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창운 서운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민형원 덕성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유선 동덕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고 원 서운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논문개재순)프로이트의 문학예술이론
프로이트의 문학예술이론
허창운·민형원·이유선·고원 템시머리말
<프로이트의 관련저술들을 기점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신분석학적 문예학으로서의’) 문학심리학의 발달을 국제적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기술하는 일은 아직도 미완의 상태에 있다. 이러한 사정은 그런 프로젝트가 지니기 마련인 학제성과 복잡성을 감안할 때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아무튼 필수적으로 수용되어야 할 사항들로 말하자면, 상이한 학파와 노선들을 관류해서 이루어진 문학과 예술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사고의 전개, 발전 및 몰락을 기술하는 일, 또 끊임없이 열광과 거부의 입장을 거듭하면서 정신분석학적 사고과정이 문예학과 문학비평에 수용되기에 이른 점을 취급하는 일, 나아가서는 또한 그러한 수용의 근거와 배경을 묘사하는 일 등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역시 유럽과 미국의 다양한 문화영역들에 한정된 수용을 말하는 것이며, 이때의 다양한 문화영역들은 물론 상호 간에 많은 영향과 관련 및 교차에도 불구하고 역시 독립적으로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학문사적 연구는 한편으로 정신분석학의 역사, 그것의 이론형성과 문화과학에서의 수용 및 그 ‘적용’의 역사로서 하나의 독립된 장에서 기술되어야 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패러다임 교체를 간직하고 있는 일반 문예학사로서 역시 또 하나의 장에서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그야말로 하나의 학제적 프로젝트이기에 한 사람의 저자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1)1) Walter Schonau, Einfuhrung in die psychoonalytische Literaturwissen
schaft, Stuttgart 1991(=SM 259), S.123.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에 직면해서, 우리가 이 책에서 수행한 공동 작업은 역사적 관점에서 문제의 전문분야를 학문적으로 조명하는 과제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단지 입문적 성격을 견지하면서 우선 프로이트의 학설에 대한 해설을 기반으로 하여 정신분석학이 문예학과 갖는 관계, 그것의 사회사적 생성배경과 사회이론과의 관계, 나아가서는 그것이 문예학적 작업에서 응용될 수 있는 실천적 가능성과 그 예시 등을 시론적으로라도 선취해 보자는 욕심에서 출발하였다. 소기의 목표를 과연 달성했는지는 다만 독자의 판단에 맡길 따름이다. 공동작업에 참여한 필자들은 한결같이 한국에서 독일문학을 공부하고 난 뒤 모두가 독일에서 각기 자신의 전공분야를 나름대로 심화시킨 경력을 가졌기에, 비슷한 학문적 관심과 경향이 이 작업의 기반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제1장에서는 정신분석학과 문예학에 관한 원론적인 기술이 독일 실정에 비추어 시도된다. 제2장에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사회이론과는 어떤 관계에 있고 그것의 사회문화적, 사회철학적 배경은 어떠하며 또 그것의 한계는 어디에 있는지를 약술한다. 나아가서 제3장에서는 문학이론에서 차지하는 재담(才談)의 성격과 구조적 특칭에 대한 규명작업이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추구 된다. 그리고 마지막 제4장에서는 구체적 작품분석을 통해서 프로이트의 문학예술론의 응용과 직결되는 이론적 성과들을 검토함으로써 정신분석학적 문예학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덧붙여 부록에는 참고자료로서 프로이트의 문학예술 이론을 대표할 수 있는 몇 가지 원전이 번역되어 실렸다.
아쉬운 점이야 한둘이 아니지만 이런 형태로라마 공동작업이 가능하게 된 것은 그동안 자신의 협소한 전공영역을 뛰어넘어, 보다 폭 넓은 학문의 지평을 획득해 보려는 필자들의 끈질긴 학구욕과 학제적시각확보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덕택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쪼록 이러한 형태의 공동작업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서 프로이트의 독일어 원전들이 한국어로 번역 • 출판될 수 있기를 바라며, 나아가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우리의 지적 풍토에서도 다방면에 걸쳐서 활용될 수 있도록 새롭고 도전적인 학문의 장이 깊고 넓게 펼쳐질 것을 기대해 본다.
끝으로 이 기초작업이 한 권의 단행본으로 출판될 수 있게끔 연구비를 지원해주고, 작업의 지연에 따른 여러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인내심을 갖고 너그럽게 기다려 준 대우 학술재단에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사의를 표하면서, 그동안 당면했던 여러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도록 애쓴 참여자 모두에게도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1997년 2월집필자 대표 허창운차례
머리말 ·5제 l 장 정신분석학과 문예학l 서론 112 정신분석학의 기본개념들 153 『 꿈의 해석』과 정신분석학적 문예학 264 문학작품의 해석모델로서 꿈의 해석 345 정신분석학적 문예학의 수용과 영향사 48제 2 장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1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의 교섭사 712 프로이트 초기 이론의 <과학주의적 자기오해> 773 『히스테리 연구』 -- 과학주의적 자기오해의 동요 824 과학주의적 자기오해의 동요와 위상적 모델의 등장 865 『대중심리학과 자아분석』 그리고 심리주의 896 사회형성의 원인으로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심리주의 957 로하임의 생물학주의 1028 『 문화와 문화에 대한 불만』과 심리주의 1059 프로이트와 마르쿠제 11710 에로스와 죽음의 본능一프로이트의 생물학주의 11911 사회이론과의 관계에서 갖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한계 12412 사회이론과 정신분석학의 올바른 관계설정에 대한 전망 129제 3 장 프로이트의 재담이론
1 전제 1352 프로이트의 재담이론 1453 재담과 희극적인 것 181제 4 장 프로이트의 문학이론과 작품분석l 프로이트의 문학이론 2012 작품분석 212부록 1 문학예술이론과 관련된 프로이트의 원전I 작가와 공상 275II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년시절의 한 가지 기억 287III 도스토예프스키와 부친살해 369IV 섬뜩함 391V 정신분석 작업에서 드러난 몇 가지 성격유형 431부록 2 송하춘의 r 청량리역』청량리역 465해설 491참고 문헌 1 • 499참고 문헌 2 • 506찾아보기/인명 • 517찾아보기/내용 • 525지은이 소개 • 534제 1 장 정신분석학과 문예학
1 서론정신분석학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정신이 지닌 심층차원의 발굴이라는 문화사적 위업을 가능케 했다. 이 혁명적 차원의 개척자는 유태계의 지크문트 프로이트 Sigmund Freud(1956-1939)로서 오스트리아가 나치제국에 합병되면서 1938년 영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빈에서 신경 정신과 의사로 활동했다. 따지고 보면 20세기 초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및 전체주의의 파괴적 혼돈의 와중에서 무의식의 의미를 새로이 발견함으로써 정신분석학은 전통적 인간관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입장을 취한 학문영역이다. 이러한 획기적 발상은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타고 서구문화 전반에 도래한 위기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 문제의 전환기적 사상은 이미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로써 니체가 옹호한 문화적 양가성의 철학으로 표출된 바 있거니와, 그러한 시대정신을 반영이라도 하듯 오스트리아의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 Hugo vonHofmannsthal은 「엔도스 경의 편지」에서 언어의석의 위기까지 상징적으로 거론한 바 있다. 이런 관점에서 슈펭글러의 유명한 저서 『서구의 몰락』 이 당시의 분위기를 총괄적으로 대변하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대 배경을 밑바탕에 깔고 근대사회의 모순과 맹점을 공략하는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예술이 생겨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그리스 철학이래 인간의 고유한 이성, 즉 의식의 제어된 활동에 자신의 본질적인 특징이 있다고 간주한 전통적 인간관은 그 기층부터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함으로써, 인간을 <이성의 동물>로 본 계몽주의적 전통 역시 의문시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지금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가공할 유전자공학과 멀티마디어의 <탈근대적> 시대에 임한 우리 인간에게 또 다른 제4의 수모가 닥칠지는 예측불허이지만, 프로이트가 인간의 자기애가 겪어야 했던 <세 가지의 수모>를 언급한 것은 그 당시로서는 주목할만한 일이었다.1) 그 첫번째 수모로는 지구를 세계중심의 지위에서 물러나게 한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과학적 인식이며, 그 다음으로는 다윈의 진화론으로서 인간의 영혼은 결코 신으로부터 연원하지 않았음을 입증한 사건이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가장 치명적인 수모는 역시 심리학적인 것으로서 이 경우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집에서조차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자기정신 내부에서 전개되는 무의식의 빈약한 전언에 철저히 의존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여기서 말하는 <무의식>이라는 개념 자체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낭만주의에서 시작하여 생철학에 이르기까지 그 개념은 주로 영혼과 자연의 창조적인 힘으로 이해되면서 인간의 오성이나 의지의1) Sigmund Freud, Vorlesung zur Eirfuhrung in die Psyduxmalyse, Frankfurt a M. 1977 s 226 참조
참여 없이 작용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런데 이 개념이 바로 프로이트에 이르러 비로소 특정한 근대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데서 발상의 <대전환>을 거론할 수 있게 된다.
프로이트가 대학에 다닐 당시의 의학은 엄격한 자연과학적 • 실증주의적 방법론이 주도적이었고, 따라서 모든 병은 육체적으로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즉 신체적 원인이 일단 확인되었을 때, 비로소 그 병은 치유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의사들은 오늘날에도 역시 대부분 그런 방법을 취하지만 이 방법은 특정한 병상(病狀), 곧 당시에 아주 흔했던 히스테리의 경우에는 별로 효과가 없었다. 그런 징후에 대해서는 아무런 신체적 원인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의사들은 자주 환각이나 신경체계의 유전적 퇴화를 언급하곤 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그런 환자들을 다루는 가운대 자신도 몰랐던 어떤 특정한 정신저 현상을 발견하였다. 말하자면 히스테리의 표출형식들은 환자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감정, 소망, 표상들과 관련이 있다는 인식이 가능해진 것이다. 프로이트 역시 그 당시 통상적이었던 관행에 준해서 처음에는 전기요법과 최면술로써 환자를 다루었던 터였는데, 그런 식의 치료방법에 대한 불만과 함께 특히 자신의 꿈을 스스로 관찰함으로써 그는 정신과정의 새로운 이론으로서, 또 치료법의 새로운 방법으로서 정신분석학을 기초하기에 이른다.아무튼 우리가 여기서 문제의 정신분석학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결과적으로 문학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구조주의와 마르크시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신분석학은 자신의 방법적 전략을 처음부터 문학이라는 대상영역을 주목하면서 개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관심분야는 다르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표방하는 방법적 전략의 응용영역으로서 문학이라는 대상이 풍성한 결실을 낳는 곳임을 알게 된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의 시조로서 문학적 공상 2)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이론을 수2) 이 개념은 독일어
립한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다양한 저명예술가들(레오나르도 다빈치, 괴테, 도스토예프스키)과 여러 문학작품들(예컨대 옌젠의 『그라디바 Gradiva』)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유사한 다른 저술들의 출현을 촉발시켰다(제4장 및 부록 참조). 이처럼 문학과 관련해서 산발적으로 탐구되기 시작한 정신분석학적 연구는 그 사이에 세계적으로 분화 • 확산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방법을 폭 넓게 수용한 쪽은 특히 미국의 문예학, 문학비평이었다. 또 근간에는 프랑스의 문예학계에서도 정신분석학적 영향이 확산 • 심화되는 추세이지만, 독일의 문예학은 상당 기간 정신분석학적 방법의 활용에 아주 소극적인 편이었다.3) 그러나 현재는 사정이 많이 달라져서 비록 주저하는 듯한 인상을 주긴 하지만 그쪽으로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편이며, 이런 점은 최근 우리의 학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를 시조로 하여 그 동안 융 C. G. Jung, 아들러 Alfred Adler, 라이히 Wilhelm Reich 를 거쳐 라캉Jacques Lacan에 이르는 도정에서 상호 간에 분화나 학파에 따른 분열을 낳기도 했다. 특히 오늘날의 문화계에서는 정통학설의 개혁자로 알려진 라캉의 이론이 해체주의와의 연계 속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원천적으로 그 근간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론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정신분석학과 문예학 간의 상호관계를 프로이트에 국한시켜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기로 한다.
3) Walter Schonau, 앞의 책, S. 112f., S. 134 참조
2 정신분석학의 기본개념들
만약 정신분석학의 근원을 대립되는 가치들의 병존상황인 문화적 양가성에서 찾을 수 있고 또 20세기를 전후해서 프루스트, 무질, 헤세, 슈니출러 및 모라비아 같은 작가들에게서도 그런 사정을 확인할 수 있다면, 정신분석학과 그런 작가들의 작품이 공유하는 공동된 원천을 환유적으로 니체라고 일컫는 지마 Peter V. Zima의 주장은 주목해 볼 가치를 지닌다. <니체는 시민적 사회 속에서 도덕적 가치, 인식적 가치 및 미학적 가치들이 지닌 이중성을 최초로 인식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와 『도덕의 계보 Genealogie der Moral』에서 특히 그에게 문제되는 것은 금욕자의 관능성, 성자의 세속적 근원 및 공공 진리의 허위성을 발견하는 일이다. 대립의 변증법을 초월해서 언제나 새로운 합(合)을 겨냥하는 헤겔과는 달리 니체는 가치의 양가성, 곧 ‘대립적 가치들의 동일시 Ineinssetzung gegensatzlicher Werte' 수준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의 사유는 변증법적 과정의 파괴적인 단계에서 멈추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로 파괴적인가는 『선악의 피안 Jenseits von Gut und Bose』에서 분명해진다. 거기서 니체는 ‘형이상학자의 기본적인 믿음은 가치들의 대립에 대한 믿음이다’라고 말한다 .> 41 하지만 이러한 형이상학자들과는 달리 궁극적으로 니체가 추구한 것은 철저한 가치의 양가성, 곧 모순과 역설의 철학이었다.이런 양상은 어떤 의미에서 또한 프로이트의 사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기본입장도 개체는 이중의 천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즉 자아는 초자아와 이드 사이에서 끊임없이 전동한다는 시각4) Peter V. Zima, "Roman, Novelle und Psychoanalyse," in Kakanien 91 (1990). Akademiai Kiado es Nyomda Vallalat, Budapest, S. 87f.
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서 주체는 자신의 행동, 자신의 몸짓 및 자신의 말에 있어서 심층적으로는 양가성의 구조를 지니고 있으므로 결국 이중적 존재로 귀결되고 만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새로운 해석이었다.
이렇듯 문학에서 정신의 이중성을 문제삼는 경우도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하나의 방법적 단초로서 문학심리학이 거론될 경우, 우리는 우선 문학과 정신의 관계가 고대 이래로 여러 문학이론에서 항시 고려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영감설이 거론되든 작가의 영혼이 지닌 상상력의 창조적 요소가 기술되든 영혼의 힘이 갖는 기능은 언제나 문학적 천재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든 논쟁에서 핵심을 형성한다. 특히 감성적인 영향력의 행사라는 관점에서는 독자(청자)에게 미치는 문학과 예술의 작용을 따지는 물음이 관건이 된다. 이 점은 감동을 노린 수사학의 문체수법뿐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의 정의에도 적용된다. 하지만 이러한 언급들은 주지의 사실이기 때문에 대개는 특별히 문학심리학적 문제로서 느껴지거나 거론되는 경우가 드문 실정이다. 따라서 문학심리학을 운위할 경우 여기서는 그 개념을 한정적으로 정신분석학에 국한시킬 필요가 있다. 문예학과 정신분석학의 관련 내지 정신분석학이 문예학에 끼친 영향에 대한 물음이 주도적이라는 맥락에서 우리는 이런 성격의 학제적 문학심리학을 각별히 <정신분석학적 문예학>이라고 적시하고자 한다 .5)이런 관점에서 지금까지 개발된 정신분석학적 문예학의 연구분야들을 간단히 살펴보면, 첫째로는 문학 창작과정에 대한 접근을 작가의 창조성과 결부시켜 여러 측면에서 시도해 보려는 연구들이 있다(예컨대 문학적 <공상> 내지 <상상력>에 관한 이론). 둘째로 이와는· 역방5) Dieter Gutzen, Norbert Oellers und JUrgen H. Petersen, Eir(iihrung in die neuere deutsche Literaturwissenschaft, Berlin 1989, 6. Aufl., S. 253f. 참조
향에서 문학의 수용을 정신분석학적으로 규명해 보려는 정신분석학적 수용이론의 단초들(예컨대 정신분석학적 영향모델이나 <역전이>로서의 수용의 문제)을 들 수 있을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구체적인 문학작품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프로이트의 모범적인 연구에 기반해서 다양하게 추구하는 연구들(예컨대 꿈의 유추로서의 작품해석)이 있다.
아무튼 이러한 연구작업들의 이해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개발한 정신분석학의 기반에 대한 통찰이 전제가 됨은 당연할 것이다. 예컨대 심리적 장치의 모델이나 꿈의 기능 및 꿈의 의미와 관련된 정신분석학의 기본인식들은 문학의 창작과 이해의 영역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선 문제의 심리모델과 억압개념 및 성적 본능이 무의식이론에서 담당하는 역할과 관련해서 그 기본개념들에 대한 설명을 선행시킬 필요가 있다. 총괄적으로 프로이트의 학설을 정리해 보면 그 골격은 대충 다음과 같다.첫째로, 프로이트는 자신의 무의식이론에 따라 정신질환의 원인을 대개 신체적(예컨대 뇌) 결함에 귀착시킨 당시 대부분의 정신의와는 달리 무의식적인 심리갈등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새로운 학문은 행동과 담화 및 정신적 신체적 증상들에 대한 무의식의 의미를 발견해 내는 것을 대상으로 삼았다. 프로이트는 자유연상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환자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이러한 의미들에 대한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환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담화와 꿈의 특정 요소들에서 자신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 모두를 말하도록 했다. 자발적으로 떠오르는 이러한 생각들은 모든 담화의 밑바탕뿐 아니라 실제로는 신경증 증세의 밑바탕에도 놓여 있는 무의식적 사고에서 기인한다. 또 대개 그런 생각들은 흔히 성적 연원의 무의식적 소망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둘째로, 프로이트의 성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성장과정은 충족될 수없는 유년기의 소망들을 무의식 속으로 억압하는 결과를 낳게 되고, 나아가서는 <소망의 승화>를, 말하자면 그 소망이 사회적으로 승화되어 더 높게 평가되는 목표를 지향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프로이트는 오래 지속되는 이 지루한 과정을 <쾌락원리>에서 <현실원리>로의 이행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그 이행은 결정적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반복되어, 극복된 것으로 착각한 특정 발전단계로의 후퇴로서 되행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의 교점이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인 것이다 .6)
6) Helga Gallas, "Psychoanalytische Positionen," in Brackert, J. Sttickrath (Hrsg.), Literaturwissenschaft. Ein Grundkurs, Reinbek b. Hamburg 1992, S.593-596 참조 <아이들은 세 살에서 다섯 살 사이에 이 콤플렉스에 빠지게 된다. 말하자면 아이들은 이성의 부모를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고 마음을 쏟게 되지만, 동성의 부모는 이 관계에서 경쟁자(=연적)로 느껴지게 된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이미 엄마는 남아이든 여아이든 양성에겐 최초로 리비도적 대상이 된다. 경쟁자에 대한 증오는 죽음의 소망에까지 이를 수 있으며, 이성에 대한 사랑은 성교를 갈망하는 소망(부모와의 근친상간)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 구도는 또한 반대경우의 계기들도 보여 준다. 즉 동성의 부모에 대한 사랑의 태도와 이성의 부모에 대한 질투의 적대적 태도(동성연애적 성분)를 보여 주기도 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내애의 경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극복은 (부친 경쟁자의 탓으로 돌려진 거세위협에 근거하는) 거세불안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계집애의 경우는 남근선망(이 경우 남근이 없는 데 대한 책임이 엄마에게 돌려진다)을 통해 이루어진다. 거세불안과 남근선망은 근친상간적 대상을 포기하는 작용을 하며 동성쪽 부모역과 동일시하는 결과를 낳는다. 프로이트에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성적 성숙과정에서 필수적인 하나의 통과단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게다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것의 극복과 연관관계에 있는 초자아의 형성을 통해 도덕, 양심 및 법의 시작단계에 위치한다. 또 부친을 동한 근친상간의 금지는 상칭적으로 나중에 모든 권위를 대변한다>(S. 594f.).셋째로, <프로이트와 그의 주변에 있는 정신분석가들은 의학적 영역과는 독립해서 정신과학적 현상들의 분석을 위해서는 어떤 가능성
들이 이 새로운 통찰에서 귀결되는지를 금방 인식했다. 『꿈의 해석』 에서 처음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문학텍스트의 설명에 끌어들였던 사람은 바로 프로이트 자신이다. 프로이트는 행릿이 자기 아버지의 살해자를 죽이는 일을 주저하게 되는 원인을 한편에서는 엄마에 대한 리비도적 점유욕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아버지가 죽기를 원하는 무의식적 소망에서 찾았다. 그후로 정착되기 시작한 정신분석학적 문예학은 문학텍스트의 위상에 관한 한 이와 유사한 해석들로부터 광범위한 결과를 도출해 내었다. 즉 문학텍스트는 퇴행적 소망이 언어화되는 장소로 간주되고 그 소망의 추구는 쾌락원리에 봉사하는가 하면 또한 무의식적 소망의 방어에 봉사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은 (무의식적 소망들의 상상적 충족으로서의) 공상과 (이 소망들의 징벌과 위장으로서의) 방어 간의 타협의 형성물로 간주된다 .>71 결국 꿈의 해석은 잠재적 텍스트의 재구성을 목표로 하는 문학해석의 모델로 간주됨으로써 <꿈작업 Traumarbeit>은 문학적 공상의 유사물로 간주되고, 꿈작업의 기제(메커니즘)들은 또한 문학텍스트에서도 재인식되는 것이다.'
이렇듯 문학작품에서도 자신의 이론을 확인하려고 시도한 프로이트는 따지고 보면 심리적 장치로서의 인간정신이 겪는 진화과정을 유전학적 측면까지 고려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역동적 dynamic,' ‘경제적 economic,' ‘형태론적 topographical' 관점 등 세 가지의 관점에서 관찰한다. 서로 배타적인 해석이 아닌, 마음 전체의 다른 측면들을 강조하는 이 세 가지는 모두 정신을 육체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려는 시도를 드러낸다.‘역동적' 관점은 본능적 충동이 의부현실의 요구에 부딪칠 때 생기는 긴장으로부터 발생한 정신 내의 여러 가지 힘이 상호작용하는 것을 드7) 같은 글, S. 595.
러낸다. ……애초부터 필연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은 육체 자체의 욕구이다. 이 욕구는 쾌락이나 고통과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 쾌락은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육체가 어떤 자극에 의해 방해를 덜 받을수록 증가하며, 이 방해가 증가하면 불쾌를 느끼게 된다. 육체와 의부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소위 프로이트의 ‘에고ego'는 정신의 일부로서 육체가 자기 욕구를 적절히 만족시키도록 육체의 행위를 조정한다. 특히 에고는 자기 보존에 신경을 쓴다. 말하자면 에고는 본질상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원시적 본능을 통제해야 한다. 경제적 모델에서 이것은 ‘현실원리’와 ‘쾌락원리’ 사이의 갈등으로 나타나고 이 갈등에서 육체는 사회의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 쾌락을 늦추고 어느 정도 불쾌를 받아들여야 함을 배운다.세번째의 형태론적' 관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여기서 공간적 비유로 파악된 심리적 장치는 에너지의 갈등을 중재하는 하위체계로 나뉘어진다. 그 첫번째 학설에서 프로이트는 정신을 의식, 전(前)의식, 무의식의 삼중구조로 파악한다. 의식은 의부세계를 느끼고 질서 짓는 인식체계, 전의식은 언제라도 의식으로 떠오를 수 있는 경험의 요소들, 그리고 무의식은 전의식과 의식의 세계 밖의 모든 것이다. 무의식은 억압의 순간에 깊숙히 정착된 본능을 담은 표상, 사상, 이미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역동적이다. 이들은 안정된 상태로 머물지 않고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영상이나 사상에서 다른 것으로 옮아가는 감정의 전이를 부추기는 역동적 상호작용을 겪는다. 에너지가 특정 기제에 의해 자유로이 흐르는 정신기제, 즉 …1차적 과정에 의해 이들은 조정된다. ……·형태론적 체계의 두번째 학설은 1923년에 소개되었는데, 여기서 프로이트는 정신을 세 개의 작인으로 구분한다. (그것들은) 육체의 필연적 욕구에서 기인하는 본능적 충동으로서의 ‘이드 id,’ 이드에서 발전하여 충동을 조정하고 억누르는 ‘에고,' 그리고 충동에 대해 부모나 사회의 역할을 감당하며 외부적 작인이라기보다는 이 영향력의 변형이라 할 수 있는 ‘초자아 superego'이다 .>8)
그러니까 인간의 정신은 궁극적으로 <이드>, <자아>, <초자아>가 끊임없이 상호작용함으로써 그 흐름과 추이를 제약하는 일종의 자장 내지 싸움터로 간주된다. <이러한 심리적 구역 내지 심급의 가장 오래된 것을 우리는 이드라고 부르는데, 이드의 내용은 출생할 때 부터 지닌, 체질상으로 결정되어 유전된 모든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체조직에서 생겨나는 충동(본능)으로서, 여기서 비로소 이드는 처음으로 우리에게 그 형태가 알려지지 않은 심리적 표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9) 좀더 부연한다면 프로이트는 이러한 충동을 두 개의 그룹, 즉 <공격충동>과 <성적 충동 Libido> 으로 요약했다. 이 두 기본충동의 협동작용과 길항작용이 궁극적으로는 온갖 다채로운 삶의 현상들을 낳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드가 충동적인 행위에 있어서 쾌락원리의 지배를 받게 되고, 또 두 가지 충동방향 속에 깔려 있는 약속된 쾌락을 만족시키는 데 모든 힘과 소망을 기울이고 있다면, 자아(=에고)는 이드가 쾌락을 충족시키려고 애쓰는 가운데 현실에서 부닥치는 저항에 기인해서 이드와 의부세계 사이의 매개심으로서 개발되는 것이다. 자아가 갖는 과제는 말하자면 <자기확립의 과제>이다. 자아가 <밖을 향해서는 결국 …… 합목적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의부세계를 변화시키는 것(활동력)을 배움으로써 그런 과제를 수행한다면, 내적으로는 충동욕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기 때문에 이드에 대항하게 되는 것이다 .>10) 그리고 제 3의 심급인 초자아는 일부는 자아 내에서, 일부는 이러한 자아의 분열로서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한8) 엘리자베드 라이트(권태영 옮김), 정신분석비평., (서운 : 문예출판사, 1989), p.18f.
9) Sigmund Freud: Abriβ der Psychoanalyse. Das Unbelrigen in der Kultur. Mit einer Rede von Thomas Mann als NachJJort, Fmnkfurt a. M. 1988, S. 9.10) 같은 책, S. 10.마디로 사회화과정의 산물로서 모든 표상이나 양심의 동요, 도덕적, 윤리적 요구 및 금지를 나타낸다. 게다가 이러한 정신적 장치는 이미 유아기에 완전히 형성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기간의 세 발전단계인 구순기 (口脣期), 항문 사디즘기, 남근기에서 얻는 경험은 성인의 정신 생활도 이미 규정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이는 심리학적으로 어른의 아버지 >11) 라고 일컬어전다.
이러한 복잡한 상호 얽힘 속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를 떠맡는 것이 자아인데, 이 자아는 자신의 행위를 이드와 초자아 및 현실의 요구에 따라 조정함으로써 가능한 한 이러한 요구들을 동시에 충족시킨다. 하지만 상이한 이해관계 속에서 균형을 이루기는 어려운 일이고, 또 성공하더라도 그것은 기껏해야 잠시 동안일 뿐이다. 그래서 이드와 초자아의 요구가 지속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없을 경우에는 정신적으로 병이 들게 되고 노이로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와 치료를 동해 획득한 경험적 인식들을 기반으로 하여 프로이트는 이드, 자아, 초자아 그리고 무의식, 전의식, 의식 간에 역동적으로 얽힌 연관관계에서 그 각각의 개별적인 발전양상을 묻는 물음에 대해서는 이드와 무의식의 경우엔 전의식과 자아의 경우와는 다른 법칙이 적용된다는 식으로 답변한다. 즉 <1 차과정>에서는 이드와 무의식의 발전이 내적 욕구충족에 따라 이성의 통제 없이 일어나는 반면에, 전의식과 자아의 경우 이성과 검열이 지배함으로써 특정 소망이 <2차과정>에 서는 무의식으로부터 전의식 속으로 떠오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내용들은 억압된 채로 남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무의식 속에 억압된 내용들을 해독해 내는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은 오직 꿈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프로이트는 특별히 꿈을 분석함으로써 무의식의 작업방식 , 말하자면 꿈작업의 특11) 같은 책 , S. 44.
정 기제들인 압축, 자리바꿈, 중충결정, 상정화 및 2차가공에 의해 잠재적인 꿈사고(자유연상을 통해 접근하는 사유연쇄) 내지 잠재몽은 소위 발현몽의 내용(깨어난 후 기억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형태의 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급기야는 꿈, 실수, 농담, 심리적 징후 및 특정한 신체적 징후들을 무의식의 형성물로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것들 속에는 억압된 소망들이 발현되고는 있으나 왜곡되었기 때문에 깨어 있는 의식이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로 있는 것이다. 정신질환의 치료방법과 더불어 또한 무의식의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프로이트는 (결국) 인간의 성발전 이론과 주체화 이론, 바꾸어 말해서 엄마에게 의존적이지만 또한 무정하기도 한 신생아가 자의식에 투철하고 노련한, 말하자면 남자나 여자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행하는 성인으로의 발전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개발한 것이다 .>12)
이런 맥락에서 당시 프로이트의 등장과 관련해서 전개되었던 학문론적 배경을 일별하는 일은 매우 시사적이라고 간주하기에 이 점을 여기서 간략하게 짚어 보기로 한다. 학문사적인 관점에서 부각되는 핵심인물은 바로 정신과학의 창시자라고 일컬어지는 딜타이이다.부론 1 정신사적 방법과 정신분석학빌헬름 딜타이 Wilhelm Dilthey (1833-1911)는 일반적으로 정신사적 방법을 기반으로 하는 문예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13) 그는 <설명의 자연과학>과 <이해의 정신과학>을 서론. 구분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문학작품의 기반을 예술가의 체험에 두는 시각에도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하지만 딜타이는 자신의 견해를 『체험과 문학 Das12) Helga Gallas, 앞의 책 , S. 594.
13) Dieter Gutzen, Norbert Oellers und JUrgen H. Petersen, Einfuhrung in die neuere deutsche Literaturwissenschaft, Berlin 1989, 6. Aufl., S. 253f. 참조.Erlebnis und die Dichtung』(1906)을 통해 결정적으로 완성하기에 앞서, 의학과 심리학의 대변자들이 예술 및 예술가 부류와 관련해서 주장한 이론들을 상대로 일대 논쟁을 벌여야만 했다. 그는 <문학적 상상력과 광기 Dichterische Einbildungskraft und Wahnsinn>(1886)라는 강연에서 당시 천재사상의 강조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심심찮게 제기된 첨예한 비난에 대항하는 반론을 제기한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여기에서도 정신과학적 입장과 경험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입장 간의 대립이었다. 딜타이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특히 후자의 입장에 근거한 견해들이 천재를 겨냥해서 육체적 사건과 정신적 사건들의 연관관계를 언급하면서 작가의 상상력을 <병적 현상>으로 보는 관점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딜타이는 이제 창조적 상상력을 지지하는 자신의 학설을 활성화하게 된다. 그는 예술가와 몽상가 내지 정신병자들 사이에서 확인되는 몇몇 유추들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이 지니는 <환각>과 <창조적 상상력>을 확연히 구분하고자 한다. 그가 강조하는 점은 작가의 건강하고 온전한 실체이다. 작가의 상상력은 어떠한 긴장상태에 서도 <조절하는 장치>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장치와는 대조적으로 <꿈과 광기>의 경우에는 확실히 정규적으로 나타나는 <인상, 표상, 감정들>이 임의적으로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이처럼 노이로제나 정신병이라 할 수 있는 광기나 꿈에 대한 딜타이의 지적에서만, 꿈을 새롭게 해석하고 특히 예술가에게 결정적인 가치를 두는 프로이트의 심리학과 사유과정을 예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딜타이의 연설에서는 또한 작가를 놀이하는 어린이와 비교하고 있는 점도 돋보인다. 나중에 정리된 프로이트의 <문학적 공상>이론을 딜타이의 이런 생각과 비교해 보면 실로 놀라운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아무튼 딜타이는 문제의 그 강연을 통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학자들이 개발하여 천재와 노이로제 간의 밀접한 관련성을 주장한 명제들 (Jacques-Joseph Moreau, 1857; Benedict August Morel,1859)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 명제들은 결정적으로 이탈리아인 의사요 인류학자인 롬브로소 Cesare Lombroso의 저술 『천재와 정신착란 Genie und Irrsinn』 (1864, 독일어판: 1888)에 의해 관철되기에 이른다. 롬 브로소는 범죄자나 작가도 다 같이 정신이상자들의 그것에 가까운 비정상적인 신체적 변화를 나타낸다는 견해를 표명했고, 나아가서는 미술과 문학에서는 종종 정신이상자들이 자신의 환각을 표현하려 하며,또 천재들 중 평균이상으로 높은 비율이 정신이상자였음을 입증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려 했다.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행사한 그의 이러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천재와 정신이상자는 약간의 다른 점이 있긴 하지만, 역시 천재는 정상적인 사람과는 병적으로 다른 성질의 신체적 구성을 지니고 있고, 또 노이로제 상태에서 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결고 골은 결국 1920년대 말에서야 독일인 심리학자 랑에-아이히바움 W.Lan e-E chbaum 에 의해 그의 저서 『천재, 정신착란 및 명성 Genie, Irrsinn und Ruhm (1928)에서 검증되고 분화된다. 이때 랑에-아이히바움은 최우선적으로 천재개념을 정의내리면서 건강한 천재와 병든 천재를 구분했다.
롬브로소의 생각은 결과적으로 다음과 갇은 일련의 병적학 Pathogrphie만 낳은 것은 아니다. 예컨대 뫼비우스 P. .Mobius는 세기전환기 즈음에 괴테에 있어서 병적인 것에 대하여」(1898)를 다룬 바 있는데, 이런 점은 루소, 니체, 로버트 슈만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또 롬브로소의 저서를 참조해서 작가의 전기로부터 정신병리학적 이론을 위한 예화들도 수집되었다. 그러나 가장 효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경우는 무엇보다도 나치가 펼친 논증의 관접에서 롬브로소의 생각을 막스 노르다우 책 Max Nordau가 채택한 일이다. 그것은 1892-1893년에 2권으로 출판된 노르다우의 저서 『타락 Entartung』에서였다. 노르다우는서문에서 명백히 롬브로소의 의학적 • 정신병리학적 연구들을 증거로 끌어대고 있는데, 이는 다분히 문화비판적 의도로 이용된 경우에 해당된다. 노르다우의 소책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시대의 새로운 예술적 • 철학적 발전(보들레르, 베를렌느, 바그너, 니체, 졸라 등)과의 청산에 관한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노르다우는 <타락>이라는 개념하에 범죄자의 비정상적인 인간학적 발전과 예술가들의 그것 사이에 일정한 연관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한 다음, 작품에서 수많은 예를 찾아내어 신체적 체격과 얼굴의 특징(베를렌느의 경우)을 지적함으로써 이러한 발전을 증명하려 했다. <항상 범죄자, 매춘부, 무정부주의자, 공공연한 정신이상자들만이 타락한 사람들은 아니다. 때때로 작가나 예술가도 타락한 자이다. 작가와 예술가는 펜과 붓 대신에 다이너마이트를 다루는 장인의 탄약과 암살자의 칼로써 건강하지 못한 충동을 만족시키는 바로 저 인류학적 가족의 구성원과 정신적으로 대부분은 또한 육체적으로도一—동일한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14)
예술가와 작가들의 전기를 증거로 끌어대고 있는 의사와 정신병리 학자들의 이러한 병적학이 결과적으로 프로이트의 연구가 지닌 관찰 방식이 문예학에서 활용되는 성과를 낳게 했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병적학은 정신분석학 내지 정신치료학과 문예학 간의 관계사에 있어서 단지 하나의 예비단계를 형성하고 있을 뿐이다.3 『꿈의 해석』과 정신분석학적 문예학프로이트는 1885 년 가을에 빈의 한 젊은 의학도로서 파리로 향한다. 그의 목적지는 19 세기 당시 신경의학의 중심지인 살페트리에르14) Max Nordau, Entartung. Kulturkritische Untersuchung, Berlin o. J., S. VII.
Salpetriere 병원이다. 4개월 반의 체류기간 동안 29세의 이 청년의학도가 실어증과 히스테리의 저명한 연구가인 장 마르탱 샤르코J.M. Charcot 밑에서 연구한 경험은 일생의 전환점이 된다. 히스테리 환자들에 대한 샤르코의 연구를 접하면서 프로이트는 심리적 질환의 원인이 뇌에 있다기보다는· 마음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철저히 자연과학적 • 실증주의적 사고로부터 단초적으로나마 정신과학적 • 해석학적 사고로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맞는 것이다. 그때 그는 샤르코와 함께 환자회전에 참여하고 그의 강의도 번역하면서 또한 자신의 독자적인 신경병리학 입문서도 저술한다. 그후 빈으로 돌아온 다음 실어증과 히스테리에 관한 연구를 독자적으로 계속한 프로이트는 1893년 샤르코가 별세했을 때 그를 기리는 감동적인 추모사에서 그가 자신의 스승이었음을 고백한다. 그후 그는 1900년에 정신분석학의 기본서인 『꿈의 해석』을 출간하는데, 이 책을 펴낼 때까지만 해도 학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꿈은 무의미하고 비합리적인 현상으로만 여겨져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꿈을 꾸는 것은 사실이다. 눈부실 정도로 색체감 넘치는 꿈도 꾸고 전한 잿빛의 어두운 꿈도 꾼다. 영화처럼 생생한 꿈도 꾸고 안개 낀 것처럼 몽롱한 꿈도 꾼다. 그러나 인간의 꿈이 새삼스럽게 정신분석의 대상으로 주목 받음으로써 새로운 학문탄생의 원천이 된 것은 역시 『꿈의 해석』 덕택이다. 인간이 꿈을 꾸는 이유와 꿈의 형성과정을 환자와 가족, 특히 프로이트 자신의 꿈을 대상으로 연구한 실증적 연구서인 이 저서에서 프로이트의 연구 결론은 <꿈은 소망의 충족이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여러 가지 소망이 내재해 있고, 이러한 소망은 때때로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감정을 격동시키는데, 바로 이 감정의 격동이 꿈을 꾸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며 또 의식상태에서 보고 들은 것을 꿈으로 나타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꿈이 소망의 충족이라면 악몽은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이러한 문제제기에서 비롯하여 꿈이 이뤄지는 과정에 대한 분석을 시작함으실로을써 밝 혀꿈낸은다 .소 망프의로 이내트용는을 꿈그이냥 <그압대축로 — 반검영 열하과는 왜 것곡이 - 아 자니리라바꿈는( 사전 치) - 극화 - 2 차가공 - 상징화> 등의 과정을 거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놀라운 논증과 사례들을 담고 있는 『 꿈의 해석 』 은 당시 심리물리학의 창시자인 페히너 Gustav Fechner(1801 - 1887)가 인간의 마음도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음을 막 증명한 상황을 감안한다면 실로 혁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저서가 20세기의 사회과학을 비롯해서 인간의 모든 생활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기념비적인 연구성과임엔 분명하지만, 출판 당시엔 학계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받았고 심지어는 경멸과 무시의 대상이기조차 했다. 초판 6 백부를 파는 데 무려 8년이란 세월이 걸려야 했다. 그러다가 프로이트 가 미국의 클라크 대학 개교 20주년 행사에 강사로 초청된 것은 『꿈 의 해석』이 출판된지 9년이 지난 때였다. 그는 감동의 빛이 역력한 얼굴로 자신의 연구에 관한 첫 강연을 했고 이 강연은 20세기 초반을 풍미한 정신분석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꿈의 해석』은 점차적으로 정신분석학의 활용분야에서 평가받는 최초의 위대한 문서가 된다. 프로이트는 이 저술에서 스스로 <억압>이라 칭한 영혼의 한 특정 과정과 접하게 되는데, 억압은 말하자면 특정 충동과 관련이 있는 표상들(생각, 이미지, 추억, 예컨대 누구를 죽이는 공상 따위)이 자아에게 위험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무의식 속으로 밀어넣으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런 식으로 프로이트는 영혼의 삶을 갈등두성이의 역동적 사건으로 보았고, 쾌락의 추구는 바로 그 구동력을 형성하는 어떤 <장치>로 간주했다. 이 쾌락추구욕은 성적 충동의 한 표현인 것이다. 이 경우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성욕>은 성기, 즉 생식기에만 한정된 욕구를 뛰어넘어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뜻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이해된다는 점을 강조해둘 필요가 있다.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드러나게 된 점은 영혼의 결정적인 갈등들이 이미 유아기 초기에 놓여 있긴 하나, 대부분 망각된 상태로밖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정신분석학은 그렇게 해서 유아기의 성을 발견하게 된다(「성이론에 관한 세 개의 논문」(1905)). 그에 부응해서 프로이트는 치료방법도 바꾼다. 그는 <자유연상> 기법을 개발했는데, 이때 분석가는 환자를 안락의자에 눕히고 그 뒤에 앉아서 환자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과 감정들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 과정을 통해 환자가 특정한 체험이나 특정한 감정상태에 대한 기억에서 느닷없이 저항감을 불러일으키게 될 경우, 이는 억압의 과정과 관계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 바로 이 지점에서 정신분석학적 작업은 시작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연상> 기법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무의식의 정체를 추적하는 정신분석학적 기법이 바로 환자의 꿈을 해석하는 작업이다. 수면중에는 의식이 작용하는 검열이 축소되기 때문에 보통 때는 숨어 있던 수많은 공상, 소망, 불안들이 대부분 암호화된 형태로 꿈 속에서 등장하게 되는데, 이런 꿈의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함으로써 심오한 영혼의 활동과정이 밝혀진다는 의미에서 꿈은 <무의식으로 통하는 지름길>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아무튼 무의식과 유아기의 성의 역할에 관한 프로이트의 전술, 그가 개발한 개념적 도구 및 치료방법은 당시 주변에서 단호한 거부에 봉착하였다. 실제로 정신분석학에서 인격개념으로서의 자아는 아주 문제두성이의 한계개념이 되고 있다. 즉 그것은 어떤 도덕도 따지지 않는 내적 충동의 독재적 힘 그리고 교육을 동해 전수 받은 도덕적 양심 및 외부의 현실세계가 제기하는 그때그때의 실제적인 요구와 요청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타협이 된다. 말하자면 자아는 의부세계, 초자아 및 이드라고 하는 세 명의 엄한 주인을 섬기면서 그들의 요구를 서로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상충하는 요구들이 조화를이룰 수 없을 경우엔 병적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다. 이런 병적 현상에 직면해서 그 치유책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정신분석학은 지속적으로 자아의 다른 것, 즉 직접적인 파악을 벗어나는 하나의 현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이 지닌 다의성은 문제가 되고 있는 사항에 대한 속수무책을 나타내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정신분석학이 문예학과 사회과학 및 예술학에 미친 획기적인 영향으로 인해 이러한 학문들의 대상도 역시 새롭게 조명되는가 하면 동시에 불투명해지기도 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 결국 정신분석학이 문학작품을 꿈과 비교하는 이유는 둘 다 공상의 형성물 내지 구성체로서 낯설면서도 동시에 뜻풀이의 가능성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서 그것들은 해석의 필요성을 지닌다는 뜻이다 . 만약 꿈의 해석이 문학적 해석의 유사물로 통할 수 있다면, 문학의 수용을 우리는 꿈의 체험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꿈과 문학작품은 화자 스스로도 알지 못하고 있는 언어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의견일치를 보고 있는 셈이다 .15)
이렇듯 정신분석학적 문학이해를 위한 기본구상이 무의식의 행적을 추적하는 『 꿈의 해석』 속에 포함되어 있음은 이제 자명하다. 여기서는 이미 대부분 유아기의 성적 소망에 의해 발아된, 이른바 무의식의 영역과 의식의 영역 간의 정신적 교환과정과 변화과정에 대한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불분명하고 혼돈적인 충동구역으로서의 <이드>, 사회적으로 각인된 규범장치로서의 <초자아> 그리고 변형시키는 검열심으로서의 <자아>로 구성되는 삼원적 심리모델은 프로이트의 기본구상에서 파생된 일종의 후기적 변모상이다. <낮의 잔재>에서 자15) Walter Schonau, "Literarische Rezeption in psychoanalytischer und in literatunvissenschaftlicher Sicht. Eine fallige Kontroverse," in Akten des VII Intematonalen Germanisten-Kongresses Gottingen 1985. Kontroverse, alte und neue. Hrsg. v. Albrecht Schone, Bd. 6, Tubingen 1986, S. 160 참조.
양분을 공급받은 꿈은 그 <잔재>를 <꿈사고>로 전이시킴으로써 수면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이 꿈사고(잠재몽)는 다시금 무의식으로부터 부상하는 소망의 충족을 나타낸다. 꿈 속에서는 검열이 해이된 상태로 있지만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주로 성욕에서 연원하는 잠재몽의 사고는 발현몽의 내용으로 화하기 전에 은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6)
본래의 <꿈작업>을 결정하는 이러한 위장과 은폐는 부분적으로 잠재몽의 사고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왜곡시키는 데 있다. 이 왜곡은 많은 잠재몽의 요소들을 <응축, 요약하고 압축시키는 기제 Verdichtung>, 그리고 어떤 표상의 강도나 의미를 다른 차원의 것으로 <전이시키는 자리바꿈의 기제 Verschiebung>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압축을 통해 꿈사고(잠재몽)는 또한 특정 요소들을 중충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소망들의 <중층화 현상 Uberdeterminierung>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서술>이라는 제3의 조치는 사고를 이미지로 옮기는(이미지화) 작업을 담당하는데, 이때 그것은 고정적 상징들을 이용한다. 이를테면 부모는 왕과 왕비, 남근은 우산이나 나무둥치 또는 뾰쪽한 무기, 여자의 질은 상자, 난로, 옷장 또는 배 같은 속이 텅빈 물체로서 나타난다 .17) 은폐시키는 <꿈의 성과>의 네번째 부분은 <2차가공>으로서 이는 그런 식으로 왜곡된 꿈요소들을 수긍할 만한 새로운 연관으로 정리하거나 경우에 따라 보완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16) Dieter Liewerscheidt, Schlassel zur Literatur, DUsseldorf, Wien, New York 1987, S. 211f. 참조.
17) 이러한 꿈의 상징체계가 선사시대적인 능력에서 연유한다고 본 프로이트의 초기 추정은 이제 융 Carl Gustav Jung의 연구단초와 만나게 되는데, 바로 그런 상칭들을 원형적인 원상징의 인류 학적 체계로 확충시킨 장본인이 융이다.아울러 이러한 이차적인 수정작업은 이제 정신분석학이 예술적인 활동성을 밝히는 이론적 단초들 중 하나가 된다. 특히 오토 랑크 Otto
Rank의 주장에 따르면 (1907) 예술가의 <꿈작업>은 (단순한) 몽상가의 꿈작업과 신경증 환자의 꿈작업 사이에 위치한다. 정신적인 균형이 불안정하고 감정조절이 비정상적인 노이로제 상태에 가까워지면 여느 때의 꿈작업은 더 이상 예술적인 긴장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예술적 긴장의 실현은 오직 2차 가공작업의 심도 있는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미적으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세심한 분석력은 왜곡된 꿈의 요소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용해시키는 일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세심함은 단지 수동적인 몽상가의 그것과는 차별성을 견지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신경증환자와도 구분지어줌으로써 예술가는 자신의 유아기적 퇴행으로부터 되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가의 심리 속에 내재하는 신경질환적인 특징들의 의미를 분명히 확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프로이트 자신도 얼마간은 유보적이었다.
다만 문제는 과연 문학텍스트를 경험적인 꿈재료처럼 분석할 수 있고, 따라서 하나의 발현몽 내용으로 취급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다. 또 그 텍스트를 4단계의 꿈작업을 재구성하여 해명함으로써 꿈작업의 동인이 된 소망으로. 소급시킬 수 있는 것인지? 아무튼 이 물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해답이 가능하다는 것이 정신분석학적 문예학의 기본입장이다. 그 근거로서 문학적 공상은 소망기공작업과 동일한 원천에서 연유하기 때문에 질적으로 다른 차별화를 낳을 이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오직 중요한 것은 문학텍스트의 정체규명 작업시에는 필히 2차 가공작업의 고차원적인 수준을 주목하는 일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근거로서 프로이트가 백일몽과 각성상태의 공상을 동일하게 꿈과 유사한 소망충족으로 파악하고, 특히 백일몽을 문학적 생산의 원료, 즉 아동적이고 자기애적인 상상놀이의 대체와 계승으로 간주한 연구논문 『작가와 공상 Der Dichter und das Phantasieren」 (1907-1908)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프로이트는 재담(농담)18)에 관한 자신의 연구(1905)(제3장 참조)에 이어서 독자가 그와 같은 은폐된 충동적 소망에서 쾌감을 얻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그것은 위장되었기 때문에 허용되는 것으로서 평소에는 금기시되어 있거나 제재를 받는 영역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외설적인 농담을 듣고 폭소 를 터뜨리는 것은 단지 그것의 질적 급소 때문만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 예술작품의 미적 향수는 역시 그것을 가능케 하는 성적 감정발산의 덕택인 것이다 .19)
18) 이 표현은 독일어 Witz의 우리말 역어로서 이 책의 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문맥에 따라서는 농담이 더 적격인 경우도 있으나 문예학적 전문용어로서 여기서는 재담이라는 표현을 선호하기로 한다.
이것은 곧 예술의 고유한 쾌감을 얻는 것으로서, 프로이트는 형식적인 은폐와 이기적이고 자기애적인 백일몽의 변경에서 미적으로 즐거움을 얻는 것을 <앞선 쾌감 Vorfreude> 내지 <유혹의 프리미엄>이라 칭한다. 그것을 통해서 작가는 우리가 <아무런 질책을 받지 않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의 공상을 즐길> 수 있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20)
꿈의 상징들이 나타내는 의미는 대체로 표준화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반복되는 꿈의 내용도 유형화되었기 때문에(시험꿈, 나체꿈, 근친이 죽는 꿈 등), 그것을 문학적 모티프와 줄거리에서 재발견하여 풀이하는 작업은 각별한 매력을 지닌다. 무엇보다도 『꿈의 해석』에서는 아직 완결되지 않은 상태로 있는 그 유명한 오이디푸스 구상을 프로이트는 1910년 이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 칭한다. 이 개념은 그 사이에 가장 널리 애용된 심리현상으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정신분석학적 문학연구에서 너무 과도하게 남용된 해석모델로 통하는지도 모른다. 궁극적으로 프로이트의 저작은 인간이 자신을 만들어낸 요소들을 억압19) Dieter Liewerscheidt, 앞의 책 , S. 212f. 참조.
20) Dieter Gutzen, Norbert Oellers und Jurgen H. Petersen, S. 263.함으로써만 현재의 자신이 된다는 모순 내지 역설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분명한 연관을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프로이트의 이론은 출발한다. 개념정의상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을 담지하는 영역이 곧 무의식이라는 관점에서 모든 정신분석학적 문예학의 작업은 시작되는 셈이다. 21)
4 문학작품의 해석모델로서 꿈의 해석『꿈의 해석』이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논의를 위해서 뿐 아니라 정신분석학적 문예학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전제들중의 하나임을 부인할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을 것이다. 꿈이 특정 기제에 따라 진행되고 그리고 일상체험에서 남게 되는 잔존물과 무엇보다도 억압된 무의식적 공상들이 꿈 속에서 발현된다면, 다시 말해 꿈의 본질이 궁극적으로 억압된 소원의 성취에 있다면, 꿈을 해석하는 정신분석학자의 과제는 꿈꾸는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꿈의 언어를 해독하고 발현몽의 내용 뒤에 숨어 있는 꿈 본래의 의미, 즉 진실되지만 억압된 소망의 표상들(잠재몽)을 드러나게 하는 데 있을 것이다. 꿈과 꿈의 기능에 대한 이러한 원리적인 인식은 문학의 이해에 기여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을 통해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그 첫째는 세계문학에 나타난 예들에서 꿈의 해석을 과시함으로써이고, 둘째는 프로이트가 설정한 꿈과 문학적 공상 간의 유추를 통해서이다. 22)이런 맥락에서 프로이트는 개개의 꿈을 묘사하고 분석한 다음, 많21) 테리 이글턴(김명환 외 옮김), 『문학이론 입문』 (서울: 창작사, 1986), 186쪽 참조. 22) Dieter Gutzen, Norbert Oellers und Jurgen H. Petersen, 앞의 책 , s. 257ff. 참조
은 사람들에게서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전형적인 것으로 분류할 수 있 는 꿈을 언급하게 된다 이를테면 부모들중 어느 한 쪽이 죽는 꿈을 꾸는 환자들은 틀림없이 그 꿈을 당치도 않는 것으로 느낄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 경우에 환자의 노이로제를 진단하게 되는데, 그의 생각에 따르면 대부분의 어린이들 마음속에서는 사건발생의 강도나 선명도가 미미한 것을 노이로제 환자들은 과장함으로써 그것들을 드러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서 프로이트는 심지어 고대의 문학작품까지 원용한다. 왜냐하면 <고대는 우리에게 전설의 소재를 이러한 인식을 뒷받침할 수 있게끔 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심리에서 연유하는, 이미 언급된 전제의 유사한 보편타당성을 통해서만 그러한 전설의 소재가 발휘하는 철저하면서도 보편적인 영향력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바로 오이디푸스 왕의 전설과 소포클레스의 동명의 드라마이다 .> 23)
프로이트는 전설과 드라마에 등장하는 왕의 이름으로 지칭한 심적 과정을 세기말의 동시대인들에게서나 고대인들에게서 똑같이 발견할 수 있는 정신생활의 인류학적 상수로 간주한다. <『오이디푸스 왕』이 그 시대의 그리스인들을 충격적으로 감동시켰던 것에 못지않게 현대의 사람들도 감동시킬 수 있다면, 그리스 비극의 효과는 운명과 인간 의지 간의 대립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립을 증명하고 있는 소재의 특수성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하나의 목소리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릴파르처 Franz Grillparzer의 『선조할머니 Die Ahnfrau』 나 다른 운명비극에 그려져 있는 숙명들은 우리가 임의적인 것으로서 거부할 수 있지만, 반면에 오이디푸스 왕의 경우엔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목소리가 운명의 강요하는 힘이 존23) Sigmund Freud, Studienausgabe in zehn Banden. Hrsg. v. Alexander Mitscherlich, Angela Richards und James Strachey, Frankfurt a M. 1972-1974, Bel. II, S. 265.
재함을 인정하는 태세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 속에는 그와 같은 계기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내려진 신탁은 오이디푸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저주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길을 우리도 역시 걸었을지 모른다는 오직 그 이유 때문에 그의 운명은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 모두는 숙명적으로 어머니에 대해서 처음으로 성적 흥분을 느끼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최초의 증오와 폭력적인 소망을 품게끔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꾸는 꿈이 그것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오이디푸스 왕은 단지 우리들 유아기의 소망의 실현일 뿐이다. 만약 우리가 유아기 이래로 노이로제 환자가 되지 않고, 어머니에 대한 성적 흥분의 굴레도 벗어나고 또 아버지에 대한 질투심을 잊는 데에도 성공했다면 우리는 오이디푸스 왕보다는 더 행복한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유아기 이래 지금까지 그 소망들이 우리 내부에서 감수한 엄청난 양의 억압 앞에서, 그리고 유아기의 시원적인 소망을 충족시켜준 그 사람 앞에서 놀라 뒤로 물러서게 된다. 작가는 그러한 연구를 통해서 오이디푸스의 죄를 폭로하고 있는 반면에 또한 우리들로 하여금 그런 충동이 비록 억압되어 있긴 하지만 우리 속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자신의 내면을 인식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우리도 역시 오이디푸스 왕처럼 자연이 우리에게 강제로 짊어지운, 도덕을 해치는 소망을 그런 줄도 모른 채 지니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이 소망이 폭로되고 난 후에야 우리 모두는 아마도 유아기의 장면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싶어 할 것이다 .> 24)
프로이트가 문학작품과 대결하면서 특정 노이로제의 발생에 대해 숙고하고 있는 점, 또 어떤 방식으로 이 숙고들을 형상화하고 있는가24) 같은 책, s. 266f.
하는 점, 그리고 정신분석학적 전단을 인식하기 위해 그런 작업을 의사의 자격으로서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등을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의 발생뿐 아니라 그것의 계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소포클레스의 드라마는 프로이트에게 하나의 인식모델로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는 프로이트로 하여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중심부에 있는 부친살해의 소망을 모든 개인의 삶에서 <운명을 결정하는 하나의 단계로서, 즉 충동발전의 첫번째 단계 를 종결짓고 필연적인 억압의 막강한 추전력으로 인간의 삶을 공유하는 불가피한 드라마로 > 25) 인식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이 그리스 비극이 잠재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고 또 현재의 관객들도 거기서 미적 경험을 얻는 것은 그것이 태고적인 꿈의 소재에서 생겨나긴 했지만 현대인도 오이디푸스라는 인물에서 자기자신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며 나아가서는 시간을 초월하여 보편타당성을 지니는 한 사건이 그 드라마 속에 구체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물론 『 오이디푸스 왕 』 속에서는 그래도 형태를 얻어 만족시켜 주는 결말을 지을 수 있지만, 노이로제 환자들의 꿈 속에서는 그것이 꿈의 세계 속으로 추방되고 만다. 그래서 그 드라마의 관객과 독자는 누구든 자신과 주인공 오이디푸스를 서로 동일시하는 가운데 추후적으로 근원적인 유아기의 갈등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또 소포클레스는 이 갈등을 그나마 공개적으로 무대 위에서 전개시킬 수 있었던 반면에, 셰익스피어에게는 문명과 문화의 발전으로 인해 그러한 처리방식이 허용되지 않는다. 『햄릿』 에서는 동일한 소재가 다르게 다루어지고 있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문화시기의 정신생활적인 차이, 즉 인류의 정서생활에 있어서 억압의 세속적인 진전이 뚜렷이 드러나25) Peter von Matt, Literaturwissenschaft und Psychoanalyse. Eine Einfuhrung, Freiburg 1972, S. 23.
게 된다. 왜냐하면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어린이의 근원적인 소망의 공상이 꿈 속에서처럼 공개적으로 실현되지만, 『 햄릿』에서는 그것이 억압된 채로 있어서 우리는 그 존재를 마치 노이로제의 경우와 유사하게 오직 그 소망의 공상에서 출발하는 <억제효과>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26>
<억제효과>를 지적하면서 프로이트는 그 드라마에 대한 새로운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는 아버지의 망령을 통한 복수의 명령과 이러한 복수를 실행함에 있어서 드러나는 행릿의 무능함 사이의 모순을 묻는, 심심찮게 제기되어 온 물음에 대해 드라마 주인공의 정신적 장치를 분석함으로써 하나의 대답을 제공하고 있다. <이극의 플롯만 하더라도 햄릿은 우리들에게 결코 행동할 수 없는 무능력의 인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그가 두 번이나 행동하는 인물로 등장하는 것을 본다. 한 번은 성급하게 화를 내는 격정에 사로잡혀 벽 쪽의 포장 뒤에 숨어서 엿듣고 있던 자를 찔러 죽일 때이고 또 다른 한 번은 르네상스 시대의 왕자다운 결단성에 충만하여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두 신하를 계획적으로 잔인하게 죽이는 때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버지의 망령이 그에게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무엇이 그를 억제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임무의 특별한 성격에 있다는 정보가 여기서 다시금 제시되고 있다. 햄릿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있지만 단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 곁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해 버린 그 남자에 대한 복수만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남자는 바로 햄릿의 유아기때 억압되었던 소망의 실현을 보여 주고 있다. 햄릿으로 하여금 복수하도록 몰아붙여야 할 증오가 그의 경우에는 자기비난과 자신의 행동을 유보시키는26) Vgl. Dieter Gutzen, Norbert Oellers und Jurgen H. Petersen, 앞의 책, s.260f.
양심의 가책으로 철저히 대체되고 있기에, 햄릿의 말대로 이해한다면, 그는 자신이 죽여야 할 범죄자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햄릿의 마음속에서 무의식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을 의식 속으로 옮겨 놓게 된 것이다 .> 27) 이 해석에 연결해서 프로이트는 드라마의 주인공들과 작가 사이에 밀접한 연관을 구축함으로써 수많은 다른 연구들을 위한 본보기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 연구들에서는 허구적 인물들의 태도와 정신생활이 너무나 안이하게 그것들을 만들어낸 자의 심리로 환원되고 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작품들이 단지 그 작품을 만든 작가들의 정신상태에 관한 기록물로서 간주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아버지가 죽은 직후에 아버지에 관련되는 유아기적 감정의 재연 속에서 씌어졌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28)
아버지의 죽음으로 『 햄릿 』 을 쓰게 되었다는 셰익스피어의 특정한 정신적 경험에 관한 프로이트의 이 언급은 개개의 작품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의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정신적 장치에 대한 인식과 꿈의 해석은 개별작품을 뛰어넘는 보다 더 큰 의미를 문예학적 작업에 가져다 준 것도 사실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한편으로 꿈의 내용을 이루는 공상들과 그 진행과정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작품 속에 표출되는 작가의 공상들 간에 성립되는 유추들이다.이처럼 꿈작업이 문학적 공상의 유사물로 간주되고 꿈작업의 기제들이 또한 문학텍스트에서도 재인식될 수 있는 근거를 이해하고 나면, 꿈의 해석이 문학해석의 모델로 통할 수 있고 또 문학해석의 목표를 잠재적 텍스트의 재구성에서 찾을 수 있는 맥락관계가 자명해지기27) Sigmund Freud, 앞의 책 , s. 269.
28) 같은 책, s. 269f.마련이다. 아무튼 당시로서는 프로이트의 꿈이론에 의거해서 상상활동의 법칙성을 추적하는 일이 가능한 것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이 법칙성은 문학작품도 규정한다고 간주되었다. 사람들은 꿈과 문학작품의 중요한 심리적 기능이 곧 무의식적 소망을 공상적으로 충족시키는데 있다고 인식했다. 하지만 무의식적 소망은 심리적 저항의 영향으로 위장되고 징벌 당한 상태에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꿈이야기를 할 때 밝혀지는 발현몽의 내용인 꿈장면은 따라서 상기한 유추에 의하면 문학작품의 줄거리 전개, 곧 표층구조에 상응하는 것이다. 반면에 잠재몽의 꿈사고가 지닌 심오한 은폐된 의미는 작품의 <심리국적인 기체 Substanz> 29) 에 필적한다. 또 꿈의 <체험>은 작품수용에 맞먹고, 꿈의 <해석>은 작품해석에 해당된다. 특정 소망에 서 촉발되는 <꿈작업>, 곧 자리바꿈이나 압축과 같은 기제를 통한 원래적인 꿈사고의 변형은 예술작업에 가담하는 무의식의 몫과 비교될 수 있다. 원래적인 공상은 예술작업에서도 거듭 집중적인 변화와 가공의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최소한 꿈에게 논리적 일관성을 부여한다는 <2차가공> 역시 창작과정과 유사성이 있다. 즉 창작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 작가의 개인적 표상들은 무의식적으로 문체와 장르 및 관습의 형식적인 법칙성과 규범을 고려함으로써 예술작품은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혁신적인 작품조차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예술관습들을 초월하려고 시도함으로써 표명되는 거부적 태도에 있어서까지 그것들을 묵살하지 않기 때문이다.물론 꿈과 예술작품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 차이점으로 말할 것 갇으면, 꿈은 일반적으로 사적이고 종종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조리하여 의사소통을 지향하지 않는 성격을 지니는 반면에 예술작품은 우선적으로는 사회적이면서 전적으로 전달과 표현을 지향하는 성격을29) Peter von Matt, 앞의 책, S. 56.
갖는다. 꿈은 일종의 사건이지만 예술작품은 일종의 성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꿈은 사건 진행과정의 충족인 반면에 예술작품은 형상화된 충족이기 때문이다 . 또 꿈은 자발적인 삶의 표현이지만, 예술작품은 미적 인공물로서 항시 유사한 작품들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으며 또한 만들어진 그 무엇이다. 꿈도 압축, 자리바꿈, 형상화 등의 꿈작업을 통해서 자기 나름으로 원래적 소망의 지나친 점을 완화하려고 시도하긴 하지만, 그런 점에서는 예술작품에 훨씬 못 미친다. 예술작품의 본령은 바로 형식미를 통해서 미적 쾌감을 제공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로렌처 A. Lorenzer의 표현에 따르면 꿈과 문학텍스트는 둘 다 상징의 구성체다. 그것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내적> 비유로 변화시킴으로써 <저지된 것의 ‘반사회성’이 사회적으로 허용된 상징들의 체계로 매개된다>는 것이다. 예술가가 상징의 형성작업을 계속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보편의식이 비난한 것, 배제한 것, 또는 간과해 버린 것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잡을 수 있는, 그리하여 타인의 상상력을 촉발할 수 있는 구성체로 형상화함으로써>30) 무의식을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31)
이처럼 정신분석학적 방법이 문학과 문예학에서 응용되는 영역은 위에서 기술된 유형의 해석분야 의에도 두 가지가 더 있음은 앞에서도 언급되었다. 그 하나는 수용에 관한 연구로서 여기서는 작가가 문학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거쳐간 과정과 유사한 심리적 과정이 독자의 경우에도 무의식적인 상태로 존재한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그밖에 또 작가의 창작성을 비롯한 생산과정에 몰두하는 연구가 있다. 이는 역사 • 사회적인 결정인자들과 더불어 특히 전기의 심리적 결정인자들에 대한 연구를 일컫는다.30) A. Lorenzer, "Tiefenhenneneutische Kulturanalyse," in Kultur-Analysen Psychoanalytische Stydien zur Kultur, hrsg. von A. Lorenzer, 1986, S. 24.
31) 앞의 책, S. 85f. 참조.쇠나우 Walter Schonau에 따르면 문학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우선적으로 문학의 생성문제를 다루는 일에서 출발함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32) 그러한 연구는 문학의 근원을 종교, 제식, 신화 및 마술에서 찾는 역사적 물음과 직결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일반인들과는 달리 작가만이 지닌 특수한 형태의 언어창작력의 발생을 따지는 물음과도 관련이 있다. 문화이론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은 물론 상기한 첫번째 문제권에서도 고유한 견해들을 개발했지만, 우리의 관심이 특히 문학적 창작의 개인적 심리발생론과 관련된 두번째 문제권에 쏠리는 것은 이 부분이 문예학적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문학작품을 폭 넓게 이해하고자 하는 자는 그 작품이 생성된 과정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다. 그래서 정신분석가들은 프로이트의 뒤를 이어 특히 문학의 창작과정에 대한 연구를 집중적으로 추구한 바 있다. 이러한 연구는 창조성에 대한 보편이론의 틀 내에서뿐 아니라 또한 문학이론적 성격의 천착들을 통해서도 수행되었다. 결국 창작력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은 단지 의지적인 노력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경험적 사실에 입각해서 사람들은 이미 그것이 무의식적인 힘들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문학적 생산과정에 대한 접근을 가능케 하는 가장 가까운 길은 직접 작가 자신에게 물어본다거나, 아니면 직접 작가에게서 나온 문서들에 대한 연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창작과정에 대한 정보를 풍부하게 담고 있는 작가 자신의 증거자료들은 그리 흔치가 않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창조적 에너지는 분명 승화된 리비도일 뿐만 아니라 또한 공격적 힘의 몫도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창작시에는 파괴적 충동력이 의부로 방향을 돌리게 되는데, 이때는 증오심이 장면으로 나타남으로써 한 작품이 탄생하는 역설이32) 같은 책, S. 1. 참조
생겨나게 되고 이로 인해 작가는 경탄을 받는다. 심지어 창조적 행위는 비밀리에 범죄행위에 접근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언급은 도스토예프스키나 니체 또는 토마스 만에게서도 발견된다. 또 드가는 예술가가 자기 작품으로 접근할 때는 마치 범죄자가 죄를 범할 때와 유사한 정신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 33) 작가의 생활환경에 대한 지식은 물론 소설을 읽는 독자에겐 상대적으로 유관성이 적고 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그에 비해 텍스트 연구가에게는 그가 자신의 인식가능성을 제한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지식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문학의 발생과정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연구는 전기적 심리자료들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 정신분석학적 창조성의 이론이 지니는 강점은 무의식적 차원의 강조, 그리고 무의식적 과정과 의식적 과정, 곧 창작과정에서의 표현의지와 억제력 간의 역동성에 대한 연구에 놓여 있다 . 반면에 문예학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암묵적으로 지배하는 경향으로서 유독 의식적인 계산과 계획의 몫만을 너무 과대평가함으로써 무의식적인 힘들이 갖는 의마를 적절히 감안하지 못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모든 정신분석학적 창조성의 연구가들은 <1차과정>의 참여 없이는 창조행위를 상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의견일치를 보고 있다. 하지만 이 참여의 규모와 성격에 대해서는 물론 의견이 엇갈린다. 프로이트가 <1차과정>으로서 이해한 것은 심리의 연상적 기능방식인데, 이는 심리가 논리의 법칙과 현실검증의 규칙에 따라 작동하지 않고 자리바 꿈과 압축의 무의식적 기제에 따라 작동하는 경우 꿈과 광기에서 발현되는 방식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대체로 쾌락원리에 순응하는 이러한 1차과정과는 달리 <2차과정>은 현실원리를 따르는데, 1차과정에서는 소망충족이 환각화되어 형상 없는 인지의 형식이 가능하다고 한33) Walter Schonau, 같은 책 , S. 5. 참조.
다면, 2차과정에서는 심리가 현실에 대한 적절한 인지와 고려를 추구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34)
프로이트의 일차적 심급론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1차과정은 무의식의 체계를 나타내고, 2차과정은 전의식과 의식의 체계를 특징짓는다. 사람들은 1차과정에서의 <비논리적> 혹은 <전논리적> 사고방식을 말함으로써 1차과정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법칙이 효력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1차과정과 2차과정이 창조과정에서 협동하는지는 이 연구분야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킨 핵심적인 물음으로서 여전히 명백히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문학적 창작과정에 대해서 중추적 의미를 지니는 것은 (흔히 무의식적인) 공상들이다. 이것들은 문학적 창작과정을 촉발시키고 수반하면서 구조화할 뿐만 아니라 또한 창작과정의 원료를 형성하기도 한다. 자신의 기초적인 논문 「작가와 공상」에서 프로이트는 1908 년에 이미 공상활동과 글쓰기 간의 연관성을 밝혀낸 바 있다. 거기서 그는 허구적 문학작품을 아이들의 놀이와 백일몽 판 )에서 도출한다. 이러한 도출은 단적으로 하나의 완벽한 미학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많은 작가들이 이미 자신들의 어린 시절에 행한 놀이들을 애정을 갖고 언급하고 있는가 하면 또 자신들의 글쓰기 작업과의 연관성들도 통찰한34) 같은 책, S. 15f. 참조. 35) 같은 책, s. 86. <이러한 꿈과 예술작품의 중간성분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 은 백일몽이다. 이는 야심적이고, 이기주의적이며, 공격적이거나 혹은 성애적인 종류의 소망이 낳는 공상으로 기초되긴 했지만 꿈보다는 더 강하게 현실원리를 고려에 넣는다. 백일몽은 각성상태에서 표상된 소망의 충족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성인의 삶에서 나타나는 아이들 놀이의 계승이기도 하다. 한스 작스가 기술한 공통된 백일몽(1924) 은 그 속에 원래 이기적이거나 공격적인 사적 백일몽의 ‘사회화’를 향한 최초의 단초들이 포함되어 있는 한 ’의사소동적’ 예술작품의 전단계로 간주할 수 있다.>
바 있다. 사람들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놀이하는 일을 중단하게 되지만, 놀이에서 얻는 쾌락을 포기할 수 없는 경우에는 대리만족으로서 백일몽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이 백일몽 속에서 대부분은 야심적이거나 성애적인 소망들이 비교적 의식적인 상상의 만족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백일몽 속에서 문학작품의 전 단계에 속하는 제2의 중요한 형식 을 보았지만, 순전한 백일몽과 복잡한 예술작품 간의 차이를 결코 오인하지는 않았다.> 36)
부론 2 융의 심층심리학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당시의 문예학자들에게 대체로 거부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작가들뿐 아니라 또한 스스로 해석자인 문예학자들에게도 인간심리에 관한 인식에서 도출될 수 있었던 프로이트의 결론들은 너무나 낯설고 위험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그에 비해서 융의 학 설은 그들에게 훨씬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프로이트의 연구 결과들이 예술가와 작품의 관계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문예학 지침서의 한 항목으로서 「심리학과 문학」에 관한 기초적인 글을 최초로 집필한 사람은 융이다. 37)융은 두 종류의 문학, 즉 인간의 경험세계에 자리하는 심리학적 문학과 그 근원이 경험의 경계를 뛰어넘어 무의식의 심층으로 소급하는 환상적인 문학으로 구분한다. <환상적인 문학>에서는 무의식과 작가간의 밀접한 관련이 명백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융은 그 관련 속에 <하나의 참된 상징, 즉 알려지지 않은 본질에 대한 표현>이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38) 즉 이 <알려지지 않은 본질>은 보다3376)) D갇ie은te r 책 G, uStz. e 2n0 ,. Norbert Oellers und Jtirge n H Pete rs en, 앞의 책 , s. 264f. 참 조.
상세히 원형으로 규정된다. 개별안간은 일종의 원초적 상 내지 원초적 전형으로 간주되는 이 원형을 통해서 언제나 인류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 초월성,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 등등에 대한 인간의 <원경험 Urerfahrung>에 관여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원형들을 또한 무의식 속에서 상징과 형상을 의식으로 떠오르게 하는 <힘의 중심이요 자장> 39)으로 상정할 수 있다. <일종의 비유어인 무의식의 언어에서는 이 원형들이 인격화되거나 상칭화된 이미지의 형태로 나타난다 .>4O ) 이러한 원형들의 이미지를 동해 인간은 인류의 <집단 무의식>에 참여한다. 바꾸어 말해서 원형은 특정한 원형적 전행과정, 이를테면 개별화나 노화의 과정처럼 언제나 그때그때의 개인적 체질과 경험으로부터 보편화된 인간적 과정, 즉 집단적 경험과 집단적 과정으로 되돌아갈 것을 지시하고 있다. 발달한 후대의 인간도 역시 원형을 거쳐서 이전의 인류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현상들을 파악하고 또 물리치고자 했던 형상 및 상징과의 관련을 경험한다. 그렇기 때문에 융은 완전히 다른 단초로부터 출발하는 헤르더의 경우와 유사하게 신화를 <그러한 경험의 극히 이른 단계의 잔재로 지칭할 수 있는 것이다 .>41) 그러한 경험의 형상들을 통해서 <집단 무의식>, 즉 여러 세대를 통해 계승된 의식의 심리적 선조건들의 독특한 구조가 이후의 환상적인 문학의 형상들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융의 견해는 무리 없이 딜타이의 생철학과 정신사적 해석의 단초들과 쉽게 연결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개별영혼 속에서뿐 아니38) C. G. Jung, "Psychologie und Dichtung," in Philosophie der Literaturwissenschaft. Hrsg. v. Emil Ennatinger, Berlin 1930, S. 322.
39) Jolande Jacobi, Die Psychologie von C. G. Jung. Eine Einfuhrung in das Gesamtwerk. Mit einem Geleitwort von C. G. Jung, Frankfurt a. M. 1978 (=Fischer-Tb. 6365), S. 49.40) 같은 책, S.53. 41) C.G. Jung, 앞의 책, Berlin 1930, s. 324.라 신화와 동화의 집단 창작물 속에서도 <집단 무의식>의 각인으로 볼 수 있는 길이 추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집단 무의식>의 학설에서 출발해서 문학작품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보편적인 것의 상징>으로 보는 딜타이의 견해에 이르는 길은 멀지 않기 때문이다. 42) 원형을 집단 무의식으로 환원시키는 일은 무엇보다도 신화와 동화의 해석을 위해 커다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 이유는 융과 이 학파의 대변자들이 이러한 <단순 형식들>의 형상들 속에서 심리의 진행과정이 <상징적, 비유적 형식>으로 묘사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43) 원형들은 개인의 마음속에서는 꿈으로 나타나지만, 집단 무의식의 현상으로서는 신화와 동화의 형태로 나타난다. 『장미공주 Dornroschen 』, 『나쁜 요정 Rumpelstilzchen 』, 『헨젤과 그레텔 Hansel und Gretel』과 같은 동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현실계로부터 마법적 • 마술적 세계 속으로의 단절 없는 이행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의 공존현상을 목격할 수 있고, 『 홀레 할머니 Frau Holle 』에서는 원형으로서의 어머니의 모습을확인할 수 있다. 또 폭포는 끊임없이 갱신되는 에너지의 상징이 되며, 계모는 어린아이에게서 대체과정과 개별화 과정을 발생시키고 특정단계에서의 종결의 원칙을 체화한다. 반면에 뱀이나 개구리로의 변신을 촉발시키는 행위 속에서는 왕자가 나중에 자기 아내로 삼는 한 소녀의 이성초월적인 비범한 능력을 목격할 수 있다.
이미 융의 심층심리학적 관찰방식에서 출발하는 신화와 동화의 연구는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언어에서 출발해서 다층적이고도 다의적인 해석에 이르게 되며, 결코 일회적이거나 완결적인 결과들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궁극적으로 문학의 이해는 여러 영향들을 받아들이려고 문호를 열고 있는 독자의 능력에 좌우되는 것42) 같은 책, S. 166f.
43) Jolande Jacobi, 앞의 책, S. 54.이다. 이처럼 프로이트의 설명적인 정신분석학적 처리방식과는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당시의 정신사적 문예학은 융의 심층심리학적 해석을 프로이트와 그 제자들이 가져온 결과들과는 달리 비교적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셈이다.44)
5 정신분석학적 문예학의 수용과 영향사<문예학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도전 > 45) 을 독일이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 것은 겨우 지난 30년 간의 일이다. 이러한 사정은 우선 1933년 이후 나치주의자들이 정신분석학자들을 국의로 추방한 사실, 그리고 그 다음으론 전후에 지배적이었던 작품내재적 방식의 문예학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다가 1960년대 말에서야 비로소 문예학은 느닷없이 정신분석학적 해석과 문제제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 까닭은 문예학이 <해방>을 지향하는 신좌파 학생운동을 통해 정신분석학을 새롭게 평가하게 되고 동시에 비판적 문학사회학을 비롯해서 수용미학과 통속문학의 제문제 쪽으로 연구영역을 확장하게 된 사회적 배경에서 설명될 수 있다 .46더구나 문예학이 처음에 정신분석학적 연구방법에 대해 경계하는듯한 태도를 보인 것은 무엇보다도 정신분석학이 지닌 배타성, 즉 전44) Dieter Gutzen, Norbert Oellers und Jurgen H. Petersen, 앞의 책, s. 265f. 참조.
45) Peter van Matt, "Die Herausforderung der Literaturwissenschaft durch die Psychoanalyse. Eine Skizze,'' in Literaturpsychologische Studien und Analysen. Hrsg. v. Walter Schonau, Amsterdam 1983, S. 1-13(Arnsterdamer Beitrage zur neueren Gennanistik, Bel. 17, 1983). 참조. 46) Dieter Gutzen, Norbert Oellers und Jtirgen H. Petersen, 앞의 책 , s. 266f. 참조.적으로 정신적 증상이란 의미에서 문학작품을 작가의 심리적 소질에 대한 기록으로 분석한 지배적인 경향에 그 원인이 있었던 셈이다. 그러다가 문예학이 무의식적으로 억압되어 버린 소망의 충족에 꿈과 예술작품의 기능이 있다고 봄으로써 이 둘을 전적으로 동일시한 초기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문예학이 자신의 연구틀을 확장시킨 결과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정신분석학이 제공한 방법적 단초를 이용함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문예학적 인식관심이 지배하고 있는 한, 정신분석학적 문예학은 다른 방법적 단초들(예컨대 실증주의적, 정신사적 단초들)과 비교해서 작가, 작품, 독자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놀랍게도 작품에 대한 참신하고도 획기적인 통찰을 가능케 하는 해답을 얻기도 한다. 그 까닭은 해당작품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심층구조를 정신분석학적 문예학이 발견해 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는 앞에서 언급한 프로이트의 <햄릿> 해석, 마트가 제시한 쉴러의 『 빌헬름 텔 』에 대한 논쟁 47), 피츠커 Carl Pietzcker가 연구한 장 파울의 『 죽은 그리스도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연설』에 대한 해석 48)을 들수 있다.뿐만 아니라 작가의 의도를 묻는 물음도 역시 정신분석학적 인식이 고려됨으로써 전통적인 문예학에서와는 다르게 답할 수 있었다. 만약 꿈작업이 그것들을 암호화했기 때문에 꿈의 형상들 뒤에 숨어 있는 원래의 동기와 소망들이 꿈꾸는 사람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는47) P. von Matt, Literaturwissenschaft und Psychoanalyse. Eine Einfuhrung , Freiburg 1972.
48) Carl Pietzcker, Einfuhrung in die Psychoanalyse des literarischen Kunstwerks am Beispiel von Jean Pauls 'Rede des toten Christus,' Wurzburg 1983것이 사실이라면, 역시 문학작품의 경우에도 꿈과 문학의 유사성을 전제로 해서 작가가 전혀 예감할 수 없었던 면들을 문학텍스트 내에서 추적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홍미로운 관심거리가 될 수 있다. 더구나 그런 측면들은 작품의 <발현된> 현상에도 불구하고 작가 자신으로서는 접근할 수 없는 미지의 상태로 머물 가능성이, 즉 마음속의 <잠재적> 충위인 이드의 영역에 자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유사한 방식으로 문학사회학의 영역에서도 통상적인 물음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제기된다. 이를테면 작품의 수용시에는 독자에게도<예술가에게 창작의 충동력을 부여했던 감동의 상태, 즉 심리적 구도가…… 다시 형성된다>는 사실에 프로이트의 견해가 근거하고 있다면, <누가 무엇을 읽는가> 또는 <누가 무엇을 왜 읽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달리 천착되어야 할 것이다 .49) 즉 작품이 출현하도록 도움을 주는 <지배적인 취미>는 필히 <취미담지자의 유형>에 의해 각인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문학작품은 개별작가뿐 아니라 집단적으로 특정 그룹에 의해서도 각인되는 일정한 은폐된 심리구조들의 표현으로서 읽혀짐이 마땅하다는 주장도 성립할 수 있다.또한 작품에서 독자가 받는 감동은 우선적으로 작가와 독자가 지닌 유사한 심리적 구도를 기반으로 해서 생겨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구도는 공상을 하면서 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해 씌여진 텍스트가 그 충동의 긴장을 독자에게서 해소시켜 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특정 작가나 그 작가의 작품을 거부하는 경우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독자가 텍스트를 보다 가까이 대할 때 뭔가 위협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그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반응으로 마음이 동요됨으로써 균형을 잃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환원될49) Sigmund Freud, Studienausgabe in zehn Biinden. Hrsg. v. Alexander Mitscherlich, Angela Richards und James Strachey, Frankfurt a. M. 1972-1974, Bd. X, S. 198.
수도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작가의 공적인 역할과 작용에 대한 문제를 추적하거나 혹은 일군의 작가들을 <형편 없는 존재>로 매도하는 일을 분석하는 작업은 대중뿐 아니라 또한 작가, 나아가서는 유죄선고를 내리는 사람 및 그에게 동조하는 집단에 대해 정치적인 적대관계를 단순히 확인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통찰에 접근하는 결과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수용미학의 영역에서 생겨난 이러한 숙고들은 인간생활에서 문학이 갖는 역할과 의미에 대한 원론적인 물음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문학과 예술의 생성이나 작용은 결국에는 금지되었기 때문에 충족되지 않은 무의식적 소망의 보상적인 만족으로써만 설명될 수 있다고 보는 프로이트의 견해는 문제를 너무 단순화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왜냐하면 문학은 언어적으로 형상화된 현실경험으로 이해되고――이때의 현실은 무의식의 충위만큼 확장된다-또 그럼으로써 인식모델로서 봉사할 수는 있다 할지라도, 단지 심리적 구조와 갈등들의 기층으로만 소급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매체의 혁신으로 일상생활이 고도의 정보화 사회로 나아가는 대전환기를 맞이하여 인쇄매체가 영상매체에 압도당하는 마당에 단순히 정신분석적인 환원주의로 일관하는 해석은 경계해야 할 일이고 특히 사회적인 여건을 고려하지 않는 문학관찰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궁극적으로 정신분석학적 문예학이 거론하는 문학과 예술의 치유적 기능은 언제나 우선 금지되었거나 억압을 통해 극복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충동력의 극복이나 일시적인 이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마트는 개개인이 문학과 예술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미적 경험은 하나의 축제가 특정 집단을 위해 지닐 수 있는 것과 동일한 의미, 즉 규제와 금지에 의해 규정된 일상을 <일시적이고 유희적으로 잊게 하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인정한 바 있다.50) 여기서는비록 호라티우스가 말한 <오락성>이 문학의 본질적 과제로서 다시 반복되고 있을지라도, 문학작품 내용과의 대결이나 만남 이전에 <유흑의 프리미엄>으로서의 미적 향수(享受)라는 측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독자가 덱스트와 맞서는 가운데 표층 하에서 인식될 수 있도록 하는, 무의식적 발전단계의 갈등잠재력과 소망잠재력에 대해서 방어적인 반응을 보이는지 또는 그 잠재력을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또한 인간적인 발전의 초시대적인 심리적 기저를 통찰하는 데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독자의 반응에 달려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 오이디푸스 왕』과 『햄릿』에서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근친상간죄를 범하는 주제를 상이하게 가공하는 가운데 내린 진단은 곧 <인류의 정서생활에서의 억압은 세속적으로 발전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예컨대 셰익스피어의 드라마)은 인간의 충동이 <문명화 과정>에서 규제되고 있음을 고지해 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엘리아스 Norbert Elias는 심리적 구조들의 초시간적 성격에 관한 프로이트의 견해와는 달리 이러한 과정을 초자아에 의한 특정한 충동에너지의 억압이 전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 매개와 무엇보다도 사회적 경쟁의 표출도 역시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51) 이러한 맥락에서 프로이트의 견해롤 새롭게 발전시킨 라캉의 주요 주장들을 부분적으로나마 일별하고자 한다.5501)) DPeietet e rr vGoun tz Mena ,t tN , o앞rb의er t 책 O, elSle. r1s0 .u nd JUrge n H. Pete rs en, 앞의 책, s. 269f. 참 조
부론 3 라캉의 프로이트 〈재해석〉
자크 라캉(1901-1981) 52)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구상들을 구조주의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행사한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로 유명하다. 그의 견해들은 지금도 여전히 분분한 논란을 야기시키고 있고 논쟁적으로 표출된 그의 주장들은 정신분석학계에 많은 갈등과 분열을 가져오기도 했다. 원천적으로 언어와 무의식의 관계를 천착하는 작업을 핵심으로 삼고 있는 라캉의 이론은 프로이트의 근원적 단초에 소급한다고 천명함으로써 심리학적 • 철학적 토론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새로운 상도 제시하고 있다. 이 이론들은 정작 정신의학계에서보다는 정신과학 분야에서 더 강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라캉의 특이한 치료요법이 심각한 모순을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아들러나 융의 학설처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하나의 고유한 사고건축물을 보여 준다. 하지만 캉은 아들러와 융과는 달리 자신을 정신분석학의 <이단자> 내지 <일탈자>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분석학의 <루터>, 즉 개혁자로서 스스로를 이해한다. 무의식의 본질과 그 탐구가능성, 나아가서 심리학적 심급으로서의 자아의 발생에 관한 근본적인 견해 차이 때문에 그를 프로이트에서 유래하는 기존의 전통에 포함시키기는 어렵다. 라캉 추종자들 역시 그런 자리매김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뿐더러 또한 수정주의적인 미국의 <자아심리학>과의 연관성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라캉은 무엇보다도 거울단계를 심리와 그 심급들의 발생에서 결정적인 시기로 보는 독창적인 이론을 창출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스스로 프로이트로 소급함으로써 정신분석학의 변혁을52) Walter Schonau, 앞의 책, S.154ff. 참조.
구축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프로이트의 자아, 이드, 초자아의 제2심급론, 즉 정신분석학의 구조론 대신에 라캉은 세 가지의 생활세계를 구별하고 있다. 즉 <실재>계, <상상>계, <상칭>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거울 단계에서 상상계가 발생할 때, 그리고 언어의 상징적 질서 속으로 들어갈 때 실재계와 결별해 버렸기 때문에 실재계에 관한 거론은 칸트의 <물 자체>의 경우처럼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것에 관해 상상할 수는 있으며, 또 말을 할 때 그것을 파악하려고 시도는 하지만 항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상상의 제국, 즉 <상상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생겨나기 이전의 생활세계에서 유래하는데, 그 세계에서는 아이의 체험을 위해 필요한 자기 신체와 어머니 신체 간의 철저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상계는 이미지의 세계이며, 아이들이 거울단계에서 거울에 비친 자화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미지들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또 우리는 언어 속에서 살면서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을 한다. 라캉이 보기에 언어는 기표들의 <상징적> 질서이다. 비록 이해의 필요 속에서 다음 사실이 간과된다 할지라도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고 유동적Ol다.상칭적인 것의 질서, 곧 언어적 <술화 Diskurs> 속에서 인간은 도달이나 접근이 불가능한 실재계 및 실재계와 관련된 욕망으로부터 멀어져 가고는 있지만, 동시에 그 욕망을 항시 언표하려고 시도한다. 무의식은 아직 상징으로 화하지는 않았으나 역시 작용하고 있는 상상계의 한 부분이다. 라캉에 따르면 개별화 과정은 아이가 처음으로 거울 속에서 자기자신을 보게 되는 거울단계에서 시작된다. 대상과 동일시하는 작업계열에서 최초의 관계가 거울상과의 관계인데, 이때의 동일시작업들이 자아를 구축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의 체험세계에 아버지가 들어섬으로써 아이는 성의 차이를 알게 될 뿐 아니라 또한 <법
칙>도 알게 되는데, 역시 일차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근친상간의 터부이다. 아버지는 하나의 다른 질서, 즉 가족의 규칙, 사회의 규칙을 대변한다. 아이는 아버지를 통해서 이미 자신의 역할이 고정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 아버지는 이제 어머니의 육체에 대한 욕망을 금지한다. 이 욕망은 의식이 없으며 따라서 욕망은 원래가 무의식인 셈이다.
언어적 의사소통에서 무의식은 흡사 잊혀졌거나 또는 검열로 인해 볼품없게 되어 버린 하나의 장을 나타낸다. 그 장의 내용은 어휘의 선택과 음색을 통해서, 실수와 이미지 또는 비유를 통해서 표명된다. 무의식은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영혼의 심층차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아직은 서술될 수 없거나 또는 더 이상 서술될 수 없는 하나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도처에서 언제나 자신을 주목하도록 만든다.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해서 의식과 무의식 간의 구별이 소멸되는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정신분석학적 요법의 목표는 공허한 지껄임에서 시작해서 참된 언표에 이르는 스칼라 상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의 경계를 이동시키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무의식은 더 이상 심층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심층심리학적으로만 파악될 수 있는 비밀두성이의 그 무엇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차라리 무의식은 언어적으로 명문화된 것과 명문화될 수 있는 것 이전에 또는 그와 나란히 아니면 그것들 사이에 놓여 있는, 그래서 역시 표층에 자리하는 것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 어떻게 무의식이 술화(述話) 속에 숨겨져 있는지를 라캉은 『 가로챈 편지 The Purloined Letter』 라는 에드가 알렌 포의 소설에 관한 그의 유명한 세미나를 기반으로 해서 보여 준 바 있다. 이 해석은 수많은 라캉식의 텍스트 해석을 위한 하나의 모델이 되고 있다. 라캉에 의하면 무의식을 고려에 넣고자 하는 텍스트 비평가는 특히 기표연쇄 속에 자리하는 틈새와 단절들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잠재적인 것이 우선적으로 표명되는 장소가 바로 그곳이라는 것이다.
라캉의 사고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명제이다. 라캉은 한편으로 프로이트가 인정한 꿈작업의 기제(압축과 자리바꿈)와 다른 한편으로는 수사학적 형상(환유와 은유)들 간의 유추를 지적한 바 있다. 수사학적 형상들은 때에 따라서는 로만 야콥슨 Roman Jakobson이 도입한 구별, 즉 언어의 계열체적 축과 통사체적 축, 말하자면 우연성의 원칙과 대체의 원칙 간의 구별과 동일하다. 이러한 유추는 라캉에 의해 거의 동일성으로 화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무의식 속에서 사물표상과 언어표상을 서로 구분한 프로이트와는 생각을 달리했으며 그렇게 해서 그는 구조주의적 언어학(페르디낭 드 소쉬르 Ferdinand de Sassure, 로만 야콥슨)과 정신분석학을 서로 연결하기에 이른다. 라캉은 소쉬르로부터 기표와 기의의 언어학적 구상을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정신분석학적 차원만큼 보완한 셈이다. 즉 모든 기표는 무의식적 욕망을 수반하고 있다고 본다. 기표들이 표현을 추구하는 필요성을 간직함으로써, 그리하여 그 필요성은 언어를 통해 정리됨으로써 무의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의식은 언어의 습득 단계에서 상징적 질서 속으로 전입할 때 의사소통을 일탈하는 그 무엇으로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언제나 우리에게 미리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다른 것의 장소>이다. 우리의 욕망은 이제 두 가지를 원한다. 첫째로 그것은 불가능한 충족을 원하거나 아니면 충족이 일시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언제나 또다시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는 그런 충족을 원하는 것이다. 그 욕망은 인정을 원하며, 언표되고자 하고 남이 들어주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표현을 추구한다. 우리가 상징계의 질서 속으로 들어서서 말하기를 시작할 경우에도 우리 인간은 결코 상상계를 떠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두 세계 속에서 사는 것이다.작가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울 형상화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그 욕망을 미리 주어전 언어기호와 전승된 구조들의 형태로서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 즉 <인간의 술화는 타자의 술화인 것이다.> 욕망의 요구는 명문화될 수 없고,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표현될 수 없다. 동경은 이루어질 수 없지만, 계속적으로 표명되고 싶어한다. 이 점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실존적으로 열중하는 일, 그러다가 그 작품이 완성되어 출판되었을 때는 무관심해지는 일, 그리고 원칙적으로 독자보다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없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마치 어떤 낯선 것을 대하듯이 마주하고 있을 때 작가가 느끼는 무관심 등에 관해서 얼마간은 설명해 준다. 언제나 작품은 결핍을 발언하거나 욕망의 충족을 약속하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전제로부터 문학의 해석은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석자는 본질적인 것이 아직 텍스트 속에서 발언되지 않은 상태로 있다는 점을 옳다고 느낄 것이며 따라서 그는 그것을 발견하는 과제에 착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발견하든 그것은 항시 본질적인 것일 수는 없다. 우리가 여기서 목격하는 것은 중심적인 상상력을 추적하고 있는 통상적인 해석과 통상적인 정신분석학적 해석이 극단적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어와 유사한 구조로서 무의식을 새로이 정의하는 이 행위는 주체적인 체험과 느낌을 위한 분석이라는 전통적 시각의 비중을 주변적인 것으로 평가절하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고전적인 분석은 우리들에게 새롭고 다르게 느낄 것을 가르치고 있는 반면에 라캉은 우리에게 새롭게 말하는 것을 가르쳐서, <성숙하게 되도록> 시도한다. 이때 그는 <누가 말하는가?>라고 주체를 따지는 불안한 물음을 제기한다. 그의 대답은 이러하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내 속에서 말하는 것이다. 언어는 우리가 상징적 질서 속으로 전입하기 전에, 즉 언어공동체의 성원이 되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언어가 비로소 우리를 주체로서 구성하는 것이다 주체의 데카르트적 자기확인은 라캉에 의해 환상으로 드러나게 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대신에 라캉의 경우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은 곳에서 나는 생각한댜 고로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드가 말하는 것이다>라는 명제는 우리가 발화시에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 즉 기의에 적합한 기표를 찾는 것과 갇은 통상적인 표상을 반박한다. 왜냐하면 라캉은 기의보다 기표의 우선권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언어의 지시적 측면은 평가절하되고 있다. 실로 이러한 견해는 많은 반론을 야기시켰고, 또 데리다도 반박했다. 라캉의 시각은 우선적으로 고립적인 단어와 단어유희, 나아가 어절과 자모에 집중한다. 그것들 속에서는 자리바꿈과 압축이 가장 잘 입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상실될 수 있는 것은 단어와 문장을 포괄하는 구조들, 즉 통사론적 현상으로서 덱스트 언어학이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구성적인 것으로 인식했고, 또 덱스트 해석이 전체 의미 내지 중심적인 상상력으로서 주목한 것에 대한 시각이다.
물론 우리가 언어를 어떻게 다루며 언어 역시 우리와 어떤 방식으로 교류하는지의 방식과 양상에 관한 그러한 원칙적인 숙고들은 분명 문학덱스트의 해석과 그것의 생산과 수용의 이론을 위해 방향제시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따라서 라캉의 저작들은 문예학적 권역에서도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새로운 문학심리학의 영역에 대한 입문서둘은 그 사이에 풍부해졌지만 대부분은 영미계통의 저작이고 또 대체로는 확신을 가전 추종자들에 의해 저술된 것들이다. 아직은 라캉의 학설을 프로이트적인 정신분석학과 대질시키면서, 문학에 대한 사고를 위한 극단적인 결론을 비교하면서 정리하는 체계적 성격의 비판적인 논평들은 없다. 53)하지만 푸코Michel Foucault와 라캉 같은 후기구조주의자들로부터53) 독일어로 된 입문서로는 헬가 갈라스 Helga Gallas의 쿨라이스트 해석서 (Textbegehren des Micmel Kohlhaas. Die Sprache des UnbewuBten und der Sinn der Literatur, 1981)가 있는데, 이 해석은 라캉주의적인 틀 내에서 해석학적 비판을 받은 바 있다(Hagestadt 1988). 라캉 학파의 다른 독일 대변자들로는 키틀러 Freidrich A Kittler, 회리쉬 Jochen Horisch, 톨렌 Gerorg C. Thoien 및 논문집 Austreibung des Geistes aus den Geisteswissenschaften (1980) 과 Eingebildete Texte(1985) 의 몇몇 저자들을 들 수 있다.
술화비판과 술화분석뿐 아니라 또한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와 폴 드 만이 주도한 해체주의라는 문예학적 방향도 파생되어 나온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문학적 작가성으로서 특정한 개체를 인정하는 전통적 표상과 결별하고 있다는 데서 획기적이다. 이 경우 문학작품은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된다. 언어예술작품은 언어 자체와 마찬가지로 고정된 의미를 지닌 기호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콘덱스트에 의존하는, 다수의 의미를 용납하는 기표들로 구성된다. 이 점은 꿈의 상징뿐 아니라 문학적 이미지와 상징들에도 유효하다. 확실히 기표의 우세설은 기표의 하위에서 기의가 실족한다는 비유를 뛰어넘어 그 이상까지도 기술하고자 함으로써 덱스트 해석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의문시하도록 만든다.
라캉이 보기에 모든 말하기와 글쓰기는 결국 일종의 실수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것을 결코 정확히는 생각할 수 없으며 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정확히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상징계의 구조는 상상계의 구조에 정확히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생각한 것을 정확히 언표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환상이다. 표현된 것의 주체가 곧 표현의 주체인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덱스트의 생성과 그것에 대한 성찰을 자신의 묘사에 함께 관련시키는 근대적 작가들은 이미 이런 사정을 고려에 넣은 바 있고, 또 전래의 소박한 주체확실성을 문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라캉보다 더 선구적이었다.물론 기표는 기의를 모르는 가운데도 그 효과의 측면에서 분석될 수 있다. 의미의 결핍, 의석적 이해에 있어서의 비연속성은 그 자체로서 필연적으로 의미로 변하지 않은 채 해석될 수 있고 또 해석되어야 한다. 라캉의 제자들은 전기적 방법을 불필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그들에게는 해석학적 근거들을 합당하게 번역할 수 있는 메타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해석자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무의석의 착각과 과오에 내맡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라캉은 정신분석학을 문학에 적용하는 구상에는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정신분석학과 문학의 관계는 적용의 관계가 아니라 포함의 관계인 것이다. 그 둘은 동일한 뿌리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적인 비평가는 고고학자처럼 심층에 숨어 있는 보물을 찾겠지만, <라캉주의자>는 수사학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훈련받은 탐정처럼 텍스트 속의 균열과 비일치를 찾을 것이다. 그래서 라캉의 독서는 해석자로 하여금 의미도식 속으로 안내한다기보다는 기표들의 무의식적 작용에 대한 그들의 감수성을 촉발시킬 수 있다. 해석자는 잠재적인 소망을 추적할 것이 아니라 즉자적 욕망을 작가와 독자의 추동력으로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문학심리학에 대한 라캉의 기여를 올바로 평가할 수 있는 시기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 갇다. 라캉의 학설이 지닌 극단성과 혁명성의 특칭은 그것의 수용이 지금까지는 동아리나 해당 그룹 내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을 뿐, 라캉주의자들과 다른 진영들 간의 문학심리학적인 대화는 아직도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물론 도발도 적지는 않다. 궁극적으로 라캉의 주장은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의 대부분이 잘못되었고, 또 무의미하거나 유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정신 분석학적 해석의 수공업에 대한 그의 비판은 비록 대부분이 고립된 진영에서일망정 기초에 대한 토론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은 사실이다. 라캉 학파의 덱스트 분석이 별로 많지 않음은 이해할 만도 하며 그것도 거의 전부가 『 가로챈 편지 』 에 관한 포의 소설을 라캉이 다룬 모델과 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 관련짓고 있는 것들이다. 포의소설에서는 편지의 내용은 미지수이며 단지 조건부로 유관성(有關性)이 있을 뿐이다. 라캉에 따르면 해석의 <내용>은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언표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으로서 라캉은 소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리바꿈>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시위하기 위해 그것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아무리 라캉이 타당성의 상대성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내용>, 죽 기의를 묻는 물음은 잘못된 것일 수는 없다. 기표의 절대화를 주장하는 라캉의 입장을 비판하는 데리다는 바로 그 점을 정당하게 지적했는데, 그 이유는 기표의 절대화란 지시성의 묵살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라캉의 수용이 어렵다는 사실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무의식적 의미를 감지해내는 수단으로서의 자유연상법이 라캉의 제자와 추종자들에 의해 너무나 무비판적이고 무절제하게 두입되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에 해석은 극도로 임의적인 인상을 주게 되고 또 비의적인 덱스트들(조이스, 바타이유, 말라르메, 카프카 등)은 더 비의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성급한 이해를 경고하고, 무의식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고 무의식을 직접 언어화하는 라캉의 서술원칙은 따라서 라캉의 제자들에 이르면 종종 유식한 현학을 뽐내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의 성찬54)이 되거나, 단지 자기 속에서만 맴돌면서 의사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무모한 사고의 자기애적인 양상으로 화하고만다. 이성중심주의에 대항하는 라캉의 무쟁은 그 실천에 있어서 유감스럽게도 너무나 자주 임의적인 비합리주의에 빠지고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궁극적으로 정신분석학적 해석이 최근에 괄목할 만한 성과들을 보여줄 수 있었다면, 그것은 단지 새로운 방법으로서의 정신분석학적54) Klaus Laennann, "Lacancan und Denidada," in, Kursbuch 84(1986) 참조
해석이, 확고히 자리잡은 전래의 처리방식들로부터 강요받은 방법적 정당화에 기인한 것이라고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성공은 정신분석학적 해석이 점차적으로 자신의 위상을 문예학으로서 이해함으로써 연구대상인 작품을 정신분석학의 연구대상인 주체와 별개의 것으로 구분한 사실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문학작품의 주제, 인물구도, 스토리와 이미지들에서 역으로 그 작품을 만든 작가의 심리상태를 추론하는 일에는 더 이상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주된 관심은 세기전환기와는 다른 징표 아래에서일망정 작품을 병적학의 토대로 이용하는 데 있지 않다는 말이다. 오히려 그러한 노력의 중심에는 작품이 놓이게 되는 것이다. 또 작품과 관련해서는 심리적 경과와 갈등이 작품의 생성에 기여했다는 인식은 그리 홍미를 끌지 못하며, 오히려 이러한 심리적 경과와 갈등이 어떻게 작품 속에 매개되어 나타나고 또 어떻게 그 작품의 구성을 규정했는가 하는 점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바로 이 형식적인 형상화에 대한 연구가 가져온 결과는 프로이트가 원래 독서경험을 미적 부분과 본질적 • 내용적 부분으로 분리한 것이 이제는 극복되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연구는 형식과 내용의 통일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 이러한 연구의 토대를 형성하는 것은 다시금 문학의 생성과정에 관한 프로이트의 견해인데, 이 과정을 좀더 분화시킨다면 정신분석학의 전단하는 방식과 문예학의 해석하는 방식은 프로이트의 원래적인 의도와는 달리 역시 서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는 무의식으로부터 의식 속으로 침두하는 복잡한 충동력과 그 경합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 동시에 그것들을 문학작품 속에서 구체화하여 전달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역시 미적 형상화로써 그것들을 암호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심리적 메커니즘은 시적 유희규칙으로 전이되고, 전기적 동기들과 내용들은 문학적 이미지들로 탈바꿈한 모습을 보여 주게 되는 것이다 .>55)
55) Gerhard Kaiser, Gottfried Keller. Eine Einfuhrung, Munchen u. Zurich 1985, s. 88.
이렇듯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학문인 문예학은 문학작품을 방법적으로 해석하여 포괄적으로 이해하려할 때, 설명하는 학문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이 제공하는 도구들을 활용할 수 있다. 이때 물론 문예학은 언제나 자신의 인식관심이 핵심적으로는 작품에 목표가 있고 따라서 정신분석학의 목표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것임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해석을 하는 문예학자들도 물론 텍스트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수가 있다. 하지만 텍스트에 관한 모든 진술은 텍스트를 가르키는 지시일 뿐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텍스트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또 담보한다는 점을 언제나 함께 말하는 진술들인 것이다. 그 전술들은 텍스트 고유의 빛을 모아 반사적으로 그 텍스트에 도로 비춤으로써 그 텍스트를 해명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해석을 하는 문예학자는 문학이 표현과 형식이라는 고유한 특성을 통해 그것 없이는 언표될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함축적 전술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이에 반해서 텍스트가 알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을, 단지 다르게 그리고 보다 더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신분석학은 동시에 문학이 원칙적으로 요구하고 있지 않는 하나의 위상을 추구한다. 정신분석학은 그 출발점에 있어서 해석이나 프로그램이 아니고, 사실에 관한 학문이고자 하는 것이다.56)
결론적으로 볼 때 정신분석학의 학설이 이런 식으로 문학작품의 분석에 적용된 전성기는 특히 제1차 대전과 파시즘의 대두 사이의 시기였다. 신경의 겸 정신병리학자로서 출발한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따지고 보면 히스테리와 그것의 성적 병인학에 관한 연구를 거쳐 정신적 질환들과 공포증(강박상태와 불안상태)을 치료하는 경험적 요법의 기초56) 같은 책, S. 114f.
를 제공한 셈이다. 따라서 문학적 적용의 예는 정신분석학이 가져다 준 부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프로이트의 주관심사는 일차적으로 정신질환의 원인을 무의식 속에 억압된 성적 충동(리비도)에서 찾아 내어 이를 환자로 하여금 의식케 함으로써 그 병을 치유하는 데 있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시민사회의 성도덕에서 작용한 인습적인 터부들과 심리적 우울증 및 그것들의 파괴작용에 대해 반기를 들기도 했다. 그는 인간적인 해방욕구와 자기이해를 촉진시키고자 했으며 사회비판적 개혁자로서 영향력을 행사한 고도의 계몽주의자였다. 폭 넓은 독서량을 지닌 의사요 학자로서 프로이트가 자기 환자들이 진술한 꿈과 그들을 해방시키는 인식들과 더불어 정신적 행동방식을 파악하기 위한 재료들을 세계문학 곳곳에서 공급받을 수 있었던 근거는, 작가들이란 언제나 본질적으로 인간심리와 그것의 다층적인 내적 과정 및 그것의 사회적 결정인자들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자신의 정신분석학적 연구 초기에 이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문학에서 발견하여 일반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57)
원론적으로 말해서, 인간심리가 복잡한 현실과 충돌하면서 빚어 내는 다채로운 양상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묘사는 당시 프로이트가 살았던 시대의 다른 작가들에게서도 발견되거니와, 이는 당시 기존의 가치체계의 혼란과 무관하지 않음은 앞에서도 암시된 바 있다. 물론 <가치(가치체계)의 위기에 대해서는 상이한 사회학적 설명들이 존재한다. 그 위기는 한편으로 사회집단들을 서로 이질화시켜서 결과적으로 에밀 뒤르켐이 ‘아노미'라 불렀던 것을 가져오게 하는 지속적인 노동 분업으로 야기되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데올로기적인 갈57) Claus Trager (Hrsg.), Worterbuch der Literaturwissenschaft, Leipzig 1986, S.419ff. 참조
등과 이데올로기와 선전을 통한 언어의 남용도 모든 가치들의 탈가치화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가치체계의 탈가치화에 대한 궁극적 근원은 보다 더 깊은 곳, 말하자면 근대 시민사회의 경제적 기반에 놓여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즉 <시민시대의 시작 이래로 그 기반은 끊임없이 의미를 획득해 왔고 최근에는 심지어 비판적 자유주의적 신문들에서조차 ‘만연하고 있는 모든 가치들의 상업화 ’(1981년 10월 16일자 《디 차이트 Die Zeit》지)를 거론하고 있다. …… 모든 생활영역들의 상업화는 질적인_윤리적, 미적, 인식적 ——- 가치들이 본연의 가치요 상업화 사회가 ……인정하는 유일한 가치인 교환가치(시장가치)를 자기 속에 숨기고 있는 공허한 빈 껍데기, 곧 가면으로 화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일 아름다운 사전모델은 가장 높은 시장가치를 지닌 사전모델이고, 가장 좋은 책은 곧 베스트셀러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선하다,' ‘아름답다’ 혹은 ‘독창적이다’와 같은 명칭들은 양가적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동시에 사물들의 참된 질을 전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좌우하는 판매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58)
아무튼 이러한 양가성이 지닌 비판적 시각과 무관하지 않는 프로이트의 관점들은 비록 예술과 문학작품들을 분석하고 해석한 목적이 무엇보다도 정신분석학적 실상을 파악하는 데 있었다 할지라도, 자주 예술학과 문예학 및 문학비평을 고무시킨 것도 사실이다. 또 그로 인해 그후 온갖 조류들과 학파들이 생겨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제영향을 너무 일방적으로 오해해서 단선적인 주고받음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지마는 지적한다 .59) 따라서58) Peter V. Zima, 앞의 책, s. 87f.
59) 갇은 책, S.99. <그렇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슈니 출러, 헤세 및 모라비아 갇은 작가들에서도, 상업화된 현실에서는 모든 문화적 가치들이 교환가치에 의해 공동화(空洞化)되기 때문에, 무의식적인 것과억압된 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무의식적인 것에 관해서 토마스 만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80세 탄생일에 행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무의식적인 것, 죽 이드는 원시적이고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전히 역동적이다. 그것은 가치평가도 모르고 선과 악이나 도덕도 모른다. 그것은 심지어 시간도, 시간의 진행도, 그것을 동한 정신적 사건의 변화도 모론다.'(Thomas Mann, in S. Freud Abn'B der Psychoanalyse. Das Unbemgen in der Kultur, "Freud und die Zukunft," Frankfurt a. M. 1953, s.138). 교환가치에 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 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시장가치와 무의식적인 것 사이의 상동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상동성이 인식될 경우엔 즉각 니체의 『 선악의 피안 』 이나 슈니층러, 무질, 카프카, 헤세 및 모라비아의 덱스트 밑바탕에 놓여있는 양가성을 사회역사적 콘텍스트에서 해석하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한 허구적 덱스트를 니체나 프로이트의 ‘제 영향'으로뷰터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도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
프로이트가 문학적 공상과 발현몽 간에 예로부터 존속해 온 밀접한 관계들을 집중적으로 인정하고 또한 무의식 속에서 혼돈적으로 분출하는 충동력과 의식의 조정기능 간의 내적 갈등도 이미 상이한 문학에서 존재함을 밝혀 낸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에 관한 논문들을 통해 그는 셰익스피어의 『 베니스의 상인 Mercrant of Venice』 ,괴테의 『시와 진실 Dichtung und Wahrheit』 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 카라마조프 형제 Brat'ja Karamazouy에 나오는 모티프들을 연구했으며, E. T. A. 호프만과 W. 하우프의 작품에서는 <섬뜩함 Das Unheimliche>을 분석하기도 했다 . 문학작품들과 작가들이 프로이트에게 고무적으로 작용하거나 확신을 심어주는 식으로(이를 테면 A. 슈니츨러) 영향력을 행사한 것과 마찬가지로 작가들 역시 그가 수행한 연구방법과 결과들을 생산적으로 수용하기도 했다. 로렌스, 조이스, 포크너, 프루스트, 지드의 작품들과 그리고 독일문학으로는 카프카, 호프만스탈, 베르델 브로흐 Hermann Broch, 무질 Robert Musil, A. 츠바이크 Arnold Zweig 와 S. 츠바이크 Stefan Zweig ,되불린,
만, 헤세의 작품들에서 구조화의 원칙에까지 이르는 정신분석학적 추동력을 인식할 수 있다. 1912년부터는 작스와 랑크가 설립한 잡지 《이마고 Imago》가 정신분석학적 문학관찰의 공식기구로서 특히 문학적 생산울 정신병리적인 비밀로서 파악하거나 풀이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정신병리학적 문학관찰 (예술가와 신경증환자와의 친족성 등)은 그 마지막 지류로서 70년대에까지 이르고 있지만(A. 미철리히, J. 크레메리우스), 당시 유물론이라고 비난받았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독일문예학, 특히 독어독문학이 냉정하게 수용하는 일에는 방해가 되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엔 딜타이가 수립한 정신사적 방법을 통해 실증주의를 극복하는 과제가 급선무였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관념론적인 게슈탈트 심리학과 유형론은 역으로 융의 신화론에 동조하는 일을 강력히 뒷받침했는데, 융의 <원체험>과 원형들은 정신사적인 <체험>에 부응했을 뿐 아니라 또한 지배적인 반( 反 )인종주의와 반(反)마르크시즘 및 보편적으로 성을 금기시하는 소시민적 근성에 동조하는 모습도 드러냈다. 이처럼 독일에서는 계몽적 경향보다는 비합리적인 경향에 우선권이 주어졌는데, 이 점은 시민적 문예학의 일반적 특징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독어독문학에서의 <융 수용>은 <프로이트 수용>과는 달리 거의 단절 없이 20년대부터 50년대까지 지속될 수 있었다.
미국의 경우 정신분석학적 작품해석은 이미 20년대부터 시작해서 1945년 이후로, 특히 카프카의 작품분석과 연결해서 가장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지만, 또한 범속한 딜레탕티슴에 이르기까지 저속화된 면도 있다. 정신분석학적 문예학이 한편으로는 생산적 주체에 집중함으로써 형식문제와 영향문제에 대한 관심을 배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평가에 대한 무관심한 입장 때문에 훨씬 뒤에 가서야 발전하게 된 한 특정과정, 즉 문학적 생산을 매번 그것의 미적 가치와는 관계 없이 문예학의 대상으로 격상시킨 사회적기능주의적 관찰을 촉진시키기도 했다. 그러다가 서구의 여러 나라에서 구조주의가 한창 전성기를 맞고 있을 때, 각별히는 그 이후에 민주적 대안적 문예학의 기반을 사회사적으로 기초하는 작업과 연관해서, 독일문학 전공특유의 <프로이트 수용>이 부흥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68세대를 통해서였다. 그 수용은 장기간에 걸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아도르노 Th. W. Adorno, 마르쿠제 H. Marcuse, J. 하버마스 Jurgen Habermas)을 통해 매개되었는데, 그 이론의 기초를 놓는 데에 는 30 년대 이래로 헤겔과 청년 마르크스와 더불어 프로이트가 현장에 있었던 것이다. 현재 국제적 문예학에 있어서 정신분석학적으로 정향(定向)된 상이한 방향과 단초들 중에는 60년대 이래 프랑스적 이론형 성물이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큰 관심거리가 되었다. 1960년 이전에 이미 문학비평가 Ch. 모롱에 의해 <심리비평> 방법이 예시된 후로 특히 30년대부터 무의식과 언어(랑가주 langage)의 구조와 과정에 몰두하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다시금 새롭게 재구성하는 작업을 시도한 라캉의 저술들이 문예학에 수용된 것은 60년대와 70년대의 일이며, 우리의 경우엔 90년대에 들어서 비로소 활발한 수용의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라캉과 더불어 또한 활발하게 문예학에서 수용되고 있는 프랑스의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저작에서 정신분석학적 • 구조주의적 사고요소들이 중층화되어 있는 푸코와 데리다이다. 이들의 추종자들은 특히 정신분석학적으로 정향된 술화분석을 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론으로서의 매력을 뛰어넘어 실천적인 차원에서 그들이 보여준 문예학적 성과에 대해서 결정적인 판단을 내리기는 아직 이른지도 모른다.
아무튼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문학의 사례연구에서 정신분석학이 단지 자신의 이론을 확인하는 선에만 머물 경우 문예학적 관심은 중단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흔히 지탄받았던 역사적 관점의 결여라는 약점은 프로이트가 지녔던 문화사적인 시각과 연결짓는 작업을통해 보완될 수도 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은 결국 그런 맹점을 근거로 해서, 정신분석학이 보상적인 문학관을 통해 충동욕구의 억제와 다른 소의현상들을 간신히 용납할 수 있을 만큼의 수준으로만 유지시킴으로써 정치적 안정화에 기여한다고 극성스럽게 비난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정신분석학은 궁극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고 반혁명적인 기능을 통해서 학문적으로는 후기자본주의적 부르주아에 봉사하고 말았다는 것이댜 하지만 결코 방법적 종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1970 년경에는 마르쿠제나 하버마스의 매개를 통해 서구 비판이론은 한정적으로 문예학적인 반향을 얻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프로이트의 구상은 20세기 전환기가 낳은, 엄격한 시민적 윤리와 이중도덕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인 반응인 동시에 또한 육체를 협오하는 기독교적 전통에 대한 간접적인 항거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사이에 이러한 통찰은 사회철학적 사회심리학적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된 바 있거니와(이 점은 제2장에서 부연될 것이다), 특히 오늘날의 후기 산업사회에 이르러 지구 곳곳에서 범람하는 영상매체로 인해 전면적으로 변화해 버린 성의 풍속도가 보상행동으로서의 <꿈꾸는 행위>와 <문학 행위>에 대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할 관심분야이기도 하다.제 2 장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
1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의 교섭사<정신적 삶 가운데서 사회적 사실들이 연구되거나 혹은 역으로 정신적 사실들이 사회적 존재 가운데서 탐구될 수 있어야 하는 한>, 1) <학문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은…… 사회이론과 대등한> 위치에 선다 .2) <인간의 본질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프로이트의 이론과 사회이론은 물론 가는 길이 서로 다론 길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를 보완하면서 동시에 풍요롭게 한다 .>3) 따라서 이 두 학문은 각기 보조 학문으로서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당위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정신분석학1 ) W. Reich, Dialektischer Materialismus und Psychoanalyse, UP Berlin 1968. S.10.
