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몽룡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미국 하버드대학교 인류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현재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한국상고사학회 회장저서 A Study of Yongsan River Valley culture - The Rise of ChiefdomSociety and State in Ancient Korea외이선복서울대학교 고고학과 졸업미국 아리조나대학교 인류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현재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부교수논문 “Lower and Middle of Northeast Asia Geoarchaeological Review'’외안승모서울대학교 고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런던대학 고고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 취득현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논문 “Origin and Differentiation of Domesticated Rice in Asia-Review of Archaeological and Botanical Evidence‘’ 외
한강유역사
한강유역사
최몽룡 이선복 안승모 박순발民音社머리말
필자들어『한강유역사라는 제목으로 대우재단에서 연구비를 받은 것이 1987 년으로 6 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이 책의 발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연구를 계획하게 된 동기는 필자 중의 한 사람언 崔夢龍이 198 면 8 월 13 일 (화요일) 대우재단에서 「서울 근교의 백제유젝」이라는 제목으후 강의를 할 기회를 얻고 곧이어 행해진 답사에서 한강유역의 문화척 중요성이 부각된 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백제시대보다 앞선 구석기와 신석기, 청동기, 초기 철기시대를 포함하여 한깅유역의 고고학척인 성과를 정리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고, 포 당시 李用熙 이사장의 배려가 있어서 이 책의 발간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필자를 포함한 다른 창가자들 모두가 원래 부지런하여 글빚이 없는 것로 유명하다. 그러나 어찌 된생인지 대우재단의 경우헤는 헝상 원고의 제출이 늦어지면서 쫓기는 듯한 인상을 주어오교 었다. 재단측에 참으로 송구스럽고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이 책은 제목이 한강유역사로 상당히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는바, 개인이 단독으로 연구합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래서 각 시대별로 휠지들에 의한 공동연구가 수행되게 되었다. 다시 말뼈 李鮮馥(서울대 :구석기시대),安承模 (국립박물관:신석기시 대)과 朴淳發(충남대 : 청동기와 초기 철기시대) 그리고 崔夢龍(서울대 : 백제시대)의 4 명이 각자의 전공분야를 살려 연구를 행하여, 이 책을 완성하고자 하였다. 그 내용은 한강유역 근처에서 발견 조사된 기존의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초기 철기시대 및 백제시대 유적플을 정리, 분석하여 우리나라 중부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의 요렴언 한강의 문화적 특성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한경유역은 현 송파구, 강동구 일대를 중심 로 한성시대 백제 (기원전 18년에서文周王이 공주로 천도한 해인서기 475 년까지)의 수도를 가진 중요한 곳이며, 또 조선시대에도 도읍지가 된 콧이기도 하다. 마침 내년, 1994 년이 조선시대 도읍지가 한양으후 옮겨진 지 600 년이 되는 해로, 이 책의 발간이 비록 늦어졌더라도 이에 맞추는 운도 있다고 자위할 수 있겠다. 여기에 정리된 한강과 관련된 고고학적 성과플은 앞으후 발굴, 조사를 통해 새로운 자료가 추가되면 조금씩 수정, 보완되겠지만, 현재까지의 성과를 정리하였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 책의 발간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이 책의 발간을 위하여 6 년 동안 기다려준 대우재단의 李奭熙 이사징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1993 년 5 월 3 일 필지플을 대표하여崔夢龍한강유역사
•차례머리말 • 5李鮮馥 구석기시대 • 9安承模 한강유역의 신석기문화 • 21朴淳發 한강유역의 청동기 ·초기 철기문화 • 115崔夢龍 한성시대의 백제 • 225필자소개 •269구석기시대*
*이 글 고는 1988 년 3 월에 작생되었와 , 풍동연구자외 연구철과 지옆으로 묵은 원고의 내용 벌 의 첨삭만을 하여 1992냄 홉 대우쩌당에 채훌원 것입훌 밝혀둔다.
李鮮馥
1 서론한국의 舊石器考古學은 1960 년대 중반에 개시되었다. 20 여 년의 짧은 시일 동안 많은성과가 구석기 연구부한 서 있었던 것도 시 설이지만, 그러나 아직 구석기고고학은 걸음마의 단계릴 , 핵품의 정럽을 위해 시급히 해결되어야만 할 문제들어 산척해 있다. 구 고고학의 성장올 더디게 하는 가창 큰 원인으로는훈련된 구석기연구전품가의 부측과 더불어 구석기 연구의 중요성 그 자체에 대한 인식부촉에서 기인하는 천국척범위에 걸친 유척조써 대한 뒷받첨의 결여 들 수 있다. 또한 구석기 유척과 유풀의 연대와 유척형성의 지철학척 배경 및 당혜의 고생태학척 청보률 명가하기 위해서는 第四紀地質學, 고생물학, 지형학, 토양학, 지구물리학 퉁풍 여러 기초 과핸야 전문 픽 창여가 펼수척이지만, 이것은 칙 이루기 요원한 기대이다. 이러한 어려용용 한국 어느 지역의 구핵기고고학 연구의 경우에있어서도 그 발전을 가로막는 조건이 되고 있는바, 결국 한강유역의 구석기 문회 뻐 대한 평가를 어렵게 만드는 기본적 한계조건이기도 하다.
한강유역은 1970 년대 이후 구석기고고학의 연구활동이 가장 활발히 전개된 지역이다. 특히 남한강유역에서는 충주댐수몰지구 문화유적조사사업을 전후하여 짧은시일 안에 몇몇 중요한 유적이 발굴되었고, 최근에는 북한강 수계의 파로호 서도 여러 지정에서 구석기 유물이 수습되었다. 따라서 비록 한깅유역에서알려진 구석기유적의 수가 결코많은것은 아니지만, 남북한을 통틀어 겨우 수십 개의 유적만이 알려진 현시점에서, 한강유역 구석기문화의 내용은한반도 전체 구석기문화의 성격 이해에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그러나 비교척 활발한 조사사업과 조사결과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이콧에서 알려진 자료의 내용이 충분히 객관척으로 검토되었다고 할 수 없다. 대부환의 보고는 극히 단편적일 뿐으후서, 현재 공표된 자료만으로는 한강유역 구석기문화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 아직 체계적언 평가를 내렬 수 없는 것이 사질이다. 한국 구석기고고학의 발전을 제약하고 있는 여러 조건과 더붙어, 이러한 사정 로 한강유역 구석기문 대한 종합척 접근이란 이 지역에서 발견된 유혀파 유물을 나열척 로 서술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 하겠다.그런데 이러한 중거의 나열척 서술 역시 그리 만만치 않은 과제이다. 이는 왜냐하면 이칙 보교문이 미간상태언 유쩍도상당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보 극히 부분척인 내용만을 소략하게 다루고 있을 뿐이기 때뭄이다. 이에 더하여, 일부 보고는 자료의 의미를 제 3지 적 입장에서 객판척으혹 평가 분석하는 것이 불가농할 정도로 연구자 개인의 주관척 관점에서 유풀의 분류와 명명 및 분석올 전개하고 있어, 사실 정확히 어떠한 유물어 어떻게 발견뭔 것언기를 판단하는 것도 어려운 형편이다. 상당수의 경우, 발견된 유물의 명가는 그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주관척 혹은 섬미척 판점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유물의 성격에 대한 결론은 〈객관척 충거에 의한 합리척 추론〉이라기보다 〈상생 의한 강변〉에 지나지 않음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는 유물과 유척의연대명가에 있어서도 절대연대 측정은 고사하고 가장 기본척인 제 4 기 지철층위에 대한 고려가 결여된 채, 단지 석기 한두 점의 형태적 특정에서유척의 연대가 단정되고 있는 것도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라 하겠다.
이들 모든 문제는 물론 학문이 성정 는 과정에서 자연히 해결되리라 기대되지만, 그러나 현재의 입징베서 한강유역의 구석기시대 문화성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실질척인 장애물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한강유역의 고고학적 과거 가운데 구석기시대에 대한 서술은 현재 학계에 공식보고된 내용 중그 관적 의미를 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내용만을 골라 유적별로 제시할 수밖에 없어, 다른 시기에 비해 극히 소략한 내용으후 그치게 휠 것이다.2 유적과유물한강유역에 존재하는 구석기유척의 숫자는 그 누구도 정확히 얼 먼 지 말할 수 없다. 지표에서 유물이 수습펀 경우헤도 문화충이 지총 속에 야칙 살아 있는지, 즉 유적이 살아 있는지 뱀는 판단하기 어렵다. 정식 조 이루어진 경우에도, 그것을 구석기유척이라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유척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러한 운제 있는 지정을제외할 때, 어쨌건 구석기유척이라고 보고되어 그 내용픽 평가가가능한 유척으로는 충주댐 수몰지구에서 조사된 금굴, 명오리, 수 , 창내라는 남한강변의 첨 및 북한강 파로호퇴수지구의 룡리 얼대에 불과하다. 한편 1991 년 흉천 강변에셔 강원대조사맨 의해 〈중 석기〉 유쩍이라고 보고된 단구지청이 좌 되었는데, 필자로서는 이 유척이 구석기시대일 농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 그 내용이 보고되지 않운 판계로 여기에서는 개별척 검토 쟁략하기로 하겠다. 이제 이들 몇 유력에서 보교 바훌 리, 검로하자면 아래와같다.2-1금굴 2)
충북 단양군 도뱀에 있는 금굴유척은 1983 년에서 1985년 까지 발굴조사 되었다. 보교지에 따르자연 유적은 모두 8 개의 퇴적단위로 구성되어 있으며, 보고자는 각 퇴척층이 전기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를 거쳐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문화기를 대표한다고 명가하였다. 개정판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보고자의 주장을 받 여, 금굴유척이 70만 년 전의 유적이라고 쓰고 있는바, 학계 일각에서는 이 유척을 한반도 最古의 유적 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이러한 주장올 많이기 어려운데, 왜냐하면 이 유적이 그토록 장기간에 걸쳐 형성되었다면 퇴적층은 이 긴시기 동안 있었던 수많은 기후변동사건을 반영효 는 다양한 주어야 하지만, 그러한 흔적은 보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유적에서 다량의 타제석기가 채집된 것은 툴 없으며, 도연이나 사진으로 제시된 석기는 구석기인 듯 여겨진다. 그렇다면 구석기문화층이 신석기문화층 아래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이 큰 듯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러나 동굴유척 연구에서 항상 문제로 대두되는 퇴척충 형성과청의 지질학척, 지형학척 판맨 대한 고려가 이 경우에도 결여되어 있고, 절대연대 측정도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유적의 구석기문화층의 성격에 대해서는 실상 무엇이라 말하기 어렵다.2-2명오리 3)충북 제현군 한수면 명오리 남한강변의 河 段 서도 충주댐수몰지구 발굴조사가 진행되던 1983년 과 1984년 에 걸쳐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여기에서는 모두 163점 의 구석기가출토되었다 한다. 발굴자는 이들 유울은 그 환경척 배경이나 석기의 특갱에서 없는 구석기시대의 것이라 보았고, 천체 석기군의 형태학척 , 특히 르발루 석핵의 존재에서 이들은 중기 구척기시대의 유풀이라고 주장 였다. 그러나 이 유혀의 경우에도 우천 문제언 것온 소위 유 을수승풍 최소한 플라이스토세의 퇴척이 확질파 는 중거가 제시되지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발견된 석기는 주로 석영이나 점판암 등 유적 주변에서 혼히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석기 중에는 박편석기가 많이 있고, 대형석기가 주종이라 한다. 이들은 직접떼기법으로 제작되었고, 간접떼기로 만들어졌다고 인정할 만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발굴된 석기는 주먹도끼 5 점, 외날찍개 , 양갈쩍개 , 돌핵 10 점, pick1 점, 박편도끼 6 점, 긁개 79 점, 첨기 14 점, 홈날석기 , 톱니날 3 점, 송곳 11 점, 칼 2 점및 조각칼 7 점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보고자의 분류는 자료의 일차분류에서 〈대형석기〉와 〈박편석기〉라는 서로 상이한 기준의 집단이분류의 규준으로 채돼되었다는 점에서 우천 문제가 있다. 이 밖에도 용어사용과 분류개념이 통일적으로 척용되고 있지 못하여, 제시된 형식분류를 받아들이기 어려움을 지적할 수 있다. 163 점의 자 료 중, 149 점이 도휴 고 하는 것은 상식적 로 납득하기 어려우며, 다른 무엇보다도 긁개라고 주장된 79 점이 과연 도구일 것언가는 의심스 다. 또, 르발루아석핵이라 주장펀 자료는 과문한 필지에게는 전혀 그런 것으 여겨지지 않는다.2-3수양개 4)수양개유적은 충북 단 양군 척성면 애곡리 남한강변에 위치한 야외유력으로서, 전곡리를 대표로 동 는 엄진강 유역의 구석기지청과 더불어 현재까지 유조.척 펀 과 마한국찬의가 지구로석 충기주유호척수 중몰 가지장구 유중 요조한사 유의척 일얼환 으것이로다서. 19 83 년 은에 서위 의19 8두 년 사이에 모두 4 회에 걸쳐 야루어졌다. 보고 에 따르자면, 유 의 퇴척층은 모두 5 개의 단위로 구분펀다고 하며, 의청통기 및 신석기 시대충 이래에서 구석기가 수습되는데, 구석기충은 다시 후기구켜기충과 충기구척 기층으혹 나쥔다고 보고되었다.그러나, 수 양 척에서 발견펀 지 료가 엄청난 양 종류라는 것은 누구나 다 언청하고 있으나, 과연 무엇이 어떻게 벌 된 것언가혀는 청은 벌굴보고가 지극히 소략한 관계로 알기 어려운 형면이다. 이 유적에 대한 필자의 지식 역시 충북대학교박물관과 국립청주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및 기타도록 등에 제시된 단편적자료에 기초하고 있으며, 단 한 차례 미정리된 유물을 극히 짧은 시간 동안 볼 수 있었을 뿐이다. 아무튼 필자가 이 유적에 대해 알고 있는짧은 지식에도 불구하고, 이 유적이 매우 복잡한 성격인 것만큼은 틀렴없는 사실로서, 보고서에서 언급된 바와 같어 간단명료하게 유척의 성격을 논할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수양개유척은 플라이스토 세 말 상대적 로 장기간에 걸친 시기 동안 여러 개의 문회적 퇴척단위가 퇴척-침식-재퇴척의 윤회를 반복하며 이룬 복합 적으혹서, 일종의 생활연과도 같은 성격의 유구도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의섬된다. 그러나 발견자료에 대한 최소한의 총체척 계량척 자료가 없는 상태에서는, 비록예를 들어 〈슴베찌르개) 냐 쐐기형석핵과도 일본학자들이 큰 관섬을 기울이는 일부 지표화석척 자호 가 발견된 사실이 지니는 문화척의미에대해서 무어라말할수없다.
보고문을 따르자연, 소위 〈중기구석기〉 문화층에서 발견된 유울은 주로 규암으로 제작되었다고 하며, 이들은 던저떼기와 직접떼기수법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망치돌, 미완성석기, 박편과 석핵 이외에도 여기에서는 첨두기, 찍개 및 주먹대패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소위 중기구석기시대의 석기가 전체 유풀어 서 차지하는 양은 미미하다고 보고되었지만, 이들어 구체척으혹 어느 정도의 비율언가는 불확실하다. 대부분의 유물은 〈후기구석기〉 충에서 수습되었다고 한다. 이 충에서 발견된 유풀은 혹요석, 혈압, 규암퉁퉁 다양한 원석을 사용하여 제작해 만든 것이라 하며, 제작수법에 있어서도 칙접떼기,간첩떼기, 눌러 둥외 다양한 수법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유물은 모두 일곱 군으로 분류되었지만, 그러나 100 여 점의혹요석제 석기는 따로 훈류되었다. 7 개 의 군은 주먹도끼, 찍개, 슴베찌르개, 긁개, 밀개, 배모양 개 및 주먹칼로서, 각각은 다시 여러 아꾼으로 머 나누어 수 있다 한다.단 척이나마 필자가 관활한 바로는, 이러한 석기 분류는 유물의성격에대한 종합적 진단은 결코 아니라고 여겨지며, 일부 미보고된 유물 중에는 의국의 자료와 비교할 때 매우 확연하게 하나의 석기유형으로. 규정할 수 있는 석기들이 다수 존재하는 듯하다. 또한 예를 들어 비교적 자료가 널리 선전되어 그 특칭이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배모양밀개의 경우, 이들이 과연 도구로서의 밀개일 것인지 의심스러운데, 아무튼 보고자 나름대로 설정한 석기형식의 규준의 객관성은 앞으로 좀더 보장받아야만 될 것이다. 결국, 수양개유적은 풍부하고 다양한 유물의 내용에서 한국에서 매우 중요한 구석기유적임에 틀림없지만, 아깝게도 아직까지 그 내용을 평가할 만큼 그 전모가알려지지 않았다.
2-4 창내5)창내유적 역시 충주댐수몰지구에서 1983년에서 1984년에 걸쳐 조사되었다. 발굴자는 창내유적에서 수습된 유물을 후기구석기로 비정하였으며, 발굴과정에 집자리가 발견되었다고 보~ 그러나 필자로서는 여기에 있다고 하는 집자리는 실상은 발굴자의 판단착오라 생각하는데, 이것은 석장리의 경우와도 갇이 발굴자의 주관적 판단이 너무 앞서간 사례가 아닐까 여겨진댜 한편 유물의 시대에 관해서도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우선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퇴적층 자체는 필자의 관찰로는 오늘날에도 하천 퇴적작용의 영향을 받고 있는 충적층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발견된 석기들이 타제석기로서의 뚜렷한 형태적 특칭을 보여주고 있다는 접에서, 이들과 되적층과의 상관관계 내지는 유물군의 상대연대에 대한 해석은 신중한 자세를 필요로 한다고 여겨진다. 만약 이들 석기가 구석기임이 확실하다면, 유적형성과정에서 보다 오래된 되적층이 침식-재되적된 과정에 대한 고려가 필요할 것이라 여겨진다.2-5 파로호퇴수지구6)
198 전 평화의 댐 공사를 위한 준비작업으로서 파로호가 퇴수되며 노출된 지역에 대한 고고학 지표조사에서 상무룡리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구석기산포지가 발견되었다. 이들 중 특히 두 지점이 강원대학교와 경희대학교에 의해 발굴되었다. 필자 역시 발굴에 참가하지 못했으나 유적 일대를 둘러보고 주변의 지형을 관찰한 바 있다.여기에서 발견된 유물은 상당한 양으로서, 크게 보아 규입이나 석영 자갈울 원석으로 하여 제작된 상대적으로 크기가 큰 각종 석기와 더불어 혹요석제 세석기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자료의 방대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간행된 보고서는 그 의양에도 불구하고 자료의 내용을 만족스럽게 이해할 만큼 정리된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하다. 예를 들어, 훅요석제 석기의 경우, 사다리꼴이나 삼각형을 비롯한 기하학적 형태의 세석기들이 다량 발견되었으나, 자료 전반의 계량적 묘사의 결여와 더불어 주요 석기유형이 정확하게 도면으로 제시되고 있지 못하다. 규암 흑은 석영제 대형석기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는바, 역시 싱술한 모든 유적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학계가 안고 있는 석기 그 자체에 대한 분석방법론의 이해와 적용에서의 문제를 반영하고 있다.이 파로호지구의 여러 구석기지접은 한 시기 동안 만들어전 것이 아닌 것만은 를림없는 듯하다. 되적층의 상대적 지형충서에서 유물군은 적어도 두 시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 철대연대가 얼마나 될 것인가는 아직 무어라 확언하기 어렵다. 규암이나 석영제 석기들은 어느 시기에나 발견될 수 있는 것이라서, 그 연대판정이 더욱 문제가 되겠지만, 그러나 흑요석제 세석기들은 형태적 특칭에서 그 연대가 수만 년 전일 가능성은 낮을듯하며, 아마도 후기구석기의 최말기 혹은 십지어는 후빙기 초기로까지도 그 연대를 낮춰 잡을 수 있을 것이다.아무튼 이러한 약접에도 불구하고, 파로호지구에서 발견된 자료는 내륙 깊숙한 산악지대에서도 구석기유척, 그것도 대규모 유적의 발견을 기대할수 있다는 첫 신호라는 점에서, 또 풀라이스토세의 종식기가 되면 한반도 모든 곳에 인간이 살았을 것이러는 시사를 던져준다는 접에서 그 의의가 있울것이다.
2-6 기타 유적1973년 조사된 충북 제원군 점말동굴(용굴)에서는 중기구석기시대의 뼈 도구와 예술품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고, 1977 과 1978년 조사된 청원군 가덕면 노현리 투루봉 동굴에서도 역시 그러한 것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8) 두루봉에서는 하나 이상의 굴이 조사되어 그중에서는 화석인골과 석기가 발견된 지점도 있다고 하며, 실제 화석인류유해는 충북대박물관에 복원, 전시되고 있으나, 아직 보고서는 간행되지 않았다. 또한 단양군 매포읍 상시리의 한 바위그늘에서도 다량의 동물화석과 몇 점의 석기와 더불어 현생인류의 화석유해도 발견되었고 주거지도 확인되었다 한다. 9) 그러나 이 둘 모두의 경우에 있어서, 과연 보고자들이 주장한 바를 모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현재로서 어려운 형편이다. 이러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은, 비록 보고서의 내용이 소략하거나 객관적 증거제시가 취약한 경우에도 모든 실물자료가 공개된다면 어느 정도 그 주장된 바에 대한 평가가 가능할 것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들 유적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자료는 제자에게 공개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제시된 자료만으로는 몇몇 뼈 도구 혹은 뼈예술품이라는 것의 공신력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죽, 이러한 몇몇 동굴지접은 모두 신생대 기 풀라이스토세의 중요한 동물화석지 접임에는 틀림없겠지만, 과연 여기에 보고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뚜렷한 인간활동의 흔적이 남아 있는가는 별개의 문재이다.이러한 동굴지접 이의에도 야의유적으로서 구석기유적으로 보고된 예가 한깅유역에서는 몇 군데 있다. 10) 이들은 타제석기가 지표에서 확인된 지접들인데, 그러나 이들 경우에도 역시 야의유적의 확인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인 되적층에 대한 충분한 고찰이 결여되어 있는 지정에 대해서는 과연 구석기유적인지 아닌지 무어라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그러한 관찰이 있다 하더라도, 자료가 지표채집된 것이고 그 양이 많지 않기 때문에 유적의 연대나 전반적 성격에 대해서도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한편 1991년 강원대박물관은 홍천읍 부근 중부고속도로 통과예정지에서 〈중석기시대〉의 유적을 발굴하였다. 이 유적에서는 다량의 대형석기와 더불어 세석기 및 이에 가까운 소형석기가 다량 수습되었다. 그러나 이 유적이 중석기시대의 유적이라는 주장은 일부 세석기의 존재에서 추정된 것으로서, 그 연대를 뒷받침할 객관적 증거는 사실 제시된 바 없다. 아무튼 그 자료의 내용이 보고되어야 무어라 판단할 성질의 문제이겠지만, 필자가 본 일부 유물의 형태적 특칭과 발굴자의 퇴적층에 대한 설명에서 어쩌면 이 유적은 상무룡리의 보다 늦은 시기와 마찬가지로 플라이스토세 최말기 이후 형성된 것일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된다. 이 유적의 발견으로 한강 상류역에서 신석기시대 이전 시기의 유적이 앞으로도 계속 발견된 가능성이 더욱 커진 겠다.
3 전망한강유역에 인간이 처음 등장해 살기 시작한 시접은 새로운 자료의 등장과 더불어 계속 상향조절될 것이다. 그러나 한강유역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놓고 보아도 현재까지의 자료에서 수십만 년 전의 인간의 흔적이 일부에서 주장하듯 확인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한반도의 구석기유적 중,그 나이를 어느 정도나마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지점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이들 중 그 어느 것에서도 그 나이를 10만 년 전 정도까지라도 올려불 수 있는 뚜렷하고 객관적인 중거는 얻어진 바 없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유적과 유물에 대한 객관적 정보의 추출보다는 자료의 오래됨에 대한 주장이 앞서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학문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제 겨우 시작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 구석기고고학의 형편에서는 지난 60년대 중반 이래 구석기시대가 한반도에 틀림없이 있음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을 거둔 것이라 자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구석기고고학은 새로운 발견과 자료 위에서 그들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객관적 절차를 수립하고 그러한 결론을 축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다른 종류의 고고학 유적에 비해 유적발견의 기대치가 매우 낮을 수밖에 없는 구석기유적이 최근 파로호지구에서 상당 발견된 사정은, 앞으로 한강유역에서 더 많은 수의 유적이 발견될 것임을 시사해 주며, 이 지역이 장차 한국 구석기고고학의 발전에 중요한 자료제공처이자 연구중심지로서 부상할 것임을 예고해 준다.
주1) 이선복 1988, 「구석기시대」, 《한국고고학보》 18, pp. 1-12.2) 손보기 1984, 「단양도담리지구유적 발굴조사보고」 (1983ㆍ1984년도), ((충주댐수몰지구 문화유적발굴조사 종합보고서 (고고 ㆍ 고분분야 I) >, 충북대학교박물관, pp.15- 99.손보기 1985, 「단양 도담리 금굴유적 발굴조사보고」 (1985년도), 《충주댐수몰지구 문화유적현장 발굴조사보고서》, 충북대학교박물관, pp. 5-100.3) 최무장 1984, 「재원 명오리 B지구 유적발굴조사보고」, 《충주댐수물지구 문화유적 발굴조사종합보고서 (고고 ㆍ 고분분야 II) >, 충북대학교박물관, pp. 3-112. 최무장 1986, 《한국의 구석기문화》, 서울 예문출판사.4) 이융조 1984, 「단양 수양개구석기유적 발굴조사보고」, ((충주댐수몰지구 문화유적 발굴조사종합보고서(고고 ㆍ 고분분야 I) >>, 충북대학교박물관, pp.101-186.이융조 1985, 「단양 수양개 구석기유적 발굴조사보고l, 《충주댐수몰지구 문화유적 현장 발굴조사보고서〉〉, 충북대학교박물관, pp. 101-252.5) 박희현 1984, 「제원 사기리 후기구석기유적 발굴조사보고』, 《충주댐수몰지구 문화 유적 발굴조사보고서 (고고 ㆍ 고분분야 I)>, 충북대학교박물관, pp. 187-269. 6) 강원대학교박물관 ㆍ 강원도 1989, 《상무룡리》, 강원대학교박물관.7) 손보기 1975, 「제원 접말동굴 발굴중간보고』, 《한국사연구》 11, pp. 9-51. 손보기 의, 1980, 《접말용굴발굴》, 연세대학교박물관.8) 이융조 1981, 「청원 두무봉제2굴 구석기문화중간보고서」, 충북대학교박물관.이융조 1983, 「청원 두루봉 제2굴 구석기문화의 연구」, 연세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손보기 1983, 《두루봉 제9굴 살림터》, 연세대학교박물관.9) 손보기 1981, 「단양 상시유적 발굴중간보고」, 『한국고대사의 조명』, 충북대학교 문화재연구회 편, pp. 3-8.손보기 1983, 「인종과 주거지」, 《한국사론》 12, 국사편찬위원회 편, pp. 187-211.손보기 1984, 《상시 1 그늘 살림터》, 연세대학교박물관.10) 황용훈 1979, 「서울 면목동유적발견 구석기의 형태학적 조사」, 《경희사학》 2,pp. 187-21 1.이융조 1979, 「청원 샘공유적」, 《대청댐수몰지구유적 발굴보고서》. 충북대학교박물관, pp. 7-40.한강유역의 신석기문화
安承模제1절 자연환경지금으로부터 만 년 전경 氷河南代 끝나고 沖積世가 시작되면서 기후가 점차 따뜻해지고 海水面도 싱승하게 된다. 특히 기원전 천 년경부터 천 년경까지는 전세계적으로 Climatic optimum 라 해서 기온과 해수면이 모두 현재보다 높아지게 된다.始興郡 君子里, 平澤, 束草 永郞湖 등 우리나라의 湖水 ㆍ 濕地 20개소에서 이루어진 花粉分析 결과에 의하1) 10000~6700년 전 사이에는 졸참나무 등 참나무亞屬이 크게 성행하고 버드나무, 호도나무, 서나무, 느륨나무, 자작나무 등의 落葉閩葉樹林도 발달하여 기후가 이전시대에 비해 급속히 溫廢淵問化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6700~450 전 사이는 소나무屬의 증가가 현저하며 낙엽활엽수도 증가하여 기후가 계속 따뜻했음을 알 수 있다. 소나 무의 회분은 다량의 炭片과 함께 검출되어 그 당시에 건조한 기후로 산불이 끊 없이 발생하였음을 보여준다. 반면 4500~1400년 전의 기간은 소나무가 감소하고 다시 참나무, 서나무, 개암나무 등의 낙엽활엽수가 증가하며 기후가 冷京化한다. 한편 永郞湖幽劑倍 地球化學內 수단에 의한 氣候變遷의 연구에 의하면2) 천 년 전과 5000~5500년 사이가 가장 높은 기온을 나타내며 6천 년 전과 4천 년 전경에는 비교적 한랭한 기온을 보이는데 특히 4천 년 전경은 일시적으로 심한 냉량화가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신석기시대의 기후는 후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현재보다 따뜻하였으나 부분적으로 기온의 변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분분석 이의에도 신석기 중기 유적인 弓山貝塚에서 나온 물소뼈, 束三洞貝塚에서 출토된 말전복 등을 보면 당시의 기온이 지금보다 최소한 2~ 3 정도 높았음을 말해 주고 있다.3)後氷期 서해안의 해안선 변화에 대하여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나타나고 있다. 朴龍安은 신평천 늪지조사에 의해 서해안이 6천5백 년 전에서 4천 년 전 사이는 매년 1.4mm, 그 후부터는 매년 0.426mm 속도로 해면 상승이 있다고 하였으며 4) 李燦은 이를 다시 약 8천 년 전에는 현재보다 7.3m, 4천 년 전에는 1.7m 정도 해수면이 낮았다고 해석하였는데 5) 이러한 연구결과를 좇아 신석기시대 서해안은 현재보다 해수면이 낮고 따라서 대부분의 유적들이 바다 속에 잠겨 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서해안 지역에서는 곳곳에서 현재보다 2~3m 높은 곳에서 옛 모래톱이 이루어져 있고6) 동해안의 방어진과 포항에서도 3~7m 높이의 海岸斷丘가 나타나고 있으며, 7) 또한 金海 혜서도 4380 100B.P., 4165 85B.P.의 C 철대연대가 측정된 문화층에서 에 의해 마모된 조개가 현재보다 5.8~7m 높은 곳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8) 오히려 바닷물이 지금보다도 내륙으로 들어왔다는 주장도 강력히 대두되고 있다. 두가지 견해 모두 해안가의 지질학적 조사와 패총의 입지조건, 조개연구가 더 진행되어야 타당성이 밝혀질 것이다.** 최근 낙동강 하구에서는 이러한 방향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補注) .
(l) 吳建煥ㆍ郭鍾喆 「金海平野에 대한考古學的硏究 」,『古代硏究』 2, 1989.® 播鏞夫 ㆍ 郭鍾喆, 洛東 ㆍ口 金海地域의 環境과 漁掃文化』, 『伽倻文化硏究』 2, 1991.이러한 기후변화는 지역척인 차이는 있으나, 전세계척인 공통현상으로
吳建煥, 完新世後半의 洛東江 三角洲 및 그 周邊海岸의 古環境』, 韓國古代史論 2, 1991.
우리나라와 가까운 遼束半島南端의 沖積 武浮而序 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9) 이 연구에 의하면 충적세는 초기의 普蘭固 , 중기의 大孤山期, 후기의 莊河 3기로 나뉘어진다. 보란점기는 10000~soooB.P. 사이로 기후는 현재보다 2~ 4"C 낮은 약간 건조한 기후였으며 자작나무가 성행하였고 해안선도 차츰 융기하고 있었으나 현재 해수면보다는 아직 낮았다. 대호산기는 낙엽활엽수림이 우세한 온난한 시기로 8000~5000B.P. 사이의 전기와 5000~2500B.P. 사이의 후기로 다시 나뉘어진다. 대호산기 전기는 현재보다 기온이 3~ '5°C 높은 온난습윤한 Climatic optimum 해당되는 시기로 현재의 山束半島와 비슷한 기후를 나타낸다. 해수면은 현재보다 높아지기 시작하여 5500B.P. 전후해서는 현재 수면보다 낮거나 높아져 대부분의 해안가가 물에 잠겼다. 대호산기 후기도 역시 낙엽활엽수립이 주류를 이루나 침엽수립의 양이 증가하고 기온은 현재보다 2~ 4 높으나 다시 건조한 기후로 바뀌 었다. 해수면은 차츰 내려가기 시작하여 4200 B.P.에는 7~ 10m, 34ooB.P에 는 4~5m로 낮아지나 여전히 현재보다는 높았다. 마지막 장하기는 침엽수립과 낙엽활영수립의 혼합림을 이루고 기후와 해수면도 현재와 비슷하게 되었다.
제 2절 신석기문화의 흐름과 지역성우리나라의 新石器文化는 충적세 초기의 따뜻해진 환경에 적옹하면서 어로와 수렵 ㆍ 채집 위주의 정착생활을 시작한 주민들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土器와 磨製石器의 제작이 시작되고 原始農耕 의한 식량생산도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현재까지의 발굴결과에 의하면 신석기시대의 상한은 Climatic optimum의 시기와 거의 비슷한 기원전 5 년대로 보이며 10) 청동기문화가시작된 기원전 1 천 년경까지. 약 4 천 년 이상 동안 지속되어졌다.
* 신석기문화의 전반적 흐름에 대해서는 아래 논문 창조 (補柱)
安承興 新石器時代』, «韓國考古學報》 21, 1988, 李盛周, 新石器時代』, 國史館論 16, 1990신석기시대는 유적에서 출토되는 토기를 기준으로 하여 몇 기로 나뉘어지는데 크게 陸起文, 押文土器가 사용된 先衍文土器文化와 梅文土器가 주류를 이루는 梅文土器文化로 나눌 수 있다.
융기문토기는 토기 표면에 덧띠를 붙이거나 표면을 찍어눌러 평행선 또는 기하학상의 문양을 장식한 토기로 平底鉢形기 주류를 이루며 부산 동삼동, 동영 상노대도 조개더미 유적 등에서 줄문토기충 밀에서 출토되어 즐문토기 보다 먼저 발생한 것이 입증되었다. 융기문토기는 동남지방의 해안가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 일본의 繩文 早期와 卿 아무르 Amur강 중류 유역과 黑龍江省 일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융기문토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C"연대만으로 볼 때 일본이 우리나라나 시베리아보다 오래되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한국을 거쳐 시베리아로 퍼져 울라간 것으로 보이나 그 반대의 견해도 강력히 대두되고 있으므로 앞으로 자료증가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11) 그러 나 우리나라와 일본 却樞 융기문토기는 형태, 문양 등에서 공통접이 많고 양지역간의 교류도 신석기 초기단계부터 보이고 있어 양지역 모두 공통의 토기 전통 위에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압문토기는12) 토기 口緣部 만 押僚 ㆍ 押引 ㆍ 暎 의한 문양을 돌린 것으로 瓜文 ㆍ 竹管文 ㆍ 短斜線文 등과 이들 문양에 의한 複合文이 있다. 융기문토 기와 비슷한 분포를 보이며 동남지방은 ㆍ 尖底의 V자형이, 강원도와 동복 지방은 平底의 鉢形이 주류를 이룬다. 압문토기는 구주의 승문 조기에서도 나타나며 시베리아의 바이칼호, 앙카라강 등에서도 보여 동복아시아 전체 에 걸쳐 형성된 수렵 ㆍ 어로를 기본 경제로 하는 고아시아족의 압문토기문화 권을 설정할 수 있을 것 갇다. 13)융기문 ㆍ 압문토기 이의에도 소위 原始無文土器를 先梅文期의 대표적 토기로 보기도 하나14) 形과 제작수법 등에서 다른 토기와 별 차이가 없고 이후 줄문토기문화에서도 양의 차이는 있으나 계속 無文土器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신석기시대에 보이는 무문토기는 별개의 형식이 아니라 융기문 ㆍ 압문 ㆍ 줄문토기 등에서 단지 문양이 생략되어전 형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다.
즐문토기는 單齒具나 多齒具로 토기표면을 누르거나 그어서 각종 기하학적 문양을 시문한 토기로 빗살무늬토기 ㆍ 幾河學文土器 ㆍ 有文土器 ㆍ 무늬토기 등으로도 불리어진다. 이 토기는 대체로 기원전 4천 년경부터 1천 년경까지 장기간 사용되었으며 우리나라 신석기문화를 대표하는 특칭적인 유물이다. 줄문토기는 전술한 융기문 ㆍ 압문토기에 비해 지역성이 강하여 크게 중 ㆍ 서부지방 ㆍ 남부지방의 尖底土器文化圈과 동북지방 ㆍ 서북지방의 平底土器文化圈으로 나뉘어진다. 15)중 ㆍ 서부지방에서는 直立口緣에 ㆍ 底로 이어지는 半卵形의 줄문토기가 특징으로 前期 에는 구연부에 단사선문 ㆍ 柄 文, 桐部에 魚骨文, 底部게 단사선문 등 각기 다른 문양을 시문한 소위 三部位 荒 器가 성행한다. 중기에는 平行線帶文 ㆍ 三角集線文 ㆍ 어골문을 교대로 토기 전면에 시문한 토기가 나타나며 후기에는 토기 전면 또는 동부까지 어골문 등의 同一文울 시문한 토기가 성행하고 삼부위문양토기는 단사선문 등의 구연부 문양만 남게 된다.남부지방의 즐문토기는 중 ㆍ 서부지방 줄문토기의 영향으로 발생하였으며 기형도 丸底의 반란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전기에는 삼부위문양토기가 성행하며 전면에 어골문을 시문한 토기가 나타난다. 중기에는 구연부에 弟形 集線文이 시문되며 후기에는 동부 이하의 문양이 생략되고 구연부에만 단사선문 ㆍ 집선문 ㆍ 斜格文이 새겨진다. 한편 말기에는 문양의 되화가 뚜렷해져 구연부에 1~2 列의 斜點列文이 남고 無文이 압도적으로 많아지며 二重口緣도 나타난다. 남부지방의 줄문토기는 기본적으로 중 ㆍ 서부지방 줄문토기의 영향 아래 발생하였으나 중 ㆍ 서부지방과는 달리 선이 깊고 굵은 太線文이 특칭이고 중 ㆍ 서부지방에 많이 보이는 단사선문보다는 加 繩文文化에서 나타나는 집선문이 성행하고 있으며 또한 丹塗土 ㆍ 配溫 등도 중 ㆍ 서부지방에서는 보이지 않는 요소이다.동북지방의 즐문토기는 平底의 深鉢形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초기에는 狀施文具로 압인 ㆍ 자돌에 의해 구연부에만 점열문을 시문하여 이전 시기의 압문토기 전통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전기에는 구연부에 단사선문 ㆍ 점열문이 시문되고 동부에는 어골문이 시문된다. 중기에는 구연 중간에서 동부까지 沈線게 의한 어골문 ㆍ 단사선문 ㆍ 組帶文이 시문된다. 후기에는 문양이 산만해지는 한편 文土器가 성행하며 말기에는 무문화 경향이 더욱 뚜렷해지고 突帶文 ㆍ 孔列文 등도 나타난다.
서북지방에서도 동북지방과 갇이 平底土器가 주류를 이룬다. 이 지역의 토기는 美松里 下層 細竹里 등에서 보이는 連續孤線文土器기나 아직 단편적 자료에 불과하며, 이어지는 전기의 유적도 명확하지 않다. 중기와 후기에 해당하는 유적은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세죽리 문화충에서는 중 ㆍ 서부지방 중기의 금탄리 문회층과 같은 平行線帶文 ㆍ 帶文과 전면에 어골문이 시문된 평저토기가 출토된다. 堂山貝塚게서는 동북지방계의 深鉢 文土器와 丸底魚 文土器가 공반되어 후기의 모습을 보이며 新岩里 문화층에서는 동부에 뇌문 ㆍ 어골문 ㆍ 三角文 등이 시문된 有類査와 台附遂 등이 보여 遼寧地方 신석기시대 후기문화와 같은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16)제 3절 한강유역의 신석기시대유적지금까지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죄수는 200여 개에 이르고 있는데 주로 큰 강이나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다. 이중 한강 유역에서만 70 곳에 가까운 많은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으며 앞으로의 조사결과에 따라 더 많은 유적이 발견될 것이다.유적의 성격을 살펴보면 서울 岩封同, 春城 內 , 江華 三巨里는 住居址,校洞 丹陽 상시 ㆍ 금굴, 堤原 접말동굴유적이고 바닷가 및 섭의 유적은 패총이 주류를 이루며 나머지 내륙의 유적들은 대부분 散布地나 包含層에서 발견된 것이다.한강유역에서도 신석기유적은 경기만 일대의 해안가와 서울과 · 楊를 중심으혹 한 한강 중류, 춘천을 중심으로 한 북한강 상류, 제원 ·단 양 · 中原 등지의 남한강 상혐 밀집분포되어 있다. 이하지역별로 나누어 중요 유척을 위주로 살펴보기로 한다.
표 l 경기만일대
No 유척지명 성격 주요창고문헌
14I 홉積흉 |貝 쩔 |韓永 熙 •安 廳, 쩌해도서지방의 지표조사
표 2 한강중·하류
지명 성격 주요창고문헌
35I 水石里 |包含層|金元龍, 「水石里先史時代꿨落住居址調훌報
표 3 북한강
461 加 Z 댐뼈양융里 |包 짧 |崔難 , 『찢않轉繼 tt住 居購짧告홉 J ,
50I II 훌田뿔 |散布 地 |有 微, 빽짧原道η 缺빼랩物 J , (<:考
표 4 냥한강
유쩍지영 성격 참고문헌 55 빠샤밟 1 ’旅붐里 散布地 金젊 l , r 流岩里住居址 1-4J, 1 973-1978 56 提爾 n 威岩里 II !많、州댐 *i !i 地區文化遺짧發抽調훌綠合報告 書J , 1985 57 II 훌石里 IIII 58 II 挑花里 II II 59 11 F훌 平里 IIII 60 ” 浦田里 住居쳐 t 손보究기», 1 1,r 1: 9제75천 점말동굴중칸보고J , ~鷹햄史f 퓨 61 꺼랩훌 R 上훌훌里 II 홍현선, r상 시 3 바위그늘의 문화연구 1987
62 II @뻐훌m. II r忠 써댐 7}석 혔뾰홈文{월훌훌짧抽짧훌홉合報告훌」 6666634576 후中昌1”1厭훌11 1 BS 훌휴수明~쩍흙 川O西 RJ~ 캐里 里里里 健혐”I””I地 任뼈흩, 「형창캉”””11유 역 의 무문토기품화:J, <(:밟南 考古뿔>} 1, 1 986KY O
。 口 싸뼈매효}때 노뻐 부·뼈배 부 옐배 잉 G /j~ 「l 。 ←ll’ 「l 』ll r。w a에 따 -뭘엠a뿌 샤A l바싸*쇄}V}쇼 뻐매
l 경기만과한강하류 1-1 矢島貝塚 京畿道 壅津郡 北道面 矢道里에 있는 시도패총은 1916년 鳥居龍藏기 有文土출토를 언급한 이래 17) 국립박물관과 서울대학교에서 간단한 시굴을 한 바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970년에 정식으로 개소의 즐문토기 패총 과 메소의 김해토기패총, 積石函꿈 기를 빌굴한 바 있다. 18) 패총은 1~3 지구의 세 지구로 나뉘어지는데 1 ㆍ 2지구 패총은 시도의 북단에 위치하며 江華島의 즐문토기 유적인 束船同 유적과 바다를 사이로 마주보고 있다. 적 석유구는 찌구 서쪽 언덕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구는 섬 동남쪽 바 닷가 비탈의 아래쪽에 있다. 발굴된 개소의 패총 이의에도 섬에는 개 이상의 패총이 더 분포하고 있다. l) 지구 패총 表土가 제거되어 貝穀層기 노출되어 있었는데 흙이 거의 없는 純貝穀層기 50cm 정도 쌓여 있고 그 밀에 검은색의 腐植 10cm 가량 나타났다. 부식토층 바닥에서는 60~80cm의 타원형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다. 화 덕자리는 지름 5cm 정도의 雜石을 평탄하게 깔고 그 위에서 불을 놓아 돌이 빨갛게 랐다. 이와 갇은 형태의 화덕자리가 패각층 사이에서도 나타났다.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土 片기고 石器가 약간 있을 뿐이며 뼈는 전혀 출 토되지 않았다. 유물은 부식토층 윗면에서 가장 많이 나왔으며 패각층 내에 서는 소량만 나왔다(도면 2). 토기는 굵은 모래알이 섞인 帖士質胎土로 빚었으며 雲母가 섞인 砂質系와 滑石과 石綿기 섞인 토기도 악칸 있다. 운모가 섞인 토기는 壁기 두텁고 대형인 전형적인 줄문토기이며 활석과 석면이 섞인 것은 기벽이 얇은 소형 토기였다. 形은 直立口緣 자형으로 된 丸底롤 한 것이 대부분이나 간혹 慮口緣도보인다. 토기의 크기는 50~60cm의 대형에 따키 소형
羅
도면 2 시도 제 1 지구 패총 출토유물
까지 있으며 대부분 鈴轍去으로 빚었다.
문양은 구연부와 동부에 다른 문양을 시문한 區分文라 같은 문양을 넣은 同一文의 두 종류가 있다. 구분문토기는 구연부에 단사선문 ㆍ點線列文 등을 넣고 동부에는 어골문을 주로 시문하였는데 구연부에는 斜格子文 ㆍ 瓜文도 소량 보이며 구연부와 동부 사이에 點列게 의한 前孤文이나 胡知送 넣은 것도 있다. 완전히 복원된 토기는 없으나 이들 구분문토기는 바닥에 무늬가 대부분 생략된 것으로 보이며 동부까지 문양이 생략된 것도 있다. 이러한 토기둘은 전부 직립구연으로 태토에 활석과 석면을 섞은 것도 많이 보인다.동일문토기는 구연부에서 동부 중간까지 橫走魚骨文을 시문한 토기로 횡주어골문은 線과 폭이 정연한 것도 있으나 조잡하고 상하의 선이 겹친 퇴화된 어골문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문양이 분해되어 格子文化된 것도 있다. 동일문토기는 모래가 많이 섞인 점토질태토로 빚은 것이 많다. 이의에도 문양이 전혀 시문되지 않은 無文樣土器도 약간 공반되고 있다.石器는 漁綱佳 까, 石 개, 石刀 까, 石鐵 ,. 磯石棒 가 출토되었다. 어망추는 길쭉한 자걷돌의 허리를 쪼아내어 만들었으며 석촉은 無莖의 速刺式이다. 석도는 강돌을 옆면에서 때려 떼어낸 격지로 예리한 날면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석부는 긴 타원형의 조그마한 岭刃石芹로 자갈돌의 한쪽 끝을 곱게 갈아서 둥근 날을 이루었다.2) 지구 패총지구에서 100m 떨어전 구릉의 동쪽 비탈면에 있으며 해발 7~8m이다. 30~60cm 두께의 순패각층 밀에 10~20cm 가량의 혹색부식토층이 깔려 있 다. 흑색부식토충 바딕에서는 지름 10~15cm의 막돌로 데를 두르고 그 안에 겁은 재가 쌓인 지름 60cm 가량의 화덕자리 가 발견되었다.출토된 유물은 토기뿐으로 패각충과 흑색부식토층 사이에서 주로 나타나며 흑색부식토층에서도 약간 보인다. 토기는 砂蜀治土로 석면 ㆍ 활석 등이 섞여 있고 직립구연에 환저이다. 구분문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동일문토기도 출토되는데 제 구의 주류를 이루는 변형 어골문토기는 한 접도 출토되지 않았다.
구분문토기에는 구연부에 조가비 이빨로 찍은 점열문을 넣고 동부에 四齒로 擦過한 횡주어골문을 시문한 것이 대부분이며 點列衝孤文도 점 보인다. 이곳의 점열문은 접 속에 조개의 이빨자국이 나 있어 다른 유적에서는 보이지 않는 특칭을 갖고 있다. 지구의 구분문토기는 바닥이 발견되지 않아 바닥의 시문 여부는 알 수 없다.동일문토기는 길고 굵은 刻線으로 구연부터 동부까지 횡주어골문을 시문하였으며 환저인 底部에는 무질서한 擦過文울 시문하였다.3) 3지구 패총잘게 부스러진 조가비로 이루어진 30cm 두께의 混土貝穀層과 30cm 두께의 순패각충, 60cm 두께의 黑色帖丑 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층에서는 김해식토기편이 출토되고 줄문토기는 순패각층과 흑색점토충의 윗부분에서 출토된다.줄문토기는 양이 적으며 구분문토기의 開部片만 보일 뿐으로 2 구와 갇은 성격의 패총으로 보인다. 토기 이의에는 帖板岩製의 逆刺式 石鐵 伊과 자그마한 刃石1 접이 출토되었을 뿐이다.순패각총의 아래에서 나온 숯울 연대로 측정한 결과 3040 59B.P의 연대가 나왔으나 실제 유적의 연대보다는 다소 늦게 나온 것 갇다.4) 積石遺構섭 최북단의 구릉 위에 위치하고 있다. 生土 위에 내부에는 10~15cm 크기의 割石울, 둘레에는 25cm 크기의 큰돌을 20cm 높이로 쌓아올려 동서165cm, 남북 145cm의 터원형 積石울 만들었는데 적석의 중앙부는 약간 함몰되었고 적석 사이에는 검은색의 부식토와 숯이 많이 차 있었다. 한편 적석 밀에서는 150X 120cm 타원형 구덩이가 30cm 깊이 가량 패여 있었으며 구덩이 밖의 생토충과 주위의 돌 사이에는 숯이 많이 나타났으며 구덩이 바닥에도 많은 숯과 유기물질이 포함된 검은 흙이 깔려 있었다. 출토유물이 찍힌 歸 片 가 적석 사이에서 출토되었을 뿐이다.
5) 연대지구 패총은 변형된 횡주어골문토기가 주류를 이루면서 구분문토기도 출토되고 있다. 양자가 동시기에 갇이 공반된 것인지 충위가 교란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변형 횡주어골문토기의 존재는 이 유적이 신석기시대 후기에 속함을 보여준다. 반면 2 구는 변형 어공문토기는 없고 저부 문양 생략된 구분문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토기는 岩寺洞 下尼에서도 출토되고 있는데 지구에서는 암사동의 全面施文의 구분문토기가 없고 狀器거의 없기 때문에 암사동· 하층이 존속한 시기 중에서도 늦은 시기 , 죽 신석기시대 중기 후엽에 속할 것으로 보인다.적석유구도 출토유물이 거의 없어 연대추정에 어려움이 있으나 C 연대가 2870 6oB. P., 3040 60B.P로 나와 후기, 죽 지구 패총과 갇은 시기로 추정된다.1-2 草芝里 別望貝 君子面 草芝 里의 해발 48m 야산의 南斜面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이 일대는 바닷가였으나 간척사업에 의해 발굴 당시에는 논과 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유척은 1978년 서울대학교에 의해 발굴되었으나 패총의 분포면적에 비해 국히 제한된 면적만 조사되었다. 19)유적의 층위는 表土下에 흑갈색 패각층이 있고 그 밀에 적갈색 또는 황갈 색 패각층이 지역에 따라 달리 되적되어 있었다. 적갈색 패각충 아래에서는 잡석이 섞인 찰전 진흙층이, 황갈색 패각층 아래에서는 화덕자리와 모래충이 깔려 있었다. 즐문토기는 적갈색 진흙충과 화덕자리 주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고 패각층에서는 줄문토기와 김해식 토기가 공반되고 있다. 따라서 이 유적은 출문토기인의 야의 주거유적이 당시 지표면 위에 형성되고 그후 원삼국시대의 김해패총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패각층의 줄문토기는옆의 구릉비탈에서 흘러 내려왔거나 원삼국시대 이후에 교란된 것들로 보인다.
화덕자리는 砂質生土를 60cm 정도 파서 만든 것으로 지름 160cm 주위까지 재가 넓게 깔려 있고 개체분의 토기조각이 散布되어 있다. 화덕자리 안에는 목탄과 재가 상당한 두께로 덮여 있으며 내부 주위에는 잡석을 돌려 놓았다. 그러나 주거로 보이는 시설은 발견되지 않았다.토기들은 몇 편의 섞인 砂質土器片을 제의하고는 모두 접토질태토에 사립을 섞었다. 器形은 직립구연에 尖底 환저의 저부를 가진 반란형으로 口律 20~ 30cm 크기를 갖고 있다. 토기는 手座去 ㆍ 輪積法 ㆍ 組줄 모두
藝;
이용해 빚었으며 토기 걷면과 구연부 안쪽에는 나무결이나 조가비를 이용해 문지른 炤良이 많이 나타난다(도면 3).
1) 패각충 출토유물신석기시대에 해당되는 유물은 토기뿐이다. 토기는 구연부 ㆍ 동부 구분없이 갇은 문양을 넣은 동일문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동일문의 종류는 單齒 깊게 새겨 나간 횡주어골문과 다치구로 아래 위가 겹치게 그어 나간 횡주어골문, 횡주어골문이 해체된 사형 무늬가 있으며 구연부에만 시문하거나 동부 중간까지 시문하였다. 이의에 구연부에 단사선문 ㆍ 短斜 約 이 눌러진 구분문토기도 출토되었다.2) 바닥충 출토유물석기 꺽 이의에는 모두 토기이다. 역시 동일문토기가 주류를 이루나 구분문토기도 패각층에 비해서는 다양하게 출토되고 있다. 동일문 중 정연한 횡주어골문은 보이지 않고 다치구에 의한 조잡한 횡주어골문이 많고 線기 짧고 문양폭이 넓은 횡주어골문, 三齒共게 의한 平行短斜線文도 보인다. 문양은 동부 중간까지나 동부 아래까지 시문하였다. 구분문계는 구연부에 단사점선문을 열 배치하고 동부에 각이 좁은 형 문양을 좌우로 겹치게 그은 뒤 그 안에 두 줄의 평행단사선을 새기고 밀은 문양을 생략한 토기, 구연부에 접열문을 12 열 시문하고 동부에 횡주어골문울 시문한 토기, 구연부에만 단사점선문 ㆍ 단사선문 ㆍ 조문 등을 시문한 토기 등이 있다. 또한 전면에 문양이 생략된 토기도 몇 편 출토되었다.석기는 磨製石芹와 숫돌 각 접씩으로 석부는 전면을 마연한 합인석부인데 단면이 檜圓形울 이루고 있으며 刃部가 크게 外 하고 있다.3) 연대패각층에서는 횡주어골문을 구연부 또는 동부 중간까지 시문한 동일문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바닥층에서도 동부 중간이나 동부 아래까지 횡주어공문을 시문한 동일문토기가 보이나 패각층과는 달리 다치구에 의한 시문이 많이 보이며 평행단사선문에 의한 동일문토기도 있다. 또한 구분문토기도 패각총에 비해 다양하며 기본적으로는 短斜線文系가 주류를 이룬다. 따라서 바닥충토기가 패각충보다는 디소 이른 양상을 보이나 공통된 문양이 많고 저부나 동부의 문양이 생략된 점에서 양자의 시간적 차이는 거의 없는 늦은 시기의 유적으로 보인다.
1-3 里遺蹟국립중앙박물관에서 支石墓 발굴시에 주위에 트렌치를 넣으면서 발견된 유적이다.20) 표토 아래 40~50cm 두께의 黑色 있고 혹색토충의 서쪽에서 크고 작은 石魂들이 깔려 있었는데 교란이 심하고 발굴면적이 제한되었으며 보고서에 유구의 도면도 없어 전체적인 성격파악이 곤란하다. 그러나 대체로 內坪기나 源組駒 서 발견된 敷石住居址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토기는 적석 사이에서 나타나며 작은 모래알이 섞인 점토질계 태토로 빚었다• 구연은 垂直에 가까우나 약간 의반되는 듯한 경향을 보이는 것이 많다. 완형은 없으나 저부는 환부로 추정된다. 문양은 구연부터 단치구로 깊게 횡주어골문을 그어 나갔다.1-4 기타유적경기만 일대의 해안가와 섭에는 패총을 위주로 한 많은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으나 대부분 지표채집 및 간단한 시굴만 한 유적들로 정식발굴한 유적은 앞의 시도패총과, 오이도패총, 별망패총뿐이다.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대부분 줄문토기이고 骨角 및 石 는 거의 출토되지 않는다. 패총은 낮은 구릉 중턱의 동쪽이나 남쪽 비탈에 지리하는 경우가 많아 바람을 피하고 따뜻한 햇빛을 받을 수 있는 양달을 골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패총의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대부분 단기간에 퇴적되어전 것 같다. 출토된 토기둘은 구연부터 횡주어공문을 시문한 동일문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일부 공반되는 구분문토기도 저부나 동부의 문양이 생략된 것이 많아 대부분 신석기시대 후기에서 말기에 걸쳐 형성된 유적으로 보인다.
