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현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
임일환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교수 박정순 연세대 철학과 교수 이승환 고려대 철학과 교수 허란주 한림대 철학과 강사 허라금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 조교수 이상화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 김상봉 그리스도 신학대학 철학과 교수 이진우 계명대 철학과 교수 임홍빈 고려대 철학과 교수감성의 철학
감성의 철학
정대현 • 임일환 • 박정순 • 이승환 • 허란주허라금 • 이상화 • 김상봉 • 이전우 • 임홍빈민음사머리말
시대에 따라 철학 문제의 지평이 달리 있었다. 철학의 문제도 시대의 지적 요구에 따라 구성되기 때문일 것이다. 감성의 이성화라는 주제는 이 시대의 여러 가지 지적 요구들 중의 하나이다. 이 주제의 의미는 감성과 이성의 관계를 새롭게 보게 할 뿐 아니라 철학적 문제의 다원화와 다양화를 가져오는 데 있다. 철학의 문제를 공동체 그리고 시대에 조금 더 연결하는 관심을 표현한 다. 감성의 철학』이라는 이름의 이 책은 그러한 작은 노력의 하 나이다. 서양에서의 이성과 감성의 이분법적 사고는 칸트에게서 선명한 표현을 얻는다. 그는 감성을 여성의 몫으로 주면서 이성을 남성 의 인지적 역할로 부여하였다. 선한 의지의 실천에 있어서도 남 성과 여성은 다르다. 남성은 〈이것은 나의 다른 방향에로의 기호 에도 불구하고 보편화할 수 있는 선이다〉라는 이성적 판단에 의 하여 선의지의 실천에 도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여성은 〈이것은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아름답다〉라는 감성의 느낌에 의 하여 선의지의 행위에 들어간다고 한다. 동양은 존재론적 이분법 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과는 같은 종류의 이분법적 역할론에 도달 하였다. 가부장적 전통의 동양은 여성과 남성을 음과 양으로 나 누고, 이에 따라 그 역할도 안과 밖의 공간적 질서에 의하여 구 분하였다. 안의 일은 사적이고 밖의 일은 공적이다. 감성과 이성, 그리고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을 인간 이해의 기 본적 범주로 간주한 전통적 사고 방식은 일종의 논리 실증주의에 젖어 있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는 어떠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그 논리는 어떤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가? 그러한 논리는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특히 그러 한 논리가 관능으로서의 성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였고 그 함 축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이분법을 극복한 인간 이해는 무 엇이고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 그러한 문화에서 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책은 이러한 물음들을 추구한다.
이 책은 철학연구회가 기획하는 연구 총서의 일환으로 출판된 다. 이 책의 연구를 지원한 대우재단의 이석희 이사장님, 또 1994 년 가을에 이 논문들이 철학연구회에서 발표되었을 때 참여 한 기고자와 그 발표의 수준을 올리는 데 기여한 최순옥, 최용 철, 나성, 김혜련, 김형철, 이윤재, 조정옥, 양운덕, 김재기 논 평자들을 기억한다. 이 연구의 마당을 마련한 철학연구회의 김효 명, 박순영, 김혜숙, 김수중, 신중섭, 강영안, 김남두 상임 이사 님들 그리고 원고정리를 한 김희옥, 박지수, 서동욱 학회 간사들 의 기여가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의 이러한 모습은 민음사 김수영 선생의 세심한 편집의 결과이다. 이 책이 출판되는 과정에 참여 한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1996 년 7월 연구자를 대표하여, 정대현차례
머리말 • 5 감성의 이성화 • 정대현 9 I 이성과 감성 감정과 정서의 이해 • 임일환 21 감정의 윤리학적 사활 • 박정순 69 눈빛 • 낯빛 • 몸짓 • 이승환 125 II 여성과 남성 여성성과 남성성의 극복을 위한 소고 • 허란주 175 성 차별적 패러다임으로서의 가부장 제도 • 허라금 213 성과 권력 • 이상화 244 III 성과 문화 성과 에로스에 대한 플라톤적 고찰•김상봉 265 성, 욕망 그리고 〈실존의 미학〉 • 이진우 296 불확정 시대의 성과 현대 문화•임홍빈 329 찾아보기/내용 • 372 찾아보기/인명 • 376 지은이 소개 • 379감성의 이성화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 다. 그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경우에도, 칸트를 위시하여 많은 철 학자들은 〈남자는 이성, 여자는 감성〉이라는 유행가 가사같은 이 분법으로 규정하여 왔다. 1)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은 성욕은 본 능적이거나 동물적이고, 성적 쾌감은 생리적이거나 감각적일 뿐 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감성과 이성의 대립의 배경 적 미신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철학자들의 그러한 침묵의 오류와 잘못된 규정이 시정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성과 감성의 배타 론에 입각한 이성 우선론의 이성주의나 감성 우선론의 낭만주의 는 철학적 입장으로서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2) 그렇다1) Immanuel Kant, Lectures on Ethics, trans., Louis Infield (London, 1930) .
2) 이성주의나 낭만주의가 철학적 입장으로서 서기 어렵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들은 하나의 건전한 인식론적 입장이기도 어렵고 인식의 기능faculty으로서의 이성이나 감성에 대한 그들의 도식적 기술이 수용되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이성은 〈영혼의 눈〉이 아니고 감성은 〈직집적으로 총체적인 거울〉이 아니기 때문이다.
면 제기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중의 하나는, 〈이성과 감성 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나는 이성과 감성의 관계를 〈감성의 이성화〉의 관계에서 파악 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나는 이 글에서 두 가지 작업을 하고 자 한다. 하나는 부정적 작업이고 다론 하나는 적극적 작업이다. 칸트는 이성주의를 완성한 철학자로 알려져 왔다.그러한 과정에 서 그의 감성비하의 철학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나는 칸트의 그러한 입장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그러나 감성의 이성화는 적극적 논변을 요구한다. 감성의 내용이란 어떻 게 주어지는가 그리고 이성의 구조는 문맥성 (文脈性)으로 이루어 진다라는 주장을 동하여 하나의 논변을 구성 하고자 한다. 이성과 감성은 각기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이성은 천상의 수 정같은 원리이고 감성은 신체의 용광로같은 분출이라는 이미지로 그려져 왔었다. 칸트는 이성론에 관한 한 일인자로 간주되어 왔 다. 그는 분석 판단의 활동이나 선험적 종합 판단에 개입되는 범 주의 형식에서 이성의 근본적 기능을 보았고 질서가 주어지기 전 또는 지식의 단계에 오르기 전의 인간 경험에서 감성의 역할을 인정하였다. 나는 칸트의 전략에서 두 가지 관찰을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 칸트는 선험적 종합 판단에 범주의 형식을 개입시키고 있다. 그 러나 그에게서 범주의 형식은 무엇인가? 열두 개의 판단에서 연 역하였다는 범주는 그의 선험적 종합 판단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서는, 현대언어로 〈의미론적 규칙〉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생각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칸트의 범주론을 의부적으로 파악했을 때 다음과 갇은 비판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양의 범주를 끌어내는 데 있어서 칸트는 특칭 판단과 단칭 판단을 원초적으로 다른 것으로 간주하고 있 다. 러셀은 전자가 후자를 함축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칸트는 질의 범주에 있어서 긍정과 부정과 무한 판단의 세 종류 만을 허용함으로써 러셀의 배중율 수용의 입장을 선행하고 있다. 칸트는 관계 범주에 있어서 가언 판단의 형식으로부터 인과 개념 을 도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언 판단이 칸트가 원하는 인과적 판단의 종합적 성격을 유지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그 리고 양상 판단으로부터 가능성, 필연성 그리고 존재의 범주를 도입한다. 그러나 가능성과 필연성을 원초적으로 다른 범주로 구 성한 것도 의문이지만 양상 범주가 그가 원하는 판단의 사실적 내용을 줄 수 있는가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칸트의 범주론을 내부적으로 이해한다면 그의 범주는 그가 원하는 의미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의미 부여를 할 수 있 을 것이다. 달리 말하여, 그의 범주들은 칸트가 원하는 바를 달 성하기 위하여 의미 규칙들이 갖는 이중성을 갖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규칙은 경험적 내용을 주는 것으로 해석될 때 세계 와 범주를 연결한다는 의미에서 경험적이지만, 또한 칸트의 필연 성을 위해서는 체계 구성적이라는 의미에서 선험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칸트의 범주들은 의미 규칙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칸트가 그의 범주론에 대한 이러한 내재적 해석을 수용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는 절대적 공간의 물리적 세계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자연 과학관 그리하여 그의 철학의 언어는 합리주의에 근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대는 우리의 시대와 그만큼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의미론적 규칙이 그의 분석 판단 이의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칸트는 범주의 구성적 성격에 주목함으로써 이성의 내재 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성이 세계를 그대로 보여줄 수 있을 만큼 두명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는 이성의 내재적 성격 에 충분히 가깝게 오지 못한 것이다.
둘째, 나는 분석 판단과 종합 판단의 구분이 체계 내적 구분으 로서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체계 내적 구분은 여러 가 지 철학적 활동에 있어서 유용한 구분이다. 그러나 지식의 보편 성과 필연성을 위해서 칸트가 필요로 하는 구분은 체계 외적 구 분이었고 어떻게 그가 그러한 체계 외적 구분을 얻을 수 있었는 가는 분명하게 보여지지 않았다.3) 나는 칸트의 분석 판단과 종합 판단의 구분은 유지되기 어렵다 고 생각한다. 칸트의 구분은 그의 체계 안에서도 일관되지 않는 다. 주어와 술어의 의미의 관계에 기초한 구분은 그 한 사례일 수 있지만 일반적 기준은 되지 못한다. 칸트는 <(((A→B)&A)→ B) 〉도 분석 판단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분석 판 단이 아니라면 종합 판단일 것인가? 그렇다면 그의 구분은 〈부 정을 하면 모순에 걸리는 판단〉을 일반적 기준으로 수용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의 소위 〈선험적 종합 판단〉 또한 이 기준을 만 족하여 분석 판단으로 낙착되는 것이 아닌가? 또 하나의 논변은 칸트의 분석 판단과 종합 판단의 구분은 의3) 졸고, 「분석 판단의 필연성」, 『자아와 실존』, 최동희 외 엮음(민음사, 1987) , pp. 52-76.
미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 구분은 언어적 구분이면 서도 칸트는 이 구분이 특정한 언어에 의존하는 구분일 것을 배 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해하기 어려운 구분인 것이다. 그러한 뜻에서 이것은 의미 없는 구분으로 보인 다. 4)
칸트의 범주론과 판단론을 살펴보았다. 칸트는 희랍적 사유방 식을 그대로 이어 받아 〈남자는 이성, 여자는 감성〉의 이분법으 로 확장시킨 것이다. 〈이성은 천상적이고 감성은 지상적〉이라는 사유방식도 그러하지만 칸트의 확장도 근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칸트는 이성과 감성의 배타성을 〈분석 판단과 종합 판단의 체계 의적 구분 가능성〉에서 보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편리 하게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을 분담하고자 했을 것이다. 분석 판단과 종합 판단에 대 한 칸트의 문맥 독립적 구분은 200 여 년 후의 우리로 하여금 문맥적 구분으로 전환을 가능하게 하 였다. 우리는 어떻게 이 구분이 감성의 이성화로 인도하는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분석 판단과 종합 판단의 문맥적 구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역설적이게도, 이를 위해서 칸트 자신이 제안한 구성적 규칙의 개념5)으로부터 하나의 반례를 둘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문장 을 보자. 〈타자석의 타자가 심판으로부터 세번째의 스트라이크 판결을 받았다는 것은 그 타자가 그 순번에서 아웃이라는 것이4) 이 구분에 관한 고전적 논의는 다음이다. Quine, W. V. 0 ., "Two Dogmas of Empiricism," From a Logical Point of View (Harper, 1953) , pp. 20-46.
5) Immanuel Kant, Critique of Pure Reason, tras. N. K. Smith (New York: St Martin's Press, 1965), pp. 450-455.다.〉 이 문장은 분석 판단인가 아니면 종합 판단인가? 이 문장 은 야구의 제도를 구성하는 규칙이다. 그렇다면 야구라는 특정한 규칙으로 만들어진 제도 안에서 이 문장은 분석 판단이다. 그러 나 다른 나라의 사람들은 다른 규칙들로써 야구를 할 수 있을 것 이다.
어떤 학자는 〈금은 원자 번호 79 이다〉라는 판단을 문맥 독립적 인 체계 의적 종합 판단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판단은 〈탄소의 분자량을 12 로 세는 기준의 체계〉에서는 분석 판 단(금의 양성자 수는 79 이다)이고 그렇지 않은 체계에서는 그러 한 원자 번호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 고 그 체계는 지금 현재 다수의 과학자들에 의하여 채택되고 있 지만 필연적은 아니다.6) 임의의 판단이 분석적인가 종합적인가 는 체계 의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판단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언어적이고 언어 체계는 다원적이기 때문이다. 그리 고 언어의 의미는 진리론적으로가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6) 〈금은 노란 색깔의 금속이다〉라는 판단에 대하여 칸트는 분석적이라고 생각한 근거 (Prolegomena to Any Future Metaphysics, Preamble Section 2. b.: Prussian Academy editon, p. 267) 가 있다. 그러나 크립키는 〈노란 색깔의 금속이다〉라는 술어, 죽 그 성질은 문맥적이라는 점을 주장한 다. 참조 : Saul Kripke, Naming and Necessity (Harvard University Press, 1980) , pp. 116-125.
이성과 감성의 관계가 외적 관접을 취하는가 또는 문맥적 관점 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은 분명하다. 칸트는 〈개념이나 이성은 감성의 내용이 없이는 공허하다〉라고 말했을 때 언뜻 이 성과 감성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 러나 그의 공허함은 이성의 형식적 성격 이의의 다른 것을 지칭
하는 것 갇지 않다. 달리 말하여 칸트는 이성에 대하여 외적인 관점을 취하였다고 생각한다. 칸트의 외적 관점에서 이성은 실재 적, 천상적 질서의 성질 또는 이 성질의 구현의 능력일 것이고, 감성은 지상적 또는 감각적 질서의 능력일 것이다.
그러나 문맥적 관점에서 이성과 감정은 체계 내재적이다. 감성 이 환경에 대해 오관에 의한 감각적 관계 그리고 이에서 결과되 는 경험과 정서를 지칭한다면, 이성은 그러한 내용에 대한 경험, 파악, 이해, 설명, 해석의 기능이나 구조이다. 이성은 관심에 의 하여 구성되는 내재적 원리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감성과 이성의 기능이 특정한 체계에서 문맥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기능만이 아니라 대상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문맥적 관점에서는 감성의 상황이 이성이 상황보다 우선적이다. 사회 과학 방법론에 따라 인간 사회가 구성되는 것 이 아니라 인간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이룰 이해하고자 하는 사 회 과학이 발생하는 순서와 갇다. 진화론이라는 가설을 수용한다 면, 동물들이 먼저 있었고 그들의 생활이 형성된 다음 이성은 그 생활의 패턴에 따라 구성되어 설명의 원리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성 우선론자의 주장은 무엇이고 그 근거는 무엇인가? 이성 은 논리의 원리라는 것이고 이것은 실재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수용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이성이 감성을 지도하고 규제하는 원리로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감성 과 이성은 둘 다 같은 체계 안에서 기능하기 마련이고 감성이 이 루어내는 경험들에 대하여 이성은 설명의 봉사자가 된다. 그렇다 면 인간 경험의 문맥적 이해란 감정의 이성화 이의의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감성의 이성화에 대한 하나의 예를 들도록 하자.” 오이디푸스 는 그의 친구 크레온에게 결혼식 다음 날,
(1) 오이디푸스는 결혼 초야에 신부 조카스타와 성 관계를 즐 겼다. 와 같은 내용의 말을 하였다. 그러나 몇 년 후 오이디푸스와 그 의 백성들은, (2) 오이디푸스의 신부 조카스타 = 오이디푸스의 모친 조카스 타 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크레온은, (3) 오이디푸스는 결혼 초야에 모친 조카스타와 성 관계를 줄 겼다 는 내용의 말을 하면서 오이디푸스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오이디 푸스는, (4) 문장들 (1) 과 (2) 는 참이지만 (3) 은 아니다 라고 대답했다. 문장 (1) 은 오이디푸스의 감성적 경험을 표상한다. 모두가 여 기에 동의한다. 그러나 칸트는 (1) 은 〈이성적〉이 아니라고 하지 만 우리는 이것도 〈이성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러 한가? 양쪽의 이성의 개념이 달라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 러나 주장의 방향은 상반되는 것이다. 성적 쾌락이라는 감성의 한 경우는 이성적 분석의 한 대상이 된다. 성적 쾌락이라는 감성7) 졸고, 「성욕의 내용과 합리성」, 『한민족 철학자대회보』 (1991), pp. 313-321.
의 경우도 체계에 따라 다른 설명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내가 믿는 것을 모를 수 없다〉라는 입장으로부터 오이디푸스의 대답 (4) 를 지지할 것이다. 포도르가 지지하는 소위 〈좁은 내용론〉의 시초이다. 오이디푸스가 성 관계의 쾌락을 추구하였던 지향성의 대상은 〈나의 신부 조카스타〉라는 기술에 의하여 서술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결혼 초야에 그의 모친과 잠을 잔다는 것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에게서는 그의 모친과의 성 관계를 즐긴 심성 적 사건은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그러나 현실의 언어는 심성 내용의 경우에도 〈넓은 내용론〉에 따라 이해되고 있다. 현실의 언어는 크레온의 명제 (3) 을 지지하 는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두 눈을 뽑았을 때, 그는 (4) 의 지향력에 의존하기보다는 (3) 의 위력 앞에 굴복한 것이다. 어떠 한 감성적 경험도 언어적인 것이고 그리하여 어떠한 감성도 이성 화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8)8) 졸고, 「이성과 맞음과 반성」, 『철학연구』 (철학연구회, 1993), pp. 293 -317. 하버마스J. Habermas의 최근 방한 강연들은 〈상황적 이성 situaed reasen〉을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성은 절차적이라는 정에서 형식적이고, 감성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있지 않다는 뜻에서 충분히 문 맥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I 이성과 감성
임일환 감정과 정서의 이해 박정순 감정의 윤리학적 사활 01승환 눈빛·낯빛·몸짓―유가 전통에서 덕의 감성적 표현에 관하여감정과 정서의 이해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다양한 인간의 정서 일반이 어떤 종류의 정신 현상인 가 또 주어전 정서는 어떻게 개별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중 심으로 정서 개념 일반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이 목적 을 위해 1-2 절은 이 문제에 대한 두 가지 전통적 이론, 즉 감정 론과 인지주의 이론을 소개하고, 감정론이 왜 올바른 이론일 수 없는가를 논증한다. 3절에서는 감정론의 대안으로서 현대적 인지 주의 이론의 장단점을 고찰하고, 4절에서는 인지주의가 왜 이론 적 매력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이론일 수 없는가를 논증한다. 결 론에서는 정서에 대한 인지주의적 접근이 한 가지 철학의 오래된 문제 ‘비극의 역설’이라는 문제의 깊이와 다면성의 이해에 어떤* 필자의 요구에 따라, 이 논문에서는 강조는 < 〉로, 인용은 ‘ ’와 " ”로 구분해 사용한다―편집자 주.
시사점을 가질 수 있는가를 점검한다.
지식이 정당성이 있는 참인 믿음인 한, 인식론자는 분명 믿음 의 행위의 정당성과 그 내용의 합리성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 리고 우리는 행위로서의 믿음의 정당성의 개념 해명에 수많은 인 식론 이론들이 형성되고 파기되어 왔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 주 최근까지 적어도 나는, 이처럼 믿음이라는 정신 현상의 정당 성 혹은 합리성을 논구하는 인식론자의 입장이 상대적으로 행복 한 처지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오늘 우리가 이 심포지엄에 서 다루어야 할 다음과 같이 다양한 정신 현상들의 목록을 보라. 공포, 분노, 후회, 당황, 슬픔, 기쁨, 우울, 혐오, 시기, 질투, 연만…… 등(그리고 물론 이 목록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다). 인식 론 자체는 그리고 특히 인식적 정당성에 대한 이론은 다종 다양 하지만, 이 다양한 이론들은 적어도 단 하나의 정신 상태의 유형 즉 믿음에 핵심적인 관심이 있다. 그러나 위에 열거된 열 몇 가 지 상이한 이름들이 지칭하는 것을 ‘정서 emotion’ 라고 통칭하거나 또는 ‘감정 feeling'이라고 통칭한다고 해서, 우리가 오늘 논의해야 할 주제가 보다 간단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서 감성 의 철학에 관한 한, 감정(또는 정서)의 일반론은 극도로 다종 다 양한 개별적 정서와 감정들에 관한 각론적인 이해가 없이는 결코 완전한 이론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통상적인 현대 인식론 교과서가 이처럼 다종 다양한 인 간 경험의 방대한 영역을 다루지 않는다는 사실은 내게는 어느 정도 서글폰 일로 여겨진다. l) 흔히 인식론자들은 부당하고 불합1) 내가 아는 대표적인 예의는 C. I. Lewis 이다. 그는 미적 경험과 윤리적 정서의 문제를 동합적인 인식론적 주제로 다루고 있다. C. I. Lewis, An Analysis of Knowledge and Valuation (La Salle:Open Court., 1946) 참 조.
리한 믿음의 사례로, 특정 감정이나 특정 정서에 치우천 믿음 혹 은 그런 것에 근거한 믿음의 사례를 들곤 한다. 그러나 이런 사 는 언제 정확히 주어진 믿음이 감정이나 정서에 치우치게 되는 가? 또 감정이나 정서의 본성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들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현대의 특정 종류의 철학 조류는 존재론적인 탐구 자체를 인간의 특정 정서, 즉 불안이나 공포의 정서에 근거 지우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또한 가 장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윤리학적 이설, 즉 벤담의 공리주의 의 대는 바로 쾌와 불쾌의 감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론 이러한 가치론과 존재론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결국은 쾌의 감정 과 불안의 정서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는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글은 다양한 인간의 정서를 어떤 종류의 정 신 현상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정서의 개념 해명에 주안점을 두려고 한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이 글은 무엇보다 정서의 '본성' 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관심의 초점이 놓여 있다 고 말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 글의 주요 문제는 예컨대, 공포나 부끄러움 같은 정서가 과연 어떤 유형의 정신 현상으로 이해되어 야 하는가, 즉 그것은 일종의 감각 sensation 인가, 인식 현상인가, 아니면 일종의 특수한 감정을 의식하는 상태인가, 특정 신체적 반응이나 행태의 유형인가, 혹은 이런 다양한 현상들의 복합체인 가 하는 문제를 다룰 것이다. 간략히 표현해서, 우리는 먼저 정서는 무엇과 동일시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둘 째로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또한 주어진 정서 유형, 예컨대 두려 움의 정신 현상은 또 다른 정서 예컨대 연민의 정서와 어떻게 구 별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주어전 정서들이 각기 어떻게 개별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해명함으로써 정서와 감정에 대한 개념 해명을 시도하고자 한다.이 두 가지 문제 즉 동일시와 개별화의 문제 해명을 위해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이 진행될 것이다. 1절에서 나는 논문의 목표에 필요한 기본적인 용어들의 해명과 몇 가지 개념 구분을 제시함으 로써 우리가 해명하고자 하는 문제를 보다 명료하게 제시하려 할 것이다. 2절에서는 정서의 본성에 대한 전통적인 두 가지 이론을 간략히 소개하고 주로 이른바 정서에 대한 ‘의식적 감정 conscious feeling'이론을 분석하고 그것의 장단점을 검토해 볼 것이다. 그리 고 왜 이 유명한 전통적인 이론의 문제점들이 이른바 정서에 대 한 〈인지적 congnitive> 이론을 자연스럽게 시사하는가를 논증할 것이다. 3절에서는 오늘날 정서의 본성에 관한 주도적인 이론으 로 간주되고 있는 〈인지적〉 이론을 소개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검 토할 것이다. 4절에서는 인지적 이론이 그 철학적 유용성과 폭넓 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왜 내게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느껴지는지 를 논증하고 과연 인지적 이론의 맥락에서 이런 불만족에 대한 깨끗한 보상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검토하고자 한다. 결론적으 로 나는 정서의 본성에 관련된 아주 오래된 철학적 퍼즐을 한 가 지 소개하고, 이 퍼즐이 정서의 이해에 관련된 제반 이론들에 어 떤 철학적 함축을 갖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럼 먼저 이제까 지 별다른 구별 없이 사용해 온 ‘감성,' ‘감정,' ‘감각,' ‘정서’라는 용어의 구분으로부터 논의를 시 작해 보자.
2 논의의 범위와 한계오늘의 심포지엄의 주제인 〈감성의 철학〉에서 ‘감성'이라는 말 은, 18, 19 세기 이른바 마음의 능력faculty에 대한 철학과 심리학 에서 사용되던 용어이다. 통상 유럽 철학적인 문맥에서 ‘감성Sinnlichkeit’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감각을 매개로 하여 받 아들이는 능력"으로 사전적으로 정의된다.2) 다시 말해 감성은 〈감정의 능력 faculty of feeling〉으로서, 특정 감정 예컨대, 통증, 쾌감, 공포감 등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우리 마음의 능력을 뜻 한다. 아마도 이런 방식으로 인간의 정신 현상의 근본적인 유형 을 구분하는 철학자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칸트일 것이다. 주 지하듯 칸트는 인간의 정신 현상의 근본적 유형을 세 가지, 즉 사유 작용(또는 '현시presentation'), 감성feeling, 그리고 의지 작용 willing으로 구분한다. 3) 따라서 우리는 ‘감성'이라는 마음의 능력 은 정의상 ‘감정', 즉 의식적으로 느껴진 경험의 성질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소산이라고 간주해야 한다. 내 생각으로, 우리말에 있어서 ‘감정’이라는 말은 격심한 고통을 경험할 때 우리가 의식 할 수 있는 고통스러운 느낌, 혹은 어지러움증을 느낄 때 우리가 느끼는 어지러움과 같이 ’의식적으로 느껴진 경험의 속성 consciousfelt quality’이라는 뜻보다는 그 내포가 넓은 것으로 흔히 사 용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감정’이라는 말보다는 '느낌', 혹은 보다 일반적으로 '...한 느낌'이라는 표현을 이 글은 필요에 따라 구별 없이 사용하고자 한다.
이처럼 감성의 능력을 특정 느낌이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능 력으로 간주하는 것은 칸트 철학에 유일한 개념체계는 결코 아니 다.4) 18, 19 세기 독일의 이른바 '마음의 능력'에 관한 심리학자2) 막스 뮐러, 알로이스 할더, 『철학 소사전』, 강성위 옮김 (이문출판사, 1988) , p. 14.
3) T. Abbot ed., "On the Relation of the Faculties of Human Mind to the Moral Laws," in Kant's Critique of Practical Reason and Other Works (London:Longman, 1909) , pp. 265-269.4) 정서의 이론에 대한 역사적 문제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W. Alston 의 다음의 논문에 주로 의존하였다. P. Edwards ed., "Emoion and Feeling."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 2 (New York : Macmillan) , pp. 479-486.
들이었던 분트 W. Wundt나 티치너 E. Titchener 같은 사람들도 감성을 기본적으로 믿음이나 판단 같은 인지 능력보다는 감각에 보다 유사한 것으로 판단한다. 즉 이들에게 있어 감정들이란 단 맛, 신맛을 느끼고, 붉고 푸름을 보는 것과 같은 감각과 근본적 으로 유사한 정신 현상인데, 단지 그것이 1) 직접적으로 눈, 코, 귀와 갇은 감각 기관에 의존하지 않고 2) 따라서 그 현상이 느껴 지는 특정 영역을 신체의 특정 부위에 한정할 수 없으며, (예컨 대 단맛은 혀에서 느껴지지만 메스꺼움은 어디에서 느껴지는가?) 3) 쾌감이나 불쾌감이란 특정 속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일상적인 다 섯 감각과 구별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감 정의 대표적인 사례는 쾌감, 현기증, 메스꺼움 같은 ‘신체적 감 각'들이었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감성, ' ‘감정’과 같은 용어 자 체의 이론적 의미가,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현기증이나 쾌감 같은 명백히 감각적 현상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앞에서 열 거한 수치심이나 연민과 같은 비교적 복잡한 정서적 반응들도 또 한 근본적으로 감각과 갇은 인식론적 지위를 지닌 것으로 파악했 음을 강력히 시사한다는 점이다. 곧 살펴보겠지만, 공포, 부끄러 움과 같은 정서를 ‘공포감,' ‘수치감’과 같은 이름으로 명명되는 특정 감정을 느끼는 정신 현상과 동일시하는 것은 한 가지 정서 에 관한 중요한 전통적인 철학 이론을 이루게 된다.이제까지 우리는 ‘감정,' ‘감성,' ‘감각,' ‘정서’ 등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어들의 관계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이 글이 주요 관심을 갖는 ‘정서’라는 용어로 우리가 정확히 어떤 정신 현상을 의미하는가를 명백히 해야 한다.첫번째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연민,' ‘공포,' ‘수치'처럼 특정 정서를 지칭하는 용어들은 문맥에 따라 주관의 한시적 정신 상태를 의미할 수도 있고, 아니면 또 다른 문맥에서는 주관의 특 정 시점에서의 정신적인 상태라기보다는 주관의 성향이나 경향성 혹은 성격적 특징을 지칭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공 포' 라는 용어를 살펴보자. 우리가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뱀 에 대한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라고 말할 경우, 우리는 그 사람 이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공포감을 느끼는 정신 상태에 있었다 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의 뱀에 대한 정서적 성향이나 경향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는 마찬 가지로, 우리는 특정 사람의 특정 행위에 대해 특정 시점에 시기 심을 느낄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보다 뛰어난 자신의 형 제에 대해 평생 동안 시기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처럼 주관의 성향이나 성격을 지칭하는 그런 의미의 ‘정서’가 아니라 특정 시점의 주관의 정신 상태 즉 오늘날의 심리철학에서 ‘정신적 사건'이나 상태라고 부르는 그런 의미의 정서의 분석에 관심의 초점을 두고자 한다.
두번째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접은, 우리가 공포, 연민, 수치 등으로 나열한 극도로 다양한 정서둘이 과연 하나의 통일성을 지닌 정신 현상, 즉 ‘정서’로 간주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예 컨대 로티 A. Rorty와 갇은 철학자는 "정서들은 자연적 집합을 규 성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5) 한편 다른 철학자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정서로 간주하는 다양한 정신 현상들 간에는 하나의 정신 현상의 유형을 구성하기에 충분한 공통성이 있다고 주장한 댜 이 문제와 관련된 또다른 철학적 논란은 특정 개별적 정서5) A. Rorty ed., Explaining Emotions (Berkeley : California Univensity Press, 1980) , p. 1.
유형이 정서의 범주에 속하는가 아닌가 하는 논란이다. 예를 들 어 솔로몬 . Solomon 이 분류하는 정서의 목록에는 무관심indifference신앙, 의무, 우정 등이 포함된다. 6) 한편 길버트 라일의 목록에는 애국심, 이해심 깊음considerate, 허영심 등도 정서의 일종으로 발견된다.7) 실상 어떤 특정 정신 상태, 예컨대 ‘애국 심'이 과연 정서의 범주에 속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각 철학 자들이 개입한 이론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문제인 것처럼 여겨진다(나 자신은 라일처럼 ‘애국심'이나 허영심'을 정서로 간주할 수 있는가에 회의적이다).
내 생각으로, 특정 정신 상태가 정서의 범주에 속하는가 아닌 가하는 문제와 정서의 적절한 범주 설정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문제에 관련된 철학적 논란을 해결하는 최선의 방책은, 논쟁의 쌍방이 모두 인정하는 대표적인 정서의 사례들을 잠정적으로 ‘정서’의 자연종으로 간주하고 이 사례들을 근거로 정서의 분석을 시도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논문의 모두에서 열거한 다양한 정 서 현상들은 이런 관점에서 의식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정서의 개념 해명을 잠정적인 대표 사례에 의존하는 이 글의 방법은 물론 개별 정서들에 대한 각론이 없는 정서에 대한 일반론이라는 점에서 이 글의 중요한 한 가지 한계를 설정한다.그러면 우러가 목표로 하는 정서의 대표적인 사례는 과연 어떤 정신적 혹은 신체적 조건이나 상태들을 내포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다음과 갇은 두려움의 정서에 내포된 전형적인 요소들을 살 펴보자. 예컨대 올 여름처럼 무더운 여름날 어떤 사람이 전신주 옆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그 사람이 이6) R. Solomon, The Passions (New York : Doubledday, 1977) , pp. 280-371. 7) Gilbent Ryle, The Concept of Mind (New York : Harper & Row, 1949) , p. 85.
상한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머리위 전신주 변압기에서 파란 불꽃과 연기가 솟아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변압기와 그에 연결 된 고압선이 지금이라도 자신의 머리 위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 을 께닫고 소스라치는 공포감에 휩싸일 것이다. 이 공포의 순간, 그 사람의 신체에는 여러 가지 자연적인 신체적 변화가 일어나 서, 예컨대 그는 얼굴이 핼쑥해지고,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르 고,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는 등의 신체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이처럼 비자발적인 신체적 동요는 또한 이러한 신체적 동요에 대 한 느낌과 동반해서 일어날 것이다. 죽 그 사람은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부지불식간에?) 느끼고, 또한 입안에 침이 마 르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그는 한편 그 장소를 급히 떠 나야 한다는 욕구를 느끼고 그 장소를 벗어난다거나 오는 주위의 사람에게 알린다거나 한다는 그런 종류의 특칭적인 행태유형을 보이거나 적어도 그런 성향을 가질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하여 공포의 정서에 휩싸인 것이다.
이 사례는 우리가 전형적인 정서적 상태의 사례라고 간주하는 것이 다음과 같이 적어도 다섯 가지의 기본적인 요소를 내포하는 복합적인 상태라는 것을 보여준다.(1) 주어전 상황이 위험한 것이라는 판단이나 믿음과 같이 인 지적인 요소.{2) 우리가 흔히 ‘공포감’이라 부르는 특정 종류의 감정 혹은 느낌.(3) 안색이 변하고 침이 마르는 것 갇은 신체적 동요.(4) (3) 에 동반하는 신체적 감각, 다시 말해 안색이 붉어짐을 느끼고 머리털이 솟는 것을 느끼는 것과 갇은 ‘신체적 감 각'의 요소(5) 회피 행태와 같은 특정한 행태적 성향.물론 우리가 정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모두 이 다섯 가지의 요소를 반드시 내포하는 것은 아니다(예컨대 부끄럽다고 항상 얼굴 이 붉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요소들 전부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가 든 사례는 ‘표본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 사례에 비추어 이 논문의 기본 물음, 즉 정서의 동일 시와 개별화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주어진 주관 의 상태를 〈특정〉 정서로 만들어주는 본질적인 요소는 무엇인 가? 만일 그 답이 (2) 공포감이란 감정의 경험이라면, 이는 정 서에 대한 감정 이론을 택하는 것이다. 물론 주어전 정서를 구성 하고 결정하는 요소가 특수한 감정이나 느낌이라는 주장은 기타 다른 정서의 요소들이 주어전 정서와 전혀 무관하다는 주장은 아 니다. 예컨대 감정론자는 공포의 정서는 공포감의 느낌 혹은 감 정과 동일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주어전 정서를 구성하는 다른 요소들이 표본적인 정서의 구성 요소임을 부인할 필요는 없 다. 단지 감정이라는 요소와는 달리 기타 다론 요소들은 주어진 정서에 단지 논리적 • 개념적으로 우유적인 관계만을 맺는다고 주 장하는 것이다.한편 정서의 동일시 문제에 대한 답변은 정서가 어떻게 개별화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의 답을 결정할 것이다. 공포의 정서가 공포의 감정과 동일시되어야 한다면 공포와 다른 정서 간의 구분 은 감정이나 느낌의 질적 차이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이 글이 목표로 하고 있는 물음이 명백해진 이상 나는 다음 철 에서 이 물음에 대한 전통적인 두 가지 답변을 고려하고자 한다.3 정서의 감정 이론-그 빛과 그림자
앞에서 우리는 표본적인 정서의 사례를 통해 특정 정서는 인지 적 요소, 감정적 요소, 신체적 동요 등의 적어도 다섯 가지의 상 이한 요소를 내포하는 복합적인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 리고 우리의 문제의 핵심적인 부분은 이들 요소들 중 무엇이 과 연 주어전 정서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인가 하는 물음이었다. 이 물음에 대한 서양 철학의 한 가지 전통적인 답변은, 특정 정 서를 그 정서가 내포하는 특정 감정 또는 느낌 (죽 우리의 항목 (2) )과 동일시하는 이론이다.철학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정서의 감정 이론적 분석을 지지 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수많은 뛰어난 철학자들이 있다. 데카르트 에 따르면 정서, 또는 그가 영혼의 ‘정념 passion’ 이라고 부르는 것은, 육체에 일어나는 모종의 변화에 대한 ‘지각' 즉 의식적인 상태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정서란 감각적 지각과 마찬가지로 영혼 의부의 어떤 것으로부터 수동적인 영향을 받는 affection 인데, 단지 의식되어진 속성이 의부 대상에 귀속되는 감각의 경 우와는 달리 그것이 영혼 자체에로 귀속된다는 점에서 감각과 구 별된 정신 상태이다.8) 우리는 이미 칸트의 유명한 인식/감성/의지의 삼분법이 정서를 또한 궁극적으로 일종의 감정으로 보는 이 론을 함축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한편 흄은 “사랑과 혐오의 열8) Descartes, "The Passions of the Sou," in Philosophical Works of Descartes vol. I ed. Haldane & Ross(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31) , pp. 344-52. 한편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볼프, 바움가르텐 등에 있어 지각과 감성의 문제에 관한 논의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오병 납, 「근대 미학의 사성적 기원에 관한 논의」, 《예술과 비평》 (1986, 가 을).
정에 대한 그 어떤 정의를 내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둘은 단지 단순 인상만을 산출하기 때문이다"9) 라고 말한다. 여 기서 흄은 분명 ‘사랑,' 혐오'라는 용어를 특정 느낌이나 감정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고, 따라서 그것이 "정의될 수 없는 단순 인상”이라는 말의 뜻은 그것이 또 다른 용어를 통해 해명될 수 없는 의식의 내재적 특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흄은 자부 심이나 수치심 감은 정서도 “그것들의 존재 자체와 그 본질을 구 성하는 것은…… 그들의 감각, 혹은 그것들이 영혼에 불러일으키 는 특이한 정서둘을 통해 "10) 규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모든 철학자들의 다양한 정서에 대한 이해들을 〈감정의 이 론〉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인용들이 시사하는 다음과 같 은 아이디어일 것이다. 주어전 정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또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직접 어떻게 느껴지는가 를 이해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죽 정서는 느낌의 문제이지 인식 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이런 관접에서 볼 때, 감정론자들이 정서와 동일시하는 감정이 란 오늘날 심리철학자들이 말하는 고통의 고통스러움과 같은 ‘감 각질 qualia’ 과 같은 인식론적 지위를 지닌 정신 현상이다. 따라서 정서의 감정 이론을 다른 종류의 이론과 구별 짓는 특징은 그것 이 정서를 근본적으로 비인지적이고 비지향적 non-intentional 이며 비자발적 이고 수동적인 상태로 파악했다는 점이다. 고통의 고통 스러움은,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관한 현상이 아니고, 판 단이나 믿음과 같이 명제적 내용을 지닌 지향적 태도도 아니다 (물론 ‘고통스러움' 자체는 통상 ‘나는 고통스럽다’라는 믿음을 강요한9) D. Hume, A Treatise of Human Nature, ed. L. Selby-Bigge (Oxford : Clarendon Press, 1951 ) , p. 329.
10) 같은 책, p. 415.다. 그러나 고통감 자체는 믿음의 상태가 아니다).
한편 감정 이론이 역사적으로 뛰어난 지지자들을 갖고 있지만, 정서를 감정이나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 판단, 욕구와 같이 근본적으로 인지적인 요소(죽 우리의 항목 (1) )로 분석하려는 시 도 역시 인상적인 역사를 갖고 있다. 철학사가들은 윤리적 정서 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서 정서에 대한 〈인지주의적〉 아론의 시발점을 발견하며, 또한 정서 일반을 ‘선과 악에 대한 잘못된 판단에 근거한 과도한 충동’으로 평가 철하하는 스토아 학파의 사상도 정서에 있어서 인지적 요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시도로 이해한다. 또한 예컨대 두려움의 정서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미래나 과거의 일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초래된 불안정한 불쾌 ''11) 로 파악한 스피노자의 심리학 역시 믿음이나 욕구같이 지 향적 태도를 통해 정서를 분석하려는 인지주의적 이론의 선구로 간주된다.정서에 대한 인지주의적 이론은, 정서 일반이 정서에 내포된 상황이나 사태에 대한 믿음, 판단, 욕구와 같은 본질적으로 인지 적인 요소와 동일시되거나, 적어도 필수적 요소로 인정되어야 하 고 따라서 각기 상이한 정서는 관련된 인지적 태도 집합의 상이 성에 의해 개별화되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내 생각으로 현대의 철학자 솔로몬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인지주의의 이론적 정향이 무엇인가를 극명히 보여주는 것 같다.어떤 사람이 내게 어떤 찰못을 저질렀다거나 나쁜 일을 했다거나 하는 것을 내가 믿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화가 날 수가 없다. 나의 분노는 판단들의 복합체와 동일하다. 마찬가지로 나의 당황은 내가11) B. Spinoza, The Ethics, PartIII , ed. S. Feldman (Hackett Inc, 1982) , Explication 13.
극도로 어색한 상황에 빠져있다는 판단과 동일하다. 12)
반면 20 세기의 대표적인 감정론자인 콜링우드R. Collingwood 는 이와는 상반된 의견을 다음과 같이 표출한다.홉스는 ‘공포란 대상이 위험할 것이라는 의견과 동반되는 협오나 회피(죽 어떤 것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노력)’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 자체는 합리적이 아닌 것을 합리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어 내는 17 세기식 합리주의적 설명이다. 그것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이유에 의거해서 공포를 해명한다. 스피노자 또한 동일한 실수를 저질렀 다. 이것은 명백한 실수다. 왜냐하면 비록 공포들 중의 일부는 부 분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예컨대 독사나 내가 독사 라고 믿는 어떤 것에 대한 공포) 다른 공포들은 이런 방식으로 결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예컨대 여성들의 쥐에 대한 공포나 아이들의 어둠에 대한 공포의 경우 ‘대상이 위험할 것이라는 의견'은 없기 때문이 다). 그리고 만일 그런 의견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공포의 합 리화이지 결코 그것이 공포를 구성한다든가 그것 원인이라고 할 수 없다.13)결국 우리는 정서에 대한 이 두 가지 전통적 해석의 대립을 다 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다. 인지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예컨대 분노의 정서에 항상, 혹은 전형적으로 내포된다는 분노의 느낌이 나 분노의 감정 자체는 분노의 정서와 동일시될 수 없다. 분노 자체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떤 잘못을 했다’라는 식의 믿음이12) R. Solomon, 앞의 책 , p. 186. 강조 원문.
13) R. Collingwood, The New Leviathan (New York : Oxford, 1947) , pp. 67-68.나 욕구의 복합체이며, 분노의 감정이란 이런 믿음 • 욕구 복합체 의 인과적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특정 감정을 동 반하지 않은 정서도 개념적으로 가능하다. 반면 감정론자에 따르 면 예컨대 공포의 느낌이 없는 공포의 정서란 개념적으로 불가능 하다. 인지주의자들이 말하는 적절한 상황에 대한 믿음 • 욕구와 같은 인지적 요소란 정서의 원인이나 결과이지 결코 정서 그 자 체와는 동일시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제 우리는 이 두 가지 전통적 이론들 중 어느 것이 정서 일 반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를 제공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하 에서 나는 감정 이론의 철학적 함축과 문제접을 살펴보고 이런 문제점들이 인지주의적 이론을 강력하게 시사한다는 점을 논증하 려 한다.먼저 감정 이론의 밝은 부분에서 시작하자. 감정 이론이 매력 적일 수 있는 첫번째 이유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특정 정서의 상 태를 특정 감정이나 느낌과 동일시하려는 강력한 성향이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앞서 열거한 대표적 정서의 목록 을 기억해 보자. 공포, 수치, 당황, 시기, 질두, 연민…… 등.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다양한 정서의 이름들에 ‘감’이나 ‘심'자를 붙이면, 우리는 쉽사리 그 목록을 ‘감정’을 지칭하는 목록으로 만 들 수 있다는 점이다. 공포가 무엇인가? 공포감을 느끼는 것. 수치가 무엇인가? 수치심을 느끼는 것 등과 같이. 실상 우리는 ‘어떤 사람이 공포의 정서 상태에 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어떤 사람이 공포감을 느낀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다시 ‘그렇다면 공 포감 자체는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물론 일상적으로 이런 질 문을 하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는 물론 공포감이 발생하는 전형적 인 상황이나 그 상황에 대한 판단이나 전형적 형태 등을 언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정론에 따르면 주어진 정서를 해명하기 위해 이처럼 감정의적인 요소를 언급해야 한다는 것은 정 서의 이해에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감정 그 자체는 정의상 그 자체로서 파악되어야 하는 의식의 내재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감정이나 느낌 자체의 인식론적 특수성은 감정론자들이 정서를 감정과 동일시하는 중요한 인식론적 동기를 부여한다. 우 리는 통상 정서 현상을 신체적 생리적 변화나 특정 형태 패턴과 같이 외적인 어떤 것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주관의 사적이고 내적 인 정신 상태로 파악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정서의 상태를 다른 그 어떤 경험 의적인 요소의 매개 없이도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성향이 있다. 그러므로 정서는 그 자체는 비인지적이지 만, 그것에 대한 직접적이고 자명한 인식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그런 특별한 인식론적 지위를 지닌 상태이어야 하고 바로 그것은 느낌이나 감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더 나아가 이처럼 직접적 인식이 가능한 감정의 지위는 왜 우 리에게 정서가 수동적 현상으로 비춰지는가를 〈설명〉한다. 우리 가 ‘공포감에 휩싸이고, 불안감이 엄습한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정서 현상에 대한 주관의 수동성을 표현한다. 그런데 이런 정서 의 수동성은 감정론자에 따르면, 감정이 감각과 공유하는 인식론 적 지위에 의해 간명히 설명된다. 당신이 숙취의 고통에 시달릴 때 그 고통은 ‘고통이여 멈추어라'하는 당신 의지의 명령에 의해 중단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불안감이라는 정서의 엄습은 의지에 의해 직접 통제가 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 다.요약하면, 감정론의 이론적 매력은 감정이 갖는 특수한 인식론 적 지위에 근거한 것으로 보여진다. 다시 말해 감정은, 그 본성 을 우리가 어떻게 기술하든, 그 상태에 대한 〈직접적이고 자명하 며 오류불가능한〉 인식적 접근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감각의 의식적 상태와 유사하고, 또 그런 의 미에서 공포자체와 공포감의 느낌은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이처럼 감정이나 느낌 이 갖는 특수한 인식론적 지위로만 감정 이론을 특징지울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정서 상태를 믿음이나 판단과 동일시 하는 인지주의적 입장도 그들이 정서와 동일시하는 믿음/판단 같 은 인지적 상태가, 감정론자들이 감정에 부여하는 특수한 인식론 적 지위에서는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지 하듯 전통적인 인식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컨대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믿을 때, 그의 (발생적) 믿음의 상태 자체는 느낌이나 감정과 마찬가지로 단지 반성이나 내성에 의해 직접적으로 자명 한 인식이 가능한 상태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직 감정론이 인지 주의적 이론과 구별될 수 있는 감정론의 이론적인 특칭을 규명하 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인지주의와 구별되는 감정론의 이론적 특칭을 포착하기 위해 서, 결국 우리는 감정론자들이 정서 일반을 그것과 동일시하는 감정 또는 느낌 자체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수밖에 없 는 것이다. 나는 이제 많은 사람들이 감정이나 느낌의 〈본성〉을 해명하려는 우리의 시도가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인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감정론에 따르면 ‘당혹감,' ‘공 포감’ 등의 감정들의 본성 그 어떤 감정 외적인 요소에 의해서도 해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감정 일반에서 모든 감정 의적인 요소를 제의한 〈순수 감정적 요소〉, 느낌에서 느낌 외적 요소를 제의한 〈순수 느낌〉의 요소만을 추출해내야 하 기 때문이다.내가 아는 한 이 까다로운 문제에 접근하는 최선책은 다음의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관의 상태를 규정할있는 상태一이를 ‘F 상태'라 부르자一들 중에서 많은 상태들 은 주관 자신이 ‘F 임'을 느끼지 않고도 주관이 ‘F 상태'에 있을,수 있는 그런 상태이다. 예를 들어 ‘피곤함'의 상태를 살펴보자. 예컨대 어떤 프로 데니스 선수는 챔피언 결정전의 마지막 순간에 서 그의 심신이 분명 ‘피곤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피곤함'을 느끼 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중요한 시합의 마지막 고비에서 시합 자체에 너무 집중해 있으므로. 마찬가지로 난로 가에서 불을 쬐 다가 허벅지를 데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허벅지가 가열된 상 태와 허벅지의 뜨거움을 느끼는 상대의 차이의 중요성을 고통을 통해 배웠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관 의 ‘F 상태를 느낌'이라는 상태에서 주관이 ‘F 상태에 있음’의 상 태를 ‘마이너스'하면 우리는 느낌의 순수 느낌적 요소를 추출해낼 수 있다고. 이 감정의 순수 감정적 요소를 통해 인지주의와 감정 론은 이렇게 구별될 수 있다. 감정론자가 말하는 ‘비인지적 상태 F' 와 인지주의자가 말하는 ‘믿음의 상태 P' 와 같은 인지적 상태 는 그것에 대한 자명한 인식의 가능성을 보장한다는 점에서는 일 치하지만, 비인지적 상태가 ‘F 상태의 느낌'이 될 때는 어떤 것, 즉 순수 느낌의 요소가 원래의 상태에 부가되지만, 믿음 상 태에 대한 메타 믿음은 원래의 상태에 무엇을 더하는 것이 아니 다.
그렇다면 감정의 〈본성〉을 구성하는 순수 감정적 요소는 무엇 으로 구성된 것인가? 홍미롭게도 여러 가지 감정 이론은 이 물 음의 상이한 답변에 의해 분류된다. 이 물음에 대한 한 가지 극 단적인 답변은 흄에 의해 대변된다고 간주된다. 14) 이미 우리는14) 이는 물론 흄에 대한 동상적인 해석이다. 흄의 이론이 인지주의적으 로 해석 가능하다는 논의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D. Davidson, "Hume's Cognitive Theory of Pride," The Journal of Philosophy 73
(1976).
흄이 특정 감정들을 더 이상 정의될 수 없는 단순 인상’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따라서 흄에 따르면 모든 상이한 정서들 각각에 더 이상 분석될 수 없으면서도 서로 근본적으로 상이한 순수 감정들을 상정할 수 있다. 한편 보다 중도적인 입장은 현대 의 철학자 베드포드E. Bedford에게서 발견된다. 예컨대 그는 "정서들을 논의하기 위해 사용되는 포괄적이고도 미묘한 언어적 구 분들 각각에 상응하는 각기 상이한 감정들의 존재를 부인한다"15) 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는 19세기의 〈요소주의적 elementalistic>심리학자들처럼 다양한 감정들 자체가 쾌, 불쾌와 같은 몇 가지 순수 감정적 요소로 분석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문제 에 대한 가장 경제적인 답변은 제임스W. ames의 이론이다. 그는 우리가 다양한 정서들에 내포되는 특정 감정 예컨대 〈공포감〉과 같은 요소, 즉 우리의 항목 (2) 는, 우리가 신체적 감각의 요 소라고 불렀던 요소 예컨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낌과 같은 것들의 복합체, 즉 우리의 항목 (4) 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에게서 정서란 단순히 특정 패턴을 갖는 신체적 감각의 복 합체인 것이다.16)
나는 이 다양한 감정 이론의 변화의 뉘앙스를 추적할 생각은 없다. 내 생각으로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다양한 감정 이론의 편 차가 주어진 정서들이 각각 어떻게 구별되어야 하는가라는 정서 의 개별화의 문제에 대한 상이한 답변둘이고, 또 이제 우리는 전 통적인 감정 이론 일반이 가지는 어두운 그립자의 윤곽을 인지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는 점이다.15) E. Bedford, "Emotions," in The Philosophy of Mind, ed. V. C. Chppcll (Englewood Cliffs : Prentice-Hall, 1962) , p. 111.
16) W. James, Psychology (New York : Henry Holt, 1892) 참조.감정론 일반에 대한 반론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예컨대 화가 났을 때의 정서와 약이 올랐을 때 의 정서는, 또 선망과 시기, 수치심과 당황감은 어떻게 구별되는 가? 흄주의자들은, 화가 났을 때와 약이 올랐을 때의 차이는 그 것이 각기 다르게 느껴질 뿐이다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 는 은근히 부아가 났을 때와 은근히 약이 올랐을 때의 순수 느낌 의 요소가 진정으로 근본적으로 상이한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또 혹자는 (예컨대 제임스는) 시기와 선망의 차이는 ‘배가 아픈'것 과 갇은 신체적 감각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고 말할 수도 있 고, 또 혹자는 양자의 순수 느낌은 불쾌감에서는 일치하지만 또 다른 그 무엇의 느낌에서는 다를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사람을 극도로 시기할 때, 진정으로 우리는 위장약을 사 먹을 정도로 배가 아픈 것을 ‘느끼는' 것인가 ? 마찬 가지로, 극도의 공포감에서 식은 땀을 홀리고 창백해지는 것을 느끼는 신체적 감각은 감기에 걸려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 가?
당황감과 수차감이 순수하게 어떤 느낌의 차이를 갖는가 하는 현상학적 물음은, 다시 말해 정서의 개별화의 문제에 대한 감정 론자들의 이론적 답변의 불명료성은, 단지 순수한 느낌의 요소를 표현할 수 있는 우리의 자연 언어의 어휘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에 불과하다고 감정론자들은 답변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생각으 로, 감정론 일반이 갖는 정서의 〈현상학적 개별화〉의 문제는 보 다 깊은 곳에 있는 것 같다.예컨대 나 자신은 ‘은근히 약이 올랐을 때 '의 느낌과 ‘은근히 부아가 났을 때'의 느낌 간의 순수 느낌적 요소에 있어서의 차이를 인식할 수 없다(실상 우리는 똑같은 말 한마디가 직장 상사의 말 이라면 분노를 일으킬 수 있지만 그것이 라이벌 동료의 말이라면 단순히 약만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주어진 정서의 파악 에서 우리의 주변 상황에 대한 인지적 파악이 본질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감정론자들은 분노와 약오름의 순수 느 낌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나와 갇은 인식론자의 반론을, 단 순히 주관적인 무지의 소치로 결코 무시해 버릴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나는 화남과 약오름의 순수한 느낌의 차이를 인지할 수 없다’는 말은, 나는 적어도 이 두 경우 모두에서 질적으로 동일 한 어떤 하나의 느낌의 요소 만을 인지한다는 말이고, 감정론 자에 따르면 그것은 두 개의 상이한 H와 G에 대한 인지여야만 한다. 따라서 두 개의 상이한 정서에 내포되는 본질적인 순수 느 낌의 요소가 동일한 것으로 개별화되든 상이한 느낌둘로 개별화 되든 간에 그 느낌의 요소 자체는 결코 그것에 대해 〈직접적이고 자명하며 오류가 불가능한〉 인식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그런 요소 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두 정서에 내포된 순수 감정의 요소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논쟁의 쌍방 중 적어도 한 쪽은 그 것에 대한 인식적 접근이 잘못될 논리적 가능성이 있는 그런 상 태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감정론 일반이 갖는 모든 이 론적인 매력은 감정이 갖는 특수한 인식론적인 지위로부터 기인 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하자. 따라서 만일 약오름과 화남의 순수 느낌의 요소가 다르게 느껴질 것이라는 감정론자들의 주장이 설 혹 옳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더 나아가 감정론 일반이 이 〈현상 학적 개별화〉라는 꺼림칙한 문제를 깨끗이 해결한다고 할지라도, 감정론은 감정론이 갖는 매력의 대부분을 포기해야만 한다. 왜냐 하면 개별화 문제 자체를 감정론적으로 해결하는 행위 자체는 순 수 감정이 특수한 인식론적인 지위를 가질 수 없음을 보여주는 작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감정 이론의 어두운 그림자는 그 이론의 빛과 함께만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이라는 결
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감정론에 대한 두번째 그룹의 반론은 '규범적 평가’에 의한 반 론이라고 불린다. 이 반론의 핵심은 다양한 정서적 반응들은 규 범적 평가가 가능한 것이므로 그것은 단순한 감정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반론이다. 우리는 흔히 사소한 일에 분통을 터뜨리 는 사 람의 정서적 반응 자체가 '부당하고,' ‘부적절한 것'이라고 판단한 다. 마찬가지로 어떤 정서적 반응은 상황에 '적절 한 반면 어떤 반응은 '유치한' 것이고 또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정서는 합리성, 적절성, 적합성과 같은 〈규범적〉 속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예컨대, 피처 G. Pitcher 에 따르면, 정서 를 감정과 동일시하는 감정론은 "정서의 개념에 있어 합리성, 정 당화 가능성과 갇은 개념에 아무런 역할을 부여할 수 없다"17) 는 것이다. 따라서 규범적 속성을 가질 수 없는 감정이나 느낌은 정 서와 동일시될 수 없다는 반론이다.내 생각으로 이 규범적 평가에 의한 반론은 전통적 감정론의 중요한 또 한 가지 문제점을 제시하는 동시에, 정서의 개념에 대 한 올바론 분석이 어떤 종류의 이론이어야 하는가를 시사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규범적 속성은 믿음, 판단과 같은 인지적 요소에 핵심적인 속성이고 따라서 정서의 올바른 분석은 어떤 방식으로 든 인지적 요소를 핵심적인 것으로 보아야할 것을 시사하기 때문 이다. 다음 절에서 우리는 정서의 인지주의적 이론을 살펴보기로 한다.17) G. Pitcher, .. Emotion," Mind 74 (1965) , p. 330.
4 인지주의적 이론과 그 변주들
앞에서 나는 감정론의 근본적 문제점을 현상학적 개별화의 문 제와 규범적 평가의 문제들로 요약하고, 이 문제점들이 정서에 대한 인지주의적 이론을 강력하게 시사함을 논증하였다. 그렇다 면 정서에 대한 인지주의적 입장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내 생각 으로 주어전 정서에 관한 이론이 인지주의적인가 아닌가를 결정 하는 물음은, 믿음과 판단과 같은 인지적인 요소가 개념적으로 정서에 필수적인 요소인가 아닌가 하는 물음이라 생각된다. 이미 보았듯이 감정론은 이것을 부인하고 있으며 바로 이 접에서 비인 주의적 이론이 전형이라 생각된다. 한편 인지주의 이론 자체는 이러한 인지적 요소 자체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충분하 다는 입장을 취하면 정서와 적철한 인지적 요소를 동일시하는 〈순수〉 인지주의적 이론이고, 단지 인지적 요소가 필요 조건이긴 하지만 정서 자체는 이 필요 조건에 비인지적 요소를 부가한 어 떤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절충식 인지주 의’라고 불릴 수 있겠다. 따라서 우리는 절충식이든 순수 이론이 든 무엇이 과연 옳은가 또 각각의 빛과 그림자는 무엇인가를 고 려하기 이전에 인지주의적 이론의 최소 요건이 과연 옳은 것인가 를 살펴보아야 한다.인지주의 이론의 최소 요건은 다음과 갇은 월튼K. Walton 의 말에서 간명히 드러난다.공포의 정서가 주관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믿음에 동반되거나 그 런 믿음을 내포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만일 그에 대한 합리적인 대 안이 없는 한 결코 포기될 수 없는 상식의 원리인 것 갇다. 찰스는 그가 위험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18)
어떤 사람이 불운과 불행에 처해 있다는 믿음 없이 어떤 사람 에 연민의 정서를 느낄 수는 없다. 특정 손가락질이 그 문화권에 서 모욕을.뜻한다는 사회적 규범을 인식하지 못하면, 당신은 물 론 손가락질에 모욕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슬프게도 그러한 당신의 무지는 때로 사악한 즐거움을 자아낸다. 따라서 적철한 상황에 대한 인지적 파악은 주어진 정서의 개념인 필수 조건이 다.그러나 이처럼 정서 일반에 있어 지향적 내용을 지닌 인지적 요소의 필수성을 강조하는 인지주의의 입장은 〈기분 mood 〉의 문 제에 부딪힌다. 감정론자에 따르면 적어도 우리들 정서의 일부는 ‘무대상적 objecless’ 이고 ‘비지향적'이다. 예컨대 우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막연한 불안의 정서와 멜랑콜릭 melancholic 한 무드가 무 엇인지를 안다. 그런데 ‘막연한 불안'이나 ‘기분'이라는 개념 자체 는 그런 정서들이 어떤 특정 대상이나 상태에 관한 것일 수 없음 울 의미한다. 따라서 월튼의 논제는 거짓이라는 것이다.이런 반론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응답은 케니 A. Kenny처럼, 이른바 ‘막연한 불안'의 정서나 비지향적 기분들을 정서의 대표적 인 사례가 아니라 단지 주변적이고 부차적인 사례로 간주하는 것 이다. 19)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상태를 ‘막연한 불안'의 정서로 부르는 것은 그 상태가 전형적인 불안의 사례와 특정 유사성을 갖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런 반대 사례는 지향 적인 태도를 내포하는 전형적인 정서의 사례를 통해 이해되어야18) K. Walton, "Fearing Fictions," The Journal of Philosophy75 (1979) , pp. 6-7.
19) A. Kenny, Action, Emtion and the Will (London, 1963) , p. 61.하고, 그런 의미에서 인지주의에 대한 올바른 반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 〈무드〉의 문제를 해결하는 보다 나 은 방식은 먼저 다음의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막연한 불안이 나 비관적 기분은 때로 주관의 한시적 상태라기보다는 성향이나 경향성을 뜻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미의 '막연 한 불안'은 한시적 의미의 정서 상태를 통해 궁극적으로 분석되 어야 하므로 반론은 논점을 벗어난다. 둘째로 무드가 한시적 의 미의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기본적으로 비지 향적 상태라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으로 보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막연한 불안'의 정서가 특정 대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사 실로부터, 그것이 비지향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지 는 않는다. 우리가 '막연한 불안'이라고 부르는 상태는, 불안의 정서의 대상이 수시로 또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비지향적〉 인 것으로 느껴진다고 보는 것이 사태에 대한 보다 적철한 기술 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적절한 믿음의 요소가 없는 정서는 불가능하다〉는 월튼의 논 제와 관련된 또 다른 반론은, 정서에 내포되는 인지적 요소가 과 연 믿음의 상태인가 하는 반론이다. 예컨대, 어린 아이의 어머니 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놓고, 아이의 안전에 불안해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학교에서 집까지가 걸어서 5분 거리밖에 안 되고, 그 사이에 위험한 건널목도 없으며, 그 시간에 교동량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가정하자. 극단적으로 그 어머니 가 '내 아이는 안전하게 오고 있는가 ? '하고 스스로 자문한다면, '안전할 것'이라고 믿는 그 순간에도 불안의 정서를 느낄 수 있 .20) 물론 이런 사례들은 ‘비합리적'인 정서적 반웅의 사례들이20) 이런 종류의 반론은 매우 흔하다. F. Bergman, "Review of Solomon's The Passion," The Journal of Philosophy 75 (1978) ; C. Calhoun,
"Cognitive Emotions ? " in What is Emotions ? ed. Calhoun and R. Solomon (New York : Oxford Press, 1984) ; J. Schaffer, "An Assessment of Emotion," American Philosophical Quarterly 20 (1983) , pp. 161-173.
다. 그러나 비합리적인 정서라고 정서의 상태가 아닌 것은 물론 아니다. 따라서 어떻게 ‘아이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믿지 않는 데 불안의 정서가 가능하겠는가 하는 반론이다.
이런 반론의 핵심은 정서에 내포된 인지적 요소가 반드시 믿음 의 상태여야만 하는가 하는 반론이다. 실상 대부분의 인지주의자 둘은 정서에 필수적인 인지적 요소가 반드시 믿음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 인지적 태도들 중 믿음은 어떤 의미 에서 〈너무 강한〉 태도의 일종이다. 왜냐하면 믿음 자체는 증거 의 합리성이나 정당성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개념이기 때 문이댜 통상 우리는 증거가 아예 없거나 너무 막연하거나 불충 분할 경우 믿음(또는 믿지 않음 의 태도를 결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정서에 필수적인 인지적 요소를 믿음으로 한정하는 경우, 인지주의자는 수많은 ‘비합리적'인 정서들을 배제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지주의자들이 ‘믿음’ 대신에 흔히 사용 하는 개념은 ‘판단, ' ‘평가 evaluation/appraisal, ' ‘감지 apprehension, ' 혹은 단순히 ‘해석 construel' 등과 같은 개념들이다. 예컨대 이런 개념에 따르면 당신이 ‘X 가 안전하기보다는 불안하다’고 판단한다 고 해서 당신이 ‘X는 불안하다’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믿기에는 증거가 너무 막연하거나 불충 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접에서 아이 의 안전에 대한 어머니의 막연한 불안은 다음과 같이 인지주의적 으로 해명될 수 있다. ‘아이가 불안전할 수도 있다’는 막연하고 단순한 생각과 아이의 안전에 대한 강렬한 (또는 지나친) 욕구만 으로도 어머니는 불안해질 수 있다.따라서 나는 정서 일반에 내포되는 인지적 요소를 이렇게 넓은 의미로 해석할 때, 인지주의는 근본적으로 옳은 이론이라고 생각 한다. 죽 나는 정서 일반의 개념 분석이 설득력 있는 이론이려 면, 그것은 정서에 내포된 인지적 요소를 간과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제 인지주의의 최소 요건에 대한 반론들이 그다지 설득력이 없음을 보인 이상, 나는 왜 이 이론이 오늘날의 〈주도 〉 이론으로 등장하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 간략히 검토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인지주의 입장을 구성하는 이론적 매력 을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인지주의는 감정 이론이 갖는 〈현상학적 개별화〉의 문제 를 해결한다. 이미 보았듯이 이 문제는 약오름과 화남의 정서, 부끄러움과 당황감의 구분이 순수 감정적인 요소만으로는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었다. 그러나 정서의 분석에 인지적인 요 소가 핵심적인 것으로 용인되면 감정론의 이 문제는 간결히 해명 될 수 있다. 예컨대 자신이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어떤 일을 했 다는 판단이나 믿음은 통상 수치심의 정서를 일으킨다. 하지만 동일한 행위도 윤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단지 문화적으 로 어색한 것이었다는 자각은 당황감의 정서를 자아낸다. 마찬가 지로 당신이 어떤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약이 오를 수도 또 화가 날 수도 있는 것이다.둘째, 감정론의 문제점인 규범적 평가의 문제 자체가 인지주의 의 장점이라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실로 정서적 반응 에 대한 규범적 평가의 다양성, 죽 합리성/비합리성, 부당성/적 절함 등의 다양한 평가 방식은 정서에 내포된 인지적 요소의 다 양성을 반영한다.셋째로 정서 현상에 대해 주목해야 할 중요한 특칭 중의 하나 는 우리의 정서적 반웅의 ‘대상’이 거의 무한히 다양해 보인다는사실이다. 분노의 정서 하나만을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정부의 졸속 행정에 화를 낼 수도 있고, 돌부리에 대해 분노할 수도 있 고, 바늘의 날카로움에 화가 날 수도 있으며 , 때로 무딘 바늘에 화가 난다. 때로 산타클로스에 대해 화를 낼 수도 있고, 판쥐의 시샘에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실로 우리가 분노할 수 있는 ‘대 상'은 사물, 사태, 사실, 전설과 허구와 공상의 주인공들 등 거 의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다. 이 모든 정서적 반응의 '대상'과 우리의 정서 상태의 관계는 단순히 인과적인 것일 수 없다. 존재 하지 않는 콩쥐나 팥쥐의 시샘이 어린 아이의 분노를 일으킬 수 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정서의 대상의 다양성과 그 대상들과 정 서와의 관계의 문제는 정서의 개념에 인지적 요소를 내포함으로 써 간결히 설명될 수 있다. 인지적 요소의 본성은 지향적 관계이 고 또한 지향적 태도의 대상은 단지 실재 대상에 국한되지 않고 전설과 허구와 같이 무엇이든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 미에서 인지주의 이론은 감정론에 비해 풍부한 설명력을 갖는 이 론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제까지 우리는 인지적 요소의 필수성을 강조한다는 그런 의 미의 최소한의 인지주의 입장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런 의미의 최소한의 인지주의는 정서의 개념 해명에 관한 한 단지 반쪽짜리 이론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모든 인지주의자는 그렇다면 정서 자체는 무엇과 동일시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인지적 요소라는 필요 조건 의에 어떤 충분 조건이 부과되어야 하는가를 해명해야 만 한다. 인지적 요소는 그 자체로 필요 충분한 조건인가? 또 따라서 인지적 요소는 단순히 정서 일반의 부분이 아니라 정서 일반과 동일시될 수 있는가? 아니면 인지적 요소의 불충분성은 특히 감정론자들이 말하는 비인지적 요소 죽 감정과 결합될 경우 에만 해소될 수 있는가? 내 생각으로 현금의 인지주의 이론의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이처럼 과연 인지주의가 어떤 형태의 이론 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앞에서 〈순수한〉 형태의 인지주의라 불렀던 이론부터 출발해보자. 이미 언급했듯이 오늘날 순수한 형태의 인지주의 이 론은 솔로몬에 의해 대변된다. 그는 "정서는 나의 상황과 나 자 신 또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평가적 (혹은 규범적) 판단과 동일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21) 그의 견해는 그가 '규범적 평가’라 고 부르는 순수 인지적 요소와 정서 일반을 동일시하는 순수 이 론의 전형인 듯이 보인다.그러나 이 솔로몬의 순수 이론은 많은 철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쉽사리 논파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자 신이 매우 어색한 상황에 처해 있다’ 판단한다는 사실 그 자체는 그가 당황감의 정서 상태에 있다는 함축을 갖지 않는다. 마찬가 지로 우리는 때로 냉정한 판단의 순간에 슬픔의 정서를 느끼지 않고도, '나에게 중요한 어떤 것이 사라져 버렸다’는 판단을 내릴 수가 있다. 이런 종류의 반대 사례들은 통상적인 규범적 판단이 정서와 단순히 동일시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 로 주관의 적절한 판단과 평가는 관련된 정서적 상태를 느끼지 않고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더 나아가 그린스팬P. Greenspan 은 왜 우리가 정서 일반을 적 절한 규범적 판단과 동일시할 수 없는가를 다음과 같이 반론한 .22) 우리의 정서의 상태 자체는 상반되는 감정의 양면적인 상 태에 있으나 그에 상응하는 판단 자체는 양면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자신이 아는 사람이 복권에 당첨된 사 실에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배가 아플 수도 있다. 이 경우 선망과21) 앞의 책, p. 187. 강조 원문.
22) A. Rorty, "A Mixed Case of Feeling," 앞의 책, p. 234.시기의 상반된 정서는 공존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성적 판단은 상반된 정서의 갈등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통합할 수 있다. ‘그 사람의 행운은 어떤 점에서는 좋은 일이지만 또 어떤 점에서 는 그렇지 못하다’라고. 그러나 이처럼 이성적 판단에 의한 갈등 의 해소가 반드시 상반되는 정서적 갈등 자체를 해소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비교적 명백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설혹 ‘그의 행 운이 궁극적으로는 좋은 일이다’라고 판단할지라도, 바로 그 판 단 때문에 시기의 정서는 약화되기보다는 강화될 수도 있는 일이 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린스팬은 정서의 ‘논리’와 판단의 논리는 상이하고 따라서 양자는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적절한 규범적 판단이나 믿음의 존재가 상응하는 정서 상태의 존재를 함축하지 않는다는 반론을 순수 이론의 〈불충분성 의 문제〉라고 부르자. 그렇다면 솔로몬 류의 순수 이론의 문제는 주어전 정서와 동일시될 수 있는 특수한 종류의 인지적 요소를 찾아내야만 하는 그런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또 다른 종류 의 인지주의자는 이런 순수 이론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정서의 개 념 분석에 비인지적 요소 죽 감정을 다시 도입함으로써 순수주의 의 문제점을 회피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겠다.이런 절충주의적 입장은, 순수주의가 초래하는 〈불충분성의 문 제〉를 이제까지 평가 절하하고 비난해 왔던 정서의 감정적 요소 를 재 도입함으로써 인지주의 자체를 옹호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들에 의하면, 차가운 판단이나 믿음의 복합체가 적절한 정서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물론 그런 요소의 냉정성’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냉정한 판단에 잊혀졌던 감정이나 느낌의 요소를 다시 결합 하면 우리는 다시 정서 일반의 개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 이다. 예컨대 라이언스W.Lyons는 이러한 절충주의적 입장의 본 령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정서가 감정이 아니라는 주장 이외에 철학자들은 특히 최근에는 정서의 ‘신체적 동요 bodily motion’ 의 부분에 대하여 거의 아무런 언 급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정도 역설적이게도, 정서의 바로 이런 국면이 정서와 단순한 믿음 혹은 특정 종류의 욕구를 구별할 수 있는 측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23)
따라서 올스톤Alson 이나 라이언스같은 절충주의자들에 따르 면, 정서 자체는 "적절한 인지적 요소가 특정 감정이나 기타 요 소들을 인과적으로 초래하는 것”으로 개념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 는 것이다.그러나 내 생각으로 이러한 절충주의는 표면적으로는 감정론과 인지주의의 행복하고 이상적인 결합'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자체로 여러 가지 문제접을 일으킬 다분한 소지가 있는 이론 으로 여겨진다. 첫째, 인지주의자들이 감정론에 대한 반박으로 사용하던, 순수한 감정의 요소가 내포되지 않는 정서의 가능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예컨대 우리가 정부의 졸 속 행정에 분개할 때 통상 우리는 특정 분노의 감정이나 느낌 없 이도 분개할 수 있다. 둘째, 정서의 개념 분석에 또 다시 느낌과 감정의 요소를 도입하면, 그 느낌의 요소는 제임스가 말하는 ‘신 체적 감각'인가 아니면 흄이 말하는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순 수 느낌인가? 셋째로 일단 감정의 요소가 적절한 인지적 요소의 인과적 결과로서 또 다시 도입되어야 한다면, 결국 우리는 우리 가 앞서 표본적인 정서의 구성 요소로 간주하였던 정서의 기타 다른 구성 요소들, 즉 신체적 동요(항목 3), 신체적 감각(항목 4), 특정 행태 패턴(항목 5) 등의 요소들도 또한 인과적인 원인이나23) W. Lyons, Emotion (Cambridge : Cambridge Univeristy Press, 1980) , p. 115.
결과로 정서의 개념 분석에 내포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철충론에 따르면 정서란 결국 〈인지적 요소+순수 느낌 +신체 동요+신체적 감각+행태 패턴〉 이라는 말인가? 그렇 다면 우리는 결국 먼 길을 돌아서 우리의 문제의 출발점에서 다 시 도달한 것이 아닌가? 더구나 인지주의의 장점이라는 것이 감 정론의 문제점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음을 상기하자. 그렇다 면 감정론에 대한 인지주의의 〈반론〉은 절충식 이론에서 어떻게 해소될 수 있는 것인가?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것 갇 다. 정서의 분석에 관한 한 최소한의 인지주의가 옳아 보인다고 할지라도, 순수한 인지주의나 절충식 인지주의 양자 모두는 문제 점을 안고 있는 이론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인지주 의자에게 또 다른 대안의 가능성은 있을 수 없어 보인다는 점이 다. 나는 다음 절에서 이러한 ‘인상'이 실재적임을 논하고자 한 다. 다시 말해 최근에 제기된 여러 인지주의적 대안들을 검토함 으로써 인지주의 자체가 쉽사리 해결될 수 없는 간장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5 인지주의의 딜레마우리가 〈불충분성의 문제〉라고 불렀던 순수한 형태의 인지주의 에 대한 반론의 핵심은, 상황에 적절한 규범적 평가를 내리는 주 관이 그에 상응하는 정서 상태를 반드시 느낄 필요는 없다는 내 용의 반론이었다. 예컨대, 우리는 ‘한강 다리는 매우 위험하다’는 토목 전문가의 전단으로부터 그 전문가가 반드시 공포나 두려움 의 정서를 느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순수한 형태의 인지주의의 대변자라 할 솔로몬은 이런 반대 사례들에 직면하여, 주 어전 정서는 일상적인 규범적 판단과 동일시되어야 할 것이 아니 라 특별한 종류의 판단이나 평가와만 동일시될 수 있다고 응답한 다. 예컨대 그는 특정 정서와 동일시될 수 있는 판단은 ‘주관에 관련된 상대적으로 강렬한 판단'이며, 때로는 그것이 ‘우리 자신 에게 특별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판단’ 또는 ‘절박한' 판단이라고 주장한다.24) 결국 그는 일상적 판단이 아니라, 절박하고 강렬하 며 주관 자신에 관련된 의미 심장한 판단들만이 적절한 정서둘과 동일시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빈슨J. Rob nson 이 지적하듯, 25) 이렇게 수정된 솔 로몬의 순수주의는 여전히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정서 자체 와는 달리 판단은 강렬함의 정도 차를 허용하는 개념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확실한 판단과 불확실한 판단과 같은 판단의 확실성 이나 정당성의 정도 차이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강렬한 판단 또는 미온적 판단이란 엄밀히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더구나 "절박하고, 주관 자신에 관련된 의미 심장한 판단"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상응하는 정서의 상태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냉정한 이성적 판단의 순간에 수많은 여성들은 자신의 사랑하는 남편이 결국은 술주정뱅이고 새빨간 거짓말장이라는 사실을 깨달 을 수 있다는 것이다. 로빈슨 자신은 따라서 정서와 동일시될 수 있는 인지적 요소는, 솔로몬이 주장하듯 특수한 종류의 판단이 아니라, 적절한 판단과 지향적 욕구의 복합체인 것으로 간주되어 야 한다고 주장한다.로빈슨에 따르면, 이처럼 정서를 판단과 욕구의 복합체와 동일24) A. Rortyr, ed., "Emotions and Choice," 앞의 책, pp. 251-81.
25) J. Robinson, "Emotion, Judgement and Desire," The Journal of Philosophy80(1983), pp. 731-41.시하는 것은 솔로몬의 순수주의에 제기되었던 수많은 반론들을 일시에 해결한다. 정서적 상태의 ‘절박성'이나 ‘강렬한' 정서적 반 응이라고 표현되는 많은 정서적 태도의 특징은 실은 정서에 내포 〈욕구〉적 상태의 개념을 통해 쉽사리 해명된다. 왜냐하면, 판 단과 달리 욕구는 강렬함의 정도나 절박함의 정도 차이 를 선명히 구별할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정서에 내포된 욕 구의 개념은 그린스팬의 〈양면적 정서의 공존〉의 현상에 의거한 반론도 또한 봉쇄할 수 있다. 상기하면 그린스팬의 반론의 요지 는 판단과는 달리 양면적 정서 자체는 통합이나 종합을 거부한 채로 공존할 수 있으므로 특정 판단과 정서는 동일시될 수 없다 는 반론이었다. 물론 이 반론에 대한 로빈슨의 논접은 판단과 달 리 상반된 욕구는 공존할 수 있으며 통합을 거부항 수 있으므로 그린스팬의 반론은 봉쇄될 수 있다는 점이다.
믿음이나 판단 의에 지향적 욕구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순수 인지주의의 많은 문제점들이 적절하게 반박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은 내 생각으로 로빈슨의 중요한 공헌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판단과 욕구의 복합체와 정서가 과연 동일시될 수 있는가 에 회의적이다. 예컨대 우리는 주어전 상황에 대해 우리와 똑갇 은 판단을 내리고 동일한 정도의 강렬한 욕구를 갖고 있으면서 도, 단지 우리와는 달리 그에 상응하는 정서를 느끼지 않는 ‘완 벽하게 이성적인’ 존재를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는 우 리 인간과는 달리 강렬한 욕구가 성취되지 않았을 때 ‘좌절감’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고 ‘성취의 기쁨'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접 에서 ‘비인간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내 직관으 로는 그런 존재의 가능성이 개념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것으 로 느껴진다. 아마도 이 논점을 이해하는 보다 직관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은 사례를 검토하는 것이다.예컨대 두 사람이 산길을 걷다가 독이 잔뜩 오른 살모사를 발 견했다고 가정하자. 물론 두 사람은 모두 그 살모사가 지극히 위 험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따라서 두 사람 모두 지극히 위험한 그 장소를 빨리 벗어나야만 한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고 가정하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중에 한 사람은 강렬한 공포의 정서를 경험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동일한 판단과 동일한 욕구에도 불구 하고 공포의 정서감 없이 ‘냉정과 침착'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다. 따라서 우리는 판단과 욕구의 복합체가 여전히 주어전 적철 한 정서와 동일시될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논증의 목정상, 살모사와 부딪힌 두 사람의 불운한 산악인들 중, 공포의 정서를 느끼는 사람의 믿음과 욕구의 복합체를 ‘정서 적 판단'이라고 부르고, 공포감을 느끼지 않은 사람의 그것을 ‘비 정서적 판단'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렇다면 위의 반례가 순수 주의에 제기하는 문제는 정서적/비정서적 판단의 차이를 어떻게 순수 인지적 요소를 통해 해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내가 아는 한 이 문제에 대한 순수주의의 입장에서의 최선의 해결책은 내쉬 . Nash의 다음과 같은 제안이다.특정 평가/욕구의 복합체를 정서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에 동반되는 전형적인 생리적 변화가 아니다. 비록 그런 생리적 변화 가 모든 또는 대부분의 정서에 동반된다고 할지라도, 그보다는 정 서의 대상에 대한 특별한 종류의 집중적 관심과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주관의(정서의 대상에 대한 비정서적 평가보다) 상대적으로 과도 한 평가의 존재인 것이다.26)26) R. Nash, "Cognitive Theories of Emotion," Nous 23 ( 1989) , p. 482.