2) 같은 책, S. 9f. 3) Reuben Osborn, Marxisme et Psychoonalyse, Paris 1967. S. 5.과 사회이론은 서로가 바람직한 관계로서 냉철하고 비판적인 협력을 견지했다기보다는 각 진영 특유의 당파성에 근거한 편견에 사로잡혀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보다 과격하게 말한다면 양자 간에 지배적이었던 이제까지의 관계는 <(두 진영이 의도적으로 조직한) 오해의 역사>4) 라고 볼 수 있다. 그나마 이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부정적인 논쟁조차도 하나의 분과학문으로 정립된 정신분석학의 초기에만 국한되어 나타났을 뿐, 양자 사이에는 오랫동안 침묵이 지배했다.
그러다가 최근에 이르러 <68혁명>에 직•간접적으로 관계한 일련의 독일 이론가들과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등장함으로써 그러한 상황은 순식간에 변화를 겪게 되고, 정신분석학은 광범위하게 이론적 관심의 핵심적 대상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러한 이론적 상황의 급변은 당시로서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사태였다. 물론 지난 30년대에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의해 정신분석학이 사회이론 가운데로 수용됨으로써, 양자의 교섭이 얼마나 생산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추구한 파시즘 연구와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한 연구에서 분명히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후로도 여전히 서방세계 가운데서는 사회이론과 정신분석학 간의 진지한 대화는 예외적인 현상으로만 남아 있었고, 또한 동구권에서도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 사이의 논쟁은 1925년경부터 스탈린주의의 이론적 중심기관지인 《마르크시즘의 기치 아래 Unter dem Banner des Marxismus》를 중심으로 루리아 A R Luria, 유리네츠 W. Jurinetz, 사피르 L. Sapir 등이 표명한 정신분석학에 대한 부정적 입장이 소련공산당의 공식입장으로 자리잡음으로써 20년대 말에는 이미 영구 종결된4) H. Dahmer, "Psychoanalyse und historischer Materialismus," in Psychoamlyse als Sozialwissenschaft, Frankfurt a. M 19971. S. 64f.
것으로 여겨져 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도 상이한 이론적, 실천적 입장에 근거한 사회이론들로부터 정신분석학으로의 다양한 접근이 - 가령 이론적 동맹관계의 구축이라는 관심에서나 혹은 타율적으로 규정되는 사회상황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실천적 관심에서 ——-산발적으로 시도되었었다. 예컨대 구조-기능주의적 이론의 테두리 안에서 정신분석학은 행위론의 한 요소로서 혹은 광범위한 시스템이론의 한 요소로서, 나아가서는 또한 유물론적 심리학, 혹은 분석적 사회심리학으로서, 또는 주체에 대한 비판이론으로서, 그리고 끝내는 심층해석학적 조작과 언어분석적 메타이론으로서 사회이론에 수용된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더구나 68혁명이 자신들의 개인적 삶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분기점을 이루었던, 독일과 프랑스의 이론가들에 의해 최근 정신분석학으로의 접근은 30년대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이론 내부에서의 위기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하버마스가 분명히 지적하고 있듯이 사회이론만으로는 <가장 진보한 산업사회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심각한 정치적 갈등이 왜 직접 물질적인 조건들에 의해 촉발되지 않고, 오히려 심리적 형식을 취하게 되는가 >5) 라는 문제를 설명할 수 없다는 인식, 즉 사회이론이 지니고 있는 이론적 한계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하는 것이다.프랑크푸르트 학파와 68세대들이 사회이론의 입장에서 정신분석학으로 접근하게 한 공통의 문제는 잃어 버린 혁명의 문제였다. 자본주의 사회의 하부구조에서 발생한 고전적 위기로부터 곧장 사회의 혁명적 변화가 도래하리라는 모든 예견과는 달리 혁명은 실종되고, 오히5) J. Habennas, Thesen zur Theorie der Sozialisation(Stichworte und Literatur zur Vorlesung im S/S 1968).
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절대적 지지에 의한 파시즘의 집권을 경험하게 되거나(프랑크푸르트 학파) 혹은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통한 혁명으로 그토록 증오하던 국가권력이 성공적으로 전복하였었음에도 불구하고 2주 후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원상으로 복귀한 국가권력과 자본주의 사회의 놀라운 안정성에 대한 충격 (68세대), 죽 왜 대중은 그들의 현실적 이해에 반하는 정치적 세력을 선택하고 추종 • 지지하는가라는 합리적인 사회이론의 테두리 안에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 현상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문제상황에 직면한 그들이 분명히 의식한 것은, 인간은 단지 자신의 합리적 의식으로부터만 이해될 수는 없고, 다양한 무의식적 행위들도 함께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 즉 <외적 권력기구도 또한 합리적인 관심들도, 인간의 리비도적 성향을 함께 배려하지 않는 한, 사회의 기능을 설명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다 >6)는 사실이었다. 즉 사회적 주체를―그것은 계급일 수도 있고 개인일 수도 있다 ―그것의 무의식적 본능 및 욕구와 함께 고찰하지 않을 경우, 사회 이론은 존재와 의식 사이의 역동성만을 고집하는 합리주의적 이데올로기로서 현실적 역사전개가 보여 주고 있는 총체적 불확실성 앞에 좌초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문제상황에 처한 사회이론가들에게 이제 프로이트의 이론은 하나의 계시나 다름없었다. 프로이트 이론의 혁명성은 그가 의식 및 그것의 사회적, 문화적 대상화에 대한 고찰에 있어서 성적 본능과 자기보존 본능에 의해 리비도-경제적으로 규제되고 있다고 보는 인간 심리영역으로서의 무의식의 영역이 생성론적으로나 기능론적으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본 데에 있다. 달리 말하자면 프로이트 이론의 혁명성은, 그가 인간의 문화 전체를 의식6) E. Fromm, Ober Methode und Aufgabe einer analytischen Sozialpsychologie, (Bemerkungen Uber Psychoanalyse und historischen Materialismus), in Zeitschrift fur Sozialforschung, Jg. 1, Leipzig 1932, S. 50.
이 직접적으로는 이해 • 접근할 수 없는 본능과 무의식의 역동성의 결과로 해석한 데에 있는 것이다. 또한 무의식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동적 현상들이 의식에 대해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어떠한 성격의 것일까 하는 획기적인 질문에서 그 혁명성은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물음이 제기되었을 때 정신분석학만이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인식, 즉 <인간 행위의 비합리적인 원동력을 합리적으로 해명 >7)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력한 도구로 비쳐졌다는 것은 어찌보면 매우 당연한 결과였다. 때문에 정신분석학이 함의하고 있는 내용과 방법론을 자신 가운데로 통합하는 일이 사회이론에게 있어서는 당면 과제가 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전자의 경우 연구소 내에서 폴록 F. Pollock, 마르쿠제, 호르크하이머 M. Horkheimer, 아도르노 등이 참여한 국가 독점자본주의 Staatsmonopolkapitalismus 에 관한 논쟁이라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하부구조에 대한 연구를 전제로 해서 정신분석학으로의 접근이 이루어전 반면에, 후자의 경우엔 정신분석학으로의 접근이 단순히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혁명을 불가능하게 저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인 이데올로기로서의 문화 • 예술 등의 상부구조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을 뿐, 하부구조의 문제 자체에 대한 연구들은 거의 활성화되지 못한 채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앞서 언급했듯이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一왜 포스트모더니스트를 이 문맥에서 제의시키는가는 앞에서 분명해졌으리라 믿는다― 목격할 수 있는 바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 간에 이루어진 생산적인 관계는 이제까지의 학문사에서 보기 드문, 단 일 회의 예외적인 사건7) P. Baran, Marxismus und Psychoonalyse, Essays, Frankfurt a. M. 1966. s.78f.
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 양자 간의 관계설정을 그토록 어렵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물음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 이러한 비판적인 문제제기와 해명을 통해서만 양자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설정이 모색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추적하고자 한다.
즉 우리가 이 논문에서 과제로 삼으려는 것은 바로 어떤 이론적 전제와 구조가, 그 자신의 이론 가운데에도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 간의 불모의 관계를 종식시킬 수 있는 긍정적 계기를 충분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로 하여금 사회이론에 접근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했는가에 대한 해명이 될 것이다.결론부터 미리 말한다면,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 사이의 생산적인 접근을 불가능하게 만든, 프로이트의 이론 심층부에 자리잡고 있는 결정적인 요인은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는 프로이트 사상의 초기로부터 최후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견지되고 있는 생각으로서, 정신분석학은 자연과학적 대상을 자연과학적 방법에 따라 다루어야 하는 학문으로 보는 <과학주의적 자기오해>가 그것이며, 둘째는 이처럼 정신분석학을 엄밀한 자연과학으로 정립하겠다는 본래의 의도가 좌절되어 감에 따라, 점차 분명히 부각되는 정신분석학의 문화 • 사회과학적 차원의 문제들을 단순히 심리학적 문제들로 축소시켜, 모든 문화적, 사회적 현상을 심리적 현상으로 환원시켜 버리려는 <심리학 주의>가 그것이다.우리는 이하에서 프로이트 자신의 초기 이론에서 중기를 거쳐 후기에 이르는 시간의 축을 따라 나타나는 각 시기의 중요한 저작들을 근거로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과학주의적 자기오해와 심리학주의가 구체적으로 각 시기마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를 추적하고자 한다.그리고 이러한 과학주의적 자기오해와 심리학주의는 단지 프로이트의 이론구조에서만 국한되어 나타나는 개별적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이제까지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 사이의 접근을 불가능하게 했던일반적이며 보편적인 구조에 해당한다. 때문에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 사이의 생산적 대화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명을 거쳐서 비로소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2 프로이트 초기 이론의 〈과학주의적 자기오해〉정신분석학의 정립을 위해 고두하던 초기부터 임종의 마지막 순간까지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론적 작업의 성숙에 따라 불가피해진 통찰과 그리고 여기서 비롯하는 온갖 동요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학의 과학론적 지위, 정신분석학의 학문적 대상과 영역 및 방법론적인 자명성에 관한 한, 정신분석학을 일관되게 자연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대상을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다루는 자연과학의 한 분과학문으로 이해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하버마스가 <정신분석학의 과학주의적 자기오해 >8 ) 라고 규정한 바 있듯이 정신분석학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해야말로, 지금 우리의 현안이 되고 있는 물음, 죽 <왜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 사이의 긍정적인 관계설정이 프로이트에게 불가능했는지>를 설득력 있게 풀이해 줄 수 있는 첫번째 실마리를 제공한다 ‘ 하버마스가 앞의 <정신분석학의 과학적 자기오해>라는 표제어 가운데서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은 프로이트가 지니고 있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이해의 양면성이다. 죽 이는 엄격한 경험적 과학주의자로서의 프로이트와 해방적 관심에 의해 규정되는 계몽주의자로서의 프로이트의 충돌에서 연유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대립구도는 그 자신에 의해 형성되고있다.8) J. Habermas, Erkenntnis und Interesse, Frankfurt a. M. 1968. S. 300ff.
놀데 H. Nolte도 이 양면성이 얼마나 심각하게 프로이트의 관심과 정신분석학의 성립을 각인하고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확인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성립은, (주체가 이제까지) 꿰뚫어 보지 못한 예속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데 기여하겠다는, 계몽적 • 해방적 인식관심에 힘입고 있다 .>9 ) 그러나 다른 한편 <프로이트 자신도 자신의 해방적 인식관심에서 발전되어 나온 단서들을 완전히 실현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속했던) 역사적 상황의 조건들로부터 충분히 자신을 해방시키지는 못했다 .>10)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상황의 문맥에서 볼 때 의학도로서의 프로이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두 가지 요인은 샤르코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의 신경정신과 학문 그리고 헬름홀츠 H. Helmholtz로 대표되는 <19세기의 실증주의적 과학관>이었다. 이 양자는 <프로이트에게 자신의 연구대상인 정신과정을 자연적 사건으로서 당대의 자연과학의 인식방법에 종속시키는 것이 자명하다고 여길 만큼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11)샤르코와 헬름홀츠로부터 프로이트가 계승한 이러한 편협한 과학주의야말로 사회이론으로의 접근을 근원적으로 불가능히게 함으로써, 정신분석학에 것들여 있는 인간해방에 기여할 수 있는 계몽적 • 해방적 인식관심의 완전한 실현을 이룰 수 없게 한 장본인이었던 셈이다.이러한 학문론적 입장의 이해롤 위해서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넓게는 당시 모든 학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실증주의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좁게는 프로이트가 다루고자 한 대상영역에 있어서 가장 앞선 수준에 도달했던, 그래서 그가 현장에서 배운 바 있는 당대9) H. Nolte, Psychoonalyse und Soziologie, Bern, Stuttgart, Wien 1970. S. 15.
10) 같은 곳.11) 같은 곳.프랑스의 샤르코 학파를 중심으로 한 신경정신과 학문에 대한 이해가 불가피하다. 당대의 신경정신과 이론의 정점을 의미하던 샤르코 학파와의 관계에서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샤르코가 당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던 히스테리의 문제에 대하여 혁명적인 견해를 피력했고, 또 그가 가르친 모든 것이 프로이트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또한 <샤르코와 같이 뛰어난 신경학자가 이 문제를 그토록 전지하게 다루었다는 사실 자체가(당시로서는) 이미 놀리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 당시 일반적으로 히스데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존심 있는 의사라면 도저히 거기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는 꾀병이거나 기껏해야 헛된 상상력이 낳은 결과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여성의 음핵을 드러냄으로서 나타나게 된, 치료되어야 할 자궁의 특별한 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그러나 이제 샤르코의 연구 덕분에 히스테리는 한순간에 선천적 요인에 의한 뇌의 퇴화에서 비롯한, 그래서 진지한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신경체계의 병으로서 공인되기에 이른다. (결국) 임상의학의 내부에서 차지하는 히스테리의 확고한 자리는 샤르코가 만든 셈이다 .>12)
이처럼 샤르코는 히스테리를 뇌의 선천적 요인에 의한 퇴화에서 비롯하는 신경체계의 병으로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히스데리가 자연과학적 • 의학적 연구의 테두리 안에서 연구될 수 있도록 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샤르코의 주장은 제자인 피에르 자네 Pierre Janet에게 계승되어 더욱 발전되었고, 나아가 심리적 증후로서의 히스데리와 그것의 신체적 원인에 대한 자연과학적 인과법칙성의 탐색을 목표로 하여 구성된 샤르코의 엄격한 자연과학적 개념체계를 프로이트도 수용하기에 이른다.12) E. Jones, Leben und Werk von Sigmund Freud, Bern, Stuttgart 1962, Bd. 1 S. 2.69f.
이런 맥락에서 19세기의 일반의학사 가운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기관유형학적 구상 organmorphologische Konzept이 이론적으로 점점 지배적인 조류를 형성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독일의 경우 특히 로키탄스키 Rokitansky와 피르호 Virchow 사이의 이론적 대결 이후, 기관유형학적 구상을 대변하는 비르코프의 입장이 생리학에서 점차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사실로 나타난다. 이러한 의학 내에서의 일반적인 발전경향과 연관해서, 신경의학에서는 특히 1860년대에 보르카 Borca 와 바르니케 Warnicke에 의해 뇌의 특정부위의 손상이 특정한 정신적 능력의 상실과 장애로 드러난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모든 장애를 어떤 특정 부위의 세포나 조직의 손상에서 확인하고자 하는 부위확인 연구 Lokalisationsforschung가 강력하게 추전된다. 신경학자들은 하나의 특정 부위나 여러 부위의 동시적 손상이 가져울 수 있는 기이한 장애의 조합관계를 도식화하여 제시하는 과제를 의욕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유형의 작업은 바르네케를 계승한 리히트하임 Lichtheim에 의한 조합관계의 도식화와 나아가 사고와 기억이 특정한 뇌세포에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마이너트 Meynert의 연구로 그 절정에 이른다.
다른 한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이론형성에 있어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또 하나의 요소는 앞서 밝힌 대로 당시의 학문관 뿐만 아니라 세계관까지도 지배하고 있던 실중주의이다. 프로이트는 생리학의 영역에서 실증주의적 경향을 대표한 브뤼케 E. Brucke의 연구소에서 학생시절이었던 1876년부터 박사학위 취득 일 년 뒤인 1882년까지 6년 여에 걸쳐 수련을 받았다. 실증주의가 프로이트에 끼친 영향에 대해 베른펠트 S. Bemfeld는 <정신분석학적 이론형성의 출발점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물리학적 관념 위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브뤼케의 생리학, 모든 과정을 측정할 수 있다고 믿는 생리학의 이상이다 .>13 ) 바꿔 말한다면, <생리학적 변화와 물리적 측정가능성을 모든심리학적 연구의 근거로 삼겠다는 생각, 즉 헬름홀츠와 브뤼케의 연구 근저에 놓여 있던 관점의 엄격한 응용이 이 당시 프로이트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다 >14) 라고 증언하고 있다. 즉 프로이트는 오랫동안 <심리적 과정들을 분명히 드러낼 수 있는 (자신이 신경원 Neuronen 이라고 규정하고자 한) 물질적 부분들의 양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상태로서 >15) 서술하고자 했고, 이때 의식의 구조란 <신경원 체계 속에서 행해지는 물리적 과정, 즉 지각과정 전체의 한 부분인 주관적 부분 >16) 으로 규정되고 있다. 이처럼 프로이트는 <일련의 심리적 병리현상들에 대한 설명을 생리학적 사고에 연결시키려는 >17) 의도를 추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도는 정신분석학의 학문론적 지위에 대한 규정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 이는 프로이트가 1895년에 출판된 『심리학 강요 Entwurf einer Psychologie』 에서 정신분석학은 <심리적 기구들의 기능을 신경체계의 기능들로서 서술하고 , 모든 과정들을 궁극적으로는 양적 변화로서 파악하려는 일관된 시도 >18) 라고 있는 곳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 결과 초기 프로이트의 작업은 엄격한 생물학주의 Biologismus의 바탕 위에서 추진되고 있고, 그 주된 과제는 모든 심리적 현상들을 <생물학적으로 유전된 성향에서 확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프로이트에게 긍극적으로 정신분석학은 좁게는 신경생리학, 넓게는 생물학에 속하는, <다른 모든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합법칙성 >19)을 연구하는 학13) E. Kris, Sigmund Freud, Aus den Anfangen der Psychoanalyse, Frankfurt a. M. 1962, S. 25에서 베른펠트가 인용.
14) 같은 곳.15) 같은 책, S. 305.16) 같은 책, S. 320.17) 같은 책, S. 46.18) 같은 책, S. 29.19) 0. Fenichel, "Uber die Psychoanalyse als Keim einer zukunftigen dialektisch - materialistischen Psychologie," in H. P. (원명은 Hans Peter Genet) Genet(Hrsg.), Marxismus, Psychoanalyse, Sexpol, Bd. 1, Frankfurt. a. M. 1970, S. 233.
문이었다. 때문에 존스 E. Jones 는 이 시기의 정신분석학이 과제는 자 연과학적 성격의 것으로서, <심리학적 과정들과 신체적 • 생물학적 과 정들 사이에 연관관계를 설정하려는 광범위하고 일관된 노력 > 20) 이라 고 정의한다. 즉 정신분석학은 자연적 원인의 탐구가운데 자신의 근거 를 갖는 <정신에 관한 자연과학 >21) 인 것이다. 이때문에 정신분석이 갖는 사회이론적 의미를 분명히 하고자 한 최초의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라이히 역시도 <정신분석학은 그 창립자의 정의에 따른다면, 자연의 특별한 영역으로서 인간의 정신을 자연과학적 수단들을 가지 고 기술하고 설명하려는 심리학적 방법일 뿐이다>22)라고 언급함으로 써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지탱하고 있던 과학주의를 분명히 하고 있다. 프로이트가 의도한 것은 정확한 자연과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정 신의 자연과학을 정립하는 일이었지, 결코 정신적 전리의 발견을 위한 새로운 철학적 방법의 정립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이 트는 철저히 19 세기 실증과학의 아들이었던 셈이다. 3 『히스데리 연구』 -과학주의적 자기오해의 동요 히스데리와 노이로제라는 현상을 자연과학의 틀 속에서만 다루겠 다는 프로이트의 처음 의도는 특히 『히스테리 연구 Studien uber
20) E. Jones, 앞의 책 , S. 112. 2l) H. Hartmann, Die Grundlagen der Psychoonalyse, Leipzig 1927. 22) W. Reich, "Dialektischer Materialismus und Psychoanalyse," in Reich, Fromm, und Bernfeld, Dialektischer Materialismus und Psychoonalyse, Underground Presse, Berlin 1968(Raubdruck), S. 9.
Hysterie』에서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는 환자 안나 오 Anna O.에 대한 연구로 크게 혼들리게 된다. 이 경험은 병원학적 요소에 대한 평가, 즉 신경증의 성립에 대한 인과관계의 설정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다. 샤르코의 경우 신경증의 발발에 대한 인과론적 가설설정에 있어서 유전적인 원인에 의한 뇌의 퇴화, 즉 신체의 유전적 요인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안나 오 케이스>에 대한 연구를 통해 프로이트는 <사회적 관계와 요구들이 광범위하게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 >(VIII 418)23)는 사실, 즉 <사회 자체가 신경증을 야기시키는 데 큰 몫을 차지한다는 사실 >(VIII 111)을 발견하게 된다. 이 발견을 통해 <정신적 의상 Trauma>라는 또 다른 요소가 프로이트의 이론 속에 자리잡는다.
23) 이후의 프로이트 인용은 아래의 프로이트 전집에 의거한다. 앞의 로마자 수자는 전집의 권 수를 , 뒤의 아라비아 수자는 쪽수를 나타낸다. S. Freud, Gesammelte Werke (I-XVIII), S. Fischer Verlag, Frankfurt 1979.
이러한 새로운 인식을 근거로 안나 오의 케이스에 대한 연구가 프로이트 이론에 가져온 가장 큰 변화의 하나는 치료의 수단으로서 대화요법의 도입이댜 이전에는 통상적인 정신의학적 수단으로서 단지 최면술만이 있었던 반면에, 이제는 대화법이 체계적으로 투입된다. 그리고 대화법은 신경증에 대한 풍부한 인식을 가져오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대화법을 통해 가능해지는 기억과 회상의 전개는 정신과 내에서 행해지던 종래의 관행을 결정적으로 뛰어넘어, 환자 스스로 자신에 대한 관찰자가 되는 입장으로 이끌어 간다. 환자는 자신의 체험을 관찰하면서 그에 다가서게 되고, 또 자유연상이라는 비체계적인 형식을 통해 하나의 경험연관을 구성하게 된다. 이로써 환자는 스스로 자신의 생활사를 이해하려는 주도적 자세를 갖게 되며, 이를 통해 점차자신의 고통을 분명히 인식하는 과정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자유연상을 통해 환자로 하여금 자신의 생활사에서 겪어야 했던 경험들을 스스로 말하게 하는 대화법이 독립적인 진료의 실천방식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새로운 연구영역이 열린다. 그것은 다름 아닌 <꿈>의 문제인데, 정신분석학은 이로써 인간에 의해 산출된 상징과 인간 상호간의 의사소통의 영역에 속하는 연구대상을 접하게 된다. 꿈의 형상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상호행위의 구조에 상응하는 언어 형상에 다름아니다. 정신분석학은 일종의 <해석의 기술 eine Kunst der Deutung> (XIII 215) 로서, 그것은 <환자의 연상들이 제공하는 자료들을 마치 어떤 숨겨진 의미를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그것들로부터 그 의미를 찾아 읽어내는 것을 >(XIII 215) 과제로 하는 일종의 기술로 자신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이는 이제까지의 <자연 과학적 방법론>과 <단순히 자연적 현상으로만 간주>되어 왔던 정신분석학의 대상영역에 대한 자기이해에 있어서 불가피하게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다. 이로써 정신분석학의 학문론적 성격과 지위에 대한 자기이해에 있어서 결정적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프로이트의 연구는 이처럼 정신적 의상이라는 개념 및 대화법이라는 새로운 방법의 도입을 동해 당시까지 고수하고 있던 자연과학적 인식의 틀을 넘어서, 환자 개인의 발병 이전의 어둡기 짝이 없는 생활사를 점점 깊이 천착해 들어가게 된다. 정신적 의상과 신경기구의 장애 사이의 관계를 묻던 물음은 이제 뜻하지 않게 형식적으로는 유년기의 정신적 의상으로, 또 내용적으로는 성적인 정신적 의상으로 특칭지워질 수 있는 단충을 발견하게 된다. 죽 신경증의 원인으로는 유년기의 성적인 정신적 의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로써 히스테리와 노이로제에 대한 그의 연구는 자연과학적 인과관계의 설정만으로는 충분히 해명할 수 없는 지점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여전히 대화의 요법에서는 심리적 기구들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떠한 치료가능성도 보지 못했다. 그는 자연과 학적 해명을 통해 인간의 심리적 기구들에 대해 약품을 투여함으로써그것을 통제 • 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개발하려는 의도를 계속 견지하게 된다. 그 결과 그는 우리가 <어떤 특정한 화학물질을 가지고 정신적 기구들의 에너지 양과 그것의 분배 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언젠가는 알게 될 것 >(XVII 108) 이라는 견해를 고집하게 된다.
이제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할 점은, 정신적 외상이라는 테제로부터 시작되는 환자 개인의 전기적 사실에 대한 관심이나, 대화법과 같은 정신분석 기법에 있어서의 해석학적 수단들의 도입과 발전도, 정신분석학의 대상은 자연이며, 정신분석학은 자연과학일 수밖에 없다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해를 결코 혼들어 놓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궁극적 목표는 여전히 모든 심리적 변화를 생리학적 혹은 유형학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과정으로 환원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심리학적 사실을 생리학적 근거로 환원하려는 그의 최초의 의도는 여전히 고수되고 있다.그러나 물론 이 단계에 이르러 프로이트도 정신에 대한 아주 작은 부분에 있어서까지 정합적인 완벽한 자연과학적 설명체계를 제시할 수 있다는 전망이 점점 더 먼 미래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과정에서 프로이트는 <나는 생리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중지하고, 심리학적인 것에 의존해야만 하는 것이 시작되는 지점을 보여 줄 수 있을지 모른다> 24)라는 소극적 표현으로 자신의 학문적 역할을 요약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이 자연과학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을 완성하겠다는 소망이 자신에 의해서는 더 이상 실현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실망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언젠가는 자연과학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이 확립될 것이라는 자신의 견해에 끝까지 충실했다. 그는 많은 좌절과 실망을 겪은 뒤에도 <(어쩔 수 없이 심리24) E. Kris,앞의 책, S. 368.
학적 범주들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현재) 우리들의 서술상의 단점은, 우리가 심리학적 용어들의 자리에 생리학적 혹은 화학적 용어들을 두입할 수 있게 될 그날이 오면 아마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XIII 65)라고 낙관하면서, <(현재의) 정신분석학의 이론적 구성물은 실제로 언젠가는 유기체적 토대 위에 세워지게 될 상부구조일 뿐이다 >(XI 403)라고 확언하고 있다.
안나 오의 분석연구를 통해 처음으로 분명해지기 시작했고, 작업이 진전됨에 따라 훨씬 더 분명해전 예기치 않던 국면들이 가져다 준 모든 동요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학을 자연과학으로 정립하려는 프로이트의 입장은 초기부터 최후까지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프로이트는 현재 수준에서의 정신분석학적 작업의 의미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잠정적으로는 정신분석학적 기술 이의의 다른 수단은 없기 때문에 이 기술들이 제약성을 갖는다해서 이를 경멸해서는 안 된다 >(XVII 108) 라고 말하고 있다. 때문에 이 문맥에서 크리스E. Kris가 확인하고 있는 것은 <프로이트가 나중에도 유기체적인 것에서 벌어지는 심리적인 것과 생화학적 과정들 사이의 관계야말로 연구되어야 할 영역이라고 보았고, 또 거듭해서 정신분석학의 언어는 단지 과도기적으로만 선정된 것이며, 정신분석학이 생리학에 의해 완전히 대체될 때까지만 타당성을 갖는다 > E) 고 본 점이다.4 과학주의적 자기오해의 동요와 위상적 모델의 등장앞서 프로이트가 말한 <심리적인 것에 의존해야만 하는 것이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말했을 때의 심리적인 것, 즉 <심리적 기구>란, 아25) 같은 책, S. 46.
직은 생리학적 혹은 병리생리학적 기능에 의해 정치하게 말해질 수 없는 바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심리학적 모델로 이해되고 있다. 이제 정신분석학은 사회와의 관계에서 개인의 복잡한 심리적 과정의 역동성과 기능적 연관관계를 보다 잘 설명할 수 있기 위해 <위상적 모델topisches Mode ll >을 개발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대략 1920년까지의 작업에서 첫번째의 위상적 모델을 발전시키며, 이 모델은 <전의식 das VorbewuBtsein>, <무의식 das Unbewutsein>, <의식 das BewuBtsein>이러는 심리적 심급들에 근거한다. 그리고 1920 년 이후부터는 이 모델을 더욱 발전시켜, <이드>, <자아>, <초자아>라는 심급들 사이의 기능적 연관에 근거한 두번째의 위상적 모델을 개발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상 모델에 의해 보다 정치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 심리적 기구에 대한 연구는 실은 두번째의 완성단계를 이루는 생리학적 모델의 전단계를 이룰 뿐이며, 두번째 단계인 생리학적 모델 위에 정신분석학을 정립한다는 것, 즉 관찰될 수 있는 병적 현상들과 원인이 되는 신체의 과정들 사이의 매개를 비로소 완벽하게 자연과학의 데두리 안에서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생리학적 모델의 정립이야 말로 프로이트의 궁극적인 학문적 목표였다. 그리고 이 사실은 다음의 주목할 만한 구절, 즉 <위상 모델은 잠정적으로는 해부학과 무관하다. 이 모델은 정신적 기구의 영역들과 관계할 뿐, ……해부학적 위치들과는 무관하다 >(X 'Z1 3)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프로이트가 사용하고 있는 <잠정적으로는>이라는 표현은 미래에는 엄격한 자연과학의 모델에 따르는 과학적 체계로서 정신분석학이 궁극적으로 정립될 것이라는 그의 강한 희망을 나타내고 있다. 결국 심리학적 범주들을 개발하도록 강요한 것은, 심리적 과정이 전적으로 신경생리학적 구조를 근거로 해서는 완벽하게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이와 같은 위상 모델로의 이행, 즉 심리학적 범주들을 가지고 심리적 현상들을 서술 • 해명하겠다는 뜻은, 내적인 심리적 과정들과 메커니즘을 파악하는 데 이용될 범주들은 주체의 행위론적 문맥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주체의 행위론적 문맥이라는 틀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성질을 갖는다 . 때문에 이론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의 중심은 점차 사회와의 대결과정에서 드러나는 개인 심리과정의 역동적 • 생성론적 재구성으로 옮겨 가게 된다. 이로써 정신분석학은 사회적 주체의 의미정향적 행위에 대한 경험적인 재구성 이론이 된다. 이렇게 해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결정적 국면으로서 사회를 인식하기에 이른다.
프로이트도 이제는 <의부세계와의 관계가 ……자아에게 있어서 결정적이다 >(XV 82) 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됨으로써 그는 <정신분석학이 비록 개인의 심리를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개인이 사회와 갖는 관계는 개인의 심리연구에 있어서 ……놓칠 수 없는 것 >(VIII 418) 이며, <따라서 개인십리학은 처음부터 이처럼 확장되고 또한 동시에 정당한 의미에서 사회심리학인 것이다 >(XIII 73) 라고 분명히 선언하기에 이른다.이렇게 연구대상으로서 개인의 생활사적 의미관계에 대한 배려가 점점 더 불가피해짐에 따라 이제 병을 일으키는 장애요인들인 사회적 요인들을-――당시의 프로이트의 표현을 빈다면――〈:문화적> 요소들 가운데서도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제 자신의 작업에서 사회, 문화제도, 문화의 요구 등과 같은 사실들에 직면하게 되고, 그 결과 개인의 심리와 사회의 관계를 핵심적인 문제로 삼는, 프로이트의 사회심리학적, 문화이론적, 역사철학적 주저들이 속속 출판된다 .예컨대 『문화적 성도덕과 현대의 신경증 Die kulturelle Sexualmoral und die moderne Nevositat』 (1908), 『토템과 터부 Totem und Tabu』 (1912-1913), 『대중심리학과 자아분석 Massenpsycholoie und ich-An- alyse』 (1921), 『정신분석학과 리비도 이론 Psychoanalyse und Libidotheorie』 (1923),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의 몰락 Der Untergang des Odi-pus-komplexes (1924), 『정신분석학 개요 Kurzer Abriβ der Psychoanalyse (1928), 문화와 문화에 대한 불만 Das Unbemgen in der Kulttur』(1930)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저작들은 신경증에 대한 보편타당한 인과법칙을 찾으려는 근본의도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초기의 과학주의적 작업들과 다름 없지만, 그러나 더 이상 자연과학적 테두리 안에서만 머무를 수는 없게 된다.
5 『대중심리학과 자아분석 』 그리고 심리주의프로이트가 적어도 자신의 중기 이론 이후 사회와 개인의 심리라는 문제를 정신분석학의 핵심 문제로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이론으로의 본격적인 접근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이러한 접근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했을까? 우리는 이 문제를 앞서 언급한 프로이트의 중기이론과 후기이론의 대표 저작들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추적해 보고자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우선은 1921년에 발표한 그의 사회심리학 영역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저작으로서 『대중심리학과 자아분석』을 중심으로, 이어서는 1923-1928년 사이에 발표된 저작들인 정신분석학과 리비도론」,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의 몰락」, 「정신분석학 개요」 등을 중심으로, 마지막으로는 프로이트의 문화이론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갖고 있고 동시에 프로이트의 후기 이론을 대표하는 저작으로서 1930년에 출판된 『문화와 문화에 대한 불만』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대중심리학과 자아분석』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중심리학적 연구는 좁은 의미에서 사회심리학적 영역을 대상으로 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독립적인 사회체계들을 대중형성의 과정으로부터 사회심리학적으로 재구성해 내고자 하는 방법론적 시도로 이루어져 있다.프로이트는 『 대중심리학과 자아분석』 제5장에서 전통적으로 사회학의 문제영역에 속하는 대중과 집단의 문제에 대한 접근을, 우선 「대중의 유형학」을 통하여, 비조직화된, 비공식적으로 구조화된 다수의 사람들의 모임뿐 아니라 또한 제도화된 구성체로서의 다수의 사람들의 모임, 매우 산만한, 혹은 매우 지속적인 모임, 같은 성격의 개인들로 이루어전 동질적인, 혹은 비동질적인 모임, 자연적인 대중과 그것의 존속을 위해서는 의부로부터의 강제가 요구되는 인위적인 대중, 원시적 대중과 고도로 분화되고 조직화된 대중, 지도자가 있는 대중과 지도자가 없는 대중으로 분류하는 작업을 행하고 있다.
이어서 제6장 이하에서 프로이트는, 그의 용어법을 따른다면, 우연적으로 성립한 지도자가 없는 자연적 대중에 비해서 장기적으로 훨씬 더 강한 안정성을 지니는 고도로 조직화된, 인위적인 대중의 대중심리학을 특히 교회와 군대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다. 나아가 프로이트는 앞서 분류한 다양한 유형의 대중 형성과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원인을 교회와 군대라는 집단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이한 <리비도적 구조 libidinose Struktur>( XIII 103)와 이를 근거로 성립하는 구성원들 사이의 <리비도적 결합libidinose Bindung>(XIII 112) 으로부터 설명하려 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대중형성의 본질은 대중구성원들 사이의 리비도적 결합에 있다 >(XIII 113). 이때의 리비도적 결합이란 대중집단의 구성원들 사이에 성립하는 애정관계와 유사한 매우 긴밀한 <정서적 결합affektive Bindung>(XIII 105)을 의미하며, 이들 집단 가운데서 구성원 개개인들은 <한편으로는 지도자와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구성원들과 리비도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XIII 104). 애정관계와 유사한 이 감정적 결합은 자신이 이상으로 삼고 있는 지도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자아정체성의 형성 Ichidentifizierung>26) 그리고 이를 통한 <자아이상의 대체 Ichidealersetzung>라는 두 가지 결과를 낳게 된다. 바꾸어 말한다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초자아를 통한 구성원 각각의 정체성의 형성과 공통된 초자아-이상의 정립을 통해서야 대중의 형성과 결합은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초자아라는 개념이, 가족, 신분, 집단, 국가 등을 이해할 수 있는, <대중심리학의 이해로 통하는 중요한 통로 >(X 169) 로 부각된다. 초자아는 사회심리학적 통합의 차원과 개인의 성격심리학적 차원에서 중심접을 이룬다. 초자아는 수평적으로는 사회심리학적 의미에서 대중형성에 기여하고, 수직적으로는 개인의 성격발전에서 결정적 기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프로이트의 대중유형학은 하나의 공식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매우 상이한 구조적 형식을 갖는 대중들의 유형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질적 유형의 대중들의 형성과 이들의 안정화라는 문제를 오로지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초자아를 통한 정체성의 형성과 공통된 이상적 초자아의 정립이라는 심리학적 현상에 대한 설명만으로 완전히 밝혀 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과연 고도로 분화되고 조직화된 <인위적 대중>의 형성이 오로지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초자아를 통한 정체성의 형성과 공통된 초자아 이상의 정립이라는 심리적 현상의 해명을 통해서 모두 설명될 수 있을지는 큰 의문이다.예컨대 프로이트가 대중의 유형을 분류하기 위해 사용한 기준들인 <안정된>이라든가 <인위적인> 등의 기준은 이미 심리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함의를 갖는다. 가령 프로이트 자신도 <교회와 군대는 인위적 대중이다. 바꿔 말하면 그 집단이 와해되는 것을 방지하거나, 혹은 그 구조에 있어서 변화를 가져오려면, 어떤 의적인 강제적 힘이 필요한 집단이다 >(XIIl 101) 라고 규정하면서, 이러한 종류의 대중집단의 형26) "Die Identifizierung strebt danach, das eigene Ich ahnlich zu gestalten wie das andere zum Vorbild genommene"(XIII 116).
성과 존속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떤 외부적 강제>가 요청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이러한 사실들을 내용적으로나 방법적으로 전혀 배려하고 있지 않다. 그는 독립적인 사회체계를 해명하는 데는 심리학 이론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었으며, <조직화된 대중>의 설명을 위해서는 심리학적 연구 이의의 사회구조의 분석 등이 요구된다고 보지 않았다 . 그는 개인들로 구성된 대중과 사회의 문제를, 단지 개인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만으로도, 즉 조직구성원들 사이에 성립하는 정서적 결합에의 욕구와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초자아를 통한 정체성의 형성과 공동된 초자아-이상의 정립이라는 세 가지 심리학적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해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 자신도 분명히 인정하고 있는 <어떤 의적인 강제>란, 사회심리학만으로는 충분히 다룰 수 없는 사회제도와 조직이 행사하는 통합과 압력을 의미한다. 즉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적 제도의 형성과 사회적 지배의 확립이라는 이중적 관점에서 다루어져야만 하는 사회적 구성체의 문제이며, 이 문제는 오로지 비판적 사회이론의 테두리 안에서만 충분히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역사는 억압적 지배의 고착화된 전동이며, 사회적 구성체들은 개개인에게 억압적인 것으로 나타나며, 개인의 심리 가운데 중대한 흔적을 남긴다, 그러나 이 사회적 구성체는 개인의 심리로만 설명될 수는 없다. 대중심리학이라고 할 때 이미 대중이라는 개념 자체가 강제의 메커니즘을 수단으로 해서 자신을 구조적으로 유지해가는 사회적 구성체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회적 구성체의 문제는 실은 심리학의 영역 너머에 있는 것이기에, 대중심리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심리학의 내부에서만 해결하기는 어려운 어떤 문제의 차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된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바로 이 문제의 차원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조직화된 대중의 문제는 단지 심리학으로부터 접근해서는 해명될 수 없다는 점을 프로이트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것이다. 이러한 맹목적인 심리주의적 환원주의가 프로이트로 하여금 결국 사회적 조직들을, 예를 들어 군대를 <고도로 조직화된>, <인위적인>, <지속적> 대중 (XIII 101), 즉 제도적 구성체라고 규정하면서도, 이를 단순히 사회심리학적 과정에서만 설명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사회적 제도와 조직은 끝내 일종의 심리학적 개념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프로이트의 『 대중심리학과 자아분석 』 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사회심리학적 연구들은 이처럼 프로이트의 방법론이 지니는 무한한 가능성뿐 아니라 또한 그 한계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의 가능성이 이제까지는 전혀 합리적으로 연구될 수 없었던 집단형성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해명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 주는 데 있다면, 그것의 한계는 제도적 구성체들을 단순히 사회심리학적 과정으로부터만 설명하고자 하는 데 있다. 즉 구성원들에 대한 <의적인 강제>로써 유지되고 있는 사회적 조직의 문제도 궁극적으로는 개개인의 심리적 과정에 대한 통찰로부터 빈틈없이 해명될 수 있다고 보는 데 있다. 그리고 문제의 심각성은 프로이트의 이러한 일방적인 심리주의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명백히 지적하여 준―또한 프로이트 역시 그 지적을 자세히 읽고, 심지어 『대중심리와 자아분석』의 재판에서 주를 통해 이 지적에 응답하고 있을 만큼 심각하게 여겼던 -한스 켈젠 Hans Kelsen 의 비판 이후에도, 프로이트가 여전히 심리주의를 계속 고집하고 있다는 데 있다.본래 한스 켈젠은 리비도 이론과 사회적 통합이론의 연결을 통하여 대중의 형성과 결합이라는 현상을 설명하려는 프로이트의 입장을 적극 지지했다. 그는 지도자의 초자아에 대한 개개인의 정서적 결합, 자아의 이상으로서의 초자아의 정착과 공통된 자아이상의 결합을 통한 정체성의 형성 등, 심리적 메커니즘의 해명을 통해서 사회현상을 설명하려는 프로이트의 새로운 시도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한스 켈젠은 프로이트의 <대중이론>에 대한 평가에서 한 가지 결정적인 점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켈젠은 앞서도 인용했듯이 <대중의 문제를 조금만 깊이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사회적 통일과 사회적 결합의 문제라는 것>27)을 알 수 있고 <이른바 안정된 대중의 특성이란 조직이며, 이는 제도들 가운데서 실현되고 있다> 28)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프로이트가 구성원들의 심리적 과정으로부터는 독립적인 조직의 문제를 등한히 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켈젠의 비판을 프로이트는 주의 깊게 경청했고, 이 비판에 대해 나름대로 깊이 고심한 흔적을 우리는 『 대중심리와 자아분석 』의 재판의 주(註)에서 읽을 수 있다. <나는 매우 이해 깊고, 예리한 한스 켈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중심리가 곧 개개인의 심리적 과정들로부터 독립된 어떤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XIII 94) 는 언급과 함께 프로이트는 <왜 사회화가 그토록 특별한 독자적인 근거설정을 필요로 하는지의 문제는 현재 우리의 관심으로부터 매우 거리가 멀다 >(XIII 102) 라고 선언한다. 결국 그는 이로써 개개인의 심리적 과정들로부터 독립적이고, 또 사회적 메커니즘을 수단으로 해서 자신을 구조적으로 유지해 가는, 사회적 구성체의 강제 요소를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자신의 본래 입장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하고 있다.또 프로이트가 켈젠에 대한 자신의 응답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인위적이며 조직화된 대중의 문제에서 본질적인 차원을 이루는 조직의 문제, 즉 대중들 사이에서 형성되고, 구성원들에 대한 <의적 강제>의 사용을 통해 유지되는 조직의 문제를 개개인의 심리적 과정의 문제로 빈틈없이 환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27) H. Kelsen, "Der Begriff des Staates und die Sozialpsychologie," in Imago. Zeitschrift ftir Anwendung der Psychoanalyse auf die Geisteswissenschaften,hrsg. v. S. Freud, Jg. 田, 2(1922), s. 109.
28) 같은 책, S. 124.때, 프로이트가 전혀 사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지적은 옳다. 프로이트에게 사회는 시종 추상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안정된 사회적 구성체에 대한 해명에서 필연적으로 함께 배려되어야 할 사회이론적 차원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조직화된 대중은 단지 심리학에서만 접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집단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사회의 객관적 조건들로부터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성체로서의 집단이 개인의 주관적 심리에 남긴 굴절된 흔적들 가운데서 주관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심리주의의 입장을 한 치의 수정도 없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프로이트의 학문론적 입장을 따른다면, 결국 사회학은 응용심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다. 또 이 확신대로라면 모든 학문은 최종적으로는 단 두 가지 학문, 즉 <순수 내지 응용 심리학과 자연학 Psychologie, reine und angewandte, und Naturkunde>(XV 194) 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사회이론을 심리학으로 환원시키면서, 독자적 성격을 갖는 조직연관으로서의 사회를 적절히 배려하지 못하는 프로이트 이론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6 사회형성의 원인으로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심리주의1921년의 『대중심리학과 자아분석』에서 분명해진 프로이트의 심리주의적 경향성은 이 장에서 다룰 1923-1928년의 일련의 저작군을 거쳐, 1930년의 『문화와 문화에 대한 불만』에서 그 절정을 이룰 때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아니 어쩌면 이 심리주의를 궁극적으로 생물학적 근거 위에 정립하고자 시도함으로써 오히려 더 증폭되는지도 모른다.프로이트가 1923-1928 년 사이에 발표한 「정신분석학과 리비도론」,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의 몰락」, 「정신분석학 개요」 등에서 과제로 삼은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다. 첫째로는 <인간의 문화와 이 문화의 위대한 제도로서 종교, 예술, 사회질서의 성립사를 다루는 모든 학문들>과의 관계에서, 심층심리학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은 <빠질 수 없는> 분과학문임을 분명히 하는 일 (XIV 2.83)이요, 둘째로는 사회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큰 의미를 갖는 초자아의 형성문제에서 오이디프스 컴플렉스가 갖는 결정적인 중요성을 분명히 하고, 또 이로부터 일관되게 사회문제를 해명하는 일이었다.
특히 두번째의 과제에서 프로이트는 초자아야말로 개인의 성격발전의 해명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의 문제를 해명하는 데 있어서도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믿었던 『 대중심리학과 자아분석 』 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이어 받아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 시기의 저작과 앞서 언급한 『 대중심리학과 자아분석 』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 대중심리학과 자아분석 』 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대중 형성과 결합이라는 문제가 주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초자아를 동한 개인들의 정체성 형성과 지도자의 초자아에 의해 대표되는 초자아-이상의 성립을 통해 설명되고 있고, 또 이 문제와의 관계에서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는 있지만 (XIII 115f., 154 참조), 그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은데 반해서, 1923-1928년의 저작군에서는 <유년기 초기의 성적 발전단계에서 중심적 현상인 오이디프스 컴플렉스 >(XIII 395) 와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의 몰락>이 초자아의 성립과 정착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음을 명백히 함으로써 사회구성의 문제해명에 있어서도 오이디프스 컴플렉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현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본래 오이디프스 컴플렉스는 근친상간의 금지 때문에 본능 에너지가 어머니라는 현실적 대상을 획득함으로써 충족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처음부터 몰락으로. 예정되어 있는 심리적 드라마의 결과로서 성립한다. 이러한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의 몰락은 한편으로는 유년기의 성적 발달에서 남근기의 종결을 가져오며, 다른 한편으로는 초자아의 확고한 형성을 가져 온다. 그리고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와 밀집한 관계에 있는 <거세불안>이야말로 초자아의 성립에서 <가장 강력한 동기>의 하나가 된다 (XIII 401). 초자아의 성립을 통해, 본능 에너지가 원래 목표로 한 어머니라는 <대상의 점유가 포기되고, ……자아에 두사된 아버지의 권위 및 부모의 권위는 그곳에서 초자아의 핵을 구성하며, 초자아는 아버지로부터 엄격함을 빌어, 근친상간의 금지를 영속화한다. 이렇게 해서 자아는 리비도적인 대상접유의 재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XIII 399).
나아가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의 본질적 내용을 이루는 세속화된 원죄로서의 부친살해와 여기에서 비롯하는 죄의식이 사회의 구성과 유지 • 존속에 있어서 절대적인 내면화된 권위의 성립 근거가 된다. 이러한 권위의 내면화 과정에서 매체가 되는 것은, 넓게는 가족, 좀더 좁게 한정한다면 일차적으로 아버지이다. 가족은 <사회의 심리적 대리인 > 29) 내지 <사회의 심리적 대변자>따)로 나타난다. 그러나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개인이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사회의 대변자는 아버지이다 .>3 따라서 <초자아는 아버지의 성격을 보존하게 된다. 그리고 오이디프스 컴플렉스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신속하게 (권위, 종교적 이론, 강의와 독서 등의 영향하에)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의 억압이 행해지며, 또한 양심으로서의 초자아도 역시 더욱 엄격해질 뿐 아니라, 심지어는 무의식적인 죄의식으로서 자아를 지배하기도 한다 >(XIII29) E. Fromm, "Ober Methode und Aufgabe einer analytischen Sozialpsychologie," in Zeitschrift filr Sozia[forschung, Jg. 1, Leipzig 1932, S. 3.5.
30) E. Fromm, Die Furcht var der Freiheit, Zilrich 1945, S. 279.31 ) A. Kolnai, Psychoonalyse und Sozio/ogie, Zur Psychologie van Masse und Gesellscfaft, Bel. 9 der Intemationalen Psychoanalytischen Bibliotek, Leipzig, Wien, ZUrich 1920, S. 33.263). 그리고 서로 변증법적 동일을 이루고 있는 <초자아의 금지기능과 독려기능 >32) 은 사회와의 관계에서 이중적인 역할을 한다. 권위는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본능을 분명히 억압할 뿐 아니라, 또한 사회적으로 승인된 목적의 실현도 독려한다.
이렇게 해서 초자아는 이른바 사회화의 중심점이 된다. <최초에는 외적 힘인 부모의 권위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적인 규범, 명령, 제약 뿐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는 <도덕성의 요구>, <가족, 계층, 민족의 공동 이상>도 확고한 규범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초자아가 사회화를 통해 획득하게 된 문화적 산물이라는 뜻으로 <문화-초자아 Kultur -Uber - Ich> 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을 뿐아니라, 누구나 반드시 유년기에 겪게 되는 오이디프스 컴플레스의 정신분석학적 재구성을 통해서 또한 사회, 국가, 문화, 제도의 권위도 설명할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1923년의 한 저작(「정신분석과 리비도 이론』)에서는 조심스럽게 <오이디프스 컴플레스의 의미는 엄청나게 증가하며, 우리는 인류 초기의 국가적 질서, 인륜, 법 및 종교가 모두 오이디프스 컴플레스에 대한 반응으로 형성되었으리라는 예감을 얻게 된다 >(XIII 229) 고 말하고 있으나, 이보다 1년 뒤에 쓰여전 다른 저작(「정신분석학 개요』)에서는 확신에 찬 어조로, 국가와 종교, 법과 윤리라는 위대한 제도들을 창출해 낸 인간의 정신활동 가운데서 매우 진지하게 고찰되어야 할 부분이 <근본적으로 목표로 하는 것은, 개인들에게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의 극복을 가능하게 하고, 개인들의 리비도를 유아적 제약으로부터 해방시켜 궁극적으로 바람직한 사회적 결합으로 이행시키는 것이다 >(XIll426) 라고 단호히 주장하기에 이른다.32) E. Fromm, "Theoretische Entwurfe Uber Autori und Farnilie, Sozialpsychologischer Teil," in Studien iiber Auton'tat und Familie, Forschungoberichte aus dem Institut fur Sozialforschung, hrsg. van M. Horkheimer, Libraire Felix Alcan, Paris 1936, S. 109.
결론적으로 말해서 프로이트는 사회질서의 형성과 정착을 분업의 과정 및 사유재산의 성립으로부터 이해하고자 하지 않고, 주체성립의 시원에 존재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부친살해에 대한 죄의식에 가득 찬 심리적 반응으로부터 이해하고자 한다. 따라서 일단 오이디프스 컴플렉스라는 인간의 심리적 드라마에 대한 통찰을 얻게되면, 모든 사회적 제도들을 바로 이 심리적 드라마에서 비롯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프로이트는 믿는다.
이처럼 프로이트는 1921년의 저작인 『 대중심리학과 자아분석 』의 출판 이후 1928년까지 쓰여전 일련의 저작들에서 일관되게 사회구성의 문제를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의 몰락과 더불어 성립하게 되는 초자아의 형성에 관한 해명을 통해 풀이하고자 했다. 나아가 그는 사회구성의 문제에 대한 심리주의적 입장을, 궁극적으로 <초자아의 성립을 생물학적 사실>로 규정함으로써 사회의 문제를 자연과학의 문제로 환원시키고 있다. 초자아는 <두 가지 매우 중요한 생물학적 사실들의 결과이다. 즉 오랜 유아적 무력함과 의존 및 오이디프스 컴플레스의 결과이다 >(XIlI 263). 물론 프로이트가 초자아 성립의 생물학적 원인으로 들고 있는 두 가지 사실들 가운데 첫번째의 오랜 유아적 무력함이란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독립적으로 자기보존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할 때까지는 의존상태가 오래 지속된다는, 이른바 인간학적 근거에서 기인하는 생물학적 사실로서 인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이디프스 컴플레스가 생물학적 차원에서만 설명될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그렇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이러한 입장 표명 직후부터 벌써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와 같이 유아의 리비도적 발전과정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문제들은 오히려 특정한 가족구조의 툴 속에서만 재구성될 수 있다는 반론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미 프롬 E.Fromm도 지적하고 있듯이, 오이디프스 컴플렉스는 아버지와의 관계 내지 아버지에 대응하는 심리적등가물이 중심적 대상관계가 되는 사회나 가족관계에서만 확인될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이에게 (시간적으로 봐서) 사회적 권위를 최초로 매개해 주지만, (내용적으로 볼 때) 사회에 선행하는 모범 Vorbild이라기 보다는 모상 Abbild이다 .>33) 가령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의 필연적 동반현상으로서 거세불안이라든가, 유년기 소녀의 남근에 대한 선망 등은 오직 <아버지 중심적인> 사회구조로부터만 보다 설득력 있게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러한 심리적 현상들을 가부장적 사회의 지배 메커니즘과 이 메커니즘이 자아형성 과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고려를 완전히 배제하고, 단순히 생물학적 사실들로서만 고찰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이러한 사회적 요소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 <심리학적 단충psy chologische Schichtung> (XIV 99) 을 꿰뚫고, 마침내 생물학적 사실들로 구성된 암반에 이른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론사의 전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오이디프스 컴플렉스가 생물학적 현상이라는 프로이트의 테제는 곧 부정되게 된다. 말리노프스키 B. Malinowski는 산호군도에 서는 멜라네시아인들의 공동체에 대한 관찰을 근거로 이미 1920 년대에 발표한 일련의 저작들에서, 트로브리안드인들은 모계적 사회조직 가운데서 살고 있으며, 오이디프스 컴플렉스는 사회에 대한 잘못된 적응의 형식으로 나타나고는 있지만, 가부장적으로 조직된 서구사회에서보다는 <훨씬 덜 해로운 모습>34)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오이디프스 컴플렉스는 따라서 생물학적인 조건들이 아닌 사회구조적인 조건들에 의해 규정된다. 말리노프스키의 공적은 <표면적으로 변할 수 없는 자연적 요인으로 보이는 것들이 사실에 있어서는 특정한 가족체계에서 비롯33) E. Fromm, 같은 책, S. 88.
34) B. Malinowski, Geschlecht und Verdrangung in primitiven Gesellschaften, Reinbeck bei Hamburg 1962, S. 259한 사회적 적응의 산물이리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가족구조와 사회구조 사이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통찰 >35) 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본 카디너 A Kardiner의 평가는 옳다. 가족체계란 사회의 기본단위의 하나로서, 각각의 사회에 고유한 사회적, 경제적 근거에 의거해서 나름대로의 고유한 컴플렉스들을 산출해 낸다. 모권적 가족체계나 모계중심적 사회에서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의 의미는 되조한다. 지배적인 아버지라는, 유일한 권위의 대변인물 대신에 권위를 대변하는 두 명의 인물이 아이에게 나타난다. 즉 그것은 낳아 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남자형제이다. 이러한 가족관계에서는 오이디프스 컴플렉스가 현저히 약화되고 있음을 말리노프스키는 확인하게 된다. 똑같은 근친상간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형제, 자매와 아저씨들과 조카들 사이의 적대성이다. 이러한 권위체계의 약화와 엄격한 처벌압력의 부재 때문에 유아성욕은 가부장적 사회에서와는 달리 완전히 몰락하는 것은 아니다. <원시인들에게 이 단계의 성( 性 )은 초기 생식기 단계에 머물게 되고,―이는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형식이다―……결코 재차 억압되지는 않는다.>36)
말리노프스키의 연구는 프로이트 이론의 가장 취약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유년기의 성적 발달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오이디프스 컴플렉스라는 갈등은 자연의 자기전개 과정이며, 때문에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에 관한 자신의 이론과 이에 근거한 사회구성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이론은, 자연과학의 보편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트로브리안드 섬의 주민들 사이에서는 오이디프스적 드라마는 프로이트 자신이 주장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음이 분명해졌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35) A. Kardiner, "Psychoanalyse and Anthropology," in Psychoonalysis and Social Process, ed. Jules H. Massennan, N.Y., London 1961. P. 22 36) B. nowski, 앞의 책, S. 80.
발달심리학이 제기하고 있는 자연과학적인 초(超)문화적 보편성에 대한 요구는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7 로하임의 생물학주의말리노프스키의 문화인류학적 작업은 유아의 성적 발전이 자연과학적 성격의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 개개 문화고유의 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것임을 충분히 밝혀 주었다 . 때문에 이러한 문화비교에 의해서 분명해전 문화적 상대주의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학적 사실들이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자연과학적 보편타당성을 지니는 법칙들임울 다시 한 번 분명히 하는 일이 프로이트 전영의 당면한 과제가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말리노프스키의 연구와 유사하게 정신분석학과 인류학을 연관시켜, 중앙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항문기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를 추전한 로하임 Geza Roheim의 작업목표이기도 했다. 그러나 로하임의 관점처럼 생물학주의에 근거해서 정신분석학이 자신을 자연과학으로 이해하고자 할 때, 그것은 이미 기능주의적 인류학이 주장하고 있는 문화상대주의에 대립해서 <모든 인간의 심리는 동일>하다는 상수론 Konstanzthese을 전제로 하게 된다. 때문에 로하임은 자신의 저작인 『정신분석학과 인류학 Psychamalysis and Anthropology』에서 <인류의 심리가 동일하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작업가설 이상의 것으로 보이며, 이는 너무도 자명한 것이어서 어떠한 증명도 필요치않은 것처럼 보인다 >37) 라고 말하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그의 초기 상수론의 입장도 1929년 실제 필드 워크에 나서게 되면서 동요하게 된다 . 그 자신의 인류학적 연구결과만으37) G. Roheim , Psychronalysis and Anthropology, N.Y. 1950, S.435.
로도 <생물학적 발전과정에서 단선적인 경향성만이 존재한다는 가설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다 >38)는 것이 드러난다. 즉 불변의 인간학적 상수를 찾는다는 것은 전혀 가망이 없음이 그에게도 분명해졌다. 이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비교인류학적 결론은-하버마스도 이와 유사한 문맥에서 말하고 있듯이 ___ <인간학적 상수들이 역사적 변수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니 이러한 물음 자체가 잘못 설정된 것이다.>39) 라는 것이었다. 불변의 인간학적 본성이 등장할 때조차, 그것은 이미 사회적 문맥을 통해 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언필칭 불변의 인간학적 본성이라는 것이 지니는 듯이 보이는 독자적인 자연과학적 법칙성이라는 것도 실은 이미 사회적으로 매개된 것으로서만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로하임의 이러한 연구 경험들은 그 자신이 가정했던 인간의 심리가 동일하다는 상수론을 수정 내지 상대화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항구적인 것, 불변의 것이 아니라, 구별되고 차이가 나는 것이 이제 그의 시야에 들어 오게 된다. 문화의 수수께끼는 이제 의석적 혹은 무의식적 동형성에 대한 분석의 심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차이에 대한 배려와 설명을 통해서만 해독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때의 연구로부터 점차 문화의 차이, 다른 문화와 구별되는 한 문화의 독자성은 유년기 꿈들로부터 비롯한다는 테제가 성립하게 된다. 모든 문화는 한 개인을 성숙시키기 위해서 그를 특정한 심리적 위기로 이끌고 이 위기를 통해 그 문화권 특유의 인격형이 산출되며, 이로부터 또한 그 문화권 고유의 경제적, 정치적, 또는 종교적 제도들이 세워진다는 것이 바로 그의 핵심 테제였다. 문화는 여러 집단의 형성, 즉 사38) W. Muensterberger, "Ober einige psychologische Fundamente der menschlichen Gesellschaftsbildung," in Soziale Welt, Jg. 16, 1965, H. 4, S. 687.
39) J. Habennas, "Anthropologie," in Fischer-Lexikon Plulosophie, Hrsg. v. A. Diemer und Ivo Frenzel, Frankfurt a M. 1958, S. 34.회화를 통해 불가피해진 분리에 의한 정신적 의상을 극복하려는 시도 일뿐이다.
그리고 문화의 원인에 대한 물음은 질병의 원인, 일탈행동의 원인에 대한 물음과 동일한 선상에서 제기된다. 즉 이들의 개별적 특수성은 일반적인 유전적 조건들과 특별한 정신적 의상 사이의 관계에서 설명된다. 로하임에 따르면 문화는 집단적 신경증으로서 ――- 개인적 신경증의 경우처럼 환경으로부터의 영향에 의해 도발된, 그러나 생물학적 과정들의 후속연계 현상일 뿐인 ―――유년기의 위기로 환원될 수 있다. 이로써 문화에 대한 로하임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이 지니는 주관주의와 정신분석학적 사실들을 보편적인 인간학적 사실들로 일반화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있게 된다.이러한 관점에서 로하임에 의해 <문화의 근원과 기능>―이는 그의 대표작의 제목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자연사로서 서술될 수 있게 된다. 그에게도 정신분석학은 자연적 대상을 다루는 자연과학인 것이다. 때문에 문화의 최종적 원인을 전적으로 생물학적 근거에서 찾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결과 로하임은 거리낌 없이 자신의 심리학적, 생물학적 환원주의를 고백하고 있다. <문화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관점은 필연적으로 환원론적이다(정신분석학은 문화를 심리학이나 심지어는 생물학에로 환원한다.>40) 이러한 로하임의 과학주의는 결국 프로이트의 과학주의가 좀더 첨예화된 모습일 뿐이다. 이제 분명한 것은 그의 초기의 상수론에서와 마찬가지로 후기의 문화이론에서도 역사적, 사회적 과정에 대한 배려는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이다.본래 프로이트가 사회구성의 문제에 대한 해명의 근거로 삼고 있는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에 대한 경험적 자료들은, 서구문명 사회에서도 중산층 이상의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연구에 근40) G. Roheim, Psychoanalysis and Anthropology, N.Y. 1950, S. 452.
거하고 있다. 즉 시민사회에서도 특권적인 사회계층에 관한 경험적 연구에 근거하고 있다. 이처럼 그의 자료들은 가부장적으로 규정된 사회로부터 얻은 것이기에 그 타당성이 제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이론적 가정과 결과들을 일반화하여, 무반성적으로 모든 시대, 모든 문명권에 대해 타당성을 지닌 보편적 인식으로 발전시키고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이러한 보편성에 대한 요구의 타당성 여부 를 사회이론적으로 진지하게 반성하기보다는, 무의식, 억압,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와 같은 정신분석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 범주들울-프로이트는 이 범주들을 <정신분석학적 이론의 기본지주>라고 불렀다-생물학적 근거 위에 정립시킴으로써 충족시키고자 했다. 프롬이 정확히 지적하고 있듯이, 프로이트는 사회적 관계를 인간이 지니는 불변의 인간학적 상수, 즉 생물학적 상수의 표현으로 실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는 시민사회적 주체들이 삶에서 겪는 고통, 시민사회 특유의 현실원리의 필연성에 대한 통찰은 사회이론에서와는 달리 궁극적으로 인간학적 차원, 즉 불변의 상수를 이루는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의 문제로 환원되고 있다. 그는 사회를 지배와 조직을 통하여 개개의 구성원들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해 있는 구성체로서가 아니라 오직 개인이 복종해야 할 생물학적 법칙에 근거한 심리학적 사실로서만 재구성하고자 한 것이다. 이 점에서 프로이트는 시민과 인간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8 『문화와 문화에 대한 불만』과 심리주의정신분석학은 일차적으로 정신과에서의 한 특수한 치료방법으로 출발했지만, 자신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심리적 문제들에서 사회적,문화적 문제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것은 자신을 단지 개인의 심리적 메커니즘의 해명이라는 좁은 영역에만 가두지 않고, 사회와 문화의 해석이라는 광범위한 영역으로 지평확장을 기하게 된다. 때문에 프로이트의 후기에는 문화발전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저작들이 속속 등장한다. 그 가운데서 가장 인상적인 만년의 작품으로 둘 수 있는 두 가지는 「환상의 미래 Die Zulrunft einer Illusion」(1927)와 『문화와 문화에 대한 불만 』 (1930) 이다. 특히 후자는 프로이트의 최후의 대작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문화와 문화에 대한 불만』에서도 (2차 위상 모델을 근거로 해서 쓰여전 이 저작은 1차 위상 모델과의 관계에서 본다면 중요한 수정 을 ―특히 본능론에서-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문화의 구성 문제에 대한 접근은 심리학주의 및 생물학주의를 절대화하는 프로이트의 본래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다. 역사적 관계에서 형성된 사회와 문화의 문제가 여전히 심리학주의 및 생물학주의의 굴절된 시각을 통해 역사성의 피안에 존재하는 문화의적인 인간학적 요소들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서 마치 카메라의 영상에서처럼 완전히 전도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저작들 가운데서도 프로이트의 입장이 갖는 한계가 또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극명하게 드러난다.프로이트의 정의를 따르면 <문화란 ……우리들의 삶이 그 가운데서 우리들의 동물적인 선조들로부터 분리되게된 행위와 제도의 총체를 말하며, 이는 두 가지 목적에 봉사한다. 즉 자연에 대립해서 인간을 보호하고 또한 인간 상호관계를 조절 >(XIV 448f.)한다. 문화에 대한 프로이트의 정의만 본다면, 인간이 노동을 통해 <자연을 가공하고> 또 사회적 지배를 동해 <인간을 가공>하는 것으로 문화의 본질적 두 측면을 규정한 마르크스의 정의와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마르크스와는 달리 문화발전 과정의 한 측면일 뿐인 자연과 인간의 신전대사 과정으로서의 노동의 문제는 적극적으로 배려하고 있으나, 다른한 측면인 사회와 문화의 문제를 해명하는 데 있어서 보다 더 본질적일 수 있는, 노동이 그 가운데에 행해지는 틀로서의 사회적 지배는 전혀 배려하고 있지 않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인간의 사회적 활동의 한 본질적 측면으로서의 사회적 지배의 차원을 노동의 문제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적 지배의 문제를 단지 보편적 규범 체계의 문제로 기술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를 사회적 지배를 통해 매개되고 있는 인간관계로서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프로이트와는 큰 차이 를 보이고 있다.
앞서의 인용문에서 분명해지고 있는, 문화에 대한 첫번째 정의에 따른다면, 문화는 우선 <막강하고, 가혹한,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우리에게 적대적으로 맹위를 떨칠 수 있는 위험에 가득 찬 외부세계 >(XV 83)로서의 자연에 대한 보호장치로서 형성된 것이다. 문화의 성립근거는 자연이 강요하는 인간적 삶의 <의적 궁핍>에 있으며, 문화는 우선 적으로 자기보존 본능에 봉사하는 <노동에 대한 강제>로 나타난다.다른 한편 _프로이트에 의해 구체적으로 디루어지지는 않은 ―문화에 대한 프로이트의 두번째 규정에 따른다면, 문화란 규제된 사회적 관계의 체계이다. 문화에 대한 첫번째 규정과의 관계에서는 <의적 궁핍>에 의해 조건지워진 자기보존 본능에 의한 노동에의 강조가 문화의 성립근거로서 제시되고 있는데 반해, 문화를 <인간상호관계의 조절>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두번째 규정과의 관계에서는 <남성의 입장으로부터는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여성의 입장으로부터는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한 부분으로서의 자식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궁극적으로는 성적 본능으로 환원될 수 있는 <사랑의 힘 >(XIV 4OO) 이, 인간들이 공동적 삶의 형식으로서 문화와 사회를 구성하는 근거로서 제시되고 있다. 때문에 그는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가치로부터 사회적으로 형성된 인간관계의 내용적 핵심을 이루는 모든 제도들을 도출해 내고자 한다.모든 사회적 불평등, 차별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사회발전이 과연 프로이트가 말하고 있는 <사랑의 힘>에 의해 추진되고 , 또한 제도화된 법과 정치적 의사형성의 과정 등도 그 자체로서 사랑에 근거한 공동 이익의 실현을 위한 가치중립적인 제도로서만 볼 수 있을까? 혹시 이는 그가 문화에 대한 두번째 규정에 필연적으로 것들어 있는 사회적 지배와 억압의 차원을 전혀 묻지 않고 , 사회와 개인 사이의 역사적 변증법을 완전히 간과함으로써 그의 연구에는 지배와 법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결여되어 있음을 증거해 주는 것은 아닐까?
계몽사상가들과는 달리 프로이트는 인간을 여러 상이한 심리적 심급들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룬 전체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일련의 상이한 심리적 심급들 사이의 비대칭적인 , 때로는 매우 위태로운 타협에 입각해서 살아가는 자연의 일부로서, 즉 본능과 충동에 의해 움직이는 <자연의 존재>로 보고 있다. 프로이트는 앞서 언급한 자기보존 본능과 성적 본능이라는 필연성에 의해 조건지워지는 문화의 발전과정이 심리구조 가운데 분화과정을 가져 오는 근본원인이 된다고 본다. 이러한 문화발전의 과정이 낳는 심리적 심급들을 그는 2차위상모델에서 <이드 Es>, <자아 das Ich>, <초자아 das Uber - Ich> 라고 부른다.1차 위상모델에서의 무의식 개념을 대체하는, 2차 모델에서의 <이드>는 에로스 Eros 와 타나토스 Thanatos라는 두 가지 인간적 원본능 (原本能)을 포괄한다. 에로스가 생명의 끝없는 지속과 생명체로서의 발전 (XIII 233) 을 통해 끝내는 대양적 감정이라는 근원적 행복감을 목표로 하는 성적 본능과 자기보존 본능인데 반해, 타나토스는 파괴, 죽음의 본능으로서 모든 관계의 단절과 파괴를 통해 <(유기체적) 생명체를 (그것이 발생하기 이전의) 무기물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것 >(XVII 71)을 목표로 하는 자기부정의 본능으로 정의된다. 프로이트의 정의에 따르면 이드는 일차적으로 쾌락원리에 복종하며, 쾌락원리란 적극적으로는 현재 이곳에서의 본능의 충족을 추구하거나 소극적으로는 고통으로 느껴지는 불쾌감을 야기하는 모든 긴장을 완화 • 회피하고자 하는 본능의 원리이다. 이에 반해 현실원리란 이러한 쾌락원리의 추구가 쾌락의 획득과 긴장의 회피라는 본래의 목적 달성에서는 오히려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본래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단지 궁극적인 목표의 달성을 연기하거나 혹은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 일시적인 불쾌까지를 감수하게 만드는 외부세계와 본능의 매개를 맡고 있는 자아의 원리이다 달리 말하면 모든 인간이 지속적으로 쾌락원리만을 추구할 때는 개인적 유기체의 존속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사회 전체의 존속까지도 위험에 처하게 된다. 때문에 의부세계와의 관계에서 자기보존을 가능한 한 합목적적으로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또 다른 하나의 심리적 심급이 필요하게 되며, 이것이 곧 자아라는 것이다. 자아라는 심급은 의부세계와 개개인 모두에게 숨겨져 있는 본능 사이의 관계를 조절하는 일을 목적으로 한다.
문화발전의 원동력은 바로 쾌락원리와 현실원리의 이 같은 갈등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문화를 일방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현실원리이다. 오늘날의 문화에서 쾌락원리를 부정하는 힘으로서의 현실원리가 이처럼 일방적으로 쾌락원리를 지배 • 대체하게 된 이유를 프로이트는, 앞서 문화에 대한 두 가지 규정에서 분명히 했듯이, 인간이 직면한 <삶의 궁핍>과 <인간 상호관계의 조절>의 필연성에서 보고 있다. 인간사회에는 언제나 힘겨운 노동 없이는 자신의 본능을 충족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자신을 재생산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자연적 자원이 주어진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또한 나아가 삶의 틀로서의 사회의 존속을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본능의 통제도 필연적이기 때문에 문화를 발전시키게 된 것이다.문화발전은 <바로 이처럼 강력한 본능이 충족되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XIV 457). 문화적 발전의 근거는 <문화에 의해서 강요된 본능의 운명 >(XIV 457), 즉 본능의 단념으로서의 본능의 승화에 놓여 있다. 그러나 문화의 발전이 이처럼 개개인에게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본능의 억압으로부터 얻어 낸 본능 에너지의 승화에 필연적으로 근거하고 있기에, 문화는 한편으로 자연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의 삶을 보다 안전하고, 보다 쾌적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동물적 본능을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끄는 데도 성공했지만, 끝내 문화는 사회의 존속을 보장하기 위해 개개인들에게 그들의 가장 절박한 본능의 추구마저도 지속적으로 희생시킬 것을 요구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경험되어, 문화 일반에 대한 불만을 자아내게 되는 것이다.
<문화에 의해 강요된 본능의 운명>으로서의 승화가 인간의 본능에 대립해서 무한정 진전될 수는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분명했다. 때문에 프로이트는 승화의 한계와 승화가 가져 울 수 있는 부정적 대가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즉 <승화에 의해 ……본능의 힘들을 (자연적 본능의) 목표로부터 보다 고차적인 (문화적) 목표로 전향시키는 것을 통한 (본능의) 극복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또한 이들에게 있어서도 한시적으로만 성공할 수 있으며, 이들의 개인적 생애에 있어서조차 시간적으로 가장 성공하기 어려운 때는 불 같은 청춘기이다 >(VII 156). 이처럼 보다 세련된 고차원의 문화적 목표로 자연적인 본능 에너지를 승화시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것은 아니며一―-이는 재능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며 ——-, 또한 그들에게조차 언제나 가능한 것도 아니다 (XIV 438 참조). 또 승화가 성공했을 때조차도 이드의 관점에서 본다면, 승화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포기해야만 했던 본래의 대상이 제공할 수 있는 만족에는 비교할 수 없는, 본래적 만족의 창백한 그립자일 뿐인, 단순한 보상만족에 지나지 않기 (XIII 44f. 참조) 때문에 절박하게 갈망하는 이드와 자아 사이의 적대적 관계에서 일방적인 이드의 억압을 의미하는 승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노이로제나, 다른 손상을 입히게 된다 >(VII 156).
프로이트는 점점 거세져 가는 본능억압의 요구를 통해 문화가 이처럼 개인적 차원에서 노이로제와 손상을 가져오는 데만 그치지 않고, 인류 전체를 병리적 증상으로 이끌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문명의 부정적 결과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러한 평가는 『 정신분석학 입문 강의 Vorlesungen zur Einleitung in die Psychoonalyse』 제3부에서 <우리 모두는 이미 병자이다>라는 단정에서 분명해지고 있다.이 문맥에서 프로이트는 전 인류적 규모에서 ―죽음의 본능이 표현된 것으로 보는 _ 일반적인 공격성의 증가라는 병리적 현상이야 말로 강요된 본능의 단념이 낳은 결과라고 본다. <문화에 의한 거부(문화에 의해 강요된 본능의 단념)가 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광범위한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모든 문화가 그것의 퇴치에 힘써야만 하는 공격성의 원인이라는 것도 안다 >(XIV 457). 개인의 자기자신에 대한, 또한 인간들 상호 간의, 혹은 문화적 제도 등에 대한 공격성의 일반적 증가는 문명이 가져온 부정적 결과이며, 이러한 <인간들 사이의 일차적인 적대성의 결과에 의해 문명사회는 끊임없이 몰락의 위협을 받게 된다 >(XIV 471). 문화의 발전은 점점 더 많은 감각적, 정서적 에너지의 희생을 요구하면서 일반적으로 문화에 대한 적대성을 고양시키고 있기에, 모든 개개인들은 가능태에 있어서 문화에 대한 적이며, 때문에 문화는 자신의 제도를 통해서 광범위하게 리비도적인 개인들로부터 보호되어야만 한다.물론 프로이드에게도 이처럼 공격성은 단순히 생물학적 근거를 갖는 (죽음의) 본능의 표현만이 아니고, 본능의 억압을 근거로 한 문명화의 과정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격성이 구체적으로는 문화의 유형과 발전단계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사회적으로 매개된 본능의 운명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능의 역사적 조건지워짐 >(XIII 38) 을 가장 분명히 하고 있는 저작으로 들 수 있는 것은,억압의 형성과정뿐 아니라 또한 억압에 의해 무의식의 일부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가도 해명하려고 한 「억압 Die Verdrangung」 (1915)이라는 논문이다 프로이트는 이 논문에서 <억압된 것과 무의식 전체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무의식은 보다 광범위한 의연을 갖는다. 억압된 것은 무의식의 한 부분일 뿐이다 >(X 264) 라고 말하면서, 무의식이 두 가지의 이질적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무의식의한 부분은 억압에 의해 형성 • 장악되고 있지만, 다른 한 부분은 유전적으로 획득된 심리적 구성체라는 것이다. 아직은 1차 위상모델에 근거하고 있는 이 논문은 유전적인 <심리적 구성체>에 대해 <만일 인간에게 동물의 본능과 유사하게 유전되는 심리적 구성체가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무의식의 핵심을 이룰 것이다>(X 294) 라고 말하고 있지만, 2차 모델에 이르면 보다 정확히 이를 <이드 가운데에 존재하는 원형적 유산 >(XIII 79) 이라고 부르게 된다. 프로이트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무의식의 핵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 부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무의식의 (또 다른 한) 핵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억악된 본능의 대변자들이다 >(X 285) 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따라서 억압의 메커니즘에 대한 해명이 무의식의 형성과정에 대한 이해의 열쇠가 된다는 추론을 근거로 프로이트는 <억압과 무의식은 광범하게 서로 상관적이다 >(X 25())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억압은 사회적으로 매개된 본능의 운명이다. 억압은 자연적 행태도 아니고, 또한 보편적 사실도 아니다. 억압은 <본능의 운명>이며, 이에 대한 조건은 사회적인 것이다. 억압은 금지와 처벌이라는 사회적 압력과 리비도적으로 장악되고 있는 충족되기를 요구하는 표상 내지 표상군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에서 생겨난다.
이처럼 프로이트도 정신분석학적 갈등인 신경증을 사회적으로 조건지워진 것으로 보고 있고, 그의 위상적 모델의 기능적-역동적 체계에서는 무의식을 억압된 것으로 규정짓고 있기도 하다. 또 이드는 단순히 자연의 필연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억압된 본능대변자들을 통해서 성립하고 있다고도 말하고 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이러한 입장보다는 문화발전의 가장 강력한 장애로서의 공격성을 일차적으로 <인간의 근원적이며, (문화로부터) 독립적인 본능 >(XIV 481), 즉 문화형성과정의 피안에 있는 인간학적 상수로 보는 입장이 더욱 강화된다. 가령 이드라는 개념 대선에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이용하는 데서도 분명해지듯이, 아직은 1차 위상모델에 근거하고 있는 1915년의 논문 「억압」에서와는 달리 , 몇 가지 새로운 가설과 개념을 도입하여 1차 모델을 더욱 발전시킨 2차 모델에 입각한 『문화와 문화에 대한 불만』 에서는 이드 개념과 관련해서 본능을 문화로부터 독립적인 인간학적 상수로 보는 입장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드 개념은 1차 모델에서의 무의식 개념을 대체하고 있다. 때문에 1차 모델에서 무의식과 억압의 문제가 불러일으킨 것과 동일한 문제가 2차 모델에서는 이드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해서 다시금 제기될 수 있다. 즉 이드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사회적 억압과 관계하는지, 아니면 소위 순수한 <자연의 필연적인 힘>일 뿐인지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드라는 개념이 1차 모델의 무의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학습된 억압에 의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음을 언급하고는 있으나, 이드를 비역사적인 인간학적 요소로 보는 입장이 그에게 있어서 본질적으로 훨씬 더 강하다.
프로이트가 1차 모델의 무의식 개념을 대체할 이드 개념을 2차 모델에 도입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그로덱 G.Groddeck이 1923 년에 출판한 저술 『이드에 관한 연구서 Das Buch vom Es』인데, 프로이트는 이 저술에서 그로덱이 제시한 이드의 정의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프로이트가 강조하는 바로는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의 삶에 있어서 본질적으로는 수동적인 것이다. 그(그로덱)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지배할 수 없는 미지의 힘에의해 살아지게 된다 >(XIII 251)고 말하면서, 프로이트는 이드 개념이 <비인격적인 것>, <소위 자연의 필연적인 힘 >(XIII 251, 각주 2))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프로이트가 2차 모델에서 이드에 대한 역동적 구상에 깃들 수 있는 이드의 역사성, 사회성을 1차 모델에서보다 더 강하게 제거하고 있음은 1938년에 쓰여진 그의 유고 『 정신분석학 개요 Abriβ der Psychcanalyse』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심리적 영역 내지 심급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을 우리는 이드라고 부른다. 이드의 내용은 유전적으로 획득된 것, 출생과 더불어 얻어전 것, 구성상 처음부터 확정되어 있는 것으로서 무엇보다도 신체의 기관들에서 비롯하는 본능이다 >(XVII 670. 이처럼 이드를 비역사적인 자연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프로이트의 입장은 그 후 <인간의 이드는 어느 시대에나 (거의) 똑같은 것으로 남는다 >41) 고보는 안나 프로이트에게까지 그대로 계승된다.나아가 프로이트의 자연주의적 관점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보여 주는 대목은, 비교적 자연적인 것으로의 환원이 용이한 이드뿐 아니라, <외부세계의 대변자 >(XIII 380) 로 규정함으로써 모든 심리적 심급들 가운데 사회적인 성격이 가장 강할 수밖에 없다고보는 초자아라는 심리적 심급까지도 그는 궁극적으로 비역사적인 생물학적 자연의 현상으로 환원시킴으로써 문화와 자연 사이의 어떠한 상호 영향관계도 부정하고 있는 점이다.프로이트는 『 정신분석학 입문 강의의 속편 Neue Folge der Vorle-sungen zur Einfiihrung in die Psychoonalyse』에서 어느 정도 역사를 저장 • 기억하는 구조단위로서 초자아가 <전통과 과거의 이상들을 대변하고, 새로운 경제적 상황에서 비롯하는 사실들에 대해서는 한동안 저항을 하게 된다 >(XV 194) 고 말함으로써 처음에는 저항을 하더라도41) A Freud, Das Ich und die Abwehrmechamismen, Munchen 1964, S.109.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경제상황과 더불어 어쩔 수 없이 변화해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함으로써, 묵시적으로 사회적 요소, 특히 경제적 요소의 심리적 심급들에 대한 영향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곧 그 뒷 문장에서 <궁극적으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경제적 필연성과 문화발전과정에 ―남들은 이를 문명이라 부른다-복종하고 있는 인간들이 무언가 다른 요소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이 다른 요소는 그 근원에 있어서 분명히 앞서 언급한 요소들로부터 독립적인 일종의 유기체적 과정에 비교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요소만이 다른 여타의 요소들에 대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XV 194) 라고 말하면서, 즉 모든 경제적 필연성과 문화발전 과정으로부터 <독립적인 일종의 유기체적> 성격을 갖는 <비사회적-경제적이고> 또한 <비심리적인 요소>만이 문명에 대해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뿐, 그 역은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앞서 심리적 심급들에 대한 사회 • 경제의 영향 가능성을 인정하는듯 했던 입장을 뒤엎는다. 그의 결론에 따르면, <인간의 내적 자연(內的 自然 )의 변화는 매우 기대하기 어렵다 >(XV 195). 그는 인간의 내적 자연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문명에 의해 길들여지기 힘든 것으로서 인간학적 요소를 절대화하면서, 아무리 긴 시간이 흐르더라도 인간의 내적 자연의 변화 가능성은 사실상 기대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표명한다.결론적으로 말해서, 프로이트는 앞서 문화에 대한 두 가지 규정에서도 분명히 하고 있듯이, 문화의 성립과 근원에 관한 연구에서 마르크스와 유사하게 문화가 인간의 의적 자연과의 대결 과정에 의해 성립 규정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의 구성과정 가운데서 사회와 인간의 내적 자연으로서의 인간의 심리 사이에 형성될 수 있는 연관관계에 대한 평가에서, 프로이트는 양자 사이의 동시성, 즉노동과 지배에 의해 규정되는 문화의 형성과 발전이 본능의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인간의 내겨 자연으로서의 이드에게 절대적 우위와 선행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마르크스와는 상반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드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심리적 심급들이 오직 역사성을 지니는 것으로 입증될 때만 사회와의 긴장관계에 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그들이 여하한 역사적 변화에도 초연한 불변의 것으로 입증될 수 있을 때, 그들은 <지배불가능한 미지의 힘>, 즉 비역사적인 것이 된다. 때문에 자연으로서의 본능에 의해 추구되는 본능의 충족과 문화발전에 의해 강요되는 본능의 단념 사이에 가변적인 관계설정이 불가능해질 때, 인간학적 상수로서 파괴적 경향의 공격성과 문화 사이에도 어떤 변증법적 관계의 설정이 불가능해전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논리를 그대로 따른다면, 문화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서의 공격본능, 자기파괴 본능을 지배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우리는 원칙적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게 된다. 프로이트의 견해에 의하면 공격본능은 절망적인 인간학적 상수이고, 이러한 공격본능, 자기파괴 본능을 지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우리에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 때 프로이트가 주장한 바, 무의식이라는 본능이 있었던 늪의 자리를 개간을 동해 이성의 보금자리로 만듦으로써 적극적으로 인간해방에 기여하겠다는 정신분석학의 계몽적 이상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환상일 수밖에 없다.그러나 프로이트의 견해처럼 인간의 공격본능이 불변의 인간학적 메커니즘 가운데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조차도, 인간의 공격본능을 상이한 문화적 단계의 사회들과 매개하는 작업을 무의미한 시도로 보고 이를 처음부터 배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사고인 것같다. 프로이트가 주장하고 있듯이 설혹 인간의 공격본능이 자연적인 것일 때조차도, 그것이 사회 가운데서 표현된다면 그것은 이미 사회적인 현상이기에,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형식을 취하고 있는지 혹은 더 나아가 문화에 의한 본능의 단념과 공격성의 관계에 대한 그의 자신감 없는 테제를 더욱 철저히 내실화해서, 공격본능 자체가 사회(문명)에 의해 산출된 것은 아닐까 하는 가능성까지도 그는 마땅히 검토했어야 한다.
9 프로이트와 마르쿠제이러한 관점에서 문화발전에 있어서 지배의 중심적 역할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을 통하여 프로이트 이론이 다다른 궁극적인 딜레마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 마르쿠제의 이론이다. 그에게 있어서 문화의 형성과정은 동시에 사회적 지배확립의 과정이기도 하다. 본능의 억압은 추상적으로 오직 문화의 발전에서만 유래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사회적 지배의 문제와 결합되어 있다. 문화의 형성과 지배의 확립, 본능의 억압은 서로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는 동전의 양면이다. 때문에 개개인을 억누르는 것은, 추상적인 문화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적 지배의 과정들이다. 이러한 과정을 프로이트는 문화 형성과정의 논리라는 막연한 표제어로만 규정하고,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음으로써 그의 문화이론은 추상적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때문에 문화에 의해 강요된 승화의 가능성이라는 문제가 시민사회와의 관계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될 수 있기 위해서는 승화의 형식들이 계층의 차이나 성별의 차이에 따라 사회 가운데서 어떤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또 현대 사회에서처럼 더 이상 외적 자연에 의해 강요되는 삶의 궁핍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과 이윤에 대한 관심에 의해서 규정되는 사회적 노동이 사회적 주체를 어떻게 변형시키며, 또한 이러한 변형이 사회의 안정 및 지배의 안정과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가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결론적으로 말해서 문화의 존속과 지배의 확보라는,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 두 가지 문제를 분석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가 프로이트에게는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문화이론적 연구는 추상적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마르쿠제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이론의 해석에 있어서, 특히 본능이론에 대한 메타심리학적 해석에 있어서 핵심적인 개념을 <지배의 개념>으로 설정하고, 또 지배를 <개인의 목적과 목표들 및 이들을 추구하고 달성하기 위해 개인들에게 미리 주어져 있는 ……방법들이 적용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작용하고 있는 것> 42)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은 매우 현명한 조치이다.
이로써 그는 개인의 목적과 목표뿐 아니라 그것의 실현을 위한 수단까지를 결정하는 지배가 현실원리의 내용과 규모를 규정하고 있음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나아가 본능이론의 차원에서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해줄 수 있는 <기본억압>과 <추가억압 >43)이라는 범주적 구분도 행할 수 있게 된다.기본억압은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삶의 궁핍>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며, 마르쿠제의 견해로는, <문화 가운데서 인류의 존속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본능의 제한 >44)에 해당한다. 이러한 기본적 억압은 어떤 시대나 사회에서도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최소한의 억압이다. 그러나 추가억압은 기본억압과는 달리 <사회적 지배를 통해 필연적이 되어 버린 제한들> 45) 이다. 이 제한들은 <지배를 행사하는 특수한 제도들에서 비롯하는 추가적인 통제와 권력의 행사> 46)를42) H. Marcuse, Trieblehre und Freiheit in Freud in der Gegenwart. Ein Vortragszyklus der Un versi댜ten Frankfurt und Heidelberg zum hundertsten Geburtstag. Frankfurter Beitrage zur Soziologie Bd. 6, Frankfurt a. M. 1957, S.402.
43) H. Marcuse, Triebstruktur und Gesellschaft, Frankfunt. a. M. S. 40.44) 같은 책, S. 40.45) 같은 책, 같은 쪽.말하며,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의해 사회적 생산력이 증대되고, 인류가 풍요로워지면서 각각의 역사단계에서 더 이상은 불필요한 것으로 됨으로써 지속적으로 철폐 • 완화되었어야 할 억압이다. 그러나 현실의 사회에서는 언제나 추가억압의 총량이 기본적 억압을 훨씬 상회했다. 왜냐하면 각 시대의 사회적 지배체제가 지배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기본적 억압을 훨씬 상회하는 추가억압을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가해 왔기 때문이다.
이 같은 기본억압과 추가억압의 범주적 구분을 통하여 분명해지는 것은 인간의 본능구조는, 사회 존속의 성패 여부가 그것의 충족과 억압에 달려 있는 일반적인 생물학적 조건들에 의해서뿐 아니라, 사회적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특수한 조건들에 의해서도 규정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 두 종류의 억압을 구별하지 않았다. 때문에 프로이트는 자연인으로서 인간의 사회화, 문명화의 과정을 쾌락원칙의 지배에서 현실원칙의 지배로 이행하는 것으로서 파악함으로써, 사회 • 문화야말로 인간의 본능을 억압하는 것이라고 올바로 보았으면서도, 라이히, 호르니 K. Horney, 프롬 등의 비판처럼 사회라는 것, 인간이라는 것을 너무나 정태적으로, 즉 존재론적으로 파악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의 문화론에서는 이 현실원칙을 인간에게 과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특정한 역사적 사회체제가 아닐까라고 물을 수 있는 가능성이 근본적으로 상실되고 만다.10 에로스와 죽음의 본능—―프로이트의 생물학주의때문에 프로이트는 문화와 인간심리 사이의 상호작용 가능성의 문46) 같은 책, S.42.
제를 『문화와 문화에 대한 불만 』 에서 사회이론적으로 새롭게 고찰하는 대신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와 같은 생물학적 근거 위에서 사회이론을 근거짓고자 했던 __국종래의 입장을 고수하게 된다. 그는 이번에도 정신분석학을 다시 한 번 자연과학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 두고자 하며, 이때 나타나는 것이 <에로스와 죽음의 본능>이라는 사변적 데제이다 그리고 에로스와 죽음의 본능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되고 있는 프로이트의 2차 위상모델과의 관계에서 특별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가 이 2차모델을 개발해 가는 과정에서 자기보촌 본능과 성적 본능이라는 두 가지 본능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1차모델에서의 본능 이론을 대폭적으로 수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차모델의 본능이론도 성적 본능 내지 에로스와 파괴본능 내지 죽음의 본능이라 불리는 두 가지 종류의 본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성적 본능 내지 에로스는 <전혀 방해 받지 않은 본래의 성적 본능>과 <이 성적본능으로부터 파생되긴 했으나 목적에 있어서 방해를 받은 승화된 본능의 자극 >(XIII 268) 으로서 1 차모델의 자기보존 본능까지를 포괄한다. 즉 1차모델에서 언급되고 있는 두 가지의 본능 전체를 포괄한다. 그러나 죽음의 본능은 1차모델에는 전혀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본능이며, <유기적 생명체를 생명이 없었던 상태로 되돌리고자 하는 >(XIII 269) 생명체의 근원적 본능의 하나이다.
본능론을 이론적으로 크게 수정함으로써 분명해지는 것은, 이미 「쾌락원리의 피안Jenseits des Lustprinzips」(1920)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 문명에 대한 프로이트의 비관적 견해이다. 프로이트의 초기 이론에서는 본능이 단지 맹목적으로 쾌락과 자기보존만을 추구하는 비이성적인 생물학적 근거로 이해되고 있지만, 1차 세계대전의 파괴의 참상을 목격함으로써 프로이트는 본능이 이와 같은 성질의 것일 수만은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즉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단지 쾌락원리만은 아니며, 이 쾌락원리보다 <더 근원적이며, 일차적인 동시에 또한 충동적인 >(XIII 22) 본능이 존재한다고 보고, 이를 프로이트는 처음에는 반복강제 (XIII 17ff . 참조)라 불렀다. 반복강제란 <생명을 가전 유기제 내에 존재하는 강제로서, 이전에 존재하던 상태를 회복하고자 하는> 유기체의 타성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XIII 38). 즉 본능은 더 이상 맹목적으로 쾌락과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로서의 자신의 가장 큰 불행인 생명의 종식을 추구하는 불길한 능력으로도 이해된다. 이로써 쾌락원리와 현실원리, 본능과 억압이라는 이원적 도식, 혹은 본능 ― 자아 一 현실이라는 자아의 합리성에 의거한 자기보존의 구조에 대한 이론으로서의 1 차모델에 근거한 이론체계는 붕괴된다. 왜냐하면 자아에게는 결정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파괴하려는 본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된 본능들은 인간에게 생득적인 불변의 생물학적 조건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 모든 생명체는 단순히 유기체적 조건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이 <내적 근거> 때문에 필연적으로 죽는 것이다. 즉 무기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생명의 최종 목표는 죽음이다 (XIII 40 참조). 죽음의 본능에 비해 볼 때, 자기보존 본능은 보잘 것 없는 작은 것이 된다. 자기보존 본능이란 생명체가 자신의 죽음의 도정을 확보하려는, 무기물로의 귀환을 위한 하나의 다른 가능성일 뿐이다 (XIII 41).
프로이트는 문화의 발전에서 점점 더 심화되기만 하는 신경증의 징후군들과 불행 -최종적으로 『문화와 문화에 대한 불만』 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책의 처음 제목은 『문화 가운데서의 불행 Das Ungluck in der Kultur 이었다』에 대한 설명을 보편적인 생물학적 유전적 가능성(본능)과 본능발전에서 개인과 사회가 겪은 차이의 관계에서 찾기보다는, 오히려 신경증과 인류의 불행을 심화시키는 사회적 장애요소 및 개인의 발전과정의 역사를 궁극적으로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생물학적 원리들로서의 에로스와 죽음의 본능이라는 두 가지의 자연원리 사이의 대결로 환원시키고 있다.이로써 프로이트에게 문화발전의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 사이의 투쟁이며, 나아가 이 두 본능 사이의 투쟁의 변증법을 그는 문화의 형성과정을 통해 내재적으로 규정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이를 존재론화하여 <삶 일반의 본질적 내용 >(XIV 481) 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보게 된다. 즉 에로스와 죽음의 본능이라는 두 가지 사변적 가설을 통해, 바꾸어 말해서 정신분석학적 이론체계가 자연과학으로서 지게 되는 부담을 자연철학으로 덜어 줌으로써, <정신적인 것에 관한 자연과학>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의 위상을 자연과학 안에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그는 이를 통해 최소한 정신분석학의 자연과학성, 즉 정신분석학의 대상이 자연이라는 사실만은 구원 •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실은 그 자신도, 자연과학적 인과관계 설정의 극한점은 결국 자연과학의 영역 가운대가 아니라, 최소한 자연과학의 피안에 있는 자연철학적 영역 가운데 속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처럼 파괴적 행위와, 공격성, 사디즘 등으로 나타나는 문명의 광기를 죽음의 본능이라는 생물학적 조건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프로이트와 관련해서,―프로이트가 주장하고 있는 정신분석학의 자연과학적 근거를 전적으로 존중함에도 불구하고-죽음의 본능이라는 가설은 너무나 쉽게 <인간의 정신적 삶에 대한 관념론적, 형이상학적 사변을 위한 도피처 >47) 로 변질될 수 있기에, 라이히는 생득적 본능으로서의 죽음의 본능이라는 가설을 거부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성격분석 Charakteranalyse』이라는 저작에서 죽음의 본능 가설과 이론적 대결을 꾀하면서, 이러한 가설은 그렇지 않아도 험난하기 짝이 없는 <인간적 고통의 사회학으로 통하는 어려운 도정을>48) 근원적으47) W. Reich, Dialektischer Materialismus und Psychoonalyse, in Reich, Fromm, Bernfeld, Dialektischer Materialismus und Psychoanalyse, Underground Presse, Berlin 1968(Raubdruck), S.15.
48) W. Reich, Clnralcteranalyse, 1933 im Selbstverlag des Verfassers erschienen(o.O.) S. 240.
로 봉쇄하게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따라서 죽음의 본능에 대한 인간학적, 사변적 가설로부터 벗어날 때만이 <죽음의 본능에 관한 이론은 ……인간적 고통에 대한 문화철학에> 이를 수 있으며, 그러할 때 비로소 정신분석학은 <심리적 갈등을 매개로 한 사회적 질서에 대한 비판 >49)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이러한 라이히의 시도에 대해 프로이트의 반응은 조소에 가까운, 매우 부정적인 것이었다. 죽음의 본능이 생득적인 불변의 인간학적 본능인지, 아니면 사회적으로 매개된 본능의 운명인지를 규명하기 위해 라이히가 1932년에 발표한 논문 「매저키스트적 성격」판)에서 프로이트는 죽음의 본능 공격성과 사디즘, 매저키즘-은 인간학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극단적인 욕구불만의49) 같은 책, S. 240.
50) 프롬은 라이히에 의해 제기된 매저키즘의 문제를 권위와 가족· Autoritat und Familie이라는 논문집에 실린 자신의 논문 중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능동적 및 수동저 본능구조의 형성과정에 대한 연구를 통해 더욱 구체화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 표명되고 있는 프롭의 견해를 따른다면, <매저키즘은 사회가 기능하는 데 가장 중요한 심리적 조건의 하나이며, (권위주의적인 자본주의) 사회를 계속적으로 결합시키는 주된 요소가 된다>(E. Fromm, Theoretische Entwtirfe Uber Au ri따 und Familie, Sozialpsychologier Teil in Studien Uber Autoritat und Familie, Forschungsberichte aus dem Institut fur Sozialforschung, hrsg. von M. Horkheimer, Libraire Felix Alcan, Paris 1936, S. 122)고 말하고 있다. 권위주의적 사회는 매조키스트적 성격을 낳고, 이는 사회구조를 안정시킨다. 매저키스트적 성격 혹은 <매저키스트적 사고에 있어서 하나의 공통적인 것은, 개인의 삶이 자신의 의지와 관심 밖에 있는 힘들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같은 책, S.120) 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회적 운동법칙에 속하는 어떠한 객관적 요소들, 현재의 사회를 유지, 고수하기 위해 창출된 모든 법적, 사회적 제도들이 개인들에게 자신들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막강한 낯선 힘으로 나타남으로서 개인들의 무력감이 극대화될 때, 매저키즘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결과로서 생겨난 사회적 산물이라는 라이히의 견해에 대해 거부의 입장을 취한다. 프로이트는 <이 두 종류의 본능의 구분은 완전히 보장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리고 임상분석의 결과가 이 구분이 제기하는 요구들을 지양해 버릴 가능성도 있다 >(XIII 271)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라이히의 해석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페렌치 S.Ferenczi에게 보낸 개인적 서한에서 라이히의 이 논문이 <우리의 죽음의 본능을 자본주의 사회의 영향이라고 보는 넌센스의 극치에 이르고 있다 >51) 고 평가한다.
11 사회이론과의 관계에서 갖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한계정신분석학이 생물학주의를 고수하는 한, 문화가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 가든, 또 사회가 아무리 전보하고 개선되어 간다 하더라도, 인간은 이미 자신의 생물학적 조건들에 의해 필연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이 결정지워진다. 때문에 어떠한 사회개혁도 무의미한 것이 된다. 이 같은 프로이트의 자연주의적 숙명론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넓게는 시민사회에 대한 사회개혁 일반을, 좁게는 마르크스주의적 개혁을 거부하게 만든 궁극적 이유이다.프로이트는 결코 시민사회의 옹호자는 아니었다. 사회의 물질적, 도덕적 존속을 위한 전제로서의 공격성의 제한과 본능의 단념 자체를 불공평하게 일방적으로 한 계급에게만 강요하는 시민사회는 도덕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나아가 현실적으로도 이러한 유형의 사회는 장기적으로 계속 존속될 수 없다고 단언할 만큼 그는 시민51) Brief Freuds an Ferenczi vom 24. Jan. 1932.
사회에 대해 철저히 비판적이었다. 어떤 문화에서 소수 구성원들의 욕구충족이 다른 소수, 아니 다수의 구성원들에 대한 억압을 전제로 하고 있다면, 또 억압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노동을 통해 만들어전 결과로서 재화의 분배에서 극히 작은 부분만을 허락받는다면, 그들이 그 문화에 대해 매우 강한 적대감을 발전시키게 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이처럼 대디수의 구성원들을 불만족한 상태로 방치함으로써 자신을 부정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문화는 장기적으로 존속할 수 있는 어떠한 전망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XIV 501 참조)라는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때문에 그는 한편으로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놓인 광활한 나라 (러시아)에서 현재 행해지고 있는 거대한 문화적 실험에 대한 >(XIV 330) 일체의 평가를 유보하고자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열강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오직 기독교적 경건성을 고수하는 데서 찾으려는 시대에, 러시아에서의 변혁은――모든 개별적인 슬픈 현상에도 불구하고― 낳은 미래의 도래를 알리는 복음과도 같다 >(XV 196f)고 말하면서 러시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거대한 사회적, 문화적 실험에 대한 자신의 호의를 감추지 않고 있다.이러한 긍정적 평가와 호의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당시 러시아에서 행해지고 있던 정치적一사회적 실천이 인간의 사회적 불행을 궁극적으로 종결시키리라는 환상을 품는 데 대해서는 명백히 경고하고 있다. <만일 볼셰바스트들이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혹은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평등을 성립시킴으로써, 인간의 공격성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으리라 >(XVI 23) 는 환상을 갖는다면, 이는 터무니 없는 기대라고 그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사유재산의 철폐에 대한 커다란 공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의 근본적인 심리적 조건들을 고찰하지 않은 채, <만인의 평등이라는 정의에 대한 추상적 요구 >(XIV 482, 473) 에만 근거해서, 과연 어떤 긍정적 결과가 성립할 수 있을지에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비록 법령과 사회개혁의 힘을 빌려 지주로부터 토지와 곳간은 몰수할 수 있을지 모르나, 곳간의 쥐들만을 몰수품목에서 뺄 수는 없듯이, 사회개혁과 법령의 개정을 통한 사회적 변화에 의해 인간의 공격성을 철폐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XIV 482 참조). 때문에 그는 <사유재산의 철폐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공격본능으로부터 분명히 하나의 강력한 도구를 빼앗게 된다. 그러나 사유재산이 강력하기는 하지만, 가장 강력한 도구는 아니라는 것은 틀림없다 >(XIV 473) 고 말하고 있다. 앞의 문장들에서 짙게 베어나오듯이, 인류의 불행을 가져 오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결국 사회적, 문화적 요소로서의 사유재산이 아니라,——-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이 본능으로서 운명적으로 불가피하게 지닐 수밖에 없고, 또 어떠한 문화나 사회를 통한 궁극적인 제거나 길들임이 불가능한――죽음의의 본능에서 표현되는 인간의 공격성인 것이다. 때문에 실천적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본능에 대한 제약을 단지 다른 곳으로 옮겨, 공격적 성향을 밖으로, 가난한 자의 부자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이동시키는 데 그쳤을 뿐 >(XV 195) 이라고 평가한다. 사회개혁은 결국 참정적인 해결방법이 될 수는 있을지 모르나, 이를 통해 인간의 사회적 불행이 근원적으로는 해결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사유재산의 철폐와 관련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해방의 프로그램에 대해서뿐 아니라, 사회개혁적 프로그램 일반에 대해서도 프로이트가 지극히 회의적이었음은 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부정적인 사회관계를 불변의 인간학적 상수로서 죽음의 본능이 표현된 것으로 봄으로써, 어떠한 사회적 변화의 프로그램에도 회의적이었던 프로이트의 태도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자연주의적 숙명론에 근거한 프로이트의 태도가 사회개혁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부정적이었는가 하는 점은 r 정신분석학적 치료의 미래에 있어서의 가능성 Die zukunftigen Chancen der pychoanalytischenTherapie」이라는 논문에서 분명해진다 . 사회적 저항과 관련해서 정신분석학은 한편으로 <사회가 남긴 손상을 가차없이 노정시켜야 >(VIII 104ff.) 하며, 이를 통해 <사회를 보다 전리에 걸맞고 품위 있는 상태로 전환시켜야 한다 >(VIII 115) 고 역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오직 <정신분석학적 계몽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나게 될 사회의 관용 >(VIII 114) 이 이러한 전환을 가져다 줄 것으로 그는 소박하게 믿고 있다. 또 <정신분석학이 기성의 사회질서와 일치할 수 없는 목적들을 신봉한다면 , 교육에 대해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가능성은 정신분석학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 정신분석학적 교육은 자신의 환자들을 선동자로 만들 때, 그것은 자신이 위임받지 않은 책임을 지려는 것이 된다 . 정신분석학은 환자들을 가능한 한 건강하고, 능률적으로 만들어 퇴원시킨다면, 자신의 일을 다 한 것이다. ……나는 심지어, 혁명적인 자들은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바람직하지 않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XV 162) 고 주장하면서, 사회적 개혁프로그램의 목표설정과 실천 방식에 대한 토론 자체를 정신분석학에서 총체적으로 금지시키고 있는 대목에서도 , 사회개혁을 통한 인간 구원의 문제에 대해 그가 얼마나 부정적이었는지가 분명해진다. 또 사회개혁의 목표설정에 관한 토론에서는 <(목표 를 둘러 싸고 벌어지는) 여러 입장들의 논쟁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결정하는 것은 분석가의 일이 아니다 >(XV 162)라는 견해를 그는 고수한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오랫동안 정신분석학을 괴롭히고 있는 물음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된다. 이 물음은 프로이트의 이론이 <인간해방을 위한 노력을 심리학적 차원으로부터 도우며>, 또한 <마르크스의 거대한 이론적 구조물을 유의미하게 보충할 뿐 아니라, 심리학적으로 심화시켜>, <사회적 상부구조를 이해하는 데 기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순에 찬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단지 시민사회를 안정시키는 데만 봉사하는 <몰락해 가는 (시민) 계급의> 철학적산물이 아닌가 하고 묻는다. 52)
정신분석학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갈등들, 사회적 요구와 본능의 목표 사이의 괴리의 큰 부분은 사회적 근원을 갖는 것이므로, 심리적 영역에서만 해결될 수는 없고, 오직 사회적 실천에 의한 변혁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때문에 정신분석학이 추구하고 있는-사회적 기원을 갖는-<의식과 본능의 자기분열die Selbstentzweiung von Bewuβtsein und Instinkt>을 단지 심리적으로만 극복하여, 그 결과 <(사회적으로) 잘 통합된 인격을 성립시키겠다는 (정신분석학의) 목표는 비난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실제 사회에서는 성취되기 어려운, 자아와 이드라는 두 힘 사이의 균형관계의 설정을 개인에게 요구하는 것이며, 또한 이 두 힘은 서로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두 힘 사이의 균형이 성립되어서도 안 된다.> 53) 그리고 정신분석학적 갈등들이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특수(개인)와 보편(사회 ) 사이의 이율배반의 지양이라는 이 념 die !dee der Aufhebung der Antinomie von Allgemeinem und Besonderemm>54)이 시민사회에서 단순한 이데올로기로 머물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따라서 정신분석학이 비합리적인 심리적 기제들로부터 환자를 해방시켜, 치유하는 일에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것이 객관적인 사회적-경제적 관계로 눈을 돌릴 때에 비로소 주어질 것이다. 정신분석학이 환자를 치유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환자를 단지 기성의 사회적-경제적 관계 안에서 잘 기능할 수 있도록 적응 • 순응시켰기 때문52) J. K Friecljung, "Das Revolutionare in Freuds Werk," in Der Kampf 19 (1926), s. 259ff. 참조.
53) Th.W. Adorno, "Zurn Verhaltnis von Soziologie und Psychologie, in Sociologica I," Aufsatze, Frankfurter Beitrage zur Soziologie Bd. 1, Frankfunt. a. M. 1955, S. 26.54) 같은 책, S. 319.이 아니라, 사회적-경제적 관계가 모순에 찬 것일 때, 환자가 진정으로 이에 저항할 수 있는 자아를 성립시켰기 때문이어야 할 것이다.
12 사회이론과 정신분석학의 올바른 관계설정에 대한 전망이하에서는 결론을 대신하여 프로이트 자신에 의해 바록 그것의 필연성이 명백히 의식되기는 하였으나, 구체적으로는 실현될 수 없었던, 사회이론과 정신분석학 사이의 긴장에 찬 생산적 매개, 양자 사이의 바람직한 동반관계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음미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몇 가지 과제들을, 프로이트가 사회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과의 관계에서 행하고 있는 -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분명히 그의 사고 가운데 내재하고 있는一비판적 단서들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분명히 해 보고자 한다.프로이트는 결코 시민사회의 옹호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문화이론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민사회에 대한 비판은 사회적 노동이나, 지배관계, 조직 등에 대한 자료적 연구나 이해가 없이, 오로지 존재론화된 인간학적 상수로서의 <죽음의 본능>을 근거로 해서만 전개되었다.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의 매개라는 획기적인 프로그램의 필연성을 프로이트 자신도 분명히 의식했음에도 불구하고, 방법론상 사회적 체계와 인간의 자연적 근거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매개해야할 것인지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는 사회학적 문제들을 생물학주의와 심리주의의 관점으로부터 단순한 응용심리학적 문제들로 환원하게 되었고, 또 이로부터 그의 자료적인 실제작업들이 많은 모순을 낳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했던 대로다.프로이트의 사회이론과 문화이론이 지니는 이러한 중대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마르크시즘의 결정적인 취약점을 인간학적 및 심리적 요소는 전혀 도외시한 채, 오로지 경제적 요소만을 절대화하고 있는 편협성에서 찾고 있는 것은 매우 올바른 지적이다 . 이때 인간학적 및 심리적 요소란, 인간의 <근원적인 본능의 움직임, 자기보존 본능, 공격성, 사랑에의 욕구, 쾌락은 획득하려 하나, 불쾌함은 회피하려는 본능 >(XV 193)을 말한다. 즉 마르크시즘은 사회적, 문화적 요소로부터 상대적인 독립성을 갖는 인간학적 요소를 등한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사회의 평면적 각인일 수만은 없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인간학적 성질들이 사회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사회화의 영역에서는 마르크스의 이론으로 충분히 파악될 수 없는 분열과 단절, 균열 등을 특징으로 하는 변증법적 과정이 사회와 개인 사이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때문에 인간학적 본성들은 사회가 개인의 사회화 과정에서 갖게 되는 한계를 명백히 해주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화 과정에서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인간학적 본성은 프로이트가 생각하듯이 사회나 문화와는 무관한 생물학적 성격의 것만으로 볼 수는 없다. 심리적 활동의 성립 자체와 그것의 내용은 인간의 생물학적 요인과 사회적 요구가 만나고 있는 교차점에서만 합당하게 규정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요소가 서로 충돌하면서 구성해 내는 심리적 모순은 오직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통해서만 합당하게 이해될 수 있다.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 사이의 긴장에 찬 생산적 관계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는가를 묻는 이 자리에서, 우리들이 우선적으로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프로이트 자신으로 하여금 정신분석학에 대한 잘못된 자기이해를 갖도록 함으로써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 사이의 매개를 불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 이후의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한 논쟁사에서 핵심쟁점이 되어 온, 정신분석학의 과학론적 지위의 문제이다.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성립 이래 시종일관되게 과학주의적-자연과학적 정신분석학의 이상을 고수하고자 했다. 따라서 그는 1908년 이후 벌써 분명해전, 정신분석학적 대상이 한편으로 <자연 대상>이자 동시에 사회적 성격을 갖는 <문화대상>이라는 정신분석학적 대상의 이중성을 합당하게 배려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임상적 분석들이 인간의 심리에 대한 분석을 보다 큰 문화 - 사회이론적인 테두리 안에서 행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점점 더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연과학적인 일반심리학을 정립하겠다는, 과학주의적 자기오해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는 사회이론적 고찰을 향해 정신분석학을 개방하여, 개인적 생활사로부터 사회의 유적(類的) 역사를 재구성함에 있어서 이 역사를 구성하는 절대적 조건들을 함께 고찰하기보다는, 일방적인 심리주의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결국 사회과학적 범주들을 비변증법적으로 자연과학적, 심리학적 범주로 환원하는 데 그치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 한계를 분명히 노출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이미 사회와 문화에 의해 구조화된 인간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정신분석학이 단순히 경험적-분석적 자연과학일 수만은 없으며, 또한 단순히 역사적-해석학적 사회과학일 수만도 없다는 사실, 즉 정신분석학은 적어도 우리 시대의 학문적 수준과 성과에 비추어 본다면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매우 미묘한 학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나아가 사회이론이 인간과 사회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인식을 얻으려한다면 사회와 개인 사이에 전개되는 변증법적 과정을 합당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학적 요소와 심리적 요소도 함께 고찰되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는 프로이트가 사회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심리학적 사실들에 대해 너무 무관심함을 지적하면서 사회이론의 영역 가운데로 정신분석학이 진출할 것을, 즉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의 생산적 접근과 매개를 촉구하는 괄목할 태도를 취하고 있는것은 어떤 점에서 당연한 결과이다. 프로이트의 이러한 입장은, 그의 사상의 최후 시기에 해당되는 1932년, 그가 정신분석학은 아직은 미완성이며, <완결성이나 체계형성에 대한 어떠한 요구도 제기하지 않는다 >(XV 197) 라고 확언하면서도, <인간의 무의식적인 심리적 메커니즘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고, 또한 병적 증상을 야기하는 메커니즘이 환자들 가운데서뿐 아니라 정상적인 인간의 심리 가운데서도 똑같이 작동하고 있음이 점차 분명해짐에 따라 ……정신분석학은 심층심리학 Tiefenpsychologie이되고, 그 자체로서 정신과학 Geisteswissenschaften의 영역에 적용가능하다 >(XIII 228)고 말하면서, 심충심리학적 설명방식을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에 확장해서 적용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그는 사회발전이 자연사적 과정으로서 전개되며, 또한 이 과정에 <경제적 요소가 절대적 우위>를 갖는다는 마르크스의 사회이론의 근본 출발점을 매우 수상찍은 것으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개인의 심리과정에 입각해서 사회화와 직업과 생계의 획득이라는 조건 아래서 태어나는 인간의 보편적 본능과 그것의 인종적 변수, 또한 그것의 문화적 변형이라는 다양한 요소들이 어떻게 서로를 저해하고 촉진하는가를 증명해 낼 수 있다면,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보충해서 진정한 사회이론을 만들 것이다 >(XV 194) 라고 말하면서,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이 매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거부하지는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회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 이론 역시 정신분석학과의 매개를 통해서만 진정한 사회이론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이 문장만을 본다면, 그는 사회이론을 결코 응용심리학의 한 분야로 왜소화시키고 있지 않을 뿐더러, 사회이론을 정신분석학과는 다른 독립적 분과학문으로 인정하면서, 단지 정신분석학의 매개를 통한 사회이론의 보충과 완성을 촉구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프로이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념과 초자아적 요소들의 영향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로써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 사이의 대립에 있어서 가장 주된 부분이 제거되었다 >56) 고보고, 양자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철회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까지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 사이의 관계설정을 그토록 어렵게 한 몇 가지 결정적 이유들 가운데 하나로 지적될 수 있는 사실, 즉 사회이론과 정신분석학이 각기 자신을 하나의 완결된 자족적인 분과학문으로 간주함으로써 너무나 쉽게 자신에게 분업적으로 할당된 학문적인 대상과 영역에 만족하면서, 맹목적인 자율성과 자족성의 가상에 굴복하여 그 가운데 안주해 왔다는 사실은 시정되어야 한다.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 사이의 관계에 대한 반성에 있어서 또 하나의 출발점을 이루게 되는 것은 이들이 각각 자신의 이론적 전제로 삼고 있는 학문적 대상과 영역 및 이로부터 비롯하는 방법론적 자명성에 대한 비판이다. 이는 곧 사회이론의 경우―그것이 경제적 요소의 절대적 우선이라는 신앙에 기초한 상 • 하부구조론에 근거를 둔 마르크스주의적 경향의 것이든, 뒤르켐의 <사회적 사실 faits sociaux> 이라는 테제에 의하여 극명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 시민사회의 그것이든 간에 - 사회학주의 안에서, 그리고 정신분석학은 심리학주의 안에서 안주해 왔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을 의미한다.호른 K Horn은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말하고 있다. <정신분석학과 다른 사회과학 사이에 협조가 어려운 것은, ……개인과 사회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모순이 정신병리학적 범주로부터 직접 사회적 현상으로 이행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생활의 역사와 사회의 유적 역사는 서로 다른 법칙에 따라 전행된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서로 다른 범주들을 필요로 한다.>56) 개인적 생활사로부55) E. Jones, 앞의 책, Bel. ill, S. 403 (Brief an Worrall, 10.9.1937) 에서 인용.
56) K. Horn, "Entwicklungen einer psychoanalytischen Sozialpsychologie," in Wehler(Hrsg.) Soziologie und Psychoanalyse, Stuttgart 1972. S. 72.터 사회의 유적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작업이 통상 실패하는 것은 이 작업이 유적 역사를 구성하는 절대적 조건들로서 노동관계나 지배관계 등을 함께 고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의 유적 역사를 구성하는 절대적 조건들은 결코 심리적인 것으로부터 도출될 수는 없다(심리주의). 또한 역으로 개인의 심리적인 구조나 메커니즘이 곧바로 사회의유적 역사로부터 연역될 수도 없다(사회학주의).
