는 결코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 때의 物“이 아니라, 氣가 "움직여 을 낳고난 이후의 物이다” 둘째는 道를 "의 위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사실상 "道"는 다만 氣의 化育流行으로, “에서 化한 것을 道라 할 수 있다" 道는 氣속에 있지만, "가 아니라 그 위이다” "直는 太極(혹은 理)이다”라는 것은 "老氏가 無라 한 것이나, 佛氏가 空이라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72)

人性論에 있어서, 韓邦奇는 "인간은 牛에 있어서, 欲과 善, 氣와 理를 똑같이 받는다”73)는 명제를 내세웠다. 그는 王廷相과 마찬가지로, 孟子가 다만 性에 善만 있다고 한 것이 아니라, 性에는 欲도 있다고 주장하였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宋代의 家가 孟子의 "善에서 머물고, 온전히 欲을 없앤다”라는 명제를 제기한 것은 단편적

71) 『掛遺 • 太和篇』. ”宋t帥於『』解人泊, 於『易人』解天道乃謂陰賜造運者氣 其理之道, 則非孔子本指矣 若然, 是以寂然不動者爲道矣 宋又附爲太極, 是寂然不動時物. 道生賜以後物, 安以道爲太極哉?"

72) 『苑洛菓』 卷1, 『正蒙捨迫序』.

73) 『苑洛菓』 卷18, 『見聞考隨錄』 1. “人之生, 欲與善, 氣與理受.”

견해라 하겠다.

楊愼(1488-1559)도 저명한 元氣論者이다. 그는 "元란 天地의 極이다"74)와 "만물 중에는 모두 元氣가 있다"75)는 명제를 제기하여, 元氣(즉 太極)는 우주만물의 본원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太極의 문제에 있어서, 楊愼은 王廷의 ”太極이란, 道化의 極울 이른 것이다"76)라는 관점을 더욱 발양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다음과 같이 논증하였다. ”元氣란 天地의 極이기 때문에 太極이라 하는 것이지, 보통의 평범한 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周子는 後人들이, 있다(有)는 데에 머물 것을 우려하여 ‘太極은 본래 無極이다’라 하였다. 이는 莊子가 元氣를 ‘大魂’라 한 것과 같다. 魂는 極과 같고, 大는 太와 같다. …… 『易』의 太極에 어찌 物이 있는가! 이것을 太極이라 하지만, 본래는 無極이라 함이 可하다"77) 太極 문제에서, 楊愼은 程朱의 ”太極은 곧 理이다”라는 명제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陸王의 "太極은 곧 心이다”라는 관점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볼 때 우주의 본원으로서의 ”太極"은 무한한 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실질로 말하자면, 太極은 이미 형태가 있는 유한한 사물 가운데 하나가 아니며, 비어서(空) 아무 것도 없는 허무도 아니고, 무한하지만 실제로 있는 - 元氣인 것이다. 이는 太極의 문제에 있어 唯物論과 唯心論을 나누는 경계인 것이다.

본체론에 있어 楊愼은 王廷相의 “氣는 모이고 흩어지지만, 없어지지 않는다"78)는 사상을 발양하였고, ”과 氣는 서로 首尾롤 이루

74) 『鉛總錄』 卷12, 『太極無極』. ”元氣者, 天地之極.”

75) 『升庵外渠』 卷42, 『長生』. ”萬物中皆有元氣.”

76) 『錢』 上篇 "太極者, 道化之極之名.”

77) 『丹鉛總錄』 卷12, 『太極無極』. ”元氣者, 天地之極, 故曰太極, 言非尋常之極也. 周子恐後人瀋於有, 故曰 ‘太極本無極.’猶莊子名元氣曰‘大魂', 魂猶極也, 大猶太也 …… 『易』之太極登有物! 謂之曰太極, 本無極可也.”

78) 『愼言 • 道體篇』. "氣有衆散無滅息.”

고 있다"79)는 저명한 논점을 제기하였다. 이른바 "杉과 氣는 서로 首尾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氣가 모여 有形의 萬物을 이룸을 말한데 불과한 것으로, 氣는 首이고 物은 尾이다. 物은 홑어져 太廊의 元氣를 이룬댜 物은 首이고, 氣는 尾이다. 形과 氣는 상호 전화한다.

王廷相으로 대표되는 元氣體論은 明代 中後 質學思想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吳廷, 高棋 등이다.

吳廷翰(1491-1559)은 그의 철학 저작 『吉齋湜錄』, 『益記』, 『積記』에서 여러 차례 王廷의 『愼言』, 『述』 등에 있는 말을 인증하고, 王廷相의 ”이 설은 매우 명쾌하여, 세속의 의혹을 깨뜨리기에 족하다”고 칭찬하였으며, 王廷相의 실학사상을 자기 입론의 근거로 삼았다. 吳廷翰은 王廷의 元氣體論 철학의 계숭자이자 발전자이다.

우주관에 있어 吳廷은 王廷相의 "元氣의 위에는 物도 없고, 道도 없고, 理도 없다”는 사상을 계승 • 발전시켜, 氣는 "천지 만물의 시조(祖)이다”라는 명제를 제가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天地의 初에는 다만 하나의 氣였을 뿐이며, 이른바 道라는 것이 별도로 존재하여 그 사이로 함께 나온 것은 아니다. 氣가 혼돈되어 천지 만물의 시조가 되고, 至尊無上의 존재가 되어, 極에 이르러 하나도 더 더하지 않게 되니, 이를 太極이라 하였다. 그것이 나누어지면서, 가볍고 맑은 것은 널리 퍼지며 발산되고, 무겁고 탁한 것은 당겨 모아지고 옹결되었으므로, 陰陽이라 하였다. 陰陽이 분화하면서, 兩儀, 四裂 五行, 四時, 萬化, 萬가 모두 여기에서 나왔으므로, 이를 道라 한다. 太極이란 이 氣가 極에 이른

79) 『丹鉛總錄』 卷22, 『語』. ”形與氣相首尾.”

것을 말한다. 陰賜이란 이 氣에 動靜이 있는 것을 말한다. 道란, 이 氣가 天地의 인간과 사물에 의해 나오는 것을 말하는데, 오직 하나뿐이다.80)

이는 王廷相이 묘사한 우주 演化 과정과 기본 에 있어 일치한다. 氣는 "천지만물의 시조"라는 우주 演化論에 근거하여, 吳廷翰은 程朱學派의 "理氣를 두 가지로 파악하는" 唯心論을 극력 반대하여, ”埋氣는 하나이다”라는 唯物論울 주장하였다. 王廷相은 朱熹의 "는 氣의 本이다”라는 사상을 비판하면서, "는 理의 本이다"(또는 "理는 氣에 근원을 두고 있다")라는 명제를 제기한 바 있다. 吳廷은 이 氣本論 사상을 발양시켰고, 이는 "天地보다 앞서 서있는, 超然的 一物“이 아니며, "氣 외에 또 별도로 埋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논증하고 있다.

氣가 가 되는 데는 달리 의문이 없을 것이다. 무릇 하나의 氣가 시작되는 데에는 혼돈만이 있을 따름이다. 氣라는 명칭이 없이 어찌 理라는 명칭이 있을 것인가? 그것이 나누어져, 兩儀가 되고, 四象이 되고, 五行, 四時, 人物, 男女, 古今이 되며, 千嬰萬化하는 것은 질서정연하여, 각각 조리가 있고, 이론바 脈絡이 분명하다. 이는 氣가 또 理라 명하여지는 이유인 것이다. 만약 그것이 잡다하게 섞이고, 어지러이 粉粉하여, 安異, 재앙, 潟亂이 닥치면, 그 理를 얻을 수 없는 것인가? 그러나 이 역시 埋를 소유한 것이다. 어찌 의 소유자를 얻었으면서, 理가 아니라고 하는가?81)

80) 『躍繼銀』 卷上. "天地之初, 一令已矣 非有所謂道者別爲一物, 以出平其者也. 氣之混論, 爲天地萬物之祖, 至而無上, 至極而無一復, 則謂之太極 及其分也, 輕淸者敷施發, 項濁者翁緊而源結 故謂之陰陽. 陰陽虹分, 兩儀 四象, 五行, 四時, 箕化, 菓皆由此出, 故謂之道. 太極者, 以此氣之極至而言也. 陰賜者, 以此氣之有動靜而言也.道者,以此氣之爲天地人物所由以出而也, 非有二也.”

여기에서 吳廷翰은 이미 氣의 "條理"로, ”脈絡이 분명하게" "”를 해석하고 있고, 理로 물질세계의 질서, 규율을 말하고 있으며, 安異, 재앙(妖珍) 등 자연계의 비정상적인 현상들도 “理의 소유"이고, 氣가 규율의 변화에 부합한 결과라고 하였다. “理"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그가 王廷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이는 吳廷의 중요한 이론적 공헌 가운데 하나이다.

道氣 문제에 있어, 吳廷翰은 王廷相의 ”元氣는 곧 道體이다”라는 사상적 기초 위에서, ”氣는 곧 道이며, 道는 곧 氣"(혹은 "는 곧 陰問)라는 관점을 제기하였으며, ”道란, 이 氣가 천지의 인간과 사물에 의해 나오는 것을 말하는데, 오직 하나뿐이다”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로써 그는 ”道가 있은 연후에 陰賜이 있다”는 程朱의 논리를 국력 반대하였다.

道器 문제에 있어, 吳廷翰은 ”聖人의 道器의 本旨"를 비교적 계통적으로 논술하였다. 吳廷翰은 ”氣 또한 道이고, 道 역시 氣이다”라고 하여, 道와 氣를 통일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而上者를 道라 하고, 形而下者룰 器라 한다.” 이는 곧 陰陽이 形을 이루는 것이다. 그 上을 말할 때 道로 하고, 그 下룰 말할 때 器라 하는데, 이는 한 가지 形을 上下로 말한 것이다. 形而下라 해도 이는 形이지, 下가 있는 것이 아니다. 形而上에 대해서 말하므로, 下라 하였을 뿐이다. 만약 有形과 無形으로 上下를 나눈다면, 이는 두 가지 物이 되는 것으로, 聖人이 말한 道器의 本

81) 『吉齋浚錄』 卷上. ”氣之爲理, 殊無可易. 盜一氣之始, 混施已 無氣之名, 又安有理之名平? 及其分而爲兩儀, 爲四象, 爲五行, 四時, 人物, 男女, 古今, 以至於萬萬化, 秩然井然 各有條理, 所脈絡分是已 此氣之所以又名爲理也 若其雜採不奇, 粉丘外, 爲異, 爲妖珍, 爲濁亂, 則誠若不其理矣, 然亦理之所有也. 安以理之所有者而疑以爲非理哉?"

旨가 아닌 것이다.82)

이 는 形而上을 "直”라 하고, 形而下를 "器”라 한 것으로 "하나의 形을 上下로 나눈 것이다” 形而上을 ”道”라 하건, 形而下룰 ”器"라 하건 간에, 이는 모두 陰陽으로 통일되어 形을 이룬 것으로, 形而上의 ""는 결코 하나의 器룰 떠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道와 器는 결코 분리된 두 개의 體가 아니다. ”道란, 器가 말미암아 나온 바이고, 器란, 道가 스스로 이룬 것이다" (同上) "만약 有形과 無形으로 上下를 나눈다면, 이는 두 가지 物이 되는 것으로, 聖人이 말한 道器의 本旨가 아닌 것이다" (同上) 이는 程朱의 ”道는 器보다 앞선다," ”器의 밖에 道롤 둔 것”이라는 관점에 대한 반박이다. 이러한 道器統一論은, 사실상 명백하게 王夫之의 道器一體論의 이론적 先이 된다.

人性論에 있어, 吳廷翰은 王廷相의 "은 氣에서 생겨났다"는 사상적 기초 위에서, ”性과 氣는 一物이다"83)라는 논점을 제기하였으며, ”性은 곧 氣이다," ”氣는 곧 性이다" (同上)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하늘이 사람을 내면서부터, …… 性이 이루어지고 形이 되었다. 비록 形 또한 性이지만, 역시 하나의 氣에 불과한 것이다. 그 氣가 굳어 體質이 있게 되면 인간의 形이 되고, 굳어져 條理가 있게 되면 인간의 性이 된다. 形이 氣가 된다 함은 手足이나 耳目의 운동과 같은 것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性이 氣가 된다 함은 仁義禮智의 정교한 靈的 感覺 같은 것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83) 그는 또 말한다. "무릇 인간은 나면서

82) 『吉齋浚錄』 卷上. "‘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之器'. 則陰陽之成形者. 以其上言之謂之道, 以其下言之之·器, 是一形而上下之. 形而下, 卽是形, 非有下也, 以對形而上 故曰下耳 若以有形無形分上下, 則是二物, 非聖人道器之旨矣."

83) 『吉齋沒錄』 卷上. ”性氣一物.”

하나의 氣일 뿐이다. 兆股의 初에는 天地의 뛰어난 氣가 無形에 잉태되어 性의 本이 되었다. 그 후에는 점차 굳어지면서, 形色 모양, 精神, 魂魄 등 性이 낳지 않은 것이 없지만 心이 큰 것이 된다. 그 明의 妙합은 形色, 모양을 주재하고, 精神, 魂魄이 기탁하는 바이며, 이에 性은 완전해진다"85) 이는 王廷相이 『橫渠理氣辯』에서 말한 바, ”精神魂魄", ”仁義禮智”와 ”知覺運動”이라는 三者의 ”一買之道"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는 “性은 곧 氣'’라는 사상에 입각하여, 程朱의 잘못된 관점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 性을 말한다”는 程朱의 논리는 氣와 性을 "분명하게 二物로 나누어” 파악하는 관점이다. "만약 내가 말한 바와 같다면, 氣의 擬緊와 造作은 理이고, 물의 맑고 탁함은 性이다. 만약 布를 布라 부른다면, 실이 縱橫으로 복잡하게 짜여져 있는 것은 理이다. 만약 樹를 樹라 부른다면, 그 뿌리, 가지, 꽃과 열매는 理가 된다. 그러므로 布라 할 때 곧 布는 性이 되는 것이고, 樹라 할 때 樹는 性이 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각각 布가 되고 樹가 되는 까닭이 理이고 性이라고 한다면, 사람으로 하여금 布와 樹의 밖에서 理와 性을 찾도록 하는 것인데,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이로써 추리해 보면, 반드시 天地보다 앞서 있는 一物을 理라 하고, 形과 氣의 위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는 一物을 性이라 할 것이니, 마침내는 혼동스러워지고 종국에는 난삽한 이론이 되어, 異說에 가까워질 것이다"86) 이는 王廷이 ”性卽理"를 "幽之論"으로 배척하고, 불교

84) 『吉齋漫錄』 卷上 ”盜天之生人, …… 性成而形. 難形亦性, 然不過一氣而巳. 其氣之派而有體質者, 則爲人之形, 源而有條理者, 爲人之性. 形之爲氣, 若手· 足耳目之運動者是已 性之爲氣 則仁義禮智之坂覺精絶者是已.”

85) 『吉齋漫錄』 卷上. "人之有生, 一氣而已. 脫兆之初, 天地秀之氣冷無形, 乃性之本 其後以浙而, 則形色, 象, 精神, 魂魄莫非性生, 而心爲 其函明之妙 則形色 象親有所宰, 精神, 魂魄有所腐, 而性於是平全鷲.”

86) 『吉齋漫錄』 卷上. ”程朱 ‘以理言性', 是抱氣與性 ‘分明抱作二物', 若如予說,

氣之視瑾, 造作, 卽是理 水混 水, . 如布煥作, 其絲樓, 經緯鎖綜, 理 如樹吸樹, 其根樹, 枝幹, 花實, 則是理, 故言布布是性, 言樹樹是性 若曰所以爲布, 所以爲樹, 乃爲理, 爲性, 則叫人於布之外, 樹之上理, 性, 鳴埋去討? 推其類 必有起然一物立於天地之先以爲理, 探然一物感於形氣之上以爲性, 終屈光憶, 終屈意見, 近於異說矣.”

의 "眞性"로 귀납시킨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以理言性"과 ”以氣論性"의 分岐는 필연적으로 ”性二"와 ”性一"의 논쟁을 야기하였다. 吳廷은 ”性氣一物“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하여, ”性은 하나"이지 ”性은 둘”이 아니다. 즉 "무릇 性을 말할 때에는, 거기에 속한 인간과 사물, 즉 氣을 가리키는 것이다”87)라고 하였으며, 이른바 "天地의 性”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王廷才과 마찬가지로 程朱의 ”氣質의 性"과 "天地의 性"에 대한 설교를 극력 배척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댜 "무릇 性이란 곧 氣인데, 性이라는 명칭은 인간의 牛이 있고 난 후에 생겨난 것이다. 인간의 牛이 있기 이전에는 性이라는 이름이 붙여질 수 없었다. 이름을 性으로 하면, 몸은 氣이지, 또 어찌 ‘’이라는 명칭이 있을 것인가? '改의 性'이 없는데, 또 어찌 ‘天地의 性’이 있겠는가? 무릇 孟子가 말한 ‘性善'과 孔夫子가 말한 ‘性近'과 같이 구하려해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을 ‘天地의 性'이라 하고 泊近’을 '의 性'이라 하여, 그 공통점만 요구할 뿐 반대되고 서로 다르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性은 하나일 따름이지 두 개가 있겠는가?"88)

吳廷은 理學家들이 善(天理)을 ”內"라 칭하고, 惡(人欲)을 ”夕"라 칭하는 것과, 人欲을 性의 밖으로 배출한다는 견해에 대해, ”性

87) 『吉策浚錄』 卷上, “凡言性, 則己屈之人物, 卽是氣質.”

88) 『吉策漫錄』 卷上, "將性卽是氣 性之名之於人之有生. 人之未生, 性不可名. 卽名爲性, 卽已是氣 又焉有‘氣質’之名平? 段無‘氣質之性', 又焉有‘天地之性'平? 魚孟子'性善, 夫子性近', 求之不', 故以天地之性', ‘相近'爲‘氣質之性', 以要其同, 而不知其反異也 性一而已. 而有二平?"

에는 內外가 없다”는 논점을 제시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道에는 內外가 없기 때문에 性에도 역시 內外가 없다. 性을 말하는 자가 안(內)을 오로지 하고 밖을 버리는 것은 모두 하나의 本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 무릇 陽은 반드시 陰을 갖고 있으며, …… 天는 반드시 人欲을 갖고 있는 것이며, 善이 반드시 惡을 갖고 있다는 것도 또한 분명하다. 性으로 天埋의 本을 삼으며 人欲이 없다고 하는 것도, 성을 밖(外)으로 하는 것이다. 만약 人欲을 밖(外)으로 하고 性이 아니라 한다면, 이는 밖(外)이 있게 되는 것으로, …… 撲敎의 堤이다" "인간과 道는 心이 본디 하나이다. 人心과 道心은 性도 또한 둘이 아니다. 人心과 人欲에 있어 人欲의 本은 天理인 즉, 人心은 또한 道心이다. 道心은 天理이며, 天理의 가운데에는 人欲이 있은 즉, 道心은 또한 人心인 것이다"89) 吳廷翰에게 있어서 內와 外, 善과 惡, 天理와 人欲은 통일되어 있어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다. ”性에는 內外가 없다”라는 견해에 극력 반대하였으며, 埋學家들이 제창한 “人欲을 제거하고, 天理를 존속하도록 한다”라는 설교에도 반대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人欲은 의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먹고 마시는 남녀에게 있어, 인간의 大欲은 존재한다. 음식을 일용할 때에나 남녀가 방에 居할 때에도 진실로 道롤 찾는다면, 이는 異端의 說로, 人倫을 벗어나고 세계를 떠난 후에나 可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법이 어디 있겠는가!"90) "는 반드시 人欲울 갖고 있다”는 관점에 근거하

89) . ”道無內外, 故性亦無內外. 性者專內而造外, 皆不達一本者也. 今夫陽之必有陰也, …… 天理必有人欲也, 之必有惡也, 亦明矣. 以性本天埋人欲 是性爲有外矣 若以人欲爲外而非性, 爲有外, …… 是!J烽敎之也.” “人與道, 心一. 人心道心, 性亦無二. 人心人欲, 人欲之本, 卽是天埋, 人心亦道心也 道心天理, 天理之中, 七人欲 則道心亦人心也.”

90) 『齋浚鉛』 卷下. “人欲不在天理外也. 飮食男女, 人之大欲存焉. 日用飮食, 男女居室 荀道, 莫非天理之自然. 若天埋於人欲之外, 則是異端之說, 離

人兪出世界而後可. 然有此理平!"

여, 그는 "人欲을 막아() 天理를 존속케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人欲이란 다만 인간이 바라는 바이지만, 天理가 갖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다만 그것이 流蕩하기 때문에, 그 私欲됨을 지칭하는 것이다. 사실상, 本體는 곧 天理이다. 聖人의 學은 인간의 욕망 때문에 그것을 절제하도록 하는 것인즉, 이 역시 天理에 다름 아니며, 인간의 욕망을 제거함으로써 天理가 되는 것이 아니고, 天理를 人欲에서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 다만 욕구를 절제함으로써 어지러움을 다스릴 뿐인데, 어찌 능히 民으로 하여금 그 욕망을 다 제거할 수 있겠는가?"91) 이 비판은 理欲 문제에 있어 王廷相의 착오적 관점을 수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明淸代유물론자들이 宋明理學의 금욕주의를 비판하는데 전투적 號角이 되었다.

高(1512-1578)은 王廷相을 위해 「浚川王公行狀」을 썼을 뿐만 아니라, 그의 ”立言은 무게 있고 교훈적이며, 근거가 매우 이성적이고 중요하며, 이전의 聖賢들이 하지 못한 것을 많이 논하였다"라고 칭찬하였으며, 자신의 『辯錄』, 『本語』 둥 철학 저작에서도 여러 차례 王廷相의 말을 인증하며, 자신의 元氣質體論의 근거로 삼았다.

理氣 관계를 논술하면서, 高은 비록 王廷相과 같은 廣度와 深度는 없었지만, 高도 또한 "理氣가 함께 구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기본적 입장은 일치하였다. 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91) 『吉齋浚錄』 卷上. “人欲 只是人之所欲, 亦是天理之所有者, 但因其流蕩, 而遂指其爲私欲耳.其質,本體卽天理也. 聖人之學, 因人之欲而節之,則亦莫非天理, 而非去人欲以爲天理, 亦非求天理於人欲也. …… 亦只節其欲以治其亂而已, 岩能使民之盡去其欲平?"

氣가 理에 갖추어져 있으면, 氣는 곧 理이다. 理가 氣에 갖추어져 있으면, 는 곧 氣이다. 이는 원래 二物이 아니며, 나눌 수 없다. …… 氣가 모이면 理도 모이고, 더불어 살며 함께 사는 것이댜 氣가 흩어지면 理도 흩어지며, 더불어 죽고 함께 죽는 것이댜 理와 氣가 어찌 떨어질 수 있으며, 이를 나누어 말할 수 있는가?92)

이와같이 “氣는 理와 더불어 있다”93)라는 관점은 理學家들이 우주 최고의 정신적 실체로 보았던 "埋”를 "派絡이 桐密하고 갈래가 분명한"94) 사물의 규율로 파악하였으며, 진일보하여 氣가 理의 기초라는 것을 인정하여, ”氣가 모이면 理도 모이고", ”氣가 홑어지면 理도 흩어진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程朱의 “理先氣後"라는 心論을 물질(氣) 및 그 규율(理)의 상호 통일이라는 唯物論으로 바꾸었다.

人性에 있어, 高은 程朱學派가 人性을 "義理의 性"과 "氣質의 性"으로 구분했던 데 대해서 王廷相의 논점을 계승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形色이란 氣가 하는 것으로, 天性이 바로 이것이며, 氣가 시작하지 않았을 때에는 理가 되지 않는다. 天性이란, 理가 갖추어진 것이다. 埋가 바로 이것이며, 理가 시작하지 않았을 때에는 氣가 되지 않는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形色이 이루어지고 天性이 갖추어지는데, 氣와 理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죽으면 形色이 훼손

92) 『辯錄』 卷8. "凉具於理, 氣卽是理 理具於氣 理卽是氣 原非二物, 不可以分也 …… 氣緊則理衆 與生供生 氣散理敗 與死但, 理氣如何離待而可分言之?"

93) 『辯錄』 卷10. ”氣與理但.”

94) 『辯錄』 卷2. “理者, 脈絡微密, 條派分明.”

되고 天性이 멸하여, 氣와 理가 동시에 그치는 것이다. 이는 氣가 곧 理이고 理가 곧 氣인 것으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宋代의 沒家는 이것을 둘로 나누어 氣買의 性이 있고 義理의 性이 있다고 하였다. 天性은 하나일 따름인데, 氣賀의 性이란 무엇인가? 또 義理의 性이 란 무엇인가? 또 氣質의 性은 形氣에 섞여있고, 義理의 性은 形氣에 섞여있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氣’負의 性이 形氣 중에 있다면, 義理의 性은 形氣 중에 있지 않다는 말인가? 形氣 중에 있지 않다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무릇 하늘이 인간을 낳았을 때는 하나의 性을 주었던 것인데, 宋信가 二性이라 여긴 것은 나로서도 감히 알지 못하겠다.95)

程朱는 性을 "氣質의 性"과 "義理의 性"으로 구분하였지만, 실제로 그들이 강조한 것은 ”義理의 性"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 걸음 나아가 "性卽理"라는 명제를 제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高은 王廷相의 "의 理로 性울 해석한다”는 관점에 의거하여, ”性卽理”의 설법을 결연히 부정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理란 脈絡이 開密하고, 갈래가 분명한 것을 말한다. 천하의 理는 모두 理이다. 그러나 性字는 生守와 心字를 좇아 만들어졌으니, 人心에 갖추어진 生의 理인 것이다. 性의 명칭이 정해지는 데에 있어 理는 虛位이다. 性은 을 포함하며 應할 수 있으나, 理

95) 『辯錄』 卷10. ”形色 氣之爲也 而天焉 氣之未始不爲理也. 天性, 理之具也 而形色此言, 理之未始不爲氣也 人衍色完而天性具, 氣與理但存也 死杉色設而天成, 氣與理但息也. 是氣卽是理, 理是氣 不以相離也. 而宋儒乃分而二之曰 有氣質之性, 有義理之性. 天性一而已, 將何者爲氣質之性? 又將何者爲義理之性平? 旦氣質之性, 謂其雜於形氣者也 義理之性, 謂其不雜於形氣者也. 然氣質之性, 古在形氣中矣 而義理之性, 乃不在形氣中平? 不在形冠之中, 則將何所住著平? 蓋天之生人也, 賊之一性, 而宋橋以爲二性, 吾不政也.”

는 體를 갖추고 하는 바가 없다. 性은 을 포함하며 應할 수 있으나, 理는 體를 갖추고 하는 바가 없다. 性은 城郭 속에 존재하며, 항상 일정하다. 理는 事物을 따라 존재하며, 각기 다르다. 性은 곧 理라 하지만, 감히 그렇게 되지는 못한다. 또 性이 곧 理라면, 理는 곧 性이다. 또 세상에 "命理'’라 하는 것이 있으면, "命性”이라 해도 될 것인가? ”文理”라 하는 것이 있으면, ”文性"이라 해도 될 것인가? 진실로 알 수 있는 것이다.96)

高은 ""과 “理"라는 두 가지 개념의 서로 다른 內函과 外延으로부터 立論하고 있다. 外延으로부터 보자면, “理"는 ”性"에 비하여 外延이 크다. ”性의 명칭이 정해지는 데에 있어 理는 熊位이다” 즉 "理”는 天下 人物 公共의 理를 지칭하는 것이며, ”性"은 다만 “人心에 갖추어진 生의 理"를 지칭하는 것이다. 內酒으로 보자면, "은 困울 포함하며 應할 수 있으나, 理는 體를 갖추고 하는 바가 없다. 性은 城郭 속에 존재하며, 항상 일정하다. 理는 사물을 따라 존재하며, 각기 다르다” 따라서 "理"와 "性"이라는 두 개의 개념을 동등하게 보면, 반드시 논리상의 혼란을 만들게 된다. 高은 "倫理'를 "倫性"이라 부를 수 없고, ”文理"를 "文性"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을 예로 들며, ”性卽理"라는 명제가 논리적으로 얼마나 혼란스러운가를 설명하였다.

天理와 人欲의 문제에 있어, 高은 吳廷翰의 “人欲의 本은 天理"라는 관점을 계승하여, ”聖人은 人情으로 天理룰 삼고, 後人들은 人을 멀리하는 것을 天理라 여긴다”97)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96) 『辯銀』 卷2. “理者, 脈絡未密, 條派分明之. 天下之理皆理也 而性字從生從心, 則人心所具之生理也. 性乃定名, 理爲虛位. 性含坂而能應, 理具體性存郭廊之中, 耿惟恒秉 理隨事物而在, 各有不同. 謂性卽理, 未政爲然也. 旦性卽是理, 則理卽是性也. 而世有稱’倫理'者店, 亦稱之'命性'可平? 有稱‘文埋'者焉, 謂之‘文性'可平? 固可識矣.

다음과 같이 말한다. "天理는 人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人을 멀리하는 것을 天理라 여긴다면, 이는 天理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道라는 것이 卑近한 것을 싫어하여, 할만하지 않다고 여기며, 역으로 高遠하고 하기 힘든 일만을 하고자 힘쓴다면, 이는 道가 되는 것이 아니다"98) 그는 다음과 같이 논증하고 있다.

理와 欲은 兩立할 수 없는 것이며, 人心은 두 가지로 쓰이지 않는다. 克已가 곧 復祖라고 하지만, 어떻게 한편으로 克己하면서 한편으로는 復하겠는가? 人欲을 막는 것이 곧 天理를 존속하게 하는 것이라 했지만, 어찌 한편으로 天理를 존속하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人欲을 막겠는가? 또 말한 바대로 하여 둘로 나눈다면, 人欲을 막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고 경계할 것인가? 홀로 있을 때를 삼가면 天理를 존속시킬 수 없는가? 심히 支離滅裂하다. 진실로 나누어짐(分)을 알고 말한다면, 모두 적당치 못하다고 할 것이다.”99)

이러한 "理와 欲은 兩立할 수 없는 것이며, 人心은 두 가지로 쓰이지 않는다”는 사상은, 정치적으로 생산을 발전시키고 사회모순을 완화시키려는 지주계급 개혁파의 바램을 반영한 것일 뿐 아니라, 이론적으로 봉건 윤리도덕의 허위성을 폭로한 것으로, 인간의 欲情에 대해서 합리적 도덕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이와같이 인간의 欲討을 긍정하는 관점은 "역사유물주의에 가까이 간 것"100)으로, 소박

97) 『本語』 卷3. ”聖人以人情爲天理, 後人遠人情以爲天理.”

98) 『錄』 卷2. "天理不外於人 若遠人情以爲天理, 則非所以爲天理也."

”若爲道者, 紙其卑近 以爲不足爲 而反務爲高遠難行之事, 則非所以爲道矣.”

99) 『間辯錄』 卷2. “理欲不兩立 人心無二用. 克己財點, 登一返克己一邊復禮平? 退人欲是存天理, 登一邊存天理又一邊過人欲平? 又卽爲所言, 分而爲一, 則戒權不退人欲平? 麗(肖)獨不存天理平? 支離桂矣. 固知分言之, 對言之, 皆未當也."

한 변증법의 빛나는 사상이다.

앞서 말한 것을 종합하면, 明 中葉 이후 朱子學의 사상체계에서 분화되어 온 元氣體論의 內海은 세 단계로 귀납시킬 수 있다.

(1) 本體論에 있어서 그들은 朱子의 “理氣를 둘로 나눈다”는 내재적 모순에서 출발하여, 그 중 “理氣는 서로 의존한다”, “理는 氣가운데 있다”는 합리적 사상을 홉수하고, “理가 氣의 本이다", “理先氣後"등의 공허한 논리를 폐기하면서, 理本論에서 氣本論으로의 軸化룰 완성하였다. 그들은 朱子學의 “理로 本을 삼는다”는 논리에 반대하였고, “無를 本으로 삼는다”는 道家의 논리와 ”空으로 本을 삼는다”는 佛學의 논리에도 반대하였으며, 氣(元氣)라는 물질적 실체를 우주만물의 本源(本體)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羅欽順의 "天地를 통하고 古今에서 구하는 것은 하나의 氣에 다름 아니다”라는 언급, 王廷相의 "元氣의 위에 物도 없고, 道도 없고, 理도 없다"는 언급, 崔銃의 "理란 氣의 갈래이다”라는 언급, 韓月璋t의 "천지 만물은 본래 동일한 氣이다”라는 언급, 楊愼의 "元氣란 天地의 極이다”라는 언급, 吳廷翰의 氣는 "천지 만물의 시조이다”라는 언급, 高의 “天地간에 오직 하나의 氣만이 있다”는 언급들은 모두 元令體論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2) 氣本論에서 출발하여, 人性을 논하면서 그들은 程朱가 人性을 天命의 性과 氣質의 性으로 나누었던 견해에 대하여, 氣本論을 출발점으로 朱子學의 "로 性울 해석한다”는 사상을 폐기하고 인성에는 다만 “氣質의 性"만 있을 뿐 "天地의 性"이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性은 氣에서 생겨난다”는 王廷相의 언급, "인간은 다만 하나의 性을 갖고 있는데, 이는 氣質의 性을 말한다”는 高棋의 언급 등은 모두 다른 각도에서 性과 氣는 "一貫된 道"라는 것

100) 레닌, 『철학노트』, 344쪽.

울 말한 것이다. (3) 다시 ”性과 氣는 서로 돕는다”는 원칙에서 출발하여, 天理와 人欲의 문제를 논하면서 明 中葉 이후의 元氣質論者들은 理欲統一說울 건지하였으며, “天理를 보존하고, 人欲을 없앤다”는 理學의 主旨에 반대하였다. ”性에는 반드시 欲이 있다”는 羅欽順의 언급, "인간은 살아가면서 欲과 善, 氣와 理룰 동시에 받는다”는 韓邦奇의 언급, ”堯舜은 情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性이 그 情이다”("性情은 분리될 수 없다")는 楊의 언급, "天理에는 반드시 人欲이 있다"(“人欲을 다스리는 것이 天理이다")는 吳廷의 언급, "와 欲은 양립할 수 없고, 人心은 두 가지로 쓰이지 않는다"는 高의 언급 등은 모두 다른 측면에서 人欲의 합리성을 긍정하고, "利”와 "欲”에서 "義”와 “理"를 구할 것을 제창한 것이다. 그들은 "利”와 "欲"을 떠나 義와 理를 구한다면, 다만 공허한 "義”와 “理"가 될 뿐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宋代의 儒家들은 義埋만 말하였을 뿐, 功利의 공허하고 부실한 風格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는 明代 元氣實體論者들이 반대한 것이었다.

明代 중엽 이후에 생겨난 사회적 정치적 위기와 이로 인해 생겨난 朱子玲의 쇠퇴는, 세계관 방면에서 元氣質體論이라는 철학 사상을 요구하였으며, 그것은 동시에 元氣實體論 철학이 탄생하는 데에 사회적 근거와 사상적 자료를 제공하가도 하였다. 元氣體論 철학의 탄생은 宋明 理學의 經世 전통과 그것이 포함한 실학사상에 대한 계승이며, 또한 그 末流들이 공허하게 心性을 논하는 데 대해서 공허한 병폐로 흐르는 것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구할 인재를 만드는 데 지도적 원칙을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주계급 개혁파의 經世 주장에 대해서 철학적 근거를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이 양자는 相輔相承的인 관계였다. (김양수 옮김)

人間 解放의 길을 향하여

――王陽明에서 李鈴까지

成復旺

이른바 “學"이란 中世紀에서 近代로 넘어가는 古代社會 末의 哲學를 지칭하는 것으로 본인은 이해하고 있다. 실학이라는 철학사조는 차이가 있으면서도 서로 관련있는 두 가지 면을 포괄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傳統 學의 "內聖"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독립적인 인격과 정신적 역량을 강조하고 인간 주체의식의 각성을 격발합으로써 인간 해방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전통 유학의 "外王"에서 출발하여, 세계의 객관성과 在性울 강조하고 외재 사물에 대한 사실적 고찰을 환기시켜 객관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전자는 近代의 民主와 통하고, 후자는 近代의 科學과 통한다. 다시 말하면, 實學이 란 전통문화가 고대에서 근대로 轉化하는 과정 중의 한 단게인 것이다.

王陽明의 心學은 宋明理學의 마지막 최고봉으로서, 明淸시기의 실학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왕양명은 부패한 봉건제도를 유지하고자 하는 희망을 완전히 개개인의 도덕 인격의 自粉에 기탁하였다. 그러나 自礎된 個體人格온 도리어 봉건 예교에 반대하고 인간의 해방을 쟁취하는 길로 나아가고 말았다. 왕양명에서 李費에 이르는 시기는 明代 思想史에 있어서 긴밀한 관련을 갖고 점차 발

전을 보였던 시기로서, 인간해방 쟁취를 위한 歷程이었다.

1. 王陽明 : “無善無惡, 心之體"

(선도 악도 없는 것이 마음의 본체이다)

朱는 인간의 心性을 논하면서 "天理"와 "人欲" (혹은 ”道心"과 “人心," “天命之性"과 "氣買之性"으로도 표현함)의 차이를 엄밀히 밝힘으로써 인간이 갖고 있는 하나의 마음(心)을 대립적인 두 방면으로 나누었다. 陸 • 王의 心學과 程 • 朱 道易의 중대한 차이점은 바로 "心과 理의 二分(析心與理爲二)”을 반대하고 '沃과 人의 합치(無間於天人)”를 주장하는 것, 다시 말하면 ‘天理'와 ‘人心’의 통일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왕양명은 ‘心'과 ‘理'의 관계를 이렇게 논술하였다.

눈에는 본체가 없으니 만물의 色으로써 본체를 삼으며 귀에는 본체가 없으니 만물의 소리로써 본체를 삼으며 코에는 본체가 없으니 만물의 냄새로써 본체를 삼으며 입에는 본체가 없으니 만물의 맛으로써 본체를 삼으며 마음에는 본체가 없으니 천지만물 의 是非로써 본체를 삼는다.1)

이것은 마음(心)을 일종의 감각기관으로 간주한 것이다. 감각기관으로서의 마음은 단지 感應하는 기능만 있을 뿐이지 자체적인 내용은 없다. 그것의 내용은 바로 감옹된 천지만물의 是非이다. 마음이 감옹의 기능을 구비하고 있는 이상, 마음은 무엇이든지 감옹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왕양명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1) 『傳習錄 • 下』. "無體, 以萬物之色爲體, 耳無體, 以萬物之聲爲體, 鼻無體, 以萬物之吳爲體, 口無體, 以萬物之味爲體, 心無體, 以天地菓物感應之是非爲體.”

접촉하면 반응하고 생각하면 통하니 비추지 않음이 없으며 느끼지 않음이 없고 통달하지 않음이 없다. 뭇 성인은 한 가지 길이요 뭇 현인은 하나로 합쳐지니 또 다른 신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바로 신이다. 하늘에 달리 희구할 것 없으니 이것이 바로 하늘이요 제왕에게 달리 순종할 것 없으니 이것이 바로 제왕임에랴 본디 중용되지 않음이 없고, 공평하지 않음이 없다.2)

이렇게 ‘心’과 ‘理'는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그러므로 왕양명은 "무릇 사물의 이치(物理)는 내 마음 밖에 있지 않다. 내 마음을 바깥에 두고 사물의 이치를 구한다면 사물의 이치는 없다. 사물의 이치를 버려두고 내 마음에서 구한다면 내 마음은 또한 어떤 것이냐? 마음의 본체는 性이고, 性은 바로 埋이다”3)라고 하였으며, 또 "마음이라는 것은 내가 하늘에서 얻은 이치이다. 하늘과 사람에게 구별은 없으며, 옛과 지금의 구분도 없다”4)라고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주희는 ”心과 理를 二分한 병폐(心理爲二之l序)”가 없지 않다.

회암이 이르기를 "인간이 학문을 하는 까닭은 心과 理 때문일 따름이댜 마음은 비록 一身을 주재하지만 실제로는 천하의 이치룰 관장하며, 이치는 비록 천하에 퍼져 있지만 사실 한 인간의 마음 밖에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구분과 합치를 하는 가운데 이미 배우는 자들에게 心과 理룰 이분하는 병폐를 심어준다.5)

2) 『頂黃勉之 • 二』. ”觸而應, 感而通, 無所不, 無所不, 所不達. 千聖同途, 萬賢合織無他如神,此卽爲神· 無他希天,此卽爲天 • 無他順帝,此卽爲帝. 本無不中, 本無不公.”

3) 『與黃勉之』. ”夫物理不外吾心. 外吾心而求物理, 無物理矣. 迫物理而求吾心, 吾心又物耶? 心之體, 性也 性卽理也.”

4) 『零徐成之 • 二』. ”心也者, 吾所得於天之理也. 無間於天人, 無分於古今.”

주희는 ‘心'과 ‘理'의 관계를 강조하려 한 것이지만, 양자의 관계룰 강조할수록 그것둘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것을 표명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주희에 대한 왕양명의 이러한 비판은 陸九淵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육구연은 일찍이 "天理와 人欲을 구분하는 것은 역시 지당한 의론이 아니다. 만약 天이 理이고 人이 欲이라면 天과 人은 같지 않은 것이다”6)라고 지적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도출된 직접적인 결론은 마음(心)에는 善도 없고 惡도 없다는 것이었다. 인간들은 선악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그러나 "天埋"는 일종의 무의식적인 ‘자연의 이치(自然之理)’로서, 소위 惡'이라는 것도 ‘惡'이라는 것도 없으며, 혹은 ‘善'도 ‘天'이며 惡'도 ‘天理'라고 한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이 내가 하늘에서 얻은 이치(心也者, 吾所껍於天之理也)"라면, 인간의 마음에는 소위 선악이라는 것이 없는 셈이 된다. ‘善'도 없고 ‘惡'도 없음이 바로 至善인 것이다. 그러므로 ”至善이라는 것은 마음의 본체이니 마음의 본체에 어찌 善하지 않음이 있겠는가? 이제 마음을 바로 잡으려면 본체상의 어디에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는가? 반드시 마음이 발동하는 곳에 대해서 비로소 힘을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7)"라고 왕양명은 말하였다. 이러한 결론을 개괄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말은 바로 왕양명 ‘四句敎’ 중의 맨 첫 구절인 내분도 없고 惡도 없는 것이 마음의 본체(無善無惡心之體)"8)라는 말이다.

5) 『與黃勉之』. 和庵謂, “人之所以爲學者, 心與理而已 心難一身, 而賀管平天下之理 理難散平役, 而不外平一人之心, 一分一合之, 而未免已啓學者心 • 理焉二之郭.”

6) 『語錄 • 上』. "天理人欲之分亦自不是至論. 若天是理, 人是欲, 則是天人不同矣.”

7) 『傳習錄 • 下』. ”至, 心之本體也 心之本體有不善? 如今要正心, 本體上何處用得工? 必就心之發動處才可着力也.”

8) 『崩錄 • 下』.

엄격한 이론 논리에서 보자면, 이러한 논층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是非를 분명히 가리는 것은 善惡울 분별하는 것과 같지 않으니, 前者는 認識論에 관한 문제이고 後者는 論理學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식론 범주의 是非는 객관사물에 그 근원을 두는 知識判斷이며 논리학 범주의 善惡은 사회생활에 그 근원을 두는 偵直判斯인 것이다. 이것들은 서로 성질이 다른 별개의 일이다. 그러나 중국 전통학술의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는 듯하다 傳統的인 中國學術의 기본적 사유방법은 ‘天人一體'이다.