白翔島게서는 鎭村라 말등 두 곳에서 패총이 발견되었는데 21) 전자에서는 횡주어골문의 동일문토기가 후자에서는 횡주어공문과 병행단사선문의 동일문토기와 무문양토기, 礎石製 긁개, 打製 製石 , 磯石棒 등이 채집되었다. 말등패총은 두께가 150cm에 이르는 대형 패총으로 조사결과에 따라서는 집터가 발견될 가능성도 높다. 또한 말등에서는 환저 점도 발견되었는데 그중 하나에는 羽狀文이 시문되어 있다. 두 유적의 토기 모두 굵은 모래알이 섞인 접토질태토로 빚었다.詞島 서해도서 신석기시대 유적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유적으로 16개소에서 패총이 발견되었으나22) 이미 파괴된 유적까지 합하면 더욱 많았을 것이댜 출토유물은 대부분 토기인데 접토질태토로 빚고 횡주어공문이나 병행단사선문으로 동부까지 시문한 동일문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지구에서는 滑石을 섞은 집선문과 정열문이 결합된 토기가 나와 金灘期와 같은 양상을 보이고 시구에서는 활석이 섞인 파상점선문· 단사선 문이 시문된 토기가 나와 다른 지역보다는 시기가 울라갈 것 같다. 토기 이 의로는 珪岩製의 구석기전통을 지닌 긁개와 찍개, 어망추, 敵石 등이 출토되었다(도면 4).江華島는 앞의 삼거리유적 이의에도 道場里23) 沙器里24) 束顧同25) 등에서도 신석기유적이 발견되었다. 동막동유적은 바닷가 砂丘게 위치한 포함충 유적으로 토기는 모래 섞인 점토로 빚었으며 대부분 구연부터 동부까지 횡주어골문기나 병행단사선문을 시문하였으며 무문양토기도 보인다. 저부는 환저째이 채집되었는데 꺽授은 無文이고 접에는 放斜狀文이 시문되어 있다(도면 ). 牛島게서도26) 토기 11~ 이 채집되었는데 모래 섞인 접토로 빚었으며 석면과 활석이 섞인 것은 태뿐이다. 문양은 모두 동일문계로, 다치구로 거꽃뤘옳꿇[ 쪼8 닙j눈까 :-펼곽;」센 /l f?l?i ,7,‘I ‘i‘ j!-l l,r ‘‘ .’-’ -‘•- ‘. ‘--- - ,,.,.••.. --- --- -I--- j-j -’
1‘ ’l 펄빨、깐꾀칸찢… 짜‘.‘쌀 ~처:~、~.;~談:~%ι?? ‘렐웰짤짧‘도면 4 연평도 왜총 출토 씌기, 토기
o4em
도연 5 우도및 강화도출토토기
칠게 시문한 횡주어골문이 많고 병행단사선문도 나타난다. 이의에 外反口緣土 와 二重口緣의 平底深鉢形土器게서 각기 長粒形 볍씨와 병씨자국이 발견되어 주목을 끌지만 기형상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일 가능성도 있어 좀더 검토되어야 할 것. 같다(도면 ,). 석기로는 규암제의 망치 • 도끼 • 찍개 • 밀개 • 돌날, 마제석부와 숫돌 등도 발견되었다.
大阜島와 靈興島 • 仙才島의 패총들에서는27) 접토에 석영 • 장석 등을· 섞은 태토로 빚은 동일문토기가 많으며 영홍도 소칭골 패총에서는 조문과 단사선문이 가득 넣어전 환저가, 선재도 버드러지 패총에서는 활석이 섞인 組帶文토기편도출토되었다.28) • 蘇島28) • 堀業島28) • 長峰島29) • 永宗島30) • 昇鳳島31)의 패총들도 위의 유적들과 갇이 동일문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소야도에서는 구연부와 동부에 어골문을 시문한 토기가 출토된 패총에서 3860 42B.P의 c1 연대가 나왔으며 소야도 〈사〉패총에서는 구연부에 단사점선문·조문이 보이고 환저에 상하로 엇갈려 사 무늬를 만들고 그 안에 선을 엇갈려 채워 넣 은 것도 보인다.
또한 耳島 패총에서 조대문 • 橫線文 • 단사선문과 함께 어공문을 구연부와 동부에 시문한 토기가 출토되는데 32) 4080 45 B. 의 c1 연대도 측정되었다.33)2 한강중·하류2-1 암사동서울특별시 江如區 岩寺 위치한 이 유적은 漢江 南岸의 沖積砂質層에 형성되어 있다. 강변에 평행하게 동서방향으로. 좁고 긴 苗卽卜 둑의 형태를 이루고 있고 이 대지 위와, 강과 내지 쪽으로 난 양쪽 경사면에 유적이 있다.I) 발굴경과암사동유적은 1925년의 乙形 犬拍 때 유적이 파괴 • 노출되어 다량의 토기와 석기가 노출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藤田亮策 가貴山將三郞 등이 유적을 답사하여 많은 유물을 채집하였다. 橫 의하면 〈채집 된 석기 • 토기 등은 몇 번에 걸쳐 자동차로 운반할 만큼 업청난 양의 유물이 채집되었다. 34) 이들 유물에 대한 본격적인 정리와 고찰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 초 有光敎-과 金冠龍 • 金廷鶴 등에 의해서이다. 이후 196 에 고려대 • 숭전대 • 경희대 • 전남대의 합동발굴을 시작으로 하여, 196 는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1971~ 1975년까지는 국립중앙박물관, 1983년에는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가장 대규모로 발굴을 한대학합동발굴단과 국립중앙박물관의 발굴결과가 아직 보고서로 발표되지 않아 유적의 정확한 성격을 알 수 없는 접은 유적의 중요성에 비추어 불행한 일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암사동유적에 관해 지금까지 발표된 글을 연대순으로 소개하기로 하겠다.
有光敎一은 조선총독부박물관과 동경대학인류학교실에 수장되어 있는 암사동유적 출토 토기와 梅原孝古資料게 있는 사전을 자료로 하여 암사동유적 출토 즐문토기에 대한 고창을 최초로 시도하였다. 35)토기의 기형은 口脣이 .. 平坦하고 높이에 비해 口程이 크며 첨저 • 환저로 끝난 도토리모양의 토기이다. 기벽의 두께는 토기 크기에 비례하고 일반적으로 무늬가 정교한 것은 기벽이 얇다• 제작은 輪積 • 卷上으로 빚고 태토는 운모가 많이 섞여 있다. 무늬는 구연부 • 동부 • 저부가 다른 것이 많다. 구연부 문양은 단사선문 위주에 그 亞形긴 단사접선문 • 조문이 있고 기타 점열문 • 사격자문 • 어골문도 소수 보인다. 접열문이 시문된 토기는 소형의 良質土器가 많다. 동부에서는 縱走魚骨文 위주에 횡주어골문 • 縱列斜線文 • 조대문이 나타나며 구연부와 동부 사이에 斜格子 • 銀齒 세 菱形 • 重孤文이 삽입된 것도 있다. 저부에는 어골문 • 종열사선문이 보인다.金元龍은 해방 이전에 수집된 橫山 collection 위주로 한 국립박물관 소장품과, 서울대박물관 소장의 토기파편을 위주로 암사동문화에 대한 고찰올 시도하였다. 36) 토기의 胎土 • 器形 • 製俗去 • 文樣 등을 고찰하여 다음과 갇은 결론을 끌어내었다. 토기는 器腹文으로 구성되는 전형적인 서해안 형식이며 어골문은 종주어골문이 특색이다. 접선으로 된 同心 子文은 夢古지방 토기와 관련이 있다. 어골문이 대형화하거나 변화된 것은 후기양식으로 시간적으로 무문토기와 병행한다. 礎石器보다 半月形石刀롤 포함한 마제 석기가 많다. 따라서 암사동유적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걸친 장기 유적으로 후기 만기는 무문토기시대와 겹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후의 논문에서 위의 결론은 줄문토기와 청동기시대 출토품을 동일문화층으로 착각한 데서 일부 오류가 있었다고 하고 있다.金廷鶴은 196~ 터 1964년까지 요에 걸쳐 지표조사를 하고 회에 한해 시굴을 하였다. 3” 이때 수집한 줄문토기는 책 여 점에 달하는데 태토는 사질토이고 운모 • 石綿 • 滑石을 섞었다. 기형은 첨저의 반란형이 압도적이고 환저나 株角平底도 소수 보인다. 문양은 구연부에서 저부까지 陰麥 • 押捨한 것이 일반적이며 극소수의 토기에 문양이 상부게만 시문되어 있다. 문양은 구연부와 동부로 구분한 것이 절대다수로 구연부에는 처음과 끝에 힘을 주어 당긴 단사선문이 74.6%나 차지하고 있으며 冷羽} • 魚骨 • 梅齒文 •尖東 文 등도 나타난다. 동부에는 어공문이 83 .4%나 차지하고 기타 사격자문, 종열사선문, 중호문 등이 약간 보인다. 저부는 동부의 어골문이 계속 하여 저부에까지 이른 것이 대부분이고 이의에 종열사선문 • 무문양 등이 약간 있다. 석기로는 낙석제의 刃部 昭孫섬 석촉, 타제긁개, 어밍추, 연석이 공반되었다.
1967~ 1968년 대학연합발굴단에 의한 조사는 암사동유적에 대한 최초의 정식발굴이나 발굴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서울대학교 역사교육학과에서 조사한 내용만이 알려져 있다. 38) 이에 따르면 130m2 범위에서 기의 圓形 甄住居址룰 받굴하였으며 줄문토기와 타제석부, 망치돌 • 합인석부, 潟 및 無莖의 三角形磨製石鐵도 다수 출토되었다. 줄문토기는 구연부와 동 부가 나뉘어 시문된 것이 대부분으로 구연부에는 4~6열의 단사선문이 腹部에는 어골문을 시문한 것이 많으나 全面게 사격문, 炫려 평행사선문을 시 문한것도있다•1971년에서 1975년까지 伊텨 걸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한 대규모 발굴이 이루어졌다. 정식보고서는 아직 발간되지 않았고 발굴결과에 대한 略報告간 일부 있을 뿐이다. 39) 75년도 발굴에서는 表 11 서 生土까지 개의 층위가 확인되었다. 층은 경작토로 즐문토기편과 백제토기편이 채집되었고 2 충은 혹색 사질층으로 壅稽, 건물지가 나오는 백제문화층이다. 은· 흑회색 사질총으로 즐문토기와 무문토기가 같이 공반되는 신석기시대 후기층으로 즐문토기는 전형적인 구분문과 거칠고 굵은 太線게 의한 어골문을 전면에 시문한 동일문토기로 나뉜다. 은· 非文化層가고 영은 명갈색 사질층으로 전형적인 줄문토기만 출토되는 층이며 원형 • 밀각방형의 수혈주거지떠 기가발견되었다.
이러한 조사결과에 의해 암사동유적의 중요성이 밝혀짐에 따라 암사동유적을 先距할 龍프 조성하고 野外展示館建立 계획이 세워지게 되었으며 서울대박물관에 의해 1983 • 1984년 차에 걸쳐 공원조성을 위한 재발굴이 이루어졌다.40)1983년도 발굴은 야의전시관 건립에 따른 파손지역에 대한 긴급발굴조사였다. 발굴에서는 1975년 국립박물관이 발굴했던 지역 일부를- 노출시키고 대형 적석유구. 47 와 화덕자리 기, 수혈 기를 발견하였다. 수혈은 지름 3.4m, 깊이 l. 74~기 원형과 지름 0.8~ 1. 5m, 깊이 0.82 血키 타원형으로 저장구덩이로 추정되었다. 적석유구는· 길이 10~20cm의 割石 • 川石을 단 정도 쌓아 만든 지름 1~3m의 원형 또는 터원형 유구이다. 돌둘은 열을 받은 흔적이 있고 돌 밀에는 불먹은 흙, 숯, 부식토가, 돌 사이에서는 토기편들이 있었으며 주위에는 기둥구멍이 없어 보고자는 무덤보다 대형야의노지 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출토된 토기들은 90% 이상이 구연부에 단 사선문, 동부개 어골문을 시문한 포탄형토기이다.1984년에는 야의에 선사취락을 복원하기 위하여 국립박물관이 1974년에 조사했던 주거지 기와, 1972년에 조사했던 주거지 기를 노출시켜 보고서를 간행하였다. 실제 발굴기관과 보고서 간행기관이 다른 문제접은 있으나 정식보고서가 간행되지 않은 암사동유적의 주거지 현황을 알 수 있게 되었다.2) 충위암사동 유적은 표토층과 생토충을 제의하면 개의 문화층이 있다• 제 문화층은 황색 사질 생토층 위에 형성된 문희층으로 명갈색 또는 적갈색의 사질층이다. 이 층에서 전형적인 서해안식 줄문토기와 주거지, 적석유구들이 발견되었다.문화층은 문화충과 비문화층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혹회색 사질층으로 곳에 따라 없는 곳도 있다. 이 충은 발굴자에 따라 견해가 달라지는데 전면에 태선에 의한 어골문을 시문한 토기와 무문양토기가 출토되는 신석기후기충으로 보는 견해, 41) 무문토기 • 석부 • 청동촉 등이 출토되는 청동기시대충으로 보는 견해와42) 양 시기의 토기들이 공반되는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청동기시대에 걷치는 문화층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43) 위 견해를 합치면 제 문화충에서는 후기 줄문토기와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모두 나오는 것은 확실하나 양자가 처음부터 공존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문화충 내에서도 시기적 선후관계가 있고 일부 말기에 공존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 갇다.
제 화충은 표토 아래 형성된 혹갈색 부식토층으로 백제문화층이다. 서는 문화충의 문화내용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관계로 문화충의 유구와 출토유물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3) 주거지국립박물관에서 조사시 아래(제 1) 문화충에서만 25 기가 발견되었다(도면 6).1971 년에는 주거지 기가 발견되었는데 말각방형과 원형의 두 종류가 서로 중복되어 나타나나 양유형의 선후관계는 모호하다. 말각방형은 가장자리에 어의 기동구멍이 있고 지름 5~6m의 크기이며 원형은 기둥구멍이 없고 지름 3 소형이다. 71-1호 주거지는 크기 5.3mX 5.2m, 깊이 0.36m의 말각방형으로. 네 모서리와 중앙에 각 개씩 모두 개의 기등구멍이 발견되었다. 화덕자리는 주거지 중앙에 있으나 대부분· 步되었다.71-2호 주거지는 크기 6.4mx 5.5 말각방형이나 대부분의 어깨선이 파괴되고 주거시설도 확인되지 않았다.71-3호 주거지와 호 • 4'호 주거지는 기가 서로 겹쳐 발견되었다. 4'호 주거지는 제일 아래에 있으며 크기 3.9mX3.lm, 깊이 0.7 키 말각방형 주거지이다. 중앙에는 자갈을 돌려놓은 둥근 화덕자리가 있다. 셨: 주거지는 앞의 주거지보다 10cm 위에서 발견되었는데 크기 6.3mX 5.9m, 깊이 0.86m의 말각방형이다. 중앙의 할석을 돌린 0.77mX0.85m 크기의 화덕자리가 있고 모서리에 데씩의 기등구멍이 있다. 호 주거지는 선겨 서남부에 겹쳐 일부분만이 님아 있을 뿐이다.
T
도연 6 암사통주거지
71-5호는 크기 7.9mx6.6m, 깊이 0.87m인 長方形笠穴로 양쪽 短壁 중앙에데씩의 돌출부가 나 있는데 面轍頭t의 경우는 단의 계단형태를 하고 있어 출입구로 볼 수 있으며, 기둥구멍은 네 모서리에 있다. 71-5호는 71-''호에 의해 내부가 파괴되었는데 5'호는 지름 4.9m, 깊이 0.52m인 원형 수
혈로 기둥구멍은 없다. 화덕자리는 자갈과 할석을 이용하여 수혈 가운데에 둥글게 만들어져 있다.
71-4호는 지름 3. m, 깊이 0.3~긱 원형으로 동북쪽으로는 수혈벽을 파고 들어간 원형 구덩이가 겹쳐 있으며 기둥구평은 없다.1974년도에는 지름 5~6 기 말각방형과 원형 주거지 기가 발견되었는데 기는 화재에 의해 폐기되었다.74 호는 호 주거지에 의하여 북쪽 부분이 유실되었다. 크기 S.9mX4.7m, 깊이 71~긱 말각방형으로. 중앙에는 냇둘로 만든 O.56mXO 71m의장방형 화덕자리가 있고 모서리에는 기둥구멍이 씩 있다. 74 호는 호를 22cm 가량 더 파고들어가 만든 크기 .4 mX4. 키 말각방형으로 중앙에는 냇돌제 장방형 화덕자리, 모서리에는 기둥구멍이 나타난다.74-2호는 지름 5m, 깊이 .4 2m의 원형에 가까운 주거지로 중앙에는 자갈과 할석을 섞어 만든 장방형의 화덕자리가 있다. 기등구멍은 네 모서리에서 나타나며 남쪽에 출입구가 만들어져 있다. 동벽 쪽에는 바닥보다 20cm 높은 돌출구가 단을 이루며 편평하게 나타나는데 선반과 갇은 저장시설인 것 같다•74-3호는 크기 .9mX5.6m, 깊이 o.76 말각방형 주거지로 方形의 화덕자리와 기둥구멍이 있으며 출입구는 님쪽 모서리에 치우쳐 밖으로 돌출되어 있다.74-4호는 크기 5mx4:85m 말각방형으로 동남벽 중앙에 출입구로 보이는 돌출부가 나 있다. 기등구멍은 모두 10개로 네 모서리에 밀집돼 있다. 1975년에는 모두 11 기의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11호는 호 안에, 8 • 6 • 4 • 호는 중복되어 나타났는데 선후관계는 호가 가장 빠르고 호一셨 호의 순이다.75-1호는 크기 4.4mx5.2m, 깊이 1 말각장방형으로 가운데에는 냇돌로 두른 70cmX cm 크기의 장방형 화덕자리가 있고 네 모서리에는 기등구멍이 한 개씩 발견되었다. 주거지에서 출토된 토기의 구연부에는 단사선문과 조문이 가장 많고 거치문 • 점열문 • 중호문 • 어골문이 약간 보인다. 75-2호는 크기 4.2mX4.5m, 깊이 62~67cm의 말각방형으로 바닥 중앙에는 냇돌로 테를 두른 50cmx66cm 정도의 화덕자리가 있고 화덕자리 납쪽에는 토기 바닥을 잘라서 거꾸로 박아 놓은 토기가 발견되었다. 벽면에서는 통나무를 얽어서 돌려 놓은 것이 木炭으로 출토되었다. 토기의 구연부 문양은 호와 비슷하고 5,000 70 B.P의 C1 연대가 측정되었다.
75-4호는 2 • 6 • 호와 겹쳐 전체규모는 파악할 수 없다. 바닥 중앙에는 66cmx 56cm 크기의 터원형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다. 토기의 구연부 문양에 는 단서선문·조문· 점열문· 어골문· 선문·무문이 있고 단사선문 밑에 파상점선문 • 거치문이 시문된 것도 있다. 또한 동부에는 어골문과 菱形文 • 선문 • 새끼문이, 저부에는 단사선문 • 횡주어골문 • 格糸紀이 시문되었다. 돌보습도 토기와 함께 출토되었으며 c1 연대는 4730 200B.P:이다.75-5호는 크기 5mx4.2m, 깊이 64~81cm의 말각방형 주거지로 중앙에 있는 돌로 데를 둘러 만든 지름 35cm의 화덕자리 밑에서 각 75-11호의 화덕자리가 겹쳐진 채 발견되었다. 출토된 토기의 구연부에는 점열문은 보이지 않고 단사선문과 조문이 주류를- 이루면서 어골문과 무문도 나타난다. 또 한 沈伏文이 시문된 外反 尉누, 有頭土器, 橫線文으로 토기 전면을 시문한 토기도 있다. c1 연대는 4610 200B.P 가 측정되었다.75-10호 거주지는 크기 4.2X3.9m, 깊이 48~67cm의 원형 수혈로 역시 바닥 중앙에는 강돌로 데를 두른 50X 54cm 규모의 원형 화덕자리가 있다. 출토된 토기의 구연부에는 단사선문이 주로 시문되어 있고 점열문 • 조문 • 선문 • 거치문도 있다. 또한 점열문을 구연부에 열 시문하고 그 밑에는 파상정열문을 시문한 平底小磁 점도 출토되었다.이 밖에 1968 서울대 역사교육과에 의해 주거지 기가 조사되었는데 1기는 방형에 가까운 不定卿距 바닥면 지름은 5~6m, 깊이는 90cm이고 내부에 냇돌로 세운 방형 這地가 있다. 다른 기는 5mX 3.5m의 檜圓距프로 깊이는 50cm 정도이다. 노지는 장방형으로 50cmX46cm의 크기이며 片磨岩片냇돌로만들었다.4) 토기
器形과 成形 태토는 운모가 섞인 사질토가 대부분이나 기벽이 얇고 정선된 태토의 토기에는 石糸유 • 滑石이 섞인 것이 많다. 이의에 角閃石 • 輝石 등도 나타난다.44)토기는 輪舒紅에 의해 주로 빚어졌으며 대부분 적갈색을 띠나 구울 때 불이 고루 미치지 못하여 회색이나 혹회색도 부분적으로 나타난다.기형은 직립구연과 첨저의 반란형 또는 范罪形기 기본으로 圓底 및 말각평저도 있으나 후자는 대부분 小孩范 다. 반란형의 尖底土器는 口怪과 高가 거의 비슷하며 높이가 20~40cm가 많은데 60cm가 넘는 대형도 보인다. 75-호 주거지에서는 무문의 有甄土器와 의반구연부에 붉게 마연하거나 꼬불문을 시문한 토기도 출토되었다. 5)文樣 구연부 • 동부 • 저부의 세 부위에 각기 다른 문양을 시문한 소위 分文系 全施文形이 주류를 이루나 동부 문양이 전면에 시문된 동일문계도 있고 소형 평저토기에는 문양이 전면 생략되거나 사격자문이 거칠게 시문되어진 것도 있다. 구분문계는 일반적으로 구연부에 3~7열의 단사선문을, 동부에 종주거골문, 저부에 횡주어골문, 방사상문을 시문한다• 무늬를 시문 부위에 따라 보면 구연부에는 단사선문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기타 조문, 점열문, 사격자문, 횡선문 등이 보인다. 동부에는 종주어골문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 횡주어골문, 이어서 격자문 • 능형문 • 찰과문 등이 보인다. 구연부와 동부 사이에 파상접선문 • 중호문 • 격자문 • 거치문 • 능형문이 첨가된 토기도 있다. 저부에는 횡주어공문 위주에 격자문 • 단사선문 • 찰과문이 시문된다. 또한 구분문계 토기에는 저부나 저부 하부의 문양이 생략된 것이 있다. 한편 동일문계는 어공문이 시문된 것으로 보이나 완형이 없어 확실한 무늬배치는알수없다.5) 석기석기는 자갈돌의 둥근 면을 옆에서 때려내어 만든 격지에 간단한 이차가공을 하여 날을 만든 긁개와 찍개 • 도끼 등의 타재석기가 주류를 이루며 납작한 터원형 자갈돌의 양끝을 쪼아내어 만든 어망추도 상당량 줄토되고 다. 마제석기로는 石芹 • 石鐵 • 石 • 石 • 石謙 • 敵石 • 石 등이 나타나는데 석기은 三角形逆刺式이나 長三角形이고 석사나 연석의 뒷면을 發大石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석부는 刃部만 마연한 것과 전면을 모두 마연한 것이 있다.
6) 연대암사동 신석기유적은 전형적인 구분문계 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아래문화충과 동일문계 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위문화충으로- 나뉘어진다. 아래문화충은 西韓 즐문토기 문화 중 빠른 시기의 것으로 대동강유역의 智塔里 • 弓山遺蹟과 비슷한 시기의 유적으로 보인다. 유적의 C"연대는 〈표 〉와 같은데 가장 빠른 6230 • 6050B.P와 가장 늦은 3430 B. 를 제의하면 대체로 4600 ~5500B.P. 사이이고 樹輪補正하면 B.C. 4500~B.C. 3500년 사이가 된다. 위층문화는 반출유물이 거의 보고되어 있지 않고 C"연대도 없으나 동일문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서해안의 다른 유적들의 연대를 참조하면 대체로 신석기 후기인 기원전 천 년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며 하한은 천 년기 전반까지 내려올 가능성도 있다.
Cl ‘연대 樹*슬補正年代( Ralph) 출토위치
2-2 漠沙里
암사동유적에서 약 6km 상류의 한강 南岸의 넓은 沖積 砂質 台地 속에 있다. 미사리는 현재 물길의 변화에 따라 한강 本流와 支荒게 의해 에워싸인섬으로 되어 있고 유적은 섬의 서남단에 형성되어 있다. 강의 沒融라 土砂채취작업 그리고 미사리 조정경기장 건설 등으로 유적이 많이 파괴되었다.유적은 1961 년에 처음으로 보고된 이후46) 60년대에 몇 차례의 지표조사와 그에 따른 지표조사 내용이 발표되었으며 47) 1980년 겨울에 서울대 • 숭실대 • 한양대 • 고려대 등의 대학합동발굴단에 의해 최초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48) 그러나 이때의 발굴도 정식발굴이 아닌 긴급발굴조사이고 보고서도 정식으로 간행되지는 않았다.* 미사리유적은 1988~ 199 견에 걸쳐 숭실대학교를 주관으로 하여 경희대 • 고려대 • 서울대 • 성균관대 • 한양대가 합동으로 대규모 발굴이 이무어졌다. 보고서는 아직 미발간이다.
1) 충위
1980년에 실시된 서울대 발굴 충위에 의하면 미사리유적은 생토층 위에 개의 충위가 형성되어 있다• 1 • 층은 황갈색 사층으로. 교란된 층이며 원 삼국시대에서 근세까지 이르는 충이다. 영은 명갈색 사충으로 비문화층이며 없는 곳도 있다. 꿈은 두께 20~40c 혹갈색 부식토층으로. 무문토기와 줄문토기가 같이 나온다. 쟁은 명갈색 사층의 간충이며 영은· 약 30cm 두께의 혹갈색 사층으로 전형적인 구분문계 중문토기가 출토된다.2) 위문화충서울대 발굴에서는 굵은 砂粒기 섞인 접토질태토로 빚은 적갈색무문토기가 10 여 편 나왔으며 어곱문을 구연부와 동부에 시문한 첨저의 반란형토기도 떠 편 출토되었다. 즐문토기의 태토는 무문토기와 걷이 접토질로 굵은 사립을 섞었다. 석기는 타제석부와 석축이 있다. 갈은 층위의 고려대학교 pit에서는 즐문토기는 보이지 않고 孔列文 器가 출토되는 方形住居址가 발견되었다.49)
한편 1966년의 서울대 지표조사에서 채집된 滿文과 50)는 운모가· 섞인 사질태토로 빚은 것인데 시기상 하문화충에 속하였을 가능성이 있다.3) 아래문화충1980년 서울대 발굴 pit에서 나타난 지표차 140~170cm의 연 l 여기에 속하며 줄문토기 400여 편과 타제석부 • 고석 • 연석 지름 5m의 타원형 수혈이 이때에 발견되었다. 토기는 첨저와 직립구연의 반란형토기가 위주이나 圓底도 있고 말각방형의 磁도 나타난다. 운모가 섞인 사질태토로 輪積이나 卷 의해 빚었으며 활석이나 섬면을 섞은 것도 있다. 구연부에는 단서선문, 동부에는 어공문을 시문한 구분문계 전면시문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구연부에 시문된 단사선문은 단이 가장 많고 3~5단, 2 • 단 순이다. 단사선문 의에도 조문 • 접열문 • 어골문이 구연부에 시문된다. 동부에는 종주와 횡주어골문이 압도적이고 사격문도 나타나며 구연부와 동부 사이에는 의한 連孤文 • 중호문이 삽입된 것도 있다. 저부에는 어공문과
醫繼」짧
도면 7 미사리유적 출토 토기
시선문이 보인다.
석기는 자컬돌을 옆에서 타격을 가하여 만든 얇은 박편의 양면에 이차가공으로 날을 만든 긁개와 도끼가 성행하는데, 특히 인부에 큼직한 타격을 가하여 예리한 날을 세운 것이 미사리 석기의 특징이다. 51) 이의에 어망추 • 연석 • 고석과 編綱具도 채집되었다. 편망구는 앞이 뾰족한 尖頭封距프로 한 쪽 끝에 구멍이 있고 좌우 양쪽에 刻綠을 넣어 끈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았다. 52)4) 연대미사리유적의 신석기시대 위 • 아래 문화충은 암사동유적의 위 • 아래 문화층과 토기의 기형 • 문양 • 태토에서 공통접이 많아 거의 같은 시기의 문화충으로 생각된다. 아래문화충의 C"연대도 5100 140B.P로 측정되어 암사동유적과 비슷하다. 53) 위문화충은 동일문식 줄문토기와 무문토기가 공반되어 신석기 후기에서 청동기시대 초기에 걸쳐 형성된 문화층으로 보인다.2-3 기타유적 同 유적은 1960년대에 서울대학교와 미국인 Chase에 의해 처음 지표조사되었으며 1970년대 초 Sarah Nelson 이 지역을 답사하고 간단한 시굴을 한 바 있다. 54) 채집된 토기는 모두 파편이며 대부분· 운모가 섞인 사질태토이고 골석을 섞은 것도 나타난다. 구연부에는 단사선문 • 조문이, 동부에는 어골문이 나타나 구분문토기로 보인다. 석기는 역석제 타제석부와 긁개, 어망추가출토되었다. 암사동·미사리의 하문화층과감은시기의 유 다.나머지 유적들도 지표채집에 의해 알려지거나 유물포함충만 발견된 유적둘로 楊州 鎭中里에서는 전형적 구분문식토기와 魚骨文이 시문된 토기가 공반되었고55) 楊州 之錦里, 56) 城南 三坪洞57) 등에서는 어골문이 시문된 동일문토기가 무문토기와 공반되어 미사리 위문화충과 갇은 성격을 나타내고 있댜 한강 하류에서도 신석기시대 후기유적들이 몇 군데 발견되고 있다. 경기도 坡쎄朋 月籠面 里의 玉石부락 유적에서는 호 北方式 支石墓 아래에서 풍화암반을 20~40cm 가량 자형으로 파고 만든 笠穴狀遺構가 발견되었다. 58) 유구의 복벽 길이는 4.5m이고 바닥은 편평하지 않으며 기둥구멍 등의 주거시설은 전혀 없었다. 토기는 전부 150여 편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이 횡주어곱문이 시문되었고 조문, 사격자문, 접열문, 조대문도 약간 보인다(도면 8). 태토는 대부분 가는 모래를 섞었으며 활석을 섞은 것은 점뿐이다. 석기는 역자식의 삼각형 마제석촉이 점 출토되었다.
도면 8
3 북한강유역
3-1 校洞 동굴유적原道 春川市 鳳儀山의 동쪽 緩傾斜地帶계 있는 긴 山尾의 북쪽 경사면에 뚫려 있으며 산의 북쪽과 서쪽은 昭陽江과 北韓江이 합류하여 만나고 있다. 동굴은 1962년 옛 聖心女大(현 翰林大) 신축공사중에 발견되었다. 59)
며 1 剛 rlImor--rmL Ir ---L
동굴은 해발 105m이며 풍화된 花岡岩盤울 인공으로 파들어가 만든 것으로 굴 입구는 偏西한 북향이다. 굴의 평면은 지름 4m 정도의 圓形기고 그 위에 半廳 천장이 있는데 천장의 높이는 가장 높은 중앙부가 2.1이며 서쪽은 바딕이 높아지면서 위로 올라가는 돌출부가 있어 저장고로 생각된다. 굴의 바닥은 흙을 깔고 整面하였으며 입구 가까이 있는 천장에는 그을음이 묻어 있다.
발견 당시 개의 人骨이 각기 발을 중앙으로 향한 채 伸展葬되어 있었는데 입구 쪽의 인골 구는 머리를 입구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한다. 동쪽에 있는 인골 밀의 고운 흙을 걷어내니 석기류가 출토되었고 토기는 입구 가까이에서 발견되었다. 이 동굴은 원래 주거지로 쓰이다가 폐기된 후 다시 무덤으로사용된 것 같다•1) 토기 (도면높이 9~13c기 小形 平底登가 접 출토되었다. 태토는 운모가 약간 섞인 점 의에는 모두 점사에 모래를 섞었다. 저부와 동부를 따로 만든 후 붙이거나 2~3개의 접토가락을 쌓아올려 빚었으며 걷면을 잘 갈아 손질하였다. 구연은 직립과 약간 의반한 것 두 종류가 있으며 口脣은 뾰족하게 처리된 것이 많다. 또한 한 접에는 가로로 구멍이 뚫린 꼭지형 손잡이가 쌍 붙어 있다.문양은 째 중 의 구연부에 시문되어 있으며 접열문이 열과 12 열 것, 조문이 열 눌러전 것, 단선이 가로로 열 눌러지고 각 밀에 點이 복합된 것 등이 있다.2) 석기석기는 석부 • 石堅 • 石器 • 석축 • 釣針 • 석도 등이 있고 管玉과 水晶片,때片등도출토되었다.석부는 길이 40.8cm, 날폭 7.6 福平細長한 대형 석부로 전면을 쪼아 整타 후 날을 걷아 합인을 세웠다. 이러한 대형석부는 동북지방에서 많이보이며 최근 蔚珍 厚浦里에서도 다량 출토된 바 있다• 60)
석착은 개가 나왔는데 길이는 .4 ~12cm이다. 礎石의 刺片으로 만든 편평세장한 單刃石芹로 몸통이 약간 부른 長方形이다.석촉은 灰色祐板岩製로 개는 長三角形 또는 보트형이고 有莖銀기다. 보트형은 단면이 而平六角形이고 鐵周緣게도 날이 서 있다. 유경축은 長身短莖 단면은 珍]다.석추는 긴 원통형의 공이로 한쪽 끝이 평탄하게 갈려 있다. 점이 출토되었다. 組合式漁具는 한쪽 끝이 약간 구부러진 형태로 동해안의 緊山里 유적에서 많이 나타난다. 61) 석도는 삼각형과 描形기 있으며 넓은 쪽에 날을 달았다. 관옥은 白玉製로 양끝에 0.5cm 가량의 察子 을 하였으나 깊이 1cm 정도만 뚫리고 관통되지는 않았다.3) 연대교동유적은 토기와 대형 석부에서 보이는 동북지방적 요소와 석착 • 석촉 등에서 보이는 서북지방적 요소를 근거로 양지역의 신석기문화가 혼합된 것 으로 보고 나아가 토기의 접토질태토, 시문 부위의 축소 등을· 근거로 무문토기문화와 접촉된 신석기 말기의 유적으로 보아왔었다. 62)그러나 최근에 조사된 오산리유적 하층에서 출토된 토기와 비교하여 불 때 문양의 패턴과 구연부 시문기법이 기본적으로 갇고 기형이나 整面수법에 있어서도 토기 걷면을 마연하여 매끄럽게 처리한 접, 구연과 구순의 끝마무리, 구멍이 뚫린 꼭지손잡이, 石粒기 섞인 접토질태토 등에서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또한 오산리 유적의 특칭적인 漁具인 組余式 釣針의 출토도 더 한층 양유적의 연결성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교동유적은 오산리유적보다는 연대가 다소 내려오겠으나 신석기시대 전기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63)3-2 內坪 敷石住居
春城郡 北山面 內坪里의 昭陽江 강안단애에 있는 이 유적은 1971년 소양댐 수몰지구조사 때 발굴되었다. 64) 발굴 당시 남은 유구의 규모는 동서길이 12.3m, 남북길이 4m이나 강 단애 쪽의 서쪽 끝은 홍수 등으로 유실되어 원래 규모는 더 것으로 생각된다. 유구의 서반부는 교란된 것으로 보이며 거의 원상태로 남은 동반부에 의하면 25~30cm의 작은 돌을 황갈색 砂生土 위에 정연하게 깔았으며 돌과 돌 사이에는 잔돌을 끼우거나 돌을 깨어 엇물려 고정시켰다. 동쪽 敷石 밀에서는 10~15cm의 잔돌로 구획한 동서 1. 5m, 남북 1.3m키 터원형 화덕자리가 나타났다. 화덕자리 내부에는 검게 부식된 흙이 채워져 있었다. 검은 흙을 걷어내니 가운데에 15 긱 잔
戀戀戀?
도연 10 내명출토토기
돌을 깊이 18cm 까지 둥글게 깔아놓았다.
이외 부석유구의 북동과 동쪽으후 3-4m 떨어져 빼의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다. 화덕자리는 15-20cm 크기의 돌을 원형 또는 타원형 로 깔아 만들었는데 가장 작은 것이 48cmX40cm, 큰 것이 160cmX 160cm의 규모이다. 이중 콧에는 남쪽에 붙어 남북 1.1m , 동 서 O.6m, 깊이 25cm 정도 되는 l 발견되었는데 내부흙은 붙어 타 새까 게 되었고 내부에서 橫走三線文이 8 條 시문된 토기가 출토되었다.내펑리의 대형 부석유구는 삼거리와 消뼈뿔와 같은 성격의 타원형 부석주거로 보고 있으며 화덕자리는 이 주거지와 관계된 야외 화덕자리로 보고 있다. 그러나 부석유구의 동쪽은 지름 6.6m 의 타원형을 이루고 있고, 서쪽이 돌의 위치가 이동되어 교란되었다 하더라도 역시 타원형에 가까운배치를 보이기 때문에 동쪽과 서쪽이 별개의 유구일 가능성도 있다. 또한 기둥구명 등의 將홈施設 혼척이 없어 주거지 이외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해 보아야한다.1) 토기 (도연 10부석유구를 덮고 있는 혹갈색의 표토층과 그 래 황갈색 생토총 사이에서 뒤섞여 나오나 부적 내에는 없었다.태토는 사철토에 모래를 섞은 것과 점토에 모래를 섞은 것이 었으며 굵은 모래와 활석 •석 연을 섞은 것도 뻗 있다. 器形은 반란형으후 구연푸는 칙 럽이거나 외반하며 저부는 환저와 첨저가 보언다. 토기는 척윤법오로 빚어 올렸는데 크기는 。 1 lO-30cm 써이나 38c 빠 넘는 큰 토기도 있다.문양은 구연부에서 동부까지 시문한 동일문계가 주류를 이룬다. 다치구로 구연부터 우에서 좌로 새겨나가기 시작한 횡주어공문이 전체 토기의93%나 차지하고 있는데 細眠 간격이 밀집되어 있고동부 밑으로 갈수록무늬가 조잡한 양상을 나타낸다. 구연부터 동부에 이르기까지 가로로 평행한 횡주삼선이 昭i 돌려진 토기와 평행단사집선문이 시문된 토기도 출토되는데 전자는 굵은 砂粒이 섞인 접토질태토이다. 위의 무늬 밖에도 竹管文• 능형문 • 사격문 • 종주어공문도 몇 편 보이며 공열문과 돌대문과 같은 특이한 문양도 있다. 공열문은 단 2편이 출토되었는데 이중 1 편만 유구 내에서 나온 것으로 復原口程이 30cm가 넘는 대형으로. 태토는 사질이며 구순 바로 밀에 3mm 정도의 구멍장식을 돌리고 있다. 돌대문토기는 구연부에 단면 樣形의 돌대 1줄을 돌리고 돌대 상하에 단사집선문을 1줄씩 새겼다.
2) 석기출토된 석기는 단지 12점으로 석부 • 지석 • 석봉과 긁개 여각개 등이다. 석부는 마제와 함께 강돌 옆면을 옆으로 때려 만든 타제석부가 있다. 지석 중 1점은 발화석으로 겸용되었다. 긁개와 찍개는 石英岩製로 경기만 일대 패총에서 많이 나타나는 석영암 석기와의 공통성을 보여준다.3) 연대내평유적에서 출토된 횡주어골문토기는 암사동의 위문화~ 시도 1 지구 등의 도서지방 패총유적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토기이며 횡주어골문이 분해된 평행단사선문도 패총유적에서 나타나고 있다. 또한 대동강유역의 金漢里I문화층에서도 횡주어공문과 돌대문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내평유적의 연대는 신석기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단 橫線文에서 금탄리1 문화층의 요소가 일부 남아 있으며 공열문토기가 섞여 들어온 것이 아닌, 부석유구와 관계되는 유물이라면 내평유적의 하한은 신석기 最末期까지 내려갈 가능성이 많다. 65)하여간 내평유적의 발견은 서해안의 후기 줄문토기문화가 한깅을 따라 북상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동해안에서 발견되는 서해안식의 후기 줄문토기의 전파경로의 중간 루트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3-3 기타 유적
위의 두 유적 이의에 정밀조사된 유적은 거의 없고 대부분 산포지나 포함충 유적들이다. 내평유적과 같이 신석기 후기 내지 말기에 속하는 유적이 많은데 66) 新梅里67) . 泉田里68) • 加平 馬場里69) 등이 이에 속한다. 의 서쪽 강안 가운데에서 채집된 토기들은 사질태토에 모래나 운모가 섞여 있는 환저토기로 횡주어공문이 주류를 이루면서 격자문 • 돌대문 등도 보인다. 한편 加平 梨谷里에서는 바닥에 사선문이 시문된 尖底土器가 출토되었고70) 동해안에서도 구분문계 토기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71) 암사동 아래문화충 단계의 이른 시기 유적이 앞으로 발견될 가능성이 많다.4 남한강유역4-1 단양상시유적北道 丹陽郡 梅浦面 上詩里 앞을 흐르는 南漢江 지류인 梅 까의 암벽에 형성된 그늘집터〔岩陰遺蹟]이다. 1981년에 연세대학교 손보기 교수에 의해 발굴된 이 유적은 忘 1 이루어져 있다. 72)제 바위그늘은 구석기시대의 Homo erectus와 Homo sapience 사람뼈가 발견되었으며 제2 그늘은 간층을 사이에 두고 아래층에서는 줄문토기, 석촉, 반월형석도가, 위층에서는 紅, 黑限가 출토되어 줄문토기문화에서 무문토기문화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바위그늘에 대 한 보고서가 아직 발간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화내용이 비교적 잘 알려진 제바위그늘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 73)제 바위그늘은 넓이 14m2의 조그만 유적으로 입구의 길이는 4m, 그늘 안의 걸이는 9m이며 안으로 갈수록 좁고 낮아진다. 충위는 모두 6 로 최하층인 연은 후빙기 이전의 문화층이며 뎅은 적색 정토층으로 무박조개로 만든 팔찌가 나왔으며 염은· 적색 사질정토층으로 융기문토기가 출토되었다. 은· 갈색 細砂層으로 줄문토기와 석기가 나왔으며 1, 층은 교란된 것으로 보이는데 즐문토기, 석기, 골기가 사람뼈와 함께 출토되었다.
1) 토기 (도면 11)토기는 층에서 지 나오고 있으나 주로 충에서 발견되고 있다. 융기문과 즐문의 두 종류가 있는데 뀜려]서는 융기문토기 개체분만 출토되었다.융기문토기는 구순 4cm 밑에서부터 2cm 간격으로 덧띠 평행으로 돌려져 있다. 덧띠는 두께가 3~4mm, 너비가 4~6mm.로 중간중간을 눌러 둥근 刻目을 내었으며 토기 걷면은 자’갑돌 같은 것으로 잘 마연하였다. 구경은 30cm에 달하며 바닥은 남아 있지 않으나 구경이 크고 밑으로 갈수록 좁가져 평저가 달린 鉢形土器일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 내부에는 불씨 담은 흔적이 남아 있어 화로로 쓰인 듯하다.기타 줄문토기들은 대부분 접토에 석영이나 운모가 섞인 태토로 빚었는 데 토기편 태토 분석에 의하면 태토에 석영 • 장석 무운모 • 화강암 • 편마
0 2cm
도면 II 상시 제3벼그늘출토토기 ·가락바퀴
암 • 활석 등이 나타나고 있다. 구경은 14~35cm 사이로 15~25cm가 전체의 2/ 처춘 차지한다. 의반된 이의에는 모두 직립구연이며 바닥은 첨저로 반란형 기형이다. 무늬는 1~2열의 단사선문이 구연부에만 시문된 것이 주류를 이루며 횡주어골문과 평행단사선문을 구연문와 동부에 시문한 토기, 점열문 밑에 횡주어골문이 보이는 토기 등도 있다. 출토된 바닥 접은 모두 무늬가 없다. 굵은 석영을 섞은 태토로 빚은 방추차도 출토되었는데 주판알 모양이며 가운데 구멍을 중심으로 1~ 점을 방사상으로 찍어 나갔다. 이러한 형태의 방추처는 동북지방 신석기 후기유적에서 많이 나타나고있다.
2) 석기석기는 굴 안쪽에 치우쳐 발견되어지며 shale 제의 석축 • 대팻날, 砂岩製의 지석 • 연석 등과 기타 찍개 • 개 • 밀개 • 자르개 • 뚜르개 • 공이 • 곰배괭이 등도 출토되고 있다. 석축은 타제와 마제가 있는데 타제는 삼각형 격지의 • 양쪽 날을 잔손질하여 만들었고 마제는 보트형과 柳葉形 逆刺式이 있으며 모두 슴베가 없는 형식이다. 곰배괭이는 석회암제로 둥그스름한 날 위에 좁아드는 어깨를 가졌으며 층에서 출토되었다. 역시 층에서 출토된 연석에는 발화석으로 겸용한 듯 구멍이 나 있다.충위별로 보면 자르개 • 석촉 • 지석 • 연석 등은 각 층에서 고루 출토되는 반면 서는 찍개 • 긁개 • 대팻날이, 층에서는 밀개 • 긁개 • 공이 • 곰배 괭이가 추가로 출토되고 있다.3) 骨器모든 충위에서 나타나며 뼈의 자연면을 그대로 쓰거나 잔손질을 베풀기도 한다. 또한 길이로 따낸 뼈 끝부분을 갈아 뾰족한 날을 세운 것도 있다. 골기의 대부분은 뾰족한 끝을 이용한 찌르개로 쓰였다.4) 조가비 층에서는 조가비로 만든 팔찌와 치레걸이가, 영려 서는 두박조개로 만든 팔찌가 출토되었으며 기타 다슬기 • 달팽이 • 우렁이 • 대고동 • 홍합 • 재첩 • 석패 • 새조개 등의 껍질도 각 충에서 나오고 있다. 특히 충서 나온 전복과 두박조개, 영딱의 투박조개는 바다산이기 때문에 원거리교역이 있었음울 말해 준다.
5) 기타사슴 • 노루 • 소 • 멧돼지 • 오소리 • 산달 • 토끼 등의 뼈가 각 충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층에서는 고라니와 말 • 너구리 • 여우과의 뼈도 보인다. 층의 사슴 아래턱으로 나이를 분석한 결과 사슴은 대부분- 4~ l 사이에 죽은 것으로밝혀졌다.한편 뀜메서는 팽나무의 열매도 출토되었다.6) 연대연째서 출토된 융기문토기의 무늬는 平衍衝 의 일종으로서 동삼동 • 上考大島 • 오산리 • Novopetrovka 유적 등에서 출토된 바 있다. 74) 평행융기 대문은 융기문 중에서도 빠른 단계의 무늬이므로, 둥의 연대도 신석기시대 早期 또는 前期게 속할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적에서 이른 시기의 융기문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이제까지 남해안의 해안가를 중심으로 강원도 동해안의 양양 오산리유적까지 울라갔던 융기문토기 문화권이 남한강 유역의 내륙지방까지 깊숙이 침무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한편 1~ 출토유물이 적어 층위간의 변화를 알 수 없으나 토기의 바닥 문양 또는 동부 문양이 생략되었으며 문양도 1~2열의 단사선문, 횡주어골문, 평행단사선문 등 늦은 시기의 문양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신석기시대 후기 이후에 형성된 문화층으로 보인다. 또한 무늬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구연부에 빗방울모양 같이 시문된 l~2열의 단사선문은 남해안의 신석기 晩期 유적에서 많이 나 터나는 문양이기 때문에 l~ 댕떡 연대하한은 신석기 만기에 속한다.응의 융기문토기, 1~ 빗방울모양 단사선문은 층과 영에서 나온 동남해안산의 두박조개와 함께 상시유적이 남해안의 신석기문화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4-2 단양금굴유적北道 丹陽郡 梅浦面 있다. 남한강의 강안 언덕에 이루어전 동굴유적으로 江水面보다 5.4m 위에 있고 굴의 크기는 높이 8m, 깊이 8.5m, 가장 넓은 곳의 너비가 7~ 10m이다. 충위는 모두 87 로 ~ Ill 층이 구석기문화충이며 기 ~ 2.의 작은 총으로 세분되는 층은 Il 충이 신석기문회층이고 Il 기충이 청동기 문화충이다. 75)1) 토기 (도면 12)구연부 30편, 동부 97편, 저부 편이 출토되었다. 모래가 섞인 접토질 태토로 輪紋 • 卷上法게 의해 빚어졌으며 운모가 섞인 것도 꽤 있다. 구연은 의반 점 의에는 모두 직립하였으며 저부는 환저가 접, 말각평저가 점
도연 12 금굴출토토기현
있어 기형은 대부분 반란형으로 보인다.
완형이 없어 전체적인 무늬배치는 알 수 없으나 남아 있는 토기편에 의하면 무늬는 구연부에만 단치구로 찰과한 것이 주류를 이룬다. 무늬가 있는 조각이 구연부는 중 27점이고, 동부는 97점 중 20점에 불과하다. 사격자문 • 빗방울모양의 단사선문을 단독으로 시문한 것이 가장 많고 태선식의 횡주어골문도 보이며 복합시문은 구연부에 단사선문을 여준 돌리고 그 밀에 組帶文이 시문된 토기편 다.2) 기타 유물석기로 납작한 조약돌의 양끝을 떼어내어 만든 어망추와 역시 납작한 자 돌로 만든 찍개, 망치돌 등이 있으며 마제석기는 출토되지 않았다.뼈송곳•뼈바늘과 조가비로 만든 팔찌, 뿔고둥의 위아래를 자르고 갈아서 만든 치레걸이도 출토되었으며 사슴 • 멧돼지 • 너구리 • 말 • 자라 등의 침승뼈, 고등 • 다슬기 • 조개 등의 조개류도 발견되었다.한편 이들을 구워먹은 불땐자리와 그을은 큰 돌들도 Il 충에서 나왔다.3) 연대구연부에만 사격자문 • 단사선문 등을· 시문한 수법은 남해안 신석기 후기인 水佳里 기 이후에 성행하고 있어 금굴유적은 신석기 후기유적으로 보인다. 반면 단사선문과 조대문이 복합시문된 토기, 태선식의 어골문 동에서 신석기 중기 후영인 수가리 기의 영향도 일부 남아 있는 것 걷다.4-3 기타유적남한강유역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198 2 과 1983년에 걸쳐 이루어전 충주댐수몰지구유적발굴조사에 의해 많은 유적이 발견되어 남한강유역 신석기문화의 한 단면을 알 수 있게되었다.
발굴조사의 성격상 유적은 단양 • 중원 • 제원군의 남한강 강안에 밀집되어 있다.제원 黃石里의 서낭지구는 Il 충에서 무문토기와 반월형석도가 血충에서 줄문토기와 낙석제 타제석기가 출토되고 있다. 76) 줄문토기는 가는 모래가 태토에 섞여 있다. 문양은 암사동과 갇이 단사점선문이 많고 이의에 어골문도 있으며 무문도 상당수 있다(도면 13). 문양구성이 남아 있는 토기편을 보면 구연부에 단사선문이, 동부에는 종주어공문이나 내부에 빗금을 채운 밀이 터진 긴 삼각형무늬가 시문되었다. 줄문토기 이의에는 돌대문토기가 무문토기충의 가장 아랫부분에서 출토되고 있어 주목을 끈다.제원 陽平里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내부포함충과 주위의 pit에서 줄문 토기가 나왔다. 77) 가늘거나 굵은 사립을 섞은 태토를 보이며 단사점선문과 종주어공문이 복합된 구연부 하부편과 횡주어골문이 시문된 동부편이 출토 되었다.기타 제원 眞木里 • 桃花里 • 成岩里, 중원 荷川里 • 紙洞里 등에서 나오는 토기들도 대부분 모래 • 운모가 섞인 점토질태토에 횡주어골문이 시문된 것이 주류를 이루나 제원 도화리에서는 활석이 섞인 단사선문의 구연부편도 출토되며 중원 명서리에서는 환저 접도 나왔다. 78)
도면 13 황석리유적 출토토기
南福 상류인 平昌江 유역에서도79) 즐문토기편의 출토예가 알려져 있으나 상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위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토기들을 보면 제원 황석리와 양평리에서는 구분 문계의 토기가 출토되어 한강 중류 암사동 아래층문화의 유입을 엿볼 수 있고, 후기에도 한강유역 토기문화의 영향이 계속되어 구연부 • 동부에 어골문을 베풀거나 구연부에만 단사선문을 베풀기도 하는데, 한편 태선문·조 대문·빗방울식의 단사선문에서 남해안토기의 요소도 나타나 결국 남한강 유역에는 서해안과 남해안의 즐문토기문화가 교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제 4 절 주거와분묘1 주거한강유역에서 발견되는 주거지는 수혈주거지가 대부분이고 기타 동굴주 거지 • 부석주거지 등도 있다.1-1 수혈주거지力 穴기 기 발견된 玉石里 이의에 암시동유적에서 20여 기가 넘는 많은주거지가발견되었다 . 5)암사동 주거지의 수혈 형태는 대부분· 한쪽 변이 약간 긴 말각방형이고 원형은 몇 기 없다. 수혈의 크기는 대체로 한 변이 5~6m이나 3.5m 전후의 小彩도 있는데 원형 수혈은 소형이 많다. 수혈의 면적은 20m2~30m2 사이가 많아 4~6인 정도의 소가족 단위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수혈의 깊이는 40~80cm 가량이나 가 넘는 깊은 것도 있다.바닥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이 바로 모래바닥이 노출되나 모래 위에 풀이나 침승가죽 등을 깔고 생활했던 것 같다.주거지마다 각기 중앙에 기씩 설치되었는데 자갈이나 할석을 데벼범멍 -
K{싸 뾰K 〈- 양 벼
z。
.
용함g 용r 합빼***이R찌:해꾀형{ ·Fha잉∞···’e@ .용해힘휠 -〈m할 *-하껴 줍뽀맨* ∞@·i} 흡굉Z **@ ‘ .용*홉벌- 월Mrψ *** 훌e엉 훌두리에 돌려 만들었다. 크기는 한 변이 50~70cm 가량이고 형태는 방형 • 장방형 • 원형이 있으나 대체로 수혈의 형태와 일치시키고 있는 것이 많다. 이러한 노지 안에서는 재가 섞여 나오나 재를 들어낸 모래바닥이나 주위의 돌에서 심하게 불먹은 흔적이 거의 없고 또한 지붕의 화재 위험성 등을 고려하면 주거지 내부의 노지는 음식조리용보다는 화로 갇은 불씨저장 또는 내부 조명의 기능을 주로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실제 암사동에서는 주거지 밖에서 길이 10~20cm의 할석이나 냇돌을 단 정도 쌓아 만든 적석유구가 발견되어 80) 야의조리시설의 가능성을 말해 주고 있으며 특히 대형동물의 조리시에는 이러한 야의노지가 이용되었을 것이다.
