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泳南 충북대 미생물학과 교수

崔흉龍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李澈 한양대 화학과 교수

姜炯읍 문화재 연구소 학예관

李盛周 청원대 박물관 연구원

趙벼典 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 연구실장

李松來 노스웨스트 크리스찬대학 교수

李 한림대 사학과 교수

尹德香 전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

盧泰敎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權五重 영남대 사학과 교수

金洙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

李鍾旭 서강대 사학과 교수

金泰植 울산대 사학과 교수

李基東 동국대 사학과 교수

宋基豪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李午熹 호암미술관 보존처리실장

李相洙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장

元 부산대 고고학과 교수

李榮文 전남대 박물관 학예 연구사

뿔盛洛 목포대 고고인류학과 교수

韓國上古史

韓國上古史

연구현황과 과제

韓國上古史學會

民音社

책 머리에

한국상고사학회는 지난 1987년 11월 14일 창립총회와 함께 출발하여, 작년 한해 동안 두 차례의 학솔발표회를 가진 바 있다. 제 I회가 1988년 2월 12- 13일에, 제2회는 갇은해 8월 16- 17일에 대우재단 세미나질에서 개최되었는데 공동주제는 「한국상고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였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고조선에서 발해에 르기까지 한국상고사에서 쟁점이 되어 온 문제들이 주로 논의되었다.

두 차례에 걸쳐 발표된 내용들을 책으로 묶었다. 그 내용은 주제와 성격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세 분야로 니누어진다.

I 연구방법론

2 고고학연구현황

3 상고사연구현황

아울러 각 주제에 따라 진행된 토론들도 함께 수록하였다.

여기에서 다루어진 내용들은 앞으로 상고사 연구의 방향올 제시할 수 있는 중요한 것들로 생각된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는 대우재단의 물심양면에 걸친 도움이 컸며, 특히 대 이사장이셨던 東洲李用願선생님과 現李奭願이사장님의 배려가 없었다면 이 학회의 성럽과 발전은 어려웠올 것임올 밝힌다.

이 두 분을 버롯히여 대우재단 판계자 여러붐 그리고 상고사학회 회훤 여러분들께 이 자리를 벌언 깊은 감사의 뭇올 천하는 바이다.

1989. 12.한국상고사학쩍창 뿔킬빼

韓國上古史---차례

책 머리에 -7

• 주제 발표

I 연구방법론

1 고고학 연구에 있어 자연과학의 활용 • 李泳南

2 古代遺物훌地의 究• 崔夢龍• 좋激• 姜炯台• 李盛周

3 역사고고학 연구의 제문제• 趙由典

4 흩史考古學맑究의 方向• 崔夢龍

5 국가의 정의와 고고학척 판단기준 • 좋松來

6 三韓연구의 방법론척 문제 • 李

고고학 연구현황

1 馬韓• 目支園R究의 諸問題• 崔훌龍

2 전북지방 原三國降代연구의 문제점 • 尹德

3 신라 짧石木柳樓연구의 제문제 • 趙由典

4 한국 고대 농업기술의 연구 현황과 과제 • 李賢

상고사 연구현황

1 고조선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敎

2 낙랑사회의 특성 •

3 고구려사 연구의 제문제 • 金t洙

4 백제 국가형성사 연구의 동향 • 旭’

5신라 골풍제 연구의 푼제 • 旭

6 加耶史연구의 제품제 •

7 4세기 椰日關係史연구의 문제점

8 발해사 연구의 운제첨 •

• 토론

1 金 退物의 보존에 대한 현상과 약간의 문제 • 李午熹‘ 87

2 保全 業의 提 • 相洙 96

3 初 鐵 代와 原三國時代• 鄭遺元 299

4 전남지방 馬隱小國比足地에 대한 고고학척언 검토 • 李榮文

5 전남지방의 原三國文化• 崔盛洛 321

6 남한지방 무문토기 전개에 대하여 • 李淸圭 325

7 고신라 적석목곽분 연구의 과제 • 崔秉鉉 329

8 농경의 기원에 관한 제문제 • 崔植

9 先史 親에 관한 몇 가지 견해 • 安承樓 346

10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대한 재검토 • 徐榮洙 349

11 낙랑의 고고학척 연구를 위한 몇 가지 제언·孫 358

12 고구려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 金基興 363

13 백제 국가형성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점 • 起錫 365

14 백제 王姓에 대하여 • 沈正輔 368

1’ 가야사 복원에 있어서 몇 가지 문제첨 • 趙榮짜 371

16 4세기 한일관계사 정렵의 과제 • 金豪植 74

17 고고자료를 이용한 가사 연구의 제문제 • 安春培 76

18 발해사 연구의 문제정 • 圭哲180

저자 약력

주제 발표

I 연구방법론

고고학 연구에 있어 자연과학의 활용

[李泳南】

고고학은 문자로 기록을 남기기 전 시대, 즉 선사시대의 사람들이 생활하면서 흔적으로 남긴 인공 또는 자연적 유물들을 학푼의 기본자료로 선태하여, 그런 혼척을 남긴 선사언들의 생활양상 및 문화를 다시 버춰보고 복원하여 볼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인류사회문화가 경시적으로, 공간척으로 어떻게 변천해 왔으며 그러한 변천이 있게끔 한 동기가 무엇이었는가를 규명함으로써 언류문화의 변동의 원리를 가늠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즉 고고학은 인접학문언 역사학과 는 다르게 문자기록이 아닌 유적 • 유물에 근거하여 학문의 목표에 이르고자 하기에, 기본자료인 유물을 체계척이며 과학척인 방법으로 얻은 후, 유물에 대하여 과학의 방법으로 철저하고 세멀한 관찰올 하고 분석하여 유물의 본질을 와악하는 것을 고고학 연구의 최우선 과제로 정하여야 할 것이다. 고고학도가 유물의 외판에 치중하여, 이들융 육안으로 관찰하고 기술한 것율 토대로 유물에 대한 고고학척 해씩을 내리고 유물과 연관된 문화의 성격울 규명하고자 한다연 때로는 평면척 사고, 주관척 추정이나 칙판척 판단에 따른 학운척 오류훌 벙할경우도 있올 뿐만 아니라, 스스로 학푼척 한계에 엽게 도탈활 수 있게 된다.

〈고고학 연구에 있어 자연과학의 활용〉이란 〈자연과학의 원리에 따라 과학기기와 방법을 사용하여 유물은 물론, 유물이 직접 • 간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지질, 물리, 화학, 생태계 등 제반 환경도 포함하는 총체적 유물계까지를 정밀하게 관찰하고 측정하고 분석한 후, 유물과 유물계에 관한 정보 및 분석결과의 내용을 통계적으로 처리하여 신뢰도를 검토한 후 유물계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유물계에 관한 총괄적 정보에 의거하여 고고학적 해석을 내려 선사문화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서술될 수 있다. 따라서 자연과학의 지식과 방법을 이용하여 다각척으로 고고유물계를 살펴본 후, 선사문화를 재조명하는 작업을 한다면, 이러한 고고학적 연구는 보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수행되었기에 연구 결과에 따른 학문적 가치를 크게 인정받을 수 있게 되며, 유물계의 외관에 치중한 관찰이나 계측에 따른 고고학적 연구에 의해 생길 수 있는 학문척 오류와 한계성을 상당히 극복할 수 있다. 즉 자연과학의 지식과 방법을 고고학 연구에 보다 넓게 활용한다면 고고학은 인류의 장구한 세월의 과거를 다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종합학문으로서 변모를 더욱 새롭게 갖추어, 내실을 기하면서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19 년대에 미국의 젊은 고고학도들을 중심£로 생겨난 신고고학(New Archaeology) 은 고고유물을 연구하는 데 있어 자연과학적 지식과 방법의 도업올 강조해 왔다. 유척 • 유물을 단순한 문화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문화조직체로 간주하는 신고고학은 그러한 문화조직체와 연계되어 있는 인간의 행통양상과 언간의 행동양상에 따라 문화가 변모하는 법칙올 규명하기 위해서 다량의 고고유물자료를 여러가지의 자연과학척인 방법으로 세세히 분류 • 분석하고 그렇게 분류 • 분석한 자료의 내용들올 컴퓨터에 업력시켜 통계학척으로 분석 • 정리함으로 써 종래의 연구 분위기와는 다르게 고고학 연구에 있어 자연과학의 이론과 방법론의 척극척인 도업을 요구해 왔다.

고고학 연구에 활용될 수 있는 자연과학의 이론과 방법은 연구방향이나 유물내용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고고학도들에게 버교적 친숙한 〈자연과학의 활용〉의 예로 유물계의 절대연대를 가늠하는 절대연대측청법융 들 수 있다. 연대측정에 척용되는 자연과학의 이론이나 방법은 휴물의 생성, 제작연대에 따라 달라짐은 물론, 유물의 물리, 화

학, 생물학적 성절에 따라서 적절한 것이 선택되어야 할 것이다. 유기성유물의 연대측정방법에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 (radio carbon dating technique) 과 아미 노산이 성 화측정 법 (amino acid racemization dating) 등이 있고 목재 성 유물은 나이 태 연대 측정 법 (tree-ring dating dendrochronology)~로 연대가 추정될 수 있으며 화성암석류의 생성연대는 Ar 비 율이 나 파열흔적 측정 (fission track dating) 으로 측정 될 수 있고 도자기류의 제작연대나 소성연대는 열발광측정법(thermoluminescence dating) 이 나 고자기 연대 측정 법 (archaeomagnetic dating) 으로, 혹요석유물의 제 작연대측정 은 흑요석수화측정법 (obsidian hydration dating) 으로 가능하다I)

1) Michels,]. W., Dating Methods in Archaeology, Seminar Press, New York, 1973·

자연과학의 여러 방법을 활용하여 유물의 성분을 분석하여 밝힘으로써 유물의 원료산지를 알아내거나, 유물의 제작기술 등을 고찰함으로써 유물의 출토 지역간의 기술수준이라든가 지역간의 유물을 통한 문화교류와 문화교류에 따른 사회의 변동 여부를 밝히는 것도 고고학연구에 있어 자연과학이 기여할 수 있는 한 분야이다. 자연과학척 지식과 방법을 이용하여 물자교류의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한 최초의 예로 19 60년대에 영국의 옥스포드대학의 〈고고미술사학 계측연구실 (The Research Laboratory for Archaeology and the History of )이 이룩한 업척을 들 수 있다.2) 이 연구실의 고고과학자들은 서력기원 전 140。

2) Catling, H. W., “Spectrographic Analysis of Mycenaean and Pottery", “ I . Introductory Note." A. E. Blin-Stoyle and E. E. Richard, "II. Method and Interim Results." Archaeomelη of, 1963. pp. 31-8.

년 이후, 에게해 지역올 지배하면서 미노아토기뭄화를 꽃피웠던 크레타 세력이 붕괴하고, 크레타의 대체세력으로 미케네가 들어섰올 때, 근동아시아와 지중해지역에 걸쳐 널리 분포양상올 보였던, 외양상 미노아토기와 유사한 점이 많은 미케네토기 뭄화권의 실상올 자연과학의 분석방법을 활용하여 밝혀내었다. 이것은 미케네토기편율 넓은 지역의 여러 곳에서 수집한 뒤 이틀 토기편의 성분훤소를 발팡분석법(optical emission spectroscopy) 과 중성 자활성화분석 법 (neutron actio vation analysis) 등으로 정밀하게 청량분석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분석 결과 지역에 따른 토기 성분의 차이를 알 수 있었으며, 따라서

미노아토기의 중심 문화권이었던 크레타섬에서는 크레타의 세력이 몰락한 이후, 미케네의 세력권 아래에 있으면서 손수 미케네식 토기를 제작한 데 비해, 크레타 이외의 다른 지역, 즉 에게해, 지중해지역, 멸리는 근동아시아까지를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미케네식 토기는 이런 지역으로 이주해 온 그리스사람들이나 아니면 원래부터 살고 있던 사람들이 외부로부터 토기제작기술을 습득하여 만든 현지 제작품이라기보다는 미케네와의 교역품으로 추정되어 당시의 미케네 문화의 교류의 일면을 조명할 수 있었다.

선사유물의 재료로 쓰였던 흑요석도 산지에 따라 구성성분원소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런 차이는 x-선형광분광분석법 (X-ray fluorescence spectrometry)으로 밝혀낼 수 있다. 고대 지중해지역에서 출토된 흑요석 제품을 만든 원료의 산지를 밝혀내어 이들 흑요석 제품의 교역범위를 규명한 것이라든가, 중남미에 번성했던 올멕문명의 흑요석 제품의 원료산지 규명을 통하여 올멕문명이 주변 지역에 얼마만큼 영향을 주었는가를 규명한 것 그리고 西티本의 近짧 山陽등지에서 출토된 현무암질 안산암계 석기류를 석재의 원산지별로 밝혀낼 수 있었던 것 등은 고고학 연구에 자연과학의 지식과 방법이 활용된 또 다른 좋은 예이다.3)

, 考古 理化畢, 훌生社版.DB和55. pp. 104-9.

선사인들의 기술 수준은 유물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다. 훤재료를 정제하거나 처리하여 제품을 만들었을 경우, 훤료의 정제, 성분의 조성, 제련 및 소성 등의 제조, 제작기솔이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어느 정도는 규명될 수 있다. 이런 류의 연구는 신석기시대 이후, 선사유물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토기제풍류에 판하여 많이 진행되고 있다. 토기 채료의 성분연구는 X선회절분광분석 법 (X-ray diffraction spectrometry) , 전자회 절분광분석 법 (electron diffraction spectrometry) , β-선 반사분산측청 법 (β-ray back scattering spectrometry) , 암석 현미 경 척 관찰 (petrographic microscopy) 이나 주사현미 경 척 판찰 (scanning electron microscopy) 등 고도의 과학기술과 방법으로 가능한데, 이는 성분의 분석결과를 갖고 태토의 조성, 정제기솔의 수준, 보강제의 사용 여부 및 보강제의 종류, 외관의 치장 기술

등 유물의 제작기술의 수준을 가능할 수 있다. 토기를 굽는 소성온도와 가마 분위기로 표현되는 토기의 소성조건은 토기의 소성술의 수준을 알려주는 지표이다. 토기의 태토성분은 소성하게 되면 물리화학적 변화를 보이는데, 성분의 물리화학적 변화를 측정함으로써 토기의 소성온도를 추정할 수 있다. 낮은 온도에서 구워진 토기의 소성온도의 추정 은 시 차열분석 법 (differential thermal analysis) 과 x-선회 절분광분석법 (X-ray diffractron Spectroscopy)에 의해 정토의 열 변성점을 알아냄으로 가능하며, 비교적 고온인 700·e 이상에서 소성된 토기의 소성 온도는 열 팽 창측정 법 (thermal expansion method) 에 의 해 추정 할 수 있다. 토기가 환원환경에서 소성되었는지 아니면 산화환경에서 소성되었는지의 소성분위기는 테토에 훈재되어 있는 철 (Fe) 이나 주석 (Sn)의 물리화학적 성상을 밝혀주는 외스바우어분광분석법(Mδssbauer spectroscopy)으로 파악될 수 있다.

특정 유물의 용도 파악, 선사유적지의 성격 규명, 선사시대 사람들의 사회생활을 밝히는 데도 자연과학적 지식과 방법이 활용될 수 있다. 유물 내부나 유적지에 잔존한 물질이라든가 토양을 적절한 물리화학적 방법으로 추출한 후 추출물 속의 단백성 총질소량측정(Kjeldalanalysis) • 탄소화함물의 잔존여부확인실험 (황산처리가열법) • 가스크로 마토그라피에 의한 지질성 물질의 검량, 인산 (P2 0s) 측정, 4) 아연 등특정 금속의 분석 등 다양한 생화학척 방법을 이용하여 선사유물 및 유적지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고 선사인들의 의 • 식생활도 가늠할 수 있다 5)

자연과학 지식 가운데 특히 생물학척 지식은 선사시대의 생활환경을 연구하는 데 필수척이다. 유적지 및 주변에서 채취한 화석화된 식물 잔재의 검색, 꽃가루 분석, 동물 잔류물의 분포 등 다양한 생명과학적 정보가 그러한 환경에 적응하며 의 • 식 • 주의 경제활동융 영위했던 선사언의 생활을 보다 뚜렷하게 조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6)

4) Eidt, R. C., “A Rapid Chemical Field Test for Archaeological Site Suπeying", American aη /iquity 38, 1973. pp. 206- 10.

,) Keeley, H. C. M. and R. I. MacPhall, “A Soil Handbook for Archaeologists". Bulletin. No.8, 1981 , Institute of Archaeology, London, England.

6) Hillman, G. C., “ Plant R밍nains" in D. H. Fiench, et al. Excavations at can

Hasan , 1969-70, In Higgs, E. S.(ed), Papers in Economic Prehistory, Cambridge Univ. Press, 1972, pp.182-8.

이외에도 유물의 완벽한 보존을 위해 물리, 화학, 생물학 등 자연과학의 원리에 근거를 둔 유물의 과학적 처리 및 보존 환경의 조성등도 자연과학적 지식과 방법이 고고학 분야에 활용될 수 있는 분야임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2

한국에서는 19 61 년 한국원자력연구소의 故채병서씨가 방사성탄소연 대측정법으로 유물의 절대연대를 측정할 수 있음을 처음 소개한 것이 자연과학의 이론과 방법이 고고학 연구에 활용될 수 있음을 제시한 첫번째 예이다 7) 그후 19 68년 한국원자력연구소에 C l4측정기재인 액체섬광계측기 (liquid scintillation counter)가 설치되어 유물의 C14연대측정이 본격적£로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 고고학도들 사이에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의 필요성은 널리 인식되어 있는 편이나, 8) 유물의 연대를 직접 측정할 수 있는 전문 과학언이 부족한 상황이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유물 시료를 일본, 미국 등 외국 연구실에 의뢰하여 유물의 방사성탄소연대를 알아내기도 한다. 한반도내에 산재한 수없이 많은 신석기유척지의 방사성탄소연대가 측정되었으며, 이들 방사성탄소연대를 수륨연대 (tree-ring date)로 보정한 뒤, 보정된 유물의 절대연대와 신석기토기의 문양 형식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임효재 교수의 「한국신석기토기의 편년」은 고고학연구에 자연과학적 방법이 잘 접옥된 좋은 예이다.9) 한동안 경희대학교 물리학과에서 가열발광연대측정법 (thermoluminmescence dating method) 으로 토기 류의 소성 연대 를 측정하는 기초적 연구를 하기도 했A나 실제 유물의 소성연대 측정에 척용된 연구 보고는 없다.

7) 채병서, 「放射뼈에 의한 새로운 年代決定法 , (考古훌衛) 2-2, 1961.

8). 放 性 年代 根 理쏠的 및 그 活用方法에 대하여. (團考古畢) 13. 1982, pp. 61 -95.

9) 임효재, rean Neolithic Chronology--A Tentative Model," Koreaη Journal 잭(9), 1985. pp. 11-22.

유물의 원재료의 산지를 밝혀내는 연구가 미약하게 진행되고 있기는 하나 이 분야에 대한 고고학도들의 관심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강원도 동해안 오산리 신석기 유척지에서 출토된 흑요석유물을 x- 선형 광분광분석 법 (X-ray f1uorescence spectrometry).2.-로 구성 원소를 분석한 결과, 오산리 출토의 흑요석유물은 원산지가 백두산인 흑요석으로 만든 것임이 밝혀졌으며, l0) 삼국시대의 곡옥제품을 고감도 주사전자 현 미 경 으로 구성 성 분의 원소분석 (scanning electron microscopy-electron probe microanalysis)을 해본 결과, 삼국시대 곡옥제품의 원석이 일본이나 남방산 경옥석과는 다른 것임이 확인되어, 삼국시대의 곡옥제품은 한국산 원석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제시한 논문도 있다 11) 그리고 영산강 유역에서 출토된 무문토기류의.태토 성분을 x-선회절분 광분석법과 발광분광분석법£로 분석한 결과, 영산강 유역 여러 곳에서 나온 이들 토기류의 국지적 생산지가 있었음을 주장한 보고도 있다. l2)

유물의 제작기술의 수준을 가늠하여 보는 데 있어 자연과학적 방법의 응용은 비교척 활발한 편이다. 이미 언급된 보고12)에 의하면 영산강 유역에서 출토된 무문토기류는 비교적 저온에서 소성되었으며, 중원문화권언 충청북도 제원군 양명리 출토의 붉은간토기 역시 여러가지 과학적 방법으로 분석한바 저온에서 소성된 토기임이 밝혀졌으며 토기 표면에 치장한 붉은 물질은 철분이 다량 함유된 물질임을 보고한 논문도 있다. I3l 남해의 상노대도에서 출토된 토기는 버교척 고온인 7 00 -750·C 에서 소성된 것으로, 조리용 토기였음을 보고한 논문도 있고, l4) 김해식 토기의 소성옴도는 83 8 "C였다는 제작기술에 판한 보

10) 서울대학교 박물관, 오산리 유적 셔울대학교 고고언류학과刊, 1985.

) 崔恩珠, 「陣園 의 . (學) 4. 1986, pp.l - :so.

1:1) Choi. Mong- Lyong.‘ Analyses of Plain Coarse Pottery from Cholla Province. and the Implication for Ceramic Technology and so-called YOngsan River Valley Culture Area," (聊園*古 10'11 合, 1981 , PP·261-76.

(3) 최몽룡, 윤동석, 이영남「忠北 陽. 挑花뽀 出土 品의 科分折---南漢江流城의 文化究(4) (尹炳t훌土回甲E念. 1984. pp. 143-67.

(4) 신숙정, 「상노대도 조개더미 휴척의 토기연구 , (白山) 28, 1984, pp. 211-71 •

고도 있다 15) 이외에도 경기도 여주 혼암리 출토의 홍도 및 무문토기의 분석, l6) 충북 제원군 황석리 출토의 붉은간토기와 가지무늬토기의 분석, 17) 경남 삼천포시 늑도 출토의 토기편의 과학적 분석 18}등 토기제작기숭의 연구에 의한 자연과학적 방법의 활용은 이처럼 비교적 활발한 편이다.

철기의 경우 철기의 성분 분석을 통한 철기 제작기술에 대한 연구는 상당한 수준이다 19) 2이 삼국시대의 초기, 토광묘 유적에서 출토된

15) 李松來, 「고창, 아산지구 유척 • 유풀의 과학적 분석 (고창·아산지구 지석묘 빨굳조사 보고서), 1984, PP·55-56.

16) 최용용, 박양진. 「여주 혼암리 토기의 과학척 분석 J. (古文化) 25 짧. 1984. PP.3-8.

17) 이융죠, 신숙정, 「제원 황석리유적 훌토의 불은간토기와 가지우늬토기의 고찰. (三佛金元뼈었授停!f-il!ff紀念훌훌훌)I, 一志ft, 1987. pp. 297-328.

18) 최용홈, 유한얼, 「三千 市 土 片의 科 的分析 三佛金元龍敎훌停年退任念 一志 . 1987. pp. 241 -2.

19 이남규. 文化의 -考의 金 的分折올 中으로 (.考古) 12, 1982, pp. 39-60.

20) 윤동석, 신경환, 「 금속학척 고찰 12, 1982, PP.97-134

철기 유물에 대하여 불꽃검사, 습식분석 등 금속학적 연구를 한바, 삼국시대의 철기는 주철(백주철, 전성주철)과 강철(백강철)로 만들어졌 으며 이들 철기의 제철 기술은 중국의 前淡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 되었다. 또한 철기 속에 들어 있는 비금속 혼재물의 분포 빛 함량을 재어본 결과 미십국 초기에 용도에 따라 탄소강을 선별하는 기술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음을 밝혀내기도 했다.

한국 고고학계에 생물화학적 지식과 방법에 의한 유물의 용도파악, 선사유척지의 성격의 고찰 또는 선사인의 의 •식 생활의 연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필자가 연전에 (19 81 ) 경기도여주군 흔암리에서 출토된 토기 파편 내부에 잔폰한 유백색 토양을 소량 채취하여 염기성염료에 의한 착섹시험, 황산처리가열법에 의한 탄소화합물 판정실험 및 semi-microK jeldal방 법에 의한 단백성 총철소의양을 측정한 척이 있다. 이러한 일련의 생화학척 실험 결과, 토기내에 남아 있던 유백색 토양은 무기성 토양이 아닌 유기물 토양이었으며 이는 용기 속에 들어있던 곡류가 변성, 부패되어 생긴 것으로 토기는 곡류 저장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추정한 바 있다(미발표) . 이러한 경우를 제

의하고는 발표된 보고나 논문은 아직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바윗그늘주거지에서 얻은 古 物의 뼈에 대한 보고가 있기는 하나, 21) 생물학적 지식을 활용한 선사시대의 고환경에 대한 본격적 연구는 전무한 편이다.

) 이융조, 「聊園 石 時代의 動 相 , ( 圖 古) 19, 1986, pp. 19-6

유물 보존에 있어 자연과학의 응용은 7년대 이후 문화재연구소와 국립중앙박물관의 보존과학실이 주축이 되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서해 신안 앞바다에서 바다 믿에 가라 앉은 유물선을 인양한 후 polyethylene glyc이수지를 사용해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는 것은 수없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보존과학의 엽적 중 우선 손꼽을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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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고고학계도 종합학문으로서 보다 견실한 발전을.위해 자연과학의 지식과 방법의 도엽이 더욱 필요함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활용의 범위도 점점 넓혀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활용될 수 있는 자연과학의 이론이나 각기 방법의 휠용범위 및 한계성 등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소극척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즉 〈고고학연구에 있어 자연과학의 활용〉이란 연에 한국고고학계는 초기 단계에 있는 형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과거 한국고고학계가 역사학에 밀착되어,주로 유물 • 유척의 외관적 관찰에 의존하여 선사문화를 규명하려던 학풍에 젖은 분위기 속에서 자연과학적 지식의 활용올 경원한 결과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고고학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자연과학의 교육 내용을 소훌히 하게 되었으며 따라서·고고학도들이 자연과학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의 수준 및 이해가 일반상식의 범주률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 고고학 연구에 유용한 고고계측실협의 셜버률 갖훈 곳이 국내에 전무하여, 버록 자연과학의 활용에 판심있는 고고학도뜰이

있다 하여도 실험실적 교육 환경에 접하여 볼 기회가 없었던 점이라든가, 자연과학언 가운데 고고학연구에 큰 관심을 지닌 사람이 적어서 고고학계가 필요로 하는 자연과학의 지식이나 정보, 또는 기재 시설을 고고학계 외부로부터 협조를 받는 데 대단히 어려웠던 점 등 학계의 여러가지 내척, 외적 요인에 의해 오늘날의 현실에 처하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고학도들 자신 스스로가 학문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 자연과학분야에 폭넓은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자연과학인과 긴밀한 학문적 관계를 맺고, 이들의 협조 위에 과학척 면모를 갖춘 고고학 (Scientific Archaeology) 의 학풍을 세우며, 후학들에게는 보다 자연과학의 이론과 방법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고고학의 교과 과정을 보완, 수정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전문고고과학자 (archaeological scientist) 의 양성 계획을 세워서 자연과학적 지식의 활용이 능란하며, 고고학에 수준 높은 학식과 안목을 지넌 후학을 많이 배출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유능한 고고과학자의 양성은 자연과학계열의 학과들과의 긴밀한 협 력 아래 고고학도들에 게 다과제 과정 (multi-subject degree) 이나 통합과제과정 (integrated subject degree) 을 이수하게 함으로써 가능하다. 물론 이러한 교과과정을 이수시킬 때에는 고고계측 실험시설을 잘 갖추어놓은 콧이나, 시셜이 구비된 여러 분야의 자연과학 실험실에서 실험실척 교육을 베풀어야 함이 필수적임은 말할 것이 없다. 이보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효과적으로 고고과학자를 배양할 수 있는 계획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자연과학지식을 지닌 자연과학인에게 고고학의 문호를 개방하여 그들로 하여금 고고학에 관심을 갖도록 하여 고고학도로 재교육올 시키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 상당한 수준의 자연과학인들이 고고학에 관심을 갖고 고고학을 다시 공부하여 고고과학자로 변모한 예가 허다하며 이들이 고고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유물의 절대연대를 알려줄 수 있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올 고안, 개발한 Libby는 원래 지질화학자였으며, 신고고학의 기수언 Binford는 임학올 공부한 사람이며, 영국의 런던에 있는 고고학연구소에서 근동아시아 지역에서 어떻게 농경이 시작되었는가툴 연구하는 환경고고학자들언 Hillman, Leggs와

Hubbard는 각기 식물재배학, 동물사육학, 화학을 전공한 자연과학인들로서 현재는 고고과학자로 활발하게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자연과학인이 고고학을 다시 공부함으로써 고고과학자로 변신한 몇몇의 예에 불과하다.

古代遺物塵地의 班究

【뿔훌龍• 李澈• 姜炯台• 李盛周】

1 서론

고고학척 발굴이나 지표조사를 통하여 어떤 유물을 수습하였을 때 우리는 단지 그 유물의 출토지를 확인하였을 뿐이다. 그 출토지가 유물의 제작소가 아니라면 그 유물이 최종척으로 사용된 장소 혹은 그 유물이 廢棄된 장소를 의미한다. 유물의 〈盧地推定〉이란 그 유물의 제작소나 그 유물의 원료산지를 찾기 위한 연구라고 할 수 있으며 제풍로서의 유물이나 그 유물을 제작하는 데 이용한 원료의 이동을 추척하는 연구이다. 결국 산지추정이란 고대의 물자이동을 추척하는 연구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물자의 이동에 대한 충거는 그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고학척으로 중요시되는 것은 그 요인이다. 이러한 物資의 이동이 개인 혹은 사회집단틀 사이에 이루어진 분배 혹은 교역 퉁의 행위의 결과라고 할 때, 그러한 행위가 어떠한 필요에 의해서 혹온 어떠한 죠칙에 의해서 이루어쳤는가라는 품제는 고고학척로 매우 충요한 의미훌 갖는다. 그러므로 훈배 혹은 교역 등의 행위와 관련된 경제척, 사회척, 이념척언 맥락융 이해하는 데 산지추정연구는 충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산지추정의 결과는 단순히 어떤 개개의 유물이 어느 산지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라는 소박한 자료제시에서 그쳐서는 안된다. 분배, 교역 등의 인간행위를 설명하는 데 산지추정의 연구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려면 어떠·한 산지로 파악된 유물이 어떻게 공간적으로 분포하는가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요청으로 인하여 산지추정 연구에는 엄벌한 방법론적인 절차와 통제가 필요하게 된다. 또한 산지추정의 연구결과로부터 생산 전업화의 정도라든가 분배교역의 조직 혹은 계층화의 정도나 정치조직, 나아가서 문명의 진화나 국가의 형성 등의 문제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보기 째문에 많은 연구자들이 산지추정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산지추정의 여러가지 방법들을 개발하여 왔다.