내쉬에 따르면, 정서적 판단은 정서의 대상에 대한 집중적 관 심과 상대적인 과잉 평가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비정서적 판단 일 반과 구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예에 비추어 보자면, 냉 정한 비정서적 판단에 비해 공포의 정서 를 느끼는 사람은 상대적 으로 독사의 위험성, 치명성 등을 과대 평가하거나 주어전 상황 의 다른 어떤 요소보다 살모사의 이런 측면에 사로잡혀 ' 있기 때 문에 주어진 공포의 정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와 유사한 맥락에서, 로버츠 R.Rober 는 "정서는 심각한 관심에 근 거한 해석"과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27)
27) R. Roberts, "What an Emotion is : A Sketch," Philosophical Review 97 (1988), p. 209. 그의 이론은 해석의 느낌을 강조한다는 접에서 절충론으 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정서가 느껴지는 것이라는 것 이외 에 느낌에 대한 의미 부여가 없다. 즉 그의. 이론의 모든 설명력은 지 적 요소에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순수주의적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정서적/비정서적 판단의 구분의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해 순수주의자들이 채택하고 있는 전략이다. 그들 은 문제 해결을 위해 판단/욕구의 결합체에 특정 부가적 인지적 요소, 즉 집중적 주목, 과대 평가, 심각한 관심 등의 특칭을 부 가함으로써 정서적/비정서적 판단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러 나 나는 이러한 순수주의의 문제해결의 전략이 결국은 일반적으 로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 순수 인지주의의 고민이 있다고 생각 한다. 이 논점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갇은 또 다른 전형 적인 정서의 유형을 살펴보자.
1943년에 40세 된 카알이라는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은 나치의 수 용소에 수감되어 있었고, 그는 가스실에서 그의 아내와 자식들 모 를 잃은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 그가 자신의 주어전 환경을 살펴 볼 때, 그에게 세계는 끔찍하고 지옥과 같은 곳으로 여겨진다.그는 정신적 황폐감, 끔찍함과 무력감을 느낀다. 카알은 자신의 가 족이 살아 있을 때는 수용소의 동료들과 나누어 먹던 맛 없고 보잘 것 없는 수용소의 배급을 더 이상 먹기를 거부하면서, 이제 그는 자신이 처형되기 직전의 나날들을 차가운 수용소 바닥에 누워서만 지낸다. 이제까지 그는 가족을 위해 목숨을 부지해 왔다. 그러나 이제 그는 죽기를 원한다.28)
이 끔찍한 사례에는, 수많은 부정적 정서들이 내포되어 있다. 가족을 잃은 비통함, 슬픔과 비감 등 그러나 그 모든 고통의 끝 에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 스스로 죽기를 원하는 카알의 정서는 심각한 우울의 정서 바로 그것이다.내가 이 예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카알의 우울의 정서는, 내쉬나 로버츠가 주장하듯, 집중적 주목이나 과도한 상황의 평 가, 심각한 관심 등의 요소로는 결코 해석될 수 없다는 점이다. 우울의 정서는 차라리 이런 구별적 특징과는 정반대되는 요소에 의해 규정되어야만 할 것 갇다. 가족의 몰살과 자신의 임박한 처 형이란 끔찍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카알의 그 어떤 '과도한' 평가 도 없어 보인다. 더구나 카알에게는 더 이상 세상의 어떤 것도 심지어 자신의 육신의 고통과 생명조차도 더 이상 관심이나 주목 울 끌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들이 전형적인 우울의 정서 의 구별적인 특징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포와 우울의 정서 양자 모두를 포괄하는 정서 일반에 대한 순수 인지주의적 규정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더 나아가 이런 나의 반 론은 단지 우울의 정서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희노애락' 이란 짧은 구절을 통해 우리들 정서 일반의 〈양극성〉을 표현한28) 이 사례는 다음 논문에서 발췌한 것이다. G. Graham, "Melancholic Epistemology," Synthese 82 ( 1990) , p. 404.
다. 어떤 정서 예컨대 시기, 공포, 자만심 등은 주관 자신에 대 한 집착이나 과도한 평가의 요소가 없이는 비정서적 판단과 구분 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한편 어떤 정서 즉 연민, 공감은 주 관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지 않은 이타적인 개념 없이는 비정서적 판단과 구별될 수 없는 개념인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정서적/ 비정서적 판단의 구분은 특정 정서의 구별적 특성을 부가하는 전 략을 통해서는 이 양극성의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다는 절망 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는 많은 경우 부가적 특정을 배제함 으로써만 특정 정서적 판단을 비정서적 판단과 구별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절충식 인지주의자들은 말할 것이다. 정서적/비정서적 판 단의 구분의 문제는 너무나 손쉬운 해결책이 있다. 공포감에 휩 싸인 산악인과 냉정한 산악인의 차이는 전자가 후자와는 달리 ‘공포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따라서 순수주의의 목에 가시는 본 질적으로 비인지적인 감정이나 느낌의 요소를 정서 개념에 재도 입함으로써 깨끗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절충식 이론이 과연 순수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정 서 일반에 올바른 이론일 수 있는 지를 검토하려면, 우리는 절충 론이 도입하는 감정의 요소의 정체와 그 이론적 기능이 무엇인지 롤 물어야 한다. 예컨대 그것은 극단적 감정론자들이 말하는 분 석 불가능한 고유한 느낌인가 아니면 제임스가 말하는 신체적 감 각인가? 이 물음에 대한 현대의 대부분의 절충론자들―예컨 대 올스톤, 라이언스, 셰퍼J .Schaffer ――:의 답변은 그것이 제임 스가 말하는 신체의 생리적 변화와 그에 동반하는 신체적 감각이 라는 답변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비교적 자명하다. 비록 절충론 이 순수주의 불충분성 때문에 감정이나 느낌을 재도입하지만, 절 충론을 또한 본질적으로 인지주의적 이론이다. 즉 절충론은 이론의 인지적 요소 때문에 전통적 감정론을 괴롭혔던, 각 정서의 개 별화의 문제를 해결한다. 따라서 올스톤이 말하듯이 "신체적 감 각이 어차피 정서에 동반된다고 가정할 때, 정서의 순수 '느낌'의 요소가 신체적 감각들의 복합체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라고 가 정하는 것이 구별 가능한 상이한 감정들을 위해 분석 불가능한 특수한 속성을 상정하는 것보다 명백히 경제적인 가정이다”라는 것이다.29) 한마디로 생리적 변화와 그에 대한 느낌 이의의 ‘신비 한' 감정의 요소를 절충론에 도입하는 것은 아무런 이론적 동기 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절충론의 감정적 부분은, 우리가 앞에서 조야한 형태의 감정론이라 비판했던 윌리엄 제임스의 현대적인 계승인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문제는 절충주의자들이 정서의 인지적 요 소 이의에 필수적인 요소로 도입하는 생리적 변화나 신체적인 감 각의 복합체가 과연 정서 일반의 개념 해명에 올바른 이론적 역 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절충론의 첫번째 문제접은 다음과 같은 개념적 문제이다. 순수 주의자들도 절충론자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정서에 생리적 변화 와 그에 대한 느낌이 동반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더구나 이런 생 리적 변화는 통상 적절한 믿음/욕구의 복합체에 의해 인과적으로 초래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신체적 감각과 변화는 주어전 정 서의 증상이지 우리의 정서의 개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는 접이다. 예컨대 다음의 사례를 보라.30) 어떤 사람이 오토바이 사고로 끔직한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고29) W. Alston, 앞의 논문, p. 483.
30) 이 사례는 F. Feldman 의 다음 논문에서 기인한다. "Two Questions about Pleasure," in Philosophical Analysis, ed. D. Austin (Dordrecht:Kluewer, 1988) , pp. 59-82.가정하자. 그는 사고로 목 이하의 전신이 완전히 마취되어 있고, 온 몸이 석고와 봉대로 감겨있지만 다행히도 한시적으로 그의 의 식만은 말짱하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가정상 가슴이 답답하고, 식은 땀이 흐르는 등의 생리적 변화는 일어날 수 없고, 따라서 그에게는 신체적 변화에 대한 감각도 있을 수 없다. 이런 경우 절충식 이론이 옳으면 그는 개념적으로 아무런 정서도 느낄 수 없어야만 한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직관으로는 이런 주장은 명 백히 반직관적인 것 갇다. 그는 여전히 예컨대, 자신이 살아났다 는 사실에 기쁨을 느낄 수도 있고, 사고를 내게 한 무책임한 운 전자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복수심을 느낄 수도 있고, 자신이 죽 울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공포감에 휩싸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데 이 모든 정서둘은 절충론에 따르면 불가능한 정서여야만 한다.
하지만 이런 반론에 직면하여 절충론자들은 이런 경우 생리적 변화의 느낌은 없을지라도 여전히 그 사람이 느끼는 긍정적 정서 에는 꽤감’이나 ‘만족스러운 느낌'이 또 부정적인 정서에는 ‘불쾌 감’ 같은 감정의 요소가 있을 수 있다고 답변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 이처럼 정서에 필수적인 요소로 내포된다는 감정의 요소를 쾌감/불쾌감으로 환원한다는 것은 우리의 정서 일반에 대 한 이해에 근본적인 왜곡을 초래할 수 있는 답변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자들이 정서의 개념 해명에 관심을 갖는 주된 이유는 인간 의 지향적 행위 일반, 죽 타인의 행위와 자신의 행위 자체의 이 해에 정서가 핵심적인 요소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격한 분노가 행복한 가정을, 때로는 평생의 명예와 지위마저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또한 우리는 정서적인 안정과 조화가 없는 행복한'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생각한다. 이 모든 정서와 관련된 인간 행위의 합리성/비합리성 또는 그 명암은 기본적으로인지적 요소를 통해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 인지주의 일반의 근 본 통찰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인간 자신의 이해에 핵심적인 정 서의 개념에 규범적 평가적 요소 이외에 쾌/불쾌감의 감각적 요 소를 또한 필수적인 것으로 용인하는 절충주의는 결국 인간의 지 향적 행위를 자극_반응의 모델로 이해하는 것은 아닌가? 나는 절충주의가 지향적 행위의 이해에 심각한 왜곡을 초래할 수 있는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이 논점을 이해하기 위해 불운한 산악인의 사례로 돌아가보자.
절충론에 따르면 정서적 판단을 하는 산악인과 비정서적 판단 을 하는 산악인의 구별은 양자가 모두 동일한 믿음과 욕구를 갖 고 있으면서도 단지 전자가 특정 생리적 변화를 느낀다는 점에서 구별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과연 이런 인지적/ 정서적 상태로부터 어떤 행위를 취할 것인가? 첫번째 가능성은 공포감을 느끼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과 근본적으로 같은 종 류의 행위를 하는 경우이다. 우리는 양자가 모두 주어전 상황에 대해 동일한 판단과 욕구를 갖는다고 가정하였으므로 이 경우가 훨씬 개연성이 높을 것이다. 어쨌든 양자는 모두 천구에게 상황 을 알린다던가 그 자리를 벗어난다던가 하는 동일한 종류의 행위 를 할 것이다. 물론 공포감을 느끼는 사람의 경우 절충론의 주장 하듯 그는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는 공포감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한 친구와 같은 행동을 한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절충론이 도입한 불쾌나 신체적 감각 등 은 인간의 지향적 행위의 이해에 아무런 필요도 없는 요소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양자의 동일한 종류의 행동은 가정상 동일한 믿 음과 욕구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신체적 변화나 불쾌감은, 그 산악인의 손이 떨리는가 또는 왜 목소리가 갈라져 나오는가 하는 등의 〈비자발적〉 행태를 설명할 수는 있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행위의 설명은 아니다.
한편 보다 홍미로운 가능성은 공포감을 느끼는 사람이 침착한 사람에 비해 전혀 상이한 종류의 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이다. 예 컨대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얼어 붙었다〉거나 천구를 버리고 도망친다거나 하는 특이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경우이다. 절충론에 따르면 이런 〈겁먹은〉 행동의 이해는 가정상 순수하게 감각적 요 소, 즉 불쾌를 통해 해명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절충론자들 은, 그 특이한 행위는 신체적 감각의 불쾌감을 속히 벗어나려는 행위로 설명된다거나 아니면 그 불쾌감이 그의 냉정한 판단을 흐 렸기 때문에 취해전 것이라고 설명하는 수밖에는 없다.31) 한마디 로 불쾌감이 그의 '얼을 빼놓았거나' 아니면 모든 그 사람의 특이 한 행동이 불쾌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행위로 설명될 수 있어야 만 한다. 나는 한 인류 종족을 단지 형오에 의해서도 말살시킬 수 있고, 때로 평생의 자존심과 우정을 파괴할 수도 있는 인간의 다양한 정서와 관련된 행위의 비극적인 다면성이, 예컨대 단순히 머리칼이 곤두서는 느낌이 초래하는 감각의 불쾌를 통해 해명될 수 있다는 이론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논점은 이것이다. 불운한 산악인의 얼 을 빼어 놓은 것은 자신의 내밀한 불쾌감이 아니라 독이 오른 살 모사인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의 이성과 판단은 단순히 감각적 불쾌감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워질 수 없이 강렬하고 표독한' 살 모사의 눈빛에 의해 마비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명백히 올바른 방향의 설명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나는 절충론이 도입하는 감각 이나 느낌의 요소는 지향적 행위의 설명에 전혀 불필요한 것이거 나 아니면 그의 이해에 심각한 왜곡을 초래하는 이론이라는 결론31) R. Nash, 앞의 논문 참조.
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절충론에 대한 나의 불만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일단 정서에 필수적인 요소로 믿음 이의 에 지향적 내용을 지닌 욕구를 인정하는 이상, 인간의 합리적 혹 은 비합리적 행위의 설명을 위해 〈쾌감의 연장/불쾌감의 제거〉라 는 또 다른 동기 부여를 하는 것은 불필요하거나 아니면, 행위의 목적론적 지향성을 왜곡한다.
이제 상황을 종합해 보자. 정서에 대한 순수 인지주의 이론은 전통적 감정론과 마찬가지로 왜 우리가 정서 일반을 하나의 통일 된 의식의 상태로 간주하는가를 해명하기 위한 이론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논증이 옳다면,공포와 우울 갇은 양극적 정서들의 쌍 을 통합하는 정서 일반의 개념에 대한 순수 인지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냉정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한편 이런 순수주의 의 문제를 생리적 변화나 감정같은 요소를 재도입하여 해결하려 는 절충주의적 이론 역시, 결정적인 반례를 허용하거나, 정서에 관련된 인간의 지향적 행위의 이해에 중대한 왜곡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결코 올바른 이론일 수 없다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없 다. 그런데 내가 논증했듯, 최소한의 인지주의의 입장이 근본적 으로 옳은 것이라면, 우리의 대안은 순수주의거나 절충주의밖에 는 없어 보인다. 이것이 내 생각으로 현대의 인지주의자들이 처 한 고민과 불안의 정서의 진상인 것 같다.6 에필로그__누가 안나 카레리나의 죽음을 슬퍼하랴철충주의의 타협이 옳게 느껴지지 않고 그렇다고 순수주의도 정서 개념 일반의 해명에 좌철할 수밖에 없다는 자각은, 혹자에 게는 현대의 정서에 대한 ‘주도적' 이론이라 불려지는 인지주의이론 자체의 붕괴를 암시하는 신호탄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 러나 나는 이런 전단은 성급한 것이라 생각한다. 인지주의의 딜 레마가 초래하는 ’고민'의 정서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정서의 이해에 있어 인지적 요소 이의의 제반 요소에 대한 세심 한 주의가 없이는, 개별 정서의 본성의 이해에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인 것 갇다. 더 나아가 나는 정서에 대한 인지주의적 접근이 한 가지 아주 오래된 철학 문제의 깊이와 다면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이 과도하게 길어 전 논문을 마감하고자 한다.
우리의 정서의 이해에 핵심적인 관련이 있는 아주 오래된 철학 적 난제는 흔히 ‘비극의 역설’ 이라고 불리는 문제이다. 이 문제 를 제기하는 한 가지 방식은 흄의 다음과 갇은 관찰에서 발견된 다. "실제 생활에서는 불쾌하고 불만족스러운 그런 정서는 비극 이나 서사시에서는 최상의 즐거움을 제공할 수도 있다. "32) 즉 흄 은 '‘훌륭한 비극 작품의 관람객이 그 자체로는 불만족스럽고 불 쾌한 슬픔, 공포, 불안 등의 여러 정서들로부터 얻는 설명하기 불가능한 쾌감’'33) 이란 구절을 통해, 비극 작품을 경험하는 데 필 수적으로 내포되는 그 자체로서 불쾌한 감정들이 어떻게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키고 만족감을 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 다. 한편 치좀R. Chisholm 에 따르면, ”이 수수께끼는 다음과 갇 이 제기될 수 있다. 미적 관조란 의심의 여지 없이 내재적 가치 를 지닌 것이다. 그러나 제반 예술에서 묘사된 대상들은 그 자체 로 내재적 가치를 지닌 것일 필요가 없다. 최상의 예술이 내재적 으로 악한 것들을 묘사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단지32) D. Hume, 앞의 책 , p. 63 1.
33) D. Hume, .. of Tragedy," in Essays Moral, Literary, Political (Oxford U. P, 1963) , p. 22 1.비극과 희극만을 고려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34) 치좀 역시, 예 컨대 근친 상간, 신들의 저주처럼 추하고 악한 것에 대한 묘사로 충만한 고전 비극들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정서적 반응이 어떻 게 또한 내재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하는 문 를 제기한다.
여기서 부각되는 ‘비극의 역설’의 초접은 근본적으로 가치론적 인 문제인 것 갇다. 우리는 통상 훌륭한 비극적 예술 품에 대한 경험과 감동을 감성의 교육과 개발, 더 나아가 인성의 교육 자체 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간주한다. 그런데 우리의 비극에 대한 미 적 경험 자체는 연민, 공포, 불안과 같이 내재적으로 불쾌한 감 정을 동반함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우리는 그것이 커다란 ‘만족감’ 과 감동을 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문제는 불쾌에 대한, 또는 불쾌를 필수적인 요소로 내포하는 미적 경험의 전체가 어떻게 가 치 있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 우 리는 자신이나 타인의 고통에 만족감이나 쾌감을 느끼는 행위는, 예컨대 매저키스트의 쾌감이나, 타인의 불운에 대한 놀부의 즐거 움 등은 일반적으로 부도덕하고 나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우리는 동일한 경험의 구조를 갖는 것 같은 비극의 미적 경험은 어떤 근거에서 내재적으로 가치있는 것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하 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 르시스’ 이론이 어떻게 해석되든 바로 이 역설에 대한 고전적인 이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그러나 인지주의적 정서의 이해가 근본적으로 옳은 것이라면, ‘비극의 역설’의 뿌리는 보다 깊은 곳에 놓여 있다. 인지주의에 따르면 우리가 연민의 정서를 느끼려면, 우리는 적어도 어떤 사34) R. Chisholm, Brentano and Intrinsic Value (Cambridge : Cambridge U. P, 1986) , p. 80.
람이 어처구니없는 불행의 희생자라는 믿음이나 판단이 있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연민의 대상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더라도 적어 도 연민의 대상이 존재한다고 믿어야만 연민의 정서는 개념적으 로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톨스토이 비극적 소설의 주인공 안 나 카레리나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허구라는 것을 안다. 따라서 우리는 안나 카레리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런데 우리 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에 대해 어떻게 연민의 정서가 가 능하겠느냐는 것이다. 예컨대 임일환의 여동생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따라서 믿고 있는 사람이 그 여동생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 주장을 넌센스라고 치부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믿고 또 그렇게 판단하는 안나 카레리나의 운명에 그 어떤 정서 를 갖는 것조차 개념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는 문제이다. 결국 ‘비극의 역설’의 첫번째 문제는 비국 작품에 대한 정서적 반응 자 체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래드포드 C. Radford 는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우리가 안나 카레 리나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불가해할 뿐만 아 니라 모순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35) 따라서 그에 따르면 예술 울 통한 감성 교육이란 권장되어야 할 미덕이 아니라 금지되어야 할 사회악이다. 한편 월튼은 안나 카레리나에 대한 우리의 인지 적 태도는 믿음이 아니라, ‘믿는 척 make-believe’ 이나 ‘허구적 믿 음’으로 규정되어야만, 그녀에 대한 연민의 정서를 개념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36)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안나 카레35) C. Radford, "How Can We be Moved by the Fate of Anna Karerina ? " in Proceedings of Aristotelian Society Suppl. vol. 49(1975).
36) K. Walton Mimesis as Make-Believe (Cambridge : Harvard University press, 1990) .리나가 기차에 몸을 던졌다’고 믿는 나의 믿음 자체에는 아무런 '허구’나 척'의 요소도 발견할 수 없다. 물론 '어떻게 안나 카레 리나에 대한 연민의 정서가 가능한가’ 하는, 첫번째 수수께끼에 비해, 안나 카레리나라는 `가능적 개별자poss i l a’ 라는 존재론적 해결책을 생각해 볼 수 있다.37) 그러나 나의 직관에는 이런 시도 는 용감해 보이지만 약간은 무모한 시도인 것 갇다.
한편 연민의 정서의 가능성에 관한 첫번째 문제는, 안나 카레 리나에 대한 우리의 '연민'이 과연 연민인가 하는 두번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정서의 가능성 자체에 의문을 표시하는 인지주 의자는 결국 안나 카레리나에 대한 우리의 반응 자체가 전정한 의미의 ‘연민'의 정서로 규정될 수 없다고 주장해야 한다. 예컨대 라일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소설의 독자들이나 연극 관람자들은 그들이 실제 생활에서 눈물을 홀리고 눈쌀을 찌푸리듯, 실제적으 로 가슴이 뛰고, 흥분되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들의 분노는 위장된 것이다"38) 라고 말한다. 즉 라일에 따르면, 안나 카레리나 의 운명에 홀리는 우리의 눈물은 진짜 눈물이 아니라 악어의 눈 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현상학에 따르면, 나는 안 나 카레리나의 죽음을 슬퍼하는 척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 는 물론 무대 위의 배우의 눈물이 ‘가장의’ 눈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일 연속극의 주인공의 불행에 눈물을 홀릴 때, 우리가 주인공 배우처럼 눈물을 홀리는 연기를 하는 것 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안나 카레리나에 대한 우리의 슬픔의 정서에는 ‘위장’이나 ‘가장’의 요소는 없다고 생각한다.따라서 우리가 안나 카레리나의 운명에 느끼는 연민이 ‘가장’이37) 예컨대 다음 논문을 보라. P. Van lnwagen , Creatures of Fiction , American Philosophical Quarterly 14 (1977) , pp. 299-308.
38) 앞의 논문, p. 103.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에게는 세번째 문제가 기다린다. 그것은 허구의 주인공에 대한 우리의 연민이 전정한 것이라면, 그 연민의 정서는 과연 합리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적어도 인지주의에 따르면, 주어전 정서의 ‘합리성'은 정서에 필수적으로 내포되는 믿음/판단/욕구의 합리성 혹은 비합리성의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안나 카레리나에 대한 우리의 각 인지적 요소들의 구체적 내용을 규명하지 않는 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비극의 역설’의 클라이맥스는, 연민과 공포와 같은 내재 적 불쾌를 필수적 부분으로 하는 미적 관조의 줄거움의 가치를 어떻게 해명하는가 하는 문제이다.결국, ‘비극의 역설’은 안나 카레리나에 대한 연민이 과연 가능 한가, 가능하다면, ‘연민'은 진짜 연민인가 아닌가, 더 나아가 그 것이 전정한 연민이라면 그것은 합리적인 정서인가 아닌가, 또 그것의 가치는, 있다면, 어떻게 해명될 수 있는가? 하는 적어도 네 가지의 문제를 내포한 문제이고, 이미 언급했듯 이 문제의 해 결의 열쇠는 정서 개념의 인지적 분석의 가능성 여부였다. 그리 고 이런 의미에서 이 문제는 우리가 아주 간략히 언급한 인식론 적, 존재론적, 윤리적, 미학적 문제에 중대한 함축을 가질 수 있 는 문제였다.결론적으로 나는 적어도 인지주의적 정서의 이해는, 일찍이 풀 라톤이 서사시와 조형 예술에 대해 가졌던 우려로부터 출발하는 ‘비극의 역설’의 문제의 깊이와 다면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최소한의 이론틀이라는 이론적 덕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리고 나는 이것이 인지주의의 딜레마로부터 우리가 느낄 수 있었 던, 좌철과 불안의 정서에 대한 한 가지 위안이 될 수 있기를 간 절히 바란다.감정의 윤리학적 사활
1 서양 윤리학사 편취이성과 감성의 싸움은 인간의 정신 내면 또는 정신과 육체 사 이의 싸움으로서 신화적 인류사로 볼 때 다섯번째로 등장하는 큰 싸움이다. 다섯 번의 큰 싸움은 신들의 전쟁과 그 황혼, 신들과 타이탄들의 싸움, 신들과 타이탄들에 대한 영웅적 인간들의 싸 움, 인간들끼리의 처절한 싸움, 그리고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인간 내면의 싸움1)이다. 다섯번째의 그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 글의 목적은 그 싸움을 서양 윤리학의 관접에서 관전 해 보고, 어느 편을 들 것인가를, 아니면 그 싸움을 이제는 종결 ―종결이 아니라면 최소한 휴전이라도-시킬 수 있는가를 심각하게 고려해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비트겐슈타인1) J. E. Tiles, "The Combat of Passion and Reason," Philosophy, vol. 52 (1977) , pp. 312-330.
Wittgenstein 식으로 문제 자체를 해소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도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한 목적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감성에 대한 인식론적 윤리학적 이해가 우 리의 보다 가치 있고 참된 삶에 공헌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가진) 능력은 통상 이분법적으로는 이성 과 감성, 삼분법적으로는 지정의 (知情意)로 나누어진다. 2) 그러나 이러한 이원론과 다원론은 당연히 이원적 다원적 구성 요소 혹은 측면들의 관계 방식에 관한 미묘한 철학적 문제를 야기시킨다.3) 그러한 문제의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마치 정치적 혼란을 해결 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독재자를 옹립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속 견처럼, 지배적 요소를 확정하는 것이다. 윤리학을 포함한 서양 철학사에서 당연히 그러한 지배적인 요소는 인류를 지칭하는 현 명하고도 이성적인 인간 Homo Sapiens의 개념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4) 이성과 감정에 관한 가장 고전적이고도2) 언제 이러한 삼분법 (intellect, passion, conation ; cognition, emotion, volition)이 정식화되었는지는 역사적으로 분명치 않으나 플라톤으로부 터 프로이트까지 걸쳐 있으므로), 현재 쓰이고 있는 의미는 17세기의 철학적 심리학의 산물이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도덕 철학의 관점에서 삼분법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Ilman Ditman, "Reason, Passion and the Will," Philosophy, vol. 59(1984), pp. 185-263 참조.
3) Jon Elster. ed., "Introduction," The Multiple Self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 pp. 1-34.4) 견유학파 the Cynics 철학자인 디오게네스 Diogenes도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이성 중심주의의 전통에 소속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성적 지식이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고 본 점과, 개같은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인간과 동물의 구 분을 무화시킨 점에서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반동의 한 전형으로 볼 수 있다. 그는 공공적 장소에서 자위 행위를 행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우 리가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지만 욕망의 자급 자족을 통해 서 적어도 욕망의 충족을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철학자의 〈자기충족성 self suffiency〉을 지향하는 것이다. 흔히 직립 인간 Homo Erectus이 이성적 인간 Homo Sapiens이 나 공작적 인간 Homo Faber의 선구가 된다고 생각되고 있으나, 디오게네스는 인간이 직립하게 됨으로 써 양손이 정확히 성기 부위와 일치하게 되어 언제나 성적 감정을 촉발 할 수 있는 상태로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최초로 깨달은 사람이다. 그 러나 직립 인간은 이성적 인간의 모습으로서 직립 이전의 상태로 돌아 는 자세, 즉 네 발로 기는 남성 위에 여성이 타고 있는 모습은 감정 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비웃는 도덕적 또는 성적 냉소주의 moral or sexual cynicism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리스토 텔레스가 말이 되어 고급 창부 Phyllis 를 태우고 있는 그림 - Hans Baldung Grien 의 목판화,
지속적인 비유는 주인과 노예의 메타포였다는 것이 그 사실을 웅 변적으로 입증해 준다.5) 이성이 플라톤적 흑백 쌍두마차의 마부
5) Robert C. Solomon, "The Philosophy of Emotions," Michael Lewis and Handbook of Emotions, ed., Jeannette M. Haviland (New York : The Guilford Press, 1993), pp. 3-15. 주인과 노예의 메타포는 어거스틴이 스 토아 학파 철학자들(에픽데토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해서 다 음과 같이 말한 구절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St. Augustine, City of God, trans. D. S. Wiesen (London ; Heinemann, 1968) , IX, 4 :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정념의 노예가 되는 것 enslavement을 거부하고 현명 한 인간의 지성과 합리성을 옹호한다. …… 그러한 현인들의 마음은 아 무런 동요 perturbation도 허용하지 않는다. 아니 그 반대로서, 마음 자 체가 정념의 주인이며, 마음은 정념들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들에 확고 부동하게 대응함으로써 미덕의 완전한 지배를 유지한 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유명한 테제인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생사를 건 상호 인정 무쟁에서 그 단초가 시작되는데, 주인과 노예의 갈립길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느냐의 여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헤 겔의 『정신현상학』은 이성의 정신 현상학만이 아니라 감정의 정신현상 학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죽음의 공포는 사 람들로 하여금 〈만인의 대한 만인의 두쟁 상태〉인 〈자연 상태〉를 탈피 하고, 절대 군주를 옹립하여 그 신민이 되는 사회 계약운 맺게 하는 결
정적 동기이다. 홉스에게서 윤리학은 〈인간 정념의 귀결〉을 담구하는 학문이다.
로, 데카르트적 선장으로 비유되었을 때도, 주인과 노예의 메타 포는 언제나 그 배경에 있었다. 따라서 감정의 애로(區路)는 충 분히 예상할 수 있으며, 그 애로를 감정적으로 느껴보기 위해 우 리는 베르디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Chorus of the Hebrew Slaves: Nabucco, Act III >이라도 들어야 할 것 같다. 주인과 노예의 메타포가 절정에 다다른 것은 스토아 학파의 무감동 apatheia스토아 학파 철학자들도 요절복통은 얀 되겠지만 여전히 농담을 즐겼다고 한다6)- 과 에피쿠로스 학파의 평정심 ataraxia —一-비 록 쾌락에서 출발하기는 했지만 〈쾌락의 역설〉에 대한 이성적 이 해를 통해서 갖는 마음의 평화이므로—이다.7)
6) John Morreall, .. Humor and Emotion," American Philosophical Quarterly, vol: 20 (1983) , pp. 297-304.
7) 스토아 학파의 apatheia 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감정 emotion 의 전 면적 말살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상존해 있다. 기본적 개 념인 pathe는 우리가 흔히 의미하는 감정의 어떤 측면이나 감정들 중 일부의 감정만을 의미한다고 샤퍼는 주장한다. Jerome Shaffer, "An Assessment Emotion," American Philosophical Quarterly, vol. 20 (1983) , pp. 161-173. 쾌락의 역설은 현대 경재학적 용어로 해석하면 〈쾌락의 한 계효용 체감의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쾌락을 의식적으로 무제 약적으로 추구하면 오히려 불쾌를 경험할 뿐이라는 것이다. 쾌락에 대 한 급격한 한계효용의 하락을 방지하는 것은 어느 정도 금욕주의적 요 소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 두 책 참조. Brad Inwood, Ethics and Human Action in Early Stoicism (Oxford : Clarendon Press, 1985) ; J. M. List, Epicurus: An Introducti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2).감정은 고전적으로 마음에 닥쳐오는 강렬한 느낌 feeling으로 육 체적 생리적 반응을 수반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8) 또한 정
8) 감각에 대해서 마음이 받아 들이는 느낌이나 기분feeling과 감정 사이
의 관계는 느낌이 감정의 필수적인 측면인가에 대한 문제가 그 기본을 이루고 있다. 자세한 논의는 Stephen R. Leighton, "Feelings and Emotion,"Review of Metaphysics, vol. 38 ( 1984) , pp. 303-320 참조.
념 passion 이라는 말도 쓰여 왔는데, 정념은 그 수동성과 비자발 성이 특징으로 이성을 잃은 강렬한 감정, 즉 격노와 성적 충동 등을 지칭한다. 정념이라는 말 자체에 〈노예가 된다〉 또는 〈지배 를 당한다〉는 주인과 노예의 구조가 담겨져 있다.9) 따라서 감정 과 정념은 미천한 것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내부의 적 혹 은 내부의 괴물 inside dragon로서 내적 동요와 영혼의 혼란을 야 기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것들은 영혼이 통제하고 정화해야 할 〈동물적 정기〉 혹은 닦아내어야 할 〈마음의 땀〉, 그리고 종국 에는 철학에 의해서 치유되어야 할 병리적 현상에 불과했던 것이 다.10) 정념론pathologia은 바로 병리학이며, 이것이 바로 파토스 pathos에 대한 에토스 ethos 의 우위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서양 윤 리학에서 정념론은 전단술이고, 윤리학은 치유술이다.
9) R. Lawrie, "Passions," Philosophy & Phenomenological Research, vol. 41 (1980), pp. 106-126. 정념 passion 의 라틴어 어원인 patior는 노예가 된 다, 지배를 당한다 (being acted upon, being subject to something, being mastered or overpowered) 는 뜻을 가지고 있다.
10) 합리주의자 철학자 데카르트가 정념을 동물적 정기와 마음의 활동이 내는 땀으로 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정념과 그것들 사이의 구 체적 관계는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Descartes, "The Passions of the Soul," The Philosophical Writings of Descartes 2 vols. trans. John Cottingham et al.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 vol. 1. p. 330. 데카르트의 〈정념론〉에 대한 논의는 김상환, "데카르트의 『정념 론』과 철학적 이성의 한계, ” 『과학과 형이상학』 오영환 의 (서운: 자유 사상사, 1993) , pp. 97-122 참조.주인과 노예의 메타포가 주는 의미는 이성의 통제 아래 우리는 감정의 위험한 충동을 안전하게 억제하거나 또는 일정한 방향으
로 이끌거나, (이상적으로) 이성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우 리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메타포를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성 중시의 경향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이지, 감정을 중시한 철학자들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 니다. 또한 이성을 중시한 철학자들도 감정을 전면적으로 배격한 것이 아니라, 통제해야 할 감정과 육성해야 할 감정을 구분하고 ―전자가 적절히 통제되고 후자도 과도하지 않는다는 조전 아 래 - 양자를 모두 도덕 철학에서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점은 감정을 윤리학의 기초로 삼으려는 철학자 들에게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서양 윤리학사를 전체적으 로 볼 때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감정은-상반되는 감정이 교차될 수 있는 것 ambivalence 이 감정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이듯 이 —一고정되지 않은 양면적인 역할을 해왔다.11) 감정은 서양 윤리학사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또 는 울면서 웃어야 할 위치에 있다. 즉 감정은 도덕의 적으로도, 도덕의 기초로도, 혹은 그 양자의 결합으로도, 또는 도덕과 무관 한 것으로도 간주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감정에 관 한 언어가 미덕과 악덕에 관한 언어와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것을 반영한다. 시기심 • 적의 • 원한 • 질투심 • 자만 • 탐욕 • 관능적 욕 구 • 격노 등의 감정은 동시에 악덕도 지칭하고, 사랑 • 공감 • 감 사 • 동정심 • 자비 • 자선 등의 미덕은 동시에 감정도 지칭한다. 그러나 어떤 미덕들―사원덕 중 정의를 제의한 나머지인 사 려, 기개, 절제 ―은 어떤 특정한 행위의 수행을 대상으로 한 다기보다는 대체로 감정의 동기적 힘을 억제하는 능력으로 간주 되어 왔다. 12) 그러나 본질적이고 고정된 의미에서 도덕적 감정과
11) Ronald de Sousa, "Emotion," Encyclopedia of Ethics, ed. Lawrence C. Becker(New York : Garland Publishing, Inc., 1992) , pp. 302-304.
부도덕한 감정, 그리고 미덕과 악덕의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용설을 통해서 갈파했듯이 그러한 구분들은 정도의 문제임과 아울러 구체적인 배경 상황에도 달려 있다.13) 격노의 감정도 도덕적 분노가 되면 사회적 개선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반면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지적하듯이 자선이라는 감 정적 덕목도 혁명의 열기를 식힘으로써 분배적으로 부정의한 사 를 영속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12) James Wallace, Virtues and Vices (Ithaca : Cornell Uni versity Press, 1978).
13) Aristotle, The Nichomaclzean Ethics, Book ll . trans. J. A. K. Thomson (New York : Penguin Books, 1955), 특히 1106a20~1109b26. 물론 아리스 토텔레스는 본질적으로 사악한 행동, 즉 간동, 절도, 살인과 같은 행위 와 본질적으로 사악한 감정, 죽 악의, 몰영치, 시기심과 갇은 감정에는 중용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특수적 덕목의 중 용에 관련된 감정 중 본질적으로 사악한 것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동상적으로는 시기심, 질무심, 동기 없는 악의, 그리고 어떤 형태의 증오와 원망, 그리고 낙담과 우울 등이 본질적으로 나쁜 감정 형태로 생각되고 있다.서양 윤리학자들은 다양한 이유에서 그러나 한 가지 목적을 위 해 -감정을 육성하거나 말살시키거나 그 양자를 결합하거나 간에, 보다 나은 개인적 사회적 삶을 위해서 -나름대로 감정 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런데 서양 윤리학사에 있어서 감정 의 위치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견해는 인간이 지닌 감성의 역할 과 위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특히 감정이 이성, 육 체, 그리고 의지에 대해서 갖는 관계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의 불 확실성에 기인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논의하겠지만, 인식론의 문제가 윤리학의 문제를 완전히 혼란시 키거나 완전히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주인과 노예의 메타포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이 있다면, 윤리학에서 감정과 의지를 중시한 철학자들도 여전히 주인과 노예의 메타포를 사용하고 있다는 아이러니이다. 데의비드 흄이 〈이성은 정념의 노예〉라고 선언했을 때, 그는 감정의 구조에 대 한 정교한 분석과 아울러 이성과 정념의 투쟁은 사이비 문제라는 것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주인과 노예의 유구한 메타포로 귀환했던 것이다. 14) 니체가 그리스 문화를 아폴론적, 디오니소스 적 요소로 양분한 것도, 그리고 기독교적 도덕을 노예의 도덕 Sklavenmoral 이라고 비난하고 초인의 도덕을 자기가 주인이 되는 군주의 도덕 Herrenmoral 이라고 찬양한 것도 역시 유구한 메타포 에로의 귀환이다. 15) 이성과 감정에 관한 주인과 노예의 메타포는 철학 일반에서의 이성 중심주의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것의 파장 은 일파만파식으로 퍼져 나간다. 이성 중심주의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 육체에 대한 정신의 우위, 야만인에 대한 문명인의 우위, 차이성에 대한 동일성의 우위, 이상하거나 미친 놈에 대한 정상인의 우위, 일상인에 대한 철학자의 우위, 자연적 감정의 발 현에 대한 감정의 교육적 순화의 우위, 감성적 여성에 대한 이성 적 남성의 우위, 16) 노예에 대한 자유민의 우위, 민주제에 대한 귀족제의 우위, 즉각적 소비의 무산자에 대한 절제의 덕목을 가 전 자본가의 우위, 낭만적 삶에 대한 계산적 이성의 우위, 감정 유입적 판단에 대한 냉철한 논리적 판단의 우위, 17) 그리고 (도덕
14) David Hume, A Treatise of Human Understanding, 2nd ed, Book Il . Sec. ill, ed. L. A. Selby-Bigge (Oxford : Clarendon Press, 1978) , p. 415.
15) Friedrich Nietzsche, The Birth of Tragedy, trans. Walter Kaufmann (New York : Vintage Books, 1967) ; Thus Spoke Zaratustra, trans, Walter Kaufmann (New York: Penguin Books, 1966) ; The Will to Power, trans. Walter Kaufmann and R. J. Hollingdale(New York ; Vintage Books, 1968).16) Genevieve Lloyd, The Man of Reason (London : Methuen, 1984).17) 논리학 교과서의 오류론에서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 fallacy of appealingto the emotion〉는 크게는 비형식적 오류이거나 자료적 오류로 분류 되고, 구체적으로는 〈논점 일탈의 오류 fallacy of irrelevant conclusion>로 분류된다.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로 중인(衆人)의 〈감정에 호소하 는 논증 argumentum ad passiones〉과 〈연민 (情愍) 의 정에 호소하는 논 증 argumentum misericordiam>, 그리고 〈존경에의 논중argumentum advercundiam〉이 언급되고 있다. 감정은 우리의 판단과 전혀 무관한 것 으로 간주되는 논리학의 독선은 이제 〈감정도 하나의 판단이다〉라고 주 장하는 감정의 인지주의적 입장 cognitivistic view of emotion을 심각하 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Robert Solomon, The Passions: The Myth and Nature of Human Emotion (New York : Doubleday, 1976) ; Joel Marks, "A Theory of Emotion," Philosophical Studies, vol. 42 ( 1982) , pp. 227-242 참조.
적 감정과 정서적 고려를 중시하는) 도덕감의 철학에 대한 (이성적 원리와 법칙에 의거한 행위와 의무를 중시하는) 법칙주의적 의무론 적 도덕철학의 우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걸쳐있다.
흔히 칸트와 흄이 이성과 감정의 관계에 대해서 반대의 의견을 말한 철학자들로 잘 인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 둘 모두가 이성과 감정의 고전적이고 통상적인 이분법을 고수함으로써 이성과 감성 이 서로 섞일 수 있는 commingled 가능성, 즉 인지적 감정 cognitive emotions 의 가능성을 탐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잘 지적되지 않 고 있다. 18) 우리는 이제 우리 시대를 풍미하는 철학적 정조로부 터의 일갈, 죽 〈탈이분법!〉의 외침에 또 하나의 사례를 더함으 로써 그것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우리는 서양 철학사에서 이성과 감정을 융합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다고 말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성과 감정을 융합해서 어느 하나 환원하려는——특히 감정을 이성의 저급한 종류인 〈혼돈된 지각〉 또는 〈왜곡된 판단〉으로 환원하려고 노력한-철학자들18) Dilman, p. 1 ; Irving Thalberg, "Avoiding the Emotion-Thought Conundrum,"Philosophy, vol. ,, (1980) , pp. 396-402.
도 여전히 그 이분법을 유지하면서, 결국에는 이성의 우월성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앞으로 논의하겠지만 요즈음 득세 를 하고 있는 감정의 인지주의적 모델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묘한 딜레마가 잠복해 있다. 감정을 인지적으 로 해석하면 전통적인 이분법을 해소할 수 있으나 여전히 이성주 의를 견지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감정을 인지적인 요소를 갖지 않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분법을 고수하는 것이고, 결국 감정의 열등성을 드러낼 뿐이다. 19) 물론 양 뿔을 피해 갈 수 있는 길은 (잡을 수 있는 길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자의 뿔을 피해 갈 수 있는 길은 이성주의의 폐해를 이성주의를 통해서 해소하는 결 자해지의 원칙을 주장하고 그 결과로 감정을 이성과 대등한 위치 에 놓는 것이다. 후자의 뿔을 피해 갈 수 있는 길은 감정을 감정 자체에 의해서 이해하거나 찬양하는 것이다.20) 다시 말하면 우리 는 감정 자체의 자연적 발로에 따라 삶을 유지하는 것이다
19) 감정과 이성에 관련된 이러한 딜레마는 막스 Marks가 제기한 것이다. 그는 감정에 관련된 입장이 인지주의든지 비인지주의든지, 가부장적 남 성주의든지 여성주의든지, 딜레마는 존재한다고 본다: Joel Marks, "Emotion East and West : Introduction to A Comparative Philosophy," Philosophy East & West, vol. 41 (1991), pp. 1-30. 원래 이러한 딜레마 는 데이비슨이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관계에 대해서 제기한 것이다. Donald Davidson, "Paradox of Irrationality," Philosophical Essays on Freud ed. Richard Wollheim and James Hopki n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p. 305. 즉 우리가 비합리성을 합리적으로 아주 잘 설명하면, 비합리성은 합리성의 드러나지 않았던 한 형태가 되며 반 면에 우리가 비합리성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간단하게 치부하면, 우리는 합리성의 배경 속으로 후되하는 것이 되며, 이것은 비합리성을 진단하 고 분석하는 우리의 합리적 능력에 손상을 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20) 파스칼도 인정했듯이 〈가슴에는 이성이 전혀 알 수 없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The heart has its reasons that reason knows nothing of).그것이 풍류 지도이든지, 낭만적 삶에의 침참이든지, 사드적인 성적 충동의 무제약적 발현이든지 ,21) 돈 후안이든지, 카사노바이 든지 간에. 그러나 후자의 길도 〈쾌락의 역설〉을 통해서 배우게 되듯이 어느 정도의 금욕주의와 연계되지 않는다면 곧 발기 능력 의 멸절로 이어질 뿐이다. 이성이 처벌하지 않는 것은 자연이 처 벌하는 셈이라고나 할까. 어떤 길을 택한다고 해도, 신이나 동 물, 또는 바보가 아니라면, 어차피 우리 인생은 모순을 안고 살 아 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22)
21) 사드의 생존 연대 (1740-1814) 는 프랑스의 구제도가 부패의 극에 달할 때부터 프랑스 혁명 이후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종교적 도덕성에 기초 하는 〈낮의 생활〉과 동물적 탐욕에 기초하는 〈밤의 생활〉이 극단적으로 양국화되어, 이중화되었던 시기이다. 그런 환경에서 성장한 사드는 자 신의 다양한 여성 편력 을 토대로 하여 사디즘의 성문학을 창출했던 것 이다. 마광수, “사드 문학의 이해를 위하여, ” 이화열 옮김, 안방 철 학』 ( La Philosophie dan la Boudoir, by Marquis De Sade) (새터 , 1992) , pp. 5-15 참조. 사드의 성생활은 결국 남과 밤의 이분법, 이성과 감성 의 전통적 이분법을 해소한 셈일까 아니면 강화한 셈일까? 안방 철 학』 번역본의 제사는 조르쥬 바타이유의 그 유명한 말이다. 〈우리 인간 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초라한 개체에 머무는 금욕의 길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존재의 정상으로서 〈에로티시즘〉에 외마디와 함께 나를 던져 말기는 일이다.〉 대비해 보건대, 파스칼이 『팡세』에서 제시한 〈내기 논증〉은 이분법에 대한 정반대의 선택 가능성운 말하고 있다.
22) Abigali Solomon-Godeau, "Living with Contradictions," ed. Andrew Ross (Minneapolis :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8) , pp. 191-213 참 조.감정에 대한 오늘날의 이론과 논쟁은 철학사의 풍부하고도 착 종된 과거를 어느 정도 이해하지 않고서는 잘 포착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최소한의 노력은 했다고 느낀다. 그러나 감정에 관련된 철학사, 특히 서양 윤리학사 읽기는 하나의 편취
(騙取) -~ 단편적 취함이든지, 편파적 취함이든지, 간편 한 취함이든지, 속여서 취함이든지 간에 ――-에 불과했다. 어느 정도의 과도한 일반화와 왜곡, 그리고 생략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다. 철학사를 세세하게 전부 다 읽는 것은 어느 한 철학자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또한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여기서는 이 정도로 만족해야만 하겠다.
2 이모우티비즘 유감서양 윤리학에서 감정의 위치를 논하면서, 빠뜨리면 내가 후회 하거나 다른 사람이 화를 낼 것은 이모우티비즘일 것이다. 이모 우티비즘 emotivism 은 흔히 정의론(情意論)으로 번역된다. 이러한 번역은 이모우티비즘이 인간의 성정 중 정서적이고 의지적인 측 면이 도덕의 전부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거나, 아니면 이 모우티비즘이 감정적 의미를 기조로 하는 윤리학이라고 보는 것 이다. 둘 다 약간의 문제는 있기 때문에 차리리 감정론이라고 하 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정교한 합리적 선택 이론이 압도하 고 있는 오늘날의 서양 윤리학계에서 이모우티비즘을 갑자기 소 리 높여 주장하는 것은 〈죽은 말에 채찍질을 가하는 것〉처럼 미 친 짓일 것이다. 우리의 논의는 이미 죽어버린 이모우티비즘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거나 재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무엇 인가 훔칠 수 있는 것이 있는지 기웃거려 보는 정도일 것이다.23)23) 기본적으로 이러한 태도는 Bernard Williams, "Morality and the Emotions," Problems of the Self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3) , Chapter 13. p. 209 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모우티비즘에 관한 본격적 인 논의는 J. O. Urmson, The Emotive Theory of Ethic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68) 참조. 재구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철학사적 인 관점에서 이모우티비즘을 전반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는 Stephen Satris, Ethical Emotivism (Dordrecht : Martinus NijhofT Publishers, 1987) 참조.
이모우티비즘은 논리 실증주의의 충견이었다. 이모우티비즘은 (논리적 명제와 경험적 명제를 제의한 모든 명재들, 즉 형이상학적, 윤리적, 종교적, 미학적 명제들은 사이비 명제들로서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논리 실증주의의 〈검증 원리〉라는 날카로운 이빨로 무 장했다. 24) 그러한 이빨에는 무자비한 과학주의적인 〈의미론적 사 디즘〉의 침이 질질 흐른다. 메타 윤리학의 관점에서 이모우티비 즘은 그러한 이빨을 방어할 아무런 수단이 없음을 자각한다. 그 래서 이모우티비즘은 윤리적 언명이 감정이나 태도의 표현, 상대 방의 감정과 태도를 변화시키는 수사학적 설득에 불과하기 때문 에, 서술적으로도 인식적으로도 무의미한 언명이라고 선언한다. 결국 이모우티비즘은 그 침이 흐르는 이빨을 겸허하게 윤리학적 살에 깊숙이 박히게 하는 〈메타 윤리학적 매저키즘〉이 된다 .25) 한마디로 이모우티비즘은 사디즘과 매저키즘이라는 처절한 감정 의 양면성으로 점철되어 있었던 것이다.
24) 졸고, 「논리실증주의의 검증 원리와 형이상학」, 과학과 형이상학』, 오영환 외 (서울 : 자유사상사, 1993), pp. 285-307 참조.
25) Ronald de Sousa, The Rationality of Emotion (Cambridge : The MIT Press, 1990), p. 305. 미국적 상황에서 보면, 이모우티비즘은(살인과 암 살과 린치와 폭력 등 극악한 감정의 발현으로 정치적, 경재적, 인종적, 종교적, 도덕적 견해 차가 대립되고 있는) 일상성의 지옥을 (승인과 비 난이라는 보다 유순한 감정의 표현으로 그러한 견해 물 선명함으로 써) 그래도 살 만하고 괜찮은 세상으로 착각케 하는 도덕적 환각재임과 동시에 피 끓는 홍국문을 갈아 앉히는 혈압 강하재이기도 하다.이모우티비즘의 주장은,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 도덕적 언명 은 승인과 비난 approval or disapproval 의 감정을 표현하고 그러한
감정을 타인에게 유발하는 것이 된다. 이모우티비즘은 어떤 의미 에서는 윤리학의 기초에 대한 한 이론으로서 제시된 것으로 볼 수 있다-즉 어찌됐든 윤리학적 언명은 감정에 딸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모우티비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윤리 학도 감정도 모두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 들에 심각한 손상을 가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이모우티비즘의 주요한 두 가지 잘못이다. 이모우티비즘이 윤리 학을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윤리학적 문제를 합리적 토 론이 불가능한 단순한 개인적인 감정의 표현으로 만들어 버렸다 는 것이다. 죽 윤리학은 기호나 선호의 승인과 비난의 문제가 된 다. 〈기호에 관한 것은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De gustibus non est disputandum. > 그러나 현대 서구 사회의 개인주의적인 병리적 파괴상을 절감하면서, 공동체주의적 덕의 윤리를 구축하려는 맥 킨타이어 MacIntyre의 주장을 들어보면 또 다른 평가도 가능하다. 그는 이모우티비즘이 주요한 도덕적 문제에 대한 아무런 합리적 합의도 불가능한 현대 서구사회의 도덕적 병리 현상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본다.26) 그렇다면 이모우티비즘은 규정적 윤리 prescriptive ethics 의 관점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서술적 윤리 descriptive ethics 의 관점에서는 윤리학에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 는지도 모른다.27)
26) Alasdair MacIntyre, After Virtue, 2nd edn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84 ; 1st edn. 1981), pp. 11-14, pp. 16-35.
27) 이러한 맥킨타이어의 주장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와 이모우티 비즘의 관계, 그리고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논쟁을 전반적으로 다루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것은 본 논문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그러나 규정적 윤리의 관점에서는 이모우티비즘에게 면죄부가 발부되기 힘들다. 이것은 이모우티비즘이 감정의 표현과 도덕적
판단 사이 의 관계에서 규범적 오류 가능성 normative fallibility 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28) 규범적 오 류 가능성의 문제는 가령 이모우티비스트가 어떤 도덕 판단 S를 내릴 때 S를 내리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를 스스로 물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러한 도덕 판단을 정당한 것으 로 간주하는 것은 단지 그러한 판단을 감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판단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것은 단 지 그러한 판단을 갖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문제는 이모우티비 즘이 감정을 심각하게 다루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손상 을 가한 이유도 아울러 밝혀준다고 소우사 Sousa 는 지적한다.29) 여기서 우리는 이모우티바스트들에게서 감정을 구체적으로 규정 하는 문제도 결국 쉽지 않은 문제로 나타났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감정의 표현과 감정의 유발도 기본적으로 다른 것 이며, 그것들이 감각적 느낌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논의되지 않고 있다. 또한 감정의 표현과 유발도 정액을 사출하듯이 어떤 환호가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 (hurrah!) ——p 어떤 야유 가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 (boo!), 아니면 비교적 지속 적인 감정의 표현과 유발도 있는지, 승인과 비난으로 나타나는 감정의 표현이 쾌락과 고통과 비슷한 심리적 상태인지 또한 타인 의 감정을 유발하는 속 내용이 소망인지 명령인지 권고인지 설득 인지 탄원인지 부탁인지도, 그리고 그 속 내용이 그것들과 다르 다면 어떻게 다른 것인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30) 이러한 비판
28) Ernest Sosa, "Moral Relativism, Cognitivism, and Defeasi ble Rules," Social Philosophy & Policy, vol. 11(1994), pp. 116-138. " Il . Emotivism Redux," pp. 120-124 참조.
29) Ronald de Sousa, The Rationality of Emotion, p. 304.30) Brand Blanshard, Reason and Goodness (London : George Allen &Unwin, 1961) , p. 243.
은 흔히 흄의 도덕감 이론이 그 역사적 기원의 하나가 된다고 간 주되고 있는 이모우티비즘에서 흄이 분석한 것과 은 감정 자체 가 대한 논의가 거의 전무하다는 것으로도 잘 입증된다 31) 소우 사는 규범적 오류 가능성의 문제를 결국은 마찬가지인 규범적 교 정 가능성 normative correctability 의 문제로 바꿈시킨다. 32) 만약 이모우티비즘이 객관적인 윤리적 기준이 없다는 것을 장하는 것이라면, 이모우티비즘은 감정 자체의 교정 가능성에 대한 그러 한 기준도 역시 없다는 것을 주장하지 을 수 없다. 결국 이모 우티비즘은 감정이 객관적 도덕의 기준이 될 것이 두려워서 감정 의 합리성이나 교정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완전히 배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모우티비스트 은 자기의 입지를 상 실할까봐 감정 자체 를 단순히 순수한 사실 raw facts, 즉 평가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게 되었다.33) 물론 우리는 스티븐슨 Stevenson이 도덕적 견해의 차이를 소견 belief의 차이와 태도 attitude 의 차이로 구분한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스티븐슨은 어떤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고 인정됨으로써 우리가 소견의 차이 에 대한 해소에 이르게 된다면, 태도의 차이도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소견과 태도 사이의 관계는
31) Cheshire Calhoun and Robert C. Solomon, ed., What is an Emotion ? (New York : Oxford University Press, 1984) , p. 32.
32) 교정 가능성의 문제는 원래 Vincent Tomas, "Ethical Disagreement and the Emotive Theory of Values," Mind, vo l. 60 (1951) , pp. 209-221 에서 제기된 것이다. 자세한 논의는 김태길, . 『윤리학 (서울 : 박영사, 1964 : 판 1974) , pp. 263-270 참조. 우리 나라에서는 김태길 교수님 의 이모우티비즘에 대한 논의가 그 출발점이며, 동시에 그 이상 가는 논의가 아직까지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33) Ronald de Sousa, The Rationality of Emotion, p. 304.논리적인 것이 아니고 인과적인 것이며, 또한 그러한 인과성도 우연적이고 심리적인 것일 뿐이라는 주장을 고수했다는 것을 우 리는 알아야만 한다.34)
이모우티바즘이 도덕과 감정 모두에 저지른 두 가지 잘못이 결 합되어 나오는 것은 우리가 직관적으로 도덕적 평가가 가능하다 고 는 부도덕한 감정에 관한 것이다. 플라돈도 언급했던 사악 한 조소자p hon c lau er_ 남의 불행을 고소해 하고 속으로 는 밖으로 박장대소하는 사람 __ 의 드러난 혹은 드러나지 않 은 감정의 표현과 태도를 어떻게 부도덕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 느냐 하는 것이다.35) 이모우티비즘은 어떤 사람의 행위나 선택이 그의 진정한 도덕적 신념이나 소견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훌륭 한 지시자 excellent indicator 라는 것을 밝혀 놓았다는 접에서 윤리 학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는 것은 대부분의 철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이모우티비즘에 따르면, 감정과 태도가 윤리적 소견이나 확신의 필수 구성 요건이며 그러한 감정과 태도는 행위와 선택에 서 현시적으로 나타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설명은 사람들이 때때로 어떤 행동이 잘못이라고 느끼고 또한 잘 못이라는 것을 시인하지만 그것을 행하고 싶은 유혹에 넘어간다 는 사실을 고려에 넣을 수 없다.36) 고대와 중세에서 이미 널리34) Charles L. Stevenson, Ethics and Language (New Haven ; Yale UniversityPress, 1944), pp. 2-3. 자세한 논의는 황경식, 「정의적 (情意的) 의 미의 기원 : C. L. evenson 의 의미론 시비」, ((철학)), 제 11 집 (1977), pp. 39-66 참조.
35) 풀라돈은 사악한 시기심 malicious envy을 의미하는 ((phthonos))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바 있다. Philebus, 47e.36) Richard R. Brandt, "Emotive Theory of Ethics,"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 ed. Paul Edwards(New York : The Macmillan Company, 1976) , pp. 493-496.회자되었던 그 유명한 경구 --〈(주여!) 나는 그것이 더 좋다 는 것을 느끼고 시인하고 있지만 왜 더 나쁜 것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까 ! 〉--를 이모우티비스들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단 말인가 ?37) 전통적으로 철학과 신학에서 이러한 문제는 〈의지 박 약 weakness of will/akrasia 〉의 문제로 알려진 것이다. 또한 프로이 트 심리학이 밝혀낸 사실, 즉 표현된 감정과 그 감정의 무의식적 실상은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의식적으로는 싫어하고 있지만 사실은 사랑하고 있음을 모르는 경우처럼 ---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소우사는 이모우티비즘이 저지른 두 가지 잘못이 결합된 것의 또 다른 예로서 〈조건적인 도덕적 진술 conditional ethical statemen〉의 문제를 든다. 문제의 출발점은 우리가 어떤 신념을 가 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어떤 태도나 감정을 가언적으로 받 아들일 수 없으므로, 우리는 도덕적 전술을 조건화하는 것처럼 우리의 감정을 조전화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38) 비록 상황이37) Video meliora proboque deteriora sequor/I see and approve of the better things ; I follow the worse: Ovid.
38) Ronald de Sousa, The Rationality of Emotion, p. 305. 이러한 소우사 의 주장은 서양 윤리학에서 유구한 전동을 가전 것으로 볼 수 있는 〈이 상적으로 동정적이고 공평한 관망자 ideally sympathetic and impartial observer〉의 도덕적 공감과 상상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모우티비즘이 조건적인 도덕적 전술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게 주장한 것이다. 그러한 관망자는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 자신을 가상적으로 집어 넣어서 자기가 어떠한 감정과 태도를 갖게 되는가를 통해서 도덕적 평가를 내리는 판정자라고 생각되고 있다. Roderick Firth, "Ethical Absolutism and the Ideal Observer," Philosophy and Phenomenological Research, vol. 12(1952) 참조. 또한 이러한 문제는 도 덕적 상상력의 문제뿐만 아니라 문학, 예술, 미학 등에 있어서 감정이 입과 감정적 상상력에 관한 복잡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자세한 논의는Richard Moran, "The Expression of Feeling i n Imagination," The PhilosophicalReview, vol. 103(1994), pp. 75-106 참조.
달라지기는 했지만 소우사가 든 예를 그대로 사용해 보기로 하 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조건절의 전전에 나타난 도덕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더라도 그 조건절을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다. 〈만약 남아 연방에 두자를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그르다면, 그러한 두 는 법으로 금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감정의 표현은 이러한 방 식으로는 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 도덕적 전전을 감정의 표현으 로 대치한다면 다음과 같은 조건절이 될 것이다. 〈제기랄, 남아 연방의 투자라니! 그러한 투자는 법으로 금지되어야 한다.〉 도 대체 이러한 대치를 통해서 이모우티비즘이 해준 것은 무엇인 가 ? 감정은 조건절의 전건에 표시되거나 되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만약 감정이 전건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면, 추정적인 도덕적인 판단은 감정의 표현과는 무관한 것이 된다. 만약 감정 이 전건에 표시되어 있다면, 그것은 전건을 실제적으로 승인하는 것이므로, 후건은 자동적으로 딸려 나온다. 소우사는 감정이 표 현된 전전을 지닌 조건절에는 사실상 어떠한 조건적인 것도 없다 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모우티비즘은 〈도덕적 진술의 조건화를 말이 안되는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39)
그렇다면 우리가 이모우티비즘에서 훔칠 수 있는 것은 무엇인 가? 도덕적 언명은 감정의 표현과 유발인데, 감정의 표현과 유 발은 비인지적인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 언명은 그 전위를 판명 할 수 없는 비인지적인 것이 된다는 주장이 이모우티비즘의 요체 이다. 따라서 이모우티비즘은 윤리학에서 비인지주의의 한 전형 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감각 자체도 인지적인 것으39) Ronald de Sousa, The Rationality of Emotion, p. 305. 원래 도덕적 조건절의 문제는 Bernard Williams, pp. 212-214 에서 제시된 것이다.
로 이해되는 것이 통례라고 한다면, 감정도 당연히 인지적인 것 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모우티비즘은 인지적 감 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인지적인 것이 되어야 할 것 이다.40) 만약 감정의 윤리학이 인지주의적 입장을 취하려고 시도 한다면 이모우티비즘은 부정적인 의미에서나마 그 기본적인 출발 점을 마련한 셈이다. 이모우티비즘이 윤리학설로서 더 이상 타당 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많은 철학자들도 인정하는 공헌이 있 다. 그것은 이모우티비즘이 우리가 어떤 사태에 우호적인 도덕적 용어를 전지하게 사용할 때면 언제나 (또는 대부분) 그 사태에 관 한 상응하는 우호적인 도덕적 감정과 태도의 표현이 부수된다는 것을 밝혀 냈다는 점이다. 또한 (비록 논리적이고 인식적인 관점이 아니라 수사적이고 심리적인 관점에서였지만) 감정의 유발과 상호 주관적 관련성을 통해서 감정의 전이성 또는 전염성을 밝혀 놓았 다는 접도 공헌으로 인정된다. 또한 이모우티비즘이 도덕적 언명 에는 감정적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밝힌 것도 공헌이다. 그러나 감정의 윤리학의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사람들은 이모우티비즘은 감정에 대한 〈무한한 추구〉의 한 출발에 불과하 다고 본다. 자! 훔칠 것을 훔쳤다면 이제 미련 없이 다음 장으 로 옮겨가도록 하자.
40) George C. Kerner, "Passions and the Cognitive Foundations of Ethics," Philosophy and Phenomenological Research, vol. 31 (1970) , pp. 177-192. 그러나 감정 자체가 인지적이라고 해도, 이모티비즘은 감정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비인지주의적이라 고 생각된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장에서 다룰 기바드 등에 의해서 견지되고 있다.
3 이모우티비즘 이후――합리적 선택 이론에서 감정의 위치
현대 영미 윤리학은 흔히 다음과 같은 여섯 단계를 거쳐서 발 전해온 것으로 간주된다. 즉 직관주의 Intuitionsm, 이모우티비 즘, 규정주의 prescriptivism, 기술주의 descriptivism, 정당근거적 접 근방식 the good reasons approach, 합리적 선택이론 rational choice theory의 여섯 단계이다. 물론 직관주의 이전에는 공리주의적 자 연주의가 있었고 미국의 실용주의적 자연주의는 처음 두 단계와 중첩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현대 윤리학의 발전 단계를 전부 추적하려는 것은 아니며, 다만 이모우티비즘에 대한 반동의 마지막 끝, 즉 합리적 선택 이론에서 감정의 위치를 간략히 찾아보려고 한다. 합리적 선택 이론은 주어진 정보와 신념 아래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욕망을 가전 선택자들의 합의를 도덕의 기초로 삼으려는 시도이 다. 그러한 시도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현재 영미 윤리 학을 풍미하고 있는 롤즈 Rawls 의 『사회 정의론』과 고티에 Gauthier의 『합의 도덕론』이다.41) 여기는 롤즈와 고티에의 입장에41) John Rawls, A Theory of Justice (Cambridge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1). 번역본으로는 황경식 옮김, 『사회 정의론』(서울 ; 서광사, 1977) . David Gauthier, Morals by Agreement (Oxford ; Clarendon Press, 1986), 번역본으로는 김형철 옮김, 『합의 도덕론』 (서울 : 철학과 현실 사, 1993). 롤즈는 나중에 합리적 선택 이론을 기초로 삼으려는 초기의 입장을 약화시키기는 했지만 제한된 범위 안에서 합리적 선덱 이론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롤즈와 고티에의 입 장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는 필자의 두 졸고, 「자유주의 정의론의 철학 적 오딧세이 __ 롤즈 정의론의 최근 변모와 그 해석 논쟁」, 현대의 윤리적 상황과 철학적 대응』(이리 : 제5회 한국 철학자 연합대회 대회
보, 1992), pp. '.573-599 ; 「고티에의 『합의도덕론』과 그 정치철학적 위 상」, 『사회 철학 대계』 차인석 외 (서울 : 민음사, 1993), 총3권 중 제2 권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pp. 346-418 참조.
대해서 구체적으로 논의할 상황이 아니므로, 독자들이 그들에 대 해서 기본적인 지식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면서, 롤즈를 중심으로 하여 고티에의 입장은 언급하는 정도로 논의하겠다.
롤즈의 정의론은 합의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자기 이익 울 추구하는 합리적 계약 당사자들이 자신의 구체적인 사회 계층 적 위치와 가치관을 모르는 무지의 장막 속에서 분배적 정의의 원칙을 선택한다는 기본적인 구도를 설정한다. 따라서 롤즈가 인 정하고 있듯이 그의 사회 계약론적 분배 정의론은 합리적 선택이 론의 한 부분이 된다. 무지의 장막 속에서는 각 개인들의 구체적 인 상황이 전부 가려져 있으므로, 롤즈의 계약 당사자들은 (자신 의 비관적 혹은 낙관적 경향과 같은 어떠한 심리적 태도뿐만 아니라 이타적 감정도 가지지 않는) 냉철한 합리적 선택자로 나타난다. 롤 즈는 자신이 설정한 선택 모형과 가장 대비되는 것으로 흄과 아 담 스미스의 .도덕감 이론 moral sentiment theory 을 연원으로 하고 있는 고전적 공리주의의 〈공평한 동정적 관망자 impartial sympatheticspector〉의 모형을 든다. 그리고 그러한 모형은 분배적 정 의의 문제가 첨예화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비현실적인 모형일 뿐 만 아니라 개인들 간의 차이도 심각하게 고려하지 못한다고 일축 한 바 있다. 42)그러나 롤즈의 정의론은 그 이면에 감정에 관한 중대한 가정을 깔고 있다. 롤즈는 우선 계약 당사자들이 〈정의감〉과 자신의 〈가 치관〉을 가진 도덕적 인간이라는 것을 가정한다.43) 이러한 점에42) 두 모형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는 황경식, 「도덕 판단의 성립 요건 ―도덕적 입장의 제모형」, ((철학)), 제 19 집, pp. 55 - 94 참조.
서 롤즈는 자신의 정의론이 우리의 도덕적 능력, 특히 정의감을 규제해 줄 원칙들을 제시할 〈도덕감에 관한 이론〉이라는 것을 천 명한다.44) 또한 롤즈는 무지의 장막에서 합리적 선택자들에게 선 택의 동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분배적 정의 원칙이 적 용되는 대상인 〈사회적 기본 가치들〉의 목록 가운데에 〈자존감의 기반〉를 포함시키고 있다. 롤즈가 자존감의 기반을 어떤 의미에 서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기본 가치로 보고 있는 것은 결국 상대 적 박탈감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45) 물질적인 재화와 자원이 나누어지는 방식은 각자의 자존감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 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롤즈는 결국 〈분배적으로 정의로운 사회〉는 우리의 분배적 입지에 관한 우리의 감정 상태 에 달려 있다는 것을 밝힌 셈이다. 목적론적 전통의 윤리학은 어 떤 쾌락적 상태와 선호를 본질적 선과 정당성의 규정, 그리고 개 인의 행위와 사회 정책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왔다. 즉 행복, 복지, 후생, 공리, 효용, 욕구의 만족 혹은 충족 등이 그것이다. 비록 롤즈는 의무론적 관점에서 자기의 정의론을 전개 하고 있지만, 선이 합리적 욕구의 만족으로 정의된다는 점에서는 목적론과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롤즈는 구체적으로 합리적 욕구
43) 롤즈는 이미 초기 논문 "Sense of Justice," The Philosophical Review,vol. 72(1963), pp. 281-305 에서 루소를 찬양하면서 그의 공감 또 는 동정심 이론에 기초한 정의론을 발전시키겠다는 야십을 토로한 바 있다. 물론 롤즈는 분배적 정의의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에서는, 〈인류애〉와 같은 고차적이고 추상적인 동정심이 아니라 공감된 〈계약적 정의감〉이 일차적인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44) 롤즈, 황경식 옮김, 앞의 책, p. 72.45) 상대적 박탈감의 문제는 W. G. Runciman, Relative Deprivation and Social Justice(London : Routledge and Kegan Paul, 1966) 에서 제기된 것이다.의 만족 상태가 어떠한 감정 상태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이 사회적 기본 가치들에 대한 지수로서 충분히 파악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문제점을 남기고 있다. 물론 이것은 롤즈만의 문제 는 아니고 동시에 공리주의자들과 복지 경제학자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롤즈는 또한 분배적으로 정의로운 사회는 질투심과 시기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감정들이 만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롤즈의 정의로운 사회에서는 사촌 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들의 복통은 거의 완전히 치유된다 고 볼 수 있다. 또한 롤즈는 피아제 J. Piaget와 콜버그 L.Kohlberg 의 도덕 발달 심리학에도 주목함으로써 도덕적 추론 능력뿐만 아 니라 도덕감의 형성 과정에도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또한 롤즈 는 정의 원칙을 위반했을 때 가지게 되는 죄책감과 자존감이 상 처를 받을 때 생기게 되는 수치심 등 많은 개별적인 감정들을 세 밀하게 분석하고 있댜 최종적으로 롤즈는 사회 정의론 의 3 부에서 정의감 자체가 선이 된다는-플라돈 시대부터 윤리학 의 중대한 과제가 되어온一정합성을 입증하려는 원대한 시도 를 전개하고 있다.그러나 롤즈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원초적 입장의 칸트적 해석 을 들고 나옴으로써 그의 정의론은 두 배경적 이론들, 즉 도덕감 이론과 칸트적 의무론 사이의 정합성 문제를 야기시킨다.46) 개인 의 모든 구체적이고도 경험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원초적 입장에 대한 칸트적 해석은 결국 도덕론에 있어서 감정의 위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47) 만약 롤즈가 칸트적인 입장을46) 롤즈, 앞의 책, 40 장 「공정성으로서의 정의에 대한 칸트적 해석」.
47) 칸트도 초기 저작에서는 영국의 도덕감 이론 특히 허치슨 Hutcheson 의 이론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즉 칸트는 미학적감정을 논하는 가운데 〈젊은이의 도덕적 감정을 높은 수준의 감수성 을 갖도록 고양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Observations on the Feeling of the Beautiful and the Sublime (1764) , trans. J. T. Goldthwait(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0), p. 116. 자세한 논의는 Keith Ward, "Chapter Il . The Doctrine of Moral Feeling," The Development of Kant' s View of Ethics (Oxford : Basil Blackwell, 1972) 참조.
보다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도덕감 이론은 칸트적 의무론을 기본적 배경으로 해서 도출된 정의의 두 원칙을 준수하려는 의무 에 대한 감정적 보충이라는 도구적인 위치만을 차지하게 된다. 최근에 여성 해방론적 윤리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비판을 들어 보면 이러한 해석이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롤즈의 정의론은 여 의 고유한 도덕적 감정인 〈배려〉와 가족적 〈연고〉를 무시하 고 추상적인 권리와 정의 또는 법칙과 의무만을 강조하는 남근 숭배적 편협성에 경도되어 있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는 것이다 48 ) 반면에 롤즈의 정의론에서 칸트적인 요소를 배제하
48)Virginia Held, "Non-contractual Society : A Feminist View," Canadian Journal of Philosophy, supplementary vol. 13 (1987) , pp. I 11.:.137, 보다 포괄적인 관점에서의 논의는 Carol Gilligan, In a Different Voices : Psychological Theory and Women's Development (Cambridge : Harvard University, 1982). 번역본으로는 허란주 옮김, 심리 이론과 여성의 발 달』(서울 : 철학과 현실사 : 1994). 솔로몬은 길리간의 이러한 비판이 우 리가 서론에서 언급한 이성과 감정에 대한 전동적인 이분법을 고수하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아울러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고정시키는 가부장 적 질서 내에 그 비판을 위치시키는 모순에 빠진다고 지적한다. 여성의 감정적 감수성이 남성보다 더 민감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남성 우월적 이데올로기에 따른 허위 의식이라는 것이다. 감정은 남녀를 불문하고 인간 모두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것이며 또한 그렇 게 되어야 한다고 솔로몬은 주장한다. Robert C. Solomon, "Beyond Reason : The Importance of Emotion in Philosophy," Revisioning Philosophy ed. James Ogilvy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2) , pp. 19-47.
고, 공리주의적인 계산적 요소를 강조하거나 아니면 흄이나 루소 의 도덕감 이론을 부각하려는 사람들은 차례로 다음과 같이 지적 한다. 첫째, 최소 극대화 규칙을 기반으로 해서 최소 수혜자의 기대치를 최대한으로 증진하려는 롤즈의 〈차등의 원칙〉은 계약 당사자들의 극도의 비관적이고 보수적인 심리적 상태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롤즈의 정의론―一-특히 차등원칙 —一-은 개인의 재능을 〈공동의 자산〉으로 간주하는 타인에 대한 공감 또 는 동정심을 배경으로 하지 않으면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롤 즈 정의론의 윤리학사적 배경은 칸트인가 아니면 흄인가? 합리 적 선택이론이 정교하게 전개되고 있는 롤즈의 정의론의 배경에 감정에 관해서 상반된 견해를 말한 두 철학자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은 포스트 이모우티비스들에게 어찌 아이러니가 아니라고 하 리!
고티에는 합리적 선택 이론 중 게임 이론을 탁월하게 구사함으 로써 사회 계약론적인 〈협상적 정의론〉의 모형을 구축한다. 그러 한 모형을 통해서 고티에는 복지 국가의 옹호자인 롤즈와 최소 국가의 옹호자인 노직 Nozick 사이의 대립을 해소하려는 시도를 『합의도덕론』에서 전개한다.49) 감정에 관련해서 주목할 것이 있 다면, 고티에가 정서성이 합리성에 수반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는 것이다.50) 보다 엄밀히 말하면 합리성은 정서적인 것을 함축 하지만 정서적인 것은 꼭 합리성을 함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지성과 감정 모두가 그 __ _자유주의적 개인 一49) Robert Nozick, Anarchy, State, and Utopia (New York : Basic Books, 1974). 번역본으로는 로버트 노직, 남경회 옮김, 『아나키에서 유토피아 로――자유주의 국가의 철학적 기초』(서울 : 문학과 지성사, 1983) 참 조.
50) 고티에, 앞의 책, 11 장 「자유주의적 개인」, pp. 472-476.를 도덕적 존재로 만든다〉는 것을 천명한다. 51) 그러나 고티에에 게 있어서 감정은 부차적인 것이며 합리적 선택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본질적인 요소는 되지 못하고 있다.52)
51) 고티에, 같은 책, p. 47. 원문에는
롤즈와 고티에를 종합적으로 볼 때, 합리적 선택 이론과 감정 을 본격적으로 접합시키려는 문제는 현대 윤리학과 합리적 선택 이론, 그리고 의사 결정론에서 하나의 공통된 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미 언급한 소우사와 우리가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기 바드 Gibbard는 이러한 과제를 위한 중대한 첫 발을 내디딘 것이 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이러한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다. 다만 엘스터 Elster 는 합리적 선택 이론의 기 본적 구도에다 감정을 포섭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거기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본격적인 논 의는 후일의 과제로 하고, 다만 그의 기본적 입장만을 언급하려
I감정/) / 행 위\< 정I보
고 한다. 그는 합리적 선택 이론의 전형적 구도인 신념과 욕구의 모형 belief-desire model 에다 다음과 같이 감정을 포섭시키려고 한 다. 53)
그러나 감정의 위치 설정과 감정과 관련된 화살표 의 향방이 꼭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는 아직도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것을 합리적 선택 이론과 감정의 만족할 만한 결합이라고 하기는 아직도 시기 상조이다. 또한 감정 자체를 신념과 욕구의 일부분 이거나 감정 자체가 그것들을 포함한다고 보는 이론들도 있으므 로 많은 논의가 더 필요하다.54) 그러나 엘스터의 이러한 모형은 우리에게 좋은 출발점을 제공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 는 감정이 인지적 신념, 욕구, 그리고 정서성의 복합체로 이루어 전다는 성분 이론componen t heory을 지지하며, 그리고 소위 비의 도적인 현상도 성분을 구성하는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점만을 밝히고자 한다. 우리가 독사를 보았을 때 (그것을 독사라고 인식 하고, 독사는 해롭다고 믿기 때문에, 독사에게 해를 입지 않으려는 욕구를 통해) 우리도 모르게 눈동자가 커지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다.55) 물론 보다 구체적인 논증은 후일의 과제로 남긴다.그러면, 이제 감정을 윤리학의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디루려고 하는 감정의 윤리학의 최근 면모와 그러한 감정의 윤리학에서는53) Jon Elster, "Rationality, Emotions, and Social Sciences," Synthesis, vol. 98(1994), p. 35.
54) 감정에 관한 신념 욕구 이론과 다른 이론들과의 기본적인 대비는 O . H. Green, The Emotions : A Philosophical Theory (Dordrecht : Kluwer Academic Publishers, 1992) , pp. xi-xiv 참조.55) 이것은 감정을 다음 요소들의 복합체로 보는 것이다. 즉 (1) 육체적 느낌 (2) 일련의 관심 집중과 의도성 (3) 평가와 판단 (4) 욕구, 충동, 그리고 행동의 경향.감정의 도덕적 중요성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4 감정의 도덕적 중요성과 감정의 윤리학의 최근 면모감정의 윤리학은 기본적으로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 우리가 어 떻게 감정을 도덕 철학의 영역에 유입시킬 것인가의 문제이며, 그러한 문제는 일차적으로 감정이란 무엇인가 하는 개념적 정의 와 분석에 관한 인식론의 문제에 달려 있다. 그러나 감정의 인식 론 자체가 감정의 윤리학의 향방과 내용을 완전히 결정하는 것을 아닐 것이다.56) 감정의 인식론이 감정이 인지적이고 합리적인 요 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이론적으로 완전히 밝혀 냈다고 하더라도 감정의 윤리학적 위치는 아직도 미지수이다. 즉 감정의 인식론은 감정이 윤리학의 본질적 기초가 되어야 하는 지,57) 아니면 감정의 심리적 실재론을 통해 윤리학을 재구성할56) John Rawls, "The Independence of Moral Theory," Proceedings and Addresse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Association, vol. 48 (1975) , pp. 5-22 참조.
57) 감정적 고려, 배려,영려가 모든 윤리학설의 동기적 배경으로 자리 잡 고 있다는 주장도 감정이 윤리학의 본질적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 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선한 인간, 죽 도덕적 인간은 배려의 감 정을 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배려의 대상은 다양할 수 있다. 공리주의처럼 모든 유정적 (有情的) 존재 sentient beings, 이기 주의처럼 자기 자신의 이익, 이타주의처럼 타인의 이익, 또는 칸트 윤 리학에서처럼 도덕법칙 혹은 의무가 대상이 될 수 있다. Joel Marks, p. 2.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배려의 지나친 개념적 포괄성에 대한 문재 를 야기시킨다. 또한 이와 비슷한 주장이 존경이나 존경십에 대해서도 전개되고 있다. 즉 칸트의 의무론은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심을 전제하
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의무론적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심은 다른 감정과 동기들과는 그 내용에 있어서 판이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존경이나 존경심 자체가 감정인가 아닌가 하는 논란이 제기되 고 있기도 하다.
수 있는지 ,58) 아니면 감정은 합리적 선택 이론에 따른 선호와 결 정의 강렬도 또는 긴박성을 나타내는 단순한 지시자에 불과한 것 인지, 아니면 감정은 객관적인 도덕적 규범이 존재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입증하는 표현 양식으로만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감정은 도덕적 객관성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도덕적 감수성의 능력인지, 아니면 감정은 인간을 도덕적 의무와 행동으로 이끌게 하는 도구적인 역할을 가전 것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감정은 다른 사람을 도덕적 의무와 법칙에 따라서 경직되게 도와주는 사 람보다는 그것을 감정적으로 수용하여 시행하는 사람이 더 인간 적이라는 정도의 것인지, 아니면 감정은 이성적인 도덕적 행위를 수행하지 못한 것에 대한 설명, 변명, 책임의 면제, 또는 정당화 를 제공하는 부차적이고 부정적인 위치만을 차지하는지를 결정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감정의 인식론은 감정이 인지적안 요소를 가지고 있고 또한 이성과 비견할 만큼 인간 생활의 전반에서 중 요하다는 것을 밝혀줌으로써 도덕적 영역에서도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는 있을 것이다. 59) 감정은 동물이나 식물의 종처 럼 자연적 집합은 아니다.60) 따라서 감정에 대한 이론의 종류는 철학 이의의 다른 학문을 포함해서 세세하게 나누면 수백 종에
58) Owen Flanagan, Varieties of Moral Personality : Ethics and Psy chologicalRealism (Cambridge : Harvard University Press, 1991) .