출입시설은 암사동 주거지 25기 중 기에서만 보이고 있는데 수혈 모서리나 한쪽 벽 중앙의 외곽을 조그맣게 방형으로. 돌출시켜 설치하였다. 기는 계단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수혈 어깨면과 비슷한 높이를 보이고 있아나무로 만든 계단 또는 경사로를 기대어 놓았을 것 같다. 출입시설이 별도로 설치되지 않은 주거지들도 역시 나무계단이나 경사로를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출입시설의 위치는 남향이 대부분이다.저장시설로는 肝藏孔 • 토기 및 주거내부시설 등이 있다. 저장공은 주거지 의곽에 자리잡고 있는데 모두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지름 90cm, 깊이 30~40cm 가량이나 지름이 2.3m나 되는 대형도 있다. 토기 중 큰 것은 저장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75-2호 주거지에서는 노지 옆에 바닥올 자르고 거꾸로 박아 놓은 토기가 발견되었다. 이렇게 바닥을 자론 토기를 거꾸로 묻어 저장시설로 사용한 예는 智塔里81) • 弓山82) 등의 대동강유역 이른 시기 신석기시대 주거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의에 71-5호 주거지에서는 한쪽 벽 중앙에 돌출부를 만들어 저장시설로 이용하였고 74-2호 주거지에서는 동벽 쪽에 선반시설을 마련하였다.柱孔은 수혈 내부의 모서리에서 4~10개까지 나타나는데 원래는 주거지 1기당 이가 파였고 나머지는 주기등을 옆에서 버티어 주거나 새로운 기등을 파묻으면서 생긴 구명일 것이다. 실제 땅에 묻어 세운 나무기등은 20년이 지나면 밀등이 씌어서 힘을 받지 못하므로 덧기둥을 세워서 보강하는 경우도 많다•83)
이러한 기둥구멍의 위치로 보아 집의 뼈대는 각 모서리에 있는 기둥구멍에 예의 기둥을 수직으로 세우고 그 위에 도리를 올렸으며 별도의 벽체시설 없이 바로 지상에서 서까래를 걸친 것으로 보인다. 서까래 중 추녀 끝까지 올라오는 것은 움 중앙에 모이게 하고 서까래 사이사이에 잔나무 가지로 너스레를 엮어서 새나 갈대 등을 덮어 지붕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지붕 형태는 輯多 또는 四角銅底 된다.반면 71-5호갇이 큰 장방형의 주거지에서는 긴 용마루를 갖는 꼭지의 움집이 만들어졌으며 기둥 없이 서까래로만 원추형 지붕을 형성한 주거지도 몇 기 보인다.1-2 부석주거지내평과 삼거리에서 나타나고 있다.내평유적의 규모는 동서 12.3m, 납북 4m 길이로 25~30cm 크기의 돌을 깔아 만들었는데 동반부만 거의 원형으로 남아 있다. 동반부 부석 중앙부의 밑에서 10~15cm긱 잔돌로 구획한 1. 5~1.3 타원형 노지가 발견되었다.삼거리에서도 大小의 石魂를 깔아 만든 부석유구가 발견되었으나 교란이 심해 전체 규모는 알 수 없다.부석주거지는 내평유적과 토기 성격이 비슷한 대동강유역의 청호리에서도 발견되었는데 가운데에는 돌을 돌려 만든 노지 데가 있었으며, 일본의 繩中期게서도 원형 • 타원형의 부석주거지가 나타나고 역시 가운데에는 노지가 설치되어 있다. ) 부석주거지는 수혈주거에서 地上住居로 바뀌는 과도기의 주거지로 보고 있다.그러나 내평과 삼거리의 유구는 모두 ~l 아니고 주거지로 불 만한 확실한 시설이 없기 때문에 주거유적으로 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좀더 자료의 증가를 기다려야 할 것 걷다.1-3 동굴주거지
인공이나 자연으로 이루어진 동굴이나 바위그늘을 주거로 이용한 예는 춘천 교동, 단양 상시 • 금굴, 제원 정말동굴 등이 있다. 동굴주거지는 특히 남한강 중 • 상류에 밀집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곳이 석회암지대로 동굴이 많이 형성되어 있어 구석기시대 이래로 계속 주거로 이용되어 왔기 때문이다.1-4定住와주거이동암사동유적은 제한된 면적에 수십 기의 수혈주거지가 밀집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수혈주거지와 토지의 출현은 定住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바 암사동의 경우 강과 강안 삼림지대의 다양한 동식물자원을 이용할 수 있었고 식량이 부족한 겨울을 위해서는 식물성자원을 저장하였을 것이다. 암사동주거지의 수혈과 노지는 주거지가 겨울에도 계속 사용되었음을 말해 준다. 85)서해도서와 해안가에 분포하고 있는 패총은 대부분 규모가 작고 한 섭에도 여러 곳에 산재하고 있으며 출토되는 유물도 매우 소량이다. 또한 섭둘이 크기가 작고 어패류 이의에 동식물자원이 빈약한 반면 패각층의 규모도 작기 때문에 장기간의 거주를 상정하기는 힘들다. 패총에서 노지는 간혹 발 견되나 주거지가 조사된 적은 없다. 따라서 패총을 형성한 주민들은 생활터전을 계속 이동하거나 내륙지방과의 교류를 통해서 생활을 영위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럴 경우 계절적 이동이라든가 소금 • 어패물과 내륙의 동식물 자원과의 교류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러한 방면의 연구가 진척이 거의 안 되어 있으며 특히 패총의 자연유물의 분석이 미흡하여 부양 인구수, 잡힌 계절, 살립시간의 길이 등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실정이다.•* 서해안 페총에서 페각류와 동물유체에 대한 정밀분석이 최초로 이루어진 곳은 安眼島古南里貝塚이다.
(l) 金秉模 沈光注, 『安眠島 古南里貝塚, 漢陽大學校博物館, 1990.®金秉模•安德任, 『安眠島 古南里貝塚 漢陽大學校博物館, 1991.2 분묘
일반적으로 무덤으로 보고 있는 유적으로는 춘천 교동동굴과 시도 적석총의 두예뿐이다.교동동굴은 주거용으로 쓰이다가 폐기된 후 다시 무덤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발견 당시 의 사람뼈가 내부 중앙 쪽으로 방을 모은 상태로 展어 있었다. 또한 출토된 토기와 석기가 모두 정연하게 만들어졌고 미완성품이 보이지 않아 副葬用으로 묻혀진 것 갇다.시도의 적석총은 1.65mX 1. 45m의 타원형 돌더미로 적석 밀에서는 크기 1.5mX 1.2m, 깊이 0.3~키 타원형 구덩이가 나왔다. 구덩이의 바닥과 적석사이에는 많은 숯과 부식된 혹색토가 깔려 있었다. 따라서 이 무덤은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넣은 다음 구덩이 위에 나무를 걸쳐 놓고 그 위에 돌을 쌓아올린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시도의 적석총을 무덤이 아니라 암사동의 대형 적석유구와 갇은 야의 조리시설로 보는 견해도 있다. 86)한강유역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신석기시대 무덤이 발견된 예가 거의 없기 때문에 신석기시대에는 간단한 土葬을 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 최근에 둘어 人骨이 공반되는 집단 매장유구가 울진 후포리, 통영 연대도의 연곡리패총 등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전자는 洗胃葬의 집단트장묘이며 후자는 시신의 상부에 져석을 한 토장묘이다.
제 5 절 生業經濟, 도구와 기술
1 식생활1-1 수렵구석기시대보다 사냥은 그 비중이 줄어드나 여전히 생업의 중요한 일부울 차지한다• 다만 구석기시대의 맘모스 갇은 대형동물이 없어침에 따라 사냥대상이 중 • 소형 동물이나 새 등으로 바뀌게 되며 이에 따라 사냥도구도 바뀌어 활과 화살이 사용된다. 활과 화살은 이미 中石器시대부터 나타나나 신석기시대에 들어 종류와 양이 증가되었다. 화살은 직접 동물에 가까이 접근하지 않아도 먼 거리에서 사냥할 수 있으며 나는 새와 빠른 동물들도 잡을 수 있어 사냥대상의 종류와 수량이 증가되었다. 또한 집단에 의한 무리 사냥 의에 개별적인 사냥도 가능하게 되었다.
한강유역에서 동물뼈가 발견되는 곳은 남한강유역의 동굴유적뿐으로 단양 상시 바위그늘에서는 사슴·노루·소·멧돼지 ·토끼 • 꿩 등이, 단양 금굴에서는 멧돼지와 사슴뼈가 출토되고 있다.서슴 • 노루 • 멧돼지 등은 신석기시대 다른 지역의 유적에서도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대동강유역의 弓山貝塚게서는 사슴 • 노루 • 멧돼지의 뼈가 100마리 분 이상이나 나오고 있어 87) 신석기 주민의 주된 식량공급원이었던 모 다.둘침승 의에 새도 많이 집았을 것으로 생각되나 당시 유적에는 꿩뼈 의에는 새뼈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암사동 토기무늬에서 새뼈로 누른 소위 鳥骨文이 나타나고 한강변에 오리가 많이 서식하고 있는 접으로 보아 당시에도 오리가 당연히 주된 사냥대상이었을 것이며 오리알도 많이 채집하였을 다.이들 짐승이나 새의 사냥에 쓰인 도구로는 石鐵 • 石籍頭 등이 출토되고 있다. 석촉은 이른 시기 유적인 춘천 교동, 서울 암사동, 광주 미사리 등에서 발견되고 있어 일찍부터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으며 위의 유적 의에 다른 신석기유적에서도 고르게 출토되고 있다. 석측은 크기와 모양이 다양해 쏘아 잡는 사냥감도 달랐던 것 같으며 동북지방의 서포항유적 기층에서는 멧돼지의 다리뼈에 석촉이 박혀 있는 채로 나와 석축의 위력을 알 수 있다• 58) 그러나 전체적인 석기 수량에 비해 석촉과 석창의 출토량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나무창과 올가미나 덫, 함정 등의 보조도구가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또한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개뼈가 자주 출토되어 사냥에 개가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각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는 역석제 긁개 scraper 는 침승의 가죽벗기기와 고기자르기에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1-2 어로한깅유역의 신석기유적은 대부분 물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닷가와 섬에는 패총이 다수 분포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魚類와 貝類가 중요한 식량 공급원이었음이 틀림없다.유적에서 직접 발견된 물고기뼈는 없지만 조선시대 史菅게 보면 한강에는 열목어 • 누치 • 쏘가리가 가장 많이 나오고 은어 • 붕어 • 웅어 • 숭어 등도 상당수 나타나고 있으며 현재에도 10 넘는 고기가 서식하고 있다. 89)물고기를 잡는 기술에는 작살이나 창을 던져 잡는 방법, 그물을 이용하거나 낚시를 하는 방법 등이 있다. 작살이나 창은 한강유역 신석기유적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으나 석촉이나 뼈 • 나무창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크다. 그물은 단독으로 또는 집단적 공동작업으로 이용되고 대량의 漁獲을 가능하게 하는 획기적인 어로기술이다. 그물추는 암사동 • 미사리 등에서 출토되는 石器 중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으며 다른 유적에서도 많이 보인다. 지역은 다르나 대동강 유역의 금탄리 문화층에서도 10호 주거지에서는 200개, 호에서는 600개나 되는 그물추가 한데 뭉쳐 있었으며 남경 31호 주거지에서도 3,000여 접이나 출토되었다. 90) 그물추는 납작한 자갈돌의 양측을 때려서 만들었는데 길이 2~4cm인 소형과 5~7cm인 다소 큰 것이 있어 어로 대상에 따라 다른 종류의 그물추가 만등거진 것 같다. 한편 미사리에서는 石製의 編綱具 때가 출토된 바 있다. 91)위의 그물추를 이용한 그물어획은 서해안 신석기유적 특히 강가유적에서 주로 나타나는 반면 낚시 특히 組余 注· 동남해안 신석기유적에서 많이 발견된다. 강원도 동해안의 繁山里遺蹟게서는 아래문화충의 동해안식 平底土팥 조합식어구와 공반되고 위문화층의 서해안식 尖底土흡가 그물추와 공반 되고 있다. 춘천 교동에서 출토되는 조합식어구는 오산리 아래층의 신석기 문화의 영향으로 다른 한강유역 신석기유적에서는 다소 이질적인 존재이다.조개류는 강에서도 채취되지만 대부분 바다에서 채취되고 있다. 경기만 일대의 조개더마들은 거의가 큰 굴껍질로 형성되어 있어 굴이 조개류 중에서 가장 많이 채취된 것으로 보이며 다른 조개류로서는 전복 • 우렁이 • 대복·고둥• 떡조개 • 반지락• 백합· 새꼬막· 비다가리비 • 가무락조개 ·소라 등이 나타난다. * 패총에서 출토되는 찍개 • 긁개 등은 이러한 굴이나 조개류를 까먹는 데 이용되었던 것 갇다.
* 서해안 층부지역에서 포획된 각종 조개 및 물고기의 종류는 안면도 페총의 분석에
1-3 채집
식물채집은 식량획득의 가장 기본적 활동으로 수렵경제에 있어서도 사냥감보다는 채집된 식물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신석기시대 당시에도 현재 한강유역에서 자라고 있는 식용식물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식물성자원은 거의 부식되어 남아 있지 않으나, 암사동과 미사리 유적에서는 도토리가 출토되고 있다•도토리는 낙엽활엽수립에서 많이 자라는 굴참나무 • 졸참나무 • 성수리나 무 등의 참나무속 Quercus 에서 나오는 씨앗으로 쉽게 채집이 가능하며 단위 면적당 수확량과 인구분양능력이 어느 야생동식물보다도 높은 편이다. 도토리는 탄닌이 많아 덟은 맛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없애기 위해 깐 도토리를 재와 풀로 싸서 모래에 묻거나 물에 담구어 두는 방법을 쓰는데 현재 우리나라 시골에서도 후자의 방법이 많이 쓰이고 있다•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되는 磯在斗 敵石은 도토리의 가공에 쓰였을 가능성이 많다. 도토리는 일본 繩幻 가장 중요한 식량자원이었으며 캘리포니아의 인디안 사회에서도 주식으로 이용되었다 한다• 92) 따라서 신석기시대의 한강유역에서도 도토리가 주식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한편 역석제 긁개와 석부 등이 유적에서 다량 출토되고 있는데 석기의 크기와 재질에서 도토리 의의 다른 식물자원이 채취에 이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서 잘 난다. 漢陽大學校博物館, 『安眠島古南里貝塚 , 1990• 1991.
1-4 농경
농경과 그에 따른 식량생산은 신석기시대의 가장 큰 특칭으로 농업혁명이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인류문화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북유럽과 시베리아의 소위 環北極文化는 농경이 없는 수렵 • 어로에만 의존한 신석기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신석기문화가 식량생산을 동반한 단계이냐 아니면 수렵 • 어로에 의존한 단계였느나메 대해서는 이론이 있으나 신석기시대에 농경이 있었다는 데 대해서는 이론이 없고 단지 그 始期게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제출되고 있다. 9,)농경의 존재를 고고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는 開堅게서 耕起 • 收榎 ,미 이어지는 생산도구가 출토되거나 재배식물이 발견되어야 한다. 위의 두 조건이 모두 갖추어진 것이 대동강유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죽 智塔里지구에서는 탄화된 조가 돌보습 • 돌낫과 공반되고 弓山貝塚게서는 뿔괭이와 뒤지개, 산돼지 이빨로 만든 낫이 출토되고 있어 대동강유역에서는 이른 시기부터 농경이 시작되었음에 툴림없다. 그런데 한강유역 특히 중류의 이른 시기 유적들은 출토되는 토기의 기형 • 문양이 대동강유역과 비슷하고 암사동 75-4호 주거지에서는 돌보습 • 돌낫 75-10호 주거지에서는 돌괭이가 출토되고 있으며 또한 대동강유역과 한강유역의 자연환경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한깅유역도 대동강유역과 비슷한 시기, 죽 늦어도 기원전 석 년기 전반에는 농경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95)당시의 농업은 火田개 의한 소규모의 밭농사로 보이는데 경작에는 撮棒 • 보습 • 괭이가 사용되었다. 돌보습의 존재로 신석기시대 농경이 괭이농사와 보습농사의 두 단계가 있었다고 보기도 하나 돌보습의 용도에 대해서는 쟁기 • 가래 • 괭이 • 삽 등 여러 견해가 있어 보습농사단계의 설정이 명확하지 않으며 돌보습이 굴봉에서 발전한 일종의 의날따비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실제 한강유역에서 출토되는 돌보습의 수량이 극히 적기 때문에 여전히 괭이농사의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곡물의 수확구로는 낫이 출토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손에 의한 수확도 고려되어야 한다. 한강유역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조합에서 농경도구의 비중이 미미하기 때문에 전체 식량에서 경작물이 차지하는 비중도 작았으리라 생각된다.
한강유역 신석기시대의 생업은 기본적으로는 broad spectrum 한 것으로 보이나 지역적 처이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죽 해안가와 도서에서는 어로가, 내륙의 남한강유역에서는 수렵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을 것 같으며 한강 중류에서는 수렵과 어로, 채집과 농경이 고루 이용되어 계절상의 식량 자원 불균형을 메워 나갔을 것으로 보인다.2 토기한강유역의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 바로 • 丸底의 즐문토기이다. 이하 즐문토기의 記距斗 문양구성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2-1 태토胎土는 토기를 빚기 위한 바팅흙으로 보통은 인근에서 얻기 쉬운 흙을 사용하였으나 토기빚기를 원활히 하고 흡수성을 조절하며, 건조하기 알맞게 하기 위해 補强齊(섞임 • 비집)를 사용하였다.암사동유척에서 채집된 토기편의 분석에 의하면 토기 보강제로는 白雲毋또는 黑雲母와 輝石기 섞인 것, 石綿기 섞인 것, 滑石기 섞인 것, 角閃石이 섞인 것 등이 있고 이미 만들었던 토기를 알맹이로 부스러뜨려 넣은 것도 있 태토에 운모를 섞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 보기 힘든 한강유역 신석기주민의 창안이며 운모가 태토에 원래 자연적으로 섞여 있었다고 보기도 하나 활석과 석면이 섞인 토기에는 운모가 섞여 있지 않고 태토에 섞인 운모의 크기가 태토에 자연적으로 섞이게 될 운모보다 크고 차지하는 양이 많아 인위적으로 섞은 것으로 보인다. 암사동유적 근처에는 운모편암이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시대는 다르나 청동기시대의 坡써 食肥旦 주거지, 원삼국시대의 春川 中島 주거지에서는 주거지 안에서 토기 보강제로 쓰기 위한 운모 덩어리가 발견되었다. 99)
활석과 석면은 器 얇고 문양이 賊超 • 孤文 등의 曲線文이거나 복집한 문양일 때 주로 섞여 있다. 암사동 등의 한강 중류유적 이의에 서해도서일대의 패총 출토 토기에서도 석면과 활석이 섞인 것이 나타나는데 이때의 문양은 대부분 이른 시기의 문양이다. 죽 태토에 석면과 활석을 섞는 것은 대동강유역의 궁산 • 지탑리유적 등 이른 시기의 유적에서 크게 유행하였는데 한강유역에서 보이는 석면과 활석이 섞인 토기의 문양도 대동강유역에서 성행한 문양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운모와 석면 • 활석과 함께 보강제로 널리 이용된 것으로 모래가 있다. 모래는 주변에서 가장 쉽게 구해질 수 있어 많이 이용되었는데 가는 모래와 굵은 모래가 보인다. 굵은 모래나 돌 알갱이는 특히 늦은 시기의 줄문토기에 많이 나타나는데 암사동이나 미사리의 신석기 후기문화층에서 출토되는 토기들에 주로 섞여 있으며 토기의 무늬도 횡주어골문 등의 동일문이 주류를 이룬다. 대동강유역에서도 모래가 섞인 토기는 늦은 시기의 것으로 역시 동일문계의 토기이다.이 밖에도 패총에서 출토되는 토기 중에는 태토에 조가비가루가 섞인 것도있다.2-2 제작방법토기의 제작은 구연부편이나 동부편이 주로 가로로 평행하게 깨진 것이 많고 기면 자체에 남아 있는 접합혼으로 보아 흙데를 쌓아울려 가면서 빚은 臣對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죽 둥근 바닥은 바로 손으로 빚어 만들고 그 위에 흙데를 차곡차곡 올려 동부와 구연부를 형성하였으펴 테의 아래 • 윗부분은 경사면으로 하여 접착이 용이하게 하였다. 윤적법은 대형토기를 빚을 때 주로 이용되었는데 암사동의 75-5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높이 38.5c 를 보면 바닥을 먼저 만든 후에 폭 12cm, 9cm, 9cm의 개의 데를 울리고 접합부분을 문질렀다. 100) 또한 암사동 출토 토기 중에는 바닥 둘레에 파여진 둥근 선 또는 단이 남아 있는 것이 있어 토기를 빚을 때 둥근 바닥을 세우기 위한 받침시설 자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01)
한편 윤적법 의에 소형토기는 손으로 직접 빚은 것이 많고 중형토기에는 흙데를 바닥에서부터 나사식으로 감아올려서 빚은 것도 나타난다.기벽의 두께는 5~12mm 사이이나 7~9mm 사이가 가장 많으며 동부가 구연부보다 두껍고 저부는 더욱 두꺼워 20mm에 가까운 것도 있다. 또한 태토에 활석이나 석면이 섞인 토기는 두께가 5~6mm 사이의 얇은 것이 많다. 토기를 빚은 후 안팎의 두께가 고르지 못한 부분이나 접합한 부분의 면을 다듬기 위해 다듬개를 서용한다. 이때 태토에 섞인 알갱이들이 긁혀지면서 패인 자국이 기면에 나타나고 있다. l02) 또한 마지막으로 구연부를 다듬을 때 물먹은 천이나 나무 등으로. 곱게 손질한 條哀이 남아 있기도 하며 도서지방에서는 조가비 등으로 면을 다듬은 토기도 출토된다.2-3 器形책 • 터 直立口緣의 礎譯形土 가 특칭이다. 첨저는 한강 중류, 환저 는 서해도서지방에서 주로 나타나며 암사동에서는 平底도 출토되나 환저의 전통이 남아 있는 株角平底로 동북지방의 평저와는 맥을 달리한다. 이러한 말각평저의 토기는 대부분 小形縮기다. 반면 춘천 교동 및 단양 상시에서 발견되는 평저토기는 한강유역의 전형적인 즐문토기와는 다른 계통의 토기 이다.구연부도 대부분 직립구연이나 시도 패총과 내평에서는 外反口緣기 나타나고 암사동 75-5호 주거지에서는 의반구연과 함께 有頭土도 출토되고 있다. 의반구견은 칙립구연에 비해 늦은 시기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포탄형토기의 크기는 높이가 20~50cm 사이로 다양하며 60cm가 넘는 대형도 있다. 口樞은 높이보다 약간 작아 구경과 높이의 비율은 0.7~1 사이 다.
2-4 燒成露天앞제서 구워져 토기의 색깔이 적갈색 • 황갈색이 기본이나 구울 때 열이 고르게 퍼지지 않기 때문에 약간 어두운 빛을 띠는 것도 있다. 구운 온도는 600~800°C 정도로 추정되나 아직 확실한 근거가 미흡하며 태토와 혼입물에 따른 차이도 있을 것이다.한편 암사동유적에서 발굴된 타원형의 적석유구를 짐승뼈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접을 근거로 토기 가마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103) 죽 밀에 돌을 깔고 토기와 땔감을 쌓은 뒤 그 위를 깨어전 토기조각 등으로 덮는 구조의 가마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바닥에 깔린 돌들은 불기운이 땅 속으로 빠지는 것을 막아중과 동시에 달구 전 상태에서 뜨거운 기운을 오래가게 한다고한다.적석유구가 가마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위의 특칭은 돌구이에 이용되었을 때에도 장접으로. 작용될 수 있으며 적석 싱부보다 하부에 재가 더 많은 점, 주위에 깨진 토기를 버리거나 토기제작 원료가 모여 있는 곳이 없는 접 등이 의문이며 민족지적 자료에 대한 검토도 이루어져야 할것이다.2-5 문양전형적인 한강유역 줄문토기의 문양은 시대의 차이에 따라 문양의 종류와 구성, 시문수법과 부위 등에도 차이가 나타나는데 크게 分文파 同一文의 두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1) 구분문토기
구분문토기는 구연부와 동부 • 저부에 서로 다른 문양이 시문된 토기로 암사동, 미사리 등의 이른 시기 유적에서 성행한다.부위별로 시문된 문양을 살펴보자.구연부 문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문양은 단사선문으로 瓜形, 돕날형 또는 棒狀施文共게 의해 橫으로 밀집된 단사선문을 반복시문한 것인데 文樣帶는 열에서 열까지 있으나 3~5 열이 가장 많다. 또한 각종 문양대의 施發點과 사이에 약간의 空臼을 주어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같은 단사선문계라도 서해도서에서는 단사점열문이 많이 보이는데 그것은 조가비가 施文具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단사선문은 암사동 • 미사리유적 토기 구연문 문양의 80% 이상을 차지한다.단서선문 이의에 구연부에 나타나는 문양으로는 접열문 • 횡선문 • 격자문 등이 있다. 정열문은 점열을 횡으로 시문한 문양으로 文樣帶 구성과 문양대 내 공백 등은 앞의 단사선문과 같다. 한강유역에서는 별로 사용되지 않으나 대동강유역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문양이다. 橫線文은 직선을 가로로 수열 돌린 것인데 그 밀에 세로 방향의 線文이 나란히 시문된 것도 있다. 횡선문의 토기편은 대부분 활석이나 석면이 혼입되어 있고 기벽이 얇다.한편 구분문토기 중에는 구연부와 동부 문양대 사이에 별개의 문양이 삽입 첨가된 것이 있는데 이를 從屬口緣部文樣帶斗고 부르며 104) 煙幽汶• 重 • 銀齒文 • 組帶文 • 格子文 등이 이에 속한다. 중호문은 열에서 열에 이르는 半圓俊 勘線知 각 衝限文圈 사이를 다시 知瞬 約巴로 연결시킨것도있다.동부 문양으로는 橫走魚骨文 • 縱힉 骨文 • 縱列斜線文 • 菱形文 • 三角帶文 • 子文•線文·새끼문등이 있다.횡주어골문과 종주어골문은 구분문토기 동부 문양의 主形式으로 斜綠을 상 하 또는 좌우로 엇갈리게 그어 나가 만든 문양이다. 연속하여 지그재그형으로 시문하는 방법과 떼어서 시문하는 방법의 두 종류가 있으며 횡주어골문은 다치구에 의한 시문이 많은 반면 종주어골문은 단치구에 의한 시문이 많다. 종주어골문 중에는 엇갈리는 사선 사이에 긴 선을 집어넣어 羽狀文장기보이는것도있다.
종열사선문은 구연부 문양 밀에 사선을 상하로 시문한 문양대를 돌린 것이며 능형문은 평행한 사선으로 능형을 만든 것으로 상하의 菱形文歷을 엇갈리게 배치하였다. 삼각대문은 밀에 터진 삼각형 안에 평행하는 사선이 채워진 것이며 격자문은 긴 선을 서로 교차시켜 이루어진 문양이다. 새끼문은 3~5열에 이르는 접열문을 연속적으로 서로 꼬아 새끼 형태의 문양을 이룬 다.저부 문양은 단사선문 • 횡주어골문 내玲獻文 등이 있다. 방사상문은 저부 끝을 향하여 단사선을 종으로 시문한 것이다.위의 문양 중 가장 일반적인 문양 조합은 구연부에 단사선문대를 몇 줄 돌리고 동부에는 어골문, 저부에는 횡주어공문이나 방사상문을 배치한 것이다. 그러나 구분문토기 중에서는 동부 문양이 저부 상부까지 계속되어 동부와 저부 문양의 구분이 없어전 것도 있으며 시기가 늦어지면 저부 문양이 없어져 구연부와 동부에만 문양이 시문되거나 동부 문양까지 없어져 구연부 문양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진다. 위와 갇은 문양배치는 半卵形 토기에서 주로 보이는 현상이며 소형의 平底砲 는 애초부터 저부 문양이 생략된 것이 많다•2) 동일문토기토기 전면에 같은 문양이 시문된다.문양은 구분문토기의 동부 문양인 횡주어골문이 구연부와 저부까지 시문되는데 구분문토기와 같이 늦은 시기에는 面의 2/3나 1/ 시문된 것이 많다. 횡주어공문도 문양의 간격이 가지런하게 이루어진 것과, 시도 지구패총의 토기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문양이 조잡해지고 상하선이 겹쳐지기도 하는 되화된 것이 있다. 후자에는 다치구를 사용하여 시문한 것이 많다. 또한 동일문 중에는 횡주어골문이 되화하면서 문양이 분해되거나 겹쳐진 사선문 • 격자문 등도 나타난다.3) 기타 토기문양
앞에서 언급한 구분문과 동일문토기가 한강유역 신석기시대 토기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이들 외에도 몇 가지 다른 형식의 토기둘이 간혹 섞여 있다•동일문토기와 갇이 기면 전체가 하나의 施文應으로 되어 있지만 문양이 한 종류가 아니라 띠대문, 무지개문, 조대문, 횡주어골문· 등이 차례로 시문되어 있고 구연부에는 띠대문, 저부에는 횡주어골문이 주로 시문되어 있는 토기가 있다. 이러한 종류의 토기는 금탄리 105)으로 불리어지는데 주로 대동강유역에서 나타나는 형식이며 한강유역에서는 岩寺洞, 延坪島, 106) 등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연평도는 위치가 대동강유역에 가까우며 암사동게서는 띠대문만이, 내평에서는 소략화된 띠대문만이 나타나 한강유역에서는 정칙하지 못한 문양이다.기타 束北系 押引文 • 雷文 • 突帶文, 東南系 隆起文 • 太線文 등의 문양도 북한강 및 남한강유역을 따라 흘러 들어오고 있으며 태토는 줄문토기와 같지만 문양이 전혀 시문되지 않은 토기도 나타나고 있다.2-6 기능任孝宰와 Nelson 은 堅에 따라 한강유역의 암사동, 미사리, 동막동유적 출토 토기의 용량을 산출하였다. 그 결과 용량이 대체로 약 41, 17l, 56I 의 璃終로 구분되며 이를 각각 음식의 준비 • 조리 • 저장의 기능을 반영한 것으로 보았다. 107나파산 토기 걸면에 재 등의 불피운 자국이 없기 때문에 토기가 직접 불 위에 올려진 것 갇지는 않으며 작은 자갈돌을 데우는 stone boiling 방법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3 석기석기는 크게 打製石 와 磨製石 로 나눌 수 있다. 타제석기는 냇돌이나
유적명 혐 三角形- 刺式-‘述 책혀-보。트 有-뀐式,‘ 싸왜l카표기 6-製打 - E 쏟-;層윌- j뼈l「댄탬 빼。石훌- ||쾌E기휩 -敵,척石 -鐵출石 石토-짧 뻐섹「||廠 |-뼈l젠||| 빼|뼈l劃 뼈퍼때具외 ll|l헤끼 ||1l돼께개찍 헤|l짧씨 l|!훨|뼈앓石岩器웰
쟈많돌의 몸돌, 또는 거기서 때어낸 격지에 잔손질을 하여 형태를 만든 찍개 • 긁개 • 도끼류로 한강유역을 포함한 서해안 신석기시대의 전통적인 석기이다. 특히 석기재료를 만들 때 자갇돌의 옆면에서 타격을 가하여 떼어내는 방법이 많이 쓰이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타제석기가 한강유역 유적들에서 출토되는 석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타제석기 중에는 구석기전통을 지닌 珪岩製 찍개 • 긁캐 등이 도서지방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마제석기의 출현은 토기의 출현과 함께 신석기문화의 또 다른 특칭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마제기법이 쓰이지만 석기의 종류에 따라서는 타제전통이 오래 남아 있다가 중 • 후기에 이르러 마제기법이 보편화되었다. 108) 돌도끼의 경우 초기에는 몸통을 거칠게 떼어낸 후 날부분만 납작하게 갈아 쓴 경우가 많으나 후기로 갈수록 가는 부위가 넓어지고 전면을 곱게 갈아 광을 낸 도끼도 나온다.
석기를 용도별로 보면 사냥이나 고기잡는 데 쓰인 石銀 • • 漁綱鏡 채집이나 농경활동에 관계되는 石相 • 石jfj: • 石鎌 • 磯石, 工具인 石jf: • 敵石 • 祗石,기타 發火石 등이 있다. 이들 중 가장 많이 나타나는 석기는 석촉 • 석부 • 연석 • 고석 • 어망추 및 礎石製의 굵개와 찍개이다•1) 석촉석축은 타제와 마제가 있으며 후자는 다시 二等邊三角形 • 逆刺式 • 보트형 • 有莖式 등이 있다. 이등변삼각형은 基部가 銀身 길이에 비해 넓은 이등변삼각형식으로 암사동과 상시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다. 역자식은 기부 중간이 위로 패여 양쪽 날개를 만들고 있는 형식으로 한강유역 및 대동강유역 출토 화살측의 주된 형식이다. 보트형은 평면이 길쭉한 보트.같이 생긴 화살촉으로 기부로 좁아들다가 기부를 직선으로 만들었다. 대동강유역의 금탄리 1 문화충에서 나타나며 한강유역에서는 교동동굴에서만 보인다. 유경식 도 교동에서만 출토되며 청동기시대의 유경식과는 달리 슴베와 몸통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다•2) 석부타제와 마제가 있다. 타제는 석부형태의 자연석을 쪼아내어 만든 것이며 마제는 전면을 곱게 간 것도 있으나 刃部만 마연한 것이 많다. 인부는 대부분 岭亦기며 단면은 長情圖杉 • 株角長方形기 있다. 한강 중류에서 발견되는 도끼 중에는 단면이 타원형이고 두께가 얇으며 날끝만 쪼아내어 만든 타제석부가 많이 출토된다. 길이는 9~13cm, 두께는 1.2~3.3cm 안팎이고 한쪽 끝이 좁고 가능거 손에 잡기 쉽게 되어 있다. 이러한 종류의 도끼는 나무베기에는 너무 약하므로 침뿌리 등의 식물성자원을 캐거나 주거지의 수혈울 파는 데 이용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09)
3) 어망추강돌이나 편암둘의 쪼아내어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크기는 10cm가 넘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3~4c 소형이다.4) 발화석불을 만들기 위해 활비비를 돌리던 구멍이 뚫려 있는 발화석은 단독으로 만들어전 것은 없고 암사동 • 상시유적처럼 磯石의 뒷면을 이용하거나 내평 유적갈이 抵石의 한쪽 면을 걷이 이용하였다.5) 연석연석은 조 등의 재배된 곡물이나 도토리 등의 식물성 자원을 가는 데 사용한 석기로 연석 위에 놓이는 磯石棒과 set 사용된다. 연석은 장타단형 • 장방형이 있으며 한쪽 면은 계속된 사용에 의해 말안장처럼 안쪽이 움푹해 진다.4 교역신석기시대에 들어선 이후에는 기본적으로는 여전히 지급자족에 의한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보이나 일부 품목에서는 교역이나 교류가 있었올 것이며 그러한 교역행위가 생각보다 광범위하였을 가능성도 있다.한강유역 신석기시대에서도 몇 가지 유공에서 교역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우선 단양 상시 바위그늘 유적에서 발견된 전복과 무박조개는 바다산으로 특히 투박조개는 남동해안에서 뭍깊이 5~20m 되는 砂審船 서 서 식하는 것으로 내륙 깊숙한 이곳과 동남해안과의 교역을 보여준다.한편 암사동 등 한강 중류에서 발견되는 煙誌紋 등의 토기 중에는 기벽이 얇고 활석이나 석면이 섞인 접토질태토로 빚은 것이 있다. 이들 토기는 운모가 섞인 사질태토로 빚은 디른 토기들보다 숫적으로 소량으로 분명히 다른 전통에 의해 빚어전 것이며 제작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죽 교역이나 교류에 의한 가능성과 직접 현지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다. 전자의 경우 활석이나 석면이 섞인 정연한 토기는 대동강유역 즐문토기의 특칭이므로 한강유역의 그것은 대동강유역에서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후자의 경우를 보면 현재 활석의 산지는 경기도 광주군의 광주광산, 양평군 양평광산, 가평군 가용굉선이고 석면은 가평군 위곡리와 청은리, 충남 홍성군 변계리 ·화봉리 ·마온리 등에서 생산된다. 이러한 산지는 암서동의 경우 가장 가까운 석면산지가 60 km, 활석은 5km 가량 떨어져 있다. 따라서 활석은 쉽게 구할 수 있으나 석면의 경우는 며칠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활석, 석면을 직접 캐왔는지, 교역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고 있지 않다. 또 미사리에서 출토된 雷文土器片도 동복지방과의 교류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밖에 암사동에서는 園醉} 함께 藏岡 조개들이 발견되고 있어 바닷가 주민들과의 접촉을 알 수 있다. 112)위와 같은 유물 이외에도 특수한 石材리든가 骨角器, 조개 • 물고기 • 나무 열매 • 소금 등의 식량에 대한 교역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제6절 編年한강유역의 신석기시대 편년은 둥근 바닥의 포탄형토기를 위주로 이루어져 왔는에 대동깅유역과 한강유역을 한 문화권으로. 합쳐 편년한 경우가 일반적이나 근자에 이르러는 한강유역을 독립시켜 편년하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 두 경우 모두 편년의 기준으로.는 층위의 상하관계, 시문방법과 시문 부위의 변화, 문양의 변천, 대 등을 이용하고 있으나 아직 자료의 부족으로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확실한 편년체계는 짜여 있지 못한 실정이다•
1 연구사우선 지금까지의 편년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소개하기로 하겠다. 韓永熙는 川江에서 한강에 이르는 중 • 서부지방의 신석기시대 편년을 최초로 시도하였다. 113) 그는 즐문토기를 문양의 배열 • 시문 부위를 기준으로 아래와 갇이 네 종류로 나누고 있다.I式 : 구연부 • 동부 • 저부의 적위에 서로 다른 문양을 시문II式:토기 전면을 하나의 施文圈으로 보고 시문IIa- 서로 다른 종류의 문양을 配合施文IIb ―저전면에 횡주어골문을 시문III式:즐문계 무문토기IV式 : 토기 의면에 한줄의 덧띠무늬를 시문하거나 간단한 瓜文 1~2 열을 불규칙하게 시문한 것, 구연부에만 문양을 시문한 것이상의 분류된 문양과 반출된 석기를 비교하고 지탑리유적과 금탄리유적의 층위관계를 고려하여 중서부지방의 신석기시대는 식으로 대표되는 I 기, 식으로 대표되는 기, ll· II • IV식으로 대표되는 기의 순으로 편년되며 1 기는 다시 돌보습 • 돌낫 등의 농기구가 다수 출토되고 瓜文 등의 곡선문이 성행하는 지탑리 l1 지구 문화를 경계로 로 구분하였다.韓永熙의 편년은 소위 식이 식보다 선행한 것으로 보아왔던 기존의 견해를 완전히 뒤엎은 것으로 이후 중서부지방 신석기편년연구의 을 마련하였다.任孝宰는 한강유역의 중류 및 도서지방 출토 토기의 문양을 겁토한 후 부위별 시문의 구분 여하와 시문면적을 기준으로 하여 다음과 갈은 형식을 설정하였다(도면 14)A系 (區分系) : 구연부와 동부에 서로 다른 문양요소로 시문된 그룹 A 全面施文 (구연부와 동부 사이에 별개의 문양이 삽입된 從周口緣部文이 있는 것은 Alb, 없는 것을 Alo 로 구분) , A Il ―底部文 생략, A 底· 部文 생략
B系(同一系) : 구연부와 동부에 갇은 문양을 시문한 그룹 BI-전면시문, BIl-저부문생략, BIll—저·동부문-생략
AB
도연 14 任孝宰(한국 출문토기의 전개)
이상의 분류를- 연대 결과와 비교 검토하여 AIa AIb-+All • Bll -+A III • Blll 순의 변천과정을 상정하고 각 단계를 전기 (B.C. 5000~B.C. 3500), 중기 (B.C. 3 500~ B.C. 2000) , 후기 (B.C. 2000~B.C. 1000) 로 비정하였다. 이러한 편년은 시문 면적의 축소화가 C"연대 결과와 비교 검토하여 편년적 의미가 있음을 검증한 데서 의의가 깊으나 다만 All • Bll가 성행하는 중기에 속하는 자료가 아직 미흡하며 Bl 의 연대 또한 명확하지 않다. 또한 시문 부위만 강조되어 문양론적인 검토가 부족하다.
韓炳三은 와 岩寺洞의 발굴결과와 弓山貝塚의 편년을 근거로 하여 암사동 I (75-5 • 10호 주거지 제의) 암서동 (75-5 • 10호 주거지 : 沈虹磁汶土器) 시도 Il • III 지구一 시도 1 지구 • 암사동 Il 충의 순으로. 변천과정을 상정하고 그 기간은 기원전 천년에서 기원전 천 년까지로 추정하였다. 115)宮本一夫는 문양 구성과 종류, 시대적 특성을 보이는 속성과 변천과정상의 상사성을 기준으로 한강유역 (宮本의 中期鮮)의 신석기시대를 아래와 갇이 기로 편년하였다. I16) 기는 암사동유적의 최하층으로· 단사선문과 종주어골문이 결합되는 시기, Il 기는 구연부 종속문으로 파상접선문이 나타나는 시기, Ill 기는 구연부 종속문에 대동강유역 금탄리 문화층에 처음 나타나는 三角集線文·斜格子文이 서용되는 시기, IV기는 시도 지구와 같이 동부문이 되화되어 다치구에 의한 사격자문 또는 횡주어공문이 시문되는 단계로 구연부 종속문이 소멸되며 전면에 횡주어공문이 시문된 토기도 이때 처음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 기는 저부문이 생략되고 문양이 되화되어 조잡해진다. V1 기는 구연부에 조잡한 단사선문대만 남거나 동부 중간까지 횡주어골문이 시문되는 시기이다但면 15).분託 기본적으로 대동강유역 弓山文化의 편년과 앞서 언급한 孝回 편년을 토대로 한 것이나 여전히 층위에 의한 설득력이 부족하고 V • VI 기 분류 대상유적의 성격도 가상적이어서 가설적 단계실정에 그치고 있다.끝으로 小原哲은 문양 구성과 함께 뽑形의 변천을 함께 고려하여 중부지방의 줄문토기편년을 암사동 기 기一시도기의 순서로 하였다. 17) 암사동
1l| 蠻짧 3 펀 4
도면 15 홈本-夫(조선 유운토기의 현년과 지역성)
기는 별로 엄격한 문양대를 고수한 직립구선의 ~1 기본인 시기로 파상점선문 등의 종속구연문도 같은 기에 포함시켰다. 암사동 Il 기는 기형은 같으나 1 기의 문양대가 부분적으로 붕괴되고 문양 구성은 구연부에 단사선문, 동부와 저부 상단에 횡주어골문, 저부 하단에 방사상문이 배치된 것이 주류를 이룬다. 시도기는 환저와 의반구연이 나타나며 문양구획이 없어져 어골문이 구연부부터 시작되어지는 시기로 시문수법이 소략해진다 (도면 16}. 한편 암사동 기보다 선행하는 단계로 융기문토기를 早期에, 시도에서 보이는 突刺點列文이 시문된 토기를 師罪] 놓았으나 후자는 증거가
암
너무 빈약하다. 또한 小原哲은 구연부에만 문양이 시문된 포탄형토기를 암서동 ll 기에 포함시켰으나 이러한 토기는 시도 지구에서 보이는 것처럼 오히려 시도기의 토기와 공반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연구성과에 의하면 유역의 • 丸底梅文土器가 전면시문에서 부분시문으로 三部位文에서 單一文으로 변천한 것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인정하고 있으나 세부적인 편년망은 한강유역에서 정식발굴되어 보고서가 나온 유적의 수가 적고 충위적 변천을 보여주는 유적은 더욱 드물기 때문에 아직 많은 異論을 보이고 있다.신석기시대 토기에서 隆起文 • 押文과 梅文의 선후관계는 동해안의 오산리 유적과 남해안의 東三 同 上老大島 패총에서 충위적으로 증명이 되었으며 한강유역의 암사동 • 미사리유적에서는 구분문의 즐문토기가 하충, 동일문의 줄문토기가 상층에서 출토되었다. 따라서 한강유역의 신석기시대는 융기문 • 압문의 평저토기가 나타나는 전기, 구분문의 첨 • 환저토기가 성행하는 중기, 동일문의 첨 • 환저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후기로 나눌 수 있다•2 전기융기문은 단양 상시 바위그늘의 뀜째서 출토되었다. 둥근 刻目이 있는 平行隆起帶文의 鉢形土꼽로 동삼동과 상노대도, 오산리유적 등에서도 출토되고 있는데 같은 바위그늘에서 출토된 동남해안산의 무박조개 (쟁伊)와 남해안식의 빗방울무늬 ( )의 존재로 보아 동해안보다는 남해안에서 낙동강올 따라 올라와 전래되어전 것 같다.압토기는 춘천 교동동굴유적에서 개가 출토되었다. 교동의 토기는 底] 기본으로 한 정 태토, 구연과 구순의 끝마무리, 구연부시문, 문양 모티브와 시문기법, 토기표면마연, 環耳 등에서 오산리 平底押文土꼽와 많은 공통성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교동의 토기문화는 동해안에서 북한강 상류를 거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결국 한강완격의 신석기시대 전기에는 동해안에서 들어온 압문토기문화가 북한강유역에, 남해안에서 울라온 융기문토기문화가 남한강유역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나 발견된 유적이 많지 않아 더 이상의 문화내용은 알 수 없다.
연대는 오산리유적과 동삼동패총 하층의 C"연대가 B.C. 5000~B.C. 4500년 전 사이에 집중되어 있어 118) 대략 기원전 천 년대로 보고자 한다.3 중기암사동 하층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1유형)는 구연부에 단사선문, 동부에 종주어골문, 저부에 횡주어골문이나 방사선식단선문을 시문한 전형적인 三部位區分文土器가며 둘째 (2유형)는 구연부와 동부 사이에 파상접선문 • 사격자문 • 삼각집선문 등의 소위 종속구 연부문이 추가된 토기, 셋째 (체형)는 구연부문은 감으나 동부에 횡주어골문이 시문되고 저부는 횡주어골문이 상부까지 계속되며 하부는 방사선문이 시문되거나 문양이 생략된 토기이다.유형과 유형의 선후관계는 대동강유역의 궁산문화 기에서 나타나 고 있다. 궁산문화 기의 지탑리 호 주거지에서는 유형의 토기가 나타나며 지탑리 지구에서는 유형의 토기가 성행하고 있다. 119) 또한 암사동의 2 유형토기에는 동부에 횡주어골문이 시문된 것도 있으며 암사동유적에서 2 유형의 파상접선문토기가 유형의 토기보다 위층에서 출토되었다고 주장하는 설명도 있다. 120)다음으로 1 • 유형과 적형의 선후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전형적인 삼부위문토기의 경우 저부의 문양이 대부분 횡주어골이므로 그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동부는 먼저 종주어골문을 시문하였을 것이라는 추론이 성립된다. 서부지방의 경우 동부에는 횡주어골문이 없으며 횡주어골문은 주로 지탑리찌구와 금탄리 문화충에서 저부 싱부에 시문되고 있올 뿐이다. 반면 한강유역에서는 동부에 횡주 • 종주어골문이 모두 나타나며 남해안에서는 횡주어골문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남해안의 첨저줄문토기가 중서부지방즐문토기의 영향으로 성립된 것으로 보는 일반적인 학설을 따르면 121) 종주어골문이 횡주어골문보다 빠르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시도 지구에서도 종주어골문의 유형이나 유형의 토기는 없고 체형의 횡주어골문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점에서 1-2- 체형의 변천과정이 상정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암사동유적 하층에서는 발표된 글과 논문에 의하면 대부분 위의 세 가지 유형토기가 혼합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후기유적인 시도 지구에서도 1 • 유형의 토기가 계속되기 때문에 충위적 근거가 빈약한 현단계에서는 위의 세 유형의 발생에 있어서 선후관계는 있다 하더라도 상당기간 공존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성이 있다.한편 대동강유역에서는 금탄리 문화충으로 대표되는 궁산문화 기가 있는데 암사동유적에서도 금탄리 문화층 토기의 특징인 띠대문이 보이고 있고 무지개문양이 연평도에서 나타나고 있으나 소량이기 때문에 금탄리 1 문화충의 토기형식은 대동강유역에서만 국지적으로. 성행한 것 같다. 122)따라서 암사동 하층은 시기적으로. 궁산문화 1~3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종주어골문과 종속구연부문이 없는 시도 지구는 암사동 하층문화의 후영에 해당한다• 중기에 해당되는 유적의 C"연대는 다음과 갇 23) (이하 B. P.는 C"연대 , B.C 는 樹輪補正年代)암사동(75년도) 6230 110B. P. 52so~5050B.C.(5175B.C.)( II ) 6050 105B.P. 5100~4900B.C.(soooB.C.)(75-l0호 住) 5510 110B.P. 4490~4350B.C. (4420B.C.)(75 크호 住) 5000 10B.P. 3880~3730B.C. (3805B.C.)(75- 住) 4730 200B.P. 3750~3350B.C. (3550B.C.)(75-5호 住) 4610 200B. P. 3650~3160B.C. (3450B.C.) (74년도) 4950 200B.P. 3980~3570B.C.(3775B.C.)미사리 (8 ) 5100 140B.P. 4160~3740B.C.(3B.C.)위의 연대를 보면 대부분 기원전 천 년대 전반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천 년대의 연대는 현단계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한강유역의 전형적인 즐문토기의 출현시기는 기원전 천 년쯤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124) 그러나 앞으로의 조사결과에 따라서 연대가 더욱 울라갈 가능성도 있다.
끝으로 주변지역과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첨 • 환저의 구분문 즐문토기는 동북지방을 제의한 전국에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중서부지방과 남부지방에서 성행하고 있다. 전형적인 포탄형 줄문토기는 중 • 서부지방에서 성립되었으며 그 발생은 전기의 압문토기에 어골문이 추가되어 만들어전 것으로. 보고 있다. 125) 그러나 아직 발생과정에 대한 연구는 미흡한 편이며 동아시아 신석기시대에서 압문토기의 위치 또한 아직은 명확하지 않은 상태이다.시문기법은 다르더라도 토기를 부위별로 나누어 시문하는 것은 遼寧地方의 興隆蒲126) 小珠山下18 • 新樂文化127) 등의 이론 신석기문화부터 나타나고 있으며 여기서의 동 부문은 압문에 의한 횡주의 지그재그문이 많다. 우리나라의 어골문이 지그재그문에서 변화하였다고 보는 의견이 있는데 128) 橫走의 지그재그문이 沈線化되면 종주어골문이 된다. 또한 중서부지방의 중호문 • 石相 등도 遼西지방 신석기 중반기단계에서 보이고 있기 때문에 129) 양지역간의 밀접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서해안식의 전형적 줄문토기 성립에는 중국 요녕지방 신석기문화의 영향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반면 첨저는 요녕지방에서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멀리 시베리아에서 나타나고 있어 시베리아 신석기문화와의 관련성이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130) 그러나 우리의 즐문토기가 중국 동북지방이나 시베리아의 영향이 있다 하더라도 기형 • 문양 • 태토 등 여러 요소의 종합된 전체적 모습에서 사뭇 독창적인 특칭을 띠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131)중서부지방에서는 대동강유역과 한강유역의 구분문토기는 약간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죽 대동강유역의 토기는 구연부에 押蔚 刺疾에 의한 정열문이 주류를 이루고 동무개 종주어골문이 시문된 반면 한강완격의 토기는 구연부에 압인 • 십선에 의한 단사선문이 주로 시문되고 동부에는 종주어골문과 횡주어골문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시문수법과 어골문의 종류에서 대동강유역이 앞선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중 • 서부지방의 중문토기는 대동강 유역에서 먼저 발생하여 한강으로 들어온 것 같다. 132)
남해안에서는 頭郞目 또는 水佳里 1 기 전영에 구분문의 포탄형 즐문토기가 나타나 중서부지방으로부터의 영향을 엿볼 수 있으나 구연부문이 太線式의 집선문 위주이고동부에 횡주어공문만 나타니는 접, 태토에 운모·석면·활석이 없는 접 등은 남해안의 특칭이다. 중부지방에서 남해안으로의 交流해안선과 내륙(남한강-+낙동강) 두 노선이 있으나 해안을 따른 교류는 서남지방의 조사가 미홉하여 정확히 알 수 없다.남한강을 통한 남부지방으로의 전파와 함께 북한깅을 통한 동해안으로의 전파도 나타나고 있다• 북한강에서 중기에 해당하는 유적은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지만 동해안의 오산리 상충에서는 서해안식의 구분식 첨저토기와 어 망추가 출토되고 있으며 領津里 • 加 也 등에서도 분포되고 있다.* 金壯錫온 「오산리토기의 연구」 (서울대학교 문학석사학위논문, 1991. 8) 에서 오산리와 증서부지방 사이에 칙접적인 관련성을 설명할 수 있는 유적이 전무하고 양지역의 문양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는 접에서 오산리의 첨저토기가 중서부지방보다 는 오히려 남해안의 침선문토기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전에 중서부 • 동해안 • 남해안 세 지역 토기의 상관관계에 대한 밀도 깊온 연구가 더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중기의 특징은 구분식 줄문토기는 기원전 천 년경쯤 대동강유역에서 발생하여 한강유역으로 들어온 후 구연부의 단사선문, 동부의 횡주어골문, 태토의 운모 혼입 등의 새로운 변화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어서 남한강과 북한강을 거슬러 남해안과 동해안까지 문화가 확산되고 있어 이때가 한강유역 신석기문화의 전성기임을 알 수 있다•
4 후기후기는 전면횡주어공문토기를 특징으로 한다. 어골문토기는 암사동과 미사리 상층에서 출토되어 구분식보다 후기임이 층위적으로 증명되었다. 암사동과 미사리 상층에서 출토된 토기에 대한 구체적 보고는 아직 나와 있지않으나 구연부부터 동부 하단까지 횡주어골문이 시문된 토기가 주류를 이루 고있다고보고있다.
시도 1 지구와 望貝塚게서는 횡주어공문과 함께 횡주어골문이 해체된 것 갇은 간격이 넓은 단사선문이 구연부와 동부에 시문된 토기도 출토되고 있으며 횡주어골문도 상하가 겹치는 등 조집해지고 간략화된 것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중기의 구분문토기도 동부 또는 저부문이 생략된 채 계속 출토되고 있으나 앞의 同一式에 비하면 소량이다.횡주어골문토기는 대동강유역에서도 궁산문화 끼 또는 금탄리 Il 문화충에서 처음 나타나고 있어 한강유역과 같은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전면에 시문된 것도 있으나 바닥 하단은 시문이 안 된 것이 많다. 그러나 남해안에서는 어골문토기가 수가리 1 기 전영에 나타나고 중엽 이후는 나타나지 않아 중서부지방과 다른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두 가지 가능성을 말해 주는데 하나는 수가리 1 기 전영의 연대가 금탄리 문화층이나 한강유역 어골문토기유적과 갇울 가능성이고133) 다른 하나는 수가리의 연대가 더욱 오래되었고 따라서 횡주어골문토기가 남해안에서 먼저 발생하였을 가능성이다. 이 밖에도 횡주어골문토기가 중기에 이미 출현하였을 가능성도 있으나 대동강유역에서 정식발굴된 중기유적에서는 횡주어골문토기가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고 한강유역에서도 횡주어골문토기가 암사동이나 미사리유적 하층에서 나왔다는 증거를 현재로서는 찾아볼 수 없다.이와 함께 횡주어골문의 기원과 성립에 관한 문제가 제시된다. 횡주어골문은 남해안에서 압문토기의 구연부에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에서 십선에 의한 전면횡주어골문토기가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구분문토기의 저부에 시문된 횡주어골문이 동부로 올라오고 다시 구연부를 포합한 토기전면에 시문되었을 가능성이다. 이러한 가정에 의하면 동부에 횡주어골문이 시문된 한강유역에서 횡주어골문토기가 발생하게 된다. 셋째는 대동강유역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하였을 가능성인데 대동강유역은 정연하고 전면에 시문된 것이 많고 한강유역은 조잡하고 바딕이나 동부하부의 문양이 생략된 것이 많으며 태토가 구분식과 다른 접을 둘 수 있다. 그런데 요서지방의 신석기토기를 보면 횡주어골문과 유사한 縱走의 지그재그문을- 전면에 시문한 것은 文化에서 처음 나타나며 요동반도에서는 小珠山中 에 횡주어골문이 처음 나타나기 때문에 河의 지그재그문이 심선화되면서 횡주어골문토기가 발생하였을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한편 대동강유역에서 횡주어골문토기가 먼저 발생한 것으로 볼 경우 한강유역 중기의 동부에 시문된 어골문 또한 횡주어공문토기의 영향으로 발생하였다는 주장도 나오나 현단계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금까지 횡주어골문토기의 성립에 관한 문제를 살펴보았으나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고 단지 횡주어골문토기, 죽 동일문토기와 구분문토기는 별개의 전통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과 한강유역에서는 후기 유적에 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횡주어공문토기는 주로 해안가와 도서지빙에 밀집분포되어 있어 서해안을 따라 확산된 것으로 보이며 한강 중류와 남한강, 북한강유역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후기 유적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연부나 동부 문양까지만 남아 있는 구분문토기도 같이 공반되고 있으며 단양 상시 , 도담 금굴 등 남한강안의 유적에서는 남해안의 후기 줄문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남해안 즐문토기문화의 역류를 생각할 수 있다.끝으로 후기의 연대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134烏耳島 4080 45B.P 2860~2620B.C. (274B.C.)蘇島 3860 42B P. 2540~2190B.C. (2225B.C.)矢島 (3지구) 3040 5 5B.P. 1480~ 1210B.C. (1310B.C.)(石塚) 3100 60B.P. 1540~ 1320B.C. (143oB.C.)(石塚) 3040 6oB.P. 1480~ 1110B.C. ( 1375B.C.)(石塚) 2870 60B.P. 1260~ 1020B.C. ( 1140B.C.)石壯里 2990 130 B. 1490~ 1110B.C. (1300B.C.)이중 오이도와 소야도 패총은 구연부와 동부에 횡주어골문이 시문된 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시도 석총은 출토된 토기가 극소수라 토기 종류를알 수 없다. 석장리는 부여 나복리와 비슷한 有文土器가 출토되었다고 보고 있다.