‘'인 이상 마땅히 ‘里’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가 바로 ‘人理’이고 ‘物'가 바로 ‘倫理’이니, 인식론이 윤리학 범주에 포함되고, 是를 분명히 가리는 것도 善惡을 분별하는 것과 같게 되었다. 이외에도, 儒持의 순수성에서 보면, 여기에 선도 악도 없는 것을 至으로 삼는 사상을 끌어들이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至善無善’은 老莊思想으로서 선악에 대한 초월이며, 따라서 유학에 대한 초월이기도 하다. 유학은 "善도 있고 惡도 있다(有善有惡)”라는 인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소위 ‘善惡學說’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인용하는 것은 노장처럼 인간의 自然本을 긍정하는 셈이며, 善惡에 대한 논쟁을 배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문제는, 만약 ”心과 理롤 이분(析心與理爲二)"하여 ‘人心' 위에 또 소위 ‘ 天理(혹은 道心이라고도 함)’라는 것이 있다고 인정한다면, 이 ‘天理'가 ‘人心'을 통치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만 한다는 점에 있다. 주희는 "반드시 道心으로 하여금 항상 一身의 주체가 되게 하여야 하며, 人心은 늘 그 명령을 듣게 하여야 한다"9)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왕양명의 이론처럼 ‘人心'이 바로 ‘天理'이고 ‘人心’ 위에 ‘天理’가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天理'라는 큰 돌덩이를 치워 버려

9) 『中草句序』. “必使道心常爲一身之主, 而人心每聽命."

‘人心'으로 하여금 고개를 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天人一體'라는 전통적인 사유방식과 ‘至善無善'이라는 노장사상은 여기에서 새로운 思想的 결실을 맺고 있다.

이것은 推論이 아니다. 왕양명 학설의 탁월한 점은 바로 經典과 聖의 앞에서 마음(心)의 권위를 수립하였다는 점에 있다. 왕양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저 군자가 학문을 논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얻은 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옳다고 여겨도, 만약 자신의 마음에 구하여 깨닫지 못하였으면 감히 옳다고 여기지 않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그르다고 생각해도, 만약 마음에 구하여 맞는 바가 있으면 감히 그르다고 하지 않아야 한다.10)

무릇 배움은 마음에서 얻는 것을 귀히 여긴다. 마음에서 구하여 그르다고 생각되는 것은 비록 그 말이 공자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감히 옳다고 할 수 없으니, 하물며 공자보다 못한 자에게서 나온 것임에랴 마음에서 구하여 옳다고 여겨지는 것은 비록 그 말이 평범한 자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감히 그르다고 할 수 없으니, 하물며 공자에게서 나온 말임에랴.11)

대저 道는 천하의 公道이며, 학문은 천하의 공통된 것이다. 주자만이 이를 얻어 사사로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공자만이 이를 얻어 사사로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12)

10) 『答徐成之 • 二』. “夫君子論學, 要在得之於心. 衆皆以爲是, 荀求之心而未會焉 未政以爲是也 衆皆以爲非, 荀求之心而有契病, 未政以爲非也.”

11) 『傳習錄 • 中』. ”夫學貴爵之心. 求之於心而非也, 難其言出於孔子, 不政以爲是也, 而況其未及孔子者平? 求之於心而是也, 難其言出於范 不政以爲非也, 而況其出於孔子者平?"

12) 『傳習錄 • 中』. ”夫道, 天下之公道也. 學, 天下之共學也. 非朱子可得而私也,

非孔子可而私也.”

‘人心'과 ‘天理'의 合一은 ‘人心’과 聖의 관계를 바꾸어 놓았다. ‘人心'은 더 이상 聖의 발 밑에 포복하여 傾理를 求乞하는 자가 아니라, 성현의 면전에 서서 是非를 判決하는 자가 되었다. 是非룰 판결하는 자는 자연히 善惡을 판결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왕양명은 또 "내 마음에 있는 事物이 이치가 순수하고 인위적인 잡됨이 없으면 善이라 한다”13)고 하였다. 다시 ''과 ‘'에 관한 그의 말을 보기로 한다.

대개 天下 古今 사람들의 은 한 가지 일 뿐이 다. 先은 禮를 제정하는 데 있어 人에 따라 알맞게 꾸몄기 때문에, 오랜 세월 행해지면서도 모두 들어맞았다. 거가에 혹 내 마음에 돌이켜 보아 편안하지 않은 바가 있다면, 그것은 기록이 잘못되거나 빠진 것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古今의 풍속 습관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바록 先王 때는 없었다 할지라도 負상 생겨날 수도 있는 것이다. 三王이 서로 體를 답습하지 않은 이유는, 만약 헛되이 옛것에만 구애되어 마음에서 얻지 않고 실행하면 이는 바로 非而힘의 禮로서 행하여도 드러나지 않고 익혀도 살피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4)

이것은 이미 ‘’로써 ‘'을 제약한 것이 아니고, ‘'으로써 ‘禮'를 가늠한 것이었다. 설사 先王의 ‘禮’라도 "내 마음에 돌이켜 보아 편안하지 않은 바가 있다면(反之吾心而有所未安)” 존중할 필요가 없으며 설사 "선왕 때는 없었다(先王未之有)” 할지라도 만일 ''이

13) 『與工純甫』. ”吾心之處事物, 純平理, 而無人爲之雜, 謂之.”

14) 『寄鄒謙之 • 二』. ”蓋天下古今之人, 其情一而已矣. 先王而., 皆因人而爲 之節文, 是以行之萬世而皆準 其或反之吾心而有所未安者, 非記之, 則必古今風氣習俗之異宜者矣 此難先王未之有, 亦可以義起. 三王之所以不相臘粉也. 若徒拘泥於古, 不於心而質行焉 是乃非閃之恐, 行不著而習不?者矣.”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諒上 생겨날 수도 있는(亦可以義起)” 것이다. ‘人心'과 ‘天理'의 合一이 ‘'과 ‘'의 관계 또한 顯倒시킨 것이다.

이것은 "千里 • 의 학설은 元代에 대립하였으나 蘇輯의 학설이 우세하지 못하였다. 우리 明代의 왕양명이 출현하여 良知의 학설로 세상을 뒤흔드니 士人들이 앞다투어 그를 따랐다. 그 학설은 소식에게서 나오지는 않았으나 소식과 같은 계통의 것이다"15)라는 范其呂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동기창을 이론가라고 하기는 부족한 점이 있으나, 이 몇 마디 말은 자못 탁월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소식은 일찍이 다시 새로이 세계를 관찰하여 "마음속에서 판단하고(而斷之於中, ''은 바로 마음이다)" “그렇지 아니한 것은 비록 옛 賢人이 말했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16)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禮의 시초는 人靜에서 비롯되므로, 그것의 편안합에 따라서 알맞게 꾸민다"17)고 하였는데, "요즘 儒者들의 의론은 그렇지 않아, 體라는 것은 성인이 홀로 尊崇하는 것으로서 천하의 일 가운데 가장 이루기 어려운 것이라 여기며, 번잡스런 허식에 이끌리고 자질구레한 말에 구애되어 털끝만큼의 차이가 있어도 종신토록 불가하다고 생각한다"18)라고 여겼다. 상술한 왕양명의 관점이 소식의 이러한 견해와 내재적 • 정신상의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소식은 宋代 道學의 가장 명백한 대립자였고, 왕양명은 明代 儒學의 一代宗로서 자연히 송대 도학과 동일한 學統인 것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소위 “그 학설은 소식에게서 나오지는 않았으나

15) 『沈德符, 野獲編』 卷刃. ”程 • 蘇之學角立於元, 而蘇不能勝. 至我明姚江出, 以良知之說動宇內, 士人月紅然從之. 其說非出於蘇, 而血脈則蘇也.”

16) 『上曾丞相』. ”其所不然者, 難古之所謂賢人之說, 亦有所不取.”

17) 『體以莊人爲本論』. ”禮之初, 始諸人, 因其所安者而爲之節文.”

18) 『體以投人爲本論』. ”今個者之論不然, 以爲禮者聖人之所獨尊, 而天下之事最難成者也 於緊文而拘於小說, 有毛之差終身以爲不可.”

소식과 같은 계통의 것이다(其說非出於麻, 而血脈則麻也.)”라는 것이니, 이 말의 의미는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 王畿: "眞性流行, 始見天則"

(진정한 본성이 행해지면 하늘의 법칙이 비로소 나타난다.)

왕양명의 四句敎란 "的도 없고 惡도 없는 것이 마음의 본체이며,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이 뜻(意)의 움직임이며, 선을 알고 악을 아는 것이 良知이며, 선을 행하고 악을 없애는 것이 格物이다”19)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맨 첫째 구절만이 ‘없다(無)’이고, 나머지 세 구절은 ‘있다(有)’이다. 이같은 사실은 바로 그가 비록 ‘天理'와 ‘人心'을 통일시켜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이 마음의 본체(無善無惡心之體)"라고 하기는 하였지만, 또 마음의 본체(體)와 마음의 작용(用)을 분리시켜 ‘意' • ‘知' • ‘物' 등 마음의 작용(用)은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반드시 "선을 행하고 악을 없애며(爲善去惡)", ‘‘철저히 갈고 다듬어야(苗加舌聞)"20)만 비로소 마음의 본체인 ‘良知'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朱熹의 ‘天'과 ‘人'의 대립을 ‘본체(體)’와 ‘작용(用)’의 대립으로 전환시킨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 모순된 것이다. 만약 마음의 본체(體)를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마음의 본체(心之體)’의 작용(用)인 ‘意 • ‘知' • ‘物'이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어떻게 "선을 행하고 악을 없애"든 간에 어쨌

19) 王畿, 『天泉證道記』. ”無善無惡心之體, 有有惡意之動, 知善知惡是良知, 爲善去惡是格物.”

20) 『答黃應原忠』.

든 결국 善惡에 대한 의식이나 선악에 대한 구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니, 어떻게 ‘有'에서 '’로 되돌아가 선도 없고 악도 없는 마음의 본체로 회귀할 것인가? 이같은 모순은 왕양명의 학설이 그의 제자 대에 이르러 분열하게 된 내재적 원인인 것이다. 錢德洪 등과 같은 제자들은 마음의 작용()에 선도 있고 악도 있다는 점에 집착하여, 마음의 본체(體)가 선도 없고 악도 없다는 점을 희석시키거나 심지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선을 행하고 악을 없애는(爲善去惡)” 방비와 규제의 노력에 급급하여, 여전히 他統 信의 "마음을 바로잡는(正心)” 길로 나아갔다. 그러나 王畿는 ‘본체(體)'와 ‘작용(用)’에 대한 스숭의 모순을 지적하고, 마음의 본체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는 점에서 출발하여 마음의 작용에 선도 있고 악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본체와 작용, 드러남과 드러나지 않음은 단지 하나의 기능일 뿐이며 마움(心)과 뜻(), 앎(知)과 사물(物)은 단지 하나의 일일 따름이다. 만약 마음이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뜻은 바로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이며, 앎은 바로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이며, 사물은 바로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이다.……뜻은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므로 만약 뜻에 선이 있고 악이 있다면 앎과 사물에도 모두 선악이 존재할 것이며, 마음에도 선악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21)

그의 견해에 따르면, 만약 선이 있고 악이 있다면 마음(心) • 뜻( 意) • 앎(知) • 사물(物)에 모두 존재하는 것이며 만약 선도 없고 악도 없다면 마음(心) • 뜻(意) • 앎(知) • 사물(物)에 모두 존재하지 않

21) 『天泉證道記』. “體用顯微 只是一機, 心意知物, 只是一. 若悟心是無善無惡之心, 意卽是無善無惡之意, 知卽是無善無惡之知, 物卽是無善無惡之物.……意是心之所發 若是有善有惡之意, 則知與物, 一起皆有, 心亦不可謂之無矣.”

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덕홍의 ‘四有’와 왕기의 ‘四無'의 차이인 것이다.

왕가의 이 ‘四無'를 경시할 수 없다. 그것은 맞을 풀어 배를 출범시키는 것과 유사한 의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본체와 작용, 드러남과 드러나지 않음은 단지 하나의 기능일 뿐이며(體用顯微, 只是一機)" • "마음과 뜻, 앎과 사물은 단지 하나의 일일 따름(心意知物, 只是一事)"이라면, 모두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이므로 "선을 행하고 악을 없애(爲善去惡)”고자 하는 일체의 노력이나 그에 대한 방비 • 규제는 모두 불필요한 일이 될 것이다.

良知는 天然의 영묘한 비결이니 항상 天機에 따라 운행되어 만물의 변화와 인간의 언행에 저절로 자연의 법칙을 나타나게 한댜 방비하거나 규제할 필요도 없고, 궁구하고 탐색할 필요도 없다. 언제 돌볼 수 있은 적이 있었으며, 또한 언제 돌볼 수 없은 적이 있었는가?22)

진정한 본성의 흐름을 따라 꾸미지 않고, 항상 평범하여야 만이 天然의 진정한 규칙이라 할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사각이나 원형의 혼적에 들어가게 되면, 아직 전아 • 명료하고 순서에 입각한 것이니, 변동하며 널리 유행하는 취지와는 아직 몇 겹의 안건을 사이 에 두고 있는 격이다.23)

고의로 감정을 억제하여 침착하게 보임은 꾸민 것과 같다. 가슴을 탁 터놓고 뜻대로 행해야 도리어 진정한 본성이 유행함을

22) 『豊城問答』. “良知是天然之寂征, 時時從天機運轉, 堤化云爲, 自見天則. 不須防檢, 不須窮索 何照管得? 何照管不得?"

23) 『示丁惟寅』. ”從眞性流行, 不涉安排, 處處平, 方是天然規短. 脫入子方 之述 尙是典要扶排, 與堤動周流之旨, 迫隔幾頂公案.”

느낀다.24)

불필요할 뿐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는 것이다. 왕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같이 의식적으로 "선을 행하고 악을 없애는(爲善去惡)” 행위는 인간의 良知룰 가로막고 인간의 진정한 본성을 훼손시킨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재능이 의식적으로 쓰이는 곳은 반드시 사사로운 것이며 진정한 본성의 흐름이 아니다. 진정한 본성이 행하여져야 비로소 하늘의 법칙이 나타난다"25)고 하였으며, 또 "재능은 약간의 才智와 수단이 있음으로써 그것과 더불어 서로 나타나니, 자신의 밝은 빛은 도리어 가려지게 된다"26)라고 하였다. "선을 행하고 악을 없에"려면 당연히 책을 읽고 학문을 해야 한다. 그러나 왕기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였다.

혹 어떤 사람의 자질이 비록 예민하고 민감하다 할지라도, 세상 인정과 교활한 마음이 자유스럽게 해주지 않으려 하여 학문을 배울 수가 없게 하면, 나쁜 점이 드러나고 회개하여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만약 또한 그로 하여금 배우게 한다면, 견해가 많아질수록 회피함에 있어서 더욱 교묘해지고, 덮어 감춤에 있어서는 더욱 정밀해지니, 일체의 원만한 지혜나 생각은 악을 행하고 다시는 고칠 수도 없을 것이다.27)

"학문을 배우는 것(學)"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언이설이나 잘못을 교묘히 감추는 것을 배우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선을 행하고

24) 『與荊川』. ”短情鎭物, 似涉安月. 坦懷任意, 反伐眞性流行.”

25) 『贈思默』. ”才着意處便是固必之私, 不是眞性流行. 眞性流行, 始見天則.”

26) 『語錄』. “才有子才智 • 使與之相形, 自己光明反爲所薇.”

27) 『語錄』. ”茶也箕難敏, 世情機心不肯放舍, 使不學, 猶有敗露梅改之時. 若又使之有, 見解危多, 超避危巧, 毅藏危密, 一切圓融智, 爲惡不可復俊矣.”

=악을 없애(爲善去惡)”려면 또한 반드시 절도 있게 예의를 지켜야 하지만, 왕기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였다.

옛 사람은 雍喪을 함에 있어서 성곽을 보고 울고, 무덤 근처의 오두막을 보고 울었는데, 이는 당연히 변심을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슬프건 슬프지 않건 성곽이나 무덤 근처의 오두막을 보고 우니, 이는 격식을 따라 하는 것이지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 그런 것은 아니다. 손님이 오면 울고 손님이 오지 않으면 울지 않는 행위는 더더욱 거짓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거짓으로 하는 것에 습관이 되어 심지어 부모의 喪에도 이러한 방법을 써서 예를 지킨다고 하니 정말 한탄할 일이다.28)

‘前'가 도리어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 허위가 몸에 배이도록 만들었음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들은 "선을 행하고 악을 없애는 것”이 아니고 바로 악을 행하고 선을 없애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기는 이 모든 것을 버리고 本心으로 돌아가 自我룰 굳게 믿을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是는 본디 명백하니 다른 데서 빌릴 필요가 없으며, 느낌에 따라 반응하니 자연스럽지 않음이없다”29)라 하였고, "성현의 학문은 오로지 스스로 믿음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是是非는 밖으로부터 오지 않는다"30)라 하였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믿어 옳다고 한다면 과감히 행해야 하고,……스스로 마음에 그르다고 한다면 결단코 반드시 행하지 않아야 한다”31)

28) 『天柱山房台語』. ”昔人, 見城英, 見宰而突, 自始礎心不容巳. 今人不倫哀與不哀, 見城郭 • 室盧而英, 乃循守格葉, 非由表也. 客至而英, 客不至而不突, 尤爲作僞 世人, 連父母之表亦用此術以爲守禮, 可暎也夫.”

29) 『答林退齋』. ”是非本明, 不須假借 隨感而應, 莫非自然.”

30) 『答林退宿』. "賢之學, 唯自信, 是是非非不從外來.”

31) 『答林退齋』. “自信, 斯然必行,…… 自心, 斯然必不行.”

라 하였으며 또 "현자는 자신의 본심을 믿으니 是是非非는 조금도 다른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32)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는 世人을 무시하고 홀로 서고자 하는 狂人精神을 제창하여, “狂人은 옛 사람을 벗으로 삼는데 뜻을 두어, 견해가 광박하고 안목이 탁 트였으며, 뜻이 높고 정취가 심원하며, 격식을 차려 세상에 받아들여지기를 구하는 것을 하찮게 여긴다"33)라고 하였다. 확실히, 마음의 본체(體)와 작용()이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자유자재롭고 원만한 이상, 무엇 때문에 세속의 격식을 따르고 타인의 是非에 억지로 응할 필요가 있겠는가? 또한 왜 가슴을 탁 터놓고 뜻대로 행하며 마음에 따라 행하지 못하는가? 왕기의 여러 가지 논의와 갖가지 비유는 그 모두가 이미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자유스럽고 활발한 인간의 心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의 마음은 텅비어 밝고 맑으며, 그 본체는 원래 활발한 것이니 어찌 붙잡아 정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오직 때때로 연마하고 변동하고 두루 행함에, 혹은 순웅하고 혹은 역행하며, 혹은 종으로 혹은 횡으로 그것이 하는 바를 따른다. 그것의 활발한 본체를 되살리고 갖가지 상황에 구에받지 않는 것을 ‘보존(存)’이 라고 일컫는다.34)

즐거움은 마음의 본체이며, 본래 활발하고 본래 거리낌이 없고 본래 방해와 묶임이 없는 것이다. 堯 • 舜 • 文 • 武의 성실근면함과 근신하고 겸손함은 단지 이 본체를 보존하여 활발하고 거리낌

32) 『門問答』. ”賢者自信本心, 是是非非一速不從人轉換.”

33) 『與賜和張子答』. ”狂子志存尙友, 廣節而疏目, 旨高而韻遠, 不府彌斑格森以求容於時.”

34) 『語錄』. “人心庫然 其原是活澄, 岩容執得定? 唯隨時練習, 變動周流, 或順或逆, 或縱或橫, 隨其所爲. 還活澄之體, 不爲諸境所礎, 斯謂之存.”

없는 기능을 잃지 않은 것이지 달리 무엇이 더 있는 것이 아니었다.35)

마치 자유로운 천사처럼 무한한 시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닌다. 외재적인 속박도 없고 또한 내재적인 구속도 없다. 얼마나 홀가분하고, 얼마나 즐거운가. 정신적인 자유에 대한 왕기의 바램과 열망이 행간에 가득 흐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허락될 수 없는 것으로서, 이미 그 당시에 세간의 의론이 분분했었다. 門人인 唐順之는 "선생께서는 자신의 믿음에 충실하셔서 행위의 방비를 하지 않으셨다. 그릇됨을 이해하여 주는 것을 위대하다고 하시어 께끗하고 더러움의 구별이 없었다. 그리하여 세간에서 선생에 대해 의론하는 자가 수없이 많았다"36)고 하였댜 후에 黃宗는 더욱 분명히 비평하여, "비록 진정한 본성이 행하여지면 저절로 하늘의 법칙이 나타난다고 하였으나 우리 儒生.의 규칙과는 차이가 있음을 면할 수 없다"37)고 하였으며, 또 "우리 儒生은 세속의 법칙 가운데서 性命을 구하니 五悠에 물들어 세속을 쫓는댜 그러하니 선악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惡을 조장하는 교량일 따름이다"38)라고 하였던 것이다. “우리 유생(吾)”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치는 확실히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왕기 학설의 의의 또한 여기에 있다.

35) 「零江南明」. ”樂是心之本體, 本是活澄, 本麗脫 本無掛硏繁純. 堯舜文武之統統業業 • 冀乾乾, 只是保任爵此體, 不失此活澄脫湘之機, 非有也.”

36) 『明偉學案』· ”先生篤於自信, 不爲行迷之防 包荒爲大, 無淨股之擇. 故世之議先生者不一而足.”

37) 『明個學案』 卷12. ”難云眞性流行, 自見天, 而於吾儒之短, 未免有出入矣.”

38) 『明儒學案』 卷12. ”吾船在世法中求命, 五欲魚染 頭出沒 於言無善惡 適爲濟惡之津梁耳.”

3 . 羅汝芳 : 不如以生字代心字

(“生"浮로 ”心”字를 대신함만 못하다.)

왕기의 ‘마음(心)’은 확실히 자유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다소 공허한 데가 있는 듯하며, 정말 "텅비어 밝고 맑아(江射佳然)" 마치 幽과도 같다. 왕기는 다만 마음(心)의 작용()만을 이야기하였을 뿐이지 마음의 본체(體)에 대해서는 별로 논의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단지 "가슴을 탁 터놓고 뜻대로 행하는 것(坦懷任意)”이나 "진정한 본성이 행해짐(眞性流行)"만을 찬미하였을 뿐이지 ‘가슴(災)’ • ‘뜻(意)’ • ‘본성(性)’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떤 학자들은 그가 마음(心)의 내용을 남김없이 없애버렀다고 말한댜 그러나 그는 완전하고 깨끗이 없애버린 것이 아니고, 때로는 仁義나 孝弟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였으니 단지 대대적으로 희석시켰을 뿐이다. 남김없이 없에버리거나 희석시키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마음(心)의 解放 과정 중에서 낡은 것을 없애버려야 비로소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는데, 마음(心)의 본체(體)는 일시에 바꾸기 어려우니 먼저 그것을 희석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心)에는 결국 내용이 있는 것인데, 마음의 내용을 깨끗이 없에버리고 마음의 해방을 논한다면, 이러한 해방은 추상적인 성질을 띄게 되어 진정으로 구현될 수 없을 것이다. 이같은 구현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현한 것이 바로 泰州學派이다. ”王陽明 선생의 학술은 泰州와 龍溪에 의하여 천하에 퍼졌으며 또한 역시 태주와 용계에 의해서 점차 失傳되었다"39) 태주학자 王良은 王畿(호는 龍溪)와 더불어 왕양명의 수제자로서 유명하다. "신체의 존중을 근본으로 삼을(尊身爲本)"

39) 黃宗羲, 『明偉學窮 卷31. "先牛之學, 有泰州 • 龍溪而風行天下, 亦因泰州 • 龍溪失其."

것을 처음으로 제창한 그는 泰州學派를 창립하였으며, 마음(心)의 구현을 위하여 길을 개척하였다. 태주학파 가운데 마음에 대하여 가장 많은 의론을 편 사람은 왕간의 再他弟子인 羅汝芳이었다.

나여방은 ‘마음(心)’을 지나치게 玄妙하게 생각하는 것을 반대하였댜 그는 비록 ‘마음(心)’의 '영묘함(妙)’을 인정하였으나, 이 ‘영묘'한 ‘마음’은 일상생활 가운데 존재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천지자연이 사람을 냄에 원래 한 덩어리의 勿인 줄 전혀 모른다. 수없이 感應하면서도 근원을 규명하지 않으며, 매우 混池한 상태여서 처음에는 명칭이 없었다. 다만 하나의 ‘心'자만이 있었는데 이 또한 억지로 제정한 것이다. 후인은 깨닫지 못하고 이에 따라 생각을 일으키니 견식이 생기고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이르기를 우리의 마음에는 실로 이같은 본체가 있고, 본체에는 실로 이같이 밝게 비춤이 있으며, 실로 이처럼 맑고 깨끗함이 있으며, 실로 이같이 자유스럽고 편안함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원래 망령되게 일어났다가 반드시 망령되게 사라지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事物을 應接하는 데에는 역시 天生의 영묘하고 混池된 마음이 작용을 한다. 마음은 그룰 위해 주체가 되어 일을 처리하는 데에 진력하지만, 그는 도리어 그것이 상황과 형색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싫어하며 고개를 돌려 단지 그 앞부분인 마음의 본체만을 생각한다. 심지어는 한 평생을 집착하면서 순수하기 짝이 없다고 여기고 신통력이 드러나기를 바라면서 천하가 태평하고 하늘이 빛을 발한다고 여긴다. 마음을 수고롭게 쓸수록 더욱 멀리 마음을 거스르게 된다.40)

40) 『語錄』. ”殊不知天地生人, 原是一團寂物. 萬感萬應而莫究根源, 混混論論而初無名色 只一‘心'字, 亦是强立 後人不省, 緣此起個念, 就會生, 露個光. 便將吾心質有是本體, 本體質有如是朗照, 有如是澄, 有如是自在寬舒 不知此段光抵原從妄起, 必隨妄滅. 及來應事接物, 迎是用着天牛妙混論

的心. 心盡在爲他作主幹, 他却嫌其不見光形色, 回頭只想前段心體. 桂至欲肥提終身, 以爲純亦不已 顯發神通, 以爲宇泰天光. 用心危勞, 違心危遠.”

日常意識活動 이외의 소위 "맑고 깨끗하며(澄洪)", "밝게 바추는 (朗照)" 마음의 ‘本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잡으려는 "망령되게 일어나는(妄起)” 생각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物에 應接하는(應事接物)” 가운데 사람을 대신하여 "주체가 되어 일을 처리하는(作主幹事)” 日常意識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상의식은 도대체 무엇인가? 물론 이러한 점에 대해서도 개괄적인 견해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에 나여방은 ‘’이라는 개념을 제기하였다.

우주간에는 아무래도 하늘이 운행을 관할한다.……緖에 이르기를 "다시 天地의 마음(心)을 나타낸다”라고 하였다.……천지에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으며, 만물을 産生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음을 전혀 모른다. 이제 만약 단지 ‘心’字 만을 받아들안다면, 나에게 마음이 있고 너 또한 마음이 있으며, 사람에게 마음이 있으면 사물에도 마음이 있으니, 어찌 천차만별일 뿐이겠는가? ‘마음(心)’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生'자로서 그것을 대신하는 것이 나으니, 하늘에 있는 日月昆辰, 땅에 있는 山川民物, 내 몸에 있는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임은 揮然히 유기체로 끊임없이 번식하니 다같이 이 天心의 재현인 것이다.41)

천지는 "만물을 산생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고(以生物爲心)", 사람과 만물은 "揮然히 유기체로 끊임없이 번식하니(然是此牛牛爲機),” 이렇게 해서 ‘'은 바로 ‘마음(心)’의 본질이자 ‘마음(心)’의

41) 『錄』. ”宇宙之, 總是乾陽統遠.……經云"復見天地之心.…… 殊不知天地無心, 以生物爲心. 今若獨取'心’字, 則吾有心而汝亦有心, 人有心而物亦有心, 何千殊溪. 異 善言心'字, 不如肥個‘生'字來替了'七, 則在天之日月星辰, 在地之山川民物, 在吾身之視聽, 軍然是此生牛爲機, 則同然是此天心之復.”

보편적 내용으로서 확립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으로써 마음의 본체로 삼은 것이다.

나여방이 말하는 '’은 바로 生命이다. 그의 중에는 생명에 대한 찬미가 충만해 있다. 그는 "공자와 안회의 즐거움(孔顔樂處)"이라는 유가의 전통적인 話題에 대해 담론할 때에, "소위 즐거움이라는 것은 내 생각에 단지 유쾌함일 따름이다. 유쾌함 이외에 어찌 소위 즐거움이라는 것이 또 있겠는가? 생기 발랄하고 활발하여 조금도 막힘이 없음이 바로 성현이 말하는 즐거움이고, 역시 성현이 말하는 仁인 것이다”42)라고 말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갓난아기가 처음 출생하여, 달래고 어르면 끊임없이 즐겁게 웃으며 젖을 먹여 키우면 끝없이 기뻐하고 좋아한다. 대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남은 본시 만물을 창조하는 생명력에 의한 것이니, 따라서 사람이 생겨남에는 저절로 타고난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43)

여기에서 그는 인간의 牛命에 대하여 순수하고 감동적인 찬미를 보내고 있다. 生命에 대한 나여방의 체험은 이렇듯 깊고 절실하였으며, 인간의 생명에 대하여 이렇게 아끼고 사랑하였다. 그가 보가에 生命은 바로 善이고, 牛命은 곧 아름다움(美)이며, 생명은 바로 즐거움(樂)이었다. 따라서 소위 "공자와 안회의 즐거움"은 과거의 儒生들이 말한 것처럼 "군자는 곤궁할 때에도 道義룰 지킨다(君子固窮)" 따위의 道德體驗을 즐기는 것이 아니며, "생기 발랄하며 활

42) 『浪』 "樂者, 窟意只是個快活而已. 登快活之外, 復有所樂哉? 活滋 了無瀋 卽是聖賢之所樂 却是聖賢之所仁.”

43) 『語錄』. “故赤子初生, 孩弄之, 則耿笑不休, 乳而之, 則愛無. 盜人之出世, 本由造物之生機, 故人之爲生, 自有天然之樂."

발하고 조금도 막힘이 없는(牛意活沼, 了無周)” 牛命體驗과 牛命自由의 體驗을 즐기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또한 그는 설사 頂我의 사사로움(有我之私)"이나 ‘‘극악한 사람(極惡之人)”에 이르기까지도 생명을 갖고 있기만 하다면 곧 "천지의 덕(天地之德)"과 통한다고 여겼다. 어떤 사람이 “우리 인간의 마음은 천지와 상통하는데 단지 自我의 사사로움 때문에 합치될 수 없습니다”44)라고 묻자, 그는 "만일 천지의 德을 논하자면, 비록 自我가 있어도 그것과 격리될 수는 없으며",45) "설사 자아의 가운데라 하더라도 천지의 생명력이 관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자신이 어리석어 그것울 모른다고 함은 가능한 일이지만, 그가 일찍이 천지의 생명력을 단절하였다고 여기는 것은 안될 일이다”46)라고 대답하였다. 어떤 사람이 또 "극악한 사람은 벼락을 맞게 되니, 하늘과 거리가 떨어져 있지 않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47)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벼락이 내리칠 때, 그 사람이 놀라는가 놀라지 않는가?",48) 또 "벼락을 맞을 때, 그 사람이 아픈가 아프지 않는가?",49)라고 반문하자, 대답은 당연히 모두 긍정적이었다.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놀람은 누가 그를 대신하여 놀라는 것이냐? 아픔은 누가 그를 대신하여 아픈 것이냐? 그렇다면 벼락은 그 사람을 때려죽일 수는 있으나, 그 사람의 놀람과 아픔을 느끼게 하는 하늘을 때려죽

44) 『語錄』. ”吾人心與天地相通, 只因有我之私, 便不能合.”

45) 『語錄』. ”若論天地之德, 難有我, 亦隔七不."

46) 『語錄』. "有我之中, 亦莫非天地生機之所貫徹 但自家愚近不知之可, 若他天地生機則不可.”

47) 『語錄』. ”極惡之人, 江旦般之, 難說與天不隔.”

48) 『語錄』. "頂殿之時, 其人驚否?"

49) 『語錄』. “被擊之寺, 其人痛否?"

일 수는 없다.50)

놀라움과 아픔은 의 자연적인 반응으로, 이러한 반응이 있다는 것은 아직 생명이 있음을 증명함이요, 생명이 있다면 여전히 천지의 大德과 상통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 유가의 견해와 더더욱 다른 점이댜 확실히, ‘牛'을 마음(心)으로 삼은 나여방은 이미 그의 관점을 道에서 牛命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牛命은 신체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신체 없는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을 마음(心)으로 삼은 나여방은 몸(身)과 마음(心)의 통일을 강조하고, 신체의 苦樂울 중시하였다. 그는 신체와 결합된 마음만이 비로소 ‘赤子之心'이며, ‘天心'과 합치된다고 생각하였다.

마음(心)은 몸(身)의 주체이며, 몸은 정신(神)의 집이다. 몸과 마음이라는 두 가지는 원래 회합하기를 좋아하며 떨어지거를 싫어한다. 그러므로 赤子와 어린아이들이 기쁘게 항상 웃는데, 그때는 몸과 마음이 서로 붙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면서 心思가 어지러워지니 근심과 괴로움을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오직 천부적 자질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자연히 전환의 길을 찾을 수 있게 된다.……각성하여 께닫는 바가 있어야 비로소 大道가 오직 이 몸에 있으며, 이 몸은 완전히 赤子이고, 赤子는 지혜와 재능을 완전히 이해하여 지혜와 재능이란 본래 學과 思가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된다. 이런 경지에 이르게 되면 정신은 자유자재롭고 세심히 깨달으며, 마음은 순식간에 허허롭고 맑음을 느끼니, 天心의 道統은 진실로 청결하고 정밀하며 미묘하다.51)

50) 『語錄』· ”驚是洪爲之? 痛是執爲之痛? 然能擊死其人, 而不能擊死其人之怒與痛之天也.”

51) 『語錄』. ”心爲身主 身爲神舍 身心二端 原樂於會合, 苦於支離. 故赤子孩,

長是歡笑, 盜其時身心猶相康衆 及少少長成, 心思雜亂, 便悠苦難當.……唯是有根器的人, 自然會尋轉路.……恨然有個悟處 方信大追只在此身, 此身揮是赤子, 赤子解知能, 知能本非學. 至是精神自在炭, 方寸頓虹虛明, 天心道脈爲潔淨精微也巳.”

끊임없이 산생되는 우주의 마음(心)이 赤子를 낳음에 당연히 몸과 마음을 함께 탄생시켰으며, 赤子 역시 아직 신체의 감각을 이탈하여 초월적인 사유를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나여방은 단지 이러한 마음과 몸이 合一된 마음이라야만 비로소 天然的인 "至云한 마음(至善之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관점에 어떤 의의가 있는 것일까? 있다. 이것은 마음이 몸으로 접근함이며, 心學이 인간의 현실생존으로 접근한 것이다. 마음은 몸에 의지하여 존재하면서도 또한 몸을 초월하므로, 心理는 生理와 관계가 있으며 또한 倫理와도 관계가 있다. 몸에 의존하여 존재하고 와 관계가 있다는 면에서 말하면, 마음은 인간의 신체적 필요와 생리적 욕망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인간의 정욕을 긍정하고 생활에서 행복의 추구를 제창하게 된다. 신체를 초월하고 윤리와 관계가 있다는 면에서 말하면, 마음은 인간의 정신적 필요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인간의 정욕을 억제하고 도덕적으로 完美함의 추구를 제창하게 된다. 과거 儒家에서의 心에 대한 논의와 의 한 분야로서의 心學은, 비록 인간의 생리적 욕망을 완전히 말살하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윤리 도덕의 입장에서 인간의 생리적 욕망을 억압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마음(心)은 주로 윤리적인 마음(心)이었고, 이러한 心學은 주로 倫理心學이었다. 비록 나여방은 아직 이같은 입장을 바꾸지는 않았지만, 이미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마음의 몸에로의 접근은 일종의 관점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일종의 감정이기도 하다. 나여방은 동정심이 매우 풍부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다음의 말을 보기로 한

다.

혹자가 刑部의 감옥에서 죄인을 불러내어 직접 질곡의 고통을 목격하고, 위로는 목에서 아래로는 발까지 조금도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없음에 문득 눈물이 홀러내린다.……무릇 양심은 형체에 깃들여 있는데 형체가 이미 공평치 않으니 양심이 어찌 활동할 수 있겠는가?……형벌의 고통은 양심을 죄인으로 삼아 질곡을 하소연할 길이 없는 것과 무엇이 또 다르겠는가?52)

내가 오십년 동안의 상황을 보건대, 형법의 常伊를 의론하는 자는 하루하루 더욱 치밀해지고, 형구를 만드는 자는 나날이 더 엄격해지며, 조사를 담당하고 고문을 시행하는 자는 하루하루 더 욱 심해진다. 법정의 계단 밑이나 감옥에서 피와 살이 뒤엉켜 홍건한 것을 볼 때마다, 코끝이 찡하고 눈살이 찡그려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탄식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자식들이 다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지난날 부모의 품을 그리위하고 형제의 곁을 그리워하는 자는 아니겠지? 어찌 모두 처음에는 善하고 오늘날에 와서는 모두 善하지 않는가?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는 반드시 소리내어 부모를 부르고, 의지할 것을 찾을 때에는 반드시 형제를 먼저 찾기 마련임을 보니, 처음에 선량하였던 자가 반드시 지금에 선하지 않은 것은 아님을 역시 믿을 수 있다.……그 善함을 믿으니 性盛이 貨하고, 그 성령을 貨하게 여기니 신체의 생명이 중요하다.53)

52) 『語錄』. ”菜提獄刑 親見梧浩之 上至於項, 下至於足, 更無可以活動, 競爲沿下.……盜良心冀形體, 形體槪私, 良心安活動.……刑役之苦, 又何異以良心爲罪人 而梧浩無所從告者哉?"

53) 『語錄』. ”籍觀五十年來 議律例者日密一, 制具者嚴一, 任稽察施t考試者日猛一日, 每見堂階之下, 牟獄之, 諸其血肉之沿演, 未不鼻酸額底 爲之暎曰, 此非盡人之子與? 非棋昔依依父母之災 悲悲兄妹之芳者平? 夫益

其皆善於初而不於今哉? 及暗其常疾痛而聲必呼父母, 相依而勢必先兄弟, 則又信其於初者而未必不善於今也已……其善而性寂斯貴矣, 貴其而腦命 斯重矣.”

이는 육체를 학대하는 고문과 형벌에 대한 성토이다. 엄격히 말해서 이것은 논리적 논증이 아니고 일종의 동정심이다. 이론으로서 는 성립하기가 어려우나, 일종의 감정으로서는 오히려 위대한 점이 있다. 그것은 정치를 초월하고, 도덕을 초월하고, 이성을 초월하여, 무조건적이고 순수한 인류의 사랑과 생명의 사랑을 구현하였기 때문이댜 이렇게 위대한 감정 앞에서는 어떠한 정치나 도덕도 모두 가 편협한 것이 되어 버리고, 어떠한 이론도 모두 암연히 빛을 잃고 만다. 나여방은 이렇게 ‘心’에서 ‘’으로 또 ‘身’으로 나아갔으며, 의 가장자리를 향하여 나아가 儒學인 듯하면서도 儒兵이 아닌 混浦地로 진출하게 되었다.

신체와 합일된 생명의 마음은 또한 인간의 생활 • 생계의 도모와 관계가 있댜 나여방은 ‘孝 • ‘弟(節)’ • ‘慈'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수많은 백성이 비록 직업의 高가 다르기는 하지만, 부모를 공양하고 자손을 보육하며 이 孝 • 弟 • 慈를 극진히 하는 점에 있어서는 일찍이 다룰 바가 없었다. ……또 때로는 여가를 틈타 길거리를 활보하며 대중의 수레와 말이 달리고 점을 싣고 하는 소란스러움을 보니, 그 가운데 인간 숫자만이 어찌 億兆만큼 많을 뿐이겠는가, 품계 또한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러나 동쪽에서 서쪽까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들은 歸省할 곳이 있어 그 生을 안돈하며, 개개인은 방비하고 조심함이 있어 이로써 목숨을 보전한다. 그 속을 살펴보건대 반드시 부모와 처자에 대한 생각이 굳게 맺어주고 유지시키니, 생애를 근면하게 영위하며 육체를 보호하는데 자연히 그만 둘 수 없는 바가 있는 것이다.54)

여기의 화제는 ‘孝' • ‘弟' • ‘慈’라는 統道德이지만, 언급한 내용은 도리어 "부모를 공양하고 자손을 보육하며(沿父母, 撫育子孫)", "을 안돈하고(安其牛)", "목숨을 보전하며(全其命)", "생에를 근면하게 영위하며 육체를 보호한다(勤, 保設腦體)”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개인과 가정을 경영하는 일상생활이자, 생계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던가? 설마 이것이 바로 '' • ‘弟' • ’慈'란 말인가? 공자께서 효를 말씀하실 때 특별히 "오늘날 효라는 것은 단지 음식으로써 능히 봉양하는 것을 일컫는데, 개나 말도 모두 먹여 기를 수가 있는 것이다. 부모에 대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55)라고 지적하였다. 효라는 것은 倫家道德의 하나로써, 그 관건은 ‘공경(敬)’에 있지 ‘봉양(義)’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봉양(渡)’을 효라고 한다면 그것은 부모를 소나 말로 취급한 것이다. 그런데 나여방은 여기에서 바로 ‘봉양(毅)’을 효라고 생각하였으니 "부모를 공양한다((共迷父母)”고 말함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여방이 부모를 천시하여 그런 것이 아니고, ‘牛'을 마음(心)으로 삼은 그로서는 관심사가 이미 공경이나 복종 따위의 도덕 규율이 아니라, 삶을 경영하는 생계 도모의 문제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비록 아직 유가의 도덕 개념을 초월하여 이론을 세운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러한 도덕 개념의 특정한 함의를 대대적으로 희석시켜, 그것들을 일상적인 생계 도모의 활동 속으로 영입시켰다. 이것이 바로 앞서 언급하였던 ‘윤리의 마음(命理之心)’이 ‘생활의 마음(生活之心)’으로의 전환이며, 心學의 인간

54) 『語錄』. ”群黎百姓, 難職業高下不同, 供莊父母, 撫育子孫, 其求盡此孝 • 弟 • 慈, 未司者也.……又時乘殿 縱步街, 大衆車馬之交勅 • 負之雜音, 其人數何宿億兆之多, 品級亦將千萬之異. 然自東速西, 自朝至暮, 人人有個歸省, 以安其生 個個有個防險 以全其命. 康制共中, 總父母妻子之念固結維繁 所以勤槿牛源, 保設斯體 而自有不能已者.”

55) 『語錄 • 爲政』. ”今之孝者是謂能, 至於犬馬 皆能有, 不敬 何以別平?"

현실 생존에로의 접근이다. ‘을 안돈하고 목숨을 보전하며 삶을 근면하게 영위한다’는 말을 한 것은, 여기에서는 역시 ‘孝' • ‘弟' • 慈’라는 名義 하에서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윤리의 마음’이 ‘생활의 마음’으로의 진일보한 전환을 따라서, 마침내 이러한 名義를 내던지고 자신의 기치를 수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여방은 이러한 경지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누군가는 도달하였을 것이다.

마음의 본체(監)를 현실 생존의 실현으로 향하게 함과 동시에, 나여방은 마음의 작용(用)에 있어서도 王畿보다 더욱 거리낌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견문을 많게 하고 절조를 지킴에 힘쓸 것(多其見, 務爲持守)”을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아를 지나치게 구하거나 억지로 선을 행하는 데 반대하고,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善惡에 대한 관념을 없앨 것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그는 ”意念이 된 이상 일어날 때가 있으면 소멸할 때가 있고, 모일 때가 있으면 홑어질 때가 있으며, 밝을 때가 있으면 어두울 때가 있는 것이다. 설사 專心하여 기억하고 생각하며 노력하여 붙잡아 두어도 필경 오래 유지하기는 어렵다. 하물며 너의 마음은 원래 살아 활동하는 것이며 신령스런 것이니, 그것을 급하게 지키려고 할수록 빨리 잃어버리게 된다”56)라고 하였으며, 또 "잊음과 도움은 상대적인 것으로 네가 잊지 않으려고 하나 반드시 잊을 때가 있을 것이다. 이미 지나가 버린 마음을 쫓지 않고 장차 오게 될 마음을 거스르지 않으며, 드넓고 활발한 대로 그것을 내버려두니, 진실로 물이 흐르듯 사물이 생겨나고 天機의 自然함으로 가득하며, 오래도록 不滅하여 곤란함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57)라 하였다. 그리고 또 "이제 바로

56) 『語錄』. "意念, 則有時而起, 便有時而滅 有時而衆, 便有時而敗 有時而明,便有時而. 縱使專心記想· 着力守住, 畢党難以持久.況汝心原是活物旦神物也 持之危急 則失危速矣.”

