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삼룡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현재 전북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고전문학 전공

윤원호

전북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현재 전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경제사전공

최전승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현재 전북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국어학 전공

김기현

서울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현재 전북대학교 국민윤리교육과 부교수

한국철학 전공

하우봉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업

현재 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사전공

願齋 黃胤錫

-영•정 시대의 호남실학

願齋 黃胤錫

-영•정 시대의 호남실학

최삼룡 • 윤원호 • 최전승 • 김기현 • 하우봉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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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 황윤석 生家(전북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願齋亂藁』(전북 유형문화재 111호)

『願齊亂深』 보관함

願』 木板 총 596枚(조선 순조 29년판)

領病造』 木板 1板당 4쪽(全板이 생가에 보관되어 있음)

願 院 龜束祠(이재를 비롯한 先代 5人을 配享)

책 머리에

이재 황윤석은 영 • 정조 시대 사람으로 문예부흥기에 조선이 낳은 대박물학자이며 저술가이다. 그는 일부학자에 의해 호남파 실학의 대표적 인물로 손꼽히고 있으나 방대한 저술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음은 물론, 그에 대한 연구도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이재의 글이 처음 간행된 시기는 그가 작고한 뒤 53년 후인 순조 29년 (1829)이다. 이재의 손자 秀瓊과 당시 전라관찰사 趙寅永에 의해서 『願齋造稿』 12권 7책이 나왔는데 여기에는 조인영의 서문이 들어 있다. 이 유고가 간행된 지 113년 후인 1942년에 후손 黃瑞九와 鄕儒들에 의해서 『願齋續稿』 14권 7책이 나왔다 위의 『이재유고』와 『이재속고』의 내용은 모두 『願齋亂藥』에서 발췌하여 편집한 것이다. 이 무렵 『理萩新編』 23권 10책도 석판으로 印行되고 「資知錄」과 「梁琴新譜」만은 수필본 그대로 발간되었다. 경인문화사에서 이들을 모두 합하여 影印縮副한 것이 『願齋全書』인데, 아직도 많은 자료들이 초고로 남아 있는 『이재난고』 속에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지방의 국립대에서 상당 기간 근무해 온 필자는 같은 대학에 계시던 철학과 李康五 교수로부터 이재의 유고가 그의 후손에 의해서 생가에 보존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 뒤에도 이강오 선생은 이재의 유고에 대하여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계시면서 그 방대한 자료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도록 힘쓰시는 등 이재의 글들이 가진 가치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호될 수 있도록 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다.

1975년에 간행된 『이재전서』 3책(上, 中, 下)만해도 깨알 같이 작은 글씨로 촘촘히 박혀 있고 쪽수도 2,000 여 쪽 이상이 되어 상당히 놀랐는데 후에 산더미 같이 쌓인 『이재난고』의 방대한 분량을 보고는 정말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재난고』는 이재가 10세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63세로 작고하기 이틀 전까지 그가 듣고, 보고, 배우고, 생각한 바를 기록한 저술이다. 여기에는 文學, 經學, 禮學, 史學, 算學, 兵形, 宗敎, 道學, 天文, 地理, 曆象 言語學, 典籍, 藝術, 醫學, 陰陽, 風 , 姓氏, 物産 등 정치 • 경제 • 사회 • 농공상 등의 인류생활에 이용되는 官事 등이 망라되어, 일기체 또는 기사체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난고』의 글씨체가 草書로 씌어진 것이 많아 초서에 익숙하 지 않은 사람이 보기는 꽤 어려운 듯 싶었다. 다행히 근래에 와서 한국 정신문화원의 협조를 얻어 정자체로 고치고 淨書를 하여 활자체로 간행 되기 시작하였다고 하니 앞으로 이재에 대한 연구 범위는 훨씬 넓어지고 다양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강오 교수의 이러한 노력에 자극받아 필자가 몸담고 있는 대학의 전라문화연구소에서는 이재를 연구의 대상으로 정하고 연구팀을 짜서 우선 문학, 언어, 경제, 사회, 철학의 분야만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이재 황윤석의 저술에 대한 연구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아 마치 황무지를 개척하는 꼴이어서 연구를 맡으신 선생님들도 선뜻 청탁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눈치였다. 이에 필자가 이재 황윤석을 우선 학계에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이재 연구의 물꼬를 트는 일이 아니겠느냐며 회유한 끝에 겨우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 그 결과물인 이 책을 내놓으면서 그 내용을 간략히 적어본다.

하우봉의 「이재 황윤석의 사회사상」에서는 먼저 그의 생애와 학문의 특칭을 밝히고 있다.

그의 학문의 가장 큰 특칭은 박학성이다. 〈君子取一物之不知〉라고 강

조한 바와 같이 그는 格物致知적인 박학을 중시하였다. 특히 종래 성리학자들이 餘技로 취급하거나 잡학이라고 천시하던 천문학이나 역법 등 자연과학에 집착한 것은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이나 지적 유희가 아닌 실용적인 학문에 대한 지향성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지리에도 깊은 업적을 남겼다. 비록 체계적인 저술은 아닐지라도 서양과 중국 및 우리나라의 역대 사서와 지리서를 참고하면서 한국의 역사, 지리에 관해 연구하였다. 특히 백제와 발해에 대해 별도의 저술을 남겼고 방법론적으로는 방언 분석을 통해서 역사를 복원하고자 시도하였다.

사회 개혁에 대한 그의 입장은 매우 소극적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萬化의 根源을 바로잡는 것---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 잡는 것이고 아래로는 백성의 풍속울 교화하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고 제도개혁은 餘로 인식하고 있었다. 요컨대 明本源主義에 입각한 위로부터의 의 식개혁이 그의 사회사상의 본질이다. 다만 재가금지, 서얼차대, 노비세 습제 등 법률이나 사회관례로 지켜왔던 악습에 대해서는 그 폐해롤 논하 면서 철폐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국방 개혁안도 눈에 띄는데 을묘왜변과 임진왜란 이후 변칙적으 로 설치, 운영되던 군사제도를 정비할 것과 더불어 수도권 정비, 築城 法, 關津守備, 海防論 등의 대안들이 그 요체이다.

최삼룡의 「이재 황윤석의 문학연구」에서는, 그의 참다운 인간적인 면 모는 문학을 통해서 가장 잘 나타나 있음을 전제로 하였다.

이재의 글들은 한문학의 모든 양식을 골고루 포용하고 있지만 운문에 서는 한시가 그 중심이 되고 있다. 이재는 문행의 가문에서 태어나 조모 로부터 글을 배우면서 시를 짓기 시작하였으며 일찍부터 시재를 나타내 었다. 후에 詞章보다는 經學을 중시하라는 스승의 가르침도 있고 하여 시공부에 몰두한 편은 아니었으나 자신이 詩魔에 사로잡혀 시쓰기를 멈 출 수 없다고 표현한 것 등으로 미루어 보면, 보고 느낀 것이나 끓어오

르는 감회에 대하여 항상 시로써 나타내는 것이 습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재유고』와 『이재속고』에 수록된 시구만 하더라도 1,800 수에 이르고, 그 의에도 훈민정음으로 된 연시조 형식의 「木州雜歌」 21 편이 남아있다.

그의 시를 주제별로 살펴보면 閑情, 交遊를 나타낸 시가 가장 많고 鄕慈, 自萬, 懷古, 旅程의 순서로 나타나며, 그밖에 仙佛, 觀物, 忠心, 性理, 修德울 표현한 내용들이 있다.

이재의 산문 중 설화성을 가장 많이 내포한 기록이 『이재만록』이다. 그의 博學多聞은 세상에 별로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逸士에도 많은 관심울 보이고 있다. 그 중에는 『海束異蹟補』에 수록된 異人, 術客의 이야기가 눈에 띄고 있어 『이재만록』은 102 인의 이인설화로 엮어 놓은 『해동이적보』의 저술자가 황윤석이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본래 『해동이적』은 현종 때 洪萬宗이 우리나라 역대의 이인 40 인의 인물설화를 엮어놓은 것인데, 이재가 『해동이적』을 보고 증보한 것이 『 해동이적보 』이다. 이 책에는 증보한 인물이 純陽子라고만 되어 있는데 순양자가 황윤석의 道號였음을 밝혔다.

이재는 홍만종이 『해동이적』에서 쓴 인물傳에 가필하거나 고쳐 썼는데 그 결과 홍만종의 『해동이적』과 황윤석의 『해동이적보』 사이에 상당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황윤석이 저술한 『해동이적보』에서는 이재 생존 당시, 죽 조선후기까지의 道仙家에 대한 면모를 엿볼 수 있으므로, 이재는 도교문학에 큰 공적을 남긴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전승의 「이재 황윤석의 ‘화음방언자의해'와 ‘이수신편' 등에 반영된 어휘연구의 성격」에서는 국어학사적 측면에서 이재의 언어학적 인식내용 올 살펴보려 하였다.

이재와 그를 전후한 일련의 실학자들의 학문적 배경과 그들의 연구업적을 고려할 때, 이 시대의 언어에 대한 학문적 사고는 宋學의 영향인

성리학, 易學 및 중국 음운학의 방법론과 체계 아래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재의 언어에 대한 관심은 다양한 운서 연구를 통한 주로 추상적인 중국의 표준 한자음 및 조선 한자음 고찰이 중심을 이루며, 우리말에 대한 이해는 여기서 나온 부산물이었다. 여기서는 언어학적 가치를 갖고 있는 이재의 여러 저작 가운데 국어학사적 관점에서 「화음방언자의해」와 『 이수신편』을 재검토하면서, 그의 어휘연구의 본질로, 중국과 오랜 문화접촉의 결과 중국어로부터 우리말에 들어온 근세 국어 차용어들의 유형과 그 성격을 규명하고 정리한 데서 찾을 수 있음을 제시하려 하였다.

또 여기에서는 그의 「화음방언자의해」에 열거된 국어단어들 가운데 18 세기 국어의 음운론과 형태론의 일부를 추출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윤원호의 「이재 황윤석의 경제관 및 경제관계자료」를 살펴보면 이재의 경제관은 왕도정치의 표본이었던 經世濟民의 실현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재가, 바록 木川현감에 이르는 하급관료에 그쳤음에도 불구하고 仕宮의 시각으로 경제문제에 관십을 가졌던 것은 조선 시대의 士族이 일반적으로 그랬듯이 지배계층의 牧民意志와 연결된다. 경제적 측면에서 왕조국가의 지탱과 유지는 물질적 기반으로서의 원활한 재정확보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으며 이에 부수하여 기층민의 생활기반에 연관됨으로써 그의 경제관은 경세제민, 재정 및 민생의 3 가지 측면으로 부각된다. 그는 화폐, 환곡과 周尺에 관한 고증의 내용을 제시하고 陸 • 海路롤 배경으로 한 대중국교역노선을 구체적으로 겁토하였다.

그리고 경제생활에 활용 가능한 지하자원, 식물자원, 관광자원과 전통 기술을 경제자원으로 묶어 정리하였다. 특히 경제자원에 관한 자료들은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서 금후 자원개발과 활용을 위하여 실질적인 자료 및 근거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기현의 「이재 황윤석의 학문체계 분석」에서는 그의 학문과 사상을 검토하고 그가 과연 지금까지 실학자로서 불린 만큼의 탈주자

학적 면모를 지니고 있었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하였다.

이재는 지금까지 실학자로 평가되어 왔다. 그것은 그의 학문이 기왕의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서학, 박물학, 국어학, 역사학 등을 포괄하고 있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그의 학문의 의연만으로 그 내포를 단정해버리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가 이전의 주자학자들과는 달리 여러 학문 분야를 섭렵했다고 해서 곧 탈주자학의 실학자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의 학문의 내포 면에서, 죽 철학적 관점에서 살피면 그는 철저한 성리학자였음이 드러난다.

그러면 이른바 실학자들과 공유하는 저 의연적 학문분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것은 그가 살았던 18 세기 조선사회의 새로운 문물에 대한 성리학적 격물정신의 소산이었다.

그는 똑같이 성리학을 연구하면서도 시대의 변화를 의면했던 다른 학자들과 학문적 경향을 달리하였다. 물론 그는 실학자들과도 다른 학문적 특징을 보였다. 요컨대 그의 학문은 성리학의 시대적 변주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상에서 각 분야별로 내용을 간략히 서술해 보았다.

이재 황윤석에 대한 기존의 연구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그의 방대한 저술을 놓고 이리저리 기웃거려 보았으므로 학계에 기여할 만큼의 만족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으리라 여겨진다. 또한 한두 사람의 노력만으로 이재 연구에 대한 전체적인 결과를 얻는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재 황윤석의 연구가 처음으로 공동연구로 시도되었다는 접에서 그리고 아직은 이재 연구의 序說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자위하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 책를 내놓는다.

앞으로 『이재난고』까지 출판이 완료되면 이재 연구의 새로운 시대가 올 것임을 기대하면서, 이 책이 이재 황윤석 연구의 조그마한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 서두른 저서의 의의를 삼는 데 만족하려고 한다. 오로지 60 평생을 학문에 몸바치며 의길을 걸었던 한 시골 선

비의 집념을 이제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학계의 많은 전공자와 후학이 이재 연구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대하면서 이재와 그 가치성에 대한 평가는 다음 번의 연구자에게 미룬다.

끝으로 이 연구를 위하여 여러 가지를 도와준 당시 전라문화연구소 탁경훈 조교의 수고를 고맙게 생각하며 특별히 편집과 교정 과정에서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은 민음사 당연중씨께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 이다.

1994. 7 乾止原에서

崔三龍

이재 황윤석

차례

책 머리에 • 5

이재 황윤석의 사회사상 13

1 서론 13

2 生混 15

3 학문과 사상의 성격 22

4 社會思想 39

5 결론 52

이재 황윤석의 문학연구 57

1 서 론 57

2 黃胤錫의 文學 60

3 결론 154

이재 황윤석의 「화음방언자의해」와 『이수신편』 등에 반영된 어

휘 연구의 성격 161

1 언어 연구에 있어서 실학의 사조와 그 시대적 제약 161

2 어휘 고찰의 방법론 167

3 『이수신편』에 반영된 근세 중국어 차용어 179

4 「화음방언자의해」에 반영된 중국어 차용어의 유형 193

5 「화음방언자의해」의 국어사적 특징 213

6 결론 223

참고문헌 225

이재 황윤석의 경제관 및 경제관련 자료 227

1 서론 227

2 경제관 228

3 沿革考證 242

4 대외교역노선 245

5 經濟資源 249

6 결론 270

이재 황윤석의 학문체계 분석 273

1 서론 273

2 性理說 275

3 異端觀 282

4 西學의 인식 287

5 博物學的 사고 293

6 民族意識의 각성 298

7 결론 303

願齋 黃胤錫 年譜 305

찾아보기 319

이재 황윤석의 사회사상

河宇鳳

1 서론

頭齋 黃胤錫이 살았던 영 • 정조 시대는 새로운 변동과 발전적 양상이 교차한 시기였다. 조선 후기의 사상계와 대내의 정책을 보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대륙에서의 明 • 淸 교체라는 국제정세의 변동에 따라 국내에서는 일본과 청에 대한 적개심이 충만하였음은 물론 조선이 중화문명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小中華意識이 풍미하였다. 문화적 우월성에 근거를 둔 이 의식은 양란 이후 손상당했던 민족의 자존십울 회복하고 전후 복구사업을 하는 데 정신적인 힘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존적인 소중화의식 속에서 청 • 일본 • 서양 등을 모두 이적시하였기 때문에 의래문물의 수용에는 아주 소극적이었다. 대중국 정책을 보더라도 淸夷秋觀과 反淸復明의 北伐論이 강조되는 가운데 청과의 문화교류가 사실상 단철되었다. 그러나 17 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대륙에서 明의 부홍운동이 종식되었고, 동아시아의 국제정세가 안정되면서 反淸이데올로기적 논리는 점차 설득력을 잃어갔다. 오히려 북벌론에 따른 국내적 제 모순이 나타

났고, 중국대륙과 문물교류의 단절에 따라 조선의 문화와 기술의 발전은 지연되었다.

한편 明末淸初 중국에 전래되기 시작한 서양의 과학문명과 천주교는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 서구문명은 漢譯西學曹라는 형태로 조선에 전래되었으며, 호기심 왕성한 학자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오랑캐로 무시하였던 청 • 일본의 발전과 서양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가 보여주는 새로운 문명은 종래 자기만족적이고 폐쇄적이었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큰 경종을 울려주고 자각을 일으키게 하였다. 정치적인 상황도 영조가 즉위하면서 일변하였다. 落平策이 실시되면서 북벌론을 고집하였던 老論 세력이 약화되었고, 포용적인 문화정책이 시행되자 조선사회도 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며 새로운 문화중흥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실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황윤석이 살았던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그는 당대의 박물학자이자 저술가로 알려져 있으며 일부 학자에 의해 이른바 호남파 실학의 대표적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그러나 그의 방대한 저술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음은 물론 그에 대한 연구도 아직은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기존의 연구도 자연과학과 언어학에 치중되어 있을 뿐이다. 1) 특히 그의 사회사상에 대한 연구는 한 편도 없다. 이 점은 그

1) 일반적인 것으로는 李康五, 「願 黃胤錫」(『實學論穀』, 1975, 전남대 호남문 화연구소), 李康五 「實學者 黃胤錫論」(『比斯伐』, 1975, 전북대 학도호국단), 吳鐘逸, 韓國實學思想과 湖南」(《茶山學報》 8 집, 1986, 다산학회), 洪性德,「全北實學의 展」 ( 『全羅文化論策』, 1992,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 李康五, 「願 쨌亂纂解題」(『全羅文化論策』, 1992,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가 있고, 어학에 대한 것으로는 李崇寧, 黃胤錫의 『理萩新編』의 考察―특히 語學硏究를 중 심으로 하여」(『陶南 趙潤濟博士回甲記念論文集』, 1964), 박태권, 「黃胤錫의 語 學說에 대하여」(『國語學史論考』, 샘문화사), 金錫得, 「願齋 黃胤錫의 華音方言 字義解」 (《東方學誌》 40 집, 1983, 연세 대 국학연구소), 姜信流, 「實學時代學者 들의 業續에 대하여― 과 黃胤錫」(《敎育論穀》 창간호, 1986, 성균관 대) 이 있으며, 과학사상에 관한 것으로는 나일성 외, 「黃胤錫의 恒星黃赤經緯 에 대한 檢討」(《方學誌》 19 집, 1978, 연세대 국학연구원), 河聲來, 「願寶

黃胤錫의 西洋科學思想 受容―滿軒 洪大容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傳 統文化硏究》 1 집, 1983, 명지대 전통문화연구소), 鄭誠禧, 願齋 黃胤錫의 科學思想 」(《淸溪史學》 9집, 199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청계사학회) 등이 있다.

가 주목할 만한 사회개혁안을 제시한 바가 적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지지만 문제가 없지 않다. 그의 성리철학이나 과학사상도 결국 당시 국가와 백성들의 삶을 보다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 바탕에 사회 사상이 없을 리 없기 때문이다. 또 자료적인 면에 있어서도 사회개혁론에 대한 체계적인 저술은 없다고 하더라도 『漫 錄』 이나 『理萩新編』 , 『食知錄』 등을 보면 부분적으로나마 언급된 바를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편 기존의 연구에 의하면 이재는 성리학과 실학적 면모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학자로서 그의 사상적 성향이나 학문적 지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 하는 문제도 논쟁거리이다. 본고에서는 이 접에 착안하여 우선 그의 학문의 형성과정과 학문체계의 특성을 살펴본 다음, 그가 제시한 사회개혁론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동시에 그의 학문적 특성과 사회사상에 대한 고찰을 통해 시론적 성격에 머물겠지만 이재 사상의 성격을 구명해보고자 한다. 그의 학문과 사상 전반에 걸친 연구가 극히 미흡한 현시점에서 종합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힘들지만 일정한 범주화는 필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2 生淮

(1) 가정적 배경

黃胤錫은 영조 5 년 (1729) 全羅北道 興德縣 龜壽洞(지금의 高散郡 星內面 檀洞)에서 출생하였다. 字를 永燮, 號를 願齋 또는 西漠山人 • 雲浦主人 • 越松外史라고 하였다. 본관은 平海이고 그의 선조가 호남에 내려와 살기는 고조부 때부터였다. 가까운 선대의 조상들이 높은 관직으로 현달

하지는 못했고 중앙의 권문세족과 큰 연관도 없었다. 그러나 영조의 승അ지로부터 〈호남의 유서있는 집안으로 대대로 학문과 행적이 있었다(南中故族 世有學行)〉라는 평을 받았을 만큼 4 대에 걸쳐 학식과 덕망이 높이 칭송된 명문이었다. 특히 숙조부인 載爾(호 ; 龜岩)은 農巖 金昌 의 문인 중에서도 석학으로 평가받았던 인물이었으며, 부친인 晩隱公 盛도 벼슬은 莊陵 參奉에 머물렀지만 학덕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래서 家藏圓普가 수천 권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재의 학문이 博覽强 의 박학성을 띠는 것도 이러한 가정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여진다.

黨色으로 보면 願齋는 老 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호남지역은 독자적인 당파를 형성해 중앙정계에서 권력투쟁을 할 만큼 세력이 크지 못했으며, 대개 서울의 어느 權門과 친분이나 학맥이 연결되느냐에 따라 당색이 정해지곤 했다.2) 그런데 이재의 집안은 선대부터 당시 노론의 핵심인물이었던 농암 김창협의 문하로서 수학하였고, 이재는 농암의 손자인 淡湖 金元行의 제자로서 입문한 이후 평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老論系 畿湖學派 안에서 도 洛論系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재는 尤庵 宋時 을 존승하여 그의 禮說을 따랐고, 湖洛論爭에서는 淡湖를 계승하여 人物性同論의 입장을 확고히 견지하였다. 그러나 이재의 교우관계를 보면 그가 당색에 얽매인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남인계 실학자와 소론계 학자들과도 친밀하게 교류하였다. 그가 평생을 두고 가장 가깝게 지냈던 鄭景淳은 少論이었으며, 徐命脣도 소론이고 李家煥은 南 이었다.

경제적 여건을 보면 그의 집안은 在地中小地主的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 갇다. 현재 생존해 있는 8 대 종손의 말을 빌면 이재의 선대에는 천석군이었다고 하는데 연보상으로도 이재의 유년시기에는 상당한 부를 소유한 토착지주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재 당대의 말년에 이르러서는 경제적 곤궁을 한탄하는 詩와 연보의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다소

2) 宋混 , 「李朝時代의 全羅道― 그 정치 및 사회적 지위」(『李朝時代의 全羅道』, 1971, 전북대 박물관) 참조.

어려워졌던 것 같다. 이와 갇은 경제적 여건이 그의 사회인식에 일정하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민생의 어려움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원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적극적 개혁론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또 도시 상공업계의 현실이나 모순에 대해서도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경제적 기반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2) 學者와 末端官吏로서의 한평생

이재의 일생은 학자와 관리로서의 한평생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해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제 1 기는 출생에서부터 30 대 후반까지의 시기로 修學期라고 할 수 있다. 그는 金昌協의 문인인 조부의 학문적 전통과 수천 권의 家藏圓害를 바탕으로 일찍이 학문에 접할 수 있었다• 5 세 때부터 조모의 지도 아래 家學을 계승하였으며 13 세에 이미 四 睿 三經을 독파하였다고 한다. 10 세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죽기 이틀전까지 빠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현재 전하는 57 권의 『願齋亂葉』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일찍이 科擧學에 뜻을 두지 않고 經學과 理萩學에 관십을 두었다고 한다. 14 세에 이수학에 뜻을 두어 16 세부터 『理萩』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 해부터 성리학에도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자 하였다. 죽 18 세 때 당시 성리학의 대가인 黎湖朴弼周 (1665-1748) 에게 편지를 보내 성리학을 공부하겠다며 사사를 받고자 하였으며 ,3) 21 세 때는 「湖洛 學 心性說」을 쓸 정도로 성리학에 조예를 보였다.4)

3) 『願齋遺稿』 권 3, 霞, 「擬上黎湖朴公弼周 書」 참조· 그러나 이 시도는 박필주의 죽음으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했다.

4) 『願齋續稿』 권 13, 「年譜」.

일정한 師門을 정하지 못하고 독학하였던 이재에게 학문적으로 큰 전기가 된 것은 漠湖 金元行 (1702-1772) 과의 만남이었다. 31 세 되던 해 김원행의 문하에 정식으로 입문한 이래 이재는 미호의 학문을 계승하였으

며 그의 자연과학에 관한 연구가 꽃피는 계기가 되었다. 5) 그러는 한편으로 이 시기에 이재는 고향의 선운사와 백양산 등에서 周易 』 을 비롯한 경서를 읽으며 성리학의 연구에 정진하였다. 36 세 때에는 전주로 나가 당시 호남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이름높았던 木山 李基慶 (1713-1787) 과 湖洛心性理 氣 說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6) 이재의 학문이 본격적으로 무르익는 것은 40 세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시기까지 기초가 형성되었고 이수학과 성리학에 있어서 6, 7 권의 저술을 남기는 등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5) 미호와의 만남과 관계, 석실서원에서의 교류에 대해서는 앞의 책 권 6, 「淡上錄」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6) 『頭 齋續稿』 권 13, 「行狀」. 李基慶의 성리철학과 정치사상에 대해서는 『木山李 基 慶 硏究』 (1991,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 참조.

제2기는 38세에 官界로 전출한 이후 58세까지 20 여 년간 관직생활을 한 시기로서 仕窟期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학문적 熟 라고 할 수 있다. 그의 官歷울 보면 38 세에 隱逸로 추천을 받아 莊陵 參奉이 된 것을 시작으로 그가 역임한 관직을 순서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莊陵 參奉―義益庫 奉事―宗簿寺 直長―司圓署 別提―世子翊衛司 翊贊―­ 司僕寺 主簿一東部都 事 ―長陵令― 縣監―掌樂院 主簿―昌陵令―­ 典性署 主簿―全義 縣監. 중앙과 지방관을 골고루 역임하였으나 대체로 6품에 해당하는 낮은 직책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문과급제를 하지 못해 藤官으로 전출했다는 점과 또 가정적 배경이 권문세가와는 거리가 있는 만큼 불가피하게 주어진 제약이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이 기간중 정경순 • 김이안 • 홍계희 • 신경준 • 홍대용 • 이가 환·서명웅 등 당대 일류의 유학자 내지 실학자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그가 서양서적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것도 이 시기였고, 저술이 집중적으로 나온 것도 40 대 전반기였다. 특히 40 대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년의 이재는 교육과 저술에 몰두하며 여생을 정리하였다. 죽 59세

되던 해인 정조 11년 (1787) 벼슬길을 그만두고 향리에 돌아온 이후부터 그는 고향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저술을 정리하다가 1791년 4월 晩隱齋에서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이재는 학자로서는 성취한 바가 크고도 많았지만 관료로서는 성공하지 못한 편이었다. 천성적으로 학문을 좋아한 그는 평생 관직에 별 뜻이 없 었다. 38세 이후 관계에 나갔지만 부친의 명에 순종하고 경제생활을 부 양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관직생활중에도 언제나 책을 가까이하고 학자들과 교류하는 것을 더 즐겨하였다. 평생 많은 교우를 사귀었으나 모두 학문적으로 맺어전 인물들이었고, 그것도 대부분 실학자둘이었다. 이재는 관계에 들어서던 해에 스승 미호로부터 호남의 호걸선비로서 〈詞章儒〉가 되지 말고 〈君子儒〉가 되라는 권고를 받았다. 여기서 말한 군자유는 과거나 벼슬길에 연연하지 않고 道學의 本源을 탐구하는 학자를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인데, 이재는 이것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것 같다.

(3) 인간적 면모와 世評

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간적인 측면과 당시 혹은 후대인들의 그에 대한 평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로서는 학문과 일상태도에 있어서 엄격함과 성실성, 학문적 호기심과 정열, 깐깐한 선비기질, 효자로서의 면모 등을 들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이재의 門人인 宋獻鎭이 쓴 「行狀」에 의하면 그는 남달리 학문에 취미와 정력을 쏟아 5 살 때 학문을 배운 이래 평생 동안 책을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었으며, 학문과 일상태도에 있어서도 업격 성실하였다 한다. 10세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운명하기 이틀 전까지 빠지지 않고 기록한 접으로 보아 아주 꼼꼼하고 성실했음울 알 수 있다. 암기력이 뛰어나서 한번 보면 바로 외어 쓰는 놀라운 재주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점은 그

의 저술을 살펴보면 실감이 난다. 그는 또한 학문적 호기심과 정열이 대단하였다. 어려서부터 일정한 사문을 정하지 못했을 때 박필주에게 직접 편지하기도 하고, 김원행 • 이기경을 찾아갔으며, 가까운 곳에 귀양온 유명한 학자가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 질의하고 토론하였다. 석실서원에 있을 때도 自鳴鐘이나 籠水閣을 보기 위해 먼길을 여행하면서도 결코 싫어하지 않았다. 자신의 학문아 어느 정도 이루어전 후에는 다른 사람이 학술적인 문제를 질문해 오면 적극적으로 대답해 주며 토론하기를 즐겨하였다. 그가 항상 말하기를 〈하늘이 남자를 만든 것이 어찌 우연이겠느냐. 그러므로 옛날의 군자는 한 가지 사물이라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였다〉라고 하였다 한다. 그의 박학 지향성과 학문적 호기심, 그리고 엄격성을 잘 드러내 주는 일화이다.

이재는 성품이 겸손하면서도 실질을 중시하였다. 그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는 체를 하지 않고 겸손하였으므로 영조가 〈참으로 지식이 있고 실질이 있는 사람〉, 〈사람됨이 두텁고 큰 인물〉이라고 칭찬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가 42세 때인 영조 46년 (1770) 9월 임금 앞에서 親試를 볼 때 親策十條를 써냈는데, 科擧造設의 폐해를 비판하고 왕실비용의 節減울 주장하는 글을 써 試官이 이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의 깐깐한 선비기질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물질이나 공명심도 그의 안중에는 없었다. 20 여 년의 관직생활을 했어도 청령하여 54 세 때에는 처의 병을 치료하는데 치료비를 제대로 부담하지 못하였을 정도였으며, 자식들에게 『三國史』라는 책을 사주기 위해 돈을 빌려야만 했다 .7)

7) 위의 책 권14, 「年譜」 및 권 13, 「行狀』.

지극한 효자로서의 면모도 빠트릴 수 없다. 그는 일찍부터 과거학에 뜻이 없었으면서도 부천의 명에 따라 계속 과거를 보았으며, 부천이 돌Ɖ아가신 이후에 바로 과거 웅시를 그만두었다. 그의 인생에 하나의 주요 계기일 수도 있는 사건을 인용해 보자. 43 세 때인 1771 년 6 월 이재는 청의 수도 燕京에 사행원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죽 우의정 金相

喆이 辨誤使로 북경에 갈 때 판서 趙峨에게 文學人材를 구해달라고 요청 하였다. 이에 조엄은 이재를 추천하였는데 이재가 70 세된 양천이 있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뒤에 영의정 金致仁이 그 이야기를 듣고 이재야말로 최적임자였다며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8) 이재가 당시 천문 역상과 서양 과학에 관한 학문적 호기심이 얼마나 컸었던가를 상상한다면, 또 . 당시 새로운 학문을 선호하던 학자들에게 북경사행이 얼마나 선망의 대상이었던가를 생각한다면, 그의 효심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사건 다음 달인 7 월 부천의 질환 소식을 듣고 고향에 다녀오게 되는데 기일을 넘겨 해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9)

당대 및 후세인들의 이재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8) 위의 책 권 14, 「年 譜」.

9) 위의 책, 같은 곳. 이재는 관리나 학자로서 현달할 수 있는 기회를 몇 번이나 놓치고 있는데, 이 사건도 그 중 하나이다. 만일 그가 북경사행을 갔다왔다면 그의 안목을 넓히고 학문에 큰 발전을 보았을 것이다. 또 해직당한 후 鄭 景 淳 등이 복직운동을 벌였으나 이재가 국구 사양했는데, 만일 이때 정경순의 권유 대로 春桂坊으로 들어갔었다면 東宮이었던 正祖를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 서 후일 호학군주가 된 정조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면 그의 인생이 전혀 달 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그의 스승인 김원행은 이재를 〈실로 호남의 호결선비 (眞湖南豪傑之士)〉 10) 라고 했고, 李 書 九도 〈남쪽지방의 호걸(南土之傑)〉이라고 했으며, 11) 洪直弼은 〈근년의 호남선비 가운데 제일이다〉 12) 라고 평하였다. 당시의 대학자 徐命牌은 〈박학한 선비 (博學之士)〉라고 하였다. 영조도 이재를 보고 〈 F恥 織者〉라고 평하였으며 정조는 〈文章之士 淳質之人〉이라고

10) 위의 책 권 13, 「學行」.

11) 위의 책 권 13, 「李 書 九撰 墓函銘」.

12) 위의 책 권 13, 「洪直弼撰 墓誌銘」. 〈抗近湖南之士 當推公爲第一〉

또 이재가 63 세를 일기로 사망했을 때 당시의 전라도 관찰사 조진택은 拘 詞 에서 그를 평하여 〈호남의 인물을 불 때 河西 金麟 厚 의 도덕이 가장 높았는데 오직 黃公만이 그 자리에 따르며 博文約禮의 學行온 갈은 경지에 있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조정에서도 그가 천문 역상에 있어서 당대 제일이라는 평가는 일반적으로 공인되었으며 대체로 정확한 것 같다. 영조 46 년 (1770) 『東國文獻備考』를 편찬할 때 조정의 공론이 이재를 편집청에 특별히 뽑고자 했을 때 그가 森官이라는 이유로 참여하지는 못했으나 후일 천문 역상 등의 분야에 있어서는 항상 이재에게 문의하였다 한다. 13)

13) 위의 색 권 13, 「李九撰 墓磁銘」, 권 14, 「年譜」. 이재의 算學에 대해서도 당시 산학의 대가인 李子敬이 이재의 득록한 이론인 立天元一法에 대해 평하면서 〈아주 정밀하여 당세에 견줄 사람이 없는 득보적인 존재〉라고 칭찬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상을 종합해 보면 이재의 박학성을 칭찬하는 것과 호남지역 을 대표하는 선비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서 전국적이거나 시대적 인물로서까지 평가받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이 접은 그가 고위관리로서 國政의 樞機에 참여하지 못했고, 사상가로서도 주목할 만한 사회 개혁론이나 독창적인 학설을 크게 제시한 바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여 진다.

3 학문과 사상의 성격

(1) 학문의 형성과정

이재의 학문이 형성된 과정을 보면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을 것이 다. 첫째는 家學의 전수이고, 둘째는 淡湖 門下로의 입문이며, 셋째로는 38 세 이후, 죽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이후 실학자들과의 교류이다. 각 단계에 있어서 이재의 학문은 내용적으로도 일정한 변화를 겪으며 발전되어 갔다고 보여진다.

이재의 가계는 대대로 學行으로 유명하였으며 수천 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던 학자집안이었다. 특히 숙조부인 載重은 畿湖老論系의 대학자인 農巖 金昌協의 제자로서 학문적 분위기가 좋았다. 이재는 비록 숙

조부로부터 직접 교육받지는 못했으나 5 살 때 학문을 처음 배운 이래 10살 때부터 지금의 『 願齊亂菜 』 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재가 성리학의 연구와 이수학에 대한 관심이 일찍부터 있었던 것은 家學의 성격이 농암의 학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데 연유한다고 여겨진다.

이재는 18 세 때 黎湖 朴弼周에게 편지를 보내 성리학을 공부하고자 하였으며, 21 세에는 鄭括와 湖洛學心 沮의 得失을 토론하고 그 후 「湖洛學 心性說」을 쓸 정도로 성리학에 조예를 보였다. 36 세 때는 당시 호남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서 이름 높았던 李基慶울 찾아가 湖洛心性理 氣 之說에 대해 토론하였다고 한다. 14) 이로 보아 성리학에 대해서는 미호를 만나기 이전에 가학의 영향과 본인의 독자적 연구로 상당한 수준에 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4) 위의 책 권 14, 「年 瓚 」.

한편 이수학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다. 이재는 14 세 때 林泳의 『 浦溪集 』 을 보고 자극을 받은 이후 처음으로 이수학에 뜻을 두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16 세 때부터 『 理萩新編』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18 세에는 자명종을 구해 분해해 보기도 하면서 「觀自鳴鐘」이란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15)

15) 위의 책, 같은 곳. 자명종에 대해서는 나중에 홍대용 등과 더 연구함으로써 「輪鐘記」로 발전하였다.

가학적 바탕 위에 일정한 사문을 정하지 못하고 독학하였던 이재에게 학문적으로 큰 전기가 된 것은 미호 문하로의 입문이었다. 이재가 미호 김원행을 처음 찾아 인사를 드린 것은 28 세 때 (1756 년)였 다. 그러나 이때는 부친의 명에 의한 것으로 사제 관계를 맺지는 않고 경서 해석상에 의문나는 것을 물어보는 정도였다.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은 3 년 후인 31 세되던 해였다. 그는 이 해 진사시에 합격한 후 아 우 胃 錫과 함께 양주로 미호를 찾아가 정식으로 입문하였다. 이 후 미호 가 별세한 1772 년까지 14 년 간 직접 수강하기도 하고, 관직 수행시에는 편지로써 문의하기도 하는 등 밀접한 교류를 나눔과 함께 깊은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미호 김원행은 농암 김창협의 양손자로서 농암의 제자인 李縮의 제자였다. 그는 李펴―宋時 ―金昌協―金昌翁―-李粹로 이어지는 기호노론계의 정통을 이은 학자로서 湖洛論爭에서는 人物性同論울 주장하였던 洛 의 대가였다• 그는 특히 湖 과의 논쟁을 하면서 理萩에 약하다는 것을 느끼고 曆學과 律呂, 象數學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제자들에게도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장려하였다 한다. 미호는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경기도 양주군에 있는 石室耆院에서 학문연구에만 전념하였는데, 이 서원은 古文運動울 중심으로 한 새로운 학풍과 함께 상수학에 대한 깊은 연구로 후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16) 당시 이 서원에는 金履安 • 洪大容 • 朴胤源 등이 모여 성리학 및 자연과학 연구에 독보적인 경지를 보이며 하나의 학파를 이루고 있었다. 그 접에서 이 石室害院學派는 조선후기 南人系의 星湖學派, 少論系의 江華學派와 더불어 대표적인 학파로 평가할 만하다. 이재는 미호 문하에 입문한 이래 석실서원파의 일원으로 큰 영향을 받았고, 미호의 학문적 지향과 학설을 이어받았다. 또 이미 성리학과 상수학에 상당한 경지를 이룩하고 있던 이재로서는 석실서원 안에서도 선두권을 유지하면서 이 학파의 학풍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6) 석실서원은 효종 5 년 (1654) 경기도 양주군 석실리에 세워졌고, 賜額을 받은 서원으로서 병자호란 때의 斤和臣 三學士를 봉안한 곳이다. 이 서원은 노론 기호계의 핵십적인 서원 가운대 하나이면서도 정계와 일정하게 거리를 두면서 古文運動과 象數學을 깊이 연구하는 등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2) 실학자들과의 교류

다음으로 이재의 학문과 사상에 영향을 준 것은 이른바 실학자들과의 교류였다. 여기에는 직접 만나지는 못했으나 사숙한 인물도 있고, 석실 서원 내에서 사귄 동문학자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학문형성에 있어 보다 중요한 요소는 관계에 전출한 이래 내직에 있으면서 중앙의

17) 이재는 地圓說을 독신했으며, 한역서학서인 『天主實義』와 『戰方外記』를 읽고 그에 대한 논평을 남기고 있다. 그의 입장은 서양과학은 수용하되 천주교는 부 정하는 이원적 태도를 취하였는데, 이 정도 성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유명학자들과 교류한 것이다. 이 점은 그의 학문, 특히 실학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가 영향받았거나 교류한 학자들과의 관계에 대해 약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가) 李漢 (1681-1763) : 이재는 이익을 직접 만난 바는 없지만 이익은 같은 시기에 양주군 석실서원과 멀지 않은 광주군 첨성리에서 1763 년까지 학문을 연구하고 있었다. 비록 남인과 노론이라는 당색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익의 학문에 대한 당시 신전기예들의 존숭감은 대단하여 북학파 실학자들도 대부분 『星湖僖說』을 읽었다고 한다. 鄭寅普의 「港軒耆序」에 의하면 이재도 홍대용과 함께 성호의 학문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재가 西學에 관심을 가지고 깊이 연구한 이유의 하나도 성호와 그 학파의 서학 연구에 일정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7)

(나) 安鼎福 (1712-1791) : 남인계 실학자인 안정복 역시 이재가 직접 대면하지는 못했지만 존경하였으며, 여러 곳에서 논평을 남기고 있다. 이재는 안정복에 대해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로 유명하다고 하며, 그가 쓴 『大麗誌』에 대해 긍정적인 논평을 하였다. 18) 또 그가 자신이 처음 의관으로 부임하였던 목천 현감의 전임자로서 훌륭한 치적을 남겼고, 『廣邑誌』를 지은 데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였다 .19) 특히 순암의 역사지리 연구에 대해 〈감찰 안정복은 이익의 문도이다. 史學으로 일컬어지며 일찍이 우리나라의 古今事實울 살피고 輿地와 官制에 이르기까지 一家를 이루었다〉라고 평하면서 특히 沮 의 위치를 이익이 요동지역의 泥河로 비정한 것에 대해 찬의를 표시하였다. 20)

18) 『願齋遺稿』 권 6, 題跋, 「跋安侯鼎福大麗誌」.

19) 『願齋續稿』 권 14, 「年譜」.

(다) 徐命隅 (1716-1787)21) : 이재와의 교류를 보면 이재가 38세 때 조정에 처음 나아간 첫 해부터 당시 참판이던 서명응과 曆象, 曆學에 대해 토론하였다는 사실이 「年譜」에 나온다. 그는 이재가 43세 때 (1771) 영조 앞에 입시하였을 때 이재에 대해 〈실로 박학한 선비〉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22) 이 해는 서명응이 『敦事新督』를 완성한 해인 만큼 아마도 이재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역상과 수리학에 대한 공동된 관심과 조예를 지녔던 두 사람이었던 만큼 신분과 직책상의 간격을 두지않고 밀접하게 교류하였던 것 같다. 23)

20) 위의 책 권 11, 『漫錄』 屯 이재가 남인 안에서도 순암울 존경한 이유는 자신보다 앞서 목천 현감을 지낸 인연도 있었겠지만 순암의 명분증시적 • 보수적 사희사상에 공감하는 바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였으리라 여겨진다. 경학사상에 있어서도 양자 모두 주자학에 경도되어 있었으며 海防論의 제창과 그 내용도 비슷한 면이 있다.

21) 당대의 박물학자로 이름 높았던 서명옹은 예조참판 • 규장각 제학 • 홍문관 대 제학을 역임한 인물로 소론계이다. 19 세기의 실학자 徐有渠의 조부이기도 한 그는 曆象學과 數理에 정통한 인물로서 北學의 비조로 칭해지기도 한다. 문집으로는 『保晩齋集』이 있으며, 영조 47 년 (1771) 예문관 재학시 편찬한 『改事新』가 대표적인 업적이다. 『改事新 書』는 15 권 7 책에 달하는 방대한 책으로 내용은 天地門 이하 醫藥門에 이르기까지 1 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백과사전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類容 이다.

22) 『願齋續稿』 권13, 「行狀」.

23) 위의 책 권 11, 『漫錄』 中에도 판서 서명응과의 象緯說에 대한 토론기사가 나온다. 또 『願齋遺稿』 권2, 「書」에 보면 서명웅이 판서를 하고 있던 때인 1766년 이재가 서명옹에게 보낸 2통의 서간문이 있다.

(라) 洪啓禧(1703-1771) : 실학자로 분류되기는 힘든 인물이지만 학자와 관리로서 영조대에 병조판서 • 이조판서를 역임한 노론계 원로였다. 동시에 『三韻野梁』를 저술한 음운학자로서 이재의 재주를 아꼈으며 학문 적 교류를 하였다. 『理萩新編』에서도 이재는 홍계회가 지은 『삼운성휘』를 가끔 인용하고 있으며, 42세 때 (1770년)에는 홍계희 • 김용경과 『朱子 大典』을 함께 교정하기도 하였다 .24) 홍계희는 영조 24 년 (1748) 通信使行

24) 위의 책 권 14, 「年靖」.

의 正使로 일본사행을 하였는데, 이때 가져온 『伊藤仁齋文集』을 이재에게 빌려주었다. 이는 이재가 일본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약간의 기록을 남기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보여전다

25) 이재의 문집에 나오는 일본관계기사로는 『 知錄』에 「日本海路」와 「日本地 區」, 『理萩新編』 제12권에 「日本四十八字」가 있고, 주목할 만한 기사로는 『願 禪稿』 권10, 『漫錄』 上에 수록되어 있는 伊藤仁 의 학문에 대한 논평이다. 홍미로운 바 있으므로 인용해 보겠다.

〈그 학문이 오로지 陸象山 • 王楊明 • 陳獻章의 三家믈 주로 하며 감히 주자학을 비방하면서 대단한 듯 자처하고 있다. 대개 莊周의 말을 빌립으로써 道門學工夫의 지리멸렬함을 앓고 있다• (중국의) 浙江 • 福建省의 배가 일본에 왕래하 는 까닭으로 중국의 서적이 (우리나라보다) 먼저 그들에게 둘어간 후 비로소 우리에게 오게 되었는데, 『三韻通考』 『性理字義』 『資治通鑑全 書』가 모두 그러하다. 우리나라 서적 가운데 『退溪集』 『芝峰類說』 갇은 책들 또한 倭館올 통해 전해졌다. (그러한 까닭으로) 그들 중에도 또한 정정 글을 숭상하게 되어 이치를 이야기하는 자가 나오게 됨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깝다 陸學에 먼저 물들었으니.>

이재가 일본의 대표적 古學派 儒學者인 伊藤仁 의 문집을 홍계희로부터 빌 려본 것은 학문적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또 그의 고학적 주장에 대해 독실한 주자학자로서 비판한 것도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일본문화의 성장에 대해서도 유교선진국으로서의 문화적 우월감을 바탕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사상계의 동향을 찰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평가에 오류도 있다. 또 伊藤仁齋의 古學을 陸象山이나 隆明學에 가깝다 는 평도 사실과 거리가 있다.

(마) 李家煥 (1742-1801) : 성호의 從孫子 경 제자로서 당시 남인계 실학파의 중심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조의 신임을 받아 대사성 • 형조판서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때 이재와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 문장에도 능했고 조선천주교회 초창기의 핵심적인 인물로서 천주교와 서양과학예 대한 조예가 깊었다. 이재의 「年譜」에 의하면 이재가 49 세되던 해 {1777 년) 조정에서 만나 文章과 典故를 논하였다고 하였다. 토론 내용에 대한 소개는 없지만 양자의 공동관심사가 서양과학이었고

모두 학문적 정열이 컸던 인물들이었던 만큼 보다 깊은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바) 洪大容 (1731-1783) : 홍대용은 북학파 실학자 안에서 그들의 利用厚生의 논리와 자연과학 연구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평가되어 진다.

이재와 홍대용은 김원행 문하의 동문이었다. 이재가 31 세되던 1759 년 미호의 문하에 입문하였을 때 홍대용은 이미 석실서원의 핵심멤버였다. 그런데 이재는 이미 3 년 전부터 석실서원을 방문하였으므로 두 사람의 최초의 만남은 1756 년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서구 과학사상을 수용하는 한편 천문학과 수학의 연구에 상당한 경지를 개척하고 있었던 이 두 사람의 만남은 한국 과학사상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와 교류사를 그들의 문집을 통해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이재가 미호 문하에 입문하였던 1759년은 홍대용이 羅景續을 만나 源天儀와 자명종 제작에 착수하던 시기이다.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이재는 천원군에 있는 홍대용의 籠水片을 방문하였고, 그 후에도 가끔 농수각에 들러 그와 같이 천문기기를 관찰하면서 천문 • 역상 • 수학 등에 대해 토론하였다 .26) 영조 52 년 (1776) 이재가 世子翊衛司 翊贊으로 있을 때에는 사헌부 감찰로 있었던 홍대용을 찾아가 〈律曆 • 象數의 說〉을 논하였으며, 27) 청나라의 曆睿인 『曆象考成』을 홍대용으로부터 빌려보았다. 28)

26) 이재는 농수각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輪鍾記」를 써서 자명종의 제작방법과 과정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였다. 영조 48 년 (1772) 에는 이재와 홍대용이 스승미호를 모시고 흥양으로 廉永瑞가 만든 자명종을 구경하러 같이 가기도 하였다.

27) 『願齋續稿』 권14, 「年譜」.

28) 위의 책 권3, 「答洪泰仁大容密」. 내용은 정조 원년 (1777) 태인 현감으로 나가있던 흥대용에게 이재가 『曆象後編』을 빌려준 데 대해 감사하고 『前編』을 다시 빌려주도록 청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曆象前後編』에 대해서는 河聲來, 앞의 논문, 69쪽 참조.

이상의 기사로 볼 때 두 사람은 20 대 후반 처음 만난 이래 거의 평생

을 두고 교류하면서 자연과학에 대해 논의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특히 천문 역상과 수학에 관해 영향을 주고 받았고, 자명종에 대해서도 홍미를 가져 각기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재의 「輪鐘記」를 보면 그가 시계에 대하여 고대로부터 당시 서양에서 나온 자명종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연구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홍대용의 자명종 연구와 깊은 관계가 있다. 또 이재의 『 이수신편 』 의 「 算學 入門」 「算學本源」 料學問答」 등 수학에 관한 저술에는 홍대용의 『器 解喬用 』 과 비슷한 내용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 활발한 의견교환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 金履安 (1722-1791) : 김이안은 미호 김원행의 아들이자 석실서원의 핵심적인 학자이기도 하다. 홍대용과 김이안은 이재의 평생지우로서 석실서원학파의 학풍을 일구어 나갔다. 특히 김이안에 대해서는 이재의 「年 譜 」나 「行狀」에 기사가 많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인간적인 면에서는 홍대용보다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아) 李德戀 (1741-1793) : 이덕무는 이른바 四檢 書 의 한 사람으로서 서얼출신이며 이재와 마찬가지로 벼슬길에서 별로 현달하지 못했다. 학문적 성향도 이재와 비슷한 백과전서파였으며 철학과 사회개혁론에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재가 이덕무를 직접 만났는지 여부는 기록상 확실하지 않으나 최소한 간접적인 접촉이라도 있었다면 1770 년대 후반 무렵이라고 여겨진다. 죽 1777 년 7 월부터 1779 년 12 월까지 홍대용이 태인 현감으로 재직할 때 이덕무를 태인으로 불러 같이 지냈다. 이 시기는 이재와 홍대용이 깊은 교류를 하고 있을 때이고 이재와 이덕무의 학문적 성향이 비슷했던 만큼 소개했으리라 보여진다. 이 후 두 사람은 서로 상당한 호감을 가졌고 우의를 유지했던 것 같다. 죽 이재가 51세 때 처음으로 의직인 목천 현감으로 나가자 이덕무는 전사 李應鼎에게 편지를 써 당시의 충청 관찰사에게 소개하도록 하였다 .29) 한편 이재도 서얼

29) 위의 책 권 14, 「年 譜」 . 그 내용 을 보면 〈목천 태수 황공은 도학과 문장이 크

고 충실한 큰 유학자로서 실로 오늘날에 있어 마지막 인물이다(李檢 睿 德戀與李進士 應屬密 曰 木川太守 黃 公 道學文 章 慕落大 儒 眞今世之叔度也)〉라고 칭찬하였다.

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의 개혁론을 주장하였는데, 여기에는 이덕무에 대한 배려도 작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 申景濬 (1712~1781) : 전라북도 순창 출신으로 이재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으며 이재와 함께 이른바 호남파 실학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재보다는 빨리 조정에 전출하여 25 년 간 중앙의 淸要職을 역임하였다. 특히 언어학과 지리학에 독보적 경지를 개척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지리서로는 『疆界志』『山水考』 『道路考』, 언어학 관계로는 『訓民正音韻解』 『五 聲 韻解』 등이 있고, 천문학서로도 『 儀表 圖 』『府仰圖 』 를 저술하였다. 이재와는 같은 시기에 조정에 있었고, 특히 언어학 • 천문학 등에 대해 많이 토론하였다. 30)

30) 신경준과 교류 를 한 사실과 토론내용은 『漫錄』과 「年 譜 」에 상당히 많이 기술되어 있다.

(차) 鄭景淳( ?-1795) : 소론 출신의 학자겸 관리로서 문장과 덕망으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다. 영의정 太和의 玄孫이며 藤官으로 관계에 전출한 이후 交河 郡守 • 長城 府使 • 楊州 牧使를 거쳐 형조판서에까지 올랐다. 이재는 37 세 때 (1765 년) 장성 부사로 부임한 정경순을 방문해 경서와 문장에 관해 토론하였다. 이때부터 의기두합하여 이재와 정경순은 평생의 지우로서 사귀었다. 두 사람은 학문뿐만 아니라 사회현실에 대한 문제 등에 대해서 많은 의견을 교환하였다는 기록이 「年譜」와 『 漫錄』에 많이 나온다. 이재의 최초 관직인 장릉 참봉도 정경순이 추천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3) 사상의 특성

이재의 학문과 사상의 성격을 구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저술목록을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後學 金魯洙가 쓴 「行狀」에 나와있는 그의 저술목록을 보면, 『理萩』 『 山雷雜考 』 『 査知錄』 『歷代韻語』『姓氏韻葉』 『性理大典注解』 『九經筋錄』 『 群 訂辨 』 各 幾卷, 『象緯指要』 2 권, 『輿地勝鹿增修起伊』 1 권, 『皇極經 世 昔 四象體用聲音卦數圖解』 1 권, 『國朝喪禮補編後本尺圖說』 1 권, 『輪鐘 記 』 1 권, 『華音方言字義解』 1 권, 『字意混誰辨』 1 권, 『海東異蹟補』 1 권, 『 小學講義』 1 권, 『亂稿』 近 百卷, 『文渠』 幾 十卷등 총 300 권에 달한다 고 한다 .31)

31) 위의 책 권 13, 「行狀」. 『理萩』는 『理萩新編』을 말하는 것으로 23 권이며, 『亂棋』는 57 권, 『文集』은 현재 『願齋遺稿』 12 권, 『願齋續稿』 14 권으로 정리되어 있다. 여기에서 정리된 목록은 기준도 일정하지 않고 빠진 것도 적지 않다. 이 밖에도 10 여 종 이상의 저술이 더 밝혀진 바 있다(鄭誠, 앞의 논문, 155쪽참조).

이재의 학문에 대해 沈定鎭은 〈六經에 근본을 두었으되 百家에 통달하였다. 크면서도 뒤섞이지 아니하고 자세하면서도 번잡하지 않으니 세상에 보기 드물게 박학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32) 그는 또 항상 〈군자가 되어 한가지 일이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부끄러운 일이다(君子恥一物不知)〉라고 할 정도로 格物致知的인 박학성을 중요시하였다. 33) 실제 저술목록과 『이수신편』 『자지록』 『문집』 등을 통해 볼 때, 그의 관심 분야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역상학 • 산학 • 기하학 • 역사학 • 지리학 • 경세치용학 • 국어학 • 자연과학 등 다양하고, 저술의 양은 浩潮하여 당대의 박물학자 내지 백과전서파라고 할 만하다.

32) 위의 책 권 13, 「行狀」• 〈本六經而達百家 大而不雜 細而不繁廣世卒有 盡 知也〉

33) 이 정에서 정조대 당시의 박물학자로 이름높았던 서명응과 이덕무가 이재를〈博學之士〉라고 한 사실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개략적인 고찰을 통한 이재의 학문 내지 사상의 특성을 들어보면 보수적인 성리철학과 소극적인 사회개혁론, 박학 지향과 실용성 중시, 국학의 연구 등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가) 보수적 性理哲學

이재의 학문과 사상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조선후기의 대부분의 유학자와 마찬가지로 經學 특히 性理學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있어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재는 성리학에 있어서 철저한 朱子尊信論者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는 尹鎖나 朴世堂의 고학적 경전해석에 대해서는 극렬하게 비판하였으며 六藝學에 대해서도 소극적이었다. 〈古學〉이 실학파의 경학적 특성이라고 볼 때 이재의 성리학은 그와 정반대이다. 이 점에서는 석실서원의 동문인 홍대용과도 아주 대조적인 면모이다.

구체적인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이재는 성리학을 연구하는 기본자세에 대해 〈성리학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주자 이후에 이미 논의가 정해졌으니 후세사람들은 오로지 마땅히 독실히 믿고 체험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34) 또 박세당과 같이 朱子說에 대해 비판하거나 새로운 학설을 제시하는 데 대해서는, 〈후학들이 先儒의 說을 대함에 있어서 만일 의십스러운 바가 있으면 마땅히 스스로 적어둠으로써 잊어버릴 것에 대비할 따름이다. 만일 (새로운) 말을 내세워 천하를 바꾸고자 함은 어리석지 않으면 망령된 것이다〉라고 하면서 비판하였다 .36) 이와 같이 그는 주자의 설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허

34) 위의 책 권 13, 「行狀」. 〈至於論性理則 以爲朱子 友 底有定論 後人但當篤信體 驗而巳〉

35) 위의 책 권 13, 「行狀」 및 권 14, 「年譜」. 〈後學之於先儒說 如有可疑則 惟當私荷記 以偏遺忘而已 若欲立首以易天下 非愚 妄也〉 이는 이재가 38 세 때 鄭東鎭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나온 주장이다. 이재는 철학적으로 특히 우암 송시열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또 그의 조부의 스승인 농암 김창협은 박세당을 비판하는 데 앞장 섰던 인물이다. 때문에 이재는 朱子一尊主義에 충실한 반면 타학문에 대한 排他性(關) 면에서 아주 치열하였다. 이재가 박세당을 비판하

고 특히 송시열과 관련하여 그를 격렬히 비난한 것은 그의 당색과 학맥으로 불 때 당연한 바 있다.

락하지 않는 철저한 朱子尊信論者일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다. 특히 고학적인 경전주석으로 한국 유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접하고 있는 윤휴나 박세당의 고학적 經說에 대해서는 맹렬하게 비판하였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평생을 두고 변하지 않았던 것 갇다. 51 세 때 金光漢과 朱陸 學 을 토론할 때에도 같은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죽 〈주자를 존중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집안이 평안하지만 주자를 배척하면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집안이 위태롭다〉 36) 라고 단정하면서 명나라가 망한 이유도 중기 이후 주자학을 배척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 윤휴 • 박세당 • 鄭齊斗 동 주자의 설에 비판적이었던 학자들을 비판하면서 〈주자는 하늘의 명을 받은 이로서 이를 따르면 성현이 되고 배척하면 요망한 역적이 된다〉고 하였다.

36) 위의 책 권 14, 「年 譜 」. 〈 尊 朱者國治而家安 背 朱川國亂而 家 危〉

물론 실학자들이 다 철학적으로 脫性理學的이거나 克朱子的인 지향을 띠는 것은 아니다. 조선후기의 실학은 철학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현실사회의 모순에 대한 제도적 대안의 모색이라는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실학이 철학적으로 체계화되는 것은 그러한 개혁론들이 양적으로 충분히 축적된 다음 질적인 변화로 옮겨지는 단계로서, 시기적으로는 18 세기 말 내지 19 세기에 들어와서이다. 구체적으로는 홍대용 • 정약용 • 최한기 등의 단계에 와서 비로소 주자성리학과는 다른 철학체계를 형성하였다고 생각된다. 그 이전 단계의 실학자들은 대부분 사회사상에 있어서는 주목할 만한 개혁론을 제시하면서도 철학적으로는 여전히 성리학을 연구하였고 주자설을 정면으로 거부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原始經典에의 回歸〉라는 방법을 통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주자학에 대해 간접적인 비판을 하며 〈실학적인 지향〉을 하였다는 접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런데 이재의 경우에는 朱子一尊主 義 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않는 철저한

〈주자학자〉였다고 보여전다.

후술하겠지만 그의 사회사상도 성리학에 근본을 둔 明本源主義에 입각하고 있는 만큼 성리학자들의 개혁론과 다를 바가 없다. 중세체제나 주자성리학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나 비판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단지 현실에서의 末幣에 대한 비판과 운용상의 개선을 논의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 博學志向과 利用厚生의 정신

이재의 학문의 가장 큰 특칭은 박학성이다. 그가 〈君子恥一物之不知〉라고 항상 강조한 바와 같이 그는 격물치지적인 박학을 중시하였다. 특히 종래 성리학자들이 餘技로 취급하거나 雜學이라고 천시하던 천문학이나 역법 등 자연과학에 집착한 것은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37) 동시에 그의 박학에는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이나 지적 유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학문에 대한 지향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역상학에 뜻을 두고 탐구한 동기에 대해 그것이 국가의 정치에 시급히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38) 죽 천문역상학은 농업을 주된 산업으로 하는 농본국가에서는 가장 긴요하고 실용적인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학자들이 이 시급한 학문을 소홀히

37) 현실에 대한 변화와 개혁을 도모하였던 실학파의 학문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칭의 하나가 백과전서파적인 성향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실용적, 이용후생적인 학문적 지향과 직결될 뿐만 아니라 博學性그 자체로서 이미 그러한 것을 경시하였던 당시의 정몽주의적 학문 경향에 대한 적극적 대웅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백과전서파라고 할 때 그 전형은 18 세기 프랑스의 사상가인 디드로를 중십으로 전개되는 계몽사상의 한 특칭으로 이해되지만, 대체로 자연과학의 연구에서 훌륭한 업적을 낸 철학자를 백과전서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7, 8 세기 동아시아에 있어서도 자연과학에 깊은 관십을 가전 철학자들이 있었다. 중국의 方以智 • 王船山 • 薰東原, 일본의 三浦梅園 갇은 이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상당수의 실학자들이 자연과학에 관십을 표하였다. 한국실학사에 있어서 백과전서파라고 부를 수 있는 학자들로서는 이익 • 안정복• 서명옹• 황윤석 • 흥대용• 이덕무· 이규경 • 최한기 등을 들 수 있다.

38) 里薇新編』 권 3. 〈接飮天授時之法 在帝王政令 誠急務也〉

하는 상황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재는 40 세 때인 1768 년 鄭持淳과의 토론에서 鄭이 주역과 역상학에 대해 질문하자 〈그것은 천고에 걸쳐 道學의 근본〉이라고 답하였다. 또 역상학의 가치에 대해 묻자, 이재는 〈역대의 史 畵 는 각기 天文志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유학자의 격물치지하는 한 단서이며, 明個둘이라면 서로 함께 강구하여서 방해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39) 또 算學울 연구함에 있어 그는 순수학술 차원에 그치지 않고 양곡과 금전을 계산하는 방법〔栗布〕, 세금을 산정하는 방법 〔表分〕, 토목공사에 소요되는 인부와 비용 등의 산출방법〔商功〕, 물자수송에 드는 비용과 노역의 산출방법〔均和 등 수학적 지식을 실용적으로 응용하는 독창적 업적을 남겼다. 도량형제의 통일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여기에는 이재의 실용적인 정신이 바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죽 그의 〈박학〉에는 당시의 지적 풍토에 대한 강한 반발과 함께 실용적인 학문에 대한 지향성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40)

39) 『願齋續稿』 권 13, 「行狀」.

40) 이러한 자연과학에 대한 지향이 그의 성리철학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어 주목된다. 죽 이재는 홍대용과 함께 人物性同 論 에 바탕하여 도덕적 윤리의 세계로부터 物理의 세계로 확대해 나가는 쪽으로 실학사상 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이러한 경향은 〈人之性〉과 〈物之性〉의 상호연관성을 강조하면서 象數學의 탐구를 권장하였던 김원행과 그의 영향 아래에 있던 석실서원의 학풍이 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자연관과 독자적인 物 論 은 이후 북학파 실학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고, 이 바탕 위에서 서구의 자연과학에 대한 연구와 수용이 가능했으며 이용후생의 개혁안도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金泰 , 『洪大容評傳』(민음사, 1987) , 유봉학, 學思想의 형성과 그 성격―滿軒 洪大容과 燕巖 朴址源올 중십으로」 (《韓國史論》 8집, 1982) , 鄭誠禧, 앞의 논문참조.

이재의 박학 지향과 자연과학 연구에 있어서 주목되는 바는 西學에 관한 연구와 입장이다. 이재가 서양서적을 언제부터 보았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 가장도서 속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석실서원에 나가면서 부터 보았을 수도 있다. 한편 그가 서양서적을 집중적으로 보았던 시기는 그의 나이 38 세인 1766 년경부터인 것 갇다. 그가 본 漢譯西學 睿 는

『職方外紀』 『天主實義』 幾何原本』 新法曆引』 曆象考成』 曆象考成後編』 『 曆象考成 上下編』 『數學問答』 『數理曆象』 『 數理精羅 』 등이다. 41) 이 시기는 그가 처음으로 관직에 나간 때인데 이후 10 여 년간이 그의 학문생활에 있어서 철정기이기도 하다. 저술도 40 세에서 43 세까지의 시기에 가장 많다.

41) 각 서적의 내용에 대해서는 정성희의 앞의 논문 참조.

서학에 대한 인식을 보면 그는 서양과학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었다. 특히 서양의 천문학과 역학 및 수학에 대해서는, 〈대개 서양사람들은 曆算과 數法 등에 있어서는 천고에 아주 뛰어나다. ……역산의 여러 가지 법은 서양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이는 아마도 바꿀 수 없는 이론일 것이다〉라고 하면서 극찬하였다. 42) 그러나 천주교에 대해서는, 〈처음에 나는 天主 實 義가 가히 볼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그 문장을 살펴보니 심히 천박하다. 그 말하는 바 천당지옥설이나 영혼불멸설은 아주 해괴하다〉 43) 라고 하면서 부정적으로 평하였다. 결론적으로 그는 〈성현의 성리학문의 설에 있어서는 주자학을 숭상하는 것보다 나음이 없다〉고 하면서 서학의 종교적 내지 정신적 측면의 수용을 거부하였다.

42) 『頭齋續 稿 』 권 11, 『漫錄』 中.

43) 위의 책, 같은 곳.

한편 이재는 학문연구방법에 있어서 귀납법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특히 『이수신편』이나 『만록』의 경우 철저하게 고증학적인 방법에 입각하여 서술하고 있다. 『이재난고』 『이수신편』 『만록』 등을 보면 그의 학자로서의 치밀성과 성실성이 약여하다• 평생에 걸친 자료수집과 정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이며 새로운 지식의 흡수에도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44)

44) 그런데 『理萩新編』의 경우 중국학자의 학설을 소개하는 데 치중하였고,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 를 제시한 바가 아주 적다는 정에 아쉬움이 있다. 저술이라기 보다는 편집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그런 정에서 체제의 세련성은 부족하지만 『漫 錄 』이 오히려 낫다. 여기서는 어떤 주제에 대해 동서고금의 諸說

올 인용하고 비교 분석한 다음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특히 〈投說〉 속에는 당시 사회에 대한 이재의 예리한 관찰력과 비판의식이 표현되어 있어 오히려 가치가 있다.

(다) 國學의 연구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당시 사회의 여러 모순에 대한 사회개혁론을 제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문화에 대응하여 조선의 전동문화를 재발견하고자 했던 이른바 國學의 연구이다. 유교사상이 전래된 이래 한국에서는 유교사상의 문화적 보편주의에 입각하여 유교적 내지 중국적인 문화를 보편적이고 우수한 것으로 인식하는 대신 한국의 전통문화를 특수하고 후진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유교사상사에 있어서도 가장 강렬한 중화주의적 성격을 띤 주자학의 영향을 받자 이러한 慕華主義 내지 문화적 사대주의 경향이 강화되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와서는 이러한 세계관에 변화가 오게 되었다. 17 세기 초반 이래 유교문화의 정통을 우리가 계승하게 되었다는 小中華意識이 생겨나게 되었다. 17 세기에서 18세기 전반기까지 풍미한 이 소중화의식은 아직 崇明反淸 인 성격을 충분히 탈피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18 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익 • 안정복 • 홍대용 • 박지원 • 정약용 등의 실학자들에 의해 그러한 한계성이 극복되면서 〈근대적 민족주의 의식〉의 싹을 보게 된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중국문화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우리 문화에 대한 가치의 재발견, 죽 역사· 지리 • 언어 • 민속등전통문화에 대한연구가활발히 진행되게 되었다.

이 접에 있어서 이재는 적지 않은 업적을 남기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지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에 관한 기록을 보면, 「東園歷代享年圓」 「東國地誌룡」 「本朝祖宗眞殿事實辨」 「越松黃氏先跡考」 (이상 『자지록』) 「擬增修東國輿地勝覽例引」 「箕子朝鮮及馬韓世系」 「麗史雜抄」 「三韓所統七十八國名號」 · 「論三韓古跡蹟」 「渤海國 5 京 15 府62 州」 「雜錄」 (이상 『이재유고』) 「金玉土石草木考」 「溫泉淑泉及異蹟考」 (이상 『이재속고』) 『이수신편』 제 6 권 「地理 내精沙」 등과 그밖에 『만록』

에서의 기사가 있다 .45) 비록 체계적인 저술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는 서양과 중국 및 우리나라 역대의 史와 지리서를 참고하면서 한국의 역사 • 지리에 관해 연구하였다. 특히 백제와 발해에 대해 별도의 저술을 남겨 깊은 관심을 가졌고, 연구방법상으로는 方言 分析을 통해 역사를 복원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였다. 죽 그는 「論三韓古跡蹟」, 「三韓所統七十八固名號」에서 삼한 각국의 固號 • 地名 • 官制 등에 대해 고찰한 후 역사지리를 연구함에 있어서 음운학 내지 언어학적 고찰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46)

45) 예를 들면, 「東國輿地勝覽」 「箕子八條」 「帶方軍의 위치」 「女眞族 위치」 「三韓의 역사」 「白頭山定界」 興德邑誌」 「姜郡貸將軍」 「慕制」 「道說國師」 등과 우리나라의 여러 제도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한 기사가 많다.

음운학과 어학에 관한 그의 연구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 방면에 관한 저술로는 『이수신편』 12 권과 20 권, 그리고 『雜著』 등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으로는 「華音方言字義解」 「字毋辨」 「訓民正音」 「文字音義及字母考」 「韻學本源」 등이 있다. 「화음방언자의해」에서는 과학적인 비교방법으로 우리말의 어원을 연구하였고, 「자모변」 「운학본원」에서는 음운학적인 입장에서 훈민정음을 중국과 일본문자와 비교하였다. 또 최세진의 『四聲通解』를 참고해서 연구한 「通考四聲圖」도 학술적 가치가 높은 연구서이다• 음운학과 국어학에 대한 그의 연구는 비교연구의 효시가 되며, 여암 신경준의 그것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것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한편 『자지록』과 『잡저』에 수록되어 있는 「深衣會通新制」 「山雷深衣制式」 「婦人繪頭制度說」 등은 한국 복식제도사 연구에 귀중한 참고문헌이라 할 수 있다.

46) 『願臺續稿』 권 11, 『漫錄』 中.

〈余飯得方 言譯 字之說 而溫以質諸東方三國高麗諸史 則所謂方言難有古今之差而亦不基大異 隨處堅堅若合符節 卽中世誤析誤合者 供可證正矣 後之留효東史者無以余言爲不信則幾矣〉 이러한 방법은 중국어 • 몽고어 • 한국어 등에 두루 밝았던 이재로서야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4 社會思想

이재의 사회사상과 관련한 자료로서는 『이수신편 』 16 권 「君道」 17 권 「治道」 『 자지록』 『 잡저 』 『만록』 등이 있다. 「군도」의 목차를 보면 總論 • 君德 • 聖學 • 儒嗣 • 君臣 • 臣道의 6 항목으로 되어 있다. 「치도」는 總論• 禮 樂·宗廟·宗法·盆法·封建·學校·用人•人才·論官·莊政·陳評·法令 • 貸罰 • 王伯 • 田斌 • 南臥縱橫岡 • 定經界之制 • 造都部之苗 • 爲溝遣試車 馬之制·邪內六鄕勸民成俗之制·六鄕六遂會民出兵之制·九畿•九服•封疆 • 理財 • 節儉 • 眼植· 禎異 • 論兵• 論 • 夷秋 등 32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의 내용을 보면 통치의 정신과 원리에서부터 관료제도 운용 • 토지제도와 사회제도 • 향촌자치제 • 재정운용방안 • 대의관계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군도」와 「치도」의 서술내용은 『이수신편』의 내용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주로 고금의 명언을 수록한 것이다. 그것도 대부분 송대 성리학자들의 일반론 내지는 극히 원론적인 말을 그대로 옮겨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 국내학 자로는 지봉 이수광의 말이 한 번 인용된 것뿐이다. 인용되는 사례도 중국 고대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역사 속의 이야기는 물론 당시 조선의 현실전단에 바탕한 내용이나 개혁안의 제시는 전혀 없다. 이 접에서 이수신편』의 「군도」와 「치도」는 이를 통해 이재의 관심범위를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의 사회사상을 구명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로서는 적당하지 못하다.

이에 비해 『자지록』의 「本國經濟大要」 「吏曹」 「兵學指南陣法變通圖」 「穴錄」「隨錄」 등의 기사와 『잡저』의 「月斗石說」 「錢貨輕重說」 등이 그의 경제 및 군사사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또 『漫錄』과 「年 譜 」 「行狀」 등에는 제목이 붙어 있을 정도의 체계적인 기사는 없지만 주목할 만한 내용이 많다. 특히 『만록』에는 이재의 사회인식과 거기에 바탕을 둔 나름대로의 대책 제시 등이 되어 있어 그의 사회사상을 구명하는 데 가장 좋은 자료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상의 자료를 바탕으로 이재의 사회사

상을 행정 • 과거제, 사회관습, 국방에 대한 개혁안을 중십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행정 및 과거제 개혁안

이재의 행정 및 과거제 개혁안은 〈救時之策〉의 형태로 제시되어 있다. 그의 救時策은 상소문으로 조정에 진언된 것이 아니고, 사적인 토론과정에서 제시된 형태로 되어 있다. 「연보」와 『만록』에 보면 구시책을 제시한 기사가 7 번 정도 나오는데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가) 39 세 (1767 년) 鄭景淳과의 토론

이 해 2 월 이재는 정경순을 방문하여 토론하면서 도량형의 불통일에서 오는 폐해가 큼을 지적하고 도량형을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7) 이어 이재는 군사제도의 개혁, 무능한 관리의 도태, 內 需 司와 宮房田의 정리와 엄격한 운용을 동한 宗室의 비용낭비 억제 등의 변동책을 제시하였다.

47) 이에 관한 자료로서는 『願齋遺稿』 권 12, 『雜꿈』, 石說」, 「箕貨輕重說」이 참고된다.

(나) 40세 (1768년) 鄭持淳과의 토론

이 해 6월 義盆庫 奉事로 재직하고 있을 때 정지순과 토론하였다. 정지순이 이재에게 經濟事物에도 항상 뜻을 두는가 라고 묻자 이재는 스스로 현실사에 어둡고 실생활에 적합치 않은 선비〔辻儒〕라고 자처하면서 논할 바가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또한 생각은 했었다면서 은 먼저 만물형성변화의 근원을 살펴야 하는데 실로 쉽지 않다. 오늘날 官制 • 兵制 • 田制를 논하는 자가 아주 많지만 반드시 먼저 백성들의 재산을 통제하고 나라의 근본을 굳건히 하고 난 후에야 餘技로 논할 수 있다. 오늘날 허다한 典例文字가 많으나 대부분이 末이고 本이 아니

다. 큰 줄기가 서면 모든 것이 스스로 풀리게 된다〉 48) 라고 대답하였다. 죽 그는 明本源主義의 입장에서 당시의 제 개혁론에 대해 그것이 끝된 것에 불과하며 근본이 아니라고 하며 큰 줄기가 서면 나머지 구체적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의 큰 줄기는 근본을 바로 하는 것으로 이념적으로는 주자성리학이요, 체제로는 조선왕조의 통치체제 바로 그것이다. 근본이 제대로 서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을 정상적으로 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재의 이 논의는 어디까지나 제도적인 개혁이 아니라 운용의 개선을 도모하는 차원에 머물고 있다. 또 그는 개혁의 순서에 있어서도 백성들의 재산 내지 산업을 통제하고 나라의 근본인 재정을 튼튼히 한 다음에야 논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백성보다는 입금 내지 나라의 입장에 서 있었다. 당시 관에 의한 민생의 피폐상에 대해서 거의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다) 41 세 (1769 년) 영조에게 건의

위와 같은 입장에 서 있었던 이재에게 있어서 정치의 개혁은 무엇보다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49) 이 해 6 월 宗簿寺 直長으로 재직시 영조에게 入侍할 때 이재는 다음과 같이 진언하였다. 죽 제도개혁보다는 임금의 마음이 근본에 바탕하고 근원을 깨끗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그러한 후에 비로소 정치에 힘써지고 公道가 넓혀지며 敎化가 존승되고 儒術이 중시되고 인재가 모이며 言路가 열리고 侍門 울 막고 廉恥가 길러지며 食誠이 막아지는 등 개선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는 임금은 억조창생의 위에서 威福의 권한을 통제하는 자로서 두려워할 바는 오직 하늘뿐인 존재라고 파악하였다. 50)

48) 『願齋續稿』 권 14, 年譜」. 〈惟大人先格萬化之源 旦固未易 如官制兵制田制可者基多 而須先制民之産 固邦本然後餘可 議 也今日 許 多典例文字非不然 而 擧 皆末也非本也 國家須先祐私之一字 大綱底 擧 則萬目自張矣〉

49) 위의 책, 같은 곳. 〈爲治之道 自人主一心〉

50) 위의 책, 같은 곳. 〈爲今之計 莫若先格聖心端本澄源 然後務 實 政快公道 崇 敎化

重 儒術收人才開 言 路塞侍門 養 廉恥銅食誠 一切立法 必自大臣咸臣而始 則紀綱不患不立 災異不患不消矣 大抵 人主處億兆之上 制威福之權 其所嚴長 惟天而已〉

갈은 내용이 行狀」에는 다음과 갇이 기록되어 있다.

〈 當 私 議 經國遠飮而曰 先格聖心端本澄源 然後務 實 政依公道崇敎化 重 信術收人才 開 言 路塞侍門 養 廉恥銅食誠 一切立法 必自公宰勤咸而始 則紀綱不患不立 災異不 患不消矣〉

물론 이 내용은 왕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기 때문에 왕의 마음을 바로잡도록 충언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측면도 있지만 이러한 이재의 생각은 거의 일관되어 있는 것 갇다. 「행장」에 보면 이 건의에 이어서 보다 구체적인 안을 제시하고 있다. 죽 경비운용에 대해서 듣고 절약방안을 고하여 말하기를, 〈급하지 않은 관리를 없애고 쓸데없는 경비를 아끼며 宮房에서 折受(임금에게서 자기몫의 땅이나 결세를 메어 받음 ; 필자 주)하는 것 중에 마땅히 파해야 할 것을 폐해서 절약하면 손익간에 얻는 바가 있을 것인죽 나라의 재정에 여유가 생기고 백성들이 곤란함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51 )

51) 앞의 책 권 13, 「行狀」. 〈聞經用告芝 曰 損不急之官 借無用之費 能宮房折受之當 儒者 節約得中有所損益 則國舒用而 民不受困矣〉

(라) 41 세 (1769 년) 〈論科制更定〉

이 해 11 월 이재는 과거제 개혁에 관해 논하였다. 그는 당시 有力者가 文翰의 一大機要를 망라하는 현상을 우려하면서 모두에게 평등하게 시험에 웅시할 기회를 주고자 하는 과거제의 취지가 유명무실해 지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당시 과거제의 운용실태가 문제가 많음을 비판하고 본래 취지에 합당한 운영을 촉구하는 것이었다.52)

52) 위의 책 권 14, 「年 譜 」. 이 기사는 다른 사람의 과거제개혁안에 대한 논평적인 성격의 글이다. 요컨대 당시의 과거제 운용실태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면서도 개혁안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전망을 하였다. 상하관리들의 의식개혁이 뒤따르지 않는 제도개혁은 별무효과라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주나라의 제도가 있다한들 어찌 쓸모가 있겠는가 하는 한탄올 하기도 하였다.

(마) 42 세 (1770 년 ) 〈親策十條〉

이 해 9 월 8 일 영조가 친히 신하들을 모아 策文울 지어보게 하였다. 이에 이재가 時葬十條룰 건의하였다. 여기서 이재는 영조에게 〈청컨대 다시는 아래로 실무자들이 할 일을 하시지 말고, 官方울 명령하거나 과거를 남발하시지 말 것이며, 잦은 행차로 안해 비용을 소모하지 마십시오〉 53) 라고 하였다.

53) 위의 책 권 13, 「行狀」. 〈 踏 勿復下行有司之 事 勿令官方科 擧 之溫額 勿復顔數動鷲以致託費〉 이때 參試官 元仁孫이 그 내용을 보고 놀라 소매에 숨겨가지고 가버렸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만록』에는 보다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죽 근래 과거가 너무 자주 행해지고 官方(관리가 지켜야할 규율 내지는 관리가 자기직무를 관장하는 법례 ; 필자 주)이 너무 남용되기 때문에 백성들이 곤궁해지고 재정이 고갈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재는 여기서 과거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式年試보다 別試가 造設되어 운용되는 것에 대해 맹비판하였다. 54) 그 결과 식년시의 권위가 떨어지고 별시가 더 중십이 되었으며, 지방에 있는 응시자들은 아주 불리한 대신 서울 부근 사람이나 유력자의 자제에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재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불만이라고도 여겨지는데, 이것은 실제에 있어서도 큰 부작용을 초래하고 과거제를 유명무실하게 하는 큰 폐단이 되었다.

54) 위의 책 권 11, 『漫錄』 屯 〈一條則曰 登以堂堂之尊 下行有司之 事 平 如浮塾煥競 一條則日 近來科 擧 太濱 官方多溫之致 如民窮財鳩 一條則日 當 今外方田政額之郭 已不勝道 而旦如殿下陵殿宮園之傾行 難出於聖慕之無窮 一番動 鷲 浮費幾何〉

(바) 46세 (1774 년) 〈救時之策〉

이 해 7 월 이재는 미호 김원행을 조문하고 서울로 돌아와 同道文官 5,6인과 이야기하는 도중 구시지책을 제시하였다. 이때는 그가 과거제를 완전히 포기하고 귀향하였던 직후였기 때문인지 가장 대담하고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였던 것 갖다.

그 내용을 보면, 〈오늘날의 제 일 중요한 바는 오직 먼저 萬化의 根源을 바로잡은 연후에 도모할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大人을 기다려 온 후에 살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治道의 근원을 〈格萬化之源〉 • 〈格君心〉 • 〈風化爲本〉에 두는 지론을 주장하였다. 이어 餘事로서 말해본다면 하고 내의정에 걸쳐 나름대로의 개혁안을 제시하였는데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亢官의 油泳와 비용절감 : 나라의 재정이 심히 군색한 만큼 급하지 않은 관리를 도태시키고 쓸모없는 비용을 축소해야 한다.

둘째, 과거제개혁 : 明經과 製述울 半分하고, 또 『朱子私議 』 에 의거하여 매 式年試마다 하나의 경전만을 보게 한다면 과거를 보는 선비의 경쟁함에 있어 막힘이 줄어들 것이다.

셋째, 지방행정기구의 축소 : 外方의 경우 小縣을 병합하고 아주 커서 통치하기 힘든 邑은 혹 營長에게 떼어 주고 界首官으로 겸하도록 한다.

넷째, 군사제도 정비 : 중앙에 있어서는 五衛司軍職衛門의 경우 乙卯倭變과 임진왜란 이래 影職이 많이 생겼는데, 이를 도태시키고 감축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옛날 제도에 따라 군병을 五衛司에 돌려 實職으로 하게 하고 새롭게 세워진 軍門은 혁파하는 것이 옳다.

다섯째, 중앙행정기구의 축소 : 供上衛門의 경우 司 壅 院 하나만 납기도록 하는 것이 옳다. 陵官에는 陵鹿署롤 설치하여 그 관원이 총괄하도록 하며 때에 따라 두루 살피고 수호하면 될 것이다. 宗簿와 宗親府는 병합해야 한다. 예문관 • 승문원 • 춘추관·홍문관의 장은 겸하도록 해야 한다.