C"연대에 의하면 후기의 연대는 기원전 천 년대 중반부터 천 년대까지 이며 다론 지역의 편년에 비추어도 이 연대가 타당하다. 다만 동일식의 횡주어골문토기의 출현연대는 앞으로의 조사결과에 따라 더 울라갈 가능성도 있을것이다.제 7 절 종합기원전 천 년대경 현재보다도 따뜻한 기후환경 속에 우리나라의 신석기문화가 시작된다. 초기 주민들은 동북지방과 동남지방의 해안에서 어로와 수렵을 기본적인 생업경제로 살았는데 이때의 문화는 크게 陸起文土器文化와 押文土器文化의 두 문화전통이 있었다.이들 주민 중 일부가 기원전 천 년경 한강유역으로 진출한다. 압문토기 문화는 동해안에서 북한강유역으로 들어오는데 춘천 교동동굴유적에서는 동해안의 오산리유적 출토 토기와 유사한 平底押文土器와 結合式魚具가 출토 되었다. 또한 융기문토기문화는 님해안에서 들어오는데 단양 상시 바위그늘유적에서 平行階 汶土器가 동남해안산의 무박조개와 함께 출토되고 있다. 그러나 두 토기문화 모두 유적이 한 곳씩밖에 없고 유적도 동굴이나 바위그늘이기 때문에 한강유역이 정착된 문화로 보이지는 않는다.기원전 천 년경 대동강유역에서 口緣部 • 開部 • 底部게 서로 다른 문양을 넣은 포탄형토기를 기본으로 하는 구분문계의 압문토기문화가 발생한다. 대동강유역의 이 문화가 한강유역으로 들어와 암사동 • 미사리 등의 한강 중류에 정착한댜 한강유역의 중문토기는 문양에서 구연부에 단사선문이 주로 시문되고 동부에는 대동강유역에서는 없던 횡주어골문이 나타나며 운모가 태토에 섞이는 등 한강유역 특유의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이때가 한강유역 신석기문화의 전성기로 구분문계의 줄문토기가 북한강을 거쳐 강원도 동해안으로, 남한강과 서해안을 거쳐 남해안으로 확산된다. 특히 동남지방에서는 한깅유역 토기문화의 영향으로 太線式의 楠文土器文化가 발생하며 멀리 北却料 式土器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시기의 주민들온 원추 • 사각추형의 움집을 지어 定住街租울 하였으며 수렵 • 어로 • 채집활동 의에도 조 • 피를 재배하는 원시농경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농경이 전체 식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천 년대 중반경 대동강과 한깅유역을 포함한 서해안에 새로이 횡주어골문으로 대표되는 동일문계토기가 나타난다. 구연부와 동부 문양의구분 없이 횡주어골문을 시문하였으며 이전의 토기와 달리 砂粒을 섞은 점토질태토로 빚은 토기이다. 이 시기에 대동강유역에서는 구분문계토기가 거의 사라지나 한강유역에서는 저부나 동부의 문양이 생략된 구분문계토기도 계속 존재하는데 동일문계의 어골문토기에 비해서는 소량이다.유적은 바닷가와 도서지방에 밀집되어 있으며 한강유역의 내륙지방에서도 발견되나 대부분 산포지나 포함충에서 발견되었을 뿐이고 주거지는 내평과 삼거리 • 옥석리 유적에서 발견되었으나 완전한 형태는 아니다. 바닷가와 도서지방의 1 년대에 나타나는 기온의 냉량화 또는 해수면의 하강과 관계되는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내륙의 많은 곳에서는 즐문토기가 무문토기와 같이 출토되고 있어 양 토기문화가 중복된 증거로도 인용되고 있는데 아직 무문토기주거지에서 즐문토기가 완형으로 출토된 예도 없고 또한 줄문토기가 혼입되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속단할 수 없다. 그러나 즐문토기문화가 무문토기문화 이후에도 지역에 따라 존속하였을 가능성은 부정 할수없다.동일문계의 횡주어골문토기는 북한강유역과 강원도의 동해안가에서도 나타나나 남해안에서는 거의 출토되지 않기 때문에 구분문계 토기처럼 크게 획산되지는 않은 것 같다. 반면 남한강유역에서는 남해안의 후기와 말기 줄문토기의 요소가 많이 나터나 남해안 줄문토기문화가 다시 낙동강유역을 거쳐 남한강유역으로 올라왔음을 보여준다.이상 한강유역의 신석기문화를 살펴보았는데 워낙 정식발굴된 유적이 드물기 때문에 피상적인 겉핥기에 그치고 만 것이 유감으로 앞으로의 조사활성화를기대하여 본다.
附記1988년 초에 제출된 이 글은 198 까지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그러나 제반사정상 책의 발간이 늦어져 1992년에 이르게 되었고 이제 글을 다시 되돌려 받았지만 그간의 급격히 발전된 고고학적 성과를 제대로 보충하기에는 시간적 여력이 미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에 이르러 생각이 다소 바뀌거나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는 부분도 여러 군데 있다. 예를 들어 본문에서는 신석기 시대 편년을 크게 先節文土器期와 衍文土器期로 나누었는데 큰 흐름은 변하지 않았지만 최근에 빌굴된 欲知島, 松島, 煙台島를 비롯한 남해안의 패총유적을 보면 선줄문토기기의 隆起文土器押文土器가 적어도 남해안지방에서는 줄문토기기에도 계속 잔존하고 있는 것으로 나터나고 있다. 한편 소위 서해안식의 尖圈距단꼽는 押 또는 口緣部文土器게 魚骨文울 첨가해서 만들어전 것이라는 견해를 받아들였으나 실제로 그러한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유적이나 압문토기가 서해안에서 발견되고 있지않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가설에 불과할 뿐이다. 오히려 平底 • 尖底土꼽와 마찬가지로 隆起文과 암문, 즐문토기는 모두 애초부터 出自가 다를 가능성도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포함하겨 본문을 대폭 보충할 필요가 있지만 여기서는 注를 보충하거나 補注를 넣고 추후의 연구를 위하여 1988 이후에 발표된 신석기 관계 문헌목록을 아래에 싣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1992. 4. 30)일산 신도시개발에 따른 구제발굴의 일환으로 고양군 성저리, 주영리 일대에 형성된 토탄층에 대한 발굴이 1991년에 선사문화연구소의 손보기 박사를 주축으로 이루어지고 발중서용이 최근에 발간되었다(한국선사문화연구소 • 경기도, 1992, 「일산 신도시개발지역 학술조사보고 ――유적발굴성과」). 자연과학과 고고학이 결합된 이번 토단층의 발굴에 의해 한강 어구의 홍적세 자연환경에 대한 폭넓은 자료가 얻어질 수 있었다 .• 신석기시대에 관한 새로운 정보로는 同一文系의 文土가 주영리 새말의 갈색 토탄층과 그 아래의 사질충에서 출토되었다. 또한 볍씨가 기원전 천 년기로 추정되는 성저리와 가와지의 토탄층에서 발견되었다고 보고되었다. 그러나 벼가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한강하류개서 재배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서 필자는 아직은 판단을 유보한다(1992. 9. 30참고문헌
姜仁求, 「中國束北地方 迫蹟의 硏究――-遼河流域地方의 古文化」, 〈韓國史學)) 11, 1990, pp. 31-92.慶熙大學校博物館, 『欲知島』, 1989.國立慶州博物館, 蔚珍厚浦浦里遺蹟』, 1991.國立光州博物館, 『突山松島 I 』, 1989.國立光州博物館, 『突山松島 II 』, 1990.國立晋州博物館 • 統營郡 『欲知島』, 1989.金秉模 • 沈光注, 『安眼島古南里貝塚―― 次發堀調査報告書』, 漢陽大學校博物館,1990.金秉模• 安德任, 『安眼島古南里貝塚-__ 功穴發堀詞査報告뺨』, 漢陽大學校博物館,1991.金壯錫, 「오산리토기의 연구――상대편년 및 타지역과의 관계」, 서울대학교 문학 석사학위논문, 1991년 .8월.金壯錫• 林尙澤 • 安承模, 「한반도 신석기 문양명칭 일람표」, 〈韓國考古學報》 26, 1991, pp. 141-172.金炳虎, 岩寺洞 先史住居址 保存處理」, 〈文化財〉 21, 1988, pp. 262-284.東亞大學校博物館, 陜川鳳溪里遺蹟』, 1989.朴九秉, 上老大島山登貝塚發堀祠査」, 《嶺南考古學》 , 1988.白燦圭, 「岩寺洞先史遺蹟復元整備工事」, 《改化財》 21, 1988, pp. 240-261.변사성,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질그릇재료의 변천」, 《조선고고연구》, 1988. 3, pp. 7-10.변사성 ·고영남, 「마산리유척의 신석기시대 집자리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89. 4, pp. -20.서국태, “강원도지방의 신석기시대 유적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88. 4, pp. S-24.—, 「씨비리지방 신석기시대 문화의 특징」, 《조선고고연구》, 1989. 4, pp. 8 -14.—, 질그릇을 통하여 본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문화유형」, 《조선고고연구》, 1990. 3, pp. 2-6.서오선 ·조현종, 新岩里 l , 國立中央博物館, 1988,
宋銀淑, 「韓國 南海岸地域 新石器文化에 대한 考察」, 서울대학교 문학석사학위논문, 1991.신숙정 , 「북한고고학계의 신석기문화 연구동향」, 〈博物館紀要》 6, 1990, pp. 49 -76.—,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자연환경-남해안지방을 중심으로, 〈價國上古史學報〉〉 10, 1992, pp. 17-82,申鍾煥, 蔚州 新岩里迫蹟」, 《嶺南考古學〉〉 6, 1989, pp, 127-171, 安承模 「新石器時代」 韓國考古學報)) 21, 1988, pp. 35-62,安春培 「居昌壬佛里 先史住居址 視踏那報 ( 1) 」, 《嶺南考古學》 6, 1989, pp. 73-125 이기길, 「무늬 제작기법으로 본 신석기토기의 연구__동삼동유석을 중심으로」, 〈東方 學志〉〉 64, 1989, pp. 51-74,—, 「동삼동回에서 나온 신석기시대 덧문지른무늬토기의 연구 (1) ―一물그릇 만들기를 중심으로」, 《古文化〉〉 34, 1989, pp. 3-32.이기길 • 황성옥, 「암사동유적의 신석기시대 뾰족밀무늬토기연구」, 멍濱基博士停年紀念考古人類學論敬』, 知識産業社, 1988, pp. 27'-340,李盛周, 「新石器時代」, 『國史館論穀』 16, 1990, pp. 1~66.이융조 • 신숙정, 「중원지방의 빗살무늬토기고찰」,孫寶基博士停年記念考古人類學論叢, 知識産業社, 1988, pp. 341-388.李淸圭, 『北村里遺蹟__ .新石器時代 바위그늘 집자리』』濟州大學校博物館, 1988.—, 「제주도 高山里 출토 隆起文土器」, @여羅文化〉〉 9, 1989, pp. 135-154. 李亨求, 「渤海沿岸 빗살무늬토기문화 硏究, 〈때國史學》 10, 1989, pp. 1-76.任孝宰, 「중부 동해안과 동복지역의 신석기문화 관련성 연구」, 代 고학보》 26, 1991, pp. 37-68.任孝宰 • 朴淳發 『烏耳島貝塚__新浦洞 A, 貝塚發撮霞査報告』, 서울대학교박물관, 1988.任孝宰 • 李俊貞 『繁山里遺蹟 』, 서울대학교박물관, 1988. 자료실, 「압록강유역, 요동반도 남단의 이른 시기 신석기시대 유적들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88. 3, pp. 2-6.張明洙 蟾津江下流의 貝塚文化;河東 牧島里·錢島里,光陽 烏沙里貝塚을 中心으로, 《古文化〉〉 34, 1989, pp. 33-78.
—, 「鏡湖江流域 出土 先史遺物 新例에 대한 小考」, 《博物館紀要〉〉 5, 1989, pp. 115-132.장호수, 「상노대도유적의 석기」, 孫寶基博士停年記念考古人類學論叢』, 知識産業社, 1988, pp. 205-226.-, 「조개더미유척의 성격一―서해중부도서지역의 신석기유적을 중십으로., 《臼山學報〉〉 35, 1988.鄭澄元 「中園 南北地方의 隆起文土器」, 〈韓國考古學報》 26, 1991, pp. 5-36. —, 「南海岸地方 初期 梅文土器의 一檢討」, 《嶺南考古學〉〉 7, 1989, pp.1 -22 鄭澄元 • 鄭漢德, 慣國島煥地方®遺蹟」, 《季f j考古學》 38, 1990, pp. 83-85. 鄭澄元 外, 新岩里 II 』, 國立中央博物館, 1989. 최삼용, 「상노대도유적의 동물뼈화석에 나타난 자른 자국」,孫寶基博士停年記念 考古人類學論叢』, 知識産業社, 1988, pp. 227-274. 崔盛洛, 「黑山島地域의 先史遺蹟」, ((陶澳文化〉〉 6, 1988, pp. 43-69. 崔夢龍• 姜炳台, 「淡沙里出土 土器의 科學的分析」, 『용남차문석교수회갑기념 사학 논총~』, 1989, pp. 805-816. 韓永熙, 「慶南 統營郡 煙谷里貝塚 發堀調査槪要」, 『第 32回全國歷史學大會發表要旨』, 1989, pp. 333-337. —, 韓半島新石器時代®地域性」, 〈季刊考古學》 38, 1992, pp. 30-34. 韓永熙 • 任鶴種, 煙台島 조개더미 斷槿部 II 」, ((韓國考古學報〉〉 26, 1991, pp. 69-140. 迂稜三, (7)堅果食 l- 日韓先史時代' } 食(7)共通性―」, 〈 崔閑職〉 132, 1989, pp. 145-190.小原哲, 며朋目文土刃變遷J, 0'>T(7)考古七歷史』 上, 1987, pp. 325 -372. 廣, 대願副債南地方摘目文土器前期(7)土器變遷, 《考古學®世界〉〉, 1989. ’ 대-目文後期 變退, 〈야사博古學〉〉 63, 1989. ' r" 目文土 編年」, 〈淨甲博古學》 38, 1992, pp. 71-74. 島, 日韓 文物交流」, 협甲博古學》 38, 1992, pp. 54- 58. 金浩, 맹細半島 動廊負存體b 〈 考古學》 38, 1992, pp. 79-82.주 1) 安田喜憲 外, 「韓固仁七낡&環境빛遷史&農耕®起源」, " , 環境變遷史』(日本文部省海外 祖분中間報告), 1980, pp.1-19. 2) 中井信之 • 洪思i奧 「韓固永郞湖椎積物(J)地球化學的手段1: J: 古氣候變遷 硏究」,며'::七 環境빛遷史』, 1980, pp. 57-61, 3) 박영철, 「한국선사시대의 자연환경연구」, 〈韓國史硏究)) 14, 1976, pp. 3-30, 4) Park, Y.A., "Submergence of the Yellow Sea Coast of Korea and Stratigra-phy of the Sinpyeongcheon Marsh, Kimje, Korea," The Journal of tlze Geological Society of Korea, Vol. 5, No, 1, 1969, pp. 57-66, 5) 李燦 「自然環境」, 『한국사 I 』, 국사편찬위원희, pp. 58-60, 6) 諒相俊 外, 대효半島 後永期 海面變化의 地形學的 證城」, 〈얘頃學會誌)) 13-1, 1977, pp. 15-22. 7) 金瑞雲, 대祚硏相節齡節碑에 발달하는 斷丘에 관한 硏究」, 〈여頃學會誌〉〉 9-2, 1973, pp.88-121, 8) 鄭澄元 外, 『金海水佳里貝塚 I 』, 釜山大學校博物館, 1981, pp.22-28, 9) 中困科學院貢陽地球化學硏究所第四紀子包粉組 • C" "Development of Natural Environment in the Southern Part of Lianing Province during the Last 10,000 Years," Scientia Sinica, Vol. 21, No. 4, 1978, pp. 516-532, 10) 金元龍, 었輯헌芹學槪說』 第三版, 一志社, 1986, pp.23-24, 11) 隆起文土器] 대한 논문은 다음과 갇은 것들이 있다. 鄒ti, 南海岸地方隆起文土꼽에 대한 硏究」, 〈沒大史學〉〉 9,' 198'· —, 「中園東北地方의 隆起文土器」, 〈僧虐猪古學報〉〉 26, 1991, 小原哲, ·'Jl區睦起文土威硏究J, 〈偵頂固庫》 13 • 14, 1985. 廣潮雄一, 며師鄧堡起文土꼽 系譜&年代」, 〈頃 t》 12, 1986. 12) 押文土꼽는 口緣部文土器(金元龍, 주 10) 앞의 책, p. 28) 로도 불리어지나 摘文土器 중에서도 구연부에만 시문한 토기가 있기 때문에 본문개서는 施文手法에 의해 압문토기로 부르기로 한다. 13) 金元龍 주 10) 앞의 책, pp. 39-40. 이의에 시베리아와 중국 동북지방의 원시토기에 대해서는 아래 논문 참조. ® 大貫靜夫, 「極東(J)先史文化」, 쩡劑考古學》 38, 1991, pp. 17-20. ® 李陳奇 「中國東北 新石꼽文化 , 古學》 38, 1991, pp. 21-24. ® 戶田哲也, 凍1/,..: 1) , ~羽考古學》, 38, 1991, pp. 62-6,. ®木村英明, 「北海道(J)石刃儀文化&東北 (l)文化』, 考古學》 38, 1991, pp.43-47, 14) w. Kim, ''Emergence of Pottery in Korea," Korean Studies Internationa.l 1, 1986.
15) 韓永熙, 「地域的 비교」, 〈〈薛國史論〉 12, 國史編慕委員ft. 1983, pp.484-489, 16) 즐문토기의 編年과 변천은 아래의 논문이 대표적이다. 宮本一夫, 며膳料 文土器 編年之地域性』, 〈〈朝鮮學報 121, 1986, pp.1-48. 小原哲, 「朝鮮節目文土器 윗遷」, 멤口 Tm考古之歷史 , 1987, pp. 326-372. 17) 鳥居龍藏, 「平安南道 • 黃海道古i鎖班査報告」, 大正五年度古f街班査報告』, 1917. 18) 韓炳三, 『矢島貝塚』, 國立博物館, 1970. 19) 金元龍, 連{ j望)貝塚發堀訓稽南連祐 〈®活g考古學報〉〉 7, 1979. 20) 金載元 • 尹武炳, 印混技石墓硏究』, 國立博物館, 1967. 21) 崔夢龍 外, 「白翔 • 延坪島의 節文土器文化」, 〈個泥 文化〉〉 3, 1982. 22) 崔夢龍 外, 위의 책. 任孝宰, 며莊g西海中部郞澳의 節文土器文化」, 《考古學〉〉 2, 1968. 23) 金廷lQ, 「韓國幾何學文土器文化의 硏究」, 《白山學報)) 4, 1968. 24) 和田雄治, 며月鮮 先史時代'적沈 」, 〈〈考古學雜誌〉〉 4-S, 1914, 25) 張明洙, 「강화 동막리 빗살문토기의 유적과 유물. , 《古文化〉〉 30, 1987. 26) 손보기 의, 「서해안우도의 선사문화」, 博物館紀要』 3, 檀固大學校, 1987. 27) 지건길 • 안승모, 「서해도서지방의 지표조사 (2) 」, 《中島〉〉 V , 園立中央博物館,1984. 28) 한영회 • 안승모, 「서해도서지방의 지표조사 (1) 」, 《中島〉〉 W, 園立中央博物館,1983. 29) 任孝幸 주 21) 앞의 책. 30) . 國, 永宗島雲南里支石墓」, 『金愛麻博士梨花勤頃 40周年紀念論文集』, 1966, 31) 金載元 • 尹武炳, 莊g西海島模』, 固立博物館, 1957. 32) 尹武炳 「烏耳島貝塚」, 《考古美術〉〉 1-4, 1960, 任孝宰, 주 21) 앞의 책. 군·朴淳發 『烏耳島貝塚』, 서울대학교박물관, 1988. 33) 任孝幸 「土 의 時代的 變遷過程」, 〈停'國史論》 12, 1983, p.6n. 任孝宰 • 朴淳發 앞의 책에서는 4080 45B.P의 연대가 겁출된 오이도 복부 패총 군을 갈은 섭의 신포동 A • C 패총과 갇이 신석기 중기 후반에 편년하였고 동 신포 동 El총과 남서부 패총은 후기 전반, 철대연대로는 B.C. 2000~ B.C.1soo년 사 이에 비정하였다. 34) 橫山將三郞, 9)"東部外 史前遺蹟」, 간學論羲》 S • 6, 19B. 35) 有光激;一, 穆隋i目文土뜹 硏究』, 京都大學校, 1962. 36) 金元龍, 岩寺里遺蹟의 土꼽 • 石폼」, 〉 17 • 18, 1962, 37) 金廷鶴, 國幾何文土꼽文化의 硏究」, 《白山學報》 4, 1968. 38) 金輝, 岩詩紅熙"環瞬陣」, 置虹璋》 13, 1970. 39) 金鍾徹, 「서울 성동구 암사동 선사시대 유적발굴」, 《박물관뉴우스》 18, 1971.
金鍾微 「서울岩寺洞先史緊落址」, 〈韓國考古學年報〉〉 2, 1975. 李白圭, 「岩寺洞新石器時代住居址調査」, 〈韓國考古學年報〉〉 3, 1976, 韓永熙, 「薛半島中 • 西部地方의 新石器文化」, 〈韓國考古學報〉 5, 1978, 40) 任孝宰, 岩寺洞」, 서울대학교박물관, 1985, 41) 李白圭, 주 39) 앞의 책, p. 14, 42) 任孝宰, 주 40) 앞의 책 , p. 33, 43) 韓炳三, 「梅目文土器」, 『世界困磁全集』 17, 小學館, 1979, p.149, 44) 이기길 • 황성옥, 「암사동(바위절)유적 신석기시대 뾰족밑 무늬토기의 연구」, 손 보기박사 정년기념 고고인류학논총』, 1988, p.298, 45) 薛永熙, 주 39) 앞의 책, p.73, 46) 金元龍 「廣州淡沙里梅文土器遺蹟」, 〈 》 14, 1961, 47) 金鍾澈, 「廣州淡沙里節文土器遺蹟에 對한 小考」, 〈個虛汚古〉〉 1, 1967, 金廷 37) 앞의 책. 48) 任孝幸 「淡沙里遺蹟緊急發堀調査」, 〈個虛博古學年報〉〉 8, 1981, 49) 尹世英, 「淡沙里住居址」, 〈 》 25, 1981, 50) 金鍾徹, 주 47) 앞의 책. 51) 金元龍, 주 46) 앞의 책, pp. 141-145, 52) 崔淑, 「淡沙里遺蹟의 一磨石器」, 《考古美術》 4-6, 1963, 53) m, 주 33) 앞의 책, p. 625. 54) D. Chase, "A Limited Archaeological Survey of the Han River Valley," Asian Prspective 4-1 • 2, 1961, S. M. Nelson, Han River Chulmuntogi, 1975, Western Washington State College. 55) 林炳泰, 「楊州郡 鎭中里先史遺蹟發堀報告」, 『八堂 • 昭島댐水沒地區遺蹟發撮綜合 報』, 文化財管理局, 1974, 56) 李白圭, 「楊州郡 芝銘里遺蹟」, 《考古學〉〉 4, 1977, 57) 忠北大博物館, 『板橋-九里 • 新葛러져 高速道路 文化遣蹟地表調査報告睿1987, 58) 金裁元 • 尹武炳, 야顧配戈七墓硏究』, 1967, 59) 金元龍 「春川校洞穴居遺蹟과 遺物」, 〈 》 20, 1963, 60) 國立慶州博物館, 禪浦里遺蹟』, 1991, 61) 任孝宰 • 權鶴洙, 『繁山里遺蹟』, 서울대학교박물관, 1984. 교동유적의 원 보고서에는 組合式漁具가 石鎖으로 찰못 분류되어 있다. 62) 金元龍 주 59) 앞의 책, pp.24-25. 63) 小原哲도 校洞遺蹟을 前期 이전의 유적으로 보고 있다. 小原哲, 주 16) 앞의 책, p. 347,
64) 韓炳三 外, 1F恥江水沒地區遺蹟發堀開査」, 八堂 • ,김陽 水沒地區遺蹟發撮綜合 誤踏國』, 文化財管理局, 1974. 65) 韓永熙, 주 39) 앞의 책, pp. 74-75. 66) 李健茂 外, 《中島》 1, 國立中央博物館, 1980. 최북규, 『중도유적지표조사보고』, 강원대학교박물관, 1984. 67) 지전길 • 이영훈, 〈〈中島)) V , 국립중앙박물관, 1984. 68) 有光敎一, 여月鮮江原道(J)先史時代遺物」, 《考古學雜誌〉〉 28-11, 1938. 69) 金元龍 「加平馬場里治鐵住居址」, 〈偏혼史學報〉〉 50 • 51, 1971. 70) 崔茂藏, 「加平梨谷里鐵器時代住居址發堀調査報告 」, 園大人文科學論霞』,1979. 71) 小原哲, 주 16) 앞의 책 , pp. 348-349. 72) 손보기, 「단양상시유적발궁중간보고」, 『한국고대사의 조명』, 충북대학교, 1981. 73) 홍현선, 「상시 바위그늘의 문화연구」, 연세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87. 74) 鄭澄元, 주 11) 앞의 책. 75) 손보기, 「단양도담리지구유적발굴 조사보고」, 84忠 水沒地區文化遺蹟發提調 1IJ, 1984. 76) 李陸助 「堤原黃石里 地區遺鎖發堀格報告 」, 82 忠州댐水沒地區文化遺蹟發撮調 査룡報告 』, 1982. 77) 崔龍 • 林永珍, 「堤原楊平里印也區發堀麗査報告」, 82忠t 댐水沒地區文化遺蹟發 堀』, 1982. 78) 忠淸北道, 『忠州댐水沒地區文化遺蹟發堀詞査綜合報告 』, 1984. 이융조·신숙정, 「증원지방의 빗살무늬 토기고찰」, 『손보기박사정년기념 고고인류 학논총』, 지식산업사, 1988. 79) 任世權, 평창강유역의 무문토기문화」, 《嶺南考古學)) 1, 1986. 80) 任孝宰 주 40) 앞의 책, p. 35, pp. 54-55. 81) 도유호, 『지탑리원시유적발굴보고』, 북한고고학연구소, 1961. 82) 도유호 • 황기덕, 『궁산원시유척발굴보고』, 북한고고학연구소, 1957. 83) 金鴻植, 岩寺 復志」. ((,c化財》 18, 1985, p. 44. 84) 韓炳三 外, 주 64) 앞의 책 , p. 462. s,) S.M. Nelson, 주 ’4) 앞의 책, pp. 105-107. 86) 金元龍 주 10) 앞의 책, pp.44-4 퍼 주 34). 87) 도유호 • 황기덕, 주 82) 앞의 책. 88) 서국태, 『조선의 신석기시대』, 사회과학출판사, 1986, p.108. 89) 서울特別市編纂委員會, 멩紅丈』, 1985, pp. 74-80. 90) 서국태, 주 88) 앞의 책, pp.94-96. 91) 崔淑嶋 주 ,2) 앞의 책.
92) Shuzo Koyama • D.H. Thomas, "Affluent Foragers," Senri Ethnological Stt,dies No. 9, National Museum of Ethnology, 1979, 辻綾三, 맹衍多 (J)堅果食――日韓先史時代 각: ) 共通庄, 〈個虹韓〉〉 132, 1989, pp.145-190. 93) S.M. Nelson, 주 54) 앞의 책, pp.91-93, 94) 李賢惡 「韓半島 銅器文化의 經劑內 背景」, 〈慣國史硏究》 56, 1987, p. 10, 95) 池健吉 • 安承模, 「韓半島 先史時代 出土 穀類와 農具」, 며國의 農耕文化』, 京畿大學校, 1983, pp. 53-75, 96) 서국태, 주 88) 앞의 책, pp.79-90, 길경택, 「한국선사시대의 농경과 농구의 발달에 관한 연구」, 《古文化〉〉 27, 1985. 97) 安承模, 「遼西地方의 先史時代 石製耕具」, 『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紀念論最 I 』·1987, p.721, 98) 이기길 • 황성옥, 주 44) 앞의 책, p. 298, 99) 이기길, 앞의 책 , p. 29~| 주 74) . 100) 諒永熙, 주 39) 앞의 책, p. 53. 101) 이기길 • 황성옥, 주 44) 앞의 책, pp. 301-302, 102) 이기길 • 황성옥, 위의 책, p. 304. 103) 이기길 • 황성욱, 위의 책, pp. 319-321. 104) m, 到簡文土器 展開」, 『末盧國』, 1983, p. 89. 105) 韓熙, 주 15) 앞의 책, p. 500. 106) 任孝宰, 주 22) 앞의 책 , 의 中.107) 任孝宰 • S.M. Nelson, 「和國 梅廷距 容點貞出과 그 文傾澤味J, @$國考古學報》 1, 1976, pp.117-121. 108) 黃龍i軍, • 骨 」, 〈慣國史論》 12, 1983, pp. H6-580. 109) S.M. Nelson, 주 8,) 앞의 책, pp. 10,-101, 110) 홍현선 주 73) 앞의 책 , p. 62. 111) 이기길 • 황성옥, 주 44) 앞의 책, pp.299-300. 112) 金元龍, 生業經濟」, 』, 1973, pp.99. 신석기시대의 활발한 교역이나 문물교류는 특히 남해안과 일본의 九州지방 사이에 서엿볼수있다. 島津義沼, 日本0文物 」, 땝甲博古學) 38, 1992, pp. ,4-,s. 113) 韓永熙, 주 39) 앞의 책 , pp. 77-79. 114) 任孝幸 주 30) • 104) 앞의 책. —, 放射性炭素年代 의한 韓國訴田릅文化의 編年硏究』, 『金哲衡專士鬱 念史學論靈』, 1983, pp. 11-38. 11,) 韓炳三, 주 43) 앞의 책, pp.1 .
116} 宮本-夫, 주 16} 앞의 책, pp.16-20, 117} 小頂함, 주 16} 앞의 책, pp.3 39-34 4, 118} 任孝宰, 「編年 , (~鋼史論» 12, 1983, p p.721-722, 119} 김용남, 「궁산문화에 대한 연구' , r.고고민속논문정 8, 1 983, p p.2-57. 12 이 輪炳三, 주 43} 앞의 책, pp.150-151, 121} 金元鏡, 주 1 이 앞의 책, p.47. 122} 陣永熙, 주 15} 앞의 책, p.500, 123} 任孝宰. 주 114} 앞의 책. 124} 金元龍, 주 1 이 앞의 책, p.32, 125} 金해 8 , 위의 책, p.40. 126} 中國社홉科學院考古 f 內 古工 , 「內豪古했 雄興陸 遺址發抽 J , «考 古» 198 년 10 기, pp.865-B74, 127} 中國社會科웰院考 漸中國的考古짧現和 , 1984, p p.180-187. 12B} , 「 { 學» 7, 1986, p .74, 129} 훈宇平, r 內훨古自治區짧現 h 빼 iffi 뚫文{갑효 , 報» 195 면 1 기. 130)빼 隊土짧의 시베리아 기원셜은 金廷훨에 의해 계속 주장되고 있는데 그의 시베려 아 뱅주에는훌훌地方 둥의 중국 동북부지방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金廷 , 주 28)앞 의 책 및 國幾何文土器文化의 홉 , «白山學報» 4, 1 96B. 131)우 리나라와 중국 빛 시베리아 신석기시대토기의 관련에 대해서는 야래 논운들도 참조하기바란다.
한강유역의 청동기 • 초기 철기문화
朴淳發제 1 절 우리나라 靑銅器文化의 변천청동기에 의한 시기구분과 土器文化우리나라의 靑銅器 는 지금까지 대체로 다음과 갇은 문화적인 특칭을 염두에 두고 이전의 府澤時代가는 다른 시대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첫째, 土器相 신석기시대의 빗살문토기와는 다른 무문토기의 출현.둘째, 石器相 石 , 石銀 등의 磨製石器의 보편적인 사용.셋째, 生業形態 반월형석도 등의 농경도구로 확인되는 農耕의 보편화.넷째, 支石墓 石稽墓 동 새로운 묘제의 출현.다섯째, 銅凱 銅芹 등 청동기의 제작 • 사용.그런데, 이와 갇은 문화내용은 지역에 따라 얼마간씩 달라서 위에 열거한 모든 요소들이 한꺼번에 전부 확인되는 지역이 있는가 하떤 일부 요소만 갖추고 있는 지역이 있다. 그 가운데 주로 문제로 등장되는 것은銅器의 제작 • 사용에 관한 지역적인 차이로서, 토기상의 지역적 차이 혹은 특징은 지역마다 각기 앞선 梅文土器의 고유한 전통을 기반으로 새로운 無文土器文化가 성립된 데에도 그 까닭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각 지역별 토기상의 차이에 대해서는 비교적 일찍부터 연구된 바 있다.
무문토기의 지역특징을 한반도 안에서만 보면, 두만강유역군의 赤色,磨硏土 대동강유역 및 황해도지방의 角形土器, 한강유역 및 그 이남지역군의 花盆形無文土器로 구별될 수 있고, 遼寧地方 및 압록강유역을 포함하면 소위 美松里型土器文化가 추가된다.이러한 무문토기상의 지역적 차이는 다소 지역간의 문화가 이질적인 듯한 인상을 줄지 모른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시기의 신석기시대의 즐문토기와 비교해 보면 지역 안에서의 줄문토기와의 공통성보다는 상이한 지역간의 무문토기의 공통성이 더욱 큼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한반도 전지역에 걸친 무문토기문화의 출현은 후술하는 것처럼 새로운 청동기문화의 영향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청동기시대에 대한 시기구분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주로 청동기의 출현, 제작, 사용이 지역에 따라 얼마간의 시기 차이가 있었던 것에 연유한다고 생각된다. 2) 즉, 한국의 청동기시대라는 시대 개념 설정을 위한 대상지역의 범위가 어디냐는 문제에 따라 청동기의 출현, 제작, 사용의 시기가 얼마간씩 차이가 나는데, 후술하는 것처럼, 요녕지방을 포함한 압록강유역에서는 늦어도 기원전 10세기 무렵에는 이미 청동기가 출현하고 있는 데 비해 한강유역에서는 대체로 기원전 백 년 무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청동기가 제작 •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청동기시대라고 말하면서 어느 지역까지를 포함하느냐의 문제가 곧 한국 청동기문화의 시작과 끝의 시기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여기서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개념설정상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서 한국 청동기문화의 기장 특칭적인 표지가 되는 至邑該織 및 출현, 제작사용등에 의해 시기구분을시도하고자하며, 그 지역범위는 앞서 제시한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공통된 문화요소들이 모두 나탸눈 요녕지방을 포함한 한반도지역으로 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이하 토기문화의 특칭에 따라 각 지역군별로 설명하겠지만 우선 결론부터 제시하면,I 선동검기Il 비파형동검기IIl 세형동검기 로 구분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시기구분은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가장 큰 특칭인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이라는 중요한 물질문화요소를 기준으로 함으로써 토기상 등의 세부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하나로서 각 지역군의 문화내용을 그 발전단계에 입각하여 체계적으로 通敗해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최근 한반도 및 요녕지방 각지에서의 발굴성과에 의해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이 요녕지방과 길림 • 장춘지방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나오고 있는 3)을 고려하면 이러한 동검의 존재 에 의한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시기구분은 타당하리라고 생각된다.1 요동지역 및 압록강유역1-1 先銅劍期遼東半島룰 포함한 한반도의 압록강유역지방은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시작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요동반도의 남단 旅兄也를 비롯한 일련의 지역에서의 그간의 발굴조사 성과에 따르면 이 지역은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지방의 청동기문화가 최초로 출현한 지역으로 이해된다.4)여대지구에서 新石器文化와 靑銅뽑文化의 층위적 중복관계를 보여주는 유적으로는 于家村迫蹟5)과 雙陀子追蹟6) 등을 둘 수 있다. 우가촌유적에서는 이 지역의 신석기말기 문화인 于家村下 惡邸과 초기 청동기문화인 于家村上 類型가 충위적으로 선후관계를 보이고 있다. 우가촌하층유형문화의 내용을 보면, 山東龍山文化의 특징적인 토기인 皮陶와 • • 세 가지 색으로 기하학 문양을 넣은 彩緖陶 그리고 砂質의 혹갈색토기가 주로 나오는데, 표면 처리는 대부분 마연한 무문이다. 토기의 기종구성은 盛, 海 (深鉢形), 豆形土器, 등인데, 용산문화에서 흔히 보이는 三足器는 보이지 않는다. 石器를 보면 福平長方形斜刃石祭 石 , 長方形石刀, 環狀石 , 三角形石綠 등이 있고 그 밖에 骨器도 있다. 우가촌하층유형문화의 연대는 C"연대 측정자료에 의하면 4085±lOOB.P. 3685 85B.P., 3710 100B.P., 3860 lOOB.P., 4025±95B.P. 로 나와1) 대체로 B.C. 1700~B.C. 2000년경이다. 이러한 絶對年代는 산동용신문화의 말기 또는 그보다 뒤인 二理卿罪시 早期商文化와 병행되는 시기이다.8)
우가촌상충유형문화는 우가촌하총유형문화를 계승한 것으로, 여대지구에 있어서 최초의 청동기문화인데, 토기는 우가촌하층유형에 보이던 채회도가 없어지고, 무문토기가 더욱 많아지는 양상을 보인다. 石器게는 편평한 장방형의 斜刃石 半月形의 雙孔石刀, 石槍, 環狀石芹, 斷面菱形의 淸入三角形石鐵이 있고 골기도 있다. 靑銅器로는 우가촌의 陀頭積石 에서 나온 것이 있는 데, 銅泡, 銅識 낚시바늘 등이 있다9) (도면 의 ). 우가촌상충유형의 연대는 C"연대 측정자료에 의하면 3230 90B.P., 3135 90 B. 으로- 나와서 10) 대체로 B.C. 1100~B.C. 1200년 무렵에 해당된다. 이러한 절대연대는 중국 의 西周初 (c.a. noo B.C.)11 병행되는 시기이다.劃子 旅大市의 후목성역에 있는 낮은 丘陸遺蹟인데, 발굴조사 결과 모두 기의 문화층이 층위척으로 중복되어 있음이 확인되어 우가촌유적과 더불어 요동반도의 신석기말~청동기시대의 편년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2) 쌍타자 기문화는 앞서 본 우가촌하층유형문화와 동일한 신석기말기의 문화로서 여기서도 채회도가 나온다. 쌍타자 기문화는 전술한 우가촌상층유형과 동일한 문화내용을 보인다. 그런데 쌍타자 기문화는 우
i.仁!젠휩감 끼?3•、ι“이、·→‘··ι r 긴f.、-“i j ? ι‘>‘J-J1‘3→-‘,c J· 안틀·값펼설μ r i F 아?ι니…이까」싸-1/헤
觸
도연 | 요동반도 및 압록강유역, 두팬뼈역의 싼통겸기의 청동기 각종
l 밴!.!1
도연 2 대통강유역선동검기 출토유울
Flll/FUm
도연 3 요동지방, 압륙장유역 및 두만강유역의 선동검기 유풀(토체 및 석제
장신구)
도면 4 요동지방, 압록강유역 및 두만강유역의 석창(선동검기)
가촌게서는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우가촌하층유형과 우가촌상층유형문화 사이에 속한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유적으로는 요동반도의 남단인 旅順區 願 서북쪽의 장군산 積石慕가 있다. 13) 이 장군산 적석묘는 앞서 본 우가촌 타두적석묘보다는 시기가 약간 빠른 것으로, 타두적석묘는 우가촌상층 유형문화인들의 무덤이다. 14)
지금까지 우가촌유적과 쌍타자유적의 충위내용과 문화내용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요동지방에서 최초로 청동기를 수반하는 문화는 우가촌상충유형임을 알 수 있고 이와 동시기의 예로서 쌍타자 기문화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쌍타자 기와 우가촌상층유형문화는 대체로 中原지방의 은말~서주 초에 병행되는 시기의 요동반도의 최초 청동기문화로 규정할 수 있고 이에 수반되는 청동기로는 銅泡 銅鐵 銅낚시바늘 등이 있음을 알았다. 죽, 이들 우가촌상충유형에는 아직 비파형동검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앞서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발전단계로 설정한 바에 의하면 〈炤織 開〉에 해당 되는 시기의 청동기문화들이다.다음은 우가촌상충문화와 동일한 내용의 선동검기의 청동문화가 한반도 내에서도 존재하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여기서는 압록강유역지방만을 대상으로 하고 다른 지역은 다시 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압록강유역에서 선동겁기의 문화내용을 보여주는 유적으로는 平北 新岩里 유적 15)이 있다. 신암리유적은 개 지접에 걸쳐 분포하고 있는데 청등말래지접, 공동묘지지점, 모래산지접의 유적이 그것이다. 이들 개 지접은 지접별로 충위내용과 문화내용이 약간씩 다른데, 이를 종합해 보면 대체로 개의 문화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암리 문화층은 청등밀래유적에서 확인되는데 그 내용은 등의 각종 기하학문이 음각되고 목부분에 부가띠문이 있는 長頭査 및 無文의 등으로 구성된 독특한 土 마제편평석부, 환상석부, 長方形 半月刀 등의 石器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문화내용은 이미 청동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발굴보고자둘은 이 문화층을 〈청등말태유형〉이라고 하였다. 이는 앞서 요동반도에서의 우가촌하층유형 文化內容라 동일한 것이나, 다만 우가촌하층유형과 비교해 체회도가 없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청등말래유형의 토기들에 보이는 각종 기하학문양은 우가촌하층유형의 채회도 문양과 유사한 것이 많아서 그들 사이에 細跡 있음이 분명하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신암리유적의 청등말래유형은 요동지방의 우가촌하층유형문화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신암리 문화충은 모래산유적에서 확인되는데 이는 型의 토기를 내는 文化이다. 미송리형토기는 표주박의 양끝을 자른 모양의 목이 달린 항아리 器形기 특징적인데, 항아리의 양쪽에는 帶伏肥手가 달려 있고 그릇표면에는 平行線帶가 음각되어 있는 것이 전형적이다. 이 유형의 토기에는 이러한 이외에 이중구연의 深鉢形 器種도 있다. 미송리형토기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유형이 처음 알려진 유적은 미송리동굴유적이었는데, 여기서는 型銅芹와 함께 이 토기가 출토되었다. 요동지방이나 吉林시방에서도 이러한 미송리형토기가 많이 확인되고 이들은 모두 비파형동검과 공반되고 있어 미송리형토기는 비파형동검기에 해당되는 토기문화이다.신암리에서는 모두 차례의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1964, 1965년까지의 발굴에서는 지금까지 말한 제 문화층인 청등말래유형문화와 제 문화층인 미송리형문화가 확인되었다. 그런데, 1966년에 지점의 발굴이 행해지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토기에 銅刀子와 銀 공반되는 문화내용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보고자들은 이를 지접 문화층이라고 하였다.제 3 지접 문화층의 토기들은 목이 긴 無文의 항아리와 굽접시 등의 기종들로 구성돼 있으며, 이들 토기에는 단추모양의 附加文라 닭벗처럼 생긴 부가문으로 장식된 것들이 많았다. 이런 토기들은 앞서 본 쌍타자 제 기문화의 토기들에서 찾아볼 수 있어 16) 이 토기들이 곧 우가촌상충문화에 해당됨울 알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가촌상충유형문화는 요동지방에서 최초의 청동기문화이므로 그와 같은 문화에 속하는 신암리의 지점 문화층 역시 한반도 내에서 최초로 나타난 청동기문화임은 분명하다• 청동도자와 동포의 伊底든 그러한 내용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신암리 제 1 문화층의 청동말래유형토기는 우가촌하층문화에 해당됨을 보았다. 따라서신암리 제 지점 문화충은 신암리에서는 비록 충위적인 중복관계는 없으나 우가촌유적의 충위적인 관계에서 보면 청등말래유형이 신암리 지접문화충에 선행함은 자명하여진다. 이제 이러한 선후관계를 정리하여 보면, 신암리유적에는 신석기 말기에 해당되는 우가촌하층유형과 동일한 청등말래유형문화가 요동지방의 영향으로 출현하고 이어서 그와 계승관계에 있는 우가촌상충유형에 해당되는 최초의 청동기문화인 신암리 지접 문화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신암리 문화로 불리는 미송리형의 토기를 내는 비파형동검시기의 문화가 이어전다.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압록강유역에 최초로 출현한 청동기문화는 일찍부터 요동지방의 신석기 말기문화인 우가촌하충유형의 영향을 받은 청등말래 유형의 신석기 말기문화를 계승하여 출현하고 있다. 한편 우가촌하층유형은 산동지방의 용산문화와 관련하여 나타난 요동반도의 신석기 말기문화이므로 한반도 최초의 청동기문화, 죽 신암리 제 지접 문화충의 문화의 출현배경도 중국의 龍山文化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겠다.신암리 지접 문화충의 문화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이 無文樣化한 砂質胎土의 적갈색토기, 마제석부, 반월형석도, 환상석부, 入石鐵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문화내용은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문화내용과는 판이하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문토기문화내용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암리 제 지점 문화충의 존재는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문화가 곧, 무문토기문화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17) 지금까지 무문토기문화와 청동기문화를 동일시하지 않았던 일부 견해도 있었으나, 18) 신암리의 경우는 그러한 견해를 받아들이기 어렵게 한다고 생각된다. 물론 대상지역 범위가 넓으면 문화의 확산 파급에 따르는 시기차가 존재하므로 신암리에서의 무문토기 출현과 청동기의 출현이 동시기라고 하더라도 한강 이남이나 대동 강유역 등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청동기의 출현 • 제작 • 사용 시접이 지역별로 얼마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하지만 이러한 시기차가 나타나는 현상 때문에 청동기시대라는 개념 대신에 해당지역의 토기문화라는 개념으로 대체해 버리면 문화변동의 기술사적인단계를 자칫 소홀하기 쉬워 오히려 해당 지역의 토기문화에 대한 정확한 시기적 위치파악에 혼선을 초래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19) 문화변동의 큰 흐름부터 정립해 놓고 다시 세부적인 지역단위로 접근하는 것이 훨씬 현상파악에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요동지방과 압록 유역지방에 걸쳐 나타난 우리나라 최초의 청동기문화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 청동기문화는 앞선 시기의 즐문토기와는 다른 무문토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반월도 등의 존재로 보아서 농경과 관련된 문화로 이해된다. 그 출현배경은 산동용산문화와 연결된다고 보인다. 청동기의 내용은 우가촌 티두적석묘에서 나온 동촉, 동포, 동낚시바늘, 동환 등이 있고, 신암리 제 지점 문화충에서 나온 銅刀子, 동포 등이 있다. 이는 아직 비파형동검이 없는 단계의 초기 청동기문화인데, 비파형동검은 신암리의 문화충의 미송리토기문화와 공반되는 뒷시기의 문화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살펴본 우가촌상충유형의 초기 청동기문화를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흐름에서 〈선동검기〉로 설정한다. 선동검기의 청동기문화 출현시대는 앞서 살펴본 대로 대체로 은말, 주초의 B.C. 1200~B.C. 1100년인데, 한반도 안의 선동검유적인 신암리의 지점 문화충의 연대도 이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어 아무리 내려잡아도 기원전 천 년을 내려가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선동검기의 下限은 다음에 오는 〈비파형동검기〉의 上限기 되므로 뒤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다음은 선동검기의 무덤형식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무덤은 支石墓와 石稽墓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최초 출현지가 요동지방임은 지금까지 본 바와 같기 때문에 한반도 안에서의 청동기문화와 관련된 지석묘, 석관묘도 그 최초 출현지가 요동지방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여기서는 요동지방을 선동검기에 해당되는 무덤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고 그들간의 선후관계는 어떠한지를 살펴봄으로써 한반도 내의 청동기시대 무덤들의 원류를 알아보기로 한다.여대지구의 신석기시대 晩期 및 청동기시대에 해당되는 무덤으로 알려진것에는 적석묘, 지석묘(石 ) 大石蓋墓 석관묘 등이 있다.20) 적석묘에는 다시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째 유형은 그 입지가 丘陸 정상이고 묘실을 山石으로 쌓은 것이다. 이에 속하는 유적으로는 將軍山 적석묘, 컵 적석묘, 四平山 적석묘 등이 있다. 출토유물을· 통해 보면, 첫째 유형의 적석묘는 여대지구의 신석기문화인 곽가촌상충유형(쌍타자 기문화)에 해당된다고 한다. cl4 연대 측정에 의한 연대로 보면 4080 70B.P.( B. C. 2130 70에 해당된다. 21)
둘째 유형의 적석묘는 주로 해안구릉에 위치하고 川石을 이용하여 축조한 多鄧式 共同墓로서 우가촌의 티두적석묘가 이에 속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동포, 동촉 등이 부장되는 조기 청동기시대의 무 덤으로 우가촌상충유형문화에 해당되며, C"연대 측정결과에 의하면 B.P.3230 90년, B.P.3135 90년 무렵에 속하는 시기의 무덤이다. 따라서 적석묘 가운데서는 첫째 유형보다 다소 늦은 형식의 것이다.지석묘는 여대지구에서는 으로 알려진 것인데, 한반도의 대동강, 황해도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된 탁자식 지석묘와 동일한 형태이다. 지석묘는 최근까지의 조사에 의하면 모두 메소에서 확인되었는데 요동반도의 旅大市, 金縣 新金縣 復縣, 莊 등의 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22) 지석묘의 연대는 그 상한이 신석기시대 만기까지 올라가나 그 대부분은 여대지구의 청동기시대의 묘제이다.대석개묘는 한반도의 遷石式 지석묘 또는 〈沈村形 고인돌〉과 갇은 형태로 매장주체부는 土城, 積石石構 石槍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大董石을 덮은 무덤을 말한다. 최근 신금현을 중심으로 계속 발견되고 있는데, 대부분 수 개 혹은 수십 개가 군을 이루어 분포하고 있는 것이 특칭이다. 23) 이러한 양상은 한반도의 대동강 및 황해도지방 그리고 한강유역을 비롯한 남한지방의 게석식 지석묘의 양상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된다. 대석개묘의 연대는 여대지구에서는 청동기의 거푸집이 함께 나오는 경우가 있어 대체로 청동기시대의 무덤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앞서 본 지석묘 죽 〈석봉〉(탁자식 지석묘)보다는 약간 늦거나 거의 동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석관묘는 얇은 板石을 써서 네 벽과 바닥, 천장을 만든 상자모양의 節石桂둘을 말하는데, 대체로 그 출토유물은 대석개묘와 동일하다고 한다. 대 부분의 석관묘는 鋼輝 , 동부 등이 부장되어 있어 뒤에 볼 요동지방의 馬石 銅短劍墓類型文化에 속하는데, 이러한 석관묘는 요녕성 및 吉林, 赤峯등에 매우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상 간략히 살펴본 여대지구의 신석기시대 및 청동기시대의 墓制둘은 한반도 지역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 연대도 한반도 지역보다 선행되고 있어 이들 묘제가 이후 한반도의 청동기시대 묘제의 출현에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묘제를 대체로 그 출현시기순으로 정리하면, 적석묘--+지석묘, 대석개묘--+석관묘로 된다. 적 석묘는 신석기시대 만기의 무덤이고 지석묘와 대석개묘는 신석기시대 만기 ~청동기시대에 주로 서용되었으며 석관묘는 비파형청동검시기의 전형적인 무덤형식의 하나로 볼 수 있다.1-2 비파형동검기비파형동검은 劍身의 모양이 비파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에 대해서는 〈滿洲式銅劍〉 璋淨式銅劍〉 여대系銅劍〉 등 분포지역상의 특칭울 나터내는 명칭과 〈曲刃短莖式銅劍〉 〈曲刃丁字形銅柄式銅劍〉 등 형태적 특칭울 따서 부르는 이름이 있으나 여기서는 〈비파형동검〉으로 부르고자 한다.비파형동검은 최근 중국 동북지방의 고고학적 성과에 따라 그 분포범위가 비교적 상세히 알려지게 되었는데, 서쪽으로는 • 유역까지, 북서쪽으로는 老合河, 西納木倫河 유역, 북쪽으로는 길림칭춘지방, 동쪽으로는 거의 한반도 전역에 걸쳐 확인되고 있다. 24)비파형동겁의 지역적 분포정형 및 그 출현, 사용연대에 대한 체계적 연구논 1968, 1969 의 秋邸 「中國東頃方 涼膳沮屬器文化 樣相」에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많은 연구25 있어 대체로 그 양상이 뚜렷이 파악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의 비파형동검문화에 대한 연구결과~ 보면 크게 두가지 갈래로 의견이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그 중십분포지가 요동지방이고 따라서 비파형동검문화를 衍族의 문화로 보는 견해이고, 26) 둘째는 비파형동검의 중심분포권 및 출현지가 요서지방이며 따라서 束胡族의 문화라고 보는 견해이다. 27) 그러나, 최근 한반도 안에서의 비파형동검 출토예가 접차 증가하는 양상과 요동지방의 고고학적 성과를 고려하면 역시 비파형동검문화의 발상지는 요동지방이며, 요서지방의 비파형동겁은 요동지방에서 출현한 비파형동검문화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추정을 가능케 하는 것은 비파형동검 분포권 안에서의 각 지역별 동검의 연대론이다. 최근 중국 북방지구의 각종 청동검들을 그 형태별로 분포지역을 취합하여 크게 개의 군으로. 나누어 고찰한 翟德芳의 연구결과28)에 의하면, 柄端게 동물의 머리모양을 조각한 곡병검을 중십으로- 하는 銅劍 印酒群 과 비파형동검군(〈束群〉), 그리고 그 두 군 가운데의 曲刃또는 直刃의 검신이면서 자루와 된 盆首柄 혹은 默形柄을 가진 동검군 (〈 〉)이 지역적으로 그 중십 분포지를 달리하고 있다. 이들 각 군의 출현연대는 서군의 검이 가장 빨라서 기원전 12세기경(商末)이며, 동군의 비파형동검은 그 출현하한연대가 아무리 늦게 잡아도 기원전 세기(西周中 • 晩期)를 내려울 수는 없고 대체로 기원전 10 세기 무렵 까지 충분히 소급되며, 中群의 곡인 혹은 직인의 공수병 또는 수형병은 이 두 군의 접촉으로 발생한 것으로 드러난다고 보고 있다.
한편, 이와 갇은 비파형동검의 출현연대는 요동지방의 비파형동검 출토 유적의 공반유물과 비파형동검의 형식분류를 결합한 연구결과29)와도 대체로 일치되고 있다. 박진욱은 동검의 전체 길이 속성과 刃部의 돌기상태 및 전체에서의 돌기부의 상대위치 등을· 기준으로 이들간의 속성결합에 의해 전체 길이가 30cm 미만이고 돌기부의 상대적 위치가 錄部 기까우며 돌기모양이 뚜렷한 비파형동검을 〈첫째 부류.〉, 전체 길이가 30~35cm 가량 되고 거의 인부 중간에 뚜렷한 돌기부가 있는 것을 〈둘째 부류〉, 그리고 전체 길이가 35cm 이상 되고 봉부가 길며 돌기부가 뚜렷하지 않은 것을 〈셋째 부류〉로 형식설정한 뒤, 다시 이들 각 부류의 비파형단검의 겁신과 靜비 공반관계를 파악하였다. 그 결과 첫째 부류에 속하는 검신은 동제검병과 갇이 나온 것이 없고, 셋째 부류의 검신은 대부분 동제검병과 함께 나온 것에 유의하여 이를 시기적인 선후관계로 파악하였다. 즉, 동병을 공반하지 않는 첫째 부류의 비파형동검은 아직 검자루가 주로 목제였을 것으로 보며, 따라서 동제검자루를 공반하는 셋째 부류보다 그 출현시기가 빠르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파형동검의 형식분류 결과 그 출현순서는 첫째 부류 一둘째 부류一셋째 부류로 되었다고 추정하였다.
각 형식별 출현연대에 대해서는 비파형동검 출토유적의 공반유물을 통해서 검토하고 있는데, 첫째 부류에 속하는 것 가운데 가장 고식의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요녕성 신금현 斐方石稽墓게서는 동검과 함께 전형적인 미송리형 항아리에 선행하는 토기가 나왔다. 이와 비슷한 것이 앞서 본 우가촌의 타두적석묘에서 이미 나오고 있고, 타두적석묘가 우가촌상충유형문화에 속하는 접을 고려하면 그 절대연대는 기원전 객기 무렵이 되어 대체로 이 시기에 이미 비파형동검이 출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터두적석묘에서 출토된 항아리는 기본적인 형태는 미송리형토기와 같으나 세부적으로 보면 미송리형토기에 보이는 帶伏祀手가 없는 접에서 다소간의 차이가 있고, 타두적석묘에서는 아직 비파형동검이 출토되고 있지 않아 쌍방석관묘의 비파형동검은 타두적석묘의 축조연대인 기원전 객기보다는 조금 늦을 것으로보인다.한편, 쌍방석관묘에서 나온 미송리형토기는 長海縣 大長山島의 上馬石유석상층에서 많이 보이는데, 요동반도에는 상마석상층과 동일한 문화내용을 보이는 유적이 다수 발견되고 있어 이들을 〈상마석상층유형문화〉라고 부르고 있다.30)상마석싱층유형문화의 土 相을 참시 살펴보면 種은 深鉢型土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호는 앞서 말한 대상파수가 달린 미송리형 항아리를 말햐겨 십발형토기는 구연을 이중으로 곱싸서 附加帶를 만들고 그 위를 손으로 누르거나 點으로 눌러 四點文올 시문한 것이 득칭이다. 이와 같은 십발형토기에도 대상파수가 달려 있는 것이 많다. 그리고 豆形土꼽는 대정형의豆身 아래에 나팔모양의 굽이 달린 모양인데 두신에는 닭벗과 같은 특이한 귀가달려 있다.