57)『語錄』. ”忘與助麻 汝欲不忘, 卽必有忘時. 不追心筑往, 不逆心將來, 任立

宏活澄, 館是水流物生, 充天機之自然, 至於恒久不息而無難矣.”

생기가 넘치니 날짐숭과 다르지 않고 새싹과 다르지 않아, 이전의 만물일체의 仁이 과연 혼연일체가 됨을 느낀다. 욕구가 적절하면 이 어찌 선한 생각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善하다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니, 善한 한쪽이 있으면 善하지 않은 한쪽이 있고, 善한 부분이 있으면 善하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이다. 어떻게 밤낮으로 서로 통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만물일체를 얻을 수 있을까?”58)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참 좋은 말이다. 과연 이럴 수 있다면 "생기 발랄하고 조금도 막힘이 없을(牛意活澈, 了無)" 것이니, 인생에서 어떠한 즐거움을 그것과 견줄 수 있을 것이며, 바랄 일이 또 뭐가 있겠는가? 마음의 자유를 제창하는 것이 한가함을 제창하는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이것은 사실, 아니 최소한, 영웅적인 기개를 소유하고 구속으로부터 초탈한 위대한 인격을 제창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큰 포부가 있고 큰 기력이 있으며 큰 식견이 있다면, 이에 안심하고 기뻐하며 천하의 널찍한 거처에 거하고, 두려움없이 대담하게 천하의 正道룰 행하리라. 工夫는 크게 이룩하기가 어려우니 크게 이룩하는 것을 하찮게 여김을 工夫로 삼고 胸橫은 강 언덕이 없이 망망하니 강언덕에 의지하지 않음을 흉금으로 삼는다. 맞을 풀어 배를 띄우고, 순풍에 노를 저어 거대한 물이 출렁이는 곳에서 종횡으로 나를 방임하는 것이 어찌 하나의 큰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59)

58) 『語錄』. ”今當下生意津津 不殊於肉鳥, 不殊於新苗, 往時菓物一體之仁, 果命成片矣 欲求停益 不是個善念? 但善便落一姬, 段有一姬, 便有一滅不, 低有一段善, 使有一段不善 如何能夜相通? 如何能1卯萬物一體?"

59) ”若果有大傑, 有大氣力, 有大識見, 就此安心樂意而居天下之廣居, 明目張際天下之正道. 工夫難到淡泊, 卽以不府淡泊爲工夫, 胸次范乳璃, 使以不

依評岸爲胸次. 解環放, 順風張悼, 則巨沒注洋, 縱橫任我, 不一大快哉.”

이 어찌 왕기가 부른 것보다 더욱 유쾌하고 드높은 심령 해방의 개선곡이 아니겠는가!

‘’은 위대한 글자이며, 동시에 中國文化思想의 牛長羽이기도 하다. 우주 만물의 끊임없는 생성과 인류 사회의 세대 번영, 그리고 각 개인의 心身의 苦樂, 이 모든 것을 ‘字 하나로써 관통할 수가 있다. 老은 만물의 ‘’으로부터 유한을 초월하여 무한으로 들어가는 우주의 정서를 萌牙시켰고, 孔孟은 사회의 ‘生'으로부터 개인을 群體에 헌납하는 도덕 이상을 산생시켰다. 그런데 나여방은 ‘’ 을 개인의 현실 생존으로 향하게 합으로써 일종의 새로운 이론 세계를 전개시켰던 것이다.

4. 李賀 : “私者, 人之心也"

(사사로움이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다.)

앞절에서 "을 안돈하고 목숨을 보전하며 생애를 근면하게 영위한다는 말을 한 것은, 여기에서는 역시 '淳' • ‘弟' • ‘慈'라는 名義하에서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윤리의 마음(倫理之心)’이 '생활의 마음(牛活之心)’으로의 진일보한 전환을 따라서, 마침내 이러한 名義를 내던지고 자신의 기치를 수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羅汝芳은 이러한 경지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누군가는 도달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이가 있으니, 바로 泰州學派 출신이면서도 태주학파를 초월한 계몽사상가 李踏이다.

이지는 하늘에서, 혹은 道德觀念 속에서 人心의 근거를 찾은 것이 결코 아니며, 바로 인간의 생존 현실에서 해답을 구하였다. 그

는 舜이 人心울 얻은 것은 단지 "통속적인 쉬운 말을 잘 살폈기(好察遇言)”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순은 항시 즐겨 물었고 또한 잘 살폈다. 살피기를 잘 하였는데, 즐겨 살핀 것은 또한 매우 통속적이어서 알기 쉬운 말이었다"60)고 하였고, 또 "길거리의 한담이나 골목의 의론, 但語나 속어, 아주 천하고 속되며 극히 凌近하여 윗사람들이 말하지 않고 군자들이 듣기 좋아하지 않은 것을 舜은 즐겨 살폈다61)라고 하였으며, 또 ”이렇게 통속적인 쉬운 말을 잘 살피는 것은 원래 중요한 일이다.……잘 살핀다면 本心을 얻을 수 있다”62)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확고부동한 태도로 통속적인 말을 살펴 人心을 찾는 길을 걸었다.

간혹 한 둘이 동참하여 이 없는 곳으로 들어감을 보면, 菩提心이 생겨납을 면할 수 없으니, 이에 백성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한 차례 가르쳐 인도한다. 재물을 좋아하고 女色을 좋아하며, 부지런히 배우고 진취적이며, 금은보화를 많이 쌓고 전답과 주택을 많이 사서 자손을 위해 도모하며, 자손에게 陰을 주기 위해 널리 風水룰 살피는 것 같은, 무릇 세상의 모든 생활을 영위하는 생산작업 둥의 일은 모두 공통되게 좋아하고 공통되게 익숙하며, 공통되게 알고 공통되게 말하는 바이니 이것이 진짜 통속적인 말이댜 여기에서 만일 그것과 거꾸로 할 수가 있다면, 불현듯 이 마음을 얻고, 불현듯 모든 聖賢頃의 眞諦와 大用을 보며, 본래의 면모를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太古의 매우 오랜 시간 동안 밝혀지지 않은 큰 일이 당장 종결될 것이다.63)

60) 『明燈道古錄』. ”舜已矣, 而又好察 好察是矣, 所女影者又是極遇之言.”

61) 『明燈道古錄』. ”唯是街談悲議, 但野語, 至陸至俗, 極沒極近, 上人所不道 • 君子所不樂聞者, 而舜祖好察之“

62) 『明燈道古錄』. "此好察還言原是要緊之.……能好察則本心.”

63) 『答鄧明府』. ”間或見一二同參從入無, 不免生菩提心, 就此百姓日用處提斯

一番 如好抵 如好色 如勤學, 如進取, 如多積金貸, 如多買宅爲子孫謀, 博取風水爲兒孫面藍, 凡世間一切治生産業等事, 皆其所共好而共習, 共知而共言者,是虹週言也. 於此果能反而求之,頓爵此心,頓見一切聖賢佛祖大機大用,識得本來面目. 則無始膜助未明大事, 當下了畢.”

실제생활 중에서, 더욱이 평민 백성간에 입으로 한 말은 바로 몸소 겪은 것이고 또한 마음으로 생각한 바이다. 따라서 실제생활 중으로 나아가 사람들의 행위를 보고 백성들의 "통속적인 말(逸言)"을 들어보기만 하면, 참된 人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며, 천백년 오랜 세월 동안 설왕설래하였던 人性의 本體 문제 또한 당장 종결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지가 "통속적인 말(言)” 가운데서 정련해 낸 人心은 도대체 무엇인가? "통속적인 말"이 뜻하는 바는 "재물을 좋아하고(好貨)" "부지런히 배운다(勤學)” 등과 같은 "생활을 영위하는 생산작업(治生産業)”에 관계되는 일이다. 이지는 단호하게 다음같이 선언하였다.

사사로움(私)이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心)이다. 인간은 반드시 사사로움이 있은 후에야 그 마음이 나타난다. 만약 사사로움이없다면 곧 마음이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밭에서 애쓰는 자는 사사로이 가을의 수확이 있은 후에야 받을 경작하는 데에 반드시 힘을 다할 것이고 집에 거주하는 자는 사사로이 창고에 물건이 쌓이는 수확이 있은 후에야 집을 다스리는 데 반드시 힘을 다할 것이며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는 사사로이 진보하는 수확이 있은 후에야 과거 준비를 하는 데에도 반드시 힘을 다할 것이다. 따라서 벼슬아치를 구하는 데 사사로이 봉록으로써 하지 않는다면, 비록 부른다 해도 틀림없이 오지 않을 것이며 만일 높은 지위가 아니라면 비록 권한다 해도 필시 이르지 않을 것이다. 비록 孔子같은 성인도 만약 司冠의 지위나 재상의 일을 대신하는 것이 없었다면, 틀림없이 하루도 魯나라에서 安身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이며 필연적인 결과이니 터무니없이 억측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사로움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허황된 담론이고 실속 없는 견해이며, 단지 벽을 사이에 두고 듣는 것을 좋아하고, 발뒤꿈치가 허공에 뜨건 땅에 닿건 상관치 않는 것이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밝은 귀를 어지럽힐 뿐이니 받아들일 만한 것이 못 된다.64)

이지가 말한 ‘사사로움(私)’은 바로 자기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며, 자기의 물질적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고, 또 "생활을 영위하는 생산작업(治生商業)”이기도 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확실히 "인간은 반드시 사사로움이 있는(人必有私)"것이다. 그것은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고,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니, 이지가 말한 것처럼 "무릇 이 세상의 중생들이 七尺의 육신을 받들어 모시는 것은 부귀공명을 위해서이며, 부귀공명이란 몸뚱이 안의 물건이니 그것을 급히 추구함은 당연한 것이다”65)

그렇다면 이러한 마음은 역시 善한 것인가? 그렇다. 또한 바로 이렇기 때문에 비로소 마음은 선한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야할 할 것은, 마음의 善惡을 가늠하는 근본적인 표준은 ‘하늘(天)’과 ‘사람(人)’이라는 점이다. 중국 대다수 古人의 관념에서 보자면, 무릇 ‘하

64) 『 • 德業儒臣後論』. ”夫私者, 人之心也. 人必有私, 而後其心乃見. 若無私, 則無心矣 如服田者, 私有秋之俊, 而後治田必力. 居家者, 私積倉之獲, 而後治家必力. 好學者, 私進取之俊, 而後業之治也必力. 故官人而不私之以錄, 則難召之必不來矣 荀無高爵 則難勸之, 必不至矣. 難有孔子之聖, 荀無司店之任 • 相事之攝 必不能一日安身於魯也. 決矣. 此自然之理, 必至之符, 非可以架空而脇說也. 然爲無私之說者, 皆畵耕之談, 觀楊之見, 但令隔好聽, 不管脚根虛質, 無益於, 只亂聽耳, 不足采也.”

65) 『答方伯』. ”夫功名, 大地衆生所以奉此七尺之身者也, 是形核以內物也, 其急宜也.”

늘(天)’로부터 얻은 것은 善한 것이고, ‘사람(人)’에게서 나온 것은 惡한 것이다. 왕양명 • 왕기 • 나여방은 모두 이같은 기준으로 마음의 善惡을 논증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생활을 영위하는 생산작업(治生産業)”의 ‘사사로움(私)’은 바로 ‘하늘(天)’로부터 얻은 것이다. 이지는 "부귀와 이익 그리고 영달은 나의 선천적인 五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니, 그 추세가 그러한 것이다"66)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만약 성인이라면 어찌 털끝만치라도 利悠의 마음이 있겠는가?"67)하고 의문을 제기하자, 그는 "성인도 사람일 따름이니 멀리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 인간 세상을 아주 버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자연히 입지 않고 먹지 않으며 곡식을 끊고 풀로 옷을 삼으며 혼자 황야로 도망갈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권세와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으니……권세와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 역시 우리 인간의 천성의 자연스러움임을 알게 된다”68)고 반박하였다. "선천적인 오관(天牛之五官)"은 당연히 하늘로부터 얻은 것이니, "선천적인 오관"의 天然的인 필요 또한 자연히 하늘로부터 얻은 것이다. "권세와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勢利之心)"은 “우리 인간의 천성의 자연스러움(吾人梨賊之自然)”이니 그 누가 선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지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통속적인 말 가운데의 俗事는 누가 가르침을 기다렸다가 행하는가? 이익을 추구하고 손해를 피하는 것은 사람마다 같은 마음이다. 이것을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고 이것을 衆人의 지혜

66) 『答耿中丞』. "利達 所以吾天生之五官, 其勢然也.”

67) 『明燈道古錄』. ”若是聖人, 安1守有一蓮利欲之心哉?"

68) 『明燈道古錄』. ”夫聖人亦人耳, 低不能高飛遠母棄人間世, 則自不能不衣不食, 絶粒衣草而自逃荒野也. 故難聖人不能無勢利之心,……則知勢利之心, 亦吾人栗賊之自然矣.”

라 하니, 통속적인 말이 영묘한 까닭이다.69)

市井의 凡人들은 몸으로 그 일을 경험하면 입으로 곧 그 일을 이야기한다. 장사치는 단지 장사 이야기만 하고, 농사에 힘쓰는 자는 단지 농사 이야기만 하는데, 이런 말들은 확실하고 재미가 있으며 진실로 德이 있는 말이라 사람들로 하여금 들어도 싫중과 피곤을 잊게 한다.70)

어찌 善할 뿐이겠는가, 그야말로 ‘지극히 진실된 것(至眞)’이며 ‘지극히 선한 것(至善)’이고 ‘지극히 아름다운 것(至美)’이다. 이것은 모두 "통속적인 말 가운데의 俗事(過言中事)”의 "저절로 이루어짐(天成)"과 "자연(自然)”에 대한 찬미이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이지가 여기에서 찬미한 ‘天' 혹은 ‘自然'은 이전의 것과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 ‘天' 혹은 ‘自然'은 일종의 貸體, 즉 인간 이외의 천지우주 • 자연계를 가리킬 수도 있으며 또한 일종의 性買, 죽 선천적 • 天然的 • 자연히 그렇게 됨을 가리킬 수도 있다. 비록 이 두 가지의 함의는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이지만, 인간에게 적용될 때 아주 상이한 결과를 나타낼 수도 있다. 前人들이 ‘天’ 혹은 ‘自然'을 말할 때는 대부분 첫번째 함의를 취한다. 다시 말하면 주로 인간 이외 모종의 소위 ‘天’의 본성으로서 인간에게 요구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天'은 왕왕 개체적인 인간과 서로 대립되는 것이다. 이지가 여기에서 말하는 ‘突 혹은 ‘自然'은 인간의 천연적인 본성을 가리키며, 이러한 ‘天'은 개체적인 인간과 서로 대립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개체적 인간의 선천적인 필요가 된다.

69) 『答鄧明府』. ”凡過言中事, 執待敎而行平? 超利避混 人人同心. 是天成, 是謂衆巧, 過言之所以妙也.”

70) 『答鄧明府』. ”市井小夫, 身履是, 口便說是. 作生意者但說生意, 力田作者但說力, 有味, 頂有德之言, 令人聽之忘限俗矣.”

간단히 말해서 그가 말한 ‘天'은 이미 자연계의 ‘天'이 아니고, 인간의 ‘天’이다. 이지는 『明燈道古錄』에서 해석하기를 "힘쓰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도 의 연히 저 절로 가운데 있는 것(思而從容 自中)”이 바로 ‘天'이며 이 "힘쓰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의연히 저절로 가운데 있는 것"을 밝혀 “굳건히 지켜 감히 잃지 않는(而固執政失)” 것이 바로 ‘인간(人)’이라고 하였다. 이로써 그가 원래 천연적인 본성과 자각의 견지라는 의의에서 ‘天'과 ‘人'이라는 말을 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실 이지의 경우에만 그런 것은 아니었댜 꼼꼼하게 고찰해 보면, 우리들이 앞에서 언급한 왕양명에서부터 줄곧 ‘天'에 대한 두 종류 함의의 한계를 혼동하고 있었으며, 슬그머니 자연계의 ‘天'에서 인간의 ‘天'으로 향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지보다 시기적으로 약간 앞서고 일찍이 왕기에게서 사사받은 적이 있던 徐消는 "그 사람에 따라서 그것을 인간(人)의 ‘天'으로 삼아야지, 그것을 자연계의 ‘天’으로 삼아서 안 된댜 그러나 모두 틀림없이 ‘天'인 것이다”71)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문제를 매우 명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이지는 바로 자연계의 ‘天'에서 인간의 灰'으로, 하늘의 ‘自然'에서 인간의 ‘自然'으로 향한 과도기의 완성자이다.

이러한 과도기의 완성을 따라, 善惡에 대한 전통적 관념은 전도되었다. 이지는 "오직 통속적인 말만이 善하다고 한다면, 통속적이지 않은 모든 말은 반드시 善하지 않다. 왜 그런가? 그런 말은 백성의 마음이 아니며 民心이 원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善하지 않고 惡하다고 하는 것이다”72)라고 하였다. 하늘에서 얻은, ”民心이 원하는 바(民情之所欲)”가 바로 善이니, ”民心이 원하지 않는 바"는

71) 『論中 • 二』. ”因其人而人之也, 不可以天之也 然而莫非天也.”

72) 『明燈道古錄』. ”夫唯以還言爲善, 則凡非週言者必不善, 何者? 以其非民之中 • 非民情之所欲 故以爲不善, 故以爲惡耳.”

당연히 惡이다. 어떠한 것들이 "民心이 원하지 않는 바"인가? 그것은 자연히 “民心이 원하는 바"를 속박하는 傳統道德이다. 이지가 전통도덕을 부정한 의론은 매우 많으나, 여기서는 상세히 논할 겨를이 없댜 다만 明末의 顧慮成이 "충효와 절의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모두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 하고 木에는 원래 이러한 충효나 절의가 없다고 한다"73)라며, 이지를 비평한 말에서 그 일면을 볼 수 있다.

이는 전통적인 善惡親念을 완전히 전도시킨 것이 아닌가? 사실, 이러한 전통적인 선악관념을 전도하는 思는 일찍부터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왕기가 "진정한 본성의 행함(傾性流行)”을 제창하고, 일체의 "방비하고 규제하는 것(防檢)”이 모두 "반드시 사사로움(固必之私)"이라고 생각하였을 때, 이미 그러한 징조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이지에 이르러 비로소 고조되기 시작하였을 뿐이다.

善惡親念이 전도됨에 따라 일종의 새로운 社會理想이 출현하였다. 이지는 "윗사람은 또 강제로 자신을 따르게 하지 않으려 하며, 다만 그 힘이 할 수 있는 바와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와, 추세가 필연적안 것만에 대해 따르게 한다. 그런 즉 千의 사람들은 각기 千萬人의 마음을 얻고, 千의 마음은 각기 千萬人의 욕구를 따르니, 이것을 ‘사물은 각각 사물에 부합한다’라고 말한다.……무릇 천하의 백성들은 각각 그 生을 추구하고, 각각 소유하고자 하는 것을 획득하니, 마음을 바로 하여 歸化하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다"74)라

73) 『顧端文遺』 卷14. 『常下釋』 "有忠孝節義之人, 却云都是作出來的, 本體原無忠孝節義.“

74) 『明燈道古錄』. "上焉者又不肯强之使從我(此""上焉者"), 只就其力之所能爲與心之所欲爲• 勢之必爲者以聽之, 則千萬其人者各其千萬人之心, 千萬其心者各遂其千萬人之欲, 是物各副物.……夫天下之民各遂其生, 各獲其所應有 不格心歸者, 未之有也.”

는 의견을 제기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자유롭게 경쟁하며 성패는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곳은 결코 天堂은 아니지만, 바로 이것이 장차 틀림없이 中世紀를 대신하게 될 사회의 특징일 것이다.

이렇게 태주학파의 사유방법을 따라 계속 전진한 이지는, ‘牛'을 마음(心)으로 삼은 나여방의 사상을 발전시켜 "생활을 영위하는 생산작업(治牛産業)”의 ‘사사로움(私)’을 마음(心)으로 삼았으며, 이로써 현실생존이란 의미에서 人心의 解放이라는 理論의 종착역으로 나아 간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아직 인간 해방의 한 면에 불과하다. 만약 이것을 주로 情欲의 해방이라고 한다면, 또한 응당 思想의 해방이 있어야만 한댜 전자는 倫理學 혹은 道德競의 문제이고, 후자는 認識論혹은 眞理觀의 문제이다. 이상에서 논한 바와 같이, 前人들은 비록 이 두 가지 면에서 혹 치중된 쪽이 있기는 하지만 왕왕 혼용하여 구분하지 않았다. 이지 또한 이 두 가지 면을 명확히 구분하지는 않았으나, 이 두 가지 면에 대한 그의 논술이 상당히 충분하기 때문에, 분화가 시작되는 모종의 조짐을 나타냄으로써, 우리들이 따로 떼어 소개할 수 있게 한다.

왕기는 마음의 작용(用)을 논하면서 "학문을 듣는 것(開學)”을 특별히 반대하였다. ”견해가 많아질수록 피하는 것은 더욱 교묘해지고 감추고 숨기는 것은 더욱 면밀해진다(見解危多, 超避危巧, 覆藏兪密)’’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지는 이에 대하여 더욱 심하게 질타하였다. 그는 인간의 시초에는 모두 ”가식이 없고 순진한(絶假純傾)" ‘童心'을 지니고 있는데, 후에 "見이 귀와 눈을 통하여 들어가 그 내면을 주관하게 되니 童心을 잃어버리게 되고",75) “道理가

75) 『童心說』. ”有聞見從耳 目而入而以爲主平其內, 而童心失.”

見을 통하여 들어가 그 내면을 주관하게 되니 范心울 잃어버리게 된다".76) 오랜 세월이 흘러 ”道理와 見이 나날이 많아지자",77) ”이에 또 아름다운 명성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것을 떨치고자 힘쓰고",78) "아름답지 못한 명성이 추악함을 알아 그것을 가리려고 힘쓰다 보니",79) "心”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어 인간은 “전혀 시초의 것이 다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80) ‘心’이 이미 사라졌으니, 인간은 이제 철저한 庫僞의 세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지는 "견문과 도리로서 마음을 삼은 이상, 말하는 바는 모두 견문과 도리의 말이지 范心에서 스스로 우러난 말이 아니다"81)라고 하였으며, 또 "어찌 거짓된 사람으로서 거짓된 말을 하고, 거짓된 일에 종사하며, 거짓된 문장을 짓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릇 그 사람이 거짓되다면 거짓이 아닌 바가 없다"82)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여기까지는 대체로 왕기가 이미 가지고 있었던 의견이 나, 이지는 더욱 진일보하여 창끝을 직접 『六經』 • 『論語』 • 『孟子』에게 돌렸다.

무릇 『六經』 • 『論語』 • 『孟子』는 史官이 과도하게 찬양한 언사가 아니면 신하가 극도로 찬미한 말들이다. 또 그렇지 않으면 사리에 어두운 門下生과 어리석은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기억하기를, 머리는 두고 꼬리는 없에며 뒤는 얻고 앞은 빠뜨린 채, 자

76) 『童心說』. ”有道理從見而入而以爲主平其內, 而窟心失.”

77) 『童心說』. "箕見 日 以益多.”

78) 『童心說』. ”於是焉又知美名之可好也, 而務欲以揚之."

79) 『童心說』. ”知不美之名可丑也, 而務欲以俺之."

80) 『窟心說』. "全不復有初矣.”

81) 『童心說』. ”夫紙以見道理篤心矣, 所言者, 皆見道理之, 非童心自出之言也.“

82) 『童心說』. ”登非以假人首假言 • 假而文假文平? 盜其人低假, 則無所不假矣.”

신이 본 바에 따라 책에 쓴 것이다. 그런데 후학들은 그것을 살피지 못하고 성인의 업에서 나왔다고 하여 그것을 經典으로 삼을 것을 결정하니, 그것이 대부분 성인의 말씀이 아닌 것을 누가 알겠는가? 설사 성인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어떤 목적을 위해 나온 것이니, 병에 따라 약을 주고 수시로 처방을 내려 사리에 어두운 문하생이나 어리석은 제자들을 구제하는데 불과할 뿐이다. 병은 증상에 따라 약을 써 치료하는 것이라 고정된 처방이 없는 것이거늘, 그것이 어찌 갑자기 萬의 至論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六經』 • 『論語』 • 『孟子』는 道學家들의 구실이며 거짓된 사람들의 집결지로서, 절대로 商心에서 나오는 말에 대해 담론할 수 없음이 분명 하다.83)

"학문을 듣는 것(開學)”에 대한 迷信을 반대하고, "스스로 본심을 믿을(自信本心)” 것을 제창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사상의 해방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왕기 둥은 단지 後儒에 대한 미신을 반대하는 데에 지나지 않았으며, 『六經』 • 『論語』 • 『孟子』에 대해서는 종래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이 말한 "스스로 본심을 믿는다(自信本心)”는 것은 사실상 스스로 한 사람의 마음을 믿는다는 것이며, 이것은 죽 孔孟의 가르침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해방은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본질적으로 말하여 虛僞이기도 하다. 오직 이지만 이러한 금기를 타파하여, "스스로 본심을 믿는다”는 것이 선결조건 없는 진실한 말이 되게 하였다.

83) 『童心說』, ”夫六經 • 語 • 孟, 非其史官過爲喪崇之詞, 則其臣子極爲費美之語. 又不然, 則其辻門徒, 硏槿弟子, 記憶師說, 有頭無尾, 得後遺, 隨其所見, 筆之於 後學不察 便謂出自聖人之口也, 決定目之爲經矣, 執知其大半非聖人之言平?縱出自聖人,要亦有爲而發,不過因病發藥,隨時處方,以救此一等切槿弟子 徒云耳. 藥뎀假病, 方難定執, 是岩可速以爲萬世之至論平? 然, 六經 • 語 • 孟, 乃道學之口貫, 假人之淵飯也, 斷斯平其不可以語於童心之言矣.”

진정 "스스로 본심을 믿는" 이지는, 자신의 머리를 갖고 있는 한 인간이 왜 반드시 다른 사람을 존숭 • 추종하여야 만 하며, 다른 사람의 信徒가 되어야 하는 지를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공자의 학문을 배우라고 권하자, 그는 하찮게 여기며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하늘이 한 사람을 낳음에는 자연히 한 사람의 쓰임이 있을지니 공자로부터 얻은 연후에야 족한 것은 아니다. 만약에 공자로부터 얻은 연후에야 족해진다면, 千古 이전에는 공자가 없었으니 끝내 사람이 될 수 없었겠는가? 따라서 공자의 학설을 배우고자 원했던 것이 바로 맹자가 맹자에 그쳤던 이유로, 나는 그것이 그르다는 것을 痛하는데 그대는 나더러 그것을 원하라고 하는가?84)

또 어떤 사람이 佛에 귀의하라 권하자, 그는 역시 달가워하지 않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西方은 아미타불의 道湯이며, 다른 한 부처의 이기도 하다. 만약 그 세계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곧 다른 집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나같은 사람은 이르는 곳마다 손님이 되어 주인되기를 원치 않으며, 처하는 데 따라 돌아다니고 일정한 삶의 거처가 없다. 이미 손님이 된 이상 오래 머무를 이유가 없게 된다. 따라서 서방으로 유력하여 서방의 부처를 임시 주인으로 삼으면 만족할 것이다. 그대처럼 그곳에 살기를 발원하여 기꺼이 그 집 자손의 무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85)

84) 『答耿中丞』. ”夫天生一人, 自有一人之用, 不待取給於孔子而後足也. 若必待取足於孔子, 則千古以前無孔子, 終不爲人平? 故悠願學孔子之說者, 乃孟子之所以止於孟子 模方痛祿其非夫, 而公謂我願之也?"

그는 공자 학문의 문하생이 되는 것을 하찮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佛家의 자손이 되는 것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무엇이 되고자 하였는가? "하늘이 한 사람을 낳음에는 자연히 한 사람의 쓰임이 있으니(天生一人, 自有一人之用)", 그는 바로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였으며, 자기의 마음으로 자기의 是非룰 건립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소위 짓는다는 것은 느끼는 바가 있어 홍이 일어났으나 뜻은 용납하지 않음을 이름이요, 혹은 감정은 격하나 언사가 느릿느릿함을 이기지 못함을 말한다. 만약 틀림없이 그 是非가 모두 성인과 부합한다면, 성인은 이미 是非가 있음이니 어찌 나에게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대저 성인에 의하여 是非를 정한다면, 말한 바는 성인의 말이지 내 마음의 말이 아니다. 말이 나의 마음에서 나오지 않고 글이 억제할 수 없는 경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無味한 것이다.86)

왜 자기의 是를 건립하려고 하는가? 새롭고 특이한 것을 내세우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세계는 발전하는 것이고 是非도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하여야 한다고 이지는 지적하였다. 그래서 그는 "무릇 是의 다툼은 歲時가 그러하듯이 밤낮으로 바뀌어 서로 같지 않다. 어제는 옳았으나

85) 『與李維淸』. ”西方是阿彌陀道場, 是一佛世界. 若願生彼世界, 卽是他家兒孫.……若僕到處爲客 不願爲主, 隨處生發, 無定生處. 錢爲客, 卽無長住之理 是以但可行游西方, 而以西方佛爲哲時主人足矣. 非若公等發願生皮 • 甘爲彼家兒孫之比也.”

86) 『炤 • 司馬遷』· ”夫所謂作者, 謂其興於有感而志不容已, 或情有所激而詞不. 克緩之也. 若必其是非盡合於聖人, 則聖人低已有是非矣, 尙何待於吾也? 夫投聖人以爲是非, 其所言者乃聖人之言也, 非吾心之言也. 言非出於吾心, 詞非由於不可退 則無味矣.”

오늘은 그르고, 어제는 그릇되었으나 오늘에는 또 옳다. 비록 공자로 하여금 지금 다시 태어나게 하여도 역시 어떻게 是非룰 정해야 하는지 몰라 단연 일정한 틀로써 상벌을 행할 것이다”87)라고 하였으며, 또 “대저 때가 같지 않고 추세가 다르면 말[言]이란 것은 변한댜 따라서 행동이 사건의 추이를 따르면 말은 사람에게 있어 달라지게 된다. 어찌하여 이전의 행동에 의거하여 전범으로 삼고, 이전의 말을 지켜 나머지 생의 모범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88)라고 하였다. 바로 세인들이 이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오로지 ”이전의 말을 지켜 나머지 생의 모범으로 삼으려 하는(守前言以效尾生)"데서 비로소 천하에 是非가 없어지게 되었다.

이진 三代에 대해 나는 논하지 않겠거니와, 이후의 三代는 漢 • 唐 • 宋이다. 중간의 천백여 년 간은 유독 是非가 없었는데, 어찌 그 사람들이 是非가 없었겠는가? 모두 공자의 是非를 是非로 삼았으니 是非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람들에 대하여 是非를 따지는 것을 또한 어찌 그칠 수 있겠는가?89)

그러므로 소위 자기의 是非를 건립하는 것은 결코 마음내키는 대로 개인의 好惡울 제창함이 아니고, 다시 새로이 세계의 是非를 찾는 것이다. 이지는 오직 공자만 배우는 것에 반대하였는데, 이것은 책을 묶어 놓고 보지 않으려 한 것이 아니고, 널리 뭇 사람의

87) 『藏害 • 世紀列傳總目前論』. ”夫是非之爭也, 如歲時然, 夜更送, 不相一也.詐日是而今日非矣, 詐日非而今日又是矣. 難使孔子復生於今, 又不知作何是非也, 而可以定本行罪貫哉.”

88) 『先行錄序』. "時異勢殊 則言者斐矣. 故行隨遷, 言病人殊. 安掛往行 以爲典要, 守前言以效尾生耶?"

89) 『藏害 • 世紀列傳總目前論』. "三代, 吾無論矣, 後三代, 淡唐宋是也. 中間千百餘年, 而獨無是非者, 登其人無是非哉? 咸以孔子之是非爲是非, 故未有是 非耳 然余之是非人也, 又安能已.”

장점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농사 짓고 도자기 굽고 고기잡는 사람들에게서 취하지 못할 것이 없다면, 千萬 聖의 善울 유독 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어찌 반드시 오로지 공자만 배운 후에 이룰 정통의 맥으로 삼으려 하는가?"90)라고 하였다. 그가 "견문과 도리(見道理)"를 마음으로 삼는 것을 반대한 것은 눈을 감고 귀를 막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였댜 그래서 그는 "누구는 소시적부터 늙어서까지 乳湘에 의거하여 시세를 논하였는데 한 사람이라도 동의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내가 처음 출사하였을 때 친히 남쪽 왜구와 북쪽 오랑캐의 난을 경험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운남성에 들어가 또 지방 군사와 요역나온 소년들의 변란 소식을 자세히 들었다. 대개 독서로 녹을 먹는 사람들은 의견이 모두 같아서 내가 본 바로서 따져 물으면, 미쳤다고 여기지 않으면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91)라고 하였다. 그는 일찍이 학문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명하였다.

오호, 이것은 어떤 일인가? 천지의 마음, 백성의 생명, 만세의 평화가 모두 여기에 있으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나는 禁思를 피하지 않고 골수에 사무쳐 그것을 논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실질에 힘쓰고 道룰 배우게 하여, 마음으로 얻는 바가 있기를 기대한다.92)

90) 『答耿司志』. ”耕綜陶漁之人槪無不可取, 則千聖萬賢之善獨不可取平? 又何必學孔子而後以爲正脈也?"

91) 『抽令喆』, “茶也從少至老, 原情論勞 不見有一人同者.……余初仕時, 親見南倭北前之亂矣, 最後入, 又翔土官童之變矣. 大槪韻害食祿之家意見皆同, 以余所見質之, 不以爲狂, 則以爲可殺也.”

92) 『炳 • 德業儒臣論』· ”盛 此何事也? 天地之心, 生民之命, 萬世之平, 皆在於此 而可輕平? 予是以不避思, 切骨而論之, 要使人務貫學道, 期心得.”

이것은 얼마나 엄숙하고 장중한 진리 추구자의 태도인가. 이렇게 건립한 是非는 단독으로 고찰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는 면에서 볼 때는 한 개인의 是非라고 할 수 있으나, 실질적인 내용으로 보자면 천하의 공변된 是非이다. 따라서 이지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오늘날의 是非는 나 이탁오 한 사람의 是非라 하여도 좋고, 千萬世 大賢人의 공변된 是非라 하여도 좋으며, 내가 千萬의 是非를 뒤집어 놓아 내가 非是로 여기는 것을 거듭 非是로 여겼다고 하여도 좋다.93)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자의 책임이며, 또한 진리 추구자가 응당 구비하여야 할 氣槪이기도 하다.

思想家에게 있어 사상의 해방을 쟁취하는 것은 바로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조금도 이익을 의미하지 않으며, 단지 헌신만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다. 이지는 바로 진리를 추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것이다. 明代에 있어 사상의 해방을 쟁취하고자 하는 思潮도 여기에 이르러 끝이 나고 만다.

이상이 바로 명대에 있어 인간 해방을 추구하는 思想史의 한 단락이다.

우리들이 이 一段의 思想史에 주의하는 까닭은 그 가운데에 깊이 생각해 볼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계의 일부 인사는 중국의 전통문화가 近 • 現代로 나아가는 내재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현재 근대적 의의를 구비하였다고 알려진 모든

93) 『藏 • 世紀列傳總目論』. ”今日之是非, 予李卓吾一人之是非可也, 爲千萬世大大人之公是非亦可也, 謂予顧倒千萬世之是非, 而復非是予之所非是者, 亦可也.”

사상은 모두 서양에서 전입된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같이 동일한 사실 판단의 기초 위에서 또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 결론이 나온댜 그 가운데 하나는, 중국인은 자신의 가치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근대적 의의를 구비한 서방의 사상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중국 민족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따라서 중국이 현대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전통문화를 포기하고 근본적인 文化移植을 진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대에 있어 이 일단의 사상사는 오히려 이러한 판단과 결론에 대하여 검토할 여지를 제기한 듯하다. 첫째, 이 일단의 사상사 가운데 모종의 경향, 특히 이지의 어떤 관점이 어느 정도의 근대적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닌지? 이 점을 완전히 부정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지 않겠는가? 둘째, 어느 정도의 근대적 의의를 지닌 이러한 경향과 관점은 중국 전통문화 자체의 발전에 의한 산물이 아닌지? 그 속에서 도대체 서양 학문의 束浙 흔적을 얼마 정도 찾아낼 수 있겠는가?

우리 중국인은 확실히 강렬한 민족특징을 지니고 있으나, 우리 민족이 인간의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특수한 것은 아니다. 다른 민족이 제기한, 인류 공통의 본성에 근원하는 요구들을 우리 민족도 일정한 때가 오면 제기할 것이다. 단지 우리들은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 사유방법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문화 사유방법에 따라 이러한 요구들을 제기할 것이다. 우리들의 문화 사유방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죽 ‘중국의 전통문화가 近 • 現代로 나아가는 내재적 구조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 일단의 思想史가 이미 약간의 단서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本文에서 토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김경동 옮김)

明淸 諸子學과 明淸思想에 대한 一考察

魏宗禹

明副甲는 중국 고대사회의 末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意識形態에 있어서 思維構造의 변화가 눈에 띄게 두드러지고 있는데, 우리는 의 태동과 발전 그리고 非儒家學派의 사상이 중시되고 또한 활발히 연구되었던 데서 이런 사실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明打는 先秦 諸子易의 연구가 상당히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그러한 연구는 명청 실학사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단서이었기에 末의 魏源(1794-1856)이래 課嗣同(1865-1898), 梁啓超(1876-1929), 胡適(1892-1962), 侯外藍(1903- ) 둥 학자들의 주목을 받음과 동시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연구되었다. 필자는 그간의 여러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역사와 논리, 죽 객관적 법칙성을 통일시키는 방법을 이용, 明淸時代의 諸子學을 간단히 논술하여 명청 사상발전의 단면을 설명함으로써 그 가치와 의의를 밝히고자 한다.

1. 明初까지 異端視된 諸子學

明初는 漢代로부터 따지면 대략 1천5백년이 흐른 시점이다. 그러

나 의식형태에 있어서는 여전히 ‘諸子百家를 폐기하고, 오로지 儒家만을 받드는(龍鼎百家, 獨崇伯術)'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先秦시대에 百家가 爭鳴하던 때 형성됐던 諸子學은 淡武帝 이후, 설 자리를 잃어갔다. 諸子學 가운데 개별적인 어느 학파를 연구했던 학자도 물론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諸子學은 거의 연구되지 않았댜 이러한 현상은 明初까지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明初의 학술계는 사상사에서는 ‘朱子의 學說을 서술하는 시기(述朱)’로 개괄하고 있는데 바꿔 말하면 朱子理學의 회복시기로 보고 있는 셈이다.

明初 이후 학술의 중심은 理學을 새롭게 부홍하는 데 있었지만 그러나 先秦諸子에 대한 연구도 간간이 이뤄지고 있었다. 당시 학자들이 諸子學 가운데 어느 일정한 학파를 연구했던 까닭은 埋學의 부족한 면을 보충하거나 ‘이단을 물리치기(群異端)'위해서였는데, 바꾸어 말하자면 제자학 자체를 포함한 ‘이단사설(異端邪說)’을 비판하거나 억압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明初의 理學大師 薛은 『錄』에서 제자서를 읽지 않거나 제자사상을 몰라서야 어떻게 ‘이단사설’을 물리칠 것이냐고 일부 유가들에게 권고하는 대목이 있다. 말하자면 제자서를 읽고 제자사상을 연구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아울러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제자백가의 말도 다 일리는 있다. 하지만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실용적이라고 생각하면 오해겠다. 그러기에 『論語 • 子張篇』에 ’致遠恐泥(원대한 큰 도에 이르는 데 통하지 않을까 두렵다)’라고 경계했던 것이다.1)

1) 『料幻』 卷四. ”諸子百家, 皆有可取之言. 但欲句句求質用, 則有不通矣. 故曰致遠恐泥.“

인용문으로도 알 수 있듯이 薛范은 제자학에 대해 다소 관용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런 태도는 漢代 이후의 상황으로 볼 것 같으면 상당히 진보된 견해이다. 그러나 薛瑢의 전체적인 사상체계로 보면 그 기본은 여전히 程朱의 사상을 준수하는 입장이며, 위에서 제자서를 읽어야하는 목적도 실은 유가의 독존적인 국면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淡代 이후로 비록 미미하나마 道家나 兵家의 서적을 연구했던 학자는 끊이지 않았다. 魏源은 『命老子』에서 “老子를 연구한 학자는 韓非 이후로 줄잡아 천여 명에 이른다(解老自韓非下千百家)”고 말한 바 있댜 魏晉時代의 玄學과 佛學 그리고 ‘宋代’의 理學은 모두 도가 즉 老莊의 사상을 홉수하여 발전했다. 兵家 가운데 『孫子兵法』과 『尉箱子』 그리고 吳起의 저작이라 여겨지는 『吳子』등 兵法舌는 줄곧 군사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위에서 언급한 병법서는 宋代의 『武經七』에 편입되어 지휘자의 필독서가 되어 왔으며 아울러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선진시대에는 유학과 더불어 ‘인기학파(顯學)'였던 墨은 晋代의 老勝이 연구했을 뿐 별로 학자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그나마도 老勝의 著作은 오래 전에 사라졌으며 다만 그의 『子敍』가 『晋 • 魯勝傳』에 실려 있을 따름이다. 그 밖의 제자서에 대한 연구도 愚子와 대동소이하며 거의 연구한 학자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明初의 宋嫌은 일찍이 『元史』를 총편집한 대학자였는데, 그가 『公孫龍子』을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白馬非馬’라는 비유나 ‘堅白同異’라는 말은 끝내 이해가 잘 안된다. 그 뒤로 시간이 날 때마다 수시로 펼쳐봤지만 龍과 뱀을 잡으려는 것처럼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정말 난해하구나, 公孫의 학설이여!2)

宋嫌하면 당대의 유명한 학자인데 얼마 되지도 않은 『公孫龍子』을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명칭과 실체를 분명히 하려거든 (그따위 야릇한 책을) 속히 태워버려야 한다(荀欲名質之正, 函火之)”고까지 극언을 하였던 것이다. 이런 사실 하나로만 봐도 『公孫能子』와 그의 사상에 대한 연구가 장기간 단절되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래도 『公孫龍子』하면 名家의 중요 저작인데 이 모양이니 기타 다른 제자서야 더이상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동안 냉대받아온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明初의 劉基는 『明史 • 劉基傳』에서 "그의 문장은 기세가 좋고 출중하여 宋嫌과 더불어 當代의 文章家로 이름이 높았다(所爲文革, 氣昌而奇, 與宋嫌井爲一代之奇)”고 칭송했다. 그러나 그의 대표저술인 『硏琦子』에는 겨우 荀子의 한 마디를 거론했을 뿐, 기타 제자학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明史 • 劉基傳』에 황제인 朱元璋이 劉基를 평가했던 말이 인용되고 있는데 "(劉基는) 자주 孔子의 말씀을 가지고 採을 깨우쳐 주었다(敎以孔子之言)”고 했다. 이 말은 바로 劉基의 기본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劉基의 『郁龍子』을 자세히 읽어보면 明初의 학풍이 宋代와는 다소 다르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다른 점을 우리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郁龍子』의 서술형식이 우언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한편한편마다 한 가지 사실을 서술하면서 아울러 한 가지 이치를 밝히고 있다는 점 이다. 예를 들면, 『兪政』편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보인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마치 의사와 같다고나 할까? 의사는 맥을 짚어 중세를 파악하고 중세에 맞춰 약방문을 내린다. ……

2) 『諸子辯』. "白馬非馬之廣 堅白同異之言, 終不可解. 后閩之, 見其如捕龍蛇, 迅勝寒, 益不可掛手. 莊哉! 其辯也.”