이재는 이상과 같은 조치들이 시행된다면 국가의 재정에 여유가 생길 것이며 백성들의 힘이 크게 곤해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55)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대개 행정 • 군사기구의 축소와 효율적

5) 위의 책 권13, 「行狀」. 〈方今第一 義 惟先格萬化之源 然後可以有所飮爲 然此須 後幾矣 試以餘 事論 之 國無偉薔 經 費其磨 而不急之官 無用之費 乃如彼若多 先須只留大比 科使明經製述半分 而又依朱子私 議 每式年各專一經 則科儒之拜續 庶可少 塞 矣 外方貝 合小縣而竝之 其最大難治之邑 則或析之營將兼于界首官 則

可矣 內朝 如五衛軍識衍門 自 乙 壬辰以來巳成 影職留亦何爲 泳減可也 不然 依古制歸軍柄於五衛使 爲 實 織而新立之軍門革麗可也 又如供上衍門 只留一司廳院 可矣 又如陵官 只 設 一陵度署官 員 而總之 使之以時周審守 護 可矣 宗簿與宗親府 竝 之可矣 禮文承文春秋與弘文相俳可矣 凡若此類試令節酷셸中有所損益 則國用可而 民力不至大困矣〉

운용을 통해 경비절감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과거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서 앞의 救時策들과 대동소이하며 특별한 개혁안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그의 주장을 집대성한 느낌을 준다.

(사) 50 세 (1778 년) 〈論治道〉

정조 2 년인 이 해 8 월 이재는 金鐘厚와 〈治道〉에 대해 토론하면서 당시의 폐해로 科擧法과 食誠律을 들고 아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과거제에 旗擧制를 보완할 것을 주장하였다. 천거를 통해 田制 • 法律 • 兵法 등 각 부문에 재능 있는 인사를 고루 등용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그렇게 하면 천하의 경륜이 성대해 질 것이라고 하였다. 56)

56) 위의 책 권 14, 「年 譜 」. 이재의 과거제 개혁론은 반계 유형원이나 성호 이익의 그것과 유사한 정이 많다. 반계도 과거재 대신에 貢擧 制의 도입 을 주장하였으며, 성호는 과거제 개혁안으로서 〈科 舊 合一〉을 강조하였다. 이재가 이들 개혁 안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재가 이 두 사람의 개혁사상 윤 존중하였던 만큼 참고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된다.

이상 이재의 개혁안을 보면 체계성이나 독창성이 부족해 보인다. 이 정도의 개혁안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제시된 바이며, 이른바 〈실학적 개혁론〉과는 거리가 있다. 또 그의 주장은 정식으로 국가에 제시된 형식도 아니었고, 대부분 주변의 사람들과 의논하는 단계에서 나온 것이다. 국가의 고위직에서 정책을 논의 • 운영한 경험이 없었던 이재로서는 국가경영적인 차원에서의 제도개혁안이나 당시의 사회모순을 구조적인 문제로 파악하는 시야를 갖추기 어려웠던 것 갇다. 그의 개혁론이 행정운영상의 부분적인 문제에 국한되어 있고, 상당 부분은 자신의 체험이나

입장이 반영되어 있는 점도 이에 기인한다고 여겨진다. 이재의 논의 속에서는 당시 농촌경제의 기본문제인 토지소유관계에 대한 개혁안이나 도시 상공업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또 영 • 정조기 급격하게 변동하고 있었던 사회저류의 움직임에 대한 인식이 박약하였으며, 그들이 겪고 있었던 제도적인 질곡을 의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실학자들과는 대조적이다. 농촌문제에서는 地主的인 입장에 서 있었고, 공업과 상업면에서는 官營 중심의 기존 질서를 옹호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 점은 그의 다른 救時之策에서도 마찬가지이다. 57)

57) 토지제도에 대해서 『理萩新編』에서 중국 周代의 井田制 • 箕田制롤 소개하기도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이를 지식으로 이해하였을 뿐 당시 조선의 토지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갇다. 그는 기존의 토지제도는 그대로 인정하였으며, 수취관계의 모순에 대한 제도적 개혁안도 제시한 바가 거의 없다. 오직 節儉과 운용의 개선을 통한 국가재정의 안정을 우선적으로 도모하였을 뿐 이다. 民力에 대한 언급도 있기는 했지만 이차적이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萬化의 根源을 바로 잡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고, 제도개혁은 〈餘事〉로 인식하고 있음도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만화의 근원이란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고, 아래로는 백성의 풍속을 교화하는 것이다. 요컨대 明本源主義에 입각한 〈위로부터의 의식개혁〉이 그의 사회사상의 본질이다. 위로부터의 제도개혁에도 소극적이었고, 밑으로부터의 개혁에 대해서는 관심은 물론 기대도 하지 않았다. 58)

58) 年 譜 」와 行狀」에 의하면 그는 항상 정치의 근본은 풍속의 교화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常謂 治道當以風化爲本).

(2) 再隊禁止 • 庶壁差待 • 奴妹世襲制 批判

이재는 재가금지 • 서얼차대 • 노비세습제 등 법률이나 사회적 관례로 지켜져 왔던 악습에 대해 그 폐해를 논하면서 철폐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재는 『만록』에서 이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검토하면서 이러한 비인간적 제도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59)

재가금지 문제에 대해 이재는 國쿠l]에 고려 말의 풍습을 없애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으로서 본다면 그러한 우려는 기우일 뿐 고려 말 재가하기 위해 부녀자가 지아비를 살해한 사건은 그 여자의 性行의 善惡에 연유할 따름이지 재가금지 여부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중국에서는 宋代 程子 • 朱子 이래 재가금지롤 논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당시 개가를 못한 부녀자들이 실은 노비나 근친들과 음행하는 현실을 지적하였다. 우리나라의 재가금지법은 너무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비판하면서 고금에 남자들의 재취를 금한 바는 왜 없는가 라고 반문하였다. 그는 또 우암 송시열이 재가 허락을 주장한 예를 인용하면서 조선후기 당시 억지열녀들이 양산되는 상황을 애석해 하였다. 그는 당시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는 이러한 비인간적 제도와 그나마 실질적으로 지켜지지 못하는 위선적인 실상에 대해 매우 냉소적으로 보았으며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러한 모순을 터주는 것이야말로 어전 정치가 마땅히 해야 할 바요 우선적으로 변동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60)

59 ) 『願 類稿』 권 10, 『漫錄』 上. 여기서 이재는 부녀자 재가금지와 서얼차별제도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서술방식은 먼저 제도의 유래와 관련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금의 제도 를 살펴보고, 구체적인 사례를 나열한 뒤 자신의 의견을 〈余日〉, 〈接〉, 〈 躍 接〉 등의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부분은 그의 고증적이고 실증적인 학문방법이 약여한 대목이다. 특히 중국과 우리나라의 각 시대별 재도와 변천상, 해당되는 구체적 인물과 사례, 종실과 신분에 따른 제도적 차이정 등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어 서일과 재가문제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이재는 또한 재가녀 자손들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성종 대부터 재가녀 자손을 淸顯職에 끼지 못하게 함으로써 신라 • 고려 이래 의 재가풍습은 변했다고 지적, 그 제도 자체의 취지는 긍정하면서도 예의적인 경우를 인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지금은 마땅히 법령을 고쳐 일찍이 과부가 되어 쫓겨 나와 의탁할 곳이 없는 자의 재가를 허락하고 그 자녀는 차별제도에 예의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

60) 위의 책, 같은 곳. 〈此尤仁政之所 當 先令 變通 也〉

또한 仁政의 한 變通이라고 하였다.

서얼차대에 대해서 이재는 『만록』에서 그 유래와 연혁에 대해 서술하였다. 그는 서얼차대에 의한 당시의 현실적인 폐해에 대해 지적하면서 사대부가의 자손들 중 특별한 재주가 있는 자라도 作亂하거나 逃去하거나 하며, 漢 學 吏官 • 學 官 등의 자리는 서얼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하였다. 이어 魚叔權 • 宋翼弼 등 유명한 행적을 남긴 서얼들을 예로 들고, 따지고 보면 黃喜 나 金宗直도 서자라고 하였다. 그는 율곡의 庶許通案 을 소개하면서 〈이것은 실로 나라를 위하고 인재를 얻고자 하는 공의로 운 마음에서 나온 바〉라고 하였다 .61) 이재는 중국에는 역대로 본래 銅壁 之法이 없었다고 하면서 〈하늘이 사람의 재주를 내는데 어찌 摘庶間에 구별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우리나라의 서얼차대제도가 너무 엄격하게 적용되는 현상에 대해서, 〈우리나라의 규정은 한번 정해지면 변통할 줄 모른다〉고 비판하였다.

61) 위의 책, 갈은 곳. 〈大抵 許通 之 論 如栗谷 諸 賢本 意 則是一 團 公心爲國家爲世 道愛 才 故也〉

이재는 나아가 인재등용에 있어서 서얼차대의 완전한 철폐와 함께 문벌에 의한 차별을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죽 그는 〈대개 우리나라는 사람을 씀에 있어서 오로지 문벌을 숭상한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하늘이 인재를 내는 데 있어 실로 적서간에 구별이 없다. 임금이 인재를 씀에 있어서는 마땅히 官을 위해서 사람을 택해야 할 따름이다〉라고 당시의 문벌승상 풍조와 미온적인 서얼허통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이와 함께 이재는 영조대에 서얼허통을 위한 정책을 시도하였는데 그것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데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하였다.

그는 또 노비제의 세습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원통함이 있다고 한다. 하 나는 서얼이 죄가 없으면서도 버립을 당하는 것이요, 하나는 부녀자의 개가를 금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노비들이 세습적으로 매매되는 것이다. 이는 천하고금에 없는 바이고 우리나라의 풍속에만 있는 것으로 또

한 仁人과 君子가 마땅히 측은히 여기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62)

62) 위의 책, 갇은 곳.

노비제에 대한 이재의 주장은 이것뿐으로 서얼이나 재가문제에 비해 소략하고 구체적인 안을 제시한 바가 없다. 이 논의도 노비제의 폐지를 주장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목천 현감 재직시에는 〈官奴契案〉을 작성하기도 하여 노비문제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여기서 생계유지가 어려운 관노비둘의 생계대책을 마련해 주려고 노력하였으며, 관노바둘의 결혼을 허락해 주고 재산취득시 손실이 없도록 조치해 주기도 하였다 .63)

63) 위의 책 권4, 題跋, 題木川麻官鉢契案」. 노비재에 관해 성호 이익은 『星湖先生全集』 권 46, 「論奴鉢」와 『星湖僖說』 권 12, 人 事 門, 「祭奴文」 등에서 노비재에 대해 인도적인 차원에서 비판하였으며 노비제의 혁파 를 주장하였고, 나아가 노비등용론까지 제창하였다. 이 정 이재의 주장보다 훨씬 급진적이고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재가 성호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3) 國防改革案

이재는 국방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나름대로의 대책을 제시하였다. 이에 관한 자료로서는 『자지록』 「兵學指南陣法通變圓」 「穴錄」 「隨錄」과 「說論防備禦梅之策」 「年譜」「行狀」 등이 있는데, 특히 42 세 때 지었다는 「설론방비어모지책」은 그의 국방사상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64)

64) 年 譜 」에 의하면 43 세되던 해인 1771 년 3 월에도 金用謙과 兵 害 와 海防에 대해 토론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때 이재는 安鄭老의 『演機新編』의 내용에 대해 탁월한 식견이라고 칭찬하였다. 죽 상권에서 唐 이래의 陣法의 오류를 고쳤고 중편의 三十六紹와 하편의 孤虛旺相이 또한 天時 • 地利 • 和의 핵심을 잘 이해하였다고 평가하면서 효종의 북벌계획의 자료로 이용될 만하다고 하였다.

그의 국방개혁안의 요체는 을묘왜변과 임진왜란 이후 변칙적으로 설치 운영되던 군사제도를 정비할 것과 더불어 수도권 수비 • 축성법 • 關津守備 • 海防論 등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가) 山城守備

이재는 우리나라가 전통적으로 산성이었고, 지세상 산성수비를 해야 하는데 근세 100 년 이래 昇平이 계속되면서 산성을 버리고 평지성으로 옮기는 현상에 대해 우려와 함께 비판하였다. 또 수도권의 성에 대해서는 북한산성의 지세는 박약한 데 비해 남한산성의 지세는 금성당지로서 수도권 방위의 요처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시 무너진 것을 애석해 하였다. 이재는 자신이 본 성 가운데 興德과 古 阜 의 성이 훌륭하다고 하면서 그 구조를 자세히 소개하였다.

(나) 關津守備

이재는 당시 화평한 때를 만나 육지에서의 關과 연안의 津에 대한 수비가 허술함을 지적하였다. 특히 서울 부근의 전 수비는 어린아이 장난과 갇다고 비판하면서 지켜야할 관전을 제시하였다. 대표적인 관으로는 북으로는 磨 雲 嶺 등 4 곳, 서로는 牛項등 5 곳, 동으로는 大關嶺등 3 곳, 남으로는 鳥嶺 등 4 곳을 들었다. 또 대표적인 전으로는 서로는 청천강 등 6 곳, 동으로는 용진강 등 4 곳, 남으로는 한강 등 7 곳을 들었다. 이들은 要衝必爭之地로서 평화로울 때 대비해 두지 않으면 난이 일어날 때 결국 버리게 된다고 하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예를 들었다.

(다) 築城法

성은 높고 험한 지역에 거하는 것이 제일 요건이라고 보았다. 이재는 몽고의 난 • 왜란 • 호란 등 전란시의 경험과 사례를 인용해 가면서 지형과 성의 상관관계를 따지고 전국의 주요 성을 분석하고 축성방안을 논하였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南原城이 가장 좋다고 하였으며, 인근의 성으로서 笠巖城과 赤袋山城의 구조와 전란시 경험을 자세히 살펴 전략적으로 분석하기도 하였다. 이재는 또 서울 근교의 축성방위안 중 북한산성을 중시한 조정의 논의를 비판하였고, 또 당시 경성수비를 축소하자고 하는 논의에 대해 반대하였다.

이 밖에 險地로서는 개성의 靑石洞과 전주의 萬馬洞울 들었다. 전자는 천애의 험지로서 병자호란시 龍骨大도 공략치 못하고 후되한 곳인데 그것을 제대로 활용치 못했음을 비판하였고, 후자는 南原의 뱀暎로서 甄萱이 잘 이용하였고 임란시 지세를 찰 이용해 방어해 냈다고 하였다. 또 그는 정유재란시 趙度男이 사용한 無聲銃의 제조방법이 전수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라) 海防論

이재는해안방위의 중요성을지적하면서 해방론에 상당한관심을가졌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동남은 일본과 접하고 서로는 중국의 산동 • 강남 • 절강지역과 가까워 해안방위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특히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죽, 〈동래 왜관에 있는 일본인은 우리나라 정세를 손바닥 안의 무늬 보듯이 알고 있는데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關西와 海西 연해지역에는 중국 산동인들이 고기잡으러 와 우리나라 사람과 자주 접하고 있으며, 호서 • 호남 • 영남 연해에는 섬이 가장 많아 중국인 • 일본인과 遠方의 여러나라 사람들이 표류해 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만일 그들 중 해적이 있어 그 섬들에 소굴을 만든다면 어찌되겠느냐. 이로써 보건대 우리나라는 실로 하나의 부서전 집에 각 면마다 바람이 불어오는 것과 갇은 형세일 따름이니 어찌 춥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재는 海防論에 깊은 관십을 가졌던 것 갇다. 그는 당시 조정이 울롱도나 거제도를 비롯한 도서지역에 백성들을 보내 살게 하지 않고 버려두는 空島政策에 대해 〈그 결과 태평시에는 황폐화되고 유사시에 해적의 근거지가 되면 어찌 회복할 것인가〉라고 하면서 비판하였다. 그는 關西海와 南海 연안 이의의 島峨에도 鎭울 치거나 백성들이 읍·촌으로 살 수 있는 곳 가운데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아주 많다고 지적하였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해적들이 이런 섭들에 정박할 수 있는데 지금 조정의 관리들은 民戶를 옮겨 鎭邑울 설치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두렵지 아니한가 라

면서 우려를 표하였다.

그는 海防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하면서 〈현재 사람들이 高 論만 좋아하고 고려시대 사람들을 배척하지만 고려시대에는 일찍이 흑산도에 押海諸縣을 설치하였다. 신라 또한 그러했음이 『三國史記 』 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로써 보건대 本朝의 먼 것을 경영하는 계책이 앞 시대보다 훨씬 못 미친다〉라고 지적하였다. 65)

65) 『頭寶 續稿 』 권 11, 『漫錄』 中.

이재는 또한 對淸使行時 국가기밀이 누설되고 있는 사실에 대해 우려를 표하였다. 이에 비해 우리측 사신이 淸의 정보를 제대로 알아오지 못하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당시 사신들이 가져오는 別單 普 契가 그 실정을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나라 밖 한 걸음 벗어난 지역의 소식도 잘 모른다고 한탄하였다.

이재의 국방개혁안과 대책을 보면 물론 海防論도 강조하였지만 대체로 對淸防禦策이 중심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국방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설론방비어모지책」도 주로 병자 • 정묘호란시 당한 사실에 대한 것이 많으며, 따라서 이 책의 주내용도 청을 假想敵으로 해서 그에 대한 방비책을 논한 것이 많다. 이재가 살고 있었던 당시에는 청으로부터의 침략에 대한 우려가 거의 없었음을 감안해 볼 때 그의 대청 인식과 결부시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 갇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북벌론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도 보여지는데, 이것은 우암 송시열 이래의 노론의 정책노선이었으며, 동시에 朱子의 對金復 意識과도 연결될 수도 있다고 보여진다. 66)

66 ) 이재의 對淸觀을 볼 수 있는 자료를 몇 가지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5 결론

60 여생을 학문연구에 바치고 호한한 저술을 남긴 이재의 학문과 사상

1644 년 대륙에서 明이 망하고 淸으로 교체된 사실에 대해 〈不幸有甲申之變〉으로 표현하였다. 또 대청사행을 〈精燕〉이라고 표현하였다. 〈精〉이란 것은 대등한 국가 내지 제후국끼리의 의교사행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요컨대 청에 대해 사대조공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부정하는 의미이다. 또 그가 43 세 때인 1771 년 6 월 북경사행을 갇 기회가 있었는대 부친의 노환올 이유로 사양하고 말았지만, 만일 그가 사행에의 동행을 간철히 원했더라면 갈 수도 있었다. 따라서 그의 사행 포기에는 부정적인 對淸觀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수도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고 또 조선후기 사상사에 어떻게 자리매김되어야 할까?

이재의 저술과 학문은 얼핏 볼 때 체계성이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본론에서 살펴본 바 그의 학문의 특징으로는 보수적인 성리철학과 소극적인 사회개혁론, 박학성의 추구와 국학의 연구를 들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일부학자들은 이재 사상의 특징이 성리학과 실학을 동시적으로 지향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일견 모순처럼 보이고 우리의 상식에 비추어 혼란스런 느낌까지 주는 성격규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면모는 18 세기 중 • 후반의 과도기적 단계에서 나타나는 실학사상의 한 특칭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실학이 철학적인 차원에서 볼 때 주자성리학을 탈피 내지 극복해 나가는 단계는 18 세기 말 내지 19 세기 전반기 홍대용 • 정약용 • 최한기에 이르러 비로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재의 사회사상을 보면 성리학이나 자연과학에 비해 저술된 바도 적고 독창적인 견해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편이다. 이재 스스로도 제도개혁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의 사회사상의 특징은 根本主義 내지 明本源主義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있어서 이러한 입장은 기본적으로 체제지향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이 부패한 상부지배계층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는 점에서는 아주 제한적인 의미에서 〈개혁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체제내의 개량〉에 머무는 것이다. 거기에는 근본적인 제도개혁이나 천민중적 지향을 찾아보기 힘들다. 위로부터의 개량, 그것도 대부분 의식상의 문제에 국한되어 있을 뿐이다. 단

지 이재의 개혁안 가운데 變通이란 말이 가끔 등장하는 것은 栗谷의 經世'습에 힘입은 바 크다고 여겨진다. 庶壁許通과 莊婦再妹禁止에 대한 비판과 철폐주장도 이미 율곡과 우암에 의해 주장된 바이며, 이재도 거기에 바탕을 두고 주장하였다. 노비문제에 대한 이재의 주장도 개혁적인 수준은 못 된다.

요컨대 철학과 사회개혁론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재는 실학자의 범주에 넣기가 어렵다. 조선후기 실학의 특징을 철학적인 면에서의 古學(혹은 實學經學이나 洙沼學으로 부르기도 한다), 사회사상에서의 제도개혁론, 박학성의 추구, 국학의 연구라는 네 가지라고 할 때 이재는 전자 두 측면에서는 부합되지 않고 후자의 두 기준에 들어맞는 학자이다. 철학과 사회개혁론 간의 모순이 있는 학자로는 이익 • 유형원 등을 들 수 있으나, 이재의 경우는 철학과 사회개혁론 양자 모두 보수적이고 단지 박학성의 추구와 국학의 연구라는 점에서만 실학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 접에서 이재는 안정복 • 이덕무 • 신경준 • 이규경과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재는 실학자인가 아닌가 하는 아주 소박한 질문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실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규정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앞에서 제시한 네 가지 조건 중 어느 한 요소만 갖추면 다 실학으로 분류하는 방식대로라면 당연히 이재는 실학자이다. 반대로 네 요소를 다 구비해야만 한다거나 혹은 중국 • 일본의 〈실학〉과 달리 사회개혁론이 중시되는 조선 실학의 특성을 부각시켜 업격히 적용한다면 이재를 포함한 위의 학자들은 실학자로 부를 수 없다. 그 경우 이들은 考證學派로 부르거나 아니면 百科全書派 학자로 분류함이 마땅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필자의 소견을 말하자면 종래 조선후기의 사상계를 實學과 非實學으로 이분해서 이해하거나 분류하는 방식을 이제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위의 네 가지의 조건 가운데 어느 한 부분에라도 해당되면 모두 실학자의 범주에 넣고 그렇지 못하면

주자성리학자 내지 비실학자로 구분하는 종래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본래 〈실학〉은 1930 년대 초반 日帝에 의한 식민사학의 정체성론 극복을 위해 학문적 내지 역사적 용어로 등장한 이후 그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그런데 오늘날의 상황에서 볼 때 실학은 사실 이상으로 너무 과장되어 이해되어 왔던 점도 없지 않다. 또 실학과 비실학이라는 양분법적 구분방식은 조선후기 사상계를 다양하고 폭넓게 이해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위와 같은 네 개의 조건을 각각 따로 분리해 독자적인 〈학파〉 내지 〈유파〉로 설정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조선의 경우 위의 경향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고한 학자가 여러 측면을 동시적으로 갖추고 있는 예가 많아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위와 갇은 방식으로 재해석해 봄으로써 조선후기 사상계를 보다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여겨진다. 예컨대 아직 구체적인 연구가 없는 거친 가설에 지나지 않지만 조선후기의 사상계를 性理學派 • 古學派 • 易明 學派 • 西學派 • 學派 • 國學派 • 重農的 改革論派 • 重商的 改革論派 • 百科全 派 등으로 다양하게 설정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재 황윤석의 문학연구

崔三龍

1 서론

願齊 黃胤錫은 당시에 학자가 탐구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 걸쳐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大博物學者였다. 그가 관여한 세계가 너무도 다양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삶과 관계있는 분야라면 그는 관심깊게 받아들였고 자신의 힘이 닿는 한 그러한 것들을 기록에 남기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個學者이기도 하고 象數學者이기도 하였으며 歷史學者요 語學者이며 社會 • 經濟學者이고 科學者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방대하고 종합적이며 백과사전적인 학문태도가 英 • 正祖를 중심으로 일어난 官學者둘의 일반적인 경향이기도 하였지만, 이재 황윤석은 그의 일생을 어느 분야에도 소홀함이 없이 배우고 사색하고 느낀 바를 고스란히 남겨두려 하였으니, 아직도 방대한 자료로 남겨진 『 願亂棋』가 이를 말하여 주고 있다.

그의 학문의 범위가 실로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세운 학문의 주체는 이른바 성현의 학이라 하는 유학에 있었다. 그러나 종전의 전통적

인 儒者와는 달리 참으로 선비가 되려면 널리 배워서 해박한 지식을 이루어야 하고 이를 법도있게 행함으로써 知行合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일찍이 실학에 뜻을 두었다 함은 성현의 학인 유학의 밖에서 별다른 실학을 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대개의 실학자들이 그러하였듯이 실천이 따르는 유학, 진실한 학문을 추구하는 유학이 그들이 의미한 실학이었다. 그러므로 황윤석의 학문은 종래의 유학에서 말하는 도덕과 그 이론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도덕과 이론의 기반 위에 경제와 실천이 수반되는 학문을 이룩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학문의 목표를 明誠과 博約( 文約禮)에 두어서, 사실 군자가 되어서 한 가지 일이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여, 평생을 끊임없이 널리 익히려고 노력하였고 이를 실천하려고 하였다. 1) 각종 분야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박학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며, 마침 영 • 정조시대에 퍼져 나가기 시작한 실학의 풍조는 그에게도 적지않이 작용하였다.

1) 宋獻鎭 撰 『이재속고』 권 13, 附錄 「行狀」, 『頭齋全書』, 590 쪽.

이재 황윤석의 실학적 면모를 의심하는 사람을 겨냥한 것처럼, 李康五 교수는 「願齋亂葉 解題」에서 이르기를, 『願齋全書』를 접해 본 사람들은 흔히 그 속에 이재의 학문이 거의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왜냐하면 이 책만으로도 그의 학문의 분야가 다양하고 또한 깊은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재난고』 속에서 발췌 편집하여 班刊된 『願齋遺稿』와 『願齋續稿』는 그 篇名에 보이듯이 辭 • 試 • 詩 • 樂府 • 睿 • 序·記·題跋·銘·策·贊·疏·婚書•上樣文·祝文·祭文•哀辭·碑·墓 表 • 墓誌 • 墓磁銘 • 行狀 • 遺事 • 傳 • 雜苦 • 蓋 • 漫錄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는 실학 분야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아무래도 구세대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분야를 위주로 수록하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2) 李康 亂案 解題」, 《全羅文化論穀》 5 집(全北大 全羅文化硏究所 刊,1992), 141 쪽.

이는 기간된 이재집이 전동적인 한문학 양식을 취함으로써 실학자 이재의 전면목을 충분히 나타내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한 말이라고 하겠다.

기간된 이재집을 집대성한 것으로는 1975 년 景印文化社에서 『湖南實學范書』 제 2 집으로 발간한 『頭密全害』 璃이 있다. 이재의 글이 처음 간행되기는 그의 死後 53 년인 純祖 29 년 (1829) 己丑으로서 이재의 孫 秀瓊과 당시의 전라관찰사 趙寅永에 의해서 『이재유고』 12 卷 7 冊이 나왔는데 趙寅永의 序文이 들어 있다. 이 造稿가 간행된 지 114 년 후, 1943 년에 후손 黃瑞 와 鄕低들에 의해서 『이재유고』 14 권 7 책이 나왔는데 『이재유고 』 와 『이재속고』의 내용은 모두 『이재난고』에서 발췌하여 편집한 것이다.

이때 『理萩新編』 (23 권 10 책)도 石版印行되고 「貸知錄」과 「梁琴新譜」만은 手策本 그대로 발간되었다. 이들을 모두 합하여 影 縮屈|한 것이 경인문화사본 『이재전서』인즉, 아직도 많은 자료들이 草稿로 남아 있는 『이재난고』 속에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재난고』는 이재가 10 세부터 시작하여 63 세로 棄世하기 2 일 전까지 듣고 보고 배우고 생각한 文學 • 經學 • 登學 • 史學 • 算學 • 兵 • 宗敎 • 道學·天文·地理·曆象·言語學•典籍•藝術·醫學·陰陽·風水·姓氏. 物産 등 政治·經濟·社會.農·工·商등의 인류생활에 이용되는 實事 를 망라하여 日記體 또는 記事體로 저술한 것이다• 이재 황윤석의 연구에 임해서 필자가 디두께 되는 부분은 문학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이재유고』와 『이재속고』에 수록되어 있는 詩文울 중십으로 그의 문학적인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3)

3) 『이재유고』와 『이재속고』는 197 년에 경인문화사에서 간행된 『이재전서』 3 책 중 제 1책에 合本하여 수록되어 있다. 이하 이재의 詩 文 자료는 모두 『이재전서』 1 에 의거하여 항목과 쪽을 표시한다.

그의 문학 분야에 관하여 논한다고 할 때, 『이재유고』와 『이재속고』의 글들은 대부분 한문학 양식을 따르고 있어 문학적 대상이 매우 광범위하다. 그러므로 우선 그의 문학세계는 詩를 중십으로 살필 수밖에 없고, 기타 害 • 記 • 傳과 갇은 산문적 양식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그러한 산문

양식의 글을 일일이 언급할 겨룰이 없다. 오직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漫錄』을 대강 살피고 題跋을 참고하여 이제까지 純陽子라는 道號만으로 기록되었던 『海束異蹟補』의 편찬자가 황윤석이었다는 사실을 확증하고자 한다. 『해동이적보』를 보면, 그는 이색적인 인물, 곧 仙家的인 인물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道家修練의 경전인 『 參同契』를 연구함으로써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를 몸소 체험하려고 했던 인물로 보인다.

2 黃胤錫의 文學

(1) 願齋詩의 槪觀

황윤석의 집안은 일찍부터 文行이 있었던 文翰家로 그의 증조 醉隱公世基와 조부 山屯公 載萬, 從祖 龜岩公 載重, 父 晩隱公 吸에 이르기까지 문행이 相傳한 집안이었다. 종조 구암공은 農嚴 金昌協의 문인으로 당대의 高士였고 부 만은공은 學行으로 齊에 천거되었던 분으로 이들의 문집이 오늘날까지도 그의 집안에 전해 오고 있다.

문한가에서 태어난 이재는 5 세 때부터 그의 조모 金氏夫人에게서 글자를 익히기 시작하였으며, 7 세에 『 小學』을 배우면서 史記와 四耆五經을 두루 읽게 되고 諸子百家에까지 글이 미쳤다. 이미 6 세 때에 조모에게서 小詩作法을 배워 詩룰 지었다 하나, 현재 남아 있는 시는 그가 8 세 때에 지었다고 하는 漢詩가 『이재난고』에 追記되어 있다. 9 세 때에는 그의 文詞가 세상사람에게 알려져 그때에 興德 縣監이 고을 선비들을 모아 글짓는 시험을 하였는데, 부친을 따라가 古風으로 首選에 뽑히니 試士 李師程이 결에 있던 古阜 縣監에게 이르기를, 이 가운데 王勃 같은 문장이 있으니 보지 않겠오 ? 하며 이재를 가리키니, 마침내 그를 불러들여 여러 가지 體로 한시를 짓게 하고, 그 作詩함을 보아 크게 기특히 여겼다고 한다. 그 해에 조모가 돌아가시면서 오칙 이재만을 불러, 네 成就를

보지 못함이 限이라는 말을 남겼다.

10 세 때부터 나날의 기록을 남기기 시작하였는데 沈泳道가 韻을 주며 그의 시를 시험하였더니 이때 쓴 시가 『이재유고』에 처음으로 나타나 있다.

沈丈 (泳道) 來 自 福峽呼韻 (戊午 10 세 作) 4)

4) 『願齋全 會 』 I , 『願齋遺稿』 권 1, 「詩」, 3 쪽.

(沈丈께서 福峽에서 오셔서 韻을 부름)

遠客來從玉水顔 멀리서 客이 오심에 玉 와 갇은 낯빛이요

身遊猶染萬楓秋 몸 주위에는 온갖 가을 단풍의 내음이 젖어 있구나

明朝筑竹何須保 내일 아침에 대지팡이로 어느 곳을 재촉하여 가시려오

綠酒相將爲我留 푸른 술을 대접하리니 나를 위하여 더 머물러 주소서

14 세 (壬戌) 때에는 「寒食雨」 5) 라는 칠언절구시를 지었는데 가히 秀作 이라 이를 만하여 적어 본다.

5) 위의 책, 303 쪽.

腐魄綿山正可懷 介子推의 원혼, 綿山에 정히 가련하니

知心終古有蒼天 그의 마음 알아주는 것은 마침내 蒼天뿐이라

故將一夜莫莫雨 그러므로 밤에 그윽한 비 되어

消却千村萬落煙 千村萬落의 연기를 소각시키는구나

한식날 비 뿌리는 정경을 綿山에서 불타 죽은 介子推의 한맺힌 눈물로 표현하여 애수를 자아낸다.

『이재유고』 卷之一 3 쪽에는 15 살(榮亥) 때의 「遊追造庵」 (5 律), 16 세 (甲子)에는 「夜坐」 (5 律), 「冬至」 (5 排律), 「讀太極圖」 (5 古) 등이 수록되어 있고, 『이재속고』 卷之一 303 쪽에는 16 세 때에 「讀其三百傳」 (7 律),「秋夜玩月 微雨適過」 (5 律) , 暮春」 (回文體, 7 律) , 「味懷」 (藏頭體, 7 絶) 이 수록되어 있어, 같은 시기의 시들이 『이재유고』와 『이재속고』에 나누어

져 실려 있다.

草稿인 『이재난고』에는 갇은 해의 시들이 함께 실려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 이재난고』에서 첫번째로 발췌하여 純祖 29 년에 발간한 책이 『이재유고』이고 1942 년에 발간된 『 이재속고』는 『이재난고』에서 두번 째로 발췌하여 『이재유고』의 보충역할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두 문집의 시들은 『이재난고』에 그 작시연대가 적혀 있어 어느 때에 지은 작품인가를 알 수 있고, 두 문집 모두 詩編의 순서가 소년기로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편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일찍부터 시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주위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지만, 그가 經學에 뜻을 두고 『周易』을 비롯하여 象數學에 깊이 빠져들면서부터는 시 공부에 크게 힘쓰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그의 스승이 된 金元行은 선비가 詞章에 힘쓰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던 분이어서 이재에게 충고하여 이르기를, 〈사장에 博治한 것은 小도 능히 할 수 있다. 누구인가 만약 이 나의 전하는 일에 힘써 준다 면 君子儒가 그 令名울 잃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한번 마음을 바꾼다면 학문이 가히 높은 자리를 접할 것이니 어찌 가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의 본바탕이 애당초 경학· 상수 등에 관심이 없었다면 모르려니와 이미 호남의 호걸스런 선비로서 어찌 가히 사장이나 즐겨 짓는 儒가 될 것이냐?〉고 하였다. 스승이 바라는 뜻을 이제 알 만하다.6)

6) 위의 책 권 13, 附錄 「行狀」, 『이재전서』 1, , 쪽. 〈又詞章博治 小人亦有能之者 軌若遂爲 君子 儒 不失其令名也 如君一轉移 問可點高地位 寧 不可勉 君之 質 若初無可 言 巳矣 底是湖南 豪 傑之士 可甘作詞章 儒 哉 師門期望之 冠 此可見也〉

이와 갇이 그는 사장보다는 경학을 중시하라는 스승의 가르침도 있고 하여 시 공부를 멀리하려고 한 접이 엿보인다. 그는 자신이 과거를 치룬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는데, 그가 과거에 집착해 있었더라면 그는 사장에 더 많은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는 「寒食日無偶漫成二 色」 1) 에서

7) 위의 책 권 1, 「詩」, 318 쪽.

樣門流*綠私頃 다리 믿으로 흐르는 물은 푸르고 맑은데

楊柳束風百五辰 봄바람에 흐늘거리는 버들이 寒食 때를 가리키는구나

靜裂光陰要記取 고요한 가운데 세월은 종요로이 흐름을 기록하나니

詩成非是愛岭人 시를 짓기는 하지만 이 나는 시 읊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세월의 흐름 따라 지난 기억들을 시로써 남겨놓지만 자기는 시 읊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짐짓 시를 의면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방대한 문집에 드러나고 있는 시의 비중으로 보아 역시 그는 그의 생각이나 심정을 일생 동안 시로써 표현한 사람임에는 틀립이 없다. 오히려 시를 쓰고 읊조리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함을 나타낸 시들이 때때로 눈에 띈다.

散味 8)

8) 위의 책, 310 쪽.

睦味詩慈兩作魔 잠자는 맛과 시에 빠지는 것 모두 魔 이니

夢中湖蝶亦哈唄 꿈 속에서조차 나비가 되어 또 시를 읊조리는구나

被人授起籠猶欽 사람들의 교란시킴을 입어서 발을 내리니

隣我彼生 及磨 내 피곤한 인생, 괴롭게 시를 연마함을 불쌍히 여긴다

自是無形難保減 이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괴로움이 멸망을 재촉하니

不知何力斷來過 무슨 힘으로 이에 와서 지나가는 것을 끊을 수 있겠는지

모르겠도다

精神護借愍勳戒 정신을 두호하고 아까워해서 은근히 경계하나니

須認渠身衝病戈 모름지기 저 詩魔로써 병을 호위하는 창으로 인정하노라

詩怒의 魔에 사로잡혀 몸은 파리하고 괴로운데, 이 무형의 것들이 와서 머무는 것을 어찌하면 끊어버릴까 하고 탄식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 詩魔病을 그대로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는 뜻을 나타내었다. 자신이 시마에 사로잡혀 시 쓰기를 멈출 수 없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면, 그가 보고 느낀 것이나 끓어오르는 감회에 대하여 항상 시로써 나타내는 것이 습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재의 行狀을 기록한 문인 宋獻仇은 「행장」에서 이르기를, 〈매양 忠孝節 의 자취가 있음을 들으면, 사라지고 매몰되어 드러나지 못할 것을 생각하고 激仰하여 반드시 傳狀울 지어 기록하였다. 문장은 크게 전하고 물이 맴돌아 깊었다. 시 또한 雄健하고 圓秘하여 調의 格이 뛰어났다. 중년에 와서는 글을 지음에 쉽사리 唐詩에 運進하였고, 더욱이 歌行에 뛰어나 衆體가 모두 갖추어져 능히 정돈되었다. 그러므로 蔚然한 가운데 대가의 數에 들었다〉고 논하였다. 9)

9) 위의 책 권 13, 附錄 「行狀」, 592 쪽. 〈詩又雄鍵圓暢 調格超指 中年製作 晟履 週唐尤長於歌行衆體 咸備該而能整 蔚然爲大家數〉

송헌진은 이재의 문장과 시를 언급함에 있어 시는 웅전, 원창하고 조격이 뛰어난 시가 이재의 시임을 표현하였고, 당의 시풍을 띠고 있으며, 각종 시의 체를 능란히 구사하여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의 시는 絶句 • 律詩 • 古詩體는 물론 辭 • 試 • 樂府 • 雜體 • 歌行 • 聯 句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詩體를 그의 문집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일찍이 나이 17 세에 「打魚試」를 지어 그의 문장력을 과시하였는데, 「타어부」는 그가 年前에 高敵의 仁川江 하류에서 고기잡이하는 광경을 본 바를 회상하여 지은 試라고 한다 .10) 앞서 題한 바 16 살에 지었다는 「暮春」은 回文體의 시로서, 바로 • 거꾸로 • 세로 • 가로로 아무렇게 읽

10) 柳在泳, 願齋의 打魚試에 대한 考察」, 《향토문화연구》 제 5 집, 원광대학교 향토문화연구소, 1989. 유재영은 이 논고에서 「打魚試」를 세밀하게 우리말로 번역하고 있으며, 이재가 몹시 십혈을 기울여 쓴 작품이라고 평하고 있다. 이재의 뛰어난 문장솜씨가 어떠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꽤 현학적인 글이다.

어도 뜻이 성립되는 시이다. 같은 시기의 「味懷」는 藏頭體로 지은 시이며 또 「太極圓」는 太極을 논한 내용의 哲學詩라 하겠다. 또 「三百傳」은 이재가 14 세 때에 林泳의 迫稿인 『浦溪集』에서 임영이 11 세에 三百을 풀이하였다는 것을 보고는, 이때부터 자극을 받아 理萩에 유의하게 되었으며 16 세 때부터 『理萩新編』을 집필함에 있어서 지은 시라고 한다. 내용은 曆象에 관하여 읊은 시이다. 젊은 시철부터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재기 발랄한 그의 詩才롤 엿볼 수 있으니, 시의 대가라고 이를 만한 바탕은 본래부터 소유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그가 생활 속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이면 모조리 詩題가 되었고, 그의 博學과 더불어 그 어느 것이든 시로 표현하지 못한 바가 없으니, 理氣 • 曆象 • 科學 • 天文學 등 문학과 거리가 있는 분야까지도 그 내용을 시로 나타내었다. 그러나 자칫하면 서정성이 결여되기 쉬운 이러한 시들 때문에 시적 정서를 자아내기에는 무미전조한 시가 되기 쉽다. 잘 숙성되지 않은 이러한 시들이 함부로 그 뼈다귀를 노출시킴으로써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워진다.

실제로 그의 시 중에는 난삽한 구절과 비약이 십한 말들이 뛰어나와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시가 있으며, 생소한 표현들이 경직된 맛을 느끼게도 한다.

그러나 앞서 송헌진이 대가에 든다고 일컬을 만큼 참신하고 전솔한 맛이 나는 시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재전서』 1의 『이재유고』와 『이재속고』에 나타난 시가를 시체별로 분류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願齋先生遺稿 卷之一,

辭 3 題, 試 3 題 .

詩五言絶句 8 15 荀 七言絶句 43 題 63 首.

五言律詩 17 題 20 首, 七言律詩 46 58 首.

五言古詩 28 題 28 首, 七言古詩 3 題 3 首.

雜體詩(聯句詩 包含) 目 7 首.

願齊先生遺稿, 卷之二.

詩 五言絶句 7 題 10 首, 七言絶句 121 題 263 首.

五言律詩 51 題 72 首, 七言律詩 56 題, 66 首.

五言古詩 11 題 11 首, 七言古詩 1 題 9 首.

雜詩(聯句詩 包含) 5 題 6 首.

願齊先生遺稿 卷之三.

樂府 3 題 3 首.

詩 五言絶句 4 題 12 首 七言絶句 61 題 172 首.

五言律詩 10 題 18 首, 七言律詩 20 題 21 首.

五言古詩 11 題 11 首, 七言古詩 7 題 7 首.

總社 辭 3 題 3 首, 試 3 題, 樂府 3 題 3 首.

詩 五言絶句 19 題 37 首, 七言絶句 225 題 498 首.

五言律詩 78 題 110 首, 七言律詩 122 題 145 首.

五言古詩 50 題 50 首, 七言古詩 11 題 19 首.

雜詩 11 題 13 首, 都合 525 題 881 首.

願齋先生續稿卷之一.

辭 2 題 2 首, 試 1 題 1 首.

詩 五言絶句 30 題 45 首, 七言絶句 205 題 289 首.

五言律詩 76 90 首, 七言律詩 62 題 71 首.

五言古詩 7 題 7 首.

雜詩 5 題 8 首.

願齋先生續稿 卷之二.

詩 五言絶句 19 31 肯 七言絶句 167 題 283 首.

五言 律詩 42 題 首, 七言律詩 24 28 首.

五 言 古詩 5 題,首

雜體詩 1 題 1 首.

總 詐 辭 2 題 2 首, 賊 1 題 1 首.

詩 五 言 絶句 49 題 76 首 七 言 絶句 372 題 572 首.

五 言 律 詩 118 題 134 首, 七 言 律詩 86 題 99 首.

五 言 古 詩 12 題 12 首 .

雜體詩 6 題 9 首, 都合 646 題 915 首.

『이재유고 』 와 이재속고』의 총합계.

辭 5 題 5 首 , 試 4 題 4 首, 樂府 3 題 3 首.

五 68 題 113 肖 七絶 597 題 1070 首,

五律 196 題 244 首, 七律 108 題 244 首,

五古 62 題 62 首, 七古 11 題 19 首.

雜 17 題 22 首, 總都合, 171 題, 786 首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갇이 『이재유고』 525 題 881 首와 『이재속고』 646 제 905 수에 나타난 시는 1,171 제 1,786 수이며, 여기에 한글 시조형인 木州雜歌 21 수를 더한다면 그의 시가는 1,807 수로 불어나게 된다. 이 중에 칠언절구가 597 제 1,070 수로 이재 시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다.

그 밖에도 『이재난고』에는 『이재유고』와 『이재속고』에서 탈락된 시들이 더 있을 것으로 생각되나 이는 차후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2) 願齋의 詩世界

앞서 살펴본 詩題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재의 詩들을 분류해 봄으로써 어떠한 내용이 이재 시에 많이 표현되어 있는지를 살피려 한다. 시를 내용별로 분류한다는 것은 곧 주제별로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겠는데 실제로 분류함에 있어서는 애매모호한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이재 시의 경향을 살피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시도를 할 수밖에 없다.

1,171 題에 달하는 시제를 15 種의 주제별로 분류하였더니 아래와 같았다.

閑情 159 題, 2. 交遊 128 題, 3. 鄕慈 123 題, 4. 敍 景 122 題, 5. 自 暎 105 題, 6. 懷古 99 題, 7. 旅程 9, 8. 換詩 60 題, 9. 仙佛 55 題, 10. 觀物 53 題, 11 . 送別 47 題 12. 忠心 42 題, 13. 性理 26 題, 14. 修德 23 題, 15. 碩祝 17 題.

이렇게 나눈 것은 徐師曾의 「文體明辨」이나 「詩體明辨」을 참고로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필자 나름대로 분류해 본 것이다. 1,171 제의 시제목을 주제별로 나누고 보니 1,154 제로 줄었다. 처음 詩體別로 분류하였다가 주제별로 분류하다 보면 더러 중복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예를 들면 하나의 시제에 七言絶句와 五言律詩가 있어 그 주제는 하나지만 詩體로 보면 2 首이기 때문에 두 개의 시제목이 중복됨으로써 주제로 분류할 때는 하나로 다시 합쳐진다.

시의 주제별로 분류가 애매모호하다는 것은 가령 閑情을 나타내는 시는 敍景을 나타내는 시와 비교해 볼 때 확연히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한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대체로는 서경묘사가 뒤따르고, 서경으로 표현되는 것들도 거기에는 작자의 감회를 부여하고 있음이 상례이다.

그래서 다만 서경묘사에 중접을 둔 시는 敍景詩로, 감회를 많이 드러낸 시로 판단되는 것은 閑情詩로 매겨두었다. 이와 같은 예들은 다른 주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복합적인 요소를 다분히 지니고 있다.

위에서 분류한 바에 의하면 이재 시의 경우 한정과 교유가 가장 많이 나타나 있고 향수, 서경이 그 다음 순위를, 자탄, 희고 등이 다음 순위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은 이재 시를 주제별로 나누어 설명하되, 죽은 이를 애도하는 換詩 와 이별을 주제로 한 送別詩, 칭송하거나 축원하는 碩祝詩는 모두 人

事에 관한 시이므로 交遊詩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또 忠心 • 性理 • 修德은 유학사상을 바탕으로 일관되어 있어 하나로 묶고, 국문시가인 木州雜는 그의 유학사상을 드러내고 있는 시가로 간주하고 여기에 삽입하여 논하고자 한다.

(가) 閑情

이재 황윤석은 英祖 5 년 (1729) 己酉 4 월 28 일 全羅道 興德縣 龜 壽 洞(현재는 全北 高故郡 星內面 權洞)에서 晩隱 黃廢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해변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 있었다. 포근한 전원생활을 줄기며 성실한 선비집안의 가풍을 이어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그는 16 세부터 『理萩新編』을 편집하고 만 권이 넘는 藏書에 묻혀 시를 짓고 학문을 업으로 하며 살았다. 그는 出仕에 대한 야망보다는 학자로서의 지조를 지키며 평생을 학문에 몰두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의 생애는 공명을 날리는 영광스러움보다는 閑居 속에 살면서 그의 詩情을 표현하였다. 그는 나이 38 세에 비로소 隱逸로 莊陵 參奉울 제수 받아 고향을 떠났고, 이후로도 그의 벼슬은 微官의 閑職으로 六品에 그치고 말았다. 그는 벼슬을 그만두고 다시 향리에 돌아와 있을 때에도 시짓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학문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벼술한 시기보다는 은일로서 한적하게 보낸 생애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한정을 나타낸 시로서 그가 16 세에 쓴 시에, 夜坐(甲子 )11)

11) 『이재유고』 권 1, 3 쪽.

夜閑淸不睦 밤이 다하도록 정신은 맑아 참이 오지 않고

虛室默疑稽 빈방에서 고요히 정신을 모으는구나

耿耿孤燈花 의로운 등의 불빛은 깜빡거리고

多多萬籍聲 온세상의 소리 적막에 참겨 있도다

造孔顔樂 아득히 孔子와 顔回의 줄거움을 품으니

因擇洛間情 인하여 程朱의 뜻을 궁구하노라

坐久還排戶 오래 앉아 있음에 도리켜 창문을 밀치니

博桑欲吐明 扶桑에 붙잡아 놓은 해 밝음을 토하려 하는구나

이 있다.

밤의 적막 속에 홀로 앉아 安貧樂道에 젖어 坐忘의 경지에 이른 孔子 니傾回의 줄거움을 맛보며 程朱學을 窮究하느라 날이 새는 줄도 모르는 연소한 선비의 청아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行狀」에 의하면 그는 하루라도 독서를 않는 때가 없었으며 능히 3, 4 일을 자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참깐 사이에 너더댓 번을 보며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12) 그 총명함과 아울러 학문과 수양에 힘쓰며 일생을 지냈다고 할 수 있겠다.

12) 生 行狀, 585쪽.

「幽溪堂夜坐聯句」 1 는 啓甫 丁觀造과 이재 황윤석(字는 永燮)이 五言2 句로 聯句하여 엮은 시로서 幽溪堂의 勝景 속에 幽人이 있음을 표현하였다.

13) 『이계유고』 권 1, 15 쪽.

啓甫 曲經三十里 꾸불꾸불한 30 리 길

遊春五六人 봄놀이 하는 대여섯 사람 있으니

永斐 薄基上東樓 저녁 어스름에 동쪽 누각에 올라

一洗十年應 한꺼번에 10 년 티끌을 씻어낸다

啓甫 桃柳三春節 복사꽃, 버들은 무르익은 봄절기를 드러내고

飛泉九曲流 날 듯 솟구치는 샘물 구곡수를 이룬다

永斐 客行暮方到 객이 저물 무렵에 바야흐로 오니

始覺入山幽 비로소 산에 들어와 그윽함을 깨닫는다

啓甫 水閣人哈夜 물소리 들리는 누각에서 밤에 시 읊는 사람 있으니

風 鳥 宿枝 바람 부는 수풀에는 새가 가지에 깃들었구나

永 此間有 여기에 큰 隱者가 있으니

眞超意誰知 이 참맛의 경지를 누가 알리요

啓甫 羅留遂翁策 屈 額의 글은 늙은이의 솜씨요

山帶武夷名 산은 武夷曲에 둘러 있구나

永燮 心法印何處 마음 법의 은 어느 곳에 있는고

寒江 帶 月 明 차가운 강에 개인 달이 밝구나

大 의 그윽한 경지가 보여주는 참맛은 은일의 심정에 사로잡힌 자가 아니면 알 수 없다는 心法의 悟妙處를 한가로이 읊조리고 있다.

그의 한정은 이재의 六言詩 형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又六言詩 14)

14) 위의 책, 16 쪽.

酷酒橫琴池上 술잔을 나누며 연못 위에서 거문고를 뜯고

哉花蔣藥谷間 골짜기에서 꽃을 기르며 약을 재배한다

好是百年淸福 좋을씨고, 이것이 백 년의 淸福일지니

雲間人亦 間 구름 사이에 있는 사람 또한 한가롭구나

자연 속에 묻혀 한가로운 심정으로 살고자 했던 바는 곧 이재가 늘상 지니고 있던 이상적 경지였을 것이다.

이재의 한정시가 가장 많이 실려 있는 곳은 『이재속고』 卷之一의 詩編 으로 무려 80 편의 시가 한정을 읊고 있다.

『이재유고』 卷之一과 『이재속고』 卷之一이 비교적 이재 생애의 전반기에 쓴 시임을 감안하여 불 때, 향수와 자탄에 젖어 있던 후반기의 인생 고뇌의 시들과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재속고』에 나타난 한정시를 찾아보면,

途中記見 二首 15)

(椎童)

硏得松林碧 깎은 듯한 산은 푸른 송림에 싸여 있는데

山花捕滿頭 산꽃을 머리 가득히 꽂았구나

世間榮辱外 세상의 영욕에서 벗어나 있으니

知爾最風流 그대는 이것이 최고의 풍류임을 알겠는가

(婦)

夫培朝耕去 지아비는 아침에 밭 갈러 가고

窟演日正中 광주리밥 가져오니 해가 정오를 가리키는구나

相看亦相勸 서로 보면서 또한 서로 권하니

應笑八珍風 八珍風味라고 옹대하여 웃는도다

초동과 밥 나르는 젊은 아낙의 소박하고 다사로운 정을 읊었다. 길을 가다가, 두 남녀가 밭두럭에 마주 앉아 웃으며 아내가 내온 밥을 맛있게 먹으면서 웃는 그 모습을 작자는 부러운 듯이 쳐다보고 있다. 한 폭의 敍景畵를 연상시키지만 이 시는 세상 영욕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정감을 그려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머리에 꽃을 가득 꽂은 사내의 純厚한 마음과 아낙네의 꾸밈없는 환한 웃음이 찰 어우러지고 있다.

다음은 가을 밤의 서정을 읊은 시이다.

秋夜偶成 16)

最菊花將願氣殘 국화떨기 장차 큰 기운에 쇠잔해 가는데

碧思正蘭璟 푸른 구름 가을의 생각이 정히 쓸쓸함을 다하는구나

淸窓夜靜人觀易 밤 고요한 맑은 창가에서 易올 보고 있으니

小院風微客倍撮 자그마한집에는바람이 산들거려 객은난간에 기대었구나

15 ) 이계속고』 권1, 318 쪽.

16) 위의 책, 307 쪽.

孤樹落庭陳影裵 외로운 나무, 높은 뜰에 비치는 엉성한 그립자가 파리하고

亂站知露幾野寒 어지러운 다듬이 소리, 이슬과 和하여 그 소리 차갑구나

呼兒試間三更未 아이 불러 삼경 이 못 미 쳤느냐고 물으며

須向參星任細 看 서쪽 參星울 향하여 자세히 살펴본다

만물이 쇠잔해 가는 가을, 사색에 참겨 쓸쓸한 정회를 맛보며 『周易』울 읽고 있는 사람, 뜰에는 엉성한 나무 그립자가 외롭고 겨울을 준비하느라 디듬질하는 소리가 차가운 적막의 공기를 찢는다. 그제야 벌써 한밤중이 되었음을 알고 하늘을 살펴보는 모습 속에서 선비의 아늑한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이재는 59 세를 마지막으로 全義 縣監에서 파직된 후, 다시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귀향하여 살다가 63 세로 세상을 마쳤다.

다음 시는 그가 벼슬길을 마감하고 향리에 돌아와 있을 때의 심정을 읊은 작품이다.

病中雜賊 17)

端居志梵槍悠 단순한생활이 처음뜻이었음을오히려 유유함에서 깨닫는다

西景公然病與謀 늙어서 공연히 병든 몸으로 꾀하나니

九日黃花還照眼 9 월 9 일의 黃菊이 도리어 눈에 비치고

十年烏幌浪低頭 10 년 동안의 벼슬살이가 부질없어 머리를 숙인다

經天緯地終誰許 세상 經論함을 마침내 누구에게 허락했더냐

弄月哈風只自由 달을 희롱하고 바람을 읊는 것만이 오직 내 자유로다

安得了煙因改葬 어찌해야 婚事를 끝내고 改葬올 마칠 것인가

永敎方寸百無憂 길이 내 마음으로 하여금 모든 근심이 없게 하리라

살아온 인생의 참뜻은 평범한 일상생활임을 깨닫는다. 이제는 늙고 병들어, 10 년 동안 벼슬살이를 한답시고 허덕이던 자신을 생각하니 머리가

17) 『이재유고』 권 3, 60 쪽.

저절로 움츠러들 뿐이다. 오직 哈風弄月만이 나에게 부여된 자유로다. 아직 남은 人間事 끝이 없나니, 그저 마음이 편안하기를 바랄 뿐이다.

(나) 交遊

이재는 그의 생애 동안 여러 人士들과 교유가 있었고 당대에 이름을 떨천 高官 • 鴻儒 둘과도 교유하였다.

특히 『이재유고』 「 書 」에 있는 그가 보낸 글 중에는 명망 있는 당시의 인물과 교유한 흔적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이들 중 눈에 띄는 사람들을 간추려본다면, 그의 師門이었던 淡湖 金元行, 喝喝齋 金用謙, 靜愼齋 金時菜, 判 書 曺敵, 監司 李基敬, 副率 楊應秀, 判 書 徐命廊, 鄭景淳, 金履安, 金履信, 仁叔 趙鎭宅, 士謙 金益休, 公孝 李思永, 宋益中,高漢聖이 있다. 이 밖에도 洪大容, 鄭弘淳, 趙晟, 申景濬, 洪啓禧, 李家煥 등과 교유가 있었다.

이 가운데 실학자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은 鄭景淳, 金履安,洪啓禧, 申景濬 李家煥, 洪大容, 徐命廣, 李德戀, 鄭喆祚 등이 당시의 實 學大家로 알려진 사람들이다. 특히 조정에 이재를 추천한 인물로 鄭景淳, 鄭弘淳 형제와 趙敵, 趙晟 형제들이 이재를 돌보아주었고 金履安, 金履信은 사문 김원행의 자제로서 친분을 맺었다.

그러나 이재의 시에서 표현된 인물들에는 그와 가까이 지내던 친척이나 비슷한 微官에 있던 사람들이 더 많이 등장한다. 정중한 「書」體로 사귄 사람과 그의 시에 친근히 오르내린 사람 사이에는 交分의 厚薄이 있는 듯하다. 아마도 시의 대상이 된 師友들이 훨씬 더 그와 가까운 정을 나눈 사람들이라고 여겨진다.

이재와 가장 친근했던 인물로는 이재의 妻叔인 啓甫 丁觀造과 師道 丁師藩을 들 수 있으니 그들은 사돈간의 情誰로 일찍부터 사귀었다.

英祖 28 년 이재의 나이 24 세 때에 지은 시를 보면,

代曺寄丁師道師庫啓甫觀庫(壬申) 18)

曾見君家一樹梅 일찍이 그대 집에 한 그루 매화 있더니

氷砲應超臘前開 추위 속에서 꽃대가 나와 섣달 그뭄 전에 피었다네

今朝相憶不成語 오늘 아침 서로 말을 이루지 못했음을 생각하며

海上空看驛使來 텅 빈 바다 위에 驛使가 오는지를 내다본다

憶君無日不恨樓 그대를 생각하면 서글프지 않은 날 없으니

爲憶天源久解 저 하늘가의 추억은 오랫동안 이어질 줄 모른다

孤夢欲圓窓又白 외로운 꿈이 둥근 창에 또 하얗게 되어버리려 하니

一庭明月 向人低 뜰의 밝은 달은 사람을 향해 낮게 떠 있구려

참시라도 보지 않으면 마음이 減械해지는 심사를 표현함으로써 그들 사이의 지극한 정을 엿볼 수 있다.

이 밖에 「代簡十九首寄丁師道」 (유고 권1, 13쪽)는 19 수에 달하는 5 언시이고, 「寄丁啓甫觀造」(유고 권1, 17 쪽)은 啓甫의 뛰어남을 읊었으며 「待啓甫(丁觀海)公孝(李思永)」(유고 권1, 18쪽)은 정관혁과 이사영이 오기를 기다리며 여름 경치 속에서 새울음을 듣는다는 내용이다.

앞서 소개한 「幽溪堂夜坐聯句」(유고 권1, 15쪽)는 정관혁과 황윤석의 聯句詩이며 「都督亭聯句」(유고, 권 1, 15 쪽)는 都督亭에서 황윤석과 정사혁이 聯句로 읊은 교유시다.

공효 이사영도 황윤석과 가까운 벗으로 「次寄李公孝思永」(유고, 권1, 17-18 쪽)은 해질녘에 찾아온 이사영의 재주를 기리며 함께 술잔을 들고 창가에 앉아 맑은 시를 읊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士謙 金益休는 황윤석과 처남 • 매부 사이로 그 교분이 일생 동안 두터웠던 사람이다. 김익휴는 河西 金麟厚의 후손으로 先代로부터 世交가 있던 집안이다. 그와 두터운 交說의 정을 읊은 시로는 「送秀才益休」(유고권 1, 18~19 쪽) 시가 있다. 또 옛날을 추억하여 金士謙과 즐기던 때

18) 위의 책 권 1, 17 쪽.

되돌아보는 懷古詩도 있다(「憶昔二용色」, 유고 권 2, 42 쪽). 김익휴는 또 이르기를 水樓翁이라고도 하였는데, 황윤석이 벼슬길을 그만두자 가세가 당장 어려워짐을 알고 참으로 깨끗하고 어전 선비라고 하며 그에게 양곡을 보내어 도와주기도 하였다. 金昌續의 아들인 金用謙은 安束 金氏의 名門으로 號는 喝喝齋다. 이재의 학문을 높이 평가한 사람으로, 나중에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그는 황윤석과 학문을 논하는 자리에서 〈평생 이와 갇은 學說은 아는 자가 없더니 요행이 황윤석을 만나 한자리에서 문답할 이를 얻었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시원하게 한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멀고 구석전 시골에서 성장했는데도 어찌 博治하고 精密함이 이와 같은고〉 하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19)

「奉階先生金用謙遊碧松亭」(유고 권2, 47 쪽)은 여러 사람이 선생을 모 시고 벽송정에서 놀 때, 벽송정에 모인 이들의 모습과 김용경의 德性을 칭송한 시이다.

또한 靜愼齋 金時菜을 이재가 만난 것은 庚辰年(영조 36 년) 正月 長城의 유배소에서였다. 그해 겨울 이재는 長城 臼羊山寺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雲門庵에 김시찬이 머물러 있음을 알고 찾아가 易 및 星象, 日 食의 類에 대하여 논하였다. 이듬해 정월에도 다시 김공과 陰陽變化, 莖七卦八之說울 논하였다. 2 월에 사면을 받아 金公은 북으로 돌아갔다. 그때 이재는 全州府에까지 따라가 환송하고 이어서 全羅監司 李基敬을 방문했던 것이다.

到雲門里金公時菜 20)

一經沿羅外 의길이 녕굴 밖으로 연하여 있고

先生已上頭선생께서는 벌써 산 위에 오르셨네

講來還避俗 귀양와서 도리어 세속을 피하니

遊想酸情幽 놀고 쉬시는 모습 십하게도 딱함이 깊도다

19) 이재선생 행장』, 526 쪽 참조.

20) 『이재유고』 권 1, 20-21 쪽.

北斗前肖夢 전날 밤 꿈에 임금을 뵈었더니

南 萬里慈 남쪽 만리에 시름이 깊도다

未須鎌到晩 모름지기 늦게 이른다고 협의치 아니할 것이니

猶得洗淸慈 오히려 근심을 씻어 맑게 하였도다

김시찬이 귀양와서 운문암에 머물고 있는 청아한 모습을 읊었다. 이재가 內職에 있을 때 그를 항상 도와준 사람이 趙最 • 趙晩 형제인데, 이들은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들의 생일을 맞아 斐湖樓롤 落成하고 趙鎭寬(號는 裕叔), 趙鎭宅(號는 仁叔) 등 아들과 친지들이 모여 唱和하였다.

특히 仁叔은 이재와 퍽 다정한 사이였으므로 그가 聯軸울 내어보이자 그냥 말 수 없어 자기도 한 수 짓는다고 하였다.

次壁湖樓韻 21)

瑞蓮雙葉葉束西 서기어린 연의 쌍꽃대와 잎이 동서로 벌렸는데

樓下淸沙先少泥 누각 아래 맑은 모래, 먼저 조금 젖어 있도다

孤矢正當新燕賀 쌍둥이의 출생을 새로운 잔치로 마땅히 축하해야 할지니

琴盛不待琴峨低 거문고와 술병은 푸른 눈썹의 미인 다다르기를 기다리지

않네

逸休舊韻尋鹽 한가롭고 아름다운 詩韻은 廳江에 찾아들고

謙護遺風祈竹溪 경허하고 근검한 유풍은 祈 의 대수풀 계곡 감도다

觸目麻珉還可喜 눈에 보이는 경치는 도리어 가히 즐길 만하니

幾回多南與提撲 그 몇 번이나 툼을 내어 이리 손을 맞잡았던가

쌍호루의 홍겹고 즐거운 잔치 풍경과 풍류를 멋드러지게 표현하고 인숙의 집안을 칭송하였다.

「次韻留別仁叔」(유고 권2, 26쪽)은 인숙의 집에 머물다가 그와 이별하며 지은 시인데, 그옥한 누각 위에 서 있는 선비의 고상함을 묘사하였고

21) 위의 책 권 2, 26 쪽.

자기의 고향생각도 나타내고 있다. 이재가 죽자 인숙은 이재의 換詩 22) 를 지어 그를 弟表하였다.

峴彼南斗南 저 남두성 남쪽에 빛나는 햇살이여

河西道最尊 河西의 道률 가장 존귀하게 높였도다

惟公其庶幾 오직 公만이 무릇 거기에 미쳤으니

博約同所存 널리 배워서 禮로 集約한 것이 갇은 곳에 있는 바이라

황윤석을 남쪽 지방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 河西에 미치는 학문과 인격을 갖추었던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재는 31 세 때에 進士試에 급제하고 이어서 미호 김원행을 찾아뵙고 執賢의 예를 올려 門下의 제자가 되었다. 그가 김원행을 늦게야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은 그가 經學 공부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 먼저 이재의 나이 22 세 때 晩隱公이 이재의 스승을 구하고자 하여 서울로 올라와 壯洞으로 승지 金文行울 찾았었는데, 김문행이 이르기를, 科文을 공부한다면 내가 가르치겠고, 경학이라면 나의 재종제 미호의 문하에 들게 하라고 하였다. 황윤석이 김원행을 찾아간 것은 이보다 10 년 뒤의 일이었지만, 그는 이제 과거보다는 경학에 뜻을 두었던 듯하다. 이재는 김원행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아들 金履安을 만났고, 여기에서 滿軒 洪大容울 만나 실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홍대용은 潭天儀와 自鳴鍾의 제작에 손을 대어 이재는 天原의 籠水閣울 방문하고 돌아와 「輪鍾記」를 썼다. 23)

그는 石室 書 院에서 김이안을 비롯하여 그의 아우인 履信 • 履顯과 친숙하게 지냈으며, 그들과의 交遊詩를 찾아볼 수 있다. 「追次金典簿正視履安己卯隱行之作仰講敎」 3 律 24)은 김이안이 벼슬길로 떠남을 전송하면서

22) 이재선생 행장」, 590 쪽.

23) 金 , 容 評傳』, 민음사, 1987, 106-108 쪽 참조.

24) 『이계유고』, 25 쪽.

이안의 청백한 모습과 자기의 선망을 나타내고 있으며 「古風一首默樞子奉錢武城使君金履信投紋之行兼示賢秀履顯」 25) 은 김이신·김이현 형제를 보내며 백양산에서 딴 樞子를 스승의 약으로 쓰도록 주어보내는 내용을 읊은 五言古詩이다.

김원행에 관한 시는 杜湖 趙晟을 방문하고 나서 미호 김원행 선생을 모시고 읊은 시가 있다.

訪杜湖因向漠上 26)

一路曾經眼 한 길을 일찍이 눈여겨왔는데

雙樓尙有情 쌍루가 오히 려 정다움구나

好去卑函丈 기쁘게 스승께 의지하게 되니

春風座上淸 봉바람이 그 자리에 맑구나

또 스승에게 고별인사를 하며 이별을 읊은 것도 있다.

談經幸得發金春 經울 談論하여 金樂器의 소리를 얻었네

一月春風仰有容 정월의 봄바람에 우러러뵈는 모습 있도다

世道他時應永積 세상의 길을 후일에 응당 선생께 의지하리니

共祈函丈 壽 如松 선생님께서 소나무처럼 壽 하시기를 함께 비노라 27)

洞玉 朴燦暎은 이재와 석실서원에서 동문수학한 벗으로 이재의 교유시에 자주 나타난다.

「哈贈洞玉」 28) 은 이재가 형옥과 석실에서 달포를 넘게 지내다가 돌아가게 됨에 같은 배를 타고 가며 서로 이별의 뜻을 표함에 십히 섭섭하여

25) 위의 책, 27 쪽.

26) 『이재속고』 권 1, 323 쪽.

27) 『이재유고』 권 2, 26 쪽, 自師門告 而退 洞 玉有 詩 屬利座中 余亦不敵無 貞 』.

28) 위의 책, 갇은 곳.

읊은 시인데, 「舟中洞玉呼韻」 29) 도 그들이 배를 타고 가면서 형옥이 韻울 부름에 이재가 운에 맞춰 읊은 시이다.

六月下江漢 6 월에 한강을 내려가니

微 爲不陽 희미하게 개어서 별이 나지 않는구나

沙平元 모래 벌은 본래 아득하고

山轉更蒼蒼 산울 돌아드니 다시 창창한 숲이라

可配雲樓遠 구름 속의 누각이 멀어져감을 견디며

因思石室凉 인하여 석실의 서늘함을 그리워한다

南歸應幾日 남쪽으로 돌아감에 며칠이 걸릴까

天末是吾鄕 저 하늘 끝이 이 나의 고향이로다

이 밖에도 高漢聖(通甫), 宋益中(仲建), 朴光淳(綠素), 僧 受 柳匡天, 李君七,任景馮, 臼時德, 任會一 등과의 교유시를 엿볼 수 있다.

(다) 鄕慈

이재 시 가운데는 향수를 읊은 시가 많은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앞서 閑情이나 交遊詩는 다른 시인의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으나 鄕怒인 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만이 지닌 독특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38 세가 되어서 비로소 장롱 참봉의 천거를 받아 강원도 영월로 부임하기 전까지의 이른바 修學 라고 볼 수 있는 시기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가 별로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微官으로 포근한 고향을 떠나 강원도의 깊은 산골로 부임한 이래로는 향수에 젖은 시가 자주 눈에 띈다. 장롱 참봉 이후 그는 義益庫 奉事職으로 자리를 옮겨 서울생활이 시작되었지만 서울생활은 그에게 어떤 만족스러움을 주지 못하였다.

그는 그때마다 늘 고향에 내려가고자 하였고, 더러는 갈 수도 있었지

29) 위의 책, 같은 곳.

만 무언가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객지생활을 던지지 못하고 宮家舵의 주변을 배회하면서 고달폰 末職을 감수해야 했다.

학문적으로는 이재의 박학함을 인정하고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를 적극적으로 추천해 주는 이는 별로 없었고, 두어 번 과거에 기대를 걸어보았으나 될 듯하면서 이상하리만큼 낙방의 쓴잔을 마셨다. 權門勢家 출신이 아닌 그로서는 談官으로서 높은 벼슬을 바라기는 어려웠다.

과거급제도 대부분 권문세가에서 차지해 버려 당시 과거제도의 폐단을 알고 있는 그는 부친이 돌아가시자 과거를 단념하였다.

그가 벼슬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는다면서도 벼슬길을 바랐던 것은 오직 부모님을 봉양하고 기쁘게 해드리기 위함이었다. 그는 主簿 • 翊賀 • 縣監 등을 전전하다가 59 세에 全義 縣監을 마지막으로 관직생활을 마감하였다.

그는 객지생활의 고달품과 관직생활의 서러움 속에서 자연 그가 자랐던 포근한 고향과 부모형제들을 그리워했던 것이다. 더욱이 효성이 지극했던 그로서는 부모를 떳떳이 모실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그 안타까움은 누구보다도 간철하였다. 그의 향수어린 시는 『이재속고』편에 더 많이 실려 있다.

江行漫成 30)

舟如牛背稷 배는 소의 등처럼 편안하고

人在鏡中淸 사람은 맑은 거울 속에 있도다

孤何年亢 의로운 섭은 어느 때에 우뚝 솟았는가

平沙盡日明 평탄한 모래 벌은 해가 다하도록 밝기만 하다

帖天元草色 하늘은· 본래 초록빛이라

移岸自鷲聲 강 언덕을 지나니 꾀꼬리소리 둘리는구나

忽憶吾鄕遠 홀연히 내 고향이 멀리 있음을 추억하고

30) 위의 책, 2쪽.

無窮父毋情 부모님을 그리는 정 무궁하도다

이 시는 그가 석실서원에 머물며 공부할 때 한강에 배를 타고 강변의 경치를 구경하면서 문득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는 시인 듯하다. 「越州歌九章章十句」 31) 는 이재가 38 세로 장릉 참봉에 천거되어 강원도 영월에서 端宗墓의 관리자가 되었을 때 궁벽한 산골의 의로움 속에 고향에 있는 가족을 그리며 읊은 시다. 이 시는 9 章으로 된 七 言 十句 (90 句)의 長詩로 첫 章에서는 이재 자신의 신세를 읊고, 父, 母, 弟, 姉, 妹, 妻 子, 女息의 순서대로 그들의 환경과 사정을 낱낱이 읊었다. 여기에 서는 이재 자신을 읊은 첫째 장만 수록하겠다.

有客束遊字永燮 동쪽으로 온 나그네 있으니 字는 永燮라

半生 倒甘人疑 半平生 못나서 사람들에게 달갑게 짓밟혔노라

讀睿 千卷果安用 천 권의 독서 과연 어디에 쓸 것인가

不向朱門肯炎手 權門勢家로 향하지 않고 제사드리기를 줄기네

尙 喜 伊來輯天 靈 오히려 여기 와서 天 靈 에 의뢰함을 기쁘게 여기니

將身可以資師友 이 몸은 장차 師友와 더불어 지내고자 했더니라

誰遣烏紗便到頭 누가 관모를 보내어 문득 머리에 쓰게 했는가

禹穴追遼旅顔酸 우임금의 묘는 멀고 멀어서 나그네 모습이 추해졌구나

鳴呼一歌令歌初放 오호 한 노래여 ! 처음 노래를 시작하노니

南望鄕山情虛腦 남쪽 고향산 바라보며 의로운 창가에서 수심에 젖는다

* 이하 8 장은 생략함.

이 노래의 每章 9 句에는 令字가 끼어 8 言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음은 七言絶句의 望鄕詩 한 수를 적어보겠다.

31) 위의 책, 28-29 쪽.

付家書有感 32)ꁕ

江南造想雜花 江南의 내 고향, 멀리 회상하니 온갖 꽃 피었겠구나

喝盡群終 日 幾回 뭇 꾀꼬리 하루에 몇 번이나 울기를 다하였던가

一雨京華春亦謝 비 오는 서울의 봉도 하직을 고하니

不塔怒絶望鄕 望鄕 에 울라 향수에 젖음을 어이할 수 없구나

집에 편지를 보내며 꽃피고 새 우는 고향을 그리워하여 서울을 떠나고 싶은 심정을 읊었다.

다음에는 이재의 晩年에 읊은 시를 적어보고자 한다.

東軒舊名樂辰堂 不知誰筆也 日坐樓上 東村雲住山漫賊 33)

斐鶴無樓確少梁 의로운 학은 깃둘 곳 없고, 기러기는 내려앉을 물이 적

구나

鏡中華炭媒新凉 거울 속의 백발, 바람소리 새롭게 서늘함을 느끼는데

歸心旦被山雲住 돌아가고픈 마음 산구름에 가려졌으니

只爲天襄到底光 다만 임금님의 은혜가 나에게 끼쳤기 때문이다

구름 머무는 산을 바라보며 집에 돌아가고 싶어도 聖恩 때문에 결행하지 못함을 나타내었다. 詩題에 樂辰堂이 束軒의 현판이 붙어 있는 곳이라면 전의 현감 시절에 쓴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에는 『이재속고』의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시제는 〈白露日 에 의지할 바 없어 홀로 앉아 杜甫詩 露從今夜白」의 다섯 글자를 韻으로 해서 五絶 5 首를 이루다〉라고 하였다 .34)

自我寫東華 나는 우리나라에 사는 사람

32) 위의 책, 43쪽.

33) 위 의 책 권3, 54쪽.

34) 『이재속고』 권1, 324쪽. 白露日獨坐 用杜詩露從今夜白 分成五甘」.

光陰苦恥盤 세월은 무정하게 달리고 달려

來時日流金 울 때는 삼복더위 기승을 부리더니

祖銃 音 露 갈 때는 학이 이슬에 놀래는도다

削憶 靑 陽節 문득 봉을 회 상하며

慕古希造縱 옛을 흠모하고 끼친 자취를 바라다가

公然炭已森 공공연하게 머리털이 벌써 파뿌리가 되도다

欲息將誰從 장차 누구를 믿고 따라야 할지 한숨만 나온다

端居感物化 일상생활 속에서 物의 변화를 느끼나니

淸商爲散樣 맑은 가울 소리가 옷것에 흩어진다

吾年庶不惑 내 나이 이제 40 이 다 되었으니

聖言傳到今 聖人의 말씀이 이제야 이르게 되었도다

忽忽望南天 홀연히 남쪽 하늘 바라보니

孤 雲 逸親舍 의로운 구름 어버이 집에 둘렀는데

斗祿意何爲 별볼일없는 봉급쟁이, 마침내 어찌하면 좋울고

緩轉仇寒夜 차가운 밤을 福轉하며 참 못 이룬다

岭燁 島 近床 귀뚜라미는 평상 아래에서 울고

蒼 牙月死魄 처마의 달은 그뭄이 가까웠도다

歸 軟勿億期 돌아가리, 때를 어기지 말자구나

恐見飛 雪 白 흰 눈이 휘날리는 것을 보기가 두렵구나

첫째 首에서는 세월이 빠름을 회고하고, 둘째 수에서는 옛 성현을 본받아 학덕을 이루겠다는 꿈이 깨졌음을 탄식하고 있다. 셋째 수에서는 평범하게 사는 가운데 만물의 변화를 느끼는 것이 곧 전리임을 깨달아 40 에야 성인의 참뜻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넷째 수는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구차한 봉급으로 부모를 제대로 봉양치 못하는 신세라, 벼슬을

그만둘지 아니면 이런 생활을 계속해야 할 것인지를 밤새우며 잠 못 이룬다. 다섯째 수는 바야흐로 가을이 돌아왔으니 빨리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다침한다. 머뭇거리며 시일을 보내다가 눈 날리는 겨울이 오면 오지도 가지도 못하리니, 때를 늦추지 말고 추위가 닥치기 전에 고향에 돌아가리라고 하였다.

비록 두보의 시구를 次韻했다고 하지만 두보시처럼 인생의 무상함과 애수가 그의 시에 스며 있음을 느낀다.

「客館秋夜」 (속고 권 1, 305 쪽) , 「秋夜」 (속고 권 1, 갇은 곳) , 「客懷」 (속고 권 1, 307 쪽), 「旅館 習 懷」 2 首(속고 권 1, 312 쪽) 등도 모두 나그네의 회포를 읊은 향수어린 시이다.

그에게는 또한 명철과 관련하여 읊은 시들이 적지 않다.

秋夕 35)

今節家鄕遠 오늘이 추석인데 고향은 멀리 있고

悠悠客一洋 유유한 나그네 한날의 浮浮草라

天淮違上塚 저 하늘 끝가에 있어 성묘도 할 수 없고

夢裏憶超庭 꿈 속에서나마 집에서 살고 있는 모습을 추억한다

描落蕭展感 객지로 멀리 떨어져 새벽의 정감이 쓸쓸하니

間關險路經 關을 사이에 두고 험한 길을 지나

何當南去好 남쪽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좋으리

高薇邊樣靈 휘파람 높이 불며 가슴을 온통 풀어헤치리라

명철이 되면 유난히도 고향이 그리워지는 십정, 어릴 때 고향에서 지내던 모습을 꿈 속에서나마 상상한다. 이 밖에 새해를 맞으면서(「新歲志 感」, 이재속고 권 2, 330 쪽), 정월 보름(「上元有感」, 이재유고 권 2, 46 쪽), 3 월 3 질(「三月三日有懷」, 이재속고 권 1, 323 쪽), 重楊節, 除夜 등의 명철과 관련된 향수시를 찾아볼 수 있다.

35) 위의 책, 319 쪽.

또한 고향이 그리울 때면 시로써 마음을 달랜다고도 하였다 .36) 이재의 많은 향수시들은 아마도 그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심정의 발로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그가 고향에 돌아와 기쁨을 느끼는 시 한 수를 추가하겠다.

還家 37)

萬里歸鴻侯 기러기는 만리길 돌아가고

南歸遊子情 나그네 남쪽으로 가는 情

靑雲萬城俗 靑雲은 京城에 俗되게 가득 차 있으니

白炭 山淸 백발로 산의 맑음을 대하노라

梅竹庭前在 뜰 앞에는 매화와 대나무 있고

圖魯案上里 서재에는 책이 놓여 있으니

吾可眞可樂 내 집만큼 진실로 줄거운 곳 없도다

不必吹慈生 이야말로 부질없이 근심을 불러일으킬 것 없도다

功名울 꿈꾸는 사나이들이 득실거리는 곳, 속된 서울을 떠나 고향에 돌아오니 山精氣는 더욱 맑고 정원에는 梅竹이 있으며 서재에는 책이 가득하다. 이 곳보다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느냐고 기뻐하고 있다. 그는 還家해서야 가정의 따사로움을 맛본다.

(라) 敍景

이재의 敍景詩는 마치 山水畵를 그리듯 寫實的인 묘사를 즐겨하고 있으며 閑情을 읊거나 旅程울 나타내는 내용들도 서경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자연 묘사에 치중하고 있는 시를 중십으로 그의 서경시를 분류 하였다. 그의 서경시들은 대부분 修學期의 젊은 시절이나 仕室期의 중년

36) 위의 책, 寄孫君禧, 321 쪽.

37) 위의 책 권 2, 330 쪽.

에 치우쳐 있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이재유고』 권1, 2 와 『이재속고』 권1에 수학을 표현한 시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단정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이재가 수학시철에 白羊山寺에서 지낼 때 백양산사에 딸린 雲 門庵에 울라가서 그 景 槪를 읊었다.

上雲門庵 38)

38) 『이재유고』 권1, 20쪽. 이 시는 『이재난고』 권3에 庚申年 9 月 11 에 쓴 시로 나타나 있으니 영조 36년에 지은 것이다.

始梵名山好 비로소 명산이 좋은 것을 알겠구나

等輿不 難 대나무 수레로 가는 것도 두렵고 어렵지 않으니

孤樓流水週 의로운 누각에는 물이 돌아 흐르고

古壁夕陽殘 오랜 벽에는 석양이 남아 있도다

楓 卒紅猶淡 단풍은 파리하나 붉은빛 이 담박하고

松耀碧 轄 寒 소나무는 여위었으나 푸르름은 추위를 느끼게 하네

應 尋 最 高 處 제 일 높은 곳을 응하여 찾아서

備 雲 端 구름 저쪽을 굽어보며 휘파람을 부노라

암자의 고색창연하고 그윽한 경개를 나타내어 마치 한 폭의 그립을 보는 듯 눈에 선연하다.

다음은 松 • 菊 • 梅 • 竹을 읊은 시다.

又和四歌 39)

(松)

落落臨哀堅 낙락장송이 구령에 드리운 것 애달프니

鮮轍本性全 고운 껍질 갈라져 터졌으나 本性은 온전하도다

自應枝不 스스로 가지에 응할 름이 없으니

藤 焉 政相章 덩굴과 담쟁이를 감히 견제하지 못하는구나

39) 위의 책, 24 쪽.