59) Alvin I. Goldman, "Ethics and Cognitive Science," Ethics, vol. 103 (1993) , pp. 337-360.60) Amelie Oksenberg Rorty, "Introduction," Explaining Emotion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0) , pp. 1-8.이르며, 감정이 인지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도 수십 종 에 이르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전부 열거해서 구체적으로 논할 수는 없다.61)
61) 어떤 심리학자들은 감정에 관한 수백 종의 정의들을 분석하고 분류 한 결과, 다음과 갇은 가장 포괄적인 정의 를 이끌어 낸다. P. R. Kleinginna, Jr. and A. M. Kleinginna, "A Categorized List of Emotional Definitions, with Suggestions for A Consensual Definition," Motivation and Emotion, vol. 5(1981), pp. 345-379. 물론 이러한 정의는 감정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다 포함하고 있으므로 너무나 포괄적이라는 비판이 당연 히 제기된다.
〈감정은 신경 호르몬계에 의해서 중재된 주관적 객관적 요소들 사이 의 상호 작용에 관한 일련의 복합체이다. 따라서 감정은 (a) 흥분된 느 낌과 쾌/불쾌와 같은 정서적 경험을 일으키고, (b) 감정적으로 연관된 지각적 효과, 평가, 분류 과정과 갇은 인지적 과정을 하고, (c) 홍 분의 조건에 대한 광범위한 생리적 조절을 활성화하고, (d) 언제나 그 러한 것은 아니지만, 흔히 표현성, 목표 지향성, 그리고 적옹성운 가진 행동을 유발한다.〉전통적으로 감정은 감각적 느낌 또는 기분으로서 흔히 생리적 반응을 수반하거나, 감각적 느낌 자체가 생리적 자극과 반응에 의해서 촉발 혹은 병발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또한 우리가 내 성 introspection 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 러나 행동주의적 이론은 행동으로 표출되고 현시된 감정을 중시 하고, 프로이트적 감정론은 감정의 무의식적 요소를 강조하며, 융Jung은 민족의 집단적인 무의식적 정조까지 가능한 것으로 본 다. 반면에 감정의 인지주의적 입장은 감정이 단순히 감각적 느 낌만이 아니라고 보고, 감정이 가지고 있는 지향성 혹은 의도성 울 부각시키면서, 신념, 판단, 평가, 사유, 구성, 관점, 관심과 고려, 합리성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감정의 인지주의적 요소를 말 하고 있으며, 그것들 중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거나 그것들을 다
양한 방식으로 결합시키기도 한다.62) 또한 심리학, 사회학, 정치 학, 생물학, 전화론, 문화 인류학, 뇌신경 생리학 등도 나름대로 감정을 규정하는 독특한 방식을 견지하고 있다. 또한 감정 중 어 떠한 감정이 기본적이고 원초적인가, 어떠한 감정이 부차적이고 학습적인가에 대해서 많은 이론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실존주의 철학자들과 하이데거를 통해서 불안과 염려가 삶의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정조라는 주장에 어느 정도 익숙해 있다. 이러한 문제 는 감정의 윤리학에서 무엇이 도덕성과 관련해서 기본적인 감정 이 되어야 하느냐의 문제로 나타난다. 감정의 윤리학의 구체적인 내용과 향방은 이러한 기본적 감정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감정에 관한 이러한 기본적인 인식론적 논의를 배경으 로 감정의 윤리학에 관련된 문제들을 추적해 보기로 하자. 감정 의 윤리학은 우선 다양한 기존의 규범적 윤리학을 배경으로 해서 부분적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즉 감정의 윤리학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여성 해방론적 윤리학을 배경으로도, 사회 생물학적 발견 에 힘입거나 아니면 윤리학적 전통에서 이타주의 윤리학을 감정 을 통해 재구성하려는 의도를 배경으로도,63) 맥킨타이어처럼 ―비록 그가 이모우티비즘을 개인주의 사회의 필연적 귀결로 비난하기는 했지만 __ ―애국심과 공동체적 소속감과 같은 지속적 이고 사회적인 감정을 존중하는 공동체주의 윤리학과 타인에 대 한 감정적 고려와 아울러 자기의 감정을 훌륭히 조절하는 책임을62) 필자가 보기에 감정의 인지주의 전반에 대한 가장 좋은 소개 논문은 다음 논문이다. John Deigh, "Cognitivism in the Theory of Emotions,"Ethics, vol. 104 (1994) , pp. 824-854.
63) L. A. Blum, Friendship, Altruism, and Morality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80)지닌 인격과 덕에 관한 윤리학을 배경으로도,64) 또는 사회적 연 대감을 강조하는 로티 Rorty식의 자유주의를 통해서도,65) 그리고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유정적(有情的) 존재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에 관한 계산 대상으로 하는 공리주의를 통해서도 전개 될 수 있다. 공리주의 일각에서는, 불교의 자비심처럼 유정적 존 재의 감정적 수용 능력이 도덕적 고려의 기준이 되면 인간과 동 물에 동일한 위상이 부여됨으로써 편협한 인간 중심주의가 아닌 (적어도 동물 중심주의 혹은 더 나아가서 생명 중심주의라는) 환경주 의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생명에의 외경〉 을 주창했던 슈바이처는 일찍이 이러한 점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 없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려는 것은 감정을 윤리학의 기초 로 삼으려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다. 우리는 간략하게나마 그러한 시도들이 감정 자체에 대해서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와 그 것들이 감정을 도덕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들을 밝혀보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시도들도 윤리학적 전통과 다른 관련 과학들의 전 통과 무관하게 갑자기 돌출되어 나온 것은 아니며, 나름대로 윤리학 과 과학적 전동에 맥을 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우리는 감 정의 윤리학이 전통적으로 감정을 윤리학에서 배제하려는 주장들 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하고 있는지도 아울러 밝히려고 한다. 칸 트를 비롯해서 감정을 윤리학에서 배제하려고 하는 철학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66) (1) 감정은 순간64) John Sabini and Maury Silver, "Emotions, Responsibility, and Character,"Responsibility, Character, and the Emotions. ed. Ferdinand Schoeman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 pp. 166-ln.
65) Richard Rorty, "Human Rights, Rationality, and Sentimentality," The Yale Review, vol. 81 (1993) , pp. 1-20.66) Leo Montana, "Understanding Oughts by Assessing Moral Reasoning or Moral Emotions," The Moral Self ed. Gil C. Noam and Thomas E. Wren (Cambridge: The MIT Press, 1993), p. 295. 칸트가 윤리학에서 배제하 려고 하는 것은 이익과 욕구, 그리고 심리적 경향성이라고 할 수 있는 충동, 감정 , 정념을 모두 포함한다. Immanuel Kant, Groundwork of the Metaphysics of Morals, trans. H. J. Paton (New York: Harper Torch Books, 1964).
적이고, 변화 무쌍하고, 변덕스러운 것이다. (2) 따라서 감정적 으로 동기화된 행동은 신뢰할 수 없고, 비일관적이며, 무분별하 고, 심지어 불합리한 것이기까지 하다. (3) 어떤 상황의 선악과 정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감정으로부터 격리시켜야 만 한다. (4)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수동적이 되므로 책임을 질 수 없다. (5) 감정은 정한 상황에 서의 특정한 사람에 관련되기 때문에 이성적 도덕에 요구되는 일 반성과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감정은 원칙에 근거하지 않는 〈편파성〉을 드러낼 뿐이다.
많은 저작들이 있기는 하지만, 감정의 윤리학의 최근 면모에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가 주목하려는 저작은 다음 세 가지이다. 즉 소우사의 감정의 합리성 (1987), 기바드의 현명한 선택과 적절한 감정 (1990), 오클리 Oakley의 도덕성과 감정이 그것들 이다.67) 본격적인 감정의 윤리학이라고 할 만한 것은 기바드와 오클리의 저작 둘이나, 소우사는 감정의 인지주의설 중 윤리학 과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는 감정의 합리성과 평가적 신념 evaluative belief을 기본축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의 저작을 언급하려고 한다. 물론 여기서 이 세 저작들을 세세히67) Allan Gibbard, Wise Choices, Apt Feelings: A Theory of Normative Judgment (Cambridge : Harvard University Press, 1990} ; Justi n Oakley, Morality and Emotions (London : Routledge, 1992)
논한다거나 그것들을 서로 비교하려는 과욕을 부릴 수는 없다. 우리의 논의는 다만 전통적으로 감정이 윤리학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이러한 저작들이 어떻게 답변하는지를 살 펴보려고 하는 제한적 입장을 가질 뿐이다.
감정의 인지적 기초에 대한 인정은 감정의 합리성에 대한 관심 을 당연히 불러일으킨다. 전통적으로 감정은 불합리할 뿐만 아니 라 합리적인 것과 무관한 것으로도 간주되어 왔다. 그 이유는 감 정을 단순한 느낌이나 생리적인 과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 나 분명히 감정은 두통과 같이 합리적인 것과 무관한 것은 아니 다. 우리가 분노와 같은 감정을 가지게 되는 데는 어떠한 이유가 존재한다. 물론 그것이 정당한 이유인가 아닌가는 또 다른 문제 이댜 따라서 감정을 비합리적인 것이나 불합리한 것으로 보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전혀 또는 대부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으 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감정 자체는 합리적인 것이 될 수 있 다.68) 따라서 감정은 적절하거나 부적절하거나, 분별이 있거나 무분별한 것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러한 구분은 감정의 발현이 배경적 상황에서 볼 때 수용될 만한 것인가의 여부뿐만 아니라 (여기서 사회적 상황은 중요한 것으로 작용한다), 개인의 지각과 신 념과 욕구에 관련해서도 내려질 수 있다. 감정이 적어도 부분적 으로는 인지적인 요소를 포함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신념과 의도 를 평가하는 데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인식적 윤리적 기준을 통 해서 감정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 우리는 〈그 감 정은 상황에 맞는 것인가? 그 감정은 사실을 고려에 넣고 생긴 것인가? 그 감정의 배경이 되는 인식과 평가는 공정하고 합리적 인가 ? 〉라는 일련의 질문을 유의미하게 제기할 수 있다. 소우사68) Calhoun and Solomon, What is an Emotion ? , p. 31.
에 의하면, 우려는 감정의 근거들을 포착하지 않고서는 감정을 이해할 수 없고, 그러한 근거둘은 나아가서 우리들에게 평가의 토대를 제공해준다.69) 여기에 관련된 최근의 논쟁들은 그러한 근 거들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며, 또한 감정의 합리성이 보다 충 분히 숙고적이고, 명료한 행위들의 합리성과 비교될 만한 것인지 의 여부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면 감정의 합리성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논의 를 배경으 로 해서 소우사의 입장을 알아보자. 소우사는 〈감정은 철학의 중 추를 형성한다. 그것은 인식론, 존재론, 철학적 심리학, 그리고 윤리학의 문제들로 우리를 인도한다〉 고 서두를 연다.70) 그의 감정의 합리성』은 합리적 삶에 있어서의 감정의 위치를 정하는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전다. 그는 합리적 삶에서의 감정의 도구적 역할을 담구함으로써, 감정이 어떻게 그러한 삶의 한 구성 요소 가 되는지를 밝힌다. 인간은 자신과 자신의 환경에 대한 많은 정 보들에 노출되어 있고 또한 그것들을 필요로 하지만, 그것들은 너무나 과다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특정한 신념과 욕구를 형성하고 결정을 내리고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서 대부분의 것들 을 무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소우사에 의하면, 감정은 정보의 〈현저성 salience〉을 조건화함으로써 과도한 정보로부터 우 리들이 마비되는 것을 방지한다.71) 이것이 바로 감정이 합리적 삶에 공헌하는 주요한 기능이다. 이러한 공헌은 생물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감정은 생물학적으로 유용한 것인데, 왜냐하면 감69) 이와 비슷한 견해를 피력한 저작은 Patricia S. Greenspan, Emotions& Reasons : An Inquiry into Emotional Justification (New York : Routledge, 1988).
70) Ronald de Sousa, The Rationality of Emotion, p. 1.71) Sousa, 같은 책 , p. 196.정은 많은 정보에 노출된 유기체가 정보를 통제하고 조철함으로 써 이 세상에 잘 대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 은 감정의 다윈적인 선택을 설명해준다.
소우사에 따르면, 본질적으로 또는 비도구적으로 합리적인 감 정들도 존재한다. 감정은 대략적으로 언어가 학습되는 방식으로 학습된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의 죽음 등의 범형적 사례 paradigmcases or scenarios 에 친숙해짐으로써 , 어떤 특정한 감정형태 들의 독특한 대상들과 그러한 대상들에 대한 반응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의 특정한 감정이 본질적으로 합리적이 되는 경우 는, 그 감정의 대상이 세계의 어떤 실재적인 대상일 때, 그 대상 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 적합한 경우이다. 우리의 감정은 암묵적 으로 가치론적 속성을 지향적 목표가 되는 대상에 부여한다. 본 질적으로 합리적인 감정들은 그러한 목표들에 관련된 대상의 속 성들에 대한 일종의 지각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어떤 감정들은 단순한 주관의 두영이 아니라, 이 세계의 실재적 속성에 대한 〈객관성의 포착〉이 된다.72) 이것은 소우사가 플라돈의 대화편 『유티프론 Eu yphron 』에 의거해서 〈유티프론 문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신뢰감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신뢰의 감정이 생기는 것 은 우리의 주관적인 신뢰감을 단순히 두영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뢰의 대상이 신뢰할 만한 것이기 때문에 신뢰의 감정이 생긴다 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면, 천인공노할 사건은 분명히 모든 사 람을 노하게 하는 어떤 공통적이고 객관적인 도덕적 실재성을 가 지고 있다는 것이다.소우사가 주장하는 감정의 객관성은 윤리학에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것은 이모우티비즘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72) 같은 책, p. 201.
서 일종의 도덕적 실재론 moral realism 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73) 또한 그것은 합리적 감정이 지니고 있는 실재론적인 가치 적 속성을 이해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도덕적 지평을 확장시키고 있다. 그리고 감정의 기초에 놓여 있는 범형적 사례는 감정이 사 회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소우 사는 특정한 시간과 환경에서 결국 개인이 감정의 담지자가 된다 는 점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일종의 도덕적 개인주의로 환원한다. 소우사는 우리의 감정은 최종적으로 〈피할 수 없는 비 극〉이 도사리고 있는 이 세계의 가치론적 측면을 적나라하게 드 러낸다고 본다. 〈모든 개인성이 함축하고 있는 죽음, 상대성, 그 리고 고독은…… 우리의 감정적 삶의 본질적 요소이다. >74) 우리 가 그러한 비극적 세계에서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 우리는 나름대로 계획도 세우고 결단도 내린다. 그러한 계획과 결단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는 합리성의 기준이 요구된다. 소우 사는 그러한 합리성의 기준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감정적 삶은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소우사의 이러한 결론은 불안과 부조리 등 감정의 어두운 측면을 강조했던 실존주의자들 을 연상시킨다. 물론 실존주의의 전형적인 비합리주의를 소우사 는 배척하고 있기는 하지만.
감정의 합리성은 철학사에 중요한 문제로 항상 간주되어 왔던 감정과 윤리학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철학의 중심 무대로 옮겨 놓는다. 윤리학적으로 〈감정은 어떤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또한 도덕성과 감정이 가지고 있는 상호 관련성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전면에 부각된다. 이러한 문제로부터 기바드의 『현 명한 선택과 적절한 감정』은 출발한다. 기바드는 이모우티비즘에73) 갈은 책 , p. 304-305.
74) 같은 책 , p. 330.서 유전된 비인지주의를 재구성하려고 한다. 물론 이모우티비스 트들과 달리 기바드에게서 도덕을 훼손하려거나 감정 자체에 손 상을 가하려는 의도는 전무하다. 그의 입장은 소위 〈규범 표현적 분석 norm-expressivistic analysis 〉으로서 도덕성뿐만 아니라 합리성 전반에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합리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을 허용하는 규범을 우리가 수용한다는 것을 표현한다〉 는 것이다.75) 이러한 규범 표현적 분석은 합리성에 대한 실재론 적 입장——-즉 어떤 것을 합리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에 하 나의 독특한 속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하는 소우사식의 인지주의 ―울 거부한다. 그런데 기바드는 전통적인 이모우티비즘적 비 인지주의와도 약간 입장을 달리한다. 죽 〈도덕 판단은 감정이 아 니라 어떤 도덕적 감정을 갖는 것이 합리적인 것인가에 대한 판 단이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기바드는 규범 표현적 분석을 전화론적 생물학의 배경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인간의 문화적 삶에 있어서 규범의 위치를 전단한 다. 그에 따르면, 규범은 인간의 상호 협동을 촉진시키기 위한 삶의 전략이다. 그런데 규범은 행동뿐만 아니라 감정에 동시에 관련됨으로써 도덕적 판단의 형태를 띠게 된다. 여기서 기바드는 규범의 기초적 감정으로서 죄책감과 분노를 든다. 〈어떤 한 사람 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그르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 행위에 대해 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합리적이고, 또한 그 사람의 행위에 대 해서 다른 사람들도 분노를 느끼는 것이 합리적일 때 오직 그때 뿐이다(……if and only if……).>76)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직관적 으로 느낄 수 있는 생각은 죄책감이나 분노를 느끼는 것 그 자체 가 도덕적 판단을 형성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죄75) Gibbard, 앞의 책 , p. 7.
76) 같은 책, p. 42.책감을 느끼지만 아무런 잘못도 안 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 이다. 기바드는 이러한 경우 그가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사 리에 맞지 않으므로 그러한 감정은 비합리적이라는 것이다. 따라 서 감정도 적절하거나 적절하지 않을 수 있으며, 도덕적 판단은 어느 때 죄책감과 분노가 적절한지에 관한 판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죄책감과 분노의 느낌이 도덕적 판딴에 대해서 필요충 분 조건이 된다는 그의 주장은 많은 반론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리는 불필요한 죄책감에 시달릴 수도 있고, 과도하게 분노할 수도 있다. 또한 도덕적으로 사악한 의도를 가전 분노도 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반론은 순환성의 문제이다. 우 리가 어떤 사람이 비난을 받아서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것과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한 생각 은 그 사람이 잘못했다는 신념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신념 이 규범적 판단의 내용을 형성하는 것이다. 기바드는 도덕적 판 단을 설명하기 위해서 죄책감과 분노에 호소하고 있지만, 그는 우리가 그러한 죄책감과 분노가 적절한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 해서는 이미 그 사람이 잘못했다는 도덕적 신념에 대한 판단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셈이다.77) 이 러한 순환성의 문제는 그의 비인지주의적인 규범 표현적 분석 전 체에 심각한 손상을 가한다. 그렇다면 이모우티비즘을 합리성을 통해 재구성하려는 그의 시도는 실패한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77) 순환성의 문제를 기바드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Justin D'Arms and Daniel Jacobson, "Expressivism, Morality, and the Emotions," Ethics, vol. 104 (1994) , pp. 739-763 참조. 그리고 우호적으 로 다루고 있는 것은 Simon Blackburn, "Wise Feeling, Apt Reading," Ethics, vol. 102 (1992) , pp. 342-356 참조.
이러한 단정을 내리기 전에 좀더 포괄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양심, 양심의 가책, 죄책감, 그리고 분노 가 도덕성 (또는 도덕성의 학습, 형성, 표현)에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현대 의 다양한 심리학적 이론들에 의해서도 기본적으로 인정되고 있 다. 우리는 폭 넓은 학제적인 연구를 통해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78) 기바드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중요 한 것은 감정이 문화 제한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 문화권에서는 감정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다. 그는 감정의 합리성과 그것에 의거한 도덕적 판단은 결국 지 방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모든 문화권에 통용되는 도덕적 판단은 없다는 지방주의parochialism를 주장하고 있다.79)
오클리의 『도덕성과 감정』 은 감정의 합리성과 도덕성의 차이를 인정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 속에서 감정의 윤리학을 구성하 려고 한다. 그러면 오클리는 감정의 합리성과 도덕성이 어떤 점 에서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는지를 알아보자.80) 우리는 부당한 피 해를 보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경우도 있지만, 자기의 입장과 이 익을 확보하기 위해서 과도하게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첫번째 의 분노는 합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타당하지만, 두번째의 분 노는 합리적으로는 타당하지만 도덕적으로는 타당하지 않다. 또 한 우리는 도덕적으로는 타당하지만 합리적으로는 타당하지 않은 감정, 예를 들어 모든 사람에 대한 형제애를 품을 수도 있다. 오 클리는 두번째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도덕성과 합리성은 차이78) Carroll E. Ezard, "Guilt, Conscience, and Morality," Human Emotions, ch. 16(New York : Plenum Press, 1977).
79) Gibbard, 앞의 책, pp. 201-203.80) Oakley, 앞의 책 , p. 41.점을 보이기 때문에 감정의 합리성이 감정의 윤리학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오클리의 생각은 어떻게 평 가될 수 있는가? 우리의 주요 관심은 합리적으로는 타당하지만 도덕적으로는 타당하지 않거나 무관한 감정의 문제이다. 우는 아이 떡 한 개 더 준다〉라는 말과 〈눈물은 여자의 무기이다 라는 말을 잘 음미해보자. 의도적으로 운다는 전제 아래, 것들은 (물질적 자원이나 타인의 관심과 위로와 은 정산적 고려를 막론하 고 감정을 통해서 자기의 분배적 입지 를 강화하려 ) 위협적 이득의 전략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것은 분배적 정의론에서 자주 언 급되고 있는 것으로, 소위 〈타인으로부터의 이중적 고려 double counting〉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중적 고 려를 위한 전략적 울음은, 마치 늑대가 온다고 거짓말하는 소년 의 말을 사람들이 처음에는 믿지만 한 번 속고 난 다음부터는 믿 지 않듯이, 지속적으로 효과적이 아니다. 계속해서 우는 아이는 떡이 아니라 볼기를 맞을 수도 있으며, 계속 우는 여자는 불쌍 사납고 어찌 해볼 수 없는 막무가내로 사람들의 눈에 날 수도 있 기 때문이다. 그때 아이와 여자는 울음을 그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감정에 있어서 도덕성과 합리성은 궁극적으로 상호 수령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러한 주장은 앞에 서 언급한 고티에와 기바드가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러한 문제는 자기 이익의 극대화를 기반으로 하는 합리적 선택이 론이 도덕의 기초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현대 윤리학의 중 차대한 문제에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81)
81) 필자의 입장은 Jung Soon Park, Contractarian Liberal· Ethics and the Theory of Rational Choice (New York : Peter Lang Publishing Co., 1992} 참조.
오클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의 윤리의 관점에서 윤리학에서 감정의 위치를 정립하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에서, 도덕적 덕목은 우리에게 올바른 행위를 할 것을 요 구할 뿐만 아니라 적절한 대상을 향한 적절한 정도의 올바른 감 정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82) 오클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덕의 윤 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행복eudaimonia 에 있어서도 감정의 위 치는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본다. 그는 감정을 〈인식, 욕구, 정 서성 이라는 세 요소가 역동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복합체라고 주 장하면서, 그의 논의를 전개한다. 83) 첫째, 동정심과 공감과 같은 이타주의적 감정은 다른 사람의 처지와 경험을 이해하고 기억하 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과 필요 에 대해서 보다 감수성 있고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타인을 도와줌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뿌듯한 감 정을 느낄 수 있다. 둘째, 감정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보다 강하 고 심원하게 결속시킬 수 있다. 그러한 감정적 결속은 안정감과 환희, 즉 삶의 맛을 준다는 것이다. 사랑과 우정과 같은 감정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무연고적 삶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 다. 사랑과 우정과 같은 감정은 타인을 하나의 인격체와 도덕적 중요성을 가전 존재로 인식하는 능력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셋째, 감정은 다른 사람과의 결속을 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추구 하는 이상과 목표에 강한 헌신을 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이 상에 감정적으로 결속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조그만 어려움에 도 그것을 포기하기가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고 해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있어서 순수성과 고결성을 상실하
82) Oakley, 앞의 책 , p. 2 ; Aristotle, The Nichomachean Ethics, Book II, Chapter 6, 1106b15-29.
83) Oakley, 앞의 책 , p. 6기가 쉽다는 것이다. 넷째, 타인과 우리의 이상에 관한 헌신적 감정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능력은 우리 자신에 대한 자긍감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클리는 이러한 네 가지 주장을 좀 더 포괄적으로 해석해 보자. 기본적으로 오클리의 주 장들은 우리의 상식적 신념, 즉 고통은 나누면 감소하고 환희는 나누면 증가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혼 히 비도덕적 혹은 도덕과 무관한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분노, 슬 픔, 그리고 좌절도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과 타인과 우리의 이상 과 자긍감을 염려하고 배려하는 데에서 온다는 점이다.84)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전혀 염려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불행한 감정들을 피할 수는 있겠지만, 그때 우리 인생에서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한 감정들을 단절하려고 노력했던 많은 신비주의적, 종교적 시도들의 최종적 목표인 엑스터시나, 니르바나 nirvana 도 결국 어 떤 감정 상태가 아닌가?
더 나아가서, 오클리는 어떤 사람의 인격이 그 사람이 가전 감 정을 통해서 도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감정은 행운과 불운처럼 단순히 닥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엄 밀한 구별을 하는 것은 어렵지만, 감정은 확실히 〈우리의 상황적 특징이라기 보다는 우리 자신의 특칭〉이라는 것이다.85)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지닌 감정을 통해서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 다. 〈찬양을 받아 마땅하다〉 또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와 같 은 엄격한 기준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타인에 대한 존경84) Harry G. Frankfurt, The Importance of What We Care Abou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 Michel Foucault, The Care of the Self, The History of Sexuality, vol. 3. trans. Robert Hurley (New York: Vintage Books, 1988) 참조.
85) Oakley, 앞의 책, p. 180과 경멸을 통해서 그 사람이 가진 감정을 평가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후자의 기준이 아니라 전자의 기준을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감정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만 한다. 오클리는 물론 우 리가 우리 자신의 감정과 관련해서 수동적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의 감정이 초래할 반응과 결과가 어 떻게 될 것인지를 예견할 수 있고, 비록 성공을 확신할 수 없지 만, 그것들을 통제할 수 있는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 다. 86) 오클리는 예견과 통제적 조치의 가능성이라는 조건이 충족 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 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감정에 대해서 도 같은 방식으로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것이다.87) 즉 사람의 인 격은 그 인격이 가전 감정에 관련해서 평가될 수 있는데, 그러한 평가는 존경과 경멸의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찬양을 받아 마땅 하다〉거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는 기준의 관점에서도 가능하 다는 것이다.88)
86) 이것은 마치 일단 마약 중독이 되면 자신의 의지로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이 되지만, 그러한 상황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면, 마약 중독 의 초기 조건을 마련한 것은 자신의 책임이 된다는 입론과 비슷하다. 윤리시즈가 사이렌의 유혹을 피하기 위해서 를 막고, 부하들에게 스 스로를 돛대에 묶으라고 명령한 것은 이러한 전략의 원형으로 흔히 인 용되고 있다. Jon Elster, Ulysses and the Sirens : Studies in Rationality and Irrationality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9) .
87) Oakley, 앞의 책 , p. 247. 감정에 대한 책임은 이미 사르트르와 솔로 몬에 의해서 제기된 바 있다. J. P. Sartre, The Emotions: Sketch of a Theory, trans. B. Frechtman (New York : Philosophical Library, 1948 : origi nal 1939) ; R. C. Solomon, "Emotion and Choice," The Review of Metaphysics, vol. 12 (1973) , pp. 210-232.88) 감정의 평가에 관한 전반적인 논의는 Steven L. Loss, "Evaluating the Emotions," The Journal of Philosophy, vol. 81 (1984) , pp. 309~326 참조.오클리는 감정의 욕구적 측면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것이 의지 의 문제와 어떤 연관을 갖는지를 납득할 만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이것은 행위뿐만 아니라 감정에 관한 도덕적 책임과 자유의지의 문제를 야기하는데, 이 문제는 유구한 철학적 전통을 가전 복잡한 문제이다.89) 더욱 문제를 복잡하게 하는 것은 감정 에도 박약 emotional akrasia 의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떤 감정은 그것을 품을 이유와 근거가 사라졌거나 잘못된 것으로 밝 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유지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 민족 은 〈한 (恨)의 정서〉를 통해서 일찍이 이러한 감정 현상을 깨달아 왔다. 한마디로 말하면, 좋은 시절이 왔으니 이제 맺힌 한은 풀 려야 하지만 〈그래도 한은 남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감 정과 의지와의 관계, 그리고 그것들이 예견적 지성과 통제적 조 치의 선택과 실행에 관련된 실천적 이성과 갖는 복합적인 관계에 대해서 해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감정의 책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처음의 문제로 다시 돌아온 셈이다. 지정의(知情意)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한 구분은 몇 세기 전 아니 이천 년 전 과거의 퇴물에 불과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아직도 유력한 민간 심리학folk psychology인가? 윤리학에
89) Gary Watson ed., Free Wil (Oxford : Oxford University Press, 1982) . 최용철 옮김, 『자유 의지와 결정론』 (서울 : 서광사, 1991) 참조. 우리는 여기서 실존주의적 결단에도, 그리고 합리적 선택이론에서의 최종적 결정은 결단적 선택 resolute choice 이라고 주장하는 맥크레넨의 입장에 도 주목해야 한다. Edward F. McClennen, Rationality and Dynamic Choice : Foundational Explorations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또한 우리는 순수한 결단을 동해 감정을 극복하는 방식을 말한 바 있는 칸트에도 주목해야 한다. Immanuel Kant, "On the Power of Mind to Master Its Morbid Feeling by Sheer Resolution," The Conflict of The Faculties, trans. Mary J. Gregor(Lincoln :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79).
도 주지주의적, 주정주의적, 주의주의적 전통이 면면히 존재하고 있다. 지에도 정의적 요소가 있고 정에도 지의적 요소가 있고 의 에도 지정적 요소가 있다면, 우리는 지의 꿈 속에서 정의 꿈을 꾸고, 정의 꿈 속에서 의의 꿈을 꾸고, 의의 꿈 속에서 다시 지 의 을 꾸는 영겁회귀의 거대한 삼환 환몽(三環 幻夢)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삼환 환몽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정(情)은 오직 몽정 (夢精)뿐이거늘 ! 여기서 필자는 도로아미타불, 감정 공부 헛수고했다는 낭패감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음을 고백해야겠다.
5 이성과 감정의 윤리학적 통합과 그 과제우리는 서양 윤리학에서 이성과 감정의 위치에 대한 탐구를 주 인과 노예의 메타포라는 단초에서 출발하여, 서양 윤리학사를 절 취해 보고, 이모우티비즘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고, 합리적 선택 이론에서의 감정의 부차적 위치를 확인하고, 감정을 도덕의 기초 로 삼으려는 감정의 윤리학의 최근 면모를 안쓰럽게 살펴보았다. 우리는, 비록 딜레마는 남아 있고, 감정을 인식론적으로 이해하 기가 어렵다는 회의를 내비추기는 했지만, 이성과 감정의 전통적 이분법을 탈피하고 감정의 예종적 애로에 활로로 터주어야 한다 는 느낌이 들도록 논의를 진행하려고 했다. 서양 윤리학의 주인 과 노예의 이분법은 중국 철학에서는 이성으로 감정을 순화 혹은 통제하는 〈이리화정(以理化情)〉 또는 〈이성제정(以性制情)〉으로 나타난다. 동방이나 서방이나 감정의 애로 사항은 동일하다.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성과 감정의 전통적인 주인과 노예 의 이분법은 너무나 많은 폐해를 끼쳐온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철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교육을 담당하고 있으므로 그 교육적 폐해를 언급해 보기로 하자. 〈인식과 감정의 적대적 관계는 양자와 관계되는 모든 것을 왜곡시킨다. 그것은 과학을 기계화하고, 예 술을 감상주의화하는 한편, 윤리학과 종교를 정서와 비이성적인 헌신이라는 두 늪 속으로 빠뜨린다. 교육은 두 개의 기괴한 분야 로 분리된다――가슴이 없는 지식과 생각이 없는 감정. 90) 대부 분의 철학자들의 감정에 대한 태도는 그러한 교육적 비극을 영속 화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도덕적, 예술적, 체육적 정서 순화 교육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 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전인 교육education for homo totus 을 하 자는 것이며, 이성의 우세한 위치만을 강조하는 부분적 인간을 위한 교육 education for homo partialis 은 안 된다는 것이다 (심각한 논의 가운데 가볍고도 씁쓸한 농담이지만, 음악 들으면서, 수학 풀면 서, 손으로 연필 돌려가면서, 공부(工夫/쿵푸 ! )하고 있는 신세대 학 생들을 볼 때마다, 야 ! 재들이야말로 선생님들이 교육시켜 주지 않 는 〈지덕체의 동시적 함양〉을 스스로 체득하고 있구나 !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또한 우리는 억제되어야 할 감정과 정념이 있다는 것도 부인하 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감정들이 억제되어야 한다고 해서 감정 전체가 간단히 매도되어서는 안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서양 윤 리학사에서 감정의 위치는 다면성을 띠어 왔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즉 감정은 도덕의 적으로도, 도덕의 기초로도 간주되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양자의 결합 으로 간주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따라서 우리는 스토아 학파처럼 윤리학에서 감정 전체의 위치를 일괄적으로 문 제삼는 것은 무의미하고, 영국의 도덕감 학파처럼 동정심, 공감,90) Israel Sheffer, "In Praise of the Cognitive Emotions," Columbia Educational Review, vol. 79 (1977) , p. 201.
관용과 같은 도덕적 정조moral sentiments를 선별하여 도덕의 기초 로 삼거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각기 다른 감정들의 도덕적 위치 를 그것들의 중용적 수용 여부 aurea mediocritas 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 좋다고 느낀다. 우리는 감정 전체에 대한 보편론이 아니라 개별적 감정들에 대한 세세한 결의론(決疑論, casuistry)이 필요하 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감정의 도덕적 위치가 문화적 이데올로기 적 요소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점도 고려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 리는 특히 여성 해방론적 윤리학과 공동체주의적 윤리학이 (자기 이익의 추구라는 합리적 선택이론에 의거한) 자유주의 윤리학에 대 해서 제기한 비판을 감정의 관접에서 간략히 언급했다. 그러나 정의의 원칙과 권리가 여성적 배려와 연고, 그리고 공동체적 소 속감으로 완전히 대체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또한 불가 능한 일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도덕 철학에 있어서 이성과 감정 양자의 조화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화는 합리 적 선택 이론과 감정이 완전히 융합되지 않는 한 손쉽지는 않을 것 같다. 감정의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지배에 관해서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이 있다. 그것은 부도덕한 감정들의 전형인 인종 차별, 계층 차별, 성 차별, 지역 차별에 관련된 감정들이다. 우리가 고 질적으로 여기는 지역 감정도 감정에 대한 그러한 지배 현상의 한 전형이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가 모두 어느 정도 이러한 부도덕한 감정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공동체 주의가 유독 애국심과 공동체적 소속감등 우호적인 도덕 감정만 을 내세우면서 자유주의는 추상적 권리와 원칙에만 근거하고 있 다는 비판을 전개하는 것은 편파적이라고 느낀다.감정의 인지주의는 어느 정도 감정의 윤리학의 등장에 대한 견 인차적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의 동기를 유발시키고구체적인 행동 및 삶의 양식을 꾸려 나가는 주요 원천이 합리적 이성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인간의 감정은 이제 중심적인 연구 대상이 되었다. 감정은 인간 정신의 사소한 파생 물이 아니고 기억과 판단, 평가와 학습 동 고도의 이성적 사고와 도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감정의 인지주의가 하고 있는 주장이 다. 그러나 감정의 인지주의의 배경에는 인간들이 자신 의 감정 에 대해서 염려하는 〈나르시시즘적 배려 가 자리잡고 있음을 아 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91)
91) 최경도 옮김, 『나르시시즘의 문화』 (The Culture of Narcissism, by Christopher Lasch) (서 울 : 문학과 지성사, 1989) , p. 287. 〈이 책에서 저 자는 과도한 억압을 받고 도덕적으로 경직된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경 제인 economic man'--그는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제도와 관습의 숭배 자이다 --이 오늘날에는 근심에 시달리고 내면적 공허감으로 인하여 필사적으로 의미 있는 삶을 찾아 헤매는 충동적인 ‘심리인 psychological man’으로 변모했다고 말한다. 이 부르주아적 개인주의의 최종 산물인 ‘심리인에게는 단지 현재만이 중요할 따름이며 항상 즉각적인 자기 만 족을 요구하면서도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상태에서 삶이 영위된 다.〉 감정에 대한 연구가 지난 20년 간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현대인 의 나르시시즘적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어쨌든 우리가 도덕의 감정적 동기를 무시한다면 윤리학은 감 정적 동기와 형식적인 도덕판단과 의무 사이의 〈자아 분열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92) 우리가 감정의 윤리학을 새롭게 구축하 려는 최근의 시도들을 논의했을 때, 그것들을 평가하기 위한 대 립적 배경으로 칸트를 위시한 의무론적 보편주의자들이 감정이 도덕적 기초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다섯 가지의 이유를 들었 다. 그 중 감정의 〈변덕성〉과 〈불합리성〉은 감정이 습관을 통해 서든지 헌신을 통해서든지 지속적 성향으로 될 수 있다는 가능성
92) M. Stocker, "The Schizophrenia of Modern Ethical Theories," Journal of Philosophy, vol. 73 (1976) , pp. 453-466.
과 감정이 합리적 이유를 가질 수 있고 또 그 이유가 평가될 수 있는 상황이 있다는 것으로 답변이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도덕 적 상황의 정확한 판단을 위한 감정의 배제〉는 오히려 감정적 배 려와 관심이 없이는 〈나 몰라라〉하는 수수방관적 태도를 취할 수 가 있다는 점과 정확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오히려 다른 사람의 처지에 감정 이입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답변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의 윤리학이 완전하게 해결하지 못한 문제로서 감정의 〈특수성〉과 감정의 〈책임에 관련 된 자유의지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감정의 윤 리학이 당면한 가장 심각한 방법론적 난제를 언급했다. 즉 감정 을 도덕적 기초로 할 때 감정 자체가 도덕적 기준을 마련하지 못 하기 때문에, 어떤 선재적인 도덕적 기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는 〈순환성〉의 문제이다. 감정의 윤리학에 관련된 이러한 세 가 지 문제들, 즉 자유의지의 문제,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 그리 고 방법론적 순환성의 문제는 철학의 고전적인 문제들이므로 여 기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려고 하지 않겠다. 다만 감정의 득수 성에 관련된 문제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접을 지적하 겠다. 첫째는 기바드가 주장한 것과 갇이 보편주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감정의 특수성을 옹호하는 것이다. 윤리학적 보편주 의는 탁상공론에 불과할 뿐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감정적으로 연 계된 특수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소크라데스는 『유티프론』에서, 공자는 『논어 에서 각각 살인을 저지른 아버지를 처벌하려는 자 식에 경악한 바 있다. 동양철학의 전동을 구체적으로 빌려 말하 면, 묵자의 무차별적 경애설(兼愛說)은 맹자의 차등적 인(差 的 仁)으로 충분히 비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정의 특수성 이 몰고 오는 폐해도――-정실주의, 충과 효의 권위주의적 강조,
연고주의, 지역주의, 천인척 등용주의, 가족적 이기주의 등 __ 적지 않은 실정이므로 이러한 문제를 감정의 윤리학이 어떻게 해 결할 수 있는지는 중대한 과제가 된다.93) 둘째는 감정이 꼭 특수 적인 것이 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동정심과 공감에 근 거한 흄이나 루소의 도덕감 이론은 각각 공평한 동정적 관망자론 과 보편의지론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서양 윤리학사에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보편주의이다. 이는 이미 언급했듯이 고 전적 공리주의의 방법론적 기초로서 흄의 공평한 동정적 관망자 론을 비판했던 롤즈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 칸트적 보편화 가능성의 원리를 규정주의의 중요한 방법론적 정 초로 삼고 있는 헤어 Hare 에 의해서도 확증된다. 그는 타인의 위 치에 우리 자신을 이입시키는 〈동정적 상상력〉이 없다면 보편화 가능성의 원리는 수용되기 어렵다는 것을 분명히 한 바 있다.94) 이러한 동정적 상상력은 기독교적 황금률과 공자의 충서지도(忠 怨之道)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요구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문제들을 혼란스럽게 열거만 했지,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 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엄습해온다. 무지를 더 큰 무지로 율(律) 하는 것이라! Ignotum per ignotius. 이 논문은 기껏해야 감정 공 부 좀 더하자는 하나의 감정 표현에 불과할 뿐, 감정에 대한 인 식론적 윤리학적 문제를 이성적으로 명쾌하게 해석하거나 해결하 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라는 감정적 합리화로 위안을 받아야겠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감정이 오랫동안 철학에서 배제됨으로써 우리는 이성과 감정에 관한 전통적 주인과 노예의93) 이러한 관점에서 주목을 끄는 논문은 John Cottingham, "Partiality, Favoritism and Morality," The Philosophical Quarterly, vol. 36 (1986) , pp. 357-373 참조.
94) R. M. Hare, Freedom and Reason (Oxford : Clarendon Press, 1963).이분법에 의거한 치유술로서의 철학적 윤리학의 공헌도 지켜 나 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95) 20 세기를 정신 분석과 심리 치 료의 세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지만, 철학은 리어왕처럼 자신의 영지를 정신 분석학과 심리학 등 다른 인접과학들에게 모 두 빼앗기고 스스로의 감정도 타인의 감정도 알지도 못하고 치유 하지도 못하는 버림받은 〈만학의 왕〉이 되었다. 감정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는 철학자들의 감정론은 이제 상식에 되어버린 뇌의 양반구 역할분담 이론, 즉 이성은 뇌의 좌반구에, 감성은 뇌의 우반구에 자리잡고 있다는 뇌신경 생리학의 정설(가 설?)을 말없이 따르고 있는 것일까? 감성의 철학을 위해서 나 의 오른쪽 반쪼가리 뇌만을 지긋이 눌러나 볼까부다.
최근에 임상 철학과 철학적 상담의 부활을 통해서 철학의 유구 한 치유적 전통을 부활하려는 시도가 있어서 주목된다.96) 임상 철학의 가능성은 어떤 면에서 철학이 감정을 얼마만큼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 다. 철학자들은 대개 초연하고 엄숙하고 목석같이 무표정한 얼굴 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누구보다도 정신적 위안 특히 감정적인 위안과 카타르시스가 필요한 사람들이다.97) 한국의 철학자들은95) Martha C. Nussbaum, The Therapy of Desire : Theory and Practice in Hellenistic Ethics (Princeton :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2) ; Jerome Neu, Emotion, Thought & Therapy : A Study of Hume and Spinoza and the Relationship of Philosophical Theories of the Emotions to PsychologicalTheories of Therapy (London : Routledge & Kegan Paul, 1977) .
96) 자세한 소개와 논의는 Shlomit C. Schuster, "Philosophy As If It Matters : The Practice of Philosophical Counseling," Critical Review, vol. 6 (1993), pp. 587-599 참조.97) 위안 문학으로서의 철학은 안티폰 Antiphon 이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는 철학사를 통해 익히 찰 알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 극을 통한 영혼의 정화〉보다 엄밀하게는 〈감정의 정화 catharis〉, 그리고 보에시우스 Boethius의 〈철학의 위안〉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환락의 도시 서울에서, 위안부를 찾아 육체로 파고 드는 보통 사람들보다도, 또는 기쁨조가 필요한 이상한 나라의 영도자보다도, 청천벽력처럼 다리가 무너져 분통이 터지는 사람들보 다도 더 심각하게) 어떤(?) 위안을 찾고 또한 그러한 위안이 절대 로 필요한 사람들이다. 잘못된 시대의 잘못된 환경에서 철학함으 로써 스스로를 의기소침하고 능력도 없는 〈못난이 학자 Invita Minerva 〉로 자조하는 회색빛 기분에 젖어 있는 것이 우리 철학자 들의 숨길 수 없는 감정적 실상이 아닌가? 우리들은 피할 수 없 는 인생의 비극을 깊이 절감하고 철학에 뛰어든 것이 아니었던 가 ? 우리들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철학이 주는 무 게로 지탱해 보려고 한 것이 아니었던가? 이제 실존주의적 감정 은 단순히 병리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 되었는가? 철학의 시작은 〈경이감 Taumazein, Staunen 〉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 철학자들 의 삶에는 아무런 경이감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도 아무런 경이감도 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무표정한 〈젊은 철학자들의 자화상〉은 서서히 일그러져 가고, 그 표정 속 에는 〈성난 얼굴로 돌아보는〉 또 다른 얼굴이 숨겨져 있다. 그 숨겨진 성난 얼굴의 의미는 무엇인가? 다윈은 인간과 동물의 얼 굴 표정은 감정의 전화론적 표정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98) 철학 자들이여 ! 우리들의 자화상에 어떠한 감정의 어떠한 전화론적 표정을 남길 것인가?
역사의 종언을 부르짖고 있는 후쿠야마 Fuku ama 는 헤겔적인 상호인정 두쟁과 플라돈적 기개thymos 가 세계사의 원동력이 되어 왔다고 주장한다.99) 그리고 역사의 종언 시대에는 아마도 권태감98) Charles Darwin, The Expression of Emotions in Man and Animals (London : Murray, 1872).
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것을 조심스럽 게 지적한다. 권태감, 그렇다 ! 기나긴 철학 논문을 읽은 뒤에는 언제나 권태감이 바늘의 실처럼 따라온다. 노래방에라도 가야겠 다. 그리고 감수성 풍부하고 혈기방장한 몇몇 철학자들과 어울려 감정의 위대한 해방자인 술의 신을 찬양하는 바커스의 오르지 Bacchanalian Orgy 라도 벌려야겠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소크라데스여, 노래하라 ! practice music ! 〉고 강권한다. 공자는, 니체의 권고도 없이, 이미 천 백년 전에 노나라 노래판에 출입 할 줄 알았던 이성과 감성의 조화자가 아니었던가 ! (論語,述而 : 공자께서 남과 같이 노래하다가 상대가 찰 부르면 반드시 되풀이 하도록 부탁하고 이에 합창하셨다/子 而善이어든 必使反之하시 고 而後 之러시다). 또한 논어 는 학문과 천구와 자존감이 우리 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는가 ! 또한 왕양명이 좋 아했던 대학』 전6장(傳六章)의 그 유명한 구절-성의(誠意) 는 〈악취를 싫어하듯 호색을 좋아하듯 (如惡惡吳 如好好色)〉 하면 저절로( ? ) 이루어진다――-도 공자는 말하지 않았던가 ! 물론 성리학자들은 공자가 과연 도덕의 선정주의( 情主義)를 옹호했 겠느냐고 화를 내면서 다른 해석을 시도하겠지만. 그러나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면, 서양 철학사에서 죽어버린 이모우티비즘을 옳 게 부활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헤겔, 니체, 십지어 칸트를 위시한 많은 철학자들이 〈열정 없이 어떤 위대한 일도 성취된 적이 없다〉는 금언을 애용한 바 있 다. 우리는 그 말이 도덕철학과 일상적인 도덕적 삶에서도 역시 지당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다음 구절을 끝으로 인용하면서, 감정과 감정의 몸을 밝히려는 그 욕망 자체로furor scribendi 말미99) Francis Fukuyama,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New York : The Free Press, 1992).
암아 괴로웠던 이 기나간 논의를 레테 강 건너의 망각의 피안이 나, 생사 고해 건너의 열락의 세계로 소멸시켜 버리는 방도나 ―아 ! 나의 영원한 여인 Ewig -Weibliche 은 어디에 ? ——-찾아 보아야겠다.100)
도덕에 관한 하나의 중대한 사실이 망각되어서는 안 된다. 도덕 에 열정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리고 도덕에 정신적 온기가 결부되 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경직되고 형식적인 정직성에 불과하 다. 전정한 도덕성은, 아름다움처럼, 지성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 다. 도덕은 안으로부터 타오르는 따스한 불길로서 고양된 타인에 대한 선의의 감정을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된다.100) E. W. Sinnott, The Bridge of Life (New York : Simon and Schuster, 1966) , pp. 181-182.
눈빛•낯빛•몸짓
―유가 전통에서 덕의 감성적 표현에 관하여1 〈몸〉은 왜 잊혀졌는가?이 글은 〈수신(修身)〉이라는 전통 철학의 주제를 초월적이고 추상적인 개념과 사변을 통하여 〈이념화〉하는 대신, 눈빛 • 낯 빛 • 몸짓과 갇은 생활 세계 안에서의 구체적이고 감성적인 표현 울 통하여 이해해 보려는 한 시도이다. 특히 이 글에서는 근대 서양의 이성 중심적 사유 방식의 영향아래 〈거대 담론〉의 차원으 로만 이해되어 오던 전통 철학에 대한 왜곡된 이해 방식을 해체 하고, 그 대신 이성 중심적 사유 방식의 그늘 아래서 억압 받아 오던 〈작은 이야기〉들을 복권시키려 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수신〉 〈예 (禮)〉 〈덕 (德)〉 등에 관한 전통 철학의 담론들이 단순 히 〈마음〉에 관한 담론이 아니라 동시에 〈몸〉에 대한 담론이었으 며, 단순히 〈이성〉에 관한 담론이 아니라 동시에 〈감성〉에 대한 담론이었음을 밝히고자 한다.유가 전통에서 〈몸〉은 〈수신〉과 관련하여 지극히 중요한 의미 를 지니고 있다. 유학자들이 수양을 이야기하면서 〈마음 수양(修 心)〉대신 〈몸 수양(修身)〉을 말하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몸〉이 전통 철학에서 차지해 온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몸〉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잊혀진 주제가 되어가고 있다. 몸〉은 왜 잊혀졌는가? 〈몸〉이 잊혀진 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 인이 있다고 여겨진다.
첫째, 근대 이후 동양의 철학자들이 전통에 뿌리박은 자기의 철학을 해오지 못한 데에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근대 서양 문물이 일본을 거쳐 우리 땅에 상륙하면서, 데카르트 • 칸트 • 쇼 펜하우어 학파의 관념론이 철학의 전부라고 생각한 동양의 철학 자들은 근대 서양 철학의 분류 방식에 따라 전통 사상을 재단하 고, 여기에 귀속될 수 없는 내용들은 비철학적이거나 미신적인 것으로 돌리고, 때로는 암묵적으로 방치해 왔다. 특히 〈몸〉은 〈정신〉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고 〈몸〉을 철학적 주제로 삼 기보다는 자연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돌리려는 근대 서양 철학 적 사고 방식은, 〈근대 서양 철학적 주제〉를 〈철학 일반의 주제〉 와 동일시하려는 동양의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몸〉은 철 학적 담론의 영역에서 소의되고 다만 한의사와 기공사 그리고 관 상술가의 전유물로 남게 되었다.특히 〈보편적 이성〉, 〈절대적 전리〉와 같은 〈거대 담론 meta narrative〉을 화두로 삼는 근대 서양의 〈토대 주의 foundationalism> 의 영향으로, 눈빛 • 낯빛 • 몸짓과 같은 〈작은 이야기〉는 철학적 관심의 영역에서 제외되게 되었다. 보편적 • 절대적 • 초역 사적 전리를 발견해 내려는 토대주의자들은 구체적 일상적 감성 적 세계 대신 추상적 • 초월적 • 이성적 세계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토대주의의 영향으로 동양의 철학자들은 이(理)/기(氣),심 (心)/성 (性), 유(有)/무(無) 등과 감은 〈거대 담론〉만을 철학 적 주제라고 여기고, 이러한 〈거대 담론〉들이 뿌리를 두고 있는 생활 세계에서의 〈작은 이야기〉들은 통속적 처세술이나 통속 심 리학적 격언과 같은 것으로 내쳐버렸다.
〈이성 중심주의 logocentrism〉의 범람 역시 〈몸〉이 철학적 탐구 의 영역에서 제의되게 만든 또 한 가지 원인이다. 물론 〈이성〉에 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특히 이성을 감성(감정)과 대립 시키고, 감성 (감정)은 이성에 비해 열등하고 부정확하며 믿을 만 한 것이 못된다고 치부하는 이성 중심주의는 눈빛 • 낯빛 • 몸짓과 같은 감성적 표현을 철학적 논의 밖으로 내몰은 주역 중의 하나 이다. 맹자는 〈측은지심이 없으면 사람도 아니다(無 隱之心, 人也)〉고 했으며, 『중용』에서는 감정의 중화(中和)를 강조했다. 주희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거경함양(居敬滿養)〉을 의쳤고, 조선 시대 우리의 선조들은 16 세기 중엽부터 수백 년에 걸쳐 〈사 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쟁을 계속하였다. 전통 윤리학의 핵 심 테제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어릴 때 부터 부모의 〈낯빛〉을 통하여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일인지 배워왔고, 1) 부모에게 간할 때는 부모의 〈낯빛〉을 살피면서 간곡 하게 충언을 하도록 배워왔다. 2) 눈빛 • 낯빛 • 몸짓이 공동체 안 에서 차지했던 의미와 역할은 이제는 다만 사회심리학의 분과 영 역인 〈대인지각 inter-personal perception〉의 분야에서 과학적 설명 의 모델을 통하여 관찰되고 기술될 뿐, 그 진정한 의미와 규범성 은 잊혀져가고 있다.1) 『論語』 「爲政」. 〈子夏 孝. : 色難. 弟子 , 有酒食,先生館, 曾是以爲孝平 >
2) 記』 「內. 」. 〈父毋有過, 下氣佑色柔 比恥 練若不入, 起敬起孝, 夏諒. >〈몸〉이 철학적 탐구에서 제의되게 된 또 다른 원인은 〈규칙 중 심 윤리학 rule-oriented ethics 〉의 범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규칙 중 심 윤리학은 행위자의 〈성품〉보다는 행위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보편적 〈규칙〉의 수립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입장에 따 르면, 인간의 행위는 금지/의무/(도덕과 무관한)자유재량의 세 영 역으로 나뉜다. 이러한 세 영역 중 도덕적 의미를 갖는 행위는 오직 금지와 의무의 두 영역뿐이고, 여기에 귀속되지 않는 행위 는 아무런 도덕적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따라서 희생 • 헌신 • 자 기수양 등과 같은 초의무적 행위는 물론이고, 눈빛 • 낯빛 • 몸짓 등과 같은 준도덕적 행위가 공동체 안에서 지니는 의미 역시 철 학적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규칙중심 윤리학의 범람과 함께 자유주의의 범람 역시 눈빛 • 낯빛 • 몸짓과 감은 〈몸적 표현〉이 철학적 담론에서 배제되게 만 든 또 다른 원인이라고 여겨진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가 다 른 어떤 가치보다도 선호되어야 한다고 하는 〈자유 선호의 예설 presumption in favor of liberty〉에 그 이론적 기반을 두고 있다. 자 유주의적 논의 구조에서, 한 개인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는 경우 는 오직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경우에 한해서이 다. 따라서 〈불침해의 원칙 the harm principle) 만이 〈의무〉와 〈금 지〉를 명시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되며, 여기에 저촉되지 않는 행위는 모두 개인의 자유 재량에 맡겨진다. 이러 한 자유주의 사회철학 안에서 〈도덕적〉이라는 의미는 곧 〈합법 적〉이라는 의미와 동일시되게 되며, 이는 곧 도덕이 더 이상 법 으로부터 독립되어 독자적으로 설 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도덕 의 사망선고를 의미한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그늘 아래서는, 희 생 • 헌신 • 자기 수양과 같은 초의무적 행위는 물론이고, 눈빛 • 낯빛 • 몸짓과 같은 준도덕적 행위는 아예 철학적 논의에서 밀려나, 다만 〈개인적 취향의 문제 a matter of personal taste 〉로 전락하 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자유주의의 급격한 확산,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도입, 그리고 도시화에 따른 급속한 익명화로 말미암아 전통적 공동체는 몰락 하게 되었고, 이러한 공동체의 몰락은 〈몸〉을 철학적 담론 밖으 로 내물게 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자본주의의 이념적 동반자 인 자유주의는 사회의 기본 단위를 사익을 추구하는 〈익명의 개 인〉들로 상정한다. 이러한 익명의 개인들 사이에는 직접적 접촉 을 통한 감정의 교환 대신, 냉철한 〈계산적 합리성 computational rationality 에 의거하여 개인의 이익을 확보하려는 계약론적 윤리 학이 생존 전략으로 부상하게 된다. 따라서 윤리학과 도덕학은 경제학적 처세술로 전락하게 되고, 눈빛 • 낯빛 • 몸짓과 같은 감 성적 접촉을 통한 유대감의 확립이나 감정의 교환은 〈비합리적〉 이라는 이유로 철학적 담론에서 추방되게 되었다.2 정신/육체의 통일로서의 〈몸〉왜 유가 전통에서는 수양을 이야기하면서 〈마음 수양〉 대신 〈몸 수양〉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유가 전통에서 〈몸〉은 과연 어 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몸〉의 동양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동양 바깥의 지적 전통에서의 정신과 육체의 문 제로부터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왜냐하면 나는 거울을 통해서만 나의 얼굴을 볼 수 있듯이, 동양적인 것은 동양 적이 아닌 것에 비추어 볼 때 그 특칭이 한층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근대 서양의 이원론적 전통에서는 〈나 self)를 정신과 육체로나누어서 고찰한다. 〈나〉를 정신과 육체로 나누어서 고찰하려는 태도는 존재의 세계를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범주짓는 형이상학적 이분법과 뿌리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존재의 세계를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나누려는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여기에 대응하는 인간의 지적 능력도 각기 이성과 감성으로 구분 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 인간 자신까지도 〈생각하는 것>으로서의 나와 〈물질적인 것〉으로서의 나로 구분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 도 아래서 몸은 자연과학적 실험과 관찰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마음은 심리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고착되게 된다.
이원론적 전통에서 〈몸〉은 생겼다 없어지는 것, 우연적인 것, 저급한 것으로 여겨지고, 오직 〈마음〉 혹은 〈이성 • 영혼 • 정신〉 만이 영원한 것, 필연적인 것,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이러한 지적 전통에 따르면, 참다운 인식을 보장해 주는 것은 육 체에서 독립한 순수 이성뿐이고, 이성이 제거된 육체는 불확실하 고 일시적이며 상대적인 감각자료를 수용하는 기관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원론적 전통에서의 육체는 아예 철학적 관심에서 제의 되거나 무시되어 버리고, 아니면 암묵적으로 방치되고 만다. 이 렇게 〈생각하는 것〉으로서의 나와 〈물질적인 것〉으로서의 나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한, 〈나=생각하는 주체=이성〉이라는 등 식이 성립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나〉와 〈몸〉 사이에는 이어질 수 없는 정신분열증적 단절이 생기게 된다.과연 몸과 마음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과연 생각하 는 주체로서의 마음만이 참된 나의 모습이며, 몸은 〈기수를 태우 고 다니는 말〉이나 〈선장을 태우고 다니는 배〉 혹은 〈영혼이 갇 혀있는 감옥〉에 불과한 것일까? 과연 나의 몸은 다만 물리화학 적 실험의 대상이 되는 〈살덩어리 korpe 〉에 불과한 것일까? 동양 의 지적 전통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도 해줄 수가없다. 만약 동양 철학에게서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대답을 기 대한다면 그것은 애당초 잘못 던져진 물음일 것이다.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신봉하지 않는 사람에게 〈정신/물질〉 혹은 〈마음/몸〉 사이의 관계 를 묻는 일은, 마치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에게 영 혼의 무게가 몇 그램이냐고 묻는 것과 같은 범주착오일 것이다.
맹자에게 있어서 마음(心)의 본질은 기(氣)이고,3) 장자에게도 정신(神)이란 정신적 속성을 띠는 〈신기(神氣)〉에서 드러난 〈현 이며 4) 범진(范鎭)에 있어서도 정신(神)은 결코 육체(形)와 분리될 수 없는 한가지 것으로, 촛농이 다하면 불꽃도 사라지듯 육체(形)가 시들면 정신(神)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5) 성리학자 들에게 있어서도 마음(心)은 기(氣)의 작용에 수반된 현상이며, 귀(鬼)/신(神) 역시 혼(魂)/백((魄)과 마찬가지로 기의 작용에 수 반된 〈현상〉에 불과하다. 동양의 지적 전통에 정신(神)/육체(形) 의 현상론적 〈속성 이원론〉은 있을지언정 양자를 두 개의 실체로 간주하려는 〈실체 이원론〉은 찾아볼 수 없다.동양적 사유는 일상적인 삶의 세계 혹은 직접적 체험의 세계를 대상으로 한다. 동양적 사유는 우리를 생활 세계에서 이간시키려 는 지나치게 추상적인 〈선험적 사변〉에 의한 〈이념화〉를 경계한 다. 우리가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생활 세계 안에서는 몸과 마 음의 이분법,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동양 적 관점에서 본다면 〈신체 없는 의식〉 〈감성과 격절된 이성〉 〈신 체로부터 유리된 자아〉란 광기어린 이성주의자의 독백에 불과하3) 孟子』 「公孫丑」上. 〈其爲 也, 至大至剛, 以直疾而無 塞于天地之「 ). >
4) 『莊子』 「天地」. 〈汝方將妄神 汝形賊, 而庶幾平 >5) 范織 『神滅 〈神 形也, 神也. 是以形存 神存, 形謝 神滅也.〉다.
동양적 전통에서 볼 때 〈나〉란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지 않은 〈몸(身)〉 그 자체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인 이아(爾 雅) 「석고(釋話)」에서는 〈몸〉은 곧 〈나(我)〉라고 풀이하고 있 으며, 대학』에서는 도덕적 수양을 말하면서 〈마음 수양(修心)〉 대신 〈몸 수양(修身)〉을 이야기한다. 삼국지 에서 장비는 눈을 부릅뜨고 〈이 〈몸〉은 장익덕이다 ! 이리 나와서 생사를 결판내 자 ! 〉하고 의 친다. 6) 또 공자는 〈진실로 제 〈몸〉을 바르게 하면 정치를 행함에 어려울 것이 무엇이며, 제 〈몸〉을 바르게 하지 못 하면 백성을 어떻게 바르게 하리요?〉라고 반문한다.7) 맹자도, 〈한 아름이나 되는 오동나무도 사람이 기르려고만 하면 기르는 방법을 알게 되는데, 자기 〈몸〉에 이르러서는 그 기르는 방법을 알지 못하니 어찌 몸 사랑(愛身)이 나무 사랑보다 못하단 말인 가 ! 〉하고 한탄한다.8) 순자도 〈예는 〈몸〉을 바르게 하는 소이이 며…… 스승은 〈몸〉으로 의표를 삼는다〉고 말한다.9) 동양의 전 통에서 볼 때 〈나〉는 곧 〈몸〉이다.동양의 생활 세계적 체험에서 본다면 이성과 감성 역시 각기 다른 대상에 관여하는 본질적으로 다른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침두적이고 연속적이며 분화될 수 없는 한 가지 능력이다.10)6) 三國志』 「蜀志」 「張飛傳」. 〈 斷植, 橫牙, : 身是張益德也. 可來共決死 〉
7) 『論語』 「子路」. 〈子曰 : 荀正其身矣, 於從政平何有 不能正其身, 如正人何 〉8) 孟子』 「告子」上. 〈孟子曰 : 洪祀之桐粹, 人荀欲生之, 皆知所以姿之者,至於身, 而不知所以投之者, 其愛身不若桐粹哉 〉9) 『荀子』 「修身」. 〈扇登者, 所以正身也…夫師, 以身爲正儀. >10) 주자의 철학적 인간학에 의하면, 하등 동물에서 고등 동물에 이르는 모든 생물체는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다소간의 지적 능력을가지고 있다. 하등 동물의 지적 능력은 단순히 감각적 지각에 머무르지 만, 고등 동물 중에서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감각적 지각 능력과 기 억(표상) 능력, 그리고 나아가 우주의 이치 를 깨달을 수 있는 고도의 이성적 능력 (개념 • 판단 • 추리능력)을 갖추고 있다. 졸고 「심성과 천리 一합리성의 주자학적 의미와 그 한계」, 『철학 연구』, 31 집(한국철학연구회, 1992), pp. 126-127 참조.
만약 이들 사이에 어떠한 차별이 있다면 그것은 본질적 혹은 〈범 주적 차이〉라기보다, 구체/추상 혹은 직접/간접 등의 차이에서 연유하는 〈정도의 차〉로 이해된다. 또한 이성이 감성에 비해 절 대적 우위 를 차지하는 칸트의 이성>오성>감성이라는 높낮이는 동양에서는 오히려 감성을 모든 인식의 기반에 두려는 감성 >오 성 >이성의 역순으로 뒤바뀐다. 동양의 지적 전통에서 〈몸에서 분리된 의식〉이나 〈감성에 기반을 두지 않은 이성〉은 애당초 존재하지 는 것이다.
3 〈몸〉과 상호주관성〈나〉는 존재하는가 ?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확인될 수 있는 것인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 다〉고 말했지만, 유학자들은 아마도 〈나는 드러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을 것이다. 유가 전통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시 켜주는 것은 몸과 유리된 순수 의식이 아니라, 나의 〈몸〉을 바라 보는 공동체 안의 상호주관적 시선이다. 『대학』에서는 다음과 같 이 말한다.소인이 혼자 있을 때에 불선한 짓을 하되 이르지 못할 곳이 없이 하다가, 군자를 보고나선 슬쩍 시침을 때고, 그 불선을 가리고 선을 드러내 보이려고 하지만, 남이 자기를 알아봄이 마치 그 폐와 간을 뚫어 보듯 한 데서야 그 무슨 소용이랴? 이런 것을 일러 〈성 실하면 밖으로 나타난다〉고 하나니, 이러한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그 안으로 깊숙한 곳을 조심한다. 증자가 말했으니, 〈열 눈이 보는 바이오, 열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 그 삼엄(森嚴)함이여 ! >11)
유가 전통에서 〈나〉의 존재는 나의 순수 의식에 의하여 확인되 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나〉 를 주시하는 타인의 시선, 죽 〈나〉를 향한 타인의 관심에 의해 확인된다. 즉 〈나는 생각한 다〉가 아니라 〈나는 드러난다〉이다.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군자가 본성으로 지니는 인 • 의 • 예 • 지는 마음에 뿌리박고 있어 서, 그것이 빛으로 발하면 얼굴에 윤택하게 나타나고, 등에 넘쳐 흐 르고 사체에 뻗어나니, 사체는 말하지 않아도 그것을 알게 해준다. 12)유가 전통에서는 나 혼자만의 순수 의식이 전리를 담보해 주지 않는다. 행위나 표현을 통해 드러나지 않고 영혼 속에 깊이 감추 어 둘 수 있는 순수한 〈내면적 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덕, 나의 감정, 나의 의지는 반드시 행위와 몸짓을 통하여 공동 체의 상호주관적 시선에 드러날 때 그 존재가 확인된다. 이런 점 에서 본다면, 나의 〈몸〉뿐 아니라 나의 〈마음〉 역시 공동체의 상 호주관적 시선에 공개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나의 〈몸〉은11) 『大學』 「傳文」. 〈小 居爲不善, 無所不至. 見君子而後版然捨其不善, 而苦其善. 人之視己, 如見其肺肝然, 則何益矣 此謂 誠於中, 形於外. 故君子必愼其獨也. 曾子曰 引所視, 十手所指, 其嚴平 潤屋,德潤心 心廣體牌. 故君子必誠其炫. >
12) 『孟子』 「盡心」上. 〈君子所性, 仁義視智根於心. 其生色也, 然見於面,益於背, 施於四體. 四體不 而哈. >공동체 구성원의 〈독해 decoding〉를 기다리는 〈기표〉가 되며, 내 면의 덕과 감정은 이에 상응하는 〈기의〉가 된다. 유가 전통에 의 하면, 공동체의 문법에서 벗어난 혼자만의 사적 언어는 애당초 불가능할 뿐 아니라,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개인이 사용 하는 언어의 의미가 공동체의 문법에 의해 규정되듯이, 개인이 드러내는 몸짓의 의미 역시 공동체의 〈약호 체계 code system〉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다시 말해서 나의 〈마음〉은 어떻 게 드러나는가? 정신과 육체를 따로 때어서 생각하는 이원론적 전통에서 〈나〉는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나의 〈살덩어리 korpe>만이 드러날 따름이다. 심리철학자들이 주제로 삼고 있는 〈다른 사람의 마음은 존재 하는가 ? >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가? 라는 질문들은 물음의 밑바닥에 몸/마음의 이원론울 전제로 깔고 있다. 이러한 질문들은 〈한 마음이 다른 마음을 알 수 있는 가?〉라는 물음으로 환원되어야 더욱 정확할 것이며, 이러한 질 문은 유학자들에게 마치 괴기소설에 나오는 유령들의 대화처럼 기이하게 들릴 것이다.정신과 육체의 통일체로서의 〈몸〉을 생각하는 유가 전통에서 는, 몸은 의식의 드러남이다. 의식은 몸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 다. 증자가 말한 것처럼 〈열 눈이 바라보고 열 손가락이 가리킬 때 소인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그의 〈몸〉이, 나아가서는 그 〈자신〉이 밖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육체와 분리될 수 있 는 데카르트의 〈나〉는 두명 인간으로 화하여 남의 시선에서 숨을 수도 있겠지만,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는 유가 전통 의 〈나〉는 남의 시선으로부터 숨을 수가 없다. 맹자는 말한다.사람을 살피는 데는 눈동자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눈동자는 자기 의 악을 엄 폐 하지 못한다. 마음속이 올바르면 눈동자가 맑고, 마 음속이 올바르지 않으면 눈동자가 흐리다. 그가 하는 말을 듣고 그 의 눈동자를 보면, 사람이 어찌 자기 마음속을 감 출 수 있겠는 가 ? 13)
과연 『 맹자 』 의 이 구절은 옛날 노인네의 통속심리학적 훈계에 불과한 것일까? 맹자의 마음/눈동자의 관계에 관한 진술은 이원 론적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심각한 의문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과연 〈마음의 올바름/올바르지 않음〉이라는 심리 적 사건 mental event 은 〈눈동자의 맑음/흐림 〉이라는 물리적 사건 physical event과 어떠한 관계에 놓여있는가?〉 이원론자들은 결국 〈정신〉이라는 화폐와 〈물질〉이라는 화폐를 상호교환해 주는 〈송 과선〉이라는 화폐 교환소에서 그 해답을 구하던가, 아니면 하느 님이라는 시계 수리공이 맞추어 놓은 〈몸이라는 시계〉와 〈마음이 라는 시계〉의 예정된 조화에서 수수께끼의 답을 찾으려 할 것이 다. 아니면 일원론자로 개종하여, 심리적 사전을 물리적 사건으 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유물론에 귀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러한 두 가지 해결책은 우리의 생활 세계적 체험에 비추어 볼 때 과연 얼마만큼의 현실 적합성을 지니고 있는가? 정말 나는 일초 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째깍거리는 두 개의 시계인가? 아니면 그저 전기화학적 펄스를 통해 인풋input과 아웃풋 output을 반복하 는 살덩어리에 불과한 것일까?우리가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생활 세계로 돌아오면 이러한 난해한 의문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서로 다른 실체 라고 이야기하는 데카르트마저도, 몸에 상처가 나면 고통을 느끼13) 孟子』 「離藥」上. 〈存平人者, 莫良于時子. 時子不能俺其惡. 胸中正時子 胸中不正 祚子時焉. 聽其 也, 觀其祚子, 人焉喪哉?>
고 고통을 생각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몸과 마음의 상호 침두성을 고백한다. 또 뇌 중추신경 동공의 확대라는 생리적 사건으로 눈빛 〉을 명해 내려는 일원론자들도 사랑하는 연인의 애잔한 눈빛 을 보고 자기를 향한 그녀의 뜨거운 감정을 감지해낸다.
일원론자이거나 이원론자이건, 〈마음〉을 탐구하는 근대 서양 철학자들은 연구실 안에서의 〈이성적 사고〉와 연구실 밖에서의 감성적 체험〉을 철저하게 분리한다. 그리고 연구실 안에서의 이 인 사고만이 전리이며, 일상생활에서의 감성적 체험은 속견 이라고 단정짓다. 근대 서양 철학자들에게는 기이하리만큼 이 상한 편견이 있다. 그들은 생활 세계 안에서의 일상적 체험에 대 해서는 그것이 언제나 진실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도 항상 속견 doxa으로 단정하고, 과학적 지식 (인과적 설명)에 대해서는 그것 이 다른 설명 모델에 의해 내일 당장 뒤바뀐다 할지라도 항상 진 리episteme로 여기려는 습성이 있다. 14)맹자의 눈동자/마음에 관한 전술은 물론 심리 철학식의 인과적 설명에 의해서 증명도 반박도 될 수 없다. 여기서 맹자는 증명도 반박도 될 수 없는 눈동자/마음의 관계를 인과적으로 〈설명〉하려 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상대방의 〈몸〉―그것이 눈빛이건 낯빛 이건 아니면 몸짓이건-을 통해서만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이해〉란 유비 추리 analogical inference와 같은 매개적이고 인과적인 사유 이전의 직 접적이고 감성적인 체험을 가리킨다. 비록 존재론적으로는 한 사 람의 내면성(감정과 의지)이 외면성(눈빛과 낯빛)에 우선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내면성에 대한 이해는 전적으로 밖으로14) Agnes Heller, "La Connaissance Quotidicnne," L'Homme et la Soclete 43 (1977), p. 95. 일상 생활의 사회학』 박재환 의, 일상성 • 일상생활연구 회 편역 (서울 : 한울 아카데미, 1994), p. 171 에서 재인용.
정시된 사상( 象), 즉 눈빛과 낯빛이라는 〈원본적 소여〉에서 출 발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맹자는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나〉를 드러낼 수 없으며,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상대방의 〈마 음〉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기호학에서 <기표〉 없는 〈기의〉를 생각할 수 없듯이, 〈몸〉을 경유하지 않는 <마음> 은 영 원히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맹자에게서 볼 수 있듯이 유가 전 통에서의 〈몸〉은 자아와 세계와의 교통 방식 kommunikationsweise 이다.15)
15) 인간의 내재적 정신이 인간의 의재적 형체(특히 눈동자)를 통해 표현 된다고 하는 맹자의 입장은 후세의 희화(給 )에 관한 미학 이론에서 그대로 계승된다. 고개지(顧情之)는 〈전신사조(傳神 照)의 요체는 눈 동자에 있다〉고 하여 인물화에서 눈동자의 중요성을 말하고( 魏晋勝流 』), 소식(蘇試) 역시 〈전신사조의 요체는 아도(阿培:눈동자)에 있 다〉고 하고 또 〈그 다음은 광대뼈와 뺨에 있다〉고 하여 인물화에 있어 서 내면성 표현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蘇束坡全集』 「組集」 12, 〈傳 〉).
4 〈표현〉으로서 의 낯빛 과 〈행위〉로서의 낯빛
우리의 감정과 의지가 〈몸〉을 통하여 밖으로 드러난다고 하면, 과연 이렇게 〈드러난 것〉은 생리적 증상이 신체를 통하여 드러난 것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으며, 또 속마음을 꾸며 가식적으로 드 러낸 것과는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가? 즉, 맹자가 말하는 마음 이 올바른 사람의 맑은 눈빛은 올바름/그름의 구분조차 없는 어 린 아이의 맑은 눈빛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으며, 또 사악한 마 녀가 꾸며낸 선한 눈빛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 것일까? 플레스너 Helmuth Plessner는 낯빛이나 몸짓과 같은 몸적 표현을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분한다. 1) 홍조와 창백함 • 기침과 재 체기 • 땀과 구역질 등과 같이 의식이 개입되지 않은 생리적 혹은 심신병리적 psychosomatic 반응들. 2) 말과 행위처럼 의식이 개입 되어 있고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낯빛과 몸짓. 플레스너는 이러한 낯빛과 몸짓을 〈행위 handlung〉라고 부른다. 3) 웃음과 울 음처럼 의식이 개입되어 있으면서도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낯빛과 몸짓. 플레스너는 이러한 종류의 낯빛과 몸짓을 〈표현 ausdruck 〉이라고 부른다. 16)
이러한 분류에 따른다면, 비만종으로 인한 동탁의 번지레한 낯 빛, 악화된 금창(金 ) 때문에 나타난 주유의 파리한 낯빛, 노년 에 악화된 뇌병으로 시달리는 조조의 초췌한 낯빛은 모두 의식이 개입되지 않은 생리적 혹은 심신병리적 〈증상〉들이다. 이와 달 리, 미인계로 여포를 유인하려는 초선의 수심에 찬 낯빛, 독이 스민 뼈를 긁어내도록 화타에게 팔을 맡긴 체 바둑에 몰두하는 관우의 태연한 낯빛, 장판교에서 단창필마로 조조의 십만대군과 대적하는 장비의 기세등등한 낯빛은 모두 의식이 개입된 자발적 〈행위〉들이다. 그러나, 삼고초려 끝에 공명을 얻은 유비의 환한 낯빛, 관우의 참수 소식을 전해들은 유비의 참담한 낯빛, 차 한 잔이 식기도 전에 적장의 목을 베고 돌아오는 관우의 의기양양한 낯빛 등은 모두 의식이 개입되어 있으나 비자발적involuntary인 〈표현〉들이다.맹자가 말하는 올바른 사람의 맑은 눈빛은 플레스너가 말하는 〈표현 ausdruck 〉처럼 내면의 감정과 의지가 자연스럽게 밖으로 표 출된 것을 말한다. 이러한 눈빛은 지향성이 결여된 생리적 〈증16) Helmuth Plessner, Laughing and Crying : A Study of the Limits of Human Behaviour (Evanston : Northwest University Press, 1970) , p. 33 참조.
상〉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의도적이고 자발적인 〈행위〉도 아 니다. 이러한 눈빛은, 한 사람의 선을 향한 감정과 의지가 내부 에서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을 때, 내면 세계 를 감싸는 껍질을 뚫고 의부 세계로 돌출하여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렇게, 단순 히 지향적 의식 작용으로만 머물러있던 감정과 의지 는 낯빛과 몸 짓을 통하여 〈외화(外化)〉 또는 〈육화(肉化)〉됨으로써 다른 사람 에게 보여지게 되며, 따라서 지각가능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오르테가는 〈몸〉을 〈표현의 장 field of expressiveness> 이라 하고, 〈눈〉을 〈영혼의 창〉이라고 부른다.17) 플레스너도 오르테가와 비 슷하게 얼굴을 영혼의 창이라고 말한다. 18) 오르데가와 플레스너 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맹자가 말하는 맑은 눈동자는 생리적 . 증상과는 구별되면서, 의도적으로 드러내려 하지도 않아도 저절 로 드러나는, 감정의 자연스런 〈흘러 내비침 (流 )〉을 말한다. 『예기』에서는 이렇게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몸을 통하여 드러나는 덕성 (감정 의지)의 자연스런 유로(流 )에 대하여 다음 과 같이 적고 있다.
효자의 제사는 (그 낯빛을 보고) 알 수 있다. 자기의 위치에 섭 에 공경하는 낯으로 허리를 숙이고, 신주 앞에 나아감에 공경스럽 고 기쁜 빛이 감돌며, 제물을 올림에 공경스러우면서 부모님의 혼 백이 와서 드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갇고, 자기 자리로 물러나서 제자리에 섬에 곧 부모의 명을 받들려 하는 것 같고, 제물을 철거 하고 물러날 때까지도 공경하고 삼가는 빛이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 으면 효자의 제사이다. 19)17) Jose Ortega Y Gasset, Man and People, trans. Willard R. Trask (New York : W. W. Norton & Company, 1957) , p, 93.
18) Helmuth Plessner, Laughing and Crying, p. 45.『예기』에서 말하는 효자의 낯빛은 생리적인 증상과는 분명히 다르면서, 그렇다고 해서 의도적으로 드러낸 것도 아닌, 내면 감 정의 자연스런 〈흘러 내비침〉를 의미한다. 『예기』 에서는 자발적 으로 표출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몸을 통하여 드러나는 인간 의 기본 감정으로 기쁨 • 노여움 • 슬픔 • 두려움 • 사랑 • 싫어함 • 욕망( 喜 怒 哀 樂 愛 惡 欲 )등의 일곱 가지를 들고 있 20) 『예기』 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러한 일곱 가지 감정들은 그 자체에 이미 〈느낌의 대상〉과 〈느낄 수 있는 상황〉 그리고 〈사 태〉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무런 지향성intentionality도 지니지 못한 무드나 센티멘탈리티와 구별된다. 이러한 감정들은 나아가서 〈판단〉의 한 형태이다. 예를 들면, 노여움(怒)은 〈비난 받을 만함〉에 대한 〈판단〉을 내포하고 있고, 사랑(愛)과 욕망 (欲)은 가치의 높낮이에 관한 〈평가〉를 내포하고 있으며, 두려움 ( )은 예상되는 위험과 손상에 대한 〈예측〉을 내포하고 있다. 〈개념〉과 〈판단〉이 〈이성 Reason〉을 구성하듯이, 〈감정〉에도 이미 이러한 이성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21)
19) 記』 「祭義」. 〈孝子之然, 可知也. 其立之也, 敬 其進之也,以偉 其 之也, 敬以欲. 退而立, 如將受命. 已徹而退, 敬齊之色不絶於面, 孝子之祭也.〉
20) 記』 運」편에서는 r1 냐g • • tfll • • • 欲의 일곱 가지 감 정을 〈배우지 않고서도 선천적으로 가능한〉 인간의 기본 감정으로 본 다. 〈何 七섬1 ? • • • • • • 欲, 七者不學而fit. > 『예기』 와는 약간 달리, 한의학에서는 선천적으로 가능한 인간의 기본감정을 ( 喜 怒 )〉의 일곱 가지 로 본다. 『醫宗金鑑』 「外科心法要決」 「惡須總論歌」. 또한 데카르트는 『예기』와 거의 비슷하게 인 간에게 기본적인 감정으로 경이 wonder • 사랑love • 미움 hatred • 욕망 desire • 기쁨joy • 슬픔sadness 등의 여섯 가지를 들고 있다 (The Passion of the Soul 』, Article LXIX 참조.21) Robert Solomon, "Existentialism, Emotions, and the Cultural Limits ofRationality," Philosophy East & West, Vol. 42, No. 4 (1992) , p. 610 참 조.
『맹자』가 인간의 본성으로 제시하는 네 가지 도덕 감정 (四端)은 『예기』의 일곱 가지 감정에 비해서, 한층 더 능동적이고 가치 지향적인 성격을 갖는다. 맹자의 <측은하게 느끼는 마음 (惻隱之心 )〉, 〈악을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마음( 蓋惡之心) , 〈사양하고 양보하는 마음(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是非之 心)〉 등은 가치의 높낮이를 구별하여 선호/배격할 수 있는 가치 지향적 감정들이다. 이러한 감정들 안에는 이미 가치의 높낮이에 대한 개념과 판단이 깃들어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맹자의 〈사 단〉은 비이성적인 느낌이 아니라 그 안에 이미 이성 을 잉태하고 있는 〈합리적 감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감정들은 눈빛과 낯빛을 통하여 〈육화〉되어 밖으로 드러남으로써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보여지게 되고 읽혀지게 된다.