호른도 말하고 있듯이 개인적 생활사와 사회의 유적 역사는 서로 다른 법칙을 따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곧 사회와 개인의 매개가 불가능하다거나, 아니면 양자가 서로 완전히 고립된, 서로 전혀 무관한 것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은, 비심리학적으로 제도적 질서의 구조만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도, 또한 프로이트처럼 심리학적으로 모든 사회적 구성체들을 심리학적 과정들로 환원시키는 것도 아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상반되는 환원론은 모두가 잘못된 것이다. 바람직한 것은, 이 양자 사이에 매우 세밀한 중간단계들을 설정하여, 개인의 심리가 사회적 과정들과 매개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 즉 분업과 지배에 근거한 전체 사회과정이 정신분석학적 작업으로부터 얻은 경험이나 자료와 결합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들 양자를 매개하여 사회와 인간에 대한 보다 광범위하고 객관적인 이해에 도달하는 일이다. 이때 만이 뤼시앵 골드만도 적절히 표현하고 있듯이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문화적 삶에 대한 보편이론으로서 자신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며, 또 그럴 때 비로소 정신분석학은 언젠가 프로이트가 예언한 것처럼 <인문 • 사회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큰 변혁들 중의 하나를 실현시킬 것이다.>57)57) L. Goldmann, Dialektische Untersuchungen, Neuwied, Berlin 1966. S.198.
제 3 장 프로이트의 재담이론
l 전제1) 생성배경빈에서 정신과 의사로 활동하던 프로이트가 44세 되던 해인 1900년에 『꿈의 해석』이 출간된다. 이어서 1905년에는 다시 세 개의 중요한 저작인 「도라의 경우」, 「성이론에 대한 세 논문」 및 「재담 그리고 무의식과의 관계」가 선을 보인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한동안 『정신분석학 입문 』 에만 열중함으로써 재담이라는 주제는 그의 관심에서 멀어진 듯했다. 그후 20년이 지난 뒤 그는 「유머」라는 작은 논문에서 그 사이 새롭게 전개된 영혼의 구조론에 입각해서, 다시 말해 <초자아> 개념을 도입하여 그 전의 재담논문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에 대한 해명을 시도한다. 따라서 이 장에서 다뤄질 프로이트의 재담이론도 우선적으로는 상기한 두 논문을 근거로 한다. 프로이트의 재담논문이『꿈의 해석 』에 연이어 나오게 된 맥락에서 우리는 그들 상호간의 긴밀한 연관성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다.
풀리스Wilhelm Flieβ 는 1899년에 『꿈의 해석』 교정본을 읽고 난 후 꿈이 너무나 많은 재담을 포함하고 있다고 비난했으며, 프로이트 자신도 『꿈의 해석』 초판 주에서 이 사실을 언급했다. 그가 재담이라는 대상에 대해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관심을 가져왔음을 우리는 『꿈의 해석』 중 희극성의 메커니즘을 설명하고 있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꿈에 대해 상세히 연구하면 할수록 프로이트는 꿈이나 꿈과 관련되는 연상들에서 자주 재담과 유사한 구조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꿈해석의 실례들은 바로 이러한 사실의 확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리스는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자신에 대한 <타자의 대변자>였다. 프리스의 의문은 무엇보다도 의식과 가장 동떨어전 심리활동이 어떻게 지금까지 오직 의식에만 유보된 특징을 보여 줄 수 있는가였으며, 프로이트가 꿈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단지 그 자신의 해석이 낳은 산물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프로이트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꿈꾸는 자가 매우 익살스럽다witzig'는 말은 확실히 옳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또 비난할 것이 못된다. 꿈꾸는 자는 모두가 우스꽝스럽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궁지에 몰리고 있다는 위기상황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들에게는 바른 정도가 막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의견 상 모든 무의식적 과정의 재담성은 재담이나 희극이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1) 그렇다면 꿈이 자기 고유의 특칭인 왜곡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갈등상황과 재담성을 어떻게 서로 연결시킬 수 있으며, 이것이 그 심리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로 타당성1) S. Freud, Aus der Artfiingen der Psychoanalyse. Frankfurt a. M. 1962, S.255.
을 갖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프로이트는 이런 의문에 대해 꿈의 제반 사항들은 비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꿈의 표현양식은 고상하고 단순한 표현을 얻지 못하고 익살을 부리는 듯하며 영상추구적으로 우회적인 표현을 얻기 일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의식은 이런 표현을 만들어 내지 못하며, 그런 표현양식의 생산자는 자신의 알 수 없는 또 다른 부분인 <무의식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꿈과 재담성과의 이런 상관관계 의에도 프로이트는 유대인이야기 모음집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뮌헨 대학 교수 립스 Th. Lipps(l851-1914)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립스는 심리학과 미학적 주제를 연구했으며, <감정이입>이란 개념도 그에게서 나왔다. 무의식에 관한 그의 견해와 1898년에 나온 『희극과 유머』 라는 그의 저서는 결국 프로이트로 하여금 재담을 연구하도록 자극했다. 게다가 18세기 이후부터는 유럽 어디에서나 <웃음>이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주제로 여겨졌다. 프로이트가 상정한 재담의 완결조건은 웃음의 창출이었으며, 그는 이러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기 위해 베르그송A. Bergson의 『웃음』 (1900)과 뒤가L. Dugas의 『웃음』 (1902)을 원용했다. 이렇게 밀거름이 마련된 상태에서 프리스의 『꿈 의 해석』 에 대한 비판은 재담연구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프로이트는 그의 논문에서 재담 연구의 필요성에 대해 우선 순수 개인적인 동기부여와 사회에서의 <재담의 매력>이라는 논거를 제시한다. 프로이트는 개인적으로 재담을 재미있게 느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도 새로운 재담은 모든 이의 관심을 끄는 사건과 같다고 여겼다. 마치 승전보와도 갇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세계를 돌아 본 자가 자신이 둘러본 도시와 풍물 그리고 교제했던 유명인사들과 더불어 자신의 자서전에서 빠뜨리지 않고 귀중하게 털어놓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여행 중에 들은 기막힌 재담이라는 것이다. 이런 단순한 발상을 넘어서서 정신적 사건들은 서로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기 때문에, 무관하게 동떨어전 영역에서의 심리학적 인식이 다른 영역에 대해 지금까지는 측량할 수 없었던 가치를 가전다는 통찰 2)이 프로이트가 재담을 연구하는 출발점이 된다. 그러므로 재담 연구가 정신분석학의 응용가능성을 제시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제목이 시사하듯이, 정신분석학은 우리가 재담 현상을 이해 • 분석하며 해명하는 기초 내지 관련점으로 이용되며, 그와 병행하여 정신분석학의 중심적인 개념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프로이트의 재담 연구가 미학에 대한 시각을 열어 준 것은 분명하다. 1907년 프로이트는 문학창작과 백일몽을 비교하는 논문을 발표하며, 문학덱스트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몇 편 내놓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프로이트가 발표한 일련의 마학 관련저작들에서는 미학 자체가 문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재담이나 예술창작은 무의식을 인식하는 또 다른 길로서 파악되었으며, 꿈꾸는 자, 재담가 혹은 작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심리적 과정의 분석이 그의 관심대상이었다. 프로이트는 인문과학적이고 미학적인 주제에 자연과학적인 정신분석학을 적용하여 인간심리의 복합적인 과정을 기술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2) 프로이트 전후의 재담이론의 전개 개요에라스무스 Erasmus von Rotterdam는 1534년 익살스러운 답변, 기지, 일화 등의 모음집 서문에서 위트3)적인 표현은 몇 마디 안 되는 말2) S. Freud, Der Witz und seine Beziehung zum UnbewuBten in Psychologische Schriften Studienausgabe B. IV. Frankfurt a. M. 1982, S. 19 참조
3) 영어로 wit, 독일어로 Witz의 기표를 가지는 것은 그 내용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우선 개념의 생성 전개 과정에 한정될 때 영어 단어의 발음 그대로 <위트>라 칭하고, 19세기에 이르러 Witz가 하나의 텍스트적 의미를 갖게 되었을 때부터는 <재담>이라고 명시하였다.로써 더 많은 의미를, 그리고 직접적으로보다는 암시적으로 이해시킨 다고 했다. 또 그것은 하나의 착상으로서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더 즐길 수 있는 천착적인 요소는 지니지 않는다고 했다. 금시초문적인 착상, 간결성, 예시와 암시적 언어, 기습적인 효과 그리고 희열 등이 위트적인 것의 원천, 형식 내지 효과로서 중요하다고 했다. 중세에 사고력, 현명함, 건강한 오성 등 타고난 성질이라기보다는 후천적으로 획득한 성질을 의미하던 <위트 du wizze>는 17세기 말 프랑스의 영향 아래 그 뜻이 좁혀져 <재치 Esprit>와 같이 통용되어 재기발랄함을 의미했다. 또 재빠른 생각의 연결, 지적 조합력, 정신적 기민성, 연상 능력 등을 가리키기도 했다. 18세기에 들어서서는 이러한 주관적 성향의 지력과 정신 태도의 모범으로서의 위트 개념은 독창력과 판단력, 환상과 예리함이 잘 어우러진 것으로 변천된다. 볼프 Ch. Wolff(『독일 형이상학』(1720))는 위트를 사물 간의 유사성을 지각하는 능력으로 보고 사물 간의 차이를 인식하는 능력과 보완적이라고 간주했다. 또 고체트 Ch. Gottsched(『비평문학 시론』(1751))는 이 정의에 입각해서 위트를 놀라운 비교를 통해 아주 새로운 은유를 만들어 내는 시적 창작력으로 이해했고, 칸트I. Kant는 위트의 기습적인 효과를 강조했다. 위트는 긴장된 기대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변화시키면서 4)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고 했다(『판단력 비판 』 (1790, 54장)).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위트는 상상력의 법칙에 따라 동떨어전 이질적 표상들을 짝짓게 하
4) 이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한 보기로서 <레싱이 어느 날 또 새로운 죄인이 처형되어 매달려 있는 교수대를 지나가게 되었을 때, 그의 동반자는 그에게 처형된 자를 위한 묘비 문을 지제없이 만들어 보라고 했다. 그는 이마의 주름살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말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여기 그가 쉬리라.'> 이 묘비명에서는 기대가 단번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변하기에 웃음이 나온다. 아무것도 보여 주지 못하고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 생각을 줄기게 되는 것이다(W. Preisendanz, Uber den Witz, Konstanz 1970, S.10 참조).
며, 대상들을 종에 귀속시키는 오성적인 특수 표상능력이라 했다. 이것은 그 뒤 18세기의 위트의 원리로 받아 들여졌으며, 19세기에 와서는 새롭게 공식화되었다.
장 파울(『미학입문』;, (1804)) 은 비교할 수 없는 크기들의 유사한 관계, 즉 더 큰 차이 속에서의 유사함이나 때론 동일함의 관계가 위트에 숨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위트는 모든 쌍을 결혼시키는 변장한 신부>라고 재치 있게 표현했다. 쇼펜하우어 A. Schopen - hauer(『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1819)) 에 따르면 두 개의 아주 다른 실제 대상들이 하나의 개념 아래로 들어가도록 강요당할 때 위트를 말할 수 있으며, 모든 웃음은 역설적이고 예기치 않았던 동기에서 나온다고 했다. 낭만주의의 경우 위트는 순수한 창조적 잠재능력으로서 이성적 질서 속에 파묻혀 버린 조정되지 않은 연상 능력이었다. 슐레겔 F. Schlegel(『철학강의』 (1836-1837))의 경우 위트는 <단편적인 천재성>으로서 자유롭고, 유회하는 사고로 구성된다. 의식의 찢겨진 조각으로서 위트는 <무의식적 세계로부터 번개같이> 나타난다고 했다. 피셔 Th. Vischer(『 고상한 것과 희극적인 것에 대하여』(1837))는 내용과 계열에서 서로 이질적인 여러 개념들을 놀랍도록 바르게 결합시키는 노련함이라고 했다. 5). 19세기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위트>라는 단어는 우선적으로 위트적 요소를 가전 작품을 가리키게 되었고, 농담과 더불어 일종의 민담적 장르로서 <재담>이 거론되었다. 1828년 괴테는 위트라는 단어를 특정한 종류의 텍스트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시대에 따라 제각기 강세만을 달리했을 뿐, 위의 모든 개념들은 <동일한 것5) 보기: <베풀린의 은행가 휘르스텐베르그는 어떤 재계 고위인사가 세상이 다 알게 두 남자와 동시에 놀아난 부인과 어째서 이혼하지 않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지라는 질문을 받자 대답하길, '거기에 뭐 이해할 것이 있겠나? 나라도 그 너절한 것에 백 퍼센트 관여하느니 차라리 멋진 것에 한 삼십 퍼센트정도 참여하겠네'>(W.Preisendanz, 같은 책, S. 11 참조).
과 동일하지 않은 것과의 조합 Kombination vom Identischem und Nicht-Identischem> 6) 이라는 공통적 기반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 반해서 프로이트는 금세기 초부터 재담적인 것의 표충적 구조에 몰두한 지금까지의 학자들과는 달리 재담의 심층구조까지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는 인간의 정신활동은 모두 목표를 가지며, 최소한 재미라도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성장과정은 쾌락원리에서 현실원리로의 이행과정으로서, 사회체제가 인정하는 보다 높은 목표를 지향함으로써 유년기적 소망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했다. 억압된 감정, 봉쇄된 생각, 내쫓긴 표상 그리고 충동력의 금기 등은 교육과 문화체계가 생성한 것들이다. 프로이트에게 무엇보다도 문제되는 것은, 앞 장에서도 지적했듯이, 성적 충동과 공격충동의 억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담은 무의식 속으로 순간적이나마 자신을 내맡겨 억압된 충동을 자유로이 풀어 준다는 것이다. 재담의 쾌감은 바로 이 억제에서 오는 소모부담을 절약하는 데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위에서 본 바에 따르면 위트의 원리는 서로 용납될 수 없고, 모순되거나 불합리한 자료, 측면, 범주들의 갑작스러운 통합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재담의 효과인 웃음은 서로 하나가 될 수 없는 것들의 명백한 통일과 연관된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경우엔 단순히 이 원리 뿐만 아니라 재담과의 반응 속에서 풀리고 배설되는 공격성의 경향도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재담이 있다. <모모씨 부부는 꽤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 어떤 이는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 저축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 말에 의하면 부인이 약간 드러누워서 많은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7) 이 재담에서 옷6) H. Hiebel, "Witz und Metapher in der psychoanaJytischen Wirkungsasthetik," in Germanisch-Romanische Monatsschrift NF 28(1978), S. 128- 154, S.132.
7) 처는 S. Freud, 앞의 책, S. 15. 프로이트는 이를 빈의 언론인 스피처 D. Spitzer(1835- 1893) 로부터 인용하였다.
음이 나올 수 있는 까닭은 평소에 억눌린 공격충동과 성적 충동이 그 의성성으로 인해 자유롭게 발산되어 쾌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재담을 프로이트는 기가 막힌 재담이라고 극찬했다. 사소한 소재를 가지고 만든 이 재담은 그가 말하고자 했던 재담의 특수성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재담의 심리적 원천인 공격 충동과 성적 충동의 순간적 발산뿐만 아니라, 그가 재담연구의 전반부 를 할애했던 재담 기법의 핵심을 다 보여 주고 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그 핵심적 감칠 맛을 느낄 수 없지만, 독일어로 설명하면 그 점울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남편에 대한 전술인 <많이 벌었다 ― 얼마간 저축했다>의 독일어는
8) 프로이트는 초현실주의자들에 대한 자신의 영향을 인정하지 않았다. 무의식의 세계를 조형화하기 위해서 가장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기교를 사용하고 있는 초현실주의 예술을 간파한 그는 달리 S. Dali에게 <당신 예술에서 내
관심을 끄는 것은 무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의식적인 것이요>라고 말했다. A. Hauser, 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 Munchen 1973, S.1003 참조.
1929년에 나온 욜레스A.Jolles의 『단순형식들』에서 재담은 다른 단순형식의 장르와 마찬가지로 그 전체가 하나의 정신적 작업이다. 그것은 아무리 단순하다 할지라도 복합적 구조를 가지는 것으로서 항상 뭔가가 해체되고, 구속된 것이 풀어지는 것을 의도한다. 언어유희라는 희극적 처리방식을 통해서 언어의 의미전달과 이해성은 소멸하고, 화자와 청자 간의 구속도 와해된다. 이 해체원리는 언어뿐만 아니라 모든 조건, 원리, 법칙, 규범 등에도 적용될 수 있다. 해체적 의도로 해서 우리 생활 속의 재담과 익살은 혼히 비난의 대상에 대한 조소 -풍자와 반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항상 부정적인 해체만이 아니라 재담과 익살은 긴장의 연속인 우리의 삶에서 정신이완적 수단이 되기도 한다. 긴장을 풀고 정신을 해방시키는 재담은 조소를 뛰어넘어서 농담이 된다. 정신의 해방, 긴장해소는 결코 구속과 긴장의 부정이 아닌 긍정적 의미에서 자유를 의미한다 . 9) 자연과학에 대칭되는 정신과학으로서의 인문학 연구에 구전문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을 총망라하여 종합적인 분석을 시도한 욜레스의 재담이론 역시 프로이트의 이론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학적인 고찰을 시도한 프레스너 H. Plessner의 『 웃음과 울음』 (1940), 리터 J. Ritter의 『웃음에 관하여 』 (1941) 등도 재담연구에 있어서 일대 전환점을 마련한 프로이트의 연구에 힘입고 있는 것이다. 위트는 정신적인 능력으로서, 언어 구조로서, 표현형식으로서 혹은 하나의 덱스트로서 원시시대부터 존재한 언어적, 사회적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술적이기에는 다소 품위가 떨어지고 정도를 벗어난 보잘것없는 것이긴 해도 위트는 그
9) A. Jolles, Einfache Formen — Legende, Sage, Mythe, Ratsel, Spruch, Kasus, Memorabile, Marchen, Witz. Tubingen 1930. S. 247-261 참조
개념정의를 위함이든, 희극성과 웃음 등과 연관시켜서든 끊임없이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어 왔다―풀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데카르트,홉스,루소,칸트,쇼펜하우어,다윈,키에르케고르,보들레르, 베르그송, 프로이트 등등.
이러한 철학적, 심리학적(정신분석학적), 인간학적 그리고 인상학적 관점에서의 위트 연구에 이어서 프라이젠단츠는 재담의 언어적, 문학적 측면을 강조한다.10) 그는 언어형상물로서의 재담을 그 전술대상보다는 진술방법과 양식에 따라 정의되는 텍스트로 본다. 재담의 생산은 특정한 사고와 표상구조에 귀속될 수 있지만, 재담에서의 재담성은 특징적 언어사용의 결과이며, 특수한 진술전략을 통해서 발화된다는 것이다. 재담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위트적 착상이 반복 • 재현되면서 재담이 밋밋하고 평범한 이야기 줄거리로 망가지는 것은 언어적 실패 때문이라는 사실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올바른 진술의 책략이 결여되었기에 <급소 Po i n te>가 파손되는 것이다. 이 급소야말로 모든 재담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형식 구성적인 것으로서 다른 종류의 해학, 익살 등과 재담을 차별화시킨다. 이 급소는 우리의 삶에서 엄격하게 규정된 사물의 질서를 단번에 사소하고 유행에 뒤진 무용한것으로 여겨지게 하는 일종의 <책략 Trick> 이다. 즉 경험모델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사고 강요와 현실 강요로부터 거리를 가지고, 규정된 의견과 감정을 넘어서서, 주어전 사물의 질서로부터 벗어난 일탈적 자세를 취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인간적 가능성이 되는 것이다. 언어적 형상물로서 재담은 결국 프라이젠단츠의 경우에도 <결손적인 현실의 상상적인 극복>)“이라는 인간학적 기능10) W. Preisendanz, 앞의 책, 참조.
11) 분프강 이저, 독서행위 {이유선 옮김)(신원문화사, 1993), 154쪽. 텍스트의 빈 자리 Leerstelle를 자신의 성향과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상상적으로 메꾸어 자기 식으로 텍스트를 구체화하는 독서행위의 인간학적 기능.을 가진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현재 지배적인 현실과 그것이 가리고 있는, 다시 말해 억압하고 있는 참재적 현실이라는 <이중적 구조>는 바로 가장 프로이트적인 것이다. 이 둘 사이의 탈경계화의 가능성을 재담에서 찾으려 했다는 것은 결국 그 부연설명과 강세만을 달리했을 뿐, 근본적인 분석의 기반에서는 프로이트에게 철저히 도움을 받고 있는 셈이다.
2 프로이트의 재담이론l) 재담이론의 비평적 고찰정신분석학을 처음으로 인문과학적 미학적 주제에 적용하려는 프로이트의 재담이론은 경험주의적이고 귀납적인 자연과학적 고찰방법에 의거한다. 프로이트는 우선 경험적 기초로서 담화에서 사용되는 재담의 실례를 관찰하고 귀납적으로 규칙을 산출하며, 어디까지나 <양적 성질의 심리에너지 >12)로서 인간의 심리과정을 기술하려 했다. 그는 지금까지 학술적 전문영역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구두의 하위 문화적 장르를 선택한 것이다. 재담이론은 개인적으로도 관심이 깊었던 유대인 이야기들이 그 근간을 이루며, 어떤 면에서는 유대재담의 해설집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또한 당시 빈의 시민사회 속에서 유통되는 재담의 분석을 동해 폐쇄적인 사회와 문화제도에서 통용되던 엄격한 성도덕에 대한 시민계층의 되폐적이며 도피적인 출구방식 등을 설명하는 일은 당시 유대 지식인의 시각으로 본 세기 전환기 합스부르크 제국의 문화적, 역사적 자료로도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13)12) S. Freud, 앞의 책, S. 139.
이러한 실례 관찰과 분석에 입각한 자신만의 독특한 재담이론의 확립을 시도했던 프로이트에게 기존의 문헌 섭렵은 그리 큰 비중을 가지지 못한다. 다만 그는 장 파울, 피셔 Th. Vischer, 피셔 K Fischer, 립스 등의 연구에서 재담 현상의 간략한 개념 구상만을 살펴보았을 뿐이다. 그가 모은 재담의 기준은 활기성, 사고 내용과의 연관성, 유희하는 판단적 성격, 비슷하지 않은 것들의 짝짓기, 표상대조, <허튼소리 속에서의 의미>, 아연케 함과 깨달음의 결합, 숨겨진 것의 끄집어 내기 그리고 특별한 간결성 등이다 .14) 그러나 이러한 기준과 성질들은 모두 적확한 관찰들이지만 개별적인 규정들로서 하나의 유기체적인 전체로 발전되어야 하며, 결여된 내적 연계의 통찰을 구축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즉 프로이트는 자신의 새로운 이론 전개를 위해서 상술한 개념 전통을 원용한다. 다시 말해서, 유희하는 판단적 성격을 가전 재담의 간결성은 무엇을 창출할 수 있는가? 하나의 올바른 재담이 되기 위해서는 위의 모든 조건을 다 충족시켜야만 하는가, 혹은 몇 가지만을? 그리고 본질적으로 부각된 성질에 입각하여 재담의 분류와 분배 등, 그는 새로운 종합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전의 개별적 인 개념을 동합하고 고전적인 자료를 다르게 분석하고 더 좋은 자료를 발굴함으로써 새로운 결론에 도달하려는 프로이트의 연구 좌표는 그렇기 때문에 복원적이면서도 혁신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13) 이에 대해서는 경향재담 단원에서 좀더 부연하기로 한다. 참고 도서로는 H. Glaser, S. Freuds Zwanzigstes ]ahrhundert. See/enbilder einer Epoche. Materialien und Analysen. Frankfurt a. M. 1979가 있다.
14) S. Freud, 같은 책, S. 18.재담의 기법적 수단과 재담의 담화에서의 사용방식이라는 커다란 두 축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연구의 진행은 다음과 같다. <…… 의 말이 재담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그 <재담성>에 초점을 맞춘 순수한 형식적 • 구조적 측면에서의 재담의 기법 기술이 선행된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재담의 심리적 원천과 쾌락 메커니즘을 탐구 하고 발전사적인 재담의 사회적 뿌리 및 재담 소통의 화용론적 분석이 이루어진다 . 또 재담 논문의 본론이라고 할 수 있는 재담과 무의식과의 관계, 무엇보다도 <재담작업 Witzarbeit>과 <꿈작업 Traumarbeit>과의 유사성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을 통해 공통적인 무의식의 근원을 밝히려고 한다. 더 나아가 희극적인 것과 유머와의 비교를 통해서 <희극적인 것>의 영역에서 재담의 자리매김으로 포괄적인 연구를 완결한다. 재담의 다양한 기법을 넘어서서 심리학적, 발전사적, 사회적 뿌리 뿐만 아니라 또한 <희극적인 것> 안에서의 재담의 체계적 자리매김이라는 한 장르의 형식에 대한 완벽한 서술을 시도한 프로이트의 저작은 스스로 의도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문예학적 분석모델로서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토도로프 T.Todorov는 기호학적 • 구조주의적 으로 프로이트의 논문을 레싱의 『우화이론』과 프롭 Propp의 『동화형태론』의 중간위치에 자리매김하면서 <관찰대상을 가능한 한 가장 상세하고 완벽하게 기술한 것>이라고 극찬한다. 특히 비루스 H. Birus는 프로이트의 재담논문을 문예학에 강한 영향을 미친 문예학적 모델로 간주하면서 단편적인 정의를 유기체적인 전체로 엮은 시도인 동시에 낭만주의적 문학비평 계열에서는 저작으로 평가한다. 또한 <재담성>에만 집중함으로써 기존의 실증주의적이며 정신사적인 것으로부터 형식적 • 구조주의적 문예학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루었다는 점도 언급하고 있다 .15) 분석방법에 있어서도 생산미학적인 관점에서뿐만 아니
15) H. Birus, Freuds "Der Witz und seine Beziehung zum Unbewuβten" als
9M(1o9d0e0ll) , esin. e 2r5 4T-e rx /t9s.o rst .e n2 .a 6n()affl. y참s e 조, .in Freib u rge r lit. p sy야 olog i sche Gesp ra
라 수용 • 영향미학적인 관점에서도 발화자와 수용자의 심리과정을 기술함으로써 현대적인 소통이론을 선취했다. 그와 더불어 또한 문서적 텍스트보다는 구어적 담화로서의 재담의 성공조건을 규명함으로써 일반 언어학적인 화용론을 앞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경제원리에 입각한 쾌락획득이라는 프로이트의 견해는 러시아 형식주의가 미적 지각의 고양을 위해 주창한 <낯설게 하기>, <반자동화>, <지각 어렵게 하기> 등의 방식과는 대치된다. 더구나 인간의 쾌락은 부담경감에서 뿐만 아니라, 그 반대로 또한 어려움을 극복했을 때에도 얻어진다는 점을 감안할 때 프로이트의 생각은 약간 고루하고 단선적이다. 그러나 러시아 형식주의적 발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시적 언어와 산문언어의 구분이었던 반면에, 프로이트의 연구대상은 시적 언어만이 아닌, 인간의 정신생활을 포괄하는 담화로서의 재담의 기능이었다는 사실이 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2) 재담의 기법이 단락에서는 재담의 실례를 관찰하여 가능한 한 모든 재담을 포괄할 수 있는 기법을 서술하려는 프로이트의 귀납적 연구진행 16)에 따라 우선적으로 중요 기법들을 확인해 보기로 한다. 프로이트는 먼저 하이네 H.Heine의 『여행스케치 Reisebilder』에서 『루카의 온천들』의한 구절을 들어 설명한다. 함부르크 출신의 복권판매업자요 의과의사인 히르쉬-히아신트는 부호인 로트쉴트와의 관계를 재담적으로 다음과 다.이 이야기한다.<정말 신의 은총이 있었죠. 나는 살로몬 로트쉴트 옆에 앉아 있었16) S. Freud, 앞의 책, S. 20-85 참조.
고 그는 나를 자기류와 동일한 사람처럼 대했죠, 전적으로 백만가족 처럼요! ……ich saβ neben Salomon Rotschiid und er behandelte mich ganz wie seinesgleichen, ganz famillionar! >
이 말의 내용을 풀이해 보면 로트쉴트는 히르쉬-히아신트를 자신과 동일한 부류의 사람처럼 취급했는데, 말하자면 백만장자의 한 가족으로 대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자의 은혜를 베풀면서 보여주는 교만은 상대방에게 뭔가 불편함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 말에서 가난한 자가 거대한 부 앞에서 느낄 수 있는 씁쓸함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묘한 감정을 진술하고 있는 이 표현이 익살스럽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의 재담적 성격은 바로 그 특이한 발언방식에 있다. 여기서의 기법은 단어의 단축이다. <가족적 familiar> 이라는 단어가 <백만가족적 famillionar> 으로 바꿔 표현됨으로써 여기에 재담적 성격과 웃음의 효과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나를 아주 친밀하게 대해주었는데, 말하자면 백만장자로서 베풀 수 있는 최대한으로. R. behandelte mich ganz familiar, d.h. soweit ein Millionar es zustande bringt.> 여기서 부문장인 뒷 문장은 별 내구력이없기 때문에 사라지고 이중에서 중요한 단어인 <백만장자Millionar>가 첫번째 문장으로 끼어 들어간다. 비슷한 요소인 <가족적 familiar>과 혼합(familiar + Millionar - famillionar) 되어서 두번째 문장을 없애는 데 도움을 주면서 본질적인 것은 그대로 남게 되는 것이다. <나를 아주 백만가족처럼 대했죠. R. behandelte mich ganz famillionar.> 이 단어 자체로서는 이해가 안 되지만 연관관계에서는 의미가 풍부해져서 웃음을 자아낸다.보충적 의미를 띄면서 혼합단어가 형성되기도 하고 가벼운 변화가 가해진 단어압축도 있다. <나는 모씨와 단둘이서 떠났는데, 그는 어리석은 동물이었어. Ich bin tete- a-bete mit ihm gefahren.>17)라는 문장에서 <어리석은 동물 dumme Vieh> 이라는 말 대신에 <머리 tete>에서는 t 대신 b를 넣어 조그만 변화로써 다시 그 뜻이 살아나게 했다. 이같이 <재담적인 것>에 있어서는 그 <짧음>이 무엇보다도 중요하ō며, 그것은 특별한 단축기법에 의거한 것이다.
혼합단어의에도 동일한 자료를 여러 가지 방식에 의거해서 사용하는 압축적 기법이 있다. 앞선 <모씨 부부>의 예는 같은 단어의 배열에 약간의 변화를 가해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아주 재미있는 재담을 만든 것이다. 동일한 단어가 한 번은 전체로, 다른 한 번은 분철로 사용됨으로써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젊은 환자에게 수음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오 나 니 0 na, nie.> 18) 또 사용방식에 따라 같은 단어가 원래의 온전한 뜻을 훼손하기도 하고, 맥락을 달리함으로써 그 뜻이 새로워지기도 한다. <‘잘 지내십니까? Wie geht's?’ 라고 맹인이 절름발이에게 물었다. 그는 대답하길 ‘보시는 바 대로죠 Wie Sie sehen.'> 여기서 동사17) tete-a-tete: 머리와 머리를 맞대고, 마주보고의 뜻을 갖는다. bete: 동물 tete-a-bete: 머리를 동물과 맞대어라는 뜻을 갖는다.
18) 0 na, nie: 전체로서 발음하면 <수음>을 뜻하지만 분철로 발음되면 <오, 에 전혀 몰라요>라는 뜻이다.되고 있다.
동일한 단어가 이중적 의미를 함축한 것으로서 사용된 경우도 여러 예 一고유명사로서의 이름과 보통명사로서의 의미, 사실적 의미와 메타포적 의미, 그리고 원래적인 이중적 의미 등―가 있다. 하이네가 『 하르츠 여행 』 에서 <지금 이 순간에 모든 학생들 이름 Studenten一 namen이 다 내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소. 교수들 중에서도 전혀 이름을 내지 않는 자 keinen Namen(무명의 인물)이 많죠.> 이는 이름-명성의 이중의미를 교묘히 사용한 경우에 해당된다.<칠면피 ―철금고 ― 철훈장 Eiserne Stirne—eiserne Kasse—eiserne Krone>, 이것들은 모두 <철 Eisen>로 만들어전 합병의 경우다. <철로된 eiserne> 이라는 형용사의 의미는 다양하지만 그렇게 특별히 눈에 띄게 대조적이지는 않은 의미이다. 그러나 다중적인 사용을 통해 문장의 엄청난 압축을 가능하게 한다. 뻔뻔스러움과 비양심으로 거대한 재산을 모으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더욱이 그러한 업적에 대한 보상으로 귀족계급의 신분적 상승까지도 가능하다는 설명을 세 마디로 압축하고 있다. 앞에서 서술한 지금까지의 예들은 다양하지만 그중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즉 재담의 성격을 부각시키는 것은 특별한 방식의 단축과 절약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이 다양한 모든 기법들에서 지배적인 응축적, 절약적 경향을 상위범주적 개념인 <압축 Verdichtung>이라 명명한다. 이 압축적 기법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련의 기법들에 대해서는 <자리바꿈 Verschiebung>적 기법이라는 포괄적 개념을 사용한다. 그 실례를 프로이트는 특히 유대인 이야기들중에서 찾아 설명한다.<어느 날 저녁 하이네는 파리의 한 살롱에서 작가 술리와 함께 담소하는데, 파리의 돈 왕(단순히 돈 때문에 그를 미다스 왕에 비교함)이 방으로 들어 왔다. 그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자, 술리는 하이네에게, ‘저기 보세요, 저기 19세기가 온통 황금송아지에게 굽신대는군요.'그러자 하이네는 그 숭앙의 대상을 홀긋 보면서 동시에 보고하는 듯 ‘오, 훨씬 늙은 게 틀림없어요.'> 여기서 황금송아지는 메타포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개인적으로 돈 많은 부자와 관련지워졌다. 작가술리가 말한 의도는 19세기의 사교계도 역시 돈 많은 황금송아지를 숭배하니 황야에서의 유대인 시절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이네는 <인간의 본성이란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군요>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그는 그렇게 자극된 생각의 방향을 슬쩍 돌려서 이중적 의미 -메타포적인 것과 사실적인 의미-를 이용하여 사실적 의미로의 어구부분(송아지를 더 강조해서)을 잡아서 답변하고 있다. <두 사람의 유대인이 목욕탕 근처에서 만났다 . ‘목욕했소? Hast du genommen ein Bad?’ 라고 물으니, ‘아니 왜? 하나가 없소? Fehlt eins?’라고 되묻는다.> 여기서는 <목욕하다 ein Bad nehmen>라는 관용구에서 강세가 <목욕 ein Bad>에서 <얻다, 가져가다 nehmen> 라는 동사에 옮겨가 목욕이라는 명사를 간과하면서 그 같은 답변을 한 것이다. 이 두 예는 단어의 이중의미와 강세의 이동이라는 두 기법이 사용되어 재담적 요소를 창출한 경우다. 이중적 의미의 재담은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단어를 동해서 청자가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하지만 자리바꿈적 기법의 재담은 그 강세 이동이 일어난 생각의 과정을 함축한다. 이 강세의 이동은 생각과정의 방향을 전환시키며, 처음의 주제와는 다른 곳으로 정신적 강세를 이동시킨다. <유대인 중매인이 구애자에게 그 처녀의 아버지는 <살아 있지 않음 nicht mehr am Leben>을 보증한다고 했다. 그러나 약혼이 끝난 뒤에 보니 아버지는 살아 있었고,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구애자가 이 사실에 대해 중매인을 질타하자, 중매쟁이가 말하기를 ‘아니 제가 뭐랍디까? 그것도 인생인가요? Nun was habe ich Ihnen gesagt? Ist denn das ein Leben?'> 여기서 삶(인생)이라는 단어의 이중의미와 자리바꿈은 죽음의 반대의미로서의 뜻에서 삶의 질을 의미하는 어구 <감옥살
이도 사는 것이냐>의 뜻으로 옮겨간 것이다. 이 재담은 중매장이가 저지르는 거짓의 뻔뻔스러움과 재치의 전형적인 혼합물이다.
의견상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사고과정을 비껴 나가는 오류적 사고를 보여 주는 재담도 또한 이 자리바꿈적 기법으로 행해진다. <가난한 자가 자신의 빈곤에 대해서 선서를 하고는 돈을 빌렸다. 바로 그날 돈을 빌려준 후전인은 레스토랑에서 마요네즈에 들어 있는 연어집시를 앞에 놓고 있는 그를 만났다. ‘어떻게 빌린 돈으로 마요네즈 연어를 먹을 수 있느냐, 여기에 내 돈을 쓰려고 했느냐' 고 비난하자, 빚쟁이가 대답하길 ‘이해할 수 없네요. 난 돈이 없을 때에는 돈이 없어서 마요네즈 연어를 먹을 수 없고, 지금은 돈은 있으나 마요네즈 연어를 먹어서는 안 된단 말인가요, 그럼 저는 언제 마요네즈 연어를 먹어야 되죠?'> 이러한 방향전환이나 사고오류적인 논리를 보여 주는 자리바꿈 기법은 모순됨, 허튼소리, 어리석음 등을 보여 주는 재담과도 연결된다. <‘이 죽어 가는 인간들에게는 결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상이 었을 텐데……' 라는 이야기의 구절에 대한 유인물에서 현자가 덧붙이길, ‘이것은 십만 명중 어떤 이에게도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옛 격언에 대한 현대적인 부연은 헛소리임이 명백하다. <거의>라는 단어를 통해서 더욱 그렇게 나타난다. 그러나 경건하게 받아들여진 옛 격언도 역시 헛소리일 뿐이라는 것을 이 재담은 보여 주고 있다. 재담 속의 헛소리는 다른 헛소리를 알아내고 표현해 주기 위한 것이다. <여행을 떠나는 아버지가 친구에게 자기가 없는 동안 딸이 정절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몇 달 뒤에 돌아오니 딸은 임신 중이었다. 물론 친구를 비난했다 그러나 친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드디어 그 아버지가 묻기를, ‘도대체 그 애가 어디에서 잤는가?' ‘내 아들 방에서.' ‘내가 그렇게 부탁을 하고 갔는데 어떻게 아들 방에서 자게 할 수 있나?' ‘하지만 그애들 사이에는 병풍이 있었고, 여기에 자네 딸 침대가, 그리고 저기에 아들놈 침대가 있었네.'‘만일 자네 아들이 병풍을 돌아온다면.' ‘그것 말고는 ……' 이라고 친구는 숙고하듯이 말했다. ‘그렇게 해서 가능했구먼.'> 여기서 친구의 어리석음은 바로 아버지의 어리석음의 거울이 된다. 어떻게 젊은 남자가 있는 집에 과년한 처녀를 맡기려 했는가. 이런 식의 해석적 축소는 재담 속의 어리석음과 재담 그 자체를 없애 버린다. 그래서 허튼소리 재담기법은 정말로 어리석고 무의미한 것들을 드러내면서 더 큰 어리석음과 엉뚱함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또 다른 사고오류는 궤변적 논리이면서도 재담적 요소를 가진다. <중매쟁이가 자신이 추천한 처녀를 싸고돈다. ‘장모가 마음에 안 들어요, 사악한 여자죠’ 라고 청년이 말하자, ‘당신은 장모와 결혼하는 것은 아니잖소, 그 딸을 원하는 것이지.’ ‘그렇죠, 하지만 그 여자는 젊지도 않고, 얼굴도 안 예쁘고.' ‘그건 상관없어요, 그녀가 젊지 않다면, 당신에게 더욱 충실할 게요.’ ‘돈도 많지도 않고.' ‘누가 돈에 대해서 말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돈과 결혼하려 합니까? 부인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고!' ‘하지만 그녀는 곱사등이잖아요.' ‘아니 당신은 뭘 원하는 것입니까? 그녀가 전혀 흠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서는 젊지도 예쁘지도 않고 더욱이 결정적인 흠이 있는 여자가 문제가 되고 있는데도, 중매쟁이는 이 결점들을 조목조목 대어서 모두가 용인될 수 있는 양 말하며, 결코 인정될 수 없는 결점인 곱사등 역시 모든 인간이 받아들여야만 할 것으로 간주한다. 궤변적이며 사고오류를 은폐하려는 가상적 논리가 들어 있으며, 개개의 요소를 개별적으로만 다루고, 합해서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고오류를 자동적으로 연이어 받아들인 경우도 있다. <신랑이 신부를 소개받고 매우 실망했다. 그래서 중매쟁이를 옆으로 불러, 왜 이런 만남을 주선했는지를 넌지시 물었다. ‘도대체 당신 왜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소?' 라고 비난조로 물었다. ‘그녀는 추하고, 늙었고 사팔뜨기에 이도 나쁘고 눈도 짓무르고……' ‘당신 더 크게 말해도 됩니다. 귀도 먹었거든요’라고중매쟁이가 끼어 들었다.> 계속해서 갇은 반응을 보인 사람이 상대방의 발언방법이나 의도에 맞출 수 없는 경우에도 계속 똑같이 반응한다. 습관적으로 반응하면서 상황의 요구에 자신을 맞추려 하지 않는다 말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의 직분과 의도를 잊어 버리고 그 말에만 반응한다. 이러한 심리적 자동주의의 발견은 모든 정체 폭로, 자기 배반과 같은 희극성 기법에 속한다 .19)
동일한 자료를 여러 번 사용하는 데에 있어서 그 표상들 간의 관계, 개념들을 통해서 새로운 제3의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을 합병이라 말했다. <인생은 두 조각으로 나뉘어진다. 첫 반쪽 부분에서는 뒤의 반쪽이 오기를 원하고, 뒤 반쪽에서는 처음 반쪽이 되돌아오기를 바란다.> 둘 사이의 매우 비슷한 관계가 동일한 자료가 된다. 이 관계에서는 방어에서 공격으로 강세가 이동한 방향돌리기 기법이 재미있다.<영주가 자기 나라를 여행하고 있는데,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자기와 같이 고귀한 사람으로 보였다. 손짓을 해서 가까이 오라 한 뒤 묻기를, ‘혹시 너의 어머니가 언젠가 성에서 일한 적이 있느냐?' ‘아닙니다, 전하, 하지만 아버지가 일한 적은 있죠’ 라고 크게 대답했다.> 영주의 공격에 대한 방어로서 똑같은 방식으로 보기 좋게 영주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방어에서 공격으로의 화살돌리기에 재담의 묘미가 들어 있다.반대적인 서술을 통해서도 재담은 성립된다. <이 여인은 여러 점에서 밀로의 비너스와 비교된다. 아주 오래되었고(늙었고), 제대로 된 이도 없고 그리고 그녀의 노란 피부에 몇 개의 흰 반점을 가전 것하며.> 여기서 하이네는 가장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비너스와 일치됨을 근거로 해서 추함을 서술했다. 이 일치는 이중적으로 표현된 성질에19) 우리 나라에서 한동안 유행했던 <최불암 시리즈> 역시 이러한 자리바꿈적 사고오류 재담이라 할 수 있겠다.
적용된다. <어떤 왕이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의과병원을 방문했는데, 마침 다리 절단 수술을 하는 교수를 만났다. 수술이 진전될 때마다 왕은 칭찬의 말을 퍼부었다. ‘브라보 브라보, 나의 추밀고문관이여!' 수술이 다 끝나자 교수는 왕에게로 와서 깊이 고개를 숙이며 묻기를, ‘전하, 다른 다리(의 수술)도 명령을 내리시겠습니까?'> 교수가 그 불쌍한 환자를 수술한 것이 마치 왕의 은총을 바라고 한 듯이 보이지만 실은 그의 수술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러나 그 교수는 자신의 실제 생각과는 다르게, 오직 왕을 위해서 다리 수술을 한 것인 양, 건강한 다리도 왕이 원한다면 또 얼마든지 수술하겠다고 말했다.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반대생각을 말하면서 자신을 표현했다. 이 반대표현을 통한 서술은 아주 강한 효과를 가진 재담기법이며, 이것은 재담뿐만 아니라 아이러니에도 사용된다 . 20)
20) 이에 대한 비근한 예로 <간 큰 남자> 시리즈를 둘 수 있겠다. <아침에 부인에게 밥 달라는 남자>, <외출하고 돌아오는 부인에게 어디 갔다 왔냐고 묻는 남자> 등등. 예전에는 지극히 당연한 요구를 마치 대담한 남편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인 양, 반대적 부연으로써 변화한 남편과 부인의 위상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이와는 달리 동질적인 것 혹은 연관된 것을 통한 서술도 또한 재담이 될 수 있다. 암시적인 이중의미, 생략을 통한 암시 등이 그것이다. <여자는 우산과 갇다. 그렇다면 남자는 아주 편리한 것을 집어든다.> 여자와 우산 사이의 빈자리는 확연하다. 우산은 충분히 비를 막지 못한다. <그렇다면>이 이와 같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편리한 것은 공공 운수기관을 말한다. 여기서 여자를 우산에 비유한 것이 문제되는데 보충 설명과 자세한 연구는 뒤 (2의 3) 재담의 경향성 참조)로 미룬다. 21)
이렇게 앞의 단원에서 사례분석을 통해 기술된 기법들을 프로이트는 크게 두 개의 상위범주에 귀속시킨다. <압축>과 <자리바꿈>이 그21) 비슷한 비유를 사용한 재담의 예:
여자와 남자의 나이에 따른 평가
10 대 20 대 30 대 40 대 50 대 60 대여자 호도 밤 사과 석류 토마토 대추남자 번갯불 성냥불 장작불 연탄불 담뱃불 반딧불암시와 생략으로 빈자리를 남겨 놓은 이 재담은 나이에 따른 성적 능력을 얘기하고 있다. 부연 설명이 없어도 청자 나름대로 해석이 가능할 정도이다. 위 본문에서의 예와는 달리 이는 보통의 가벼운 의설적, 자조적 재담의 경우이다.것이다. 위에서 본대로 재담의 간결함, 혼합단어의 창출, 동일 자료의 중복 사용, 이중적 의미 등이 <압축>적 기법이다. 반면에 논리 방향의 전환, 사고오류, 자동주의적 전개, 간접서술 등은 <자리바꿈>적 기법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압축 메커니즘에서 꿈에서와 동일한 심리과정이 발견되며, 자리바꿈 기법인 사고오류, 모순, 간접서술, 반대적 표현 등은 모두 꿈에서 반복된다고 본다. 꿈의 이질적 면모는 역시 자리바꿈 때문이며, 또 비판과 도덕의 유효성도 상실되어 있다. 간접서술, 암시, 비유, 상정 등으로 꿈사고가 대체되어 표현된다는 점에서 꿈의 표현방식과 깨어 있을 때의 생각방식은 구분된다. 광범위한 <꿈작업>과 <재담작업> 간의 일치점을 해명하고 그 근거를 찾는 것이 프로이트의 재담연구의 과제가 된다. 그러나 경험적 기초에서 조사 • 분류된 기법의 서술을 보면 경험주의적 귀납적 방법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찾아낸 심리기제적 도식이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처럼 진행된다. 그에게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무의식>으로 통한다. 그는 결국 재담과 꿈 사이의 유사성을 말하기 위해서 장황하게 재담기법을 조사 • 분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줄 정도이다. 깨어 있는 삶에서 처리되지 못한 낮의 잔재는 밤에도 자기권한의 에너지를 장악하고 잠을 방해하려 한다. 수면에 별다른 해가
되지 않으면서 소망형성적인 낮의 잔재는 잠이라는 느슨해진 의식상태 속에서 자신을 변형시켜 영상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곧 꿈이다. 이 소망은 교육, 사회 그리고 문화체제 속에서 의식되어서는 안되며, 봉쇄되고, 내쫓기고, 우회적으로 돌려진 표상, 감정, 충동 등, 한 마디로 억압된 것들의 소망충족이다. 억압되어 무의식으로 가라앉은 충동들은 잠재적 <꿈사고 Tra urng edanl
담 Gedankenwitz>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재담은 또 다른 관점에서 분류되기도 한다 . 일반적으로 재담은 자기목적적이고 별 특별한 의도를 가지지 않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특별한 의도 아래 행해지기도 한다. 즉 재담은 경향적이 된다. 비경향적인 재담을 <추상재담> 혹은 <무해재담> 22)이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해재담이 다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의미심장할 수 있다. 다만 그 내용이 보다 문제되는 특별한 의도에 봉사하고자 하는 <경향재담>에 대립될 뿐이다. 프로이트는 재담이론의 이론적 해명을 위해서는 경향적인 것보다는 무해재담이 더 소중하다고 보았다 . 그것은 무해하고 내용이 없기에 가장 순수한 형태적 재담의 문제점들을 보여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실상 인간의 심리기제를 자기 의도대로 더욱 확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경향재담 분석에 더 몰두한다.
22) 추상재담은 Th. Vischer에 의해 명명된 것이고, 무해재담은 S. Freud가 명명 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활동에는 목적과 목표가 있다. 재담도 역시 정신적 과정 속에서 <쾌감 Lust>를 얻고자 한다. 무해재담의 쾌감효과는 대개 절도가 있어서 재담을 들은 청자는 명백한 만족감을 갖게 되지만 단지 가벼운 웃음으로 끝난다. 그러나 경향재담은 항상 갑작스러운 폭소를 자아내게 한다. 이 사실에서 무해재담이 갖지 못하는 특수한 쾌감의 원천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기목적적이 아닌 재담은 흔히 두 가지 경향에 이용된다고 프로이트는 보았다.첫째로 적대적인 재담은 공격, 풍자 그리고 방어에 사용된다. 둘째로 의설적 재담은 <노출 EntbloBung> 23) 로서 성적 충동의 표출에 이용된
23) S.Freud, 앞의 책, S.93 참조. 성적 부분을 노출시키려는 것은 우리의 성적 충동 Libido에 속한다. 누구나 노출적 충동을 가지고 있으나 이는 사회적, 윤리적 규범과 예절 때문에 항상 억압되어 왔다. 이는 아마도 만지는 것, 접촉이라는 일차적 쾌감을 대체한다고 보여진다. 흔히 만지는 것 대신에 보는 것으로도 만족이 성취된다. 어린애는 자기 스스로를 노출시키려는 경향이 있
으며, 이 경향의 과다한 간섭과 억제는 과다노출 충동의 변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자의 소극적 노출경향은 성적 부끄러움과도 연관된다.
അ다. 이의에 냉소적, 회의적인 경향재담으로도 분류했다 24)
우선 외설적 재담의 예를 들어보자. 프로이트적 개념에 따르면 <음담 Zote>은 성적 사실과 상황들을 담화를 통해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성적 흥분을 유발시킨 특정한 사람에게 향해지고 이 말을 듣는 자는 화자의 성적 흥분을 알게 되고 자기 스스로도 성적으로 흥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흥분 대신 부끄러움이나 어리둥절함으로 반응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흥분에 대한 반응과 우회적인 동의만을 의미할 뿐이다. 음담은 우선적으로 여자에게 행해지는 유혹시도였다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접근하고자 노출적 경향의 재담을 사용한다면, 첫째는 자신을 보여 주기 위해서, 둘째는 여자의 상상을 일깨워서 여자 역시 자신의 것에 상응하는 성적 흥분에 촉발되어 수동적인 노출경향의 효과를 갖고자 함이다. 음담은 구애의 말로서 아직 재담은 아니다. 그 말로 곧 여자의 위의 준비 태세가 이루어지고 성적 행동으로 이행되면, 음담의 수명은 짧게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이 구애의 말은 음담으로서의 자기 목적을 가지게 된다. 즉 성적 공격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못할 때 그것은 단지 흥분 유발로 머물며, 여자에게서 나타나는 흥분유발 표시에서 쾌감을 이끌어 낸다. 여기서 장애물에 부딪천 성적 공격은 적대적이고 잔인하다. 성적 충동의 가학적인 요소로 장애물에 대항한다. 여자의 완강함이 음담 형성의 두번째 조건이 된다. 여자의 저항은 대개는 제3자가 있을 때 이루어지는 데, 이 제3자는 음담의 중요 조건이 된다. 그러나 우선 여자가 빠져서는 안 된다. 보통 천민들의 경우에는 술집 여자가 나타남과 동시에 음담이 시작되는 반면, 고상한 사교계24) 같은 책, S.109 참조
의 경우에는 여자가 출현하면 음담은 중단된다. 부끄러워하는 여자를 전제로 한 여흥을 자기들 안에서만 허용하는 것이다. 여자 대신에 듣는 자, 보는 자인 제3자가 음담형성의 조건이 된다. 이렇게 해서 음담은 재담적 성격에 가까워진다. 경향적 재담에는 보통 세 사람이 필요하다 재담생산자, 적대적이거나 성적 공격의 대상이 되는 자 그리고 쾌감을 산출하려는 재담의 의도가 실현되는 제3자가 그들이다. 보통 천민들 사이에서는 음담이 재담형식을 갖추지 않는 반면에 좀더 고상한, 소위 상류사회에서는 재담의 형식적 요건이 부가된다. 음담은 재담적이 되고, 재담이기에 용인된다. 기법은 주로 <암시 Anspielung>인데, 청자가 자신의 상상 속에서 직접적인 의설성으로써 재구성해야 하는 동떨어진 연관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알맹이를 대체하는 기법이다. 음담으로 말해전 것과 암시를 통해 자극된 것과의 불균형이 크면 클수록 재담은 세련된 것이 되며, 점점 높은 사교 모임으로 전출하게 된다. 재담은 자신의 경향에 봉사하면서 무엇인가를 성취한다. 즉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방해물에 대항하여 성적 충동과 공격충동의 충족을 가능케 한다. 이 방해물이란 더 높은 교육단계와 사회화단계에 상응하게 고양된 적나라한 성적 향유의 불능성이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그답게 남녀의 불능성의 강도를 구분한다. 즉 여자는 대상물에 불과하고 인간의 본성을 대표하는 것은 남자라는 생각에 고정되어 있다. 문화와 높은 교육으로 인간 원래의 본성적 심리조직은 억압되고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자연적인 것이 용인되기 어려운 것이 되어 강한 저항으로써 억압된다. 그러나 인간 심리는 이러한 포기를 견디기 어려워 하며, 경향재담은 바로 이 포기된 것을 되돌려 준다.
어린 아이로서 아직 적대감의 기반을 떠나지 못한 우리에게 고상한 인격문화는 후에 욕설을 사용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함을 가르쳐 주며, 두쟁이 용인된 경우에도 싸움에서 사용될 수 있는 수단의 숫자는 더욱 줄어든다. 행동을 통한 적대감 표시를 포기해야만 한 이후 인간은 성적 공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비방의 새로운 비법을 만들어 냈다고 프로이트는 규정한다. 그 목표는 재담을 듣는 제3자도 우리의 적에게 적대적이 되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공격의 대상인 적을 왜소하고 경멸적이며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우회적으로 그를 이기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제3자는 재담을 듣고 웃음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승리를 함께 향유한다. 의식적으로 내놓고 사용할 수 없는 적의 우스꽝스러움은 재담이라는 형식에서는 허용된다. 즉 제한을 우회하여 새로운 쾌락원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앞의 <영주재담>에서 사랑하는 어머니를 비하시키려는 영주에 대해서 그의 높은 지체 때문에 직접 적대적인 대응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 재담은 아무런 위험부담 없이도 비하를 멋지게 앙갚음할 수 있게 한다. 합병적 기법으로 암시를 통해 공격자에게 화살을 되돌려 사용하는 것이다. 의적인 상황으로 인해서 비방과 거슬리는 답변이 방해받는 경우, 예를 들어서 권위적인 고위충에 대한 공격과 비판25)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이 <경향재담>이 선호된다고 보았다.
25) 의적 요인인 권위를 빌린 비방 방해와 내적 요인으로서의 성적 충동억제로부터의 해방을 위해서 사용된 음담적-적대적 재담을 우리는 다음의 재담시리즈에서 볼 수 있다. <도시를 관통[간동]하는 고속도로를 만들어 관광[강간]도시로 만들겠다.> 이것은 기법적으로는 동음어의 이중의미를 사용하여 권위적 인물의 발음 부정확성을 부각시켜 그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동시에 부도덕성이 선거 공약으로 공언되는 현실에 대한 정치적 공격과 의설적 노출경향이 내포된 음담이 결합된 예이다.
<니는 의무[애무]만 하고 나는 사정만 하겠다 > 이것 역시 기법적으로 동음어의 이중적 의미의 사용인데, 바로 권위적 인물의 발음 불능의 결점을 이용하여 음담화된 북미회담의 결과와 표방된 개혁의지를 비꼬는 공격적 재담이라고 볼 수 있겠다.<경향재담>이 성적 충동이나 공격충동의 내적 요인의 억제와 외적상황으로 인하여 직접 내리 깎을 수 없는 위대하고 존경스럽고 힘있
는 자에게 그 화살이 향하고 있다면, 앞에서 본 열등하고 힘 없는 자들에 대한, 즉 일련의 중매쟁이 재담 시리즈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그들의 가련함에서 재담성이 나오는 것이 틀림없다면, 재담의 전면에서 말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뭔가 은폐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고 프로이트는 추측한다. 잠깐 주의하지 않은 순간에 진실을 흘려 버리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위장이 끝났기에 즐거워한다. 이러한 내적 연관 없이 그 자동주의에 압도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중매쟁이의 우스꽝스러움이 그를 호감이 가는 인물로 만들어 준다. 그는 중매가 끝났다고 생각될 때 마지막 남은 결정적 흠을 말해 버리고, 아주 면밀한 논거가 필요한 기회를 이용해서 자신이 봉사하고 있는 자를 경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된 사람이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자신은 이것을 이용해서 밥을 먹고 있는 사람이니 터놓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은폐된 공격의 대상은 사실상 이 결혼 흥정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다. 신부, 신랑 그리고 부모, 아니 중매라는 제도가 공격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재담의 전면에 나타난 우스꽝스러움을 넘어서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인간적 내면의 목소리에 프로이트는 귀기울이는 것이다. 앞의 <마요네즈 연어> 재담에서도 그는 단순히 빚쟁이의 궤변적 논리를 넘어서, 좀더 심오한 핵심을 읽어내려 한다. 돈 없는 남자의 사치스러운 향유는 저급한 것으로서 우리에게 거부반응을 일으키지만, <향유>라는 측면에서만 볼 때 사실은 성취방법을 불문하는 향유지상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보답 받지 못하는 체념과 포기라는 덮개 아래 윤리와 본능 사이의 갈등이 표현된 것이며, 허무주의적인 <오늘을 즐기자>라는 생활신조와도 연결된다고 보았다26). 여
26) S. Freud, 앞의 책, S. 104 참조.
억압된 경향충동의 무의식적 순간적 분출로서의 재담이 갖는 사회적 성격을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인간의 소망과 갇망은 요구가 많고,가차 없는 도덕 아래 이해될 권리를 가전다. 그리고 이 도덕이란 몇몇 안 되는 부유한 자와 권력자들이 언제나 아무런 유예 없이 자신들의 소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이기적인 규율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치료 기술이 우리의 생명을 지켜 주지 못하고, 사회제도가 우리의 삶을 즐겁게 해주지 못하는 한, 도덕적 요구에 대항하는 우리 내부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충족되지 못한 요구는 사회를 변화시킬 힘을 키우지만, 어차피 개인의 요구는 그렇게 지연되고 뭉쳐져 단결되는 것은 아니다. 갈등의 영구 보편적 해결은 없는 것이다.>
기서 프로이트는 재담은 근본적으로 인간 진실의 표출로서 기존의 가치체계 一一도덕, 제도 등등――一에 대한 저항으로 본다.
위와도 연결될 수 있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의 억제로 기능하는 사회제도나 가치체계에 대한 거부감이 우회적으로 표현된 재담을 프로이트는 냉소적 재담이라 부르고 있다. 혼히 이 재담으로써 공격당하곤 했던 제도 중에서 결혼만큼이나 긴박하게 도덕규율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제도도 없다고 보았다. 성적 자유에 대한 요구만큼 개인적인 것은 없으며, 성의 영역만큼 문화가 억압을 시도한 곳도 없다. 27) <여자는 우산과 같다. 그렇다면 남자는 가능히면 편리한 것을 집어든27) 글라저 H. Glaser는 프로이트의 재담론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그 당시 사회에서의 소통적 불협화음을 재담 속에서 보여 준다고 했다. 재담은 무의미Unsinn로 가득 찬 의미위기 Sinnkrise를 드러 내는 대화의 중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다루고 있는 문제는 바로 문화적 성도덕에 대한 고통, 규범과 금기로부터 (재담의 도움으로) 탈출하려는 시도라고 했다. 당시 문화적으로, 제도적으로 억제된 <성>은 그 도피구로서 포르노 문학과 화려하고 고상한 의관을 한 사창가를 만들어 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성이 상품화되는 포르노는 음담의 도움을 받아 구두화(口頭化)된 성의 품질을 표시하고 있었으며, 포르노적인 통속예술은 사실은 공공 도덕을 거의 어기지 못했다. 유곽은 검열받지 않은 성의 무대로 안락하고 은밀한 향유를 위해 살롱적 외관을 갖추기도 했으며, 매춘부라는 상품을 내놓는 자본주의적 장사였다. 일차대전까지 유럽에서 매춘 행위가 얼마나 확대되었는가 하는 사실을 현세대는 거의 상상도 못할 정도라고 츠바이크 S. Zweig는 증언하였다. H. Glaser, 앞의 책, S.115-124 참조
다.> 이 재담의 기법은 아무런 재담성도 없는 엉뚱한 비교(여자 : 우산), 암시 ( 편리한 것 = 공공 교통수단) 그리고 불가해를 중전시키는 생략이다. 풀어서 말하면 정욕을 피하기 위해서 남자는 결혼을 한다. 그러나 결혼은 좀더 강한 욕구 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마치 비를 피하기 위해서 우산을 쓴다 해도 비에 젖듯이. 두 경우 모두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한다. 뒤의 경우는 공공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앞의 경우는 손쉽게 돈으로 여자를 산다. 재담은 이렇게 해서 냉소주의로 보완된다. 결혼이 남자의 성적 요구 를 만족시키는 행사가 되지 못한다고 공공연하게 떠들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재담은 이것을 다양하게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다. 인간의 본능적 욕구와 전실을 억압하는 제도와 도덕으로부터의 비판적 해방을 주장하는 혁명적인 프로이트도 막상 여성에 대해서는 보수적 성향을 그대로 보이고 있다. 대부분 여자 환자들로부터 성적 본능의 억압에서 결과된 히스데리 등 병적 현상의 분석을 이끌어 냈으면서도,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적인 그의 여성관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기에 <인간>이란 개념 속에서 그는 다만 <남성>을 지칭하고만 있다. 따라서 인간 욕망의 기표로서의 <남근>이론은 비판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이트 이론의 부정적 측면은 시대적 명성이나 유행에 따르지 않고 인간 정신의 심연 탐색에 철두철미하게 몰두한 학자적인 양심과 그로부터 그가 보여 준 혁명적인 결과로 조금이나마 상쇄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염세적인 냉소주의적 재담의 예를 보자. <한 난청자가 의사에게 진찰을 하러 왔다. 의사의 진단인 즉, 그가 너무 많은 독주를 마셔서 귀가 먹은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금주를 권했고, 환자도 약속했다. 한참 뒤에 의사가 길에서 환자를 만나 안부를 물으니 고맙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크게 소리지르실 필요가 없습니다. 의사님, 제가 술을 끊었더니 다시 잘 들을 수 있습니다.’ 얼마 후에 다시 만나, 의사는 평상시 목소리로 그의 건강상태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나 그는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어떻다고요? 뭐라고요?' ‘제가 보기에 당신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군요’ 하고 의사는 귀에 대고 크게 외쳤다. ‘당신 말이 옳아요’ 라고 난청자는 대답하며, ‘저는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허나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이유입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동안에 저는 잘 들을 수 있었지요. 그러나 제가 들은 것은 그 어떤 것도 술만큼 좋지 못했답니다.'> 기법상 이 재담은 하나의 <구체화 Veranschaulichung>이다. 이야기의 기술은 웃음을 자아내게 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뒤에는 슬픈 의문―과연 그 남자가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인지 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염세적인 이야기들이 암시하는 유대인의 다양하고 절망적인 비참함에 프로이트는 관심을 두었던 것 같다. 경향재담은 자기 스스로를 비판하는 경우에 더욱 효과적인데, 이는 개인들의 집합체인 한 민족에게도 해당된다. 유대 민족의 생활 밀바닥에서부터 우러나온 재담은 남에 대한 공격적 경향을 보이기보다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조적이며 냉소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경향이 질다. 어느 민족보다도 자신의 결점과 장점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은 누구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바라보고 있다고 프로이트는 믿고 있었던 것이다.
4) 쾌감메커니즘과 재담의 심리적 원천(1) 심리부담의 절약재담의 사고내용에 대한 쾌감과 원래의 재담적 쾌감이 서로 혼합됨으로써 우리는 재담의 재미를 만끽한다. 따라서 재담에서의 쾌감은 두 가지 원천을 갖는다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하나는 말해지는 방식인 기법이요, 두번째는 그 내용과 관계되는 경향이다. 이 두 원천에서 어떻게 쾌감이 나오는가라는 쾌감작용의 메커니즘을 그는 경제원칙에 의거하여 <절약>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가 경향재담을 장황하게 설명한 것도 이 쾌감작용을 용이하게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내적 요인으로든 의적 요인으로든 경향실행이 방해될 때 재담의 도움으로 이 억제가 소멸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순간적인 무의식적 표출인 재담으로 경향의 충족이 이루어짐으로써 억제가 해체되고 이 억제와 결합된 <심리적 적체>가 풀어지는 것이다. 내적 요인에서는 이미 존재한 <심적 장애 Hemmung>가 제거되고, 외적 요인에서는 새로운 억제의 생성이 불필요해전다는 것이다. 이 심리적 억제를 유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산하는 데에도 <심리적 경비부담>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경향재담에서 쾌감의 획득은 절약된 심리적 경비부담에 상응한다.> 28)
이렇게 억제와 억압에서의 부담절약이라는 경향재담의 쾌감작용 원리는 이제 반대로 기법적 원천을 가진 무해재담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단어재담 중에서 심리적 관점이 단어의 뜻이 아니라 그 발음에 맞춰지고, 그 사물개념과의 관계에서 주어진 뜻 대신 음향적인 단어개념이 등장한다. 여기서도 심리작업이 매우 가벼워진다고 여겨진다. 동일한 단어나 비슷한 단어를 사용해서 하나의 표상범주에서 다른, 동떨어전 범주로 나아감으로써 재담의 쾌감이 느끼지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것은 바로 심리적 경비부담의 절약으로 귀착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프로이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로스 Groos 를 원용하여29) 재발견 내지 재인식행위는 인간에게 쾌감을 일으킨다고 상정한다.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있을 때에도 매번 잘 알려진 것을 다시 발28) S. Freud, 앞의 책 , S. 112.
29) 같은 책, S.115 참조.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의 향유는 이 재인식에 기초한다고 했다. 그로스도 『인간의 유회 Die Spiele der Menschen (1899) 에서 재발견은 기계화되지 않은 곳에서는 항상 쾌락과 결부된다고 하였으며, 단순히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쾌감이 동반된다고 했다. 인식에서의 만족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서 오는 기쁨에 기인하기에 인식 자체가 즐겁다고 했다.견하게 된다는 공통점을 지니는 위의 경우에서 <기지(旣知의) 것을 재발견하는 일>이 재미있다고 했으며, 이 쾌감은 바로 아는 것을 다시 발견하는 부담절약에서 온다고 보았다 . 여기서는 그것으로 지배할 수 있는 어떤 힘에 대한 줄거움 또는 난관의 극복에서 쾌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식 그 자체, 즉 심리부담의 경감에서 쾌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30) 각운, 압운, 후렴 등 그리고 문학에서의 비슷한 단어음의 반복적인 형식은 이처럼 인식 그 자체, 즉 심리부담의 경감을 통
30) 프로이트의 이러한 재인식 - 재발견으로서의 유희 개념과 쾌감원 이론은 후기에 가서 많은 변화를 겪는다. 배버 Weber는 이를 동일한 것의 자기애적인 재인식이라고 재정의하면서 후기 프로이트의 경우 자기에 이론의 전개와 더불어 그의 유회개념은 변화했다고 본다 . 동일한 것의 재발견 , 반복 등은 내적 성질이라기보다는 자기애적인 동일화로 기술된다는 것이다. 자아는 타자의 자리를 접하면서 자기 안에서 타자를 보충하고, 자신의 타자성을 제거하면서 다시 자신의 위치에 도달하려 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것을 다시 발견하고 반복하고 그리고 재인식하려는, 그리고 차별적 운동을 동일성의 운동으로 변화시키려는 소망이 바로 그것의 한 표출 모습이라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실로 묶은 실패를 침대 믿으로 숨겼다-꺼냈다 하는 놀이는 바로 <사라짐과 다시 나타남>의 완벽한 표본적 놀이인데, 여기서 프로이트는 재발견의 경제성이나 심리부담의 절약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배제하려 했던 힘에 대한 관계 논리를 도입한다. 어린애를 떠난 엄마에 대한 복수충동 등, 반복된 체험 자체가 쾌락원이 되지못하고, 오히려 어린애 유회 뒤에 숨은 충동력- 활발한 장악력, 복수, 경쟁 - 이 우세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베버는 언어유희 역시 원래적이고 순전한 것이 아니며, 자기애적인 나에게만 재미있다는 것이다. 리듬표본이나 운을 사용한 여러 형식의 반복은 동일시가 차이의 인식보다도 단순해서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타자를 자신의 한 변형으로 환원하려는 자기애적인 나의 이해에도 맞아 떨어지기에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희와 의미를 상충관계로 보려는 프로이트의 노력은 효력을 잃는다고 보았다. 베버의 이러한 비판은 다음 단원에서의 유회개념에도 적용된다고 본다. Weber, Freud Legende. Vier Studien zum psychoanalytischen Denken(Ubs. v. M.Scholl). Wien 1989. S. 96-100 참조해서 재미를 제공하는 것이고, 기지의 것을 재발견하는 유희의 실현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가 재담기법에 대해서는 아주 탁월하게 서술했으나 이 기법이 청자에게 쾌감을 촉발시키는 것을 언어소모의 절약 내지 사고작업과 지적 소모의 절약으로 본 것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프라이젠단츠는 비판한다. 재담에서 생겨나는 쾌감은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서 극복된 저항에도 기인한다는 것이다. 즉 절약된 사고부담보다는 오히려 이해하기 위해서 불러들인 지적 소모를 더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1)
사고오류 등 자리바꿈의 기법이 사용된 재담은 재발견과는 거리가 있지만 이것도 역시 심리소모의 절약 내지 경감의 관점에서 설명된다. 그에 따르면 이미 취해진 사고의 도정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것을 고수하는 것보다는 쉽다. 차별되는 것을 하나로 합하는 것보다는 서로 상반되게 하는 것이 더욱 용이하며, 논리적으로 바난받는 결론 방식을 관철시키는 것이 어떤 때는 더욱 편안하기도 하다. 단어나 생각들을 엮어서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조건들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심리적 쾌감을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재담작업이 쾌감의 원천이 된다는 것은 이질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열등한 지적 작업이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줄거움을 주는 것은 재담이라는 특수 영역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재담의 언어와 구조는 청자의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충족시켜 준다. 또 그 기대 도식을 붕괴시키면서 충족시키기도 한다. 기대 충족의 논리를 단순히 심리부담의 절약으로만 해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프라이젠단츠에 따르면 재담의 핵심은 항상 청자가 채워야 하는 빈자리에 있으며, 이 빈자리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재담이 기대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콘텍스트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엄마, 나 할머니하고 놀아도 돼?'31) W. Preisendanz, 앞의 책, s. 24f. 참조.
라고 아이가 묻자, 엄마가 대답하길, ‘안 된다, 관이 닫혀 있단다.'> 여기서 엄마의 <안 돼>라는 대답은 기대될 수 있는 결과의 하나이지만, 뒤따르는 암시로 말해진 것을 통해 우리의 기대도식을 깨뜨려 버린다. 그러나 아이가 할머니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면 엄마의 대답은 극히 당연한 것이다. 상이한 콘덱스트에 근거한 기대도식과 기대 충족의 엄청난 단절은 암시와 함께 그 핵심이 된다는 것이다. 단절에는 기습적인 것, 예기치 못함과 금시초문의 것이 있다. 이 새로움의 충격이 재담이 보여 주는 쾌감효과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32)
문학이론 전개선상에서 비교해 볼 때에도 프로이트의 이러한 단선적인 경제 원리적 해석단초는 러시아 형식주의의 <낯설게 하기>, <반자동화>, <지각 어렵게 하기> 등과 비교해서 전부해 보인다. 물론 앞서 설명한대로 시적 언어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생활담화도 다룬 프로이트의 대상범위를 고려해야 할 것이며, 더 나아가서 프로이트는 인간 심리과정을 어디까지나 양적 에너지의 이동과정으로 기술하려 했다는 차이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근거에서 전개한 여러 가지 결과가 꼭 전부한 것만은 아니었다. 비루스가 지적 한대로 여러 가지 기법의 목록화는 초기 형식적인 시적 희극성 이론을 선취한 것이며, 각운, 압운, 후렴 등의 반복형식이 재담과 같은 쾌감원을 가진다는 사실 발견과 소리-의미연관의 관련성 등 야콥슨의 주장과 유사한 생각은 현대문학 이론을 선취한 것이나 다름없다 .33)3323)) H감.은B ir 책u, s, S앞. 2의.8. 참책,조 s . .'l:1 0 참조. 야콥슨은 소리 一 의미연계의 관련성을 시의 등가원리라 하였다. 죽 동일하거나 비슷한 단어음 뒤에 있는 동일한 의미에 대한 기대가 잘 유지되고, 동시에 단어의 유사성으로서 다른 의미와의 본질적인 유사성이 보일 때 좋은 재담이 생긴다고 하였다.
(2) 유희 -농담-재담
재담이 주는 쾌감의 심리적 원천 규명과 더불어 프로이트는 경향재담의 작용메커니즘의 공식을 더 상세히 해명하고자 유아기 놀이로 소급해서 재담의 성립 발전단계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놀이 Spiel>와 <농담 Scherz>은 재담의 두 전 단계이다. 어린아이가 단어와 생각을 나열하는 것을 배울 때, 놀이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자신의 능력을 연습해야 할 충동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했다. 여기서 유사한 것의 반복, 알고 있는 것의 재발견, 동일음 등에서 귀결되는 쾌감작용과 만나게 된다(각주 30) 참조). 이 쾌감효과로 어린아이는 단어의 뜻이나 연관을 고려하지 않고 놀이를 계속한다는 것이다. 단어와 사고의 유희 및 절약의 쾌감효과로 유발된 재담이 곧 그것의 첫번째 단계라 명명했다. 그러나 발전된 비판이나 이성의 개입으로 유아적 놀이는 더 이상 우연적인 재발견으로부터 쾌감 얻기가 어려워진다. 유희에서의 쾌감획득을- 가능케 하고 동시에 이러한 비판적 요구를 침묵시키는 것이 농담이라는 것이다. 단어의 무의미한 조립과 생각들의 모순되는 나열이 하나의 의미를 가지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단어와 생각의 형상을 위해 모든 재담적 기법이 동원된다. 다만 농담과 재담이 구분되는 것은 농담은 비판이 금지된 것을 가능케 해서 얻는 만족만을 우선하고, 그 문장의 의미는 어떤 가치와 새로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로키단스키가 아들 네 명의 장래 직업에 대해 한 말 ‘둘은 치료하고 둘은 울부짖고 Zwei heilen und zwei heulen'> 라는 농담에서는 의사와 가수라는 직업에 대한 정보가 틀리지 않았고, 다만 재미로 달리 표현했을 뿐인 농담의 예이다.이제 결론적으로 정리한다면 경향재담의 작용원리는 다음과 같이 공식화될 수 있을 것이다.34) 재담은 단어와 생각을 자유롭게 사용하면34) S. Freud, 앞의 책, S. 129f. 참조.
서 쾌락을 유발하려고 유희로 시작한다. 이성이 강화되면서 단어와 유희가 무의미해지고 생각과 놀이도 어리석은 것으로 거부되면, 재담은 이 쾌락원을 고수하면서, 헛소리는 해방시키면서 쾌감을 얻고자 농담으로 변한다. 농담은 무경향적이다. 단지 쾌락을 창출하려는 의도만을 가지기에 자신의 전술이 허튼 소리이거나 아무런 내용이 없는 데에도 만족한다. 아직 경향이 없고 원래적인 재담으로서의 농담은 생각에 도움을 주며 비판적 공격에 대해 무장한다. 여기서 쾌락원의 혼동원리가 쓰이며, 드디어 전희원리 Prinzip der Vorlust35)에 따라 농담은 내적 억제를 제거하기 위해 거대한 억제와 싸우고 있는 경향 편에 서게 된다. 이성 -비판적 판단-억제는 그가 차례로 싸워야 하는 대상이다. 원래적인 단어쾌락원을 고수하며 농담의 단계에서 억제 제
35) 간단히 말해 경향재담의 경우, 우선 단어재담으로서의 기법적 유희가 유혹 의 프리미엄 Verlockungspramie으로 작용하고 그로부터 얻은 작은 쾌감이 더 큰 쾌감을 위한 전회로서 쾌락원의 발판이 된다. 금지되고 억압된 소망의 충족이라는 경향에 봉사하면서 앞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쾌락을 얻게 된다 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성이론에 관한 세 개의 논문」에서 성행위에서의 전희작용에 대해 상술하였고, 『작가와 공상』에서도 창작행위에서의 전회의 역할에 대해 언급한다. 예를 들어 문화적 제약으로 욕설은 품위와 예의의 문제가 되어 욕 섣 뒤에는 늘 불쾌할 뿐이다. 그래서 욕설로 사용되는 단어와 생각에서 재담 을 만든다. 억압이 방해하지 않는 단어유회라는 쾌락원에서 재미를 끌어낸 다. 재담화된 욕설은 허용되기에 새로운 쾌락을 낳는다. 억눌린 경향이 재담 쾌감의 도움으로 더 큰 억제믈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욕망의 충족은 재담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그와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커져서 이전에 억눌린 경향이 아무런 감소 없이 관철된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쾌락원의 혼동원리). 다른 쾌락가능성이 저지당해서 자신만으로는 아무런 쾌락을 유발 시키지 못하는 상황에 쾌락전개 가능성이 합류한다. 제공된 적은 양의 쾌감 의 도움으로 매우 크고 그렇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양의 쾌감을 얻는다. 더 큰 쾌감을 얻고자 사용되는 쾌감을 전회라 하였고, 그 원리를 전회 원리라 불렀다.
거를 통해 새로운 쾌락원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다. 쾌락은 <유희쾌감 Spiellust>이든 <제거쾌감 Aufhebungslust>이든 모두 심리적 부담의 절약에서 도출된다.
5) 사회적 과정으로서 재담-소통을 통한 재담의 완결재담은 쾌락획득을 위해 개발된 유희이며, 쾌락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정신적 작업중에서 가장 사회적인 것으로서 그 이해 조건이 엄격한 것으로 규정된다 . 재담의 형성은 그 착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착상의 전달을 통해서 미지의 재담과정을 완결시켜야 하는 그 무엇이 남아 있다. 즉 재담은 결코 혼자서는 즐길 수 없다. 재담작업은 전달로의 열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희극적인 것 das Komische>은 전달됨으로써 그 즐거움을 더할 수도 있지만 역시 혼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반면에, 내 머리에 떠오른 재담에서는 커다란 만족을 느끼더라도 혼자 웃을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희극적인 것은 두 사람이 필요하다. 나 그리고 내가 희극적으로 느끼는 남, 즉 나와 이 대상인물로써 희극적 과정은 충분하다. 제3자는 있어도 좋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단어와 생각과의 유희로서 재담은 우선 대상물이 필요하며, 농담의 단계에서 벌써 그 결과를 전달할 제3자가 필요하다. 재담생산자는 경향억제의 제거로 인해 쾌락을 얻지만 웃음으로 배설할 수는 없다. 자유로워진 에너지가 심리내적으로 다르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심리부담적인 양에 해당되는 재담작업이 일어나는 것이다. 재담작업으로 얻어전 전희는 억제제거를 계속 떠맡는다(각주 35) 참조). 그것은 제거에 필요한 힘을 스스로 조달함으로써 쾌락을 제공하게 된다. 재담을 듣는 제3자에게서 재담생산자의 심리과정이 추체험적으로 비슷하게 진행되며, 결과적으로 그는 아주 적은 부담으로 재담의 쾌락을 얻는다. 재담을 들음으로써 그에게도 역시 같은 표상이나 사고 결합이 일어나며, 그 과정도 커다란 내적 방해물과 부딪친다. 이 경우 제3자도 똑같은 부담의 몫을 두자해야 되는데, 그는 이때 이 양을 절약한다. 억제에 사용된 점유에너지가 재담을 들으면서 금지된 표상을 만들면 불필요한 잉여물이 된다. 이것이 다른 주의력에 분산되지 않으면서 웃음으로 배설되는 것이다. 36) 제3자의 웃음은 처음의 발설자에게로 전염된다. 나의 재담발설은 남을 웃기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내가 웃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36) 웃음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프로이트는 스펜서, 뒤가, 베르그송 등을 원용한다. 스펜서에 따르면 웃음은 정신적 흥분의 배설현상이며, 이 흥분의 심리적 사용이 갑자기 방해물에 부딪친 것에 대한 증거이다. 웃음은 단지 의식이 깨닫지 못한 채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변화할 때 생긴다. 뒤가는 웃음을 하나의 긴장해소로 보았다. 웃음은 이전에 어떤 심리적 길을 점유하는 데 사용된 심리에너지의 양이 사용될 수 없게 되어서 자유롭게 배설될 수 있을 때 생긴다고 프로이트는 결론내렸다. S.Freud, 앞의 책, S.138 참조.
따라서 재담의 기법은 두 가지 경향에 봉사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그것은 처음의 발설자에게 재담을 가능하도록 해주고 제3자에게는 가능한 한 커다란 쾌감효과를 부여하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으로부터 보호하는 일과 전희메커니즘이 가령 전자에 속한다면 그밖의 다른 것은 모두 후자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재담이 야기하는 웃음은 그 형식이 마련하는 <전희> 그리고 금지되거나 억압된 소망의 실현으로 생기는 <마지막 쾌감 Endlust>에서 연유한다. 재치 있는 반응이나 기지에 찬 급소가 사회적으로 허용될 때만이 재담의 전달 교환과 이해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만족은 억제부담을 순간적으로 제거한 결과이다. 이때 화자와 청자의 관계는 범죄자와 공범자의 관계37)와 비슷하다. 만일 청자가 웃지 않는다면 재담적인 것은 창피스러울 뿐이다. 안심하게 되는 청중의 공범자적 반응을 통해서 수
37) W. Schonau, Einfuhrung in die psychoanalytische Literaturwissenschaft. Stuttgart 1991. S. 49 참조.
치와 죄의식이 해방되는 것이다. 청자의 웃음은 화자의 웃음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서 고해성사 뒤의 사면에 해당될 수 있다. 즉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문화적으로 제도화된 긴장완화와 죄의식의 경감이 문제되는 것이다. 38) 이렇게 재담을 사회적 과정으로 이동시켜 재담완결과정을 설명함으로써 프로이트는 어떤 의미에서 현대적 소통이론과 화용론을 선취하고 있고 , 더욱이 다음 단원에서 해명될 희극성, 재담 그리고 유머와의 차별적인 관계를 서술함으로써 심리학적 문예이론을 시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6) 재담이 꿈과 무의식과 갖는 관계재담이론을 집필하게 된 동기에서 볼 때 이 단원은 아마도 프로이트가 재담이론을 통해 주장하고자 한 것의 핵심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꿈의 해석』이 이해 받지 못하고 비판받는 것에 대한 일종의 반론을 제시하기 위해 그는 재담을 연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재담이론은 무엇보다도 꿈이론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무의식>에 대한 변론으로도 기능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란 지금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지금 주의하고 있지 않은 어떤 것, 전정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보충해야만 하는 그 무엇이라고 주장한다.39)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는 무의식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많다는 것이다. 『꿈의 해석』에서 <무의식으로 통하38) 같은 책, S. 50. 참조 .
39) S. Freud, 앞의 책, S.152 참조.는 지름길>이 기술되었듯이, 재담론에서 프로이트가 궁극적으로 의도한 것은 재담은 주체의 지배를 벗어나는 무의식적 순간들의 표출물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일이었다. 재담은 무의식의 억압된 내용을 해독할 수 있게 하는 꿈, 실수, 심리적 칭후, 특정한 신체칭후와 동일한 계열에 선다고 볼 수 있다. 발현몽은 프로이트에 따르면 잠재몽(꿈사고)이라는 심리형성물이 굴절되고 변형된 것이며, 이러한 차이는 무의식에서의 <꿈작업>이라는 개념을 상정케 한다. 꿈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질적이고 기이한 요소들은 바로 이 꿈작업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꿈사고의 자료는 꿈작업이 행해지는 동안에 <응축 Zusammendrangung>과 <압축>의 변형을 겪는다. 이러한 꿈작업의 제2왜곡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자리바꿈>이다. 꿈사고에서 지엽적이고 부수적인 것이 발현몽에서는 아주 강한 감각적 강도를 가지고 중심적 위치를 점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것은 보통 의식할 수 있는 생각에서 <사고오류>라는 인상만을 준다. 이러한 변형과 왜곡은 근본적으로 <검열>의 저항력에 대항하는 수단인 것이다.
이에 비해서 재담은 단번에 일어나는 <착상>저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뭔가 정의될 수 없는 것, 부재, 지적 긴장이 갑작스레 사라지는 것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을 느끼며 순간적으로 일어나지만 언어적 표현이라는 옷을 입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담의 사고과정은 추적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한순간 사고과정을 빠뜨리게 되는데, 그 과정이 갑작스레 무의식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이 재담이라 했다. 프로이트는 무엇보다도 무의식과 관련된 재담의 특징을 간결함에서 찾았다. 간결함은 무의식적 가공의 표시로서 의식전단계에서 결여된 압축을 위한 조건이 무의식적 사고과정에서 주어진다고 보았다. 꿈작업의 압축과 자리바꿈은 그대로 재담작업의 기법이 된다. 재담의 유회적 근원은 무의식과 연결된다. 유회적 압축기법은 특별한 의도 없이 자동적으로 사고과정 중 무의식에서 생겨난다고 가정한다. <유아기적인 것 das Infantile>은 무의식의 근원이다. 무의식적 사고과정은 초기 유아단계에서 유일하게 생성되는 것이다. 재담형성을 위해 무의식으로 침잠한 생각은 거기에서 그 옛날의 단어와 놀이터를 찾는다. 생각은 어린애적인 쾌감을 되찾기 위해서 한순간 유아적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꿈과 재담은 동일한 근원에서 출발한 것으로서 그 표현을 향한 도정에서도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꿈은 꿈꾸는 자만이 수면중에 영상적으로 지각하는 것으로서 깨어난 뒤에는 기억의 파편만이 남을 뿐이다. 반면에 재담은 그 표현 매체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언어이고 전달과 소통을 통해 완결되는 것으로서 무엇보다도 제3자의 역할이 문제가 된다. 이 점에서 꿈작업은 검열을 피하기 위해 재담작업이 가지는 많은 제한을 뛰어넘을 수가 있으며 더 많은 연상적 표현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재담은 꿈처럼 타협할 수는 없으며, 그 방해를 바껴 나가기보다는 단어나 허튼소리로써 유희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도 단어의 다의성과 사고관계의 다양성으로 유희나 허튼소리가 허용되고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경우에만 선택한다. <꿈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여전히 하나의 소망이다. 재담은 하나의 발전된 유희이다. 꿈은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의 커다란 이해와 관계된다. 환영이라는 퇴행적인 우회로에서 자신의 소망을 채우며, 잠자고 싶은 욕구가 이를 허용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재담은 우리의 정신적 기구의 무욕구적인 활동으로부터 작은 쾌락을 얻고, 그 활동중에 곁들인 획득물로서 쾌락을 낚아챈다. 그리하여 이차적으로 의부세계에 대한 기능을 가지게 된다. 꿈이 불쾌의 절약을 위한 것이라면, 재담은 쾌락획득이며, 이 두 가지 목표에서 우리의 모든 정신활동이 만나게 된다.>40)
40) S. Freud, 앞의 책, S.168.
7) 재담과 문학 내지 꿈과의 관계
프로이트는 문학활동의 목표 역시 궁극적으로 쾌락획득이라고 본다. 그는 문학의 내용을 성격짓기 위해서 꿈의 의미구조를 그 기초로 삼고 있으며, 시적 형식을 표시하기 위해서는 재담형식을 그 본보기로 한다. 꿈과 문학을 비교해 본다면, 언어예술작품도 본질적으로는 작가가 일상생활에서는 드러내고 밝힐 수 없는 억압된 충동소망에서 나온다. 시적 영감 속에서 작가는 마치 꿈에서와 같이 억압된 것에 대한 자신의 저항을 느슨하게 하여 부분적으로 자신의 무의식적 소망에 내맡긴다. 그럼으로써 무의식의 풍부한 영상과의 합성규칙을 이해하게 된다. 창조과정에서는 꿈작업 대신 창조적인 환상이 숨겨진 충동소망을 상상의 장면 연속으로 바꾼다. 이 렇게 작가는 구조상으로 꿈과 다르지 않는, 작품의 <원료>가 되는 <백일몽>을 구상한다. 그러나 꿈은 꿈꾸는 자의 반사회적이며 자의적인 표현인데 반하여 시적 자기표현은 수용이 문제되기에 작가가 독자의 의미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형식화한다. 따라서 꿈과 문학은 구조적으로는 구분되지 않으며 기껏해야 감추려는 검열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이렇게 문학도 꿈과 마찬가지로 이중구조를 가전다. 독자에게 우선 파고들며 검열의 결과인 덱스트의 의적 전술 뒤에는 우리에게 말해지지 않은 충동소망의 표현으로서 원래적이며 중심적인 의미내용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예술작품도 꿈과 같이 우리의 현실적인 삶을 드러냈다가는 동시에 감추는 타협물로 본다. 그러나 문학은 미확정의 다양한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이해 전달물로서 개인적인 공상을 일반적인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41) 프로이트는 「작가와 공상」에서 백일몽을 꿈41) 꿈과 문학과의 병행적 비교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작가와 공상 Der Dichter und das Phantasieren」 (1908)과 바르텔 M. Bartel, "Traum und Witz bei Freud. Die Paradigmen psychoanalytischer Dichtungstheorie"(1980), in
Literatur und Psychoanalyse, hrsg. v. K Bohnen, 1981를 참고하여 정리한 것이다.
과 무의식과 관련지었으며, 재담논문에서는 시적 형식을, 다시 말해 초기 형태의 시적 형식을 미적인 기능 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연구했다. 무의식적 왜곡과 자리바꿈으로 이룩한 감추기를 문학작업은 의식적으로 실행한다. 재담작업 역시 이 감추기를 수행한다. 프로이트는 특히 미적 체험에서의 형식 기능을 강조했다. 그의 전희원리에서 보았듯이 형식미는 일종의 유혹의 프리미엄으로 기능하며, 이것으로써 금지된 환상과 충동욕구에 대한 더 큰 쾌락을 마련해 준다고 했다. 시적 담화의 아름다움은 그래서 우리에게 충동검열로부터 위협받지 않고 또 그때문에 유보 없이 즐길 수 있는 쾌락획득을 약속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감추어전 시적 텍스트의 숨겨진 원래의 의미영역 42)을 우리는 정신분석학을 통해서 벗겨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작품은 의미를 드러내면서도 감추고 있으며, 개별적인 것을 틈새 없이 하나의 통일된 것으로 진술하기보다는 서로 충돌케 하는 것이다. 분석가는 보통의 독자처럼 텍스트를 따라가지 않고 텍스트의 개별적인 것들 속의 실질적인 질서를 재구성해야만 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해를 교란 • 혼란시키는 복잡한 의미충의 와중을 떠나, 작품이해의 재구성에 있어서 꼭 필요한, 언뜻 보기에 두드러지지 않은 표현들을 따로 분리해 내어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덱스트 개별 요소들의 상관성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가설에 따르면 문학은 풍부한 전동에도 불
42) 오이디프스의 외면적인 의미는 신적인 전지전능함과 인간의 책임감을 합치려는 것으로 부친을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려는 충동경향과는 아무런 연관 없이 꾸며진다. 행릿에서도 복수가 지연되는 것은 삼촌이 자기 대신 부친을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했기에 자기의 소망을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둘 다 오이디프스 컴플렉스가 중심 테마인 것이다. 제4장에서 제시되는 한국 작품 『청량리역』과 『서편제』의 상세한 분석 또한 이러한 프로이트적 문법논리를 따른 것이다.
구하고 결국 늘 같은 것만을 말하며, 예술의 다양성은 단지 우리가 충동긴장을 풀기 위해 또 다시 새로운 단서를 찾는 과정의 표현일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가 문학 텍스트를 읽는 동기는 실로 다양하며, 또한 친숙한 세계를 새롭게 보기 위함이기도 하다. 게다가 덱스트의 진술로부터 작가의 충동소망과 충동갈등을 귀납•추리할 수 있기 이전에 우리는 이미 작품의 줄거리를 그 의미내용에서 이해할 수 있다 . 즉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의 완결성과 전체성이라는 기본원칙을 정신분석학은 크게 존중하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은 개별적 요소의 의미를 파악하고 배열하고 무게를 잴 필수적인 기준들을 이미 가지고 있다. 분석에 앞서 이미 이론의 기초가설 一一억압, 저항, 타협 등등__거울 통해서 텍스트는 하나의 통일체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이트적인 가설은 문학을 정신분석학의 시녀로 전락시킨다고 비판하는 바르텔은 정신분석학의 유효성을 제한하자고 제안한다. <자연적인 의식의 순수한 이해>, 즉 자연적인 이해가 텍스트를 시적인 자기표현으로 간주하고 작가의 생애라는 맥락 속으로 끌어들일 때에만 통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43) 문학과 꿈을 비교하는 경우에는 꿈과 문학의 자료 원천이라는 생산미학적인 입장과 관계가 있다면, 문학작업과 재담작업의 비교에서는 감추기 기법뿐만 아니라 또한 소통적 수용 • 영향미학적 입장과도 연관될 수 있다고 보겠다 . 그리고 재담이론의 경우에는 유혹의 프리미엄, 전회원리뿐만 아니라 재담에서의 빈자리를 청자가 메꾸어 웃음으로 반응하는 소통의 완결 등 병행적인 유추가 더 필요하다고 보며 , 그러할 때 유익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44)
43) M. Bartels, 앞의 책, S.19. 27f. 참조
44) 볼프강 이저의 『독서행위』 는 정신분석학적인 독서방법에 대해 많은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3 재담과 희극적인 것
재담의 기법, 심리적 원천, 쾌락작용의 메커니즘 등을 규명한 뒤 프로이트는 재담을 희극이라는 대 장르적 범주 안에서 상호 비교를 통해 그 자리매김을 시도한다. 재담, <희극적인 것 das Komische> 그리고 유머를 그들의 상이한 경비절약 一 즉 억제, 표상 그리고 감정 소모부담의 절약 ——- 과 그들의 상이한 원천 一 무의식, 전의식 그리고 초자아―등으로 성격을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는 사회적으로 다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재담은 남에게 전달하려는 욕구가 커서 제3자가 필요하지만, 희극적인 것에서는 나와 상대자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유머는 희극적인 것 중에서 가장 자족적인 것으로 혼자서 그 과정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 도식적 비교에 의해 분류되고 배분되는 자리매김은 다소 작위적이고 단선적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사회적 과정이라는 주제를 통해 세 범주가 상호 주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영역으로 이동하여 정신분석학적이며 수용미학적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 이러한 상호 간의 관계설정적 분석은 다른 장르의 ―예를 들어 단순형식들-분석모델이 될 수 있다고 본다.1) 순진함<희극적인 것>의 이해를 위해서 프로이트는 재담에 가장 가깝고 단순한 <순전함 das Naive>에서 출발한다. <순진함>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발견되는 것으로, 우리의 개입이 없이 대상에 해당하는 인물의 말과 행동에서 생겨난다. 어떤 이가 아무런 억제감도 가지지 않기에 이 억제를 넘어설 때 생긴다. <순전함>의 작용조건은 그가 아무런 억제를 하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무례하고 뻔뻔스러운 사람일 뿐이며 우리는 웃지 않고 화를 낸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행했던 억제부담은 순전함 앞에서는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냥 웃음으로 배설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12살의 소녀와 10살의 소년 두 남매가 자신들이 만든 연극을 친척들 앞에서 보여 주려 했다. 장면은 해변가 오두막이다. 1막에서 어부와 그의 아내는 척박한 시대와 궁핍한 밥벌이에 대해서 한탄한다. 남편은 배를 타고 멀리 나가 돈을 벌어 올 것을 결심한다. 2막에서는 몇 년 뒤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 다시 돌아와 그 오두막 앞에서 아내와 상봉한다. 그는 아내에게 바깥 세상에서 많은 행운과 재물을 얻었음을 자랑하자, 아내 역시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도 결코 게으르지 않았다고 말하며 오두막 문을 열어 안을 보여 준다. 거기에는 어린아이 역할을 하는 인형이 12개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러자 폭소가 터져 나왔고, 이 두 배우는 웃음의 이유를 알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채 아저씨, 아줌마를 바라볼 뿐이었다.> 여기서 어린 작가는 아이가 생길 수 있는 조건을 알지 못하며 그러한 무지에서 만들어전 황당한 극의 전개가 어른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한 것이다. 재담과 <순전함>은 동일하게 단어오용, 허튼소리, 음담 등을 만든다. 그러나 재담에서 나타나는 생산자의 심리 과정이 <순전함>에서는 탈락한다. 순전한 인간이 표현수단과 사고방법을 그대로 사용하며 어떤 부가적인 의미를 알지 못한다. <순전함>의 생산자는 억제를 하지 않기에 그대로 허튼소리나 음담을 직접적으로 아무런 타협 없이 발설한다. 수용자에게 검열소멸이 이루어지기에 재담처럼 작용하기도 한다. 우리는 생산자의 심리상태를 관찰하여 자신을 그 상태로 옮겨 놓으며,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을 몰입시키고 그의 심리상태와 나의 그것을 비교함으로써 부담경비가 절약되고 절약된 만큼의 부담양이 웃음으로 배설된다. 웃음은 분노가 절약된 결과이다. 생산자의 정신과정으로 자신을 두입하는 것이 순전함에서는 중요하다. 순전함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담차이로부터 쾌락이 나오는 한, 희극적인 것이다. 이런 현상은 재
담의 경우 매우 낯선 것이다.
2) 〈희극적인 것〉의 조건(1) 동작의 희극우리가 판토마임에서 광대의 동작을 보고 웃는 것은 그들의 동작이 과장되고 당치도 않기 때문이다. 그 동작의 정도가 너무 지나친 데 대해서 웃는 것이다. 여기서의 웃음은 타인에게서 관찰한 동작과 자기라면 의당 그렇게 했을 동작을 비교하는 데에서 생성된다. 즉 그것은 특정한 것을 표상하는 것과 그 표상 내용 간의 차이에서 생겨난다. 타인의 동작을 보고 그것을 따라 하는 것이 그것에 대한 이해의 지름길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근육적인 동작의 모방적 실행은 일어나지 않고, 비슷한 동작에서의 소모에 대한 희미한 기억의 도움으로 동일한 것을 표상한다. 이렇게 표상적으로 모방하는 동안 신경지배가 근육으로 이동한다. 물론 훨씬 적은 장악력을 이동시키고 주된 소모에너지를 흘려 보내지 않는다. 표상이 수반하는 신경지배부담은 그 동작의 양에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리학적 분석에 기반하여 다음과 같이 동작에서의 웃음 발생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특정한 동작을 보면 동작을 하기 위한 소모부담 때문에 우선 표상하도록 자극 받는다. 이 정신적 과정에서 나는 그 관찰대상자의 위치에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동시에 그 동작의 목표까지도 인식하고 이전 경험에 따라 그 소모의 양을 과소평가한다. 그 관찰된 인물을 제치고 내가 이 동작의 목표에 다다른 듯 행동한다. 이 둘의 표상가능성은 관찰동작과 나의 동작을 비교하게 한다. 과도하고 어울리지 않은 타인의 동작에서 그 이해를 위한 나의 과소모는 곧장 그 동원이 통제를 받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데로 사용되거나 웃음으로 배설된다.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동작에 대한 쾌락의 생성이며, 나 자신의 동작과의 비교에서 사용불능이 되어 버린 잉여적인 신경지배경비이다. 정신적, 영혼적인 성질에서 발견되는 희극성은 관찰대상과 나와의 비교 결과이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적 동작에서와는 반대로 작용한 결과이다. 영혼적인 업적에서는 다른 이가 내가 보기에 필수불가결의 소모부담조차 절약했을 때 우스꽝스럽다 . 허튼소리나 멍청한 짓은 열등한 성과이기 때문이다 . 이 두 경우에서 우리의 웃음은 우리가 관찰대상에 대해 재미있게 느끼는 우월감의 표현임을 부인할 수 없다. 반대의 경우라면 우리는 웃지 않고 놀라거나 경탄할 것이다 . 타인과 나의 비교로부터 희극적인 쾌락의 원천을 찾는 것은 희극의 발생기원적인 면에서 중요하다.
(2) 희극적으로 만들기희극성은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들로부터 우연히 얻은 습득물이다. 그것은 인물, 동작, 행태, 행동 그리고 성격 등에서 발견되는데, 한 인물이 희극적으로 보이는 조건이 알려지면서 인물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상황의 희극성이 생성되며 이 인식을 바탕으로 특정한 인물을 상황 속에 두입하여 임의로 희극적으로 만들 수 있다. 타인을 희극적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희극적 쾌락이라는 예기치 않은 것을 인식하게 되고 또 고도의 교양적 기법의 기원이 된다.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도 희극적으로 만들 수 있다. 희극적으로 만들기의 수단으로는, 희극적 상황으로의 이동, 모방, 변장, 폭로, <풍자화Karikatur>, <회화화 Parodie> 그리고 <형식개작 Travestie>등이 있다 . 이것들은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경향에도 봉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어떤 이의 다리를 걸어 그가 넘어지게 함으로써 그를 멍청하게 만들 때>와 같이 사회적 요인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상황을 희극적으로 옮겨 놓는 것이다 . 풍자화, 회화화, 형식개작 그리고 폭로는 권위와 존경을 요구하는 고상한 인물과 대상에게 향해진다. 그것들은 내려깎기 방식이다. 풍자화는 고상한 대상의 전체적 표현 중에서 전체상으로 지각될 때에는 간과되는 희극적인 개별 부분울 부각시키면서 45) 내려깎기를 이룬다. 부분의 고립화로 달성된 희극적 효과는 우리 기억 속에는 전체로 퍼진다. 실제로 그러한 간과된 희극적인 부분이 결여된 곳에는 자체로서 희극적이지 못한 것의 과장으로 희극성을 생성시킨다. 이러한 현실 위조로서 풍자화의 효과가 아무런 저해를 받지 않는 것이 희극적 쾌락의 원천이 지닌 특징이다.
45) 독일 수상 헬무트 콜의 얼굴은 뺨이 통통하고, 머리쪽은 비교적 홀쭉하다. 그래서 서양배 (Birne, 전구와도 비교되는 모양, 우리의 표주박과 비슷하다)에 비유된다. 김영삼 대통령의 강조된 입부위나 김대중씨의 지팡이 등의 부각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질 것이다.
희화화나 형식개작은 다른 방식의 내려깎기이다. 인물들의 잘 알려진 성격, 말, 행동 사이의 통일성을 파괴하고, 그들의 언동을 저질스러운 것과 대체시키면서 내려 깎는다. 동일한 메커니즘이 폭로에도 적용된다. 여기에는 이미 잘 알려진 방식이 있다. 개별 인간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다. 일련의 중매장이 재담에서 이야기의 형식으로 사용되는 자동주의 폭로46)는 희극적인 것의 좋은 예가 된다.
46) <신랑이 중매쟁이와 함께 처음으로 신부집에 왔다. 거실에서 가족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에 중매쟁이는 온갖 은그릇이 진열된 유리장을 가리켰다. ‘자 보시오, 이걸 보니 이 집이 얼마나 부자인 줄 알겠지요.' ‘하지만,' 의심쩍은 젊은이는 물었다. ‘이 값진 물건들 을 부자인 것처럼 보이려고 빌려 올 수도 있지 않겠오?' ‘아니 뭐라고요?' 중매쟁이는 정신나간 듯이 대답했다. ‘아니 대체 누가 이런 사람들에게 무엇을 빌려준단 말이요!'> S.Freud, 앞의 책, S.63 참조
3) 재담과 희극적인 것의 차별성
지금까지 설명한 전개를 거꾸로 폭로, 희극적인 것 그리고 재담으로 되돌아가 그 차이점을 살펴보자. 무의식에서는 보통 있는 일이지만 의식에서는 <사고오류>로만 판단되는 사고방식이 많은 재담의 기법적 수단이 되었다. 재담적 성격이 의심스러울 때에는 희극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꿈작업과 유추해서 볼 때, 이성적 비판과 단어와 허튼소리 Unsinn 놀이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충동이 타협된 곳에서 이런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의식적인 사고의 단초가 한순간 무의식적인 가공에 맡겨질 때, 타협으로서 생성된 것은 두 가지 요구를 충족시킨다. 재담이 아무런 의미는 없지만 허용된 문장의 형식을 가지는 경우도 있고, 또는 귀중한 생각의 표현 속으로 잠입할 수도 있다. 재담이 이성적 비판 아래에서 다만 허튼소리(무의미)로 보이는 것은 특히 무의식에서는 흔히 있지만 의식에서는 금지된 사고오류일 때 그러하다. 무의식에서의 사고방식이 의식적인 것에서도 남아 있는 것이 있다. 간접표현, 암시 등등 의식에서는 많은 제한을 받더라도 이 기법으로 재담은 비판을 회피한다. 재담은 사고오류를 은폐하고, 의견상의 논리를 가장한다(예컨대 마요네즈연어 재담). 위에서 언급한대로 여기서 사용된 사고오류는 비판에 대해서 <희극적>으로 보인다. 무의식적이며 오류적인 사고를 의식적으로 내버려두는 것은 쾌락을 만들어 내는 수단이다. 사고오류를 기법으로 하고 그 때문에 허튼소리인양 보이는 재담은 동시에 희극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갑이 을에게서 구리남비를 빌렸는데, 나중에 을은 남비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쓸 수가 없다면서 따지게 되었다. 이에 대해 그의 변호인측은 첫째 나는 을로부터 어떤 남비도 빌리지 않았으며, 둘째 내가 을에게서 남비를 넘겨받았을 때 이미 남비에 구멍이 있었고, 셋째 나는 남비를 통채로 돌려주었오'>라고 전술한다. 여기서 각각의 진술은 옳다, 그러나 합해 볼 때 그것들은 서로 어긋난다. 갑은 함께 연관지어 생각해야 되는 것을 따로따로 다루고 있다. 그 자체로는 모두 문제가 없는 개별적인 생각이 모인 다수의 생각들이 서로 조정 • 지양되는 일은 무의식에
서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무의식의 사고방식과 상응하는 꿈에서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양자택일적인 것은 없고 단지 <동시적 병존>만이 있을 뿐이다.47)<어느 헝가리 마을에서 대장장이가 죽을 죄를 지었다. 그러나 시장은 다른 재단사를 목매달아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그 마울에는 두 명의 재단사가 살고 있었지만 대장장이는 한 사람뿐이었고, 어쨌든 꼭 단죄는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48) 여기서 죄지은 이와 형 받는 이의 자리바꿈은 의식적인 논리의 법칙에는 위반되지만, 무의식적 사고방식에서는 모순되지 않는다. 위의 남비이야기는 재담이라기보다는 익살에 가깝지만 둘째 이야기는 재담과 (희극적인) 익살 둘 다 될 수 있다. 무의식적 사고방식은 재담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47) S. Freud, 앞의 책, S. 191 참조.
48) 같은 책, S.191. 참조. 프로이트가 애호했던 이 이야기는 『정신분석학 입문』 의 <자아와 초자아> 단원에서도 나온다.재담의 기법에도 쓰였던 심리적 자동주의가 <희극적인 것>에도 사용되며, 반대적 서술을 통한 폭로 역시 재담과 연관될 수 있다. 무의식적 사고방식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경우 필연적으로 재담과 <희극성Komik>이 만나게 된다. 재담생산자의 쾌락생성 기법이 제3자에게서는 희극적 쾌락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제3자에 대한 재담의 효과는 희극성의 메커니즘에 따라 일어난다. 지적인 원천에서 쾌락을 얻으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그러나 허튼소리와는 다른 이중의미적 재담과 암시재담에서는 희극적인 것과 비슷한 작용이 청자에게서 일어나지 않는다. 허튼소리 같은 의형을 지닌 재담이라 해서 모두가 익살스러운 것은 아니고 오히려 청자를 어리둥절하게 하거나 거부적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 재담과 희극은 무엇보다도 심리상의 자리매김에서 구분된다는 것이다. 재담의 쾌락원은 무의식에 놓여 있는 반면에 희극성에서는 전의식에 귀속시켜야 하는 두 개의 소모 경비의 비교에 쾌
락원이 있다. 희극이 전의식 선상의 영역에서 작동한다면 재담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희극성에 기여한다고 보는 것이다. 49)
4) 희극성(l) 희극성의 원천재담과 희극을 심리영역에서의 자리매김으로 차별화했던 프로이트는 희극성의 원천을 재담에서와 마찬가지로 유아기적인 것에서 도출하려 한다 . 모방은, 풍자나 과장이 부가되었든 그대로이든, 광범위한 희극적 쾌락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프로이트는 모방에서 희극성을 분석하면서 <왜 그 자체로는 하나도 우습지 않은 두 얼굴을 비교하면서 웃을까?>라는 질문으로 접근한 베르그송을 원용한다 . 베르그송은 생명체 중에서 완벽하게 닮은 것은 없으며, 만일 똑같은 것을 보았을 때에는 그 뒤에 숨어 있을 어떤 메커니즘, 즉 동일한 틀의 복사물이거나 기계적인 생산방식을 생각케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웃음의 원인은 생명에서 무생명으로의 격하에서 나온다 했다. 50) 이어서 프로이트는 자신의 절약 • 경감 메커니즘을 부연 • 설명하려 한다. 모두 다른 생명체를 이해하려면 그에 따른 소모경비가 필요한데, 완벽한 일치나 현혹적인 모방으로 새로운 소모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실망하게 되며, 이 실망은 경감이라는 의미에서이고 잉여적이 된 <기대소모경비 Erwartungsaufwand>는 웃음으로 배설된다는 것이다. 똑같은 공식이 희극적인 고정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희극적인 고정은 전문적인 습관, 고정관념 그리고 모든 자극에 반복되는 어구 등을 말하며 기대경비와 동일한 것으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이해49) 같은 책, S. 193. 참조.
50) 같은 책, S. 194. 참조·하는 데 필요한 소모경비와의 비교가 문제가 된다. 재담에서와 같이 동일한 것의 재발견이라는 원천적 쾌감만이 비교 사용의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미지의 것과 기지의 것,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을 비교하여 낯선 것과 어려운 것을 설명함으로써 지적으로 경감이 되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것과 사실적인 것을 비교하는 것은 일종의 사실로의 격하로서 추상화부담이 덜어진 것이다. 둘 사이의 추상화부담의 수준차이가 크면 클수록, 예를 들어 진지한 것과 낯설은 것, 특히 지적이거나 도덕적인 것이 진부하고 저급한 것과 비교될 때 이 비교는 희극적이 된다. <급기야 인내라는 나의 바지에서 모든 단추가 떨어져 나갈 때 까지 Bis mir endlich alle Knopfe rissen an der Hose der Geduld> 51) 는 익살스럽게 저하된 비교의 탁월한 보기이다. 어렵게 이해되는 낯선 것, 추상적인 것, 고상한 것은 이제 그 표상에 추상화 부담소모가 별로 필요하지 않은 낯익고 저급한 것과 일치된다고 주장하면서 프로이트는 그것을 저급한 것으로 폭로했다. 그러므로 비교의 희극성은 격하의 경우로 귀착된다. 똑같은 것에서 얻는 희극적 쾌감을 그는 비교되는 것의 대조에서가 아니라 두 추상화 부담소모의 차이로부터 도출했다. 그는 이전의 희극이론의 상호 비판적인 주장―희극성을 대조적 표상이나 기대의 부숴짐에 근거를 두려는-에서는 희극의 본질을 도출할 수 없다고 보고, <희극적 쾌감은 두 개의 소모부담의 비교 차이로부터 나온다>는 명제를 이론적 기초로서 제공하
51) H. Heine의 Romanzero 제3권, 『Jehuda ben Halevy IV』에 나오는 시구. 이것은 그러나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재담적 성격을 가진다. 암시의 수단으로서 비교가 의설의 영역으로 들어와 외설적인 것에 대한 쾌감을 풀어놓는다. 위의 하이네의 예에서도 보았듯이 재담과 희극의 차이는 그 말의 고의적 의도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포크와 노력으로 어머니는 국에서 그것을 끄집어 내셨다>는 단순히 익살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하이네가 괴팅겐 주민의 계층을 <교수, 학생, 소시민 그리고 가축>으로 나누었을 때, 이 분류는 진술 뒤에 숨은 그의 공격적 경향으로 재담적 성격을 띠는 것이다.
려 한다. 쾌감의 효과인 웃음은 바로 이 차이가 사용될 수 없어서 배설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생겨난다고 보았다. 희극의 과정도 또한 재담 과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의력으로 인한 과도 장악을 견디지 못한다. 즉 그 과정은 주목 받지 않고 그대로 자동적이 되어야 한다. 희극성의 생성원인 비교에만 주의력이 집중되었을 때 희극적 쾌감은 산출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시험관에게는 시험 답안지의 무식한 허튼소리가 우습지 않지만, 시험과 상관없는 동료는 수험생이 얼마나 제대로 아는가보다는 얼마나 재치 있는가에 관심이 많기에 그 허튼소리에 파안 대소할 수 있는 것이다. 희극이 생성된 경우가 동시에 강한 감정 산출의 자극을 유발할 때 방해가 되어 그 부담차이의 배설이 배제된다. 희극은 개별자의 입장—―감정, 기분 상태 그리고 입장견지 등—에 따라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2) 희극성의 심리적 발생 근원프로이트는 심리적 발생원으로부터 희극성을 이해하고자 한 동기를 베르그송의 『웃음』 으로부터 받았다고 언급한다. 베르그송의 희극성의 공식인 <생명의 기계화 mecanisation de la vie>, <자연적인 것을 인공적인 것으로 바꾸기> 등을 그는 이미 희극적 원천으로서 원용했다. 베르그송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자동주의에서 연상적으로 자동장치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고, 일련의 희극적 효괴를 어린아이의 장난감에 대한 희미해진 기억에 귀속시키려 했다, 즉 유아적 기쁨의 추후 작용으로부터 희극성을 도출하려 했다고 이해한다. 프로이트는 이미 재담에서 유아기적 근원을 추론해 보았듯이, 동일한 방식으로 베그르송이 추정한 희극의 유아기적 뿌리를 추적하기로 한다. 이 추적에서 그는 베르그송의 <기억된 쾌감>에 <비교>를 관련시켜 자신의 이론을 만든 것이다.어린아이 자체는 희극의 모든 조건을 충족시킬 경우에도 희극적일수 없다는 것이댜 그들이 우스꽝스럽게 보일 때는 그들이 어린아이가 아니라 전지한 어른같이 행동했을 때라는 것이다. 이때 어린이의 본질이 그대로 유지될 때에만 우리는 순수하고 희극적인 것을 상기하는 쾌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순진함>이 나타난 경우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게는 아직 희극에 대한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른인 우리가 과대한 움직임을 보았을 때 그를 이해하려는 부담과 실제 자신이 했을 때 필요로 하는 부담의 차이에서 희극의 감정이 생긴다. 어린아이는 그러나 다만 모방하면서 이해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그리고 서로 비교해 보면서 관찰대상보다 자신이 더 잘했다는 우월감에서 웃는다. 이때의 웃음도 부담차이로부터 도출될 수 있지만, 이 우월감의 웃음은 희극적인 웃음이라기보다는 순수한 쾌감의 웃음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길에서 미끄러져 넘어졌을 때 우리는 이유는 모르지만 그 모양이 우스워 웃는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그 경우 우월감이나 고소하다는 생각에서 一즉 너는 넘어졌지, 난 안 넘어져一하고 웃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어린아이 같은 쾌락동기를 어른은 상실했으며, 동일한 조건에서 그 대신 희극적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일반화시키면, 희극성은 유아기적인 것을 일깨우는 것이기에 희극성은 다시 얻은 <잃어 버렸던 어린이 웃음>으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내가 다른 이와 비교해서 그 부담차이로 웃는다면, 다른 이에게서 어린아이를 재발견 52)했기 때문이다. 이 웃음은 그러므로 성인인 나와 어린아이로서의 나의 비교에도 해당된다고 결론짓고 있다.
베르그송은 희극성의 원천을 유아기에 대한 기억에 국한시켰지만52) 프어로린이이트의는 비 이교 비 사교고:를 S다o 음rn의ac h두t e s문 d장er적 — 관ich 계 r로na c표he현 e했s다 a.nd ers( 그는 저렇게 한다 - 나는 다르게 한다).
성인의 비교사고: Der macht es so, wie ich es als Kind gemacht habe( 그는 내가 어릴 때 했듯이 한다). S. Freud, 앞의 책, S. 209. 참조.프로이트는 유아기적인 것 전체로 확장하려 한다. 희극성을 유발하는 비교는 유아적인 쾌감이나 놀이를 일깨워주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어린이다운 본질 전체, 유아적인 고통에 조금 연관되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타인과 나의 비교에서는 타인이 어린아이로 보이며, 동작, 형태, 정신적 성과 등에서 동작 충동이나 정신적, 도덕적 미숙함 등이 유아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타인 안에서의 비교에서 그를 어린아이로 격하시키는 것이며 여기서 희극은 <감정이입>을 기초로 한다. 상황적 희극성, 풍자화, 모방, 내려깎기, 폭로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상황적 희극성이란 우리가 대개는 어린아이의 무력함을 재발견하는 데에서 오는 어리둥절함이다. 과장은 정당한 비판이 되는 경우에는 쾌감을 수반하며, 이것은 어린아이 본래의 무절제함과 연관된다고 본다. 모방은 어린아이의 최상의 기술이며 그들의 놀이 대부분을 유발하는 동기이다. 어린아이의 공명심은 자기 또래보다는 어른을 모방하려 한다. 어린아이와 어른과의 관계에 격하희극이 연관되는 것이다. 성인이 어린아이로 되돌아와 자신을 억누르는 우월성을 포기하고 어린아이같이 놀 때 어린아이에게 커다란 쾌감을 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린아이에게 순수한 쾌감을 주는 경감이 어른에게는 희극화하는 수단이 되며, 희극적 쾌감의 원천이 된다고 본다.