(菊)

鮮鮮直宜 고운 모습 똑바르니 서리가 내려도

幽秀如有立 그윽하게 빼어남이 독립해 있는 것 갇구나

抵死亦猶 죽음에 이르러서도 향기 오히려 멀리 퍼지니

寧爲兒女泣 어찌하여 兒女子를 울게 하느냐

(梅)

可但調英實 가히 다만 매실줍을 만드노니

麟臘韻高 가득한 향기 섣달의 운치가 높도다

節看存鐵骨 문득 바라보니 철골이 있어

塔與慰 蕭 惡 감히 견디며 더불어 쓸쓸한 詩客을 위로한다

(竹)

冬荷幾多年 겨울을 무성하게 몇 년을 지냈던고

縱描成束矢 꺾고 쳐내어 화살다발을 이루니

威鳳去已造 위엄있는 봉은 떠나서 멀리 사라지도다

感軟良在時 감탄함이 전실로 이때에 있도다

松·菊·梅 은 모두 철개와 지조의 상칭으로 우리 옛 사람이 즐겨 詩題로 선택하였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그 강한 인내로 견디는 모습은 선비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기도 하였다. 이 시는 『이재난고』 권3에 의하면 甲申年(영조 40년) 2월에 지은 시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完山(全州)의 南樓에 울라 전주의 시가지를 굽어보면서 완산의 風物울 묘사하였다.

完山南樓 40)

朱漏入靑冥 붉은 난간에서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니

40) 『이계속고』 권1, 305쪽.

氷雪徹擦淸 빙설이 거치니 흉금이 맑구나

束洪慶基殿 동쪽으로 경기전을 향하고

南膳百濟城 남쪽으로 백제성을 을려본다

鳥飛平地涼 새는 날아 평지를 스쳐 지나가고

人語碧空 輕 사람의 말소리는 푸른 공중에서 경쾌하구나

府內誰云大 府內를 누가 크다고 말했더냐

還如一小 도리어 하나의 작은 웅덩이 감도다

城外城中五千家 完山城 안팎이 5 천 家戶롤 이루니

千家盡映紅權花 그 중 千家는 紅楠花가 다 비 친다

素衣靑若遠溪女 흰 옷에 푸른 대숲을 끼고 멀리 개울가에 있는 여인들

快馬健奴誰氏車 날랜 말에 전장한 노복이 있으니 어느 누구의 수레 런가

香鼓識時 月 황혼에 치는 북소리는 때를 알려 달을 보고 비로소 울부

짓는다

晩摩土忽成篠 새벽바람이 땅을 휩쓸며 홀연히 煙霞를 이룬다

方知五十三州內 바야흐로 알겠거니, 조선 53 주 안에서

惟一南京獨可諦 유일하게 이 南京이 오직 자랑스럽구나

完山南樓詩는 五言律詩와 七言律詩의 2 首로 이루어졌다. 『이재난고』권1에 의하면 그의 나이 18 세쯤(丙寅 丁卯間)에 이루어진 시이다.

그 시절 完山城 안팎이 5 千 家口쯤 되었다니, 全州府의 번성함을 알 수 있고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여인의 모습과 大官의 수레로 보이는 마차와 황혼녘의 경치, 새벽바람에 일어나는 안개의 흐름을 서경하여 조선 53주 내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곳임을 나타내었다. 여기에서 납루란 그 위치로 보아 豊南樓임이 분명하다.

이 밖에 金山寺, 拔香亭(泰仁), 參禮, 登山(廳山), 楚山(井邑) 등의 이름이 보이는 서경시들이 있어서 친근한 애착심마저 느껴진다. 金溝縣에서의 풍경 한 토막을 적어보겠다.

金溝道中 41)

束鳳西凰一雨過 봉황이 한바탕 쏟아지는 비에 지나가고

來溪紅杏婚人多 골짜기 시내에는 붉은 은행과 美人이 많도다

行行自此風光好 여기서부터 갈수록 風光이 더 좋으니

白嶽山前更若何 백악산(북한산) 앞에 다시 있는 듯

금구는 전주에 속했던 현으로 毋岳山 뒷끝에 자리잡아 경치가 좋은 곳이다. 마치 서울의 白嶽山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하였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것 이외에 人事의 景울 서술한 것이 있다.

過牙山 白巖坪有感二 42)

右南望溫泉行宮

溫城直 是花山 溫城(溫陽)에서 북으로 곧장 가면 花山이라

隱隱行宮遠樹間 은은한 行宮은 멀리 나무 사이로 보인다

知有四朝臨浴所 네 왕조가 목욕하는 곳임을 알겠으니

聖泉嘉號冠東裵 聖泉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東邦에 으뜸일세

右 望金衛李忠武顯忠祠

桐鄕行過又桑鄕 오동나무 마을을 지나고 뽕나무 마을을 지나니

大樹餘風立馬場 큰 니무 바람에 흔들리는 곳에 말 매던 곳 있도다

海外元功天下澤 해의에서의 으뜸가는 공이 천하에 골고루 미쳤으니

他時一酷尊丹黃 다른 날 붉고 누런 술울 한 잔 을려 제사하리라

이 시는 이재가 전의 현감으로 있을 때 牙山 白坪 뜰에서 온천으로 행하는 임금의 행차와 金衛에 있는 李忠武公의 현충사를 바라보며 읊었다. 임금이 목욕하시던 聖 가 와 임진왜란에 왜적을 바다에서 물리친 이순신의

41) 위의 책 권2, 330쪽.

42) 재유고』 권3, 54쪽.

祠堂에 대한 경전함을 나타내고 있다.

(마) 自噴

외견상 평범하고 순탄한 일생을 보낸 듯이 보이는 이재를 詩를 통해서 보면 의의로 자신을 슬퍼하는 시가 많음에 놀란다. 그는 당쟁 등으로 인하여 유배당하거나 비참하게 零落한 풍운의 정치인도 아니었다. 한평생을 오로지 학문에 순수한 열정을 바친 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벼슬은 6品울 넘지 않았고 外職으로 木川과 全義의 현감 노릇을 한 것 이의에는 관리로서 백성들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다. 또한 그가 거친 內職이란 별로 실속도 없는 閑職으로서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스스로 만족할 만큼 미련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학자로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지식과 포부를 실생활을 통해서 구현해 보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大科에도 몇 번 응시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겨우 38세에 이르러서야 藤官으로서 末職인 참봉을 拜하게 되었다.

호남의 해변가에서 성장한 그는 중앙의 權門勢家의 눈에는 하나의 시 골뜨기에 불과했다. 그의 학문을 익히 알고 있는 高官大爵도 그의 해박한 지식에는 감탄하였지만, 그에게 벼슬자리를 주고자 밀어주는 이는 없었고, 더구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것이 음관으로 出仕하려는 그에게는 어려움이 많았다.

어느 때 황윤석은 敎旨를 받들어 入直官으로서 集 慶 堂에 入侍하였는데 임금이 職掌과 姓名을 물었다. 묻기를 마치자 결에 있던 領議政 金致仁이 먼저 아뢰기를, 〈臣이 듣건대 황윤석은 易學에 깊고 百家 를 會通 하였으며, 餘力으로 文章에도 능하여 이제까지 編 輯 廳 울 돕고 있습니다. 임금님의 裁可를 받던 당초에는 조정의 의론이 황윤석을 特還하고자 하였으나, 『文獻備考』는 그 部門과 條項에 따르게 되어 있으므로 여러 신하 에게 나누어 위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속히 監修하여 만들어야 하는

데 황윤석은 一門一條로 일을 맡기기는 불가한 일이고, 마땅히 총괄하여 위촉할 것이로되 음관이라는 것이 장애가 되어 文官의 관례로서는 수행이 불가능합니다. 임금께 아뢰어 여러 堂에게 사무를 담당케 하되, 다만 아래로부터 사사로이 왕래하여 상의를 시키도록 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43)

그가 『문헌비고』 편집을 총괄할 수 있는 능력과 博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일을 시킬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또 承旨 趙跋이 황윤석 부자의 문학과 行諒가 심히 깊다는 점을 강조하자 마침내 임금이 직접 윤석에게 이것저것 묻고 그의 議論에 감탄하였다. 얼마 후 승지 申景濬과 함께 입시한 자리에서 그들이 살던 마을의 이름과 순창과 홍덕 간의 相距가 얼마나 되는지를 물은 후에 能하였는데 임금이 侍臣에게 말하기를 〈신경준은 다행히 나를 만나서 그 재주를 펼 수 있었는데, 황윤석은 오직 나를 만나지 못하였으니 他日에 그 누구 쓰는 자 있으리요〉 하였다 한다. 영조가 만년에 가서야 황윤석의 재주를 알아보았지만, 대개 임금의 뜻은 그가 과거에 오르지 못한 것을 아까워한 듯하다 .44)

먼저, 그가 庭試를 보러 가는 도중에 읊은 시가 있다.

壬申八月有庭試余往起途中偶成 45)

疑患曾經法 근십과 아픔이 일찍이 나를 겁나게 하더니

秋來髮欲宣 가올이 음에 귀밑머리가 일찍이 세고자 하는구나

遠遊還此日 멀리서 음에 이날이 돌아오니

萬事只蒼天 모든 일은 저 하늘에 말길 뿐

落落寧難合 높고 높은 것은 오히려 합하기 어렵고

43) 『이재선생 행장」, 587쪽.

44) 위의 책, 갈은 곳.

45) 『이재속고』 권1, 313쪽.

迎迎却有緣 지지부전한 것이 나의 연분이로구나

江山無限意 강산의 뜻을 헤아릴 길이 없으니

新確定相傳 새로 오는 기러기 정히 좋은 소식 전하리라

과거를 보는 일에 그는 겁을 먹고 있다. 그래서 아직 24 세밖에 되지 않았는데 머리가 세려고 한다는 것이다. 먼 길을 달려온 이날의 운명을 저 하늘에 맡길 뿐, 靑雲의 뜻은 성취하기 어렵고 나의 일은 지지부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내 연분인 듯, 그러나 이번에는 좋은 소식을 전하리라고 낙관해 본다.

그런데 모처럼 기대해 보던 과거는 실패로 그치고 만다.

失第南歸朝次梨峴旅店二首46)

翁 鶴炭在江南 어버이 늙어 강남에 계시는데

詐夜思兒政不塔 지난 밤 아들 생각하느라고 정히 괴로우셨겠지

世上功名何與我 세상의 공명은 어느 때 나와 함께 할 것인가

夢回千里自成慈 꿈에 천 리를 돌아가니 스스로 부끄러움만 이루었구나

늙으신 부모에 대한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드러내면서 功名이 자기에게 이르지 않음을 슬퍼하고 있다. 이 시는 제목으로 보아 과거에 낙방하고 남쪽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 梨峴의 旅店에서 읊은 시임을 알 수 있다.

다음 시는 자기의 신세를 自暎하면서 스스로 위로를 찾으려 하고 있다.

味懷二首 47)

平生志氣壓南州 평생의 志氣는 남쪽 고을을 壓頭하였건만

猶此樓樓瀋一頭 오히려 이 마음이 들떠서 머리가 곽 막혔구나

天讓局踏軟段後 하늘의 千里馬는 조랑말 뒤에서 발굽을 오그리고

46) 위의 책, 323 쪽.

47) 위의 책, 308 쪽.

夜珠藏彩斌夫流 夜光珠는 광채를 옥돌의 類에 감추어버렸도다

年來浙斷風座夢 근래에 와서 세상 풍전의 꿈이 점접 스러지니

春去徒深歲月怒 봄은 가고 부질없이 세월이 깊어짐에 근심만 더하는도다

說靑雲漢山 듣건대 漢山 북쪽에서는 靑雲을 말하며

緖粉朱紫幾千 善惡의 무리들이 몇 천이나 어지러이 날뛴다고

不用悲傷歲月 세월의 빠름을 슬퍼하여 傷心하지 말자

天生男子登尋常 하늘이 사나이를 낳으매 어찌 심상히 내겠는가

功名在分難難力 功名은 분수 있는 것, 비록 힘쓰는 것만으로는 어려운 것

職業由人旦勿忘 직업이란 사람을 말미암아서 있다는 걸 잊지 말자

誠實着心終有效 성실하게 마음 붙이면 마침내 결과가 있으리니

樓遠失志亦何僞 뜻을 잃고 방황하여 또한 어찌 마음을 상케 할 것인가

君看自古英賢士 그대여, 自古로 英賢한 선비물 보아라

未必皆從富貴場 반드시 모두 富貴를 쫓아간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한때는 남쪽 고울에서 장래를 촉망받는 선비로 豪氣를 떨치며 포부도 컸었다. 그러나 세월의 풍진 속에서 자신이 점점 위축되어감을 느끼며 官府에서 소의되는 것이 서럽다. 서울에서는 많은 무리들이 청운을 붙들고자 날뛰는 세상이다. 그러나 어찌 하늘이 사나이를 버리겠는가! 성실하게 살면 언제인가는 그 빛을 보겠지. 사람마다 각자의 召命이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부질없이 부귀 쫓는 것에 마음을 두지 말자고 다침하고 있다.

그가 젊었을 때 읊은 「放言」 48) 이라는 시를 보면 그는 자신감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서 그의 자탄은 더욱 심각해 지고 있다.

48) 『이재유고』 권 1, 12 쪽.

漫成 49)

濟身經世登殊塗 몸을 이루고 세상을 經給함에 어찌 다른 길 있으리요

成法流傳自大低 법을 이루어 전하여 온 것은 大情로부터라

可借偏方時又晩 애석하구나, 치우천 지방에서 태어나고, 때 또한 늦었으니

白頭隨處見廟辻 흰머리 가는 곳마다 辻活함을 비웃는도다

몸을 이루고 세상을 경륜하는 것이 大信의 뜻이건만, 자기는 서울로부터 먼 변방의 호남에서 태어났고, 또 늦게야 벼슬을 한답시고 微官末職에 매달리고 있으니, 자신의 못남을 비웃는 듯한 태도가 내 가슴을 멍들게 한다고 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전라도 지방은 정치적으로 소의되어가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사실은 李重煥이 『擇里志』에서 기록한 바에 의하면,

전라도에서는 園朝 중엽 이후로 큰 벼슬을 지낸 사람이 드물어서 인재를 능히 배양하지 못하였으므로 인물이 적고, 士大夫는 서울 親知를 따라서 色目이 구별되었다. 까닭에 예전에는 南人과 北人이 많았으나 지금은 老論과 少論이 많다. 도내에서 큰 氏族이라고 불리는 자는 십여 집에 불과하며 부유한 집도 많으나 높게 알려진 사람은 드물다. 이것은 奇大升, 李恒 이의에는 先生長者로서 선비둘을 지도 훈계할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60)

조선 중엽 이후로 전라도가 정치적으로 소의된 원인을 다른 지역에 비해 學派나 黨派를 이끌어갈 만한 先生이 없었던 데서 찾는 것은 文廟에 배향된 18 현을 살펴보면 더욱 확연히 나타난다.

전라도 출신으로 문묘에 배향된 인물은 長城 출신의 金麟厚 (1510 ~1560) 단 1명에 불과하며 이는 경상도 8명, 충청도 4명에 비하면 훨씬 적은 수이다. 또한 김인후의 배향도 그가 죽은 지 200 여 년이 지난 정조

49) 『이재속고』 권2, 339쪽.

50) 李重煥, 『擇里志』, 卜居總論」, 心條.

20년 (1796)에야 이루어전 것임을 볼 때 전라도의 정치적 소의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소의를 가중시킨 중요한 원인으로는 선조 때의 鄭汝立 謀坂사건에 연유된 것으로 보인다. 정여립의 逆謀가 사실이었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 이를 계기로 하여 西人의 領首 鄭澈은 이른바 당시 湖南五臣(鄭介淸 • 柳夢井 • 曺大中 • 李澄 • 李浩)과 그 가문을 쑥받으로 만들었고, 이 모반사건이 전라도 지역에 가져다준 영향은 조선 전기의 함경도 • 평안도에 못지 않았다고 한다. 51)

51) 洪性德 「全 實學 의 展開」, 《全羅文化論穀》 제 5 집(全北大 全羅文化硏究所刊, 1992) , 340-341쪽.

황윤석도 이러한 지방적인 제약 때문에 중앙과의 인맥관계가 소홀하여 자연 출세에 지장이 있었던 듯하다.52) 또한 당파간의 반목이 심했던 그 당시에는 이재가 처신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52) 李 睿 九도 이재의 「墓磁銘」에서 중세 이전에는 호남에 많은 인재가 있었으나, 근래에 와서는 접정 裵微해 지고 있음을 한탄하였다. 〈惟中世以上 湖南之人材彬 醉置長德 相繼有作 而時代店速 流風浙微 此識者之所共噴也〉 『이재속고』권 13, 附錄 「墓磁銘」, 593 쪽.

황윤석이 처음 莊陵 參奉으로 천거되었을 때 그 천거자가 소론인 鄭景淳 형제로 알려지자, 노론인 金元 의 아들 金履安이 이재의 염려를 달래고자 오히려 위로의 말을 던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데 천거자가 소론이었다는 점에서 그는 노론의 따가운 눈총이 두려워지기도 하였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53)

狂風에 落花하는 모습을 비유하여 黨爭의 飛禍룰 풍자한 시를 보면

近聞都下多斌落花詩 54)

一朝露霜降晴空 하루 아침에 괴성벽력이 맑은 하늘에 내리더니

風持流鷲雨打蜂 광풍이 꾀꼬리를 다 쓸어버리고 비는 벌을 두드리도다

53) 李康五, 亂纂 解題」, 《全羅文化論穀》 재 5 집, 160-161 쪽, 丙戌七月四 條日 記

54) 이재속고』 권2, 330쪽.

無限落花誰政情 끝없이 떨어지는 꽃, 누가 감히 애석해 할까

只應撮鄕任西束 다만 내던지는 것을 東西에 맡길 뿐

당시 束人(南人)과 西人(老論)과의 당쟁으로 인한 화근을 이렇게 비유하여 나타낸 듯하다.

당쟁의 화를 표현한 시를 또 한 수 적어 보면,

記聞 55)

겔閣旦論凶黨其 高官의 집에서 또 菓를 凶黨으로 몰아세우니

低緊欲出廟庭誰 個贊이 조정에 나가고자 할 사람 누구인고

長安百里造回首 장안 백 리를 멀리 살펴봐도

唯我無朋慰所思 나는 朋黨이 없으니 그것을 위로로 생각하노라

이재는 비록 노론에 가까운 집안이라고 하지만 본인이 어떤 黨色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위로가 된다고 하였다. 당색의 폐해는 조정의 큰 골칫거리요, 처세에 지극히 어려운 대목이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중앙에서 친척이나 연줄을 댈 수 있는 인물을 구해 보았지만, 벼슬을 얻지 못하는 고동을 다음과 갇이 표현하였다.

漫書四首 56)

洛城雲物又新秋 서울의 기후는 또 새로운 가을을 맞았는데

淸雨空漆白露道 맑은 비는 허공에 뿌려 흰 이슬을 맺혔도다

入夜那塔聞短燁 밤이 돌아오니 귀뚜라미 소리를 어찌 감당할까

歸心千里 同流 돌아가고폰 마음 천 리인데 물도 함께 호른다

吾登平生高踏人 내 어찌 평생에 高踏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55) 위의 책, 336 쪽.

56) 위의 책, 339 쪽.

爲官求卑抱緣親 벼슬을 위하여 과거를 구하고 緣親울 모두 찾아보았건만

臼頭已是魔相戱 흰머리는 이미 鬼廣의 조롱거리가 되고

無奈庭陀一病身 미끄러져 한 병신이 되었으니 어찌할 도리 없구나

人笑將歸我戀歸 사람들은 내가고향을 그리워하여 돌아가고자 함을 비웃나니

未成榮養欲何爲 영달하여 부모 공양 이루지 못하고 무엇을 하고자 하느뇨

秋風去去英容國 가을바람은 蓮花恐로 가고 또 가는데

裕超西山愛日陣 차라리 西山에 나아가 효도로써 빛내리라

明時投跋距初心 밝은 때에 벼슬을 던지니 어찌 처음 마음이랴

慈線離懷日月深 어머니를 이별한 회포는 날이 갈수록 깊어진다

如海門前終航備 고관대작의 문전에서 끝내 뻣뻣하여 屈하지 못하니

-靴南出更誰禁 한 번 채찍질하여 남으로 감을 다시 누가 말리겠는가

그는 벼슬을 구하려고 애써도 모두 어그러지고, 돌아가고자 하나 부모에게 榮達의 奉養도 안겨주지 못한 채 돌아감을 사람들이 비웃는다고 했다. 좋은 시절에 벼슬하는 것을 어찌 탓할 수 있으리오만, 권문세가의 문전에서 굽신거리지 못하는 주제라 남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西洋早秋對雨睿感」 57) 에서도 벼슬을 구하러 가는 자신을 거짓 陶淵明이라고 自廟하고, 朝野의 모든 이들이 모르는 척 쳐다보기만 하니 부끄럽기 그지없다고 실토하고 있다. 그 밖의 「自廟」 58) 에서는 木川 원님인 자신이 가소롭다고 하면서 주머니는 비고 官衛는 고요한데 병으로 고생함을 탄식하고 있다. 또 「自笑六絶」 59) 은 몸은 城市에 있으나 마음은 山林에 있음을 말하고 하급관리 생활의 서글폼, 어버이를 위한답시고 무엇

57) 위의 책, 같은 곳.

58) 위의 책, 341 쪽.

59) 『이계유고』 권 2, 47 쪽.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자신의 신세자탄을 읊고 있다.

(바) 懷古

옛일을 되돌아보며 회포에 젖어 읊은 시들을 懷古詩로 묶었다. 황윤석은 歷史와 典故에도 해박하였으므로 緣故가 있는 情兼에 접하면 그 감회를 시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회고시는 그 자신 지난 날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나 역사의 哀歡이 남아 있는 자취, 또는 그가 여행하면서 지나는 곳의 古跡을 대상으로 하였다.

다음의 시는 이재 시편 중 첫 쪽에 나와 있는 회고시라 하겠다.

流朋磁懷古 60).

八百年前跡 800 년 전의 자취

溪岸上 쌍계의 언덕 위에 누대 있으니

海雲今杏杏 海雲(崔致遠의 號)의 자취 이제 아득한데

誰說九龍來 누군가 말하기를 九龍이 왔다고 한다

유상대는 泰仁의 옛 縣에 있는 최고운의 追造處라고 注를 달았고, 시 뒷부분에는 英宗 에 큰 물이 졌는데 石灘菴의 僧이 마침 장가 있는 언덕을 바라보니 光明이 대낮 갇았다. 九龍이 꿈틀거리고 金冠에 옥을 차고 왕래하는 사람이 있어 그를 이상히 여기고 감탄하여 이르기를, 최치원이 다시 到來하였나 보다고 했다는 것이다.

최치원을 읊은 시는 다음에서도 찾아 수 있다.

諒懷古跡 61)

孤雲縱跡世爭疑 孤雲의 종적에 대해서는 세상이 다무어 의심한다

如鬼如仙總未知 그는 귀신도 갇고 신선도 감아서 도무지 알 수 없다고

60) 위의 책 권 1, 5 쪽.

61) 위의 책, 10 쪽.

靑鶴紅流來往日 청학 날으는 紅流洞 계곡을 왕래할 때에

鎖林請嶺翊興時 계림은 망하고 곡령이 홍할 때라고 했네

非關素薔耿詩酒 평소에 詩酒를 담하는 것을 관계치 아니하니

不是高風效顔箕 이 고상한 풍이 箕山系貝 를 본뜬 것은 아니다

料得當年微意在 헤아려 보건대 그때에 미묘한 뜻이 있음을 얻었으니

孤 雲 縱跡世何疑 고운의 종적을 세상은 어찌 의심하는가

최치원의 최후에 대해서는 세간의 설이 분분하다.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고도 하고, 죽어 귀신이 되었다고도 한다. 그가 가야산에 숨어 살던 때에 신라는 망하고 고려가 흥하리라고 예언한 것은 미묘한 뜻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라고.

이 밖의 최치원에 대한 회고시로 「次崔孤 雲 紅流洞石刻詩韻」 62) 이 있는데, 이재는 가야산 홍류동에 새겨진 최치원의 시를 자신이 損本해서 걸어 두고 시끄러운 세상을 멀리하고픈 자신의 심정을 읊었다. 「泳崔文昌致遠影禎」 63) 은 최치원의 영정을 보고 그의 뛰어난 풍모를 읊었는데, 이로 보아 황윤석의 최치원에 대한 관심이 상당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이재가 처음 벼슬에 천거되어 머나먼 寧越 땅으로 端宗을 모신 莊陵울 찾았을 때, 그는 단종의 눈물어린 哀 事 를 서술하였다.

奉審莊陵 64)

亭亭 華表山 雲 端 우뚝 솟은 능의 문은 구름 끝에 솟아 있고

羊馬無聲松柏寒 羊과 馬는 소리 없고 松柏만 차갑구나

烏帶遺臣超區僕 烏冠에 띠 두른 신하는 몸을 굽혀 철 올리고

紅衣老僕說平安 붉은 옷 입은 노복은 평안하시라고 말한다

千年去水流究盡 천 년을 흐르는 물 원동함을 다 흘려보낼지니

62) 위의 책 권2, 38-39쪽.

63) 위의 책 권3, ,2쪽.

64) 위의 책 권2, 2 . 8쪽.

一種空山葬聖難 한번 빈 산에 묻힌 임금의 어려움을

乘 喜先朝延賓曆 先朝(숙종?)께서 延賓曆으로 기쁘게 하였으니

不須招恨險邊決 슬퍼 하여 뺨에 눈물을 홀리지 말지 어다

또한 그 옛날의 슬픈 추억을 회상한 시로 「子規詞八色」 65) 이 있으니, 이 시는 단종이 영월에 귀양 와서 지은 시 子規詞 篇을 읽으며 피를 토하는 듯한 단종의 기막힌 심정을 이재는 그의 詩筆로 그려내었다.

落花岩은 단종을 모시던 궁녀들이 단종이 승하하던 날 동쪽 강변에 솟은 바위에서 投身을 하였는데 그 떠 있는 시체가 강물을 덮었다는 유래가 담겨진 바위이다.

落花岩 66)

古祠束出石峨峨 옛 사당이 동쪽으로 우뚝한데 바위는 험히 솟았으니

千丈平臨百頃潭 천 길 바위가 백 이랑의 연못에 다다라 있도다

憶得當時徒有派 당시를 생각하며 부질없이 눈물만 홀리니

何人忍寫落花岩 어떤 사람이 참아 落花岩이라고 썼단 말인가

淸治浦는 단종이 영월에 오면서 처음 도착한 곳인데 階行都事가 밤에 曲灘 언덕 위에 앉아 美人歌를 지었다고 한다. 그 가사가 매우 슬퍼서 萬曆 丁巳년에 龍漢 金止男이 錦江에서 놀 때 女娘이 傳하는 唱올 듣고 한문으로 번역하여 五言六句로 썼다고 한다. 이 청령포가를 이재 나름대로 七言絶句로 읊은 것이 「魏淸治浦歌」 67) 인 듯하다.

淸治浦上月明時 청령포에 달이 밝은 때에

徹夜哀鳴有子規 밤 새워 술피 우는 子規가 있구나

65) 위의 차, 29 쪽.

66) 『이재속고』 권 1, 325 쪽.

67) 위의 책, 326 쪽.

能鮮六臣腐恨否 너는 능히 六臣의 원한울 아는지 모르는지

冥冥天地已難知 아득한 천지를 참으로 알기 어렵구나

그의 회고시 중에는 原 에 들려 하롯밤을 묵으면서 옛날에 이곳에서 벌어졌던 역사를 회고해 본다.

原州 68)

雄嶽山陰古 原 원주는 치악산 북쪽 옛 北原인데

客來秋日已黃香 나그네 음에 가을날은 이미 황혼이 잦아드는구나

弓王覇跡空流水 弓商와 王建이 다투던 자취는 부질없이 물에 홀러가고

沖甲英積何處村 날 듯 갑옷 입은 영웅의 목소리는 어느 마을에서 울렸던가

石度應留萩谷史 돌로 된 상자 속에는 옹당 萩谷(元天錫)의 감춰진 역사

가 있을테고

沙場猶有壬辰魂 모래사장에는 아직도 임전란에 죽은 혼이 서려 있구나

悠悠萬 事 都休間 아득한 만사를 모두 묻지 말아라

極目 嘉 禾是聖恩 눈에 보이는 것은 아름다운 벼이삭이니, 이는 오직 聖恩

이라

원주를 말하면서 궁예와 왕건이 爭覇하던 영웅의 목소리가 울렸던 그 옛날을 회상하고, 또 고려의 遺臣 元天錫이 萩谷에 몸을 숨겨 비밀한 역사를 돌상자에 감춘 일과, 임진왜란 때 물가 백사장에서 죽은 많은 원혼들을 떠올리고 있다.

역사를 회고하는 시에는 士禍에 관한 것, 壬辰倭亂, 丁卯丙子胡亂의 치욕 등을 상기시키는 것들이 있다.

다음은 자기 先代의 유적을 희고하는 내용의 시이다.

68) 『이재속고』 권2, 28 쪽.

敬懷兩祖遺跡有感 69)

溫 海幽居招邦玉 영해의 그윽한 곳에 사시니 오히려 마을의 옥이요

玉 春草 自黃香 玉 장 의 봄풀은 황혼녘에 이르렀도다

江南野錄 誰 修傳 강남의 野錄은 누가 매만져서 전할 것인가

高 士風流合尙 論 고상한 선비의 풍류는 합당하게 높이 의론돼야 할 것이니

一世將産徵實跡 一世가 장차 사라지려 함에 실제의 자취를 칭험하려는도다

居孫塔棟典刑存 나약한 후손은 예전의 법도를 지키기가 부끄럽고

只應乙卯歸來泳 다만 웅당히 乙卯년에 돌아온 자취 읊어야 할 것이니

長井龜巖乾海門 길이 귀암과 아울러서 海門에 우뚝하리라

이 시에 대한 後拔에 이르기를 일찍이 자기의 曾祖 醉隱公이 숙종 乙卯年에 큰 변이 일어나 많은 어진 이가 귀양가고 쫓겨 감에 비록 布衣를 입었으나 이때에 이르러서 擧業을 포기하고 派 의 해변 마을에 숨어 울적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이 무렵 樞子洞에 堂을 卜築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 후 叔祖인 龜岩公이 조금 장소를 옮겨 수백 척이 넘는 계곡 서쪽 언덕 위에 오늘에 이르는 그 집을 짓고 살면서 학문을 논하고 덕을 쌓았지만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사이에 집이 헐어서 근래에 와서 다시 修復하였다. 오늘에는 우리 門戶가 미약해져 그분들이 저술해 놓은 것들이 派沒될까 저허하여 이재 자신이 그 저술을 다시 매만지려 한다는 것이다. 從祖인 귀암공이 쌓아 이름지은 누대는 鳴玉臺이며, 그 누대의 유적을 보며 감회를 읊은 「玉臺」 10) 시도있다.

다음은 尤庵 宋時 의 眞影이 있는 祠堂울 보고 읊은 시이다.

69) 위의 책 권 1, 16 쪽.

70) 위의 책, 갈은 곳.

曆拜尤庵先生眞影志感 71)

束表杜湖子동쪽 지방의 杜湖子와

南州白水翁 남쪽 고을의 白水翁과

吾爺亦爲政 내 부찬 晩隱公 또한 참여했네

多士此承風 많은 선비둘이 尤庵의 風을 계승하여

一代知斯盛 한때 이곳이 성하였음을 아나니

遺祠得更崇 남겨진 祠堂을 다시 崇墓하는도다

沿桑今日派 세상이 많이 변하여 今 에 눈물 흐르니

可但憶雙桐 다만 오동나무가 쌍으로 있었던 것을 기억하노라

이 시의 井普에는 〈예전 戊寅年에 杜湖 趙 臼水 楊應秀, 내 先親晩隱公이 다른 선비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構會하며 盛함을 이루었고 많은 선비의 숭모의 대상이 되었다. 그때 내 선천께서 오동나무 두 그루를 廟 옆에 손수 심었는데 누가 한 그루를 잘랐는지, 애석하기 그지없다〉고 하였다.

또한 옛날에 벗들과 被香亭에서 노닐던 추억울 읊은 시가 있다.

被香亭憶舊遊 72)

曾共雲泉二妙齡 일찍이 구름과 샘은 둘 다 묘령의 아가씨들이라

春寒官閣情空洲 봄 추위에 官閣에서 빈 물가를 굽어보니

陳樣更有維鳩子 성긴 가슴속엔 다시 어린 비둘기만 남아 있구나

天淮已白頭 한번 이별이 아득한 옛일이 되었으니, 벌써 머리가 회었

구려

이 밖의 被香亭의 추억을 읊은 시로는 「被香亭志哀二律」 73)이 있다. 이

71) 위의 책 권2, 41쪽.

72) 『이재속고』 권1, 324쪽.

73) 『이계유고』 권3, , 52-53쪽.

시는 모친을 모시고 피향정에 와서 즐겨했던 옛일을 회상하며 이제는 모친이 돌아가시고 없으니 눈물겹도록 쓸쓸하기만 하다고 하였다.

(사) 旅程

旅程詩는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표현한 시를 말한다.

金時習의 『四遊錄』도 일종의 여정시라고 할 수 있다. 여정시에는 懷古的인 것, 打情的인 것, 敍景的인 것도 모두 포함하고 있어 특별히 여정시를 따로 구별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徐師曾의 詩體明辨』의 유형 분류에서 行旅詩가 있음을 감안하여 별도로 모아보았다.

이재의 시 가운데는 그가 직책상, 또는 학문과 천지를 찾아 여행하면서 혹은 고향을 오고가면서 적은 시들이 많이 있다.

대개 그의 修學期의 시들은, 고향을 중심으로 한 호남지방을 찾아 다니며 적은 것과 司馬試 급제 후 金元行을 찾아 石室에서 수학할 때의 여정을 볼 수 있다.

仕官期에는 강원도 영월에 장릉 참봉으로 부임하였다가 다시 서울로 오고 또 內職의 수행차 茂朱 赤裁山울 오고가며 충청도를 거쳐오는 여정이 있고, 때로는 고향길을 오고가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木川과 全義의 현감으로 나가 있으면서 그 일대를 배회한 것도 있다. 그의 여정을 시로써 살펴보면 가야산 쪽을 제의하고는 경상도나 경기 이북으로 여행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전라도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潭山울 지나면서 지은 시를 보면,

過山府 74)

夢殘發古驛 꿈이 아직 덜 깨인 채 오랜 驛올 發行하니

百里前途開 백 리 앞길이 열려 있구나

紅 査中出 붉은 해는 査山중에서 솟고

靑山馬首來 靑山은 말머리를 향하여 다가온다

74) 위의 책 권 1, 19 쪽.

薄寒無酒退 엷은 추위가 술 없이도 물러가고

高興有詩裁 높은 홍취가 있어 시를 짓는다

南紀看看盡 남쪽을 다 지나고 보니

歸心忽己備 돌아가고폰 마음 홀연히 몸을 재촉한다

이 시는 丙子年에 『이재난고』 75) 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28 세 때에 지은 시임을 알겠고, 또 여기에는 「春塘臺起試紀行」이란 紀行文이 있는 것으로, 과거에 웅시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길인 듯하다.

다음은 황윤석이 副御課奉安使로 赤裝山城에 갔을 때 읊은 시이다. 赤袋山은 史庫가 있는 곳으로 조정의 實錄울 보관하던 곳이다.

袋城記事 76)

信宿雲霞表 구름과 안개 깔린 곳에서 이틀을 잔다

仙緣梵未灰 선연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느낀다

百年護國寺 백 년 세월을 거친 호국사와

千切接廉臺 천 길이나 되는 안령대가 있고

石室奎護井 석실에는 奎宿의 별자리 천장이 있구나

盧山雪色開 검은 산은 눈빛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風流三印會 여기 풍류객 세 사람이 모였다

他 日 更誰來 다른 날 누가 다시 찾아올는지

이때는 그의 나이 42세로 늦게야 영조와 인연을 맺었고 그해 겨울 (10 월 18 일)에 禮曹判書 韓光會와 더불어 御課(王室系譜의 대강을 뽑아 베낀 책)을 모시고 發行하여 적상산성의 寶閣에 奉安하였다. 인하여 안령대에서 놀고 朱子影堂울 배알하였다. 배로 南川의 연변에서 놀며 물길을 거슬러 寒風樓 • 睦亭 • 長春院 • 抱琴樓 아래로 돌아 違州書院울 지나며

75) 『이재난고』 권 2, 起辛未二月止己卯二月條.

76) 『이재유고』 권 2, 37-38 쪽.

네 선생을 배알하고, 淸州兵營에 이르러 戊申義士 洪公森이 결의한 바 있는 정자를 찾아보고 10 월 戊子 에 伏命하였다 .77) 다음은 이재가 48 세때에 木川 현감을 제수받고 기뻐하며 사당에 고하고 떠나는 시이다.

八月二 九日得木川除名三 日早告廟志感 78)

普幣浮名是桂坊 별안간 뜬 이름이 이 桂坊이더니

前春太僕更恩光 지난 봉 이 몸이 다시 聖恩의 光明을 입어

爭如木嶽新除旨 새로이 제수를 받아 다무어 木川에 간다

一笑慈顔 意 頓强 한 번 웃으시는 어머님 얼굴에는 뜻이 문득 굳세도다

영조가 승하하기 전 桂坊에 있게 되어 翊贊을 제수받았지만 별 실속이 없었다. 정조가 즉위한 해에 司僕寺 主簿로 제수받고 東部都事로 옮겼다가 그해 겨울에 長陵令으로 옮겼다.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려고 하는데, 8 월에 목천 현감을 제수받았던 것이다.

그는 실속없는 내직보다는 차라리 의직을 얻는 것이 실속이 있다고 생각하여 퍽 기뻐했던 듯하다. 아마 이때에 황윤석은 經世濟民의 꿈을 조그마한 고을에서나마 성취시켜보겠다고 대단한 의욕을 보였던 것 갇다.

또한 고을원이 됨으로써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 다음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행차 오기를 기다리며 旅店에서의 감회를 읊은 시이다.

日新店中祖待慈行 二首 79)

參視皇華次第 睿 삼례, 황화를 차례대로 써본다

慈行無疾亦撫徐 어머니의 행차는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다

東風錦 呼船地 봄바람 불어오는 錦江, 배 머무는 곳에서 부르는 소리여

77) 頭齋年 譜」, 『이재전서』 I1, 661쪽.

78) 『이재유고』 권2, 49쪽.

79) 『이계속고』 권2, 340쪽.

驚喜擬兒件起居 나는 바보처럼 놀라고 기뻐서 기다리며 앉았다 섰다 한다

六朔離違奈寸心 六朔을 떨어져 있음은 어찌 이 내 마음이리요

春陣到此國恩深 봄빛이 여기에 이르니 나라의 은혜가 깊도다

願從逆旅承顔後 원컨대 여정을 거슬러서 얼굴을 뵈온 후

北去南還抱好音 북을 버리고 남으로 돌아가니 모두 좋은 소식이로다

이때가 庚子年 2월로 모친을 맞아들여 즐겁게 해드리기를 다했다고 하였다. 80)

그러나 그해 6월에 吏飛가 倉穀을 도적하여 流用함에 이르러 차마 법의 철차로써 다스리지 않고 독촉하여 반납시키려다가 도리어 모함을 당하게 된다. 이에 세금을 함부로 하였다 하여 파직을 당하고 말았다.

그 뒤에 그는 고향에 돌아와 은거생활을 하였고 그 사이 몇 번이나 벼술의 물망에 올랐지만 스스로 파직당한 몸이라고 하여 거절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임금이 황윤석을 특별히 원하시므로 마침내 전의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성은이 망극하여 그의 經給을 펴보려고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중앙의 세도를 믿고 還穀울 청하는 자들이 있어 이를 거철하였더니, 이들이 암행어사 沈煥에게 이재를 모함함으로써 결국 1 년도 못 되어 파직을 당하였다.

그는 이후부터 관직에 나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이 세상을 하직하는 날까지 향리에서 살았다.

다음의 시는 그가 下鄕을 결십하고 고향에 돌아가는 길에 參禮驛에서 읊은 시로 보인다.

峴發參禮 81)

雪湖山週 눈 온 후 호수와 산은 멀어지고

80) 이재선생 행장」, 589쪽.

81) 『이재속고』 권1, 317쪽.

OO天宇淸 …… 하늘은 맑구나

未須慈落拓 아직 근심은 멀리 사라지지 않았는데

己自判平生 몸이 스스로 평생을 돌아본다

舊架殘普在 묵은 선반에는 책들이 남아 있겠지

新年小租耕 새해에는 작은 송아지로 밭갈이나 하며

奉親因敎子 어머니를 모시고 자식을 가르쳐보리라

季氏亦同情 아우도 또한 나와 뜻을 갇이하겠지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날들을 따져보고, 이제부터는 향리에 살면서 부모를 봉양하고 아이들이나 가르치면서 지내는 것이 자기의 분수임을 깨닫는다. 아우도 내 마음을 이해하여 줄 것이다.

(아) 仙佛

이재가 학문의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 여겼던 것은 經學이었고 그 중에서도 性理學에 궁극적인 목적을 두었다. 그는 朱子의 學을 定論으로 삼고 우리나라에서는 宋尤庵이 이를 계승하였다고 하여 두 분을 높이 받들었다. 그러나 전실로 성리학에 밝고자 하는 선비는 선불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고서는 그 이치를 동할 수 없을 것이니, 성리학이 仙佛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된 新儒學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항상 이르기를, 하늘아 남아를 냄에 어찌 우연이 있으리요, 그런고로 옛 군자는 한 물건이라도 아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고 하였다.

성리학을 더욱 깊이 알기 위해서든, 어떠한 학문이라도 모르면 부끄럽다고 하는 그의 왕성한 지적 욕구 때문이든 간에 조선사회에서 異端이라고 하는 선불에 대해서도 그의 탐색은 소홀함이 없었다.

『이재난고』에 의하면 그의 나이 35 세 때 矣未年 7 월에 『周易』을 읽은 餘 에 佛家睿를 섭렵하였다. 그 책들은 『眞言集怨 章』, 『圓覺諺解』, 『龍籠手鑑』, 『大明三藏法數』, 『華嚴感談會玄記』, 『賢首諸乘法數』, 『寧嚴經四十二字門』, 『司馬溫公解禪偶』, 『經門普訓』 등을 抄錄하고, 『

恐姚章』에서는 梵語의 音韻울 初 • 中聲 • 終 으로 분석하여 표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불가서가 우리 偉者들에게 가히 貸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82)

이 무렵 그는 白羊山寺에 머물고 있었던 듯한데, 그 몇 해 전에도 長城의 백양산사에 가서 독서도 하고 참선하는 僧과도 만나 불교에 대해 많은 이해를 가졌었다.

또 鄕里 근처의 高散 禪雲山寺에 가서도 머물렀다. 이제 불교에 관련된 시들을 몇 수 적어보고자 한다.

上寒山寺普賢峰 83)

范莊捨得混盤魂 아득한 가운데 열반의 혼을 얻게 되었으니

出入風輪轉幾番 바람바퀴에 출입하여 轄轄한 지 그 몇 번이었던고

君看化後身千億 그대 열반 후 몸이 천억이나 나타내심을 보나니

天外螺般立立尊저 하늘 밖에 소라머리의 우뚝 솟음이 존경스럽구나

보현보살은 온갖 行으로 중생을 구제하기로 서원하고 몸을 나타내신 보살이다. 우뚝 솟은 보현봉을 바라보고 보현보살의 무수한 化身을 생각하며 읊은 시이다.

庚辰年 가올 황윤석이 32세 때 장성 백양산 백련암에서 우연히 昊肅이라는 수행자를 만났는데 그의 이름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던 이재는 서로 만나서 시를 주고받았다. 그때에 민숙을 만나 읊은 시이다.

和 肅84)

白谷風流又白蓮 白羊山 계곡의 풍류는 또한 白蓮庵이라

82) 『이재난고』 권 3, 矣未條

83) 『이재유고』 권 1, 8-9 쪽.

84) 위의 책 , 21 쪽.

宗門今古一燈傳 宗 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한 불빛이 전하니

浮生少知何恨浮生이 잠시 이별함에 어찌 恨됨을 알리요

須更觀空了衆緣 모름지기 중생의 인연이 空임을 보았노라

又贈

雲居十載遣心安 산중 생활 10 년에 마음 편안함으로 消겁하니

爭似吾家體用完 어찌 우리 個家의 體用이 완전함과 갇으랴

至意工夫源貸熟 지극한 경지의 공부는 혼연히 원숙함이 귀하니

他時旦紋穀秘看 다른 때에 또한 곡식과 피를 견주어보아라

민숙의 수행이 상당한 경지에 다다라 마음의 편안함을 얻었다고 하나, 자기가 보기에는 僞家의 體用이 완전한 공부만은 못하다고 하였다. 견주어 비유컨대 유가는- 곡식의 낱알이요, 佛家는 피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여 유가를 높이고 있다.

이 밖의 「峴寫」 85) 에서는 참선하고 있는 高僧의 모습을, 「哈示昊肅」 86)에서는 민숙을 마치 仙界에서 노니는 道士처럼 표현하였다. 또 「次李丈(巨運) 白羊內藏軸」 87) 에서는 그의 벗들과 천지들, 그리고 스님들과 함께 白羊寺와 內藏寺, 福興의 峽谷울 지나면서 그 정경을 묘사하고 그옥한 坐忘의 경지까지 언급하였다.

다음 시는 輪廻에 대한 그의 견해를 피력하고 ' 있다.

佛표山僧永日求詩二首 88)

紙桐過雨尙斑斑 백일홍은 비 그치니 오히려 얼룩이 지고

僧到斜陽門不關 중이 석양에 이르니 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見說雲居秋正好 보고 말하기를 산중 생활은 가율이 제일 좋지요

85) 위의 책, 갈은 곳.

86) 위의 책, 갈은 곳.

87) 위의 책 권 2, 22 쪽.

88) 위의 책, 27 쪽.

衆香楓錦佛 山 불대산은 단풍이 비단 펼친 듯 향기가 가득하답니다

南歸禪踊幾時間 남쪽으로 돌아가는 禪客의 禪踊울 몇 번이나 들었는고

一念恒沙環復環 오직 한 생각 항하의 모래는 다시 輪廻한다지만

我亦有開能信否 나 역시 그 말을 들었으나 능히 믿을 수는 없네

心齊千古只輪顔 마음은 천고와 갇은데 다만 모습만 바뀔 뿐이겠지

중들이 말하는 윤회는 믿을 수 없지만, 자기 생각에는 마음에 따라서 모습만 바뀌어질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황윤석의 禪에 대한 갈망은 「畑寺雜泳」 89) 에 나타나고 있는데 모두 10 수로 되어 있다. 그 중의 한 수만 적어 본다.

哲借束房宿 잠시 동안 동쪽 방에 숙소를 빌렸다

襄根一半油 俗應의 뿌리가 한꺼번에 반은 무너지는 듯

月 明禪語軟달은 밝고 禪語는 부드러우며

天冷睦廣逃 하늘은 싸늘하여 졸음이 도망친다

亢亢墓吾事 우뚝 앉아서 나의 일을 부끄러워한다

間間疾爾曹 한가로운 모습의 너희들이 부럽구나

秋風耀鶴影 가을바람에 파리한 학의 그림자는

早晩着江阜 조만간에 저 피안의 강언덕에 도착하리라

여기에서 우뚝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한가로이 수도하고 있는 수행자들을 선망하고 있다.

황윤석이 仙家에 관십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이미 年少한 때부터가 아닌가 한다. 대개 황윤석의 스송을 金元行으로 보고 있지만, 그가 고향인 흥덕에서 자랄 때 사사했었고 영향력을 많이 끼친 사람은 潘溪 柳馨速의 外孫인 毒 村 白時德이었으니 수촌은 이재 부자가 사사했던 스승이

89) 이계속고』 권 1, 314 쪽.

라고 한다 .90) 백시덕은 이재의 실학사상에도 영향을 남겼으리라고 짐작되지만, 이재가 읊은 백시덕에 관한 시를 보면 그에게서 신선의 풍모를 느끼게 한다.

유형원도 일찍이 丹學의 大家 權克中으로부터 『參同契』를 베껴 온 바 있었거니와, 유형원 감은 당시 최고의 실학자들이 단학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것은 맑은 정신과 건강을 지키고자 하는, 선비의 일상생활에는 지극히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재가 수촌 백시덕에 대하여 읊은 시가 있다.

白丈(時德)元日有詩敬次以示意 91)

蒼顔鶴炭戊辰歲 푸른 얼굴에 흰머리 戊辰年이요

商 三意十一年 높은 나이에 3 번 포상 받음도 11 년이라

雲月滿窓其富貨 구름 낀 달 창에 가득하니 참으로 부귀스럽고

風波平地自神仙 평지에 풍파이니 스스로 신선이로다

心從靜哀無參咸 마음은 고요함을 좇아 분산됨이 없고

事到手頭識後先 일이 손끝에 이르면 선후를 식별할 줄 안다

郡猶如不足 降彭 이 오히려 翁만 갇지 못하니

政愚詩句問其然 감히 시구에 의지하여 그러한 까닭을 묻노라

戊辰年의 모습을 읊었으니 이재가 18세(영조 22년)되던 해에 백시덕의 신선 갇은 풍모와 깨끗하고 고요한 삶을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이재가 선가에 결정적인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그가 『周易』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단학의 경전인 『참동계』는 그 이론의 바탕을 『주역』에서 취하고 있다. 황윤석은 선가 수련의 핵십이라 할 수 있는 『참동계』의 문헌적 고증에 열을 올려 당시의 석학 保晩齋 徐命廣과 견해를 달리했을 뿐 아니라, 『이재전서』 1 에는 「古文參同契」와

90) 柳在泳, 『春岡隨錄』, 湖南의 人物 3, 黃胤錫條 참조, 會文化社 刊. 1992.

91) 『이재속고』 권1, 308쪽.

「參同契經文」을 수록 비교하였고, 또 「參同解跋」 「參同契說」 등을 써서 자기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는 또 나이 38세 때에 한국의 神仙傳이라고 할 수 있는 洪萬宗의 『海束異蹟』을 읽었고 나중에는 많은 異人들의 자취를 첨가하여 『海束異蹟』을 增補한 것이 이른바 源束異蹟補』를 이루었다.

이제 그의 道仙의 시를 살펴보면, 단학 수련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漫諒 92)

萬事風波不用驚 세상 모든 일의 풍파에도 놀라지 않으리라

等開天籍爲 島 자연의 소리 모두 한가로우니,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 걸까

丹遠夜夜黃家襄 단로의 불을 밤마다 단전 속에 지펴서

惟戀龍哈虎喝野 오직 용이 신음하고 호랑이 휘파람소리를 듣고자 한다

萬籍供寂한 夜半에 丹田에 마음을 모으고 오직 龍虎가 뒤얽혀 丹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재난고』에 의하면 이 시는 乙亥年(영조 31년), 이재의 나이 27 세 때에 씌어전 시다 .93) 그는 지난해부터 단학공부에 열중하여 용호가 合成하는 공부를 이루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슬퍼하고 있다.

夜坐94)

一年已强半 1 년이 벌써 반을 넘어서니

秋思政悠哉 가을의 생각이 정히 悠 한지고

易學圓 書 梅 易學과 圖睿는 어두워지고

丹功鼎器類 丹學工夫는 그릇이 무너졌네

92) 『이재유고』 권 1, 19 쪽.

93) 『이재유고』 권 2, 乙亥條.

94) 『이재유고』 권 1, 19 쪽.

多岐楊子突 갈림길이 많아서 楊子가 곡하고

窮轍阮公哀 수레바퀴 자취 다하니 阮籍公의 슬픔이로다

棄四還成笑 다 내팽개치고 도리어 한바탕 웃으니

天風爲我來 하늘 바람이 나를 위하여 불어오누나

반 년이 넘도록 丹功에 힘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음에 포기하고 웃어버리니 하늘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고 하였다.

그는 중년의 仕窟期를 거치면서 인생이 허망합을 깊이 인식하고 참 道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

聞 95)

人世悠悠萬念輕 인간 세상 유유히 흘러감에 온갖 생각은 가벼운 것

十年何事有虛 10 년 동안 무엇을 했기에 헛이름만 남았는고

流 是無函 養 저 아름다운 꾀꼬리 소리는 函 養 함이 없었나니

飛去飛來自道名 날라가고 날라옴·이 곧 道라고 이름하리라

구태여 함양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꾀꼬리소리는 철로 아름답다. 有爲의 헛된 이름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 자연 그대로를 따라서 사는 저 꾀꼬리의 행함이 도가 아니겠느냐고 말하고 있다.

「木葉二絶」 96) 도 나뭇잎의 盛哀를 보며 原始反本을 생각하고 孔子 『緊辭傳』의 精氣遊魂과 佛氏의 輪廻說을 침작해 보는 儒 • 佛 • 道의 會通올 모색하고 있다.

또 「有感五絶」 97) 에서는 알기는 쉬우나 행하기 어려움을 말하고, 老子의 儉約울 깨달아 항상 전실하고 誠울 다하라는 先師의 가르침, 혼자 닦는 공부는 족히 稀후함을 맛볼 수 있다지만 이루기도 힘들고 자칫하여

95) 위의 책 권2, 47쪽.

96) 위의 책, 48쪽.

97) 위의 책, 같은 곳.

破危에 빠지기 쉬움을 경계하였으며, 오직 敬長의 마음으로 不朽의 존재를 믿을 수밖에 없다. 내 인생 이미 반백 년이 넘었으니, 다만 자연의 흐름에 순응해서 힘써 행함이 존귀한 것임을 토로하였다.

이재는 자신이 隱者가 되어 자연에 동화된 그의 심정을 이렇게도 읊었다.

夜哈 98)

今夜蓬山月 오늘 밤 봉래산의 달을

幽人只獨看 그윽이 숨어 사는 사람이 홀로 본다

半輪疏柳外 반달은 엉성한 버드나무 밖에 걸려 있고

孤杭宿雲端 의로이 구름 끝에서 베개를 베고 잔다

骨奭淸無夢 뻣골이 시원하고 맑아 꿈이 없으니

詩成捨有歡 시를 지음에 기쁨이 흡족하구나

與誰同此景 누구와 더불어 이 경치를 함께 할까

雙話一更寒 이 자연과 대화하다 보니 한밤이 싸늘하구나

반달이 버드나무 밖에 걸려 있는 고즈넉한 밤, 시원한 느낌이 심신에 스며들어 꿈 없는 평안함을 느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재는 養生공부에 미련을 두고 『참동계』를 애독하면서 스스로 양생을 꾀해 본다.

午晴 99)

午雲開雨歐時한낮 구름 개이고 비 그칠 새

東風無力柳綠垂 東風은 힘을 잃고 푸른 버들은 늘어졌네

伊來不信參同契 요즈음에 와서 參同契를 믿지 못하겠으니

萬福千周賢巳哀 천만 번 읽었으나 귀밑머리는 이미 쇠하였네

98) 『이재속고』 권1, 309쪽.

99) 위의 책 권2, 331 쪽.

참동계』를 열심히 읽어도 귀믿머리는 희어지니 『참동계』에 회의를 느낀다. 그래도 고향이 그리워지고 고즈넉한 밤이 되면 그는 또 還丹공부에 열중한다.

夜雨思鄕 100)

入夜鳴庭樹 밤들면서 뜰의 나무가 소리를 내더니

西風一雨凉 서풍에 한바탕 비를 뿌리고 서늘해지는구나

遊人情不味 나그네 근십에 젖어 참은 오지 않고

掃思悠無腸돌아가고폰 생각뿐 아무런 마음도 일어나지 않네

垂向應埃苦 속세의 괴로움을 끌어내 뱉고

還丹日月化 丹울 돌립에 水火가 분주하구나

向來觀易莊 이제까지 易의 뜻을 觀照하노라니

終始棟雲莊 終始 雲莊(宋의 劉槍, 朱熹의 제자)에게 부끄럽도다

추석 명절을 당하여 고향길이 더욱 그리워져 단공을 행하였으나 늙어감을 막을 도리가 없다고 하였다.

中秋述懷二首 101)

一年明月最今背 일 년에 달 밝기는 오늘밤이 철정이라

千里覇懷 國造 천 리 길 나그네의 회포는 고향땅이 아득하고

却有夢魂能識路 문득 꿈에서야 고향길을 알 수 있더라

晩天來往親輕駐 새벽하늘에 바람소리만 윙윙거린다

不信金稽滿鼎中가득한 솔 가운데의 金梧올 믿지 못하겠으니

看看蒼髮轉成翁 푸른 머리가 변하여 늙은이 됨을 본다

石函古本曾何益 石函 속의 古本參同契가 일찍이 무슨 유익이 있었던고

100) 위의 책, 332 쪽.

101) 위의 책, 갈은 곳.

目向義經識合通 또 易經에 비춰 보고 含通함이 있음을 깨닫는다

石函古本이란 중국에서 오랫동안 전래해 오던 『참동계』가 아니라, 明나라 楊愼이 땅 속의 석함 속에서 새로 찾았다는 『참동계』를 말하는데, 황윤석은 石函本을 最古最眞本이라고 주장하였다. 易의 이치를 생각해 보면 석함본과 뜻이 서로 통하는데, 그러나 푸른 머리가 흰머리 되어 가는 현실은 어쩔 수 없다고 안타까워한다.

다음은 이재의 만년, 그의 나이 60 세가 다 된 나이에 읊은 시가 있다. 「井普」에 이르기를, 지난 시절에 『참동계』를 함께 논하고 배웠던 李老怒가 꿈에 나타나서 다시 『참동계』의 이치에 대해 설명해 준다. 이로서는 중년에 만났었고 이미 죽은 지도 18, 9 년이 지난 뒤 꿈에 나타났으니 一 靈은 派沒하지 않은 듯하다고 하였다.

記夢(井書 )102)

朱蔡參同黃李家 朱子와 蔡沈의 參同은 黃老家의 것이니

幾年顔面夢無追 모습이 꿈에서 그대로 나타남이 그 몇 년 만인가

修身候死惟吾事 몸을 닦아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오직 나의 일이거늘

浙懷營魂卷係多 내 영혼이 券屬에 매어 살고 있음이 부끄럽도다

죽은 이로서는 평소에 星曆 • 風水 • 醫 卜 에도 익숙하고 단학에도 많이 유념하였음을 미루어 그가 이로서에게 『참동계』에 관하여 배운 바가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자) 觀物

어떠한 사물을 보고 느낌을 표현한다든가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거나 觀照하는 시를 특별히 觀物詩라고 이름하였다. 사물에 정해서 일어나는 홍미를 표현하는 것이 시라면 그 어느 한 가지도 관

102) 『이재유고』 권3, 55-56쪽.

물시 아님이 없을 터이나, 여기에서는 정서보다도 사물을 살펴 묘사하는데 목적을 둔 시를 말한다. 이재를 실학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이 관물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는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둘을 관찰하고 궁구하여 實用에 나아가고자 하였다.

삼라만상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호기심은 그를 博物學者로 만들었고 하나도 모르는 것이 없기를 바라는 學究悠은 그로 하여금 정서적인 시세계조차 관물시로 표현하는 것을 주저치 않게 했다.

이재의 행장을 쓴 門下人 宋憲鎭은 행장에서 이르기를, 선생의 바른 뜻은 전실로 볼 만하다. 무릇 그 논하는 바가 크고 넓어서 칼을 놀리더라도 조리가 맞고 비어 있는 것을 지적하여 가히 어루만진다. 행함에 있어서는 널리 통하고 정밀히 관찰하여 진실로 실천을 알아서, 스스로 가히 미루어 깨달았다.

차라리 古聖울 배움에는 미치지 못하나, 功利의 효과에만 척도를 삼지 않고, 곧은 道를 쫓는 데는 달하지 못하였으나, 무조건 따라감에는 매이지 않았다. 비록 이르기를 그의 학문을 〈有用之學〉이라 하나 이 세상에 두루 통하는 선비라고 함이 가할 것이다 .103)

103) 「이재선생 행장」, 591 쪽. 『이재전서』 1. 〈先生之雅志 此固可見 而凡其所 論 俠 快 遊刃堅堅中 可接而 行 博通耕察 眞 知 實 賤 自可推之 事 學古 聖 而不及 不現規 於功利之效 事從直道而未達 不拘拘於情仰之態 灘 謂 之有用之 學 而間世之 通 信可 矣

그는 天文 • 曆象에 밝아서 日食이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고 이를 「日食詩」 104) 로 표현하였는데, 일식이 일어나는 과정을 서양의 과학적인 인식을 토대로 하여 자세히 설명하면서도 하늘이 꾸짖을까 염려하는 경계의 징조로 받아들이고 있어, 전통적인 占星學的 견해에서 탈피하지 못하였다.

대체로 황윤석은 서양의 과학사상 수용에 있어서 그들의 천문· 역법 등에 감탄을 표시하고 있으나, 서양의 사상에는 동감하지 않았다고 한

104) 『이재유고』 권 1, 5쪽

다. 105)

이 밖의 「月食 50韻」 106) 시도, 月 食이 일어나게 되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自鳴鐘을 살살이 관찰하고 있는 것이 곧 「自鳴鐘」 107) 시이다.

西洋妙制落吾束 서양에서 묘하게 만든 것이 우리나라에도 생겼다

十二鐘 白銅 12의 종소리는 白銅을 삐걱거리게 하고

月自三句盆不缺 달의 三句으로부터 곽차서 이지러지지 않는다

天從百歲變須通 하늘이 백 년 동안 변함을 좇아서 모름지기 통하니

鐵環組語元排分 쇠와 고리가 서로 어긋나서 본래대로 排分되고

金動描登爲風 금저울이 움직임에 어이하여 바람이 이는가

倫識此間無限妙 아마도 이 듬의 사이에 무한한 묘 있음을 알지니

許君親往兄崔洪 그대에게 허락하노니 천히 가서 최 • 홍을 뵈어라

이재는 楚山(井邑)에 사는 李彦復이 새로 자명종을 구입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값이 60 兩이요, 그 만든 것이 정교하다고 해서 금년 가을에 玉川을 歷訪하고 그 모형 보기를 청하였다. 모형과 작동하는 모습을 정밀히 살피고 나서, 대개 이 종은 서양에서 비롯되어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하여진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이 자명종을 만들 수 있는 이는 서울에서는 崔天若 • 洪 壽 海요, 호남에서는 同福 사람 羅景動이 있을 따름이다. 白銅으로 만든 것도 있고, 鋼鐵로, 혹은 나무로 견고히 해서 만든 것도 있다고 한다. 이제 비로소 예전에 들었던 바를 목격하고 一律로써 그 만든 것을 간략히 적고자 한다고 하였다. 이 시는 자명종의 작동하는 모습을 보고. 대단히 신기함을 표현하였다.

105) 河聲來 頂齋 黃胤錫의 西洋科學思想受容」, 『전동문화연구』 1 집, 明知大 한 국전통문화연구소 刊, 1983.

l06) 『이재유고』 권1, 9쪽.

107) 위의 책, 5~6쪽

다음은 이재가 長陵令으로 交河에 있을 때 그 고을의 風水地理를 살피며 읊은 시이다.

交河雜祿四絶 108)

風流從古說宣城 풍류는 예로부터 宣城에 있다고 말하여 왔다

滿地沿洲吏隱情 풍만한 땅과 푸른 물가는 벼슬아치의 숨은 뜻이 담겨 있

으나

安得玄陣與太白 어찌하면 그옥한 빛과 太白의 반짝임을 얻을 수 있을까

一廷賓主檀斐淸 한자리의 손과 주인은 서로 맑음을 오로지 한다

陸陸伏伏月籠山 솟구쳤다 가라앉았다 하는 월롱산은

造走西南二 間 서남 두 물 사이에 비스듬히 달리니

還有大江陵外賜 오히려 큰 강이 능 밖에 賜見해 있고

移都初議已 端 도읍을 옮기자는 처음의 의론이 이미 단서를 열었다

英陵威里大家麻 세종의 후손들이 사는 大家집

亭子臨流可網鏞 정자는 강류에 임하여 鍾魚를 잡을 만하고

聞道居孫曾獨保 들으니 쇠잔한 후손들이 唯濁히 찰 보존하여

千金未許 人輪 千金울 다른 이에게 보내는 걸 허락하지 않았네

栗老東方道學宗 栗谷 노인은 東方道學의 머리요

同時麗澤有龜峰 갇은 시대에 아름다운 여택이 龜峰에게 미쳤네

傷心弱 今何在 마음 상한 약한 후예는 지금 어디에 사는고

鉉踊遺場草自封 가야금 소리 끼쳐진 곳에 풀만 스스로 무성하도다

교하는 본래 광해군 때 호남의 地官 朴懿信이 도읍지를 교하(宣城)에 옮길 것을 제의한 적이 있었다. 英祖 7 년 辛亥에 이곳에 陵울 옮겼는데

108) 위의 책 권2, 45-46쪽.

正祖 때 長陵令으로 오게 된 것이다. 栗谷 李와 龜峰 宋翼弼도 서울은 弱한 곳이라 하여 傷心하였다는 것이다.

교하는 임진강과 한강이 合流해 있는 땅으로, 남북이 통일되면 이곳이 가장 적합한 도읍지가 될 것이라고 언급한 風水學者 崔昌祚氏의 말이 연상된다.

또한 天象을 살피며 읊은 시 중에 「夜坐三糸色」 109) 이 있다.

玉杓西幹蒼龍角 북두칠성은 서쪽으로 돌아 蒼 의 머리에 있고

銀浦束回白虎頭 은하수는 동쪽으로 돌아 白虎의 머리에 있도다

獨有五星天極位 오직 五星이 天極에 자리하고 있으니

不隨經緯任旋周 經緯를 따르지 않고 돌아가는 周 에 말기도다

一天星斗炯成行 하늘의 별빛이 찬란히 빛나고

洛珠旋幾點光 옥구슬의 빛 점접 이 흐르는데

獨有紫微宮 極 홀로 자미궁 북극에 있어서

不明不暗運陰陽 음양의 움직임에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다

風落江南九月天 바람 부는 강남의 9 월 하늘이라

葉聲和雨錢殘年 잎의 소리는 빗소리와 화하여 남은 해롤 錢送하고

仙雲未到空相憶 仙雲은 아직 이르지 않았는데 부질없는 추억에 참기도다

秋影應函白鳥邊 가을 그립자 白鳥의 주변에 응하여 잠겨 있구나

가을밤 하늘에 천상을 살피면서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조하고, 부질없는 생각 속에서 나이만 먹어가는 자신을 웅시하고 있다. 「觀星二首」 110)도 별자리를 올려다보면서 天文울 헤아리는 시이다.

푸른 하늘에 옥가루처럼 뿌려진 별들을 바라보면서 今日에 천문을 아

109) 『이재속고』 권 1, 307 쪽.

110) 위의 책, 311 쪽.

는 자가 적으니 그 효험을 어찌 얻을 것이냐고 하여 은근히 자신이 천문에 조예 깊음을 과시하고 있다.

자연의 빛은 허공 중의 어둠과 새벽 속에서 밝은 법이니 내가 몸소 별을 占하고자 하나 玉京에서 强風을 불어 보내어 어쩔 수가 없다고 하였다.

盡幅을 보고 읊은 시도 있는데 「漫題滿州畵篠四흙色」 111) 은 만주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이 화폭에 그려져 있음을 보고 그립을 보며 苦節한 자기의 신세를 위로하고 있다.

황윤석은 古畵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하는데 우아하고 청결한 것으로부터 관통하여 스스로 一家를 이루었다 한다. 112)

부채를 보고 읊은 시에는 「題楚山小扇」 113) 이 있다.

湘竹炎 藤光色新 源湘의 斑竹과 刻溪의 등나무 빛이 새로운데

風流大守寄駿人 風流스런 태수는 詩客에게 글을 부탁하는구나

秋來莫怨恩情薄 가을이 옴에 恩情의 엷음을 원망하지 말라

淸暑明年手更親 明年의 맑은 더위에 손이 다시 너와 천해지리라

風流大守는 楚山 縣令을 일컬은 것 갇다. 태수가 부채를 내밀면서 시를 부탁하니 이재가 부채에다 〈秋來莫怨恩情薄 淸暑明年手更親〉이라고 써주었다고 볼수 있다.

이 밖의 「奉和龍湖金丈會謙盆梅二律」 114) 은 金會謙이 소유한 盆梅의 기이함을 읊었고, 「文房四友四首」 115) 는 봇 • 먹 • 벼루 • 종이를 순차적으로 읊은 관물시라고 하겠다.

111) 『이재유고』 권 3, 54 쪽.

112) 「이재선생 행장」, 592 쪽, 『이재전서』 I, 古畵而自雅潔 可續自成一家.

113) 『이재속고』 권 1, 321 쪽.

114) 『이재유고』 권 1, 6 쪽.

115) 위의 책, 13 쪽.

또 물시계를 읊은 시 (「卽事」, 이재속고』 권1, 320쪽), 밤송이룰 읊은 시 (「吳君錄魚栗」, 『이재속고』 권1, 320쪽), 연꽃 구경을 하며 읊은 시 (「被香亭賞蓮」, 『이재속고』 권1, 305쪽) 등은 모두 관물시라고 볼 수 있다.

(차) 忠心, 性理, 修德

忠心 • 生理 • 修德울 한 데묶어 놓은 이유는 이러한 시의 내용이 대개 유교적인 성격을 가진 윤리와 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학문의 궁극적 목표는 性理學의 이념에 따라 사는 것이었고 그 실천이 충효요, 수덕을 행하는 일이었다. 그는 한결같이 紫陽(朱子)의 定 을 宗으로 삼았다.

그가 朱子學의 신봉자임을 柳在泳은 이렇게 나타내었다.

그의 經典에 대한 태도는 朱子學의 범위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으니 梅山 洪直弼撰 墓誌銘에서도 지적했듯이 異說을 내세워 주자학에 反함을 반대했다. 그리고 象山을 이어받은 楊明의 知行合一說에 대해서도 知行二者 間에는 실행에 선후가 있고 가치의 경중에 있어서 먼저 致知하고 난 연후에 力行해야지 卽知卽行할 수는 없다고 했다. 또 程朱學과 陸王學울 불타와 마귀에 비하여 상호 一肖一長하는데 국가의 安危와의 관계됨을 극론하여 宋 • 元 • 明 • 淸의 패망과 興起 사실로써 예증하였고, 我東에 있어서도 尹白湖의 中庸注釋 朴西溪의 四 睿 注釋의 이설 및 鄭 霞 谷의 陽明學 존승은 다 주자의 道問學 공부에 염증이 나 양명학을 환영했음을 듣고 이를 경계하고 있다. 116)

또 「行狀」에서 이르기를,

性理 를 논함에 이르러서는 朱子로써 하여 이미 定論이 되었습니다. 後人은 다만 篇信體驗할 따름입니다. 이제에 이르러 더욱 精微로운 것을 구하고 新

116) 柳泳 , 遺稿를 읽고」, 『春岡隨錄』 {以會文化社. 1992) ,244쪽.

語를 만들기에 힘써서 스스로 前人이 아직 發明하지 않은 뜻을 발명했다고 附言하는 자가 있으니 진실로 개탄할 일입니다.

또 이르기를, 德을 밝히는 것을 本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모두 배워서 聖人이 된다고 하는 것은 本明에 있어서 같기 때문입니다. 이제 만일 이르기를 사람이 物과 더불어 本性이 같지 않다고 한다면 어찌 써 人物의 性品울 능히 다할 수 있을 것이며, 聖과 凡이 본심이 갇지 않다면 어찌 써 氣質울 능히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氣가 나아음에 그 靈虛합을 가리켜 이르기를 心이라 하나니, 더욱이 십분 명백합니다. 또 『中』 「首章」을 논한 社에 이르기를, 이른바 理 역시 타고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氣가 모양을 이루어서 理가 스스로 그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비록 이르기를, 人과 人性은 갇고 人과 物性은 다르다고 하나 性은 곧 理입니다. 理는 하나일 따름이어서 스스로 天地本然의 것이니 一本일 따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17)

이와 같은 言說은 그의 스승인 淡湖 金元行의 人物性同論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德을 밝혀서 닦는 것이야말로 本心울 찾는 것이니 수덕은 篤信體驗하는 것을 이룰 따름이다. 그래서 이재는 끊임없이 닦아 나가는 윤리규법이 충효요 우애와 갇은 덕목이라고 보았다.

이재의 효심은 주로 앞의 鄕怒詩 가운데 思親의 情을 많이 엿볼 수 있거니와, 그는 당대의 임금이었던 영조 • 정조에게 忠義가 매우 깊었던 사람이다.

특히 영조는 임금이 만년에야 비로소 황윤석을 만나게 됨을 한탄스러워했다고 했으며, 이에 윤석은 임금의 恩義에 크게 감동된 듯하다. 먼저

117) 「이재선생 행장」, 591 쪽. 〈至於論性理則 以爲朱子以後底有定 論 後人但當萬體而已 今乃益求其倍 務爲新語 自附於發前人未發之義者 良可槪也. 又曰明德本心也 人皆可以學聖 都在於本明之同故也 今若日 人異物本性不問 何 以能盡人物之性. 聖與凡本心 情]則 何以能變化 氣質平 就氣上指其靈盧 謂 之心尤 十分明白 又論中庸首章往日 所謂理亦試 爲 卽其 氣 以成形而理 自在其中 人 與人性同 人與物住異 而性卽理也 理一而自天地本然者 而 言 之 巳〉

이러한 忠心울 표현한 시를 찾아보겠다.

伏聞九月七日 118)

半世江南一布衣 반세기 동안 강남에서 布衣로 지냈는데

那知名性徹彬閑 어찌하여 이름과 성이 대궐문을 뚫고 알려졌을까

孤忠自有訓恩 외로운 ,忠臣, 스스로 은혜를 갚을 날 있으리니

情懷狂 言 與願違 미친 듯 지꺼리는 말이 원하는 것을 어길까 부끄럽도다

호남의 해변가 조그만 마울에서 태어난 無名의 선비를 임금께서 이렇듯 알아주시니 그 은혜를 어찌하면 좋으냐고 감격해서 읊은 시임을 알 수 있다.

辛卯年(영조 47 년) 4 월에 이재가 太廟를 祭하는 棒 官으로 入侍했을 때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는 일찍이 申景濬과 동시에 입시하여 사람들이 재주가 많은 이라고 일컬었다〉고 하였다. 이재는 감히 仰待하지 못하였다. 知經廷 徐命脣이 아뢰기를, 〈그러하옵니다. 과연 이 사람이야말로 博學한 선비〉라고 하였다. 그 후 그는 六品으로 陸次하여 司團署 別提로 자리를 옮겼다. 「崇政殿入侍時記事二絶」 119) 은 이때의 감격을 읊은 시다.

一篠紅 雲 棒日開 한무리의 紅雲이 해(임금)를 받들어 열리니

都宮禮樂大庭來모든 궁의 예 악이 큰 뜰로 나오는구나

卽知聖孝無窮慕 임금의 효십, 무궁하게 연모함을 곧 알겠으니

親律從今又幾回 몸소 익히심이 이제를 좇아 또 몇 번일까

名達天聽幸有年 이름이 天聽에 달한 것이 다행이 여러 해니

姓黃珍 重 玉音傳 黃氏 姓은 珍重하다고 임금의 소리 전했도다

多才登是微臣 事 재주가 많다고 하시니 어찌 이 微臣의 일일 줄이야

118) 『이재유고』 권 2, 37 쪽.

119) 위의 책, 38 쪽.

聞道朝端不芝 조정의 높으신 어른이 어전 이가 모자라지 않다고 이

는 것을 들었노라

자기를 알아주어 성명을 확인하고 재주가 많다고 하신, 임금님의 칭찬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드러나 있다.

그를 아껴주던 영조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의 슬픔은 대단하였던 듯, 영조의 능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홀리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健元陵祭訖復路回望 先王元陵志感 120)

龍盤淸派忽三年 임금의 구레나뭇에 맑은 눈물 흘러내린 지 어느덧 3년 세월

未死遺臣 已宣 아직 죽지 못한 遺臣은 귀밀머리가 이미 흐트러졌구나

隱隱歸時松梧路 소리 없이 松梧 우거진 길로 돌아올 때

槍懷勤政時登廷 勤政殿에 오르시어 經廷하시던 모습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健元陵(太祖墓)에서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元陵(英祖陵)을 바라보고 아직도 살아남은 신하의 애릇한 심정을 표현하였다. 이재는 만년에 이르러 9월 13일 밤에 꿈을 꾸었는데 그는 꿈 속에서 古閩怨詩를 읊고 있었다. 그 閩怨詩는 이러했다.

西風械械動梧枝 서풍은 구슬프게 오동나무 가지를 흔들어대고

碧落冥冥雅去退 푸른 하늘 아득한 곳에 기러기 날아감이 더디구나

꿈에서 깨어나 생각해 보니 오늘이 곧 先王의 誕辰 이었다. 이에 꿈에서 지아비를 생각하는 시가 임금을 사모하는 십정과 같음을 생각하고 고규원시를 이어서 作詩하여 걸어 두고 죽을 때까지 생각하며 슬퍼했다

120) 위의 책, 42 쪽.

고 한다.

湘竹斑斑已幾枝 通 의 얼룩진 대나무 이미 몇 가지던가

九疑魂斷白雲迎 九疑山의 혼은 끊어지고 白雲만 더딘데

多情徹晩神靈雨 정이 많아 새벽에 이르도록 신령한 비가 나린다

將派菌駿柳 池 쓸쓸한 駿客은 버들 북쪽의 연못에서 눈물 홀리리라 121)

舜임금을 애도하는 峨皇과 女英에 비유하여 자신의 심정을 읊었다.

이 밖의 백성과 나라를 생각하는 시에 「自定良洞歸雷雨」 122)가 있다.

跋馬千峰雨 말로 내다르니 千峰에 비 오고

驚人十月雷 10월의 뇌성이 사람을 놀라게 한다.

平生民國念 평생을 백성과 나라 생각뿐이니

達夜未成灰 밤이 늦도록 그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라 곧 임금을 생각하는 시에 비해서 백성의 참혹한 생활을 연민하는 愛民의 시는 별로 찾아볼 수 없다.

다음에는 性理說에 관한 시를 적어 보겠다.

氣哈二律 123)

吾觀一元氣 나는 하나인 元氣롤 본다

充塞太虛中 그 원기는 태허 증에 꽉 차 있어

若信無函有 無에 有가 들어 있음을 믿을 것 같으면

方知實在空 바야흐로 實이 空에 있음을 알리라

121) 위의 책 권 3, 62 쪽, 九月十三日夜雨 偶夢記古閩怨詩.

122) 『이계속고』 권2, 341쪽.

123) 『이계유고』 권1, 6쪽

方伸因節屈 바야흐로 늘어남은 屈함을 인하고

惟寂便能通 오직 고요한 가운데 문득 통하니

所以然何者 그러한 까닭은 어째서냐?

原頭理不窮 본래 으뜸인 理가 다하지 않은 때문이다

復떴云此氣 徐花潭이 이 氣를 일러

緊散不停機 모이고 흩어져서 기틀을 멈추지 않고

灰死如前暖 재처럼 꺼진 것 갇지만 다시 따뜻해 지고

花柏亦再排 꽃이 말랐지만 다시 향기 난다고 한다

此由張子誤 이로 말미암아 張載는 誤認를 범했고

還近釋家非 도리어 佛家와 비슷하나 그 또한 아니다

斐眼誰看破 한눈으로 이를 看破한 사람이 누구인가

石潭我所希 李栗谷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사람이다

황윤석은 위의 시에서 氣 가운데에 理가 있다고 하였다. 서화담은 氣란 재가 꺼지면 다시 따뜻해지고, 꽃이 말라 떨어지지만 다시 소생하여 향기를 피운다고 하여 이른바 氣一元論을 주장하였지만, 이는 佛家의 輪廻說과도 비슷하고 또한 張橫渠의 오류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하였다. 오직 이율곡만이 氣 속에 理가 있다고 하는 理乘氣發說에 동참하고 있다.

五言古詩로 된 「讀太極圖」 124) 는 『太極圖』를 읽고 태극의 이치를 깨달으니, 즉 본성은 본래 선한 것인데 人欲이 가리워 인간이 타락하고 미로에서 헤맨다는 뜻을 읊었다. 「大易岭」 125) 은 大易의 浩滿함을 읊었고, 「去冬寫出性理大全數編」 126) 은 『性理大全』을 읽다가 눈병이 나서 여러 방법을 써보았으나 더하더니, 맑은 하늘을 보고 글을 짓다가 머리를 지나치게 쓴 것이 화근임을 깨닫고 神仙境 같은 곳올 찾아나서려고 한다고 하였다.

124) 위의 책, 3-4 쪽.

125) 위의 책, 7 쪽.

126) 위의 책, 4 쪽•

이로 보건대, 황윤석이 얼마나 성리대전』 에 골몰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오언고시인 「雜詩」 127) 에서는 氣 의 성질과 追滿性, 작용 등을 易과 康節의 원리에서 설명하였다.

다음은 당시에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湖洛心 洞 異說에 대하여, 그가 人物性同論에 찬동하였음을 보여주는 시이다.

有懷 128)

乾坤一大穀 천지는 하나의 큰 껍질이니

而我立其中 그 가운데 내가 서 있도다

身是 氣 之緊 몸이란 이 氣 가 모인 것이요

理無物不同 理는 만물이 갇지 않음이 없으니

必須 養 天性 반드시 모름지기 天性을 길러서

莫或負皇表 빛나는 表心을 혹시라도 저버리지 말라

所以昔賢 語 옛 賢者의 말이 라고 하는 까닭은

於斯乃見功 이에서 곧 功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몸뿐 아니라 만물이 모두 氣가 모인 것이요, 또한 理(性)가 모두 동일한 것이니 천성을 길러서 본심을 찾아야 그 功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본십은 萬化의 근원이 된다.

「從古五絶」 129) 의 시 가운데,

萬化源頭只一心 萬化의 근원은 다만 하나의 마음뿐이니

工夫都不 離誠 飮 공부는 誠과 欽올 떠나고서는 있을 수 없다

非 誠 卽僞非欽津 誠 스럽지 않으면 거짓이요, 欽敬하지 않으면 放窓한 것.

127) 위의 책 권2, 48쪽.

128) 『이재속고』 권1, 305쪽.

129) 『 이재유고』 권2, 46쪽.

良法分明臥夜敍 좋은 법이란 분명히 尻夜로 경계하는 말이 된다

만화의 근본은 오직 마음뿐이니, 이 마음을 좇아서 欽하고 정성되이하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하였다. 마음을 만화의 근본으로 삼은 것은 性理에 입각한 이재의 이른바 明本源主義라 하겠다.

이재는 일찍이 개인적으로 나라 다스림을 의논하되 멀리 꾀하여 이르기를, 聖心의 端本을 먼저 格致하여서 근원을 맑힌 후에 실제적인 다스림에 힘써야 한다고 하였다.

快公(사전의 결정을 衆 議 에 구하는 일, 또는 과거를 업격하게 함)의 道 가 받들어지고, 敎化가 僞術을 무겁게 하여 人材를 수렴하여 言路룰 열고, 요행을 바라는 門을 닫고, 염치를 기르며, 食 誠하는 것을 막아서 일체의 법을 세우고, 반드시 公宰勅咸부터 기강을 잡기 시작한다면, 기강을 세우지 못할 걱정이 없고 災異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130)

먼저 임금부터 〈만화의 근본을 밝힘, 곧 先格萬化之源〉이 급선무라고 하였다.

다음에는 수덕에 관한 시를 찾아보고자 한다. 젊은 수학기의 시로 보이는 「偶岭一糸色」 131) 은 혼자 있을 때를 삼가하고 조심하라는 유교의 가르침을 보여주고 있다.

人不愼於獨 사람은 홀로 있을 때 삼가하지 않고

莫 言 誰得知 자기 혼자의 일을 누가 알까 하고 말하지 마라

天遠 하늘에서 듣는 것이 멀다고 하나

却只在房椎 문득 옆의 장막에서 듣는 것과 갇도다

130) 「이재선생 행장」, 591 쪽. 〈 當 私 鐵經國 遠 飮而 先格 聖 心 端 本 澄源然後 務 政依公道 崇 敎化 重儒術 收人材 開言 路 塞 幸門 養廉 恥 銅食 藏 一切 立法 必 自公宰勳 威 而始紀 綱 不息不立 災 異 不 息 〉

131) 『이재속고』 권1, 306쪽.

이 밖의 「自省」 132) 도 天理를 두려워하여 항상 자성할 것을 보여주고 있다.