그러한 진맥과 약방문이 제대로 된다면 환자는 살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다.3)

위에 인용문으로 알 수 있듯 사실을 서술함에 있어서 비교적 현실적이고도 평이한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이어서 둘째로는 문장의 스타일이 참신하다는 점이다. 한 편의 글이 글자수가 많아야 백여자, 적으면 수십 자로 되어 있다. 이런 경향은 선진 제자서의 스타일과 유사하며, 宋代 이후에 만연된 理銀家들의 속빈 강정같은 선문답 식의 어록체나 따분할 정도로 길기만 할 뿐 알맹이가 없는 注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서 보면 明初의 선진 제자학에 대한 태도는 그 이전과 비교하여 볼 때 다소 관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관점에 있어서는 여전히 그 이전과 하등 다를 바가 없음도 알 수 있다. 明初 학자들의 선진 제자학에 대한 태도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는 제자학 연구의 범위가 대단히 협소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은 제자학에 대한 전면적인 이해가 결핍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물론 제자학의 일부분에 대해 섭렵했던 학자도 있었지만, 그들의 목적은 단지 유학의 부족함을 보충하여 이학체계를 더욱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隋代의 王通올 예로 들어보면, 그는 "儒家 • 釋家 • 道家의 三家는 하나가 될 수 있다(三敎可一)”고 하여 釋家와 도가의 장점을 취해 儒家의 단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宋代 학자들은 바로 이러한 임무를 실천에 옮겨 新儒學, 죽 理學을 새롭게 창립시켰던 것이다. 둘째로 그들이 제자학을 연구했던 또 하나의 목적은 이단을 배척하여 유학의 독존적인 위치를 수호하려는 데 있었다. 漢代에 ‘이단을 배척했다(群異端)’는 것은 선진 제자학을 가리키는데, 이런 행위

3) ”治天下者 其猶醫平 醫切脈以知證, 審證以爲方. …… 牛, 不當死矣.”

는 중앙집권정치의 반영이자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唐代 이후의 ‘辭媒端'도 위와 같은 목적을 위해 불교를 배척했던 것이다. "생물은 (천적과의) 조화를 통해 (날로) 견실해지니, (그러한) 견제세력이 없으면 (오히려) 도태되고 만다(和牛物, 同)". 儒家의 發殷도 이와같이 ‘이단’과의 충돌과 조화 속에서 계속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淡代 이후, 제자학을 종합평가했던 학자로는 魯勝, 劉線, 柳宗元그리고 導適 동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劉臨은 『文心龍 • 諸子篇』에서 대단히 훌륭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를테면, "는 道家學說을 펼치며 상상의 극치를 달렀다(莊周述道以翔)"든지, ”墨衍은 근검절약의 교훈을 집행했다(墨租執儉簡之敎)"든지, ”尹文은 명칭과 실제가 부합되는지의 여부를 따졌다(尹文課名質之符)"든지, "子는 자연계의 변화를 가지고 정치를 운운했다(子義政於天文)"든지, ”申子(申不) • 商子(商陝)는 藏刑峻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申商刀錄以制理)"든지, ”鬼谷子는 변론으로써 업적을 올린다(鬼谷辱物以策動)"든지, ”尸校는 名家의 학설을 총괄했다(尸俊兼總丁雜術)"든지, ”『列子 • 易問篇』에는 愚公移山과 龍伯國의 거인이 한걸음에 大海를 건넜다는 이야기가 있다(列子有移山踏海之說)"든지, ”『淮南子 • 天篇』에 共工이 幽頭과 싸우다 潭札에 부딪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졌다(南有傾天折地之說)" 둥이 그것이다. 劉臨은 『文心離龍』『諸子篇」 첫머리에서 또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諸子란 道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하고 아울러 자신의 뜻을 저술로써 표현한 것이다. (옛말에도) 덕행에 있어서 높은 성취를 이룬 사람이 가장 훌륭하고 그 다음은 저술에 있어서 높은 성취를 이룬 사람이 훌륭하다고 했다. 일반 백성들은 무리를 지어 생활하기에 복잡한 세상살이에서 출세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그러나 무

릇 君子는 자신의 명성과 덕행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을 한스러워한다. 그러기에 오로지 걸출한 영재만이 자신의 저술을 후세에 남가고 아울러 명성을 휘날리게 되니 이것은 마치 해와 달이 하늘에 걸린 것처럼 모두가 우러러보게 된다.4)

劉盟의 논술은 제자학을 공정하게 평가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짤막하긴 하지만 요점을 찔러낸 대단히 훌륭한 평론으로, 제자학을 이처럼 간단명료하게 지적한 문장도 혼치는 않다. 제자학에 대한 劉螺의 논술을 두고 代 학자 傅山(1607-1684)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의지가 당당하고 굳세며 주관이 강하고 판단이 칼같다. 거침없이 내뱉는 것 같지만 실은 캥기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의 평론을 하나 하나 검토해보면, 걷만 번지르르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부한 이야기도 아니다. 또한 전혀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허점투성이도 아니다. 中古時代 저술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렇게 하기가 절대 쉬운 게 아니다, 절대 쉬운 게 아니다!5)

傅山은 위의 글에서 劉綿의 『者子篇』에 대해 두 가지 점을 밝히고 있다. 첫째는 劉線의 논술을 인정하고 높이 산 점이다. 傅山의 생각으로는 中古時代에 제자학은 보편적으로 배척을 당했기 때문에 제자학을 연구하는 학자는 별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劉線은 이처럼 제자학의 장점을 지적하고 그 요점까지 집어냈다. 이렇게

4) ”諸子者, 入道見志之. 太上立德 其次立 百姓之群居, 苦粉雜而英. 君子之處世, 疾名德之不章. 唯英才特達, 則炳曜垂文, 騰其姓氏, 想諸日月焉.”

5) 『雜錄』. ”心氣堅, 眼偏手練 似無思, 而非無思. 以其言, 濟其, 不華不腐 不周不, 中古之風也. 難難!"

하는 데는 깊고 넓은 학문적 수양과 뚜렷한 의지력이 없어서는 불가능한 것인데 劉線은 그런 면을 갖추었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傅山은 劉腐에게도 어쩔 수 없는 한계점이 있음을 지적했다. ”似無思罰 而非無思“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면 劉綴은 「諸子篇」 말미에서 "兩漢以後로 (제자학의) 기세가 점차 약해지기 시작하여 크고 넓은 길이 앞에 열려있는데도 (학자들은 유가의 설에) 빌붙어 그 속에서 응용이나 하고 있으니 이것은 (戰國時代 이전과 비교할 때)고금의 상황이 점차 변했기 때문이다. 오호라! 제자백가는 그 당시와는 맞지 않았으나 그들의 이론과 포부는 저술을 통해서 충분히 편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견해는 그 이전의 학설을 뛰어넘고 그들의 포부는 후세에 길이 남았다. 설사 돌과 쇠가 섞여 없어진댜 해도 그들의 목소리마저 사라질 리 있겠느냐!"6) 여기서 劉錄은 양한 이후의 제자학 연구는 단지 유가의 설에 빌붙어서 응용이나 할 따름이었지 실질적인 발전은 없었음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자학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될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그는 열망하고 있었다. 그러는 한편 劉線은 또한 정통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史記』에는 用兵의 책략이 많이 수록되어 있고 諸子에는 정당하지 못한 수단이 꽤 섞여 있다. 그렇긴 하지만 박학다식한 학자는 응당 그 요점을 붙잡아 그 꽃을 감상하고 그 열매를 음미하면서 옳은 것만 취하고 그릇된 것은 버리는 게 온당하겠다. 그렇다면 옳고 그름의 차이까지 분명히 알면서 박학다식한 바이니 그의 학문은 일대 장관이 아닐 수 없겠다.7)

6) ”兩漢以后, 體勢弱, 難明平坦途, 而類多依來, 此遠近之潮變也. 盛夫! 身與時龜 志共道申, 原心于菓古之上, 而送懷于千古之下, 金石源矣, 聲其銅平!"

7) "蓋以史記多兵謀 而諸子雜說術也. 然治聞之士, 宜撮綱要, 華而食實, 棄邪而采正, 極麻參差, 亦學家之壯觀也.”

劉線이 諸子雜論術'이라든가 ‘棄邪而采正'이라고 한 점은 바로 그가 儒家의 五經울 기준으로 邪正을 구분하고 또한 전통 儒家에서 말하는 ‘잣대에 맞다(入短)’와 ‘기준에서 벗어났다(出軌)’는 그런 척도를 가지고 한 말이다. 그러므로 劉媒의 제자론은 비록 훌륭한 평론이긴 하지만 여전히 經學의 ‘思罪'을 벗어나지 못한 ‘中古之風'의 소산이며 아울러 前代의 학문을 총결하여 제자학을 논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明初 이후로 내려오면서 물론 ‘中古之風'을 여전히 답습하긴 했지만 그래도 제자학에 대한 태도가 그 이전처럼 고집스럽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明初에 편찬된 각종 類나 如로부터 그러한 경향을 감지할 수 있다.

明代에 편찬된 類 가운데 『永樂大典』이 가장 방대하다. 총22,877권인데 목록만 해도 60권에 달한다. 『永樂大典』은 永樂 元年7월에 편찬을 시작하여 5년(서기 1407년) 10월에 완성되었는데 주편은 解, 姚廣孝 둥이 맡았다. 明 成祖 朱桃諭는 解綴둥에게 『영락대전』의 편찬을 명하면서 고금의 사물이 이 책 저책에 흩어져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무릇 문자가 발명된 이래 經史子染의 각종 서적을 비롯하여 天文, 地誌 陰賜 醫卜, 僧道, 技藝에 이르기까지 분야별로 각각 한 권의 책으로 묶되 빠짐이 없이 자세하게 하라.8)

『永樂大典』은 선진부터 明初까지의 각종 서적을 망라하여 분야별로 나누고 韻의 순서대로 배열한 일종의 백과전서인데 내용이나 양에 있어서 대단히 방대한 類習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8) 『成祖質錄』 卷二十一. “凡契以來, 經史子染百家之, 至于天文, 地志, 陰陽 醫卜, 僧道, 技松之言, 各輯爲一, 毋限浩繁.”

부분은 제자서도 전부 수록되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훌륭한 것은 수록된 자료가 "직접 원문에서 발췌했으며 한 글자도 마음대로 고치지 않았다(直取原文, 未拉改片語)”는 점이다.9) 그러므로 『영락대전』의 출현은 하나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롬이 아니라 중국 역사에 있어서 이전의 학문을 총결한다는 의미가 있고, 아울러 제자학의 연구에도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자면, 明初까지만 해도 제자학은 여전히 이단시되었지만 그러나 상황이 그 이전에 비해 훨씬 개방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明代 중엽에 이르러서는 더욱 분명히 나타나게 된다.

2 . 明代中葉의 諸子學硏究 熱風

明代 萬曆年에 태어났던 査織佐는 『國海錄』에서 당시의 학풍을 "당시는 제자학 연구에 대단한 붐이 일었다”10)고 적어 놓았다. 우리는 '대단한 붐(酷尙)’이란 단 한 마디로써 당시 학계는 제자학 연구에 대단한 열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明初 이후 학술계는 程朱理學을 되풀이하는 소위 ‘述朱'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곤경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대충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 데 첫째는 사회경제의 회복과 발전으로 말미암아 시민경제가 長足의 발전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경제구조가 바뀌면 의식형태도 자연히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당시에 ‘一條便法’의 稅制가 출현한 점이 바로 그 점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둘째는 理學의

9) 全祖, 『妙永樂大典記』 참고.

10) 卷3, 『陳子龍傳』. ”時風氣酷尙諸子.”

말류들이 그저 말장난이나 하는 심성의 토론에 탐닉하였다는 것이다. 注疏에 의존하는 그들의 사유방식은 이미 현실에 적옹할 수 없었다. 陽明心易의 출현은 새로운 대안의 제시하는가 했지만 역시 반짝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자학 속에 포함된 사상적 자료가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제자학의 연구열은 이와같이 致과 務質을 중시하는 학술발전의 추세에서 발생한 것이다.

한편 明代 중엽부터 儒家 내부에서도 ‘明道’로써 ‘致用'하자는 실학사상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바꿔 말하면 明經'의 목적은 明道에 있고, ‘道'의 목적은 致用에 있다는 뜻이다. 이런 주장을 했던 유학자들은 致用을 떠나서 講學을 하거나 經學을 연구하는 행위는 그릇됐다고 못박았다. 이를테면 王廷相은 "유자가 학문을 연구하는 것은 결국 明道하기 위할 따름이다"11)하고 말했다.

또한 黃館은 그의 저서 『明道篇』에서 아예 "儒는 經世의 학문이다(儒則經 世之學也)"하고 말했다.

그밖에 呂은 經世致用을 떠난 학문은 ‘거짓 학문(僞學)’이자 쓸모없는 학문(腐學)’이라 몰아부치며 "국가의 존망, 백성의 생사, 심신의 邪正(丁國家之存亡, 百姓之生死, 身心之邪正)” 둥과 같은 유용한 학문을 제창하면서 "실질적인 사업에 공을 세우고 업적을 남기는 게 사실 어렵다(建功立業並難事)”고 결론지었다.12) 말하자면 입으로만 나불거리는 학문은 하기 쉽지만 현실에 유용한 학문은 이루기에 쉽지 않다고 간파한 것이다. 그 외에도 王良은 儒學에서 말하는 이른바 道라는 것이 심오하여 접근조차 어려운 그런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일상생활이 곧 道다(百姓日用卽道)”라고 주장했다. 위에서 언급했듯, (점잖은) 유자들의 주장과 내용이

11) 『家藏菓』, 『太極辯』. ”船者之爲學, 歸于明道而已.”

12) 이상은 『哈語』 卷4 『品溪』에 보임.

설사 각기 차이가 있다고는 하더라도 그들의 공통된 요지는 ‘明道致用'임을 알 수 있다.

明代 萬曆年間 이후로 學術硏究의 추세는 明道致用의 실학사상 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학자들은 우선 三敎는 평등하다는 관점에서 제자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그 가운데 李災와 楊愼이 대표적인 학자였다.

李는 明淸時代를 통틀어 제자학연구의 창시자라 할만하다. 그는 道家뿐 아니라 兵家 및 墨家까지도 매우 진지한 태도로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老子解』, 『莊子解』, 『孫子參同』, 『墨子批選』과 같은 전문적인 제자학 연구서룰 저술했다. 그는 經과 諸子이 평등하다고 주장했으며 아울러 儒釋道 三敎도 평등하다는 전제로 그의 논지를 전개했다. 그는 『三敎品篇』의 序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三敎의 聖人들은 하늘을 떠받치고 땅 위에 우뚝 선 위대한 분들인데 그분들 사이에 무슨 우열이 있을 손가. 그러기에 ‘천하의 道는 한 가지요, 성현의 마음은 똑같다’고 하는 것이다. …… 다 똑같은 道이고 마음인즉 뭐가 다를 게 있겠느냐!13)

李踏는 三敎는 서로 통하며 三敎의 창시자는 모두 위대한 聖人이라고 설명했다. 이렇듯 聖人이란 칭호는 단지 孔子와 儒家에서 이야기하는 三代의 聖人뿐 아니라 老子와 釋迎까지도 聖人의 대열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또한 李費는 三敎의 宗旨에도 공통점이 있다며 三敎는 모두 "생사의 문제를 끝까지 연구하고 아울러 생명의 의의를 탐구한다(皆爲窮究自己生死根因, 探討自家性命下落)”고

13) “三敎聖人, 頂天立地, 不容菓同明矣. 故, ‘天下無二道, 聖賢無二心' …… 低謂之道, 謂之心矣, 則安有異哉!"

주장했다. 그러므로 三敎의 취지는 완전히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三敎의 차이점이란 사실 각자의 편견 때문이라고 못박았다. 따라서 그들이 모두 ‘天下無異道'의 관점을 갖는다면 불필요한 모순과 알력은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다. 단지 各派의 道란 그들의 敎主가 서로 얼굴이 틀리듯 각각 나름대로의 特殊한 스타일이 있을 수는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三敎의 敎旨는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서로 平等하게 대해야만 옳으며 그렇지 않고 어느 한 敎롤 이단으로 몰아 배척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의가 없다고 주장했다. 李의 이런 관점은 그의 「言善篇」과 「三敎好述」에서도 누차 밝히고 있다.

李費가 三敎는 평동하다는 관점에서 출발하여 經學과 諸子學이 평등함을 주장했다면, 楊은 직설적인 방식으로 거짓 학문의 위험성을 동탄하면서 質學思惟方法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우선 학풍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소리쳤다.

漢代의 학자들은 經을 해석할 때 설사 부자지간이라도 자기 주장을 끗끗이 편다. 그런데 요즘 학자들을 보면 나는 곤혹스럽다. 단지 宋나라 사람들의 첫마디만 주워담기 바빠 옛사람들의 훌륭한 견해는 거들떠도 안 본다. 그러다보니 이것저것 다 필요 없고 오로지 宋나라 사람의 말만 쫓고, 그것도 모자란지 宋나라 사람의 말도 필요 없다며 오로지 朱子만 따라간다.14)

楊愼은 明代以后의 宋儒后學들이 ‘推捨宋人之緖言'이나 할 뿐, 진지하게 학문을 하지 않는다고 못마땅해 했고, 또한 ‘盡掃百家'하며 儒家獨尊이나 꾀하려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學術을 발전시키는 원

14) 『升庵集』 卷71, 『先鄭后鄭』. “淡人說經, 難天地父子不荀同也 今之學者吾惑之 推捨宋人之緖 不究古昔之妙論, 盡掃百家而歸之宋人, 又盡掃宋人而歸之朱子.”

동력과 諸子百家를 활발히 연구하는 풍토를 연결시켜 주장한 楊愼의 견해는 대단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고식적인 학풍을 진작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실학적인 사유방법을 제시했다.

요즘 학자들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단지 소리나 그림자만 쫓아다닌다. 그러다 보니 學이 뒷전으로 물러난지도 어언 천년, 쓸데없는 말장난으로 후세의 학자들을 그릇된 곳으로 끌고갔다.15)

楊愼은 당시 학자들의 양태를 지적하여 "조금 난다는 자들은 性命이 어쩌구저쩌구 하지만 (한결같이) 宋人의 어록이나 우려먹고, 그것도 못하는 자들은 과거시험에나 매달려 宋人의 策論이나 배끼는데 정신이 없다"16)고 말했다. 당시의 학자들은 그저 말장난으로 性命을 토론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과거시험을 위해 八股文이나 책론을 연습하고 있다 보니 쓸모 없는 허황된 학풍이 만연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런 현상을 두고 楊愼은 다음과 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말로야 뭘 못하겠나? 하지만 입으로만 큰소리를 치는 사람은 대접받고, 묵묵히 실용적인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은 알아주지 않는다. 또한 남의 학설에나 빌붙는 사람은 승승장구하는데 독창적으로 자신의 학문을 하는 사람은 항상 고독하다. 정말 개탄스런 일이다!17)

15) 『升庵渠』 卷45, 『夫子與点』. ”今之學者, 循聲吹影, 使實學不明于千戊, 而虛談大誤于后人也.”

16) 『升庵渠』 卷52, 『文學之哀』. "高者談性命, 祖宋人之語錄; 卑者習括業, 抄宋人之策論."

17) 『亢飛魚躍』. ”惡虛者易高 而推責者反下, 冀飛者騰, 而特立者腦聞, 是可槪也.”

여기에서 楊恨은 학문의 虛와 을 대비시켜 이야기하면서 오로지 실학을 진흥시켜야만 學術 자체뿐 아니라 사회도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楊愼의 이러한 견해는 당시의 보편적인 관념과는 서로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楊愼이 광범위한 독서로 다져진 학식의 소유자였기에 유용한 학문이 필요함을 절감했고 따라서 학문은 반드시 현실에 유용하고 생활에 직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楊愼은 제자학 연구의 중요성을 갈파하게 된다. 『楊愼學報』에 따르면 제자서적을 정독한 것만도 여러 종에 이르며 평론 또한 훌륭한 견해가 허다한데, 그러나 그의 총결론은 단 하나로 즉 실용을 추구했던 것이다. 諸子評 중에서도 그는 특히 莊子룰 주목했다. 장자가 당시 사회에 분개했다는 대목을 서술할 때 楊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詩租發蒙은 대개 性理룰 따지며 세속의 명예나 추구하는 작자들이 하는 짓이었다. 그런 작자들의 추종자는 宋代 末期에 극치룰 이루었는데 그 여파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 결과로 사람들마다 꾹 참고 따르는 것 같지만 그러나 마음에서 우러나와 그러는 게 아니다.18)

楊恨은 學術界의 독점현상에 대해 깊은 불만과 압박을 느끼고 있었댜 따라서 그는 莊子처럼 모든 명예나 이익을 뒷전으로 팽개치고 오로지 實學思想으로 대항하리라 결심하게 된다. 그가 이처럼 발전하게 된 데에는 물론 先秦 諸子百家의 자유로운 학풍 및 莊子의 자유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새로운 국면을 불러일으

18) 『』 卷46. ”詩禮發蒙 談性理而釣名者以之. 其流莫盛于宋之晩世, 今猶未珍. 使一世之人, 谷聲而暗服之, 然非心服也.”

킨 楊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막강한 영향력을 불러일으켰다. 생명력 넘치는 李費의 사상이 바로 그 점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李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외람되게 선생의 일생과 경력을 살살이 조사하여 책상머리에 모셔놓고 마치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듯 내 행동의 모범으로 삼았다. 그런데 뭐도 모르는 자들은 뜬소문만 듣고 선생을 단지 박학다식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으니 정말 가소롭기 그지없도다.19)

위의 인용문으로도 알 수 있듯 李費는 楊愼을 존경하고 추앙했을 뿐 아니라 楊愼의 새로운 사상을 기준으로 자신도 매진하기로 결심했다. 그 후 李費는 자신의 결심을 진지하고 철저하게 실행에 옮기게 된다.

明代 중엽에 일기 시작한 새로운 사조는 楊愼과 李校가 주도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세 가지 있었다. 첫째는 俗學올 반대하고 실학을 주창한 점이다. 楊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워봐야 쓸모 없는 학문이 바로 요즈음의 속학이다."20) 李賢도 역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즘 학자들은 입을 열면 하지 않아야 할 말만 하고 있다."21) 이처럼 두 사람은 "천여 년 동안 어둠 속에 가려 있던 實學(千載的實學)”을 다시금 밝히겠다는, 바꿔 말하면 유용한 학문으로 무용한 학문을 대체하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둘째로 두 사람은 儒家의 독존을 반대하고 제자백가의 학

19) 『韻升庵渠序』. ”余是以窟敷仰之私, 欲考其平始末, 履歷之詳, 時時之莊凡案, 嚴然如游其門, 晶而從之. 況復有子綾, 從風吹盤, 以先牛但可謂之博學之人焉 尤可笑矣.”

20) 『揚升庵全集』 卷75. ”學而無用, 世之谷學以之.”

21) 『迫』 卷1, 『復宋太守』. ”凡言者, 言平不言者也.”

설을 부활시키자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어느 하나의 思想으로 전체 학문의 시시비비를 저울질하는 것을 반대했다. 아울러 明代의 사상이 빈약하고 폐쇄적인 원인은 모든 사고활동을 협소한 宋學의 테두리 안에 제한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점에 대해 楊愼은 다음과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비판했다. "요즘 학자들은 …… 宋나라 때 학자가 옳다고 한 것은 무조건 옳다고 하고, 宋나 라 때 학자가 그르다고 한 것은 덮어놓고 그르다고 주장한다."22) 그런데 그 원인을 추궁해나가면 朱의 사상을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李費는 당시의 그러한 학풍을 바로잡기 위해 옳고 그름은 애당초 정해져 있지 않다는 無定論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펼치고 있다.

무릇 옳다 그르다 하는 논쟁은 마치 세월처럼 주야로 바뀌는 것이라 뭐라 하나로 못박을 수는 없다. 어제 옳았던 것이 오늘 그를 수도 있겠고, 오늘 그른 것이 내일 다시 옳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설사 孔子가 오늘 다시 나타난다 해도 옳고 그름을 한 마디로 단언할 수 없거늘 어찌 섣불리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옳다 그르다 칭찬하거나 비 판하는가!23)

李校는 상대적인 시점에서 "모두들 孔子의 是非 기준을 표준으로 삼는(咸以孔子之是非爲是非)” 독단을 반대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사상의 자유로운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게 되었다. 李費의 "한 가지 학설만을 고집하지 않으면 四通八達할 수

22) 『升庵渠』 卷52, 『文字之哀』, ”今之學者 ...... 宋人曰是, 今人亦曰是, 宋人曰非, 今人亦曰非.”

23) 『藏』, 『世紀列傳總目前論』. ”夫是非之爭也, 如歲時然, 夜史造, 不相也 詐日是而今日非矣 今日非而後日又是矣, 難使孔夫子復生于今, 又不知作如何是非也, 而何速以定本行罰哉!"

있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법을 떨쳐버리면 현실에 유용한 학문이 나올 수 있다"24)는 관점은 그가 제자학을 연구하고 아울러 실학을 제창하는 이론적인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공자를 是非의 판단 기준으로 삼지 않는 李費의 관점이나 朱子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지 않겠다는 楊愼의 관점은 모두 學的 領域에 있어서 독단현상을 배격하면서 사상의 자유로운 발전을 주장하는 것으로 실상 일맥상통하는 견해인 것이다. 셋째로 두 학자는 학문을 위해 기꺼이 狗道하고자 하는 정신이 있었다. 明代는 經와 理學이 明王朝의 보호와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統合차원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明史』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天啓 崇禎(1621-1644) 사이에 문체가 더욱 급변하여 經書 • 史書 및 제자백가를 넘나들어야 행세하기 시작하더니 이때부터 유학을 이탈하여 논지를 펼치는 자가 많아졌다. 그리하여 국가에서 기준에 어긋나는 괴상하고 위험한 논조를 수 차례 엄금한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그러한 경향이 워낙 大勢를 이루었기에 별 효과가 없었다.25)

제자백가를 포함한 이른바 "괴상하고 위험한 논조"가 물밀 듯이 몰려들어 明末에는 급기야 "대세를 이루어 국가의 명령에 따르지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楊愼과 李費이 일으킨 새로운 사조가 대세룰 이루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理學家들의 ‘群異端'은 행동이 아닌 단지 입이나 글로써 압력을 넣는 데 그쳤다. 그러나 明代의 통치자들은 이러한 신사조를 심각한 정치문제로 보고 갖은 박해를 가했다. 그 결과 楊愼과 李贊둥 사상가는 모두 비명에 가고 말았

24) 『 • 孟阿傳』. ”不執一說 使可適行, 不定死法, 便可活世.”

25) 『明距』 卷69, 『選志』. “啓禎之間 文體益堤, 以出入經史百氏爲高, 而窓秩者亦多矣 難數申說異險辭之禁, 勢重難返, 卒不能從.”

다. 그들은 학문을 위해 狗道하고 말았던 것이다.

3 . 明末淸初는 諸子學 發展의 極盛時期.

明末淸初 중국의 學術界에는 實學이라고 하는 初期的인 계몽사조가 출현하게 되는데 선진 제자학이 새롭게 연구되기 시작하는 것은 그 사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제자학이 새롭개 조명되기 시작한 원인은 크게 다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思惟發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明代 萬曆以後 시민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明末淸初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시민의식이 대단히 활발해졌댜 그 결과로 실학사상이 중대한 발전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런 가운데서 제자학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실학사상과 제자학의 융합은 새로운 사유구조를 당연히 필요로 하게 된다. 둘째는 사회역사발전의 새로운 상황이 제자학의 연구를 부채질했다. 明末 시민경제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 결과 사회구조가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사회구조의 급격한 변화로 말미암아 淸나라의 침입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반항하는 수많은 지식분자들은 무력저항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무력저항이 실패하게 되자 그들은 냉정하게 두 왕조를 비교하게 되었다. 明과 淸나라 사이에 차이점이 많지만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하동의 차이가 없는 文化專制主義 정권임을 깨달았다. 따라서 일부 진보적 지식분자들은 反專制의 깃발을 내세우며 思想文化領域으로 투쟁의 장소를 옮겼다. 그들은 실학으로 전제정치의 御用俗學에 대항했으며 선진 제자백가의 자유사상으로 통치사상에 반대했다. 明末의 실학사상은 그 주요내용이 사회개혁이었지만 淸初에 이르러서는 전제를 반대하는 쪽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제자학은 부홍의 계기를 맞이했고 제자학의

연구 또한 역대 학술사상상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明末初에 諸子學이 부홍하면서 학술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점에 대해 顧炎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明나라 萬曆 말기에 학자들은 새로운 학설을 선호하여 莊子, 列子룰 포함한 제자의 학설을 儒家의 경전해석에 동원했다. 심지어는 佛敎의 경전과 老子룰 家와 결합시켜 천년 동안 맥이 끊어졌던 학설을 소생시켰다고 자부하기까지 했다.26)

顧炎武의 지적으로도 알 수 있듯, 明代 天開 崇禎年間 이후로 제자백가 사상을 위시한 각종 새로운 학설이 學術界룰 주도하면서 통치지위에 있던 官學, 죽 理學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의식형태의 새로운 변화를 암시하는 당시 국면에 대해 明나라 왕조는 엄격한 금지령을 내렸다. 淸나라가 들어선 뒤 얼마 안 되는 順治9年(1652년)에 淸 왕조 역시 비슷한 금지령을 내리고 있다.

항간의 출판업자들은 理學政治에 유익한 서적만을 간행토록 엄격히 통제한다. 그 밖의 쓸데없는 잡소리나 음란한 내용 및 사사로운 개인문집 간행을 일률 엄금하며 이룰 어기는 자는 단호하게 엄중 문책하겠다.27)

淸 왕조는 새로운 학설을 심각한 정치문제로 간주하여 ‘통행하는 것을 엄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므로 제자학과 실학사상을 모두 官方의 모진 배척을 받으며 여전히 ‘이단'시 되었음을 알 수 있

26) 『亭林文集』, 卷5, 『富平李君慕志銘』. ”當萬曆之末, 士子好新說, 以莊列百家之窟入經義, 莊至合佛老與吾個爲一, 自謂千載絶學.”

27) 魏錫 監, 『政全』 卷7, 『坊禁例』. ”坊間問買, 止許刊行理學政治有益文業諸 其他語達詞 及一切滋刻窟芸社稿, 通行嚴禁, 違者從重究治.”

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어긴 자는 엄중 문책하겠다’고 했지만 새로운 학설은 그런데 아랑곳없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다는 사실이다.

明末淸初에 제자학으로부터 실학사상을 연구해낸 학자가 즐비했고 아울러 그들의 표현방식 또한 각양각색이었다. 黃宗羲, 唐甄 등은 諸子著述의 형식으로 하였고, 王夫之, 顧炎는 ”六經의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모색을 한다(六經責我開生面)”는 사유노선을 따라 탐색했다. 그런데 諸子著作으로부터 직접 실학사상을 밝혀낸 학자로는 傅과 方以智가 대표적이다. 傅山과 方以智가 제자사상에서 실학사상을 밝힌 것 가운데 다음 세 가지가 비교적 중요한데, 그것은 각각 更商思想, 경학과 제자학의 평등 그리고 四測之學이다. 실학사상의 이 세 가지 면은 明末淸初의 실학사상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學 理論思魚의 발전에도 원동력이 되었다.

상공업을 중요시하는 사상은 明末淸初의 실학사상에서 중요한 내용의 하나였다. 이 점에 대해 黃宗義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의 유생들 가운데 생각이 깊지 못한 사람들은 工商을 하찮게 여겨 제멋대로 억압하려고 헛소리를 해댄다. 허나 공업이란 말할 것도 없이 옛 聖王이 추구했던 바이었고 상업 또한 각자가 원하는 물건을 유통시키는 바이니 모두가 다 국가에 있어 아마 근본이 되는 일이겠다.28)

黃宗羲는 실학의 원칙에 입각해서 일부 유생들이 상공업을 업신여기는 풍조가 있는데, 그것은 터무니없는 견해라고 일축했다. 그는 당시 사회현실에 근거하여 농업뿐 아니라 상공업도 국가경영에

28) 『明夷待訪錄』, 財三 "情不察 以工商爲末, 妄議仰之 夫工固聖王之所欲來, 商又使其願出于途者, 盜皆本也.”

근본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관점은 당시 진보적인 사상가들이 한결같이 인식하고 있던 생각으로 그들은 사회의 富를 부단히 증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傅山은 墨家著作 가운데 재산의 사회작용에 대해 "백성둘이 활기차게 움직이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게 그들을 부유하게 하기 때문이다"29)하고 명쾌하게 지적했다.

傅山은 재산을 모으고 저축하는 행위는 인간이 생존하고 발전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이자 인간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원동력으로 보았다. 唐甄도 「占」의 「民篇」에서 ”財物이란 國家의 보물이요 百姓의 목숨이다(財者, 國家之寶也, 民之命也.)"하고 설파하여 역시 재산의 중요한 의미를 강조했다. 傅山은 ”何以緊人? 曰才"30)의 관점을 극구 찬동하며 "어떻게 사람을 모이게 하지? 그거야 財物이다. 그러니 가난한 선비에게는 자연히 사람이 모여들지 않는다. 집안이나 국가도 역시 똑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재물이란 말을 입에 올리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은 그저 선생입네 거드름이나 피우는 속빈 강정신세일 따름이다. 재물이 없어 항상 쩔쩔 매면서도 입은 살아서 仁義가 어쩌고저쩌고 떠벌리는 그런 인간은 누가 못할까"31)하고 말했다.

傅山은 재산을 경시하거나 홀대하는 관점을 반대했던 것이다. 사서의 하나인 『大學』에 "재물을 굵어모으면 백성이 홑어지고, 재산을 뿌리면 백성이 모여든다(財緊則民散, 財散則民緊)”는 말이 있다. 傅山은 『대학』의 이런 내용을 공박했다. 그는 현실로써 그 반대임을 주장했다. 죽, 재물이 있으면 백성이 모여들고, 재물이 바닥나면 백성도 달아난다. 말하자면 재화가 모자라면 사람을 모을 수가 없

29) 『子大取篇紀』. “生人之有爲也, 本以富生人.”

30) 『易 • 繁辭』.

31) 『孫郵藏傅山手稿照片』, ”何以裵人? 曰財, 自然貧士難平有群矣. 家國亦然.故諱財者, 自是一敎化頭骨相耳. 常貧賤隣語仁義之人, 大易容俊也.”

는데 그것은 가정이나 국가로 말해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唐甄도 「潭走篇」에서 "부귀를 업신여기며 安貧樂道한다(輕富此安貧賤)”는 것은 "한결같이 자신을 속이는 짓(皆自敗也)”으로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들은 모두 재화와 의리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더구나 재화를 모으면 백성이 흩어진다는 견해는 더욱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魏源은 19세기에 위와 같은 관점을 다음과 같이 다시 거론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세력이 형성되며 재화가 모이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사람이 모여들면 강대해지고 사람이 흩어지면 망하게 된다.32)

魏源은 재화가 모이면 사람들도 모여든다는 관점을 발전시켜 재화가 모이면 사람만 모여들 뿐 아니라 국가도 강대해진다며 富民과 强國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이런 면에서 明末淸初 富民思想의 의의와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傅山은 李의 “理財를 운위하지 않는 자는 결코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33)는 주장에 근거하여 "시장의 장사꾼도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市井賤夫可以治天下)”고 주장하기에 이르러 상공업을 중시하는 사상을 反專制로까지 발전시켰다.

경학과 제자학이 평등하다는 관점은 누구보다도 傅山이 먼저 제창했고 또 발전시켰다. 선진 제자백가가 사상과 문화에 있어서 지극히 활발하게 발전했던 이유가 바로 그들 제자백가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경쟁했기 때문이라고 傅山은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서 傅山은 사상의 자유를 원했다. 그는 어느 수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32) 『默祖』 治篇 三 "人所衆則勢生焉 財所在人緊 人强, 人亡.”

33) 『四評 • 大學』. ”不言理財者, 決不能平治天下.”

했다.

경학과 제자학 간의 논쟁은 너무 사소한 일이다. 유생들은 단지 六經밖에는 몰라 제자학은 경학만 못하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참 한심한 생각들이다.34)

傅山은 일반 유생들이 경학을 존중하는 반면 제자학을 업신여기는 풍조가 참으로 속된 견해일 뿐더러 근거도 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는 훈고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經'과 ‘子’ 두 글자는 모두 水에서 유래했다며 "물이면 홀러가지 않을 리가 없다(水則無不流行之理)"며 經과 子의 속뜻은 서로 통하는 대등의 관계로 玲卑의 구별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배움을 좋아함에 가릴 것이 없다(好學無常家)”라 하여 광범위한 지식습득을 주장하면서 비단 서적을 통해서 뿐 아니라 자연과 사회 속에서도 유용한 지식을 습득하도록 권했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好易l無常家」에 "견문이 넓지 못한 게 아쉬우니 古今을 넘나들며 노력해본다(昔見之博, 卿廷溫丁古今)”는 구절에 단적으로 나타난다.

傅은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했다.

정신나간 사람은 음식 맛을 모르듯이 (유가에만 푹빠진 사람들온) 부처님의 자비로운 행적이 중천에 떴는데도 보질 못하고 諸子述이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데도 듣질 못하니 아마 눈멀고 귀먹은 지가 너무 오래된 탓인가 보다. 멀어버린 눈을 뜨게 하고 찰못된 곳에 빠진 몸을 구출하려해도 (워낙 비관적이라) 이룰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35)

34) 『紅』 卷38. ”經子之爭亦末矣, 只因儒者知六經之名, 遂以爲子不如經之, 習見之仰可見.”

35) 『街紅翁渠』 卷16. ”失心之士, 幸無役采, 致使如來本遊大明中天而不見, 諸子

著述袁雷鼓旋而不. 蓋其述也久矣. 難然欲俠香蒙之目, 拔弱之身者, 亦將如此, 何哉!"

학문에 종사하는 것은 ‘음식을 먹는 것(篠采)’과 같아 각종 영양소를 홉수해야 비로소 신체에 유익하듯 제자백가를 자유로이 연구하고 그 장점을 홉수해야 창조적인 사유로 발전할 수 있다고 傅山은 생각했던 것이다.

경학과 제자학이 평등하다는 관점은 方以智도 역시 절묘한 비유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산 하나에 골짜기가 열이면 곧 계곡이 열이 된다. 그렇다면 무수한 산에 골짜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한 골짜기들이 하나같이 계곡을 이루고, 그런 다음 평지로 홀러나와 다른 물줄기와 합해져 강을 이룬다. 강과 강이 합쳐져 큰 호수를 이루고 결국은 바다로 홀러 들어간다. 이렇게 보면 발원은 제각이지만 결국은 하나로 통하지 않는가?36)

方以智는 학파의 성립이라든가 여러 학파가 병립하는 것은 큼지막한 산줄기에 이리저리 흐르는 계곡의 물과 같아 결국은 합해져 바다로 흘러든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方以智는 대저택에 비유해서 다시 한번 설명하고 있다.

대저택에 비유하자면 비록 안체니 누각이니 하는 구분이 있겠지만 모두 하나의 저택에 속해 있다. 길목이 통하고 또 그렇게 통하면서 서로 쓸모가 있게 되어 있다.37)

36) 『東西均 源流』. ”一山一血 則十溪, 則始源之多也無址數. 浙流至麗而成溪, 溪與溪合, 出與別河合. 潮合潮大, 始與四뀝合, 然后入平海, 쌌非源分而流一平?”

37) 『學錄文渠』 卷9 『無可大師六十』. "之大宅, 然難有堂奧樓閣之區分, 其賞一宅也, 門經相通, 而通相爲用者也.”

方以堡는 중국고대 사상문화 전체를 하나의 대저택으로 보아 각종 학파를 대저택의 일부로 간주하고 전체와 일부의 관계가 서로 툴리면서도 통하는 그런 유기적인 구조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는 경학과 제자학이 평등할 뿐더러 사회의식형태의 전체적인 협력관념이 스며들어 있다. 그러므로 方以는 ”敎는 셋이 아니다. 하나이자 셋이고 셋이자 하나이다"38)하고 말했다.

말하자면 儒釋道 三敎는 각각 독립적인 존재이면서 또한 유기적으로 통일된 사회의식의 한 구성부분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方以는 隋代 王通의 “三敎는 하나로 볼 수 있다(三敎可一)”는 주장, 明末[初의 경자평동설 그리고 유가의 ‘辛異端說' 등을 子史의 발전과 과학의 논리에 맞춰 합리적으로 해결하여 결론을 내렀다.

方以智의 사상에는 과학적인 실학정신이 보인다. 말하자면 그는 과학정신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方以智는 장자의 「知北游」를 비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세에는 실학을 하지 않으면서도 입만 열면 "은 言을 버리고," ”至爲는 爲를 버린다”고 하는데 그런 수작은 좁쌀장사와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39)

장자는 道에 합당한 말은 내뱉지도 않고 道에 합당한 일은 하지도 않는 것이 객관세계와 충돌이나 모순을 빚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대해 方以는 반대의견을 표시했다. ‘만약 더욱 노력하여 실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마음을 놓고 깨달을 수 있겠는가!'40) 하물며 ‘말세'에 태어났으면 더욱 더 道에 따라 의식적으로 세상의

38) 同上.

39) 『地抱莊』 卷6. ”末世之不爲貫學, 而口 口‘至言去言''至爲去爲'者, 其去賣相者何?

40) 同上. ”若不多方盡奪之, 安能放下而自覺平!"

일에 참여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方以智는 學과 識道룰 하나로 묶었다. 이 점에 대해 그는 ”數는 本末을 감추고 있는 단서이며 수 가운데 度는 본말을 적절하게 제어하는 것이자 道의 열쇠이다"41)하고 말했다.

方以는 실학의 도는 象數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실물에 대해 "실질적인 측량으로 질량을 밝힌 다음 그것을 기준으로 공식을 세우면 정확하게 될 것이다”42)하고 했다. 이것은 그의 실학사상이 현실적인 참여에 있을 뿐 아니라 실학의 내용 또한 이론사유와 수리 논리적 사유로 구성되어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方以智는 惠施의 ‘歷物之意'를 극찬하고는 忠施의 설을 "植物은 모두 大小, 長短, 傾로 호환하는 것으로 결국 하나로 통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43)고 개괄했다.

方以는 실학에 과학적인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公孫은 名과 을 뒤집어 사람을 헷갈리게나 하지만 惠施는 그런 장난은 치지 않는다. 그는 큰 도리(大理)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黃線가 하늘이 무너지거나 땅이 꺼지지 않는 이유 그리고 비바람과 번개 벼락이 치는 까닭을 물어보는 대목을 볼작시면 이건 商의 周牌와 太西의 質과 같이 物理를 따지고 드는 것으로 전혀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질문은 數를 겁내서 오리무중으로 도피하거나 거짓 아는 체하는 자들이 대답할 수 있는 문제겠느냐? 또한 보수적인 행보로 한치 앞도 못보고 제자리에서 떠드는 자들이 말할 수 있는 문제겠느냐?44)

41) 『菊地抱莊』 卷9. "爲藏本末之端幾, 而數中之度, 乃統本末之適節也, 道之治也.“

42) 『菊地抱莊』 卷3. ”以質測通幾 統類發凡, 罰矣!"

43) 『菊地抱莊』 卷9. ”歷物皆以大小, 長短, 虛貫互換, 而顯其通道爲一耳.”

方以智는 여기서 계속 실학의 과학적인 면에 대해 밝히고 있다. 우선 그는 ‘歷物'이 ‘核物窮理'라며 定과 定性의 실질적인 측정을 통해 사물의 질과 양을 구체적으로 확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과정에는 과학적인 質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론 사유 속의 과학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 또한 그는 ‘欲窮大理'의 ‘大理'는 곧 "龍互換, 而顯其通道爲一"의 ‘道'라고 생각했다. 이 道'는 곧 ‘質'인데 사물의 質測을 통해서 얻어낸 質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道'는 곧 ‘症'이기도 한데 추상적인 사유를 거쳐 논리적으로 도출해낸 결론이기 때문이다. 실학적 사유방법은 에 근거한 다. 말하자면 "전혀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梨可架宰)". 그렇다고 해서 "數를 겁내 오리무중으로 도피(長數逃玄)"하여 과학적인 사유나 이론사유를 벗어나서는 결코 안 된다. 그러므로 方以智가 말하는 虛實互換'의 이치는 理學家들의 ‘避質代曲'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점에 대해 方以智는 『物理小識』에서 "卽藏通幾"라는 명제를 내놓고, 『語錄』에서 "通幾護質測之窮"이란 명제를 내놓아 실학과학과 철학의 관계는 구별되면서도 서로 통일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의 質測質學 속에는 도리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 道理는 質測實易!의 論斷보다 高次元에 속해 있는 것으로 과학적인 求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을 뿐더러 실에 의거하여 大理를 구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선진 名家와 道家 및 현대 사회실학사조에서 발원하여 형성된 관점은 淸初以來의 실학을 새로운 단계로 제고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王夫之는 이 점에 대해 극찬하였다.