원산지를 찾으려는 연구자는 이동된 물품과 그것의 원료산지나 제작소 사이에 존재하는 물질적 혹은 문화적언 얼치성을 논중하여야만 하고 (Earl:9 82 ) 그것을 공간적으로 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방법으로서 유물에 내재하는 가시척 혹은 비가시척언 제반 속성들을 분석해 낼 수 있는 여러가지 기법들과 함께 분석자료를 논리척으로 표시해 줄 수 있는 기법들이 필요하다.

또한 산지추정의 연구는 여러가지 관점에서 연구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의 관점에 의해서 산지추정의 절차와 방법이 선돼되게 된다. 연구의 관점이란 어떠한 문제를 해결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산지추정을 통하여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으면 산지추정연구의 자료는 그 유용성이 반감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고학척 판찰내용에 기초하여 자료가 철저히 분석되어야 하고 분석학척 산지추정을 통해서만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제시되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산지추정연구의 여러가지 방법과 판정들을 평가하고 분석화학척 방법과 수리척 분류법에 의한 국내의 산지추정연구률 소개하면서 앞으로의 전망을 논해보고자 한다.

산지추정의 연구는 무엇보다도 금세기 자연과학의 발천에 힘입은 바가 크다. 자연과학의 공헌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면 첫째로 분삭화학기법의 개량이다. 과거의 습식분석방법은 훈석에 시간, 노력,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다수의 料에서 다수의 성분원소를 분석해 내야 하는 산지추정의 연구에는 척합하지 않다. 산지추청에 척합한 분

석 방법으로 평 가받고 있는 光X繼分析法(X-ray f10urescence analysis)이나 中性子放射化分析法(neutron activation analysis) 등은 최근의 핵물리학이나 분광학의 발전이 분석화학에 적용된 결과이다.

둘째로는 정량분석된 다변수의 자료를 수학적으로 분류하거나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 쫓變뀔統計學의 발전을 들 수 있다. 특히 화학, 생물학, 생태학, 심리학 등의 제반과학에서 발전시켜 적용해 온 여러가지 통계적 기법은 분석된 자료를 산지별로 분류하는 데 효과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

셋째로는 컴퓨터의 이용을 들 수 있다. 컴퓨터는 분석과정에서도 이용되지만 특히 쫓變iit統홉f學에서와 같이 복잡한 계산을 신속하게 그리고 반복척으로 수행해 줄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개발되어 산지추정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근래에 이르기까지 산지에 대한 연구나 혹은 분배 • 교역에 대한 연구가 몇몇 예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형펀이다. 산지연구로서 영산강 유역 無文土짧의 국지적 생산을 검증하려는 연구 (Choi: 1981 ) 韓國illI玉의 원석이 국내산임을 밝힌 연구(최은주 : 1986) , 쳤山파遺웰 혹요석이 백두산에서 용 것임을 보여준 보고(동촌무신 : 1985) 등이 전부이다. 고대교역에 대한 연구로서 국내 산지연구나 교역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으로 선구적인 것은 위만조선이 한과 맺은 무역판계나 중국의 한과 滅• 三韓이 맺은 무역관계의 연구(최용룡 : 1983, 1985), 그리고 의 교역체계 연구(이현혜 : 1988 ) 등올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필자는 산지나 교역에 대한 연구의 부진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인 혜품이라뇨 주장하고 싶다.첫째로, 그동안 고고학의 연구가 소박한 樣式 • 編年• 傳播 에만지나치게 집착하였기 혜문에 유물 뒤에 상호작용하는 개인이나 사회집단의 행위라든가, 경제척 혹은 사회척, 이념척 맥락에 관하여는 무관심하였다. 그래서 결국 산지추청이나 고대교역뿐만 아니라 그밖에고고학이 거혼할 수 있는 제이론의 형성에도 장애를 가져왔다.풀혜로, 산지추정에서 이용하는 여러가지 훈석화학과 암석학척 분섹이나 판활 기법들과 함째 훈석결과롤 표시하는 통계척 기법들에 관확여 그동안 고고학자는 우판성했먼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반면 자

연과학자들은 고대유물을 분석연구하는 데 미처 주목하지 못하였다. 산지추정의 연구는 자연과학과 고고학의 상호연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분야이기 때문에, 학문 상호간의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실정으로 보아 본격적언 산지추정의 연구는 불가능하였으리라고 여걱지는 것이다.

셋째로, 위의 예와도 갇이 몇 가지의 분석화학적 또는 암석학적 방법에 의한 산지추정연구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 연구들은 분석한 유물도 몇 점 되지 않고 결과를 제시하는 방법에서도 특정 성분원소의 있고 없음이라든지 어떤 함량치를 단순히 비교한다든지 하는 데 머무르고 있어서 보다 진전된 이론형성으로 나아가기에는 미홉한 점이 많이 있다.

여기에서 최근에 이루어지고 있는 국내 산지추정의 연구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한양대학교 화학과의 李敵교수를 비롯한 연구진, 문화재연구소의 姜炯台, 그리고 동력자원연구소의 중성자방사화 분석실의 연구진으로 연구팀이 구성됨으로써 비롯되었고, 고고학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헤 본격화되었다. 이 산지추정연구는 중성자방사화분석에 의해 다수의 시료에서 다수의 미량성분원소를 정량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 분석결과를 여러가지 變 統計學기법을 응용하여 표시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에 의하여 보다 유의성 있는 산지추정 자료를 만들 수 있고 고고학적 이론형성에 유용한 산지추정이 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2 산지추정의 제문제

고대 유물의 산지를 추정하는 작업은 그 연구률 진행하는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여러가지 문제률 가지고 있다. 예률 들면 표본을 선돼하여 시료률 준비하는 일이라든지, 산지추정의 여러가지 고고학척, 자연과학척 분석방법올 선돼하는 일 혹은 분씩된 자료훌 제시하는 방법의 문제와 같은 것이 었다.

또한 산지추정은 수많은 고고학척 문제에 지향하고 있다. 족 산지추정올 통하여 정곤하고자 하는 유물의 공간척언 폴포, 생산이나 교

역의 조직, 전업화 등과 같은 문제들이 있다.

이러한 두 가지 법주의 문제는 실제로 상호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어떠한 고고학적 운제가 제기되느냐에 따라 산지추정의 분석이나 결과제시방법이 선태되고 개발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주로 산지추정의 연구를 진행시키는 데 실제적으로 부딪치는 문제들을 다루기로 한다. 산지추정의 목적, 방법 및 절차 등에 관하여 검토하게 되겠는데, 이에 앞서 산지추정의 연구에 필요한 몇 가지 개념들에 관하여 정의하고자 한다.

물자의 이동 : 산지추정의 연구에서는 완제품으로서의 유물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원료나 반제품 등의 이동을 포괄척으로 다루게 된다. 여기에서 물자의 이동하면 우선 〈交易〉이라는 개념을 떠올리 게 된다. 영 어 에 서는 trade와 exchange라는 말이 있다. tradecr는 말은 exchange와 동의어로 취급되기도 하는데 (Renfrew: 1975) , 최근 고고학 문헌에서는 exchange라는 말을 더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것 같다 (Earle and Ericson: 1977. EriCson and Earle: 1982• Brumfiel and Earle: 1987). Polanyi (1957: 266) 는 trade를 (the mutual appropriative movement of goods between hands)라고 정의한 바 있는데 trade에는 (1) 사람 (2) 물품 (3) 운반 (4) 兩便(교역으로 서로 주고 받는 두 편) 등 네 가지 요소를 포항해 야 한다고 한다 (P이anyi : 1975). exchange라는 말도 거의 비슷하게 쓰이고 있다. exchange란 (spatial distribution of materials from hand to hand and from social group to social group)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Earle: 1982 ). 이 정의도 역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두 면 사이에 물품을 주고 받는 어떤 행위와 그 결과를 지칭하는것 같다. Ref.lfrew (1977 )는 exchange 와 trade를 구분하여 (exchange is here interpreted in the widest sense : indeed in the case of some distribution it is not established 비at the goods changed hands at all)이 라 하고 (trade in this case implies procurement of materials from a distance. by whatever mechanism)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이와 찰은 정의는 그 자신의 연구의 일판성을 위하여 잠정척으로 내련 것이다. 그래서 우리말에서 〈교역〉이란 단어는 Earle(198)이 정의한 바와 같은 의미훌 가지고 고고학 용어로 활용되는 것이 좋올 것 같다. 산지추정의 연구에서 발하는 물자의 이동은 trade 혹은 exchge의

의미를 갖는 〈交易〉뿐 아니라, 분배 • 징수 등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도 있고 단순히 한 개인이나 집단의 이동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산지추정의 연구에서는 일차적으로 이동의 원인이 무엇이든지간에 물자 이동의 증거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 이 산지는 원료산지와 제작소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Harbottle: 1982). 화학분석이나 암석학적인 관찰을 통한 산지추정은 출토지, 제작소, 원료산지 세 지정 사이의 물질적인 동일성을 찾는 작업이다. 이렇게 세 지점에 대한 조사가 완전하게 이루어진다면, 어느 제작소 혹은 어느 지역의 어느 지층 등과 같이 극히 축소된 공간적인 범위나 장소를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산지추정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매우 정밀한 지질조사라 하더라도 고대의 장인이 원료를 채취했던 장소를 정확히 지적하기란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작소에 있어서도 우리가 모든 제작소를 찾아내었다고 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 하더라도 한 제작소가 반드시 하나의 원료산지와 연결되리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분석화학적 방법이나 암석학척 방법에 의하여 산지추정을 한다는 것은 분석화학적, 암석학척인특성화를 공간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다. 그련데 분석방법이나 자료 해석에서 그 정확성의 정도는 여러 수준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하여 산지라는 개념은 하나의 〈장소〉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지대〉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유용하리라고 생각된다. 이 지대라는 의미를 부여함Z로써 광범한 지질학척 통일성을 보이는 지역을 특성화하는 데 있어서나 혹은 통일한 지질학척 근원올 갖는 원료산지들을 공유하는 제작소들을 특성화하는 데 유용할 것 같다. 이 와 유사하게 셜정된 개 념 으로 Rands and Bishop의 resource procurement zone(Rands and Bishop: 1980, Bishop, Rands and Holley: 1982 ) 이 나, Arnold 의 resource zone (1978 ) , Vita-Finzi 와 Higgs의 Catchment area (1970) 둥이 있다.

分類와 同定: 산지추정은 두 가지 판정에서 진행훨 수 있다. 하냐는 선정된 얼련의 시료률 화학척, 암석학척 특성에 따라 분류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특성화되어 있는 산지에 미지의 시료들을 통정하는 작업이다. 그련데 화학척, 암섹학척으로 혹성화되어 있는

일군의 시료는 그 자체만으로 산지의 의미를 갖는다기보다, 고고학적 관찰내용을 통하여 특성화되어 있는 군과 대입되어야 산지로서의 자격을 가질 수 있다. 즉 화학적, 암석학적 특성화가 고고학척 사실을 반영할 수 있어야 산지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선정된 일련의 시료들이 산지에 따라 몇 개의 군으로 분류되려면 각 군은 화학적, 암석학적 성질상의 상호 겹침이 최소화되고 그 자체로서 일치성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특성화된 일군의 시료에 미지의 시료가 동정되려면 그 시료군이 가지는 화학척, 암석학적 성질상의 법위 내지는 영역에 그 미지의 시료가 포항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류나 동정은 단지 화학적, 암석학척 특성화에 불과하기 때문에 어떠한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정당한 산지분류나 산지동정이 되려면 고고학적 사실과 대비되어야 한다.

국지적 생산품과 수입풍 : 국지척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제작소와 가깝거나 그와 관련된 것 (near or associated with the production center (Harbottle: 1982 ) 을 의미하고 그 이외의 것은 수입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장정적인 것이며 이 한쌍의 개념은 고고학척으로 인식되는 지역척, 경제척, 사회척인 경계와 결부되어 있다(姜炯台: 1988).

국지척 생산품이냐, 수업품이냐를 판정하는 일은 사회집단의 규모라든가 어떤 지역척인 범위가 기준이 되어서 결청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회집단이나 지역척인 범위가 하나의 단위가 되어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제작소를 소유하고 그곳에서 생산된 물품이 그 집단 혹은 범위에 공급될 때 우리는 국지척인 생산품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이외의 것올 수입품이라고 할 수 있다.

(1 ) 잔치추정의 목적

전홍고고학에서는 유물이나 유구에 나타나는 속성들을 분석하여 토기의 품양에서 주거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어떤 유형별로 분류하고,이것으로 유척의 연대훌 추정한다든지 혹은 민족이나 사회집단 등을 추청하는 례 이용하여 왔다. 이러한 관점은 이미 신고고학자들에 의

해 (normative view)라고 비판을 받아왔으나 아직까지 고고학의 기본적인 방법으로 실행되고 있다. 한 유물의 양식적인 변화가 시간의 흐름의 반영이고 양식의 공간적인 분포가 민족 혹은 사회집단의 특성화로 연결되어 편년이나 지역성을 기술하는 데서 끝나버리연 고고학이 거론할 수 있는 그밖의 문제는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전통고고학의 관점에서는 지역간의 유물양식의 차이는 민족 혹은 사회집단의 차이로 해석되고 그 유사성은 동일한 집단 혹은 양식의 전파로 셜명될 것이다. 그리고 한 지역에서의 유물양식의 급격한 변화는 어떤 역사적 사건 즉 정복, 민족이동, 전쟁 등으로 해석되어질 것이다.

한국고고학에서는 유물에 대한 형식분류가 연구의 기본적인 주제가 되어 왔고 이러한 유형의 인식은 거의 편년과 지역성을 기술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형식과 양식에 대한 개념척인 혼동이나 애매성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산지추정의 연구에서는 유물을 일정한 유형으로 나누어 인식하려고 하기보다 생산, 분배, 교역 등에 참여하는 인간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확보하고자 하며, 유물의 형식이나 양식 등으로 고정되고 경계지어진 민족이나 사회집단을 인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하여 생산하고 상호교역하는 사회집단이나 조직을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전통척인 양식의 개념이나 형식분류의 방법 등은 산지추정 연구의 효과척인 수단이 될 수 없다.

Hudson(967)은 인간행위가 어떻게 얼어나는가를 기술하려는 〈과정에 대한 인식〉과 그러한 인간행위의 관찰가능한 결과률 기술하려는 〈유형에 대한 인식〉을 구분하였다. 그런데 결과로서 나타난 유형으로부터 인간행위를 직접척으로 추론하는 것은 한계가 있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행위와 과정은 그 결과인 유형으로푸터 언식훨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과정을 요사해 줄 수 있는 이룬척 모벨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국내의 산지추정 연구에서도 그러한 이룬척 모웰이나 고고학척 자료에 대한 관정의 변화가 펼요하다. 형식분류로부터 편년과 지역성 기술하고 민족이나 정치집단 등윷 추론하는 것이 산지연구의 목적은 아니며, 교역하고 분배하는 인간과 정단의 상호작용용 인식하는 것을

목척으로 하고 있다. 또한 전파론적 관점에서는 두 지역에서 극히 유사한 유물들이 출토되었을 때 양식이 전파되어 국지적으로 생산된 것인지 수업품언지를 쉽게 결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예 산지추정의 연구에서는 이에 대한 보다 확정적인 증거를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2) 산지추정의 방법 및 절차

산지를 추정하려면 이동된 유물과 그 유물의 산지로 가정된 제작소나 원료산지 사이의 문화적 • 물철적 동일성을 찾아야 하며 그 방법에 는 화학분석, 암석학적 분석, 양식론적 분석 등이 있다 (Earle: 982).

어떤 양식의 유물이 한 지역에서 빈도가 높게 나타나고 그것과 양식척으로 극히 유사한 유물이 다른 지역에서 보다 적은 빈도로 나타날 때, 보다 많은 양으로 출토되는 지역에서 보다 소량으로 출토되는 지역으로 유물이 이동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유물의 제작소가 알려졌을 경우 그 제작소로부터 출토되는 유물의 기술적, 양식척 제속성들올 세밀하게 분석하고 표준화의 정도에 의한 變異의 한계를 셜정할 수 있다면 통일제작소와 유물 분포를 논증할 수 있을 것이다. Alden (1982) 은 토기제작소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양식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이동된 유물의 분포를 확인한 바 있다.

어떤 유물의 양식분포로부터 유물의 교역을 추론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근거를 가지지만 그 자체만으로 타당성을 고접할 수 없고 암석학척 분석이나 화학분석융 통해서 보완되어야 한다(Plog: 1980, Hantman and Plog: 1982). Hantman과 Plag(I982 ) 는 미국 남서부 토기의 양식척, 기술척 속성올 훈석하여 양식분포와 토기교역 사이의 단순한 상판판계는 존재하지 않음올 보여주었다. 어느 청도의 양식상의 유사성은 토기교역£로 셜명하지만 토기교역에 의해 셜명되지 않는 양식분포를 기능척 정보교환모댈(Wobst: 1977)로 셜명하고 있다 (Braun and Plog: 1982). 우엇보다도 Hantman과 Plog(1982) 는 토기교역의 칙캡쩍인 충거를 암석학척 훈석으로 찾고 있다.

산지추청의 연구에 있어서 양식론척인 방법이 암석학척언 분석이나 화학분석에 비하여 얼퉁한 방법이라는 것율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

다. 이러한 세 가지 방법이 상호 보완척임을 밝히려고 한다. 유물의 양식적언 특성이란 단순한 관찰이나 계측으로 파악되지만 岩石願微鏡을 이용한다면 시료를 찰라내고 갈아서 박편슬라이드를 만들고 사진을 판독해야 하는 등 번잡해진다. 이에 비해 화학분석은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게 된다. 따라서 모든 유물을 분석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며 분석을 요하는 표본의 범위를 제한헤 주어야 한다. 분석에 앞서서 분석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나 그 문제에 척절한 시료를 선정하는 것은 양식롱척 분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어떤 유물이 교역되었다는 사실은 유물의 양식적인 분포로부터 처음 감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지추정의 연구에서는 어떠한 분석방법 즉 앙석학척 분석을 채용하든지 아니연 화학분석을 채용하든지간에 다음과 같은 3단계의 절차에 따르게 된다. 첫째로 분석의 대상이 되는 유물과 유물이 출토된 유적 혹은 지역적인 범위를 선정하고 광범위한 지철학적인 조사를 통하여 고대의 원료채취장소로 이용되었을 만한 자원을 찾고 시료를 채취한다. 둘째로는 시료를 준비하고 암석학척 화학적 분석을 실시하여 정성적 정량적 자료를 마련한다. 셋째로 분석된 자료를 여러가지 통계적 기법을 이용하여 산지별로 특성화한다. 이와 같은 특성화는 암석학· 화학적인 성질애 근거하여 분류된 시료들의 군이므로 이것을 고고학척으로 관찰된 내용에 근거하여 분류된 군과 비교하여야 한다. 분석과 통계적 분류에 관하여는 다음 章에서 서술하기로 하고 첫단계의 분석대상의 선정과 예비척언 지질조사에 대해서만 간략히 언급하기로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연과학쩍인 방법에 의한 산지추정이란 유물이나 원료의 물질척인 상사성이나 상이성올 공간척인 분포로 표시하는 연구를 말한다. 과거의 산지추정의 연구에서는 어떤 유물들이 이동하여 어디에서 출토되는 예가 었다는 정도의 자료훌 제시하기.만 하면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현대 고고학에서는 고대교역에 대한 연구의 이롱과 방법이 청교화되면서 어떤 유물의 공간척언 폴포와 멀도로 표시되는 산지추정의 자료률 휠요로 하게 되었고 산지용 추청했옳 때 그 유의성을 확률로 표시할 수 있어야 바랍칙한 자료로 평가받용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분석대상을 선정하는 데는 @유물의 공간척인 분포와 시간척인 위치,@사회집단이나 혹은 그 지역적인 구분에 관한 고고학척인 제이론,@자원의 분포와 지형 등에 관하여 폭넓게 고려해야 한다.

유물의 분포에 관한 가장 보편척이고 형식적인 표현 방법은 산지로부터의 거리와 교역된 유물의 양을 수학적인 등식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Renfrew, Dixon and Canno: 1968, Hodder: 1974, Hodder and Orton: 1976 , Renfrew: 1977>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지형이나 자원, 운반수단 등의 요인에 의한 변동을 적절히 표현해 줄 수 있는 방법은 되지 못한다. 단순히 거리와 교역된 유물의 양만의 상관 관계를 이차원적으로 표시해주기보다 지형이나 사회적 • 경제적 맥락 등을 고려하여 유물의 분포를 삼차원척으로 표현해 줄 필요가 있다고 한다 (Ericson:1977>' 실제로 산지로부터의 거리와 교역된 유물의 양은 다양한 요인들에 의 해 국지 척 인 변 이 성 을 보이 기 때 문에 (Sidrys: 1977, Ammerman and Andrefsky : 1982) 일반척인 모렐로 예측하기 곤란하다. 이러한 연구에 산지추정이 척절한 자료를 제시하려면 매우 광범위한 지역(때로는 수천 km) 에 걸쳐 체계척으로 시료를 수집해야 한다.

산지추정의 연구에서는 원료채취장소, 제작소, 출토지, 이 세 지점으로부터 표본이 모아져야 한다. 그러므로 광범한 지철조사에 의하여 원료산지를 찾아야 하며 미발표 제작소와 출토지가 상호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최근의 新羅• 뻐耶土짧處:it!!.推定의 시도(姜炯台:1988 , 李澈• 姜炯台• 李盛周: 미발표)에서도 이 점이 강조되었다. 慶州•의 土器짧地( 作所) , 慶州, 永川의 原料塵地(結土層) 그리고 慶州古樓(出土地) 세 지점으로부터 시료를 모아 분석하였다.

끝으로 시료의 물철척인 성철에 관해서 언급하기로 한다. 산지추정에 이용되는 시료는 지구화학척 과정을 충분히 반영하여 산지가 다름에 따라(원료물질의 지질학척 기원이 다륨에 따라) 화학척 • 암석학척 성훈의 함량훈포가 달라야 하고 유물의 어느 곳올 분석하더라도 같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균질하여야 한다(Goffer: 1980. 그러나 매우 균절하다고 생각되는 유물 즉 금속이나 유리와 같은 것윤 유물의 어느 부분을 채취하여 붐석하더라도 같은 결과가 나요겠지만 불균절한 물질에 있어서는 유물의 각 ¥위에 따라 훈석결과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

다. 특히 토기와 같은 것은 原料結土에 어떤 첨가제를 섞는다거냐 표변에 안료, 유약, 슬럽 등을 업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토기에 들어있는 석영과 같은 첨가제는 미량성분의 농도를 회석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한다. 이렇게 원료물질을 2차적으로 가공함흐로써 불균질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서로 근원이 다른 물질을 섞어서 제작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예를 들어 토기의 태토에 섞어 넣는 첨가제는 원거리에서 교역해 오는 경우도 있고 (Shepard: 1976, 337) 유리의 樓刺나 협·色倒등도 근원이 다른 물철언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우 그 특이성은 분석원소의 수를 늘리고 각 원소의 농도분포의 패턴을 세밀히 관찰하여 분류에 척절한 원소를 선정하고 분류에 역행하는 원소를 제외시킴£로써 극복할 수 있다.

3 분석화학에 의한 산지추정

(1) 분석방법

문제의 성질, 시료의 종류와 양, 시간과 경비 등을 고려하여 분석방법을 선택한다. 3 년 전만 하더라도 다량의 시료에서 다수의 원소를 짧은 시간내에 동시정량분석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한 방법이 가능하게 된 것은 분광학과 원자물리학의 발전이 분석화학에서 실현된 기술혁신 때뭄이다. 진보된 붐석화학의 방법이 산지연구에 척용된 것은 옥스포드대학의 考古 術史學l빠究實職室에서 수행된 Mycenae, Minoa 토기붐석일 것이다. 이때 사용한 방법은 Emission Spectroscopy로서 반정 량법 이 고 주성분 (major element)을 분석한 데 그쳐 뒤에 정밀한 재분석이 있었다 (Catling: 1963, CatIing and Jones: 1977, Jones and Rutter: 1977). 앞서 말한 바와 갈이 산지분석에는 양식론책 방법, 암석학척 방법, 분석화학척 방법이 었다고 하겠는데, 간편하고 경비가 척게 드는 방법온 양식롱척 방법이겠고 가장 복잡하고 값비싼 방법이 붐석화학에 의한 방법얼 것이다. 그러나 훈석화학척 방법이 각팡받는 이유는 훈석결과훌 청확한 정량적 자료로 제시할 수 있어서 자료의 수준이 높고 그것옳 세련된 통계

척 기법으로 산지에 따라 분류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분석화학척 기기분석의 방법 중 어떤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유물에 대한 손상정도(파괴 혹은 비파괴분석인가? ), 분석의 감도(얼마의 미량까지 결정할 수 있는가? ), 선택성(분석가능한 성분의 개수) , 정밀도, 분석에 소요되는 시간과 버용, 적용범위 (분석대상이 되는 유물의 종류) (Tite : 1972 ) 등에 따라 척절한 방법을 선택하여야 한다. 그러나 고대유물분석에서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 있다. 가급척이면 버파괴분석이거나 매우 소량의 시료로도 분석가능한 것이 좋다. 산지연구에서 유용한 정보를 주는 것은 미량성분 (traceelement)이므로 감도가 뛰어난 방법이 좋다.@ 분석될 수 있는 원소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끝£로 분석시간이 짧고, 비용이 척고, 정확한 정량분석이면 좋다.

이러한 모든 조건을 완벽히 갖춘 분석방법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대체로 이러한 조건에 어느 정도 접근하는 방법으로 형광X선분석(X-ray Fluorescence Analysis: XRF) 과 중성 자방사화분석(Neutron Activation Analysis: NAA) 이 있다. 이 두 방법 은 黑魔石, 土, 磁 , , 流 l藥, 玉器동의 산지추정에 광범하게 이용되고 있다.

NAA와 같은 방법은 소량의 시료로도 그 속에 함유된 다수의 미량성분훤소률 비교척 짧은 시간내에 동시 정량분석할 수 있어서 산지추정연구에 매우 효과척인 분석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훈의 고고유물은 훤상을 보존해야 할 필요 때문에 버파괴분석드로 분석되는 것이 바람칙하다. 그러나 완전한 버파괴분석으로 정밀도가 높은 정량분석용 기대하기 어렵다. 중성자방사화분석은 비교척 소량의 시료로도 분석이 가농하기 때문에 산지추정 분석에 척합하다고 할 수 있다.

미량성분의 함량으로후터 산지에 따른 분류를 하는데 어떠한 성분이 유효한지훌 판단할 수 있는 선험척언 기준은 없다. 그러므로 될 수 있으면 다수의 미량성폼훤소를 정량붐석하여 산지별로 분류해야 한다. 어떠한 성분원소가 폼류에 기여하는지는 전척으로 통계척 절차를 통하여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며 어떤 선험척인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혹핵 토기와 같온 유물온 매우 폴균질한 물철이고 특히 청까제 풍의 영향으로 미량생폼의 농도가 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

다. 이러한 자료의 편향성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이 다수의 원소를 분석하는 일이다· NAA는 선택성이 뛰어난 분석방법으로 많은 미량 성분원소의 함량을 결정할 수 있다.

여기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국내의 산지추정연구에서도 중성자방사화분석을 이용하였다. 이 방법£로 그동안 土,, 磁짧, 結土(姜炯台:198 5, Lee Kwun Kang: 1986, Lee Kwun Kim et al: 1986, Lee Kwun Junget al: 1986) , 유리 (李澈, 械五千, 훨炯台外: 1987) 및 網鏡(李澈, 權五千, 李仁 外: 1987) 등을 분석하였다.

(2) 수학적 분석

1) 자료의 성질

화학분석에 의하여 마련된 자료로부터 각 시료들에 포함되어 있는 성분원소와 그 함량들을 서로 비교 검토하여 산지별로 분류가 이루어진다. 고고학에서는 유물을 분류할 때 유물이 가지고 있는 많은 속성과 그 조합을 가지고 분류하게 된다 (Clarke: 1968). 많은 양의 고고학적 유물이 분석되면 그로부터 다수의 성분원소와 그 함량으로 된 자료를 얻게 된다. 이러한 자료를 산지별로 분류하고 그 타당성을 검증하고자 할 때 우리는 수학적인 방법에 의존하게 된다. 산지분류에서 한 유물의 성분원소는 속성이 되고, 그 원소의 있고 없음이나 함량 등은 속성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동안 고고학에서도 수리분류학의 업창에서 유물의 계측치와 같이 연속변수로 표현되는 유물의 속성올 가지고 분류하는 방법이 이용되어 왔다 (Doran and Hodson: ). 여기에서 고찰해 보고자 하는 산지붐류의 방법은 다변량통계학에 의한 자료해석법이며 넓게 본 수리분류학척 업장과 상통하는 것이다.

다변량통계학에 의한 자료해석올 논하기에 앞서 자료의 성질에 판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산지추정의 분석결과는 표본(유물, 시료)과 변수(속성, 성분원소)의 자료매트릭스로 제시되는데 정성척 자료 정량척 자료 혼합자료로 구분된다. 청성척 자료라는 것은 어떤 성훈원소가 있고 없음의 상태로만 규청될 수밖에 없어서 파 의 Boolean type의 값으로 자료률 갱리하게 된다. 이에 버하여 정량척 자료는 성훈원소의 함량

퍼센트라든지 혹은 농도와 갇이 연속변수로 표시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N 개의 유물시료로부터 M개의 원소가 정량분석되었다면 이 정량자료는 NxM의 자료매트릭스로 정리될 수 있다. 이러한 정량적 자료에서 다변량통계학적 해석법을 적용하여 수학적으로 분류되는 群을 얻을 수 있다.