天理元來直 天理는 본래 곧은 것

如何更有私 어찌 다시금 私가 있으리요

一源因異流 한 근원에서 다른 줄기가 갈라지나니

千里自差篠 千里의 거리도 터럭 끝만한 차이부터라

舜禹危微義 舜과 禹임금 때도 義가 위태롭고 적었으니

人萬存去時 사람과 짐승이 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때라

吾將不遠復 내가 머지 않아 天理를 회복하리니

無負尻心期 일찍이 간직했던 처음의 기약을 버리지 말 것이라

먼저 본십이란 곧은 것이니, 이러한 本源울 깨닫고 힘써 닦지 아니하면 처음에는 逢蓋의 차이라도, 나중에는 千里만큼의 격차가 생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재는 의부의 개혁보다는 먼저 마음이 곧고 맑아야 비로소 만 가지가 변화될 수 있다는, 내부의 십성을 밝힐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또한 「自戒五絶」 133) 의 시는 浩然之氣를 간직하고 떳떳이 살 것과 邪念에 이끌리지 말 것, 하늘을 두려워할 것, 敬을 오로지 공부할 것이니 내 마음의 본성이 하늘임을 믿을 것, 中道를 지킬 것 등을 스스로에게 타이르고 있다.

또 날마다 조십스럽고 두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시를 써서 기록해둔다고 하였다.

132) 위의 책 권 2, 329 쪽.

133) 『이재유고』 권 2, 46 쪽.

比日不勝競 詩以識之 二絶 134)

出入源須愼爾儀 출입이 분명치 않으니 너의 태도를 삼가하라

駿駿不敬此何爲 마음을 조급히 하며 공경합이 없으니 이 어인 일인가

一心放去將無禪 한마음 내버려 두면 장차 꺼릴 바 없게 되나니

勞力從今戒外駐 이제부터 힘써서 밖으로 눈파는 짓을 경계하라

平生活淡是科場 평생을 科場에 대한 욕심없이 편안히 지냈는데

一命年來限鎖組 한번 命울 받고부터는 나를 얽매는 자물쇠와 고삐가 싫

어졌도다

但得沒身充此意 다만 이 몸이 다하도록 나의 이 뜻을 충실히 한다면

浩然何處不成剛 浩然한 것이 어느 곳에 처하든지 굳셈을 이루지 못할 소냐

의부의 것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浩然함을 지켜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면 조급함도 두려움도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다음은 이재가 61 세 때 회갑을 맞이하며 읊은 시다.

六 粹辰志感 135)

我生重乙酉 나의 삶이 거듭 乙酉年을 맞게 되니

天地一崎人 나는 천지간에 쓸모없는 사람

忽此純陽月 이때는 純陽의 달이요

方當列宿辰 바야흐로 星宿가 벌려 있는 때로다

桑蓬憶初度 남아의 큰 뜻을 처음 헤아리던 때가 이제는 부끄럽고

祠感終身 부모님의 사랑을 終身토록 잊지 못하네

尙有頭貞 일찍이 바른 가르침을 길러중이 있었으니

端須 自新 단정하게 마땅히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하리라

134) 위의 책, 33 쪽.

135) 위의 책 권 3, 59 쪽.

자기의 號 룰 願齊로 했음과 갇이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닦아 나간다고 하는 頭卦는 자신이 수덕을 기른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終身의 때가 머지 않았음을 느끼면서도 끝날까지 修 身 울 게을리 않겠다는 뜻을 보여주고 있다.

(카) 木州雜歌

「木州雜歌」는 훈민정음으로 쓰여진 21 章 의 노래이다. 노래형식은 連作時調로 되어 있으며 자서전적인 내용을 儒家的인 주제로 나타내고 있다.

「목주잡가」에 대해서는 일찍이 柳在泳 교수가 작자 및 작품의 제작연대 및 原歌 • 내용 • 형식 등에 관하여 論 究한 바 있었다. 136)

『 願 齋領稿』 에는 21 장이 수록되어 있지만 원본인 『頭齋亂梨』 (己亥 庚子年度本) 에는 28 수로 나타나있다고 하였다. 원래 亂謀本의 28 수의 「목주잠가」가 이재속고』를 편찬할 때 (1942 년) 7 수가 剛削되고 순서도 다소 바뀌었다. 「목주잠가」는 이재가 51 세 때인 1779 년(正祖 3 年 己亥) 木川縣監으로 外任울 맡은 후 소감을 피력한 연작시조이다.

우선 명칭 및 작품수에 있어서도 續 稿本에는 〈木州雜歌共 二十一 章 〉으로 되어 있으나 난고본에는 〈雜歌 共二十八首〉로 되어 있으며 표기에 있어서도 난고본에 <> 등이 續稿 本에는 〈하, 해, 달〉 등으로 나타나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 이재속고』에 나타난 21 장을 중심으로 그 주제를 파악하는데 그치고자 한다.

이 노래는 먼저 목천 현감으로 제수받은 임금님의 은혜를 내세우고 있다. 황윤석으로서는 그 동안 아무런 실권도 없는 내적의 微官으로 있다가 늦게야 영조의 눈에 띄어 그의 인품과 博識을 인정받아 司圓署 別提로 陸次하였고, 내직으로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마침내 처음으로 지방관으로서의 의직을 말게 되었다.

136) 標在泳, 頭齋 黃胤錫 의 木州 維歌 에 對한 考察」, 《韓 國 言語 文 學》 第 7 輯、 韓國文 學會, 1970, 5.

의직을 맡아 고을원이 된다는 것은 비록 작은 고을일 망정 이재에게는 어버이를 모실 수 있고 자기의 경륜을 펴 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그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먼저 그는 목천 현감으로 갈 수 있게 된 것이 모두 君恩이라고 하는 접을 강조하였다.

其一. 君恩이 岡極 와 白炭의 木川오니

그리던 家周울어 大桐만나리다

아마도 四百里 風雪의 慈親思念 어려우라

其二. 阿 님 날 바라고 阿避님 내 뫼오려

三年後 六年만의 薄邑을 엇단 말가

두어라 薄邑일망정 天地君父 恩惠로다

其三. 고을도 적다말고 物力도 府타말고

내마암 다하오면 國恩을 가푸려니

술푸다 勢업슨 微臣이라 뜻과달라 어니하랴

其四 밥술도 남恩惠오 뵈울도 님恩惠니

家屬親咸둘이 님은혜 아라시령

懷實노 아압기옷아오면 衣食日用 無情하리

여기까지는 忠心’의 章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난고본에는 其一 앞에 3수가 더 놓여 있으나, 이는 先王(영조)에 대한 恩意에 대하여 잊지 못하는 십정을 표현한 것들이므로 군은에 대한 충십에는 차질이 없다. 또 난고본에는 其一 바로 앞에 其四가 와 있어 순서가 바뀌었다.

其五에서 其十까지의 6장은 오늘의 자기가 있기까지 先代家이 살았던 고향의 정경과 훌륭한 先祖둘을 표현하였고, 또한 자기도 이러한 곳

에 태어나 先代의 造訓울 받들며 자랐음을 말하고 言行을 절제하여 修德하는 생활을 해왔음을 나타내었다.

其五. 南來先墓 桃李所여 王輪山도 몇해런고

象頭山 束南의 더욱죠타 龍頭 려라

이 後의 先人亡室 完窓되면 무삼關念 하울소냐

其六. 오래다 우리 龜 壽 洞中 束偏잿밧이다

仮正先祖 舊基암고 烈女帝親 施門마조

眞實노 二百年追墓하면 孝子孝孫 되오리라

其七. 龜 壽 洞 本宅西偏 四十里 追造山下

蓬萊난 凡案이오 沙浦雲浦 樣帶로다

그中의 우리집 三世遺i띠 어이참아 니잘소니

其八. 龍頭先山 十里西南太山古縣 第三里라

黃接上下 龍溪물의 慈親夢中 해비최네

이몸이 胎育하온 吉地오니 承先待後 아닐쇼냐

其九 文章도 繼繼할샤 行諒도 承承할샤

科官이 긋다한달 우리五世 눌불을가

두어라 明農讀 하여 先子遺訓 傳하여몬

其十. 言語도 不可不愼 飮食도 不可不節

言 語로 文字의 미뤄보고 飮食으로 財祿의 바뤄보라

넷聖人 願卦大象이니 우리先訓 더욱 조타

其五에서는 고향의 山勢를 말하였고 그곳에 묻힐 분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其六에서는 오래된 마을 龜 壽 洞 동편에 五代祖 余正이 서울로부터

호남에 내려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으니, 그 사이 2 백 년간에 孝子孝孫이 많이 나왔다고 하였다. 其七에서는 귀수동 서쪽 소요산 아래에 이재의 從祖 龜岩公이 鳴玉성란 樓 를 세웠는데, 해변마을이 띠처럼 둘러 있는 우리집 앞의 유적임을 나타내었다. 其 부터는 그의 모친이 泰仁 古縣에서 임신하였을 때 태몽에 黃傍上頂에서 아침해가 游出하여 光水色이 온동 藩 樣 하고 수정갇이 빛났다고 한 夢事를 서술하였다. 其九에서도 이러한 吉地에서 태어난 後孫둘의 文 章 과 行諱를 자랑하며 선대의 유훈이 전하여지기를, 其十에서는 언행을 삼가하고 절제하여 수덕을 기르는 이재 집안의 가르침을 칭송하였다. 이재의 부친 晩 隱 公이 항상 책상머리에 願卦를 붙여 두고 가르침을 삼았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자기를 願齋로 號하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先德의 장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난고본에는 其五에 앞서서 3 수가 더 있는데 집안의 형제 자매와 亡室 후 어린 자식에 대한 걱정, 백발에 소실을 얻고 죽은 아내를 생각하는 정이 표현되어 있다. 아마도 집안에 대한 푸념 갇은 인상을 주어 속고에서는 빼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其十一에서 其十四까지는 본심이 수덕의 근원임을 말하고 本心이란 純善한 것이며 聖凡이 한가지요, 본성은 人과 物이 한가지니 마음을 알고 살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여기에 이른바 人物性同論과 明本源主 義 의 뜻이 담겨져 있다.

其十一. 虛 靈 하온 이내本心 純善하온 이내本性

本心은 聖凡이 한가지요 本性은 人物이 한가지니

엇디타 本心性 泊失하여 至愚至賤 되올소냐

其十二. 天地도 廣大하다. 내마암갓치 廣大

日月도 光明하다. 내마암갓치 光明

眞實노 내마암 天地 月갓게하면 堯舜同歸하오리라

其十三. 靈明不測 이내마암 出入無時 이내마암

菊祖間 千里萬里요 須央間 千古萬古 러라

아마도 輕輕히 照管하고 忍忍히 存在하여 敬字닛지마오려니

其十四. 매이쥐면 바아지리 아니쥐면 다라나리

忽忘忽助 地境의 이내마암 存省하여

죽도록 距虎履 이요 臨淵限谷이오리라

마음은 본래 光明하고 廣大하지만, 마음이란 無時出入하여 고정됨이 없으니 항상 살펴보고 경건히 해야 함을 말하였다. 마치 호랑이 꼬리를 밟듯, 살얼음 위를 걷듯, 삼가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문은 性理의 장에 해당한다고 보겠다.

其十五에서 其二十一까지는 마음을 인간답게 잘 써서 윤리를 지켜야 함을 말하고 그렇지 못하면 금수나 다름이 없음을 말하여 至愚至賤에 빠지지 않기를 경계하였다.

其十五. 君臣은 大義잇고 父子난 至親이며

長幼有序의 兄弟들고 朋友有信의 師生드네

아마도 夫婦一倫은 五倫之本이라 엇디 無別하올소냐

其十六. 七歲孫男을 祖母도 안을소냐 七歲孫女를 祖父도 안 을소냐

七歲男女不同席은 兄弟妹妹도 잇지 말게

아모리 夫婦間 至親至密이나 爲先有別하여세라

其十七. 人生이 有怒하야 寒峻凱憶 밧겨無

桂聲도 저푸오나 亂色도 더욱저

죠곰곳 本心일사오면 사람아녀 倉獸 l 려라

其十八. 意獸도 寒暖알고 飯獸도 凱砲알고

喬默도 死生利害 낫낫치 모라난 일 잇듯던가

슬푸다 飯獸만 賤타말고 내몸 賞키 도라보게

其十九. 이내몸이 天地 의 食獸와 다라기난

倫紀禮節 제모로고. 이能히 아름이니

엇지타 天地에 參爲三才하여 食獸同踏하울소냐

其二十. 貧默옷 아니되면 夷秋도 되지 말고

下愚로 上智티워 堯舜周 源洛閔 되어보소

두어라 層層階椎에 머다한달 언마 머을손가

其二十一 人才야 前도 炎도 彼此同異 언마하리

아나이 잇사오면 쓰이난이 절로잇네

아마도 代人才난 自了一代事 가 하노라

下愚도 닦으면 上智가 되는 법이니 비록 닦는 데에도 層階가 있어 다 聖賢이 될 수 없지만 그 차이는 별 것 아니다. 人才 또한 다른 바가 있다지만 알면 써줄 사람이 철로 생기나니 一代의 인재도 자기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난고본에는 其二十一 앞에 한 수가 더 끼어 있다.

내용은 古今의 인물이나 中外의 인물이 본래 다를 바 없다는 뜻을 보태었다.

위의 마지막 부분은 수덕함으로써 인격을 완성할 수 있다는 수덕의 장이라고 하겠다.

이상에서 본 바 「목주잠가」는 忠心 ·性理·修德을 포합하는 儒家的 理想울 표현한 노래라고 볼 수 있다.

(3) 『願齋漫錄』과 『海束異蹟補』

『願齋漫錄』은 『이재속고』 14권 중 권10, 11, 12에 속하며 권10은 漫錄 上, 권11은 漫錄 中, 권12는 漫錄 下로 되어 있다.

柳在泳은 이재의 학문을 소개함에 있어서 이르기를, 이재는 실학자 중에서도 가장 多才多能한 학자였다. 실학자로서의 면모와 그 深工이 造 • 續稿의 雜著와 필생의 역량을 기울인 『理萩新編』에 나타나 있으며, 그의 학문과 인격, 교제인사 및 당시의 세태를 아는 데는 手策日記에서 발췌한 속고의 만록이며, 학문의 授受와 求書, 從遊人間의 親疏관계를 살피는 데는 유•속고의 與答智翰이라고 하였다 .137)

『이재만록』은 곧 手策日記인 이재난고』에서 발췌한 것이며 이재의 학문과 인격, 교제인사 및 당시의 세태를 알아보는 데에 가장 적합한 자료임을 말하였다. 〈만록〉이라는 제명이 보여주듯이 이 『만록』에는 그가 당시에 듣고 보고 만난 것들에 대하여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그때 그때 적어 놓은 것으로 얼핏 잡동사니를 모아 놓은 記聞과 갇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 『만록』 속에는 많은 인물에 대한 설화들이 포함되어 있어 문학적인 면에 있어서는 퍽 홍미로운 대상이 된다고 하겠다. 특히 그가 교제한 인사와 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 또한 자기의 견해까지 첨가되어 있어 그 당시 그에게 비쳐진 당대 사회의 습관과 풍속, 세태 등이 홍미롭게 서술되어 있다. 그의 博學多聞은 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기이한 인물에게 관심을 보여 이른바 道敎的인 인물에 대한 일화가 적지 않다.

그는 經學공부를 위주로 한다고 하였지만 易에 특히 심취되어 象數學의 大家로 일컬어졌으며, 또한 『參同契』에 대한 그의 관십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의 『참동계』에 대한 관심은 또한 仙家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고본다.

『창동계』란 周易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그것을 人體에 적용시킴으로써

137) 擔在泳 齋遣稿를 읽고, 『春岡隨錄』 會文化社 刊, 1992) , 243쪽.

不老長生울 꾀하고 仙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즉 인체를 小宇宙로 보고 大宇宙의 운행과 작용을 인체의 生理에 적응시킨 것이니, 우주의 이치를 易理라 한다면 인체의 생리적인 이치를 丹理라고 할 수 있으니, 참동계의 의미는 우주의 이치에 인간이 참여하여 契合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참동계』는 束漢 桓帝 (147-167) 때에 魏伯陽에 의하여 易經』에 포함되어 있는 상수학을 바탕으로 하여 저술된 丹學經典이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윤석이 선가에 탐닉하게 된 주요한 원인이 그의 역학공부에 있다고 본다. 상수에 관련된 『참동계』에 이끌립으로써 단학의 이론을 파고들었고, 또한 몸소 단학을 체득하려는 丹功修練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단학공부는 養生과 마음 修養에 있었으므로 대개 조선 선비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나, 의형적으로는 異端視되어 『참동계』의 연구는 중국에서처럼 활발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참동계』에 대하여 注釋을 낸 이로 仁祖 때의 權克中 (1585~1659) 의 『參同契柱解』를 들 수 있다. 英·正祖 시대에 와 실학이 크게 대두되면서부터는 오히려 『참동계』에 대한 실학자들의 관십이 커져갔다.

참동계의 근본 목적은 인체 안에 丹울 형성하여 불사적 존재 곧 신선으로 변화하는 공부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늙음을 늦추고 건강을 지키려는 양생이 현실적으로는 더 可合했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하는 문제도 필수적으로는 실학의 영역이 아닐 수 없었다.

호남 실학의 선구자 潘溪 柳馨遠의 연보에는 그의 나이 36 세 (孝宗 8년, 丁酉, 1657 년) 때에 봄에 서울에 들어갔다가 가을에는 호남지방울 편력하고 돌아왔는데 馬原石室의 권극중을 방문하고 『참동계』 一寫울 베껴 가져왔다고 하였다 .138)

전라도 부안지방에 거주하였던 유형원은 이와 감이 『창동계』 를 베껴

138) 『柳馨遠』, 國의 思想大全集』 22( 同和出版公社 刊, 1977).

소중히 간직하였고 그의 의손 臼時德에게도 전수하여 마침내 이재에게 이르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당대의 석학이었던 徐命 역시 『易參同契詳釋』을 내었는데, 그간 황윤석을 만나 易象을 중심으로 한 『참동계』의 해석문제를 둘러싸고 진지한 토론을 벌였던 것이다.

『海束異蹟補』 權靑霞(名은 克中 ) 築에 『참동계』에 관해 언급하기를, 근세에 南九萬의 首章의 社解가 있어 자못 정밀하고, 또 楓菴 閔以升 역시 그 大義룰 연구하였으니, 중국의 正陽 鍾離權, 純陽 呂束賓 이래 上陽, 抱一, 石罰 諸家가 모두 말을 풀이해 놓았으나 편집해 놓은 것이 착오가 있고 가리키는 바가 분명치 못해서, 皇明 때 楊愼이 땅 속에서 얻었다는 石函本만 갇지 못하다. 석함본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참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여기에도 한두 군데 착오된 것이 있다. 靑露子가 六十四章으로 나눈 것은 곧 상양(陳致虛)의 91 장이 오류가 된 것을 답습한 것이다. 어찌 청하자는 석함본을 보지 못하였던가? 이미 보았으면서도 믿지 못하는 바가 있어서 그랬던가 ? 139)

황윤석은 권국중이 낸 주해가 『참동계』 원본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고 明에서 최근 발견된 양신의 석함본이 眞本임을 주장하고 있다.

황윤석의 手抄자료집인 『箕知錄』에는 석함본인 『古文參同契』가 실려 있고, 그 뒤에는 전해 오는 전통적인 참동계 경문도 아울러 실었다. 140) 서명옹은 그의 『參同考』를 통해서 석함본이 最古最眞이라는 참동계설에 반대하여 전동적으로 전해오는 상양자 전치허, 권국중으로 이어온 참동계설을 지지하였다. 141)

서명웅의 손자 徐有渠도 후대 실학파의 거두로서 그의 저술 『孫養志』률 통하여 건강과 양생에 관하여 그의 실학적인 면모를 드러낸 인물이었

139) 黃胤錫, 『海東異蹟補』, 權靑霞條.

140) 『이재전서』 I, 古文參同契序, 參同契經文」, 301-316쪽.

141) 金兪 壽 , 徐命脣의 〈參同改〉와 〈易參同契詳釋〉」, 『韓國道敎와 道敎思想』, 韓國道敎思想硏究會 編(亞細亞文化社, 1991}.

다. 142)

황윤석은 단학 분야에 관한 것뿐 아니라 천문 • 지리에도 밝았는데 모두 역과 상수학에 관계를 맺고 있는 것들이다.

그의 道仙家에 대한 관심은 그의 수필일기에 수시로 기록되었고, 나중에는 이 난고본에 실린 인물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정리하여 마침내 『해동이적보』를 엮은 것으로 보인다.

본래 『 海束異蹟』은 顯宗 때의 道仙 취향적인 사람 洪萬宗이 엮은 책이다. 이 책에는 束漠 鄭斗卿의 『海束異蹟序』와 自序가 실려 있는데 丙午臘月上洗長洲題라 하였으므로 1660 년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長洲는 홍만종의 호이다. 이 책의 맨 뒤에는 華陽洞主라 하여 尤庵 宋時헛!의 跋文이 붙어 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 역대의 異蹟人物 40 人에 대한 기록이 적혀 있다. 그런데 이재가 홍만종의 『해동이적』을 본 것은 丁亥年 9 월 (1763) 에서 다음해인 戊子年 사이에 읽었음이 『이재난고』 권 9 에 나타나 있으니 그의 나이 39 세쯤이었으리라.

여하튼 이 『해동이적』을 본 후 이재는 이에 자극을 받아 자기가 난고본에 기록해 두었거나 그의 생애에 들었던 奇聞을 첨가하여 나중에 『 해동이적보』를 썼는데, 『해동이적보』가 언제 세상에 출현하게 되었는지 확실한 연대는 아직 考究해 보지 못했으나, 아마도 그의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下鄕해 있을 때 쓰인 것으로 보인다. 죽 그가 평생 쓰다시피한 일기 『亂梨』 중에서 우리나라의 異人奇事를 수시로 기록한 것을 모아 정리한 것이 중보된 『해동이적보』가 되었다.

『해동이적보』(고려대 소장본)에서는 정두경의 序와 홍만종의 自序가 생략되어 있고 그 대신 豊山 洪萬宗輯, 越松 純陽子補라고 적혀 있다. 또한 『해동이적』을 상, 하로 나누어 상권에는 鄭嫌(호는 北窓), 鄭階(호는 古玉) 형제의 행적과 설화 • 시들을 실었다.

142) 李鎭洙, 「朝鮮養生思想의 成立에 관한 考察」, 『韓國道敎와 道家 息想』, 韓 國道敎思想硏究會 編(亞細亞文化社, 1991).

하권에는 檀君으로부터 林泊에 이르기까지 상 • 하 모두 합하여 102 人을 수록하였다. 특별히 황윤석이 추가한 인물란에는 그 앞에 補字를 덧붙였다.

홍만종의 『해동이적』에 나와 있는 인물이라도 그가 추가하여 기록한 부분이 있으면 역시 補자를 붙여 표시하였다. 분량면을 비교해 보면 홍만종의 『해동이적』보다 황윤석의 『해동이적보 』 가 훨씬 방대할 뿐만 아니라 이재 당시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기록되고 있어 거의 조선 후기까지를 망라한 神仙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동이적보』의 끝에도 역시 우암 송시열의 跋이 있는데, 여기에 덧붙여 「異蹟補跋」이라 하여 純陽子의 跋文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

그 동안 순양자란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었다. 혹은 北窓 집안의 후손일 거라는 추측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재전서』를 살피다 보니 황윤석의 行狀(宋獻鎭撰)과 묘지명(洪直弼撰) 속에서 이재의 저술로 『해동이적보』 1 권 또는 『 해동이적보』가 있음을 발견하고 143) 越松 144) 순양자란 곧 황윤석임을 짐작케 하였다.

『이재전서』 목록 중 발문을 찾아보니 『전서』 I 『願齋迫稿』 卷之七에 「題海東異蹟後」가 있어서 「異蹟補跋」과 대조해 보았다.

「題海東異蹟後」의 내용은 다음과 갇다.

屈子于遠遊 篇願度世 朱子于參同契駐解 其旨微矣 登易與不知道者哉 則 海東異蹟之輯而補 亦或有百世之揚郡與 意

순양자의 「이적보발」도 위와 똑같은 내용인데, 다만 百世가 後世로 단 한 글자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황윤석은 自號를 本貫의 이름을 따서 越松外史라 부르기도 하였으므로 월송 순양자는 그가 『해동이적보』를 편찬

143) 『이재속고』 권13, 592쪽(行狀), 594쪽(墓誌銘).

144) 『이계유고』 권11, 265쪽. 「雜養」에 「越松黃氏先跡考」가 있어 越松(平海) 黃氏의 내력을 기술하고 있다.

하면서 붙인 道號라고 하겠다. 그가 자기의 본명을 밝히지 못한 것은 『행동이적보』의 저술이 유가의 입장에서 볼 때 떳떳하지 못함을 저어하여 이름을 숨겼음이 분명하다.

비록 책이름을 홍만종의 저술에 자기가 증보한 것으로 꾸며 놓았지만 해동이적 』 과 해동이적보 』 는 마치 저자가 다른 책으로 연상될 만큼 두 책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해동이적보』는 분량면에 있어서도 『해동이적 』 을 훨씬 능가하고 인원수도 늘렸을 뿐만 아니라, 홍만종이 이미 디룬 인물에 있어서도 자상하게 注룰 달기도 하고, 문장도 바꾸어 표현한 것이 많아 황윤석은 『해동이적 』 을 새로 썼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이제 난고본에서 발췌한 『이재만록 』 중에서 『해동이적보』에 나타난 奇人둘의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道術에 관한 부분을 찾아보면,

孔子는 怪力亂 神 을 입에 울리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는 後 學 들에게 마땅 한 法 度 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告發울 당하여 어쩔 수 없이 징계 를 당한 자들이 있으니 일찍이 중국의 妖妄한 자들도 역사가의 기록에 실려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田禹治 이래로 幻 術 과 週甲에 능하여 무리들 을 迷惑시키고 죄 를 받은 자가 수없이 많으니 전우치도 마침내는 尹 君平 에게 제지 를 당하여 信川에서 獄 死하였는데, 후에 그 묘 를 발굴하여 보니 植이 비어 있어서 그 실은 죽지 않았다고 전한다.

吳彦寬은 故人이 된 羅州人 謙의 庶子로서 吳謙은 贊 成 벼 슬을 지냈다. 彦寬은 智異山에 들어가서 仙道를 얻었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마침내는 金自兼의 妻 李氏가 과부로 사는 것을 유혹하여 羅氏 姓을 가진 妄과 합께 居昌으로 도망하였다. 거기에서 金吾에게 杖死 를 당했으나, 그 무리들은 또한

이르기를 사실은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宋 란 사람은 그 어미를 섬기는 데 있어 不孝한 자는 아니었다. 다만 일찍이 小術을 배워서 사람들에게 漏池되어 소문이 둘리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이르기 를 諸葛孔明이 다시 출현하였다 하기도 하고 혹은 능히 변화를 일으켜 호랑이가 될 수 있다고도 하였다. 戊申兒粧(무신년 李仁佐 의 반란사건)와 은밀히 서로 왕래하였는데, 혹은 御史 3 人이 그 마울에 들어갔다 하고, 혹은 송하가 賊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알지 못했다고도 말하고 있다. 反賊들이 이미 兒 를 서울의 西小門 및 全州, 南原, 扶安 등지에 전후해서 걸었는데, 전주에 걸린 것은 賀의 소행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필경에는 監 營 將校 數 3 人에게 붙잡힌 바 되어 殿上에서 을 받게 되었는데, 임금이 특별히 그의 術을 시험하라고 命하였다. 가 시도하였으나 효험이 없자 말하기를, 庚申年(영조 16 년, 1740 년)에 천하가 장차 큰 난리가 있을 것이니 원컨대 저를 살려주시기만 한다면 이때를 기다려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杖死를 시키고 말았다. 경신년에는 별일이 없었다. 妖人은 그래서 가히 징벌하여야 마땅하다.

鄭斗南이라는 자는 朱斐가 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얘기도 앞서와 똑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去年에 柳君弼이 말하기를 자기가 젊어서 山寺에서 독서를 하였는데, 한 사람이 가끔 철에 놀러왔다. 그는 중들과 더불어 呪文에 능하였다. 주문을 외우다 보면 노란 콩이 참새가 되어 날라갔다. 또 짚신을 땅에다 묻고서 주문을 외우면, 겨울철에 갑자기 푸른 오이 덩굴이 나오고 꽃마다 열매를 맺어 잠깐 사이에 변화를 일으키니 보는 사람들이 놀라워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것에만 능할 뿐 다른 것은 할 줄 모르니, 이런 것을 이른바 소술이라고 하는 것으로 禍를 받기에 적당하고 충분하다고 할 것이니, 그 따위 이 어디에 소용이 되겠는가 ?145)

145) 위 3 편의 설화는 『이계속고』 권 10, 『이재만록』 上, 519 쪽에 수록되어 있다.

『해동이적보』에는 田禹治, 金自兼, 朱斐, 成揆窓의 異人說話가 실려있는데, 田禹治條는 이마 홍만종이 撰한 『해동이적』에서 나온 바 있었다.

그 밖에 김자겸 • 주비 • 성규헌은 황윤석이 『 해동이적보 』 에 새로 수록한 인물이다.

다음에는 이재만록』의 윗부분과 관련하여 『해동이적보』의 金自兼條를 살펴보겠다.

金自兼은 光海 때 인물로 金自點의 兄이다.

道佛울 崇信 하여 異行怪術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또한 그의 妻 李氏도 延平府院君의 女로 역시 도술을 익히고 그를 信奉하였다. 吳謙의 妄子彦 寬이 스스로를 지리산 仙人이라 칭하고 자경과 더불어 젊은 시절부터 方外의 벗으로서 兄弟같이 지냈다. 自兼이 장차 죽을 때에 임해서 彦寬에게 妻子를 부탁하고 죽었다. 이때부터 吳彦寬 은 마음대로 자경의 집에 왕래하였다. 그 때 兵使羅廷彦의 妄이 부처를 배운다 칭하고 집에서는 踊經울 하고 절에 가서는 佛事를 일삼더니, 하루는 언관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씨와 나정언의 妄을 데리고 出家하여 어디론지 사라졌다.

얼마 후에 居昌사람이 와서 縣官에게 고하기를, 荒唐한 남자와 부인들이 山谷石窟에 있으니 종적이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이때는 大 이 권세를 휘두르며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일 때였으므로 金吾가 쫓아가 붙잡았다. 언관 이 이씨를 자기의 처라고 함으로 監司에게 알리고 義禁府에 文害 移管 하니 마침내 의금부에서 잡아 가두었다. 이때가 光海 甲寅年이다. 언관은 親駒으로 마침내 죽음을 당하고, 이씨부인은 스스로 자원해서 궁정의 심부름하는 여인으로 들어가, 이름을 英日이라 하고 慈壽宮에서 살았다. 그녀가 글에 능하고 자혜가 있어 비구니 가운데서 異行이 있으므로 宮中이 모두 生佛이라 하여 심히 높은 대우를 받았다.

이씨는 金尙宮과 광해의 壁姬와 깊은 交契를 맺어 母女처럼 지냈다. 李彌贈이 李 , 金自點의 反正계획올 의십하여 韓翔등을 시켜 稽間하도록 하였다. 自點이 위험을 느껴 당황하였지만 광해군이 영일의 하는 말을 듣고서

그녀에게 넘어가 마침내 무사하였다.

矣亥反正은 실로 영일의 功이 컸다고 할 수 있다.

혹은 이르기를 언관은 이미 죽음을 당하였는데, 그 무리들은 오히려 진짜 오언관은 죽지 않고 가짜 언관이 죽었다고 하니 어찌 荒誕치 않으랴. 146)

『해동이적보』 김자경條에는 吳彦寬과 李氏女, 羅妄에 대해서 자세히 나오고 大北派의 탄압과 矣亥反正 같은 대사건에 특히 이씨녀가 연루되어 있음을 나타내었다.

황윤석은 小術울 부리는 妖人둘의 죽음을, 사람들이 不死했다고 말함에 대하여 荒誕한 소리라고 一笑에 붙이고 있다. 『이재만록』에는 주비에 관하여 간단히 기술하였음에 반하여 『해동이적보』에는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朱斐는 北道의 선비라 하였고, 尤菴集 중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의 異術은 깜짝할 사이에 千里를 가고, 평생을 강원도 영동지방에 많은 종적을 남기고 있는데, 지금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의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斐가 尤菴을 만난 것은 康熙 乙巳年(顯宗 6년)이었다. 肅宗 때 한 妖婦가 있었는데 自稱 龍女婦 이라 하고 惑世하다가 그 죄로 죽음을 당하였다. 그 옥에서의 다스립이 엄하고 비밀에 부쳐져서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주비는 言辭로 말미암아 連累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鄭斗南은 주비의 法을 私師하였다. 李厚源의 後孫家에 毒氣가 있어 그것을 두납이 다스려 땅을 파서 더러운 기운을 묻으니 아무 탈이 없게 되었다. 斗南이 晩年에는 氣가 쇠하여 귀신에게 볶겨서 죽고 말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斐가 죽었다고 하나 사실은 죽은 것이 아니고 그 죽은 사람은 假者라는 것이다.

戊申 때의 妖人 宋賀가 젊은 시절에 그에게 사사했다고 하고 혹은 그렇지 않다고도 한다. 그가 전술함에 있어서 스스로 말하기를 成揆憲과 함께 居하

146) 『海東異蹟補』(高麗大 所藏本), 金自兼 108-109 쪽.

면서 그에게 『玉張玄機』 一卷을 얻었다고 하니 이는 가히 칭험할 만하다. 147)

다음은 규헌의 이야기로 이어전다.

成揆憲은 九流에 크게 통하였고 爲人이 不覇하였다. 肅宗 甲戌年에 上陳하여 南九萬이 兒 울 옹호한 죄를 다스리도록 청하였고, 英祖 初年에 또 상소하여 청하기를 閔分活요이 好黨을 다스립에 엄하게 하지 않은 죄를 論하였는데, 또 오래지 않아 大 이 일어날 것을 말하였더니, 과연 戊申에 그 결과가 나타났다. 벼슬은 漢城麥革에 이르렀으며 물러나 春川에서 늙었는데 나이 九十餘歲에 同知中樞로 生을 마쳤다. 본래 嶺南人인데 혹은 자세치 않다고도 한다. 일찍이 丹家, 三式의 說에 깊었고 그 앞을 내다봄이 이와 갇았다. 148)

주비의 설화에는 정두남 • 송하 • 성규헌에 관한 내용이 『만록』에서 보다 더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이들 설화를 보더라도 『이재만록』에 록된 道流둘이 『해동이적보』를 撰하는데 있어서 참고된 자료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본 바와 갇이 이재는 교의가 두터웠던 柳君弼(名은 匡天)이 젊었을 때 산사에서 見聞한 바를 기록하고 있다. 그 산사에 가끔 놀러오는 자가 있어 중들과 더불어 주문을 의우고 幻術을 부리는 것을 말하였다. 이러한 자들은 小術만 알고 있지 정작 大道를 모르고 있어서 災禍를 自招하였다고 評하였다. 이재는 환술을 요망한 것으로 간주했지만 그 자체를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환술을 해보았자 쓸모없는 짓에 정력낭비한다고 하여 환술의 무가치성을 주장하였다.

다음에는 『이재만록』에 실려 있는 閔應聖의 설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147) 위의 책, 朱斐 鄭斗南 條, 109-110 쪽.

148) 위의 책, 成揆憲 條 110 쪽.

李源의 말에 의하면, 세상에서 이르기를 張志恒은 易學이 깊고 兵家는 當世에 제일이라고 하여, 일찍이 가서 말해 보았더니 부질없이 헛된 이름을 얻은 자라고 하였다. 내가(이재) 전부터 湖西의 山郡에 閔應聖이라는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야말로 中國人의 易學兵 의 秘法을 전하는 자라고 하였다. 그래서 묻기를 장지항은 그 나머지만을 얻어 尊待를 받는다고 하니 그 소문이 맞느냐고 하였다.

李生이 말하기를, 〈과연 그 소문대로입니다. 지난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서 智異山 서쪽 기슭에 梨花洞이라는 곳이 가히 살 만하다고 하기에 興陽에서 돌아오면서 歷訪하였으나 아직 役 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때였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 마을에 들어갔는데, 띠집이 여러 채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노인이 앉아서 易 을 읽고 그 다음에는 자손과 아이들이 易에 대해서 尋常하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저 노인이 혹시 閔翁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노인이 이르기를, 오늘 날씨를 보니 큰 비가 오겠네. 머물러 하뭇밤을 지냄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는 하늘에 구름이 없었는데, 저녁 사이에 큰 비가 왔습니다. 마침내 그 보배가 민옹임을 살피지 못하고 떠나 왔으니 不遇라고 하겠지요. 恨然히 돌아오는데 계룡산 寺를 지내다가 嶺南人 河大盜울 만났습니다. 늙었으나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병이 있어 4, 5 일 머물러 있기를 부탁하니 河가 卜莖 睿 1 冊을 부탁하며 베껴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불가불 수고의 대가를 치뤄야겠습니다 하고 말하면서 내 평생에 星命을 살펴보았지만 命을 말함에 있어서는 과거사가 역력히 맞는 효험이 있으니, 이는 閔公의 설을 시험삼아서 해본 결과입니다. 저번에 당신이 이화동에서 만난 노인이 바로 민옹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다시 이화동을 찾아가 보았으나, 〈이미 他地로 옮겨가 찾지 못하고 술프게도 헛되이 돌아왔습니다〉라고 하였다.149)

『이재만록』에서 민옹성은 易學에 밝고 兵法에 뛰어난 隱者임을 알 수 있다.

149) 『이재속고』 권12, 『만록』, 580쪽.

『해동이적보』에는 민응성에 관하여 대략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閔應聖은 湖西사람인데 永山 중에서 살았다. 明나라의 道流에게서 兵法을 전수받았는데 내력이 심히 확실하였다. 張志恒이 淸州 營 이 되어 매양 툼만 나면 말을 타고 달려가서 배웠다. 거의 날마다 쫓아다니다가 志恒이 자리를 옮겨감에 應聖도 또한 자취를 감추었다.

혹은 말하기를 智異山에 숨었다 하고 혹은 俗離山으로 옮겨갔다고도 하는데 자세히는 알 수 없다. 혹은 이르기를 속리산 깊은 곳에 李處士라는 이가 있어서 易學이 심히 밝다고 하니 아마도 같은 무리가 아닐까 한다.

지항은 본래 大將 廊翼의 孫子인데 문을 닫고 독서하여, 그 전실한 태도가 低者와 다름 없었고 權 를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아 오만하디는 비방을 받기도 했지만, 그야말로 奇異한 선비요, 易占 陣法에 通達한 이니, 대개 그 통달함이 응성에게서 나온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항은 文武가 당대의 제일이라고 하는 만큼 주목해 불 일이다 .150)

『해동이적보』에서도 민응성을 역학 • 병법에 밝은 은둔자로 표현하였다. 張志恒은 『이재만록』에서 李源의 이야기로는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지만, 『해동이적보』에서는 민응성에 못지 않은 弟子로서 奇士요 文武에 통달한 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재만록』 권 12 에 나오는 朴燁의 이야기 151) 는 그가 계교를 써서 淸나라의 호랑이탈을 쓴 밀정을 잡았다가 놓아주는 이야기로부터, 仁祖反正 때 그가 달아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王命에 순웅하여 기꺼이 목숨을 버렸다는 호걸의 기상을 부가시켰다.

이 부분은 그 내용이 『해동이적보』와 대체로 흡사하다. 다만 『해동이적보』에서는 그를 前知할 줄 아는 신비한 인물로 그렸을 뿐 아니라, 젊었을 때 鬼女를 따라가 시체를 거두어 주는 이야기도 있어 훨씬 홍미롭

150) 『海東異蹟補』 , 閔應聖 條, 107 쪽.

151) 『이재속고』 권 12, 『만록』, 582 쪽.

게 꾸며 져 있다. 152)

또한 『만록』 중에는 영조 시대의 道流 李宜臼에 관한 記事도 실려 있는데, 이의백은 자신이 道流가 되어 見聞하고 체험한 이야기들을 『梧溪日誌集』 에 수록하였다. 153)

황윤석이 해동이적보』에 수록한 休休子 154) 는 바로 梧溪 李宜白의 스승이다.

『이재만록』에는 황윤석이 이의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李生源가 또 말하기를 당세에 또한 스스로 奇士가 있으니, 字邊의 張朝,信川의 李宜白, 成川의 金河道입니다. 이들은 隱居하며 독서하고 百家九流에 크게 통하였으니 내 일찍이 千里길을 걸어가서 그들을 방문하였지요. 과연 소문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다만 張生은 한 번 보고 그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는데 炯漫하게 기울어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지요. 그 사람은 사람이 반드시 감출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서, 때에 서울에 이르러 徐命聞과 相從하였으니, 이것이 곧 그의 短點입니다. 李와 金 두 사람은 모두 감추려고 힘쓰고 더욱이 金은 사람들이 아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낮에는 治金을 하여 칼을 만들어서 스스로 生計를 삼고, 밤이면 새벽에 이르기까지 易을 읽어서 八陣, 六花,太乙, 星曆,적을 막고 오랑캐를 방비하는 대책 등, 강구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밤이 깊고 인적이 고요한 즈음에 시험삼아 한번 가서 말을 건네면, 지성껏 물어본 다음에야 겨우 한두 마디를 뱉어냅니다. 이 세 사람은 다 50이 못 되었는데 어찌하여 세상을 좋아하지 않는 무리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이재) 이르기를 龍은 쓰지 않음을 귀하게 여기고 또한 머리가 없음올 귀하게 여기나니, 이른바 쓸모없다고 한 것은 無用이 아니다. 머리가 없는 자는 머리가 정말 없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있어도 없는 것 갇이 할 따

152) 海東異蹟補』, 朴燁 條, 120-123쪽.

153) 崔三龍, 李宜白의 沼 誌集’에 대하여」, 『韓國道敎와 道家思想』, 한국도교사상연구회 編 亞細亞文化社, 1991.

154) 『海東異讓補, 雪 鴻 • 片金子 • 休休子 條

름이다. 오직 사람도 또한 그러하니 古今에 英俊함이 어찌 그 限界가 있으리오. 앎을 구하는 것에 급급하여 時勢를 헤아리지 않고 가볍게 나오는 자는 보잘 것 없는 것이요. 그 身名을 보존한다고 하면서 대개 存心函養을 능히 하지 않으면 淡短해 지는 것이라오. 이런고로 사람이 聖賢의 규모와 역량을 알지 못하고는 안 되는 것이니 朱子가 이른바 진정한 큰 英雄인 것이다. 155)

이 글에서 李源는 張朝 • 李宜臼 • 金河道 3 人을 직접 만난 사람이요, 호岭석은 이들의 이야기를 이호로부터 들어 알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해동이적보』에 나오는 雲鴻 • 休休子 • 片金子 들에 관한 사적도 이호로부터 들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면 『오계일지집』의 저자 이의백은 어떠한 인물인가?

오계 이의백은 조선 숙종조에 仙風이 전하여 온 龍仁 李氏의 가문에 태어나 일찍이 個業울 익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실의에 잠겨있다가 仙家에 뛰어 들었던 인물이다. 그가 선가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은 그의 내력 있는 仙骨家系의 영향과 선비로서 영달할 수 있는 과거에 낙방울 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자랄 때부터 선가의 소양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며 과거의 낙방이 거기에 직접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후로 그는 일생 동안 仙家修練에 힘쓰면서 方術을 익히고, 산수간을 떠돌며 빈곤 속에서 숨어 사는 생애를 보냈다. 특히 그의 高祖인 雲 鴻은 『靑鶴集』의 저자인 趙汝籍의 스승으로서 뛰어난 仙人이었다. 『오계일지집』은 조선 영조 때를 중십으로 해서 살았던 오계 이의백이 당시의 도류들과 어울려 다니며 견문하고 체험한 바를 隨想의 형식으로 기록해 놓은 일종의 道家說話集이다. 156)

韓無長의 『海東傳道錄』이 조여적의 『청학집』과 더불어 거의 갈은 시대 (宣祖-仁祖 年間)에 씌어전 것이라면, 이의백의 『오계일지집』과 황윤석

155) 『이재속고』 권 12, 『만록』, 580 쪽.

156) 崔三龍 위의 논문 참조.

의 『해동이적보』도 영 • 정 연간의 같은 시대에 씌어진 異人說話集이라 할 수 있다.

3 결론

천하의 일에 無不通知했던 博物學者 頭齋 黃胤錫의 참다운 면모, 인간적인 면모는 文學이라는 자기표현의 양식에 의하여 생생히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제까지 그의 문학세계를 詩를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았고, 散文에 있어서는 이재가 『海束異蹟補』의 저술자라는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이재만록』 중의 道家說i유를 살펴보았다.

이재는 文行의 가문에 태어나 祖母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시를 짓기 시작하였으며 일찍부터 詩才를 나타내었다.

그의 시는 『願齋遺稿』와 『願齋續稿』에 나누어 수록되어 있는데, 아직 草稿로 남아 있는 『願齋亂策』에는 『유고』와 『속고』의 시들이 실려 있어『난고』를 통하여 作詩年代를 알 수 있다.

『난고』의 작시연대로 보아 이재의 시들은 대체로 少年期에서 老年期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편성되어 있다. 그는 詞章보다는 經學울 중시하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유념하여 시공부에 몰두하는 것을 삼가한 접이 없지 않으나, 자신이 詩魔에 사로잡혀 시쓰기를 멈출 수 없었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면, 그가 보고 느낀 것이나 끓어오르는 감회에 대하여 항상 시로써 나타내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願齋全智』 1 에 수록되어 있는 『유고』와 『속고』의 시들만 하여도 1,800 首를 넘어서고 있다.

대체로 그에 대한 詩評은 雄健하고 圓暢하여 調의 格이 뛰어나고, 唐詩에 運進하였으며, 歌行에도 뛰어나 衆體를 모두 갖추었다고 하였다.

이재의 시 가운데는 참신하고 진솔한 맛이 우러나는 시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었다.

가행을 포함한 이재의 漢詩는 1,171 題에 1,786 首로 줄잡아 볼 수 있고 여기에 한글 聯時調型인 「木州雜歌」 21 수를 첨가하였다.

시의 제목을 주제별로 분류하여 15 種으로 하였다. 그 주제별로 보건대, 開情 • 交遊를 나타낸 시가 가장 많은 편에 속하고, 鄕慈 내却景 • 自暎 • 懷古 • 旅程의 순서로 나타나며, 挑詩 • 送 • 碩 의 시는 交遊詩에 包括시켰다. 그 밖에 仙佛 내視物 • 忠心 • 性理 • 修德을 표현한 내용들이 있다.

그는 그의 閑情詩의 배경을 이루는 현재 전라북도 고창군에 속해 있는 서남해변이 가까운 마울에서 태어나, 바다와 산과 둘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환경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선비 집안의 성실한 가풍과 文人家에서 성장한 그는 한적한 환경과 자연을 대하면서 한가롭·고 悠然한 정서를 키워왔다. 그가 고향을 떠나 벼슬살이를 시작한 것은 38 세가 넘어서였고, 벼슬을 그만 두었을 때에는 鄕里에 머무르곤 하였다• 이러한 환경과 번거로운 세속사를 멀리하고 조용히 은둔하고자 하는 소망은 閑情의 시로 많이 나타났다.

『이재유고』의 「睿」 중에는 그가 당시 명망있는 인물들과 交遊한 흔적이 보이는데, 그의 師門 金元行을 비롯하여 金用謙, 金時燦, 曺敵, 李基敬, 楊應秀, 鄭景淳,徐命廣, 金履安, 金履信, 趙鎭宅, 金益休, 李思永,宋益中, 高漢聖 등이 있고 이 밖에 실학자계열로 洪大容, 鄭 8 淳, 申景濬, 洪啓禧,李家煥, 李德戀가 있다.

그러나 시에서는 위의 몇몇 분을 제의하고는 그와 가까이 지내던 천지와 그 비슷한 입장에 처했던 微官둘이 많이 등장한다. 대체로 詩作의 대상이 된 師友둘은 훨씬 그와 가까운 情分을 나누던 사람들로 느껴진다.

시로 볼 때, 가장 친근했던 인물은 이재의 처숙인 丁觀薩 • 丁師鏞 형제와 매부인 김익휴로 항상 이재를 염려해 주는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벼슬자리에 추천한 정경순, 이재가 內職에 있울 때 그를 도와준 趙晟 • 趙慮의 쌍동이 형제, 그 아들인 조전태, 이재의 스승인 김원

행과 아들인 김이안 형제, 石室 習 院에서 사귄 朴t H 玉, 그 의에 이사영, 송익중, 유광천 등이 있다.

그에게 유독 향수에 관한 시가 많다는 것은 그의 객지 생활이 고달폈음을 말하여 주고 있다• 그의 첫 부임지가 강원도 寧越의 깊은 산중이었을 뿐만 아니라, 내직에 들어와서도 부모를 모실 만큼 넉넉한 벼슬자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객지 생활의 고달품과 관직 생활의 서러움 속에서 자연히 포근한 고향이 그리웠고, 효성이 지극한 그로서는 부모를 함께 모시지 못함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특히 명절이라든가 계철이 변화하는 때는 유난히 고향생각에 목이 메이고 부모 • 형제에 대한 그리움이 그로 하여금 시를 짓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의 敍景詩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솜씨를 나타내었으니, 산수화를 그리듯 情 景 울 즐겨 묘사하였다. 서경을 묘사한 시들은 수학 시절과 중년에 벼슬살이룰 이곳 저곳 옮겨 다니면서 읊은 것들이 많다. 고향 주변의 경치, 山寺의 풍경, 梅, 松,菊, 竹, 全州의 풍물, 그가 의직으로 현감 노릇을 할 때의 모습 등이 나타나 있다.

이재에게는 그가 스스로를 탄식해 마지않은 自暎詩가 적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의견상 학자로서의 열정과 일상의 성실한 생활로 일관하였지만 그의 내면에는 그 누구에게 호소조차 하기 어려운 고독과 슬폼의 상처를 안고 살았다. 그는 서남해안의 마을에서 태어나 그런대로 청빈한 鄕班으로 행세하였지만 大科에 두어 번 실패하고 나서 중년 가까운 나이에 藤官으로 나아갔으나 별로 빛을 보지 못하였다. 많은 선비와 權門勢家의 사대부들에게 차츰 그의 浩滿한 학문이 인정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선뜻 그를 밀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겉으로는 그를 인재라고 추앙하면서도 정작 벼슬자리를 주는 데는 인색하였던 것이다. 영조 만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임금의 눈에 띠어 그의 博學多識울 인정받고 그에게 알맞은 자리를 주고자 하였지만 대과도 못하고 그렇다고 권문세가의 비호도 받지 못한 그를 임금은 다만 안타까이 여길 뿐이었다.

그가 벼슬을 얻고자 함은 오직 부모님을 모시고 싶어하는 십정일 뿐이

라고 시에서 호소하고 있다. 당쟁의 와중에서 항상 눈치를 살펴야 하는 세태 속에서, 학자다운 자존심을 굽히면서까지 빌붙는 것은 그의 성격상 도저히 허락될 수 없었다.

그는 역사에 관련된 사건이나 故事에 博通하였으므로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는 순간 지난날을 회고하는 시들을 꽤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영월에 가 莊陵의 參奉으로 있으면서는 悲運의 端宗을 추모하고 그때 그 시절을 연상하며 詩策을 움직였다. 여행 중 迫跡에 대한 회고, 그의 젊은 시철이 담긴 고향 근처의 승지와 先祖들의 遺康에 대해 읊었다.

그의 학문은 性理學에 궁극적인 목적을 두었지만 성리학을 窮究하다 보니 자연 仙佛 쪽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수학시절에 長城의 白羊 山寺에 머물면서 독서를 겸하여 參 을 배웠고, 그후에도 고향 근처의 禪雲山寺를 왕래하면서 佛 書 룰 탐독하였다.

한편 『周易』에 깊이 빠지다 보니 『參同契』를 되풀이하여 읽게 되었고 丹學의 經典인 『참동계』를 연구하여 그의 견해를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몸소 丹學修練을 익혀서 養生의 효과를 얻고자 하였다. 그는 인생의 역정 속에서 삶의 허무함을 느끼고 선불을 탐색해 봄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얻고 건강한 삶을 누려보려고 했다. 그러나 참동계 공부에도 나중에는 회의를 나타냈다. 세속에 얽매여 몸은 어쩔 수 없이 늙어가는데 丹功올 이루지 못함을 탄식하였다. 이러한 삶의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그의 仙佛詩이다.

자연의 서경보다는 어떤 물건이나 어떠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모습울 관찰하여 묘사한 시를 觀物詩라는 이름으로 불러 보았다. 그는 박물학자답게 사물에 대한 호기심과 관찰을 통해서 이를 실용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 그의 실학적인 일면이라고 하겠다. 自鳴鍾올 읊온 시, 天象을 살피며 읊은 것, • 月食의 이치, 風水地理에 관한 것, 화폭, 부채에 관한 것들을 뽑아보았다.

그의 시에는 임금에 대한 자기의 忠心울 표현한 것이 있다. 그는 늦게나마 영조께서 자신을 알아준 것에 대한 감격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가 임종할 즈음에도 꿈에 옛 閩怨詩를 읊다가 깨었는데 그 날이 돌아가신 先王의 탄신일이라서 그 애달품과 안타까움을 시로 표현하기까지 했다. 물론 백성과 나라에 대한 근심을 표현한 것도 없지는 않으나, 백성들의 모습에 눈길을 돌리기보다는 항상 임금을 향한 충심을 더 많이 드러내고 있다.

또한 유학의 이론인 性理에 대한 철학적인 생각을 시로써 나타내었으니, 그의 스승인 김원행의 人物性同 습의 학설을 계승하여, 모든 개혁과 변화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심을 정화시킴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는 明本源에 그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리하여 본심을 정화시키는 修德울 행하는 것이 인간이 지향해야 할 태도임을 시로써 읊었다.

시조 형식을 갖춘 21 수의 「木州雜歌」에는, 먼저 木川 원으로 부임하게 됨을 君恩으로서 강조하고, 자기 선대가 수덕한 집안임을 말하였으며, 본심의 純善함을 밝혀 이를 잃지 않음으로써 萬化가 본심에 歸一하여 三桐五 을 바르게 실천할 수 있는 인재됨을 나타내었다.

이재의 산문 중 說話性을 가장 많이 내포한 기록이 『이재만록』이다. 그의 博學多聞은 이 세상에 별로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逸士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 중에는 『海束異蹟補』에 수록된 異人 • 術客의 이야기들이 눈에 띄고 있어, 102 의 異人說話를 저술한 장본인이 황윤석이었음울 알려주는 구체적 증거가 된다. 본래 『海東異蹟』은 顯宗 때의 好道仙 家 洪萬宗이 한국 역대의 이인 40 인의 인물설화를 엮어 놓은 것이다. 이재가 홍만종의 『해동이적』을 보고, 거기에다가 자기가 평생에 見聞한 바를 덧붙여 이재 당시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102 인의 인물설화로 增 補한 책이 『해동이적보』이다.

홍만종이 『해동이적』 傳에서 쓴 인물전에 혹은 加筆하거나 고쳐 쓴 부분이 있어, 홍만종의 『해동이적』과 황윤석의 『해동이적보』 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황윤석의 『해동이적보』는 훨씬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柱를 달아 보충한 부분도 많다.

『해동이적보』 뒤의 純陽子 跋文이 『이재유고』 권7, 跋 「題海東異蹟後」

의 내용과 일치함으로써 순양자가 이재의 道號이며, 바로 그 편찬자임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 이재만록』 중에는 『梧溪日誌集』의 저자인 梧溪 李宜白의 면모가 단편적이나마 들어가 있다.

갇은 시대에 황윤석의 『해동이적보』와 이의백의 『오계일지집』이 모두 이인들의 奇事로 엮어져 있어 조선 후기의 道仙家에 대한 면모까지 파악할 수 있다. 『오계일지집』은 이의백이 名家에서 태어나 과거에 낙방하고 선가에 입문하여 師友를 좇으면서 몸소 보고 듣고 체험한 바를 기록한 道家類의 설화집이다.

그러므로 編述에 대한 시각도 황윤석은 유학자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 반면, 이의백은 선가의 입장에서 자신의 전실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재만록』은 『이재난고』에서 부분적으로 발췌한 것인 만큼 『이재난고』가 정리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면 『해동이적보』에 기술된 인물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들어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이재 황윤석의 「화음방언자의해」와 『이수신편』 등에 반영된 어휘 연구의 성격

최전승

l 언어 연구에 있어서 실학의 사조와 그 시대적 제약

1.1 언어학을 언어에 대한 과학적 연구라고 정의할 때, 여기서 〈과학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특정한 시대의 사조와 철학, 죽 시대정신에 따라서 서로 다른 내용을 갖는다. 또한 어느 특정한 시대의 언어학자들이 언어의 다양한 측면 가운데 어떤 주제와 현상만을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사상과 이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조시대의 대표적인 실학자들 가운데 전북 고창에서 출생한 이재 황윤석은 일찍이 國語學史의 영역에서 그의 연구 업적 (1) 「華音方言字義解」 (『이재유고』, 권12. 12b-27b) , (2) 字母辨」 (『이재유고』, 권12. 12b -27b) 및 (3) 「本學韻源」 (『이수신편』, 권20. 1a-67b) 등을 통해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국어학사가 우리말을 객관적으로 연구해 온 국어학자들의 이론

과 체계 및 그 연구 대상과 방법론의 변천에 관한 학문이라면, 업밀한 의미에 있어서 황윤석의 업적은 상당한 부분 여기서 제의될 수밖에 없다. 그의 언어 인식에는 우리말, 죽 국어에 대한 체계적인 개념이 없었고, 국어의 언어 현실 그 자체에 대한 독자적 해석도 시도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윤석의 언어에 대한 광범위한 학문의 세계―중국의 音韻學 중심의――를 파악하고, 그것에 대한 적절한 가치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국어학사적 안목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황윤석이 〈실학〉이라는 당대의 사회적 및 문화적 여건 하에서 언어에 기울인 폭넓은 관심과 그것에 대한 적철한 자리매김은 한국의 문화사 내지는 철학 및 사상사의 맥락에서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재 황윤석과 일단의 실학자들이 활동하였던 대략 숙종 이후 영 • 정 조 시대의 실학과 관련된 시대상과 학문적 배경을 고려할 때, 이 시대에 있어서 언어에 대한 과학적 사고는 宋學의 영향으로 형성된 성리학과 역학 및 중국 음운학의 방법론과 그 체계하에서 형성되었다. 이조 초기, 세종조부터 실학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유일한 언어학 이론은 중국의 음운학이었으며, 특히 음성이론에 대한 지배적인 언어철학은 성리학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황윤석의 학문적 사고와 방법론은 중국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는 제약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언어에 대한 관심은 중국의 전통적인 운서 연구를 동하여 주로 추상적인 중국의 표준 한자음 및 조선 한자음의 고찰이 중십을 이루었으며, 우리말에 대한 부분은 여기서 파생된 일종의 부산물이었다. 그 결과 황윤석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적 국어를 객관적으로 관찰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국어에 대한 인식은 오칙 중국의 운서――예를 들면, 『성리대전』의 일부인 소옹의 『황극경세서』의 체계와 한자어의 관접에서만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국어〉란 개념은 실학시대와는 거리가 먼 개화기 시대에 형성된 것이며, 여기에 해당되는 〈俗語 • 方言 • 但言〉 등의 용어가 이 시기에 일반화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우리말의 문자나 음성체계를 국어의 현실에서 고찰하지 않고 중국의 추상적 운서의 이론과 체계로 파악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보기는 호}윤석의 『 이수신편 』 에 실린 〈세종대왕 훈민정음 본문 자모〉 (20 : 50a,b) 의 도표이다. 이 도표에서 그는 훈민정음의 초성체계를 중국 한자음과 관련된 설상음과 설두음 및 齒頭音과 正齒音까지를 이용하여 전동적인 36 자모 체계로 재구성하였다. 또한 국어 단어들의 유래와 기원을 고찰한 그의 「華音方言字義解」 (1780) 의 중심 주제는 제목 그대로 국어의 상당량의 어휘가 중국어에서 차용되었거나 기원되었음을 규명하는 것이었다. 물론 원래의 17 字 초성체계를 중국 운서체계로 전환시킨 〈세종대왕 훈민정음 본문 자모〉라든가, 당시로는 획기적인 「화음방언자의해」를 통해서 황윤석의 탁월한 견해와 박학다식한 학문, 그리고 考證的인 고찰방법이 드러난다. 그러나 중국 운서와 조선 한자음 연구에서 그의 언어학의 학문이 출발하였기 때문에, 방법론은 여기서 습득된 이론과 체계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학문적 • 시대적 제약은 황윤석과 동 시대 및 그를 전후하여 활동한 실학시대의 일련의 어학자들에게도 예의가 아니다. 따라서 황윤석의 어학에 관한 학문적 체계와 특칭은 독자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고, 그 시대정신의 표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연구 업적을 그를 선행했거나 후행했던 여타의 다른 실학자들의 연구 업적과 관련을 맺어 비교 검토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다음은 황윤석을 전후하여 등장한 어학자들과, 그들의 대표적인 저작 및 연구 성격을 간추린 것이다(강신항 1967 : 8-9 ; 김완전, 도수희 1986 : 262).

崔錫鼎 (인조 24 년-숙종 41 년, 1646-1715) : 『經世正韻』 (1678) ➔ 훈민정음의 체계를 소옹의 『皇極經世聲音唱和 圖 』의 이론으로 해석하고, 이것을 토대로 韻圖를 작성하였다(배윤덕 1990).

朴性源 (숙종 23 년-영조 43 년, 1697-1767) : 『華東正音通釋韻考』 (1748) 一중국 한자음(華音)과 당시의 조선 한자음(東音)을 함께 이용할 수 있

도록 일원화한 韻害로, 국어 한자음의 변화와 중국음의 변천과정을 규명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이돈주 1977).

洪啓禧(숙종 29년-영조 47년, 1703-1771) : 『三韻 菜』 (1751) → 조선 한자음만을 기준으로 하여 편찬된 한국식 운서이다(유창균 1980). 凡例 에는 〈諺字初中聲之岡〉가 실려 있으며, 日毋字 에 대한 音價 설명이 있다. 李思質(숙종 31 년-영조 52 년, 1705-1776) : 『訓民宗編』 → 훈민정음 문자의 기원을 圓과 方의 상형에서 찾으려고 하는 이른바 圓方象形說을 주장하였다.

申景濬(숙종 38 년-영조 5 년, 1712-1781) : 『訓民正音韻解』 → 훈민정음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서(韻圖)이나, 최석정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였다. 국어와 조선 한자음에 대한 언급이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洪良浩(경종 4 년-순조 2 년, 1724-1802) : 『北塞記略』 → 함경도 방언어휘 수집. 예 :小車→跋高, 門→烏羅, 北→後, 象實→栗 등.

李德戀(영조 17 년-정조 17 년, 1741-1793) : 『靑莊館全書』 → 속담과 경상도 방언 및 훈민정음의 기원을 언급했다.

鄭東意(영조 30 년-순조 8 년, 1754-1808) : 『畵永編』 (상, 하. 1806) → 포르두갈어를 비롯한 의국어 어휘 108개를 수집. 국어에 대한 관찰이 등장하기 시작했다(예컨대, 사이 시옷에 대한 견해) (도수희 1992).

丁若鏞(영조 38 년-헌종 2 년, 1762-1836) : 『雅言覺非』 → 국어의 어원을 한자의 字義와 音에서 추구하였으며, 중국 한자음의 입장에서 당시 말과 글의 찰못을 고증하여 바로잡으려 했다. 그 대상은 199항 450여 개에 이른다.

柳僖(영조 49 년-헌종 3 년, 1773-1837) : 『諺文志』, 『物名改』 → 신경준·정동유 등의 어학자들의 韻學 이론을 계승하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여러 운서둘을 참조하여 〈柳氏校定漢字音〉을 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물명고』에서 19 세기 국어의 다양한 어휘를 수집하였다(유창균

1980).

1.2 황윤석을 포함하여, 이 시기의 실학자들 가운데 언어를 연구하는 기본태도와 내용에는 〈 實事 求是〉라든가 〈務 實 力行〉과 같은 의도를 가진 과학화 또는 사회 현실화의 실학의 정신은 찾을 수 없는 것이 특칭이다.

물론 전통적인 중국 한자음을 수립하고, 조선 한자음 가운데 변화가 심하게 일어난 대중들의 俗音을 정리하여 원래의 중국 한자음〔華音〕으로 귀속시키려는 언어 정책적인 측면에서 그들 연구의 실용성을 평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당시 言衆둘의 언어생활과 거리가 먼 작업이었다. 언어 사용면에서 실용성이라 한다면 황윤석의 『이재속고』 가운데 〈文字音義及字母改〉 (7 : 10a-12a)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는 문자와 발음은 서로 상이하지만, 의미가 비슷하거나 갇은 유형의 한자( 智 - 寫 , 吾 戈-予, 靑 - -, 生-産, 大-多, 始- ,-首, 虫 , 界 - 境- 弱 등), 또는 받음은 동일하지만 문자가 상이한 한자(伐-罰) 등의 용례가 50 여 항목에 걸쳐 나열되어 있다. 아러한 유형은 정약용의 『雅言梵非』 제1권에 더욱 세밀하게 정리되어 있다. 예를 들면, 同訓 ( 다리 → 橋/脚), 異 義 (고기 → 魚/肉), 異音(辰 → 신/진, 狀 → 상/장 등), 訓同 (날 → 飛 生, , 日 ) 등.

그러나 이들은 언어학의 측면에서 당대의 유일한 과학이었던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성리학과 중국 음운학에 몰두함으로써 이조 초기의 고전적인 운서 연구의 흐름을 그대로 답습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세종조의 운서 연구와 성리학의 철학이 당시의 15 세기 국어의 음운체계를 정밀하게 분석하여 〈訓民正音〉이라는 새로운 음소문자 를 완성시키게 했던 원천이 되었음을 상기할 때, 황윤석을 포함한 실학시대의 언어연구는 단편적인 방언 및 유희의 『物名改』와 같은 어휘 수집과, · 부차적으로 이루어전 국어 현상의 관찰만을 제의하면 대부분 학문 을 위한 학문이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관접에서 대표적인 실학자 황윤석의 학문의 목표는 〈성현의 학문을 익혀 大儒가 되려는 것이었고, 군자가 되어 한

가지 일이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부끄러운 일이며, 智者는 博學이 있어야 한다는 聖訓의 실현이었다〉는 이강오 선생의 지적이 이해되는 것이다(이강오, 「‘이재유고 를 보니」, 1988, 《금호문화》).

그러나 황윤석을 포함한 일단의 실학자들은 언어에 대한 공동된 연구주제를 공유하고 있었으며, 동 시대의 학자들 간에 학문적 교류와 토론이 있는 가운데, 서로 다른 학설을 비판하거나 수용 또는 계승 발전시키는 학문적 전통을 이루고 있었다. 예컨대, 『畵永編』 (1806) 의 저자인 玄同 鄭東意와 『언문지』를 지은 유희 두 학자는 사제지간으로, 정동유의 언어 이론이 『언문지』의 저작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도수희 1992 : 164). 그리고 황윤석은 『훈민정음韻解』를 저술한 신경준, 『三韻聲萊』의 저자인 홍계희, 정동유 등과 직접적인 교섭을 가지며, 선행세대 실학자들(최석정의 『經世正韻』, 이수광의 『芝峰類說』, 박성원의 『華束正音通釋韻改』 등)의 문헌을 동해서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유재영 1970 : 43). 이와 갇은 맥락에서 어학에 관심을 보였던 실학자들은 나름대로의 학문적 흐름 또는 경향을 지속시키는 하나의 두드러진 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우선 이들은 문화적인 자아의식의 표현으로 〈훈민정음〉의 문자의 기원과 그 체계를 근본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또한 이들은 〈훈민정음〉의 문자체계의 우수성을 내세웠으며, 아울러 중국 운서의 이론 (36자모)으로 〈훈민정음〉의 원리를 재해석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실학 시대 어학자들이 시도했던 다음과 갇은 〈훈민정음〉의 制字 원리 및 기원에 대한 고찰은 이들이 맺었던 학문상의 상호 영향을 찰 반영하여 준다고 생각한다.

황윤석은 〈우리 훈민정음의 근원은•••••• 결국 梵字의 범위 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이수신편』, 「韻學本源」)고 판단했다. 이러한 주장은 이수광의 『지봉유설』(권 18) 에서 〈我國諺書字樣 全微梵字〉로 소급되는데, 그 원류는 성종 때 성현의 용재총화에서 훈민정음을 < >라고 언급하는 데 있다고 한다(강신항 1991 : 86). 그 반면, 은

그의 『 훈음종편 』 에서 이수광의 범자기원설을 부정하고, 〈훈민정음〉은 〈 音 에 근본하였다〉는 易學的 근거를 제시하였다. 신경준은 발음기관 상형설을 제기한 반면에, 유희는 그의 『 언문지 』 에서 蒙 古字 기원설을 주ō장하였다. 또한 이덕무는 그의 『 靑 莊館全 著 』에서 古築 기원설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各 象 其形而制之〉라는 언급(제자해)과 정인지 서문 가운데 〈象形而字像古 策 〉 및 최만리의 반대 상소문에서 〈 字 形微古篠文〉에서 비롯된 해석이다. 물론 그들은 훈민정음의 제자원리를 명시적으로 규정해 놓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각자의 주장에 대하여 설득력 있는 자료를 제시하지도 않았다. 황윤석도 〈세종대왕 훈민정음 본문 자모〉에서 훈민정음을 해례본에서 世宗御制 서문이 있는 例 義 편과 정인지의 序만을 기록한 『 세종실록』 및 〈列聖御制〉에서 보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훈민정음〉 해례본이 이미 발견된 지금까지 그 문자의 제자 원리와 기원에 관해서 다양한 해석과 관접이 끊이지 않고 동장하고 있다(유창균 1966, 안병희 1992, 김영만 1987, Fromkin & Rodman 1993 : 375-376).

2 어휘 고찰의 방법론

『이수신편』 등에서 보인 황윤석의 당대 聲韻學的 이론이 대체로 이차적이며 동시에 나열적인 기술을 면치 못하였음을 상기해 볼 때, 화음방언자의해」 등에 반영된 그의 어휘적 인식은 매우 설명적이며 또한 독창적인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1) 어떤 학

1) 『이수신편』의 卷頭마다 명시되어 있는 〈四 浜 散人 황윤석 편집〉이란 기록이 여기에 실린 내용의 성격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명시가 없는 『이재유고 』와는 달리, 『이수신편』은 대부분 중국 운서의 문헌과 중국 학자들의 학설을 옮기거나 또는 발췌하여 편집하였다. 따라서 그의 주장이란 중국 한자음을 한글로 표음하고 여기에 약간의 주석을 첨부했을 뿐 이라는 평가가 국어학사적 측면에서 내

려진 바 있다(이숭녕 1972 : 170).

사실 『이수신편』의 권1 「太極圖」에서 시작하여 권 13 의 「皇極經世 書 」를 거쳐 권20 의 韻學本源」까지의 내용을 조감하여 보면, 황윤석이 방대한 중국 운학을 이해하고 고십하여 연구하여 가는 일종의 학습 노트와 갇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 반면, 『이수신편』에 다른 문헌의 기록이나 학자들의 주장을 옮긴 다음, 여기에 황윤석 자신의 견해나 그 수정안을 첨부하기도 하였다.

문적 대상에 대한 접근방법의 위계에서 첫번째의 관찰 단계와 두번째의 기술 단계는 마지막 세번째의 설명 단계보다 더 낮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세번째의 설명 단계는 그만큼 위험부담을 안고 있는 것이며, 먼저 정밀한 관찰과 객관적인 기술의 검증을 거치지 않고는 도달하기 어려운 작업이다. 따라서 황윤석의 「화음방언자의해」 등에 나타난 어휘적 설명을 우리가 이해하고 또한 검증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먼저 황윤석의 논리와 사고의 학문적 배경을 이루었던 당대의 사회적 조건들과 학문체계를 고찰하는· 것이다. 본고에서 이러한 고찰은 필자의 능력을 벗어나는 영역이기 때문에, 차선의 방법으로 여기에서는 그가 이끌어낸 설명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했던 몇 가지 방법론적 원칙을 「화음방언자의해」 등에 있는 예들의 유형을 중심으로 추출하려고 한다.

국어 단어들의 유래와 중국어 (또는 범어 • 몽고어 등)로부터의 어휘 차용 관계를 취급한 이 책은 실학시대의 새로운 학풍의 반영이었으며, 이 시기에 어원 • 방언 및 어휘의 수집 • 편찬이 황윤석을 전후하여 많이 등장하였다. 따라서 황윤석이 시도한 어휘 연구의 성격은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의봉의 『동한역어』, 정약용의 『아언각비』 등과 같은 일련의 전통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황윤석의 어휘 연구의 본질은 우리말에 대한 전지한 자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의 연구는 古史를 고찰함에 있어 먼저 우리말의 본래의 모습을 정리하는 것이었다(유재영 1910a). 이러한 연고로 「화음방언자의해」에는 內外 史睿에 등장하는 人名 • 地名 • 官諏名에 대한 그의 관심이 크게 반영되어 있다.

필자는 이 글 가운데 제3장에서 『이수신편』(이재유고 권 20: 58b) 에 실려 있는 근세 중국어 차용어 목록의 유형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다음 제 4 장부터는 「화음방언자의해」에 기술된 중국어 차용어의 유형과 성격을 분석할 것이며, 제 5 장에서는 황윤석이 「화음방언자의해」에서 예증하려고 했던 18 세기 국어 어휘들이 반영하는 국어사적 측면을 논의하려고 한다. 2)

2) 황윤석의 화음방언자의해」에 대한 단편적 언급은 지금까지 출간된 10 여 종의 〈국어학사〉 교과서 부류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화음방언자의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최근에 이종철 (1981 : 151~171), 김석득 (1983 : 61-91) 에서 시도되었다. 그리고 중국어 계통의 차용어에 관한 전반적 연구는 이기문 (1991) 에 종합되어 있다. 본고를 작성하는 데 있어서 이분들의 선행 연구에 도움을 크게 받았음을 여기서 밝히고 감사를 표한다. 또한 중세와 근대국어의 어휘 자료를 열거함에 있어서 유창돈의 『이조어 사전』 (1977, 연대 출판부)을 이용하였다.

(1) 古音 運用에 있어서 〈聲訓〉의 원칙

「화음방언자의해」 등에서 황윤석은 고대의 중국 한자음을 비롯한 성음학적 지식을 풍부하게 구사하였는데, 여기에도 중국의 학자들이 어휘〔語詞〕룰 설명할 때 전통적으로 이용하는 古音의 운용 방식이 그대로 답습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한 가지 방식은 〈音近相通(소리가 가까우면 뜻도 동한다)〉 현상에 근거한 聲訓이다(李新船 1990 : 165). 李新船 (1990) 의 설명에 의하면, 前代의 중국 학자들은 어떠한 詞(字)의 뜻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음근상통에 의하여 먼저 소리 (성음)의 관계로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에 성음들 사이의 갇고 비슷함에 따라 어휘의 뜻을 푸는 방법이 생겨 나왔으며, 이것이 바로 〈성훈〉이라는 것이다. 황윤석도 국어의 어휘를 한자음으로 取音하여 성훈의 방식으로 뜻을 해석하려고 하였다. 죽, 어휘의 의미는 성음에 첨가된 것이기 때문에, 성음이 같으면 뜻도 거의 그의 범주 속에 있다는 관접인 것이다.

예를 들면, 황윤석은 「화음방언자의해」 (25: 39a/46a) 에서 우리말 〈씨

〔種子〕〉에 대한 유래를 다음과 같이 華語와 관련하여 논증하였다 : 죽, 〈種子〉를 우리 말에서 〈時〉字로 쓰는데, 이것은 죽 漢語의 禪毋의 소리이다. 漢人들도 〈籠子〉를 예전에 〈屈〉로 불렀다. 蒙韻에서도 〈罪〉는 心毋에 귀속되기 때문에 〈時〉와 서로 가깝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나라 소리에서도 서로 가까워서 〈時〉로 부르는 것이다. 무릇 人畜이나 草木에 전하는 모든 〈종자〉를 〈時〉로 통칭하지만, 그것을 뜻으로 새길 때에는 〈종자〉가 될 따름이다. 또한 (25 : 39a, 〈孤子〉 항목) 〈屈〉의 화음은 〈시〉로서 우리나라에서 과일의 씨나 곡식의 종자까지 범칭하며, 혹은 〈實〉이라 한다. 〈實〉과 〈時〉는 소리가 서로 가깝다.

이상이 국어의 〈씨〉에 대한 황윤석의 어휘적 설명이다. 국어의 〈씨〉가 화어의 〈時 昆 • 實〉 등에서 유래한다는 황윤석의 설명의 타당성 여부는 여기서 논의로 하지만, 우선 〈종자〉에 대한 18 세기 어형이 〈時〉로 音譯될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이 앞선다. 이 어형의 중세국어 형태는 어두자음군을 갖고 있었지만, 18 세기에 와서는 이미 초성이 경음으로 변화되었을 것이다.

종안 삐라(월석 2.2), 삐 죵(種, 유합, 하 7), 核 삐 (물명고, 四木). 위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갇이, 이른바 〈음근상통〉의 원리가 언어적 계동이 서로 다른 중국어와 국어의 어휘 사이에 적용되었다는 사실이 황윤석의 「화음방언자의해」의 한계를 나타낸다. 이러한 사실은 〈柄〉과〈鼻〉가 각각 華音으로 초 • 중 • 종성이 같기 때문에 그 의미도 역시 동용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국어에도 그대로 적용하려는 그의 시도에도 드러난다 (25 : 37a-37b). 그리하여 〈鼻〉는 우리말에서 〈고〉 또는 〈코〉라하며, 동시에 자루를 갖고 있는 모든 것은 〈곡지〉라 하는데 대개 〈곡> 는 〈고〉의 바뀜이라는 것이다. 또한 방아공이〔祚〕를 〈고〉라 하고, 〈象〉은 〈코기리〉라 하는데, 이것은 원래 〈고기리〉에서 나온 것으로 황윤석은 보았다. 따라서 원래 〈고기리〉는 그 코가 자루처럼 길기 때문에 붙여전 이름

이고, 방아공이의 〈고〉도 역시 갇은 원리에 의하여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루를 갖고 있는 것을 〈곡지〉라 한다는 데에는 별로 할 말이 없지만, 〈곡지〉의 〈곡〉이 〈고〉의 변화라 하여 국어에서 〈고〉〔 鼻 〕와 〈곡지〉를 연관지으려는 호 윤석의 의도는 전연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착상의 원천이 화어에서의 〈鼻〉와 〈柄〉의 발음이 서로 가까워서 의미가 상통한다는 사실인데, 이 원리가 계동이 전연 상이한 국어의 어휘에 적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황윤석의 사고가 「화음방언자의해」의 주제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그의 설명에서 오늘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사실은 18 세기에 〈고〔 鼻 〕〉에 격음화 현상이 보편화되었으며, 황윤석은 이것을 〈고>코〉의 과정으로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코기리〉〔 象 〕에서 〈고〉〔 鼻 〕를 분석하여 ‘고기리>코기리’로 보았다는 점이다.

(2) 〈古音通假〉의 원칙

「화음방언자의해」 등에서 구사된 古音의 운용에 대한 또 다른 방식은 갇거나 비슷한 음으로 굴자를 서로 빌려 쓰는 이른바 〈古音通假〉의 원칙이다. 이러한 방식은 비단 황윤석의 경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한자음으로 취음한 국어의 어휘 해석에 있어서는 특히 「화음방언자의해」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황윤석은 이 책에서 (2 : 34a) 東俗에서 〈大〉를 〈漢•千•汗•養•建〉이라 하는데, 이것들은 초성이 같거나, 또는 중성이 같거나, 아니면 종성이 갇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글자들은 비록 변했지만 그 의미는 충분히 동용되며, 이 말은 몽고어나 여전어와 매우 가깝다는 사실을 그는 또한 지적하였다. 따라서 祖父를 우리말에서 〈한아비〉라 하고 OO毋〉를 〈한마〉라고 하는데, 이것은 와 〈大毋〉 를 말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大=한〉의 연관을 찾게 된다. 또한 그는 협주에서 〈鴻〉과 〈洪〉이 예전에 모두 〈항〉 음을 갖고 있었으며 이것울 로 새겼기 때문에 〈漢〉과 〈汗〉은 사실인죽 〈洪,鴻〉의 轉昔일 뿐입을 언급

하였다. 3)

3) 이러한 〈大=한(汗)〉에 대한 인식이 당대 실학자들에서 보편적으로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의봉의 『동한역어』에서 〈漢接〉(하날) 항목에 다음과 갈은 구철이 보인다. 〈『계립유사』의 표기 ‘漢接'올 보건대, 이것은 마땅히 ‘汗兒’라는 것이다. 『지봉유설』에서 말하기 를 우리말에서 ‘大'를 ‘汗'이라 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 天'은 ‘汗兒’가 된다. ‘兒’는 중국음으로 ‘乙’이다.〉

이러한 그의 설명에서 출현하는 〈한아비〉형은 15 • 6세기의 국어에서 자연스러운 어형이다. 이미 18 세기에 와서 이것은 〈할아비〉로 변화했을 것이나, 황윤석은 자기가 확립한 공식 〈大=한〉을 지키려고 古形을 사용한 것 갇다. 할아비 (祖父, 신속, 孝 4.6 7 ). 그런데 〈祖毋〉에 대하여 황윤석이 사용한 〈한마〉형은 18 세기 국어의 어휘로 의심스럽다. 이것은 이미 15 세기부터 〈할미〉(월석 10 : 17)로 쓰였으며, 근대 국어의 『역어유해』(상, 56a) 에 등장하는 〈한어미〉형은 어원 의식의 표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황윤석은 또 다른 협주에서 〈한마〉형은 〈한어미〉에서 급히 발음하여 형성된 축약형입을 밝히고 있다. 〈한어미 → 한마〉로의 축약은 근대국어 음운규칙의 관접에서 그 타당성을 결하고 있지만, 이러한 방식이 또한 그의 어휘 연구의 일면을 이루고 있다.

(3) 음운 축약의 규칙

황윤석은 이 책에서 국어의 어휘형태를 설명할 때 독특한 축약의 규칙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음운규칙들은 상황에 따라서 적용되는 것이며, 이 가운데에서 어떤 보편적 원칙이나 일관성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는 음운연결의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는 축약을 〈급히 말하면〉 또는 〈급하게 그릇 전하여〉, 〈몇몇 소리가 합하여〉 등으로 표현하였다.

황윤석의 「화음방언자의해」 가운데 등장하는 수많은 보기 가운데 ‘外亞父>을아바'와 ‘內亞母>누의’의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하는 형태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25 : 33b), 우리나라에서 여동생이

오빠를 부를 때 〈울아바〉라 하며, 남동생이 누님을 부를 때 〈누의〉라 하는데, 이것은 본래 각각 〈外亞父〉및 〈內亞父〉에서 세 소리가 합하여 변화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에 이른 근거로 황윤석은 다음과 갇이 두 가지 사실을 들었다. 첫째는 男兄은 대체로 밖에 있으며 女弟가 아버지 다음가는· 분으로 존경〔尊兒父〕한다는 것이요, 女兄은 안에 있어 남동생으로부터 어머니 다음가는 분갇이 보인다는 것이다. 둘째는 〈外〉의 華 音 은 〈왜〉이고, 〈內〉의 화음은 〈뉘〉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황윤석이 논증으로 제시한 두 가지 사실은 국어의 〈울아바〉와 〈누의〉의 음과 華語의 〈外〉와 〈內〉 음의 어떤 유사성을 억지로 합리화하려는 의도를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이 가운데에도 다음과 갇은 황윤석의 언급은 통칙이 될 만하다. 즉 〈일반적으로 急 하게 말하면 一字로 되고, 천천히 말하면 二字가 되는 예들이 상당히 많다〉 (25 : 34b). 그러나 이 동칙에 대한 예증으로 황윤석이 제시한 보기로는 합리적인 것보다 불합리한 것이 더욱 많다.