5 눈빛 • 낯빛 • 몸짓의 사회적 의미눈빛 • 낯빛 • 몸짓은 한 사람의 내면적 상태 (감정 • 의지)를 드 러내 주는 〈기호〉일 뿐 아니라, 발화 행위와 마찬가지로 〈의사 소통〉의 매체가 된다. 로빈슨 크루소의 위엄 있는 낯빛은 그가 무인도에 혼자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다. 그의 위엄 있는 낯빛은 프라이데이라는 노예가 섬에 상륙하면서부터 의미를 가진다. 프라이데이는 주인의 위엄 있는 낯빛을 통해 더 많은 충성을 요구하는 주인의 의도를 읽어낸다. 이런 의미에서 〈낯빛〉은 〈비언어적 의사 소통 non-verbal communication〉의 중요 한 수단이 된다. 『예기』의 다음 구절을 보자.군자의 곁에 시좌했을 때, 군자가 하품을 하거나 기지개를 켠다 면, 곧 그 지팡이와 신발을 손에 들 것이다. 또 군자가 해지는 것 을 보고 있을 때는, (이미 떠날 생각이 있는 것이므로) 시자는 곧 리에서 물러갈 을 청한다22)
군자의 하품과 기지개는 단순히 신체적 피로에서 연유한 생리 적 징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위 문맥에 묘사된 하품과 기지개는 단순한 신체적 징후가 아니라 〈그만 이 자리를 떠나고 싶다〉라는 의사표시로서의 〈행위〉이다. 드러내놓고 작별을 고하기 어려운 상황, 말을 하면 도리어 어색해질 상황에서는 〈언어〉보다 〈낯빛〉 이 더 유효할 수도 있다. 더욱이 말 많고 혀가 미끄러운 사람을 기피하는 유가 전통23) 에서는 상황에 따라 〈말〉보다는 한 차례의 〈낯빛〉이 오히려 적절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품이 나 기지개와 같이 의사 소통을 목적으로 표출된 몸짓은 〈언어〉로 치환될 수 있는 상징적 몸짓 emblem 이다.24) 일상 생활에서의 〈상 징적 몸짓〉은 의사 소통의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나아가서 지 위 • 지배 • 복종 등과 같은 역학 관계의 표지판이 되기도 한다.신하로서 임금 앞에서 술을 마실 때, 첫 잔을 받음에 낯빛이 엄22) 『禮記 「曲 」上. 〈侍坐於君子, 子矢 , 撰杖 , 視日甄莫, 侍坐出矣.〉
23) 『論語』 「學而」. 〈巧 令色鮮矣仁. > 論語 「公治長」. 〈巧 .呂 令色足左丘明恥之, 丘亦恥之. >24) 에크만Paul Ekman은 에프런 Efron 과 함께, 의사 소통을 목적으로 표 출된 몸짓을 〈상징적 행위 emblem〉라고 명명한다. Paul Ekman, "Biological and Cultural Contributions to Body and Facial Movement in the Expression of Emotions," in Explain Emotions, ed. A. O . Rort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0) , p. 73-76 참조.숙 단정해야 하며, 둘째 잔을 받음에 온화하고 삼가는 낯빛을 띠어 야 한다. 삼작(三爵)으로 예를 마치므로, 셋째 잔을 받음에 기쁘고 공경하는 낯빛으로 물러난다. 25)
위의 인용문에서는, 연석에서 임금에게 술잔을 받는 신하가 갖 추어야 할 낯빛을 이야기하고 있다. 눈빛 • 낯빛 • 몸짓은 한편으 로는 개인의 내면 깊숙이 감추어전 은밀한 감정을 드러내 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역학 관계 안에서의 〈미시적 권 력구조〉를 드러내 주기도 한다. 특히 지배와 복종의 역학 관계 안에서, 복종하는 사람은 몸을 굽히거나 자세를 낮추는 것과 같 은 거시적 동작을 통해서 상대방에 대한 종속을 표시하기도 하지 만, 더욱 중요하게는 눈빛 • 낯빛과 같은 미시적 표현을 통해서 종속을 표시하기도 한다. 숙종 때, 당시의 거유( 巨儒) 송시열이 임금을 알현하면서 임금의 용안을 한 번 쳐다 볼 수 있도록 특별 탄원을 올린 26) 은 〈눈빛〉과 같은 미시적 표현이 역학 관계에서 지녔던 중요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또한 동양의 고대 형법에서 임금의 가마에 손가락질하는 일을 모반(謀坂)과 더불어 십악(十 惡) 중의 하나로 취급하고 있는 27) 역시 몸짓이라는 〈기호〉가 역학 관계 안에서 지녔던 중요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지배/복25) 『禮記』 「玉溪」. 〈君子之飮酒也, 受一爵而色酒如也, 二爵而言言斯.已三爵而油油以退 …. >
26) 『숙종실록』 10, 년 庚申 10 월. 〈송시열이 아뢰기를:주상께서 동궁 으로 계실 당시 참시 입시(入侍)한 적이 있으나, 그후 수년 간 주상의 용안을 뵙지 못했으니, 원컨대 한번 우러러 뵙고 싶습니다. 주상께서 허락하셨다(時烈曰 : 上在春宮時, 哲爲入侍. 而其後累年未觀天, 願得仰視. 上許之.)〉27) 『唐律疏議』 卷第 「十惡」, 長孫無思 撰(北京 : 中華周 1983), 11 쪽.종의 역학 관계에서는 종속 당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 지위에 어울리는 복장이나 몸짓 그리고 낯빛을 통하여 권위와 위엄을 내보인다. 이런 점에서 눈빛과 낯 빛 뿐아니라, 의복과 말투까지 모두가 역학 관계를 드러내주는 미시적 <기호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군자가) 군대를 통솔하여 전쟁에 임할 때 표정은 용감하고 과단 성이 있어야 하며, 그 호령은 엄정해야 하고, 그 안색은 엄숙해야 하고, 그 시선은 맑고 날카로워야 한다.28)여기서는 군대를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 부하들 앞에서 갖추어 야 할 낯빛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지위 표시로서의 낯빛에 관한 언급은 거슬러 울라가면 『상서 (尙 )』에서도 발견된다. 『상 서』에서는 백성을 다스리는 군왕이 갖추어야 할 조건 다섯 가지 를 들면서 그 중 첫번째로 〈용모〉를 들고 있다.29) 선조 때 사헌 부 장령 정인홍은 추상같이 위엄 있는 〈낯빛〉을 지녔기 때문에 하급 관리는 물론이고 심지어 시골에 있는 수령들까지도 그를 두 려워했다고 율곡(栗谷)은 일기에 적고 있다•30)권력은 명령과 같은 명시적 언어 행위를 통해서만 행사되는 것 은 아니며, 복종 역시 명시적인 순종의 언어를 통해서만 수행되 는 것은 아니다. 눈빛과 낯빛을 통한 비강제적이고 비명시적인 형태의 지배/복종 관계가 오히려 강제적이고 명시적인 지배/복종28) 『禮記』 「玉f長」. 〈…戒容 , 容路路, 色容廊 , 視容 , . >
29) 『尙 「周 」 「洪範」. 〈二 : 五 , 一曰說, 二曰 視, 四曰聽, 五曰思〉30) 李 , 『石潭日記』(下), 윤사순 옮김(서울:삼성 미술 문화재단, 1983) , p. 433.관계보다 더 일상적이고 빈번하다고 할 수 있다.31) 그러나 유가 전통에서 지배자의 낯빛과 복종자의 낯빛 을 이야기할 때, 단순히 〈물리적 권력〉을 염두에 둔 형식적 혹은 가식적 낯빛을 이야기하 는 것은 아니다. 지배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은 위엄 있는 낯빛을 내보이기 전에 그 지위에 합당한 〈덕 (德)〉 을 미리 내면에 갖추어 야 하며, 내면에 〈덕〉이 충만할 때 저절로 〈낯빛〉을 통하여 밖으 로 내비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종속의 지위에 는 사람도 무 조건 아첨 떠는 낯빛을 꾸며내서는 안 되며, 전정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내면에 갖추어질 때 존경심은 낯빛을 통하여 저절로 드러 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 에서는 〈마음이 바르게 된 연후에 몸이 닦이게 된다〉고32) 하고, 공자는 〈아양떠는 말과 꾸 민 낯빛에는 진정한 인(仁)이 드물다〉33) 고 한 것이다. 『예기』에 서는 군자의 내면에 쌓인 덕이 낯빛을 통하여 밖으로 드러날 때 백성들은 이를 보고 훈화되어 저절로 승복하게 된다는 것을 다음 과 같이 말한다.
31) George Homans, Social Behavior : Its Elementary Forms (New York : Harcourt Brace Jovanovich, 1974) , p. 83. 『육체의 언어학』 김쾌상 옮김 (서울 : 일월서각, 1990), p. 30 에서 재인용.
32) 『大學』. 〈…心正而後修身…〉33) 『論 「學而」. 〈巧 令色, 鮮矣仁. >음악은 마음속에서 발동하는 것이고, 예는 밖에서 발동하는 것이 다. 음악의 궁극은 화(和)고, 예의 궁극은 순(順)이다. 군자가 마 음속으로 화락하고 밖으로 드러난 외모가 공순하면, 백성들은 그 낯빛 ( 色)을 보고 훈화되어 서로 다두지 않으며, 그 용모를 보고 훈화되어 태만하거나 방탕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덕 의 빛이 (군자의) 마음속에서 움직이면 백성은 복종하지 않음이 없 으며, (군자가 행위를 통하여) 도리를 밖으로 펼친다면 백성은 승
복하여 따른다. 그러므로 〈예악의 를 체득하여 천하에 실시한다 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이 조금도 어렵지 않다〉고 한 것이다.34)
따라서 군자에게는 거시적 행위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의 사 소한 눈빛 • 낯빛 • 몸짓, 나아가서는 심지어 의복과 말두까지도 모두 〈수신> 의 대상이 되며, 또 이러한 몸적 표현은 다른 사람을 감화시키는 수단이 된다.성인이 행위의 규범을 제정함에 있어서…… 예로써 절제하고, 신 의로써 사귀고, 낯빛으로 드러내고, 의복으로 훈화하고, 친구로써 서로 격려하여 극에 이르게 한다…… 이런 까닭에 군자가 그 (지위 에 맞는) 〈옷〉을 입었을 때는 〈낯빛〉으로 가다듬어 아름답게 하고, 이미 그 〈낯빛〉이 갖추어지면 군자의 〈언사〉로써 가다듬어 더욱 아 름답게 하고, 이미 그 언사를 이룩하였다면 군자의 〈덕〉으로써 충 실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 〈옷〉을 입고서 거기에 어울리는 〈낯빛〉 이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낯빛〉이 의젓함에 거기에 어울리 는 〈언사〉가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언사〉가 있음에 거기에 어울리는 〈덕〉이 없음을 부끄러워하고, 그 〈덕〉이 있음에 거기에 어울리는 〈행위〉가 없음을 부끄러워한다.35)34) 『禮記』 「樂記」. 〈故樂也者, 動於內者也. 視也者, 動於外 也. 樂極和, 禮極 頓 內和而外順, 則民昭其顔色, 而不與爭也; 望其容 而民不生易 焉. 故德 動於內, 而民莫不 , 理發諸外, 而民莫不承J頓: ,樂之道, 而鈴之, 天下無難矣.
35) 『 記 「表記」. 〈是故聖人之制行也…. 禮以節之, 以結之, 容祝以文之, 衣服以移之, 朋友以極之 是故君子服其ffflJI 文以君子之容, 有其容 文以君子之辭, 遂其辭 宜以君子之德. 是故, 君子恥服其 無其容,有其容而 其辭, 恥有其辭而無其德, 恥有其德而無 >『예기』에 따르면, 눈빛과 낯빛뿐 아니라 심지어 의복 역시 한 사람의 정신성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즉 유가적 관점에서 본 다면 의복은 단순히 몸의 보호나 보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 의 지위를 드러내 주는 기호이며, 나아가서는 자신의 정신성 (죽, 감정과 의지)까지 나타내주는 의미 작용 이다. 예기 에서는 정 신성이 결여된 가식적 꾸밈으로서의 의복을 경계한다. 그 옷을 입었을 때는 반드시 거기에 합당한 덕을 내면에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면〉과 〈내면〉의 일치, 또는 〈기표 와 〈기의〉 의 일치를 공자는 〈표현과 바탕의 일치(文꼈彬彬)〉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유가 전통에서의 눈빛 • 낯빛 • 몸짓은 권력 관계뿐 아니라 도덕 관계를 나타내 주는 복합적 기호 체계이다. 『예기』 에서는 공동체 안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도덕적 상황에서 개인들은 어떻게 각 상 황에 적합한 눈빛 • 낯빛 • 몸짓으로 처신해야 하는지 예시하고 있 다. 한 개인이 다양한 도덕적 상황에 직면하여 각 상황에 적합한 눈빛 • 낯빛 • 몸짓을 자연스럽게 표출해내기 위해서는, 고도로 세 련된 표현 감각과 독해 감각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 감각과 독해 감각을 익히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 어떤 낯빛이 적합한지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직관 능력이 요구된다• 공 자는 그의 일상 생활에서 각 상황에 적합한 눈빛 • 낯빛 • 몸짓을 어떻게 표출해냈는지 『논어』를 통해 살펴본다면,군주가 불러 빈객의 접대를 명하시면 얼굴빛을 긴장하며 걸음은 조심스러웠다. 함께 선 빈객과 더불어 읍함에 손은 좌우로 옮기나 옷의 앞뒤 자락은 가지런히 하셨다. 걸어 나아감에 날개편 듯하며, 빈객이 물러난 뒤에는 반드시 복명하여 〈빈객은 만족하여 돌아보지 않고 가더이다〉라고 하였다.36)잠자리에 들면 시체처럼 눕지 않으며, 집에 한가롭게 거함에 위 엄 있는 낯빛을 하지 않으며, 상복 입은 사람을 보면 비록 친하다 해도 반드시 얼굴빛 을 달리하였으며, 벼슬한 자와 장님을 보면 공 식 만남이 아니라도 반드시 용모를 갖추며, 상복 입은 자에게는 수 레 위에서도 절하며, 상주에게도 몸을 굽히셨다. 음식이 성대하면 시 을 바꾸어 일어나 후의 를 표하며, 우뢰와 폭풍이 심할 떈 반드시 낯빛을 바로 잡았다. 37)
수레에 오름에 반드시 바르게 서서 줄을 잡고, 수레 안에서는 좌 로 아보지 않고, 큰소리로 질책하지 않으며, 손을 들어 이것 저것 가리키지 않았다. 38)논어에 묘사된 공자의 낯빛과 몸짓, 그리고 『예기』 에 기록된 수많은 낯빛과 몸짓에 관한 언급들은, 낯빛과 몸짓들이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구체적인 〈맥락〉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 〈예 )〉는 크게는 국가의 체제와 조직을 규정하는 관습법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작게는 일상 생활에서 각 상황에 적합한 행위와 몸 짓 그리고 낯빛까지 일일이 예시해주는 일생활 지침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레게 James Legg 는 〈예〉를 〈상황적 합성〉의 의미와 〈예의 범절〉의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는36) 論語 「鄕 」. 召使 色 也, 足護女也. 掛所女立, 坐右手, 衣前後 也. 超進, 翼如也. 賓退, 必復命l : 賓不顧矣. >
37) 論語 「鄕t 」. 不容. 兄齊襄 , 見 者, 難襄必以稅. 凶服 式之, 式負版 有盛露 色而作. 風 列, 必燮.〉38) 『論語 「鄕 」. 〈乘 必正立執緩. 中不內顧, 不疾 不親指. >39) James Legge, The Li Ki or Collection of Treatises on the Rules ofPropriety or Ceremonial Usages (Oxford : Clarendon Press, 1885).
) 중에 지녀야 할 낯빛, 지휘관으로서 부하들 앞에서 지녀야 할 낯빛, 부모에게 간언할 때의 낯빛, 부모 • 시부모 앞에서 아들 며느리가 지녀야할 낯빛…… 등 수많은 상황에서 해 내야 하 는 다양한 〈낯빛〉에 대하여 『예기』 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거상 중의 용모는 슬픔에 지쳐 축 쳐진 듯하게 하고, 낯빛은 걱 정 때문에 힘이 빠진 듯 하게 하고, 시선은 놀라고 당황하여 침침 한 듯하게 하고, 말소리는 슬픔에 겨워 들릴 듯 말듯하게 한다.40)상( )에 임했을 때는 반드시 슬퍼하는 낯빛이 있어야하고, 상여 줄을 잡았을 때는 웃지 않는다. 음악에 임해서는 탄식하지 않아야 . 하고, 갑옷과 두구를 입었을 때는 반드시 침범할 수 없는 기색이 있어야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낯빛을 잃지 않 도록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41)만약 부모에게 과실이 있으면 기운을 죽이고 낯빛을 부드럽게 하 여 간한다. 만약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는 공경심과 효성 을 일으켜, 부모님의 기분이 나아질 때를 기다려 다시 간한다.42)부모나 시부모가 계시는 곳에 있을 때에는 … 감히 헛구역질하고 트립하고 재채기하고 기침하고 하품하고 기지개 펴고 한발로 뛰고 벽에 기대고 결눈질하고 침 밸고 코를 훌쩍거려서는 안되며……43)40) 禮記』 「玉漢」. 〈i起容 色若顧亂 視容 梅梅, 言容爾腦.〉
41) 『禮記』 」上. 〈臨喪 必有哀色, 執綿不笑, 臨樂不欲, 有不 之色. 故君子戒愼不失色於人. >42) 『 記』 「內 」. 〈父母有過 下氣佑色柔 范 洙若不入, 起敬起孝, 凍.〉이렇게 각 상황에 적합한 감정을 〈몸〉에 익숙하게 체현하여 밖 으로 드러낼 때, 그 낯빛은 더 이상 의도적인 〈행위 handlung〉가 아니라 저절로 드러난 〈표현 ausdruck 〉처럼 자연스럽게 된다. 이 렇게 각 상황에 적합한 감정을 내면적으로 〈느끼는 일〉과 의면적 으로 드러내는 일〉이 하나가 될 때, 그리고 자발적인 〈행위〉가 비자발적인 〈표현〉처럼 자연스럽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행위 -표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공자가 인생의 최후 경지로 말한 예술적 경지에서 노닌다(itfi.於座)〉라는 말은 이러한 경지롤 말한 것일 것이다. 유가 윤리의 궁극 경지는 행위를 〈규칙〉에 맞 게 재단해 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한 〈행위-표현〉을 통하여 타인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전범〉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경지이 다. 이런 의미에서 〈이룬 사람(成人)〉의 몸(눈빛 • 낯빛 • 몸짓)은 타인에게 도덕적 전범이 된다. 중용』에서는 어떻게 한 사람의 〈몸〉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덕적 전범이 될 수 있는지 다음과 갇 이 말한다.
한 구석 한 구석 빼놓지 않고 수양해나가면 정성(誠)이 있게 되 고, 정성(誠)이 있으면 몸에 드러나게 된다. 몸에 드러나면 뚜렷해 지고, 뚜렷해지면 밝아진다. 밝아지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 고, 감동시키면 그 사람은 변하게 되며, 변하면 감화하게 된다. 오 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誠)이라야 다른 사람을 감화시킬 수 있 다. 44)43) 『禮記』 「內 」. 〈在父毋f,J姑之所……不政 屯唯峻矢 跋f 帥視, 不政唯決……〉
44) 『中 If』 23 章. < . 誠則形, , 動, 動則燮, . 唯天下至誠, 能爲化>이처럼 한 감정 (의지)의 표출이 더 이상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저절로 내비치는 〈표현〉처럼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수양을 통한 감정의 체현이 요청된다. 따라서, 내면의 정 심 (正心)과 성의 (誠 )는 물론이고, 일상 생활에서의 눈빛과 낯 빛, 걸음걸이나 손의 모양, 심지어 숨쉬는 모양까지 모두가 유가 적 〈수신〉의 대상이 된다.
군자의 낯빛은 여유 있고 침착하게 하여야 한다. 존경하는 이를 뵐 때는 삼가고 공손하게 해야 한다. 군자의 걷는 모양은 묵직하 게, 손의 모양은 공손하게, 눈의 시선은 단정하게, 입의 모양은 함 부로 말하지 않으려는 듯하게, 말소리는 나직하게, 머리 모양은 곧 게, 숨은 들리지 않는 듯하게, 선 모양은 덕이 충만한 하게, 낯 빛은 엄숙하게 하고, 앉을 때는 시( )처럼 바로 앉는다.45)『예기』 에 나오는 이러한 아홉 가지 몸적 표현은 〈구용(九容)〉 이라고 불리우며, 유가 전통에서 두고 두고 〈수신〉의 지침이 되 어왔다.46) 현대인들이 스킨 케어나 바디 빌딩과 같은 〈살덩어리 가꾸기〉에 치중한다면, 유학자들은 정신(감정, 의지)과 육체의 통합체로서의 〈몸 가꾸기〉에 치중해 온 것이다.45) 記 「玉 」. 〈君子之容舒迎, 見所尊者齊逸. 足容 手容 , 端, 口容止, 聲容評, 頭容直, 氣容 , 立容德, 色容 , 坐如尸.〉
46) 朱子 類』 12 「守持」편 참조. 주자는 『예기』에 나오는 〈구용(九 容) 〉을 〈경 (敬) 〉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다.6 도가의 유가적 〈낯빛〉 비판
도가는 유가적 눈빛 • 낯빛 • 몸짓에 대하여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낸다. 도가의 관점에서 본다면, 유가의 〈수신〉을 통하여 다듬 어전 〈예〉에 맞는 눈빛 • 낯빛 • 몸짓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함께 공유하는 자연스런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낸 문화적 무대 위에서의 연출로 보이기 때문이다. 도가는 상황 에 적합하게 절제된 예절바른 낯빛보다는 〈웃음〉과 〈울음〉처럼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원초적 감정의 자연스런 유로(流露) 에 더 큰 진실성을 부여한다. 위 (魏)나라 때 노자 장자를 숭상했 던 완적 ( 籍 : 210-263) 의 이야기가 이를 잘 드러내 준다. 완적 은 바둑을 두다가 모친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완적은 바 둑을 다 마천 후 두 말의 술을 마시고 호곡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몇 되나 되는 피를 토하고 혼절하였다. 깨어나서 다시 삶은 돼지 한 마리를 먹고 술 두말을 마신 후에 다시 호곡하기 시작하여 몇 되나 되는 피를 토했다. 혜강의 형인 혜희(稽喜)가 예(禮)를 갖 추어 조문을 하자 백안(白眼:못마땅한 눈빛 • 낯빛)으로 대접하 고, 혜강(稽康)이 술과 거문고로 문상하자 청안(靑眼:반가운 눈 빛 • 낯빛)으로 맞이했다고 한다. 47)따라서 도가에서는 유가에서처럼 감정의 절제와 중화(中和)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48) 도가에서는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감정47) 『晋 49, 「阮籍傳」.
48) 유가에서는 감정의 〈중화(中和)〉를 강조한다. 〈중화〉란 〈상황〉에 적 합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적중(的中)〉의 의미와, 감정을 〈정도〉에 맞게 절제하는 〈중철(中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졸고 「심성과 천 리 __합리성〉의 주자학적 의미와 그 한계」, 『철학연구』, 제31집(한국 철학연구회, 1992년), p. 122-148 참조.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초월하려고 한다. 장자 자신의 이야기는 이러한 도가적 관점을 잘 설명해준다.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두 다리 를 쭉 뻗고 앉아서 술동이 를 두드리며 노래 를 불렀다. 친구 혜시 는 이 광경을 보고 장자에게 너무하지 않느냐고 힐문하자, 장자 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지 않다. 아내가 막 세상을 떠났을 때 나라고 어찌 슬퍼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태초를 살펴보니 본래 생명이 없었다. 생명이 없었을 뿐 아니라, 형체조차 없었다. 형체가 없었을 뿐 아니라 기 )도 없었다. 황홀하게 뒤섞여 변화하는 도중 문득 기가 생겨나 고, 기가 생긴 다음 형체가 생겨나고, 형체가 변하여 생명이 생겨 나고, 이제 또 차례로 변하여 죽어간다. 이것은 봄 • 여름 • 가을 • 겨울의 사계와 더불어 흘러가는 것이다. 내 아내는 우주를 큰 집으 로 삼아 편안하게 자고 있는데, 내가 큰소리로 엉엉 운다면 내 스 스로 운명에 통달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울음을 그친 것이다. 49)장자가 아내의 죽음을 놓고 처음에 큰 소리로 운 것은 슬픔이 라는 감정이 저절로 몸을 통하여 흘러 내비친 것(流 ), 즉 〈표 현 ausdruck 〉이다. 그러나 장자가 곧 울음을 그친 것은 〈태어남= 기쁨〉 그리고 〈죽음=슬픔〉이라는 인간 중심적 개념의 틀에서 벗 어나 생멸하는 우주의 변화에 모든 것을 내말기려는 달관의 경지49) 『莊子』 「至樂篇」. 〈不然. 是其始死也, 我獨何能無槪然 察其始,本無生; 非徒無生也, 而本無形 ; 非徒無形也, 而本無 雜平 芬之 變而有氣 變而有形, 形變而有生. 今又變而之死, 是相與爲春秋冬夏四時行也. 個然度於巨室 而我微微然隨而突之, 自以爲不通平命, 故止也.〉
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다. 장자는 인간 중심적인 개념의 틀을 통 하여 사고하기를 거부한다. 장자에 의하면 인간은 우주 내의 타 존재에 비하여 하등의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인간 은 다른 사물과 평등하며, 인간의 찻대로 다른 존재를 재단하려 는 태도는 타존재에 대한 월권이고 대자연에 대한 항명이다. 따 라서 장자는 철저하게 인간 중심적 사고의 틀――-아름다움과 추 함, 옳음과 그름, 위대함과 하찮음 등의 이항대립적 구분을 깨부 술 것을 주장한다. 장자는 인간 중심적 개념의 틀에서 뛰쳐나와 현상계에 명멸하는 온갖 대립과 무질서를 있는 그대로 포용하려 는 것이다. 장자는 〈무관점의 관점 the view from nowhere 50) 에서 유가의 입장이 인간중심적 편견이라고 비판한다. 장자는 특히 〈만물평등(齊物)〉51) 의 관점에서, 수신을 통해 다듬어전 유가적 낯빛은 권력 구도 안에서의 권위적 가면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다음 우화에서 장자는, 사성기(士成綺)라는 유가적 인물과 노자 (老子)라는 도가적 인물의 가상적 대화를 설정하여 유가적 낯빛 을 비웃는다.
사성기가 노자에게 공손하게 가르침을 청했다. 〈저는 어떻게 몸 을 닦으면(修身) 좋겠습니까?〉 노자가 말하기를:〈당신의 낯빛은 단정하며 위압적이고, 눈빛은 곧바르며, 이마는 번듯하게 솟았고, 입은 유창하게 생겼고, 당신의 풍채는 위업이 있어서 마치 달아나 려는 말을 매어놓은 상이오. 행동으로 옮기면 민첩하고, 마음이 발 동하면 기민하며, 눈으로 살피면 너무 자세하며, 지혜와 기교가 오50) 〈무관점의 관점〉이란 용어는 네이글의 책 이름에서 빌려온 것임. Thomas Nagel, The View From Nowhere (Oxford :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
51) 『莊子』 「齊物論」.만하게 드러나 보이는구료. 무릇 이런 것들은 모두 믿을 만한 것이 못되오……〉52)
한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나며 살아가는 주위 환경을 넓은 의미 에서 공동체라고 한다면, 장자가 인정하는 유일한 공동체는 온갖 동물과 식물 그리고 사물들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자연〉뿐이다. 장자는 이러한 〈자연〉 이의에 아무런 공동체도 인정하지 않는다. 공동체는 공동체에서 목표로 삼는 공동선을 성취하기 위하여 구 성원들에게 때로는 〈헌신〉을 요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의무〉와 〈금지〉를 통하여 구성 원들의 자유를 제 한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이라는 공동체가 장자라는 개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의무 는 무엇이고 금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타존재에 대한 불간섭〉 그리고 여기서 얻어지는 〈다양한 목소리들의 평화로운 공존〉 그 것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장자의 사상은 〈범우주적 자유주의〉 이다. 장자는 인간 세계의 속박에서 벗어나 인간 외적인 존재를 남김없이 포괄하는 범존재계의 자유와 평등을 설파한다.장자는 유가의 〈수신〉을 동하여 도달한 근엄하고 문채 (文彩)나 는 몸 대신, 수많은 꼽추 • 불구자 • 추남들을 동원하여 〈비틀림 속의 곧음〉 〈추함 속에 것든 아름다움〉 〈고통 속에 깃든 자유〉를 낱낱이 들춰 보인다. 53) 장자가 자유로운 사람으로 묘사하는 우사52) 『莊子』 「天道」. 〈 多身若何 老子曰 :而容崩然, 而目衝然, 而甄類然, , 而狀義然, 似緊馬而止也. 動而持, 發而機, 察而審, 知巧而視於泰. 凡以爲不信…〉
53) 장자와 마찬가지로 칸트 역시, 정상적이고 규칙적인 인체의 모습은 정신이 결핍된 지극히 평범한 인간을 보여주는데 불과하지만, 왜곡되고 추한 모습에서 인간의 정신성이 절실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많은 예 술 작품에서 우리는 실제로 이러한 중거를 발견할 수 있다. 구부정한 자세로 고통스러워하는 미켈란젤로의 「노예」, 구부리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서 우리는 한 〈몸〉에 드러난 강렬 한 정신성 을 엿볼 수 있다. 미와 마사시(三輪正), 『身體 哲學』(日本:行路社, 1989), 서동은 옮김, 몸의 철학』(서울:도서충판 해와 달, 1993) , p. 230 참조.
(右師)는 한 쪽 발이 잘린 쩔뚝발이이고,54) 장자가 자연 생명을 다 누린 사람으로 예찬하는 지리소(支離疏)는 꼽추이며 ,55) 장자 가 세속을 초월한 사람으로 칭찬하는 애태타(哀胎宅)는 지독히 못 생간 추남이고,56) 장자가 인간세의 질곡에서 해방되어 자유로 운 사람이라고 극찬하는 자여 (子輿)는 몸뚱이가 뒤틀려 턱이 배 꼽 밀에 처박히고 어깨는 머리 위로 솟은 불구자이다.57) 장자는 다음 우화에서 열자( 子)와 그의 스승인 백혼무인(伯香 人)의 가상적 대화를 통하여, 〈수신〉에 의하여 도달한 유가의 근엄한 〈몸〉을 기롱한다.
열자는 제나라 왕을 만나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가 생각을 바꿔 돌아오던 중, 그의 스승인 백혼무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어찌된 일이냐? 어째서 되돌아 오느냐?」 「네, 실은 두려워서……」 「무엇이 두려웠단 말인가?」 「여행 도중 밥집에서 밥을 먹는데 열 집이면 다섯 집에서는 항상 주인이 다른 손님을 제쳐놓고 저의 주문부터 받으려는 것이었습니 다…….」 「그래. 하지만 그것이 어째서 두려웠다는 것이지?」「아마 제가 마음 속의 〈성실함(誠)〉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하였54) 『莊子』 「 生主」.
55) 『莊子』 「人間世」. 56) 『莊子』 「德充符」. 57) 『莊子』 「大宗師」.기 때문에 얼굴과 몸으로 광채를 발하여, 보는 사람을 압도하고 주 인으로 하여금 먼저 온 노인네 를 무시하고 롤 먼저 접대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근심거리 를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58)
열자와 백혼무인의 대화를 통하여 장자는 〈안으로 성실하면 밖 으로 드러난다〉는 유가적 신념을 정면으로 배척하고 있다. 유가 의 〈덕〉이란 지배자의 구실이고, 유가의 〈낯빛〉이란 권위의 가면 이라는 것이 장자의 생각인 것 같다. 장자는 안으로 성실하면 밖으로 드러난다〉는 유가적 신념과 정반대로 〈덕은 밖으로 드러 나지 않는다(德不形)〉고 주장한다.〈덕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대답하 기를:〈평평함(平)〉이란 물이 흐르지 않고 멈추어 있는 극치이다. (지극히 평평하기 때문에) 표준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안 으로 간직하되 밖으로 출렁이지 않는 상태이다. 덕이란 〈화(和)〉를 이루는 수양이다. 그러므로 덕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만물은 (그에게서) 떠나지 못한다.59)장자에 의하면 진실한 덕은 내면에 있는 것이지 밖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다. 마치 고요한 물 속에 지극한 평평함이 담겨 있듯, 꾸미지 않은 담담한 낯빛에 진정한 덕(德)이 숨겨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노자도 장자와 마찬가지로 꾸미지 않은 낯빛을 예찬한 다.58) 『莊子』 「列禦冠」.
59) 『莊子』 「德充符」. 〈何謂德不形 : 平者, 水停之盛也. 其可以爲法也, 內保之而外不瀋也. 德者, 成和之修也. 德不形者, 物不能離也.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숙이 감추어 언뜻 보면 점포가 텅 빈 것 같고, 진정한 군자는 성대한 덕을 지니고 있으나 외모는 마치 모자라는 것처럼 보인다.60)
60) 『史記』 「老子韓非列傳」. 〈良深藏若 , 君子盛德若愚.〉 혜강(稽康) 도 노자와 비슷하게, 진정한 덕은 꾸미지 않은 낯빛 속에 담겨 있다고 본다. 〈良賈深藏 外形若虛 君子盛德, 容說若不足.〉(『 中散集』 高士傳」)
장자는 나아가서 덕이 뛰어난 사람은 외형(外形)마저 잊게 된 다고 말한다.
절름발이며 꼽추에다 언청이인 인기지리무신(I싸跋支離無脈)이 위 (衛) 영공( 公)에게 도(道) 를 말했다. 영공은 그를 매우 좋아했 다. 그후로 영공은 몸이 온전한 사람을 보면 그의 목이 가늘고 기 다랗다고 여겼다. 또 목에 물동이같이 큰 혹이 달린 옹앙대영이 제 ( )환공(桓公)에게 도(道)를 말했다. 제 환공은 그를 매우 좋아 했다. 그후로 제 환공은 몸이 온전한 사람을 보면 목이 가늘고 기 다랗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덕이 높으면 그 외모를 잊게 되는 것이 다. 61)장자의 철학은 자유의 철학이다. 장자는 인위적인 문화의 틀에 서 벗어나 나비처럼 자유롭게 대자연을 훨훨 날고 싶어한다.62) 장자는 인간 세상에서 철저하게 〈이화(異化)〉하여 〈자아self)를 자연 속에 용해시키려고 한다. 장자가 궁극의 목표로 삼고 있는61) 『 子』 「德充符」. 〈 跋支離庶服說衛公. 公說之, 而視全人, 其脫裵像大廢說齊桓公. 桓公說之, 而視全人, 其脫IIH 故從有所長,而形有所忘.〉
62) 『莊子』 「箕生主」에 나오는 〈胡蝶夢〉 이야기.〈얽매임에서 풀려남 (縣解) 63) 이란 바로 이러한 〈무자아 no-self)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장자의 〈자유의 철학〉과 대조적으로 유학은 〈공동체의 철학〉이 다. 인간세를 떠나 대자연으로 비상하려는 장자의 〈이화〉의 날갯 짓과 달리, 유가는 문화 세계 안으로의 〈동화(同化)〉를 지향한 다. 유가적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상황에 적합한 감정을 몸으로 체현하여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 앞에서 예절바른 낯빛과 몸짓 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예〉라는 공동체의 질서에 동화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감정과 욕망에 대한 끝없는 절제와 극기가 요구 된다. 장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자유에 대한 억압이며 자 연에 대한 왜곡이다. 장자는 유가의 〈소속된 삶〉 대신 〈자유〉를, 공동체로의 〈동화〉 대신 공동체로부터의 〈이화〉를, 그리고 인문 세계의 〈척전(拓展)〉 대신 〈자연적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과연 우리는 장자의 말처럼 〈무관점의 관점〉에서 인간이기 를 거부한 채 자연계의 다른 사물과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 일까?사실 현실 세계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타인과 구별하 려는 〈이화〉를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어디엔가 귀속되고자 하는 〈동화〉를 추구한다. 그러나 과연 장자의 말처럼 인문세계에서 철 저하게 유리된 〈이화〉의 삶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장자가 제시 하는 〈이화〉의 길과 유가가 제시하는 〈동화〉의 길은 서로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듯하면서도 우리의 삶 속에 기묘한 모습으로 공 존하고 있다. 동화될 수 없는 삶은 고단하고, 이화될 수 없는 삶 은 부자유할 것이다. 이화와 동화는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 인간이 이렇게 〈이화〉를 추구하면서도 〈동화〉에 뿌리63) 『莊子』 「大宗師」.
를 둘 수밖에 없는 모순적 존재라면, 남은 문제는 〈이화인가? 동화인가?〉의 양자 택일의 문제라기보다, 얼마나 진실한 〈이화〉 의 몸짓으로 〈동화〉에 내재된 기만과 허위를 들추어 내고, 얼마 나 진실한 〈동화〉의 몸짓으로 왜곡되고 방종한 〈이화〉를 바로잡 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사실 유가에서는 장자가 비판하는 것처럼 〈가식적 낯빛〉과 〈기 만적 동화〉를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아첨하는 낯빛과 꾸며낸 낯 는 인( )이 드물다〉고 한 공자의 말처럼, 유가는 가식적 낯 빛과 기만적 동화에 대해 장자 못지않게 비판적이었다. 유가에서 는 겉으로 꾸며낸 가식적 낯빛 대신 내면의 충실을 먼저 내세운 다. 『중용』에서는 〈밖으로 드러남〉의 전제 조건으로 〈안으로 성 실함〉 을 이야기하고 『대학』에서는 제가 • 치국 • 평천하의 전제 조건으로 정심 • 성의 • 치지 • 격물을 내세우고 있다. 이렇게 〈안〉 과 〈밖〉을 이어주는 매개 고리가 바로 〈몸(身)〉인 셈이다. 유가 에서는 〈내면(質)과 외면(文)이 고루 빛나는 상태(文質彬彬)〉에 이르는 공부를 〈수신〉으로 여겼으며, 가식적 낯빛과 기만적 동화 에 대해서는 장자 못지않게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기만적 낯빛에 대한 장자의 지적은 말류(末流) 유자 (儒 者)에 대한 비판은 될지언정 유가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니라 고 생각된다. 가식적 낯빛과 기만적 동화를 비판하는 점에 있어 서는 유가는 오히려 장자와 같은 입장에 서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64) 『中庸』. 〈… 則形…〉 『大學』. 〈… 於中, 形於外…〉
7 눈빛 • 낯빛 • 몸짓과 〈지인〉
전통 사회에서 〈덕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알 것인가?〉하는 〈지 인(知人)〉의 문제는 단순한 도덕적 관심사가 아니라, 현실 정치 즉 관직 임용과 인사 행정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 중의 하 나였다. 『상서』에서는 〈사람을 잘 아는 자는 '밝다 (哲). 밝은 자 만이 능히 사람을 관직에 안배할 수 있다〉고 하여 사람 파악하는 능력의 중요성을 적고 있다.65) 공자도 〈지혜( )〉가 무엇인지 물 어보는 번지(吳運)에게 〈사람을 잘 아는 능력〉이라고 대답한 다.66) 공자는 또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자기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라〉고 말한다.67) 이 러한 구절들은 〈사람에 의한 통치 (人治)〉 또는 〈덕에 의한 통치 (德治)〉의 전통에서 〈지인〉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 지 시사해 주는 단편적인 예들이다.그러나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맹자의 말처럼 눈동자가 맑은 사람은 속마음도 바르다고 여겨야 하는가 ? 하지만, 속마음 이 바르지만 눈빛이 흐린 사람은, 속마음이 바르지 않지만 눈빛 은 맑은 사람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가? 과연 우리는 흐린 눈 빛을 가진 사람은 속마음도 흐리다고 여기고, 맑은 눈빛을 가진 사람은 속마음도 맑다고 여겨야 하는가 ?옛날 중국의 비취 상인들은 고객의 속마음을 살피기 위해 귀부 인들의 눈동자를 유심히 관찰하곤 했다. 68) 또한 거짓말 담지기를65) 『尙 』 」. 〈知人 哲, 能官 . >
66) 『史記』 「仲尼弟子列傳」. 〈吳迎問仁. 子曰 : . 間智. : 知人. >67) 『論語 「學而」. 〈不患人之不知己, 患不知人也. >68) Desmond Morris, Man Watching (Grafton, 1978), 『맨 워칭』, 과학세 대 옮김 (서울 : 도서출판 까치, 1994), p. 286.발명하기 이전의 범죄학에서는 피의자의 속마음을 탐지하기 위하 여 〈눈빛〉을 관찰하기도 했다. 『주례』에서는 피의자를 심문하는 다섯 가지 방법으로, 〈하는 말을 들어보고(辭聽)〉 〈낯빛을 살피 고(色聽)〉 〈숨쉬는 모양을 살피고( )〉 〈무슨 말을 귀담아 듣 는지 관찰하고(耳 〉 〈눈빛을 살핀다(目 )〉라고 적고 있다. 69) 명 (明) 의 혜제 (惠帝)는 그가 아직 제위에 오르기 전에 태손(太 孫)으로 있을 당시, 절도 협의로 잡혀온 협의자 여섯 명의 눈동 자를 관찰하고, 그 중 한 명은 절도범이 아니라고 단언한 적이 있다. 심문 결과, 과연 혜제의 지적처럼 그 사람은 절도 형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 일이 있다.70)
그러나 감성적 직관에 의한 타인의 감정 이해에는 분명히 한계 가 뒤따른다. 인간은 자신의 순수한 감정을 은폐하거나 위장할 수도 있으며, 또 타인의 감정을 대하는 사람이 편견이나 선입견 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자도 한때는 사람을 평가함에 있 어서 편견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다. 죽, 관상학적인 〈상모(狀 統)〉와 내면의 〈표현〉으로서의 〈낯빛〉을 혼동한 일이 바로 그것 이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따르면, 공자는 자기를 스승으로 모시려는 담대멸명( 滅明)의 얼굴이 추한 것을 보고 그를 탐 탁치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담대멸명이 공부를 마치면 물러나서 열심히 덕을 닦을 뿐 아니라 그의 행실이 모두 사리에 맞으며, 졸업 후에는 그를 사모하여 따르는 제자가 삼백 인이나 되고, 그69) 『周禮』 「秋 」. 〈以五 聽獄松, 求民 一日辭懿, l 色懿, 三曰氣聽, 耳聽, 五曰目聽.〉
70) 『明合典』 65, 「詳獄考」. 惠帝爲太孫時, 通者獲盜七, 之,於帝曰 : 六人皆盜, 其一非是. 試之果然, 何以知之. : ,'懿 獄, 色聽爲上. 此人時子.,軒 , 顧視端詳, 必非盜也. 帝日 : t台獄貨通經,信然.〉의 덕망이 제후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자, 자신의 잘못된 인물 평 가에 대하여 후회하면서, 〈내가 용모를 보고 사람을 취했다가 자 우(子羽 : 담대멸명의 자( ))에게서 실수를 했구나 ! 라고 고백 한다. 71)
공자의 이러한 고백은,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고정적인 〈신체의 모습(狀統)〉를 보고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되며, <내면의 표현〉 으로서의 〈낯빛〉을 통해서 한 사람의 감정과 의지 를 직관해야 한 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가의 〈지인〉은 관상술가의 〈관상 보기 (相人)〉와 명확하게 구별된다. 관상학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인간의 고정적인 형모(形統)에서 그 사람의 부귀 (富 )와 현달 (顯達)을 점치려 하지만, 유가에서는 살아 움직이는 눈빛과 낯 빛, 즉 〈몸적 표현〉을 통하여 그 사람의 내면성 (덕성 • 감정 • 의 지)을 읽으려고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그의 낯빛을 은폐하거나 위장할 경우, 과연 우리는 어떻게 그의 속마음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일까? 공자는 겉으로 드러난 낯빛과 내면의 덕이 일치하지 않 는 경우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낯빛은) 빼어나되 (속마음이) 실하지 못한 자가 있다.72)낯빛이 엄하되 속마음은 물러터진 사람은 소인에 비할 수 있으 니, 이러한 사람은 마치 개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는 사람과 같다.73)따라서 한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는 일은 눈빛과 낯빛과 같은 미시적 표현에 대한 일회적 칙관만으로는 충전(充全)하지 않으71) 『史記』 「仲尼弟子列傳」.
72) 『論 「子 」. 〈秀而不實者, 有矣夫. >73) 論語 」. 〈色腐內苗 諸小人, 其猶察寄之盜也與 >며, 거시적 행위에 대한 지속적이고 반성적인 체험까지 병행되어 야 한다. 따라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을 관찰함에 있어) 그가 하는 행위 를 보고, 그의 의도를 보 며, 그의 욕망을 살핀다면, (그의 사람됨을) 어찌 숨길 수 있으리 요? 어찌 숨길 수 있으리요 ?74)여기서 공자가 말하는 행위 • 의도 • 욕망은 한 사람의 성격 형 성에 수적인 요소들이다. 한 사람의 행위와 의지의 일관성을 우리 는 그 사람의 〈성향 disposition〉이라고 부른다. 한 사람이 그 의 행위나 의지에 있어서 들쭉날쭉하게 일관성이 없을 때 우리는 그의 〈성향〉을 가늠할 수 없게 되고, 나아가서는 그의 〈자아정체 성 self identity〉을 의심하게 된다. 한두 번의 가식적 행위 , 한두 번의 위선적인 낯빛은 우리를 속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성향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을 통하여 우리는 그 사람 의 성격을 알아차리게 된다. 공자는 한두 번의 눈빛 • 낯빛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속적인 성향 을 보고 그의 성격을 파악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 올바르 지 못한 사람이 그의 낯빛과 행위로 한두 번 우리를 속일 수도 있겠지만, 평생동안 자기의 속마음을 감추면서 가식적으로 살아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어찌 자기의 사람됨을 숨길 수 있으리요?〉라고 반문하는 것이다.유가 전통에서 〈사람알기 (知人)〉의 조건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한 사람의 감정과 의지 (혹은 덕성과 인격)가 타인에게 이해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의 감정과 의지가74) 論語 政」. 〈視其所., 所由, 所安, 複哉 哉?〉
〈몸〉을 통하여 밖으로 표현되어져야 한다. 2) 표현하는 사람이나 그 표현을 읽는 사람 모두가 전실해야 한다. 3) 성향에 대한 지 속적이고 반성적인 체험이 요구되며, 자아정체성이 불안정한 사 람 그리고 자신의 감정과 의지 를 은폐하거나 가장하는 사람은 파 악하기 어렵다. 4) 감성적 직관 능력(智 • 哲)이 탁월해야 타인의 감정과 의지를 잘 읽을 수 있다.75)
75) 유가의 지인에 대한 조전과 비슷하게, 데이비드 노톤David Norton 은 사람을 알기 위한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조건을 들고 있다. 1) 다른 사람을 알려는 사람이나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이 모두가 〈진실〉한 경우, 사람알기는 일반적으로 가능하다. 2) 상대방이 자신을 알도록 하 기 위해서는 〈표현〉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3) 〈자아 정체성〉이 불안정한 사람은 알기가 어렵다. 4)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모종의 기술이 요구되며, 이러한 기술은 만약 성품에 관한 〈유형학 typology〉이 정립된다면 더욱 손쉬워질 것이다. 갈렌Galen 이나 셀던 Sheldon, 그리고 Carl Jung은 이러한 〈성품학〉의 범주를 확립하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이며, 존 스뮤어트 밀J. S. Mill 은 인간의 성격에 관한 과학으로 〈품성학ethology〉을 발전시킬 것을 제안한 바 있다. David Norton, Personal Destinies : A Philosophy of Ethical Individualism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6) , pp. 271-273 참조.
동양의 지적 전통에서는 사람의 성격과 인품을 파악하기 위한 〈기술〉과 〈범주〉를 체계적으로 정립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지 만,76) 유가는 이러한 측면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유가
76) 중국의 지적 전통에서, 성격 파악을 위한 실용적 기준과 범주를 제시 한 경우는, 『대대예기(大裁視記)』 「문왕관인(文王官人)」편과 『일주서 (逸周 )』 「관인 (官人)」편에 나오는 〈육칭 (六徵)〉, 『육도(六踏)』 「선장 (選將) 」편에 나오는 〈팔징 (八徵)〉, 『여씨춘추(呂氏春秋)』 「논인 (論人)편에 나오는 〈팔관 • 육협 • 육척 • 사은(八觀 • 六陰 • 六咸 • 四隱)〉 등을 들 수 있다. 중국에서 〈성격학〉이라는 분야에서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체계적 이론을 정립한 사람은 위(魏)의 유소(劉助)로서, 그는 『인물지 (人物志)』라는 저작을 통하여, 성격 형성의 과정과 성격 분류법, 그리 고 각 성격둘의 장점과 단점, 각 성격에 적합한 직업, 성격을 파악하는
방법으로서 팔관 • 칠류 • 구징 (八觀 • 七終 • 九徵) 등을 일목요연하게 서 술하고 있다. 이러한 분야의 주제는 현대에 들어 도덕십리학 • 성격심리 학 • 생리심리학 • 사회심리학 등의 분과 영역에서 실험과 관찰을 동하여 주로 〈행동주의적〉인 방법에 의해 연구가 주도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는 〈성격학 characterlogy〉을 체계적으로 정립하려는 시도보다는, 〈어떻게 하면 전실한 성격의 소유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근본 적 문제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의 밑바 탕에는, 진실한 덕이 내면에 쌓이면 구태여 드러내려 하지 않아 도 저절로 드러나게 되고, 구태여 남에게 알리려하지 않아도 저 절로 알려지게 된다는 신념이 깔려있다.
또한 이러한 신념의 저변에는 정신과 육체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한 가지 것이라는 생활 세계적 체험이 바탕에 깔려 있다. 육체와 정신의 통합체로서의 〈몸〉이라는 대전제 아래 유가적 〈수 은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77) 죽, 몸가짐을 정제 • 엄숙 함으로써 마음(감정과 의지)도 전일하게 되고, 또 마음을 전일하 게 유지함으로써 용모나 의표도 단정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 다. 『이조실록』 의 「졸기 (卒記)」에서는 죽은 명인들의 인물평을 기록하면서 빈번하게 그들의 〈용모〉와 〈풍채〉까지 더불어 묘사하 고 있다. 즉 한 인물을 평가할 때, 그가 생전에 행했던 거시적 행위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의 낯빛과 몸짓까지 함께 살펴보아 야 그의 인품과 자질 그리고 의지와 덕성에 대하여 더욱 정확하 게 알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조실록)에 나타난 우리 선조 들의 몸적 표현에 관한 예를 몇 가지 들어본다면,77) 비슷한 의미에서, 조선조의 실학자 최한기는 몸과 마음에 고루 삼부 하여 〈정신성〉과 〈몸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기(氣)를 〈신기 (神 )〉라고 명명한다(崔漢綺, 『人政』).
예천군 수(洙)가 졸하였다…… 풍모와 용자가 단아하고 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겨서 그 뜻을 상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시호를 소효(昭 孝)라 하였으니, 용의(容儀)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 하고, 인자하고 은혜를 베풀며 어버이 를 사랑하는 것을 효( )라 한다……78)
좌의정 최항이 졸하였다…… 문정(文靖)이라고 시호하니, 도덕이 높고 박학다문한 것을 문(文)이라 하고,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말 이 적은 것을 정(靖)이라 한다. 최항의 사람됨은 겸손하고 조심스 러웠으며 말이 적은 데다가, 비록 한더위라도 의관을 정제하고 무 릎을 모으고 꿇어앉아 온종일 게으른 표정이 없었으며…… 79)의정부 좌참찬 이훈( 項)이 졸하였다…… 시호를 안소(安昭)라 하였는데, 화평(和平)을 좋아하여 다투지 아니한 것을 안(安)이라 하고, 용의(容儀)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고 한다.80)『이조실록』의 「졸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안으로 성실하 면 밖으로 드러난다〉81)는 유가적 신념은 전통 사회의 선비들에게 수신에 관한 철칙으로 신봉되었으며, 나아가서 이러한 신념은 일 상 생활 속에서 하찮게 보이는 〈낯빛〉과 〈몸짓〉에까지 철저하게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78) 『이조실록』 「세조」 원년 9월 11일.
79) 『이조실록』 「성종」 5년 4월 28일. 80) 『이조실록』 「성종」 12 년 5월 15일. 81) 『大學』 「傳文」. 〈誠於中, 形於外. > 『中 』. 〈…誠Rlj形…. >8 잃어버린 〈눈빛 • 낯빛 • 몸짓〉을 찾아서
위에서 우리는 눈빛 • 낯빛 • 몸짓과 같은 몸적 표현이 유가 전 통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유가적 생활 세계에서 육체 와 분리될 수 있는 정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곧 정신과 육체의 통합체로서의 〈몸〉이다. 공동체의 상호주관적 시선에 드 러난 몸〉을 통하여 〈나〉는 밖으로 드러나고 공동체의 구성원들 에게 읽혀지게 된다. 따라서 〈몸〉은 〈기호〉의 운반체이며, 눈빛 과 낯빛은 곧 한 사람의 정신성 (기의) 이 밖으로 드러난 것 (기표) 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가 전통의 〈몸〉은 자아와 세계와의 〈교통 방식〉이기도 하다. 유가 전통에서 눈빛과 낯빛, 그리고 몸짓과 옷차림은 일상 생활의 다양한 문맥 안에서 상황에 적합하게 절제 된 모습으로 표현되어져야 한다. 〈수신〉을 통하여 표현된 눈빛과 낯빛은 한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 주는 지표가 된다. 눈빛과 낯빛 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고, 또 상 대방의 감정과 의지를 체험하기도 하면서, 더불어 〈소속된 삶〉을 일구어나간다. 이런 점에서 유가는 철저하게 〈소속된 삶〉을 지향 하는 공동체의 철학이다.전통 사회에서 지향해 온 〈소속된 삶〉은 자유주의의 범람과 더 불어 이제는 과거의 영욕을 뒤로한 채 박물관의 창고 속에 고색 창연한 유물로 등록되었다. 몰락한 공동체를 뒤덮는 세속화되고 물신화된 자유의 물결 속에서 〈낯빛〉은 왜곡된 모습으로 뒤틀려 우리의 눈앞에 드러난다.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는 농도 질은 몸 짓, 절제되지 않고 거칠 것 없는 감정 표현, 호전적이고 경계 어 린 혹은 냉담하거나 무관심한 눈빛 ___ 이러한 눈빛둘은 자신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을 공동체 구성원의 상호주관적인 시선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낯선 침입자로 인식하는 〈이화〉의 눈빛이다.유가에서 경계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왜곡된 〈이화〉는 아 니었는지 ?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몸짓의 방종함과 무례함을 탓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인의 낯빛과 몸짓은 의무나 금지의 대 상이 아니라 자유 재량의 영역에 속하며, 이러한 영역에 관한 논 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침해이기 때문이다.
모든 가치가 일률적으로 화폐 가치로 환산되는 자본주의의 문 화에서 〈낯빛〉은 더 이상 한 사람의 진실한 내면의 표현이 아니 라 사회적 지위와 부를 드러내주는 지표가 된다. 미인대회에서의 조작된 낯빛(이미지 메이킹), 쥔 자와 가진 자의 늠름한 낯빛, 그 리고 부를 과시하기 위한 치장과 의복-이러한 낯빛 • 몸짓 • 의복둘은 장자가 공자와 더불어 지탄했던 진실성이 결여된 〈가 면〉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낯빛의 기만성을 인식하면서도 그 전실성에 대해서 더 이상 캐묻지 않는다. 왜냐하면 더 많이 가진다는 것은 더 좋은 일이며, 가진 것의 표현은 윤리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 사적인 취미판단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상업주의에 편승한 기술 문명의 덕택으로 우리는 가족과 친구 로부터 해방되었다. 아내와 남편은 직접 눈을 마주치는 대신 텔 레비전에 등장하는 스타의 눈빛을 매개로 공감대를 유지해나가 고, 아이들은 숙제를 끝마치기 무섭게 오락기 앞에서 팩맨이나 베이버와 같은 우주의 악인을 대상으로 전쟁을 치른다. 친구들은 더 이상 골치 아프게 얼굴을 맞대고 시 (詩)와 인생을 논할 필요 도 없이, 락 카페나 뮤직비디오 레스토랑에서 영상 속의 뉴키츠 를 따라 춤추고 노래하기만 하면 된다. 소녀들은 더 이상 갈망하 는 눈빛과 억제하는 몸짓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이, 상대방 이 걸친 옷의 브랜드와 차종만 보고서 살덩어리를 내말기면 된 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가족과 천구 그리고 연인에게서 실종 된 눈빛과 낯빛을 갈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행위의 〈규칙〉만이 우리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길로 인도해 줄 수 있을 뿐, 눈빛 • 낯빛 혹은 〈감정〉과 〈성품〉에 관한 이야기 는 옛 노인네들이 남긴 진부하고 통속적인 훈계에 불과하기 때문 이다.
파편화되고 표류하는 자아, 왜곡되고 뒤틀린 자유, 전도되고 식화된 이성, 그리고 날로 팽배하는 상업주의와 물신주의의 물결 에서 잠시 벗어나, 진열장 너머로 먼지를 쓴 채 간직되어 있는 〈소속된 삶〉의 잔영들을 보고 있노라면, 낯설면서도 문득 반가운 기분이 든다. 왜 우리는 선험적이고 추상적 사변에 의한 거대 담 론만이 전리라고 여기려하는가? 왜 우리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생활 세계에서의 체험둘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 하려 드는가 ? 이성과 감성, 그리고 합리와 비합리의 경계선은 그렇게도 명확하고 절대적인 것인가? 과연 보편적 행위의 규칙, 그리고 전략적 합리성만이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주는 것일까? 또한 철학과 비철학, 진리와 통속의 경계선은 과연 〈누구에 의 한〉 〈어떤 기준〉에 의해 설정되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동양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경계선에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는 것 일까?II 여성과 남성
허란주여성성과 남성성의 극복을 위한 소고—자율적인 개체허라금성 차별적 패러다임으로서의 가부장 제도이상화성과권력―철학에서의 의미여성성과 남성성의 극복을 위한 소고
―자율적인 개체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살아오면서 여성과 남성의 〈참모습〉이 무엇이어야 하는 지 누누히 들어 왔다. 여성은 나긋나긋하며, 상냥하고, 순종적이 어야 하며, 남성은 독립적이고, 리더쉽이 있어야 하며, 냉철해야 한다는 등의 고정 관념은 너무도 혼해서, 우리는 오히려 당연하 게 이러한 관념들을 상식으로 받아들여 왔고, 이들을 자기 자신 과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에 적용해 왔다. 여성들이 〈여성적〉이 어야 하고, 남성들이 〈남성적〉이어야 한다는 당위적이고 규범적 인식은, 많은 여성들이 〈여성적〉이며 많은 남성들이 〈남성적〉이 라는 현상에서 도출되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나 감정에 더욱 민감하여 감정 이입의 능력이 남성들보다 뛰어나며, 남성들은 이에 반해서 객관적이며, 자신의 감정 통제에 탁월한능력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이런 현상을 토대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여성은 본성상 〈여성 적〉이고, 남성은 본성상 〈남성적〉이기 때문에, 각자의 고유한 본 성을 거스르는 행태는 자연에 어긋나며, 따라서 비정상적인 궤도 이탈 deviation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디라 간디나 로자 룩셈 부르크처럼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남성에 못지않은 독립성과 리더쉽을 발휘하는 여성은 〈여성의 몸 안에 갇힌 남성〉으로 여겨 지고, 마찬가지로 남성이지만 부드러움과 순종성 등 〈여성적〉인 특성들을 보이는 이들은 〈남성의 몸 안에 갇힌 여성〉으로 여겨진 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자와 같은 경우는 우리의 존경을 받을 만 하다고 생각되나, 그것은 뛰어난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여성적인 매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준남성〉으로서 였으며, 후자와 같은 경 우는 우리가 교화시켜야 할 비정상적인 변태로 여겨졌다. 1)1)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은 전자는 그대로 우리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식의 긍정적인 평가가 내려지는 반면 후자에 대 해서는 주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다는 접이다. 여기서도 여성적 특성 은 남성적 특성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이 반중된다. 또, 심 리치료에 있어서도 정상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여성적 모델보다 남성적 모델에 더욱 가깝다(브로버만 외 : 69-71).
과연 이러한 평가가 정당한 것인가? 이에 대해서 적합한 판단 이 내려지기 위해서는 우선 〈여성성〉과 〈남성성〉이 과연 여성과 남성의 본성과 필연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인지에 대한 분석이 선 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주제는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가져온 것 으로서, 이에 대한 입장으로서 〈본성설 nature theory〉과 〈후천설 nurture theory〉이 있다. 기존의 학자들과 일반인들이 대부분 받아 들였던 것은 본성설이다. 페미니스트들 중에서도 본성설과 양립 가능한 입장을 전개하는 이들이 있다.2) 하지만, 대다수의 페미
2) 소위 보살핌의 입장을 지지하는 길리간, 노딩스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이 입장에서는 여성의 특성이라 여겨지는 보살핌을 남녀 모두가 발달시켜야 하는 윤리적 이상으로 보기 때문에, 여성이 〈여성적〉이라는 것은 오히려 여성에게 유리할 수 있다.
니스트들은 개인의 특수한 상황과는 무관하게 사회의 성별적 고 정 관념을 부과하는 본성설의 입장이 여성의 종속을 영속화시키 는 기능을 한다면서 본성설에 대해 반론을 전개해 왔다.
이들과 견해를 같이하는 필자는 다음 절에서 본성설에 대해 살 피고, 이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들을 제시할 것이며, 그 대안으로서 행위자들이 〈여성적〉이나 〈남성적〉으로 되는 데에는 환경적 요인이 생물학적 특성들보다 더 큰 역할을 담당한다는 후 천설의 입장을 받아들일 것이다. 성별의 획득에 이렇듯 환경이 큰 영향을 미친다고 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 재사회화가 이루어 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들이 있을 수 있다. 필자는 그 다음 절에서 성별의 문제와 관련하여 재사회화가 목표로 삼아 야 할 이상으로서 제시되는 〈양성성〉을 분석할 것인데, 먼저 양 성성이 지닌 두 의미를 살피고, 이 중 〈다수적 양성성〉이 바람직 한 이상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논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다 수적 양성성〉의 정신은 받아들인다고 해도 〈양성성〉이라는 용법 은 극복되어야 함을 결론에서 주장하겠다.2 여성은 왜 〈여성적〉이며, 남성은 왜 〈남성적〉인 가? -본성설 대 후천설많은 사람들이 여성은 〈여성적〉이며, 남성은 〈남성적〉이라는 명제가 참이라고 생각한다. 이 명제는 어찌 보면 동어 반복 tautology에 불과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성sex 과 성별gender 은 구분해야 한다.” 한 개체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하 는 것은 생물학적인 특성에서 근거한다. 한 개체에서 에스트로겐 호르몬이 더 많이 검출되고, 신체 구조적으로 자궁, 난자, 난소 등을 가지고 있으며, 크로모좀 배열이 XX 일 경우, 그는 생물학 적으로 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는 달리, 한 개체에서 안드 로젠이 활성화되어 있고, 신체 구조적으로 정자, 소낭, 음경, 음 낭 등이 있으며, 크로모종 배열이 XY 일 경우, 그 개체는 생물 학적으로 남성이다.4)
3) 이 기준과 관련해서는 베텔링-브라긴 pp. 4-7, 마틴과 부어히스 p. 3, 제이크와 로버츠 p. 454 참조. 〈성〉과 〈성별〉이라는 번역은 카플란과 세드니의 『성의 심리학』에서 차용한 것이다(p. 7).
4) 이에 대한 예의도 있다. 그런 예로서 androgenital syndrome, Turner's syndrome, hermaphroditism 환자들을 들 수 있다. 첫째 증상은 여아가 남아의 성칭을 가진 경우이고, 둘째 증상은 크로모좀 배열이 XX 대신 X인 경우이고, 셋째 증상은 크로모종 배열은 XY 이지만 남아의 성징이 발달되지 않은 경우를 말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랜제티와 커란 (1992), pp. 18-22 참조.이에 반해 〈여성성〉과 〈남성성〉의 성별적 구분은 심리적 및 사 회적인 기준에 의한다. 한 개체가 감정적이며, 주관적이고, 수동 적이며, 예민하고, 의존적이며, 순종적이고, 수다스러우며, 표현 력이 있고, 안정성에 대한 강한 욕구를 지니고 있으며, 배려 깊 고, 다정 다감하며, 겸손하고,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남의 말에 경청하며, 직관적일 때, 우리는 그 개체를 〈여성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에 반해 한 개체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자기 주장이 강하고, 독립적이며, 객관적이고, 능동 적이며, 경쟁적이고, 단도 직입적이며, 냉철하고, 모험심이 강하 며, 자신감에 넘치며, 야망이 있고, 공격적이며, 감정 억제에 능 하고, 의지력이 있을 때, 우리는 그 개체를 〈남성적〉이라고 느끼
게 된다(브로버만 의 : 63, 66 이하 참조).
그렇다면 위에서 제시한 명제는 생물학적 여성은 심리 • 사회적 으로 〈여성적〉이며, 생물학적 남성은 심리 • 사회적으로 〈남성적〉 이라는 말로 명료화될 수 있다. 이 명제를 보편명제로 본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이다. 왜냐하면, 생물학적인 성에 걸맞지 않은 성별을 보이는 사람들도 가끔 있기 때문이다.5) 하지만, 만약 이 명제를 일반적인 현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 명제는 참이다. 실제로 현상을 살피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성에 걸맞는 성별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많은 경우에 이 명제가 규범 성을 지닌 또 하나의 명제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즉 대부분의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학식 높은 많은 학자 들도 이 앞서의 명제에 입각하여 생물학적인 여성은 모름지기 〈여성적〉이어야 하고, 생물학적인 남성은 모름지기 〈남성적〉이어 야 한다는 규범 판단 또한 받아들였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타당 한 추론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이것이 타당한 추론이 되기 위 해서는 중간에 어떤 다른 명제가 전제로서 상정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물론 성과 성별 간의 관계에 대한 명제이다.5) 이런 사람들은 과거 원시 부족에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예를 들어, 북미 Mohave족의 hwame와 alyha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나, 북아시아와 북미 지역의 berdache 등이 기록되어 있다(마틴 & 부어히스 : 94-105).
생물학적인 성과 심리 • 사회적인 성별이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고 보는 것이 바로 본성설의 입장이다.6)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능
6) 이제 본성설을 살핌에 있어서 필자는 불가피하게 생물학적인 여성과 〈여성성〉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겠는데, 그 이유는 기존의 학자들 대부 분이 주로 여성은 마땅히 〈여성적〉인 특성을 도모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성도 마땅히 〈남성적〉인 목 성을 도모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은 잠시 유보될 것이지만, 여성에 대 한 논증에 유추하여 남성에 대한 논증도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주의적인 입장에서, 여성의 본성은 여성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이 기능이란 물론 생식기능으로서, 차세대를 낳고 양육하는 것이다(오킨Okin : 80-81, 83). 가부장 제 도를 체계적으로 정당화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루소도 여성의 본성은 그녀의 성적이고 생식적인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 라고 한다(같은 책 : 99-100). 여성은 항상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하 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삶의 진정한 목적이다〉 (같은 책 : 118). 칸트는 여성과 남성에게 적합한 덕성이 다르며, 양성은 서로를 보완하는 것이 자연에 의해 주어진 운명이라면서, 여성이 이러한 특성을 지니게 된 것은 종족 보존과 사회의 세련 refinement를 위해서라고 한다. 여성은 종족 보존을 위해서 두 려움이 많고, 소극적이며, 사회의 세련화를 위해서 섬세하고 delicate 표현력이 풍부하다고eloquent 한다(디카슨 : 140-141). 7)
7) 디카슨에 의하면 칸트는 Anthropology from a Pragmatic Point of View (The Hague : Martinus Nijhoff, 1974) , p. 169에서 이러한 말을 하 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논증이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공통된 〈본성설〉적인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여성이 심 리 • 사회적으로 〈여성적〉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성이 생물학적으 로 다음 세대를 낳게끔 운명지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성 은 생물학적으로 다음 세대를 낳고, 양육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 에, 그러한 기능에 적합하도록 보살피고자 하는 감정이 강하고, 보호 받는 존재의 필요와 감정에 감응적이며, 부드럽고, 직관적 이며, 민감하며,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논증을 좀더 체계 화한다면, 아래와 같다.
논증 1( 사실적 논증)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자식을 낳고 양육하게끔 만들어졌다. 여성은 이런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특정한 심리 • 사회적(〈여성 )인 특성들을 가지게 된다. 임신 및 자녀 양육은 자연(본성)적인 특성이다• 따라서 〈여성적〉인 특성 또한 자연(본성)적인 것이다. 이것은 사실에 대한 논증이다.8) 우리는 이러한 사실적 논증에 입각해서 다음의 논증을 도출할 수 있다.8) 위의 학자들은 다루지 않았지만, 우리가 이와 대칭적인 관계에 있는 남성에 관한 논증을 구성한다면, 남성에게는 〈남성적〉인 성이 본성적 이라는 또 하나의 결론이 가능해 진다. 실제로 현대에 들어, 골드버그 (1974) 에 의해 남성 호르몬 데스토스데론 분비로 인한 공격성의 증대에 입각한 논증이 제시되는데, 이것은 위의 논증에 대응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논증 2( 규범적 논증)
여성은 자연적으로 (본성상) 〈여성적〉이다. 자연적인 것(본성에 따르는 것)은 바람직하다. 따라서 여성은 마땅히 〈여성적〉이도록 해야 한다. 타당한 논증 2를 반박하기 위해서는 첫번째 전제나 두번째 전 제가 거짓임을 입증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첫번째 전제를 반 박하는 과정에서 논증 1의 문제점이 밝혀질 것이다. 1) 논증 2의 첫번째 전제 먼저 논증 2의 첫번째 전제를 살펴보자. 여성은 본성상 〈여성적〉이라고 했는데, 이 명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증 l 로 돌아가야 한다. 논증 1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두번째 전 제이다. 과연 여성은 임신과 자녀 양육을 위해 필연적으로 특정 한 심리 • 사회적(〈여성적〉)인 특성들을 가지게 되는가 ?9) 〈여성 적〉 특성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보살핌의 성향이고, 나머지 특 성들은 보살핌을 용이하게끔 하기 위해 부수적으로 필요한 특성 들로 볼 수 있기 때문에, 필자는 여기서 이 특성에 논의 를 국한 시키겠다. 과연 보살핌의 성향은 임신과 관련된 적 기능과 필연적 관련이 있는 것인가? 마틴 Martin 과 부어히스 Voorhies 는 임신과 무관한 소녀들이나 독신녀들도 어린이 이나 연약한 존재 에게 관심을 가지며, 그들을 기꺼이 돌보는 등, 여성들은 대체로 임신 과정과 무관하게 보살핌의 성향을 보이기 때문에 이 성이 특별히 임신과 관련을 갖지는 않는다고 한다. 임신의 과정은 오 히려 기존의 성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9) 이 주제는 인류학이나 심리학 등 사회과학에서 주로 다루는 문제이기 때문에 철학도인 필자가 여기서 수박 겉 핥기 식의 논의밖에 할 수 없 을 유감으로 여긴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필자가 뒤에 나열한 참고 문헌들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여성은 좀더 깊은 생물학적 인자 때문에 보살핌의 성 향을 나타내게 되는 것인가? 여성은 상대적으로 남성보다 더 많 은 여성 호르몬의 영향을 받으므로, 이 호르몬이 보살핌의 성향 을 발동시킨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마틴과 부어히스에 의하면, 이에 대한 여러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호르몬과 보살핌의 성향 간 에 필연적인 연결을 입증하는 자료는 여태까지 없다고 한다. 10)
10) 반면에 남성 호르몬 분비와 〈남성적〉인 특성들 간의 관계에 대한 연 구는 꽤 성과를 보았다. 이러한 연구에 의하면, 남성 호르몬 안드로젠 때문에 남성은 독립적이고, 공간적 능력이 뛰어나며, 공격적이며, 그 밖의 다른 〈남성적〉 성들을 나타낸다(랜제티와 커란 : 22}. 또 맥코비
(1966), 맥코비와 (1974), 그리고 골드버그 등에 의해서 남성들 이 여성들에 비해 더 공격적이라는 실험결과가 지속적으로 제시되고 있 다. 하지만, 어떤 사회에서는 남성이 여성보다 더 부드럽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아 이러한 생물학적 특성은 사회화에 의해 통제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마틴과 부어히스 : 52-82).
오히려 환경적 영향의 중요성을 암시하는 자료가 여러 가지 있 는데, 할로우 Harlow 가 주관한 리서스 Rhesus 원숭이 암컷에 대한 실험에서는, 건강한 원숭이 암컷들이 태어나자마자 격리되어 홀 로 사육된 결과, 새끼를 가진 후에 전혀 보살피고자 하는 성향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는 새끼들을 학대하거나 죽이는 경우까지 도 생겼다고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보살핌의 성향이 발 달하는 데에 있어서 환경적 요인이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 이다. 원숭이에 대한 연구 결과를 인간에게 아무런 제한 없이 적 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겠지만, 원숭이가 인간과 가장 유사한 동물이라는 점을 참작할 때, 이 연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간에 관한 연구 중에도 보살핌의 성향과 환경적 요인의 긴밀 한 관계가 암시된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미드 Mead 의 아라페쉬 Arapesh 족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아라페쉬족의 남성과 여성은 모두 비슷하게 보살핌의 성향을 나타낸다고 한다(미드 : 279). 또 마누스 Manus 족의 남성들은 여성들보다 더욱 〈여성적〉이라고 한 다. 이 남성들은 유아들과 노는 것을 여성들보다 더욱 즐기며, 미드가 인형을 주었을 때 남아들이 여아들보다 더 큰 관심을 나 타냈다고 한다(마틴과 부어히스 : 78- 79). 이러한 문화 횡단 cross -cultural적 자료들을 참조했을 때, 여성이 필연적으로 보살핌의 성향이 강하다는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사회 에 따라 남성이 여성보다 더 강한 보살핌의 성향을 보이기도 하 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대부분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보살핌의 성 향이 강한 현상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아마도 마틴과 부 어히스가 지적하듯이, 대다수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보살핌의 성 향이 강한 이유는 아마도 여성들이 아동들을 키우는 일차적 책임 을 지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자녀 양육의 책임을 수행하는 데 있 어서 보살피고자 하는 성향은 큰 덕목이기에, 대부분의 사회에서 미래의 일차적 양육자들인 여성에게 보살핌의 중요성이 직 • 간접 적으로 교육된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처도로우 Chodorow(1978) 역시 환경적 요 소를 더욱 결정적인 것으로 본다. 그에 의하면 우리 사회와 같이 여성에게 양육의 일차적 책임이 맡겨진 사회에서는 계속해서 여 성이 남성보다 자녀 양육에 더 적합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남 아는 자신에게 적합한 성별적 정체감을 형성시키기 위해 어머니 와의 긴밀한 연결을 끊고 아버지와의 연결을 수립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아버지는 가족 외적인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자녀 양육의 문제는 부차적으로 여겨 보살핌의 능력이 발달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동일시하는 남아 역시 그러한 능력을 발달시키지 못하게 된다. 이에 반해 여아는 성장 과정 전 반을 통해서 어머니와 긴밀한 연결을 유지하므로, 어머니에게서 자녀 양육과 관련된 많은 기술을 배울 수 있게 되고, 보살핌의 성향 그 자체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는 것이다.이러한 설명들은 가설이기 때문에 후천설이 진리임을 객관적으 로 입증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여성은 필연적으로 〈여성 적〉이라는 본성설을 지지할 만한 객관적 입증자료가 부재하고, 오히려 후천설을 지지하는 여러 자료들이 제시된 상태에서, 여성 들이 어째서 보살핌의 성향이 강한지에 대해 명쾌한 설명을 제공 해 주는 이 가설들은 받아들일 만하다.그래도 후천설은 단지 가설에 불과할 뿐이라고 고집하는 독자 에게는 다음의 논리가 제시될 수 있다. 그림 Grim 이 지적하듯이 만약 두 가설이 대립하고 어느 것이 전리인지 알 수 없을 경우, 우리는 그것이 거짓일 경우 폐해가 덜한 가설을 채택해야 하는 데, 후천설은 확실히 본성설보다 폐해가 덜하다(그림 : 133-138 참 조). 만약 본성설을 채택했는데 후천설이 참인 경우에는 부정의 injustice의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좀더 나은 지위에 오 를 수 있는 능력을 가전 사람에게 그 지위에 오르기 위한 경쟁조 차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게 기회가 박탈된 것이기 때 문이다. 후천설을 채택했는데 본성설이 참인 경우에는 비효율성 의 문제가 일어난다. 왜냐하면 원초적으로 능력이 미달되는 자에 게 능력의 향상을 위한 특수 교육이 부과되느라 자원이 낭비되었 을 뿐 아니라, 그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직위에 오른다고 해 도 기대되는 만큼의 결과를 산출해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 다. 11) 부정의가 비효율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폐 해라고 생각하는 필자는 본성설 및 이 설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논증 2의 첫번째 전제가 거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1) 물론 이 경우에도 불공정성 inequity의 문제가 일어날 수가 있다. 왜 냐하면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잠재력을 더욱 증진시킬 수 있는 자 원을 능력이 없는 사람의 특수 교육에 빼앗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 은 원초적으로 공정한 기회가 박탈되어 일어나는 부정의보다는 훨씬 덜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그림은 이 논의 외에도 후천설이 평등의 이상에 더 근접하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논지를 덧붙인다(p. 137-138).
2) 논증 의 둘째 전제
논증 2의 두번째 전제는 어떤가? 자연적인 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이라고 볼 이유가 있는가? 우선 〈자연적〉이라는 것이 과 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자주 쓰여 왔지만, 실상 그 의미가 제대로 분석된 적은 없는 듯 하다. 우리는 〈자연적 natural 〉이라는 용어를 〈인위적 artificial 〉이라 는 용어의 대비로서, 인간의 노동이 개입되지 않은 〈자연 그 자 체〉라는 뜻으로 쓸 때가 있다. 이때 〈노동〉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식적인 활동이 개입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 신체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의식 활동이 배제된 움 직임, 예를 들어 반사 작용과 같은 것은 〈노동〉에 해당되지 않는 다. 그렇다면 자연적인 것은 인간의 노동이 배제된 상태에서 존 재하는 모든 것이다. 폭풍우나 천둥 번개같은 자연 현상 및 인간 을 포함한 모든 동식물의 단순한 생성, 성장 및 소멸 과정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의미에서 〈자연적〉인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자연은 이미 인간과 관계 없이 그저 존재하는 상황이므로, 그것은 가치의 영역과는 무관해진다. 우리는 폭풍우가 우리에게 주는 영향에 대해서 〈득 이 된다〉느니, 〈해가 된다〉느니 논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바 람직하다〉느니, 또는 〈바람직하지 않다〉느니 라고 말하지는 않는 다. 무엇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그 상태가 도래하도록 노력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만, 자연 상태는 그저 주어전 것이고, 우리는 그 에 의해 수동적으로 영향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더구나 〈자연적〉인 것을 이런 의미로 보았을 때, 임신과 자녀 양육은 자연적인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전 과정에 인간의 의식적인 선택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 문명이 발달하여 여성의 피임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 여성이 임신하는 데에는 의식적인 결단이 개입될 가능성이 커진다. 또 임신 후에도 임신 중절을 통해서 의식적으로 임신 과정을 종결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임신을 지속시킨다는 것 또한 의식 적인 결정을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식을 양육하는 것도 인간의 의식적인 활동과 무관한 것이 결코 아니다. 여성은 자식 을 잘 양육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고하고 자기 절제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러운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을 때, 〈자연〉이 자연 그 자체〉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자연 nature 은 〈문화culture) 에 대비되기도 하는데 , 과연 이런 의 미에서 자연적인 것이 바람직한가? 오트너에 의하면, 〈문화〉는 인류가 주어전 자연적 조건으로부터 초월하는 데 수단이 되며, 의미 있는 형식들을 만들고 유지하는 과정과 관련이 있다. 즉 그 것은 인류가 자연에 대해 통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인간 의식 human consciousness 〉과 동의어이다(오트너 : 72) . 그렇다면 〈자연〉은 모든 문화가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것이며 문화보다 한 단계 낮은 상태로서 원시적이고 조야한 본능의 세계이다. 12) 하지 만 이렇게 해석했을 때, 자연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볼 수 없으므 로, 논증 2의 두 번째 전제는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12) 맹목적인 물질 문명의 추구로 인한 폐해가 극에 달하고, 이에 대한 극복으로서 다시금 원초적인 생명력을 되살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 한 현대의 관접에서 이 논의는 시대 착오적인 듯한 느낌이 기도 한 다. 이 이유는 오트너가 이 글을 썼던 시기 (1974) 의 미국 사회가 물질 문명의 혜택을 비판없이 누렀던 시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가부장제적인 입장에서 여성은 바로 이러한 의 미의 자연과 연관지어져 왔다. 13) 여성의 육체적인 기능은 자식을
13) 오트너는 세 가지 측면에서 여성이 자연과 관련되어 왔다고 하는데, 그것은 여성의 생물학적 기능, 여성의 사회적 역할, 그리고 여성 심리 의 측면에서였다(오트너 : 73-83 참조). 필자는 우리의 논의와 관련이
있는 첫째와 둘째 측면에 국한시켜 논의를 전개하겠다.