상마석상충유형과 동일한 내용의 토기상을 보이는 것으로.는 요동지방의 일련의 유적들 이의에 압록강유역의 신암리유적 문화충이 있다.3" 신암 리 문화충의 문화내용은 미송리형토기문화로 이해되어 왔었는데, 상마석상층유형토기상과의 이상과 갇은 공통접으로 미루어 이는 압록강유역에 있어서 상마석상충유형과 병행하는 시기의 것으로 생각한다.상마석상충유형은 c1 연대 측정결과가 3170 150B.P., 3130 100B.P 로 나와 대체로 B.C. 1200~B.C. 1100년 무렵으로 알려져 있고, 앞서 본 우가촌상충유형보다는 약간 늦은 시기의 청동기문화로 보고. 있다. 32)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요동지방에서 最古式의 비파형동검은 쌍방석관묘에서 처음으로 나오고 있으며, 이는 미송리형토기와 공반되고 있다. 요동지방에서의 미송리형토기는 〈상마석상충유형〉에 속하는 일련의 유적들 에서 많이 나오는 것이므로 비파형동검은 요동지방의 상마석상충유형문화단계 시기에 출현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상마석상충유형은 요동 지방의 비파형동검문화로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보다 앞선 선동검기문화단계인 우가촌상층유형과 문화내용상 계승관계에 있다. 이러한 내용은 우가촌상충유형 시기의 무덤인 우가촌 타두적석묘 출토의 토기와 상마석상층유형의 특칭적인 토기인 미송리형토기 사이에 형태적인 공통성이 인지되는 데서 뒷받침된다. 상마석상충유형의 연대는 C"연대 측정결과 대체로 기원전 천백 년 무렵까지 소급되어 비파형동검의 출현시기도 이 무렵으로 불 수 있다.비파형동검을 가진 미송리형토기문화는 요동지방뿐 아니라 길립, 장춘지방, 압록강유역의 신암리, 미송리유적에서도 확인되며, 한반도지역에서도 비파형동검이 거의 전역에 걸쳐 나오고 있어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에서 중요한 한 시기를 대표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비파형동겁문화의 직,간접영향을 받은 시기를 〈비파형동검기〉로 설정하고자 한다.다음은 비파형동검의 둘째 부류 및 셋째 부류의 출현연대를 간략히 살펴봄으로써 비파형동검기의 시기적인 세분 문제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둘째 부류에 속하는 비파형동검 가운데 그 연대가 분명한 것으로는 率城南山 01 호 석곽묘 출토품이 있다. 남산근 무덤에서는 중기형 (둘째 부류)의 비파형동검과 함께 中原의 西周後期~春和南던店i 추정되는 銅器들이 나왔는데 , 그 가운데 銅戈가 上村嶺 탑太子元徒戈 등의 年銘 있는 동과와 동일한 형태의 것이어서 그 절대연대를 기원전 세기초에서 기원전 8 세기 중영 무렵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 33) 이와 같은 절대연대 비정은, 남산근 무덤과 동일한 夏和舌上円文化에 속하는 林西縣大井古銅鑛出土 木炭을 시료로 한 C”측정연대가 2780 100B.P., 2700 100B.P. (B.C. 830~B.C.750로 나와 있어 34) 그 가능성이 더욱 크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둘째 부류의 중기형 비파형동검의 시기는 기원전 세기 중엽~기원전 세기 무렵으로 볼 수 있으며, 이보다 앞선 첫째 부류의 초기형은 대체로 기원전 10세기~기원전 세기 중엽 무렵까지 존재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셋째 부류의 후기형 비파형동검은 중기형의 둘째 부류에서 변화 발전한 것이므로 그 출현 상한연대는 앞서의 둘째 부류의 연대를 고려하면 대체로 기원전 세기 무렵이 된다. 그러면 셋째 부류의 비파형동검의 하한은 어떠한지를 알아보아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樓上 무덤 출토 동검을 통해서 살펴보고자한다.누상무덤에서 나온 비파형동검은 돌기부가 거의 없이 밋밋한 형태로서 후기형의 비파형동검 가운데서는 가장 늦은 형식으로. 보이며, 초기의 세형동검으로 보고 있는 尹家村 12호 무덤 출토 동검과 형태적으로 매우 가깝다. 따라서 누상 출토 비파형동검은 세형동검으로 변하기 직전 단계의 것으로 보아도 틀림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후기형에 속하는 셋째 부류 비파형동검의 하한연대는 윤가촌 12호 무덤의 축조연대로 장을 수 있으며 이는 대체로 비파형동검의 하한이 될 수 있을 것이다.윤가촌 12호 무덤은 윤가촌 유적의 층위관계로 보면 아래층 기에 속하는데, 이 층은 위로는 이미 초기 철기시대에 들어간 灰色繩文土器를 내는 위층과 누상무덤과 동일 시기의 아래문화층 사이에 끼여 있다고 한다. 35) 그런데 회색승문토기가 출토된 충과 동일한 충이 존재하는 細竹里유적 맨 위층에서 기원전 세기~기원전 세기에 해당되는 明刀錢기 나오고 있어, 아래충 기의 연대는 기원전 세기로 볼 수 있다. 즉 세형동검이 나오는 아래층기의 윤가촌 호 무덤의 축조연대는 기원전 세기 무렵이 되는 것이고 따라서 아래충 기에 해당하는 누상무덤의 연대는 이보다 빠른 기원전 세기 까지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후기형의 셋째 부류 비파형단검은 그 상한이 기원전 세기 무렵이고 그 하한은 기원전 세기까지로 생각한다.이상의 비파형동검 각 형식별 출현연대를 근거로 하여 요동지방에서의 비파형동검기를 좀더 세분해 볼 수 있었는데, 초기형의 첫째 부류 비파형동검기를 비파형동검기 기, 둘째 부류의 중기형 비파형동검 사용시기를 비파형동검기 기, 그리고 셋째 부류의 후기형 시기를 비파형동검기 기로 부르고자 한다. 이를 도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갇다.요동지방 버파형통검기의 세분
분기 동검형식 절대연대
끝으로 비파형동검기의 각 분기별 흐름을 간략히 살펴봉으로써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특히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변천 파악에 참고가 되고자 한다. 중국 동북지방의 비파형동검문화에 대한 최근의 연구결과36)에 따르면, 비파형동검은 요동지방에서 기원전 백 년경에 최초로 출현하였고 이것이 기원전 세기~기원전 세기 무렵에 걸친 기에 卽幻켜· 한반도지역으로 파급되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중기형이 다수 토되는 輯楊
二台營子 및 앞서 본 남산근유적의 존재는 비파형동검기 기의 그러한 사정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기에 있어 한반도지역에로의 파급은 한반도 각지에서 최근 비파형동검이 많이 확인되는 사실로 알 수 있는데 비파형동검의 형태는 모두 중기형 혹은 후기형에 속하는 것들이다(도면 5~8). 한반도지역에서 확인되는 비파형동검 기 관계유물로는 비파형동검 이의에도 비파형동모, 扇形 동부, 그리고 거푸집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석관묘, 지석묘의 부정유물로. 출토되고 있다(표 참조).
비파형동검기 기 또는 기에 해당되는 시기의 土器掛은 기에서는 미송리형토기이고 기에는 房里形 토기가 나오는데, 묵방리형토기는 미송리형토기의 변화 • 발전형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미송리형토기와 묵방리형토기 간의 시기적 선후관계는 세죽리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죽리유적의 충위관계는 맨 아래에서 미송리형토기가 나오고, 그 위에는 묵방리형토기가 나오는 충이 있으며, 맨 위에는 회색승석문이 찍힌 토기편과 鐵器들이 나온다. 그런데 회색승석문토기를 내는 충과 묵방리형토기를 출토하는 충 사이에는 충위를 이루고 있지는 않으나 牛角形肥手가 달린 토기를 내는 시기가 존재한다고 한다. 37) 세죽리유적에서의 이러한 층위관계는 요동지방의 비파형동검 분기와 연결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승석문토기, 철기 출토층-초기 철기시대• 우각형파수토기편 출토층__세형동검시기• 묵방리형토기 출토충__비파형동검기 기• 미송리형토기 출토충__비파형동검기 기한반도지역으로 파급된 비파형동검기의 흔적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갇은 세죽리유적이나, 앞서 말한 바 있는 신암리유적 (제 문화층)과 갇이 비파형동겁과 관련된 미송리형토기가 출토되는 것이 있는 반면에 대동강 이남의대부분 지역에서는 미송리형토기는 나오지 않고 비과형동검, 비파형동모, 선형동부 등의 銅 확인되고 있다. 이중 전자와 같이 미송리형토기를 출
l Eu
도연 5 빼尙州 출토 바화형통령 (효웹협 l 솔환 소강)
1\ CD @
도면 6 한반도 출토 비파형 동검 각종0 경남 의창 진동리 석관묘 ® 평남 개천 용흥리 평양부근 부여 송곡리 석관묘®청도®청도
@
도면 7 한반도 출토 비파형동검 각종® 宁도 연안군 금곡동 ® 평양시 서포동 ® 개성시 해평리® 平사도 신평군 선암리 석관묘 ® 황해도 배천군 대아리 석관묘® 傳春川출토 ® 전남 여천시 적량동 지석묘
깨
천남 송주굳 牛山里 내우 지석요 출토 비와형통컴
토하는 유적이 분포하는 지역을 〈비파형동검문화권〉 후자와 같이 동기만 출토되는 유적 분포권을 〈비파형동검문화영향권〉이라고 구분하여 부르고자한다. 이렇게 보면 한반도지역은 요동지방과 인접한 청천강 이북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권〉과 대동강 이남의 〈비파형동검문화영향권〉 지역으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비파형동검문화영향권지역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한다.
이상 요동지방과 압록강유역의 비파형동검기의 문화내용을 간략히 살펴 보았다. 요동지방의 비파형동검문화는 그보다 앞선 선동검기의 문화인 우가촌상충유형을 계승한 상마석상충유형시기에 요동지방에서 발상되었고 그 다음 비파형동검문화기 기 무렵에 이르러 요서지방과 한반도지역으로 파급됨을알수있었다.1-3 세형동검기세형동검은 앞서 본 비파형동검과 더불어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동검의 하나이다. 세형동검의 분포지역은 종전에는 주로 한반도 안에서만 알려졌으나 최근의 요동지방 및 길림, 장춘지방 등지에서의 발굴조사에 의하면 그 분포는 종전의 비파형동검분포권 가운데 添可以東 전지역에 걸쳐 있는 것이 획인된다. 38) 이와 같은 세형동검의 분포를 감안하면 요동지방에서도 세형동검기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하 요동지방의 세형동검기의 문화내용을 간략히 살펴보고 이 시기의 요동지방과 한반도지역과의 문화적 관련성을 알아보고자 한다.요동지방 및 吉長地方에서 세형동검을 출토하는 유적들은 모두 무덤둘로서 무덤의 형식에는 석관묘, 석곽묘, 토광묘 등이 있다• 이 기운데 가장 예가 많은 묘제는 토광묘로서 앞선 시기의 비파형동겁이 주로 석관묘 적석묘 등에서 나오는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이는 시기적인 차이를 반영한다고 생각한다.요동지방 및 길림, 장춘지방의 세형동검 가운데 그출현이 가장 이른예는 윤가촌 12호 석곽묘의 것으로 보고 있다. 동겁의 형태는 아직 한반도지역에서 보이는 것에 비교하면 인부의 양쪽에 缺入部가 없는 접이 다르나, 앞선 시기의 비파형동검과 비교해 보면 인부의 돌기부가 없고 基部의 둥근 형태가 사라진 점 등 차이가 뚜렷하다. 윤가촌 12호 석곽묘 출토 동검의 이와 같은 형태적 득칭은 이 동검이 비파형동검에서 세형동겁으로. 변천하고 있는 초기단계의 것이라는 접을 말해 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초기 세형동검은 윤가촌 이의에도 二道河子 1•3호 토광묘,39) 황해도 孤山 토광묘 0)에서도 확인된다. 한편, 요동지방의 초기 세형동검 가운데는 인부의 아랫부분에 져 있는 것들도 발견되는데 이와 같은 모양의 초기 세형동검을 내는 유적으로는 길림 懷德縣 大靑山 토광묘, 4l) 丹束地區의 大房身 유적 2) 등이 있다. 초기 세형동검에서의 이러한 형태적 차이를 기준으로 앞서 윤가촌12호 출토품과 같은 것을 〈고산리 -윤가촌형〉, 대청산 토광묘 출토품과 갇은 것을 〈대청산형〉으로 부르기도 하고, 3) 전자를 曲刃短莖式 동검 식, 후자를 C 식으로 부르기도 한다. 44) 그 명칭이야 어떠하든 이들을 모두 비파형동검의 변화형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은 공통된 견해이다. 박진욱은 이들 초기 세형동검의 형태별 지역분포를 취합하여 윤가촌-고산리형은 요동지방 및 길장지방에 모두 나타나고 있고 대청산형은 주로 길림지방에만 나타난다고 파악하여 이러한 형태적 특칭을 지역적인 차이로 보는 한편, 두 가지 형태의 세형동검이 모두 나타나는 요동지방을 최초 세형동검의 발생지로 보고 있다. 45)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동해서 비파형동검이 세형동검으로 변화, 발전한 지역이 대체로 요동지방이라는 견해는 매우 타딩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반도 내에서 출토되는 세형동검은 이들과 그 형태가 얼마간 다르므로 한반도의 전형적인 세형동검은 요동지방에서의 그와 같은 형태변화를 토대로 대체로 대동강유역을 중십으로 하는 지역에서 더욱 발전한 형태로 보고, 요동 • 길장지구의 세형동검을 〈초기세형동검〉, 한반도지역의 세형동검을 〈전형세형동검〉이라 부르고자 한다.다음으로는 요동지방에서의 초기세형동검 출현연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이에 대해서는 초기세형동검 중 가장 고식으로 보고 있는 윤가촌 12호 무덤 출토품의 출현시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윤가촌 12호 무덤은 앞서 본 것처럼 윤가촌 아래충 기충에 해당되며 그 연대는 기원전 세기 무렵이• 다. 따라서, 요동지방에서 비파형동검이 세형동검으로 변화되는 시점도 이 무렵으로 볼 수 있다. 기원전 세기 무렵에 요동지방에서 출현하기 시작한 초기세형동검은 이후 길림 • 장춘지방과 한반도지역으로 확산되면서 각기 지역적인 특칭을 지닌 고유한 형태로 발전되었다고 보인다. 그러면, 요동 지방에서 세형동검기의 하한은 어떻게 되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윤가촌12호 무덤이 나온 윤가촌 기충 위에는 윤가촌 위충문화가 있는데, 여기서는 회색승석문이 찍힌 토기와 함께 철기가 나타나고 있다. 이로써 보면 세형동검기는 윤가촌 위충의 초기 철기문화 이전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 초기 철기문화의 출현연대가 곧 요동지방에서의 세형동검기의 하한연대가 되는 것이다. 초기 철기문화의 출현연대에 대해서는 윤가촌유적의 충위내용과 비슷한 충위관계를 보이고 있는 세죽리유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앞서 본 것처럼 세죽리유적의 충위는 맨 아래층의 즐문토기문화층(세죽리 1 )이 있고, 그 위에는 청동기시대의 문화총인 미송리형토기를 내는 충(세죽리L)과 묵방리형토기를 내는 충(세죽리 n2) 이 놓여 있으며 다시 이 층 위에 승석문토기와 철기를 출토하는 초기 철기시대충(세죽리血)이 있다. 한편, 철기시대충과 청동기시대 위층(세죽리 n 2) 사이에는 확실한 층위를 이루지는 않았으나 우각형파수가 달린 토기를 내는 단계의 교란충이 존재한다. 이 교란충은 요동지방의 윤가촌 아래층 기층과 동일한 시기인 세형동검기로 보고 있다. 46) 그런데, 맨 위층의 철기를 출토하는 충에 기원전 세기~기원전 기경에 주조된 것으로 알려진 명도전이 갇이 나오고 있어 희색승석문토기를 출토하는 초기 철기시대문화충의 연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초기 철기문화의 출현이 기원전 세기~기원전 기이므로 그 아래의 세형동검기의 하한연대도 당연히 이 무렵이 된다. 그런데, 요동지방과 청 천강 이북지역에는 기원전 세기초 이후에 소위 〈세죽리-연화보 유형〉으로 알려진 戰國鐵器文化가 전개되므로 7) 요동지방에서 세형동검기의 하한울 기원전 세기초 무렵으로 좁힐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면 요동지방과 한반도 청천강 이북지역에서의 세형동검기는 기원전 세기를 상한으로 하고 기원전 세기초를 하한으로. 하는 기간 동안에 해당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그런데, 한반도의 대동강 이남지역에서는 그 이후에도 세형동검을 표식으로 하는 문화가 계속 나타나고 있어 뒷시기의 일부는 초기 철기시대에 들어간 것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절을 바꾸어 후술하기로 한다.
다음은 요동지방 및 압록강 • 청천강유역의 세형동검기의 문화내용 가운데 토기에 대해서만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유적 가운데 토기를 다수 출토하는 유적으로는 윤가촌유적, 정가와자유적 48)을 둘 수 있는데, 여기서 출토되는 토기는 앞서 비파형동검기의 토기들에서 보이던 二眞口緣의 深鉢類와 목이 긴 黑包卽肝土器 등이 전형적이다. 이 밖에 끝이 뭉툭한 니무그루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토기도 있다. 나무그루손정시토기는 세형동검시기에 처음 나타나지만, 이중구연심발과 흑색마연장경호류는 비파형동검시기부터 이미 존재하던 것들이다. 이중구연토기는 요동지방에서는 비파형동검기 이전의 선동검기에 해당되는 우가촌상충유형에서부터 이미 나타나지만 심받형의 이중구연토기는 대체로 비파형동검기인 미송리형토기와 같이 나타난다. 미송리형토기와 공반되는 이중구연심발의 예는 신암리 문화충, 미송리유적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형동검과 공반되는 경우는49) 二道河子 호 토광묘, 牧羊城 무덤에서 볼 수 있다. 흑색마연장경호도 이중구연심발형토기와 마찬가지로 정가와자, 윤가촌 등지의 유적에서 확인되는데 세형동검과 공반되는 예는 정가와자 호 토광묘에서 볼 수 있다. 50) 이 밖에도 요동지방의 세형동검시기 토기에는 두형토기 등도 있으 가장 전형적인 것은 앞서 본 이중구연십발형토기와 혹색마연장경호라고 생각한다. 이 접은 뒤에서 보는 것처럼 요동지방의 세형동검문화가 한반도지역으로 파급되면서 나타났다고 생각되는 한강유역의 접토대토기와 흑색마연장경호의 공반관계를 고려해 보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지금까지 요동지방 및 압록강지역의 청동기문화의 변천과정을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 등의 청동기의 존재를 기준으로 선동검기, 비파형동겁, 세형동검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시기 청동기 토기 묘꺼l 절대연대
2 대동강유역 및 황해도지방
2-1 선동검기대동강유역 및 황해도지방은 팽이모양 또는 뒤집어놓은 뿔모양으로 생긴 독특한 토기형태를 가진 무문토기문화의 중십지역으로 흔히 각형토기문화 지역 또는 팽이형토기문화지역으로 불린다. 이 지역에서의 청동키시대는 바로 이 각형토기의 출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술하겠지만, 최초로 각형토기가 출현되는 시정에서는 아직 청동키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아직 청동기시대 (청동기의 한 사용 뜨는 제 아序지는 시대라는 의미 라는 말이 그 전정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그러나 무문화된 각형토기의 출현은 분명히 앞서 본 요동지방 및 압록강유역 등지의 早期 청동기문화와의 관계가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비록 대동강유역 및 황해도지방에서 아직 청동기가 확인되지 않더라도 각형토기문화의 성립배경에는 청동기문화와 접촉이 있었다고 보여전다. 그러므로 각형토기의 출현시점부터를 〈청동기시대〉라는 개념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에 대한 ·용어 개념은 앞서 다섯 가지로 구분하여 말한 것과 같다. 각형토기문화는 土器相게서 줄문토기와 다른 무문토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石器相게서도 石 石鐵 등의 마제석기가 보편화되었으며, 반월형석도 등의 농경도구의 존재로서 농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음 도 확인된다. 다만 청동기의 제작 • 사용만이 각형토기출현단계의 시기에서 아직 확인되지 않을 뿐이므로 전반적인 문화내용에서는 신석기시대 다음의 청동기시대의 개념에 들어간 것임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각형토기의 출현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이해되는 문화가 후술하듯이 요동지방 및 압록강유역의 우가촌상층유형 조기 청동기문화라는 접은 각형토기문화를 우리나라 전체를 대상으로 하였을 때 청동기문화단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함을 뒷받침해 준다고생각된다.디음은 각형토기문화의 성립배경을 주로 토기를 통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각형토기의 출현에 대해서는, 신석기시대의 줄문토기에 無 , 重口緣 平底라는 몇 가지 새로운 요쇼 받이들여집으로써 각형토기가 발생하게 되었다고 보는 金元龍 박사의 견해 51~ 대체로 타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금탄리유적 52)의 층위관계는 이러한 각형토기의 출현배경에 대한 추정올 뒷받침하고 있다. 여기서는 신석기 후기문화층인 금탄리 문화층에서 이미 무문양화된 尖底 줄문토기가 다수 출토되고 있고, 문화충 다음에 놓이는 문화층(주거지 이의의 문화충)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각형토기하가 나타나고 있어 줄문토기에서 각형토기에로의 변천과정의 일단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금탄리 문화층의 줄문토기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무문양화의 경향과, 그 이후에 초기의 각형토기가 성립되는 데에 있어 중요한 형태적 특칭인 이중구연 및 평저화가 의부문화로부터의 자극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이 지역의 자체 문화발전의 결과인지를 생각해 보자. 만약, 각형토기문화와 지리적 • 문화적 천연관계가 있으면서 이보다 시기적으로 선행하고 있는 어떤 토기문화 속에서 각형토기의 중요한 형태적 특칭이 거의 대부분 확인된다면, 각형토기의 성립배경에는 그러한 앞선 토기문화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아 논리적으로 타당성이 인정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각형토기는 자체발생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서, 요동지방 및 압록강유역의 청동기문화를 일별하면서 우가촌하층유형에서 무문화된 器面을 마연한 토기와 함께 각종 기하학문이 시문된 토기가 존재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 문화는 반월형석도 등의 농경도구를 포함하고 있어 농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이 우가촌하층유형문화가 압록강유역으로 파급되어 이 지역의 말기 신석기문화인 청등말래유형의 토기문화(신암리 문화충)를 성립시켰음도 알고 있다. 한편, 우가촌하층유형 다음에 나오는 우가촌상충유형문화에서 일부 이중구연토기가 나타나고 있는데, 54) 이러한 이중구연토기가 많아지는 시기는 문화보다 조금 뒤인 미송리형토기단계이다. 압록강유역의 미송리형토기시기 (신암리 문화충시기)에 많이 보이는 이중구연토기는 다음절에서 보게 될 두만깅유역의 서포항 기층에서도 볼 수 있다. 55) 서포항 기충은 두만강유역의 최말기 신석기문화인데, 여기서는 이중구연토기뿐만 아니라 반월형석도도 나타나고 있어, 이 무렵에 이미 농경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화내용은 요동지방의 우가촌하층유형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나, 이중구연토기의 존재는 아무래도 우가촌상충유형과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생각되므로 대체로 요동 지방의 우가촌상층유형과 비슷하거나 조금 늦은 단계로 생각된다. 한편, 서포항 기층에서는 압록강유역의 청등말래유형(신암리 문화층)과 동일한 雷文, 단추모양의 浮點文이 부가된 토기편이 나타나고 있어”) 요동지방의 우가촌하층유형 (쌍타자 I 기층)과의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이상의 내용으로 보면, 한반도의 압록강유역 및 두만강유역 일대의 밀키 신석기단계 또는 초기 청동기문화와 요동지방의 우가촌하층유형문화 및 그 다음의 우가촌상층유형문화와의 사이에 親緣관계가 있음이 확실하다고 보여진다. 압록강유역의 신암리 1 문화(청등말래유형토기)의 성립배경이 요동지방의 우가촌하층유형문화라는 사실은 앞서 요동지방 및 압록강유역의 청동기문화를 설명하면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이러한 관계는 두만깅유역의 말기 신석기~초기 청동기문화의 성립배경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말한 내용으로 보면 자명해진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다시 살펴볼것이다.
압록강유역 및 두만강유역의 말기 신석기문화 및 초기 청동기문화의 출현 배경이 요동지방의 말기 신석기문화(우가촌하총유형) 및 그 뒤의 초기 청동기문화(우가촌상충유형)였다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대동강유역 및 황해도지방의 말기 신석기문화(금탄리 Il 문화충) 및 그 다음에 이어지는 초기 청동기문화(금탄리 주거지 의 포함층)의 성립 배경에도 그러한 요동지방의 우가촌하층유형문화와 우가촌상충유형문화의 영향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금탄리 ll 문화층의 토기를 간략히 살펴보면, 우선 태토가 사립이 많이 섞인 접토로 된 점이 그 전의 금탄리 1 문화충의 토기와 다른 점이고, 다음으로. 무문화된 토기의 증가와, 덧무늬 및 평저토기의 출현, 그리고 적갈색의 마연기법이 나타나는 등의 여러 가지 점들이 금탄리 1 문화층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내용들이다. 그런데, 금탄리 ll 문화충의 이러한 새로운 경향은 앞서의 요동지방 우가촌하층유형에서 잘 볼 수 있기 때문에 금탄리 문화층과 우가촌하층유형과의 관계는 분명해진다. 결국 금탄리 l 문화층의 출현배경에는 우가촌하층유형과 같은 요동지방의 말기 신석기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앞서 요동지방의 청동기문화 변천을 논하면서 참시 언급한바와같이 우가촌하층유형의 성립배경에는산동지방의 말기 용산문화와 영향관계가 있었다• 이로써 보면 요동지방을 비롯한 한반도 각지의 농경을 동반한 말기 신석기문화의 출현계기에는 산동용산문화와 일정한 칙 • 간접적인 관계가 있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듯하다.금탄리 문화충은 다음 시기의 조기 각형토기문화로 이행되었던 접은 앞서 말한 바와 같으므로 이상의 내용을 통해서 대동깅유역 및 황해도지방의 각형토기문화 출현계기에는 가까이로는 요동지방 및 압록깅유역의 말기 신석기문화의 영향이 있었고 멀리 간접적으로는 산동용산문화의 입김도 스며있었다. 그런데, 조기 각형토기가 금탄리 문화충의 토기와 다른 가장 큰 차이접은 각형토기의 이중구연인데 이는 우가촌상충유형에서 그 유래를 찾울 수 있다. 이중구연 처리기법은 각형토기뿐만 아니라 앞서 본 두만강유역의 서포항 기충의 토기에도 존재하고 있어 당시 우가촌상충유형문화가 한반도지역으로 널리 파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각형토기의 성립배경에는 금탄리 Il 문화충 시기에 우가촌하층유형문화의 영향이 있었고, 이후 계속하여 이중구연기법은 우가촌상충유형문화와의 영향관계를 통하여 각형토기에 등장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는 조기 각형토기의 출토 시점의 철대연대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이에 대해서는 요동지방의 우가촌상충유형문화의 절대연대를 참고할 수 있는데, 우가촌상충유형의 절대연대는 C"연대 측정에 의해 대체로 B.C. 1200~B.C. 1100년 무렵임은 앞서 이미 말하였다. 우가촌상층유형의 파급으로 인해 그 출현계기가 마련된 각형토기는 따라서 이 연대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음은 당연하다. 여기서는 우가촌상층유형문화의 중심 분포권인 요동지방과 대동깅유역과의 거리를 감안해 얼마간의 시차를 인정하여 대체로 B.C. 1100~B.C. 1000년 무렵울 각형토기의 출현연대로 보고자 한다. 각형 토기의 출현연대에 대해서는논자에 따라서 그견해가상당히 다른데 ,57) 을려 보는 쪽의 연대관은 대체로 기원전 책 년기말 무렵으로 보고 있으며 基德 1966, 1966) 낮추어 보는 쪽은 기원전 세기~기원전 기까지 보고 있으나(後藤直 1971, 藤口健二 1982), 이들 각자의 연대관에는 요동지방의 초기 청동기문화인 우기촌상층유형의 절대연대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한편, 韓永熙는 각형토기 조기단계를 기원전 어]기~기원전 세기로 비정하고, 그에 부연하여 〈……신암리문화와 그 문화의 모체로 생각되는 요녕반도의 문화가 대비 연구되고, 또한 평얀감도 • 황해도지방의 신석기문화에 충격을 주어 각형토기문화를 생성케 만든 의래문화의 연구가 구체화될 때 보다 뚜렷이 부각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SII 봐는 탁견을 제시한 바 있다. 이와 갇은 각형토기문화의 성립배경에 대한 견해는 이 글을 통해 개전한 필자의 견해와 전적으로 일치되어 찬성하여 마지않으나, 구체적인 철대연대에 대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우가촌상충유형문화가 각형토기 성립에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하다고 전제한다면, 역시 B.C. 1lOO~B.C. 1000년 무렵까지도 소급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끝으로 각형토기문화권의 선동검기에 속하는 유적들에서 출토된 청동기 에 대해서 알아보고, 아울러 선동검기의 하한연대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선동검기에서의 청동기 출토예는 금탄리 호 주거지에서 나온 堅파 新興洞 호 주거지에서 나온 銅泡가 있다. 신홍동에서 나온 동포는 출토 당시에는 그 모양이 갖춰져 있었으나 부식이 심하여 수습되는 과정에서 없어져 버렸다고59) 하는데, 직경이 2.5cm 가량 되어 江界 龍里 석관묘 출토품과 거의 갇다. 신흥동 주거지는 한영희의 분기에 의하면, 각형토기문화의 전기에 해당된다. 금탄리 호 주거지 출토 동착은 전체 길이가 약 5.6cm 가량 되는데 끝이 일부 결실되어 있다. 60) 금탄리 호 주거지는 각형토기문화의 중기에 속하는데 여기서는 동착과 함께 有血溝式 有莖式 製石 출토되고 있어 뒤에서 보게 될 이 지역의 비파형동검기에 해당되기도 한다.
선동검기에 해당되는 이상의 유적 출토예에 비추어 각형토기문화권의 선동검기는 각형토기문화권의 중기까지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각형토기의 조기에는 아칙 청동기의 출토예가 확인된 바 없기 때문에 각형토기의 전기 이전까지는 대동강유역 및 황해도지방에서는 아직 청동기가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청동기시대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각형토기의 출현배경이 된 요동지방의 우가촌상층유형문화는 청동기문화이므로 아직 청동기가 확인되지 않은 각형토기 조기도 선동 검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고자 한다. 결국 각형토기문화권의 조기부터 선동검기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며, 그 하한은 각형토기의 중기 무렵까지라고 본댜 따라서 선동검기의 철대연대는 각형토기의 출현시점인 B.C. 1100~B.C. 1000년경부터 비파형동검기가 시작되는 기원전 때]기까지로 되는데, 선동검기의 하한 죽 비파형동검기의 시작연대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후술하고자한다.2-2 비파형동검기
대동강유역 및 황해도지방에 비파형동검문화가 파급된 것은 최근까지 이 지역의 각지 유적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의 존재로 입증된다. 비파형동검은 평양 부근(후기형), 평양시 서포동(중기형), 개성 해평리(중·후기형), 輝도 신평군 선암리(후기형), 황해도 배천군 대아리(후기형), 황해도 연안군 금곡동(중기형) 등지 (표 참조)에서 출토되었는데 동검의 형식은 모두 중기형 이후에 속하는 것들이다(도면 5~ 조). 이로써 대동강유역 및 황해도지방의 각형토기문화권에 비파형동검문화가 파급된 시기는 요동지방의 비파형동검기의 기 이후에 해당됨을 알 수 있는데, 절대연대는 앞서의 요동지방의 연대를 참고하면 대체로 기원전 세기~기원전 세기경이라고 생각한다.비파형동검기의 각형토기문화권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비파형동검과 각형토기가 공반된 예가 없어 이 시기가 정확히 각형토기문화의 어느 단계인지 확실치 않다. 한영희는 각형토기 중기의 기원전 기~기원전 세기 무렵에 비파형동검문화가 파급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 근거로서 이 시기에 각형토기 문화권에서 장축벽면 주위 및 바닥중잉에 기둥구멍이 배열된 II 식 주거지가 만들어지고 이와 동일한 주거지인 세죽리 I식 주거지에서 비파형동검문화의 토기인 미송리형토기와 함께 이중구연십발형토기가 나오고 있는 점을 들고 있다.6 그런데, 세죽리유적에서의 이 시기에 해당되는 충에서 출토되는 미송리형토기는 전형적인 미송리형토기가 아닌 그 다음 단계의 묵방리형토기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62) 묵방리형토기는 앞서 살펴본 대로 비파형동검기의 제 기에 해당되므로, 각형토기문화 지역에서 출토되는 중기형 비파형동겁을 고려하면 이보다는 일찍 비파형동검문화가 파급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생각한다. 한편, 세죽리의 이 중현토기는 구연형태는 각형토기와 유사하지만 바닥이 각형트기보다 훨씬 넓은 것으로서, 이는 팽이형토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기보디는 요동 지방의 비파형동검문화지역에서 우가촌상충문화단계부터 나오는 이중구연토기와 관련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세죽리 이중구연토기 가운데에는 대상파수가 달린 것이 있는데, 이러한 이중구연토기가 압록강유역의 비파형동검기 세 기에 속하는 신암리 제 Il 문화충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 63) 이룰 뒷받침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필자는 각형토기문화지역에서 비파형동검문화의 파급은 앞서 본 것처럼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동검이 중기형인 점을 주목하여 그 상한울 기원전 세기로 보고 실제의 파급시기는 두 지역간의 문화변천의 시간차를 감안하여 기원전 1 기로 보면 타당하리라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앞서 한영희는 각형토기문화 중기인 기원전 기~기원 전 세기에 비파형동검문화가 파급되었다고 하면서 그 방증으로서 송국리의 비파형동검과 그 주거지의 연대를 기원전 @l 기~기원전 세기로 보고 있는데, 64) 최근 송국리 동검의 시기를 기원전 기~기원전 세기로 울려 보고 있어 65) 앞서의 기원전 세기~기원전 세기 비파형동검문화 파급설의 근거는 더욱 약하다고 생각한다.이상 각형토기문화권에서의 비파형동검문화시기를 살펴보았다. 그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기경으로. 보이며, 이는 이 시기의 각형토기문화권의 문화내용은 한영희의 각형토기문화 분기에 따르면 중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주목되는 것은 유혈구식마제석검이 등장한다는 접이다. 각형토기문화지역의 유혈구식석검으로는 금탄리 호 주거지 출토예와 갇은莖血溝石創봐 원암리 주거지 출토품과 같은 二段柄式有血溝石劍어 있는데 1,2 및 도면 9,10 참조), 이들은 모두 비파형동검 파급 이후 이를 祖型으로 하여 만들어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 일찍이 金廷鶴은 玉石里 주거지의 이단병식유혈구석검의 조형이 비파형동검이라는 주장을 한 바 있66) 金元龍 마제석검 가운데 유경식석검은 비파형동검이 세형동검으로 변하는 시기 무렵에 동겁을 조형으로 하였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67) 아무튼 한반도의 마제석검이 세형동검을 조형으로 한 것은 분명히 아니므 로 이의 조형이 될 수 있는 동검이 만약 당시에 존재하였다면, 현재로서는 비파형동검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한편, 無面辛 一段柄式 마제석검의 조형표 | 유혈구 유경식마제석검 출토지일람표
일련번호 유적명 유격성격 길이 (em) 형태 출천
이 오르도스식동검이라는 주장이 68) 있는데, 최근의 오르도스 청동기에 대한 연구들 참고하면 한반도의 마제석검과 형태적으로 유사한 오르도스동검은 남산근 101호 무덤에서 중기형 비파형동겁과 께 나오고 있고 그
표 2 유혈구 이단병식마제석검 출토지 일람표
일련번호 유적영 유척성격 길이 (em) 형태 출전
시기는 앞서 본 것처럼 기원전 세기~기원전 세기에 해당된다. 오르도스문화의 발상지는 내몽고 장성 연변지대인 복위 40 지접의 오르도스지방으
~
도연 9 유혈구 유경식마제석검 각종 @ 전냥 보성군 우잔리 출토 @ 운율 운산리 지석요출토 @ 미렴리 훌포 @토성리 출토 @북창대명리 석광요 (4, 호) 출토 @ 북창 대형리 석관묘 출토 (8호 )(1) 금웹 포함충 훌토 @ 금란리 8호 주거지 출토
o」 과 m
도연 10 유혈구 이단병식마제석검 각종 @ 의창 형성리 석활묘 훌토 @ 훌주 동후리 씌판요 출토 @ 월성 신향 l 출토 @ 파주 육씌리 주거지 훌토 @ 어수구석판묘 출토 @ 고덕리 출토 @여주혼빼 (l~ 호주커지) 훌토
표 3 한반도 내에서의 비파형동검 출토지 얼랑표
일련번호 유척명 유쩍성격 길이형태 출천
출전문헌 1) 도유호, 「지탑리 원시유적 발굴보고』, 유적발굴보고》 제8집 1961, 도판 cⅩⅩⅩⅤⅢ-⑤. 2) 석광준, 오덕리 고인돌 발굴보고, 고고학자료집》 제4집, 1974, p.104'.
3) 정찬영, 「북창군 대평리유적 발굴보고」, 《고고학자료집》 제4집, 1974, p.137.
4) 고고학연구실, 「미림 쉴바위 원시유적 정리보고」, 《문화유산》 1960년 3기.5) 김영우, 「중화군 강로리 유적조사보고」, 《고고민속》 1964년 1기.6) 김용간, 「금탄리 원시유적 발굴보고」, 1965, p. 40. 7) 有光敎一, 服 製石 硏究 , 1967, 도판 3.8) 정백운, 「강남 원암리 원시유적 발굴보고」, 문화유산 , 1958년 1기.9) 황기덕,. 1958년 춘하기 어지돈지구 관개공사 유적정리 간략보고( Ⅱ )」, 《문화유산》,1959년 2기.10) 有光敎一, 앞의 책, 도판 5.11) 김재원 • 윤무병, 『한국지석묘연구』, 1967, p. 43. 12) 임효재, 『흔암리주거지』 4, 서울대학교고고인류학총刊 제8책, 1978, 도판 35-C.13) 김정학, 「한국무문토기문화의 연구」, 《백산학보》 제3호, 1976, p.43.14) 심봉근, 「밀양 남전리와 의창 평성리유적 출토유물」, 『윤무병박사회갑기념론총』·1984, p. 6 1. 15) 안춘배, 「산청 묵곡리 출토 마제석검에 대한 고찰」, 고문화〉〉 22집, 1983, pp. 25 - 32. 16) 황기덕, 「최근에 새로 알려진 비파형단검과 좁은놋단검 관계의 유적유물.」, 〈고고학 자료집》 4, 1974, pp. 158-159.17) 『조선고문화종감』 권, 1946, p.65.18) 한병삼, 「개천 룡홍리 출토 청동검과 반출유물」, 〈고고학》 1집, 1968. .19) 정용길, 「신평군 선암리 돌상자무덤」, 〈고고학자료집》 6집. 1983, p.171.20) 리규태, 배천군 대아리 돌상자무덤」, 〈고고학자료집》 6집. 1983, p.176.21) 왕성수, 「개성 부근에서 드러난 비파형단검과 좁은놋단검 관계유물」, 〈고고학자료 집》6집 ~, 1983, p.169.22) 「부여 송국리 출토 일괄유물」,고고학》 3집, 1974, p. 155.22) 有光敎一, 며朋粒떄店道出土土器石꼽J, ((考古學雜誌》 28-1 1.24) 김원용, 「전무주출토 요녕식 동검에 대하여」, 《진단학보》 38, 1974, pp. 16-25. 기 이건무, 「청동유물의 땜질기법」, 『삼불김원용교수정년되임기념론총』 I , 1987, 일지 사, pp.170-171 ..26) 심봉근, 「경남지방출토 청동유물의 신열」, 《부산사학》 4, 1980, pp. 164-182.27) 송정현 • 이영문, 「牛山里 내우 支石 」, 『注岩댐水沒地域文化遺蹟發堀調査報告 』 ( Ⅱ ) , 1988, p. 286.28) 有光敎-, 앞의 책, 도판 25-4.29) 《월간문화재》 198~ 월 일자 보도.30) 추연식,「파주 식현리 무문토기 주거지유물」, 《경남사학》 제3집 ~. 1986, p. 20.로 보고 있으며, 이의 요서지방으로의 束傳 시기가 남산근 101호 무덤의 연대인 기원전 세기~기원전 세기 무렵 이후일 뿐 아니라 요하 동쪽으로의 확산 흔적은 현재까지의 중국 동북지방의 청동기문화 연구결과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기 70) 때문에 한반도 출토 마제석검의 르토 동검 조형설도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하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상과 갇은 내용으로 봐서 우리나라의 마제석검 가운데 일단병식무혈구마제석검은 동검이 아닌 다른 형태의 검을 조형으로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유혈구식마제석검은 분명히 동검의 형태를 모방한 것으로 판단되므로 지금까지 한반도지역의 마제석검의 연대를 고려할 때, 그 조형이 될 수 있는 것으로는 비파형동검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불 때 매우 주목되는 현상은 한반도출토의 유혈구식마제석검의 분포지역 , 2 참조)이 비파형동검의 분포지역 億. 3 참조)과 거의 같다는 사실인데, 이러한 분포지역상의 일치가 단순한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필자는 유혈구식마제석검은 비파형동검문화의 한반도지역으로의 파급 이후에, 이전의 무혈구식마제석검 제작자들이 新來의 비파형동검을 조형으로 하여 유혈구식마제석검을 제작 • 사용하였다고 생각하고싶다.지금까지 각형토기문화지역에서의 비파형동검기의 출현시기를 알아보았고, 그 무렵 비파형동검의 출현에 따라 각형토기문화 속에서 일어난 현상의 하나로 이해되는 것으로서 유혈구식마제석검의 존재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대동강유역 및 황해도지방의 각형토기문화권에서는 기원전 때]기 무렵에 비파형동검문화가 영향을 미쳤다고 불 수 있었다.그러면 기원전 핵]기 무렵은 각형토기문화의 어느 단계에 해당되는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앞서 지적한 대로 비파형동검이 직접 각형토기와 공반되는 예는 아직 없으나, 비파형동검울 조형으로 하여 출현한 것으로 생각되는 유혈구식마제석검의 존재를 통해서 각형토기문화와의 관계를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유혈구식마제석검이 나오는 유적으로는 평양 원암리 주거지, 금탄리 호 주거지, 금탄리 포함충, 지탑리 포항충 동의 주거유적과 북창 대평리 호, 호 석관묘, 황해도 덕암리 석관묘, 은율운산리 지석묘, 봉산 어수구 석관묘 등의 분묘유적이 있다(표 1,2 참조). 그런데 금탄리 호 주거지 및 원암리 주거지는 대체로 각형토기문화의 중기에 해당 버는 유적들이므로 비파형동검문화가 각형토기문화권에 파급된 시기는 각형토기문화의 중기 이후임이 분명해진다. 또한, 비파형동검문화가 파급되는 이 시기의 묘제는 앞서 열거한 유경식마제석검 출토 분묘들을 통해 서 보면 지석묘, 석관묘 등이었음도 알게 된다.
다음은 비파형동검기의 하한시기에 대해서 알아보자. 앞서 요동지방 및 압록킹유역지방의 청동기문화변천에서 본 바와 갇이 비파형동검기의 하한은 세형동검의 출현시점과 직접 관계된다. 각형토기문화 분포권 안에서 알려진 초기형의 세형동검으로는 황해도 고산리 토광묘 출토품이 있으나 이는 두 자루의 중국 동검 및 동부와 걷이 나왔을 뿐 공반된 토기가 없어 각형토기문화와 쉽게 연결시켜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요동반도 및 압록강유역 세형동검기의 경우에는 이중구연의 십발형토기 , 흑색마연장경호 등과 더불어 끝이 뭉룩한 나무그루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토기 등이 새로 출현하고 있음을 보았다. 대동강유역 및 황해도지방에서도 이러한 토기들이 출토되는 유적이 알려져 있는데 평양의 南京유적에서는 이중구연심발형토기와 묵방리형토기가 함께 출토되었고, 72 황해도 明砂里 유척에서는 옹관으로. 쓰인 토기 가운데 끝이 뭉룩한 손잡이가 달린 登와 의반된 구연을 가전 십발형토기가 나왔다. 또 황해도 御 區 支石山게서도 명사리와 갇은 뭉툭한 손잡이 가 달린 토기가 출토되어 이러한 특칭적인 토기를 〈명사리형토기〉로 부르기도 한다.73) 소위 명사리형토기가 세죽리유적의 맨 위층(초기 철기문화충)과 가운대충(청동기시대문화층) 사이의 교란층에서 출토되는 세모고리모양의 손잡기 또는 쇠뿔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토기들과 동일한 것들임은 앞서 여러 차례 살펴본 바와 같다. 세죽리의 쇠뿔모양 또는 세모고리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토기들은 요동반도 및 압록강유역지방의 세형동검기에 해당되며, 그 바로 아래 ( 에는 묵방리형토기를 내는 층이 있는데 이는 비파형동검기 기에 속한다. 세죽리의 이러한 각 층별 토기문화의 선후관계를 통하여 볼 때 대동강유역 및 황해도지방의 남경유적, 명사리, 지석산 등지에서 나온 위와 같은 토기들이 세형동검기에 해당되는 것은 확실해졌다. 따라서 대동강유역 및 ~l도지방의 비파형동검기는 남경유적이나 명사리 등지에서 나오는 소위 명사리형토기에 앞서는 시기까지로 봐야 할 것이다. 소위 명사리형토기 바로 직전 시기의 토기는 곧 각형토기이다. 각형토기와 명사리형토기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각형토기문화권에서 명사리형토기가 소수의 유적에서만 출토된 접을 들어 각형토기가 명사리형토기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초기 철기시대의 승석문토기로 이어졌다고 주장하는 이견이 있다. 그러나 남경유적에서 출토되는 이중구연 심발형토기가 한강유역에서의 흔히 점토대토기라고 부르는 심발형토기와 동일한 것들이고, 명사리의 파수 달린 토기들은 세죽리유적뿐만 아니라 한강 이남의 신창리, 金丈里 등지에서도 확인되는 접으로 미루어 대동강과 황해도지방의 각형토기 지역만 명사리형토기 시기가 없었다고 보는 것은 논리적 근거가 약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각형토기문화권 지역과 동일한 대동강과 황해도지방이 전형적인 세형동검문화의 중심지임은 주지의 서실인 접에 비추어볼 때, 세형동검시기의 토기단계를 거치지 않았다는 것은 초기 세형동검문화의 한반도 지역으로의 파급과정상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하면 남경유적이나 명사리 등지에서 출토되는 토기들의 바로 직전 단계가 각형토기임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대동강유역 및 황해도지방의 비파형동검기는 세형동검기로 밝혀진 남경유적 및 명사리 출토 토기에 앞서는 시기의 토기문화 죽, 각형토기 후기까지 이어전다는 것이다. 이로써 비파형동검기는 각형토기 중기에 출현하여 후기까지 걸치는 기간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마지막으로 비파형동검기의 하한연대에 대해 알아보지. 절대연대를 알수 있는 분명한 자료는 아직 없으나 앞서의 요동지방 빛 압록강유역에서는 기원전 기 무렵부터 세형동검기가 시작되고 있으므로 이보다 조금 늦은 시기를 잡아 대체로 기원전 기~기원전 기경에는 이 지역에서도세형동검기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비파형동검기의 하한은 기원전 기 무렵까지로 보면 어떨까 한다. 결국 대동깅유역 및 황해도지방에서의 비파형동검기는 이 지역의 각형토기문화 중기에서 후기까지 걸친 기간에 해당되고 그 절대연대는 대체로 기원전 기에서 기원전 기 사이로 볼 수 있겠다.
2-3 세형동검기대동강유역 및 황해도지방에서 세형동검기의 시작은 이 지역에서 각형토기문화가 끝나고 새로운 토기문화인 점토대토기와 뭉툭 우각형파수가 달린 소위 명사리형토기 등으로 구성된 토기문화가 나타나면서부터이다. 그 시작연대는 앞서 비파형동검기의 하한을 살펴보면서 이미 말한 대로, 기원전 때 기 무렵에 비파형동검기가 끝나므로 기원전 기말, 기원전 세기 초경에는 세형동검기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서는 대동강유역 및 황해도지방의 세형동검기 문화내용의 변천을 주로 토기와 세형동검을 중 십으로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세형동검에 대한 연구는 그간에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최근 이청규에 의한 종합적인 연구가 있다. 75) 이 글에서는 세형동검기의 문화내용을 살펴보는 데에 있어 이청규의 연구를 참고하고자 한다. 이청규에 의하면 세형동검은 그 공반유물과 형식분류 결과에 따라 모두 기로 나뉘어진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갇다.I 기 : 세형동검 BI 시기Ⅱ기:세형동검 BⅡ 식이주가되는시기로銅鐵, 銅籍출현Ⅲ기 : BⅡ, BⅢ 식 세형동검이 공존하나, BⅢ식이 우제한 시기, 銅戈, 細文錢, 車馬貝출현IV 기 : BⅢ식 세형동검시기, 銅苑, 銅芹, 銅堅 등의 工貝가 銀造鐵器Ⅴ기 : BlV식 동검 출현이와 갇은 세형동검 및 반출유물에 의한 분기에서 보면, III 기부터는 이미 鐵器가 나오고 있어 I , Il 기까지만 청동기시대에 해당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세형동검은 이처럼 청동기와 초기 철기시대에 모두 걸쳐 있는 銅器기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세형동검이 출현하는 시접인 기원전 백 년경부터 초기 철기시대로 구분하자는 의견이 최근에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76) 그러나, 세형동검과 철기의 반출은 매, BW식 등 늦은 시기의 세형동검에서만 확인되고, 앞서 요동지방의 초기형 세형동검은 분명히 청동기시대에 속하므로 우리나라 전체를 대상으로 보면 결코 세형동검의 출현부터를 초기 철기시대로 편입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세형동검은 비파형동검과 함께 우리나라 청동기의 가장 특징적인 동기의 하나인데 이러한 세형동검을 초기 철기시대의 표지적인 유물로 하는 것은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남한 지방만을 대상으로 하면 세형동검의 출현과 초기 철기의 시작은 거의 시차가 없을지 모르나, 초기형 세형동검의 출현지역인 요동지방의 경우는 세형동검문화와 초기 철기문화인 소위 세죽리 -연화보유형문화와는 별개이므로 청동기시대의 마지막 단계로서 세형동검기를 보는 편이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리라 본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서, B I, BⅡ 식 세형동검이 존재하는 시기인 이청규의 분기에 의한 I , 기를 세형동검기 전기, ~BW식 세형동검과 철기가 반출하는 이청규의 따, N, 기를 세형동검 후기로 하여, 전기까지를 청동기시대로 하고 후기는 초기 철기시대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다.
다음은 세형동검의 형식 및 반출 동 • 철기 이의에 토기를 통해 세형동검기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세형동검과 토기가 같이 나오는 경우는 세형동검기 후기에는 비교적 그 예가 많으나, 전기에는 거의 반출되는 예가 없다. 이 점은 비파형동검기에서와 공통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갇이 세형동검기는 각형토기와 다른 새로운 토기문화인 접토대토기와 명산리형토기와 갇이 시작되므로 비록 반출된 토기는 없으나 그 시기의 토기내용은 짐작할 수 있다.세형동겁기의 대동강유역, 황해도지방의 토기에는 남경유적에서 출토된접토대토기와 명사리유적에서 옹관으로 쓰인 의반구연심받형토기 및 뭉한 손잡이가 달린 登形 토기가 있으며, 다음으로 주로 토광목괵묘에서 세형동검과 반출되는 승석문토기호 및 花盆形 토기가 있다. 남경유적에서는 접토대토기와 함께 묵방리형토기가 나오고 있어 비파형동검기와 곧바로 연결되는 이른 시기의 세형동검기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접토대토기는 앞서 말한 대로 요동지방 이중구연심발형토기의 한 형식으로 생각되는데, 점토대토기라 불리는 특징적인 형식으로 정착된 것은 위와 갇은 요동지방 이중구연토기가 한반도지역에 영향을 미쳐 일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접토대토기는 그 주요 분포지역이 한강유역 이남의 남한지방이러는 이유로 한강유역에서 최초로 출현지라 하였다고 추정하고 있었으나, 77) 지금까지 살펴본 사실로 보면 초기형 세형동검이 발생한 요동지방의 이중구연심발형토기가 대체로 한반도의 대동강유역에서 독특한 접토대토기로 정착된 것으로 보는 것이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전반적인 변천과정을 고려할 때 타당한 것으로 이해된다. 남경유적에서 출토된 접토대토기는 따라서 이 지역의 세형동검기에서는 이른 시기에 해당되는 토기로 봐야 할 것이다. 이는 반출된 묵방리형토기가 비파형동검기 토기문화의 하나인 접에서도 뒷받침된다. 명사리에서 나온 토기 중 심발형토기에 속하는 것은 접토대 대신에 구연이 의반된 것으로 바뀌어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반구연심발형토기는 전남의 新昌里 옹관78)과 郡谷里 패총79) 등지에서 출토된 토기에서도 확인되는데, 대체로 접토대토기가 변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죽, 남경유적 출토품과 갇은 단면형이 둥근 점토대가 단면삼각형으로 바뀌고 나아가 점토대가 사라지면서 의반된 구연형태로 바뀌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접토대토기의 구연형태 변화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학자들이 지적한 바 있는데, 군곡리 패총의 층위별 구연형태 분포빈도상에서 대체로 그러한 변천과정이 확인되고 있어 80) 점토대토기가 의반구연의 십발형토기로 변화 • 발전하였다고 보는 추정을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명사리의 의반구연심발형토기는 남경유적 출토 접토대토기보다 그 제작시기가 얼마간 늦은 점토대토기 다음 단계의 십발형토기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명사리에서는 의반구연 십발
형토기와 함께 뭉툭한 손잡이가 달린 호형토기도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손잡이가 달린 호형토기 역시 신창리에서도 출토되고 있어 대체로 점토대토기가 의반구연심발형토기로 변화된 단계의 호형토기의 예로 보인다. 細竹里유적에는 이러한 호형토기에 組合式牛角形肥手와 유사한 소위 세모고리가 달린 것도 있는데, 한강유역 이남지역에서는 水石里81 니 白荊島 출토품82)와 같은 환상파수가 달린 것, 鷹峯, 83) 금장리 84) 등에서와 갇이 조합식우각형파수 또는 우각형파수가 달린 것, 그리고 신창리와 늑도, ) 금장리 등지에서와 같이 끝이 뭉툭한 우각형파수가 달린 것 등이 있다. 호형토기에 달린 이러한 파수의 제형태는 그 출현의 시기차가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대체로 환상피수가 가장 선행한 형태이고 그 다음이 조합식우각형파수, 우각형파수 순으로 변화되고86) 최후로 신창리, 명사리 출토품과 같은 뭉툭한 형태의 손집이형태가 나타난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논의결과 명사리 출토의반구연심발형토기는 남경유적과 같은 접토대토기가 변화 • 발전한 토기이며, 뭉룩한 손집이가 달린 호형토기도 〈세모고리〉(조합식 우각형파수)파수가 달린 세죽리 출토품보다는 늦은 시기의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점토대토기 및 호형토기는 앞서 본 대로 한강 이남지역에서는 다양한 변천단계를 보여주고 있으나, 대동강유역 • 황해도지방에서는 아직 그러한 토기들이 모두다 확인되지는 않고 다만 최근에 단면원형의 접토대토기와 늦은 시기의 의반구연심발형토기 단계만 확인된다. 점토대토기가 한강 이남지역으로 파급된 시기는 대체로 남경유적 출토품 시기인 단면원형접토대토기 단계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한강 이남지역에서는 단면삼각형의 접토대토기 단계를 거쳐 의반구연십발형토기로 바뀌고 있는 접에 비추어 대동강 • 황해도지방에서도 그러한 변화 발전의 과정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현재로서는 분명하지 않다. 일단, 단면원형의 전형적인 접토대토기를 내는 남경유적 시기 와 접토대토기의 변화형인 의반구연십발형토기를 내는 명사리유적 시기로 구분하고자 한다. 남경유적과 명사리에서 모두 세형동겁이 공반되지 않아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가 구체적으로 어떤 형식의 세형동겁과 동일시기에 해당되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뒤에 불 소위 〈화분형토기났근 대체로 BⅢ
BIV식 세형동검과 반출되어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되는 세형동검기 후기의 토기이고 화분형토기가 점토대토기 및 명사리형토기와 공반되지 않는 점으로 보면 이들 두 유적은 모두 세형동검기 전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대체로 세형동검 식과 동일한 시기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이청규의 분기에 따르면, 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화분형토기는 그 모양은 대개 접토대토기와 비슷하지만 주로 토광목곽묘에서 회색승문토기, 단경호 등과 반출되는 경우가 많다. Bill, BIV식 세형동검, 동과, 車馬貝 등의 동기가 공반되며 일부 철기가 존재하는 시기인 세형동검기 후기 (초기 철기시대)의 토기에 속한다. 점토대토기와의 형태적 유사성에서 화분형토기를 전자의 변화 발전형으로 보는 견해도87) 있으나, 화분형토기는 명사리 갇은 의반구연심발형토기 다음 시기에 나오므로 형식발달 과정상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세형동검기 후기에는 화분형토기와 갇은 형태의 동기, 철기도 있어 88) 이러한 금속제 그릇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으로생각된다.지금까지 세형동검기의 토기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세형동검 전기에는 점토대토기와 명사리형 의반구연심발형토기 및 뭉목한 피수가 달린 호가 있으며, 세형동검 후기에는 화분형토기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토기상을 세형동검의 형식 및 공반 청동기와 결부해 보면, 접토대토기 및 명사리형토기는 I, il식 세형동검기에 해당 되고, 화분형토기는 Bl, BIV식 동검 및 동과, 細, , 차마구 그리고 철기와 같이 나오고 있다. 점토대토기, 명사리형토기와 갇은 시기의 B I , BI 식 세형동검기는 아칙 청동기만 나오는 세형동검 전기에 속하는데. 이는 이청규의 I. 분기에 해당한다. 한편, 화분형토기는 目, BIV식 세형동검이 주로 나타나는 시기에 속하는데, 이 무렵에는 이미 철기가 존재하므로 초기철기시대에 속한다. 이청규의 1~V분기에 해당되는데 이 글에서 말하는 세형동겁기 후기이다.끝으로 세형동검 전기와 후기의 연대에 대해서 알아보면, 이청규는 제 1기를 석암리 출토 秦戈의 記年銘(B.C. 221년)을 근거로 기원전 백 년을 상한으로 보고 있다. 89) 이에 따르면 세형동검 후기의 시작은 기원전 백 년경으로 볼 수 있다. 죽, 기원전 세기말~기원전 책]기초 무렵에 세형동검후기 (초기 철기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로써 세형동검기 전기는 비파형동검기 하한연대인 기원전 때기 이후인 대개 기원전 기말부터 세형동검 후기 (초기 철기시대)의 상한연대인 기원전 세기~기원전 기초의 기간에 해당된다. 한편, 세형동검기 후기의 하한연대는 BIV식 세형동검과 함께 나온 高商 墓 (貞相洞 ) 출토 〈永始三年〉 (B.C. 14년)銘이 있는 일산대의 촌재로써 알 수 있는데 90) 대체로 기원전 세기말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대동강유역 및 황해도지방의 청동기문화의 변천을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정리 요약하면 다음 표와 같다.