죽 〈野〉는 우리나라 말로는 〈드르〉인데, 이것을 급하게 말한죽 〈들〉이 된다는 그의 설명 (25 : 32a) 은 ‘드르>들’의 역사적 과정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황윤석이 추출한 국어의 〈들〉은 이것이 화음 또는 여진어 〈句子〉에서 유래되었음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해석에 의하면, 〈句〉에서 초성 〈ㄷ〉과 〈子(즐)〉에서 〈兒 (알) 〉의 경우와 동일하게 중성과 종성을 취한 〈울〉을 합한 결과가 국어의 〈들〉이라는 것이다.

일찍이 『훈몽자회』(예산본)와 『역어유해』 등에서 한자어 〈句〉에 대한 새김으로 〈드르〉를 배당시켜 왔는데, 황윤석이 이러한 자료 를 참고한 것 갇다.

句, 드르 뎐(훈몽, 중. 2a)

野句子(여뎐즈) , 드르(역어, 상. 6a), cf. 野여, 들 (한청, 1. 34b).

그 반면, 사람의 나이를 계산할 때 우리말에서 쓰는 〈한살, 두살〉의

〈살〉은 〈歲除日〉의 세 음이 축약되어 〈서을〉이 되고, 이것이 다시 바뀌어 〈살〉이 되었다는 설명 (25 : 3Bb) 이나, 국어의 〈아들〔子〕〉이란 말이 한자어 〈阿核等(아해들)〉으로부터 급히 발음한 결과 단축되어 형성되었다 (25 : 56b) 는 축약의 공식은 전연 타당성이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갇은 예에서는 급하게 잘못 와전되어 발음〔急而計 되어도 축약형의 모습을 갖지 않는다. 죽 우리말의 石首魚는 화어 憂魚〉인데, 〈錢〉음은 〈宗〉이고 〈종어〉의 소리를 급하게 잘못 발음하여 〈조긔〉가 되었다는 것이다 (25 : 32a). 따라서 황윤석이 시도한 국어의 〈조긔〉와 화음의 〈錢魚〉의 대비는 단순한 소리의 유사성에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4) 변화〔音轉〕의 원칙

황윤석의 국어 어휘 고찰은 그 기원을 규명하는 것으로 시종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해당 어휘의 기원과 그 유래를 밝힘으로써 그것에 대한 완전한 설명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發生的genetic 접근방법을 택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 실학시대의 전반적인 학풍에 따라 국어의 어휘 유래의 대부분의 기원이 한자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華語에서 국어로의 어휘 이전을 설정함에 있어서 야기되는 중요한 음운론적 문제를 해결하는 간편한 방법으로 현행 중국어 발음하고는 상이한 古華音울 찾거나, 이른바 〈音轉〉의 원칙을 무제한 자유롭게 활용하였다.

여기서 황윤석이 빈번하게 사용하는 술어 〈음전〉 또는 〈轉〉은 역사적 음운변화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적 변화의 구체적 원리가 제시된 바는 없으며, 대체로 모든 변화의 유형을 포괄하여 통칭하는 편리한 장치로 사용되었다. 황윤석이 국어의 어휘를 중국 한자어에서 기원되어 변화를 거쳐 형성된 것으로 제시한 〈음전〉에는 그 근거를 나름대로 제시한 유형도 있지만、 그러한 증명이 전연 생략된 유형도 많다.

a) 먼저 첫번째 유형에 관한 예를 들면, 국어의 〈발〔足〕〉이 한자어〈跋兒〉에서의 변화라는 것이다 (25 : 35a). 그리고 화음 〈跋〉를 국어의

〈발〉의 초성에 접근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이른바 古華音울 제시한다. 그리하여 〈跋〉의 고화음은 〈바〉이기 때문에, 〈 夫〉의 초성 〈ㅂ〉과 〈兒〉의 화음 〈알〉이 결합되어 〈발〉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坪〉은 大野란 뜻이며 국어에서 〈별(벌)〉이라 한다 (25 : 35b). 그런데 신라어에서는 〈伐〉을 〈火〉라 하며, 이 〈火〉는 우리말로 〈불〉이고 〈별(벌)〉에 가깝다고 황윤석은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원래 〈별(벌)〉은 〈坪〉에서 변화된 형태로 설명되는 것이다. 이러한 〈음전〉의 원칙은 최근 까지 양주동 (1965)의 어원 연구 등에서 〈音轉,音韻互轉〉 및 〈通音〉 등의 용어로 지속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b) 중국 한자음 자체가 잘못 변화되어 우리말에 차용된 경우와, 우리말에서 잘못 변화된 차용어도 있다는 것이다.

〈중국어에서 船上에서 비를 피하고 햇볕울 가리기 위해서 대오리, 띠, 부들 같은 것을 엮어 배를 덮는 물건을 ‘蓬’ 또는 ‘斗蓬'이라 하는데, 우리 東俗語에서는 바뀌어 ‘둥’이라 한다. 이것은, 죽 ‘斗’의 잘못이다〉 (25 : 44a).

〈중국어에서 〈銀〉를 〈推〉라 한다. 이것이 우리말에서 바뀌어 〈톱〉이라 부른다. 그런데 〈토〉는 〈推(퇴)〉의 잘못 바뀜이다〉 (25 : 42a).

c) 전혀 근거 제시 없는 〈音轉〉의 유형으로 다음과 갇은 예를 둘 수 있다. 죽, 〈雄〉을 국어에서 〈수〉라 하는데, 이것은 〈雄〉의 〈웅〉 또는 〈흉〉의 변화라는 것이다 (25 : 32a). 그리고 〈化馬〉를 〈피마〉라 부르는데, 여기서 〈피〉는 〈化〉의 변화이다 (25 : 32a).

d) 또한 동일한 글자의 고화음일지라도 국어 어휘에 따라서 상이하게 변화된 예를 「화음방언자의해」에서 찾을 수 있다. 황윤석에 의하면, 화음의 이른바 〈荊籠〉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채롱〉이라는 것이다 (25 : 32a). 은 〈楚木〉인데, 〉의 고화음에는 〈강〉의 와전된 발음인 〈가〉가 있으며, 〈楚〉자의 고화음은 〈차〉가 찰못된 〈채〉이다. 그러므로 화어인 〈荊籠〉이 국어에서 〈채롱〉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황윤석은 「화음방언자의해」의 같은 면 (25 : 32a)에서의 고화음을 이용

하여 이번에는 국어의 〈회차리〉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즉 〈夏楚〉는 우리말로 〈호차〉이다. 그것은 〈夏〉의 고화음이 〈호〉이고, 〈楚〉의 고화음이 〈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일한 〈楚〉자의 고화음이 〈채몽〉에서는 ‘차>채'로 변한 반면, 여기서는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 국어의 〈호차〉의 유래에 대한 황윤석의 설명에는 몇 가지 의문이 있다. 우선 〈楚〉의 고화음 문제는 그렇다 하더라도, 18 세기 국어에 〈회차리〉에 해당되는 〈호차〉형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없는 것 같다. 그 대신 〈회초리〉(類合,하. 50a) 형이 근대국어에 나타나지만, 〈호차〉와의 연관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5) 漢字의 音과 새김에 의한 대응의 원칙

고대 史 普 에 등장하는 인명 • 지명 • 관직명 등의 고유명사에 대한 어원적 해석은 『三國史記 』 와 『三國遺 事 』 등에서부터 나타난다. 황윤석의 어원 연구의 출발이 고사를 고찰하는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화음방언자의해」에서 이러한 고유명사에 대한 어원 설명이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고대 자료를 해석함에 있어 황윤석은 借字表記와 고유어 사이에 한자의 음과 새김에 의한 대웅의 원칙을 정확히 파악하였다.

신라 王號인 〈尼師今〉이나 〈居西干〉 둥에 대한 황윤석의 어원 해석은 대략 『삼국사기』의 기록(권 2, 新羅本紀)을 그대로 옮겨 온 것이다. 또한 그는 신라 관제에 〈舒發翰〉, 〈舒弗甘〉이 〈角干〉과 동일한 의미라는 『삼국사기』의 기록(권 38) 을 그가 확립한 고대 표기법의 원리에 따라서 다음과 갇이 실증적으로 증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신라의 관제를 살펴보면, ‘大舒發翰' 또는 ‘大舒弗甘’이 있다. 이른바 ‘弗甘'은 ‘發翰'과 소리가 서로 가까워서 글자가 넘나든다. 또한 ‘大角干' 이란 것이 있는데, 여기서 ‘角’은 곧 ' 發' 또는 ‘舒弗'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말에서 ‘角’을 '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舒'의 자모는 언문에서 ‘ㅅ’ 이 되고, ‘發'은 ‘불’과 소리가 가까우며 ‘弗'의 발음은 그대로

‘불’이다. 그리하여 만약 ‘ㅅ' 을 ‘불’의 오른쪽 위에 붙이면 곧 ‘뿔’이 된다. 이 '뿔'은 ‘ 角'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그리고 ‘불’에서 초성 ‘ㅂ' 을 제거하고 ‘ㅅ' 을 위에 올려 놓으면 ‘술’이 되며, ‘翰'음은 ‘多(하다)’에 가깝기 때문에 빨리 말하면 ‘술한'이 되니, 이것은 ‘酒多'가 된다. 또한 ‘干'의 우리 나라 音 은 ‘ ', ‘甘'과 가깝다〉 (25 : 24b).

여기서 황윤석은 한자의 음을 빌려 표기한 〈舒發〉 또는 〈舒弗〉이 한자어 〈角〉과 대응하며, 〈角〉의 고유어는 〈뿔〉이기 때문에 〈舒發, 舒弗= 〉이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翰〉과 〈甘〉은 〈干〉과 대응하므로 〈翰,甘=干〉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황윤석은 〈舒發翰, 舒弗甘=角干= 한〉의 대응을 합리적으로 이끌어 내었다. 물론 이와 같은 황윤석의 논증은 『 삼국사기』의 기록과 해설에 기댄 바 크지만, 〈 ㅅ 〉계 합용병서를 갖고 있는 국어의 〈뿔〉형이 18 세기 국어에서 硬音이 아닌 어두자음 s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물론 이러한 논증의 결과, 〈 ㅅ 〉계 합용병서가 원래 어두자음군으로 출발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18 세기 국어에서 어두자음군 〈ㅂ〉계 합용병서마저 경음화하는 경향에 비추어, 황윤석이 설정한 〈舒發, 舒弗= 〉의 대응에서 〈舒〉의 자모가 국어에서 〈 ㅅ〉이 된다는 논리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염두에 두고 어디까지나 어원의식 또는 표기에 이끌린 판단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화음방언자의해」에서 〈 葛 文王〉과 〈白頭山〉에 대한 어원적 해석은 황윤석의 독창성이 그대로 발휘된 항목이었다. 신라 〈 葛 文王〉에 대한 언급은 일찍이 『 삼국사기』에 나타난다. 〈新羅追封王 皆稱 葛 文王 其義未詳〉(권 1). 여기에 대하여 황윤석은 다음과 갇은 해석으로 그 의미에 접근하였다.

〈우리말〔東國方 言 )에서 ‘死'를 ‘주근(죽은)’이라 하고, ‘ 葛 '의 우리 말은 走 (주) ’에 가깝고, ‘文'의 우리 말은 ‘斤 (근) ’에 가깝다〉 (25 : 25a) .

이와 갇이 황윤석은 〈葛文王〉이란 고대 표기 를 각각 〈 葛 〉과 〈文〉에 대한 새김으로 읽어 〈죽은 王〉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판단할 기준이 없으나, 〈葛文=죽은〉의 등식은 황윤석이 파악한 고대자료 해석의 전형적인 방식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우선 중세국어와 근대국어를 통하여 〈葛〉의 새김은 〈츩(방언에 따라서는 ‘츨’)〉으로 나타난다.

츩 갈(葛 훈몽, 상. 9a ; 유합, 상. 8a),

츩 불휘랄 (分온, 26),

츩 ( 葛 葛 物 譜 雜 草 ),

가난 츨 오시 (중간, 두시, 12.10).

따라서 〈 葛 文〉의 원래의 새김은 〈츩글〉 정도가 되는 것인데, 이것이 〈죽은〉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먼저 추정이 직감으로 이루어지고, 그 다음 여기에 근사치로 대응하는 글자를 모색한 결과로 보인다.

황윤석은 오늘날의 〈白頭山〉이란 명칭이 원래 〈蓋馬山〉에서 유래되었음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 우리말에서 泊'자를 ‘希(희), 階(해), ' 또는 ‘何(하)’로 부르는 것은 蓋'와 더불어 聲 이 서로 가깝기 때문이다. 또한 ‘頭'자를 우리말에서 ‘ 摩 里’ 또는 ‘ 麻 라 부르는데, 이것은 ‘馬'자와 더불어 聲 이 가깝기 때문인 것이다〉 (25 : 25a).

위의 설명에서 〈蓋馬〉와 〈白頭〉의 대웅으로부터 (1) 〈蓋=白〉, (2)〈馬=頭〉와 같은 등식이 성립된다. 〈蓋〉의 중국 한자음은 藤堂明保의 『 漢字 語 源辭典』 에 의 하면, 周 had → 六朝 hai → 唐 hai, 元 hai → 北京hai와 갇은 변천을 보여 준다(이종철 1981 : 162). 그러나 〈蓋〉의 조선 한자음은 보편적으로 〈개〉(두웨, 개, 蓋, 광주판 천자문, 7a; 두에, 개, 蓋 倭 語 . 下, 14) 였다. 따라서 〈蓋〉의 중국 한자음이 국어에서 대략 〉에 해당하며, 이것은 다시 〈白〉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馬는 우리말에서 〈마리, 말(麻十 )〉과 가까워서 이번에는 이 소리를 의미하는 〈頭〉로 대치되었다고 한다.

3 『이수신편』에 반영된 근세 중국어 차용어

황윤석의 「화음방언자의해」와 『 이수신편』에는 音譯 차용어 (중국어의 원음 을 이용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조선 한자음으로 받아들인 어휘)와 중국어로부터 직접 우리나라에 수용된 音請 차용어(죽 중국어의 발음 그대로 들어 온 어휘)들이 자주 언급되어 있다. 황윤석이 이 책들에서 파악하고 그 유래를 설명하려고 했던 중국어 차용어들의 유형과 그것에 대한 논증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러나 그가 46세 때 (英祖 50 년) 편집한 『이수신편 』 이 그의 말년의 원숙한 학문적 경지를 보인 「화음방언자의해」(1780) 보다 더 일찍 세상에 나왔다(이숭녕 1972). 따라서 먼저 『이수신편 』 에 실려 있는 중국어 차용어의 유형을 검토하면 「화음방언자의해」의 해당 부분의 성격도 아울러 파악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 이수신편 』 (20 권 58b) 에는 잡다한 여러 항목들 가운데 근세 중국어에서 당시의 우리나라에 들어 와 사용되고 있던 음역 차용어 목록이 제시되어 있다. 죽 그는 우리나라 말 가운데 중국어가 많이 들어 와 사용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 예를 24 가지로 나누어 중국어 발음과 함께 제시하였다. 그런데 『 이수신편 』 에 실린 이 항목들은 황윤석 이 원래 柳 馨遠 이 지은 『반계수록 』 (권25) 에서 옮겨 실은 것이라는 사실이 최근의 연구에서 판명되었다(이기문 1991 : 383). 유형원 (1622, 광해군 14-1673, 현종 14) 은 경제 실학에 뛰어난 당대의 유명한 학자로 그가 10 년에 걸쳐 저술한 『 반계수록 』 총 26 권에는 그의 사상과 이념 및 이상국가 실현에 대한 구상이 전개되어 있다. 1770 년 영조가 이 책을 간행케하였는데, 황윤석이 그 가운데 중국어 차용어에 관한 부분을 옮겨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 항목을 먼저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다. 4)

4) 중국어 기원의 차용어와 중국어 발음을 수집해 놓은 『반계수록 』(권25)에는 다음과 같은 16항목이 제시되어 있는데, 이러한 사실을 규명해 놓은 이기문 {1991 : 234)에서 다시 재인용하려고 한다.

①當直曰 當直디. ②家事日 家갸事스, ③下慮日 下햐慮츄, ④鋼臼鋼

퉁, ⑤ 頭盛日 頭무盛퀴, ⑥ 大紅 大다紅홍, ⑦ 紫的日 紫짜的디, ⑧ 鳩靑 曰 鷄야靑칭, ⑨ 假的日 假갸的디, ⑩ 網市曰 網망市긴, ⑪ 團領日 團뒨領링, ⑫ 帖裏日 帖텨裏리, ⑬ 腦包日 腦랏包밧, ⑭ 錢租日 錢쳔稽랑, ⑮ 甘結曰 甘 간結계, ⑯ 帖子曰 帖텨子즈.

『반계수록』에서 제시된 16 항목을 황윤석의 『이수신편』에서의 24 항목과 대조해 보면 그대로 순서까지 일치한다. 그러나 『이수신편』에서는 華音 표기에 약간의 차이가 발견된다. 예를 들면, 園핀領링 (『반계수록』) 一 團던領링 (『이수신편』). 그러나 『역어유해』에 〈園핀領링〉(상. 44b) 으로 미루어 보면, 전자의 표기가 더 정확한 것 갇다. 『이수신편』에 제시된 24 가지 유형의 중국어 차용어 가운데, 『반계수록』에서 옮겨 온 16 항목을 제의한 기타의 여덟 가지 차용어 목록은 황윤석이 여기에 첨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1) 當直(當당 直지) : 원래 官公의 제도로 이조 때 義禁府의 都事가 당직청에 番을 드는 것을 뜻한다. 그렇지만 『박통사 언해』, 『노걸대 언해』 또는 『역어유해』 및 『한청문감』 등에서 구체적으로 그 용례가 드러나지 않는다.

2) 家事(家갸 事스, 一云 家伏) : 이기문 (1991 : 224) 에 의하면, 이 단어는 器具의 일종을 뜻하는데, 月印釋譜』 23 殘卷의 〈갸사〉 (74) 가 바로 이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갸사랄 몯 다 서러 앳난다시 하앳더니(월석. 23, 74).

위의 예문에 나오는 〈갸사〉는 漢文으로 작성된 『目蓮經』에서 〈腕樣〉에 해당된다고 한다. 또한 『語錄解』 (1657) 의 「家事」 항목에 〈俗指器 爲갸 此是漢語〉와 갇은 언급이 보이는데, 〈갸사〉는 현대국어에서 〈개숫물〉에 남아 있다고 한다(이기문 1991 : 235).

3) 下處(下햐 處츄) : 〈숙소를 정하다〉의 뜻으로, 근대국어의 문헌에서는 〈햐쳐〉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처음에 중국어 원음 〈햐츄〉에 충실했던 발음이 일상 생활어에 빈번하게 사용되면서 그 차용어의 한자를 우리 나라 한자음으로 읽으려는 경향에서(십재기 1982: 59) 〈햐쳐〉로 변모된 것

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번역 『노걸대』에서 중국어 원음 〈햐츄〉가 사용되었지만, 중간 본 『노걸대 언해』에서는 이 어형이 〈햐쳐〉로 전환되어 나타나고 있다.

우리 햐츄로 보내여라(我下處送來, 번역 노걸대, 하. 20b),

우리 햐쳐로 보내여라(언해 노걸대, 하. 18b),

내 안직 햐츄에 가노라(我旦到下處去, 번역 노걸대, 하. 6b),

내 아직 햐쳐의 가노라(언해 노걸대, 하. 6a).

주로 근대국어의 자료에 등장하는 〈햐쳐〉형은 〈下處〉의 조선 한자음 〈하쳐〉의 관여로 형성된 혼효형 contaminated word 인 것으로 생각된다 (김완전 1976: 181). 그리고 이 어형이 근대국어에서는 중국어 원음〈햐츄〉를 완전히 대치시키게 되었다.

햐쳐에 가쟈(下處去, 노걸대,하. 3a), 햐쳐의 가셔(노걸대, 상. 52b),

하쳐하다(住下處, 동문, 상. 29),

하쳐한 마을에 쉬게하다(三譯, 3 : 22b).

4) 銅(銅퉁 本뚱) : 이 어휘는 오늘날 〈눈이 퉁방울만하다〉와 같은 成語에 化石形으로 남아 있는데, 〈銅〉에 대한 〈풍〉의 발음은 『석보상절』에서도 나타났다(이기문 1991 : 220). 퉁부풀 티면 (6. 28a). 또한 16 세기의 『훈몽자회』에서는 이미 조선 한자음 〈동〉으로 바뀌어 쓰였다. 구리동(銅, 黃-듀석, 紅-퉁, 예산본. 중, 15b).

그러나 중국어 원음에 가까운 〈퉁〉이 중국에서 들여 온 銅製의 기구 명칭에는 근대국어에서도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음을 불 수 있다.

퉁노고(銅銅子, 한청 11. 38b), 룽노고(銅퉁 鎬고, 역어. 補, 43a),

퉁구(銅錄 역어, 상. 43a), 구리 (紅훙 銅릉, 역어, 하. 2a)

白銅 (버퉁, 역어. 補, 38b).

5) 頭(頭투 盛퀴) : 음역 차용어 〈투퀴〉로부터 국어 음운체계에 동화된 〈투구〉형의 출현은 용비어천가』에서부터 확인된다. 투구 아니 밧기시면(若不脫開 52 장). 일찍이 정약용도 그의 『아언각비』(권 2) 에서 頭盛를 〈뛰具〉와 갇은 取音字로 쓰는 것은 華音 〈뛰귀〉가 잘못 옮겨진 것(誤魏)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言衆이 차용 시기의 음운론적 형태인 이른바 〈頭盛〉의 중국어의 원음을 국어에 동화된 〈투구〉로 사용하였으며, 이것은 결국 근대국어에서는 고유어로 귀화된 느낌이 든다.

투구 듀 ( , 俗呼頭盛, 예산본 훈몽, 중. 14a),

투구(頭투 盛퀴, 역어, 상. 21a)

투구(盛퀴, 한청, 5. 1a), 두구 우히 박은 둥근 쇠 (한청, 5. 1a),

투구 감토(한청, 5. 2a).

6) 大紅(大더 紅흉) : 황윤석은 그의 「화음방언자의해」에서 〈다홍〉의 大紅이 원래 〈桃紅〉에서 온 것으로 설명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오늘날 ‘大紅色'이라고 부르는 것은, 죽 ‘桃되 紅홍'인 것이다(‘ ' 의 화음은 ‘大'에 가깝다)〉 (25 권 32b).

그러나 『역어유해』(하. 3b) 에서 〈대홍〉과 〈도홍〉이 각각 다른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음을 본다. 다홍 비단(大다 紅훙), 도훙 비단(桃타 紅훙). 우리말에서 〈다홍〉이 원래 중국어 〈大紅〉에서 직접 차용되었으며, 국어로의 차용과정에서 〈大〉는 중국어 원음을 그대로 유지하는 반면, 둘째 음철 〈紅〉의 〈훙〉 발음은 〈홍〉으로 수용되었는데, 이것은 모음조화라는 음운규칙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수용언어에서 이와 갇은 조정을 거친 〈다흥〉형이 16 세기 국어에서부터 문헌상으로 확인되며, 오늘날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다홍 비체 금 도려 비단(번역 노걸대, 하. 24b),

다홍 비체 슈질하난(번역 박통사, 상. 14a).

7) 紫的(紫자 的디) : 국어에 유입된 여러 가지 색채어 가운데 하나로서, 중국어에서 직접 차용된 〈자디〉형이 사용되다가 구개음화 현상을 수용하여 근대국어에서는 〈자지〉로 변모되었다. 그런데 〈紫〉의 중국어 원음이 떠어유해 』 및 『 한청문감』 등에 〈즈〉로 표기된 것을 보면, 〈자디〉의 〈자〉는 조선 한자음인 반면 〈디〉는 중국어 원음인 것으로 보인다.

자지 (紫즈, 한청 10. 64b) ,

자디 비단(紫즈 許쥬 紗스, 역어, 하. 4b},

자지 (紫즈 色서, 역어, 補. 40a).

그러나 이 단어는 다시 〈자주〉로 바뀌는 경향을 보여 주는데, 한자어〈紫朱〉로 잘못 이끌린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하여 최근의 국어사전류에서도 이 차용어와 결합하여 단어가 형성된 복합어들이 대부분 〈자주〉형으로 등록되어 있다.

8) 雅靑 (島 야 靑 칭) : 현재 이 차용어는 국어 한자음 〈아청〉으로 옮겨가고 있지만, 아직도 16 세기 초영의 발음인 〈야쳥〉을 습관상으로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張三植, 『大漢韓辭典』 1983 : 1790). 문세영의 『조선어사전 』 (1938 : 949) 에는 〈야청〉의 항목이 〈겁정에 푸른빛이 나는 빛〉으로 설명되어 있다. 일찍이 번역 『노걸대』 등에는 〈 鷄靑 〉이 차용 당시의 중국어 발음 〈야칭〉으로(상. 13b) 나와 있으며, 이것에 대한 번역문에 〈야 쳥〉이 배당되었다.

여기서 〈鷄靑〉의 〈야〉는 중국어 발음이며, 〈청〉은 조선 한자음으로서, 이러한 〈야쳥〉 형태가 근대국어의 문헌 자료 를 롱하여 확인된다. 『한청문감』에는 이 어휘가 만주어로 〈야천〉으로 반영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야쳥엔 세돈이오( 靑的三錢, 번역 노걸대, 상. 14a),

야쳥엔 서돈이오(언해, 노걸대, 상. 12b),

야쳥 비단에 綠 노혼 슬갑을 미고(박동사 신석, 1. 29b),

鷄야 靑칭 : 一一 비단, 黑허 靑칭 : 거믄 야청비단(역어, 하. 4a),

靑칭 , 야청 (한청 , 10. 65b) .

9) 假的(假갸 的디) : 상업 물품 등에 사용되는 차용어인 것 같지만, 전형적인 『朴通事』와 『老乞大』 등의 문헌에 그 사용 예가 확인되지 않는 다. 다만 『역어유해』에 〈假갸 的디, 거줏 것〉(상. 69a) 으로 나온다. 또한 같은 책에 〈假的〉과 대립되어 〈眞진 的디, 진짓 것〉(상. 69a) 항목이 보이는데, 이 〈전지〉 형은 〈眞的〉의 차용어로서 이미 15 세기의 문헌에 사용되어 있다(이기문 1991 : 225).

乃終 내 진딧 업수미 아니니 (월석, 1, 36)I

眞金은 진딧 금이라(월석, 7, 29),

진딧 血螺와 (구급방, 하. 90a),

진딧 有福훈 됴혼 사나해러라(眞是有福……, 박동사 신석 1. 29a).

그런데 『역어유해』에 ‘진디 >전지’의 변화는 구개음화를 수용한 것 갇지만, 이러한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다른 15 세기 문헌에도 〈진지〉 형이 출현하였다(전짓 氣運이(眞氣, 초간 杜詩 8. 56), 전짓 석우황을(眞雄黃, 구급간. 6. 59)).

10) 網 ( 網망 市긴) : 〈網〉의 중국어 발음은 〈왕〉(역어, 상. 43b) 이기 때문에, 〈망〉은 조선 한자음으로 생각된다. 구슬로 망매자 낀 간다개(網 蓋兒, 번역 박통사, 상. 29b). 그러나 『한청문감』에서 〈網市〉은 그대로 〈왕건〉으로 사용되었다.

〈市긴〉의 경우도 차용어에서 〈건〉 또는 〈근〉으로 나타나지만, 결국 오늘날 〈망전〉과 같이 〈건〉으로 재조정된 것은 조선 한자음의 간섭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된다. 슈건, 건(市, 類合, 상. 31).

網왕 兒살, 망건(역어, 상. 43b),

網왕 子즈 盛퀴, 망근골(역어, 하. 18a),

籠퉁 綱왕 兒 , 망긴 쓰쇼셔 (역어, 상. 48a).

11) 團領(固던 領링) : 복식에 관한 중국어 차용어로 생각되지만, 『역어유해』의 〈團핀 領링〉(상. 44b, cf, 圓원 領링) 이의에는 출현하지 않는다.

12) 帖襄(帖텨 襄리) : 번역 『박동사』에는 중국어 〈帖텨 襄리〉가 〈렬릭〉으로 번역되어 있다. 또한 『역어유해』에서 〈帖텨 裏리, 텰릭〉(상. 44b) 의 예도 등장한다. 그러나 중국어 〈터리〉가 국어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텰릭〉으로 수용되었는가가 문제이다. 사실, 국어의 〈텰릭〉은 몽고어 terlig에서 차용된 것으로, 元代에 중국어와 국어에 둘어 온 것이라 한다(이기문 1991 : 217).

거몬 텰릭 뵈 닷 비를( 個黑帖裏布, 번역 박통사, 상. ~la},

금으로 흉비 짠 텰릭과(織金胸輩帖裏, 번역 박동사, 상. 72a),

내 덜리기 어느 네 슈질한 텨리게 미츠료(我的帖裏…… 번역 박봉사, 상. 72a).

13} 錢種(錢천 稽량) : 이 단어는 15 세기 문헌자료에 한글 표기만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중국어 〈錢 과의 차용과 맺고 있는 유연 관계가 약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재공한다. 따라서 『훈몽자회』에 〈천량줄 회, 難〉(하. 21) 와 같은 새김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차용어의 경우에서와 같이 조선 한자음으로 조정되지 않고, 중국어 원음을 유지해 오고 있는 사실이 주목된다.

천량 만히 시러 (석보, 6. 15b),

布施 천량알 펴아 내야 남 줄씨라(월석, 1. 12b),

천량이 法을 몬 미츨쌔(월석, 18. 31a).

이 단어는 근대국어에 와서 고유어가 수행하는 음운규칙의 지배를 받아서 〈쳘량〉으로 변화되어 귀화된 모습을 보여 준다. 철량 가난 (八歲兒, 2a). 그리하여 정약용은 그의 『아언각비』(권 2) 에서, 중국어 차용어 〈錢檔〉이 그릇된 取音字인 〈賤量〉으로 쓰이고 있음을 지적하고 화음이 원래 〈천량〉임을 깨우치고 있다.

또한 〈錢〉의 경우도 현대국어에서 복합어에 〈밑천〉과 갇은 흔적을 남겼지만, 번역 『노걸대』 등에서는 생산적으로 사용되었다(김완전 1976: 183). 대되 언머 천이 드 고(상. 11b), 져기 니천 어두라(利錢, 상. 13a), 쳔이시며 쳔 업슨 줄을(有錢, 상. 27b).

그 반면, 같은 책에서와 번역 『박통사』에서 중국어 〈錢〉에 대하여 〈돈〉이 번역문에 쓰이는 경우도 많았다.

야청엔 세돈이오 쇼홍엔 두 돈이오(三錢…… 二錢, 번역 노걸대, 상. 13b),

한근 깁 한 피렌 세 돈 주고(번역 노걸대, 상. 13b),

은 두 돈을 쓰고(二錢銀子, 번역 박통사, 상. 12a).

14) 腦包(낫腦밧包, 卽 耳俺) : 십재기 (1982 : 61) 는 『이수신편』에 제시된 〈낫밧〉가 국어에서 〈남바위〉로 변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죽 Tabaco 가 〈담배〉로 바뀐 것과 같이 〈낫〉는 후행하는 〈ㅂ〉에 의해 〈남〉으로 바뀌고, 〈밧〉 는 2 음절로 나뉘어 〈바우 • 바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그의 『아언각비』(권 2) 에서 〈耳俺〉과 관련된 〈額俺〉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십재기 1982 : 62, 주 17) . 참조).

〈額俺이란 것은 담비 • 족제비 털로 만든 모자를 말한다. 華音으로 額

은 耳와 같이 읽는다. 그것은 중국에 오늘날 入聲이 없기 때문인데, 束俗에 誰傳되어 耳俺이 되게 이르렀다. 『經國大典』에 ‘당상관은 담비 가죽 耳俺을 쓰고, 당하관은 족제비 가죽 耳俺울 쓴다’와 갇은 기록을 보면, 그 잘못 사용된 근원이 자못 오랜 것이다. 게다가 또한 朝官이 쓰는 것은 높고 크게 만들었기 때문에 耳俺이라 불렀다(털의 주위가 높았다). 아전과 서리가 쓰는 것은 그 주위를 둘러싸게 만들었기 때문에 額俺이라 하였다(털의 주위가 낮았다). 그러나 사실 이 모두는 본시 耳俺이 아니라 額俺인 것인데, 이것은 이마를 덮을 수는 있지만 귀는 덮을 수 없기 때문이다.〉

총독부 편 『조선어사전 』 (1920 ; 565) 에서 〈아양〉 항목은 〈부인이 겨울에 머리에 쓰던 防寒具(額俺)〉와 같이 설명되어 있다. 문세영 (1938 : 921) 에서도 이와 동일한 기술이 보인다.

15) 甘結(甘간 結계, 甘本作勘) : 〈官公〉에서 쓰이던 단어로 『동문유해』에 등장하지만(상. 12a), 다른 문헌들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16) 帖子(帖텨 子즈) : 이 단어의 흔적은 〈체지(帖紙)〉 등으로 남아있는데, 〈체지〉에 대해서 문세영 (1938 : 1387) 은 1) 관아에서 吏屬울 교용하던 서면, 2) 물건을 받은 표로 설명하였다. 이 〈체지〉는 원래의 중국어 〈帖子〉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현재에 이르까지 여러 가지의 음운론적 및 형태론적 조정을 거친 어형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 단어는 번역『박동사』에서부터 직접 차용형으로 등장한다.

빨 탈 톄자 가져다가(帖텨 兒사, 번역 박통사, 상 . 12a).

17) 上頭(上상 頭투) : 이 단어는 비어두 음절 위치에서 〈샹투-샹토〉의 변이를 보인다. 그러나 중국어 <上頭>는 근대국어 문헌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기) 샹투, 계 (훈몽, 중. 25),

ㄴ) 綴子, 샹토(역어, 상. 47b), 샹토, 계 (의어, 상. 44b),

계집의 샹토, 자(한청, 11, 22b).

18} 阪頭(區간 頭두, 區亦作區 昔感覆頭也 器菩也 亦作次) : 이 차용어는 번역 『박통사』에서부터 등장하며, 여기서 중국어 〈個맛子자〉에 대하여 〈감토〉(상. 52b) 형이 배정되어 있다. 〈幌子 → 감토〉는 『家禮諺解』에서 다음과 갇이 확인된다. 모자난 감되니 (1, 27b).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중국어 〈區頭〉는 직접 문헌상으로 〈감두〉와 관련을 보이지 않는다.

호}윤석은 〈감투〉에 대해서 그의 「화음방언자의해」에서 다음과 갇이 상세한 설명을 한 바 있다.

〈현재 하얀 털로 만들어전 작은 모자를 淸人둘은 쓰지 않는다. 遼束에 살고 있는 七家嶺 주민들이 우리나라 사람들만을 위해서 제조하여 팔았다. 그렇기 때문에 혹은 ‘七架’로도 불리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明朝 이전에는 ‘歷頭’라 했는데, ‘恒'의 소리가 ‘政'이며 물전을 덮는 까닭에 그런 명칭이 지어졌다. 문자 또한 ‘恒'이 되었다• 高麗史에서 ‘次頭’로 되었지만, 다시 잘못 바뀌어 ‘甘土'가 되었으니 더욱 의미가 없게 되었다. 歷頭'의 제작은 본래 元에서 시작된 것 같다〉 (25 : 43b).

또한 정약용도 『아언각비』(권 2) 에서 ‘悳頭’가 잘못 번역되어 우리나라에서 〈甘土〉로 취음되었으나, 원래의 화음은 〈감뛰〉임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중국어 〈간두〉가, 「화음방언자의해」와 『아언각비』에서 제시된 取音字 〈甘土〉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문헌자료에서 〈감토〉로 나타나는 사실이 주목된다.

감토, ( 신증 유합, 상. 31b), 小暢子, 감토(역어, 상. 43b)

幌 감토, 만주어 ‘캄투’(kam tu) (한청, 11. 1a)

따라서 비어두 음철의 〈頭(두)〉가 근대국어에서 〈토〉로 수용된 셈인대, 이러한 사정은 〈상토 頭)〉와 대략 일치된다. 그러나 〈頭(무)〉가

어두 음절에 있는 〈투구(頭)〉에서는 〈토〉로 실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상은 국어의 음절위치에서 일어나는 음운론적 현상과 관련 있는 것 갇다. 그 반면, 〈투구〉형은 〈투구-투고〉와 갇은 변이가 19 세기 전라방언 자료에서 보인다.

장군 두고도 소장의 투고요(화룡. 92a), 금 두고울 쓰고(적성, 상. 19b), 황금 두고(판. 赤, 492 ; 충렬, 상. 31b), 쌍봉 두고(삼국지, 4.26a) , cf. 투구을 쓰고 (적 성 , 하. 26a).

19) 水飯(水슈 飯판) : 〈 飯〉은 『역어유해』의 〈食輯〉 항목에 중국어 표제어로 등록되어 있지만, 이것에 대응하는 국어의 단어는 〈믈 밥〉 (상. 49a) 으로 대응되어 있다. 그러나 이 차용어가 다른 문헌에서 구체적으로 사용된 예는 보이지 않는다.

20) 八朔(八바 朔삿) : 이 단어는 『閑中錄』에서 〈어리석은 놈〉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바 있다. 요놈이 일되고 바삭이가 아니니 (p. 416, 유창돈 1977 : 362). 또한 문세영 (1938 : 547) 은 〈바사기〉 항목에서 〈사물에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 곧 덜된 사람의 별명, 여덟 달〉과 갇이 설명하였다. 〈바삭이〉가 〈여덟 달〉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이 단어는 황윤석이 지적해 놓은 대로 중국어 〈八朔〉에서 온 것 갇다. 〈八〉은 번역 『노걸대』에서 〈파〉 또는 〈바〉로 대웅되어 있다.

당시몽 칠파릿 길히 잇고나(還有七八里路, 번역 노걸대, 상. 60a),

이 은이 다몬 바품 은이로소니 (只有八成銀, 번역 노걸대, 상. 64b).

그러나 〈八朔〉은 국어의 단어형성론의 규칙을 따라서 〈八朔+접사 -이〉의 형태론적 조정을 거쳤다. 李義鳳의 『東韓譯語』에도 〈八朔〉에 대한 설명에서 〈일정한 기한울 못 채우고 출생한 사람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모자란 사람을 칭하며, 그 음은 ‘바삭'이다〉라고 하였다.

21) 四段(四비 段단) : 이 단어는 15 세기 문헌부터 그 용례가 확인된다. 비단文 갇하샤미 (法화 2. 12b). 그러나 번역 『박통사』에서는 중국어〈段둰 子자〉에 대하여 번역문에 〈비단〉형이 대응되어 있다.

우회 쁘실 비단이오(上用段子),

제왕네 쁘실 비단도 아니며(不是諸王段子, 번역 박동사, 상. 14b),

비단 사라 너러 오노이다(買段子去來, 번역 박동사, 상. 14a).

그리고 〈四段〉의 〈匠〉의 중국음이 번역 『박동사』 (상. 51b) 에서는 〈四피〉로 되어 있으며, 번역 『노걸대』에서 중국어 〈買布五四〉은 〈뵈 닷필에 파라〉(상. 13b) 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중국어 〈四段〉은 〈피둰〉 정도의 발음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비단〉과 유사한 점은 있다. 그러나 〈四〉의 한국 한자음은 일찍부터 〈필〉로 정착된 것 갇다. 필 필, 四(신증 유합, 상. 26a).

22) 銅(銅뚱 料튀 俗云 퉁휘) : 〈銅뚱〉은 위의 4) 를 참조. 〈料휘〉에 대해서는 다음 4.2 에서 언급될 것이다.

23} 馬兒(馬마 兒알),

24) 損兒(猫워 兒알) : 먼저 23) 에서 황윤석은 국어의 〈말〉이 중국어〈馬兒〉에서 이른바 〈마+알 → 말〉의 과정을 거쳐서 차용된 형태로 판단한 것 갇다. 이러한 방식의 실학자들의 사고는 비단 황윤석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이의봉의 『東韓譯語』 가운데 국어의 〈불〔火〕〉을 〈火不能自燃而必附物而後燃 故曰 附兒 兒音乙〉이라 하여 〈附兒〉와 연관시킨 바 있다.

그리하여 〈馬兒 → 말〉과 갇은 유형이 황윤석의 「화음방언자의해」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근대 국어 『譯語』 부류의 문헌자료에는 중국어의 〈馬〉에다 접미사(또는 語尾) 〈兒〉를 첨가한 예는 보이지 않는다. 馬마, 말, 모린(한청 14. 16a). 중국어에서 〈兒〉가 접미사로 쓰인 것은 역사적으로 〈子〉보다 늦어 隋 • 唐 이전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으며, 南宋

에 이르러 이것이 성행하게 되었다고 한다(周法高 1989: 194). 그런데 宋 吳自牧의 『夢梁錄』에 아이들이 집안에서 가지고 노는 종류를 수록한 항목 중에 〈馬兒〉가 등장한다고 한다(周法高 1989 : 196).

중국어 단어에 첨가된 접미사 〈兒〉의 발음은 16 세기의 번역 『노걸대』, 『박동사』 등과 17 세기 말엽의 『역어유해』 및 英朝 말년에 간행된 『한청문감』 등에서 상이하게 반영되어 있다.

ㄱ) 草찻店던兒 , 초개로 지은 뎜(번역 노걸대, 상. 62b),

瓜과兒사, 의 (번역 노걸대, 상. 63b),

銀규兒사, 돕(번역 박통사, 상. 16a),

椎쥐兒사, 쇠약(번역 박동사, 상. 16a),

紫자租탄 祀바兒사, 자탄 잘애 (번역 박동사, 상. 15b).

ㄴ) 出츄規두兒 , 힝역 (역어, 상. 62a),

積두兒살, 쇠아지 (역어, 하. 30b),

梨리兒살, 배 (역어, 상. 35a),

猫맛兒살, 옷밤이(한청, 13. 51b).

황윤석의 시대에 〈兒〉의 중국음은 『한청문감』에서의 발음과 비슷했던 것 같다(〈帖兒〉의 발음에 대한 그의 〈兒〉 설명 참조). 그리하여 그는 「화음방언자의해」에서 〈馬兒 → 말〉의 원리를 이용하여 국어의 고유어 〈발〔足〕〉이 중국어에서 왔음을 다음과 갇이 설명했다. 〈‘발〔足〕'올 우리 나라에서 ‘발'이라 하는데, 이것은 ‘跋兒’가 바뀐 것이다. ‘跋'음은 고화음으로 ‘바'이다〉 (25 : 35a). 따라서 황윤석에 의하면 여기서도 〈바+알→ 발〉의 공식이 적용된다 할 것이다. 그러나 황윤석은 동일한 〈兒〉음이지만 다른 단어의 설명에서는 공식의 일관성을 지키지 않았다.

죽 그는 우리나라에서 개를 부르는 소리 〈위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였다.

〈(ㄱ) 우리나라에서 개를 부르는 소리 ‘월이’라는 것은 寧語 ‘鳩兒'의

轄이다 (25 : 44a), (ㄴ) 唐나라 때 狗를 ‘ 帖兒’라 불렀으며, 이 단어를 해석하여 보면 ‘음은 ‘워(影母)’이고 개이름이다. ‘兒'음은 ‘이〔日母〕'이며 漢俗音은 ‘응'이지만, 오늘날 漢俗에서 변하여 齒音 ‘ㅅ' 대신에 우리나라에서 ‘乙'자와 같은 헛소리를 끝소리에 두어 '알'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를 합하면 이른바 ‘워리’가 된다. ‘워리’는 ‘워이’ 혹은 ‘워 ' 의 바뀜인 것이다〉 (25 : 25b). 5)

〈워리〉에 관한 황윤석의 설명에 의하면, 〈兒〉음이 〈리〉까지 온 것은 〈알〉에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화음방언자의해」 가운데 〈羊兒 → 아리〉의 변화에서도 나타난다. 죽 〈羊을 부르는 소리는 우리나라에서 ‘아리’라고 하는데, 이것은 화음 ‘羊兒’가 바뀐 형태이다〉 (25 : 44a). 그러나 〈藤兒〉의 경우에는 〈兒〉가 〈래〉로도 바뀌는 무원칙을 황윤석은 이 책에서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돼지 부르는 소리인 ‘도래’는 화음 諒兒’에서 바뀐 것이다〉 (25 : 44a).

개 부르는 소리 〈워리〉, 양 부르는 소리 〈아리〉, 돼지 부르는 소리〈도래〉가 각각 중국어에서 왔을 가능성은 없지만, 황윤석은 18 세기 국어어휘에 전기한 목록을 첨가한 셈이 되었다. 18 세기에 柳義養이 그의 「北關路程錄」에서 함경북도에서 사용되고 있는 방언어휘 39 개를 제시한 바 있는데 (최강현 1976, King 1991 : 12-16), 이 가운데 가축 부르는 소리는 다음과 같다. 〈닭 부르기난 죠죠하고, 도야디 부르기난 오루러하고, 도야디 삿기난 끌끌하고, 매야디 부르기난 허허하고……〉 (147쪽). 따라서 돼지 부르는 소리 역시 18 세기에 〈도래〉형과 〈오루러〉 또는 〈끌끌〉형으로 방언 분화를 보였음을 알 수 있다.

5) 張三植의 『大 漢 韓辭典』 {1983) 에 의 하면, < (와) > 『集韻』 烏和切, WO, 〈損镕兒 : 개의 이름 또는 漏子〉 (900 쪽).

4 「화음방언자의해」에 반영된 중국어 차용어의 유형 4.1 지금까지 『이수신편』 (20 권 58b) 에서 언급된 중국어 차용어 이의 에, 황윤석의 「화음방언자의해」에는 다양한 항목의 중국어 차용어들이 그 유래와 함께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세 가지 유형이 혼착되 어 있다. 첫째 유형은 위에서 〈馬兒 → 말, 猫兒 → 워리〉 부류와 갇은 중 국어 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된 견강부회 또는 잘못된 유추에서 결과된 예 들이다• 둘째 유형은 황윤석이 이 책에서 제시한 국어 단어의 중국어 기 원이 일단 의심스럽지만 신중히 검토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몇 가지 예 들이다. 셋째는 중국어 기원이 확실한 예들인데, 이들은 따로 4.2 에서 종합하여 검토하기로 한다. 가 먼저 중국어 중십의 사고에서 추출된 몇 가지 예들을 유형별로 살 펴봉으로써 어휘 고찰에 관한 황윤석의 전형적인 방법론과, 여기에 동원 된 18 세기 국어 어휘둘의 성격을 겁토하기로 한다. (A) 중국어 漢字音와 18 세기 국어 단어 사이에 초성이 어느 정도 유 사성을 보이는 경우에는 국어 단어가 중국어로부터 차용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여기서 파생되는 모음이나 어간말 자음의 차이는 차용의 과정 또는 역사적인 변화〔轉)에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한 역사적 변화의 유형에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음이 황윤석의 「화음방언 자의해」에 드러난 특칭이었다. 1) 隊 → 조 : 〈중국어 한자 ‘塚'는 '잣'음을 갖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바뀌어 우리말에서 ‘조’가 되었다〉 (25 : 43a). 2) 悼 → 저 : 〈중국어 한자 ‘悼'는 ‘잣'음으로 난다. 이것이 바뀌어 우리 말에서 ‘저'가 되었다〉 (25 : 43a). 〈塚〉는 (chuo 『集韻 竹 覺 切〉 (장삼식 1983 : 256) 로서, 이것과 대웅시

킨 〈조-〉는 중세국어의 단계에서 어간 말음에 반치음 〈스〉을 가지고 있었으며(종-), 그 이후에 방언형 〈줏-〉도 문헌에 등장하였다. 『間語類• 補』(1775)에 〈味〉의 중국어 한자음이 〈조〉로 병기되어 있다. 味조뻣치, 조아 먹다 (48a).

뿔로 조아낸 後에 (구급방, 하. 32b)

딕조술 탁, 塚(신중 유합, 상. 13a).

〈悼〉는

비 를 딜어 저어 가고져(초간,두시 25. 40),

저어도 뮈우디 묻츈며 (金삼, 3. 29).

따라서 〈종-〉과 〈정 〉이 중국어 〈麻〉과 〈悼〉에서 차용되어 오는 과정에서 용언어간에 반치음이 첨가되었을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또한 국어 단어들의 모든 영역이 차용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더욱이 이들 용언 어간이 기본어휘에 속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Bynon 1979) 중국어로부터의 차용은 생각할 수 없다. 중국어 한자음과 18세기 국어 단어 사이에 우연한 발음의 유사가 황윤석의 주의를 끈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유형에 다음과 같은 예도 귀속된다. 〈말을 타는 것을 東俗에서 ‘뜬’라 하는데, 이것은 넓:(타)’가 바뀐 것이다〉 (25 : 44a). 여기서는 〈駐(타) 뜬-〉로 직접 대웅시킨 것이다.

3) 치 : 〈우리말에서 ‘寒'을 ‘치’라 부르는데, 이것은 의 華音이다〉 (25 : 35a) .

4) 乾鶴 간치 : 〈우리말에서 ‘競'올 ‘간치’라 부르는데, 이것은 곧 ‘乾의 바뀜이다〉 (25 : 35a).

여기 근대 국어에서 < > 변칙용언인 〈칩-〉 어간이 〈妻〉로부터 유래

되었다는 설명은 국어 용언의 어간말 자음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그리고 남부방언형 〈간치〉는 그렇게 설명된다 하더라도, 중부방언형 〈가치〉는 첫 음철 말음에 〈ㄴ〉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가치 競(훈몽, 상.17}, 가마괴와 간치왜 (중간, 두시 16, 37b).

5) 다음의 예는 국어 단어의 어간 말음까지 고려에 넣었다고 생각된다. 죽, 疾 → 다 , 다라 : <‘ 疾'은 凍傷을 입은 것인데 오늘날 우리말에서 ‘다’ 혹은 ‘다라’라고 부른다〉 {25 : 43a).

추위에 살이 얼어 터지는 것을 중세 및 근대국어에서 〈둘다〔 東〕〉라 하였는데, 이것의 용례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바리 다라 해여디닐 교툐대(구급방, 상. 7a),

달 탁床, (훈몽, 중. 34) ,

뺨이 다라 쁠히다(언해 박동사, 중. 29}.

그러나 『역어유해』에서 〈손다다, 발다다〉에 해당하는 중국어는 單〉와 대응되어 있음을 볼 때, 「화음방언자의해」에서 황윤석이 언급한 〈萩〉과 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輝균手 , 輝균 脚교(역어, 상. 62b). 또한 〈採〉의 音이 국어의 〈달-〉의 어두자음과 어떤 유사성을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황윤석이 〈萩 → 달〉이라는 유래보다는 중국어 한자어 〈疾〉에 대한 우리말을 단순히 대웅시켜 놓았다고 생각한다.

(B) 당대의 중국어 한자어와 18 세기 국어의 단어 간에 직접적인 발음상 대웅이 발견되지 않는 경우에는 다른 기원(별칭)을 찾거나, 古華晋올 이용하였다.

1) 抄造 → 죠회(紙) : 〈중국에서 ‘紙'를 ‘抄造’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우리말에서 바뀌어 ‘죠회’가 되었다〉 (25 : 44b).

〈紙〉의 18 세기 국어 단어로 〈종회〉 또는 〈죠희〉형만 문헌에 출현하고, 〈죠희〉는 일반적으로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황윤석이 제시한 <>형은 현재 남부방언형 〈종우〉의 중간단계의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죽 15 세기의 〈죠해〉에서 선행음철 〈오〉의 원순모음화 작용에 의하여 비어두 음절 모음이 원순화된 〈죠회〉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燒샷紙즈, 종회 살오다(역어, 상. 25b},

紙즈捨녀兒살 , 종해심(역어, 하. 16b},

紙쟈, 죠해(한청, 4. 17a}.

2) 蒙貴>貴→괴(猫) : 〈고양이를 ‘烏 이라 한다. 이것은 오늘날 고양이가 우는 소리인 ‘아웅'이다. 潟’의 古音은 ‘아’이었다. 또한 고양이룰 蒙貴’라 하는데, 元 에서 ‘蒙'자를 기피하여 단지 ‘ 貞’라고만 불렀다. 이 責'는 바뀌어 우리말에서 ‘괴’가 되었다. 고양이를 『高麗史』에서는 ‘高伊'라 하였다〉 (25 : 44a).

중국어 한자 〈貴〉의 발음은

3) 總 → 바날(針) : 〈우리말에서 ‘針線之針'을 ‘바날' 이라 부른다. 대저編'字는 예전에 ‘방'音을 가졌으며, ‘날' 은 곧 ''자에 대한 우리말이다〉(25 : 38b) .

4) 國 → 밧(田) : 〈중국어 한자 ‘園'는 예전에 ‘바'음을 갖고 있었다. 밭은 소채의 근본이 되므로 우리나라에서는 곡식의 발을 아울러 ‘밧’이라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말의 ‘밧’은 예전 ‘園'자의 음이다〉 (25 : 39a).

5) 損篇子 → (귀)쇼시게 : 〈捨息子를 풀어 말하면(' ' 셩의 音은 ‘消'이다. 우리말에서 ‘쇼’라 부르는데, 이것은 제거한다는 뜻이다. 意시의 音은 ‘息'이다) 귀에 있는 때를 없애는 것을 우리말에서는 ‘귀우개' 또는 ‘귀쇼시게'라 부르는데, 이것의 용법이 바뀌어져서 구멍 속을 둘낙날락하는 모든 행위를 ‘쇼시’ 혹은 ‘슈시’ 혹은 ‘쇼샤’라 한다.이것은 전부 ‘捨意'이변한 소리인 것이다〉 (25 : 26a).

〈바날〔針〕〉, 〈밭〔田〕〉 등의 단어가 중국어 차용어일 가능성은 없는 것 갇댜 〈바날〉의 〈날〉이 〈 〉자에 대한 우리말이라면 〈바날〉형은 중세국어에서 이른바 〈ㅎ〉곡용을 보여야 한다. 중세국어에서 〈날〉은 어간말음에 〈ㅎ〉을 갖고 있는 〈ㅎ〉종성체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 〔針)〉과 〈날〔 〕〉의 곡용형태는 중세국어에서 다음과 같이 상이하게 나타난다.

ㄱ) 무수한 날히 蓮花ㅣ 다의니(曲, 상. 71)

날하란 너므 둗겁게 말오( 인兒사 , 번역 박동사, 상. 16a).

ㄴ) 바날랄 두드려(초간, 두시, 7. 4a),

바날와 芬子왜 (원각경, 서. 69).

따라서 〈바날〉의 두번째 성분 〈날〉과 〈날ㅎ〔)〉와는 상관성이 없다. 더욱이 〈바낤날ㅎ〉 갇은 중세국어의 복합어가 존재하고 있다. 바낤날할 셰여 (원각경, 서. 69). 또한 〈밭〔田〕〉의 어간말음 〈ㅌ〉는, 〈솥〔釜〕, 밑(底〕, 돝〔猪〕, 낱〔節〕〉 등의 어휘들과 마찬가지로, 18 세기 국어에서는 주격어미 〈-이〉와 결합될 때 구개음화가 적용된 모습을 보여 준다. 그리고 주격의 구개음화형은 곡용상의 형태를 동일시키기 위한 유추작용을 거쳐 대격형태에까지 수평화되었다. 이러한 당대 〈밭〉의 곡용형태들을 고려에 넣지 않고 단독형 중십으로 이끌어낸 황윤석의 판단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밧치 (경 신록. 32a) , 밧찰(경신록. 16b/1sb)

밧출 파라(오륜행실도, 4. 29a), 밧찰 디니며 (오륜행실도, 1. 44a).

국어의 동사 어간에 명사 파생정미사 〈-개〉를 정미하여 파생명사 를 만드는 단어형성 규칙이 중세국어 단계뿐만 아니라 근대국어에서도 생산적이었다. 따라서 황윤석이 언급한 이른바 복합어 〈귀쇼시게〉에서의 〈쇼시〉의 성분은 동사어간 〈뿌시-〉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니뿌시다(역어,

상. 47b). 귓구멍 속의 때를 뜻하는 귀에지는 근대국어에서 〈귀여지〉(耳矢, 역어, 상. 33a) 로 나타나지만, 이것을 제거하는 기구로 〈귀우개〉형만 주로 확인된다.

耳 乞와子즈, 귀우개 (역어, 상. 44a),

耳을乞와, 귀우개 (한청, 11. 25a),

귀 우개 (平桃子, 物譜 服飾) .

그러나 〈니슈시개〉(牙杖, 한청, 11. 25a) 또는 〈니뿌시개〉(역어, 보.38b) 의 형태로 미루어 볼 때, 황윤석이 언급한 18 세기 국어 형태 〈니슈시개〉 혹은 〈니쇼시개〉가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만일 그가 분석한 바와 같이 〈니쇼시개〉의 〈쇼시〉가 중국어 〈捨意〉의 轉이라면, 국어의 동사 어간 〈슈시-〉는 일종의 逆形成 back formation 로 나온 형태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러한 추정은 불가능한 것이다.

(C) 우연한 일치에 의하여 계동이 상이한 중국어 한자어와 국어 단어간에 1 : 1 의 음성상의 유사성을 보일 때, 황윤석은 다른 항목에서와 같은 논증 과정도 제시함이 없이 (고화음 또는 〈之轉〉) 그 원인이 직접 중국어로부터 국어로 차용되었음에 있다고 보았다.

〈‘龜'를 ‘거복이라 하는데, 이것은 죽 ‘龜卜'이다. '龍'을 ‘미리’라 하는대, 이것은 즉 ‘美利'이다〉 (25 : 41a).

위의 예 가운데 〈龍〉에 대한 근대국어 〈미리〉가 확인된다. 〈미리〉의 중세국어 형태는 〈미르〉였다. 따라서 황윤석이 제시한 〈미리〉는 한자어〈美利〉에 맞추기 위한 형태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황윤석은 그의 「화음방언자의해」의 다른 부분에서 〈‘龍'을 우리말로는 ‘룡'이라 하는데, 東俗에서 예전에 ‘미르’라 하였다〉 (25 : 44b) 고 지적한 바 있기 때문에 ‘미르>미리’와 같은 변화를 생각할 수 있다. 사실, 근대국어를 반영하는 『천자문표] 여러 판본 가운데 〈미리〉형이 발견된다. 6)

6) 20 세기 초엽의 서부 동남 방언을 반영하고 있는 역대 『천자문』에도 〈미리 룡〉(龍 10b)이 확인된다.

미라 룡(광주본), 미래 룡(대동급본), 미르 룡(내각문고본), 미리 룡(송 광사본), 미리 룡(행곡본), (손희하 1991 : 325). cf. 미르 룡, 龍(예산본, 훈몽, 상. 10b).

또한 이의봉의 『동한역어』에서도 〈龍〉이 〈彌里(미리)〉로 취음되어 있으며, 정약용은 그의 아언각비』(권1) 에서 〈龍〉을 풀어 말하면 〈祿(미리)〉가 된다고 보았다. 〈龍〉에 대한 윤석의 〈美利〉는 후대의 『동언고략』의 표기에도 나타난다. 龍日 미리者 美利也, cf. 龜日 居卜也.

여기서 〈미리〉의 출현은 〈미르〉에 접미사 -i가 접미된 〈미의〉형의 역사적 발달의 결과(죽, 미릐>미리)일 것으로 생각되는데, 대동급본 『천자문』에서 보이는 〈미래〉가 이러한 과정을 중간단계의 형식으로 나타내고 있다.

(D) 차용 관계를 규명함에 있어서 황윤석은 중국어 한자음의 변화에 관한 지식은 풍부하게 구사하였지만, 국어 단어의 역사적 변화에 관하여는 극히 제한된 견해를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중국어 한자어에 일어났다고 추정되는 바뀜의 원리를 황윤석은 국어 단어에까지 확대하려는 시도룰 보였다.

1) 贊 → 팔 : 〈‘脣'를 '팔‘ 이라 한다. ‘脣'는 예전에 ‘ㅍ'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ㅂ '으로 변했을 따름이 다〉 (25 : 39a) .

황윤석은 국어의 〈팔〉과 중국어 〈脣〉를 연관지음에 있어서 어두자음〈ㅍ〉와 〈ㅂ〉의 상이를 〈 〉가 예전에 〈ㅍ〉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하였다 .7) 그러나 황윤석은 18 세기 국어의 〈팔〉이 원래 〈발ㅎ〉에서 격음화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였다. 만약 그가 국어에서의 이러한 〈바뀜〉을 알고 있었다면 「화음방언자

7) 張植의 『大漢韓辭奧』에 의하면 (1983) , 〈胃〉의 중국어 발음온 (pi, 『 集韻 』 阜義〉이다.

의해」에 반영된 그의 논증에 따라서 직접 일 대 일의 대응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ㄱ) 발 爲 (解例, 用字例),

펴엤던 밤할 구필 싸이예(석보, 6. 2a),

발할 드르시니(曲, 상. 192).

ㄴ) 팔 굉, 宏(훈몽, 상. 26a), 팔 비, 背(신증 유합, 상 . 21b).

그러나 황윤석이 「화음방언자의해」의 다른 부분에서 〈코기리〔象〕〉에서 〈고〔鼻〕〉를 분석해 내고, ‘고>코'의 변화를 지적했음에도 (25 : 37a), 여기서 ‘발>팔’의 과정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국어의 변화에 대한 그의 정보가 비체계적이었음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8)

8) 또한 황윤석은 자기 논지 전개의 필요에 따라, 죽 국어의 단어를 중국어 한자讵어에 가능한 가깝게 접근시키는 방편으로 방언형도 사용하였다. 사계절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중국어에서 왔음을 보이기 위하여 음성과 의미적 접근을 다음과 같이 보였다(25 : 39a). 즉 〈本 → 봄(봄이 四時의 本이기 때문), 炎然→ 여람(天氣가 炎熱하기 때문), 裁牧 → 가을(百物이 자라 익어 거두기 때문), 居畫 → 겨술(사람들이 居室하고 만물이 근원으로 들아가기 때문). 그리고 〈가을>의 유래에 황윤석은 〈가술〉형도 첨가하였다. 高秋(秋의 古音은 〈수〉) → 가술. 〈겨울(冬)〉 에 대한 어원 풀이에서 최창렬 {1986: 39~40) 이 〈추우니까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 머물러 있는 계철이기 때문에〉 (39 쪽) 어근은 〈겨〉요 그 뜻은 傾〉나 (在)에 혜당되며, 〈겨울〉은 〈겨다〉의 관형형 〈겨을〉(在家할)이라고 해 석한 내용을 참고로 계시한다.

2) 步 → 발(托) : 〈오늘날 두 팔을 뻗어서 땅의 장단을 측량하는 것을 우리말에서 ‘一祀'(音은 발)라고 한다. 이것은 실재로는 당연히 ‘一步’라 해야 옳은 것이다. ‘步'는 예전에 ‘바'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25 : 37b).

국어의 〈발〔托〕〉은 16 세기 국어, 특히 최세진이 저술한 『훈몽자회』와 번역 『박동사』에서 〈바람〉 또는 〈바람〉과 감은 이음철 단어로 나타났다. 그리고 ‘바람>발'의 과정을 거친 단음절의 〈발〉 또한 중국어 원전에서의

〈托(華 토)〉에 대한 번역이었다.

바람 탁, 托, 伸 社物 (훈몽, 하. 34a),

이 몃 바람고(幾托, 번역 박동사, 상. 14b),

닐굽 바리 차니라(滿七托, 번역 박동사, 상. 14b).

3) 〈예전에 ’關'은 ‘곤'음을 갖고 있었으며, 串'도 ‘곤'음(또한 ‘혼'음)을 갖고 있었다. ‘環'을 ‘골해’라 부르는데, 여기서 ‘골’의 ‘고’는 원래 ‘호’에서 바뀐 것이다. 花'의 ‘ 호’도 ‘고’로 바뀐 것이고, ‘宮'의 ‘호’ 역시 ‘고’로 바뀜 역시 마찬가지이다〉 (25 : 38a).

중국어에서 ‘호>고’로의 변화 원리를 국어 단어에 그대로 적용시켜 〈골해 (環), 곶(花)〉 등이 중국어 (호)에서 국어로 차용되는 과정 (고)에서도 일어났다는 판단인 것이다.

4) 弦 炫(古華音 히) → 시 → (입, 뱃, 활)시울 : 〈활의 갓선은 ‘弦’이고, 배의 가〔邊〕도 역시 ‘炫'이다. 입의 가도 ‘弦, 鉉’과 더불어 우리말에서 똑같이 시울'이라 한다. 곧 ‘先韻’의 古華音이 ‘ 眞 , 侵 , 支’와 상통하기 때문에 ‘弦(현)’은 예전에 ‘히법을· 갖고 있었으며, 이것이 다시 변하여 ‘시’로 된 것이다〉 (25 : 35a).

여기서 중국어의 〈히〉가 국어에서 〈시〉로 변화하여 〈시울〉이 되었다는 황윤석의 설명은 논의로 한다 하더라도, 그가 한자어와 연관지어 관찰한 바와 같이 국어의 〈눈시울 • 뱃시울 • 활시위, 입시울(입술)〉 등은 의미상 으로 유사한 특칭을 보유하고 있다.

ㄱ) 입시을 슌 脣 (훈몽, 상. 26b : 신중 유합, 상. 21a),

脣 입시우리라( 諺 訓),

ㄴ) 벗시울 현, 炫(훈몽, 중. 26b),

빗 시우를 두드리놋다(초간, 두시. 20, 7).

ㄷ) 활 가져다가 시욹 연즈라(上弦着 , 언해 노걸대, 하. 27b).

그러나 〈시울〉에 대하여 〈시욹〉형이 공존하고 있는데, 특히 〈弦〉의 경우에 〈시움〉이 자주 등장한다. 활시욹 잇거든(언해 『노걸대』, 하. 29b). 〈눈시울〉(捷, 훈몽, 상. 25a) 에서는 나타나지 않던 어간말 〈ㄱ〉이 근대 국어에 와서 보이기도 한다. 눈시욹(眼邊, 한청, 5. 49b). 이러한 현상이 〈입시울〉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입시욹(脣, 規 . 22). 따라서 원래 〈시울〉과 〈시욹〉은 다른 기원의 단어로 출발하였지만, 황윤석이 해석한 바와 갇이, 의미의 유연성으로 인하여 후대에 와서 혼착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한청문감』에서 〈시울〉, 〈시욹〉, 〈시위〉가 각각 분화된 상태를 부분적으로 보여 준다.

ㄱ) 시욹, 邊 (한청, 11. 45a),

시욹 너른 마흐래 (한청, 11, 1a),

ㄴ) 입시울, 脣(한청, 5. 50a),

ㄷ) 활시위, 弓弦(한청, 5. 16b},

시위 토겨보다(彈弦試了, 한청, 5, 15a},

시위 언다(配弓弦, 한청, 5. 14b).

나 황윤석의 「화음방언자의해」 가운데 중국어 차용의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일단 검토해 불 필요가 있는 예들을 여기서 살펴보기로 한다.

1) 土增 → 도가니 : 〈우리말에서 ‘도간’은 곧 ‘土 ’이다〉 (25 : 40b).

그러나 국어의 〈도관〉 또는 〈도간〉에 대해서 중국어 한자어 〈土增〉이 문헌상에서 사용된 적은 없었다.

도관 감( , 훈몽, 중. 16), 鎬 도관(四解, 하. 75),

鎭兒 도관(언해 박동사, 하. 29) ,

甘칸鎭고, 도간(역 어 , 하. 14b) ,

도간의 담고(鎭, 두창, 하. 30) •

2) 場 子 → 단지 : 〈우리말에서 ‘단지’라 하는 것은 곧 ‘ 子'이다. ’은 또한 隔'으로도 사용한다〉 (25 : 40b).굕

중국어 한자어에 명사어미 〈-子〉가 딸려 차용될 때 일찍이 중세국어부터 〈-지〉로 정착된 예가 나타난다. 가지 加(훈몽, 상. 13)' 가지(加子, 物譜). 따라서 〈단지〉의 〈-지〉 역시 〈-子〉와 관련이 있을 것 갇지만, 이 단어는 원래 〈단디〉로 출현하였다. 그러므로 황윤석이 제시한 18 세기 단어 〈단지〉는 〈단디〉로부터 구개음화를 수행한 형태이다. 또한 이 단어와 대응되는 한자어는 아래의 예에서와 같이 〈 〉 등과 거리가 멀었다.

단디 관(泥 훈몽, 중. 12),

금단디예 쇠준의(金긴躍권兒사, 번역 박동사, 상. 41b),

뜸ㅅ단지 (역어, 보. 35b).

따라서 번역 박통사』에 나오는 〈耀권兒사〉가 국어로 직접 차용되었다면 〈단디〉가 되었을 가능성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3) 荊籠 → 채롱 : 〈중국어를 살펴볼 때 ‘荊籠'은 곧 우리말에서 이른바 채롱’이다. ‘荊’은 楚木'이며, ‘荊'자의 古華音에 ‘가’가 있었는데 音이 와 전되어 ‘강’이 되었다. ‘楚'자 고화음인 ‘차’가 찰못 변하여 채'가 되었기 때문에, 채롱'이라 하였다〉 (25 : 32a).

황윤석이 지적한 바와 갇이, 국어의 〈채롱〉은 중세와 근대국어의 문헌에서 중국어 〈荊籠〉과 대응을 보여 주지만, 첫째 〈荊〉에서 〈楚〉로의 대치는 그렇다 하더라도,9) 둘째 〈楚〉의 한자음 ch'u, 또는 이른바 고화음이라는 〈차〉가 국어에서 〈채〉로 변했다는 설명에는 어느 정도 객관성이 없는 것 같다.

9) 張植의 『大漢韓辭奧』 (1983 : 1274) 에 의하면, 은 〈광대싸리, 형 ( 楚 也)〉으로 나온다.

채룡, 荊籠(四解 하. 47),

두 채롱에 대쵸다마 싣고(着兩荊籠子襄, 언해 노걸대, 상. 26b),

荊깅籠룽, 채롱(역어, 하. 14b), 荊깅篤쾅, 채광조리 (역어, 하. 14b).

그런데 국어의 〈채〉의 사전적 의미는 〈바구니나 광주리 따위의 그릇을 결어서 만드는 데에 쓰는 껍질을 벗긴 싸리나 버드나무 따위의 가는 나뭇가지 → 채그릇〉을 뜻하기 때문에 〈荊籠〉에 대한 국어의 〈채롱〉은 고유어인 〈채〉+漢語系 차용어 〈籠〉의 복합어일 가능성이 많다. 위의 예문가운데 〈荊깅窟쾅 → 채광조리〉(역어, 하. 14b) 가 이러한 단어 형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4) 消工, 箱工 → 沙工 : 국어의 〈샤공〉은 15 세기부터 문헌상에 나타나는데, 황윤석은 이 단어가 중국어 〈箱工〉 또는 〈稽工〉에서 기원된 차용어임을 밝히고 있다.

〈情'는 또한 ‘槍' (솨)와 通한다. 따라서 行船하기 위하여 ‘箱'를 사용하는 사람을 ‘箱工'이라 한다. 우리말에서는 이것이 轉하여 ‘少工’이 되었다〉 (25 : 40b).

국어의 〈사공〉이 중국어 기원일 것이라는 사고는 실학시대 학자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존재했었다. 또한 정약용도 그의 『아언각비』(권2)에서 〈納工〉이 誤懿되어 〈沙工〉이 되었는데, 원래의 화음은 〈솨궁〉임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국어의 〈사공〉에 대한 중국어 한자어는 시대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게 등장하였다.

ㄱ) 寫工 : 샤공이 幸혀 담디 아니하야(篤工, 초간, 杜詩 15. 33),

샤공이 배 녜오대(高師 , 金삼, 5. 38),

ㄴ) 繪子 : 繪子 샤공(四解 下. 22),

ㄷ) 槍사工궁, 사공(역어, 하. 21a), 槍사子즈, 사공(역어, 하. 21a).

5) 每輯 → 매잡 → 매답 : 〈『四聲通解』에서 ' 매잡은 流蘇니, 이것은 同心으로 맺은 것이다’라고 했다. 또 그 책에서 ‘條頭下垂藥는 ‘수아’라 일컫

는다’ 하였다. 또한 오늘날 漢俗語에서 ‘方勝兒'를 ‘매잡 이라고 하니, 이것은 流蘇를 맺은 것이다(勝성은 去野이고, 流蘇의 華音은 ‘링수’이다). 내가 『 經國大典』을 살펴보니 이른바 ‘每輯'을 ‘매잡'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이것이 변하여 ‘매답'이 되었다. 그리고 ‘方勝'은 변하여 ‘방식' 혹은 ‘방석매답'으로 부르게 되었다〉 (25 : 25b).

황윤석이 제시한 〈流蘇〉의 중국식 발음 〈링수〉는 『역어유해』의 표기를 참조하면 『 홍무정운역훈』, 『사성동해』를 거쳐 내려 온 이른바 正音이었고 현실음 谷 音 〕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方방勝싱兒살 , 사면 매줍(역어, 상. 45b),

流링 /뉘 蘇 수/수(역어, 상. 45b).

〈流森〉의 사전적 의미는 〈예전에 旗나 乘願 등에 달던 五彩실로 된술〉이며, 또한 〈方勝〉은 〈일명 金築紙로서, 보자기 네 귀에 다는 금빛종이로 만든 · 장식품〉이다. 황윤석이 『사성통해』에서 인용한 〈 매잡, 流蘇同心結也〉는 〈蘇字 注〉(상. 40b) 에서, 〈今俗語 方勝兒 매잡 卽 流蘇結也〉는 <券字 注〉(하. 54a) 에서 나온다. 또한, 〈수아〉에 관한 부분은 『사성통해』에는 〈수사〉(상. 40) 로 나온다• 이 단어는 『훈몽자회』에서도 〈수 사 슈, 俗呼 --兒〉(중. 23a) 와 같이 출현하였으며, 번역 『박통사』에서는 〈條兒〉가 국어에서 〈수스〉로 옮겨져 있다.

수스 사다 가초리니(買將條兒來帶他, 번역 박통사, 상. 16b).

후대에 등장하는 한국식 〈每輯〉은 譯 字 (또는 取 音 字) 일 가능성 이 많다. 죽 「行用吏文」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타난다. 매듭, 絲 繩 之結 處 日每輯如流蘇之類(김종손 1985 : 117 참조), 結子俗呼 每 輯 (악범 8. 3). 그러므로 이 시기에는 〈매잡〉의 의미가 변모되어 〈結子〉 정도로 발 전 하였으며, 따라서 다른 기원의 〈매답〉과 정근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매

잡〉이 변하여 〈매답〉으로 되었을 가능성은 없다. 18 세기 국어 형태로 등.장하는 〈매답〉은 〈매답〉에서 변화된 형태인 것이다. 『사성통해』에는 〈매잡〉과 대립을 이루는 〈매답〉형이 관찰된다. 이 〈매답〉형은 근대국어에 와서 〈매듭〉으로 변하는데, 황윤석이 언급한 〈매답〉은 비어두음절 표기〈아〉에 대한 철자식 발음이었다.

황윤석은 〈方勝〉이 변하여 〈방식〉 또는 〈방석매답〉이 되었다고 보았으나, 〈방셕〉형은 이미 15 세기 국어에 출현하였다.

世尊이 방셕 주어 안치시니라(석보, 6. 20b).

4.2 중국과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밀접한 문화적 접촉을 가져 왔으며, 따라서 경제 • 정치 • 사상 및 학문 등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일방적인 문화적 유입을 엄청나게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일찍이 게르만 민족이 초기 기독교 교회와 그리스 • 로마의 고전적 문화에 접하게 됨으로써 받았던 지대한 영향과 비견될 만한 것이다 (Bynon 1979: 296). 우리나라가 중국 문화와의 접촉에서 받은 영향의 범위와 폭은 우리나라에 들어 온 수많은 중국어 차용어들의 항목을 검토해 볼 때 쉽게 상상될 수 있다.

12 세기 초영에 작성된 孫穆의 『계립유사』의 기록에서도 차용되기 어려운 기본 어휘들까지 한자어로 이미 대치되어 가는 과정을 보게 된다. 山曰 山, 海日 海, 千 千, 萬日 萬 등. 중국으로부터 들어 오는 차용어둘의 증가와 더불어 고유어에서 한자어로의 대치 과정은 그 이후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으며, 황윤석과 그를 전후한 일단의 실학자들이 살았던 실학시대에는 중국어 중십의 사고가 극치를 이루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의 고유어까지도 한자로 취음하여 중국어로부터 기원된 것으로 인식하게 되고, 또한 이러한 과정을 해설하려는 이른바 〈語源〉 의식이 실학자둘 사이에 하나의 경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반영의 하나가 황윤석의 「화음방언자의해」로 나타난 것이다.

황윤석이 지은 연시조 「木州雜歌」(이재속고, 권 2 : 32a~37a) 가운데 다음과 같은 한 首에 등장하는 〈아비〔父〕〉와 〈어미〔母〕〉의 취음자들이 가장 전형적인 중국어 중심의 사고를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阿 님 날 바리고 阿 님 내 뫼오려

三年後 六年만의 薄邑을 엇단말가

두어라 薄邑일 망정 天地 君父 恩惠로다(其 二).

그런데 이러한 유형은 17 세기 이수광의 『지봉유설』 (1614) 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今俗謂父 阿父, 謂毋曰 阿彌…… 蓋本唐語也. 또한 이러한 견해는 이의봉의 『동한역어』에까지 지속되어 오는 것이다.

우리가 4.1 에서 지금까지 검토해 은 예들은 〈阿父, 阿彌〉와 같은 유형들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화음방언자의해」 가운데 중국어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온 차용어일 가능성이 높은 예만을 추려내서 검토하기로 한다.

1) 推釣 → 대파 : 황윤석에 의하면 (25 : 42a), 중국어에서 나무를 깍아 평평하게 하는 기구를 〈椎砲〉라 하는데 우리말에서는 이것이 변하여 〈대파〉라고 부른다고 한다. 〈대〉는 중국어 〈推(퇴)〉가 우리말에서 그릇.바꿔진 것이고, 〈파〉도 역시 〈抱(퐈)〉가 그릇 바꿔진 음이라는 것이다. 10)

10) 황윤석은 같은 책에서 (25 : 42a) 국어 단어 〈톱〉은 중국어 〈推〉에서 차용된 것인대, 〈톱〉의 〈토〉는 〈推(퇴)〉가 찰못 바뀐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다음의 예에서 관찰하는 바와 갈이 〈톱〉과 〈推〉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울 것 같다.

톱 거, 銀 俗平 -- (예산본 훈몽, 중. 8b),

銀규子즈, 톱(역어, 하. 11b),

銀귀 , 톱(한청 , 10. 34a).

정약용도 그의 『아언각비』(권 2) 에서 중국어 〈推錦〉가 우리나라에서 찰못 옮겨서 〈大牌〉가 되었다고 지적하고, 본래의 華 音 은 〈뒤과〉입을 밝힌 바 있다. 장삼식의 『大漢韓辭典』 (1983) 에 의하면, 〈推錦〉의 발음은 각각

의 대파〉와 중국어 〈推砲〉와의 연관은 16 세기 문헌자료에서부터 쉽게 확인할 수 있다.啕

ㄱ) 글게 포, 俗平 -- 子, 又 대파 曰 推 --( 예산본 훈몽, 중. 8b),

推튀 抱퐈, 대파(역어, 하. 17b),

대파, (推鐵 同文, 하. 16b),

砲밧 花휘 , 대파밥(한청, 13. 30b),

ㄴ) 대패 (祖 신증, 유합, 하. 42b),

대패와 끌과(退抱,언해 박동사,하. 12b),

대패 ㅅ 밥(砲花, 역어. 보. 45a).

또한 『한청문감』에서 〈佳튀 봐, 대파〉 (10, 34a) 의 항목에 첨가된 만주어 〈튀바라쿠〉가 주목된다. 위의 예에서 〈대파〉는 〈대패〉로의 변화를 보여 주는데, 『아언각비』에서의 취음자인 〈大牌〉도 〈대패〉를 나타내는 것같다.

2) 휘, 후 : 이 항목은 황윤석의 『이수신편』 (20 : 5Bb) 에서 열거된 근세 중국어 차용어 가운데 〈銅料(銅뚱 料휘, 俗韻 퉁휘)〉와 같이 제시된 바 있다.

〈漢人들은 ‘料'를 우리나라 音으로 ‘後(후)’와 갇이 부른다. 우리말에서는 ‘料'을 ‘曲(곡)’音으로 부른다. 그런데 관청 창고에서만 관리들이 ‘ ' 를 화음을 사용하여 ‘後’와 같이 부른다〉 (25 : 29a).

여기서 황윤석은 중국어 차용어 斗〉가 통상적인 상황에서는 〈곡〉으로 사용되지만, 관청 창고에서 관리들이 쌀을 되는 상황에서는 중국어 〈후〉로 쓰이고 있는 홍미 있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중국어 차용어가 부분적으로는 사용자들의 사회적 계층에 따라서 상이하게 옮겨지는 단계가 있었음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음독 차용어에서 음역 차용어로 옮겨 가는 과정을 뜻한다.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곡 은 16 세기 『훈몽자회』에서 등장한다. 고 곡,

斗(예산본 훈몽, 중. 6b). 이러한 사실을 보면, 중국어 〈料〉에 대한 〈곡〉은 당시의 조선 한자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장삼식의 『大漢韓辭典』 (1983 : 629) 에서 〈斗〉은 〈열 말들이 곡, 휘 곡〉으로 풀이되어 있다. 최세진의 번역 『박통사』에는 중국어 〈휘〔斗〕〉가 우리말에서 〈고〉로 옮겨져 있어 『훈몽자회』의 내용과 일치를 보여 준다. 그러나 언해 『박통사』에서는 이것은 〈휘〉로 대치되었다.

監하 난 관원손디 닐어 고로 되에 하라. 말로 되면 브죡하리라.

( 후起키, 번역 박통사, 상. 12a),

감납하난 관인들의게 닐러 휘로 되게 하라. 말로 되면 차디 못하리라

(언해 박동사, 상. 12b).

이와 같이 언해 『박통사』에 보이는 〈휘〉가 근대국어의 문헌자료에서 주로 쓰이게 되었다.

후 起키, 휘로 되다(역어, 상. 24b), 후 子즈, 휘(역어, 하. 14 b)

후, 휘(한청, 10. 19b), 祖주 料후, 料之大者(한청, 10. 19a).

3) 弗律 → 봇(夫斯) :문자를 매개로 하지 않고 가장 오래전에 우리나라에 둘어 온 분명한 차용어로 〈먹〔 墨 〕〉과 〈글〔契〕〉 등과 함께 〈봇〔 筆 〕〉이 언급된다(김완전 1971 : 107). 〈筆〉의 조선 한자음이 〈필〉로 나타나는 반면, 15 세기의 〈붇〉은 한자음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인 입성자들의 말음 -t가 -l 로 바뀌는 변화에 적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붇〉의 차용시기가 우리나라의 전통적 한자음 형성기 이전이었음이 증명된다고 한다 (이기문 1991 : 227).

〈우리말에서 ‘ 筆 '을 ‘夫斯’라 한다(‘斯’의 초성을 ‘夫’의 종성으로 합하였다). 漢語로 筆 '을 혹은 ‘弗律'이라 부르는대, 이것은 ‘ 筆' 과 ‘ 弗律’이 소

리가 아주 가깝기 때문이다. 대략 ‘筆', '弗', ‘夫’는 초성이 모두 가깝다〉 (25 : 24a).

〈봇〔策〕〉이 중국어 〈弗律〉의 차용어라는 인식은 황윤석을 전후한 실학 시대에 널리 확산되어 있었을 것이다. 죽 「束言考署」에도 〈策曰 봇字 方人蜀人謂策日 弗律〉과 같은 언급이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봇〉에 대한 譯字 〈夫斯〉는 15 세기의 어간말 〈亡〉이 18 세기에 와서는 이미 〈 ㅅ 〉으로 체언의 재구조화를 수행한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에 주목된다.

ㄱ) 붇 爲筆(訓民正音 解伊, 用字例),

草木이어나 부디어나(석보, 13. 52b),

한 부드로 에워 바몰디며(一策, 金삼, 5. 38).

ㄴ) 부살 드러 (五倫, 2. 59),

붓살 나리오매 (경신록 언석. 64a), 봇스로(좌 동. 64b),

cf. 봇을 잡아(경신록 언석. 53a).