혼합자료는 정성자료와 정량자료뿐만 아니라 색깔이나 경도와 같은 단위 형 철 (unit character) (sneath and sokal: 1973) 내 의 여 러 상태 (multistate:ranked or unranked) 의 자료까지 고려 할 수 있 다. 이 러 한 혼합자료는 산지추정의 연구에서 유물의 양식, 기능, 기술적인 정보까지 포함시켜 분류될 수 있을 것이 q(Rice and Saffer: 1982>, 정량자료를 다루게 될 때 우리는 먼저 NxM 의 자료매트릭스를 M차원공간에서 N 개의 점으로 표현하게 된다. 이때 각 변수들의 값(성분원소의 함량)은 상호간의 큰 격차를 보이거나 하냐의 변수내에서의 최대 • 최소치의 편차에서도 큰 격차를 보이게 된다. Sneath와 Sakal(1973)은 수리분류의 원려로서 모든 형질을 고려하는 데 동등한 가중치를 두어야 한다고 한다. 원자료를 그대로 분류에 이용하게 되면 含활이 큰 성분원소가 자료해석을 지배하게 된다 (Harbottle: 1976). 그러므로 M차 공간상에 N개의 점을 표시했을 때 각 변수들의 분산을 균등하게 해주어 분포상의 편향성을 교정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Pielou: 1984). 이러한 의도에서 원자료를 변형시킬 때 혼히 상용 log률 취하거나 (Harbottle: 1976) autoscaling 즉 영점형균과 단위 표준편차를 갖는 표준화의 방법을 이용한다(姜炯台: 1985. Lee Kwun Kim Lee and Kim: 1986, ~澈• 權五千• 姜炯台外: 1987. 李澈• 權五千• 李仁鍾 外: 1987>

끝으로 성분원소의 평가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화학분석에 의한 정량자료로푸터 시료률 산지별로 분류할 때 분류에 기여하는 원소를 선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분석하는 시료들은 지구화학적인 파청의 산물인 훨빼이나 점토 등으로 제작된 유물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붐석화학척언 산지추청은 각 유물이 그 현료의 채취장소가 다홈에 따라 화학척 성분이 다률 것이라는 가청에 업론하고 있다. 그 자료는 각각 지철학척 기현이 다르기 혜품에 화학척 성분조성도 다를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떤 유물이나 원료롤 폼석했울 때 성분훤소의

함량분포는 지구화학척인 과정에 따라 특별한 유형을 보이는 것이 있으리라고 기대된다. 이렇게 함량분포에서 어떤 특별한 유형을 보여주면서 각 지역의 지질척 특성을 반영하여 주는 식별언자(三품利一:19 8 3) 가 산지분류에 크게 기여하는 성분원소로 선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각 성분원소의 농도평균치, 표준편차, 변동계수를 구해 보았을때, 각 시료간에 명균치의 차가 크고 각각의 변동계수는 작은 원소가 선정된다(河 速郞外: 1986).

2) 분류방법

우리들이 산지분류에 이용하는 방법들을 논하기에 앞서 다변량통계학에서 데이타의 분포에 존재하는 어떤 유형 (pattern) 을 인지하는 관점에 대하여 간략히 서숭해 둔다. 혼히 분류방법이라면 송이분석법(clustering method)과 같은 분류(classification)와 자료의 분포를 찰 관찰할 수 있도록 하는 주성분분석법 (principal component analysis) 이나선형판별식분석 (statistical linear discriminant analysis) 과 같은 배열(ordination) 을 통칭하는 예가 많다. 그러나 분류(classification) 와 배열 (ordination)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출발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첫째 , 분류라 하면 송이분석법 (clustering method) 과 같이 다차원의 공간에 분포한 점들을 그 유사도(점들의 근접성)지수에 따라 상호간의 관계를 2차원으로 환원시켜 무리를 만드는 방법올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류에는 그 계통성 혹은 근연성을 표시해 주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Pielou: 1977) 그 대표척인 것이 송이분석법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배열 (ordination)이란 다차훤의 공간에 배치된 정들의 분포를 보다 낮은 차원으로 투영시켜서 판찰하기 쉽게 해주는 수학척언 규칙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분류법을 척용하여 다차원의 공간에 분포한 정틀을 가까운 것끼리 묶어나갔올 경우, 다행히 같은 군울 이루는 것들이 서로 모여 있고 다른 군율 이루는 것틀과는 충폼히 떨어져셔 분포한다면 분류는 우리가 없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이상적인 상태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에 비해셔 배얼법은 원자료에 담겨져 있는 내용을 손상시키지 않£면서 다치원에 분포한 점들을 손쉽게 판찰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을 사용하였다.

송이분석 법 (cluster analysis)

시료세트에 대한 정보가 없을 때 시료에 포함된 변수를 근거로 그 데이타의 구조를 발견키 위해 채용되는 분석법으로서 시료 상호간의 유사성 측청값을 구한 다음 단일 연결과정을 통하여 이 시료세트를 여러 송이로 분류하는 방법이다. 시료 상호간의 유사성 측정으로는 여러 방법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Beck 와 Hoste(1974.973-993)에 의해 소개된 방법을 본연구에 사용하였으므로 여기에서 그 방법을 기술하고자 한다.

분석되어 그 함량을 아는 미량원소의 개수와 같은 수의 차원을 갖는 기하학척 공간을 상상한 다음 그 시료 중의 미량원소들 개개의 농도를 서로 다른 각 화표축의 특정값으로 간주하면 각 시료는 그 좌표 공간 중의 한 점으로 나타내어진다. 공간에서 각 점들 사이의 거리는 시료 사이의 버동일성 (dissimilarity)의 측도가 되며 이 비동일성의 표현방법 중에는 식(1)과 칼은 표현이 있다.

Dii= z lCt.m-Ci,ml/M ------------------------------(1)

여기서 M은 분석된 미량훤소의 갯수이고 i 및 j는 특별한 시료를 명시하기 위한 지표(indices) 이다. Ci , m과 C m은 i 및 j시료에 함유된 원소의 표준화된 농도이다. 농도의 표준화는 주어진 원소의 제일 낮은 농도률 0, 제일 높은 농도를 l 로 두어 수행하였다.

여기서 clustering한다는 것은 거리값이 서로 작은 시료플로부터 묶어나가연서 최종척으로 모든 시료가 묶이는 것이다. 이들올 묶는 데 Sneath와 Sok리 (1973~ 21 4- 잭。)은 여러가지 방법을 소개하고 있으나 우리 는 계 충척 기 하중심훈류방법 (hierarchical centroid sorting method)을 사용하였다.

만약 N개의 시료흩 고려한다변 N(N-l)/2개의 서로 다른 Dij값이 계산되며 이충 제얼 작은 값이 가창 버슷한 시료의 짱에 대웅하게 된다. 이 빵의 기하충성이 이 쌓이 속하는 계급(class)의 핵 (kernal)이된다. 철과척로 그 쌓윤 그것의 기하중심값으로 대치되며 N-l개의

효과적인 시료 (effective samples) 가 된다. D ij 값이 다시 계산되며 그중에서 가장 비슷한 쌍이 찾아진다. 이와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 계급의 핵이 새로 만들어지든지 이미 구성된 송이에 첨가되어 모든 시료가 어떤 하나의 단일계급에 합류하게 된다. 이와 같이 시료를 분류하면 하나의 수목보 (dendrogram) 가 되며 이것은 지형이론으로 그린 나무(topological tree) 를 평연상에 투영한 것에 상당한다.

어떤 절차를 이용하여 clustering하든지간에 이 수리분류는 비동일성값이 어느 정도일 떼 분군의 의미를 부여해야 할지 문제가 된다. Sneath와 Sokal (1973. 63-75)은 운영분류단위(operational taxonomic unit) 라는 인위적언 단위를 제안하여 각 버통일성 등급에서 나타나는 분군을 생물학적 사실과 대비하고 있다. 고고학에서는 고고학척 사실을 가셜로서 먼저 제기하고 이러한 clustering을 가셜검중척으로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李盛f되 : 1987. 121}. 산지분류에서는 동필산지로서 확실하다고 가정된 분군이 어느 정도의 버통일성값에서 출현하는 지 살펴 야 한다(炯台: 1985).

주성 분분석 법 (principal component analysis: peA)

peA는 펙터 (Factor)분석법과 비슷한 접근법이다. 다변수의 자료에 펙터분석을 수행하는 목적은 관측된 변수의 세트로부터 유도된 미지 또는 추상적 원인변수의 한 세트를 사용하여 그 자료세트의 변이성(variability) 을 기 술함에 있다. 원자료의 분산-공분산(variance-covariance) 매트릭스가 그 변이성올 대표하고 있다. peA에서 원언변수들은 측정변수의 칙교선형결합으로 나타내어진다.

각각 M개의 변수로 된 N개의 시료에서 얻는 한 세트의 자료 (NXM 자료매트랙스)는 M차원의 공간의 N개정으로 된 한 세트로 간주된다. 먼저 분석데이타 X{j률 다음과 같이 오토스켈랭 (autoscaling) 하여 신변수의 자료매트랙스 를 구할 수 있다.

z=(Xυ-Xi) / ••••••••••••••••••••••••••••••••• ······(1)

여기서 X와 는 각각 j번째 원소의 천명균농도 및 표춘연차이다.

z=(Zμ)H)(M •••••••••••••••••••••••••••••••••••••• _••…·(2)

N 및 M은 각각 분석된 시료수 및 분석원소의 수이다.

Z’Z = R ·(3)

Z ’Z은 관측치의 분산공분산매트릭스 R이며 그 데이타세트의 분산을 나타내고 있다.

각 주성분은 다음과 같은 선형결합으로 주어진다.

Yυ= k1z1+ k 2z2 + + kmzm············ "'(4)

매트릭스 기술법으로는 Y=Z·K가 된다. 여기서 Z(N ,M) 는 시료의 수가 N 이고 분석된 원소의 수가 M인 데이타 매트릭스이다. K(M, P)는 고유백타계수 매트릭스이고 Y(N, P) 는 성분득점 매트릭스이며 P는 식 (3)의 분산-공분산 매트릭스의 순위이다. 최대 가변도를 가질 때 각 고유값 (L L2,··L9 ) 과 이에 대응하는 고유벡타 계수 K를 산출할 수 있i며, 이 고유벡터계수를 식 (4)에 대입하여 각 성분의 득점 스코아를 얻을 수 있다.

션형 판멸식분석 법 (statistical linear discriminant analysis: SLDA) 전체시료가 둘 혹은 둘 이상의 군을 형성하고 있으며 N 개의 시료에서 각각 M개의 변수를 측정하여 얻은 NxM 데이타세트는 M차훤의 공간에서 N 개의 점으로 된 한 셋트로 나타낼 수 있다. 판별식분석법은 최소의 오차로 각 시료들이 어떤 군으로 분류되는가를 나타낼 수 있는 한 세트의 규칙올 찾는 것이다. 이 규칙을 판별식이라 한다. 산지훈류에 척용된다면, 분석하고자 하는 자료 매트릭스가 몇 개의 산지로 훈류훨 때 그 분리롤 최척화할 수 있는 판별식올 구하는 것으로 식(1)과 갈이 훤인변수들의 선형결합드로 주어진다.

{(Xu, xii, , Xii' ···f XiM)

=k 1xil + k 2X{2+…kJXii+ ... + kMXjM (1)

벡터기술법으혹 표시하면 식(l)은 Yi=K· Xi가 된다. 여기서 K는 원언변수외 계수백터이며 Xi는 각 시료i에서 측정된 원언변수의 성분

벡터이다. 또 Yi는 각 시료 i의 판별접수 (Discriminant score, DSi)이다.

모든 변수가 동등한 중요성을 가지도록 오토스켈령하여 신변수로 잔환시키면 원인변수 Xij는 표준화된 신변수 Zij로 전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식(1)의 판별식은 표준화된 신변수들의 선형결합으로 변환되어지며 식 (2)와 같다.

f(Zil' Zi2,"', Zij,"', ZiM)

=V1Zjl +V2Zi2+…VjZij+…+VMZiM …(2)

벡터기술법으로 표현하면 Yi=V· Zi가 되며 V는 표준화된 신변수의 계수 벡터이고 Zi는 각 시료 i에서 계산된 신변수의 성분벡터이다.

만약 전체시료가 K개의 군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군마다 Np(p=l, 2 K) 개의 시료를 포함하며, 각 시료마다 M개의 변수를 측정하였다고 하면 전체시료수는 N= 로 나타내어진다. 신변수에 대한 전체 분산매트릭스 T는 식 (3)으로 주어지며

여기서 B는 군간 분산매트릭스이며 W는 군내부 분산 매트릭스이다. 계수벡터 V로 나타내어진 백터 위에 신변수 Z의 투영은 Y=V·Z로 주어진다. 투영점들에 대한 군간분산과 군내부분산은 By=V’BV와 Wy=V’WV로 주어지며 W는 원인변수 Xii에서 계산된다. 투영점들의 군간분산에 대한 문내부분산의 버는 식 (4)와 같이 정의된다.

L=(V’BV)/(V’"WV)

Fisher 의 기준에 따라 L은 aL/av=o. 으로 최대화시켜 정리하면 식(5)가 된다.

BV=L ················································(5)

식 (5)의 양변에 W- 1을 곱하면 식(6)이 된다.

W-IBV=LV··························…(6)

식 (6)의 벡터 V는 매트릭스 W-1B 의 고유계수벡터이며 L은 벡터V에 대응하는 고유값임을 알 수 있다. L은 군의 분류를 최대화하기 위하여 군간분산에 대한 군내부분산의 비로 정의되므로 W-1B 의 가장 큰 고유값에 관계되는 고유벡터계수는 식 (2)의 판별식의 계수로 사용되어져야 한다.

SIMCA (statistical isolinear multiple component analysis)

동일한 성질을 갖는 시료들이 모여 하나의 군을 형성한다고 하면 이에 대한 일반척인 수학척 모렐로 표현할 수 있다. 분명한 군에 소속된 시료들에서 관찰된 데이타(참조사료 데이타세트)로부터 각 군의 수학척 모벨의 파라미터를 구하여 각 군을 특성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미지의 시료는 정의된 각 꿈의 모렐에 맞추어 봄으로써 어떠한 군에 소속되는지 혹은 옐외 (outlier) 의 시료인지 확인할 수 있다.

SIMCA 방법을 사용하면 데 이타의 분포가 정규분포에 따르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군으로 분류할 수 있고 필요한 가변도를 모두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분류법에 비해 탁월함이 업중되었다.

각 군 q는 파라미터 β, 8 및 e에 의하여 주성분식(l)로 정의된다.

YiI.

여기서 Y(q)는 q군에 속하고 있는 시료 k속에 함유된 i성분훤소의 오토스켈랭된 환석치이며 Aq 는 주성붐 수이다. βia(q) 빛 8ak(q)의 결정온 Z(qYZ(q) 매트릭스로후터 교유값 및 고유빽터률 구하는 것에 귀결된다. 여기서 Z는 Y에서 각 변수의 평균었(요토스켈령되었으므로O엄)을 뺀 다음 조합한 매트릭스이다. 편차(q)·는 z값에서 Aq 와 같은 수의 곱의 향을 빼주어 구한다. 곱항의 수 Aq 는 각 시료의 각 A값에서

편차의 제곱의 합 A를 각 편차 Eo.로부터 구하고 대응하는 A를 더 해주어 총계 DA를 계산한다. 이 DA값은 그 모렐식 (1) 이 각 A값에 있어서 참조시료세트의 행동을 얼마나 잘 나타내는지에 관한 측도가 된다. (DA-1-DA)/(M-Aq) vs DA/(η q-A q -l) (M-A q ) 에 관하여 F-test함으로써 마지막 곱의 항이 중요한지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 이때 사용한 임계 F-값 (p=O.05)은 (M-Aq) vs (η q-A q -l) (M-A q ) 에 대응한다. 앞서 구한 편차 Eo. (ql로부터 SO(ql2를 구할 수 있으며 q창조시료의 가변도를 나타내고 있다.

So(q)Z= 2: 2: E iJ.(Qlz/(nq-Aq-l) (M-Aq) ·········(2)

여기서 i =1, 2, "', M (M =분석된 원소의 수), a=1, 2, "', A (A =모렐식(I)에서 곱항의 수), k = 1 , 2,… n( η=q번째 창조시료세트에서 시료의 수) 어떤 시료 p의 관측치 YiP를 이상에서 구한 βia(ql 및 곱의 항 Aq 를 사용하여 다음 식으로 편차 EiP를 구한다.

Yip- ai(q)=Zip= Ca ia(q ’ + EiP(q) •••••••••••••• '(3)

여기서 파라미터 Cap는 편차 EiP를 최소화시켜 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구한 편차 EiP로부터 가변도 Sp(q)2을 구하여 시료 p가 q굳에 얼마나 찰 맞추어지는지 그 정도를 나타내고 있다.

시료 p가 어떤 q군에 속하는지 또한 열외인지에 판한 판단기준은 F=Sp(q)1 • 에 의하며 이때 임계 F-값 (P=o.05) 으로는 (M-Aq) vS(n-Aq-1) (M-Aq)올 취한다. 시료 p가 속하고 있는 군과의 거리는 수칙거리에 대웅하는 Sp로 나타내며 그외 관련군과의 거리는 실제거리에 대웅하는 d/q)률 사용한다. 이때 F=dp(Q)2ISo(뼈으로 테스트 할 수 있다.

4 산지추정의 예

(1) 土器

) 토기 • 산지추정의 기초

토기라는 것은 점토로 제작되며 점토는 지질학적인 공간내의 한 장소 즉 정토충으로부터 채취된다. 또한 이 정토는 지질학적 혹은 지구화학척 과정의 산물이며 그 생성은 암석으로부터의 풍화에 기인한다. 암석이 풍화되어 검토가 되어도 정토에는 암석의 화학특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점토는 그 지역의 지반을 구성하는 암석의 화학특성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토기태토에 있어서 화학특성상의 차이는 지역차를 반영하는 것이다(三注利-:198 3).

그런데 산지라고 하는, 분리될 수 있고 특성화되어 정의될 수 있는 공간을 설정하려면, 토기의 태토를 화학적으로 특성화하고 그러한 특성화가 공간척으로 정의되는 원료산지를 지척해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토기태토의 분석이 화학척 특성상의 상이성이나 상사성을 기술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산지에 대한 어떤 추론을 하고자 한다면, 자원획득지대라는 개념이 필요하게 되고 이 개념은 토기제작소와 결부된 공간척 언 범 위 (Rands and Bishop: 1980) 를 추론하는 데 유용하다.

분석화학에 의한 산지추정에서는 하냐의 토기제작소가 어떤 일정한 원료점토의 산지를 개발하였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으며 산지라고 하는 분리될 수 있는 공간올 토기태토의 화학척 특성화로부터 정의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2) 태토의 화학척 특성화

그러면 토기흩 어떻게 화학척으로 특성화할 것인가?

토기훌 제작할 때는 채취된 정토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흥청용 통하여 가공하는 것으로 알려져 었다. 토기률 사용하는 데 필요한 기농척, 장식척언 효과훌 얻기 위하여 가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水飛하여 장물율 제거한다든지, 청가제를 혼업시킨다든지, 표면에 slip울 업힌다든지 하는 행위가 이러한 가공에 해당한다

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토의 가공이 토기의 태토를 화학척으로 특성화하여 이것을 원료산지에 대입시키는 일을 어렵게 한다. 그러므로 토기태토를 분석하기에 앞서 점토를 가공하였는지의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삼국시대 뼈뿜와 같은 경우, 첨가제의 흔업은 인정되지만 수비나 slip을 바르는 가공은 인정되지 않는다. 특히 삼국시대 도기에는 석영이 훈입되는 양이 가장 많은데, 토기태토를 분석할 때 석영이 포함될 경우에는 미량성분의 농도가 상대척으로 낮아지게 된다( in and Sayre: 197 1). 따라서 삼국시대 도기를 산지추정분석할 경우에는 Tempering된 입 자를 제 외 한 점토만을 분석 해 야 한다. 여기 소개 하고자 하는 우리의 산지추정분석도 철저하게 점토만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정토의 주성분을 이루고 있는 원소는 Si, AI, Fe, Ca, K, Na, Mg 등과 같은 것들이다. 각각의 정토산지로부터 이러한 주성분원소를 분석하여 비교해 보면 함량분포의 범위가 서로 겹치는 것들이 많아서 점토를 산지별로 특성화하는 데는 척합하지 않다 (Poole and Finch: 1972). 토기연구에서 이러한 주성분들이 분석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분석은 그 목적이 산지추정이 아니고 제작기술을 복원해 보기 위한 연구인 것이다. 특히 뼈짧 磁짧에 있어서 白色度나 透光많 혹은 燒成時熱에 대하여 반응하는 양상 등을 검토하기 위한 것이다. 즉 同時의 商代白 와 印放 의 점토 선태에서의 차이를 보여준다든지 시대에 따라서 자기의 절이 높아지는 것을 鐵含有뚫의 차이로 나타내준다든지 하는 연구에서 주성분의 분석이 유용하다(李家治: 1978, =. 張福成• 鄭永I : 1964>'

그러므로 토기의 산지추정에서는 주성분보다는 미량성분원소의 분석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수많은 토기와 검토의 산지추정에서 미량성분원소를 분석하여 그 함량붐포로부터 산지률 추청하는 것이 유용함이 업충되어 왔고 우리나라에서도 그 유용성이 컴충되고 있다(李澈:1981 , 姜炯台: 198:5, Lee Kwan and Lee: 1985, Lee Kwan and Kang:1986, Lee Kwan Kim Lee and Kim: 1986).

3) 大聊耶土器의 산지분류

한국토기의 최초 산지추정은 고령지방고훈에서 훌토되는 대가야토

기였다(姜炯台: 1985. Lee Kwun Kim and Lee: 198 5). 靈本館洞2 3號. -A, E, D, E, F, G, 號樓등과 역시 高靈池山洞 樓• 34號. 35 號. 45 등에서 표본이 모아져 분석되었다. 토기의 種은 高杯와 蓋, 有 $形 · 短 와 底 등이 있고 色土 , 軟質關 , 質關 類들이 다 포함된다. 즉 色의 土器類들과 ·色 은 짜白色의 軟質• 種質 器類들이 표본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최초의 토기 산지추정은 다분히 시험적인 것이어서 토기의 양식론척, 지역척 단위들 상호간의 산지별 비교는 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자기시료들과 함께 분석되고 磁짧짧址別로 지역단위가 된 표본들과 비교하여 분류되었다. 避器試料와 土짧試料를 합하여 25 개 試料가 준비되고 중성자방사화분석에 의하여 Na, K, Sc, Cr, Fe, Co, Cu, Ga, Rb, Cs, Ba, La, Ce, Sm,. Eu, Tb, Lu, Hi, Ta, Th 등 총 개 의 미 량성분원소의 농도를 결정하였다(姜뼈台: 1985,Lee Kwun Kim and Lee:198정량분석된 개의 미량성분원소를 가지고 250711 시료의 상호판계를 알아보기 위하여 선돼된 자료분석법은 송이분석 (cluster analysis) 이다. 산지별, 양식척 단위로 인정된 고고학척 가셜을 검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cluster analysis를 시도할 수 있지만 이 분류법은 성철상으로도 확정척이지 않은 개체들 상호간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하여 채태되는 폼류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정량봄석된 20개 미량성분원소의 농도를 표준화한 값을 가지고 250개의 시료들 상호간의 非同一性(dissimilarity)올 송이분석법의 식(1)에 의해 구하였다.

그렴 1 은 버 동얼성 값을 사용하여 hierarchical centroid sorting method에 의해 작성한 dendrogram이다. 여기에서는 버교척 낮은 非同一性값에서 묶이는 群들에 속하는 시료들을 선청하였다. 이들 선정된 시료는 재훈휴되며 이들 선경된 시료의 출토지와 개수 그리고 각군의 고유부호롤 불여 표1 로 하였다. dendrogram애서 5.6% 이하의 버동앨성으로 우리용 이루는 8개의 亞群중에는 몇 개의 지역이 섞여있는 것도 있고 하나의 지역이 세 개의 亞群로 분리되는 것도 있다.

大 耶土 들로부터 구한 시료들이 3개의 亞 응로 분리되었

0.23

0.20 0.15 -。 재 0.10 0.05 0.00 ...'.. 그림 1 토기 및 자기시료의 Dendrogram

다. 磁 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지역으로부터 채집된 시료가 통일한 群을 이루고 있는 경우도 있는 데 비해서 토기는 원료언 結土를 선택하는데 자기와는 다름을 알 수 있다. 토기의 태토는 자기의 태토와는 수준이 다른 물질임을 알 수 있고 이는 토기와 자기를 함께 수학척으로 분류한 결과를 명가하는 데 고려해 두어야만 한다.

선정된 분군에 속하는 시료들올 재분류하기에 앞서 분석된 각 원소의 함량분포형태로부터 분류에 크게 기여하는 훤소률 추출하였다. 일부의 미량성분훤소의 함량에 규칙성과 상호판련된 꽤턴옵 이루게 되는 것은 결정장(crystal field) 의 영향과 이들 이온의 구조척 륙성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들 상판성이 큰 훨소는 원소의 주기표상에서 동족에 속하고 같은 핵학척 물리척 성질융 갖기 때문에 암씩의 생성, 풍화의 과정에서 같은 지구화학척 착용옳 받은 결과로 알려져 었다(Joron, Treuil Jaffrezic: 1977, 三 利一: 1983> 이러한 분포관계로부터 분류에 크게 기언하는 훤소로서 Cs, Cr, Sm, Sc, Th 풍의 미량성훈원소들이 선정되었다.

표 1 料의 出土地와 부호 및 종류

추출된 5개의 미량성분훤소롤 가지고 선정된 분군의 시료들을 재분류하였다. 그 결과가 그렴 2언데, 홉磁와 白磁類< 口, V, X) 들은 지역별로 매우 찰 훈류되는 데 버혜 고령의 대가야토기 ('Y, .A, 0) 들은 동얼산지언데도 찰 폴류가 되지 않는다.

다용로 우리는 션형판벌붐석에 의하여 대가야토기훌 세분하였다.

0.5

0.4 0.3 K。G ~O 0.2 0.1 0.0 그림 2 토기 및 자기시료의 Dendrogram( 각 부호는 표 l참 조)

이 분류에서는 3 개의 i也域群으로부터 시료를 선정하였다. 경기도지역의 토기와 경상남도 킴해지역의 토기, 고령의 대가야지역토기 등 3지역의 토기분석 자료를 가지고 판별식분석에 의해 특정화를 시도하였다 (Lee Kwun lung Lee and Kim: 1986, Lee Kwun lung Kim Lee and Kim:1986). 이 지역척 특성화를 위하여 분류에 크게 기인한다고 생각되는 Cu, K, La, Na, Ce, Th, Cr, Cs, Sc, Rb, Co 둥 개의 성분원소를 션정하였다.

선택된 성분훤소의 분석자료세트률 가지고 최소의 오차로서 셰 개의 群올 분리할 수 있는 두 개의 判別핍 (dininant function)를 구하였다. 이 판별식분석은 토기태토의 화학척 뎌l 이타에 의한 통계학척 분류가 고고학척 지역군의 훈류와 어느 만큼 일치흩}는가흩 검충하는 것이다. 이러한 검충과청올 통하여 보다 세훈된 산지추정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갯이다. 두 판별함수에 대한 각 훨빠외 判別 (discninant score) 률 구하였다. 그 다읍으혹 두 개의 판혈청수용 촉으로 한 2차원 명변 위에 각 지역군의 영역과 함째 각 시료외 뀌치를

잉N。F 。eNn -o. b o。 P -o 뼈$〈oN↓피회 l뼈띠o@ 훌U~빼 @ Rm곱D oM oMQ e- n‘ R 뿌

P ·뻐 I1 ~J 。~~ t>tt>>t> PP εr-4 ~N 2('η S~ oN ~하뻐 u ~~ 으....‘ P •P P t> o’. l~며패j n 션rα뎌oi i ’bP .p.... 〈매걱 전nro 。。 ~.. o。 ~뎌o )~ ’ / tη 하홉i JO<뎌O i’ ’‘@‘ ‘ -。N ,-없~-줍-;RR동rδ£ 3ib:융。5 R. i 。 1。1← ! / • x ’미lt ,.、 } x 꽤 )• 。·” |。.N 。-- 。。. 。- -- .。N ·l x ·。” |.。 l이

표시하였다.

여기에서 두 판별함수가 통계학적으로 중요한지를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X 2 -Statistics(Barlett’5 V) 에 의해 위의 두 판별함수가 통계적으로 중요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판별식 분석에 의하여 京幾, 慶南, 高靈의 三地域群으로부터 선정된 87개의 土뚫標本중에서 79% 의 시료가 각 군에 정확히 배당되었다(그럽 3).

또한 出土地別로 A, B, C 3개 群으로 구분된 高靈의 大 耶土器를 분류하고자 하였다. 高靈의 세 표群을 분류해 주는 데 크게 기여하는 Sm, Ga, La, Cs, Tb, Se, Rb, Fe 등 8개의 성분원소가 선정되었다. 이들 자료세트를 가지고 각 시료에 대한 판별점수를 구하여, 2차원 평면의 판별공간에 각 시료의 위치와 亞群의 분리선을 설정하였다(그림4). 위의 판별식분석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試料i 가 그 위치 (DSi) 로부터 어떤 分群으로 분류되려면 각각의 分群, g의 위치 즉 DSp , DSq와 비교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하나 시료 i 가 高靈A群에 소속되려면 Ac 흐 Be와 Ae

마하라노비스거리 (Mahalanobis distance) 값을 이용한 上記의 分類規則을 이용하여 어느 分群에 해당하는지 모르는 미지의 結土試科를 통정할 수 있다. 만일 미지의 시료 i가 A群어l 해당된다면,

Ae=(DSμ-DS1 ,group A)2+ (DS2••-DS2,group AP]-t

Be= (DS1,.-DS1,group s )2+ (DS2,.-DS2,group s )2]+Cc=( DSl,.- DSl.l1r oup C>2 + (DS2 . -DS2 ,g r oup c)2 ]-t

일 때 AcBc이고 Ac

4) 土 址出土土器의 別분류

앞서 홈훌의 大뼈耶土器들이 세 개의 亞群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했지만 이것은 지역별 토기태토의 화학척언 특성화를 시도했을 뿔 그 이상의 고고학척 의미는 갖지 않는다. 이러한 시도를 넘어 고고학적의미를 가진 산지추청이 되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려해야만 한

다.

첫째로, 어디에서 !첼料結土가 채취되고 어디에서 제작되어 어디로 운반되었는지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원료산지, 제작소, 출토지 등 세 지점으로부터 시료들이 모아져야 한다 (Harbottle 1982).

둘째로, 광범한 지질조사를 통하여 정토의 화학적 특성화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을 공간적 분포와 관계하여 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토기의 제속성들을 관찰하여 토기의 시간척 • 공간적 분포를 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로, 그런 다음 지철구조의 특성화-문화적 특성화-화학척 특성화 사이의 공간적언 관계를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토기의 산지추정에서는 무엇보다도 토기의 제작소(짧址)와 토기 출토지 (古빽, 댐 등)와의 관계가 검토되어야 하겠고, 어떤 양식에 속하는 토기의 공간적 분포와 같이 고고학적으로 특성화된 유물의 공간척 분포로부터 토기의 산지에 관한 문제의 제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土뽑짧址로부터 수집한 土짧片틀을 분석하여 로 정확히 분류가 이루어진다면 이후에 古境이나 住居地, 貝壞들에서 출토되는 토기들을 정확히 산지에 동정할 수 있다고 보고 土짧짧地에서 시료를 모아 분석하여 수학척 분류를 시도하였다(李澈• 姜炯台• 李盛周: 마발표, 월炯台: 1988).