44) 『約地砲莊』 卷9. ”公孫龍翻名貫以破人, 惠施不執此也, 正欲窮大理耳! 觀黃細天地所以不不路風雨雷맙之故, 此似商高之周牌男太西之質, 核物窮理, 惡不可室者也 長數逃玄, 傾冒總者所能答平? 又登循常守培, 局應尺者所能道平?”

密翁과 그 아드님이 '質測'의 학문에 종사한 바 그것은 참으로 배우면서도 계속 사유했던 결과로 나타난 실학의 공로이다. 아마 格物이라 하는 것은 실물을 가지고 그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니 오로지 慣'이 바로 그 方法이다.45)

王夫之는 “六經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분야를 개척토록 다그친다(六經責我生面)”고 했던 사상가로 선진제자학 중의 名家에 대해 다소 경시했고 老子 莊子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을 가했던 학자였다. 王夫之는 '子는 意智로써 사물을 추측할 뿐 物理를 추궁하지는 않았다”46)하고 정확한 판단을 한 점은 方以智가 장자에 대해 내렀던 판단과 일치하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그는 ‘意智測物'을 경시했고 아울러 ‘意智測物'과 ‘窮理'를 분리해서 생각했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方以智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다. 方以智는 바로 이 점을 옳게 파악했기에 "通幾設質測之窮"이라는 정확한 결론을 얻을 수가 있었다.

王夫之가 方以智의 ‘質測通幾之學'의 ‘通幾'의 의의를 경시한 것은 아마 그의 사유방식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王夫之 실학의 특징은 買理買身으로 이것은 方以智의 質測通幾의 道理와는 상통하는 것이다. 王夫之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의 用은 모두 有를 用하는 것이다. 나는 그 用에 따르기에 그 體가 有함을 알거늘 무슨 의문이 또 있을까?"47)

45) 『』. ”密翁用其公子爲質測之學, 誠學思兼致之質功. 蓋格物者卽物以窮理, 推質測爲得之“

46) 『莊子通序』. ”莊子以意智測物, 而不窮物理.”

47) 『周易外傳』 卷2. "天下之用, 皆用有者也. 吾從其用, 而知其體之有, 待疑哉?"

王夫之는 器物의 은 그 관건이 ‘知体之有'에 있다고 하여 체가 있어야 비로소 용이 있다고 했다. 아울러 ”体와 用은 모두 있으면서 서로 이 요구된다(本用有而相需以質)”고 하여 休와 用은 모두 을 근거로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思問錄』의 「內篇」에서 "天에는 象이 되고 物에는 數가 되고 人心에는 理가 된다. 옛 聖人들은 象數에서 바로 理룰 얻었지 理에서 象數가 됐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48)고 하여 理는 天地萬物의 有한 理이지 有를 떠나서는 象敷도 없고 理도 없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王夫之는 ‘明体致用'의 命題를 내세운 바 있는데 여기에서 理룰 物의 法則과 구조로 파악하고 아울러 明体란 事物의 理致를 밝히는 것이며 明理의 목적은 致用에 있다고 했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유학에서 도출된 것이지만 方以의 質通幾之身과는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4. 乾嘉時代 諸子學의 歷史的 貢獻

乾慕寺는 제자학의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의 乾隆 • 嘉慶 연간은 청나라 왕조가 사회의 의식형태영역에 있어서 감시가 강화되면서 문화전제주의 정책을 실행하여 文字獄이 빈번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乾嘉時代의 학자들은 선진제자학의 사상적 연구에 매진하기 힘들었고, 따라서 그들은 제자서의 정리 쪽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고대로부터 내려왔던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적들을 정리하고 총결하는 작업은 사회형태가 전환하던 明末淸初에 있어서 사

48) ”在天而爲象 在物而爲數, 在人心而爲理. 古之聖人于象數而得理也, 未聞理而爲之象數也.”

상문화계의 많은 학자들의 역사적인 과업이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작업은 이미 明代 중엽부터 진행되기 시작했다. 楊恨은 일찍이 말한 바 있다. ”宋나라 학자들의 견해만 특별히 지키면서 淡個의 설을 홀대해선 안 된다(不可殊守宋人而略漢儒)”고 했고, 또한 ”宋儒의 失着을 돌이켜보면 漢의 설을 페기하고 자기 뜻대로 해석했기 때문이다’王 여기서 알 수 있듯 楊愼은 오로지 漢唐의 傳注疏釋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올바른 결론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漢學에서 배울 것을 권했고 아울러 독실하고 실질적인 학문에 매진할 것을 주장하여 晩의 사상계에 활력소를 불어넣었고 마침내 乾慕 고증학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 뒤로 顧炎武, 若 등이 고증학을 주장하고 나와 淸代 고증학의 시조가 되었다. 乾慕時의 학자들은 고적을 고증하고 정리하는 작업과 동시에 선진 제자학 저서에 대해서도 진지한 校注와 輯俠 그리고 辨僞에 종사하여 古代學術史에 있어서 훌륭한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 狂沖中, 畢玩 孫星衍 그리고 王先謙 둥이 있다.

乾 제자학 연구는 선진의 墨家著害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시했다. 여기에서 다음 두 가지 점이 주목된다. 첫째는 墨家 중의 模한 내용이 청대 학자들의 교훈이 되었다. 淸初의 학자 傅山은 『墨子』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서를 저술해낸 바 있다. 둘째는 유학의 독점적인 국면에 불만을 품고 선진시대에 유가와 대동한 관계에 있었던 墨家의 ‘顯學' 지위를 회복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乾盛時에 우선 注中이 墨學을 연구했다. 그의 『子 • 校勘稿』와 『表微』 1권은 이미 전해지지 않으나 그의 『墨子敍』와 『後紋』가 그 뒤의 학자들에게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畢玩의 『墨子注』과 孫胎讓의 『墨子開話』 둥 저작은 학계에 역시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輯俠

49) 『升庵梨』 卷42, 『曰中星鳥』魚 "影宋之失, 在廢淡傾而自用己見耳.”

역시 乾慕 諸子學 硏究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제자서는 秦漢時代 이후로 연구가 거의 끊겼는데다 장시간에 걸친 재난으로 말미암아 輯俠과 정리의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이를테면 『尸子』같은 책은 기록에 의하면 원서는 6만여 자라 했는데 宋 이후로 2만 자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 뒤 孫星衍, 繼培 등 학자가 2만 자의 기초 위에 30여 종의 고적 중에서 나머지 구절을 찾아내어 현존 『尸子』을 편집해냈다. 이런 작업이 얼마나 힘든 과정인가는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밖에 乾 학자들은 전체 제자서에 대해 진위를 가리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 성과야 완전무결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진일보한 연구에는 충분한 참고가치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乾嘉 학자들의 제자학 연구 및 정리가 원작자들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사회역사적 조건)에 의거해서 문제된 원문의 신뢰여부를 판가름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고적을 정리 연구하는데 근대과학 방법론이 은연중에 적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實學原則的 역사분석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江中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논술했다.

周官이 실직하자 제자학이 일어났다. 제자학들은 각각 하나의 학술을 택해 자신들의 학문을 정 립해갔는데 다들 따져보면 도리가 있고 논리가 서는 말들이다. 그러한 제자학들이 서로 비교하여 의견이 맞을 때는 仁과 義 같다가도 서로 거리를 두며 敬遠할 때는 물과 불처럼 상극이다. 마침내 『呂氏春秋』가 나와 제자학을 집대성하게 되었다.50)

江中은 춘추전국 시기의 사회와 역사의 발전에 근거하여 선진

50) 『述學 • 呂氏春秋序』. ”周官失其職 而諸子之學以興, 各擇一術, 以明其學, 莫不持之以故, 言之成理. 及比而同之, 則仁之與義, 敬之以和, 猶水火之相反也.最後『呂氏春秋』, 則諸子之有之.”

제자백가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본래사실을 분석 • 설명하고 있다. 그는 우선 西周시대에 학문은 官府에서 관장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다 東周이래로 학술이 민간으로 전파되었는데 제자학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태어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선진 제자학은 모두 "각각 하나의 學術을 선덱하여(各擇一術)” 차츰 독립된 하나의 학파를 이루었다고 말했다. 설사 공자가 창립한 학파도 역시 ‘魯지방의 儒(魯之征)’라고 하는 일종의 지방색을 띤 학파였을 뿐이다. 여기에는 江中은 각 학파가 평등함을 은연중에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뒤 그는 선진 제자학에는 서로 같고 다른 점이 존재하는 바, 서로 논쟁이 붙을 때는 물과 불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다 마침내 『呂氏春秋』가 출현하게 되는데, 이것은 제자학이 일종의 통일된 형태로 집대성하게 되는 추세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狂中은 당시 學術 상황에 대해 다음 두 가지 점을 확실하게 밝혔다. 첫째는 洛擇一術’이다. 선진 제자학은 한결같이 유용한 실학, 유용한 기예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注은 공자가 六藝로써 가르쳤다는 대목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유가의 六藝는 세상에 유용한 여섯가지 기능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후세 유생들이 입으로만 나불거리는 그저 문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둘째는 제자학의 학설은 모두가 "도리가 있고 논리가 서는(持之以故, 言之成理)” 말들로 독립적인 학파를 이루며 서로 平等하게 경쟁했다는 사실이다. 王中은 유가와 묵가를 동시에 거론하며 두 학파는 당시 '學'으로 양대학파를 이루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 주장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유가와 묵가가 서로 갑론을박했던 것은 당시 학술계의 정상적인 현상이라 생각하며 아울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현상이야 제자백가에 있어서 그렇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墨子가 孔子를 공박하는 거야 老子가 硏學을 몰아붙이는 것과 같다. 결국 서로 안 맞아 각자의 길을 갈 따름이었다.51)

의 서술은 있는 사실 그대로를 논술한 것으로 묵가를 올리고 유가를 낮춘 말이 아니다.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그의 일관된 역사분석법의 표현일 뿐이다. 狂中은 후대의 유생들이 墨家學派룰 억압한 데에 깊은 불만을 나타냈으며 그러한 억압은 역사적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고 또한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 자신도 墨子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공격과 모함을 받은 적이 있기에 그러한 느낌은 남다르게 심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부당한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墨家를 일컬어 "질박하고 실질적이며 자중하는(質質而自重)” 학파라고 치켜세웠댜 아울러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墨家의 학술이 여기 있으니 그 근본됨을 따져보건대 후세에 검소의 모범이 되고 만물에 치우침이 없고 數度에 번잡함이 없고 오로지 자신을 바로잡고 검토하여 당시의 어려움을 대비하고자 했거늘 그 옛날 道術이 여기에 있다고 하더니만 정말 옳은 소리구나!52)

注中은 墨學이 실용적인 학문으로 당시의 어려움에 대비하고자 했다고 주장하고 아울러 墨學 자체는 질박하고 실질적이며 자중하는 성격이기에 스스로를 바로잡고 검토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다

51) 『述學 • 墨子序』. ”此在諸子百家, 莫不如是. 故墨子之誤孔子, 猶老子之細儒學也, 歸于不相謀而已.”

52) 『墨子序』. ”墨子之學而原其始曰, 不復于後世, 不磨于菓物, 不輝于數度, 以繩墨自炤而備世之急, 古之道術有在于是者, 可謂知言矣.”

스리는 데 유익한 학술이라고 설파했다. 江中 자신이 세상에 쓸모있는 학술을 주장했기에 그가 墨家의 학술에 호감을 느껴 동지로 삼은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裁은 乾慕時의 저명한 학자이다. 그는 학술을 논하는 문장에서 "옛사람의 학문은 행동에 있었는데(古人之學在行事)", 요즘 사람들은 ‘벼슬길에 오르는 과거시험(制義)’에나 있다고 비판했다. 바꿔 말해서 엣사람들은 학문에 종사함에 독립적인 사고를 중요시하고 따라서 배움으로써 致을 생각하고 그리하여 실질적인 功效룰 염두에 두었다. 그런 반면에 요즘 사람들은 "학문을 하는데 내력이없고(空所依(L方)” 또한 宋易표의 족쇄에 옴짝달싹 못하게 묶여 있는데다가 벼슬길에 혈안이 되어 八股文에나 정신 팔려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맹자의 ”資之深則取之左右逢其源"을 해석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릇 스스로 깨우치는 경우는 모두 그러하다. 孔 • 孟의 道를 구함에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깨우쳤다고 할 수 없다. 楊子, 墨子, 老子, 莊子, 佛家의 道도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역시 깨우쳤다고 할 수 없다.53)

彭允初는 戴篠이 임종하기 일개월 전에 편지를 써서 戴短이 학술을 논함에 있어 理學과 程朱에 어긋남이 있다고 비판했다. 戴炭은 답신을 통해 절묘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답신에서 그는 우선 다음과 같이 말했다.

宋이후 孔 • 孟의 서적은 모두 진정한 의미가 왜곡되었으니 유

53) 『答彭進士允初』. "凡自得之說盡然. 求孔孟之道, 不至是不可之有, 求楊 墨 老, 莊, 佛之道, 不至是亦不可謂之有."

생들이 노자와 불가의 설을 잡다하게 인용하여 해석한 탓이다.54)

말하자면 理學家와 그 후학들은 표면상 이단을 배척하고 제자학을 물리쳤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고 꼬집었다. 이와 동시에 해박한 학문이란 孔 • 孟의 학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선진 제자와 佛學까지도 연구해야만 비로소 현실생활에서 ‘左右逢源'의 효과를 거둘 수 있으며 언제 어디서라도 막힘 없이 풀어 쓸 수 있다고 설파했다. 裁이 이처럼 제자학을 어느 정도 중요시했던 것은 그가 실학을 주장했던 것과 관계가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이단이나 제자학을 배칙하느니 아예 정주 이학의 해악을 밝히고 그 후학들의 헛된 학풍을 비판하는 것이 오히려 더욱 바람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편 章學誠은 『文史通義』에서 경학과 제자학이 학술사상에서 차지하는 위치룰 공정하게 평가했는데, 경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지적했다.

六經은 모두 역사기록이다. 옛사람들은 창작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건이나 사실을 떠나서 무슨 도리롤 떠버린 적이 없었다. 그러기에 六經이라 하는 서적은 모투가 옛날 임금님들의 정치적인 기록인 것이다.55)

章學誠이 생각건대, 六經은 "사실을 가지고 도리를 말한(因事言理)" 서적이며, 따라서 경서란 고대 역사의 문헌자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서를 중요시하는 것은 무방하지만 영원히 불변하는 진리로 받드는 것은 안 된다고 못박았다. 그의 논조는 대단히 충격적

54) "宋以來, 孔孟之盡失其釋, 儒者雜裝老釋之言以解之.”

55) 『文史通義 • 易敎上』. “六經皆史也. 古人不著, 古人未符離事而言理, 六經皆先王之政典也.”

이긴 하지만 실제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는 발언이다. 章學誠은 제자학을 언급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자라 하면 다 도리가 있는 말을 논리적으로 잘 다듬어 도체의 일단을 틀림없이 획득한 연후에 자신의 견해를 종횡무진 발휘하여 하나의 독특한 체계를 이룬 그러한 학파를 가리키는 것이다.56)

章學誠은 비록 제자학에 관한 전문적인 연구서적이 없지만 그는 “일이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는(事勢自然)” 그런 시점에 입각하여 제자서와 제자학은 고대사회발전의 산물로 모두 "도체의 일단을 반드시 얻은(必有得于道体之一端)"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러하기에 제자학은 옹당 학술사에서 당연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章學誠과 江中 등 학자들은 信質한 방법으로 학술사상사를 연구하여 선진 제자학에 대해 실제 역사에 걸맞은 알맞은 자리매김을 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학문적 성과는 事勢自然'과 ‘因事成理'의 방법에서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明末淸初에 불기 시작한 선진 제자학의 연구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그러한 연구경향은 明淸思想의 발전에 중대한 의미가 있다. 우선 明末淸初에 불붙기 시작한 제자학 연구는 실학사상의 발전이 믿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明淸時期는 유학이 여전히 正宗의 위치에 있었고 제자학은 이단시되었다. 그러나 明初 이후로 理學을 추종하는 유생들은 날이 갈수록 의리에 얽매어 헛된 토론에나 전념하다 보니 점차 현실과 유리되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은 사유 자체의 발전에 무익할 뿐더러 사회와 역사의 발전에도 걸림돌이 되었다. 이

56) 『文史通義 • 詩敎上』. ”諸子之成 其持之有故, 而言之成理, 必有于道體之一端 而後乃能窓郞其說 以成一家之言也.”

러한 상황에서 일부 사상가들은 실질을 숭상하는 관념의 지배하에 淡學을 부홍하여 실속 있는 학문을 전개하고 아울러 제자학의 연구를 촉진시킴으로써 학계의 금단현상을 돌파하려 했다. 따라서 실학사상의 발전은 제자학의 부홍을 가져왔고, 제자학의 부홍과 발전은 확실히 일종의 사상해방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와 더불어 明淸時期 제자학의 부홍과 발전은 실학사유방법의 발전을 강력하게 촉진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楊愼은 淡學의 信質함을 대단히 높게 평가한 바 있다. 그는 여러 차례 "英나라 학자들은 경서를 논함에 비록 부자간에도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漢人說經, 天地父子不荀同)”고 칭찬했던 것이다. 楊恨이 淡學을 높이 사고 宋學을 깎아버린 거야 유학 내부의 두 갈래 파벌을 가리킨 것이가 때문에 별다른 큰 의미는 없다고 하겠으나 그의 이러한 견해는 후세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어 理學에 대해 전면적인 재평가를 촉진하게 되었다. 아울러 제자학의 유용한 성분에 대한 연구를 촉발시켜 학풍의 방향을 선회케 하는 그런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댜 이와 동시에 淡學을 새롭게 조명하게 되면서 乾慕 고증학이 새롭게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따라서 明淸思想과 문화의 발전에 새로운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학풍은 李於, 傅山둥의 학자를 거치면서 제자학의 연구는 또 다시 새로운 클라이맥스를 맞이했고 아울러 실학사유방법의 내용에도 더욱 충실을 기하게 되었다. 方以智가 제시한 ‘質測’質學은 바로 이 점을 증명하고 있다. 方以智의 ‘買測'의 학설의 주요원천은 바로 『장자』에 있었던 것이다. 方以智는 ’質測藏通幾'라고 하여 質의 학설 가운데 철학적 사유가 내포되어 있다고 했다. 또한 ‘通幾護質測'이라 하여 質測꿨學 역시 철학사상의 지도를 받고 있다고 여겼다. 이처럼 자연과학과 응용과학의 기초 위에 건립된 관점은 실학에 과학적인 진리탐색의 내용을 부여했으며 근대과학 사유방법의 초기 발전 단계에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乾慕 제자학은 바록 ‘通幾'의 실학사상에 대해 새로운 내용을 보태주지는 못했지만 다음 몇 가지 점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첫째는, 선진 제자학의 연구경향에서 老으로부터 墨子 荀子로 전환하게 했는데, 이는 논리적 사유의 경향을 점차 중요시하게 됐음을 가리킨다. 둘째는 乾 제자학은 楊, 顧炎武 등이 주장한 淡學治學方法을 계승하여 선진 제자학저서에 대해 전면적인 정리 및 고증 작업을 진행했다. 그런데 그들의 治學方法에는 실험과학의 논증방법과 근대 역사분석법의 초기적 형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듯 淡에서 비롯됐지만 淡學보다 더욱 효과 있는 방법으로 校勘, 輯俠 및 辨僞를 통해 제자서를 정리했기에 학술적인 가치를 대단히 높게 평가받았다. 셋째로, 明荊 제자학은 명청 사상발전의 대략을 표현한 것이며 明淸思想은 明活 사회발전의 궤적을 반영했다는 점이다. 明代 시민경제의 존재와 발전은 바로 시민의식이 대단히 활발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실학사상은 바로 일종의 시민의식의 표현형식인 셈이다. 따라서 선진 제자학의 연구는 시민의식의 중요한 사상적 원천이라고 볼 수 있다. 明末淸斷 장기간에 걸친 전쟁과 난리 속에 시민경제는 거의 파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淸 왕조는 잔혹한 독재정책을 일방적으로 수행하다 보니 乾隆年間 이후로 사회는 활기를 잃게 되어 제자학의 연구 역시 고증학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지금까지 세게의 선진국에 속해있던 중국이 낙후하기 시작했던 까닭을 설명할 수 있겠다. 이상으로 우리는 明淸 제자학 발전의 개략을 통해 明淸 사회 및 역사발전의 험난한 가시발길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렇듯 파란만장한 明淸 학술사상의 역사는 우리가 중국 근대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며 아울러 앞으로 중국의 현대화를 이해하고 추진하는 데도 역시 훌륭한 반성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인호 옮김)

實學과 科學

董光襲

“實學" 이란 용어의 의미에 대해 학자들은 의견의 일치를 못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經世思想과 批判精神에 착안하여 논리를 펼치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 質學을 科學과의 상호관계에서 살핀다면 본인은 實學을 다음의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하고자 한다. "實理"를 강조하는 理性質學, ”買效"를 강조하는 功利質學, ”證眼"를 강조하는 質證質學이 그것들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대체적으로 質學思想의 발전단계를 반영하고 있다.” 엄격하게 이야기해서 科學은 근대 유럽에서 발생했다. 단지 그 역사를 따지고 올라가면 고대 과학과 중세 과학의 說이 존재할 따름이다. "세계범위적 과학기원법칙"(the law of Oecurnenogenesisl)에 따르면 中國傳統文化에서도 물론 科學의 源流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의 고대문화에는 買學과 科學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에서 발생한 近代科學이 "西學東渤" 시기에 중국으로 전입되기

1) 이러한 나의 견해는 抽摘 『質學與格致學』에서 주장한 바 있다. 抽稿는 1992년 10월 濟南에서 개최된 "第二屈 東方買學學術硏討"에 발표했으나 會議論文集은 아직 출간되지 않은 상태이다.

2) 조세프 니담(Needham Joseph : 中國名 李約瑟)의 「『中國科學技術史』편술계획의 동기 • 진행 • 현황」(1001년), 『李約瑟文』, 5-21쪽, 潘吉星 主編, 遼寧科學技術出版社, 1986年.

시작했다. 束西洋의 古代科學이 아무리 形式과 世界에서 차이가 있고, 또한 근대과학과 고대과학이 질적으로 다르다 하더라도 科學이라는 것은 自然法則을 反映하는 것이고, 近代科學이란 각 문명지대의 고대과학이 축적된 결과이기 때문에 과학은 결국 古今이 상통하고 동서양이 합치된다고 말할 수 있다. 유럽의 근대과학이 전세계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세계 각 문명지대의 과학근대화는 한결같이 유럽 근대과학의 모델을 그대로 따랐고, 따라서 유럽 근대과학의 세계화라는 큰 흐름의 각 단계를 구성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중국문화권이 근대과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儒學의 ”格物窮理" 說과의 만남으로 가능했다. 중국의 과학이 전통으로부터 근대로 진입한 교량은 "格致學"이었으며, 格至文學의 발생과 발전은 理性主義, 功利態度, 質證精神이 서로 융합하고 승화된 결과였는데, 이런 결과는 바로 儒學傳統 중의 ”貸學"사상이 장기적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아울러 그 발전이 축적된 結晶이라고 볼 수 있다.

1 . 實學의 意味와 科學精神

중국에서 실학사를 다룬 전문서적으로 최초인 『明淸質學思潮史』3) 는 "明學思潮"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明淸 시대의 철학적 특징을 批判精神, 經世思想, 科學精神, 啓蒙意識 둥 네 가지로 귀납하고 있다. 이로써 先秦諸子學, 兩漢經學, 魏晉玄學, 隋唐佛學, 宋明理學, 明淸實學 그리고 近代의 新學으로 이어지는 중국철학사의 각 시대적 특징이 정연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무릇 시대적인 특징을 浮刻시키는 데 목적을 두어야할 철학사 저술이 慣[學"개념의 유구한 역사를 생략하고 "明淸1t學思潮"의 특징을 운운할 때, 그런 저

3) 陳鼓應 • 辛冠沿~ • 葛榮晉 主織 『明淸貫學思潮史』, 齊魯習社, 1989年.

작이 물론 전혀 쓸모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이론적으로 문제가 있게 된다. 우선 質學이 理學 및 心學과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明學은 자칭 “質學"이라고 주장했던 理學과 心學울 비판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판대상이 아무리 理學과 心學의 末流였고 또한 "月學이 程朱理學 및 陸王心學과는 器承과 否定의 관계에 있음"을 看過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買學을 논리적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결합을 露시키게 된다. 그 다음 이유로는 간단하게 "學"이라고 하지 않고 "淸質學,願"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러한 "定(성격을 규정하는)” 방식은 비록 內容과 特徵을 서술하는 데에 별다른 장애를 받지 않겠지만, 그러나 필경 소위 “"이라는 것이 理論體系인지, 아니면 일종의 학술 연구적 偵値越向인지 분명치 않아 質學思潮史 논술에 있어 이론상의 모호함을 면하기 어렵다. 바로 이러한 문제점에 있어서 학자들 사이에 아직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姜廣沮는 灣 中央硏究院 歷史語言硏究所를 통해 二十五史를 검색한 결과, 唐 禮部侍郞 楊館이 取士制度(관리선발제도)의 개혁을 주장한 奏疏(서기 703年)에서 五經울 “"이라 칭했음을 발견했다. 姜廣輝는 唐代부터 淸代까지 ”質學"이란 용어의 의미가 “治經" "彦" ”經世"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고 결론지었다.4) ” 한편 羅織는 「質學義辨」5)에서 ”崇關虛"를 實學의 본질적 특징이라고 규정하고 質學思想의 源流를 淡代로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羅識는 實學이 儒學의 변화에 따라 발전했으며, 宋明 道學家들이 가장 먼저 實學의 範朗를 제시하여 新橋學의 특징으로 삼았고, 明淸 質學은 이러한 新個學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일종의 背反者라고 생각했다.

4) 姜廣輝 『學“槪念的歷史內酒』, 『中國哲學』, 1993年, 第16.

5) 羅燒 『學義辨』, 『주자학간』, 1993年 第1, 28-39쪽.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통일된 "易” 개념이 역사상 형성되지도 않았고, 또한 "質學" 역시 일종의 學說이나 理論體系가 아니라 학술연구에 있어서 "求"을 주장하는 일종의 偵値越向일 따름이다. 여기서 "求"이란 적어도 質理, 效, 證 등 세 가지 기본요소의 추구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科學이란 것도 일종의 理性的인 작업이라고 볼 때, 그 목적은 人類에게 행복을 안겨줄 수 있는 확실하고도 보편적인 지식이므로, 이 또한 일종의 "求質”의 학문인 셈이다. 따라서 "學"과 ”科學"의 기본정신은 대체적으로 일치하며, 그 핵심은 모두 "事求是"인 것이다.6) 실학사상 발전사를 거시적으로 훑어보면 실학적 偵値越向의 형성에는 과학활동이 영향을 미치고 있고, 또한 과학의 발전에도 실학적 가치관의 영향이 뚜렷하댜 그러므로 실학과 과학은 시종 상호영향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실학과 과학의 상호영향의 관점에서 실학발전사를 살펴보면 실학은 淡代에서 시작되었다. 治經울 특징으로 하는 淡代 儒易!에는 "質學"思想의 모든 기본적 요소가 發茅하고 있다. 西淡의 范仲舒(179-104 B.C.)는 선진 제자학의 실용주의적 목적을 겨냥하여 "담긴 뜻을 바르게 할 뿐 그 이익은 고려치 아니하며, 聖人의 道를 밝힐 뿐 그 효과는 따지지 않는다(正其諒而不謀其利, 明其道而不計其功)”고 하여 순수이성적인 학술적 요구를 제시했다. 또한 西淡末年의 劉飮(?-23 B.C.)이 주장했던 古文經學은 口傳經學에 의문을 표시하면서 訓話룰 통한 求質의 학문을 제시했다. 한편 東漢의 王充(27-97)은 識緯神學의 迷信을 반대하면서 "일이란 효험이 있는 것만큼 분명한 게 없고, 논리는 중거가 있는 것만큼 확고한 것이 없다(事莫明于有效, 論莫定于有證)"며 실증적인 태도를 주장했던 것이

6) 笠可禎 先生(1800-1974)은 浙江大學 총장에 재직할 당시 校訓을 "求是" 두자로 정하여 교수와 학생들의 과학정신을 강조한 바 있었다.

다. 이 모두는 한결같이 "求"을 요구하는 이성주의의 표현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實學"의 발단은 아무래도 東漢의 班固(32-92)를 기준으로 삼아야만 한다. 『簿書』의 『河獻王 劉德』 論贊에서 班固는 劉德에 대해 "인격을 수양하면서 옛 성인의 도리를 좋아하고 또한 買事求是 했다(修而好古, 求是)”고 평가하고 있다. 과학의 입장에 치중해서 이 부분을 음미한다면 班固가 劉을 평가하며 말한 “事求是" 넉 자는 대단한 의미를 갖는다. 班固 자신이 ”地理志"를 최초로 개발한 지리학자일 뿐 아니라, 劉德은 수공예기술 백과사전인 『考工記』를 이용하여 『周福』의 결손 부분인 『冬官篇』을 재구성한 인물이기에 우리는 그들의 과학적 관점과 역사적 공헌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漢의 班固가 “事求是"를 제시하면서부터 의 阮元(1764-1927)이 “求是"를 계통적인 실증방법으로 발전시키기까지를 통틀어, ”質事求是"를 축으로 형성된 質學思想의 역사적 맥락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클라이맥스가 존재하고 있다. 宋元 理性質學, 明淸 功利實學, 淸末 實證質學이 그것이다. 근세의 康有爲(1857-1927)는 『質理公法全』를 저술했다. 첫째 편이 “學解”로서 質學의 言語룰 가지고 과학방법 문제를 토론하면서 다음과 같이 質學三法을 제시 했다. “"法(驗法에 해당), "論“法(歸納法에 해당), ”虛質"法(演釋法에 해당)이 그것들이 다. 최근세의 毛澤東(1893-1976)은 "事求是"를 철학 명제로 해석울 가했으며, 鄧小平은 사상노선으로 여겨 제창했다. 이렇게 보건대 실학사상이 얼마나 넓고 깊은 영향력을 미쳤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班固가 "實事求是"룰 제시한 시기는 바로 識緯說이 범람하고 경학 내부도 분쟁이 심화되던 때였다. 그러다 魏晉南北朝 시기의 經學 쇠퇴와 玄學의 대두, 그리고 곧 이어 성행한 隋唐佛學과 倫道佛의 合流過程을 겪으며, 마침내 治經이 바로 "實學"이라는 주장이

출현하게 된다. 그런데 宋代의 程願(1033-1107)는 “오로지 理만이 實이다(惟理爲質)”라고 하여, “理性'’을 제창하면서 그러한 바탕 위에 창건한 理學을 “質學'’이라고 칭하였다. 理學은 佛家와 道家의 合理的인 自然親을 홉수하면서 그들의 비이성적인 사조 및 한당훈고의 번잡하고 支離滅裂한 폐단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본인은 理學家들의 이와 같은 “官學" 價値親을 “理性質學"이라고 보고 있으며, 이것은 실학의 첫번째 전환점으로 간주하고 있다.

功利은 실학사상발전사에 있어서 두번째 전환점이다. 功利質學온 明代 중엽부터 발생하기 시작하여 아편전쟁 시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理性質學이 “頂"를 강조하고 이론의 형태로써 자신을 표현하는 것과는 다르게, 功利質學은 학술의 “實"과 "實效"를 강조하면서 아울러 사조의 형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물론 功利思潮도 비판적 이성의 실학의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崔銃(1478-1541)은 周敦願(1017-1073), 程願, 張載(1020-1077), 召!多(1011-1077) 둥의 학문이 모두 ”質學"에 속한다고 했으며, 또한 章學誠(1738-1801)도 黃翰 蔡元定, 眞德秀, 魏了翁 둥의 학자들은 모두 朱子를 계승하여 실학에 힘썼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그런 점을 익히 잘 알 수 있다.

“模學"은 실학사상발전사에서 세번째 전환점이다. 模學이란 淸代의 고중학을 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인데, 그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明代의 楊愼(1488-15.59), 陳第(1541-1617), 그리고 淸初의 顧炎武(1613-1682) 둥이 사용한 고증이나 훈고 방법 을 찾을 수 있다. 고중학은 乾慕時代에 전성기를 구가하여 학계에 주도적인 연구방법이 되었으며, 그러한 학자들을 통틀어 乾嘉學派라고 부르고 있다. 그 중 영향력이 가장 컸던 학자 그룹으로는 戴震(1724-1777)을 대표로 하는 院派 惠棟(1697-1758)을 대표로 하는 吳派, 注中(1745-1849)을 대표로 하는 揚派가 있다. 乾絲學派룰 集大成한 阮元

(1764-1849)은 학문연구에 있어서 그들이 지향했던 목적과 방법을 개괄하여 “實求是”라 칭했던 것이다. 明代의 楊愼은 훈고 방법을 사용하여 朱熹 이전의 六經에 담긴 뜻을 추구했고, 陳第는 楊恨의 방법을 계승하여 “本證"뿐 아니라 ”芳證"까지 동원하여 『詩經』의 古音을 고층했으며, 淸初의 顧炎武는 陳第의 방법으로 역사룰 연구했고, 惠棟은 경서연구에 있어서 古証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고, 戴店은 경서에 담긴 뜻을 밝혀 옳은 것을 추구했고, 江中은 오로지 옳은 것만을 추구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러한 模學의 先閣者들과 대표들은 아닌게 아니라 "質事求是”의 정신을 發揚했음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실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개괄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乾慕學派에서 상당히 유명한 洪亮吉(1746-1800)만 해도 그저 다음과 같이 "본질을 파고 들어가 본뜻을 서술하고, 실사구시 한다(本述原, 質事求是)"7)고만 말했을 뿐이며, 또한 阮元도 “實求是”의 훈고적 방법을 하나의 체계로 정립한 바, "지식인이 독서함에 옹당 경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경서를 연구하려면 응당 注疏부터 시작해야 하고, 주소를 이해하려면 응당 훈고부터 시작해야 하고, 훈고를 잘하려면 응당 聲韻부터 시작해야 한다”8)고 말했을 따름이다.

2 . 實學과 傳統科學의 發展

실학과 과학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영향적 관계의 일반적 특징을 고찰하려면, 실학이 중국의 전통과학과 더불어 역사상 세 차례 절정기에 달했을 때,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가장 좋다.

7) 『施閣文甲集』 卷9.

8) 『硏經室三集』 卷2, 『江西校刻 宋本十三經注疏後』.

古代希臘의 科學으로부터 근대과학이 勃興하기까지의 1천여 년 동안 유럽의 과학은 쇠퇴하고 있었다. 이 기간에 과학발전상 중대한 공헌을 한 민족은 아랍인들과 중국인들이다. 특히 중국은 漢代에 중국전통과학의 패턴이 형성된 이래로 세 차례의 절정기를 맞는다. 첫번째는 魏晉南北朝 時이고, 두번째는 宋元 時期이고, 세번째는 明代 末이다.

과학의 발전에는 물론 그 자신의 논리적인 근원이 있게 마련이며, 또한 자연적인 지리나 사회적 • 정치적 • 문화적인 조건들에 따라 변화하게 된다. 따라서 전통과학이 절정을 이루게 된 요소는 다방면에 걸쳐 있는데, 그 가운데 실학이 문화적 조건의 하나로 전통과학의 발전에 무시 못할 영향력을 구사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實學"은 유학과 과학을 잇는 하나의 끈으로 볼 수 있다. 理性質學은 宋代에 일어났지만 그 원류는 魏晉南北朝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魏晉南北朝 時代에 玄學家들이 비록 “實學"이란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이성으로 미신을 반대했고, 간단명료함으로 써 번잡함을 대신하면서, "자연의 이치(自然之理)"나 "명분을 버리고 실질을 취한다(棄名任質)”는 정신을 강조했던 것이다. 따라서 “玄學”의 "玄"은 "熊"가 아니라 사실 理性實學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명분을 분별하고, 그 이치를 분석한다(辨名析理)”는 당시 玄學家들의 사유방식은 비단 宋明理學의 형성 뿐 아니라, 당시의 자연과학이 이론화하는데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魏晉南北朝 시대는 중국과학사에 있어서 눈부신 성과를 올린 시기의 하나이다. 서기 500년을 전후한 100여년 사이에 천문학자 祖沖之(429-500) 및 그의 아들 祖日恒, 지리학자 鄭道元(?-527), 약제학자 陶弘景(456-536), 농학가 賈思線(6세기 상반기) 등 다섯 명의 세계 일류 과학자가 출현하게 된다. 이 시기 과학상의 주요성과는 기

하학, 원주율계산을 비롯하여 소수점 일곱 자리의 계산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그 당시의 세계수준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모두 이성이 그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9) 그런데 실은 서기 3세기에 이미 수학자 劉往건의 수학사상 속에서 우리는 理性質學 정신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劉徽는 『章算澳妹』에서 "念의 분열을 관찰하여 산수의 근원을 종합했다(觀陰陽之割裂, 總符那(之根源)”고 하여, 數學을 연구하는 자신의 기본방침과 "글로써 이치를 분석하고, 그림으로 천하를 분해한다(析理以羽, 解體用圖)”는 수학방법론의 綱領올 피력한 것으로 보아 理性質學 精神을 집약적으로 표현했음이 분명하다.

宋代 理學家들은 『大學』의 ”格物致知"를 『易傳』의 "窮理盡"에 연결시켜 "物窮理"의 인식론과 추론방법을 제시했다. 程 • 朱의 "物에서 온갖 이치룰 추구한다(求菓理于外物)”는 주장에 陸 • 王의 "마음속에서 단 하나의 기본적인 이치를 추구한다(求一理于內心)”는 주장이 보충되어, 格物窮理의 "나란한 두 바퀴 수레(雙輪車-여기서는 동등한 역할로 공헌했음을 수레의 두 바퀴로 비유)”를 형성했던 것이다. ”格物窮理情은 宋 • • 淸代룰 거치면서 변화발전을 부단히 거듭하는데, 그 중에서도 과학적 이성정신의 영향이 갈수록 커졌다. 宋元代에 과학의 발전이 절정에 이른 것이나, 明代末 과학기술이 종합적인 발전을 보인 점 둥은 모두 理性質學의 과학적 이성정신에 힘입은 바 컸던 것이다.

理學의 형성과 발전은 과학적 이성의 진보를 촉진시켰다. 과학적 이성은 論理理性, 數學理性, 實驗理性의 삼 단계를 포함하고 있다. 宋代 理學은 論理理性과 數學理性에 있어서 空前의 발전을 기록했

9) 대만학자 洪萬生은 "用性"이 이 시기 수학발전의 원동력이었다고 주장했다. 洪萬生의 『祖視證明的時代一魏晉南北朝時期的科技』, 劉俗가 主編한 『中國文化新論 • 科技篇』(聯經出版公司, 1982年.) 참고.

는데, 宋代의 數理科學이 이론적 전환과 고도의 발전을 이룬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格物"에 관한 논술이 비록 質驗埋性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易傳』의 "叫房"의 관찰정신은 하여튼 상당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宋末元初 사람인 趙友欽이 촛불 천 개를 가지고 삼층 누각에서 그림자에 관한 대형 광학실험을 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宋代의 ""이 ”"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상황 역시 우리가 주목해야할 역사적 현상이다. 말하자면 이 시기에 인문과학에 해당하는 “埋", ”道學", ”易學'’뿐만 아니라, “", ”數學", ”物理之學" 등의 용어 가 등장했던 것이다.10) 중국에서 역사가 오래된 博物學은 程 • 朱가 주장한 ”格物致知"를 개기로 하여 "格致學"을 발전시키게 된다. 宋末에 『格物腦談』이 출현한 것이 그 시발이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朱子의 5代제자이자 저명한 의학가인 朱店亨이 자신의 전문 의학서를 『格致餘論』으로 명명하고, 아울러 自에서 "옛 사람들은 의학을 우리

10) "數學”이란 용어는 원래 의 數에 관한 形學옹 가리켰던 것인데, 秦九가 이것을 자신의 연구와 연결시켜 『數學大略』이란 책을 저술하면서 부터 과학적인 의미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한편 秦九部의 『學大Ill各』이란 에 관해 말하자면 현존하는 문헌으로는 정확히 어떤 서명이 옳은 것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秦九의 이 저술은 전해 오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서명이 출현하고 있다. 宋의 陳振孫은 『虹術』이라고 기록하였고, 宋元代의 周密온 『數學大各』이라고 기록했으며, 『永樂大典』에는 『』으로, 明代 王應麟은 『數九』으로 기록했다. 李迪은 『數九章源流考』에서 『數術大略正斗 『數學大』이 "비교적 정확한 서명인 듯하다”고 밝혔는데, 그의 논조는 전자판 원래 서명으로 보는 경향이 엿보인다. ”物理之”은 이 제시했고, 그 의미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물리학은 비록 아니다. 그러나 천 몇 백년 동안이나 사용되어 오던 "物理" 두 자 뒤에 "" 자가 붙었다는 의미는 주목할 만하다. 北宋의 博物學家 賢寧(919-1002)은 張衡(78-139)이 地動儀룰 발명한 사실을 두고 "물리의 극치를 이루었다(窮物理之極致)”고 칭한 것도 ”物理之學" 역시 과학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표명한다고 하겠다.

學家들 格物致知의 한 가지 일로 보았다(古人以爲吾孟格物致知一)”고 했는데, 이런 논조는 朱世杰에 이르러 더욱 분명해진다. 朱世杰은 『四元玉鑑』의 自에서 아예 수학을 "엣 사람들의 格物致知의 학문(古人格物致知之易)”이라고 못박고 있는 것이다. 宋末元初에 등장한 수학가 李治(1192-1279), 秦九部(1202-1261), 楊(13세기), 朱世杰(13세기 말-14세기 초) 그리고 천문학가 郭守敬(1231-1316) 및 농학가 王禎(1271-1300) 둥은 바로 理性質의 전파와 관련이 있다.

南宋 功利學派가 발전을 거듭하여 明代 중엽에 이르게 되면 陽明心의 知行合一 정신과 결합하여 일의 성취와 실효를 강조하는 功利隸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사조가 성행하던 시기는 바로 유학의 "格物致女" 학설에 대한 空의 광범위한 토론이 진행되던 때였다. 『大學』의 ”格物致知"는 의미가 분명한 인식론의 명제인데, 단지 위아래 문장을 연관시켜 목표를 고려할 때 윤리도덕 문제와 관련된다. 朱熹(1130-1200)는 二程의 설을 계승하여 ”格物"을 “사물에 나아가서 그 이치를 따진다(卽物窮理)”고 해석하였으나, 王守仁(1472-1529)은 "마음을 바로 한다(正心)”로 해석 했다. 明淸時代의 실학가들은 거의 모두가 格物致女에 관한 논쟁에 참여했다. 明淸時代의 학자들은 理學의 格物 관점에 대해 비평도 물론 했지만 계승 또한 없지 않았다. 일부는 윤리도덕의 실천에 중점을 두었고, 일부는 인식론에 주안점을 두었다. 주안점을 어디에 두었던 간에 그들은 모두 "格物"의 기능과 효과를 강조하였다. 말하자면 그들이 格物致知에 대해 토론했던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객관사물의 명확한 의미를 탐색하도록 계도했다는 데 그 과학적 의의가 있다. 羅欽順(1465-1547)은 王守仁의 格物에 대한 해석을 지적하여 "내적인 것에만 국한되어 외적인 것을 놓쳤다(局于內而迫于外)"11)고 비판했다. 또 高拳龍(1562-1626)은 "학문은 반드시 格物로부터 입문해야

한다(學必由格物入)"며, 格物의 대상은 人倫道德뿐 아니라 動植物까지도 包含된다고 주장했다.12) 또 顔元(1635-1704)은 ”格物致知"를 해석하면서 "格”을 "손으로 친다(手格)는 뜻의 格으로, 몸소 실행한다(手格之格, 身親事)”고 하여 행동이 지식보다 앞섬을 강조하였다.13) 당시의 과학자들은 바로 ”格物”의 실천자였는데, 李時珍(1518-1593)은 『本草綱目』(1578年)을, 朱載均(1536-1611)는 『若律全』(1606年)를, 徐光啓는 『農政全』(1627年)를, 方以智(1611-1671)는 『物理小』(1631年)를, 宋應星(1587-1666)은 『天工物』(1637年)을, 徐弘祖(1587-1641)는 『徐固客游記』(1641)를 각각 완성하여 중국 전통과학기술의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明末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서양의 과학기술을 중국으로 전하게 된다. 『易』 에 보이는 ”會通" 사상이 서양의 학문을 받아들이는 지도원칙으로 이용되었으며, 따라서 서양 학문은 중국 "格物致知"개념에 유용한 연장이라고 여겨져 환영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중국의 曆法과 천문학 및 수학의 단기적인 부홍을 초래하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西會通"을 촉진한 학자들은 대부분이 王陽明 학파라는 사실이다. 초창기에 서양 학문을 받아들인 저명한 세 명 가운데 李之溪(1565-1633)는 조정에 상소를 올려 역법, 水理, 산수, 측량, 혼천의(禪天儀), 해시계, 地圖學, 醫學, 樂器, 格物窮理의 학문, 기하학 둥의 과학은 ”質學에 도움이 되고, 세상에 유용한(有資實學, 有碑世用)" 학문이므로 "서양의 책들을 번역하여 널리 교육시키도록(魏譯西來畵 以廣文敎)” 요청했던 것이다.14) 또한 徐光啓(1562-1633)는 서양 학문을 실학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中西會

11) 『困知錄附錄 • 再與工陽』.