15 세기에 <ㄷ> 어간 말음을 가지고 있었던 일련의 단어들(예를 들면 〈곧〔處)〉, 〈벋(友〕〉' 〈뜯〔義〕〉' 〈빋 〔債)〉 등)도 근대국어의 어느 단계에서 붇>붓’의 변화에 동참하였다. 그런데 어휘둘의 성격에 따라서 어간 말 ‘ㄷ>ㅅ’ 의 변화를 수용한 속도에 완급의 차이를 보인다. 그런데 ‘ㄷ >ㅅ’ 의 변화의 중간단계로 ‘ㄷ>ㅈ’의 변화가 어휘에 따라서 먼저 등장한다. 예를 들면, 중간본 『두시언해』에 〈벋〉의 주격형이 체언어간 말음〈 ㅈ 〉으로 실현되어 있다. 버지와 무로매 (友, 중간, 杜詩 3. 53b). 여기에 나타난 ‘버디>버지’의 과정은 중간본 『두시언해』에 생산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구개음화가 형태소 경계를 넘어서 확대된 것으로 생각된다.

18세기 경상도 방언의 특칭을 반영하고 있는 「염불보권문」에서도 〈벗 의 주격형에 구개음화가 적용되어 있음은 당연한 현상이다. 의원과 친한 버지 다와 닐오대 (17b}. 주격형에서 일어난 ‘벋>벚’의 변화가 18 세

기 문헌자료에 오면 구개음화의 환경이 아닌 대격형에도 적용되어 있다. 어전 스성과 벗즐 구득하야(경신록 언석. 80b). 이러한 사실은 주격형의 어간말 〈ㅈ〉이 대격형으로 유추적 확대를 수행하였음을 의미한다. 18 세기 말엽의 『경신록 언석』에는 〈쏟〔意〕〉 및 〈빋〔債〕〉의 대격형들도 이러한 유추에 적용되어 있다. 〈씆〉의 대격형의 출현은 먼저 구개음화위 환경을 갖고 있는 주격형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씃지 한걷갓하야(경신록언석. 14b).

ㄱ) 빗줄 샤하며 (80b), 빗줄 져 이시며 (84b),

ㄴ) 씃즐 방자히 (61b), cf. 씃을 밧들어 (15b).

또한 『경신록언석』에는 어간말 〈ㅈ〉이 마찰음화하여 〈 ㅅ 〉으로 바뀌는 예들도 보여 준다. 사관 벗살 져 바리미니라 (82b). 그리하여 19세기 후기 전라방언 자료에서 이러한 유형의 단어들의 곡용형은 어간 말음에서 〈大〉과 〈 ㅅ〉의 부단한 변이를 보인다(최전승 1986 : 269).

4) 頂子 → 딩자 : 〈鎌子〉는 예전에 군모 위에 달던 장식으로 금·은·옥의 구별이 있었다(문세 영 1938 : 1313}. 황윤석은 〈딩자〉의 유래를 다음과 갇이 설명하였다.

〈오늘날 武臣의 머리 위에 쓰는 붉은 전립에 玉과 마노로 장식한 것을 ‘딩자' 라 한다. 이것은 곧 ' 子(華語)’를 말한다〉 (25 : 41b). 또한 정약용도 그의 아언각비』(권 2) 에서 일반적으로 〈頂子〉를 〈微子〉로 말하는 것은 〈頂子〉의 중국음 〈딩즈〉에서 그릇 옮겨진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이 단어는 『 譯語 』 부류의 문헌들에서 중국어 〈頂子〉 또는 〈項兒〉로 나타나며, 이것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딩자〉로 옮겨져 있다. 따라서 〈딩자〉는 황윤석이나 정약용의 지적대로 중국어에서 직접 차용된 단어입이 분명하다.

ㄱ) 손가락만큰 자타날 딩자애(頂딩兒ㅅ, 번역 박통사, 상. 29b),

ㄴ) 호박 딩자 일빅 : (頂딩子자, 번역 노걸대, 하. 67b),

頂子, 딩자(同文, 상. 55),

ㄷ) 頂딩子즈, --- -(역어, 상. 43b).

『한청문감』에서 〈딩즈(頂子)〉는 구개음화를 거쳐 〈정즈〉 (11, 2b) 로 등장하는 사실이 주목된다• 그리고 이 단어는 만주어에서도 〈징스〉로 나타난다. 따라서 『아언각비』에서 잘못 옮겨졌다고 지적된 〈微子〉형 역시 구개음화와 관련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황윤석이 활동하였던 지역과 시기에 이미 t-구개음화 현상이 생산적으로 일어났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황윤석은 그의 「자모변」에서 관찰해 놓은 바 있다. 그러나 「화음방언자의해」에 등장하는 한자음 〈딩즈〉는 구개음화와 무관하였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예는 구개음화 현상이 고유어와 한자어에 동일한 세력으로 파급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나타낸다.

5) 頂 → 딩 : 「화음방언자의해」에서 〈項子(딩즈)〉와 같은 항목에 배당된 〈딘(딩)〉은 역시 중국어 〈頂〉으로부터 온 직접 차용어일 가능성이 있다. 황윤석은 이것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선명을 하였다.

〈가죽신 밀에 쇠못대가리를 박은 것을 ‘딘’이라 한다. 이 ‘딘’은 곧 ‘ ' 의 화음이다〉 (25 : 41b).

장삼식의 『大漢韓辭典』 (1983 : 1573) 에 의하면, 〈針〉의 발음은

針딩靴휘, 딩박근 휘 (역어, 상. 46a),

針딩骨구針딩的디, 서징 박은 셜마(한청, 11. 12a).

『한청문감』에서 〈딩즈(項子)〉가 〈징즈〉로 구개음화를 반영한 것과 같이, 〈針〉도 〈징〉으로 변화를 보여 준다. 따라서 오늘날의 〈칭(針)은 증국어 〈딩〉이 구개음화를 수용한 결과로 생각된다. 11)

11) 그 반만 이어서 계속되는 〈針〉과 관련된 〈針兒 - 당알-다 갈〉과 갈은 차용

에 대한 황윤석의 논증에는 객관성이 없다. 즉 〈말굽에 뾰족한 쇠못대가리를 박은 것을 ‘다강이라 하는데, 이 또한 ‘針'올 말한다. 옛 사람이 ‘丁'올 '當’이라 訓했기 때문에, ‘針’ 또한 ‘당'음을 갖고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갈'이라는 것은 ‘針兒(당알)’ 이 변한 음이다〉 (25 : 41b).

국어의 〈다갇〉에 대한 중국어 〈針〉이 근대국어 문헌에서 확인되기는 하지만 음은 역시 〈당〉이 아닌 〈딩〉으로 나온다.

打다馬마針딩, 다갈 박다(역어, 보. 46a),

針딩鐵터踏티, 다갈 박다(한청, 14. 3~b),

cf. 馬脚追 다갈, 一云 馬針子(역어, 하. 20b).

그리고 설령 황윤석의 설명대로 〈針〉에 〈당〉음을 인정하며, 〈針〉에 접미사 〈兒〉가 첨가되어 〈針兒〉이 존재하였다 하더라도, 〈당알 → 다갈〉의 과정은 전연 합리적이지 못하다. 그러므로 국어의 〈다갈〉이 차용어라면 중국어와는 관련이 없는 다른 언어로부터 왔을 가능성이 많다.

5 「화음방언자의해」의 국어사적 특징

황윤석의 「화음방언자의해」에는 18세기 국어의 다양한 어휘의 모습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으며, 그가 제시한 논증 가운데에는 근대국어의 중요한 형태론적 및 음운론적 정보들이 발견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차용어와 관련된 「화음방언자의해」에 대한 고찰을 떠나서, 國語史 자료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살펴보기로 한다. 12)

12) 유창돈의 『李朝語辭奧』 (1977) 에는 화음방언자의해」에 출현하는 18세기 어휘들이 사전의 표제어로 등록되어 있다.

1) 발(田) 一 갓 앗 : 황윤석은 「화음방언자의해」 (25 : 44b) 에서 〈田〉은 우리말에서 〈밧〉이라 하는데, 오늘날 이것이 변하여 〈갓〉 또는 〈앗〉이 되었다고 관찰하였다. 근대국어의 〈밭〔田〕〉에 대한 곡용형태는 황윤석의 표기에 반영되지 않았지만, 여기서 단독형 〈밧〉의 출현은 체언 어간말〈 ㅌ 〉이 주격 조사와 결합될 때 구개음화를 수행하고 이어서 ‘ㅊ >ㅅ’ 와 갇은 마찰음화를 나타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18 세기 말의 『경신록언석』에서는 체언 어간말 〈ㅌ〉을 갖고 있던 명사들이 대격 등의 곡용형

에서 주격에 일어난 구개음화의 수평화를 수용했지만, 그 다음 단계인 마찰음화 과정은 보여 주지 않았다.

남의 밧출 거층게 말며 (65b) ,

cf. 밧히 거름홍제 (65a), 밧 갈기 (65a).

황윤석이 언급한 〈밧〔田〕〉에 대한 〈앗〉은 단독으로 출현하는 형태는 아니다. 즉 중세국어부터 〈받〔田)〉이 복합어를 형성할 때, 주로 r 과 이중모음의 부음 -y의 음성환경 다음에 어두의 p가 순경음화되어 〈ㅂ〉으로 전환되는 보편적 음성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이어서 〈-밭〉형은 β>w의 변화에 의하여 〈-앝〉으로 바뀌게 되었다.

대말밭(竹田, 용비어천가. 5 : 26},

cf. 대범 (大虎 용비어천가. 87),

팔왇(火田, 초간, 杜詩, 7. 17b), 팔왓(중간, 杜詩, 3. 46a).

그러나 현대방언에 잔존해 있는 형태들을 관찰해 보면, 복합어에서 ‘ ㅂ > ㅸ'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음성환경은 문헌에서 보여 주는 것보다 광범위하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황윤석이 언급한 〈앗〉형은 아래와 같은 복합어 등에서 관찰된 결과일 것이다.

보리앝(보리밭, 평북 의주 《한글》 7 권 7 호), 보리앗(『제주방언』, 68쪽), 13)

조왈(조발, 평남 개천 《한글》 7 권 5 호) , 원두왈(참의Qㅏㅌ, 좌동),

물왙(물이 괴는 발, 『제주방언』, 67 쪽),

모살왙, 몰래왙(모래밭, 『제주방언』, 67 쪽), 가슬왙(좌동, 432 쪽),

13) 제주도 방언의 자료는 박용후의 『제주방언 연구』 (동원사, 1960) 에서 인용하였다. 또한 최전승 (1988 : 416) 을 참조.

대왕(대받, 『제주방언』, 66 쪽).

또한 그가 언급한 〈밭〉에 대한 〈갓〉형은 단독형으로는 일반적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 이것과 관련하여 김준영 {1990) 에서의 다음과 같은 관찰이 주목된다.

<‘ 갓'은 지금도 柴 草 룰 남이 손대지 못하도록 말리어 가꾸는 곳을 ‘말림갓'이라고 하는데, 그 ‘갓'이 ‘받’과 같은 뜻일 것이다〉 (388-389 쪽).

2) 어시, 어이, 아시 → 父, 君 : 황윤석은 「화음방언자의해」 여러 곳에서 〈安市城〉이 〈瓜凰城〉이었음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였다 {25 : 22a, 33a, 41a). 그 가운데 예전의 〈安市〉가 지금의 〈沙伊〉(죽, 새) 2 字와 관련 있음을 규명하는 자리에서 제시한 다음과 갇은 언급이 주목된다.

<鳳 '을 오늘날 ‘새’라 부르는데, 또는 新羅 古 語 로 ‘아시새’라 한다. 이것은 죽 ‘어시새'인 것이다. 鳳이 ‘翊族之長'으로 임금과 갇고 어버이와 같기 때문에 ‘어시’라 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父'를 ‘어시’ 또는 ‘어이’라 한다〉 (25 : 41a ) .

예 산본 『 훈몽자회 』 에 서 〈 鳳 凰〉은 각각 〈봉황 봉, 봉황 황〉 (상. 8a) 과 같은 새김을 보여 주지만, 『천자문』의 다양한 판본 가운데에는 〈봉황봉〉 유형과 〈새 봉〉 유형 두 가지가 나타난다.

鳳 : ①새 봉(광주본), ②새 봉(대동급본), ③봉황 봉(내각문고본), ④봉황 봉(경인본), ⑤봉황 봉(칠장사본), ⑥봉황 봉(신미본), ⑦새봉(서릉부본), ⑧새 봉(정사본), ⑨서 봉(행곡본), ⑩새 봉(갑오본) 등(손회하 1991 : 331 을 참조).

황윤석이 언급한 18 세기 형태 〈어시〉는 중세국어의 〈어시〔父母〕〉로 소급된다. 이 어휘는 반치음의 변화로 〈어이〉가 되어 형태상의 불안정읍 초래한 결과, 후대의 문헌에서는 전연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반치음과 관련이 없었던 납부방언형 〈어시〉는 황윤석의 시대에도 그대로 사용되 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 어시 아드 리 의 롭고 입게 드 외야(석보, 6. 5b),

어시 아둘이 입게 사노이다(월곡. 142),

어시 다 눈 멀어든(월석, 2, 12b).

또한 방언형 〈어시〉는 19 세기 후기 전라방언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어시 (판, 심청. 176 ; 조웅. 1, 24a).

3) 구개음화 → ㄷ, ㅌ>ㅈ, ㅊ; ㄱ, ㅋ>ㅈ, ㅊ ; ㅎ>ㅅ : 황윤석의 「화음방언자의해」에 등장하는 18 세기 국어 단어들에는 일반적으로 t-계 구개음화가 반영되어 있다. 단디 >단지 (25 : 40b), 고티 >고치 (25 : 4oa). 일찍이 그가 저술한 「자모변」에는 주로 조선 한자음 사용에 있어서 〈聲 俗用 14 字〉와 관련하여 당시의 구개음화 현상이 다음과 갇이 기술되어 있다.

〈또 十四字로 표기되는 俗語믈 살펴보면, 端母 ‘ㄷ' 과 精毋 ‘ㅈ 및 透 母 ‘ㅌ' 과 淸母 ‘ㅊ'이 서로 혼동되어 있다. 지금은 다만 關西人들만 구별하며, 다른 지방의 사람들은 구별할 수 없다. >

그 반면, 「화음방언자의해」에는 k- 계 구개음화와 h- 계 구개음화를 반영한 예들로 (이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발견되지는 않으나) 한자음들이 변화된 과정을 국어 단어와 관련하여 언급한 다음과 갇은 항목들이 주목 된다.

ㄱ) 〈虹은, 죽 ‘婦蝶'이다. 虹은 工聲울 따르는데, ‘工’의 초성 ‘ㄱ’이 'ㄷ, ㅊ'으로 바뀌어 ‘婦'의 초성이 되었다. 이것은 ‘ㄱ’이 ‘ㅈ, ㅊ’로 바뀌는 것과 같다. 그러나 ‘虹'의 초성은 ‘ㅎ'이 되었는데, 이것 역시 변화된 것이다〉 (25 : 34b). ”)

14) 국어의 k- 계 구개음화와 관련하여 황윤석의 다음과 같은 언급도 제시할 필요ᘕ가 있다.

〈 의 訓 온 ‘助'이다. 대저 介母의 초성 ‘ㄱ은 助母의 초성 ‘ㅈ’ 과 서로 바뀐다. 이것은 오늘날 중국어와 우리말에서 ‘ㄱ’과 ‘ㅈ’ 이 相轉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25 : 48a).

위의 설명 가운데 〈ㄱ〉이 <ㅈ, ㅊ〉으로 바뀌는 원리는 중국어와 국어의 음운현상을 황윤석이 동일하게 잘못 취급한 경우이지만, 당시에 그가 살았던 지역과 그 시대에 작용하였던 k- 계 구개음화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L) 〈小롤 ‘쟉'이라 하는데, 영남 • 관동지방에서는 ‘효'라고도 한다. 이것은 雀 ' 을 우리나라에서 ‘쟉'이라 하고 , 중국에서는 ‘죠’라고 하는 바와 갇이, 모두 ‘죠’ 음이 그렇게 동용된 것이다. ‘小’ 초성이 지금은 ‘ㅅ’ 으로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말에서 ‘ㅎ'과 ‘ㅅ’ 의 相混됨이 ‘ㄱ’과 ‘ㅈ’의 상혼됩과 같은 이치이다〉 (25 : 34b).

장삼식의 『大漢韓辭典』 (1983) 에 의하면, 〈雀〉의 발음은

기) 혀근 션비 톨 보시고(小 儒 , 용비어천가. 82),

굴그니여 혀그니여 울디 아니 하리 업더라(월석, 10. 12b).

ㄴ) 骨隨옌 효 벌에 (월곡. 70),

효근 니피 뺏고(小葉 초간, 杜詩, 7. 5a).

이러한 〈혹-〉 또는 〈혁-〉 어간들은 후대의 발달과정에서 중세국어의 〈젹-(小)〉으로 합류된 모습을 보이나, 『해동가요』에 등장하는 〈셕은 션뷔〉 {81 쪽) 등을 보면 〈혁-〉의 구개음화형이 적어도 지역방언에 존재했음이 틀립없다. 황윤석이 언급한 〈ㄱ〉 과 〈ㅈ〉 및 〈ㅎ〉과 〈ㅅ〉의 혼동은 당시에 일어나고 있던 국어 현실에서 한자음으로 유추된 것 같다.

4) 접미사 -i의 첨가 : 황윤석의 「화음방언자의해」에는 명사어간에 파생접사 -i가 접미되어 발달된 18 세기의 납부방언형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기) 〈오늘날 商買’를 場斷’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商'의 古 寧꿈 이 ‘ 場 '과 가깝기 때문이다〉 (25 : 32b).

중세국어부터 〈댱사〉형이 등장하는데, 황윤석이 언급한 18 세기의 형태

는 〈댱싀〉 또는 〈댱새〉 정도가 될 것 같다. 〈댱사〉가 〈댱사 → 댱싀〉 정도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당 사+ 접미사 -i〉와 갇은 형태론적 과정이 개입되어야 한다. 현대 남부방언에서 장사하는 사람을 〈장시〉라 하는데, 이것은 ‘당싀>쟝시>장시’로 변화의 결과일 것이다. 19 세기 후기 함경도 방언 자료에서 〈댱사+접미사 -i〉의 중간단계를 반영하는 형태들이 발견된다.

ㄱ) 댱새, 댱싀 (푸철로의 『로한자뎐』 , 269 쪽) ,

장시 (함남 정 평 〈〈한글》 5 권 3 호, 함흥 《한글》 6 권 10 호) ,

당새, 화당새 (평북 개천, 《한글〉〉 7 권 5 호).

ㄴ) 〈우리말에서 ‘弟'를 ‘아이’라 하고 예전에는 ‘아츠’라 하였는데, 이것은 ‘亞次' 二音이 바뀐 것이다〉 (25 : 33b).

여기서 〈弟〉의 의미로 언급된 18 세기 국어형태 〈아이〉 또한 중세국어〈아ㅅ〉에서 발달된 것인데, 〈아ㅅ+ 접미사 -i〉와 같은 형태론적 조정을 거쳐 결과된 방언형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방언형들의 여러 가지 단계가 18세기 문헌자료부터 등장한다. 죽, 18 세기 대구 동화사에서 간행된 『염불보권문』 (1764) 에는 〈아의〉 (23) 와 〈아싀〉 두 가지가 등장한다고 한다(김주원 1984). 19 세기 후반 함경도 방언의 특칭을 반영하는 푸칠로의 『로한자뎐』에서 이 방언형의 계속적인 발달을 추적할 수 있다.

아의르 션다, 아의를 배엿소 (463 쪽).

그리고 이 형태는 『한불자뎐』 (1880) 에는 ‘아의>아이’의 변화를 보인다: 아아, 아으, 아오, 아이 (2 쪽). 이 사전에 출현하는 〈아이〉형은 19세기 후반 어느 지역의 방언형이 분명한데, 1940 년대에 수집된 평북방언과 최근의 『평북 천자문』(김이협, 1981) 에서도 확인된다.

아우 → 아이, 동생(평북 벽동, 《한글》 4 권 10 호),

아이, 데 (弟, 『평북 천자문』, 562 쪽).

또한 〈아의 〔弟〕〉형은 20 세기 초반의 경남 서부 방언을 반영하는 『역대천자문』에도 나타난다(홍윤표 1986). 아의, 제 (弟, 19b). 15)

15) 또한 〈천자문〉의 판본 가운데 〈정사본〉에도 이러한 유형인 〈아이〉형이 등장한다(손회하 1991 : 356). 따라서 〈아ㅅ〉 또는 이것의 후대형 〈아ㅇ〉에 접미사 -i가 첨가된 방언형들의 분포가 광법위하였다고 생각한다.

〈아ㅅ〔弟 와 비슷한 음성환경과 굴절형태 룹 갖고 있었던 〈여ㅅ〔 역시 19 세기 후기 전라방언 자료에서 〈여위〉 또는 〈여의〉, 〈여이〉형옵 보여 주는데, 이 방언형 역시 접미사 -i의 간섭올 받은 것으로 보인다(최전승 1988).

ㄱ) 여의가 ㅊ져와셔(판. 되, 298), 여의가 슬퍼 ㅎ고(판. 변· 554),

ㄴ) 여위랄 새무잔들(완판. 되, 11b), cf. 여우 를 새무잔들(판 퇴, 284)

ㄷ) 여히와 툭씌의 (길동. 11a), 빅여히 (판. 박, 382).

5) 새(摘) → 풀(草) : 〈‘早’에 예전에 ‘새'음이 있었다. 그러므로 를 또한 ‘새’라고 한다〉 (25 : 32b).

중세국어에는 지붕을 이는 데 사용되는 풀로 다음과 같은 환경에서 〈새〉가 쓰이고 있었다. 그리고 『훈몽자회』에서는 〈새〉가 이엉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俺은 새지비라(법화, 2. 444),

혼 새지비로소니(一草堂 초간 杜詩, 7. 2b),

새 니욘 俺子ㅣ(南明,상. 72),

새닐 셤 (苦, 훈몽, 하, 18).

따라서 〈풀〔草〕〉과 〈새〉의 의미라든가, 쓰이는 상황은 상이한 것이었다. 풀옷(석보, 11. 28), 풀, 초(草, 훈몽, 하. 3), 풀과 나모논 (초간두시, 8. 44). 그러나 18 세기 국어에 와서 황윤석이 증언한 바와 갇이 〈풀〉과 〈새〉가 동의어로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역어유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웍새 (王根草, 하. 40a), 노링속새 (黃皮草, 하. 40a) .

6) ‘魚꾹: 발음상의 우리말의 습관 : 〈이제 우리말을 살펴보면, ‘ '를 ‘붕어’(‘부’가 ‘붕’이 되었다), ‘雄'를 ‘링어’(‘리’가 링'이 되었다), ‘鏡'를 ‘웅어’(‘우’가 ‘웅'이 되었다), 泊魚’를 빙어'(‘白’은 화음에 종성이 없지만, 우리말에서 ‘비'가 ‘빙'이 되었다), ‘裕'를 ‘공의'(‘고’가 ‘공'이 되었다), 秀魚'를 ‘슝어’(‘슈'가 ‘슝'이 되었다)라고 한다. 여기서 각 글자의 종성에 있는 ‘ㅇ’ 이란 것은 무엇일까? 華音의 각각의 韻은 종성이 없는데, 우리 말에서 종성으로 暎音 ‘0' 을 아울러 첨가한 것은 오직 우리말의 습관일 뿐이 다〉 (25 : 3lb-32a) .

황윤석이 우리말에서 〈魚〉자가 첨가된 고기 명칭의 종성에 /n/ 이 붙는 원인에 대해서 생각하여 본 이후, 이러한 특유한 현상에 대한 고찰은 주시경 (1908 : 20-21), 이숭녕 (1988 : 159-162) 및 김석득 (1983 : 68)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김석득 (1983) 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대체로 〈魚〉자의 <ㅇ> /n/ 초성을 인정하는 주시경 (1908) 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四野通解』 중, ‘韻會三十五字母之圓’에는 ‘魚ㅇ次淸次音’ 으로 나오니 이를 믿어 ‘魚'자의 漢音은 ㅇ초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68 쪽).

그런데 황윤석의 예 가운데 〈고의〉를 華語 〈傍〉에서 기원된 것으로 보고, ‘고>공’으로 이해한 것은 잘못인 것 갇다. 그가 언급한 〈공의〉형은 유창돈의 『이조어사전』 (75 쪽)에도 등록되어 있는데, 다른 문헌에서 이 단어는 확인되지 않는다.

고의 고(情 훈몽, 중. 23},

고의 (裕쿠兒ㅅ, 번역 박통사, 상. 26b},

裕쿠兒ㅅ, 고의, 일운 子(역어, 상. 4Sb).

〈고의 는 15 세 기 국어에는 〈 ㄱ의〉로 쓰였으며, 이것은 비어두 음철

〈오〉의 원순성 동화를 입어 〈고의〉가 되었으며, 이어서 ‘고의>고의’와 같은 과정을 거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 ㄱ의〉는 鷄林類 事 』의 〈傍日河背〉와 『 梁 習 新羅傳 』 의 〈傍曰 祠半〉을 고려하면.〈가비〉로 소급된다.

ㄱ) 어미 나한 가외오( 媒 生裕子, 金삼, 5. 6),

ㄴ) 고의 샹( 袋 , 광주판 천자문. 4a),

眞實 로 웃고의 하오치로다(중간, 杜詩, 1. 19).

7) 門 → 烏羅 오래 : 〈일찍이 영남에서 간행된 千字文』 새김 에서, (중략) 또한 ‘門'자를 ‘ 烏 羅’로 새긴 것을 보았는데, 全州의 아동들이 客舍의 大門을 가리켜 말하기를 ‘ 烏 羅’라 한다〉 (25 : 23a).

황윤석이 참조한 영남 인본 『 千字文 』 이 구체적으로 어떤 판본인가 확인되지는 않지만, 천자문 』 의 여러 판본 가운데 〈門〉의 새김으로 〈오래문〉이 〈문 문〉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출현한다.

ㄱ) 오래 문(門, 광주본, 대동급본, 경인본, 내각문고본, 칠장사본, 신미본, 영남대본, 용문사본, 송광사본, 갑술본, 정사본, 행곡본, 갑오본),

ㄴ) 문 문(門, 서릉부본, 주해 중간본) (손희하 1991 : 385}.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의 새김 가운데 빈도가 많은 〈오래 문〉이 보수적인 형태인 반면, 〈문 문〉은 개신적 형태일 가능성이 많다. 『천자문 』의 전동으로 비추어 불 때, 개신형인 ㄱ)이 대다수 를 형성했 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 문〉이 전동적인 釋 이라는 사실은 『훈몽자회 』 에서도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훈몽자회』의 편자인 최세진은 한자의 釋 에 관한 한 상당한 개혁주의자여서 『훈몽자회』 법례에서 지적된 바와 갈이 ( 常 用之 釋)은 취하지 않았다(이기문 1991 : 267). 그런데 『훈몽자회 』 에 두 가지 釋을첨기한 항목들이 보이는데, 〈문 문(門)〉이 여기에 속한다. 문 문 ( 門, 俗

呼 --子 在外爲門 國語 오래 문, 예산본. 중. 4a). 이러한 예는 처음의 것이 새로운 釋이고、 첨기된 것이 보수적 釋임을 나타낸다고 한다(이기문 1991 : 267).

중세국어나 근대국어의 일반적 문헌에서 〈門〉을 뜻하는 〈오래〉형은 그 사용빈도가 많지 않았다.

문 오래며 과실납갈 (門卷果木, 번역 소학, 9. 96a),

오래뜰 쁘서르믈 게을이 호미오(不掃除門庭, 여씨향약, 9),

오래 문 (門, 동경제대본 백련초해, 2a).

따라서 국어 어휘사의 관점에서 〈門〉에 대한 개신적 〈문〉형이 보수적 〈오래〉형을 계속하여 대치시켜 온 것 같다. 더욱이 18 세기의 황윤석이 〈오래〉형을 영남 인본의 〈천자문〉에서 보았다는 점과, 또한 이 단어는 전주 아동들이 객사 대문을 가리킬 때 쓴다고 지적한 사실 등을 미루어 보면, 그는 이 어휘를 모르고 있었던 것 갇다. 그리하여 그 시기에 〈오래〉형은 어떤 사회계층의 화자들에게는 의미가 완전히 축소되어 전주의 〈객사 대문〉만을 지시하게 되었을 것이다• 16) 또한 이 형태는 변방의 방언형으로 그 명맥을 유지해 왔을 가능성도 있으니, 황윤석과 동 시대 인물인 洪養浩 {1724-1802) 의 「孔州風土記」(北塞記略)에 기록된 〈孔州(경홍)〉 방언에 〈오래〉형이 보인다. 烏喇 : 門.

16) 그러나 〈오래〉에 대한 권신규 (1939, 《한글》, 7권 2호)의 설명을 참고하면, 그것의 사용 역사는 매우 길며, 의미 또한 다양하게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죽 〈‘오래’는 門이나 이옷마을이나 宗中올 이름이니, 『훈몽자회』에 門의 訓올 ‘오래’라 하였고, 지금 國內에서도 문을 ‘오래’라 하며, 경기 지방에서도 집 근처 곧 '터서리' 문 ‘ 오래 뚤’이라 하며, 함경도 지방에서는 이웃마울올 ‘오래’라 하며, 온 종중을 ‘오래’라 하고, 어떤 지방에서는 ‘문'올 ‘올레라 하여 단단히 읽기도 한다〉 (11쪽).

그런데 홍양호나 황윤석의 기록에 나오는 〈烏羅〉 또는 〈烏喇〉는 〈오라〉의 取音字일 것인데, 이것이 〈오래〉의 변형임은 분명하다.

6 결론

종래에 황윤석의 「화음방언자의해」는 실학시대에 국어의 語源울 중국어 • 몽고어 • 梵語 및 여전어 등에서 탐구한 본격적인 어원 연구라고 평가되어 왔다. 또한 국어 연구사적인 면에서, 이것은 우리말의 적극적 비교 연구의 효시라고 간주되기도 하였다(김석득 1983 : 61). 따라서 황윤석은 가장 광범위하게 중국어 • 범어 및 주변 국가들의 언어 어휘를 들어 비교한 최초의 〈비교언어학자〉라고 칭송되기도 하였다(강헌규 1988 : 102). 이숭녕 (1972) 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그는 韻學者로서보다는 어휘론의 어원 규명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語源學者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원 연구〉 또는 〈비교언어학〉에 대한 현대적인 〈역사언어학〉의 술어에 비추어 볼 때, 그와 갇은 평가는 과장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국어 단어의 기원과 그 유래를 단순히 규명하였다고 해서 어원 연구를 하였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죽 단어의 어원론은 해당 단어가 가지고 있었던 음운 • 형태 및 의미의 역사를 초기 단계의 언어의 문법, 또는 차용어의 경우라면 차용해 준 언어의 문법에 이르기까지 시간적으로 소급하여 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연 다른 상이한 언어들과 국어를 대비하였다고 해서 〈비교언어학〉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동계 언어둘의 규명과 변화의 규칙성 및 음성 대웅의 포착이 없이는 이러한 작업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황윤석의 화음방언자의해」 및 『이수신편』 등에 대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평가는 두 가지 척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나는 황윤석이 활동했던 실학이라는 조류 속에서 그의 업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현대적 측면에서 그의 업적이 후대의 연구와 학자들에게 끼친 영향과, 오늘날의 학문 형성에 기여한 정도 몰 측 정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위에서 황윤석의 업적에 대해서 언급된 몇 가지의 표현들은 주로 전자의 척도에서만 추출된 평가로 생각된다.

후자의 척도에 비추어 본다면, 황윤석의 어휘 연구의 본질은 중국과의 밀접한 문화 접촉의 결과 중국어로부터 우리말에 들어 온 근세 중국어 차용어들의 유형과 성격을 규명하고 정리해 놓았다는 사실에 있다. 본 연구에서 필자는 이러한 황윤석의 업적을 주로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물론 그의 연구 가운데에는 玉石이 혼합되어 있어서, 이것을 세밀하게 체로 치고 정리하는 작업을 전제로 한다. 본고는 이러한 정리작업을 시도해 본 셈이다.

『이수신편』에 실려 있는 근세 중국어 차용어 24 개 항목 가운데 대부분은 원래 유성원의 『반계수록』에서 그대로 옮긴 것으로 이기문 (1991) 에서 판명된 바 있으나, 이들 차용어들의 성격과 그 쓰임을 본고에서 파악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과 정보를 근거로 하여 「화음방언자의해」 가운데 중국어 기원 차용어들의 성격을 두 가지로 분류하여 고찰하였다. 하나는 황윤석의 중국어 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된 판단 찰못의 유형과 전형적인 견강부회의 방식을 음미하였다. 다른 하나는 『이수신편』의 차용어자료를 보강할 수 있는 훌륭한 예들을 추려 보았다.

본고의 제 5 절에서는 황윤석의 「화음방언자의해」에 제시된 국어 단어들 가운데 18 세기 국어의 음운론과 형태론의 일부를 국어사의 관접에서 추출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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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 황윤석의 경제관 및 경제관련 자료

尹源鎬

1 서론

願齋黃胤錫 (1729-1791) 은 조선후기 英 • 正時代의 학자로서 性理學은 물론 수학, 언어학, 과학 등에도 조예가 깊어 여러 가지 저술을 남겼으며 이 밖에 사회, 경제 부문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사항들을 정리하여 종합적으로 망라하였다.

『願齋全 害 』 중에 수록된 경제관계 기사는 비교적 다양하며 분량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재 자신의 저술보다는 타인의 작품을 轉載한 부분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예를 들면 『이재전서』, 『理萩新 書 』 권 17 중의 「田試」, 「井田」, 「理財」, 「節儉」, 販」 등과 『이재전서』III 중의 「平壤抵瀋陽路程」, 本朝柳馨速潘溪隨錄田制署」, 「本朝韓久菴箕田遺制說」, 「農政全 書 抄」, 「玄恩先生(徐光啓)田制井田汶」 동이 이에 속한다. 이에 대하여 이재가 自述한 경제관계 기사는 상대적으로 소량이며 체계화되지 않은 채 「題跋, 「序」, 「雜耆」 등에서 標題 를 설정하여 기 술 된 이의에 『漫錄』 중에 혼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재의 경제에 판한 기술부

분은 그 자신의 특이한 입장으로부터 당시의 상황들을 관찰 기록하였다는 의미에서 나름대로의 연구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재의 경제관련 기사 중, 전재된 부분은 그 자신의 創見이나 주장과는 무관한 것이므로 본 연구에서는 이들을 배제하고 그의 자술이라 여겨지는 부분만을 자료로 활용하였다. 이재의 경제관련 기사는 경제에 관한 그의 주장과 착상을 서술한 경제관과 그 밖에 경제관계 자료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후자는 다시 경제의 운용과정과 결부된 일부 사항의 沿革을 考證한 부분, 對外交易路線 및 貸源 부분으로 나뉜다. 아래에서는 편의상 위의 사항들을 순서로 하여 각각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였다.

2 경제관

이재의 경제관은 기본적으로 王道政治의 표본이었던 經世濟民의 실천울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미 冒頭에서 살핀 바와 갇이 그는 仕道에 들어 官歷이 陵參奉울 거쳐 木川縣監에 이르는 하급관료에 그쳤으나, 仕宮의 시각으로 경제문제에 관십을 가졌던 것은 조선시대의 士族이 일반적으로 그랬듯이 지배계층의 牧民意志와 연결되고 있다• 이같은 기반에서 그의 경제관은 이른바 이상적인 治道의 구현을 바탕으로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왕조국가의 유지를 위한 의지로 표출되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왕조국가의 支採과 유지는 물질적 기반으로서의 원활한 재정확보에 대한 관십으로 나타났으며 이에 부수하여 基層民의 생활기반에 연관되므로서 그의 경제관은 경세제민, 財政 및 民生의 3 가지 측면으로 부각되어 진다.

(1) 경세제민

이재의 기본적인 경재관은 경세제민에 바탕을 두고 있다. 경세제민이

란 국가를 다스려 백성을 구제하는 것으로 왕도정치의 기본이 된다. 이재의 견해에 의하면 일체의 治道란 君王의 인격수양으로부터 그 기반이 이루어지는데 이에 관하여 『 願 齋 緖稿 』 의 『沒錄 』 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다스림의 본보기는 먼저 君主의 마음을 바로 잡고나서 均田制産을 하는 것이라 하나, 經 世 濟 民은 이들이 함께 竝行함으로써 이루어진다. 1)

그러나 구체적으로 경세제민을 위해서는 당대의 정치이념이었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여기에 군주를 보좌하는 자들의 역량이 동원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계획을 위해서는 諸 公이 힘써 합심해야 한다. 위에서는 먼저 性學울 勸勉하며, 아래로는 널리 英俊한 무리들을 끌어모아 緊精 會 神하여 유익한 말을 듣도록해야 한다. 그리하여 어진 사람을 모두 擧 用하여 민간에 한사람도 남지 않게되면 均田에 관하여 , 制産에 관하여, 掌 設, 治兵, 敎 , 典例, 法 律 을 밝힘에 관하여 능하게 된다 .2)

요컨대 이재의 왕도사상의 기반은 성리학에 근본을 두고 군주의 완벽한 인격수양을 배경으로 하되, 이를 위하여 광범한 인재 擧 用을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경세제민의 일반적인 성취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均田이나 制産 등과 갇은 經濟는 분산된 하나의 항목이 아니고 王道具現에 관한 제 사항의 일부분으로서 전체의 구성분자이므로 따로 분리해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제 의적인 제 항목과 동일한 차원에서 병존하며 상호 견인관계 내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왕도

1) 『願齋』 卷 11, 『漫錄』 中 『願 齋 全 書 』 I (1919,8, 景仁出版社影印*.이하 『全書』 1이라 함. ), 553-554쪽.

2) 위의 책, 554쪽.

구현에 봉사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경제에 관한 기타의 사상 역시 전체啕로부터 영향을 받게 된다.

(2) 재정

이재의 경제관은 국가의 재정을 배경으로 하여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위에서 말한 왕도사상의 실질적 표현이었다. 그는 특히 당시의 일반적 재정압박 요인을 지적하고 이를 해소하는 데 관심을 集注함으로써 국가 經用의 원활을 기하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時幣〉라는 형식으로써 재정압박 요인을 지적하여 그 시정을 촉구하고 있다. 그의 『漫錄』에 수록된 자료를 들어 시폐에 관한 기본 범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작년 9월, 聖策의 묻는 바에 좇아 科 의 時卵 한두 가지를 製入하였다. …… 그 하나는 근래 과거가 너무 빈번하여 官方의 溫收가 지나침에 따라 백성이 빈궁하고 재정이 바닥나려 한다. 또 하나는 현재 外方의 田政, 軍額의 郭害가 다스릴 수 없게 되었다. 그 밖에 殿下의 陵殿宮園의 빈번한 行次는 聖基의 무궁함에서 나온 것이지만 한 번의 행차로 낭비가 얼마인가 .3)

위의 예에서 보면 빈번한 科擧, 外方의 田政, 軍額, 君王의 번다한 陵殿宮園 행차 등이 당시 재정낭비의 문제접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같은 사안들은 모두 중앙정부의 재정과 직결되는 것들로서, 이재는 특히 이와 관련된 국가의 재정부담에 초접을 맞추어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위 인용문의 내용에 따라 먼저 科擧에 관한 사항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여타의 일을 論하자면 나라에는 비축한 것이 없고 평상의 비용이 몹시 궁핍한데 중요하지도 않은 관직과 무익한 용도가 저처럼 심하고 많다. 먼저

3) 위의 책, 553쪽.

大比科만을 남겨두고 經義 를 考試하는 明經科와 製述科는 반으로 하되 朱子私議에 근거하여 매 과거보는 시기의 해에 하나씩만을 처리하면 과거보는 低生의 경쟁이 차단될 수 있다 .4)

조선시대의 과거는 高麗의 제도를 답습하여 文, 武, 雜科로 대별되었다. 과거는 定期試로서 子, 卯, 午, 酉年에 실시하는 式年試, 부정기시로서 增廣試, 說聖試, 春塘 臺 試와 成均館 내의 科試가 있었다. 과거에는 또 司馬試혹은 生進試와 文科(大科)가 있고 생전시는 다시 初試, 覆試의 2 단계, 문과는 초, 복 이외에 殿試의 3 단계가 있어 모두 5 단계를 거쳐야만 급제하였던 것으로 그 절차가 번다한 데다가 후일에 이르러서는 과거를 너무 자주 실시한 결과 합격하여도 登用되지 않는 폐단이 나타났으며 순조 18 년 (1881) 에는 〈科場郭節目〉까지 나오게 되었다. 6)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는 大比科는 式年科를, 明經科는 生 員 科룰 지칭하며 製述科는 生進試의 합격자가 치루는 文科 初試를 일컫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특히 부정기시험의 횟수를 줄여 정부의 용도철감을 주장하고 있다.

다음으로 外方의 田政이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畿內롤 제의한 제 지방의 田地에 관한 대책으로서, 대별하여 宮 房 田에 관한 부분과 농민의 田音이 포괄되나 이재의 논의 중에는 민간 관련부분이 배제되고 宮房 부분만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 밖에 諸宮房에 대한 免稅折受의 액수는 大典에 新舊增減의 제도가 없는 것은 아니나, 田結에 한도가 있는데 궁방을 점점 더 설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령 賓 曆이 萬年이나 무궁하게 되면 나라 안의 것이 모두 折受되어 나라는 손을 쓸 수 없게 될 것이다 .6)

4) 위의 책, 같은 곳.

5) 『純 祖實 錄』, 권 21, 純 祖 18 年 , 5月 丙 寅 , 13-15 쪽 참조.

6) 주 2) 와 같음.

원래 宮房田은 왕실의 일부인 宮室과 왕실에서 分家 獨立한 宮家 에 급여한 田土였다. 職田에 경제적 기초를 두었던 宮房 은 明 宗 때에 職田制가 유명무실하게 되고 임진왜란을 계기로 완전히 폐지되자 그 경제적 기초를 확보하기 위하여 제정되었던 것인데, 이후 국방상의 요충을 제의한 전국 각지에 걸쳐 토지를 겸병하였다. 이들에 의한 토지겸병은 농민경제를 위협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재정궁핍, 田政의 문란을 초래하였으므로 英祖 20 년 {1744) 에는 『領 大典 』의 규정에서 궁방에 대한 토지급여와 수취액을 법제화하였다.7) 이에 따라 궁방전은 出稅田과 免稅田(永作宮屯=有土免稅丑 과 元結免稅=無土免稅田)으로 구성되었으나, 給與免稅種別(有土와 無土)이 명기되지 않은 데다 이들 허접을 바탕으로 出稅田의 은닉과 특례적 給與 등이 이루어져 궁방전의 정비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되었다. 궁방전의 폐단은 조선조 전시대에 걸쳤던 것으로서 『萬機要 에 의하면 순조 9 년 (1809) 에 이르러서는 전국의 전답 1,456,592 結 중 37 , 926 結이 8) 宮 房 田化하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이재는 궁방전의 겸병이 확대됨에 따라 折受로 인한 국가재정의 잠식확산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軍額이란 軍役에 관련된 人員數롤 말한다. 임전란 이후, 備兵制의 실시로 放軍收布가 이루어지면서 立役을 원치 않는 軍役義務者는 규정된 番布믈 납부함으로써 役을 마치게 되었다. 따라서 軍料는 국고에서 지급하게 되어 良役은 국방상의 의의보다 收布라는 재정상의 의의로 변형되었고,9) 軍 額의 缺損은 재정압박의 중대한 요인이 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이재는 당시 만연하고 있었던 避役 사례를 민간 종교와 연관시켜 지적함으로써 軍 額의 확보책을 강구하고자 하였다.

佛 敎는 전후 수천 년에 걸쳐 극성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은 쇠되하였

7} 『續大奧』 2, 戶 奧 諸 田, 1974, 景 仁文化社 影印本, 141-142 쪽.

8) 『萬機要覽 』 財 用 編 2, 田結, 1972, 경 인문화사 영 인본, 202 쪽 참조、

9} 雲學 , 『韓國 史 近世後 期 露 』, 1971, 乙酉文化社, 210 쪽

다. 그러나 兒徒는 나라의 씀씀이 때문에 절박한 문제가 되고 있다. 대체로 크게는 군사의 규모이며, 작게는 紙物이다. 따라서 혹자는 말하기를 이들을 쫓아 還俗케 하되 法令으로 充軍하거나 종이를 만드는 일에 종사케 하면 인구가 늘고 쓰임새가 종전과 갇을텐데 무엇 때문에 환속시키지 않는가 말한다. 이갇은 주장은 옳은 말이다. 온 나라를 통털어 兒徒를 일조일석에 환속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만약 年限을 정하여 立制하고 새로 머리깍기를 금하면 수십 년 안에 兒徒라는 자들이 없어질 것이다. …… 居士祠堂은 중도 아니고 여중도 아니며 販佛賣禪하고 貢試를 피하며 軍役을 기피한다. 비록 비럭질을 하더라도 가정의 낙이 있거늘, 자녀를 끌고 다니며 놀고 먹으니 위로는 민간의 호적에 빠져서 도움이 못 되고 아래로는 寺 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같은 것을 금하는 것은 다루기 쉬운 일인데, 나라의 政務를 다스리는 사람과 軍額울 꾀하는 자가 어찌 한마디 말을 않는가. 근년 元台仁의 손자가 호남지방을 接撫할 때 이들을 마을에서 축출키를 임명하여 몰아내니 湖西 경내 대로상의 쉬는 곳마다 그득하였는데 이를 금함이 어렵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를 啓請하여 말끔히 배제하지 않음이 가석하다. 10)

위에서 말한 避役者는 僧 , 假僧으로서의 削炭한 兒徒, 居士 등을 일괄하는 것이나 이들의 피역은 원래 정부에 의한 부담과중에서 주로 기인한 것이었다. 조선후기의 양민은 과중한 부담으로 인하여 권문세가에 投托하거나 僧籍에 들어가 이를 회피하였으며 그 경향은 갈수록 십화되었다. 11) 다만 이재는 조선시대의 仰佛政策을 은연중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둘 · 부터 磁徒로 卑下하고 이들의 還俗울 주장함으로써 財源確保策울 강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갈은 지적은 兒徒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당시 향교를 배경으로 형성된 避役에까지 이르고 있다.

邑士로서 縣學에 속하는 자를 學生이라 하고 鄕校에 딸린 자를 校生이라

10) 『이재속고』 권10, 『沒錄』 上. 『全書』 I, ,518쪽.

11) 『韓國學大百科 事 典』 (1) , 1972, 을유문화사, 480 쪽 참조.

하였는데 향교란 文廟가 있는 곳이다. 임전란 뒤에는 이를 폐지하여 인원을 두지 않았으므로 〈學生〉이라는 명칭은 京中의 四學에만 있게 되었다. 교생의 칭호는 사대부 자제들이 접차 싫어하여 피하게 되었거니와, 그 시작은 편한 것을 취하고 게으름에 버릇이 되어 향교에 들어 勤業하지 않으려 함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향교는 良民逃役之所로 변하였다. 12)

그러나 軍役과 연관된 재정압박의 해결책은 軍額 이의에도 軍 의 개혁이라는 차원에 적극적인 비중이 두어졌다. 군제의 개혁이란 임전란 이후에 설치된 訓練都監, 御營麻, 抱戒 禁衛營, 守禦鹿을 〈古制에 따라 그 軍權을 종전의 五衛에 되돌려 실제적인 직무를 행사케 하되 새로 세운 五軍門을 혁파해야 한다〉 13) 고 하였다. 이에 관한 내력은 다음 자료들에 자세히 제시되어 있다.

관제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대한 것으로 五衛가 있거니와 다시 五軍 을 창설하였다. 이 두 가지는 그 하나를 의당 혁파해야 한다. 오위의 법은 옛날 兵法의 좋은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先人둘은 舊例를 그대로 답습하여 이를 없애지 않도록 청하였다. 軍職의 虛名을 공연히 설치하여 給料로 내어주는 쌀을 허비하기보다는 오군문과 여러 가지 養兵의 법규를 모두 혁파하여 그 칙을 五衛에 되돌려야 한다.14)

지금 經用이 결핍하여 朝廷에서는 變通을 하고자 한다. 이에는 먼저 요건치 않은 官位를 없애야 하며 무용한 비용을 아껴야 한다. 이에 관해 한두 가지 말하자면 오군문의 所用은 특히 많거니와 이는 본시 하루 아침에 혁파 할 수 없다. 오위군직은 명의가 있어도 실체가 없어전 것인데 이를 두어 어디에 쓸 것인가. 만약 오위의 舊制를 부활하여 變通한다면 오군문은 明宗 이전과 똑같이 하는 것이 가하다. 그렇지 않으면 軍職의 祿울 無斷坐食하는

12) 이계속고』 권 12, 『漫錄』 下, 『全 睿 』 I , 578쪽.

13) 위의 아 권 11, 『沒錄』 屯 『全 書 』 I, 553쪽.

14) 위의 책, 같은 곳.

자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15)

오군영의 설치로 인한 軍備의 과대한 확장과 軍編制의 연계성 없는 혼란은 재정의 핍박을 가져온 원인이었다. 군영의 신설은 자연 軍額의 증가 를 수반하여 備兵制를 바탕으로 精兵養成울 지향하던 당시의 상황 하에서 재정적 지원이 요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도의 재정난에 처해 있었던 당시의 정부 입장에서는 이를 보장할 능력이 없었다. 16)

결국 무용한 관직은 오군영 설치로 확대되어 재정결핍을 초래했으므로 임전란 이전의 구제인 오위로 회귀하는 것만이 이를 해소하는 유일한 방안임이 이재의 주장이었다.

이 밖에도 왕실의 經用에 관하여, 임금의 번다한 陵殿宮園 行次가 재정압박 요인으로서 冒 頭의 인용문에서처럼 막대한 비용을 요구한다는 지적과 함께 이재는 〈京外의 각 陵에 각각 여러 인원을 두는 일 등을…… 불가불 시정할 사항〉17) 이라 지적하였다. 왕실의 재정지출에 관해서는 〈 王 子大君, 公翁主가 天死하는 경우에까지 제사를 지내는 일〉은 물론, 〈祖宗大統의 중대함과 祖功宗 德 에 연유하여 임금의 宗廟 또는 遠 祖 를 合祀하는 사당에서 제사를 폐하지 않음〉 18) 을 대담하게 지적하여 그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재가 일반적인 재정압박 요인의 해소 이의에도 임금의 陵 殿宮園 행차를 위시, 遠祖 를 合祀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재정궁핍올 이유로 그 폐지를 주장하였던 것은 당시의 재정궁핍상이 극도에 이르렀음을 웅변하는 것이며, 이같은 이재의 입장은 士族으로서 또는 仕窟者으로서의 哀情의한 표현이기도 하다.

15) 위의 책, 갈은 곳. 『全 』 I , 554쪽.

16) 『韓國史 近世後期 篇 』, 211쪽.

17) 주 13)과 같음.

18) 주 15)와 같음.

i t에 이르기를 나라에 삼 년 동안 쓸 것이 비축되어 있지 않으면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 듣자하니 심지어 반 년 쓸 것도 바축되지 않아 緩 急 을 벗어났으니 장차 어찌할 것인가. 무릇 여기서 한 말은 일상의 것인데 현재의 재상들은 이를 思諱로 생각하는 것 갇다. 19)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이재는 정부의 재정궁핍이라는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관한 폐해를 지적함으로써 그 해소책을 강구하고자 하였다. 정부의 재정에 관한 사항이야말로 이재가 견지하였던 경제사상의 핵십이었다.

(3) 民生

이재의 민간경제에 대한 관접은 앞서 살핀 경세제민을 위한 한 支柱로서 민간과 직결된 경제문제에 대응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願庵吳公傳』에서 그가 인용한 「奇公祭文」 중의 〈海溫水早, 試役傾 重 , 量 田不均, 軍民侵漁〉 20) 등을 범주로 하여 이에 관한 관심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민생에 대한 폐해 요인의 제거 및 해소에 있어서, 이재는 여전히 정부의 입장에서 국가 우선의 의지에 따라 이들을 부차적으로 취급하였다.

예컨대 凶荒의 구제에 관하여, 丙午年의 荒歡對策으로 販植이 논의되었을 때에 그는 監司 金光默에게 보낸 答 睿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같은 흉년에 出納올 節減하여야 할 때를 맞아 販 懷 울 논의함에 大政이 경 솔히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설령 精排還分이 이루어전다 하더라도 이를 꼭 진휼할 것은 없다. 21)

19) 주 13)과 같음.

20 ) 『이재속고』 권 11, 傳 , 願庵吳公傳」. 『全 書 』 I , 226쪽.

21 ) 위의 책 권4, 『答金藍司光默書」. 『全書』 I, 89쪽.

이재의 心眼에는 흉년으로 인한 백성의 진휼보다는 정부의 재정지출이 더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다만 〈대체로 백성들의 일반적인 情況은 비록 풍년이라 하더라도 위로부터 베풀어주는 것이 많음을 좋게 여긴다. 울 같은 해에는 이같은 願望이 더욱 철실한데 만약 그 뜻이 어그러지면 반드시 怨望이 뒤따르게 되므로〉 22) 진휼에 대한 구체적 사항들의 논의가 필요함을 주장하고 있다. 이갇은 차원에서 그의 전휼대책은 정부 관료의 주관하에서 世論, 농민의 窮之 정도, 농민의 경제기반 등을 정밀히 고려한 뒤 이를 구제하되 정부의 濟民意志 宣揚을 그 궁극의 지표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진휼은 私悠이 아님이 명백하다. 그러나 그 중의 曲折은 의당列邑守令의 手分形勢 안에서 융통성 있게 운용토록 함이 어떨지. 近例로서 이른바 之次, 尤莊의 구별, 경작지의 소유 여부, 이것이 그 대략이다. 다만 전휼울 하게 하더라도 오직 잘 갖추고 取捨할 일이다. 찬찬하게 빈룹 없이 하면 왕실이 기한을 물리고 等數를 나누어 매기는 덕행도 넉넉하게 되며, 이들을 병행하여도 잘못됨이 없다 .23)

그는 이같은 기본 입장을 바탕으로 기타 민생과 연결된 사항들을 적으나마 지적하여 시정하고자 하였는데 그 실례를 收取와 契로써 들어보기로한다.

조선 후기에 있어서의 수취 문제는 軍政, 田政, 還穀에 걸쳐 극단적인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었지만 이재는 그갇은 문제들을 전면적으로 다루기보다는 미세한 차원에 중접을 두고 예컨대, 度量衡이나 量 田 등에서 문제의 소재를 발견하여 거론하고 있다. 이재의 도량형에 관한 논의는 그 연혁, 由緖에 속한 내용이 『漫錄』과 『理萩新 書 』에 상세히 제시되어

22) 위의 책, 같은 곳.

23) 위의 책, 갈은 곳.

있는데 ,2 -4) 이 방면에 있어서 이재는 납달리 출중한 식견과 안목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는 이에 관한 제도적 폐해를 다음과 갇이 지적하였다.

24) 『이재속고』 권11, 『 漫錄 』 屯 『全 睿 』 l, 542, 550, 551 쪽. 『願 齋 全 睿 』 II 『理薇編』 권 21, 算學入門 부분의 量率 衡率 斤評, 度率 附律度 量 衡圖 漢銅料尺寸推底 術, 本國續大典 地亭 石斗 量 , 田結料 등 참조、 『理萩新 書 』 권 22- 23 에는 度量衡의 실용을 위한 數理가 제시되어 있음.

국가와 관련된 민간의 일을 살펴보건대 尺度의 길이, 말의 크기, 저울의 무게는 이에 이르러 더욱이 詳定해야 하나 眞黃鍾을 복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만약 同律과 도량형의 迫炫를 조금이라도 본뜨게 한다면 나라에서 그 제도에 상이함이 없게 하여 백성이 현혹되이 사용치 않도록 해야 한다. 25)

위의 인용문에서 진황종이란 각종 도량형의 원형을 규정한 중국의 『源本』으로 당시 그 원리에 배치되는 도량형이 시행되어 폐해가 발생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어 〈戶曹에서 銅으로 주조한 布出尺은 違守印尺에 비해 6 푼 남짓 긴데, 이는 甲戌年의 이른바 該用布尺으로서, 이에 근거하여 만들어낸 量 尺은 원래 違守舊尺보다 길기 때문에 이제 甲戌尺과 違守尺을 모두 버리고 따로 극히 정밀한 周尺을 만들되 이에 근거하여 다시 布尺, 量 尺을 제작하여 백성이 法度가 있음을 확실히 알게 해야만 爭端을 없애며 사리에도 맞는다〉고 하였다 .26) 요컨대 이재는 收取에 관한 폐해의 기본을 도량형의 착오에서 발견함으로부터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그 중에서 도량형의 사용에 관한 실제적인 폐해는 다음과 갇이 지적되고 있다.

그런데 역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祖宗의 제도는 크게 문란되어 斗升, 尺度는 곳곳마다 서로 다르게 되었다. 監營이 일찍부터 各 邑의 料子를

25) 『이재속고』 권11, 『漫錄』 中. 『全書』 l 550쪽.

26) 위의 책, 같은 곳.

거둬들여 이를 고치려하나 각 읍에서는 틀림없이 小料으로써 上送하므로, 大料은 숨겨져서 나타나지 않고 貢稅 때를 기다려 이를 사용하므로 민폐가 극심한데 이는 거듭 엄히 다스려야 할 일이다 .27)

인용문 중의 斗子란 이른바 〈石〉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官府는 小斗을 써서 15 斗롤 담아 平石이라 하였고, 民間은 大料을 써서 20 두를 담아 全石이라 하였으므로 28) 기본적으로 수취의 기준이 민간에게 불리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상급 관부의 이에 대한 시정은 하급 관청에 결부된 이해관계로 인하여 물론 시정될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도량형의 기본이 혼란되어 있었으므로 조선후기의 불합리한 수취체계에 있어서 도량형의 사용은 항상 민간에게 불리한 쪽으로 귀결되었다.

관부의 상황을 보건대, 백성에게 거둬들일 때는 긴 자, 큰 말, 무거운 저울을 쓰고 민간에게 나누어 줄 때에는 짧은 자, 작은 말, 가벼운 저울을 사용한다 .29)

27) 위의 책, 551쪽.

28) 다만 嶺東地方에서만은 小料울 사용하였다. 『願齋遺稿』 권12, 雜著 , 料石 It.. 『全書』 I , 280쪽 참조 `

29) 주 25)와 같음.

도량형에서와 같이 田地에 대해 收稅할 경우에도 수탈의 폐해가 뒤따랐음을 이재는 지적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田地에 대한 과세는 대체로 結負法에 따랐는데, 이는 토지면적과 그 수확량을 이중으로 표시하는 독특한 계량법으로서 穀禾의 수량을 기준으로 하여 穀 禾 1 權울 〈抱〉, 10여 를 〈束〉, 10 束울 〈 負 ) >, 100 負 를 〈結〉로 하였다. 30) 수세시에 殘餘의 수를 全數에 올려붙이는 폐단은 다음과 같이 지적되고 있다.

30)結負法의 단위명칭은 結負束祀를 원칙으로 하되 楓 面, 積 으로도 불 렀다. 1 祀… 1 平方 量 田尺 ·•· 1尺 1束 ···10 平方 量 田尺 · · • 10尺. 1 負 ... 100 平方量田 尺 · 亂 1 結… 10.000 平方 量 田尺 ...積 . 震檀學會 , 『 韓國 史 朝 鮮 前 期 , 1971, 398쪽.

結負로서 수세할 때에 관해서 말하자면, 당초 측량하여 얻은 本數에 등급울 정함이 가하다. 근래 外方 고을에서는 왕왕 殘餘의 수를 全數에 올려 붙이는데, 예를 들면 9 부 8, 9 속은 10 부로 하여 칭수액을 늘리고 또 9 부 1, 2 속도 10 부로 울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자질구레한 이야기이겠지만 리에서 면으로, 면에서 읍으로, 읍에서 도에 이르기까지 늘어난 칭수액이 얼마나 될 것인가? 이 역시 조정에서 의당 알아야 할 일이다 .31)

이상에서 살펴본 수취관련 문제는 정부에 연관된 민생의 한 단면에 관한 것으로서 이재의 소망사항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지방관원으로 재직하였던 당시의 이재에게 있어서 해결 가능한 민생관련 사항은 스스로 관할하고 있었던 행정구역의 범위 안에서 직접 현안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이같은 차원에서 契에 관한 문제는 이재에게 있어서 가장 가능한 실천사항이었다. 이재는 木川 縣監 재임시 〈官奴 卑使令裁에 관한 殘辨〉가 尤基함을 지적, 〈木川 고을은 땅이 群薄하고 백성이 가난하여 他邑과 비교가 되지 않는데, 男子인 官奴使令은 倉直 등의 장소에 왕래하거나 파견될 수 있지만 그렇지도 못한 가련한 관비의 딱한 정황〉 32) 을 들어 이를 구제하고자 하였다.

대체로 使容 本官에 관한 각 항목의 酒食과 迎送의 段落과 바느질, 빨래, 다듬이질, 뭍갇기, 調茶, 泥葉之役 및 巡營移屬 한 가지만도 누가 맨손으로 필요에 응할 수 있겠는가. 他邑의 技女가 있는 곳으로부터 말하자 면, 여전히 索錢하여 自充을 하는데 本邑은 늙어서 추한 것과 계집종뿐이어서 굶어 죽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다. 어느 곳을 의지하여 이를 유념할 것인가. 그 심한 자는 京鄕의 公私負債가 산처럼 많아 다스릴 수가 없다 .33)

31) 주 29)와 같음.

32) 위의 책 귄4 題跋. 木 縣官奴契案」. 『全書』 I. 391쪽.

33) 위의 책, 같은 곳.

목천현의 관비들이 처해 있었던 궁상의 해소책은 이재의 주요 관심사였던 鄕約, 洞契 등에 관한 사항들과 관련되며 34) 이들에게 자구책을 제시하는 것으로 발현되었다. 계란 상호간에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일종의 민간협동단체인데 여기에서 이재는 관비들의 共 濟 機構로서 의 계를 구상하여 출자금, 원금, 利殖, 공동의 경제기반, 관리기구 등에 관한 개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다만 西面의 공비에 속하는 자와 京兒는 40량을 내게하되 10량은 우환이 있을 때 돌려 주고 30 량은 10명의 牌로서 계를 만드는 데 지출한다. 원금과 이자가 불어나 영구적인 公뾰의 바탕으로 하기 를 입안하되, 특히 공비의 우두머리가 이를 관리한다. 노비 중에서 바탕이 부부지간이나 다름 없는 경우 는 한 가지로 합침도 가하다. 이에 따라 首奴都管은 1량당 그 절반을 이자로 거두어 그 액수가 많아지면 땅을 사되 조금도 손실이 나타나지 않게 해야 한다. 이는 비록 작은 일이지만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행하고, 가까운 것으로 먼 일을 이룩하며, 하찮은 것으로 尊 大한 것을 추진하는 계제이다. 35)

이재의 민생에 관한 관심의 표현은 이 밖에 흔히 발견되지 않으나, 관료의 食虐과 관련된 부분이 소수 散見된다. 권문세가, 하급관속의 수취와 연결된 侵漁와 민생파괴의 사례로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또 貢稅를 배로 운반할 때 勢 家 私人이 蘭書를 가지고 을러대니 彼葬한 고울의 수령이 많이 바쳐 실으려 한다. 色吏와 결꾼배도 백 가지로 농간을 부려 필경 백성에게서 더 많은 것을 거두니 이제 위험이 절박하기 그지 없다. 곁꾼울 泉窓 하는 법이 문서에 있거니와 세가사인의 폐해는 불가불 칭벌해야

34) 위의 책 권4, 序, 木川西面院洞約案序」.全書』 I , 379쪽. 위의 책 題跋, 「題木西面雲田里洞契案」, 391쪽. 위의 책 권7, 織警 「木觸約申筋鍾告文」 『全書』 I , 455쪽 참조.

35) 주32)과 같음.

한다. 36)

이 밖에 당장의 時幣로서 이재는 〈관리의 妙迫으로 도적의 窟穴에 投身하는〉 사례 37)를 지적하거나, 〈 兪萩과 捕盜麻의 결탁〉 38)을 들고, 사회제도로서는 막연하게 〈노비세습과 매매〉를 거론 39)하는 이의에 달리 時郭를 지적하지 않고 있다.

조선후기 사회의 민생은, 특히 영·정조간에 심화된 정부, 관료, 권문세가, 하급관속 등의 수탈로 인하여 파국에 직면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재의 저술에서는 이른바 〈隣族隣微〉, 〈黃口策丁〉, 〈白骨徵布〉 등 기충민 수탈의 내용이나 심지어는 그에 관한 용어조차도 기술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는 심히 託異로운 일이다.

3 沿革考證

고증, 연혁에 관한 부분은 경제사실의 실상을 밝히거나 서술한 것으로서 모두가 경제제도의 내용에 관계되어 있다. 구체적으로는 箕子田, 常平羅視 화폐, 도량형 등이 그 주제로 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일반적으로 밝혀진 부분과 아직까지 분명하게 해명되지 않은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자에 관해서는 이를 번다하게 거론할 일이 아니므로 40) 여기에서는 그 내용의 해명이 아직까지 미흡하다고 생각되는 常平躍躍과 周尺의 本源 부분만을 추려 금후의 연구자료로 제공하고자 하였다.

36) 위의 책 권 11, 『漫錄』 中. 『全 睿 』 I, 551쪽.

37) 위의 책 권 12, 『漫錄』 下. 『全 睿 』 I , 575쪽.

38) 위의 책 . 『全 書 』 I , 574-575쪽.

39) 위의 책 권 1 0, 『漫錄』 上. 『全 』 I , 527쪽.

40) 箕 子田」에 관하여서는 『願齋全 睿 I , 542 쪽. 화페에 관한 錢貨輕 重 說」은 281 쪽, 興 總 縣古印 記 」는 452-453 쪽, 儀妙說」은 453-454 쪽. 度 量 衡」에 관해서는 541-542, 550, 551 쪽을 참조할 것.

(1) 常平躍躍

備局의 諸 大臣이하 및 본청 堂郞은 모두 오늘날 常平躍躍이 우리나라에서 어느 때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하므로 이를 고증하여 제시한다.

내가 『陳齋集』을 살펴보니 숙종 신묘년에 良役變通으로 인하여 獻議할 때 누군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五衛制度는 國典에 룡見되나 상세한 것은 알 수 없고, 倉穀躍躍의 규칙도 어느 때에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들 일은 모두 나라의 大政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의당 실록에 기록되었을 텐데, 듣자 하니 春秋館 소장의 (실록에) 그것이 있다 한다.……그런데 일찍이 『高麗史百官志』를 들춰보니 穆宗朝에 司農卿울 폐하였는데 忠宣王 때에 典農寺로 改置하였다. 고려사의 世家에 忠宣王을 기록하여 말하기를, 漢의 常平倉울 본보기로 하여 백성과 躍躍함으로 써 급한 경우를 주선하였으되 이를 사사로이 다루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 이름을 儒積倉으로 고쳤는데 공민왕이 舊名을 복원하여 司農寺라 하였다가 다시 전농시로 고쳤다. 司農寺는 籍田으로서 이를 令隸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제도를 따라 太宗 元年에 전농시로 고쳐 籍田을 관장하고 祭需를 올렸으며 常平倉도 이에 속하였다. 또 販悼廳이 있었는데 『經國大典』이 시행되자 典農의 직이 폐지되고 실무가 戶 曹 에 귀속되어 宋 元豊의 官制와 같았다. 興仁門 밖 楊州 땅에는 典農의 옛 자리가 있 거니와, 죽 東籍田이 바로 그것이다. 근년, 상평, 진휼 2 청은 宣惠廳에 합쳐졌다가 갑자기 均役顧에 병합되었다. 이상 본조에 관한 연혁은 『龍飛御天歌』 注에 나오는 것인데, 이 기록을 근거로 하자면 상평조적은 실제로 (고려) 忠宣에서 시작되었고 大典이 만들어지자 이내 호조에 이관되어 다시는 스스로 시〔寺〕를 이루지 못한 바를 고증한 사람이 드물다. 41)

41蔕 『이재속고』 권12, 『漫錄』 下. 『全 書 』 I, 572쪽.

(2) 周尺本源

내가 明朝野史의 『昭代典』을 본 적이 있는데 洪武 4 년 {1371) 에 만든 「玉圓記」가 실려 있었다. 4 方은 1 촌 5 푼으로 〈廣運之記〉라는 글이 씌어 있었으며 그 모양이 극히 작아 우리나라의 小啓字와 흡사하였다. 나라를 창업할 당시 玉을 갈아 문체를 만들었는데 틀림없이 周尺 중에서 극히 정밀한 것을 사용하였으므로 약간의 차이도 있지 않다. 만약 이 印跡을 구한다면 그 모〔角〕를 재어 周尺으로 삼을 수 있으며 屈田에 사용할 수 있다. 대체로 중국에서는 주척으로 臥를 계량하는데 우리나라 社尺 역시 주척이며 4 척 7 촌 7 푼 5 리이다. 李公(願命)이 『경국대전』에 있는 구제를 내세워 違守舊尺, 죽 주척 4 척 7 촌 7 푼 5 리를 사용하고자 하였거니와 甲戌量尺은 2 촌 2 푼 2 리 4 4 를 늘렸는데, 이는 포백척의 1 촌으로서 주척 寸分의 수에 해당한다. 1 等田尺은 위에서 말한 周尺 4 척 7 촌 7 분 5 리로서 포백척 2 척 1 촌 4 푼 6 리이며 (原注 : 죽 주척 2 척 2 촌 2 푼 4 리 4 호) 따라서 포백 1 척은 1 等田尺의 4 푼 6 리 6 호, 죽 주척 2 촌 2 푼 2 리 4 호 4 사로서 위에서 말한 갑술년에 길이를 늘린 것이다. 갑술년에는 이렇게 길이를 첨가하였는데, 사용하는 양척은 4 척 9 촌 9 푼 7 리 4 호 4 사로서 5 척에 비해서는 겨우 2 리 5 호 6사가 적을 뿐이다. 이에 따라 숙종 정해년 (1707) 에는 宜寧縣에 松類緊補本을 刻設하여 5 척을 1 척으로 바로 잡았다. 이는 중국의 舊法, 길이 5 척과 넓이 5 척을 1 보로 하는 것에 근거한 것으로서 오늘날의 景田法으로 말한다면 1 보로써 1 척으로 당하게 하는 까닭이다. 己亥年에 논의된 것과 호남의 인사들이 따르고자 하는 갑술년 것에 연유되며, 李公은 혼자 『경국대전』의 제도를 지키려 하였다. 그런데 明朝의 「玉圖記」 1 촌 5 푼인 네모라는 것올 李公이 보려고 內府睿籍에서 간행한 것을 詳考하여 근거로 삼았으나 필경에 이를 자세히 밝혔는지는 확실치 않다. 내가 丙申年가 올에 月沙의 후손 李陽源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우연히 월사가 天子를 배알하였을 때 황제가 하사한 『通鑑節要宋元續記』 한 峽을 발견하였다. 책 머리마다 朱文으로 〈廣運之 〉라 하였다. 이것이 바로 李公이 상고하여

근거로 삼고자 한 것인데 내가 눈여겨 주의하여 보아두었으나 이치대로 模寫하여 가져와 考古의 자료로 삼을 듬을 갖지 못하였다 .42)

4 대외교역노선

조선시대의 대의관계는 중국 및 일본에 대한 事大, 交隣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 중에서 중국에 대한 事大關係는 종전의 전통이 답습되어 온 것으로서 丙子胡亂 (1637) 을 분기점으로 그 내용에 약간의 변동이 생겼으나 기본적인 근간에는 크게 변함이 없었다. 사대를 위한 조공은 실제에 있어서 일종의 公貿易으로 英祖 4 年 (1728) 의 경우를 보면 莘布, 細布, 綿綿 紙物, 紋席, 獸皮가 獻上된 이의에 沿路 및 北京의 淸國官員에게 주는 〈禮單〉이 있었으며 鋼殿, 緖皮, 細, 組布, 結絲, 銀, 毅馬등이 代償으로 〈賞賜〉되 었다. 43)

이재가 제시한 대의관계 交易路線은 사대 및 交隣에 의거하여 중국 및 일본 방면으로 대별되나 후자의 경우는 경제와 무관한 通信使行路程이며 더구나 顯宗 9 年 (1668) 姜流에 의해 간행된 『看洋錄』을 轉寫한 것이므로 이 부분은 배제하고) 중국 방면에 관한 것만을 정리하였다. 또 중국 관련 자료로서도 〈平壤-瀋陽路程〉은 仁祖 14 年 (1636) 에 尹德憲이 쓴 『北行日記』의 轉寫部分이므로 이를 正文으로 다루지 않았다. 45)

42) 위의 책 권 11, 『漫錄』 中, ,,550쪽.

43) 『轉國史 近世後期窟』, 112쪽.

44) 『願齋全 容』 m, 日本海路, 192-193쪽.

4,) 위*의 책, 平壤抵陽路程, 185쪽. 平壤 → 順安 → 安州 → 嘉山 → 笠江亭 → 定州 → 川 → 龍川 → 白馬城(義州) → 中江 → 三江灘 → 九 城(小川 지남) → 金石山(山下川上) → 鳳 ( 川 지남) → 壅北河( 을 지나 沙正) → 通 (城을 지나 川) → 第三 (사이에 2 개의 大川) → 連山堡 → 嶺 → 四鏞臺 → 石巖

→ 三遼河 → 九 臺 → 三炯臺(사이에 3개의 大川) → 四炯臺→ 安平村 → 梨木 臺 → 太子江 → 漏泥堡 → 案伊堡 →沙河鎌 → 白 → 混于江 → 瀋隆城

기타 대중국 교역노선은 陸路와 海路로 나뉘지만 정세 및 기타 상황의 변동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각 노선에 관한 사항을 이재의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갇다.

(1) 陸路

(가)北京路程 46)

이재의 자료에 의하면, 北京路程은 원래 契丹의 崇熙(重熙, 1032-1055) 이후 등장된 노선으로서 대중국 교역관계의 幹線이었다• 다만 병자호란 이전까지 조선의 대중국관계가 안정적이었을 때에는 이 노선이 사용되었으나 병자호란 뒤 仁祖의 南漢山城 出城 (1638) 이후에는 당시의 淸인 瀋陽에만 往還하였고, 淸 世祖가 入關한 뒤 仁祖 23 年 (1645) 부터는 北京으로 進 貢 하였는데 그 路程은 대략 조선초기와 비슷하였다 .47)

義州 鴨綠江 30里 → 九連城 60里 → 蕙秀站 30里 → 鳳凰城 50里 → 松站 70里 → 通速堡 60里 → 連山關 75里 → 狼子山 70里 → 新城 60里 → 十里城 60里 → 瀋陽 城 65里 → 孤子家 80里 → 白旗堡 75里 → 小里山 70里 → 硏廣寧城 70里 → 十三 山 120里 → 高橋堡 60里 → 寧遠(現 興城)衛 60里 → 東關驛 60里 → 浪水河站 70里 → 山海關 80里 → 檜關 85里 → 永平村 60里 → 沙河府 100里 → 覽潤 85里 → 玉田 100里 → 邦均店 120里 → 禪城(通州에서 北京까지 40里) →

46) 위의 책 , 北京路程 186-187쪽.

47) 韓國史 近世後期編』 , 111-112쪽 참조.

南小館

義州에서 北京까지는 總 1, 985里였으며, 이 중 山海關에서 北京이 670里였다.

(나) 中原進貢路 48)

이 노선은 明代에 있어서의 對中國交易路線으로 北京路程에서와 갇이 北京을 종점으로 연결되었다.

荊義站(압록강 넘어 桐門) 20里 → 鎮江城 20里 → 九連城의 湯站 70里 →鳳凰城 40里 → 金石山의 鎭束堡 60里 → 鎭夷堡 60里 → 草河口의 連山關 70里 →甜水站 30里 → 遼東 90里 → 陽 → 鞍山 60里 → 海州衛 60里 → 牛家庄40里 → 沙嶺 60里 → 高平驛 60里 → 盤山驛 50里 → 廣寧 50里 → 閭陽驛 30里 → 十三山 40里 → 小凌河 60里 → 杏山驛 38里 → 連山驛 50里 → 寧遠衛 50里 → 曹家庄 15里 → 東關驛 50里 → 沙河驛 36里 → 前屯衛 50里 → 高嶺驛 50里 → 山 海關 50里 → 深河驛 6里 → 撫寧縣 40里 → 永平府 70里 → 沙河驛 70里 → 玉田縣 80里 → 薊州 80里 → 三河縣 70里 → 通州 70里 → 北京 義州에서 遼東까지 420里, 山海關까지 1,299里, 北京까지는 1,979里이고, 여기에 漢 에서 義州까지의 거리 1,186里를 더하면 한양에서 북경까지는 총 105息(3,165里)의 거리가 된다. 따라서 1 일 3 息 (90里)의 행로로 보아 35일의 程 을 필요로 하였다.

48} 위의 책, 中原進貢路程, 190 쪽.

(2) 海路 49)

광해군 13 년부터 後金과의 관계로 朝 • 明간의 통로가 끊어지면서, 漢陽-北京간의 동로는 宣川 宣沙浦로부터 시작하는 해로를 거쳐 登州에 상륙하여 그곳으로부터 육로로 萊州府,濟南府, 靑州府, 德州, 景州, 漆州를 거쳐 北京으로 들어 가는 길을 택하여 명과의 通交룰 계속하였다. 원래 명대 초기의 朝貢路는 海路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恭愍王 21 년 (1372년) 3 월에 고려를 떠나 入明하였던 洪師範 일행이 귀로에 폭풍을 만나 39 명의 익사자를 보게 된 일대 불상사가 발생한 이래 폐지되었다 .50) 이 노선은 광해군 13 년 (1621) 이후 재개되었으며 종접은 육로의 경우와 갇이 북경이었다.

宣川 宣沙浦(여기서 發船) 60里 → 鐵山 椴島 140里 → 車牛島 500里 → 鹿島600里 → 石城島 300里 → 長山島 200里 → 廣鹿島 308里 → 三山島 200里 → 平島 1000里 → 寶城島 200里 → 匙機島 200里 → 廟島(이하 陸路) 80里 → 登州 80里 → 黃縣 60里 → 黃山驛 60里 → 朱橋驛 60里 → 萊州府 70里 → 灰埠驛 80里 → 昌邑縣 80里 → 濰縣 50里 → 昌樂縣 70里 → 靑州府 70里 → 金嶺驛 70里 → 長山縣30里 → 鄒平縣 60里 → 章丘縣 40里 → 龍山驛 70里 → 濟南府 50里 → 齊河縣70里 → 禹城縣 70里 → 平原縣 90里 → 德州 60里 → 景州 50里 → 阜城縣 40里 → 富庄驛 40里 → 獻縣 70里 → 河閭府 70里 → 任丘縣 70里 → 雄縣 70里 → 新城縣

49) 위의 책, 辛酉以後航海路程, 190-192쪽.

50) 食 朝鮮初期의 對明朝 貢 關係考』, 山大學校論文集 》 第 14 輯(人文社會科 學21) , 1972, 139쪽.

50里 → 涿州 70 里 → 良鄉縣 50里 → 大井店 40里 → 京都(北京)

宣 川에서 登 州 海路는 3,760 里, 登州에서 濟 南까지 930 里, 이 를 포함하여 北京

까지 1,900 里였다. 따라서 宣 에서 北京까지 水陸路는 總 5,660 里였다.

丁 (1627) 年 이후에는 振山 石多山에서 發船하였는데 槪島까지 300里였다.

己巳 (1629) 年 이후에는 해로를 바꿔 平 島 에서 길을 나누었다.

平島 40里 → 旅順口 40里 → 鐵山喝 80里 → 洋島 40里 → 雙島 500 里 → 南凡口 170里 → 北汎口 1, 000 里 → 覺華島 10 里 → 寧遠衛 (육로) → 曹家庄

平島 에서 亭 遠衛까지 1,860 里, 寧遠衛에서 北京까지는 931 里이다• 宣 川에서 寧

遠衛 까지는 海路 4,160 里이며, 宣 川에서 北京까지의 水陸路는 합계 5,091 里였

다.

이재가 제시한 對中國 교역노선 중에서 〈中原進 貢 路〉는 현재까지 밝혀전 노선과 대동소이하나 특히 北京路程은 그 기원이 契丹과 관련을 가진 고려초기 德 宗 때부터 開設되었음이 밝혀집으로써 고려시대의 對遼交易關係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5 經濟資源

경제자원은 경제생활에 활용 가능한 제 자료로서 願 齋集 에서는 金 屬 ,石, 土, 植物, 溫泉 등과 자연적인 異跡, 그리고 전통적인 技術 등이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들 자원은 전통적인 상황에서 소박하게 소개되고 있지만 넓은 의미로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이용가능성이 확대될 수 있으므로 금후의 수요를 위하여 이 를 재조명함으로써 개발이용과 연결시키고자 한다.

(1) 金玉土石草木

願齋全』에 수록된 金玉土石草木 수는 金周 11 종, 土 屬 10 종, 石類 18 종, 玉類 14 종과 木類 26 종, 草類 36 종을 포함하고 있다. 그 중에서 金屬 土類, 石類, 玉類는 産地와 性狀이 소개되어 있고 그 밖에 草木類에 관해서는 性狀, 명칭 또는 용도가 밝혀져 있다. 草類 중 11종을 제하고는 禁稷栗 등 穀類에 관한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농업상황 연구를 위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아래에서는 위의 순서에 따라 유관자료를 정리하기로 한다.

(가) 金屬 51)

金 : 慈山( 泥金 〈호박씨 또는 밀기울 형상〉) : (高麗 때에는 施善, 洪州, 漢城南山) 康津, 竹川,成川. 砂金은 平壤 大同江邊

銀 : 端川, 成川, 扶安邑中 盤石 및 王登島, 鎭安 馬嶺, 古阜 斗升山, 羅 州 源珍山

銅 : 寧海 大所山, 珍山 達往山, 金溝 堂頭峴, 彦陽

銅鐵(錫) : 公州 馬峴, 遂安 銅里浦山, 長淵 眞石洞, 平昌 梁香里, 金城 楓洞里, 龜城 古 延

自然銅(山骨) : 連山, 三登江 知洞,淳昌,昌平, 興陽, 康津, 海南 , 靈光 城內

鉛(黑鉛) : 寧海 蒼 院南, 永興 免旨社

鉛(鉛) : 瑞興 食帖, 淮陽 秋非山, 金城 金也洞, 端川 吐羅山, 殷山 自 吾里

鐵 : 忠州 周連里, 堤川 米古介, 木川 山方川, 全義 兩房里, 定山 水閑 里, 恩 津 鶴 旨熊田吐串, 尼山 泉洞, 石城 三山里, 洪州 生天浦, 瑞 山 馬 山里, 泰安 多修山串, 海美 生天浦, 梁山 火者浦, 永川 乾川,

51) 『이계속고』 권9, 維著』, 『金玉土石草木汶, 金類 『全 書 』 l, 504-505 쪽.