표 2 土器 및 結土試의 出土地와 固有符

시료가 수집된 土器黨地는 慶 . 月城地域의 古 土 (內南面上辛里, 同花 냉정골, 川北面德山里)와 高靈지역의 大 耶土器 ( 內 洞) , 慶州• 月城地혔의 統一新羅 北面花山里) 등이고 이와 함께 주변의 古境出土土器試料로서 花짝里냉정골고분 출토 토기와 原料結土시료로서 慶州月城地域結土옳地4지점으로부터 시료를 채취하여 어느 짧地에 해당하는지를 검토하였다(표 2).

역시 중성자방사화분석에 의해 17개의 미량성분원소 Sn, As, Ga, K, Na, La, Ce, 'Yb, Th, Cr, Hf, Cs, Se, Rb, Fe, Co, Eu 퉁이 7 2종의 시료로부터 분석되었고 이 분석데이타세트를 가지고 주성분분석 (peA)을 이용하여 데이타의 분포를 검토하였다. PCA에 의해 古新雜짧群-大 耶짧群-統一新雜 群의 3개의 群이 형성됨을 확언하였다(그렴 5).

주성분분석 결과로부터 토기의 창조시료를 선정하였고 다시 線型判別式分析(SLDA)에 의해 세 군의 분류규칙을 정하고자 하였다. 이때에는 9개의 미량성분원소 Sm, Ga, K, Na , Ce, Th, Cr, Fe, Eu가 분류에 크게 기여하는 원소로 선청되어 이들의 함량데이타로부터 분류되었다. 두 개의 판별점수를 두 축으로 하는 1차원 평변에 각 試料를

..' , -; - 20 ., a’’. 디-- -i - -4.0 -2.0 0.0 2.0 5.0 FIRST EIGENVEKTOR I 1주 성문) 그림 5 主成分分析(pcA) 에 의한 土 址出土 의 分布

-4.0 -2.0 0.0 2.0

。 。 2.0 2.0 mQ N 。 A 。。~ & - ~63 2 A 0.0 A ’, 0.0

V A

그림 6 상신리-화곡동-덕산리, 내곡동, 화산리 토기요지시료의 선형판벌식 분석 (SLDA) 결과

표시한 결과(그림 6) , 古新羅훌훌群(上辛 - 里-衛山멜)-大 耶 群-純一新羅 群의 3군이 98 .3% 의 효율로 분류되었다.

여기에서 慶싸I . 月城地城의 古新羅훌훌群에 속하는 세 개의 亞群 즉上辛里-化:fr里-德山里를 다시 判別式分析로 재분류하였는데 그 절과(그렴 7) 3개의 亞群이 84·4%의 효율로 훈류훨 수 있었다.

우리는 新羅• 耶土器 址출토 토기훌 분석하여 얻온 자료훌 수학척로 분류하는 데 있어서 3 단계의 폼류천략윷 세웠다. 첫째로 추성분분석법 (peA) 을 사용하여 각 시료를의 폼포률 검토하고(그렴 5)각 시료들이 어떠한 군올 이루고 있는지훌 알아본다. 률째로‘ 각 시훌들이 어떠한 群울 이루고 있다면 이훌 참조시료씻효(training set)로

-2.0 -1.0 0.0 1.0 2.0 / 13.0

/ 가I 。‘ o NI (f) 1Q. 0 1 v.. v / -11.0 a l' 0.0I.0 & 。 -1-1. 0 -2.01-3.01- 스 -1-3.0 -2.0 -1.0 0.0 1.0 DS I 2.0 3.0

그림 7 상신리,화곡동, 덕산리 토기요지의 선형판볕식 분석 (SLDA) 및 정토와 고분토기의 분류겉과

삼아서 線훨뿜j別式分折에 의하여 재분류한다. 셋째로 두 개의 판별식에 의한 z차훨 명변에 나타난 분류 결과에 미지의 시료률 대업시켜 그 산지훌 동청한다.

이와 같온 폴류방법은 다음과 칼은 고고학척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록 우리가 training set로 선정한 群은 고고학척 시료의 지질학척

특성을 화학적으로 분석하고 통계적으로 분류한 群이다. 우리는 이러한 群을 셜정함으로써 그것이 고고학척인 고찰(짧뼈別, 樣式別, 出土地別그 어떤 관점에서든지간에)과 결합하여 분류된 群과 얼마만큼 일치 하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그것이 몇 퍼센트의 확률로 일치함이 밝혀진다면 우리는 화학적 분석과 통계학척인 방법으로 고고학척 사실을 그만큼의 확률로 뒷받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토기표본이 모두 제작소(혔址)로부터 수집된 것이므로 古 에서 출토되는 미지의 土뿜랩料를 산지추정하였을 때 그 청도의 확률로 산지추정은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古 大 耶 -統一新維 의 분류가 9 8 .3% 이므로 우리가 미지의 시료를 분석하여 위의 세 가지 산지에 동청했을 혜 그 정확도는 9 8 .3% 가 된다는 뭇이다.

(2) 觸

I) 古代 의 생산기술

최고의 빠쐐製유물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등지에서 출토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BC 2.3 0년경의 유척으로부터 유리덩어리가 출토된 바가 있어서 적어도 이 시기부터는 유리가 제작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고대유리는 소다-석회유리로서 B.C.8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냥유리 製法이 개발될 때까지 이 지역 유리제작술의 특정을 이룬다. 이 소다-석회유리라는 것은 실리카의 훌훌뽀點을 낮추기 위해 소다(Na2 0) 와 석회 (CaD)률 청가 시켜 만든 유리를 말하며 여기에 마그네시아(MgO)가 얼청한 양으로 들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고대 오리엔트 지방에서는 각 지역에 따라 製法上의 同一性을 보이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유리를 구분하는 데는 CaD에 대한 MgO의 비율올 이용하고 있다(Goffer:1980, 148).

Sayre와 Smith(1962) 는 중동지방파 이집트, 유럽, 북아프리카지역의 고대유리를 그 성분함량의 차이로부터 ’가지 Group.으로 구폼하였는데 MgO의 함량이 높은 (4.6- 2 .9%) B.C. 2,00。년대 B.C.연

년)의 統獨群® K2 0와 MgO가 낮은 함량을 보이고 Sb2 0S 의 함량이 높은 (1. 93 -0·53%) 안티몬유리 @ 동방의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안티몬유리에 대하여 안티몬의 함량이 낮고 MnO의 함량이 상대적으로 높은 서방의 로만글라스群 고대오리엔트 유리제법을 계승한 K2O와 MgO의 함량이 높은 초기 이슬람유리군 @ 끝으로 PbO의 함량이 매우 높은 (4°-33%) 이슬람납유리군이 그것이다. 이들 5 가지 群은 각각 지역적 연대적언 분류군에 대업될 수 있다고 한다 (Sayre and Smith: 1962, Smith: 1970).

중국에서는 고대오리엔트나 서방세계의 유리제법과 현저한 차이를 보이면서 독자적인 유리제작기술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중국에서 최고의 유리는 束周初까지 소급되지만 회소한 예에 불과하고 척어도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그 출토예가 많아지게 된다. B.c. 4세기에서 z세기사이의 연대로 추정되는 청동기에 유리구슬이 강업되어 있는 예가 유존한다. 이 유리구슬은 분석화학자인 Seligmann 에 의해 분석되어 그것이 Ba의 함량이 상당히 높은 납유리로 밝혀진 바 있다.

이러한 유리구슬은 서방세계에서도 유행하던 양식이지만 성분함량에서 서방의 예와는 푸렷한 차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의 독자적언 유리제법올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由水힘雄: 1975. 26- 27, 1977, 102). 이 중국식 납유리에는 PbO가 약 35%정도 함유되어 있어서 PbO의 함유량만으로는 서방의 납유리와 다를 바가 없지만 BaO의 함량이 약 15% 정도에 이르고 있어 푸렷한 차이를 볼 수 있다.

이러한 납-바륭유리는 한대 이전의 중국유리제법의 특색을 이푼다. Seligmann과 Beck의 폼석 연구 (Seligmann and Beck: 1938) 에 따르면 한대 이전의 남유리에는 BaO가 함유되어 있으나 당대 이후의 납유리에는 BaG가 없거나, 었다 하더라도 5% 이하 청도로 소량이 함유되어 있율 뿔이다. 그리고 당대 이후의 납유리에는 PbO의 함량이 월둥히 높아진다(由水常雄: 1975. 27

서방세계의 유리가 나트륨유리나 칼륨유리의 전통올 가진 데 비해서 충국에서는 전통척로 납유리폴 생산하였다. 그련데 중국에서도 서방세계외 유리제품과 꼭 같은 유리제품이 출토되고 있다.

河北쩔 훌훌외 封民훌群충에 北훨祖民훌훌(훌훌季: 1957) , 廣州市械技빼의 末期(市文理 : 195), 東품期의 江南

省南京市象山7 號꿇(南京市댄物f혐 : 1972 ) , 겼풍寧省北票-縣西합흉子에서 발견된 北빡의 팩素꽤의 꿇(짧f홉漸: 1973) 등에서 로만글라스 계통의 유리제품과 형태나 색깔이 거의 일치하는 것들이 출토된 바 있다. 중국 華大學에서 線 光分析으로 封民훌에서 출토된 로만글라스系의 杯의 화학성분을 定 分析한 결과가 있다. 封훨 出土統 杯는 좁綠色의 전형적인 網救統챔杯이며 중부유럽과 地中海암뿜 등지에서 많이 출토되는 것이다. 정량분석 결과 납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고 Si와 Ca가 주성분을 이루고 Cl과 K가 비교척 많았다(民, 寶中: 1982).

이러한 성분함량은 중국식 統뼈製法과는 관계가 없는 소다-석회유리이다. 由水 975, 33 - 39) 은 중국에서 출토된 로만글라스를 양식적인 비교를 통하여 서방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련 바 있다. 封 꿇 出土網救짧작챔杯의 분석자들도 이것이 동로마제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소다-석회유리의 생산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代의 洪이 저숭한 『抱朴子 白」篇-에는 〈外國作水精施, 寶是合 種](以作之今交(交) , 廣(廣싸) 쫓有得其法而鐘之〉라고 기록된것으로 보아 중국내 제한된 지역에서는 고대 서방의 유리제법이 소개되어 그 방법드로 유리가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특히 유리의 원료가 되는 五핸의 依가 천연수산화나트륨, 천연탄산칼륨, 草木의 재, 소금 등으로 생각하는데 이들은 중국내에서 천연척으로 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A.D.4세기경에는 서방의 소다-석회유리의 제작기술이 전래되어 동양의 일부지역에서 그러한 방법에 의해 유리가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2) 韓圍古代의 生 과 塵地

한국에서의 流 製品의 출토는 樂浪古境의 예가 제일 年代가 것이다. 삼국시대전기 (原三園)에 해당하는 여러 유척 측 海貝, 명양 里也區住居地 과 같은 生活遺置이나 朝團i同, 老團洞, 遺演洞, 浦里土 둥과 같은 遺들에서 裝身具로 쓰인 유리구술이나 流 玉類들이 출토되었다.

이들 品들이 구체척 로 어떠한 방법으로 제각되었는지는 븐

명하지 않다. 다만 중국식 流觸製作技術이 樂浪을 통하여 전래되어한국에서 생산되었거나 중국에서 수업된 유물로 생각되어 왔다.

지금까지 이 시기의 유리제품이 분석보고된 예가 없어서 그러한 추론은 구체척인 중거의 뒷받침이 없는 형편이다.

일본의 顆生時代의 유척에서도 유리제품이 출토된다. 九州福의須 本에서 출토된 유리 玉과 짤玉, 그리고 飯 市立岩에서 출토된 管玉동의 網生 代遺路에서 출토된 유물이 분석된 바 있다. 이들 유물은 모두 BaO가 14- 16% 정도 들어 있고 PbO의 함량이 38.5-4°·8% 정도 된다(山 雄: 198I a). 이러한 성분함량은 중국 漢大의유리제풍과 일치한다. 또한 유리에 포함된 납의 isotope 들 사이의 비융이 일본산납이 아니라 중국산납에 가캅다고 한다(山뼈一雄: .I98I b).그런데 生時 遺敵인 須~ 부근에서 玉을 만들기 위한 型이 출토된 바 있고, 특히 玉은 한반도와 일본 특유의 것이라 流 製曲玉자체가 그대로 중국에서 수업되었다기보다 여러가지 代의 유리구슬을 수입하여 이것을 녹여 판옥이나 曲玉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山뼈雄: I98I a).

한반도의 유리제품이 과연 국내산언지 아니면 중국산인지는 문제로 남아 있고 만약 국내산이라면 어디에서 제작되어 분배 • 교역되었는지 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최근에 網生中 遊體인 山縣百問川今 遺 에서 유리슬러그가 출토되었다고 하여 網生時代의 유리제작 가능성올 시사한 바 있다(井上弘: 1982). 그러나 유리슬러그의 성분함량에서 볼 때 A12 가 12.63% 정도에 이르고 있어서 서방의 고대유리나 중국고대유리 그 어느 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뿐더러 유리로서는 알루미나의 함량이 너무 높아서 유리슬러그로서 보기 어렵다.

삼국시대 중기의 고훈에서는 유리제 유물이 막대한 양으로 출토될 뿔만 아니라 그 종류도 다양해진다. 유리제의 九玉, 대추玉, 쫓玉, 曲玉파 갈은 玉類뿔만 아니라 새로이 유리제 容器類가 추가된다. 특히 유리제 容짧類는 삼국 중에서 오칙 新羅古樓에서만 출토되고 었다. 州地 의 大 古樓 金, 鳳, 天馬(古樓). 南大 를(98 古樓) 둥에서 다수의 유리제 容 가 출토되었다.

또한 玉類에 있어서도 備으로 쓰인 玉야 한 고분에서 수

천 개씩 출토된다.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리제품을 제작기술 • 산지와 관련하여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流 容 했로서 형태와 색깔이 전형적인 Roman glass와 꼭 같다. 이러한 점은 由水常維에 의하여 자세히 설명된 바 (由水 雄: 1975. 1976• 1977) 와갇이 古新 大型古에서 출토되는 용기류는 중부유럽, 혹해와 지중해 연안, 시리아 지역의 Roman glass들이 수입된 것이 틀렴없다. 둘째로는 玉, 玉, 多面玉玉• 玉등의 각종 玉類로서 慶 古樓에서만 출토되는 것이 아니라, 三國의 각 고분에서 쫓 出土되고 形와 文 등에서 한국적 특색을 보이는 유리제품이 있다. 이러한 流 玉類들은 한 古 에서 수천개 혹은 개 개씩이나 출토되고 있는 점 대추玉이나 뻐玉들은 한국 고유의 양식이라는 점 味都王隆·前域區 4에서 출토된 A物象 玉, 仁 洞古境群 群 號 어 서 출토된 거북 玉등의 玉들은 象 文樣이 新羅• 의 고유한 모티브라는 점을 들어 이들 유리제품이 한국산임을 밝힌 연구가 있다(李냈읍 : 1981 .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분석화학을 이용한 고대유리의 제작기술이나 산지의 연구가 거의 없었다. 유리에 포함된 주성분이나 亞 의 함량을 분석하여 고대유리 제작기술상의 운제를 해결하고자 한 연구도 거의 없으며, 미량성분을 이용한 산지추정의 연구도 아칙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기에서 소개 하고자 하는 중성자방사화분석올 이용한 한국 고대유리의 산지추정연구는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되는 수많은 유리제품의 산지를 미량성분의 함량분포로부터 추정하고자 하는 연구이며, 부차적으로 한국고대유리의 제작기술에 대한 정보도 얻올 수 있었다. 主成分이나 亞成分만올 分析하여 나트륨유라이냐 칼륨유리이냐 아니면 납유리이냐 하는 것을 결정해 주는 데서 끝나지 않고 方 製品과 韓園流離 을 地別로 특성화하는 것이 이 연구의 목켜이다.

3) 한국고대유리 산지추정

유리의 화학조성과 산지추청

보통 유리는 실리카 (SiO ) 로 되어 었다. 실리카가 용융흰 상태에셔

갑자기 냉각시키면 결정화되지 않은 非옮質의 유리가 생성된다. 그련데 순수한 실리차는 , 7 00·C 정도에 이르러 용융되므로 고대의 장인이 이 정도의 고온을 얻기란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보다 낮은 온도에서 실리카를 녹이기 위해 일종의 조용제를 첨가하게 된다. 이러한 조용제로서 첨가된 Na, Ca, K 등의 원자는 非옮.( 실리카의 Si와 0가 구성하는 업체척인 그물 속에 갇히게 된다. 이밖에 유리의 특별한 화학척, 물리척 안정성을 얻기 위해 첨가하는 성분, 특별한 색상올 내기 위한 착색제 성분, 투명도냐 불투명도를 증가시키기 위해 첨가하는 성분 퉁이 유리 속에 개재되어 있다.

혼히 유리를 분석한다면 주성분이나 아성분을 분석하는 예가 많았다. 이러한 연구사례는 국내에서나 일본 중국 등에서도 자주 본다. 그러나 주성분을 분석하여 어떤 제작소에서 만든 유리를 다른 제작소의 유리와 구분하는 것은 용이하지도 않고 바람직한 방법도 아니다(Caley: 1962, Sayre and Smith: 1961 ). 주성분을 분석한다는 것은 제작기술을 이해하기 위한 연구이며 제작기술은 널리 알려져 광법위한 지역에 동일한 제작기술의 전통이 유지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Sayre and Smith: 1961 , Smith: 197

특히 고대의 유리제작자들은 유리의 용융점을 낮추기 위한 K, Ca, Na, Ph 등의 조용제를 천연원료로부터 구하였다(Turner: 1956 ). Na와 같은 것은 천연탄산나트륨이나 海草로부터 구하고 K은 초목의 재에서 구하는 것으로 말려져 있다 (FoIl and Hoops: 1982). 또는 중국에서 천연수산화나트륨이 內陸湖에서 구해지고(世民, 周寶中: 1982 ) , 나일강 하류의 Wadi는 천연탄산나트륨 산지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집트의 Wadi에서 산출하는 탄산나트륨은 특정한 성분원소 (Eu이와 상관판계율 가지고 있어 그것올 훤료로 제작한 유리제풍을 분리해 내는 데 유용하 (Sayre: 1965>

주성훈이나 아성폼들은 유리에 청가되는 천연원료의 종류에 따라 극별한 상판판계훌 가지므로(Velde and Gendron: 1980, Folk and Hoops: 1982, Turner: 1956) 산지추정올 위 한 연구에서 는 이 러 한 성분 고려하는 데 신중융 요한다. 또한 유리에 어떠한 색깔올 내기 위해서라든지, 혹은 유리의 내구성율 높이기 위해서라든지, 유리률 제작하는 떼 작업성융 좋게 하기 위해서 유리에 고의로 어떠한 성분들

을 투여하는데, 그러한 성분들이 상관관계를 가지는 경우가 있므로 (Handerson and Warren: 1981) 산지추정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사실들을 주의깊게 평가해야만 한다.

산지추정 연구에서는 고대 유리제작자들이 어떤 효파를 내기 위해 고의로 첨가시컨 성분틀을 고려하는 데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성분들을 통하여 분류를 하였다연 그 분류는 산지에 따른 분류가 되지 못하고 제작기술상의 분류가 되고 말 것이다. 각 제작소마다 제작기숭아 달랐으리라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제작기술상의 발명은 광범위한 지역에 보급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Sayre and Smith: 1961, Velde and Gendron: 198o). 유리의 산지추정에서는 Pb의 동위원소들 사이의 비율이나 산소 동위원소인 0-18의 농도를 이 용하는 방법 이 개 발되 어 왔으며 (Brill: 1970, Brill and Warnpier: 1967, Brill, Shieds awnd Wampler) , 또한 미 량성분의 함량분포로 부터 산지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효과척인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이 in and Sayre: 1974, Christie, Brenna and Straume: 1979, Velde and Gendron:1980, Henderson and Warren: 1981).

시료의 션정과 분석

이 연구에서는 삼국시대 각 古과 츄址, 그리고 유리제작소로 알려진 장소 등에서 총 45 개의 流f뼈片틀을 시료로 선정하여 분석하였다. 출토지별로 시료를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표 3).

( i ) 慶州皇南大爆으로부터 구한 유리그릇조각 5 정(무색, 청색, 청남색) , 유리구슬 9점(色)

( ii ) 俠川玉田古樓群24號樓의 청색츄리구슬 4점, 同43 境의 色유리구솔 4점, 同43 훌훌境의 홉한色유리구슬 3정

(iii) 鋼動춤址百濟文化層出土綠色유리그릇 조각 16점

(iv) 月城群內南面徵훌里유리가마로 구천되어 온 곳에서 청남색 流슬러그 3점

(V) 昌原道漢洞1號土 出土寶色유리구슐 청, 寶藍色

선정된 45종의 유리시료에서 19가지의 원소(Ag, As, Br, ee, Co, Cr, Eu, Fe, Hf, K, La, Lu, Na, Ru, Sb, Se, Sm, Th, Zn) 훌 충성 자방사분석에

경북 경주 황남대총, 경남 합천 옥천리 24 호분, 경남 합천 욕전리 9호분, 경남 합천 육전리 43호분, 전북 익산 미욕사지, 갱남 창훨 도채동 Z호훈

의하여 분석하고, 한 가지의 원소 Pb는 원자홉수분광분석에 의하여 분석하였다. 따라서 총 45종의 시료에서 가지의 훤소가 정량분석되었다(표 3). 이들 분석데이타를 가지고 主威分分析法(principal component analysis) 과 SIMCA (statistical isolinear multiple component analysis)를 이용하여 시료틀 상호간의 관계를 검토하였다.

표3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분석된 주성분과 미량성분은 비교척 반강기가 긴 核種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연구에서 중성자방사 분석은 비교척 긴 반감기의 核種을 이용하였으므로 CaO, MgO, Si02 ’A120 3 , BaO와 같은 주요성분은 분석에서 빠져 있다. 그래서 주성분을 이용하여 시료 상호간의 관계를 알아보기는 어렵다. 유리에서 주성분을 이루는 CaO, Na20 , KzO, Fe20s , PbO, A120 3 , BaO와 같은 것은 유리를 제조할 때 특별한 효파를 얻기 위해 고의로 첨가되는 성분으로 알려져 있다.

표3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시료 .6. (6-10) 이 칼륨을 함유한 알칼리유리이고, .6. (12, 13) , ‘ (15- 2I )은 나트륨을 함유한 알칼리유리이며 그리고 口(25-40) .A., θ(45) 는 납유리라는 것이다.

古代流 製作技術과 관련해서 위의 표 4개의 성분함량을 통하여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아래와 같다.

첫째, 皇南大 出土.6. (Il) 시료가 납유리인 것을 제외하면 고신라와 耶의 古樓에서 출토되는 유리는 Na K올 함유한 알칼리 유리이다. 따라서 중국식 유리제법이 아니라 서방식 유리제법 전통을 따르고 있다.

둘째, 益山弼勳 址의 백제문화충에서 출토된 유리편들은 모두 납의 함량이 %-80% 까지 들어가는 납유리로서 홉代유리제법에 따른 것이다.

셋째, 古新 와 耶古境에서 출토된 납유리제풍 중에서 皇南大에서 출토된 유리용기 ~(II) 시료는 Roman glass 계의 납유리 제작기슐과 유사하다.

다용으로 현소 상호간의 상관관계률 알아보기 위하여 상판매트릭스훌 구하였다(표 4> 이 표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상관계수가 보다커서 전체데이타롤 홍하여 푸렷한 양의 상관관계률 가지는 현소의 조합온 다읍과 갈다 : (Pb, Ag), (Sb, Ag), (Eu, Sm, La, Lu, Th, Sc

Fe) , (Co, Br, K, Ce, Sc) , (Br, Sm, Ce, Sc) , (Ru, As) , (Hf, La, Th) , (Th, Sm, La, Lu) , (Ce, K) , (La, Sm), (K, Br, Sm) , (Br, Sm) 같은 조합에 속하는 원소끼리는 원료의 공급원이 동일할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으나, 누락된 주성분원소를 분석하여 그러한 상관관계를 더 검토할 필요가 있고, 또한 고고학적 혹 화학적 인 고찰을 통한 분류와 관계시켜 자세히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Na와 K의 상관계수는 음의 값을 보이고 있어 두 원소의 원료공급원이 다르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흔히 Na는 해양식툴이나 천연탄산나트륨을 공급원으로 하고 K은 초목의 재를 공급원으로 한다고 알려져 있다(Turner: 1920, Folk and Hoops: 1982, Velde and Gendron: 1980).

수학적 분류

평상척인 클러스터령법을 이용하여 분석자료를 분류했을 경우 각 원소의 함량변수가 정규분포를 이루어야 의미있는 분류가 될 수 였다. 그리고 이 방법은 같은 分群이 아닌데도 포함되어 있는 열외(outlier)의 시료가 존재할 때나 분류에 기여하지 않는 변수가 끼어 있을 때 척절한 방법이 아니다.

우리는 고대유리분석자료를 산지에 따라 분류하는 데 2단계의 분류절차에 따랐다. 첫째 主않分分析에 의한 분류이다. 주성분 I 과 주성분 2 에 의해 각 시료들의 분포를 관찰하였을 때 둘 이상의 分群이 형성됨을 불 수 있었고 그 分群에 포함된 시료를 참조시료세트 (training set) 로 하였다. 이 分群은 고고학척언 분류와는 상관 없이 하나의 화학척-통계척으로 훈류된 것이다. 이 分群이 또다른 상위의 통계적 기법에 의해 고고학척인 분류와 얼치하고 있는지를 검증해야 한다.

둘째, 2개의 주성분S로는 48 % 의 가변도밖에 고려하지 못한 것이므로 군올 분류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누락되어 있다. 따라서 필요한 가변도롤 오두 사용할 수 있는 SIMCA 법올 이용하였다(Duewer, Kowalski and Schatzki: 1975, Christie, Brenna and Straume: 1979, Lee Kwun Kang et al: 1987a.b). 이 SIMCA를 통하여 채컴토한 결과 고고학척언 판정에서 분류된 것과 화학척-통계학척언 판점에서 분류된 것이 얼치함율 훌 수 있었다.

표 5 Eigenvalue 와 그 寄與度

Component Ii 34567 Eigenvalue 6,7 4 2.812·33 1.9 2 1·5°1·°4 。 .86 Contribution(%) 33·714.1 1l·7 9.67·55.24·3 Cumulative(%) 33·747.859·569.176.681.886.1

먼저 주성분분석을 사용하여 최대가변도를 가질 때 각 고유값과 각 고유값이 기여하는 % 및 누척%를 표 5 에 나타내었다. 첫번째 고유벡터계수에 대응하는 득점스코아를 X축에, 두번째 고유백터계수에 대응하는 득점스코아를 Y축에 도시한 것이 그렴 8 이다. 이 그렴을 통하여 볼 때 모두 5개의 群이 언정된다. 칼륨함유 알칼리유리 (2 .6. (6-10) )와 나트륨함유 알칼리유리 (3 .6‘ (5- 21 » 는 각각 별개의 群을 이루고 있다. 같은 납유리일지라도 알칼리성납유리(5口(34-38 » 와 보통 납유리 (4디 (25 - 33, 39 , 4°» 는 각각 별도의 群을 이루고 있다. 또한 皇南大爆유리그릇시료 (1 .6. (1-3 , ll, 14» 는 하나의 별도의 群을 이루고 있다.

표5와 그림 8을 통해서 볼 때 그립 8은 전체가변도 중에서 48%만울 이용하여 도시한 것이기 때문에 5 2 % 의 가변도는 고려되지 않았다.즉 각 群으로 분류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누락된 것이다. SIMCA 법을 사용하면 데이타의 분포가 정규분포에 따르는지에 판계없이 군으로 분류할 수 있고 몇 개의 類似품料가 갇은 군이 아닌데도 포함되어 있는지를 확인할 수도 있다(Duewer, Kowalski and Schatzki: 1975).

SIMCA 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창고시료세트(training set)가 필요한데, 주성분분석의 결과로 얻은 각 群別試料홉 각 군의 창고시료로 삼았다. 고고학척인 판찰내용울 통한 分群즉 출토지가 칼은 시료률이 그림 8파 같이 동일한 群으로 묶얼 경우 이들 시료는 창죠식료로 하였고 그외의 시료는 테스트시료로 삼았다. 그래셔 (i) 이틀 동얼한 群으로 묶언 훌照試料가 독렵된 분군율 이루고 있는지 여부와 (피)옐외 (outlier) 에 해당하는 시료가 과연 옐외언지의 여후홉 SIMCA 법요로채검토하였다.

SIMCA에 따르면 각 붐군 q는 파라미터 a , β, 8, e 에 의하여 철

그립 8 제 I 져l :l eigenvektor에 의한 유리시료의 分布

정되며 다음과 같은 주성훈식 (principal component equation) 에 의해 청의된다.

a-I

여기에서 Y(J(I)는 q群에 속하고 있는 시료 k속에 함유된 i성분원소의 표준화된 분석치이며 Aq는 주성붐의 수이다. 그리고 £는 하나의 이상척언 모멜로부터의 면차률 기솔하기 위한 값이다. 각 분군들에 대한 파라미터 a , β , 8의 차이로 표시되는 것이다. 하나의 분군은 그것이 청확하든 혹은 정확하지 않든간에 통일한 群으로 분류된 시료들의 묶옴언데, 이 分群내의 변이성은 가변도 So(q)’와 표준편차 So(q) 로 표시되며 그 分群은 F-test로 검충할 수 있다.

시료 p가 q활의 창조시료언 경우 有 Sp(q)률 구하여 표 6

표 6 흩照세트와 테스트세트에 대한 試料들의 分布

에 나타내었다. 웰料p가 어떤 q群에 속하는지 또는 열외인지에 관한 F-test에 의거하였다. 그 결과를 표δ에 나타내였다. SF(q)값은 P륨料에서 q群까지의 수칙거리에 대웅한다. 즉 試科p와 그가 속하고 있는 群과의 거리는 수칙거리 5 1'(9)로 나타내었으며 그외의 聯群과의 거리는 실제거리에 대용하는 Dp(q)를 이용하였다(Wold and Sjstram: 1977, Lee et al: 1987>'

料에 대한 고고학적 관찰내용과 주성분에 의한 도시(그렴 8) 를 통하여 선정한 각 분군의 참조시료는 SIMCA에 의해서 선정된 각 分群에 속하였으며 열외에 해당하는 시료는 없었다.