낳는 것이며, 삶의 많은 부분이 이 기능을 담당하기 위해 소비된 다는 점에서 여성은 문화와 동떨어진 존재라고 주장되었다. 또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또는 자연에 가까운) 미취학 아동들과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의미하는 자녀 양육 및 가사 노동 역시 여성을 문화로부터 분리시킨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것은 여성의 〈본분〉으로서 당연히 여성에게 부과되어야 하는 것이다. 문화와 격리된 삶의 방식은 인간에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일반적 상식을 받아들인다면, 여성에게 부과되는 이러한 상태는 분명 역 설적이다. 왜냐하면 일반적 인간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역시 인간인 여성에게는 바람직한 것으로 강조되어 왔기 이다. 따 라서 이 입장은 자기 모순을 범하든지, 아니면 인류를 우월한 자 (남성)와 열등한 자(여성)로 나누는 이분법을 전제하고 있든지, 둘 중 하나이다. 어떤 이론이든 자기 모순을 범해서는 안 되므 로, 이 입장은 후자로 해석되어야 할텐데, 과연 이 이분법은 받 아들일 수 있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우월과 열등의 기준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 라 다르겠지만14), 적어도 위에서와 갇이 〈문화〉를 중시하고, 정 보와 전문 지식의 축적이 성패를 판가름하는 현대 사회에 논의를 국한시킨다면,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가설이 들어설 여지 는 없다. 즉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임신을 하게끔 만들어졌다고 해도, 여성은 여전히 남성과 같은 의식적 동물이며 언어를 사용 하고, 지식을 축적하며, 가치에 대해 사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적 존재이다.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정보 사회에 서 생산적인 구성원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했으며,14) 육체적 물리력에 있어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일반적으로 열등하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여성들은 특정 분야에서 남성들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 하기도 한다. 임신의 기능을 여성이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 여성 을 남성보다 열등한 〈비문화적〉 존재로 운명짓는다는 것은 유치 하고 시대 착오적인 발상이다. 인류의 존속이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중요한 과업이고, 누구라도 그 과업의 완수를 위해 임신을 해야 하며,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이 기능을 담당하도록 만들어졌다고 해서, 여성이 과연 열등한 존재로 취급되어야 할 것인가? 여성이 열등한 존재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임신을 거부하고 남성과 마찬가지로 문화 활동에만 전념한다면 그때에야 여성이 우월한 존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또, 여성은 자녀 양 육 및 가사 노동을 전담하기 때문에 자연에 가깝다고 하는데, 여 성만이 이러한 활동에 종사할 필연성은 없다. 여성이 남성 못지 않게 문화적 존재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여성들의 사회 참여도 점차 늘어나야 한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자녀 양육과 가사 노 동을 여성이 전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남성의 동등한 참여가 시 급히 요망된다.15)
15) 더구나 가사 활동에 문화적인 측면이 없다고 분 수도 없다. 예를 들 어, 어린이의 초기 사회화는 가정 내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데, 이 과정은 유아를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문화적 존재로 변모시키는 것 으로서 문화적으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또 요리의 예를 더라도, 여 러 자연적 재료들로 음식으로 만드는 것은 문화적인 의의가 있다고 분 수 있다.
〈자연적인 것은 바람직하다〉는 명제에 적용될 수 있는 〈자연 적〉의 의미로 다음의 대안은 어떤가? 〈자연적〉인 것은 〈우리의 본성에 잠재되어 있는in our nature〉의 뜻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 규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것에 잠재되 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 경험
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잠재력인지에 대해 대체로 추측 할 수 있다. 적어도 인간은 의식적인 존재이며, 높은 지력을 지 녔고, 더 편안한 삶을 갈구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러한 지력을 활용하여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할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과정에서 문화와 여러 사회 제도들을 만들어 운용하는데, 이러한 인간의 활동이나, 그 활동의 산물인 제도 등은 대체로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심대한 문제가 있다. 바로 아까도 지적했 듯이,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분 명 인간은 위에 나열했던 여러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인간은 다른 여러 특성들을 지닌다. 예를 들어 남성에 대 한 연구에서도 거듭 밝혀졌지만, 인간에게는 공격적인 면이 있 다. 역사적으로 수없이 거듭되었던 전쟁들이나, 나치 독일의 유 태인 학살, 현대의 르완다 및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일어나는 끔 찍한 살상 등은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도 인간의 잠재력이 실현된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인가? 이에 대해 제정신인 어느 누구도 긍정 적으로 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때에는 오히려 이 특정한 잠재 력을 무화시키려 노력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잠재력이 실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미로 해석된 논 증 2의 두번째 전제는 받아들일 수 없거나, 적어도 바람직한 참 재력과 바람직하지 않은 잠재력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필요로 한다. 그 기준으로서 〈평화성〉을 도입하여 16), 비교적 평화적으로 발16) 이 기준에 대해서 제대로 논하자면 책 한 권이 소요될 것이지만, 필 자는 편의를 위하여 〈평화성〉의 기준에 논의를 국한시키겠다. 그러나 〈평화성〉의 기준은 매우 느슨한 기준이라는 것을 필자도 인정하며, 좀
더 체계적인 기준으로서, 〈인간의 복지 향상 여부〉, 또는 〈정의의 원리 와의 정합성〉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기준들을 도 입한다면, 가부장제는 분명히 이 세번째 의미에서 자연스럽지 않은 제 도로 판정될 것이다.
현된 잠재력만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상정해 보자. 이렇게 본다 면, 어떤 특정 사회에서 폭력이 수반되지 않고 그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생된 제도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반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 제도가 인류의 잠재력이 〈평화적〉으로 실현된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며, 그 사회에서 〈여성적〉인 여성 이 종속되고 〈남성적〉인 남성이 주도적인 문화 주체로 살아가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주장은 어쩌면 일리가 있 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논의의 일부에 불과하다. 가부장 제도가 한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켰던 것은 아마도 인류 역사의 과거 어느 한 시점, 어떤 특정한 사회에서였을 것이다. 만약 어 떤 역사적 시점에서 자연 자원도 희소하고, 출산에 대한 통제력 도 없는 데다가, 사냥에 의존하여 음식물을 얻는 사회가 있었다 면, 일반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근력이 떨어지고 생물학적으로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러한 사회에서는 가부장 제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 한 의미에서 바람직한 것은 가부장 제도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쿵( ! Kung)이라는 채집 사회에서는 여성들이 더 효율적으로 경 제적 활동을 하기 때문에, 여성과 남성이 비교적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여성들도 그들의 능력을 인정받아 다른 사회 구성원들 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17) 이러한 평등한 사회 관계는 이 사회의
17) 오켈리와 카아니에 의하면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쿵 부족에서는 여성 이 열매나 음식물을 채집해서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음식물의 60 에서 80% 를 제공한다고 한다. 남성들은 동물 사냥을 통해서 음식물을 제공 하기는 하지만, 사막에서의 동물 사냥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되어서 여성
들의 채집 활동이 더 큰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족의 여성들은 그들의 지식과 기술 때문에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존경받는다. 또 자이레의 음부티 피그미 Mbuti Pygmy족이나, 필리핀의 아그타 Agta 족의 여성과 남성은 사냥이나 음식물 채집에 함께 참여하여 평등한 관 계를 유지하며, 뉴기니 남동쪽의 큰 섬에서 사는 바나티나이 Vanatinai 부족도 노동의 분리나 사회적 관계에 있어 매우 평등하다고 한다(레포 보스키 : 178).
특수한 상황에 맞게끔 평화적으로 자생했기 때문에, 이것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뿐이 아니다. 만약 한 사 회제도는 사람들이 자신의 특수한 상황에 맞게끔 평화롭게 형성 해 나갈 때 자연스럽고, 이런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것은 바람직 하다고 한다면, 현대에는 현대에 적합한 제도들이 자연스럽고 바 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의 특수한 상황은 무엇인가? 성별 문제와 관련 해서는, 현대 의학이 발달하면서 여성의 생식능력 reproductive ability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겨나게 되면서 여 성이 아이를 가지거나 가지지 않을 수 있는 선택권을 향유하게 되었다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퍼거슨 Ferguson : 52 참조). 또 현대 에는 근력보다 전문적 지식이 더 중요한 사회적 자원인 고로 여 성들이 남성들보다 직업 전선에서 불리할 이유도 없게 되었다. 이러한 현대적 상황에 가부장제는 더 이상 적합하다고 볼 수 없 다. 어떻게 보면 파이어스톤 Firestone 이 주장하듯이 이러한 문화 적, 과학적인 발달을 토대로 하여 성별적 역할에서 모두가 자유 로워진 상태에 걸맞는 제도가 현대의 특수 상황에 맞는 자연스럽 고 바람직한 제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18) 이렇게 본다면, 논18) 이와 관련해서는 파이어스톤의 책 참조(pp. 140-141). 하지만 파이어 스톤은 급진적 페미니스트로서 여성의 본성인 임신과 자녀 양육을 여성 읍 구속시키는 원인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논의가 전개된 것은 자 연적인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을 개조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는 맥락에서였다.
증 2의 두번째 전제는 페미니즘에 유리하게 이용될 수도 있으며, 더 이상 본성론적 논증을 뒷받침하지 못하게 된다.
3 새로운 인간상의 모색 ——- 양성적 androgynous 인간앞에서 <여성성> 과 〈남성성〉이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는 논증을 받아들일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 밝혀진 지금, 우리는 남성과 여성 모두가 구해야 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모색할 수 있는 단 계에 들어섰다. 바람직한 인간상은 무엇이며, 이러한 인간상이 추구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이야말로 페미니즘뿐 만 아니라 윤리학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탐구해 온 주제라 할 수 있겠다. 그런 만큼 이 문재와 관련한 철학적 문헌들은 셀 수 없을 정도이고, 여기에 대해서 논의하다 보면 현재 우리의 관심 으로부터 벗어날 우려가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 주제를 양성 문 제와 관련된 논의에 국한할 것인데, 이때 부각되는 것이 〈양성 적〉인 인간상이다. 이 인간상은 페미니즘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관심과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으로서 깊이 논의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양성성〉은 무엇이며, 이것은 과연 우리 가 추구해야 할 만한 이상인가?1) 단일적 양성성양성성의 어원을 살펴보면, 그것은 남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이를 〈 Gynandry〉라고 부르기도 한다(데일리 Daly : 31). 문리적으로 해석된 양성성은 〈여성적〉인 특성과 〈남 성적〉인 특성이 동시에 한 개인에게서 발견되는 상태를 의미한 다. 즉 양성적인 인간은 그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전 남성이건 간에, 〈여성적〉인 특성들과 〈남성적〉인 특성들을 골고루 지니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그의 생물학적인 성과 관련 없이, 감수성이 예민하고, 남들에 대해 보살피고자 함과 동시에, 합리 적이고, 용감하며, 냉철하기도 해야 한다.
데일리는 이 개념이 〈마치 존 웨인과 브리지트 바르도를 스카 치 데이프로 붙여 놓은 것과 같이, 인간에 대한 두 개의 왜곡된 반쪽들을 함께 붙여놓은 꼴〉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같은 책 : 30). 즉 현대 사회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이라 지칭되는 것에 는 덕성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특성들도 있기 때문에, 이 개념들 울 그대로 접합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만과 질두, 유약함, 무능. 어리석음 등은 여성들이 지니고 있 는 부정적인 특성들로 여겨지고, 폭력과 비정함 및 권위주의 등 은 남성의 부정적인 특성들로 여겨지는데, 덕성과 악덕을 구분하 지 않고 접합할 때에 도출되는 인간상은 우리가 익숙한 정상인보 다도 훨씬 부도덕할 수 있다. 이런 점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상 식적인 〈여성성〉과 〈남성성〉의 접합은 마치 〈주인과 노예 언어 또는 이미지를 통해 자유로운 인간을 규정하려는 것〉과 같이 자 가당착적 일 수 있다(레 이몬드 Raymond : 61} .이에 대해 양성성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양성성의 개념이 전 통적인 〈여성성〉 및 〈남성성〉과 관련되는 부정적인 특성들은 포 함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죽 여기서 양성성이 〈여성성〉과 〈남 성성〉이 결합되는 상태라고 했을 때, 이 특성들은 바람직한 특성 들, 즉 덕성들에 국한된다는 것이다(워렌 Warren : 171 ; 트레빌콧Trebilcot : 164). 이렇게 보았을 때, 〈여성적〉 덕성은 그 중심에 보살핌의 성향을 두고 있으며, 다른 여러 덕성들은 이 덕성을 제 대로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적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여성 적〉 덕성은 우선적으로 보살피고자 하는 성향이 강한 것이고, 보 살핌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필요에 대한 감응성, 그들에 대한 강한 보호 본능, 따뜻함, 부드러움, 조용함, 깔끔 함, 탁월한 언어적 표현력, 직관력, 협동심 등의 덕성들이 필요 하게 되는 것이다. 그에 반해 남성적 덕성을 논할 때에 핵심이 되는 덕성은 없지만, 대체로 합리성, 논리성, 객관성, 효율성, 책임감, 독립성, 용기, 자신감 등을 〈남성적〉 덕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찌보면 이러한 두 종류의 덕성들이 융합되는 것은 불가능하 다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두 종류의 덕성들은 서로 양립 불가능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경우에 냉철하고 합리적인 사람이 다른 어떤 경우에는 감성적이고 부드 럽다는 것은 모순적 내지는 비일관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합 리적이고 냉철한 사업가가 갓난아기를 안고 다독거리며 우유를 주는 모습을 상상하기가 다소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이런 모습은 매우 이상적으로 느껴지기는 하지만). 하지만 트. 레빌콧이 지적한 대로, 양성성이 목표로 하는 것은 지금 당장 우 리가 아는 상태로의 여성성과 남성성의 결합이 아니라, 이러한 결합에의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성별을 넘어선 〈새로운 특성들과 새로운 종류의 성격들〉이 창출되는 상태이다. 이 때에 양성적인 인간은 〈더 이상 부분적으로 여성적이고 부분적으로 남성적인 인 간이 아니라, 여성적이지도 남성적이지도 않은, 그 속에서 성별 이 사라지는 인간〉일 것이다(트레빌콧 : 164).양성성의 옹호자들은 이 인간상이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하는보편적 이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가? 그 이유는 우 리가 일반적으로 〈남성적〉인 덕성이나, 〈여성적〉인 덕성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덕성〉이라는 용어에서도 암시되듯이, 가치로운 것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죽 이 덕성들은 단지 여성이나 남성 만이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닌, 모든 인간이 추구하고 발달시켜야 하는 〈인간적〉 덕성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갇은 책 : 166). 또 만약 다른 조건이 같다면, 덕성은 많이 발달시킬수록 다고 한 다(워렌 : 179). 더구나, 모든 인간이 이러한 덕성들을 발달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바에야, 이 덕성들을 모두 추구하 지 않을 이유는 없다. 퍼거슨이 지적하듯이, 모든 인간의 두뇌 왼쪽은 분석적, 논리적, 연쇄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고, 오른쪽은 전체적이고, 은유적이며, 직관적인 사고의 기능이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 입증된 상황에서(퍼거슨 : 62-63) 이 덕성들을 골고루 발달시키는 것은 인간의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것이고, 너스바움 이 말하는 모든 것을 두루 갖춘 온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방 법인 것이다(너스바움 : 294-297 참조). 이렇듯 〈여성적〉 덕성들과 〈남성적〉 덕성들을 두루 갖춘 인간상은 모든 사람들이 추구해야 하는 하나의 보편적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을 트레빌콧은 〈단 일적 양성성 monoandrogy y〉의 입장이라고 지칭한다(트레빌콧 : 162).
2) 다수적 양성성단일적 양성성의 입장은 가장 일반적인 양성성의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트레빌콧은 이 입장에 대비되는 입장으로서 〈다수적 양성성 polyandrogyny〉의 입장을 더욱 바람직한 대안으로 제시한다(트레빌콧 : 163). 이 입장에 따르면 성별과 관련해서 사람들이 추구해야 하는 이상은 단일적 양성성의 이상 단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일적으로 양성적인 모습을 추구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어떤 사람들은 순수하게 〈여성적〉인 모습이나, 또는 순수하게 〈남성적〉인 모습을 이상으로서 추구할 수도 있다.
다수적 양성성이 추구되는 사회가 대다수의 여성들은 〈여성적〉 이고, 대다수의 남성들은 〈남성적〉인 우리의 현실과 무엇이 다른 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수적 양성성이 추구되는 상 황과 현상황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현상황에서 성과 성별은 간 밀한 관계 를 갖지만, 다수적 양성성이 추구되는 세계에서는 성과 성별의 관계가 끊어전다. 즉 이 세계에서는 생물학적인 남성이 〈순수하게〉 여성적인 특성들만을 발달시킬 수도 있고, 생물학적 인 여성이 〈순수하게〉 남성적인 특성들만을 발달시킬 수도 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단일적 양성성의 입장에서와 감이 〈여성성〉과 〈남성성〉이 잘 조화된 상태를 추구할 수도 있다. 개인들이 추구 하는 이상이 어느 정도의 〈여성성〉 대 〈남성성〉의 비율을 충족시 키느냐는 다수적 양성성의 입장에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단지 그들이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정보들에 접하는 과정 -필 자는 이를 〈비판적 고찰〉의 과정 19) 이라고 부르겠는데-을 통 해, 자율적으로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여성성〉 대 〈남성성〉의 비율을 선택한다는 것이고, 사회는 각 개인이 자신의 이상을 추 구하는 데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다방면으로 돕는다는 접이다.다수적 양성성의 입장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 것인가? 물론 지 금 당장은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단일적 양성성의 이 상이 실현되는 것도 역시 지금 당장은 별 현실성이 없다. 이 둘19) 필자는 졸고 「절차적 자율성」에서 자세하게 이 과정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pp. 92-114 참조.
중 어느 것이라도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먼저 현 사회의 강 압적인 성별 고정 관념들이 해체되어야 한다. 즉 〈여성성〉 및 〈남성성〉과 관련된 부정적 특성들이 배제되어야 하며, 여성은 '여성적'이어야 하고, 남성은 '남성적'이어야 한다〉는 관념 또한 폐기되어야 한다. 따라서, 트레빌콧이 지적한 대로 다수적 양성 성과 단일적 양성성의 입장에서 최우선적인 목표는 현재의 전통 적인 성별 개념들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 두 입장은 공 동접 이 있다(갇은 책 : 165).
하지만 만약 이러한 고정 관념이 무너지거나, 또는 적어도 현 재보다 많이 약화된 상태에서 이 두 입장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순수〉하게 〈여성적〉인 모습이나 〈남성적〉인 모습은 단일적 양성성을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거부되어야 하지만, 다수 적 양성성을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인정된다. 그렇다면 장기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 어떤 입장이 더 나은 것인가? 필자는 다음의 두 방식으로 다수적 양성성의 입장이 단일적 양성성의 업장보다 낫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필자는 먼저 단일적 양성성의 입장 이 지니고 있는 난접을 지적하고, 둘째로 다수적 양성성을 뒷받 침하는 근거로서 자율성의 최우선적인 가치에 대해 논의할 것이 다.(1) 단일적 양성성의 문제점단일적 양성성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추구하는 이상적 인간상은 〈여성적〉 및 〈남성적〉 덕성들을 두루 갖춘 조화된 인간의 모습이 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상은 모든 행위자들이 자신의 성과 무관 하게 추구해야 하는 보편적인 이상이다. 하지만 어떤 이상이 〈보 편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이상이 〈보편적〉이 라는 것은 그 이상이 규범적으로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것인가,아니면 사실상 보편적이란 말인가? 〈이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규범적인 것이므로, 어떤 이상이 〈보편적〉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모든 사람이 사실상 그 이상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단지 어떤 이상이 〈보편적〉인 것으로 부과된다고 해서 그것이 일반적 의미에서의 〈보편적〉 이상이 될 수는· 없 다.20) 보편적 이상은 규범성의 조건 의에도, 적절한 조전 아래에 서 모든 사람 이 그것을 기꺼이 보편적 이상으로 받아들일 것이 라는 조건 또한 만족시켜야 한다. 즉 한 이상이 〈보편적〉이라고 했을 때에, 그것은 그 이상이 인간 본성에 너무도 근본적이기 때 문에, 만약 이 명료하게 생각하기만 한다면 모든 사람들은 그것 을 원할 것이고, 따라서 그것의 부과는 더 이상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0)예를 들어, 어떤 독재자가 자신만의 이득을 최대화할 것을 보편적인 이상으로 부과한다고 해서 그것이 보편적인 이상이 될 수는 없을 것이 다.
그렇다면, 과연 〈명료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필자는 이것을 행위자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과 관 련해서 상관성 있는 모든 취득 가능한 정보를, 이상적으로 생생 한 방식으로, 편견 없이, 여러 번 계속해서 고려해 보는 것이라 고 보고 싶다.21) 〈이상적으로 생생한 방식으로〉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정보를 그 생생함과 구체성을 최대화시킨 상태에서 고찰
21) 브랜트는 이러한 과정을 〈인지적 심리치료cognitive psychotherapy〉라 고 부르면서, 비합리적인 욕구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이상과 관련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 라고 생각한다(브랜트 : 111-113 참조). 이 과정은 바로 〈비판적 고찰〉 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본다면 단일적 양성성의 이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다수적 양성성에서 필수적인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 다고 볼 수 있다.
하는 것을 의미하며, 〈취득 가능한 정보〉는 당대의 과학적 지식 의 일부이거나, 또는 귀납적 및 연역적 논리의 규칙들에 부합하 는, 공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증거에 의해 정당화되는 신념들, 또는 현재 과학에 알려진 절차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증거에 입 각한 신념들을 의미한다. 또 〈상관성이 있는〉 정보는 행위자가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정보를 의미하 는데, 예를 들어 그 이상이 실현되었을 경우 예견 가능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생각이라든지, 또는 그 이상이 실현되었을 때 행위 자가 어떤 느낌을 가질지 등에 대한 정보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계속해서〉 수행하라는 것은 그 과정을 통해서 행위자가 그 이상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될 때까지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다면, 행위자가 거짓된 신념에 의존하여 형성하였거 나, 모방 심리에 의해 형성했거나 또는 어릴 적 잘못된 사회화나 주입에 의하여 무의식적으로 형성했거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좋 다고 하니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이상 등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판정될 것이다(브랜트Brandt : 115 이하 참조).
단일적 양성성의 이상은 이 과정을 거쳤을 때에도 가치로운 이 상으로서 모든 사람들에 의해 채택될 수 있는 것인가? 어떤 사 람들은 덕윤리학자들이나 단일적 양성성 옹호자들과 같이 모든 것을 두루 갖춘 모습을 이상적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 만, 명료히 생각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하더라도 〈모든〉 행위자들 이 단일적 양성성의 이상을 자신의 이상으로 받아들인다고 볼 수 는 없다. 어떤 이들은 자기 삶의 일면에 집중하여 그것을 발전시 키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 이상의 실현을 위 해 일생을 바칠 수도 있다. 22)22) 그 예로서 간디나 루터와 같은 인물들을 둘 수 있다. 길리간은 이러 한 인물들이 지나치게 자신의 〈남성적〉 이상에만 얽매어 인간 관계의
측면에 소홀한 을 들어 비판하고 있다(길리간 Gilligan 1993 : 269)
이런 삶이 분명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일적 양성성의 이상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볼 수 는 없다. 그 일례로서, 다양하며 때로는 모순적인 여러 덕성들이 과연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라는 이미 지적했던 문제와 더불 어, 이 이상을 채택한 행위자 이 그 과다한 부담으로 인해 과연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 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생각해 볼 때 굳이 단일적 양성성의 이상 이 <남성적>인 이상이나 〈여성적〉인 이상들보다 더 낫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고 된다. 더구나, 단일적 양성성의 이상은 단 하 나의 이상 밖에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강압적이다. 어떤 행위자는 <명료한〉 사고를 거치더라도 〈남성적〉인 이상을 추구하 고, 또 다른 어떤 행위자는 〈여성적〉인 이상을 추구하고자 할 수 도 있을 터인데, 단일적 양성성의 입장은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 하지 않으며 자신의 입장만을 유일하게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다른 입장에 서는 행위자에게는 〈횡포〉가 될 수 있다. 즉 단일적 양성성의 입장에서는 행위자들의 자율성이 무시될 소 지가 있다.
(2) 다수적 양성성이 전제하는 자율성의 의미이에 반해 다수적 양성성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개 인의 자율성이다. 행위자들은 모두 자율적으로 자신의 이상을 추 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최소한의 요건으로서 〈비판적 사 고〉의 과정만 만족시킨다면 〈여성적〉인 이상이나 〈남성적〉인 이 상도 바람직한 이상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개인의 자율성이 존중 된다는 것은 어째서 그렇게 중요한가? 어째서 자율성에 대한 존중은 어떤 것보다도 우선적으로 여겨져야 하는가? 그 이유는 자 율성이 상황에 따라 경중을 따질 수 있는 여러 중요한 가치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가치들의 경중이 따져지고 평가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선행 요건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 행위자에게 자율성이 결여되었다면, 그는 이미 여러 가치들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릴 수 없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율성은 〈가치들 중의 가치〉이며, 어떤 다른 가치보다 도 우선적인 것이다.23)
23) 많은 윤리학자들이 이러한 필자의 견해를 공유한다는 것은 철학사적 으로 자율성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살펴보면 명백하다. 자율성의 개념은 서양 도덕 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상이한 윤리학 체계들이라고 해도 자율성의 개념은 공공연하게나 또는 암묵적으로 그 체계 속에 중요한 요소로서 도입된 경우가 대부분 이다. 자율성을 도덕원리의 근원적 요소로서 도입한 대표적인 예로서는 거워쓰 A.Gewirth 의 일반적 일관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Generic Consistency나 칸트의 제4정언명법인 자율성의 원리the formula of autonomy 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렇듯 자율성을 표면에 부각시키지 않았더라도 많은 도덕철학자들은 자율성의 비양도성the inalienability of autonomy을 전제하고 그들의 도덕 체계를 전개한다.
또 자율성이야말로 위에서 정의한 바대로의 〈보편적〉인 이상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즉 자율성은 인간 본성에 너무도 근 본적이기 때문에, 만약 그들이 명료하게 생각하기만 한다면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원할 것이고, 따라서 그것의 부과는 더 이상 부 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유일한 것이다. 앞서 정의한 방식으로 〈명료〉하게 생각한 행위자는 자신의 특수한 상황에 따라서 〈남성 적〉인 삶을 살아가고 싶을 수도 있고, 〈여성적〉인 삶을 살아가고 싶을 수도 있으며, 또 단일적으로 〈양성적〉인 삶을 살아가고 싶 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자들 어느 누구도 자율성이 결여된 삶을 살아가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자율성이 결여된 삶
이라는 것은 행위자에게 자기 삶에 대한 결정권이 박탈되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명료히〉 생각할 자유조차 박탈된 상태이므로, 〈명료히 〉 생각했을 때 자율성이 결여된 삶을 원하다는 것은 어쩌 면 자기 무효적 self nullifying인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든 중요한 것은 자율성이 이렇듯 모든 인간에게 근본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이렇듯 최우선적인 가치인 자율성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우선적 으로 모든 합리적인 행위자들에게 고유한 삶이 있다는 점을 인정 해야 한다. 행위자들은 환경이나, 성격, 그들이 경험해 온 바가 각각 다르다. 이러한 행위자들은 〈상이한 목적을 추구하고 그 목적의 만족을 위한 상치되는 요구들을〉 가질 뿐 아니라(롤즈 Rawls : 127),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살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레이만 : 6, 75 참조). 이렇듯 충돌 가능한 다양한 삶의 계획 들을 가지는 행위자들의 자율성이 제대로 존중되기 위해서는 행 위자들이 그들의 고유한 가치관을 선택하고 그것을 추구함에 있 어 그 가치관의 내용에 최소한의 제약만을 가하는 도덕 원칙이 채택되어야 한다. 단일적 양성성의 입장에서처럼 모든 행위자들 에게 단 하나의 보편적인 이상을 추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최소 한의 제약이라고 볼 수 없다. 다수적 양성성의 입장이야말로 모 든 행위자들이 자신의 상황이나 성향에 따라 각자의 이상을 스스 로 설정하고 추구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에 행위자들이 〈무엇을 원할지에 대해 어떠한 선행적 제한도 가하지 않고〉(롤즈 : 254), 따라서 행위자들의 자율성에 상응하는 존중을 표명하는 입장일 수 있는 것이다.3) 다수적 양성성에 대한 단일적 양성성으로부터의 비판이러한 다수적 양성성의 논지에 대해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티몬스 Timmons & 와써만Wasserman : 2-3). 우선, 이러한 다수 적 양성성의 입장이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비 판이 있다. 즉 다수적 양성성의 입장에서는 논의를 전개하기도 전에 이미 자율성의 가치를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 이의의 여러 덕성들은 이차적인 문제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다수적 양성성의 입장이 단일적 양성성의 입장에 비해 우월하다 는 것이 입증되기 위해서는 자율성이 어째서 다른 덕성들보다 더 중요한가가 먼저 입증되어야 하는데, 다수적 양성성의 입장에서 는 이미 자율성의 최우선적인 가치가 상정되었기 때문에 순환적 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밝혀진 바와 갇이, 자율성은 어느 가치보다도 선행되는 우선성이 있다. 행위자가 자율적이지 못하 다면, 마치 아무리 멋진 마네킹이라도 마네킹에 불과한 것과 같 이, 그가 지닌 어떤 덕성도 의미가 없게 된다. 이렇듯 자율성의 최우선성에 대한 앞서의 논의가 보충된다면, 다수적 양성성의 입 장이 순환적이라는 비판은 극복될 수 있다.
둘째로, 행위자들이 다수적 양성성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단수적 양성성에서 요구하는 특성들이 구비되어야 하기 때문에, 단일적 양성성은 다수적 양성성보다 선행되어야 한 다는 주장이 있다. 즉 다수적 양성성의 입장에서 요구되는 대표 적 특성들로는 열린 마음(관용 또는 무편견성)과 정보에 밝아야 한다는 것이 있는데, 열린 마음의 요건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감정에 대한 감응성과 같은 여성적 덕성을 전제하고, 정보에 밝 아야 한다는 요건은 행위자가 객관적이고, 논리적이고, 호기심이 많을 것 등 남성적 덕성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 로 다수적 양성성의 이상을 추구하는 행위자는 단일적 양성성의 이상을 먼저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비판은 논리적 비약을 하고 있다. 한 행위자가 열린 마음을가져야 한다는 것은 그가 감응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 는다. 한 행위자가 다른 사람에 대해 감응적이라는 것은 전자가 후자를 개인적으로 만났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한 행위자는 자신이 만나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 대해서도 관용적일 수 있다. 실제로, 한 행위자는 추상적인 이념들에 대해서도 관용적일 수 있다. 즉 열린 마음에의 요청은 특별히 다른 사람들과의 직접적 대면을 전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정보에 밝아야 한다는 것 도 행위자가 논리적이어야 한다거나, 객관적이어야 한다거나, 호 기심이 많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감정적이고, 호 기심이 없는 사람 도 자신이 무엇을 전정으로 원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위치와 관련된 많은 정보를 찾아보고 견 문을 넓혀야 한다. 아마도 현실적으로 정보에 밝은 사람들은 호 기심이 많고 객관적일지 모르겠으나, 다수적 양성성이 요구하는 요건은 규범적인 것이지 사실에 관한 기술이 아닌 것이다.
세째로, 다수적 양성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무편견성, 자율성 등의 가치를 최우선적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미 단일적 양성성의 이상에 대해 나쁜 편견을 가지게 된다는 비판이 있다. 즉 다수적 양성성의 입장에서 중요시되는 관용의 덕성을 받아들인 행위자는 당연히 단 하나의 유일한 이상을 추구하는 단일적 양성성의 이상 을 거부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단일적 양성성의 이상이 요구 하는 여러 덕성들의 함양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것이며, 결국 이 러한 덕성들은 함양되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는 것 이다. 이 비판 역시 지나친 논리적 비약을 범하고 있다. 관용이 중요 하다는 것을 인식한 행위자들이 〈여성적〉 및 〈남성적〉 덕성의 함 양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수적 양성성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덕성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아니라, 이러한 덕성들이 두루 함양된 이상만이 유일하게 바람직 하다는 주장이 어떤 행위자들에게는 자율성에 대한 침해가 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행위자는 그의 성향에 따라 〈여성적〉 덕 성만 추구하고자 할 수도 있고, 어떤 다른 행위자는 전혀 그 반 대일 수도 있다. 또 어떤 행위자는 단일적 양성성의 이상을 자신 에게 알맞는 이상으로 채택할 수도 있다. 또 어떤 행위자는 단일 적 양성성의 이상을 자신에게 알맞는 이상으로 채택할 수도 있 댜 이 세 경우 모두 자신이 채택한 이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다수적 양성성 입장의 취지이다. 즉 〈여 성적〉인 덕성들과 〈남성적〉인 덕성들이 모두 바람직한 것이긴 하 지만, 이 여러 덕성들 중 어떤 덕성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는 자 율적인 개인에게 말기자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단일적 양성성의 입장으로부터 다수적 양성성 의 입장에 가해진 비판들은 모두 극복가능한 것들이며, 자율성의 우선적인 가치에 대한 필자의 논의가 정당한 한 다수적 양성성의 이상은 단일적 양성성의 이상보다 더 우선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맺는 말 필자는 이 논문에서 전통적인 〈여성성〉과 〈남성성〉이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부과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대한 대안 들을 스스로 모색할 수 있고, 또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리고 이러한 대안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서 〈양성성〉의 이 상을 살폈고, 이에 대한 두 가지의 해석 중 특히 〈다수적 양성 성〉의 이상이 바람직하다는 논의를 펼쳤다. 하지만 〈양성성〉의개념에 대해서는 극복하기 힘든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필자는 여기서 이 문제점을 살피고, 이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함 으로써 이 논문을 끝맺고자 한다.
그 문제점은 이렇다. 〈양성성〉의 개념은 인간의 성격에 대한 성적 고정 관념을 제거하고자 하지만, 그 개념 자체가 바로 그것 이 거부하고자 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개념을 통해 구성되 었기 때문에 자가당착적이다.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덕성이 성별 화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여성적〉이고 〈남성적〉인 덕성들을 발달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설적이지 않은가? 여성들에게 합리성, 논리성 등을 발달시키라고 종용하면서도 그 것들을 여전히 〈남성적〉인 덕성들로 부르는 것은 이 덕성들이 여 전히 여성들에게는 이질적인 것이고, 남성들에게는 자연스럽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고 있는 듯 여겨질 수도 있다(워렌 : 181 : 데일 리 : 31 참조 ; 레이몬드 : 61 참조) . 워렌은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양성성〉이라는 용법을 고집 한다. 〈양성성〉이라는 것이 단지 은유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또 〈여성성〉 또는 〈남성성〉이라는 것이 단지 오래된 언어 적 관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백히 하기만 한다면,24)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일반인들에게 페미니스트의 메시지를 더 용이하게 전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더구나 현실적으로 많은 페미니스 트 이론가들이 이 용어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당장 이 용법을 버린다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덧붙인다. 하지만 언젠 가 이 고정 관념들이 무너져 내려 더 이상 합리성이 〈남성적〉이 고, 보살핌이 〈여성적〉이라는 신화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우 리는 〈양성성〉이라는 개념 또한 포기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워24) 그래서 필자는 일관성 있게 이 용어들을 강조 부호 안에 넣었다. 〈소 위〉를 이 용어들 앞에 붙여 사용해도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렌 : 182-183) .
하지만 필자는 비어드슬리 Beardsley와 마찬가지로 〈양성성〉이라 는 용어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미래를 위해서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비어드슬리 : 197- 199). 〈양성성〉은 상기한 자가당착성과 여성/남성의 이분법적 사고로 인해 종국에는 페미니스트 목적에 폐해를 끼칠 수도 있다.25) 즉 페미니즘이 목표로 하는 것은 성별 고정관념의 극복임에도, 〈여성성〉과 〈남성성〉의 결합을 의미하는 〈양성성〉의 사용으로 인해 이 용어가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 무 지한 사람들에게는 성별의 구분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계 속해서 여겨질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이 계속 되는 한 페미니스트들이 애초에 목표로 설정했던 자의적인 성별 고정 관념의 폐기는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25) 실로 워렌은 반페미니스트들이 〈양성성〉의 개념 을 그들의 왜곡된 목 적에 사용한 예로서 June Singer의 Androgyny : Toward a New Theory of Sexuality (Garden City, N. Y. : Anchor Press, 1976) , p. 183 를 든다.
따라서 우리는 〈양성성〉의 정신을 고스란히 간직하지만 이분법 적 논리를 극복한 대안적 용어 를 찾아야 하겠는데, 26) 필자는 생 소한 개념의 소개로 혼란을 불러일으키느니 차라리 기존의 용어 중 〈양성성〉이 의미하는 것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는 용어를 찾 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자율성〉이 바로 그러한 용어라고 생각하는데, 이미 본 바와 같이 이 용어는 다수적 양성
26)예를 들어 레이몬드는 〈온전성 integrity〉의 개념을 제시한다. 그녀는 온전성을 〈어떤 부분이나 요소도 제거되거나 부족하지 않은 상황 : 분리 되지 않거나 깨어지지 않은 상태…… 분리되지 않은 것 ; 완전한 전체 ……불순하거나 침해되지 않은 상태 ; 고장나거나unimpaired 부패되지 uncorrupted 않은 상태 : 원초적으로 완전한 상태 ; 건전성〉이라고 규정 한다. 그녀는 이것이 가부장제로의 〈타락〉이 있기 전의 〈원초적〉 상태 을 의미한다고 한다.
성이 함축하고 있는 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 리가 기존의 성별 고정 관념을 넘어섰을 때에 이상으로 추구해야 하는 인간상은 〈자율적〉인 인간상이다.27) 자율적인 행위자들은 그들이 생물학적으로 어떤 성에 속하든 간에 자신의 상황과 성향 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거쳐서 자신이 전정으로 원하는 모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며, 이때 그 모습은 온화하고, 따뜻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정성을 쏟는 모습일 수도 있고, 자신의 일에 대한 확신에 넘쳐서 의연하게 외길을 걷는 모습일 수도 있다. 행 위자들이 바판적 고찰의 과정에 충실한 이상,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도 우리의 존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27) 페미니스트 일각에서는 자율성의 개념이 너무 〈남성적〉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는데, 필자는 이들이 주장하는 〈보살핌〉의 이상도 자율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을 「페미니즘과 자율성」에서 논한 바 있다.
* 필자의 요구에 따라, 이 논문은 참고 문헌을 제시한다――·편집자 주.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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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왜 여성들의 지위는 역사 속에서 시도된 여러 번의 삶의 제도 전환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요지부동의 것인가? 여성이 열 등하기 때문인가? 사회주의자들은 자유주의를 공격한다. 자유주 의가 결과한 자본주의는 여성의 경제 사회적 종속 위치를 전혀 개선시키지 못했고, 부르주아 가족은 오직 가사일만을 여성에게 제공했다는 것이다. 계급 관계와 경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 의 분석은 보다 급전적인 여성주의의 초접이 되었다. 그러나 여 성주의자들은 마르크스 이론 역시 여성 문제를 분석하는 틀로 부 적절한 것임을 발견했다. 여성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데 실패한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은 시몬느 드 보브와르와 같은 여성주의자들 로 하여금 타자와 자아의 실존적 관계에 대한 보다 면밀한 탐구 를 하도록 이끌었다. 그후 심리분석적 여성주의자들은, 실존주의 적 관계 분석을 넘어, 마르크스주의의 혁명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는 가부장적 가족 구조에서 발생한 여성적인 심리 연구에 몰 두했다. 최근의 구조주의 언어 이론가들은 성 차별주의가 바로 문화의 최초 기원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그렇다면 여성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변하기 위해서는 문화 자 체를 거부해야 할 것인가? 반(反)문화주의를 택하지 않는 한, 세상은 여성들에게 있어서 출구 없는 방인가? 이 글은 이런 물 음들에 기본적인 관심을 가지면서, 이제까지 논의되어 왔던 여러 여성주의 입장들을 통해 가부장 제도와 여성 차별의 관계에 대한 개략적인 지도를 그려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런 지도 위에서 여 성주의가 어떤 식으로 가부장적 질서들에 대처할 수 있을지에 대 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가부장 제도와 자유주의 최근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의 억압적(차별적) 현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다른 억압의 상황과 달리 여성에서만 그리고 여성 모두에 서 관찰되는 억압의 특징이 무엇인가에 주목한다. 물론 여성적 억압의 정체성은 여성이라는 이유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라는 점 에서 찾아진다. 그러나 그 특징 중 중요한 것 하나는, 다른 경우 에서와는 달리 여성적 억압과 관련해서 여성들의 주목할 만한 저 항이 역사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여성의 억압은 다른 종류의 억압, 예컨대 인종 이나 빈부, 신분에 따른 억압들보다 심각성의 정도가 덜했기 때 문에, 즉 참을 만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여성이 특별히 모자라 기 때문인가? 여성과 남성의 차별은 다른 차별과 달리, 합리적 인 이유를 갖는 합당한 것이었기 때문인가?밀J. S. Mill은 『여성의 예속』 에서 여성들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다른 어떤 경우에서 보다 교묘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남성 들은 여성들을 힘으로 지배하지 않는다.〉 남성들이 여성에게 요 구하는 것은 단지 힘으로 지배되는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었으며, 그 이상의 것, 즉 여성의 마음 the favourit까지 원했다는 것이다. 즉 전면적 지배를 원한 것이다. 때문에 남성들은 다른 종류에서 사용되는 힘의 공포 대신 교육과 길들임이라는 보다 교묘한 방법 을 사용했고, 이에 여성은 자신의 상태를 객관화해 본다는 것이 그만큼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1) 존 스뮤어트 밀, 『여성의 예속』, 김예숙 옮김 (이대 출판부, 1986) , p. 62. “사회적 자연적 원인들이 합세하여 여성들이 남성의 권력에 집단적 으로 저항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남성은…… 공포라는 수단 대 신 교육이라는 수단을 사용한다. ……여성적인 것은 순종과 복종이며, 철저히 자신을 부정하고 남을 위해 사는 것이 도덕적인 것이며, 애정 이외의 삶을 살지 않는 것이 여성의 의무이며 여성의 본성이라고 교육 한다. …… 그리하여 더욱 철저한 예속화가 이루어진다.
그는 같은 책에서 〈인간은 더 이상 고정된 신분으로 태어나지 않고, 신분의 냉혹한 굴레에 매이지도 않고, 그들의 능력과 주어 전 이로운 기회들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각자에게 가장 바람직스 럽게 보이는 운명을 자유롭게 성취한다는 데서 발견되는 현대적 이념에 비추어 볼 때, 여성의 억압은 현대 사회 제도 가운데 떠 있는 고립된 사실〉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런 여성을 예속화하 는 제도 대신 그는 여성에 대한 모든 직업을 개방하는 남녀 평등 제도를 제안한다. 여성도 남성도 마찬가지로 한 인간으로서 자신 의 삶의 목표나 방식을 선택할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여성의 종 속적 지위를 강요하는 제도와 관습을 변경하고자 한다. 이들 변 화를 통해 〈가장 보편적인 인간 관계가 부정의 대신 정의에 의해 규제될 때 오는 사회적 이익〉과 더불어 〈해방된 인류의 절반이
얻게 될 사적인 행복, 즉 인간이 본성적으로 가장 필요한 자유를 얻음으로써 얻게 될 행복〉이라는 개인적인 이익이 보장될 것이 며, 이는 공리주의적 원리에도 부합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가부장 제도와 현대의 자유주의 이념은 분명 양립 불가능하다. 전자는 남성이 가정이나 가정 밖에서 수장이 되는 질서로서 남성 에 대한 여성의 종속관계가 본질적이다. 반면 후자는 인간의 자 율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으로서, 누구도 적절한 이유 없이 차별 받아서는 안 된다는 평등성을 본래적 이념으로 한다. 이런 자유주의 이념에서 모색된 사회 계약적 모델은 정치적 가 부장제를 극복하는 데는 효과가 있었다. 로크는 〈가부장제 비판〉 에서 계약론적 정치 모델 이전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었던 가부장 적 정치 질서관을 대변하고 있는 필머를 공격한다.2) 필머는 정 치적 권위는 상속의 정통성에 기초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신은 아담에게 세상을 주었고, 그 지배권은 아담으로부터 옛날 가부장 들을 통해 역사 시대의 정통성을 갖춘 합법적인 왕국에로 이전되 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필머에 따르면 〈부자연스러운 것이 며〉 위험스럽고 말도 되지 않는 것이다. 왕권을 이전된 가부장적 권위로 보는 필머의 군주 정치 사상을 비판함으로써 로크는 계약 론적 정치 사상을 전개시킨다. 그리고 일관되게, 그는 가부장적 권위가 정치 무대에서 인정될 이유가 없다면 가정 내에서의 가부 장적 질서가 옹호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가정 내 에서의 부권의 철대성을 강조한 자유주의자 루소와는 달리, 가정 안에서 부권과 모권은 동등한 것이라는 견해를 밝힘으로써 가정2) Melissa A. Butler, "Early Liberal Roots of Feminism : John Locke and the Attak on Patriarchy," Feminist Interpretations and Pilitical Theory, ed. Mary Lyndon Shanley & Carole Pateman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Press, 1977) , pp. 74-94.
내에서 상당한 민주적 질서로의 진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3)
그러나 그는 재산을 경영하거나 관리하는 데서 여성과 남성이 가정 안에서 동등하다고 한다면, 그들 간에 의견이 불일치할 경 우, 효과적인 결정을 내릴 수 없을 것을 염려한다. 그리하여 가 정에는 최종 결정권자가 있어야 하며, 그것은 남편이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남편이 있는 결혼한 여성은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 는 존재가 된다. 재산권을 인권 개념으로 이해했던 로크로서는 결과적으로 결혼한 여성의 인권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가정 안에서의 결정권은 남성에게 있어야 한다는 가부장적 관념 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이른바 〈가부장적 반가부장주의〉인 셈 이다.4)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자유와 이점에서 어느 누구도 차별되지 않아야 한다는 평등의 자유주의적 이념의 적용은 남성에게 한정 되는 것으로서 여성에게까지 확장되지 않았다. 자유주의적 이념 이 가부장적 가족질서나 사회적인 성 관계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 은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월스톤크래프트나 해리엣 테일러 등 초기 여성주의자들은 평등 의 원칙을 여성들에게까지 확장시킬 것을 요구한다. 5) 그리고 최 근 많은 여성주의자들도 민주주의가 기초하고 있는 정의, 자유, 평등의 원칙들을 여성과 가족에까지 확장시킬 것을 요구해 왔다. 그들은 여성이 정책에서나, 작업장에서나, 최종적으로는 집에서,3) John Locke, "Of Paternal Power," Philosophy of Woman, ed. Mary Briody Mahowald(Hackett Publishing Company, 1983), pp. 158-160.
4) 이 명칭은 Zillah Eisenstein이 붙인 것이다. 참고, 『자유주의 여성 해 방론의 급진적 미래』, 이경애 옮김 (이화여대 출판부, 1981), p. 59. 5) Mary Wollstonecraft, "A Vindication of the Right of Woman " in Rights of women ed. Charles Hagelman Jr. (New York : Norton, 1967) , pp. 205 -220.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취급해 줄 것을 요구해 왔다. 간단히 말해 서 그들이 요구한 것은 현대 사회의 계약적 관계들 안에 자유롭 게 들어갈 수 있는 완전한 권리에 대한 요구였다. 그들은 자유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기회 균등의 원칙과 법 앞에서의 평등 원칙 이 여성을 과거와 같은 종속적인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리라 믿은 것이다.
그러나 요사이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믿음의 정당성에 대한 반성이 일고 있다. 민주주의 질서 안에서 역시도 여성의 가 부장적인 종속적 위치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현실 인식으로부 터 일어난 의식의 전환이다. 왜 만인은 누구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천부 인권을 갖고 태어난 평등한 존재라는 자유주의 이 념조차 여성들을 해방시키지 못하는가? 이런 상황은 우리 나라도 예의가 아니다. 1991 년 가족법 개정 은, 비록 세법, 민법 등의 개별 조항의 문제들이 아직 남아 있기 는 하지만, 〈양성 평등의 실현 및 사회 민주화를 뒷받침할 법〉이 라는 평가를 얻고 있다. 이것은 이 사회에서 개인이 그의 삶을 살아나가는 선택을 함에 있어서, 성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장 애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평등화 요청을 실현한 것으로 우리 법 사상사에서도 큰 획을 그은 것이라 평가될 만한 것이다. 그러나 〈풍성한 제도적 평등 보장책이 정착되어 가고 있는 시점에 접어 들면서 오히려 법이라고 불리는 그 무엇이, 진정 여성의 삶의 그 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해줄 수 있는가에 관한 회의들이 시 작되고 있다. 이러한 지적 동요는 우선 현상적으로는 무엇보다도 법 개혁을 이룩한 여권 신장론자들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 성이 처한 현실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경험적 인식으 로부터 오는 것이라 하겠다.〉6)3 가부장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자유주의적 방향에서 부딪치게 된 이런 상황에 대한 분석은 다 양하다. 자유주의적 여성주의는 여성의 이성적 자율성의 회복을 통한 가부장적 제도의 변화를 기대한다. 여성이 모든 면에서 남 성과 같아짐으로써 여성의 차별적 현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 이다. 이로써 이들은 경제적 독립성을 위한 직업이나 이성적 자 율성 회복을 위한 교육 기회의 균등을 요구한다. 모든 면에서 남 성과 같아짐으로써 남성과 동등해질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여성적인 특징들이 바로 여성 자신을 열등하게 원 인이라 보는 반여성적 여성주의로 나가는 경향이다.그러나 이런 접근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자유주의는 주 어전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상황을 초월하여 이성적 자 율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에 따라 여성 역 시 주어진 삶의 질서가 어떠하든 여성은 자신의 상황을 객관화해 보고, 깨어 있는 의식으로 자신의 주체적 자아를 확립해야 한다 는 것이다. 즉 인간을 이성적 실존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실존 주의 입장에 서는 보부와르 역시, 극한 한계 상황 속에서도 실존 적 결단을 내리는 존재로서 인간임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위와 같 은 흐름 속에 있다.이 점을 가장 신랄하게 지적하는 측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 여성의 문제 해결에 내적인 결단만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문제 해결의 모든 것을 개인적인 의지에다 뒤집어씌운다는 것이다. 여 성 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사실 여성 자신의 문제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들 여성주의자들이 비판하는 여성적 특성들은 사6) 박은정, 「여성주의 정의론」 (법 앞에서의 양성평등 연구회 발표, 미간 행), p. 1.
실 그들이 선택한 특성이라기 보다는 사회 문화적으로 형성된 것 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이 따로 있다 면, 여성의 의식적 깨임만으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 자유 주의적 여성주의는 칸트적 자율성만을 강조하는 대신 정치 경제 적 자유를 소홀히 함으로써 그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자유주의적 여성주의는 여성이 왜 지금과 같은 장적인 질서 속에 자신을 적응시켜 왔는지 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다. 7)
7) 밀 역시 여성의 『예속』에서 가부장 제도가 역사에서 시도된 유일한 성 체계 형태라는 사실로부터 논의를 출발시키고 있을 뿐, 왜나 어떻게를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럼으로써, 그 역시 여성이 가사 일을 돌보고 남성 이 사회 활동을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보고 있다.
대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의 차별적 상황을 여성 의부적 상황, 기본적으로 사회의 경제적 구조에서 찾는다. 이런 의부적 여건의 변화가 여성의 의식 변화보다 문제 해결에 있어 일차적이 다. 인간의 의식이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 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이다. 이들은 사유 재 산의 발생이 가부장적 가족의 기원이라고 본다.8) 여성은 임신 • 출산 • 양육이라는 과정 속에서 남성의 보호를 필요로 하고, 가정 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자원의 공급을 남성에게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남성은 생산 방법의 향상을 통한 부의 축적을 이루게 되 고, 이 부를 상속할 자식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 다. 이것이 부권제로의 전환이며, 여성에 세계사적인 패배를 의 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남성은 부르주아이며 여성은 프 롤레타리아이다.〉9) 여성 억압은 남성의 사유 재산권 행사에서
8) Friedrich Engels, "Origin of the Family," Philosophy of Woman, ed, Mary Briody Mahowald(Hackett Publishing Company, 1983), pp. 101-116.
9) Rosemarie Tong, Feminist Thought (Westview Press, 1989) , p. 48.비롯된, 사유 재산 제도가 결과한 계급 억압의 한 형태라는 것이 다. 따라서 여성의 문제를 사유 재산 제도를 없애 계급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제거되리라 진단한다. 그러나 이들의 가부장 제도 분석 역시 가부장 제도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성적 차이에 의한 노동 분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기본 가정 위에서 출발한다는 점 에서 그 한계를 시사하고 있다.
사실, 급진적 여성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실망에서 나온 것이다. 10) 공산주의 국가에서의 여성의 삶이 가부장적인 질서로 부터의 해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경제적 계 급 해방이 곧 성의 해방이 아님을 확인한 것이다. 11) 경제적 계급 차별이 제거되더라도 성적 계급 차별은 여전히 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여성 차별 현상은 경제 계급 구조의 부수 현상이 아니 다. 마르크스주의 분석의 잘못은 그들이 계급 제도로서 사회를 이해할 때 경제 계급과 독립해 있는 성 계급 제도의 독자성을 인 식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10) 급진적 여성주의가 남성 맑시스트들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Rosemarie Tong(l989) 참고.
11) 〈비록 지역에 따라 다르게 관행화되기는 하지만. 노동의 성적 분업은 소련이나 쿠바나 중국 등에서도 존재한다. 이들 사회의 역사가 달랐었 고, 가부장 제도에 대한 투쟁에서의 한계는 그들 문화의 특수성에 의해 규정되어왔다. 거기에는 특히 중국과 쿠바에는, 여성의 삶에 진정한 진 전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국가에는 노동이나 사회의 성적 분업이 존재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말이 아니다〉 Zillah Eisenstein, "Developing a Thoery of Capitalist Patriarchy and Socialist Feminism," in Capitalist Patriarchy and the Case for Socialist Feminism (1979) , p. 25.차별 당하는 여성 경험의 중심은 경제적인 계급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성적인 계급 체계에서이다. 그렇기에 급전주의자들은 역 사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간의 두쟁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
의 투쟁으로 쓰여져야 하며, 접전의 경계선은 남성과 여성 사이 에 그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의 사회적인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생산 관계가 아니라 재생산(출산)의 관계라는 것이다. 즉 출산을 여성 통제를 이용하는 가부장제가 여성 억압의 기초라는 것이다.
이제 처음 여성 문제의 해명을 위한 개념틀로서 가부장제 를 사 용하는 급진적 여성주의는 〈가부장 제도란 남성이 권력의 우위와 경제적 특권을 점하는 성적인 권력 체계〉라고 정의한다. 12) 가부 장 제도란 남성 중심의 사회적 위계 질서이다. 가부장 제도에 기 반한 법적 제도가 과거에 훨씬 명백했다 하더라도, 권력의 기본 관계는 노동이나 사회의 성적 분업을 통해 오늘날에도 암암리에 여전하다. 가부장 제도의 근원은 경제적이거나 역사적인데 있다 기 보다 오히려 생물학적인 데 있다. 〈남성들의 통제를 통해, 가 부장 제도의 뿌리는 여성의 출산적 자아에 뻗쳐 있다. 이런 권력 의 위계 질서 속에서 여성의 위치는 경제적 계급 구조에 의해 정 의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사회 조직에 의해 정의된다〉.이런 분석을 통해, 개인적인 것으로서의 성은 실은 정치적인 것이라는 점이 밝혀진다. 급진적 여성주의에서 개인적인 것과 공 적인 것간의 이분법적인 분리가 사실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밀접 히 연결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여성들은 사회의 바로 구 성의 정치 때문에 종속적인 위치를 공유하고 있다. 성적인 분 업화를 통해 사회 구조를 조직하는 것은 여성의 활동과 일과 욕 구와 야망을 제한한다. 〈성은 정치적 함축을 갖는 사회적 지위 범주the status category이다〉. 13)가부장 제도는 체제 보편적이며 문화 보편적 crosscultural 이다.12) 같은 책, p. 17.
13) Kate Millett, Sexual Politics (Nwe York : Doubleday, I970) , p. 25.그것은 사회마다 그들이 어떻게 성적 위계 질서를 제도화하느냐 에 따라 다르게 현실화될 뿐이다.14) 〈성 역할의 윤곽은 사회적으 로 차이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권력은(예의 없이) 남성의 몫 이었으며 지금도 남성의 몫이다〉.15)
14)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믿는 것과는 달리, 대부분의 여성주의자들은 가 부장 제도의 역사는 자본주의 역사보다 선행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단 자본주의 제도하의 성 역할을 통해 남성에게 권력을 제공하는 오늘날의 가부장 제도는 핵가족 안에서 제도화된다는 특징을 가질 뿐이다.
15) Zillah Eisenstein, 앞의 책 , p. 24.4 가부장 제도와 성 역할
급진적 여성주의는 이제 여성 억압 현실의 뿌리가 〈가부장적인 성의 체계〉에 깊이 박혀 있음을 본 것이다. 이에 따라, 계몽주의 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나 마르크스주의가 가부장적 질서를 타파 하는 데 왜 효과적이지 못했는가가 설명된다. 자유주의 역시 남 성과 여성의 성 역할에 따른 역할 분담을 효율적인 것이라는 의 미에서,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가부장적 질서를 옹호 하게 되며, 마르크스주의 역시 여성의 문제를 경제적 계급 질서 의 문제로만 분석함으로써 가정 내에서의 성 역할을 제대로 분석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이 분석에 기초한다면, 여성의 가부장 제도에서 비롯되며, 가 부장 제도를 가부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토대로 하고 있는 여성과 남성의 성 역할 개념을 거부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가부장 제도 의 정당성은 성 역할의 정당성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성 역할이정당함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이라고 여겨져 온 것들이 진정 〈여성적〉, 〈남성적〉이라 할 만한 것인지 가 검토되어야 한다.16) 이런 논의에서 발견되는 잘못은, 생물학 적 개념으로서의 암수를 지칭하는 sex 와 문화적 개념으로서의 여성과 남성을 지칭하는 성gender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이다. 17) 이런 구분을 명확히 한다면, 여성으로 사는 것과 여자로 사는 것 사이에는 필연적 연관이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16) Joyce Trebilcot에 따라 여기에서 〈성 역할〉은 특정 성을 갖는 사람들 에 의해서만 (또는 주로) 행해지는 것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여러 요 인들이 성과 역할 간의 상호 관계 를 장려하고 있는 그런 역할을 의미하 는 것으로 사용한다. Joyce Trebiloct, "Sex Role : the Argument from Nature," Social Ethics : Morality and Social Policy, ed. Thomas A. Mappes & Jane S. Zcmbaty (Mc Graw-Hill Book Company 1977), p. 155 참조.
17) 성적인 속성은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이지만 gender는 역사적 과정 의 산물이다. 예컨대 여성이 임신을 한다는 사실은 성 sex 에 기인한다. 그러나 여성이 아이를 기른다는 사실은 gedner, 문화적 구조에 기인한 다. 사희 안에서의 여성의 지위 를 고정시키는 주범은 sex 가 아니라 gender이다.성 역할에 대한 논의에서, 이 점을 혼동함으로써 여성적인 것 과 남성적인 자연적 차이가 곧 사회적 문화적 역할의 차이의 기 초가 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가부장적 질서를 정당화해 주는 〈여성적〉, 〈남성적〉 구분의 대부분은 문화적인 것, 사회적인 것이라는 데 여성주의자들은 논의를 집중시켜 왔 다. 인간이 태어나서 자신의 자아를 형성시키는 사회화의 과정에 서, 여성은 자신의 문화가 여성적이라고 규정해 온 기존의 가치 나 규범을 습득하고, 내면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18) 때문에 남성
18) 실존주의자나 정신 분석적 여성주의자들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산 양식이 바뀌게 되면 여성의 문제도 해결되리
라고 믿었지만 경제 계급이 제거된 사회에서도 여전히 여성이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에 매달려 있게 되는 것은 여성 스스로 전통적인 역할을 선 택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선 택〉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전통적인 기존의 문화 속에서 형성된 자 아는 그 문화가 가지고 있는 삶의 양식들까지 내면화한 자아이기 때문 에 기존의 방식대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이들 양성주의자들은 여성으로 하여금 〈여성적〉 역할을 선덱하게 만드는 자 아 형성의 과정을 분석한다. Andrea Nye, Feminist Theory and the Philosophies of Man (Routledge : New York, London, 1988) , pp. 115 -171.
들에게 보다 여성들에게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행동이나 심리적 특성들은 우리 사회가 주입시키고 주조해 낸 특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특성에 의거해서 현재의 성 역할의 당위성을 주장한 다는 것은 현재의 질서를 공고히 한다는 의미 이외에 그 질서 자 체의 정당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실제로 현재 관찰되는 특징들이 특정성과 내적 관련을 갖고 있 는 것인지 아니면 전적으로 비본래적인 의적 관련성을 갖는 것인 지 여부는 사실 끝나기 어려운 논쟁일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특성들이 본래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에 따른 성 역할이 정당한 것인가에 있다. 그것이 본래적 특징이라 하더라도 그런 특징들에 따라 역할을 고정시키고 어떤 제도가 그것을 강제하는 것이 바람 직한가는 전혀 별개의 물음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문화적 동물〉 이라 정의할 때 거기에 두는 긍정적 가치는 인간이 자연적 상태 에 매이지 않고 오히려 자연적 질서를 극복하고 인간을 위한 보 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를 꾀한다는 데서 찾아진다는 점을 고 려한다면, 성 역할이 성적인 자연 특성에 따른 것이라는 것 자체 가 그것의 정당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이런 이 유로 트레빌콧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자연적, 심리적 차이에 대한 문제가 〈성 역할〉이라는 주제를 다 루는 문헌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해야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댜 성 역할이 있어야 하는지 여부는 양성 간의 내적 심리적 차이 에 달려 있지 않다. 결국 문제는 〈양성이 자연적으로 무엇인가?〉 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사회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가?〉이다.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의, 평등, 그리고 자유라는 도덕적 개념에 호소해야 하지, 성차에 대한 경험적 사실 에 호소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성 역할에 대한 철학적 논의도 전 자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19)
이 논의가 여성과 남성의 그 어떤 차이도 전정한 차이가 아님 을 주장하는 것까지 나가야 할 이유는 없다. 여성은 임신할 수 있는, 남성이 갖고 있지 못한 자연적 기능을 하며, 이런 자연적 기능과 관련된 생리적 구조나 호르몬의 차이가 남성과는 다른 행 위나 심리적인 특성을 지니도록 영향을 준다는 점 등을 전적으로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조건들이 성 역할을 고 정시키기 위해 지나치게 강조되고 과장되어 왔다는 점이다.20) 그19) 같은 책, p. 1~9.
20) Steven Goldberg 는 "The Inevitability of patriarchy," ed. Thomas (1977) 에서 양성 간의 차이는 공격성의 차이에서 판가름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비록 어떤 한 여성이 남성들과 경쟁할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여성들은 성 간의 직접 경쟁을 최소화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낫다고 논변한다. 그것이 여성에게 최선의 이익이며 사회 전체적으 로도 이익이라는 것이다. 즉 도덕적으로도 정담화됨을 주장하는 것이 다. 그러나 이런 논변은 과연 개인의 자유와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을 목인하면서까지 추구할 만한 이익이 무엇인가가 먼저 대답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재기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대답해 야 할 것이다. 성 분업에 기초한 가부장 제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여 성의 이익이라는 논변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현실적으로 왜 남성들이 하는 일에 비해 사회적 보상이 현저히 뒤떨어지는 일에 여성들이 종사하게 되는지를 해명해야 할 것이다.
런 자연적 특성들은 가부장적 제도를 통해 성 역할을 강제하는 것을 정당화해 주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5 성 차별 체계로서의 가부장 제도성 역할 자체가 남성이 권력의 우위와 경제적 특권을 점하는 성적인 권력 체계 를 귀결하는 것은 아니다. 성 역할 분담이 가부 장적 질서로 연결되는 데는 사회적 효율성 또는 경쟁력의 제고라 는 가치가 매개되어 있다. 사회적 효율성을 최고 목표로 삼는 구 조에서는 개개인의 특수성은 일차적 존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모든 사회 구조는 효율성의 제고를 위해 조직화되며, 그 안에서 인간의 위치는 결정된다.어떤 제도나 질서가 사회적 효율성을 높이는가는 그 사회의 성 격에 의해 결정된다. 사실상 가부장적 질서를 효율성이라는 목표 에 의해 정당화하는 논의가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인류가 가져 본 사회나 문화의 성격에 기인하는 것일지 모른다. 이제까지의 역사는 인간의 생존을 위해 자연을 정복하는 역사였다고 말해진 다. 이른바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충족되는 에덴 동산으로부터 아담과 이브가 쫓겨난 이래, 인류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연적 여건 및 다른 인간들과의 투쟁하는 경쟁의 역사로 기술된다. 이런 점은 동양이나 서양을 막론하고 인류 보편적이 다. 이런 여건에서 필요한 능력은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능 력이며 자신이 목표한 것을 획득할 수 있는 공격력이다. 생존이 라는 목표 아래 남성적인 능력이 우대되고, 상대적으로 여성적능력이 평가 절하되는 문화가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21)
21) 알려진 모든 사회에서 여성은 문화보다는 자연에 더 가까운 존재로 정체화된다. 자연의 지배를 통해 그것을 극복하는 것으로서 이해되는 모든 문화는 이제 자연적인 것에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에 여성은 존재 의 질서에서 열등한 것의 상징이 된다. 이에 대한 충분한 인류학적 논 의는 Gerda Lermer, The Creation of Patriarchy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참고. 특히 ch. 1 "Origin," pp. 15-35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을 최고 목표로 삼는 구조에서 훌륭 한 인간이란 필요한 것들을 쟁취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갖춘 자 가 된다. 이때 〈필요한 것〉이란 문화적인 의미에서 가치 있는 것 둘로서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해서 얻는 것들과 남들과 경쟁해서 이겨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에 한정된다. 공기나 물과 같이 경쟁 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기 는 하지만 가치 있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 자손 역시 마찬가지 다. 인류의 생존 보존을 위해 자손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경쟁에서 이긴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문화 적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다.22) 공적인 경쟁의 영역이 문화적 가 치가 생산되는 영역이며, 경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영역은 사적 인 영역으로 분류되어 문화 의적인 또는 자연의 영역이 되는 것 이다. 이제 문화적인 가치를 얻을 수 있는 인간의 탁월성은 공적 인 경쟁 속에서 남과 겨루어 이길 수 있는 능력,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며, 그것은 이제 권력을 보장하는 능력이다. 모든 가치가 화폐에 의해 측정되고 비교되고 교환되는 현대 사회에서, 공적인 영역에서의 활동은 화폐가 지불되지만 사적인 영역에서의 활동은 화폐가 지불되지 않는 영역으로 분류됨으로써, 필요한 것들을 얻 을 수 있는 힘은 남성들에게만 부여된다. 이런 구조에서 남성은
22) 일부일처 제도는 자손의 생산과 양육을 경쟁의 영역으로부터 배제시 키는 것운 공고히 해주었다.
생산자요 여성은 소비자일 뿐이다.
이런 구조에서 요구되는 능력은 어떤 의미에서 필요한 것을 얻 기 위해 밀고 당기는 인간 시장 안에서의 경제적 탁월성이다. 전 제되고 있는 사회의 모델은 다름 아닌 시장market place 이다. 그 리고 여기서 활동하는 인간들은 상호 무관심한 자들로, 바로 그 시장에서 자신이 이익을 최대화하려는 목표와 그 목표를 실현시 켜줄 가장 효과적인 수단에 관심을 갖는 경제인들로 그려진다.23) 경쟁의 가치 를 강조하는 문화에서는 경쟁 능력의 탁월성은 합리 적 능력이란 이름으로 도덕적으로 경쟁 능력을 갖춘 자는 실제적 권력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 권위까지 획득한다.이처럼 경쟁의 영역과 경쟁 의적 영역을 가르고, 전자에 문화 적 가치를 부여하는 반면, 후자를 자연적인 것 즉 인간적인 가치 이전 단계로 간주하는 구조 속에서, 아이를 배고 낳아 수유하고 양육하게 되는 여성의 역할과 그동안에 필요한 것들을 밖으로 부 터 공급하게 되는 남성의 역할은 가부장적 질서를 형성한다. 가 족 안에서 〈공적〉인 영역에서의 활동을 통해 가족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 남성은, 〈사적〉인 영역에서의 활동을 통해 가족 둘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 여성보다 우위이다. 이때의 우월성은 단순히 정치, 경제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도덕적인 의미 까지 포함하는 우월성이다.파이어스톤 같은 급전적 여성주의자들은 생물학적 성 차이가 가부장제의 궁극적 원천이라 분석하고, 따라서 여성 해방은 그런 생물학적 차이를 무화시키는 것으로부터 가능하다는 처방을 내놓23) Virginia Held, "Non-contractual Society : A Feminist View in Science, Morality & Feminist Theory," ed. Marsha Hanen & Kai Nielsen, Canadian Journal of Philosophy Supplementarys, Vol. 13 (The Univeristy of Calgary,1987), pp. 111-137.
았지만,24) 사실 가부장적 질서는 생물학적인 sex 차이 자체 때 문이라기보다는 그 능력을 여성 억압을 위해 이용하는 정치, 경 제, 문화적 장치들에 있는 것이다.25)
24) 그녀는 여성 해방은 출산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주장한다. 즉 여성의 육체를 구속하는 임신 출산을 현대의 기술에 맡김으로써, 여성을 억압 하는데 이용되는 원인을 제거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 정치 에서의 힘의 문제 를 간과한 데서 나온 성공할 수 없는 해결책이라는 비 판을 받는다. 남성들이 사회의 힘을 갖고 있는 한, 현대의 기술 발전이 여성들의 해방을 위해 전개되지는 결코 않는다는 것이다. 참고, 슐라미 스 파이어스돈, 『성의 변증법』, 김예숙 옮김 (도서출판 풀빛, 1983) ; Zillah, 앞의 책 .
25) 이런 입장들에 대한 소개는 질라 아이젠스타인 (1981) 참고. 여기에서 사회주의 여성주의 논의를 펼치는 질라는 여성 억압의 구조를 자본주의 경제 체계와 가부장적 성 체계의 변증법적 이중 체계로 분석하고 있다.6 다원적인 가치 회복과 가부장 제도의 관계
그렇다면 여성 해방의 방법은 여성적 차이를 거부하고 남성과 같아짐으로써 아예 가부장적 빌미의 원천을 근본적으로 제거해 버리는 급진적 방법을 채택하는 것만이 가부장 제도를 청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니다. 여성과 남성은 다르지만 여성적인 특 징이나 여성적 활동이 남성적 특징이나 활동과 동등한 가치를 지 닌다는 길을 택함으로써 여성성을 유지하면서도 그때문에 차별당 하지 않는 비가부장적 제도라는 비교적 온전한 길을 택할 수도 있는 것이다.후자의 논의는 특히 길리건의 심리학적 연구 결과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셈이다. 그녀는 심리 관찰 결과 여성적 사고나 행위에서 발견되는 여성 특유의 일반적 특징들이 있음을 확인하면서, 그 특징들이 이제까지 기존 철학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도 덕적 가치에 있어서 열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등한 것, 남성 적 특징이 갖는 결함을 보완해 주는 상보적 관계에 있는 것임을 제안한다.26)
길리전에 따르면, 첫째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주어진 세계를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주어진 현실을 수용하는 유연성이 높다고 말한다. 그러한 특징이 여성 고유의 것인지, 사회화된 것인지 여부를 단적으로 가릴 수 는 없겠다. 그러나 여성에게 두드러지는 것으로 관찰되는 이런 특성은 아마도 여성적 조건들, 생리학적으로나 사회학적인 두 가 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형성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 든 이제까지 이런 성질들이 수동적인 것,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 었던 것은 지배지향적이고 공격지향적인 문화가 가지고 있는 가 치 기준에 의한 평가의 결과이다.남성적 윤리관에서 가장되고 있는 인간은 보다 자율적이고 독 립적인 인간상이다. 이들은 협동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관계 이의에 어떤 관계로부터도 벗어나는 것을 최선으로 여긴다. 타인 의 간섭을 최대한 배제하고 나 역시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 간에 최대한의 거리를 유지한다. 사회 구성원들은 상대방에 대해 상호 무관심한 존재들인 것이다. 이런 시장에서의 경제적인 활동을 하 는 데 요구되는 의무는 시장 제도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공정 성의 규칙들을 준수할 것뿐이다. 여기에서는 누구나 이 규칙을 준수하리라는 기본적인 신뢰만이 요청된다.합리적인 경제인들로 구성된 시장 공동체에서 달성할 수 있는 인간의 행복이란 어떤 모습일 것인가? 여기서는 상대방이 공정26) C. Gilligan, In a Different Voice( 『심리 이론과 여성의 발달, 허란주 옮김) (철학과 현실사, 1993).
한 게임의 규칙을 준수하고 있는가만 공적 관심이 될 뿐 다른 것 은 공적 간섭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곳의 행위자들 은 독립적이며 자족적이라는 의미에서 자율적이다. 공정한 규칙 을 준수하면서 자신의 이익의 최대화를 위해 또는 최소 양보를 위해 협상하고 경쟁한다. 그러나 이런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인간 들이 모여 경쟁하는 사회가 인간의 복지를 실현해 주는 사회인 가? 여성들은 이런 의미의 독립성이나 자족성은 인간 실현을 의 미하는 자율성이 아니라고 본다. 시장 안에서 실현되는 인간의 자율성은 소의되고 고독한 자율성일 뿐이다.27)
27)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그리고 있는 이런 사회 속에서 활동하는 인간 은 긴장하며 지친다. 그리하여 이런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런 긴 장과 지침을 풀고 휴식할 수 있는 삶의 다른 공간이 필수적으로 마련되 어야 한다. 바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사회에서 그곳은 바로 가정이 된 다. 경쟁적 능력을 추구하는 사회일수록 가정의 가치는 미화된다. 그러 나 그런 휴식의 공간은 여성의 전적인 희생에 의해 뒷받쳐진다. 가정 안에서의 여성의 활동은 애정과 헌신이라는 덕의 이름으로 찬양될 뿐이 다.
경쟁능력이 인간적 탁월성으로 강조되는 것은 사실상 모순이 다. 왜냐하면 경쟁 능력은 생존이라는 자연적이고 기본적인 목적 내지는 보다 큰 욕구의 충족을 위해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물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으로서 특별히 인간적인 덕목으로 간주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인간다운 덕목이 무엇인가를 논의할 때, 생존이나 욕구의 충족을 위해 필 요한 덕목이 무엇인가 보다는 바람직한 인간 공동체를 위해 필요 한 덕목이 무엇인가가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공적인 영역에서의 경쟁능력이 인류의 바람직한 삶의 제도를 위해 필요 한 제일 덕목이라는 논의는 성공적이지 않다.
아네트 베이어 Annete Baier28) 나 코드Code는 자족적이고 독립28) Annete Baire, "The Need for More thjan Justice" in Science, Morality, and Feminist iheory, ed, Marsha Hanen & Kai Nielsen (Calgary : University of Calgary Press, 1987) , pp. 44-56.
적인 것으로서의 개인주의적 자율성 대신, 공동체를 바탕으로 한 상호 의존의 자율성 개념을 발전시킨다. 코드의 용어를 빌리면 개인person 이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창조되는 이차적 개인이다 second person .29) 그리고 우리의 상호 의존성은 일생을 통해 계 속된다. 우정의 관계나 가족의 관계는 몰개인적 용어나 상호 무 관심한 용어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관계와 더불어 전면에 나타나는 것이 신뢰, 돌봄, 헌신과 같은 개념들이다. 이 둘 개념들은 상호 무관심한 데서 확보되는 공평성이나 공정성의 관점에서는 이해될 수조차 없는 개념들이다. 이들 관계에서 개인 은 공평성과 상호 무관심 아래에 상호 대치되거나 무차별적으로 취급될 수 없다.
29) Lorraine Code, "Second Persons," in Science, Morality, and Feminist iheory, ed. Marha Hanen & Kai Nielsen (Calgary : University of Calgary Press, 1987) , pp. 357-382.
여성주의 윤리학자들은 도덕적 모델을 시장 대신 가족으로, 경 제인들 간의 계약 관계 대신 부모자식 간의 돌봄의 관계를 이상 적인 인간 관계 모델로 삼고자 한다.30) 주어진 현실을 수용하는 태도, 상대방을 인정하는 태도에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남성적 윤리관이 이상으로 삼았던 사회 공동체의 문제들을 치유 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여성적 특성들이 강조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는 방식이다. 여성주의 논의를 펴는 많은 이들이 여성주의적 특징의 중요성은 이제까지 취급되어 왔던 것과는 전 혀 다른 의미를 현대 사회에서 가짐을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을
30) Nel Noddings, Caring : A Feminine Appreoach to Ethics and Moral Education (Berkeley, CA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4) .
같이한다. 가부장적 지배질서를 특징짓는 지배하는 권력power-over을 지향하는 문화가 아니라 함께하는 능력pleasure-with31) 을 지향하는 문화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우리가 와 있음은 환경 보존 문제 등 지구적인 문제들의 등장으로 서서히 자각되고 있 다.
31) 모든 형태 억압(인종 차별주의, 성 차별주의 등등)의 패러다임이 바 로 가부장 제도임을 분석한 저서 Beyond Power에서 Marilyn French는 남성적 세계를 〈지배 권력power over〉 세계로, 여성적 세계를 〈함께 나누는 pleasure-with> 세계라는 용어로 지칭하고 있다. Rosemari Tong, Feminist Thought, p. 101, 참고.
그러나 여성성의 가치가 남성적 가치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에 근거한) 다원주의적 논제가 갖는 한계 를 여성주의자들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런 류의 논의가 오히 려 여성의 성 역할을 제도화하는 것 자체를 정당화해 주는 역할 을 할 수 있음을 경계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경쟁 을 통해 충분치 않은 자원들을 서로 나누는 방식이 경쟁의 논리 에 의거하는 상황에서라면, 목적하는 것을 얻는 데 있어, 여성적 특성은 남성적 특징에 비해 분명히 열등한 것일 뿐 결코 대등한 성질일 수 없다. 상대를 배려하는 사람과 상대를 힘에 의해 지배 하려는 사람이 공정한 경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후자가 전적인 힘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이때 이야기되는 공정성이니 협동이니 하는 말은 기만적인 용어임에 틀림없다. 이 런 상황의 전환 없이 여성적인 덕을 여성에게 강조하는 것은 실 질적인 기만이며 착취이다. 때문에 여성적 덕목이 가치 있음을 역설하는 방식이 여성만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이야기되는 방 식을 경계해야 한다. 여성적인 덕이 찬양되는 방식은 현재와 같 은 방식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성적인 덕을 실천하는 것이 곧
실질적으로 여성이 복종하고 희생하고 겸손함을 의미하게 되는 의적 여건들, 즉 가부장적 질서의 전환이 선행되어야 한다. 가부장 제도가 성적인 노동 분업과 여성의 몸을 출산의 도구로 사용하는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구조를 통해 유지되어 왔으며 ,32) 가부장적 불평등은 여성의 위치를 출산자로서 조장하고 미화하는 데 사용된 기제들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33) 이런 사실들을 간과한 채, 여성적 덕을 찬양하는 것은 또 다시 가부장적 권력 통제 여성들을 흡수시키게 됨을 뜻한다. 여성적인 덕의 전정한 찬양은 가부장적 성 체계가 청산된 구조 속에서만
32) Zillah Eisenstein, "Relations of Capitalist Partriarchy," Capitalist Patriarchyand the Case for Socialist Feminism (1979) , p.50.
33) D. Dinnerstein 과 N. Chodorow는 여자의 어머니 역할mothering은 자 연적, 본성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도, 단지 사회적으로 그렇게 구조지워 져 버리는 것도 아니라는 입장을 취한다. 오히려 의식적 선택이기에 앞 서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무의식은 전(前) 오이디푸스 시기의 남아, 여아가 자신을 길러주는 대상(어머니)과의 관 계에서 갖게 되는 서로 다른 경험의 과정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이런 유아 경험이 성장 후의 사회적 함축을 지니게 된다고 분석한다. 남자는 어머니의 몸과 자신의 몸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면서 어머니와의 분리된 관계를 경험하게 되고 이로부터 대상과의 경쟁적 관계 속에 자신을 놓 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여아는 어머니와의 일체감을 통해 내적인 공생 관계를 더 중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무의식은 성장한 후에도 남자 는 공적인 삶에 가치 를 두고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 성취하는 일을 추구 하는 일을 선택하도록 만들며 여자는 가족과의 관계 롤 유지하는 일을 선택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양성의 분리라는 문제점을 벗어나는 길을 이들은 어머니 역할을 부모가 함께 하는 것으로 제안한다. 아이를낳는 일과 달리 아이를 키우는 일은 여성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Tong, 156). 물론 이런 분석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논쟁이 걸 려 있다. 그러나 현재의 성 역할이 기존의 삶의 총체적인 질서에 의해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영향받은 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 을 것이다.가능하다.
여성적인 것이 남성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여성적인 것에 대한 가치의 회복은 어떤 의미에서 시 작에 불과할지 모른다. 여기에 러너가 들고 있는 한 가지 비유가 적절하다 .34) 여자와 남자가 같은 무대 위에서 그들 각자에게 배 당된 같은 비중을 갖는, 역할들을 연기한다. 그 연극은 그 두 종 류의 연기자 없이는 진행될 수 없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연극 전체에 더도 덜도 기여하지 않는다. 누구도 여분적이거나 없어도 좋은 역할이 아니다. 그런데 무대 장치는 남성이 바라보고 칠하 고 배치한다. 남성이 극본을 쓰고 연출하며 연기자의 연기의 의 미가 해석된다. 그들은 가장 재미있고 가장 영웅적인 부분에 자 신들을 배정하고 여성에게는 배경적인 역할을 맡긴다.여성이 그들이 연극 속에 배정된 방식에 있어 차이를 깨닫게 되자, 그들은 역할 배정에 있어서 보다 평등성을 요구한다. 그들 은 가끔 남성들을 대신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남성 연기자의 결 원이 생겼을 때 대역을 하기도 한다. 끝에 가서 여성들이 상당한 투쟁 뒤에, 역할 배정에 있어서의 평등한 기회에의 권리를 쟁취 한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먼저 〈자격을 갖출 것을〉 요구받는다. 그들의 〈자격〉이란 용어는 다시 남성에 의해 규정된다. 얼마나 여성의 자격을 갖추었는가를 남성이 심사한다. 허가서를 주든지 말든지를 남성이 결정한다.남성들이 극본을 쓰고 무대 배치를 하고 연출을 맡는 한, 여성 의 역할이 남성 역할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가치를 · 갖는 것임을34) Gerda Lerner, The creation of Patriarchy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pp. 12-13.