彦陽 石南山, 安栗 酷泉 多仁 大谷灘, 益德 無范山, 禮安 上里, 龍宮 修正灘, 尙州 松羅灘, 陝川 治鎖 深妙里, 三嘉 黃山, 山陰 尺旨 山, 丹城 尺旨山, 昌平 無等山, 茂朱 大德山, 光陽 木谷, 務安 鐵所 里, 咸平 沙乃浦 翁巖iili, 光州 無等山 長貸洞, 同福 無等山, 和順 冷川, 三涉 稷帖, 襄陽 西禪寺 束峯下, 橫城 金窟伊, 文川 頭里山, 北靑 聖代山, 端川 吐羅山 最里, 永興 山倉洞, 利城 羅下洞; 吉州 多信浦, 鍾城 海汀, 慶興 鹿屯島 海汀察阜 會寧 間洞, 富寧 多葛 洞, 黃州 鐵和縣, 瑞興 食帖 鳳山 白邊, 安岳 慈光洞, 遂安見造 山, 信川 杜田里, 牛峯 觀音山, 海州 沙單 松禾 鐵伊山, 豊川 金山, 長淵 冬羅串 吉單 高山, 棟山, 延豊

水鐵(生鐵) : 淸風 平登山, 沃川 安邑 枝內洞, 懷仁 老成山, 報恩 熊峴 車衣峴, 公州 馬峴, 蔚山 達川山, 竹川 申之山, 咸平海際 兩班橋海岸

石鐵 : 懷德 稷洞, 竹川 市之山, 載寧 大渠毛老山, 長連 小金山, 海州 黃谷里, 殷栗 金山浦, 施善 熊前山, 寧越 乞峴, 洪川 末訖洞, 金城 岐城里 也浦坪, 金化 方洞川, 安峽奴隱洞

沙鐵 : 慶州 八助滿, 吉川 西齊

*1) 付川 • 成川의 金은 최상품으로 稽鍊하지 않은 상태에서 1 兩의 가격이 30-45兩이었다.

*2) 平壤 大同江邊의 砂礎은 모두가 金으로서 民間이 義州를 경유, 중국의 遼島地 方에 고가로 밀수출하였다.

*3) 高山에서 생산되는 鐵은 良質이며 棟山 • 延 은 多産地域이다.

*4) 關東地方에서는 石鐵로 칼과 馬針울 만든다.

(나) 土類 52)

朱土:淸州周岸

造(黑婁 걸금, 겅금, 朱色의 繪畵用 顔料, 수영이나 머리카락 染料)

52) 위의 책, 土類, 505 쪽.

赤土 : 黃川 南二里, 平山 省惡山

禹餘根(太一餘根 ; 赤土 중에서 극히 붉은 것) : 平坂

黑土 : 和順 束 25 里 黑土帖

白土(白培, 白善, 惡土) : 吉州 西北 崔世洞

土三靑 : (三靑, 藍色의 繪畵用 물감) : 明川 永平山

深中淸 : 蔚山 北門外

森綠(宮中의 丹靑用 물감) : 長 森城山, 豊川 軍長里, 嘉山

荷葉綠(籍御用 물감) : 海州 靑苦巖

土炭:黃海道 海邊

*1) 黃海道 海邊地方의 土炭은 多産이다.

*2) 黃州의 赤土는 最上品이다.

(다) 石類 53)

綠墓 : 廳州, 抵平, 長溫 獨子洞, 朔寧 金洞寺, 淸風 筋山, 丹陽 平洞, 淸州, 靑川 潘石邊, 靑山 南里 石窟, 鎭本 蔚於洞, 連山 大屯洞, 順川 蠶 里, 平山 慈秀山, 金化, 甲山 雲龍

白 : 甲山 池卷洞, 慶州 含羅峴

黑 (검금, 수영이나 머리카락 染料) : 報恩

石琉黃 : ,忠州 老鳥 柴勿谷, 淸風 筋山 白夜山 雙巖山 論陽里, 慶州 非月 洞山, 淸道 馬谷山, 端川 鳥乙足 北峯底, 義州 客舍庭中

滑石 (곱돌 活石) : 忠州 連源驛後 三涉, 金化

壇(鍾)石 : 瑞興 食帖, 鳳山, 金城 金也洞

(磯) (器) : 慶州 東面

水泡石(浮石, 含水石) : 寶城, 順天, 甲山 雲籠, 義州, 江界, 消源, 理 山,碧遣

水 :高城安詳仇彌

53) 위의 책, 石鼠 , 505-507쪽.

石鍾乳 : 淸風 風穴 田里 石穴, 永春 南三里 巖間, 濟州 三邑, 族善,率越

無名石(형상은 黑石炭과 유사함) : 龍川 柚山

雲母( 雲 英, 石麟, 石銀) : 平壤

天矢(하느살, 형상은 화살촉과 비슷함) : 보통 山田에 많음

空靑(銅의 精固가 엉킨 것) : 平山

磁石(指南石) : 高城 金剛山 捨帖寺 山映樓下 潤中,淮陽, 鐵原, 寧越 西江束邊 渡頭沒灘, 古阜 壽 光山, 扶安 海中 玉登島 滿山, 茂長 月 串 島 高田에서 十里, 羅州 榮山江 下流 南岸 仰巖下 水中, 湖南 海岸一帶

晋 石 (차돌, 祐石) : 高城 朴莊洞

石脂:利城

沈香石(怪石) : 豊德扶蘇山 敬天寺 束門

玉石 : 丹陽 德上洞, 牙山 弟峴, 尙州 甲長山, 遂安 掛項山 熊岩, 原州 塔田谷, 平昌 赤岩里 星磨嶺

症玉砂(磯玉蹴 軟玉沙) : 南陽,仁川, 豊 德 德積山 興王寺古基, 慶州, 淳昌 赤城江邊, 南平 池野狀 水邊

燈石 : 高原 伐羅山 白石窟

王燈石 : 尙州 大鳥峴, 安峽 藤葛洞

鼎石 (藥躍 제작에 사용) : 洪原 車跋嶺下

馨石(南陽靑玉, 玉冊 睿 版 等 제작에 사용) : 南陽 舍那山寺西

斑石 (花草石의 일종) : 密陽 北 亭 里

華斑石(玉石, 花草石, 紅紫, 黃白, 純白色이 있음) : 海南 三里原 埋玉 山, 康津 靈島

靑:江華 摩 尼山

靑石 : 丹陽 若也村, 族善 碧坡山, 安峽 猪仇星 灘上 石壁

藍石(靑石) :平山

靑玉石 : 淸州 居音里, 康津 觀音洞

白玉石 : 恩津 仇佐谷

琉石 (琉璃石) : 三涉 氷洞

水精石 : 懷仁 ,馬山, 盟基 , 谷洞, 兎山 注火里, 高城 溫井洞, 盜岩 達摩 山 水精窟

水晶(水精, 火因晶) : 牙山 佛嚴院里

白石英(白水晶) : 高城 溫井洞, 漢城含春苑 束岡培外, 晋 , 順天, 古阜曲 光山

朱石: 明川 黃土洞

紫石 : 安束 秀川 可爲峴

紫現石 : 平昌 味存峴, 宣川 多米里, 郭山 宣沙浦, 安束, 茂長 心元面 大 治谷興馬山

黑峴石(黃白黑色은 金沙石이라 稱함) : 藍浦

黑石:安州 南塘江邊

碩瑞石(馮 : 蔚山 達浦里, 安州 安戒

珉瑞 : 三涉府西 堅頭里 및 三勿香

磯石 : 迎日 雲 桃山, 寶城 永川, 黃州 天眞山, 康羽 巡威島, 高原 院岐 里, 甲山 雲 , 羅州 茅山, 羅州南 背音里, 順天 永川

靑磯石 : 平山 賓山驛 牛峯 景兒帖

璟汗石:海南

璟 : (高麗 顯宗 때 安城에서 두 그루, 靈光에서 한 그루를 헌상)

*1) 윗쪽에 淑井이 있고, 그 아래에 白艦이 있으면 샘물은 시고 떪으며 차가워서 胡被 맛이 나는데 淸州의 淑井院에서는 목을 쏘는 듯한 샘물이 솟아난다.

*2) 慶州의 毗 霜 은 原石올 채취하여 용기에 넣고 구워서 사용한다.

*3) 磁石은 茂長 月串島産이 上品이며, 羅州 榮山江 下流 迎巖下 水中에서 낚아 올 리는 것이 極上品이다. 또 湖南沿海 一帶의 磁石은 1 兩의 값이 1 兩이었다.

*4) 시 羅州人 羅相紀의 先山에서 채취되는 磁石은 質이 극히 좋다.

*5) 碇玉沙는 淳昌 赤城江과 南平 池野洑水邊產이 가장 良質이다. *6) 紫視石(벼루돌)은 平昌 味呑峴에서 나는 것이 가장 良質이어서 中國의 端州產

에 비해 손색이 없다.

*7) 花草石 54) 은 康準 珍島에서 생산되는 것이 紅紫, 黃白, 純白 또는 斑色으로 연하여 刻字할 수 있고 돕으로 썰 수 있다. 印意 땀版, 酒莊 등을 만드는데 京城에서는 진귀하게 여긴다. 중국의 소위 紅賓石은 대체로 이런 것들일 것이다.

이 밖에 視石으로서는 羅州의 浦溪睿院 근처에서 각종 色彩의 것이 벼루 제작에 사용되었다.

羅州 서쪽 吏侍郞面 信傑院林 沿溪睿院 동북쪽 小川 옆 大路변은 視嚴이라 부르는데, 그곳의 돌은 紫色, 靑黑色 또는 靑紅色이 섞여 있다. 會津林氏 先山의 白虎末 口에서 나는 돌로 벼루를 만들 수 있다 .55)

또 羅距에는 賀物級 石視이 있었는데 2 백년 가량이나 전해 내려오면서도 닳지 않고 視池에 물을 담으면 며칠이 지나도 마르지 않았다 한다 .56)

視石 이의에 特記되어 있는 것은 水晶으로 그 특산지는 慶州이다. 慶州의 諸 特産으로는 水璃 , 密花, 水晶이 있으나 그 중에서 水晶은 平廣, 大召 등지에서 생산되며 眼鏡, 笠樓(갓끈) 裝飾울 만드는 데 쓰였다. 아울러 水晶의 性狀에 관해서는 다음과 갇이 기술하고 있다.

慶州에서 생산되는 水珉瑞, 密花(藍花, 坡泊의 일종)는 중국말로는 木難이라 하나 美羅라 부른다. 수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平廣, 大召에서 나는 것은 마치 蓮송이 속에 연밥이 들어 있듯이 이몰 잡아빼면 하나하나가 여섯모이다. 먹줄 있는 것을 골라 안경과 갓끈을 만드는데 우리나라, 중국, 일본에서 으뜸이다. 57)

54) 위의 책, 雜 」, 511쪽.

55) 위의 책, 507쪽.

56) 위의 책, 같은 곳

57) 위의 책, 같은 곳.

慶州의 水晶은 종전부터 眼疾을 않던 관료들의 안경 원료로 사용돼 오던 것을 이재 자신이 직접 사용한 바 있어서 그 견고함과 품질의 우수성이 입증되기도 하였다.

기유년에 武城 金使君 履信이 나의 안질을 알고 이 안경을 꺼내주면서 이것이 경주의 수정안경으로 옛날 閔公이 府尹으로 있을 때 구하여 老峰, 隨 , 丹巖에게, 그리고 근년에는 正獻相國에게 전수하다가 이제는 내가 가지고 있으나 역시 公物인 셈이어서 내게 주어도 무방타 하였다. 그 바탕은 두꺼워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는다. ......천하의 안경 중에서 경주산만큼 좋은 것이 없으므로 이를 가진 것이 더 없이 다행이다 .58)

나는 평소에 잔글씨를 너무 많이 보아 젊었을 때 이미 안질을 앓았으며 乙酉年부터는 안경을 써서 시력을 대신하였다. 안경은 좋은 것을 가지지 못하다가 요즘 鷄林의 水 으로 만든 것을 얻었는데 이는 閔正獻 相國이 五代에 걸쳐 보관했던 것으로 順興金使君 履信이 준 것이다. 北京에서 산 것이라 하여도 과함이 없으며 다만 바탕이 희어 검은색이 없음이 유감이다. 오색 중에서 검은색이 안력을 기른다 .59)

水晶의 産地는 慶州 이의에도 羅州로서, 紫紅白色의 玉과 함께 생산됨 아래의 玉類에 제시된 資料와 같다.이에 부수하여 水 을 다듬어 眼鏡을 磨製하는 磨床 에 관해서는 역시 州의 特産올 지적, 〈磯玉砂의 가루로 수정을 가는데, 이것 없이는 갈 수 없다〉고 하여 當地의 磯玉砂를 逸品으로 꼽고 있으며, 이밖에 羅州産의 磯玉砂도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60)

58) 이재유고』 권 7, 題, 156쪽.

59) 위의 책, 같은 곳.

60) 『이계속고』 권 9, 『織署』, 石類 ,507쪽.

(라) 玉類 61)

玉으로서 돌에 유사한 것은 石類에 포함되어 있다.

白玉 : 利川 護法里, 水原 格只島, 仁 怒伊島, 永春中仇里山 昌田山 沙古介山, 淸安 蛇山里, 鎭추 三岐山, 泰安 安興梁海邊, 牙山 所岩 里, 成川 白嶺山 石窟, 德川 長楊山, 寧遠 察洞, 端川 梨洞

靑王(坡 ) : 淸州 溫羅山, 結城 龍骨里, 海州 龍游里, 端川 里洞, 成川

淡靑玉 : 義 玉江

紅玉 : 端

烏王 : 鳳山 墨 川, 泰川 長林里, 端川 梨洞

播王(酒 製造에 쓰인다.)

琉璃瓦(靑瓦, 黃丹과 白土로 제작한다. )

黃王 : 鳳山 逸興倉, 端川 梨洞, 成川

筑珠(眞珠, 履珠, 조개〔妹〕의 胎에서 꺼낸다고 한다. 龍珠는 턱〔領〕에서, 鉉珠는 껍질〔皮〕에서, 蛇珠는 입에서, 崎珠는 발〔足)에서, 持珠는 배 〔腹〕에서 생기는데 馬刀始 큰 것에도 眞 珠가 있다. ) : 濟州, 含寧束 148 里 高郞峽 慶興 撫夷堡 東편의 큰 못〔澤〕

單環:濟州

貝(자게. 紫班이 있는 것은 硏螺, 큰 것은 河老鵬. 뼈로써 馬勒울 장식하며 玉河 ( 坡)는 朝廷의 品階에 따라 사용한다. ) : 濟州

魏鷄(紫白靑色이 섞인 것으로 술잔을 만든다.) : 濟州

無炭木(바닷물이 빠지면 단단하고 검게되며 붉은 접이 있는 것으로 帶湖 類에 속한다) : 濟州 牛 鳥 海中

號퍼(虎魄 江珠, 인파, 松脂가 땅에 묻혀 茨答이 되어 1 천 년이면 療泊이 되는데 깊이 8, 9 尺에서 생겨난다. 明泊, 香泊, 嫌泊이 있으며 深紅色울 띤 것이 靈 泊이다. 熱울 加하여 옷감 위에 놓아 芬子씨 吸引하는 것이 眞品이다.)

61) 위의 책, 같은 곳.

玉은 羅州의 伽遼山 後麗에서 紫·漁·白 三色으로 水 과 함께 생산된다.

羅州 남쪽 豆 洞面 上谷村, 죽 榮山江 남쪽 濟民倉 맞은편의 마을 뒤 伽速山 後麗에서는 紫, 紅, 白색의 三色石이 나는데 단단한 것과 무른 것 두 가지가 있다. 크기는 주먹만한데 밝고 두명하여 이로써 물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부딪히면 불똥이 난다. 玉이나 의 類에 속한다. 62)

이와 관련하여 玉울 다듬는 磨材로서 磯玉砂가 特記되어 있다.

羅州 동문 밖에 榮山江으로 흘러드는 내(川)가 있는데 강변의 쇠돌모래〔蹟礎〕를 비벼 소금 가마 솥에 넣는다. 솥바닥에 소금이 엉기면 이로써 옥을 다듬으며, 이것이 바로 遜玉砂다 .63)

碩玉砂는 의 磨 製에도 사용되었다.

石炭은 石類 또는 土類로 분류되지 않고 별도로 취급되어 그 용도 및 활용 가능성이 검토되었다. 이재는 石炭과 烏金石의 관계에서 양자가 同一物인지에 관십을 가지면서 아울러 醫藥으로서의 용도를 밝히고 있다.

世間에서는 우리나라에 石炭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徐巨正의 『輿 地 覽 』에는 경상도 慶 州府 동쪽 5里에 위치한 芬皇寺는 新羅 때 창건한 것으로 寫麗 의 平章使 韓文俊이 지은 利 評 國師碑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烏 金이라 한다. 許浚 의 『東醫寶鑑』에는 烏金이 石炭으로서 慧 直와 惡麗을 치유한다고 되어 있다. 64)

62) 위의 책, 같은 곳.

63) 위의 책, 같은 곳.

64) 위의 책, 506쪽.

또 당시 黃海道 沿岸 各邑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土炭이 연료로 쓰임과, 京城 流入울 거론하고 石炭에 刻字함으로써 碑石材에 충당될 수 있는지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아울러 江華道産 石材로서 제작하는 魂游石床 • 華 表 • 望柱石, 棟山 • 南浦 • 恩 津 • 黃山 • 南原 山洞의 石材를 들어 石炭과 구별하였다.

우리나라 黃 海 道의 沿海 各邑에서는 근래 土炭을 생산하여 땔감을 대신하는데 守宰들이 이를 채취하여 선물하면서 서울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와 잘 아는 사대부는 왕왕 이를 奇 賓 라고 말하는데 이것 역시 석탄의 類에 속한다. 그런데 석탄에 글씨를 새겨 碑石을 만들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비석생산지로서 江 華 産은 희고 연하여 魂游石과 華表, 望柱石울 만들기에 적당하며, 棟山産은 玉처럼 단단한데도 音 石 또는 帖石이라 부른다. 南浦産은 검으면서도 극히 단단하다. 恩 津 産은 彩 雲 과 黃山 江 邊 의 것이 좋으나 너무 물러서 오래 가지 못한다. 단지 南原의 山洞面에서 나는 것은 검고 단단하여 금색이 접접으로 박혀있으며 刻字하는 데 힘이 드나 오래도록 닳지 않는다. 아마 芬 皇 寺의 烏 金石碑도 이런 類일 것이며 석탄과는 다르다 . 65)

(마) 木類 66)

桂(귀, 긔. 李仁老 『破閑集』에 따르면 開城 天 爵 寺 南門 근처에 野桂수백 그루가 그늘을 이루어 행인의 휴식처가 되었다고 한다.)

批祀( 盧 橘. 南方産으로 열매를 먹는다.)

石南(石楠, 楠 열매는 은행과 비슷하고 酸味가 있으며 약재로 쓴다.)

木蘭 (桂類로서 향은 石南과 같다. )

松(솔. 우리나라에는 소나무가 많다.)

海松(잣 柏子, 果松. 식용할 수 있으며 쪽〔 耆 〕쩝는 위에 비치개(懿)로

65) 위의 책, 같은 곳.

66) 위의 책, 木類, 507-508 쪽.

도 쓴다.)

萬年松(香木. 香이 강하여 佛香으로 쓰이며 括木으로도 生長이 용이하다. 京城人들이 琴盜, 菜居을 만들어 쓴다. ) : 金剛山, 妙香山 頂上, 鬱陵島(萬年松林이 5 平方里에 이른다.)

柏(즙백, 汗植 側葉 열매와 잎을 찧어 甘을 服用하면 吐血을 치료한다.)

憂生柏 : 金剛山, 妙香山, 智異山,太白山, 漢祭山 산허리 이상 정상 부근 稷(소나우와 비슷하다.)

檜(젓, 柏. 잎은 잣나무와 갇고 등치는 소나무와 같다. )

縱(잎은 소나무와 갇고 등치는 잣나무와 비슷하다. )

丁香:寧越邑 周平混家

杉(松類) : 濟州, 關束

棒( )

椎(菜 三虫福除에 쓰인다. ) : 長城 白岩山

老祠刺(노가재, 菓 羅漢柏) : 山間이나 墓前에 많이 있다.

黃楊(※회양목)

紫檀(香木) : 江原 및 全羅南道

提子 (木丹木, 越桃, 休蘭, 情桃, 지지)

茶(차나모, 茶, 慣, , , )

山茶(冬柏,春柏, 四節柏)

蠶葛木(쓱갈나모, 哥舒木, 加時木. 鳥銃簡幹의 材料) : 深山에 많다.

杜沖(杜仲, 思仙木, 石思仙)

龍 木 (龍籠草. 海若 위에서 뿌리와 함께 생장하며 쪼개진 줄기는 2, 3 尺으로 食筋 追 馬 , 窟苦를 만든다.) : 咸鏡北道 六鎭의 海中

彬木(평나모)

畵(귀목, 檀木)

*長滅 白岩山의 震가 가장 良質이다.

(바) 草類 67)

草類 중에서 일상생활과 비교적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들이 열거되었다.

桑寄生 (쏭·나모우회 겨 아샤리 )

天門冬

麥門冬 ( . 連珠材床로 쓰인다. )

大黃(將軍草 잡풀. 根莖과 밥풀을 이겨 木器를 붙이면 극히 堅固하다.)

絡石(담댱이, 石薛 )

苦采(고자바기. 游冬葉)

溪 (茶香草)

凍蕙(멍덕파. 幌子의 蒙 材床로 쓰인다.)

山 (山芬非池 김치의 재료로 극히 좋다.) : 京畿, 慶尙道 山中

忍冬(겨아사리. 老翁駿草, 水楊藤)

閔蕙 : 咸楊 南五十里 花長山 (眞蘭은 邊山에 많다. )

(사) 乘稷栗類 68)

식량이되는 곡류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제시되었다. (※는 필자주)

乘(禁子, 기장이. 帖性이 있는 것은 , 없는 것이 委이다.)

稷(粹子. 帖性이 있는 것은 , 없는 것이 栗이다.)

栗(穀子, 것조)

精(피. ※기장의 일종)

碑(피와 비슷하나 결이 가늘다. ※禾의 일종)

精( ※돌피 (피 ≒ ) )

桓(桓黑委 ※검은 기장, 한 껍질 안에 두 개가 들어 있는 검은 기장)

廳(委, 黃米)

촌(키, 白梁栗)

67) 위의 책, 草氣 ,508쪽.

68) 위의 책, 「四聲通解委稷票之辨 , 508-509쪽.

樣(南方에서는 委라 부르고, 北方에서는 高梁이라 한다.)

蒼(赤梁栗)

稽(占性 있는 穀物의 총칭. 杭米는 栗으로서 禁米와 비슷하며 알이 잘아 밥으로는 적당치 않고 술을 빚는 데 좋다.)

帖( )

柚(柚稱 穀物로서 祐性이 없는 것)

杭( 稱 점성이 없는 것은 稷. 니쌀)

梁(栗과 닮았으나 큰 것. 黃靑白 3 種이 있다. )

葛(※촉규화)

蘆(女羅)

株(徐柄)

精(占稱)

紹(蜀委, 슈수, 당수, 唐委, 登禁)

禾(稱北瓜梁에 속하는 것)

渠(治栗)

*1) 米는 栗杭로서 委米와 비슷한데 너무 차져서 밥으로는 적당치 못하나 韻酒에는 좋다.

*2) 桓委로써 讓酒를 할 때는 黃流(鬱金)를 삶아 섞으면 香味가 좋고 金色이 듣는다.

이 밖에도 이재는 별도로 麻를 소개하고 그 유래, 종자, 용도 및 우리 나라에서의 명칭과 용도를 밝혔다.

중국에서는 삼〔麻〕올 大麻라 부르는데 張奏이 西域의 大苑 (Fergana) 에서 처음 구해왔다. 油麻種도 麻라고 하므로 胡麻와 구별하여 中國麻를 大麻라고 한다. 胡三省에 따르면 胡麻는 芝麻라 부르며 그 알맹이는 조〔栗〕보다 작고 검으며 기름올 짠다. 아홉 번 삶아 말려 먹으면 凱峨를 면한다. (原註: 현재의 芝麻는 脂麻의 轉音이며 우리나라의 眞佳子는 香油를 짜는 재료

69) 위의 책 , 509쪽. 70} 위의 책 , 「 溫 泉 嶽 泉及 異讀 改」, 509-510쪽.

이다 .)69)

(2) 溫泉, 根泉 및 異 70)

溫 泉 , 被泉 및 異蹟은 모두 자연물 및 그 현상에 관한 것으로서. 본원적인 지리조건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인간의 생활을 위하여 이들은 자연의 특혜를 賜與하므로 이미 개발 이용된 것도 있지만 과학기술에 바탕을 두고 금후의 용도를 확대함으로써 관광자원으로서도 활용할 수 있다. 溫泉, 淑泉 美味泉, 潮泉 潮池, 風穴, 氷山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가) 溫泉

여기에는 溫泉의 위치 또는 주요 연혁,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延 登 : 北三十里 安 富驛 西便 溫井院

公州 : 儒 城 束三里. 朝鮮 太祖 李成桂가 鷄 龍山 定都에 관한 吉凶울 占쳤으며 太宗은 이곳에 와서 목욕한 바 있다.

溫陽 : 北七里 질병치료에 有效하다• 太祖, 世宗, 世祖, 貞 熹 王后가 入 浴하였으며, 御室은 上 • 中 • 下 3 湯으로 나누었다. 近世에는 顯 宗,肅 宗이 入浴하였다. 內外 行宮이 있다.

德山:南五里

平山 : 南五十里石桐浴室

安岳:北二十七里 洞陰

信川:東六里

文化 : 南五十里 弓村의 石間水는 특히 登徹하다. 西二十里 終達 .

殷栗 : 北十三里. 맛이 짜서 口誠泉이라 하는데 많은 사람이 목욕으로 병을 고친다. 물은 따뜻하지 않으나 짜거워서 더운 것 같다.

海州 : 西六十三里 烏山. 그 남쪽 부근은 땅이 모두 溫 氣 가 있으나 물맛은 짜다.

白川 : 南二十五里 租站. 南五里 大楊浦邊

平海 : 西二十六里 臼岩山下 所台谷

高城 : 西北三十二里 洞穴. 白石英과 水精石도 나온다. 世宗의 행차가 있었다.

蔚珍 : 北 周仁里, 물은 微溫이다.

伊川 : 北 九十九里 寺i圓 世宗이 行宮을 수축하고 入浴하였다.

東萊 : 府北五里. 열로써 계란이 익는다. 병자를 치유한다. 新羅 때 王의 행차가 누차 있었으며 娑石의 四 에 銅柱를 세운 洞穴이 남아 있다. 근래에 당지의 府使가 누각을 지어 복원하였다.

永興 : 束十五里 潭泉. 微溫이나 물이 짜 질병치료에 有效하다•

安邊:西南一五七里

鏡城 : 西三十四里 維峯. 西一百十里 雲 加委

吉州 : 西九十一里 火簡. 北三十里 藥水, 西四十五里 大寺洞. 西十三里乾者介洞

明川 : 東六十五里 黃津里

朔州 : 南十三里 溫井川 南

廣州 : 南漢城西北溫水洞 에 옛날 온천이 있었다.

龍岡 : 西三十里 於乙洞 周園 二十餘步. 물은 아주 뜨거우며 짜다. 그 옆 서쪽으로 十餘步에 둘레 3 尺의 온천은 微溫이며 짜다. 다시 그 西便에 있는 冷泉은 둘레 3 尺으로서 극히 짜고 깊다. 閔尺間에 溫冷이 찰 통한다. 龍岡溫泉水로써 삼〔麻〕을 찔〔蒸〕수 있다 한다.

雲 山 : 東四十里 雲 山 溫井川 南

熙川:東五十里 元洪里

事川 : 東十五里 退羅山下

成川 : 三十五里 藥 水山下. 山 위에는 蓮池가 있다.

陽德 : 北二十里 田, 모두 3個斤이며 몹시 뜨겁다. 西七十里 草川의 2

個所는 微溫이다.

順川 : 北쪽 龍島 南十五里 天將里 山谷中의 釜淵은 가뭄에 마르지 않고 겨울에 얼지 않으며 3里를 홀러서 땅 속으로 스며든다.

寧遠 : 束三十里 仇老波里

高敏 : 束十里 松時下 溫水洞은 옛날 溫水가 있었던 곳이다.

綾州 : 溫水洞은 옛날 溫水가 있었던 곳이다.

長城 : 府 西北二十里 옛날 松江寺. 金谷의 윗쪽, 通安里 아래에 온천이 있었으나 현재는 埋滅되었다.

溫陽:西七里

龍岡 : 西三十里 於乙洞 온천은 물이 짜다. 그 서쪽에 微溫이며 물이 짠 온천이 또 있다.

(나) 根泉

淑泉이란 그 물이 山淑처럼 시고 럽고 차가운 샘(井 水, 酸造冷 如淑味)을 말한다.

淸州 : 東北三十九里 淑井院 옆 淑峴의 북쪽으로, 북쪽의 淸安과는 15里 의 거리. 물맛은 山淑와 갇으며 冷水谷으로 질병을 고친다. 世宗,世祖가 入浴하였으며 行宮이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현재는 상하로 2 개소의 泉이 있으나 탁한데 上泉만은 중심에서 물거품이 방울처럼 솟구천다.

文義 : 西三十里. 맛은 山淑처럼 매우나 질병을 치료한다.

溫陽 : 西七里에 있는 온천의 行宮御室 庭中의 두 탕 사이에 맑고 차며, 달고 매우며, 부드럽고 연한 물이 나온다. 世祖 가 溫 泉浴 율 할 때 이 물이 솟구쳤으므로 이를 駐 歸 新井이라 명명하였다.

靑 松:東八里

全義:北十里 銅侍 즉 木川의 남쪽 경계. 그 남쪽에 하나, 그 북쭉 木川에 둘이 있는데 모두 山淑 맛이 있다.

榮川 :北四十二里

屈山 : 西二十五里. 병을 낫게 하며 靈泉이라 부른다.

雲山 : 西三十里. 매우 차서 百病을 치료하며 藥 水 라 이름한다.

龍江:西三十里 於乙洞. 맛이 짜다. 그 서쪽에 미지근하며 짠 샘이 있고 서쪽으로 더 가면 짜고 깊은 冷泉이 있다.

江陰:束十二里 酸水

(다) 美味泉

美味泉은 물맛이 특출한 샘물이다.

禮川( 達川) : 忠州南 騎牛子. 물맛아 東國(朝鮮) 제일이다.

江陵 : 西一百五十里 五臺山 西台下 于簡水· 색깔과 맛이 뛰어나다. 서로 수백 리를 흘러 漢江이 되어 바다에 둘어가 于簡 水 는 물줄기가 치우치지 않고 색깔과 맛이 변치 않아, 마치 中國 揚子江 江心의 물이 참맛〔正味〕을 잃지 않은 것과 갇다. 漢江의 이름은 이로부터 연유하였다.

(라) 潮泉 潮池

潮泉 • 潮池는 潮 水 의 영향을 받아 불어나고 줄어드는 샘 또는 못을 말한다.

聞慶 : 潮泉온 두 군데가 있다. 하나는 縣南의 所屯山에 있으며 白巖穴에서 나오나 그 根源은 실처럼 가늘다. 매일 朝夕으로 차올라 넘치며 3 里까지 噴沒하다가 끝이는 것이 潮 水 의 나고 듦과 갇다. 하나는 縣의 남쪽 5 里 井谷里에 있으며 土穴에서 나와 매일 세 번 洞口에 噴滋하여 所耶川(原注:縣南 6 里)에 들어가는데 이룰 〈물미리〔水推〕〉 라한다.

漢城 : 南部 倭館洞 종전, 맑고 얕은 샘 〔泉〕이 있었는데 潮水에 따라 움칙였다. 漢江과 지하로 통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埋減되어 平地가 되었다. 烽 禮門 남쪽의 藍井 역시 漢江과 땅 속으로 통하여 불어나고 줄고 하였다 한다.

策巖 : 達摩山 동쪽 彌勒院穴의 남쪽 百步 高嚴下에 작고 모난 潮池가 있 는데 바다와 통하여 끝없이 깊다. 물은 짜며 潮水에 따라 불고 준다. (마) 風水穴 風水穴은 冷風이 이는 山洞울 말한다. 淸風 : 여름에 찬바람이 나오는 風水穴이 있다. 族善 : 南二里 大陰山에 風穴이 있어 岩石 사이에 얼음〔氷 ) 을 놓아두면 여름을 지나도 녹지 않는다. 水穴도 있다. 義興 : 東三十里 華山麗에 넓이 3 尺 2 寸, 길이 2 尺 8 寸의 風穴이 있다. 불 어나오는 바람이 극히 차서 초여름에는 반드시 얼음이 언다. 光州 : 瑞石山 圭峯寺 옆의 石壁下에 넓이 5 寸, 길이 1 尺의 풍혈이 있는 데 바람이 일고 벚는다. 殷山 : 北三十里 付板山下. 큰 바람이 열홀에 두세 차례 인다. (바) 氷山, 氷穴, 氷泉 이들은 風水穴보다 더 저온의 자연조건으로 결빙하는 경우이다. 義城 : 南四十里에 氷山이 있다. 山의 큰 岩石 아래 風穴이라는 石穴이 있는데 입구의 높이 3 尺, 넓이 4 尺 8 寸, 가로 5 尺 1 寸. 암석 바로 아 래 넓이 1 尺, 깊이를 알 수 없는 氷穴이 있는데 立夏 後에 얼기 시 작하되 몹시 더우면 단단해지고 흙비〔 霜 雨〕가 을 때면 녹는다. 春秋 로 춥고 덥지 않으며 겨울에는 봄처럼 따뜻하다. 靑山 : 氷泉이 있는데 4 월에 얼기 시작하고 8 월에 녹아 暖 氣 가 피어 오른다. 盆德 : 西七十里 大達山에 氷穴이 있는데 한여름에도 단단한 얼음이 있다. (3) 傳統技術 71) 우리나라의 전통적 기술은 현대산업과 연결되지 못한 체 서방의 기술

71) 위의 책, 雜 」, 510-511쪽.

에 縣逐당함으로써 인습과 관련된 〈秘方〉에 머물고 말았다. 현상으로 보아 산업을 위한 기술개발 및 菩 의 과제가 怒案으로서, 선전국과의 기술격차가 심화되고 있는 접을 감안하면 전통기술에 대한 조명은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는 필자주)

萩子油(배초기람, ※숭채기름), 鷺鷄랍(※농병아리, 사다새 기름) : 칼刀, 劍〕에 발라 두면 녹〔鎌造〕이 슬지 않는다.

惠(함박파) : 金玉을 녹여 액화시킨다.

水銀 : 金을 반고체 상태로 만들며, 銀을 녹인다.

蝶岭訪(※두꺼비 기름) : 玉에 발라 깎으면 초〔織〕처럼 무르게 되나 많이 바르지는 말 것. 암컷으로 살전 놈을 골라 찰게 썰어 불에 볶아 기름〔音〕울 만들어 玉에 발라도 연하고 부드럽게 되어 자르기가 쉽다. 옛날 玉器 중에서 특이하게 조각된 것은 인공으로서만 된 것이 아니고 昆吾 지방에서 나는 칼(原注 : 銀悟)과 翊除防울 사용하여 깎은 것이다. 嫌餘防은 烏米酒와 地捨(※오이풀)酒에 의하여 물〔水〕이 된다. (原注 : 地檜草는 의나무불휘라 하는데 玉鼓根이라고도 한다. 山野에 自生하며 잎은 느릅나무〔檜〕와 비슷하며 긴 편이다. 꽃은 紫黑色으로 메주〔鼓〕처럼 걷은 검으나 속은 붉다. 수박, 참의 비슷한 냄새가 있다.)

地根 : 재(灰〕로써 돌을 문드러지게 한다.

擔桐尻(※두꺼비 오중) : 돌에 바르면 문드러지게 할 수 있다.

橘白皮(※느릅나무 흰껍질) : 축축하게 하여 풀〔湖〕처럼 쓸 수 있으며 기와〔瓦)와 돌을 붙이면 극히 잘 붙는다.

鷄子白(※달걀 흰자위) : 白 가루와 섞어 充器를 붙이면 극히 견고하다.

胡桐源 : 모양은 黃懿과 비슷하며 단단하다• 扶爆木이란 西域 地方의 胡桐脂이다. 맛은 쓰고 짠대 물에 넣어 金銀 辨藥으로 쓴다. (原注 :算은 쇠쌔다로서 혼합하여 金 • 銀 • 鐵을 불이면 견고하다. 모든 물체를 부드럽게 할 수 있으며 소량을 초(酷) 속에 넣어 끓는 것이 진품이다.)

碩砂(北庭砂) : 黃白色 牙f#의 윤택 있는 것과 비슷하다. 金銀을 부드럽게 하는데 鈴藥으로 쓸 수 있다.

斷角 : 酷나 물구멍 〔水 寅 )의 진흙 속에 오래 넣어 둔 뒤, 끊거나 깎거나 갇면 힘이 들지 않는다.

梧桐( 靑 梧桐 碧梧桐) : 말리면 극히 단단하게 되는데 飾匡松片으로 모따〕를 잘라낼 수 있다.

磯 石(※숫돌) : 안경의 유리나 水晶 등은 이로써 갈면 간편하다.

油(※기름) : 尙衣院의 玉匠은 玉울 다룰 때 기름을 발라 광을 낸다.

通玉t)(軟玉砂) : 몽근 가루로 水 을 다루는 데 꼭 필요하다.

冬柏子油(※冬柏씨 기름) : 鈴 鍾(※自鳴鍾)의 돕니바퀴에 발라 회전을 원활하게 한다.

木遠(黃 Ml ) : 花草石의 全石으로써 狀을 만들 때는 그 배 〔腹〕를 파내어 속울 비게 하기 어렵다. 이런 때에는 먼저 두 쪽의 돌을 相對되게 파낸 뒤, 木 織 을 花草石의 몽근가루에 섞은 것과 黃 嫌 法油룰 혼합하여 불에 쬐어 덥게 하고 두 쪽의 石片도 따뜻하게 하여 木 嫌 부스러기를 발라 붙이면 교묘하게 붙어 영구히 떨어지지 않는다. 만약 시간이 오래 지나 물이 새면 다시 불에 쬐어 붙인다. 木 緣 은 蟲 緣 , 白嫌으로 불리어 藍嶽과 동명이나 異物이다. 원래 冬 靑 樹(原注 : 木 嫌 온 水靑木에서도 나는데 水靑木은 옛날의 물푸레나무〔椿〕의 秦 皮이다)의 작은 벌레로서 樹液을 빨아먹으며, 그 오줌이 나무에 불어 脂粉이 되어 엉키는 곳에서 생기며 濟 州에 많다. 끈적거릴 때 이를 모아 찌꺼기를 빼고 기름과 섞어 초〔煙〕를 만들면 밝고 맑기가 藍嫌 으로 만든 초보다 뛰어나다. 石工이 碑磁을 새길 때, 誤 刻하거나 缺字하는 경우에는 木 鎌 과 그 돌가루를 섞어 불이면 본래의 바탕보다 더욱 完 實 하며 구별이 안되므로 深妙하게 고칠 수 있다. 오십 년이나 지탱이 된다고 한다.

懿 汗(※지렁이 ) : 길바닥에서 죽으려 하는 지렁이 즙으로 交 , 瓦器를 붙이면 극히 견고하다.

大口魚皮(※대구 껍질) : 대구 껍질 졸인 計으로 갓풀〔膠〕을 만들어 깨진 벼루를 붙이면 견고하기 이를 데 없다. 부스러진 烏晶眼鏡을 붙이면 흔적 없이 완벽하게 된다.

縮砂 : 전하게 졸인 물을 복용하면 잘못 삼킨 金銀銅錢이 저절로 배설된다.

勃齊:勃蔣 4,5 매와 銅錢 한닢을 함께 씹으면 銅錢은 저절로 바스러진다. 銅錢이나 鐵物을 찰못 삼켰을 때 勃齊나 그 이깬 것을 삼키면 저절로 녹는다. (原注 : 勃蔣는 筋萩, 地栗, 茨로 불리우며 잎은 화살처럼 생겼고 뿌리는 黃色으로 토란〔宇〕과 비슷하다. 습지나 못〔澤〕가에 살며 凱能을 면케 하며 가루로도 만든다. 正二月에 채취하되 흉년에는 多量을 비축하여 양식으로도 쓴다. 울배, 가차라기, 울미라고도 부른다.)

달인꿀(練藍), 엿( 唐), 흰엿(白糖), 염교(雍白), 蔡 : 돈〔錢, 가락지〔環〕, 비녀〔奴智〕를 잘못 삼켰을 때 이들을 갈아 즙으로 마시면 저절로 나온다.

磁石 : 바늘(針〕을 잘못 삼켰을 때, 磁石을 머금고 있으면 저절로 나온 다. 누에콩〔蠶豆〕 삶은 것과 부추〔非菜〕를 먹으면 바늘과 蠶豆가 저절로 내려간다. 腕豆를 쓰기도 한다.

6 결론

본문에서는 먼저 경세제민, 재정, 민생에 관한 사항으로부터 이재의 경제관을 살펴본 뒤, 常平霜羅과 周尺에 관한 고증의 내용을 제시하고 陸海路를 배경으로 한 대중국 교역노선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제생활에 활용 가능한 지하자원, 식물자원, 觀光資源과 전통기술을 경제자원으로 묶어 정리하였다.

頭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이재의 경제관련자료는 기타 부분에 비

해 내용이 풍부하지 못하거나 체계화되어 있지 않아 이룰 정리하는 데 다소의 무리를 감내하였으나 이들 자료로부터 이재 자신의 경제에 관한 관점 및 자세를 파악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 학술상의 참고 자료를 발굴하였으며, 나아가서 실용성을 가진 경제자원의 내용을 정리할 수 있었음은 연구의 실질적 성과라 할 수 있다.

이재 황윤석 자신에 관하여 살펴보면, 궁극적으로 전통적인 性理學에 집착하여 당시의 志士層에 널리 유포되고 있었던 實學的 姿勢와는 관련을 가지고 있지 않다. 또 사회 • 경제의 측면에서 보면, 정부 위주의 경제관을 관철, 민생에 대한 고려를 소홀히 하여 현실적인 경제문제의 개선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같은 의미에서 보면 이재는 가치판단의 차원보다는 차라리 경제사실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만 집착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다룬 고증작업 및 대중국 교역노선의 사실적 해명 이의에, 특히 경제자원에 관한 자료들은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서, 금후의 자원개발과 활용을 위하여 실질적인 자료 및 근거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서는 이제까지 정리된 『이재전서』 3 책을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 하였으나 이 밖에도 이재의 경제관계자료가 더욱 많이 수록되어 있을 『이재난고』의 총정리와 출간이 이루어지게 되면 본 연구에 대한 수정, 보완이 크게 가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이재 황윤석의 학문체계 분석

金基鉉

1 서론

우리는 조선조 유학자들의 학문을 연구함에 있어서 보통 성리학·실학, 또는 양명학의 학문적 범형을 사전에 준비한다. 이러한 방법은 조선조 유학의 전개과정을 고려할 때 일면 타당하며 또 유용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 동안 엮어온 저 분석의 구도와 범형이 과연 정확한 것인지 업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조선조 성리학과 실학(그리고 양면학)의 철학적 정체에 대한 우리들의 연구가 아직도 미흡한 실정에서, 그것은 자칫 유학자들의 학문, 더 나아가서 조선조 유학사 전체를 크게 왜곡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성리학과 실학의 두 학풍을 공유하고 있는 학자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願齋 黃胤錫 {1729-1791) 의 사상온 그 한 예에 해당된다.

이재의 생애는 英祖 5 년에서 正祖 15 년에 걸친다. 그는, 말하자면 실학의 난숙기에 살면서 학문을 익힌 것이다. 실재로 그는 當軒 洪大容(1731-1783) , 旅庵 申景濬 (1712-1781) 등 이른바 당대의 실학자들과 학

적 교류를 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내의적 상황이 그의 학문형성에 끼친 영향은 다대하였다. 이 점은 그의 저술에 산재해 있는 바, 서양의 과학이나 우리의 역사 • 지리 • 언어 등에 대한 그의 학문적 관심과 인식의 깊이에서 뚜렷이 확인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학풍을 실학으로 단정해도 좋을 성 싶다. 李康五 선생이 그를 가리켜 〈영 • 정조의 연간에 金增 • 柳뽐遠이 실학의 터를 닦은 전라도 땅에서 申景濬 • 魏伯珪와 더불어 실학의 공적을 쌓아올립으로써 空理無用에 빠졌던 유학의 실용적 가치를 발양한 실학파 석학의 한 사람〉 1) 이라 한 것이나, 또는 河野來 선생이 그를 〈호남파 실학의 大家〉 2) 라고 지목한 것은 그의 위와 같은 학문영역에 착안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 후술하는 것처럼 그는 철저한 朱子(學) 신봉자였다. 그의 문인 宋獻鎭은 「行狀」에서 선생의 학문을 다음과 갇이 평한다. 〈처음부터 性理文字에 근본하지 않음이 없었고, 『小學』 『擊蒙要談』 『聖學輯要』 『心經』 『近思錄』 그리고 程子와 朱子의 全 睿 롤 반복적으로 숙독하였다.〉 3) 하성래 선생 또한 이러한 자료에 바탕하여 그의 학문적 경향을 〈성리학에 입각한 明本源主義〉 4) 라고 규정한다. 그의 학문에 대한 이와 같은 평가들은 확실히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그는 심지어 성리학의 수입 이후 형성 전개된 학설의 분파 속에서 자신이야말로 朱子性理學의 정통 계승자임을 은근히 자처하기까지 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접에 입각하는 한 그는 독실한 성리학자였다고 말해도 전혀 틀린 지적은 아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이재에 대한 두 가지 평가, 죽 〈실학의 석학〉이면서 또한 〈理學의 연구에 정전〉 5) 한 학자라는, 일견 상

1) 이강오, 『願齋 黃胤錫」, 『實學論穀』(전남대학교 출판부), 455쪽.

2) 『顯齋全 容 』 I, 「解題」 (景仁文化社) .

3) 위의 책, 行狀」, ,90쪽.

4) 위의 책, 解題」· 4쪽.

5) 위의 책, 解題」, 2쪽.

충된 보고는 어떻게 정리 • 이해되어야 하는가? 이와 관련하여 역시 하성래 선생은 〈성리학에 입각한 이재의 명본원주의는 그의 실학사상의 한 특성을 형성하고 있다〉 6) 고 한다. 〈성리학적 실학〉이라고도 요약될 수 있을 그의 이러한 어정쩡한 절충은 비록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우리가 이재의 학문을 논의함에 있어서 무시하기 어려운 문제의식을 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성리학과 실학에 대한 학계의 연구성과에 의거할 때 이재의 학문은 분명히 그 두 가지를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학이 성리학과는 다른 하나의 새로운 사조일진대 양자가 어떻게 한 학자에게 공존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은 이재의 학문에 대한 기왕의 평가들을 재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그의 사상을 성리학 • 서학 • 국학 등과 관련하여 다각도로 조명해 보고자 한다.

2 性理說

願齋의 성리설은 그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밝혀줄 핵심적인 자료가 된다. 우리는 그것을, 그가 16 세에 편집을 시작하여 거기에 〈평생의 정력을 쏟았다〉고 하는 『이수신편』 7) 1, 2 권에 실린 太極圖, 太極, 理氣 등의 항목과, 역시 그가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 당시의 湖洛 人物性同異 論爭 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상세한 고찰의 예비적 단계로서 우선 성리학에 대한 그의 인식태도를 살펴보도록 하자. 거기에는 그의 사유의 중십축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재는 〈나이 10 여 세 무렵, 과거공부 이의에 이른바 성리학이 따로 있다는 것을 처음 알고는 분연히 몸 바쳐 그에 종사하려는 뜻올 남 몰래 가진〉 8) 이래로 성리학의 연구와 옹호의 의지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6) 위의 책, 「解題」, 4 쪽.

7) 위의 책, 「理萩新編序」, 128 쪽.

이 점은 그가 그의 생애 각 시기에 걸쳐 성리학의 여러 주제들을 계속 논의하고, 한편 성리학 이의의 여러 학설들을, 심지어는 같은 성리학 내에서도 朱子의 본의에 어긋난다고 여겨지는 여러 주장들을 강하게 비판 • 배척하고 있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그가 나이 사십에 꿈 속에서 그의 스승 淡湖 金元行 (1702-1772) 에게 人物性同異論과 관련하여 理氣心性說을 질의하고 자신의 논리를 개진한 것이나, 50 세에 당시 人物性異論의 제창자였던 南塘 韓元 (1682-1751) 에 대하여 程朱를 존신하지 않는다고 비난한 것, 또는 51 세에 朱子說에 입각하여 王陽明의 知行合一說을 비판한 것 등이 그 예가 된다. 특히 그는 주자에게 거의 절대의 신앙을 보이고 있는데, 그의 몇몇 발언들을 들어보도록 하자. 〈사대부의 행동거지의 大法이 朱子睿에 다 들어 있다.〉 9) 〈孔子를 계승한 자는 주자 한 사람뿐이다.〉 10) 〈주자는 하늘이 임명한 사람으로서, 그를 우러르는 사람은 성현이 될 것이요, 그를 거역하는 자는 요사한 역적이다.〉 11) 〈주자를 존중하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집안이 편안해질 것이요, 주자를 거역하면 나라가 혼란해지고 집안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12) 〈朱子學은 세상사람들이 모두 받들어 마땅하다. >13 )

이재의 이와 갇은 신앙적 자세는 당연히 朱子說의 일언반구에 대해서도 왈가왈부를 허용하지 않는 교조주의적 태도를 드러낸다. 그가 梅齋 李彦迪 (1491-1553) 의 「大學章句補遺」를 주자의 뜻과 다르다 하여 곱지 않은 시선으로 대한 것이나, 또는 白湖 尹鎖 (1617-1680) 의 脫朱子的인 학문태도를 〈斯文亂賊〉으로 몰아 죽인 尤庵 宋時烈 (1607-1689) 의 비학문적 자세에 찬사를 보낸 것은 14) 이의 당연한 결과이다. 우리에게 실학자

8) 위의 책, 擬上黎湖朴公 菅, 65쪽.

9) 위의 책, 『與趙仁叔 書 」, 83쪽.

10) 위의 책. 『答羅舒川書」, 93쪽.

11) 위의 책, 『漫錄』· 559쪽.

12) 위의 책, 같은 곳.

13) 위의 책. 年 , 604쪽.

14) 위의 책, 『漫錄』' 513쪽.

로 알려져 있는, 또 한 사람의 〈사문난적〉 西溪 朴世堂 (1629-1703) 또한 그러한 그에게 용납될 리가 없었다. 서계의 실학을 확고하게 해주는 것으로 논거되는 反朱子學의 「思辨錄」이 이재에게는 〈나라를 혼란과 멸망에 빠트리는 요사한 역적의 짓〉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15)

이재의 학문성향은 그가 조선조 유교의 學統을 정리하는 시각에서도 읽혀진다. 그는 〈尤庵 宋文正公 선생이 栗谷과 沙溪를 계승한 이래로 주자학이 동방에 크게 밝아졌다〉고 전제한 뒤 우암의 학통이 農巖 金昌協(1651-1708) ―陶庵 李薛 (1678-1746) 一淡湖 金元行에게로 이어졌음을 주장하고 있다. 16) 이러한 학동 인식은 물론 많은 문제를 내포한다. 거기에는 되계학파가 제의되어 있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암의 유지를 받들어 속리산 화양동에 〈 萬 束廟〉를 세웠던 우암의 제자 遂庵 權尙夏 {1641-1721) 와 그의 문하의 이른바 黃江八學士의 학문적 위상이 격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개 人物性同異 문제에 대한 그의 경직된 인식태도에 기인한다. 그의 생각으로는 〈사리의 분명한 판단과 논리의 정확한 전개는 孫巖 李束 (1677-1727) 과 洗馬 玄尙整( ?-? ) 이 가장 뛰어났는데 불행히도 일찍 죽어서 크게 밝혀지지 못했음〉에 반하여, 그 논쟁의 상대방이었던 南塘 韓元袁의 지나친 자기주장과 편견, 그리고 이들의 스승이었던 수암의 모호한 인식태도가 사리를 혼란 왜곡시킨 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17) 그는 여기에서 미호에 이은 자신의 주자학적 정통성을 암암리에 자부하고 있었던 것처럽 보인다. 아무튼 이와 같은 학통관은 그의 철학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특히 그의 글 여러 곳에서 드러나는 바와 갇이 그가 우암을 깊이 존신했던 태도에 서 18) 우리는 그의 철학의 기본 범주를 미루어 짐작해 불 수 있다.

15) 위의 책, 『漫錄』, 559쪽 참조.

16) 위의 책, 「記湖洛二學始末 , 447쪽 참조.

17) 위의 책, 같은 곳. 참고로 이는 그가 湖洛논쟁 중 洛學파의 대열에 서 있음을 말해 준다.

18) 위의 책, 與趙仁叔 言 」, 83-84 쪽, 巖 書 院 魔鷄 尤 翁眞 像』, 304 쪽 , 記鋼 格二

學始末 」 , 447 쪽, 通諭 長城鄕校文」, 456쪽, 『漫錄』, 513쪽 등 참조.

이상의 고찰에 입각할 때 이재의 철학은 朱子性理學 내의 것임이 명백해진다. 다시 말하면 그의 세계관이나 인간관 등은 성리학의 理 氣 心性개념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것은 특히 그가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율곡의 〈 氣 發理乘一途〉說을 위주로 하고 있다 .19) 이제 그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자.

천지 사이에는 다만 理 • 氣 • 質 세 가지가 있을 뿐이다. 質은 氣 가 쌓여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氣 에 비하여 분명하게 드러난다. 氣 는 理에 비하여 흔적이 조금 있긴 하지만 그래도 형체를 가진 質과는 갇지 않다. 理는 형태도 흔적도 없지만 지극히 신묘하여 氣 에 내재해 작용한다. 그래서 氣 가 쌓여서 質이 될 때 理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을 예로 든다면 신체와 혈육은 모두 質이고 한기와 열기, 호흡은 모두 氣 이며 仁義 視 智와 같은 것은 理이다 .20)

이재의 이러한 설법은 곰곰이 따져 보면, 우주 내의 천차만별하고 복잡다단한 만물들의 생성과 변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거기에는 어떤 질서와 법칙이 있는 것인가? 하는 등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담고 있음올 알 수 있다. 요컨대 그의 철학은 세계와 사물, 인간의 경험을 理 • 氣 • 質의 개념으로 파악하여 의미체계화한 것이다. 이에 의하면 우주만물(質〕은 그 흔적이 찰 드러나지 않는 氣가 작용한 결과이다. 氣란 사물의 생성 변화에 작용하는 힘으로서, 그것은 陰과 陽의 두 양태를 갖는다. 음은 수동적 • 소극적 • 부정적인 힘이요, 양은 능동적 • 적극적 • 긍정적인 힘이다. 양자는 물론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 성질상 끊임없이 유동하는 그것은 일정한 주기와 한도 속에서 각자 자신의 모습을 바꾼다. 모든 것은 그 극단에 이르면 반전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재는 이

19) 위의 책 , 「答丁丈 會 」, 74쪽 참조、

20) 위의 책 , 『 漫錄 』, 517쪽.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이 변해서 양이 되고 양이 변해서 음이 된다. >21 ) 氣 의 유동상에서 살펴전 음양의 이와 같은 상호순환적 성질은 그 자체가 양자의 상호내포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재의 표현을 빌리면 〈음양 가운데에는 각기 음양이 갖추어져 있다〉 .22) 왜냐하면 一 氣내에 음양의 순환과정상 一者의 성장은 그 자체가 他者의 쇠퇴를 수반하면서 양자가 서로 맞물려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재의 사물 생성관이 여기에서 드디어 그 핵심을 드러낸다. 〈천지만물의 생성 • 변화는 음양二氣 일 뿐이다. >23 ) 말하자면 우주의 삼라만상은 음양으로 표상되는 상반적인 두 힘의 역동적 상호작용의 결과다.

21) 위의 책, 「上靜 愼脣 金公 書 」, 69쪽.

22) 위의 책, 같은 곳.

23) 위의 책, 撫 孤 亭記 」, 137쪽.

세계를 일련의 이기론적 의미체계 속에서 파악하는 이재는 음양의 순환변화의 한 중심에 理를 설정한다. 理란 음양의 변화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자연의 섭리를 뜻한다. 세계만물이 혼란과 파국으로 마감됨이 없이 일정한 질서와 조화 속에서 끊임없이 발전해 나가는 것이나, 또는 사물들이 각기 그 고유의 본질을 얻어 이를 실현해 나가는 것은 모두 이一元의 理에 근거한다. 理가 없는 세계와 사물을 우리는 상상할 수가 없다. 이재의 다음 시구는 이러한 뜻을 요령있게 함축한다. 〈삼라만상이 모두 하나의 근원에서 펼쳐지나니/인간세상에 어느 사물인들 그 느티나무 같지 않으랴. >24 ) 그는 또한 다음과 갇이 적고 있다. 〈만약 이 理가 없다면 천지도 없고, 사람도 만물도 없으며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다. 理가 있음으로써 氣 가 작용하여 만물의 발육이 있게 되는 것이다.〉 25)

24) 위의 책, 「利高通甫泳棟慕先之作二絶, ,50쪽. 위의 시에서 〈그 느티나무〉 운운한 것은 〈삼라만상이 하나의 理에 근원 을 둔 것( 理 一分殊)〉이라는 성리학상의 대명재를 느티나무(의 한 뿌리와 기타 많은 부분들)에 비유한 혹자의 시를차용한 것이다.

25) 『願齋全書』 II, 『理薇新編』, 7쪽.

한편 이재의 인간관 역시 이기론의 범주 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 점은

이미 말한 것처럼 그가 당시 호락의 人物性同異論爭에 깊숙이 참여하고 있음에서 확실히 인지된다. 주지하는 것처럼 人物性同異論은 인간과 초목금수간의 본질의 이동을 따지는 논쟁이다. 이기론의 시각에서 살펴볼 때 양자의 존재 본질은 어느 수준에서부터 서로 달라지는가? 사실 성리학의 매우 추상적이고 복잡다단한 이기심성론은 이 문제에 대하여 필연 적으로 혼란스러운 답안을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서 하나의 논리 정연한 人物性觀을 찾아내기는 무망하였던 것이다. 조선후기 호락논쟁은 성리학상 그 동안 참복되어 있었던 그러한 문제가 터진 것이었다. 그 첨예한 대립은 『中庸』 天命之謂性章의, 주자의 주석을 논거로 한 의암의 人物性同論과, 『孟子』 生之謂性章의 역시 주자 주석을 근거로 한 南 의 人物性異論 의 격돌로 나타났다. 우리는 여기에서 호락논쟁의 전말에 대한 소개를 생략하고, 洛學者였던 이재의 인간관에 분석의 초접을 맞추어 보도록 하자.

이재는 인간과 초목금수의 본성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주장한다. 이는 매우 해괴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성리학의 이론구조 속에서 그 나름대로의 근거를 갖는다. 만물의 존재근원을 理, 죽 자연의 섭리에 두고 있는 이재의 성리학에 의하면, 인간은 물론 초목금수도 마찬가지로 자연의 섭리를 타고난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 귀결이다. 〈性卽理〉는 바로 이의 요약명제에 해당된다. 그런데 성리학상 자연의 섭리는 결코 몰가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윤리적인 속성을 갖는다. 『중용』의 〈誠者天之道〉, 『周易』의 〈一陰一陽之謂道 槿之者善 成之者性〉 26) 이라 한 뜻에서, 그리고 특히 우리가 이기설에서 항시 접하는 바 이 글자에 배어 있는 윤리적 의미 등에서 이 점이 어렵지 않게 간취된다. 그렇다면 자연의 〈윤리적〉 섭리 하의 만물은 역시 모두 윤리적 본질을 타고난다고 말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仁義禮智信은 그에 대한 인간본위의 가치범주적인 언명일

26 ) 朱子의 혜석에 의하면 위의 (繼之者)善은 人事상의 개념이 아니다. 그는 말한다. 〈위의 일단의 글은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뜻을 말한 것이지 人性상의 일을 말한 것이 아니다.〉(『周易傳義』(二以會), 上」 細注 朱子說, 1011쪽).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재가 인간과 초목금수의 본질을 똑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양자의 실질적인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갇이 말한다. 〈五性은 사람이나 초목금수가 자연으로부터 갇이 타고난다. 다만 사람은 그것을 확대실현할 수 있는데 반하여 초목금수는 그러 하지 못하다. >27 ) 사람은 利他의 사회 생활을 아는데, 초목금수는 自利의 본능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理(性)의 실현과 은폐를 결정짓는 氣質의 淸潟粹駿에 기인하는 것이라 하거니 와 ,28) 사람의 청수한 기질은 바로 마음으로 드러난다. 그는 도덕성을 확대실현할 수 있는, 그리하여 자연의 섭리에까지 동참할 수 있는 정신능력을 타고 난 것이다. 이재의 다음과 갇은 영원은 이러한 인식에 바탕을 둔다.

天地도 廣大하다 내 마암 갓치 廣大

日月도 光明하다 내 마암 갓치 光明

진실로 내 마암 天地日月 갓게 하면 堯舜同歸 하오리라 .29)

초목금수와 다른 인간 존재의 특수성과 위대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역시 말한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지만 마음이 아니면 사람이 될 수 없다. 마음은 세상만사의 근원이지만 敬이 아니면 마음을 이끌어 나갇 수가 없다.〉 30) 이렇게 하여 그는 敬울 통해서 거동을 신칙함은 물론 心性을 함양함으로써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의 正位를 확보하려 하였다. 그의 저술 곳곳에서 강조되고 있는 敬은 이러한 사고의 맥을 갖는다. 이는 그의 인간관이 이기설의 전제하에 性-心-敬으로 이어지는

27) 『願齋全書』 I, 記湖洛二學始末」, 447쪽.

28) 위의 책, 「答丁丈密 , 74쪽 참조

29) 위의 책, 「木州雜歌』, 344쪽.

30) 위의 책, 扶安鄕校萬化樓 重修記」 , 381쪽.

이론과 실천의 성리학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철학이 〈처음부터 性理文字에 근본하지 않음이 없었다〉는 그의 문인 宋獻仇1 의 말을 추인하지 않을 수 없다

3 異端觀

조선조 유학자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들이 이단을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를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들이 여타의 사상을 일종의 〈邪說〉로―이단이라는 말에는 이러한 비난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치부해 버리는 태도 자체가 그들의 사상적 정향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학사상을 규명하는 데 그 학자들의 이단관이 한 가지 자료가 되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願齋의 학문과 사상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의 이단관 역시 예의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래에서는 그 이전의 성리학자들에 의해서 이단으로 규정되어 온 佛敎와 楊明學을 그가 어떻게 인식하였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도록 한다. 그는 道家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는 아마도 그것이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거의 배척됨으로써 그의 학문적 경계의식울 자극하지 못했던 데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재의 불교인식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는 윤회설 • 罪福說 • 舍利의 존재 등을 문제로 삼고 있는데, 먼저 윤회설에 대한 그의 인식태도를 살펴 보도록 하자. 그는 윤회설의 타당성 여부를 묻는 혹자의 질문에 다음과 갇이 대답한다.

그것은 역사 천지의 氣가 이미 흩어진 것은 사라지고 새로이 출현하는 것이 그 뒤를 잇는다는 이치를 모르는 소치다. 만약 혼령이 없어지지 않고 이리저리 윤희한다면, 그것은 이미 홀어졌는데도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출현이 이어질 것도 없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橫渠의 『正蒙』에 육체가 다하면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이미 朱子에 의해서 비판받은 바있다. 내가 믿는 사람은 程子와 주자뿐이다 .31)

이는 그의 윤회설 비판이 理氣論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앞서 살핀 것처럼 인간의 생사는 氣 의 이합취산의 산물이다. 이때 이미 흩어진 氣 는 더 이상 존속함이 없이 사라져 없어진다. 〈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큰 화로와 같아서 그 가운데 어느 한 가지 물건도 소진되지 않는 것이 없다. 오늘의 새로운 물건은 어제 사라졌던 것이 재생된 것이 아니다. >32 ) 그가 花潭 徐敬德 (1489-1546) 의 一氣長存說을 비판하면서 그것이 佛說에 가깝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근거에서이다 .33) 요컨대 그에게 있어서 불교의 윤회설은 이 세계의 구성요소인 〈理〉 氣 • 質의 본질을 알지 못한 소치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의 죄복설에 대해서는 그도 그 합리성을 일단 인정한다. 선한 자는 복을 얻고 악한 자는 죄를 받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는 것이다. 이는 사실 유가의 신념이기도 하다. 『普經』의 「湯皓」편에 〈福善禍器〉의 언명 또한 이와 뜻을 전적으로 같이한다. 문제는 다만 그것이 불교의 교리상에서 권선정악의 윤리적 가르침으로 행사되지 않고 종교적으로 변질되어 사람들에게 비합리적인 생활을 강요하는 설법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재는 불교가 사람들에게 겁을 주면서 그들의 미혹을 조장하는 것으로 죄복설 이상 가는 것이 없다고 하면서 그 문제접을 다음과 갇이 지적한다.

사리와 시비를 따질 것도 없이 오칙 일념으로 불교에 귀의하기만 하면 모두 악이 씻겨지고 만복이 저절로 깃든다고 하니, 이 어찌 이치에 합당하겠는가. 게다가 보시의 많고 적음에만 기준을 두어 선악을 나눌 뿐 의리의 옳

31) 위의 책, 『漫錄』, 518쪽.

32) 위의 책, 『漫錄』, 539쪽.

33) 위의 책, 「夜坐對月有感 , 氣岭 二 律 」, 6쪽 참조.

고 그름은 생각하지 않으니, 이런 일에는 어리석은 사람이나 아이들조차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에 이른바 才智 있는 사람들과 지위 높은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거기에 빠져 버리니, 지위 높은 사람 중에는 어리석은 자들이 당연히 있는 법이지만 재지 있는 사람들도 그러한 것은 어쩐 일인가? 34)

이는 불교의 죄복설이 사회에 끼치는 폐해에 대한 탄식이기도 하다. 당시 일반 백성들은 물론 사대부와 궁중의 사람들까지도 재물을 싸가지고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며 극락왕생을 빌거나 또는 顔堂을 짓기도 하여 그것이 민폐를 많이 야기하였던 것이다 .35) 원당이란 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시고 그의 명복을 비는 법당을 말한다. 고려시대에 성행하여 사회적 폐단이 심했으며 그 유습은 조선조에도 금지되지 않아 민폐를 많이 낳았다. 正祖 때 (1776) 에 이르러서야 전국에 산재해 있는 그것들을 철거하도록 하고 그것을 다시는 건축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이 제정되어 그 폐해가 전정되었다• 여하든 이재의 이러한 비판은 기본적으로 성리학 이전에 불교의 종교적 맹접에 대한 유교적 합리정신의 대웅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梅軒安璃(1243-1306} , 圓隱 鄭夢周 (1337-1392) , 三峰 鄭道傳 (?-1398) 과 같은 초기 성리학자들의 排佛論에 접맥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는 죄복설을 비판하는 한편 그들의 불교배척의 공로를 칭송하고 있기 때문이다 .36)

한편 부처의 사리에 대해서, 그는 精氣의 옹결현상이라 하면서 그것은 승려 이의에 일반인들에게도 가능한 일일 것임을 주장한다. 이에 관해서는 그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佛家에서는 걷핏하면 成佛者는 죽으면 사리가 나오고 (그 아래의) 法力者도 超骨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교가 본래 사람을 화장하지 않아서 그러하지 , 만일 화

34) 위의 책, 『漫錄』, 518쪽.

35) 위의 책, 『沒錄』, 581쪽 참조.

36) 위의 책, 『漫錄』, 518쪽 참조.

장한다면 불가처럼 사리가 나올지 어떻게 알겠는가. 또 아주 어리석고 패악한 사람들에게서도 그것이 나올지 어찌 알겠는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정기가 응결되어 생긴 것일 뿐이다. 또 梵語의 사리는 곧 중국어의 超骨울 뜻하는데, 어리석은 중들이 그것을 두 가지로 나누니 가소롭다.〉 37)

이재의 양명학 비판은 두 가지 점에서 행해진다. 먼저 학문방법론에 대한 것이다. 양명학은 학문을 함에 있어서 어려운 것은 피하고 간편함만을 추구하려 한다는 것이다 .38) 이러한 비판은 양명학이 세계만물에 대해 어려우면서도 의미 깊은 탐구작업을 포기하고 다만 비교적 용이한( ? ) 마음수양에만 치중하는 태도를 표적으로 하고 있다. 주지하는 것처럼 이 문제는 朱子의 〈道間學〉과 陸象山의 〈尊德性〉의 대립 이래로 陸王學에 대한 성리학자들의 한결갇은 지적사항이기도 하다. 객관적 사리탐구를 중시하는 〈도문학〉의 그들에게 있어서, 주체의 덕성 함양만을 강조하는 〈존덕성〉의 육왕학은 쉽고 간편한 것만을 추구하는 편협한 학문태도로 여겨졌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만물탐구의 학문방법이 너무 지리하다는 육왕학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들은 반대로 그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 덕성 함양의 무모성을 지적하면서 양자를 병행해야 함을 주장한다. 실제로 성리학자들, 특히 조선조 성리학자들이 〈도문학〉과 더불어 행했던 바 〈존덕성〉의 공부는 단순히 진지함을 넘어서 매우 도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학풍의 잔재는 이재의 敬공부에서도 엿보인다. 다만 주목되는 접은 〈도문학〉에 대한 그의 관십이 여느 성리학자들의 그것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는 접이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의하려 하거니와, 객관적으로 살피면 〈존덕성〉보다는 〈도문학〉에 단연 기울어 있었던 그는, 육왕학에 대하여 주자나 기타 다른 성리학자들 이상으로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양명학의 지행합일설에 대한 이재의 비판 또한 성리학자들에게는 전형

37) 위의 책, 같은 곳.

38) 위의 책, 『漫錄』, 559쪽 참조.

적인 것이다. 앎과 실천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앎이 전실한 곳에 곧 실천이 있고 실천이 각성된 곳에 곧 앎이 있다는 王陽明의 주장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마음의 앎과 몸의 실천이 궁극적으로 두 가지가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근원을 파고들면 먼저 앎을 얻어야만 실천을 할 수 있다. 어떻게 앎이 곧 실천이요 실천이 곧 앎이라 할 수 있겠는가. >39 ) 앎이 실천보다 앞선다는 그의 말은 곧 앎이 실천보다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에 의하면 경중으로 따진다면 앎보다는 실천이 오히려 중요하다. 그러나 양자는 역시 상호보완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앎을 쌓고 또 한편으로는 실천에 힘써 양자를 병행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40) 그의 이와 같은 주장은 그 스스로 말하는 바와 갇이 주자의 정론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나 知行說의 논의를 떠나서 그의 학문 전체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는 역시 〈도문학〉의 학문적 성향 속에서 실천과 무관한 객관적 지식의 담구에 열중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접은 후술하는 바 그의 博物學的 사고에서 확인된다.

이재의 양명학 비판은 조선조의 몇몇 학자들에게로 옮겨진다. 그의 말울 들어보도록 하자. 〈우리나라로 말하더라도 근세에 또한 양명학을 추구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주자의 도문학 공부를 싫어하였기 때문인데, 결국에 가서는 주자를 배척하고 육상산을 존중하게 되고 말았다. 尹鎖가 中庸柱를 개정한 것이나 朴世堂이 四 書 辻를 개정한 것이 모두 그러한 경우이고, 鄭齊斗는 아예 순전한 양명학자다.〉 41) 이재가 이와 갇이 尹白湖와 朴西溪를 사실과 달리 양명학자로 몰아붙여 비난한 데에는 아마도 宋尤庵 계열로서의 당파적 시각과 오해가 함께 작용하였을 것이다. 주자의 이론뿐만 아니라 우암의 정치적 주장을 비판한 그들이 그에게는 〈나라를 멸망으로 이끄는 요사한 역적〉으로 여겨져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양명학이 〈육상산에 동조하고 주자를 비판

39) 위의 책, 같은 곳.

40) 위의 책, 같은 곳.

41) 위의 책, 같은 곳.

함으로써 천하를 급속히 오랑캐 세계로 빠뜨렸다〉 42) 는 이재의 정치적 무고행위는 그의 학문적 입지와 정치적 주의를 알려주는 한 단서가 된다.

4 西學의 인식

西學(천주교와 서양과학)은 성리학으로 짜여전 조선조 지식인 사회의 사상판도에 변화를 불러일으킨 한 요인이다. 그것은 불교나 노장사상· 양명학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異端〉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으로부터의 유입 이후 많은 성리학자들에 의해 꽤 전지하게 연구 • 검토되는 행운을 얻었다. 당시 성리학자들이 서학에 별다른 경계의식을 갖지 않고 접근했던 것은, 아마도 천주교의 〈매우 천박한〉――이는 이재의 논평이지만 43) 성리학자들의 인식수준은 이를 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교리와 서양과학의 가치중립적 성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서학이 성리학적 사회(세계)질서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이와 갇은 오판과 방십을 자각한 것은 18 세기 말엽에 이르러서였다. 그때쯤에는 천주교 교세가 전통의 사회질서에 위협을 가할 만큼 상당히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정치적 당리당략이 함께 작용한 결과이긴 하지만, 1791 년의 辛亥邪 獄 과 1801 년의 辛 酉 邪 獄 은 순전히 사상사적으로만 살피면 성리학자들이 뒤늦게 서학에 가한 예의 이단의식의 산물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후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야욕에 노출된 구한말의 성리학자들이 그 이단의식의 연장선상에서 매우 감정적으로 모든 서양적인 것을 〈萬獸의 道〉로 규정, 타도하려 했던 사실은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다.

이재가 서학을 언제 접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가 34세에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利璃寶(Matteo Ricci, 1552-1610)의 『幾何原本』을

42) 위의 책, 『 漫錄 』, 514 쪽.

43) 위의 책 , 『 漫鉛 』 , 545 쪽 참조

언급, 〈‘이 책이 사물의 이치를 크게 밝혀놓고 있으므로 서양인의 저술이라 해서 우리가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선배들이 많이들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그 내용을 간절히 알고 싶어했던 것을 보면 ,44) 아마도 그는 30 세 전후에 서학의 소식을 듣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서학일반에 대한 그의 총괄적인 논평을 들어보도록 하자.

처음에 나는 天主 實 義가 볼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살펴보니 매우 천박하다. 그 중에서도 천당지옥설과 영혼불멸설은 너무나도 해괴하다. 李之溪가 어째서 그렇게 추켜올렸는지 모르겠다. 대체로 서양인들의 曆法과 算法 등은 천고에 뛰어나다. 성현들의 성리학설은 漏洛關閔 이상 가는 것이 없지만 역법과 산법 등은 서양의 것보다 나은 예가 없다 .45)

44} 위의 책, 與金宜伯行」, 369쪽 참조.

45) 위의 책 , 『 沒錄 』, 545 쪽. 渡洛關間이란, 요컨대 周源溪 • 程子 • 張橫渠 • 朱子의 학문 을 뜻한다.

천주교의 천당지옥설과 영혼불멸설이 왜 그렇게 해괴한지, 이재는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의 유교적 합리주의로 판단하기에는 아마도 그 말들이 너무나도 황당무계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그것들을 따질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그의 불교관으로부터 유추해 낼 수 있다. 불교의 윤회설에도 천주교의 천당지옥 • 영혼불멸설과 유사한 내용이 있으며 그는 그것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 天主 實 義 』 를 〈老佛의 찌꺼기를 홍천 것에 불과하다〉 46) 고 혹평한 것도 그 유사성을 기초로 한다. 그에 의하면 이 세상의 만사만물은의 이합취산의 현상으로서, 한번 홀어전 氣는 더 이상 존속함이 없이 사라져 버린다. 사람의 혼백도 이에서 예의가 되지 않는다. 그것 역시 죽음과 함께 홀어져 없어지는 것이지 유독 그것만 계속 남아 저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귀신 혼백을 불러 모신다는 유교의

46) 위의 책, 年譜』, 626쪽.

제사에도 영혼불멸의 협의가 주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자손이 그들과 〈同氣間〉인 조상을 추모하며 감동에 짖는 효성의 표현형식일 뿐이다. 〈자손의 氣가 곧 조상의 氣이기 때문에 자손이 자기 안에서 조상 現前의 감동을 갖는 것일 뿐이다.〉 47) 그러므로 영혼의 세계는 존재할 여지가 없으며, 이에 따라 천당지옥도 〈해괴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재가 『 천주실의 』 를 읽으면서 성리학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고 있는 것도 천주교의 그와 같은 교리에 비하여 성리학이야말로 철학적 깊이와 이론적 치밀성을 갖고 있다는 그의 자부십의 발로일 것이다.

이재는 천주교의 교설을 혹평한 것과는 달리 서양의 과학에 대해서만큼은 아낌없는 찬사와 함께 적극적 수용의 의지를 보인다. 48) 그는 서양의 기술을 자명종 시계나 야금술 • 丹靑기법 등에서 접하였고, 49) 과학에 관해서는 『幾何原本』, 新法曆引』 등의 서적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50) 『기하원본』은 희랍인 유클리드Euclid 의 『幾何原理』를 명나라 徐光啓와 마데오리치가 함께 번역한 책이요, 신법력인』은 역시 명나라 徐光啓, 李之 溪 와 서 양 의 湯 若 望 Joannes Adam Schall Von Bell), 羅 雅 谷 (Rho Giacomo) 등이 공동 저술한 책이다. 전자는 주지하는 것처럼 수학(기하학)의 고전적 교과서이고, 후자는 서양역법의 전래에 따라 중국 전통의 그것을 수정 보완한 천문학 서적이다. 이는 이재의 과학사상의 범위를 말해 준다. 그는 수학과 천문학에 당시로서는 상당히 전문가적 식견을 습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47) 위의 책, 『漫錄』, 539쪽.

48) 참고로 이재의 과학사상에 대해서는 하성래 선생의 願賓 黃胤錫의 서양과학 사상 수용」( 傳統文化硏究》 제1집)이라는 논제의 연구보고가 있다.

49) 『願齋全 書 』 I, 自鳴鐘」, 5 쪽, 「年譜 」, 626 쪽 동 참조.

50) 이재는 『新法曆引』을 〈천고에 뛰어난〉 책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위의 책, 『漫錄』,544쪽 참조).

수학과 기하학에 대한 이재의 관심 정도와 지식수준은 그의 算學間答」과 「算學入門」, 「算學本源」에 찰 나타나 있다. 그는 거기에서 가감승

제의 원리를 응용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길이 • 넓이 • 부피 • 무게 등을 구하는 방법을 기술하고 또 응용문제들을 풀이한다. 예컨대 〈두 다리의 닭과 네 다리의 토끼, 그리고 여섯 다리의 짐승이 한 우리 속에 총합 82다리 23 마리가 있다면 각 짐승의 숫자는 몇 마리가 될 것인가 ? > 하는 문제에 그는 가능한 답들을 예시하면서 그것의 계산공식을 제출, 설명한다 .51) 그가 도량형에 관심을 가졌던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각종 산술의 기초가 되는 도량형이 통일되지 않고서는 수학은 학문으로서의 보편성을 얻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田地나 곡식 등의 도량형을 중국의 그것과 비교 • 고증한 것도 이러한 인식의 소산이다. 도량형은 물론 순수학문적인 차원의 것으로만 논의될 수는 없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합의된 사회질서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민생의 안부에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정비는 政 事 의 급선무가 되지 않을 수 없댜 그가 〈백성들에게 세금과 공물을 거둘 때에는 긴 자 • 큰 말 • 무거운 저울을 사용하고 그들에게 물품을 나누어 줄 때에는 짧은 자 • 작은 말 • 가벼운 저울을 사용한다〉 하면서 지방마다, 그리고 사용자마다 다른 그것들의 정비를 강조한 것 52) 도 이에 연유한다. 도량형에 대한 이와 같은 사회적 인식은 원래 과학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수학적 안목은 거기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재의 천문학의 특칭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地圓說과 역법이 그것이다• 종래 천지의 형태에 관해서는 天圓地方說이 제자백가의 정설이었다. 그러나 17 세기 초 서양의 선교사들이 속속 중국에 들어와 서양의 과학을 소개하면서부터 그것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지구 역시 둥글며,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전하고 설득하였기 때문이다. 천원지방설의 동요는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중국과 다를 것이 없었다. 중국으로부터 서양의 과학이 전파되면서 그것은 학자들의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51) 위의 책 , 算學 問答」, 494쪽 참조.

52) 위의 책 , 『 濕錄 』, 550-551쪽 참조.

이재는 篠巖의 저술을 인용하여 이를 소개하는 .53) 한편 地方說을 고집하는 의암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갇이 반박한다. 〈하늘은 땅 밖의 큰 원이요 땅은 하늘 안의 작은 원이다. 원으로 원을 둘러싸는 것이 사리와 형세상 당연한 일이니 이는 曾子가 말한 대로다. 만약 정말 하늘은 둥근데 땅이 모났다면 이는 하늘의 원으로 포괄되지 않는 땅의 네 모서리가 생기는 꼴이다. 이는 『 大 裁禮 』에 이미 적혀 있거니와 『 周牌』와 『周易』. 「 卦」 文 言 傳과도 신묘하게 부합한다. 그러니 서양역법상 땅도 둥글다는 주장이 어찌 근거 없는 것이겠는가?〉 54) 지방설에 대한 비판논리가 비과학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以 夷 制 夷 〉의 수법처럼 보이며, 서양의 천문학을 이미 숙지하고 있었던 그의 〈地圓〉의 주장은 상당히 과학적인 논거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접은 그가 그 논거로 지구가 기울어져 있음과 태양의 黃道, 지구의 赤道를 들고 있는 데에서 추찰된다. 55)

53) 위의 책, 『 漫錄 』, 544쪽 참조`

54) 위의 책, 「題嵐 巖集 天地 辨 六面世界冬 夏 兩至相 配圓 」, 387 쪽. 『 周停 』는 고대 算法에 관한 책이다.

55) 위의 책 , 『 漫錄 』 542쪽 참조.

그의 지원설이 서양의 천문학을 접수한 결과라면 지동설 또는 지전설에 대한 그의 견해는 어떠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는 이에 관해서는 명시적인 언급을 하고 있지 않지만, 지원설의 고전적 논거로 『주역』 「곤괘」의 문언전을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지동설을 묵시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땅은 지극히 부드럽지만 그 움직입은 강건하고, 지극히 고요하지만 그 덕은 방정하다(坤至柔而動也剛 至靜而德方)〉는 「곤괘」 문언전을 지동설의 논거로 삼고 있는 滿軒 洪大容의 주장과 이재의 취지가 같기 때문이다. 56) 또한 〈천체가 지구의 둘레를 도는 것이 아니고 지구가 회전함으로써 낮과 밤의 하루가 이루어전다〉고

56) 全相運 「滿軒 洪大容의 과학사상」, 『실학논총』 (전남대 출판부), 471쪽 참조 滿軒과 이재는 淡湖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며 교류한 사이이다.

주장한 『易學圓解』의 저자 大谷 金錫文(생몰년 미상, 肅 宗 때 학자임 57)울 그가 홈모해 마지않았던 점에서도 58) 그의 지동설은 간접적으로 추측될 수 있다.

57) 大谷의 사상에 대해서는 閔泳珪, 「 17세기 李朝學 의 地動說」(《한국사연구 휘보 》 제1호, 4-6쪽 참조)

58) 『願寶全容』 I , 「異林啓濬睿, 116쪽, 「書金大谷錫文易學圖解」, 144쪽, 與金持 平宗譯睿, 363쪽 등 참조.

한편 역법에 대한 이재의 안목은 그것에 관한 그의 많은 저술들에서 쉽게 살펴질 뿐만 아니라, 그의 曆學이 조정의 대신들에 의해 회자되고 또 영조가 그를 직접 불러 문답했던 데서 59) 객관적으로 확인된다. 그는 역법에 대해 서양의 그것을 알기 이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14세에 그의 아버지로부터 중국 고대 역법의 하나인 『書經』 「三百」과 관련하여 충고를 듣고서부터 그것에 유념하기 시작하였다. 60) 그는 일월성신의 운행과 계절 절기를 추산하는 학문으로서의 역법이야말로 정치의 요령임을 강조하지만 61) 정작 그의 연구 수준은 실용을 넘어서서 방대하고 도저한 이론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가 고금의 역법들을 연혁적으로 고찰하고 있음은 물론, 고려시대 이래 우리나라 • 중국 • 서양, 심지어는 回回國의 역법들까지 비교분석하고 있는 점이 이를 잘 말해 준다 .62) 그러나 역시 서양역법의 과학적 타당성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말한다. 〈서양의 역법이 전래된 이후로 일월성신이 모두 법도를 얻어 歲 差를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63)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사고가 서양의 과학적 합리정신으로만 채워져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의 天文 인식태도는 기본적으로 유교적이었다. 그는 서양의 역법에 기준을 두고 동양의 그것을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후자를 골간으로, 더

59) 위의 책 , 年譜」, 610쪽 참조. 그의 나이 42세 때의 일이다.