I 群혹은 3 群에 속할 것으로 예측된 시료 ‘ (22, 23 , 24) 는 I 群에 속해 있었고 시료口(37) 은 關l없群2 , 4. 5로부터 모두 열외였다. 시료 (4 1 , 4 2, 43) 은 어떤 군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그리고 試科굉 (44·45) 는 I 군과 4군으로부터 열외업이 판정되었다.

산지분류에 대한 고고학적 소견

이상의 산지분류를 고고학척 관활내용과 결부시켜 고활하면 다음과 갇다.

첫째, 주성분분석과 SIMCA를 통하여 분류된 群은 皇南大뿔 유리용기 (16)/皇南大爆유리구슬 (2 6.)/玉田24 號石柳뺑, 9離土용훌훌(3‘)/顆執 址條色유리容 (알칼리계납유리 )(4口)/顆勳 址綠色유리容器(보통납유리) (5 口)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휠南大爆의 유리용기는 유리구슬과 산지가 다르다. 신라고분에서 출토되는 거의 모든 유리용기가 서방에서 수업된 것임을 밝혔던 田水常雄(1975 , 1976, 1977) 의 셜을 재확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古없에서 다량으로 출토되는 유리구슬류는 국내산이고 양식척으로 매우 이절적인 Roman glass계의 유리용기는 수입품으로 보아야 할것 같다. 특히 수입품인 유리용기들이 하나의 群올 이루고 있어 이들 수입품을 제작하였던 산지가 일정하였음올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皇南大 의 유리구슬들은 그것이 Na함유 알칼리유리이든, K함유 알칼리유리이든 통일한 群.을 이루고 있는데, 청가제로서 근원이 다른 물질을 섞더라도 통일한 산지로 묶일 가능성올 시사해 주고 있다.

셋째, 陳川의 玉田古樓群에서 출토되는 유리구슐은 출토되는 遺構가 土樓養이냐 石懶樓이냐에 따라 다르지 않고· 색깔이 청색 業色이냐에 따라 다른 群.올 이룬다.

넷째 鋼勳츄址에서 출토된 녹색의 유리용기들은 그것이 알카리계납유리냐 보통납유리냐에 따라 群융 달리하고 있다. 앞셔 이들 납유리는 중국 당대 이후의 유리제법과 판계가 깊다고 하였는떼 또다혼 주성분을 분석하고 중국유리와 버교혜 보아야 보다 의미있는 갱보흩 얻

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섯째, 昌原道 洞출토 유려는 독럽된 群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유리요지로 고고학계에 소개되었던 月城群內南面鎭 里가마에서 채집된 統 슬러그는 어떠한 群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5 결론과 전망

지금까지 산지추정의 전반적인 문제들을 검토하고 국내산지추정연구에 대해서 약간의 소개를 덧붙였다. 산지추정의 연구라는 것은 이동된 물자의 제작소, 원료산지를 찾아가는 것이며 결국 이러한 노력은 고대교역 조칙을 복원하기 위한 기초적인 연구인 것이다. 최근의 산지연구는 단순히 유물이 어디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단순히 지척하고 그 분포도를 작성하는 데서 (Hodder and Orton: 1976, 17-29) 끝나지 않고, 거리와 교역풍멀도의 상관관계 (Hodder and Orton:1976, 98 - 126, Renfrew: 1977)를 비롯하여, 지형이나 가용자원, 그밖의 사회척, 경제척 맥락 등에 의해 좌우되는 유물의 분포나 밀도를삼차원척으로 표시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Hodder and Orton: 1976, 17-29). 그래서 이러한 연구에 뒷받침이 될 수 있는 것이 산지추정의 연구언 것이다.

이 산지추정연구의 실체적인 어려웅을 몇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시료 자체가 불균절하다든지, 아니면 여러 원료산지로부터의 채취된 재료률 섞어서 제작되기 때문에, 지구화학척언 가정에 역행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문제가 었다. 그리고 우리가 다변량통계학의 방법울 이용하여 분석자료률 산지별로 분류하였을 때 그것이 과연 고고학척 사실율 얼마만큼 반영할 수 있느냐도 문제가 된다. 끝으로 산지추청올 위해서 ‘모든 유물울 품석해 볼 수는 없다. 우리가 분석을 흥해 산지별로 분류해 줄 수 있는 유물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제한된 폴석자료로 천체척인 현상올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는지도 품제된다.

이러한 품제훌 해결하기 위해서 제안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폴석되는 며량성훈원소의 개수훌 늘리고 분석의 청멀도률 높

이는 것이다.

둘째로 여러가지 다변량통계학의 기법을 체계적이고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통계척으로 분류된 분군을 고고학척 관창내용과 계속적으로 비교해 보는 일이다. 최초로 분류된 분군은 하나의 reference group으로 삼아 또다른 다변 량통계 학 기 법을 이용하여 재검토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토기를 하나의 예로 든다면 전척으로 회·학성 분으로만 특성 화된 토기 의 분류단위 (chemical paste compositional reference unit: CPCRU) (Bishop et al: 1982, Bishop and Rands: 1982)는 하나의 참고군이 되고 여러가지 육안으로 관찰되는 내용, 즉 태토의 조직, 색상, 장식 및 그밖의 양식적인 속성들을 통하여 그 분류의 타당성 이 검 증 되 고 보 강 되 는 분류단위 (paste compositional reference unit: PCRU) 로 격 상시 켜 나가야 한다.

셋째로 고고학과 분석화학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고고학척 문제제기를 통하여 분석에 필요한 시료가 척절히 선정되어야 하고, 분석이 비록 제한된 유물만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전체척인 현상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방법론척 절차와 이론척 툴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산지연구는 교역체계에 관한 이론적언 가셜의 수립 광범한 지질조사와 체계척인 표본유출 양식론적 연구를 통한 세분되고 전문화된 연구 여러가지 분석기법과 통계기법을 이용하여 쫓元素를 정교하고 신뢰도 높게 분류하는 일이다. 현재까지의 연구자료를 가지고는 교역체계를 셜명하려는 어떠한 언급도 보류해야 할 것이며 충분한 자료의 축척이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

끝으로 이 산지연구는 몇몇 개인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료의 습득이나 문제의 제기부터 분석과 이론화까지 여러 연구자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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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고학 연구의 제문제

【趙由典】

1 서론

광복 후 4。여 년 동안 우리나라에 있어서 고고학의 발전은 타학문에서도 마찬가지겠으나 나름대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얻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Thomsen(1788- 1865. 덴마크)의 三l힘찌法에 따른 우리나라의 先史考古學의 編年에 있어서 구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존재가 부인되고 신석기시대에서 바로 역사시대로 들어갔다는 과거 일제어용학자들의 주장을 말끔히 씻고 구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존재률 확고하게 밝힌 것은 이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순수고고학에서는 어쩌면 다루지 않아야 되는 역사시대의 영역에까지 고고학이 파급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문제는 역사학에 있어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古代史혹은 上古史에 있어서 공통척£로 문헌자료의 부족으로 언하여 그 역사에 대해 모르는 점이 많다는 데 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온 아닌 것이다.

즉, 고대사에 있어서 국가의 기훤 및 체제, 사회조칙, 나아가 문화내용에 있어서 해결해야 할 얼이 너무나 많다는 것운 역셜척으로 역사기록이 없기 때문인 것은 누구나 다 언정하는 바와 강다. 이와 갈이

문헌 부족이 아닌 고갈현상에서 고고학적£로 분류되는 유적, 유구, 유물, 자연유물의 조사연구를 통혜서만 문헌의 부족을 보완하는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좀더 새롭고 사실에 가까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歷史考古學이란 용어는 역사와 고고학이란 학문의 독럽영역에서 판단하고 생각할 때 어디까지나 역사의 보조학문에 더 비중을 둘 수 있다고 주장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 역사고고학이란 용어는 검원룡 교수에 의해 정식으로 사용됨으로써 하나의 공식용어로 되었다.

197 8년도 국사면찬위원회에서 간행한 『훼댐 ~論』의 三國I뽑代, 역사고고학란에 다음과 같이 그 대상시기를 밝히고 있다. <역사고고학에서 다루는 기간은 문헌상으로 삼국이 시작되는 서력기원 개시 전후부터 서기 9세기까지를 포함시켰으며 따라서 金海쩨 또는 原三國 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 말엽까지를 그 대상으로 하였다. 그리고 다루는 분야는 시대셜정, 편년, 묘제, 고분관계유물, 기타유적으로 하였으며 미술사, 불교관계유적 • 유물은 제외하였다〉고 대상시기와 대상유척 • 유물을 분명히 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역사고고학의 시기와 대상을 검원룡 교수의 견해에 일단 따르기로 하고 전개하기로 한다. 다만 편년에 있어서 金海 나 原三國 代라는 용어 대신 초기철기시대 (300B.C.-o) , 삼국시대 전기 (0-3 00A.D.) 로 하고 그후를 삼국시대 후기 (300-668A.D.) , 신라통일시대(668-9A.D.) 로 구분하고자 한다(이 견해는 19 8 7년 1월에 발표한 整龍교수의 편년l)에 따른 것이다>. 먼저 우리나라 역사고고학의 성립

I) 「聊園 古學의 시대구훈에 대한 약간의 提 , 崔永禮先生 甲紀念 探究훌. 1987.

배경을 간략히 알아보고 나아가 역사고고학이 이룩한 공헌에 대해 서술하고 끝으로 근본척인 역사고고학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언급해보고자 한다.

2 역사고고학의 성립배경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역사고고학이란 용어는 1978

년 비로소 문자화됨으로써 고고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고,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고고학사에서 이 용어의 사용이 이루어진 배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고고학이란 학문의 성럽은 과거 일제가 이루어놓은 토대 위에서 시작된다. 즉 조선총독부에서 고용한 일제 어용학자들에 의해 우리나라의 유적 • 유물이 조사되면서 그 조사결과인 조선고척조사보고를 大正년간부터 n끔和년간까지 4° 여 년 동안 수시로 간행함으로써 그 시초를 갖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조사에 참여하는 기회를 전혀 주지 않고 철저히 일제 어용학자들만의 참가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일본의 문화유산 약탈행위를 보면 그 근훤을 알 수 있다 18 94 년 제정된 〈戰홉消國웰物收필方法〉속에 명시된 내용에 따르면 동양의 보물은 일본에 집중보관되어야 마땅하고 이것은 나라를 빛내는 일이며 전시에 이름있는 물건을 수집하는 것은 전숭의 명예라 했다. 이와 같이 일본 첨략군의 정신과 행위는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유감없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19°4년의 경우에는 개성과 강화도지방의 고려고분을 일본군이 백주에 다이나마이트까지 사용하여 파괴하고 고려자기 등 귀중한 문화재를 약탈하여, 일본 귀족 비장품 전시회에 이 물건들이 진열되었A니 실로 있어서는 안될 그들의 만행이었던 것이다. 그후 경주 • 검해 • 창녕 • 공주 • 부여 퉁 우리나라전국각지의 많은 문화유산아 파괴되고 수많은 문화재가 약탈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 있어서 수탈의 대상이 주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그리고 고려의 무멈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약탈행위가 자행되고 있는 한편 일제시 고고학척인 발굴조사 대상도 주로 고분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운 물론 부장된 유물에 대한 관심의 작용도 함께 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고고학적인 조사활동에서도 그들에 의해 고고학율 선사고고학과 역사고고학으로 二大분류2)하여 오히려 역사고고학에

2) 일본의 경우 역사고고학이란 용어훌 정확히 언제환터 사용하였는지 할 수 없으나 1959년 처음 발간된 뼈佛考古훌훌훌典 에 역사고고학에 대한 생명이 보언다.

사천 현저자의 한 사랑언 小林行雄이 역사고고학애 대혜 상써하재 생명하

고 있는데 〈고고학은 선사고고학과 역사고고학으로 나누는 것이 보현책〉이라하고 역사고고학은 역사시대의 문화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小林온 사전 연찬 당시 얼본 경도대학 고고학연구실에 있었고 경도대학에 고고학강화가 19 20년경푸터 시작되고 있음융 용 때 아우리 빨라도 1920。년 이천에는 사용되지 않았융 것이고 그 이후에 사용되어 오고 있옴을 알 수 있융 것 강다.

水 元新, 1970.

보다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광복 후 우리손으로 된 최초의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는 1946년에 이루어진 打家으로서 국립박물관에 의해서였다. 우리손으로 된 최초의 발굴조사 대상 역시 고분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고고학적인 발굴조사의 시작과 주된 대상이 역사시대의 고분이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고 아울러 고고학이란 학문이 뿌리를 내리기 전에 이미 일제시대부터 역사시대의 유적 • 유물이 그 대상으로 되면서 발굴이 역사시대 연구의 보조기능으로서 자리를 굳혀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19 8 5 년까지 이루어진 고고학적인 시기별 발굴 유척의 건수를 보면 선사시대인 청동기시대 이후 475 건으로 구분되는 바 역시 역사시대의 유적 • 유물이 60%3)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J) 팡혹 후 198 7년까지 시대별 발굴휴척 건수 용계는 다융과 찰다

이러한 현황에서 볼 때 역사시대를 다루는 유척의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나아가 역사시대를 대상으로 다루는 고고학이 바로 역사고고학이라는 개념이 성럽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3 광복 후 중요 역사유적 의 발굴 및 공헌

광복 후 우리손으로 이루어진 역사시대의 중요유적으로서는 1946년 에 발굴조사된 慶州의 비롯하여 感恩 址, 風納洞土城, 寧王鷹, 天, 南大樓, 池, 皇龍 址, 網 址, 夢村土城

등 이밖에 많은 유척을 들 수 있다.

이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표와 같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광복 후 역사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 볼 때, 몇 가지 공헌을 들 수가 있게 되었다.

첫째, 고대기록의 신벙성을 높여준 데 있다. 이것은 1979년 -80년 사이에 이루어진 恩、 址의 전면 발굴조사에서 〈金堂下來 〉 이란 삼국유사』의 기록4)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확인하였고 1971년 이루어진 公州宋山洞에 있는 藥 에서 발견으로 이 무덤이 백제 제 25대 륭寧王陸이란 것과 함께 『삼국사기』어l 기록된 〈…束大將파百濟王…)5)이라고 한 것과 『 卷』에 기록된 〈寧來大將 百濟廣王…)6)라고 한 것과 일치하고 있음을 밝히게 되었다.

'4) 三園遺짧』뻐興第二훌i皮훌‘홉의 註에 인용된 츄中記에 〈…金堂뼈下來向때 一1차 之入 〉라고 기륙되어 있는데, 이것은 文武大王의 넋이 이 되어 왜구홉 지키다 강은사 금당의 동쪽으로 나있는 구명융 통해 들어와 쉬었다는 상갱척 의미훌 내포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륙융 뒷받청할 수 있는 금당 기단부에 마련되었먼 遺柳가 발굴초사휩으로써 기륙의 신맹생윷 높여주게 된 것이다.

三園史 百홉本紀第四훌훌王뚫에 〈훌훌王짧斯!톰행긍긍院) (二十-年…可使持節都활百홉짧훌훌tl.大將의 기륙이 보언다.

6) 1971년 훌토현 前面에 〈훌束大 百 斯麻王年六十二훌.....)라고 새져져 있다.

툴째, 역사고고학척인 발굴을 통해 역사학에 있어서의 젠뀔한 문헌자료를 유적 • 유물로 보완함으로써 문헌사학의 한계성을 극복하는 데 도움올 주었다. 이것은 기록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 고대사에 있어서 고대국가의 전체를 밝히는 실마리와 함께 연구를 가능하게 했다.

風納洞土城, 夢村土城, 二뿔山城풍의 역사고고학적인 발굴조사에 의해 초기백제의 전모가 밝혀지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이 밖에 많은 공헌을 들 수 있겠으나 이 두 가지로 대별 • 요약된다 할 것이다.

4 역사고고학 연구의 몇 가지 문제점

지금까지 역사고고학에 대해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 있어서 역사고고학 용어 자체는 크게 부담없이 받아들여지고 있고, 자연스럽게 선사고고학과 역사고고학으로 고고학 자체에 있어서도 양분되어 독자적으로 발전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역사고고학의 입장이 오히려 강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구라파나 미국 등 서양에서는 역사고고학이란 용어가 사용되지 않고 있는 반면 일본에서 사용되어 왔음을 볼 때 이것은 그 조사의 대상이 역사시대의 유척 • 유물에 입각한 것으로, 어떻게 보면 동양적인 용어의 결합으로 해석되어도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광복 4° 여 년 동안 고고학적언 발굴대상에서 역사시대의 유적 • 유물이 주류를 이루었고 앞으로도 이러한 추세는 변함이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추세에 따른 역사고고학에 있어서의 연구문제는 상대척으로 많아지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몇 가지 문제점을 도출해 보고자 한다.

첫째, 연구방법에 업각해서 볼 때 아칙도 유적 • 유물 위주의 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물의 형태, 문양, 분포에 따른 해석보다는 유물의 제작기술, 활용도 등 당시 품화를 밝히는 데 더욱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지역적인 조사연구의 법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연구자들이 몸담고 있는 지역의 역사유물에 대한 기득권올 주장하는 것은 자칫 지방고고학이란 용어의 탄생을 가농하게 할 우려가 있다. 보다 시야를 넓혀야 할 것이다.

셋째, 역사고고학의 발굴대상이 고분과 춤址에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도시유척 등 종합척인 대상올 찾아 발굴이 이루어져야 버로소 전체척인 문화복원이 가능해질 것이다.

넷째,역사유척에 대한 통상의 고고학척언 발굴방법에서 활피해야 할 것이다. 특히 수몰지구나 대규모 산업단지조성시에 이쭈어지는 발굴에 있어서 工期에 준혜 시간에 맞혀 발굴조사혜야 하기 빼품에

전문분야별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원할 수 있는 발굴단체에 초점을 맞충으로써 발굴의 소흘함은 물론 여기에 따른 연구와 해석에도 많은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는 것이다.

유척 발굴의 첫째는 청확한 조사에 의한 사실 그대로의 정확한 보고언 것이다. 그래야만 옹바른 연구가 가능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과학척이고 치밀한 발굴조사가 요구되며 시일에 쫓겨 조사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이 밖에 게개 연구분야별로 살펴보면 많은 문제정이 있겠으나 우선 이상으로 가름하고 앞으로 더욱 문제점을 찾아 보완하고자 한다.

5 결론

선사고고학이든 역사고고학이든간에 그 대상이 있어야 학문이 성렵되는 것은 정한 이치로서 대상이 없다연 학문의 성립은 불가능한 것이다.

고고학에 있어서 그 대상은 바로 유척 • 유물임은 재론을 요구하지 않는다. 학문의 품제 이전에 가장 근본적언 문제는 선사유적이든 역사시대유척이든 파괴와 멸실올 막아야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공기가 없으면 인간의 존재도 없어지는 것과 같이 유척이 없으면 고고학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국토의 균형있는 개발과 다목척댐 건셜, 대규모 주택 ·공업단지 조성뽑만 아니라 민가의 개량, 농지의 청리 둥으로 고고학척인 대상유척이 눈 깜확할 사이에 혼적조차 없어지고 마는 시점에 와 있다. 그러므으로 학품 이전에 우리는 효과척인 유척보존대책을 먼저 강구해야 할 것이다.

歷史考古學鼎究의 方向

----우리나라에서 역사시대의 시작

【崔줬龍】

전통적인 고고학 연구에 있어서 중요시되는 방법은 編年(chronology)과 型式分類(typology)이다.

형 식분류에 업 각한 편년의 셜정으로 문화단계 (cultural stage)를 설명하고 그것들이 모여 문화사(culture history)를 형성하게 된다.

문화단계는 공간과 시 간의 통합 (spatial·temporal integration) 이 며 , 종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문화적 특철에 의해 대표되는 시간과 공간의 지속성 (Temporal and spatial continuity represented by cultural traits»라 할 수 있다.1)

I) Gordon Willey & Philip Phillips, Method and Theory in America껴 ArcJuuology. The Univ. of Chicago Press. 19757th Impression.H p.이 맺 PP.72 -78.

문화단계는 이러한 시간척 • 공간척 통합하에서 설정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예외없이 문화단계를 특정짓는 표식척언 유물이나 특절 (trait) 을 중심흐로 편년을 설정하고 이를 공간과 시간으로 확대시켜 문화단계가 만틀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품화는 크게 다음의 6단계로 나누어지고 있다.

짧石器時代(Palaeolithic age)

新石器時代(Neolithic age)

(Bronze age)

初期鐵器時代(Early Iron age)

三園f 代前(Fonner Three kingdoms period) 2)

三國時代後期(Later Three kingdoms period)

역사고고학의 범주에는 한국고고학 편년상 초기철기시대(300 B.C -0) , 삼국시대전기 (0-300 A.D.) , 삼국시대후기 (300-600 A.D.) 가 포혼되며, 넓게는 통일신라(668-935), 고려 (9 18 - 1 39 2 ) 와 조선 (1392- 1910)까지도 포함된다.

그런데 현재 삼국시대후기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기간은 불교문화재를 많이 다루기 때문에 고고학보다는 美術史에서 주로 취급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초기철기시대와 삼국시대전기3)에 국한하여 특효역사고고학이 어느 시기부터 적용될 수 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려 한다.

우리는 혼히 문자사용의 유무에 따라 선사시대 (prehistory)와 역사시대 (history)를 구분하며, 그 사이에 과도기적인 시기로 京史時 (protohistory)를 설정한다.

원사시대란 〈선사시대 다음에 오는 문자기록으로 앞뒤가 들어맞는 문자가 출현하기 이전의 지역에 대한 시대 )4)를 의미하는데 우리나

2) 삼국시대전기라는 용어는 종전에 검원용교수에 의해 원삼국시대로 명영똑 것으로 서력기훤 전후에서 서기 3°。년 사이에 해당하는 시기이다(金元 聊園考古 說 , -志 , 1986 3 版, 리고 경 남 統營 面上老大團貝훌(손보기, r상노대도의 선사시대 살럽 , 수서훤, P·I98 P.II7) , 南上面王佛(山女大安春培 拖) , 全南와 松 面山및 곡천(충북대 李隆ψj 교수 발굴), 楊口那陽口펀 상무룡리 유척 E존재로 中石 代의 성정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그 연대에 대한 문제는 영으로 좀더 고찰이 요구된다.

3) 이 용에는 펼자에 의해 현삼국시대란 용어 대신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다(. 「考古 의 時代區分에 대한 약간의 提 , 崔永 先生筆甲紀 探究堂, 1987, PP.783 -788>

Warwick Bray· David Trump, The Penquin Dictionary of Archaeology.

1970, P.187. 그리고 原史時代에 대한 다른 성명도 있다. 즉 Tournai은 183.년 기혹이나 고문서가 나오기 이천 a로 거슐러 융라가는 인류 역사의 부훈흩지 청 하기 위 하여 〈先史(prehistory)) 라는 단어훌 만들어 냈으며 (Fagan, Briar. World Prehistory, Little Brown & Co, 1978, P.7> , 01 先史時代는 모든 역사시대에 얄서연서 폴자훌 지닌 文明의 기반이 되는 〈根 的先史時代 와 비혹 폼자는 없지만 文字 지닌 집단과의 직정척, 감정척 굉

계률 맺고 있었먼 문화들에 의해 나타나는 쑤차척언 선사시대 (secondary prehistory, marginal prehistory)의 둘로 나누어진다. 후자에 대해셔는 〈原史時代(protohistory))라는 용어가 대신 사용되기도 한다. Piggott, ,Approach /0 Archaeology, MacGraw-Hill books, 196" PP.76- 100.

에서는 초기철기시대 (300 B.C. -0) 가 이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의 초기철기시대 문화는 細形錫創으로 대표되는데, 이 시기의 문화상을 간략히 살펴보면 청동기는 점차 熾뚫化되어 가며 造의 鐵 가 등장한다. 그리고 토기에 있어서는 검은간토기 (혹도)와 업술단변에 원형 또는 타원형의 덧띠가 보강되는 덧띠토기(정토대토기)가 새로이 등장한다. 접자리는 하천이나 해안에서 가까운 얄으막한 구롱상에 위치하며, 그 규모도 신석기시대의 것틀보다 크며, 버교척 많은 수의 집자리들이 모여 취락을 형성한다.

그리고 꽃힘로는 고인돌(지석요)과 돌널무덤 (석관요)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널무덤(토광묘)과 독무덤(웅판묘) 등의 새로운 묘제가 유행하기도 한다 5) 한편 전남지방에서는 고인돌이 이 시대말기까지도 그대로 존속하다가 다음의 삼국시대전기 즉 馬韓 代로 그대로 이어졌다 .6)

그런데 엄멀한 의미에서 볼 때 이 시기에는 이미 문자가 사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즉 서기전 194- 108 년에 평양에 衛滿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를 세우고 중국과 활발한 교역을 행했던 것으로 믿어지는데 당시 한반도 내외에서의 교역수단으로는 明 훌훌이나 표珠훌훌을 비롯한 중국의 화폐가 이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7)

이 당시 서로간에는 문자가 사용되었£며 당시의 문자는 漢字였올 가능성이 유력시된다.

최근 慶南 昌茶戶里유적에서 출토된 붓의 존재 ’와 천남 海南

5) 龍, 前 文(註3) P.786.

6) 龍, 「全南 方의 고언롤과 률우업, 全南古文化의 性格과. 第 回全南古文化심포지웅. 1986. PP·30.

7) 園古代園 形成에 대한 一考 ---朝#의 뼈 , r金 埈 士回甲紀念史 , 1983. pp.61-77 빛 r古代의 成 과 易 , r聊園古代의 園 와 , 198,. PP.57-76•

8) 李, 「훌昌茶戶里遺 발굴초사재보 , r박훌판 신폼 202호, 1988연 6 얼자 4面.

里貝 에서 출토된 貨 9)의 존재는 당시의 문자사용을 알려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9)

아직까지는 이 시기를 원사시대로 보기는 하지만 앞으로 자료의 축척 여하에 따라셔는 한국고고학에 있어서 역사시대의 상한이 초기철기시대까지로 거슬러올라갈 가능성이 많다 하겠다. 따라서 앞으로 초기철기시대를 前(300-200 B.C.) , 中(200 - 100 B.C.) , 徐(100 B.C.-o) 의 3期로 세분할 수 있다면 초기철기시대 중기에까지 역사시대의 상한이 소급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앞으로 『三國志鏡志束 」이나 관계 記파를 분석하여 그 세분되는 시기에 대한 내용을 보충할 수 있는 자료를 찾아야 할 것이다. 초기철기시대 다음에 등장하는 삼국시대전기는 종래의 原三國時代로서 서력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로부터 기원 후 3 년경에 이르는 시기가 이에 해당된다. 이 시기의 대표척인 문화상으로는 청동기의 실용성 소멸, 철기생산의 보급, 金海土짧의 출현 및 보급, 농경 특히 도작의 발전, 고인돌의 소멸, 돌널무덤의 발달 등을 들 수 있으며, 이 시기를 대표하는 유척으로는 金海, 梁띠, 東葉, 固城, 昌原, 城山둥지의 조개더미를 들 수 있다.lO)

, 앞의 책 ( 2). PP.127-129.

이 시대는 역사학에서는 辰• 馬• 휴韓의 三障時代로 불려왔으며, 고고학에서는 원사시대란 의미에서 金海H훌代로 통칭되어 왔다. 그런데 검해시대라 합은 특정지명을 딴 것이라 이상하고, 또 삼한시대라고만 하면 북한지역을 도외시한 것이 되어 그 시대의 문화를 대표하는 명청으로 척당하지 못한 약점이 있다. 그리고 초기철기시대라 하면 청동기시대 후기이며, 이 시기는 삼국의 개시기와 버슷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어 金元龍교수는 이 시기를 原三圍時代라 명명한 바도 있다.

그러데 앞서 언급한 대로 초기철기시대에 형성된 衛滿朝 을 우리나라에 나타난 문헌상의 최초의 국가11)로 인청한다면, 三園史記어l보이는 그 이후의 三園, 다시 말하여 홉句뻐, 百흙, 新羅의 국가형성

11) , 앞의 책 (註7)

시기와 국가로서의 자격이 문제시된다. 다시 말해서 r삼국사기」어 언급된 삼국의 기원 및 형성연대가 학계에 확청된 사실로 받아들여질때 原三國 代라는 용어로 이들을 포용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최근 『삼국사기. 百濟本紀」의 記펄를 통해 본 「漢城l많代百濟의 都의 변천과 領域」문제의 고찰은 이러한 점을 시사헤 주며, 특히 溫祚王代의 는 백제가 건국초부터 완벽한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l2)

) 「漢城時代百濟의 都용地와 願城 ,13) 崔, 「 南面古場群의 , 州 南面古 , 光州椰 13 冊, 1988, PP.197- 206•

그리고 최근에는 ,떤합도 신라, 백제와 같은 시기에 공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인정되어지고 있어, l3) 삼한시대 역시 삼국의 개시기와 같은 시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원삼국시대라는 용어보다는 삼국시대를 포함할 수 있는 〈삼국시대전기〉라는 용어가 보다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三國 記』어 나타나는 신라(서기전 57 년) , 고구려(서기천 37 년) , 백제 (서기전 18년)의 건국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최초의 삼국은 ,떤합 • 井핸 • 辰輪과 마찬가지로 초기철기시대의 토착세력을 바탕으로 하여 共흉的으로 등장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역척인 차이, 운화의 수용, 무역 등과 같은 대외관계에 의존해 三韓地域까지 통합하게 되어 후일 삼국으로 정렵하면서 한반도내에서 대표국들로 성장하게 된 것으로 믿어진다.

따라서 삼국시대를 전기 (0-3 년)와 후기 (30-668년)의 두 시기로 구분한다면 삼한시대 역시 삼국시대전기에 포함된다 하겠다.

결론척으로 말하면, 우리나라에서 역사시대는 초기철기시대에까지 소급될 수 있i며, 앞로 세분에 따라서는 중기 (200- 100 B. C.) 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삼국시대전기부터는 완천한 역사시대로 보아도 우방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역사고고학의 연구는 초기철기시대에 중점용 두어 토기나 기타 중요유물, 묘제의 형식훈류와 푼헌자료의 보충에 업각한 시간척, 공간척언 연구가 새로이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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譯. 京始國家의 逃化, 民 社, 1989.

(國 市民 座 제 1 집, 햄 1988

국가의 정의와 고고학적 판단기준

【李松來】

1 문제

사회학과 정치학의 견지에서 볼 때 국가란 하나의 사회체제로서 상당한 영토, 수십만 혹은 수백만 이상의 인구, 그 영토와 주민에 대한 통치권(권력 독점권) , 그리고 그 통치권의 중앙집권화라고 하겠다.