35) 여성이 자신을 전체 공동체 속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남성과 동등한 한 개인임을 자각하게 되는 데, 근대 자유주의 인간관의 공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자유주의적 이념 아래에서 여성들은 꾸준히 인간 으로서의 평등권을 주장하게 되고 실제 법 개정을 동해 상당한 법 앞에 서의 평등을 실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법적 평등이 실질적인 평등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가부장적 질서에 대해 갖는 자유주의 이념의 한계 를 보여준다. 우리 나라의 경우, 이런 문제 는 훨씬 심각하다. 이런 상황의 원인은 아마도 우리 나라에서 갖는 법 개정의 수한 성격에서도 찾아질 수 있다. 서구 사회에서 법 개정의 과정과 우리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들은 수년 간 길게는 수백 년 간의 긴 시간의 논쟁과 무쟁의 과정을 거쳐 어느 정도 합의에 이르러 법 개정이 이루어지는 만큼, 개정된 법에는 변화된 관념이나 문 화적 생활 양식들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죽 일반인의 변화된 삶 의 구조나 생각들이 법의 개정을 초래케 하는 것이다. 반면, 우리 사회 에서의 법 개정이란 일반인들의 변화된 관념이 기존의 법에 대한 의문 을 재기하게 하고 그에 따른 여론화, 공론화를 동해 이루어전다기 보 다, 정치적 논리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정치적인 필 요에 따라 힘 있는 정치인들의 결단에 의해 법 개정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개정된 법이 아무리 합리적 이고 명분 위에 서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법과 우리의 생활 속에서 뿌리내리고 있는 현실을 지배하는 기존의 관행과 상식들 사이의 간극은 엄청나다. 이런 맥락에서 봉 때, 서구의 법과 우리의 개정된 법이 구현 하고 있는 양성 평등의 수준을 단순 비교하여 우리 나라에서의 양성 평 등 현실을 평가하는 것은 위험스럽다.
인정받는 것만으로는 여성을 남성과 결코 평등하게 만들지 못할 것임을 깨닫게 된 시점이 바로, 맨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우리 가 서 있는 시점이다.35)
7 다원주의적 문화
밀은 『여성의 예속』 1장 「남녀 불평등 제도의 정당화가 가능한 가?」에서 남녀 간의 사회적 관념을 규제하는 원칙이 인류의 역 사이래 무수한 사고나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바뀌어 본 적이 없음을 놀라와 한다. 관습적이고 일상적인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 로 보게 만드는 사고의 습성이 장구한 역사를 갖고 내려온 이런 원칙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조차 상상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부장적 질서를 대치할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대안적 질서는 어떤 것일 것인가?러너가 제시한 다음 두 가지 은유가 새로운 시각으로부터 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울 것이다.36)36) 같은 책, pp. 11-12.
한쪽 눈으로만 볼 때, 우리의 시상은 시야가 좁아질 뿐 아니라 깊이도 결여된다. 다른 쪽 눈의 시상을 갖다 이어 붙였을 때에도 여전히 깊이를 결여한다. 두 눈으로 볼 때만이 우리는 충분한 시야 를 볼 수 있고 정확한 깊이 감각을 가질 수 있다. 또 하나의 은유 는 컴퓨터 화상이다. 컴퓨터가 (이차원의) 삼각형 그림을 보여준다. 그 그림의 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삼각형은 공간 속에서 움직 여 (삼차원의) 피라미드로 변환된다. 이제 그 피라미드는 여전히 피 라미드와 삼각형의 상을 유지하면서 (사차원의) 커브를 만들며 공간 속에서 움직인다. 우리는 사면을, 그 중 어느 것도 놓치지 않으면 서, 그들 서로 간의 관계들 속에서 동시에 전부 본다.
우리가 남녀의 관계를 가부장적인 틀에서 보아온 방식은 이차 원적이다. 가부장적 틀에다 〈여성적 시각을 덧대는 것〉은 삼차원적인 지각이다. 여성적 관점이 전체와 충분히 통합되어 움직일 때, 다시 말해서 여성의 관점이 남성의 관점과 동등할 때만이 전 체를 이루고 있는 진정한 관계들과 부분들 간의 내적 연관성을 정확히 깊이 있게 그리고 풍부하게 지각한다.
우리는 어차피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관점이야말로 보편적이고 객 관적인 관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단일 뿐이다. 그렇다면 결코 여성이 될 리 없고, 따라서 여성의 위치에 서서 세상을 체험할 수 는 남성은 여성의 관점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다른 하나의 목소리로 들어야 한다. 물론 여성도 남성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나 여성은 이미 남성들이 그들의 관점에서 서서 하는 소리를 통해 대부분의 세상을 이해해 왔고 바라보아 왔다. 이제 남성들 이 여성들의 소리에 를 기울여야 할 차례인 것이다.37)37) 물론 자신의 위치에서 세상을 이해함을 통해 전혀 불편함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익이 되는 경우라면, 그는 다른 방향에서 세계를 바라 보아야 할 동기를 갖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구 환경과 같은 인류 가 처한 문제들은 이제까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이런 상황이 남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관 접에만 머물러 있도록 허락하지 않고 있다.
러너의 은유가 시사하듯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할 이유는 없다. 그것이 하나의 문 화로서 추구되는 것 자체를 거부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지금까 지의 가부장적 문화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유일하고 전부인 절대적 문화로서 자처하고 군립함으로써 억압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여러 가능한 선택 중 하나로서까지 가부장적 문화를 거부 해야 할 궁극적인 이유는 없을지 모른다.
여성적 관점에서 인간 관계를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고정된 틀을 고집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여러 가지 다양한 삶의 질 서들이 추구될 수 있다. 급전적 여성주의자들 예컨대, 호그랜드 가 꿈꾸는 여성들만의 공동체들이 추구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한 자웅 동체적 인간상을 인간의 이상으로 하는 공동체가 추구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부장적 질서 이의의 다른 양성 관계 질서를 가져 본 적이 없는 우리로서는 우선 다양한 양성 관계들을 기초 로 하는 여러 공동체들을 허용할 수 있는 의식이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들 여러 공동체들이 어떤 질서를 서로 형성하 게 되는지를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하나의 질서 속 에서 일사 불란한 통일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부장 제도에 길들여져 온 우리의 의식과 기존의 모든 관행과 제도들이 실질적인 질서를 형성하고 있는 현실 상황에서, 가부장 제도를 다른 가능한 여러 질서둘 중 하나의 선택 가능지 로 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말이 되지 않을지 모른다. 현재 상황 에서 가부장적 문화를 하나의 문화로서 인정한다는 것은 곧 가부장적문화만을 실질적으로 인정하는 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문화로서 가부장 제도를 허용한다는 것은 이론적 인 차원에서의 의미이다. 가부장 제도가 여러 제도들 중 하나의 제도가 되는 상황으로 가기 위해, 실천적인 현 상황의 차원에서 가부장 제도는 일단은 거부되어야 할 제도이다.현재 상황에서 가부장 제도의 극복은 어떻게 모색되어야 할 까? 가부장 제도란, 도덕적으로나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남성 중심의 힘의 체계이다. 이런 체계의 극복 은 반성적 논의를 통한 합의에 의해서만은 이루어질 수 없다. 공 정한 정의의 원칙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도 이루어질 수 없다.38)38) 정의의 원칙을 제정하는 관점이 칸트적 순수 이성의 관점이거나 롤즈 적 무지의 베일을 쓴 관접이라면, 거기에 여성적 특수성이 반영될 수
없다. 실제로 모든 인간적 특수성을 초월해서 그 모든 것에 대해 객관 적인 보편적 관점이라든가 공평 무사한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 입장을 넘어 남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방법을 통해 정의의 원칙 을 발견하려는 시도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실재로 이런 역지사지의 방 법은 자신이 상대방의 입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관계(예 를 들어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까지 그 공정성의 효력을 발생시킬 수 없다. 그 점은 칸트나 롤스 자신이 자신의 글들 안에서 확인해 주고 있 다.
정의를 실현하는 기구로 이해되는 국가 역시 사회적 힘의 갈등을 조정하는 상위 기관이라기보다는 사회 내에서 벌어지는 투쟁의 일부분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39) 법 개정을 통한 가부장적 질서의 전환은, 그것이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충분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그렇다면 그 한계를 넘어서는 데는 어떤 방식을 채택해야 할 것 인가?
가부장적 질서의 전환을 위해 활동하는 여성주의자들은 자신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를 가늠할 것을 권유한다. 여성의 자아는 사회화된 자아일 수밖에 없지만, 동시 에 그런 자기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자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기 반성을 통해 일깨워진 새로운 의식들을 통해,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좀 더 객관화시켜 봄으로써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 의 생활 속에서 여성으로서 당하는 고통과 부당함의 체험을 개인 적인 것이거나 사소한 것으로 취급하지 말 것을 권유한다. 그런 체험을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해 자신의 경험이 갖는 의 미를 정치적 힘으로 구체화시킴으로써 기존의 질서에 영향을 주 어야 한다는 것이다.39) Zillah Eisenstein(1981), 앞의 책, p. 351.
이런 과정에서 주의할 점은 여성들 자신이 스스로 비판했던 기 존의 남성적 특징들을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공유하는 주관성이라는 (불가능한) 이상 the Ideal of Shared Subjectivity〉 40)에 의해 문제 해결을 시도하게 되는 위험성을 경계해 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성 자신이 부정하고자 하는 상황적 조 건들을 제거하는 방식이 여성들만의 그리고 여성들 모두의 동질 성을 기초로 하는 통일된 단일 체계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 각은 근거 없는 생각일지 모론다. 가부장 제도는 성 체계라는 점 에서 하나의 제도이지만, 그것은 문화나 사회 경제 체제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적응시켜 왔음을 상기해야 한다. 주관적 일체감이라는 이상은 실현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배타성이라는 바 람직하지 못한 정치적 함축을 갖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 런 이상을 추구하는 남성들에 의해 배제되었던 그룹이 사실 이제 까지의 여성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여성주의 안에서 이런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은 남성들과 똑같아지려는 우를 범하는 것이 될지 모른다. 〈보다 받아들일 만한 정치학은 정치 구성원들이 서로를 자신이 자신을 이해하는 것처럼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 고, 그것을 배타적으로 닫아버림 없이 그 거리를 받아들일 것이 다〉41) 는 말이 실천적 여성주의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을 차별하는 가부장적 질서의 변화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가?과연 그 변화의 시작이 도대체 가능한가? 많은 문화 인류학자들이 말해 주듯, 성 차별이 곧 문화의 기원이었다면, 성 차별의 극복은 모계 중심의 자연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 이의에40) Iris M. Youg, "The Ideal of Community and the Political of Difference," Feminism/Postmodernism, ed. Linda J. Nicholson (Routledge, 1990) , pp. 300-323.
41) 같은 책, p. 312.달리 길이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여성주의의 가부장 제도 비판 은 문화 거부론인가? 이 물음에 대해 이 글이 취한 입장은 비교 적 온전한 것이다. 우리가 타고 있는 배가 잘못되어 있음을 발견 했을 때 그 배에서 뛰어내리는 것만이 최선의 해결책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서 있는 상황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노이라트의 비유처럼 배를 침몰시키지 않으면서 이제 까지 가져보지 못한 보다 나은 배를 위해, 구멍난 배의 부분들을 교체하는 방법이 최선일지 모른다. 출구 없는 방에서 벽에 머리 를 부딪치는 방법보다는, 벽의 균열된 부분들을 두들겨 출구를 내는 방법을 백하는 것이다. 주어전 세계에 대처하는 여성들의 지혜가 가부장적 질서 청산에 대해서도 요청된다.
성과 권력
―철학에서의 의미1 들어가는 말성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고찰의 자리는 역사적으로 실 재해 왔던 사회적 맥락 속에서 위치지워질 수밖에 없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전제에서 출발한다. 〈기존의 철학 또는 주류 철학은 남성 지배 체계인 가부장적 권력 체계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가 부장적 권력 관계를 반영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이를 정당화하 는 이론적인 틀을 제공해 왔다.〉가부장제에 의해서 구성된 위계적 성별gender 체계는 철학이라 는 학문의 이론적 영역과 실천적 영역에 두루 침윤되어 있다. 그 결과 철학 속에서 여성은 비하되고 부재한 채로 보편적 인간의 범주에서 배제되어 왔다. 본 글에서는 가부장적 권력 관계가 철 학적 실천과 이론 속에 어떠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또 어떠한 방 식으로 은폐되어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인간과세계에 대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의 체계로 표방되고, 믿어 져 왔던 철학이라는 학문이 실제로는 남성 중심적이고, 남성 편 향적인 방식으로 생산되고 구성되어 온 지식의 체계임을 밝히고 자한다.
2 권력과 성I) 권력과 성권력과 성은 복합적인 구조물이며, 그에 상응하여 〈권력과 성〉 의 개념 역시 복합적이라 할 수 있다.권력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권한과 능 력,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거나 〈물리적 힘 또는 세력〉, 〈통제, 영향력, 권위〉라고 정의된다. 사회학적으로 정의된 권력의 개념 은 〈인적 자원을 포함한 사회적 자원에 대한 통제력과 사회적 기 구에 대한 통제력〉을 의미한다. 권력은 반드시 물리적인 힘에만 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이고 심리적인 힘에 기반 하기도 한다. 1) 다시 말해 권력은 강압적이고 강제적으로만 획득 되고 행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조작과 설득을 통해서 획득 되고 행사되기도 한다. 또한 권력은 권위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강제와 지배, 그리고 조작과 설득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해 주고 뒷받침해 준다. 지적 권위, 관습적 도덕적 권위, 법적 제도적 권 위의 형태로 권력은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 침두되어 있는 것이1) 권력에 대한 포괄적 논의는 다음을 참조. John Scott ed., Power, Critical concepts(Routledge, London and New York, 1994), Vol I , II , III.
다.
이렇게 볼 때 권력이라는 말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 으며, 반드시 지배와 예속을 내포하는 것도 아니다. 지배와 예속 은 관계적 개념이다. 그러므로 권력 관계가 지배와 예속의 관계 로 되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라는 망 속에서이다. 권력이 사 용되고 행사되는 방식에 따라서 권력 관계는 지매와 예속의 관계 로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이 서로 교 섭하고, 우선권을 정하고,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 권력의 과정이 라 할 수 있다. 권력은 관계의 일부분이고, 이러한 점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권력 관계에 편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권력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체계 속에서만 행사되는 것이 아 니라 일상의 도처에서 행사된다. 그것은 일터에서, 학교에서, 거 리에서, 지하철 속에서도 행사된다. 권력은 지배하는 사람이 지 배받는 사람에게만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 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서로 무관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식적 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다양한 각본에 의해 다양한 형태 로 행사되는 것이다.성 또한 권력과 마찬가지로 여러 차원으로 분화시켜 논의해야 하는 복합적인 개념이다.2) 인간에게 있어서 성이라는 것은 단순2) 성이라는 개념은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일반적으로 영어권에서는 다 음과 갇이 분류한다.
(1) 생물학적 성 (Sex:Male/Female) (2) 사회 적 , 문화적 성 (Gender : Masculinity/Feminity) (3) 인간의 성 생활과 연관되는 행위, 관계 방식, 선호 양식, 사회적 규범, 심리 구조 등을 총괄하는 의미의 성 (Sexuality : Heterosexuality/ Homosexaulity : Male Sexuality/ Female Sexuality) , 성의 개념 및 정의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다음을 참조. 장필화, 「성에 관련한 여성 해방론의 이해와 문재」, 『일과 성』, 한국 여성학회 편(청하, 1992), p. 187 이하.
3) 가부장제에서 여성에 대해 남성의 권력이 행사되는 구조와 형태는 다 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가부장적 생산 양식 : 여성의 가사 노동 전담 (2) 임금 노동에서의 가부장적 관계 : 고용과 임금에서의 성 차별한 자연(생물학)의 차원을 넘어서서 자연(몸)과 심리(마음, 정신) 그리고 문화가 만나는 교차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인간의 삶에서 성은 종족 번식을 위한 생식 기능에 국 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 형성과 자의식, 사회적 관계와 역할, 사회적 규범 등에 의해서 규정되고 또한 역으로 성이 이들 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성은 한 개인의 내적 요구만으로 형성되 는, 그래서 사적이고 내밀한 생활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현실의 요구와 조건에 의해서 제한받고 규정당한 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다. 인간의 성은 사회적 규범과 제도의 힘 이 가하는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으며, 한 사회를 지배하는 위계적 질서와 권력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2) 가부장제 -성을 준거로 하는 권력 관계성은 사회와 국가에 의해 제도적으로 통제당하며 사회적 규범 에 의해서 도덕적으로 조정된다. 성에 대한 개인적인 선호나 심 리적인 과정은 사회적으로 규제되고 조직화 • 구조화되며 통제를 받는다.성과 관련된 권력 관계의 대표적인 형태는 가부장제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성별에 따른 권력 불균형의 보편적인 형태를 보여 준다. 사회적 관계의 체계로서 가부장제는 여러 차원과 수준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로 표출된다.3) 개인들 간의 권력 관계(3) 국가에서의 가부장적 관계
(4) 남성 폭력 : 성 폭력과 성 희롱 (5) 성에서의 가부장적 관계 : 이중 모랄 (6) 문화적 제도에 있어서의 가부장적 관계 참조. Silbia Walby, Theorizing Partriarchy (Basil Blackwell, Cambridge, 1990).는 일차적으로 어떠한 목적을 추구하는 개인의 행위를 통해 형성 된다. 그러나 개인적 차원에서의 권력 관계는 보다 더 큰 사회적 차원에 확립되어 있는 권력 체계와의 상관 관계 속에서 형성되며 또한 사회적 권력 체계를 반영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부장적 권력 체계 속의 모든 인간은 자신들의 인격적인 의도가 개입되는 가 아닌가 하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성과 연관되어 형성되는 권력 관계에 편입되어 있는 것이다.
3 철학에서의 성과 권력성과 권력은 철학과 무관하지 않으며, 정치 철학에 국한되는 문제만도 아니다. 전통적 철학 이론에 대해 존재론에서부터 인식 론 그리고 윤리 이론에 이르기까지 남성 중심적이고 남성 지배적 인 권력 관계를 반영하고 수호해 왔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이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총체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와 인식을 추구하 고 인간의 행위와 공동 생활에 보편적인 규범을 제시하려는 학문 으로서의 철학이 이러한 자기 이해 자체에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는 현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철학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며 가치 중립적인 학문이라는 자기 이해를 정당화하는 논변을 설득 력 있게 제시하든가 아니면 그러한 자기 이해를 수정하거나 포기해야 하는 갈림길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철학은 전통 철학의 기본 전제들을 권력과 성의 상관 관계 속에서 비판 적으로 검사해야 한다는 요구와 도전을 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 는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이 에서는 기존 철학에서 내재하는 남성 중심주의에 대한 비 판의 논거들을 존재론과 인식론 그리고 윤리학의 문제 영역에서 개관해 보면서 철학의 비판적 자기 성찰의 필요성을 역설하고자 한다.1) 존재론―이분법적 존재론의 가부장적 변형철학에서의 이성 중심주의와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여 러 진영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조류로 포스트모더니즘 과 페미니즘 및 탈식민주의를 둘 수 있다. 여성 중심주의와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현대의 위기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계기 로 촉발되었다. 그런데 왜 서구 중심주의와 이성 중심주의가 남 성 중심주의와 연관되는가?이성과 남성을 동치시키는 것은 여성주의자들의 의도적 발견이 나 창작이 아니다. 철학의 오랜 역사동안 이성을 남성적인 것, 남성만의 능력으로 간주해 온 것은 다름아닌 남성 철학자들이었 다. 고대의 존재론적 이원론은 이분법의 목록에서 남성을 선, 빛, 능동성, 형상, 완전성의 항에 놓고, 그 반대항인 악, 어둠, 수동성, 질료, 불완전성에 여성을 위치지움으로써 여성이 열등한 존재라는 규정을 명시하고 있다(피타고라스와 아리스토텔레스). 한 편 근세의 인식론적 패러다임에서 나타나는 이분법에서 남성/여 성의 이분법은 주체/객체, 이성/감성, 영혼/육체, 정신/물질, 문 화/자연의 이분법과 동치된다. 고대의 존재론적 패러다임에서의이분법이나 근세의 인식론적 패러다임에서의 이분법은 의관상 상 호 보완적으로 보이거나 그렇게 주장되기도 하지만, 이런 이분법 에 의거하여 형성된 철학적 이론들은 거의가 이성의 편에 놓인 항목들에 우월한 가치를 부여한다. 이분법에서 양항은 동치의 것 이 아니라 위계적인 것이다.
이러한 위계적 이분법의 틀에서 존재론적 이원론의 양항은 더 이상 자족적이고 독립된 원리에 의해서 작동하는 대등한 가치를 지닌 두 개의 세계가 아니다. 한쪽 항이 우월하고 바람직하고 완 전성에 더 가깝다면 다른 항은 열등하고 반대항의 완전성을 침해 하는 위험스러운 것으로 간주된다.서구 철학에서는 이론적 인식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것도 정신 이고 자유로운 실천적 행위의 매개체도 정신이다. 이와 달리 육 체는 불확실성과 제약의 원천으로 간주되었다. 감성은 객관성을 추구하는 이성의 능력을 저해하는 것으로, 육체는 영혼의 초월성 을 내재성으로 끌어내리는 영혼의 감옥으로 이해되었다. 물질이 수동적이고 비활동적인 반면, 정신은 능동적이고 창조적이다. 이 러한 위계적인 이분법의 가부장적 변형이 남성을 이성과 동일시 하고 여성을 감성과 동치시킨 것이다.남성은 인간을 자연보다 우월한 것으로 보고 자신과 자연을 분 리시키면서 자신은 주체가 되어 자연을 대상화한다. 고대 희랍 철학에서는 여성을 물질(질료)과 연결시켰고, 기독교 철학에서는 여성을 육체와 연결시켰으며, 베이컨과 같은 근세 철학자는 여성 울 자연과 연결시켰다. 여성은 생리, 임신, 출산, 수유라는 생물 학적 조건들로 인해 남성보다 더 육체와 자연에 가까운 존재로 간주되면서 자연과 더불어 남성 주체의 대상 또는 자아의 타자가 된다. 그래서 감성, 육체, 자연과 함께 연상되고 동치되는 여성 은 불합리적이고(정념적이고) 정복되어야 하는 존재이며 유혹적인 존재이다. 이처럼 위계적인 이원론은 가부장적 성별 위계 질 서를 규범화하고 반영한다. 철학은 여성을 연약하고 감정적으로 불안정하며 직관에 의존하고 논리적으로 비일관적 존재로 규정함 으로써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이론적 토대가 되어 온 것이다. 보편적 개인 또는 보편적 주체라는 철학적 구성물들이 일반적 으로 공적 시민 즉 남성에 대한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은 기존의 존재론이 위계적 이분법의 가부장적 변형이라는 존재론적 틀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분법적 존재론에 의 해 각인되어 온 이성이나 지식과 같은 규범적 개념은 주류 철학 의 인식론적 출발점이 될 뿐 아니라 윤리학적 이론의 기본 전제 가 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철학의 이성 중심주의는 남성 중심 주의와 연관되어 비판될 수 있는 것이다.
2) 인식론一객관적 지식과 이성적 인식 주체(I) 객관적 지식의 이상철학의 한 분과로서 인식론은 인식의 본질과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며, 인식의 원천, 가능 조건, 범위, 한계에 대한 물음이 그 주요 주제가 된다.인식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참된 인식이다.인식론은 우리가 앎 또는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 이 믿음이나 억견과 구별되는 기준이 무엇인가, 즉 타당한 근거 를 가지고 정당화될 수 있는 지식의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 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지식론이 된다.인식론은 어떠한 지식이 대상에 대한 가장 좋은 신념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기준을 정해 준다는 의미에서 규범적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인식론은 그러한 기준의 설정과 함께 그 기준을 정당화 해야 한다.인식론의 기본 물음을 성과 권력과의 관계에서 논구한다는 것 은 다음과 갇은 고찰 방식을 함의하는 것이다.
〈누가 아는가?〉 하는 물음은 인식 주체에 관한 물음이다. 이는 누가 지식을 생산하는가 하는 물음 즉 지식 생산자에 대한 물음과 함께 고찰되어야 한다. 누가 지식을 생산해 내느냐, 누가 지식에 대한 권위를 부여하는가 하는 물음은 지식과 권력의 상관 관계를 지시한다. 따라서 이러한 물음을 도의시하고 인식론적 기 본 물음을 논구할 수 없다. 〈무엇을 아는가?〉 하는 물음은 인식 대상에 관한 물음이 다. 이는 과학적 지식의 대상을 누가 선택하고 어떠한 가정으로 부터 출발하며 어떠한 방법론으로 접근하는가 하는 물음과 함께 고찰되어야 한다.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을) 어떻게 아는가 ? > 하는 물음은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 간에 이루어지는 인식 과정과 참된 인식 의 원천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물음은 지식 생산 과정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조직되며, 과학적 지식의 권위를 판정하는 기준이 누 구에 의하여 결정되는가를 함께 고찰해야 답변될 수 있다.이러한 문제 제기와 고찰 방식은 인식론에 내재해 있는 남성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새로운 인식론적 패러다임을 시도하는 여성 주의 인식론의 공통된 주제로 부각된다.4) 여성주의자들에 의해 수행되고 있는 인식론적 논의는 직접적으로 여성과 성에 대한 이 론을 구성하고 있는 인식과 지식을 문제 삼을 뿐만 아니라 과학 적 지식의 본성 그 자체와 과학적 지식이 생산되고 지적 권위를4) 여성주의 인식론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다음을 참조. 졸고. 「여성학의 철학적 기반 - 여성주의 인식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 이화여대 인문과학 대학 《논총〉〉, 제 65 집, l•2호 (1994).
부여받는 그 과정을 문제 삼으며, 지식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논 의로까지 확대된다.
기존의 인식론에 내재한 남성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논변은 다 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과학적 지식의 생산 주체 -과거와 현재를 불문하고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과학적 탐구에 여성들이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 과 참여의 기회가 남성 에 의해 체계적으로 배제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을 생산하는 제도에서부터 여성이라 는 특정 집단이 체계적으로 배제되어 온 이상, 과학은 가치 중립 적 • 성 중립적일 수 없다. 과학적 지식의 지적 권위―과학적 탐구를 통한 지식 생 산은 과학자 개인의 단독적인 활동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 라 사회적으로 지적 권위를 승인 받는 제도적 장치 속에서 일어 나는 것이다. 기존의 지식 생산 체계는 거의 대부분이 남성에 의 해 주도되어 왔고 점유되어 왔다. 지적 권위를 부여하는 제도와 인적 자원은 남성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과학적 지식의 대상——-과학적 탐구의 과정에서 어떠한 특 정한 주제나 문제를 체계적으로 무시하거나 간과하고 주변화하기 때문에 과학은 중립적일 수가 없다.권력의 비대칭성 죽 불평등은 과학적 기획에 지대한 영향을 끼 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인식론에서의 과학 이론은 과 학적 발견의 맥락보다는 이미 생산된 과학적 지식의 정당화 맥락 에만 주력해 왔다. 정당화의 맥락에만 초점을 둘 때, 과학적 발 견의 과정에서 작용하는 편견들과 성 차별-이데올로기적 편향 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과학적 발견의 맥락에서 가설 을 세우고 자료를 수집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성 차별적 편견의작용을 방치하는 것도 과학의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남성의 권력 이며, 과학의 남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저지하는 것 또한 남 성의 권력이다.
기존 인식론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은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기존의 과학에 대한 이해와 규범을 검토하면 서 주류 철학에서의 여성 배제와 여성 부재를 문제삼는다. 이 입 장은 주류 철학의 내용이 남류 지식임을 폭로하면서 기존의 주류 지식에서 배제되었던 여성에 관계된 쟁점들과 주제 들을 연구하고 다시 씀으로써 기존의 지식을 수정 • 보완하는 작업에 집중한다.또 다른 입장은 기존의 과학 이해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 기한다. 이는 여성이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서 소홀히 취급되거 나 무시된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견해에서 출발한다. 즉 중립 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이 있고, 거기에 간과되고 배제된 여성을 대상으로 첨가시키는 것 즉 지식을 보완하는 것만으로는 주류 지 식을 남류 지식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다. 이 입장에 의하면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지식의 방향 설정 자체가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이기 때문에 기존의 이론 틀과 분석 틀을 원용하여 〈잊혀져 왔던 여성〉들을 주체화하는 것은 한 계가 있다는 것이다.이 두번째 입장은 과학적 지식을 그 객관성과 가치 중립성을 정당화해야 하는 고정된 산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역동적 인 사회적 과정으로 보고자 한다. 따라서 기존의 인식론적 틀에 서 개인이 서로 구별되지 않고, 그들의 사회적 위치나 지위가 어 떠한 중요성도 갖지 않음을 문제시한다. 지식이 생산되고 사용되 는 것은 집단적인 삶 속에서이고, 이 집단적인 삶은 인식적 권위 가 행사되는 사회적 배치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은 기존의 서양 인식론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식 주체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어진다.
(2)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이성적 인식 주체서양의 전통적 인식론에서 인식자는 개인이다. 여기서 인식 주 체로서의 개인이란 세계를 이해하고 지각하는 데에 있어서 욕구 나 쾌락,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일체의 취향이나 정념을 제어하고 동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개인을 말한다. 이러한 능 력을 이성적 능력이라고 하고, 이성 이의의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지배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만이 인식적 자율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결국 합리론이전 경험론이건 전통적인 근대 인 식론에 있어서 이상적인 인식 행위자는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고립된 개인 또는 탈육체화된 정신이다.그러나 실제적인 현실 속에서 인간의 자아 정체성은 사회적 맥 락과 무관하게 형성되는 것도 인식되는 것도 아니다.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인간은 언어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제도적으로 위계화된 성별에 의해서 자아를 형성하고 자기 정체성을 의식한 다.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성별이 자아 정체성을 구성하는 방식이 기 때문에 성별이 존재와 인식과 행위를 규격화하게 된다. 이러 한 사회 속에서는 인간의 육체도 성별화된다. 가부장제에서 보편 적인 여성의 성별 역할은 여성의 의무와 책임을 재생산의 영역에 국한해 왔다 .5) 이러한 성별 역할 분담은 세계를 남성의 세계와 여성의 세계로 이분화시킨다. 이 이분화된 세계 속에서 남성과 여성이 자신을 인식하고 성을 체험하는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 다.5) 공 • 사 영역의 분리는 여성배제의 가장 강력한 원칙으로 작용한다. 특히 가족이 그러한데, 역사 속에서 존재해 온 가족은 항상 가부장적 가족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개인의 의식(주관)이 육체적인 체험과 독립적 인 원리에 따라 작동하고, 사회적 역사적 조건과 무관하게 가치 중립적인 지식을 생산하는 행위자를 상정하는 인식론의 기본 전 제를 의문시하게 된다.
3) 윤리학―이중 규범과 자율적 도덕 행위자윤리학 또는 도덕 철학은 옳고 그른 행동, 도덕적 의무의 본 성, 선한 삶의 의미들을 문제 삼는 철학의 분야이다. 전통적 규 범 윤리학은 보편적으로 도덕적 행위와 도덕적 판단의 준거가 될 수 있는 논증 가능한 원리나 법칙을 제시하며 그 타당성을 정당 화해 왔다.전동적 윤리학에 공통되는 기본 전제는 도덕 원리가 인간 모두 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하고(보편화 가능성), 모든 인 간이 그것을 준수해야 한다(지시적 기능)는 것이다. 또한 법이나 신념 등 다른 규범 체계보다 우월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주관 적이지 않고 사회적이거나 공적이어야 하며, 일상적인 삶 속에서 행동의 지침으로 실천될 수 있어야 한다(실천 가능성)는 것이 다. 6)(1) 보편화 가능성과 이중 규범성과 권력의 관계를 윤리학의 틀 속에서 고찰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부딪히게 된다. 과연 전통적인 윤리 이론에서 말하는 〈모든 인간들〉이란 남6) Rosemarie Tong, Feminine and Feminist Ethics (Belmont ; Wardsworth Publishing Company. 1993) , p. 13ff.
성과 여성 모두를 포괄하는 것인가? 다시 말하면 보편화 가능성 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도덕적 원리는 남성에게뿐만 아니 라 여성에게도 동등한 타당성을 가지고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은 도덕적 주체의 문제로 이어전다. 자율적이고 자립 적인 주체라고 할 때 남성뿐만이 아니라 여성들도 함께 계산하고 있는 것일까?
전통적 윤리학의 이론과 원리들은 실천가능한 것인가?첫번째 물음은 도덕적 이중 규범을 중심으로 답변될 수 있고, 두번째 물음은 도덕적 주체의 문제와 연결시켜 고찰되어야 할 문 제이다. 만일 여성도 인간이라는 견해에 동의한다면, 그러나 도덕적 원리의 보편화 가능성의 조건이 남성에게만 해당된다면, 전통적 인 윤리 이론은 남성의 윤리일 뿐 보편적인 윤리가 될 수 없다. 만일 여성도 인간이라는 견해에 동의한다면, 그러나 여성에 게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주체로서의 권리와 능력이 있다는 점을 거부한다면, 전통적 윤리 이론에서 도덕적 행위자는 〈모든 인간〉 이 아니라 〈남성〉에게만 국한될 수밖에 없다.성별적 이중 규범을 내포하고 있는 전통적 윤리 이론은 위에서 제기된 두 가지 측면에서 결코 성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이론이라 고 볼 수 없다. 성별적 이중 규범 체계의 대표적인 전형은 고대 철학에서부터 근세 철학에 이르기까지 거희 모든 철학자들의 이 론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을 〈불완전한 남성〉 또는 〈기형의 남자〉 로 정의한다. 여성은 도덕적 주체로서 갖추어야 할 이성 능력을 불완전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여성에겐 〈권위가 없다〉는 말로 표현한다. 이는 여성에게 도덕적 행 위자로서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는 입장이다. 남성과 여 성는 그 능력이 다르고, 그래서 도덕적으로도 를 수밖에 없다 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의 덕과 남성의 덕은 다르고 여성과 남성 의 도덕적 의무도 달라전다.
근세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남성과 여성의 다름을 도덕적 차이 로 귀결시키는 것은 루소와 칸트 그리고 헤겔에게서 보다 세련화 되고 정교화되어 나타난다. 이들은 여성과 남성 양자를 모두 도 덕적 행위자로서의 인격체로 간주한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은 인 간으로서 동등하지만 그 본성에 있어서는 다르다는 것이다.칸트는 남성의 성은 고상한 성이고 여성의 성은 아름다운 성이 라고 규정한 뒤, 이에 따라 남성과 여성에게 합당한 두 가지 유 형의 덕을 구분한다. 남성의 덕은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고 여성은 덕은 감정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다. 칸트는 〈아름다운 성이 원칙에 대한 능력이 있는 것을 거의 믿을 수가 없다〉고 보 면서 여성이 도덕적 원리나 의무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은 합 당하지 않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칸트에 의하면 여자는 도덕적 감정에 의해서 행동하는 것이지 도덕적 법칙에 의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칸트의 여성에 대한 서술들은 그의 의무론 적 윤리학에서 정언 명령으로 공식화된 도덕 법칙이 남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든지, 아니면 그의 철학적 이론 내에 상호 모순이 있는 것이든지 양자 중에 하나라 할 수 있다.이중 규범 체계는 이론적으로 윤리적 원리의 보편화 가능성에 위배된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상의 실천에서 이중 규범의 체 계가 순결, 돌봄, 책임 등을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강요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중 규범은 남녀가 함께 관여되어 있고, 남녀가 함께 부딪히는 도덕적 딜레마의 상황(낙태, 간통, 매춘, 포르노그라피와 같은 문제 상황)에서 그 고민의 정식적 부담과 심리적 피를 여성에게만 전가하는 결과를 수반한다.
이렇게 남성에게 유리한 편향적인 가치 체계는 여성에 대한 남 성의 지배 권력을 반영해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정당화 하면서 유지시키고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윤리 이론 들은 남녀 간의 권력 관계에 내재되어 있는 불평등의 결과이기도 하고 또한 원인이 되기도 하면서 악순환의 궤도를 맴돌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2) 실천 가능성과 도덕적 자아 형성의 문제도덕적 원리에 대한 기본 전제들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능력과 조건을 갖춘 도덕적 행위자 즉 도덕적 주체가 상정되어야 한다. 전통적 규범 윤리학은 그것이 의무론적 윤리 체계이건 목 적론적 윤리 체계이건 간에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고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주체를 상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규범 윤리 체계 속에서 여성이 도덕적 주체로서 인정된다고 해도 그러한 도덕적 원리가 적용되는 세계가 여성의 자율성과 자립성을 불가능하게 하는 세계라면 그 도덕적 원리는 실천 불가능한 원리가 되어 버 리고, 실천 불가능성은 지시성, 보편 타당성, 객관성을 탈취당할 수밖에 없다.앞에서도 강조했듯이 주체라는 것은 완결되고 고정된 그 무엇 으로 소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은 순수한 의식이나 통일 적인 추상물이 아니라 육체를 가전, 성을 가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세계-내-존재〉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고립적 인 원자적 주체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망 속에 편입되어 있는 관 계적 주체인 것이다. 노동을 통해 생산하고, 생명과 삶을 재생산하고, 인격적 인간 관계를 통해 서로 상호 소통하고 사회화되는 일상적 삶의 실천 속에서 우리들의 자아 정체성은 구성된다. 남 성 우월주의 이데올로기가 일상적 삶의 모든 구조에 침투해 있으 며 제도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는 가부장적 사회의 주체는 성별에 의해 획득되고 행사되는 권력의 관계 망 속에서 형성되 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생산과 재생산, 성 및 사회화를 로 이분 화하는 가부장적 사회 구조 속에서 자신의 도덕적 행위 를 선택하 고 판단하는 도덕적 행위자이며 도덕적 갈등을 해야 하는 도 덕적 주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규범 윤리 체계의 원리가 보편화되고 실천 가능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행위자 죽 자율적 주체에 대한 메타 윤리학적 이론이 필요하다. 메타 윤리학의 과제가 〈규범적 주장 과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한 올바른 방법을 정식화하고, 이 방법 이 정확한 방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면, 메타 윤리학 은 이러한 방법이 적용 가능하고 실천 가능한 사회적 조건들까지 도 명료히 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메타 윤리학은 도덕적 주 체의 자율성을 어떠한 방법으로 보장할 수 있는가 하는 사회 이 론적 문제까지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4 맺음말이제까지 보편적 • 초역사적으로 타당하다고 표방되고 받아들여 졌던 철학적 이론과 기본 범주들이 남성 중심주의적이며 남성 지 배적이라는 비판의 논거들을 성과 권력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개관해 보았다.권력은 반드시 강제적 지배나 가시적인 폭력의 형태로만 행사되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적 권력 관계 속에서 권력은 남성 지배 와 여성 예속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권력 관계는 인간의 존 재와 인식과 행위 를 성별에 따라 위계적으로 이분화시킨다. 철학 속에서 성과 권력의 관계 는 존재론적 이분법의 가부장적 변형으 로 나타나며, 도덕적 이중 규범 체계와 추상적인 자율적 도덕 행 위자에 대한 이상, 그리고 참된 인식과 학적 지식에 대한 접근과 권위에 대한 남성의 독점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일상적 지식의 비판적 성찰을 동해 인간을 선입견과 편견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점에서 철학적 지식은 일상 적 지식과 구분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철학이 가부장제적 권력 관계 속에서 수행되는 한, 그러면서도 가부장제적 권력 관계 자 체를 문제시하지 않는 한, 철학은 여전히 검사도 논증도 되지 않 은 일상적 지식의 성 차별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의 모습 을 스스로가 인식하지도 문제삼지도 않고 있다는 공격과 비판을 면할 수 없다.철학은 남류 철학 또는 성 차별적 철학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 해서 우선적으로 이제까지 간과되어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 한 인간의 삶의 주요한 구성 부분들을 철학함의 주제로 삼아야 한다. 또한 가부장적 사회 관계 속에서 수행되어온 철학적 이론 들과 보편적 가치나 이념을 대변한다고 간주되었던 기본 전제들 이 실제로는 어떻게 남성 중심주의에의 편향을 함축하고 있는가 룰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검토를 위해 서 철학은 가부장적 사회를 지배하는 담론과 실천이 남성과 여성 사이의 위계적 권력 관계를 구성하고 정당화하는 방식에 주목해 야 한다.성과 권력이라는 주제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결국 철학이 그 안에서 권력 관계를 주도적으로 반영할 것인가? 또는 능동적으로 정당화할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넘어설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철학은 성 차별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도되 는 사회적 담론과 실천에 편승할 것이 아니라, 지배적인 사회적 담론과 실천을 남성 우월주의의 신화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데 기 여하는 해방적이고 비판적인 담론과 실천이 되어야 한다.
冊 성과문화
김상봉성과 에로스에 대한 플라톤적 고찰이진우성, 욕망 그리고 〈실존의 미학〉―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를 중심으로임홍빈불확정 시대의 성과 현대 문화성과 에로스에 대한 플라톤적 고찰
―어떤 의미에서 에로스는 선의 원인인가1 육체적 충동으로서의 에로스〈에로스 〉란 그리스어에서 성적인 욕망, 또는 이것이 동반 된 사랑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 과, 거기 뿌리박고 있는 정념으로서의 연애 감정을 가리키는 말 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에로스에 대한 풀라돈 Platon 의 견해는 우 선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로스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육체적 욕망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육체로부터의 해 방을 뜻하는 것이라 하여 죽음까지도 재앙이 아니라 축복으로 받 아들였던1) 이 고상한 철학자에게 성욕이라는 것이 무슨 긍정적 인 의미나 가치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 그것은 인간의 영혼 가 운데서 〈거칠고 짐승갇은 부분 LOV 2) 이I) Phaedo, 특히 67 b-c.
2) Res publica, 571 c.며, 수치와 사려를 알지 못하는 한낱 맹목적인 충동에 지나지 않 는 것이어서 ,3) 성욕에 사로잡힌 것은 술에 만취된 상태 µc8uoTLK6C 나 미 친 상태 µc ALKdc 와 마찬가지로 4) 무정부적이고 무법적인 상태 avapxi a Kai avoµ 에 떨어지는 것을 뜻한다. 5) 성욕이 가지는 이와 같은 방종과 야수성을 표현하기 위해 플라톤 은 에로스를 가리켜 영혼의 독재자 라고 부르기 를 주저 하지 않았다.6) 독재자가 보편적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법과 정 의의 원리에 입각해 나라를 통치하는 대신에 오직 자신의 개인적 취향과 욕망, 그리고 그때그때의 변덕에 따라 나라를 다스려, 그 것을 극도의 무질서와 노예 상태에 빠뜨리듯, 에로스 역시, 그것 이 영혼의 지배자가 될 경우, 영혼을 부자유와 노예 상태 속에서 황폐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에로스에 관한 철학적 반성에 있어 플라몬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서서 특별히 염려했던 것도 바로, 영혼이 에로스에 의해 지배될 때 생겨나는 영혼의 부자유와 노예 상태였다. 인간의 영 혼은 자신 속의 동물적이고도 맹목적인 욕망을 이성적 사유와 분 별의 힘에 의해 다스리고 지배할 때, 자신의 본래적 탁월함을 실 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의 모든 부분과 모든 기능은, 이성 적 분별의 힘에 의해 통제되고 조정될 때, 자신의 본래성을 실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영혼이 누릴 수 있는 여러 가 지 쾌락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쾌락조차도 그것이 영혼의 일 인 한, 이성의 지배에 종속할 때 참되고 온전한 쾌락으로서 발생3) 같은 곳 : ,rdonc AEkvµ¢vov TE Kdi dmAAarµ¢vov ai oxuvnc Kdi ¢p OE.(모든 수치와 사려에서 사뭇 풀려나고 벗어난 것처럼).
4) 같은 책, ,573 C. 5) 같은 책, ,575 a. 6) 같은 책, 573 b와 d.할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말에 따르면, 〈영혼 전체가 지혜를 사랑하는 부분에 따르고 있어서, 거기에 자중지란이 없을 경우에 각 부분은 다른 모든 것에서도 제 자신의 일을 수행하면서 올바 른 상태에 있을 수 있는데, 특히 쾌락에 관해서도 이런 경우에만 각 부분이 자기에게 어울리는 가장 훌륭하고 그리고 가능한 가장 참된 쾌락을 누릴 수 있다.〉7)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의 본래성에 머무를 때 참되고 온전하다. 쾌락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혼의 모 든 부분이 자신의 본래성을 실현함을 통해 산출하는 쾌락이야 말 로 참되고 온전한 기쁨인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태의 전리나 본 래적 원형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바로 영혼의 이성적인 부 분이다. 그리하여 욕망이 이성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의 본래성과 전리에 순응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때 모든 욕 망은 자신의 본래성에 합치되고 어울리는 쾌락을 얻게 될 것이 다. 그리고 그것은 욕망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쾌락이기도 한 것이다.8)
7) 같은 책 , 586 e ¢Lloao(/J
서 가장 참된 쾌락을 누리게 될 것이고, 또 그런 욕망들 자신에 어울리 는 (고유한) 쾌락을 얻게 될 것일세. 만약 각각에 대해서 가장 좋은 것 은 또한 가장 어울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말일세.)
그런데 인간이 가지는 모든 욕망들 가운데서 가장 강하고 가장 맹목적인 욕망, 그리하여 법과 질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 는 욕망이 바로 성적인 욕망이다.9) 그것은 오직 달콤한 것만을 찾아다니는 〈거대한 수벌 µ¢rac TJOhv 〉과도 같은 것인데, 10) 그것 이 우리의 영혼이 가질 수 있는 욕망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 라는 사실은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의 사실을 통해 입증된다. 즉 우리의 다론 모든 욕망은 우리의 영혼, 우리의 의식이 잠에 떨어 지면 더불어 잦아든다. 그러나 우리의 성적인 욕망은 의식이 잠 들어도 같이 잠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잠잘 때도 깨어 있 는 JCEpi 7:0V VJCVOV tritpoµi VTJ> 욕망으로서, 11) 그렇게 잠들었을 경우에는 꿈을 통해서 자신의 무시무시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다. 12)
이처럼 성욕은 우리가 잠들었을 때조차 잦아들지 않고 꿈 속 에서까지 자기를 드러낼 정도로 강렬하고 집요하다. 그런데 이 것이 더 나쁜 것은, 그것이 또한 맹목적이고 무차별하기 때문이 다. 강렬한 성욕에 사로잡힌 인간은 부끄러움이나 사려분별에서 사뭇 풀려나고 면제된 것처럼,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무 슨 짓이든지 거리낌없이 하려고 한다. 13) 〈어미와의 동침 µ rpi µc wuo a 〉이든 〈짐승과의 성 관계〉이든, 욕망에 사로잡힌 영혼9) 같은 책, 587 b.
10) 같은 책, 573 a. 11) 같은 책, 571 c. 12) 같은 책, 572, bf0Eotgvt0tc CVOLCrirvcraLgv8nAov. (그것은 꿈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네.) 13) 같은 책, 571 c.은 어떤 것 앞에서도 삼가는 법이 없다.14) 또한 그것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흉칙한 살인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 로 맹목적이다. 15) 이처럼 성적인 욕망이 일체의 자연적 법도와 인륜적 규범을 무시하는 까닭에, 에로스를 가리켜 플라톤은 〈독 재 군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의 지배자가 될 수 있 는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비록 그것이 영혼을 지배한다 하더라도, 왕아 아니라 한낱 독재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런 경우, 〈영혼의 가장 탁월한 부분이 노예가 되는 반면, 가장 사악하고 미치광이 같은 작은 부분이 도리어 주인 노릇을 하게 된다.〉 16) 다시 말해 영혼의 신적인 부분이 영혼의 동물적 부분의 지배 아래 굴종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17) 그런데 인간 의 영혼의 본래성이란 신적인 부분으로서의 이성적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므로, 그것이 통째로 다른 무엇보다도 동물적 욕망의 지배 아래 놓인다는 것은 또한 영혼이 자기 지배의 힘을 상실한 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의 영혼이 자기 자 신에 대한 군주적 지배권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는―바로 이 자기 지배가 곧 자유인 바 -영혼은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성 적인 욕망을 이성에 의해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만이 영 혼은 자신의 자유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18)
14) 같은 책, 571 c-d.
15) 같은 책 , 571 d, 574 e. 16) 같은 책, 577 d : rajTd dE µ¢pn 8oui cUElv, i v tIClK¢orara, µlKbdv 5t Kdi µox8npdTdTOV Kai µdVLK arov 6cJ1CdCLV. 17) 같은 책, 589 c. 18) M . Foucault, Histoire de la sexualite : L'usage des plaisire, 문경자, 신은영 옮김 , 『성의 역사 2권 - 쾌락의 활용』 (나남, 1990) 을 보라. 여기서 필자는 영혼의 자기 지배의 확보가 성의 문제에 대한 고대인의 관심의 중심이었음을 설득력 있게 서술하고 있다.그런데 플라톤이 에로스를 위험하고 통제되어야 할 것으로 보 는 까닭은 그것이 단지 영혼의 내적 자유를 위협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플라톤의 견해에 따르면 에로스는 영혼의 자기 관계를 왜곡시킬 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역시 기형적인 것이 되도록 한다. 사실상 에로스는 잠재적으로든 현재적으로든, 욕망의 대상이 되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즉 그 것은 지향적인 intentional 정념인 것이다. 그런데 에로스가 특정 한 사람에 대한 지향성 속에서 발생할 때, 그것은 단순한 성욕으 로서가 아니라 성욕이 결부된 연애 감정으로서 나타난다. 그런데 플라돈은 사랑의 감정으로서의 에로스에 대해서도 때때로 부정적 인 견해를 표시한다. 그의 대화편 『파이드로스 Phaedrus 에서 그 는 리시아스 Lysias 와 소크라데스 Sokrates 의 입을 빌어 꽤 장황하 게 에로스적 사랑의 해악을 고발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욕망 에 사로잡혀 쾌락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애인을 자 기 좋은 대로 자신에게 맞추려 한다.〉 19) 즉 그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애인을 주체성 없는 한갓 도구로 삼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 울 자신의 욕망의 충족을 위한 도구로 만든다는 점에서 에로스적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부도덕에 떨어질 위험을 안고 있다. 물론 사랑에 빠진 사람들 모두가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사랑하는 사람 을 자신의 욕망 충족의 도구로 삼으려는 명시적 의도에 이끌려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감 정이 이성적 분별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 맹목적인 정념이라는 점 에서, 그것은 하나의 〈질병 voaEfv 〉과도 갇은 것이어서, 20) 욕망 이 충족되고 열정이 식었을 때, 즉 영혼이 질병으로부터 벗어나
19) Phaderus, 238 e : r""JC"JCluµi ac dpxoµ€VQ Ulcuovri rc Vn dvd JC0U Tdv tpdµEVOV i LOf V ta JC aGKE CLV.
20) 같은 책, 231 d.냉정을 되찾았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애인에 대해 여전 히 애착과 사랑을 느낄 수 있겠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인 것이 다.21) 그리하여 에로스적 욕망에 사로잡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은 사랑의 대상을 한갓 도구나 수단으로 여기는 까닭에, 인간을 참된 의미에서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고 오직 타인의 주인이 되거나 아니면 노예가 될 뿐이다.22) 즉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그 는 참된 자유, 참된 우정을 이루지 못하고 왜곡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에로스는 욕망의 주체와 객체 모두를 부자유와 노예 상 태에 빠뜨린다. 욕망의 주체에 관해서 볼 때, 성적인 욕망에 사 로잡힌 인간은 자연적인 충동의 노예가 되어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를 상실하고 오직 충동과 욕망의 요구에 속박당한다는 점에 서, 자신의 참된 자유를 상실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욕망 의 객체에 관해서 볼 때, 그가 타인의 욕망 충족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전락한다는 점에서, 욕망은 그를 부자유스럽게 만든다. 그리하여 에로스란 그것의 주체를 위해서나 객체를 위해서 모두 해롭고 부도덕한 정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성적인 욕망 자체를 우리로부터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 다. 에로스란 인간의 본성 자체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어서 완전 한 덕을 갖춘 듯이 보이는 사람조차도 이 욕망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23) 그리하여 우리는 다만 우리의 영혼 속의 동물적 욕망을 신적인 능력에 의해 다스리고 통제함으로써 정신의 평화21) 같은 책, 232 e.
22) Res publica, 576a:t v vr apar Pi (CJ(J니HAOLµtv o¢ROTE Ocvi, dci6¢ TOD 6E(JJd0VTEC i 60oAEUovTEc aAk (그들은 평생동안 누구의 친구도 되지 못하고, 언제나 다른 사람의 주인이나 노예로서 산다.) 23) 같은 책, 572 b.와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2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으로서의 에로스 그러나 플라톤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다. 이것은 에로스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파이드로스』에서만 하더라도 그 는 같은 대화편에서 에로스를 비난하던 처음의 말투를 완전히 바 꾸어 뒤에 가서는 그것을 찬양하고 있다. 정신의 질병이라 매도 되었던 에로스는 이제 모든 좋은 것, 모든 선의 원천인 신적인 광기(狂 )라고 칭송된다. 우리의 삶에서 모든 좋은 것, 모든 탁 월한 것은 신적인 광기를 통한 것이다.24) 그런데 모든 신적인 광 기와 선한 열정 가운데서도 최고의 것이 사랑이다. 25) 그러나 에 로스의 찬양에 대해 말하자면, 플라톤은 어떤 다른 대화편에서 보다 『잔치Symposium』 편에서 그의 정신의 깊이를 유감 없이 드 러내고 있다. 여기서도 에로스는 우선은 성적인 욕망과 그것이 결부된 연애 감정으로 이해되어 있다. 그러나 풀라톤은 동일한 사태의 본질을 『잔치』에서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파악한다. 한마 디로 말하자면, 에로스란 〈추한 것을 꺼리고 아름다운 것을 향해 명예를 겨루는 마음 tJCi µtv T0 tg aiuxpotc aiuxuvn, gJCi t TOtC Kotc ¢UoTlµ 〉이다.26) 여기서 플라톤은 육체적인 욕망으로서의 에로 스에 내재한 정신적 열망을 읽어 내고 있다. 성적인 욕망은 그것 이 육체적 충동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접에서, 다른 종류의 육체적 욕망과 갇다. 인간은 배고풀 때 먹고, 목마를 때 마시기를 원하24) Phaedn,s, 244 a.
25) 같은 책, 245 b-c. 26) Symposium 178 d.고, 먹고 마신 뒤에는 주기적으로 배설하기를 원하듯, 성적인 욕 망 또한 그렇게 해소시키기를 원한다. 우리의 육체가 먹기를 요 구하고 배설하기 를 요구하듯, 성욕 역시 일종의 배고픔이나 목마 름, 또는 배설에의 욕구일 수 있다. 다만 성적인 배설을 요구하 는 육체적 기관이 소화 기관이 아닌 생식 기관인 것이 다를 뿐, 그 의에 는 식욕이나 성욕 사이에 아무런 본질적 차이도 없는 것 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마치 무엇을 어떻게 먹든 배만 부르게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우리가 생 각하 , 어떤 식으로든 성적인 욕망을 채울 수만 있으면 그것으 로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퀴니코스 Kynikos 학파 의 디오게네스 Diogenes 는 인간의 성욕을 배고풀 때의 식욕이나 목마를 때의 갈증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자연스런 육체적 욕망으 로 여겼던 모양으로, 성욕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그의 삶 속에서 도 일관되게 관철하였던 바, 그는 성욕을 느낄 때면 대낮에 사람 들이 들끓는 도시의 광장 한복판에서 자위 행위를 했다고 전해전 다. 27) 남들이 보는 앞에서 물을 마시는 것이 조금도 부끄러운 일 이 아니라면, 남들이 보는 앞이라 해서 육체의 다른 기관의 욕망 을 채워주는 것을 꺼려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 그 철학 자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비록 디오게네스와 감은 두철한 일관성을 보이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성적인 욕망을 최소한 관념적으로는 한갓 육 체적인 충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를 조금 더 깊이 숙고하면, 우리는 성욕을 단순히 육 체적인 욕망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 아님을 이내 알아 차릴 수 있다. 물론 어떤 경우이든 성욕이 우리의 육체로부터 생27) M. Foucault, 같은 책, p. 68.
겨나는 욕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성적인 욕망의 모 든 계기들이 전적으로 육체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배고픔에도 불구하고 계속 굶는다면, 또는 목마를 때 육체가 물을 요구하는 것을 끝내 의면해 버린다면, 그때 우리의 육체는 파괴되어 버린 다. 그러나 성욕은 다르다. 우리가 아무리 오랫동안 육체의 성적 인 갈증을 채워주지 않고 의면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육체의 어 떤 부분도 해를 입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가 금욕적인 삶을 살 때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신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욕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육체적인 충동 으로부터 생겨나는 욕망이기는 하지만, 오직 육체적인 계기들로 서만 이루어전 것이 아니며, 어떤 식으로든 정신적 계기에 의해 매개되어 있는 것임을 말해 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가장 동물적 이고 가장 저급한 욕망인 듯 보이는 에로스 속에 도리어 정신적 차원이 것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예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다.
그러나 성욕이 한갓 육체적 충동으로 모두 환원될 수 있는 것 이 아니라면, 그것 속의 정신적 계기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 수 있는가? 풀라돈의 『잔치』는 에로스의 정신적 계기들을 가장 단 순하고 소박한 차원에서부터 가장 깊고 본질적인 단계에 이를 때 까지 펼쳐 보이는 에로스의 현상학 이라 말할 수 있는데, 그중 에서도 에로스의 가장 직접적이고도 원초적인 정신적 계기로서 간주되는 것이, 위에서 언급했던 바대로,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 이다. 플라톤은 『잔치』에서 첫번째 연설인 파이드로스의 연설 속 에서 이것을 아예 에로스에 대한 정의의 형식으로 전술한다.내가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추한 것들에 대한 형오,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선망입니다.28)28) Symposium , 178 d : U )'GI ot o Ti , v tJCL ' µ¢v TOt c aio x po t caio x uvnv, gJCi rot c KdAot c OL, loT uia v.
이 정의는 『잔치』 의 전편에 걸쳐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이란 에로스를 한갓 육체적 충동으로부터 정신적 동경에로 고양시키는, 그것의 가장 근원적인 정신적 계기 로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이 에로스를 가리켜 아름다움에 대한 선망이라고 말할 때, 그는 이것을 통해 에로스 를 순수히 정신적인 동경으로 규정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떤 경우이든 로스가 육체적인 충동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은 부 될 수 없다. 그리하여 『잔치』 에서 문제되는 것이 에로스의 정 신적 계기 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육체적 욕망, 즉 직접적 성욕 가운데 내재해 있는 정신성이며, 그런 만큼 에로스가 육체적 욕 망이라는 사실은 당연한 사태로서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에로스 는 성적인 충동으로부터 시작되며, 육체적 욕망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것이기 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육체성의 영역에 갇혀 있 는 욕망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과 뗄 수 없이 결합된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름 다움과 추함이란 분명히 정신적인 가치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리 하여 에로스란 육체적 욕망이되, 정신적 동경을 자기 속에 품고 있는 육체적 욕망, 또는 거꾸로 육체적 욕망의 형태로 나타난 정 신적 동경이라고까지 불리울 수 있을 법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 의 육체와 영혼 사이에 놓여 있는 다리이며, 인간 속에 같이 있 는 두 가지 이질적 차원이 만나는 장소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에로스는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과 결합 되어 있는가? 언뜻 보기에 에로스에 대한 풀라돈의 정의는 육체 적 충동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미적 감각을 성적인 욕망에 두 사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성적인 욕망의 본질적지향성을 반추해 보면 플라톤의 성욕에 대한 이해가 결코 한갓 관념적인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다. 성욕은 지향적이다. 그것 은 언제나 욕망의 대상이 되는 타인에게 향해져 있는 욕망인 것 이다. 물론 성적인 욕망에 있어서 그것의 최초의 계기 는 타인에 의해서 촉발되지 않은 채 스스로 발생하는 순수한 육체적 충동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충동은 그것이 아무리 순수한 육체적 충동으 로부터 시작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발현되는 순간에 동시에 대상 적 지향으로 전이되기 마련이다. 즉 성욕이란 그것의 발생이 현 재적이든 잠재적이든, 욕망의 대상에 대한 지향이다. 소박하게 말하자면 성욕은 언제나 특정한 혹은 불특정한, 사람에 대한 지 향과 더불어 발생하는 것이다.29) 그런데 이 지향은 무차별한 것 이 아니다. 플라톤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가 성적인 욕망 가운데 서 어떤 사람을 지향할 때, 우리는 무차별하게 아무나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아름다운 사람을 지향한다. 우리는 같 은 값이라면 추하고 못생긴 사람보다는 아름다운 사람을 원한다. 그리고 더럽고 추한 상황 속에서보다는 될 수 있는 대로 아름다 운 환경 속에서 사랑하기 원한다. 그런 한에서 에로스란 한갓 육 체적 충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추한 것을 꺼리고 아 름다운 사람과 상태를 꿈꾸는 심미적 동경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이처럼 에로스가 한갓 육체적 충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 시에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열망인 까닭에, 그것은 순간적인 충 동에 머무르지 않고, 지속적인 애착을 동반하는 사랑의 정념에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존재의 감성적인 차원에서는 어떤 것도 머무르는 것이 없다. 이것은 나29) 같은 책, 199 C 이하를 보라. 여기서 플라톤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반 드시 누군가의 어머니와 아버지이듯이 에로스 역시 언제나 〈무엇인가에 대한 욕망 gK mvdc〉임을 말하고 있다.
의 육체적인 육망에 대해서든, 또는 그 욕망의 대상이 되는 타인 에 대해서든 똑같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만약 나와 나의 욕망에 대상이 되는 타인과의 관계가 오직 육체적인 충동에 의해서만 지 배되는 순수한 감성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치 루 소J . J. Rousseau 가 묘사한 자연인처럼, 성 관계를 통해 우리의 육체적 욕망이 채워지면 서로에 대한 더 이상의 관심도 없이 각 자 자기의 길로 갈 수 을 것이다.30) 그리하여 성욕에 의해 이 루어진 어떠한 관계도 항구적이고 지속적일 수 없을 것이다. 한 갓 육체적 충동이란 그 자신 영속적인 것도 아니고 또한 영속적 인 을 욕구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31) 모든 감성적 정념들 이 그러하듯이 성적인 충동 역시 끊임없는 흐름 속에 있으며, 그 자체로서는 충동의 해소나 배설 이의에는 아무 것도 더 바라지 않는다. 그에 반해 우리의 의식의 흐름에 규정된 형식을 부여하 고, 더불어 우리 앞에 펼쳐진 세계의 존재 를 무차별한 흐름과 끊 임없는 소멸로부터 규정된 현존 속에서 머무르게 하는 것은 오직 존재 일반에 깃든 정신적 가치와 지성적 규정이다.
30) J. J. Rousseau, Discours sur /'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egalite parmi les hommes, 최현 옮김, 『인간 불평등 기원론』 (법우사, 범우 고 전선 6, 1994년) p. 230, 245 이하, 331 이하.
31) Symposium, 183 d-e : novpc.i, S' tori v fKEfvo, o tpaorr, o v8nµ oc, d TOO o0µaroc µaAAov fj C I/IVXi c ipdv. Kdi rdp OU µdVlµdc t oa v, &TC µoviµov tpdv npdrµaroc. (그러나 저속한 애인은 나쁩니다. 그는 영혼보다 육체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머무르는 것을 사 랑하지 않으므로, 그의 사랑 역시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이런 사정은 에로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우리가 순수히 육체적인 욕망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그것은 무차별한 성 적 충동 이의의 다른 것을 뜻하는 것일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특정한 대상에 대한 사랑과 애착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그때 그
것을 특정한 사람에게 머무르게 하는 것이 육체적 충동 그 자체 일 수는 없다. 그것은 감성적 충동을 넘어가는 어떤 것, 즉 에로 스 속의 어떤 정신적 가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32) 그런데 성적 인 욕망이 대상에 대한 지향성을 본질적 계기로 내포한다 하더라 도, 여기서의 대상과의 관계는 인식적, 관조적 관계 는 아니다. 그리하여 에로스를 한갓 일시적인 육체적 충동으로부터 특정한 사람에 대한 지속적인 애착, 즉 사랑의 감정으로 고착시키는 것 은 대상에 대한 단순한 개념적 규정일 수는 없다. 개념이란 원칙 적으로 정념을 이론적으로 기술할 수는 있어도 실천적으로 규정 하거나 현실적으로 유발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 가 어떤 대상을 어떤 개념을 통해 기술하든지 간에, 개념적 규정 그 자체를 통해 사랑의 느낌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런데 이런 사정은 도덕적 명령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무엇보 다 애착으로서의 사랑의 감정이란 명령될 수 있는 것이 아니 다.33) 사랑이나 애착은 도덕적 명령을 통해서나, 도덕적 준칙에 의한 의지의 규정을 통해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일차적으로 감정과 느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 가 도덕적 명령은 언제나 보편에 관계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복음서의 명령은 어떤 특정한 개인에게 내려진 명령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어떤 특정한 원수에 대하여 요구된 명령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명령이며, 그리고 그들의 모든 가능한 적대자에 관하여 요구되는 명령인 것이다. 그러나 애착으 로서의 사랑의 감정은 이런 의미의 보편성을 가질 수는 없다. 그
32) 루소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에로스의 육체적 계기와 정신적 계기를 구분하고 있다. J. J. Rousseau, 같은 책 , p. 245.
33) I. Kant, Grundlk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Akademie Ausgabe Bd. 4, s. 399.것은 이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머무르는 정념이 기는 하되, 사물의 본질에 관한 개념이든, 선의 개념이든, 개념 적 보편의 매개 를 통해 머무르는 정념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의 특수한 개별자와의 관계 속에서 지속성을 얻는 정념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순수한 육체적 충동으로서의 에로스를 지속적인 사 랑으로 고양시키는 것은 지성적 개념도 아니고 또한 도덕적 명령 도 아니다.
그러나 사물의 지성적 규정도 또는 의지의 도덕적 규정도 아니 라면, 어떤 다른 정신적 규정이 한갓 육체적 충동으로서의 성욕 을 지속적인 사랑으로 머무르게 하는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 은, 하나의 정신적 규정이 그것의 의연에 있어서 그 규정 아래 포섭되는 모든 대상들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 의 개별적인 대상에 관해 적용되면서도, 감성적인 개별성과 일회 성에로 함몰되지 않고, 하나의 특수한 대상에 깃든 정신적 규정 으로 계속 머무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때마다 어떤 특정한 개별적 대상에 대하여 우 리가 느끼는 지속적인 애착과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에로 스가 어떻게 육체적인 성적 충동으로부터 사랑의 감정에로 이행 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어떤 정신적인 규정이 우리의 욕망을 하 나의 특정한 대상을 향해 고착시키고 그 앞에서 머무르게 하느냐 는 물음인 것이다. 그런데 개념적인 규정도, 의지의 도덕적 규정 도, 우리의 욕망을 특정한 대상 앞에 머무르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제 오직 한 가지 정신적 규정만을 가능한 욕망의 인도 자로서 상정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이다. 특수하고 개별적인 대상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육체적 욕망을 감성적 충동 이상의 것으로 고양시켜 그 특수한 대상에 대한 관계에 머무르도 록 하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개별적인 대상에 일회적인 방식으로것들면서도 자신의 정신적 가치를 상실하지 않는 정신적 규정성 역시 오직 아름다움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성적 충동이 본질적으 로 내포하는 대상에 대한 지향성이 무차별하거나 일회적인 관계 성이 아니라 특정한 대상에 대해 머무르는 애착과 사랑의 관계에 로 상승할 수 있는 것은 에로스가 오직 아름다운 대상,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욕망으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체적 으로 욕망하는 대상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욕망을 그 대상에 머무 르게 한다. 아무런 보편적 통찰, 아무런 도덕적 강제를 통하지 않아도, 아름다움은 우리의 욕망을 일회적 충동으로부터 지속적 애착인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에로스를 가리켜 플라톤이 아름다움에 대한 선망이라 규정할 때, 그는 에로스를 자기 속에 정신적 동경을 품은 육체적 욕망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그것의 본질을 의식의 감성적 차원으 로부터 지성적 차원에로의 이행 속에서 또는 그 두 지평의 매개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감성적 직접성과 지성적 통 찰이나 동경은 아름다움과 그것에 대한 열망 속에서 매개되는 것 이다. 이처럼 에로스가 한갓 육체적인 충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 니라 동시에 정신적 동경을 자기 속에 품고 있는 한에서, 그것은 억압되고 통제되어야 할 야수적 충동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의 영혼을 감성적 직접성으로부터 지성적 깨달음에로 인도하는 도야 의 원리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맨 처음으로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을 통해 다른 모든 정신 적 가치에 대해 눈뜨게 되는 것이다.3 선의 원인으로서의 에로스
플라톤은 이것을 무엇보다도 사랑과 우리의 도덕적 능력의 관 를 통해 설명한다. 에로스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 가장 선한 것들의 원인 µcri orav drav aaog〉이라고 그는 주장한다.34) 물론 도덕적 선이란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이해 될 수 있다. 그런데 『잔치』 의 첫번째 연사인 파이드로스의 연설 을 통해 판단한다면, 라돈은 도덕적 탁월함의 본질을 다른 무 엇보다도 먼저 용기에서 찾고 있다. 파이드로스는 사랑이 유발하 는 선을 말하면서 동성애적 애인들끼리 구성된 군대를 예로 들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 로 이루어전 군대가 가능하다면, 그런 군 대와 싸워 어느 누구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를 위하여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35) 여기서 파이드로스가 도덕적 선을 하필 전무적 용기에 결부시키 는 것은 어쩌면 오래 전 야만의 흔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 나 이것은 결코 올바른 관찰이 아니다. 도리어 풀라톤은 용기 속 에서 도덕적 탁월함의 가장 보편적인 바탕을 정당하게 지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한마디로 말해 정신의 강건함이 없는 곳에서는 어떤 참된 도덕적 성취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의 도 덕적 능력과 소질은 소박한 의미에서의 마음의 착함과 양순함으 로 모두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지를 규정하는 도덕적 당위는 그것에 대한 의부적 상황이나 우리 속의 자연적 정념의 저항의 현실성 때문에, 마땅히 수행되어야만 할 당위로서 존립한 다. 만약 도덕적 의지에 저항하는 장애물이 우리의 마음 안이나 밖의 현실 속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때 우리의 의지는34) Symposium, 198 c.
35) 같은 책, 178 e 이하.더 이상 당위적 규정에 의해 인도될 필요가 없을 것이며, 더 이 상 도덕적인 의지로서 발생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도덕적 당위 란 의지에 대한 강제에 존립한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애써 강제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 까닭은 도덕적 가치를 갖는 의지와 행위가 원칙적으로 마음 안팎의 저항에 부딪히게 되어 있 는 까닭이다. 누구라도 평화로울 때에는 길을 걷다 넘어진 어린 아이를 일으켜 줄 정도의 여유와 호의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적에게 쫓겨 후퇴하면서 상처 입은 전우를 하려 할 때, 우리는 심리적 저항과 현실적 저항에 부딪히게 될 것이 다. 도덕적 당위란 그 저항을 극복하라는, 의지에 대한 명령이 다. 그러나 저항의 극복을 위해서는 정신의 강전함이 요구된다. 그것이 곧 용기이다. 그런 한에서 용기란 도덕적 의지의 가장 근 원적인 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우리는 타인을 위하여 마음 안팎의 저항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하게 되는가 ? 선을 향한 용기, 도덕 적 행위의 힘은 어디에 뿌리박고 있는 것인가 ? 플라톤적 시각에 따르면, 그 용기의 뿌리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 은 인간을 용감하게 만든다. 아무리 저열한 사람이라도 사랑에 빠졌을 때는 나면서부터 가장 용기 있는 사람과 같을 정도로 용 감해지기 마련이다.36) 사랑하는 이들의 용기를 실증하기 위해서 는, 우리는 단지 그들만이 타인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는 사실을 생각하기만 하면 족하다.37) 예를 들어 펠리아스의 딸인 알케스티스 Alkestis 는 자기 남편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하여 기 꺼이 그를 위해 대신 죽었던 것이다.38) 타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36) 같은 책 , 179 a : oz)ci c obTl,J Vrwa UK av aurbc d gp gvEOV LdOELE 1Cpdc
의 생명을 버리는 것은 분명히 도덕적인 가치를 갖는 행위이다. 어쩌면 그것은 최고의 도덕적 가치를 갖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데 플라톤은 그와 같은 숭고한 자기 희생이 사랑에 뿌리박고 있 는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플라톤은 칸트I. Kant와 헤어진다. 칸트는 탐닉과 의무를 엄격히 구분하여 의무에 따른 행위를 결코 탐닉과 애착의 감정에로 환원시키려 하지 않았다.39) 물론 플라톤 역시 탐닉과 의무를 무차별하게 동일시하는 것은 아 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도덕적 의지란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 는 의지이며, 그런 만큼 도덕적 실천이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 이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도덕적 행위는 결코 단순한 담닉과 같 은 것일 수 없다. 그것은 플라톤에게 있어서도 역시 조화로운 탐 닉이 아니라 대립되는 힘들의 상쟁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다. 그 런데 놀랍게도 플라톤은 오직 저항의 극복을 통해서만 발생하는 도덕적 의지와 행위의 원천을 탐닉과 사랑의 감정에서 찾는다. 의무는 사랑이나 탐닉과 같지 않다. 사랑은 달지만 의무는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의무 에 따르는 행위 또한 생기지 않는다. 이것이 플라톤이 보여주는 도덕적 행위의 역설이다.
그러나 도덕적인 의지가 그와는 종류가 다른 사랑의 감정에 뿌 리박고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플라톤은 이 점에 대해 논 증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의 대화편에서 으레 그렇듯이 여 기서도 그는 추상적 논증보다도 구체적 실례와 비유를 통해 말한 다. 그러나 그가 파이드로스의 입을 통해 말하는 한 가지 예화 (例話)는 예화 이상의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38) 같은 곳.
39) I. Kant. 같은 책따라서 내가 장담하건대 사랑을 하는 남자라면 누구이든 , 수치스 런 일을 하다가 들키거나 남에게서 모욕을 당하고서도, 비겁하여 그대로 땅하고만 있는 것이 드러날 경우에, 그의 아버지나 친구, 그밖의 누구에게 들킨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소년에게 들킨 것만큼 괴로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동일한 일을 우리는 사랑을 받는 사 람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어떤 수치스런 일을 하다 들켰 을 때, 누구보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유난히 부끄러워 하는 것입니다.40)
40) Symposium, 178 d-e : Onµi f i vuv £ro av6pa 6aTLC £p, c a ai axu pdV lCOL V Kdrd8nAoc ri WOLTO miaxav UJCd TOV L ' dvavpiav µh cipvvoµEvo,, ofir'av vJCo bc ¢vra o0T dA GdL Ec uCd t Taipav oUTE OJC au oucvbc UCd LLKv.
여기서 플라톤은 우리가 수치스러운 일을 했을 때 느끼는 마음의 괴로움과 부끄러움, 즉 양심의 가책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것 은 선한 의지와 동근원적인 것으로서, 선한 의지와 양심의 가책 이란 동전의 앞 • 뒷면과도 같다. 우리의 자연적인 정념이나 충동 또는 욕망이 도덕적 의지에 맞서는 저항이라면, 양심의 가책이란 악으로 기울어지려는 마음의 모든 경향성에 대한 저항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우리의 의지로 하여금 선을 향해 나아가도록 고무 하고 촉진한다. 플라톤 역시 그와 같은 문맥에서 부끄러움과 마 음의 괴로움을 말하고 있다. 수치스런 일 앞에서의 부끄러움과 마음의 괴로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악을 멀리하게 하고 선을 향해 매진하도록 만든다. 죽 여기서 말하는 괴로움과 부끄러움이란 선 을 향한 용기의 원천인 것이다. 플라톤은 위의 인용문 바로 다 음에 사랑하는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전 나라와 군대의 용기를 말 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의 인용문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부끄러움과 괴로움은 중립적인 심리 현상이 아니 라 엄연히 도덕적인 양심의 발생의 서술이다. 그런데 여기서 플 라톤은 똑같은 추악한 행위에 대해서라도 양심의 가책의 무게는 경우에 따라 다르며, 어떤 경우보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사람 은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낀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양심의 가 책의 무게 는 내가 나쁜 일을 저질렀을 경우에 내가 누구의 응시 앞에 노출되어 있느냐에 따라 달라전다. 그때 나를 바라보는 사 람과 나 사이에 형성된 사랑과 애착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가 책의 무게 는 더 무거워진다. 친구의 눈길이나 부모의 눈길 역시 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그들과 나 사이에도 역시 어떤 의미 로든 사랑과 애착의 감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감정 의 끈은 에로스적 사랑의 끈만큼 강한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어 떤 다른 사람의 눈길보다 나는 나의 애인의 눈길을 더욱 아프게 의식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일반적으로 표현하자면, 양심의 무게란 사랑의 크기에 비례한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양심이란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서구적 전통에서 보았을 때 양심이란 이미 그것의 어원에서부 터 〈같이 conscientia〉을 뜻한다. 양심이란 나 자신의 행위를 누군가가 같이 알고 있다는 의식, 나의 행위, 나의 마음의 모든 일이 누군가에 의해 응시되고 있다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양심이란 이와 같은 타자적 응시를 내가 나의 내면 속에서 의식하는 것을 뜻한다. 현실에 있어서 누군가가 나 의 행위와 내면적 의식 상태를 안팎으로 꿰뚫어 보든 말든, 내가 나 자신 속에서 의식하는 타자적 응시가 곧 양심인 것이다. 그리 하여 양심이란 내면화된 타자적 응시에 기초한다. 그 눈길 앞에 서의 삼감과 부끄러움이 양심이요, 또한 가책인 것이다. 그러나 그 눈길은 누구의 어떤 눈길일 수 있는가? 아니면 이런 물음은필요 없는 것인가? 그리하여 그것이 신의 눈이든 내 속의 또 다 른 순수 자아의 눈이든 아니면 사회적인 감시의 눈이든, 그 어떤 것이든 그것이 타자적인 눈길이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인 가? 플라톤은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타자 적 응시와 그것 앞에서의 부끄러움을 공간적 현실 속에서 형상화 시키고 있다. 즉 그것은 내면적 양심의 공간적 형상화다. 그런데 여기서 풀라돈은 양심의 본질적 계기가 되는 타자적 응시가 결코 무차별한 임의의 타자의 눈길일 수 없으며, 오직 사랑의 눈길이 어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의지가 악에로 기울어질 때, 그것 은 제어할 수 있는 것은 결코 무관심한 타자의 감시의 눈초리가 아니다. 오직 사랑의 눈길만이 우리의 마음 속에 부끄러움과 참 회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리하여 자기의 내면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사랑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또한 양심도 죄의식도 알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양심이란 사랑을 주고받는 것을 통해 싹트고 도야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에로스란 적극적인 의미로나 소극적인 의미에 있어서 나 모두 〈가장 선한 것들의 원인〉이다. 그것은 한 편에 있어서 선을 향한 적국적 용기의 원천이며 다른 한 편에 있어서는 악으 로 기울어지려는 의지의 경향성에 저항하는 양심의 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사랑이 이처럼 선의 원인이 될 수 있 는가? 이 물음에 대해 폴라톤은 『잔치』에서 논증적인 해명을 제 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플라톤이 그 물음에 대해 장황한 대답 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에로스가 선의 원인이 되는 까닭은 분명하다. 『잔치』에서의 정의에 따르자면 사랑이란 아름다움에의 동경과 선망이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다움을 욕구하 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어떤 사람에게 사랑과 애착을 느끼는 것 은 한갓 자신의 육체적 충동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에 임재하는 아름다움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메논 Meno』에서 소크라데스가 말하듯, 〈누구든 아름다운 것을 욕구하 는 사람은 또한 선한 것을 욕구하는 것이다〉41) 그리하여 아름다 움에의 동경과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동시에 선을 향한 동경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어떤 존재자에 있어서든 선한 것은 또한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42) 영혼의 선함에 대해서만 말한다 하더라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 여서, 덕이란 곧 영혼의 건강과 아름다움이다.43) 그리하여 아름 다운 일은 영혼을 덕에로 이끌며 추한 일은 영혼을 악덕에로 이 끈다. 44) 아름다움에의 헌신이란 동시에 선에의 헌신과도 같은 것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아름다움이란 〈선의 아버 지〉라고 불릴 수 있다.45)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 속에서 선에로 인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에로스가 아름다움 의 선망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선에 대한 동경이기도 하며, 그런 만큼 그것은 선의 원인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아름다움을 선의 원인이라 주장할 때 그가 뜻 하는 것이, 아름다움이 선의 존재 그 자체의 원인이라는 것이 아 님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 아름다움이 어떤 경우에도 선 그 자체41) Meno, 77 b : -rov 't'CJV Ka,Wv t mvµoiJvw araCJV t mvµ V c t vaL.
42) Symposium, 201 C : -rciraa Ou Kai Kala OOKEL 0£ EVaL (자네는 선한 것이 또한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가?).43) Res pub/ica, 444 d-e : cipE't'T µiv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성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선 그 자체가 그와는 반대로 아름다움에 의해 처음으로 생겨나는 것이 라 한다면, 선이란 존재의 한갓 파생적인 속성에 지나지 않을 것 이며, 영혼의 덕 또한 순전히 경험적이고 후천적으로 얻어전 것 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가 플라돈의 철학 체계와 합 치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구구한 설명이 필요치 않 다. 선은 오히려 존재 일반의 최고의 근원적 원리로서, 어떤 다 른 원리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 아니며 정반대로 오직 선의 원리 를 통해서만 모든 다른 존재자가 그것 자신으로서 존재하게 되 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 은 〈선의 이데아〉를 가리켜 인식되는 것에는 그것의 진리를 제공 하고 인식하는 자에게는 인식의 능력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 다.46) 간단히 말하자면 선이란 존재의 원리인 동시에 인식의 원 리인 것이다. 이런 사정은 인간의 경우에도 다른 것일 수 없다. 인간 역시 인간의 선을 통해 비로소 인간이 된다. 그런 점에 있 어서 모든 인간은 선을 나누어 가지고 태어나며, 그 선을 통해 인간으로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경우에도 선이란 후천적 으로 획득된 파생적 소질이나 성격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 원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선이 자신의 존재 근거를 자기 밖에서 갖지 않 는 존재의 근본 원리라고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아름다움이 선의 원인이요 선의 아버지와도 같은 것일 수 있는가? 그 까닭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세계가 선 그 자체가 원형적으로 실현되어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모든 것이 끊임없이 생겨나고46) Res publica. 508 c : rouro roi vvv V dli aav pExov TO tc nw KOµ¢VOLC Kai rWV KOVrL uvaµLV oLdv v ro draoD ¢av L Etval.