시기 청동기 토기(석기) 묘꺼 l 절대연대
3 두만강유역 및 함경남북도지방 3-1 선동검기 두만강유역의 청동기문화의 시작은 서포항유적 청동기시대 제 I 기충 시 기부터로 보고 있다. 91) 서포항 청동기시대 제 I 기충은 앞선 신석기시대 말 기문화인 서포항 기충, 호곡 기충의 문화내용을 계승한 것으로 보고 있 는데, 서포항 기충과 호곡 기충의 문화내용은 앞서 본 요동지방의 우가 촌하층유형문화 및 압록강유역의 청등말래유형 (신암리 1 문화충)과 유사성이 느껴진다• 이에 대해서 토기를 중심으로 잠시 살펴보면, 서포항 기충에 앞선 서포항lV 기충에서부터 각종의 기하학문양이 많이 보이며, 그릇 몸체 에 콩알과 갇은 浮點文이 장식되는 경우가 확인되는데 92) 이러한 내용은 앞 서 본 것처럼 우가촌하층유형문화 및 압록강 하류의 청등말래유형 (신암리 1 문화)토기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들이다. 이 밖에도 호곡 I 기충에서 보이는 굽다리가 달린 컵모양의 토기 93 4=- 신암리 청등말래유형의 토기 가운데서 꼭 갇은 모양을 찾바볼 수 있다. 94) 이러한 내용은 두만강유역의 신석기 말기문 화와 요동지방 및 압록강하류지방의 신석기 말기문화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있었음올 말해 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우가촌하층유형문화 다음에 이 어지는 우가촌싱층유형문화와도 얼마간의 관계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우가촌상충문화에 이중구연의 수법이 많이 나타나고 있음은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이러한 이중구연토기가 두만강유역의 신석기 말기문화인 서포항V 기층의 토기들에서도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95) 이중구연토기 이의에 호 곡 1 기에 나타나는 목이 짧은 球形査96)의 모양은 우가촌상층유형문화의 적 석묘인 陀頭유적에서 흔히 보이는 토기 기종들과 공통성이 많은데, 이러한 토기들간에 나타나는 형태적 공통성도 결코 우연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 다. 이처럼 두만강유역의 말기 신석기문화와 압록강유역 및 요동지방의 말 기 신석기문화 및 조기 청동기문화(우가촌상층유형문화) 사이에는 일정한 관 련성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두만강유역의 말기 신석기문화에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징도 있는데, 공열기법의 존재가 그것이다. 서포항 기 및 호곡 기에 보이는 공열기법은 주로 화분형의 심발형토기의 아가리 부근에 그릇의 안벽에서 밖 으로 찔러서 밖이 불룩하게 튀어나오게 한 究節杉 공열이 대부분인데, 이러 한 관통되지 않은 공열기법은 뒤에서 다루게 될 한강유역의 말기 신석기문 화인 내평유적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공열토기 전통은 두만강유역과 한 강유역 및 그 이남의 남한지방 무문토기문화와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에 매 우 중요한 실마리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으로 보면, 두만강유역의 신석기 말기문화인 서포 항 V 기충 및 호곡 I 기충의 문화는 요동지방 및 압록강유역의 우가촌하층유 형문화와 관련이 있었던 것은 인정된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 절대연대의 비정에도 우가촌하층유형문화의 연대를 참고할 수가 있다. 우가촌하층유형 문화의 절대연대는 C”측정연대에 의하면 B.C. 2135 100~ B. 1735 85년 이므로, S7) 두만강유역의 말기 신석기문화의 연대도 대체로 이와 병행되는 기원전 천 년기말~기원전 천 년기초 무렵으로 생각된다. 두만강유역의 청동기문화는 지금까지 살펴본 서포항 기충 및 호곡 기 충 다음 단계인 서포항 청동기문화충 1 기 및 호곡 제 I 기층 시기부터 시작 되는데, 여기서 이 무렵을 청동기문화의 시작이라고 규정하는 근거는 신석 기 말기에 나타나는 줄문토기 (각종 기하학문기 음각된 토기)가 사라지고 대신 그전부터 나타나기 시직하였던 무문토기가 대폭 증가하는 것과 동시에 새로 운 적색마연토기 (붉은간그릇)가 등장하는 등의 주로 일련의 토기문화상의 차이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토기상에서의 구분 이의에도 앞서 우 리나라 청동기시대 개념파악을 위해 설정한 바 있는 석기상, 생업형태, 청 동기의 존재 등의 각 기준에서 보면 두만강유역의 이 시기에는 석기상에서 도 앞선 신석기말기에 비해 타제훅요석기의 현저한 감소에 반하겨 , 석 부, 반월도 등의 마제석기의 대폭 증가현상이 두드러지며, 농경의 정착도 확인되고 있다. 98) 청동기의 출현도 확인되는데, 나전 초로 무덤에서의 銅管玉, 동포, 회령 창효리 무덤의 동천, 호곡동개서 나은 동포뮬 모방한 土泡
등의 존재가 그것이다(도면 의 참조).
다음은 두만강유역 청동기문화의 전개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나아가 함경남북도 동해안일대 지역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두만강유역의 청동기문화는 크게 전기의 적색마연토기문화(붉은간그릇문화)와 후기의 갈색 또는 혹색 마연토기문화(갈색 • 검정간그릇문화)로 나뉘어진다. 99) 전기에 해당되는 유적으로는 서포항유적의 청동기시대 제 1기충, 회령 오동 제 1 기충, 호곡 제 Il 기충, 서포항 청동기 제 Il 기충, 초도유적의 적갈색마연토기관계충이 있으며, 이들은 대체로 나열된 순서대로 다시 서로간에 시기적인 선후관계가 존재한다고 한다. 100) 전기의 적색마연토기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면, 태토에는 모래가 거의 섞어지지 않았으며 그릇표면을 광채가 나도록 마연한 다음 붉은 물감을 바른 것인데, 적색마연토기질로 된 기종들에는 대접모양의 구경이 넓은 그릇과 소형 심발형토기 그리고 구연이 의반된 호 등이 있다. 한편, 전기에는 적색마연토기 이의에 적갈색무문토기도 존재하는데, 이러한 무문토기는 신석기 말기 이래로 줄곧 이어지던 것이다. 신석기 말기의 무문토기에는 돌유형의 반관통 공열문이 장식된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으나, 청동기시대 전기에는 공열문은 거의 대부분이 관통된 것들이고 구연의 모양도 신석기 말기의 호곡 1 기충에서 보이는 곧은 구연과 달리 외반된 구연이 주를 이루고 있어 시기적인 차이가 나타난다. 전기에 속하는 청동기의 존재는 아직 흔하지는 않지만, 초도의 청동방울, 동포, 동제관옥 등을 둘 수 있는데, 이러한 청동기 이의에도 초도유적에서는 뼈로 만든 끌과 걷이 청동기를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두만강유역의 전기 청동기문화는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변천의 흐름 속에서 보면 분명히 선동검기에 해당되는 시기임을 알수있다.두만강유역의 청동기문화 후기는 갈색 및 흑색 마연토기 (갈색 • 검정간그릇) 문화를 말하는세, 이에 해당되는 유적은 회령 오동 제 lI , 제 田기층, 호곡동 171층, 호곡동 기층 등이다. 이 시기에는 적색마연토기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대체로 갈색마연의 대형기종이 많아지는 추세를 보이는데, 일부의 심발형 대형토기 목부분에는 突帶가 나타나기도 한다. 갈색마연토기와 검정색마연토기는 거의 공존하지만 검정색마연토기가 보다 늦게까지 사용되면서 그 일부는 초기 철기시대에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후기에 해당되는 시기의 청동기의 예로는 회령 창효리의 청동팔찌, 호곡동 50호 주거지의 녹인 청동덩어리 등이 있다. 후기도 전기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변천단계에서 보면 선동검기와 같은 단계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함남지방의 청동기문화와의 관계를 통해서 뒤에서 보듯이, 두만강유역의 청동기문화 후기의 흑색마연토기 (검정간그릇)와 함께 비파형동검기의 청동기유물이 공반되는 소위 〈금야유형〉의 존재를 고려하면, 두만강유역의 청동기문화 후기 후반 무렵이 우리나라 청동기문화 변천단계의 비파형동검기와 병행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비파형동검문화의 파급경로가 청천강 • 대동강 상류를 경유하여 원산만 일대의 함남지방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이므로 두만강유역에는 비파형동검문화가 직접 미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만강유역의 청동기문화의 변천을 여타 한반도지역의 청동기문화 변천과 결부시켜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록 비파형동검문화의 파급내용이 확인되지 않는 지역이더라도, 지금까지 디른 지역들에서와 갇은 변천단계를 적용시켜 일단 두만강유역의 청동기문화 전기 및 후기의 앞부분을 선동검기로 설정하고, 후기의 뒷부분 죽, 검정간그릇이 우세해지는 시기를 함남지방의 비파형동검기문화내용인 〈금야유형〉과 병행되는 시기 죽, 비파형동검기와 병행하는 단계로 파악하여 두고자한다.
그러면 이제 함경남도지방의 청동기시대 문화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함남지방의 청동기문화는 앞서 살펴본 두만강유역의 청동기문화와 대동강 • 청천강 상류지방을 경유해 이 지역에 파급된 서복지방의 청동기문화가 복합되어 나타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지역의 청동기문화는 크게 나누거 보면, 두만강유역의 적색마연토기와 그 무렵의 무문토기가 파급되어 형성되었다고 보여지는 소위 〈강상리유형〉102) (또는〈호만포유형〉)과 두만강유역의 후기 청동기문화에 서북지방의 비파형동검문화가 결합되어 나타난 〈금야-토성리유형〉 103) 그리고 흑색마연의 장경호 및 이중구연심발형토기와 함께 세형동검의 검파두식이 출토되는 洪原郡 浦유적 104)으로 대표되는 이 지역의 세형동검기문화가 있다. 여기서는 〈강상리유형 만 살펴보고 나머지 〈금야-토성리유형〉, 운포유적 등에 대해서는 뒤에서 절을 달리하여 알아보고자한다.
강상리유형의 유적 가운데 순수하게 적갈색마연토기만이 나타나는 유적은 함경남도 신포시 (이전에는 新昌郡) 강상리 호만포가 알려져 있는데 기형이 복원되는 토기가 거의 없어 기종구성 내용은 확실치 않으나 태토로 보면 두만강유역의 적색마연토기와 꼭 갇다고 한다. 105) 한편, 적갈색마연토기 이의에 이 시기에는 무문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이 있다. 함북 金策市 仁里나 元山市 中坪洞 유적에서는 공열토기와 호형토기가 출토되었는데, 공열토기 가운데는 반관통된 돌유형의 것들이 있다. 106) 이러한 반관동 돌유형 공열문은 두만강유역의 신석기시대에 특징적인 것임은 앞서 보았다. 함남지방의 돌유형 공열문도 대체로 두만강유역의 그러한 공열토기와 비슷한 시기로 생각된다. 그런데, 덕인리 출토품은 북방식 지석묘에서 나왔는데, 덕인리 지석묘는 한반도의 동북지방에서는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예에 속한다. 지석묘는 앞서 본 요동지방에서는 신석기 말기~초기 청동기시대에 이미 나타나고 있어 덕인리의 북방식 지석묘도 그러한 요동지방의 지석묘가 한반도지역으로 파급되는 과정에서 출현한 것으로 파악된다.지금까지 두만강유역 및 함경도지방의 선동검기의 청동기문화에 대해 개략적으로 알아보았다. 두만강유역에서는 전기의 적갈색마연토기문화와 후기의 갈색마연토기문화 시기에 해당되며, 함경도 동해안지방에서는 두만강유역의 전기 청동기문화가 파급된 〈강상리유형〉의 적색마연토기문화와 서북지방으로부터 파급되어 온 지석묘 등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문화내용을 보이는 시기이다. 그러면, 마지막으 두만강유역 및 함경도 동해안지방의 선동검기의 연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먼저, 선동검기의 개시연대는 이 지역의 청동기문화의 시작 죽, 적색마연토기문화의 출현과 시기를 같이하는데,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대체로 요동지방의 우가촌하층유형문화와 서포항 • 기, 호곡동 기 문화와의 관련성으로 봐서 적색마연토기문화의 출현시기는 우가촌상층유형문화와 병행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그 절대연대는 우가촌상충문화의 절대연대를 참고하여 B.C. 1200~B.C. 1100년경으로 비정하고자 한다. 한편, 선동검기의 하한연대는 곧 이 지역에서의 비파형동검기의 시작연대와 갇은 것이겠지만 앞서 본 대로 두만강유역에서는 비파형동검문화가 직접 파급된 흔적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함경도 동해안지방의 〈금야-토성리유형〉과 두만강유역의 흑색마연토기 (검정간그릇)와의 관계로써 보면 대체로 두만강유역의 후기 청동기문화의 후반 무렵은 비파형동검기와 평행되는 시기로 생각되므로- 선동검기의 하한을 호곡동 제 매기~제 기충 시기로 볼 수 있다. 호곡동 제 기충의 연대를 기원전 세기~기원전 세기로 보고 있으므로107) 이보다 조금 이른 기원전 기~기원전 세기 무렵울 이 지역의 선동검기의 하한 죽, 비파형동검기의 개시연대로 보고자 한다.
3-2 비파형동겁기앞서의 선동검기의 문화내용을 살펴보면서 이미 언급한 대로 두만강유역의 청동기문화에는 비파형동검문화의 직접적인 파급 흔적이 현재까지로서는 거의 확인되지 않았지만 일단 이 지역의 후기 청동기문화인 검정색간그릇시기를 한반도 여타 지역에서의 비파형동검기와 병행하는 시기로 비정할 수 있었다• 한편, 함경도의 동해안지방에서는 비파형동검문화의 영향이 확인되는데 이는소위 〈금야-토성리유형〉의문화내용으로대표되는것이다. 여기서는 주로 〈금야―토성리유형〉의 문화내용을 중십으로 살펴보고자 한다.〈금야-토성리유형〉의 유적으로는 1965년도에 조사된 북청군 중리유적, 108) 1964년에 조서된 영흥옵유적, 109) 최근 1982년도에 조사된 북청군 토성리유적 110) 등이 있다. 〈금야-토성리유형〉이라는 명칭은 최근에 여전 것인데,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금야유형〉라고 불리어졌다가 198 토성리 주거지가 조사되면서 토성리 주거지 내부 저장공바서 선형동부, 청동끌, 청동방울 등의 청동기가 다량 출토됨으로써 〈금야_토성리>형으로 개칭된 것이다. 〈금야유형〉이러는 명칭은 1964년도 영흥옵유적이 조사되면서 이 유적에서 비파형동검, 선형동부 등의 일련의 비파형동검문화의 청동기거푸집이 출토되었는데, 영흥읍이 금야읍으로 개칭되면서 이 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를 〈금야유형〉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금야-토성리유형〉의 토기는 갈색간그릇과 검정간그릇으로 나뉘어진다. 갈색간그릇에는 세죽리, 공귀리유적 출토품과 갇이 몸체에 꼭지형손잡이가 달린 것이 대표적인데 이러한 토기에는 아가리에 공열문이 있는 것이 많다. 꼭지형손잡이 이의에 나무그루형의 손잡이가 달린 것도 있으나 이들은 늦은 시기에 해당되는 것들로 두만강유역의 초기 철기문화시기와 병행되는 것들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갈색무문토기 (갈색간그릇)에는 구연이 이중으로 겹싸인 토기들도 있으며, 이중구연 위에 디시 공열이 장식된 것들도 있다. 한편, 검정간그릇에는 몸체에 음각선을 두르고 그 사이룰 다시 삼각형으로 구획한 뒤 빗금을 태운 문양들도 보이는데 111) 이러한 문양은 요동지방 비파형동검기의 강상묘 출토 혹색마연호112)에서도 보이고 있어 일정한 관련성을 말해 준다고 생각된다. 〈금야-토성리 유형〉에 흔히 나타나는 토기인 꼭지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심발형토기는 세죽리의 묵방리형토기 문화층(세죽리) 에서 나오는 것과 동일한데, 이로써 미루어 보면, 〈금야-토성리유형〉 은 대체로 앞서 본 요동지방의 비파형동검기의 제패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 시기는 철대연대로 보면 대개 기원전 세기~기원전 세기에 해당되므로 함경도 동해안지방의 〈금야-토성리유형〉의 비파형동검문화도 이 무렵으로 보면 크게 틀립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금야-토성리유형〉으로 대표되는 함경도 동해안지방의 비파형동검문화의 청동기로는 영흥읍(현재는 금야읍)유적에서 나온 비파형동검거푸집, 선형동부거푸집, 청동방울거푸집 등과 토성리유적에서 나온 선형동부, 청동꿀, 청동방울 등이 있는데, 이들 유물은 이 지역에서 청동기가 주조되었음올 입증해 주는 자료이므로 당시 비파형동겁기의 청동기 제작이 성행되었음울충분히 알수있다. 그런데, 〈금야-토성리유형〉의 일련의 유척들에서아직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예는 없지만, 비파형동모의 존재로 보아 장차 비파형동검의 출토가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이 지역의 비파형동검기의 개시연대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자. 앞서 말한 것처럼 금야-토성리유형의 토기와 세죽리의 묵방리형토기문화충(Il 3) 출토의 토기를 대비해 보면 그 상한은 요동지방 비파형동검기의 제때기 죽, 기원전 세기 무렵이 될 것이나, 비파형동검문화의 이 지역에 서로의 파급 시간차를 고려하여 〈금야-토성리유형〉의 출현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세기~기원전 세기 무렵으로 하여 두고자 한다. 이는 앞서 두만강유역의 선동검기의 하한연대를 호곡동 제 기충과 대비하여 기원전 데기~기원전 세기 무렵으로 비정한 것도 고려하였다. 한편, 비파형동검기의 하한 죽, 이 지역에서의 세형동검기의 시직연대는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대개 기원전 세기초 무렵으로 생각되는데, 이는 대동강유역의 세형동검기 전기의 중엽경에 해당되는 시기이다.3-3 세형동검기두만강유역 및 함경도의 동해안지방의 세형동검기는 주로 함경도의 동해안지방의 각 유적에서 출토된 세형동검 및 반출 청동기들로 대표되는데, 세형동검이 출토된 주요 유적으로는 함흥시의 梨衛同 토광묘, 함남 신창군細陣 토광묘, 함남 인홍군 龍山里 토광묘, 함흥 盤卿h, 호상동, 합주군대성리, 인홍군 연동리, 함흥시 송해리, 흥원군 窮浦里 등과 멀리 이즈웨스토프석관묘 등이 있다.이 지역의 세형동검기의 유적들은 대부분이 무덤들인데 이들은 무덤의 형식과 세형동겁의 형식, 그리고 반출유뭉개 의해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류는 석관묘유적이고 둘째 분류는 토광묘유적이다. 석관묘유적은 이즈웨스토프 한 예밖에 없지만, 세형동검과 반출청동기의 내용을 보면, B 식 세형동겁 (이하 세형동겁 및 반출청동기의 형식명칭은 모두 이청규의 형식분류계 의함) AI 식 銅鈴 銅錫, 형식의 租幻 (신식 조문경) 등으로 이청규의 세형동검 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둘쨋번의 토광묘 관계 유적의 출토품을 보면, 이화동에서는 Bll, I[식 세형동검 각 개씩, All 식동모 까, All 식 동과, 의 세문경 및 철부가 나왔으며 하세동리에서 는 血식 세형동검, All 식 동모, AI 식 동과, 그리고 방울모양의 수레부속구가 나왔는데, 이들은 모두 이청규의 세형동검 매기에 해당된다.
석관묘와 관련된 첫번째의 세형동검기의 문화내용은 따라서 토광묘와 관련된 두번째의 문화내용보다 시기적으로 선행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는 첫째 부류의 것을 이 지역의 세형동검기 전기로, 두번째 부류의 것을 세형동검기 후기로 부르기로 한다. 후기에 속하는 이화동· 토광묘에서는 이미 철부가 공반되고 있으므로 이 지역의 세형동검기의 후기는 실제로는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되는데, 이러한 점은 앞서 대동강유역의 세형동검기 후기에서도 철기가 출현하는 접과 동일한 양상이다.다음은 세형동검기의 토기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기로 한다. 이 지역에서 세형동검과 함께 토기가 출토된 예는 이화동 토광묘에서 찾이볼 수 있으나 작은 파편에 불과하여 전체 기형을 알 수 없는 형편이다. 한편, 세형동검의 검파두식과 함께 토기가 출토된 유적으로는 운포리가 있는데, 여기서는 적색마연토기편들도 섞여 출토되었으나 특칭적인 것으로.는 흑색마연의 장경호와 더불어 이중구연의 십발형토기가 있다. 114) 이러한 흑색마연장경호와 이중구연심발형토기는 앞서의 요동지방의 세형동검기의 흑색마연장경호 및 대동강유역의 세형동검기에 보이는 접토대토기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운포리에서는 철기가 공반되지는 않았으므로 이러한 토기상은 이 지역의 세형동검 전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된다.마지막으로 세형동검기의 개시연대 및 종언시기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앞서 말한 대로 세형동검기 전기에 해당되는 유적들은 이청규의 세형동검 시기의 분기에 따르면 제 I 기에 해당되고, 초기 철기시대에 전입한 후기는 이청규의 기에 해당된다. 제頂기의 상한은 앞서의 대동강유역의 세형동검기의 연대 비정에서 이미 보았듯이, 石巖里 출토 진과의 記年銘(B.C.22l년)에 의거하여 기원전 백 년경으로 불 수 있다. 따라서 이 지역에
시기 청동기 토기 묘께 정대연대
서의 세형동검기의 후기 죽, 초기 철기시대의 상한은 기원전 세기말~기원전 기초로 볼 수 있겠다. 한편, 이 지역에서의 세형동검기 전기의 시작은 이청규의 세형동검기 분기의 Il 기에 해당되어 대체로 기원전 세기 무렵으로 볼 수 있다. 115)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 지역에서의 세형동검기 전기는 기원전 기초~기원전 세기말 기초까지로 비정되며, 초기 철기시대로 접어드는 세형동검기 후기는 대체로 기원전 무렵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세형동검기 후기의 하한연대는 어떠한가를 알아보자. 세형동검은 나오지 않고 철겁편과 동제 검파두식이 출토되는 영흥군 소라리 토성의 연대가 대체로 기원전 꺼끼 후반~기원전 세기초로 비정되고6) 있는데, 소라리 토성의 연대가 이 지역의 세형
동검기 후기의 하한으로 생각된다. 결국 이 지역의 세형동검기의 하한은 기원전 기 후반~기원전 세기초가 된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두만강유역 및 함경도 동해안 일대지방의 청동기문화의 변천을 알아보았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앞의 도표와 갇다. 제 2 절 한강유역의 청동기 • 초기 철기문화의 변천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를 청동기의 출현, 사용 등의 기준에 따라 크게 先銅帥, 梵卽翁隨 , 細形銅왔 期로 나누어 각 지역군별로 그 변천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앞서 이미 밝힌 것처럼 청동기의 출현, 제작, 사용이라는 기준을 적용한 이유는 청동기문화임이 분명한 무문토기문화를 청동기와는 결부시키지 않은 채 토기문화만을 세분 편년하근 데서 야기되는 문화변동의 일관된 계기성 파악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는 청동기의 출현 • 제작 • 사용상으로 보면 대체로 앞서 설정한 선동검기一비파형동검기-세형동검기라는 변천단계를 거쳤음은 거의 전지역에서 확인할 수 있으나, 토기상으로는 일정한 지역적 특성이 있는 것도 역시 중요한 사실이다. 앞서 살펴본 각 지역군은 토기문화상의 그러한 지역적 특성을 기준으로 묶어진 것들임은 이미 말하였다. 이제 지금까지 논의된 각 지역군별 청동기문화의 변천내용을· 정리, 요약하면 다음 ( 〉와 갇다.한강유역의 청동기 • 초기 철기문화내용도 지금까지 고찰한 여타 지역군들과 동일한 변천과정을 거쳤던 것으로 이해되므로 이하 한강유역의 청동기문화 및 초기 철기문화내용도 선동검기, 비파형동검기, 세형동검기, 초기철기시대로 나누어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tII -~ ~::똥웅 풍~ 녕경~~ ~~~~ 후슴 .육;원; 만-흙 :느; 션 Fτl훔 _|r 는을 1 | 월훌~~ |lI- :< 쫓r흐월:철r 필io:: 똘딛혹흉헌ι 뚫펀좋훌 찮 i 훈> 활훌뿔 [ 글화;싫댈 월i첩 뿔뿔훨廳처 ;풍|E벡l ‘;j\...| 1〈 J ;‘ 뿔;: ~ 좋 .Q. 활~r ;oK 쫓 훌좋蠻휠 좋| 훨할: 많좋좋뚫휩여 ;i꽤 i 쫓렇 i 좋π ¥:훌 :윤 1 !.-.., 벼켈며-망흰매κιι·{ N 후**; l-i?-κtκv 슛뚫휠훤칩좋쩔뿔;: 쫓펴똘훤 뚫흉F 혀칠훌뚫작띈 ;뚫i 좋 p훌l 혀 → τ훌 。 ul흉o짧 1.짧. I쫓품 ::i;좋훌 설講쫓 짧흉붉 콜-; 짧 ::훤;_훌펌쫓-짧찮훌훨 -짧흉훌훌 훌 품 -j::j 월l흉훨 훤 n-:;를훨짧~ 이{용 :흙 흘 i 훌 훌l' >::;~월 ~:; 훌 r짧혜 i! 벼악매헤{매」뼈오κ-rm,{- 버@{&*κ훈7uFlr후-F 윤--킹훌 횡강*울따*배 :R ξ 입 응뼈뀌홉떠짧]I펀~협J 뽑If 얻획깐;T흩 :f• -좋짧- 훗훌-Iξ’ :→~빼+톰i훌 l풍흐홉7(빼 ) 뻐t> g l 선동검기
f 치속~~.~때
말기 신석기문화임을 알 수 있겠다• 이러한 최말기 신석기문화 단계에 돌유형의 반관통 공열토기가 공반되는 것은 한강유역의 무문토기문화의 출현배경에 대한 매우 중요한 시사로 이해된다. 앞서 말한 대로 돌유형 공열토기는 두만강유역에서는 호곡 I 기 무렵의 신석기 말기에 이미 나타나므로 금탄리 Il 문화충 시기의 즐문토기와 공반된 내평의 공열토기도 그러한 두만강유역의 초기 공열토기와 그다지 시기적으로. 멀리 떨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봐야할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근거로 한강유역의 돌유형 공열토기는 대체로 두만강유역의 신석기 말기단계의 반관동 돌유형 공열토기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갇은 공열토기의 출현시점은 당시 한강유역의 최말기신석기문화 단계이며, 그것은 대체로 대동강유역의 각형토기문화에 앞선 금탄리 Il 문회충 시기와 병행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다음은 내평유적에서 출토된 한강유역 최초의 무문토기인 공열토기의 구체적인 연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앞서 대동강유역의 청동기문화의 변천에서 이미 보았듯이 그 지역의 각형토기의 출현시기가 대체로 B.C. 1100~B.C.1000년 사이이므로 이보다 앞서는 금탄리 제 Il 문화충의 연대는 그 하한이 기원전 세기 무렵임은 분명하다. 한편 돌유형 공열토기가 나오는 두만강유역의 호곡 1 기의 연대도 대체로 기원전 객]기 무렵으로 볼 수 있었는데, 이는 전술한 바 있다. 이러한 한강 이북의 양지역의 연대를 감안하면 내평유적은 기원전 11세기초 이전으로 소급될 수는 없다. 그런데, 두만강유역의 돌유형 공열토기는 함남지방에서는 이 지역의 선동검기인 기원전 천 년경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한강유역의 내평 공열토기는 기원전 천 년경 또는 그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출현하였던 것으로. 불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내평유적에서 출토된 木炭울 시료로 하여 측정된 C"연대가 기원전 1100~기원전 1300년, 기원전 780~ 기원전 890년, 기원전 400~기원전 470 120) (이상은 모두 補定年代임)으로. 나온 것을 참고할 수 있다. 한강 이북지역의 연대를 고려하여 내평유적의 연대를 대체로 기원전 1000~기원전 900년으로 비정하고자 한다.이상의 내용을 통해서 보면, 한강유역에 최초로 나타난 무문토기문화는 기원전 1000~ 기원전 900년경 두만강유역의 신석기 말기 또는 초기 청동기문화의 돌유형 공열토기문화였고, 그 당시 한강유역의 신석기문화는 대동강유역의 금탄리 Il 문화충과 병행되는 말기 신석기문화였다고 생각된다. 이룰 잠정적으로 〈내평유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최초로 한강유역에 파급된 두만강유역의 공열토기문화는 이후 이 지역에서 계속 발전하여 남부지방으로 확산되면서 독특한 남한 무문토기문화를 형성하였다고 생각된다.
한강유역의 선동검기 청동기문화는 바로 이러한 〈내평유형只끝 배경으로하여 발전된 것인데, 지금부터 선동검기에 속하는 유적 유물들을 구체적으로살펴보기로한다•1-1 경기도 파주군 교하리유적 121)교하리유적은 당초 이곳의 지석묘를 발굴하다가 집자리가 발견되어 조사되었다. 지석묘는 모두 기가 조사되었으나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주거지는 모두 채가 확인 • 조사되었는데 기는 지석묘의 蓋石 아래에서 드러났고, 또 다른 기는 지석묘와 관계없이 발견된 것이다. 전자는 호 주거지, 후자는 호 주거지로 명명되었다. 여기서는 선동검기에 해당되는 호 주거지의 유구 및 유물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유구 구릉에 위치한 호 집자리는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長軸은 능선방향과 평행한 남一북방향인데 일부가 파괴되어 현재 남아 있는 길이는 동벽이 7. m, 남벽은 4.4m 가량이다. 수혈의 깊이는 발굴 당시 표토로부터 50~70cm 가량이나, 풍화암반충을 파내려간 깊이는 30~40cm 정도이다. 기등구멍시설은 분명하지 않지만 님쪽 부분에 치우쳐 不整圓俊蘆曲가 확인되었다•출토유물但면 11의 @) 토기와 석기가 있다. 토기에는 무문토기문화와 줄문토기가 있는데, 이들은 층위 구분 없이 같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무문토기는 구연이 곧게 끝난 심발형토기들이다. 한편, 석기는 모두 석촉들인데 그 가운데는 造刺形의 몸에 비교적 긴 莖가 달린 有莖式이 점이고 無莖三角銀 肉이다.
1-2 경기도 江華郡 河站面 三巨里 122)이 유적에서는 지석묘 기와 주거지 기가 조사되었는데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유적은 각형토기를 출토히근 주거지이다.유구 낮은 구릉수 에 위치하고 있는데 파괴가 심한 상태여서 당초의 전체크기는 확인할 수가 없다• 장축은 대체로 능선방향과 일치되며 현재 남은 길이는 동벽이 2. m, 남벽이 1.6m 가량이다. 벽선을 따라 기둥구멍이 일부 확인된다.출토유물(도면 1~ CD) 주거지 내부에서 이중구연의 각형토기 구연부편 l개와 밑이 좁은 각형토기 저부편 접이 나왔다. 그 밖에 주거지 의부 주위에서 庸平 單刃石 이 수습되었다.1-3 서울시 松坡區 可樂洞l23)1963년도 고려대학교에 의해 주거지 기가 조사되었다.유구 표고 약 40m 가량의 구릉의 사면에 위치하고 있는데 주거지의 확실한 규모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대체로 동서 lOm, 남북 7m 가량의 범위에 걸쳐 유물이 출토되었다.출토유물도면 떠 토기 개체분과 석기가 출토되었다. 토기는 호형토기 때과 십발형토기 47脫체분, 그리고 소형 완이 접 나왔는데 , 십발형토기는 구연의 모양이 각형토기와 동일한 이중구연을 하고 있어 각형토기의 영향으로 한강유역에 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흔히 可樂里式土器로 불리는 것인데 여기서는 가락동유형 m)으로 부르고자 한다.석기에는 三角形警入鐵, 방추차, 석도 등이 있는데 아직 반월형석도는 보
CD 삼거리 주거지 출토 .M7
도연 12 한7 뼈 역 선동검기 훌동유훌
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강유역의 선동검기에 해당되는 시기의 유적과 유물을 살펴보았다. 이 시기에는 우선 토기에 있어서 두 가지 계통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특칭이다. 죽, 交河里 호 주거지에서 보이는 심발형토기계층과 三巨里 주거지의 각형토기계통이 그것이다. 교하리의 심발형토기계통은 이보다 앞선 한강유역의 신석기 말기에 파급된 동북지방(두만강유역)의 말기 신석기의 영향으로 출현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한강유역의 심발형토기는 남한지방울 제의하면 현재까지는 모두 두만강유역에서만 나타나므로 그 문화계통상으로 보면 두만강유역과의 관련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된다. 한편, 삼거리의 각형토기는 대동강유역의 각형토기문화지역으로부터 파급된 것은 분명한데, 그 파급시기는 대체로 각형토기의 형태로 보아 新興洞·深村里와 비슷한 단계의 각형토기문화의 전기 125)경으로 추정된다.그런데, 가락동 주거지에서 나오는 가락동유형의 토기는 전술한 교하리 호 주거지 출토의 십발형토기와 삼거리 출토의 각형토기의 요소가 복합된 양상으로 보이므로 교하리 및 삼거리보다는 그 출현이 약간 늦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뒤에 볼 비파형동검기의 玉石里 주거지, 狀岩里 주거지보다는 얼마간 앞서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그 근거로는 비파형동검문화의 영향으로 출현한 것으로 보이는 유혈구식마제석검을 공반한 혼암리유형 126)의 토기들은 가락동유형과, 공열토기를 주축으로 하는 驛三洞유형 127) 토기들이 복합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선동검기의 한강유역에는 계통이 다른 2 의 무문토기문화인 각형토기문화의 삼거리유적 집단과 두만강유역의 십발형토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교하리유적 집단이 공존하고 있다가, 일부 가락동유적의 경우와 갇은 두 계동의 복합문화양상을 띠는 유적 집단이 나타나는 문화내용을 보이고 있다. 십발형토기문화의 갈래인 교하리유적의 집단은 앞서 내평유적과 같은 신석기 말기의 두만강유역에서 파급된 토기문화와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생각되나, 교하리에서는 내평유척에서와는 달리 무문토기가 주를 이루고 있는 128)으로 이루어 얼마간의 시차가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교하리 호 주거지의 토기들은 앞서 내평유적의 연대를 고려하면 대체로 기원전 10세기~기원전 세기 무렵으로 비정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삼거리의 각형토기는 대동강유역의 각형토기문화 전기 무렵으로 볼 수 있으므로 앞서 대동깅유역의 청동기문화변천에서 본 바와 갇이 대체로 기원전 세기~기원전 기로 비정된다. 가락동 토기는겁고하리, 삼거리 양토기문화의 복합으로 출현한 것으로 보이므로 대개 기원전 기 무렵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연대는 뒤에 보게 될 한강유역의 비파형동검기의 시작과 관련되므로 비파형동검문화의 한강유역에로의 파급 시접을 살펴보면서 재론할 것이다.
2 비파형동검기한깅유역에 있어서의 비파형동검기는 대동강유역 및 황해도지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비파형동검문화가 직접 파급된 경우는 아니다. 죽 비파형동검문화의 간접영향지역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파형동검기를 설정하는 이유는 이미 전술한 바 있듯이 한강유역의 독특한 십발형무문토기문화의 흐름을 우리나라 전체 청동기문화의 변천 속에서의 그 시간적 위치를 보다 명료히 파악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요동지방 및 압록강유역의 선진 청동기문화인 비파형동검문화와 병행하며 대동강유역을 비롯한 한반도지역에그 영향이 나타나는 한 시기라는 의미로서 〈비파형동검기〉라는 용어를 쓰고자한다.앞서 한반도 각지의 비파형동검 출토예를 살펴보면서 보았듯이 비파형동검문화의 파급은 최근에 한반도 거의 전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한강유역에서는 비파형동검문화의 파급내용이 뚜렷하지는 않으나 부여 松菊里의 비파형동검의 출토예를 보면 분명히 한강유역에도 비파형동검문화의 영향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정식 발굴조사된 경우는 아니지만 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비파형동검이 꺽 있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하고 있다(도면 의 ). 춘천 출토의 비파형동검을 보면 접 모두 錄部가失되어 현재의 길이는 각각 22.0cm, 14.0cm 가량인데, 남아 있는 인부의 형태로 보면 대체로 비파형동검의 중 • 후기형들이다. 죽, 인부의 돌기가 뚜렷하지 않는 점, 基部의 팽만도가 약한 점 등은 모두 후기형에 가까운 특칭o 다.
춘천 출토의 비파형동검의 형태가 후기형에 가깝다고 하여 한강유역에서의 비파형동검의 파급시점이 곧 비파형동검기의 후기, 죽 요동지방 비파형동검기 기 무렵이라고 봉 수는 없다. 앞서 말한 송국리의 비파형동검을 비롯하여 傳尙)사 출토의 비파형동검 (도면 5) 등을 보면 이들은 모두 전형적인 형태의 비파형동검, 죽 중기형에 속하고 있어 성유역만 유독 늦은 시기의 비파형동검이 나온다고 보는 것은 비파형동검문화의 한반도지역으로의 파급과정을 감안할 때 타당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한강유역에도 대체로 대동강유역지방과 비슷한 비파형동검 중기형시기, 죽 요동지방 비파형동검기 기 무렵에 비파형동검문화가 파급되었다고 보고자한다. 요동지방의 비파형동검기 기는 앞서 이미 보았듯이 대체로 기원전 세기~기원전 세기 사이에 해당되는데, 대동강유역의 각형토기문화권에 비파형동검문화가 파급된 시점이 전술한 것처럼 대개 기원전 세기말~기원전 핵기초이므로 한강유역은 이보다 약간 늦게 보아 기원전 갸버 년경 (B.C. 세기초)으로 비정하면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송국리의 비파형동검을 기원전 핵기기원전 세기 무렵으로 보고 있는 견해 130)와도 일치된다.이상의 내용으로써 한깅유역의 비파형동검기의 시작을 대체로 기원전 7백 년경으로 불 수 있는데, 이 연대는 장차 이 지역에서의 비파형동검유적발견예에 따라 얼마간 더 올라갈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되나 현재까지의 상황을 고려하여 참정적으로 그렇게 비정해 둔다. 그러면, 한강유역에 파급된 비파형동검문화의 흔적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앞서, 대동강유역 및 황해도지방의 각형토기문화지역에서의 비파형동검문화의 과군서용을 살펴보면서 그 무렵의 마제석검이 유혈구식으로. 되는 현상을보았다. 즉, 기존에 존재하던 마제석검이 새로이 파급된 비파형동검을 모방하겨 유구가 있는 마제석검으로 제작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양상은 그대로 한강유역의 무문토기문화권에서도 일어났다고 생각되는데, 이 지역에 비파형동겁이 파급된 시접인 기원전 백 년을 전후한 시기에 나타나는 마제석검이 유혈구식임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한강유역에서 출토된 유혈구식마제석검은 현재까지는 거의 모두 유혈구석검들인데, 坡쎄開玉石里, 食峴里, 隔쎄謂狀岩里 (12호주거지, 호주거지), 廣州郡 高德里(현재 서울시 강동구고덕동) 등의 예가그것이다 및 도면 10 참조). 이 가운대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 예는 여주 흔암리 12호 주 거지와 파주 옥석리 등인데, C"연대 측정결과를 보면 다음과 갇다.• 흔암리 12호 주거지 131> : B.C.1490~B.C.1650, B.C.1030~B.C.1300,B.C. 780~B.C. 930, B. C.1110~ B.C.1390(이상 보정연대)• 파주 옥석리 주거지 132 : B.C.740~B.C.900(보정연대)혼암리 12호의 경우는 그 편차가 큰 편인데, 앞서 본 바와 갇이 한강유역의 청동기시대 무문토기문화의 출현 상한이 기원전 세기초 무렵임을 감안하면, B.C. 780~B.C. 930년의 측정결과만 어느 정도 타당한 범위의 연대로 보인다. C 측정결과를 임의로 취사선택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나, 측정결과로 제시된 구체적 절대연대값은 결국 많은 통계적 의미를 가지는 값의 하나이므로 정확하게 측정된 측정값이 충분히 많이 모여지면, 그 가운데 다수를 접하는 측정값들의 범위 속에 실제의 철대연대가 포함되어 있다고 불 수 있다. 여기서는 우선, 한강유역의 청동기시대 무문토기문화의 출현연대보다 훨씬 울라간 측정값들은 분명히 실제의 연대를 반영한 예는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배제하는 것이다. 한편, 파주 옥석리의 측정값은 하나의 결과밖에 없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할 수 없으나, 흔암리의 측정값 가운데 비교적 실체적 의미를 가전 것으로 불 수 있는 측정치인 B.C.~B.C. 930년의 예를 감안하면 옥석리의 B.C. 740~B.C. 9001의 결과는 대체로 실제의 연대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의 두 유적의 측정치를 실제의 절대연대를 반영하는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한강유역에 있어서 유혈구식마제석검의 제작시기도 대체로 이 무렵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결국, 이 연대는 압록강 및 요동반도지역, 대동강유역의 비파형동검기의 연대를 고려하여 비정한 성유역에로의 비파형동검문화 파급 • 시기인 기원전 백 년 전후한 시기와 거의 일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한강유역에서의 유혈구식마제석검의 출현은 이 지역에 비파형동검이 파급된 후 무문토기문화에 나타난 변화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백 년을 전후한 시기로 볼 수 있겠다.지금부터는 한강유역 비파형동검기의 문화내용을 대표적인 유적의 출토 유물 특히, 토기를 중심으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봉으로써 , 청동기의 공반이 거의 없는 한강유역의 십발형무문토기문화 변천의 내용을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한 단계로서의 비파형동검기라는 문화단위로 이해해 보고자 한다.2-1 경기도 파주군 옥석리 주거지 133)옥석리유적에서는 지석묘 기와 주거지 기가 조사되었는데, 주거지 기는 모두 지석묘의 아래에서 드러났다. 기의 주거지 가운데 호 지석묘 아래에서 노출된 것은 즐문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신석기시대의 주거지로 생각되는 것이다. 여기서 살펴보고자 히는 주거지는 Bl호 지석묘 아래에서 드러난 무문토기문화를 내는 주거지이다.무문토기 주거지의 입지는 표고 약 80m에 달하는 구릉의 능선 위인데, 登쩌 규모는 동서 m, 남북 短逐기 3.7m에 달하는 비교적 대형이다. 은 벽을 돌아가면서 촘촘히 드러났으나 바닥면에서의 蘆址의 유무는확인되지 않았다.출토유몰됴면 짝 토기는 모두 12 편이 출토되었으나, 그 가운데 구연부편은 11접이었고, 접 가운데 여}이 공열토기 구연편이어서 거
투롤뀔
도연 13 한강유역 버파형동컴기유혀 출토유물
의 모두 공열토기였음을 알 수 있다.
석기에는 製石劍 점, 磨製石鐵 , 多頭石芹片 점, 訪佳 , 片刃石芹 접, 祗石 점, 磯石 접 등이 있는데, 마제석검은 전술한 것처럼 유혈구식이단병으로 한강유역에 비파형동검이 파급된 후 동검의 영향으로 제작된 것으로볼수 있다.이 주거지의 연대는 주거지 내부에서 출토된 직경 12cm 가량 되는 불탄기등의 목단을 시료로 하여 측정된 C"연대가 B.P. 2590 105년으로 나와, 이를 樹輪補正연대로 환산하면 앞서 본 것처럼 C.740~ B. 900년 무렵으로비정된다.2-2 서울시 강님구 역삼동 주거지 134)주거지의 크기는 길이 16m, 폭 약 3m 가량 되어 앞서 본 옥석리 주거지의 크기와 거의 같다. 주공은 벽면에 붙어서 1~2m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으나, 주거지의 바닥에는 확인되지 않았다. 수혈의 깊이는 50~60cm 가량된다.출토유물됴면 회 토기에는 호형토기와 십발형토기, 그리고 적색마연토기가 있다. 심발형토기에는 반관통 또는 관통된 공열토기가 많으며 이 가운데는 구순부를 刻目한 구순각목공열토기도 있다. 이러한 토기상은 앞서 본 옥석리와 뒤에서 살펴볼 흔암리 주거지에서도 갇은 예가 있어 이를 소위 〈역삼동유형〉135)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글에서도 한강유역 비파형동겁기의 무문토기문화의 한 유형이라는 의미에서 공열토기, 구순긱목(공열)토기, 적색마연토기 단경호 등으로 구성된 토기상을 보이는 역삼동 주거지, 흔암리 4, 호 주거지, 116) 그리고 앞서의 옥석리 주거지 출토의 토기를 묶어서 <역삼동유형>의 토기로 부르고자 한다.석기에는 단면원통형의 마제석부, 반월형석도, 편평편인석부, 삼각형만 입촉등이 있다.2-3 경기도 여주군 혼암리 주거지 137)
혼암리 주거지는 남한강유역의 경기도 隔 謂 占東面 狀岩里 부락 뒷산 표고 약 123m 가량의 구릉사면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1972년부터 197 8도까지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모두 14채의 집자리가 확인되었다.혼암리 주거지에는 앞서 본 바와 갇이 공열토기, 구순각목(공열)토기, 적색마연토기 등으로 구성된 토기상이 보이는 역삼동유형의 토기들을 출토하는 주거지들과, 역삼동유형 토기상에 앞서의 선동검기에 속하는 가락동유형의 토기상이 복합되어 나타난 〈혼암리유형〉138)의 토기들을 출토하는 주거지들이 있다. 전자에 속하는 것들은 炫 호 주거지가 있는데, 이들은 혼암리유형의 토기를 내는 주거지들보다는 얼마간 선행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139) 여기서는 〈혼암리유형〉의 토기상을 보이는 주거지들에 대해서만 살펴보고자한다.1) 흔암리 1호 주거지주거지의 크기는 길이 8.2m, 폭 4.2~ 장방형으로 화강암 풍화 암반을 약 80cm 가량 굴착하여 축조하였다. 바닥에는 화덕자리와 기동구멍 등의 시설은 없으나 5~10cm 두께로 접토를 깔았다.출토유물은 〈도면 14〉와 갇은데, 토기에는 공열토기, 적색마연토기, 호형토기 등이 있으며, 적색마연토기 가운데는 전형적인 원저단경호 이의에 源精 굽다리를 가진 것도 있다. 한편, 호형토기의 구연부 파편에는 옴각으로 格子를 이루게 시문한 것과 각형토기에 보이는 이중구연의 파편도 있어, 앞서 말한것처럼 각형토기문화와의 관계를보여주고있다.석기로는 양인원동석부, 삼각형만입촉, 반월형석도, 유혈구식마제석검편 등이 있다.2) 흔암리 2호 주거지수혈의 일부만 남아 있는데, 북쪽 벽은 6.9m, 서쪽 벽은 3.2m 가량만
4cmO g ε A
도면 14 한7 뻐 역 버파형동검기유척 출토유물
아 있다. 기둥구멍이나 화덕시설은 드러나지 않았으나 진흙을 깔아놓은 접은 1호주거지와같다.
출토유물에는 공열토기편, 구순각목 공열토기, 구연 아래에 음각선이 있어 팽이형토기문화의 요소를 보이면서 동시에 공열이 있는 토기편, 고배형적색마연토기편, 방추차, 어망추, 유경석촉, 편평단인석부, 반월형석도, 연석 등이 있다.3) 흔암리 7호주거지납북 장축의 장방형수혈인데 동쪽 부분이 일부 파손되어 있다. 남북 길이가 9.6m, 남아 있는 동서 폭은 2.8m 가량 된다. 바닥면에는 접토를 깔았고 기등구멍이 바닥 가운데 뚫려 있다.출토유물에는 공열토기, 구순각목토기, 구연 아래에 단사선이 있으면서 구순기 각紅 토기, 어망추, 방추차, 원통형 양인석부, 연석 등이 있다.4) 흔암리 9호 주거지
남북 장벽의 길이 7.05m, 동서 단벽 3.5m로 내부에는 별다른 시설이 없다.출토유물은 공열토기, 고배형토기, 적색마연토기, 호형토기, 구연부 아래에 단사선문이 있는 각형토기 계통의 토기편 등의 토기류와 二段莖石鐵,삼각만입촉, 편평석부, 반월형석도, 석도 등의 석기류 등이다.5) 흔암리 12 호 주거지능선 정상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데, 긴 벽의 길이는 9.7m, 짧은 벽의 길이는 3.5m 가량 된다. 바닥에는 일부 진흙을 깔았으며 기둥구멍과 저장용구멍이 있다. 기둥구멍은 양쪽의 긴벽을 따라 각 열, 바닥 가운데 열 모두 열이 확인되었으며, 화덕은 개소에서 드러났다.출토유물은 공열토기, 구순각목공열토기, 각형토기 계동의 토기, 고배형토기, 호형토기 등의 토기류와, 유혈구식마제석검편, 반월형석도, 석창, 寧石祭 삼각만입촉, 일단, 이단유석촉, 석도 등의 석기류가 있으며, 그 밖에 보리, 조, 수수, 쌀 등의 炭化穀物기 출토되어 흔암리 주거지인들의 농경생업기반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2-4 기타유적비파형동검기에 속하는 유적으로는 경기도 廣州郡 深少里 주거지, 140) 강원도 春城郡 新梅里 주거지, 충북 堤原郡 庫平里 지구 주거지 142) 등이 있다.2-5 한강유역 비파형동검기의 토기문화의 전개지금까지 한강유역 비파형동검기의 대표적인 유적들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각 유적 출토의 토기를 통해서 한강유역 토기문화의 전개에 대해서 간략히 알아보기로한다.
앞서, 선동검기에는 신석기 말기의 줄문토기와 공반되는 반관통공열토기를 출토하는 내평유적을 대표로 하는 〈내평유형〉으로부터 발전되어 온 것으로서, 교하리 주거지를 표식으로 하는 〈교하리유형〉과, 대동강유역의 각형토기문화 전기단계에서 한강유역으로 파급되어 온 강화도 〈삼거리유형〉 그리고 이 양자가 한강유역에서 복합되어 나타나는 〈가락동유형〉 등의 토기문화가존재하였다.비파형동검기에 오면 〈교하리유형〉의 심발형무문토기에 새로이 적색마연토기가 더해지고 기존의 심발형무문토기에도 口脣刻目 등의 요스 나타나는 〈역삼동유형〉의 토기가 출현하는데, 옥석리 주거지, 역삼동 주거지 등의 한깅하류지역의 유적과 堤原 陽坪里 주거지 등의 남한강상류지역의 유적이 그것이다. 〈역삼동유형〉의 토기문화는 다시 선동검기의 늦은 무렵부터 존속하던 〈가락동유형〉의 토기문화와 결합하면서 새로이 〈혼암리유형〉의 토기문화가 출현하는 기반을 제공하였는데, 〈혼암리유형〉의 토기내용을 보이는 유적에는 흔암리 1, 2, 7, 9, 12, 14호 주거지 등이 있었다. 비파형동검기의 토기문화인 역삼동유형과 흔암리유형은 석기상에 있어서도 선동검기와는 차이가 있는데, 유혈구식마제석검의 존재가 그것이다. 죽 역삼동유형과 흔암리유형에는 유혈구식마제석검이 공반되지만, 교하리유형, 삼거리유형, 가락동유형의 토기문화에는 유혈구식마제석검이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 말한 바 있듯이, 유혈구식마제석검은 한강유역에 비파형동검이 파급된 후 그것을 모델로 하여 출현된 것으로 보이므로 유혈구식마제석겁의 존재는 곧 비파형동검기로 불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유혈구식마제석검과 공반되는 역삼동유형과 흔암리유형의 토기문화는 그것을 공반하지 않은 교하리유형, 삼거리유형, 가락동유형의 토기문화보다는· 시기적으로 늦은 것으로보아야할것이다.지금까지 살펴본 한강유역 십발형무문토기문화의 전개내용을 정리하면 다 갇이 그 시기적 선후관계를 설정할 수 있겠다.
신석기말기 선동검기 비파형통검기
3 세형동검기
앞서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변천을 통하여 살펴보았듯이, 세형동검기의 시작은 이중구연의 심발형토기 (한강유형 및 대동강유역에서는 점토대토기 , 혹색마연장경호 등의 새로운 토기문화와 관련되어 있다. 한강유역에서의 세형동검기도 역시 그러한데, 세형동검기의 시작은 대체로 대동강유역을 경유해 온 요동반도의 초기 세형동검문화의 파급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출현시기에 대해서는 한강유역 자체에서만 보면 확실한 근거가 없으나, 앞서 본 요동반도 및 대동강유역에서의 출연대를 고려하면 대체로 기원전 어기말~기원전 세기 무렵으로 볼 수 있다. 이예 대해서는 上紫浦里 4호 지석묘의 C"연대 측정결과를 참고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비파형동검의 후기형 143과 함께 공열토기, 적색마연토기 등이 출토되고 있어 한강유역에서의 비파형동검기의 마지막 시기에 해당되는 유적으로 불 수 있다. 연대측정의 결과는 기원전 백었 년정연대으로서 대체로 기원전 기 무렵에는 비파형동검기가 끝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강유역을 비룻한 그 이남지역에서 출토되는 세형동검의 형식이 대부분 Bl 식 이후의 것이 많아 이청규의 세형동검 제 11 기 이후에 해당되고 그 상한은 기원전 백년경으로 보고 있는 접과도 부합된다.지금부터는 한강유역의 세형동검기에 해당되는 유적, 유물에 대해서 간략하게 개괄한 후, 한강유역의 세형동검기가 가지는 독특한 성격에 대해서 언급해보고자한다.