5) 유머(1) 희극과 유머회국이라는 대범주 안에서 무의식적 뿌리와 전의식적 뿌리라는 자리매김으로 구분되었던 재담과 희극도 그 쾌감의 생성메커니즘은 심리적 소모부담이 절약되고 그 잉여적 심리에너지가 배설된 것이 곧 웃음이라는 가시적 효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리고 쾌감 발생원은 어김없이 유아기적인 것으로 귀착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희극적 범주에 속하는 유머는 그것들과 어떻게 차별화되며 어떤 위치를 점하게 될까? 프로이트는 유머에서의 쾌감 생성과정에 마찬가지의 메커니즘 ―예의 절약, 유아기적인 것으로의 회귀 등-을 적용하고 있다. 희극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그가 밝혔듯이 희극적 작용의 가장 큰 방해물은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목적 없는 동작이 해를 부르고, 어리석음이 불치를 낳고 실망이 고통을 준다면, 희극성은 끝장난 것이다. 유머는 이러한 고통스러운 감정의 분만에도 불구하고 쾌락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라고 프로이트는 보고 있다. 우리의 습관상 고통스러운 감정을 낳을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지고 이 감정을 억누르기 위한 동기들이 작용하면, 그러한 감정 발전의 조건이 성립된 것이다. 이때 고통의 당사자는 유머적인 쾌감을 얻으며, 상관없는 자는 희극적 쾌감을 얻는 다는 것이다. <유머적 쾌감은 다름 아닌 이 중지된 감정 분만의 대가, 즉 절약된 감정부담에서 나오는 것이다 .>53) 쾌감분만에 방해되는 감정 분만을 제거하는 의미에서 유머는 재담이나 다른 회국들과 용해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 감정이 온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없어지면 서투른 유머가 되기 일쑤다. 눈물을 홀리며 웃는 경우가 그것이며, 어떤 감정에서 부분적 에너지가 빠지고는 유머적으로 가미되는 것이다. 또한 유머적 쾌감이 감정자극의 저지로 얻어지듯이 희극적 쾌감을 방해함으로써 생겨난다고 본다. 프로이트는 돈키호테가 그 자신은 아무런 유머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유머적이라 할 수 있을 즐거움을 그의 전지함으로 보여 주는 인물로 해석했다. 라만차의 돈키호테는 원래 순수한 해학적인(희극적인) 인물로서, 기사에 대한 공상적 세계가 머리끝까지 가득 찬 다 큰 아이와 같다. 그러나 작가가 이 우스꽝스러운 인물에게 깊은 지혜와 고상한 의도를 구비시켜서, 자신의 목표에 굳은 신념을 가지면서, 의무를 전지하게, 약속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상주의의 상
53) 같은 책 . s. 212.
징적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희극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소동의 관점에서 볼 때 유머는 희극의 양식들 중에서 가장 자족적이다. 그 과정은 당사자 한 사람에게서 이미 완성된다. 다른 이의 참여가 하등의 새로운 것을 덧붙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 속에 생긴 유머적 쾌감을 남에게 전달하려는 충동 없이 그대로 간직된다. 그렇기 때문에 유머적 쾌감의 생성과정의 분석이 어려워져서, 다만 전달되었거나 뒤따라 느낀 유머적 쾌감을 이해하면서 어느 정도 통찰이 가능할 뿐이라는 것이다. 유머과정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추측한다. 첫째, 그 과정이 유머적 입장을 취하는 당사자에게만 일어나고, 제2자는 관객이나 수익자적 위치를 가전다. 둘째는 한 사람은 유머과정에 참여하지 않는데, 제2자가 이 사람을 유머적 관찰의 대상으로 삼을 때 이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다. <월요일에 처형장으로 가는 불량배 왈, ‘자, 이번 주가 아주 멋있게 시작하는군’>이라는 <씁쓸한 익살 Galgenhumor>의 유머과정은 당사자에게만 일어나지만, 그 일과 아무런 상관없는 우리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 유머 효과가 미쳐서 우리 역시 유머적 쾌감획득에 이른다. 후자의 경우는 작가나 서술자가 실제의 혹은 허구적 인물들의 거동을 유머적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이 인물들은 어떤 유머를 보여 줄 필요가 없고, 유머적 입장은 다만 그들을 대상으로 삼는 자의 일이다. 독자나 관객은 앞의 경우에서와 같이 유머를 즐길 뿐이다. 요약하면 유머적 입장을 자신이나 타인에게 취할 수 있으며, 그것이 당사자에게 쾌감획득을 가능케 하고 그리고 비슷한 쾌감획득이 상관 없는 관객에게도 그냥 주어지는 것이다.프로이트는 타인이 발설한 유머를 보는 관객에서의 과정의 관찰을 통해서 유머적 쾌감획득의 원천을 파악하려 했다. 관객은 다른 이가 감정표시 -화를 내고, 불평하고, 고통을 호소하고, 놀라고, 소름끼쳐 하고, 절망에 빠지는 등등―를 하리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상황 속에 있는 것을 본다. 관객이나 청자는 자신에게도 동일한 감정의흥분이 일어나면서 그를 따른다. 그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농담을 한다. 이제 절약된 <감정 소모부담 Gefuhlsaufwand>이 청자에게 쾌감획득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유머의 본질은 그 상황이 불러일으킬 감정을 절약하고 , 그러한 감정표현 가능성을 농담으로 넘기는 것이다. 위의 <처형자의 익살>에서 표현 자체는 적절하지만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의 발언이다. 이 재담을 유머로 만들고 있는 것은 이번 주가 다른 주와 다르다는 것을 간과하고,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 차이 를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처형장으로 가는 죄수가 마지막으로 원한 것이 그의 드러낸 목을 따뜻하게 감싸 줄 목도리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그 목도리는 전혀 가치가 없고 쓸모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러한 자신의 습관화된 본질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절망으로 몰고 갈 상황을 의면하는 데에는 인간 영혼의 어떤 위대함 같은 것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유머의 위대성은 우리가 그 유머적 인물의 상황에 아무런 제어를 느끼지 않을 때에만 나타난다고 본다. 54) 앞의 불량배의 경우 그를 절망으로 몰고가는 상황이 우리의 연민을 불러일으키지만 그가 그 상황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우리의 연민이 제어 된다. 이렇게 연민으로의 부담이 소모되지 않게 되어 그를 보고 웃는 것이다. 그 담담함이 우리에게 전염되는 것이다. 절약된 연민이 유머의 쾌감원이 되는 것이다.
54) 같은 책, S.213 참조 . <스페인의 왕 칼 1세와 독일황제 칼 5세에 대한 음모에 가담한 귀족이 잡혔다. 그는 대역 죄인으로서 자신의 목이 잘릴 것이라는 운명을 감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예견도 그가 스페인의 세습귀족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이 가진 권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생각과 표현을 막지 못했다. 즉 스페인 귀족은 왕 앞에서 모자를 쓸 수 있었다. 그래서 ‘내 머리는 당신 앞에서 모자를 쓴 채 떨어질 권리를 가진다’라고 했다.> 이 유머에서 우리가 웃지 않는다면 그의 처신에 대한 경탄감이 유머적 쾌감을 덮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유머는 재담과 희극에서와 갇이 어떤 해방적인 것뿐만 아니라 위대하고 고귀한 어떤 것도 가진다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위대함은 자기애의 승리, 다시 말해서 승리감에 차서 주장된 자아의 신성불가침에 있다는 것이다. 자아는 현실적 동기로 마음이 상하고 괴로워하기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의부상황으로 인한 마음의 쇼크가 자신을 몹시 슬프게 하지 않도록 한다. 그리고 이 쇼크는 이제 쾌감획득의 원인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만일 월요일에 처형장으로 가는 자가 <어쩔 수 없어, 나 같은 녀석이 교수형을 당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될까. 이 세상은 그때문에 결코 망하지는 않으리>라고 말했다면, 이 말은 세상에 대한 심오한 숙고가 들어 있다는 점에서 현명하고 정당한 현실평가이지만 유머적 흔적은 전혀 들어 있지 않는 것이다. 유머는 체념하지 않고 반항적이며, 자아의 승리일 뿐만 아니라 현실상황의 불리함에 대항하는 쾌락원리 Lustprinzip의 승리라고 본다.55) 이 점에서 유머는 고통에 대한 방어방법 중 하나가 된다. 노이로제, 광기, 도취, 자기탐닉, 황홀경 등은 고통에서 벗어 나기 위해 인간 영혼생활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유머도 이들과 관련될 수 있으며, 재담에는 없는 품위를 지닌다. 재담은 다만 쾌감을 얻기 위해서, 혹은 공격충동에 봉사하여 쾌감을 얻기 때문이다.
(2) 유머와 초자아. 유아기적인 것인간 영혼생활에 있어서 방어과정은 도피반사 심리의 상관물이며 내면적 원천으로부터 불쾌감이 생겨나지 않도록 하는 임무를 가진다. 이 과제를 수행하면서 자동적 조정장치가 작동하는데, 결국 이 조정은 유해하기에 의식적인 사고로 통제되어야 한다. 프로이트는 이런 방어의 특정한 형태, 즉 실패한 억압을 노이로제의 발생에서 설명했55) S. Freud, Der Humor(1927), in Freud, 같은 책, S.278. 참조.
다. 이와 관련지어 그는 유머에서 이 방어성과의 최고치를 발견한다. 억압과 같이 고통스러운 감정과 연결된 표상내용을 의식적으로 주목하지 않으려는 자동주의적 방어 를 유머로 극복했다고 보는 것이다. 유머는 준비중인 불쾌분만에서 에너지를 빼앗아 웃음으로 배설하는, 즉 수동적 자동주의가 아니라 불쾌를 쾌감으로 변화시키는 적극적인 수단인 것이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다시 유머를 유아적인 것과 연관시킨다. 타인에게 유머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그를 성인이 어린아이 대하듯 하는 것이다. 성인은 크나큰 고통과 관심을 하잘 것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웃는다. 자신에 대해서 유머적 입장을 취했을 때에는 어린아이에 대해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유머적인 자리바꿈의 증거인 자아의 고양됨은 아마도 현재의 자아와 유아적 자아의 비교로부터 도출했을 것이라고 본다. 프로이트의 영혼구조 분석에 따르면 자아 속에는 그 핵심으로 특별한 심급기관이 있다. 그것은 초자아로서 대개는 자아와 용해되어 구분되기 어려우나, 경우에 따라서는 확연히 구분되기도 한다. 초자아는 부모의 심급기관적 역할을 이어받은 것으로서 상정된다. 유아기의 부모와도 같이, 때로는 자아를 엄격하게 다루기도 하고, 때로는 자아를 유머로 위로하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유머감각이 있는 자는 자신의 자아에서 심리적 강세를 초자아로 이동시켜 유머적 입장에 도달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요약해 본다면, 유머는 변화된 심리관계로서 나를 현실의 불리함에 저항하면서 대두될 불쾌를 피하려는 상황으로 옮겨 놓는다. 유머적인 기분은 삶이 아무리 위험해 보여도 어린아이 유희일 뿐이라는 환상을 매개한다. 성인은 어릴 때 자신이 얼마나 전지하게 놀이를 행했던가를 생각해 낸다. 이제 어린아이 놀이를 진지한 일로 동일시하면서 삶의 무거운 압박을 벗어 던지면서 유머의 쾌감을 얻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체험을 상상적으로 가공하는 유회적 실행에 더 어울린다. 재미없는 경험들을 반복하여 습득하고 불만스러운 현실을 소망으로 바꾼다. 어린아이와 현실과의 이러한 관계는 백일몽과 글쓰기 등에 남아 있다고 본다. 어린아이는 유희세계와 현실을 구분할 줄 안다하더라도, 유희적 실습은 어렵고 전지한 업무이다. 유머적 왜곡에서 성인은 한순간이나마 현실 극복을 위한 긴장감을 어린아이의 유희세계에서의 전지함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현실에 대한 상상적 여유 공간을 가지게 되며, 상상력이라는 사치도 만나는 것이다. 이렇게 프로이트는 <자기에의 승리>, <초과점유된 초자아> 등유머 분석에서의 기본적 방향을 제시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유머는 재담보다는 희극 쪽에 가깝게 자리잡고 있다. 재담이 무의식과 전의식의 타협으로 생성된다면, 희극과 유머는 전의식에 자리한디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희극의 생성조건은 동일한 표상을 위해 두 개의 상이한 표상방식을 사용하며, 이 비교에서 희극적 차이가 생긴다. 재담은 청자를 염두에 두고 다르게 작업하는 이해방식의 차이를 고려해야만 한다. 전의식적인 표충과 무의식적 심층이라는 상이한 표상방식에서 쾌감을 도출하는 재담은 그 전의식적 과정에 희극적인 것과 공유하는 것이 있다. 유머는 상황에 따라 습관적으로 부연된 감정의 자극만을 피하면 유머적 쾌감을 얻기 때문에 크게는 기대희극의 일종이다. 그러나 유머에서는 동일한 내용의 두 개의 상이한 표상방식이 문제되지 않는다. 유머적 자리바꿈은 희극적 작용에 위험해 보이는 자유로운 경비부담이 다르게 사용된 경우이다. 유머는 초자아의 매개를 통해서 희극에 기여하는 것이다.56)재담쾌감은 절약된 제어부담에서 나오며, 희극쾌감은 절약된 표상(장악)부담에서 그리고 유머적 쾌감은 절약된 감정소모로부터 나온다고 프로이트는 정리한다. 이렇게 심리기구의 세 가지 상이한 작업방식이 모두 절약에서 쾌감을 생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셋 모두 우리56) S. Freud, 앞의 책, S. 281 참조.
영혼적 활동이 자신의 활동으로 상실한 쾌감을 다시 얻는 방법을 기술한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본다. 이런 방법으로 얻고자 하는 <희열Euphorie>57) 은 우리가 아주 적은 부담으로 심리작업을 작동시켰던 삶의 한 시기의 기분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유아기적 원천으로 되돌아 간다. 그것은 <어린시절의 기분 이의의 어떤 것도 아니다. 이 때 우리는 어떤 희극적인 것도 알지 못했고, 재담적 능력도 없었으며, 삶에서 행복을 느끼기 위해 유머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58)
57) Lust: 하고 싶은 욕구, 재미, 쾌감, 줄거움 등으로 번역된다.
Euphorie: 예를 들어서 마취제나 마약등 약물복용 뒤, 환자의 경우 죽음 직전의 매우 고양된 쾌감을 뜻한다. 프로이트는 지금까지의 분석에서 항상 앞의 단어를 사용하였으나 이 마지막 결말에 와서 매우 색깔이 가미된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독자를 약간 당황시키는 감이 없지 않다.58) 같은 책, S. 219.문학예술 이론적 궤적을 추적하고자 시작한 프로이트의 재담이론에 대한 정독과 해설을 통해서 우리는 이제 프로이트가 인간의 영혼세계를 규명하고자 모든 정신적 영역을 자연과학적인 입장에서 분석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가 자신의 정신분석학 연구를 위해서 끌어 들였던 인간의 뛰어난 정신적 작업은 바로 신화, 문학작품, 예술작품 그리고 언어생활 등등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정신분석학적 성과를 그대로 문학예술론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체계적이며 포괄적인 연구가 부수적으로 수반한 많은 미학적 발견들과 문학예술 이론과의 연계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프로이트의 과히 혁명적이면서도 다목적용 기본원리를 단지 도식적으로만 적용하는 위험으로부터 문학예술의 복합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을 간과하지 않으려 한다. 인간정신을 포괄하는 프로이트적 원리와 개념들은 분명히 문학예술행위를 이해하고 규명하는 작업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해 준다. 우리의 과제는 문학행위, 예술행위의 특성에 맞게
응용을 세분화시키는 일일 것이다 . 프로이트, 프로이트 이후의 이론 ―푸코, 라캉, 데리다 등등―울 이해하고, 또 그들을 넘어서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작업은 무엇보다도 프로이트 원전의 정확한 이해이다. 중요한 기초 작업의 임무를 주어진 틀에서나마 수행한다는 것은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과제로 남은 어려운 문제점들이 또 하나의 새로운 도전으로서 우리 앞에 놓여 있음을 잊지 않는다.
제 4 장 프로이트의 문학이론과 작품분석
1 프로이트의 문학이론1) 「작가와 공상」 I)1) 프로이트의 문학이론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원전의 자료는 제한되어 있다. 프로이트 연구전집 10권 조형예술과 문학에 수록된 논문과 책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①『옌젠의 그라디바』에 나타난 망상과 꿈』 (1907)②『레오나르도 다 빈치 유년시절의 한 가지 기억』(1910)③「무대 위에서의 정신병적 인물들』(195)④「작가와 공상』 (1908)⑤『상자 선택의 주제』 (1913)⑥『미켈란젤로의 모세』(1914)⑦『덧없음』(1916)『꿈의 해석』이라는 틀 안에서 이미 『햄릿』과 『오이디푸스』 등 문학
⑧「정신분석 작업에서 드러난 몇 가지 성격유형」(1916)
⑨「『시와 진실 』 에 나오는 유년시절의 한 가지 기억」 (1917)⑩「도스토예프스키와 부친살해」 (1928)⑪「괴테상 수상연설문」 (1930)위 논문중 세 편(①,④,⑩)을 중심으로 하여, 이 글의 1절에서는 프로이트의 이론과 작품분석을 요약한 다음, 2절에서는 이 이론을 바탕으로 문학작품과 영화작품의 실제 작품분석을 시도한다. 위의 논문 가운데 네 편(②,④,⑧,⑩)과 전집 제4권에 수록된 섬뜩함 Das Unheimliche』(1910), 모두 다섯 편의 한글 번역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작품의 분석을 시도한 바 있는 프로이트는 문학에 대한 관심에 있어서 일방적이고 제한적이라는 약점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꿈의 해석』이라는 정치하고 방대한 작업의 결과를 그의 문학이론에 포함시킬 경우, 그 일방성과 제한성을 뛰어넘는 획기적인 시각이 갖추어진다. 자유연상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꿈의 분석은 <압축>, <자리바꿈>과 <표현가능성>이라는 기본개념을 꿈작업의 열쇠개념으로 파악하면서, 의식의 세계에서 억압된 무의식의 세계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무의식적인 꿈작업과 의식적인 꿈의 분석은 그 두 과정이 의식과 무의식의 이분법을 따른 분리현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언어를 매개로하여 구체적으로 실현된 단일현상의 양면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과 꿈은 함께 고유영역을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문학과 꿈은 무엇보다도 <공상 Phantasieren>의 개념으로 그 공유의 세계를 확인한다. 언어적 형상화를 위해 미메시스와 더불어 필요불가결한 개념인 공상을 프로이트는 문학의 틀로부터 자유롭게 풀어, <놀이>라는 일상적 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관시킨다. 공상, 몽상은 문학적 행위에 참여하는 제한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놀이처럼 모든 사람이 줄기는 보편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프로이트가 주목하는 놀이의 기본성격은 그것이 현실과 반대되는 것이라는데 있다. 현실을 벗어나는 행위로서 놀이와 공상은 똑같은 궤도에서 움직인다.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놀이는 늘 현실의 힘을 빌려야만 된다는 사실이다. 한편 현실원리가 지배적인 성인의 세계에서는 어린아이의 진지한 놀이는 더 이상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게 된다. 어른의 세계는 어린이의 세계보다도 근본적으로 더 강렬하고 더 많은 쾌락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하는 쾌락을 헛되이 찾는 어른이 손쉽게 이르는 곳이 바로 공상이라는 이름의 놀이인 셈이다.
어린아이의 <놀이 Spiel>는 진지하다. 어른들의 단순한 공상과는 달리 작가의 창작과정에서도 어린아이의 놀이에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한 진지함이 드러난다. 그 진지함이 비극적 성격의 인물에서 구현되면 <비극 Trauerspiel> 으로, 그와 반대로 희극적 성격에서 강조되면 <희극 Lustspiel> 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무대에서 관객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사람을 우리는 <배우 Schauspieler>라고 부른다. 놀이와 문학의 상관관계는 이와 갇이 <놀이>라는 공통된 단어를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다.꿈은 소원의 충족이다. 어린이의 놀이 또한 소원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 소원은, 어른의 공상이 소원의 표현이면서도 비밀의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는 것과는 달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단순한 소원이다. 어른의 공상은 어린이의 놀이를 이어받는 <대체물 Ersatzbildung>이면서도 쾌락의 비밀스런 성격 때문에, 꿈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공간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공상은 어린이의 놀이를 그 원천으로 하면서도 공상은 그만큼 더 꿈과의 근천성을 확보한다.공상의 첫번째 특징은 그것이 불행한 사람 특유의 탈출구가 된다는 사실이다. <행복한 사람은 한 번도 공상의 날개를 펴지 않으며, 단지 불만족스런 사람만 그럴 뿐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채워지지 못한 소망들은 공상의 추진력 >2)이라고 프로이트가 주장할 때 소망충족을 중심으로 꿈과 공상, 꿈과 문학 그리고 공상과 문학의 서로 맞물리는 고리가 설정된다고 말할 수 있다. 공상의 동의어인 <백일몽>에서 특히 꿈과 공상의 절대적 친밀관계가 잘 표현되어 있다. 공상, 꿈 그리고 문학으로 이루어지는 삼각형의 동심원은 소원을 다시 <야심적인 소망>과 <성애적 소망>으로 나누면서, 결코 완전히는 충족되지 않는 인간의 욕망과 공상의 소원이 동질화되면서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두 소망이 대립적이라기보다는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하나로 일치되고 있음을 강조하는 그의 논조가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말하자면 프로이트는 불행한 사람만의 공상이 아닌 모든 인간의 공상을 상정하면서, 공상과 꿈 그리고 문학을 그만큼 더 가깝게 하나의 구심점으로 접근시키고 있는 것이다. 공상은 억압된 것의 탈출구이기에 꿈과 문학의 핵심을 형성한다. 공상과 문학의 근친성은 시간개념의 도입으로 더욱 강조된다. <과거, 현재, 미래가 소망의 줄에 고스란이 꿰어> 있으며, 이것은 시간개념의 형성을 뜻하지만 동시에 그것의 파괴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공상이 지나칠 경우 노이로제와 정신병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공상 또한 병증상의 바로 그전(前)단계로서 환자들이 호소하는 것이 이런 고통의 증상들이다.> 작가는 이들과 궤를 같이 하며 마침내 <대낮의 몽상가>로 정의되기에 이른다.
프로이트의 문학에 대한 관심은 전체적으로 작품의 내용적인 측면에 치중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r 무대 위에서의 정신병적 인물들」(1905)부터 「도스토예프스키와 부친살해」 (1928) 에 이르면서 그의 주된 관심사는 작품 주인공에서 작가 자신으로 옮겨짐을 알 수 있다. 『꿈의 분석』에서 이미 꿈과 문학의 소재로서 부친살해의 주제가 다루어 졌기에, 그의 저술활동 마지막 시기에 또다시 이 문제가 다루어질 때2) 프로이트 연구본 제10권, 173 쪽.
는 자연히 비중이 옮겨질 수밖에 없으며, 이때 그 관심의 대상은 작품이 아니고 작가 자신이다. 이것은 <어떤 인상과 추억을 토대로 작가가 자기의 작품을 건축하는지 알고자> 프로이트의 관심이 작품에서 작가의 전기로 옮겨지고 있는 점과 상통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 현상으로 파악된 부천살해는 꿈과 문학의 소재로서뿐만 아니라 또한 현실적인 것으로도 파악된다. 프로이트는 하나의 특이한 경우로서 도스토예프스키를 예로 들고 있는데, 이때 그는 현실과 작품에서 일어나는 부친살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프로이트는 작가, 신경증 환자, 도덕가 및 죄인이라는 다양한 성격을 가진 주인공으로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내면을 분석한다. 풍부한 내면세계의 수수께끼는 18세 때의 작가가 겪은 아버지의 살해에서 비롯한다. 은밀히 소망했던 부친의 죽음이 살해된 모습으로 현실화되었을 때의 충격이 그를 사로잡은 것이며, 프로이트는 작가의 간질질환이 이때의 충격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임을 가설로 내세우고 있다. 간질 증상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인 그의 어린 시절에 그를 엄습한 가사상태의 발작에 대한 프로이트의 설명은 다음과 갇다. <그것은 죽은 자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태도, 즉 실제로 죽었거나 또는 죽기를 원하는 자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뒤의 경우가 더 중요하다. 그 경우 발작은 처벌의 성격을 지닌다. 남이 죽기를 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가 그 남이 되어 죽어 있다. 정신분석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소년의 경우 이 다른 사람은 보통 아버지이며, 따라서 히스테리 발작은 증오스런 아버지의 죽음을 소망한 일에 대해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내리는 처벌이다.>3)작가의 도박벽과 관련하여 프로이트는 또한 슈테판 츠바이크 Stefan Zweig의 작품집 『감정의 혼란 Die Verwirrung der Gefuhle』의 「어느3) 같은 책, 276 쪽
여자의 24시간」에서 젊은이의 심리를 분석하고 있다. 사춘기의 소원 공상이라는 시각에서 자위의 욕망이 어머니와 같은 여자의 도움을 받아 충족된다는 설명 끝에 덧붙여 작가의 <도박벽이 참을 수 없는 자위행위의 변형으로서 재연>된 것으로 파악한다.
「정신분석 작업에서 나타난 몇 가지 성격유형」의 두번째 유형인 <성공의 시점에서 좌절하는 사람>에서 집중적으로 분석된 입센의 『로스머스홀름 Rosmersholm』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4) 레베카는 자기가 사랑하는 로스머가 부인을 잃고난 뒤,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 질문의 답변을 설명하는 개념인 죄의식은 - 레베카는 로스머의 부인 베아데의 자살을 유도 했다―사실 표면적인 답변일 뿐이다. 레베카의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근친상간으로 비롯된 죄의식, 부모와 자식 사이의 심리적 갈등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백일몽의 수준에서 만족된 것이 아니라, 현실로서, 그것도 반복된 운명으로서 재현되고 있다는, 개인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죄의식이 그와 같은 인간적 욕망의 수수께끼를 이루는 원인임이 밝혀진다. 레베카의 경우 또한 <성격유형>의 세번째 유형인 <죄의식으로 인한 범죄자들>에 속한다는 점, 그리고 <죄의식이 범죄로 인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즉 죄의식 때문에 범죄가 발생한다는 점>을 유추케 한다.개인운명의 특별한 점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백일몽을 꿈꾸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을 예의적인 존재로 설정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백일몽이건 문학작품이건 그 효과는 대단한 것으로서, 프로이트는 이 문학적 작용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주인공으로 하여금 숨겨진 동기를 모두 다 큰 소리로 남김 없이 발설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작가가 구사하는 <세련된 경제성4) 같은 책, 244-251 쪽
의 기법 eine feine okonomische Kunst>이다. 경제성의 기법을 통해서 작가는 독자에게 스스로 이를 보충하도록 강요하고, 우리의 정신적인 활동을 촉진하며 , 정신적인 활동을 비판적인 사고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우리를 주인공과 동일시하도록 꽁꽁 묶어둔다. 그러나 서두른 작가라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죄다 분명하게 표현해 버릴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런 작가는 우리의 날카롭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지성을 장려한다. 그런 지성은 환상이 심화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막아 버린다.>
2) 『그라디바』의 정신분석프로이트가 옌젠 Wilhelm Jensen(1837 - 1911)의 작품에 주목하게 된 것은 융 C. G. Jung을 통해서였다. 1906 년 여름의 일로서 두 사람이 서로 개인적으로 알게 되기 몇 달 전이었다. 이 글은 1907년 헬러 출판사에서 발행된 응용심리학 논총 1권에 발표되었다. 프로이트는 이 책자를 작가인 옌젠에게 보낸 다음 세 차례에 걸쳐 (5월 13일, 25일, 12월 14일) 짧은 편지를 주고 받는다. 옌젠 소설의 무대를 이루는 폼페이에 대한 프로이트의 관심은 그 이전부터 크게 자리잡고 있었으며, 실제로 1902년 9월에는 그곳을 방문하기에 이른다. 폼페이라는 고고학적 현장의 상징성은, 화산의 잿더미에 파묻혔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발굴된 역사적 배경이 마치 완전히 망각되었다가 어른이 되어 기억으로 되살아나는 유년시절의 체험을 재구성하는 정신분석의 개인사적 방법과 아주 흡사하다는 접에서 , 프로이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라디바』의 분석은 1900년 출판된 『꿈의 해석』에서 『햄릿』과 『오이디푸스 왕』의 정신분석적 접근이 이미 시도된 다음에 이루어진 문학작품의 정신분석으로서, 「도라」와 「성이론에 대한 세 가지 논문」 (1905) 에서 정리된 바 있는 정신질환 이론의 학문적 배경 속에서 프로이트 특유의 꿈이론이 문학이론으로 자리잡아 가는 현장성을 확연하게 보여 주고 있다.
옌젠 소설의 줄거리를 아주 짧게 줄이면 다음과 같다. 젊은 고고학자인 노베르트 하놀트 Norbert Hanold는 그라디바 Gradiva라고 자신이 이름붙인 고대 부조상의 아름다움에 너무 도취된 나머지 그 모습을 현실에서 찾아 헤메기 시작한다. 이 방황은 그를 폼페이까지 가도록 하며, 그곳에서 꿈과 망상의 상태에서 드디어 그라디바이며 초에인 인물을 만나기에 이른다. 79년 폼페이의 종말과 함께 죽었다고 생각된 그녀를 실제 만나고 있다는 꿈과 망상의 세계로부터 그가 마침내 현실로 되돌아 오는 진기한 과정에서, 아버지와 함께 폼페이에 온 초에 베르트강 Zoe Bertgang이라는 하놀트의 어린시절의 소꼽친구가 결정적인 역할을 떠맡는다.프로이트가 『그라디바』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은 소설 속에 나오는 꿈의 해석이다. 그렇다고 해서 꿈의 본질에 대한 어떤 새로운 사실이 더 밝혀질 것으로 그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문학생산의 성격이 좀더 구체적으로 밝혀지리라 예상하고 있다. 『그라디바』 의 분석은 많은 작가의 여러 가지 꿈의 대조분석과는 달리 한 작가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심층분석한다는 점에서 『꿈의 해석』과 보완관계에 있다.하놀트가 그의 고향에서 예술작품 속의 그라디바와 같이 발꿈치를 수직으로 들고 걸어가는 여자를 찾아다니면서 꾸었던 첫번째 꿈은 다음과 같다. 폼페이가 베수비아 화산의 폭발이라는 대재앙을 맞은 날인 79년 8월 24일 그는 폼페이의 주피터 신전 옆에 있는 광장에 서 있었다.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그라디바가 지나가고 있었다 . 그때까지도 그는 그녀가 이곳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무서운 일이 닥칠 것을 알고 있던 그가 경고의 비명을 질렀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걷고 있었다. 신전의 회랑에 이르자 그녀는 층계에 앉아 천천히 머리와 몸을 눕혔는데, 그 얼굴은 점차 창백해지다가 마침내 대리석처럼 차갑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가 뒤쫓아 갔을 때 그녀는 잠자는 듯한 표정으로 충계에 누워 있었으며, 불타는 폼페이 시의 화산 잿더미가 그녀의 몸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 꿈이 갖는 소망충족의 성격은 프로이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고고학자들 특유의 소망으로서, 79년의 재앙 현장에 있고 싶다는 소망이며, 둘째 소망은 성애적 성격의 것으로서, 연인이 잠자리에 누울 때 함께 그 자리에 있고 싶다는 소망으로, 이와 같은 소망들이 꿈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꿈을 꾸고난 뒤 얼마 있다가 그는 창 밖으로 그라디바로 보이는 여자가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뒤를 쫓아간 일이 있었는데, 이 초기 망상 증상의 상태에서는 현실로 돌아오는 일이 손쉽게 이루어진다. 길거리 장사꾼 아주머니가 그의 잠옷차림을 보고 주의를 환기시켰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작가 또는 신경증환자 정도로 몽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던 주인공이 유달리 자신의 관심을 끌고 있는 그라디바를 예술품과 꿈에서 사실적 인물로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점차 그라디바는 살아있는 폼페이의 여인으로서 그와 동시대에 살고 있는 망상의 존재로 점차 바뀌어가고 있었다.
로마, 나폴리를 거쳐 마침내 폼페이에 이르러 겪게 되는 그의 망상의 체험은 그 심도에 있어 상상을 뛰어넘는 종류의 것이다. 폼페이의 유적지에서 그가 실제로 그라디바를 만난 것이다 . 그녀가 독일어로 대답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망상은 계속된다. 그가 그녀에게 처음에는 그리스어로 말을 걸었지만, 대꾸가 없자 그 다음에는 라틴어로 말을 거는데, 그때 그녀는 독일어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와 이야기하실 생각이라면, 독일어로 말씀하셔야 됩니다.> 이 말로써 그녀가 주인공이 생각하는 것처럼 폼페이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독자 자신의 관심이 앞으로는 이 여자의 정체에 쏠리게 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주인공의 망상의 상태는 고삐를 멈출 줄 모른다.프로이트는 이 시점에서 초에라고 밝혀지는 그녀의 역할에 큰 의미를 준다. 그녀는 주인공을 어린시절부터 잘 알고 있으며, 지금은 그의 집 맞은 편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고고학이라는 전문영역에 빠져 어떤 여자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던 하놀트가 그라디바를 통해 소꼽동무였던 초에를 재발견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결정적인 역할을 떠맡는다 환자가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치유되는 과정과 유사한 과정이 하놀트와 초에 그라디바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가 폼페이에 머물고 있는 동안 그녀도 동물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와서 우연히 그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현실의 초에와 하놀트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몽상 속의 그라디바와 하놀트로서 만나게 된다 . 그는 말하자면 환자로서 사태 를 모두 파악하고 있는 정신과 의사인 초에에게 자신의 그라디바 상을 전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초에 그라디바가 바로 이 전이의 과정을 어떤 실제의 정신과 의사보다도 더욱 능숙하게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인물로서 등장하는 것이다 . 초에와 하놀트와의 대화에서 그녀의 말은 의도적으로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한편으로는 망상에 빠져 있는 그의 기대를 만족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망상의 차원 너머에서 그 표현의 무의식적 전실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프로이트는 망상과 전실이 같은 표현형식을 빌려 전달되고 있는 것을 <위트의 승리 ein Triumph des Witzes>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초에가 이미 노베르트의 망상중을 이해하고 그에게 현실의 시각을 서서이 마련해 주던 때에, 그가 꾼 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햇볕을 쬐며 그라디바가 어딘가 앉아서 도마뱀을 잡겠다고 풀잎으로 올가미를 만들면서 말하길, <제발 잠자코 있어, 내 동료친구가 이걸로 굉장한 재미를 보았단 말야.> 수면 상태에서도 그는 이 꿈의 내용이 너무 엉뚱하다고 비판하고 있었는데, 그가 이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은 짧은 웃음 소리를 내지르며 새 한 마리가 도마뱀을 주둥이에 물고 날아갔기 때문이었다.이 꿈의 분석에서도 압축과 자리바꿈의 시각이 엉킨 부분을 풀어 준다. 주인공이 지금껏 모르고 있던 세번째 여관의 이름인 태양 여관 Albergo del Sole과 햇볕(을 쬐며) in der Sonne, 도마뱀을 잡던 동물학자와 초에의 신혼여행 중인 여자천구/동료 여자친구. 프로이트는 이 꿈의 잠재몽을 우선 대략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태양여관에 묵고 있는데, 왜 나와 이런 장난을 하는 것인가? 그녀의 경멸을 표출하고자 함인가? 또는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그래서 남자로 받아 들이려는 것인가?>. 이 마지막 가능성에 대한 답변은 수면상태에서 진짜 미친 생각이라며 부정적으로 내려진다. 논문의 끝에 가서 프로이트는 이 꿈이 드러내는 소원충족의 측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도마뱀 사냥의 상황을 빌려, 연인한테 잡혀서 순종하고 싶다는 소망으로서 수동적, 피학적 성격을 갖는다.
프로이트가 시도한 작품 분석의 특칭은 미시적 방법으로서 흔히 관찰대상으로 주목받지 않는 사소한 대상의 관찰과 부각에 있다. 이것은 꿈의 분석에서 빌려온 방법인데, 그는 발현몽의 의미파편들을 결코 무시하거나 도의시하는 일이 없다. 문학작품의 구체적 분석인 『그라디바 』 의 경우에는 사건의 결정적 전환점에 꿈의 내용이 기술되면서, 미시적 분석의 단서들을 프로이트에게 제공해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유년시절의 한 가지 기억』에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들, 어머니의 장례식 때 사용된 경비내력서, 아버지의 부고 등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을 찾아 내고 있다. 「섬뜩함」에서는 <섬뜩한 unheimlich>이라는 단어와 부정/긍정의 관계에 있는 <비밀스런 heimlich>이라는 단어의 어원과 광범위한 용례를 사전과 문학작품에서 뽑아 언어학자의 치밀함을 능가하는 정확성으로 열거, 분류하고 있다. 그런 다음 그가 다음과 같이 주장할 때 독자는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섬뜩함이란 이 경우에도 옛날에 낯익었던 것이다. 섬뜩한 unheimlich이란 단어 앞에 붙은 전철 un 은 억압의 표시이다.> 이와 같은 미시적 작업을 통한 사건의 주도면밀한 재구성은 프로이트의 이론체계라는 거시적 시각을 저변에 깔며 독자에게 충분한 설득력을 갖게 된다.
2 작품분석1) 송하춘의 『청량리역』 5)5) 이 글은 이미 <현대 비평과 이론)'>(1995년 가을/겨울)에 발표된 논문 『꿈의 문법을 빌린 소설의 서술기법』과 거의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으나, 내용에 있어서 두 글의 차이는 결정적으로 구별된다. 각주 29)를 참고할 것.
<눈을 감으면 그 여자는 어디론지
허겁지검 달려 가고 있었고, 그 앞에 멀리출렁이는 바다가 보였다 . 꿈에 물결이 비치는 날>『 하백의 딸들 』, 53쪽 6)6) 인용문의 쪽수는 송하춘 소설집 『하백의 딸들』(문학과 지성사, 1994)을 따르고 있다. 『청량리역』의 쪽수는 55-80에 이른다.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작품을 부록에 재수록한다. 괄호 안의 둘째 쪽수는 이 책의 부록을 따른 것이다.
(1)『청량리역』1 그리고 0 / 〈논 가운데 황새〉와 〈보따리 같은 할머니〉
소설의 짤막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청량리역에 부부와 사내의 노모가 등장한다. 사내는 삼척으로 떠나고, 여자는 휴가 나오는 아들을 기다린다. 김일병(태준)은 여자친구인 윤희 때문에 어머니를 따돌리고 도망간다. 노모는 대합실에 혼자 남아 있다가 순경들의 도움을받는다. 오팔팔에 사는 계집아이가 노모를 버리고 도망간 여자를 보았다기에, 사람들이 쫓아갔으나 잡지 못하고 돌아온다. 그 사이에 노모는 약을 먹고 자살한다. 한편 최경장은 죄수들을 호송하는 길에 오팔팔에서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지만 그들이 도망가 버리기 때문에 큰 곤욕을 치르게 되고, 민순경과 의경들은 두 사건의 결과를 바라보며 허탈한 상태에 빠진다.
되풀이반복 충동은 실현되지 않은 욕망의 지속적 살풀이다. 꿈과 문학은 바로 이 살풀이의 현장이다. 이 소설의 내용에서 눈에 띄게 되풀이되고 있는 것으로는 남자 등장인물의 도주를 손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가장 문제되고 있는 되풀이는 사실은 최경장을 통해 되풀이되는 노모의 사랑이다. 내용의 심충분석에 들어가기 앞서 형식적인 문제를 먼저 다루기로 한다. 그러자면 구체적인 공간을 가리키는 단어 <청량리역>을 꾸미고 있는 소도구들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공간의 상관개념인 시간의 특정한 표현을 먼저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그 까닭은 이 표현이 소설에 나오는 다른 모든 단어들과는 대조적으로 아라비아 숫자로 쓰여 있으며, 게다가 이렇다 할 의미도 없이 세 차례나 되풀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전광판 시계가 방금 10:00를 넘어서고 있었다 >(56, 466).<10:04 때, 개찰구 너머 철길 쪽에서 역무원 아저씨가 나타났다>(57, 468).<정각에서 1분을 넘긴 10:OO 에 그는 개찰구의 철문을 열었다 >(58,467).서울에 있는 많은 역 가운데 왜 하필 청량리역인가 ?7) 하는 물음은7) 이 소설의 현재사건에 단역으로 참가하면서도 동시에 방관자인 의경 한 사
람이 소설 맨 뒤에서 갇은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렇지? 하필 청량리역에서 호송을 할게 뭐냐?'>(79, 489),
전광판에 그려질 수 있는 스물네 시간 가운데 왜 꼭 10:00 이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과 맞물린다. 첫번째 물음에 대한 답변은 소설에 나오는 또 하나의 공간지칭 단어로 가능하다. 청량리역은 바로 그 다른 공간, <오팔팔>을 쉽게 연상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어떤 특정한 구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서는 아주 드문 일이지만 이 단어 또한 숫자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단어를 작가는 이 소설에서 꼭 세 차례만 쓰고 있다.<알고 보니, 그 아이는 오팔팔에서 심부름을 나온 아이였다 >(72, 481).<‘바로 여기, 오팔팔에서 걸렸더구만 '>(74, 483).<‘오팔팔이 라니 ?'>(74, 483).그러나 시각을 알릴 때의 즉물적 태도와는 달리 작가는- 이 숫자의 시각적 성격을 아예 무시하고 있다. 그러면 그럴수록 어떤 임의의 숫자를 전광판의 시각적 효과를 빌려 독자에게 부각시킨 위 세 문장의 독특한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그 숫자를 읽어 보자. 한글발음과 한자발음의 숫자를 읽어내는 두 가지 독법을 적용하면 각각 <열시>, <십에 사>, <십에 육>으로 읽어 볼 수 있다 8). 여기에서 분명히8) 작가는 전광판의 시각적 특성을 빌려 <열 시>라는 일상적 언어표현 대신 아라비아 숫자를 부각시키고 있다. 작가의 이와 같은 기법을 빌려 필자 또한 시각적 특성이 없는 <열>이라는 한글보다 <십>이라는 한자어, 시각적 특성을 아직 확보하고 있는 한자어를 더 부각시키기로 한다. 게다가 <십>은, 人을 반복시킬 경우에는 <씹>이 되므로서 시각적 성격에 청각적 성격이 덧붙여진다. 이 이중적 의미가 직접 단어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숫자로서 무의미하게 그러면서도 되풀이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은 소설의 구성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다. <검열>을 피해 드러난 이 숫자와 <가위>가 설명되어 있는 본문 다음 부분을 참고할 것. 민 순경과 새 친구 두 사람 사이의 대화에서는 (74-75, 483-484) 이 단어가 생략되면서 벌어지는 장면이 익살스럽게
그려져 있다. 끝 장면에 가서야 그나마 <오입 >(79, 488) 이라는 색깔 없는 표현이 딱 한 번 쓰이고 있다. <십에 사>,< 십에 육> 두 표현의 끝 숫자를 놓고 특정한 한자로써 보완시켜 말장난할 때, 이 소설의 주제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이중 독법이 가능하다 < 사랑과 죽음>, <사랑과 육체>. 노모의 은유적 표현인 < 보따리> 또한 10 이라는 숫자와 연관되는데, 그것은 보자기를 묶거나 풀 때 한자어 열 십자의 모습으로 잘 드러난다. 어떻게 보면 묶인 보자기 안에 <니미씹할>이라는 욕망/금기가 감추어져 있다 할 수도 있겠다. 이것과 관련하여 참고할 것은, 어린이 놀이에서 <가위>는 <보>를 그리고 <보>는 <바위>를 이긴다는 사실이다.
짚고 넘어가야 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열시 육분을 독자에게 보여중으로써 작가가 끝까지 5라는 숫자를 독자의 시각으로부터 떼어 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정각 (작가는 이 단어로써 열시가 아닌 열시 오분을 말하고 있음)에서 1분을 넘긴 >(58, 468) 이라는 노골적으로 은폐된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9). 이 점이 지적된 마당에서는 왜
9) 네째 절에 가서야 드디어 숫자 5가 무심코 시야로 들어온다. <오늘은 예정보다 5분 늦게 도착한 셈이다 >(63, 473). 소설의 이 대목에 와서 두 명의 군인이 (육군 하사와 일등병) <몇 횐데?> <십삼 회.> <어! 이 새끼 나하고 동창이잖아!>등 감추어전 음담패설을 길게 농하고 있다. 그 농담의 성격은 십/씹, 삼 회 세 차례라는 <말장난>, 동성애의 한 표현인 구멍동서(나란히 걸려 있는 팬티 참고, 65, 475) 등으로 나타난다. 뭇 사내들(또는 두 군인 아저씨)의 하룻 밤 정다운 여자 물 상칭할 수도 있는 <윤희>라는 이름도 나온다. 옛날의 588 에서 손님을 붙잡는 여자들의 풍경이 연상되는 장면들도 있다. <그러나 일등병이 워낙 본체만체했으므로, 여자는 쉽게 접근하지 못하였다>(65, 475) <이번에 여자는 일등병의 팔뚝을 붙들고 완강하게 버렸다.>, <일등병과 여자는 광장 한복판에 서서 잠시 겯고틀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다섯째 (5) 절에 와서는 청량리역에서 빠져나와 지하도로 무대가 드디어 바뀌며 또 하나의 여자 이름 <민자년>이 - 이 소설에는 여자 이름 둘만 나오고 나머지 여자는 모두 익명이다. 남자의 이름은 이 두 여자 이름과의 관계 속에서 태준이 한 사람만 밝혀진다 - 나오게 된다. 이 모든 소도구들은(숫자, 군인, 여자, 지하도, 팬티 또 그리고 더) 두말할 필요 없이 <보여지는> 숫자 5와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58, 468 쪽의 이 표현 속에 문제되고 있는 아라비아 숫자 <1> 이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오팔팔이라는 표기가 아라비아 숫자가 아닌 한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 까닭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오팔팔은 말하자면 작가에게 시각적 성격이 박탈/거세된 대상인 셈이다. 이 소설의 첫문장을 주의깊게 읽은 독자에게는 이제 중요한 하나의 독서시각이 열리게 된다. 그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역파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것,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하면 <0> 에 대한 관심으로 소설은 시작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역파가 소설의 처음에 언급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소설의 끝까지 주의 깊게 따라가 본다 할지라도, 과연 청량리역에 역파가 있는지 없는지는 독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다. 소설의 첫 문장을 이룰 만큼 작가에게 중요한 역파가 실제 어디에 있는지를, 아니 있는지 없는지의 그 기본적 사실조차 이 소설의 독자가 설령 모른다 할지라도, 이 소설을 마치 다 이해한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답변의 실마리는 그나마 적어도 작가에게는 보일 수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대상인 바로 그 역파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자신에게 이 단어가 어떤 의미를 띄고 있다는 점을 작가는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그 단어를, 기의가 아니라 기표인 그 단어를 반복하여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숨길 수 없는 어떤 부분을 이제 공공연하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역설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은 껍데기인 이 기표를 뜻글자인 한자로써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글과 한자의 되풀이. 되풀이는 이 소설의 중요한 기법이다. 무엇이 과연 반복되고 있는 것인가? 이미 밝혔듯이 숫자가 세 차례 되풀이되고 있다. 그 숫자는 10이다. 똑같이 세 차례 되풀이 되는 오팔팔이라는 숫자가 있다. 열시(10:00,10:04,10:O6)라는 숫자에는 또한 영(0)이라는 숫자와 일(1)이라는 숫자가 되풀이 드러나 있다. 보이지 않는 역파는, 말하자면 숫자로는 <0> 이고, 보이지 않는 역파라는 표현이 이미 함축하고 있는 보이는 역파는 숫자로는 <1> 인 셈이다.욕망의 분열된 표현으로서의 0 과 1, 그리고 틈새를 실현시키는 장치, 욕망의 억압/표출의 상징으로서의 가위 (0과 1의 결합된 모습)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0은 여성의 성의 상징으로(<샛문>, <변기>, <지하도> , < 개찰구>, <가방의 지퍼>) <보따리 같은 할머니>의 모습 그리고 < 허겁지겁> 굴러가듯 도망치는 몸짓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소설의 첫 문장을 이루는 <보이지 않는 역파>인가 하면, 역에서는 보이지 않는 부재의 현장 588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것은 생명의 모습이며(<빨간 산딸기 두 접시와 다래 다섯 개>) 동시에 그 입구가 차단된 폐쇄된 공간 (<감옥>)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그와 달리 1은 남성의 성의 상징으로(<우렁찬 바퀴 소리>, <칼>, <일등병의 팔뚝>, <우람한 돌기둥>, <철길>) 일등병, 역무원, 경찰등 지키거나 쫓는 쪽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죽음의 모습이며 (<산송장>)검열의 현장이다. 검열을 나타내는 가위에는 <그림>으로서 <1> 과
질 수 있다. 세 사람의 여자들은 태준이 엄마, 보따리 같은 노파 그리고 오팔팔에서 심부름을 나온 아이를(<청소하는 아줌마들> 또한 이 아이가 대표하는 유형에 들어간다) 말한다. 남자의 유형은 그 역할로 볼 때 다시 크게 둘로 나뉜다 도망가는 남자와 지키는/쫓는 남자다. 여자의 유형도 그와 비슷하게 역할이 주어져, 도망가는 여자와 쫓는 여자로 나뉜다. 이때 그 위치가 불분명하게 그려지고 있는 여자는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이 소설의 구심점으로 작용하는 <보따리 같은> 노모다. 아들이 노모로부터 도망가다시피 행동한다는 점은 그녀의 며느리인 태준이 엄마와 그 아들과의 관계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그녀는 도망가는 사람인가 하면 동시에 쫓는 사람이다. 태준이 엄마는 그럼으로써 분열된 모습을 보이게 된다. 홍미로운 점은 지키는/쫓는 남자의 유형 또한 그 안에서 다시 도망가는 남자와 지키는/쫓는 남자로 세분, 분열된다는 것이다. 일등병으로는 지키는 남자이지만 태준이라는 이름을 가전 아들로는 도망가는 남자인 셈이다 10). 세 가지 유형의 남자들은 그럼으로써 도망가는 남자들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때 최경장의 위치가 문제된다. 그러나 가만이 들여다 보면 그도 또한 <새끼들>을 결과적으로 도망가도록 하면서 비슷한 운명을 나누고 있다.
김일병과 최경장이야말로 이 소설에서 자리바꿈을 실현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작가의 분신으로서 노모로 대표되는 모성에 대한 양가성을 구현한다. 지키는/쫓는 남자의 유형에서 이미 가시화된 양가성의 문제는 이 소설의 구조 속에서 모성에 대한 남자들의 이중적 태도로 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태준이라는 이름을 가진 김일병의 경우는 모성에 대한 거리감이 더 강조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성에 대한 밀착성이 완전히 배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보따리 같은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한편에서는 숨김없이 표현되고 있는10) 각주 23) 을 참고할 것.
것이다. 태준이라는 이름은 꼭 두 차례 나오는데, 그것은 가족관계에서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는 여자에게 처음 전달된다. <'태준이 올 시간인데, 기다렸다가 당신이 직접 데리고 들어가지 그래 ?'>(59 , 469). 태준이가 어머니로부터 벗어 나려는 심리가 있는 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두 사람을 일부러 부딪치게 소설을 꾸려가고 있는 화자의 의도는 자리바꿈이라는 장치에 대한 이해를 필연적 으로 만든다. 문학사에 기록된 소설가의 이름으로 이태준과 박태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모성에 대한 양가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김일병의 이름이 왜 하필 태준인가 하는 점을 분신과 자리바꿈이라는 개념들을 통해 충분히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태준이라는 이름은 그 여자가 남편의 말대로 아들을 기다렸다가 만났는데도, 그가 도망가는 바람에 쫓아가야 되는 장면에서 또 한 차례 나온다. <‘태준아? 태준이 어디 갔니 ?'>(69, 479).
모두 아홉 개의 절로 나뉘어 있는 소설에서 그 사이 사건의 진행은 어느새 2절에서 5절로 건너 뛴 상태에서 그 5절이 끝나가고 있다. 소설은 우선 양적인 측면에서 그 분수령을 이미 넘어선 것이다. 현재와 과거의 두 가지 사건으로 이루어전 소설에서 이제부터는 소설의 남자 주역들은 모두 무대에서 빠지게 된다. 그 텅 빈 자리에 이제는 청소하는 아줌마들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벌써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도망가는 장면과 쫓아가는 장면이 일등병과 여자 사이에서 대표적, 상징적으로 다루어지고 난 시점에서, 화자에게 남아 있는 일거리는 뒷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일을 마무리지으며 독자에게 그럴듯한 설명을 해주는 것이다.이 과정에서 새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오팔팔에서 <심부름을 나온 >11)(72, 481) 아이라는 사실은 아주 상징적이다. <오팔팔>이라는 단11) 이 단어는 또한 소설의 첫 단어 <역파> 를 연상시킨다.
어가 여기에서 처음 그리고 의식적으로 쓰이고 있다. 소설의 이 부분에 와서 아이가 사건의 증인 역할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은 작가/화자의 문제와 관련 되어 매우 흥미롭다 . 아이말고도 소설 속의 대부분 인물들 또한 <심부름>을 나온 사람들로 보인다. 그러나 소설 구성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결정적인 증인의 역을 떠맡고 있기에 그 누구보다도 이 아이야말로 작가 자신의 <심부름꾼>이 되는 것이다. 그 아이가 증인 역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은 작가와 함께 계속 사건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두 남자, 그것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인 두 남자가 각각 어머니로부터 도망가 버린 다음에, 소설의 바로 이 부분에 이르러서야 작가 자신 어쩔 수 없이 심부름꾼/화자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이제는 작가의 입장을 어렵풋이 이해하기 시작한 독자에게 선수를 쳐서 간접적이긴 하지만 그런 만큼 더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는 것이다. 작가와 화자의 구체적인 분리가 말하자면 이 장면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그 결과 다음에서 다루어지게 될 화자와 작가의 일치하지 않는 서술 형식의 문제가 뒤따르게 된다.
소설의 처음과 끝인 1절과 9절에는 단역의 기능만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한다. <의경 셋에 경장이 하나 >(55, 465). 그리고 <의경 셋에 순경이 하나 >(78, 487 ), 이들은 소설에 나오는 두 사건 가운데 현재사건의 뒷처리를 떠맡게끔 설정된 인물인데, 결과적으로 이들은 일을 끝매듭짓기는커녕 오히려 일을 얽히게 만든 것처럼 몰려 있다. 그 몰린 상황을 소설의 9절에서 1절에 등장한 최경장과 자리바꿈만 한 인물 민순경이 현재사건을 매듭지으며 다음과 같이 내뱉고 있다. <‘아냐, 그건 내 실수였어.’ 민순경은 뭔가를 크게 후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그가 밝히고 있는 사실은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말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맞대질을 시키겠다고, 누가 말했었지?'>(78, 487). 물론 이 표현은 7절에 나오는 문장과 관련되어 있기는 하다. <‘그래, 그런 놈은 당장 잡아다가 맞대질을 시켜야 된다구 '>(76, 485), 그러면12) 시간적으로 사건의 현장을 거의 지키고 있으며 (3절에서 9절까지) 할머니 가방의 지퍼까지 열었던 민순경이 588에서 심부름 나온 아이의 증언이 이미 있었는데도 사건의 협의자로 그 아들을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은, 위에서 언 급된 민순경의 발언 및 맞대질의 모호성과 함께, 논문의 2장에서 재시되는 결론의 신빙성을 뒷받침한다.
서도 과연 누가 노파를 죽음으로 이끈 도화선인 맞대질의 발설자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말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라는 발설을 민순경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독자가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입을 빌려 알려지는 그 다음의 문장 <누가 말했었지?>에 이르면 맞대질의 발설자는 끝내 익명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노파의 자살이라는 사회적 문제의 윤리성이 이 소설의 메시지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에게는 이런 끝처리가 바로 이 문제의 심각성과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믿고 <맞장구>를 (80, 489) 치며 주제와 형식의 일치에 만족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 글의 관심은 바로 이런 틈새에 놓이며, 이 시각은 다름이 아니라 화자와 작가의 일치하지 않는 서술내용과 깊이 맞물려 간다.
틈새틈새는 억눌려 있는 무의식이 의식화되는 갈등의 현장이다. 글의 앞뒤가 어긋나면서 드러나는 틈새는 이 소설에서는 이미 그 앞 6절에서 비롯되고 있다. 누가 이 노인을 버렸을까? 라는 물음에 이 사건 해결의 책임을 떠맡은 경찰은 다음과 갇이 말하고 있다. <‘허어, 참. 어떤 불효 막심한 녀석이 또 제 에미를 하나 버렸군.'>(70, 480), <‘아,참. 버려진 노모가 있소. 그 아들이 몰래 갖다 버렸을거요 '>(75, 484).12) 경찰의 추측, 사실 틀렸다고 할 수만은 없는 이 추측은 그러나 한 증인의 발언으로 뒤집어진다. <‘아줌마, 내가 봤어요. 이 할머니, 아까 어떤 아줌마가 여기다 놓고 갔어요 '>(71, 481). <고도로 훈련된 기량에서 달성>13)된 이 소설은 바로 이 결정적 장면에서 이 소설의 가장 허술한 면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 어긋난 곳에서 이 작품의 제 모습이 발견되고 있다고 보는 시각에서는 결코 허술한 면으로 치부되어 한쪽으로 밀어 놓아질 대목이 아니다. 독자로 하여금 오팔팔에서 심부름 나온 아이의 말을 믿게끔 화자의 입장을 구성하면서, 동시에 불일치의 흔적을 흩뿌리며 다니는 작가의 입장이 묘하게 뒤얽혀 있다. <처음에 아줌마들은 도리어 그 아이를 의심했었다>(71, 481).
이와 같은 작가의 치밀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문장에서는 앞뒤가 안맞는 표현이 드러난다. <‘그래, 그런 놈은 당장 잡아다가 맞대질을 시켜야 된다구.'> 오팔팔에서 심부름 나온 아이가 다시 등장하여 앞의 증언을 되풀이 한다. <‘아까 그 여자였어요. 저기서 봤어요. 그 여자가 이 할머니를 여기다 버리고 갔었다구요.'>(75, 485). 아이의 발언은 반복되고, 그 내용에 또 하나의 사실이 덧붙여지면서 요지부동의 증언으로 자리잡는다. <‘지하도 쪽으로 가고 있었어요 . 어떤 군인 아저씨랑 같이였어요.'> 위에서 지적되었듯이, 군인은 경찰관, 역무원과 함께 지키는/쫓는 사람의 역할을 떠맡고 있다. 그는 이미 그 역할을 훌륭하게 보여 주기까지 한 바 있었다. <여자는 상관없이 계단을 뛰어내려 가고 있었다. 일등병이 그 뒤를 바싹 따라붙으며 다그쳐 물었다. ‘엄마가 그랬죠? 그렇죠? 엄마가 할머니를 내쫓은거죠?'> (68, 478). 그런데 이제 와서 그 군인 아저씨와 그 여자가 같이 있었다는 사실은 여자에게 반복되어 지워진 혐의를 지우고 그 화살이 오히려 엉뚱하게도 남자를 맞추도록 조준되어 간다. 이 엉뚱한 방향의 표현이 바로 위에서 인용된 바 있는 그 문장이다. <‘그래, 그런 놈은 당장 잡아다가 맞대질을 시켜야 된다구.'> 보따리 같은 노파를 버린 사13) 1993년 여상문학상 수상작품집 』 411쪽에 실린 평론가의 문장.
람은 과연 이 문장이 암시하듯, 그리고 경찰과 또 청소하는 아줌마들의 섣부른 추측처럼 남자인 것인지 아니면 증인의 말과 일등병의 추측처럼 여자인 것인지 아리송하다. 그리고 위에서 지적된 대로 누가이 발설의 주인공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니 이 사건의 갑작스런 종결 때문/덕분에 가려져 있다. 우리의 작업은 이제 이 문장과 위에서 같이 인용된 또 하나의 다른 문장을 문맥에서 때어내어 우리의 시각에서 재구성하는 일로 이어전다. 우리가 방금 살펴보면서 확인하였듯이, 문맥은 오히려 진실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다른 문장은 , 우리가 반복하여 인용하고 있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말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 맞대질을 시키겠다고, 누가 말했었지?'> 이 문장이 담고 있는 고유한 문제점에 접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문장이 되풀이 되고 있는 문장이라는 언어적 사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것은 7절과 8절에서 반복되는 이 문장이 6절과 7절에서 되풀이 등장하고 있는 아이에 의하여 사실은 가능하다는 점에서 더욱 강한 설득력을 얻게 된다. 아이의 생김새는 6절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열두서너 살이나 됐을까, 잽싸고 당차게 생긴 계집 아이 하나가 아줌마들 사이를 파고든 것은 그때였다 >(71, 481 ), 7절에 서 되풀이되는 그 문장은 이제는 다음과 같다. <열두서너 살이나 됐울까, 아까 그 계집아이가 다시 장면 속을 파고 든 것은 그때였다> (75, 485). 되풀이 되는 나이와 관련하여, 소설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2절의 첫째 문장을 살펴 보자. <나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사내 하나가 방금 대합실 안으로 뛰어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58, 468). 현재사건이 바로 이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는가 하면, 이 사건이 바로 그 아이의 반복된 등장으로 말미암아 해결/파멸로 치닫게 된다는 점은 우연치고는 너무 극적인 우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것이 우연은 처음부터 이미 반복을 배제하고 있기에 가능하기 때문이다. 위 세 문장에서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표현이 있다. <그때였다.> 숫자의 반복에서부터 시작하여, 같은 표현의 반복과 같은 언어적, 미시적 측면이 있는가 하면, 등장인물의 반복, 사건의 반복과 같은 구성적, 거시적 측면이 있다. 말하자면 반복은 이 소설 시학의 핵심을 이룬다 할 수 있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 반복의 성격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또 한번 그러나 마지막으로 하나의 문장을 더 살펴보자.
압축압축은 꿈의 문법에서 수수께끼의 큰 몫을 차지한다. 압축되어 있는 문제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0)14) <밀린 인파의 봇물이 터지자, 긴 꼬리의 줄이 잡아 먹히듯 철길 쪽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58, 468).이 문장이 인용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1절에 나온 문장으로서 이미 이 소설의 억압된 여러 문제점들을 하나의 핵심으로 응축시켜 표현하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이 문장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문장들의 중요성을,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는 숫자와 함께 가장 먼저 1절에서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며, 위에서 지적한 바있는 <그때였다>는 표현과 각각 1절의 끝 그리고 2절의 처음이라는 관계로 서로 맞물려 있는 문맥 때문이다. 소설의 구성, 사건의 발단과 그 종결이라는 극적 구성을 알리는 데 이 표현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반복기법이야말로 이 소설의 씨줄이자 날줄이라는 입장을 긍정적으로 확인시킨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 문장을 보는 우리의 관심은 더욱 커지고, 그 문장이 과연 어디에서 되풀이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변형되어 나타날 것인지 마냥 궁금해전다. 현재사건의 전개 바로 직14) 0과 1의 상징성을 이미 앞에서 밝혀 놓았기에, 1과 2라는 일상적 번호 대신에 두 인용문의 내용에 더 적절한 0과 1이라는 번호를 각각 불이기로 한다.
전에 그 모습을 보였던 이 문장은 그 사건이 이미 종결된 상태에서 다만 경찰의 확인업무만 마무리 되고 있는 8절의 첫문단에서 거듭 드러나 있다.
(1) <개찰구가 열리면 이제 긴 줄의 꼬리는 잡아당기듯 철길 밖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76, 486).이 두 문장은 서로 차이를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비슷하면서도, 그러나 시각을 달리하는 표현에 이르러서는 결정적인 차이를 드러내 놓고 만다 이 소설의 특징을 살린 공간표현을 먼저 보자. (0)의 문장에서는 (1)의 문장과는 달리 개찰구라는 단어가 빠져 있다. 개찰구는 지키는/쫓는 사람의 영역이다. 지키는/쫓는 사람을 구체적 행동으로써 대표하는 일등병과 여자의 끝장면도 바로 이 개찰구에서 벌어진다. <개찰문은 자동 개폐식이었다. ‘태준아? 태준이 어디 갔니?' 여자가 소스라쳐 놀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승강장 안으로 그녀가 자기 몸뚱이를 들이 밀었다가 다시 빼내는 순간, 일등병이 그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69, 479). 쫓아가는 사람은 여기에서 걸리고 만다. 개찰구는 말하자면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검열>의 현장이다. 무엇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까닭은 바로 그 욕망의 부분이 억눌려 있기 때문이며, 이 억눌린 부분은 개찰구/검문소를 빠져나와 어떻게 해서든 제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이 검열기제 앞에서 사람의 일상적 의식은 무력해진다. 검열의 생리를 잘 알고 있는 것은 무의식이다. 태준은 따라서 흔적도 없이 그 안에서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의식은 갈 길이 없다. 그렇기에, <여자는 참시 그 자리에 넋을 잃고 서 있었다.> 그 여자는 다시 움직인다. 그러나 그녀가 가는 곳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다론 어느 곳도 아닌 바로 그곳, 또 다른 검열기관이 자리잡고 있는 곳일 수밖에 없다. <여자는 허겁지겁 개찰구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정신없이 대합실을 향해 뛰었다.> 이 문장으로 합설은 끝나고, 독자는 화자와 함께 이 소설의 결정적 검열기관이 자리잡은 곳인 대합실 15)로 무거운 발을 옮겨야 된다. 대관절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그런 것인가, <그러나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여자는 일단 그 통로를 받치고 섰는 우람한 기둥 뒤로 가서 자신의 몸뚱이를 가렸다. 일등병을 찾는 일보다 더 크고 무서운 일이 이미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70, 479-480).
15) 의식/무의식의 검열 현장인 대합실/개찰구에는 따라서 일상적 검열기관이 무력하며, 잠정적으로 그 기능이 정지된다. <역사의 왼편, 나오는 문 안쪽으로 ‘청량리경찰서 보안근무소’ 간판이 걸려 있긴 하지만, 거기는 문이 닫혀 있었다 >(55, 465). 그리고 그 현장에서 벌어지는 의식/무의식의 충돌 때문에 <역파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기에 이재 자유로운 <연상은 육체와 그것이 속한 사회 사이의 충돌에 관해 얘기해 준다.>
개찰구라는 단어는 (1)의 문장에만 나와 있다. <개찰구가 열리면> 검열행위가 결정적으로 느슨해진다. 이 상태에서 노파의 죽음이 바로 그 다음에 밝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태껏 억눌려 있던 것은 따라서 노파의 죽음이다. 말하자면 노파의 죽음과 관계된 심리기제가 지금까지 억눌려 있다가, 이 죽음과 더불어 해방되어 여자의 무의식 또한 제 집으로 돌아 울 수 있게 되었으니, 따라서 <잡으러 간 여자는 광장 밖의 아무데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76, 486). 그렇다면 (0) 의 문장에 개찰구라는 단어가 보이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 단어는 그 문장에서 쓰이지 않고 있다. 바로 그 앞의 문장에 이미 나왔기 때문이다. <정각에서 1분을 넘긴 10:06에 그는 개찰구의 철문을 열었다.> 이 문장을 (0)의 문장과 연결시켜 살펴보기에 앞서, 여기에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어쨌든 (0)의 문장에는 <개찰구>가 보이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강조하자면 (0)의 문장과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는 1절의 첫 문장에 부딪게 된다. <역파는 보이지 않았다.> 낯선 단어 <역파> 때문에 우리의 뇌리에 아직도 남아 있는 이 문장은 그
러나 그 다음 문장과 연결되면서 그 수수께끼 같은 성격을 곧장 박탈당한다. <역사의 왼편 ……문이 닫혀 있었다>라는 다음 문장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수수께끼 같은 표현은 그만 갑자기 무색해지며, 그 다음 문장처럼 산문의 기능을 다 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사실과 직결된 산문적 문장이 있기에 역설적으로 첫 문장의 수수께끼 성격은 대조적으로 더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사건이 벌어지기에 앞서, 열린 <철문> 개찰구는 개찰구가 갖고 있는 양가성 열림/닫힘의 함수 관계에서 열림보다는 오히려 닫힘을 상징한다. 그리하여 그 철문은 요지부동의 억압상태를 보인다. 언젠가는 기필코 한 번 폭발하고 말 이 위험의 수위, 그 상태가 다음과 같은 표현들을 얻고 있다. <밀린 인파의 봇물이 터지자>, <잡아 먹히듯>, <철길 쪽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이 위험의 구체적 대상이 젊은 남자가 처음 대면하는 여성, 그것도 위험한 여성/창녀의 성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이 동시에 지적될 수 있겠다. <긴 꼬리의 줄>은 <정각에서 1분을 넘긴 10:06>이라는 표현에서 은폐된 5라는 숫자와 영(0) 이라는 숫자를 위아래로 반복하여 붙일 때 이루어지는 숫자 88이 이어지는 장면, 그러니까 588이라는 적선지역에 줄을 이어 끝없이 서 있던 여자/구미호를 연상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1)의 문장에서는 시간적으로 (0) 의 문장과 긴 거리를 두고 위험 밖에 서 있는 모습(<이제>, <철길 밖으로>)을 보여 준다. 여성의 위험은 커녕 여성 자체를 이미 의식하지 못하는 태도 즉 무기력한 남성의 상징 및 자위행위를(<개찰구가 열리면>, <건 줄의 꼬리>, <잡아 당기듯>, <빨려 들어갈 것이다>) 연상시킴으로써 이 두 문장의 비슷한/반대되는 성격이 두드러진다. (1)의 문장 바로 그 앞 문장은 우연치 않게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역사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76, 486). 다시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장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그 문장은 (0)의 문장과 그 정반대되는 위치에서, 그러나 끝까지 1절이라는 공통된 관계 속에 남아 있다. <역파는 보이지 않았다.> 한글과 한자라는 두 대립되는 기표로 반복되며 우리의 시각을 교란시키고 있는 역파는 <한 때의 청량한 바람이 그 청량리 바닥을 휩쓸고 지나> 갔는데도 (80, 489) 과연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인가?16)
16) 의식주를 상칭하는 <보일러, 밥통, 옷, 술>이 차례대로 걸려 있는 광고판의 마지막 다섯번째 <빈 게시판>으로 작가 스스로 간접적이나마 이 질문에 대답을 내리고 있다. <빈 게시판도 무슨 뜻이 담겨 있는 것 같기는 하다>(60, 470).
(2) 1 또는 0/ 발현몽 또는 잠재몽
<되풀이>라는 형식적 측면이 강조된 작품분석에 이제는 <소원풀이>라는 내용적 측면을 덧붙임으로 송하춘의 소설시학을 정리하기로 한다. 「청량리역」에서 작가는 이론적 소설시학의 단계를 구체적인 언어의 작업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으며, 이 작품에 구현된 소설시학은 그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축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17).17) 『발견으로서의 소설기법』을 출판하여 좋은 반응을 받고 있는 작가가 이 책에 이어 발표한 첫 작품이 바로 「청량리역」이다.
보이지 않는 역파라는 상징을 빌려 표현되어 있듯이, 소설 「청량리역」에서 여성의 성은 감추어져 있으면서, 되풀이되는 두 문장의 비교에서 밝혀진 것처럼 부정적으로 그려져 있다. 여성의 성뿐만 아니라 여성 자체가 부정적 시각에서 포착되어, 노모를 버리는 짓조차 여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소설의 처음인 1절과 끝의 9절은 등장인물이 아예 남자들, 그것도 남성위주의 사회를 지키는 경찰들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끝 대목에서 그들이 무심코 던지는 말만 들어도 (<‘여자를 보면 남자는 이성을 잃는 법이다. 그게 사랑이다.' ‘사랑이라구? 사랑, 더럽구나.'>) 여성부정적 시각을 곧 느낄 수 있다 18) 이런 부정적 시각이 이미 바탕
18) 여성부정적 시각은 여성예찬적 시각과 표리관계를 이룬다. 노모가 차지하는 구심력/원심력적 위치로 보아 이것은 당연하다. 각주 9)에서 짧게 언급된
동성애의 문제가 이 맥락에서 더 자세히 검토되어질 필요가 있다(프로이트의 논문 『레오나르도 다 빈치 유년시절의 한 가지 기억』을 참고할 것). 여기에서 부각되는 인물이 바로 최 경장이다. 최 경장은 교도소 가는 <새끼들> (74, 484)을 데리고, 그 < 새끼들이 하도 사정사정 애원을 하니까>, <자기는 않고>, <밖에 서서 망을 봐줬대나?>라는 간접화법 사건의 주인공으로 묘사되고 있다. 필자가 강조한 인용문만 읽으면 그의 행동은 못 먹는(<일단 감방에 들어갔다 하면…… 맛이라곤 볼 수가 없거든>) 불쌍한 새끼들을 위해 죄를 지으면서까지, 자신은 먹지도 못하면서 새끼들만 챙겨 주는 갸륵한 모성을 금방 연상케 한다. 문제되는 심리는 모성을 흉내내며 자신이 모성의 자 리에 들어 앉아 자기가 어머니한데 받은 사랑을 고스란이 자기와 같은 남자 (새끼)에게 주고자 하는 동성애의 충동이다. 여성부정적 시각과 여성예찬적 시각이 얼마나 맞뭉려 있는지 보여 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여성 자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그런 여자와의 육체적 사랑에 대한 거부감을 동시에 표현하는 <더럽구나>라는 단어가 최 경장 사건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암시적이다. <더럽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74, 483). 필자의 시각에서는 이 표현이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표면적 거부감에 대한 물음/항변으로 이해된다. 앞 본문의 「압축」에서 자세히 분석된 두 문장의 대비는 동성애 충동이라는 시각에서 훨씬 더 뚜렷하게 들어난다. 이렇게 되면 앞에서 설명된 <1> 과 <0> 의 상칭이 <남자의 성>과 <항문>의 부분만큼 더 확장된다. 화장실이라는 소도구가 묘사된 부분을 인용해 보자. <그 말을 들었을 때, 여자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여자는 잠시 허둥댔다 . 그녀는 지금까지 잘 버티고 섰던 크고 우람한 돌기둥을 두 팔로 힘껏 밀었다. 그리고 어떻게 화장실까지 걷어나갈 수 있었던지, 그녀는 자신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 변기를 타고 앉았던 기억은 난다. 그러나 실지로 방뇨가 있었던지 없었던지는 아무래도 기억을 할 수가 없었다 >(73, 482). 화장실에 왜 갔는지, 그것이 방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또 다른 볼 일 때문이었는지 아주 불투명하다. 기억을 할 수 없다는 대목만 가지고 보자면, 여기에서 문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은 억압된 욕망, 금지된 욕망과 관계되어 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이 욕망의 정체를 벗겨 줄 수도 있는 귀절을 위 인용문에서 따로 떼어 강조한다면, <크고 우람한 돌기 등을 두 팔로 힘껏 밀었다.>
에 깔려 있기 때문에, 작가가 애써 소설의 정점에 설정한 비극적 사건은 그 도덕적 성격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없기에 이른다. 따라서
송하춘의 소설에서 주목할 것은 노모의 죽음을 빌린 윤리 도덕적 교화라는 표면적 문제점이 아니다. 은유/압축과 환유/자리바꿈을 빌린 무의식의 언어적 작업이 일상성의 단면을 제시하는 단편소설이라는 허구의 세계 안에서 눈부신 문학적 결실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때, 이 점은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소설보다도 더욱 허구적인 세계로서 무엇보다도 꿈을 들 수 있겠는데, 꿈이 사실은 소원의 충족일 따름이라는 프로이트 시각에서 보자면 도대체 무엇이 이 작품에서 문제되고 있는 것인가? 필자는 다만 <그것이 착각이 아니기 를 바라며 >(80, 489)19) 정신분석적 입장에 서서 이 문제의 심층을 열어 놓는다. <보따리 갇은 할머니>를 소설적 허구라는 틀 안에서 버릴 수밖에 없는 사람20)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21)<무엇이든 보지 않는 것이 없
19) 이중독법의 정당성을 옆에서 거들어 주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이 표현으로 사실상 소설은 끝나고 있다. 그럼으로써 소설의 첫문장 <역파는 보이지 않았다>와 앞뒤에서 서로 맞물려 있다. 소설 이해의 새로운 시각을 열어 보여주는 단어인 <착각>은 1절에서 이미 사용된 바 있다. <곧 다시 눈을 감아 버렀다. 기적이 울고 있는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59, 469).
20) 『청량리역」과 연작 관계에 있는 이보다 앞서 발표된 단편소설 「청계천 가는 길」의 끝 문장에도 이와 비교될 수 있는 표현이 나온다. <'……하마터면 그걸 빼먹고 갈 뻔했지 않은가. 애써 생각해 보니, 내가 빠뜨린 보따리가 겨우 그것이었다 .'>(304).21) 추리소설의 기법과 한 점으로 모여 응축되는 공간묘사로 사건이 박진감 있게 진행되기에 그 독서 시간이 더욱 짧게 느껴지는 것과는 상대적으로 이 소설의 이야기된 시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고 있다. 아침 열시라는 시간이 1절에, <십분 전 두시>라고 5절에, 그리고 마지막 절에는 (구월의) <지는 해를 바라보며> 라고 각각 밝혀져 있다. 독자들은 전광판 시계가 알리는 <10:00를> 무심코 읽고 넘어 가다가, 노모가 버려지고 있다는 사실과 청량리역이 풍기는 분위기 때문에 밤중에 사건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울텐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내는 한 번 더 발 아래 노모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구월의 아침 햇살이 바닥의 더러운 땟국을 핥으며 대합실 안으로 기어들어 오고 싶어했다 >(58-59, 468- 469). 그런 독자들이 볼 때 소설의 이야기 시간은 밤 열시부터 시작하여 대충 자정쯤 끝난 것으로 자칫생각하기 쉽게 《문학사상》 (1993년 4월호)의 이 달의 문제작, 소설 325쪽 참고――<첫 장면은 의경들이 득실거리는 밤 10시 정각의 청량리역 주변을 묘사합니다>) 사건은 엮어져 있고, 이와 같은 착각의 가능성을 작가 스스로 열어 놓고 있다는 접이 (위에서 이제 막 인용된 문장, <그것이 착각이 아니길 바라며> 안에 착각의 가능성이 이미 함축되어 있다) 바로 이 작품의 이중 독법을 정당화시켜 준다.
다>22)는 <논 가운데 황새처럼>23) (71, 480) 생긴 작가 자신을 상징한다.
22) 무엇이든 보지 않는 것이 없기에 그는 바로 소설의 첫 문장에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고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문장 또한 같은 맥락에 있다. <그나마 바닥에 흘린 이물질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사람은 아이 하나뿐이었다> (77, 486).
23) 소설의 분위기에 어긋나는 파격적인 이 비유는 이것이 과연 <청소하는 아줌마들>의 은유인지 아니면 작가 자신의 환유인지 모호하다(또한 이 비유는 작가의 분신 가운데 하나인 최 경장이 <밖에 서서 망을 봐준> 장면을 연상 시킨다). 소설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등장하는 사내의 이름이 태준이고, 이 이름은 박태준과 이태준이라는 두 사람의 작가를 연상시킨다. 이로써 분열된 등장인물 태준과 분열된 작가 송하춘의 대비가 가능·하게 된다(다만 작가의 고향이 곡창의 중심지 김제라는 사실과, 그의 사회적 신분이 교수이면서 동시에 소설, 그것도 588을 바로 연상시키는 「청량리역」과 같은 글을 써야되는 갇등/타협의 표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비유는 이중적으로 읽히고, 그러기에 소설의 이중적 구성과 맞물린다는 점을 참고로 덧붙인다).이 소설에서 작가가 가장 관심을 두는 인물로 <보따리 같은 할머니>가 등장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문제는 그녀가 애정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떠나야 할 대상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보따리>는 이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모성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의 작품 <보따리>가 말하자면 모성인 셈이다. 그가 싸들고 와서 독자에게 풀러 보여 주는 보따리가 바로 모성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그의 창작의 젖줄이기에 강력한 모성을 그가 바라고 있으면서도, 24)
24) 자신의 죽음으로 자식을 살린다는 의미에서 할머니의 죽움은 강한 모성의 풍모를 비장한 자세로 보이고 있다. <보따리>가 작가 자신의 모성으로 장작의 젖줄이라는 점은 할머니의 죽음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소도구에도 내바
치고 있다. <'마신 것을 다 토했어요. 우유가 상했었나봐요'>(77, 486 ). 송하춘의 최근작인 「하백의 딸들」을 보면 창작의 젖줄로서의 모성이 신화적 배경 속에서 절대적 존재로 신격화된다. 여기에서도 <봉지>와 <요강>의 표현을 빌려 <보따리>의 상징이 나온다. <비닐 봉지에 싼 썩은 생선 꾸러미 같은 것이 길가에 버려져 있었다. 아침 햇살이 눈부신 처마 밑 그 자리다. 뭔가 꿈틀하는 것이 그 안에 있었다. 미친 것. 그러자 할매는 그것을 사타구니 밑으로 쑥 집어넣었는데 , 아무도 그걸 본 사람은 없었다. 다가오던 두 경찰이 저만큼 길을 돌아서 피해가고 있었다 . 할매가 요강을 타고 앉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햇살이 그 으슥한 치마폭 아래로 기어들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할매는 바람이 새어들지 못하도록 두 팔로 치맛자락을 여몄다. 솔솔 따스한 체온이 후미진 사타구니 안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뭔가가 꼬물꼬물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54).「청량리역」의 <보따리 같은 할머니>에게 차마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는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다음 작품인 『거기 오랜 손길」과 「하백의 딸들」에서는 모성의 미화/신격화작업이 곧장 뒤따르고 있는 셈이다. 돼지를 기르는 어머니와 진달래꽃이 함께 어울어져 있는 작품 「전달래꽃』에서도 삶/창작의 젓줄인 모성이 소설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다른 한편 작가로서의 자신을 주장할 수 있자면 그녀의 그늘을 떠나야만 된다.25) 찾아오면서도 결국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갈등이 이 소설의 기본적 골격을 이루고 있으며, 이 의식적, 무의식적 갈등은 어머니를 떠나는 젊은 군인이라는 인물 설정에서 아주 적나라하게 기술되고 있다.26) 「청량리역」에 등장하는 세 유형의 남자들이 모두 사건의
25) 이별의 아픈 느낌으로써 소설이 끝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득 가던 길을 멈추었다. 역사의 뒤편 철길 쪽에선가, 기적 같은 것이 울고 있었다 >(80, 489). 「청량리역』이 드러내는 여성부정적 시각이 바로 이 점에서 기인하고 있다.
26) 세 가지 유형의 남자 가운데 그가 유일하게 자신의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등장한다. <태준>만이 어머니와의 복잡한 관계에서 자신을 주장할 수 있게 소설이 구성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머니가 할머니한테 가하는 못된 짓을 그가 따지고 있는 것도 중요한 대목이다. <‘엄마가 그랬죠? 그렇죠? 엄마가 또 할머니를 내쫓은 거죠?>(68, 478). 모성에 대한 작가의 양가적 태도가 어머니/할머니를 바라보는 태준의 시각을 통해 여기에서 이미 잘 드러나고 있다.
현장으로 모이면서도 동시에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도망가다시피 그곳을 떠나고 있다는 사실, <맞대질>이 끝내 이루어질 수 없게 된 사실이야말로 우리의 정신분석적 시각을 소설 구성의 측면에서 사실적으로 보완해 주고 있는 것이다. 강력한 모성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움직임은 그것이 구심력과 원심력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글쓰기가 사실은 반복강박이라는 심리적 기제와 맞물려 이루어지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할 수 있겠다. 27) 모순되는 이 두 가지 움직임으로써 마침내 모성은 그의 욕망의 대상으로 확인되기에 이른다. 28) 이 소설의 분석에서 처음부터 우리가 주목한 바 있는 반복의 기법은 바로 모성을 향한 욕망과 그것의 억압이라는 분열상태가 글쓰기와 읽기라는 문학적 행동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청량리역」의 정신분석은 얼핏 이와 같은 결론으로써 매듭된 것처럼 보인다. 이 소설이 그러나 꿈의 문법을 빌렸다고 전제한 상태에서 그 결론은 사실은 발현몽의 설명에 불과할 따름이고, 소설의 심층구조를 이루는 잠재몽의 분석은 아직도 해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해답은 여태껏 가장 소홀히 다루어전 최 경장의 일화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청량리역」에서 문제되고 있는 반복기법이 최경장을 통해 구현된 모성적 사랑에서 그 정점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은 따라서 이 소설 구조의 가장 홍미로운 대목을 이룬다. 모든 소도구를 다 동원한 반복기법의 다양성은 사실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얼핏 경찰사회의 감추어전 일화처럼 보이는 최경장의 특이한 행동을 정27) 소설의 끝 문장에서 마지막으로 또 한 번 반복기법이 나타나고 있다. <한 떼의 청량한 바람이 그 청량리 바닥을 휩쓸고 지나갔다.> 작가의 창작과정이 우리가 결론으로 제시한 문제와 얼마나 집요하게 얽혀있는가 하는 점을 보여 주는 인상적인 문장이다.
28) 소설의 끝부분에서 양가성의 시각으로 사랑이 정의되고 있는 것은 따라서 아주 당연한 일이다. <‘사랑이라고? 사랑, 더럽구나.'>(80, 489).점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1과 0이라는 숫자/그림부터가 그렇다. 그것은 먼저 경찰 <1> 과 죄수 <0> 의 모습을 그려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과 0이 붙어 만들어지는 숫자 <10, 십>에서 ㅅ이 되풀이되어 만들어지는 단어 <씹>, 그것의 살아 있는 현장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다름아닌 바로 최 경장 자신인 것이다. 씹의 현장에 있으면서도 그 장면을 다만 밖에서 지켜 주고만 있다는 점에서, 최 경장이야말로 <청량리역>을 소설이라는 허구의 세계에서만 펼쳐보이고 있는 작가 자신의 가장 정확한 분신이 되는 셈이다. 최 경장의 행동은 새로 나온 순경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그) 새끼둘이 하도 사정사정 애원을 하니까, 넘어갔겠지 '>(74 , 484). 글의 문맥에서 따로 때어 꿈의 소도구로 사용할 경우, 이 문장은 경찰한데 끌려가는 죄수로서의 새끼들로부터 돌연 먹을 것이 없어 보채는 가난한 집의 불쌍한 새끼들로 탈바꿈한다.29) 꿈의 문법 속에서 최경장은 자신의 죽음으로써 자식의 행복을 꿈꾸는 노모의 화신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노모의 육체적 죽음은 말하자면 모성의 부활을 작가 자신의 가장 정확한 분신인 최경장 안에서 실현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되고 있는 것은 그러나 자기희생과 죽음도 불사하지 않
29) 1993년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 에 우수작으로 수록된 「청량리역」 을 처음 읽은 1993년 가을 , 그런 다음 또 몇 차례 곱씹어 읽고, 1994년 단편집 『하백의 딸들』 이 출판되고 나서도, 우둔한 필자는 이 문장에 참재된 또 다른 가능성을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1995년 여름에 위 본문의 각주 9)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겨우 이 문장의 이중독법을 깨우쳤다. 정신분석적 독서는 독자가 쉽게 생각하듯이 이론의 섯부른 덧씌우기 작업이 아니라, 꿈의 작업 그리고 그것의 분석 작업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틀에서 비껴 창출되는 관심과 애정의 또 다른 산물임이 설득력 있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중독법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결론 부분이 빠진 상태로 이미 필자의 글이 《현대비평과 이론》(1995년 가을/겨울)에 실리게 되었는데, 이 논문은 형식상으로는 완성되었지만, 내용상으로는 반쪽에 불과한 글임을 이 기회에 밝혀둔다.
는 모성 자체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 위대한 모성에 고착되어 있는 <내적이며 필연적인 동성애> 30) 인 셈이다. 위 본문의 주 9)에서 짤막하게 한 줄로 언급된 바 있는 동성애의 소설적 구성이 수많은 은폐/ 노출적 되풀이 기법을 빌려 마침내 극적으로 확인되는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발현몽 속의 잠재몽, 그 무의식 상태에서 작가는 자신의 가장 은밀한 소망을 자신도 모르게 꿈으로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30) 이 책의 부록, 『레오나르도 다 빈치 유년시절의 한 가지 기억』, 325쪽. <어머니에 대한 어린이의 사랑은 의식면에서 더이상 발전하지 못한다. 그 사랑은 억압된다. 어린이는 자기 자신을 어머니의 위치에 놓고 어머니와 동일시하며, 자기 자신을 본보기로 삼아, 그와 비슷한 사람을 새로운 사랑의 대상으로 택함으로써 그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억압한다. 그래서 그는 동성애자가 된다>(같은 책, 327쪽). 위 본문의 각주 18)을 참고할 것.
2) 이청준의 『서편제』
<알 수 없는 건 알려고 하지 마시오.느낄 수 없는 사람은 알 수도 없습니다.>『예언자』, 210쪽문학작품의 독서와 비평에 있어서, 작가와 작품 그리고 작품과 독자와의 관계를 파악하는 일은 그 관계의 대화적 성격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단편소설처럼 잡지 또는 작품집 속에 묻혀 있다가 새롭게 발굴되면 그 관계를 조명할 수 있는 시각, 그리고 더 나아가 그 현상의 사회적 맥락을 검토할 필요성이 더욱더 요구된다. 1976년 《뿌리 깊은 나무》 4월호에 발표되어 그동안 작품집 『남도사람』(1978년), 『잃어 버린 말을 찾아서 』 (1981년)에 실려 있다가, 1993년 영화로 나와 기록적 흥행성과를 거둔 작품 「서편제」가 그 대표적 보기가 될 수 있다 하겠다.31)31) 1978년에 전남일보에 「남도사람」이 실렸고, 그 해 4월에 작품집 「남도사람」이 출판되었다. 모두 14편이 수록된 이 단편집에 「서편제」는 뜻밖에도 「남도사람』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1993년 1월 작품집 『서편제』가 나왔는데, 이것은 영화 『서편제』의 상영시기와 맞물려 기획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의 기본성격은, 대상관계 및 사회적 맥락의 검토라는 필요성이 크면 클수록, 그 모태를 이루는 작품이해의 바탕 또한 넉넉하게 갖추어져 있어야 된다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것의 정지 작업을 수행하는데 있다. 우리의 작업은 따라서 되풀이/소원풀이로 파악되는 글쓰기의 현장을 작품의 분석 과정에서 드러내 보이면서, 글읽기라는 독자의 문학적 행동을 갇은 차원에서 파악하는데 있다.
(1)「서편제」―햇덩이/핏덩이 그리고 〈고삐가 매인 짐승〉, 또는 골짜기/손님소리 -무의식 세계로 열린 통로 32)32) <소릿재>의 골짜기 마을, <그리고 그 소릿재 공동 묘지 길의 초입께에 조개 껍질을 엎어 놓은 듯 뿌연 먼지 를 뒤집어 쓰고 둘앉아 있는 한 작은 초가주막 >(43), <하지만 계집아이는 어찌된 속셈인지 한사코 그 흉흉한 오두막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어른의 말을 따르기는 커녕 나중에는 그 죽은 아비의 소리까지 그녀가 대신하기 시작했다 >(47), <소리무덤의 묘지기나 다름이 없는 인간>, <하지만 전 그걸 원망하거나 이곳을 떠나고 싶은 생각은 없답니다 >(48). 이와 갇은 표현들은 소리와 무의식의 세계가 적어도 소통관계에 있다는 추측을 허용하며, 이 소설에서 一一그뿐만 아니라 이청준 소설전반에 걸쳐 ――문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은 무의식 세계의 허구적 구성이라는 우리의 시각을 뒷받침한다.
소설의 제목만 놓고 볼 때 작가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듯 하다. 국어사전에(이희승 편, 『국어대사전』 ,1973년 20판) 이 단어가 나오지 않기에 독자는 사실 작가의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도, 무슨 이유인지 작가는 입을 다물고 있고 독자의 호기심만 자극
하고 있는 것이다 33). 그럴 것이 작가는 한글로 쓰인 제목 옆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하는 어떤 천절함도 보이지 않고 있으며, 작품 안에 그 단어가 쓰이는 일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작가의 태도는 서편제의 연작이랄 수 있는 작품 「선학동 나그네」의 제목에 명기된 한자를 기억하는 독자에게는 눈에 띄는 것일 수밖에 없다. 제목 말고도 게다가 이 작품 안에는 수많은 한자들이 괄호 안에서 독자의 시선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각도에서 보자면 이상한 것은 그것 뿐이 아니다. 작품 「서편제」에는 한자가 일체 쓰여 있지도 않다. 한자의 시각적 도움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독자는 말하자면 의미에 치우치지 않고 언어 자체의 고유한 세계에 끌려 들어 갈 수 있다는 말인 셈인가? 이 작품은 판소리를 다룬 작품이니 중요한 것은 의미가 아니라 그저 소리일 따름이라는 말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이 작품에서는 어떤 비밀이 문제되고 있고 독자에게는 그곳, 무의식의 영역에 이르는 통로가 사실상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함인가? 작가만 알고 있는 내용 그리고 그 세계가 끝내 누설되어서는 안 된다는 언질을 주고 있는 것인가?
33) 영화 「서편제」가 흥행에 성공한 다음의 시각이 아닌 소설 발표 당시의 시각에서 이 단어의 비중이 검토되고 있다.
사실 이 작품에는 비밀이 이야기되고 있고, 주인공인 사내의 행적은 이 비밀을 추적하는 데 바쳐진 듯한 인상마저 준다. 비밀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대목을 먼저 인용하자. <딸아이에게 눈을 잃게 한 것은 다름아닌 그녀의 아비 바로 그 사람이었을 거라 말한 것이 여자가 사내에게 털어 놓은 놀라운 비밀의 핵심이었다 >(54).34) 이 문장을 살피면, <놀라운 비밀의 핵심>이라는 거창한 표현이 사실은 약화되고 있
34) 「서편제」의 쪽수 43-62 쪽을 포함하여 이청준 작품에서 인용한 쪽수는 모두 작품집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를 따른다. 「남도사람」과는 달리 여기에서는 숫자로 절 표시를 하지 않고 있다.
는데, 그 까닭은 여자의 발설 내용이 비밀의 핵심 그 자체가 아니라 그녀의 추측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그것이 추측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을 사실이라고 받아 들일 수 없는 입장에서 온다. <어렸을 적의 여인은 결코 그런 끔찍스러운 얘기들을 믿으려 하지 않았었다.> 놀라운 비밀의 핵심이 밝혀지고 있는 마당에 이와 같은 그녀의 산중한 태도는 비밀을 좇고 있는 사내의 태도와 비교된다. <아니, 그 여자가 그럼 앞을 못 보는 장님이었단 말인가? 그리된 내력이 도대체 어떤 것이었다던가? 그 여자 아마 태생부터가 장님으로 난 여잔 아니었을 거 아닌가 말이네 >(53). 자신의 속을 털어놓 지는 않고, 제 3 자를 통해 장님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하는 욕망이 성급하게 내밴는 표현에 잘 나타나 있다. 독자는 화자인 그를 통하여 비밀에 접근하게 되지만, 그리하여 화자의 입장에 서서 비밀을 알고자 하는 바쁜 마음이 되지만, 이 태도가 결국 비밀의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게 방해한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게다가 그 비밀이라는 것이 그 마을 의 동네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내용일 때는 문제점이 더욱 커진다. 그녀가 사내에게 털어 놓은 놀라운 비밀의 핵심은 모두 간접화법으로 쓰여져 있다. 작가가 이 경우 전적으로 간접화법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일상적인 세계에서는 직접 체험이 불가능한 죽음, 종교 등 삶과 언어의 고유한 영역에 대한 신중한 접근의 태도로 이해될 수 있다. 꿈에서 경험하는 체험 또한 그것의 허구적 성격 때문에 간접화법의 영역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청준의 작품에서 간접화법을 포함한 여러 가지 꿈의 기법이 서술의 현장에서 확인되는 것은 따라서 당연한 일이다. 작가는 비밀을 미끼로 독자를 화자의 바쁜 마음에 더욱 밀착시키고, 그럴수록 더욱 더디게, 어눌하게 자신의 입장을 여자를 통하여 나타냄으로써, 언어/무의식의 속성을 파악한 상태에서 언제나 화자/독자보다 우위에 선다. 작가가 이 상태를 즐기기까지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위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자신의 속을 털어놓지는 않으
면서 비밀을 알아 내려 하기에, 게다가 그 비밀이 자신의 비밀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더 화자/독자는 작가의 손 안에 머물게 된다. 작가는 그런 바쁜 독자를 앞에 두고 결코 전지자의 시각을 빌릴 필요 조차도 없다. 그는 독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기에 마음씨 좋은 작가이고, 그것의 헛점을 또 짚어 주기에 뛰어난 작가로 남을 수 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보자. 소설의 끝은 상대방이 필요하는 것은 다 준 사람이, 자기가 줄 수 있는 것은 다 줄 수 있었기에, 혼연한 마음으로 이제 상대방이 바쁜 나머지 깜박 잊어 버린 그의 헛점을 짚어 주는 여유까지 보이게 된다. 그것도, 그것을 말하지 않고 잊어 버린 자신한데 마치 잘못이 있다는 두로 들릴 수 있을 만큼 가벼운 마음으로써, <‘아마 그 여자 어렸을 때 소리 장단을 부축해 준 북채잡이 어린 오라비가 한 분 계셨더라는데, 제가 여태 그걸 말씀드리지 않고 있던가요 ?'>(62).
위에서 검토된 시각을 가지고 이 소설의 첫 문장을 살피기로 한다. <여인은 초저녁부터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줄창 소리를 뽑아대고, 사내는 그 여인의 소리로 하여 끊임없이 어떤 예감 같은 것을 견디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북장단을 잡고 있었다. 소리를 쉬지 않는 여인이나, 묵묵히 장단 가락만 잡고 있는 사내가 양쪽 다 이마에는 힘든 땀방울이 솟고 있었다 >(43). 「서편제」라는 제목의 뜻이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소설의 모두는 그만큼 더 성실하게 판소리의 분위기를 뜨겁게 그리고 있으며, 소설의 진행과 함께 벌어질 작가와 화자/독자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할 수 있을 것인가 예상케 한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다루어 알고 있듯이 더디고 어눌한 인물은 오히려 여자 편이고 사내는 그와 반대로 성급하며 뜨거운 인물인데도, 작가는 그 관계를 역으로 뒤집어 보이고 있다. 그 숨겨진 정열을 처음부터 밝힘으로써 이 여인을 향한 작가의 애정이 잘 나타나 있는 첫 문장은 이 소설에서 작가가 자신의 본업인 언어 그리고 무의식의 세계와 얼마나 진지하게 씨름하게 될 것인가를 의심할 여지 없이 뚜렷하게 드러내 준다. 땀방울로 상징되는 대결 관계는 판소리 마당을 통한 정제 작업 속에 용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픔>, <소리>, <견딤>, <이마>, <땀방울>로 이어지는 첫 장면은 소설이 전개되면서 또 다시 확인된다. 그것은 사내의 어린 시절과 연결된다. 이 이야기가 회상되는 장면에서 다시 열띤 판소리의 분위기가 재연된다. <여인이 성큼 소리를 시작하자 사내도 이내 다시 북통을 끌어 안으며 뒤늦은 장단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내의 기색 따윈 아랑곳도 하지 않은 채 여인의 소리가 점점 열기를 더해 가기 시작하자, 사내 쪽도 마침내는 북채를 꼰아쥔 손바닥 안에 서서히 다시 땀이 배기 시작했다 >(49). 비밀이 전달되거나 또는 회상이 이루어지기에 앞서 의식처럼 꼭 따르는 소리마당이 어떤 뜻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먼저 이 장면을 살펴보자. 이 사내가 여인을 찾아옴으로써,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에서는 사내한테 사건의 주도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야기를 유도하는 기능을 갖는 소리의 마당에서는 또 다시 여인이 판을 이끌어간다. <뒤늦은 장단을 따라가기 시작했다>는 표현에 그 관계가 함축되 어 있다. 세째 절에 가서는 이 관계가 더욱 뚜렷해진다. <여인이 이윽 고 사내를 유인하듯 천천히 다시 노래를 시작하고 있었다 >(55-56). 이것은 네째 절에서 사내의 패배가 그려지면서 그 절정을 이룬다. <사내는 이제 얼굴빛이 참혹할 만큼 힘이 빠져 있었다 >(6O). 이 패배는 사내의 기색 따윈 아랑곳하지 않은 여인의 탓인가? 어쨌거나 이미 여인은 이때 심리적으로 우위에 서있다. 그녀가 그때 들려 주는 소리대목이 우연치 않게도 매 품팔이를 떠나는 홍보의 신세타령이다. 과연 그의 회상에 매 품팔이의 심리가 엿보이는지, 우리는 사내의 회상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기로 한다.거세공포
회상의 색조는 붉은 색이다. 그 붉은 색을 강조하고자 작가는 회상하는 순간의 모습까지 기록하고 있다. <사내는 그때 과연 몸을 불태울 듯이 뜨거운 어떤 태양의 불별을 견디고 있었다.> 그리고 그 태양은 회상 속에서도 뜨겁다. <소년의 머리 위에는 언제나 그 이글이글 타오르는 뜨거운 햇덩이가 걸려 있었다 >(51). 뜨거움과 아픔 그리고 붉은 색이 하나로 모여 <핏덩이 갇은 갓난애>가 태어난다. 결국 햇덩이/핏덩이로 응축되는 회상이다. 햇덩이는 그러나 사내 자신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언제나 뜨겁게만 불타고 있던 햇덩이야말로 그 날의 소년이 숙명처럼 아직 그것을 찾아 헤매다니고 있는 그 자신의 운명의 얼굴이었다 >(51). 밀에서 더 언급이 되겠지만 장님이 되어 버린 누이, 그 <운명의 얼굴>을 찾아 헤매다니는 사람으로서 그는 누이와는 햇덩이/핏덩이로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임이 드러난다. 헷덩이의 강조는 허기와 아픔 그리고 매 품팔이의 심리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해로 상징되는 어떤 개인적 신화의 탄생을 부각시킨다. 이 신화는 핏덩이를 가능케 한 <뱀>과 젊은 엄마 (그리고 그에 앞선 아비)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신화의 탄생은 이 소설의 <놀라운 비밀의 핵심>인가 하면 바로 그 어긋나기의 실체를 동시에 보여준다 35).35) 작가는 작품집 『남도사람』 후기에서 <원죄의식 같은 것>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동시에 자신의 창작과정과 연결시킨다.
사내의 회상에 앞서 여인의 회상이 먼저 기술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한 사람의 죽음이 이야기되고 있다. <그럭저럭 그 해 겨울도 다해가던 음력 세모께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은 마침 가는 해를 파묻어 보내듯 온 고을 가득하게 밤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그날 밤 새벽녘에 아비는 그만 피를 토하며 가쁜 숨을 거둬 가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47). 이 회상에서는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이 섞여 나오며 또한 3인칭 기술과 1인칭기술이 함께 어울어전다. 소문과 체험이 뒤얽혀 있다. 대화로 이야기가 전개되다 어느새 독백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판소리의 이야기 전달 방법으로서 개인적, 폐쇄적 세계관을 뛰어넘는 보편적, 개방적 인생관을 수용하는 다성적 세계의 모습이다. 이청준의 작품에서 무의식의 세계가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마당에서 그 세계의 표현을 가능케 하는 장치가 필요한 것은 자명하다. 직접화법과 간접화법, 3인칭과 1인칭 기술, 대화와 독백 등 일방적 시각을 보완하는 기법들이 요건하게 활용되고 있고, 특히 판소리의 다성구조는 작가 이청준이 무의식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다. 대화에서 회상으로 이어지는 이 1절에서는 여인의 회상 뿐만 아니라, 또한 춘향가 몇 대목, 수궁가 한 대목 그리고 흥보가의 신세타령까지 들리고 있는 것이다. 여인의 회상이 실현되기까지는 말하자면 수 많은 장치가 요구된 것이며, 무엇보다도 그 회상의 앞뒤를 수궁가와 흥보가의 신세타령으로 감싸고 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다. 그러기에 아비의 죽음에는 <겨울>, <눈>과 핏덩이, <가는 해>와 <새벽녘>의 대립되고 있는 두 세계가 서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사내의 회상은 그러나 단색적이며 독백적이다. 그것은 똑같은 비극의 세계이면서도 개인적이며, 폐쇄적인 나머지 악몽의 세계며, 타자를 받아 들일 수 없어 끝까지 독선적이다. 이런 분위기는 회상에 임하는 사내의 자세에서 이미 드러나 있다. <그리고 마치 가슴이 끓어오르는 어떤 뜨거운 회상의 골짜기를 헤매어 들기 시작한 두 눈길엔 이상스런 열기 같은 것이 담기기 시작했다 >(49). <끓어오르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찬 단조의 세계며, 게다가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고조되는 일방성이 드세게 자리잡고 있다. 그곳에서는 만남이 배제된 헤매임이 주도적이고, 죄와 비밀의 골짜기라는 폐쇄적 시각이 봉우리라는 개방적 시각을 차단시킨다. 사내의 회상이 시작되는
데 여인이 홍보의 매 품팔이 신세타령을 불러 준다는 사실이 이미 많은 것을 이야기한댜 <끓어오르는>, <뜨거운>, <열기>로 미리 제시된 햇덩이/핏덩이의 정체가 죄의식과 깊이 연루되었음을 웅변해 주기 때문이다.
햇덩이/핏덩이가 죄의식과 연루되어 있음은 위의 세 단어만 살펴보아도 금방 밝혀진다. 사내의 회상에서 <뜨거운>이란 형용사는 늘 명사 <햇덩이>를 꾸미고 있다. <그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뜨거운 햇덩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해변가 언덕밭>이라는 자연의 품 안에서 이 햇덩이는 밝음을 뜻한다. 그러나 윗 문장에서는 <뜨거운 회상>으로 묶여 있는 상태에서 <골짜기>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뜨거운 회상의 골짜기>는 햇덩이의 힘이 가장 무력해지는 골짜기, 바로 어두운 골짜기를 드러내 놓는다. 그러면 어떻게 밝음의 햇덩이와 어두움의 골짜기가 <뜨거운 회상의 골짜기>라는 표현 안에서 어렵게 만날 수 있게 되었나? <뜨거운>이라는 형용사가 명사가 되면 <열기>가 된다. 이 명사를 다시 꾸미는 형용사가 있다. <이상스런>. 이 형용사는 사내의 회상에서도 <뜨거운>이라는 형용사처럼 똑같이 중요한 역할을 몇 번씩 되풀이한다. 이 단어는 소리와 연결되어 있다. <이상스 런 콧소리>, <이상스런 노랫가락 소리>, <그 이상스런 웅얼거림>. 사내의 회상이 비밀스런 사건을 전달해야만 될 때도 바로 이 단어가 쓰이고 있다. <그러자 한 가지 이상스런 일이 일어났다 >(50). 그 이상스런 일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그러나 아직도 엄마는 소년의 세계에 함께 있었고, 엄마와 햇덩이는 이 소년의 의식에 하나로 박혀 있다. <그러면서 어미는 뜨거운 햇볕 아래 하루종일 가물가물 밭이랑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첫 장면〉소년의 개인적 비극은 그리고 그 혼자만의 비밀은 해가 지면 엄마와함께 지낼 수 있던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지면서, 그것도 어두움과 함께 그리고 얼굴을 알 수 없는 타자의 개입으로써 일어난다. <그리고 마침내 뉘엿뉘엿 산봉우리 너머로 햇덩이가 떨어지고, 거뭇한 저녁어스름이 서서히 산기슭을 덮어 내려오기 시작하자, 진종일 녹음 속에만 숨어 있던 노래 소리가 비로소 뱀처럼 은밀스럽게 산 어스름을 타고 내려와선, 그 뱀이 먹이를 덮치듯이 아직도 가물가물 밭고랑 사이를 떠돌고 있던 소년의 어미를 후닥닥 덮쳐 버린 것이었다>(50). 무의식의 허구적 구성이라는 이 글의 기본시각에서 보자면 한자어로 그 의미가 고정되지 않은 「서편제」라는 단어의 이중성이 바로 이 장면에서 그 정체를 드러낸다 할 수 있겠다. 그것이 비극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악몽으로 남게 되는 데에는 바로 윗 문장의 전반부, 아직 뱀이 모습을 보이기 전까지의 장면이 사실은 지금까지 소년이 늘 기다려마지 않던 순간, 기쁨과 안식의 순간이었던 만큼 더욱 비극적이다. 그러기에 <그 언제나 뜨겁게만 불타고 있던 헷덩이야말로 소년이 숙명처럼 아직 그것을 찾아 헤매다니고 있는 그 자신의 운명의 얼굴>(50)로 끝까지 남는 것이다. 이 비극은 햇덩이와 핏덩이가 하나로 되는 순간, <이듬해 이른 여름의 어느 날 밤>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악몽으로 뒤엉킨다. 이 뒤엉컴의 악몽이 사내의 세계를 단색의 독백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이 단색의 독백은 어쩔 수 없이 <마치 가슴이 끓어오르는> 듯한 상태에서 늘 되풀이된다. 이 장면, <뱀이 먹이를> 덮친 장면이 말하자면 사내의 <숙명의 태양 >(49), 그 비밀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첫 장면 Urszene> 인 셈이다. 이 개념은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면서도(그런 일이 있었다고 나중에 어떤 일에 덧붙여 생기는 상상 속에서도 물론 똑같이 일어난다) 기억에 남아 있지 않기에 스스로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디는 점에서 무의식의 작용과 비교되는 정신분석적 용어이다. 부모의 성교를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바라보면서 다만 그 소리와 몸짓에 따라 아버지 쪽에서 어머니에게 가해지는 폭력으로
여겨지는 <첫 장면>의 성격은 제3의 시각을 빌린 욕망의 모습이라는 정신분석의 기본적 틀을 보여 준다. 따라서 <이상스런 열기>는 어느 다른 곳도 아닌 바로 그 장면의 목격 현장인 사내의 <두 눈길>에서 일어나 <담기기> 시작하여 끝내는 헤어날 수 없는 <골짜기>를 이루고 마는 것이다. 이 골짜기에는 한편 어머니의 죽음을 불러 일으킨 <소리의 사내>가 살고 있고, 그리고 다른 한편 <잠을 자거나 잠을 깨거나 소년의 귓가에선 노래 소리가> 멈추지 않는 그 소년, 사내의 어미에 대한 욕망을 욕망함으로써 결국 그녀의 죽음에 깊은 죄의식을 느끼는 <고삐가 매인 짐승 꼴>로 <그 무덤가 잔디에서 >(49) 그 소년 /사내가 산다. 그리고 이 <골짜기>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소릿재>의 골짜기 마을, <그리고 그 소릿재 공동 묘 지 길의 초입께에 조개 껍질을 엎어 놓은 듯 뿌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들앉아 있는 한 작은 초가 주막 >(43) 에서 독자에게 들려 오고 있는 것이다.
독자는 자기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생각도 없이 그 비밀의 이야기만 듣고 싶어 하는 줄 작가는 잘 알고 있기에 그는 가는 말로 한마디 슬쩍 던지며 말하자면 자기의 본업을 충실히 한다. <내력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마 그쯤 짐작을 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 소릿재와 소릿재 주막에는 또 다른 내력이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 골짜기 마을에(<고개 아랫마을 사람들은 밤만 되면 아비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었다>) 그 <소리의 사내>와 <열 다섯이 체 될까말까한 어린 딸아이> 두 부녀가 <읍내 마을의 한 대가집 사랑채에 이상한 식객>으로 <가을 한 철을 하영없이 소리만 하고> 지내다가 <어느 새 겨울이 닥쳐오고, 겨울철 찬바람에 병세가 덧치기 시작했던지, 가울철부터 심심찮게 늘어가던 그 아비 쪽의 기침 소리가 갑자기 참을 수 없는 발작기로 변해> 갔는데도 불구하고 <아비는 웬일인지 한사코 그만 어른의 집을 나가겠노라 이상스런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고,고집을 말리다 못한 주인 어른이 마침내는 노인의 뜻을 알아차린 듯 찬바람 휘몰아치는 겨울 거리 밖으로 두 부녀를 내보내고 말았>던 것이며, <그날 한나절 방황 끝에 두 부녀가 찾아든 곳이 그 공동 묘지 길 아래 버려진 헛간 같은 빈 집이었다는 것이다 >(46). 바로 그 골짜기 마을에서 그는 죽었다. <식음을 전폐한 채 방만 되면 소리를 일삼고> 있다가, <마침 가는 해를 파묻어 보내듯 온 고을 가득하게 밤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그날 밤 새벽녘에 아비는 드디어 이승에서의 마지막 소리를 하고 나서 그 길로 그만 피를 토하며 가쁜 숨을 거둬가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이제 그 <골짜기>에는 아버지 대신 그 딸이 살게 된다. <하지만 계집아이는 어찌된 속셈인지 한사코 그 흉흉한 오두막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어른의 말을 따르기는 커녕 나중에는 그 죽은 아비의 소리까지 그녀가 대신하기 시작했다 >(47). <그런 세월>을 <꼬박 삼 년이나> 살다가 <아비의 삼년상이 끝나던 날 새벽> <여자는 혼자 집을 나간 채 그것으로 그만 다시는 영영 종적을 들을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소릿재 주막>에서 <말하자면 그 소리무덤의 묘지기나 다름이 없는 인간>이 그 자리를 지키며, 또 그 두 부녀처럼 그곳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 한다. <하지만 전 그걸 원망하거나 이곳을 떠나고 싶은 생각은 없답니다 >(48).
이 <골짜기>를 말하자면 세 사람이 지켜 온 셈이다. 그렇다면 그 <회상의 골짜기> 결코 떠나지 못하는 사내의 입장은 그 세 사람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그의 남다른 입장은 먼저 그 자신의 살의에서 확인된다. <어미를 죽인 것이 바로 사내의 소리>였기에 <그는 자기의 손으로 그 나이먹은 사내와 사내의 소리를 죽이고 말 은밀한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56). 그는 <어미의 원한을 풀어 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그 계획/꿈이 막 실현되려 하던 참에 <이상스런 마력>이 작용, 복수는 수포로 돌아가고 그는 아비와 누이를 떠나야 된다. 36) 그런데 이 마지막 장면 또한 어느 공짜기에서 벌어지며, 그가 도망가는 방향은 그를 찾는 소리의 반대 쪽으로 되어 있다. <그를 부르며 찾아 헤매는 듯한 사내의 소리가 골짜기를 아득히 메아리 쳐 오고 있었지만, 녀석은 점점 소리가 멀어지는 반대쪽으로만 발길을 재촉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59). 그러나 그에게는 회상의 골짜기라는 도피처밖에 갈 곳이 없기에, 그는 결코 그 골짜기를 떠날 수 없다. <그러나 녀석에겐 아직도 그 골짜기를 길게 메아리쳐 오던 사내의 마지막 소리 를 피해 갈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결국 그의 회상의 골짜기는 바로 현실의 소릿골이 되는 셈이다. <그날 밤도 그는 어느새 안타깝게 그를 찾아 헤매는 사내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버릇처럼 어디론가 그것을 멀어지려고 숨이 차도록 다급한 발길을 끝없이 재촉해 가고 있었다 >(60). 그가 아무리 그 반대쪽으로 달려가 본다 해도, 그가 서 있는 곳은 결국 그 회상의 소릿골이다. 그것은 어머니의 죽음으로써 그의 죄값/거세가 사실화되고, 아비 살해의 꿈은 결국 그를 언제나 <첫 장면>의 상황으로 되돌려 놓고, 그는 거기에서 바로 아비의 욕망을 반복하는 자신의 얼굴만을 발견하게 되기
36) 소망공상이 억압되고 있는 인물의 전형적인 보기를 프로이트는 <햄릿>에서 찾고 있다. 프로이트는 이 비극의 성격을 자기에게 주어진 복수의 임무를 햄릿이 조금씩 늦추고 있다는 사실로 요약한다. 햄릿의 백부는 햄릿 자신이 유년시절에 품었던 억압된 소망을 실현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햄릿의 복수/살해를 정당화시키는 증오심은 어쩔 수 없이 자기비난, 양심의 가책과 바꿔지면서 그의 복수행위는 자꾸만 지연된다. 프로이트 문학이론의 핵심개념 가운데 하나인 <소망충족>을 작가 이청준은 아비, 장님 누이와 오라비의 이야기를 다른 각도에서 다룬 소설 <다시 태어나는 말>에서 <소원풀이>라고 풀어 쓰고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 결국 소원풀이 를 하고 만 셈이군요' 지욱이 좀 싱거워진 느낌으로 다시 한 마딜 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지욱은 김석호씨의 의중을 빗나가고 있었다. '작자가 원했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었겠지요.’ 김석호씨는 다시 지욱을 완곡하게 부인하고 나섰다. …… ‘하지만 작자는 그렇게 되지를 못했답니다……'>(271쪽).
때문이다. 두 사내의 얼굴이 햇덩이라는 상징을 빌려 똑같은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따라서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그 언제나 뜨겁게만 불타고 있던 햇덩이야말로 그 날의 소년이 숙명처럼 아직 그것을 찾아 헤매다니고 있는 그 자신의 운명의 얼굴이었다 >(51). <소년에겐 여전히 그 뜨거운 햇덩이가 소리의 진짜 얼굴로 남아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도 마찬가지였다. 사정이 달라져 버린 소리의 사내가 핏덩이 갇은 갓난애와 소년을 데리고 이 고을 저 고울로 소리를 하며 밥구걸을 다니고 있었을 때도, 소리의 진짜 얼굴은 언제나 그 뜨겁게 이글거리는 햇덩이 쪽이었다 >(51 - 52).
〈섬뜩함〉<여자가 사내에게 털어 놓은 놀라운 비밀의 핵심>은 <딸아이에게 눈을 잃게 한 것은 다름아닌 그녀의 아비, 바로 그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사내는 소년의 어미를 욕망했고, 소년은 또 그 욕망을 욕망함으로서 그녀의 죽음과 무관할 수 없다. 그녀의 딸로 구현된 부재의 존재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또다시 반복되는 욕망과 그 욕망의 죄값(거세)를 내용으로 담고 있기에, 현존/부재의 인물인 사내에게도 그것이 그토록 <놀라운 비밀의 핵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눈을 잃은 누이의 얼굴이야말로, <그 언제나 뜨겁게만 불타고 있던 햇덩이>/핏덩이야 말로, 바로 <그날의 소년이 숙명처럼 아직 그것을 찾아 헤매다니고 있는 그 자신의 운명의 얼굴 >(51쪽)이며, 그 거세의 적나라한 실체를 보여 준다. <눈을 잃다>는 것으로 상징되는 거세가 어미의 죽음과 함께 실현되었던 햇덩이/핏덩이의 숙명적 동질관계를 확인, 지속시킨다. 프로이트는 그의 문학예술 이론이 다루어전 논문 「섬뜩함」에서 거세공포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눈과 성기가 같음을 밝히면서, <섬뜩한>이란 형용사의 기본 단어 <비밀스런>에 <고향과 같은>이라는 또 다른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익숙하지 않은 것, 고향과 같지 않은 것, 낯선 것이 섬뜩한 느낌을 자아낸다고 설명한다. 작품 「서편제」의 <놀라운 비밀의 핵심>은 <딸아이에게 눈을 잃게 한 것은 다름아닌 아비, 바로 그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데, 거세의 행위자, 또는 거세의 위협으로써 아들을 사회의 규범 속으로 끌고 가는 사람이 일반적으로 아버지 또는 아버지에 준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볼 때는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니다(이 관계를 보여 주는 표현들로서는, <언젠가는 또 사내가 자기를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항상 녀석을 떨리게 하였다. 소리를 하고 있을 때 밖엔 좀처럼 입을 여는 일이 드문 버릇이나 사내의 그 말없는 눈길이 더욱더 녀석을 두렵게 했다.……사내가 두렵기 때문에 그가 시키는 대로 북채잡이 노릇까지는 터놓고 거역을 할 수가 없었다. 순종을 하는 체해 보이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57쪽). 오히려 <비밀의 핵심>은 동질 관계에 있는 햇덩이/핏덩이를 거세의 현장인 <덩이>와 관계지음에 있어 그 거세가 <햇덩이>, 소년이 아닌 <핏덩이>, 누이에게 옮겨지는 <자리바꿈>이 독자에게 <낯설게> 느껴지도록 만든 바로 그 <섬뜩함>의 비밀이다 하겠다. 프로이트는 그의 논문에서 그밖에도 문학작품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시각을 보여 준다. 억압된 유아기의 복잡한 심리상태, <거세 콤플렉스>말고도 <어머니 자궁의 그리움>이 <섬뜩함>이라는 문학 예술적 작용과 관계되어 있음을 그 는 밝힌다. 이 시각에서 보자면, 소설의 배경이자 현장인 골짜기가 사실은 어머니 또는 고향의 현존/부재의 상징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골짜기에 화자가 <손님>으로 나타나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묻고 듣는 그 <낯선>, <진기한> 풍경,공동 묘지를 배경으로 한 그 <기이한> 분위기에 이 소설의 <비밀의 핵심>이 있다 할 것이다. 본문 위에서 지적된 단어 <이상스런> 또한 이 맥락에 연결되어 있기에, 소설에는 <이상한>, <기이한>이라는 형용사로 묶여진 중요한 표현이 많이 나온다. <이상한 살기>, <기이한 서러움>, <이상스런 힘 >(58쪽), <이상스런 마력 >(57쪽), <해답을 풀어
낼 수 없는 기이한 수수께끼 >(59쪽). 특히 마지막 두 표현은 사건/화자의 관계뿐 아니라 독자/작품의 관계, 그리고 그 두 관계의 상호관계를 살피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그 골짜기를 떠난 것처럼 되어 있으면서도, 어쨌거나 사실은 그가 <회상의 골짜기>를 끝내 떠날 수 없기에, 골짜기와의 관계에서 볼 때, 그곳을 지킨 다른 세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현존/부재의 인물이 되는 셈이다 . 작가/화자의 관계에 비추어 볼 때(이 글의 끝 부분 참고할 것), 작가 또한 현존/부재의 존재로 파악될 수 있는 시각이 따라서 열리게 된다. 「서편제」가 작품집 『남도사람』 에 「남도사람」으로 실려 있다는 사실에서 엿보이는 작가 이청준의 족적이 우리의 입장을 뒷받침한다 . 그에게 그 일이 부재의 당사자로서 놀리운 일이 되면 될수록, 그에게 그 이야기를 알려준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놀라운 반응이 되레 이상해진다.<한데 손님은 어째서 자꾸 그런 쓸데없는 애기에까지 홍미가 그리 많으시오?>이 물음을 이어가는 그녀의 전술은 이 소설의 가장 은밀한 데를 찌르는 의표로 기록된다.<가만히 보니 아까부터 손님은 제 소리보다도 오이려 그 여자 이야기 쪽에 정신이 더 팔리고 계신 듯해 보이시던데 손님한테도 무슨 그럴 만한 사연이 계신 게 아니시오?>(54).비밀의 핵심이 이제 바야흐로 밝혀지기 시작하는 마당에서 그것을 둘러 싼 화자, 작가 그리고 독자의 반응 및 관계를 따지고 이 글을 끝맺기로 한다. 먼저 우리가 밝혀야 할 것으로 이 <놀라운 비밀의 핵심>,의 중요성은 이 두 가지 측면을 서로 관계 지을 때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 시각에서 열쇠개념으로 부상되는 표현은 <손님>이다. <놀라운 비밀의 핵심>이 진술되면서 이루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에 이르러서야 여자는 남자를 손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첫번째 것은 위에 인용되었고, 둘째 것은 다음과 같다.