소멸하는 파생적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는 선이 원형적 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겨나고 또 소멸한다. 그런데 아름 다움은 선 그 자체의 원인은 아니지만 이 세계에서의 선의 생성 의 원인으로 이해되는 것이다.47) 이 원칙은 다른 무엇보다도 인 간의 영혼의 선에 적용된다. 인간 역시 그가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인간의 선, 즉 인간의 존재론적 완전성에 참여한다. 그런 한 에 있어서, 인간은 자신의 선을 선천적으로 자신 속에 갖추고 있 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존재론적 원리로 이해된 덕 아이다. 그러나 인간의 덕은 순수히 원형적인 형태로 각 사람 속에서 현 전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인간의 덕은 어떤 경우에도 순수한 현실태로서 현존하지는 않는 것이다. 육체의 옷을 입고 있는 감 성적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 덕은 오히려 실현되어야만 할 가능태 로서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인간 존재의 바로 이 유한성 때문에 선과 덕이 비로소 참된 의미의 윤리적 가치를 갖게 된다. 즉 선 은 이제 더 이상 죽자적으로 주어지고 실현되어 있는 존재가 아 니라 인간 자신의 의지와 행위에 의해 실현되어야만 하는 당위로 서 제시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인간의 덕을 실현할 때, 그때 우리는 도덕적인 의미에서 선한 사람이 된다.48) 물론 여기 서 덕의 실현은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와 결단에 달려 있다.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플라톤은 〈덕에는 주인이 없다〉고 말한다.
47) P. Friedlander, Platon , S. 103 f. 또한 Hippias maj or, 297 a-b.
48) Gorgias, 506 d : ci..U v draoi r"uµEV Kdi µc c Kdi Ta VTa drad £OT.LV, dpETi c TLVOC lCaparcvoµ¢vnc; ·(그러나 다른 모든 선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덕이 입재했을 때,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겠지?).그러나 덕에는 주인이 없다. 덕을 존중하는가 소홀히 하는가에 따라 각 사람은 덕을 더 혹은 덜 가지게 될 것이다. 책임은 선택하
는 자에게 있다. 신에게는 책임이 없느니라.49)
인간이 자기 존재의 본래적 탁월함과 완전성에 더 가까워지느 냐 아니면 더 멀어지느냐는 인간 자신의 책임에 속한다.50) 그리 고 여기에 인간 존재의 윤리성이 놓여 있는 것이다.그러나 인간이 덕을 실현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 인간 자신 의 선택에 달려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의지의 자유가 인 정될 수 있다 하더라도, 플라톤은 인간의 자유를 결코 근대의 칸 트처럼 의지의 무제약적인 자발성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칸트에 게 있어서 도덕적 의지의 자유란 일체의 감성적 세계를 초월해 있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플라톤의 경우에 인간이 덕을 선택하거 나 악덕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란 도리어 인간이 자기 자신의 본 래성과 합치되어 있지 않고 그로부터 소의되고 이탈하여 있다는, 그의 감성적 실존의 반대 급부였다. 죽 자유란 인간 실존의 제한 과 한계의 표현인 것이다. 인간은 이 세계에서는 자기 자신과의 거리 속에서 실존한다. 그에게는 자기 자신이 하나의 과제이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실현해야 할 것인지가 하나의 과제로 서 인간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어떤 인간이 되느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자유에 속한다. 그러 나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자기 스스로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의 이 자유는 오직 인간 존재의 본래성이 순수한 현실성 속에서 즉 자적으로 실현되어 있지 않고 언제나 가능성으로서 주어져 있을 뿐이라는, 인간 실존의 유한성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한 자유이 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자유란 플라톤의 경우에는 인간의 제49) Res publica, 617 e : cipEr d(JJCOTOV, fJV TL Kdi dTLµdV nAi ov Kai gkTTOV aEi c gKd(Jroc g{EL. a i Ti a £ioµ¢vou Edc dvai TLOC.
50) Leges, 904 b-c.한과 유한성의 또 다른 얼굴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선을 향한 인간의 의지 역시 어떤 경우에도 무제 약적인 자발성 속에서 발생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인간의 선 택의 자유는 어떤 의적인 상황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언제나 선 을 통찰하고 그것을 지향하는 무제약적인 도덕적 능력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본질적인 장애와 제한 아래 놓 여 는 실천적 능력인 것이다. 여기서 선을 향한 인간의 의지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는 모든 종류의 육체적 욕망과 쾌락이 다.1) 인간의 이 자기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것을 지향 한다는 것은 그것의 자연스러운 경향성이다. 더 나아가 쾌락은 그 자체로서 는 악이 아니며, 원칙적으로 바람직하고 좋은 것이 다. 다만 모든 쾌락은 그것이 각 존재의 완전성의 실현과 결합되 어 있고, 완전성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경우에만 온전한 의미에서 선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감성적 굴레는 인간의 영혼이 감성적 욕망과 쾌락에 골몰하도록, 그것을 육체적 세계에 붙들어 맨다. 이렇게 되어 눈앞의 육체적 쾌락에 얽매인 영혼은 자기 자 신의 본래적 선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상실하게 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영혼은 자기보다 저급한 상태에 머물러, 자기에 비해 저 급한 쾌락에 탐닉하게 되는데, 이처럼 영혼이 자기 자신보다 낮 고 천한 상태에로 기울어지려는 경향성이나 그러한 상태가 곧 악 인 것이다. 52)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본래적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가 먼저, 인간의 영혼을 끊임없이 아래로 잡아당기는, 인간의 감성 적 굴레의 제약으로부터 점차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51) Phaedo, 66b 이하.
52) Augustinus, De vera religione, 성염 옮김 , 『참된 종교』 (분도출판사, 1989 년) , pp. XX/38, Xl/21-23 참조.여 육체적 쾌락으로 향하는 영혼의 관심을 자신의 본성에 합치하 는 지성적 가치에로 전환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환은 어떻게 가능한가? 만약 인간이 처음에는 한갓 육체적인 충동과 욕망의 덩어리로 이 세계에 던져지는 것이라면 도대체 무엇이 우 리로 하여금 감성적인 안락과 쾌락만을 추구하고 그에 탐닉하려 는 경향성으로부터 벗어나 정신적인 가치를 갈망하고 동경하게 하는 것인가? 왜냐하면 정신적 가치란 원칙적으로 육체의 충동 및 욕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어서, 육체의 눈과 감각은 정신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 전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매개, 즉 인간 의 영혼을 감성적 사물에 대한 탐닉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정신적 가치에 대한 동경으로 나아가게 해줄 수 있는 어떤 도야(陶治)의 원리가 요구된다. 그런데 이 도야의 원리가 인간의 감성적 탐닉 과 정신적 동경을 자연스럽게 매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 안 에 존재의 감성적 차원과 지성적 차원을 동시에 포섭하고 있어야 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정신적 가치가 눈에 보이는 감성적 형상 속에서 우리 앞에 주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감성적 세계로부터 지성적 세계로 인도하는 다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에 따르면 감성적 세계와 지성적 매개자, 유한과 무한을 이어주는 다리가 곧 아름다움이다. 이것을 플라톤은 『파 이드로스』에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설명하고 있다아름다움에 대하여 우리가 말했던 바와 갇이, 그것은 실재하는 것들과 더불어 빛나고 있었네, 그리고 우리가 이 세계로 온 뒤에, 우리는 우리의 감각 기관들 가운데서 가장 명석한 기관을 통해, 그 것이 가장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음을 인식하였네. 왜냐하면 우리에게 시각이란 육체를 통한 지각 가운데 가장 예민한 것이기 때 문일세. 지성적 통찰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며 다른 모든 바람직 한 도 마찬가지일세.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올 수 있는 자신의 찬란한 영상을 제공할 수 있었더라면, 그것은 엄청나게 강렬한 욕 을 불러일으켰 을 걷세. 그러나 실제로는 오직 아름다움만이 눈에 가장 분명하고 또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성질을 갖는 걸세 .53)
53) Phaedrus, 250-d : Epi St KaAAOV(, i(JJ[cp E[J(Oµcv, µET'tKci v(,JV TE Aa EV dv, EDpd T't AdvTEC Kd Cl 心µcv aurd 6ld C gvaprEardT1C ai oB~aE(,)5 TOv i µET¢p(,JV OTiAfJov t vapr¢0TdTa dI/Ilc rdp 기µtv EdT1 v 5ld TOj) µaroc gpZEt dL di o8i 0E(,JV, f ¢pdvnOLC 00X dparal--6ELV ouc rdp av J(( pEtXEV gp ac, a TO TOV £dEijc t vapr t C El (,Jllov XETO EL'c dI/IL V i dv--Kai T&A oa £paorci. vDv t KdAAoc µdvov Ta nv guxc µotpav, &uT' £K V¢maTOV ElvdL Kdi ¢paoµL .dTOV.
아름다움이라는 그 자체로서는 정신적인 존재에 속한다. 인간 의 영혼은 그것 을 우리가 이 세계에 오기 전, 영혼의 고향인 이 데아의 세계에서 이미 보았었다. 우리가 이 세계에로 온 뒤에 다 른 모든 정신적 가치와 존재들은 이 세계의 육체적 장벽 너머로 자신을 숨기고 말았다. 우리가 오직 지성적 통찰을 통해서만 파 악할 수 있는 것들 그리고 다른 모든 바람직한 것들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되고 말았다. 만약 그런 것들이 눈에 보 이는 형태로 우리에게 직접 직관될 수 있었더라면 그것들은 우리 속에 엄청난 욕망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며, 그것들을 향한 우리 의 욕망은 다른 모든 감성적 욕망들을 비할 나위없이 압도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다 탁월하고 보다 완전한 존재는 그것이 우 리에게 제공하는 쾌락과 즐거움에 있어서도 더욱 완전하고 탁월 한 것이어서 보다 저급하고 불완전한 존재가 제공하는 하찮은 쾌 락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54) 그리하여 우리가
54) Res publica, 582-586.
그와 같은 지성적 존재와 가치들을 직접 직관할 수 있고 그것들 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쾌락과 기쁨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더라 면, 우리는 아무런 매개, 아무런 의적 강요 없이도 참된 선을 실 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세계 속에서는 정신적 실재들을 직접 직관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이다. 아 름다움은 그 자체로서는 정신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눈에 보이는 영상을 우리에게 준다. 그것은 감성적 방식으로 계시된 이데아이 다. 바움가르텐 A. G. Baumgarten 식으로 말하자면, 아름 다움이란 〈감성적 인식의 완전성 perfectio cognitionis sensitivae>55)즉 감성적 직관 속에서 포착된 존재의 완전성인 것이다. 그리하 여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존재의 완전성을 감성적 존재의 형상 속 에서 직관하고 체험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 완전성이 빛을 발할 때 우리가 느끼는 고양된 기쁨과 쾌락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그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열망하도록 인도한다. 그렇게 아름다움 을 통해 우리 속에서 싹트는 존재의 완전성을 향한 동경이 곧 에 로스이다. 그런데 존재의 완전성을 향한 동경은 또한 참된 선을 향한 욕구이기도 하다. 선이란 존재의 완전성이요, 그것의 실현 을 열망하는 의지가 곧 선한 의지이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아름 다움을 통해 우리 속에서 자연스럽게 선을 향한 동경을 불러일으 킨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선의 원인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듯이, 에로스는 처음에는 우리의 육체적 충동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육체적 충동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을 자신 속에 품은 욕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에로스의 이러한 정55) A. G. Baumgarten, Aesthetica, § 14.
신적 계기에 주목한다면, 그것은 더 나아가 선의 원인이라고까지 불리울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은 선에 대한 동경을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에로스는 전체 로서 보았을 때 인간 존재의 감성적 차원과 지성적 차원을 매개 하는 다리로서, 인간을 감성적 존재로부터 지성적 존재에로 고양 시키는 도야의 원리인 것이다.
성, 욕망 그리고 〈실존의 미학〉
—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를 중심으로l 왜 현대는 성의 시대인가?〈아무래도 우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에 관해 더 많이 말하 고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우리는 이 일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이상한 거리낌 때문에 성에 대해 충분히 말하고 있지 않다고 생 각한다. 또 우리는 너무 겁이 많고 소심하며, 무기력과 비겁함 때문에 성의 자명성 앞에서 항상 눈을 감아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본질적인 것이 언제나 우리들의 손에서 빠져 나가는 까닭 에 성을 항상 새롭게 탐지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성에 대해 가장 끈질기고 동시에 가장 초조해 하는 사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사회일 것이다〉” 미셸 푸코는 이렇게 우리 시대를 성1) Michel Foucault, Sexualitlit und Wahrheit 1 : Der Wille zum Wissenn (Franmkfurt, 1979), p. 46f. 번역본은 이규현 옮김, 『성의 역사, 제 1 권 : 앎의 의지』 (나남, 1990). 아래에서는 푸코의 Histoire de la sexualit
를 제1권은 『앎의 의지』, 제2권은 『쾌락의 활용』, 제3권은 『자기 에의 배려』로 약하여 독일어 판과 번역본의 쪽수를 병기하여 임용함. M. Foucault, Sexualitat und Wahrheit 2 : Der GebraucJ, der Lllste(Frankfurt,1979). 번역본은 문경자, 신은영 공동 옮김, 『성의 역사, 제2권 : 쾌락의 활용』 (나남, 1990). Sexualitat und Wahrheit 3 : Die Sorge um sich(Frankfurt, 1979). 번역본은 이혜숙, 이영목 공동 옮김, 『성의 역 사, 제3권 : 자기에의 배려』 (나남 1990).
의 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성은 의, 식, 주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기초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동물적 성격을 드 러내는 본능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은 동서 고금을 막 론하고 담론화되는 인류의 지속적 관심사였다. 그렇다면 현대가 성의 시대라는 푸코의 단언은 무엇을 뜻하는가? 〈성, 그것은 모 든 것의 원인이며 근원이다〉2) 라는 푸코의 주장은 성의 보편성을 재확인하는 것에 불과한 것인가? 물론 푸코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생물학적 사실로서의 성도 아니고 문화적 현상으로서의 성 도 아니다. 따라서 그가 성의 역사』를 통해 의도하는 것은 성적 행동과 실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도 아니며, 또 성적 행동 방 식에 관한 과학적, 종교적, 철학적 사상들을 분석하는 것도 아니 .3) 푸코는 오히려 성이 현대인의 자거 이해와 자기 정의에 있 어 중요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한편으로는 성과 주체성의 관계를 조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의 담론과 진 리와의 관계를 분석하고자 한다.
성은 분명 우리 시대의 기호이다. 그것은 성에 관한 담론이 현 대에 들어와서 폭발적으로 팽창하였다는 사실에서뿐만 아니라 모 든 담론 이성과 성적 가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데서도 여실 히 드러난다. 오랫동안 성은 담론의 영역에 속하기보다는 오히려2) M. Foucault, 『앎의 의지』 p. 99/93.
3) 미셸 푸코. 『쾌락의 환용』, p. 9/17 참조실천의 대상이었다. 서양의 빅토리아 시대와 동양의 유교주의 시 대를 돌이켜 보면, 성에 관한 담론이 사회적으로 엄격하게 통제 되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성적 욕망은 인류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생식 기능으로 제한되었고, 생 식이 없는 성에는 침묵의 낙인이 찍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성에 관해 비교적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은 빅토리아 시 대의 〈단조롭기 짝이 없는 밤〉을 그려보며 홀리는 쓴 웃음이 잘 말해 준다. 우리는 성에 선고되었던 침묵의 금지 명령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또 성적 쾌락을 자유롭게 추구한다. 성은 이제 우 리 자신의 인격과 취미를 형성하는 결정적 매개 수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가 어떻게 사랑하는가를 알게 되면, 네가 어 떤 존재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4) 라는 말이 거부감 없이 받 아들여질 정도로 성은 오늘날 우리의 삶을 결정하게 되었다. 성 에 관한 담론은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고 있는 성의 의미에 오히 려 반비례하였다는 것은 이제 옛말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성 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우리는 성의 문제에 있어 전정 자유로운 것인가? 우리 자신을 성의 주체로 인정하는 담론의 발전이 동시 에 자유로운 주체의 발전을 의미하는가? 만약 우리가 이러한 질 문에 반드시 긍정적 대답만을 할 수 없다면, 성의 해방이 동시에 인간 해방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전통적 견해를 뒤집어 놓는 푸코 의 관점은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푸코는 성에 관한 발언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권력 장치가 동시 에 성의 담론을 팽창시켰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성이 침묵을 강 요당하였던 17 세기에 성에 관한 담론은 한편으로 엄격하게 검열4) M. Focault/Richard Sennett, "Sexualitat und Einsamkeit," (1980) M. Foucault, Von der Freundschaft als Lebensweise. Michel Foucault im Gespriich (Berlin, 1984) , p. 25.
되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대화의 상대자와 성에 관해 말할 수 있는지가 엄밀하게 규정되었다. 그런데 18 세 기 무렵에 이르면 성에 관해 말하는 것을 부추기는 정치적, 경제 적, 기술적 선동이 일어난다. 노동력의 증대와 효율적 관리를 위 해 권력은 의학, 위생학, 통계학, 교육학과 같은 과학의 영역에 서 성에 관한 객관적 담론을 팽창시켰다. 다시 말해 성에 관한 담론은 엄격한 금지로부터 유용한 공공적 담론을 통한 성의 규제 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5) 이러한 역설적 사실로부터 푸코는 성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 분하고 결정하였던 것이 권력 장치였던 것처럼, 현대 사회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보이는 성 담론의 생산을 선택하고 통제하고 조 직하는 것도 역시 권력 장치라는 사실을 간파한다. 만약 성에 관 한 자유로운 담론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권력 장치라고 한다면, 억압된 성에 관해 말함으로써 성을 억압하는 권력으로부터 해방 될 수 있다는 〈억압 가설〉은 근본적으로 설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6) 여기서 우리는 성의 해방이 곧 자유로운 주체의 발전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성의 담론을 결정하는 권력 주체가 누구이며, 그는 어
5) 미셸 푸코, 『앎의 의지』, p. 35, 42 이하를 참조할 것. 18 세기에 성에 관한 담론이 폭발적으로 팽창한 것은 성에 관한 새로운 감수성 또는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노동력이라는 공익의 관접에 힘 입었다. 인구의 경제적, 정치적 문제의 핵십을 이룬다는 점에서 성은 근본 적으로 경찰과 통치police의 용무가 되었다는 정을 푸코는 강조한다.
6) 예컨대 마르쿠제는 〈자유로운 담론의 관용이 해방을 준비하고 발전시키는 길〉이라고 단언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에 관한 자유로운 담론은 곧 인간 해방의 길로 인식될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H. Marcuse, "Repressive Toleranz, .. R. P. WolfT, B. Moore, H. Marcuse, Kritik der reinen Toleranz (Frankfurt, 1978) , p. 101 을 참조할 것.떤 관점에서 성의 담론을 통제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현대 사회 에서 폭발적으로 팽창한 성의 담론은 이렇게 인간을 자원으로 파 악하는 권력 장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다면 성의 담론이 억압과 검열에도 불구하고 확대되고 보 편화된 까닭은 무엇인가? 푸코는 그 이유를 현대의 과학 정신을 발전시켰던 〈앎에의 의지〉에서 찾는다. 성과 욕망이 침묵할 수밖 에 없는 비밀의 영역으로 추방당하면 할수록, 앎에의 의지는 성 과 육체를 더욱더 집요하게 담론화하였다는 것이다. 만약 성과 욕망이 모든 죄의 근원이라면, 우리는 육욕이 언제 어떻게 발생 하는가를 알아야만 육욕으로부터 구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과 욕망에 관한 담론을 규제하는 기독교적 도덕 규범은 결국 성과 욕망을 끊임없는 성찰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 다. 기독교적 고해 성사는 따라서 율법에 어긋나는 행위뿐만 아 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욕망을 고백하라는 명법을 발전시켰다. 자신의 영적인 삶을 보전하기 위하여 육욕을 억압하 였던 기독교적 〈고백의 담론〉7)은 결국 욕망 자체를 담론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것이다. 푸코가 글머리의 인용문에서 말하고 있 듯이 우리가 성에 관해 말해야 하는 의무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 제는 성과 욕망의 담론 자체가 끊임없는 욕망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닌가 ?8) 만약 권력이 성과 욕망의 생산적 담론에 의해 유지되 고 또 성의 담론은 욕망과 육체의 지속적인 대상화로 이루어전다 면, 권력-지식一쾌락의 순환 구조는 끊을 수 없는 것이 아닌 가? 우리가 이 질문을 쉽게 부정할 수 없다면, 현대는 분명 성 과 욕망의 끊임없는 담론화를 추구하는 쾌락의 시대이다.7) 미셸 푸코, 『앎의 의지』, p. 31/39 참조.
8) M. Foucault, Die Ordnung des Diskurse (Frankfurt/Berlin/Wien, 1977), p.8 참조.성에 관한 담론이 보편화된 오늘날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을 완전히 성적 욕망의 주체로서 경험한다.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성적 욕망은 물론 정신의 순화된 언어 밀에서 꿈틀거리는 단순한 육욕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의 권력 장치는 우 리 자신과 성 사이에 무한한 앎의 의지를 개입시키고 있기 때문 이다. 우리는 성과 쾌락에 대해 끊임없이 알려고 하며, 이 과정 에서 〈쾌락에 대한 앎〉은 곧 〈쾌락을 아는 쾌락〉으로 전환된 다. 9) 성은 결코 새로운 수치심 때문에 숨겨져 있는 비밀이 아니 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성이 우리의 본질에 관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우리는 성의 진리를 알아내야 하는 압박을 받고 있다. 이렇게 성은 우리 자신의 존재에 관한 물음의 촛점을 이룬다. 현대 사회에서 성은 우리 자신을 의식하는 매개 수단으로서 기능하는 까닭에 그것은 결코 자연적 성이 아니다. 오히려 현대인을 욕망의 주체로서 구성하는 성의 권력 장치는 인 간의 육체와 유리되어 있다. 그렇다면 욕망의 담론화는 전통적으 로 군림해 온 영혼과 신체, 정신과 육체, 이성과 본능, 의식과 충동의 이원론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신체를 영혼의 감옥으 로 파악하는 플라톤과 신체에 대해 정신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데 카르트를 상기한다면, 성적 욕망의 보편화는 과연 정신-신체 ―관계의 전도를 의미하는 것인가? 만약 성 담론의 확대가 성 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정신과 육체의 관계 를 성의 관점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푸코가 정확하 게 지적하고 있듯이, 성은 근본적으로 정신과 신체가 구분되기 이전에 작용하는 삶의 토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과 성적 욕 망에 대처하는 방식은 결국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
9) 미셸 푸코, 앞은 책 , p. 97/92 참조.
느냐 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0) 예컨대 플라톤을 위시한 고대 철학은 쾌락이 인간의 자연적 육체로부터 나온다고 파악하 였다면, 현대의 성 담론은 쾌락이 육체에 대한 지식의 산물이라 고 생각한다. 현대의 쾌락이 실존하는 자연적 육체보다는 〈표상 된 육체〉, 〈문자화된 육체〉, 즉 정신을 통해 그려진 육체로부터 발생한다면, 쾌락에 대한 끊임없는 지식을 추구하는 현대적 욕망 체계는 결국 인간의 자연적 육체를 배제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는 신체에 대한 정신의 우월성을 똑같이 주장하는 것 같지만, 데 카르트의 〈육체와 분리된 정신〉은 사실 플라톤의 〈육체에 갇혀진 영혼〉과 대립된다. 마찬가지로 플라톤은 육체를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는 쾌락의 근원으로 파악하는 데 반해 데카르트는 육체 를 생각하는 자아에 의해 해독되어야 할 객체로서 파악하고 있 다. 성적 욕망이 담론의 추전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오늘날 인간 의 육체는 여전히 하나의 비밀로서 남아 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육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 는가?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자연적 육체성을 배제한 현대 정신 의 보편화는 결국 정신의 물질화를 야기하였다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이 다시 욕망의 도덕적 주체로서 구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우리는 인간의 육체도 역시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는 주체적 성격과 보편적 정신에 의해 읽혀지는 객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11)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10) 이러한 맥락에서 미셸 푸코는 서양이 우리의 신체, 정신, 개성, 역사와 같은 모든 것을 〈욕망의 논리〉 아래에서 사유하였다고 단언한다. 이에 관해서는 미셸 푸코, 같은 책, p.92/98 참조.
11) 이에 관해서는 D. Kamper/Ch. Wulf, "Zwischen Archaologie und Pathographie : Korper-Subjekt, Korper-Objekt," Der andere Karper, hrsg. v. D. Kamper/Ch. Wulf(Berlin, 1984), pp. 3-10 참조.우선 육체를 객체로서 파악하는 현대의 담론이 인간을 성적 욕망 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과정을 살펴보고, 그 다음으로 육체를 욕망의 주체로서 파악하는 고대의 철학이 어떻게 인간을 윤리적 주체로서 구성하는가를 조명하고, 끝으로 성적 욕망이 보편화된 현대에서 자아를 형성할 수 있는 방식으로서 〈실존의 미학〉을 제 시하고자 한다.
2 객체로서 읽혀진 육체와 〈성의 과학〉정신과 육체를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전통적 의식 철학은 대체 로 인간의 성과 욕망을 〈이성 없는 기계론〉 12) 의 영역으로 분류하 였다. 자연적 세계로부터 사유하는 주체를 분리하여 절대적 우선 성을 부여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데카르트이다. 인간을 표 상하는 주체로서 구성한 데카르트의 의식 철학은 모든 현실의 토 대로서 〈표상 가능성〉을 설정한다. 우리가 명석하고 판명하게 표 상할 수 없는 것은 데카르트에게 있어 어떤 현실성과 확실성도 가지지 못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데카르트에게 있어 어떤 존재인 가 ? 데카르트는 인간을 한편으로는 〈사유의 주체 res cogitans〉로 설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계〉로 파악한다. 13) 다시 말해 자연적 육체로서의 인간은 사유를 통해 비로소 그 현실성이 구성 되는 기계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적 사유는 결국 인간 자신의 구조를 끊임없이 합리적으로 드러내려는 욕망 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육체12) 미셸 푸코, 앞의 책, p. 98/92.
13) R. Descartes, Trait€ de l'Homme (1664) , reuv es de Descartes, ed Ch. Adam et P. Tannery, Bd. X I (Paris, 1974) , p. 202/120.가 정신에 의해 읽혀지는 객체로서 구성됨을 쉽게 알 수 있다. 결국 데카르트적 인간은 자신이 정신적 존재임을 정당화하기 위 해서는 우선 이성과 대립되는 것, 즉 이성의 타자를 끊임없이 구 성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성과 욕망, 자연과 육체, 감 정과 환상은 이성적인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물론 그 렇다고 해서 성과 욕망이 그 자체로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 히려 합리화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성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본질에 속하는 것만을 사유할 수 있는 까닭에〉 14) 이성에 의해 표 상되는 육체는 결코 자연적 육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데카르트가 인간의 육체를 정확한 규칙에 의해 작동하는 시계에 비유하고 있 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결국 데카르트로 대변 되는 근대는 한편으로 이성과 대립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규정하 고, 다른 한편으로 〈다른 것〉의 영역을 합리적으로 계산하고 예 측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모순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정신의 확실성을 혹보하기 위한 회의의 과 정이 인간의 성과 욕망을 끊임없이 대상화하고 있으며, 이는 결 국 이성을 성과 욕망의 지속적 대상화에 예속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자기 의식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성과 욕망도 이제는 정신에 의 해 읽혀져야 할 객체로서 파악된다. 성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며 정신에 의해 〈말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성은 이제 스스로 자신 의 비밀을 털어놓아야 하는 심문의 대상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 서 푸코는 〈말하는 성〉 또는 〈읽혀진 성격〉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15) 또한 푸코는 진리를 찾아가는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와14) R. Descartes, Meditationen Uber die Grundlagen der Philosophie, hrsg. v. L. Gabe(Hamburg, 1959) , Vorwort, p. 17.
15) 미셸 푸코, 앞의 책, p. 46/51, 97/91 참조.기독교적 고백의 담론 사이에는 유사한 구조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진리를 획득하기 위하여 표상된 대상과 사유하는 주체의 일치 여부를 회의하는 제 규칙은 성과 욕망을 죄의 근원으로 삼 아 고백 을 강요하는 고해 성사의 규칙과 다룰 바 없는 것이다. 우리가 과연 영적인 을 영위하고 있는지 를 검증하기 위해서 우 리는 영혼과 육체를 가로질러 성과 어떤 친화성을 갖는 무수한 쾌락을 고백해야만 한다. 비록 꿈에서 표상된 것이라 할지라도 깨어난 후 쾌감을 느끼지 않았는지 고백의 검증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자기 검증의 윤리 규칙은 감성에 의한 오류뿐 만 아니라 꿈에 의한 오류를 배제하고자 하는 데카르트의 방법론 적 회의 속에 재현되고 있다. 데카르트적 정신이 대상을 〈의식 앞에 세워 놓고 vor-stellen> 진리를 검증하듯이 , 18 세기 이래 발전 된 성 과학은 성과 욕망을 신문하여 그 전리를 캐어내려고 한다. 그렇다면 고백의 담론과 방법론적 회의는 어떻게 인간의 육체 와 욕망을 읽혀져야 할 문자로서 파악하며, 또 어떻게 성의 담론 을 보편화하는데 기여하였는가? 푸코는 인간의 신체를 신문하여 진리를 알아내는 객관적 방법을 〈성의 과학 sc en ti a sexual 〉이라 고 명명하며, 경험으로 축적되는 육체적 쾌락에 관한 실천적 진 리 인 〈성애의 기술 ars erotica〉과 구별한다. 16) 성애술은 육체적 쾌 락을 쾌락으로 인정함으로써 성의 진리를 알아내려고 하는데 반 하여, 성 과학은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을 구분하는 절대적 법칙 과 유용성의 기준에서 성과 욕망을 고찰한다. 푸코는 성에 관한 지식을 담론화하는 기제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성에 관한 기독교 적 윤리도 역시 쾌락의 활용을 규제하는 차원에 머물렀을 것이라
16) 같은 책, p. 74/74. 전자가 주체의 자기 변형 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윤리 지향적이라면, 후자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고정된 주체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법전(法典) 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고 추정한다. 성에 관한 진리를 알아내는 절차는 처음부터 권력 장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는 것은 고백의 담론에서 명백 하게 드러난다. 성에 관한 담론을 규제하는 권력 장치 dispositif 17) 는 다시 말해 국가와 개인을 매개하는 수단으로 기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푸코는 고백의 담론을 현대인이 자신을 욕망의 주체로서 인정하고 구성하는 절차로 파악한다.
17) 프랑스어 개념 〈장치 dispositif)는 주로 사법적 , 의료적 , 군사적 맥락에서 사용되는데, 푸코의 이론에서는 특수한 전략적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권력 장치를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진실의 고백, 즉 자기 자신을 욕망의 주체로서 인정하는 담론의 절차가 결국은 〈권력에 대한 개체화의 절차〉 18)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고백 aveu 이라는 낱말이 본래 〈주장하다〉, 〈정당화하다〉는 뜻의 라틴어 advocare 에서 유래 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고백의 담론은 타인에 의한 인정 과 특정한 행위와 사상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는 자기 고백의 두 차원을 가지고 있다. 즉 현대인은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 보편적 법칙에 예속시킴으로써 자신을 하나의 개체로서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푸코는 고백의 담론은 대체로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 다고 파악한다. 첫째, 고백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하나의 주체로 서 정당화하기 위한 절차이다. 19) 자신의 삶이 선험적 주체에 부 합하는가를 검증하기 위해서 우리는 제각기 자신의 범죄와 과오, 자신의 생각과 욕망, 자신의 과거와 꿈을 고백해야 한다. 현대인 은 가장 말하기 힘든 성과 욕망을 가장 정교하게 말하도록 강요 당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적 주체 형성에 있어 중요한 것은 바로 고백의 강제성이다. 만약 고백이 내면의 명령에 의해 자발적으로
18) 같은 책 , p. 76/75.
19) 같은 책 , p. 76/76 참조.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의면적 권력 장치는 성과 욕망의 전실을 고백하도록 협박한다. 이런 맥락에서 푸코는 〈고문〉과 〈고백〉은 진실을 알아내는 권력 장치의 양축을 이룬다고 단언한다. 20) 우리 가 고백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고백 자체가 권력 장치로 여겨지기보다는 오히려 해방과 자유의 절차로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스쳐 가는 모든 욕망과 표상을 고백하는 것이 모두 자유 를 위해서라는 믿음은 결국 인간을 이중적으로 주체화하였다. 즉 인간의 육체를 객체화하여 성과 욕망의 진리를 알아내려는 성의 담론은 인간을 한편으로는 권력 장치에 예속되어 있는 피지배자 로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적 욕망의 주체 sujet로서 구성하 는 전략을 실행하는 것이다.21)
둘째, 고백은 말하는 주체와 발언의 객체가 일치하는 담론의 의식이다. 성과 욕망에 관한 고백은 자신의 내면을 대상화하는 까닭에 본질적으로 자기 고백이다. 그러나 푸코는 모든 고백은 권력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화의 상대자가 없는 고 백도 역시 고백을 요청하고, 강요하고, 판단하는 기제가 없으면 기능하지 못한다는 점을 주시한다. 고백의 내용을 판단할 수 있 는 특정한 주체가 없다면, 고백의 상대는 규범적 구속력을 가지 고 있는 권력 장치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백의 정당성을 결정하 는 것은 결코 고백의 내용이 아니라는 점을 간파할 수 있다. 만 약 고백 행위만으로 자신의 무고함을 인정받고, 속죄되고, 영혼 이 정화된다면, 구원은 고백의 내용으로 결정되기보다는 오히려 고백의 절차에 의해 확보되는 것이다. 즉 〈어떻게 말해지는가〉 하는 철차가 고백의 진실을 보장하지, 〈무엇이 말해지는가〉 하는20) 같은 책, p. 77/76.
21) 같은 책, p. 78/78.고백의 내용으로 진실이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역설적 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고백의 담론에 있어 권력의 주체는 말하 는 자 쪽이 아니라 묻고 듣는 자이기 때문이다.
셋째, 고백의 담론은 성의 진실을 알아내는 과학적 절차 자체 를 쾌락화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성과 욕망을 끊임없 이 고백하도록 강요하는 권력 장치는 자신의 육체적 삶을 무한히 대상화함으로써 결국은 욕망의 원천을 다원화하는 결과를 가져왔 다. 욕망의 근원이 다양해지는 것에 비례하여 욕망의 진실을 알 아내는 고백의 제도도 역시 확산되었다. 고백의 담론은 자녀와 부모, 학생과 교사, 의사와 환자, 국가와 국민의 모든 관계에 적 용되었으며, 이에 상응하는 과학적 담론을 발전시켰다. 푸코는 전실을 생산하는 두 가지 양식, 즉 고백의 절차와 과학적 담론 사이에는 상호 간섭이 일어났다고 확신한다. 우리가 성과 욕망의 전실을 고백의 담론을 통해 알아내야 하는 까닭은 성과 욕망이 말하기 힘든 영역에 속하기 때문은 아니다. 성과 욕망의 기능 자 체가 항상 합리적 담론의 손으로부터 빠져나가기 때문에, 우리는 성과 욕망의 진실을 알아내는 쾌락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렇 기 때문에 현대 사회는 성과 욕망을 배제 또는 억압의 부정적 기 제로 통제하려기보다는 오히려 성과 욕망에 관한 생산적 지식을 통해 효율적으로 규제하려고 한다. 결국 현대의 권력 장치는 성 과 욕망을 어둡고 근접할 수 없는 지대로 추방하기보다는 오히려 〈성격을 사물과 육체의 표면으로 분산시켜 이들로 하여금 성을 자극하고 표현하고 말해 주도록 만듦으로써 성을 현실 안에 정착 시킨다〉22)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자신의 정신과 육체 를 대상화하는 현대적 주체는 이렇게 모든 사물을 성적 욕망의22) 같은 책 , p. 92/89.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한마디로 말해서 현대적 주체에 의해 표상 될 수 있는 모든 사물과 육체는 성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적 성 과학이 객관주의의 관점에서 이론적 관찰에 우선성을 부여함으로써 육체를 윤리적 규범 체계로부터 분리시켜 탈도덕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육체, 그것은 쾌락의 주체가 아니라 오직 앎의 의지의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성 과학 의 이론적 관심은 쾌락의 활용보다는 생산성과 유용성에 맞추어 져 있다. 인간의 육체는 관리의 대상으로서 지속적으로 담론화된 다. 그러나 이 경우 생산적으로 관리되고 통제되어야 할 육체는 결코 인간의 유한한 육체가 아니다. 성 과학은 근대 과학 정신과 마찬가지로 육체를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물체로서 파악한다. 결국 인간의 육체는 고유한 언어와 쾌락의 논리를 가지고 있는 자연적 육체의 성격을 상실하고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육체의 의미가 과연 과학적 담론에 의해 완전히 파악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현대의 반성적 의식은 물론 모든 사물을 표상할 수 있는 대상으로, 즉 비물질적 기호로 전환시키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과연 성과 욕망에 관해서도 반성적 의식은 인간의 육체를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가? 니체적 정신에서 구상적으로 표현하자면, 정신이 육체 로부터 추상화되어 가벼워지면 질수록 인간의 육체는 더욱 더 무 거워지는 것은 아닌가? 인간의 육체를 오직 표상과 지배의 대상 으로만 파악한다면, 그것은 결국 유한한 인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성과 욕망을 대상화하고 사물화하는 담론이 지배 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결국 인간의 정신은 자신이 사물화한 대상 에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육체의 탈정신화를 통한 정신의 사물화라는 역설적 효과를 푸코는 〈성적 도착의 정착〉 23) 으로 표현한다. 진리에의 의지라는 이 름으로 현대의 권력 장치는 인간의 육체와 성적 욕망을 그 국단 까지 추적한다. 결국 예전에는 거의 문제시되지 않던 문제들, 죽 동성애, 근친 상간, 사디즘, 편집증 갇은 것들이 고백의 담론을 통해 전면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 성 과학은 인간의 육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육체와 성적 욕망을 대상화 하고 문자화하는 데 모든 노력을 집중한다. 24) 현대의 주체가 자 신의 성과 욕망을 이성의 타자로서 끊임없이 대상화함으로써만 주체로서 구성될 수 있다면, 우리는 이성에 의해 비정상적인 것 으로 파악된 것을 문자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서 볼 때 성도착은 도덕적 규범으로부터 일탈하는 비정상적 행위 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의해 표상된 비물질적 대상에 육 체적 성격을 부여하여 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성적 도착은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실천 양식을 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와 욕망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권 력의 관능화를 통한 쾌락의 증진〉 25) 이다. 현대적 주체성을 받쳐 주고 있는 앎에의 의지는 성적 욕망이 정상으로부터 일탈한 곳을 문자화하고, 분리시키고, 대상화한다. 만약 현대의 주체가 정상 과 비정상의 끊임없는 구분을 통해 구성된다면, 주체의 지식은 바로 주체의 병리학에 다른 아닌 것이다. 인간의 육체를 효율적 으로 관리하는 권력이 확대되면 될수록 성적 욕망이 세분화되고, 세분화된 성적 욕망에 간섭하면 할수록 권력이 증대된다. 만약
23) 같은 책 , p. 50/54.
24) 권력, 지식, 욕망의 생산적 상관 관계에 관해서는 졸고, 「미셸 푸코 —권력, 지식, 그리고 욕망」, 『탈현대의 사회 철학』(문예출판사, 1993), p. 207 이하를 볼 것.25) 미셸 푸코, 앞의 책, p. 60/62.우리가 육체를 정신과 분리시켜 보편적 법칙에 따라 문자화하면 할수록 정신의 물화를 더욱 심화시킬 뿐이라면, 우리의 자연적 육체와 육체로부터 나오는 성적 쾌락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육체가 가지고 있는 유일무이한 개 별성에 주목한다면, 우리는 보편적 언어로 우리의 육체를 획일화 하는 현대적 권력 장치에 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자기 관계를 모 색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정신과 육체를 유기적 관 계로 파악한 고대의 성애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3 주체로서 말하는 육체와 〈쾌락의 활용〉성은 분명 우리 시대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을 통해 우리 자신의 존재가 무엇이며,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가를 문제화 하며,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문제화하기 때문이다. 푸코는 성의 역사』 제1권에서 주로 현대인이 자신을 성적 욕망의 주체 로서 인정하도록 만드는 권력의 기제와 담론의 장치를 분석하였 다. 푸코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섹스가 아니라 한 인 간 존재를 주체로 만드는 실천의 양식들이다. 26) 그렇다면 육체를 객체로 파악하지 않고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규정할 수 있는 실 천 양식들은 없는 것인가? 만약 우리가 육체를 단지 성적 욕망 의 객체로서 읽어 내는 현대의 권력 장치에 순응하지 않겠다면, 우리는 육체를 다른 관점에서 파악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26) 이에 관해서는 P. Rabinow/H.L. Dreyfus, "How We Behave : Interview with Michel Foucault," Vanity Fair(November 1983), p. 62. 여기서 푸코는 자신이 관십을 가지는 것은 〈섹스보다는 자기 기술에 관한 물음들이며〉, 〈섹스는 지루할 뿐이라고〉 고백한다.
질문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자연적 육체, 즉 신체는 자유하는 자아와 의식에 의해 찬탈되었던 현실적 주체의 자리를 되찾는 다.27) 인간의 신체가 자신의 고유한 언어를 말하는 주체로서 다 시 기능한다면, 우리는 육체적 욕망과 쾌락과의 관계를 통해 우 리 자신을 윤리적 주체로서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왜 냐하면 표상화된 육체에 예속된 노예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우리 자신의 신체에 고유한 권리를 되돌려 줌으로써 신체의 정신성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7) 여기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의미를 스스로 충족시키는 유기체적 생명체물 신체 Leib라고 명명하고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지배 대상으로서의 육체 Kerper와 구분하고자 한다. 이에 관해서는 Renaissance (Reinbek bei Hamburg, 1988) 를 참조할 것
물론 신체의 회복이 결코 전통적 성애술로의 단순한 회귀를 의미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는 이미 유기체에 대한 사랑 없이 삶을 영위하려는 권력 장치를 발전시켰다. 거대한 관료 체제는 더 이 상-뒤르켐이 말한 바 있는-〈유기체적 유대성〉에 의해 유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을 개별화하고 주체화하는 성 적 담론의 권력 장치를 결코 사회적 퇴락의 징후로 파악해서는 안된다. 사회적 유대성의 상실은 사회적 관계가 점점 더 자유로 운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관계가 자연, 신적인 법칙, 유기체적 필연성으로부터 해방되면 될수록, 사람들 은 더욱 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변형시킬 수 있는 주체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물론 현대와 같이 파편화된 사회에 서 자유로운 선맥의 의미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하나의 독립적 주체로서 구성할 수 있는가 하는 실천 방식과 밀접한 연 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육체를 대상화하는 성 담론 의 팽창은 현대 사회가 제공하는 자유의 가능성을 왜곡한다고 푸
코는 전단한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과 본능을 억압하는 여러 사 회적 금지들을 지양하면, 다시 말해 성을 해방 시키면 주체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허구이다.28) 성의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만 약 우리의 욕망을 해방시킨다면, 우리는 타자와의 쾌락의 관계에 서 어떻게 윤리적으로 행동하는가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요 청되 는 윤리적 문제이다. 여기서 우리가 신체와 쾌락과의 관계에 서 우리 자신을 하나의 주체로서 구성할 수 있다면, 타자와의 관 계 역시 윤리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그 렇기 때문에 푸코는 〈성적 욕망의 장치에 대한 반격의 거검은 성 -욕망이 아니라 육체와 쾌락이어야 한다〉29)고 단언한다. 현대에 들어와 다양하게 드러난 육체, 쾌락, 지식을 오히려 권력의 저항 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일단 성적 욕망 의 장치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를 개별화하여 전체에 예속시키는 권력 관계를 반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푸코는 새로운 쾌락의 문화와 새로운 성애의 기 술을 시도한다. 물론 객체로 읽혀진 육체로부터 의미의 담지자로 서의 신체로 시각을 전환하려는 푸코의 시도는 주체가 선험적으 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품처럼 형성되고 변형 되는 것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이렇게 스스로를 변형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육체와 영혼, 자신의 사고와 행동 그리고 자신의 실존 방식에 영향을 주는 실천들을 〈실존의 예술〉 또는 〈자기의 기술〉이라고 명명한다.30) 푸코는 자신을 하나의 윤28) M. Foucualt, Freiheit und Selbstsorge, Interview 1984 und Vorlesung 1982, hrsg. v. H. Becker (Frankfurt, 1985) , p. 11 이하 참조.
29) 미셸 푸코, 『앎의 의지』, p. 187/167.30) 미셸 푸코, 『쾌락의 활용』, p. 18/25.리적 주체로서 구성하는 자기 기술의 전형을 고대의 성애술에서 발견한다. 성애의 기술은 실천으로서 간주되고 경험으로 축적되 는 육체의 쾌락 자체로부터 추출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애의 기 술은 현대의 성 과학과는 달리 실천에 우선성을 부여한다. 물론 실천의 기준은 유용성이 아니라 쾌락이다. 또한 쾌락의 주체이며 동시에 객체이기도 한 인간의 육체가 유한한 까닭에 성애의 기술 은 쾌락을 윤리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실천 양식들을 발전시킨 다. 여기서 우리는 성애의 기술은 신체 전체 를 포괄하는 데 반 해, 섹스는 성적 욕망의 개별적 성기만을 다룬다. 성애의 기술이 신체적이라면, 섹스는 물체로 대상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육체적 이다. 31)
푸코는 성적 욕망의 진리를 추구하는 현대의 성 과학에 쾌락의 경험으로부터 전리를 획득하고자 하는 성애의 기술을 대립시킨 다. 왜냐하면 성애의 기술은―푸코가 의지하고 있는 바타이유 에 따르면―〈필연적으로 정신적이며, 단순히 육체적이지 않 기〉32) 때문이다. 푸코는 하나의 윤리로서 기능할 수 있는 성애의 표본으로서 고대 동양, 특히 중국의 성애술을 예로 든다.33) 서양 의 고대에서는 비록 성애술이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쾌락의 활용 을 통해 윤리적 주체를 구성하는 실존의 기술이 발전되었다고 푸31) W. Schmid, Auf der Suche nach einer neuen Lebenskunst, Die Frage nach dem Grund und die NeubegrUng der Ethik bei Founcau/t (Frankfurt, 1991) , p. 339 참조.
32) George bataille, "Jenseits der Grenzen," ( 1954) , Sprachen des Korpers (Berlin, 1979) , p. 95.33) 이에 관해서는 미셸 푸코, 『쾌락의 활용』, .176/155 와 M. Foucault, "On the Gcneology of Ethics : An obcrwiew of Work in Progress," H. L. Dreyfus, P. Rabinow, Michel Foucault. Beyond Structuralism and Hermeneutics (Chicago, 1983) , p. 235 참조.코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고대의 성애술과 실존의 기술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과연 무엇인가? 다시 말해 고대의 철학은 인간 의 육체에 있어 무엇을 문제화하여 인간을 도덕적 주체로 정립하 였는가? 그것은 육체적 쾌락이다. 푸코가 〈성의 역사〉 제2권에 서 쾌락의 활용을 연구한 주된 목적은 현대적 성의 욕망과 기독 교적 육욕에 대한 대립 개념을 해명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고 대에 는 성적 욕망, 죄의 근원으로서의 육욕과 같은 개념이 존재 하지 않았다. 성애와 관련된 용어 〈아프로디지아ta aphrodisia 〉는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서 쾌락을 제공하는 행위, 몸짓, 접 촉, 감각적 쾌락, 성교 행위를 지칭하였다. 즉 고대에서는 한 인 간이 주체로서 형성될 수 있는가는 자신의 육체적 쾌락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었던 것이다.34) 현대의 성적 욕망 이 표상된 육체, 문자화된 육체로부터 발생한다면, 고대인들이 문제시하였던 쾌락은 바로 인간의 자연적 육체에 기인한다. 육체 적 쾌락을 지칭하는 아프로디지아의 개념에는 세 가지 서로 구분 되는 계기들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는 사랑을 요청하는 욕구이 며, 둘째는 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구체적 실천 행위이며, 셋째는 욕구 충족에 수반되는 현상으로서의 타락이다. 현대의 성 개념은 일방적으로 욕망을 강조하고 실천과 쾌락을 등한시한다.35) 이런 맥락에서 푸코는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성적 욕망의 이론을 쾌락의 윤리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그렇다면 푸코는 왜 쾌락을
34) 어떤 의미에서 고대의 철학은 쾌락에 대한 성찰로부터 탄생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W. Schmid, Die Gebrut der Philosophie in Galen der LUste. Michel Founcaults Archaologie des platonischen Eros (Frankfurt, 1990) 을 참조할 것.
35) M. Foucault, "On the Genealogy of Ethices," 앞의 책 , p. 243 을 참조 할 것.새로운 문화의 중심점으로 설정하려는 것인가? 푸코는 특히 쾌 락이 구체적 실천과 기술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중요시한다. 쾌락은 갑자기 발생하는 사건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대 객관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 행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쾌락은 주체를 중심으로부터 이탈시키며 한계까지 몰고 간다. 그렇기 때문에 쾌락의 인간은 자기 극복의 인간이며, 자기 자신을 넘어서 타자에로 이행해 갈 수 있는 초월의 인간이 라고 푸코는 주장한다. 쾌락을 활용하는 실존의 기술에서 쾌락은 결코 그 자체 목표가 아니다. 쾌락은 단지 자기 자신을 형성하고 변형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쾌락이 자기 형성의 통로 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역동적 성격을 가지 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성적 욕망이 수동적으로 고백을 강요 당하는 것과는 달리 아프로디지아는 〈행위로 이끌어 가는 욕망, 쾌락과 연결된 행위, 그리고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쾌락을 순환적 으로 결합시키는 역동적 힘〉36) 이다. 따라서 윤리적 문제는 어떤 욕망, 어떤 행위, 어떤 쾌락을 추구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 라, 우리가 쾌락과 욕망에 의해 얼마나 강하게 이끌리며 이에 대 해 어떻게 능동적으로 대처하는가 하는 실천의 문제이다.
아프로디지아는 특히 두 가지 관점에서 윤리적 문제가 된다. 첫째, 아프로디지아는 행위의 빈도수 유형과 성적 행동의 양식에 따라 도덕적으로 판단되었다. 고대인들은 오늘날과 같이 결코 대 상의 유형과 성적 행동의 양식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들이 문제시한 것은 육체적 쾌락은 자신의 고유한 활 동성으로 말미암아 무절제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예컨대 아리스 토텔레스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자연적 욕망에서 우리가 저지36) 미셀 푸코, 『쾌락의 활용』, p. 58/56.
를 수 있는 유일한 잘못은 양적인 무절제, 즉 과잉이다. 둘째로 아프로디지아가 윤리적 문제가 되는 것은 것은 육체적 쾌락을 추 구하는 행위의 양극성과 관련이 있다. 성적 쾌락의 실천에서는 생식 기능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개의 역할과 두 개의 극점, 죽 능동적 역할과 수동적 역할이 분명히 구분된다. 아프로디지아의 관점에서 보면 성도착 행위는 본래 주어져 있는 능동적 역할과 수동적 역할이 전도되는 경우에 해당한다. 따라서 남자에게 있어 서 <과도함과 수동성은 아프로디지아를 실천함에 있어 부도덕성 의 두 가지 주요한 형태이다.〉37) 고대 철학은 이렇게 인간의 육 체적 쾌락의 힘이 본래 잠재적으로 과도한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 에 도덕적 문제는 이 힘에 대적할 수 있는 관리술을 어떻게 확보 하는가 하는 물음으로 모아전다.
그렇다면 고대인들은 항상 한계를 넘어서려는 과도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아프로디지아에 직면하여 어떻게 자신을 도덕적 주 체로서 구성하는가? 다시 말해 육체적 쾌락의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체와 어떤 윤리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현대인은 의면적 권력 장치에 의해 수동적으로 주체화되고 개별화된다면, 우리는 고대의 실존 기술에서 우리 자신을 능동적으로 주체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플라톤은 쾌락을 올바로 활용하는 이와 같은 도덕적 태도를 〈엔크라테이아Enkrateia 〉라고 명명한다. 물론 엔크라테이아는 쾌락과 욕망에 대한 지배를 통해 영혼의 질 서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절제 sophrosyne 와 혼용되기도 하지만 푸 코는 엔크라데이아를 더욱 선호한다. 왜냐하면 엔크라데이아는 〈욕망과 쾌락의 영역에서 저항하거나 싸울 수 있게 해주는 자기 지배의 능동적 형태〉38)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에게 있어37) 같은 책, p. 64/61.
38) 같은 책, p. 85/79.절제가 이성의 힘에 대한 경의와 동시에 〈자기 내면의 질서 politeia en auto 〉를 의미한다면, 자기 지배는 개인의 절제의 덕을 획득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에게 행해야 하는 훈련과 조절의 형태 이다. 성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현대 사회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의 육체적 쾌락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육체적 욕망의 노예 가 되지 않는 능동적 실천의 방식으로서 엔크라데이아는 자유의 실천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엔크라데이아 는 욕망과 쾌락과의 투쟁적 관계를 전제하는 까닭에 항상 욕망과 쾌락의 현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엔크라데이아가 지배하는 욕망과 쾌락이 거세면 거셀수록, 자기 지배의 가치는 더욱 높아 진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를 지배할 수 있는 자만이 타인을 지배 의 능동적 주체로서 인정할 수 있으며 동시에 타인과 전정한 윤 리적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쾌락의 활용이 실존 예술로서 윤리의 개념에 속한다고 해서 푸 코가 쾌락주의 윤리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실존 예술의 대상 인 쾌락은 결코 쾌락주의와 관계가 없으며, 마찬가지로 완성된 삶을 표현하는 총체적 개념인 〈행복eudaimonia〉과도 관계가 없 다. 쾌락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가능한 자기 변형의 문제 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말하는 〈활용〉은 결코 대상의 단순한 사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변형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타자와의 강도 높은 관계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쾌락을 새롭게 문제화함으로써 새로운 주체화의 방식을 획득할 수 있는가? 푸코는 쾌락의 새로운 문화가 더 이상 동일 성의 명법에 따라 작용하지 않는 주체화의 방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푸코에 의하면 성애는 동일성을 확인하기보다 는 타자의 경험을 추구한다고 전제한다. 성애는 푸코에게 있어 자기 망각과 타자 경험의 표본적 패러다임이다. 따라서 자기 지배를 전제하는 성애에서 문제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랑〉이 라고 부르는 직접성의 경험도 아니며, 성적 열정의 과잉에 의한 자기 자신의 해체도 아니다. 푸코가 주목하는 성애의 관계는 자 기 자신의 변형을 통한 타자의 경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푸코는 욕망을 해방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쾌락의 능력을 고양시켜야 한다 고 주장한다. 우리가 타자의 경험이라는 관점에서 성적 쾌락에 접근하면, 우리는 순수한 성적 교집과 사랑에 의한 동일성의 융 해라는 두 가지 틀에 박힌 틀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타자를 하나의 능동적 주체로 인정하고 그와 윤리적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지배를 요청하는 금욕의 훈련이 전 제된다. 바로 여기에 실존의 미학을 발전시킬 필요성이 있는 것 이다.
4 자기 염려와 〈실존의 미학〉자기 자신의 욕망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고백할 것을 강요하는 성의 시대에 자기 자신을 하나의 주체로서 구성할 수 있는 새로 운 삶의 기술은 동시에 새로운 윤리와 연관된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도덕적이라고 일컬을 때 통상 두 가지 점을 주목한다. 한편으로는 그 행동이 보편적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규범, 법칙 또는 가치에 부합하는가 하는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내가 도덕적 규약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 의식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실천둘이다. 그런데 특정한 도덕 규 약에 대한 태도는 항상 특정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만약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적 규약 이 〈네 자신의 성적 욕망을 끊임없이 추적하여 고백하라〉라는 명법이라고 한다면, 우리 자신을 도덕적 주체로서 구성하기 위해서 는 일단 이 명법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립해야 한다. 우리 자 신을 도덕적 주체로 구성할 수 있는 존재 방식을 획득하려면 한 편으로는 기존의 도덕적 규율에 대한 지속적 문제화가 필요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알려고 하고 또 자신에게 영향을 줌으로 써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완성시켜야 한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삶을 미적 가치를 가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파악하고 스스로를 도덕적 주체로 만들어가는 실천 양식을 〈실촌의 미학〉이라고 명 명한다.39) 성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주제는——-한 마디로 표현하면——주체 구성의 형식이다. 현대의 주체가 보편 적 〈규범〉을 통해 수동적으로 구성된다면, 고대의 주체 형성에는 자신을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실존의 〈형식〉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40) 여기서 우리는 주체 구성의 형식에 따라 신체와의 관계 도 역시 다르게 파악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현대의 성적 담 론 장치는 인간의 육체를 성적 욕망의 근원으로 객체화하고 있다 면, 고대의 실존의 미학은 인간의 육체 자체를 대상화될 수 있는 신체로 보지 않고 그 자체 하나의 〈활동〉으로 본다. 여기서 말하 는 활동은 물론 현대와 같이 성적 욕망의 분출을 의미하지 않는
39) 이 점에서 푸코는 철저하게 니체가 초기에 발전시킨 〈예술가-형이상학〉의 관점을 수용하고 있다. 니체는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허위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인간을 〈자기 자신을 주체로서, 그것도 예술가적으로 창조하는 주체〉로 파악하면서, 이 예술가적 성격이 소크라데스주의에 의해 망각되었다고 말한다. F. Nietzsche, "Uber Wahrheit und LUge im aussermoralischen Sinne," Siimtliche Werke. Kritische Studienausgabe in 15 Bander, Bdl. hrsg. v. G. Colli und M. Montinari (MUnchen, 1980) , p. 883.
40) W. Schmid, Auf der Suche nach einer neuen Lebenskunst, 앞의 책 , p. 225 을 참조할 것.다. 고대인들이 자기 염려의 대상으로 삼았던 대상은 물론 영혼의 활동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푸코는 〈자기에 대한 염려는 활동에 대한 염려이지 결코 실체로서의 영혼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고〉41) 단언한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염려는 궁극적으로 영혼에 대한 염려로 이 어진다. 그렇다면 영혼을 염려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신체에 정신적 성격을 다시 부여함으로써 과연 현대의 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푸코가 주장하고 있듯이 우리가 직면 하고 있는 문제는 다른 시대에 다른 문제로 말미암아 발전된 해 결 방식으로 극복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서 영혼이라는 전부한 말을 사용하는 까닭은 그것이 본래 활동성, 주체로서의 행위 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상화될 수 없는 인격의 영혼성은 우리가 스스로를 도덕적 주체로서 구성할 수 있 다는 사실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때의 영혼은 플라톤의 「파 이돈」에서 서술되고 있는 것과 같이, 신체의 감옥에 갇혀 있는 그래서 해방시켜야 할 영혼도 아니며, 또 「폴리데이아」에서처럼 보편적 위계 질서를 가지고 있는 정태적 구조도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실천을 위해 자신의 신체를 사용하고 쾌락을 활용하는 행 위의 주체이다.42) 따라서 푸코가 비판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자기 염려 epimeleia heautou>43) 의 실천은 보편적 법과 규범, 종교 적 의무를 통해 이루어지는 주체화 방식을 문제시한다. 다시 말 해 푸코는 개인의 실존 양식에서 오늘날 보편화되고 있는 권력41) M. Foucault, "Technologien des Selbst," 앞의 책, p. 35.
42) M. Foucault, Freiheit und Selbstsorge, 앞의 책 , p. 37.43) 이에 관해서는 미셸 푸코, 『자기에의 배려』, p. 60/57 와 M. Foucault, "Technologien des Selbst," L. H. Martin, H. Gutman, P H. Hutton, Technologien des Selbst, 앞의 책, pp. 24-62 를 참조할 것.장치에 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개인의 삶을 보호하고 증대시킨다는 현대 복지 국가의 권력 장치는 사회의 구 성원을 철저하게 개별화함으로써 결국은 개인의 주체적 행위가능 성을 박탈한다는 두려움의 그림자가 실존의 미학에 질게 드리워 져 있다.44) 푸코는 보편주의적 힘을 가지고 개인의 삶을 전체화 하고 있는 현대의 권력 장치로부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라는 급진 자유주의적, 무정부주의적 결단론으로 도망가고 있는 것이다.45) 그러나 강화된 자율적 주체를 저항의 핵심으로 설정하는 푸코의 대안은 과연 복잡하고 미묘하게 작동하는 권력 장치 안에서 개인이 과연 자신의 자유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겠 는가 하는 물음을 여전히 남겨 놓는다.
44) 모든 사회 관계가 개인의 권리와 복지를 증진하는 데 집중되고 있음에도 구하고 오히려 개인의 자유는 점점 축소되어 가고 있다는 역설적 사실에 관해서는 졸고, 현대의 철학적 에토스-칸트의 계몽주의에 대한 푸코의 탈현대적 해석」, 《철학 연구 15>(1993), pp. 51-71 를 참조 할 것.
45) 이에 관해서는 Hans Herbert Kogler, .. Frohliche Subjektivitat. Historische Ethik und drcifache Ontologie beim spaten Foucault," Ethos der Moderne, Foucaults Kritik der Aufklarung, hrsg. v. E. Erdmann, R. Forst, A. Honneth(Frankfurt/New York, 1990), p. 223 참조할 것.개인을 전체화하는 현대의 권력 장치에 우리가 과연 삶의 양식 을 개인화함으로써 대처할 수 있는가? 실존의 미학 자체도 이론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스스로 선택해야 할 문제라고 한다면, 그것은 개인을 다른 형태로 개별화시키는 또 다른 내면성의 문화를 조장하는 것은 아닌가 ? 그러나 우리가 다루고 있는 〈성과 욕망〉의 문제가 개인의 삶과 직결된다는 점을 인정하면, 우리는 실존의 미학으로부터 인간을 개별화하고 동시 에 획일화하는 현대의 권력 장치에 대항할 수 있는 관점을 끄집
어 낼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윤리적 실존 방식과 사회적, 정치 적 구조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없을 수 있다는 인식에 근거한 다. 오히려 우리는 미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윤리적 관계 변 을 통해 사회를 전체화하는 권력에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한 다. 그렇다면 현대의 권력 장치에 의해 점차 확대 팽창되고 있는 적 욕망의 담론에 대해 실존의 미학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 는가? 주지하다시피 현대의 계몽가들은 인간의 성적 욕망을 처 음에는 통제되지 않는 쾌락, 도착, 파괴력으로 가득찬 공포의 판 도라 상자로 여겼다. 그러나 점차 세련되어진 현대의 권력 장치 는 인간의 신체를 생산적 자원으로서 대상화함으로써 성적 욕망 을 긍정적으로 담론화하였다. 그동안 금기시되어 왔던 성 행위, 성적 도착, 동성애 등이 오늘날 거리낌없이 사람의 입에 오르내 리고 있다. 권력이 성을 과학적으로 담론화하고 자본주의적으로 상품화함으로써 야기된 결과는 성적 욕망의 팽창과 인간 욕구의 다원화이다. 여기서 우리는 보수적인 사람은 정상위를, 진보적인 자유인은 다양한 체위를 즐긴다는 통계를 자유의 확대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은 냉철한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면, 우리 는 모든 개인이 표면적으로는 개별적 욕구와 가치를 추구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광고를 통한 이차적 욕구의 확대 재생산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듯이 실제적으로는 욕구 충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개별화시키는 자본주의적 논리에 예속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현대적 권력 장치는 욕구를 다원화하여 개인을 개별적 욕구에 예속시킴으로써 결국은 전체적으로 획일화시키고 있는 것 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원화된 욕구와 성적 욕망을 독립된 삶 의 형식을 위해 이용할 수 없는가? 우리가 과거의 엄격한 성 윤 리를 복원함으로써 현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확대된 성 적 욕망에 직면하여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방
46) 미셸 푸코는 도덕적 실천과 규범의 관계 를 〈윤리적 실체〉, 〈복종 양식〉, 〈자기 작업〉, 〈도덕적 태도의 목적〉이라는 네 가지 관점에서 다룬다. 이에 관해서는 관계 를 이루는 도덕적 관점을 〈윤리적 실체〉라고 명명한다. 이에 관해서는 미셸 푸코, 『쾌락의 활용』, p. 37/40 를 참조할 것.
법은 무엇인가? 인간을 성적 욕망의 노예로 개별화하는 권력 장 치에 대항할 수 있는 길은 쾌락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성과 욕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실천 방식이 요청되는 것이다. 성을 해방시키지 않고서도, 성적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고서도 무한한 쾌락을 향유할 수 있는 실천을 우리는 〈탈현대적 금욕주 의〉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우리가 관계 맺는 사람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대신에 우리와 같은 능동적 주체로서 인정 하고 공유할 수 있는 쾌락을 일구어 갈 때 우리는 성의 문제에서 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탈현대적 금욕주의는 자기 자신을 윤리적 주체로 구 성하기 위하여 어떤 방식으로 자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자기 자신을 하나의 도덕적 주체로 구성하는 데는 특히 두 가지 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하나는 우리가 무엇을 도덕적으로 문제화해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 실체〉에 관한 것이며, 다른 하 나는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도덕적 주체로 구성하는가 하는 〈윤 리적 작업〉에 관한 것이다 .46) 첫째, 자기 관계는 자기 자신의 어 떤 부분을 도덕적 행동의 주된 대상으로 설정하느냐 하는 관점에 따라 달라전다. 성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도덕적 행동의 주된 질료가 고대의 윤리에서는 〈쾌락〉이었으며, 기독교적 도덕에서는 〈육욕〉이었고, 현대 사회에서는 〈성〉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도 덕적 행위의 대상이 쾌락으로부터 육욕을 거쳐 성으로 변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푸코는 이에 대한 주된원인을 자기 염려로부터 자기 인식으로의 전환에서 찾는다. 고대 의 자기 인식은 인간을 신체적 존재로 인정하여 자기 자신과 일 정한 윤리적 관계를 맺는다. 이에 반해 인간의 육체는 죄의 근원 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는 육욕의 원천을 알고자 하는 인식 욕구 에서 신체를 자기 인식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그런데 자기인식 의 명법은 결국 인간의 신체를 성적 욕망의 담지자로 변화시켰다 는 사실을 성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서술에서 간파할 수 있다 고 푸코는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원죄 이전의 아담 의 육체는 영혼과 의지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런데 신의 의지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반역 때문에 아담은 자신 의 신체에 대한 벌을 받게 되었다. 아담의 의지에 따르지 않는 최초의 신체 부분이 성기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렇게 기독교적 도덕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발기하는 성은 신에 대항하는 인간의 모습〉47) 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통제되지 않 는 성기의 발기는 바로 인간 자신이 신에게 행하였던 봉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의지와 관계 없이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성기의 원칙을 리비도 Lobido 라고 명명한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영혼의 모든 활동 속에서 리비도적 인 것을 해독해야 한다는 기독교적 자기 인식은 결국 인간의 신 체를 리비도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여기서 우리는 성적 욕망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기독교적 윤리에서 중요한 것은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의지와 비자의 적 충동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육욕으로부터 해방된 순수 자아 를 탐구하는 자기 인식은 결국 타인과의 관계를 배제한다. 그러 나 윤리적 태도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
47) M. Foucault/R. Sennett, "Seuxalitat und Einsamkeit," Von der Freundschaft, Michel Foucault im Grsprach, 앞의 책, p. 42.
계의 형식〉48) 를 포괄한다. 자기 관계는 자기 자신을 객체화함으 로써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 이다. 49) 자기 자신을 객체화함으로써 성적 욕망을 무한히 확대하 는 현대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위만 있고 성교(性交)가 없는 시대 이다. 따라서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도덕적 주체로 구성 하기 위해서는 우선 타인도 역시 자기 지배의 주체라는 점을 인 정하고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쾌락을 도덕적 태도의 대상으로 삼 아야 한다.
둘째, 구체적 실천과 도덕적 규범의 관계는 스스로를 변형시키 기 위하여 자신에게 행하는 작업 방식에 따라 를 수 있다. 푸 코는 자기 변형의 목적으로 자신에게 행하는 실천을 본래의 의미 에 있어서의 〈금욕askein 〉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육체를 죄의 근 원으로 보고 육체적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을 구원의 전제 조건으 로 파악하는 기독교적 윤리는 자기의 포기를 추구하는 부정적 금 욕주의를 전개한다.50) 육욕의 원천을 철저하게 탐구하고자 하는 기독교적 〈자기 인식〉은 인간의 신체와 현세적 삶의 조건을 부정48) M. Foucault, "Polemics, Politics, and Problematizations," The Foucault Reader, 앞의 책 , p. 41
49) 자기 관계의 〈자기 heautou 〉는 삼인칭 재귀 대명사로서의 반성적 성격 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기 실천의 자기는 결코 근대 의식 철학이 전 제하고 있는 절대적 자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에 관해서는 w. Schmid, "Auf der Suche nach einer neuen Lebenskunst," 앞의 책 , p. 247을 참조할 것.50) 이에 관해서 E. Leites, Purtanisches Gewissen und moderne Sexualitat (Frankfurt, 1988) 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청교도적 양심은 결코 영혼의 다른 부분들에 대한 완전한 금욕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원칙적으로 세속의 모든 쾌락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내면의 조화와 일관성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결과적으로 금욕을 가져왔다는 것이다.함으로써 결국 〈자기 포기〉를 가져왔다고 푸코는 분석한다. 그러 나 본래적 의미에서의 금욕은 특정한 삶의 방식을 획득하기 위하 여 자신의 신체로부터 발생하는 쾌락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영향 을 미치는 능동적 활동이라는 것이다.51) 여기서 푸코는 오늘날 보편화된 성적 욕망을 부정적 금욕주의로 해결할 수 없음을 암시 고 있다. 우리는 성적 욕망의 담론화를 오히려 새로운 주체 형 성의 계기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자기포기가 아니라 자기 변형을 추구하는 금욕적 실천이다.
성적 담론의 장치가 고정적 주체와 절대적 자아를 설정함으로 써 인간의 신체를 물화하였다면, 이제 우리는 인간의 신체를 복 권시키기 위하여 고정된 주체를 포기해야 한다. 기독교적 금욕주 의가 영혼의 구원을 위해 자기 포기를 추구하였다면, 욕망이 보 편화된 시대의 탈현대적 금욕주의는 유한한 신체에 대한 배려를 위해 고정된 주체를 포기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자기 관계를 통 해 형성되는 도덕적 주체는 사유하는 주체도 아니며 초월적 주체 도 아니다.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기를 변형시키는 경 험의 주체이다. 권력 관계 속에서의 경험과 자기 실천을 통해 형 성되는 권력 주체의 특칭은 따라서 변형 가능성과 다양성이다. 따라서 실존의 미학이 추구하는 주체는-칸트가 종합적 통각 의 통일성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한- 다채롭고 다양 한 자아〉이다.52) 주체가 스스로를 형성하는 원리는 동일성이 아 니라 오히려 끊임없는 변형들을 관통하는 일관성이다. 주체는 동 일하지 않기 때문에 변형 가능하다는 접을 전제하면, 개인의 고 정된 동일성은 존재하지 않음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개인의 주 체성, 즉 개성은 고정된 자아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51) M. Foucault, Freiheit und Selbstsorge, 앞의 책 p. 10 을 참조할 것.
52) I.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16, B 134.없는 변형의 결과〉53) 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대의 성적 담론 장치에 의해 실행된 욕망의 다원화는 주체 형 성의 다양한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성과 욕 망과의 다양한 관계는 동시에 사회의 다양한 권력 관계를 반영하 고 또 동시에 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 여기서 전제되는 것 은 다양한 권력 관계가 하나의 규범에 의해 지배되어서는 안 된 디는 점이다. 획일적인 권력 관계로 경직되지 않고 활동적 주체 들의 호혜적인 상호 관계를 허용하는 윤리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고정된 주체를 포기하고 신체의 다양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물론 사람들은 이와 같이 쾌락의 상대를 능동 적 주체로 인정하는 탈현대적 금욕주의를 보편화될 수 없는 개인 의 실존 양식이라고 몰아부칠 수 있다. 그렇다면 더욱 잘된 일이 다. 모든 것이 하나의 보편적 권력 장치에 의해 획일화되는 시대 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저항 양식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고 또 사람들이 보는 것과는 다르게 지각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54) 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을 성적 욕망의 노예로 만드는 권력 장치에 대항하는 길은, 니체가 말하고 있듯이 〈다양한 형태의 삶과 공동체를 시험하는 길〉이 다. 55)
53) M. Frank, "Subject, Person, lndividuum," Die Frage nach dem Subjekt, hg. v. M. Frank et al. (Frankfut, 1988) , p. 26,
54) 미셸 푸코, 『쾌락의 환용』, p. 15/23.55) F. Nietzsche, Morgenrothe, lll 164, KSA 3, p. 147 푸코도 역시 〈새로운 공동체, 공동 생활, 쾌락의 형식들을 탐구하는〉 실험의 필연성에 관 해 말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M. Foucault, "Ein Spiel um die Psychoanalyse," Dispositive der Macht (Berlin, 1978) , p. 161.불확정 시대의 성과 현대 문화
1 성과 문화의 상호 규정성현존하는 집단들 간의 다양한 생활 방식들은 성에 대한 문화적 해석의 필요성을 인식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예술, 종교, 제도, 관습 등의 문화의 차원들도 성적인 충동이나 에로스적인 감정이 어떻게 해석되는가에 따라서 성격을 달리한다. 이 접에서 프로이 트 Freud 의 정신 분석학은 성에 대한 이론적 반성의 역사에서 하 나의 분수령을 의미한다. 1) 그러나 프로이트의 성에 대한 관심은1) 그는 욕망의 문법이 이를 표현해 주는 표상과 행위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접근 가능하다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문화 자체를 에로스와 타나토스 간의 투쟁이 진행되는 장소로서 간주한다. 문화론을 계기로 삼아 정신분석학은 분석적 과학의 차원을 넘어서 철학적이며 신화학적인 차원으로 이행해간다 (Paul Rica ur, Die Interpretation, Suhrkamp(Frankfurt M. 1974), pp.164-165. 프로이트의 다음 작품들 『쾌락 원칙의 저편』 (1920), 『나르시시즈의 입문』 (1914) 등은 문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서 정신 분석학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여기서 프로이드는 죽음에 대한
충동을 논의의 핵심에 설정함으로써 정신 분석학 이론의 전환점을 마련한다. 특히 인간의 심리적인 에너지가 항상성의 원칙에 의해서 작용하는 자기 충족적 기제로서의 충동 구조로 간주된다는 전통적인 모형을 확장, 변형시킨다. 예술, 종교, 도덕 등의 문화영역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와의 연관 속에서 새롭게 조명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성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문화 유형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주장과 일견 상반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문화 결정론적 해석은 이미 통용되는 사회적 관습에 대한 존중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생성론적인 분석의 결과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이미 경험적인 권위로서 작용하는 문화 유형과 성에 대한 한 공동체 집단 간의 상호 작용에 대한 서술이 여기서 중요하다. 반면에 정신 분석학에서 출발하는 성과 문화의 연관성에.대한 분석은 인간학적이며 인류학적인 것이다. 여기서는 앞의 경우에서와는 반대로 문화의 다양한 차원들, 예술, 종교, 도덕 등이 성적인 욕망을 어떻게 처리,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형성된 결과로 간주된다.
인간의 인격성과 문화에 대한 분석을 위해 보다 넓은 영역으로 확장되며, 그의 탐구들은 인간의 자기 이해와 관련해서 한 중요 한 이정표로 남아 있다. 인간의 성 Sex & Gender과 문화는 비록 결정론적인 인과 관계로 묶여 있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심층적 으로 상호 매개되어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랑에 관한 집요하고도 광범위한 관심, 결혼과 가족이라는 제도의 생명 력, 다른 존재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사회적 본능의 보편성, 성 적 욕구의 다양한 상징적 표현들은 성과 문화의 중첩된 매개의 방식들을 보여준다. 성과 에로스적 충동의 역사에 대한 풍부한 체험은 사실상 철학에서보다는 인류학이나 민속학을 통해서 가능 하다. 예컨대 이성이나 도덕적 규범들에 관한 철학적 주제들과 달리 성의 문제는 바로 이성이나 합리성의 원리에 의해서 정리되 거나 동화될 수 없는 삶의 차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성에 대한 자기 해석이 인간과 문화의 자기 정체성의 형 성과 관련해서 지니는 의미를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다
른 철학적 주제들과는 달리 성에 대한 이해는 그 문화적 규정성 으로 인해서 보편적인 세계 해석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철학적 사 유의 주변부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생물적인 의미에서의 성만이 철학적 담론에서 소의된 것은 아 니다. 여성과 남성 간의 관계 역시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관심에 가려서 철학자들의 주목을 받지못한 것이 사실이다. 여성이나 부 권제적 가족 제도 등에 대한 서양 철학자들의 빈약한 언급들은 미개한 수준에서 그치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처한 당대의 편견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태반이다. 성과 특히 여성에 대한 서구 남 성 철학자들의 간헐적인 언급은 프랑스 혁명 이후 비로소 등장한 일부 진보적인 계몽 사상가들(푸리에 Fourier) 이나, 여성의 정치적 평등을 주장한 댓가로 자산의 목을 단두대에 바친 드 구즈De Gouges 와 콩도르세 Condercet, 자유주의자인 밀 J. S. Mill, 마르크 스 K.Marx 등의 소수 선각자들을 제의하면 심각한 고려의 대상 이 되지 못한다. 심지어 루소 Rousseau 와 같은 자연주의적인 감 성 철학자조차 근본적인 의미에서 반여성주의자인 서양 철학자들 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육 이원론과 함께, 정신적 본질주의자인 플라톤의 여성에 대한 편견은 서양의 문화적 특징 으로 침전되어 있다. 심지어 플라톤은 『티마이오스 Timaios 』에서 여성과 성 기관의 생성에 대한 언급하면서, 비겁하거나 덕이 부 족한 남성은 내세에서 여성으로 태어날 개연성이 농후하다고 주 장한다.2) 그의 이원론적 형이상학, 정신주의에 입각한 육체의 경시 등은 여성에 대한 지배적 관점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2) Platon, Timaios, 90d 이하 참조, Samtliche Werke, 5, Nach de Ubersetzung von F. Schleiermacher, Rowohlt, Hamburg 1959.
성을 둘러싼 역사적 담론들은 성의 개념에 대한 어떠한 접 근 방식을 요구하는가? 오늘날 일부 미국의 성의 연구 Gender
Studies가 생물학적 성의 개념과 문화적 성의 개념을 구별햐려는 의도는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구별이 어떠한 단점도 지 니지 않은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3) 성적 차이에 관한 문화적 해석은 당연히 Sex 과 함께 사랑, 가족 제도, 결혼, 정치적 조 절의 방식들에 대한 이해를 요청한다. 가령, 기존의 남성 중심주 의적인 세계관은 몸과 자연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의 반성을 요구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적 태도는 일견 혼란스러운 작업으로 비추어질 뿐만 아니라,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대한 <문화적인〉 맥 락에서의 성Gender 에 대한 물음을 〈자연적이며 생물학적인 성 Sex〉에 대한 물음과 함께 다루는 데서 발생하는 문제성을 피하 기 어렵다는 반론도 제기될 수 있다. 여성과 자연의 연계성, 또 는 이에 대한 상투적인 표상은 페미니즘의 분리주의적 경향에서 도 발견되고 또 생태 여성주의의 한 논거로 채택되기도 한다. 필 자는 이러한 형태의 자연과 여성의 친밀성을 통해서 도덕적이며 실천적인 논의의 근거가 주어질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 나 여기서 자연과 문화적 차원으로서의 성적 정체성을 함께 다루 는 첫째 이유는 성에 대한 담론의 발생사적 차원에 대한 분석을 위한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현대 기술 시대의 정신 분열증적 상 황에 대한 비판적 견해와 관련된다. 가령 오늘날 기술 시대의 여 성들은, 자신들의 육체가 지니는 생식의 기능과 성적인 자기 표
3) 최근 이에 대한 훌륭한 분석이 Die Neue Rundschau, Heft 4 (Fischer Verlag: 1993) 에서 시도되었다. gedner와 sex에 대한 구별이 지니는 포괄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Babara Vinken 의 "Der Stoff, aus dem die Korper sind," p. 9 이하 참조. Judith Buttler 등의 미국의 여성주의자들 에 의해서 주로 논의되고 있는 Gender Studies와 프랑스의 J. Fraisse 간의 견해 차이가 위 특집에서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필요한 경우에만 이 두 개념들을 영문으로 표기함으로써 구별하겠지만 문맥상으로 보아 혼동의 소지는 별로 없으리라 짐작한다.
현, 모성 등의 여러 차원들을 제각기 분리해서 소위 〈합리적인 계약〉의 대상으로 물상화하려는 기술적 지배에 직면하고 있다. 이는 매우 복잡한 상황을 의미한다. 여성의 경우 전일적 관접에 서 바라볼 때, 모성과 생식의 기능, 성적인 자기 표현 등이 일치 됨으로써 참된 자기 정체성의 형성이 가능하다. 그러나 기술 시 대의 계약주의는 여성이 〈소유한〉 기능들의 부분들을 물상화하고 계약 대상으로 삼는 경향을 보인다. 이로써 전일적인 삶의 가능 성은 비현실적인 표상이 되어간다. 성적인 행위의 대상으로서의 매춘이나 인공 수정, 대리모 등을 정당화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 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을 관통하는 한결 같은 분리의 방식은 계약주의이다. 몸과 성, 자궁 등은 제각기 분리된 기관들로서 사회 공학을 포함하는 기술적인 지배와 계약의 대상 으로 간주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주로 선전 서구 산업 사회에서 목격할 수 있는 이러한 사태들은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실천 철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존재에 대한 통 합적인 경험을 통해서만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그리고 도덕적으 로 손상되지 않은 전일적인 자기 정체성을 형성한다. 따라서 다 음 절들에서 성Sex 과 성Gedner를 함께 고찰하는 것은 다분히 의 도적이며, 그 근본적인 목표는 기술 시대의 계약 문화에 근거한 분리주의적 관점을 비판의 대상으로 설정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또한 몸과 성, 가부장제들을 동시에 고려하는 전일적인 자기 정 체성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의 페미니 즘 이론가인 쥬느비예브 프레스Genevieve Frasisse가 이미 적절하 게 말할 것처럼 4) -성적 정체성으로서의 뇌와 생물학적 성으 로서의 자연을 구별하는 것이 문제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
4) "Ein Gesprach mil Gcnevieve Fraisse gcfilhrt von Eva Horn," in Die Neue Rundschau (Frankfurt : M., S. Fischer Verlag, 1993) , Heft 4, p. 48 참조.