'''I'~ 4 다「\- ←~-] J
백η뼈
도연 15 한강휴역 세형통검기 토기 각종
o 5cm
3-1 京畿道 南楊州郡 漠金面 水石里 住居地 146)
수석리 주거지는 한강 北岸의 표고 약 40m의 구릉·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는 모두 채의 집자리가 조사되어 접토대토기, 혹색마연장경호 등의 세형동검기의 토기들이 다수 확인되었다. 출토된 토기들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도면 15의 ④).수석리에서 출토된 토기들의 器種게는 접토대토기(심발형토기), 흑색마연장경호, 의반구연무문토기, 내경구연무문토기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은 점토대토기와 혹색마연장경호로서 이 두 기종은 세형동검기의 특칭적인 토기문화의 중요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접토대토기 3접이 확인되었다. 표면색이 혹갈색에 가까운데 태토에는 약간의 조갯가루가 섞여 있다고 한다. 구경 20.5cm, 높이 24cm 가량 되는데 구연에 말아붙인 접토대는 단면이 원형이다•흑색토기장경호 점이 있는데 꺽 모두 표면색이 완전히 흑색은 아니지만 기형상으로 보면 세형동검과 함께 출토되는 흑색마연장경호와 동일하다. 1 점은 구연부의 일부가 결실되어 27.5cm, 구경 11cm, 詞樞 21cm 가량 .되며 태토에는 砂粒이 약간 섞여 있다. 표면은 일부 마연되어 있고 黑灰色을 띠고 있다. 또 다른 접은 瑠床 둥근 고리형 손잡이가 동체 양쪽 두 곳에 달린 장경호로서 높이 32.8cm, 구경 13.5cm, 동경 29cm 정도이다. 이 밖에 장경호는 아니지만 표면이 마연되고 흑색을 띤 토기질로 된 목이 달린호의 파편들이 2점 더 있다.3-2 서울시 城東區 峨嵯山 유적 147)포합충 유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물들은 모두 지표채집에 의해 수습된 것둘이다. 토기들에는 단면원형의 접토대토기, 고배형토기, 혹색마연의 장경호 파편 등이 있 ).3-3 서울시 城東區 鷹峯 유적 148)
포함총유적으로 지표채집된 유물들이다. 출토유뭉게는 단면원형의 접토대토기, 고배형토기, 혹색마연장경호 등의 토기류와 유구석부 등의 석기류가 있다. 혹색마연장경호에는 조합식 우각형파수와 의뿔우각형파수가 달린것이 많다.3-4 이 밖의 南楊州郡 陶谷里149)유적과 춘천 溫採同150) 등지에서 단면원형접토대토기편이 확인되고 있다.3-5 楊州郡 四老里 유적 151)割石 써서 무덤을 만든 석관묘 유적이다. 세형동검 접, 銅施 접과 함께 漢式土器가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나 토기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도면15의 ).3-6 경기도 龍仁郡 慕賢面 草夫里152세형동검의 거푸집이 출토된 유적이다. 거푸집은 모두 활석으로 만든 것으로 枚가 組로 되는 것이다. 3매가 출토되었는데, 가 에 속하고 나머지 때는 또 다른 료에 속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거푸집의 크기에 따라 세형동검의 크기를 추정해 보면 각각 길이 2,cm, 27cm 정도 된다.3-7 기타 세형동검 관련 유적 .한강유역에서 밝혀진 세형동검 관계유적으로는 세형동검이 나온 서울登浦, 153) 江虹區 上一洞, 154) 세문경과 세형동검이 출토된 강원도 橫城郡
r!l\\l ICIl}
도연 16 한;뼈역 세형통령기 청동기
빼
도연 17 한강유역 세형동검기 출토유몰
里유적, 155) 동모의 거푸집이 나온 高揚郡 元堂里156) 등이 알려져 있다但면 16, 17) . 이상으로 한강유역의 세형동검기의 유적과 유물에 대해서 간략히 개략적척료 살펴보았다. 다음은 이들 유뭉울 통하여 한강유역 세형동검기의 특칭에 대해서 양가보학 한다. 여기서는 특히 토기와 세형동검을 중십으로 하여 언급한다.
세형동검기의 토기는 정토대토기와 흑색 (마연)장경호로 대표되는 것은 여러 申념 살펴본 것과 갇은데, 정토대토기와 흑색 (마연)장경호는 지역 및 시기적인 선후관계에 따라 얼마간의 형태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의 대동깅유역의 세형동검기를 살펴보면서 이미 말한 바 있다. 죽, 접토대토기는 최초 단면원형의 점토대에서 단면삼각형으로- 변화되고 나아가 점토대가 없이 의반구연으로 변천되고 있고, 흑색 (마연)장경호의 경우는 몸체에 붙은 파수의 형태가 최초 환상파수에서 조합식 우각형파수로, 다시 우각형파수, 끝이 뭉툭한 파수로 이행 변천하고 있음은 대체로 명백하다고 생각된다. 앞서 살펴본 한강유역의 세형동검기의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들은 접토대토기의 경우는 아직까지 단면 삼각형의 토기는 확실한 예가 없고 모두 시기적으로 이른 단면원형의 점토대토기만이 확인된다. 흑색 (마연)장경호에는 水石里에서 나온 환상파수가 달린 것과, 옹봉유적에서 나온 조합식우각형파수 및 우각형파수가 달린 것이 있으나, 뭉독한 파수가 달린 것은 없다. 이도 역시 접토대토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들만이 확인된다•
한편, 세형동검의 경우를 보면, 모두 李淸圭의 식에 속하는 것들이고 이러한 세형동겁은 대체로 이청규의 세형동검 분기의 제 기에 해당되는 내용들이다. 157) 그리고 주목되는 접은 한강유역에서는 아직 세형동검과 철기가 반출되는 예가 획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인데, 전술한 바 있는 대동강유역, 함경도 동해안지역 등지에서는 B 식 세형동검과 함께 일부의 철기가 반출되는 것에 비하면 그 양상에 차이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한강유역의 이러한 양상은 앞서의 토기에서도 모두 이른 시기의 특칭을 보이는 접과 세형동검의 형식이 B 식으로 비교적 이른 것인 접 등과 함께 생각해 보면, 결국 대동강유역, 함경도 동해안지방 등의 세형동검기보다 빨리 세형동검기가 끝났음을 나타낸다고 생각된다. 죽, 한강유역의 세형동검기는 이후 초기 철기가 들어오는 시기까지 이어지지 않고 끝 났다고 불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 앞서 살펴본 대동강유역과 함경도 동해안지방의 경우를 상기해 보면, 이들 양지역에서 세형동검기는 철기를 반출하지 않는 전기와 철기를 반출하는 후기로 세분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강유역의 경우는 세형동검이 철기와 공반된 세형동검기 후기가 없댜 그리고 세형동겁의 형식이나 토기가 모두 비교적 시기적으로 이른 특칭울보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볼 때, 한강유역의 세형동검기는 초기 철기에 들어 가는 세형동검기의 후기단계가 없는 세형동검기 전기단계만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러한 한강유역의 지역적 특징은 한강 이남의 호남지방, 영남지방 등에서는 세형동검이 초기 철기시대에까지 계속 나타나고 있는 세형동검 후기단계가 확인되고 있는 사실과 대비해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세형동검기의 후기, 죽 초기 철기를 공반한 세형동검문화가 확인되는 지역인 대동강유역, 원산만일대의 함경도 동해안지역, 영남지방의 대구, 경주, 김해 등지가 모두 초기 철기시대 및 原三固시대에 걸쳐 정치세력의 성장기반이었다는 점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세형동검기의 후기가 없는 한강유역에서는 당시 현저한 지역 정치세력의 성장기반이 아니었으며, 이러한 일종의 힘의 공백상태는 초기 철기 이후 이 지역에 초기 백제가 성립되기까지 이어졌다고 보여진다. 뒤에서 보게 될 초기 철기의 시작이 늦어전 까닭도 결국 세형동검기의 후기 무렵부터 이 지역이 공백상태 또는 문화적 의곽지역으로 된 것에 관련이 있다고생각되며, 나아가 납하 유이민세력인 백제가 한강유역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일련의 양상과 관계가 깊다고 보여진다.4 초기 철기시대우리나라에 초기 철기문화가 들어오는 시기에 대해서는 얼마간의 이견이 있으나, 대체로 중국의 戰國南浮} 철기문화가 최초로 파급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158) 초기 철기문화의 개시에 관한 이견들은 결국 그 대상지역이 어디냐에 따라 서로 다른 견해가 나터니는 것에 기인된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해서는 한반도의 각 지역을 일정한 지역군으로 나누고, 각 지역군별로 과학적인 철기의 분석이 따라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는 한강유역 초기 철기문화의 시작과 전개에 대해서 알아 보고자 하는데,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접근방법으로서, 우선 우리나라의 초기 철기문화의 전반적인 전개에 대해 일별함으로써 한강유역의 초기 철기문화의 시기적인 위치를 부각시켜 보고자 한다.
누나라의 초기 철기문화의 시작과 전개는 대체로 세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159) 여기서 말하는 세 단계란 문화발전단계를 지칭한다기보다는 초기 철기문화의 파급의 계기를 의미하는데, 따라서 서로 다른 파급단계가 곧 문화계통상의 현저한 치이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최초로 철기문화가 파급되는 제 단계는 중국의 전국시대의 燕가 철기문 화가 주로 한반도의 서북부 및 두만강유역에 걸쳐 파급되는 계기이다. 전국 철기문화의 요동지방 및 한반도 서북지방에로의 파급은 소위 〈세죽리 -연화 보유형〉의 철기문화를 형성하였는데, 그 문화내용은 대체로 회색승석문토 기, 海綜운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계의 전국철기를 내는 유적지로 는 滋江直 용연동유적, 평북 세죽리유적, 두만강유역의 호곡동, 오동유적 등이 있는데 ,160) 철기의 내용은 횡단면 장방형주조철부, 철경, 철제반월도, 철모, 鐵錢 철괭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철제의 형태는 刺湖의 분류에 의하면 AI식 계동으로 姿部의 폭이 刃部의 폭보다 큰 것들이다. 제 1 단계 전국철기의 한반도 서북부 지방에로의 파급시기는 세죽리나 용연동유적 출토의 명도전에 의하면 대체로 기원전 때]기말~기원전 세기초 무렵으로 추정된다.2단계의 철기문화 파급은 주로 서북지방의 대동강유역을 비롯한 지역의 토광목관묘 및 토광목곽묘 출토의 철기들로 대표된다. 이는 앞서의 청동기시대 문화내용 중 세형동검 후기 죽, 철기를 공반하는 세형동검기에 해당된다. 단계의 철기문화가 파급되는 지역은 대동강유역, 원산만 일대의 함경남도지방, 경주일대, 낙동강 하류지방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문화내용올 보면 세형동검, 세형동겁을 모방한 鐵劍, 동조의 A I, 유, BI 계 통 철부, 細兼, 철끌, 鐵刀子 등의 철기로 이루어진다. 한편, 토기에 있어서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대동강유역에서는 화분형토기, 회색승석문토기 등으로 구성되고, 낙동강유역에서는 단면삼각형의 정토대토기, 의반구연의 무문토기 등으로 이루어전 鄭澄元 • 申敬澈의 소위
털M
활캘 g ‘---o-' ‘‘-----'' 1’e m o‘ ,, 10'em
도면 18 한강유역의 초기 철기유적 출토 토기, 철기
--홍 ZD
도면 19 한강유역 초기 철기유적 출토유물
or 、 o
뿔 즐 빼 i 품짧 즐‘’‘ 윌.-- j 양펴 μ ‘ 'trr 쫓.... 뚫용 j 짧 g CTJ 버
:• :! ·ι。C[-- u」------------ ”。F)t i
배째O때F
‘
( 버빵집좋흉파똥짧 NN 핍버
Iiu
-
패뻐때 강또 K때 -예 짧짧 RN 버핍〈종말기 무문토기문화〉, 또는 崔盛洛의 〈경질무문토기문화〉의 내용과 갇다. 단계 초기 철기문화가 파급되는 계기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대체로 勤苗朝鮮의 성립과 시기적으로 병행되고 있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162)단계에 해당되는 유적에는 대동강유역의 台城里 토광묘군, 雲城里 토광묘군, 함남지방의 所羅里 土城, 경주지방의 九政里, 入室里 유적, 낙동강유역의 茶戶里 토광묘, 三千浦 勒島 유적 등이 있다. 제 단계 철기문화의 파급시기는 대체로 위만조선의 성립시기인 기원전 기초 무렵이 상한연대로 추정되며 그 하한은 낙랑의 설치연대인 기원전 108년경 죽 기원전 기말경으로볼수있다.
3단계의 철기문화는 낙랑의 설치 이후 한대의 철기문화의 본격적인 파급과 때를 같이한다. 철기문화의 내용을 보면 동조의 BIl 식 죽, 단조 姿芹와 더불어 새로이 인부가 턱이 지면서 넓어전 刃울 가진 BW식이 출현하며, 鐵飾날, 環頭刀子, 無莖三角濁入鐵鐵 등이 있다. 토기는 대동강유역에서는 화분형토기, 한식토기 등이 있고, 남부지방의 경주나 낙동강유역에서는 瓦質土器가 나타난다. 한편, 한강유역에서는 승석문, 격자문이 打探된 호형토기와 더불어 여전히 경질무문토기가 사용되고 있다. 이 시기의 중요유적으로는 대동강유역의 소위 귀를무덤 (낙랑목곽분), 벽돌무덤 등이 있으며, 한강유역에는 中島, 屯內 西心同, 加平 馬場里 荷川里 지구, 島坪里, 桃花등지의 적석총 등이 있고, 낙동강유역에는 와질토기를 출토하는 원삼국시대의 土壤木部墓들이 있다.이상 우리나라의 초기 철기문화의 시작과 그 전개과정을 단계별로 간략히 살펴보았다. 결국 한강유역의 초기 철기문화는 3단계에 해당되는데, 이 정은 한강 이남의 낙동강유역이나 경주지방에서 2단계부터 초기 철기문화가 나터나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매우 주목된다. 한강유역의 청동기문화를 살펴보면서 이미 말하였듯이 한강유역에는 철기를 반출하는 세형동검관계 유적이 없는데 (죽, 세형동겁기 후기) 이러한 사실이 이 지역에서 초기 철기문화가 늦게 나터나는 현상과 어떤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현재까지 드러난 유적과 유물을 통해서 보면 한강유역에는 세형동검기 후기단계부터 초기 철기문화 파급의 단계까지 일정한 문화적 공백상태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공백상태의 인지는 결국 이 지역의 초기 철기유적의 시기가 늦다는 접에 기초하므로 이에 대해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하여 이하 한강유역의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고지 한다.우선, 토기에 대해서 살펴보면, 한강유역의 초기 철기유적인 163) 內, 164) 西屯洞 165) 馬場里, 166) II F 지구167) 등지에서 출토되는 토기에는 의반구연을 가전 경질무문토기, 뚜껑형경질무문토기, 완형경질무문토기 등 의 경질무문토기 계통과 승석문, 격자문 등이 시문된 목이 있는 有顯說反口緣登 등으로 이루어진 赤福色 및 灰色軟質의 打接文 계동의 토기, 그리고 무늬가 없는 회색 혹색마연의 軟質 168) 등이 있다(도면 18~23). 申敬澈은 외반구연경질무문토기의 존재로써 이들 토기문화를 대체로 낙동강유역의 단면삼각형 점토대토기와 병행하는 시기인 소위 〈종말기 무문토기冷본화로 보고169) 있는데 최근 郡谷里 貝塚게서도 이러한 경질무문토기의 존재가 확인되므로 토기의 질과 형태상으로는 어느 정도 수긍된다. 그러나, 뒤에서 말하는 것처럼 한강유역에 있어서 이와 갇은 경질무문트기는 그 존재시기가 남부지방의 낙동깅유역과 동일하지는 않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경질무문토기의 존속기간이 다소 길며, 따라서 한강유역의 경질무문토기는 勒島유적과 갇이 단계의 초기 철기문화가 파급된 시기보다 늦은 단계의 초기 철기문화가 파급된 시기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예로는 앞서 본 中島유적에서 출토되는 혹색마연의 의반단경호의 존재를 둘 수 있는데, 이러한 의반단경의 회색 또는 혹색마연토기는 귀틀무덤인 운성리 가말뫼 호 무덤 170)에서 꼭 같은 예를 볼 수 있다. 운성리 귀틀무덤의 연대는 낙랑 귀를무덤의 상한이 AD. OO 고, 벽돌무덤의 출현은 서기 2 세기 후반경으로 보고 있어 대체로 서기 대 ~서기 로 추정된다. 이와 갈은 연대는 늑도유적을 비롯한 남부지방의 경질무문토기 유적들보다 는 늦은 것이다. 토기에서의 이러한 연대는 철기를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한강유역의 철기는 단계의 초기 철기에 해당된다. 이
~
도면 24 한강유역 초기 철기시대 주거지
에 대해서 이하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한강유역의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철기 가운데 시기적인 특칭을 비교적 뚜렷이 보여주는 것으로는 철부와 철삽 등이 있다(도면 25). 물론, 철기는 그 특성상 형태변화의 속도가 토기보다는 느리기 때문에 토기가 자세히 연구된 지역에서는 굳이 철기를 통해서 그 연대를 연구할 필요가 없겠지만, 앞서 본 것처럼 한강유역의 초기 철기문화는 현단계에서 명확히 연구되어 있지 않고 토기 자체에 대한 견해도 일치된 것이 아니므로 우선은 철기로써 그 문화발전단계를 크게 구분짓는 것도 유익할 것으로 판단된다.중도유적에서 나온 철기에는 고구려식의 芹形鐵儀과 창고다리 (철준) 172) 등 삼국시대의 武器類가 있다. 이러한 부형철측은 北倉郡 大坪里 유적 제 접 위문화층에서 나온 예가 있고 위문화층의 연대는 서기 3~ 기로 보고 있 다. 173) 중도의 보고자들은 철촉만을 보면 중도유적이 서기 3~ 기까지도 내려울 수 있다고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大坪里유적 출토품을 접 가운
데 문화충의 시기인 서기 1~2세기로 추정하였다. 아무튼 중도유적의 연대는 최소한 철기를 통해서 보면 분명히 연대가 올려 볼 수 없는 유적이다.
한강유역에서 철기가 비교적 많이 출토된 초기 철기유적에는 중원군 하천리 지구의 주거지가 있다. 여기서는 銀造姿 접, 造鐵 점, 철삽 1접, 鐵鉢片 점, 刀子 점 등이 나왔는데 (도면 18~19) 이 가운데 시기적인 특징이 비교적 분명한 것으로는 단조철부와 삽날이다(도면 25 참조).하천리 지구의 단조철부는 인부가 많이 파손된 것인데, 남아 있는 부분만으로 그 형태를 추정해 보면 동조의 B 식 계통에 해당된다. 지금까지 이러한 공부는 대체로 삼국시대 이후에 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으나, 최근 부산의 老而同 16호분과 갇은 서기 세기 중엽경의 瓦質土器 후기에 해당되는 원삼국시대의 유적에서도 출토되므로"5) 좀더 일찍 출현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한강유역에서도 양평리 호 적석총, 176) 도화리 적석총177)등의 서기 2~3세기 무렵의 유적에서 나오고 있으므로 BlV 식 공부의 출현이 삼국시대보다는 이르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편, 한강 이북지 역에서는 北倉 대평리 지점 위문화충178) 시기에 해당되는 데서 접 나왔고, 고구려 무덤인 靑里 33호분179)에서 접 나온 바 있다. 이상의 각지 유적 출토내용을 종합해 보면 B IV 식 공부는 대체로 원삼국기인 서기 2~3세기 무렵에 출현하는 철기로 보면 크게 틀립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하천리 지구에서는 또한 철삽날이 접 출토되었다. 삽날은 중국에서는 대개 전국기부터 주조로 만들어졌으나, 180) 우리나라에서는 제 단계 철기문화의 파급시기부터 나오는 것으로 불 수 있다. 하천리 지구와 형태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단조로 된 삽날이 나온 예로는 은율군의 城里 가말뫼 호 귀를무덤 181)이 있다. 운성리 호 귀를무덤의 연대는 앞서 말한 대로 서기 1~ 기경에 해당된다.하천리 지구에서 나온 철기 가운데 주목되는 것으로. 또한 주조철부가 있다. 이러한 주조철부는 지금까지 대체로 부형철기로 부르고 있는 것인데 대체로 삼국시대에 나타나고 있어 우리나라의 초기 철기 제 단계 파급시기 에 보이는 동조의 B I 계동의 주조부기와는 다론 것이다. 182) 하천리 F지구출토 주조철부와 유사한 시기의 출토예로는 양평군 大心里 183) 출토품, 老回16 18 4) 토광묘 출토품, 蒙村土城 185) 출토품 등이 있다. 노포동 16호 토광묘는 전술한 것처럼 서기 세기 중엽경으로- 비정되나, 대심리와 몽촌토성의 경우는 초기 백제시기에 해당된다. 대심리유적은 당초 보고자들은 기원전 세기~기원전 때기경으로 올려 보았으나, 반출되는 백제토기들로 미루어 대체로 몽촌토성과 갇은 초기 백제시기로 할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대심리유적 자체가 단일한 시기에 형성된 단순유적은 아니지만 여기의 주조철부와 관련된 시기는 초기 백제로 봐야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몽촌토성에서의 주조철부 출토예의 존재는 물론이고, 대심리출토의 토기들에도 전면에 格子文이 打探된 시루편 186) 등 일련의 초기 백제토기가보이는데, 이러한시루는몽촌토성의 초기 백제토기 가운데 몽촌 Il 기에서 나타나는 것들187)이기 때문이다. 몽촌 Il 기의 연대는 서기 기 중엽 이후이다. 이러한 주조철부의 출토예를 감안하면 하천리의 주조철부는 대체로 서기 세기 무렵으로 볼 수 있을 것이나, 이와 반출되는 단조공부 및 삽날의 연대와 야 생각하겨 , 여타 유적의 출토예들보다 이른 시기의 주조철부로 보고자 하며, 그 연대는 잠정적으로 서기 2~3세기로 하여둔다.
지금까지 살펴본 중도 및 하천리 시구의 철기의 연대를 생각한다면, 한강유역의 초기 철기문화는 결코 서기 세기 이전으로. 소급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서기 2~3세기까지 내려 보아야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 까닭은 하천리의 철기 가운데 운성리 호 귀틀무덤 출토예와 유사한 삽날만이 서기 l~ 끼기로 불 수 있으며, 나머지 공부와 주조철부는 결코 서기 l기를 울러갈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며, 삽날의 경우에 있어서도 운성리 출토품과는 형태적인 차이가 있어 보다 이른 시기로 볼 수 있는 분명한 근거가 되기에는 미흡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철기의 형태적인 고찰은 金屬學적인 분석의 뒷받침이 없이는 그 의미를 확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단계에서 腦四로 살펴본 데 불과하므로 장차 금속학적인 분석이 있으면 보다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李南珪의 한강유역 초기 철기 유적출토 철기의 분석결과188~ 시사적이다. 馬場里 유적 출토철편에 대한 분석 결과를 해석하면서 〈……마장리의 鐵片은 800°C 이하의 온도에서 水燒入water quenching 조직으로 판단되고 있어, 당시에 이미 중국의 한대에 성행한 銃鐵距范핍 및 그 열처리 기술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선철계 탈탄강은 西漢 중기 이후 도가니 (印荷) 야철법이 발전하면서 점차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며, 수소입, 죽 물에 담금질하여 철의 질을 강화 는 방법이 쓰였다는 것은 고도의 제강기술이 도입되어 있었디는 것을 증명한다〉 (방접은 필자가 부가하였음)고 하고 있는데 , 이는 한강유역에의 초기 철기문화의 파급이 단계의 철기문화임을 뒷받침하는 동시에 시기적으로 지금까지의 생각보다 훨씬 늦은 것을 말해 주는지도 모른다.
이상 한강유역의 초기 철기문화의 개시와 전개에 대한 내용을 주로 철기 자체의 형태적인 측면을 타지역과의 비교를 통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한강유역의 초기 철기문화는 우리나라 철기문화의 파급단계에서 단계의 파급시기와 관련되고 그 실연대는 서기 2~3세기경까지 내려울 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장차 연구결과에 따라 실연대 비정은 얼마간의 융통성이 있으나 초기 철기 개시상한은 서기 세기를 소급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이는 최근 낙동강유역의 茶戶里나 늑도유적 등지에서 한강유역보다 이른 시기인 제 단계 철기문화의 파급과 관련된 철기내용이 속속 밝혀지고 있고 그 실연대가 대략 기원전 세기 무렵임을 고려하면 대체로 수긍이 가는 바이다.결론적으로 말하면, 한강유역에는 세형동검기가 끝나고 대동강유역, 낙동강유역을 비롯한 여타 지역처럼 곧바로 초기 철기문화가 성립되지 못하고 최소한 서기 녀]기 무렵까지는 문화적으로. 일종의 공백상태, 죽 문화 주변 지역으로 남아 있었고, 서기 1~ 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 지역에 초기철기문화가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양상은 세형동검기에도 어느 정도 적용되는데 여타 지역에 비해 세형동검기에 해당되는 유적이 수적으로 상당히 열세임은 그러한 내용을 뒷받침한다고 생각된다. 이와 갈이 한강유역이 당시에 일종의 주변문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접은 어쩌면 초기백제가 한깅유역을 배경으로 성립되었던 데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죽,유이민집단인 초기 백제 건국세력이 쉽사리 건국의 기반을 얻는 데는 在地의 강력한 지역통합세력이 없는 것이 더 유리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주1) 金元龍 「韓國無文土器地域分類試; 」, 《考古學〉〉 집, 1968, pp.1-38 .2) (i) 金元龍, 古學稽槪說』, 一志社, 1986., pp. 66-69. 金元龍 外, 羽郭밖 와 그 文化』, 三星文化文庫 89.3) 박진욱 의 , 「비파형단검문화에 관한 연구」, 1987 및 <표 3> 참조.4) 許玉林 • 許明 • 高美華, 旅大地區 新石器時代文化和靑銅器時代文化槪述」, • 考古與歷史』 I , 1982, pp. 23-41.5) 許玉林 外, 주 4) 앞의 책.6)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 「중국동북지방의 유적발굴보고 (1963~1965) 」, 1966, pp. 1-53.7) 許玉林外, 주 4) 앞의 책.8) Kwang-Chih Chang, The Archaeology of Ancient China, 3rd edition, 1977, pp. 144-281.9) 許明綱 外, 「大連于家村陀頭積七墓地』, 〈改物〉〉 1983년 9기, pp.41-42.10) 許玉林 外, 4) 앞의 책.11) Kwang-Chih Chang, 앞의 책, p.384.12)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 6) 앞의 책.13)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 6) 앞의 책 pp.55-62.14) 許明綱 外, 9) 앞의 책, p.47.15) ① 신의주 역사박물관, 1966년도 신암리유적발굴간략보고 , 〈고고민속》 1967년 2기, pp.41-44.②리순진, 「신암리유적발굴중간보고』. 고고민속》 1965년 3기, pp. 40-49.③김용간 • 리순진, 1965년도 신암리유적발굴중간보고』, 〈고고민속)) 1966년 3기 , pp. 26-2916)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 주 6) 앞의 책, pp.37-44. 17) 金 、 주 2) 의③ 盧爆莊, 惟t區分에 대한 一見解」, 『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記念敬』 I '1987, pp. 755-767.
19) 李淸圭, 「南韓地方 無文土器文化의 展p 와 5II 土器文化의 位置」, 〈慣迪 古史學 報》 제 호, 1988, pp. 85-88.李淸圭 교수는 無文土器文化의 시기구분에 처음으로 청동기, 철기 등 금속기문화와 대비하는 分期를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무문·토기문화의 체계적 이해를 위한 큰 진전이라고 생각된다. 필자의 견해도 대체로 이와 갇은데 세부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 글를 진행하면서 밝힐 것이다.20) 許玉林 外, 주 4) 앞의 책.21) 許玉林 外, 주 4) 앞의 책.22) 許玉林 • 許明綱, 旅大地區 石柄 綜述23) 許玉林 外, 주 4) 앞의 책.24) 박진욱 의, 「비파형단검문화에 관한 연구」, 1987, pp. 29-42.25) ① 秋山進午, 「中國東北地方 初期金屬器文化 樣相 U:), (中), (下)」, 《考古學〉〉 B-4, '4-1, ,4-4, 1968, 1969.② 鳥恩 干我國北方的靑銅短劍」, 《考古》 1978년 기.③ 相효 「中國萊따泥師,r論」, ((考古學報》 1980년 기.④ 還雷 멩千曲刃靑銅短劍的若干問題」, 《考古〉〉 1982년 기.⑤ 斯楓紋 떨沖國東北地區含曲刃靑銅短創的文化遺存J, 《考古學報》 1982년 471, 1983년 기.⑥ 박진욱 의, 『비파형단겁문화에 관한 연구』, 1987.⑦ 醫國, 「中國北方地區靑銅短劍分群硏究J, 《考古學報》 1988년 기.26) 주 2,) 의 ®, ®, ®, 앞의 책.27) 주 25) 의 ®, ® ®, ®, 앞의 책.28) 醫國, 주 2,) 의 ®, 앞의 책.29) 박진욱 의, 주 기의 ®, 앞의 책, pp.6-29.30) 許玉林 外, 주 4) 앞의 책.31) 주 15,) 의 ®, ®, 앞의 책.32) 許玉林 外, 주 4) 앞의 책.33) 박진욱 의, 주 기의 ®, 앞의 책. pp.23-24.34)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實諭室, 放射性破素副定年代報告 8) 」, 《考古》 1979 년 17], p.89.3,)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 주 6) 앞의 책.36) 주 25 )의 ③, ⑥ ⑦, 앞의 책.37) 박진욱 의, 주 25) 의 ⑥ 앞의 책. pp.26•27.38) 박진욱 의, 주 2,) 의 ⑥ 앞의 자 pp_.72-92.39) 박진욱 의, 주 25) 의 ®, 앞의 책, pp.79-80.
40) 황기덕 , 「최근에 새로 알려진 비파형동검과 좁은 놋단검 관계의 유적유물 , 〈" 학자료집》 4, 1977.41) 吉林省文物管理委員會, 「吉林 懷德大菅山發現靑銅短劍」, 考古)) 1974년 기, p, 276.42) 許玉林·王連春, 「丹束地區出土的背銅短劍」, 《考古》 1984년 기, p.713.43) 박진욱 의, 주 25) 의 ⑥, 앞의 책, p. 84.44) 林溫 주 25) 의 ③, 앞의 책.45) 박진욱 의, 주 25) 의 ⑥, 앞의 책, p. 87.46) 김정문, 「세죽리유적발공중간보고 (1) 」, 〈고고민속〉〉 1964년 2기 및 주 25) 의 ⑥, 앞의 책, pp. 26-27.47) 박진욱 의, 주 25) 의 ⑥, 앞의 책, p. 80.48)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 주 6) 앞의 책.49) 박진욱 의, 주 25) 의 ⑥, 앞의 책, p.77.50)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 주 6) 앞의 책.51) 金元龍, 주 1) 앞의 책 및 緯永熙, 「角形土器考」, 〈個括뀜考古學報〉〉 14• 15 合輯,1983, pp.77-132.52) 김용간, 금탄리원시유적발굴보고, 1965, pp. 23-24. 53) 韓熙, 주 51) 앞의 책. 54) 于家村上層類型에 해당되는 雙陀子 기충에서 이중구연토기가 보이고 있다.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 주 6) 앞의 책 참조.55) 김용간 • 서국태, 「서포항원시유적발굴보고, 『고고민속논문집』 4, 1972, p.107.56) 김용간 의, 주 55) 앞의 책, p.97.57) 韓永熙, 주 51) 앞의 책, pp.126-127.58) 韓永熙, 주 51) 앞의 책, p.128.59) 서국태, 신흥동팽이그릇집자리」, 〈고고민속 》 1974년 기.60) 김용간, 주 52) 앞의 책.61) 韓熙, 주 51) 앞의 책, p.127.62) 西谷正, 細竹里( )土 杓 題 南部朝鮮無文土器編年 杓 -先生六十三歲論文集』, 1977, pp.474-494.63) 리순진, 주 15) 의 ②, 앞의 책.64) 韓永熙, 주 51) 앞의 사 p.127.65) 李健茂, 瀋遠物의 技法」, 『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記念論霞 I 』, 1987, pp. 178-178.66) 金廷鶴, 籍勳古學」, 河出書房新社, 1972, p. 96.67) 金元龍, 禮配氐石劍의 起源에 關한 硏究, 《白山學報》 1~. 1971, pp.1-30.68) 金元龍 주 67) 앞의 책.
69) 田廣 • 爾多斯式 銅器的淵原」, 考古學報 1988년 기, pp. 257-275 및 주 5) 의 . 앞의 책.70) 田廣 外, 주 69) 앞의 책.7I) 韓永熙, 주 51) 앞의 책.72) 林炳 「韓園無文土器의 硏究」, 個徒史學〉〉 7, 1986, pp. 105-106.73) 後驛, 銅器&土器•石器」, 森貞次郞博士古稀記念古文化論渠』, 1982. pp. 258-259.74) 韓永熙, 주 51) 앞의 책, pp.126-127.75) 圭, 「細形銅劍의 型式分類 및 그 變遷에 對하여」, 〈여追汚古學報〉〉 13 집, 1982, pp. 1-37.76) 金元 , 주 2) 의 ®, 앞의 책, pp.68-69.77) 韓掛仁, 「祐土 土器 文化性格의 一考察」,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178) 金元龍 「新昌里壅稽墓地」, 서울대학교 考古人類學穀刊 弟-楊, 1964. 圓版 7.79) 崔盛洛, 「海南郡谷里貝塚 I • Il 」, 木浦大 校博物館, 1987, 1988.80) 崔洛, 주 79) 앞의 책.81) 金元 , 「水石里先史時代緊落住居址謂踏華浩」, 〈여漆겁洋-1-》 11 집, 1966, pp.1 -16.82) 「白 出土 黑'田長類登」, 《考古學》 집, 1974, pp. 152-154.83) 吉白圭, 「京畿道 無文土器 • 磨製石器」, 《考古學》 집, 1974, p. 125.84) 金丈里 출토품이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未刊이지만 篇者見에의함.85) 申敬澈 南三千浦市勒島遺蹟」, 회 한국고고학 전국대회발표요지, 1985.86) 申敬識 「熊'"文化期 紀元前上限說 再考」, 〈沒大史學〉〉 집, 1980, pp.240-242.87) 황기덕 • 박진욱 • 정찬영, 「기원전 5세기~기원 3세기 서북조선의 문화」, 〈고고민 속논문집》 3, 1971, p. 85.88) 황기덕 의, 주 87) 앞의 책, p. 29.89) 圭, 주 75) 앞의 책.90) 고고학연구소, 『고조선 문재연구논문집J, 1977, p. 102.91) 『조선의 청동기시대』, 1984, pp. 10-1 1.92) 김용간·서국태, 주 55) 앞의 책, p.97.93) 김용간,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질그릇 갖춤새변천에 보이는 문화발전의 고유성」, 『고고민속논문집』 7집, 1979, p.91, 그림 의 6, 7.94) 리순진, 주 15) 앞의 책, p.44, 그림 의 12, 13.95) 김용간, 서국태, 주 55) 앞의 책, p. 107, 그림 의 1, 4.96) 김용간, 주 93) 앞의 책, p. 90, 그림 2~ 4.97) 許玉林 外, 주 4) 앞의 책•
98) 황기덕, 「두만강유역의 청동기시대문화」, 『고고민속논문집』 2집, 1970, pp.1-47.99) 황기덕, 주 98) 앞의 책.100) 주 91) 앞의 책, p.1 1.101) 황기덕, 주 98) 앞의 책, p.18.102) 주 91) 앞의 책, p.11,73.103) ① 주 91) 앞의 책, p.73. ② 김용간 • 안영준, 「함경남도, 양강도 일대에서 새로 알려진 청동기시대 유물 에 대한 고찰」, <<조선고고연구》 1986년 제 호, pp. 24-29.104) 西谷正, 威錢南道 撫文土器..:, 〈여璃淵)), pp. 165-189.105) 주 91) 앞의 책, p. 75.106) 西谷正, 주 104) 앞의 책.107) 주 91) 앞의 책, p.11.108) 안영준, 「북청군중리유적」, 〈고고민속 》 1966년 제 2호, pp. 24-27.109) 서국태, 「영홍읍유적에 관한보고」, 〈고고민속》 1965년 2호, pp.35-45.110) 김용간 의, 주 103) 의 ② 앞의 책.111) 안영준, 주 108) 앞의 책, p.126.112) 조중공동고고학 발굴대, 6) 앞의 책, p.73.113) 박진욱, 함경남도 일대의 고대유척 조사보고」, 고고학자료집》 제4집, 1977, pp. 165-182.114) 박진욱, 주 113) 앞의 책, pp. 177-178.115) 李淸圭 주 75) 앞의 책.116) 박진욱, 주 113) 앞의 책, p.18 1.117) 李白圭, I 慧文 磨製石 編年울 中心으로」, 《考古學》 집, 1974, pp. 53-129.118) 崔夢龍, 頂江 水沒地區 遺蹟 發撮覇호, 『八堂, 昭陽댐水沒地區遺蹟發堀綜合 調』, 1974, pp.433-507.119) 韓永熙, 줄문토기의 地域的 비교」, 선입配巳盲》 12, 국사편찬위원희, 1983, p. 504.120) 崔盛洛, 放傾性 炭素測定年代問題의 卿」 考古學報》 태, 1982, p. 92.121) 金載元•尹武炳, 慣國支-墓써究』, 1967, pp.51-64. 122) 金載元•尹武炳 주 121) 앞의 책, pp.65-78.123) 金廷鶴, 壇낫阿藥里住居址 發振報告J, (i!건〔化》 ~. 1963, pp. 11-25.124) 華陣, 주 19) 앞의 책.12기 轉싸鳥 주 51) 앞의 책.126) 李淸圭, 주 19) 앞의 책.
127) 李淸圭, 갇은 책.128) 交河里에서는 즐문토기도 나왔으나, 이 줄문토기들은 한강유역의 줄문토기 후기의 제 분기 (開 - I , 矢島期)에 해당되는 것들이므로, 무문토기들과 동시기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任孝宰 • 朴淳發, 「烏耳島貝塚-―-新浦銅A, 貝塚發堀調査報告, 서울대학교 박물관, 1988, pp. 104-109 참조.129) 有光敎 朝鮮江原道出土 土器 石器」, 《考古學雜誌〉〉 28-11, 1938.130) 李健茂 주 65) 앞의 책.131) 崔沿 주 120) 앞의 책, p. 92.132) 崔盛洛, 갇은 책 , p, 92.133) 金載元 • 尹武炳, 주 121) 앞의 책, pp. 23-49.134) 金良善 • 林炳泰 「驛三洞住居址發堀報告」, 〈여겨學硏究》 야, 1968.135) 李淸圭, 주 19) 앞의 책.136) 「狀岩里住居址」, 서울대학교 考古人類學穀 1974.137) 金元龍 外, 「狀岩里住居址:.l, 서울대학교 考古人類學穀刊 冊, 1973. 狀里住居址」, 서울대학교 考古人類學穀f 第 , 1974. 「臨里住居址 」, 서울대학교 考古人類學왔刊 冊, 1976. 任孝宰, 「狀岩里住居址」, 서울대학교 考古人類學穀刊 第해 , 1978.138) 李淸圭, 주 19) 앞의 책.139) 李白圭, 「靑銅器時代의 漢江流域」, 『漢江史』, 서울특별시, 1986, pp.244-280.140) 尹世英, 「淡沙里住居址」, 〈 〉〉 25집, 1981.141) 李健茂 外, 『中島』 n , 198 1.142) 崔龍 外, 「堤原 島坪里 也區 發堀調査報告」, 『忠州댐水沒地區文化遺蹟發堀調 1982.143) 李淸圭, 주 75) 앞의 책에서는 세형동검 B I 식으로 보고 있으나, 형태적으로는 비파형동검 후기형과 거의 동일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굳이 세형동검으로 본다면, 요동반도의 초기형 세형동검에 더 유사한데, 이러한 초기형 세형동검은 한강유역에서 토출되는 것으로.는 불 수 없으며, 공반된 토기문화가 이 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시기의 토기인 접에서도 세형동검기의 시작과 더불어 접토대토기, 흑색마연장경호 등을 주체로 하는 새로운 토기문화가 나타나는 여타 지역에서의 경우를 고려하면, 상자포리의 동검은 비파형동검 후기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144) 崔盛沿 주 120) 앞의 책, p. 92,145) 李淸圭, 주 75) 앞의 책.146) 金這, 「水石里 先邦 緊落住居址 調査報告J, @翊積料 대, 1966, pp. 1 ~16.147) 林炳菜 「漢江流域無文土器年代」, 덕적 稙博士回甲記念 翰園史學論穀』, 1969, pp. 552-56 1.
148) 稽山將三郞 「京城府外鷹峯遺蹟報告」, 〈여대限學雜誌》 제2권 5호, 1930, pp. 280 -300.149) 金廷책 「緯固庶文土器文化의 硏究」, 《白山學報》 제3호, 1967, p. 27.150) 任世權, 春川溫衣洞無文土꼽遣蹟」, 〈여넷t》 21, 22 합집, 1977.151) 西谷正, 「朝鮮發見 恒 , 《古代學硏究》 46, 1966.152) 靑銅遺物圓錄』, 國立中央博物館, 1968.153) 樞本杜人, 며服存 考古學』, 1980. 154) 梅原末治, 藤田亮策, 璃鮮古文化結鑑 , 1947.155) 李麻, 「積城塔林里出土一括遺物」, 《考古學〉〉 4, 1977.156) 本杜人, 주 153) 앞의 책. 157) 李淸圭, 주 75) 앞의 책.158) 尹東錫, 대能野 朋虹岸의 發展과 金屬學的 解釋J, 〈改 〉 18호, 1985, pp. 129-136. 159) 尹東錫, 주 158) 앞의 책.160) 淵見浩, 대 ~初期鐵期文化』, 1982, pp. 203-229.161) 東潮 占寸 鐵芹 系譜」, 『森貞次郞博士古稀記念古文化論集』,1982, pp. 511-548.162) • 申敬澈, 終末期無文土꼽에 관한 硏究」, 〈僧迪博古學報》 20, 1987, pp. 113-131.163) (D 李鍵茂 外, 『中島』 I , 1980.® 池鍵吉外, 『中島』 I[ , 1982.164) 元永煥 • 崔福圭, 『屯內』, 1984.16 기 林炳菜 「水源西屯洞住居址發堀槪報」, 〈慣遜汚古學年報〉〉 9, 1982, pp. 33-34.166) 韓永熙, 「馬場里住居址出十遺物」, 『中島』 11, 1982.167) 尹容鎭, 中原 荷川里 地區 遺蹟發堀調査報告, 『忠州댐水沒地區文化遺蹟發撮調 査綜合報告書』 ( I ) , 1984, pp. 385-476. 168) 李健茂 주 163) 의 O 앞의 책, 도면 心] ®. 169) 鄭澄元 • 申敬澈 주 162) 앞의 책.170) 리규태, 「은율군 운성리 나무곽무덤과 귀틀무덤, ((고고학자료집)) 제6집. 1983, pp.189-196.171) 황기덕 • 박진욱 • 정찬영, 「기원전 5세기~기원 3기 서북조선의 문화」, 고고민속논문집》 3, 1971, pp. 75-80.172) 李鍵茂 外, 주 163) 의 O 앞의 책.173) 정찬영, 북창군 대평리유적 발굴보고』, 고고학자료집) 4, 1974, pp. 119-156.174) 束湖 주 161) 앞의 책.
175) 尹炳, . 宋桂鉉, 「釜山老 洞遣蹟」 n . 1988, p.41.176) 裵基同 「堤原 陽坪里 샤也區 遣蹟發堀調査報告」, 『忠#I 水沒地區文化遺蹟發堀 開査綜合報告 』 ( I ) , t 984, pp. 615-692.177) 崔夢龍 外, 「堤原 桃花里地區遺蹟發堀課査報告」, 『忠州 水沒地區文化遺蹟發堀 課査綜合報告 ( I ) , 1984, pp. 693-726.178) 정찬영, 주 173) 앞의 책.179) 金基雄, 「高句麗의 武器와 馬具』, 〈여追史論〉〉 15, 1985, pp. 39-62.180) 潮見浩, 주 160) 앞의 책.181) 리규태, 주 170) 앞의 책.182) 束淵 주 161) 앞의 책.183) 金元t 外, 「楊平郡 大心里遺蹟發堀報告J, 『八堂 • 昭隅댐水沒地區遺蹟發堀綜合調 査, 1974, pp. 173-282.184) 尹炳鏞 外, 주 175) 앞의 책.185) 金元龍 • 任孝적 • 朴淳發, 영쟈 束南地區發堀開査報告」, 1988, p. 300. 186) 金元龍 外, 주 183) 앞의 책, p. 252.187) 金元龍 外, 주 185) 앞의 책, pp.118-12 1.188) 李南珪 「南緯初期鐵器文化의 一考察 특히 鐵器의 金屬學的 分析올 中心으로」, 〈여國考古學報〉〉 13, 1982, pp. 39-60.한성시대의 백제
崔夢龍1백제는 시조 淵祚王의 개국(기원전 )으로.부터 31대 義慈王 20년(서기 660년)에 이르러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약 70~ 년에 걸친 오랜 기간 동안 신라 • 고구려뿐 아니라 일본, 그리고 증국의 여러 나라와 정치 • 문화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나름대로의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7백여 년간 계속된 백제의 역사는 그 도옵지의 변천에 따라 크게 漢城時代(溫祚王 원년, 기원전 興卜~蓋鹵王 21년, 475년), 熊津(公州)時代文周王 원년, 475년~聖王 16년, 538년), 此(扶餘)時代~ 16년, 53 興~義駐 20년, 660년)의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이 세 시기의 문화적인 목칭둘은, 지금까지 연구 • 조사된 고고학적 자료에서도 찰 드러난다.이중에서 온조왕이 고구려계의 유이민집단을 이끌고 한강유역으로. 남하하여 慰禮城에 도읍을 정한 시기로부터 문주왕이 熊尊 천도를 감행하는 시기 까지를 (기원전 ~서기 475년) 面齊의 漢戱明浮十 칭한다.이 시기는 馬韓 54 小國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 條荀 그 체제를 정비하고 세력권을 확장하여 古代國家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한편 대의적으로는王, 1) 또는 西韓王2) 이 동치하던 目支園을 중심으로 하는 마한 諸固울 와해시키고 그 진여세력을 한반도의 남부지역으로 몰아내고, 3) 한강유역에서 실질적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있어서 백제의 주세력권은 夢村土城울 중심으로 하는 직경 10km 이내의 지역으로 비정되겠으며, 그 도읍지는 대개 河北虹덮城, 河南城, 漢山, 漢城으로 비정된다. 4)몽촌토성을 중심으로 하는 직경 10km 이내 지역에서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몽촌토성 (사적 297호)을 비롯하여 納洞 토성(사적 11호), 二聖山城(京畿道 廣州郡 향토유적 호), ) 宮里일대, 石村洞 古項群(사적 243호), 고분군(사적 270호), 可樂洞 고분군 등의 유적이 있다(도면 I).백제시대의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인 연구조사는, 1970년대에 들어와서 충남 공주 宋山里에서 武寧王陵기 발굴조사5)되기 전까지 신라나 고구려에 관한 연구조사에 비해 매우 빈약한 실정이었으며, 그나마도 공주와 부여지역에 국한된 것이었다.그러므로 보다 근본적인 백제의 성격을 담고 있는 한성시대의 백제에 관한 고고학적인 자료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었다.그후 1970년대 중반에 집어들면서 서울특별시가 주관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송파구의 석촌동, 가락동, 방이동 등의 지역이 토지구회정리사업지구로 설정되면서, 그 동안 방치되어 훼손되어 가던 이들 유적들이 발굴조6)되어 유적들의 성격이 어느 정도 밝혀지고 많은 고고학적 자료들이 축적되어 오늘에 이르는 실정이다.이러한 백제 초기의 유적들에서 밝혀진 자료들을 통해 볼 때, 몽 성일대가 백제의 건국세력이 위치하던 핵십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몽촌토성에 인접한 석촌동, 가락동, 방이동 일대에 밀집분포하는 대형 고분들온 당시 지배층들의 분묘로 추정된다.이러한고고학적인 자료의 분석에 의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백제의 도읍에 관한 는『三國史記』의 기록은 백제가 도읍을 河北慰禮城→河蘭嶽懿→漢山→漢城으로세 번에 걸쳐 옮겼다는것으로해석되어지기도한다.7)
지금까지 여러 학자들은 한성시대 백제의 도읍지의 변천과 그에 따른 위치 비정에 있어서 〈표 〉에서와 갇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고고학 자료를 정리 • 분석해 보면 한성시대 백제의 도읍은 〈표 〉와 같이 새롭게 비정될 수 있다. 죽 이들 도읍지들은 현재 서울시 송파구 일대와 경기도 광주군 일대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한성시대의 백제유적들을 면밀히 검토해 본다면 하복위례성은 중량천 유역 일대에, 하남위례성은 몽촌토성으로, 한산은 이성산성으로, 그리고 한성은 경기도 광주군 춘궁리 일대로 각각 비정될 것이다.표 | 백제 초기 都城의 위치 및 천도과정에 대한 諸說
i ii!北 河南
i 可北웹휠成→河南 「漢江밤L 域 百濟째여城址
(崔흉뼈 •~ 표훌, 주 4, p .86)
표 2 한성시대 都城의 위치 및 천도과정
명청 移짧훌期 위치
(뿔훌빼 ·f훨 훌, 주 4, p .1 01)
이들 지역에서는 앞으로도 한성시대 백제에 관계되는 고고학적 자료들이 계속해서 추가될 것이다.
그런대 이제까지 발굴조사된 한성시대 백제의 유적들을 크게 나누어 본다면 그것들은 (돌무지 무덤)과 封土配 대표되는 분묘유척 8)과 성곽유쳐으로나누거진다.2 유적
2-1 분묘墓制는 전통적인 형식요소를 강하게 반영하면서도, 디른 한편으로는 의부로부터의 새로운 요소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고고학적인 자료이다. 그러므로 묘제는 특정지역에 있어서 한정된 시기 동안 이루어전 문화를 파악하는 데 매우 유용한 자료가 된다 하겠다.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제 초기에 이용되었던 주된 묘제로는 積石塚과 封土增기 있는데, 적석총계통의 분묘가 고구려적인 전통을 이어받은 유이민집단의 지배세력의 묘제라면, 土塘墓(움무덤), 壅檜墓(독무덤), 石鄒墓(돌덧널무덤) 등의 봉토분계통의 분묘들은 이전부터 한강유역에서 사용되었 던 토착적인 묘제라 할 수 있겠다. 9)이러한 한강유역의 적석총계와 봉토분계의 분묘들의 분포 및 특징, 그리고 그 출토유물들에 대한 고찰은, 그 고분들이 초기 백제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알려줄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초기 백제문화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도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줄 것이다.1) 적석총(돌무지 무덤)선사시대의 적석총은 시신을 안치한 후 그 위에 흙을 덮는 대신에 돌을 쌓는 가장 원시적이고 간단한 분묘양식이었다. 이는 충고 바람이 강한 시베리아의 초원지대에서 일찍부터 유행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10) 우리나라의 선사시대에서는 경기도 矢島 貝塚의 발견예 11)와 강원도 春城郡 泉田里12)의 경우가알려진정도이다.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적석총은 그보다는 보다 정제된 型式의 것을 말하는데, 이 적석총은 지강도 자성군 법동리 하구비 신풍동, 서해리, • 조아리 시중군 노남리와 십귀리, 초산군 연무리 등지에서 많이 발견되는 원래 고구
‘· -\
도연 l 서울의 백제휴척 障團考古뺑地圖, 1984, p .3~ 및 p.1 2~)
번유적호 유적지명 참고문헨 비고
려의 전통적인 묘제였다. 또 적석총 중에는 압록강변 저지대인 炫江道 慈城松岩里 지구 33, 45, 56, 88, 106호와 楚山郡 坪里 心구 호분길이 前方後圓頃의 원형과 같은 형식도 보고되고 있어 이는 별도의 문제로 앞으로 연구의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이들의 연대도 다른 적석총과 마찬가지로 기원전 2~3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源江 유역의 桓仁지방과 압록강의 지류인 免魯江 유역의 時中郡 慈城郡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13)
기원전 기경에 이러한 적석총들이 축조되기 시작할 때, 적석총의 구조는 따부에 냇돌을 力核으로 깔고 관을 안치한 다음에 다시 냇돌을 덮는 형식이었는데, 서기 2~3세기경이 되면서는 그 입지가 강안에서 내륙이나 산기슭로 바뀌었으며 사용된 돌도 산돌로 바뀌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이 적석총의 형식은 보다 정제되어 장군총과 같은 대형 적석총도 나타나다가 서기 세기경이 되면 石室壇(돌방무덤)에 의해 대치된다.그런데 이 고구려의 묘재는 고구려의 유이민들이 한강유역으로 남하하여 백제사회를 건설하게 되면서는 한강유역에도 분포하게 된다.죽 북한강과 남한강의 상류지역에서부터 하류지역인 서울 강동구 석촌동 일대에 이르는 지역에 여러 형식의 적석총들이 축조되었다. 지금까지 남아있거나 조사 • 확인된 바 있는 적석총의 분포는 다음과 같다.남한강 상류인 平昌郡 余萬里와 應岩里에서 堤原郡 陽坪里, 桃花里, 153 까지 적석총이 분포하며, 북한강 싱류의 華川郡 看尺里 17)에서도 유적이 보고된 바 있다. 그보다 아래로 내려와서 춘천 근교의 春城郡 山泉里 유적, 유적 18)이 보고되었으며,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양평지역에서도 深驛, 雨 釋里 일대에 적석총이 분포한다. 19) 그리고 최근 경기도 연천군 중면 삼곳리에서도 백제시대의 적석총이 발견되어 문화재유적 조사실에 의해 1992. 9.21~11.15 사이에 시굴이 이루어진 바 있다.한강 하류의 서울시 송파구 石村洞 일대에서는 기단식 적석총인 호분과 선분이 정식으로 발굴되어 보고된 바 있으며 ,20) 198 에는 셨분과 호분의 주변지역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추정 1, 2분과 호 적석총이라 명명된 3 기의 적석총이 추가로 조사된 바 있다. 2 이 지역에는이틀 외에도 이들과 유사한 형식의 적석총들이 여러 기더 있었을 것 로 믿어진다. 그리고 청양군 體에서도 적석총 l 기가 191 변에 「조선고척보고 에 간략하게 소개된 바 있으며 최근에는 공주 宋山里에서도 석촌동 4 호분과 같은 것이 발굴되어 蓋 의 허묘 또는 가묘로 주장되기도 하였다(도면 2).22 )
룹
도연 2 송산리 方壇階段形 무덤 복원도
않훨由典, 「쩌 U 里 方뿔階段形 무덤에 대하여 J , «홉훌王짧의 맑혔觀과 짧뻐 훌», 훌훌王曉옳擔 2 륙년 짧衛훌훌훌, 1991, p .61 에셔 언용)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한강유역에 분포하고 있는 적석총들은 크게 적석총과 無製距 적석총으로 대별된다. 그리고 무기단식은 네 귀나 의곽에 돌을 쌓아 방형의 단을 만든 보다 정제된 형식과 단순히 돌을 쌓아 方維形기나 方台形의 형태를 갖춘 형식으로 니누어지며, 기단식은 茨道여길 의 유무에 따라 세분될 수 있다. 23)
제원군 交里, 평창군 余萬里, 鷹岩里의 적석총들은 모두 단을 이루지 않은 채 방추형 또는 방대형의 적석분구를 이룬 형식으로 모든 적석총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초보적인 무기단식 적석총으로 알려져 있다.駐隅 1•2호분과 中島의 적석총들도 기단의 출현은 없는 형식이지만 앞의 것들과는 달리 저변에 방형의 단을 설치한 후에 돌을 쌓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는 보다 발전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양평리 호분은 강변에 길게 형성된 충적대지에 강돌을 이용하여 축조된 것이며, 호분은 자연구릉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축조된 것인데, 그 중앙부는 묘곽시설이 있었던 연유로 비교적 두껍게 7~ 정도로 적석을 하였으며, 그 주변은 1~2 겹 정도로 얇게 쌓았다. 中島 束增은 그 기본 골격은 양평리의 고분과 동일하나 방추형으로 적석을 하기 전에 묘실을 축조했다는 접이 다르다. 이 묘실은 내곽과 의곽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안에는 남녀 명을 본관에 北杭 또는 西杭으로 하여 합장한 듯이 보인다. 그리고 양평리 1 • 호분은 그 파괴 정도가 심하여 보다 정밀한 조사가 이루어지진 못했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양자가 기본적으로 같은 골격을 갖는 것으로 보여진다.기단식 적석총은 淡道의 유무에 따라 분류될 수 있다. 桃花里, 汶湖里,柱目 호분 등의 고분들은 疾道施~1 없는 것들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중 석촌동 호분을 제의한 두 고분은 그 정형이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고, 그 흔적만이 엿보이는 매우 초보적인 형태의 기단식 적석총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고분은 모두 강안의 충적대지 위에 개의 단을 올린 형식인데, 문호리 것의 그 파괴 정도가 극히 십하여 원래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도화리 고분은 아래의 단은 겹으로 되어 있으며, 제일 윗단은 현재 져 정도가 남아 있는데 원래는 4~5겹 이상으로 돌을 쌓았던 것으로여겨진다. 그리고 맨 윗단에는 2.8X2.1X0.4m 규모의 석실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는 보다 발전된 유형의 고분으로 믿어진다.