<그렇담 손님은 제 애길 너무 곧이곧대로 믿고 계신가 보구만요. 전 아직도 그걸 통 믿을 수가 없는데 말씀이오 >(55).소릿재에 사는 여인에게는 작가도 화자도 그리고 독자도 모두 손님이 된다. 그런데 그녀는 손님, 소설 속의 손님을 처음 맞이 했을 때 바로 손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판이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은 시점에 와서야 그 분위기에 어울리지도 않게 손님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가장 <뜨거운> 대목이 지난 뒤에야 손님이란 차가운 단어가 쓰이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죄의식/거세라는 뜨거움/차가움의 갈등이 독자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품에 대한 심리적 <저항>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융화의 구심점으로 판소리 마당이 <양쪽 다 이마에는 힘든 땀방울>로 그려진 열기 속에서 소설의 모두에 도입되어 있다. 햇덩이/핏덩이와 <골짜기>라는 두 상징에서 뚜렷이 드러난 뜨거움/차가움이라는 이 소설의 대립되는 기본적 틀이 이제 손님이란 표현이 작용하는 <낯설게 하기>를 통해 소설의 마지막 회상, 가장 차가운 회상으로 넘어 가는 대목에 와서 균형 있게 자리 잡혀 가고 있는 것이다.작가와 독자 그리고 화자 세 사람 가운데 과연 누가 이 시점에서 여인에게 가장 낯선 사람으로 보일 것인가, 그리하여 그녀의 의표를 찌르는 말을 정작 받고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 것인가? 작가는 독자의 관심을 화자의 관심에 밀착시켰기에 소설에서 우위를 확보한다.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는 작가가 손님이 된다. 독자는 이 글에 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소릿재 주막까지 온 셈이니 그도 또한 손님이 된다. 그러나 화자야말로 소릿재까지 찾아와 술잔을 비우며 여인의 소리를 듣고 있으니 두말할 나위 없이 진짜 손님이다. 그리고 문장 속에서 여인은 그를 손님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녀의 화법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입장을 밝히고 있지 않은가. <이젠 여인 쪽에서도 벌써 사내의 그런 눈치를 알아차린듯, 그러나 어딘가 지레 시치미를 떼고 있는 목소리로 엉뚱스레 의뭉을 떨어대고 있었다 >(62). 호기심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화자나 독자나 똑같이 궁금하다. 그러나 독자는 화자가 자신의 누이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누이가 장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관심도에서 뒷전에 선다.
특히 마지막 넷째 절에서 소설의 끝을 바로 앞두고 두 차례 사용되고 있는 손님이란 표현이 화자, 독자, 그리고 작가에게 작용하는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을 먼저 살펴 보자. 우선 화자는 눈 먼 누이가 아닌 이 낯선 여인을 통해서도 골짜기를 자신의 고향으로 끝내 받아 들일 수는 없다는 상황을 다시 확인한다 . 이것은 진실의 추적이 여인과 사내의 만남이라는 손 쉬운 방법이 아닌 두 사람의 대립된 위치라는 긴장 관계로써 그나마 지속적으로 가능하다는 통찰을 근거로 한다. 다음, 독자는 화자에게만 향하고 있는 듯이 들리는 이 표현 때문에 독자와 화자의 밀착된 상태가 허구임을 알게 된다. 그 결과 자신의 입장을 오히려 역으로 작품의 손님으로서 떼어 놓고 볼 수 있는 필요한 거리, <미적 거리>를 확보한다. 이제 독자는 화자와의 나르시스적 밀착 관계에서 떠날 수 있고, 이 상태에서 독자/화자/작가 사이에 가로 놓인 얽힌 관계를 객관적으로 새롭게 바라보며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독자에게는 독자의 위치를, 화자에게는 화자의 위치를 되돌려 줌으로써 화자에게 입혀 놓았던 자신의 몫/한계를 되찾아 오며, 세 사람의 시각이 각자의 입장을 바탕으로 정제된다는 사실에 만족할 수 있다.
손님이라는 단어가 쓰인 나머지 두 문장을 마저 읽고나서 이 문제를 더 생각해 보자.<‘손님께서도 아마 그렇게 믿어야 마음이 편해지시는가 보군요.'> <‘그래, 손님께선 이제 그 여자가 장님이 되어 버린 것을 아시고도 여전히 그 누이를 찾아 헤매다니실 참인가요 ?'>(61).손님과 여인의 관계설정에 있어서, 첫째 문장의 경우에는 먼저 화자가 여인에게 가장 낯선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사 <께서도>로써 또 다른 존재가 이 문장과 관련되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둘째 문장에서는 손님은 오히려 작가 쪽이다. 왜냐하면 작가는 「서편제」에서 이미 다룬 이야기를 「선학동 나그네」37) 「다시 태어 나는 말」38)에서 두 차례나 되풀이하여 끄집어 내면서, <여전히 그 누이를 찾아 헤매고 다니실> 사람으로 자신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화자가 사실은 소릿골을 떠나지 못한다는 점을 이미 밝혀 놓았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누이>라는 표현이 작가에게는 도무지 어색하다. 그렇다고 그 표현이 화자에게는 하나도 어색하지 않단 말인가? 그럴 것이 화자는 그 비밀을 입 밖에 내놓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도37) <‘그래 노형은 아직도 그 누이의 종적을 찾아다닐 참이오?'>(159쪽).
38) <하여 사내는 결국 그 누이와 누이의 소리를 찾아 남도 고을을 헤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지도 다시 십 여 년이 흘렀다 ...... ‘그런데, 윤선생, 그 오라비가 이재 거의 반평생도 더 넘어 살고 나서 무엇 때문에 다시 그 옛날의 의붓아비와 누이 생각을 하게 되었겠소. 그리고 그토록 누이윤 찾아 헤매고 있겠어요'>(270쪽).<손님>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여인은 동시에 <누이>라는 단어를 슬쩍 홀리고 있다. 위 두 문장에서 암시되고 있는 것은, 이 비밀에 참여하는 화자 이의의 또 다른 존재, 여인으로 하여금 화자가 그녀에게 들려 준 것 그 이상의 것을 발언토록 하는 존재, 다시 말해 바로 작가의 존재가 드러나고 있다 할 것이다. 소설의 끝 문장인 여인의 변명을 다시 인용한다. <‘아마 그 여자 어렸을 때 소리 장단을 부축해 준 북채잡이 어린 오라버니가 한 분 계셨더라는데, 제가 여태 그걸 말씀드리지 않고 있던가요?'> 화자를 쉽게 뒷전으로 밀어다 놓고 작가가 화자/독자의 빈 자리를 메꾸며 부각되는 순간이다. 그 윗 자리에 앉아 있는 자신이 그러나 얼마나 화자의 어리석음과 죄의식을 필요하고 있는가 그는 익히 알고 있다. 윗 자리에 앉아 있는, 군림하는 작가의 모습은 이 소설의 무대를 향한 작가와 독자의 상반된 시각에서 이미 찾아진다. 이야기의 무대가 아니라 그 무대의 배경을 이룰 따름인 소릿재의 극적 성격 때문에 독자는 사건의 무대가 소릿재의 초입 골짜기 쪽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잊고 소릿재를 울려다 보는 일이 잦다면, 골짜기에 촛점이 맞추어전 작가의 시각은 그와 반대로 그보다 더 높은 곳, 말하자면 소릿재로부터 골짜기를 내려다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시각이야말로 바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50쪽) 원초적 상태로의 회귀 본능이라는 그 소원풀이를 가능케한다. 작가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자기 작품의 손님이다. 화자의 비밀이 자기 자신과 깊이 관련된 것인 줄 빤히 알면서도 그는 끝까지 작품에 낯선 자세를 취해야 된다. 그러기에 그는 또한 화자/독자에 대하여 끝까지 우위의 자세를 취할 수 있다. 그는 그러나 그 우위의 자세에서만 이 부끄러움과 죄의식의 문제를 언어와의 끈질긴 싸움, 진실과 거짓의 실체를 보이는 놀이의 마당으로까지 역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언어와 무의식 세계를 이해하고 파악하려는 집요한 문학적 접근이야말로 작가 이청준의 우위를 지속적으로 가능케 한다.
(2) 되풀이/소원풀이의 글쓰기
판소리의 다성적 구성이 소설의 속 이야기를 감싸는 격자구조를 보완함으로써, 대결구도라는 폐쇄적 승부의 세계를 떠나 융합구도라는 대화적 놀이의 현장, 소리 마당으로의 도약이 시도되고 있다는 점에서 「서편제」는 이청준 작품의 분수령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 은유 또는 압축, 환유 또는 자리바꿈을 빌린 무의식의 언어적 작업이 일상성의 단면을 제시하는 단편소설의 틀 안에서 눈부신 문학적 결실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작품의 긴장감이 유발하는 예기치 않은 획기적 성격이라 할 수 있겠다. 「서편제」에서는 도망가야만 했던 사내가 소설의 화자가 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본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어느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사건의 현장인 <골짜기>에 이제는 <손님>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다. <눈의 상실은 자아 이미지의 분열과 그에 따른 주체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은유>이기에, 자아 이미지의 분열이 햇덩이/핏덩이로 이미 드러난 상태에서 마침내 <손님>이라는 표현을 얻은 것은 앞뒤가 맞다 하겠다. <나는 내가 없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라는 라캉의 명제에서 분열되어 나타난 주체의 모습이 바로 <손님>인 셈이다. 장님이 된 누이를 찾아 헤매는 <손님>을 여인의 시각에서 볼 때, 그가 다름아닌 바로 그 장님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바로 이 소설의 <섬뜩함>이 자리 잡고 있다 할 것이다. <골짜기>를 무의식의 상칭으로 볼 때는, <손님>이 일상적인 의식의 세계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소설의 화자이기에 작가의 몫을 어느 만큼 나누고 있고, 그런 만큼 자신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는 커녕, 그는 오히려 자신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가 작중 인물로서 사건의 현장에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이미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시간이 그만큼 흘러가 버린 것이다. 이 잃어 버린 오랜 시간이 있었기에 그는 과거의 사건과 자신의 털어 놓지 않을 수 없는 비밀을 그나마독자에게 알릴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밝힌 것은 물론 사건의 전모는 아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기까지는 작가의 도움, 자신의 비밀을 어디까지나 다만 소설 속 화자의 이야기로 제한한다는 작가의 약속이 필요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게까지 많은 것을 화자에게 양보하면서 작가는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작가의 의중을 간접적으로 밝힐 수 있는 요건한 장치인가 하면, 다른 한편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달리 자기에게 주어전 제 운명의 길을 충실하게 걷는데 열중하다 보면 작품완성이라는 지상과제를 떠맡은 작가 자신의 입장과 크게 맞부딪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작가가 화자에게 더욱 많은 것을 줄수록 둘의 관계는 더욱 팽팽해지면서 그 긴장이 절정에 이르게 되는 때도 나타나는데, 바로 이 순간 대립 관계는 오히려 무너지고, 화자는 거꾸로 작가의 분신으로까지 발전, 역전되기에 이른다. <전이>/ <역전이>라는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연상시키는 이 겹치기 작용에 힘입어, 작가의 주도면밀하면서 동시에 위험 부담을 안고 있는 작업은 그 전지함의 자세로써 마침내 독자를 설득할 수 있기에 이른다. 이청준의 작품 구성에서 화자와 작가의 관계는 피분석자와 분석자의 전이/ 역전이 관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채로 극복할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한 무의식의 작용이 자리잡았던 곳에 나 스스로에 대한 주도적 입장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명제로 요약되는 정신분석의 지향점과 그 모색 과정의 요건한 장치인 전이/역전이라는 방법이 작가 자신의 그것과 비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이/역전이의 관계는 상호 신뢰의 자세로 시작되었는가 하면 어느새 불신의 톰이 벌어져 있고, 관심이 간섭과 뒤얽혀지고, 대화의 열린 상태가 어느새 닫혀져 자기방어를 합리화한다. 그 갈등이 고리로 이어져 맞물려 온다. 또한 전이/역전이의 개념으로써 머리말에서 언급된 작가와 작품, 작품과 독자, 비평가와 작품 사이의 상호관계 및 그 역동성을 밝힐 수 있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현실로 다가온 꿈은 그만 낯선 사내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싶어하는 소년의 꿈은 아버지의 죽음에 뒤이은 어머니의 죽음으로써 끝내 깊은 상처를 간직한 좌절된 꿈으로 남는다 . 소설이라는 허구의 세계를 빌어 그 꿈을 재현하고자 하는 화자/작가의 꿈은 결국 반복 강박의 상태에서나마 좌절된 소원의 실현을 꿈꾸게 된다. 현실에서는 끝내 다 이루지 못한 꿈의 모습이었기에, 그것이 무의식의 힘을 빌어 소설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날수록, 이제는 거꾸로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적 장치로써 오히려 그것을 방해하고 감추면서 <낯설게> 되풀이하여, 그 소원의 좌절이 지연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역으로 소원의 실현을 꿈꾸는 소원풀이, 바로 그것이 글쓰기라는 <기이한 서러움>의 작업에서 문제되고 있는 것이다. 되풀이/소원풀이라는 겹치기 표현에서 두 단어는 서로 작용하여 닮아간다 . 형식이 강조되는 표현 <되풀이>에서 <되>는 <소원풀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되다>, <이루어지다>라는 뜻을 받아 <소원풀이>와 갇은 말로 읽혀질 수 있다. 내용이 강조된 표현 <소원풀이>는 그 내용의 절대성이 <되풀이>로써 상대적으로 되며, 마침내 <소원풀이>의 형식적 측면인 <되풀이>가 부각되기에 이른다. <해답을 풀어 낼 수 없는 기이한 수수께끼>를 앞에 놓고 작가와 독자 그리고 비평가는 똑같이 덱스트의 <손님>이 된다. 글쓰기/글읽기, 문학적 상상력의 품 속이라는 안정된 자리를 빌려, 무의식 세계로 열린 통로, <이상스런 마력>의 <골짜기>를 저마다 찾고 있기에.
3) 공—상의영 화미 예학술 의 정신분석적 접근「메꽃」프로이트의 문학예술 이론의 바탕을 이루는 공상 또는 몽상의 개념은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공상의 가상적 실현에 있어 시각과 청각을주축으로 하는 감각적 측면을 고루 만족시키는 종합예술로서의 영화예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부뉴엘이 1928년에 살바도르 달리와 합작으로 만든 작품 「안달루시아의 개」에는 영화예술의 <첫 장면 Urszene> 이라 할 수도 있는 장면이 화면 가득 부각, 남자의 눈 한 쪽이 면도칼로 절단된다. 20세기 영화예술의 두 가지 대표적 주제인 성과 폭력이 절묘하게 영상화되어 있는 이 장면은 『꿈의 해석』 에서 소개된 남성과 여성의 단순한 상징으로서 볼 수도 있고, 나아가 남성이 저지르는 성의 폭행으로 파악하거나, 왕당파에 대한 공화파의 두쟁이라는 스페인적 역사상황과 사회구조의 문제에 대한 상징으로도 볼 수 있겠다 . 그러나 의미가 강조된 이와 같은 해석보다는 장면 그 자체를 형성의 시각으로 접근하여, 절단됨으로써 열려지고 있는 생체기관, 다름 아닌 여성의 성이 가장 적나라하며 도발적인 모습으로 관객에게 재현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국부의 부각이라는 제한된 의미에서 포르노의 성격마저 보여주는 이 장면은 영화예술이 갖는 혁명적 성격까지 함축된, 예술표현 사상 가장 전위적인 방식으로 욕망의 현장과 동시에 처벌의 실상을 영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무후무한 충격과, 초현실주의를 포함한, 시각의 새로운 차원의 체험을 가능케 하고 있는 것이다.
전위적 예술활동과 혁명적 사회운동이 치열하던 20세기 전반부와는 달리 냉전체제 속에서 보수적, 복고적 경향이 강하게 자리잡던 후반부의 프랑스와 서구세계에서 68년 학생운동은 혁신적 사회이념과 운동의 중심으로서 평가되는데, 이보다 조금 앞서 발표된 부뉴엘의 회심작 「메꽃 Belle de jour」(1966)은 현실의 가상적 재현과 그 현실의 전복이라는 차원에서 「안달루시아의 개」의 초현실적, 비판적 정열이 고스란이 살아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영화의 표면적 설정은 복고풍이다. 귀족의 저택을 연상시키는 집의 정원으로 마부 두 사람이 마차를 몰고 있고, 그 뒤에는 주인공 부부가정답게 앉아 있다. 이 처음의 장면이 끝장면에서도 그대로 반복됨으로써 시간의 통상적 흐름이 의문시되버리는 이 영화는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사건의 모든 과정이 영화의 종결과 함께 오히려 능동적 공상의 무한한 가능성에 문을 열어 준다는 점에서, 영화 속에서 꾸며진 연출자 시각의 이야기가 부정되고 있음을 보여중과 동시에 관객의 적극적 공상참여의 길을 펼쳐놓는 것이다. 실제로, 반복되는 마차의 장면이 그러나 끝장면에서는 두 주인공 남녀의 생략이라는 방법으로 변형되어 , 비어 있는 자리에 이제는 관객이 들어앉도록 초대하고 있다. 몽상의 세계에서 관객은 비워놓은 그 자리에 이미 무의식의 차원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것이다
이 역순의 추적은 영화의 사건전개와는 달리 여성의 시각이 아닌 남성의 시각이 된다. 영화의 끝 부분에 가면, 죄를 지은 사람은 세브린느인데 아무런 죄를 짓지도 않은 그녀의 남편이 총알에 맞아 반신 불수에 실명의 상태로 휠체어에 앉아 있다. 그의 천구가 찾아와 세브린느와 관련된 모든 진상을 알려 주고 돌아간 뒤, 그는 갑자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건강한 사람으로 돌아온다. 이 장면으로써 관객에게 공상과 현실의 뚜렷한 경계가 무너진다. 관객의 지금까지의 공상을 통한 간접체험이 세브린느의 시각을 빌린 것과는 달리, 세브린느 남편이 실명했다가 다시 시력을 회복한 이 순간,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관객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비어 있는 마차의 좌석에 초대될 때, 그리하여 관객이 스스로 자신의 공상을 시작하게 될 때, 그는 이제 세브린느의 시각이 아닌 그녀의 남편의 시각을 빌리게 된다. 그럴것이 관객의 공상을 결정적으로 자극하고 있는 것은 이제 그녀의 남편이 체험한 실명과 개안의 모순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 공상은 결국 망설임과 제 3 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욕망의 시각이다. 의사의 아내 세브린느가 체험하는 고급창녀의 이중생활과 남편의 총격사고라는 영화의 줄거리를 통한 도식적 이분법이 관객의 주도적 욕망의 몽상을 통해 지양되어, 욕망과 죄의식이 동시에 확인되는 과정을 이제 관객은 영화예술의 안정된 형식 속에서가 아닌 자신의 불안한 몸을 통한 직접 체험 속에서 겪을 수 있는 것이다.
「하수구에 뜬 달」이 영화(장 자크 베넥스 감독의 1983년도 작품)의 끝장면에는 주인공의 현실적 상황이 고스란이 그려지고 있다. 제라르 델마스가 자신의 애인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와서 <배가 고프다>는 말을 던지자 벨라는 기쁜듯이 그를 바라다 본다. 그 뒤를 이어 영화의 소도구로 쓰인 거대한 광고판이 화면을 전부 차지하며 부각된다. 그곳에는 남국의 바닷속에 밝은 그립자를 드리우며 (청량)음료수 병 하나가 떠 있는 장면과 그 밑으로 <딴 세상을 즐겨보세요>라는 문구만이 고독할 만큼 크게 자리잡고 있다. 몽상세계를 떠나 현실세계로 되돌아온 주인공과는 달리 현실세계를 떠난 몽상세계의 상징으로써 이 영화가 끝나고 있다는 사실은 아주 의미심장하다.관객이 받아 본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아주 짧은 사건의 개요만 적혀있다. <카트린느는 빈민촌의 한 골목에서 강간 당한 뒤 자살한다. 그의 오빠인 제라르는 복수를 결심하고 매일 밤 부듯가를 헤매면서 남자들을 살핀다. 그러던 중 죽은 여동생을 이상하리만큼 닮은 아름답고 차가운 로레타를 만나게 된다. 또한 벨라는 그의 사랑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데 그는 계속 강간범을 찾는 데만 열중한다.>영화는 까뜨린느의 주검을 어둡게 그리고 조금씩, 그러나 끝장면과 똑같은 비중으로 관객에게 부각시킨다. 첫 장면과 끝 장면에서 색조의 대비만큼 눈에 띄는 것으로는 욕망의 대상인 여자와 물이 현실감을 완전히 상실한 채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죽은 시체로서,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주인공이 살고 있는 무너질듯한 건물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분위기로써. 부두의 하역꾼인 무식한 주인공이 아마읽을 수도 없을 영어의 문구는 그 광고판이 그의 집 앞에 서 있다는 사실과는 아무 상관없이 오히려 관객을 겨냥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불러 일으킨다. 그렇다면 과연 주인공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는 계속 강간범을 찾는 데만 열중하고 있는 것일까? 복수를 결심하고 있다지만 막상 복수를 당하는 쪽은 오히려 제라르 쪽이다. 하마터면 그는 두 무뢰한에게 살해당할 뻔 하지 않았던가?
제라르와의 육체적인 관계를 열망하는 벨라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부터 살펴 보자. 그녀야말로 그녀 집 앞의 광고판과는 정말 무관한 인물이다. 그녀가 욕망하는 것은 그의 젊고 강렬한 육체이고, 그것을 그녀는 소유하는가 하면 동시에 그 욕망의 실현이 좌절되기에, 그녀에게는 또 다른 욕망의 세계가 있을 수 없다 . 그 욕망의 좌절에 복수하고자 그녀는 영화 끝에 가서 제라르의 살해 청부인을 매수하지 않았던가. 바로 그런 그녀가 첫 장면에서 그네를 타며 집안에 세워둔 고물구급차에 그 그네로 박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이 장면의 성적 암시는 너무 뚜렷하다. 이 장면에 이어 로레타가 붉은 스포츠카를 몰고 빈민가의 좁은 골목길 그의 집 앞에 이르러 차를 멈춘다. 처박혀 있는 고물 구급차와 골목길을 가득 채우는 붉은 스포츠카의 대비. 제라르의 육체를 갈망하는 여자와 제라르가 욕망하는 여자의 육체. 이 여자의 육체는 그러나 영안실에 안치된 죽은 시신으로 드러나거나, 몽상 속의 결혼식 다음날 그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는 주인집 뚱보 아줌마로서만 그에게 허락/금지된다. 그 뚱보 아줌마의 침대에서 나됭굴어 떨어전 그에게 어젯밤 결혼식의 증거로서 성모마리아상이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 암시적이다.로레타를 만나면서부터 발생하는 사고는 그 결과 그의 육체가 부상을 입고 있다는 사실에서 욕망/처벌의 존재가 다름아닌 주인공 자신임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배경을 이루는 죄의식의 정체는 로레타 오빠의 자동차 사고로 인한 부모의 죽음, 그리고 그의 죄의식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추론될 수 있다. 영화의 대사에서 자주· 쓰이고 있는 <꿈>이라는 단어와 몽상적으로 늘 달밤에 이루어지는 사건의 구성은 이 영화의 첫 장면부터 시작하여 끝 장면에 이르기까지 공상이라는 개념이 열쇠개념으로 적용되어 있다는 시각을 관객에게 허용한다. 죽은 여동생의 벗겨진 시신으로 시작하여 환상적인 남국의 바다 장면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의 주된 흐름은 사실을 위장한 몽상의 세계인 것이다. 사실과 몽상의 경계가 무너진 욕망의 현장을 관객이 다 들여다 본 다음 그에게 주어전 과제는 영화라는 가시적 세계, 그렇기에 현실적 세계를 떠난 자신의 또 다른 내면, 즉 몽상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는 일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밝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물 속에 빠져있는 물병과 <딴 세상을 즐겨보세요>라는 문장은 따라서 이제 관객을 향한 권유가 되는 셈이며, 몽상이라는 그 딴 세상은 보기에 따라서는 어둡게도 또는 아주 딴판인 밝은 색조로도 모습을 보일 수 있는 별 세계인 것이다.
「레옹」이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은 셋이다. 남자가 둘이고 여자는 하나다. 한 남자는 마피아 조직에 끼어 있고 또 하나의 다른 남자는 국가권력에 끼어 있다. 여자는 두 남자 사이에 끼어 있는 셈이다. 또는 이 여자는 두 남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 무엇이 진상일 것인가? 두 남자 사이에 끼어 있는 여자의 삼각관계? 두 남자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여자의 막강한 욕망? 자신의 목적을 위해 두 남자를 이용하는 여자의 범죄? 이 영화의 여주인공은 이런 가능성을 다 갖추고 있는가 하면 동시에 이런 기대들을 순식간에 무색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그녀는 젊다. 너무 젊어야 한다. 막강한 두 사람의 남자를 그 정반대의 위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인물, 그녀는 열두 살이다. 그러나 그녀는 막강한 여자다(마틸데 Mathilde의 어원은 권력, 강력, 투쟁이다).주인공 남자의 이름은 레옹이다. 강렬한 여자에 못지않게 그 또한 막강한 남자일 수밖에 없다. 그는 프랑스의 자존심이 걸린 인물 (나폴)레옹의 현대판 화신인가 하면 그를 능가하는 면도 또 갖고 있다. 그의 키는 마틸데와 대비를 이루면서 우뚝 솟아 있다. 뉴욕의 우람한 어떤 건물을 배경으로 한다할지라도 작다는 느낌을 결코 주지 않는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등장한 19세기의 인물 나폴레옹과는 달리 세기말의 고독한 독불장군인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마틸데에게 가르치는 첫번째 사격 연습용 조준의 대상이 수행원을 거느리고 있는 정치가 (나폴레옹)인 것이다. (그 정치가가 바로 레옹의 또 다른 분신이기에 그렇게 높고 먼 위치에서도 마틸데가 그를 적중시킬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남자의 이름은 무엇인가? 레옹과 마틸데의 그늘에 가려 그의 이름은 관객의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의 모습은 그들에 못지않게 뇌리에 깊이 박히게 된다. 그것은 분열된 현대인의 모습이다. 사실은 그 모습이 무엇보다도 마틸데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 홍미를 끈다. 그녀 또한 학교라는 제도권 안의 인물이면서 힘에 대한 관계에서 분열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이 영화는 두 개의 장면을 중심으로 연출되어 있다. 그 한 장면을 이루는 것은 바로 바로 악몽의 현장이다. 마틸데를 뺀 가족 전부가 몰살당한다. 가족 안의 힘의 관계에서 보자면 죽어야 될 사람은 다름아닌 바로 그녀인데도 말이다. 제일 먼저 살해당하는 사람이 그녀의 어머니고 그 다음이 그녀의 언니다. 그들은 그녀의 새엄마, 새언니이기에 가족 사이의 애중관계에서 보자면 가장 증오의 대상인 것이다. 자기 친남동생이 죽고난 뒤 마지막으로 그녀의 아버지가 살해당한다. 어머니가 살해당하는 장소가 화장실 안의 욕조라는 사실은 그곳이 동시에 마틸데가 훔쳐본 부부의 성교의 현장이라는 점과 맞물려 있다.제3의 인물인 마약담당 수사반장이 이 살인극의 범인이다. 그러나 가족구성원 사이의 심리극을 이미 파악한 상황에서 영화의 표면적 서술차원에서 시선이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영화의 이해는 심충분석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제3의 인물은 국가 권력기관의 하수인인가 하면 동시에 이 영화 구성의 하수인이다. 그의 살인극은 다름아닌 여주인공의 억압된 소망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고스란이 꿈의 문법을 빌리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마약 담당 수사반장의 중책을 지닌 인물인가 하면 동시에 마약중독자라는 사실에서 그가 맡고 있는 살인극의 백일몽 성격이 충분히 엿보인다. 이와 같은 백일몽의 성격, 꿈의 작업덕분에 마틸데는 시종일관 양심의 가책을 전혀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수심리로 무장된 상태에서 오히려 한 발짝 더 나가 그녀와 이 영화의 가장 억압된 욕망의 충족이라는 단계로 넘어간다.
가족이 없는 레옹이 이제 고아가 된 마틸데의 후견인 역할을 맡게 된다. 그는 이 짐을 의식적으로 떠맡지 않으려 하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마틸데 가족의 바로 이웃에 사는 사람으로서 살인 현장의 유일한 증인이라는 배역을 통해 어쩔 수 없이 마틸데의 억압된 욕망을 함께 나누고 있는 인물인 것이다. 그가 보이는 저항의 몸짓은 그 억압된 욕망의 충족을 꿈꾸는 사람이 마틸데라기보다는 사실은 오히려 자기자신 쪽에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그러나 실감 있게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레옹의 이와 같은 복잡한 인물설정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성격을 제시한다. 영화가 형상화하는 꿈의 문법을 실제 의식하고 있는 사람은 영화 속에서는 바로 레옹인 것이다. 레옹은 살인극의 증인으로서 이 가족심리극의 진상과 의미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상태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형벌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은 마틸데의 백일몽이 아닌 자기자신의 꿈의 실현임을 의식해가는 과정에서 그의 죽음은 사필귀정의 논리로 매듭된다.마틸데가 새로 찾은 아버지의 대역(그녀의 새엄마가 마틸데의 아빠를 새로 남편으로 찾았듯이)인 레옹은 전능을 구현하는 인물로서 여기에서는 분리불안의 악몽 Trauma을 보상받으려는 복수심리의 기제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근친상간의 욕망을 뛰어넘는 이와 같은 심리기제에는 다름아닌 나르시즘이 깊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만의 공생관계 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어머니와 자식 간의 애정교환이 이 영화의 두 개의 중요한 장면 사이에서 연출되고 있는 것은 따라서 아주 당연한 일이다. 이 영화에서는 그것이 그러나 남자와 계집애 사이에서 벌어지도록 연출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언급되지 않은 이 영화의 두번째 장면은 마틸데의 분리불안이 재현되는 장면으로서 이 영화는 사실은 이 장면의 연출을 위해 모든 것이 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우수한 병기가 다 동원되는 전두의 장면에서 레옹은 마틸데를 자신의 수중으로 다시 빼앗아 오면서 동시에 도끼를 찾아 방으로 들고 온다. 그 도끼로 레옹은 방의 벽에서 하나의 구멍을 열어 놓는다. 그리고 그 구멍은 <빠져 나가는> 구멍인 것이다. 그 구멍으로는 그러나 마틸데의 몸 하나만 빠져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그녀는 이 공생관계의 종지부를 삶의 시작이 아닌 끝으로 받아들이면서 필사적으로 거부한다. 살신성인의 지극한 정성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데 이것은 끝장면으로 연결되어 레옹은 자신의 가슴 가득한 폭탄과 함께 산화, 그러나 그 영혼은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대지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레옹이 자신의 방에서 도끼로 열어 보여 주는 구멍 그리고 그의 가슴 가득 매달린 폭탄은 꿈의 해석에서 사용되는 개념인 자리바꿈으로 써 풀어보자면 여성의 성과 가슴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가장 강력한 남성의 몸이 욕망의 충족, 공생관계를 거쳐 죽음에 이르는 순간 가장 강력한 여성의 몸으로 바뀌어 드러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니키타」와 「그랑 블루」에 이어 「레옹」을 연출한 감독의 집요한 문제추적의 연장선에서 과연 그의 다음 작품이 이 질문에 대한 중요한 시각을 보완, 제시할 것인지 벌써 기다려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광기의 미학―국공포영화의 공상적, 유희적 성격일상생활의 단조로움으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세계로 넘어가는 길이 있다면 그곳은 얼마나 흥미진진할 것인가!? 바로 단절의 직선이 연결의 곡선으로 되돌아 오는 곳이리라. 우리는 먼저 그 길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자동차로 그곳을 찾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것이다. 직선의 논리는 단절을 뜻하기 때문이다. 광기의 증상이 드러나는 셈이다. 걸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자전거가 제격일 테지만, 문제는 영화 속에서 내가 주인공으로서 자동차를 이용해야만 되고, 거꾸로 다른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내 쪽으로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때 자전거와 자동차의 방향이 서로 다를 것은 뻔한 이치다. 자동차는 내가 몰고 있는 한 대 뿐이고, 자전거는 이따금씩 그러나 끊이지 않고 달려 오고 있다.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자동차를 몰고서도 게다가 목적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인데도 나는 결국 그곳에 이르게 된다. 그곳은 지도에도 없는 마을이다 . 수수께끼 같은 마을의 이름은 <힙스의 끝>이다.그 마을의 교회가 최종 목적지다. 모든 것이 글에 쓰인데로 일어난다. 그 소설의 작가가 그곳에서 마지막 원고를 정리하고 있다. 나의 역할은 그 원고를 모든 사악한 존재들로부터 안전하게 빼돌려 대도시의 출판사로 넘기는 일이다. 작가가 그 역할을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나에게 이미 맡겨 놓았기에 나는 그 역할에서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꼼짝 못하고 그 힘에 사로잡혀 움직일 수밖에 없다. 나를 사로잡고 꼼짝 못하게 하는 힘, 그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의 이 체험은 내가 정신병원에 수용된 뒤, 병원에서 나가지 않기로 마음먹고 난 상태에서 털어놓는 이야기이기에, 그리고 결국 나는 유일한 생존자로서 병원을 나서게 되고 폐허가 되버린 도시의 영화관에서 이 모든 과정을 화면에서 다시 체험하도록 되어 있기에 사실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백일몽 쪽에 더 가깝다.
정신병원, 교회 그리고 영화관, 이 세 공간이 이 영화 (「광기의 입 속에서」)의 무대를 이룬다. 어느 곳이 과연 광기의 입 속일 것인가? 앞의 두 공간은 영화의 제목과 직접 관련된다. 주인공은 그곳에서 마치 광기의 입 안에서나 체험할 수 있는 일들을 겪는다. 웅장한 성과 같은 정신병원, 주인공이 나오기를 거부하는 정신병원은 현대문명의 상징이다. 주인공 존 트랜트(존과 요한은 같은 이름이며 이 영화의 세기말적 분위기는 「요한계시록」을 연상시킨다)는 그곳이 바깥세계보다 더 안전하다고 믿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믿음을 제공하는 밖의 여건을 허구로서 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책이라는 장치가 이용되고 있는 것은 허구세계의 성격과 일치한다. 그의 정신병원은 말하자면 허구세계로의 진입을 가능케 해주는 장치인 셈이다.교회는 그의 죄의식과 관련된다. 정신병원이 그의 죄를 처벌하는 집행기관이라면, 교회는 그 죄를 의식할 수 있도록 구성된 장치이다. 교회의 인물로서 케인(카인)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케인과 존이 공유하는 분신의 관계를 추론할 수 있다. 케인과 존의 분신관계는 이곳에서 케인을 찾아오도록 존에게 일을 맡긴 출판사의 사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실현된다. 그가 말하자면 억압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준다. 케인은 그럴 경우 아버지가 추방한 아들의 역을 떠맡는다. 밤의 거리에서 존이 목격하는 경찰관의 구타장면과 그 근처에 붙어있는 케인의 작품 선전포스터가 이 관계를 이미 실감 있게 그려 보이고 있다.교회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여관집 주인 할머니의 발목에 묶여 있는 남편의 모습에서 바로 이 억압된 장면의 성격이 재현되고 있다. 현실의 세계에서는 구타하는 경관과 출판사의 사장으로 상징되고 있는 아버지의 권위가 꿈의 세계에서는 여자의 발목에 묶인 상태에서 벗겨진 몸으로 꿈틀대는 남자의 육체로써 그 적나라한 얼굴을 드러낸다. 이장면은 물론 프로이트식 개념인 <첫 장면 Urszene> 의 공포영화적 표현임에 틀림없다. 호기심을 가지고 몰려다니는 기이한 아이들의 얼굴이 이 장면과 연관되어 있다. 백일몽 또는 꿈의 세계에서 아들은 교회를 독차지하며 신의 자리를 차지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수많은 맹견이 무장한 사내들의 공격을 물리치는 장면에서 꿈의 상태에서나마 표출의 기회를 찾던 억압된 아들의 공격욕이 드디어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 (「매드니스」라는 제목으로 상영됨)의 재미는 무엇보다도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장면들의 연출에 못지않게 그 공포심을 다시 없애주는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데 있다. 주인공의 죄의식이 공포심을 유발하는 원인이라면, 그가 마지못해 빠져드는 독서의 세계, 죄를 짓고도 죄의식을 갖지 않아도 되는 꿈과 공상의 세계(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는 길, 꿈길의 입구에서 그가 자전거 탄 사람을 치었는데도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다 소재로 삼고 있는 종합예술로서의 영화의 세계(이 모든 광기와 도착의 과정을 겪고 난 뒤 주인공이 들어가는 곳이 바로 영화관이다), 이것들이 바로 그 공포심을 없애 주며 유희의 형식 안에서 그것을 균형있게 즐기도록 해주고 있는것이다.할리우드의 세계는 공상의 세계다. 그것은 죄의식의 세계와 유희의 세계를 공존케하는 형상화의 현장이다. 그것의 끊임없는 재현과정이다. 관객은 이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죄의식을 의식하는가 하면 동시에 그것을 잊고 벗어나는 작업의 지속성을 통하여 삶의 질을 풍성하게 변모시킨다. 공포영화는 인류의 무의식적 죄의식에 대한 집단적 체험의 과정을 이룬다는 점에서 공포영화를 통한 집단적인 순화와 거세의 과정은 문명세계의 또 다른 이면이다. 자신의 모습을 찾고, 죄와 처벌의 현실을 두려워하며 동시에 예술적 형식을 빌려 자신의 일그러전 모습을 보며 즐길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문명세계가 갖는 또 하나의 묘미일 것이다.
꿈과 현실 —「쇼생크 탈출」과 「토탈 이클립스」「토탈 이클립스」라는 영화는 제목보다는 쉬운 영화인데 반해,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는 제목보다는 어려운 영화다. 전자의 영화가 드러내 보여 주는 영화인 것과는 달리, 후자의 영화는 드러내 보이면서 감추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원제 Redemtion of Srawshenk에 이미 어려움의 성격이 담겨 있다. 원제와 달리 한국의 관객은 이 영화를 <탈출>의 영화로 보게 되는데, 이것은 영화의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이 영화의 무대인 형무소는 사건의 현장으로서보다는 주인공인 앤디의 심리상태가 두사된 내면세계의 반영물로 파악된다. 그가 해결해야 할 첫째 문제는 부친살해 콤플렉스다. 자신의 부인과 그 정부를 살해한 협의로 그가 종신형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형무소장(아버지의 분신)의 죽음을 실현하고자 죄를 뒤집어 쓰는 셈이다. 유죄판결을 받는 과정에서 살해현장에서 발견된 권총과 탄알이 앤디 자신의 그것과 똑같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버렸다는 권총이 강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그런데 그 지신의 남성을 상징하는 권총은 거세 공포때문에 발견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자신의 처와 그 정부의 간통장면으로 표현된 부모의 <첫 장면>을 욕망하는 앤디의 죄의식은, 형무소에 이중(!) 종신형의 형벌로 수감됨으로써 그 거세의 성격이 확인된다.진짜 범인의 등장은 이 영화의 반전을 유도한다. 물론 그는 실제 등장인물로서 사건의 현장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등장인물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만 등장한다. 앤디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는 이 진짜범인의 역할은 영화구성상 그를 감옥에서 풀어 내보내는 무죄의 증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 그의 죄는 법적인 죄가 아니라심리적인 죄의식일 뿐이니-거꾸로 그를 영구히 감옥에 처박아 두는 계기가 되도록 한다. 그리고 동시에 형무소장의 범죄를 명확히 가시화한다. 그는 용기 있는 죄수, 앤디의 무죄를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젊은이, 그리고 천신난고 끝에 앤디가 말하자면 아버지로서 인간답게 만들어 놓은 그 아들을 총으로 살해토록 한다.
그 속에서 오랜 수감생활을 통해 길들여지면서 마침내는 집보다도 더 안전하게 느껴지는 형무소, 이 형무소의 소장은 절대적 아버지의 상을 대신한다. 이 아버지가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장 모범적으로 발전한 문제의 죄수인 아들을 죽이고 나서야 비로소 영화의 가장 은밀한 소원중의 하나인 부친 살해의 꿈이 실현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꿈은 주인공의 협의사실이었던 타살이라는 방식이 아닌 자살로서 이루어지기에 앤디의 숨은 욕망을 더욱 만족시킨다. 자살은 다름아닌 형무소 소장 자신의 권위의 상징인 권총으로써 수행된다. 진짜 범인―그는 일그러진 노인, 감옥에 갇혀 있는 모습으로 관객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이 사용한 권총과 그의 권총이 똑같았기에, 그리고 6연발 권총으로 발사된 탄알이 실제로는 8발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계획된 살인이라는 판결을 받았기에, 다른 의미에서 <똑같은> 권총으로 그가 형무소소장의 권위를 스스로 파괴했다는 것은 이중의 만족을 가져다 준다. 이제 거세된 존재는 디름아닌 아버지인 것이다.이 순간, 아버지의 거세가 확실하게 드러난 순간에 앤디의 진짜 욕망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앤디와 이 영화의 화자인 레드, 두 남자는 동성애자들의 꿈의 섬인 멕시코의 외딴 섬에서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영화 「델타 비너스」에 보면 멕시코가 동성애의 엘도라도로 언급되고 있다. __ 영화에서 시종일관 가장 억눌린 상태로 관객에게 제시되는 문제점이 바로 동성애다. 관객은 그러나 앤디의 가장 억눌린 욕망인 동성애를 그것의 가장 부정적인 모습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증인이기에 설마한들 다른 사람 아닌 바로 그 앤디가 그와같은 욕망을 꿈꾸리라고는 생각도 못한다. 증인으로서의 관객이 주인공의 동성애자로서의 죄의식을 무죄로 판결내리고 있다는 사실과, 다른 한편 영화 속의 배심원들이 주인공이 저지르지 않은 살인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 이 영화의 예술적 성공을 실현시킨 아이러니 기법이라 할 수 있겠다.
주인공의 동성애는 모성에 대한 욕망과 짝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부모의 <첫 장면>이 주인공의 죄의식을 이루고 있는 체험임을 비추어 볼 때, 그리고 영화에서 가장 정점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아들/부친살해의 구조에서 볼 때 이는 아주 당연하다 할 수 있겠다. 앤디와 레드의 숙명적 접촉이 영화 속의 영화의 주인공인 여배우의 소유라는 모습으로 가시화되고 있다는 점도 이런 도식에 잘 맞는 포석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여배우를 그러나 그는 실물로서 소유하지는 못하고 사진으로서만 소유한다. 꿈의 형식으로서만. 그리고 앤디의 욕망의 화신인 그 여자를 사진으로 소유하게 되는 순간은 드러난 동성애의 유혹과 폭력을 그가 처음으로 남성다운 행동으로써 물리쳤을 때였다. 레드로부터 그는 그 사진을 공짜로 선물 받는다. 그가 갖고 싶어했던 또 다른 욕망의 상칭인 작은 망치(!)를 레드의 힘을 빌려 소유했을 때는 물론 돈을 지불했어야 했다. 여자 배우의 사전은 세 번 바뀐다. 그리고 바뀔 때마다 그 육체적 도발과 유혹의 강도는 높아만 간다. 마침내 앤디의 탈옥이 성공했을 때 우리는 그 모든 이야기를 다름 아닌 레드의 입을 빌려서 알게 된다. 앤디는 여자배우의 사전(어머니의 대치물) 뒤에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서 도망쳐 나온다. 자궁과 출산의 비유로 읽힐 수 있는 이 장면은 그러나 탈옥의 제2단계에 접어들면서 항문과 직장이라는 모습을 갖춘 동성애의 알레고리임이 밝혀진다.「쇼생크 탈출」은 따라서 현실에서 실제 이루어진 <탈출>만 문제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몽상 또는 꿈의 형식을 빌려 이루어진, 현실에서는 실현할 수 없는 소망의 실현이 사실은 더 문제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제목이 보여주는 단순한 발현몽의 차원을 넘는, 참재몽의 해석이 요구되는 어려운 예술영화임이 밝혀졌다. 그와 달리 두 예술가, 시인의 동성애라는 예술적이며 쇼킹한 소재를 영화화한 「완전일식」이라는 영화는 그것이 보여 주고 있는 것들이 현실의 복사/재현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토탈 이클립스」라는 제목에 어울리지 않게 사실은 아주 전부한 영화임이 또한 드러난 셈이다. <완전 일식> - 「쇼생크 탈출」과 같은 원작자의 작품인 「돌로레스」에서 배경으로 나오는 완전 일식, 살인사건, 그리고 이 영화의 발현몽을 참고할 것 ――-그 상태에서 인간은 볼 수가 없고, 사실은 다만 꿈꿀 수 있을 뿐이기에.
부록 1 문학예술이론과 관련된
프로이트의 원전I 작가와 공상
작가라는 특이한 인격체가-이폴리토 데스테 추기경이 아리오스토한테 물어 보았던 질문처럼 -어디에서 작품의 소재를 가져오는지, 그런 소재들로 우리를 사로잡아 그러리라 생각도 못했던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라는 문제가 늘 문외한인 우리의 큰 관심사였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은 작가 스스로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만족할 만한 대답도 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 커지고, 아무리 문학적 소재선택의 조건과 시적 형상기술의 본질에 대해 통찰력을 갖춘다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 작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관심은 지속된다.적어도 우리한테 작가의 창작과 어떤 식으로든 비슷한 행위가 발견될 수만 있다면! 그러면 그것을 연구하여 작가의 창작에 대한 설명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전망은 존재한다-작가 스스로 그들 고유의 영역과 일반적 인간존재 사이의 거리를 좁힌다는 일을 반기고 있다. 모든 사람 속에는 작가가 숨겨 있으며 마지막 작가는 마지막 인간과 함께 죽을 것이라고 우리가 늘 작가들로부터 듣고 있지 않은가.
문학적 행위의 첫 발자취를 어린아이한테서 찾아봐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집중적 행위는 놀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아이는 누구나 나름대로의 세계를 만들어 내거나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만의 세계를 그의 마 음에 드는 새로운 질서 속으로 옮김으로써 마치 시인처럼 행동한다. 그가 이 세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리라. 정반대로 그의 놀이를 아주 전지하게 여기며 거기에다 많은 양의 감정을 바친다. 놀이의 반대는 진지함이 아니라 현실이다. 모든 감정 소모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자기의 놀이세계를 현실과 아주 잘 구별하며 상상의 대상물과 관계를 실제 현실의 잡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사물에 즐겨 갖다 붙인다. 바로 이 갖다 붙이기 Anlehnung야말로 아이의 <놀이>를 <공상>과 구별한다.그런데 작가는 놀고 있는 아이와 똑갇은 일을 한다. 그는 공상의 세계를 만들고 그것을 아주 진지하게 여긴다. 감정충전이 크다는 말인데, 한편 그는 공상세계를 현실로부터 엄격하게 나눈다. 그리고 아이의 유희와 문학적 창작의 유사점은 연기 가능한 감각적 대상들에 대한 의탁을 필요로 하는 이런 공연들에 희극(기쁨의 놀이), 비극(슬픔의 놀이) 등 극(유회)라는 언어적 표현 그리고 그것을 연기하는 사람에게 연기자(놀이패)라는 언어적 표현을 중으로서 잘 나타나 있다. 그러 나 문학적 세계의 비현실성에서 예술적 기교에 필요한 아주 중요한결과들이 나오는데, 왜냐하면 실제 재미를 가져다 줄 수 없는 많은 것이 공상의 놀이 속에서는 재미있으며 그 자체 본래 조절하기 힘든 많 은 감정들이 작가의 청중과 관객에게 재미의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현실과 유희의 대립의 문제를 좀더 심화시키도록 하자! 아이가 자라면서 놀이를 그치고, 삶의 힘든 일과 수십년 동안 진지하게 씨름하다 보면, 어느날 놀이와 현실의 대립을 다시 지양하는 정신적 성향에 이를 수 있다. 어른이 된 그는 옛날에 얼마나 전지하게 놀이를 즐겼던가 생각하게 되고 , 어른으로 해야 되는 진지한 일과 어린 시절의 놀이를 같이 놓으면서 일상생활의 중압감을 떨치며 유머의 진한 재미를 찾는다.
나이 를 먹으면서 사람은 놀이를 그만 둔다. 겉만 보자면 그는 놀이에서 얻는 재미를 포기한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생활을 아는 사람이라면 한 번 맛본 재미를 포기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그에게 없다는 것을 익히 안다. 우리는 원래 아무 것도 포기할 수 없고 어떤 것을 다른 것과 바꿀 따름이다. 포기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은 대리 형성 또는 대용물 형성이다 . 철들면서 놀이를 그만 두는 것은 사실은 실제하는 대상에 의존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놀이 대신에 이제 그는 공상을 즐긴다. 그는 모래밭에 누각을 지으면서 백일몽을 꿈꾼다. 내 생각으로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백일몽을 꿈꾼다. 이 사실은 오랫동안 간과되어 그 중요성이 충분히 인식되지 못했다.인간의 공상은 어린아이들의 놀이보다 관찰하기가 쉽지 않다. 아이는 혼자 놀기도 하고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그들만의 심리적 체계를 이루기도 하지만, 어른들에게 아무것도 보여 주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 앞에서 놀이를 감추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른은 자신의 공상을 부끄러워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숨긴다. 그것은 그 자신의 가장 은밀한 부분으로서 사람들은 보통 과오를 고백할지언정 공상은 좀체 알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공상을 하는 사람은 자기 혼자 뿐이라고 여기고 사실은 다른 사람들한테도 비슷한 생각이 널리 퍼져있다고는 감도 못잡는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유희를 즐기는 사람과 공상을 즐기는 사람의 상이한 태도는 사실은 서로 맞물려 있는 두 행동의 동인에 그 까닭이 있다.아이의 놀이를 주도하는 것은 소망들인데 아이가 자라도록 도와 주는 본래 한 가지 소망은 커서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는 늘 <어른>놀이를 즐기며 어른들의 생활을 보고 알게 된 것을 놀이에서 흉내낸다. 아이가 이 소망을 감출 이유는 없다. 어른은 사정이 다르다. 한편으로 어른으로서 놀이라든가 공상을 즐겨서는 안 되고 현실에서 행동해야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한편 공상을 일으키는 소망들 가운데 꼭 감추어야 하는 것들도 많이 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공상을 유아적이며 금지된 것으로서 부끄러워한다.
그것이 그토록 비밀에 휩싸여 있다면 인간의 공상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많이 잘 알게 되는 것인가? 그런데 세상에는 고통의 대상과 기쁨의 까닭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이라는, 엄격한 여신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신경질환 환자들로서 정신요법을 통한 회복을 기대하는 의사에게 또한 그들의 공상을 고백해야 한다. 이 통로가 우리에게 최상의 지식을 갖다주며, 그 내용은 건강한 사람들이 전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인 바, 이와 같은 우리의 추측은 타당하다고 본다.이제 우리는 공상의 주요 성격돌을 알아보기로 한다. 행복한 사람은 한 번도 공상의 날개를 펴지 않고, 불만족스런 사람만 그럴 뿐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채워지지 못한 소망들은 공상의 추전력이며, 모든 개개의 공상은 소망의 충족, 불만족스런 현실의 교정이다. 사람마다 성, 성격 그리고 주변환경에 따라 실현코자 하는 소원도 다르다. 그러나 그것은 대표적인 두 가지 방향에 따라 분류될 수 있다. 당사자의 신분향상에 도움이 되는 의욕적인 소망 또는 성애적 소망이 그것이다. 젊은 여자들의 경우 거의 전적으로 성적 소망이 주류를 이루는데 그럴 것이 일반적으로 사회적 욕망은 사랑의 노력에 파묻힌다. 젊은 남자의 경우 성적 욕망 말고 이기적, 야심적 욕망이 대종을 이룬다. 그렇긴 하지만 두 방향의 반대적 성격말고 그것의 빈번한 결합을강조하기로 하자. 많은 교회제단의 그림들 구석에 헌화자의 초상이 보이듯이 대부분의 야심적인 공상에도 어느 귀퉁인가에는 귀부인의 모습이 발견된다. 사실 공상가는 그녀를 위하여 이 모든 모험을 수행ᘕ하는 것이며 그 값진 전리품을 그녀의 발 앞에 늘어놓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생각을 감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육을 잘 받은 여자에게 성적 욕구는 사실 최소한만 허용되어 있고, 젊은 남자는 응석부리던 유년시절부터 몸에 붙은 지나친 자기주장을 비슷한 처지의 까다로운 개체들로 가득 찬 사회에 적응한다는 목적의식에서 제어할 줄 알아야 된다.
이런 공상적 행동의 산물인 개별적 공상, 공중누각 또는 백일몽들은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꼭 천편일률적이며 불변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변화하는 삶의 인상들에 적응하여 처지가 바뀜에 따라 변화하고, 작용하는 새로운 인상이 생길 때마다 소위 말하는 <시대의 표시>를 얻게 된다. 공상의 시간에 대한 관계는 아주 의미가 깊다. 공상은 말하자면 세 개의 시간, 인간 상상력의 세 시간단위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상 작업은 지금 당장의 인상과, 즉 그 당사자의 중요한 소망들 가운데 하나를 일깨울 수 있는 현재에 있어서의 사건과 연결되는데, 대부분 유아시절에서 오는 옛날 체험의 기억이 현재의 입장에서 접근되는 것이다. 그때에는 이 소망이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이 접근은 결국 미래의 상황을 연출하는데, 이 상황에서 바로 그 소망이 다시 실현되는 바, 그것이 바로 백일몽 또는 공상으로서, 여기에는 현재 사건과 기억에서 비롯한 흔적들이 담겨 있다.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가 소망의 줄에 고스란히 꿰어 있는 셈이다.가장 전부한 보기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기로 한다. 당신이 가난하고 고아가 된 젊은이에게 어쩌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고용주의 주소를 주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곳으로 가는 길에 그는 백일몽에 빠질 수 있는데 이는 그의 형편에 비추어 보아 가능한 일이다. 공상의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을 것이다 . 그곳에서 그는 일자리를 얻게 되고 사장의 마음에 들어 사업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그의 집에 초대를 받아 매력적인 따님과 결혼을 하게 되고 그런 뒤 회사의 책임자로서 나중에는 사업을 떠맡게 된다 . 그가 행복한 어린시절에 누렸던 것을 이제 그는 공상 속에서 실현한다. 아늑한 가정, 사랑하는 부모님과 애톳한 애정의 첫 대상들. 이런 보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체험에 따라 미래의 청사전을 펼치고자 소망이 바로 현재의 기회를 이용한다는 사실이다.
공상에 대해 말할 것이 또 많이 있겠지만 아주 간결하게 요점만 말하고자 한다. 공상이 지나치게 많아지며 너무 강력한 힘을 행사하게 되면 정신질환 또는 정신병에 빠질 조건이 갖춰진다. 공상 또한 병증상의 바로 그 전단계로서 환자들이 호소하는 것이 이런 고통의 증상들이다. 병리학에 이르는 수많은 옆 길이 여기에서 가지를 치고 있는것이다.그러나 나는 공상의 꿈에 대한 관계를 지나칠 수 없다. 우리가 밤마다 꾸는 꿈 또한 이런 공상과 다르지 않다. 이 점은 꿈의 해석을 통해 분명해진다. 언어는 공상가의 뜬 구름 같은 생각들을 <백일몽>이라고 부름으로써, 놀랍도록 현명하게 꿈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이미 오래 전에 마무리지었다. 이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꿈의 의미가 대부분 뚜렷하지 못하다면, 그 까닭은 그 꿈이 부끄럽고 또 자신에게 도 숨겨야 하는 것들인 나머지, 억압되고 무의식으로 밀려가 있는 그런 소망들이 밤이 되면 우리 안에서 활발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억압된 소망과 그 떨거지들한테는 이제 형편없이 왜곡된 표현이 주어질 수밖에 없다. 꿈의 왜곡에 대한 학문적 작업을 통한 설명이 성공한 상태에서, 밤에 꾸는 꿈이 우리 모두에게 잘 알려진 공상인 백일몽과 갇은 소망의 충족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하등 어려운 일이 아니다.공상에 대해서는 이쯤으로 끝내고 이제 작가를 보기로 하자! 과연 작가를 <대낮의 몽상가>와, 그의 창작을 백일몽과 비교해도 되는 것인가? 여기에서 첫번째 차이가 부각된다. 고대의 서사시인과 비극작가처럼 완결된 소재 를 빌려오는 작가와 소재를 자유롭게 창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가를 서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 후자의 경우를 더 살펴보자. 우리의 비교에 적합한 작가는 평론가들이 호평하는 작가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까다롭지 않은 소설, 단편, 이야기를 써서 수 많은 열광적인 독자를 확보하는 작가들이다. 이들 작가의 작품에서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들 작품에는 모두 관심의 촛점을 이루는 주인공이 있어 작가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주인공에 대한 우리의 성원을 얻으려 애쓰며, 특별한 운명으로써 그 주인공을 지켜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의 어떤 한 장에서 주인공이 의식을 잃고 중상을 입고 피를 홀리며 쓰러지는 것으로 끝나면, 다음 장은 틀림없이 그가 극진한 치료를 받으며 회복되고 있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소설의 1권이 폭풍을 만난 배가 침몰하는 것으로 끝나면, 제2권에서는 그 배의 기적적인 구조로 시작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설은 계속될 수 없는 노릇이다. 이 확신의 느낌을 가지고 독자는 주인공의 위험한 운명의 여로를 동반하는데, 바로 이 확신감이 있기에 실제 주인공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자 물에 뛰어들거나, 적진을 향해 돌진하고자 총알에 몸을 맞 기는 것이다. 독일문학의 중요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 이 본래적 영웅감을 다음과 갇이 재미있게 표현하였다. <네게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안첸그루버). 내 생각으로는 그러나 불사신이라는 속이 비치는 이 특징 속에서 힘들이지 않고 모든 백일몽과 소설의 주인공, 왕으로서의 나라는 존재를 읽어 볼 수 있다.
자아중심적인 이런 소설의 또 다른 전형적 특칭들이 동일한 성격을 보여 준다. 소설의 여자들이 모두 늘 주인공을 사랑한다면 이것은 현실의 묘사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백일몽의 필수적 요소라고 쉽사리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설의 다른 등장인물들이 선인과 악인으로 분명히 나뉘어질 때, 이는 현실에서 관찰되는 인간성격의 다양성을 포기하고서만 가능한 일이다. <선인>둘은 주인공이 된 자아의 협조자이지만, 그러나 <악인>은 그 자아의 적과 경쟁자들이다.
아주 많은 문학작품이 소박한 백일몽이라는 기본꼴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우리가 결코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러나 극단의 변종들 또한 빈틈없는 일련의 중간단계들을 통해 이 기본꼴과 관계되어질 수 있다는 추측을 아무래도 나는 억누를 수 없다. 소위 심리소설의 많은 작품 안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주인공만이 내부에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이 내 눈길을 끈다. 그의 영혼 속에 말하자면 작가가 앉아서 다른 인물들을 의부로부터 살피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심리소설은 자신의 자아를 자아관찰로써 부분자아로 분열시키고 그에 따라 그의 내적 삶의 갈등물길을 여러 인물에게 인격화시키는 현대 작가의 독특한 경향에 힘입고 있다. 백일몽이라는 전형과 완전히 대립된 소설로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한 인물이 행동의 역할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오히려 마치 구경군처럼 다른 인물의 행동과 고통을 수수방관만 하는 <궤도에서 벗어난> 소설을 들 수 있겠다. 졸라의 후기소설에 이런 작품이 여러 편 있다. 그렇지만 작가가 아니면서 여러 면에서 소위 규범에서 벗어난 개인들의 십리적 분석을 통해 백일몽과 유사한 변형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밝혀야겠는데, 이 변형들에서는 자아가 구경꾼의 역할에 만족한다.작가와 대낮의 몽상가, 문학작품과 백일몽의 동일화가 의미를 갖자면 무엇보다도 어떤 식으로든 그것의 생산성이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내세웠던 세 가지 시간과 그것을 꿰뚫는 소원에 대한 상상의 관계에 대한 공식을 작가의 작품에 적용하여 작가의 인생과 작품 사이의 관계를 그것의 힘을 빌려 연구해 보면 어떨까. 어떤 기대상상을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할지 일반적으로 모르고 있었다. 대부분은 이 관계를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다. 공상에서 얻어전 통찰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기대해야 할 것이다. 강렬한 현실적 체험이 작가 안에 옛날의, 대부분 유년시절에 속하는 체험을 불러 일으키는 바, 이제 이 체험으로부터 작품 안에서 실현되는 소망이 비롯한다. 작품 자체는 생생한 자극의 요인, 옛 기억의 요인들을 다 보여 준다.
이 공식의 복잡함에 놀랄 것은 없다. 실제로는 그것이 너무 일방적 도식으로 판명되리라 나는 추측하지만, 그러나 그 안에 전상으로의 첫 접근이 담겨 있을 것이며, 내가 이미 몇 · 가지 이런 시도를 해 본 상태에서는 문학 생산품의 이와 같은 관찰방식이 결실을 맺게 되리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작가의 삶에서 차지하는 유년시절의 기억이 어쩌면 낯설 만큼 강조되고 있는 것은 작품과 백일몽이 옛날 아이들 장난의 계속이며 대제라는 전제에서 제일 먼저 유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 여러분은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자유로운 창작물이 아닌 완결된, 알려진 소재의 문학화가 실현되고 있는 종류의 문학작품들을 다시 검토하기로 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도 소재의 선택과 그 소재의 상당한 변화를 통해 부분적 독자성이 작가에게 주어지고 있다. 그 소재들을 누구나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신화, 설화와 동화라는 민중의 보고에서 비롯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심리학적 형성물의 분석이 완결된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러나 예를 들면 신화로부터 그것이 모든 국가의 소망공상의 왜곡된 잔여물, 오래되지 않은 인류의 세속적 꿈과 일치할 것임을 주장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내 강연의 제목에서 먼저 언급되고 있는 작가에 대하여 공상보다도 훨씬 더 많이 이야기된 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연구가 활발하지 못하다는 변명으로써 독자 여러분께 사과 드리는 바이다 .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공상의 연구로부터 문학적 소재선택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독자 여러분께 자극과 도전을 일깨울 따름이다. 작가가 어떤 방법을 가지고 독자에게 작품을 통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는 또 다른 문제는 전혀 손도 대지 못한 상태이다. 마지막으로 공상에 관한 우리의 논의에서 시적 감동의 문제로 어떻게 길이 통하는지 짧게나마 다루기로 한다.
백일몽자들이 그의 공상을 부끄러워 할 이유를 느끼고 있기에 다른 사람 앞에서 그것을 세심하게 감춘다고 앞에서 말한 바 있다. 나는 이제 거기에 덧붙일 것이 있는데, 설령 그가 그것을 알려 준다 하더라도 이런 폭로를 통해 아무런 즐거움도 우리에게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공상을 우리가 알게되면 협오감을 갖게 되거나 잘해봤자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작가가 자기의 유희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거나 또는 자신의 개인적 백일몽이기 쉬운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로 전달하면 우리는 수많은 원천에서 흘러 모여드는 비상한 쾌락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작가가 그것을 실현시키는가 하는 것은 그 자신만의 고유한 비밀이다. 모든 개체로서의 자아와 다른 자아들 사이에 생기는 장애와 관련되는 협오감의 극복이라는 기술 속에 본래적인 창작의 비밀이 자리잡고 있다. 이 기술 가운데 두 가지를 소개한다. 작가는 이기적인 백일몽의 성격을 변화와 은폐를 통해 줄이며, 공상의 묘사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순전히 형식적, 다시 말해 미적 쾌감획득으로써 우리를 사로잡는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런 쾌감획득을 유혹의 프리미엄 Verlockungspramie 또는 앞선 쾌감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의 효과는 깊이 뿌리 박고 있는 심리적 원천에서 더 큰 쾌감을 끌어 오는 데 있다. 작가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모든 미적 쾌감은 이런 앞선 쾌감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작품의 본래 재미는 우리 영혼 안에 있는 긴장들의 해방으로부터 온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제 아무런 질책을 받지 않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의 공상을 즐길 수 있도록 작가가 우리를 성공적으로 도와주는 데까지 적지 않게 기여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 새로운, 홍미로운 그리고 뒤얽힌 연구의 출발점에 서있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적어도 이번만은 이것으로써 우리의 논의를 끝내기로 한다1)(고원 옮김).
1) 프로이트 연구본 제10권, 169-179쪽에서 옮김.
II 레오나르도 다 빈치 유년시절의 한 가지 기억
1평소에는 병약한 사람들만 상대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정신의학의 연구가 인류의 위대한 사람에게 접근할 때, 그것은 문의한들이 흔히 몰아세우듯 다음과 같은 모티브를 따라가지는 않는다. 즉 <빛나는 것에 먹칠을 하고 숭고한 것을 비방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여느 환자들의 불완전성과 위인들의 완전성 사이의 거리를 좁혀 본다고 해서 거기 무슨 만족이 있을 리도 없다. 아니, 정신의학의 연구는 그런 위대한 인물들을 통해 인식되는 것 전부가 이해할 가치가 있는 것임을 발견하는 데에 그칠 따름이다. 그리고 정상적인 행동도 병적인 행동도 다 똑갇이 준엄하게 지배하는 법칙들에 따르는 행위가 그를 창피스럽게 만드는 결과가 될 만큼 위대한 인물은 하나도 없는 줄 믿는다.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하나로서, 이미 동시대의 사람들로부터 찬탄받고 있던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Vinci (1452-1519)가 일면 이미 그들에게도 수수께끼처럼 보였던 점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윤곽을 다만 억측할 수 있을 뿐, 절대로 정할 수 없는>1) 만능의 천재인 그는 화가로서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그 시대에 끼쳤다. 다만 그의 내부에서 예술가와 결합하고 있던 자연연구자의(그리고 기술자의) 위대성은 우리에 의해 비로소 인식되었다. 그의 과학적인 발견들은 미발표인 채로 , 미사용인 채로 있었던 반면 그의 걸작 그림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자연연구자는 일생에 걸쳐 그 안에 있는 예술가를 결코 자유롭게 놔두지 않았으며, 종종 그를 심히 해치기도 하였고 궁극에는 몹시 억압하기조차 했다. 바자리 Vasari (1511-1574)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임종 때에 <나는 내 예술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음으로써 신과 인간을 모욕했다>고 자책했다는 것이다.2)비록 바자리의 이 이야기는 어느 모로나 개연성이 없고, 또 이미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이 신비로운 거장을 둘러싸고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전설들에 속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역시 그 시 대와 당시 사람들의 판단의 증거로서 부정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1) 콘스탄티노바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있어서의 마돈나 형의 발전』에 야콥 부르크하르트 J. Burckhardt의 말로 인용되어 있다.
2) 바자리의 『미술가 열전』, <그는 경건한 생각에서 침대에 앉으려고 일어났다. 자기의 병과 그 실정을 설명하면서. 게다가 또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예술에 정진하지 않음으로써 신과 인류를 얼마나 많이 노하게 했는가를 토로했다.>인간으로서의 레오나르도를 동시대인들이 이해하는 데에 있어 작용한 방해요소는 무엇이었는가? 다방면에 걸친 그의 재능과 지식은 분명 아니다. 물론 이 다면성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일명 모로라 불리는 밀라노 영주인 로도비코 스포르차 Lodovico Sforza의 궁전에서, 연
주가로서 자신이 새로 발명한 악기인 수금을 소개하거나, 또는 건축과 병기의 기사로서의 자기 업적을 자랑하는 그 주목할 만한 편지를 이 영주 앞으로 쓸 수 있도록 하였지만, 사실 이처럼 다양한 능력들이 한 사람 속에 집중되었던 일은 르네상스 때에는 그다지 희귀하지 않았다. 물론 레오나르도는 그런 인물들 중 가장 빛나는 본보기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는 자연으로부터 빈약한 몸밖에 받지 못하고, 또한 자기 자신 편에서도 인생의 의적인 형식들에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고서 쓰라리고 암담한 심정으로 인간관계들을 회피하는 그런 천재류에 속해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키도 크고 균형이 잡힌 몸집에 용모의 미는 더할 나위 없고, 출중한 체력을 지니고 몸가짐은 매력적이며, 화술의 대가여서 누구에게나 쾌활하고 정다운 인간이었다. 그는 자기 주위의 사물의 아름다움도 사랑했으며 멋들어전 옷을 즐겨입고, 또 생활태도의 세련이라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의 회화론중 그의 활발한 향락능력을 드러내는 귀절에서, 그는 미술을 그것의 자매예술과 비교하여 조각가의 일의 고초를 다음과 갇이 말하고 있다. <조각의 경우에는 얼굴이 아주 더러워지며, 또 대리석 가루 투성이가 되어 마치 빵장수와 같이 되버린다. 그리고 작은 대리석 조각을 뒤집어쓰므로 등에는 마치 눈이 내린것 같으며, 집은 돌조각과 먼지로 가득해진다. 한편 화가의 경우에는 이와 정반대다. …… 왜냐하면, 화가는 좋은 옷을 입고, 매우 기분좋게 작품 앞에 앉아, 고운 색이 묻은 가벼운 붓을 움직이므로.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있을 수 있다. 또 그의 집은 아름다운 그림으로 꽉 차고, 빛날 만큼 깨끗하다. 가끔 그는 음악이나 갖가지 훌륭한 작품의 낭독 등의 모임을 갖는데, 낭독도 망치나 기타의 시끄러운 소리에 방해받지 않고, 퍽 유쾌하게 들을 수가 있다 .>3)
3) 『회화론 』 (독일어판, 1909), 36쪽.
레오나르도가 눈부실 만치 쾌활하며 향락을 좋아했다는 생각은 이 거장의 상당히 긴 초기 생활기에만 적용될 수 있다. 그후 그는 로도비코 스포르차의 지배가 몰락하자, 부득이 자기의 활동중심인 밀라노와 보장된 지위를 떠나, 프랑스의 최후 은거지에 다다르기까지 불안정하며 실패 연속인 생활을 했다. 그때 그의 기질의 빛도 바래기 시작했을지도 모르며, 그의 성격의 몇 가지 이상한 특징도 한층 심하게 노출되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서 그의 관심이 예술에서 과학으로 많이 전환된 것도, 그 자신과 당대의 사람들 사이에 간격을 넓히는 데에 큰 구실을 하였을 것이다. 당대의 중론에 따르면 그는, 이를 테면 그의 옛 동창 페루지노 Perugino처럼, 주문에 응해 부지런히 그려 치부하려고 하는 대신에 모든 노력을 다만 시간낭비했는데, 당대의 사람들게 이는 변덕스런 놀이로 보이거나, 또는 심지어 <마술>에 이용되고 있다는 협의를 갖게끔 하였다. 우리는 그의 수기에서 그가 어떤 기술을 연구했는지를 잘 알고 있으므로, 당시의 사람들보다 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교회의 권위가 고대의 권위와 교체되기 시작하였고, 가정을 토대로 삼지 않은 연구법에 아직 익숙치 않았던 시대에, 베이컨과 코페르니쿠스의 무시못할 경쟁자인 선구자 레오나르도는 고독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과 사람의 시체를 해부하고, 비행물체를 만들고, 식물의 배양과 독에 대한 그 반응을 연구하고 있었을 때, 그는 분명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자들로부터는 아주 멀리 떨어져 나왔으며, 이런 불리한 시대에 실험실 안에서 실험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피난처를 찾은 천덕꾸러기인 연금술사들에 접근해 갔다.
이것이 그의 그림에 준 결과는, 그가 화필잡기를 꺼렸으며, 점점 적게, 그나마 어쩌다가, 그리고 시작한 것은 대부분 미완성인 채로 내버려 두고, 자기 작품의 최후의 운명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던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 예술에 대한 그의 관계를 몰랐던 그 시대의 사람들이 그에게 비난을 가한 점이기도 하였다.
후세의 레오나르도 예찬자들의 일부분은 변덕스러운 홈을 그의 성격에서 말살하고자 애썼다. 그들은 레오나르도 성격중 비난되고 있는 점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일반적인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일에 몰두했던 정력적인 미켈란젤로 (1475 - 1564)도 많은 작품을 미완성품으로 남기지 않았는가. 이것은 조금도 그의 과실이 아니었는데, 레오나르도의 경우도 이와 동일하다. 게다가 그의 몇몇의 작품은 레오나르도 자신이 말하는 정도로 미완성이 아니었다. 일반 사람에게는 걸작으로 보이는 것이라도, 예술작품의 창조자에게는 여전히 자기 의도가 불충분하게 구체화한 것으로 보일 게다. 어떤 완전한 것이 그의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모사하려다가 그는 거듭 절망한다. 아뭏든 예술가는 자기 작품이 당하는 궁극적인 운명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이 변명들의 몇몇은 일리가 있다 하더라도, 레오나르도의 경우에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사정을 이것으로써 해명하지는 못한다. 작품과의 쓰라린 무쟁, 그 끝의 작품 포기와 작품의 장래의 운명에 대한 무관심은 다른 예술가들의 경우에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이 자세를 확실히 극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솔미 Solmi는 레오나르도 제자 한 사람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41) <그가 그림을 그릴 때 그는 시종 떨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으며, 게다가 시작했었던 일은 하나도 완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술을 숭고하게 여겨, 남들에게는 훌륭한 작품으로 보였던 자기의 작품 속에서 숱한 과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의 최후의 그림들인 「레다」, 「산트 오노프리오의 마돈나」, 「바커스」, 「세례자 요한」 등은 <그의 모든 작품이 대개 그렇듯이 ……> 미완성으로 남겨졌다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의 모사품을 그4) 솔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들의 복원」 (1910), 12쪽.
린 로마초 Lomazzo는, 한 소네트 속에서 자기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는 레오나르도의 유명한 무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5)
자신의 그림으로부터 화필을 놓지 않은 프로토게네스는, 결코 아무것도 완성시키지 못했던 신적인 다빈치와 같다.레오나르도의 느린 일손은 유명했다.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제 수도원에 있는 「최후의 만찬」을 그는 가장 근본적으로 예비연구한 후, 꼭 3년 걸려서 그렸다. 그 당시 젊은 수도승으로서 이 수도원에 속해 있던 소설가 마테오 반델리 Matteo Bandelli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아침 일찍 발판에 울라가서, 먹거나 마실 생각을 하지 않은 채, 황혼이 질 때까지 손에서 화필을 한 번도 놓지 않은 때가 상당히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림에 손을 대지 않고서 여러 날을 보내기도 했다. 어떤 날에는 몇 시간이나 그림 앞에 서서 마음속으로 그것을 검토하는 데에 만족하기도 했다. 또 다른 날에는, 프란체스코스 포르차를 위하여 기마입상의 모델을 만들고 있던 밀라노 성의 궁정으로부터 곧장 수도원으로 와서, 그립 속의 한 인물에 두세 번 화필을 대었다가는, 즉시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6) 바자리에 의하면 그는 플로렌스인 프란체스코 델 지오콘도의 부인 모나리자의 초상을 장장 4년이나 걸려 그렸지만, 결국 그것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끝내 이 그림은 주문자에게 전달되지 않고 레오나르도의 손에 남아, 나중에 그가 그것을 프랑스까지 가지고 갔다는 실정도 이 얘기에 부합되는 것 같다.7) 프란츠 1세가 사들인 이 그림은 오늘날 루브르 미술관의 가장 큰 보물중의 하나로 되어 있다.5) 스코나미리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청년시대, 연구와 자료 』 (1900), 112쪽.
6) 자이트리츠, 『레오나르도 다 빈치, 르네상스의 전환점』(1909), 제1권, 203쪽.7) 같은 책, 제2권, 48쪽.장차 그림 속에 담겨질 모티프의 하나하나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그린 레오나르도의 방대한 양의 스케치와 습작들과 같은 증거물과 그 의 일하는 방식에 대한 보고를 견주어 보면, 졸속이라든가 변덕이라 는 특징은 예술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관계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 았다는 점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여기에는 굉장한 몰입, 그 동안에 몹시 신중히 결정이 내려질 그 가능성의 풍부함, 도 저히 충족될 것같지 않은 요구들, 그리고 이상적인 시도 뒤에서 예술 가의 필연적인 뒤처짐을 동해서도 설명되지 않을 작업의 제지 Hem- mung 등을 알게 된다. 따라서 이전부터 눈에 띈 레오나르도의 느린 일손은 이 제지의 징후임이, 훨씬 훗날에 이르러 나타난 미술로부터 의 이탈에 대한 예고임이 드러난다. 8) 「최후의 만찬」이 가전 전연 부당 하다고만 봉 수 없는 운명도 이 느린 일손 때문이었다. 레오나르도는 밀칠이 아직 축축할 동안에 작업을 재빨리 끝내 버려야 하는 벽화에 친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여유 있게 기분에 따라서 그림을 완성시킬 수 있도록 천천히 마르는 기름물감을 골랐다. 그렇지만 그림 물감은 벽에 붙지를 않고 밀칠에서 벗겨져 버렸다. 벽의 이런 홈에 공 간의 제약이 가중하여서, 「최후의 만찬」을 만부득이 못쓰게 만들었다.9) 이와 동일한 기술상의 실패에 의해 그가 후일 미켈란젤로와 경쟁하 여, 플로렌스의 살라 데 콘실리오의 벽에 그리기 시작했다가, 역시 미 완성인 채로 포기한 안기아리 Anghiari 기병전의 그림도 소멸된 모양 이다. 여기서는 다른 흥미, 즉 실험의 흥미가 예술에 대한 흥미를 우 선 강화해 놓고, 나중에 작품을 손상시킨 것 같다. 인간 레오나르도의 성격도 몇 개의 이상한 특색과 외관상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그에게서 나타나는 일종의 게으름과 무관심은 도저히
8) 페이터의 『르네상스』(1873), 100쪽. <그러나 그가 일생의 어느 시기에 예술가의 일을 거의 그만두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독일어 제2판, 1906).
9) 자이트리츠, 앞의 책 1권 205쪽 이하. 작품의 복원의 역사를 참조.부정될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활동을 위해 가장 넓은 활동범위를 얻고자 애쓰고 있던 시대에 一이것은 물론 남에게 정력적인 공격을 전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 그는 잠잠한 평온함을 추구하고 적대와 논쟁을 피한 점에서 특이했다 . 그 누구에 대해서도 온화하고 친절했으며 , 또 동물을 죽이는 것을 옳은 짓이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육식도 피했던 모양이며, 또 시장에서 산 새를 자유롭게 놓아 주는 것을 특히 좋아했다 .10) 그는 또 전쟁과 유혈을 단죄하고, 인간을 동물계의 왕으로 부르기는커녕 오히려 야수들 중의 가장 나쁜 것이라고 불렀다.11) 그렇지만 그가 아무리 이와 같은 섬세한 여성적 감성을 지녔어도 그는 사형수의 뒤를 따라 처형장까지 가서 공포 때문에 일그러진 얼굴을 연구하고, 이것을 스케치책에 그려 넣고, 또 가장 잔인한 공격무기를 설계하여 최고의 병기기술자로서 체사레 보르지아 Cesare Borgia에 봉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종종 선악에 대해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다. 또는 그는 특별한 기준으로 측정되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는 또 높은 지위에 앉았을 때, 모든 적들 중 가장 잔혹하고 가장 비열한 상대인 체사레 보르지아에게 로마니아를 소유하게 해준 출정군에 참가하였다 .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수기 중에는 단 한 줄도 이 시기에 있었던 사건에 대한 비판이나 관심을 표시하고 있지 않다. 여기에서 그를 프랑스 출정중인 괴테와 비교해 보는 것도 결코 부당한 일이 아니다.
10) 뮌츠, 『레오나르도 다 빈치』 (1899), 18쪽(인도에서 메디치 가의 한 사람에게 보낸 그 시대의 사람의 편지가 레오나르도의 이런 행동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리히터의 『레오나르도의 저작』에 의함).
11) 보타치, 『생물학자, 해부학자로서의 레오나르도』 (1910), 186쪽.만약 전기작자가 그 주인공의 정신적 생활을 정말로 간파하고자 한다면, 대개의 전기가 그렇듯이 신중을 기하거나 체면을 차리기 위해서 주인공의 성행위 내지 성적 특칭을 묵과해서는 안 된다. 레오나르
도의 경우 이 점에 관해 알려져 있는 것은 퍽 적지만, 이 적은 것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무궤도의 관능성이 음울한 금욕과 싸우고 있던 이 시대에, 레오나르도는 여성미의 예술가, 묘사가로서는 도저히 생각 할 수 없는 냉정한 성거부자를 대표했다. 솔미는 그의 성적 불감증을 나타내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그로부터 인용하고 있다.12) <생식행위와 그것에 결부되어 있는 모든 것은 너무나 불쾌하므로, 만일 그것이 옛부터의 풍습이 아니었거나, 그밖에 아름다운 용모와 관능적인 소질이 인간에게 없었더라면, 인간은 쉬 죽어 버렸을 게다.> 최고의 과학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처럼 위대한 정신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될 정도로 천진한 것들一우화적인 박물지와 동물 이야기, 익살 및 예언 13)―을 포함하고 있는 그의 유고는 매우 순결 ―금욕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하여, 순수 문학작품으로 이를 본다면, 오늘날에도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이다. 마치 모든 생물을 보존하는 에로스만은 연구자의 지식욕에 있어 탐구할 만한 재료가 못 된다는 듯이 그 유고들은 온갖 성적인 것을 단연 거부하고 있다.14) 위대한 예술가들이 얼마나 종종 에로틱하고 지독히 추잡하기 조차 한 묘사로 자신들의 공상을 토로하는가는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그와는 반대로 여성의 내부 생식기와 자궁 안에 있어서의 태아의 위치에 관한 몇 개의 스케치만 남겼을 뿐이다 .15)
레오나르도가 과연 사랑에 빠져 여자를 포옹해본 적이 있었는지는 자못 의심스럽다. 미켈란젤로가 비토리아 콜로나 Vittoria Colonna와 가12) 솔미, 『레오나르도 다 빈치』 (1908). 24쪽.
13) 헤르츠펠트 ,『사상가, 연구가, 시인으로서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제2판, (1906).14) 그러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예외가 있다――-그의 손으로 수집된, 번역 되지 않은 상태로 있는 『익살집 belle facezie』이 그것이다. 헤르츠펠트의 책 을 참조.
15) 성교행위를 해부학적인 신체중심축의 단면도 Sagittaldurchschnitt로 그리고, 결코 추잡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그림에는 라이틀러 Reitler 박사가 발견한 몇 개의 주목할 만한 실수가 보인다. 그는 이 논문 속에서 내가 언급한 바와 같은 레오나르도의 성격 특징의 뜻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국제정신분석학회지)>, 제4권(1916-1917).
<그런데 이 거대한 탐구자 정신도 실로 이 생식행위의 묘사에서는분명히 그의 그보다 더 컸던 성적 억압의 결과이거니와――-전연 무능력하였다 남자의 몸은 전체가 그려 있지만, 여자의 몸은 부분적으로만 그려 있다. 보통 사람에게 여기 그려진 그림을 머리부분만을 내놓고 하반신을 전부 감추고서 보인다면, 반드시 이 머리는 여자의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마의 곱슬머리뿐만 아니라, 등을 따라 거의 제4 내지 제5척추까지 늘어져 있는 곱슬 머리도 남자보다는 여자 머리의 특징을 뚜렷히 나타내고 있다. 여자의 가슴에는 두 결함이 드러나 있다. 더구나 첫번째 결함은 순전히 예술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가슴의 윤곽은 흉하게 축 처진 젖통의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결함은 해부학적인 것이데, 탐구자 레오나르도는 분명히 성적저항 Sexualabwehr 에 방해를 받아서, 아마 단 한 번도 젖먹이고 있는 여자의 젖꼭지를 주시한 적이 없던 것으로 짐작된다. 만일 그가 젖꼭지를 유심히 보았다면, 반드시 그는 젖은 서로 다른 여러 배설관에서 흘러나옴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레오나르도는 단지 하나의 관만 그렸을 뿐인데, 그것은 깊이배까지 다달아 있다. 아마 레오나르도의 의견으로는, 젖은 유관Milchkanal에서 나오는 것, 아마 또 성기와 어떤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물론 당시 시체해부는 시체매음으로 간주되어 엄벌되었기 때문에, 인체의 내부기관의 연구는 극도로 곤란했던 실정이 참작되어야 한다. 아주 적은 해부재료 밖에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던 레오나르도가, 적어도 배에 임파조 Lymphreservoir가 있는 사실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조차도 매우 의심스럽다. 그림 속에 의심의 여지 없이 그것 비슷한 빈 공간이 그려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가 유관을 더 아랫 쪽으로 내부성기에 도달하는 것으로 그린 것은, 젖분비의 시작과 임신의 끝이 시간적으로 동시임을 해부학적인 관계에 의해 명백히 나타내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당시의 사정을 고려하여 이 예술가의 불충분한 해부학적 지식은 용서한다 하더라도, 레오나르도가 여성기를 이다지도 소홀히 다루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과연 질과 자궁 비슷한 것을 알아볼 수 있기는 하지만, 자궁 그 자체는 완전히 혼란된 선으로 그려져 있다.
이와 반대로 남성기는 훨씬 더 정확히 그려져 있다. 이를테면 그는 불알을 그리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음경외피까지도 아주 정확히 그려 넣고 있다.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레오나르도가 성교를 시키고 있는 자세이다. 유명한 예술가가 그린 누은 자세로의 성교와 옆으로의 성교의 그림 내지 스케치는 있지만, 이처럼 서 있는 자세에서의 성행위를 그린다는 것은, 아마 고립된, 거의 기괴망측한 묘사의 원인으로서 어떤 특히 강한 성적 억압이 존재함을 추측케 한다. 즐기려고 할 떄에는 되도록 편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물론 두 근원적인 행동, 즉 배고픔과 사랑에도 해당된다. 고대의 대부분의 민족들은 식사할 때 눕는 자세를 취했다. 성교 때에는 오늘날도 보통은 우리 조상들이 했던 바와 똑갇이 편안히 눕는다. 누음으로써 상당히 오랫동안 이 바람직한 상태로 있고 싶다는 의욕이 어느 정도 표명된다.
그리고 또 여자의 머리 비슷한 이 남자의 용모는 퍽 분개한 저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눈썹은 잔뜩 찌푸리고, 시선은 반감을 품은 채 옆으로 돌리고, 입술은 굳게 다물고, 그 양 끝은 아래로 처져 있다. 이 얼굴에서는 사랑행위에 대한 쾌감도 쾌락의 행복감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분노와 혐오가 나타나 있을 뿐이다.그러나 레오나르도가 범한 가장 졸렬한 실수는 두 다리의 묘사이다. 즉, 남자의 다리는 사실상 바른 다리이어야 한다. 레오나르도는 성교를 해부학적인 신체중심축의 단면도로 그렸으므로, 남자의 왼쪽 다리는 그림의 윗 쪽에 있어야 하며, 또 반대로 여자의 다리는 똑같은 이유에서 왼쪽 다리이어야 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레오나르도는 남자의 다리와 여자의 다리를 맞바꾸어 버렸다. 남자는 왼쪽 다리를, 여자는 오른쪽 다리를 가지고 있다. 엄지발가락이 다리 안쪽으로 되어 있는 점에 유의한다면, 이 혼동은 가장 쉽게 인정될 것이다. 결국 이 해부도만으로는, 이 위대한 예술가, 탐구가를 거의 완전한 혼란으로 빠뜨린 성적인 억압을 추측케 할 뿐이다.그러나 라이틀러의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해, 다급히 그린 정도의 스케치를 그처럼 호되게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며, 또 이 스케치의 각 부분이 실제로 관련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지도 철대로 확실치 않다는 비판도 나돌고 있다.졌던 관계의 경우처럼 여성에 대한 그의 은밀한 정신적인 관계 여부 또한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아직 제자로서 스승 베로키오 Verrocchio 집에 살고 있었을 때, 금지된 동성애 관계 때문에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고소당한 일이 있었지만 무죄로 끝났다. 이는 그가 평판 나쁜 한 소년을 모델로 썼기 때문에 그런 의심을 받았던 모양이다.16) 스승이 된 후부터 그는 제자로 뽑은 미동과 젊은이들에 둘러싸였다. 이 제자
16) 스코나미리오(앞의 책, 49쪽)에 의하면, 이 일화와 관계 있는 문서는, 아틀란티쿠스 고본 Codex Atlanticus중 다음과 같이 애매하게, 그리고 가지각색으로 읽혀져 온 대목이다. <내가 신을 갓난아기로 나타내면 당신은 나를 감옥에 집어넣고, 이제 어른으로 나타내면 당신도 더욱 잔혹한 짓을 나에게 한다.>
들 중의 맨 마지막 제자인 프란체스코 멜치 Francesco Melzi는 그를 따라 프랑스로 가서 그가 죽는 날까지 그 옆에 있었으며, 결국 그의 상속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므로 그와 제자들 사이에 성행위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 위대한 예술가에 대한 터무니 없는 모독이 라면서 일축하는 근대의 그의 전기작가들의 확신에 동조할 수 없음은 당연하나, 우리는 당시의 사제관계의 관습에 따라서 생활을 함께 하고 있던 젊은이들에게 대한 레오나르도의 애정관계는 성행위까지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듯하다. 게다가 그의 성적 정력도 별반 신통치 않았다고 추측된다.
이 정서생활과 성생활의 특색은, 예술가와 학자로서의 레오나르도라는 이중성격과 결부시켜서 단 한 가지 방법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종종 심리학적인 관점과 거리를 두고 있는 전기작가들 중 오직 솔미만이 이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책에 접근하였다. 레오나르도를 한 대역사 소설의 주인공으로 택한 시인 드미트리 세르게이비치 메레주코프스키 Dmitri Seregeyevich Merezhkovsy는 이 별난 인물의 심리학적 이해 위에 그 묘사의 기초를 두고 무미건조한 말로서가 아니라, 시인의 방식으로 훌륭한 조형적인 표현 속에 자기 견해를 명백히 표명하였다 .17) 솔미는 레오나르도를 다음과 같이 판단한다. <그러나 자기를 둘러싸는 모든 것을 이해하며, 냉정한 우월감으로써 완전한 모든 것의 가장 깊은 비밀을 헤아리고자 하는 진정시킬 길 없는 욕구가 있었기에 레오나르도의 작품은 늘 미완성인 채로 남도록 저주 받았다.>18) 『콘페렌체 피오렌티네』의 한 논문 속에는 다음과 같은 레오나르도의 의견이 인용되어 있다. 이것은 그의 신앙고백을 나타내고17) 메레주코프스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독일어판, 1903). 이것은 『그리스도와 반(反)그리스도 』 라는 제목의 방대한 삼부작 중의 둘째 소설이다. 다른 둘은 『율리안 아포스타타』와 『피터 대제와 알렉세이』이다.
18) 솔미, 앞의 책, 46쪽 참조.자신의 본질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우선 그 사물을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것도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한다.>19)즉 사람은 그 자체의 본질을 철저히 인식하지 못하는 한, 어떤 것을 사랑하거나 미워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레오나르도는 이와 동일한 말을 회화론의 한 구절에서 되풀이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무신앙이라는 비난에 대해 자기변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비난자들은 잠자코 있을지어다. 왜냐하면 그 행동은 매우 찬탄할 만한 많은 사물들의 창조자를 알 수 있는 방법이며, 또한 매우 위대한 발견자를 사랑할 수 있는 방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실로 위대한 사랑은 사랑을 받는 대상의 위대한 인식에서 생기며, 만약 당신이 이 대상을 거의 모른다면, 당신은 이를 거의 사랑하지 못하거나, 또는 전혀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이러한 레오나르도의 의견들의 가치는 그것들이 어떤 중요한 심리적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 에서 찾아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주장하는 바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며, 레오나르도는 이것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가 그 정동(情動)을 쏟고 싶은 대상을 연구하여, 그 본질을 인식할 때까지는 사랑하거나 미워하기를 자제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반대로 인간은 감정적인 모티프에 유발되어 충동적으로 사랑하는 법인데, 이 감정적 모티프는 인식과는 무관하며, 또 그 활동은 숙고와 반성에 의하여 최대한 약화될 따름이다. 따라서 레오나르도는 다만 이렇게 말했을 뿐 이다. 즉 인간의 사랑은 바르고 홈잡을 데 없는 사랑이 아니다. 인간은 정동을 억제하여 내성(內省)의 지배 밑에 두어, 그것에 대해 심사19) 보타치, 앞의 책, 193쪽.
20) 『회화론』, 54쪽.숙고한 후 합격시킨 연후에야 비로소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어함을 안다. 즉 <나의 경우는 그렇다, 나와 똑같은 태도로 사랑하며 미워하는 것이 만인에게 바람직한 일이다.>
그리고 그의 경우는 실제로 그러했던 모양이다. 그의 정동은 억눌려 있었고 탐구적인 충동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는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고, 다만 그가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자문했다. 그리하여 그는 우선은 선과 악에 대해, 미와 추에 대해 무관심한 듯이 보였다. 사랑과 미움은 이 탐구자가 일을 하고 있을 동안에 그 적극적 내지 소극적인 징후를 버리고서 모두 다같이 지적인 흥미로 변질해 갔다. 그러나 실제로 레오나르도는 정열이 없는 인간이 아니었다 . 그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모든 인간활동의 원초적인 힘, 인식적인 불꽃 없이는 견딜 수 없었다. 다만 그는 그 정열을 지식욕으로 변질시켜 버렸다. 그리고 이 정열에서 얻어지는 영속성, 불변성 및 통찰력을 갖고서 그는 연구에 전심했다 . 그리고 그 정신노동의 정점에서 인식을 얻었을 때, 비로소 오랫동안 억제해왔던 정동을 확 풀어 주었다. 일을 끝마친 후에 비로소, 마치 본류에서 옆으로 끌어 놓았던 한 지류에 물을 대듯이, 정동을 마음대로 흘려 버렸다. 관련된 것의 대부분을 널리 살펴볼 수 있는 발견의 정점에 올랐을 때, 비로소 정서에 압도당했다. 그는 열광적인 말로, 그가 연구한 창조물의 그 부분의 장엄성을, 또는―― 종교적인 표현을 쓴다면――창조자의 위대성을 찬양했다. 솔미는 레오나르도에 있어서의 이 변화의 과정을 바로 알고 있었다 . 레오나르도가 자연의 숭고한 법칙 ―<오, 놀라운 필연성이여……>――을 찬미하는 글의 일부분을 인용한 후에, 솔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연의 지식을 일종의 종교적인 정서로 변형시키는 것은 레오나르도의 수고의 특질의 하나이며, 그것에 관한 수백의 실례가 있다 > 21)21) 솔미, 앞의 책(1910) 11쪽.
레오나르도는 그 탐욕스럽고 끈질긴 지식욕 때문에 이탈리아의 파우스트라고 불려왔다. 그러나, 우리가 파우스트 비극의 전제로서 받아들여야 할 변형 一탐구적인 충동이 생활의 기쁨으로 돌아가는 가능한 변형 一 에 관한 회의를 전부 도의시한다면, 레오나르도의 발전은 오히려 스피노자의 사고방식을 연상시킨다고 감히 말해보고 싶어진다.
생리적인 원동력과 마찬가지로 심적인 원동력도 아마 손상 없이는 활동의 갖가지 형식으로 뒤바뀌어지지 않는다. 레오나르도의 예는, 이 뒤바꾸기가 어떻게 다른 과정을 취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완전히 인식한 후에 비로소 사랑한다는 이 연기(延期)는 하나의 대상(代信)이 된다. 인식에 철저해 버리면, 사람은 전혀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한다. 그는 사랑과 미움의 피안에 머무른다. 그는 사랑하는 대신 탐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것이 레오나르도의 일생에 다른 위인과 예술가들보다도 애정사건이 월등히 적었던 까닭이다. 다른 예술가와 위인들이 그 속에서 자기의 최상의 것을 체험한, 마음을 고취하고 육신을 불태우고 마는 거센 정열은 레오나르도를 엄습한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그리고 또 다른 결과도 있다. 사람은 행동하는 대신 탐구하는 경우도 있다. 세계의 장엄과 그 콤플렉스 및 법칙을 어령풋이 알아차리기 시작한 인간은 자기자신의 시시한 자아를 잊기 쉽다. 찬미에 몰두한 끝에 전정 겸허하게 되어, 곧잘 사람은 자기자신이 세계의 힘의 일부 임을 까맣게 잊는다. 그 개인적인 힘의 정도에 따라서 세계 一작은 것이더라도 큰 것에 못지 않게 신비스러우며 의미심장한――의 필연적인 과정의 일부분을 변경하려고 애써도 좋다는 것을 잊어 버린다. 아마도 레오나르도는 솔미가 믿듯이 자기의 예술에 도움이 되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을 것이다. 22) 그는 빈틈없이 자연을 모방하기 위해, 그리고 남들에게 같은 길을 가리키기 위해 빛, 색채, 그립자, 원근법 등의 성질과 법칙을 알려고 노력했다. 아마 그는 이미 그 당시부터 이런 인식이 예술가에 대해 갖는 가치를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동기에 의해 몰린 그는, 여전히 화가로서의 필요성에 이끌리기는 하였지만, 소재, 즉 동식물과 인체의 조화의 연구로 나갔다. 그것도 의관만을 흙어보지 않고, 그 내부구조와 생명기능까지도-왜냐하면 이 기능은 겉에도 나타나 있고, 예술에 의해 묘사되기를 요구하고 있으므로 - 인식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최후에는, 너무 심해진 이 충동은 예술의 요구와의 관련에 파탄을 초래할 정도로 그의 마음을 휩쓸어 갔다. 그리고 그는 역학의 일반적인 법칙을 발견하거나, 또 아르노 계곡의 지충과 화석과정의 역사를 추정해서, 마침내는 그 책 속에 큰 글자로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쓸 정도까지 되었다. 그의 연구는 실제로 자연과학의 모든 분야에 퍼졌으며, 또한 그 어느 분야에서는 그는 발견자이거나, 또는 적어도 예언자 내지 선구자였다.23) 그런데 이런 그의 지식욕은 늘 외계에만 돌려 있어, 인간의 마음의 탐구를 다소 저지한 모양이다. 그가 교묘하게 얽힌 우의화를 그린 「아카데미아 빈치아나 Academia Vinciana」에는 심리학이 들어갈 여지가 적다.
22) 같은 책, 8쪽. 레오나르도는 처음에는 화가들에게 자연의 연구를 의무적인 것으로 요구했었다. 이윽고 연구열은 지배적인 것이 되었고, 그가 원하는 바는 이미 예술을 위한 과학이 아니라 과학을 위한 과학이었다.
23) 마리 헤르츠펠트의 아름다운 전기적인 서문(1906), 『콘페렌체 피오렌티네』 (1910) 의 여러 에세이와 다른 곳에 열거된 그의 과학적 업적을 참조.그가 자연탐구로부터 자기의 출발점이었던 예술활동으로 돌아가려고 해보았을 때, 그는 분명 그의 관심의 새로운 방향과 일변된 심적활동의 성질에 의해 혼란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림에서 그는 그중에
서도 한 문제에 흥미를 가졌다. 이 한 문제의 배후에, 그는 끝없고 무전장한 자연연구에서 늘 겪은 바와 똑같이, 무수한 다른 문제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이제 그는 이미 자기의 요구를 제한하거나, 예술 작품을 고립시켜서 보거나, 또 예술작품이 속해 있는 넓은 관련으로부터 그것을 뜯어 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 일체를 그림 속에 표현해 보려는 절망적인 노력을 기울인 끝에, 그는 그것을 미완성인 채로 포기하거나, 또는 그것을 미완성이라고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에는 예술가 편이 탐구자를 조수로서 고용하였는데, 이제는 고용인 편이 강해져서 주인을 짓누르게 되었다. 레오나르도에게 있어서처럼 어떤 사람의 성격상에서 유일한 충동만이 지나치게 강하게 형성되어 있음을 보게되면, 우리는 특별한 성향이라는 개념으로 그것을 설명하게 된다. 그것의 유기적 조건에 대해 세부적으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노이로제 환자에 대한 정신분석 연구는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는 바, 우리의 가설이 확인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 강한 충동은 이미 그의 유아기에 활동하고 있었으며, 그 지배적 경향은 유년시절의 인상을 통해 확실하게 자리잡아 갔다. 우리의 견해로는 본시 성적인 원동력이 자기강화를 위해 활용되며, 그 결과 어른이 되어 그의 성생활의 한 측면으로 드러난다. 이런 사람은 보통 애정에 쏟아 부을 정열로 학문연구에 헌실할 것이며, 사랑하는 것 대신에 연구할 것이다. 연구충동뿐 아니라 아주 강한 충동의 다론 경우에 있어서도 그 충동의 성적 강화가 핵심개념이 될 것이라고 본다.사람의 일상생활을 살펴보면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성적인 원동력의 많은 부분을 직업활동에 활용한다. 성충동은 승화될 수 있기에 좀더 현실적인 목표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성적 관심사나 유년시절의 강력한 충동임이 드러난다면 우리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성생활의 일부가 다른 강력한 활동으로 대체되어 그 본래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이 또한 우리 주장을 증명해 주는 셈이다.
왕성한 연구활동의 경우에는 문제가 좀 복잡하다. 어린이는 전지한 충동이며 성적 관심과는 무관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이의 호기심이 사실은 그 집요한 질문의 성격을 통해 드러나는데 어른들은 이 질문의 성격을 오해할 수밖에 없다.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을 직접 묻지 않고 빙빙 돌려 감추며 끝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철이 들면 이런 행동은 그친다. 정신분석 연구의 결과에 따르면 특히 재주 있는 아이들은 대략 만 세 살 때부터 유아적 성연구 과정을 겪는다. 이 나이 또래의 호기심은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자산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위협받게 되는 동생의 출생 등의 중요한 체험을 통해 형성된다. 이러 위협적인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자면 마치 그것이 필요하기라도 하듯이 아이들의 호기심은 출산의 비밀로 집중된다. 어른들의 서두른 반응은 오히려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면 황새가 애를 데려온다는 식의 대꾸는 불신의 감정을 나중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잊지 못하게 한다. 말하자면 정신적 독립성이 전실의 문제와 함께 싹튼다. 아기가 엄마의 뱃속에 있음을 나름대로 알아내고, 성충동의 지적 호기심을 통해 그것이 음식과 관계되어 장을 통해 아기가 태어난다는 것이며, 아빠의 이상한 행동 등, 적의적이며 폭력적인 어른의 성행위의 비밀까지도 짐작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의 어린 몸을 근거로 해서는 더 이상의 출생비밀을 알아낼 수 없으며, 지적 모험에 있어 일종의 좌절감을 그에게 안겨 준다.24)유아적 성연구는 결국 강력한 성억압으로 끝난다. 연구욕은 이제 세 가능성을 갖는다. 첫째 탐구욕과 성욕은 함께 된서리를 맞아 종교24) 이런 무리한 주장의 이해를 위해서는 『다섯 살 된 소년의 공포심 분석』 (1909)을 읽어볼 것.
적 영양하에 지적 독립성은 경우에 따라서는 평생 동안 저지된다. 바로 신경증적 거부반응의 유형으로 남게된다. 이렇게 해서 생긴 위축된 사고력은 쉽사리 신경질환을 야기한다. 두번째 경우에는 지적 성숙이 성적 억압에 대결할 수 있을 만큼 발전하여 억압된 성연구를 왜곡되고 묶인 상태로나마 외골수의 수준에서 무의식적으로 수행한다. 이 경우 사고는 성욕화하며 지적활동은 쾌락과 불안이라는 성적 과정과 맞물려 더욱 강조된다. 탐구는 성행위가 되는 것이다. 지적 해결의 감정은 성적 만족을 대신한다. 실현되지 않는 질문의 해결이며 외골수의 태도에는 결코 끝날 수 없는 유아기의 탐구욕을 되풀이 보여 준다.
희귀하면서 완벽한 제3의 유형에서는 사고의 거부반응이며 신경증적인 사고의 강박감에서 묘하게 벗어난다. 성악압은 물론 나타나지만 성욕의 부분총동 을 무의식으로 추방하는 일은 없다. 리비도는 처음부터 호기심으로 승화하여 강력한 탐구욕으로 자리잡는다. 여기에서도 탐구는 어느 정도 성활동의 강요된 대체물이기 십상이지만, 무의식의 폭발이 아닌 승화라는 심리적 과정의 다양성의 결과로 신경증의 성격울 갖지는 않는다. 또한 유아 성연구가 갖는 본래의 문제점으로부터도 얽매이지 않은 상태에서 지적 관심사에 자유롭게 몰두할 수 있게 된다. 승화된 리비도의 공급을 받아 강해진 충동은 성의 억압이라는 문제를 다른 식으로 여유만만하게 다룬다.레오나르도가 보여 주는 막강한 연구자의 정열과 소위 말하는 이상적 동성애로 제한된 성생활의 위축의 일치를 보자면 그는 두말할 나위없이 제3의 유형에 속하는 인물이다. 성적 호기심으로 표현된 그의 유아적 호기심의 단계를 지나 그의 리비도의 대부분의 몫을 연구욕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의 존재의 핵심이며 비밀이다. 물론 이것을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자면 그의 유아기 시절의 심적 발전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전승된 자료가 거의 없는마당에 그 자료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게다가 현대인이라할지라도 그런 문제에 주목하여 자료를 남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는 레오나르도의 어린 시절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1452년 플로렌스와 엠폴리 사이의 조그만 도시인 빈치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생아였는데, 그 당시로 보자면 그것은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아버지 세르 피에로 다 빈치는 공증인이었는데, 그 마을의 이름을 따온 빈치 집안은 대대로 공증인과 농지경작자였다. 어머니 카테리나는 아마 농부의 딸이었을 것이고 빈치 마을의 다른 주민과 나중에 결혼했다. 이 어머니는 레오나르도의 전기에 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시인 메레주코프스키만 그녀의 발자취를 기록하고 있다. 레오나르도의 유년시절의 유일한 자료는 1457년의 플로렌스의 부동산 납세장부에 기록된 사실로서 그는 빈치 가의 가족들 가운데 세르 피에로의 다섯 살된 서자로 등록되어 있다 .25) 세르 피에로와 처녀 알비에라의 결혼에서는 아이가 없었으며, 그래서 어린 레오나르도는 아버지의 집에서 성장했다. 그는 이 아버지의 집을 몇 살 되던 때인지는 모르지만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작업실에 입문하면서 비로소 떠나게 된다. 이미 1472년 레오나르도의 이름은 <화가 연맹>의 회원명단에 나온다. 이것이 전부다.2내가 아는 한, 레오나르도는 그의 유년기에 대한 기억을 단 한 번 과학논문 안에 삽입하고 있다. 독수리의 비행에 대해 다루고 있는 한25) 스코나미리오, 앞의 책, 15 쪽.
대목에서 그는 갑자기 이야기를 중단하고는, 머리 속에 떠오른 유년기의 기억을 더듬기 시작한다.
<이미 훨씬 전부터 나는 독수리와 깊은 관계를 맺게끔 결정되어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으로 생각되는데 내가 아직 요람에 누워 있었을 때, 독수리 한 마리가 나에게 내려와서 꼬리로 내 입을 열고 여러 번 그것으로 내 입술을 때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26)예컨대 유년기의 한 기억, 그것도 가장 특이한 종류의 기억이다. 그 이야기는 주인공의 나이와 그 내용 때문에 매우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젖먹이 시절의 일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가능한 일일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 독수리가 그 꼬리로 어린아이의 입을 열었다고 주장하는 레오나르도의 기억은 너무나 사실과 동떨어져 있어서 전설적으로 들린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문제점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다른 견해를 취하고자 한다. 그 독수리 장면은 실은 레오나르도의 기억이 아니라, 그가 나중에 꾸며서 어린시절로 옮겨 놓은 공상일 것이다.27)26) 같은 책, 22쪽.
27) 하벨록 엘리스 Havelock Ellis는 《심리학 잡지 Journal of Mental Science》 (1910)에서 이 논문에 대해 언급하면서, 위에 기술한 나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어린이의 기억이란 종종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보다 훨씬 멀리까지 미치게 마련이므로, 레오나르도의 기억도 아마 현실적인 근거를 갖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큰 새는 굳이 독수리일 필요는 없었다. 나는 기꺼이 이 점을 인정하고자 하며, 분규를 피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가정을 덧붙이고자 한다. 즉 그의 어머니는 큰 새 한 마리가 아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이를 어떤 심상치 않은 징조로 생각하고, 나중에 이 일을 아들에게 여러 번 들려 주었다. 결국 아들은 이 이야기를 계속해서 기억해 두고, 흔히 그런 것처럼, 훗날 그 기억을 자기자신의 경험에 대한 기억과 혼동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내용을 변경해 본다고 해서 내 견해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 유년기에 관해 사람들이 훗날에 꾸며 내는 공상이란 이처럼 평소에는 잊고 지내는 사소한 과거의 사건에 근거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대단치 않은 사건을 끌어내어, 레오나르도가 독수리라고 부른 새와 그 새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손질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비밀스런 동기가 필요한 것이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유년기의 기억은 대개 그 기원이 비슷하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성숙기의 의식적인 기억처럼 체험에 의해 고정되고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유년기가 지나가 버린 후에야 비로소 끌려나와 변화되고 왜곡되어 후기의 성향들을 만족시킨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공상과 엄밀히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아마 고대민족들 사이에서 역사기술이 생겨나게 된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면 기억의 성질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민족은 그 자체가 약소할 동안은 역사를 서술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들은 다만 땅을 갈고 이웃 민족들에 대항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싸우고, 땅을 빼앗아 부를 획득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영웅적이고 비역사적인 시대에 해당한다. 그리고 나서 다른 시대가 시작된다. 이제 그들은 자신을 의식하게 되고, 자신들이 부유하고 강력하다고 느끼며, 이때 비로소 자신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발전했는지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역사서술은 당대의 체험들을 계속해서 적어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과거를 회고하며 전설과 구전을 수집하는 동시에 풍속과 관습에 남은 고대의 자취를 해석하고, 이렇게 해서 과거의 역사를 창조해 낸다. 이런 고대사가 과거의 실제 모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대의 생각과 소원이 표현된 것임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많은 일이 민족의 기억에서 떨어져 나가고, 한편 다른 것들은 왜곡되고, 과거의 몇몇 흔적은 당대의 이념에 부합되도록 오역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사는 객관적인 지식욕이라는 동기에서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작용하여 그들을 격려하고 고무하며,
혹은 그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성숙기의 체험에 관한 인간의 기억은 모든 면에서 위의 역사기술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유년기의 기억은 그 기원과 신빙성에 관한 한 후대에 경향적으로 수정된 한 민족의 고대사에 해당된다.
만약 독수리가 요람에 있는 레오나르도를 찾아왔다고 하는 이야기가 훗날 조작된 공상에 불과하다면, 이 일에 더 이상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무가치한 일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새의 비행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연구에 정해진 운명의 존엄을 이용했다는 공공연한 경향으로 이 이야기를 해명하는 데 만족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과소평가는 한 민족의 고대사 속에 있는 신화 • 전설 • 해석 등의 소재를 경솔하게 거부해 버리는 경우와 바슷한 잘못을 저지르는 결과가 될 것이다. 모든 왜곡과 오해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현실은 어쨌든 그것들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들은 민족이 원시시대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낸 것으로, 한때는 강력하였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력 있는 동기들의 지배 아래서 이루어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작용하고 있는 갖가지 동기들을 알아내야만 이 왜곡을 원상태로 돌릴 수 있다고 한다면, 우선 이 전설적인 소재의 배후에 있는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개개인의 유년기 기억이나 공상에도 이와 동일한 것이 적용된다. 어떤 사람이 유년기부터 기억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일은 절대로 하찮은 일이 아니다. 자기 자신도 그 의미를 잘 모르는 기억의 잔재의 배후에는 대개 그의 심적 발전의 가장 중요한 특칭이 되는 매우 귀중한 증거가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28) 그런데 그 숨28) 나는 지금까지 또 다른 위인의 예를 들어 이해할 수 없는 유년기의 기억을 이용해 보려고 시도한 바 있다. 예컨대 괴테가 그의 나이 60세에 출간해 낸 전기를 보면 첫 페이지에 다음과 갇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즉 그는 이웃사람들이 부추기는 바람에 크고 작은 토기그릇들을 창문을 통해 거리로 내던져 산산조각내고 만다 이것이 바로 그가 유년기에 대해 보고하고 있는 유
일한 장면이다. 이 이야기는 다른 평범한 몇몇 아이들의 유년기 기억내용과 일치하는 점이 거의 없어 나는 이 유년기기억을 분석해 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게다가 괴테의 나이가 3년 9개월 되었을 때 태어나 약 열 살이 되던 해에 죽어 버린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괴테는 그 시점에서 동생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어 이것도 분석의 동기가 되었다(그는 이 동생에 대해 후에 그가 유년기에 여러 차례 앓아 누웠다는 것 을 이야기하고 있다). 논문 「『시와 진실 』 에 나오는 유년시절의 한 가지 기억」에서는 접시를 내던지는 행위를 신경쓰이는 방해자에게 대항하기 위한 마술적인 행동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이 사건이 보고되고 있는 상황에 근거해 판단해 보면, 결국 둘째 아들이 괴테와 어머니와의 내적인 관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괴테나 레오나르도의 경우처럼 어머니에 대한 어렸을 때의 기억을 이런 식으로 변조시켜 기억한다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일까?
겨진 요소를 밝혀 내기 위해서는 정신분석적 기법 가운데 훌륭한 보조수단이 있으므로, 레오나르도의 일생의 공백을 유년기 공상에 대한 분석을 통해 채워 넣는 시도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만족할 만한 정도의 확신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이 위대한 수수께끼같은 인간에 대한 무수한 연구들이 이보다 더 나은 운명을 지니지는 않았다는 사실로 스스로 위로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정신분석의 시각으로 레오나르도의 독수리 공상을 살펴보게 되면, 그것은 그리 낯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를데면 꿈 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리라 믿는다. 이 공상을 공상에 고유한 언어로부터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번역은 성적인 내용을 지향한다. <꼬리 coda> 는 이탈리아어나 그밖의 다른 의국어들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음경 상징이자, 대상표현의 하나이다. 독수리가 어린이의 입을 열고, 꼬리로 그 속을 강하게 쳤다는 이 공상에 포함되어 있는 상황은 펠라치오fellatio 개념, 즉 상대방의 입 속에 음경을 삽입하는 성행위의 개념과 합치한다. 다만 여기서 기묘한 것은 이 공상이 철저히 피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여성이나 피동적인 동성연애자들 (성행위에서 여성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보여 주는 몇몇 꿈이나 공상과도 비슷하다.
정신분석은 조금만 적용되어도 이미 위대하고 순수한 인간의 기억에 대해 용서할 수 없는 모욕을 가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독자 여러분은 잠시 자제해 주길 바라는 바이며, 정신분석 방법에 분개한 나머지 이 방법을 더 이상 따르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렇게 화를 낸다고 해서 레오나르도의 유년기의 공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설명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또 레오나르도 자신도 가장 명확한 방식으로 이 공상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대一원한다면 편견이라고 말해도 좋다一를 버릴 수 없다. 즉 공상에는 꿈 • 환영 • 정신착란 등과 같은 심적 창조물과 마찬가지로 그 어떤 뜻이 들어 있을 것이라는 기대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우리는 아직 최종결론을 내리지 않은 분석적 연구에 잠시 귀를 더 기울여 보도록 하자.음경을 입에 물고 빠는 성행위는 시민사회에서는 기분 나쁜 성적 도착으로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현대의 一:고대의 조각에서 증명되듯이 보다 이전 시대에도一여자들 사이에서는 종종 나타나는 일이며, 사랑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는 그 불쾌한 성격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 같다. 의사들은 그런 경향에서 비롯된 공상을 종종 여성들에게서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은 크라프트 에빙 Kraft Ebing의 『병적인 성심리학 Psychopathial sexualis』 이라는 책이 나 혹은 다른 보고서를 통해서 그런 종류의 성적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런 공상을 하는 것이다. 여자들의 경우 스스로 쉽게 그런 소원공상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29) 계속해서 연구해 보면,29) 『히스테리 분석 소고』 (1905) 참고.