반면, 사회진화론의 견지에서 볼 때, 국가란 인류사회의 발전과정에 있어서의 한 단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사회진화론에 업각하여 〈국가〉라는 현상을 연구해 옹 학자들은 사회발전사를 대개 4단계로 나누어서 국가를 그 최종 단계의 사회체제로 보아왔다. 예를 들면 서버스와 프리드는 인류사회 진화과정올 4단계로 나운뒤 , 제 I 단계 를 군집 (band) 혹은 평 동사회 (eqalitarian society) , 제 1단계를 종족 (tribe) 혹은 계급사회 (rank society) , 제 3단계률 군장사회(chiefdom) 혹은 계 층사회 (stratified society) , 그리고, 제 4단계 률 국가(state) 라 부르고 있다.

이미 최몽룡, 김정배 교수 둥 제학지들은 이와 칼온 사회진화론을한국상고사에 척용해서 한국민족의 사회발전 과정율 인류학척으로 또는 고고학척으로 해명해 보았다. 이것은 한국상고사 연구에 새로운 〈디벤손〉과 의미를 부가하는 것으로서 학문척으로 매우 충요한 역할이

라고 보겠다.

사회진화론과 고고학을 기반으로 상고사의 전개과정을 해명해 보려는 것은 먼저 인류문화사회가 단순한 현상에서 복합적인 현상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것과 이런 문화사회의 변화과정은 과학적으로 입증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입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상고사의 전환과정을 규명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상고시대에, 특히 선사시대에 존재했던 평등사회와 계층화된 군창사회는 고고학적 자료로서 그들의 존재 여부를 충분히 해명할 수 있다고 간주하였으나, 단순한 군창사회가 복합적언 군장사회로, 그리고 복합척인 군장사회가 초기국가로 전환된 과정을 고고학적으로 규명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이 있다.

그 주된 이유는, 발전된 군장사회, 즉 복합적 군장사회와 초기국가간에 상사점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일부 학자들은 복합척 군장사회는 이미 초기국가의 제요소와 형태를 모두 갖추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카르네이로는 복합척 군장사회를 최고수준의 군장사회 (maximal chiefdom)라 지칭하고, 그것은 규모와 복합성에 있어서 이미 국가의 문간에 도달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서버스는 군장사회와 국가를 고고학척흐로 구분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군장사회와 그후에 발생한 사회간의 차이는 다만 상대적인 개념의 문제이며, 정도척 차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군장사회와 국가는 크고 작기, 혹은 단순하고 복합척인 변에서의 차이점 외에는 특별한 구붐척 요소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해 본다연, 최고 수준의 군장사회는 군장사회의 최종 단계언 국가의 최초상태가 되는 것으로, 이와 같은 하나의 상태훌 어떻게 두 가지의 개념 (군장사회와 국가)으로 그 전후상태와 접속시킬 수 있울 것언가의 운제라 할 수 었다.

이러한 정의와 개념의 문제는 한국상고사에 대한 〈적절한 셜명〉올 오색하고자 하는 관련 전공자들에게도 품제의 과제라 할 수 있다. 이미 기백 교수가 「고구려의 국가형성 문제」라는 논고에서 언급한 바와 찰이 한반도에서 출현한 최초의 국가와 그 상태 및 발생의 사회, 폼화척 배경과 시대척 상황융 규명함에 있어서 야기되는 해석상의 혼

돈과 의견의 충돌은 앞서 살펴본 개념문제와도 상당히 연루되어 있다하겠다. 이 문제의 실감을 톱기 위하여, 피상척인 신문기사에 해당하겠으나 예를 하나 들어본다면, 지난 4월 9일자 동아일보에 다호리 목관묘 발굴과 그 의미를 소개하는 기사가 「철제도구 사용 문명국가 입증, 삼국시대 이전에 국가 형성 기틀잡아」라는 제목하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그 기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한병삼관장은 농기구인 고대의 따비를 비롯, 철제도끼, 자귀 등이 발굴된 것으로 미루어볼 예, 이제까지 삼국시대 이전을 미개사회로 알았으나, 이 지역에 고대로부터 농업이 발달되어 있었으며 철기, 철기제조 전문가가 있을 만큼 강력한 고대국가를 형성했음이 밝혀져 종래 학셜의 수정이 불가피해졌다고 설명했다· )

이 신문기사를 읽고서 4월 15 일 다호리 현장을 방문하여 발굴책임자언 이건무선생을 만나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다. 이때에 이선생은 이 지역에 기원전 1 세기에 국가가 형성되었다기보다는 하나의. 족장사회로 간주해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가 있다.

사실상 현학계에서 국가와 군장사회에 대한 정의와 구분이 논란이 되고 있는 실정에서 볼 때, 그 당시 낙동강 유역에 존재했던 사회가 군장사회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고, 초기국가였다고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서비스가 주장하는 대로 군장사회가 그후에 발생한 사회간의 차이가 다만 상대적이고, 크고 작은 정도 차이에 불파하다면 다호리 유적은 학자들의 주관척 견해에 따라서 군장사회의 중거물로 설명될 수도 있고, 초기국가의 유산으로도 취급될 수 있을 것이다.

2 君長社會와 國家

이러한 문제를 해명해 보려는 입장에서 먼저 품장사회와 국가의 혹징과 성격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다. 그동안 인류학과 기타 품화척으로 연구 발표된 모든 청보률 통합, 창조해셔 보면, 군장사회는 최소한도로 다음의 열 가지의 성격과 특갱올 나타낸다고 활 수 있겠다.

군장사회는 계충화되어 있다. 나아가 꾼창사회에는 이러한 계총

별로 사회적, 경제척인 차이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차등척 특정이 그 이전의 명등사회와 군장사회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몇 개의 부락올 중심으로 한 수장만이 있는 단순한 군장사회가 있고, 몇 명의 수장과 그 수뚫 위에 군창을 두는 복합척 군장사회가 있고, 몇 명의 군장들과 그 군장들 위에 대군장 혹은 맹주를 둔 최고수준 (maximal chiefdom) 의 군장사회도 있다.

2. 군장의 역할은 주로 사회, 경제척 통합과 융화를 장려하고 도모하는 데 있다. 특히 주민들의 생산작업에 필요한 협동작업의 조절과 장려, 그리고 주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제물품(주민들의 생산 혹은 교역을 통해서 업수한)을 주민들에게 재분배해 주는 사회척, 경제척 역할을 맡고 있다.

3· 군장사회의 권위는 혈통관계에 의존되어 있다. 가계와 혈통을 통해서 군장과 수장들의 권위와 지위가 결정되고 유지된다. 그리고 그러한 지위는 세습제도화되어 있다. 따라서, 개인의 인격과는 상관없이 그 지위가 계숭, 유지된다. 군장의 지위는 무력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그 지위를 통해서 주민들에게 주어지는 이익과 안녕이 인정되기 때문에 계속 유지되고 제도화된 것이 (institution alization of chiefly office).

4· 군장사회 는 지 역 척 성 격 (regional characteristics) 을 띠 고 있다. 즉 일정한 지역 범위 안에서 사회 경제 활동이 이루어진다. 군장사회이천의 명동사회에서는 상호 자럽적인 공동체들이 통일한 지역권내에서 활통하며 상호작용한다. 따라서 군장사회의 권력은 군장과 수장들에게 분산되어 있고 지역화되어 있다. 군장은 수장들보다 좀더 큰 권력올 갖고 있으나 독점척인 권력행사는 하지 못한다.

5· 군장사회는 종교와 일정한 관계를 갖고 있다. 경우에 따라 군장은 신격화되어 있기도 하며, 제사장 혹은 샤만의 역할도 담당한다. 그리고 신버성올 띠는 복잡한 의식절차를 통하여 군장의 지위와 권위가 창화되고 유지된다.

6. 군장사회에는 칙업과 기술의 전품화가 나타난다. 식량생산은 농후들 혹은 어부들이 담당하고, 회귀품의 제작은 해당 전품기술자들이 담당한다. 반면, 권력올 행사하는 상충계급에 속하는 자들은 생산활동에는 종사하지 않으며 공세로 받은 식량에 의존한다. 이것은 이미

관료제도 (bureaucracy) 가 나타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7· 군장사회는 많은 인구를 소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군장사회는 많은 공동체들이 통합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며, 특히 중심지 기능을 하는 공동체에는 상대적으로 보다 많은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

8. 대부분의 군장사회는 농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대체로 군장사회에 있어서의 인구증가는 이러한 농경생산에서 비롯된다.

9· 군장사회의 계층간에는 무력적 투쟁이 드물지만, 인접 군장사회틀간에는 투쟁과 전쟁이 자주 있다. 군장사회 내부에서 발생한 무력투쟁은 군장이 자기 지위와 권력을 남용했을 때 군장에 대한 반란으로 얼어난 것이 대부분이다.

10. 계층화된 군장사회의 신분체제는 취락지 유형으로 반영된다. 군장과 수장들이 거주하는 지역에는 그들의 권력을 상정하는 기념물이 건립되어 있고, 또한 상대적인 지위에 따라 그 규모의 차이가 나타난다.

이와 같은 특정과 성격들을 지닌 군장사회에 버해서 국가는 어떠한 특정을 갖고 있으며, 어떤 점에서 군장사회와 구분되는가? 차르네이로는 국가의 특정을 자립척언 정치체제, 다수의 공통체를 포함한 영토, 징집과 정세의 권력 그리고 법률을 만들고 시행할 수 있는 권력 등의 네 가지를 들고 있다. 프리드는 국가를 사회의 힘의 조직(society’s organization of power)이라고 부르고, 사회경제척으로 불균형한 계층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목척하에서 만들어진 정치혀 권력체제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의 특정은 권력독점이고 그것올 합법화시키려는 목적에서 통치권 (sovereignty)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견지에서, 서버스는 국가의 특칭을 억압척언 물리척 세력 (repressive physical force) 으로 칭 하고 척국에 대 한 전쟁 과 정복의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체제로 간주하고 있다. 프래너리는 앞에서 지척된 특정들 외에 혈통관계를 초월한 직업척 지도자 (professional)들에 의한 행정체제, 수섭만 이상의 언구 그리고 복잡한 계충사회흩 국가의 복칭으로 열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셜명들에 의거한다면 군장사회와 버교하여 국가가 지니는 차이점이란 권력의 독점과 혈통판계의 회박성 그리고 사회척 북합

성의 정도 차이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들도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데, 군장사회는 혈통관계에 업각한 사회이며, 국가란 그러한 관계를 초월한 사회체제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근대국가에 해당하는 것이지 동양 특히 고대동양사회에는 척용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재론할 필요도‘ 없이 고구려나 백제, 신라와 日本의 초기국가의 경우를 보아도 명백한 사실이라 하겠다. 국가를 혈통관계를 초월한 사회정치체제로 국한시키게 된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王國들을 모두 군장사회로 간주해야 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고대국가의 정의에 있어서 혈통관계를 거론하는 것은 타당성 이 없다고 하겠다.

포한 오랫동안 학자틀간에 도시발달과 문자의 사용을 고대국가의 특정으로 간주해 왔다. 이러한 기준은 주로 고대 근동지역에서 발생한 국가들에 관련된 이지 중미나 남미지역에서 발생한 문명과 국가들에는 타당성이 없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중미와 남미지역에는 2 , 000여 년 전에 도시가 발달하지 않은 콧에 그리고 문자가 사용되기 전언 선사시대에 찬란한 문명과 국가가 발생했던 것이다.

나아가 개중에는 성문법을 국가와 연결시키는 견해도 있다. 즉 고대사회에 성문법이 생기고 성문법의 울령에 의해서 관료들과 주민들의 행동과 사회판계가 조절됐을 때에 국가가 발생했다고 보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셜에도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첫째로, 발전된 복합적 군장사회란 이미 조직화되고 제도화된 사회인데, 이와 갇은 사회가 융령없이 이루어진 사회라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문자로 기록된 윷령이 구두로 전파되고 보존되어 있는 율령보다 더 진보된 혹은 더 신뢰성이 있는 율령이라고 보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언류학척으로 주지하다시피 문자사용 이전의 소위 선사시대 아회는 구두로 전파되고 구두로 보존되는 신화, 전설, 가계관계의 정보(족보) , 윤리척 • 도먹척 교훈, 그의 사회판계를 조절하는 법률 둥모두 그 공통체 사회의 성재 (sacred property)로 취급했던 것이며 역사시대에 생긴 성문법 이상A로 중요시했먼 것이다. 사실상 원사시대(protohistorical period rotoliterate period) 에는 구두전셜이 문자로 기륙훤 천설보다도 더 많은 신뢰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 인류학자들의 견해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옐민족의 사회률 죠절했던 소위 모세

오경에 기록되어 있는 전설들과 율법들이 오랫동안 구두로 전파되고 보존되어 왔다는 학자들의 견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대 이스라엘사회는 국가의 사회체제를 갖추기 전에 벌써 율법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 율령은 구두로 전파되었고, 그러한 율령에 의해서 사회의 질서와 안녕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국가가 성럽된 후 구두로 내려왔던 전셜들과 법률들이 마침내 문자로 기록되었던 것이며, 국가사회가 더욱 복잡해지면서 좀더 복잡한 율법이 사회의 휠요성에 따라 부가되었다는 차이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국가를 군장사회로부터 구분시켜 주는 요소로서 남게 되는 것은 권력독점권이라 할 수 있다. 즉 발전된 복합척 군창사회체제를 갖춘 지역에 장기적으로 통치권을 소유하고 그 지역의 모든 주민을 통치하는 중앙집권척 정치체제가 존재한다면 그 지역에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고 간주해도 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고학을 응용해서 상고사를 해명해 보고자 하는 연구자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바로 고대사회의 계층화와 함께 권력독점화의 과정을 규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상고사의 해명을 위한 고고학척 판정기준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3 고대의 사회정치발전과정에 대한 고고학적 판정기준

(1) 유물의 한계성

먼저 고고학척 유물의 한계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오랫동안 인류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대규모의 건물이나 요제 등의 유척지와 회귀한 유물들올 계충화된 사회의 충거로 보아왔다. 예를 들연, 콜린 렌프르우는 영국 Wessex지역에 신석기시대에 축조된 거대한 묘제와 스토운헨지 퉁 그리고, 지중혜의 말타성에 거석으로 축조된 선사시대 성전을 선사시대에 존재했던 군장사회의 충거물로 해석했다. 이것은 선사시대에 발생한 대규모의 건물이나 묘, 혹은 성전 같은 것이 조직화된 대규모의 언구와 노동력 그리고 통솔자가 있는 사회에서만이 가능하다는 천제에셔 나온 해껄이다. 이련

전제로, 선사시대에 축조된 대형 건물이나 요가 계층화된 사회의 산출이라는 데는 누구나 다 인정한다. 그러나 그러한 계층사회가 단순한 군장사회였는지 발전된 복합적인 군장사회였는지 혹은 초기국가였는지에 대해서는 규명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 계층화된 묘제와 매장품, 전문기술에 의해서 제작된 귀중풍, 교역을 통해서 업수한 수입품, 대규모의 건물, 잉여생산물의 저장창고 등 이 모든 유물들이 복합적 군장사회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인지 혹은 초기국가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찬란한 유물들이 선사시대의 무덤에서 발견된다거나 문자가 새겨진 유물이 발견된다거나, 혹은 문자를 사용했다는 증거가 었다거나, 혹은 성문법에 의한 율령제도가 확인된다고 해서 그러한 사회를 국가로 간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유물뿐만 아니라 전쟁의 중거, 또는 죄인처벌이 중거가 확인된다고 해서 그 사회가 중앙 집권척 권력독점을 행사한 국가였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계속척인 사회발전도상에서 어디가 군장사회의 중점이고 어디가 국가의 기점언가를 지척하기란 종래의 콜린 렌프르우와 같은 학자들이 이용한 고고학 자료만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2) 사회계층화와 취락지유형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해 보려는 목적에서 지난 20여 년간 미국의 많은 고고학자들이 취락고고학에 몰두하여 왔다. 취락고고학의 선구자인 고오든 윌리는 〈취락유형이 고고학척 문화에 대한 기능적 해설의 전략척언 출발점〉이라고 주장하면서 선사문화 • 사회의 이해와 복원에 있어서의 그 중요성을 지척하였다. 취락고고학은 한 지역내에 청착한 집단율 이해함에 있어서 특히 인간과 자연환경과의 관계와 인간과 언간과의 판계에 초점을 두고 있다. 취락고고학자들은 특히 후자의 관계를 취락고고학이 다루게 됩으로써 선사 또는 상고시대에 발생 또는 존재했먼 공동체들간의 상호관계를 규명할 수도 있고 시대에 따라서 변천하는 사회체제의 성격도 해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취지를 지난 취락고고학은 한 지역내에 형성된 취락지틀 사이에 몇 단계의 사회정치척 중심부가 존재했으며, 그러한 중심부들이

시대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가를 규명하는 데 연구의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연구방식은 사회체제가 복잡해질수록 그러한 복잡성이 취락유형에 구조적으로 반영된다는 인류학척 관찰에 업각한 것이다. 이를 좀더 구체화시키면 사회의 복잡화는 언제나 취락편성의 계층화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경우를 예를 들자연, 대한민국의 취락편성제도에 있어서 부락-문청소재지-도청소재지-수도서울 등으로 계층화되어 그 건물의 규모와 인구, 도시셜계의 복합성 등에서 구분이 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토대로 하여 취락고고학자들은 취락고고학을 통하여 상고시대의 사회정치척 중심부를 규명할 수 있고, 시대에 따라서 몇 단계의 중심부가 형성되었는지까지를 밝힐 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중심부의 수와 그 성격을 분석해서 시대순으로 단순군장사회에서 복합군장사회 또는 초기 국가상태로의 변천과정을 각각이 단계별 상태와 함께 규명할 수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이론과 방법을 이용하여 선사시대의 복합사회를 연구해 온 스테포나이티스는 평등사회는 중심부가 없는 사회체제였고, 단순한 군장사회는 일단계의 중심부만이 존재하는 사회였으며, 복합척 군장사회는 1 단계 혹은 3 단계의 중심부를 갖춘 사회였음을 지척하고 었다. 또한 사회가 발전해 갈수록 중섬부의 단계수가 더욱 많이 증가 (2단계 혹은 3 단계까지)되어 가며 언제나 최종단계의 중심지는 하나만 있게 되고 하위단계의 중섬지들과 그 관할지역을 총괄하는 중심부(수도)의 역할을 하게 된다고 셜명한고 있다.

사회 • 정치체제가 복합화된다는 것은 그 체제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이 증가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 z단계의 중심부가 제 I 단계의 중심부에 대하여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이 더 크고 제 3 단계의 중심부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이 제 단계의 중심부가 행사할 수 있는 권력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상고시대에 존재했번 사회 • 정치체제의 성격을 규명한다는 것은 동시에 그 체제의 권력규모륨 밝히는 것이 된다 하겠다.

스테포냐이티스는 권력의 양척 측정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연 상고시대에 존재했던 사회 • 정치체제의 권력윷 어떠한 방법으로 측정할 수 있올 것인가? 권력이란 결국 한 지역내의 자훨과 생산력

에 대하여 행사하는 힘이기 때문에 일정한 지역내의 정치체제가 관할했던 자원과 생산력을 측정함로써 그 측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중심부에 속하는 공동체내에는 대형건물 또는 대형묘지와 기념비 등이 축조되는 것이 상례이고 그러한 축조물의 건셜에 투입된 노동력, 언원수, 노동시간 등을 계산하면 각 중심부에 제공된 공세의 총량측정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중심부들의 연구와 그 중심부 관할지역의 곡물 생산력과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계산해서 각 중심부의 상대적 권력행사력도 규명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틀연, 생산력이 한정되어 있는 위치에 자리잡은 한 중섬부에 대규모의 인구와 건물들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 중심부의 주민들이 주로 다른 중섬부들로부터 받은 식량공세에 의존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러한 대규모의 중섬부가 다른 중심부들에 대하여 행사한 권력이 더 강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갇이 양적£로 측정된 자료를 통해서 일정한 지역내에 존재했던 중심부들의 상대척언 사회 · 정치적 관계를 규명할 수가 있고, 나아가 그러한 사회 • 정치체제의 전체척인 성격까지도 규명할 수가 았다는 것이다.

미국 동남부지역에 〈마운드벌〉문화권 (1200- 1500 A.D.) 이라는 선사시대의 문화권 유척이 있다. 이 지역에는 동일한 시기에 존재했던 취락지가 많이 산재되어 있는데, 취락지들의 규모에 따라 小, 中, 大의세 가지로 구분된다. 이 중에서 소형규모의 취락지가 가장 많으며 또한 가장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중형규모의 취락지들은 몇 개에 불과한데 거의가 다 통일한 규모이고, 소형 취락지들로부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중형취락지 안에는 I개씩의 커다란 언조제방 (mound) 이 갖추어져 있다. 대형규모의 취락지는 〈마운드벌〉로 불리는 곳으로서 그 규모가 중형취락지보다 물론 크고 그 판할 영역내에 는 개의 커다란 언조제방이 갖추어져 있다. 스테포나이티스는 중형의 취락지들율 그 지역의 제 I 단계 중심부로, (마운드벌〉올 져12단계 중심꽉로서 군장의 -주거지로 보았다. 즉 〈마운드벌〉품화권 사회를 2단계의 정치행청 중섬부로 구성된 복합척 문장사회로 간주하였다.

스테포나이티스의 취락고고학 연구 가운데 유명한 사례가 소위 形成期(formative) )의 〈멕시코 벨리〉문화권에 대한 연구인데, 여기에서

도 취락고고학의 방법을 이용하여 시대에 따라 변천된 사회 • 정치체제의 성격규명을 시도하였다. 특히 이 연구에서는 수학과 통계학을 응용해서 각각의 상대적 권력량을 측정하였다. 그 조사결과에 의하면 〈中째形成뼈〉인 기원전 800-5 00년 사이에는 자립적으로 자체척인 권한을 행사하는 멀집부락들만으로 구성되어 있고 〈後뼈形成뻐〉인 기원 전 500-200년 사이에는 제 I 단계와 제 2단계의 두 가지 행정중심부가 출현하였다. 제 단계의 행정중심지는 제 I 단계의 중심지에 비하여 3배가 되는 양의 공세를 받아들였으며 그 지역의 총인구 가운데 16%가 비생산자층에 속했던 사실을 지척하였다. 즉 이 〈중기형성기〉에 이미 복합적 군장사회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결과가 발표된 후로는 아직 초기국가체제를 갖춘 사회에 관하여 동일한 판정과 방법에 의한 연구가 발표되지 않고 있으나, 여하튼 필자의 생각으로는 최소한 3 단계의 중심부를 갖고 있는 최고수준의 복합척 군장사회가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국가로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 이미 상술한 바와 같이 국가의 특정이 권력의 독점척 행사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적어도 3 단계의 중심부를 갖고 있는 발전된 군장사회의 대군장이나 맹주가 권력의 독점화와 중앙집권화에 성공하고, 또 그것이 조직화되고 장기화되면 군장사회는 국가로 변하게 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군장이 권력의 독점척 행사와 중앙집권화에 성공하려면, 나아가 그것이 장기척으로 유지되려면, 최소한 대군장은 믿에 있는 군장들과 수장들의 권력을 모두 합친 것보다 배 이상의 권력을 소유해야 될 것이라고 추측되는데, 척어도 그만한 권력이 있어야 군장들을 다스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수준의 권력을 소유하고 있던 중심부의 존재 여부의 확언이 국가의 존재 여부 판단에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그러한 정보는 취락고고학의 척용을 통하여 수집이 가능하다.

방법론적으로 간단히 셜명한다면 취락고고학은 지역척 어프로치, 즉 일청한 지역을 상대로 해서 실시된다. 따라서 먼저 해당지역의 총괄척언 고고학척 성격을 해명하기 위하여 체계척이고 철저한 답사(systematic and intensive survey)와 기획척인 발굴이 이루어져야 된다. 이러한 조사를 통해서 얻은 그 지역내의 선사시대와 상고시대의 취락

지 분포상태, 취락지들의 상호 거리, 각각의 규모, 인구, 취락지들의 자연환경과 생산력, 취락지들의 시대적 변천 등의 정보를 토대로 추정과 설명을 시도하는 것이 취락고고학의 기본 취지라 하겠다. 동일한 방법으로 여러 지역, 즉 한강유역, 금강유역, 낙동강유역, 영산강 유역 등의 취락고고학 정보가 증가함에 따라 연구대상의 지역도 점차 확대되어 한반도와 같은 광범위한 지역의 고대 문화 • 사회 발달과정에 대한 추정과 셜명도 가능하게 된다.

한반도의 경우 우선 한반도 전지역에 걸쳐 산재되어 있는 지석묘와 토기편 산포지는 취락고고학 연구에 중요한 기본자료가 된다. 이러한 기초자료와 현재 발굴조사를 통하여 점차 증가되어 가고 있는 주거지 자료는 앞으로 한반도의 취락고고학적 연구에 필수적언 요소들이 될 것이다. 또한 가까운 장래에 한반도의 경우에 적합한 취락고고학의 이론과 방법이 정돈되면 상고사의 연구에도 긴요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며, 현재 학계의 초점이 되고 있는 다호리 유척의 사회정치척 의미도 새롭게 조명될 수가 있을 것이다.

4 결론

군장사회와 계충화된 사회가 선사시대에 존재했는지 존재하지 않았는지는 고고학척으로 충분히 해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계층사회의 성격을 고고학척으로 구체척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발전된 군장사회와 초기국가간에 상사점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발전된 군장사회는 초기국가의 특정과 성격을 거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고고학척으로 업중된 계급사회가 발전된 군장사회였는지 혹은 초기국가였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언제 고대국가가 최초로 발생했느냐는 철문은 어려운 과제로 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륨 해명해 보려는 목척에서 국가를 군장사회로부터 구훈시켜 주는 요소가 국가의 권력독점파 그러한 권력의 중앙집권화라는 것용 지척했다. 따라서 권력이란 한 지역내의 자원과 생산력에 대해서 행사하는 험이니만큼 일정한 지역내에 존재했던 권력 중심지와

그들의 상대척 규모를 측정함으로써 그 사회의 정치적 성격올 규명할 수 있다는 것을 시도했다.

특히 사회의 계층화는 취락지 유형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취락고고학을 응용해서 선사시대와 상고시대에 존재했던 계층사회의 성격을 규명할 수 었다는 것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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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韓연구의 방법론적 문제

【李賢惠】

1 연구현황

삼한의 실체는 세형동검문화단계 이래 한반도 중납부 일대에 형성되어 있었던 정치 사회집단들이다. 이들은 한국고대사 서술에서 부족연맹단계, 연맹왕국시대 2) 또는 삼국시대전기 3)로 정리되고 있으며,고고학척 시대구분으로는 원삼국시대에 해당된다.4)

상한 문제에 대해서는 19 1년대 이래 일본인 학자들의 古 名분석을 통한 역사지리적 고찰과 함께, 5)년대 후반 신채호에 의한 삼한의 종족계열과 성럽과정에 대한 설명이 시도되었다.히 이어 1930년대에 이르러 이병도의 「삼한문제의 신고찰」이 발표되면서 삼한의 성

x) 金哲埈, 「古代園家훌훌逢史j , (t*뿜文化史大系) x, 9이, P·4f78.

2) 李基白, 園 新 , x976, PP.38-39.3) 崔 「時代와 古代園 의 生 , , 1986,

) 元 , 障國考·古 , 1966, PP.128-1.....

) 田左右吉, 「三 考 , 遍世, 「三考 , (外交홉史) 2, 1923. 井九, 三, 「三 考 , (史 1923}. 前 作, 「三'古 名考 正 , (史 1925.

6) 申 浩, 「前後三'考 , 史 究 , 1929.

럽, 小의 지리적 위치, 사회상 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가해졌다.) 이후 19 60년대에 이르기까지 단편적인 논고들과 함께 연구업적

7) 李, 「三椰 돼의 新考(1)-(6). (學報) 4 • 5 • 6 • 7. 1-1937·

에 대한 정리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연구시각상으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7년대에 들어와 한국고대국가의 기원에 대한 재검토가 거론되면서 새로운 연구경향이 대두되었다. 즉 인류학 이론의 도입, 삼국사기』초기 기록의 활성화, 그리고 고고학 자료의 축적 등에 험업어 삼한 연구도 시각과 자료면에서 중요한 전환 계기를 맞이하였다. 그 결과 연구대상이 점차 구체성을 띠면서 소국의 정치 • 샤회적 성격, 구조 빛 변천과정에 대한 의문이 검토되기 시작하고, 8) 이러한 과정에서 펼연적으로 여러가지 새로운 문제점들이 파생되었다.

8) 金貞培, 「 政治史的 味. (報) 79. 1978. -- • 三 圍의 隔 聞題 . (究) 26, 1979.

千 字, 「三 園 形成J (上) (下), (聊國) 2 • 3. 1976.-- , 三의 成立 程 . (史學) 26, 1976.

金tf:珍, 「三 時代의 落. 7. 民大 俠..園 所, 1984.

三 成過 究 1984.

이러한 문제들 중에서도 이번 학숭 모임의 공동주제인 국가형성문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삼한 소국을 지칭하는 용어와 개념 설정, 삼국사기 초기기록과 삼국지 한전 기록과의 상치점에 대한 상반된 입장, 그리고 삼한 소국의 성격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로서, 이들은 이미 대부분의 연구자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어 오던 사항들이다.

동일한 역사적 실체를 두고 이처럼 다양한 견해가 서로 대립되는 일차적인 원인은 자료의 절대 부족으로 돌려질 수도 있겠지만,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다른 하나의 원인은 연구시각과 방법론상의 혼란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본발표에서는 이 두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앞으로의 과제와 그 해결을 위한 약간의 모색을 해보고자 한다.