12) 『答顧泥陽先生論格物』.

13) 『大學辨』.

14) 『同文指』.

通" 개념을 제시했고, 서양 학문을 받아들이면서도 특히 천주교의 교리에 치중했던 楊廷·琦 역시 "서양 학자들의 연구는 모두 실생활과 밀접한 관개가 있으며 그들이 하는 학문 역시 모두 實學이다”라고 단정지었다.15) 이러한 주장을 계기로 實學의 발전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침내 종착역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서양 학문의 자극과 文字獄(禍를 가리킴)의 위협이 동시에 당시 중국학자들을 짓누르면서 점차 對學을 특징으로 하는 실증실학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형성된 실증실학은 실학의 방법론을 고도로 발달시키면서 유가의 格致學과 근대과학의 교량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3 . 實學과 中國科學의 近代化

중국사회의 근대화는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었으며, 1840년 아편전쟁을 기점으로 한다는 것은 거의 공인된 바이다. 그러나 과학의 근대화는 위에서 언급한 사회 근대화의 기점과 완전히 합치하는 것은 아니다. 본인은 1582년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중국에 입국한 때부터가 중국사회 근대화의 기점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이처럼 과학 근대화의 기점은 사회 근대화의 기점보다 200여 년 앞선 16세기 말이었다. 이 둘 사이의 시차가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크기 때문에, 일부 학자의 논저에서는 과학 근대화의 기점을 사회 근대화의 기점에 그대로 따르거나, 심지어는 언급을 회피하는 경향마저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큰 시간적 격차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것은 중국 사회내부의 근대화 추세가 좌절을 겪으며 "밖에서부터 녹아 들어간

15) 『同文絶微記序』.

(外探)" 때문이다. 여기서 外探이라고 한 것은, 근대화의 주요 원동력이 전통사회의 외부압력으로부터 말미암았기에, 소극적인 모방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고 아울러 순서 또한 거꾸로 진행되었다는 뜻이댜 말하자면 가장 먼저 물질적인 府面, 그 다음이 제도적인 府而, 마지막이 비로소 사상적인 府面의 순서로 진행되었다는 뜻이다.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와 아편전쟁까지의 200여 년 동안 서양 학문의 수입은 일부 소수 학자들의 안목을 넓혀주었다. 이러한 소수 학자들의 노력으로 인하여 중국 전통문화 속의 과학은 우선적으로 세계과학의 주류로 합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崇禎曆』(1635年)나 『數理精羅』(1723年)과 같은 과학서적은 정체된 중국사회를 일으키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아편전쟁의 포성이 중국을 뒤흔들면서 식민주의의 폭력적인 위협이 가해지자, 중국사회의 근대화가 비로소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불과 60년이 못되는 기간 동안에 洋務運動, 戊戌嬰法, 辛亥革命, 新文化運動 등을 거치면서 500여 년에 걸친 서양의 근대화가 중국에서 그럭저럭 연출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응당 거쳐야 할 순서가 전도되면서 진행된 근대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부실한 성과는, 결국 근대 중국이 서양의 근대화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허다한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결과를 가져오고야 말았다.

만일 우리가 민족적 굴욕감을 잠시 벗어 던지고 역사적 관점에서 문제를 직시한다면, 근대과학기술을 물질적으로 활용하여 만든 군함과 대포로 중무장한 서양 식민주의자들은 아닌게 아니라 중국을 혁신시키는 도구 역할을 확실히 하였다. 일찍이 1853년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던 것이다.

영국의 대포는 중국 황제의 권위를 파괴하여 저 멀리 하늘 나라에 있던 제국으로 하여금 지상의 세계와 접촉하게 만들었다.

다른 세계와의 차단은 衍中國을 보존시키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그런데 이 조건이 영국의 폭력에 의해 무너졌을 때 곧 이어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인 해체의 과정이다. 이것은 마치 밀패된 관속에 조심스레 보존되던 미이라가 일단 신선한 외부 공기와 접촉하면서 곧 바로 해체되는 것과 같다.

중국의 전제사회를 해체시킨 "신선한 공기”의 주요성분은 바로 근대과학기술이다. 마르크스가 중국 전통사회를 미이라와 같은 "爭的" "停掃的“인 아시아 사회로 비유한 것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의 "東方主義 競點"―"灰格" 사관을 계승한 또 다른 표현임이 확실하다.16) 그러나 중국이 비록 2천 여 년 동안 전제주의 아래 놓여 있었지만 실은 그 사이에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明代 중엽에 이르러 중국은 경제 사회적인 어떤 요소가 이미 출현하였다. 과학문화에 대해서 말하자면, 明初에는 宋代의 과학열풍이 이미 쇠퇴하여 그러한 상황이 거의 2백 여 년 지속되다가 隆萬年에 경제가 부흥하고, 功利實學 사상이 대두되면서 중국의 전통문화 내부에서도 과학근대화가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양 선교사들이 과학기술을 전하자, 이 두 가지 과학근대화 추세가 중국에서 점차 합류하기 시작했다.

중국 전통과학 내부로부터 발생한 과학근대화는 주로 과학의 사회화로 표현되어 의학, 수학 영역에서 비교적 두드러졌다. 의학에 대해서 말하자면 의학의 내재가치와 의사의 자주적인 작용이 이미 인식되었다. 의학의 근대화 추세가 가장 집중적으로 표현된 부분은 바로 체제화였다. 明代에 도시, 군대, 공장에는 이미 의료기구가 광범위하게 설립되었다. 더욱이 주목을 끄는 것은 1568년 明나라 수

16) 楊君實, 『家倫理, 韋伯命源與意識形態』, 《知識分子》 , 1984年 여름호, 58-65쪽.

도 順天府(지금의 北京)에 상당한 규모의 "一問党宅仁紅”가 설립된 일이다. 그 다음으로 수학에 관해서 말하자면, 明代로 접어들면서 발전이 정지되어 거의 사라질 위기에 있던 宋元의 수학이 明代 중엽 상업이 발달하면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다시금 발전하기 시작했다. 상인 출신의 수학가들은 실용수학을 집필하는 예가 빈번해 浙江의 吳敬이 『九章算法比類大全』(1450年)을, 河北의 王文素가 『廊登今算學寶鑑』(1513年)을, 安徽의 程大位(1533-1606)가 『法統宗』(1592年)을 각각 저술했으며, 한편 珠算 역시 算을 대체해 상업업무에 이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수학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을 뿐 아니라 수학이 과거제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음을 표시하고 있다. 과거제도에서 明算를 제외시켜 文官試驗科目에서 삭제한 것은, 수학을 전공하려는 사람과 벼슬길로 매진하려는 사람이 명확한 방향설정을 하게 하는 데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하였던 셈이다. 정부가 독점하다시피 하여 관청냄새가 가장 강했던 曆法과 天文學 분야에서도 孝宗出帝가 曆法의 개인적인 師事롤 어느 정도 허용한 이후, 민간에서 曆法이나 天文學 연구자들이 점차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와 함께 서양 천문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급기야 17세기에는 천문학의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朱載增의 音律學과 그의 "理致는 數로 밝혀지고, 數는 埋致에서 나온다(理由數顯, 數由埋出)”는 사상 및 徐光啓의 ”數度十"大綱은 또한 자연과학의 수학화 추세를 예견케 하고 있다. 기술영역에 있어서 기술의 발달은 이제 정부의 관리에서 벗어나 경제생활 속에 뿌리룰 내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宋應思이 선언한 "부귀영달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다(與功名進取, 苑不相關)”는 聲明은 실질적으로 과학기술의 "獨立宣言"이었다. 중국 과학의 사회화는 마치 유럽 과학의 세속화와도 같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유럽의 과학이 신학으로부터 분리되었듯 중국도 유학으로부터 분리되었던 것이다.

중국과학의 근대화는 유럽에서 발생한 근대과학기술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서양 선교사들의 과학기술 수입, 洋務運動의 기술 수입, 그리고 지식인들의 과학문화운동 등 “三部作"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럽에서 발생한 근대과학기술이 중국에 전입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중국의 과학적 문화유산이 기초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심리적으로 아무리 많은 장에요소와 격렬한 中西文化衝突이 있었다 하더라도, 科學이란 학문은 본질적으로 조세프 니담이 말했듯 ”束西洋의 수학, 천문학, 물리학은 불과 기름 같아 칙 하면 달라붙는" 그런 관계이다. 그런데 여기서 "척 하면 달라붙는" 것은 個澳의 "格物致知"를 매개로 했기 때문이다. ”格致" 두 자가 확정되면서 아울러 "科學"의 前身으로 여겨진 것은 실학사상의 발전과정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댜 宋의 理性質學이 『大學』에 보이는 ”格物致知"에 대해 새롭게 토론을 시작하고, 批判理性精神은 중국전통과학을 절정으로 밀어올렸던 것이다. 明淸時代에 功利質學이 일어나면서 ”格物致知"의 명제는 空의 분석을 거치게 되었고, 錢精神은 중국과학을 근대과학의 근처로 끌어올렸다. 서양의 학술이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實證宜學은 유학으로부터 格致學을 분리시켜냈던 것이다.

”格致"가 학문이 된 것은 元代의 朱盤亨(1281-1358)이 자신의 의학서를 『格致餘論』으로 명명하면서 비롯되었다. 明代 曺昭는 자신의 저서를 『格致要論』(1387年)이라 명명했고, 李時珍(1518-1593)은 자신의 本范學 저술을 "格物之學"이라 칭했고, 胡文煥은 자신의 고증학 관련서적을 『格致如距』라 명명했고, 熊明遇도 자신의 저서를 『格致菜』(1620年)라 칭했다. 徐光啓가 선교사들이 중국에 소개한 자연철학과 중국의 ‘‘格物窮理'’의 학문을 대등하개 취급한 이후로,17)

17) 『幾何原本序』와 『泰西水法序』.

선교사들도 점차 ”格物", ”窮理", ”格致"동과 같은 명칭을 사용하여 자연과학의 학문을 지칭하게 되었다. Alphonse Vagnoni(1566-1640)의 『空際格致』, Jean Schall von Bell(1591-1666)의 『坤輿格致』, Ferdinad Verbierst (1623-1688)가 康熙皇帝에게 올린 『理學 』 등이 그것이다. 이 밖에도 陳元이 편집한 중국전통과학 백과전서인 『格致鏡原』(1735年)이 있고, 阮元이 편찬한 『』(1795-1799)은 유가의 격물학자 243명의 전기이다. 이러한 학자들은 모든 과학이 서양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의 저작으로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洋務運動 기간에 "格致"란 용어는 중국과 서양학자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W.AP. Martin(1827-1916)은 『格致入門』(1866年)을 편역했다. 특히 John Fryer(1839-1928)는 徐(1818-1884)와 함께 上海에서 “格致院"(1874年)을 창립하고 아울러 『格致征編』(1876-1890)을 창간하였다. 그런 가운데 마침내 ”格致"를 사용한 일련의 自然科學 通論籍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格致啓學』, 『各致小引』, 『格物探原』, 『格致新機』, 『格致須知』, 『格致略論』, 『格致釋器』, 『格致州隅』, 『格致答題要』 등이 그러하다. 서양 과학지식의 수입이 기정사실화 되면서, 王仁俊은 『格致古女』(1897年)를 편찬하여 중국 고적 속에 보이는 과학지식을 전문적으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格致"가 이처럼 광범위하게 전파되자 결국 淸나라 정부는 京師同文館에 "格物磯"(1888年)을 설립했고, 京師大學堂에 ”格致學"(1898年)을 설치하면서 『欽定學堂章程』(1902年) 중에 "格致科"를 여덟 개의 단과대학 중의 하나로 규정하여 천문학, 지질학, 고등수학, 화학, 물리학, 동식물학 둥 여섯 과목으로 세분하였다. 여기에 이르러 格致學은 규범화되었던 것이다. 같은 해 梁啓超(1873-1929)는 『新民范報』에 『格致學沿革考略』을 발표하여 格致學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格致"란 이름 아래 중국과 서양의 과학이 합류하였고, 나아가 "格致"에서 "科學"으로 진행하게 되는데,18) 이것이 중국과학 근대화의 일대 특징이다.

과학의 내용에 있어서 格致學이 전통과 근대를 연결시켜 주는 끈이었다면, 杖學은 孟家의 買事求是的 정신과 근대과학의 경험방법 사이에 교량을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乾慕學派가 현실에서 벗어나 古籍에 注疏를 다는 작업에만 전념한 점에 대해, 후세 사람들은 비평을 가하면서도 그들의 연구성과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대다수 학자들은 乾慕學派들이 단지 古籍에만 매달렀다 하여 그들의 杖擧을 學의 범주에 집어넣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실은 그들의 考證成와 연구방법이 중국과학발전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들 乾嘉學派의 "" 정신은 梁啓超가 일찍이 『淸代學術槪論』(1921年)에서도 높은 평가를 내린 바 있다. 그들이 質事求是 정신을 考古에 사용했을 뿐 자연과학에 응용하지 않은 점에 대해 대단히 애석해 하고 있을 따름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더라도 "이러한 연구정신은 사실상 근대과학이 성립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此種硏究耕神, 質近世科學頓以成立)”고 평가하고 있다. 대대적으로 과학방법을 제창했던 胡適(1891-1962)은 과학방법의 핵심이 “사실과 증거를 존중하는 것(尊担事實與證打)”이라고 생각했다. 胡適은 비록 乾嘉學派 학자들이 과학방법을 古籍에 응용함에 있어 여전히 부족했음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乾慕學派의 고증방법이 과학적임을 칭찬하면서 「代學者의 治學方法」(1920年)이란 논문을 작성했다. 바로 이 글에서 胡適은 ”假說은 大肥하게, 증명은 細心하게(大膳假說, 小心證求)"란 구호를 부르짖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그 뒤로도 『治學方法과 材料』(1928年)와 『中

18) 奧洪業, 『從“格致"到“科學”』, 『自然辨證法通開凡』, 第10(1988), 第3, 39-50쪽.

國思想史속의 科學方法」(1958年)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梁啓超와 胡適은 과학이 중국인들에게 결코 낯선 것이 아님을 층명하고자 했던 듯하다. 胡適은 「中國의 文座復興」(1934年)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새로운 서양과학에 대해 결코 공개적인 制裁를 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중국의 格物致知 관념의 유용한 연장으로 여겨져 처음부터 환영을 받았다. 다만 유일한 制裁라면 무의식적인 것으로 傳統的인 文과 占籍의 習에서 오는 것이었다.” Joseph. R. Levenson은 자신의 「淸代經驗主義의 天折」(1954年)이란 글에서 代初期 사상가들의 경험주의적 태도는 Francis Bacon(1561-1626)의 귀납경험형식 보다도 Pierre Ablard(1079-1142)의 前科學 一元論에 더욱 가깝다고 생각했다. 또 郭預願는 중국 선배학자들이 現代科學을 찬양한 행위는 결국 淸代科學과 현대과학을 연결시키는 경험방법으로 전환되었다고 생각했다.19) 模學家와 자연과학 분야의 수많은 학자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일으킨 영향 역시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특히 천문학, 수학 그리고 지리학 영역에서 그러하다.

4. 韓國과 日本에서의 實學 發展狀況

실학은 중국에서 발원하여 그 뒤 한국 • 일본 등의 인접국으로 전파되었다. 한국과 일본에서의 실학발전은 대체적으로 理性質島에서 功利質學으로 발전하다가 다시 實證學으로 이어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 역사적 작용도 역시 중국과 유사하여 자국의 개방정책과 근대화에 일종의 원동력 역할을 하게 된다.

한국의 경우는 서기 1세기에 이미 중국의 유학이 도입되었다. 그

19) 郭類願 著, 傾 譯, 『中國現代思想中的唯科學主義』(1965年), 77쪽, 江蘇人民出版社, 1989年.

때가 한국의 삼국시대였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675-935)를 거치면서 유학은 한국의 교육과 정치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高麗(918-1392) 말기에 程朱理學이 도입되면서 마침내 朝鮮王朝 5백년 동안 의식형태의 지도이념이 되었으며, 理性學은 "端七情理氣 之爭"에서 불붙기 시작했다. 朝鮮王(1392-1910) 중엽에 이르자 功利質學 思가 사회적 위기를 해결하고자 일어나게 된다. 17세기에는 李昭光(1563-1628), 柳馨遠(1622-1673), 朴世堂(1729-1703), 李(1681-1763) 등은 黃宗羲(1610-1695) 식의 ”經世致用"을 주장했다. 이어서 18세기에 洪大容(1731-1783), 朴源(1737-1805), 朴齊家(1750-?) 동은 活初 예수회 식의 "利用厚生”을 주장했는데, 역시 ”功利質學"과 다름이 없다. 19세기에는 丁若(1762-1836)과 金正喜 등이 "質事求是"를 주장한 바, 실은 “登貸烏”에 속하는 것이다. 李과 그의 문하인 恨後(1702-1761), 安鼎福(1756-1791), 權哲身(1736-1801), 李家煥(1742-1801), 李(1754-1786), 李承薰(1756-1801), 丁若鈴(1758-1816), 丁若鍾(1760-1801) 등으로 형성된 近畿學派는 후세에 實學派로 칭해진다. 丁若鈴은 李粉 이래로 발전해온 質學울 染大成하였으며 "오로지 옳은 것을 구하고, 오로지 옳은 것을 따르고, 오로지 옳은 것을 잡는다(惟是是求, 惟是是從, 惟是是執)”는 12자 방침을 강력히 주장했다.

한국의 전통과학기술은 중국으로부터 도움받은 바 컸다. 일찍이 서기 7세기에 중국에서 6세기에 발명된 木形技術을 이용하여 『無括淨光大陀羅尼經』(704-751年 사이에 인쇄)을 인쇄했는데, 이것은 현재 알려진 바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이다. 이어서 1230년에는 세계 최초로 활자주조 기술을 개발하여 1377년에 인쇄한 『直旨心經』 역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활자 인쇄물이다. 또한 1515년에는 銅活字 주조기술을 발명하였으며, 인쇄기술의 발달로 地圖學의 발전을 촉진시키게 되었다. 1357년 화약 제조기술을 습득

한 뒤 얼마 안 돼 治鐵技術과 결합, 火器製造에 응용하여 1444년 성공적으로 鐵製大砲를 주조해냈다. 당시 한국으로 중국의 전통과학서적이 계속 흘러 들어갔으며, 아울러 한국은 서양과학의 홉수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를테면 1602년 北京에서 발간된 李之溪 版本마테오리치(中國名 利耶夜)의 『萬國全圖』를 그 이듬해 使臣 李光庭을 통해 북경으로부터 입수했다. 이 사실은 買學家 이수광의 孔峰類』(1614年)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1603年 北京에서 간행된 마테오리치의 『兩儀玄』 역시 곧 使臣울 통해 한국으로 반입 했댜 使臣 黃汝一(1556-1622)의 후손이 보관중인 이 지도는 이제 진귀한 보물이 되어버렸다. 위에서 언급한 科擧傳播 事夕는 한국의 質學과 뚜럿한 관련이 있다.

한편 일본의 경우는 실학개념이 明治 初期 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福澤諭吉(1835-1901)과 津田傾道(1829-1902)에 의해 형성되었지만, 그러나 일찍이 17세기에 藤原f晶腐(1561-1619), 林(1583-1657), 中江藤樹(1608-1648) 둥이 理性買學 사상을 받아들였고, 熊澤洛山(1619-1691) 등이 功利質學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 후 山鹿素行(1622-1685), 伊藤仁齋(1627-1705), 伊藤東vI(1670-1738), 貝原益軒(1630-1714), 新井白石(1657-1725), 西川如見(1648-1724) 둥의 實學에는 뚜렷한 經驗主義 경향이 보여 이미 "登學"에 속하고 있다. 宮崎安貞(1623-1679), 특히 萩牛祖(1666-1728)는 質證과 功利를 결합한 實學路線을 창립하게 된다. 이어서 출현한 前野良澤(1723-1803), 杉田玄白(1733-1827), 司馬江漢(1747-1818) 등의 蘭學派 實學과 山片幡桃(1748-1821), 三浦梅園(1723-1789), 机足萬里(1778-1852) 등의 儒學派 質學은 그 기본적 出發이 西洋學問이든 漢學이든 간에 모두가 質證隨이다. 渡邊華山(1793-1841), 高野長英(1804-1850)의 質은 西洋學에 기초를 두었고, 佐久間象山(1811-1864), 橫井小楠(1800-1869)의 실학은 에 기초를 두었으나 모두 전통과학에서

근대과학으로 넘어가는 打登이었다.

일본의 전통과학 근대화는 江戶時代(1603-1863) 후기 德川吉宗(1684-1751)이 第8代 將軍(1716年)에 임명된 뒤 실시한 일련의 개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前野良澤과 山田玄白 등이 독일의 Johann Adam Kulmus(l689-1745)의 Anatomische Tabellen (1722年)을 淡文本 『解體(解刻學)新』(1774년)로 번역출판한 사건은 과학근대화의 돌파구가 되었다. 이 책의 출판은 전통의학에서 근대의학으로의 발전을 표시할 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점은 物理, 化學, 牛物學 등 자연과학의 제반분야가 현대적 의의의 質證科學의 길목으로 접어들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이 점에 대해 光湘元恭(1821-1870)이 그의 『理學提要』(1582년)에서 설명한 바 ”物理, 解體(解部學), 生理, 病理, 藥理, 化學, 經驗(臨床) 등 7개 학과는 서양의학에서 필수적인 기초" 그대로였다. 1825년 川本幸民(1810-1871)은 일본에서 최초로 『氣海親廣義』란 물리학 서적을 출판했고, 田川格庵(1797-1845)은 1835年에 일본 최초로 『植學啓原』이란 식물학 서적을 출판했으며, 아울러 1837년 일본 최초로 근대화학 저작인 『化學開宗』을 출판하였다. 江戶 時代를 거쳐 明治維新(1868년)에 이르러 일본은 근대화의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인호 옮김)

實學과 儒家의 經世傳統

馮天瑠

實學精神의 요체는 "經世"사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과 동아시아 각국의 質學史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경세사상의 형성과 발전과정에 대한 고찰로 소급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는 이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특별히 儒家의 經世傳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經世와 入世

“經世"는 ”治世"라고도 하는데, 이때의 "經"는 先秦時代의 典籍속에서 "經給"이라는 말로 자주 쓰인 것으로, "匡伊" 즉 잘못을 바로잡아 구제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周易』에 "군자는 그것으로 경륜을 한다(君子以經給)"1)는 말이 나오는데 『周易正義』에서는 ”經은 經를 일컫고 給온 綱給, 즉 三綱五倫을 가리킨다”고 풀이하고 있다. 또 『中』에는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됨이어야 천하의 大經을 경륜할 수 있다(惟天下至誠, 爲能經給天下之大經)”는 구절이 있는데 朱의 注에서 “經은 사물의 端緖를 따져 나누는 것

1) 『易 • 屯』.

이요 給은 그 종류를 비교하여 한데 뭉뚱그리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2)

“經"자와 ”世"자가 합쳐져 經給이라는 말로 쓰인 예는 『子』에서 처음으로 찾아 볼 수 있다.

옛 역사 속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일과 선왕의 뜻에 관하여 성인이 의론은 하였으되 옳고 그름을 따지지는 않았다.3)

秦淡時代 이후로는 ”經世", "경술(經術, 經世之術)", "경실(經頁, 經世之買用)", "경제(經濟, 經世沿民)" 등의 용어가 더욱 자주 쓰이게 된다. 이러한 용어들은 대체로 모두 소극적 은둔사상과는 상반되는 입장과 지향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을 이끌어 나라를 다스려 나가고 공덕을 쌓는 것을 뜻한다고 하겠다.

“入世"는 바로 이러한 ”經世"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세상일에 뛰어들어 참여한다”는 "입세"의 사상은 유가사상을 포함하는 중국문화에 있어 하나의 기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세"의 정신은 彼岸의 세계를 구축하여 영혼의 영생을 꿈꾸는 사고와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오히려 此의 세계에서 사람들을 이끌고 교화하여 "성현의 덕을 배우게 하고", 立德과 立功과 立言이라는 三朽의 덕을 쌓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풍조의 선양과 보급으로 인해 중국민족은 종교의 미혹에 빠져들지 않는 비종교적 태도를 견지해올 수 있었으며, 人倫과 三綱五倫을 중심으로 삼는 인문주의적 문화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것은 서아시아, 유럽, 남아시아 등 다른 여러 지역의 민족들이 고대와 중세에 걸쳐 종교와 신학을 국가제도의 기반으로 삼아

2) 『四混 • 中沼句』. ”經者理其緖而分之, 給者比其類而合之."

3) 『坪 • 齊物論』. “春秋經世, 先王之志, 聖人議而不辯."

온 것과 대조적인 측면이다. 중국의 고대사회에도 神權至上後의 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殷周時代가 그러한 예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종교가 통일적이고 체계화된 상태로 정립되어 있지 못했고, 周代로 넘어 오면서 "백성을 중히 여기고 귀신을 가벼이 여기는(重民炳神)" 사조가 대두하기 시작하여 종교에 대한 관념은 점차 부차적 지위로 떨어지게 되었다.

隨에서는 殷兪와 周福의 차이룰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은나라 사람들은 귀신을 존중하여 백성들을 이끌어 귀신을 섬기게 했으며, 귀신을 우선시하고 예를 뒤로 했다. 주나라 사람들은 예를 촌중하고 그 시행을 존중하여, 귀신을 받들기는 하되 멀리 하였고, 사람을 가까이 하고 정성스럽게 대했다.4)

그러나 주나라 사람들이 殷代의 天命思想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주나라 사람들은 殷周交替의 사회적 격변 속에서 "천명이라 하더라도 항구적일 수는 없다”,5) "하늘도 믿을 바가 못된다”,6) "소인은 (하늘도) 지켜줄 수가 없다."7)라는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敬德保民의 정신이 국가 통치이념의 지위를 확립해 감에 따라 새로운 사상적 조류가 생겨나게 되었다. 즉 통치자가 늘 하늘에만 의지하는 것은 아무런 실제적 도움도 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현실정치를 개선하는 것, "바로 백성을 제대로 다스리는 일“8)이 가장 중요한 것

4) 『陶 • 表記』. "文人尊神, 率民以事神, 先鬼而後衍. …… 周人施, 敬神而遠之, 近人而忠焉.”

5) 『 • 周 • 康話』. ”惟命不于常.”

6) 『 • 周 • 君』. "天不可.”

7) 『 • 周 • 康話』. “小人難保.”

8) 『尙 • 周 • 康皓』. ”乃其又民."

이며, "하늘이 보는 것은 백성들이 보는 것에서 비롯되고, 하늘이 듣는 소리는 백성이 듣는 소리에서 비롯된다"9)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변화된 인식은 天命思想이라는 대전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통치자가 담당해야 할 역할의 주안점을 이전의 하늘의 뜻을 살피는 것에서 실제적 통치문제로 옮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인식의 대두를 계기로 周代에는 ”神本位에서 人間本位"로의 새로운 문화상의 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한편으로 ”入經世論"의 사상적 전통에 있어 출발점이 되었는데, 바로 여기에서 質學 사상의 뿌리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 古代儒學의 ‘盛世論的 氣風'

周代 후기의 정치학은 진일보하여 종교로부터 벗어나 실제적 통치의 방법을 세워나가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정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치는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다음 세 가지에 힘써야 한댜 첫번째는 사람을 가려 뽑는 일이고 두번째는 백성에 그 근본을 두는 일이며, 세번째는 시세를 따르는 일이다.10)

여기서 이미 정치의 참뜻은 "신의 뜻을 살펴 그것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제대로) 다스리는 일’’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9) 『孟子 • 萬上』. "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

10) 『左傳 • 昭公七年』. ”政, 不可不恨也, 務三而已 一曰擇人, 二曰因民, 三曰從時."

春秋에 유학을 창시한 孔子 역시 이러한 사상적 영향 아래서 자신의 정치철학을 구축한 사람이다. 그는 "前를 정비하였고" “인간을 본위로 한" 周문화의 계승자로서, 殷周時代 이래의 천명사상과 귀신을 모시는 전통에 대해 근본적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그것의 허구적 측면에 대해서는 심도있는 논의를 기피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孔子께서는 괴상한 일과 완력을 쓰는 일, 난잡한 일과 귀신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11)

季路가 귀신을 섬기는 것에 대하여 여쭈어 보았다. 이에 대해 공자께서는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섭긴다 하는가?'라고 대답하셨다. 계로가 ‘죽음에 관하여 감히 여쭈어 보고자 하나이다'하며 다시 물어보자, 공자께서는 '삶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거늘 어찌 죽음을 안다고 하겠는가?'라고 대답하셨다.12)

奧迎가 지혜에 대하여 물었다. 공자께서는 ‘백성을 의롭게 하는 데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면 이것을 일러 지혜롭다 할만 하다’고 대답하셨다.13)

공자는 사후세계와 귀신의 존재여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세상 바깥의 일에 관하여서는 성인들이 살아 계셨을 때에도 문제삼지 않으셨다"14)고 한 莊子의 언급도 이런

11) 『兪語 • 述而』. ”子不語怪力亂神.”

12) 『溫 • 先進』. ”季路鬼神, 子曰 : '苗事人, 務能鬼?' 曰 : ‘政死.'曰 : 洙知生, 焉知死?"

13) 『論語 • 雍也』· ”笑迎間知, 子曰 :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知矣.'"

14) 『子 • 齊物論』. ”六合之外 聖人存而不."

공자의 입장과 같은 맥락에 놓인다.

공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현실의 인간세상에서 벌어지는 생생한 사건들이었다.

공자께서 늘 말씀하시는 것은 詩와 지키는 礎가 다 하시는 말씀이었다.15)

朱의 주에서는 "‘雅'는 ‘' 즉, ‘언제나'라는 뜻이고 ‘執'은 ‘守'즉 ‘지킨다’는 뜻이다. 『시경』으로써 性析을 바르게 하는 법을 배우고, 『서경』으로써 政事룰 올바르게 하는 법을 익히고 『예기』로써 예절을 바르게 하는 법을 배우니, 이 세 가지는 모두가 실제 일상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 항상 그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16)라고 풀이 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문화사상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제 아무리 廣大하고 高尙한 의론이라 하더라도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져서는 안 된다."-이러한 인식은 순전히 이론적인 문제에 대해서조차도 倫理綱常이나 실제의 정치문제에 대한 구체적 고찰과 관계시켜 바라보는 태도를 낳게 했다.

공자의 일생에 걸친 말과 행동 속에서 이러한 "실제 문제를 중시하고 공허한 의론을 경계하는'’ 태도는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다. 그는 列國을 돌아다니며 公卿大夫들을 유세하여 그 바쁘기가 "앉은자리에 온기가 돌 겨롤이 없을" 정도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력적인 활동가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후세의 사람은 "공자는 대체 어떤 분으로, 한 시대를 바삐 살다 가셨던가?"17)라고 물었는데,

15) 『論語 • 述而』. ”子所雅 詩 • • 執禮, 皆雅言也.”

16) 『溫洙氏』. 潭, 常也 執 守也 詩以理性, 以道政事, 禮以證節文, 皆切於日用之, 故常言之.”

17) 唐玄宗, 『魯祭孔子而吸』. ”夫子何爲者, 柄柄一代中.”

이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周而의 모범에 의거하여 세상을 바로잡고(炤世), 구제하고(救世), 경륜(經世)해 나가려는 일념으로 한 시대를 바쁘게 살다 간 사람이라고.

公山弗援가 노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佛)杓이 진나라에 대항해 일어나는 사건이 일어나, 평소 공자가 책망해 마지않던 ”犯上作亂”의 사태가 벌어진 일이 있었다. 이때 난을 일으킨 두 신하가 공자를 초빙하자 공자는 두말 없이 떠날 준비를 하라고 제자들에게 일렀댜 이 말을 듣고 평소 성격이 강직한데다 스승이 "위험한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말라"18)고 한 따위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던 子路가 스승의 행동이 법도에 어긋나지 않느냐고 따졌다. 이에 공자는 자신이 그들의 초빙에 응한 것은 "난을 일으킨 무리를 돕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助亂党)"변혁을 일으킨 세력에 찬동하는 뜻19)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즉, 그는 자신이 취한 입장이 그가 숭상한 주례를 수호하는 입장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으며(“磨而璃", "里而終")동시에 그는 언제나 그를 불러 등용하려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文 • 武 • 周公의 道'를 중홍시킬 준비가 되어있음을 명확히 선언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은 공자가 세상에 중용되고자 하는 생각이 간절했음과 함께, 그가 원한 역할이 모양새를 갖추는 데 필요한 장식물의 자리가 아니라 실제 정치에 힘을 미치는 역할이었음을 보여준다. 그가 세상에 중용되고자 한 마음이 그토록 간절했기에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고", ”굶주림도 마다하지 않는" 고행을 하며 열국

18) 『論語 • 泰伯』. ”危邦不入, 亂邦不居.”

19) 郭洙若의 『十判 孔墨的批判』에서는 "는 난을 일으킨 무리에 대해 언제나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 데 반해 공자는 난운 일으킨 무리를 도우기도 했다는 협의가 있다. (그러나 이때의) 난을 일으킨 무리둘이란 당시로서는 백성의 입장을 보다 잘 대변할 수 있었던 신홍 세력운 가리키는 것으로 봉 수 있겠다”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을 떠돌며 유세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자가 당시 위정자들과 토론했던 문제도 "어떻게 정치를 할 것 인가?", "어떻게 백성을 부릴 것인가?", "어떻게 해야 백성들로 하여금 따르게 할 것인가?” 하는 통치방법의 문제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공자가 창시한 유학의 "입세-경세론적 가치관’’이 확립된 과정은 伯家 자체의 기원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하겠다. 고대의 지식계급, 즉 君子는 대개 세 가지 부류의 직책과 관련되어 있었다.

우선 天文울 맡은 직책에 종사한 사람들이 있다. 전국시대의 제자백가 가운데 陰賜家의 경우가 이러한 직책에서 유래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20)

둘째로 종교와 관련된 직책을 맡은 이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때면 家臣이 巫史가 되었다."21) 商周時代에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임무를 맡은 巫 • 史 • 卜 • 祝의 네 가지 부류의 직책이 있었는데, 이들은 당시 문화활동의 가장 중요한 담당자들이기도 했댜 儒家의 경우, 이들 가운데 무, 축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공자는 어린 시절 제사놀이를 할 때면 언제나 祭器를 차리고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孔子爲兒姬戱, 常陳組豆, 設禮容)”는 『史記 孔子世家』의 기록이나, “나가서는 公卿을 섬기고, 집에서는 父兄을 섬기며, 장사를 지낼 때는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고, 술을 마시더라도 실수를 하지 않는다"22)고 한 공자 자신의 언급을 볼 때 공자가 청년시절, 권세가의 집을 드나들며 제례를 돌봐주는 일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러한 일은 巫祝의

20) 『淡 • 狂文志』. ”陰陽家者甄 蓋出于羲和之官. 敬順吳天, 曆象日月星辰, 敬授民時.“

21) 『國語 • 楚語』. "夫人作享 家爲巫史.”

22) 『論語 • 子平』. "公卿, 入事父兄, 炭事不政不勉, 不爲酒困."

유풍이 남아있는 부분으로 지적될 수 있겠다.

그러나 공자를 비롯한 儒家는 고대 지식인의 직책 가운데 또 다른 하나인 통치자의 정치적 보좌역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겠다. 통치자의 측근에서 정무를 보좌하는 인물을 가리켜 『尙書』에서는 ”謀人"이라고 칭하고 있다. 유가는 바로 이 “모인”의 한 부류에 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에 대한 설명은 분분하다. 『漢맙 • 座文志』에서 "유가는 대개 司徒의 관직에서 나온 것으로 임금을 도와 음양의 이치를 따르도록 하고 백성을 널리 교화하는 일을 자신의 직책으로 삼았다(儒家者類, 蓋出丁司徒之. 助人君頂陰陽, 明敎化也)"고 설명하고 있다.

先秦諸子는 어쩌면 하나의 관직에서 갈라져 나온 것일 수도 있다는 관점도 있다. 이 경우 儒家 역시 국가의 영토와 백성을 관리하고 토지의 전적과 백성의 군역 요역을 담당하는 ”司徒之官"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지만 아직 정설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유가는 종교와 관련된 업무나 천문을 맡은 직책에 있는 이들과는 분리되기 시작했다. 유가는 "청묘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은 직책에서 유래한" 墨家나 ”史官에서 유래한" 道家, ”羲和之官(천문을 담당한 관리)에서 유래한" 음양가와 명확히 구분되었다. 그리고 유가는 교화를 담당한 제사계층과도 일정한 계승관계가 있었기에 통치자를 보좌한다는 측면 외에도 "도와 예를 겸비하여 師와 의 임무를 함께 수행하는"23) 임무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임금을 보좌하는 임무를 맡기는 했으되 “敎化룰 폐지하고 仁愛를 멀리하며 형벌과 법률만을 담당하는"24) “理官" 출신의 法家와도 구분된다.

유가의 입세, 경세사상이 확립된 것은 선진제자가 출현한 역사적

23) 『掛經室文菓 • 國史橋林傳序』. ”道與禮合 兼備師.”

24) 『漢 • 松文志』. “無敎化, 去仁愛, 專任刑法.”

배경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淮南子 • 要略』에서는 제자의 학문은 모두 당시의 사회적 모순을 개혁하기 위한 시대의 요구에 따라 생겨났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으며, 梁啓超도 이러한 입장에 대해 "상당수준 진리에 가깝다”는 말로 동의를 표명하고 있다.25)

『한서 • 예문지』에서는 제자의 학문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자 十家 중에 볼 만한 것은 九家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왕도가 이미 쇠퇴하여 제후들이 직접 정치를 담당하게 된 이후에 일어난 것이다. 이 당시 군주들의 好惡가 달라지자 구가의 학술들이 벌때처럼 일어나서 각기 한 가지 측면만을 취하여 그 잘하는 바를 숭상하였으며, 이것으로써 다투어 유세하여 제후들에게 영합하고자 하였다.26)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우선, 선진제자는 "왕도가 쇠하고 제후들이 직접 정치에 나서는" 춘추전국시대의 극렬한 정치투쟁 속에서 나타났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이들은 "당시 군주들이" “제각기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는 여러 가지 통치방법"을 필요로 하는 요구에 부응하여 "여기저기서 일어난 것이며", 제자백가들은 자기의 한 가지 학설만을 내세워 "제후들에게 등용되기를 바랐”으므로 그들이 정치권력에 대해 깊은 의존적 태도를 보였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뒤집어 보면, 당시의 각 제후국과 정치집단들은 생사를 걸고 정치적 군사적 투쟁을 벌이는 와중에 있었기에, 자신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학자들이 고상하고 현묘한 사색에나 빠져,

25) 染啓超, 『飮氷室全集 • 中國古代學術流硏究十綱』

26) "子十家 其可觀者, 九家而已. 皆起於王道低微 諸侯力政. 時君世主好惡殊方, 是以九家之術蜂出井作, 各引一端, 崇其所善, 以此勅說, 取合諸侯.”

현실의 급박함을 돌아보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순수학술 연구에나 몰두하고 있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요컨대 그 시대가 사상가들에게 요구한 것은 세상을 다스려나갈 책략이었지 일반적인 의미의 오묘한 이론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인해 선진의 제자사상가들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입세-경세"의 가치관에 경도되었다. 黃宗羲가 말한 바와 같이 "옛날 유가, 묵가를 비롯한 제자백가의 저서들은 크게는 천하를 다스리는 데 쓰이고 작게는 각기 그 명목에 맞는 일에 쓰였으니 공허한 의론이나 사실과 어긋난 것은 하나도 없었다”27)고 하겠다.

자연 속을 소요하며 세속을 초탈하려 한 노자와 장자까지도 "齊物"은 “齊人"을 위한 것이었으며, 어떻게 "應帝王”의 임무를 달성할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깊이 고민하는 문제였다. 이런 특수한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선진시대에는 역사학, 윤리학, 정치학 등 직접적으로 사회를 다스려나갈 방법을 연구하는 학과가 먼저 발전해 나가게 되었다. 六經의 권위와 명성은 후세에 와서 알려졌지만 그 내용은 훨씬 이전에 정립되어, "공자가 나기 전에 세상에 이미 六經이 있었다."28)

육경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문제는 주로 역사학, 정치학, 윤리학 등이댜 일반적으로 『시경』으로써 뜻을 말하고 『서경』으로써 사실을 말하고, 『예기』로써 행실을 말하고, 『악기』로써 조화를 말하며, 『주역』으로써 음양을 말하고, 『춘추』로써 명분을 말한다”29)고 하지

27) 『今水經序』. ”古者硏墨諸家, 其所著 大者以治天下, 小者以爲名用, 盜未有空言者也.”

28) 『定庵文染補編 • 六經正名』. ”孔子之未生, 天下有六經久矣.”

29) 『莊子 • 天下』. "以道志 以道, 松以道行, 樂以道和, 易以道陰, 春秋以道名分.”

만 "六腐를 법도의 기준으로 삼은"30) 유가는 선진시대의 세상을 다스리는 데 쓰인 세 가지 학문(역사학, 정치학, 윤리학)의 집대성자였다. 한 마디로 말해 유학이 근거로 삼은 육경은 모두 經世致用의 학문이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육경을 공부할 것을 권하였는데, 이것은 공허한 이론의 탐구에 목표를 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실용적 관점을 명백히 하였다.

시 삼백편을 외우고서도, 정사를 맏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사방에 사신으로 파견되어서도 제대로 웅대하지 못한다면, 시를 외운 것이 많은들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31)

청나라의 方舊는 공자사상의 참뜻을 깨달았다고 하면서, ‘‘옛날의 이른바 학문이란 마음을 밝게 하여 그것으로써 사물의 법칙을 궁구하고 세상일에 이롭게 하는 것이니, 세상일에 쓰일 수 없다면 학문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32)

“通經治用"과 ”六經治世"의 논리는 중국봉건시대에 있어서 일반화된 논리였다. 육경에 통달한 자라야 관직을 얻을 수 있었고, 조정의 조령이나 신하들이 임금께 올리는 상소문 등도 모두 육경을 표준으로 삼고 그에 의거하여 작성되었다. 청나라의 章學誠은 "육경은 모두 史害이다. 육경은 모두 선왕의 정사의 기록으로 선왕이 왕위에 계시면서 도를 행하시고 세상을 다스려 나가신 것을 기록한 것이니 결코 공허한 의론이 아닌 것"33)이라 했으며, 또 "공자께

30) 『史記 • 論六家之要旨』. ”以六禮爲法.”