우리는 도덕적인 면에서 그토록 심하게 배척당하던 이 상황이 가장 순수한 근원으로 소급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젖먹이 시절에 어머니와 유모의 젖꼭지를 입에 물고 그것을 빨았을 때 우리 모두가 한 번은 기분좋게 느꼈던 그 상황이 개작되어 나타난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 훗날 아이는 암소의 젖통을 알게 되는데, 이것은 젖꼭지와 그 기능이 비슷하고, 음경과는 그 모양과 위치가 비슷하므로, 후에 아이가 그 불쾌한 성적 공상을 만들어 내는 전 단계가 획득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왜 레오나르도가 자신의 소위 독수리 기억을 젖먹이 시절에 끼워 놓았는지 알 수 있다. 이 공상의 배후에는 바로 어머니의젖을 빠는 행위, 또는 젖을 먹는 행위에 대한 추억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는 인간적으로 아름다운 이 장면을 다른 많은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성모 마리아와 그 아들의 모습을 빌어 화필로써 그리고자 계획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아직 우리는 남녀 양성에 똑같이 중요한 이 추억이 레오나르도라는 남성에 의해 피동적 • 동성애적 공상으로 변형되어 있는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머니의 젖을 빠는 행위와 동성애가 어떤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잠시 덮어두기로 하자. 그리고 레오나르도를 동성애자라고 간주했다고 하는 사실을 상기해 보기로 하자. 이 경우에 청년 레오나르도에 대한 그 비난이 정당했는지 어떤지는 아무래도 좋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도착증 환자로 판정하는 것은 실제 그런 행위가 있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정서적 태도를 통해 결정하기 때문이다.다음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레오나르도의 유년기 공상이 지니고 있는 또 하나의 이해하기 어려운 특징이다. 우리는 이 공상을 어머니가 젖을 먹이는 것으로 해석하고, 어머니는 독수리에 의해 대체 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독수리는 어디에서 왔을까, 그리고 어떻게 어머니의 대용물이 되었는가?여기서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르지만 그것은 너무나 의외의 것이어서 곧 떨쳐 버리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어쨌든 고대 이집트인의 신성한 상형문자를 보면 어머니는 독수리의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30) 이집트인은 독수리의 머리를 가전 모성신이나, 혹은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경우에는 적어도 그중의 하나가 독수리의 머리로 되어 있는 모성신을 숭배하고 있었다.31) 그리고 이 여신의 이름을 <무트 Mut>라고 불렀다 . 독일어에서 <어머니 Mutter>라는 단어와 발음이 비슷한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독수리는 사실상 이런 식으로 어머니와 관계가 되는데, 하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상형문자의 해독은 프랑소와 샹폴리옹 Francois Champollion(1790 - 1832)에 의해 처음으로 이루어전 것인데, 그렇다면 레오나르도는 그보다 먼저 이것을 알고 있었다고 추측해도 좋을까? 32)
어떻게 고대 이집트인이 독수리를 모성의 상징으로 선택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홍미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이집트인의 문화와 종교는 이미 그리스 • 로마인에게 학문적 호기심의 대상이었으며,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문헌 속에는 상형문자에 대한 각각의 기록들이 오랫동안, 우리가 직접 이집트인의 유적들을 해독해 낼 수 있기 이전부터 남겨져 있었다 . 그 문헌들은 예컨대 스트라보 Strabo, 플루타크Plutarch, 암미아누스 마르첼리우스Ammianus Marcellius와 같은 유명한 작가가 쓴 것이거나, 또 일부는 무명작가가 쓴 것이다. 이 문헌들은 이를테면 호라폴로 니로우스 Horapollo Nilous의 『상형문자론』과 헤르메스 트리스메지스토스 Hermes Trismegistos라는 신의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동방의 성직자 잠언집과 같이 그 기원과 집필년도30) 호라폴로, 『상형문자』, 1권 11쪽, <어머니를 묘사하고자…… 그들은 독수리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31) 로셔, 『그리스 로마 신화사전』 (1894-1897). 란조네, 『이집트 신화사전』 (1882).32) 하르트레벤, 『샹폴리옹 , 생애와 작품』 (1906).가 불확실한 것들이다. 우리는 이 문헌들을 근거로 해서 독수리가 모성의 상칭으로 간주되었음을 알아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새에는 암컷만 있고 수컷은 없다고 믿어져 왔기 때문이다 .33) 그리고 고대인의 자연과학을 보면 이 제한된 생물에 대한 대응물도 나타나 있다. 즉 이집트인들은 그들이 신처럼 숭배했던 딱정벌레의 경우에는 수컷밖에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34)
그런데 만약 독수리가 모두 암컷이었다면, 어떻게 독수리의 수태가 이루어지는 것일까? 이 점에 관해서 호라폴로의 견해가 훌륭한 해답을 마련해 주고 있다.35) 일정한 시기가 되면, 이 새들은 공중을 날으면 서 질을 열어, 바람에 의해 임신한다는 것이다.그래서 이제 우리는 뜻밖에도 조금전 이치에 맞지 않다고 일축해버렸던 것을 어느 정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레오나르도는 이집트인이 어머니라는 개념을 독수리의 형상으로 나타냈다고 하는 동화 같은 학문적 이야기를 아무래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문학과 과학의 모든 영역에 관심을 두고 있던 비상한 다독가였다. 아틀란티쿠스 고본(稿本)에는 그가 한때 소유하고 있던 모든 책의 목록이 들어 있고,36) 또 그가 친구로부터 빌린 책에 관한 수많은 메모들이 있다. 리히터 37) 가 그의 수기에서 모아 편집한 발췌문에 따르면 그의 독서범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무수한 책들 중에는 자연과학에 대한 고대의 서적이나 당대의33) <수컷의 독수리는 나타나지 않고 모두 암컷이다> 뢰머 (1903), 732쪽
34) 플루타크, <즉 이집트인들은 딱정벌레는 모두 수컷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독수리의 수컷은 발견되는 일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35) 호라폴로, ‘앙상형문자』(레만스 편집본, 1835). 독수리의 성에 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어머니를 표시할 때 독수리를 그려놓는데, 그 까닭은 독수리의 경우에는 수컷이 없기 때문이다.>36) 뮌츠, 앞의 책, 282쪽.37) 같은 곳.책들도 빠져 있지 않았다. 이 책들은 모두 당시에 이미 인쇄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며, 게다가 밀라노는 새로운 인쇄기술 분야에서 이탈리아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연구를 계속해 보면, 레오나르도가 독수리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확신으로 굳혀 줄 수 있는 기록과 접하게 된다. 박식한 출판가이자 논평가인 호라폴로는 이미 인용한 텍스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그러나 교 부들 은 독수리에 관한 이 이야기 를 자연의 질 서에서 끌어낸 증거로 삼았고, 처녀수태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논박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열렬히 지지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 들 사이에서 이 이야기가 오가게 되었다.>따라서 독수리는 암컷밖에 없으며, 또는 공중에서 혼자 새끼를 밴 다는 우화는 딱정벌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종교와 무관한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교부들은 처녀수태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자연과학적인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제멋대로 이용했다. 고대의 훌륭한 기록들에 따르면 독수리는 바람에 의해 수태한다고 되어 있는 데, 왜 똑같은 일이 인간에게는 한 번도 일어나서는 안 된단 말인가? 이러한 이용가치 때문에 교부들은 <거의 모두> 독수리 우화를 늘어놓곤 하였다. 따라서 레오나르도도 유력한 권위층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었으리라는 점에는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레오나르도의 독수리 공상이 성립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우연히 그가 교부들이나 자연과학 서적을 통해 독수리는 모두 암컷이며, 수컷의 도움 없이 새끼를 낳을 수 있음을 알았을 때, 그의 머리 속에는 나중에 자신의 공상으로 변형시킨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 기억은 바로 자기 자신 역시 어머니는 있으나 아버지가 없는 한 마리의 새끼독수리라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또 거기에 덧붙여, 오래된 인상이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어머니의 가슴에서 얻었던 쾌락의 여운을 첨가하였다. 그리고 아이를 안은 성모의 모습을 모든 예술가들이 귀중하게 여기고 여러 작가들이 그것을 언급한 사실 또한 레오나르도가 이 공상을 가치있고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작용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렇게 해서 단지 한 여자의 아기예수가 아닌 위로하고 구제하는 자로서의 아기예수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유년기의 공상을 분해하는 경우에, 우리는 나중에 추가되어 그 기억을 수정하고 왜곡시킨 동기들과 실제의 내용을 구분짓고자 한다. 레오나르도의 경우에서는 이제 이 공상의 실제 내용을 알아냈다고 생각된다. 즉 어머니를 독수리로 대체시켜 놓은 것은 그 아이에게 아버지가 없었고 어머니와 단 둘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사생아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의 독수리 공상과 일치해 있다. 바로 그때문에 그는 자신을 새끼독수리와 비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소년시절에 관한 상당히 확실한 사실에 따르면, 그는 5살때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것이 언제 일어났는지, 태어난 후 몇 달 후나 혹은 징세대장에 이름이 기입되기 몇주일 전이었는지 하는 점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여기에 독수리 공상의 해석을 적용해 보면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레오나르도가 자기 일생에 중요한 초기의 몇 년을 보낸 곳은 아버지와 계모 밑이 아니라, 버림받고 불쌍한 친어머니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는 충분히 아버지가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신분석 연구에서 비롯되는 빈약하고 일면 약간 대담한 결론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더 파고 들어가면 그 뜻은 점점 커질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유년기를 둘러 싼 사실적인 환경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더욱 확실해진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 세르 피에로 다 빈치는 레오나르도가 태어나던 해에 귀족 돈나 알비에라와 결혼하였다. 이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으므로 레오나르도는 5살때 아버지의 집, 아니 오히려 할아버지의 집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은 기록상으로 증명되어 있다. 그런데 장차 하나님의 은혜로 아이가 생길지도 모르는 젊은 아내에게 처음부터 사생아를 돌보도록 맡기는 것은 결코 혼한 일은 아니었댜 실망에 사로잡혀 몇 해가 흘러가고 나서야, 아마 그들은 자신들이 바랬던 아이를 얻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귀엽게 성장해 가는 그 사생아를 맡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자기 천어머니로부터 아버지 집으로 옮겨가게 되기까지는 적어도 3년, 아마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은 독수리 공상의 해석과도 잘 들어맞는다. 일생의 최초의 3, 4년 동안에 인상이나 의부세계에 대한 반응법들은 고정되고 굳어지는데, 이것은 이후의 경험에 의해서도 그 의미가 없어지지 않게끔 되어 있다.
한 사람의 불가해한 유년기 기억과 그 기억에서 비롯된 공상이 항상 그 사람의 심적 발전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한다면, 우리가 독수리 공상에 의해 확증한 사실, 즉 레오나르도가 일생의 최초의 몇 년을 어머니와 단둘이 지냈다는 사실은 그의 내면 생활의 형식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해 본다면 다른 아이들보다 한 가지 더 어려운 문제에 처해 있었던 아이가 이 수수께끼에 대해 유난히 열정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또한 일찍부터 연구가가 되어, 아이가 어디에서 생기며,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들로 고민했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자기의 연구와 유년기의 이야기 사이에는 이러한 연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후에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게 된다. 즉 자신은 요람에 있었을 때 이미 독수리의 방문을 받았으므로, 새의 비행이라는 문제를 보다 심도있게 연구하도록 예전부터 결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새의 비행에관한 문제로 초점이 맞춰진 지식욕을 이제 유아적 성탐구에서 연구해 보기로 하겠는데 , 별 어려움 없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3레오나르도의 유년기 공상 속에 나오는 독수리라는 요소는 실제의 기억내용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자신과 이 공상 사이의 연관성은, 그의 이후의 삶에서 이 내용의 의미가 밝혀진다. 그런데 해석작업을 더 계속해 가면, 우리는 이 기억내용이 왜 동성애적인 상황으로 변형되어 버렸는가 하는 기이한 문제에 부딪친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는 一 아기가 젖을 빠는 대상으로서의 어머니라는 표현이 더 낫겠다一한 마리의 독수리로 변해서 아기의 입에 꼬리를 넣는다. 독수리의 <꼬리>는 보통 대용어법(代用語法)에 따르면 바로 남성기, 즉 음경을 뜻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모성을 의미하는 새에 남성의 특징을 부여하는데까지 상상력이 미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이 부조리에 직면하여, 어떻게 이 공상의 상을 합리적인 의미로 환원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가서는 그만 어쩔 줄을 모르게 된다.우리는 단념해서는 안 된다. 이미 과거에 얼마나 여러 차례, 의견상으로는 부조리한 꿈의 의미를 끈덕지게 밝혀내고야 말았던가! 유년기의 공상을 해석하는 것이 꿈의 경우보다 더 어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우선 특별한 것 하나만이 뚝 떨어져 있음은 절대로 좋은 현상이 아님을 기억하자, 그리고 서둘러 그 옆에 다른 특별한 것들을 늘어 놓아보기로 하자. 38)로셔 전문사전에서 드렉슬러가 주장하듯이 독수리 머리를 한 이집38)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1900).4장 첫부분에도 그와 비슷한 언급이 있다.
트인의 여신 무트 Mut, 전연 비인간적인 특징을 지닌 이 여신의 모습은 종종 이시스 Isis나 하토르 Hathor처럼 더 생기 넘치는 개성을 가진 다른 모성신과 융합해 왔다. 그러나 동시에 늘 특별한 존재로서 숭배를 받아 왔다. 개개의 신들이 절충주의 Synkretismus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은 뒤섞인 신의 모습과 더불어 이집트 판테온의 특색이었다. 독자성을 갖춘 개개의 신의 형상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수리 머리를 한 모성신은 음경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젖가슴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성임을 알 수 있는 그 여신의 신체에는, 발기상태에 있는 음경도 있었던 것이다.
요컨데 레오나르도의 독수리 공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신 무트의 경우에도, 모성과 남성의 특성이 결합되어 있었다. 우리는 레오나르도가 책을 보고 모성의 독수리가 지닌 양성구유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는 가정하에 이 일치를 설명해야 할까? 그런 가능성은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읽은 책은, 이 이상한 특색에 관해 조금도 기록하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 일치의 원인은, 공통적이고 여기저기 영향력을 미치고는 있지만, 아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모티브로 환원하여 캐보는 것이 훨씬 그럴듯 하겠다.신화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양성구유자 즉 남성과 여성의 성적 특징이 결합되어 있는 것은 다만 무트 신만이 아니라, 이시스와 하토르 등의 다른 신들에도 있는 성질인데, 후자는 그들 역시 모성적인 성질을 지니고 무트와 혼동된 경우에만 그러했을 것이다.39) 또한 신화가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이집트인의 다른 신들, 이를테면 사이스의 네이드Neith von Seis는-――이것이 나중에 희랍의 여신 아테네가 되었다 一원래 양성구유, 즉 반음반양 hermaphroditisch으로 간주되었으며,39) 『유아의 성이론에 관하여』(1908) 참조.
또한 이것은 희랍의 여러 신들, 이를데면 디오니소스 무리의 신들에도, 나중에 여성적인 사랑의 여신인 것으로만 알려진 아프로디테에도 똑같이 들어맞는다. 따라서 신화학은 여자의 몸에 삽입된 음경은 자연의 근원적인 창조력을 뜻하며, 그리고 이 모든 반음반양신들은 남성적인 요소와 여성적인 요소 를 결합해야만 비로소 신의 완전성이 알맞게 표현된다는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모성적인 성질에 대립하는 남성적인 힘의 표시로 오인된 어머니의 본질을 구현한 모습과 상치되지 않는다는 이런 의견은 우리의 심리적 수수께끼를 해명해 주지는 못한다.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유아의 성욕론 편에 마련되어 있다 . 남성기가 어머니의 묘사와 양립하고 있던 시기가 한 번 있다. 사내아이는 성생활의 수수께끼에 호기심을 돌릴 때야 비로소 자신의 성기에 대한 관심에 사로 잡히게 된다. 사내아이는 자기와 비슷비슷한 줄 알고 있는 딴 사람들에게 남성기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기 몸의 이 부분을 너무도 귀중한, 너무도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그만큼 중요한 다른 모양의 성기가 있으리라고는 짐작할 수도 없으므로 모든 인간은, 심지어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자기 것 같은 음경을 갖고 있다고 가정치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선임관이 나이 어린 탐구자의 마음에 깊이 뿌리박혀 있으므로 어린 계집아이의 성기를 처음 보았을 때도 선입견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 지각 Wahrnehmung은 물론 그에게, 계집아이에게는 그의 것과는 다른 것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는 계집아이에서 음경을 발견할 수 없다는 이 지각내용을 자기 자신에게 납득시키지는 못한다. 성기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사내아이에게는 섬뜩하고 견딜 수 없는 일이므로 그 때문에 그는, 성기는 계집아이에게도 있지만, 아직 그것은 퍽 작으며 앞으로 커질 것이라고 적절히 타협적인 생각을 한다 .40) 그러나 그후 계속 살펴보아도 이 기대가 실현되지 않으면, 그는 계집아이도 원래는 페니스가 있었지
40) 《정신분석과 정신병리학 연감》, 《국제의학 정신분석 연감》, 《이마고 Imago》의 여러 고찰을 참조.
만 그것은 잘려지고 그 자리가 상처가 되어 남아 있는 것이라는 다른 핑계를 생각해 낸다. 이 이론상의 전보는 괴로웠던 자기 자신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이뤄진 것이다. 그 동안에도 그는 줄곧 만일 그가 너무 노골적으로 성기에 관심을 쏟는다면, 이 소중한 기관이 잘려나갈 것이라는 소리를 들어왔던 것이다. 이 거세위협에 영향을 받아 그는 바야흐로 여성기에 관한 개념을 바꾼다. 그는 이때 이후 자기가 남성이라는 것에 대해 치를 떨겠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이미 가장 무서운 벌을 받은 그 불행한 피조물을 업신여길 것이다 .41)
41) 본인은 이민족들 간에 아주 근본적으로 나타나는 비합리적인 유태인 배척주의의 한 원인을 당연히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중에 할례는 거세와 동일시된다. 이런 추측을 인류의 원시시대까지 소급시켜 본다면, 할례는 본래 온화함의 대리이며, 절단이며, 거세였음에 틀림없다는 느낌이 든다.
어린아이가 거세컴플렉스의 지배에 빠지기 전에, 바꿔 말하면 어린아이가 여자를 아직 남자와 동등한 것으로 생각하던 시기에는 성적인 충동활동으로서 강렬한 관찰욕이 어린이에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린이는 아마 처음에는 그것을 자기 것과 비교해 보기 위해서겠지만 함부로 남의 성기를 보려 한다. 어머니를 대상으로 생겨난 성적인 관심은 이내 페니스라고 생각하고 있는 어머니의 성기를 보고 싶다는 갈망에서 정점에 다다른다. 그러나 나중에 여자에게는 페니스가 없다는 사실을 겨우 알게 되면, 이 갈망이 거꾸로 협오감으로 변해 버리는 일이 종종 있다. 그리고 사춘기의 나이가 되면 이 협오감은 정신적 성불능, 여성형오중, 지속적인 동성애 등의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일찌기 갈망했던 대상, 여자의 페니스에의 고착(固着)은 유아기의 성탐구라는 부분을 유난스럽게 철저히 추구했던 어린이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여자의 발과 신발에 대한 주물적 fetischartig
인 숭배는 발을, 한때 숭배했다가 그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여자의 페니스에 대한 대표상징으로 받아들인다. <여자의 머리카락 자르기를 좋아하는 변태성욕자 Zopfabschneider> 는 부지중에 여자의 성기에 거세를 가하는 사람의 역할을 맡고 있다.
성기와 성기능을 문화적으로 평가절하하는 관점을 버리지 않는 한, 유아기 성욕의 활동들은 올바로 이해되지 않을 것이며, 여기 설명된 의견들을 아마 믿기 어렵다고 외면하게 될 것이다. 유아기의 정신활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시시대와 비교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성기를 이미 수십 세대나 전부터 <치부 Pudenda>와 부끄러움의 대상으로 여겼다. 성적 억압이 더 진행하는 경우에는 혐오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현대의 성생활, 특히 인류문화를 담당하는 계급의 성생활을 널리 살펴보면, 현대인중 태반이 다만 마지못해 생식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을 따름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위엄이 손상되고 떨어진다고 느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42)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보는 성생활에 대한 의견으로는, 그런 생각은 교양 없는 낮은 사회충에만 국한되어 있으며, 더 높은 세련된 계급에서는 그런 생각은 문화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인정되므로 감춰지고, 그런 의견은 양심의 심한 가책을 느끼지 않고서는 지속적으로 품고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원시시대는 이렇지 않았다. 문화탐구자가 힘겹게 이룩한 문집을 보면, 성기는 애초부터 인간의 자랑이며 희망으로서 신으로 숭배되었고, 그 기능의 신성이 인간이 새롭게 터득한 모든 활동 위에 자리잡고 있다는 확증을 얻을 수가 있다. 무수한 신들의 모습은 성기의 본질을 승화시킴으로써 생겨났다. 그리고 공식적인 종교와 성활동과의 관계가 이미 일반의식에 감추어져 있던 시대에는, 얼마간의 신자들 가운데 비밀숭배의 형식으로 이룬 관계를 지속시키려는 활발한42) 이 부분은 1919년 덧붙여진 것이다.
움직임이 있었다. 그렇지만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서, 그처럼 많은 신적인 것, 신성한 것이 성 전체에서 제거되어, 마침내는 그 미미한 찌꺼기만이 남아 경시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심리적 혼적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법이므로, 성기숭배의 가장 원시적인 형식은, 현대에도 엄연히 남아 있음을 지적할 수 있으며, 또 현대인의 사용언어, 관습, 미신도 이 발전과정의 모든 단계의 찌꺼기를 포함하고 있다 해서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43)
중요한 생물학적인 유사성을 볼 때, 각 개인의 심리적 발전은 인류발전 과정을 단축해서 되풀이된다는 의견에 우리는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따라서 어린이가 성기를 높이 평가하는 점에 관한 유아심리의 정신분석적 연구가 얻어낸 결론도 허무맹랑하다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가 페니스를 가졌다는 어린이의 가정은 이집트의 무트와 레오나르도의 유년기 공상에 나오는 독수리 <꼬리> 등의 모성신의 양성구유적인 성을 파생시킨 공통된 근원이다. 우리는 다만 잘못 이해하여 이런 신들에 대한 서술들을 단어의 의학적 의미에서 반음양이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다. 양성기가 있으면 보는 이로 하여금 협오감을 느끼게 하지만, 이 신들에서 양성기가 실제로 결합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볼 수 없다. 그들은 단지 모성의 표징으로서의 젖가슴을 가전 데다가, 음경이 있으며, 이것은 어린이가 어머니의 몸에 관해 품고 있던 첫번 이미지의 경우와 아주 갇다. 신화는 이처럼 원시적으로 공상된 존경하는 어머니의 육체를 신자들이 알도록 보존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레오나르도의 공상 속에서 독수리의 꼬리가 강조되어 있음을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가 있다. <당시 나는 어머니한테서 정다운 호기심을 느끼고 있어서, 엄마도 내 것과 꼭 같은 성기를 가지고 있는 줄 믿고 있었다.> 그것은 레오나르도가 일찍부터 성탐구를43) 나이트(1786) 참조
시작한 증거이며, 우리 견해로는 이것이야말로 그후의 그의 전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41)
44) 이것은 주로 자드거의 연구이다. 본인은 경험상 이 연구에 근본적으로 의견일치를 하고 있다.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 연구가로는 비인의 슈테켈과 부다페스트의 페렌치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면, 레오나르도의 유년기 공상에 있어서 독수리 꼬리의 설명만으로 만족할 수 없음을 금새 깨닫게 된다. 거기에는 아직도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이 더 많이 있는 모양이다. 그의 공상에서 가장 현저한 특징은, 어머니의 젖을 빠는 것이 이젠 자신이 젖을 물리는 것으로, 즉 피동으로 변해 있는 점, 따라서 의심할 여지 없이 동성애적인 성격을 가전 상황으로 변해 있는 점이다. 여기서 레오나르도가 성생활에서는 동성애자처럼 행동했다는 자료에서 추측된 것을 생각해 보면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오른다. 즉 이 공상은 유년기에 어머니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관계 및 관념적인 승화된 동성애 경향이긴 하지만 후에 나타난 그의 동성에적인 경향 사이의 인과관계를 나타내고 있지는 않을까? 만약 우리가 동성애 환자에 대한 정신분석적인 연구에서 내적이며 필연적인 동성애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우리는 절대로 레오나르도의 왜곡된 기억으로부터 그런 관계를 추론하는 일은 못했을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그들의 성생활에 가해지는 법적 제재에 항거할 힘 있는 행동을 취하는 동성애자들은, 그들의 이론적 대변자를 통해, 자신들은 처음부터 특별한 성적 변종이다, 성적 중간단계이다, <제3의성>이다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자기들은 선천적으로 여자를 상대해서는 도저히 느끼지 못하는 쾌감을 남자에게서 느끼는 기질적인 요인을 타고났노라고 의친다. 그런데 인도적 견지에서 그들의 요구를 인정하여 주려고 하면 할수록 사람은 그들의 이론――동정애의 심리적인 발생기원을 전연 무시하고서 세워진 ―― 에 대해 신중해질 수도있을 것이다. 정신분석은 이 간격을 메꾸고 동성애자의 주장에 따르는 방법을 제시한다. 정신분석은 매우 적은 숫자의 사람들을 상대하여 이 과제의 해결을 시도했을 뿐이지만, 지금까지 전행된 연구는 놀라운 성과를 낳았다. 우리가 조사한 모든 동성애자는, 이미 깨끗이 잊어버린 유년기 초기에, 여자에 대해, 대개 어머니에 대해 매우 강하게 성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생각은 어머니 자신의 과도한 부드러움에 의해 일깨워지거나 또는 고취되고, 또 어린이의 삶에 미치는 아버지의 역할이 적음으로 인해 강화된다. 자드거가 주장하는 바는, 그가 다룬 동성애환자들의 어머니는 남성적인 여자인 경우가 혼했다는 것이다. 즉 정력적인 성격의 여자들이며 남편을 억압하는 여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나도 가끔 같은 광경을 목격했다. 그보다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경우는, 아버지가 처음부터 없었다든가 일찍부터 안 계셔서, 그 결과 사내아이가 전적으로 어머니의 영향만을 받은 경우였다. 만약 아버지가 그에게 영향을 많이 끼쳤더라면, 아들은 이성을 상대자로 선택할 때 바른 결정을 했으리라고 생각한다.45)
45) 이런 성적 정신분석 연구는 성적 변태의 원인을 해명하지는 않았지만 동성연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의문을 떨쳐 버려 주었다. 그 첫번째 의문은 위에 인용한 어머니에 대한 성적 욕망의 고착이고, 다른 하나는 가장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도 동성애를 선택할 수도 있고 한 번이라도 동성애를 해본 적이 있으며, 무의식중에 동성애에 집착하거나 동성애에 대한 강경한 저항을 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확신시켜 주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 두 가지 확신들은 <제3의 성>이라고 인정받으려하는 동성애자들의 요구도, 선천적 인 동성애와 후천적인 동성애 사이의 일견 중요하게 보이는 구별도 배척해 버린다. 다른 성적, 육체적 특칭들의 존재는 동성애적인 대상선택에 있어 큰 영향력을 갖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동성애의 이론적 대변자들이 정신 분석이 거둔 연구성과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예비단계가 지나고 난 후에는 하나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 변화의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이미 알려져 있지만, 그 동기가 되었
던 힘은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어린이의 사랑은 의식면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다 . 그 사랑은 억압된다. 어린이는 자기 자신을 어머니의 위치에 놓고 어머니와 동일시하며, 자기 자신을 본보기로 삼아 그와 비슷한 사람을 새로운 사랑의 대상으로 택함으로써 그 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억압한다. 그래서 그는 동성애자가 된다. 이제 어른이 된 그가 사랑하고 있는 어린이란, 실은 일찌기 어머니가 어린 그를 사랑했던 것처럼, 자기자신의 대치된 인물이며 재생에 불과하므로, 그는 다시금 자기사랑 Autoerotismus에 빠진 셈이라 하겠다. 희랍신화는 거울에 비천 자기 자신의 모습 의에는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젊은이, 그리고 이 이름의 아름다운 꽃으로 변해 버린 젊은이를 나르시스 Narzissus라고 부르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런 아이 를 나르시시즘의 길목에서 애정의 대상을 찾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46)
심리학적으로 더 규명해 가면, 이런 방식으로 동성애자가 된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어머니에 대한 기억상 Erinnerungsbild을 언제까지나 지니고 있다는 주장이 타당성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억압함으로써 그는 이 사랑을 무의식중에 지니고 있으며 계속 어머니에게 충실한 상태로 남는다. 그가 소년의 꽁무니를 따라 다니며 애인이 되려고 하는 것 갇아도, 실은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그를 부정한 사람으로 만들지도 모르는 다른 여자들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 개개의 경우를 직접 관찰한 결과, 일견 남성에게만 매력을 느끼는 사람도 사실은 정상적인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성에게도 끌릴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마다 허둥지둥, 여자로부터 받은 흥분을 남자 대상에 옮기고, 이런 방식으로 그46) 나르시스 개념을 처음 프로이드가 인용한 것은 『세 논문 Drei Abhandlungen』 (1905)의 재판이 나오기 몇 달 전이었다. 『세 논문』 제1장의 1절 마지막 부분에 덧붙어진 주석. 주요 서술은 『나르시시즘 입문』(1914)에 있다.
가 일찌기 동성애를 획득했던 그 상태를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것이다.
우리는 동성애 심리의 발생에 관한 이 설명의 중요성을 과장할 뜻은 추호도 없다. 이 설명들이 동성애의 대변자들이 말하는 공식적 이론에 정면으로 대립된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문제를 결정적으로 해결할 정도로 포괄적이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동성애라고 불리우는 것은 가지각색의 심리적, 성적 억압의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생각되며, 또 우리가 인식한 과정은 많은 것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아마도 <동성애>의 한 유형에만 들어맞을 것이다. 우리는 <동성애>의 한 가지 유형에만 다음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즉 우리가 본 동성애의 유형에서는 우리가 요구한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유추된 효과가 실제로 나타나 있는 경우의 수보다 훨씬 많아서, 우리로서도 대개 거기서부터 모든 동성애를 발생시키는 미지의 체질상의 요인이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만약 우리의 출발점이었던 독수리 공상의 장본인인 레오나르도가 이런 동성애자의 한 유형이었다는 유력한 추정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연구한 이 유형의 동성애의 심리적 발생을 연구할 엄두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47)물론 이 위대한 예술가, 자연과학자의 성적 태도에 관해 알려져 있는 것은 적지만, 당대의 사람들의 증언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전승 자료들을 조명해 보면, 레오나르도는 마치 남다른 노력을 하여 인간의 공통된 동물적 욕구를 훨씬 더 초월한 듯이, 예의적으로 성적인 욕구와 활동이 줄어든 사람으로 보인다. 과연 그는 직접적인 성적 만족을 구한 적이 있었는지, 만일 있47) 동성애와 그 발생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은 프로이트의 『세 논문』에 있다. 이 주제에 대한 다른 후기의 논쟁은 무엇보다 여성의 동성애의 경우에 대한 프로이트의 설명과 그의 논문 『질무, 편집증, 동성애의 신경증적 메커니즘에 관하여』 (1922)에 들어 있다.
었다면 어떤 방법으로 구했는지, 또는 그 따위 것 없이도 지낼 수 있었는지, 이것들은 불문에 붙여두자. 그러나 우리도, 마치 명령이라도 받은듯이 다른 사람을 성행위로 이끄는 모든 감정의 흐름을 레오나르도의 경우에서도 탐구해 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성적 갈망, 리비도가 그 구성에 참가하고 있지 않은 정신생활은 상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설령 그 갈망이 본래의 목적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더라도 또는 그 실행이 억제된 것이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레오나르도에게서 불변하는 성적 경향의 <흔적> 이상의 것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 흔적들은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를 아직도 동성애자로 분류하도록 해준다. 그가 특히 예쁜 어린이와 젊은이만을 제자로 삼았던 일은 전부터 지적되었다. 그는 제자들에 대해서 천절하고 동정심이 있었다. 제자가 병이 들면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간호하듯이, 자신의 어머니가 그를 그렇게 돌보았을 것처럼 그들을 돌보고 간호하였다. 그는 미모 때문에 제자를 선택했지 그 재능 때문에 선택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세자레 다 세스토, 볼트라피오, 안드레아 살라이노, 프란체스코 멜찌 등 나중에 훌륭한 화가가 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결국 독립하지 못하고, 스승이 죽은 후에는 미술사에 자취를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 그 작품면에서 보아 마땅히 그의 제자라고 불러야 할 다른 사람들, 루이니와 바찌 ―일명 소도마一를 레오나르도는 개인적으로 몰랐던 모양이다.제자들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태도가 성적 동기와는 완전히 무관하며, 이로부터 그가 성적 특이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없다는 항의에 부딪치게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항의에 대해 우리는 아주 신중하게 , 우리 견해가 그렇지 않으면 수수께끼로 남을 이 거장의 특이한 몇몇 태도를 해명해 줄 수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레오나르도는 당시 일기를 쓰고 있었다. 그는 그 작은 가로쓰기 노트에다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기록을 남겼다. 묘하게도 그는 이 일기 속에서, 자신을 <너>라고 부르고 있다. <루카 선생으로부터 근의 곱셈을 배우라.
<다바코 선생으로부터 원을 네모 꼴로 만드는 법을 배우라> 49) 또 어느 날 여행을 떠날 때에는 <정원의 일로 밀라노로 간다. ……봇짐을 두 개 만들게 해라. 볼트라피오로 하여금 연마기를 보여달라고 해서 그것으로 돌을 연마하여 받아라. ……책을 안드레아 일 토데스코선생께 전하라.> 또는 전연 다른 의도의 계획, <너는 네 논문에서 지구가 달과 같은 유성의 하나임을 보여야 한다. 즉 우리가 사는 세상의 고귀성을 증명해야 한다>라고 쓰여있다.좌우간 이 일기에는, 다른 고인들의 일기와 마찬가지로 종종 하루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겨우 두세 마디로 처리되거나 또는 전연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이 일기에는 그 기이함 때문에 레오나르도에 대해 글을 쓴 모든 전기작가들이 인용하는 두셋의 기입사항이 있다. 그것은 자질구레한 지출에 관한 기록이다, 마치 편협할 만큼 엄격하고 인색한 가장이 적어 놓은 것 같다. 여기에는 큰 액수의 경비에 관한 기록은 하나도 없고, 또 이 예술가가 부기에 정통했다는 아무 증거도 없다. 이런 기록 중의 하나로 제자 안드레아 살라이노에게 사준 새 외투에 관한 것이 있다.은색 비단 15리라 4솔디장식용 빨간 벨벳 ― 9 리라끈 9 솔디48) 송미, 앞의 책 (1908), 152쪽.
49) 같은 곳.단추 12 솔디
또 다른 매우 상세한 메모에는 다른 제자 또는 모델의 나쁜 성품과 도벽으로 인해 그가 입은 손실이 계산되어 기입되어 있다. <1490년 4월 21일에 나는 이 수첩을 쓰기 시작하고, 다시 그 말을 시작했다. 당시 10살이었던 자코모는 1490년 막달레린의 날에 우리집에 왔다(난의 기입_훔치는 버릇, 거짓말, 이기주의, 무서운 식성). 이튿날에 나는 그에게 셔츠 둘, 그리고 바지와 자켓을 재단시켰다. 그리고 이 물건의 값을 치르기 위해 내가 돈을 옆에 놓았더니, 그는 내 지갑에서 돈을 훔쳤다. 나는 확증을 쥐고 있었지만(난의 기입-4 리라) 솔직한 고백을 도저히 강요할 수 없었다.> 이처럼 어린이의 비행에 관한 얘기는 계속되어, 다음과 같은 계산으로 끝나 있다. <첫 해에는 외무 1벌 2리라 셔츠 6벌 4리라. 자켓 3벌 6리라. 양말 4켤레 7리라, 기타.>레오나르도의 전기작가들은 주인공의 수수께끼 같은 심리적 생활에서 그의 사소한 약점과 특성을 출발점으로 삼으려고는 하지 않아서, 이 기묘한 계산들의 경우에도 제자들에 대한 이 거장의 선의와 동정심을 강조하는 주석을 붙이곤 하였다 . 레오나르도의 행위가 아니라, 그가 그런 행위의 증거들을 우리에게 남겼다는 사실에는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잊고 있다. 레오나르도가 자신이 호인이라는 증거들을 일부러 우리에게 남기려고 하는 동기를 서술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떤 다른 호의적인 동기로 인해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겼다고 가정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동기가 무엇이었던가는 쉽사리 짐작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 레오나르도가 쓴 것들 중에서 발견된 또 하나의 디음과 갇은 계산서가 제자들의 옷, 기타에 관하여 자잘하게 쓴이 특이한 메모내용을 명확하게 밝혀 주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그런 자료를 열거해 본다고 해도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카데리나가 죽은 후의 장례비 —27풀로린
초 2 파운드 18 플로린십자가의 운반 및 건립을 위해 —― 12 플로린관의 받침 4 플로린관 드는 인부 8 플로린신부 4 명, 수사 4 명에게 20 플로린종 치는 값 2 플로린무덤 파는 일꾼 16 플로린허가를 위해, 공무원에게 1 풀로린합계 108 플로린장사 전에 쓴 비용의사에게 4 플로린설탕과초 12 플로린합계 16 플로린총계 124 플로린이 카데리나가 누구였는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시인 메레주코브 스키뿐이다. 다른 두 개의 짧은 메모에서 그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레오나르도의 어머니는 빈치의 가난한 촌부였는데 당시 41세의 아들을 찾아 보기 위하여 1493년 밀라노에 왔다. 그녀는 밀라노에서 병을 얻어, 레오나르도가 병원에 입원시켰으며, 그녀가 죽자 그는 막대한 경비로 엄숙히 장례를 치러 드렸다.인간십리에 통달한 작가의 이런 해석은 증명될 수는 없지만 수많은 내적인 개연성은 요구할 수 있으며, 레오나르도의 정서활동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밖의 사실과 완전히 일치하므로, 나는 그 해석이 옳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레오나르도는 그때까지 완전히 강압적으로 감정을 탐구대상으로 삼아 그 자유로운 표현을 억압하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억압된 것이 강력히 밖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일찍이 몹시 사랑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가 그런 경우였다. 장례비용에 관한 이 계산서 속에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바뀐,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표현되어 있다. 어째서 이런 왜곡이 생겼는지 다만 놀러울 따름이다. 이것은 정상적인 심리상의 관점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노이로제와 같은 병적인 조건일 경우, 특히 소위 <강박신경증>의 병적인 조건 아래서는 이와 같은 일이 곧 잘 일어난다. 강박신경증의 경우에는 강렬한, 그러나 심리적 억압에 의해 무의식으로 되어 버린 감정이 사소하며 어리석은 정신활동으로 바뀌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대립하는 힘들은 이갇은 억압된 감정 표현을 극도로 미약하게 만들어 버리므로, 이 감정의 강도는 아주 하찮은 것으로 평가받기 쉽다. 그러나 이 미미한 표현행위를 관철시키는 수단인 강박적인 억압에서 실제의, 무의식에 뿌리박은, 의식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충동의 힘이 나타난다. 강박신경증의 경우에 그 사건에 대한 그런 종류의 연상은, 그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기록된 레오나르도의 장례비용의 계산서에서 잘 설명된다. 무의식 속에서 그는 여전히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어머니에 대해 성적으로 고착되어 있다. 나중에 시작된, 이 유아적 고착의 억압에 맞서려는 저항 때문에 일기 속에 어머니를 위해 특히 색다르고 훌륭한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타협책으로서 신경증적 충돌에서 생긴 것은 실제로 수행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 그런 연유로 계산서가 일기 속에 기입되었지만, 후세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되고 말았다.
장례비용 계산서에서 얻은 견해를 제자들에게 쓴 비용 계산서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모험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의 경우는 리비도적 충동의 근소한 부분이 왜곡된 표현을 강박적으로 만들어낸 일례일 것이다. 어머니와 또 어렸을 때의 자신의 미모를 꼭 닮은제자들은 그의 성적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의 본질을 지배하고 있는 성적 강박 관념이 그런 표현을 하게 한, 그리고 어머니에게 쓴 돈을 치근차근 상세히 기록하게 한 강박성은 이런 그의 발육부진의 갈등들을 교묘하게 누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일 정말 그렇다면, 실제로 레오나르도의 애정생활은 우리가 그 심리 전개상황을 밝힐 수 있었던 그 동성애의 유형에 속해 있을성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독수리 공상 속에 나오는 동성애적 상황도 그 뜻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주장해 온 바로 그 유형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어머니에 대한 성애적인 관계 때문에 나는 동성애자가 되었다.
4레오나르도의 독수리 공상이 여전히 우리의 시선을 붙들고 있다. 지나칠 정도로 명확히 성행위의 묘사를 상기시키는 말(<그리고 여러 번 그 꼬리로 내 입술을 쳤다>) 속에서 레오나르도는 모자 사이의 성적 관계의 강도를 강조하고 있다. 어머니의 동작과 입 언저리의 강조를 연결시킨 점으로부터 이 공상에 포함되어 있는 두번째의 기억을 밝히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우리는 이것을, 어머니는 내 입에 열렬한 키스를 무수히 했다라고 번역할 수가 있다. 이 공상은 젖을 빨린 일과, 어머니한데 키스 당한 일에 대한 기억으로 구성되어 있다.자연은 이 예술가에게 그 자신조차도 모르는 가장 신비로운 심적 충동을 작품의 창조로 표현하는 재능을 주었다. 그리고 그 작품들은, 이 예술가가 모르는 낯선 타인들을, 그들 자신이 어떻게 사로잡히는지를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로잡는다. 레오나르도 일생의 작품 가운데 어릴 때의 가장 강한 인상으로서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을 입증할 만한 작품은 하나도 없을까? 있다고 기대해도 좋을 것 갇다. 그렇지만 예술가가 삶에서 얻은 인상이 작품에 담겨지기 전까지 얼마나 심각한 변화를 거쳐야 하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특히 레오나르도의 경우에는 그런 증거의 확실성에 대한 요구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그립을 생각해 보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작품 속의 여자의 입술에 그린 매혹적이고도 수수께끼 갇은 그 유별난 미소를 상기하게 된다. 길게 잡아늘인, 활 모양의 입술 위에 나타나 있는 미소, 그것은 그의 작품의 특징이 되었으며 특히 레오나르도 풍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플로렌스 출신인 모나리자 델 지오콘도의 이국적 색채를 띤 아름다운 얼굴에서 볼 수 있는 이 미소는 보는 이들을 가장 강력하게 사로잡으며 혼란 속으로 몰아간다. 이 미소는 해석을 요구했고, 그에 따라 갖가지 해석이 내려졌지만, 어느 하나도 만족할 만한 것은 없었다. <모나리자가, 그녀를 한참동안 응시한 다음 그녀와 말하기 시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당황케 한지 거의 4세기가 되었다.>무터의 말을 빌려보자. <보는 사람을 특히 사로잡는 것은 이 미소의 마적인 매력이다. 유혹적으로 미소를 보내는 듯 하면서도 한편으로 넋없는 사람처럼 차갑게 공허 속을 응시하는 듯한 이 여자에 대해서 지금까지 무수한 시인과 작가들이 써 왔지만, 아무도 그 미소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으며 그녀의 생각을 해석하지 못했다. 풍경을 포함한 모든 것이 폭풍 전의 불안한 관능성으로 떨고 있는 것처럼 몽환적이며 비밀로 가득 차 있다.>모나리자의 미소 속에는 상이한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있는 듯하다는 생각이 몇몇 비평가의 주의를 끌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아름 다운 풀로렌스 여성의 표정 가운데에 여성의 애정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대립적 요소, 즉 정숙과 유혹, 헌신적인 부드러움과 무자비하게 요구하여 남자를 마치 물건처럼 사르는 관능성이 완벽하게 표현된 것으로 보려고 한다. 뮌츠도 그런 의견이다. <모나리자 지오콘도가 얼마나 불가사의한 매혹적인 수수께끼를 거의 4 세기 동안 그녀 앞으로 물려드는 찬탄자들에게 보여 왔는지 잘 알려져 있다. (피에르 드 코를레라는 가명 아래 신분을 감춘 예리한 필자의 글귀 를 빌린다면) 일찍이 어떤 예술가도 ‘이처럼 여성의 본질 그 자체를 표현하지 못했다. 부드러움과 요색(姚色), 수줍음과 은밀한 일락을, 초연한 마음과 성찰하는 머리, 자신의 빛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신중한 인격의 모든 신비 를 이 정도로 표현한 사람은 없다.'> 이탈리아인 안젤로 콘티는 루브르의 이 그립이 헷빛에 의해 생명이 부여되고 있다고 본다. <그녀는 의짓한 고요 속에서 미소짓고 있었다. 정복과 잔인이라는 여자의 본능 , 종족의 온 유전물 • 유혹과 술책에 대한 욕구 • 기만의 술법 • 잔혹한 의도 를 감춘 친절이 모든 것들이 나타났다가는 미소하는 베일 뒤로 차례로 사라지고, 그녀의 미소의 시정( 詩情 )이 혼연 녹아 들어갔다…… 선과 악 • 잔인과 자비 • 얌전함과 앙큼함을 품고서 그녀는 웃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아마 1503년부터 1507년까지, 즉 이미 50세를 넘어 두 번째로 플로렌스에 체재하는 동안 4년이나 걸려서 이 그림을 그렸다. 바자리의 기록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이 부인이 모델로 앉아 있을 동안 그녀를 즐겁게 하여 그녀의 얼굴에 미소를 잡아 두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썼다고 한다. 당시 그의 화필이 화포 위에 재현한 모든 우아한 아름다움은 오늘 전해져 있는 그립에는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동안 그것은 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그립이 레오나르도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것을 미완성이라면서 주문자에게 전하지 않고 프랑스로 가지고 갔는데, 거기서 그의 후원자 프란츠 1세가 루브르 미술관용으로 그 그림을 사들였다.모나리자의 표정의 수수께끼는 미해결인 채로 두자. 다만 그녀의미소가 지난 4세기 동안의 모든 관찰자에 못지 않게 예술가 자신을 강력하게 매혹했다는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에 주목하자. 이 매혹적인 미소는 그후 그의 모든 그립과 제자들의 그림에 거듭 나타나 있다.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는 초상화이므로, 우리들은 그가 그녀의 모습에 그녀 자신이 지니고 있지 않은 그처럼 두드러진 특징을 제멋대로 첨가했다고는 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이 미소를 모델에서 발견했으며, 그 매력에 아주 사로잡혀서 그후 자기의 공상에 의한 자유로운 창작작품에 이 미소를 부여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예컨데 콘스탄티노바는 다음과 갇이 이와 비슷한 의견을 말하고 있다. <모나리자 델 지오콘도의 초상화에 몰두하고 있던 오랜기간 동안 이 거장은 이 부인의 얼굴이 가전 섬세한 아름다움에 너무나 반한 나머지, 이 얼굴의 특징을――-특히 그 신비로운 미소와 기이한 시선을一一그후 그가 그리거나 또는 스케치한 모든 얼굴에 끌어들였다. 지오콘도 표정의 특징은 루브르에 있는 「세례자 요한」이라는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특징은 셋이 하나의 모습을 이루는 성 안나」라는 그립 속의 마리아의 얼굴 속에서 뚜렷하게 볼 수 있다>50)
그렇지만 실정은 전혀 달랐을런지도 모른다. 이 예술가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후 다시는 놓지 않았던 지오콘도의 미소가 지닌 매력을 더 깊이 근거지어야 할 필요성을 그의 전기작가들 중 몇몇이 느꼈다. 모나리자의 그림 속에 <인간이 문화를 가전 이래 겪은 온갖 사랑의 체험이 구현>된 것으로 보고, 또 <레오나르도의 작품 전체에서 늘 어떤 불행을 예고하는 것과 결부되어 있는 듯한 그 불가해한 미소>에 대해 매우 세밀하게 언급하고 있는 페이터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우리를 다른 길로 인도해 간다. <좌우간 이 그림은 초상화이다. 우리50) 페이터, 앞의 책 (독일어판, 1906, 157쪽.
는 이 그림이 어떻게 어릴 때부터 그의 꿈의 틀 속에 섞여 왔는지를 추적할 수가 있다 따라서 만일 어떤 뚜렷한 반증이 있다면 몰라도, 우리는 이것이야말로 그가 마침내 발견하여 구체화한 그의 이상적인 여인상이라고 믿고 싶다 .> 54)
헤르츠펠트가 레오나르도는 모나리자 속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쳤는데, 바로 그 때문에 그만큼 자기자신의 본질을 그립 ――- <그 그림의 특징은 전부터 신비로운 공감상태로 레오나르도의 마음 속에 놓여 있었다> -속에 담을 수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이 암시적인 견해들을 명백히 해보자. 레오나르도가 모나리자의 미소에 매혹된 까닭은 이 미소가 오랫동안 그의 마음 속에 참자고 있던 것, 다시 말하면 어떤 오래된 기억을 일깨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기억은 일단 그것이 되살아난 다음부터는 다시는 그를 놓지 않을 정도로 의미있는 것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그 기억에 새로운 표현을 부여해야만 했다. 페이터의 확언, 즉 모나리자와 같은 얼굴이 어떻게 유년기 이래로 그의 꿈의 틀 속에 섞여 있는가를 추적할 수 있다는 주장은 믿을 만한 것으로 보이며, 그 말 그대로 받아들일 만하다.바자리는 그의 최초의 예술적 시도로 r 웃고 있는 여자들의 머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아무것도 증명하려고 하지 않으므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이 대목은 독일어 번역에서는 한층 완전하게 되어 있다. <청년기에 그는 웃고 있는 여자의 머리 두셋을 진흙으로 만들어, 석고로 그 복제를 여러 개 만들었으며, 또 마치 거장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 같이 예쁜 어린이의 머리를 두세 개 만들었다.>이리하여 우리는 그의 예술활동이 두 가지 대상을 묘사하는 데에서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는데, 그 두 가지 대상은 이미 우리가 그의 독51) 콘스탄티노바, 앞의 책, 44쪽.
수리 공상을 분석하면서 결론지은 그 대상을 상기시킨다. 만일 예쁜 어린이의 머리가 유년기의 그 자신의 복제라면, 미소하고 있는 여인들은 그의 어머니인 카데리나를 되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신비로운 미소, 즉 그가 잃어버렸다가 플로렌스의 귀부인에게서 다시 발견했을 때 완전히 반해 버린 그 미소를 바로 그의 어머니가 지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할 수 있다.
시간적으로 모나리자에 이어 나온 레오나르도의 그림은 소위 「셋이 하나의 모습을 이루는 성 안나」, 즉 마리아와 어린 예수가 함께 있는 성 안나의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레오나르도 풍의 미소가 가장 아름답고 뚜렷하게 두 여인의 얼굴에 표현되어 있다. 레오나르도가 모나리자의 초상화보다 얼마나 일찍, 또는 늦게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제작기간이 둘다 수년이나 되었으므로 그가 동시에 두 그림에 몰두했다고 보아도 괜찮을 것 갇다. 만일 레오나르도가 모나리자의 특칭에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상에 의해 성 안나의 구도를 만들도록 자극되었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대와 완전히 일치하게 된다. 왜냐하면 지오콘도의 미소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그의 마음에 환기시켰다면, 우리는 그 미소가 우선 그로 하여금 모성을 찬미토록 하고, 플로렌스의 귀부인에게서 발견한 미소를 어머니한테 재현시키도록 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관심을 모나리자의 초상으로부터 이것에 못지 않게 아름다우며 지금도 역시 루브르에 있는 또 다른 그립으로 옮겨 갈 수 있다.딸과 손자를 거느린 성 안나는 이탈리아 미술에서는 좀처럼 다루어 지지 않는 소재다. 레오나르도의 묘사는 종래에 알려져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대단히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무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두세 명의 화가, 예컨데 한스 프리스, 형 홀바인, 지롤라모 다이 리브리는 안나를 마리아 옆에 앉히고 둘 사이에 어린이를 세우고 있다. 베를린에 있는 그림을 그린 야콥 코르넬리츠와 갇은 그밖의 화가들은 본래의 의미 그대로 「셋이 하나의 모습을 이루는 성 안나」를 그렸다. 즉 그들은 안나가 팔 안에 마리아의 작은 몸을 안고 그 마리아의 무릎 위에 어린 예수가 앉혀져 있는 것처럼 그렸던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경우에는, 마리아가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앞으로 굽혀 앉고 두 손으로 사내아이를 붙잡고 있는데, 그 아이는 새끼양과 놀고 있으며 그것을 좀 짓궂게 다루고 있는 것 같다. 할머니는 한 쪽의 노출된 팔을 허리에 대고 행복에 넘친 웃음을 머금은 채 둘을 내려다보고 있다. 인물의 배치는 확실히 자연스럽다고는 말할 수 없다. 두 여자의 입술에 감도는 미소는 분명히 모나리자의 초상에 나타난 미소와 동일 하지만, 그 섬뜩하고 수수께끼 같은 성격을 상실하고 있다. 여기서는 전정한 친밀감과 평온한 행복감이 표현되어 있다.
우리가 이 그림을 잠시 주시하고 있으면 훌연히 다음과 같이 느끼게 될 것이다. 레오나르도만이 독수리 공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만이 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이 그림 속에는 그의 유년기의 역사가 종합되어 있다. 이 그림의 세부적 요소들은 레오나르도의 극히 개인적인 생활인상을 참고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아버지의 집에는 친절한 계모 도나 알비에라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의 어머니, 즉 친할머니인 모나 루치아도 있었는데, 그녀는 할머니가 보통 그렇듯이 그에 대해 다정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런 환경이 그로 하여금 어머니와 할머니에 의해 보살핌을 받은 유년기의 묘사를 수월하게 했을 것이다. 이 그림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현저한 특징에는 더 중대한 의미가 있다. 마리아의 어머니인 동시에 어린 아이의 할머니인 성 안나는 나이가 꽤 들어 있었을 텐데도 __물론 성모 마리아보다 약간은 노숙하고 전지하게 그려져 있지만—一아직 아름다움이 채 가시지 않은 젊은 여인으로 그려져 있다. 요컨데 레오나르도는 어린 아이에게 두 어머니를 준 셈이다. 한 사람은 팔을 어린이에게 뻗고 있고 또 한 사람은 배경에 있다. 그리고 둘다 행복한 어머니의 복된 미소를 담고 있다. 그림에 나타난 이러한 특징은 여러 필자들의 주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예를 들면 무터는 레오나르도가 나이 든 모습이나, 주름 등을 그릴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안나도 빛나는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 설명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어머니와 딸이 같은 나이>임을 부정하는 의견을 취하고 있댜 그러나 성 안나가 훨씬 젊게 그려졌다는 인상은 그림에서 받은 것이지 결코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고안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아마 무터식의 설명으로써 충분할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유년기는 실제로 이 그림처럼 기이했다. 그는 두 어머니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그의 생모로 그가 3세에서 5세 사이에 생이별한 카데리나이고, 또 하나는 젊고도 다정한 계모로서 아버지의 아내인 도나 알비에라이다. 이러한 유년기의 사실과 위에서 언급한 어머니와 할머니의 존재를 합쳐 하나로 만듦으로써 「셋이 하나의 모습을 이루는 성 안나」의 구도가 그의 생각 속에 자리잡았다. 아이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어머니다운 모습의 여인-할머니 - 은 그 의모와 아이에 대한 공간관계에서 볼 때 생모 카데리나에 해당된다. 아마도 레오나르도는 이 불행한 여자가 전에는 남편을, 그리고 지금 또 아들마저 지체높은 경쟁자에게 부득이 양보해야만 했을 때에 느꼈던 질투를 성 안나의 행복한 미소로 부정하고 덮어 버린 것 같다.52)이리하여 우리는 모나리자 델 지오콘도의 미소가 어른으로서의 레오나르도에게 유년기 초엽의 기억을 환기시켰을 것이라는 예측을 그의 다른 작품에서 확인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이탈리아 화가들의 그림에 등장하는 마돈나와 기타의 고귀한 여자들은, 그리며, 탐구하며, 참고 견딜 운명을 타고난 훌륭한 아들을 세상사람들에게 선물로 바친 가없은 촌부 카테리나의 기묘하고도 행복한 미소와 다소곳이 옆으로 향한 머리를 보여 준다.모나리자의 얼굴 속에서 이 미소가 가전 두 가지 의미, 즉 끝 없는애정에 대한 약속과 불행을 예고하는 위협(페이터의 말을 따름, 『르네상스』,135쪽)을 재현하는 데에 성공했을 때, 레오나르도는 가장 어렸을 때의 기억의 내용에도 충실했던 셈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애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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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이 그림에서 안나의 모습과 마리아의 모습 을 때어 보려고 할 때 그것이 손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두 사람은 서두르게 만들어전 꿈 속의 인물처럼 서로 융합되어 있으므로, 어디서 안나가 끝나고 어디서 마리아가 시작하는지를 말하기 어려운 곳이 여러 군데 있다. 이처럼 바평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는 실수나 구조의 결함으로 보이는 것도, 숨은 뜻을 환기시키는 정신분석적 견지에서는 의미있는 것이 된다. 그의 어릴 때의 두 어머니는 이 예술가에게 있어서는 한 인물로 융합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루브르의 『셋이 하나의 모습을 이루는 성 안나』와 그와 동일한 소재를 다른 구도로 표시하고 있는 런던의 유명한 밑그림 <제3도>을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런던의 것에서는 두 여인상이 더 밀접히 융합되어 있어 그 경계가 한층 더 불분명하므로 도저히 해석할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때문에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은 <마치 두 사람의 머리는셋이 하나의 모습을 이루는 성 안나
한 몸에서 생긴 것 같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대개의 평자들은 이 런던의 밀그림을 루브르 이전의 것으로 보는 점에서는 일치해 있으며, 그 성립기 를 레오나르도가 처음으로 밀라노에 체재했던 때(1500 년 이전)로 추정하고 있다. 아돌프 로젠베르크는 1898년의 논문에서 이와 반대로 이 밑그림의 구도상 동일한 제재가 후기에, 그리고 더 성공적으로 형상화되었다고 보고, 안톤 슈프링어의 의견을 따라 이것을 모나리자 이 후의 작품으로 치고 있다. 밑그림 <제3도> 쪽이 훨씬 오래된 작품일 것이라는 의견은 우리 논지와 완전히 일치한다 . 사실 루브르의 그림이 어떻게 이 밑그림에서 생겼는가를 상상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지만 , 그 반대의 경우는 도저히 생각될 수 없다. 밑그림 <제3도>의 구도에서 출발한 레오나르도는 유년시절의 기억과 일치하는 두 여자의 꿈과 같은 융합을 포기하고 두 머리 를 공간적으로 서로 분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것은 마리아의 머리와 상체를 어머니로부터 때어서 아랫쪽으로 구부리게 함으로써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린 예수를 무릎에서 내려 땅에 놓아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어린 요한을 위한 여지가 없어지므로, 그는 어린 양으로 대치되었다.루브르의 그림에 관해 오스카 피스터가 주목할 만한 발견을 했는데, 비록 이 발견을 무조건 승인하려는 생각이 들진 않더라도 결코 그것에 무관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독특한 모양을 가진, 그리고 분간하기 어려운 마리아의 옷차림 속에서 독수리의 윤곽을 발견했고 이를 <무의식적 그림맞추기>라고 해석했다.<예술가의 어머니를 나타낸 그림 속에서 아주 분명하게 독수리, 즉 모성의 상징을 볼 수 있다. 앞쪽 여성의 허리 둘레에서 볼 수 있는 파란 옷자락, 그리고 넓적다리와 오른편 무릎 쪽으로 퍼져 있는 파란 옷자락 속에서 매우 특징적인 독수리의 머리와 목, 그리고 날카롭게 구부러져 있는 몸뚱이의 끝머리를 볼 수 있다. 내가 제시한 이 발견을 본 사람 가운데서 그 누구도 이 그림맞추기의 명백한 존재를 부인하지 못했다>(피스터(1913), 147쪽). 「정상적 인 사람에 있어서의 음어, 암호문, 무의식의 그림맞추기」<정신분석 • 정신병 리학 연구연감>, 제5권 (1913년).지금쯤이면 독자는 피스터가 지적한 독수리의 윤곽을 찾기 위해 이 책에 첨부한 삽화를 자세하게 살피는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 가장자리가 그림맞추기의 윤곽을 표시하고 있는 파란 옷은 복제화에서는 밝은 회색을 띠고 그 이의의 보다 어두운 색의 옷으로부터 도드라져 있다<제2도>.피스터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어디까지가 그림맞추기인가 하는 점이다. 그 주변보다 뚜럿하게 도드라져 있는 이 옷을 그 중심부터 더듬어가면, 우리는 그것이 한편에서는 발 쪽으로 내려가고, 다른 편에서는 그녀의 어깨와 어린 아이 쪽으로 올라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전자는 그 성질상 대략 독수리의 날개와 꼬리이며, 후자는 뾰죽한 배와――특히 우리가 날개의 윤곽과 비슷한 방사형의 선에 주의한다면 ―새의 펼쳐진 꼬리가 된다. 이 꼬리의 오른 편 끝은 ‘운명적으로 의미심장한 레오나르도의 유년기의 공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린 아이의 입, 즉 레오나르도의 입쪽으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나서 피스터는 계속해서 이 해석을 더욱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그 경우 생기는 난점들을 거론하고 있다.그에게 숙명이 되어 그의 운명과 그를 기다리고 있던 고난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의 독수리 공상이 암시하고 있는 애무의 격렬함은 너무나 당연했다. 버림받은 불쌍한 어머니는 일찍이 맛보았던 애정의 기억과 새로운 애정에 대한 동경을 모두 모성애 속에 고스란히 쏟아넣었음에 틀림없다. 남편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 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이 그를 귀여워해 줄 아버지를 갖지 못한데 대한 보상 또한 그녀가 바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욕구불만에 처한 모든 어머니처럼 어린 아들을 남편 대신으로 생각했고, 그 아들의 성적 욕구를 너무 일찍 성숙시킴으로써 오히려 아들로부터 남성의 일부분을 뺏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양육하며 보살피는 젖먹이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은 성장하고 있는 소년에 대한 애정보다도 훨씬 깊다. 그 사랑은 모든 심리적 소원뿐만이 아니라 모든 육체적 욕구도 충족시켜 주는 애정관계, 즉 완전한 만족을 주는 애정관계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행복의 한 형태를 나타낸다면, 이 행복은 다분히 다음과 같은 가능성, 즉 이미 일찍부터 억압되었고 도착적이라고 불리우게 될 소망충동을 조금도 비난하지 않고서 만족시켜주는 가능성에서 비롯한다. 가장 행복한 젊은 부부의 경우에도 아버지는 아들, 특히 어린 아들이 그의 적수라는 것을 감지한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무의식에 깊숙히 뿌리박고 있는, 총애받고 있는 자에 대한 반감이 생긴다.
레오나르도가 생애의 절정기에, 일찍이 자기를 에무할 때 어머니의 입가에 감돌고 있던 행복과 황홀감에 가득 찬 미소를 다시 만났을 때에, 그에게는 이미 두 번 다시 그처럼 부드러운 여자의 입술을 담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화가가 되어 있었으므로, 이 미소를 화필로 그려내려고 매우 고심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그렸거나 또는 그가 지도하여 제자들에게 그리게 했거나 간에 그의 모든 그림에, 즉 레다와 세례자 요한에게 , 또 바커스에게 이 미소를 부여했다. 세례자 요한과 바커스는 같은 유형의 변형이다. <레오나르도는 성경 속의 메뚜기를 먹는 사나이를 변형시켜 입술에 신비로운 미소를 담고 미끈한 두 다리를 포개고 앉아서 도취시키는 눈으로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바커스와 아폴로로 만들었다>고 무터는 말하고 있다(1909, 1권, 314쪽). 이 그림들에는 그 비밀 속으로 아무도 감히 들어가 보려 하지 않는 신비가 숨쉬고 있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그것을 레오나르도의 초기 작품과 관련시켜 보는 것이 고작이다. 이 인물들도 역시 남녀양성적이지만 그것은 이미 독수리 공상의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들은 여성다운 몸매와 부드러움을 갖춘 아름다운 청년들이다. 그들은 눈을 내리깔지 않고 마치 남들에게는 함구해야 할 큰 행복을 알고나 있는 듯이 신비적인 승리감을 가지고 응시하고 있다. 잘 알려진 그 황홀한 미소는 그것이 애정의 비밀임을 예감하게 한다. 레오나르도는 남성적 존재와 여성적 존재를 그처럼 행복하게 결합시켜, 어머니한테 환멸감을 느낀 어린 아이의 소망총족을 나타냄으로써, 이 인물들을 통해 자기 자신의 애정생활의 불행을 부정하고, 또한 그것을 예술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고 볼 수있다.5
레오나르도의 일기 속에 있는 메모중 그 중요한 내용 때문에 그리고 형식상의 사소한 실수 때문에 독자의 주의를 끄는 한 기록이 있다. 1504년 7월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1504년 7월 9일 수요일 7시에 포테스타궁 공증인인 아버지 피에로 다빈치가 별세하셨다 . 때는 7시, 향년 80세, 아들 열과 딸 둘을 남기시고서.이 메모는 레오나르도의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것이다. 형식상의 사소한 실수라는 것은 <때는 7시>라는 말이 두 번이나 반복되어 나오는데, 레오나르도가 문장 처음에 이미 써넣었다는 것을 문장 마지막에서 잊어 버린 것 같이 보인다. 아주 사소한 점이어서 정신분석가가 아니라면 문제삼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사람들은 이런 사소한 점까지는 주목하지 않을 것이며, 또 설사 그것을 발견했더라도, 이런 것은 멍하니 있을 때라든가 흥분상태에서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그 이상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다.그러나 정신분석가의 생각은 다르다. 무엇이든지 어떤 작은 것에도 숨겨진 정신 과정이 밖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망각이나 반복은 의미심장한 것이며 평소 숨겨전 행동을 밖으로 표출시키는 것은 <멍한 상태>임을 이미 오래 전에 배워왔던 것이다.그래서 우리는 이 메모도 카테리나의 장례비 계산서와 제자들에게 쓴 비용계산서와 마찬가지로, 레오나르도가 정동(情動)의 억압에 실패하여 오랫동안 은폐되어 있던 것이 강압적으로 왜곡된 표현을 취하게 된 경우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 형식도 서로 유사하고, 똑같이 꼼꼼하고, 똑같이 숫자를 강조하고 있다.53)우리는 이런 반복을 무의식의 끈질김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정동적53) 이 메모에서 레오나르도가 범한 더 큰 실수는 묵인하기로 하자. 그는 77세의 아버지의 나이를 80세로 적었다.
인 강조를 암시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다. 이를테면 단테의 <천상편> 중에서 지상의 정당하지 않은 대리자에 대하여 성 베드로가 격분하며 했던 말을 상기해 보라.
신의 아들이 오심으로써 비어 있는 나의 권좌.그 권좌를, 나의 그 권좌를 이제 지상에서 차지한 그가나의 묘지를 시궁창이 되게 하였도다.제27곡 22-25 행만약 레오나르도에게 감정장애 Affekthemmung가 없었으면 일기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을 것이다. 오늘 7시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세르피에로 다빈치, 불쌍한 아버지! 그러나 무의식의 끈질김이 죽음의 기록중 가장 사소한 것, 즉 사망시간의 자리를 비집고 드러나, 그때문에 이 기사에는 비장함이 없어지고, 더욱이 우리로 하여금 여기에 무엇인가가 감춰지고 억압되어 있음을 눈치채도록 한다.대대로 공증인의 자손이며, 그 자신도 공증인이었던 세르 피에로 다빈치는 매우 활력 넘치는 사람이며, 명성과 부귀를 얻었다. 그는 네번 결혼했다. 첫번째 아내와 두번째 아내는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었다. 레오나르도가 24세로 이미 오래 전에 아버지의 집을 나와 스승 베로키오의 작업실로 옮겼을 때인 1476년에야 비로소 아버지는 간신히 셋째 아내로부터 호적상의 정식 아들을 얻었다. 그는 넷째 아내, 바꿔 말하면 마지막으로 결혼한 아내 ――그는 이때 이미 오십세였다 와의 사이에 아홉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더 낳았다54)54) 레오나르도는 그 일기 속에서 형제의 수도 잘못 적은 모양인데, 이런 오기는 일기의 정확성에 비추어 불 때 눈에 띄는 대비를 이룬다.
아버지도 레오나르도의 성심리 발전에서 큰 구실을 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도 단지 소년 레오나르도의 유년기의 초기에는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부정적 구실뿐만 아니라, 유년기 후기에는 그가 함께 있음으로 해서 직접적으로도 큰 구실을 했을 것이다. 어린이로서 어머니를 연모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 대신 들어앉으려고 하며, 공상 속에서 자기를 아버지와 동일시하며, 또 나중에는 이 소망을 극복하는 것을 자기의 인생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다. 레오나르도가 채 다섯 살도 안 되어 할아버지 집에 들어갔을 때, 젊은 계모인 알비에라는 확실히 그의 느낌에 생모의 자리를 대신했으며, 또 그는 아버지와는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쟁관계로 된다. 두루 알려진 바와 같이, 동성애자가 되느냐 않느냐는 사춘기 무렵에 이르러 비로소 결정된다. 동성애자가 되기로 결정했을 때 아버지와의 동일시는 그의 성생활에서는 의미를 상실했지만, 성의 영역이 아닌 다른 활동영역에서도 여전히 계속되어 갔다. 바자리의 말에 의하면 <그는 거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일거리도 좀체 없었다>고 하는데도, 사치와 화려한 옷을 좋아했으며 많은 하인과 말을 두었다고 한다. 이런 취미가 그의 미적 감각 때문이었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이 취미안에는 아버지를 모방하여 능가하려는 강박감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아버지는 가난한 처녀농부에 비해서는 지체 높은 양반이었다. 때문에 그 아들 내면에는 이 지체 높은 양반 노릇을 해 보이며, 아버지를 능가해 보려는 충동을, 참다운 기품이란 어떤 것인가를 아버지에게 보여 주겠다는 강박감이 항상 남아 있었다.
창조하는 예술가는 일반적으로 자신을 자기 작품에 대해 아버지로서 느낀다는 것은 분명하다. 레오나르도가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한 것은 화가로서 그의 작품창작에 숙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그것들을 창조했지만, 일찌기 그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염두에 두지않았던 것처럼, 자신의 작품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 이후의 아버지의 관심은 이미 이 강박감을 없애 주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강박감은 실로 유년 초기에 그에게 보인 인상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는 억압된 것은 그 시기 이후의 어떤 경험에 의해서도 수정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훨씬 이후의 시대에도 그랬듯이 모든 예술가가 지체 높은 주인을, 즉 후견인을, 그에게 일거리를 주며 그의 운명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후견인을 필요로 했다. 레오나르도의 후견인은 야망 있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며, 의교적으로는 민첩한 그러나 변덕스럽고도 신뢰감 없는 로도비코 스포르차 , 일명 모로공이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 궁정에서 일생의 황금기를 보냈다. 그에게 고용되어 있는 동안 레오나르도는 가장 자유롭게 창조력을 펼쳐 나갔다. 최후의 만찬,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기마입상이 이를 증명해 준다. 모로공, 스포르차가 파국에 이르기 전에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를 떠났고, 모로공은 결국 포로로 잡혀 프랑스에서 옥사하였다. 그의 후견인의 운명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 레오나르도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공은 자신의 영토, 재산, 자유를 잃었다. 그가 착수했던 일들은 하나같이 완성되지 않았다 .> 55) 레오나르도가 자신이 후세사람에게 받은 비난을 그 후견인에게 돌리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며, 분명히 그냥 지나칠 문제는 아니다. 마치 그 자신이 작품을 미완성인 채로 포기한 책임을 아버지 후손 중의 한 사람에게 전가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사실 그는 모로공에 대해서 부당한 말을 하지는 않았다.아버지의 모방이 예술가인 그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기는 하였지만, 아버지에 대한 거부는 아마도 위대한 학자로서의 학문적 업적을 위한 유아적인 전제조건이었을 것이다. 메레주코프스키의 비유에 따르면, 그는 남들이 아직 자고 있을 동안에 어둠 속에서 너무 일찍 깨어 있55) 자이트리츠, 앞의 책, 제2권, 270쪽
던 사람에 비교될 수 있다. 56) 그 정당성이 인정되자면 장차 자유로운 연구가 뒤따라야 하겠지만, 우선 다음과 같은 주장을 시도할 수 있겠다. <논쟁에서 권위라는 방패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이성(理性)이 아니라 기억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 57) 이리하여 그는 근대 최초의 자연과학 탐구자가 되었으며, 또 희랍시대 이래로 오로지 관찰과 자기의 판단만을 의지하면서 자연의 비밀을 탐사하려고 했던 그의 용기야 말로 풍성한 발견과 예언의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권위는 경시 되어야 하며 <선조>를 모방하는 것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모든 전리의 원천은 자연탐구에 있음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면, 그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승화단계에서, 일찌기 경이로워 하며 세계를 응시했던 어린 그의 머리에 밀려오던 그 관심을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문이 지닌 추상성을 거꾸로 다시 구체적인 개인의 체험으로 고쳐 보면, 선조와 권위는 요컨데 아버지였으며, 자연은 그를 길러 준 다정하고 온화한 어머니였다. 대개의 어린이의 경우에는 예나 지금이나 어떤 권위를 뒷받침으로 삼으려는 욕구가 너무 강하므로, 만약 이 권위가 위협받으면 그들의 세계는 혼들리기 시작하겠지만, 레오나르도만은 그 뒷받침 없이도 잘 견디어 나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만일 그가 인생의 처음 몇 년 동안 아버지를 체념하도록 배우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이 뒷받침 없이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 후년기의 대담하고도 독자적인 학문연구는, 아버지의 제지를 받지 않은 유아적인 성탐구를 전제로 삼은 것이었으며, 성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이루어전 성탐구였다.
만일 누군가가 레오나르도처럼 유년 초기에 아버지한테 핍박받지 않아 탐구할 때 일찌감치 권위의 족쇄를 내던졌는데, 바로 그 사람이56) 메레주코프스키, 앞의 책(각주 17(1903)), 348쪽.
57) 솔미 , 앞의 책 (1910), 13쪽일평생 신앙인으로 남아 있어 종교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이보다 더 우리 기대에 어긋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정신분석은 <아버지 컴플레스>와 신앙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가르쳐 주었으며, 또한 인격화된 신은 심리적으로 숭고해진 아버지이며, 아버지와 다름없으며 권위가 무너지면 그 즉시 젊은이들이 신앙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날마다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부모 컴플렉스 Elternkomplex속에서 종교의 필요성의 근원을 인식하게 된다. 전능한 동시에 공정한 신과 선한 자연은 유년기에 있어서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관념이 재정립된 것이라기보다는 부모가 엄청나게 승화된 것이다. 신앙이란 생물학적으로는 오랫동안 계속되는 어린이의 의지할 데 없는 상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태에서 생겨나며, 인간이 장성해서 인생의 거대한 힘에 부딪쳐 자기가 정말 내버려지고 약한 자임을 깨달을 때, 현재의 그런 의지할 데 없는 처지를 어린 시절과 똑같이 느낀다. 또 그 전의 유년기에 자신을 보호해 주었던 힘들을 퇴행적으로 갱신하여 그 절망감을 부정하려고 한다. 신앙인은 노이로제에 걸리지 않는다고 종교는 확언하고 있는데, 이 신경증적 질병에 대한 방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즉 신앙인은 종교에 의해, 개인의 경우이건 전인류의 경우이건 죄의식이 따라다니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제거되어 있으며, 비신앙인 혼자 이 과제와 맞붙어 싸워야 하는데, 신앙인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경우는 종교적인 신앙에 관한 이 견해의 반증이 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에게 무신앙의 또는 당시에는 동일한 뜻을 지니고 있던 이단의 죄를 덮어씌우려는 목소리는 그의 생존시에도 이미 높았으며, 또 바자리가 처음 쓴 레오나르도 전기 가운데도 그것이 명백히 지적되어 있다 .58) 그런데 바자리는 1568년의 제2판에서는 그 부58) 바자리, 앞의 책(1550).
분을 지웠다. 종교적으로 말썽이 되어 있던 그 당시의 문제되는 표현에 대하여, 레오나르도가 왜 예수교에 대한 자기 태도를 그의 수기 속에서조차 바로 언급하기를 삼갔는가는 쉽게 이해가 간다. 자연탐구자인 그는 성경의 천지창조설 따위는 거들떠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는 노아의 홍수의 가능성을 부정하였으며, 또한 지질학적으로는 지구의 나이를 현대인과 마찬가지로 거침 없이 수십 만 년이라고 계산해 냈다. 59)
그의 <예언>에는 틀림없이 예수교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 말이 더러 있다 60). 예컨데 「기도하는 성자들의 그림」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듣지 않고, 눈은 떠 있으나 아무것도 보지 않는 자와 말할 것이다. 그 사람들은 그런 자에게 말을 건넬 것이며, 아무 대답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눈먼 자를 위해 불을 켤 것이다.>또는 「수난 금요일에 울린 기도에 관해」61) <동방에서 죽은 오직 하나뿐인 남자의 죽음 때문에 유럽의 모든 나라의 백성들이 눈물을 홀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일반적으로 레오나르도의 예술을 평가하기로는, 그는 성자들의 형상이 갖고 있는 교회와의 관계를 마저 끊고, 위대하고도 아름다운 인간적인 감수성을 그 형상 안에 표현하기 위해 그 성자들을 인간의 세계로 끌어내렸다고 한다. 무터는 그를 찬양하여, 그가 데카당의 기분을 극복하고서 관능성과 생을 향락할 권리를 인간에게 회복시켜 주었다고 말하였다. 위대한 자연의 수수께끼를 규명하는 데 몰두하는 레오나르도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는 그의 수기에는 이 위대한 비밀들의 궁59) 뮌츠, 앞의 책, 292쪽 이하.
60) 헤르츠펠트, 앞의 책, 292쪽.61) 같은 책, 297쪽.극적인 근원인 창조자에 대한 경모의 구절은 있지만, 그가 이 신의 권능과 개인적으로 확고하게 연관되기를 원했다는 구절은 없다. 만년의 깊은 지혜가 기록된 글에서는 <필연>이라는 자연법칙 밑에 있는 인간, 그리고 신의 호의 내지는 은총으로 위로받기를 기대하지 않는 인간의 체념이 풍기고 있다. 레오나르도가 교조적인 종교도, 인격적인 종교도 극복하였으며, 자연탐구적인 연구를 함으로써 믿음이 강한 기독교인의 세계관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에는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유년기에 레오나르도의 최초의 탐구 역시 성문제들에만 집중되어 있었다는 가설은 앞서 말한 어렸을 때의 정신적 생활의 발전에 관한 우리의 견해에서 볼 때 인정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더 선명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면서, 그의 탐구충동을 독수리 공상에 결부시켜, 새의 비상이라는 문제를 특별한 운명의 사슬로 인해 자기에게 부가된 문제의 하나로서 강조한다. 그의 기록 속에 새의 비상을 다루고 있는 예언처럼 들리는 퍽 애매한 대목이 있는데, 이것은 그가 비행기술을 스스로 모방해 보려는 소원에 얼마나 들뜬 관심을 가지고 집착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가장 훌륭히 증명하고 있다. <그 큰 새는 거대한 백조의 등을 떠나 비로소 날기 시작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해주고, 모든 책들을 그의 명성으로 가득 채울 것이며, 그가 태어난 새둥지에는 영원한 영광이 것들 것이다 >.62) 아마 그는 자기가 언젠가는 날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소망을 충족시켜 주는 꿈의 체험을 통해 이 소망의 충족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행복을 기대하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그런데 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비상을 꿈꿀까? 이 접에 관해서 정신분석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비상 또는 새는 다른 소망의 위장62) 같은 책, 32쪽. <거대한 백조>는 피렌체 근처의 언덕인 몬테 세세로 Monte Cecero를 뜻함.
에 지나지 않으며, 그리고 그 소망을 인식하려면 언어적, 전문적 지식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꼬치꼬치 캐묻는 어린이에게 황새 같은 큰 새가 아기를 날라 온다고 얘기해 주거나, 고대인이 음경을 그릴 때 날개가 달려 있는 것으로 그리거나, 또 남성의 성행위를 독일어로는 가장 보편적으로 새 Vogel의 동사형 <교미하다 vogeln> 라고 하며, 이탈리아어에서는 남성기를 직접 새 <우첼로 ucello> 라고 말하고 있음은 모두 어떤 관련의 작은 단편에 불과하며, 그 관련은 날고 싶다는 소망이 꿈에서는 성행위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동경에 지나지 않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요컨데, 이것은 초기 유아기의 소망이다. 성인이 되어서 유년기를 생각해 보면 유년기는 행복했던 시대, 순간을 기뻐하며 아무런 소원도 없이 미래를 바라보던 시기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어른들은 어린이를 부러워한다. 그렇지만 만일 어린이들 자신이 아직 장성하기 전에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발표할 수가 있었다면, 그들은 아마 그와는 전혀 다르게 말할 것이다. 유년기는 우리가 왜곡하여 회고하는 것처럼 행복한 목가적인 시기가 아닌 모양이다. 오히려 어린이는 자라서 어른과 똑같이 행동하려는 유일한 소망으로 유년기가 계속되는 동안 계속 자국된다. 이 어린이의 소망이 온갖 유희를 충동질한다. 어린이들이 성적 탐구의 과정에서 그들에게는 그것을 아는 것도 행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는 무엇인가 놀라운 일을 어른들은 수수께끼에 싸인 그러나 매우 중요한 곳에서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면, 그들의 마음은 그 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격렬한 소망으로 자극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비행의 형식으로 꿈을 꾸거나, 또는 후년의 비행이라는 소망으로 위장시킬 준비를 한다. 이런 까닭으로, 우리 시대에 이르러 드디어 그 목적을 달성한 비행은 애당초는 유아의 성욕에 뿌리를 박고 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 자신은 비행의 문제에 어릴 적부터 특별한 개인적인 관계를 느끼고 있었다고 고백합으로써 그의 유년기의 탐구가 성적인 것에 돌려져 있었음을 확증하는 셈이 된다 . 현대의 유아연구의 결과로 우리는 그렇게 추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하나의 문제만은 적어도 나중에 그를 성으로부터 이탈시킨 강박성을 모면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완전한 지적 성숙의 시기까지 계속해 그는 의미만 약간 변경했을 뿐 이 동일한 문제에 늘 흥미를 잃지 않아 왔다. 그러므로 그가 원했던 기술 Kunst은 일차적인 성적 의미에서도, 기계적인 뜻에서도 성공하지 못하고, 둘 다 그에게는 좌절된 소망으로 끝났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위대한 레오나르도는 일평생 여러 점에서 어린애 같았다. 위대한 사람은 모두 무엇인가 유아적인 것을 평생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는 흔히 말한다. 그는 성인이 되어서도 노는 것을 좋아했으며 , 또 그때문에 당대의 사람들한테 괴상하고, 이해하기 어러운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는 궁정의 축제와 성대한 향응에 초대를 받았을 때, 늘 매우 정교한 기계장난감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거장이 그 따위 시시한 일에 정력을 소비했다고는 보고 싶지는 않지만, 당자는 오히려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즐거웠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바자리에 의하면 그는 부탁을 받지 않고서도 그런 것을 즐겨 만들었다는 것이다. <거기(로마)에서 그는 초를 뭉쳐, 그것이 굳기 전에 속이 텅 빈 훌륭한 동물의 모양을 만들었다. 공기를 불어넣으면 그것은 날게 되고, 속의 공기가 빠지면 땅에 떨어졌다. 또 그는 벨베데레의 포도재배자가 발견한 퍽 진기한 도마뱀에다 다른 도마뱀에서 벗긴 가죽으로 날개를 달고, 그 날개를 수은으로 채웠다. 그래서 도마뱀이 걸어가면 날개도 따라서 움직이고 펼쳐졌다. 그리고 그는 이 날개에 눈, 수염, 뿔을 만들어 주고, 그 도마뱀을 길들여 상자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어 친구들을 혼비백산시켰다.>63) 이런 장난은 종종 내용이 어려운 그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에63) 바자리, 앞의 책 (독일어 판, 1843), 39쪽.
쓰였다. <그는 종종 양의 창자를 깨끗이 씻은 다음, 뭉쳐서 손 안에 쥘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만들었다. 이것을 그는 큰 방으로 들여와서 옆방에 있는 대장간의 풀무를 갖다 놓고, 양의 창자를 그것에 꼭 고정시키고서 공기를 불어 넣었다. 창자는 방안 가득이 부풀어서, 사람들은 구석으로 도망쳐야 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창자껍질이 점점 두명하게 되며 공기로 채워지는가를 보여 주고, 처음에는 좁은 자리밖에 차지하지 않았던 창자가 점점 넓은 공간으로 퍼져감을 보이면서, 그는 이것을 천재에 비유했다.>64) 그의 우화와 수수께끼를 읽으면 천진스런 은폐와 교묘한 변장에 대한 이와 같은 장난의 기쁨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후자는 <예언>의 형식으로 되고, 거의 전부 심원한 뜻을 가졌으나, 놀랄 만치 기지가 결여되어 있었다.
레오나르도가 그의 공상에 허용한 놀이와 비약은 몇몇 경우에 이 성격을 오해한 그의 전기작가들을 고약한 오류에 빠지게 만들었다. 예컨대 밀라노에 있는 레오나르도의 원고에는 <시리아의 디오다리오, 바빌로니아의 성스러운 왕>에게 보내는 초고가 있다. 여기에서 레오나르도는 어떤 일을 하기 위해 동방의 이 지방으로 파견된 기사로 자기를 소개하고, 게으르다는 비난에 대해 변명하고 여기에 여러 도시와 산들의 지리학적인 기록을 첨가하고, 끝으로 그의 체류중 그곳에서 일어난 큰 자연현상에 대해 자세히 썼다.65)그런데 1883년에 리히터는 이 원고에서 레오나르도가 실제로 이집트의 왕을 위해 이 답사여행을 했으며, 동방에서는 모하메드교를 신봉하기조차 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이 체류는 1483년 이전, 따라서 밀라노 공의 궁정으로 이사하기 이전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그64) 같은 책, 39쪽.
65) 이 편지들과 이것에 관계 있는 것들에 관해서는 뮌츠의 앞의 책, 82쪽 이하, 편지와 그에 뒤따르는 수기의 본문은 헤르츠펠트 앞의 책, 223쪽 이하를 참조.러나 다른 전기작가들은 소위 레오나르도의 동방여행은 실제는 이 젊은 예술가가 자기 자신의 재미를 위해 만들어 낸 상상의 산물이며, 이 상상 속에서 아마 그는 세상을 보고, 모험을 체험하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아카데미아 빈치아나 academia vinciana」도 아마 이런 공상의 하나일 것이다. 아카데미아의 이름이 붙은 대여섯의 매우 정교하게 그려전 그림이 있어, 그 때문에 그런 것이 실재한 줄 가정했던 모양이다. 바자리는 이 그림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으나, 아카데미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66)66) <또한 그는 실타래그림을 그리면서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실의 한 끝에서 다른 끝을 쫓아가다 보면, 나중에는 완전한 원형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식의 매우 복잡하고 아름다운 동판 조각도 만들었는데, 그 복판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있다. ‘레오나르두스 빈치 아카데미아'>, 바자리, 앞의 책, 8쪽.
레오나르도의 놀이충동이 성년기에는 사라지고, 그것 또한 그의 인격의 최종적이며 가장 높은 단계를 뜻한 그의 연구활동으로 흡수되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그 놀이충동이 오래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훗날에는 다시 얻지 못한 최상의 성애적 행복을 유년기에 맛본 사람의 그 유년기로부터의 이탈과정이 얼마나 서서히 이루어지는가 하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이다.
6현대의 독자들이 모든 병적학 Pathographie을 몰취미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숨기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독자들의 이러한 부정적 생각은, 위대한 인물을 병리기술학적으로 다루는 경우 그의 중요성과 업적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는 비난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다른 평범한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되는 것들을 위대한 인물에게서 연구하는 것은 쓸모없는 경솔한 짓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부당하다는 것은 분명하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것이 핑계와 은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병리기술학은 결코 위대한 인간의 업적을 이해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처럼 거부하는 태도의 실제 동기는 다른 데 있다. 전기작가들이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그들의 주인공에 고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그 실제 동기를 발견할 수 있다. 전기작가들이 그 주인공을 그들의 연구대상으로 고른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개인적인 정서생활에 기초를 둔 여러 이유때문에 처음부터 그에게 특별한 애착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이상화작업에 몰두하는데, 이는 어릴 때 가졌던 아버지의 이상상을 주인공 속에 새로이 부활시키는 방식, 즉 그 위대한 주인공을 그들의 유아기적 모범의 대열에 편입시키려는 형태를 취한다. 작가들은 이러한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주인공의 의모에서 나타나는 개인적인 특성을 없애고, 내적이나 의적인 저항으로 점철된 생의 두쟁의 혼적을 다듬으며, 인간적인 홈 내지 불완전함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도록 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우리가 친밀감을 가질 수 있는 인간대신 냉정하고 근접하기 어려운 이상적인 인간상을 만들어 낸다. 그들이 이런 방식으로 작업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전실은 환상의 희생물이 되고, 그들의 유아기적 공상때문에 인간성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매력적인 비밀을 파헤칠 기회가 상실되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자신도 전실을 사랑하며 지식욕에 불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본성에서 드러나는 사소한 특색과 수수께끼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심적이고 지적인 발전의 조건들은 찾아 내고자 하는 시도를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를 대상으로 하여 배우면서도, 그를 존경할 것이다. 그가 유년기를 거치면서 감내해야 했던 희생을 연구하여 그에게 불행의 비극적 낙인을 찍은 요인들을 모았는데, 이것이 그의 위대성을 손상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레오나르도를 노이로제 환자나, 어색한 표현이지만, <신경병자 NervenkranKen>로 평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병리학 분야에서 얻은 관점을 레오나르도에게 적용하려고 한다며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은, 우리가 이미 포기한 편견에 아직도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미 건강과 병, 정상과 이상이 정확하게 구별된다거나, 신경증적인 특징이 일반적인 열등성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고 있다. 신경증적인 증상들은 인간이 어린아이에서 문화인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수행해야 할 다소의 억압작업을 위한 대체물이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대체물을 만들어 내며, 단지 그 수효나 강도, 배분방식만이 병이라는 것의 실제적인 개념과 기질적인 열등성에 대한 추론을 정당화해 준다. 레오나르도의 성격에서 볼 수 있는 미미한 징후에서 판단해 볼 때, 우리는 그가 강박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노이로제의 한 유형과 비슷하다고 판단할 수 있으며, 그의 연구태도가 노이로제 환자가 꼬치꼬치캐는 태도와 비슷하고 그의 억제행위가 노이로제 환자의 의지상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연구목표는 레오나르도의 성생활과 예술생활에 나타나는 억제행위를 해명하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그의 심적 발전과정으로부터 알아낸 것들을 이 목표를 위해 총괄해 볼 수 있다.그의 유전적인 관계들은 알 수 없다. 이와 달리 그의 유년기의 우연한 상황들이 그에게 끼친 심각한 영향은 알 수 있다. 사생아였던 그는 5살까지는 아버지를 모른 채 어머니 손에서 귀하게 자랐다. 그는 어머니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 어머니의 입맞춤 때문에 성적으로 조숙해진 그는 유아적 성활동기에 들어갔음에 틀림없다. 이를 증명해주는 한 가지 자료가 있는데 그것은 그가 어린아이이면서도 성적 탐구에 몰두했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의 여러 가지 인상은 그의 관찰충동과 지적충동을 가장 심하게 자극했다. 성감대인 입은 그후 잊혀지지 않고 강조되었다. 동물을 지나치게 사랑했던 그의 후년의 대립적 태도에서, 우리는 그가 유년기에 강한 가학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론할 수도 있다.
강한 억압이 이 과도한 유아성에 종결을 짓고 사춘기에 나타난 성향들을 확립했다. 이러한 변화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거친 관능적 활동으로부터의 이탈이다. 레오나르도는 금욕생활을 할 수 있게 되고 성과 무관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넘쳐 흐르는 사춘기의 격정이 소년을 덮치지만, 이 격정은 그로 하여금 대체물을 만들도록 강제하기 때문에 그를 병들게 하진 않는다. 성충동이 요구하는 대부분의 것은 어릴 때 가졌던 성적 호기심에 대한 경향 덕택에 일반적인 지식욕으로 승화될 수 있다. 리비도중에서 극히 일부분이 성적 목표를 위해 보존되어, 어른이 된 레오나르도의 위축된 성생활을 대표한다.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억압되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어쩔 수 없이 동성애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고 소년에 대한 관념적 사랑으로 나타난다. 추억이 고착된 형태로 남아 있지만 당분간은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이렇게 해서 억압과 고착 그리고 승화는, 성충동이 레오나르도의 심적생활을 위해서 한 기여들을 적절히 처리하는 식으로 분할되어 갔다.아주 어린 시절부터 레오나르도는 예술가, 화가 그리고 조각가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는 유년기에 관찰충동이 일찍 눈떴기 때문에 강화되었던 특별한 재능 때문이다 . 예술가로서의 그의 활동이 어떻게 해서 마음의 근원적인 충동에서 유도되는가를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만 아직 우리의 역량이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는 다만 예술가의 창조행위가 성욕의 배출구가 되기도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미소짓는 여자들과 소년들의 머리, 바꿔 말해 그의 성욕대상의 묘사는 그의 초기의 예술적인 노력 속에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바자리의 보고를 제시하는 데에 만족하겠다. 청년시절에 레오나르도는 일단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일한 것처럼 보인다. 그가 자신의 의적 삶을 꾸려 나가는 데에 있어 아버지를 모범으로 삼았던 것처럼, 운명의 은총이 그로 하여금 로도비코 모로공에게서 아버지의 대체상을 발견하도록 했던 밀라노에서 그는 남성적인 창조력과 예술가적인 생산성의 시기를 체험한다. 거의 완전한 실제 성생활의 억압이, 승화된 성적 경향의 활동을 위해 반드시 가장 좋은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곧 드러난다. 성적생활의 전형적인 특질이 그의 능동적 태도와 신속한 결정능력을 마비시키는 데에 효력을 나타내면서, 이미 <성 만찬>을 그릴 때 심사숙고하며 망설이는 경향이 방해가 되는 것으로 드러나고, 결국 이 경향이 기술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이 대작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제 노이로제 환자의 퇴행현상이라고나 할 수 있는 과정이 서서히 진행된다. 유년기에 조건지위전 탐구자의 역할이, 사춘기에 그에게서 드러난 예술가의 역할을 뛰어넘는다. 그의 성충동의 제2차 승화는 제1차 억압 때에 준비되었던 근원적인 승화에 부딪혀 후퇴한다. 그는 탐구자가 되는 것이다. 처음엔 그래도 예술에 복무하는 탐구자였지만 나중에는 예술과 독립적으로 그리고 그것을 떠나 탐구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아버지의 대리자였던 후원자를 잃고 삶이 점점 암울해져 감에 따라 이러한 되행적인 대체가 점점 더 그를 사로 잡는다. 그가 그린 그림을 매우 가지고 싶어하는 이자벨라 데스테 백작부인의 서신왕래자가 보고하고 있듯이 <붓놀림이 극도로 불안정한 사람impacientissimo al pennello>이 된다. 어린 시절의 과거가 그를 압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 있어 예술적 창작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탐구는 무의식적 충동들의 활동을 특칭짓는 특성들, 즉 만족하지 못하는 욕망, 전후가리지 않는 완고함, 현실상황에 적응하는
능력의 부족 등의 특성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생의 절정에 달한 50 대 초입, 다시 말하면 여자의 경우 성적 특성이 이미 사라질 시기지만 남자의 경우 리비도가 아직 정력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시기에 새로운 변화가 그에게 일어난다. 그의 심적 내용의 더 깊은 층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속적인 퇴행은 위축되어 있던 그의 예술에는 도움이 된다. 그는 어머니의 행복스러우며 감각적인 황홀한 미소에 대힌 기억울 일깨우는 한 여성을 만난다. 그는 이처럼 환기된 기억의 영향 아래, 웃고 있는 여인들을 창작하던 무렵, 즉 그로 하여금 처음 예술적인 시도를 하게 했던 때의 충동을 다시 얻게 된다. 그는 「모나리자」와 「셋이 하나의 모습을 이루는 성 안나」, 그리고 수수께끼와 같은 미소를 특징으로 갖고 있는 일련의 신비스러운 그림들을 그린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성적 충동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예술에 존재하고 있던 저해요소 Hemmung를 다시 한 번 극복하고 승리를 구가한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자면 이 마지막 발전은 점점 다가오는 노년의 어둠 속에서 희미해전다. 그의 지성은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의 시대를 뛰어넘어 최고의 세계관을 얻는 데에까지 올라 있었던 것이다.나는 앞 장에서 레오나르도의 발전과정에 대한 그러한 묘사가 어떻게 가능하며, 그의 인생을 그렇게 구분하고 예술과 인생 사이에서 그가 주저하는 것을 그렇게 해명하는 것이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지 제시했다. 정신분석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그 전문가들이 나의 이러한 논술을 보고서, 내가 단지 한 편의 정신분석적인 소설을 썼을 뿐이라고 판결을 내린다면, 나는 이에 대해 내가 이 결과들의 확실성을 과대시하고 있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위대하고 수수께끼 같은 인물, 죽 사람들이 강력하고 충동적인 정열을 느끼리라고 기대하지만 그것이 표현될 때는 이상하게도 부드러운 양상을 띠는 이 존재에 대해 매력을 느끼고 있다.레오나르도의 삶에 관한 진실이 무엇이든간에 우리는 그것을 정신분석적으로 해명하려는 우리의 시도를, 다른 과제를 다 처리할 때까지는 그만둘 수 없다. 앞으로 계속될 모든 설명이 실패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전기작성에 있어 정신분석의 능력이 가지는 한계를 아주 일반적으로 정해 두어야 한다. 정신분석적인 탐구는 개인사의 자료들, 즉 한편으로는 사건이나 환경의 영향에 있어서 드러난 우연적 요소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이 취한 반응에 대한 보고들을 이용한다. 정신분석 연구는 심리적 과정에 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하여 개인의 반웅들로부터 역동적으로 그의 본질을 근거짓고자 하며, 그의 근원적인 심적 충동이 가지는 힘들과 그것이 나중에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하는 지를 밝히고자 한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한 인물이 취하는 삶의 태도는 기질과 운명, 내적인 힘들과 의적인 힘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해명된다. 레오나르도의 경우와 같이 이러한 시도가 확실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신분석학의 방법이 잘못되어 있거나 불충분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이 인물에 대해 전하고 있는 자료 그 자체가 불확실하며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불행한 사태에 대한 책임은, 정신분석학으로 하여금 그처럼 불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판정을 내리도록 강요한 작가에게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자료를 제아무리 많이 사용하거나 심리적 과정을 제아무리 확실하게 조작하더라도, 정신분석적 탐구는 두 가지 점에 있어 그 개인이 반드시 그러한 사람이라는 필연성에 대한 통찰을 산출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레오나르도의 경우, 그가 사생아로 태어났다는 점과 어머니가 그를 지나치게 귀여워했다는 우연성이 그의 성격형성과 이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이러한 유아기를 거친 이후에 나타나는 성적 억압이 그로 하여금 리비도를 지식욕으로 승화시키도록 강요했고, 나머지 생애동안 그를 성적 소극자로 만들어 버렸다는 견해를 취해 왔다. 그러나 유아기의 첫번째 성적만족 이후에 나타난 이러한 억압은 반드시 나타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다른 개인에게서는 나타나지 않거나, 나타났다 하더라도 아주 미약했을런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기서 정신분석적으로는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인정해야 한다. 지속되는 억압 Verdrangungsschub이라는 이러한 출발점을 유일하게 가능한 출발점으로 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리비도의 대부분을 지식욕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겐 불가능했을 것이다 . 다른 사람의 경우 레오나르도와 같은 영향을 받았다면 지적 활동이 지속적으로 방해를 받거나 극복할 수 없는 강박노이로제 성향을 띠게 되었을 것이다 . 따라서 레오나르도의 다음 두 가지 특성, 즉 충동을 억압하는 경향과 원초적인 충동을 승화시키는 비상한 능력은 정신분석학적 방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
충동과 그것의 전환은 정신분석학이 알아 낼 수 있는 마지막 과제이다. 그곳에서 정신분석학은 생물학적 연구에 자리를 넘겨 준다. 우리는 부득이 억압의 경향과 승화능력의 근원을, 그 위에 비로소 심적구조물이 세워지는 성격의 유기적 기초에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술적인 소질과 능력이 승화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술적인 업적의 본질은 정신분석적으로는 규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생물학적 연구는 인간의 유기적 체질의 중요한 특징들을 물질적 의미에서 남성적 소질과 여성적 소질이 혼합된 것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레오나르도의 육체적 아름다움이나 그가 왼손잡이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설명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순수 심리학적인 연구의 바탕을 견지하고 싶다. 우리의 목표는 여전히 의적인 체험들과 충동에 따라 이루어지는 인간의 반응 사이의 연관관계를 증명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이 비록 우리에게 레오나르도의 예술성을 해명해 주진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의 표현들과 제약들은 분명히 해준다. 여하간 그와 같은 유년기의 체험을 가진 사람만이 <모나리자>와 <셋이 하나의 모습을 이루는 성 안나>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가 있으며, 자신의 작품에 그처럼 슬픈 운명을 부여하고 자연탐구자로서 그처럼 놀라운 업적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보이며, 그의 모든 업적과 불운에 대한 열쇠를 유년기의 독수리 공상에 숨겨 놓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 인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부모가 차지하는 우연적 위치라고 규정하는 연구결과, 예를 들면 레오나르도의 운명을 그가 사생아로 출생했다는 사실과 그의 첫번째 계모인 도나 알비에라가 불임이었다는 것에 결부시키는 연구결과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전 않을까? 나는 그런 의심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연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기술했을 때 레오나르도가 극복하려고 했던 경건한 세계관으로 후퇴함을 의미한다. 물론 정의의 신과 선한 섭리가, 그처럼 아무 보호도 받지 못하는 시기에 그러한 영향으로부터 우리를 더 잘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것은 마음아픈 일이다. 하지만 그 경우 우리의 인생에 있어 모든 것이 우연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곧잘 잊는다. 우리의 출생부터가 정자와 난자의 결합을 통한 우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우연은 자연의 법칙성과 필연성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며 우리의 소원이나 환상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요인을 체질의 필연성과 유년기의 우연성으로 나누는 것은 개개의 경우 아직 불완전해 보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유년기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 모두는 행릿의 대사를 연상시키는 레오나르도의 회의적인 말, 즉 <결코 경험된 적이 없었던 무수한 원인들로 충만한> 자연에 대해 너무도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 우리 모든 인간존재는 이러한 자연의 <원인ragioni>들이 경험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무수한실험의 하나하나에 해당한다 67) (강미란, 정소영, 정혜진 옮김).
67) 프로이트 연구본 제10권, 88-159쪽에서 옮김. 연구본과 전집(제8권, 127-211 쪽)의 두 전집 각주에는 차이가 있으며 각주 번역은 옮긴이의 재량에 말김. 또는 프로이트 전집 제8권 127-211쪽.
Ⅲ 도스토예프스키와 부친살해
풍부한 개성을 지닌 도스토예프스키를 앞에 놓고 우리는 그의 네 가지 모습, 즉 문학가, 노이로제 환자, 도덕가 및 죄인으로서의 그의 면모를 구별해 보고자 한다. 이처럼 혼란스럽게 얽혀 있는 가운데에서 올바른 길을 찾으려면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가장 의문의 여지가 적은 것은 문학가로서의 그의 모습인데, 문학가로서의 그는 셰익스피어에 견주어 그다지 뒤지지 않는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은 지금까지 쓰여졌던 가장 훌륭한 소설이며, 거기 삽입되어 있는 대심문관의 일화는 세계문학의 걸작들 중의 하나여서,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문학가가 문제가 되는 한 유감스럽게도 정신분석적인 방법은 손을 둘 수밖에 없다.가장 먼저 공격할 수 있는 면은, 도덕가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이다. 가장 심각한 죄악을 경험해 본 일이 있는 사람만이 가장 높은 경지의 도덕성에 도달한다는 것을 논거로 삼아 우리가 그를 도덕적으로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한 가지 의문점을 소홀히 하는 태도이다.마음속에 유혹을 느껴 그것에 반응하긴 하지 만 굴복하지 않는 사람은 도덕적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죄를 범하고, 그후 뉘우치는 가운데 고상한 도덕적 요구사항들을 내세우는 사람은, 안이한 길을 걸었다는 비난을 면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도덕성에 내포된 본질, 즉 단념이라는 것을 실천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무릇 도덕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인류의 실제적인 아익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은 민족 이동시기의 야만인, 즉 살인을 저지른 뒤 그 행동을 참회하지만 그 참회라는 것이 곧바로 다른 살인을 가능케 하기 위한 기술이 되어 버리는, 그러한 야만인들을 생각나게 한다. 이반 대제의 행동도 이와 똑같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도덕성과 타협하는 태도는 두드러진 러시아적 특색이다. 따라서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덕적인 고두 끝에 도달한 최종적인 결과 또한 조금도 칭찬할 만한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충동과 인간사회의 요구들을 화해시키고자 악전고두를 벌인 끝에, 그는 오히려 뒷걸음질쳐 세속적, 종교적 권위에 굴복하고 있다. 즉 러시아 황제와 기독교의 신을 숭배하기에 이르며, 편협한 러시아적 민족주의에 빠져들고 마는데, 이는 그보다 못한 사람들도 별로 힘들이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단계이다. 이것이 위대한 인격 도스토예프스키의 약점이다. 그는 인류의 스승과 해방자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보호, 감시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인류문화의 미래가 그에게 감사해야 할 점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가 노이로제 때문에 그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마도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가 높은 지성과 강한 인류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에게는 다른 인생행로, 이를테면 사도와 같은 성스러운 길이 열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죄인이나 범죄자로 보려고 할 때 심한 반대가 일어나는데, 사실 범죄자에 대한 속된 평가를 염두에 두고 그렇게 반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그 참된 동기를 곧 알게 된다. 범죄자의 본질적인 특색을 이루는 것은 무한한 이기주의와 강한 파괴적인성향이다. 그리고 이 두 성향에 공통되며, 또 이 둘이 표출되기 위한 전제를 이루는 것은 사랑의 결여, 즉 인간적 대상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가치를 인정하는 능력의 결여이다. 이때 당장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이와는 정반대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성격이다. 그는 사랑받기를 몹시 갈구했으며, 첫번째 아내와 그 정부에 대한 관계에서 드러나듯이, 미움을 빌미로 한 복수의 권리가 자기에게 있었던 경우조차 사랑하며 도와중으로써 과장된 친절까지 표시하는 등, 사람을 사랑하는 대단한 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렇다면 대관절 그를 범죄자로 치부하려는 유혹은 어디서 생기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그가 작품소재를 선택하는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도스토 예프스키는 그 소재로 폭력배, 살인범, 이기주의자와 같은 인물들을 특히 즐겨 선택하고 있는데, 이 사실은 그와 같은 성향이 그 자신의 내부에도 잠재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더우기 그의 생애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사실, 예컨데 노름하는 버릇이나, 어린 소녀를 폭행한 사건 또한 이 의문에 대한 대답에 아마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모순은 그 자신을 쉽게 범죄자로 만들었을지도 모를 매우 강한 파괴본능이, 실제의 생활에서는 주로 자신의 인격으로 (즉 바깥으로 돌려지는 대신 안으로) 돌려져, 그 결과 피학증과 죄의식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을 인식하면 자연스럽게 풀린다. 아무튼 그의 성격 속에는 가학적 특성들도 많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조차 퍼부은 신경질이나 심술, 옹졸한 마음들에 나타나 있으며, 또는 작가로서의 그가 독자를 다루는 수법에도 나타나 있다. 즉 그는 작은 일에 있어서는 남들에 대한 가학성 환자였으며, 큰 일에 있어서는 자기자신에 대한 가학성 환자, 따라서 피학성 환자, 말하자면 가장 온화하고 가장 친철하며 가장 돕기 좋아하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복잡다단한 인격 속에서 하나의 양적인 요소와 두 개의 질적인 요소, 즉 세 가지 요소를 골라냈다. 그것은 비상한 정도의 애정과 그에게 가학-피학적 내지 범죄자적 기질을 부여했음에 들림없는 도착적 충동 및 분석이 불가능한 예술가로서의 재질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의 결합은 노이로제 증상을 동반하지 않고도 무난한 상태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노이로제 환자가 아니면서 완전한 의미에서의 피학성 성격자도 있는 것이다. 충동의 요구와 이에 대립하고 있는 억제(덧붙여 그 경우에 이용가능한 승화방법) 사이의 힘의 관계만을 주목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충동적인 성격>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노이로제가 동반된다면 상황은 불투명해진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위와 같은 조건들이 없다면 노이로제는 발생하지 않을런지도 모르지만, 자아에 의해 앞으로 해결될 문제점이 심하면 심할수록 이러한 동반은 보다 일찍 이루어전다. 노이로제는, 자아가 그런 통합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 바꿔 말하면 그런 시도를 함으로써 자아의 통일성을 잃었음을 표시하는 하나의 징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엄격한 의미에서 노이로제의 존재를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을 간질환자라고 불렀으며 남들도 그사실을 인정했는데, 그것은 그가 심한 발작을 일으키고 그와 동시에 의식을 잃거나 근육경련을 일으켰고, 그후에 불쾌한 상태에 빠졌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소위 간질이 그의 노이로제의 한 가지 증상에 불과했다는 것, 따라서 히스데리성 간질 Hysteroepilepsie, 곧 심한 히스테리로 분류되어야 하리라는 것은 상당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아직 단정을 내릴 수는 없다. 하나는 소위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에 관한 병상일지가 불완전하고 불확실하기 때문이며, 또하나는 그의 경우 간질과 비슷한 발작에 뒤따라 일어났다는 병적상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가 아직 명확치 않기 때문이다.우선 두번째 점을 논의하자. 여기서 간질의 병리학을 낱낱이 되풀이하는 것은, 그렇다고 무슨 결정적인 결론이 나오지 않겠으므로 불필요하다. 다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힐 수는 있다. 옛부터 <신성한 병 Marbus sacer> 이라고 불렸던 간질은 오늘날도 여전히 명백한 임상적 통일성을 드러낸다. 바꿔 말하면, 예측하기가 전혀 불가능하며, 일견 아무 유인도 없이 일어나는 듯한 경련발작, 성격이 변하여 과민해지고 공격적으로 되는 현상 및 모든 정신능력의 점진적 감되가 이 무시무시한 병에는 수반되어 나타난다. 그렇지만 이러한 증상은 최종적으로는 모두 불확실한 것으로 귀결된다. 혀를 깨물거나 오중을 싸는 심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발작은, 거듭되면 자기자신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는 치명적인 간질상태로 되기도 하지만, 이 상태가 잠시 소강상태가 되거나 일시적인 현기증을 느끼는 상태로 완화될 수도 있으며, 또는 발작대신, 환자가 마치 무의식의 지배하에 있을 때 그러하듯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어떤 일을 하는 순간이 번갈아 나타나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정확한 진상을 알 수 없지만 발작은 대개 순전히 육체적 현상이다. 하지만 최초에는 순전히 심적인 영향 (충격)에 의해 발작이 일어날 수도 있으며, 그후에도 계속해서 심적인 자극에 반응하는 경우 또한 있을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지적 능력의 감퇴가 특징적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사례에서는 이 병의 영향력 밖에서 최고도의 지적 능력이 장애를 겪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헬름홀츠). (같은 것이 주장되고 있는 기타의 사례는 불확실하거나,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경우와 같이 의문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간질발작을 일으킨 사람들은 우둔한 인상이나 발육장애가 있는 듯한 인상을 줄 수도 있으며, 물론 늘 그렇지는 않지만, 심한 경우 매우 분명한 백치성과 극심한 뇌손상이 수반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모습을 띤 이 발작들은 다른 종류의 사람들, 즉 정신적 기능은 완전히 발달되어 있지만 정서가 과잉되어 있어 그것이 제대로 제어되지 않는 사람에게도 일어난다. 따라서 이런 상황아래서 간질이라는 임상질환
의 동일성을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생각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의부에 나타난 여러 가지 증상이 동일하다는 점에 착안할 때, 그 배후에서 충동을 비정상적인 수단으로써 배출하는 장치, 즉 조직학적 내지 독물학적 중증에 의한 뇌기능 장애의 경우뿐만 아니라, 심적 에너지의 관리가 불충분하게 제어되어 있는 경우, 바꿔 말하면 마음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에너지의 운영이 위기에 이른 경우와 같이 완전히 다른 상황 아래에서도 제 기능을 발휘하는 장치가 있다는 기능적인 해석을 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 갇다. 우리는 이처럼 이분된 현상 뒤에서 그 기저에 숨어 있는 충동배출 장치가 동일하다는 것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충동배출 장치는 궁극에 있어서는 독물학적인 원인에 기인하고 있는 성적인 과정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미 옛날의 의사들도 성교를 가벼운 간질이라고 불렀다. 즉 간질에 의한 자극배출의 완화된, 그리고 조절된 형태가 성교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의 모든 사실에 공통된다고 할 수 있는 <간질적 반응>은, 의심할 바 없이 노이로제에 의해서도 이용된다. 노이로제의 본질은 심리적으로 처리할 수 없을 만큼의 자극을 육체적인 방법으로 해소시키려고 한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간질발작은 히스테리의 한 증상이 되며, 정상적인 성교에 의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히스데리에 의해 조절되고 변형된다. 그러므로 기관적 원인에 의한 간질과 심리적인 원인을 갖는 간질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실제적으로 적용해 보면, 전자를 갖고 있는 쪽은 뇌에 병이 있는 사람이며, 후자를 갖고 있는 쪽은 노이로제환자이다. 전자의 경우, 그 심적 생활을 조종하고 있는 것은 심적 생활과는 무관한 의부적 장애이며, 후자의 경우에 보게 되는 장애는 심리현상자체의 한 표현이다.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은 아마 두번째 종류의 것이었던 듯 싶다. 엄밀히 말해서 이것을 입증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발작의 최초 발현 및 그후에 있어서의 불규칙한 반복과 그의 심적 생활 사이의 관계를 남김 없이 밝힐 필요가 있는데, 그러기에는 우리 지식이 아직 너무 적다. 발작 그 자체의 묘사는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바가 없다. 게다가 발작과 도스토예프스키 체험간의 관계에 관한 자료가 불충분하며, 서로 모순되는 때조차 드물지 않다. 그래서 결국 다음과 같이 가정, 즉 그의 간질발작은 유년시절까지 소급되며, 이 발작이 처음에는 비교적 약한 증상을 보이다가 18세 때의 충격적인 체험, 바꿔 말하면 아버지의 살해를 겪은 뒤 비로소 간질이라는 모습을 갖게 되었다는 가정이 가장 그럴듯한 것 같다. 시베리아 유형시기에는 발작이 중단되었다는 것이 만약 증명될 수만 있다면 위의 가정은 적절한 것이 되겠지만, 이것과 모순되는 다른 보고들이 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 속에 나오는 부친살해와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아버지의 운명 사이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연관성이 있음을 주목한 전기작가의 수효는 한둘이 아니었으며, 이러한 연관성이 <특정한 현대적, 심리적 방향>에 대한 그들의 언급을 가능케 했다. 이 사건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음이 받은 가장 중대한 의상과, 이에 대한 그의 반응 속에서 그의 노이로제의 요체를 알아내려는 정신분석적 고찰이 시도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확고히 하려고 할 때 내가 두려워하는 점은, 내가 말하는 바가 정신분석학의 표현방식과 이론에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분명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확실한 출발점이 하나 있다.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간질의 증상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인 그의 어린 시절에 그를 엄습한 최초의 발작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가를 알고 있다. 이 발작들은 죽음의 의미를 갖고 있었으며, 죽음에 대한 공포에 의해 유도된 것으로, 무기력한 수면상태를 필요로 한다. 그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이 병은 갑작스럽고 이유 없는 우울증의 모습으로 그를 찾아 왔다. 그가훗날 친구인 솔로비요프 Solowjoff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마치 자기가 당장 죽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후에는 정말로 죽음과 홉사한 상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형 안드레는, 표도르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자기는 밤중에 가사상태와 비슷한 참에 빠질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되면 5일 후에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묻어 달라고 쓴 작은 메모를 자기 전에 남겨 두곤 했다고 언급했다.
우리는 이런 가사상태의 발작이 어떤 의미와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죽은 자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태도, 즉 실제로 죽었거나, 또는 죽기를 원하는 자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뒤의 경우가 더 중요하다. 그 경우 발작은 처벌의 성격을 지닌다. 남이 죽기를 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가 그 남이 되어 죽어 있다. 정신분석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소년의 경우 보통 이 다른 사람은 보통 아버지이며, 따라서 이 히스데리 발작은 증오스런 아버지의 죽음을 소망한 일에 대해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내리는 처벌이다.두루 알려진 바와 같이, 인류 전체의 경우나 각 개인의 경우를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동시에 가장 최초의 범죄는 부친살해이다. 그것이 유일한 근원인지를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죄의식의 주요한 근원이 부친살해임은 확실하다. 여러 모로 검토했음에도 불구하고 죄와 속죄를 하려는 욕구가 심리적으로 어떤 근원을 가지고 있는지 아직껏밝히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부찬살해가 그 유일한 근원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경우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상황은 복잡하기 때문에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아버지에 대한 소년의 태도는 양가적이다. 경쟁자로서의 아버지를 제거하고 싶다는 증오감 외에, 대개는 아버지에 대한 일정한 정도의 애정이 존재한다. 이 두 가지 입장이 합쳐져서 자기를 아버지와 동일시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한편에서는 아버지를 찬미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지위에 앉기를 원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를 없애고 싶기 때문에 아버지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이 하나의 강력한 장애에 부딪친다. 즉 어떤 순간이 오면 아이는 경쟁자로서의 아버지를 제거하려고 할 경우, 그 벌로 아버지가 자기를 거세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는 거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바꿔 말하면 자기의 남성성을 지키고 싶다는 이해타산에서 아버지를 없애고 어머니를 차지하겠다는 욕망을 포기한다. 이 욕망이 무의식 속에 계속 남아 있게 되면 이것을 바탕으로 죄의식이 생긴다. 우리의 견해에 따르면, 위에 설명한 것은 정상적인 과정이며, 소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겪는 정상적인 운명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중요한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만약 그 아이에게 우리가 양성성이라고 부르는 체질적인 인자가 비교적 강하게 형성되어 있는 경우에는 사태가 훨씬 복잡해진다. 그 경우 거세에 의해 남성성이 위협받는 상황 아래에서는 여성성 쪽으로 피해 차라리 자기를 어머니의 지위에 놓고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의 역할을 떠맡으려는 경향이 강해전다. 그러나 이러한 해결방식도 거세에 대한 불안 때문에 불가능히게 된다. 만약 여자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면 거세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아이는 알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애착이라는 두 충동은 억압된다. 두 가지 충동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의적인 위험, 죽 거세에 대한 불안 때문에 포기되는 반면, 아버지에 대한 애착은 내적인 충동위험으로 취급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충동위험 역시 근본적으로는 위의 의적인 위험(거세)으로 소급된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다. 거세는 벌로서이건,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대가로서이건 아무튼 끔찍스러운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억압하는 두 요소중 첫 번째의 것, 즉 벌로서의 거세에 대한 직접적인 불안은 정상적인 요소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병적으로 십화되는 것은 둘째 요소, 즉 여자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불안이 더해질 때인 것 같다. 강한 양성적 소질은 노이로제의 필수조건 내지 강화요소가 된다. 도스 토예프스키에게 이런 소질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게 추측될 수 있다. 그 소질은 그가 살아가면서 맺은 남자와의 교우관계가 차지 했던 중요한 몫에서 짐작되는 바와 같이 언제 표면화할지 모르는 형식(잠재적 동성애) 속이나, 연적에 대한 이상하리 만큼 다정한 태도 속에서, 그리고 소설 속의 많은 예들이 보여 주고 있는 바와 같이 억압된 동성애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그의 남다른 이해 속에 나타나 있다.