2 연구 방법론상의 문제

국가 형성이라는 관점애서 삼한을 검토할 경우,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접근 방법이 있다. 그 하냐는 삼한 소국 자체의 정치, 사회, 경제적 성격 규명과 함께 그 발전 과정을 개별적으로 추정해 나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 벡제의 국가 형성이라는 입장에서 소국집합체로서의 마한, 진한, 변한의 성립과 함께 그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신라, 백제 국가로 편제되어 나가는가 하는 관점이다.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들은 주로 후지-의 관점에서 진행되어 왔으며, 근래에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활성화를 통해 한층 구체적인 접근이 시도되고 있다. 그리고 전자와 같이 소국 그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경우에도, 문헌 기록의 절대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연구 자료와 방법론변에서 새로운 모색이 지속되고, 그 결과 고고학 자료를 활용하거냐 신진화론의 발전 도식을 도입한 연구들이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그러므로 삼한 연구에 있어서 자료와 방법론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은 『삼국사기』초기 기록의 해석, 고고학 자료의 활용, 신진화론의 도입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단편적이나마 小國단계에서의 斯障國과 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r삼국지 韓」의 한계를 보충하여 삼한 소국의 구체적언 사정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예컨대 斯熾I 6村 내는 6部와 관련된 기록은 삼한 소국올 구성하는 순5 혐집단과 이들의 결합 장태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이며, 신라의 소국 정복 기사와 함께 伯濟園파 ,맨障王파의 판계 기혹은 辰, 小國厭 體의 실체와 더불어 삼한 각 소국간의 역학관계를 시사하는 자료로서 적극적인 활용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연구 시각에 따라서는 상반된 업장에서 출발하더라도 궁극척으로는 역사 복원과 사료의 합리척 해석이라는 공동의 방향율 지향해 나가야하며,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자료와 과학척 방법율 동훤한 끊엄없는 검증 작업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련 의미에서 본다면 현재 삼한 연구는 문제의 제기 단계에 처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융 것이다. 다음으로 고고학 자료의 활용이라는 면율 알펴보면, 고고학 자료는

문헌자료룹 통해 관념적으로 이헤되고 있었던 하나의 사회를 실질적인 형태로 감지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한다는 데 일차적인 특정이 있다. 그러나 자료 말견의 우연성, 물질 자료를 통한 사회의 복원, 발굴 기술상의 문제 동 기본적언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신고고학의 업장에서 이러한 취약점 극복을 위해 자연과학적 지식을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상한 연구에 있어서는 1960 년대에 三上次 에 의해 支필사회의 성립과 변천을 풍하여 삼한 소국에 대한 설명이 시도된 적이 있으며, 9) 이후 신진화론의 영향으로 고고학 자료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9) 三上次 . 南都朝휘 部族園 立 展. 馬台園 194.古代 北 史 1966.

고고학적 지식이 축적됨에 따라 세형동검문화 및 원삼국시대의 유물이 삼한 연구의 주요 대상으로 주목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그간 경주 젠H~&H페의 분묘 유적으로 대표되는 채문화유적을 비롯하여 전남의 접자리 유척 등 이른바 원삼국시대의 고고학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고고학 자료에 대한 의존도가 날로 증가될 전망이다.

그런데 고고학 자료를 활용할 때 먼저 부딪치는 어려움은 유물, 유척의 편년에 대한 의견의 폭이 다양하여 일정한 기준을 얻기가 쉽지않다는 것이며, 이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문화전파론 내지는 형식학척 고찰 일변도의 연구 관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역사척 해석을 가할 수 있는 기술척인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국가 형성 문제에서 관심의 초점이 되는 정치권력의 성격이나 계총화 현상을 고고학 자료를 통해 추출할 경우, 이에 합당한 자연과학척 분석이나 논리척언 뒷받칭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 유물 유척에 대한 피상척언 관찰만으로는 결국 추론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이와 과련된 문제들은 연구 과제를 검토하는 부분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될 것이다.

다음으로 인류학 이론의 도업과 이률 둘러싼 약간의 문제점들올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신진화론의 개념을 사용하여 삼한 소국의 성격용 이해하려는 시도는 서구척인 학문 이론에 기초하여 한국고대사회

의 성격을 체계화하려는 노력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론의 구체척인 적용 과정에서 논자에 따라 상당한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근래 인류학 전공자들에 의해 신진화론의 도입과 적용 과정에서 나타나 는 여러가지의 문제점들이 지적되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예컨대 중남미를 비롯한 몇몇 지역을 대상으로 한 Elman Service의 진화 도식을 보편적인 모델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왜 그리고 어떻게라는 의문을 전제로 각 단계의 성립 빛 이행 원인과 과정을 추적하는 신진화론 인류학자들의 기본적인 방법과는 달리, 각 단계를 설명하는 특정적 요소들 중 몇 가지만 선택하여 그 유무에 의해 특정 정치제를 특정 단계로 규정한다는 것 등이다 1 1) 특히 chiefdom을 비롯한 각 단계의 개념 이해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은 12) 기본적인 문제부터 다시 살펴보게 하는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한국고대사회의 정치체제의 변화 및 발전을 굳이 이러한 도식에 넣어서 규정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10) 金貞, 註8 의 논문.

李 旭, r新羅園家形成史 究. 1982.

II) 金光偉, 「국가형성에 관한 인류학켜 야룡파 한국고대사 文化 究) 17. 198 5. PP.24- 25·

12) 全京秀, .「신진화롱과 국가형성롱 (園史 ) 19. pp.,86-,89. 1968, 셔율대학쿄 文大學園史學科.

방법론상으로 이러한 견해 차이가 발생되는 근본적인 원인의 하나는 신진화론이라는 이론체계 자체의 불완전성과 비판척 보완 과정에 대한 정보와 언식의 한계성 떼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진화론이라는 이론체계는 연역척 논리를 기초로 여러가지 가셜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각각의 가셜들은 현재까지도 계속하여 다각척언 검중과 비판을 통해 수정 보완되는 과정에 있다는 점을 새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삼한 문제에서 거론되고 있는 chiefdom의 경우, 서구의 연구자들은 지난 10여년간의 논쟁 결과, 어떤 사회를 두고 이것융 chiefdom으로 분류할 것인지 아닌지에 주력하던 초기의 고정된 형식학척 관점에서 이미 벗어나고 있다. 즉 chiefdom 이란 사회척 풀명퉁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국가사회로 진화할 때, 그 과정상에서 나타

나는 일정 한 형 태 의 사회 즉 intermediate-level societies라고 하는 보다 포괄적인 개념에 합의하고 있으며, 그 유형과 기능에 따라 다양한 분류가 시도됨에 따라 궁극적으로 비교사적 관점을 지향하고 있다. l3)

Xl) Earle, Timothy K., ‘ Chiefdoms in Archaeological and Ethnohistorical Perspective", Annμal Review of Anthy 1987.

이에 반해 현재 우리 고대사학계에서는 삼한의 소국을 chiefdom으로 규정할 것인지 아니면 삼한 소국의 구성단위인 힘홉에 해당하는 盛國의 村을 chiefdom으로 볼 것인지 하는 형식학척 의문을 제기하는 단계에서 아직 머물고 있다. 이처럼 신진화론의 도업과 적용 과정에서 적지 않은 문제가 생겨나는 것은 새로운 방법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과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단적으로 우리 학계 전체의 연구 토대의 취약성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연구 시각면에서 중요한 디덤돌을 제공함으로써 학셜사척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임에 틀림없다.

3 연구 과제

이상에서 간단히 살펴본 바와 같이 삼한 연구상에 있어서도 국가형성이라는 문제가 대두되면서 몇 가지의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고 이 과정에서 상당한 흔란을 겪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공통의 과제는 무엇이, 어떻게, 왜라는 구체척언 연구 대상의 셜정과 그 과정과 원인을 설명해 나갈 수 있는 기준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첫째, 삼한 소국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혜서는 먼저 소국의 정치권력의 기반과 크기를 검토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정치 권력의 성격올 검토하는 과정에서 주로 그 사회가 구조척으로 몇 단계의 위계조칙 (hierarch) 율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위계조직의 頂點에 위치하는 자가 어떠한 성격의 권력올 행사하고 있으며, 권력의 중앙집권화와 통치조직의 전문화가 어느 정도로 진행되어 있는가 하는 운제들이 연

구 대상으로 부각되고 있다.

삼국지 웰댐 의 기록을 통해서 삼한 소국내에는 國울 主帥와 落의 帥라는 척어도 두 단계의 위계가 확인된다. 여기에 삼국사기 新羅本紀」의 기록을 보충한다면 福 落내에 다시 許웰와 摩齊가 통솔하는 또 한 단계의 하부조직이 추가될 수 있다 14) 그리고 〈其

14) 三 記」卷 , 新羅本 , 尼師今元年條.

官有鍵率善 君 郞將都園伯長등의 통치기구의 분화과정을 시사하는 기록들 역시 삼한 소국의. 위계관계를 뒷받침하는 자료틀이다. 이로 미루어 삼한 소국은 평균적으로 3 단계의 위계조칙을 가진 정치단위체로 최소한 이해될 수 있다.

통치 조직상으로 나타나는 위계화의 정도를 구체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주거지와 분묘 유척들이 분석되기도 한다. 문헌 기록이 전혀 없고 고고학 자료에만 전적으로 의폰할 수밖에 없는 지역에서는 상대척으로 주거지의 규모가 크거나 인구가 밀집된 지역, 그리고 보다 풍부한 부장품을 내는 분묘들이 모여 있는 지역을 위계상으로 상위에 있으면서 중심지적 기능을 한 집단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상대적인 차이를 몇 단계로 분류하여 전체적인 위계화의 정도를 판단하는 방식이 사용되기도 한다 15) 삼한 연구에 있어서도 최소한 國 과 落의 기

IS) Wright, Henry T., ‘ Recent Research on the Origin of the State,’ Annual Revieω of Anthropology 6, 1977. P.38I.

능적인 차이나 상대척인 세력 격차를 실증적으로 검토하고, 소국 신지의 권력의 크기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고고학척 방법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련데 삼한 소국을 구성하는 다수의 융락집단들은 園 雖有主 落雜居不能 相制1)하는 상태, 즉 대내켜£로 각 융락집단들은 상호 경쟁하고 견제하는 관계에 있으며, 소국의 지배자가 아직도 大 落의 帥라는 위치에서 크게 격상된 위치에 있었던 것 갈지는 않다. 정책을 결정하고 명령을 내리는 과정에서 위계 조직이 여러 단계로 분화되어 있을수록 정치척으로 진화된 집단이라는 하나의 기준이 살한 소국의 경우에는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 의품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된 상황 속에서도 다수의 읍락집단들이 통합되어 대외척으로 하나의 단일한 정치단위체로 기능한다는 사실올 중요시해야 해며, 통합

의 메차니즘을 밝히는 것이 또 하나의 연구 과제라 할 것이다.

정치권력의 형성과 존속 기반에 대해서는 전쟁, 관개, 무역 등 다양한 이론들이· 나와 있지만, l6) 이 가운데서도 삼한 소국의 권력 기반

16) Earle, K., 앞논운 p~83과 Hass, Jonathan, The of the Prehistoric State, 1982, pp.‘33- 149.

을 고찰하는 데는 교역 문제가 바중있게 다루어져야 할 것 같다. 지금까지 철의 생산과 보급 현상을 통해 막연히 소국의 정치권력의 성장 기반이 추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유물의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원료산지와 제작지가 밝혀지고, 교역 물품의 종류와 교역 루트, 교역망 등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축적된다면 중심지central place theory)과 같은 이론의 틀을 활용하여 위계 조직의 존속기반에 대한 좀더 논리적인 접근도 가능할 것이다.

다음으로, 국가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검토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계층화 문제이다. 한국고대사회에서도 청동기문화단계에 들어 오면서 경제적인 변에서의 사회분화 현상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세형동검문화기를 거쳐 원삼국시대가 되면 이러한 분화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다양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고고학 자료들은 주로 편년척인 체계화 작업을 중심으로 연구 검토되어 왔으나, 횡척인 사회 관계로 시각을 돌린다면 이러한 측면의 해석도 충분히 가능해지리라 생각된다. 훤삼국기의 대표척인 분묘 유적인 土樞木鄭t였을 규모와 부장품변에서 서로 비교해 보면 분묘에 따라 질과 양변에서 상당한 격차가 나타나고 있다. 이는 게개인의 사회 경제척 지위가 직접척으로 투영된 것으로서, 주언공에 따라 매장을 위해 투업된 노동력과 富의 양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며, 어떠한 측면에서건 개인척언 차별이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이 곧 정치,경제, 사회척으로 지배권력을 행사하는 지배신분과 그렇지 못한 피지배신분충의 구분 관계를 반영하는 것쩌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계충화 문제에 있어서는 신분의 구분 이외에 세습 관계가 고려되어야 하며, 식생활올 비롯하여 지배자집단의 전용 주거지역이 설정되어 있었는지, 그리고 매장지역이 별도로 구획되어 있었는지 아니면 분묘의 업지척 조건상£로 어떤 구분이 있

었는가 하는 등의 문제들이 광범위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l7) 『삼국

17) Hass. Jonathan, 앞 논푼, PP.9 1 - lo6.

A.Tainter and Ross H.Cordy, ‘ An Archaeological Analysis of Social Ranking and Residence Groups in Prehistoric Hawaii’ , ArchaeokJgy ,1977

사기 신라본기」에는 月誠과 金城축조와 같은 斯짧國의 지배자집단의 전용 거주지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이러한 기록들의 실상과 정확성을 알려면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이러한 유적들이 일반 주거지와 비교해 규모냐 건축 재료변에서,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던 생활용품변에서 어떠한 차이가 언제부터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점들이 분요 부장품자료와 관련지워 면밀히 검토되어야만 하겠다.

끝으로 삼한 소국들 중에는 3 세기 이전단계에 이미 정치권력의 진화가 중단된 것도 있으나, 대부분이 4-5 세기 이후까지 독자척인 지배기반을 유지하면서 성장을 지속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그러므로 간과해서는 아니될 또 하나의 연구시각은 삼한 소국의 성격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질적, 양적으로 어떠한 변화를 나타내는가 하는 점이다. 고고학상으로도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초반경에는 古境이 출현하고 토기제작 기술상에도 중요한 변화가 보이며, 철제 무기의 부장량이 크게 증대한다. 그리고 4-5 세기 이후가 되면 중요 소국의 중심지에서 지배자의 권위를 반영하는 金網製, 製 類가 발견되고. 있어, 멜l 둠 지배자의 권력기반이 확대되고 집중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고분의 규모와 유물의 비교를 통해 역으로 국읍세력과 읍락집단의 분포 상태가 추정될 수 있으며, 각 단계별 변화 내용을 토대로 정치 권력이 행사되는 유형과 기반, 그리고 위계조직의 질적, 양적인 변화가 다각척으로 분석될 여지가 크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삼한 소국은 인구나 영역의 규모는 상대척으로 작은 편이나 계층 분화현상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등 초기국가의 중요한 특질들을 나타내고 있다. 앞으로 고고학 자료의 기술척인 활용으로 小國智의 권력 기반과 권력의 크기 풍에 대한 종더 자세한 지식이 얻어진다면 소국 자체의 개념뿐 아니라 소국올 지청하는 용어 문제도 버교척 용이하게 정리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삼한 소국의 성격도 학계의 전반적인 연구경향에 의해 국가 형성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연구 검토될 것이 요구되고 있다. 이같은 요구는 한국고대사회를 세계사 속에서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하나의 노력언 동시에, 한국고대사 나름의 독자적인 기틀을 모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무비판적인 이론의 도입도 경계해야 하겠지만 특정 이론에 대한 부정적인 선업견도 지양해야 한다. 그리하여 합리척인 분석 체계나 과학적 방법론을 선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을 축척해 나가야 할 것이다.

고고학 연구현황

馬韓• 支園班究의 諸問題

【崔夢龍

한국고고학의 시대구분에 있어서 原三園時代라 함은 서력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로부터 서기 3 00년경까지를 일걷는다. l)

그련데 이 시기는 신라와 백제가 실질척언 고대왕국으로 성장하여 진정한 의미의 삼국시대가 전개되기 이전의 과도기로서 역사척으로는 삼한시대 또는 삼국시대전기2)라 부를 수도 있겠다. 또 이 시대률 전남지방에 국한한다면 마한시대라 할 수도 있다.

I) 金元龍, 園考古 , 1986. pp.n8- 130•

1) 崔, 圖고고학의 홉代 分에 대한 약간의 , 先生 甲. 훌求 , 1987, P.78

한강이남지역에서 이 시기에 존재하던 제소국들의 접합체인 삼한사회에 관한 연구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의 전환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고고학뿐만 아니라 고대사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커다란 의미를 갖는 분야라는 것은 얼찍부터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이 분야에 대한 사료의 부족과 고고학척 조사의 불충분으로언하여 삼한 제소국의 충분한 성격파악은 고사하고 제국의 위치버정도 어려운 실정이다.

여기에서는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와 사료를 통하여, 마한사회와 이들이 共立하여 세운 目支國의 위치와 존재시기의 문제점들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겠다.

2

목지국을 盟主國로 하는 마한 54소국은 제소국의 연맹사회였던 삼한사회의 중추세력집단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사회의 정확한 성격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는 실정이다.

마한사회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마한의 성럽시기와 그 위치 비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삼국지 辰함條」에는 古之亡A 週쫓投來遊웰國,띄합뽑來界地與之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泰의 존재시기 (기원전 249- 기원전 207) 를 고려하면 ,펀함의 성럽시기가 기원전 3세기 이전으로 올라갈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겠다. 그리고 『三國史記.新羅本紀第一始祖 西千條」에 〈三十八年(B.C.20) 二月公 馬韓王讓 公 辰二韓. 屬國比年不輸職 大之. 若是乎. 前此中 泰 來來 處. 韓 與辰 居至是 韓之有~烏) <三十JL年(B.C.I9) 馬輸王 或 西 王前 使今當其 正之… 乃避〉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이 서기전 년경이 되면 이미 패韓王으로 부를 정도로 강력한 정치체제를 수립했음을 보여주며, 또 당시에 ,맨韓과 新雜간에 교류가 있었음도 보여준다.3) 이렇듯 마한사회가 늦어도 서기전 년경에 이미 왕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서기전 세기초에 고대국가로서 위만조선이 이미 형성되었던 것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r삼국지」와 r삼국사기」의 기록뿐만 아니라 마한에 판한 다른 문헌기륙들로 미루어보아 마한 54園은 늦어도 서력기원을

3) , 「考古 的則面에서 본 .陣. (馬짧 • 百濟文化) 9. 光大學校 • 百 文化 究所. 1986• Pp·5- I 5·

4) 崔 , 「 園古代園 形成에 대한 一考察. 哲埈i 土띠甲記 史 知 業 1983. pp.61-77.

전후로한 시기에는 문헌상에 등장한다. 그리고 〈地合方四千餘里來西以海 限皆古之辰國也馬韓 大共立其 辰王 支國짧王三輪之地其諸國王先皆足'〉이라는 『후한서 J r險따」의 기록에서 보이는 마한의 외교 • 행정의 중심국인 목지국이 백제의 近혐古王에 의해 멸망하여 마한사회가 백제에 병합되는 것이 서기 3 6 9년 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목지국을 위시한 마한사회는 적어도 40년 이상 존재하면서 나름대로의 문화를 계승발전해 왔던 것으로 보여진다.

마한 제소국의 위치비정에 있어서 가장 논의가 많이 되는 것은, 마한언을 공립하여 세운 마한의 일소국으로 정치 ·문화·외교의 중심국이었던 목지국에 관해서이다. 이 목지국은 申팔港 (익산 • 금마) • 李困 천원 • 직산 및 부근의 평택 • 성환) • 浩 (서울 위례성) • 千寶字8)(인천) • 金파培 익산→예산) 등의 여러 학자들에 의해 각기 서로 다른 지역으로 비정되어 왔다.

목지국의 처음 위치는 밍南天原휠짧山일대로 추정되어지며, 이콧에서는 후에 개책되었을 당대의 熾으로 추정되는 山城이 발굴된 바도 있다 11 ) 그리고 백제의 近땀古王이 서기 3 6 9년(근초고왕 24年)에 마한의 잔여세력을 멸망시키고 전라도 남해안 일대에까지 그 세력을 확장시켰다는 것으로 보아, l2) 마한의 초기영역이 天原·樓山일대와 부근의 平澤·成歡일대였다 하더라도 그 이후에 남쪽의 益山일대로 그 영역이 옮겨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I3)

그러나 마한의 목지국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한국고고학의 시대구분상에서 서력기원 전후부터 서기 3년경까지에 해당되는 原三國시

6) 李퍼흙, 「덤 支國의 位없와 그 地理 r障園古代史 英 1976• pp.그 4 2 - 2 4 8 •

7) 申 浩, 「戰後三 考. 國史究草 193°; 全 版. 1977. p.89.

8) 千寬宇, 「目支國考 .園史24. 1979. PP.13-30 •

9) 金貞, 「王 辰園과 ‘三 ’의 . 聊園 ~ 13. 1976• P·17 「目支國考'. 千寬宇先生遺 紀~,훌園핏웰훨훌. 표홈文化, 1985. Pp.13 1 - IH.

10) , 前 文(註6).

ll) 成周 • 杰, 「 山 山城 拖 中 告. (百 究) 16. )南大 校百濟究. 1985. pp.IOI -160.

1) 困, r輪圖史」古代 , 文化. 1959. P.36:

13) 李基白• 李基束, 聊園史古代 • . 1982• p.95 및 P·J38•

대 혹은 삼국시대전기로서 그 하한이 近휩古王代에까지 존재했었음을 고려할 때 위의 여러 지역에는 그에 대응될 만한 증거를 보여줄 수 있는 고고학적인 자료가 미약할 실정이다.

그런데 나주 橋南面大安里, 德山里, 新村里(사적 76 • 77 • 7 8호) 일대에는 이 시기에 해당하는 매우 설득력있는 고고학적 증거가 나타난다. 즉 이 일대에는 大形古樓群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며, 특히 新村里9號t 에서 출토된 金爾冠의 존재는 이 일대에 강력한 支配짧뼈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하겠다. 그리고 또 괜城隆代百濟(기원전 18- 서기 475) 의 영역이 북으로 禮城江, 동으로 春川, 西로는 南으론 提川• 淸싸로 비정되므로 목지국 최종 위치는 종래의 益山, 禮山說보다는 提 . 淸싸 이남에 위치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할 수 있겠다. l4)

필자는 이러한 문헌상의 자료와 지금까지 마한지역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인 성과를 근거로 하여 목지국의 마지막 근거지를 全雜南道짧州游南面일대로 비정하는 가설을 세운 바 있다. l5) 그런데 여기서

14) • 五, 古 的資料 흥해 본 百홉흥의 城 . 千 宇先生遺..園史 正 文化 1985. p.83.

15) , 文註..

주의해야 할 것은 近쩍古王代에 의해 마한 목지국이 백제에 정치 • 군사척으로 멸망당한 후에도 상당한 기간 동안 이 지역에는 마한의 문화전통 계속되었다는 사실이다.

3

그러면 羅州地域올 포함한 전남지방의 마한관계 유적을 통하여 마한 • 목지국문화의 성격을 간략히 파악해 보자.

전남지방에서 발견되는 유적으로 이 시기에 해당되는 것으로는 고인툴(지석요)과 독무멈 (옹관묘)으로 대별되는 분묘유적과 주거유척이 있다.

얼마전까지 전남지방에서는 선사시대의 주거유척은 발견조사된

예 16)가 있요나 原三國 에 해당되는 주거유적은 조사된 예가 없었다. 그런데 지난 19 86년과 19 8 7년에 행해진 住岩댐 수몰지구 발굴조사에서 全南昇싸l 那松光面洛水里와 大갑및 효弄部落에서 도합 백수십여기에 달하는 대규모 취락유척이 발굴조사된 바 있다.l7) 이 발굴에서

16) 崔 , 「光州松岩洞住居址 告圖考古, 1978, PP-73.

17) 서울大 校考古 科와 園立光州椰 에 의해 19 86년파 19 8 7년 두 차혜에걸쳐 根關 된 바 있으며, 그 절과로 다용과 강온 면의 율이 었다.

가. , 「三園時代 의 全南地方文化 3 , 1987. PP·I-9.

냐. 崔흉龍• 홈표훌 • 金承玉, 「昇州大용里첩자리 훌훌훌홉햄. 文化化財管理局, 1987. pp. 80-lll.

는 원삼국시대의 주거지와 무문토기시대의 주거지가 혼재되어 노출되었는데, 특히 원삼국시대의 주거지는 이 지역에서 최초로 발견된 마한시대의 주거지로서 커다란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분묘유적으로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척언 묘제의 하나로 특히 이 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유적과 청동기시대 말기부터 출현하기 시작하여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러서는 지배적인 묘제로 등장하여 백제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용되는 독무덤유적이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전남지방의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후기에서 초기철기시대에 걸쳐 축조되었으며, 이 고인롤은 당시의 정치 • 사회적인 양상을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이 고인돌이 주된 꿇制로 사용되던 사회에는 전문 장언이 존재했으며, 지역간에 기술의 전파와 제작품의 교역이 있었고, 사회진화단계상으로‘계급사회언 族長社會(chiefdom society) 의 단계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앞A로 이 고인폴의 공간척인 분포에서 보여지는 세력권 또는 문화권의 존재가 밝혀지고 전남지방의 고인돌이 갖는 독특한 성격이 규명되면, 이 지방에서 차후에 보여지는 단계의 사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전남지방의 독무덤들은 영산강 하류의 備南面新村 山里, 大安里등의 짧南面일대와 待面f岩里와 인곤의 岩都始終面, 威平휠 月뾰面등지에 칩중척으로 풀포하는데, 이러한 독무혐의 집중척인 분포는 우리나라에서 이 영산강 하류지역의 예가 유얼하다.

游南面일대의 고분들은 거대한 하나의 封土내에 여릿의 製챔을 合拜한 것들이다.그 중에서 新村 號 과 德山뿔 號햄과 같은 前方後때形의 고분들은 그 외형과 매장방식에서, 그리고 德山里 과 大安 號 은 봉토주위에 도랑이 설치되었다는 점 등에서 일본의 고분들과 유사한 면이 있어 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18)

18) 有光軟-, 「 州橋南面古 (抽 (B和十三年 古 報告), 1938, PP·:zo-35.

이들 고분군들이 밀집되어 있는 나주지역은 전주와 함께 전라도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을 만큼 우리나라의 남서부 지방에서 정치 • 경제 •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다. 그런데 이 나주지역이 榮山江流했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하는 것은 고려가 지방제도를 정리하면서 12收의 하나를 나주에 설치하면서이다. 그런데 그 이전의 나주지역에 관한 기록은 미미한 실정이며, 특히 이 지역이 백제의 영토로 편입되기 이전의 상황에 관한 기록은 더욱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단지 당시 나주 일대의 성격을 파악해 볼 수 있는 자료로는 짜南而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古慣群.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나온 金網冠을 비롯한 유물 등을 살펴보면, 당시 이 지역에는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제가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자료들은 游南而을 포함하는 나주지역을 ,떤勳54園의 하나로 비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위치비청은 학자들간에 견해차이를 보이며, 이 일대에 不弼支國, 布짧支國등의 명칭을 가진 국가가 존재했었다는 추정도 있다. 하지만 이 游南面일대에 백제와 시기척으로 같은 국가단계의 정치체제가 존재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겠다.

지금까지 이들 고분들의 연대는 대략 5 세기 후반을 전후한 시기로 알려졌지만, 全北南原킴 松洞面細l 田里19)에서 초기철기시대의 주거 유적이 발굴조사됨 A로써, 그 연대가 그 이전드로 소급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즉 이 유척에서는 종래의 전통적인 민무늬토기와 함께 효훨土器 및

19) 尹 「南原細田里遺 表收 遺 報告. (全 文化) 1 . 1986, PP.167-184.

金海土뽑계통의 잃色土땀가 출토되었는데, 그중에서 환원된 칩、質의 色土器들은 羅싸I 南面古慣群에서 나타냐는 뚫혐片들과 매우 홉사하다. 그리고 이 유적의 연대는 原三國째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연 羅州游南面古벌群들의 연대도 종래의 생각보다 1-2 세기 정도 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분의 연대, 金網冠을 비롯한 각종 부장품, 그리고 大形古慣의 밀집분포 등을 고려해 볼 때 짧싸| 橋南面i 일대는 어느 정도 연대상의 차이는 있지만 기록에 보이는 마한의 마지막 근거지일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짧南面을 비롯한 영산강유역의 대형 독무럽들은 이 지역이 실질적으로 백재의 영향권에 들어가기 이전에 이콧에 자리잡고 있던, 小國의 지배층들의 것으로 보여진다. 즉 초기철기시대 이후 새로운 철기문화를 수용함£로써 농업생산력을 중대시키고 사회적인 발전을 이룩한 마한의 小國들은 그들의 유치권력을 확대 • 팽창시키연서 소형 독 무덤을 거대화시킨 것이다. 영산강유역이 실질적무로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은 제반사항을 종합해 볼 예, 기록에 보이는 4세기 후반이라기보다는 이 지역에 大安 5 號 과 같은 백제의 石室이 등장하는 6세기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20) 崔 龍• 李 圭• 盧 廳, 州樞南面大安,를 百, (文化 文化財 理局, 1979. pp.90 - 104.

그러므로 영산강유역의 대형 독무덤들은 마한소국의 지배층들의 무럽이며, 특히 金網冠이 출토된 游南面新村멸 號빽은 목지국 말기의 지배자, 또는 목지국의 전통을 이은 지방호족의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제반사항으로 미루어보아 백제의 南避과 이에 따른 지배영역의 南部續 으로 인하여 세력이 축소된 목지국의 최종 곤거지는 영산강 유역의 합南面일대로 비정될 수 있올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지금까지 발견조사된 金網冠들이 당시의 정치체제하에서 국가의 단계를 나타내는 최고지도자 또는 王의 상징물 (status symbol)로서 인정되는 것으로도 그 타당성올 인정받을 수 있겠다.

그러므로 목지국올 맹주국으로 하는 , 韓 小園과 고구려 • 백제 •신라 삼국과의 관계는 공시척이고 상호판련된 대퉁한 수준21)이었다고

21) 崔 龍, 前婚文(註2) , P.788.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필자 나름의 답은 다음과 같이 천리될 수 있겠다.

I. 마한은 그 성립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늦어도 서력기원 전후부터로 보아야 할 것 같으며. 4세기 후반 백제에 의해 멸망하고 나서도, 서기 53 8년 技餘速都이후 백제가 이 지역을 직접 관리할 때까지 나름대로의 독자척인 문화전통을 계숭해 왔다.

2. 馬韓諸小國의 맹주국이었던 목지국의 처음 위치는 없歡• 覆山 일대로 추정될 수 있겠지만, 이후에 백제의 세력이 확대되면서는 그 근거지가 점차 羅사 짧南面일대로 내려왔을 가능성도 높다.

3· 마한 • 목지국은 고대 三國과 마찬가지로 稱王을 할 정도의 국가를 형성했으며, 이러한 사실은 이보다 시대가 뒤떨어지는 자료이긴 하지만 新村里號t홉에서 출토된 금동관 등의 유물을 통해 볼 때 최고 권력자의 존재는 충분히 입증된다 하겠다.

4· 游南面일대의 古樓群들은 4세기 후반기 이후가 되면 행정상로는 백제에 편입되어지나, 실질적으로는 백제와는 별개의 독자척인 마한 • 목지국의 전통을 유지해 온 세력집단의 분요일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답은 어디까지나 가설로서 앞으로 고고학적인 자료의 증가에 따라 좀더 보완이 될 것이다.