31) 『兪語 • 子路』 "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難多, 亦笑以爲.”

32) 『傳信錄序』. ”古之所學者, 將明諸心, 以盡在物之理, 而濟世用, 無濟于用者不也.”

33) 『文史通義 • 易敎上』. ”六經皆史也. 六經皆先王之政典也. 六經皆先王得位行

道經緯世宙之造 而非托於空.”

서 육경을 지으신 것은 모두가 선왕의 典에서 취한 것으로 실제 사실과 동떨어져 이치만을 논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34)고 하였다. 이것은 육경 자체와 육경을 정리하고 세상에 전한 공자의 이성주의적 해석태도를 지적한 것이라고 하겠다.

전체적으로 보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우주의 본체룰 깊이 있게 탐구한 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사물과 전적을 고증하고 훈고한 학자이기도 했고, 나아가 당시 의 윤리, 정치 문제에 대해 고찰하고 자신의 수행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려 한 정치가, 사상가이기도 했다.

주나라 말기의 유가사상가들은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으나 때를 만나지 못했다. 司馬談과 司席遷 부자가 당시의 유가들을 평하여, "박식했으나 핵심을 결하고 있었고, 열심히 노력하였으되 공적을 쌓지 못했"으며, ”辻遠하여 실제 사정에 밝지 못했다”고 하였다.35) 그러나 당시의 유가둘은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공자의 경우만 해도 자신의 치세능력에 대해 스스로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공자는 "혹 나를 써주는 사람만 있다면 단 일 년에 나라를 바로잡고, 삼 년이면 성과를 올리겠다”36) 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예측은 "예악이 무너진" 周 말기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공자 자신의 정치적 공적은 "제나라에서 배척당하고, 송나라와 위나라에서 쫓겨나고, 진나라 채나라에서는 곤경을 당하였으며", "구차하기가 상갓집 개와 같았다”37)고 한 것에서 알

34) 『文史通義 • 經解』. ”夫子之述六經, 皆取先王典, 未離著理.”

35) 『史記 • 孟子荀卿列傳』. ”博而要, 勞而少功.” “辻遠于.”

36) 『 • 子路』. ”荀有用我者, 期月而已可也, 三年有成.”

37) 『史記 • 公子世家』. "禾平齊, 逐平宋衛, 困于陳蔡之.” ”累梁若炭家之狗.”

수 있듯 그다지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유가의 입세와 경세에 대한 신념은 정치적 좌절과 동시대인의 몰이해에도 아랑곳 없이 혼들리지 않았다.

유가의 입세一경세론의 사상과 실천은 당시 세상을 피해 숨은 은자들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荷篠丈人과 같은 이들은 공자의 제자들을 가리켜 “四股도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고 오곡도 분별하지 못한다"38)고 하였으며, 石文의 문지기(晟門)는 공자를 "자신이 하려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줄 알면서도 하는 자”刃)라고 하였고, 楚나라의 狂人 接輿는 풍자의 뜻이 담긴 노래(風歌)를 부르면서 孔子에게 권면하기를, 더이상 政에 헛되이 매달리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오늘날 정사룰 좇는 이들은 위태하기”40) 때문이었다. 몸소 경작하며 은거한 張沮와 架沿은 孔門의 師弟들에게 자신들과 함께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살자고 하였다. 언어가 극히 간략하고 글귀를 금처 럼 아낀 『論語』에서, 者가 儒學者의 經世親을 비판한 곳이 대여섯 곳에서나 보이고, 또 어떤 단락은 특히 길다. 이것은 孔에서 은자와 왕래하고 논란하는 것을 중시하였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바로 춘추시대에 은자가 전국에 두루 존재하였고, 은둔(通世) 사상은 사회상황이 반영된 무시할 수 없는 사조였으며, 유가의 “入世世" 관념은 바로 "은둔” 사조와의 논변으로부터 발양된 것임을 말한다.

원래 孔子는 난세 중의 隱者에 대해 동정적이었다. 그는 일찍이 세상을 도피한 사람들을 "賢者"41)라 불렀고, 특히 伯夷 • 叔齊와 같은

38) 『論語 • 微子』. ”四體不動 五穀不分.”

39) 『兪語 • 』 ”知其不可以爲之者."

40) 『論語 • 微子』. “今之從政者苑而.”

41) 『論語惡』. "현자는 세상을 피하고, 그 다음은 땅을 피하며, 그 다음은 色을 피하고, 그 다음은 말을 피한다(賢者(避)世, 其次群地, 其次群色, 其次群).”

逸民", 곧 “그 뜻을 꺾지 않아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은"42) 사람들을 매우 칭송했다. 이것은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세상에 나오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43)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 슬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몸을) 거두어 숨긴다”44)라고 한 그의 처세 철학과 상통한댜 또한 儒旦의 전체적인 체계에서, ”벼슬(仕)"과 "은거()”는 시종 서로 보충적인 두 측면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致仕"는 유학의 주류이고 "간"은 다만 보조적인 위치일 뿐이어서, 유학자가 麟하여도 왕왕 "마음은 높은 궁궐에 있어서",45) 이른바 "종묘의 높은 지위에 있을 때엔 그 백성을 걱정하고, 강호간의 먼 곳에 거처할 땐 그 임금을 걱정한다”.46) 孔子의 경우, 좌절을 당했을 때 어쩌다 세상을 도피하고자 하는 의론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의 기본 취지는 역시 세상을 도피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는 자로가 전해준 長沮와 架의 도피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매우 실망스럽게 말했다.

사람은 새와 짐승과는 함께 어울리지 못할 것이니, 내가 이 사람의 무리와 함께 하지 않고 누구와 함께 하겠는가.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나는 더불어 바꾸지 아니하리라.47)

자신은 藍者처럼 그렇게 자연 속에 동화되어 새 • 짐승과 어울리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단지 사람과만 일을 이야기할 수

42) 『論語 • 微子』. ”不降其志, 不辱其身.”

43) 『瀋論語 • 泰伯』. "天下有道見 無道隱."

44) 『論語 • 衛索公』. ”邦有道, 邦無道可卷而懷之.”

45) ”心存魏閑.”

46) 范仲泥 『岳陽樓記』. “居廟堂之高 及其民; 庫江湖之遠, 則及其君.”

47) 『令語 • 微子』. "獸不可與同詳 吾非斯人之徒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焉."

있다는, 세상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뜻을 주장하였다.

孔의 또다른 大家 子夏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벼슬하고도 여유가 있으면 배우고, 배우고도 여유가 있으면 벼슬할 지니라."48) 그는 "학문(學)"과 "실행(行)", "학문(學)"과 ‘벼슬(仕)”을 서로 표리를 이루는 관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說文解字』에서 “仕"자의 뜻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명확히 지적하였다. “사는 배우는 것이다(仕, 學也).” 章太炎도 이렇게 말하였다. "말하자면 벼슬은 또 배움과 같다는 것이다."49) 결론적으로 말하면, 儒家는 道와 學과 治 세 가지를 하나로 관통했던 古風을 계승하였다. 淸대 사람 程晋芳은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옛날 사람들 중에 학문을 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다스려 천하 국가의 일에 옹하게 하였댜 그런고로 혼자 거처하면 큰 유학자가 되었고, 세상에 나오면 큰 신하가 되었으니, 일(事)과 마음(心)을 나누어 둘로 쪼개지 아니하였고, 배움(學)과 실행(行)을 나누어 둘로 쪼개지 아니 하였던 것이다."50) 呼自珍은 이와 같은 풍격을 개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周나라 이전에는 한 시대의 다스림이 곧 한 시대의 학문이었다. 한 시대의 학문은 모두 한 시대의 왕이 열었던 것이다. …… 道와 學과 治라는 것은 곧 하나였을 따름이다."51) 이렇게 후세의 유학자들에게 숭앙을 받은 "옛날에는 經과 治術의 구분이 없었다"52)는 류의 仕學合一의 전통은 바로 孔子가 창설한 유학의 ”入世

48) 『論語 • 子長』. ”仕而俊學, 學而俊仕.”

49) 『檢論 • 訂孔』 "仕者又與學同.”

50) 『正學論三』(『皇朝經世文編』 卷一, 學術二.) ”夫古人爲學者, 以自治其身心, 而以應天下國家之. 故處爲大, 出爲大臣, 未有音與心爲二, 學與行爲二者也.“

51) 『自珍全渠 • 治學』. ”自周而上, 一代之治, 卽一代之學也. 一代之學, 皆一代王者開之也 …… 道也, 學也, 治也. 則一而已矣.”

52) 『皇朝經世文編』 卷一, 『經義制事異同論』. ”古無經術治術之分.”

-經世" 풍격의 체현이다 "입세-경세"의 기풍은 중국 선비들의 주요 흐름이 되어, 儒牛.의 우수한 측면과 부족한 측면들은 모두 이와 연계되어 왔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입세경세"라는 줄을 잡기만 하면 "윤리-정치’’ 型의 중국문화의 정신을 파악할 수 있다고.

3 儒學經世의 두 방향

—“內聖"과 ”外王"

유학의 소박한 入世정신은, 經世致의 가치관을 지니고 있으면서 유학의 기나긴 모순운동의 역정 속에서 엷어질 때도 있었고 변형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으나 시종 면면히 끊이지 않아서, 변화가 심한 와중에서도 일관되어 왔다. 그러나 孔子 이후로 유학의 경세관의 주조에는 두 가지 상이한 방향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중국 문화사에 있어서 매우 긴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유가에서는 "윤리-정치" 형의 학설 체계를 만들었다. 이에 따르면 유가에는 인간의 내재적인 주관적 윤리수양론과 외재적인 객관적 정치론이라는 두 가지 상호 연계되어 있는 구성부분이 포괄된다. 전자는 이론바 ”仁"學 또는 “內聖"의 學이고 후자는 이른바 “而”學 또는 ”外王"의 學이다. 孔子에게는 이 두 가지 측면이 하나의 체계 내에 혼연일체로 통일되어 있다. 그는 人를 배우는 "下學"과 天命에 通達하는 "上達"이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야지 서로 끊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주장하였다.53)

53) 『論語 • 憲』.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탓하지 않고, 아래로부터 배위 위로 뭉달하니, 나릅 아는 것은 하늘뿐인저!' (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上達. 知我者其天平!')" 側의 『論話義疏』. ”下學온 人를 배우는 것이고, 上達은 天命에 동단하는 것이다(下, 人

事; 上達 達天命)."

공자는 또 스스로를 수양하는 것(修己)이 남을 편안케 하는 것(安人)이나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安百姓)과 서로 관통되는 것임울 주장하였다.54) 그는 가장 이상적인 경계란 舜임금과 같이 "몸가짐을 공손하게 하고 南面하여 王位에 앉아 계실 따름"55)인 것이다. 그렇지만 孔子 이후로는 下과 上達, 修己와 治이라는 두 측면들이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리가 이루어진 원인은 春秋시대 이래로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성현들이 밝게 드러나지 아니하고 道와 德이 하나가 되지 못하였"56)기 때문이다. ”內聖과 外王의 道는 캄캄하여 밝혀지지 아니하고 엉키어서 드러나지 않게 되었댜 그리하여 천하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들이 하고 싶은 바를 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방책으로 삼게 된"57) 국면이 나타났다. 이렇게 "도술이 천하에 의해 찢겨지는"58) 추세는 諸子들의 번성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동일한 학파 내부에서조차도 유별이 나타나게 되었댜 유가의 경우, 이러한 분기는 주로 孟阿와 荀況의 두 학파로 나타났댜 전자는 유학의 원래 가르침 중에서 ”內聖"의 학을 발전시

54) 『論語 • 』. "子路가 子에 대해 물으니,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 수양을 경건 성실하게 해야 한다’라 하셨다. 자로가 묻기를 ‘그렇게만 하면 됩니까?'라 하자 말씀하시기몰, '자기 수양을 하고 납을 편안하개 해주어야 한다’라 하셨다. 자로가 또 묻기를, ‘그렇개만 하면 됩니까?'라 하자 말씀하시기를, ‘자기 수양을 하고 백성을 안락하고 편안하게 해주어야 한다’라 하셨다.(子路間君子, 子曰: ‘修已以敬.’ 曰: ‘如斯而已平?' 曰: '{街己以安人.’ 曰:斯而已平?' 曰: ‘修己以安百姓.')"

55) 『兪 • 衛公』 "억지로 함이 없이 잘 다스리는 이는 舜임금이신저! 그 어떻게 하셨던가? 몸가짐을 공손하게 하고 南面하여 王位에 앉아 계셨을 따릅이시다(無爲而治者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56) 『子 • 天下』 "天下大亂 貸聖不明, 道德不一.”

57) 『莊子 • 天下』. ”內聖外王之道, 而不明, 而不發; 天下之人, 各爲其所欲焉 以自爲方.”

58) 『子 • 天下』. “道篠 將爲天下裂.”

키는 데에 치중하였고, 후자는 유학의 원래 가르침 중에서 “外王"의 학을 발전시키는 데에 주력하였다.

孟의 사상은 대략 曾參과 子思라는 줄기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그는 "유가의 도를 다듬고, 五經에 통달하였으며, 특히 『詩經』과 『에 뛰어났다."59) 그의 사상은 또한 孔子의 "입세―경세" 풍격과 일맥상통한다. "세상이 쇠하고 도가 미약해지자 사악한 말과 포악한 행실이 일어난"60) 戰國 시대에, 孟庫는 강렬한 治世之心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언명하였다. "천하를 平治하고자 한다면, 지금 세상에서 나 말고 그 누가 있으리요?"61) 孟庫가 "천하를 平治하고자 한"62) 방책의 핵심은, “人心울 바르게 하여"63) “사악한 說을 그치게 하고 편벽된 행위를 막으며 방자한 말을 몰아내는"64) 목표에 이르는 데에 있었다. 그러므로 孟는 孔子 經世학설의 한 측면, 즉 외재적인 ""學을 중시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밝혔다. 情의 禮를 나는 배운 적이 없다."65) 孔子가 상당히 칭찬한 齊桓公이나 管仲과 같은 事功이 뚜렷한 인물들에 대해 孟子는 매우 반감을 가졌을 뿐 아니라,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하기까지 하였다. “孔子의 門徒들은 桓公이나 文公 같은 覇者에 관한 일을 논하지 않았습니다."66) 이것은 바로 孟庫가 孔島의 "外王"의 경향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반대로 孔子 經世 학설의 또 다른 한 측면, 죽 내재적인 "仁“學을 발양하고, 또 仁學을 정치의 영역

59) 趙岐, 『孟子題辭』. ”治儒術之道, 通五經, 尤長於詩 • "

60) 『孟子 • 勝文公下』 "世哀道微, 邪說暴行有作.”

61) 『孟子 • 公孫丑下』. ”如欲平治天下, 當今之世, 舍我其誰也?"

62) ”平治天下.”

63) ”正人心.”

64) 『孟子 • 勝文公下』. "息邪說, 距波行, 放程辭.”

65) 『孟子 • 股文公上』. "諸侯之福, 吾未之學也.”

66) 『孟子 • 梁惠王上』. ”仲尼之徒, 無道桓文之事者.”

에까지 적용하여 ”仁政"설을 제기하는 데에 주력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仁 • 義 • 而 • 智는 밖에서 나에게로 녹아드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원래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르기를, ‘구하면 얻을 것이요, 버리면 잃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67) 사람은 단지 마음속에 원래 있는 인 • 의 • 예 • 지라는 이 "四端"을 끄집어내기만 하면 바로 ”四海(天下)를 보전할 수 있으니",68) 이것도 바로 이른바 ”仁政"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에 근거하여 孟阿가 설계한 경세의 길은 안으로부터 밖으로, 자신으로부터 천하로 향하는 길이었다. 孟子가 이르기를 “사람들이 항상 하는 말이 있는데, 모두 천하와 국가만 애기한다. 천하의 근본은 나라에 있고, 나라의 근본은 집에 있으며, 집의 근본은 자신에게 있다”.70) 思孟學派의 대표작인 『大學』에서는 이 경세의 방안에 대해 더욱 구체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옛날에 천하에 밝은 덕을 밝히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나라를 다스렀다.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집안을 다스렀다. 그 집안을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몸을 닦았다. ……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수신을 근본으로 삼았다.71)

思孟學派처럼 개인의 수양을 출발점으로 삼아 治國平天下에 이르는 경세 方略은 보통사람들에게도 보급되었지만, 그보다는 더욱

67) 『孟子 • 告子上』. "仁義禮智, 非由外絲我也. 我固有之也. …… 故曰: ‘求得之, 舍失之.'"

68) 『孟子 • 公孫丑上』. ”足以保四海,”

69) 『孟子 • 離媒2· "人有恒言, 皆曰: ‘天下國家.' 天下之本在國, 國之本在家, 家之本在身.”

70) ”古之欲明明德于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 自天子以至于庶人, 是皆以修身爲本.”

임금과 군주를 위해 설계된 것이다. 孟는 “仁으로써 정치를 하지 않으면, 천하를 다스릴 수 없으니",71) 仁政을 실시하는 관건은 어진 사람(仁人)이 군주를 돕는 데 있고, 仁人이 군주를 위하면 바로 인정이 있게 되니, 나아가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천하가 평화롭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임금이 어질면 (백성이) 어질지 아니할 수 없고, 임금이 의로우면 의롭지 아니할 수 없으며, 임금이 바르면 바르지 아니할 수 없으니, 한 번 임금이 바로 세워지면 나라가 평정되는 것이다."72)

유학의 또 다른 경향의 대표자 荀況은 "而"學을 출발점으로 삼아, • 樂을 근본으로 하고, 器로 상징되는 외재적인 事功을 건립하는 데에 뜻을 두었다. 바로 청대 유학자가 개괄한 "엣 성왕의 經世之道는 禮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다"73)는 말과도 같이. 荀況은 외부세계를 정복하고자 온 힘을 쏟았다. 곧 이른바 “사물을 길러 裁制하고", "天命을 제어하여, 그것을 사용한다”는 것이다."74) 이것이 바로 荀況과 孟의 경세 방법이 구별되는 부분이다. 순황은 인간의 사회성을 강조하였는 바,75) 사회성을 지닌 인간집단이 모인다고 해서 인간의 선의에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여기에 필요한 것은 질서를 세우는 것이고, 곧 (그들 사이에) 구별되는 바("夕"과 增")가 있어야 하며, 여기에 條理化 • 制度化를 더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禮"라는 것이다.

荀況의 경세 학설의 중심내용은 "禮"에 대한 논의에 있다. 순황

71) ”不以仁政, 不能平治天下.”

72) 『孟子 • 離媒』· “君仁莫不仁, 君義莫不義, 君正莫不正, 一正君而國定矣.”(“君正” 이하는 『孟子』 原典에 없다-역자주)

73) 『庫全召總 目 • 經部 • 禮說提要』. ”古聖王經世之道, 莫于商.”

74) 『子 • 天論』. ”物畜而制之“, ”制天命而用之.”

75) 『荀子 • 效』. ”道란 무엇인가? 君이 도이다. 君은 무엇인가? 모일 수 있는 것이다(道者 何也? 曰: 君道也 君者, 何也? 曰: 能群也).”

은, 예의 기원은 인간의 선천적인 지혜에 있지 않고, 인간의 물질적인 요구로부터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忠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이르기를 사람은 나면서부터 욕망이 있게 되고, 욕망이 있는데도 얻지 못하면 구하지 않을 수 없으며, 구하는 데에 정도의 한계가 없게 되면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싸우면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워지면 궁하게 된다. 옛 임금들은 어지러워지는 것을 싫어하였기에 예의를 만들어 그들을 나누었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욕망을 채워주고 사람들이 구하는 것을 주었다. 욕망으로 하여금 물건에 궁하여지지 않도록 하고, 물건은 반드시 욕망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여, 이 두 가지가 서로 견제하며 자라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예가 생겨난 이유인 것이다.76)

순황은 예의 기능을 논하면서 주로 그것의 정치적 통치작용에 대해 서술하였다.

사람은 祖가 없으면 살지 못하고, 일은 예가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으며, 나라에 예가 없으면 편안하지 못하다.77)

規短는 네모와 원의 극치요, 禮라는 것은 人道의 극치이다.78)

순황은 유가 경전의 해석에 대하여도 역시 외재적인 事功(經世-

76) 『荀子 • 禮論』. ”禮起于何也? 曰: 人生而有欲, 欲而不, 則不能無求, 求而無度記分堤 則不能不爭 爭", 亂窮 先王惡其亂也, 故制禮.義以分之, 以迫人之欲,給人之求 使欲必不窮平物,物必不屈于欲, 兩者相持而長, 是稷之所起也.”

77) 『硏子 • 修身』. “人輯不生, 事無禮不成, 國家無禮不寧.”

78) 『汗 • 閃論』· ”規短者方之至, 禮者人道之極也.”

역자주)으로부터 접근하였다.

그러므로 『서경』은 정사의 기록이고, 『시경』은 음악에 알맞은 것들을 모아놓은 것이며, 簿託』는 法의 근본이며 여러 가지 일에 관한 규정이다.79)

이것은 실제로 후세의 "육경은 모두 史이다", "육경은 모두 선왕의 政典이다"80)라는 등의 견해의 선구가 되고 있다. 또한 여타의 여러 경전들에 대하여 荀況은 특히 예를 부각시켜, 面豊 • 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가 가리킨 학문하는 길은 "경전을 암송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예를 읽는 것에서 멈추는"81) 것이었다.

荀況이 생각한 이상적인 경계는 "예"라는 규범 아래에서 질서정연하게 상하의 등급이 분명하고, 또 외재적인 事功의 성취가 충만된 세계였다.

천하를 통일하고, 만물을 넉넉하게 하며, 백성들을 잘 길러 천하를 모두 이롭게 하면, 길이 통하는 곳의 모든 사람둘이 복종해 온다.82)

이러한 "성왕의 자취가 드러나는"83) 화면은 실제로는 바로 하나로 통일된 봉건 제국의 청사진인 것이다. 이러한 청사진에 관하여 순황은 상당히 구체적인 설계를 하였다. 그는 우선 군주의 중요성

79) 『子 • 勸學』. "者, 政事之紀也. 者, 中聲之所也. 『禮』者, 法之大分, 類之紀綱也.”

80) ”六經皆史", “六經皆先王之政典.”

81) 『迫子 • 勸學』. ”始平經, 終平禎禮.”

82) 『子 • 非十二子』. ”一天下, 財萬物, 長迫人民, 兼利天下, 通達之, 莫不從服.”

83) "聖王之述著矣.”

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구분이 없으면 사람에게 큰 해악이 되고, 구분이 있으면 천하에 큰 이익이 된다. 임금은 구분을 관장하는 중요한 中樞이다.84)

계속해서 그는 재상을 두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만일 한 재상이 통솔하면 신하와 관리들은 도에 머무르며 정연하게 힘쓰게 되니, 이것이 주인된 사람의 직책이다."85) 나아가 그는 백성들을 부유하게 해야 하는 군주의 직책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그러므로 王者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覇者는 선비를 부유하게 한다.”86) 그는 또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길은 비용의 절약과 생산의 발전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나라를 풍족하게 하는 길은 쓰는 것을 절약하여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나머지를 잘 간직하는 데에 있댜 …… 백성을 부유하게 하면 백성이 부자가 되고, 백성이 부자가 되면 밭을 비옥하게 잘 경작하고, 밭을 비옥하게 잘 경작하면 생산하는 곡식이 백배로 는다."87)

요컨대, 荀況은 君主의 정치와 官吏의 운용에서부터 경제정책에 이르기까지 신홍 봉건제국의 건립을 위하여 실행이 절실한 완비된 방안을 제공하였다. 통일된 봉건제국 秦 • 漢의 건립으로 순황이 표방한 "外王"이라는 經世·의 方略은 성공적으로 실천되었다고 할 수

84) 『子 • 富國』. “故無分者, 人之人害也; 有分者, 天下之大利也. 而人君者, 所以管分之樞要也.”

85) 『荀子 • 王』. ”若夫論一相而兼率之, 使臣下百吏莫不宿迫鄕方而務, 是人主之職也.”

86) 『好子 • 王制』. “故王者富民, 覇者富士.”

87) 『子 • 富國』. “足國之道, 節用裕民, 而善藏其餘 …… 裕民民富, 民富以易; 田肥以易, 則出者百倍.”

있다.

4. 秦漢 이후 儒學經世의 복잡한 형태

위에서 말한 것처럼 유학 경세의 두 방향의 성패 여부는 아마도 戰國시대로부터 秦漢시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사회적 실천에 의해서 검증되고 감별되었고, 역사는 이미 이 두 가지 경세 방향 중에서 선택을 한 것 같다. 그러나 문제가 이처럼 간단하지는 않다.

”外王”의 노선 아래서 이끌어지고 세워져 온 대통일의 봉건제국은 혁혁한 문치와 무공을 쟁취해왔다. 秦始皇과 漢武帝의 권위와 功業은 모두 이전 시대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대통일된 봉건제국이라는 사회적 실체는 자신의 모순에 의해 매우 급속히 혼란스러워졌고, 이것은 통치자와 지식계층(士人)으로 하여금 경세의 방략에 대해 새로운 조정을 필요로 하도록 하였다. 통치자는 단지 외재적인 事功만으로는 부족하며 또 확실치도 않다는 것, 또한 어떤 특정한 모범에 의거하여 사람들―부지런하게 훈련하면서도 安分自足하는 백성들―의 영혼을 빚어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士人들은 통치자가 백성을 기르고 다스리는 것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 "군주의 마음 중에 그릇된 것을 바로잡아"88) 그로 하여금 "선정을 베풀도록"89) 해야 하였다. 죽, 이른바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올바르게 한다"90)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봉건사회 중 • 후기의 유생들이 절대권력을 지닌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는 방법이 되기도 하였다. 세계적으로 볼 때, 중세의 많은 민족

88) "各君心之."

89) ”行善政.”

90) ”正心而正朝廷.”

과 국가들에서 영혼의 鉛造와 군권의 제한에 관한 임무는 종교와 수도원을 통해서 행해지고 완성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종교와 신학이 비록 상당한 작용을 발휘했지만, 사람들의 영혼을 빚어내는 사명-군주를 교화하는 것까지를 포함하여一은 주로 유학자들에게 떨어졌다. 이렇게 思孟學派에서 발휘된 "內聖”의 學은 기치를 드높이게 되고, 때를 만나 홍성하여, "彦, 齊, 治, 平”은 土人들이 가지게 된 익숙한 생활신조가 되었으며, 『大學』은 "천하를 다스리는 자의 율령과 제도이므로, 그것에 근본을 두면 반드시 잘 다스려질 것이요, 그것에 어긋나면 반드시 어지러워질 것이다"91)라고 보게 되었댜 이와 반대로 荀況의 ”外王”의 學은 막후로 퇴장하여, 단지 봉건 통치계급에게 실제적으로 운용되었을 뿐, 그리 칭송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의미로부터 말해 볼 때, 思孟學派의 ”內聖"의 학은 한대 이후의 중국 봉건사회에서 "基宗敎"로 작용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그것은 종묘에 드높이 거처하게 된 승리자가 되었다.

봉건사회가 발전함에 따라서 孟의 지위는 더더욱 높아져왔다. 漢代의 趙岐는 孟를 일컬어 "亞聖"이라고 하였고, 唐代의 韓悠는 孟庫가 孔學 전통의 정통적인 계승자라는 점을 인정하여, “-舜禹-易-文-武-周公-孔-孟”으로 발전되어 온 계통을 세웠으며, 특히 “孟가 죽은 뒤로 그 道는 전하여지지 않게 되었다"92)고 지적하였다. 韓兪는 荀況도 존승하였다. ”荀卿은 올바름을 지켰으며, 그의 커다란 논지는 드넓었다(荀卿守正, 大論是弘)". 그렇지만 그는 "크게는 순수하지만 작게는 홈이 있다(大醉小紙)”고도 말함으로써, 유학의 정통적인 것에서 벗어난 것으로 생각하여 배척하였다.

오직 孟庫가 있었기에 비로소 완전무결해졌으니, 이른바 "孟庫는 目厚. 한 자 중에서 순후한 자(孟氏醉平醉者也)"라는 것이다. 실제로

91) 德秀, 『大尹衍義序』. "君天下者之律令格例也. 本之則必治, 違之必亂.”

92) 『原道』· "軒之死 不其傳焉.”

는 韓危가 이미 ‘道統說'을 제창하였다. 宋代의 理學家들 또한 대체로 이와 같은 견해롤 취했는데, 그들은 이론적인 측면에서 더더욱 道統'을 천명하여 孟의 ‘內聖之島'을 발전시켰고, 그 발전은 ‘外王之學'과 분리되어 대립되기 시작했다. 程腐의 "성인의 학문은 子思와 孟卓가 아니었다면 거의 끊기었을 것"93)이라는 언급은 맹자에 대한 추앙일 뿐 아니라, 外王經世의 노선을 발전시켜 온 荀況의 학문에 대한 배격이기도 하다. 이학가들은 "근원을 안으로 삼고 말단은 밖으로 한다(內本外末)”는 입장 아래 修身을 우선시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태평하게 하는 것을 나중으로 삼는 관점을 더욱 더 확실하게 제출하였다.

학문에는 木末과 先後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格物致知가 이른바 근본이요 시작이고,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말단이자 끝이다.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반드시 그 자신에 뿌리를 둔다. 그 몸이 바르지 않고서도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없다.94)

이는 곧 "마음을 바로 하고 뜻을 정성되게 하는(正心誠意)"것을 내용으로 하는 ‘修身'을 끝없이 치켜올림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태평케 하는(治國平天下)” 것을 한없이 억제한 것이다. 더 나아가 심지어는 오직 ‘수신’이 있어야 비로소 本體論的인 의의를 갖추게 되는 것이니, ‘治平'은 반드시 실제적인 모색과 구체적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연히 이루어져 달성하게 되는 목표라고 인식한 것이다.

93) 『河南程氏迫』 卷17. ”聖人之學, 若非子思 • 孟子, 則幾息矣.”

94) 『河南程氏粹言』 卷1. "翊大於知本末終始. 致知格物, 所本也, 始也; 治天下國家, 所謂末也, 終也 治天下國家, 必本諸身. 其身不正, 而能治天下國家者, 無之.”

종합하자면, 秦漢 이후의 유학은 맹가와 순황에서 비롯된 ‘內聖'과 ‘外王’의 두 방면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晩淸시대의 康有爲는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개괄적으로 논술하였다.

공자의 학문에는 義理도 있고 經世도 있다. 宋學은 『鉛恥』에 근본하였고 小裁礎의 『大學』 • 『中』과 『맹자』에서 보충하였다. 주희가 摘子이고 宋明 이후의 학문은 모두 그를 법통으로 삼고 있다. 宋 • 元 • 明과 本(淸-역자주)의 학문 유파는 그의 많은 자손으로 의리에 치중한 것들이다. 淡學은 『春秋』에 주를 단 『臼』과 『梁』에 근본하였고, 「王」와 『荀子』에서 보충하였다. 范仲舒는 『공양』의 적자이고, 劉向은 『곡량』의 적자인데, 淡은 모두 그들을 법통으로 삼고 있다. 『史』과 漢代 군신들의 정치에 대한 議論이 모두 그들의 支流로서 經에 가까운 것들이다.95)

위의 강유위의 논의는 유학의 양대 조류의 윤곽을 개괄적으로 그려낸 것으로, 여기에는 몇 가지의 정정과 보충이 필요하다.

첫째, 강유위가 말한 유학의 두 개의 유파 중 비단 義理派만이 『논어』에 근본한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經世派가 『논어』를 존중함이 의리파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다. 순황 이래로 송대의 葉適 • 陳亮 明末淸初의 顧炎武 • 黃宗羲 • 王夫之와 청대 中後葉의 店自珍 • 魏源 둥 經世實身}의 학문을 힘써 제창한 학자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논어』를 학술의 모범으로 삼았다. 그들이 理學의 空疏함을 힘껏 배척할 때에도 왕왕 『논어』의 救世精神은 그 지침이 되었다.

95) 浪興學記』, "孔子之學, 有義理, 有經世 宋學本於『論語』, 而小戴之『大學』 • 『中』及『孟子』佐之, 朱子爲之摘嗣, 凡宋明以來之學, 皆其所統, 宋元明及國朝學案 其衆子孫也. 多於義理者也. 淡學則本於『春秋』之『公羊』 • 『梁』, 而小戴之『王制』及『荀子』輔之, 而以范仲舒爲』摘嗣, 劉向爲紀梁』摘嗣, 凡淡學皆其所統, 『史記』 • 兩漢君臣政議, 其支脈也, 近於經世者也."

둘째 宋明理學이 비록 순황의 학문 ‘外王'노선을 격렬하게 비판하며 '義理之’의 발전에 치중하였지만, 二里 • 朱熹뿐 아니라 陸象山 • 王陽明 모두가 유학의 ‘경세'라는 기본적인 宗旨를 결코 방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경세'의 풍격이 ‘순황-동중서’ 동의 경세파에 의해 독점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二程과 같은 이들은 거듭해서 유학의 經世致用의 전통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경전을 연구하는 것은 致用으로 해야할 것이다. …… 오늘날 경전을 연구한다고 일컬어지는 자들이 과연 政와 外交에 능통할 수 있겠는가? 그런죽 경전을 연구한다고 하는 자들은 章句나 연구하는 말단일 따름이니 이는 학문에 있어서의 큰 우환거리이다.96)

程와 程願는 또한 불교의 "허황되어 실제에 근거하지 않음(無質)”을 배척하였고,97) 禪을 배우는 자의 "평안히 거처하며 性命에 대해 고상하게 말하는(平居高談性命)” 것과 "世"에 "밝지 못함(不)”을 비판하였다.98)

宋學의 한 지류인 召의 象數之學은 추상적이고 허황된 형태로 표출되었지만, 그러한 소옹일지라도 그 뜻은 또한 ‘경세'에 있었다. 그의 주요 저작인 『皇極經世』 • 『經世衍易圖』에는 이러한 취지가 표명되어 있다.

주희는 더욱더 ‘내성지학’이 ‘修身'과 ‘治國平天下’의 양 방면의 공능을 겸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子思 • 孟阿學派의 대표작인 『중용』에 대해 "놓아두면 온 세상에 가득차고, 거두어들이면 은밀한

96) 『河南程氏迫』 卷4. ”窮經, 將以致用也. …… 今世之號爲窮經者, 果能達於政事專對之間平? 則其所謂窮經者, 句之末耳, 此學者之大患也.”

97) 『河南程氏迫』 卷13.

98) 『河南程氏迫』 卷18.

곳에 몸을 숨겨 세상에 나타나지 않아 그 맛이 무궁함은, 『중용』이 모두 實學에 관한 것이기 때문”99)이라고 말하가도 했다. 그는 또한 공자의 “人를 배워 天命에 통달한다(下學而上達)”는 뜻을 발양하여, 마땅히 인사를 연구하는 ‘學' 방면에 많은 노력을 경주하여야 ‘上達'이 비로소 근거를 갖게 된다고 인식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현은 사람들을 가르침에 下[장에 대해 많이 말하였고, 上達에 대해서는 적게 말하였다. 말하자면 하학에 대한 공부는 많아져도 괜찮다는 것이다. 다만 하학만을 이해한다면 협소해질 것이다. 여러 일을 이해함에 또한 모름지기 핵심적인 것을 알아야 한다. 하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달만을 이해하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게 되니, 아마 홀로 외따로이 떨어져 무미건조하게 될 것이다.100)

주지하고 있듯이, 陸九淵 • 王賜明 또한 ‘治國平天下'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당시 사람들은 왕양명을 칭하여 "과 도덕은 세상에서 매우 뛰어났다”101)고 하였다. 理學을 반대했던 청대의 顔元조차도 육구연과 왕양명은 "정신이 훼손되지 않아 일에 임하여서는 유용함을 숭상한다”102)고 하였다. 이상으로 알 수 있듯이, 공자 이후 유학의 두 조류의 차이는 ‘경세'를 하려하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하히 ‘경세'할 것이냐의 문제一즉 ‘內聖'을 통해 ‘경

99) 『章句』. ”放之彌六合, 卷之退藏於密, 其味無窮, 皆實學也.”

100) 『朱子語錄』. "罪羽敎人, 多說下, 少說上達事. 說下學功夫要多, 也好;但只理會下學, 又局低了. 須會過來, 也要知個通處. 不去理會下學, 只理上達, 卽都無事可敏, 恐孤單柏操.”

101) 『千百年眼』 卷13. "功道德, 卓絶海內.”

102) 戱, 『顔氏學記』 卷1. ”精神不損, 臨事尙爲有用.”

세'라는 목적에 이룰 것인가 아니면 직접적으로 外在하는 事述에 힘쓸 것인가에 있다. 이학은 末流, 특히 王의 말류에 이르러서는 확연하게 경세의 종지와 배치된다. 그들은 "평안하게 거처하면서 性命에 대해 고상하게 말하지만, 일에 임해서는 망연자실하여 수족을 놀리지 못한다. 저들은 공허한 이치를 추구할 뿐 당대의 일에 있어서는 몸소 겪으며 밝혀 시행한 적이 없103)었다. 이미 유학의 경세라는 궤도를 벗어나 空疏한 玄談의 길로 전락된 것이다.

셋째, 강유위가 논술한 경세파는 한대 이후에 매우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댜 더욱이 의리파가 宋明理學으로 발전함에 따라 상호대립적이면서도 서로를 보완하는 학파로서의 모습을 당당하게 드러냈댜 二程 • 주희와 육구연 • 왕양명이 유학의 경세 전통을 방기하지는 않았지만, 불교와 도교의 宇宙論과 개체의 修屈에 중점을 두는 특질을 홉수하여 자사 • 맹가학파의 ‘內聖之學’과 융합시켰다. 이렇듯 그들의 중점이 우주본체에 대한 사고와 개인수양의 완전함으로 옮겨짐에 따라 그들은 철학과 윤리학의 두 방면에서 前人들의 성과를 뛰어넘었다. 그러나 사회를 구제하고자 하는 열정은 많이 냉각되었다. 예컨대, 章學誠의 지적처럼 ”性命의 학문이 쉬이 허무로 빠져들"104)었던 것이다. 이는 분명 중국문화 고유의 ‘救世'풍격의 약화를 의미한다. 그래서 송대 이후로 국가와 민족이 겪었던 매우 고통스러웠던 형세와 강렬한 대비를 이루면서 주희 • 육구연 둥에 반대하는, 南宋의 葉適 • 陳亮을 대표로 하는 反理學派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청대의 全祖望은 『宋元學案』에서 이런 상황에 대해 명쾌하게 서술하고 있다.

103) 『皇朝經世文編』 卷1, 陳仙, 『勸功篇下』. ”平居高言性命, 臨事范無描手足,彼求空之理, 而於當世之, 未親歷而明試之.”

104) 『文史通義 • 朱陸』. ”性命之說 易入無.”

남송의 乾(乾道와 熙의 약칭으로, 둘 다 孝宗의 年이다.-역자 주) 연간에는 娑學이 성행하였는데, 東萊 형제인 呂祖謙과 呂祖儉이 性命의 학문으로 홍기하였고, 同(陳亮)는 의 학문으로 홍기하였으며, 說齋(唐仲友)는 經制의 학문을 제창하였다.105)

섭적과 진량은 유학의 경세의 기치를 높이 들어올려 주희 • 육구연 등의 理氣心性을 중심으로 삼는 학술경향에 반대하였고, 정치 • 군사 • 경제 등 사회의 현실적인 문제를 출발점으로 삼아 헛되이 事功을 말하지는 않았다. 섭적의 비판의 예봉은 주희나 육구연에만 한정되지는 않았다. 그는 자사 • 맹가학파를 겨냥하였다.

曾參의 학문은 자기 자신을 근본으로 삼았기에 몸가짐과 말씨 외에는 탐구할 겨를이 없었다. 大道에 있어 빠뜨린 부분이 많아 성현이라 칭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子思가 『중용』을 지음에 고매한 것은 지극히 고매하고 심오한 것은 지극히 십오했으나 上古시대로부터 전해지던 바는 아니었다. 세상에서는 맹가가 공자를 전했으니 거의 성현이라 할 만하다고 한다. 그러나 덕을 여는 것이 넓고 다스림을 얘기한 것이 잦았으나 처신함이 지나쳤고 세상물정에 대한 경험이 소홀하였다. 이에 배우는 자들은 신기함만을 쫓아 木流룰 망각하였으니 道가 완전하게 그 자취를 드러내지 못하게 되었다.106)

이는 분명히 맹가 학문의 ‘內聖’ 노선에 대한 비판이자 순황 학

105) 『宋元學案 • 說齋學案』. ”乾淳之際, 婆學最盛 東萊兄弟(呂祖謙 • 呂祖儉)以性命之學越 (陳亮)以事功之學起, 而說密(唐仲友)爲經制之學.”

106) 『宋元學案 • 水心學案J. “付子之學, 以身爲本, 容色辭氣之外不峻. 大道多迫峰 未可爲聖 子思作吐』, 高者極高, 深者極深, 非上世. 世以孟子傳孔子, 苑或庶幾 然德廣, 語治, 處已過, 涉世疏. 學者超新逐奇, 忽忘本流, 使道不完而有迎.”

문의 ‘夕'노선에 대한 긍정과 그것을 발양코자하는 의도의 표현이다.

反理學派는 원대와 명대에는 발전하지 못하였고, 그 시기에는 다만 理學의 주희와 육구연의 두 흐름이 개속해서 세상에서 크게 유행하였는데, 그 內聖之의 片面性 또한 극단으로 흘러갔다. ‘를 탐구하는 학문(道問學)’의 程朱一派는 날로 공소함으로 치달렸고, 德性을 존중한다(舒德性)’는 陸王一派는 더욱더 禪으로 흘러, 마침내는 명말의 "공소한 논의가 나라를 망치는(空論亡國)”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心性의 학문에 연연해하는 선비들은 "시대의 여려움울 구제할 방책이 없음을 부끄럽게 여겨 그저 한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황제의 은혜에 보답코자(棟無半策匡, 惟余一死相君恩)"했을 뿐이었다. 明末活初의 顧炎武는 경세의 기치를 높이 들고 심성의 학문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내가 탄식하는 바는 백여 년 이래 학문을 했다는 사람들이 왕왕 ‘心’에 대해 말하거나 '上’에 대해 말하면서도 막연하여 그 정수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공자는 ‘命'과 ‘'에 대한 언급을 드물게 하였으며, 그의 性과 天道에 대한 언급은 자공도 들은 적이 없었다. …… 오늘날의 선비들은 그러하지 않아, 식객들과 문인들을 모은 학자가 수천에 이르는데, 비유하자면 초목이 구별되는 것과 같다(그 수효가 많고 차별성이 있다는 뜻― 역자주). 그러나 하나같이 모두가 心이나 性을 말한다. 다양한 학문과 지식을 버리고 하나의 방도만을 구하여, 세상이 곤궁해도 말하지 않고서는 종일토록 危微 • 精一의 說만을 강구한다.107)

107) 『亭林文渠 • 與友人論學』. ”萩吹夫百年以來之爲學者, 往往心性, 而范不訂其解也. 命與仁, 夫子之所平言也; 性與天道, 子貨之未也. …… 今之君子則不然,衆賓客門人之學者數十百人, 諸草木, 區以別矣.而一皆與之心言性 舍多學而識 以求一之方, 四四海困窮不言, 而終日講危微精一之說.”