이러한 초보적인 수준의 고분들에 비해 보다 발달된 정형을 보이는 것으로는 석촌동 3 • 호분을 둘 수 있다.석촌동 호분은 문호리 도화리에서 이어지는 발전과정으로 볼 수 있는데, 그 규모가 보다 방대해지고 묘단이 정형화되었다. 이 호분은 강변의 충적대지 중에서 약간 높은 곳에 입지하는데, 版築工法을 이용하여 정지작업을 하고, 다음은 을 이용하여 단을 쌓고, 그 내부는 할석으로채우는 방식으로 단의 기단식 적석총을 이루었는데, 1~2단 정도가 더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제일 윗단에서 副構으로 보이는 석곽시설이 발견되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시설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석촌동 호분은 석촌동 호보다 한층 발전한 것으로 연도시설이 있는 기단식 적석총이다. 이는 바닥에 잔지칼을 정방형으로 깐 묘성을 만든 후 방형석벽을 쌓아울리고, 내부는 점토로 판축하고 접토부 위에 葬石을 깐 단의 기단식 적석총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점토부의 정상에는 4. x4.6m 규 모의 묘곽이 설치되어 있으며, 그 님쪽에는 형식적인 연도가 나 있다.석촌동에서는 이의에도 1987 의 발굴조사에서 기의 적석총이 추가로 확인되었는데, 모두 파괴 정도가 십할 뿐만 아니라 후대의 십한 교란으로 인하여 본래의 상태를 알아내기는 어려운 실정이다.그중 추정 호분이라 명명된 적석총은 서로 다른 시기에 축조된 기의 고분이 합쳐진 雙頃으로 밝혀졌다. 두 고분의 연결부분은 폭 3.7 라 판축부로 이루어졌고, 南增게서는 개의 주곽과 개의 작은 부곽시설이 발견되었다. 추정 호분은 그 이전에 축조되었다고 믿어지는 대형 적석총이 파괴되는 과정상에서 그 자리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 역시 단으로 된 기단식적석총으로 보인다. 고분의 동북부에서 작은 割石 조각들이 바닥면에 깔려 있음이 발견되었으며, 서북부에서는 목관 기가 조사되었다.호 적석총이라 명명된 고분은 상부구조는 모두 파괴되고 하부구조만이 남아 있으므로 전체적인 윤곽을 알 수는 없지만 발견된 하부구조의 석렬이外方內圓形이었다는 것이 이채롭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살펴본 한강유역의 백제 초기의 적석총들은 대개 파괴와 교란의 정도가 심하여 그 고분의 성격을 규명하고, 편년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유물의 출토가 적은 실정이다.中島게서는 약간의 無文土器片들이 출토되었지만, 주를 이루는 토기는 회색, 회청색, 회흑색, 갈색을 띠는 경질의 金海式土器片들이다. 도화리에서는 빗살무늬토기부터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것들까지 다양한 종류의 토기들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석각 의부의 돌 아래에서 출토인 方格交을 打探한 色圓底短類登는 이 고분의 연대추정에 중요한 자료이다. 陽坪里에서는 심국시대 토기편과회색연질의 打捨文(두드립 무늬) 토기편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直立口緣의 繩席文(삿무늬) 토기가 주목된다(林의 도면 과 4 참조).이상과 갇이 中島, 陽坪理, 桃花理 汶湖里 등지에서는 格子文(문살무늬)이 나 승석문이 시문된 金海式 토기가 그 주류를 이룬다.이들 고분들보다 시기가 떨어지는 석촌동의 고분들은 그 파괴와 교란의 정도가 보다 심하여 고분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유물의 출토가 드물며, 출토유적의 共伴 관계가 불명확한 경우가 많아 출토유물을 통한 유적의 編年이 어려운실정이다.1호분과 관련된 토기는 風納里式 租質有文土器 底部片 접이 있을 뿐인데, 이는 남분과 북분을 연결하는 접토 판축부에서 발견되었다. 이 底部片은粒이 많이 섞인 租質胎土로 제작된 적갈색연질토기편이다.호분에서는 시굴갱 바닥에서, 고운 泥質胎土로 저온에서 소성된 흑회색의 軟箕않不(급다리 집시)片과, 목관이 있었던 토광묘에 부칭되었던 직립구연의 短甄査가 완형으로 출토되었다.호분과 선분에서는 회청색경질토기편과 백제 瓦距 그리고 고구려계통의 뤄句片과 중국의 黃楊包藏紅 部가 출토되었다.양평리, 도화리, 중도에서는 鐵刀子, 鐵識 鐵~. 鐵鉢 등의 철기가 출토되었는대 무기류가 많은 것이 눈에 띈다.양평리와도화리는출토된 토기류와철기류의 양식, 제작방법, 공반관계
25 〔[징D디며 여휴、〕 γ\C편 펀없 Z1 덤: 〕 딛표7 가대즙락3 호형석동분토석봉 2동광촌토 호분쪽요동분
도면 3 석촌동 고분 출토 토기 편년표 (林永珍, 엽f濟初期 副葬土뽑와 生活土器와의 關係」, 《백제토기와 묘지》, 6 회 한국상고사학회 학술발표회 1991. 9, p. 53 및 54oll 서 인용)
등에서 서로 유사하며, 또 고구려의 것들과도 비슷한 접이 있다. 죽 도화리와 양평리의 적석총은 그 축조방식과 출토유물을 고려해 불 때 동일한 세력 집단의 것이거나, 아니면 서로 밀정한 교역관계를 맺었던 집단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도 강력한 철기문화를 가지고 남하한 고구려계
μ많뽕메[버꽤돼 \Ti2γ₩+μ 「r내K늘~메느γ나많 co)n뾰「폈띠爛講{때柳 () 빠、찍μz뼈쐐nF띠 햄[£r〔W따템、w- { ] ‘rh태떼패내”1애킥기확F/타버川 m wm늑J亡찌먹잉〔)ε}~폐년 U F」기織『밟0/월]]Jm『ψ끼N / ‘\,*f)k川W『κn
도면 4 몽촌토성 출토 토기 편년표 泳珍, 앞의 책에서 인용)
의 유이민집단이었을 것이다. 24)
이외에도 문호리와 양평리, 그리고 도화리에서 管玉이 출토되었으며, 중도, 양평리, 문호리, 도화리 등지에서는 청동기도 출토되었다. 그 의에 홍미있는 유물로는 석촌동 호분의 부곽에서 출토된 은제품이 있다. 이것의 길이는 4.1cm 정도이며 모양은 요즘 사용하는 귀후비개와 비슷하나 원래의 용도는 불분명하다. 그리고 호분에서는 황갈색 구형의 유리구슬이 表士게서 발견되었는데 그 중앙에는 작은 구멍이 관통되어 있고 내부에는 작은 기포들이 많이 있다.앞에서 고구려계의 유이민집단의 지도자인 溫祚가 한강유역으로 남하하여 그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는 시기부터 고구려 王의 납하정책으로 인해 당시의 수도였던 한성 (현 春宮里 일대)을 고구려에 빼앗기고 蓋齒王마저 전사하고 文周王게 의해 웅진천도가 감행된 서기 475년까지의 약 500년간을 백제의 한성시대라 비정한 바 있다.그런데 당시 한강유역의 중부지방에 축조된 적석총의 분포와 그 축조양식, 출토유물들은 당시의 백제의 영역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죽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갇이 고구려에서는 기원전 2~3세기경부터 이미 초보적인 형태의 적석총의 축조가 시작되어 서기 4~5세기에 이르러 석실분이 주된 묘제로 사용될 때까지 지배계층의 분묘로 적석총이 축조되었다. 세기라 하면 장수왕의 평양천도와 시기적으로 부합되며, 이는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고구려 지배계층의 분묘형식이 적석총에서 석실분으로 변화했음을 의미한다.당시 고구려 고분들의 분포양상을 살펴보면, 대다수가 평양 이북에 위치하고, 평양 이남에 위치한 것들은 적석총에 비해 시기가 떨어지는 것으로. 밝혀진 석실분들임을 알 수 있다. 25) 免魯江, 潭江 등지의 압록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된 적석총들이 그 중간지역을 공백으로 한 채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의 중부지방에 출현하고 있다는 것은 그 축조세력의 국적문제와 결부시켜 생각해 불 문제이다.앞서 살펴본 한강유역의 적석총 가운데 중도, 양평리, 도화리의 것들은 그 성격이 서로 비슷하며, 그 축조시기도 모두 늦어도 세기 내지 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호리의 적석총은 이들보다는 조금 늦은 시기이고, 석촌동 3 • 호분보다는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죽 이들 고분들은 중도, 양평리, 1•2호분, 도화리 (2~ 거기 이전)-+문호리 (3세기 ) -+ 석촌동 3 • 호분 (4~ 세기초)으로 편년될 수 있다.
이들 중 가장 연구가 많이 된 석촌동 3 •• 호분의 하한은 분명히 웅전천도 이전, 죽 서기 475년 이전임이 확실하며, 특히 호분은 삼국사기』에 보이는 고분축조기사26)와 관련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호분은 호분과 여러 면에서 근접하는, 시기적으로는 조금 이른 것이라 하겠으며, 특히 호분 주변에 대한 발굴조서에서 출토된 束晋 (317~420년)의 磁四耳登27) (도면 5)는 호분의 연대를 추정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하겠다.이러한 적석총의 분포상황을 볼 때 당시 백제는 『삼국사기』 온조왕대의 기록에서 보이는 바와 갈이 동으로 走壤(春川), 남으로 ll| (安城!1 1)' 북으로 油可때戱工)에까지 그 세력을 떨친 것으로 여겨진다. 28)
도면 5 석촌동 호분 주변 호 토광묘 출토 청자사이호
한강유역에 분포한 백제 초기의 적석총들은 이러한 기록 부합되는 고고학적 자료의 하나이며, 이는오히려 기록울보충해 준다.
2) 토광묘(움무덤)봉토분은 적석총과 함께 한성시대의 백제문화를 반영하는 중요한 묘제의 하나이다. 적석총이 시신을 안치한 후에 돌을 쌓음으로써 봉분을 만드는 데 반해 봉토분은 흙을 덮음으로써 봉분을 이루는 매장양식이다. 이 봉토분은 다시 매장 주체부의 시설에 따라 토광묘계와 석실계로 나누어질 수 있으며, 백제 초기의 봉토분의 입지를 보면 토광묘는 평지에 위치하는 데 반해 석실분들은 얕은 구릉성에 위치한다.이중에서도 토광묘는 지하에 구덩이를 파고 본관을 매장하고 때로는 壅을 곁들여 묻은 것인데 이는 적석총보다 앞선 이 지역 본래의 묘제이다. 29)이러한 성격을 지닌 토광묘의 분포와 그 구조적인 특징들을 살펴보는 것 은 당시 한강유역 문화의 파악에, 적석총에 관한 연구에 함께 커다란 기여 를 할 것이라 기대된다.고구려계의 유이민집단의 묘제로 알려진 적석총이 웅진천도 이후에는 그 자취를 감춘 데 반하여 토광묘는 계속 이용되었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조사에서 밝혀진바있다.서울 강동구 석촌동, 가락동 지구와 청주시 新尉同 고분군은 백제지역에서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대표적인 토광묘유적이다.지금까지 서울 강동구 석촌동, 가락동 일대에서 확인조사된 토광묘로는 석촌동 호분,30) 6, 731)호분, 파괴분32)과 가락동 1, 호분33)이 있다. 그리고 최근 석촌동 호분 동쪽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8개의 목관을 가전 대형 토광묘과 玉石封土壇을 포함해 l3기의 토광묘가 확인조사되었으며, 34) 또 석촌동 호분과 호분 주변에 대한 871d의 발굴조사에서도 기의 토광묘가 조사되었다• 35)그런데 이들은 모두 반경 km 이내의 좁은 沖積 밀집되어 백재의 건국세력과 토착세력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가되고있다.
청주시 신봉동에는 낮은 야산의 구릉일대에 笠穴式 석실분, 橫穴式 석실분, 토광묘로 구성된 수천 기에 달하는 고분군이 위치하고 있다. 이 유적은 지난 1982년과 1990년 차에 걸쳐 발굴조사되어 토광묘 105기, 파괴석실분 기, 독무덤 기 등 많은 유구가 확인된 바 있다. 36) 이 백제 고분에서는 처음으로 갑옷과 화살통장식편이 출토되었으며, 마구류와 환두대도를 비롯한 각종 철제무기류가 다량으로 수습되어 학계의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이의에도 부여군 新里의 製 영입군 M里, 공주군 長岐面 柚木亂城, 牛城面 銅大里, 南山里, 보녕군 倉巖里 등지에서 토광묘가 발굴조사 혹은 확인된 바 있다.백제의 것으로 보이는 공주, 부여지방과 서울 근교의 석실 • 봉토분들이 대개 구릉상에 위치하는 데 반해 가락동 1, 호분은 평지에 위치한다.가락동 호분의 크기는 長邊 14m, 높이 1. 89m이며 목관이 안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묘광의 크기는 1. 23X0.4 8m이다. 이 호분은 지표면을 얕게 파 토광을 만든 후에 목관을 안치한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다. 호분은 기저부가 12X15m, 높이 2.2 기 크기로 되어 있으며 장축 방향은 동북-남서이다. 이는 호분과는 달리 하나의 봉분· 내에 기의 토광묘와 기의 옹관묘가 합장된 특이한 형식이다.청주시 신봉동의 토광묘들은 표고 103m의 야산 동, 남, 북 사면에 매우 밀집되어 분포하며, 비교적 낮은 지대에 위치한 토광묘에서는 卵形土器類가 출토되며, 높은 지대에서는 마구와 무기류가 출토된다. 이 고분군의 토광묘들은 대개 산의 경사면을 가로질러 장방형의 묘광을 수직으로 파낸 구조로 되어 있는대, 묘광의 크기는 대개 장변 2.3~3.7m, 폭 0.8~ 1.8m 정도 이며 노쇠한석비례층을파들어감으로써 만들어져 있으며 남동-북서, 동서 -남북을 정축으로 한다.석촌동 호분은 남북방향을 칭축으로 하는 타원형의 頃丘로 이루어졌으며, 묘광 위에 덮은 접토와 봉토의 유실을 막기 위하여 耳石 시설을 했다. 이 고분도 가락동 갭분처럼 이상의 小壤丘률 커다란 하나의 봉토로 씌운 구조로 되어 있으며, 신라의 고분처럼 봉분의 의연에 호석과 유사한 시설을했다.
석촌동 파괴분도 한 봉토 내에 여러 개의 매장주체를 가진 것으로 집단묘의 성격을 띤다. 이 고분은 평지 위에 약간 높은 접토대지를 조성하고 그 위에 기의 토광묘와 기의 옹관묘를 설치한 후, 각각에 小封土를 씌우고, 그 위에 다시 커다란 봉토를 씌운 남북 직경이 38m에 달하는 거대한 봉분 다.호분 동쪽에서 조사된 石封 沿은 파괴가 심하여 정확한 고분의 성격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 고분의 구조는 일정한 묘역 내에 여러 개의 매칭 를 설치하고 각각의 소분구를 씌운 후, 그 위에 주먹만한 川石이나 割石을 1 겹 깔고 나서 거대한 봉토를 덮어씌움으로써 묘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부분을 근거로 전체규모를 추정해 본다면, 직경 4.2m, 전체 봉토 직경 6.6m, 높이 2.2m 이상이 될 것이다.대형토광묘는 앞에서 언급한 다른 多葬 와는 그 성격이 다른 집단묘이다. 이 고분은 길이 10m, 폭 2.6~3.2m, 높이 0.8~ 커다란 토광을 납북방향으로 설치하고, 그 안에 기의 목관을 안치한 다음 각 목관의 사이는 펄흙이나 논흙과 갇이 접토질이 강한 흙으로 채우고, 전체 토광 위를 흙으로 덮고 다시 1~2경의 할석을 덮어 묘역을 이룬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다. 각 목관의 크기는 길이 1.8~3m, 폭 0.6m 내의이다.이의에 호분 동쪽 주변에서 조사된 11기의 토광묘들은 길이 2.2~2.6m, 폭 0.7~1.Om, 높이 0.2m 내의의 크기의 것들이며, 대개 서남 동북향을 장축 방향으로 하며, 몇몇의 경우에선 옹관이 되기도 했다.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갇이 토광묘들은 그 매장양식에 있어서 단일묘와 집단묘로대분된다.단일묘는 토광을 파고 그 안에 시신을 直葬하거나 목관에 넣어 안치하고 분구를 씌운 간단한 형식이며, 광이나 목관의 한쪽 끝에 甄査나 의 토 기나 刀子, 劍과 감은 유물이 부장되는 것이 보통이다. 호분 동쪽에서 조 사된 11기의 토광묘들이 이러한 유형이며, 청주 신봉동을 비릇하여 공주,논산, 부여 등지의 토광묘들도 이에 해당된다.
집단묘는 각각의 광에 시신을 넣은 목관을 안치하고 제각기에 소분구를 씌운 후 다시 그 위에 석회를 섞은 접토나 줍석을 덮어 거대한 봉분을 이루어 전체적으로 〈一封土下 多葬頃〉의 형태를 이룬다. 석촌동 호분, 파양분, 호분 동쪽의 즙석봉토분, 가락동 호분 등이 이러한 집단묘에 해당된다. 호분 동쪽에서 조사된 대형토광묘는 한 봉토 내에 여럿의 매장 주체가 있다는 접에서 이들과 유사하지만, 개별적인 坡을 마련하는 대신에 길이 lOm, 폭 2.6~3 2m의 커다란 광 내에 여러 기의 목관이 안치되었다는 접에서는이들과다르다.또 다른 유형으로는 토광묘에 옹관이 階葬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토광묘의 좌우 혹은 어느 한 지접에 옹관이 배장되는 것인데, 이에 사용된 옹관은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던 것이다. 석촌동 파괴분, 호분 동쪽의 고분군에서 나타나는 토광묘들과 가락동 호분이 이에 해당된다.백제 초기의 토광묘들의 입지상태를 보면 낮은 산의 경사면이나 평지가 대부분인데 양자는 모두 그 배후에 광활한 농경지를 가지고 있다• 아직까지 부여 • 공주천도 이후에 조성된 토광묘에 대한 조사가 부족한 상태라 지배층의 묘제가 석실분으로 대치된 이후의 토광묘의 입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입지의 선택은 자연지리적인 사회풍속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여진다.토광묘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부여, 공주 등지에서 지배층의 분묘로 사용되었다고 믿어지는 석실분이나 遠築增세서 출토되는 유물들에 비해 그 양과질에 있어서 뒤떨어지지만, 대체로 유물부칭의 원칙은 지켜진 것으로 보여진다.부장품의 대부분은 토기류와 철기류이지만 이따금 금동제품이나 청동제품도 출토된다. 유물들은 용도별로 살펴보면, 鐵凱 鐵刀子, 鐵祥 鐵鐵갇 무기류와 鐵쁨(밀재갈), 籠子(발걸이), 紋具(띠고리) 등의 마구류, 그리고 鐵角 鐵壓 토기류와 같은 생활용구와 鐵虹 꺾쇠와 같은 목관 부속품 등으로 나누어진다.가장 많이 출토되는 것은 역시 토기류인데 회청색, 회색의 軟質 내헌했 가주류를 이룬다. 토기의 조합상을 보면 호와 호끼리의 조합이 많으며 , 가끔 호와 鉢이나 益등이 결합되어 출토되기도 하다. 이외에 平底廣口登, 廣眉登,蓋杯등도 가끔 출토된 바 있으며, 5 세기 후반, 웅진천도 후에는 장경호,台付盛抱杯삼족토기병 등이 부장된 예도 있다.
철기는 도자, 검 , 鐵鎌등의 무기류와 뽑 證子, 紋子등의 마구류가 주종을 이루며, 마구류는 청주 신봉동의 토광묘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어 그 被葬者신분을 추측하게 해준다. 그리고 무기류는 유물의 성격상 피장자의허리부분에서 많이 출토된다.토광묘의 어깨선 의곽에서 유물이 출토되는 경우도 있는데 석촌동 3호분 동쪽의 8호 토광묘 외곽에서 동진시대의 靑班四昞笠} 발과 함께 출토37)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석촌동, 가락동 일대의 토광묘들은 그 축조양식, 유물의 배치, 출토유물의 성격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때 그 맥이 통하는 백제 초기의 先住民集團, 죽 토착세력의 가족묘 내지는 친족집단의 집단묘 또는 개인묘로- 비정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토광묘의 피장자들은 주변의 적석총의 피장지들보다 하위이나 옹관묘나 소형석실분으로 대변되는 평민층보다는 상위인 지배계층이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38)가락동 2호분과 석촌동의 집단묘들은 청주 신봉동 고분들과 같은 일반적인 형식의 토광묘들과는 조금 다른 형식을 보인다. 죽 이들 고분들은 분구가 방대형을 이루며, 다칭이 행해질 뿐 아니라 목관의 直葬기 행해지고 매장주체가 지상에 위치한다. 39) 이는 토광묘의 기본적인 틀을 유지하면서 시공의 변화에 따라 변형된 것이라 하겠다•한편 청주 신봉동 고분의 피장자들은 토광묘에서 철제 단감이 등장하고,마구류와 무기류가 집중적으로. 출토된 것으로 보아, 전무몰 수행하던 전무 단원이었던 남성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봉동 고분군에서 나온 토기들은 서울의 석촌동과 강원도 원성군 법천리 40) 등지에서 출토되는 토기 들과 일맥상통하는 면을 보인다.이러한 토기의 양상과 여러 제반사항을 근거로 報告者는 이 신봉동 고분군의 연대를 백제가 웅전천도를 하기 이전의 서기 4~5세기로 비정한 바도있다. 41)
사진 1 청주 신봉동 출토 鳥足文이 있는 토기 (조족문은 나주 반남군 덕산리 3.4호 신촌리 6호에서 출토한 바 있어 백재 초기 목지국의 이동과 관계가 있다.)
사진 2 청주 신봉동 백제 토광묘 발굴
그러므로 지금까지 살펴본 서울 석촌동의 토광묘들과 가락동 1 • 2호분 그리고 청주 신봉동의 토광묘(사진 1, 2) 는 앞에서 언급한 적석총과 함께 한성시대의 백제문호 반영하는 중요한 분묘 유적들이라 하겠다. 특히 신봉동의 발견은 충남 진천군 山水里, 三龍里의 백제 초기 가마와 함께 백제 초기의 영역을 밝혀주는 데 주요한 자료가 된다. 백제가 문주왕 75년 한성에서 공주로 천도하기 전까지의 한성시대의 백제 영역은 현재까지 고고학적자료에 의하면 북으로 예성강, 서로 인천, 남으로 청주와 공주 그리고 서쪽으로 전천까지 포함됨을 알 수 있다.
3) 기타 분묘유적적석총과 토광묘 의에 한강유역에 위치한 백제 초기의 고분으로 석실분과 석곽묘가있다.웅전천도 후의 석실분은 대개 산, 구릉의 중턱이나 정성부에 위치한 데 반해 초기의 고분들은 평지나 낮은 구릉상에 입지한다• ◄2)이들 석실분의 골격은 대개 고구려의 석실분을 따르며, 석실의 형태는 석실의 평면이 방형이고 疾進가 동벽 가까이에 위치한 〈기〉자형과 장방형의 석실의 남벽 중앙에 연도가 달린 〈모〉자형의 두 가지가 있다. 43)여주 梅龍里석실분은 해방 전에 조사된 바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데 제 2호분에서는 신라적인 색채가 강한 太環式金銅耳飾기 출토되었을 뿐아니라, 이 고분들은 複葬塞기면서 고구려식의 부부 합장묘가 아닌, 영남지방의 가족묘 전통과 부합되는 2인 이상의 가족묘라는 접 등에서 고구려 고분에 신라 고분을 가미한 듯한 특수한 형식의 고분이며 그 축조시기도 백제초가 아닌 서기 6~7세기 정도로 비정된다.44)방이동에서도 여러 기의 석실고분이 조사◄5)된 바 있는데 이들 고분군도 한성시대의 백제고분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하겠다. 46)이의에도 강원도 춘성군 芳洞里, . 新梅里, 경기도 여주군 甫通里48) 등지에서 석실고분의 조사가 있었으나, 이들 고분들이 고구려의 것인지, 백제의 것인지는 불확실한 실정이다.강원도 원성군 法泉里49)에서 조사된 2호 석곽묘에서는 서울 가락동 2호분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黑包料肝土器와 중국의 束晋荊滋가 출토되었는데, 이 고분의 연대는 이러한 유물을 동해 볼 때 4세기경이라 하겠다. 그리고 *경기도 화성군 白谷里에서도 서기 3~ 心1] 기에 해당되는 석실분과 앞서 언급한 청루 심봉동에서 이보다 시대가 약간 떨어지는 백제 석실분이 조사된 바 있다. 50)
2-2 요지熙址는 당시 사회의 토기발전과정의 파악뿐만 아니라 제반 기술수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이다.백제시대의 토기요지 (사진 3, 도면 6) 가 확인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
사진 3 진천 상룡리 도요지 발굴
.,<1 <걱
도면 6 산수리 87-8호 요지 실측도(崔秉鉉, 「진천 산수리 백재토기 요지군」,《백제토기와 요지》, 1991. 9, 제 6회 한국상고사학회 십포지업, p. 39와p .4 여서 인용)
근의 일로 지난 1983년 전주시립박물관에 의해 고창 운곡리에서 서기 6세기대로 추정되는 백제 요지가 조사된 바 있었다. 이후 익산 신통리, 전천
삼룡리, 산수리, 승주 대곡리, 영암 구림리, 해남 군곡리 등지에서 토기요지가 계속해서 조사되었으나51) 아직까지 백제토기의 계보를 밝히고 당시의 기술수준 파악하기에는 그 자료가 부족한 실정이다.
이중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한성시대 백제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 유적은 충북 전천의 삼룡리, 산수리 요지이다. 진천지역의 요지들은 지난 1986년부터 연처적으로 발굴조사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모두 19기의 토기요지와 그와 연관된 6기의 수혈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아직까지 정식 종합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지만 발굴자의 의견에 따르면 진천에서 조사된 요지들은 무문토기에서 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백제토기로 이어지는 발전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일부에서 3세기 후반 이후에 생산되었다고 하는 회청색경질토기가 이미 서력기원을 전후로 하는 시기부터 의부로부터의 기술유입 없이 자체적으로 생산되었다는 새로운 주장이 대두되기도 하였다.2-3 성지1) 몽촌토성 (사적 297호, 사진 4-1, 2, 3)백제의 한성시대에 있어서 정치 • 문화 •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도성지의 하나로 비정되는 夢村土城은 과거 日人들에 의해 조사되어 二里 로 명명된52) 후 얼마 전까지 아무런 조사 없이 방치되어 왔다.이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된 것은 서울시와 문화재관리국이 몽촌토성 일대를 유적공원으로` 정화 • 복원하기로 결정하면서부터이다.이러한 계획에 따라 이 유척은 1983년 이후 계속 연차적으로 발굴조사되어지고있다.1983년에는 이 유적의 보존을 위한 기초작업으로 城의 규모와 외곽시설의 파악을 위한 부분발공기 행해졌으며, 1984년에는 토성의 축조방법, 내부시설물의 확인 등과 갇은 보다 구체적인 발굴조사가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4개 대학으로 구성된 몽촌토성 발굴조사단에 의해 이루어전 바 있다. 53) 그리고
사진 4기 직구 단경 구형호(몽촌유형)
사진 4-2 서진 전문도기편 및 중국 청자
사진 4-3 동형기대 (원동형토기 )
1985년에는 토성 내에 형성되었던 취락시설이 철거되면서 성 내부에 대한발굴 및 유적공원 조성에 따른 내부시설물 공사에 필요한 기초 자료조사를 위한 6개월간에 걸친 대규모의 발굴조사" 있었으며, 1987년에도 성의 역사적인 성격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전면발굴조사의 일환으로 토성의 동북지구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진 바 있다. 55
지금까지의 발굴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몽촌토성은 기본적으로 남한산에서 뻗어 내려온 표고 8m의 비교적 낮은 야산을 중십으로. 하는 자연구룡을 방벽으로 하고, 구롱기 낮거나 끊긴 부분에는 판축공법을 이용하여 벽을쌓은성이다.성의 크기는 남북최장 730m, 동서최장 540m, 동서평균 4oom로 전체적으로는 마름모꼴을 하고 있다. 성벽의 길이는 정상부를- 기준으로- 서북벽 617m, 동북벽 650m, 서남벽 418m, 동남벽 600m로 총2285m에 달하며 따로 동북벽에서 성의 동북쪽으로 270m 정도 뻗은 의성이 있다. 총면적은 정상부를 기준으로 하면 약 6만7천 평이나 성의 의벽 하단을 기준으로 하면 약 9만3천 평에 달하여 토성 내의 지형적인 요인을 고려해도 대략 8천 ~1 만 명 정도의 인구수용능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전체적인 성의 형태는 자연구릉을 최대한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굴곡이 심한 타원형이다.성의벽에는 구릉의 경사 및 단을 만들고 부분적으로 목책시설의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성의 주위에는 경주 月城과 갇이 核字로 둘러싸이도록 하고 성문은 동 • 남 • 북의 세 곳에 만들었다. 그런데 성 내부의 도로망과 의부와의 연결을 고려할 때 에 해당하는 문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토성의 위치와 지형적인 면을 종합해 보면 삼성동 토성과 0. 75km, 이성산성과는 4. 8km씩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중앙적인 입지를 가지며, 비교적 낮은 구릉상에 있으면서도 한강 일대를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는다. 죽 토성으로부터 북으로는 암사동을· 지나 강변의 토막리까지 서로는 잠실을 지나 삼성동까지 조명할 수 있는 지접이라는 접 등을 고려할 때이 지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문헌기록에 의하면 河南慰視城은 기원전 5년에서 近肖古王26년인 371년까지 376년간 백제의 도읍이었다. 그런데 몽촌토성의 지정학적 위치와 수차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여러 유구 • 유물 등을 통해 볼 때 몽촌토성이 곧 하남위례성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이 유적에서는西晋時代(265~316) 의 灰柚疑차齡롭芹기 출토되었는데, 이는 도자기라는 유물이 그 유통연대가 비교적 짧은 것을 고려할 때 이 유적이 늦어도 3세기 후반경에는 이미 축조되었음을 시사해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리고 최근 廣口長類逢圓簡形三足꼽를 비롯한 고구려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어 文周王의 공주천도 이후에도 이 성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사전5, 6). 그리고 성내의 백제문화층은 방사성연대 측정결과도 서기 240土60년
사진 5 고구려토기 : 광구 장경 사이옹
사진 6 고구려토기 : 원동형 삼족기
과 370 士70년으로 나타나 토성의 존속연대와 부합된다.
한편 성 내부에는 조사된 분묘들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이 유물의 하한을 정해 준다. 즉 1호 토광묘에서 나온 회청색의 高杯와 刻線, 기 시문된 장경호편은 5세기로 보이며, 2호 토광묘에서 출토된 삼족토기와 台附査등은 공주나 부여 등지의 유물 등과 동하므로 5세기 후반경으로 보여진다.그 의에도 일본의 고대토기인 植輪(하니와)의 祖型으로 보이는 원통형 토기와 지하저장혈, 수혈주거지, 토광묘, 옹관묘, 적석총 등도 조사되어 몽촌토성이 백제의 두번째 도읍인 하남위례성으로 비정되는 데 충분한 근거가 되고있다.그러나 지금까지 수차의 발굴이 있었지만 유적 전체의 면적을 생각할 때 조사지역은 국히 한정된 것이기 때문에 몽촌토성이 지닌 역사적인 의의를 규명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앞으로 예정된 유적의 전면조사가 차차 이루어지면 몽촌토성 자체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규명되지 못한 초기 백제사의 중요한 자료가 쏟아져 나울 것으로기대된다.2) 이성산성(광주군 향토유적 제 1 호, 사전 8)二聖山城은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 일대에 위치한 표고 209. 8m의 이성산 정성부에 돌로 쌓은 산성이다.이 성에서는 한강유역에 위치한 여러 성곽들이 한눈에 둘어오며, 성이 위치한 서부면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확보되었을 뿐 아니라, 성내에서 많은 삼국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는 등 여러 면에서 학계의 관십이 되어왔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이러한 제반 사항과 근초고왕 26년(서기 371년)의 기록56)에서 보이는 야店陽陣〉이라는 내용은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한 일시적인 천도라는 해석에 근거하여, 이성산성이 백제가 서기 371년에서 春宮里. 일대로 도읍을 옮기는 서기 391년까지 도읍으로 사용했던 지역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57)그러나 초기 백제사에서 이성산성이 이처럼 중요한 유적입에도 불구하고이 지역이 정식으로- 조사되기 시작하는 것은 최근에 와서의 일이다.그 동안 방치되었던 이성산성이 정식으로 조사된 것은 지난 1985 년에 한양대학교 박물관이 경기도의 지원하에 실시한 경기도 面齊文化迫蹟地表調査SB)에서이다•
이와 같은 조사를 동하여 이 유적의 중요성이 보다 인식되어, 이성산성에 대한 연차 발굴계획이 세워졌다.1986년에 실시된 1 차 발굴조사에서는 성벽과 저수지를 비롯하여 대형 건물지, 信仰面 저장혈, 석곽묘 등의 여러 유 가 확안된 바59) 있으며, 저수지의 규모확인, 성벽의 구조파악, C 지구의 건물지 노출, 그리고 고 으로 여겨지는 D 지구에 대한 전면발굴 등을 목적으로. 하는 2 차 발굴이 진행되었다(사진 7-1, 2, 3) . 지금까지의 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산성의 총둘레는 1925m 에 달하며 그 높이는 6~7m 정도이고, 그 의형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축조되었기 때문에 부정형의 사각형에 가깝다. 성 내부의 면적은 약 47,200평 정도이다.
사진 7-1 석촌동근처의 발굴
사진 7-2 석촌동 고분군의 발굴
뚫활. 꽤||
사진 7-3 몽촌토성의 발굴
성벽은 바깥쪽에는 큰 돌을 쌓고 그 사이사이에는 잡석과 흙을 채웠으며, 그 안쪽에는 약 긱 폭으로 판축을 하고 윗부분에는 3단의 석축을 쌓는 방식으로 축조되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성벽의 안쪽에 토사의 압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竹중의 석렬을보강한예도 확인된 바 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토기류와 기와류가 대부분이고, 석기류가 약간 있는 정도이다. 석기류에는 마제석촉, 석부, 방추차 외에 당시 병사 둘의 개인 휴대품으로서 창이나 화살촉 등을 가는 데 사용한 것으로 생각되는 크기 5cm 정도의 숫돌이 여러 접 출토되었다.다양한 토기편도 출토되는데, 백제계동의 연질토기와 고구려의 성격을 띠는 토기를 비롯히여 印花紋土器片이 많이 출토되었다. 가장 많이 출토되는유물은 기와인데, 문양은 격자문이 가장 많으며 크기는 40~45cm 정도이다. 이 산성의 축조년도를 확실하게 제시할 만한 유물의 출토는 아직 없지만, 토기와 기와편 등을 동해 볼 때, 이 유적은 한성시대 후기에 축조되어 고구려, 신라로 이어지면서 개축되어 사용되다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 그
사진 8 이성산성의발굴
EjN
( ·영 -α 싸영 -뀔일빨행· 廠빼κ*)-힘*떼-향버 싸 칭F 용-。F 훤버
효용가치가 감소되면서 폐기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추정은 建物址를 따라 무더기로 발견되는 다양한 종류의 기와들과도 부합된다.
이성산성에 대한 조사(사진 8, 도면 7) 도 몽촌토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직까지 전체 유적의 크기에 비해서 매우 한정된 부분에 지나지 않는 실정이므로 앞으로 보다 넓은 지역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유적 전체의 성격을 성급히 규정짓기는 어려운 실정이다.3) 춘궁리 일대경기도 광주군 春宮里일대는 한성시대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인 한성으로 비정되어지고 있다.해방전 이 지역을 조사한 바 있는 日人今西龍은, 이 지역은 넓고 비옥한 평야지대이며 동쪽에는 l 위치하고 남쪽에는 한강에 면하여 남한산이 있으며, 북으로는 한강이 있고 서로는 二聖 있어 빙어에 유리한 요지라고 보고한 바 있다. 61)이 지역의 원지명은 〈고골[古邑)〉이라 전하는데, 이는 〈고구려골〉이라는 의미라 하며, 부근에는 大圓宇 철이 있는데, 그 절터에는 고려 초기의 석탑 2기(보물 12호춘꿍키 영석탑과보물 13호춘궁리 玲석탑)가 있으며, 절부근의 넓은 평지에는 많은 토기편들이 널려져 있다. 62)백제가 도읍을 다시 지금의 춘궁리 일대로 비정되는 한성으로 옮겼다는 것은 辰斯王7년, 죽 서기 391년의 기록 63)에 근거하는데 이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전의 도읍이었던 한산, 죽 이성산성이 지형적인 조건으로. 일시적인 수비에는 유리하나 장기간에 걸친 일국의 도성으로는 부적합했기 때문으로생각할수있겠다.그러나 지금까지 이 지역에서는 회색연질토기편과 회청색경질토기, 그리고 기와편들이 지표상에서 채집되었을 뿐 실제적인 발굴조사는 없었기 때문에 이 지역이 한성시대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었다는 가설을 증명할 만한 고고학적인 증거는 없었다.앞으로 이 일대에 대한 정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앞에서 언급한 몽촌토성과 이성산성에 대한 연구가 종합된다면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초기백제사에 관한 많은 의문이 풀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4) 풍납동 토성 (사적 11 호)서울 특별시 강동구 風柄除1] 위치하고 있는 백제 초기의 성곽유적은 1965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64)되어 그 성격이 어느 정도 밝혀진 바 있으며, 일찍이 1925년의 대홍수 때는 靑銅誰斗가 발견된 바도 있다.발굴 당시 성의 동벽 1500m, 남벽 200m, 북벽 300m, 서북벽 250m 등 모두 2250m 정도 남아 있었으며, 남북 2km, 동서 1km, 총둘레 4km 정도의 규모이다.이 토성이 백제 초기의 城拍밖즌 데는 이론이 없으나 어느 성인가 하는데는 여러 학자들의 주장이 다르다.죽 李丙熙박사는 풍납리라는 지명이 〈바람드리〉의 漢譯기며, 이는 〈배암드리 (蛇城)〉의 轉俗斗고 주칭하며 이 토성을 삼국사기의 기록65)에서 보이는 蛇城으로 비정한 바 있다. 66) 그리고 이 유적을 직접 발굴한 金元龍교수는 이 의견에 동의하면서 발굴시 출토된 유물을 동해 불 때 이 풍납동 토성은 방어용의 성이긴 하지만 평시에는 일반민들도 많이 거주했던 반군반민적인 옵성 67)이었다고 주장했다.한편 일인 點見房之假본 풍납동 토성을 위례성으로 보았으며, 또 풍납동 토성을 坪古城으로 보고, 蛇城은 현재의 船里부근으로 비정하는 견해 68)도 있다. 그런데 풍납동 토성이 위치한 일대는 지대가 너무 낮고, 또 깅에 인접하여 도성으로서는 부적당한 위치이므로 이 풍납동 토성을 위례성으로 보는견해는문제가있다.이 토성에서는 청동기시대 후기의 無文土 비롯하여 租質有文土랴 金海式印文勘와 新羅式土 , 黑隣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토기편과 다른 유물둘의 공반관계를 살펴볼 때, 이 유적은 서기 녀l기경에 축조되어 웅진천도 이전까지 사용된 방어용 성이면서도 일반인도 많이 거주했던 반군반민의 읍성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5) 기타 성지최근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중원군 신니면 見訪里에서 백제의 판축토성(사진 9)69)과 경회대학교 고고미술사연구소 주관으로 발굴한 경기도 파주군
사진 9 충북 중원군 신니면 견학리 백제토성
사진 10 관미성 (오두산성) 발굴
開驛戱同里에서 백제의 중요한 북방의 요새인 關腦成(緊頭山城)이 확인된 바 있다 (사전 10) . 그리고 1984년 양천구 신정동 야산에서도 향토사학자인 韓宗燮씨에 의해 백제 초기의 토성인 新機城라(《전교학신문》, 1991년 11월 6일자 19면) 하남시 교산동 검단산 산정에서 하남 위례성터가 확인되었다고 하나 아칙 발굴과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70)
3 맺음말지금까지 한성시대 백제의 유적들을 크게 분묘유적과 성곽유적으로 나누어 살펴보면서, 또 이러한 유적들에서 나타난 고고학적 자료들을 『삼국사기』의 기록과 비교해 보면서 백제의 영역과 그 도읍지의 변천을 나름대로 추론해보았다.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삼국시대 초기의 문헌기록도 매우 빈약하고 지금까지 이 시기에 해당되는 고고학적 유적들에 대한 조사도 미비할 뿐만 아니라 그나마 조사도 매우 부분적인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전체적인 백제사의 연구는 매우 미비한 실정이다.앞으로 보다 많은 유적들이 조사되어져 고고학적인 자료가 풍부해지고 그것들이 역사적인 자료와 상호 보완되어지면 베일에 싸여 있는 초기 백제사의 여러 문제접둘이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71)附이 글은 198~싸 써놓았던 것으로, 글이 만들어지고 난 후 5년이 지나는 동안 많은 자료가 새로이 나왔다. 그러나 몇 가지 문장이나 사진을 추가하는 데 그쳤을 뿐 대폭적인 수정을 가하지 못하였다. 필자 스스로 생각해도 소략한 정이 눈에 띄지만 시간의 재약상 그대로 인쇄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최몽룡 • 심정보 편저의 『백제사의 이해』 (학연문화사, 1991)가 최근 출간되어 소략한 정은 이책에서 다소 보완될 것이다. 독자의 양해를 구한다.주
1) 〈馬緯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固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薛種人焉〉(더友漢』, 「緯傳」, 馬韓條).2) 馮韓王苑或設上日商紅前辱我使今當其朗L之其國不足平也上日幸人之災不仁也不從乃遺使몹慰〉 (『三國史記,, 「新羅本紀」, 始祖赫居世居西干三十九年條) .3) 崔夢龍, 「考古學的側面에서 본 .馬韓」, 『馬薛• 百濟文化』第九輯, 圓光大學校馬緯·百濟文化硏究ifr, 1986.9. 15.4) 崔·橫五榮, 「考古學的資料믈 通해 본 百濟初期의 領域考察」, r 千寬宇先生還·歷紀念韓園史學論穀』, 正音文化社, 1985, pp. 83-119, 崔, 「漢城試百濟의 都邑地와 領域」, 〈쌓羽情넥i》 60, 1985, pp. 97-101,맹땀土城과 河南慰視城」, 〈酒濟硏究》1~, 1988, pp. 5-12,崔·沈正輔編꿈, T荊濟史의 理解』, 學硏文化史, 1991,') 文化財管理局文化財硏究所, 『武亭王陵文化財管理局古蹟湖査報告』, 1973,6) 蠶室地區遺蹟址發撮調査團, r 蠶室地區遺蹟址發堀調査報告」, 1974, 1975, 1976,7) 崔•槿五榮, 주 4) 앞의 책.8) 璋, 딸國葬盟記幻 第크, 一志社, 1986, p. 177,9) 金元龍주 8) 앞의 책, p. 184,10) 金元龍, 며國의 古壤」, 『교양국사총서 2』,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1974, p. 52,11) 韓炳三, 「矢島貝塚J, r 國立博物館古跋開査報告』, 第八冊, 國立博物館, 1970,pp. 45-46,12) 金載元• 尹驛, 며莊配女_七소墓硏究」, 멤泣博物館 古蹟競稽南견;』 第6JHt, 固立博物館, 1967, pp. 79-98.13) 이 유척들은 북한에서 나온 『고고학자료집』 3 집 (1963) 과 『조선고고연구』 1호(1990) 에 실려 있으며, 최근 『복한문화유적 발굴개보』, 『북한문화재 조사서』 3 책,문화재연구소, 1992 자강도편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14) 裵顯, 「堤原島坪里A也區遺蹟(第-*)」, r82 忠州댐水沒地區 文化遺蹟發撮祠査』, 1982, pp. 39-90 및 r堤原島坪里샤也區 遺蹟發撮略報告J, 『83, 忠州댐水沒地區 文化遺蹟發撮報告術, 1983, pp. 299-314.15) 朴m, r堤原桃花믿也區 遺蹟發撮詞査報告」, 『83, 忠州댐水沒地區文化遺蹟發撮調査墨報告官』, 1983, pp . 315-328,16) 忠1 巳博物館, 「忠州댐水沒地區 文化財地表調査報告홉」, 1982. 9. 30,17) 趙東, 潭川地方의 先史社會考察』' 명 1I敎大論文集 4』, 1968, pp. 35-36,18) 朴M· 崔福圭, 야獻祐塚配麟懿禪」, 『中島發撮讚査報告書』, 1982, pp.20-82.19) 黃龍潭, rMIIS 1§*'m 蹟配翻浩」, 『 水沒地區 遺蹟發撮綜섬』, 1974, pp. 333-377.20) 서울대학교 博物館• 同考古學科, 야;村洞積石塚 發堀調査報告」, 『서울大學敎 考古人類學范刑』에&. 1975 金U • 裵基同, 宅村洞3 號頂(積石塚) 發堀開査報告1J.t」, 서울대학교 박물관.1983.石村洞迫蹟發堀潤査團, 守i村洞3 就項(積石塚) 復元울 爲한 發掃課査뽑」, 서울대학교 博物館, 1984
21) 서울특별시 • 石村洞發堀詞査團, 며규刊同 古沼郡發堀朋査報告」, 1987, pp. 21-6122) 大正六年度「古蹟詞査報告」, 1917, p. 641 및 사진 244 참조.尹根一, 「公州宋山里古項發撮朋査槪報」, 〈改化財〉〉21, 1988, pp. 307-336, 그리고 1991 년 l 여 18 일 사에서 열린 무녕왕릉 발굴 2 02-년 심포지움에서 개로왕의허묘 또는 가묘로 주장되었다混曲典, 「宋山里方禮階段形무덤에 대하여」, 〈여;亭王陸의 硏究現況과 諸間題〉〉, 1991, p. 59).23) 정찬영, 「고구려 적석총에 관하여」, 《문화유산》 1961-1965, 1961, p, 39.24) 權五策, 며庫罪讀의 성장과정에 관한 -考察」, 법賤史論』 15輯, 1986, pp. 1-94 .25) 尹世英, 「高句麗古項」, 慣迪考古學地圓――韓固考古學報特輯I 』, 韓園考古學硏究會, 1984, pp. 32-33.26) 0여업하石於郁里河 作掃以葬父骨緣河樹遇自蛇城之東至崇山之北〉(『三國史記』,「百濟本紀」, 蓋菌王二十一年條) .27) 金元龍• 林永珍「石村洞3筑埃동쪽 古坦群整里詞査報告J, 『서울대학교 考古人類j』十三冊, 1986, pp. 20-21,28) 〈十三年八月遣使馬韓告遷都遂劃定退場北至沮河南限熊)II 西窮大海東極走壤〉(『三國史記』, 「百濟本紀」, 始祿溫祚王十三年條). 또 최근의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黃海道 黃州에서 百濟土器가 충현하고 있어 백제의 북쪽 경계선의 일면이밝혀진 셈이다(崔鍾澤, 「夢村出土百濟土例」, @輯出二古史ffi》4統, 1990, pp.329-340) , 그리고 百濟石城인 坡州의 關彌城, 鎭lIl 三龍里, 山水里의 百濟照址,淸州新鳳洞百濟古壇및 公州의 蓋貞王의 虛墓인 方壇階段形무덤의 발굴조사로백제의 영역에 대한 범위가 속속 밝혀지고 있다.29) 金元龍, 주 8) 앞의 책, p. 180.30) 蠶室地區-, 「蠶發」, 信輯E杓덮멈的 第4 輯1978, pp, 40-41.31) 朝鮮總輝, 「昭和二年度古壤祠査報告J, 1928.32) 一, 주 29), pp. 31 -4o.33) 尹世英, 「可樂洞百濟古壤第一號• 第二鼠發撮調査略報」, ¢射덮鼻》 第三輯, •1974, pp. 131-146.34) 金元龍• 林永珍, 주 26) , pp. 14-36,
35) 서울특별시 • 石村洞發堀訓査團, 주 20}, pp. 108-122.36) 휴勤 • 車勇杰「淸州新鳳洞百濟古坦群發堀調査報告합」, 百濟文化開發硏究院,1983, pp. 31-124,忠北大博物館, 「淸州新鳳洞百濟古項群發堀朋査報告왑」, 1990.37) 金元龍• 林永珍, 주 26) .38) 任孝幸「石村洞百濟初期古慣의 性格」, 《考古美術》第129 • 13 0Af,井, 1976, p.65.39) 姜, 「漢江流域의 土築墓」, 『三國時代項丘墓硏究』, 1984, pp. 11-40,40) 金元龍, 「原城郡法泉里石掃墓와 出土遺物」, 《考古美術〉〉第12 얘t, 1973, pp. 2-10.41) 쭤翻 • 車勇杰주 3 기 앞의 책, pp. 176-177.42) 姜仁求, 땅濟古壇硏究』, 一志社, 1977, p. 7,43) 金元龍주 8} 앞의 책, p. 180,44) 金元龍, 屯濟初期古慣에 대한 再考」, . 1974, pp. 1-18.45) 金秉撲, 영祐」, 《考古學》第4 輯, 1977, pp. 1-35.趙由典, 尉訂財갖堀報告」, 〈改:化財》第9lt, 1975, pp. 98-123.46) 金元龍주 43), 앞의 책, pp. 1-18.47) 金元龍「春城郡芳洞里의 高句麗式石室壇2基」, 《考古美術》149說1981, pp.1-5.48} 姜仁求, 따 甫通里의 石室古頃__妹角慕井式石室頃의 一例」, 『翰泊助博士亭年記念史學論霞』, 1981, pp. 35-50.49) 金元龍주 39), 앞의 책.50} 金元籠벼職郡 白谷里百濟古頃과 土꼽類」, ((白_ ” 究〉〉2, 1971, pp. 147-156.51) 崔夢龍• 崔秉鉉編, 댜南詞代처 熹址硏究」, 1988 및 대멉쿄上古史學會 제 6회 學術會發表要旨, 1991.,2) 朝鮮總督府, r大正예꿨 古積調査報告J, 1920, p. 595.53) 夢村土城發露調査團, 멤稽, • 復元을 위한 夢村土城發撮覇査報告, 1984.54) 夢村土城發撮讚m, 명村土城 發揮調査報告』, 1985.") 金元龍 任永珍, 명村土城東北地區 發攝報告』, 서울특별시, 서울대학교박물관, 1987.金·任 直, - 禪』 서울대학교 박물관1988.,6) 値麗擧莘五之伏兵於演吐侯至急擊之高句麗兵敗ft. ··-··(중략) 攻 夏力團뻔 王引軍退移都和 住項쳅따, 딴南体紀』,近肖古王二十六年條).
57) 槿夢龍, 「漢曲寺代百濟의 都邑地와 領域」, 〈성困[學報)) 6 예 , 1985, pp. 215-220.58) 金秉撲• tk光注• 許美埋, 「京畿道百濟文化遺蹟」(地表課査報告) , ;大學校博物•館穀함』 第漏, 1986, pp . 84-88. 59) 金秉撲• 沈光速「二聖山城」(發堀謂査中間報告魯) , 『漢陽大學校博物館穀魯』第5輯, 漢推大學校, 1987.60) 斜繼, 「二聖山城의 性格과 年代」, 〈悟濟初期文化의 考古學的再照明〉〉(第11 回韓固考古學全國大合發表要旨) , 薛國考古學硏究合, 1987, pp. 39-52.61) 今西龍大正五年度古蹟謂査報告, 朝鮮古蹟誤踏淸浩, 朝鮮總督府, 1916, pp. 70-75.62) 金犯莫• 沈光注• 許美煙, 「廣州春宮里宮址」, 京畿道百濟文化遺蹟『漢湘大學校博t 第堀』, 1986, pp. 89-9 1'.63) 修宮室 究池造山… ... 『三固史記』, 濟本紀」 辰斯王七年條).64) 金元龍, r屈納里包含層調査報告」, 『서울대학교 考古人類學穀뺨』 第三冊, 서울대학교 考古人類學科, 1965.65) 터魏 修阿旦城蛇城備之〉(『三國史紀』, 濟本紀』, 責稽王元年條) 및潟盡人惑土築城卽於其內作宮樓閣臺樹無不壯麗又取大石於郁里河作鄕以葬父骨緣可樹樞自蛇城之束至崇山至 〉(『三國史記』, 댜面나本紀」, 蓋貞王二十一年條).66) 李丙熹「廣風納里土城과 百濟時代의 蛇城」, 〈[學報〉〉 l , 1939, pp. 145-l53.67) 金元龍주 62) 앞의 책. pp. 8-9, 40-44.68) 方東仁, 「屋納里土城의 歷史地理的檢討」, 《白山學報》l (iM, 1974, p. 2.69) ,忠北大博物館, 『中原見鶴里土城調査報告』”冊, 1992.70) 韓宗燮, 『漢江西部와 百濟達國』(1989) 및 T范펌選別 河南慰禮城地의 究 에 대한 硏究』(1992),71) 최근 忠北鎭l1 三龍里에서도 기원 때l 기 전후로 한 百濟時代窟址가 발굴되고 있어 그 領域이 鎭Ill에까지 이름을 알 수 있다(崔秉鉉, 1l 三龍里土 蒸址』, 第12回韓國考古學全國大會發表要旨, 1988, pp. 127-134).필자소개
崔夢龍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미국 하버드대학 인류학과에서 고고학 전공으로 철학박사학위 취득현재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및 학과장한국상고사학회 회장저서 A Study of Yongsan River Valley Culture- The Rise of ChiefdomSociety and State in Ancient Korea (동성사, 1984}李鮮紋서울대학교 고고학과 졸업미국 아리조나대학교 인류학과에서 고고학 전공으로 철학박사학위 취득현재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부교수논문 "Lower and Middle of Northeast Asia Geoarchaeological Review"(학위논문, 1986)安承模서울대학교 고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런던대학 고고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 취득현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논문 "Origin and Differentiation of Domesticated Rice in Asia-Review of Archaeological and Botanical Evidence" (학위논문, 1993)朴淳發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현재 충남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전입강사논문 「한강유역 백제토기의 변천과 몽촌토성의 성격에 대한 일고찰 _몽촌토성 출토품을 중심으로』 (학위논문, 1988)
한강유역사대우학술총서·공동연구1판 1쇄 찍음---1993년 5월 30일1판 볘 펴냄 -1993년 6월 10일지은이__崔夢龍 • 李鮮腹• 安承樹朴·淳發펴낸이__朴孟浩펴낸곳~民昔社출판둥록 199 1. 12. 20 재 16-490호우편대체번호 010041-31-0523282은행지로번호 3007783서울 강남구 신사동 '06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515-2000~2 (영업부) 515-2003~' (편집부) 515-2007, 515-2101 (팩시밀리)값 6,500 원Printed in Seoul, Korea©攝"'外, 1993역사·韓國KDC911 , 002ISBN 89-37+-4518-2 94910ISBN 89-374-3000-2 (세트)
대우학술총서(공동연구 및 자료집) 아짧담 스미구스 연구 조순 외 7 인 조선후기 향약연구 微#사회사연구회 한국上古史 한국상고사학회 孤雲 崔致遠 심인종 외 5 인 한국 고대국가의 형성 한국고대사연구회 인지과학 조명한 외 11 인 한국 여성의 전통상 김열규 외 5 인 중국의 천하사상 윤내현 외 4 인 미국인의 생활과 실용주의 이보형 외 5 인 현대과학의 윤리 김용준 외 3 인 대한제국기의 토지제도 김흥식 외 4 인 뇌의 인공적 확장은 가능한가 박순달 외 3 인 인간이란 무엇인가 장회익 외 6 인 현대과학의 제문제 김용준 외 6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