아버지를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태도에 관한, 그리고 그것이 거세에 대한 위협의 영향 밑에서 어떻게 변화해 가는가에 관한 이 설명이, 정신분석에 친숙치 못한 독자들의 눈에 불쾌하고 미덥지 못한 것으로 비친다면 미안하게 여기는 바이지만, 그렇다 해도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 나 자신도 이 거세컴플렉스에 대한 언급이 가장 일반적인 거부감을 야기시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간 하다. 그러나 나는 정신분석상의 경험이 이러한 관계들에 대한 모든 의구심을 극복하게 해주며, 이 관계들 속에서 모든 노이로제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를 발견하게 해준다고 단언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열쇠를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에도 적용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무의식적 정신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것들은 우리의 의식에게는 너무나 낯선 존재다.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속에 포함된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억압한 결과들이 지금까지 언급한 바를 가지고 다 설명된 것은 아니다. 자기와 아버지를 동일시하는 태도가 결국 자아 속에 지속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이 새롭게 추가된다. 그 동일시는 자아 속에 흡수되지만, 별개의 심급으로서 자아 속에서 자아의 다른 내용들에 대립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을 초자아라고 부르며, 부모의 영향을 계승한 그 초자아에게 가장 중요한 기능들을 부여한다.만일 아버지가 엄격하고 난폭하거나 잔인했으면, 초자아는 이 성격들을 그로부터 물려받으며, 이 초자아와 자아의 관계 속에서 이전에 억압되어져야 했던 피동성이 다시 고개를 든다. 즉 초자아는 가학적 성격을 띠며, 이와 반대로 자아는 피학적인 성격, 즉 그 근본에 있어서는 여성적, 피동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이때 자아의 내부에서는 벌을 받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일어나는데, 그 욕망은 한편으로는 운명적으로 그렇게 정해진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초자아(죄의식)에 의해 학대받는 가운데 만족을 발견한다. 모든 벌은 궁극적으로는 거세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로 아버지에 대해 옛부터 지니고 있던 피동적인 태도의 실현이다. 그리고 운명이라는 것도 결국은 나중에 발생한 아버지의 두사에 불과하다.
양심이 형성되는 정상적인 과정도 지금까지 설명된 비정상적인 과정과 홉사함에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이 둘의 경계를 확정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 경우 피동적 요소가 발현하는 데에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은 억압된 여성성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밖에 부수적인 요소로서, 우리가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라고 규정한 아버지가 실제로 특히 난폭한가 아닌가 하는 것도 중요한 뜻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경우에 해당된다. 우리는 그가 남다른 죄의식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의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피학적인 경향의 원인을, 그의 성격 속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 여성적 요소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성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즉 그는 유난히 강한 양성적 소질을 타고난 사람이었으며, 각별한 노력을 한 후에야 매우 엄격했던 아버지에 대한 의존관계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이미 언급된 것들에 이 양성적 성격을 덧붙여 보자. 그러면 일찍부터 그에게 나타나 있던 <가사발작>의 증상은 자아가 초자아의 허가를 받아 벌로서 자신에게 부과한 아버지와 자기의 동일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는 스스로 아버지가 되기 위해 아버지를 죽이고자 했다. 이제 너는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죽은 아버지다.> 이는 히스데리 증상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그때 <이번에는 아버지가 너를 죽일 차례>가 된다. 죽음의 증상은 자아의 입장에서 볼 때는 남자답고자 하는 소망이 환상 속에서 만족되는 것이며, 동시에 피학적인 만족이 기도 하다. 그와 달리 동일한 증상이 초자아에 있어서는 처벌하면서 느끼는 만족, 곧 가학적인 만족이다. 이 양자, 자아와 초자아는 계속해서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어떤 사람과 그 관심의 대상으로서의 아버지의 관계는, 그 내용을 그대로 가전 채 자아와 초자아 간의 관계로 옮겨져 있다. 즉 동일한 각본이 제2의 무대에서 새로 상연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기인하는 이런 유아적 반응은 현실이 계속 그 재료를 공급하지 않으면 없어질런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버지로서의 성격은 그대로 유지된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되며, 같은 이유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에도 아버지에 대한 증오, 이 사악한 아버지가 죽었으면 하는 소망은 계속 남아 있다. 그런데 만일 이처럼 억압된 소망이 현실에서 충족되면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환상은 현실이 되지만 그 반면 이것을 저지하려는 조처도 강화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도스토예프스키의 발작은 간질의 성격을 띄게 되고, 분명하게도 여전히 벌로서의 자기와 아버지를 동일시하는 태도를 의미하지만, 아버지의 무서운 죽음 그 자체처럼 두려운 것이 되었다. 이 발작들이 그 이의에 어떤 특히 성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추측할 수는 없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즉 간질발작의 전조로 순간적인 최고의 기쁨이 체험되는데, 그것은 아마 아버지가 죽었다는 기별을 받았을 때 그가 맛본 승리감과 해방감이 정착된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쁨의 순간 후에는 한층 잔인한 벌이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승리감과 우울함, 즉 흥겨움과 우울함의 이러한 연속은 아버지를 죽인 원시집단의 형제들 간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며, 토템만찬의 의식 속에서도 이런 순간이 되풀이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시베리아에서는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그의 발작이 벌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실증할 따름이다. 그가 다른 방법으로 처벌되었다면 더 이상 발작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러한 비참과 굴욕의 세월을 실망하지 않고 견디었다는 것은, 정신적 측면에서의 득실을 따져 볼 때 오히려 처벌이 필요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 그가 정치범으로서 유죄선고를 받은 것은 부당했으며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는 현실의 아버지한테 범한 죄에 합당한 형벌의 대체물인 이 부당한 형벌을 아버지로서의 황제에게서 순순히 받았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처벌하는 대신, 아버지의 대리자인 황제가 자기를 처벌토록 했다. 여기서 사회가 부과한 형벌을 심리적으로 정당화하는 태도의 일면을 보게 된다. 많은 범죄자들이 스스로 처벌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초자아가 그것을 요구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초자아는 자신에게 벌을 주는 수고를 면하는 것이다.
히스데리 증상이 복잡한 의미변화를 거친다는 점을 아는 사람이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발작이 가지는 의미를 이러한 발단단계를 넘어서서 정초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행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도스토예프스키의 발작이 갖고 있는 본래의 의미는 나중에 그 위에 쌓인 모든 첨가물에 의해서도 조금도 변치 않고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우리는 그가 아버지를 죽일 의도를 가졌기 때문에 얻게 된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평생 자유롭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양심의 가책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결정적인 구실을 하고 있는 다른 두 영역, 즉 국가의 권위와 신에 대한 믿음이라는 영역에 대한 그의 태도를 또한 결정했다. 첫번째 영역에서 그는 아버지로서의 황제에 대해 완전한 복종의 태도를 보였는데, 이 황제는 도스 토예프스키가 발작하기 전에 겪곤 했던 죽음의 연극을 실제로 그와 함께 상연했었다. 이 경우에는 속죄에 중점이 놓여 있었다. 반면 그는 종교의 영역에서는 좀더 자유로왔다. 믿을 만한 기록에 의하면, 그는 일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과 무신론 사이 를 방황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위대한 지성은 그가 신앙에서 유도되는 논리의 모순을 하나도 간과하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는 세계역사의 발전을 개인으로서 재현하는 가운데, 예수의 이상 속에서 탈출구와 죄로부터 해방울 얻고자 했으며, 자기의 고뇌를 예수와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가 그 이상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반동가가 된 것은 종교감정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죄, 즉 인류에게 공동된 아들로서의 죄가 그의 경우 초개인적인 강력함을 획득하고 있어서, 그의 뛰어난 지성으로도 마침내 이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이렇게 말할 경우 우리는 분석의 본질인 불편부당성을 포기하고, 어떤 특정한 세계관의 당파적인 관점에서 볼 때만 정당하게 인정될 수 있는 기준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치를 재려고 한다는 비난에 직면하게 된다. 보수적인 사람이라면 대심문관의 편을 들 것이고, 따라서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해서도 다른 판단을 내릴 것이다. 앞의 비난은 옳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결정이 노이로제 때문에 생긴 사고장애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고 말함으로써, 이 비난을 완화하는 것 뿐이다.
고금을 동한 문학의 세 걸작인 소포클레스의 『 오이디푸스 왕 』, 셰익스피어의 『 햄릿 』 및 도스토예프스키의 『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 이 동일한 테마, 즉 부친살해라는 테마를 다루고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 세 작품에는 여자를 둘러싼 성적인 경쟁이라는 모티브도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가장 솔직한 표현은 희랍전설에 의거한 소포클레스의 드라마이다. 이 작품에서는 부천을 살해한 사람이 주인공자신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사실을 감추거나 완화하지 않으면 문학적 형상화는 불가능하다. 부친살해의 의도를 우리가 정신분석에서 목표로 삼고 있는 바와 갇이 노골적으로 드러낼 경우, 그것은 정신 분석적인 사전준비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참고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는 행위의 요건은 유지되면서도, 주인공으로서는 알 길이 없는 운명의 강요, 즉 그의 무의식적 동기가 현실로 나타나게 함으로써 교묘한 완화과정을 거치고 있다. 주인공은 무심코 아버지를 죽이며, 겉보기에 거기엔 여자의 영향은 개입되지 않은 것같다. 그러나 이러한 연관성은 주인공이 아버지의 상징인 괴물을 처치한 후, 말하자면 제2의 부친살해를 실행한 후에 어머니인 왕비를 차지하게 되는 방식으로 그 의도가 확인되어 있다.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그것을 의식한 후에도 주인공은 그것이 운명의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는 핑계로 그것을 모면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그 죄를 받아들이며, 마치 의식적으로 지은 죄인 것처럼 처벌받는다. 이것은 곰곰히 생각해 보면 부당하게 생각되겠지만 심리적으로는 완전히 정당하다. 『 햄릿 』 의 경우에는 묘사가 더 간접적이다. 주인공은 아버지를 직접 죽이지 않고, 그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은 타인이며, 그 타인의 입장에서는 햄릿의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 부친살해가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여자를 사이에 둔 성적경쟁이라는 불쾌한 모티브는 은폐될 필요가 없다. 타인에 의한 아버지 살해가 주인공에게 미친 영향이 어떤 것인가를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주인공이 갖고 있는 외디푸스 컴플렉스도 그 반사광 속에서 볼 수가 있다. 주인공은 아버지를 죽인 사람에게 당연히 복수해야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가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 그의 죄의식이었음을 알고 있다. 노이로제의 경우에 그러한 것처럼, 죄의식은 복수를 행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인지하는 태도로 바꿔져 있다. 주인공이 이 죄를 초개인적인 것으로 느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지
들이 있다. 그는 타인들 또한 자기 자신 못지않게 멸시한다. <모든 사람을 그가 행한 바에 따라 다룬다면 운명의 노여움을 면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이 방향을 한 걸음 더 진전시킨 것이다. 여기서도 다른 사람이 아버지를 죽인다. 그러나 그 사람도 성적인 경쟁의 모티브를 명백히 구현하고 있는 드미트리와 마찬가지로, 피살된 아버지의 아들, 즉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의 하나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작가가 이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병, 소위 간질을 부여하고 있으며, 그것은 마치 간질환자 또는 노이로제 환자로서의 자기가 부천살해범임을 고백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후 법정에서의 변론에서는 소위 심리학이 양극을 가전 막대기라는 저 유명한 조소가 뒤따른다. 이것은 훌륭한 위장에 다름아닌데, 왜냐하면 이 위장을 뒤집기만 하면 도스토예프스키적인 견해의 가장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소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심리학이 아니라 법적 수사절차이다. 누가 실제로 범죄를 저질렀는가 하는 점은 중요치 않다. 심리학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마음속으로 그것을 소망했으며,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환영했던 사람이 누군가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즉 충동을 억제할 줄 모르는 드미트리나 회의적인 냉소주의자 이반, 나아가서는 아버지를 죽이게 된 간질환자 스메르자코프뿐만 아니라 이들과 대조적 인물인 알료샤까지도 모두 부천살해에 대해 같은 책임이 있다. 이 소설 속에는 도스토예프스키적인 특색을 두드러지게 보여 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조시마 장로는 드미트리와 말하는 동안에 그가 부친살해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그의 앞에 엎드린다. 이것은 그가 드미트리를 찬미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는 성직자인 그가 살인범을 경멸하거나 꺼려하려는 유혹을 물리치고, 자기가 그런 유혹을 느낀 일에 대한 보상으로서 이 살인범 앞에 머리를 숙인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실 그 범죄자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동
정은 끝이 없고, 그 불행한 사람이 받을 만한 연민의 차원을 넘어서 있다 그의 동정은 고대에 간질환자나 정신병자를 대할 때에 가졌던 성스러운 두려움을 상기시킨다. 그의 눈에는 그 범죄자가 죄를 혼자 떠맡음으로써, 분명히 같은 죄를 범했을 다른 사람들을 구제한 사람으로까지 비치고 있다 . 그가 이미 살인을 한 덕분에 다른 사람들은 이제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어졌다 . 따라서 사람들은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자기들이 그 죄를 범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호의적인 동정 이상의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 속에도 범인과 같은 살해충동이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한, 범인과 자기의 동일시이며 원래는 약간 전이된 나르시시즘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호의가 가지는 윤리적 가치에 이론이 제기되어서는 안 된다. 아마도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돌려지는 호의적 동정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구조인 것 같은데, 다만 그것이 죄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작가라는 극단적인 경우라서 유난히 쉽게 눈에 띄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재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 범인과 자기의 이러한 동일시에 의한 동정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도 처음에는, 이기적인 동기에서 죄를 범한 보통 범죄자나 정치범 및 종교적인 범죄자를 다루었다. 그 일생의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는 가장 원초적인 유형의 범죄자, 즉 부친살해자에게로 돌아왔으며, 이 사람의 얘기를 통해 문학적인 자기고백을 시도했다.
유작과 그의 부인의 일기가 출간됨으로써 그의 삶의 한 가지 일화, 즉 그가 독일에서 도박에 몰입했던 때의 일이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었다(필룁-밀러, 엑슈타인, 1925). 그것이 병적인 정열의 발작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고, 이 점에 관해서는 일반의 의견도 일치해 있다. 이 주목할 만한, 아울러 대문호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에 대한 합리화도 적지 않았다. 여러 노이로제 환자의 경우와 같이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에도 빚부담이 본래의 죄의식을 대신했다. 그는 도박으로 번 돈이 있어 빚장이들한테 감금되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잡고자 한다는 핑계를 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핑계에 불과했으며, 그는 그것을 인식할 만한 통찰력이 충분히 있었고, 그것을 스스로 인정할 만한 솔직함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도박 그 자체, 도박을 위한 도박임을 알고 있었다. 충동적이며 전혀 무의미한 그의 행동의 세세한 점들 모두가 이를 증명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잃을 때까지 안절부절하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도박도 자신을 벌하는 방법의 하나였다. 그가 자신의 젊은 아내에게, 앞으로는 놀음을 하지 않겠다거나 오늘 하루는 놀음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이 몇번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아내의 말에 의하면, 그는 거의 항상 이 약속을 어겼다. 도박에 져 자기와 아내가 극도로 빈궁한 지경에 이르게 되면 그는 거기에서 제2의 병적 만족을 얻었다. 그런 때에 그는 그녀의 면전에서 자기자신을 욕하고 멸시할 수 있었으며, 그녀에게 자기를 경멸하라고 요구하거나, 늙은 죄인과 결혼한 일을 원통하게 생각해 달라고 청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양심의 무거운 짐을 내려 놓으면, 이튿날에는 또 도박이 시작되었다 . 그의 젊은 아내는 이러한 상황이 되풀이되는 것에 익숙해졌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구제를 기대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가능성인 창작활동이, 내외가 단돈 한 푼도 없게 되어 최후의 물건까지 전당잡힌 후보다 더 잘 되는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이 전후관계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부과한 처벌로 그의 죄의식이 만족을 얻으면, 문학활동을 방해하고 있던 것이 힘을 잃고, 그때에야 비로소 그는 문학적 성공으로의 길로 몇 발자국 더 나갈 수 있었다.
다년간 잊고 있던 유년시절의 생활중 어떤 부분이 도박벽 속에서 재현되는가 하는 점은 한 젊은 작가의 단편에서 손쉽게 짐작할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에 몰두했던 슈테판 츠바이크는 세 단편을 모은 『감정의 혼란』 (1927)이라는 작품에서 「한 여자의 24 시간」이라는 제목의 얘기를 싣고 있다. 저자 자신의 말을 빌린다면 이 주옥 같은 단편이 의도하는 바는, 여자가 얼마나 무책임한 존재인가, 여자는 의외의 체험을 당하면 얼마나 지나친, 자신조차도 놀랄 정도의 행동을 하게 되는가를 묘사하는 것뿐이다 . 그러나 이 단편이 내포하는 바는 더 심오하다. 그것에 관해서는 저자 자신의 변명은 별반 없지만, 만일 이 작품에 정신분석적인 해석을 내린다면, 그 속에 표현되어 있는 것은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인류 일반에 공통되는 그 어떤 것, 아니 오히려 남성적인 그 무엇이다. 그리고 그런 정신분석적인 해석이 전상을 포착한 것임은 분명하므로 아무도 이를 거부할 수 없다. 나와 친교가 있는 그 작가의 대답, 즉 은밀한 실마리를 주기 위해 많은 세부사항들이 계산된 것처럼 이야기 속에 얽혀 있지만, 그가 들은 해석은 그가 알고 있는 바나 의도하는 바와 전혀 다르다고 확언한 점은 예술창작의 본질적 특성을 나타내 준다. 츠바이크의 단편은, 나이가 지긋한 지체높은 부인이 이십 여 년 전의 체험을 작가에게 얘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젊어서 과부가 되었고 이젠 자립하게 된 두 아들의 어머니이며, 삶에 대한 아무 기대도 품지 않고 있던 이 부인은 42살 때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있던 여행길에서 우연히 모나코의 도박장에 들어가서, 이목을 끄는 그 장소의 여러 인상 가운데 곧장 두 손을 발견하여 그것에 반해 버렸다. 그 손은 돈을 잃고 있는 노름꾼의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감정을 무서울 정도로 솔직하고 강렬하게 드러내는 듯이 보였다. 주인공은 잘 생긴 젊은 청년이었는데 -츠바이크는 우연인 것처럼 이 젊은이의 나이를 그를 응시하고 있는 부인의 장남과 똑같이 설정하고 있다 ――·돈을 다 잃고 난 뒤 절망에 빠져 노름판을 떠난다. 아마 공원에 가서 희망 없는 목숨을 끊으려고 했을 것이다. 설명할 길 없는 동정에 사로잡힌 부인은 그의 뒤를 좇아가서
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이 젊은이를 구제하고자 한다. 젊은이는 이 여자도 주변에서 그를 성가시게 하는 여자들의 하나인 줄 알고 쫓아 버리려 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의 옆을 떠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와 같은 호텔에 숙박하고, 마침내는 한 침대에서 자게 된다. 이 즉흥적인 사랑의 밤이 지나자, 부인은 이내 평온을 찾은 듯 보이는 그 젊은이에게 매우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는 도박을 하지 않겠다는 굳은 약속을 시킨 다음, 고향으로 돌아갈 만한 돈을 주고, 기차가 떠나기 전에 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그후 여자의 마음 속에는 젊은이에 대한 커다란 애정이 고개를 들어, 그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 그와 작별하지 않고서 함께 떠나기로 결심한다. 사소한 우연이 겹쳐 지체하다가 그녀는 기차를 놓친다. 떠나가 버린 사람에 대한 동경을 가진 채 그녀는 다시 앞서의 도박장으로. 돌아오는데, 거기서 우연히 맨 처음 그녀의 동정을 불러일으켰던 두 손을 다시 발견하고서 깜짝 놀란다. 젊은이는 약속을 어기고 도박장으로 되돌아 왔던 것이다. 여자는 그에게 약속을 상기시키려 한다. 그렇지만 도박에 눈 먼 그는 방해하지 말라고 욕하면서 여자에게 돌아가라고 말하고, 그녀가 자기를 구하기 위해 쓴 돈을 그녀 앞에 던진다. 몹시 상심한 여자는 마지못해 그 자리를 떠나는데, 나중에 젊은이의 자살을 막으려고 했던 자기의 노력이 실패로 끝났음을 듣게 된다.
훌륭하게 설명되어 있고, 빈틈 없는 동기를 가진 이 이야기는 확실히 그것만으로도 완전하여, 반드시 독자에게 큰 감명을 준다. 그러나 정신분석이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이 창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의식적인 것으로 회상되는 사춘기의 소원공상이라는 바탕 위에 서 있다. 그 공상은 젊은이를 자위의 무서운 해로움으로부터 보호해 주고자, 아들을 손수 성생활로 이끌고 싶다는 어머니의 욕망이다. 자주 나타나는 구원의 이야기는 모두 이와 똑같은 바탕에 근거를 두고 있다.자위라는 <악덕>은 여기서는 노름이라는 악덕으로 대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젊은이의 두 손의 정열적인 움직임이 강조되어 있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노름벽은 어린 시절의 자위충동을 대용하는 것이며, 어린이 방에서 손으로 성기를 가지고 장난하는 짓은 다름아닌 <놀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유혹,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그러나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는 결심, 마취시키는 쾌감 및 자기자신을 망치고 있다(자살)는 양심의 가책, 이 모든 것은 대용물인 도박벽에서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一 하지만 츠바이크의 소설은 아들이 아니라 어머니에 의해 서술되고 있다 一 <만약 자위가 나를 어떤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지를 어머니가 안다면 나를 그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틀림없이 그녀의 부드러운 육체를 허용할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들에겐 기쁜 일임에 틀림없다. 츠바이크의 소설 속에 나오는 청년은 어머니를 매춘부와 동일시하고 있는데, 이것도 동일한 공상의 계열에 속한다. 이러한 공상은 접근하기 어려운 여자에의 접근을 손쉽게 해준다. 이러한 환상에 뒤따르는 양심의 가책을 나타내는 것은 이 단편의 비극적인 결말이다. 작가가 이 단편에 부여한 의관이 정신 분석상의 의미를 감추고자 하는 점을 주목하는 것 또한 재미있다. 왜냐하면 여성의 성적 생활이 갑작스럽고 신비로운 충동의 지배를 받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그때까지 정절을 꾸준히 지켜왔던 부인이 왜 그런 놀라운 행동을 취했는가에 대해 충분한 동기를 밝혀 준다. 죽은 남편의 추억에 충실했던 이 부인은 망부와 비슷한 매력이 있는 남자로부터 받는 유혹을 지금까지 물리칠 수 있었다. 그렇지만一그리고 이 점에서는 아들의 환상으로 보는 것이 옳은데一그녀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아들한데 사랑이 전이되는 것을 어머니로서의 그녀는 막을 수 없었고, 운명은 무방비
상태의 그녀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여러 번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 도박벽, 자신을 처벌할 좋은 기회가 되는 이 도박벽
이 참을 수 없는 자위행동의 변형으로서 재현된 것이라면, 그것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생활에서 그처럼 큰 자리를 차지했던 것도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모든 중증의 노이로제에는 유년기 및 사춘기의 자기성욕적 만족이 으례 보이며, 이것을 억제하려는 노력과 아버지에 대한 공포 간의 관계는 이미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1)(정현규 옮김).
1) 프로이트 연구본 제10권, 267-286쪽에서 옮김.
Ⅳ 섬뜩함
1정신분석기는 미학적 연구를 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는 경우가 드문데, 이는 미학을 미에 관한 이론으로 한정하지 않고, 우리 감정의 특성에 관한 이론으로 이해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 그는 정신생활의 다른 충들 속에서 작업하면서, 목표도달을 제지당하고 억압받으며 수많은 부수적 상황들에 종속되어 있는 감정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거의 상관하지 않는다. 이러한 감정의 움직임들은 대부분 미학의 제재이다. 그러나 때로는 정신분석가가 미학의 특정한 영역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경우도 생기는데, 그런 경우 그 영역은 본류로부터 벗어나, 미학의 전문문헌으로부터 경시되는 경우가 보통이다.그 하나가 <섬뜩함 das Unheimliche>이다. 이것이 무서운 것, 불안과 공포를 자아내는 것에 속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한 이 말이 언제나 명확히 규정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어서, 대체로 불안을 자아내는 것들과 동일시되고 있음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특별한 개념어의 사용을 정당화시키는 특별한 핵심이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 불안한 것 안에서 섬뜩함을 구분하게 해주는 이 일반적인 핵심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런데 대개 미학 연구는 모순되고, 거부적이고, 고통스러운 것보다는, 예쁘고, 훌륭하고, 매력적인, 다시 말해 긍정적인 감정 및 그의 조건, 그를 불러 일으키는 대상들만을 즐겨 다루므로, 우리의 질문에 대해 상세하게 다룬 미학문헌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의료심리학 문헌중에서 나는 단 하나 옌치 E. Jentsch1)의 내용은 풍부하나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논문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시대적 이유로 인해 이 소논문을 준비하면서 이와 관련된 문헌, 특히 의국문헌을 철저히 찾아내지는 못했음을 솔직히 말해야겠다. 그러므로 이 논문을 독자 앞에 내놓으면서 나는 어떤 우위도 주장하지 않겠다.섬뜩함을 연구할 때의 어려움으로서 옌치는 이 감정가치에 대한 예민도가 사람에 따라 갖가지임을 강조하고 있다 . 정말 그렇다. 실제로 이 새로운 계획을 세운 필자 자신조차 이 분야에 있어서의 특별한 둔 감성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비상한 민감성이 있어야 마땅할 분야다. 나는 벌써 오랫동안 섬뜩한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체험하거나 맞닥뜨려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제서야 그러한 감정들을 내 안에서 깨우기 위해 그 감정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만 할 형편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어려움은 미학의 다른 여러 분야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로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의심스러운 특성이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해 모순 없이 승인되는 몇몇 경우들을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1) 『섬뜩함의 심리학에 관하여』(1906).
두 가지의 방식이 가능하다. 즉 언어의 발달이 <섬뜩한 unheimlich>이라는 말 속에 지금까지 어떤 의미를 남겨 왔는가를 조사하는 것이 첫번째 방식이고, 다음은 인물과 사물, 감각인상, 체험과 상황에서 우리 속에 섬뜩함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을 모으고, 이 모든 경우들에 공통되는 것으로부터 섬뜩함의 감춰진 성질을 밝혀낸다는 것이 두번째 방식이댜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이 두 방식은 결국 같은 결론, 즉 섬뜩함이란 옛부터 알고 있는 것, 오랫동안 친근한 것으로 소급되는 성질의 무서운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어떤 조건 아래서 친근한 것이 섬뜩함, 무서운 것이 될 수 있는가는 다음에 차차 분명해질 것이다. 또 덧붙여 두겠는데, 이 연구는 실제는 개별 경우들을 수집하는 방식을 택하였으며, 나중에야 단어의 관용적 용법에 의해 결론이 증명되었다. 그렇지만 이 논문에서는 그 순서를 거꾸로 하게 될 것이다.
독일어의 <섬뜩한>은 분명히 비밀의 heimlich , 고향의 heimisch, 천근한 vertraut과는 대립적이므로, 따라서 무엇인가가 무서움은 바로 그것이 잘 알려져 있거나 친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금방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물론 새롭고 친근하지 않은 것 전부가 무서운 것이 아니므로, 이 관계를 역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다만 새로운 것은 쉽사리 무섭고 섬뜩함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약간의 새로운 것만이 무서우며, 전부가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새로운 것, 친근하지 않은 것에는 우선 그것들을 섬뜩함으로 만드는 그 무엇이 첨가되어야만 한다.옌치는 대체적으로 섬뜩함이 새롭고 친근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갖는 이러한 관계에서 멈춰 버렸다. 그는 섬뜩한 감정이 성립하기 위한 본질적인 조건을 지적인 불확실성 속에서 찾는다. 섬뜩함이란 언제나 사람들이 소위 환히 꿰뚫고 있지 않은 그 무엇일 것이라는 견해이다. 인간은 그 환경에 정통하고 있을수록, 그 환경 속의 사물과 사건들에서 섬뜩하다는 인상을 받는 일이 적을 것이다.
이 정의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므로 섬뜩함=친근하지 않은 것이라는 이 방정식을 넘어서 보도록 하자. 우선 의국어에 시선을 돌려 보자. 그러나 우리가 뒤져보는 의국어 사전들은 조금도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 자신이 외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는 커녕 우리는 많은 언어에 독일어로 무서운 것 das Schreckhafte이라는 이 특별한 어감을 지닌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2)2) 다음의 인용은 라이크 Theodor Reik 박사의 호의에 의한 것이다.
라틴어(게오르게스 K. E. Georges의 독일-라틴어 소사전. 1898)
섬뜩한 장소 -locus suspectus, 섬뜩한 밤에 -intempesta nocte희랍어 (로스트 Rost와 솅클 Schenkl의 사전들) uoc -즉 낯설은, 진기한.영어(루카스 Lukas. 벨로우 · Bellow, 플뤼겔 FIugel, 뮈레-산더스 Muret-Sanders의 사전들)uncomfortable, uneasy, gloomy, dismal, uncanny, ghastly, 집에 관해서는 haunted, 사람에 관해서는 a repulsive fellow.프랑스어 (작스-빌라트 Sachs-Villatte)inquietant, sinistre, lugubre, mal a son aise 스페인어 (롤하우젠 Tollhausen. 1889)sospechoso, de mal aguero, lugubre, siniestro.이탈리아어와 포르투갈어는 풀어서 말하는 정도의 단어들로 만족하고 있는 듯하다. 아라비아어와 히브리어에서는 <섬뜩한>이 <마적인>, <끔찍한>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독일어로 돌아가 보자.다니엘 산더스 Daniel Sanders의 『독일어사전』(1860년)에는 비밀스런 heimlich이라는 단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설이 나와 있는데, 이것을 나는 여기에 그대로 전재하고, 몇 군데는 특별히 강조해 보고자 한다 (1권, 729쪽).비밀스런 Heimlich, 형용사(명사는 die Heimlichkeit, 복수는 die Heimlchkeiten). 1 Heimelich로도 사용, 가정의 heimelig, 집에 속하는 zum Hause gehorig, 이국의 것이 아닌 nicht fremd, 친근한 vertraut, 길들은 zahm, 사랑하는 traut, 기분좋은 traulich, 마음 편한 anheimelnd 등.(a) <고어> 집 또는 가족에 속하는 것, 또는 그것들에 속한다고 인정되는 것 , 라틴어의 familiaris와 비교하라. 친근한: 집안 사람Die Heimlichen, die Hausgenossen, 추밀고문관 Der heimliche Rath , 창세기 41:45, 사무엘하 23:23, 역대상 12:25, 지금은 이 단어 대신 Geheimer((d) 의 1을 참조) Ra th가 사용됨 , Heimlicher 참조.(b) 동물에 대해, 길들은, 인간을 따르는의 뜻. 반대어는 야생의 wild, 예: 거칠지도wild 않고 친하지도 heirnlich 않은 짐승. 야수 Wild Thier …… 그것들을 사람들 주변에서 길들여 친숙하게 기르면. 이 짐승들이 어릴 때부터 사람 곁에서 자라면, 그것들은 아주 친근하고, 우호적이 된다. 또 한가지 예: 이 어린 양이 매우 길들어 내 손으로부터 먹이를 받아 먹는다. 황새는 항상 아름답고 길들은 새다 등.(c) 안락한 traut, 기분좋고 마음 편한 traulich anheimelnd; 고요한 만족의 느낌 등, 담으로 둘러 싸인 집이 불러일으키는 유쾌한 평안과 안전한 보호의 만족감: 이방인이 너의 숲을 개간하는 그런 나라에 있어도 너는 마음이 편안한가?; 그 여자는 그의 집에 있는 것이 마음 편하지 않았다; 잘잘 졸졸 줄줄 소리 내며 흐르는 숲의 시내를 따라…… 높고 편한 그늘진 오솔길에서. 고향의 안락함 Heimlichkeit을 파괴한다. 이토록 친근하고 편안한 장소를 나는 지금까지 본 일이 없다(괴테); 우리는 거기를 정말 편안하고 기분좋고 유쾌하고 친근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좁은 담으로 둘러싸인 평화로운 은밀함 속에서; 아주 적은 것을 가지고 즐거운 가정을 만들 줄 아는 세심한 주부; 조금 전까지는 그처럼 낯설었던 남자가 이제는 그럴수록 더욱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신교도인 지주는 …… 가톨릭교도인 자신의 부하들 사이에서는 편안하지 않음을 느낀다; 주위가 기분좋게 되고, 저녁의 고요가 조용히 네 작은 방 가에 것들일 때; 그들이 휴식을 위해 소망했을 법한 자리처럼 조용하고 사랑스럽고 편안한; 다시 없는 쉴 자리. 그곳이 그에게는 전혀 편안하지 않았다. 또 다음과 갇은 용법도 있다: 그 장소는 매우 조용하며 한적하고 그늘져 있어 마음이 놓였다; 이리저리 출렁이는 파도는 꿈꾸는 듯 자장가처럼 편안하고. ——· 특히 Unheimlich를 참조하라 -- 특히 슈바벤 지방과 스위스의 작가들은 종종 3음절로 사용: 이를테면, 그가 집에 누워 있었을 때, 이보는 밤에 또다시 얼마나 <마음이 놓였을까 heimelich>, 집에 있어 아주 마음 편했다 heimelig; 따뜻한 방, 상쾌한 오후; 인간이 얼마나 자기가 작으며 주님은 위대한가를 마음으로부터 느낄 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편안이다; 사람들은 점차 서로서로에 대해 진정 상냥하고 평안해졌다; 기분 좋은 편안함; 여기만큼 내게 편한 곳은 없을 것이다; 먼 나라에서 오는 자는…… 대부분 사람들과 편안히 살지 않는다; 자신의 식구들에 둘러싸여서…… 한때는 그렇게도 다정하고 즐거웠던 그 오두막; 그 때 야경꾼의 뿔피리 소리가 답으로부터 매우 평화롭게 울려 나온다. 거기 그의 음성이 부드럽게 더해진다; 거기에서는 아주 부드럽고 따뜻하게 놀랄 만큼 평안히 잘 수 있다.
이 좋은 단어가 2번의 뜻과 혼동되기가 쉽다는 이유 때문에 사어가 되어 버리는 일을 막기 위해 위의 방식을 보편화하는게 좋겠다. 다음 예와 비교하라. <체크가의 사람은 모두 은밀합니다(heimlich,2)> 은밀하다고 Heimlich?……heimelich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 겁니까?<글쎄, 그들은 마치 파묻어 버린 샘이나 말라버린 연못처럼 여겨지거든요. 이 샘이나 연못에 갈 때마다, 언젠가는 다시 한 번 물이 나울 수도 있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답니다.> 우리는 그것을 섬뜩하다 unheimlich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것을 은밀하다 heimlich라고 말하시는군요. 당신은 대체 어떤 점에서 이 가족이 무언가 숨겨진 것이나 신뢰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구츠코).
(d) 특히 슐레지엔 지방에서 기쁜frohlich, 쾌활한 heiter의 뜻으로 쓰임, 날씨에 관해서도 씀2 숨은 versteckt, 숨겨 두다 verborgen gehalten,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고 은폐하고자 하다, 비밀 (Geheim,2)과 비교하라, 이 단어는 신고 독일어 시대의 사람들에 이르러 특히 옛날 언어, 성경에서 사용됨, 예컨대 욥기11:6, 15:8, 지혜서 2:22 , 고린도 전서 2:7 등. 그리고 비밀 Geheimnis 대신 은밀 heimlichkeit을 사용하기도 함. 마태복음 13: 35 등, 항상 정확하게 분리되어 있지는 않음: 은밀히 (heimlich, 누군가의 등 뒤에서) 무엇을 한다, 몰래 도망쳐 나온다; 비밀집회, 약속; 은밀하게 심술궂은 기쁨을 가지고 바라보다; 남몰래 탄식한다, 운다; 무언가를 은폐하려는 듯 은밀히 행하다; 내밀한 연애, 정사, 죄; (부유함이 감추도록 명하는) 비밀의 장소, 사무엘상 5:6, 작은 방(퇴장), 열왕기하 10:27 ; 비밀의 의자; 무덤 속에, 비밀 속에 던져 넣는다. __· 은밀히 라오메돈 앞으로 이끌다/암말들을.――사악한 주인에 대해 몰래, 은밀히 기만적으로, 악의적으로…… 고통받는 친구에 대해 솔직하고, 자발적으로, 호의적이고 친철하게; 내 마음에 감춰진 가장 신성한 것을 알아주게; 은밀한 기술; 공기가 자유롭게 통하지 않게 되면 숨은 음모가 시작된다; 자유란 은밀한 모반자들의 조용한 암호이며, 공개적인 혁명가들의 커다란 외침이다(괴테); 거룩하고은밀한 영향;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뿌리를 나는 가지고 있다. 깊은 땅 속에 난 뿌리 박고 있다; 나의 비밀의 장난 ; 그가 그것을 분명하고 양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것을 은밀하고 비양심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은밀히 눈치채지 않도 록 무색 망원경 을 만들게 해라 ; 금후 절대로 우리 사이에 숨기는 것이 없기를―― 누군가의 비밀 heimlichkeiten을 알게 되다, 공개하다, 누설하다; 나의 등 뒤에서 음모를 꾸미다 ; 이 시대에 사람들은 애써 비밀을 갖는다; 비밀과 은밀한 취미; (숨겨진 황금의) 비밀에 대해 무력한 마력은 통찰의 손길만이 해결할 수 있다; 네가 그 여자 를 어떤 고요한 비밀 장소에 숨겨 두었는가 를 말하라 . 비밀의 성을 만드는 꿀벌들이여(밀랍봉인); 희귀한 비술을 터득하고서. 합성어는 1번의 (c)를 보라. 특히 반대어도 마찬가지임. 이를 테면 Un-heimlich는 불쾌한 것, 불안한 공포를 자국하는 것의 뜻. 그에게는 아무래도 섬뜩하고 유령처럼 보였다; 섬찟하고 불안한 밤의 시간들; 벌써 오래 전부터 나는 섬뜩한, 아니 끔찍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그것이 내게는 섬뜩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괴테) 섬뜩한 공포 를 맛본다…… (하이네) 석상처럼 섬뜩하고 굳어 있는; 연무라 불리우는 기분 나쁜 안개. 이 창백한 젊은이들은· 기분 나쁘며 뭔가 악한 일을 꾸미고 있다. 감춰져 있어야 할 것, 비밀에 붙 여야 할 것이 겉으로 드러나면 사람들은 이것을 섬뜩하다 unheimlich고 말한다(셀링) ―신성한 것을 감추다, 알지 못하는 섬뜩함 Unheimlichkeit으로 둘러싸다 등. 一―캄페가 근거도 없이 주장하는 것처럼 2번 뜻의 반대어로 사용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상의 긴 인용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하임리히 heimlich 라는 단어가 갖는 여러 가지 의미 중에는 반대어인 운하임리히 unheimlich와 일치하는 의미도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친한 것, 기분 좋은 것 das Heimliche가 기분 나쁜 것, 비밀인 것 das Unheimliche이 되는 것이다. 구츠코의 예를 보자. <우리는 그것을 섬뜩하다 unheimlich고 하는데,당신은 그것을 은밀하다 heimlich고 하시는군요.> 어쨌든 heimlich라는 단어가 하나의 의미만 갖고 있지 않고, 두 개의 표상군, 즉 친밀한 것, 유쾌한 것의 표상군과 감춰진 것, 숨겨져 있는 것의 표상군에 속하며, 이 둘은 대립적은 아니지만 서로 완전히 낯선 것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unheimlich는 다만 1번 의미의 반대어로서 사용될 뿐이며, 2의 의미의 반대어로서는 사용되는 일이 없다. 이 두 의미 사이에 어떤 발생사적 관계를 가정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는 산더스의 사전에서는 알 수 없다. 반면에 앞서의 인용문 속의 셸링의 말에 주의하고 싶다. 셸링의 말은 unheimlich라는 개념의 내용에 관해,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섬뜩함이란 비밀이며 감춰져 있어야 할 것이 겉으로 나타난 모든 것들이다.
이렇게 자극된 우리의 의문은 그림형제의 사전(라이프치히 1877년판, 제4권 제2부, 873쪽 이하)을 통해 부분적으로 해결된다.heimlich ; 형용사와 부사 vemaculus, occultus;중고 독일어로 heimelich , heimlich874쪽: 약간 다른 의미로 사용: 나는 편안 heimlich하다, 공포에서 자유 롭다.[3] (b) heimlich란 또한 유령 같은 것이 없는 장소에 쓰인다……875 쪽: (β) 친한, 낯익은, 친밀한.4 고향의, 집안에서의 뜻으로부터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감춰져 있는, 숨겨져 있는의 개념이 다양한 관련성 속에서 형성된다……876 쪽: <호수의 왼편 목장은 숲 속에 은밀히 놓여 있다>(쉴러, 『빌헬름 텔』 제1막 4장).……극히 자유롭고 근대의 용례로서는 이례에 속하는 것인데…… heimlich는 숨기는 행동의 동사와 결합한다: 나를 그 초막 속에 몰래 지키시고(시편 27:5). (·……인체에서 보이지 않는 곳, 치부……죽지 않은 사람들은 은밀한 곳을 맞았다. 사무엘상 5 : 12)
c) 국사에서 중요한 동시에 비밀을 유지해야 할 방책을 의논하는 관리를 추밀고문관 heimliche Rate이라고 부른다. 이 형용사는 오늘날의 용어법에 따르면 geheim(비밀의)으로 바꾸어야 한다; …… 바로 왕이 그(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추밀고문관)라 하고……(창세기 41장 45절).878쪽: 6 인식에 있어서 heimlich란, 신비로운, 비유적인의 의미임: 신비한 의미, mysticus, divinus, occultus, figuratus.878쪽: 다른 뜻으로는 heimlich는 인식되지 않은 채 있던 것, 무의식적인 의 뜻…… 그러나 또한 heimlich는 연구와 관련하여 닫혀진, 탐구하기 어려운의 뜻으로쓰임……<너는 알았겠지? 그들은 우리를 믿지 않는다. 프리트랜더후의 속마음을 알 수 없는 heimlich 얼굴을 무서워하고 있다 >(r 발렌슈타인 진영」, 제2막). (9) 앞 번호에서 나왔던 숨겨진 것, 위험한 것의 의미는 더욱 발전하여, 그 결과 heimlich가 보통은 unheimlich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heimlich, 3b의 의미에서 발전, 874쪽을 참조): <나는 가끔 내가 밤중에 방황하거나, 유령을 믿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어떤 구석도 나에게는 섬뜩하고 무섭다>(클링어, 『극장 』 ).그러므로 이 단어는 일종의 양가성에 따라서 자신의 의미를 발전시키고, 마침내는 반대어와 일치하기에 이른다. unheimlich는 어쨌든 heimlich의 한 종류다. 아직 충분히 명확하지는 않은 이 결과를 셸링의 정의와 일치시켜 두기로 하자. 섬뜩함의 개개의 실례를 일일이 살펴 가면, 이 말이 암시하는 바를 알게 될 것이다.2
이제 섬뜩한 느낌을 특별히 강하고 명확하게 일깨울 수 있는 사람과 사물, 인상, 사건, 상황 등을 음미해 보자. 그러면 당장 필요한 것은 적절한 예를 하나 고르기이다. E. 옌치는 좋은 예로서 <외관상은 살아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 정말 살아 있는지 어떤지 하는 의문, 또 반대로 생명 없는 사물이 어쩌면 생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을들어 납인형, 정교한 인형, 자동인형들이 주는 인상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또 이 인상에 속하는 것으로서, 간질의 발작과 광기의 발작 등의 섬뜩함을 들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러한 것들이 일상적인 심적 활동의 배후에는 자동적인-기계적인 과정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관찰자의 마음 속에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옌치의 견해에 전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우리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는 섬뜩한 효과를 그 누구보다도 훌륭히 묘사하는데 성공했던 한 작가의 존재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이야기에 의해 섬뜩한 인상을 용이하게 불러일으키는 확실한 기교의 하나는, 이야기 속의 한 인물이 인간인지 또는 자동인형과 같은 것인지를 불확실하게 해둘 것, 그리고 독자에게 즉시 이 사태를 탐구하여 정확히 하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 애매함이 직접 독자의 주의력의 초접이 되지 않게 해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일이 명확해지고 나면 흔히 말하듯이 특별한 감정적 효과는 즉시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호프만 E. T. A Hoffmann은 그 환상적인 이야기 속에서 이 심리적 술책을 성공적으로 반복하여 활용하였다>고 옌치는 쓰고 있다.이 정확한 지적은 호프만의 『밤의 이야기』 중의 「모래사내 Sand-mann」를 향하고 있다. 오펜바흐의 가극 『 호프만의 이야기 』의 제1막에 나오는 인형 올림피아라는 인물은 여기서 따왔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살아 있는 듯이 보이는 인형 올림피아라는 모티프는 이 소설이 지닌 비할 나위 없이 섬뜩한 효과를 위해 기능하고 있는 유일한 모티프가 결코 아니다. 아니 유일한 모티프가 아닐 뿐더러 가장 중요한 모티프조차도 아니다. 또 작가 스스로 올림피아의 에피소드를 다소 풍자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으며 젊은이의 입을 빌어 사랑에 대한 과대평가를 조롱하는데 이용하고 있다는 점도 이 효과를 올리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소설의 중심점에는 어떤 다른 주제가 놓여 있다. 이 주제는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며, 중요한 곳에서는 늘 반복해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어린이의 눈을 빼는 모래사내라는 모티프이다.
이 환상적인 이야기는 학생 나타나엘의 어린 시절의 추억에서 시작된다. 그는 현재 행복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수수께끼같은 무서운 죽음과 연결된 기억울 도저히 지워 버리지 못하고 있다.이따금 어머니는 밤에 잘 시간이 되면 <모래사내가 온다>고 일러서 아이들을 침대로 보내곤 했었는데, 그럴때면 나타나엘은 영낙없이 정말 아버지를 괴롭히러 오는 손님의 무거운 발소리를 듣는다. 어머니는 모래사내에 대해 질문 받으면, 의례 그런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유모가 자세한 얘기를 들려준다. <나쁜 놈인데요, 아이가 자려고 하지 않으면 와요. 그리고 아이의 눈 속에 두 손 가득 움켜 쥔 모래를 던져요. 그리고 눈알이 피두성이가 되어 튀어나오면 그것을 자루에 넣어 반달로 가지고 가서, 자기 아이들에게 먹여요. 그 아이들은 반달의 집 속에 있는데, 올빼미처럼 끝이 구부러진 부리를 가지고 있어요. 그 부리로 말 안 듣는 아이들의 눈을 쪼아 먹기 위해서죠.>소년 나타나엘은 이윽고 장성하여 지각도 들어, 모래사내를 그처럼 무서운 것으로 생각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모래사내에 대한 불안은 그의 마음속에 뿌리박고 있었다. 대체 모래사내는 어떻게 생겼는지 보기로 결심한 그는 모래사내가 울 듯한 어느 날 밤, 아버지의서재의 한 구석에 숨었다. 찾아온 남자는 변호사 코펠리우스였다. 가끔 점심에 초대되어 올 때마다, 아이들이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 코펠리우스를 무서운 모래사내와 동일시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미 이 장면의 나머지 부분에서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이 불안에 사로잡힌 소년의 최초의 망상인지, 그렇지 않으면 소설의 세계 속에서 사실로서 인정되어야 할 보고인지에 대해 얼버무리기 시작한다. 아버지와 손님은 화로에 이글이글 불을 피우고서 일을 시작한다 숨어 있던 소년은 코펠리우스가 <눈알을 내놔라, 눈알을 내놔라>하고 떠드는 소리를 듣고, 고함을 질러 자기가 있음을 드러내고 만다. 코펠리우스는 소년을 붙잡아, 불 속에서 시뻘겋게 탄 불등걸을 꺼내어 그것을 소년의 눈에 뿌리려고 한다. 눈알을 화로에 던져 넣겠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소년의 눈은 용서해 달라고 애원한다. 그리고나서 소년이 깊은 실신에 빠지고, 오랫동안 아프게 되는 것으로. 이 체험은 끝난다. 모래사내를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사람이라면 어린이의 이 환상 속에는 유모가 해준 이야기의 자취가 있음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어린이의 눈 속에 던져지는 것은, 지금은 모래알 대신 시뻘겋게 탄 불등걸인데, 두 경우 다 그것은 눈알을 빼내기 위해서다. 1년 후, 모래사내가 다시 왔을 때, 아버지는 서재에서 폭발로 인해 죽는다. 변호사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사라
다.그런데 소년시절의 이 무서운 모습을, 대학생이 된 나타나엘은 행상하는 이탈리아인 안경장수 주제페 코폴라에게서 보았다. 그는 그 대학도시에서 나타나엘에게 청우계를 사라고 권한다. 거절 당하자 <청우계는 필요없습니까, 청우계는 필요 없다구요 .. 그럼, 좋은 눈알도 있습니다. 좋은 눈알도>하고 말한다. 나타나엘은 깜짝 놀라지만, 내놓은 눈알이 아무렇지도 않은 보통 안경이었으므로 놀람도 약간 가라앉는다. 그는 코폴라한테서 주머니용 망원경을 하나 사서, 그것으로 건너 편의 스팔란차니 교수의 집을 들여다 보다가, 교수의 예쁜, 그러나이상하게도 말수가 적고 움직이지도 않는 딸 올림피아를 보게 된다. 곧 그는 이 딸을 열렬히 사랑하게 되어 자기의 영리하고 성실한 약혼녀를 잊어 버린다. 그러나 올림피아는 실은 스팔란차니가 기계장치를 만들고 코폴라――그 모래사내――가 그 눈알을 끼워 넣은 자동인형이었다. 우연히도 나타나엘은 이 두 제작가가 자신들의 작품을 놓고 싸우는 장면을 보게 된다. 안경장수는 눈알이 없는 나무 인형을 메고 가버리고, 학자 스팔란차니는 방바닥에 떨어전 피두성이 올림피아의 눈알을 나타나엘의 가슴에 던지면서, 이것은 코폴라가 나타나엘에게서 훔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새로운 광기의 발작에 사로잡히고,그 착란 속에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기억이 이 새로운 충격과 연결된다. <야, 야, 야, 불의 고리, 불의 고리! 돌아라, 불의 고리, 신난다, 신난다, 나무인형, 야, 귀여운 나무인형, 돌아라.> 그는 이렇게 외치면서, 올림피아의 아버지라고도 할 수 있는 교수에게 덤벼 들어, 그를 교살하려고 한다.
길고도 중한 병에서 나타나엘도 드디어 완쾌한 듯이 보였다. 그는 다시 만난 약혼녀와 결혼할 예정으로 되어 있다. 어느 날 둘이서 시내를 걸어가게 되는데, 높은 시청의 탑이 거대한 그림자를 광장에 던지고 있다. 소녀는 탑에 올라가 보자고 제안한다. 그동안 두 사람과 함께 있던 그 여자의 오빠는 아래에서 기다리게 된다. 위에 올라가자 거리를 따라 이쪽으로 움직여 오는 듯한 기묘한 형상이 클라라의 주의를 끈다. 나타나엘은 주머니에 갖고 있던 코폴라의 망원경으로 관찰한다. 그러자 그는 새로이 광기에 사로잡혀 <나무인형아, 빙빙 돌아라>하고 부르짖으면서 클라라를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려고 한다. 그 여자의 외침을 듣고 달려온 오빠가 그녀를 구조하여 안고 뛰어 내려 간다. 위에서는 <불의 고리여, 빙빙 돌아라>하고 울부짖으면서 미친 나타나엘이 뛰어 돌아다니고 있다. 이 말의 유래는 우리가 이미 아는 바다. 아래에 모여든 사람들 가운데 별안간 다시 나타난 변호사 코펠리우스가 우뚝 서 있다 나타나엘한테 광기가 터전 까닭은 이 자가 접근해 옴을 보았기 때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미쳐 날뛰는 사나이를 전정시키러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코펠리우스 3)는 웃으면서 <잠깐 기다리시오, 곧 제 발로 내려와요>하고 말한다. 나타나엘은 돌연 멈추고, 코펠리우스의 모습을 발견하자 째지는 듯한 소리로 <그래, 좋은 눈알이다, 좋은 눈알이야!> 하고 의치더니 난간에서 떨어진다 그가 머리가 깨진 채 포장돌 위에 쓰러졌을 때, 모래사내는 군중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3) 이 이름의 어원에 관해:코펠라 Coppella = 시험용 남비(아버지가 죽음을 당한 화학실험과 관계 있음), 코포 Coppo = 눈구멍(랑크박사의 소견에 의함).
이상의 요약에 의해서 분명해지는 것은, 섬뜩한 느낌은 모래사내라는 인물, 즉 눈알을 빼앗긴다는 관념에 직접적으로 밀착되어 있으며, 엔치가 주장한 바와 같은 지적 불확실성은 이러한 효과와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확실히 인형 올림피아의 경우 생명이 있는냐 없느냐는 의혹도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더욱 섬뜩한 예 앞에서 이러한 의혹은 더 이상 문제시되지 않는다. 물론 작가는 처음에는 일부러 이것이 현실세계인지 또는 작가가 임의로 만들어낸 공상세계인지 우리로 하여금 알아채지 못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일종의 불확실성 속에 남겨 둔다. 물론 그 어느 편을 취하든 그것은 작가의 자유이며, 만일 그가 이를테면 셰익스피어가 『햄릿』과 『맥베스』에서, 또한 다른 의미에서 『 템페스트 』 와 『 한여름 밤의 꿈』에서 한 것처럼, 정령과 악령 및 유령이 출몰하는 세계를 소설의 무대로 택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에게 동의할 수밖에 없으며, 작가를 따라가는 동안은 작가가 전제로 삼은 그 세계를 마치 현실세계처럼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호프만의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에 이 불확실성은 없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호프만이 우리까지도 기이한 안경장수의 망원경 또는 안경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게 하려는 것을 깨닫는다. 아니, 작가 자신이 전에는 이런 기구로 사물을 본 일이 있는 듯함을 깨닫는다. 소설의 결말은 안경장수 코폴라는 실제로 변호사 코펠리우스임을, 따라서 모래사내이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미 <지적(知的)인 불확실성>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미친 사람의 공상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성적인 우월로써 그 뒤에 감춰진 전상을 파악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런 식으로 설명되었다고 해서 섬뜩함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지적 불확실성이라는 것은, 이 섬뜩한 효과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조금도 유용하지 않다.이와 반대로 정신분석상의 경험은 눈을 다치거나 또는 잃는다는 것은 어린이들에게 무서운 불안이 됨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 불안한 심정은 많은 성인에게도 남아 있어 그들은 어떤 육체적인 손상보다도 눈을 상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자신의 눈동자처럼 소중히 여긴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그런데 꿈, 공상, 신화들을 연구해보면, 눈에 대한 불안, 실명에 대한 불안은 종종 거세에 관한 불안을 대신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푸스가 스스로를 실명시킨 것은 속죄법에 따라 그에게 가해지기로 되어 있는 거세의 벌을 경감시킨 것에 불과하다. 합리적인 관점에서, 눈에 관한 불안은 거세불안에서 파생되었다는 주장을 거부할 수도 있다. 혹은 눈과 같이 귀중한 기관이 그에 상응하는 커다란 두려움으로써 다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거세불안의 배후에는 이보다 더 깊은 비밀이나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이 견해로는 꿈, 공상, 신화 등에 나타나 있는 음경과 눈 사이의 대상관계를 바로 파악한 셈이 되지 않을 뿐더러, 또 음경을 자르겠다는 협박에 대해 특히 강하고 어두운 감정이 일어나며, 그리고 이 감정이 비로소 다른 기관들을 잃는다는 관념에도 여운을준다는 인상을 없애지는 못할 것이다. 실제로 노이로제 환자의 분석에서 <거세 컴플렉스>의 세부를 알고, 환자의 심적 생활에서 이것이 차지하는 커다란 비중을 인식하게 되면, 더 이상의 의문은 사라져 버린다.
그래도 나는 정신분석적 견지에 반대하는 사람에게, 실명의 불안이 거세 컴플렉스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특히 호프만의 「모래사내」의 이야기를 선택하지는 말라고 권해야겠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왜 여기서 실명의 불안이 아버지의 죽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모르게 된다. 왜 모래사내는 항상 사랑의 훼방군으로 등장하는가? 그는 불행한 나타나엘과 그 약혼녀와의, 그리고 그의 가장 친한 벗인 약혼녀의 오빠와의 사이를 갈라놓는 자다. 그는 나타나엘의 제2의 애인인 인형 올림피아를 망가뜨리고, 또 나타나엘이 다시 만난 클라라와 행복한 결혼생활로 들어가기 직전에 그를 자살로 몰아넣는다. 그 소설의 이런 요소와 기타 여러 특징은 실명하는 불안과 거세의 관계를 부인하며, 제멋대로이며 무의미하게 보이지만, 모래사내 대신 거세를 행하고 싶었던 두려운 아버지를 바꿔 놓아보면, 반대로 이해할 만한 것이 된다.4)4) 사실 호프만이 공상을 다루면서 소재의 요소들을 그 원래의 질서를 재건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지는 않았다. 어린시절의 이야기에서 아버지와 코펠리우스는 양가성에 의해 두 대립물로 분열된 아버지의 상이다. 한쪽은 장님으로 만들겠다고(거세) 위협하고, 다른 쪽, 선량한 쪽인 아버지는 제발 아들의 눈을 그냥 둬 달라고 간원한다. 억압을 가장 심하게 받은 컴플렉스의 부분, 즉 나쁜 아버지가 죽었으면 하는 소원은 선량한 아버지의 죽음 가운데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코펠리우스의 탓으로 되어 있다. 후일의 대학생 시절의 얘기 속에서 이 한 쌍의 아버지에 해당되는 것은 스팔란차니 교수와 안경장수 코폴라다. 교수 자체는 아버지 계열의 한 인물이며, 코폴라는 변호사 코펠리우스와 동일한 인물로 인식되어 있다. 그들은 전에 함께 비밀의 화로에서 일을 했듯이 지금은 함께 인형 올립피아를 만들었다. 교수는 올림피아의 아버지라고조차 불리운다. 이처럼 두 번이나 함께 있는 사실로부터 생
각해 보면, 그들이 아버지의 상이 분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기술자도 안경 장수와 함께 올림피아의 아버지이며 또한 나타니엘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무서운 장면에서 코펠리우스는 소년을 장님으로 만들기를 단념한 후 시험 삼아 그의 팔과 다리를 비틀어 보았다. 즉 기술자가 인형의 몸에 하듯이 그에게 했다. 잠귀신 표상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이 기묘한 특징 때문에 거세의 새로운 등가물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 특징은 코펠리우스와 그의 나중의 적수인 기술자 스팔란차니와의 내적인 동일성 또한 암시하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올림피아를 해석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자동인형은 나타니엘이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에 대해 지녔던 여성적인 태도가 물질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두 아버지 스팔란차니와 코폴라는 나타니엘의 한 쌍의 아버지의 신판이며 재생이다. 안경장수가 나타니엘의 눈알을 훔쳐 인형에 끼었다는 스팔란차니의 말은 그 자체로서는 이해가 불가능하였으나, 이제 올림피아와 나타니엘의 동일성을 입증하는 것으로서 의미심장해진다. 올림피아는 말하자면 나타니엘에게서 분리된 컴플렉스이며, 이것이 사람의 탈을 쓰고 그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나타니엘이 이 컴플렉스에 지배되어 있음은 올림피아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억제할 길 없이 강렬하다는 데에 표현되어 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자기애적인 것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그러면 이런 사랑에 빠진 남자가 실제의 사랑의 대상에서 멀어지는 까닭도 이해할 수 있다. 거세 컴플렉스에 의해 아버지에게 정착되어 있는 청년이, 여자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타당하다. 이는 여러 환자를 분석한 결과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들의 경우 그 내용은 물론 소설의 경우처럼 공상적은 아니지만, 대학생 나타니엘의 얘기에 못지 않게 비참한 것이다.
호프만은 불행한 부부관계에서 태어났다. 그가 3세때 아버지는 그 작은 가정을 떠나 다시는 그들과 함께 살지 않았다. 그리제바흐가 호프만 전집의 머리말에 쓴 전기를 읽어 보면, 아버지에 대한 관계는 이 작가의 감정생활에서 가장 다치기 쉬운 부분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그러므로 우리는 모래사내가 갖는 섬뜩함의 원인을 어린이의 거세컴플렉스의 불안으로 소급해 보려고 한다. 그러나 섬뜩한 느낌의 성립조건으로서 이런 유아적 요인을 설정하려고 하자마자, 우리는 이 결론을 섬뜩함의 다른 예에 적용해 보고 싶은 용기가 생긴다. 「모래사내」에는 이의에도 살아 있는 듯한 인형이라는 모티프가 등장하는
데, 옌치는 이를 중요시했다. 그는 어떤 것이 살아 있는지 어떤지 분명치 않다는 지적인 불확실성이 환기되는 점, 그리고 생명 없는 것이 생명체와 너무 닮은 점은, 섬뜩한 느낌을 자아내는 데 특별히 적합한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형을 대상으로 삼는 경우, 우리는 어린이의 세계에서 별로 떨어져 있지 않으며, 놀이를 하는 어린아이는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 사이를 전혀 엄격하게 구별치 않고, 오히려 즐겨 그 인형을 생명 있는 것처럼 다룬다. 우연히 한 여환자로부터 들은 얘기인데, 그 여자는 8세 때에도 아직 특별한 방법으로 인형을 잔뜩 쏘아보고 있으면 인형은 살아날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도 역시 어린 시절의 요소는 손쉽게 발견된다. 그러나 기이한 일은 「모래사내」의 경우에는 오래된 어린 시절의 불안이 일깨워지는데 반해, 이 살아 있는 인형의 경우에는 불안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고, 어린이는 인형이 되살아나기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을 뿐더러, 그렇게 되기를 원하기조차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섬뜩한 느낌의 근원은 어린이의 불안이 아니라, 어린이의 소원 또는 단지 어린이의 신앙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것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아마도 이것은 나중에 우리의 이해를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는 다양성에 지나지 않는다.
호프만은 문학에서 섬뜩함을 다루는 데는 무적의 대가다. 장편소설 『악마의 영약(飯藥)』 은 섬뜩한 효과를 내는 모든 종류의 모티프들로 충만되어 있다. 이 소설의 내용은 너무나 풍부하고 복잡하므로, 요약 조차 불가능할 것 갇다. 끝에 이르러 지금까지 독자에게 감춰져 있던 줄거리의 전제들이 제시되지만, 그 결과는 독자에게 수수께끼를 풀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독자를 완전히 혼란시킨다. 작가는 같은 종류의 소재들을 너무 쌓아 올렸다. 그 때문에 전체의 인상이 약해지지는 않지만, 이해하기가 어려워졌다. 우선 우리로서는 섬뜩한 효과를 울리는 모티프들 중에서 가장 현저한 것을 골라내어, 그것을유아기의 근원으로 소급시킬 수 있는지를 살피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 주제들은 모든 단계와 형태 속에서 나타나는 분신현상과 관계 있다. 즉 겉모양이 홉사하기 때문에 동일시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 소위 텔레파시에 의해 이 인물들 중의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로 심적 과정이 전이됨으로써 이 관계가 고양되고,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지식, 감정, 체험을 공유하게 되는 것, 다른 인물과의 동일시를 통해 그 결과 자기의 자아에 대해 혼란을 일으키거나 또는 다른 자아를 자신의 자아 대신으로 바꿔 놓는 것, 즉 자아배가, 자아분열, 자아혼동, 그리하여 마침내는 동일한 일의 끊임없는 반복, 비슷한 용모, 성격, 운명, 범죄행위의 되풀이, 아니 연속되는 몇 세대 동안 이름까지도 되풀이되는 현상 등이다.
분신의 모티프는 오토 랑크 Otto Rank의 동명의 논문 속에서 매우 소상히 논술되어 있다.5) 거울에 비치는 모습, 그림자, 수호신, 생령설, 죽음의 공포 등에 대한 분신의 관계들이 여기에서 연구되어 있지만, 이 모티프의 놀라운 발전사도 여기 명확히 되어 있다. 왜냐하면 분신이란 본래 자아의 영속에 대한 보장, <죽음의 위력에 대한 단호한 부정>(랑크)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불사의> 혼이야말로 육체의 최초의 분신였던 모양이다. 파멸에 대한 방어로서 창안해 낸 이러한 이중화의 경향을 우리는 꿈의 언어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거세가 성기상징의 이중화 혹은 복수화에 의해 표현되곤 한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문화에서 사자의 자태를 영속적인 소재 속에 떠 두는 기술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 관념들은 원시인과 어린이의 마음을 지배하는, 즉 원초적 나르시시즘의 무한한 자기애를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렇지만 이 단계를 극복하면 분신의 형태에도 변화가 일어나, 전에는 영생의 보증이었던 것이 이제는 죽음에 대한 섬뜩한 전조5) 랑크, 「분신」(1914).
로 변한다.
분신의 관념이 이 근원적 나르시시즘과 함께 몰락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 관념은 분신발전의 단계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 속에는 서서히, 나머지 자아와 대립하는 특수한 기관이 형성되어, 이 기관이 자기관찰과 자기비판의 구실을 하며, 마음 속에서 검열의 일을 도맡으며, 이윽고 우리 의식에 <양심>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감시망상의 병적인 케이스에서는 이 마음의 기관이 고립하고, 자아로부터 분리되어서, 의사의 눈으로 분간할 수 있게 된다. 나머지의 자아를 마치 대상처럼 다룰 수 있는 이러한 기관이 존재한다는 사실, 즉 인간은 자기관찰을 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낡은 <분신>의 관념을 새로운 의미로 채울 수 있게 하고, 또 이 관념에게 여러 가지 것들을, 무엇보다도 자기비판의 눈에는 이미 극복된 낡은 원시시대의 나르시시즘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전부를 전가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6)6) 인간의 가슴에는 두 혼이 살고 있다고 시인이 푸념할 때, 그리고 통속십리학이 인간의 자아분열에 관해 말할 때, 그들이 생각하는 바는 자아십리학에 속하는 분열, 즉 비판적 기관과 나머지 자아 사이의 분열이지, 정신분석에 의해 발견된 자아와 무의식적으로 억압된 것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차이는 자아비판에 의해 거절된 것들 속에는, 억압된 것들의 파생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어느 정도 약화된다.
그러나 자아비판에게 불쾌한 내용들만이 분신에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공상 가운데서 아직도 집착하길 좋아하는 충족되지 않은 모든 가능성, 불리한 의적 환경이 꺾어 버린 자아의 모든 목표, 그리고 자유의지라는 착각을 빚어낸 모든 억압된 의지결정도 역시 분신에 편입된다 .7)
7) 분신에 관한 랑크의 연구는 에버스 H. H. Ewers 의 작품 『프라하의 대학생』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이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그 애인에게 결무의 상대를 죽이지 않기를 약속했다. 그러나 결투장으로 가는 길에 그는 이미 상대를 죽
그렇지만 이처럼 하여 분신현상의 명백한 근거를 관찰한 지금, 우리는 이것들 중의 어느 하나도, 이 현상에 수반되어 있는 굉장히 강렬한 정도의 섬뜩한 느낌을 우리에게 이해시켜 주지는 않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병리학적인 심리적 과정에 관한 우리 지식에 의해 이렇게 부언해도 괜찮겠다. 즉 이 내용들 중 어느 하나도, 그것을 낯선 것으로서 자아로부터 투사해 내는 방어노력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고. 뭐니뭐니해도 섬뜩함의 성격은 오직 분신이 이미 극복된 심리적 원시시대에 속하는 형성물이라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이 형성물은 물론 그 당시에는 더 친밀한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신들이 자신들의 종교가 멸망한 후에는 악마가 되듯이, 분신은 공포상이 된 것이다(하이네의 『유형지의 신들 Die Gotter im Exil』을 참조).
호프만이 사용하고 있는 기타 자아방해의 형식들은 이 <분신> 모티프의 예를 살펴보면 판단내리기가 쉽다. 그 경우 중요한 것은 자아감정의 발달사에 있어서의 개별 단계로 되돌아 가기, 자아가 아직 의계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확연히 구별되어 있지 않았던 시기로 소급하기이다. 나는 이 모티프들이 섬뜩한 인상을 자아내는 데 이바지하고 있는 줄로 믿는다. 물론 이 인상 속에 있는 그러한 모티프들의 몫을 정확히 분리해 끄집어 내기는 수월치 않다하더라도 말이다.동일한 것의 되풀이라는 요소를 섬뜩한 느낌의 근원으로 보는 데 대해 아마 모든 사람이 찬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이 동일한 것의 되풀이 현상은 일정한 조건들 아래, 그리고 일정한 상황과의 결합 하에서 섬뜩한 느낌을 일으킨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이 느낌은 또 많은 꿈 속에서의 곤혹스런 상황도 상기시킨다. 어느 더운 여름날의 오후, 이탈리아 소도시의 인적 없는 낯선 거리를 걷고 있던 나는 어느 구역에 들어갔는데, 거기가 어떤 성여 버린 자기의 <분신>를 만난다.
질의 곳인지는 한눈에 곧 알 수 있었다. 작은 집들의 창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화장한 여자들 뿐이었기에, 나는 급히 다음 모퉁이를 돌아 그 좁은 거리를 빠져 나왔다. 그런데 얼마동안 길을 모르고 걷고 있다가, 나는 갑자기 내가 같은 거리에 다시 와 있음을 발견했다. 그렇게 되자 내 모습은 남들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으므로, 허둥지둥 또 거기를 떠났는데, 그 결과 새로운 길을 돌아서 세번째로 같은 거리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자 나는 섬뜩하다고밖에는 달리 형용할 길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더 이상 길을 찾아다니기를 단념하고, 조금 전에 떠난 광장으로 돌아왔을 때 안도감을 느꼈다. 다른 점에서는 이 얘기와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무심코 같은 장소로 돌아온다는 공통된 요소를 지닌 다른 상황들 역시 그 결과로서는 이와 똑같이 곤혹스러운 느낌, 섬뜩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를테면 산의 숲속에서 안개를 만나 길을 잃어 어떻게해서든지 도표가 있는 길, 또는 잘 아는 길로 나가려고 애쓰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전 자리로 되돌아 오는 경우, 또는 낯선 깜깜한 방 안에서 문이나 전기 스위치를 더듬더듬 찾는데, 번번이 늘 같은 세간에 부딪히는 등의 경우다. 이것은 마크 트웨인이 기괴하게 과장함으로써, 매우 희극적인 것으로 바꿔 놓은 상황이다.
평소 같으면 <우연>이라고 치부해 버릴 대수롭지도 않은 것을, 섬뜩함으로 만들고 숙명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은, 의도하지 않았던 되풀이라는 요인임은, 다른 경험들로부터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예컨대 옷 맡기는 곳에 맡긴 옷의 보관증으로서 어떤 숫자, 예컨대 62번의 번호표를 받거나, 할당된 선실번호가 이와 똑같이 62호임을 발견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대단치 않은 경험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서는 무의미한 두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서 같은 날에 62라는 숫자를 여러 번 만난다든지, 또는 숫자가 붙은 모든 것들, 번지나 호텔방, 열차번호 등이 반복해서 갇은 숫자를, 적어도 그 부분중에 가지고 있음을 주목하기 시작하면, 이 인상은 전연 다른 것이 된다.요컨대 <섬뜩하다>. 그리고 미신의 유혹에 대해 단호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특정한 숫자의 이 끈질긴 되풀이에서 어떤 비밀의 의미를, 이를테면 자기 수명의 암시를 받는 것 같은 심정도 된다. 또는 유명한 생리학자 헤링의 저서를 읽고 있을 때, 단 며칠 사이에 연달아 각각 다른 두 나라에서 이와 같은 이름의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그것도 그가 이제까지 그런 이름의 사람들과는 만나본 일도 없는 경우가 그러할 것이다. 최근에 한 우수한 과학자가 섬뜩한 인상을 해소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 종류의 사건을 일정한 법칙 아래 분류하려고 시도했다. 그 성패여부는 나로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다.8)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는 것의 섬뜩함이 어떻게 유아심리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가를, 여기서는 다만 암시하는 것으로 그치고, 그 대신 이것에 관해서는 이미 다른 연관성 하에서 소상히 논의한 바가 있음을 알려 두겠다. 즉 무의식적인 마음 안에서는 본능적인 충동에서 비롯하는 <반복강박>의 지배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 본능들 그 자체의 내적 성질에 고유한 것이며, 쾌감원칙을 초월할 만큼 강할 뿐더러, 마음의 어떤 측면에 마력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또 어린이의 충동들 속에서는 아직도 매우 뚜렷하게 드러나며, 노이로제 환자의 정신분석 과정의 한 단계를 지배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상의 모든 추론으로부터 이 내적인 반복강박을 상기시키는 것이야말로 섬뜩함으로 느껴진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이제 판단하기 곤란한 이 관계들을 떠나, 의심할 바 없이 섬뜩한 예를 찾아보도록 하자. 그런 몇 예들을 분석함으로써 우리 가정의 타당성에 대해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듯하다.『폴뤼크라테스의 반지』에서 손님은 친구의 모든 소원이 즉시 이뤄8) 카머러, 『연속의 법칙』 (1919).
지고, 모든 근심이 운명에 의해 지체없이 해결되는 것을 보고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돌아선다. 그 친구가 그에게는 <섬뜩해>졌던 것이다. 그 자신이 들려 주는 <너무 행복한 자는 신들의 질투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며, 그 의미는 신화적으로 감춰진 채로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간단한 상황에서 예를 찾아 보기로 하자. 나는 어떤 강박성 노이로제 환자의 병력 속에 이 환자는 전에 온천요양소에 체류했는데, 거기서 큰 효험을 보았다고 쓴 일이 있다. 9) 그렇지만 영리한 그는 자기가 좋아진 까닭은 물의 효력 때문이 아니라 방의 위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방은 매우 싹싹한 간호부의 방 바로 옆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이 요양소에 왔을 때, 그는 전과 같은 방을 얻으려고 했지만, 그 방에는 이미 어떤 노인이 들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그는 자기의 불만을 이런 말로 나타냈다. <흥, 졸도라도 해서 죽어라.> 2주일 후에 그 노인은 정말 졸도 발작을 일으켰다. 나의 환자에게 이것은 <섬뜩한> 체험이 되었다. 만약 그의 말과 발작 사이의 기간이 훨씬 더 짧았더라면, 또는 이 환자가 이와 유사한 경우들에 대해 많이 듣게 되었더라면, 섬뜩한 인상은 한결 강했을 것이다. 사실 그는 이런 종류의 일치를 어렵지 않게 경험했다. 그러나 그 하나만이 아니라 내가 다룬 노이로제 환자들은 모두 비슷한 일을 체험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에 대해 막 생각하고 난 후, 그 사람을 뜻밖에 만나게 되더라도 절대로 놀라지 않았다. 또 그들은 전날 밤에 <오랫동안 아무개 소식을 전연 못 들었는데>하고 말하면, 이튿날 아침에는 그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곤 했다. 특히 사고나 죽음의 경우에는 그 직전에 그들의 머리에 그 생각이 스치지 않은 적이 별로 없었다. 그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자신들이 <대개의 경우> 적중하는 <예감>을
9) 「강박 노이로제의 한 사례에 관한 의견」 (1909).
지니고 있다는 매우 겸손한 표현을 사용하곤 했다.
가장 섬뜩하고 널리 퍼져 있는 미신의 하나는 <나쁜 눈초리>에 대한 불안이다. 함부르크의 안과의 젤리히만 S. Seligmann이 이것을 철저히 연구했다 .10) 이 불안이 유래하는 원천은 언제나 분명해 보인다. 귀중하면서도 깨지기 쉬운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남들의 질투를 두려워하는 나머지, 자기가 남의 입장에 섰더라면 느꼈을 질투를 남들에게 투사한다. 그런 마음의 움직임은, 비록 말로 나타내지 않더라도 눈을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만일 누군가가 특별히 원치 않는 바의 두드러지는 특징에 의해 우리의 주의를 끌었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사람의 질투는 유난히 심하며, 그것이 행동이 되어 나타나리라고 믿어 버린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를 해치고자 하는 숨은 의도를 두려워하며 어떤 종류의 징후를 보기만 해도, 그 의도가 힘까지도 마음대로 하리라고 생각하게 된다.섬뜩함에 대한 위의 예들은 한 환자의 시사에 따라 내가 <사고의 전능>이라고 명명했던 원리에 의거해 있다. 이제는 우리가 어떤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섬뜩함의 여러 예들에 대한 분석은, 우리를 애니미즘이라는 옛날의 세계관으로 이끌었다. 애니미즘의 특칭은 세계를 인간의 혼으로 충만시키고, 자기 자신의 심적 과정을 자기도취적으로 과대평가하는 것이며, 사고의 전능과 그 위에 세워진 마법의 기술들이다. 또한 조심스럽게 등급이 매겨진 신통력, 마력들을 낯선 인물이나 사물(마나)에 배분하는 것, 또는 발전단계에 있는 무제한한 나르시시즘이 현실로부터의 명백한 제지에 대해 저항하도록 돕는 창조물 전체가 그 특칭이다. 그리고 우리 전부는 각각의 개인적 발전 중에 원시인의 애니미즘에 일치하는 한 시기를 거치고 있으며, 또 이 한 시기는 우리로부터 사라질 때 반드시 의부로 드러날10) 『나쁜 눈초리 그리고 비슷한 것』(1910-1911).
수 있는 찌끼와 흔적을 남긴다. 오늘날 우리가 <섬뜩하게> 느끼는 것들 전부는, 이 애니미즘적인 심적 활동의 찌끼를 건드려 이를 밖으로 나타나게 하는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11)
11) 이 점에 관해서는 『토템과 타부』(1913 년)의 제3장 『애니미즘, 마법, 사고의 전능』을 참조. 그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이도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고의 전능과 애니미즘적 사고방법을 증명하고자 하는 인상들에 대해 우리는 섬뜩함'의 성격을 부여하는 모양이다. - 반면에 ‘판단' 속에서는 이미 그런 것을 저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소눈문의 본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두 가지 소견을 밝힐 때가 되었다. 첫째로 만약 정신분석 이론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어떤 종류의 것이라도 정서적 충동의 감정은 예의없이 억압에 의해 불안으로 변화된다면, 그런 불안한 것들의 여러 실례들 속에는 이 불안한 것이란 되풀이해 나타나는 어떤 억압된 것임을 보여 주는 일단의 그룹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이 종류의 불안한 것이야말로 바로 섬뜩함일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그 자체가 본래 불안한 것이었는지 또는 다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둘째로 만일 이것이 정말 섬뜩함의 숨은 성질이라면, 언어의 관용적 사용에서 친근한 것이란 단어가 그 반대어인 섬뜩함으로 이행해 가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이 섬뜩함은 실제는 새롭거나 낯선 것이 아니라, 마음과는 옛부터 친한 것이며, 다만 억압과정을 거쳐 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 억압에 대한 관계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섬뜩함이란 감춰 있어야만 하는데 밖에 드러난 그 어떤 것이다>라는 셸링의 정의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제 남은 일이라곤, 우리가 획득한 이 견해를 섬뜩함의 다른 몇몇 경우를 통해 시험해 보는 것뿐이다.많은 사람들이 가장 섬뜩하게 느끼는 것은 죽음, 시체, 죽은 이의 귀환, 정령, 유령 등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여러 외국어에서는 독일어로 섬뜩한 집이라고 말하는 것을 유령이 나오는 집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연구를 아마도 섬뜩함에 관한 가장 심한 예가 될 만한 것들을 다룸으로써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섬뜩함이 너무 종종 소름이 끼치는 것과 혼동되어 부분적으로는 그것에 의해 덮여 감춰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죽음에 대한 우리 관계처럼 우리 사고와 감정이 원시시대부터 변화하지 않은 채, 옛 것이 얇은 덮개 아래에 완전히 보존되어 온 영역은 거의 없다. 왜 이처럼 변하지 않고 왔는가를 훌륭히 설명해 주는 것으로서 두 가지를 열거할 수 있겠다. 즉 근원적인 정서반응의 강력함과 과학적 지식의 부족이다. 죽음은 온갖 생물의 필연적인 운명인지, 그렇지 않으면 삶의 내부에 있어서의 규칙적인, 그러나 피할 수도 있는 우연한 일인지, 이것을 우리 생물학은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죽어야 한다는 말은, 물론 논리학의 교과서에 일반적인 명제의 본보기로서 실려 있지만, 아무도 그 전실은 파악치 못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무의식은, 지금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거의 생각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종교는 계속 각 개인의 죽음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의 중요성에 이론을 제기하며, 죽음을 넘어서는 생존을 가정하고 있다. 국가권력은 만일 인간이 더 좋은 내세에 기대를 걸고 현재의 생활을 수정하기를 단념해 버린다면, 인간들 사이에 도덕적 질서를 유지하기는 영 불가능한 줄 믿고 있다. 또 우리의 대도시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과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겠다는 강연회의 광고문이 걸려 있으며, 또 학자들 중에서도 가장 비상한 두뇌를 가전 이나 예민한 사상가 몇몇은 특히 그들 자신의 생애의 종말이 가까와 오면 죽은 자와의 교섭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판국이다. 이 모양으로 우리 대부분이 이 점에 관해서는 아직도 야만인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으므로, 죽은 자에 대한 원시적인 불안이 우리에게는 아
직도 몹시 강하여, 조금이라도 촉발되면, 즉시 밖으로 나타날 차비를 차리고 있다는 것도 결코 놀랄 일이 못된다. 아마 오늘날도 여전히 이 불안은 죽은 자는 살아 남은 자의 적이 되고, 자신의 새로운 생존, 즉 죽음의 동반자로서 살아남은 자를 끌어가고자 한다는 낡은 생각을 지니고 있을 것이댜 이처럼 죽음에 대한 관계가 옛날과 조금도 변해 있지 않은 이상, 오히려 우리는 원시적인 감정이 그 어떤 섬뜩함으로 회상되기 위해 필요한 억압이라는 조건은, 실은 없지 않느냐고 질문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조건은 역시 존재한다. 소위 교양있는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이미 죽은 자가 영혼으로서 보이게 된다고는 더 이상 믿지 않으며, 그런 현상을 있음직하지도 않은 아득한 조건에 결부시켜 버리고 있다. 그 위에 원래 매우 애매하고 양가적인 죽은 자에 대한 정서적 태도는 마음의 상층부분에서는 의경이라는 뚜렷한 것으로 약화되어 버렸다 .12)
이제는 조금만 더 보충하면 될 듯하다. 왜냐하면 애니미즘, 마법과 주술, 사고의 전능, 죽음에 대한 태도, 의도하지 않은 반복, 거세컴플렉스 등을 통해, 우리는 불안한 것을 와의뜩함으로 만드는 요인을 거의 다 규명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우리는 살아 있는 인간에 관해서도 섬뜩하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그것은 그 인간이 어떤 나쁜 의도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의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또 우리를 해치려는 그의 의도가 특별한 힘의 도움을 받아 실현될 것이라는 말이 덧붙여져야 한다. <제타토레 Gettatore>는 이에 대한 적절한 실례인데, 로마민족의 미신 속에 등장하는 이 섬뜩한 인물을 알브레히트 쉐퍼는 『요젭 몽포르트Josef Montfort」라는 작품 속에서 시적인 직관과 깊은 정신분석적 이해력을 가지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인물로 개조했다. 그러나12) 『토템과 타부』 속의 「타부와 양가성」을 참조.
이 은밀한 힘들을 문제로 삼을 때 우리는 다시 애니미즘의 기반에 서게 된다. 경건한 그레트헨이 메피스토를 대단히 섬뜩하게 생각한 까닭은 그에게서 그런 은밀한 힘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확실히 내가 천재라는 것을,어쩌면 악마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간질과 광기의 섬뜩함은 이와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 문외한은 거기에서 어떤 힘의 작용을 본다. 그 힘이 설마 자기 옆 사람 속에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자신의 내면 깊은 구석에서 그 기미를 희미하게 느낄 수 있다. 중세 때는 이런 병을 전부 악마의 소행으로 돌렸는데, 이것은 심리적으로 거의 정확하며, 논리적으로도 맞다. 아니, 여러 사람들이 정신분석 그 자체를 섬뜩하게 생각한 까닭은, 정신분석이 이러한 은밀한 힘의 발견에 종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썩 빠르지는 못했지민 수년 동안 앓고 있던 한 소녀의 치료에 성공했을 때, 나는 그런 말을 그녀가 완쾌한지 한참 후에 그 어머니로부터 들은 일이 있다.하우프의 동화에 나오는 절단된 수족, 잘린 목, 팔에서 떨어전 손 또는 위에 말한 쉐퍼의 책에 나오는 혼자 춤추는 다리 등의 것들은 무엇인가 매우 섬뜩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특히 맨 끝의 예처럼 그것들이 독립된 활동을 할 때는 더욱 그렇다. 이 섬뜩함은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거세컴플렉스에의 접근으로부터 생긴다. 그리고 아마 많은 사람들이 가장 섬뜩하게 생각하는 것은 생매장 당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이 무서운 공상은 단지 다른 공상이 변형된 것이며 그 다른 공상이란 본래 조금도 무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쾌락의 맛을 갖고 있는 것, 즉 모태 안에서의 삶에 대한 공상이 변형된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엄밀히 말한다면 애니미즘과 극복된 심적 장치의 활동방식에 관한 앞서의 주장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지만, 그래도 각별히 강조할 만하다고 생각되는 일반적인 점을 추가하고자 한다. 요컨대 공상과 현실간의 구분이 말살 될 때와, 우리가 여태까지 공상적이라고 여겨왔던 것이 현실로서 우리 앞에 나타날 때, 또 어떤 상징이 상징된 것의 기능과 의미를 완전히 물려받을 때에는 자주 그리고 쉽게 섬뜩한 인상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주술행위에 따르는 섬뜩함의 대부분은 이 요인의 탓이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유아적인 요소는 노이로제 환자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한데, 물적 현실에 견주어 심리적 현실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바로 사고의 전능이라는 것에 연결되어 있는 특징인 것이다. 나는 제1차 세계대전의 두절상태 속에서 영국의 잡지 《바닷가 Strand》한 부를 입수했는데, 그 안의 잡다한 기사들 중에서 다음과 같은 단편을 읽게 되었다. 젊은 내의가 세간이 딸린 집으로 이사한다. 그 집에는 악어를 조각한 기묘한 테이불이 있었다. 그런데 늘 저녁이 되면 그 집안에 참을 수 없는 독특한 냄새가 퍼진다.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진다. 분명치 않은 것이 계단을 살그머니 올라감을 보는 듯하다. 요컨대 내의는 이 테이불이 있기 때문에, 이 집에는 악어의 도깨비가 나온다거나, 캄캄해지면 목재의 괴물이 살아난다는 등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퍽 단순한 얘기이지만, 섬뜩한 인상은 매우 명확하게 느껴졌다.
여기 제시한 예들이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결론으로서 정신분석적 연구에서 얻은 한 경험을 말하고 싶다. 이것이 만일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면, 섬뜩함에 관한 우리 견해가 옳다는 것을 훌륭하게 확증시켜 주는 것이다. 노이로제 환자는 곧잘 여자의 성기는 어쩐지 섬뜩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여성기라는 섬뜩한 곳은 누구를 막론하고 맨 처음 한 번은 살았던 인간의 옛 고향으로 가는 입구다. 농담에도 <사랑은 고향의 그리움이다>라는 말이 있다. 만약 꿈 속에서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장소다. 전에 한 번 여기 있던 일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장소 또는 경치가 있었다면, 그것은 반드시 여성기 내지 자궁으로 해석해도 좋다. 그러기에 섬뜩함이란 이 경우에도 이전에 천했던 것이다. 섬뜩한 unheimlich이란 단어 앞에 붙은 전철 un은 억압의 표시이다.
4그런데 여기까지 읽어올 동안에도, 독자들의 머리에는 이미 갖가지 의문이 떠올랐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이제 그것들을 정리해 보기로 하자.섬뜩함은 일단 억압을 거쳐 다시 되돌아온 친숙한 것이며, 그리고 모든 섬뜩함은 이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음은 분명한 듯하다. 그렇지만 이 정도의 재료로는 섬뜩함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명백히 이 명제의 역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과거와 민족적 원시시대의 억압된 소원과 극복된 사고방식을 상기시키는 모든 것이 섬뜩함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또 우리는 우리의 명제를 증명할 거의 모든 예에 대해 그를 논박하는 비슷한 실례가 발견된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지 않다. 이를테면 하우프의 동화 「잘린 손의 이야기」의 잘린 손은 확실히 섬뜩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섬뜩함을 거세 컴플렉스에 소급시켰다. 그러나 헤로도두스의 「람프세니트의 보물」에 관한 얘기에서는 공주가 도적 괴수의 손을 꽉 잡으려고 하자 그는 동생의 잘려진 손을 남겨 놓고 간다. 그런데 아마 대개의 독자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이겠지만, 이 얘기는 전연 섬뜩한 인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리고 『폴뤼크라테스의 반지』에 있어서의 신속한 소원충족은 그 이집트 왕과 마찬가지로 명백히 우리에게도 섬뜩한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독일의 동화에 즉각적인소원충족의 이야기는 무척 많은데도 섬뜩한 느낌은 도무지 없다. 「세가지 소원」의 이야기에서 아내는 소시지 굽는 맛있는 냄새에 끌려서, 나도 그런 순대를 먹고 싶다고 말한다. 즉시 접시에 담긴 소시지가 그 여자 앞에 놓여 있다. 남편은 화가 나서 그런 것은 주제넘게 구는 계집의 코에나 매달리라고 원한다 . 소시지는 당장 아내의 코에 매달린다. 이 이야기는 매우 인상적이지만 섬뜩하지는 않다. 일반적으로 동화는 공공연히 사고와 소원의 전능이라는 애니미즘적인 관점에 서 있지만, 순수한 동화이면서 섬뜩함이 등장하는 동화는 전혀 없다. 또한 우리는 앞서 생명없는 사물, 그림, 인형들이 생명을 갖게 되면, 몹시 섬뜩한 인상을 준다고 말했지만 안데르센의 동화에서는 세간, 그릇, 납의 군인들은 전부 살아 있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섬뜩함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그리고 피그말리온의 아름다운 조각작품이 살아나는 것을 섬뜩하게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가사상태와 죽은 자의 재생을 우리는 앞서 퍽 섬뜩함으로 쳤다. 그러나 그런 것도 동화 속에서는 매우 일상적이다. 예컨대 백설공주가 다시 눈뜰 때 누가 감히 섬뜩하다고 말할까? 또 예를 들어 신약성경의 경우처럼 기적 얘기에 나오는 죽은 자의 부활도 섬뜩함과는 전연 무관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동일한 일의 의도하지 않은 재발은 우리에게 의심할 바 없이 섬뜩한 인상을 주었지만,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다른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미 우리는 그것이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우 를 알고 있으며, 또 이 종류의 예라면 얼마든지 열거할 수가 있다. 다른 경우에는 그것은 강조의 역할 등을 맡는다. 그렇다면 고요함, 고독, 어둠의 섬뜩함은 어디서 비롯하는가? 이 요인들은 비록 그것이 어린이들로 . 하여금 가장 빈번히 불안을 느끼게 하는 조건이긴 하지만, 역시 섬뜩한 느낌이 생기는 데 있어서의 위험의 역할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이미 죽음의 섬뜩함에 대한 지적 불확실성의 의미를 인정하긴 했지만, 정말 지적 불확실성을 완전히 경시해도 괜찮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섬뜩한 감정이 생기기 위해서는, 역시 앞에서 제시했던 재료적 조건들 이의의 다른 것도 결정적이라고 인정해야 할 형편이다. 물론 여기서 그 최초의 논구로 섬뜩함이리는 문제에 대한 정신분석적인 관심은 해결되었으며, 나머지 일은 아마 미학적인 연구에 기대할 길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섬뜩함의 유래는 억압된 친숙한 것이라는 우리 견해가 얼마 만큼의 가치가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하나의 관찰이 이 불확실성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우리의 기대에 모순되는 실례들의 거의 전부는 허구의 영역, 문학의 분야로부터 가져 온 것들이다. 이 사실은 실제로 경험하는 섬뜩함과 단지 상상해 보거나 책으로 읽는 섬뜩함을 구별하라고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다.체험하는 섬뜩함의 조건은 훨씬 단순하지만, 실례는 광범하지 않다. 그것들은 예의없이 우리 해결의 시도에 일치하며, 그때마다 옛부터 친숙했던 억압된 것으로 소급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심리학적으로 의미 있고 중요한 재료의 구별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예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사고의 전능, 신속한 소원충족, 해를 끼치는 은밀한 힘, 죽은 자의 재생 등이 야기하는 섬뜩함을 생각해보자. 이 경우들에서는 섬뜩한 감정이 성립되는 조건이 오인될 염려는 없다. 우리, 혹은 우리의 원시적인 조상은 일찌기 이 가능성들을 현실이라고 믿었으며, 이 사건들이 정말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미 그런 것들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이 사고방식을 <극복해 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 새로운 사고방식에 대해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다. 낡은 사고방식은 여전히 우리 속에 살아 있어, 자기의 존재가 확증될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이 옛날의 내버린 확신을 확인시키는 듯한 일이 우리생활 가운데 <일어나면>, 당장 우리는 섬뜩한 감정을 갖게 된다. 그런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그래, 그러면 역시 그것은 정말이었다. —一 마음에 소원을 품음으로써 남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죽은 자가 계속 살아 있어 그가 전에 활동했던 곳에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은!> 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가 있다. 반대로 이 애니미즘적인 확신들을 철저히 완전히 제거한 사람, 그런 사람에게는 이런 류의 섬뜩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 소원과 충족의 아주 기이한 일치, 동일한 장소 또는 동일한 날짜에 있어서의 갇은 경험의 신비스런 되풀이, 착각하기 쉬운 시각인지, 매우 의심스러운 소음 등도 그를 당황시키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섬뜩함> 앞에서 느끼게 되는 불안조차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적으로 현실음미, 물적 현실에 대한 문제이다.13)
13) 분신의 섬뜩함도 이런 종류의 것이므로, 우리가 자기 자신의 모습과 뜻밖에 마주치게 될 때의 효과를 경험해 보는 것은 홍미로운 일이다. 마흐 E. Mach는 그런 종류의 관찰 두 가지를 『감각의 분석』 (1900년) 속에 기록하고 있다. 그 하나는 그가 자기가 보고 있는 얼굴이 자기 자신임을 알았을 때 적지 않게 놀랐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가 타고 있는 차에 올라탄 낯설어 보이는 이에 대해 좋지 못한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참 초라한 행색의 교장이 탔구나!> ——나 자신에게도 그와 갇은 경험이 있다. 혼자 침대차의 방에 앉아 있는데, 기차가 심히 흔들렀다. 그때 옆의 세면대로 봉하는 문이 열리더니, 여행모자를 쓰고 잠옷을 입은 한 노인이 내 방에 들어왔다. 세면대는 두 개의 차실 사이에 있었으므로, 나는 그가 방향을 착각하여 내 방에 잘못 들어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에게 설명해 주려고 일어섰을 때, 나는 그 침입자가 실은 사이문의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의 모습임을 알고 어안이 벙병해졌다. 나는 지금도 이 현상이 몹시 불쾌한 것이었음운 기억하고 있다. 요컨대 우리 두 사람, 마흐와 나는 분신에 깜짝 놀라는 대신, 그것을 승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때에 느낀 불쾌함은 분신을 섬뜩함으로 느끼는 원시적인 반동의 찌끼가 아니었을까?
억압된 유아적 컴플레스, 거세 컴플렉스, 자궁공상 등에서 생기는
섬뜩함과 관련해서는 사정이 약간 달라서 이 종류의 섬뜩한 느낌을 일깨우는 현실의 체험은 그다지 흔치 않기는 하다. 실제로 체험되는 섬뜩함은, 앞서 언급했던 그룹에 속한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둘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아적 컴플렉스에서 생기는 섬뜩함에 있어서는 물적 현실성의 문제는 전연 일어나지 않는다. 그 대신 심리적 현실성이 문제가 된다. 즉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내용의 현실적인 억압과 이 억압된 내용의 회귀이지, 그런 내용의 <현실성에 대한 신앙>의 폐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한 경우에는 어떤 일정한 표상내용이, 다른 경우에는 그 내용의 물적 현실성에 대한 신앙이 억압되어 있다고 말해도 좋다. 그렇지만 이 나중 경우의 표현방법은 아마 <억압>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적절한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여기서 느껴지는 심리적 차이를 고려하여 문화인의 애니미즘적 확신이 존재하는 그 상태를-크건 적건 완전한-<극복상태>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결론은 이렇게 된다. 실제로 체험되는 섬뜩함이 성립되는 것은 <억압된> 유아적 컴플렉스가 어떤 인상에 의해 다시 활동하기 시작하든가, 또는 <극복된> 원시적 확신이 재확인되는 듯이 보일 때다. 끝으로 우리는 완벽하게 해결하고 분명히 설명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지금까지 보아 온 두 가지 섬뜩한 체험은 항상 판연히 구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제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원시적 확신이 그 가장 깊은 부분에서 유아적 컴플렉스와 관련을 가지며, 원래 그 속에 뿌리 박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처럼 한계가 흐릿해짐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공상과 문학 등의 허구의 섬뜩함은 사실상 별도로 논의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실생활의 섬뜩함뿐만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없는 다른 것도 포함하고 있다. 억압된 것과 극복된 것의 대립은 철저한 수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문학 속의 섬뜩함으로 전이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공상의 영역은 그 내용이 현실검증에 의해 구속되어 있지 않다는 전제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설적이지만 이런 결론이 된다 . <만약 그것이 실생활에서 일어났더라면 섬뜩하게 생각될 많은 일도, 문학 속에서는 반드시 섬뜩하지 않으며, 또 문학에는 실생활에는 없는 섬뜩한 효과를 내는 여러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작가에게 허용되어 있는 수많은 자유 가운데 하나인데, 작가는 자기가 좋아하는대로 그 묘사세계를 우리와 친근한 현실과 합치하도록 선택할 수 있으며, 또는 현실로부터 벗어난 것이 되도록 택할 수도 있다 . 우리는 그 어느 경우에도 그를 따라갈 뿐이다. 이를테면 동화세계는 처음부터 현실의 기반을 버리고 공공연히 애니미즘적 확신을 수용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소원충족, 은밀한 힘들, 사고의 전능, 생명 없는 것을 생명 있는 것으로 만들기는 동화 속에서는 매우 일상적이며, 그것들은 조금도 섬뜩한 인상을 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섬뜩한 감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믿기 어렵다고 인정되는 것이 정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의 갈등이 요구되는데, 이러한 문제는 동화세계의 전제에 의해 애초부터 제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우리가 섬뜩함의 해결책을 반박하는 여러 예를 제공해 준 동화는 우리가 처음에 언급한 경우, 즉 실생활에 일어났더라면 섬뜩하게 작용했을 수많은 일도 픽션의 영역에서는 섬뜩하지 않다는 경우를 확인해 주고 있다. 동화에는 그밖에도 나중에 짧게 언급할 생각인 다른 요인들도 들어온다.작가는 또한 악령 내지 죽은 자의 영혼과 같은 초월적인 영적 존재롤 받아들임으로써, 동화세계만큼은 공상적이 아니지만, 그래도 현실세계와는 구별되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 창조물들이 지니고 있을 수도 있는 섬뜩함은 그것이 문학적인 현실의 전제들 하에 있는 한은 섬뜩하지 않게 되어 버린다. 단테의 「지옥」의 영혼들과, 셰익스피어의 『햄릿』, 『맥베스 』, 『줄리어스 시저』 등의 유령형상은 과연 음산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지만, 결국은 호머의 신들의 유쾌한세계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섬뜩하지는 않다. 우리가 우리 판단을 작가가 설정하는 현실의 조건에 순응시켜 이러한 영혼과 망령 및 유령들을 현실세계 안의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실재물인 듯이 다루기 때문이다. 그다지 섬뜩하지 않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작가가 일반적인 현실의 토대 위에 서 있는 듯이 보일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물론 그런 경우에는 작가는 실생활에서 섬뜩한 감정을 일으키기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며, 또 실생활에서 섬뜩하게 작용하는 것은 모두 작품 속에서도 같은 작용을 한다. 그러나 그 경우, 작가는 실은 전연 일어나지 않거나 또는 아주 드물게 일어날 뿐인 사건들을 일으킴으로써 경험으로 가능한 한도를 넘어, 섬뜩한 효과를 곱으로 높일 수가 있다. 그런 때 작가는 우리를 배반하여 이미 우리가 극복했던 미신에게 우리를 넘겨 주는 셈이 된다. 그는 우리를 속여, 이는 일반적인 현실이라고 약속해 놓고서, 잠시 후 결국은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 버린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체험에 반응하듯이 작가의 허구에 반응한다. 그러다가 작가의 속임수를 깨달을 때는 이미 늦다. 작가는 이미 그 목적을 달성한 후다. 그러나 작가는 순수한 효과를 올리지는 못했다고 나는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불만의 감정과 의도된 속임수에 대한 일종의 분노가 남게 된다. 나는 즐겨 기적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는 슈니출러의 『예언 Die Weissagung』과 이와 유사하게 기적적인 소재를 즐겨 다루고 있는 작품을 읽었을 때 특히 분명하게 그러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런데 작가는 우리의 이러한 반역을 피하고, 동시에 자신의 의도를 달성하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 방법은 이렇다. 즉 작가가 묘사하는 세계를 위해 어떤 전제를 택했는가를 한참동안 우리에게 비밀로 하든가, 또는 교활하고 교묘하게도 그런 결정적인 설명을 최후까지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말해서,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허구는 실생활에서는 가능치 않을 섬뜩한 감정의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여기서 확증된다.
엄밀히 말한다면, 이 모든 다양성은 이미 극복된 것으로부터 생기는 섬뜩함에만 관계한다. 억압된 컴플렉스에서 생기는 섬뜩함은 더 강한 저항력을 갖고 있으며, 문학에서도-한 가지 조건을 도의시한다면 ― 실제의 체험에서와 마찬가지로 섬뜩하다. 극복된 것에서 생기는 다른 섬뜩함은 실제의 체험에서도, 그리고 물적 현실의 기반에 서 있는 문학에서도 이 성격을 나타내지만, 작가에 의해 창조된 허구의 현실 가운데서는 이 성격을 잃는 것 또한 쉽다.작가의 자유, 그리고 섬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거나 저지하는 작가의 특권은, 이상의 설명으로 불충분할 만큼 광범위하다. 실제의 체험에 대해 우리는 대체로 한결같이 수동적이며, 소재적인 것의 영향에 좌우된다. 우리는 작가에 대해서는 특히 유순하다. 그리하여 그가 우리를 옮겨 놓는 그 기분에 의해, 그리고 그가 우리 속에 일깨우는 기대에 의해, 작가는 우리 감정의 흐름을 한 방향에서 막아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도 있으며, 또 종종 동일한 소재에서 매우 다양한 효과들을 얻을 수가 있다. 이것들은 예전부터 잘 알려져 있는 점이며, 또 아마 유명한 미학자에 의해 소상히 논의되어 있을 것이다. 섬뜩함의 원인에 관한 우리 추론에 반대하는 몇몇 예들이 지닌 모순을 해명하려던 중에, 우리는 의도하지도 않은 채 이 연구영역에 들어서고 말았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이 예들의 하나로 되돌아가도록 하자.앞서 우리는 왜 「람프세니트의 보물」에 나오는 잘린 손은, 예를 들어 하우프의 「잘린 손의 이야기」에서처럼 섬뜩하지 않은가 질문했다. 억압된 컴플렉스라는 근원에서 생기는 섬뜩함의 극히 큰 저항력을 인식한 지금, 이 문제는 더욱 중요하게 생각된다. 그 대답은 간단하다. 즉 우리는 여기서 공주의 감정보다도 도적 두목의 뛰어난 잔꾀에 정신이 팔리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 공주한테 섬뜩한 감정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 여자가 실신하여 쓰러졌다 하더라도 결코 기이하게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조금도 섬뜩함을 느끼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 여자의 입장에서 느끼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스트로이의 소극 「상심하는 사내 Der Zerrissene」 속에서 자기를 살인자로 생각하여 도망치는 남자가, 함정의 어느 뚜껑문을 열어 보아도 피살된 사람 비슷한 유령이 나오는 것을 보고 절망하여 <나는 단 ‘한’ 사람만 죽였다. 왜 이처럼 징그럽게 속출하는 것인가?>하고 울부짖을 때, 전과는 다른 상황에 의해 우리는 섬뜩한 인상을 받지 않는다. 우리는 이 장면의 전제조건들을 알고 있으므로, <상심하는 사내>의 혼란을 함께 겪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의당 섬뜩할 것도, 우리에게는 참을 수 없는 희극으로서 작용한다.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의 『캔터빌의 유령』 의 얘기에 나오는 것과 같은 <진짜> 유령이더라도, 만약 작가가 그것을 빈정대거나 놀리며 기뻐하기 시작하면, 적어도 공포라도 자아내고자 하는 유령의 모든 노력은 무의미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처럼 허구의 세계에서는 감정의 작용은 소재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있다. 동화세계에서는 불안감과 섬뜩한 감정이 일으켜져서는 절대 안 된다. 우리는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다시 그런 감정이 일어날 듯한 기회를 만나더라도 이를 무시해 버린다.
고독, 정적, 암흑에 관해 말하자면, 이것들은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결코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어린이의 불안과 연결되어 있는 요소들이다. 정신분석적 연구는 다른 자리에서 이 문제를 논의해 두었다 14) (이노은 옮김).14) 프로이트 연구본 제4권, 241-274쪽에서 옮김.
V 정신분석 작업에서 드러난 몇 가지 성격유형
노이로제 환자를 정신분석으로 치료할 때, 의사가 먼저 환자의 성격에 관심을 돌리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의사가 더 알고 싶어하는 것은, 환자의 증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충동이 그 증상 배후에 감추어져 있고 또 이런 증상을 통해 해소되는가, 그 충동욕구에서 이러한 증상으로 이어지는 은밀한 회로는 어떤 단계를 거치게 되는가 하는 점들이다. 그러나 의료상의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서, 의사는 곧 호기심을 다른 대상들로 돌릴 수밖에 없다. 의사는 환자와 자신을 대립시키는 방해물들 때문에 자신의 연구가 위협을 받고 있음을 깨닫고 또 이러한 방해물들을 환자의 성격 탓으로 돌릴 수 있다. 그래서 이제 이 성격이라는 요소가 의사의 일차적인 관심을 끌게 된다.의사의 노력을 방해하는 것은 단지, 환자가 스스로 밝히고 또 주변 사람들도 인정하는 성격의 특징만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환자에게 별로 강하게 나타날 것 갇지 않았던 특징들이 환자에게서 매우 강렬하게 상승되어 드러나는 경우도 종종 있고, 평소에는 전혀 드러내지 않았던 성향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다음 글은 이러한 놀라운 성격의 특징 가운데 몇 가지를 기술하고 그 원인을 밝혀 본다.
1 예외들정신분석 작업이 늘 떠맡는 과제는 환자로 하여금 주변에 널려 있는 직접적인 쾌락의 향수를 포기하도록 하는 일이다. 환자가 쾌락 그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 아마도 그 어떤 인간에게도 그것을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종교라 하더라도 세속적인 쾌락을 버릴 것을 요구할 때는, 저승에서 이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더 많은 소중한 즐거움을 그 대가로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렇다. 환자가 포기해야 하는 것은 즐기다 보면 손상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그런 쾌락일 뿐이다. 환자는 잠시 동안 쾌락을 멀리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직접적인 쾌락의 즐김과, 비록 지연되기는 하겠지만 그것을 포기함으로써 얻어지는 더 확실한 쾌락의 즐김을 교환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환자는 의사의 지도 아래 <쾌락원리에서 현실원리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통해 성숙한 인간은 미숙한 어린이와 구분된다. 이러한 교육을 실시할 때 의사의 뛰어난 식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의사가 환자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환자 자신의 오성이 환자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것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인가 스스로 안다는 것과 이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는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타인의 말은 더 효과적일 수 있는데, 의사는 바로 이 효과적인 타인의 역할을 떠맡는다. 의사는 한 인간에게 타인이 행사할 수 있는 그런 영향력을 이용한다. 정신분석에서 흔히 행해지는 방법은 원래의 위치에서 벗어난 것, 약화된 것의 자리에, 근원적인 것, 뿌리 같은 것을 집어 넣는 일임을 상기해 보자. 의사는 교육작업을 행할 때, 애정이 갖고 있는 모종의 성분을 이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의사가 이 재교육을 실시할 때 최초의 교육을 가능하게 했던 그 과정만을 반복할 뿐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어려운 상황에 부딪혀 필연적으로 행할 수밖에 없는 것을 제의하면, 위대한 교육자의 역할을 맡는 것은 바로 애정이다. 그리고 완전하지 못한 인간은 가까운 주변인의 애정을 통해서 어려운 상황에서 내려지는 명령들을 존중하고 그것을 위반한 벌을 면제받게 된다.
환자에게 당분간 모종의 쾌락해소를 포기하도록 요구하고, 더 나은 결과를 위해서 당분간 고통을 감수할 희생, 각오를 요구하며, 오로지 사람이라면 모두 지켜야 할 필연성에 복종하도록 결심할 것만을 강요하게 되면, 특이한 동기로 인해서 그러한 요구에 저항하는 개인들을 마주치게 된다. 그들은 충분히 고통을 받았고, 단념했으며, 더 이상의 요구를 면제받을 권리가 있고, 자신들은 예의이고 또 예의로 남고 싶기 때문에, 그 어떤 필연성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복종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런 유의 환자들에게는 앞서 말한 권리가, 확신으로 상승하여 그들은 그러한 고통스런 희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특별한 섭리가 자신을 지켜 주고 있다고 믿게 된다. 그렇게 강렬하게 표출되는 내적인 단호함에 비하면, 의사의 논거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의사의 영향력도 처음엔 잘 먹혀들지 않는다. 그래서 의사는 그런 해로운 편견이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지 그 근원을 더듬어 볼 수밖에 없다.누구나 다 자신을 <예의>로 치고, 타인에 앞서는 우선권을 갖기를 요구하고 싶어한다는 점은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한 사람이 정말로 자신을 예의라고 선언하고 행동한다면, 거기에는 주위에서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특별한 이유가 필요하게 된다. 그 이유는 한 가지 이상일 수도 있다. 연구 사례에서 나는 나의 환자들의 공동적인 특칭이 그들의 <어린 시절의 생활환경>에서 찾아볼 수 있음을 입증할 수 있었다. 환자들의 노이로제는 아주어린 유년시절에 겪은 체험이나 고통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지 않으며, 또 그러한 체험과 고통이 자신의 인격에 불공평한 해악을 끼쳤다고 평가할 줄 알았다. 이렇게 불공평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우선권을 요구하게 되고 또 반항하게 되는데, 이것은 훗날 노이로제 현상을 촉발하는 갈등을 격화시키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 내가 치료한 노이로제 환자 가운데 어떤 여자는 선천적으로 자신의 신체 장기가 안 좋았고 이것이 자신의 삶의 목표를 성취하는 데 방해물이 되었다고 깨닫게 되면서, 삶에 대한 불만이 무르익어 갔다. 장기가 안 좋았던 그 여자는 그것이 우연히 후천적으로 얻은 것이라고 간주했던 동안에는 그걸 묵묵히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유전적인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그녀는 반항적으로 되어갔다. 신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다고 믿었던 어떤 젊은이는 젖먹이였을 때 보모를 통해 우연히 병에 전염되어 그 희생자가 되었다. 그는 마치 사고의 보상을 요구하듯이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그런 요구를 제기할 근거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 이후의 자신의 일생을 방탕하게 보내고 말았다. 그의 경우 어렴풋한 그의 기억의 잔재와 증상의 해석을 통해서 나는 이러한 결론을 내렸는데, 이것은 나중에 가족들의 말에서 객관적으로 확인되었다.
나는 이런 식의 또 다른 병력(病歷)에 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그 이유는 여러분들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유년시절 오랜 질병 끝에 얻은 개인의 성격왜곡과 고통스런 과거를 가진 민족 전체의 성향에 나타난 성격왜곡 사이에도 명확한 유사성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 그러나 나는 어느 대 문호가 창조해 낸 한 인물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인물의 경우 자신은 예외임을 요구하는 데 그것은 선천적인 손상의 계기와 내적으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고 또 그 동기도 선천적인 손상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 Richard lll』의 도입부 독백 부분에서 나중에 왕이 될 글로스터 Glost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익살희극을 위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오사랑에 빠진 거울의 환심을 사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리.조악하게 만들어진 나는 가볍게 돌고 있는 요정 앞에서뻐길 만한 사랑의 근임도 갖추지 못했도다.멋진 몸의 균형도 잡지 못하는 나는선천적으로 신체는 기형이었고몸은 뒤틀리고, 돌보아 주는 이 하나 없으며, 때가 되기도 전에숨쉬는 이 세상으로 내보내져, 반제품(半製品)인 채게다가 다리는 절고 볼품 하나 없으니다리를 절며 지나가노라면 개들도 짓어대누나나는 사랑받는 연인이 되어말만 뻔질나게 멋진 이 세월의 무료함을 달렌 수도 없으니차라리 악당이나 되어이 세월의 공허한 쾌락과는 원수나 되리라.선언적인 이 구절로부터 우리가 받는 첫 인상은 아마도 우리의 주제와 관계가 불분명하다는 점일 것이다. 리처드는 오로지 이런 말만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 지루한 시간이 난 지겹다. 난 즐거워지고 싶다. 그러나 모습이 흉칙하여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즐길 수는 없기 때문에, 난 악행을 저지르고, 속이고, 살인을 범하게 될 것이다. 난 평소에 내 맘에 드는 것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경솔한 동기화는 그 배후에 진지한 어떤 것이 숨겨져 있지 않다면, 관객들의 관심을 모두 질식시켜 버릴 것이다. 또 심리학적으로도 이 극은 성공을 거두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내적인 반감 없이 그의 대담성과 재치에 감탄을 느낄 수 있으려면, 작가는 주인공에 대한 동정심을 일으키는 은밀한 배경을 우리에게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하고, 또 그러한 동정심은 그를 이해하고 그와 내적으로 일체감을 가질 때에라야 우러나울 수 있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리처드의 이 독백이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독백은 단지 암시하고 있을 뿐이고, 또 암시된 부분을 풀어나가는 것은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암시된 부분을 완성해 보면, 경박한 가상은 사라지고, 리처드가 자신의 추한 모습을 묘사할 때 보여 주는 비애와 면밀함이 선명히 드러나며, 또 이 악당 같은 사람에게조차 동정심을 일게하는 우리와의 공통점이 분명해전다. 악당과 우리의 공통점이란 이런 것이다. <자연은 사람들의 사랑을 얻어내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내게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내게 심히 불공평한 일을 저질렀다. 인생은 내게 그에 대해 손해 보상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난 그 손해보상을 받으러 갈 것이다. 난 예외여야 하고, 또 예외가 됨으로써 타인에게 손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우려쯤은 무시해도 좋을 권리가 있어야 함을 요구한다. 난 스스로 부정을 저질러도 된다. 내게 먼저 불행이 저질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스스로가 리처드와 같은 상황이 될 수도 있음을 느낀다. 아니 우리는 작은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미 리처드와 같은 상황임을 느낀다. 리처드는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우리가 느끼는 어느 한측면을 크게 확대해 놓은 인물이다. 우리는 모두 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손상을 입어서 자연이나 운명을 원망할 근거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 모두는 어린 시기에 우리의 나르시시시즘, 즉 자기사랑이 손상된 것에 대해 피해보상을 요구한다. 자연은 왜 우리에게 발더 (Balder, 북구 신화에 나오는 여름 태양의 신, 옮긴이)의 황금 곱슬 머리나, 지크프리트 Siegfried, (독일 전설에 나오는 영웅, 옮긴이)의 강인함, 혹은 천재의 훤칠한 이마나 귀족계급의 귀티나는 얼굴을 부여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왜 왕궁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서민계층의 좁은 방에서 태어났을까? 그렇지만 않았던들, 우리는 우리가 부러워해야만 하는 그런 모든 사람들과 꼭 마찬가지로 멋지고 고상하게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작가는 자신의 주인공으로 하여금 숨겨진 동기를 모두 다 큰 소리로 남김없이 발설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작가가 구사하는 세련된 경제성의 기법이다. 경제성의 기법을 동해서 작가는 독자에게 스스로 이를 보충하도록 강요하고, 우리의 정신적인 활동을 촉진하며, 정신적인 활동을 비판적인 사고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우리를 주인공과 동일시하도록 꼭꼭 묶어 둔다. 그러나 서두른 작가라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죄다 분명하게 표현해 버릴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런 작가는 우리의 날키롭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지성을 장려한다. 그런 지성은 환상이 심화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막아 버린다.우리는 <예외들>이라는 부분을 끝맺기 전에, 여자들이 우선권을 요구하고 또 삶의 여러 강제로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은 이유에서 나온 것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정신분석 작업에서 우리가 경험했듯이, 여자들은 어려서 피해를 입었고, 스스로는 아무 책임도 없는데 약간의 제약을 받고 있으며, 배척당하고 있다고 느낀다. 또 더러 어떤 딸들이 어머니에 대해 갖고 있는 나쁜 감정도 그 기본 뿌리에는 어머니가 자신을 사내가 아니라 계집으로 낳아 주었다는 데 대한 비난이 깔려 있다.2 성공의 시점에서 좌절하는 사람정신분석 작업의 결과 우리는 <인간이란 좌절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린다>는 명제를 얻게 되었다. 여기서 좌절이란 리비도적인 욕구 충족의 좌절을 의미한다. 물론 이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 우회로를 돌아갈 필요가 있다. 노이로제에 걸리기 위해서는 한 인간의 리비도적인 욕구와 그의 존재의 한 부분, 즉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고, 그의 자기 보존 충동의 표현이며 또 자기 존재에 관한 이상들을 포함하는 그런 자기 존재의 한 부분 사이의 갈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병인성(病因性)의 갈등은 리비도가 자아에 의해 이미 오래 전에 극복, 추방되었으며 따라서 장래에도 금지되어 있는 길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자 할 때에만 일어난다. 물론 스스로에게는 공정하고 이상적인 해결 기회가 박탈되었을 때, 리비도는 그런 길과 목표를 추구하려 한다. 따라서 실질적인 욕구해소의 결여나 실패는, 결코 유일한 조건은 아니라 하더라도, 노이로제가 발생하는 일차적인 조건이 된다.
의사인 우리로서도 더러 어떤 사람들이 때때로 충분히 근거가 있고 오랫동안 품어왔던 욕구가 충족되자마자 바로 병에 걸리는 것을 경험했다면, 그것은 더욱 놀랍고 심지어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행운을 참을 수 없었던 듯이 보인다. 성공과 발병 사이에는 근본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의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느 부인의 운명을 통찰해 볼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이를 표본으로 삼아 그러한 비극적인 급변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좋은 가문에서 유복하게 자란 그 여자는 아주 어린 소녀였을 때에 삶을 줄기려는 욕구를 억제치 못하여, 부모 곁을 떠나, 모험을 즐기며 세상 곳곳을 떠돌아 다녔다. 그러다 그녀는 마침내 어느 예술가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그녀의 여성적인 매력을 평가할 줄 알았고, 또 신분이 하락한 그 여자에게 섬세한 소질이 있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집에 데려가서 인생의 충실한 반려자로 삼았다. 그녀는 단지 시민가정의 환경에 적응하기만 하면 완전한 행복을 누릴 것처럼 보였다. 몇 년 동안 동거한 후에 그는 자기 가족들을 설득하여 그녀와친하게 만들 수 있었고, 그녀를 정식으로 법적인 아내로 맞을 준비를 다 갖추었다. 이 순간에 그녀는 좌절하기 시작했다 . 그녀는 정당한 아내로서 자신이 해야 할 집안 일을 소홀히 했고, 자신을 가족의 일원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친척들로부터 오히려 따돌림받는다고 생각했으며, 무의미한 질투심 때문에 자기 남자에게도 천지들과의 사교적인 왕래를 막아 버렸으며, 그의 예술 작업을 방해하며, 곧 치료할 수 없는 정신적인 질환에 걸리게 되었다.