은 근세로부터 비롯하는 서구 문명에 내재된 이원론적 분리의 경 향성에서 비롯하는 성 차별의 발생적 연관을 은폐할 수 있기 때 문이다. 왜곡된 생물학적 표상으로부터 성의 문화적인 개념을 구 출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발생사적인 성 차별의 문화적인 전통, 즉 오늘날 철저하게 발굴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비판되어야 하는 역사의 자취를 지워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성의 문화적 규정성은 왜 논의될 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물음 자체는 상당히 전부해졌다. 성에 대한 이해의 방식이 도덕 규범과의 상충 여부에 따라서 판단되는 이진법적인 틀에 의해서 좌우될 경우, 또는 정치적 통제의 필요성에 의해서 성에 대한 특 정한 이해의 방식이 강요될 경우, 성의 문화적 규정성은 은폐되 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다른 삶의 조건들이 보이 는 〈자연스러운〉 외양과 달리 억압적인 질서로 작용한다는 사실 도 묻혀버린다. 그래서 결혼, 가부장제 등의 사회적 제도나 관 습, 일탈적인 행위들을 포함하는 성적 정체성의 문제는 심층적인 분석을 요구하며 이는 종종 세계에 대한 철학적, 형이상학적 전 제들에 대한 검토를 수반하는 것이다. 이성, 감성과 몸, 언어, 상징 등에 대한 탐색은 문화 분석의 중요한 조건들이다.성과 문화의 상호 규정성은 특히 인간에 대한 본성론적 접근을 동해서는 굴절되거나 누락되기 쉬운 주제들을 부각시킨다. 성을 단순한 생물학적이며 실증 과학적인 논의의 영역에서 해방시켜 인간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경험하고 인식하는 인문학의 훌륭한 과제로서 성적 자기 정체성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작업이 남아 있 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격과 문화의 상호 규정성은 과거의 억압 적인 성 문화를 반성하고 보다 인간적인 성들 간의 정의를 조망 하기 위한 규범적인 관점으로 확장될 수 있는가? 성의 문화적 규정성은 최소한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정당화의 논거로서,채택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반성의 매개 작용에 의 해서 자연적인 자기 정체성의 이해가 해체되는 계기로서 그 같은 분석이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위험은 본성론이나 생 물학적 결정론의 경우에서 발생할 수 있다. 나중에 생태 여성주 의에 대한 논란에서도 다루겠지만—그리고 이미 여러 사람들 에 의해서도 간파되고 비판된 사실이지만一여성의 특정한 심 리적 성향성을 확대 해석할 때 이미 여성의 특정한 사회 정치적 역할 분담이나 이미 너무도 잘 준수되고 있는 경제적 분업은 암 묵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문제는 성과 문화의 상호 규정성이 결정론적인 조건에 대한 인과 관계의 분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존의 성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자신과 세계에 대한 해석 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존재로 볼 수 있는 한, 성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은 오히려 대안 적인 자기 이해의 촉매로 작용한다. 분석적인 작업과 규범적인 자기 이해의 가능성이 서술상에서는 구별될 수 있으나 개별적인 행위 주체의 자기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도 분리되어 존재 해야만 할 이유는 없다.
2 성과 서구 문화왜 Sex 에 대한 도덕적 해석은 한계를 드러내는가? 도덕적 규범들이나 도덕적 행위에 대한 이해 자체가 문화적인 맥락에서 만 성립된다는 주장을 수용하지 않더라도, 윤리적인 관점에서 성 의 문제가 중시되지 못한 이유들이 다양한데 그중의 하나는 그것 이 최소한 윤리적으로 요청되는 행위에 속하지 않는다고 판단되 었기 때문이다.5) 성적인 욕구의 충족은 억압적인 사회의 경우가족의 틀 내에서 종족의 번식을 위한 행위인 한에서만 정당화되 었으며, 결코 도덕적으로 권장할 만한 사태가 아니었기 때문이 다. 만약 인간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권장할 만큼 가치 있는 행위 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행위, 그리고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도덕적인 승인이나 거부를 수반하지 않는 도덕 의적인 행위로 구 별할 경우 성적인 행위는 그것이 최소한 종족의 번식과 관련하는 한 세번째 유형의 행위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은 역사 적으로 특정한 시기의 성에 대한 입장들과 상응하지 않는다. 서 양의 고대나 중세의 성 문화적 유형들 중에서 한 주축적인 경향 성은 금욕주의로 간주되는데 이를 정당화하는 방식은 다분히 철 학적이다. 쾌락을 넘어서는 금욕주의적인 삶의 방식만이 유일하 게 도덕적인 정당성을 지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에도 그것은 어떤 강제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성에 대한 문화적 해석의 결과 로서 나타난다. 서양에서 기원후 1, 2세기에 자기 절제, 자기에 대한 도덕적인 염려의 태도가 강조되는 것은 국가에 의한 성적인 행위의 매도에 기인한다기보다는 도덕적 자아 해석에서 비롯한 다. 즉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다른 삶을 살 려는 자아 존중 사상에 의해서 금욕주의는 하나의 성에 대한 관 접으로 정립된다. 이와 관련된 최근의 분석은 푸코의 업적이기도 하다.6) 그러나 이러한 자기에 대한 배려들이 비록 도덕적 강제
5) Raymond A. Belliotti, Sex, in A Companion to Ethica, ed. P. Singer (Oxford, Basil Blackell : 1993), pp. 315-326 참조. 〈실존적 자기 통합성을 유지하는 데, 성이 중요하다면 그것은 생물학적 사실인가? 아니면 사회 내에서의 어떤 부차적인 집단들이 맺는 일종의 사회적 구성체에 불과한가.〉 라는 그의 물음(같은 글 : 319) 역시 반드시 윤리적인 맥락에서 논의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성에 대한 계약설적 입장은 전통적인 성적 자기 정체성에 대한 근대 서구인들의 반발로서 이해된다.
6) Michel Foucault, Le souci de soi, Histoire de la sexualite 3, Gallimard,1984) , pp. 54 참조.
의 형태를 취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금욕주의적 자아의 개념은 철저하게 인간에 대한 이원론적 관점을 전제한다. 정신과 육체로 구성된 존재로서 육체는 정신의 감옥이며 성적인 쾌락은 육체의 성질을 대표하기 때문에 자연히 정신의 자기 정화 과정은 성적인 욕구로부터의 해방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견해가 관철되 었기 때문이다. 이 극단적인 입장은 인간을 복합적인 인간학적 성질들 간의 전일적인 조화를 통한 자기정체성을 가능케 하기는 커녕, 이미 인격성과 이드Es 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들이 보여 준 것처럼 오히려 인격성 내부에서의 갈등 구조를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건강하지 못한 서구 문화의 위선적인 자기 분열을 초래 한다.
성의 문화적 규정성은 성의 역사에 대한 또 다른 사례를 통해 서 더욱 강하게 뒷받침된다. 중세 유럽 사회는 17 세기에 이르기 까지 간음한 여인에 대한 살인에 대해 논의해 왔다. 간통한 여성 을 이에 대해 격분한 남편이 죽일 경우 그것은 무죄이며 또한 허 용될 수 있는 행위인가의 여부가 논의되었던 것이다. 간음한 여 인의 살해는 비로소 1665 년경, 교황, 알렉산더 Alexander 7세에 의해서 단죄되기에 이른다.7) 또 중세에는 성을 통해서 추구되는 모든 쾌락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은 것은 물론이다. 죄에 대한 종 교적인 우려에서 결혼한 부부의 성 관계 역시 아우구스티누스 이 래로 어디까지나 종족의 번식이라는 목적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었다. 위에서 거론한 17 세기 교황의 〈성 윤리〉에 대한 칙령 은 당시 유행하던 여성의 복장에서 자연히 드러나는 여성의 가슴7) 이 부분은 다음 문헌을 참조했음. Albert R., Jonsen & Stephen Toulmin, The Abuse of Casuistry, Berkeley (Univcersity of CalifTonia Press, 1988) , 특히 pp. 178-179 참조.
에 우연히 쏟아지는 눈길마저도 도덕적으로 죄악시한다. 인간을 고문하는 행위는 허용되지만 자위 행위를 포함하는 모든 성적인 욕망의 표현은 허용되지 않는다.
반면에 서구와 함께 동양 사회에서도 받아들인 자유주의적인 세계 이해의 방식은 고문은 범죄시하지만 성적인 욕망의 표현은 그것이 실정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도덕적으로 허용된다. 물론 도덕적으로 허용된다는 것과 도덕적으로 권장된다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구별이 요구되지만, 에로스적 표현은 자연스러운 행위로 서 더 이상 도덕적 당위의 세계로 간주되지 않는다. 절대적인 스 토아적 금욕과 선승(禪僧)들의 고행을 모든 사람 에게 동일한 정도로 권장할 수 없는 것처럼, 성과 에로스를 통한 자기 실현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권장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여하튼 우 리는 수백 년의 역사적인 거리를 통해서 오늘날 이미 낯설어진 두 가지 유형의 성에 대한 문화적인 이해의 방식을 경험한다. 오 늘날 편협하기 짝이 없다고 여겨지는 기독교의 성 윤리를 통해서 사실상 피타고라스 학파나 풀라돈주의의 망령이 중세에 변형된 형태로 복원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연원인 유대교에서는 성 과 에로스에 대한 금욕주의가 관철되지 못하고 비교적 균형잡힌 성문화가 발견되는 반면 중세의 기독교에서는 여러 종교 정치적 인 고려에서 영육이 분리된 것으로 이해되고, 감성적인 세계 인 식의 방식 또한 평가 절하된다. 이러한 사태는 기독교의 본질이 나 예수의 견해라기보다 기독교가 유대교적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는 제도화 과정에서 빚어지지만 사실상은 정치적인 지배의 관심 에 의해서 본격화되는 것이다.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권위적인 정치적 지배 체계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편향적인 교리 해석이 시 도된다.8) 기독교 세계의 성 문화는 정치적 지배 관계와 이에 대 한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의 역할을 수행한 형이상학에 대한 보다8) Knud Lgstrup, Norm und Spotane t (J. C. B. Mohr, TUbingen, 1989), p. 224.
세밀한 분석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은 종교 자체의 분 지화 과정에 대한 배려를 요구한다. 가령 루터는 구교의 교황들 보다 조화로운 정체성의 경험을 인정한다. 그는 육체성, 감성에 서 죄악의 원인을 찾지 않고 인간의 자만심에서 발견한다. 성적 인 욕구는 하나의 불가피한 사태로 인식되었으나 결코 그 어떤 제거되어야 할 특징으로 배척되지는 않는다. 물론 19 세기 이후의 서구 시민 사회에 들어와서 성적인 욕구는 사회적인 금기로 여겨 진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말하거나 논하는 행위 자체가 금기 시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에 대한 은폐와 왜곡 등의 행위가 자본 주의 초기 단계의 도덕적 담론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성에 대한 이해의 방식에는 과거와 달리 종교와 도덕이 아닌 과학이 주도하는 경향성이 발견된다. 오늘날의 성은 이미 푸코가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처럼 과학을 매개로 하는 사회 공학 적인 관리의 대상도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단편적인 사례들은 성과 문화의 상호 규정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문 제는 다만 그 규정성을 지배하는 사회 • 정치적 역학 관계에 대한 분석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의 결과가 어떠하건 관계 없이 보 편적으로 작용하는 성적 자기 정체성의 체험은 존재한다.
이 점에서 오히려 감성과 성, 에로스 등에 관한 중세나 서구 시민 사회의 금욕주의적인 성적 정체성의 관점은 일탈적이다. 성 의 역사에 대한 포괄적인 전망은 분리주의적 관점, 즉 영혼과 육 체의 이원론보다는 전일적인 에로스적 사랑에 대한 견해를 지지 한다. 여기서 역사적으로 나타난 개별적인 사례들을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몇 가지 사례들은 폴 라톤주의적인 인간관, 존재론의 문제성을 인식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분리주의적 관점은 분절화된, 그리고 다른 표현들로부터 고립, 단절된 성적 자기 실현만을 강조함으로써 왜곡된 성의 문 화를 산출한다. 이는 성적인 욕망과 자기 표현의 복합적인 차원 들에 대한 간략한 검토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뢰그스트륨L¢gstrup(앞의 글 : 199) 이 언급한 대로 성은 어떤 생물적인 충동 에 너지의 발현이기도 하지만 에로스적 자극의 차원, 타인과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사회적 본능 등이 혼합된 복합체인 것이다. 성과 사랑에 대한 논의에서 뢰그스트륨은 덴마크 심리학자 이의르겐 이의르겐센J¢rgen J¢r ensen 의 분류를 따른다. 이뢰르겐은 인간 의 성적인 욕망을 (1) 성 기관을 통한 욕구genitales Bedurfnis (2} 육체적 접촉에 의한 욕구erogenes Bedurfnis (3) 에로스적인 욕구 등으로 구별한다. 에로스적인 욕구는 어떤 존재와 함께 있 고 싶어 하며 그 존재를 사모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분류를 우리 의 논의와 연결시켜 해석할 경우, 실제상의 사랑의 경험이나 성 에 대한 문화적 해석은 이들 욕망들 간의 다양한 조합의 방식을 통해서 분류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정한 낭만주의적인 사랑의 유형은 첫번째나 두번째 유형의 욕망이 표현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즉물적인 쾌락주의는 오직 제1유형과 제2유 형만을 강조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러 다른 동기와 맥 락에서 출발한 성에 대한 해석들이 결과에 있어서는 동일한 욕구 의 유형의 강조나 부정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성에 대한 침묵을 위선적으로 강요하는 문화의 유형도 낭만주의 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오늘 날 현대 사회가 낭만주의나 ―우리의 경우-위선적인 유교 문화의 영향보다는, 즉물적인 분리주의에 의해서 성의 욕망을 도 구화하고 상품화해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진 부한 문제가 되어버린 성의 상품화는 분리주의적 정체성의 관점
과 계약론에 근거한 사회적 삶의 방식을 통해서 확산된다. 한때 성해방 의 천국이었던 북구에서 뢰그스트륨은 「사랑과 성」 이란 의 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오늘날 발생하고 있 는 것은 에로스적인 관계가 열정이 결여되고 감정이 빈곤한 관계 로 전락되어 간다는 사실이다〉(뢰그스트륨의 앞의 글 참조). 현대 문화의 반생태적인 자기 소모성, 죽물주의, 소비주의 등은 상칭 적으로 포르 를 통해서 구체화된다어그스트륨 : 앞의 글, p. 232 이하 참조). 은폐된 는 오늘날 광고들을 통해서 대중 매체 를 타고 사랑과 감성, 전일성의 경험 등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 린다. 포르노는 체의 또 다른 죽음을 선포하면서 인격과 인간 이 성 기관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후자를 위해서 전자가 존재하 는 전도된 세계관을 유포하는 것이다(앞의 글 : 237). 이는 정신과 육체의 통합적인 이해, 전일성, 존재의 복잡성 등에 대한 경험을 차단한다는 것이다. 결국 성 자체는 문화의 표현이라는 뢰그스트 륨(p. 227) 의 관접을 부정할 수 없다면 현대 서구의 성적 자기 정체성은 서구적 생활 세계의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왜곡된 양상 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고 여겨진다.
서구적인 자유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삶의 방식들을 통해서 실 현된다. 예컨대, 삶에 대한 여러 선덱적 대안들이 제시되고 능동 적인 의사 결정에 따라서 특정한 삶의 방식들이 행위 주체에 의 해서 강제 없이 선택됨으로써 자유는 경험된다. 이 접에서 성의 자유는 현대 산업 사회에서 결혼을 할 것인가의 여부, 아이 를 가 질 것인가, 또는 계약에 의해서 타인의 몸이나 자궁을 빌릴 것인 가의 선택적 결정이나 계약 등에 의해서 실현된다. 단일한 전통 적인 규범의 구속력이 해체되는 과정과 삶의 다른 선택적 대안들 이 계약을 매개로 고려되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물린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들은 근대인이 자신의 삶을 실험함에 있어서 공동체의 일반적인 규칙보다는 자율적인 삶의 이해에 의존한다는 사실 을 말해준다. 여기에 덧붙어 현대 시민 사회를 지배하는 성의 원 칙은 효용성, 위기 관리의 가능성 등이다. 오늘날 사랑의 모험에 대한 거부는 대개 이러한 원칙들과 관련된다. 전일적 사랑이 결 여된 욕망은 의무와 책임보다는 권리, 자기 실현, 자기 표현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의 개인주의적인 삶의 방식을 가능케 한다. 사랑보다는 에로스적인 욕망의 주관적인 실현이 보다 용이한 문 화 속에서 현대인들은 살아간다. 뢰그스트륨이 훌륭하게 지적한 대로 에로스적 욕망의 충족은 궁극적으로 주관적인 데 반해, 사 랑은 근본적으로 간주관적인 삶의 자기 표현이다. 이러한 분석은 현대의 개인주의적 삶의 방식이 성적 자기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심층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반영한다. 상호 주관성이 존중되 는 공동체주의적인 질서의 해체와 함께, 사랑과 에로스적 욕망의 분리 또한 가속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인간의 도덕적인 불 감증이나 나르시시즘적인 성향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의 생물학적 조건과도 관련한다. 〈사랑은 비록 성적인 만족감을 높여줄 수는 있어도 성적인 만족의 전제 조건은 아니기 때문이 다〉(앞의 글 : 210). 또한 성적인 쾌락은 다른 쾌락과 달리 직접적 이다. 성적인 쾌락은 또한 푸코가 소개한 것처럼9) 쾌감의 근원 이 통제 가능한, 즉 자신의 내부에 있는gaudium (lactita) 가 아니 라, 일시적이며, 불안하고 쾌감의 지속이 짧은voluptas 임을 말해 준다. 현대의 문화 상품들은 이러한 직접적인 자기 만족을 위해 서 고안되기 때문에 낭만적인 표상의 매개 작용을 전제한 사랑보 다는 직접적인 감각의 만족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우정이나 자기 수양의 조용한 체험은 매개적인 기쁨들인 데 비해서 에로스적인
9) Michel Focault, Le souci de soi, Historire de la sexualite 3 (Gallimard, 1984) , p. 83 참조.
욕구의 만족은 직접적인 방식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감각주 의적인 성 문화의 유형들은 사실상 그 이념적 기원이 형이상학적 이원론에 의해서 설명 가능하다. 성에 대한 문화적 해석의 역사 적 가변성, 다양성 등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독점적 예의성, 열정 을 동반한 에로스적 사랑과 성적인 욕망의 전일성을 강조하는 사 회적인 공통 관념은 아직 유효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정당화 된다. 반면에 현대 자본주의는 계약설적 관점에서 낭만적 견해와 통합적인 성적 자기 정체성을 오직 사적인 체험으로만 허용한다. 사적인 영역과 달리 몸에 대한 공적인 계약의 관계는 성적 체험 의 내밀성, 특수성이 인간의 자기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을 의면 하며, 나아가서 위에서 논한 영육 이원론이라는 존재론적 구별을 이미 항상 암묵적으로 승인한다. 이제 다음 장에서 이같은 구별 의 근세적 연원을 살펴봄으로써 성과 문화의 상호 구속성이 어떠 한 발생사적 연관을 지니는가 검토할 차례이다. 몸과 성에 대한 체험의 분리를 가속화하는 문화적 경향성은 철학적이며 역사적인 조건들과 긴밀히 관계한다. 그리고 이는 자연 지배의 사상이 보 다 집요하게 관철된 서구의 근세와 근대에 대한 비판적인 독해를 요구한다.
3 성적 정체성의 근세적 왜곡서구의 근세 문명은 합리적인 세계 해석에 근거한 지배의 방식 들이 과거의 고대 사회보다 더 철저하게 관철된 시기로 기록될 것이다. 우리는 우선 이제 설명하게 될 사고의 유형이나 세계 이 해의 방식이 최초로 근세에 등장했다고 단언하지 않는다. 다만 다음과 같은 경향성들이 주축적인 세계 해석의 경향성으로 관철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 경향성들은 상호 긴밀한 형이상학적 상징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성적 정체성의 형성과 관 련해서 중요한 변화를 초래한다. 그 첫번째 논의의 대상은 성 Gender을 문화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가부장제 이 다. 수천 년 넘 게 지속되어 온 가부장적인 지배 구조를 배제한 상태에서 성 Gender & Sex 과 현대 문화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기만적인 행위 에 가깝다. 가부장적 지배 구조는 전통과 권위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한 자유주의적 시민 사회가 형성된 이후에도 그 영향력을 행 사하고 있다. 문명의 역사는 종종 상호 모순적인 해석의 동기들 을 여러 차원에서 제기한다. 그것은 해석자의 상상력에 기인한다 기 보다 문명의 전개 과정 자체가 이중적인 양상을 지니는 데에 서 연유한다.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프랑스 혁명 등으로 점철된 근세 이후의 서구 역사는 인간 해방의 역사로 기록될 만한 이유 룰 지닌다. 이러한 해석이 아직도 상당 부분 유효하고 또 존경할 만한 것은 사실이다. 신분제적 사회에서 계약 사회로의 이행은 봉건제적 질서를 철폐하고 혈통과 세습적 권위를 대신해서 자유 로운 계약 관계에 의해서 인간 관계가 조정됨으로써 새롭고 자유 로운 행위 주체들에 의해서 구성된 시민 사회가 열린 것이다. 실 질적인 삶의 조건들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은 경우에도 형식적 인 의미에서의 자유와 평등은 계몽적 시민 사회의 이념으로 논의 되기도 한다. 특히 오늘날 국가의 기원이나 법적 강제력의 정당 성 사회적 삶의 조정 방식으로서의 계약 사상은 서구적 질서의 확산에 힘입어 유럽을 넘어서, 전세계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그 러나 사회 계약 이론은 모든 개인들의 정치적 참여와 평등을 표 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불평둘을 지양하지 못한 결과를 가 져온다.
신분과 혈통에 근거한 부성주의적인paternalistic 정치 이념에대한 투쟁은 새로운 형태의 가부장제를 낳는 것이다. 일견 계약 이론을 가부장적인 정치 사상과 연관지우려는 시도 자체가 의심 스러운 이유는 계약설의 이론 형식이 자랑하는 보편성, 형식성에 서 기인한다. 그러나 이는 정치 사상의 전개 과정에 대한 피상적 인 이해에서 비롯한다는 것이 최근 페이트맨 Pateman 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그는 가부장적인 정치 사상이 대략적으로 다음 세단 계의 변화를 보여왔는데 현대에서도 그것은 일정한 성적 지배의 유형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10)
10) 이 탁월한 정치 철학서는 보다 자세한 독해를 정당하게 요구하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Carole Pateman, The Sexual Contract (Polity Press, Oxford, 1988).
(1)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상trraidtional patriarchal thought : 정치적 권력의 범형을 가장이 가정의 내부에서 지니는 부권적인 권위로부터 유추해서 정당화하는 방식이며 이는 정치적인 지배 권력에 대한 일종의 발생학적 정당화의 방식이다. (2) 고전적인 가부장적 사상classical patriarchal thought : 이는 계약론자인 로 크와 논쟁을 벌였던 필머 Filmer의 사상에서 나타나는데, 여기서 국가 권력은 직접적으로 가부장적인 권위와 동일시되고 있다. 마 지막으로 가부장적 정치 사상은 계약 이론과의 논쟁을 통해서 (3) 근대적인 가부장적 사유modern patriarchal thought로 변형된 다. 이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으로 회자된 박애fraternite의 개념에 서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인 시민 사회에서의 가부장 적인 사유는 형제애라는 남성성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는 아 버지의 부성paternity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성성 masculiity에 의 해서 정치적 계약이 맺어진다는 생각을 낳게 된다 (Pateman : 37 참 조) .이상의 주장은 다분히 신분에서 계약from status to contract 으로의 이행이 성적인 정치적 불평등을 극복 지양하는 단계에 도
달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계약 이론의 바로 그러한 계속되는 영향력이 성적인 계약의 문제를 은폐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계약에 대한 페미니즘의 논변을 주변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시민권, 고용, 결혼 동은 모두 계약적 성격을 지닌다. 사회 계약 은 성적인 계약을 전제하며, 시민적 자유는 부권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Pateman:X 참조). 본래적인 사회 계약은 성적이며-사회 적인 협약 a sexual-social pact이었지만 사회 계약 이론의 전형적 인 주장들은 모든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약의 이야기는 정치적 권리의 생성에 관한 것이며 이는 왜 국가의 법 적 강제권이 행사나 개인이 자신의 소유물에 대해서 지니는 권리 가 정당한지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가부장적인 부권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은 여성에 대해서 행사할 수 있는 남성의 권리에 대한 것이다. 원초적 계약을 통해서 창조된 새로운 시민 사회는 결국 가부장적인 사회 질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부장제가 정치적 권력의 한 조건으로 정당화될 수 있 었던 또 다른, 그러나 본질적인 이유는, 이미 수많은 페미니즘 이론의 비판 대상이 된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분리이다.
근세 사회 정치 사상은 주로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구 별과 함께 국가 권력이 법을 매개로 행사될 수 있는 삶의 차원을 공적인 영역으로 제한시킴으로써 국가와 공동체적 규범 체계로부 터 비교적 자유로워진 삶의 세계를 사적인 세계로 규정한다. 성 적인 차이는 특히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구별에 의해서 더욱 공고해진다. 시민적이며, 문화적인 세계와 자연적인 세계의 대립은 이제 공적이며 시민 사회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구별 로 대체되고 가부장제 등의 문제는 비정치적인 문제로 치부된다. 따라서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는 이제 새로운 토대를 확보한 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여성의 문제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한다는 주장으로까지 발전하며, 공적인 담론의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 통제하는 경향과 맞물린다. 근세 사회의 사회 정치적 질서 는 이처럼 가부장적 제도의 공고화라는 성적 지배의 유형을 결과 로 낳는다. 물론 공동체 사회에서의 부권제적 특징과 자유주의적 인 정치 체제하에서 그것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다만 사적 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구별하는 관습 자체가 공동체적 사회의 붕괴 과정과 일치한다고 볼 때 한 시기에 서로 상이한 정당화의 논변이 성적 담론의 질서를 교란하는 현상도 예상된다.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자유주의의 정치 이념에 의해서 구별되면 서 여성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탈 정치화된 일상의 차원에 국한된 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정치적 구별이 존재하는 한 페미니 즘의 논쟁은 한결같이 지배의 일반적인 구조에 대한 관심보다는 경쟁력 있는 여성을 권력 엘리트의 위치에 확보하거나 아니면 인 위적인 정책적 배려에 의해서 공적인 영역을 공접하기 위한 노력 으로 기울어진다. 여성의 가사 노동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나 신고전주의 경제학에서 일반적으로 고려되고 있지 못하는 것처 럼, 여성이라는 존재는 일반적으로 눈에 뜨이지 않는, 그리고 사 실상 사회의 전면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존재들인 한에서 이러한 노력은 존중할 만 하다. 다만 문제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의 분리와 노동의 성적 분업이 직결되어 있으며 이는 부권제적 지배 구조를 변경하는 데 더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자유주의 경제 사상은 상품 경제와 시장의 보편성을 전제한 것이 다. 따라서 시장 이 공동체 사회의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이동한 근대사의 전개 과정은 동시에 여성의 가사 노동이 지니는 의미가 은폐되어 온 역사와 맥락을 갇이 한다.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오늘날 가사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공동체 사회의 노 동 강도로부터 부분적으로 해방되었다 하더라도 과거의 노동 행
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전일성, 실체성의 상실을 댓가로 지불할 수밖에 없으며, 특히 생태학적 문제를 고려할 때 이는 상당히 비 싼 댓가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여기서 가부장제를 문명의 근원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견해나 여타의 인류학적인 논의들을 검토할 입장에 서 있지 않 다. 예컨대 남성들은 신체 구조상 자식들의 생물학적 연고권을 확인할 수 없으며 이러한 불확실성을 통제하기 위해서 가부장제 와 같은 질서를 만들어냈다는 등의 설명은 다분히 오래 전의 인 류에 대한 가설적 주장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Paternan : 35 참 조). 프로이트나 여타의 인류학적인 해석들이 지니는 흥미로움에 도 불구하고 인류의 문화적 시원에 대한 가설들이 성의 문화적 규정성에 대한 아래의 논의에서 선결되어야만 하는 과제들로 여 겨지지는 않는다. 가부장제는 엄연한 사실이며 중요한 것은 이에 대한 특정한 이해의 방식이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일반적인 입장들 과 어떻게 관계하는가이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관심은 모든 삶의 구질서들이 재편성되기 시작한 근세에 들어와서 어떠한 이유로 인해 가부장제만은 지속적인 문화적 구속으로 작용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근세 서구 문명의 다른 전제들에서 성에 대한 문 화적 왜곡의 간접적인 조건들을 발견한다. 현대 서구 문화의 왜 곡된 성적 정체성은 상당부분 근세적 연원을 지닌다. 근세의 자 연 지배 사상과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속적인 억압은 밀접하게 관련하는데 여기에는 일차적으로 여성의 성적 특칭과· 자연의 본 성을 서로 상응하는 것으로 이해한 점과, 가부장적인 질서의 지 배구조가 작용한다. 인간의 기본권, 인권에 대한 보편적인 관심 이 자유주의적인 정치 사상, 계약론 등의 형태로 구체화되었음에 도 불구하고 성에 대한 이중적인 억압과 왜곡이 계속된 것은 서 구의 근세적인 세계해석이 지니는 근본적인 문제성을 가리킨다.이 의도적으로 증폭되는 데 있다. 이러한 해석들은 또한 인간과 자연, 정신성과 몸성을 존재론적으로 철저하게 구별하는 근세적 자연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성에 대한 인간학적 물음이 인간의 몸에 대한 인식을 전제하거 나 수반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로 간주된다. 플라톤주의적인 형 이상학의 부정적인 영향은 성과 몸, 감성, 그리고 자연에 대한 철학적 담론의 빈곤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주제들을 실증적 경험과학의 영역에 방치함으로써 성적 자기 정체성에 관 한 과학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정립하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한 다. 육체의 불완전함이 성으로 나타난 것으로 해석되는 한, 금욕 주의가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며, 이점에서 현대 선전 산업 국가 의 일부에서 발견되는 성의 해방(?)에 대한 자유롭지 못한 집착 은 적극적인 성적 자기 표현이라기 보다 일종의 문화적 반동이 다. 플라돈적 형이상학은 기독교적 금욕주의와 결합해 성적 충동 에 대한 문화적 해석의 극단적인 대립을 부추진다. 가령 금욕주 의의 숭고함이란 정신적인 아름다움으로 표상되며 이는 육체의 성적인 욕구가 보이는 저급함과 대립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이 스적인 문화의 절정기에는 영혼과 육체의 분리가 성에 대한 왜곡 된 해석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금욕주의 문 화는 당대의 지배적인 담론, 즉 기독교의 정치적 영향력의 작용 에 더 큰 비중을 실리게 한다.특히 데카르트적인 자연관은 인간의 몸에 대한 플라톤적인 편 견을 오히려 강화한다. 서구의 형이상학은 보편적인 세계 이해의 원리를 시간 초월적인 전리의 차원에 위치시킴으로써 순수 사유 의 경험적 토대인 인간의 몸과 사물들의 세계는 철저하게 배척당 한다.11) 그 주된 이유는 사물들과 몸의 세계가 소멸적이기 때문 이다. 비록 정신과 물체의 세계를 이원적으로 구별함으로써 영혼11) 이는 특히 근대 과학이 보이는 인간학적 전제로부터의 도피로도 설명 된다. 근세에 들어와서 과학적 합리성은 인간의 인간학적 차원으로부터 해방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고정 관념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Apel은 Lei bniz 의 단자가 영혼을 지닌 실체로서 육체와 정신의 이윈론을 극복 했다는 종래의 견해를 반박하고 결국에는 궁극적으로 Platon-Descartes 의 이원론이 관철된 것으로 해석한다. 예정 조화선은 육체 세계의 역학 적 질서와 영혼의 내면 세계 를 반영하는 단자의 유기적인 세계 간의 상 웅 관계에 대한 논리적이며 존재론적인 주장이며 영혼과 육체 간의 실 질적인 상호 작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주체와 외부 세계는 Descartes 와 Leibniz그의 세계관에서 결정적으로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근세 철학을 관통하는 심신 문재는 오늘날에도 몸성에 대한 철 학적 해석에서 새로운 시사점들을 제공해 준다. 자세한 것은 K.O.Apel, "Das Leibapriori der : Erkenntnis. Eine erkennt nisanthropologische Betrachtung im AnschluB an Leibnizens Monadenlehre," in Neue Anthropologie, Band 7 (Stuttgart : dtv, 1974) , pp. 252-288 참조. 또 자연 과학의 근세적 전개 과정은 철저하고 집요한 방식으로 추구된 인간적 몸성 으로부터의 도피로 이해된다. 이에 대한 과학 철학적 연구는 근자에 Werner Kutschmann, "Das Mal der Eigenen Natur," in : Zeitschrift fur philosophische Forschung, Band 40, Heft ;3. 1986, Meisenheim/Glan, S., pp. 375-387을 참조했음.
의 불멸성을 하나의 가능한 형이상학적 관념으로 잔존하게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몸의 차원을 기계적이며 정량적인 사유 방식에 의해서 처리해도 좋다는 면죄부를 동시에 발행한 셈이 되었다. 오히려 서구 사회에서보다는 원시적인 공동체 사회에서 몸과 성에 대한 건강한 담론이 발견된다는 사실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육 이원론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고 나아가서 성의 세계 와 합리적인 이성의 세계를 존재론적으로 차별한다. 이러한 태도 는 현대의 산업 사회에 들어와서 더욱 공고해전다. 이 점에서 현 대 문화의 건강함이나 존재론적 온전성을 검증하기 좋은 시금석 중의 하나가 바로 성과 몸에 대한 문화적 해석의 방식들이다. 이 주제들에 대한 담론 자체가 어떻게 구조화되는가는 실증 과학보
디는 인문적 반성을 기다린다. 반면에 오늘날 이 주제들에 대한 담론은 몸에 대한 기술적 전문가들, 여러 유형의 요법사들, 의사 들에 의해서 좌우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과거에 성에 대한 담론 이 죄의식이라는 개념을 주축적인 원리로 좌우되어 온 종교의 영 향력이나, 수치심을 중심으로 논의되어 온 도덕적 반성의 영역으 로부터 서서히 독립해서, 기술적 분석과 기술적인 관리의 대상으 로 재편성되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성적인 욕망을 동반한 행 위가 자손의 번식을 전제하지 않은 경우 죄악으로 간주된 과거와 달리, 오늘날 성과 관련한 행위는 부분적으로 기술적인, 또는 사 회의 일정한 법적 질서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위기 관리의 관점에 서 자기 표현의 기술적 극대화라는 관점에서 이해된다. 이처럼 성과 몸의 문제를 통제 가능한 위험으로 간주하는 한, 성격은 기 술적인 합리성과 상업적 계약의 차원을 벗어난 능동적인 성적 자 기 정체성의 형성에 공헌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인 태도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근세적인 패러다임, 즉 몸에 대한 존 재론적인 관점을 이미 항상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들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최소한 성적 자기 정체 성의 형성에 어떠한 세계 해석의 방식들이 상호 결속하고 일련의 공조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하다. 근세 이후에 본격화된 이 세 가지 지배의 경향성들은 성적 차이와 성 문화를 둘러싼 근대적 모순이 어떠한 형이상학적인 전제에 기인 하며, 나아가서 어떻게 상호 중첩된 계기들에 의해서 성의 평등 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공고한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를 보 여준다. 실제로 마지막 장에서 살펴볼 예정인 생태 여성주의 Eco em sm는 그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일부 여성 해방론자들 이 책상에서 고안해 낸 이론적인 구성체가 아니라 근대적 지배 유형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비판적 반성에서 비롯한다. 왜냐하면이성에 의한 감성과 몸의 지배, 가부장제, 자연 지배적 태도들은 서로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억압당한 존재의 차원들이 새로운 연대를 주장하는 것이다.
4 기술 시대의 성 계약이제 날의 고도 기술 사회는 성적 정체성과 관련해서 중요한 변화들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절에서 살펴본 종교나 도덕이 아니라 과학과 상업적 계약의 관점이다. 또 절에서 검토한 지배의 유형들은 기술 시대에 들어와서 단순한 지배와 억압 등의 개념으로서는 적 절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술 시대의 성적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질서들은 소비 자본주의의 일상적인 삶의 양식들과 관련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일종의 자연스러운 의양으로서 우리들의 생활 세계의 내부에 이미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다. 물론 이제 살펴볼 사례들은 지배의 한 첨예화된 양식이 아니라 성적 정체성 자체의 〈혼란〉을 가져오는 새로운 경향성들을 반영하지만 이러한 사례들은 일회적 사건이 아닌 기술 시대의 주축적인 경향성을 예고하는 징표로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한에서 예시적이며 경험적 사례들에 대한 검토는 그 제한된 설명력에도 불구하고 유용한 접근 방법으로서 정당화될 수 있다. 기술적 합리성과 현대 사회의 기능적 체계들이 보여주는 자기 준거적 역 동성은 드디어 인간의 몸성과 자연성, 여성성 등의 해체와 분리를 가속화한다. 이러한 전환은 계약의 관접을 통해서 관철된다. 계약은 이제 전통적인 규범과 문화적인 통제의 방식을 대체하고 성에 대한 이해의 방식에서 과학 기술적 처리의 효율성을 높인다. 게다가 계약은 이제 과학 기술적 합리성에 의한 몸성과 성적 차이의 분리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한다. 12)
12) C. Pateman의 다음 주장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Contract is conventionally believed to have defeated the old partriarchal order, but, in eliminating the final remnants of the old world of status, contract may yet usher in a new form of paternal right." (Patemnan : 앞의 글 p. 218 에서 인용)
사례 1 성전환의 문제 이는 툴민Toulmin 이 거론한 사례를 통해서 다루기로 한다. 13) 오늘날 적지 않은, 특히 서구인들은 자신이 지니고 태어날 때의 성과는 다른 성으로서 살아가기 를 원하는 것은 사실이다. 가령 아내와 함께 한 가정을 꾸려나 가면서 아들을 키우고 있는 어떤 남자가 여러 해 동안의 결혼 생활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서 살아가기를 원할 경우 의사가 이를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오늘날 의료 기술상 호르몬 요법을 겸한 성전환 수술은 가능하며 성적인 자기 정체 성에서 심각한 갈등을 느끼는 성인에게 이러한 수술을 거부한 다는 것은 부당하다. 반면에 결혼 당시에는 남성이었던 남편이 이제 여성으로 성전환할 경우 그 결혼 관계가 동성 간의 결혼 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의 실정법 체계와 충돌할 경우 이를 어 떻게 해석하는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성전환 수술 후에도 그 여성이 여성이 된 남편과 함께 살기를 원할 경우 이를 법적으 로 인정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허용할 경우 평 등성과 일관성의 원칙에 따라, 앞으로는 여성과 여성, 남성과 남성이 결혼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 이 사례에서 아이들 의 권익을 생각하면 경우에 따라서 결혼 생활의 지속이 오히려 도덕적으로 타당하다는 논거도 제시될 수 있다. 그러나 툴민의 해석대로 아이들의 권익이 결혼 생활의 지속에 의해서만 보장
13) S. Toulmin, 앞의 책, p. 316 이하 참조.
되리라는 사실은 다소 불투명하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사회화 과정에서 부모가 같은 성을 지닐 경우 어떠한 부정적인 결과가 초래될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례를 성의 전환이라 는 의료 기술에 의해서 초래된 법 체계와 도덕 규범의 혼란을 말해 준다. 성전환 수술은 결혼, 사랑, 육체의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을 가중시킨다. 인간의 몸에 대한 의료적 처치, 의 료적 수술의 윤리가 성 문화의 변화를 강요하는 것이다. 소위 툴민이 언급한 대로 의료 기술은 여기서 기존의 법 체계, 도덕 규범이 전제한 기본적이며 사실적인 전제들에 대한 혼란을 초 래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법적, 도덕적 규범의 정당성을 전제 한 연역적 논변이 의료 기술에 의한 성적 정체성의 교란에 의 해서 무력화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 자기 실현, 여성과 납 성 간의 정의로운 관계 등은 구체적으로 변화된 경험적 조건 들, 가능한 상황들과 관련해서 새로운 해석과 정체성의 검토를 강요받는다. 앞에서의 예가 예의적인 윤리적 상황이기 때문에 심각하게 고려될 만한 가치가 없을까. 그렇지 않다. 도덕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인간의 행위들은 오히려 일탈적인 예의들 이며 이러한 행위의 비일상성이 바로 철학적 담론이 장에서 제 의되어야 한다는 논변을 정당화해 주지 못한다. 의료 기술과 몸, 성의 연관에 관한 문제는 인공 수정과 대리모의 문제를 동 해서도 검토될 수 있다.
사례 2 성과 몸에 대한 기술적 합리성의 분리주의적 전략 은 이미 일부 선진국 특히 미국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는 대리 모의 사례에서 드러난다. 대리모의 문제가 특히 홍미로운 이유 는-매춘과 유사하게 -바로 성적인 기능과 여성성과 그 리고 모성의 분리가 합리적인 계약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사실 이다. 이는 역으로 계약론적 관점이 인간의 존재론적 자기 동일성에 어떠한 변화를 초래하고 또 강요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간주된다. 이 역시 고도 기술 사회가 실현되 기 이전의 인간은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사태이며 이중적인 의미에서의 성적 정체성 Sex & Gender Identity에 중요한 변화 를 강요하는 사건이다. 대리모의 문제는 여성의 자궁을 임의의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서 빌림으로써, 그리고 일반적으로 남 성의 정자가 이식됨으로써 성립되는데 여기서도 정자의 주인이 태어날 아이에 대한 양육권을 합법적으로 주장할 수 있게 된 다. 이는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모성과 여성성이 분리될 수 있 음을 의미하며, 이는 사실상, 의료 기술의 발달과 함께 사람들 의 사회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사회 계약적〉 접근의 결과이 다. 즉 인간은 근세 사회 이래로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로서 인 식되었으며 이는 최소한 법적 질서와 상거래 등의 사적인 계약 주체로서의 개인을 행위 주체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과거에 여 성 해방론은 남성과 여성의 성적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 여성 이 하나의 독립된 인격임을 선언하고 성적 차이의 문화적 규정 성을 강조해 왔다. 14) 근대주의적인 여성 해방론은 이제 대리모 의 문제와 관련해서 중대한 도전에 직면한다. 인공 수정의 분 리주의적 전략은 가령 결혼一―품只론 여기서는 이성과의 결혼 을 의미하며 여성과 여성 간의 〈결혼〉 가능성은 일단 배제한다 ―과 가부장제를 거부한 독신 여성에게도 아이를 안겨준다. 여성의 고유한 성적인 차이가 사실상, 여성의 본래적 성질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문화의 고유한 맥락에서 교육 등의 사회 화의 과정을 통해서 비롯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여 성을 하나의 독립된 계약 주체로서, 그리고 여성이기 이전에
14) 예를 들어 보부와르의 경우 : 『제 2 의 성』 (서울 : 을유문화사, 1993).
한 행위의 주체로서 인정하게 만든다. 이러한 견해는 여성과 모성의 분리에 직면해서 여성 고유의 신체적 특성을 근거로 어 떠한 저항적 논변 을 허락하지 않는다. 성 초월적인 중성적 존 재로서의 인간적 정체성과 성적 정체성 간의 이러한 갈등은 이 제 새로운 이론적 전환의 시점을 예고한다.
위에서 검토한 두 사례 은 인간의 삶의 방식을 계약론적인 방 법에 의해서 하고 정당화되는 데 수반되는 난점들을 보여준 다. 이제 우리는 기로에 놓인 것이다. 인간과 기계, 인간과 인간 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계약 이론으로 해결하려는 시도 들은 결국 인간의 자기 정체성에 근본적인 전환을 강요하며 이는 종종 인간의 탈 인간화,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의 영속화는 물론 여성의 여성성, 모성의 해체 등을 초래한다. 물론 여기서 함께 검토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기술적 발전(?)은 여성에게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만을 약속하지 않는다. 또 이미 성전환 수술의 경 우에처럼 의료 기술의 발달은 남성도 포함하는 성적 자기 정체성 의 근본적인 위기를 가져온다. 물론 데크노피아를 이상적인 그리 고 유일한 대안으로 전제할 수만 있다면 이러한 변화는 위기가 아니라 새로운 기회로서 찬양될 것이다. 기술 공학의 시대에서 이는 여성에게만 고유한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성의 문제와 연 결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차적인 영향력은 현재의 가부장적 질서를 고려할 때, 여성에게 가해질 것이다. 고도 기술 사회의 일반적인 원칙, 즉 만들 수 있는 것은 만들어져야 한다는 가공성 의 원리 하에 귀속시키는 기술 시대에 인간적 실천, 정치적 실천 의 가능성은 성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이 주제가 사실상 우리 논의의 종착역이다. 앞선 논의의 방향과 주제의 일정한 선택을 좌우한 것도 바로 이 마지막 주제이다.5 여성적인 문화로의 전환?
문화의 본래적인 의미는 보살핌과 가꿈이다. 여성의 일상적인 삶의 방식과 영역은 주로 이러한 의미와 함께 연상되는 것이 사 실이다. 그것은 여성들이 기술 시대의 화려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여성성과 모성의 분리를 용인하지 않는 한에서만 유효한 생각이 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논변이 사회 경제적 분업과 사적인 영역 에만 여성의 존재를 허용하는 문화적 관행을 정당화하기 위한 주 장의 논거로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2절과 3절에서의 분석은 특히 기술 시대에 이르 러 여성적인 문화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여성적인 문화가 시대적인 요청으로 권고되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것은 역사적으로는 누적되어 온 지배 관계의 전환일수도 있으 며, 또는 공격적인 남성 문화와 연결된 자연 지배의 관점에 대한 대안적인 문화의 양식으로서도 검토될 수 있다. 물론 이 두 가지 유형의 지배 관계들이 서로 무관한 차원들로 생활 세계의 성격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제안들이 그 실현 가 능성을 떠나서 일단 최소한의 도덕적인 승인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된다. 또 생태 여성주의나 가부장제의 변형 등은 여 성적인 문화의 다른 차원들과 연결된다. 그것은 이성 중심주의와 기술적 합리성의 지배에 대한 대안적인 감성의 방식으로서 시도 될 수 있다. 경쟁과 두쟁으로 얼룩전 정치 경제적 현실과 관련해 서 그리고 자율성의 남성 윤리와 구별되는 새로운 공생과 〈보살 핌의 윤리 Gilligana>15)로서도 검토될 수 있다.15) 이 개념에 대해서는 Carol Giligan, In A Different Voice(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 1982) 참조. 유감스럽게도 자주 거론되지는 않지만 여성의 심리에 대한, 필자가 아는 한 최초의 본격적인, 그러나
당대의 여성에 대한 시대적인 관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연구 는 독일의 사회학자 Simmel 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Georg Simmel, "Zur Psychologie der Frauen," in Simmels Aufsatze 1887, bis 1890, S. (Suhrkamp, Frankfurt, M., 1989), pp. 66-102.
그런데 여성의 실천적 행위나 정치적 참여의 문제는 여성의 모 성, 여성의 도덕적, 심리적 특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서 근거지워 질 수 있는가? 특히 여성인 디츠 는 달리 생각한다.16) 기본 적으로 정치적 참여의 원리를 여성의 특정한 생물적一인격적 특성 에 근거해서 정당화하려는 논변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전제적인 사회, 단일 정당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관료 사회, 민주 공화국에서도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어머니의 모성을 숭배, 존 경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도 어린이의 권리들은 존중된다. 억압된 것들에 대한 동정심이 이런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착 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7) 문제는 실질적으로 여성과 어린이 등의 억압된 존재들이 단순히 더 철저하게 보호, 육성된다는 데 있지 않고 누구에 의해서 그러한 목적들이 설정되고 공개적으로 그 구체적인 방안이 논의되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이 며 사회적인 권리의 평등권에 관해서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 라, 공적인 영역에서의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능동적인 참여를 통 해 페미니즘은 자유를 궁극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정치의 차원과 접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적 차이는 성의 권리를 인정 Gender Recognition 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정치 철학적 관 점에서 반성되고 있다. 서구의 자유주의 사회는 사실상 지금까지 권리와 계약 중심의 사회로 이해된다. 오늘날 자유주의 사회의
16) M. Dietz, Context is All : "Feminism and Theories of Citizenship," in Dimensions of Radical Democracy, Ed. Chantal Mouffe (Verso London, New York) , pp. 63-88.
17) 같은 논문, p. 76 참조.새로운 전환이 요구되는 것은 종래의 억압된 차원들에 대한 온정 적인, 어디까지나 가부장적인 배려가 아니다. 여성주의가 여성의 권리만을 논의의 중심에 설정하는 한 그것은 결국 현대 문명의 근본적인 문제들과 관련해서 일시적인 단견으로 그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 현대 여성들은 주부들의 경우 가사 노동에 대한 대가로 어떠한 사적인 삶의 능동적인 실현을 스스로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종종 소비를 통해서 소비 자본주의의 역 동성에 간접적으로 공헌하고 있다. 오늘날 현대 사회의 생태적이 며 사회 구조적인 문제들은 단순한 권리 중심의 정치적 평등을 넘어서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적 참여 를 통한 새로운 사회를 실 현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는 사실상 자유주의 의 근본적인 이념과 배치되지 않는다. 제도화되고 관료화된 정치 체제에 여성이 어느 정도 배려되고 있는가에 대한 것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정치의 가능성, 능동적인 변화의 가능성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디츠도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 듯이 18) 반여성주의는 오늘날 남성들과 함께 새로운 자본주의의 윤리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권리와 계약론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자유주의와 경제 중십주의가 아닌, 책임과 참여에 의 해서 실현되는 정치적 이성의 지속적인 우위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단순히 생물학적, 문화적 조건들에 의해서 결과로 나타난 여성의 여성적인 특징을 강조함으로써는 성립될 수 없다. 여성들 의 여성적인 특칭들이 보다 민주주의적인 인격에 적합하다는 주 장 자체가 반민주적인 관점이라는 비판 역시 정당하다. 〈시민권 의 참된 민주주의적인 변호는 성적인 대립과 여성의 우위에 호소 함으로써〉19) 강변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여성 중심주의적인
18) 같은 논문, p. 77 참조.
19) 같은 논문, p. 78 참조.논변은 존재의 또 다른 분리와 분열을 암묵적으로 정당화하는 기 대하지 않았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성적인 문화 는 흔히 남성들만의 특징으로 잘못 간주되어 온 자율적인 인격을 어떠한 경우에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율성은 성 적 차이들의 맥락 의촌적인 심리적 특칭이라기보다 보편적인 반 성의 능력이며 이는 인간 일반에게 요구되는 능력인 것이다. 자 율성의 보편적 중요성은 바로 여성 자신의 자기 정체성과 관련해 서도 강조될 수 있다. 가령, 북구 스칸디나비아의 경우에서 처 20) 여성의 참정권이 구체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입법, 행정 등의 전분야에 걸쳐서 실현된 경우에도 모든 정치적인 문제들이 〈여성주의〉적인 원칙 하에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레이라 eira 의 경험적인 연구는 결론적으로 여성과 남성 간의 문제가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해결된 이후에도 어떠한 역할이 여성들에게 가 장 훌륭하고 적합한지에 대해서 여성들 자신들 간에 어떠한 합의 가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적인 주 장들이 자율성과 여성적인 특징들 간의 관계와 관련해서 나름대 로의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자율성의 원칙은 다른 인격적인 특 징들과 구별되는 합리적인 행위라고 판단할 수 있는 성적 차이를 초월한 보편적인 능력이다. 남성과 여성들 간의 갈등이 해소되었 다고 전제할 경우에도 여성 들간의 역할 분담이나, 나아가서 이 상적인 존재 실현의 방식에 대해서 어떠한 합의가 주어지지 않는
20) 여성은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 국회의원 중 대략 1/3 을 차지하며, 1980 년대 중반 이후로 노르웨이 각료 중 50%, 노동당 소속의 Gro Harlem Brundlanmd는 수상을 3회에 걸쳐서 역임했다. 보다 자세한 내 용은 Arnlaug Leira, "The 'Woman-Friendly' Welfare State? : The Case of Norwa and Sweden," in Women and Social Polices in Europe : Work, Family and the State, Ed. Jane Lewis(Vernont Edward Elgar Pub, 1993), pp. 49 이하를 참조할 것.
한 자율적인 판단과 이성적인 선택의 능력은 지속적인 의미를 지 닌다. 이는 페미니즘의 다양한 입장들 가운데서 어떠한 입장들을 채택하는가의 문제와도 관련한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적 참여의 문제와 성적인 차이 를 연계시킬 경우 예상되는 문제들을 좀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성 과 함께 항상 연상되는 인격적 특징들 가운데는 의사 소통성, 보 살핌, 소유물을 나누어 가지려는 속성 등이 거론된다 21) 정치 철 학자 굴드Gould 는 당연히 이 특징들이 여성의 본성으로부터 연 유한 것이 아니라, 여성의 경험으로부터 전개된, 즉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특징들이라고주장한다. 물론 굴드가 언급하고 있는 것 처럼 이들 특징들은 여성에게만 고유한 것도 아니다. 또 이와 관 련된 인격적 특징들, 공동체에 대한 관심, 협력, 협동심 등은 주 로 공적인 의사 결정의 영역에서보다 사적인 의사 결정의 영역에 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영역에서 일방적으로 타인과의 경쟁적 관계 속에서 자기 이해를 이기적으 로 추구하거나 주체적으로 자율성의 원리에 의거해서 행위하는 남성과 다른 윤리적 심성을 여성들은 보인다는 것이다. 위계 질 서가 분명한 권위주의적 의사 결정의 유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이 심리적, 인격적 특칭들은 사적인 영역에서 주로 발현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정치적 의사 결정의 과정에서나 기업 집 단의 행위에서도 행위의 유형은 일방적인 경쟁적 전략만으로 설 명되지 않는다. 사회적 집단들이 경우에 따라서 경쟁자와의 협력 이나 공생적인 관계를 모색하는 보다 복잡한 행위 유형을 보인다 는 사실을 감안할 때, 여성의 심리적 특칭들이 사적인 영역에 국 한되거나. 자율성의 원리와 일종의 대립적 관계를 형성해야만 한21) Carol Gould, Rethinking democrac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 pp. 298 이하 참조.
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여기서 실질적인 행위의 유형이 한 사회적 조직의 자기 보존과 관련해서 요구되는가와 관계 없이, 어떠한 유형의 인격적 특징이 의사 결정 과정에서 보다 민주적인 참여의 가능성 을 약속해 주는가이다. 이 두번째 물음이 비로소 여성적인 문화와 관련해서 실천적인 전망을 허락한다. 가령안에서 언급한 여성의 일반적 특성들이 비록 본성에서 연유한 것이건, 문화적으로 사회화의 과정을 통해서 비롯한 것이건 관계없이 이러한 특징들이 중시되는 의사 결정의 과정은 권위주의적인의사 결정의 과정과 구별된다. 개인적인 자기 이해만을 주장하는경쟁적 모델이 아닌 자치적이며 상호 협동적인 새로운 의사 결정의 방식은 역으로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인격적인 형성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칠 것이다.22) 형식적 대의 민주주의를 넘어서 참여 민주주의의 원칙은 홍미롭게도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온 인격적 특징들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물론 일방적으로 성적이며 인격적인 차이에 의존해서만 참여 민주주의의 원칙이 요구될 수는 없다. 가령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다. 광범위한 규모의 국가에서 어떻게 대의 민주주의적인 의사 결정의 방식과 참여 민주주의적인 방식이 서로 보완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굴드가 논하고 있는 것처럼, 여성의 인격적 특징들은 모든 의사 결정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또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간에 존재하는 차이는 성적인 차별의 고착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고안된 것이라기보다는 국가로부터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단순히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남성이나 여성의 일반적 권리로서의 인권은 이제 단순히 법적인 평등의 차원을 넘어서서 모든 구성원의 참여를 요구하
22) Gould, 같은 책, p. 21, 297 등 참조.
며 이 참여는 단순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자기 계발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공의 의사 결정에 대한 개인들의 참여 는 동등한 권리의 배려라는 차원을 넘어서, 참여하는 개인들의 인격적인 자기실현과 계발에 기여한다. 이 점에서 참여 는 인권개념의 구체적인 실현을 의미한다(굴드, 앞의 글 : 190- 214 참조). 반 면에 여성의 인격적 특징들은 참여의 원칙과 관련해서 주장되어 오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비로소 여성적인 문화로의 전환이 단순히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간의 일반적인 구별을 철폐하기 위한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보다 설득력 있는 주장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구성원, 특히 지금까지 소의된 여성의 참여를 실현하는 것이며 를 위해서 특정한 여성의 인격적 특징을 부각시킬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동일한 결론을 우리는 다음 논의에서도 이끌어낼 수 있다. 아래의 서술은 생태 여성주의를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여성의 자연적, 심리적 특성들에 근거한 실천 철학적 논번들의 문제성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생태주의와 여성주의의 만남은 단순히 지금까지 억압된 존재의 차원들 간의 결속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대 기술 문명의 위기들 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여성과 남성 간의 정의로 운 관계가 자연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 정립과 직결되어 있다는 주장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생태 여성주의는 여성적인 가치와 여성적인 성격의 특징들을 강조하는 데 이는 자연과 여성간에 존재한다고 간주되는 문화적 해석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자연과 여성을 연결시키는 표상들은 대개 겸손함, 수동적인 온순함, 자연과의 교감, 상호 관계성, 모성적인 보살핌 등과 갇은 것들이다. 이러한 성질들이 생득적으로 여성의 생물학적인 조건에 의해서 주어진 것인지 아니면 교육 등의 사회화 과정에 의해서 후천적으로 습득된 것인지는 여기서도 중요하지 않다. 또 남성들도 이러한 성질들을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되나 여성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그러한 성질들이 발현되지 않기 때문에 논변의 전개 과정에서 심한 무리를 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트레빌콧의 주장대로 인간은 양면성을 지닌 존재이다. 모든 인간들은 성적인 특징과 함께 인간의 보편적 특징들을 함께 공유한다.23) 오늘날 지속 가능한 사회는 부분적으로 가부장적인 자연 지배 이데올로기의 전환을 요구하며, 이 점이 여성의 자연 친화적인 성질들을 주목하도록 요청한다는 것이다. 결국 생태주의와 여성주의의 연결은 자연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시대적인 요청으로 이해된다. 게다가 여성들은 자신들의 생물학적 특성에 의해서 남성보다 자연에 더 근접해 있기에 자연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여성적인 가치들은 단순히 자연의 위기와 관련해서만 거론되지 않는다. 인류 사회는 수천 년 동안 가부장적인 문화에 의해서 지배당한 결과 여성적인 성질들 을 남성적인 성질들과 구별했을 뿐만 아니라, 후자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여성적 가치들을 부각시킴 으로써 문화의 새로운 질서 즉, 가부장 제도로부터의 해방이 가 능하다는 것이다. 여성은 과거에 보부와르류의 여성주의가 추구 한 것처럼, 또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여성주의가 시도한 것처럼, 여성도 남성과 같은 한 독립적인 주체로서 존립한다는 남성과의 동일성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를 강조, 견지함으로
23) Joyce Trebilcot, Sex Roles : The Argument from Nature, Social Ethics, Ed. T. Mapes, J, Zembaty (N.Y : Graw-Hill Book Company, 1982), pp. 140-146. Trebilcot의 논변이 드러내는 한계는, 실천 철학적 논의윤 성적인 특징과 차이에 근거해서 전개하는 다른 논변들의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해당된다고 여겨진다.
써 가부장제로부터 연유하는 가치의 표상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 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입장은 〈분리주의적〉이며 또한 남성과 여성의 동질성보다는 〈차이〉를 강조하는 페미니즘과도 부분적으 로 연결된다. 이는 생태 여성주의가 종래의 전통적인, 소위 제2 세대 여성주의와 다른 정치적 전략을 채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상의 논의는 암묵적으로 인간의 행위가 인격적 성질을 반영한 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는 자신이 생득적으로, 그리 고 사회화의 과정을 통해서 습득한 성질들과 함께 자신과 세계에 대한 능동적인 해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자율성이란 인격적 성 질이면서 의부 세계와 자신의 행위, 성격을 포함해서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자율적 성격과 자율적인 반성의 가능성은 분명히 구별되면서 구체적인 행위에서는 동시적 계기로 작용한 다. 엄격히 말하면 여성에 고유하다는 생태적 성질들, 귀소성, 자연과의 친화력, 상호 관계성 등은 자율성의 원리와 직접적으로 모순되는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자율성은 성적 차이에 의해서 발현되는 특수한 심리적 경향성, 도덕적 경향성이라기 보다는 인 격적 성질들에 대한 메타적인 반성의 가능성과 관련한다. 따라서 성적 차이나 심리적 기질에 관계 없이 자율성은 인간과 인간, 인 간과 자연과의 상호 관계에서 보편적인 중요한 판단의 능력으로 요구된다. 자연과의 원초적인 일체감을 본능이나 모성적 감정으 로 느끼는 능력과 자율성의 능력이 동일한 차원에서 모순되는 것 이 아니다. 전자는 오히려 자율성이 발현될 수 있는 구체적인 행 위의 동기를 강화하는 요인들이다. 본능과 감성, 자연과의 원초 적인 일체감을 다시 강조하는 것은 반계몽주의적인 결론을 유도 할 뿐만 아니라, 자율성 개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주장에 불 과하다.
인격적 성질들은 그것이 자연에 대한 관조적인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 한 구체적인 사회정치적인 행위나 개인적인 결단 등을 통해서 현실을 변화시킨다. 그런데 구체적인 행위의 상황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과 관련해서 앞에서 거론된 여성적인 성질들은 해 석과 반성의 과정을 수반해야만 한다. 게다가 구체적인 행위는 경우에 따라서 지극히 〈남성적〉일 수밖에 없다. 정당하지 못한 질서와 권위에 대해서는 여성의 〈자율적인〉 판단이 요구되며 이 에 근거한 적극적이며 남성적인 참여와 행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결국 상황 독립적으로 모든 경우에 생태적인 가치와 인격적 특징 들이 전제되어야만 〈지속 가능한 사회〉,〈자연과의 화해〉, 〈인간 에 의한 인간의 〈부당한 ! > 지배 구조의 철폐가 가능한 것은 아 니며,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24) 우리는 여기서 생물학적 결정론 못지 않게 본성론에 입각한 논변의 위험성을 인식하게 된다. 여 성의 본성에 대한 지금까지의 담론이 주로 비합리적인 성질들을 강조하고 여성과 감성, 여성과 자연, 여성과 인간의 몸성을 일련 의 폐쇄적인 순환적 규정들의 집합으로 간주하는 한 우리는 근세 적 표상의 포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상에 우리가 오랫동안 익숙해 왔으며 문화적으로 확대 재생산된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여성의 여성성과, 모성의 강조가 의미 있는 결 과를 산출하면서 동시에 근거지워진 논변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24) 생태 여성주의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반론도 무시할 수 없다. A. Dobson, Green political thought (London : Harper Collins Academic, 1990} , p. 199 참조) 의 논의를 좀더 확장하면 다음과 갇은 반론이 성립 된다. 역사적으로 보아 자연을 숭배한 과거의 공동체 사회들이 자동적으로 가부장제를 포기하지는 않았으며 이러한 사태는 비단 과거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부장제 를 포기한 사회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자동적으로 실현시키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적 차이에 근거한 분리주의적 논변이 생태주의적 사회의 한 핀요 조건으로 검토될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의 의미는 지니지 못할 것이다.
경우는 상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과학 기술적 장치에 의해서 여성성과 모성을 인위적으로 분리하고 여성의 신체를 소 위 자유주의적인 계약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신체를 사물화하려 는 경향성에 대해서 여성성, 모성의 중요성은 물론, 이 두 차원 들의 근원적인 유기성, 전일성이 강조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에 도 인간의 자기동일성에 근거해서 혹은 인격적 존재의 비양도성, 불가침성이라는 고전적인 자유주의적인 논변만으로도 충분한 논 거가 제시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여성성의 유한 성적 특징은 의료 기술과 가부장적 질서에 바탕한 계약론적인 지 배 구조에 대한 비판의 논거로 채택될 수 있지만, 비판의 논거로 서 오직 이러한 성적인 차이에만 의존해야만 한다는 강제적 필연 성은 성립하지 않는다.
여성 문화가 가부장제를 비롯한 남성 중심주의적인 androcentrism 문화와 함께 남성 혐오적인 관점 androphobia을 동시에 지양, 극복해야 한다면 생태 여성주의의 암묵적이며, 경우에 따라 서는 명시적인 전제들, 즉, 분리주의, 남성과 여성의 차이 를 절 대화하는 입장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남성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 서가 아니다. 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현대 사회의 기능적인 체계 들, 기업, 국가, 교육, 종교, 철학, 언어 등의 제도나 체계 등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지배적인 원리들의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분리주의〉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고려해야 할 문제 는 여성성의 남성성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남성적인 문명의 내부에서, 남성적이며, 공격적인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다. 그것은 어떤 유형의 〈분리주의〉나 〈여성 중심주의〉가 아니라 억압된 차원들의 자율성을 전제한 새로운 연대의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성과 자연의 관계는 종래의 생물적 재생산과 경제적 생산의 존재론적, 사회적 분리를 극복, 지양함으로 써 새롭게 정의로운 관계로 변화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의 원리는 결코 여성의 자연과의 천화성이나 성적인 차이에 의해서 근거지워지지 않는다. 중충적 억압을 구조화해 온 역사적 연원에서의 연계성이 직접적으로 실천적 규범의 논거로 채택되어야 할 이유도, 필연성도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산적인 행위와 생물학적인 재생산의 역할은 밀접 한 상호 의존성에 의해서 특징지워진다. 생물학적 재생산 구조에 서의 변화는 생산 부분에서의 변화와 여러 차원에서 관련한다. 전자가 유지되지 않는 한 경제적 생산 구조는 유지될 수 없는 것 이다. 생산적인 행위는 주로 공적인 영역으로 생물학적 재생산의 경우는 인구 정책 25) 등의 간접적인 영향을 고려하더라도 일단 사 적인 영역의 행위로 간주된다. 그런데 생태학적으로 지속 가능한 사회의 전망은 나아가서 생산적 행위를 공공 부문, 즉 상품 경제 와 교환 가치 위주의 경제 행위보다는 생태 지역주의를 선호한 다. 이는 다시 말해서 가사 노동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생태 지역주의는 공적인 행위와 사적인 행 위의 구별은 물론 이들 영역 간의 구별이 남성과 여성 간의 성적 인 구별과 일대 일로 대응해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성의 문제는 이제 남성들이 차지하고 있는 권력의 재분배나 권리 의 문제를 넘어서 노동과 생물적 재생산의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생태 여성주의가 일종의 단순한 여성의25) 사실상 태아 살인 허용법으로 규정될 수 있는 우리 나라의 〈모자보건법〉은 반생명적인 인구 조절 정책의 하나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매년 자행되는 낙태 시술은 대략 추정해서 1,0 만에서 200 만 건에 이른다. 모자 보건법의 반생명성에 대한 법학적인 논변은 배종대(홍문사, 1994), pp. 134-152 참조. 형법각론 참조.
권리나 평등한 계약을 넘어서 문화적 전환의 이념과 맞물리고 있 음을 여기서 발견한다.26) 물론 위에서도 거론했지만 논리적으로 가부장제가 사라진다고 해서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사회가 자 동적으로 도래한다는 보장은 없다. 전자는 후자의 필요 조건이지 충분 조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이며 생산적인 부문 과 사적인 부문 간의 가부장적인 구별의 약화 내지 해체는 새로 운 사회로의 문화적 전환에 있어서 일종의 촉매 역할 이상의 의 미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고정된 구별들이야말 로 문명의 파괴적인 경향성들을 떠받들고 있는 전제들이기 때문 이다. 이러한 전제들은 정신과 자연의 이원론적 구별의 절대화나 몸에 대한 이성의 지배적 관심 등과 함께 오늘날 근본적인 재검 토를 요구한다. 여성의 경우 몸에 대한 지배는 상징적으로 몸성 과 여성성, 여성성과 모성의 인위적인 분리로 나타난다. 이러한 분리는 과학 기술의 시대에 의료 기술과 소위 계약론적인 관점에 의해서 실현되고 또 정당화된다. 여성적인 문화는 결국 기술 사 회의 이 갇은 경향성들을 지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
26) 공적이며 생산적인 삶의 영역과 사적이며 재생산적인 삶의 영역이 성에 따라서 구획지워지는 데 반대하는 페미니즘의 경향을 Prue Chamberlayne은 〈성의 재구성gender reconstruction 〉으로 불린다. 이는 분명히 1960 년 대의 성 중립적인gender neutra( 여권 운동이나 여성의 동등한 정치적 참정권을 요구하는 성의 인정gender recognition 보다 근본적인 경향으로 이해된다. 물론 우리가 여기서 검토한 것처럼, 성의 역할에 대한 재구성적 관점이 어떠한 문화적이며 문명사적인 의미를 지니는지, 혹은 지닐 수 있는지에 관한 Chambcrlayne이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논변이 이렇게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Prue Chamberlayne, "Women and the State : Changes in Roles and Rights in France, West Germany, Italy and Britain, 1970-1990," in Women and Social Policies in Europe, Ed. Jane Lewis, Edwald Elgar, England Hants, 1993, pp. 170-193.
다. 이러한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문화적 전환은 결국 성적 차이에 근거한 〈분리주의〉나 〈권리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정치적 참여의 가능성과 직결된다.
ㄱ
가부장제 244, 247-248 가부장주의와 마르크스주의 219- 222 가부장주의와 성 역할 223-226 가부장주의와 자유주의 214-218 감각 32 감각질 32 감성 24,70-71,73,79,86,96,103, 117,127,132-133,250 감성과 이성 9-17 감성의 이성화 10 감성적 125, 137, 166 감정 25, 69-70, 72, 78, 85, 88, 95, 102, 116, 127, 129-131, 134-135, 139-144, 151, 153-154, 163-165, 169, 171 감정의 윤리학 96-97, 100, 102, 110. 개체화 306 객관적 지식 251-256 고백의 담론 300, 305-308, 310 공동체주의 82, 100, 117. 공리주의 89, 90, 92, 94, 101 . 관상(觀相) 126, 163-164 구성적 규칙 13 권력 245-246, 260-261 권력 장치 299, 304, 306-307, 322-323금욕 326-327
금욕주의 79 기의 135, 148, 169 기표 135, 148, 169 기호 142, 145, 148, 169 ㄴ남성성 177-178, 194-196 낭만주의 9 논리 실증주의 81 ㄷ다수적 양성성 196-206, 208 단일적 양성성 193-196, 198 -201 덕 (德) 125, 134-135, 146-147, 158-159, 162, 164, 285-290 덕의 윤리 82, 101, 110 도덕 74, 83, 92, 97, 109-110, 124 도덕적 감정 88, 92 도덕감 이론 90-91, 94, 116 도덕적 자아 259-260 도덕 행위자 256-257 도야의 원리 292 동정심 94, 111, 116, 120 ㄹ 리비도 325찾아보기/내용
ㅁ
마음 125, 130-131, 134-138, 146 말하는 성 304 매저키즘 81 매타 윤리학 81, 260 목적론적 윤리 259 몸 125-140, 148, 151- 1 53, 156 -157, 161, 165, 167, 169 문맥적 관점 15 물질 250 ㅂ 보살핌 182, 195 보편적 이상 198-199, 202 보편화 254-260 본성설 176, 179-193 분노 103, 107. 비극의 역설 64 이하 비판적 고찰 197, 199-200, 209 ㅅ 사디즘 81 사회과학 방법론 15 선 294 성 177-178, 197, 246-247 성별 178, 197, 244 성욕 9, 14, 265-266, 268-280 성애의 기술 305, 311, 314 성의 과학 305, 309성의 시대 296,
수신 (修身) 125-126, 147, 152 -153, 155-157, 167, 169 스토아 학파 71, 72, 116. 실재론 105-106 실재적 15 실존의 미학 303, 319-321 실존주의 100, 106, 122. 심성적 사건 17 ㅇ아름다움 286-288, 292-295 아프로디지아 315-319 악 291 앎에의 의지 300-301, 309-310 애국심 100, 117. 양심 284-286 억압 가설 299 엔크라데이아 317-318 예 (禮) 125, 132, 150, 160 양성성 193-209 여성성 177-178, 194-196 여성주의 윤리 231-234 욕구 95, 96, 103 용기 284-286 유가(信家) 125-126 129, 133 -134, 138, 143, 148, 151-153, 155 -157, 160-161 164-170 육체 250육체, 자연적 312, 315
육체, 표상된 302, 312, 315 윤리학 69, 74- 75, 80, 82, 85, 101, 115-116, 254-260 의무론 78, 93, 119. 의무론적 윤리 258-259 의미 이론 14 의지 박약 86, 114. 이모우티비즘 80-81, 84, 86, 88, 105-106, 115 이성 69-70, 73, 76, 116, 125, 127, 130-133, 141, 171, 249 이성적 16 이성주의 9, 10 이성 중심주의 251 이원론 249 이중 규범 256-260 인식론 251-255 인식 주체 251-256 인지주의 78, 88, 102, 117 ㅈ자기 염려 321 자연, 자연적, 자연스러움 186-194 자유 128, 156, 159-160, 170-172, 290 자유 의지 114, 119 자유주의 82, 101, 117,자율성 201-203, 208- 209, 232-233
자존감 91, 92. 정념 73, 76, 116. 정서 25, 94, 111. 116. 정서의 감정 이론 31 이하 정서의 인지주의적 이론 43 이하 정 신 126, 130-131, 136, 153, 167, 251 정언 명령 258 정의감 90-92 존재론 249-251 좁은 내용론 17 죄책감 108-109 주인과 노예 71, 73, 74, 115, 120 중용설 75, 117 주체 259 지향성 17 진화론 15 ㅊ철학 70, 121, 122 ㅋ카타르시스 65 쾌락 316 쾌락의 역설 79ㅌ
탈현대적 금욕주의 324 ㅍ표현 138-140, 144, 147-148, 151 -152, 154, 163-165, 168 ㅎ합리성 94, 99, 102, 104, 106, 107 합리적 선택 이론 80, 89-90, 95-96, 117.
합리주의 12 행복 111 행위 138-140, 143, 147, 151-152, 164-165 현저성 104 황금률 120 후천설 176, 183-185 희랍적 사유 13ㄱ
거다 러너 236, 238 고티에 Gauthier ,David .89,94-95공자(孔子) 119-120, 123, 132, 146, 148- 1 49, 151, 162-165 그린스팬 P.Greenspan 49, 54 기바드 Gibbard, Allan. 95, 102, 106-108, 119 ㄴ내쉬 R.Nash 55-56 노자(老子) 153-155, 158 노직 Nozick,Robert. 94 니체 76, 123, 328 ㄷ다윈 Darwin,Charles 122 데일리 194, 207 데카르트 17, 31, 126, 133, 137, 302-305 뒤르켐 312 디오게네스 Diogenes 70, 273 ㄹ라이언스 W.Lyons 51, 58 라일 G.Ryle 28, 67 래드포드 C.Radford 66 로레인 코드 232-233로버츠 R.Roberts 56
로빈슨 J.Robinson 53-54 로티 Rorty , Richard 27, 101 롤즈 Rawls, John 89- 92, 120 루소 258 루이스 C.I.Lewis 22, 주1, ㅁ 맥킨타이어 MacIntyre ,Alasdair 82, 100 맹자(孟子) 127, 131, 135-140, 142, 162 메리 월스톤크래프트 217 미드 183 ㅂ 바움가르텐 294 바타이유 314 범전(范鎭) 131 베드포드 E.Bedford 39 베이컨 250 분트 W.Wundt 26 ㅅ셰퍼 J.Scheffer 58 소우사 Sousa, Ernest 83-84, 86 -87, 95, 104, 106 소크라테스 Socrates 119, 123 솔로몬 R.Sokomon 27, 32, 49쇼펜하우어 126
순자(荀子) 132 스티븐슨 Stevenson, Charles. 84 -85 스피노자 B.Spinoza 33, 34 ㅇ 아넷트 베이어 232 아리스토텔레스 33, 65, 71, 75, 110-111, 117, 249, 257 아이리스 영 242 엘스터 Eister, Jon 95-96 열자(列子) 157-158 오르데가 140 오이디푸스 16 오클리 Oakley, Justin 102, 109 -112, 114 올스톤 W.Alston 51, 58 완적 (阮籍) 153 월튼 K.Wlaton 43 율곡(栗谷) 145 ㅈ장자(莊子) 131, 153-161 제임스 W.James 39, 51, 58 조카스타 16 존 로크 220-221 존 스튜어트 밀 215 주희 (朱熹) 127ㅊ
처도로우 184 치좀 R.Chisholm 64 ㅋ칸트 9-17, 25, 77, 92-93, 123, 127, 133, 258, 283 칼 마르크스 219-223 캐롤 길리건 230-231 케니 A.Kenny 44 콜링우드 R.Collngwood 34 콜버그 Kohlberg, L 92 클레온 16 ㅌ트레빌콧 194-198 티치너 E.Tichner 26 ㅍ포도르 17 푸코 296-299 풀라톤 68, 72, 86, 93, 124, 265 -295, 302, 317, 321 플레스너 139-140 피아제 Piaget,J. 92 피처 G.Pitcher 42 피타고라스 249ㅎ
하버마스 17 헤겔 258 헤리엣 테일러 221 헤어 Hare, R.M. 120후쿠야마 Fukuyama, Francis 123
흄 Hume, David .32, 38, 64, 76, 84, 120지은이 소개
정대현고려대 철학과 및 동대학원 석, 박사. 미국 웨스터민스터 신학 교 학사 및 템플대학에서 수학. 1977 년 이후 이화여대에서 언어 철학을 교수. 주요 논저로는 『한국어와 철학적 분석』, 『지식이란 무엇인가 : 지식개념의 일상언어적 분석』, 『필연성의 문맥적 이해』 외 다수.임일환서울대 자연대 이학사, 동대학원 미학과 석사. 미국 브라운대학 철학과 박사. 현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교수. 주요 논저로는 『실 재론과 관념론』(공저), 「인식적 토대론의 논리적 형식」, 「이성과 인식」 외 다수.박정순연세대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에모리대학 윤리학 박 사. 현재 연세대 철학과 교수. 주요 논저로는 ContractarianLiberal Ethics and the Theory of Rational Choice (New York : Peter Lang, 1992),「자유주의 정의론의 철학적 오딧세이」 외 다수.이승환고려대 철학과 졸업, 대만대 철학연구소 석사 및 미국 하와이대 철학과 박사. 현재 고려대 철학과 교수. 주요 논저로는 『논쟁 으로 보는 중국철학』(공저), 『중국의 사회사상』(공저), 「유가는 법치에 반대했는가?」 외 다수 .
허란주서울대 법대 졸업, 미국 뉴욕주립대 철학과 석, 박사. 현재 한 림대 강사 . 주요 논문으로는 「절차적 원리의 실질적 원리에 대한 우월성」, 「정의와 보살핌」, 「절차적 자율성」 외 다수.허라금이화여대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서강대 철학과 박사. 현재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 조교수. 주요 논문으로는 「도덕적 실재 론과 덕 윤리」, 「‘여성적’인 도덕관점과 바람직한 인류공동체」 외 다수.이상화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종교철학 석사. 서독 튀 빙겐대학 철학 석, 박사. 현재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 . 주요 논문 으로는 「대화에 대한 실천 철학적 고찰 :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능 력이론을 중심으로」, 「비판으로서의 철학 : 포스트모더니즘과 비판 이론」 외 다수.김상봉연세대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 독일 마인츠대학 철학박사 . 현재 그리스도 신학대학 종교철학과 교수. 주요 논문으로는 Das Problem des Dinges an sich im Opus Postrumum Kants ,"「형이상학과 진리」, 「선험철학과 존재론」 외 다수.이진우
연세대 독문과 졸업,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학 철학 석, 박사. 현재 계명대 철학과 교수. 주요 논저로는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정치철학』, 『탈현대의 사회철학』 외 다수.임홍빈고려대 철학과 졸업,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철학 석, 박사. 현 재 고려대 철학과 교수 . 주요 논저로는 『헤겔철학에서의 절대적 차이와 개념』, 『기술문명과 철학』, 『근대적 이성과 헤겔철학』 외 다수.(이 순서는 논문게재 순서와 동일함)감성의 철학
대우학술충서•공동연구판 쇄 찍음1996년 월 25 일 판 쇄 펴 1996년 월 30 일 지은이정대현·임 일환·박정순·이승환 허란주·허라금·이상화·김상봉·이진우·입홍빈 펴낸이 朴孟浩 펴낸곳(주)민음사 충판등록 1966. s. 19. 16- .C 90호 서울 강남구 신사동506 강남출판문회센터 노 대표전화 515-2000/팩시밀리 515-2007 © 정대현·임일환·박정순·이승환·허란주·허라금·이상화·김상봉·이진우·임홍빈 printed in Seoul, Korea. 철학 일반 KDC/100 ISBN 89-374-4536-o 94100 ISBN 89-374-3000-2 (세트) 값 16,000 원대우학술총서
공동연구 아담 스미스 연구 조순 외 7 인 조선후기 향약연구 항촌사회사연구회 한국상고사 한국상고사학회 孤 최치원 한종만 외 5 인 한국 고대국가의 형성 한국고대사인구회 인지과학 조명한 외 11 인 한국 여성의 전통상 김열규 외 5 인 중국의 천하사상 윤내현 외 4 인 미국인의 생활과 실용주의 이보형 외 5 인 현대과학과 윤리 김용준 외 3 인 대한제국기의 토지제도 김홍식 외 4 인 뇌의 인공적 확장은 가능한가 박순달 외 3 인 인간이란 무엇인가 장회익 외 6 인 현대과학의 제문제 김용준 외 6 인 존 스듀어트 밀 연구 조순 외 10 인 임진왜란과 한국문학 김태준 외 6 인 서재필 이택휘 외 5 인 한강유역사 최몽룡 외 3 인 현대지리학의 이론가들 한국지리연구회 한국인의 대미인식 류영익 외 3 인 이재 황윤석 최삼룡 외 4인 시카고학파의 경제학 자유주의경제확연구희 물리음향학 1 서상준 외 4 인 막스 베버 사회학의 쟁접들 전성우 외 8인 대한제국의 토지조사 사업 한국역사연구획 근대사분과 토지대장연구반 한국어 데이터베이스의 설계 위한기초연구 정광 이기용 김흥규 임해창 강범모하이에크 연구 조순 외 9인수치천체물리학 다산학 연구1. 정다산 연구의 현황 한우근 외 7인2. 정다산과 그 시대 강만길 외 8인3. 정다산의 경학 이을호 외 3인4. 다산학의 탐구 강만길 외 6인
자료집1. 한국의 친족 용어 최재석2. 충남토속지명사전 최문휘3. 한국의 음식용어 윤서석4. 제주토속지명사전 오성찬5. 전북전래지명총람 유재영6. 한말의병 관계문헌 해제집 홍순권 외 3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