고염무는 공자의 학문을 正宗으로 하여 그를 바탕으로 埋科의 공소함을 비판하였다. 그는 시대적 병폐의 정곡을 찔러, ”道를 밝혀 세상을 구제함(明道救世)”에 힘을 기울였고, 학자의 공부가 "단지 자신을 이롭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도리를 밝히고 사람을 맑게 하는 마음을 가지며, 혼란을 다스려 바름으로 돌아가는 일을 하고, 세상의 모습이 어째서 극단으로 홀러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깨닫게 되는, 즉 일어나 세상을 구제할 것을 생각하는"108)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고염무와 동시대의 황종희 또한 ’史學經世'의 구호를 제출하였다. 그는 "무릇 二十一史에 기록된 것은 모두 세상을 경영한 일로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109)고 하였다. 王夫之 또한 사학의 효용은 "과거를 서술합으로써 미래의 스승으로 삼는(述往以爲來者師)"것에 있다고 합으로써 "경세의 大’을 찬란하게 밝혔다.110) 왕부지는 또한 통치의 자료로 쓰고자 정치에 대해 논의하였고, 세상에 대한 世의 작용을 풍부히 하고자 風俗에 대해 논의하였다. 財務를 논의합에 그 뜻은 다스려짐과 혼란합(治亂), 홍성함과 쇠퇴함(興哀)의 근원을 탐구하는 데 두었고, 학술을 논의함에 그 핵심을 옛 정치의 흔적을 더듬어 찾는 데에 두었다. 이렇듯, 경세치용을 제창하는 것은 명말청초의 한 학풍을 이루었다. 고염무의 문인인 潘來은 일반인들이 고염무의 학문을 단지 考證學이라고 간주함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염무의 학문은 경세와 실용에 관한 학문으로 이를 잘 사용하면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다. 오로지 考振가 정밀했음만을 찬미하는 것은 고염무의 의도를 모르는 것이다."111) 그러나 청 중엽의 학계는 공교롭

108) 『亭林全渠 • 與潘治耕札』. ”非利己而已也, 有明道淑人之心, 有擬亂反正之, 知天下之勢之何以流極而至於Jlt, 則思起而有以救之.”

109) 『情雷文約 • 補歷代史表』. “夫二十一史所載 凡經世之業, 無不矣.”

110) 『通鑑記』 卷6.

게도 고염무의 ‘考抽의 정밀함'만을 계승 발전시키고, 그의 ‘明泊救世’의 主旨는 방기하여, 고증학이 극성하게 되었다. 경세의 정신은 가려져 드러나지 않았으니, 그 원인은 章太炎이 말한 바 "금기가 많았기에 시가와 文史가 거칠었고, 백성을 어리석게 한 탓에 세상을 경영하고자 했던 先王의 뜻이 쇠한"112) 데에 있었다.

청 중엽의 古書에 파묻혀 세상을 회피하던 학풍의 구제는 道光 • 咸 연간의 경세학자인 陳自珍 • 魏源이 담당하였다. 그들은 아편전쟁 전후의 사회의 위기에 직면하여, 당시 학자들이 고증학만을 일삼던 풍조에 반대하고, "경세의 학술을 治世의 학술로 삼을 것(以經術爲治術)”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사회현실과 정치에 뜻을 두고, 중국의 역사와 변방 및 타국의 역사, 지리를 탐구하여 당시의 爲政者들에게 정책을 건의하는 등 부국강병의 책략을 도모하였댜 공자진과 위원의 학술은 중국 전통의 경세의 학문을 토대로 시야를 세계로 돌림으로써 성립되어진, "국가의 망해 감을 구하여 그 존립을 꾀하고자 했던(救亡樞l存)” 근대의 새로운 학문의 과도기적 형태이자 교량이 되었다.

이상을 개괄하여 말하자면, 공자를 시초로 하는 유학의 경세의 전통은 ‘內聖'과 ‘外王’의 두 방면으로, 이천여 년간 하나가 홍기하면 다른 하나는 쇠퇴하면서도 끊기지 않으며 발전해왔다. 그 대략울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11) 『知錄序』. "氏之學, 經濟實用之學也, 如用之足以直太平. 唯貸其考熊之精, 未知顧氏之意.”

112) 『檢論 • 淸儒』. ”多, 故歌詩文史格; 愚民, 故經世先工之志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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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유학 중 經世의 위와 같은 두 흐름의 발전과정에서의 충돌과 융합은 중국 봉건사회의 각종 모순을 반영했을 뿐 아니라 중국 봉건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및 민족성 둥에 내재하는 정신을 형성하여 왔다. 예컨대, 중국인들은 국가와 민족의 운명에 집착하는 일종의 臺患意識(이른바, "천하의 흥망은 필부에 책임이 있다(天下興亡, 四夫有)”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왕왕 도덕적인 自我完善의 추구를 창조적인 사회활동 위에 두기도 하는데, 이런 현상온 유학 중 경세의 두 흐름 영향 하에 형성된 것이다.

중국의 사대부들이 보편적으로 경세의 뜻을 품고 있었던 듯하지만, 그 정도가 높은 자들이 세상과 국가의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

113) 이 표는 다만 전동유학의 경세의 ‘內聖'과 ‘外王’의 두 방면에서의 흐름을 대략적으로 구분한 것으로, 위 학자들의 철학적인 입장과 정치주장 둥이 서로 일치된다는 것은 아니다.

아 "천하가 걱정하기에 앞서 걱정하고 천하가 즐긴 후에 즐김(先天下之菱而표, 後天下之樂而樂)”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바치는 것을 개의치 않게 여긴 반면, 그 정도가 낮아 그저 벼슬을 하고 진급을 위한 지름길만을 열심히 찾던 자들은 일단 중요한 관직에 오르더라도 "江, 衣服, 言詞에 대해서나 잘 알아 완숙하게 처리할 뿐, 그 외에는 알지 못했다."114) 중국 사대부의 이러한 두 종류의 사상과 행동은 모두 유학 중 경세의 전통과 관련 있는 것으로 공자의 가르침 중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經世의 정신은 근대 중국의 각종 정치파벌에 의해 각기 운용되었고 발전되었다. 그 한 방면으로 근대중국의 維新派와 革命派를 둘 수 있는데, 둘 다 經世와 救世의 열정을 갖지 않은 적이 없었댜 康有爲의 『車上』, 嗣의 「絶命詩」, 孫中山의 『政論』, 鄒容의 『革命軍』, 陳天華의 『世鐘』, 『獅子』, 『孟回頭』 둥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經世濟民의 옛 풍격에 불어넣어 보완시킨 것들이다. 戊戌裵法과 辛亥革命으로 대표되는 근대의 정치활동은 문화사조의 계승이란 측면에서 말하자면, 물론 서구의 자극 또한 큰 역할을 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2천여년간의 經世精神―이 정신은 물론 儒家에만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다른 한 방면으로, 근대 중국의 민중운동을 진압했던 통치계급의 인물로서 付國藩, 胡林冀 등이 있는데, 이들 또한 救世에 온 정신을 다하는 경세정신 지니고 있었다. 증국번은 姚의 ‘義理, 考製, 詞章’에 ‘經濟'를 첨가해 經世致用의 學을 중요한 지위로 격상시켰다. 이 또한 유학 중 경세사상의 매우 중요한 한 부분이다.

학술 그 자체로서 논의할 때 유학의 ‘경세론적 기풍(經世風格)’

114) 『定庵文捨迫 • 明良論二』. ”知車馬 • 服飾 • 言詞捷給而已, 外此非所知也."

은, 분야별로 세분화되지 않은 채 각종의 學科가 독립적인 발전을 하지 못했던 經學傳統의 산물로, 사대부들의 經世라는 大道를 주로 ‘벼슬길'로 끌어들인 것이지만, 이것이 고대와 근현대의 중국 지식계층 및 인민대중들에게 미친 영향은 과소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理學이 철학과 윤리학을 經易에서 분리시키고, 宇宙의 本體를 사고하는 학자들과 정치를 담당하는 관리들을 구별지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실증적인 과학의 발전을 저해하고 空疏로 빠져들고 만 폐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反理學派는 본래 救世의 열정이 충일하였으며,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군사학, 역사학 등의 방면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실증과학의 탄탄한 뒷받침을 얻지 못해 막연함에 빠졌다. 그래서 그들이 심성을 다룬 학문과 사회생활 실제와의 괴리물 비판할 때에도 다만 ‘道, 學, 治’ 三位一體의 옛 전통을 계승할 수 있었을 뿐인, 이른바 "반드시 안으로 도덕에 근본하면 밖으로 세상을 경영할 수 있다"115)고 지적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 때문에 反埋穆派의 經世質學 속에 다소 계몽적인 요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근대철학으로 발전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강성위 옮김)

115) 『日子追 • 黃庭表渠序』 참조.

中韓 實學思潮의 異同을 論함

步近智

中 • 韓 兩國의 ‘質學,思祚'는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역사적 배경의 차이로 인하여 발전과정이나 사회에 대한 영향 및 역사적 기능 면에서 각기 다른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점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1. 中韓實學의 공통점

1) 舍虛務實. 經世致用

이미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싹트기 시작한 明代 中(16세기 초)의 중국에서는 官學인 程朱理學이 쇠락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여 賜明心毋이 홍기하여 널리 유행되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양명심학이 廊無空談으로 빠질 경향이 있음을 간파한 羅欽順 • 王廷相 둥은 학술이란 治世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壇腦을 제기하고 ‘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明 萬曆 中期에서 淸 康熙 中(16세기 말-18세기 초)는 ‘天崩地解'

의 대혼돈시기였으며 또한 실학사조의 홍성시기이기도 하다. 혼란과 위기의 시대상황 하에서 뜻있는 지식인들은 王學末流의 亡國空論을 반대하고 '泊國强兵과 ‘槍世救民’을 위하여 治陵天下의 유용한 학문으로서 실학을 제창함으로써 明末淸初 실학사상의 사회기초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던 것은 顧志成 • 羽共能울 중심으로 하는 東林學派였다. 학술 면에서 그들은 空談울 반대하고 “을 중시하였으며", 講習과 證 위주의 治學方法을 제창하고 舍庫務의 학풍을 선도하였다.

明朝가 멸망하자 지식인들은 "精端울 구제하는 방법은 質身이지 空論이 아니다"(顧炎武, 『錄』)라고 하며 ‘明心見性'의 空談을 유용한 실학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黃宗羲 • 方以 • 顧炎武 • 王夫之 둥은 바로 이같은 명청실학사상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뛰어난 사상가였다. 浙東學派의 창시자인 황종희는 왕양명학파 출신이기는 하지만 "女의 폐단을 바로잡고 실천을 위주로 하였으며" 연구사료를 중시하고 通經致用하는 학풍을 창도하였다. 儒學經에 통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天文 • 地理 • 歷史 • 閔學 • 音韻學둥 실제학문에 조예가 깊은 方以는 특히 ‘測之學'을 강조하여 質測 • 險 둥을 제창하였다. 고염무는 송명이학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儒學의 通經致用 전통을 발양하고 經世致用의 質學을 창성케하여 "학술을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난세를 바로잡아 태평성세룰 일으킨다”(『初刻日知錄自』)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晩明의 공허한 학풍에 반대한 왕부지는 陸 • 王과 程 • 朱를 비판하며 "人道룰 밝힘으로써 實學을 삼고 古今의 허망한 학설을 모두 폐기하여 실질로 되돌아가게 하였다”(『大行府君行狀』). 이들의 실학사상은 李顯 • 費密 • 毛奇齡 둥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결론적으로 명말청초 실학사조의 주요 특색은 儒의 經世전통을 계승 • 발양하여 학술내용이나 학풍 면에서 모두 舍虛務 • 經世致用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

다는 점이다.

舍),衍務과 經世致用의 특징은 실학사상이 홍성했던 朝鮮 후기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조선 실학의 선구자 李卒光은 17세기 초에 이미 朱子 性理學의 淸談空論에 비판을 가하며 "心으로 質政을 행하고 買功으로 效를 행할 것”(『乞血的k • 務陳想實札子』)을 제기하여 ‘'이 治國安의 근본 문제임을 강조하였다. 조선 실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이수광의 뒤를 이어, 柳馨遠은 부국강병의 실현을 위해 土地 • 稅 • 인재선발 • 문벌제도 • 공상업정책 및 군사제도 등에 대한 개혁방안을 제창함으로써 실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18세기 이후 조선의 英祖(1725-1776) • 正祖(1777-1800)시대에는 각종 정치 • 사회모순의 해결을 위한 일련의 정책으로 사회경제의 발전을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학술문화 발전에도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였댜 이외에도 중국의 실학사조 역시 조선 후기의 실학 홍성에 영향을 주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조선 실학의 홍성 시기를 창시한 사상가는 이수광 • 유형원의 실학 성과를 계승하여 자신의 사상체계를 형성하였던 李이다. 성리학을 맹신하던 당시의 학풍을 타파하는 데 힘을 기울인 이익은 공허한 학풍을 반대하며 실학을 제창하였다. 우선 그는 유가 경전에 대한 맹목적인 암송을 거부하고 ‘致疑'와 ‘致'을 강조하며 경세치용의 실학을 주장하였다. 둘째, 그는 유가 경전에만 한정된 학문탐구를 거부하고 조국의 역사 • 지리 • 제도 • 풍속 등 여러 방면으로 연구 영역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셋째, 서방의 자연과학기술을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自國의 자연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공부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익이 창도한 실학사상은 후학들에 의해 계승 • 발전되어 星湖學派를 형성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朴止源을 대표로 하는 ‘利用厚牛'潘는 이

익의 실학사상을 계승 • 발전시켜, 학문이 소중한 까닭은 바로 質用과 ‘利用厚牛’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濟世刃의 학문을 탐구하여 天文 • 歷史 • 地理 • 經濟 • 군사 • 문학 둥에 대하여 두루 정통하였다. 박지원과 洪大容은 모두 부국강병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국의 과학문명이나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방의 과학문명을 배워야한다고 주장하였기에 ‘北學派'로 불려지게 되었다.

19세기 초 조선 실학을 집대성한 丁若은 우수한 실학 전통을 더욱 적극적으로 발양하고, 당시의 정치 • 문화 면에서 지도자로 자처하는 성리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진정한 儒學者란 마땅히 治國安民하고 아울러 文武를 겸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어찌 남의 글을 베끼고 古服을 착용하며 拜綴 익히는 것을 일삼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어떠한 종류의 학문이라도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실용적인 도움이 없다면 학문이라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정치 • 경제 • 군사 • 역사 • 경학 • 지리 • 언어 • 문학 • 物理 • 技術 • 음악 • 의학 등의 분야에 대해 광범위하고 심오하게 연구하였다. 조선 실학에 있어서도 舍庫務과 경세치용 추구로 인하여 출현한 백과전서식의 학풍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실학 홍성 시기의 중요 특징이 되었던 것이다.

2) 濟世救民 • 專制批判의 민주계몽적 경향

明代 萬曆 중기 이후 동림학파는 조정을 혁신하여 ‘濟世救民'할 것을 주장하고 ”士農工商은 백성들의 본업이다’’라는 경제사상을 제기하여 전통적인 祖農仰商 관념을 부정하였다. 황종희는 ‘工商皆本'이라는 주장을 제기하였고, 고염무는 상업간섭정책을 반대하며 鹽茶의 자유매매를 주장하였다. 고헌성도 ‘‘천하의 是非는 천하에 맡겨두어야 한다”라는 슬로건을 제창하며 봉건전제통치를 비판하였

다. 봉건전제정치에 대한 성토문이라 할 수 있는 『明夷待訪錄』에서 黃宗는, 군주는 천하의 ‘大害'로서 "지금 천하 사람들은 군주를 원수로 간주하며 獨夫라 일컫는다”라고 질타하였을 뿐 아니라 "옛날에는 천하 백성들이 주인이었고 군주는 손님이었다”(「原君」篇)라는 초기 민주계몽사상의 관념을 제기하였다. 그는 또 "내가 출사하는 것은 군주 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민을 위해서이다"(『原臣』篇)라고 공표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천하를 다스리는 도구는 모두 학교에서 나온다”라는 近代 君主立憲 議會制度 사상과 유사한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왕부지는 빈부 불균형 현상의 존재를 합리적인 것으로 인정하며 ‘大賈民’을 國之司命'으로 간주하여 시민계층의 財‘晶觀을 반영하였다. 그는 또 재정사상 면에서 荀說울 뛰어넘어 이론적으로 화폐세를 옹호한 최초의 사상가였다.

조선실학자 李沙은 양반문벌제도와 노비제도의 폐지 • 문무관리 선발제도의 개혁을 주장하고 인재와 관리를 백성들 중에서 선발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는 또 당시 사회에 존재하는 6가지 병폐를 ‘六猛’라 부르며 ‘六’를 제거해야만 부국강병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댜 이밖에도 이익은 농민의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 농업생산을 발전시키고자 均田制를 주장하였으며, 상업의 발전도 중시하여 상인을 四民의 하나로 간주하였다.

洪大容은 직접적으로 ‘四民平等'이라는 구호를 제창하였다. 이는 封建尊卑責賤 等級制度에 대한 비판으로서 초기 계몽주의사상의 경향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는 實用學問울 국가부강의 관건으로 간주하여 박지원의 ‘利用厚生' 학파에게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저명한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박지원은 ‘利用厚牛'이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만약 국가를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백성을 이롭게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그는 봉건적 신분등급제도의 폐지를 주

장하였으며 토지 문제에 있어서는 限田制 실행을 제창하고 의 발전을 주장하였다. 박지원은 또 화폐유통과 금속화폐 주조를 통한 농촌의 상품생산과 상업무역발전 촉진을 조정에 건의함으로써 신홍시민계층의 이익과 소망을 반영하였다.

조선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은 실학의 진보적 사회정치 관점을 최고의 수준으로 제고시켰다. 그는 「原牧」이라는 글에서 통치자 ‘牧'이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고대에는 백성을 위하여 존재했던 ‘' 이 백성을 착취하는 통치자로 변질되었음을 비판하고, 통치자가 백성을 위하여 존재하는 민본제도를 수립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 군주는 마땅히 백성들이 추대하고 백성들이 파면이나 改選도 할 수 있다는 관점을 제기하였다. 정약용은 또 田制改革을 주장하고 "농사짓는 자만이 농지를 소유할(唯耕者, 有)” 것을 제창하였으며, 공상업의 발전 • 광산개발 • 교통발달과 대외무역 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실학자의 민주계몽사상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 復古反對 • 重情’非理’. 그리고 개성 해방의 제창

중국의 실학사조는 문학 영역에까지 영향을 끼쳐 李 • 湯顯祖 • 袁宏道를 대표로 하는 문예혁신파를 출현시켰다. 그들은 현실을 중시하고 복고를 반대하였으며, 人悠을 인정하고 ‘理'보다는 ‘’을 중시하였으며(里情非理), 개성의 해방 및 문예예술의 혁신과 창조를 제창하였다.

우선 문학의 복고주의를 결사코 반대하고 현실을 중시한 이지와 원굉도 둥은 "다스림은 적절한 때를 귀히 여기며 배움은 經世를 필요로 한다”는 문학 주장을 제기하고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였다.

둘째로 이지는 "옷입고 밥먹는 것은 人倫이자 物理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기하고 아울러 “사람에게 반드시 사사로움이 있음"은 바로 "자연의 이치이며 필연적인 귀결"이라 하였다. 이같은 사상은 "天理를 보존하고 人悠울 제거할" 것을 주장한 理旦家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지는 또 모든 사람은 ‘牛而知之’라고 하는 평등관을 선양하며 남녀평등 • 君臣평등을 주장하는 한편, ”物情이 서로 다르다”라는 個性說을 제기하여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제창하였댜 이것은 신홍시민계층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셋째로 ''보다는 ‘'을 중시하여 "개인의 性을 토로하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문예혁신과 창조를 제창하였다. 湯顯祖는 ‘至'說을 제창하여 봉건현실에 대항하였다. 원굉도의 ‘性靈은 ‘適II寺’와 適競念을 강조하여, 시민문학으로 봉건문학을 대체한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면에 있어 조선 실학 홍성 시기의 사상가와 문학가들은 더욱 철저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더욱 중시한 이익은 현실사회를 반영함에 있어 "지적하는 바가 있고" "세상 사람에게 풍자해야"(『塞說』권30 「李白古風」)한다고 작가들에게 요구하였으며, 박지원은 문학의 목적을 ”立言하여 교화를 베푸는" 것이라 하였다. 莖情非理 면에 있어 人悠은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객관 사실이라 여긴 이익은 ‘之心'은 ‘血肉之心'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 주장하며, 철학의 차원에서 ‘’의 근원을 제시하였다. 박지원은 ‘悠'과 ''을 애정 혼인의 바참한 운명과 관련시켜 봉건예교의 죄악을 비판하였다.

문예창작의 자유와 혁신 면에서 이익과 박지원 • 홍대용은 작가의 '頂心' • ‘自作’에서 나온 것이거나 혹은 "자신의 소리(自家音)”에서 나온 것만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박지원은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화를 알고, 創新하면서 법도에 맞출 수가 있다”(『楚亭菓序』)는 문학창작이론을 제기하여, 前

人의 뛰어난 성과를 계승한 기초 위에 현실생활에서 받는 느낌을 결합함으로써 전인을 뛰어넘는 생명력 있는 新作 창조를 요구하였다. 이 모든 것은 시민문학의 홍기를 의미하며 문학예술 면에서의 초기 계몽적 특색을 구현한 것이다.

4) 철학 면에서의 순수 유물론과 과학문화 면에서의 개방 및 독창정신

중국 명청 시기의 실학사상가 중 동림학파의 顧志成과 高少 같은 이들은 宇宙觀에 있어서는 여전히 ‘理’本論의 유심주의 관점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인식론 상에서는 유물주의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명청 시기 황종희 • 방이지 • 고염무 • 왕부지 등의 탁월한 사상가들은 우주관 면에서 張載의 ‘氣本論의 유물주의사상을 계승하였고 인식론 상에서도 유물론을 표방하였다. 방이지는 인식의 주체(心)와 객체(物)의 호환작용인 ‘心物交格'의 인식 원칙과 歸納 • 演釋 • 類推 • 理 등의 인식 방법을 제기하고, 인식의 목적은 偵를 얻어 質際를 指導하고 質際를 改造하는 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왕부지는 ‘太情一' • ‘太虛本動'을 강조하며, 세계는 본체와 현상 • 물질과 운동의 통일체임을 지적하였다. 인식론 면에서 그는 “言必徵乳義必切理"와 ‘行之爲貸'의 체계적인 관점을 제기하고 ”言天者徵於人, 급古者徵於今"(『張子蒙 • 德篇』)을 강조하여 感性認識과 理性認識의 결합을 중시하였다.

李에서 丁若負에 이르는 조선 실학 홍성기의 사상가들은 張載와 自國의 저명 사상가인 徐敬德의 ‘氣 유물론을 계승 • 발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귀신과 종교를 비판하고 실학을 제창하며 실학을 연구함으로써 커다란 성과를 이루었다. 이익은 ‘氣'학설을 심화하여 ‘氣則不滅'의 유물론 관점을 제기하였는데, 이것은 서경덕의 氣薄滅

思想울 발전시킨 것이었다. 박지원은 구체적 사물의 형태는 비록 서로 다르지만 그 사물의 물질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관점을 제기하였으며, 認識은 물질이 惑覺器에 작용하여 생겨나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정약용은 ‘太極’을 物買性의 氣로 해석하여, 천지만물은 물질의 시초인 ‘太極'(‘')으로부터 생겨나며, 天 • 地 • 水 • 火의 물질 4요소도 ‘'의 파생물이라 여겼다. 인식론 면에서 정약용은 程朱理學의 ‘先知後行'溝과 상대적인 ‘先行後'知을 제기하였다. 탁월한 실학사상의 이론 기초를 구비한 그는 당시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여 최고의 수준에 오를 수 있었다.

中韓 양국의 실학사상가들은 서방의 선진 자연과학기술 수용을 주장하면서도 맹목적인 숭배는 반대하였으며, 科學文化 상의 개방과 독창정신을 제창하고 우수한 自國 전통문화의 발양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2. 中韓實學의 차이점

1) 실학사상의 이론 • 실천 • 보급 면에서의 차이점

중한양국의 실학사상은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에서 발생하고 홍성하였기 때문에 그 발전 상황과 사회 영향 및 역사적 기능에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국에서의 실학사상이론은 비록 이른 시기에 발전하여 심오하고 광범위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으나, 당시에는 널리 보급될 역사적 배경을 구비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직접적인 사회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로 실천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는 다르다. 초기 계몽주의 경향을 띤 심오한 실학사상 이론의 영향과 부분적으로나마 실현될 객관적 조건이 존재함

으로써 경제발전과 사회진보를 촉진시키고 국가의 번영을 초래하였다.

명말청초의 중국실학은 理學과 봉건전제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하여 초기 민주계몽주의 사상 경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당시 역사적 배경 하에서 실현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明末에는 조정의 부패 탓으로 동림학파 및 기타 土人들의 정치 • 경제발전에 관련된 일련의 실학사상이 단지 사상과 이론 차원에만 머물러 있었으며 결국 그것이 실천될 객관조건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그후 明가 멸망하고 淸朝가 들어서자, 전통적인 君臣之義’에서 벗어난 一群의 지식인들이 명대 중기이래의 각종 사회현상을 냉철하게 분석하여 새로운 出路룰 모색하였다. 黃宗 • 顧炎武 • 方以 • 王夫之 등의 사상가와 애국적인 학자들은 고통스런 반성으로부터 "폐단을 구하는 길은 導에 있지 空言에 있지 않다"(『日知錄』권7)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理學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새로운 사상으로의 대체를 역설하였다. 그후로 뛰어난 사상가 • 과학자와 학자들이 대거 출현하여 명말청초 실학사조의 발전에 적극적인 영향을 끼쳤으나 실현될 객관적 조건이 역시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淸 康熙 말기에서 乾隆• 慕慶에 이르는 기간, 통치 기반이 안정됨에 따라 고압적인 정책과 文化專制政策을 시행하여 文字獄을 일으켰다. 그 결과 정치 일선에서 멀리 물러난 많은 학자들이 訓話學 • 考證學에 몰두함으로써 乾嘉漢學이 학술 주류가 되었고 실학사조는 점차 몰락하게 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도 여전히 일부 사상가들은 漢學의 속박에서 벗어나 經訪解의 방법을 통하여 통치자들이 제창하는 理學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진보적 사상을 대담하게 제기하였다. 명청실학사조는 특정한 역사 배경으로 인하여 마땅히 있어야 할 기능을 발휘하

지는 못하였지만, 적극적인 사상과 혁신적 • 진취적인 그 정신은 우수한 중국전통문화 중의 하나로서 후인들에 의해 계승 • 발양되고 있다.

조선왕조 후기는 봉건사회가 점차 해체 • 붕괴되어가던 시기로서 왕조통치의 기초 사상인 성리학이 나날이 침체되어 갔다. 또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 등의 전란으로 인하여 국가경제와 민생은 큰 타격을 받았으며, 각 분야의 모순과 비리는 날로 심화되었다. 이에 사회개혁으로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제할 필요성이 강력히 대두되었던 것이다.

전쟁의 상혼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의 근면과 노력으로 경제는 점차 회복되어 갔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까지 농업생산의 급속한 발전과 상품경제의 농촌 진출로 인하여 농민계층의 분화가 촉진되었다. 수공업 • 상업 •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신홍 상공업계층이 홍기하고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발생 요소가 점차 증강되었으며, 사회계급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발생하였고 전통적인 각종 신분간의 구분이 날로 모호해졌다. 이것은 근본적인 면에서 봉건제도의 기초를 동요시켰으며 근대로 향하는 조건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이때 官學으로서의 성리학은 날로 침체하였고 戰後에는 罰의 도구로 전락하였다. 성리학으로 그들의 통치를 유지하던 양반 귀족들은 사회변동을 억제하기 위하여 잔혹한 수단을 취하려고 하였다. 실학사조의 출현은 사회발전과 사상학술계의 신사상 • 신학풍 창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특히 당시의 통치자인 英祖(1725-1776)는 ‘탕평책'울 실시하고 당쟁을 억제함으로써 실학사조의 홍성에 일조하였다. 그 뒤를 이은 正祖(1777-1800)는 前代의 정책을 계승하여 당쟁을 억제하고 특히 ‘규장각'을 설치하여 박지원 • 박제가 • 이가환·유득공·이덕무와 정약용 등과 같이 당파를 초월한 저명 사

상가들을 취합하였고, 그들은 각종 사회개혁 방안을 국왕에게 건의하였다. 이것은 바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이 홍성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이 되었다. 실학 사상가들의 개혁이론과 구체적 방안은 국가의 정책에 어느 정도 반영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正德 우선의 사상전통을 타파하고 ‘利用厚生’을 중심 사상으로 삼은 면에서의 차이점

조선 실학의 진일보한 발전으로 어떤 실학사상가들은 "正 • 利用 • 生"이라는 전통적 유학사상의 틀을 대담하게 벗어나 경제를 도덕의 결정 요소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利用厚牛'이 실학 연구의 주요 대상이자 실천의 주도적 사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인식은 중국의 명청 실학사상가들보다 명확하고 심오한 것이었다.

도덕윤리와 정치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 유학 전통과 ”正 • 利用 • "이라는 儒家의 전통적 사유 구조로 말미암아, 중국에서는 그것을 따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결코 순서를 바꾸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명청실학 홍성 시기의 顔李學派도 실학을 제창하여 실용을 강조하고 空言울 배척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형식상에서는 여전히 옛 성현의 가르침으로 "堯 • • 周 • 孔의 三(正德 • 利用 • 厚生)를 주창하였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대부분은 민생과 경세치용의 실학을 강조하면서도 ‘正德’을 首位에 두어 감히 先賢이 정해 놓은 순서를 함부로 바꾸지 못하였다. 이것은 그들에 대한 유학 전통의 속박이 변함없이 견고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조선의 실학사상가 박지원은 이같은 유학사상의 전통 및 틀을 과감히 타파하여 ‘利用厚生'을 ‘正德 앞에 두었다. 그는 "利用 연후에 厚生할 수 있으며 厚生 연후에 正德할 수 있다. 利用할 수 없으면서 厚生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며, 厚生할 수 없는 상

황에서 어찌 할 수 있겠는가?"(『燕巖梨 • 渡江錄』)라고 하면서 경제야말로 도덕을 결정하는 요소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는 봉건도덕윤리를 ‘天理’와 동일시하였던 성리학에 대한 비판이자 淸談과 空論을 숭상하던 당시 풍조에 대한 근본적인 변혁이기도 하였댜 그후 박지원 • 박제가 등의 실학사상가에 의해 제창되어 '北科派'의 중심 사상이 된 ‘利用’은 조선의 경제 회복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뿐 만 아니라, 외국 선진문화를 수용하여 자국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3) 의국 선전문화 학습 수용시의 장애 요소와 그 필요성에 대한 자각 정도 면에서의 차이점

중국 明米 西方에서 전래된 자연과학기술 지식은 주로 曆法을 개정하는 데 필수적인 천문학 • 수학지식과 外을 방어하기 위한 火抱기술에 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徐光啓 • 李之羅 둥의 지식인들은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며, 중국 전통문화에 익숙한 마테오 리치는 '冷條;' • ‘補儒 및 ‘超儒'의 방법으로 중국 지식인의 심리에 적응시켜 장애가 비교적 적었다. 그러나 ‘夷夏之辨'과 ‘天朋'大區을 중시하던 전통사상의 속박 하에서 탁견과 용기를 갖춘 소수 지식인을 제외하면, 서방의 것을 배우고자 하는 이는 결국 소수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經世致用의 실학사상 탐구는 단지 선견지명이 있는 극소수 지식인에 국한되어 있었다.

淸初에서 아편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중국은 ‘西學’의 전파에 대해 시종 소극적인 태도, 심지어는 배척하는 테도를 보였다. ‘西學'의 전파를 반대하는 일부 수구관료와 사회세력들은 "차라리 中夏에 좋은 曆法이 없게 할지언정 中夏에 서양인이 있게 해서는 안된다”라는 주장을 제기할 정도였는데 이에 호옹하는 자가 적지 않았

다. 이것은 통치집단의 맹목적이고 완고한 대외배척 테도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자연과학에 홍미를 가진 강희제의 집정 기간이나 王錫 • 梅文鼎 등 일부 淸初 학자의 경우에는 좀 예외이기는 하였지만, 로마교황 클레르몽 11세가 중국 풍속에 대해 멋대로 간섭하고 '體儀之爭'이 첨예해지자 강희 56년(1717) 청나라 조정에서 서양인의 중국전도 활동을 엄금한 이후 거의 모든 서양 전도사들이 본국으로 추방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의 천주교 전도 활동은 150년간 중단되었다. 1840년 아편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의 지식인들은 비로소 外患 방지와 강국에 대한 설욕을 위해 근대 중국에 들어 처음으로 서방을 배우고 연구하고자 하는 의식이 팽배해졌던 것이다.

중국의 경우와는 달리 조선은 17세기 초에 이미 중국에서 간행된 각종 西康 서적이 전래되어 지식인들의 주의를 끌었다. 18세기 이후로는 탁월한 사상가들에 의해 ‘夷夏之’의 족쇄가 타파되어 사상과 안목이 넓혀졌으며, 아울러 국왕 正祖의 신임과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西學'과 淸代文化를 학습 • 수용하려는 열기가 일었다. 당시 외국사상 학습의 장애는 주로 ''로 자처하며 자만에 빠진, 그리고 를 ‘夷秋'으로 간주하는 일부 성리학자들의 排淸意識이었다. 실학사상가들은 이러한 장에를 제거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던 것이다.

첫째, 과학기술이 생산을 촉진시키고 국가를 부강하게 한다는 점을 인식하였던 실학사상가들은 ‘西學'과 淸朝文化의 학습 • 수용을 적극적으로 조정에 건의하였다. 둘째는 잘못된 ‘夷夏之辨' 관념을 억제 • 일소하고자 노력하였다. 李演은 국가간의 평등 관계를 논술하였고, 洪大容은 ‘以天視物'의 객관적 태도와 천문학 연구로 유가의 ‘天圓地方馮'과 ‘地球中心'을 반박하였으며, 박지원은 ‘師夷' • ‘制夷'라는 탁월한 관점을 제기하였다. 홍대용 • 박지원을 창시자로 하는 ‘北學派'는 조선 실학 주요 학파 중의 하나였다. 셋째, 박지원 • 박제

가 • 유득공 • 이덕무 • 이가환 • 정약용 등 당파를 초월한 실학사상가들은 正祖의 신임을 얻었으며, 비록 직위는 높지 않았으나 현실정치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넷째는 民族自主意識을 고양하고 모든 국가에는 고유한 민족적 특징이 있음을 강조하였으며 민족문화에 대한 연구를 추진하였다. 『東史綱目』 • 『列朝統紀』 • 『 海東釋史』과 『東史』 등의 저작은 모두 조선 민족의 역사와 文物典章制度에 대해 심도 있게 논술한 것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中韓兩國의 실학사조는 각각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나 모두가 홍성과 발전의 시기를 거친 것이었다. 풍부한 사상 내용 • 혁신적인 용기와 근대로 향한 여명을 밝힌 계몽정신은 모두 자국의 경제 • 정치 및 사상문화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또한 풍부한 정신자산으로서 자국의 전통문화 속에 융합되어 후인들에 의해 계승 • 발양되고 있는 것이다.

(김경동 옮김)

後記

1993년에 출간할 예정이었던 이 책을 이제야 上粹하게 되었다. 책의 출간이 늦어졌을 뿐만 아니라 편집 계획도 다소 수정되었다. 韓國과 中國 양국에서 수십 명의 학자가 동원되는 巨秩인데다가 좀 더 나은 논문집을 만들겠다는 의욕이 넘쳐 이렇게 되었다.

그러나 책의 출간이 늦어진 만큼의 보람도 있었다. 이 책에 수록된 19편의 논문들은 지금까지의 • 中 양국의 실학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것이고, 또한 양국의 현단계 실학 연구의 수준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어서 韓 • 中 學硏究史의 획을 긋는 성과물이 될 수 있다고 감히 자부하는 바, 이것이 무엇보다 큰 보람인 것이다.

기왕에 출간된 『中日實學史硏究』와 더불어 이 『韓中實學史硏究』의 출간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뜻깊은 일이라 생각한다. 우선 이 책이 출간됨으로써 漢字文化圈에 속해 있는 동아시아 3국이 왜 공동으로 실학을 연구해야 하는가를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되었으며, 아울러 韓 ·中· 日 3국의 실학 연구 성과를 중간 점검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또한 3개국 실학 연구의 심화 • 발전을 위한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의 中國語版이 中國에서 한국과 동시에 출간될 예정이다.

東아시아 국가들간의 연대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祚今의 세계 정세 하에서, • 中 양국의 質學硏究의 成果物이 한국과 중국에서 각각 『韓中學史硏究』와 『中韓質學史硏究』라는 이름으로 동시에 출간되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끝으로 연구비를 지원해 준 대우재단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

1998. 7.

宋載卽

筆者 紹介

한국측

李佑成

成均館大校 名敎授, 大韓民國學術院 會員.

主要論著 : 『韓國의 脫史像』, 『韓國社會 硏究』, 『韓國古典의 發見』, 『學舍散梨』 等

鄭昌烈

淡賜大學校 史學科 敎授.

主要論著: 『午民戰爭 硏究』,『韓國民族民衆運動 硏究』(共著) 等.

朴星來

韓國外國語大學校 史學科 敎授, 韓國科學史學會 會長.主要論著: 『李漢의 西洋科學 受容』,『韓國科學史』, 『韓國人의 科學精神』等.

林澤

成均館大學校 漢文敎育科 敎授, 韓國英文學會 會長.

主要論著: 『韓國文學史의 視角』, 『李朝時代 敍寺』(注), 『韓國近代文學史論』(共著) 等.

金明昊

成均館大學校 溪文學科 敎授.

主要論著: 『熱河日記 硏究』, 『朴珪 硏究』, 『燕巖文學과 史記』 等.

金文植

서울大學校 奎章閣 學藝硏究士.

主愛論著: 『朝鮮後期 經學思想 硏究』, 『18世紀後半 서울學人의 淸學認識과 淸文物 導入論』 等.

金容傑

誠信女子大學校 淡文敎育科 敎授.

主要論著: 『星湖李의 哲學思想 硏究』, 『性理學과 學의 思惟體系 比校』, 『朝鮮朝後期 宜學思想 硏究』 等.

李照衡

成均館大學校 名敎授.

主要論著: 『茶山經學 硏究』, 『韓國思想大系』(共著), 『譯注 孟子要義』, 『每의 經學思想』 等.

鄭允炯

弘益大學校 經濟學科 敎授.

主要論著: 『西洋經濟思想史 硏究』, 『如의 迫上改革論』 等.

宋載召

成均館大學校 漢文學科 敎授

主要論著: 『茶山詩硏究』, 『英詩 用事의 普兪的 機能』 等.

중국측

辛冠潔

中國社會科學院 哲學硏究所 敎授.

主要論著: 『中國古代 名哲學家 評傳』(共編), 『中國近代 著名哲學家評傳』(共編), 『中國古代 俠名哲學名著 評述(共編), 『中國傳統思想硏究范』(編著), 『明淸質學思潮史』(共編), 『黃宗羲 評傳』, 『列子 評述』, 『論李退溪心學思想』 等.

陳祖武

中國社會科學院 歷史硏究所 副敎授 • 副所長.

主要論著: 『初學術思辨錄』, 『마르크스주의 歷史觀과 中華文明』(共著), 『明思潮史』(共著) 等.

丁冠之

山東大學校 敎授, 中國傳統文化硏究所 副所長, <齊魯文化> 主編.

主要論著: 『中國背學史 資料選』(共編), 『中國近代 著名哲學家 評傳』(共編), 『沿康 評』, 『阮籍 評』, 『明油直易의 早期 啓蒙思想』 等.

陳朝晴

山東大學校 中國傳統文化硏究所 講師, <齊魯文化> 副主編.

主要論著: 『中國質學發展論略』 等.

陳之安

山東大學校 敎授, 黨委 古記, 中國傳統文化硏究所 所長.

主要論著: 『中國近代史』, 『顔李學派의 敎育思想』, 『中國實學發展論略』等.

趙宗正

山東社會科學院 儒學硏究所 所長 • 敎授.

主要論著: 『雍 評傳』, 『顔元李 評傳』, 『甄 評傳』, 『山束古代思想家』(編著), 『萬斯同 • 全祖望의 經世史學思想』, 『章學誠의 歷史哲學』 等.

葛榮晋

中國人民大學校 哲學科 敎授.

主要論著: 『王廷相生平學術編年』, 『王廷相과 明代 氣學』, 『中國哲學範菌史』, 『明治質學思潮史』(共編), 『中國哲學通史』(共編), 『中國質學思想史』(共著) 等.

成復旺

中國人民大學校 哲學科 敎授.

主要論著: 『中國文學理論史』, 『神與物游―論中國傳統審美方式』, 『中國古代의 人學과 美學』, 『中國美學範時辭典』 等.

魏宗禹

山西大學校 哲學科 敎授

主愛論著: 『山 ”思以濟世"의 學思想』, 『江中의 "用世之"』, 『孔子의 基本思에 대한 思考』 等.

蓋光壁

中國科學院 自然科學史硏究所 敎授.

主要論著: 『의 數學結』, 『EPR 聯 불가사의』, 『中國近現代技術史綱』, 『易學科學史斜』, 『馬赫思想 硏究』, 『世界物理學史』, 『當代新道家』 等

馮天瑠

湖北大學校 中國思想文化硏究所 敎授.

主要論著: 『張之洞 評傳』, 『中國 古文化의 吳秘』(共著), 『辛亥武昌首義史』 『中華文化史』(共著) 等.

步近智

中國社會科學院 歷史硏究所 敎授.

主要論著: 『中國思想發展史』(共著), 『宋明理學史』(共著), 『明印學思潮史』(共著), 『中華文明史』 10卷(學術思想學科 主編 및 主要僚者), 『論李退溪的天人之學』, 『退溪學과 明代朱學』, 『論道山之學』 等.

韓中質學史硏究

대우학술총서 • 공동연구

1 판 1쇄 펴냄 1998년 10월 30일

엮은이 韓國宜學硏究會

펴낸이 朴孟浩

펴낸곳 (주)민음사

출판등록 1966. 5. 19(제16-490호)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06 강남출판문화센터 5충

515-2000( 대표전화)/515-2007(팩시밀리)

값 26,000원

® 韓國印學硏究會, 1998

아시아(東洋)철학, 사상/KDC150

Printed in Seoul, Korea

ISBN 89-374-4545-X 94150

ISBN 89-374-3000-2 (세트)

대우학술총서(공동연구)

한국 여성의 전통상 김인규 외 5인

미국인의 생활과 실용주의 이보성 외 5인

현대과학과 윤리 김용준 의 3인

중국의 천하사상 윤내현 외 4인

인지과학 조명한 외 11인

孤雲 최치원 한종만 외 5인

아담 스미스 연구 조순 외 7인

한국상고사 한국상고사학회

대한제국기의 토지제도 김홍식 의 4인

조선 후기 향약연구 향촌사회사언구회

합국 고대국가의 형성 한국고대사연구회

뇌의 인공적 확장은 가능한가 박순단 의 3인

인간이란 무엇인가 장회익 외 6인

현대과학의 제문제 김용준 외 6인

존 스튜어트 밀 연구 조순 외 10인

임진왜란과 한국문학 김태준 외 6인

서재필 이택휘 외 5인

한강유역사 최몽룡 외 3인

현대지리학의 이론가들 한국지리연구회

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14세기 고려사회

성격 연구반

한국인의 대미인식 유영익 외 3인

이재 황윤석 최삼룡 외 4인

시카고학파의 경제학 자유주의경제학연구회

물리음향학1 서상준 의 4인

막스 베버 사회학의 쟁접들 진성우 외 8인

대한제국의 토지조사 사업 한국역사연구회 근대사분과토지대장연구반

한국서 데이터베이스의 설계 및 응용을 위한 기초 연구 정광 • 이기용 • 김홍규 • 임해창 • 강범모

하이에크 연구 조순 외 9인

수치천체물리학 l 수치천체물리학연구회

과학사와 과학교육 양승훈 의 4인

이론 물리의 수학적 접근 김두철 외 12인

감성의 철학 정대현 외 9인

계산의미론과 그 응용 이기용 외 11인

프로이트와 문학예술이론 허창운 외 3인

언어학 이른파 한국어 의미 • 통사 구조 습득 l 조숙환 외

조신토지조사사업의 연구 김홍석 외 5인

구형항성계의 진화 오갑수 외

지방자치와 지역발전 성경룡 외 10인

성간 매질에서의 물리 현상 강해성 외

茶山學연구

1 . 정다산 연구의 현황 한우근 외 7인

2. 정다산과 그 시대 한우근 외 7인

3. 정다산의 경학 이을호 외 3인

4. 다산학의 탑구 강만길 외 6인

자료집

1 . 한국의 친족용어 최재석

2. 충남토속지명사전 최문휘

3. 한국의 음식용어 윤서석

4. 제주토속지명사전 오성찬

5. 전북전래지명충랍 유재영

6. 한말의병 관계문헌 해재집 홍순귄 외 3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