매우 존경을 받는 어느 남자에게서 나는 또 다른 사례를 관찰했다. 그 남자는 대학교 선생이었고, 여러 해 동안 자신을 학문의 길로 인도해 준 스승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욕망을 품고 있었다. 그런 욕망은 쉽게 납득이 갔다. 노 스승이 퇴직한 뒤 동료들이 그에게 그가 후임자로 선택될 거라고 알려주자, 그는 의기소침해지기 시작하며, 자기 업적을 과소평가했으며 , 자기는 자신에게 배분될 자리의 역할을 수행할 자질이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우울증에 빠졌다. 그는 우울증 때문에 그후 여러 해 동안 모든 활동에서 손을 때고 말았다.이 두 경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로 사정이 다르기는 하다. 그러나 욕구의 충족을 앞두고 발병했다가, 이로 인해 그 충족의 기쁨을 없애고 말았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이러한 경험은 인간은 좌절 때문에 발병한다는 명제와 모순되는데, 이러한 모순은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의적> 좌절과 <내적>좌절을 구별한다면 그러한 모순은 지양된다. 현실생활에서 리비도를 해소시켜 줄 대상이 탈락해 버린다면, 이것은 외적인 좌절이다. 의적인 좌절은 내적인 좌절과 함께 자리하지 않는 한, 아무런 작용도 미치지 못하고 또 병원(病源)이 되지 않는다. 내적인 좌절은 자아에게서 시작해야 하고, 이제 리비도가 차지하고자 하는 다른 대상들을 리비도에게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갈등이 발생하고, 노이로제 질환의 기회, 즉 억압된 무의식이라는 우회로를 통한 보상만족의 기회가 생긴다. 따라서 내적인 좌절은 두 경우 모두에다 관찰되지만, 의적인 실제적인 좌절은 내적인 좌절이 활동할 상황을 마련하기 전에는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한다. 인간이 성공할 때 발병하는 예의적인 경우에는, 내적인 좌절이 스스로 효과를 발휘하지만, 이 경우에도 의적인 좌절이 욕구 충족에 자리를 내주고 난 뒤비로소 나타났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는 얼핏보면 약간 특이한 점들이 남아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욕구가 공상으로만 존재하고 충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듯이 보이는 한에 있어서, 자아가 욕구를 무해한 것으로 묵인한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것은 아니다. 반면 욕구충족이 가까워지거나 욕구가 실현되려는 위기감이 보이자마자 자아는 욕구와 날카롭게 대립되어 자신을 방어한다. 노이로제가 만들어지는 잘 알려진 상황과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은 데 있다. 즉 내적으로 리비도가 들어차서 상승하면 지금까지 가볍게 평가되어 오고 용인되어 왔던 공상이 두려운 적이 되는 반면, 우리의 경우에는 갈등폭발의 신호가 실재 생활의 의적인 변화에 의해 주어졌다는 점이다.
분석작업 결과 개인들에게 현실은 변화하여 행복을 가져다 주었지만 거기에서 오랫동안 품어 온 기대의 충족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양심의 힘>이라는 점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혀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서 우리를 종종 놀라게 하는, 판결을 내리고 처벌하는 이러한 성향들의 본질과 근원을 찾아내는 일은 어려운 과제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거나 추측하고 있는 바를 나는 의사로서 관찰했던 사례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위대한 작가가 풍부한 영혼에 관한 지식을 동원해서 만들어 냈던 작중 인물들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여러분도 잘 알 것이다.집요한 정력을 쏟으면서 얻으려고 했던 성공이 이루어지자 파멸해 버리는 인물 가운데 하나가 <셰익스피어의 극에 나오는 맥베스의 부인>이다. 그녀에게는 전에는 동요도, 내적인 갈등의 징후도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공명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성품이 온화한 자기남편의 근심을 없애 주는 일만을 추구했다. 그녀는 자신의 모성마저 희생시키며 살인을 저지르고자 한다. 범죄에 의해 이루어질 자신의 공명심의 목표를 지키는 일이 필요하게 될 때, 이러한 모성이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지 알지도 못한 채로.<오라, 그대 정령들이여,사람을 죽일 생각을 품고 있는 그대들이여, 나의 모성을 빼앗고.…… 나의 가슴으로 오라,그대 살인을 돕는 자들이여! 내 젖을 다 빨아 담즙만 남게 하라!>(1막 6장)<난 젖을 먹여 보아서 아노라,젖을 빠는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하지만 아이가 내 모습을 보고 웃을지라도난 이빨도 없는 아이의 주둥이를 내 젖꼭지에서 잡아 빼며,아이의 머리동을 던져 박살을 내고 말리라.그대가 맹세한 대로, 나도 한 번 맹세하면.>(1막 7장)그녀가 행동을 개시하기 직전까지 단 한 차례 가벼운 반항심이 그녀를 사로잡을 뿐이다.<그의 잠자는 모습이 내 아버지와 같지만 않았어도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을 텐데.>(2막 2장)이제 던컨 Duncan을 살해함으로써 왕비가 되자, 그녀에게는 환멸 비슷한 것, 권태 비슷한 것이 스쳐지나가 듯이 나타난다. 우리는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 모른다.
<아무런 소득도 없어, 모든 것은 거짓이야,소원은 이루어졌으되, 충족은 없으니,죽임으로써 영원한 불안을 불러일으키느니차라리 살해 당하는 것이 더 안전하지나 않을까>(3막 2장)그러나 그녀는 참아낸다. 이 말에 이어지는 연회장면에서는 오직 그녀만이 침착성을 유지하고, 자기 남편의 착란을 은폐하며, 손님들을 돌려 보낼 핑계를 찾아낸다. 그런 다음 그 여자는 우리로부터 모습을 감춘다. 그녀는 살인을 저지른 그날 밤의 인상에 사로잡혀서, 몽유병자로 다시 우리에게 모습을 나타낸다 (5막 1장). 그녀는 당시와 마찬가지로 또 다시 남편에게 용기를 내라고 말한다.<어휴 여보, 군인이 겁을 내나요? 누가 알까 두려워 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우리의 권세를 따져 볼 자 뉘 있으오리까.>그녀는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다. 범행을 끝낸 남편을 무섭게 했던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녀는 <더 이상 은폐할 수 없는 그 사건이 마치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은폐하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피묻어 피냄새가 나는 손을 씻는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아무 쓸모도 없음을 알고 있다. 그토록 후회하지 않는 듯이 보이던 그녀를 후회가 짓눌렀던 듯이 보인다. 초기의 그녀처럼 그 사이에 몹시 잔인해져 있던 맥베스는 그녀가 죽자 단지 짤막한 조사를 뇌까릴 뿐이다.<그녀가 좀더 늦게 죽을 수도 있었으련만.
그런 말을 들을 시간적인 여유가 아직은 있었을 텐데.>(5막 6장)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매우 단단한 쇠붙이를 두드려 만들어 놓은 것처럼 보이던 이러한 성격을 깨뜨려 버린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단지 완수된 행위가 보여 주는 또 다른 얼굴, 즉 환멸뿐인가? 맥베스 부인에게는 원초적으로 연약하고 여성다운 부드러운 영혼도 있어서 이것이 응축되고 긴장되었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표출되었다고 추론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러한 파멸이 보다 심층적인 동기화를 통해 이루어져서, 우리에게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오게 만드는 어떤 징후들을 탐구해 볼 수도 있을 것인가?여기서 이 문제들을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당시까지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제임스의 즉위를 칭송하기 위해 지은 축하공연극 Gelegenheitsstuck이다. 이 소재는 이미 주어져 있었고 또한 다른 작가들도 다룬 바 있다. 세익스피어는 여러 작가들의 작품들을 낯익은 방식으로 활용했었던 것이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특이하게 풍자해 보여 주었다.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고, 한때 제임스의 출생 소식을 듣고는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자신을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통>이라고 불렀던1) <처녀> 엘리자벳은 바로 아이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왕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제임스는 엘리자벳이 비록 마음에 끌리지는 않았지만 처형명령을 내렸던 마리아의 아1) 맥베스 2장 1절 참조.
<그들은 나의 몸에 열매맺지 못하는 황금을 올려 놓고 손에 헛된 왕홀을 쥐어주었도다. 그러나 그 왕홀은 남의 손에 미끌어져 들어갈 것인데, 나의 아들이 나의 대를 잇지 못하기 때문이다.>들이었다. 그리고 마리아는 정치적인 고려에 의해 관계는 흐려져 있었지만 그녀의 피붙이 친척이었고, 그녀의 손님이라고 부를 수 있던 여자였다.
제임스 1 세의 즉위는 불임의 저주와 또 지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세대의 축복을 보여 준다. 세익스피어의 맥베스의 사건전개는 이러한 대립을 토대로 구성되고 있다. 운명의 여신들은 그에게는 바로 그가 왕이 될 거라고 약속을 해주었지만, 뱅코우 Banquo 에게는 그의 아이들이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맥베스는 이러한 예언에 반항했고, 자기자신의 공명심을 해소하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못하여, 새 왕조를 세우려고 했으며, 남들에게 이득을 주려고 살인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익스피어의 이 작품에서 공명심이 일으키는 비극만을 보려고 한다면 이러한 점을 간과하기가 쉽다. 멕베스는 영원히 살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가 반항했던 예언의 한 부분을 무력화시키는 길은 오로지 자신의 대를 이을 아이들을 갖는 방법밖에 없다. 그는 자기의 힘센 부인에게까지 그런 아이들을 기대하는 듯이 보인다.<그대여, 아들만 낳아 주시오그대의 강인한 골수에서 태어나는 것은사내 아들밖에 없으리니.>(1막 7장)이러한 기대에 환멸을 느끼게 되면, 그가 운명에 굴복하거나 혹은 그의 행동이 목표와 목적을 잃고 파멸하도록 판결을 받은 자의 맹목적인 분노로 변해, 손에 닿는 것이면 모두다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자하는 인간으로 변해가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맥베스가 이러한 과정을 거쳐감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비극의 정점에서 우리는 흔히 다의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저 전율스런 절규를 발견한다. 이 구절은그의 변신을 설명할 열쇠를 포함하고 있을 수도 있다. 맥더프 Macduff의 절규는 다음과 같다.
<그에겐 자식이 없어>(4막 3장)이 구절은 분명히 <단지 그에게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그가 내 아이들을 죽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자체 내에 그 이상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구절은 맥베스로 하여금 자신의 천성을 훨씬 뛰어넘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강인한 부인의 성격의 유일한 약점을 건드리는 심오한 모티프롤 드러내 보여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맥더프의 이 말이 가리키는 곳을 정점으로 해서 그 주위를 살펴보면, 부자의 갈등 관계가 이 극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선량한 던컨의 살해는 바로 부친살해에 다름 아니다. 뱅코우의 경우 맥베스는 아버지를 죽였고,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빠져나갔다. 맥더프의 경우 아버지가 그를 버리고 떠나갔기 때문에 그가 아이들을 죽인다. 마법으로 불러내는 장면에서 운명의 여신들은 그에게 왕관을 쓴 피묻은 아이를 불러내 준다. 그 전의 무장한 몸통은 아마 맥베스 자신일 것이다. 배경에는 그러나 복수자 맥더프의 음침한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 스스로는 생식의 법칙의 한 예의가 된다. 그는 자기 어머니로부터 순산을 통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제왕절개를 통해 태어났기 때문이다.맥베스에게 자식이 없고 그의 부인이 불임이라는 점이 생식의 성스러움을 어긴 범죄에 대한 벌이라면, 또 맥베스가 아버지가 될 수 없었던 것이 그가 아이들에게서 아버지를, 아버지에게서 아이들을 빼앗았기 때문이라면, 또 맥베스 부인이 모성을 상실한 것이 그녀가 살해의 정령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호소해서 일어난 것이라면, 이것들은 철저히 동태복수법(同態 法)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일 것이다. 나는 그 여자의 발병, 그녀의 무자비한 마음이 후회로 변화되는 것 따위가 그녀가 자식이 없다는 점에 대한 반응이라고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녀는 자식이 없음으로 인해서 자연의 위력에 대한 자신의 무력감을 확실히 깨닫게 되고 또 동시에 그녀는 범죄를 통해 얻은 성과의 대부분도 자신의 책임으로 인해서 잃게됨을 분명히 알게 된다.
셰익스피어는 맥베스의 소재를 『흘린세드의 연대기 Die Chronik von Holinshed』 (1577)에서 얻었다. 이 작품에서 그 여자는 스스로 여왕이 되기 위해서 남편에게 살인을 범하도록 선동하는 야심 찬 여자로 겨우 몇 차례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그녀의 향후 운명이나 성격의 발전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 반대로, 그곳에서는 맥베스의 성격이 피에 굶주린 폭군으로 변해가는 과정만은 우리가 방금 조사해 보았던 것과 유사하게 동기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흘린세드의 경우에는 맥베스를 왕으로 만들어 주는 던컨에 대한 살인과 그의 계속되는 악행 사이에는 10 년의 간격이 있고, 이 기간이 지나면서 그는 엄격하지만 정의로운 지배자로 변모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기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뱅코우에게 내려진 예언이 그 자신의 운명에 관한 예언과 마찬가지로 실현될 수도 있다는 고통스런 번뇌에 시달리게 되고 ,그 결과 그에게서 변화가 이루어진다. 이제 비로소 그는 뱅코우를 죽이게 하고 셰익스피어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범죄에 휘말려 든다. 비록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흘린세드의 경우에도 그를 이런 길로 몰고 간 것은 그가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점이 그 동기가 되었다고 추측해 볼만한 근거는 충분히 있다. 셰익스피어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그의 비극에서는 사건들이 숨쉴 틈도 없이 급하게 우리를 스쳐지나 간다. 극중 인물들의 진술에 따라 이들 사건들이 진행되는 기간을 계산해 보면 약 <일 주일>에 불과할 정도이다.2) 이렇게 빨리 진행되기 때문에 맥베스나 그의 부인의 성격이 급변하는 동기를재구성해 볼 토대가 없다. 자식의 기대에 대한 계속되는 실망이 그 부인을 녹초로 만들고, 남편을 도전적이고 광폭한 성격으로 몰고 갈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비극에서는 시간을 경제적으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인물의 성격을 내적인 동기 외에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발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 내부에서, 그리고 이 작품과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 사이에는 수많은 섬세한 연관성들이 자식 없음이라는 모티브 속에서 만나려고 하고 있어 모순이 남게 된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소심하지만 공명심이 강한 남자를 거침없는 폭군으로 만들고, 강철처럼 단단한 선동가 여인을 후회로 번뇌하는 병든 여자로 만드는 동기들이 무엇인가라는 점은 내가 알기로는 알아낼 수 없다. 원문의 보존 상태가 나쁘고, 작가의 의도는 분명치 않으며, 전설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 이로 인한 삼중의 어두움을 뚫고 나아가는 것을 우리는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비극이 관객에게 미친 엄청난 영향을 염두에 둔다면, 이런 연구가 나태한 것이라고 누군가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그런 비판이 옳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작가는 서술기법을 통해서 우리를 압도할 수 있고, 그럴 경우 우리의 사고는 불구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추가로 작품의 효과를 그 심리분석 메커니즘을 통해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것까지 작가가 방해할 수는 없다. 작가는 값싼 개연성을 희생해서라도 극적인 효과를 노리고자 한다면, 자기가 보여 주고자 하는 사건들의 자연스러운 시간순서를 마음대로 단축시킬 수 있지 않느냐는 지적도 역시 이 자리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희생이라는 것은 단지 개연성만을 파괴하는 곳에서나 정당화될 수 있을 뿐3) , 인과적인 연결까지 지양하는 곳에서까지 정당화될
2) 다름슈테터, 『맥베스』 (1881), 75쪽.
3) 예를 들면 리처드 3세가, 자기가 죽인 왕의 관을 붙들고 안나에게 구혼하는 장면에서처럼.수 없기 때문이다. 또 시간의 경과를 2-3일로 한정시킨다고 명백히 밝히지 않고, 오히려 정해지지 않은 채로 남겨 놓는다면, 극의 효과를 위해서라도 시간의 단절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맥베스의 경우와 같은 문제를 미해결인 채로 남겨 놓기는 어렵기 때문에, 나는 한 가지 의견을 덧붙여 언급하고자 한다 . 이것은 새로운 출구를 제시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루드비히 예켈스 Ludwig Jekels는 얼마 전 셰익스피어를 연구한 글에서 이 작가의 기법의 한 부분을 밝혀 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맥베스에도 적용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는 주장하기를, 셰익스피어는 한 성격을 자주 두 인물로 분할하는데, 분할된 한 인물을 나머지 다른 한 인물과 하나로 합성시키지 않고는 그 어느 한 쪽도 이해하기가 불완전한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한다. 맥베스나 그의 부인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들을 자립적인 인물로 파악하고 보충해 주는 맥베스라는 인물을 고려에 넣지 않은 채, 그들의 변신의 동기를 탐구한다면 당연히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흔적을 추적해 보지는 않겠다. 그러나 살인을 저지른 날 밤 맥베스에게서 싹터 나온 불안의 씨앗은 맥베스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놀랍게도 그의 부인에게서 발전되어 나온다는 견해를 뒷받침해 줄 몇 가지 증거들을 끌어 대고 싶다.4) 범행을 저지르기 전에 단검의 환각을 맛 본 사람은 바로 맥베스이지만, 후에 정신 착란에 빠진 사람은 그의 부인이다. 그는 살인을 저지른 후 집에서 누군가 이렇게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더 이상 참들지 마라, 맥베스는 사람을 죽였다. 따라서 맥베스는 더 이상 잠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맥베스 왕이 더 이상 잠들지 못한다는 말을 전혀 듣지 못한다. 반면 우리는 왕비가 잠에서 깨어나 몽유병자처럼 헤매면서 자신의 죄를 폭로하는 광경을 보게된다. 그는 손에 피가 묻은 채 힘 없4) 다름슈테터, 같은 곳.
이 그곳에 서서 그 어떤 바다 신의 물결도 자기 손을 깨끗하게 씻어 줄 수 없음을 한탄했다. 그때 그녀는 소량의 물이라도 범행으로부터 우리를 씻어 줄 거라고 위로했다. 그러나 그녀는 15분 정도 손을 씻어도 손에 묻은 피의 얼룩을 제거하지 못한다. <아라비아의 그 어느 향수를 가지고도 이 작은 손 하나 향기 나게 하지 못한다 >(5장 1절). 맥베스가 양심의 고통 속에서 두려워한 것이 그녀한데서 실현된다. 그녀는 범행 후에 후회하고, 그는 도전적으로 되어 간다. 그들은 서로 뒤섞여 범죄에 대해 보일 수 있는 반응들을 남김없이 다 보여 준다. 마치 심리적으로 하나인 개체가 통합되지 못하고 두 부분으로 남아 있는 듯이, 그리고 하나의 원형에서 파생된 두 모형처럼.
맥베스 부인의 경우, 우리는 그녀가 왜 성공 후에 병에 걸려 파멸했느냐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엄격하게 심리분석이라는 과제를 기꺼이 떠맡은 어느 다른 극작가의 작품에서 더 멋진 해결 전망이 우리에게 눈짓을 보내고 있다.조산원의 딸인 레베카 감비크 Rebekka Gamvik는 양아버지인 베스트박사 Doktor West에 의해 양육되어,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종교적 신앙 위에 세워진 도덕성을 동해 삶의 욕망을 억누르는 족쇄를 경멸했다. 양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녀는 어느 유서깊은 종족의 종가인 로스머스홀름 Rosmersholm에 입양되었다. 그런데 이 가문의 사람들은 웃음을 모르고 엄격한 의무수행을 위해서 쾌락을 희생했다. 로스머스홀름에는 목사 요하네스 로스머 Johannes Rosmer 와 병들고 자식이 없는 그의 부인 베아테 Beate가 살고 있다. 귀족 같은 이 남자를 향한 <억누를 수 없는 야수 같은 욕정>에 사로 잡혀, 레베키는 방해가 되는 그 부인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실 행하면서 <대담하고 천성적으로 자유로운> 가차 없는 의지 를 이용한다. 그녀는 혼인의 목적은 아이를 낳는 것이라고 기록해 놓은 의학서적을 그 부인의 손에 쥐어 준다. 그래서 그 불쌍한 부인은 자신의 혼인이 정당한지를 놓고 혼란에 빠진다. 레베카는 로스머가 읽는 책을 자신도 읽으며 로스머의 생각에 공감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로스머가 낡은 믿음을 버리고 개화사상을 받아들일 참이라고 그 부인에게 넌지시 알려 준다. 레베카는 남편에 대한 그 부인의 도덕적인 신뢰감을 뒤흔들어 버린 후, 마침내 그 부인에게 자기로서는 로스머와 맺은 불륜 정사로 인한 결과를 감추기 위해서는 곧 집을 나가버릴 수밖에 없다고 단단히 일러둔다. 죄악에서 나온 계획이 성공을 거둔다. 우울하고 저능하다고 여겨져 왔던 그 불쌍한 부인은 자신 스스로가 무가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녀는 사랑했던 남편의 행복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물레방앗간의 다리에서 물 속으로 뛰어든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레베카와 로스머는 로스머스호름에서 단 둘이서만 살게 된다. 로스머는 자신들이 맺는 관계를 순수하게 정신적이고 이상적인 우정으로 여기고 싶어한다. 그러나 의부로부터 이러한 관계를 놓고 처음으로 구설들이 떠돌게 되고, 동시에 로스머도 자기아내가 어떤 계기로 인해서 죽게 되었을까라는 점을 생각하며 고통스런 회의를 품게 된다. 그래서 그는 레베카에게 자기 후처가 되어 슬픈 과거에 종지부를 찍고 활기차고 새로운 생활을 꾸려나가자고 부탁한다 (2막). 이러한 제안을 받자 그녀는 한동안 환호성을 올린다. 그러나 곧 다음 순간에 결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밝히며, 만일 그가 계속해서 자신에게 치근덕거리면 자신도 <베아테가 걸었던 길을,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로스머는 수긍하지는 않으면서도 이 거절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더욱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레베카이다. 우리는 그녀의 행동과 의도를 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거부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의십해서는 안될 것이다.대담하고 천성적으로 자유로운 의지를 타고나서, 자신의 욕구의 실현을 위해서는 가차없이 길을 개척해 나아가는, 모험을 즐기는 그녀가 성공의 열매를 따라는 제안을 받고도 이를 실행하려고 하지 않는데,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녀 스스로 4막에서 우리에게 해명을 준다. <그것 참 끔찍한 일이야, 이 세상의 모든 행운이 내게 두 손 가득히 제시되는 지금, 지금 난 바로 내 자신의 과거가 행복으로 가는 길을 폐쇄해 버리는 그런 여인이 되어 버렸어. > 말하자면 그녀는 그 동안에 완전히 다른 여인이 되어 있었다. 양심이 눈을 떠서, 그녀는 죄의식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그녀의 쾌락의 향수를 방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양심은 어떻게 해서 눈을 뜨게 되었는가? 먼저 그녀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보고, 이를 완전히 믿어야 할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제 의지를 질식시켜 버린 것은 바로 다름 아닌 로스머 가문의 인생관이예요. 아니 적어도 당신의 인생관이지요. 이것이 제 의지를 병들게 했어요. 전 같으면 내게는 통용되지도 않았을 율법으로 저의 의지를 노예로 만들었어요. 당신과 함께 산다는 것, 이보세요, 그것이 내 마음을 우아하게 만들었어요.>이러한 영향은 그녀가 로스머와 단 둘이서만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말 없이, 고독하게, 당신이 당신의 생각들을 모두 다 조건 없이 내게 주었을 때, 당신이 느끼신 것처럼 그렇게 부드럽고 섬세한 분위기를 느끼고나자, 그때 저에게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어요.>그 직전에 그녀는 이 변화의 다른 측면을 한탄한 적이 있었다. <로스머스홀름이 내 힘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여기서 나의 용기 있는 의지는 불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무능해졌습니다! 나로서는 모든 것을 다 용감하게 도전해볼 시간은 지나가 버렸습니다. 나는 행동할 힘을 잃어버렸어요, 로스머.>레베카는 로스머와 자신이 제거한 부인의 오빠인 교장 크롤 Rektor Kroll 앞에서 자발적으로 자신이 범인임을 고백한 후, 이런 말을 한다.입센 Ibsen 은 대가답게 섬세하고 짤막한 몇 마디 말로 레베카가 거짓말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솔직하지도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었던 것이다. 선입견으로부터 매우 자유로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나이를 한 살 정도 낮추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두 남자 앞에서 행한 그녀의 고백은 불충분하며 따라서 크롤의 추궁에 의해서 몇 가지 본질적인 점들이 보충된다. 그녀의 결혼 포기 선언이 다른 한 가지 를 감추기 위해서 한 가지 요소만 폭로한 것이라고 가정할 자유가 우리에게도 있다.
물론 로스머스홀름의 분위기, 고상한 로스머와의 교제 등이 그녀의 마음을 고상하게 해주었으며 또 그녀를 정신적인 불구로 만들었다는 그녀의 주장을 의심해 볼 근거가 우리에게는 없다. 이런 전술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알고 느꼈던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그 여자에게서 일어났던 일 전부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녀가 모든 문제를 다 밝힐 필요도 없다. 로스머가 미친 영향은 단지 덮는 의두에 불과하고, 그 배후에는 또 다른 영향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주목할 만한 특징이 이 또 다른 방향을 지시해 준다.그녀의 고백이 끝나고, 이 극의 끝부분에 나오는 마지막 설득 장면에서 로스머는 그녀에게 자기 아내가 되어 달라고 다시 한 번 부탁한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저지른 죄악을 용서해 준다. 그녀는 비록 자신이 용서를 받는다 하더라도 노련하게 속여서 불쌍한 베아테에게 죄악을 저지른 자신이 그 책임까지 면제받을 수는 없으리라고 응당 대답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에게 또 다른 비난을 가한다. 생각이 자유분방한 그녀에게서 듣는 이런 비난은 우리를 매우 생소하게 만들고 또 레베카가 차지했던 그 자리에 어울리지도 않는다. <오호, 여보, 다시는 그런 말씀 마세요!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에요! 당신도 분명히 아시겠지만, 전 과거가 있어요, 로스머.> 그녀는 물론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암시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유롭고 아무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았던 시절에는 그녀는 로스머 부인에게 저지른 범죄적인 행동보다는 이러한 성관계가 로스머와의 결합을 방해하는 더 강력한 방해물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로스머는 그녀의 성문제에 얽힌 과거에 관해서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녀의 과거를 알려 주는 것들은 모두 극 속에 소위 지하에 잠복해 있어서 그녀의 과거는 암시를 통해 해명되어야 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녀의 과거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극에 들어 있는 그녀의 과거에 관한 암시는 교묘한 기술로 짜여 있어서 오해의 여지는 없겠기 때문이다.레베카의 첫 거절과 그녀의 고백 사이에는 그녀의 향후 운명과 관련하여 결정적으로 중요한 어떤 것들이 일어나고 있다. 교장 크롤은 그녀를 방문하여 그녀가 사생아이며, 베스트 박사의 양녀로서 베스트 박사는 그녀의 엄마가 죽은 후 그녀를 양녀로 삼았음을 알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녀에게 굴욕감을 줄려고 한다. 증오로 인해서 그의 감각은 예민해져 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에게 어떤 새로운 것을 말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있다. <실제로, 전, 당신이 사정을 아주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베스트 박사의 양녀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특이한 일이었지 않나요.> <그때 그분은 당신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지요. 당신 어머니가 돌아가신 바로 직후였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가혹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분 집에 머물러 있어요. 그분이 당신에게 돈 한 푼 유산으로 남기지 않으리라는 것을 당신은 압니다. 당신은 책 상자나 물려받았지요 그렇지요. 그런데도 당신은 그분 댁에서 참고 견디었어요. 그분의 변덕을 참으면서요. 마지막 순간까지 그분을 돌봐 드렸지요.> <당신이 그분을 위해서 했던 일들은 딸의 자연스런 본능 때문이었다고 난 유추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나머지 모든 태도들도 당신의 태생에서 온 자연스런 결과라고 난 생각하고 있지요.>
그러나 크롤은 착각을 범했다. 레베카는 자신이 베스트 박사의 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크롤이 불분명한 비유를 들어 그녀의 과거를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그가 다른 어떤 것을 말하고 있다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가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서도 한참 동안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적인 크롤이 전에 자신을 방문했을 때 툴리게 알려 준 것을 토대로 자기 나이를 계산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크롤은 그녀의 항변을 당당하게 거부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계산은 정확할 겁니다. 베스트씨는 임명되기 일 년 전에 그곳에 잠시 손님으로 와 계셨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말을 듣자 그녀는 마음의 평정을 잃어 간다. <그것은 틀려요.> 그녀는 이리저리 왔다갔다 한다. 그리고 손을 비비꼰다. <그럴 리가 없어요. 당신은 지금 그런 말로 내게 설득하려고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지금도 진실이 아니에요. 진실일 수가 없어요! 지금도 그렇고, 언제라도 그래요!> 그녀가 너무 흥분하자 크롤은 그녀에게 이야기를 계속 들려줄 수 없게 된다.크롤 그러나 당신은, 맙소사 왜 그렇게 격렬해지시나요? 당신은 지금 저를 두렵게 하고 있어요. 나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생각해야 한단 말인가요!레베카: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은 그 무엇을 믿거나 생각해서도 안 돼요.크롤 그렇다면 당신은 이 일을, 이 개연성을 그처럼 가슴에 묻어 두고 계신가요, 제게 분명히 말해 주세요레베카(재차 정신을 차리며): 그것은 아주 간단해요. 교장 선생님. 난 그렇게 천박한 사생아로 여겨지고 싶지 않은 것 뿐이에요.레베카의 태도의 수수께끼를 푸는 해법은 단 하나 뿐이다. 베스트 박사가 자신의 아버지일 수도 있다는 소식은 그녀가 접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타격이다. 그녀는 베스트 박사의 양녀일 뿐만 아니라 정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크롤이 이런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그녀는 그가 이 관계를 년지시 암시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자유 분방한 성격을 갖고 있어서 그 관계를 털어놓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교장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베스트 박사가 자기아버지였음을 몰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크롤은 그녀가 베스트 박사와 애정관계를 맺고 있음을 몰랐던 것이다. 그녀가 로스머의 청혼을 마지막으로 거부하면서 자신은 과거 있는 여자여서 그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다는 구실을 내세웠을 때, 그녀가 염두에 둔 것은 오로지 이 애정관계 뿐이었다. 만일 로스머가 알고 싶어했었다면, 그녀는 로스머에게 자신의 비밀 가운데 절반만을 알려 줄 수 있었을 뿐이고 그 비밀의 나머지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녀가 그와 결혼을 하는 데 방해물로 작용했던 것은 그 심각한 범죄가 아니라 그녀의 이러한 과거였음을 알게 되었다.자신이 친아버지의 정부가 되었음을 알고나서, 그녀는 이제 자신을 압도하며 솟아 나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녀는 로스머와 크롤 앞에서 고백을 마치고, 자신을 살인녀로 낙인찍는다. 그리고 범죄를 저지르면서까지 준비해 왔던 행복을 마침내 포기하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러나 그녀의 성공을 좌절케 하는 죄의식의 본래 동기는 비밀로 남아 있다. 우리는 그것이 로스머스홀름의 분위기나 로스머의 도덕적 영향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알았다.지금까지 우리 글을 따라 읽은 사람이라면 몇 가지 의혹을 느끼게 될 것이고, 따라서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우리가 이 작가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레베카가 로스머를 최초로 거부한 것은 크롤이 그녀를 두번째로 방문하기 이전, 말하자면 크롤이 그녀가 사생아임을 폭로하기 이전이며 또한 그녀가 자신의 근친상간을 모르던 시기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거절은 매우 강력하고 심각한 것이었다. 범행으로 얻은 성과를 포기하게 만든 죄의식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이미 그녀가 근친상간을 범했음을 알기 전에 이미 작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까지의 것을 인정하게되면, 근친상간이 그녀의 죄의식의 근원이라는 생각은 지워 버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레베카 베스트를 다루면서, 그녀가 작가 입센의 매우 비판적인 이성이 만들어 낸 상상의 산물로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물이기라도 한 듯이 고찰해 보았다. 우리는 위와 같은 반론을 해결하기 위해 똑같은 관점을 견지해도 좋을 것이다. 그 반론은 옳다. 일말의 양심이 근친상간을 깨닫기 전에 레베카에게도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 대한 책임을 레베카 스스로 인정하고 한탄하고 있는 그 영향의 탓으로 돌려도 아무런 지장은 없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우리는 제2의 동기를 인정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교장이 전해 주는 말을 들었을 때 레베카가 보여 준 태도 및 그것에 바로 이어서 그녀가 고백을 통해서 보이는 반응을 보면 이제서야 비로소 보다 더 강력하고 결정적인 결혼 포기의 동기가 드러나고 있음을 의심할 수 없게 한다. 복합적인 동기들이 작용을 하고 있는 셈인데, 여기서 표면적인 동기 배후에는 보다 심층적인 동기가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사태는 문학작품을 형상화할 때 경제성의 원칙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생긴다. 따라서 이 보다 심층적인 동기는 두드러지게 언급되어서는 안 되고, 극장의 관객들이나 독자들이 편안하게 인지할 수 없게 은폐된 채 남아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나 관객에게서 심각한 거부감이 일고, 감정에 근거를 둔 이 거부감은 극의 효과를 의문시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당연히 우리는 작품에 드러난 동기는 그것에 의해 은폐된 동기와 내적인 연관을 맺지 않아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것을 완화시키고 또 그것에서 도출해 낸 것으로 입증되어야 할 것이라고 요구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작가의 의식적인 문학적 조합이 무의식적인 전제에서 논리적으로 나타났다고 작가를 믿어도 좋다면, 우리는 더 나가서 작가가 이 요구를 충족시켰음을 보여 주는 시도를 해보일 수도 있다. 교장이 레베카에게 분석적으로 냉혹하게 근친상간이었음을 알려 주기 이전에 이미 레베카의 죄의식은 근친상간에 관한 비난이라는 근원에서 흘러 나온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작가가 암시해 놓은 그녀의 과거를 상세하게 보강해 가며 재구성해 본다면, 그녀도 역시 자기 엄마와 베스트 박사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보르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가 어머니의 뒤를 이어서 그 남자의 집에 기거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커다란 인상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비록 그녀가 이 일반적인 상상이 그녀의 경우 현실로 되었음을 모르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그녀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녀가 로스머스홀름에 왔을 때, 첫번째 경험의 내적인 힘이 그녀를 충동해서, 처음에는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그녀의 개입없이 실현되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을 초래케 했다. 그 상황이란 바로 아내이면서 어머니인 베아터를 제거하고 남자이면서 아버지인 베스트 박사 곁에서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자신의 뜻에 반해 한 발짝 한 발짝 베아타를 살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을 매우 설득력 있고 절박하게 이렇게 설명한다.
도대체가 당신들은 내가 대담하고 깊이 생각해서 일을 진행시켰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당시 저는 여러분 앞에 서서 이야기하는 지금의 제가 아니었어요. 그리고 한 인간 속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의지가 있다고 저는 감히 생각해 봅니다. 전 베아터를 죽여 버리고 싶었어요! 그 어떤 식으로든지요 하지만 그런 방향으로 나가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치도 않았어요. 한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일을 저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고,그때마다 내 가슴 속에선 무슨 소리인가 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이제 그만둬! 더 이상 나아가지 말라구! 하는 소리 말이에요 . 그렇지만 저는 그만둘 수 없었어요.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거예요. 조금씩이나마 말이지요. 그렇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갔지요. 그러다 일이 벌어지고 만 거예요. 이런 식으로 일은 저절로 터지고 만거라구요.
이것은 꾸민 말이 아니고, 실제 일어난 일을 설명한 것이다. 로스머스홀름에서 그녀에게 일어난 일들, 즉 로스머에 대한 연모와 그의 부인에 대한 적대감은 이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결과이며,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 그리고 베스트 박사와 자신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재연된 것이다.따라서 맨 처음 그녀로 하여금 로스머의 구애를 거절하게 했던 죄책감은 크롤로부터 전해들은 후 그녀로 하여금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했던, 그보다 더 커다란 죄책감과 기본적으로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녀가 베스트 박사의 영향 아래서 자유분방한 생각을 갖게 되었고 또 종교적인 도덕을 경멸하게 되었듯이, 마찬가지로 그녀는 로스머에 대한 새로운 사랑을 통해서 양심적이고 귀족적인 인간으로 변모했던 것이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 내부에서 일어난 일들에 관해서 그 정도로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녀는 정당하게도 로스머의 영향이 자신의 태도 변화를 야기한 동기라고 부를 수 있었다.하녀나 말동무로서 혹은 가정교사로서 한 가정에 들어간 아가씨가 그곳에서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연유하는 백일몽, 즉 그 집의 안주인이 어떤 식으로든지 죽게 되고, 바깥주인이 자신을 아내의 자리에 들어앉힐지도 모른다는 헛된 꿈을 참으로 빈번히 그리고 규칙적으로 꾸게 된다는 것을 정신분석 작업을 하는 의사라면 잘 알고 있다. 『로스머스홀름 』 이라는 작품은 그러한 처지의 아가씨들이 일상적으로 꾸게 되는 환상을 다룬 최고의 예술작품이다.이 여주인공의 이력 가운데 이 백일몽에 앞서서 그에 꼭 상응하는 현실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작품은 비극이 된다. 5)
5) 『로스머스홀름』 에 나타난 근친상간이라는 주제를 여기서와 같은 방식으로 연구한 아주 뛰어난 연구서가 있다. 랑크, 『문학과 설화에 나타난 근친상간의 주제』 (1912).
길게 문학 이야기를 했는데 이제 이를 끝맺고 의사로서의 경험으로 되돌아가기로 하자. 그 목적은 단지 양자 사이에는 완전한 일치가 존재함을 몇 마디 말로 단정짓기 위한 것이다. 정신분석 작업 결과 실패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성공했을 때도 마음의 상처를 입히는 양심의 힘은 은밀하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즉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무릇 우리의 죄의식 일반이 다 그럴 것이다.
3 죄의식으로 인한 범죄자들훗날에는 매우 정직하고 착실한 사람이 된 자들도 종종 자신의 청년 시절, 특히 사춘기 이전의 시기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 주다가 죄를 짓게 만드는 금지된 행위들, 예를 들면 절도나 사기 혹은 방화 등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내게 털어놓기도 했다. 나는 그런 시기에는 도덕적인 억제력이 약하다는 점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으냐며 그런 이야기들을 무심코 넘기려고 했고, 이것들을 보다 의미 있는 연관성 속에 넣어 분류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나도 매우 두드러지고 연구에 도움이 되는 사례들에 접하고 나서 그러한 사례들을 철저히 연구하게 되었다. 내가 치료를 맡고 있었던 환자들, 그것도 그런 젊은 시절을 넘긴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사례들이 있었다. 이를 연구한 결과 놀랍게도, 그러한 범죄행위들이 저질러진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런 행위들이 금지되어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런 행위를 저지르면 행위자의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점과 연관이 있다고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계속해서 마음을 짓누르는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비행을 저지르고 나면 마음의 짓눌림이 완화되었다. 적어도 그 어떤 식으로든지 죄의식은 표출되지 않았다.
비록 역설처럼 들릴 지 모르지만,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범죄 이전에 죄의식이 있었다는 것, 즉 죄의식이 범죄로 인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즉 죄의식 때문에 범죄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당연히 죄의식으로 인한 범죄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죄의식이 먼저 존재한다는 내 주장은 물론 수많은 전술들과 작용들을 통해 입증되었다.그러나 특이한 사실들을 확인하는 것이 학문 연구의 목표는 아니다. 다음과 같은 두 개의 또 다른 문제들에 관한 답변이 있어야 한다. 먼저 범행 전의 어두운 죄의식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종류의 원인이 인간의 범죄에 의미 있는 몫을 담당하고 있는가?첫번째 질문의 해답을 추적해 가다 보면 인간의 죄의식 일반의 근원에 관한 정보를 알게 된다. 정신분석 작업은 거의 규칙적으로 이러한 어두운 죄책감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기인함을 보여 준다. 즉 죄의식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성적 관계를 맺고자 하는 두 가지의 커다란 범죄적인 의도의 반응인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의도를 비교해 보면 물론 죄책감을 고착시키기 위해 저질러진 범죄는 고통받는 자에게는 마음 고통을 완화시켜 주었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버지 살해와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은 인간의 커다란 두 가지 범죄로서, 유일하게 원시사회에서도 처벌을 받았고 기피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인간은 이제 유산으로 물려받아 영혼의 힘으로 등장하는 인간의 양심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획득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연구에서 추정 확인된 바 있다.
두번째 질문에 답하는 것은 정신분석 작업을 넘어선다. 어린이들의 경우 처벌을 유발하기 위해 <나쁜 아이>가 되고 처벌을 받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만족해한다는 것을 목격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들을 훗날 분석 연구해 보면, 그들의 죄책감이 처벌을 자원하도록 했던 흔적을 종종 찾아 볼 수 있다. 성인 범죄자들의 경우, 죄책감 없이 범죄를 저지른 사람, 그 어떤 도덕적인 억제력도 계발하지 못했거나 사회와의 갈등 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켰던 사람들은 모두 제의해 놓아야 한다. 하지만 이미 처벌을 받았던 많은 대부분의 범죄자의 경우 그러한 범죄의 동기가 충분히 고려될 수 있을 것이며, 또 이것에 의해 범죄심리학의 애매한 점들이 설명되고, 처벌에 새로운 심리학적 정초가 마련될 것이다.어느 친구는 니체도 <죄책감으로 인한 범죄자>가 된 경우를 알고 있었다고 내게 가르쳐 주었다. 짜라투스트라의 「창백한 범죄자에 관해서」라는 글에 나오는 몇몇 구절들은 죄책감이 먼저 존재하고 또 이러한 죄책감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해 준다. 범죄자들 가운데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창백한 범죄자>에 속하게 되는지를 결정짓는 것은 훗날의 연구에 맡기기로 하자 6) (김길웅 옮김).6) 프로이트 연구본 제10권, 229-253쪽에서 옮김.
부록 2 송하춘의 「청량리역」청량리역
역파(驛派)는 보이지 않았다.역사(驛舍)의 왼편, 나오는 문 안쪽으로 <청량리 경찰서 보안 근무소> 간판이 걸려 있긴 하지만, 거기는 문이 닫혀 있었다. 로터리 건너편에도 파출소가 하나 있기는 하다. 그러나 구역이 다르니까 거기서도 이곳 청량리역을 직접 관할하지는 않을 것이다.대합실 안이고 밖이고 할 것 없이, 그러나 경찰들은 어디고 좍 깔려 있었다. 하긴 역파가 따로 필요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무더기로 대기하고 있다가 시간이 되면 와서 교대 근무를 하는 것일테니까, 파출소보다는 아마 더 큰 경찰서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대합실 안에서는 적어도 네 명쯤의 제복 차림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현관 입구 쪽에 둘, 화장실로 통하는 후미진 구석 쪽에 하나, 그들은 모두 의무 경찰들인 것 갇다. 그리고 아, 오늘은 잎사귀 세 개짜리가 떴구나. 의경 셋에 경장이 하나, 경장은 아마 이번 근무조의조장일 것이다. 조장답게, 그는 의경들과 섞이지 않고, 사람들이 서있거나 쭈그려 앉아 있는 바닥의 긴 나무 걸상들 틈새를 혼자서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열차가 출발할 시간이다.이번에 떠날 차는 열시 십오분발 태백선 비둘기호다. 방금 전에 춘천행 통일호가 떠났고, 그리고는 약 사십분쯤 시간을 띄웠다가 아마 경주행 차례가 될 것이다. 승객들이 밀리는데도 이처럼 출발 시간이 고르지 못한 까닭은 그 안에 도착해야 할 차들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들어오는 차와 나가는 차들이 최소한 간이역에서 충돌하는 일은 생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철길 쪽에서 한두 차례 기적 소리가 울렸을 법도 하건만, 대합실 안에서는 아무도 그 소리를 들은 것 같지 않았다. 바깥 소리를 듣기에는 이곳 대합실 안의 소음이 너무 컸다.전광판 시계가 방금 10:00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우르르 개찰구 앞으로 몰려가더니, 금세 입구까지 닿는 긴 꼬리를 이었다. 출발 시각 십분 전쯤이면 개찰이 시작될 거라는 걸 이미 고대하고들 있었던 모양이다. 무심해 뵈던 사람들이 언제 그토록 세상 돌아가는 일에 촉각을 곧두세우고 있었던지, 세상은 참 무심하다고 탓하거나 깔볼 일만도 아닌 것 같다. 무심해 된다는 건 자기한데 몰두한다는 뜻일 데니까, 함부로 그 무심을 탓하다가는, 탓하는 사람만 자기 일에 몰두하지 못하는 셈이 되고 말 것이다.경찰들은 열차가 들고나는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이 개찰구 쪽으로 몰리자 갑자기 매표 창구 앞이 한산해졌으므로, 현관 입구 쪽을 지키고 섰던 의경들은 오히려 그 앞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최경장님한데 무슨 일 있었다며?」그렇게 묻는 사람은 두 사람 가운데 일경이었다. 묻기 전에 그는흘긋 최경장 쪽을 훔쳐 보았었다.
「쉬쉬 하는 걸 보면 아마 좋지 않은 일인가봅니다. 본서까지 불려 갔었다는군요」말을 받는 사람은 이경이었다. 이경이라면 아직 훈련소 밥이 삭지도 않았을 것이다. 얼굴이 앳되어 보이고, 푸른 제복에서는 풋내가 풀풀 풍겼다.「호송 출장소에서 근무하다 왔었거든. 인사 때도 아닌데 갑자기 이쪽으로 날려온 걷 보면 아마 문제가 있었을 거야.」「호송이라니? 죄수들 압송하는 일 말입니까?」「그럼, 물먹었을 걸, 아마」그들은 또 한 차례 최경장 쪽을 흘긋 보았다.잎사귀 세 개가 의경들과 함께 동초를 서기는 드문 일이었다. 동료들 이목도 이목이거니와, 홀로 심사가 산란하니까, 아마 자청해서 외근을 나와 버렸을 것이다. 그가 이곳 파출소로 전출되어온 지는 보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아직 낯이 선 데다가, 그나마 동료들 앞에 떳떳지 못한 과거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들통나봤자 별것 아닐 테지만, 공무원이 업무와 관련된 일로 협의를 받는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10:04 때, 개찰구 너머 철길 쪽에서 역무원 아저씨가 나타났다. 그도 정확히 십분 전 개찰 시각을 지키고 있음이었다. 사람들이 긴 줄을 서거나 말거나, 그것이 자신과 무관해 뵈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긴 줄의 맨 앞으로 가더니, 그는 일단 근무 자세로 섰다. 표정이 꽤 밝아 보이지만, 그렇다고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서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팔목을 들어 자신의 시계로 시간을 본다거나, 엿장수처럼 괜히 검표 가위를 딱딱거린다거나, 또한 괜스레 자신의 금테 모자를 벗었다가 다시 고쳐 쓰곤 하는 몸짓들이 어쩌면 그의 오랜 직장 생활에서 생긴 일상의 자유와 방만인지도 몰랐다. 정각에서 1 분을 넘긴 10:06 에 그는 개찰구의 철문을 열었다. 밀린 인파의 봇물이 터지자, 긴 꼬리의 줄이 잡아 먹히듯 철길 쪽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사내 하나가 방금 대합실 안으로 뛰어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흰 와이셔츠에다가 위아래 낡은 곤색 양복을 걷쳤는데, 넥타이를 매지 않아서 그런지 그는 목이 헐거워 보였다. 그러자,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여자 하나가 홍익매점 앞의 우람한 기둥 앞에서 그를 향해 번쩍 손을 들어 주었다.「여기요」여자는 밤색 카디건 같은 것을 입고 있었는데, 낡고 빛이 바래서 그런지 전혀 꾸미고 나온 모습이 아니었다.「이제 어떻게 하지?」사내는 허겁지겁 여자 쪽으로 가더니 물었다. 그는 물을 때 여자를 보지 않고 자신의 발밀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발 아래 콘크리트 바닥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집에서 함께 밥상머리를 마주했던 자신의 노모가 앉아 있었다. 노모는 늙은 폐마처럼 힘겹게 자신의 눈꺼풀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세상일과는 무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차 떠나겠어요 . 당신이나 얼른 나가세요」여지는 어느덧 휘헝해진 개찰구 쪽에다 대고 사내를 다그쳤다. 역무원 아저씨가 빈 가위를 들고 서서 대합실 안을 휘 둘러보았고, 그 눈길이 자기를 스치는 것 같자, 사내는 말할 수 없이 초조해졌다.『밤엔 추워지겠는걸. 내의를 입혀드릴까?』사내는 한 번 더 발 아래 노모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구월의 아침 햇살이 바닥의 더러운 땟국을 핥으며 대합실 안으로 기어 들어오고싶어했다.
「어머니가 뭐, 어린앤가. 만원짜리에다 천원짜리도 몇 장 더 얹어 드렸다구요」여자가 빨대 꽂힌 팩우유를 노모의 손에 쥐어 주면서 말했다. 노모는 표정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지만, 입에 갖다대지는 않았다. 사내가 벽시계 를 한번 홀긋 보았다. 그리고 그는 어려운 결정을 내린듯 단호하게 말했다.「알았어. 다녀올게」쫓고 쫓기면서, 사내와 여자는 빈 개찰구를 향해 뛰었다.「태준이 올 시간인데, 기다렸다가 당신이 직접 데리고 들어가지 그래?」사내의 등뒤에서 여자는 그 말을 들었다.「알았어요, 가시거든 곧 연락주세요」사내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쪽에서 우렁찬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노모는 아들이 사라져간 쪽을 향해 한차례 힘겨운 눈길을 보냈지만, 곧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기적이 울고 있는 것 갇은 착각 속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여자는 사내가 떠나고 없는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빠져나간 사람의 숫자만큼을 채우느라고 대합실 안은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 소리내어 떠들거나 웃는 사람이 없는데도 숨소리, 신발 끄는 소리, 옷깃 스치는 소리만으로 이처럼 큰 소음을 낼 수 있다는 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우리 역은 친절봉사 역입니다>가 오른쪽 벽 위에 키보다 두 배나 높게 걸려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러나 그 말을 읽거나 믿는 사람은 혼치 않았다. 그런가 하면, 그 위로 큼지막하게 다섯개나 걸려 있는 광고판을 보는 사람은 많았다. 입구 쪽에서부터 차례대로 보일러, 밥통, 옷, 술, 그리고 나머지 한 칸은 불이 꺼져 있거니와, 내용물도 들어 있지 않았다. 광고란 반드시 보기 좋으라고 걸어 놓은 그림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눈요기로만 한다면야 하필 보일러와 밥통과 의복을 걷어 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걸 모르고 깜빡 미인계에 속아 사람들이 의식주의 중요성을 잊는다면 야단이다. 의식주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역시 취하는 일인 것 같다. 그래서 옷 광고 뒤에 곧 술 광고를 걸었을 것이다 . 그러고 보니, 빈 게시판도 무슨 뜻이 담겨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것은 휴식이래도 좋고, 잠이래도 좋다. 하여튼 그냥 공백이면 어떤가. 먹고 자고 입고 마시고, 그리고는 편안하게 잠들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일 데니까.
최경장이 기어코 다시 불려가는 모양이었다. 교대 시간이 아직 멀었는데, 민순경이 오더니 최경장을 들여보내고, 대신 자기가 근무를 서는 것이다.「최경장님, 소장님께서 들어오시랍니다」민순경은 최경장 앞으로 가더니 짧게 보고를 마쳤다. 그러자 최경장은 더 물을 것도 없이 대합실을 떠나 버린 것이다. 먼 빛으로만 그것을 지켜보고 섰던 의경들이 이번에는 직접 민순경 앞으로 가서 궁금한 것들을 캐묻기 시작했다.「민순경님, 최경장님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죠?」「아무 일도 아냐, 임마. 호송해가던 죄수들을 놓쳤을 뿐야」민순경은 최경장을 편들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모른다거나 알아도 감추고 싶어서가 아니라, 함부로 맞먹으려고 드는 의경들과 거리를 두고 싶었을 것이다. 직업 경찰이 의무 경찰과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건 당연하다. 한솥밥을 먹는다고는 하지만, 임기를 마치면 그들은 곧 옷을 벗고 민간인으로 돌아갈 사람들이다. 그런가 하면 자기들은 오래 그곳을 지켜야 할 사람이니까, 어쨌든 프로의 세계를 아마추어가 엿보는 건 싫었을 것이다.
「그게 도대체 언제 적 이야깁니까? 도주를 했다면, 그때 당장 문제 를 삼았어야지, 뒤늦게 이제 와서 왜 그게 문제가 된다는 거죠?」짐작으로나마, 의경들도 그 일을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민순경 앞에 겁을 먹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마추어는 아마추어대로 그들만이 갖는 묘한 자존심이 있어서, 잎사귀 하나쯤 아마 맞먹어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뒤늦게 그 새끼들이 붙잡혀왔다지 뭐야. 처음에 놓쳤을 때는 그냥 단순히 근무 태만죄를 적용하고 말았었는데, 이제 잡아놓고 보니, 그 새끼들이 또 뭔가를 새로 불었겠지」「그게 뭐죠? 뭘, 그 새끼들이 불었다는 거죠?」「모른다니까」민순경도 이번에는 약간 달아오른 것 같았다.화장실 쪽의 통로를 지키고 섰는 의경도 함께 끼고 싶지만, 그는 근무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방금 실내에서 잘못 담배를 태운 잠바데기를 붙들고 시비를 벌이던 참이었다. 벽이고 기둥이고 할 것없이 눈길 닿는 곳이면 어디고 금연 공고판이 붙어 있었다. 잠바데기는 벽 위에 높다랗게 걸린 열차 시간표를 읽느라고 아마 그것을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왠 보따리 갇은 할머니가 구두 코에 와 걸려도 걸리는지를 모른 채 녀석은 안으로 들어왔었다. 그리고 잠시 소변을 좀 볼까 하고 화장실 쪽으로 가는데 그만 의경이 그를 낚아챈 것이다. 녀석을 주목한 사람은 대합실 안에서 단 두 사람뿐이었다. 하나는 그를 붙잡은 의경이고, 또 하나는 아까 열차를 타고 떠난 사내의 여자였는데, 두 사람 다 처음부터 그를 볼래서 본 것은 아니다. 의경은 그가 아니라 그의 담배를 보았었고, 여자는 또한 그가 아니라 그의 구두코에 와 걸리는 보따리 같은 할머니를 보았었다. 그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자는 내내 그 짐 보따리 때문에 개찰구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 그러다가 녀석이 그것을 구둣발로 툭 건드리자, 더 이상 가슴이 떨려서 견딜 수 없었으므로, 그만 그곳을 황급히 빠져나갔다. 여자는 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이 몰린 틈새를 비집고, 민순경들이 섰는 기둥 뒤쪽으로만 걸어서 나갔다. 그러다가 마지막 잠바데기 옆을 스칠 때 재빠르게 몸을 내뺐는데, 그때까지 대합실 안에서 그 여자를 주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서는 좀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서로 감싸주겠죠?」민순경들은 하던 잡담을 계속하고 있었다. 최경장이 설령 잘못한 점이 있더라도, 같은 경찰들끼리니까 쉽게 풀려나지 않겠냐는 뜻일 것이다.「그렇게는 안 된다」민순경은 단호했다.「왜요? 경찰들은 피도 눈물도 없나요?」「잘못 보아 주었다가는 윗대가리가 잘리거든 . 너 같으면 임마, 부하 살리겠다고 네 모가지에 칼 대겠냐?」「최경장님 그럼 감옥 가겠네?」「감옥 아니면 옷 벗길결.」「아구야」「왜? 김 일경, 너도 무슨 죄전 일 있어?」방금 춘천에서 오는 열차가 도착하고 있었다. 아까 그 사내가 타고 간 태백선 비둘기호 열차와는 아마 석곡쯤에서 엇갈렸을 것이다.나오는 문은 역사의 바깥 왼편에 있었다. 들어가는 문이 건물 안 에 있어서, 그 안에 들어가 차표를 끊고, 기차가 올 때까지 그 안에서 기다리고, 또 들어가서 차를 타곤 하던 것과 달리, 차에서 내려 곧바로 표를 던져두고 나오면 그냥 역 광장이었다.
오늘은 예정보다 5분 늦게 도착한 셈이다. 차에서 내린 손님들은 아까 열차를 타러 나가던 사람들과는 달리 뛰거나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아마 시간을 정해놓고 빨리 타주기를 재촉하는 기차라거나, 아니면 노모를 버리고 허겁지검 달아나야만 한다거나 하는 사람들이 이번에는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마중나온 사람을 찾느라고 고개를 늘여빼고 바깥쪽을 기웃거리는 사람이 없지 않았지만, 대개는 무거운 짐 보따리를 질질 끌거나, 보따리가 없더라도 호주머니에 손을 지른 채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며 긴 줄의 끝을 따라가는 정도였다.줄은 두 가닥이었다. 두 군바리가 한쪽 줄의 끝으로 따라붙으면서 아까부터 주고받던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문래동? 문래동, 어디?」무슨 말을 주고받던 끝이었는지, 둘 중의 하나가 등 뒤의 병사를 향해 휙 돌아설 정도였다. 그는 육군 하사였다.「문래전화국 앞입니다.」등 뒤의 군인이 대답했다. 그는 일등병이었는데, 하사와 별로 친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가을 햇살이 푸른 제복에 가 닿자, 등 뒤의 다리미 자국에서는 청동의 푸르름이 반질거렸다.「쭈욱 그 동네서만 살았더란 말야?」하사가 줄을 따라 걸어가면서 물었다.「네, 문래 국민학교 때부터」「그래애?」역무원이 빠른 손놀림으로 그들의 줄을 축내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곧 긴 꼬리의 맨 앞에 와 섰다.「고등학교도?」
이번에 하사는 순시를 바꾸어 자기 앞으로 일등병을 끌어 세우면서 물었다 . 고등학교도 문래 고등학교를 나왔냐는 뜻이다. 그때 중년의 여자가 역 광장의 바깥쪽에 서 있는 것을 일등병은 보았다. 여자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는데, 그녀의 낡고 빛바랜 가디건 같은 것을 보자 , 그는 곧 그 여자가 자기 어머니인 것을 알았다.「네」일등병은 그러나 그 여자의 눈길을 피하느라고 짧게 대답했다.「몇 횐데?」「십삼 회」「어! 이 새끼 나하고 동창이잖아?」개찰구를 쓰윽 빠져나오면서 그 말을 일등병은 들었다.둘이는 새로 악수를 나누느라고 잠시 나오는 문 앞에 서 있었다. 근데 왜 우리가 여태 몰라봤지? 놀라면서 하사가 손을 내밀었고, 일등병이 씁쓰레 웃으면서 그 손을 받아 쥐었다. 임마, 넌 알고 있었어? 물으면서 하사가 염치없는 웃음을 웃었고, 일등병이 맘모스 쪽을 넘겨다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커피 숍 <대왕>에서는 지금쯤 윤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중년의 여자는 일등병이 어서 하사의 손아귀로부터 풀려나기를 기다리며, 반 발짝 옆으로 비켜서 있었다. 가자. 가서, 우리 낮술이나 한 잔 푸자. 하사가 일등병의 손을 잡아끌었고, 아냐, 만날 사람 있어, 라고 일등병은 그것을 거절했다. 누구? 애인? 하사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고, 아냐, 어머니. 일등병이 여자 쪽을 홀긋 보면서 대답했다. 어엉! 어머니도 이런 델 나오냐? 일등병의 시선이 가 닿는 곳에 정말이지 일등병의 어머니 같은 여자가 서 있음을 하사는 보았지만, 그러나 그는 곧 악수를 풀 수가 없었다.「야 , 미안했다. 우리, 그 일은 없었던 걸로 하자」
하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엊그제 그 일을 그는 떠올리고 있음이었다. 일등병은 웃지 않았다. 그도 그 일을 잊지 못하고 있음이었다. 지난주 내무반에서 있었던 일이다. 세탁물을 널어 말리는데, 겁도 없게시리 일등병 팬티가 하사님 팬티 곁에 나란히 걸려 있더라는 것이다. 이거, 어떤 새끼 거야? 그러더니, 변명을 할 새도 없이 하사는 일등병의 얼굴이고 옆구리고를 마구 쥐어패던 것이다. 그런 새끼가 이제 알고 보니 고등학교 동창이라고?하사를 따돌리고 나자, 일등병은 잽싸게 대합실 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그러자 뒤에서 받치고 섰던 여자가 일등병보다 더 잽싸게 달려가 그의 앞장을 가로막고 섰다.「어디 가니? 에미, 여기 있지 않니?」여자의 목 안에서는 첫소리가 났다. 애써 절박감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는 아마 할 수만 있다면, 일등병의 어깨를 포근히 감싸주고라도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일등병이 워낙 본체만체 했으므로, 여자는 쉽게 접근하지 못하였다.「알았어, 엄마. 금방 갔다 올께」일등병은 일부러 느긋해 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말꼬리는 느리고, 오히려 핀잔이 섞여 있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늘 자기 어머니를 따돌리곤 했을 것이다. 이번에 여자는 일등병의 팔뚝을 붙들고 완강하게 버렸다.「안 된다. 너, 또 이 에미를 따돌릴라고 그러는 거지?」「내일 차표를 예매해야 돼요. 지금 사두지 않으면 나, 부대에 못들어간단 말야, 엄마. 부대에 못 들어가면 엄마 아들 어떻게 되는 줄이나 알아? 맞아 죽는단 말야』「표는 내가 사오마. 넌, 여기 섰거라. 아니다. 그러면 넌, 그 사이에 또 달아나겠지? 이걸 어떡허믄 좋으냐?」
일등병과 여자는 광장 한복판에 서서 잠시 겯고틀기를 계속했다. 여자는 남편이 곁에 없는 것을 애석해하는 것 같았다. 만일 남편이 곁에 있기만 하다면, 아들이 이렇게까지 말 안 듣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다. 설령 말을 듣지 않더라도, 남편더러 아들을 붙잡아 매게 하고, 자기가 가서 표를 사오면 될 것이었다.「같이 가요, 엄마. 엄마랑 같이 가면 될 거 아냐?」일등병이 마침내 잡힌 소매를 뿌리치며 반항하기 시작했다.「 안 된다」그래도 여자는 막무가내였다.「왜 엄마는 되고 나는 안 된다는 거죠?」「이놈아, 너 또 그 기집애 나오랬지? 그 기집애, 너 대합실 안에 숨겨뒀지, 그지?」「대합실 안에 윤희가 있다구요? 내기해요, 엄마. 내 말이 거짓말이면 나 엄마 아들 안 할께」일등병이 워낙 거세게 대들자, 여자는 한풀 꺾이는 것 같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태도를 바꾸어 곧 애원하기 시작했다.「제발 빈다. 에미랑 그냥 집으로 들어가면 안 되겠니? 그 기집애는 정말 나쁜 아이다」「뭐라구요? 윤희가 나쁜 아이라고? 엄마가 윤희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죠?」그러나 여자가 워낙 간절하게 빌어댔으므로, 이번에는 일등병 쪽에서 먼저 고집을 포기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잠자코 하늘을 보고 서있더니, 문득 발길을 되돌려 시내 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여자가 일등병의 허리춤을 움켜쥐며 바싹 그의 뒤를 따라붙고 있었다.『순전한 널 꼬여서 이렇듯 그 아이는 네 정신을 홀라당 빼앗아 가버렸잖니? 그만 만나라. 제발, 이 에미가 널 위해서 하는 소리란다」
고개를 떨군 채, 일등병은 말없이 광장을 걸어 나가고 있었다.「시장할 텐데, 뭘 좀 먹겠니?」광장 한복판에 시계탑이 서 있었다. 곁눈질로 시간을 읽으면서, 일등병은 훨씬 상냥해진 여자의 그 말을 들었다.「됐어요. 이거나 놓으세요」일등병이 불퉁거리면서 허리춤의 손을 뿌리쳤고, 여자는 뒤따라 가면서 그 손을 풀었다. 시계는 십분 전 두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내버스와 택시들이 줄지어 섰는 로터리 쪽에 지하도로 통하는 입구가 보였다.「어서 가자. 해지기 전에 노량진 시장도 다녀와야 되고, 바쁘구나」여기서부터는 여자가 일등병을 앞질러 잰걸음을 시작하였다.「전철 타시게요?」「막히지 않는 건 전철밖에 없다」지하도의 층계는 가팔랐다. 일등병은 잠자코 여자를 뒤따라가면서 물었다.「요새도 포장마차 하세요?」「안 하면 뭘 먹고 사니? 민자년까지 요새는 집에 와 있다는구나.「당장 집세도 울려 달라는데, 자칫 잘못했다가는 우리 네 식구 길바닥에 나있을 판이다」「민자가 와 있다니? 대학 가겠대요? 또」층계를 내려서려다 말고, 일등병은 주춤 발걸음을 멈추었다.「공장이 문을 닫았다는구나. 요즈음은 하루에 열 개씩도 더 망하는가보더라.」「그 판에 여긴 뭘 하러 나와요? 윤회한데 뭐, 엄마 아들 빼앗길까봐?」
「아버지가 삼척 가셨잖니? 현장 감독한데 가서 다시 사정해 본다더라. 어떻하겠니? 우선 발등에 붙은 불이나 끄고, 차차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아까 아침 차로 떠나셨다」지하도 충계는 중간에 2단으로 꺾이는 데가 있었다. 그 꺾이는 곳의 시멘트 바닥에 가난한 가을 열매들을 모아놓고 파는 노파가 하나 앉아 있었다. 일등병은 거기서 빨간 산딸기 두 접시와 다래 다섯 개를 샀다.「웬걸, 그렇게 많이 사니?」「할머니 드시라고요. 할머니, 산딸기 좋아하시잖아요?」「아서라, 할머니 마석 가셨다.」여자가 펄쩍 뛰며 그것을 말렸다.「마석이라니? 죽어서 땅에 묻히기 전에는 절대로 밖에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잖아요?」「그래도 가셨다」여자는 상관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일등병이 그 뒤를 바짝 따라붙으며 다그쳐 물었다.「엄마가 그랬죠? 그렇죠? 엄마가 또 할머니를 내쫓은 거죠?」「에미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내가 가래서 가고 있으래서 있울 사람이냐, 할머니가? 민자년하고 방 싸움하기 싫으니까, 가는가 보더라」「그게 보낸 거 아니고 뭐예요? 못 가시게 엄마가 말렸어야지」두번째 계단이 끝나는 데서 매표창구가 바라다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등병이 여자를 앞질러 먼저 자판기 앞으로 가서 섰다. 그 철제 캐비닛 같은 상자 안에서, 일등병은 전철표를 한 장만 꺼냈다. 여자는 그것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교회 양로당도 문 닫은 지 오래라면서, 마석엔 가면 어디로 간다는 거죠?」
일등병이 여자한데 전철표를 건네 주면서 물었다.「낸들 아니? 가니까 가는 줄 알았지」여자는 그것을 걸어가면서 건네 받았다. 사람들 틈새에 끼여 천천히 그들은 개찰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개찰문은 자동 개폐식이었다.「태준아? 태준이 어디 갔니?」여자가 소스라쳐 놀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승강장 안으로 그녀가 자기 몸뚱이를 들이밀었다가 다시 빼내는 순간, 일등병이 그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여자는 참시 그 자리에 넋을 잃고 서 있었다. 녀석이 윤희를 만나고 안 만나고는 문제가 아니다. 대합실이 아니기만 하다면, 차라리 녀석은 어디서고 윤희를 만나고 있는 편이 낫겠다. 만일 그렇지 않고 녀석이 정말 차표를 끊는답시고, 대합실 안으로 달려가기라도 했다면 이건 야단이다. 여자는 다시 허겁지겁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정신 없이 대합실을 향해 뛰었다.광장을 지나 대합실로 통하는 문은 두 군데가 있었다. 하나는 그 광장만큼이나 넓고 우람한 현관문이고, 또 하나는 왼편 화장실 쪽으로 난 샛문이 그것인데, 물론 용변이 아니라도 사람들은 대합실로 들어가거나, 또는 광장으로 빠져나올 때 자주 그 샛문을 이용한다. 여자는 현관의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샛문 쪽을 택하였다. 샛문을 지나면 곧 통로가 나온다. 대합실로 통하는 좁다란 골목길이다. 그녀는 거기서 두려움에 떨고 서 있었다. 대합실 안에 일등병은 없는 것 같았다. 더 샅샅이 뒤져보고 싶었지만, 그러나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여자는 일단 그 통로를 받치고 섰는 우람한 기둥 뒤로 가서 자신의 몸뚱이를 가렸다. 일등병을 찾는 일보다 더 크고 무서운 일이 이미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 집이 어디세요?」여자는 그 말을 정확히 기둥 뒤에 숨어서 들었다 . 꽤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 보따리 같은 할머니를 빙 둘러싸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인 것 같은 경찰이 할머니를 다그치고 앉았는 모습까지도 사람들 틈바구니 사이로 보였다. 할머니는 입을 열지 않았다.「할머니, 여기 누구랑 같이 오셨지요?」또 한 차례 경찰의 것인 듯한 목소리를 여자는 들었다. 이번에도 그쪽에서는 반응이 없는 것 같았다. 쭈그려 앉았던 경찰이 불쑥 사람들 키와 같은 높이로 일어서는 것을 여자는 보았다.「허어, 참. 어떤 불효막심한 녀석이 또 제 에미를 하나 버렸군」누구한테랄 것도 없이 고개를 들어 경찰은 탄식의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그 보따리 같은 할머니를 사람들이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경찰보다 먼저 발견한 사람은 청소하는 아줌마둘이었다. 논 가운데 황새처럼, 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합실 바닥을 휩쓸고 다니니까, 무엇이든 보지 않는 것이 없다.「얼라! 이 할머니가 여기 여적 있네」그러나 아중마들까지도 정작 어떤 예감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은 오후 두 시가 넘어서였다. 그들은 그것이 치워야 할 물건인지, 아닌지를 놓고 한바탕 왈가왈부했었다.「누가 몰래 버리고 갔능갑만, 얼른 치워 버려야 쓸 것인디」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나이가 젊은 축이었다. 그러나 약간만 늙수그레한 사람이면 그보다는 훨씬 신중한 편이었다.「산송장인가? 임자 있는 물건이고만 그러네」「글메. 임자가 있응께 이만큼이나 꾸며서 내보냈겼지?」
대낮에 이런 데서 산송장을 보는 일이란 그들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오늘은 자식이 어미를 버렸기 망정이지, 어미가 자식을 버리는 일조차 요새는 심심찮게 보던 것이다.그러나 그 청소하는 아중마들보다 더 먼저 할머니를 본 사람은 엉뚱한 데서 나왔다. 열두서너 살이나 됐을까, 잽싸고 당차게 생긴 계집아이 하나가 아줌마들 사이를 파고든 것은 그때였다. 그 아이는 그 할머니를 보는 정도가 아니라, 여기 그 할머니를 버리고 간 사람까지를 보았다는 것이다.「아줌마, 내가 봤어요. 이 할머니, 아까 어떤 아줌마가 여기다 놓고 갔어요」아이는 놀라움으로 이마가 벌겅게 상기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여기 사람을 버렸다는 말이 아이를 그토록 놀라게 했을 것이다.「너는 누구냐? 느이 할매냐?」처음에 아줌마들은 도리어 그 아이를 의심했었다. 그 아이가 아니라도, 어쩌면 그 아이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이 할머니를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는 아니라고 펄펄 뛰었다.「아녜요. 어떤 아줌마가 여기다 놓고 갔다니까요」「어디 갔지? 그 아줌마」「몰라요, 아까 봤었는데. 저 개찰구 앞에 있었어요」알고 보니, 그 아이는 오팔팔에서 심부름을 나온 아이였다. 그걸 알고 풀어 주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오래 끌려다니면서 아줌마들한테 치도곤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오팔팔이라면, 아마 그 아이도 누구한텐가 버림을 받았거나 몰래 빼내온 물건이기가 십상일 것이다. 그런 것이 하물며 그 할머니를 버린다거나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민순경들이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그 다음다음 차례였다. 아이는 자기가 이 할머니를 버린 집안의 자식일 거라고 의심받는 것에 대하여 전혀 기분 나빠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았다. 다만 그 꺼져 가는 생명을 보고도 못 본 체하는 아줌마들이 놀랍고 이상할 뿐이었다.
「아저씨, 저기, 누가 버리고 간 할머니가 있대요」참다 못해, 아이는 의경들한데 가서 그것을 일러바쳤고, 그러자 의경들이 다시 민순경한데 가서 그 사실을 전한 것이다.「백차 불러. 박일경. 당장 백차를 부르라구」민순경의 업무 처리는 단호하고도 사무적이었다. 이제 백차가 오면 곧 할머니는 구청 사회 복지과로 넘어갈 것이다. 할머니가 갖고 나온 것이라고는 작은 손가방 하나뿐이었다. 사람을 넘겨 줄 때는 정확히 그 소지품도 함께 양도되어야 할 것이다. 박일경이 백차를 부르러 가고 없는 동안, 민순경은 그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물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할머니도 들으라고 그는 그 안의 것들을 꺼내면서 일부러 큰 소리로 외쳤다. 속옷이 한 벌, 구겨진 낯수건 하나, 헌 양말이 한 켤레, 만 원짜리 하나에다가 천 원짜리가 석장, 그리고 어? 종이에 싼 알약이 있네?「할머니, 이 약은 뭐지요?」「수면제라오. 당최 잠을 이루지 못해요」노파의 그 말을 들었을 때, 여자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여자는 잠시 허둥댔다. 그녀는 지금까지 잘 버티고 섰던 크고 우람한 돌기둥을 두 팔로 힘껏 밀었다. 그리고 어떻게 화장실까지 걸어나갈 수 있었던지, 그녀는 자신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 변기를 타고 앉았던 기억은 난다. 그러나 실지로 방뇨가 있었던지 없었던지는 아무래도 기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역 광장을 아주 빠져나간 것은 그리고 나서도 꽤 시간이흐른 뒤였다.
백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백차도 오기 전에 민순경은 그곳을 떠나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교대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이제 경찰들이 바뀌면 이 할머니는 다시 자기와는 무관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민순경은 조금 뒷맛이 개운치 않음을 느꼈다. 할머니가 입을 열어 자신의 주소나 전화 번호 같은 것들을 밝히고, 그래서 다시 편안하게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갔더라면 민순경은 마음이 훨씬 훌가분했을 것이다. 새로운 근무조가 대합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의경 셋에 순경이 하나, 이번에도 의경 아닌 순경이 잎사귀 두 개짜리이기는 민순경 때나 마찬가지였다. 교대식은 다로 필요없었다. 다만 최경장 건에 대한 소식을 듣느라고, 민순경은 조금 출발이 늦어질 뿐이었다. 우선 처리할 일은 물론 할머니를 인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새로 나온 사람들을 보자, 문득 최경장 건이 궁금해졌으므로, 할머니 건은 깜빡 잊어먹은 셈이었다.「결국 입건되는 모양입디다」새로 나온 순경이 전하는 소식은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았다.「크게 먹었던가 보죠?」민순경은 그를 다시 안쪽으로 끌어들이면서 물었다.「먹기는? 걸려도 아주 더럽게 걸렸습디다」새 친구는 누군가를 빈정거리는 표정이었다.「더럽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민순경이 주춤 발걸음을 세웠고, 그러는 그를 새 친구는 힐난하듯 쳐다보았다.「바로 여기, 오팔팔에서 걸렸더구먼」「오팔팔이라니?」민순경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입을 하 벌리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캐묻기를 계속하였다.
「아니, 그게 무슨 죄란 말이오? 최경장이 거기서 의상치기를 했던가? 아니면, 살림을 차렸었나?」그는 마치 싸우는 사람처럼 서서 핏대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민순경이 딱하다는 듯, 새 친구는 목 안의 소리로 속삭이는 것이었다.「그게 아니라, 교도소 가는 새끼들을 데리고, 글쎄 그게 말이나 되오?」「아니, 최경장님이? 함께?」「미쳤소? 그 새끼들이 하도 사정사정 애원을 하니까, 넘어갔겠지. 그리고는 밖에 서서 망을 바줬대나?」「자기는 않고? 허, 허허」민순경이 하도 기가 막혀 했으므로, 그들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서 있었다.「경찰을 우습게 봤군. 그때 왜 최경장이 가만 있었나? 냉정하게 딱 자르지 못하구서?」민순경은 최경장을 원망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새 친구가 또 그를 두둔하기 시작했다.「딴은 그럴 수도 있겠지. 일단 감방에 들어갔다 하면 여자 맛이라곤 볼 수가 없거든 감옥이 달리 감옥이겠어?」민순경은 다시 헤어지자고 손을 내밀었다.「아, 참. 버려진 노모가 있소. 그 아들이 몰래 갖다 버렸을 거요」「또 귀찮은 일이오?」「어차피 구청으로 갈 물건이오. 백차를 불렀으니까. 자, 그럼 수고하시오」현관 입구 쪽에서는 민순경이 어서 나오기를 기다리며, 의경들끼리 잡담을 늘어 놓고 서 있었다.
열두서너 살이나 됐을까, 아까 그 계집아이가 다시 장면 속을 파고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아저씨! 저기요, 저기」아이는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오더니, 광장 밖의 로터리 쪽을 향하여 막무가내 민순경의 팔뚝을 잡아끄는 것이었다.「아까 그 여자였어요. 저기서 봤어요. 그 여자가 이 할머니를 여기다 버리고 갔었다구요」「뭐라구? 네가 그 여자를 봤다구?」놀란 것은 민순경들뿐이 아니었다. 할머니를 에워싸고 섰던 사람들 모두가 아이한테 달겨붙었다.「지하도 쪽으로 가고 있었어요. 어떤 군인 아저씨랑 같이였어요」「뭐야? 군인 아저씨라고? 그게 누구지?」의경이고, 순경이랑이 아이를 따라 황급히 고아장 밖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순간 그 보따리 같은 할머니한데서도 뭔가 스쳐간 만큼의 꿈틀거림이 있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주목한 사람은 없었다.「어디야? 가보자」빙 둘러서 있던 사람들도 덩달아 함께 밖으로 뛰쳐 나가고 있었다.「그래, 그런 놈은 당장 잡아다가 맞대질을 시켜야 된다구」 이번에 노파는 꽤 충동적으로 상체를 흔들었다. 뭔가가 아마 퍼뜩 머리를 스치고 갔던 것 같다. 노파는 무거운 눈길을 들어 흘긋 광장 밖을 훔쳐보았다. 그리고는 곧 오랜만에 혼자인 것 갇은 깊은 외로움 속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대합실 안에서는 또 한 차례 개찰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번에 떠날 차는 그 종착역이 어디든 밤을 향해 달려야 할 것이다. 다시 입구까지 닿는 건 줄이 이어졌고, 또 다른 역무원 아저씨가 그 긴 줄의 맨 앞에 서서 시간을 재고 있었다. 철길 밖으로는 운행을 아주 정지해 버렸거나, 빼곡히 하물을 실었을 것 같은 기차의 낡은 토막들이 겹겹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서, 이미 반쯤은 어두워진 상태였다. 곧 떠날 차는 왼편 나오는 문 안쪽 어딘가에 대기하고 있을 테지만,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역사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개찰구가 열리면 이제 긴 줄의 꼬리는 잡아당기듯 철길 밖으로 빨려들어갈 것이다.
잡으러 간 여자는 광장 밖의 아무데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기다리던 경찰 백차는 그 틈을 비집고 들이닥쳤다. 허탕을 친 사람들이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합실 안으로 되돌아오고 있을 때였다.「얼라! 죽었네. 이 할머니가, 죽었어!」청소하는 아줌마들이 노파의 죽음을 발견한 것은 거의 같은 시각이었다. 노파는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아무렇게나 고꾸라져 있었다. 사람들이 다시 우르르 노파가 있던 데로 몰려들었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가까이서 에워싸지 못하고 다만 멀리서 그것을 지켜볼 뿐 이었다.「마신 것을 다 토했어요 . 우유가 상했었나봐요」그나마 바닥에 홀린 이물질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사람은 아이 하나뿐이었다.「아니다. 극약인가? 이 노인네가 극약이 어디서 났지?」백차의 경관들은 그것을 들여다 보지 않았다. 보지 않고도 이런 일을 쉽게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은 아마 경찰들뿐일 것이다. 그들은 노파가 왜 죽었는지, 혹은 누가 죽였는지를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 죽음을 슬퍼하거나 애석해하는 사람은 대합실 안에 아무도 없었다. 이제 경찰이 할 일이라고는 그 죽은 노파를 차에 실어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산 사람을 실으러 왔다가 죽은 송장을 싣고 간다고 해서 그게 재수 없는 일이냐 하면 그건 아닌 것 같다. 그것이 산 사람이든 죽은 송장이든, 그들은 그것을 어디론가 실어다주기만 하면 그만이다. 산 사람이면 구청 사회 복지과로 갈 것이고, 죽은 송장이면 경찰 병원이나 시립 병원 같은 데로 일단 갈 것이다. 노파는 죽었으니까, 아마 시립 병원쯤 갈지 모른다. 시체를 차에 태우는 일은 의경들을 시켰다. 민순경은 노파의 가방을 챙기는 일에 더 몰두하였다.
「그게 그러니까 수면제가 아니었었군」그는 그 가방 속을 속속들이 뒤지다가 뭔가를 알아낸 것 갇았다.아까 그 수면제가 없어졌다는 것이다.「그걸 먹어버렸나요?」의경 중의 하나가 쾅 뒷문을 닫고 나오면서 물었다. 문이 닫히기 전에 민순경은 그 가방을 시체와 함께 실었다.「아냐, 그건 내 실수였어」민순경은 뭔가를 크게 후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수면제 말입니까?」「말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맞대질을 시키겠다고, 누가 말했었지?」「연고자가 나타났을 땐 별수없는 일이었지 않습니까?」「아냐, 내가 서툴렀다. 자식은 아무한테나 불지만, 부모는 절대로 불지 않거든. 잡힐 때까지는 말하지 않는 게 좋았다」백차는 떠난 지 오래였다.의경 셋에 순경이 하나, 그들은 지는 해를 바라보며 천천히 청량리역 광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주보이는 하늘이 헌 누더기를걸친 듯 허망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동대문, 종로, 서대문, 마포, 하늘은 그 너머 어디까지고 한없이 뻗어 있을 것이다.
「최경장님이 걸려도 아주 더럽게 걸렸더군」민순경이 불쑥 최경장 소식을 허공에 띄우고 있었다. 죽은 노파를 말한다고 한 것이 그만 최경장을 들먹거리고 말았을 것이다. 죽은 사람은 그 죽음이 슬프다가도 그 자리를 떠나면 곧 잊혀지는 법이다. 산 사람은 산 사람끼리 앞으로 살아갈 일이 더 겨정스럽기 때문일 것이다.「최경장님, 혼자였답니까? 호송을 그렇게도 하는 겁니까?」산 최경장이 궁금하기는 의경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민순경이 최경장을 자기 일처럼 아파하는 것에 비하여, 그들은 그것을 남의 일 보듯 쳐다 본다는 점이었다.「그렇게는 안 된다. 죄수 하나에 호송 경찰이 둘, 그런 식으로 언제나 죄수보다는 많아야 한다. 그때는 아마 경찰이 둘이었을 것이다.」허공을 떠받치고 섰는 건물의 검은 윤곽들을 그들은 함께 걸어가면서 보았다.「왜, 함께 막아내지 못했을까?」의경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마주보며 뇌까리고 있었다.「그게 문제였다. 같이 가던 사람이 고지질을 해버렸다」「반댈했었구나. 그 새낀 오입도 안 하나?」성난 사과처럼, 의경들이 벌전 얼굴둘을 쳐들고 흥분하기 시작하였다.「아무리 반댈 했어도 그렇지. 개도 밥 먹을 때는 안 건드린다더라. 어떻게 그런 걸 다 일러바칠 수가 있니?」「출세를 위해서는 그럴 수 있다. 고발하면 일 계급 승전하는 수가있거든」
민순경이 말했다.「와아, 놀랍다」「놀랍니? 난, 무섭다」광장이 끝나는 길가에 서서 그들은 사이 좋게 담배를 한 대씩 나누어 태웠다. 불을 붙이느라고 잠시 머리를 조아렸고, 그러나 곧 연기를 내뿜느라고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청량리가 문제였구나」누군가가 역사 쪽을 향해 청량리를 원망하고 있었다.「그렇지? 하필 청량리역에서 호송을 할 게 뭐냐?」또 누군가가 그 말이 맞다고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의경 셋에 순경이 하나, 민순경은 서둘러 이문동 쪽으로 발길을 내딛었다. 의경은 의경들끼리 최경장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입씨름을 이제부터 계속할 것이다.「아니다. 청량리 아니라도 여자는 많다. 문제는 배신이다.」「죄수가 도망치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다. 그게 왜 배신이란 말인가?」세 의경 가운데, 하나는 이경이었다. 이번에는 하나뿐인 이경이 그 대열을 이탈하고 있었다.「도와 준 사람을 망쳐 놓았으면, 그게 배신 아니고 뭐란 말이냐?」「여자를 보면 남자는 이성을 잃는 법이다. 그게 사랑이다」「사랑이라구? 사랑, 더럽구나.」두 일경이 문득 가던 길을 멈추었다. 역사의 뒤편 철길 쪽에선가, 기적 같은 것이 울고 있었다. 그것이 착각이 아니기를 바라며 그들은 광장 쪽을 뒤돌아보았다. 한 떼의 청량한 바람이 그 청량리 바닥을 휩쓸고 지나갔다.해설
이 책은 1900년에 출판된 『꿈의 해석』을 획기적인 출발점으로 하여 발전 • 전개되는 프로이트의 문학예술론에 대한 기초적인 안내와 핵심 정보를 제공하는 데 일차적인 목표를 두고 있다. <제1장 정신분석학과 문예학>의 내용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본개념들에 대한 해설을 주축으로 정신분석학적 문예학의 가능성을 타전하고 있다. 20세기 문학예술의 이해에 있어 고유한 열쇠개념인 니체의 양가성(兩慣性)이 프로이트의 심리구조론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당시의 사회 • 문화적인 배경과 연결시켜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뿐만 아니라 정신분석학적 문예학이 자신의 연구대상을 어떤 영역에서 확보하고 있으며 그 가능성은 현재 어느 정도로 확산되어 있는지롤 그동안의 변천사를 중심으로 요약하고 있다. 아울러 실증과학으로서의 정신분석학과 해석학으로서의 문예학의 특징과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정신분석학적 문예학>이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을 명시적으로 제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이어서 <제2장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은 19세기의 실증적 자연과학의 전동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프로이트 사상의 한계와 가능성을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의 상보관계 속에서 검토하고 있다 . 제1장과 제2장의 이론적 접근은 제3장과 제4장에서 문화와 예술이라는 구체적인 사회현실에 대한 언어적 • 정신분석적 접근을 통해 보완 • 심화되어 있음을 독자는 쉽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좀더 부연한다면 제3장은 『꿈의 해석』 과 더불어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론이 가장 독창적인 결실을 맺고 있는 재담이론을 풍부한 사례의 힘을 빌려 설득력 있게 해설하고 있다. 특히 의사소통적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는 프로이트의 재담이론은 일반적 통념을 뛰어넘어 사회문화적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정신분석학이 갖는 실효성 있는 방법적 타당성과 가능성을 확인시켜 준다. 마지막으로 <제4장 프로이트의 문학이론과 작품분석>에서는 문학 • 예술이론으로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지닌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지금까지의 비판적 시각과는 달리 구체적인 작품분석을 제시하면서 정신분석학의 이론적 적실성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에서 프로이트의 문학이론에 접근하고 있다. 이는 프로이트가 『그라디바』 에서 보여 준 작품분석의 모범을 좇아 문학작품과 영화작품에 대한 실제비평이 가능하다는 주장의 설득력을 확보하기 위한 예비작업적 성격을 지닌다. 분석된 문학작품은 이청준의 「서편제」와 송하춘의 「청량리역」이며, 작품분석의 성격상 「청량리역」을 부록에 재수록했다.프로이트의 문학예술론은 정신분석학이 지닌 대화적 • 의사소통적 성격을 근거로 해서 사회 • 문화 전반에 걸친 폭 넓은 비판이론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시각이다. 재담이론에서 프로이트가 유대인의 재담들을 삽화적으로 자주 인용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유대인이라는 특정한 사회, 문화의 고유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을 뛰어넘어 보편타당성도 만족시키는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재담이론은 프로이트의 문학예술론 가운데서 한 몫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회 • 문화이론의 기본을 이루는 중요한 관접도 제시한댜 사회 • 문화 이론의 주요 저서로 손꼽히는 『 문화와 문화에 대한 불만 Das Unbemgen in der Kultur』이 제2장에서 집중적으로 검토되고 있는 것은 재담이론을 사회이론의 시각에서 보완하는 유익한 작업이 될 수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한다.
***<사회적 사실들이 정신적 삶 가운데서 연구되거나, 거꾸로 정신적인 사실들이 사회적 존재 가운대서 탐구되는 한 학문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은……사회이론과 대등하다. 물론 프로이트의 이론과 사회이론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 … … 그러나 이들은 서로를 보완하며 동시에 풍요롭게 한다.> 그 이유는 두 학문이 보조과학으로서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1930년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통한 사회이론과 정신분석학의 접목이 얼마나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 파시즘과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대한 연구로써 진지하게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서방세계에서는 사회이론과 정신분석학의 대화가 변함없이 예의적인 현상으로만 머물렀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동구권에서의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 사이의 논쟁은, 1925년경부터 정신분석학에 대한 부정적 입장이 소련공산당의 공식입장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이미 20년대 말에 결정적으로 단절된다. 그리하여 양자 사이에는 긴 침묵과 양측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오해의 역사만이 지속되어 왔다.따라서 이 책의 제2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프로이트 이론에 있어 어떤 이론적 전제와 구조가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 사이의 이러한 불모의 관계를 종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또 그렇다면 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이 막혀 버렸는지, 바꾸어 말해서 프로이트의 이론 가운데 내재하고 있는 이 물음에 대한 긍정적인 계기들에도 불구하고 그로 하여금 정신분석학의 사회이론에로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명 작업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 사이의 생산적 접근을 불가능하게 만든, 프로이트 이론의 심층부에 자리잡고 있는 결정적인 요인은, 첫째로 정신분석학을 자연과학적 방법에 따라 대상을 다루어야하는 자연과학으로 간주하는 <과학주의적 자기오해>이며, 둘째로는 이처럼 정신분석학을 엄밀한 자연과학으로 정립하겠다는 본래의 의도가 좌절되어감에 따라 점차 분명히 부각되는 요인으로서 정신분석학의 문화과학적, 사회과학적 차원의 문제들을 단순한 심리학적 문제로 축약시켜, 모든 문화적, 사회적 현상을 심리학적 현상으로 환원시켜 버리려는 심리학주의가 그것이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프로이트 이론의 초기에서 중기를 거쳐 후기에 이르는 주요 저작들을 근거로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과학주의적 자기오해와 심리주의가 구체적으로 각 시기마다 어떤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이 연구를 통하여 밝혀질 과학주의적 자기오해와 심리주의는 단지프로이트의 이론구조에만 국한되어 나타나는 개별적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이제까지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 사이의 접근을 불가능하게 했던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구조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때문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사회이론 쪽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막아 버린 이상의 두 가지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명 작업이 선행될 때, 앞으로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 사이의 생산적 대화도 비로소 가능해지리라 믿는다.* * *
이 책의 제 3 장이 다루는 주내용은 재담에 관한 것인데, 프로이트의 재담논문은 『 꿈의 해석 』 에 대한 비판적 주장에 맞서 인간의 정신활동에 있어서 <재담>을 꿈의 또 다른 패러다임으로서 연구한 결과이다. 『 꿈의 해석 』 작업에서 프로이트 자신도 확인했듯이, 꿈은 재담적 요소를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무의식>의 규명과 꿈의 재담성에 대한 심층적 설명을 위해서 재담이나 희극성 등을 좀더 체계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의 재담에 관한 논구는 어디까지나 정신분석학적 발견을 위한 것이지, 마학 또는 문예학의 연구로서 구상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상으로서의 <재담>이 언어적, 문예학적 현상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 책에서는 프로이트의 연구 과정과 결과에서 미학적, 문예학적 단초와 접점들을 추적하여 응용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제3장에서는 우선적으로 그 이론의 근간이 되는 두 논문, 『재담 그리고 무의식과의 관계 Der Witz und seine Beziehungen zum UnbewuBten』(1905)와 「유머 Der Humor 」 (1929) 의 정독과 비판적 이해를 위해 한편으로는 재담이론에 대한 이론적 논문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론을 실제 우리 사회에서 발견되는 많은 예화에 적용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재담분석이 그 이전의 재담이론이 보여준 철학적, 언어학적, 사회기능적인 고찰의 전통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 그들과의 공통점과 차별성은 무엇인지, 상호 간의 수용, 영향관계는 어떠한지를 추적하기 위해 먼저 프로이트 전후의 재담론의 전개를 개관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이는 원용된 이전의 이론과 그것의 혁신적 극복을 위한 프로이트의 연구좌표를 도출하고, 또 이후의 이론에 대한 프로이트의 영향을 가늠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전제로 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역사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재담에 대해서 체계적이며 방대한 분석작업을 시도하였다. 그것은 재담의 형식적 측면뿐만 아니라, 그것의 정신적 원천 그리고 사회적 기능도 포함된 심충분석이다. 더 나아가 <희극적인 것>으로 포괄되는 다른 장르들과의 상호 공통점과 상이점을 분석하여 대범주 안에서의 재담을 자리매김했을 뿐만 아니라, 문학에서의 중요한 요소인 <희극성>, <웃음>등에 대한 새롭고 획기적인 이론적 기반도 마련하고 있다.
<남근>으로 표시되는 인간욕망의 기표가 암시하듯이 프로이트는 철저히 가부장적인 남성우월주의자였다. 자신이 살았던 세기전환기에서 억압적이며 정체된 기독교 문화의 윤리관 , 사회제도에 대한 그의 시각은 매우 전보적이었음에도 불 구하고, 억압적인 사회제도의 굴레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인간은 그에게 있어서 우선적으로 남성을 지칭하고 있었다. 그가 지녔던 이러한 보수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문적 성과는 매우 진보적이며, 현대적 이론을 선취한 점이 많다는 것이 눈에 띈다. 자연과학적인 그의 이론에서는 <질량불변의 원칙>, <경제 원칙>, <쾌락원리>, <현실원리> 등의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따라서 그의 글은 미학이나 문예학적 고찰에서는 혼치 않은 체계성과 일목요연함을 보여주는 장점도 있는 반면에, 인간의 복합적인 정신활동이 단순구조로 환원되어 버리는 도식성을 피할 길이 없는 약점도 드러낸다. 그러나 문헌적인 것뿐만 아니라 또한 구어적인 대화로까지 대상범위를 확대하여 문장이 아닌 담화까지도 분석대상의 단위가 되었으며, 또 재담의 생산적 측면과 더불어 그것의 소통에서 이론의 완결성을 찾음으로써 현대 언어학의 화행론과 수용이론 내지 영향이론을 선취하고 있는 면모도 보여 준다. 재담의 기법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순수 유회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설명하는 등 프라그 구조주의적 견해와 유사성을 보인다. 사회학적으로도 억압적인 성윤리에 맞서 인간 욕망의 원천을 규명하고 그것의 해방을 주장함으로써 막다른 골목에 다달은 기독교 문화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면서 현대의 사회이론에 못지 않은 문화비평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 * * 초현실주의를 비롯한 20세기 초의 전보적 문학예술 운동이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 힘입은 바가 컸던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20세기 후반부의 문학을 주도하는 문학비평 역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내지 그의 문학예술 이론과는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마르크시즘적 문학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문학사회학이 새롭게 개척한 분야에서 이제 정신분석적 문학비평이 적절한 호소력과 설득력을 얻는 것은, 사회이론과 정신분석학이라는 얼핏 대립되는 두 흐름을 능동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명제를 놓고 볼 때, 어떤 의미에서 도전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정신분석학과 문예학>에서 문학비평의 구획된 틀을 뛰어넘는 사회문화 비평이론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 현황과 한계를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 할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이와 같은 시도를 통해 문예학이라는 자칫 자족적, 폐쇄적 학문이 지닌 대화적, 소통적 측면도 활성호H l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아울러 20세기 예술의 가장 혁신적인 변화를 영화예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할 때, 문학예술 분야뿐 아니라 사회 • 문화 전반에 걸쳐서도 영화가 끼친 영향은 이제 심층적인 접근을 필요로 할 만큼 충분히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영화예술의 발전과 정신분석학의 발전은 각기 다른 길을 걸어 왔을지라도 19세기의 문화를 배경으로 하여 20세기에 발전된 문화현상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는다. 꿈과 무의식을 중심으로 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영화예술이 공유하는는 목수성울 고려해 볼 때, 영화예술의 정신분석학적 검토가 소홀히 되고 있는사실은 뜻밖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제4장에서 문학작품과 함께 영화작품의 분석이 시도되고 있는 이유를 독자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록에는 프로이트의 논문 다섯 편 (「작가와 공상」,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년시절의 한 가지 기억 』 , 「도스토예프스키와 부친살해」, 「섬뜩함」 그리고 「정신분석 작업에서 드러난 몇 가지 성격유형」)이 한글로 옮겨져 수록되어 있으며, 옮긴이의 이름은 번역문 뒤에 밝혀져 있다. 이들 논문은 이 책에서 취급된 주제들과 직 •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문학, 예술, 사회, 가족구조., 인간의 기본정서 등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독자에게 직접 전달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참고 문헌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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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스 18, 23, 59고체트 139골드만 134괴테 25, 66, 294, 310, 311, 396, 397,398구츠코 397, 398그로덱 113그로스 167그릴파르처 3.5그림 형제 399글라저 164김대중 185김영삼 185L나이트 324네스트로이 430노르다우 25놀테 78니체 11, 15, 25, 26, 43, 66, 461 490ㄷ다름슈테터 447, 448다 빈치, 레오나르도 229, 235, 287367
다 빈치, 세르 307, 317, 347, 348다 빈치, 알비에라 318, 341, 349다윈 144단테 348, 427달리 142, 258데리다 58, 59, 61, 68, 200데스테, 이자벨라 362데스데, 이폴리토 275데카르트 58, 144도스토예프스키, 안드레 376도스토예프스키, 표도르 43, 66, 204,205, 369, 382돈키호테 193되불린 66뒤가 137 174뒤르켐 64, 133드가 43드레슬러 319드만 59디오다리오 357 딜타이 23, 46, 47, 67ㄹ라이오스 36라이크 394
라이틀러 3, 298라이히 14, 71, 82, 119, 122, 123, 124라캉 14, 53-69, 200, 255란조네 314랑에-아이히바움 25랑크 31, 67, 410, 411, 459레만스 315레싱 147로렌스 66로렌처 41로마초 292로셔 314, 319로젠베르크 344로키탄스키 80로트레아몽 142로하임 102, 104름브로소 28뢰머 315루리아 72루소 25, 144루터 53리처드 3세 434-436, 447리터 143리히터 294, 315리히텐베르크 158
리히트하임 80립스 137, 146□마르첼리우스 314마르쿠제 68, 69, 75, 117, 118마르크스 68, 100, 107, 115, 116, 127,130, 132, 133마이너트 80마트 37, 40, 48-51마흐 425만 43, 66말라르메 61말리노프스키 100, 101, 102메 레주코프스키 299, 307, 332, 350,351맥베스 440-449멜치 299, 329모나 루치아 340모라비아 15, 66모롱 68뫼비우스 25무질 15, 66무터 335, 339, 341, 346무트 314, 320, 324
뮌츠 294, 315, 35.3, 357미철리히 67미켈란젤로 50, 291, 293, 295ㅂ바그너 26바르니케 80바르텔 178, 180바자리 2.88, 292, 336, 338, 352, 356358바타이유 61박태준 231반델리 292베넥스 260베로키오 298,베르그송 137, 144, 174, 1~, 100베르펠 66베른펠트 80, 81베를렌느 26베버 168베이컨 290보들레르 26, 144보르지아 294보르카 80보타치 294, 300
볼프 139부뉴엘 258부르크하르트 288브레통 142브로흐 66브뤼케 80, 81비루스 147, 170人사피르 72산더스 395, 399샤르코 27, 78, 79, 83샹폴리옹 314성 베드로 348성 안나 339-344성 요한 344성 요한(세례자) 337, 346성모 마리아 313, 317, 342-344셰익스피어 37, 39, 52, 66, 369, 382,405, 427, 434, 440, 443, 444, 446,448셸링 398, 400, 417소쉬르 56소포클레스 35, 37, 382֑
솔미 291, 295, 299, 301 -303, 330,351송하춘 212, 228, 231, 232, 491쇠나우 5, 14, 15, 30, 41-45, 53, 174,175쇼펜하우어 140, 144쉐퍼 419, 420쉴러 49, 399, 400슈니츨러 15, 66, 428슈만 25슈테켈 325슈펭글러 12슈프링어 344슐레겔 140스코나미리오 29, 298, 307, 308스트라보 314스펜서 174스포르차(일명 모로 공) 288, 290,292, 350, 362스피노자 302스피처 142ㅇ아도르노 68, 128아들러 14, 53
아리스토텔레스 16, 44, 144, 167,290아리오스토 275아카데마아 빈치아나 303, 358아테네 320아틀란티쿠스 고본 298, 315아포스타타 299아프로디테 322알렉세이 299안데르센 423야콥손 56, 170에라스무스 138에버스 411에빙 312엘리스 308엘리아스 52엥겔스 133예켈스 448엔젠 207옌치 392, 393, 401, 405, 409오 83, 86오이디푸스 35 36, 201, 400오펜바흐 401와일드 430욜레스 143
유리네츠 72융 14, 20, 31, 45-48, 53, 67, 207이글턴 34이반 대제 370이시스 320이오카스테 36이저 144, 180이청준 235-237, 241, 242, 247, 255491이태준 231 이희승 236입센 206, 452, 456ㅈ자네 79자드거 325, 327자이트리츠 292, 293, 350 작스 44, 67장 파울 49, 140, 146젤리히만 416조이스 61, 66존스 79, 82, 133졸라 26지드 66지마 15, 65, 66
지오콘도(일명 모나 리자) 29'2, 335-338, 341ㅊ최불암 155츠바이크, A 66츠바이크, s. 164, 205, 387, 389 ㅋ카디너 101카머러 414카테리나 307, 312 ,319 , 341, 347카프카 61, 66, 67칸트 54, 139, 144켈젠 93, 94코르넬리츠 339코페르니쿠스 12, 290콘스탄티노바 288, 337, 338콜 185 콜로나 295크레메리우스 67크리스 81, 85, 86클라이스트 59클링어 400키에르케고르 144
키케로 144키틀러 59ㅌ토도로프 147톨렌 59트웨인 413ㅍ파우스트 302페렌치 124, 325페루지노 200페이터 293, 337, 342페히너 28포 55, 60포크너 66폴록 75푸코 58, 68, 200퓔룁-밀러 385프라이 젠단츠 139, 140, 144, 169,170프란츠 1세 292프레스너 143프로이트, 안나 114프로이트, 지그문트 15, 17-20, 26,
29, 32, 44, 74, 81- 100, 105-115,120, 121, 12'2 , 124-127, 130, 132,133, 134, 135 , 163『강박 노이로제의 한 사례에 관한 의견』 415『괴테상 수상 연설문」 202『꿈의 해석』 26- 45 , 13.5 , 136, 142,157, 201, 207, 208, 258, 320, 490491, 494『나르시시즘 입문』 327 『다섯 살된 소년의 공포심 분석」 305『대중심리학과 자아분석 』 88-96, 99『덧없음」 201도라의 경우 135 ,207『도스토예프스키와 부친살해』201, 204, 205, 369-390, 497『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년시절의한 가지 기억』 201, 211, 229, 235,287-367, 497『무대 위에서의 정신병적 인물들』201, 204『문화와 문화에 대한 불만』 21, 89,95, 105-117, 120, 121, 492『문화적 성도덕과 현대의 신경증』 88『미켈란젤로의 모세」 201
『상자 선택의 주제』 201『섬뜩함」 201, 211, 391-430, 497 『 성이론에 대한 세 논문 』 29, 135,172, 207, 327『시와 진실」에 나오는 유년시절의한 가지 기억 201, 311『심리학 강요』 81『억압』 112, 113『 엔젠의 『그라디바』에 나타난 망상과 꿈 』 14, 201, 207-211, 491『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몰락』 88,89, 95,『유머 』 13.5 , 196, 198, 199, 494『유아의 성이론에 관하여」 320, 321『작가와 공상」 32, 44, 172, 178,201-204, 497『 재담 그리고 무의식과의 관계 』 135,138, 142, 139, 146, 148, 159, 160,163, 167, 171, 175, 177, 185, 187 ,188, 191, 193, 195, 494『정신분석 작업에서 드러난 몇 가지성격유형』 201, 200, 431-461, 497『 정신분석학 개요 』 21, 22, 89, 95,98, 114「정신분석학과 리비도 이론」 88, 89,
95, 98『 정신분석학의 여명기 』 136『 정신분석학 입문 강의 』 111, 135,187『 정신분석학 입문 강의의 속편 』 114영신분석학적 치료의 미래에 있어서의 가능성』 126『질투, 편집증, 동성애의 신경증적 메커니즘에 관하여』 328『 쾌락원리의 피안 』 120『 토템과 터부 』 88, 417, 419『환상의 미래 』 106 『히스테리 연구』 82, 312프로토게네스 292프롬 73, 74, 97-100, 105 , 119, 123프롭 147프루스트 15, 66프리스 339플리스 136플라톤 144플루타크 314, 315피르호 80피셔 Fischer, K 146피셔 Vischer, Th. 140, 144, 159피스터 344, 345
피츠커 49ㅎ하르트레벤 314하버마스 68, 69, 73, 77, 103하우프 66, 420, 422, 429하이네 148, 151, 155, 189, 398, 412하토르 320햄릿 37, 38, 179, 201, 247, 366헤겔 15, 68헤로도무스 422헤르더 46헤르츠펠트 295, 303, 338, 353, 354,357헤세 15, 66
헬름홀츠 78, 81, 373호라티우스 52호라폴로 314, 315, 316호르니 119호르크하이머 75호른 133, 134호머 427 호프만 66, 401, 405, 407, 408, 409,412호프만스탈 11홀바인 339홉스 144회리쉬 59히벨 141ㄱ
가학성 160, 361, 371, 379갈등 64, 231, 438, 441감정 소모부담 195감정장애 348강박(감) 334, 349, 350, 3-56, 360강박신경증 333, 365갖다 붙이기 276감정이입 192 개별화 과정 47, 54 개인심리학 88 1거세 18, 216, 248, 251, 32'2 , 323, 377, 407, 408 , 거세위협 322거세불안(컴플렉스) 97, 100, 241, 249, 322 , 378, 406-408, 419, 420, 425 거울단계 53 검열 28, 176, 214, 225, 226 결핍 57, 371 경제성의 기법 206, 437 경제원리 148, 166, 456, 495 경제적 관점 19, 20 경향재담 146, 159, 162, 167, 171 계몽주의 12, 64, 71계열체적 축 56
고정관념 188고착 235, 322 , 326, 333, 359, 361공격성 111, 113, 116, 125, 126, 130공격충동 21, 42, 141, 142공상 13, 14, 24, 30, 32, 44, 178, 202,257, 259, 260, 275- 2285, 308, 312,324, 334, 357, 358, 389, 405, 411,420, 421, 440,과학주의 76, 71, 78, 82, 104, 493관용 127 관찰충동 361광기 24, 266, 404, 420교육 127교환가치 65구성체 41구순기 22구조주의 13, 53, 68그림맞추기 344근친상간 18, 54, 200, 456, 457, 459금욕 295, 361금지 55, 98, 215( 금기) 261, 355, 460급소 144기대 소모경비 188기본억압 118
기 억 308, 338, 342, 351
기의 54, 56, 58-61, 495기표 54, 56, 58-61, 216, 228, 495기표연쇄 55꿈 13, 17, 22, 27, 29, 31, 33, 84, 157,175-171, 178, 235, 246, 271, 280,311, 319, 338, 342, 406, 410꿈의 작업 234꿈작업 19, 32, 40, 56, 147, 157, 202꿈재료 32L나르시시즘 252, 327, 385, 410, 411,416, 436남근 165, 495남근기 22, 97남근선망 18, 100낮의 잔재 30노동 107놀이 24, 171, 197, 202, 203, 268,276-278, 355, 358, 389, 409농담 23, 171ㄷ다성구조 242, 255다의성 30
단어재담 158단절 55대용(체)물 203, 313, 360, 361대중심리학 91대중유형학 91대화요법 83도착(적 충동) 345, 372 도착증 환자 313독수리 공상 317, 318, 320, 328, 334,338, 340, 345, 346, 354, 366돈키호테 193동성애(자) 18, 215, 229, 235, 270,271, 298, 300, 312, 313, 317, 322,325-329, 334, 349, 361, 378동일시 317, 327, 349동태복수법 446동화 47되풀이 (반복) 213, 217, 224, 233,255, 257, 259, 328, 347, 410,412-414, 417, 419, 425ㄹ러시아 형식주의 148, 170리비도 18, 19, 21, 64, 74, 90, 97, 98,
112, 159, 306, 329, 333, 361, 363,
364, 365, 437, 439, 440口마르크시즘 13마지막 쾌감 174망상 403, 411모계사회 101모성 229, 231, 232, 314, 319, 339,344, 345, 441모태 (자궁) 79, 297, 420, 422, 425무의식 12, 20, 28, 29, 34, 45, 53, 55,56, 66, 75, 87, 105, 108, 112, 120,137, 175-177, 226, 230, 236, 238,239, 255, 280, 305, 333, 344, 346,347, 362, 373 ,377, 418, 491무의식의 핵심 112무해재담 159문명 115문명화 과정 52문학심리학 5, 16문화 109, 111문화 초자아 98미적 쾌감 41ㅂ
반복강제(강박) 121, 233, 257, 414반사회성 41발현몽 23, 31, 32, 40, 66, 176, 228,235방어 19, 62, 352, 410, 412, 440백일몽 44, 45, 178, 197, 204, 200,264, 277, 279-284, 458, 459범죄심리학 461변신 47변태 326변태성욕자 323변혁 134병적학(병리기술학) 25, 62, 358, 359본능 109, 120, 121부모 콤플렉스 352 부재 249, 250, 349부친살해 99, 205, 271, 375, 376 , 382,383, 384, 445분석적 사회심리학 73분신 256, 257, 269, 410-412, 425,448분열 218, 233, 255, 263, 403, 411불감증 295비역사적 114
비판이론 68, 491, 400
비판적 사회이론 92비합리적 75비합리주의 61빈자리 144, 169, 180, 254人사랑 107 사회심리학 88사회역사적 문맥 66상부구조 86, 133 상상계 54, 59상상력 24상칭 41, 45, 344상칭계 54, 59상칭적 질서 56상칭화 23생리학 80, 86생리학적 모델 87생 물학주의 81, 102 , 100, 119-124,129섬뜩함 66, 248, 321, 391-430성격왜곡 434성욕 28, 361성적 본능 120성적 저항 297
성적충동 리비도 21, 42, 141, 142세 가지의 수모 12소망(소원 ) 27, 40, 49, 203, 204, 230,271, 278-280, 309, 345, 354, 355,414, 425, 442소망충족 44, 49, 211, 247, 255, 257,346, 354, 380, 422-424, 427소의현상 69소원공상 312, 388수동적 113수사학적 형상 56수용미학 51순진함 181, 182, 191승화 18, 110, 117, 304, 300, 352, 361,362, 364신경병자 360신경 증(노이 로제 ) 22, 35, 83, 84, 89,104, 111, 121, 100, 304, 306, 372,374 , 378 , 407, 415, 421, 434, 437신화 46실수 23, 55, 59, 296, 347, 348실제계 54실제비평 491실증과학 490
실증주의 13, 27, 49, 78, 80
심리적 경비부담(소모부담) 141,167, 168, 173, 181, 182, 188, 189,195심리적 자동주의 155, 185, 187심리적 현실 421, 426심리비평 68심리학주의 76, 93, 95, 99, 104, 106,133, 134, 493심적 장애 167심층심리학 45-48, 55, 132ㅇ아노미 64아버지 39, 97, 100, 205, 347아버지 콤플렉스 352악몽 27, 242, 263, 265알레고리 271암시 161, 436압축 23, 213, 31, 151, 156, 176, 202,224앞선 쾌감(전희) 33, 172, 174, 179,180애니미즘 416, 417, 419-421, 423,425-427양가성 15, 66, 218, 232, 233, 376,
400, 407, 490양면성 78양성 320, 324, 346, 377, 378양심 411, 440, 451, 459양적 에너지 145, 170, 174어긋나기 241어머니 235억압 23, 28, 105, 110, 112, 117, 229,235, 280, 288, 305, 327, 333, 345,348, 350, 362, 365, 377, 407, 417,419, 422, 426, 429, 439억제행위 360억제효과 언어 56, 57, 68언어분석적 메타이론 73언어유희(단어유회, 말장난) 58, 143,168, 172, 215에로스 108, 119-124역동적 19, 364역전이 17, 256영화예술 496오이디푸스 콤플렉스 18, 19, 33, 37,54, 88, 95-101, 104, 120, 352, 377,380, 383, 457-460의연 112
왜곡 23, 2,8, 136, 158, 280, 309, 333,347욕망 55, 57, 60, 213, 217, 233, 238,245, 259, 261우연 366우울증 64, 439원경험 46, 67원죄의식 241원형 46위상 모델 87, 106위장 32, 355위 트 138-141, 210유머 192-199유아기(유년기) 22, 29, 176, 100,193, 199, 304, 300, 322, 323, 341,345, 354, 355, 358, 359, 366, 410,433유아적 39, 351, 356, 421, 425, 426유혹의 프리미엄 33, 52, 172, 179,180, 28468세대(혁명) 68, 72, 74은유 56, 230, 255 은폐 235, 357, 359의사소통 44, 54의식 20, 87, 143
의존 99음담 160응축 176이기주의 44, 370이드 20, 21, 30, 50, 58, 66, 87 108,110, 113, 114, 116, 128 이상화 359이율배반 128이중 독법 230, 231, 234이중적 구조 145이차 가공 22, 23, 28, 31, 40, 43이해 23일차 과정 20, 43ㅈ자기 보존 본능(충동) 74, 107, 120,121, 130, 438자기애 168, 198, 327, 408, 410자동주의 폭로 185 자리바꿈 23, 28, 31, 61, 151, 156,176, 202, 217, 265자아 20, 30, 53, 87, 88, 97, 108, 109,128 ,372, 380, 438자아심리학 53자아이상 90
자아정체성 90자위 (수음) 150, 206, 227, 388, 389자유연상 17, 23 29, 61, 83 226잔재 46잠재몽(잠재적 꿈사고) 23, 31, 34,40, 158, 176, 228, 233, 235장치 28재구성 이론 88재담 135, 136, 146, 164, 177, 494재담이론 491, 494재담작업 147, 157, 176재연 39, 206저항 29, 40, 114, 298, 326, 333, 359,433전의식 20, 87, 181전이 20, 62, 256, 389, 410, 426정동 300, 301, 347정서적 결합 90정신분석 39, 42, 48, 60, 62, 63, 80,81, 82, 84, 88, 96, 122 , 127, 128 ,130, 131, 132, 134, 312, 324, 325,326, 342, 354, 364, 365, 378 , 492,496정신분석가 29, 127, 256, 347정신분석적 소설 363
정신분석학 420, 432정신분석학적 문예학 16정신사적 방법 23- 26, 46, 49정신적 의상 83, 84, 85, 104, 375정신착란 25, 312, 448제3자 161, 162, 173, 174, 177, 181,187제지 293, 363좌절 305,356,437,455죄의식 232, 243, 251, 2.54, 260, 268,270, 371, 376, 379, 383, 385, 451,456, 459, 460주물적 322주저 363죽음의 본능 119, 124중층결정 23, 31증상 431지배 118집단 무의식 46징후 23, 293, 360, 416, 443ㅊ차이 103첫장면 244, 258, 268, 269, 271초자아 21, 30, 52, 87, 91, 93, 97-99,
108, 114, 135, 197 , 198, 378초현실주의 496최면술 13, 83추가억압 118추리소설 230충동 26, 50, 141, 180, 303, 304, 305,333, 334, 361, 365, 372, 374, 431ㅋ쾌감(쾌락) 171, 179, 192 , 193, 199,2B4, 300, 325, 420, 432쾌감원리 18, 19, 20, 100, 120, 196,432, 495콘페렌체 피오렌티네 299, 303E타나토스 108타락 2.5타인 432타자 57, 242타협 19, 29, 231, 333탐정 60덱스트 63토텔만찬 381통사론 58
통사체적 축 56퇴행 (적 소망) 18, 19, 32, 352, 362,363투사 97, 379, 412, 416틈새 55, 217, 221ㅍ파괴 본능 370 , 371 편견 360표현가능성 202프라그 구조주의 495프랑크푸르트 학파 72-74, 492프로이트 수용 68피학증 123, 371, 379, 380ㅎ항문 사디즘기 22해방 78, 98, 127해부학 87해석 61-63, 84해석학 27, 490해체주의 14, 59핵심범주 105행위론적 문맥 88현실원리 18, 20, 44, 109, 119, 432,
495형태론적 관점 19, 20환원(주의) 51, 495환유 56, 230
흔적 222, 329, 359희극적인 것 181-192히스테리 13, 27, 79, 82-86, 374지은이 소개
허창운서울대 독문과 졸업, 독일 뮌헨 대학교 석, 박사독일 훔볼트 재단 연구교수 역임현재 서울대 독문과 교수논저 『현대 문예학의 이해』 『니벨룽겐의 노래』 의 다수민형원서울대 독문과 졸업, 동대학원 미학과 석사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 철학박사현재 덕성여대 철학과 교수논저 Kritik und Rettung des Scheins bei Th. W. Adorno자연으로서의 인간의 위기와 자연과의 화해의 모색 외 다수이유선서울대 독문과 졸업, 독일 콘스탄츠 대학 석, 박사현재 동덕여대 독문과 교수논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카프카 수용 및 비평"로베르트 발저의 문학세계" 의 다수고원서울대 독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 박사현재 —서울대E n독t w 문ick과 lun교g 수 d er Ji떠 Fassung en 논저 Robert Musils Di e Versuchung der sti lle n Veronik a 요젭 카의 육체적 표현과 그것의 심리적 의미'’ 의 다수(위 순서는 논문게재순과 동일함)프로이트의 문학예술이론
대우학술충서·공동연구1 판 1 쇄 찍음 • 1997년 2 월 20 일1 판 1 쇄 펴냄 .1997년 2 월 25 일지은이 • 허창운 민형원 이유선 고원펴낸이 • 朴孟浩/펴낸곳 • (주)민음사출판등록 1 9:沿 5. 19. 제 16-4OO 호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앉沿 강남출판문화센터 5 충대표전화 515- 200)/팩시밀리 514-3249값 21,500 원© 허 창운 민 형 원 이 유선 고원 lrlJ l. print e d in Seoul, Korea.문학이 론 KDC/701ISBN 89- 었 4-4538-7 94800 ISBN 89874- 3CXX) _2( 세트)1 대우학술총서 |
공동연구조선후기 향약연구 향촌사회사연구회한국상고사 한국상고사학회현대과학과 윤리 김용준 외 3 인대한제국기의 토지제도 김홍식 외 4 인뇌의 인공적 확장은 가능한가 박순달 외 3 인존 스듀어트 밀 연구 조순 외 10 인임진왜란과 한국문학 김태준 외 6 인서재필 이택휘 외 5 인한강유역사 최옹용 외 3 인현대지리학의 이론가들 한국지리연구회한국인의 대미인식 류영익 외 3 인이재 황윤석 최삼용 외 4 인시카고학파의 경제학 자유주의경제학연구회물리음향학 1 서상준 외 4 인막스 배버 사회학의 쟁점들 전성우 외 8 인대한제국의 토지조사 사업F뚝土;1. 건 四 구~쓰, 、.靈- ... ,.. ■._...,훈t· 'r.,-몬.'•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