60) 위의 책, 年譜」, 600쪽 참조

61)「颐齋全書」I,「芥三百總解」,34쪽 참조,

62)『颐齋全書』I,「古今曆法放」,481쪽,「明史回回曆補正諸數」,483쪽 등 참조

63) 위의 책,『浸錄』, 543쪽.

나아가서 천문과 人事에 관한 유교의 기본정신을 전제로 전자를 참고하여 후자의 부분적 오류와 미비점을 補正하였다. 이 접은 그가 일식 • 월식에 대한 서양역법의 원리적 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그것을 여전히 하나의 〈災變〉으로 규정, 天人感應說상 통치자의 惡政에 대한 일종의 경고표시로 이해하려는 태도에서)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이와 갇이 서양의 과학을 수용하면서도 기본적으로 완강한 유교정신이 이재의 과학적 사고에 제약을 가하고 있다는 접이 그의 과학사상의 한계라면 한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 博物學的 사고

우리는 이재의 저술을 읽으면서 그의 학문의 호한함에 놀라움을 금치못한다. 그는 위에서 살핀 수학과 천문학은 물론 易學 • 視 學 • 역사 • 군사 • 국어학 • 음성학 • 식물학 • 광물학 • 기타 제자백가를 광범위하게 섭렵하여 각 분야에 높은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그가 59 세에 자술한 내용은 그의 학문적 관심의 범위를 잘 말해 준다. 〈나는 어려서 글을 읽고 글자를 쓰면서부터 별들을 관찰하고 달을 점치고, 높은 곳에 올라 먼 곳을 관측하고, 불 밝혀 밤을 새우며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經 史子 集 과 心性 理氣 • 聲音 • 蒙害 • 隸畵 • 그립 • 醫藥 • 象數 • 제자백가가 일절 사색의 대상 아닌 것이 없어 일찍이 어지럼증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65) 결국 그는 시력의 악화에 실명의 위기까지 겪으면서 〈그것이 운명이라면 더 이상 한탄할 게 무엇 있겠는가〉 하고 자탄의 역설을 토로하기도 한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공부에 침참하게 만들었을까 ? 이에 대한 대답온 그의 학문의 기본정신을 밝혀줄 것이다. 그의 「自警歲」을 한번 읽어보도록 하자.

64) 위의 책, 『漫錄』, ,544쪽 참조.

65) 위의 책, 「自敍說」, 260쪽.

하늘 아래 땅 위에 조그만 한 몸이여, 천지에 참여하여 三才 가 되었도다. 천지간의 삼라만상 내 본분의 일 아님 없음이여, 하나라도 규명치 못한다면 나의 일은 미완으로 남으리라.

학문을 넓게 하여 삼라만상의 세세한 이치 를 남김없이 깨우치고, 요건하게 실천하여 나의 순수한 마음 여한없이 밝히련다. 이러한 나의 뜻에 힘은 미치지 못하지만 몸이 다할 때까지 노력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두리라 .66)

天地人 三才의 하나로서 자신의 우주적 大我됨을 자각 또는 자임하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우주내 만사만물은 결코 그 자신과 무관한 것일 수가 없었다. 만약 그가 사물들과 세상사를 자기 밖의 일로 의면한다면 그는 그만큼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세상을 위해서 다리털 하나도 뽑지 않을 사람이라고 孟子가 비난해 마지않은 楊朱는, 어쩌면 이재의 안목으로는 〈본분의 일〉을 방기한 자기부정의 전형에 해당될 것이다. 그의 박학이 추구하는 궁국의 목표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삼재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만사만물의 실현에 앞서 그 각각의 이치를 알아내려 하였던 것이다. 그의 이와 같은 염원은, 객관적으로 살피면 그가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또한 그 자신이 염려했던 것처럼 67)〈요긴한 실천〉의 약화와 함께 雜 學 쪽으로 기우는 감이 있지만, 어쨌든 우리가 현재 접하는 바 광범위에 걸친 그의 저술은 이의 산물이다. 이제 아래에서는 그의 학문의 특징적인 것만을 몇 가지 살펴보도록 한다.

66) 위의 책, 『自警廣』, 392쪽.

67) 위의 책 , 訓洪 克之 樂眞序 」 , 129쪽 참조

이재는 어학에 상당한 관십을 가지고 우리말과 중국의 韻學을 깊이있게 고찰하였다. 그의 「 華音 方言字 義 解」와 「字母辨」, 그리고 『理萩新編』상의 「 皇極 經 世害 」와 「 韻學 本源」은 그 결과물이다 .68) 그는 우리말의 어

68) 이재의 어학설에 대해서는 현재 국어학계의 연구보고가 여러 편 있다. 아래에서는 이숭녕 선생의 황윤석의 '이수신편'의 고찰 - 특히 어학연구를 중심으

로 하여」(『陶南 趙潤濟 박사 희갑기념 논문집』 소재)와, 박태권 선생의 황윤석의 어학설에 대하여」(『국어학사논고』, 생문화사)를 참고하여 그의 어학설을 간략하게 소개하려 한다.

원들을 밝히고 있는데 아래에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李德慰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人을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梵語에서 나왔다〉고 한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 전래의 吏讀에 장부를 마름, 마슴이라 하는데 마가 사(舍)의 음으로 바뀌어 샤름이 되었다.

우리의 습속에 兄울 맛이라 부르는데 이는 孟의 음이 바뀐 것이요, 弟를 아이라 하고 또 옛날에는 아츠라 하였는데 이는 亞次 두 음이 바뀐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의 一歲 二歲를 혼순 두술이라 부르는데 그 살이란 歲除日 세 말이 합성해서 서울로 되었다가 또 살로 된 것이다 .69)

한편 박태권 선생은 이재의 음운학이 당시의 어학발전에 끼친 해독을 지적하면서도 그것의 학문적 독자성을 다음과 갇이 평가한다. 〈關 의 皇極經世圓를 본따서 황윤석 자신이 韻圖를 만들었고, 중국음과 우리 자음의 차이와 근원을 밝히려 하였다.〉 〈황윤석은 중국 소옹의 운도의 학설에도 영향을 받았지만 현실음에도 충실하여 체계화한 일면을 드러내고 있다. > 〈황윤석도 數理論을 중심한 음양오행설로써 韻學을 설명하였고, 『性理大全』의 이론에서 윤색된 것이긴 하지만 『훈민정음운해』에서 신경준이 한 것처럼 오로지 황국경세설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70) 우리는

69) 『願齋全書』 I, 寧音方言字義解」, 285-286쪽.

70) 박태권, 앞의 책, 196 쪽, 198 쪽, 204 쪽. 이는 이숭녕 선생이 이재의 어학 설을 낮추어 평가한 데 대한 반박이다. 이숭녕 선생은 다음과 갑이 말한다. 〈이재는 중국운서의 지식의 흡수와 소개에 급급했고 ‘한글’로 그 字音을 표기해 놓았는대 중국운서의 연구에서 어느새 개척을 노린 것이라고도 볼 수 없다.〉 〈이재는 훈민정음’의 고찰에서도 국어 자체에서 보지 않고 중국운서의 연구의 위치에서 고찰한 것이다.〉(이숭녕, 위의 논문)

여기에서 이재의 어학설의 학문적 깊이와 특징, 그것의 국어학사적 의의 등에 대하여 상세한 분석과 결론을 내릴 처지가 되지 못한다. 다만 그의 학문적 정향을 논의함에 있어서 그의 어학설이 갖고 있는 의의만큼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재는 金 • 玉 • 土 • 石 • 草 • 木에 대하여 그것들 각각의 성질과 종류, 매장(서식)분포, 우리말 어원 등을 고찰하기도 한다. 이는 그의 개인적인 관찰과 실험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기보다는 아마도 전래의 지식들을 수집하여 정리한 것일 거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과학사를 기술하는 데 있어서 한 가지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斯界의 식물학 • 광물학 연구에도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서는 홍미로운 내용들을 몇 가지 소개해 본다.

蘭草는 威湘 땅 남쪽 15 리 花長山에 많이 난다. 우리나라에는 假蘭이라는 것이 있는데 잎사귀는 麥門冬을 닮았다. 입춘일에 처음 싹이 나고 여름을 지나 입동일에 돌연 줄기 하나가 나와서는 그 끝에 꽃이 맺힌다. 사람들 말에는 邊山에 眞蘭이 있다는데 사실인지 모르겠다. 71)

玉을 새기는 데 두꺼비 기름을 바르면 마치 밀랍 새기돗 쉬워진다 .72)

일찍이 姜世晃에게서 들으니 대구(바닷고기)의 껍질을 삶아 줍을 내서 풀을 만들어 깨진 벼루를 불이면 그 부분이 아주 단단해진다고 한다 .73)

우리나라 康津, 珍島의 연해지역에 花草石이 나는데 붉은색 • 황백색 • 순백색이 있고 아롱진 것도 있다. 돌의 질이 부드러워서 새길 수도 있고 톱으로 자물 수도 있어서 도장 • 智 版 • 술병 등을 만들 수 있다. 74)

71) 위의 책, 金玉土石草木改』, 508쪽.

72) 위의 책, 雜志, 510쪽.

73) 위의 책, 같은 곳.

74) 위의 책, 『雜志」 511쪽.

이재는 이러한 식물과 광물들의 우리말 호칭들을 함께 적어놓기도 하는데, 그것은 앞에서 살핀 바 국어(학)에 대한 그의 관심의 소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전국의 온천 소재지와 각 온천의 물의 특성둘을 분석하고 있으며 風穴 • 氷穴 등의 위치를 상세하게 기록해 두고 있다. 이 역시 우리의 국토 • 지리에 대해 그가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울 말해 준다. 그 밖에 그는 일종의 기술서적이라 할 수 있는 『律呂新 』 • 『前漢書律曆志』 • 『井三百傳』 • 幾衡傳』 등을 주해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이른바 잡학을 천시하지 않고 학문의 한 과목으로 적극 수용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가 평생의 정력을 쏟았다고 하는 『理萩新編』은 그러한 사고의 결정판이다. 한편 그가 남녀를 분석한 내용들은 차라리 유희적이기까지 하다. 75)

이재의 이와 같은 박물학적 관심은 아무래도 심성의 수양이나 도덕의 실천과는 거리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이 접은 사물의 이치 탐구를 똑갇이 강조하면서도 수신과 치국 등 삶의 긴요한 사항에 〈窮理〉를 집중시켰던 이전의 성리학자들과 다른 그의 학문적 성향을 보여준다. 윤리도덕과 敬공부를 강조하는 그의 여러 글에서, 요컨대 〈성현되는 것이 평소 희망이요 나라 걱정은 노년의 마음〉이라는 그의 꿈 속의 시에서 16) 드러나는 것처럼, 心身의 수행과 사회적 실천을 소홀히 하거나 의면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지만, 우리는 역시 그가 제한 없는 지식 탐구에 더 큰 학문적 열의를 갖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사실 이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너무 박학에만 힘써 실천궁행에 소홀하다는 혹자의 지적에 그는 다음과 갇이 시인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별 생각도 없이 되지 못하게 天人 관계를 한번 람구해 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하여 周易 • 洪範 • 律曆 • 睿 • 數의 이론과, 산천 • 郡縣 • 풍속의 기록, 음양 • 귀신 • 心性情 意 의 변증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유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나머지 점점 잡학 쪽으로 빠져들었습니다.〉 77) 그는 이어

75) 위의 책, 『漫錄』, 519 쪽 참조.

76) 위의 책, 「年 譜 」, 625 쪽.

77) 위의 책, 訓洪克之樂眞序」, 129쪽.

스승의 일깨움으로 자신의 문제점을 깨달았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 어려서부터의 박물학적 태도를 버리지 못하였다. 그의 이데올로기적 사고에 저촉되지 않는, 즉 〈異端〉 이의의 모든 분야에 그의 학문적 관심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가 그 동안 經學에 의해 천시당해 온 잡학의 학계 진입을 유도하고 그 위상을 제고하면서, 한편으로 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지식과 실천의 합치를 지향하였던 기왕의 학문풍토에 반하여 양자를 분리시키는, 정확히 말하면 실천으로부터 지식을 독립시키는 의의一그것의 긍·부정적 의의는 논의로 하고―를 조선조유학사상사 속에 마련해 놓고 있음을 말해 준다.

6 民族意識의 각성

이재는 우리의 역사와 민속 • 국방 그리고 지역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 접은 東國輿地勝覽』의 내용 및 체제를 검토, 보완하려는 그의 뜻에서 간단히 확인된다. 78) 우리나라 각 도의 연혁 • 풍속 • 廟社• 陵喪 • 土産의 종류· 효자 열녀의 行狀 • 성곽· 산천 • 名賢의 사적 등올 싣고 있는 이 책의 주제와 관련하여 그는 그 동안 잘못 보고된, 또는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실들을 기록해 두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그는 〈箕子8條〉 중에서 일실된 5條를 변증하고, 79) 우리의 視俗과 제도들을 역사적으로 고찰한다. 80) 특이한 것은 그가 방언의 추적을 통하여 우리의 역사를 복원하려 하고 있다는 접이다. 그는 유사한 한자음으로 기록된 방언을 사람들이 그 한자의 뜻으로 번역 이해함으로써 역사와 민속 • 제

78) 위의 책, 『擬增修東國輿地勝覽例引 , 276쪽.

79) 위의 책, 箕子八條辨」, 276 쪽 참조. 그의 변증논리 및 내용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처럽 보여 여기에서는 그 자세한 소개를 생략한다.

80) 이는 그의 「難 」 및 『漫錄』에 여기저기 산견된다.

도의 정확한 인식에 혼란을 야기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관점은 지금도 역사 탐구의 의의 있는 한 방법론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자.

단군이 들어간 阿斯達山을 史家가 〈지금의 九月 山〉이라 주석한 데 대하여 뒷날 사람들은 산이름을 바꾼 것이라고만 여길 뿐, 그러한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한다. 九는 방언의 阿斯를 번역한 것이고 月은 방언의 달을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는 한두 가지가 아닌데 번역된 글자에만 근거할 뿐 방언에서 그 뜻을 찾지 않기 때문에 땅이름이나 산이름, 사물들의 명칭 등 고사에 관계된 것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모호한· 채 알지 못하는 것이다. 81)

내가 방언과 그 번역글자의 견지에서 우리나라 삼국과 고려의 재 역사를 두루 검토해 보니 이른바 방언들에 고금의 차이가 있기는 하였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도처에서 분명하기가 마치 둘로 쪼개진 나뭇조각(符節〕울 서로 맞추는 것과도 갇아서 中世에 잘못 분석되고 종합된 것들을 모두 바로 잡을 수 있었다. 뒷날 우리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내 말올 불신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82)

그는 또한 고려의 명장 강감찬과 金就璃가 거란의 여러 차례에 걸친 침략을 물리침으로써 우리의 풍속이 온존될 수 있었음을 들어서, 임진왜란 당시의 수훈자들 이상 가는 그들의 공로를 가볍게 말해서는 안 됨을 주장하기도 하고 ,83) 肅宗 38 년 (1712) 백두산 定界碑를 세움 당시 함경

81) 위의 책, 『漫錄』, 546쪽.

82) 위의 책, 『漫錄』, 547쪽.

83) 위의 책, 『漫錄』, 535쪽 참조. 그는 조선의 禮樂刑政을 고려의 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五禮儀는 사실상 고려사의 禮志 를 因翼한 것이고, 軌은 사실상 고려사의 樂志를 인습한 것이며. 紅濟六典과 艦國 大全과 그 前後錄은 또한 고려의 재도를 많이 인습한 것이다. 이러한대도 고려인들을 매

도할 수 있는가.〉

감사였던 朴權이 청나라의 관리와 그것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실언과 실책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땅 700 리를 잃고 만 경위를 따지고 또 분노하기도 한다• 84) 기타 그는 三韓의 忍史를 서술하는 등 85) 단편적 사적들을 수 없이 검증하고 있는데, 그의 이와 갇은 일련의 인식태도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대한 반성과 함께 민족의 주체성을 자각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물론 그의 국제사회관과 맞물려 있다. 청나라에 대해서는 일종의 小中華 의식을 드러내며, 한편으로 서양세계를 알게 된 그로서는 당연히 우리의 민족과 역사에 대하여 주체적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전자와 관련하여 청나라를 夷秋視하면서 孝宗의 북벌의지를 칭송한 86) 그에게 있어서 그 동안 중국사학에 묻혀 있었던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 알고 정립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재의 국제사회관은 국방에 대한 관심에로 진전된다. 그는 국내 여러 성곽들의 입지조건과 역사상 의적 침입시 승패의 요인들을 분석한다. 그는 또한 청 • 일 • 서양의 총포를 소개하면서 그것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무관심을 지적하고, 우리나라 3 면 바다와 1 면 산악의 지형적 허실을 논의하며, 해적들의 거점화 방지와 국리민복을 위한 섬들의 적철한 관리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87) 요컨대 그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실로 사방으로 바람 들어오는 부서진 집〉 88) 과도 같기 때문에 적철한 대비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역시 그의 국제사회관에 기인함은 물론이다. 그가 〈중국인과 일본인 및 원방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표류해서 들락거리는 일이 적지 않다〉고 하면서 그들의 해적질을 염려한 데에

84) 위의 책, 『 住』, 578쪽 참조.

85) 위의 책, 沒錄』, 556쪽 참조、

86) 위의 책, 『睿乙巳四月因廣中慶 傾紋 後」, 388쪽, 「通諭長城鄕校文」, 456쪽. 年 譜 』, 624쪽 등 참조.

87) 위의 책, 『 錄』, 547-549쪽 참조.

88} 위의 책 『沒錄』, 549쪽.

서 드러나는 것처럼, 89) 그는 중국과 일본 • 서양의 위협적인 접근 속에서 상호 적대화되어 가는 국제관계를 인식하면서 우리나라의 지리와 입지조건 을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또 국가와 민족의 보위책을 개전하였던 것이다.

이재의 민족의식이 갖는 특색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조선조 유학자들의 민족의식의 양상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민족의식은 한 민족이 타민족과 대립 상쟁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인 만큼, 병자호란 이전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명나라를 사대하였던 유학자들에게 민족의식은 별로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물론 北 虛 와 南倭의 도발이 간헐적으로 있었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미개한 야만집단의 도발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하였다. 그러한 그들의 의식을 일거에 일깨운 결정적인 계기가 병자호란이었다. 중국 중원에서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등장한 청나라의 침입과 仁祖의 치욕적인 항복은 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으면서 그들로 하여금 중국과의 관계를 재검토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사대의식의 종지부―여전히 對明事大의 비현실적인 명분주의가 남아 있긴 하였지만 ―와 함께 민족의식의 각성을 유도하였다. 당시 조정의 북벌논의는 그것의 정치적 연출이었고 학자들의 소중화 의식은 우수한 문화민족으로서의 자존심의 표출이었다. 이러한 내용의 민족의식은 그 후 1세기가 지난 뒤의 이재에게도 여전히 작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민족의식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孝宗 때의 유학자들보다 넓은 세계인식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를 반추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직 청나라와의 관계 속에서만 정치적 • 문화적 집단의식을 드러냈을 뿐이었는 데 반하여 그는 그 밖에 서양문화의 인지 속에서 우리 자신을 보다 객관적으로 성찰하려 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접을, 그가 서양의 과학을 칭찬하면서 한편으로 栗谷―沙溪―尤庵으로 이어져 온 성리철학의 우수성 을 주장하고, 서양

89) 위의 책, 같은 곳.

의 총포를 경계하면서 사람들의 국방의식을 촉구하며, 일인과 청인의 국내정세 영담을 영려하면서 그 방비책을 강구한 데에서 추론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이와 갇은 민족의식은 몇몇의 실학자들의 그것과는 특색을 달리한다. 예컨대 이른바 북학파 실학자들이 전통적 華夷觀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개방된 사고 속에서 세계와 민족을 바라보려 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청나라에 관한 한 화이관에 입각한 배타적 민족의식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의 민족의식이 조선조 유학사상 상에서 살필 때 일종의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이재는 우리 사회의 지방색과 관련하여 호남인의 전상을 묻고 있는데, 이는 그가 국제사회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를 확인하려 했던 것과 사고의 궤를 달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澤堂이 호남의 풍속을 부박하고 奉佛한다고 평한 이래로 先王祖의 君臣上下가 모두 호남사람들에게 교활하고 간사하다는 말을 덮어씌어왔다〉 90) 고 생각하는 그에게 그러한 비난은 호남인의 정체에 대한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면서 호남인으로서의 자기성찰과 함께 자존의식을 곧추세우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澤堂類의 편견에 대항하여 〈사람들이 그들의 기질을 어떻게 닦느냐에 문제가 달린 것이지 한 지방의 습속이 그것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니다〉 91) 라고 반박하고, 또 호서 • 영남 • 호남의 인물들과 그들의 기질에 대하여 사회 정치적 원인 분석을 행하고 있다 .92) 영남의 退溪李洗 (1501-1570) 에 비하여 道學과 節義가 결코 못지 않은 호남의 河西 金麟厚 (1510-1560) 를 선양하려 했던 그의 강렬한 의지 93) 또한 이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아무튼 그가 민족문제와 지역문제에 대해 보였던 일련의 집단의식과 성원의식은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집단간의 대립과 차별이 현저해져 간 18 세기의 시대적 • 사회적 산물로 여겨진다.

90) 위의 책, 『漫錄』, 565쪽.

91) 위의 책, 같은 곳.

92) 위의 책, 『漫錄』, 564-565쪽 참조.

93) 위의 책, 『漫錄』, ,561쪽 참조

7 결론

이재의 학문 전반에 대한 이상의 고찰은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바가 있다. 그의 학문은 의형상 성리학과 실학 양자를 다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양자를 포함하는 제 3 의 어떤 사상 또는 사조를 말해 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간단히 거철하기 어려운 이 가설은 앞으로 좀더 전지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겠지만, 이재의 경우 성리학과 실학을 꿰뚫는 어떤 새로운 학문체계를 그에게서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는 그의 학문이 양자 중의 하나에 정초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먼저 그의 학문의 실학성 여부를 검토해 보도록 하자• 우리 학계는 실학의 특징을 대체로 서학의 접수, 박물학적 사고, 국학의 연구 등에서 찾는다. 이를 기준으로 한다면 이재의 학문은 명백히 실학에 해당된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적 관점에서는 매우 미홉한 기준이 아닐 수 없다. 철학적 세계관과 인간관 등이 그 판단의 핵심적 준거가 되어야 하며 학자들의 서학 연구 등도 이의 연장선상에서 검토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실학사상에 대한 대대적인 재검을 요구하거니와, 이재의 학문은 이 접에서 분명한 답변을 갖고 있다. 철학적 준거에 입각하는 한 그는 철저히 성리학자라는 것이다. 게다가 기왕의 성리학적 사회체제에 반발하면서 새로운 사회관과 정치사상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 실학이라면 이재에게서 그것을 찾기는 무망한 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시대에 대한 고민과 사회개혁의 의식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사상 또한 성리학의 그것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의 성리학은 서학 • 박물학 • 국학 등과 어떻게 논리적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 우리는 그 연결고리를 그의 〈格物(窮理)〉 정신에서 발견한다. 사물에 대한 객관적 람구를 강조하는 그것은 陸王 學 으로부터 너무 번거롭고 지리하다는 비판을 듣기까지 하였다. 이재의 서학·박물학 등은 그 번거로움과 지리함의 한 양상이다. 그의 격물정신은 어쩌면 이 접을 필연적으로 초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살았

던 18 세기의 조선사회는 程 • 朱 또는 退 • 栗시대에는 없었던 학문적 탐구 대상을 그에게 많이 제공했기 때문이다. 〈세상만물을 만에 하나라도 규명치 못한다면 나의 일은 미완으로 남으리라〉고 自 菩 했던 그로서는 그 시대, 그 사회의 새로운 현상들을 일일이 탐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성리학의 한계를 자각하지 못했다는 점은 그의 시대인식과 담구의 불철저함을 말해 주며, 한편 그의 격물정신은 정치적 소의자로서의 지식유희 경향을 노정하기도 하지만, 그 나름대로의 학문적 일관성은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요컨대 그의 학문은 성리학의 시대적 변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願齋 黃胤錫 年譜

(『願齋組私』 권 14 「年 譜 」 부분을 요약 정리함)

1729 영조 5년

4 월 28 일 전라도 興德縣 龜 壽 洞에서 출생하다.

1733 동 9 년 공 5세

처음으로 조모에게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다.

1734 동 10 년 공 6세

조모 김씨에게 『小學』을 배우다.

1735 동 11 년 공 7세

『小學』을 독파하고 이때부터 차례로 『史記』와 四 智 五經에서부터 諸子百家에 이르기까지 읽어 나가다.

1736 동 12 년 공 8세

4 월 부친 晩 隱 公울 따라 龜 嶽 祠에 참배함 : 여러 선비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이재가 龜嶽 書 院이라는 네 글자 를 크게 써서 좌중을 놀라게 하다.

1737 동 13 년 공 9세

古阜郡守가 선비둘을 시험하는 자리에서 응해 古風으로 首選에 뽑히고, 군수가 이재의 필체에 대해 감탄하다.

7 월 조모 김씨가 별세함 : 조모가 임종시에 말하기를 집안일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오직 이재를 불러 너의 성취를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라고 하였다 한다.

1738 동 14년 공 . 10세

문장이 이미 이루어져 沈泳道가 韻울 주어 시험해 보다. 이 해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함 : 이 후 운명하기 이틀전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써서 60 여 책을 이루었다고 한다.

1740 동 16년 공 12세

8 월 高放에서 열린 式年試에 웅시하다. 경전을 독파한 후 부친의 명으로 다시 익히는데 하루도 과제를 거르지 않았다 한다.

1742 동 18년 공 14세

12 월 白時明을 따라 壽 村에 가서 책을 읽다.

처음으로 理萩學에 뜻을 둠 : 林泳의 『浦溪集』을 읽고 그가 11 세에 퓨三百울 이해했다는 기사를 보게 되다. 부친 만은공이 옛 사람이 11세에 하였는데 너는 14 세에 할 수 있느냐 라는 말을 듣고 이로부터 理萩學에 뜻을 두게 되 었다 한다.

1744 동 20년 공 16세

9 월 『理薇新編』을 편찬하기 시작함 : 『性理大全』의 조례를 모방하여 근본 대전에 두되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편찬, 巨陝을 이루었으며 평생의 정력을 이 책에 기울였다고 한다.

1745 동 21년 공 17세

정월 冠禮률 행하다.

새로 지은 사당의 上樣文을 짓다.

1746 동 22년 공 18세

黎湖 朴弼周에게 편지를 보내고자 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함 : 박필주에게 스승으로 모시고자 하는 편지를 썼으나 울리지 못하다. 考巖書院을 방문해서 宋時홋!!의 眞影을 처음 보다.

8월 自鳴鍾을 봄 : 전사 李彦復의 집에서 처음 자명종을 보고 그 후 비싼 값을 주고 구입해서 전체를 해부해 보다.

1747 동 23년 공 19세

龜巖書堂에 놀러가다.

1748 동 24년 공 20세

정월 昌原 丁氏롤 부인으로 맞이하다.

3월 남원부사가 개최한 文會에 나가 장원을 하다.

8월 남원부사가 또 개최한 文會에 나가 장원을 하다.

1749 동 25년 공 21세

8월 巡試에 합격하다.

11월 丁括에게 「論湖洛學心性說得失」에 관한 답서를 쓰다.

1750 동 26년 공 22세

정월 부천 만은공이 承旨 金文行의 집울 방문해 공의 장래를 의논함 :

김문행이 말하기를 이재가 만일 서울에 와서 科擧學을 공부하겠다면 자기가 말겠지만 經學울 하겠다면 美湖 金元行울 찾아가라고 하다.

1752 동 28년 공 24세

9월 庭試에 응시하다.

1753 동 29년 공 25세

8월 古阜 束堂試에 策으로 入格하다.

1754 동 30년 공 26세

3월 錦山 束堂試에 응시하다.

6월 南原 陸tffi試에 장원으로 합격하다.

1755 동 31년 공 27세

정월 束山院 慣製로서 長城士林들에게 小尹울 文廟에 從享하자는 의논에 대해 배척하는 글을 써서 通諭하다.

1756 동 32년 공 28세

2월 고암서원에 가 宋時烈의 영정에 참배하다.

6월 全州 陸補試에 장원으로 합격 하다.

9월 부친의 명으로 미호 김원행을 찾아뵙고 「爲學規模」와 「泉塘心性之辨」을 바치다.

12월 潭陽陸補試에 장원으로 합격하다.

1757 동 33년 공 29세

9월 다시 미호선생을 찾아뵙다.

1758 동 34년 공 30세

3월 부천 만은공을 따라 고암서원에 가서 小學講會에 참석하다.

5월 전주의 尹居溪에게 부친의 서신울 전하다.

1759 동 35년 공 31세

2월 進士 覆 試에 합격하다.

동생 胃錫과 함께 미호선생을 찾아뵙고 정식으로 師弟之義를 맺다.

4월 고암서원 강회에 참석하다.

선운사 도솔암에 놀러가 僧 師忍을 방문하다.

5 월 淳昌의 楊白水를 방문하다.

靜愼齋 金時菜이 黑山島에 유배온다는 말을 듣고 井邑에서 만나보 고자 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하다.

8 월 미호를 찾아뵙고 『 大學 』 全篇을 받다.

1760 동 36년 공 32세

정월 김시찬을 長城의 摘所로 방문하다.

2월 河西先生廟룰 참배하다.

11월 白羊山 白蓮菴에 들어가 『周易』을 읽다.

1762 동 38년 공 34세

2월 아들 七漢 태어나다.

7월 동생과 함께 月重輪울 보고 설명하다.

12월 김시찬울 방문해 『周易』과 星象 • 日 食 등을 논하다.

1763 동 39년 공 35세 정월 다시 김시찬을 만나 陰陽變化와 莖卦七八의 說을 토론하다.

1764 동 40년 공 36세

2월 김시찬을 북으로 전송하고 귀로에 전주에 들러 木山 李基敬울 방문해 〈湖洛心性理氣之辨〉을 토론하다.

3월 庭試에 웅시하고 성균관에 남아 『周易』을 읽다.

4월 미호를 방문하고 石室書院에 머물면서 여러 선생울 만나보다.

5월 미호에게 가서 다시 『大學』을 토론하고 석실서원에서 동문 여러 사람들과 『中庸』을 강론하다.

12월 長城으로 가서 鄭景淳올 這所에서 만나 봄 : 정경순은 십히 기뻐하며 『周易』과 諸家·五禮·三傳과 漢·唐 이래의 문장 등에 대해

논의하다. 이재는 또 자신이 지은 『古文詩』 3 책의 평론을 정경순에게 부탁하다.

1765 동 41 년 공 37 세

정월 金瑞와 『大學』의 明德과 退溪 • 栗谷의 四七理氣와 湖洛諸賢의 〈心 性同異之辨〉을 토론하다.

4 월 華陽洞 院을 방문해 송시열의 묘에 참배하다.

金履安이 縣監으로 있는 報恩에서 미호를 찾아뵙다.

12 월 安衡圭와 李疏巖의 〈心性理氣之說〉에 관해 토론하다.

1766 동 42 년 공 38 세

정월 미호가 春川에 성묘하려 감에 따라가서 찾아핌 : 미호가 이재의 학문적 열의를 칭찬하면서 〈호남의 호걸선비〉로서 〈詞章信〉가 되지 말고 〈君子儒〉가 되라고 권면하다.

4 월 參判 徐命腐과 易象 • 曆學 • 範數 • 字睿 • 八線九數의 뜻에 관해 토론하다.

6 월 莊陵 參奉울 제수받음 : 부임시 미호를 찾아가 『混岡堂遺稿』의 교정 부탁과 함께 권면의 말씀을 받다.

9 월 미호선생을 찾아핍 : 『혼벽당유고』를 교정해 바치고 다시 목록 편정과 序를 부탁받다. 김이안과 太玄經莖法에 관해 토론하다. 鄭東鎭과 陸學의 찰못됨에 관해 토론함 : 陸象山과 王陽明, 朴世堂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주자학을 옹호하다.

1767 동 43 년 공 39 세

2 월 미호의 부인상에 대해 조문하다.

정경순울 방문해 〈救時之策〉을 논의 : 도량형제의 • 통일, 군사제도 개혁, 亢官의 도태, 宗室의 비용 억제 등을 주장하다.

3월 鄭述祚와 邦禮의 찰못됨을 논하다.

4월 同百順과 風水說에 관해 토론하다.

정경순과 〈星曆前知之術〉에 관해 토론하다.

9 월 동생 주석과 함께 講星試에 응시하다.

12 월 귀향하다.

1768 동 44 년, 공 40 세

3 월 꿈에 미호선생을 만나 心性設의 의심되는 바를 질의하다.

6 월 義盆庫 奉事를 제수받다.

7 월 趙敵을 방문해 邦禮에 관해 토론하다.

監察 尹昌鼎과 마데오 리치의 地圓說에 관해 토론하다.

8 월 정지순을 방문해 易象 • 律呂와 經濟 • 事務에 관해 토론하다.

11 월 李其와 日食 • 月食의 이치에 관해 토론하다.

12 월 直長 李洙과 律呂之法에 대해 토론하다.

1769 동 45 년 공 41 세

정월 사직을 하고 귀향하였지만 한달 여를 지나 다시 복직하다.

3 월 金益休와 함께 미호를 찾아뵙고 「大學章句或間」과 「中庸或間」의 의심나는 바에 관해 토론하다.

5 월 金庸謙과 「中庸費隱」과 曆範 • 律曆 • 田兵 • 官職 • 算數 • 音樂之說 에 관해 토론하다.

6 월 司圓署 直長으로 승전하였으며 얼마 안있어 宗簿寺 直長으로 옮기다.

7 월 七夕날에 명을 받아 入侍하다.

상관에게 화를 내고 귀향하려고 정하였으나 그만둠 : 宗簿寺 提調의 무리한 처사에 항의하여 다룬 다음 사직하고 귀향하려고 하였으나 조업, 김용경과 부친의 만류에 의해 단념하였다. 대신 이재는 당시 관료사회의 무능 부패상을 비판하면서 나름대로의 개혁안을 제시하다.

9 월 奉事 宋鼎休가 와서 鄭台를 찾아보라고 권유한 데 대해 거절하다. 徐有隣에게 편지를 써 尹居溪에게 무례한 짓을 하지 말라고 하다.

참판 李最中이 보자고 하는데 가지 않음 : 疆域志』 수찬 관계로 자문을 이최중이 요청한 데 대해 사양하고 가지 않다. 대신 다음해 봄 提調 鄭存謙이 『文獻備考』 편찬에 대한 도움을 청하자 관계되는 책을 보내주다.

11 월 科擧制 更定에 대해 논함 : 有力者가 文翰의 機要를 장악하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비판하면서, 인재를 공평하게 널리 구하고자 하는 과거제의 본래 취지에 합당하게 운영할 것을 강조하다. 진사 李衡喆과 三韓時代의 古跡에 관해 토론하다. 진사 徐有防이 찾아와서 그의 형인 徐有隣을 만나보라고 하였으나 거절하다. 邦禮의 오류를 논하다.

1770 동 46 년 공 42 세

2 월 金用謙, 洪啓禧와 함께 『朱子大全』을 교정하다.

3 월 思陵 祭官으로 差出되다•

李顯直에게 『算學入門』에 관해 답하다.

持平 權依의 疏로 인해 사직하고 귀향하려고 하였으나 그만둠 : 宰相 名士와 森官 18 인을 배척하라는 권회의 상소문에 자신의 이름이 끼여 있자 곧 사직하려 하였으나 校理 李秉鼎의 반대상소가 있고 영조가 그를 받아들이자 철회하다.

4 월 교지를 받들어 入直官으로서 集慶堂에서 입시함 : 영조에게 영의정 金致仁, 우의정 金相喆, 좌의정 韓翼뿜 등이 이재에 대해 역상학과 문장 등에 아주 밝은 사람이라고 소개하자 왕이 직접 이재에게 역법에 관해 물어보다. 이에 이재가 역법의 변화와 차이접을 설명하자 영조가 실로 〈博識하고 質實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면서 그대를 너무 늦게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특별한 교지를 받아 승지 申景濬과 함께 경복궁 근정전의 옛터에 서 입시함 : 궁궐의 연혁에 • 관한 영조의 물음에 이재가 대답하다.

영조가 신경준은 일찍 등용되어 재주를 폈지만 이재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그렇지 못했다면서 그 재주를 아까워했다고 한다.

7 월 祭祈晴으로 차출되다.

8 월 崇陵 祭官으로 차출되다.

9 월 영조가 베푼 菊會에서 「親策十條」를 지어 올림 : 영조가 천히 신하둘을 모아 개최한 菊合에서 策文을 짓도록 하자 이재는 時卵十條와 그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하다. 그런데 그 내용이 왕을 직접 비판하는 것도 있어 參試官 元仁孫이 죄를 입을까 두려워 소매 속에 감추고 제출하지 않았다 한다.

10 월 禮曹判 書 韓光會와 함께 御謀을 茂州 赤裝山城의 寶閣에 봉안하다.

11 월 默陵 祭官에 차출되다.

12 월 부친 만은공이 4 가지 戒語를 쓴 『臨履錄』을 보내오다. 『說論防備禦 每之策』을 저술하다.

1771 동 47 년 공 43 세

정월 翼陵 祭官으로 차출되다.

3 월 김용경과 兵 魯 와 海防에 관해 토론하다.

4 월 宗廟 大享에 참예하다. 이후 棒沮官으로 입시하다•

6 월 金聖範, 金鐘純이 와서 律呂 • 曆象 • 數學과 禮說 • 文章에 대해 토론하다. 司園署 別提로 승전하고 디음날 입시하다. 북경사행의 기회를 사양함 : 영의정 金相喆이 辨匠使로 연경에 사행을 감에 文學人材를 구하자 판서 趙魔이 이재를 추천하였는데 칠순 부모가 있다는 이유로 사양하다. 吏曹에서 司憲府 監察에 추천(擬望)하다.

7 월 부친의 병으로 사직을 하고 귀향하다. 병 간호 후 귀임날짜 를 어겨 파직되다.

11 월 귀향하다.

12 월 부천 만은공 별세하다.

1772 동 48 년 공 44 세

3 월 만은공의 장례를 치르다. 『晩隱迫稿』와 『龜嚴迫稿』를 편찬하다. 7 월 미호 김원행 별세하다.

1773 동 49 년 공 45 세

3 월 이조에서 刑曹 正郞에 추천하다.

1774 동 50 년 공 46 세

7 월 미호선생묘에 제사하다. 救時策 제시:미호묘에 제사한 후 서울에 돌아와 同道文官 奇彦鼎 등 몇 사람과 救時之策울 논의하다. 이 자리서 이재는 亢官의 도태, 과거제도 개혁, 지방행정기구의 축소, 군사제도 정비, 중앙행정기구의 축소 등 5 개조에 걸쳐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8 월 沈定鎭이 와서 經義와 卜 莖 • 律曆 • 算數 • 星緯 • 兵陣之法 등을 토론하다. 귀향:趙鎭官 등 여러 士友둘이 만류하였으나 앞으로 과거를 일체 포기하겠다고 하며 귀향하다.

1775 동 51 년 공 47 세

11 월 이조에서 司圓署 別提에 副望으로 추천하다.

12 월 이조에서 禁府 都事에 副望으로 추천하다.

1776 동 52 년 공 48 세

정월 翊衛司 翊 贊 울 제수받다.

3 월 귀향하다. 이 달 5 일에 영조대왕이 승하하고 10 일 王世孫이 죽위하다.

7 월 영조의 因山에 나가 突하고 四拜하다. 參奉 金履運을 방문해 三代之治의 回復에 대해 토론하다. 監察 洪大容울 방문해 律曆 • 象數之說에 대해 토론하다.

1778 정조 2 년 공 50 세

정월 司僕寺 王簿를 제수받다.

3 월 大報壇 祭官과 健元陵 祭官으로 차출되다. 束部 者事로 옮기다.

4 월 正 言 韓晩裕의 『周易』 乾卦象象의 次序와 坤卦 이하가 갇지 않다는 물음에 대해 답서를 보내다.

5 월 영조에 대한 宗廟大祭에 봉조관으로 참배하다. 奉 事 朴海 壽 의 『大學』 明德說에 대한 물음에 답하다. 金在鎖의 湖南賢傑之士에 대한 물음에 답하다.

6 월 이조에서 工曹 正郞에 末望으로 추천하다. 輸對官으로 熙政堂에서 정조께 입시하다.

7 월 이조에서 戶曹 正郞에 末望으로 추천하다. 봉조관으로 종묘대향에 참례하다. 沈有鎭을 방문하여 〈化民易俗之道〉를 논하다. 奉事 趙器鎭과 經禮 • 律曆 • 易範 • 經給 • 制度에 관해 토론하다. 進士 韓致明울 방문하여 『史記』의 의심나는 바를 토론하다. 『湖洛二學始末記』를 저술하다.

8 월 正師 李家煥과 文章 • 典故 • 字 畵 • 聲韻 • 律曆 • 篤 法에 관해 토론하다. 金와 〈爲治之道〉를 논함 : 당시의 時醉로서 科擧法과 食誠律의 폐해를 들고 과거제에 藤擧制룔 보완할 것을 주장하다. 文在淵과 『周易』의 掛功變占之法에 관해 토론하다.

12 월 長陵令으로 옮김.

1779 동 3 년 공 51 세

정월 金光漢과 〈朱陸學術之異〉와 〈師友處義之道〉에 관해 논함 : 王陽明의 知行合一說에 관한 김광한의 물음에 대해 이재는 陸王學을 비판하고 주자학을 옹호하는 입 장을 강조하다. 또 주자학을 비판한 조선조의 尹 , 朴世堂, 鄭齊斗 등에 대해 맹렬히 비판하다.

4월 進士 李東運, 李敬臣과 理氣 • 象數 • 心性 • 禮儀之說에 관해 강론하다.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三園史』를 구입하다.

8월 木川 縣監울 제수받다.

1780 동 4년 공 52세

정월 충청관찰사를 방문하여 세배함 : 檢著官 李德戀가 진사 李應鼎에게 목천태수 황윤석이 道學과 文章에 뛰어나 大儒라는 내용의 서찰을 보낸 사실을 알게 되다.

6 월 휘하 관리의 부정을 막지 못한 죄로 파직당해 귀향하다.

1781 동 5년 공 53세

俠仰公宋純 行狀」을 찬하다.

1783 동 7 년 공 55 세

4월 꿈에 미호선생을 만나뵙다.

8월 道伯이 추천하였으나 사양함 : 『文獻通考』의 重修를 위해 文學極望之士를 추천하라는 정조의 명에 따라 전라관찰사가 이재를 極望으로 추천하였으나 고사하다.

1784 동 8 년 공 56 세

정월 掌樂院 主簿를 제수받았다가 곧이어 昌陵令으로 바뀌다. 그러나 禪祀가 있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않다.

2 월 정경순이 이재를 桂坊에 추천하다.

9월 이조가 翊衛司 翊衛에 望으로 추천하다.

1785 동 9년 공 57세

3월 河西先生墓에 참배하다.

1786 동 10년 공 58세

4월 典性署 主簿를 제수받다.

6월 金履度의 부탁에 따라 束宮의 抱詞를 짓다. 全義 縣監울 제수받다.

7월 熙政堂에서 정조께 입시함 : 정조가 이재를 〈文章之士 淳質之人〉이라고 평하고 전에 그대를 桂坊에 기용하려고 했는데 동궁이 죽음에 비창할 따름이라고 하였다 한다.

1787 동 11년 공 59세

정월 사직하고 귀향하다.

1788 동 12년 공 60세

3월 李得顯이 太極의 先後天潭天儀의 문제와 華東諸賢의 遺事를 물어 오자 이에 답하다. 長城 儒生이 와서 慕巖祠 位次의 改正是非를 물어오자 이에 답하다.

4월 『晩隱遺事』를 편찬하다.

10월 고암서원 유림들의 청에 의해 고암서원의 講長이 되다.

1789 동 13년 공 61세

2월 조정에서 이재를 南 에 추천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하다.

10월 꿈에 자신의 挑詞一律을 짓다.

1790 동 14년 공 62세

11월 자신의 祭文울 짓다. 이 해에 여러 번 십한 병을 앓아 빈사지경에

이르다.

1791 동 15년 공 63세

4월 金相集이 와서 『大學』을 강론하다. 晩隱齋 西 室에서 63세를 일기로 운명하다.

6월 古阜郡 厚里 先兆에 묻히다.

1820 순조 20년

아들 七漢이 「行錄」을 찬하다.

1821 순조 21년

門人 宋獻鎭이 「行狀」을 찬하다.

1824 순조 24년

童山李 睿 九가 墓福銘」을 찬하다.

1829 순조 29년 沒後 39 년되는 해에 『遺稿』가 편찬되다.

1843 헌종 9년

梅山 洪直弼이 「墓誌銘」을 찬하다.

1943

『遣稿』 간행 후 114 년이 지나 『遺稿續編』이 이루어지다.

가야산 100, 105

歌行 64

빠寺 150

강감찬 299

疆界志 30

江陵 266

綱砂 269

강신항 14, 163, 166

疆域志 312

강원도 80, 82, 105, 148, 156

江陰 266

江華學派 24

居昌 145, 147

健元陵 127

擊蒙要決 274

格物 303

甄萱 51

結負法 239, 240

敬 281, 285, 297

經國大典 243, 244, 299

경기전 89

經門智일 11 109

경상도 95. 105

磐石 253

鏡 2

經世濟民 229, 236

경인문화사본 59

經濟觀 228

經濟六典 299

經學 17, 62, 78, 109, 140, 154, 298

결군배 241

桂 259

契 240, 241

계룡산 150

계립유사 172, 206

桂坊 107

啓甫 70, 71

緊辭 115

溪葬 261

矣亥反正 148

고려 100

高麗史 243

古文詩 310

古文運動 24

古文參同契 113, 142

古本參同契 117

古阜 60

改事新喜 26

音石 253, 259

高城 264

古詩體 64

銅李之法 48

古音通假의 원칙 171

考證學派 54

高欽 64, 110

高散郡 69, 155

高散 溫水洞 264

苦采 261

古風 60

古學 32, 54

古學派 55

高漢聖 74, 80, 155

古畵 123

作子 238

坤卦 291

梵徒 233

貢擧制 45

空島政策 51

公牌 241

公私負債 240

貢稅 239, 241

孔子 69, 70, 115, 145, 276

公州 26

空 253

科擧 231

科擧學 17

羽婦再妹禁止 54

科場郭節目 231

科學 65

科學思想 119

科學者 57

官奴契案 49

觀物 68, 118, 155

觀物詩 118, 123, 157

官 Ml 240

觀自鳴鍾 23

광물학 296

廣邑志 2,

光州 267

廣州 264

光海 147

光海君 121, 147

怪力亂神 145

校生 233

交 68, 74, 155

交遊詩 69, 79, 80, 155

交河 121. 122

구개움화 197. 203, 211, 212, 216

구개읍화의 수평화 214

九筑錄 31

龜 121

龜 壽 洞 69

救 314

龜岩公 60, 103, 137

龜燦苦堂 307

組級 院 307

龜巖迫稿 314

龜獄詞 305

龜獄苦院 305

九疑山 128

瑟蟲 260

국문시가 69

國朝喪禮補編後本尺圖說 31

국학 303

國學派 55

群苦訂辨 31

軍額 230, 232, 233, 234, 235

軍役 232, 234

君子個 62

軍制 234

窮理, 297, 303

宮房田 231, 232

弓 102

權克中 113, 141,

權門勢家 81, 82, 91, 98, 156

權尙夏 277

權靑霞 142

權依 311

偉木 260

귀신 288, 297

閩怨詩 127, 158

均役廳 243

均田制産 229

근대국어 178, 181, 197, 206

근대국어의 음운규칙 172

근대국어의 자료 181, 187, 209

根本主義 53

近思錄 274

근세 중국어 차용어 179, 212

金 250, 251

錦江 101

금구 90

金溝縣 89

金山寺 89

金 250

氣 278, 279, 282, 283, 288, 289

磯錢 270

奇大升 95

氣發理乘一途 278

三百 292

三百傳 297

氣一元論 129

箕子 8 條 298

箕田制 46

氣質 281

幾何原理 289

幾何原本 36, 287, 289

기하학 289

磯衡傳 297

畿湖學派 16

吉 #I 264

金光默 236

金光漢 33, 316

金魯洙 31

金文行 78, 307

金相集 318

金相喆 19, 312

金得 14, 169, 220

金錫文 292

金聖範 313

金瑾 310

金時習 105

金時菜: 74, 76, 77. 155

金氏夫人 60

金吾 145, 147

김완진 181, 209

金用謙 49, 74, 76, 155, 311

金元行 16, 17, 19, 21, 23, 28, 35,

43, 62, 74, 78, 79, 96, 105, 112,

125, 155, 158, 276, 277, 307

金增 274

金命 142

金履度 317

金履信 74, 79, 155

金履安 18, 24, 29, 74, 78, 96, 155,

156, 310

金履運 315

김이현 79

金益休 74, 75, 155, 311

金麟厚 21,75, 95, 302

金 自 兼 145, 147, 148

金自點 147

金在鎭 31,

金宗直 48

金正 313

金鐘厚 315

김주원 218

金止男 101

金昌綺 76

金昌協 16, 17, 22, 24, 32, 60, 277

金昌倉 24

金就璃 299

金致仁 21, 91, 312

金 35

金河道 152, 153

金 123

ㄴ羅景續 28

羅景勤 120

羅相紀 254

나일성 14

羅廷彦 147

羅州 258

羅州 槍溪書院 255

洛論 24

洛論系 16

絡石 261

洛派 277

洛學者 280

落花岩 101

亂稿 31

蘭蕙 261

南九萬 142, 149

南塘 280

납부 방언형 195

납부 방언형 〈어시〉〔母) 215

藍石 253

鑑收: 230

南原 146

南人 16, 95, 97

璟 254

內藏寺 111

冷泉 264. 266

冷風 267

老祠薰 260

甘(館)石 252

老論 14. 16. 95. 96, 97

老 288

奴 241

奴 49

老子 115

노장사상 287

녹〔鑛造〕 268

綠앙¥ 252

농병아리-사다새 기름〔虹鷄 〕 268

籠水 19, 28, 78

綠 252

느릅나무 껍질(捨白皮〕 268

綾州 溫水洞 265

丹 141

丹家 149

斷角 269

丹功 115, 157

丹功修練 141

檀君 144

丹遣 114

丹理 141

丹田 114

端宗 100, 101, 157

端宗墓 82

丹學 113, 118, 141, 143

丹學經典 141

丹學修鍊 114, 157

달걀 흰자위 〔鷄子白) 268

違川 266

淡靑玉 257

滿軒 291

漢軒書序 25

唐詩 64

黨爭 96, 91

댱사 商人) 217. 218

대 〔竹〕 261

大料 239

대구껍질〔大口魚皮〕 270

大戴 291

戴束原 34

大麗誌 25

大麻 262

大明三藏法數 109

珉瓚 257

大北 147

大北派 148

對外交易路線 245

對遼交易關係 249

大苑 (Fergana) 262

大個 95

大隱 71

對淸防禦策 52

大學 309, 310, 315

大學章句補遺 276

大黃 261

德山 263

道家 282

道家流 159

道家說話 154

道家說話集 153

道家修鍊 60

道敎的 140

도덕성 281

度量衡 238, 239, 244, 290

道路考 30

道流 149, 151, 152, 153

道門學 285, 286

道佛 147

道士 111

道仙 114

道仙家 143, 159

道術 145

陶淵明 98

道號 145, 159

讀大學 309

葛木 260

銅 250

束國文獻借考 22

束國輿地勝覽 298

束萊 264

束方道學 121

동백씨 기름〔冬柏子油〕 269

同福 120

束部都事 107

동언고략 199, 210

束醫寶監 258

束人 97

同知中樞 149

銅鐵 250

凍蕙 261

두꺼비 기름〔塘岭防) 268

두꺼비 오중(塘桐屈〕 268

杜甫 85杜甫詩 83, 85

杜沖 260

道甲 14,

燈石 253

羅雅谷 (Rho Giacomo) 289

唱唱齋 76

理 278, 279, 280, 281, 283

理一分殊 279

璃瑾 254

璃瑾石 254

馬原石 室 141

마음 281

馬針 251

마테오리치 289

萬機要 覽 232

萬年松 260

冀束廟 277

萬曆 101

漫錄 15, 26, 30, 36, 39, 43, 48, 60

生柏 260

換 詩 68, 78, 155

晩 隱 69

晩 隱 公 60, 78, 104, 137

晩 隱遺 稿 314

晩 隱 遣 事 317

晩 隱齋 19

萬 化 15

萬 化의 根源 130, 131

望 鄕 詩 82

매즙(每 輯 〕 20,

麥 門冬 261

孟 子 280, 294

免稅田 232

明本 源 158

明本 源主義 41, 46, 53, 131, 137,

274, 275

明 誠 58

玉臺 103, 137

明 의 復輿運勤 13

剛川 2

母 山 90

모음조화 182

華主 義 37

木蘭 259

木峨 269

木類 259

木州雜歌 67, 69, 134, 139, 155,

158, 207

木川 91, 98, 105, 159

木川縣監 107, 134, 135

墓 磁銘 96

墓誌銘 144

無名石 253

武 夷 曲 71

茂朱 105

無炭木 257

문세영 183, 187, 189

文 義 265

文在淵 315

文 集 31

文體明 辯 68

文 學 65

문한가 60

文化 263

文獻備 考 91, 92, 311

물감 252

물명고 164

물미리〔水推〕 266

물시계 124

微 官 末 職 95

미르〔 龍 〕 199

美 味川 266

美 人歌 101

溪 湖 78, 277, 291

閔百 順 310

民生 236, 240, 241

吳肅 80, 110, 111

閔應聖 149, 150, 151

閔以 142

民族慈識 278, 301

閔鎭遠 149

密花 255

〈ㅂ〉계 합용병서 177

바늘〔針〕 270

朴光淳 80

朴 300

博物學 293, 303

博物學者 119, 1'.5 4 , l'.5 7

박성원 163

朴世堂 32, 277, 286, 310, 316

博約 58

朴烽 151, 152

朴胤源 24

朴懿信 121

朴址源 37

朴燦暎 79

박태권 14

朴弼周 17, 19, 23, 307

박학 294, 297

朴海 壽 315

朴洞玉 79, 80, 156

斑石 253

反朱子學 277

勃齊 270

放軍收布 232

方術 153

방언 298

方以智 34

밭〔田〕의 곡용형 197, 213

排佛論 284

階行租事 101

柏 260

百家九流 152

百科全書派 54, 55

백련암 110

白 252, 254

白石英 254, 264

白時德 80, 112, 113, 142

白嶽山 90

白玉 257

白玉石 254

白羊寺 111

白羊山 79, 110

白羊山寺 76, 87, 157

白川 263

白土 252

白湖 286

번역 박통사 205

播玉 257

播朱 251

梵語 110

벼루(現石) 254, 255

벽송정 76

辨經使 21, 313

變通 234, 243

丙子胡亂 245, 246, 301

孫養志 142

보현보살 110

福峽 61

福興 111

本心 125, 130

事 80

鳳山 266

試 64

부안 141, 146

附仰圖 30

부추〔非菜〕 270

北京路程 246

北伐論 13, 14

북색기략 164

北人 95

북학파 55, 302

芬皇寺 258

佛家 111, 129

佛敎 110, 232, 282, 283, 284, 287,

288

佛臺山 112

不老長生 141

佛 書 157

佛說 283

佛香 260

槪 260

비교언어학 223

比丘尼 147

磁 252. 254

批祀 2,9

氷山 267

氷泉 267

氷穴 267

〈ㅅ〉계 합용병서 177

辭 , 64, 65, 66. 67

沙溪 277, 301

史 記 60, 305

司 卿 243

사대의식 301

舍利 282, 284, 285

司馬溫公解禪偶 109

斯文亂賊 276, 277

思辨錄 277

司僕寺 107

四書五經 60

四密注釋 124

邪說 282

四聲通解 38

四遊錄 105

師忍, 309

詞章 62, 154

沙鐵 251

司圓署 126, 134

士禍 102

仕室期 86, 105, 115

社會改革論 15

社會·經濟學者 57

朔州 264

山芬 261

山茶 260

山郞公 60

山雷雜考 31

山水考 30

算法 288

算學問答 289

算學本源 289

算學入門 289, 311

璟 254

杉 260

三國史 19, 316

삼국사기 ’2, 176, 177

삼국유사 176

參 89, 108

三式 149

三運通考 27

三韻聲萊 26, 164, 166

三才 294

三浦梅園 34

三韓 300

桑寄生 261

象數學 24, 62, 140, 141, 143

象數學者 57

魚緯說 26

象緯指要 31

上智 139

常平 243

色吏 241

生佛 147

生之謂性章 280

西經 283, 292

敍疑 68, .86 , 155

徐敬德 283

敍景詩 86, 89, 156

西溪 277, 286

徐光啓 289

徐命廣 16, 18, 21, 26, 34, 74, 113,

126, 142, 152, 155, 310

徐師言 68, 105

서양과학 287

庶享許通 54

庶享許通案 48

서울 86, 90, 94, 95, 105, 136, 141,

146

徐有渠 26, 142

徐有麟 311

徐有防 312

西人 96, 97

委稷栗類 261

西學 288, 303

西學派 55

徐花潭 129

石 239

石間水 263

石南 259

石類 252

石疏黃 252

石室書院 19, 24, 25, 28, 35, 78,

79, 82, 156, 309

石室杏院學派 24

石材 259

石鍾乳 253

石脂 253

石鐵 251

石炭 258

石灘菴 99

石函本 118, 142

仙家 112, 113, 140, 141, 153, 159

仙家修練 153

仙家的인 人物 60

仙界 111

仙骨家系 153

선교사 290

仙道 145

仙佛 68, 109, 155, 157

仙佛詩 157

宣 121

禪山寺 110, 157

仙人 153

宣祖 96, 153

仙風 153

宣惠廳 243

設防備集擇之策 313

섭리 279, 280

性 281

成揆悳 147, 148, 149星內面 69

星曆 118」

性理 68, 69, 124, 131, 138, 139,

155, 158

性理大典 129, 130, 162, 295, 306

性理大典注解 31

性理文字 274, 282

性理說 275

性理字意 27

性理學 15, 18, 24, 32, 109, 124,

157, 162

性理學派 55

聖所 90

姓氏韻案 31

성음학적 이론 167

性卽理 280

聖泉 90, 152

成川 264

性學 229

聖學輯要 274

聖賢의 學 57, 58

星湖僖說 25

星湖學派 24

懿 169

세계관 278, 303

세종실록 167

部康節 130

小料 239

少論 16, 95. 96

少論系 26

舊龍 128

小禦 14 6, 148, 149

郡雍 295

鍊店集 243

小中華 300

小中華意識 13, 37

小學 60, 274, 305

小學講義 31

紹大典 232

俗離山 151

솔〔松〕 259

宋文正公 277

送別 68, 155

宋時烈 16, 24, 103, 143, 144, 276,

307, 308

宋益中 74, 80, 155, 156

宋冀弼 48, 122

宋鼎休 311

宋俊浩 16

碩祝 68, 1

宋賀 146, 148, 149

송학의 영향 162

宋獻鎭 19, 64, 65, 119, 144, 274,

282, 318

水溫石 252

秀瓊 59

首奴都管 241

修 68, 69, 124, 125, 131, 137,

139, 155, 158

水樓翁 76

數理論 295

數理曆象 36

數理精直 36

數理學 26

水瑞 255

修身 134

遂庵 277

水銀 268

수저 〔迎〕 260

水晶 254, 255, 256, 258, 269

水精石 254, 264

徐鐘記 29, 31

水鐵 251

收取 238, 240, 241

收 239, 242

水泡石 252

수학 289, 290

修學期 80, 86, 105, 131

數學問答 36

修學時節 157

肅宗 103, 148, 149, 292, 299

숙종조 153

純陽子 60, 143, 144, 158, 159

純祖 59, 62

순창 92

順川 釜淵 265

術客 158

술잔〔酒孟〕 257

숫돌〔璃石) 269

崇禮門 藍井 266

松子油 268

崇熙 (重熙, 契丹) 246

詩魔 63, 64, 154

詩魔病 64

시적 정서 65

詩情 69

詩題 88

詩體 64, 68

詩體明辯 68, 105

時~ 230, 242

時醉十條 313

식물학 296

申禁濬 18, 30, 54, 74, 92, 126,

155, 164, 273, 274, 295, 312

新羅 100

新羅 〈慕文王〉 177

新法曆引 36

神仙境 129

神仙傳 114, 144

辛酉邪獄 287

新情 109

信川 145, 152, 263

辛亥邪獄 287

實錄 243

實事 59

實用 119

실천 286

實學 58, 141, 273, 274, 275, 303

實學經學 54

學思想 113

實學者 57, 58, 59, 113, 119, 140,

141, 155, 273

실학자들의 연구 업적 163

:學派 142

心經 274

心法曆引 289

心性 281

心性情意 297

沈泳道 61, 306

沈有鎭 315

심재기 180, 186

沈定鎭 31. 314

深中淸 2

沈香石 2

沈煥 108

19 세기 함경도 방언의 특칭 218

15 세기 문헌 자료 1

18 세 기 국어 177. 194. 19~. 219

雙湖樓 77

앎 286

牙山 90

아언각비 164, 168, 186, 189, 204,

207

아의〔弟〕 219

峨皇 128

樂府 64, 66, 67

惡麗 258

樂志 299

樂學軌範 299

眼鏡 255, 256, 269, 270

技廉臺 106

安邊 2

안병희 166

安貧樂道 70

安岳 263

安璃 284

顔回 69, 70

安獻福 25. 34, 37, 54

安衡圭 310

鵬 257

藥耀 2

陽 278, 279

渠議 59

陽 2

陽明學 124, 282, 285, 286, 287

陽明學滋 55

楊養白水 309 生116, 141, 157

楊愼 118, 142

楊應秀 74, 104, 155

楊子 115

量田 237, 244

讓酒 262

楊朱 294

양주동 175

〈어魚> 발음상의 우리 말 습관 220

魚叔權 48

어시〔毋〕 215

어 원 의식 177, 206

語學者 57

언문지 164, 167

呂束賓 142

碩山 105

璃石 254

女英 128

旅程 68. 86, 105, 155

旅程詩 105

輿地勝覽 258

輿地勝覽增修起例 31

易經 141. 150

歷代韻語 31

曆法 288, 290. 292

歷史學者 57

曆象 65. 119

曆象考成 28. 36

曆象考成後編 36

曆象學 26. 312

曆象後編i 28

역어유해 173

易參同契詳釋 142

易學 292. 293

易學圖解 292

逆形成 (back formation) 198

鉛 250

聯句詩 64, 65, 66, 75

演機新編 49

聯時調型 155

磯(軟)玉沙 253. 256, 258, 269

連作時調 134

鉛鐵 250

延 263

영교〔雍白〕 270

漏洛關閔 288

染料 251, 252

엿〔餘糖〕 270

嶺南人 149, 150

盆德 267

嶺束地方 148

寧邊 152

永庚 70, 71, 82

字遠 265

寧越 80, 82, 100, 101, 105, 156,

157

英日 147, 148

英正祖 57, 141

英祖 74, 92, 99, 106, 113, 114,

121, 125, 126, 127, 134, 135,

146, 149, 152, 153, 273, 292

榮川 265

永穴 297

영혼 289

영혼불멸설 288

永興 264

禮單 245

禮志 299

禮 293

吳謙 145, 147

梧溪 B 誌集 152, 153, 159

五軍門 234

烏金 258, 259

梧桐 269

오래(門) 221

五禮儀 299

五性 281

五聲韻解 30

五言古詩 66, 67, 79, 129, 130

吳彦寬 145, 147, 148

五 言 律詩 66, 67, 68, 89

五 言 絶句 66, 67

烏玉 257

五衛 234, 235, 243

玉 256, 258, 268, 269

玉京 123

玉圖記 244

玉燈石 2

玉類 2

玉石 253

玉張玄機 149

玉川 120

溫城 90

溫陽 265

溫泉 263

完山 88

完山城 89

阮籍公 11,

왕건 102

王勃 60

王船山 34

王陽明 27, 276, 286, 310, 316

嶺 280, 291

龍籠手鑑 109

龍江 2 66

龍 265

龍岡溫泉 264

龍骨大 51

龍飛御天歌 243

龍紋木 260

용재총화 166

龍虎 114

尤菴 277, 286, 301

尤菴集 148

禹餘根 252

萩谷 102

韻圖 295

雲母 253

紫 門庵 76, 77, 87

雲 山 264, 266

雲莊 117

韻學 294, 29'.5

韻學本源 294

雲鴻 1'.5 3

鬱金 262

蔚珍 264

圓梵諺解 109

願堂 284

元仁孫 313

元陵 127

원순모음화 작용 196

原始反本 115

元天錫 102

元台仁 233

月籠山 121

松外史 1

月食 120

麟伯珪 274

鶴伯陽 141

理的 理想 139

幽溪堂 70

柳匡天 80, 156

迫稿 318

追稿領編 318

個敎 131

柳君弼 146, 149

琉璃瓦 257

柳夢井 96

유봉학 35

情佛道 115

流膳 99

琉石 254

유성원의 반계수록 179, 180

有用之學 119

유의양의 北關路程錄 192

情者 58, 151

柳在泳 113, 124, 134, 140, 168

유창균 166

유추작용 197, 211

유클리 드 (Euclid ) 289

儒學 57, 58

儒學思想 69

儒學者 57, 159

柳馨遠 54, 112, 113, 141, 274

유희 164

陸象山 27, 285, 286, 310

六臣 102

六 言詩 71

六藝學 32

陸王學 124, 285, 303

尹君平 145

尹舜溪 311

輪鍾記 78

輪廻 112, 282

輪廻說 115, 129

尹鎖 32, 33, 276, 286, 316

律呂新書 297

律曆 297

律 詩 64

銀 250

殷栗 263

殷山 267

隱逸 69

隱者 116, 150

乙印委變 44, 49

陰 278, 279

陰官 81, 91, 92, 156

음독 차용어 179, 182, 208

음양 279, 297

음양오행설 295

음역 차용어 179, 208

음운축약 172

岭風弄月 74

損琴樓 106

醫 卜 118

義城 267

儀表 111 30

義興 267

李家煥 16, 18, 27, 74, 155, 315

李束 277, 311

李康五 14, 58, 96

李敬臣 316

願卦 134, 137

李君七 80

李貴 147

이규경 34, 54

理氣 65, 275

李基敬 18, 19, 23, 74, 76, 155, 309

이기문 179, 180, 181, 184, 209,

221

理氣論 280, 283

理氣 心性 278

이기심성론 280

理氣心性說 276

李浩 96

異端 109, 287, 298

異端証 282

異端視 141

李德戀 29, 34, 54, 74, 155, 295,

316

李束運 316

吏讀 295

伊藤仁齊 27

伊藤仁齊文集 27

李得顯 317

李老怨 118

利璃寶 287

李澄 96

李秉鼎 312

이사질 164

李思永 74, 75, 155, 156

李師程 60

李 密 九 96

理萩 17, 31

이수광 166, 207

理薇新編 15, 23, 26, 27, 29, 31,

36, 37, 39, 46, 59, 65, 69, 140,

161, 167, 180, 223, 275, 294,

297, 306

理薇 學 17, 23, 306

이순신(忠武公) 90

異 148

이숭녕 168, 220

理氣發說 129

李 169

願庵吳公傳 236

李陽源 244

李彦復 120

李彦迪 276

李魏巖 310

李宜白 152, 153, 159

이 의봉의 束韓譯語 189, 190

李 (栗谷) 24, 121, 122, 129, 277,

278, 301

李願命 244

李彌贈 147

李濱 25, 34, 37, 54

異人 114, 158

異人奇事 143

異人說話 147, 158

異人說話集 154

李仁佐 146

李子敬 22

李粹 24, 277

願齋 60, 71, 74, 80, 83, 90, 96,

107, 110, 118, 126, 134, 137,

149

願齋亂纂 17, 23, 36, H, 58, 59,

60, 62, 67, 88, 89, 106, 109,

110, 114, 134, 140, 143, 154,

159

願齋亂蓬 解題 ,8

願漫 140, 145, 146, 147, 148,

149, 150, 151, 152, 154, 158,

159

願先生 行狀 70, 92, 123, 125, 131

願稿 17, 18, 25, 26, 27, 28,

31, 36, 38, 41, 47, 52. 58, 59,

61, 62. 66. 67, 71, 81, 83, 85.

87. 88, 92, 95. 96. 101, 112,

113, 116, 122, 123, 128, 130,

131, 134, 140, 144, 146, 150,

151, 153, 154, 165

願 遺稿 17, 25, 26, 31, 37, 40,

58, 59, 61, 62, 65, 66, 67, 69;

70, 71, 85, 87, 94, 98, 110, 114,

120, 123, 126, 128, 130, 132,

144, 154, 155, 158, 161, 166

願 全 魯 58, 59, 113, 142, 144,

145

異蹟補跋 144

異蹟人物 143

이종철 178

李重煥 95

李之溪 288

李鎭洙 143

伊川 264

理學 274

李恒 95

異行怪術 147

梨峴 93

李顯直 312

李衡喆 312

李灘 D0, 151, 153

李混 302

梨花洞 150

翊贊 81, 107

인간관 278, 280, 303

忍冬 261

인물설화 158

人物性觀 280

人物性同論 16, 24, 35, 280

人物性同異 277

人物性同異論 276

人物性同異論爭 275, 280

人物性異論 276, 280

人性 280

仁叔 77, 78

仁義禮智 278

仁義視智信 280

仁祖 141, 153, 301

仁祖反正 151

仁川江 64

一氣 279

一氣長存說 283

일본 120

日食 119

日 月 281

林培 144

任景 80

臨履錄 313

林泳 23, 65, 306

임진강 122

壬辰倭亂 44, 49, 90, 102

任會一 80

自탑飯 293

子規詞 101

紫檀 260

自 鳴鍾 19, 28, 120, 1'7

字母辯 161, 217, 294

紫石 254

磁石 253 , 2,4, 270

慈壽宮 147

紫陽 124

自然銅 250

紫 石 254

字意混誰辨 31

貸知錄 15, 27, 31, 37, 38, 39, 59,

65, 69, 140, 142

自治通鑑全書 27

自暎 68, 91, 155

自暎詩 156

雜著 38, 39

雜體 64

雜體詩 65, 66, 67

雜學 294, 297, 298

棒 260

張 262

壯洞 78

藏頭體 61, 65

莊陵 100, 157

長陵令 107, 121, 122

莊陵 參奉 69, 80, 82, 96, 105

長城 76, 95, 110, 157, 265

張鬪 152, 153

張載 129

張志恒 150, 151

長春院 106

財政 230

鑄積倉 243

赤道 291

赤笑山 105, 106

籍田 243

赤土 252

典農寺 243

全羅監司 76

全羅道 69, 95, 96, 105, 141

全羅北道 (全北) 69, 155

田禹治 145, 147

全義 91, 105, 265

全義 縣藍 73, 81, 83, 90, 108

全州 90, 146, 156

全州府 76, 89

傳統技術 267

前漢耆律曆志 297

絶句 64

折受 232

占星學的 견해 119

접미사 -i의 첨가 217

鄭介淸 96

鄭景淳 16, 18, 21, 30, 40, 74, 96,

155, 309, 316

定界碑 299

丁觀爆 70, 74, 75, 155

丁 23, 307

精氣 284, 285

精氣遊魂 115

鄭臺 311

鄭道傳 284

鄭東 164, 166

鄭東鎭 32, 310

鄭斗卿 143

鄭斗南 146, 148, 149

鄭 143

正蒙 282

鄭夢周 284

丁卯丙子胡亂 102

丁師爆 74, 75, 155

廉 253

施善 267

鄭鼠禧 15,35

鄭違祚 310

廳T試H 92, 丁 33, 37, 53, 164, 168, 186

205, 207

汝立 96

院玉沙 253, 254

鄭寅普 25

程子 274, 283

鄭階 143

井田制 46

鄭齊斗 33, 286, 316

正祖 95, 122, 125, 134, 273, 284

鄭存斗 312

程朱 70, 276

程朱學 70, 124

鄭持淳 35, 40, 311

鄭澈 96

鄭喆祚 74

丁香 260

鄭弘淳 74, 155

諸葛孔明 146

濟民倉(榮山江) 258

題跋 60

제사 289

除夜 85

諸子百家 60

조개(貝〕 257

朝貢 245

趙器鎭 315

大中 96

曺敵 74, 155, 311

檀洞 69

朝鮮前期 96

朝鮮中葉 95

조선총독부편 조선어 사전 187

조선 한자음 181, 183, 185

조선 한자음의 간섭 184

朝鮮後期 95, 159

趙嶋 21, 77, 155, 311

趙汝籍 153

趙寅永 59

趙敎 74, 77, 79, 92, 104

潮池 267

趙鎭寬 77, 314

趙鎭宅 74, 77, 155

潮泉 266

烏銃 260

德性 285

存心函養 153

縱 260

鍾離權 142

坐忘 70

罪福說 282, 283, 284

周法高 191

主簿 81, 107

周牌 291

朱斐 146, 147, 149

洲湘學 54

朱石 254

주시경 220

周 易 18, 62, 73, 109, 113, 140,

157, 280, 291, 297, 309, 315

朱陸學 33

朱子 118, 153, 274, 276, 283, 285,

286

朱子大典 26, 311

朱子私議

朱子警 276

朱子說 32

朱子性理學 274, 278

朱子一尊主義 32, 33

朱子尊信論者. 32

朱子學 124, 276, 277

周尺 238, 244

朱土 251

鎔解孟用 29

중간본 두시언해 210

중국어 기원의 차용어 179

중국어 차용어 179, 206, 209

중국어 차용어 의 유형 179, 193

212

중국의 音韻學 162

중국 한자음 178, 183

頂店的 改革論派 55

中道 132

중세국어 178, 194, 197, 219

頂陽節 85

中庸 125, 280, 309

中 注釋 124

中原進貢路 247

重學的 改革論派 55

卽知卽行 124

曾子 291

地圖說 25

지동설 291, 292

지렁이 269

地理 143

智異山 145, 150, 151

芝麻 262

地方說 291

芝峰類說 27, 166, 207

地圓說 290, 291

지전설 291

地 268

知行說 286

知行合一 58

知行合一說 124, 276, 285

機 260

職方外紀 25 36

眞言集急壘章 109

眞佳子 262

眞珠 257

陳致虛 142

陳獻章 27

眞黃鐘 238

販憶 237

質 278, 283

集慶堂 91

疾病治療 264, 265, 266

茶 260

借字表記 176

參同契 60, 113, 116, 117, 118, 140,

141, 142

참동계경문 114

參同契說 114

參同契注解 141

參同考 142

參同解跋 114

參 91, 157

參星 73

讀 23, 65, 306

沿州書院 106

蔡沈 118

蔡 270

천당지옥실 288

天命之謂性章 280

天 119, 122, 123, 143

天冬 261

天文學 65, 289. 290

天 l22, 157

天 253

天原 78

天 地方說 290

天人感應說 293

천주교 14, 287, 288, 289

天主實義 25, 36, 288, 289

天地 281

天地日月 281

鐵 250, 251

哲學詩 65

靑燁石 253

靑璃石 254

청령포 101

靑山 267

靑石 253

靑松 265

靑玉 253, 257

靑玉石 253

淸夷秋觀 13

淸州 265

淸濁粹駿 281

靑霞子 142

靑鶴集 153

체언 어간말 <ㅌ> 213

체언의 재구조화 210

초〔炯) 269

草類 261

楚山 89, .120

楚山縣令 123

淑井 254

淑井院 254

淑泉 265

최강현 192

崔三龍 57, 152, 153

崔錫辯 163

최세진 38

최세진의 사성통해 205, 206

최창렬 200

崔 昌 祚 122

崔天若 120

崔致遠 99, 100

최 한기 33, 34, 53

秋夕 85, 117

縮砂 270

春岡隨錄 113, 124, 140

春桂坊 21

春川 149

262

忠心 68, 69, 124, 126, 135, 139,

155, 157

忠淸道 95, 105

醉隱公 60, 103

維嶽山 102

相子 260

親策十條 19, 313

七 言 古詩 65, 66

七言十句 82

七 言 律詩 65, 66, 67, 89

七 言 絶句 65, 66, 67, 68, 101

七 言 絶句詩 61

打魚試 64

코기리〔象〕 200

湯話 283

湯若望 (Jo annes Adam Schall von

Bell) 289

蕩平策 14

太極 27

太極圖 275

泰仁 99, 137

泰川 264

太玄經第法 310

澤堂 302

擇里志 95

土三靑 252

土類 251

土炭 252, 259

吐血 260

通鑑節要宋元續 244

退溪集 27

퇴계학파 277

破閑集 259

八珍風味 72

彬木 260

片金子 153

平山 263

平石 239

평안도 96

平海 264

覽南樓 89

風水 118

風地 121, 157

風水 122

風水 267

屬 291

拔香 亭 89, 104, 105

〈ㅎ〉 종성체언 197

河大 150

河西 78

河 聲 來 14, 120

荷葉綠 252

學 生 233

한강 82, 122

韓光 會 106, 313

韓 晩裕 315

韓無長 153

韓文俊 258

漢文學樣式 59

韓翔 147

漢城參軍149

漢詩 60, 1

算藥 268, 269

韓元 袁 276, 277

漢譯西學書 14

韓翼 312

閑情 68, 69, 80, 86, 155

閑情 詩 71. 155

韓致 明 315

寒風 106

함경도 96

항박과( 蕙 ) 268

恒 112

東異蹟 114, 143. 144, 14,, 147,

158

灘東異 讀補 31, 60, 114, 140, 142,

3, 1, 145, 147, 148. 149.

151, 152, 153, 154, 154, 158,

159

海束傳道錄 153

海防論26, 49, 51, 52

海松 259

海州 264

行旅 詩 105

行用吏文 205

行狀 62, 64, 70, 144, 274

行次 235

行次入浴 263, 264, 265

鄕校 234

鄕慈 68, 80, 155, 156

鄕慈詩85, 86, 125

縣監 81

현대 방언의 잔존형 214

玄尙 整 277

賢首諸乘法數 109

顯宗 143

현충사 90

護國寺 106

湖洛 275

湖洛論爭 16, 24, 277, 280

湖洛心性同異說 130

湖洛心性理氣說 18

湖洛心性理氣之說 23

湖洛二學始末 315

湖洛學心性說 17. 23

胡桐浪 268

湖南 62, 91, 95. 105, 121. 126.

137, 141

湖南實學 141

湖南實學環 59

湖南五臣 96

호남인 302

湖南派頁學 14

湖南貸傑之士 315

湖論 24

盛山 89

湖西 150, 151

浩然之氣 132

혼령 282

혼백 288

混闇堂遠稿 310

싸曰天儀 28

혼표형 (contaminated word) 181

洪啓禧 18, 26, 74, 155, 164, 312

洪公森 107

洪大容 15, 18, 23, 24, 28, 29, 33,

34, 35, 37, 53, 74, 78, 155, 273,

291, 315

洪萬宗 114, 143, 147, 158

洪範 297

洪師範 248

洪性德 14, 96

洪 壽 海 120

洪良浩 164, 223

紅 257

洪直弼 124, 144

華東正音通釋考 163

化民易俗之道 315

花山 90

華斑石 253

華嚴經四十二字門 109

華嚴戀談會玄記 109

華陽洞 書 院 310

寧音方言字義解 31, 161, 163, 168,

169, 172, 176, 182, 188, 191,

202, 206, 212, 217, 223, 294

화음방언자의해의 국어사적 특칭

213

華夷觀 302

和評固師碑 258

還丹工夫 117

暎睦亭 106

幻術 145, 149

桓帝 141

滑石 252

黃江八學士 277

皇極經世圖 295

皇 極經世 容 162, 294

皇極經世 咨 四象體用聲音卦數圖解

31

黃老家 118

黃流 262

黃玉 257

黃瑞 59

黃載重 16, 22

黃 錫 23, 308

黃應 69

黃喜 48

檜 260

懷古 68, 99, 155

懷古詩 99, 100, 102

回文體 61, 64

희양목(黃楊〕 260

會通 115 118

回回國 292

橫渠 282

孝宗 141, 300, 301

後金復讐意識 52

훈몽자회 (예 산본) 174, 181, 185,

205, 208

훈민정읍 16,, 166

訓 民正 警 30, 164. 295

훈민정음의 근원 166, 167

訓民宗編 164, 167

休休子 152, 153

黑 252

黑石 254

黑視石 254

黑 土 252

興 60, 92, 112

興縣 69

興限 150

흰엿頂糖〕 270

熙川 264

저자약력

崔三龍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석사, 박사)

현재 전북대학교 인문과학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고전문학 전공

저서 『한국초기 소설의 道仙思想』 {1982) , 『한국문학과 道敎思想』 {1990)

尹源鎬

전북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졸업

중화민국 국립대만대학, 중국문화대학에서 경제사학으로 문학박사 학위 취득

현재 전북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교수

경제사전공

저서 『고전 공산주의 사상』 『한국경제의 좌표』 (공저)

논문 「중공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의 다수

崔鈴承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석사)

전북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박사)

현재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국어학전공

저서 『 19 세기 후기 전라방언의 음운현상과 그 역사성』 {1986), 『역사언어학』(번

역, 1992)

金基鉉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 박사)

현재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국민윤리교육과 부교수

한국철학 전공

논문 「유가의 생사화해 및 불멸의식」 외 여러 편

河宇鳳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사학과 졸업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 (문학박사)

현재 전북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사학과 교수

한국사전공

저서 『조선후기 실학자의 日本觀 硏究』 (1989), 『역사적으로 본 일본인의 한국

관』 (번역, 1990)

이재 황윤석

—영 • 정 시대의 호남실학

대우학술총서•공동연구

1 판 1 쇄 찍음一一一一一1994. 8. 20

1 판 1 쇄 펴냄一一一一一1994. 8. 30

지은이 최삼룡 • 윤원호 • 최전승 • 김기현 • 하우봉

펴낸이 朴孟浩

편집 당연중

조판 동국전산

펴낸곳 (주)民音社

출판등록 1991 . 12. 20. 제 16-490 호

135-120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506 강남출판문화센터 5 층

대표전화 515-2000 팩시밀리 515-2007

값 12,000 원

© 최상통 • 윤원호 • 최전승 • 김기현 • 하우봉, 1994

역사 • 전기 /KDC 990

Printed in Seoul, Korea

ISBN 89-374-4522-0 94990

ISBN 89-374-3000-2 (세트)

대우학술총서

공동연구

아담 스미스 연구 조순 외 7 인

조선후기 향약연구 향촌사회사연구회

한국상고사 한국상고사학회

孤雲 최치원 한종만 외 5 인

한국 고대국가의 형성 한국고대사연구회

인지과학 조명한 외 11인

한국 여성의 전통상 김열규 외 5 인

중국의 천하서상 윤내현 외 4 인

미국인의 생활과 실용주의 이보형 외 5 인

현대과학과 윤리 김용준 외 3 인

대한제국기의 토지제도 김홍식 외 4 인

뇌의 인공적 확장은 가능한가 박순달 외 3 인

인간이란 무엇인가 장회익 외 6 인

현대과학의 제문제 김용준 외 6 인

촌 스튜어트 밀 연구 조순 외 10 인

임진왜란과 한국문학 김태준 외 6 인

서재필 이택휘 외 5인

한강유역사 최몽룡 외 3인

현대지리학의 이론가 들 한국 지 리연구 회

한국인의 대미인식 류 영 익 외 3 인

茶 山 學 연구

1. 정 다산 연 구의 현황 한 우근 외 7 인

2. 정다 산과 그 시대 강만길 외 8 인

3. 정다산 의 경학 이 을호 외 3 인

4. 다산학의 탐구 강만 길 외 6 인

자료집

1. 한국의 친족용어 최재석

2. 충남토속지명사전 최문휘

3. 한국의 음식용어 윤서석

4. 제주 토 속지명사전 오성찬

5. 전복전래지명 총람 유재영

6. 한말의병 관계문헌 해제집 홍순권 외 3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