활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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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 州 南面古 和十三年度古 朝 告), 193 8.PP.2。

전북지방 原三國時代연구의 문제점

【尹德香】

전북지방의 原三國I많代연구성과나 조사활동은 거의 백지상태인 생이며, 원삼국시대를 전후한 시기, 즉 청동기시대나 백제시대에 대한 연구 • 조사도 매우 빈약한 실정이다. 다만 최근에 들어와 益山 址나 효店里古합群 조사되고 익산지역을 중심으로 청동유물이 발견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또 수는 많지 않으나 原三園期의 유풀이 출토되는 유적의 발견 예가 있고 그 수가 충가하고 있으며, 원삼국문화의 기반이 되는 支石뚫社會를 업충해 주는 지석묘의 발견이 척지않다. 그러므로 이 지역에서도 앞으로의 연구 • 조사에 의하여 보다 많은 원삼국시대의 유적이 발견되고 그 품화내용이 밝혀질 것은 거의 분명한 일이다.

여기에서는 우선 이 지역에 있어서의 유척조사현황융 잘펴보교, 다음으로 원삼국시대에 속하는 유척을 알아보도륙 하겠다. 이훌 홍하여 전북지방에 있어서 원삼국시대 연구가 가지는 몇가지 품제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며, 연구의 현황도 파악훨 수 있융 것A로 생각된다. 이률 바탕으로 전북지역의 역사척 • 지리척 배갱율 살펴봉으로써 앞으로의 연구방향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1 遺 調 現況

1984년에 간행된 考古學地圖1)에 수록된 전북지방의 유물출토지, 또는 유척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표 l

천주시 완주군 남씬군 우주군 천안군 잉설군 장수군 j ’!.。‘ ;L‘:r- 고 창군 갱융군 익산군 욱구군 겨 l 신석기유척 z l 3 청동기문화 포항충 44 (주거지) (토기) ’ I 6 (석기 : l 2 4 7 석검, 석촉) (석기 : lII 3 반훨도 동) (갱동기 : ll I‘(Iλ ) 3 동검) (챙동기 : lI1 동모, 동과) (청동기 : 44 동경. 기타) (요셰 I :지 I 1 lIl ’ I 。 석.n..씩관.n.) (요셰 I: 토 Il 피훌요.용판요) 초기챙기용펴 (유척) 77 빼제고품 l 4 lI 4 I 2 14 제 i 34 2 11I Z3 9 z 13 l 64

이 표에는 한 유적이 겹쳐진 경우도 있으며 또 반면에 누락된 것도 있으나 대체로 전북지역에서의 고고학적인 연구현황을 찰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첫째로, 어떤 형태이건 유척, 또는 유물에 대한 조사가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매우 침체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지역적인 편중성을 들 수 있다. 즉, 64개소 중 技安 에서 조사된 것이 23개소로 전체의 3 6% 이며 다음 益山淑이 13개소 20%로 이 두 군에서 조사된 것이 전체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물론 유적이나 유물이 균등하게 출토되거나 발견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지역에서 특히 많은 유물이 발견되고 유적이 확인된 것은 조사영역의 국지성에 기인하는 면이 없지 않다. 또 이들 지역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조사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유적수로는 이들도 I0개소 미만의 유적이 중복된 것이란 것을 지척할 수가 있다. 이로써 보면 이 지역의 연구조사활동의 수준을 어느 정도는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세번째로, 유적간의 시기적 단절을 들 수가 있다. 즉 南原那의 경우 백제고분만이 조사되었흐며, 가장 조사가 활발한 技安那의 경우 백제고분은 헬챔휩 x 기가 조사되었을 뿐이다.2) 또 益山체이나 홉散那의 경우,

2) 이에 대해서는 의견올 달리하고 있며 훌뼈훌훌 原三훌時代에 촉하는 것로 생각한 바가 있다. 稱, 「 格 例尹 土回甲

아니 정확히 말하면 技安那을 제외한 전북지역에서는 19 84년까지 초기철기문화(I펑三國文化로 이후 통일)의 유척 • 유물이 발견된 바가 없다.

그 이후의 조사에 대하여서는 약간은 희망척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19 84년부터 전북지방의 각 市• 部의 문화유척지표조사가 연차척으로 실시된 데에서 기인하며 상당한 기대를 가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조사는 1 년어2개군(市포함)지역융 조사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全北大, 圖光大, 群山大퉁이 이 조사를 담당하였다. 이에 의하여 1984년에 高敬훌IS • 技安那, 19 8 5년에 金樓那과 群山市률 포함한 끊蕭那, 19 86년에 益山짧과 井울都, 그리고 19 87년에 南原市를 포함한 南原과 全州市를 포함한 完州觀이 조사되었다. 이 조사보고서에서 청동기시대-백제에 이르는 유척을 뽑아서 정리하연 다음 표와 같다.

~故3) 技安.) 金찮5) ~섭'/i.6) 益山7) 井울8) 南原

3) 全北大 校 館. 홉빼k地方文化財地表 告 1984.

4) 圓光大 校 聊百 文化 究所, 全 北道文化 告 技安 ). 1984.

5) 全北大 校, 方文化財 表觸 報告 . 1985.

6) 山大 方의 文化遺. 1987 圓光大 校. ..百 文化 究所, 益山 文化 地表觸 告 百 文化 第9 , 1986•

98)) 全全州北市大立 校 『井 南 原方 文方化文財化 地 表 告 .替 1199868•7.

위 표에 나타나 유척들을 다시 시대별로 세분하는 것은 지표조사보고서라는 한계에 의하여 매우 곤란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이들은 개괄척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표에서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서해안을 변하고 있지 않은 益山那을 제외하고 조사대상 전지역에서 지석

요가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高敬짧의 경우 그 수가 매우 많다는 점올 지척할 수가 있는데 현지답사한 바에 의하면 그 수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럽에도 불구하고 이들 지석묘와 관련이 있는 유척이 거의 확인되지 않았다. 즉 지석묘만이 있고 그것을 축조한 주체들의 생활유척이 익산군과 남원군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전혀 확인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둘째로는 삼국시대, 또는 그 이전의 성터가 주목되는데 이들 중에 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이 대부분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몇몇의 경우 특히 부안이나 남원의 토성 중에는 원삼국시대로 올려볼 수 있는 것이 었다. 끝으로 정읍군의 경우에 분명히 제시되었고, 개개 보고서 마다 거의 공통척으로 언급되는 바와 같이 고분의 도굴, 또는 파괴가 심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로 인하여 발생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2 원삼국시대의 유적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빈약한 단계에-있는 이 지역의 유물·유적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원삼국시대의 유척울 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이들 중에는 보고자와는 견해률 달리하는 것도 포함시켰음을 먼저 밝혀둔다.

全榮來,

井울那 永元面 졸훨里 古 ttl 封土中 全榮來, 「井둠 雲훌훌里 古J1t群」

上짧합 第 3 輯 1974 井둠部 효束面 二城里 全榮來, 「井붙 =城里 뚫格一例」 ¥훌#홉 上빼합 第 5 웰 1975 1.:i홈t 휠 n 雅山面 上甲몇 李첼잖外, (中島) u附 I. 忠南 • 支石횡群 全北 j 빼헬 地表調경 E 報告 198 1 11 新林面松햄필 全榮來, 「高敢 松원 ti 里 ¥훌*월훌」 뚫#홉 上해웰 第 5 輯 1975 群山市 內興洞沙玉 群山大學 뼈.物館, (1天滿地方의 貝 t 훌 文化遺웰) 198 5 i 天칩홉群 米星울 꾀 I 女훌 I 뭔 11 t 해펀 F 11 11 仙避島!I! 金元원 ti , r 各 地方의 土짧, 石뚫, .말 11 합角器 J (輪國및) I 1977 11 大¥ f 面 媒山뿔 ftX게힘地 李Il!~外, 上揚펀 198 1 裡및市 八뿔 i 同 原八뿔 上同 II 앞· 뒷산 益山짧 望據面 韓山월!-花 金普-基, 「益山짧 文化財 地表調 南·나암·나명 경 E 報告홉〈先史遺짧) J (馬陣百濟 11 文化} 第 9 輯 198 6 ”” 新里 새말 ¥훌*홈 밟19完8 6奎 , 〈古뺏 •뼈 짧址〉 上同홉 생 t~훌 훌1s i률 휠윷面 東之山里 李白圭, 「옳뿔 홉훨 住居址 쩔鋼 住居址 報告 J (全北史學} 第 6 轉 198 :2 技安훌1s j앙 山面 所山里 全경흩來, 「技安地方 古代 圍뼈遺 城 告R훌 }파 第 그4 陣 遺19빼7’ J ( 全北遺웰렴훌훌홉 11 11 土山里 /I 上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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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옐거된 유척 외에도 훤삼국시대에 속하는 유척이 더 있울 것이 분명하지만 여기에서는 우선 이들율 중심으로 천륙지방의 훤삼국 시대에 대하여 잘펴보기로 하겠다.

위의 유척들은 크게 주거유척, 분묘유적, 그리고 성터로 나눌 수있다. 이들 중 주거유적으로 확언된 것은 청하주거지와 세전리유척이 있다.

청하주거지는 절반 이상이 이미 파괴된 방형수혈 주거지이며 내부에서 무문토기와 함께 검해식토기가 공반하였다. 10)

세전리유척에서는11 ) 모두 23 基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는데 長橋圖形, 技角方形의 수혈주거지로 내부에서는 거의 모두 熾址가 확인되었다.

10) 李白圭, 「住 址 告全北史 第 , 1982•

토기는 무문토기의 전통을 강하게 지닌 金海式土器가 주종을 이루는데 高杯도 늦은 시기의 주거지에서는 출토된다. 또 전모가 드러난 13基중 10基의 주거지 내부에서는 두께가 두꺼운 大廳片이 출토되며, 그중 복원된 것에 의하면 바닥에 매우 작은 굽이 있는 廣협의 長 로 松龍里훌훌格土器와 매우 유사한 기형을 보이고 있다. 이 유척에서는 철기와 석기도 출토되고 있으며, 탄화된 짧物도 출토되고 있는데 두가지 점을 특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소형토기의 존재이며 이들 토기는 각종 실용토기를 작게 만든 것으로서 실용적인 토기는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는 소형토기와 함께 토주가 제작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토주 한 세트가 발견된 것이 있는데 이에는 관옥과 面玉을 포방한 것도 있고 곡옥을 모방한 것도 있다. 이갇은 土珠는 거의 모든 주거지에서 칙경 0·3cm 내외의 小玉에서부터 각종 구슬이 출토되고 있다. 그리고 3 차조사에서 조사된 주거지에서는 수정을 찰라낸 원석이 발견된 바가 있어 이 유척에서 수정옥을 제작했올 것으로 추정되었다. 측 각종의 구술과 구슬오방풍이 다량 출토되고 있는 정올 한 특정으로 들 수 있다. 이것은 三園志鏡書東奏 韓條」의 以 珠 財寶…의 기록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細田里遺짧은 조사된 내용 외에도 그 업지에서 주목되는 바가 있다. 첫째 주변에 무문토기유척과 지석묘가 있으며 둘째 훌훌格으로 추청되는 유척이 북쪽으로 둘러싼 야산에 자리하며, 셋째 동북쪽에 훤삼국시기의 성터가 있다는 정에서 그러하다.

분요유척으로는 우선 훌格훌률 들 수 있다. 01 들 훌格은 지표조사

의 결과를 참작하면 전북지역의 거의 전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조사된 松龍里, 三城里등지의 廳챔土짧는 部에 銀敏文휴양를 가지며 이같은 것은 시기가 약간 늦은 南原斗洛뿔 12)에서도 볼 수 있다. 이 格 이 조사된 바와 갇이 원삼국시대의 분묘로서 전북지역에서 주종을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면, 三國志 輸條」의 〈有相無椰〉과 일치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相 이후의 분묘형태로 南原 岩 석곽묘가 있으며 封土에서 金海式土끊 검출된 雲1짧및石室慣이 검토의 대상이 된다. 전자는 破壞햄으로 분명한 것은 아니나 석재로 꿇椰을 축조한 것은 를렴없는것 같으며, 출토유물에서도 昌原三來洞週웹과 공통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주변지역에 ψII耶土팝를 내는 고분군이 자리하고 있으며, 封土境도 있다 13) 이 유척을 원삼국시대의 뚫制로 언정할 경우 원론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즉 원삼국시대의 하한을 토착문화의 하한으로 할 것언가 아니면 정치권의 변화로 삼을 것인가, 또는 한반도 전체의 맥락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첫번째 셜에 따를 경우 里古慣은 당연히 원삼국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며,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은 新月및製格꿇14)도 이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이

lZ) 全榮來, 「全北 方出土 格 例. (全北遺 } 第 . 1973.

(3) 全北大 校 館, 前 (註9). 1987.

(4) 全榮來, 「古 仙里. (全北 聊 第2 . 1973.

경우 전북지방원삼국시대의 묘제로서 石椰幕(또는 石훌행)가 寶格 와 공존하는 것이 된다. 두번째 說에 따를 경우, 즉 백제에 의하여 전북 지방이 장악된 이후를 삼국시대로 파악할 경우 이 지역의 동부 ·산간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가야의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하연 백제문화가 아니고 椰文化로 편입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다. 또 언제부터 정치척 A로 백제영역에 포함되었는가가 밝혀져야만 이 지역의 원삼국시대의 하한을 알 수 있게 된다. 세번째 기준에 의할 경우 문화의 흐름을 일도양단식으로 가률 수 있는가 하는 정 외에 어느 유척의 연대가 언제언가 하는 현년상의 품제가 있다. 예컨대 斗洛里의 경우 A.D.3-4C. 新月里의 경우 A.D.4-C라는 연대판올 그대로 인정할 때 이들이 원삼국시대인가 삼국시대의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게 된다.

끝으로 성터에는 주로 명야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토성이 있는데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조사된 것이 없다. 그러나 이들 유적의 지표상에서 收指되는 유물에 의하면 생활용기와 함께 製片이 있어 복합유적으로서 원삼국문화를 구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척일 것으로 생각한다.

3 문제점과 연구방향

천북지방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반도에서 가장 농업생산량이 큰곳으로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집단이 생활하기 적합한 곳이다. 이 지역은 짧江을 사이에 두고 북으로 충청남도와 접하고 소백산맥에 의하여 동으로 경상도지방과 접하며 남으로는 전라남도와 별다른 자연적인 구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서 전남지방과의 교류는 매우 용야한 편이며 고대인들이 육로를 이용했을 경우 소백산맥의 동쪽에 위치한 때l耶와의 접촉도 활발했을 것으로 보언다.

마한 54국에 대한 위치버청에 의하면 15) 전북지방에는 10-11 개의

15) 」古 鷹. PP·283-289. 1959.

소국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고 그중에는 한때 ,馬:웰의 중심이었다는 乾馬園이 포함되어 있다. 이갇은 나라의 수효에 상응할 만한 유적이 아칙 발견되지 않았고, 또 이를 업중할 만한 내용도 조사되지 않은 실정이다. 그러나 익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많은 청동유물이 출토되며, 홉빼k 上甲펀 일대의 支石護群은 족히 한 개 小園을 상정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 뼈11 田뿔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나 井 鷹仙里• 훌훌훌里일대 등은 一小園으로서의 가능성올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각지에 있는 토성들은 그 같은 집단부락의 중심으로 파악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칼은 것틀울 중심으로 이 지방의 원삼국문화에 대입하기 위해서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척지 않은 어려움파 품제가 있다. 결론올 대신하여 이들올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원삼국뭄화 또는 시대에 대하여 이 지역에 척용되는 개념이

우선 정립되어야 하는데, 이는 탈리 표현하자연 이 지역 또는 인근지역과의 관계에서 編年쨌이 확립되어야 함을 말한다.

둘째, 주거지와 직결되는 훌制의 확인이 우선 있어야 되며, 동시에 支石輩와 石懶 의 관계, 또는 짧格幕와의 관계가 밝혀져야 될 것이다. 또 토성과 주거지와의 관계, 즉 토성내에 집단 주거지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세천리의 예에서 보듯 토성과는 별도의 장소에 있는 것인지 등이 밝혀져야 될 것이다.

셋째, 지배계층의 발생을 업중할 수 있는 분명한 유척이 조사되어야 하며 그 대상으로는 했훨나 토성이 제시될 수 있다. 특히 토성은 축성방법에 대한 것이 아니고 전면적언 발굴조사에 의하여 척잖은 자료를 얻을 수 있도록 조사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이 지역의 특수성에 의하여 백제와 가야의 관계, 달리 말하면 가야의 실체에 대한 연구가 밑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끝드로 이들 모든 문제에 선행하여 원삼국시대, 아니 그를 중심으로 한 시기의 유척에 대한 확인작업이 이루어져야 되며 최소한 유적 • 유물 地名表라도 작성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외에도 많은 문제가 있을 것이며, 이제 첫발을 디디는 원상국문화에 대한 연구이고 보면 문제가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 보다 청확한 표현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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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積石木懶瓚연구의 제문제

【趙由典】

지금도 경주시내에는 古新雜時代무멈 가운데 외형이 구릉으로 오언될 정도로 거대한 것에서부터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명지에 집단을 이루어 분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무덤들 가운데 내부구조가 소위 신라 積石木柳壞으로 불리는 무덤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척석목곽분이란 돌무지덧널무덤인데 고신라시대 무럽으로 대표되고 있며, 과거 일제시대부터 유명한 金冠爆발굴조사로 관심있는 사람의 연구의 대상이 되어왔다. 광복 후에도 우리 손으로 신라 척석목곽분이 학술조사의 필요성이나 유척지의 정비 등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짐으로써 자료의 충가에 따라 다소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어 오고 있다. 그것은 연구자의 판점과 시각에서 본 제시년대의 섬한 진폭이라든지 木鄭樓자체의 변천은 물론, 발굴조사를 통해 본 구조에 있어서도 木柳이 놓이는 위치가 지상식과 지하식, 반지하식이 알려져 있으나 아칙까지 푸렷한 이유률 알 수 없으며, 뱃톨율 이용하여 목곽 위로 엎지 않으면 안되었는지 둥 본질변에서 밝혀져야 할 문제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특수한 훌制의 계통울 추구하는 과청에서 그 훤류훌 代의 木 境에 두고 積石은 支石 의

石에 연결시키는 견해와 木懶精造는 土據木構 와 樂浪木椰 의 전통에 남방식 支石훨의 천石또는 한강변에 분포하고 있는 백제시대의 뱃돌 석곽의 확대발전이라고 보는 견해, 나아가 신라의 척석목곽분의 기훤은 스키타이 파지리크 분요에 있고 始原은 선사시대의 적석에 었으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石壞과 관련지어 발달했다고 하는 견해 등 하나로 통일된 견해가 보이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조사된 자료를 시대순으로 알아보고 나아가 얼찌기 선학들이 지적한 문제점을 몇가지 측면에서 다시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신라 적석목곽분 연구가 다소나마 진전되기를 기대해마지 않는 바이며 여러분의 질책을 바란다.

2

신라 적석목곽분에 대한 최초의 발굴은 19 06년 경주 皇南洞의 味鄭王陸주변에 있는 한 무덤이었다. 이 무덤은 당시 今西龍이 무덤의구조를 확인하기 위헤 조사한 것으로 발굴 후 보고서는 발간되지 않았다. 조사는 무덤내부의 중심에 이르지 못하고 그친 것으로 보이며 그때 시굴한 내용을 셜영하는 가운데 皇南里의 大形樓내부는 척석으로 관을 옹호하고 있고 석곽이 없다고 하고 있음으로 보아 이것이 최초의 신라 척석목곽분이란 발설이며 그후 웠IJ場조사가 이루어져 출토 유물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척고 있다.

〈慶 古境群가운데 한 원형분 로서 높이 32 ,’ 동서 지톰I4 1 남북 지름 147 내부를 조사하니 지반에서 약 파서 주먹만한 뱃돌을 넣어 지면을 견고히 하고 목판과 부장풍옵 묻고 뱃률로서 엎고 그 위에 5의 두께로 結土롤 씌우고 다시 그 위로 좌은 돌을 혼합한 흙을 덮었다… 자갈돌 사이에서 훨創울 수습했다…〉

이 내용올 보면 무법의 구조가 지하에 훌훌城율 파교 목판용 놓윤 후 자갈을 엎고 그 위로 점토로 피복한 후 봉분용 엎었다는 기본구죠는 확언되고 있다. 다만 자갈돌 사이에셔 鄭 둥 휴물 약간옳 수슐했다는데, 이것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발굴의 찰못인지 아니면 유물의 유출인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 발굴조사 후 19 21 년 우연히 발굴된 金冠援의 金冠은 일약 연구자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신라 積石木懶 에서 최초의 금관 출토라는 것 때문에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나아가 19 2 4년 金 樓및 樓이 발굴되고, 1926년에는 樓이 발굴조사 되었는데 이 경우는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가 考古學에 관심이 있다는 벌미로 외교척인 유적발굴의 제물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후 계속하여 광복 이전까지 14호, 15 호, 54호, 82호, 83 호, 10 9호 등의 신라 적석 목곽분이 발굴조사되었다.

金冠

州市路西洞古 群가운데에 있었다. 1921년 민가건물을 짓기 위해 터를 고르다 우연히 발견된 무덤으로 민가로 말미암아 봉분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나 직경 45m, 높이 10m로 추정되는 대형 우덤이었다.

지상에 木椰을 두고 목곽내에는 윷칠한 관을 넣었고 유물로서는 金冠, 금제허리띠와 장식, 각종 왜용장식, 구슬 등 다량의 유물이 수습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고신라시대 금관이 출토된 무덤이 되었다. 금관이 출토된 남성의 우덤으로 鄭의 규모는 길이 5·om , 폭 2.om로 밝혀져 있고 조사자들은 무덤의 연대를 6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金 場

金 은 경주시 路폐에 분포하고 있는 고분 가운데 있었다.

19 2 4년 발굴조사되어 무멈 내부에서 금관 동 많은 부장품이 발견되었다. 이 무덤은 고신라시대 무멈 가운데에서 두번째로 순금관이 나왔으며, 특히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의 훌훌馬A物形토기가 처음으로 출토되어 당시의 기마생활을 추측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고, 冠훌보다는 세밀히 죠사하여 척석목팍분의 구조를 처음으로 정확히 밝혀내어 신라 무덤연구에 큰 공헌융 했다.

이 무댐의 외형은 원래 칙경 10m, 높이 4·5m 정도의 봉토률 갖추고 있었고 내부구조는 광의 바닥에 큰 뱃롤을 두 겹, 그 위에 자갈울

2cm 두께로 깐 후, 동서 4·39m , 남북 0.82 m , 높이 2m의 옥곽을 와서 넣고 그 내부에 시신을 담은 목관과 부장품을 넣은 형식으로, 목곽 주위와 위로는 사람머리 크기의 뱃돌로 덮은 다음 그 위로 흙을 덮었다.

이 무덤 내부에서 금제방울이 처음으로 출토되어 이름을 금령총으로 했다.

빼 힐爆은 금령총과 동시에 발굴조사되었는데 규모가 금령총과 비슷했고 목판 역시 금령총과 마찬가지로 금박을 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금동제 신발이 나와 식리총으로 이름하였다.

모두 지하애 광을 마련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들 무덤들은 연구자들에 의해 6세기초에 조성된 것으로 펀년되었다.

瑞 爆

뚫州市없西i同에 분포하는 고분 가운데에 있었다.

19 26년 발굴조사되었는데 이 무덤에서도 금관이 출토되었다. 금관이 출토될 당시에는 스웨덴의 황태자이며 고고학에 관심이 있는 구스타프공이 참관하면서 손수 순금관을 들어내었다. 이 무덤에서는 〈연수원년신묘(延쉽元年辛라고 새겨진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무덤에서 나온 금관에 달려 있는 장식품 가운데 세 마리의 鳳風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스웨렌 황태자의 발굴기념으로 스웨덴 〈瑞〉字와 風폐의 〈 〉字를 합쳐 〈瑞때.爆〉이라 이름했다.

이 무멈은 지상에 목곽을 마련한 형태로 밝혀졌고 목곽의 규모는 4.6') X3.66 X0.6m, 목관은 3·7 Xm로 추정되었다.

조사자는 이 무덤에서 나온 은그릇에 새겨진 辛年올 신라 智證王 혜인 서기 5 11 년으로 비정하여 무덤을 6세기초로 편년하고 있다.

皇南洞109 廳樓

경주 皇南洞31 번지에 있는 고분으로 1934년 조사되었다.

발굴 전 외형은 높이 1.8m, 밑지름m (동셔), 13m (남홉)의 장타원상올 보이고 있었고 완만한 경사률 이루고 있어 밭으로 경착하고

있었다.

조사결과 4개의 椰이 한 봉토내에 있었고 1. 2호곽은 봉토내에. 3·4호곽은 지하에 마련되었으며 I호곽만 장축을 남북으로 한 독특한 형태의 집단묘임이 확인되었다.

발굴자는 3·4호곽이 먼저 축조되고 후에 1. 2호곽이 축조되었지만 그 시기적으로 큰 폭은 없고 피장자들은 관계가 깊은 사람들의 무덤으로 보았으며 아울러 호 남성. 2호 여성. 3·4호는 남성의 무덤 로 구분했다.

특히 4호에서는 철제의 말안장들인 앞뒷가리개 (前輪. 갖輪)와 비늘갑옷 <甲)이 출토되어 무덤의 주인공이 무사임을 증명하는 자료가 되었다.

3

광복 후 최초로 적석목곽분을 조사한 것은 194 6년의 일로서 조선총독부로부터 박물관을 언수한 당시 국립박물관장언 金파파元박사에 의해 호우총과 은령총 발굴이 최초로 우리 손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호우총에서 출토수습된 청동그릇(鋼찮)의 믿바닥에 새격진 명문의 발견으로 무덤의 이름이 호우총으로 명명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그릇이 고구려 광개토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유물로서 그 연대의 대략을 추정할 수 있게 되어 신라 적석목곽분의 편년에 하나의 획을 긋는 중요한 발굴이 되었다.

그후 도시계획 등의 이유로 부분척인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오다 197년대에 들어와 경주 고도개발계획에 의헤 天馬壞, 皇南大據 이 계획척으로 발굴조사되어 신라척석목팍분의 연구에 많은 자료를 얻게 되었다.

市 노서동에 분포하는 고분 중에 있었다.

1946년에 발굴조사되었는데 푸장품 가운데 고구려 광개토대왕 무덤

의 사당에 사용하기 위해 만든 명문이 새겨진 청동그릇이 나와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자료가 되었다. 또한 雜없를 내쫓는 方相R의 윷철한 가면이 나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가면으로 몹시 귀중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동그릇에 새겨진 글자에 의해 이 무덤이 서기 415년을 얼마 념지 않은 시기에 무덤이 마련된 것임을 알게 되어 이러한 신라무덤의 축조시대를 비정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무덤은 지하에 광을 마련했고, 목곽의 규모는 4.2 X 1.4 X 1.2m, 목관은 2.4 X l.Om 로 추정되었다. 무덤의 연대는 5세기초로 편년되고 있다.

天馬塚

경주의 황남동 고분군 가운데 있는 무덤이다.

이 무덤은 지름 47m, 높이 12·7m 되는 완전한 봉토를 갖춘 것으로 1973년 발굴조사되 었다.

무덤의 내용은 지상 위에 통서 6.6m , 남북 4·2m , 높이 2.1m 의 목곽내에 길이 2.15m , 폭 。.8 , 높이 65cm 의 목관과 길이 1.8m, 폭1m, 높이 80cm 크기의 부장풍만 넣는 목궤가 목관의 동쪽에 놓여 있었다. 목관과 목례가 담긴 옥곽 주위 및 위로는 뱃돌을 엎었는데 지름 23·6m , 높이 7·5m 、규모였다. 이들 뱃돌 위로 20cm 두께의 정토를 발라 봉토에서 스며드는 물기를 차단토록 했고 그 위로 홍토충이 덮혔다. 관 안에는 금으로 만든 허리띠와 순금관을 쓰고 둥근고리가 탈린 큰 칼을 찬 유해가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있었고 그 밖에 수 많은 유물들이 함께 묻혀 있었다.

한편, 부장품수장례 속에는 토기, 쇠슐, 유리그릇, 말안장 둥 馬具類, 철기 등 다양하고 많은 유물이 들어 있었다. 그 중 말다래에 흰말이 하늘을 나는 그렴이 있어 고신라시대 회화의 수준옳 엿볼 수 있는 유명한 그렴이므로 무멈의 이름 역시 하늘율 나는 말의 그렴이 있는 무덤이란 뭇에서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皇南大

경주시 皇南洞의 천마총 동편에 있다.

이 무덤은 외형상으로 보아서 신라시대의 가장 대표척인 으로 서 바닥의 전체길이 114m, 높이 23m 로 신라무멈 가운데 가장 큰 封土를 보이고 있다.

1974년 발굴조사되어 무멈 내부의 구조가 밝혀졌는데 天馬훌과 같이 지상에 목곽이 마련된 형식이나 北境의 경우 목곽이 동서 6.8m, 남북 4·6m. 높이 4m로 높이가 천마총의 z배에 달했다.

이 황남대총에서는 순금관이 北慣에서 출토되고 남분에서는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특히 北뺑에서 출토된 銀製의 허리띠끝장식에 〈夫帶〉라는 〈刻짧文〉이 있어 여성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밖에 많은 금제풍, 철기, 유리그릇, 토기 등이 출토 수습되었다.

무엄의 조성은 南慣이 먼저 만들어진 후 북분이 만들어졌고 5세기초의 신라의 무덤으로 남분의 경우 임금£로, 북분의 경우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聊王樓地區古樓

1973년 慶州皇南洞에 있는 味鄭王陸을 포함한 皇南洞古樓群올 경비하여 古樓公園을 조성하기 위해 민가를 헐어내고 정지작업 중에 封土률 앓은 무덤이 밀집된 상태로 노출되어 이의 조사를 국랩경주박물판, 국립부여박물판,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단국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푸산대학교, 경북대학교, 영남대학교의 박물관이 참여하여 넓은 면척에서 많은 고분이 발굴조사되었다.

조사결과 훌格훌, 小形石柳훌훌, 積石木鄭樓둥 여러 요제가 확인되었다. 폭히 경북대학교에서 조사한 제 I 구역 고분군은 대형 척석목곽훈의 묘군 사이에 공존하고 있으며 부장풍은 빈약했고 또 소형고훈을 파꾀하고 대형고분율 조성한 것으로 밝혀져 소형고분이 대형고분에 선행한다는 사실용 알게 되었다. 이것은 신라 대형 積石木樞境조성 천단계의 양상올 알게 하는 중요한 발굴이 되었다.

4

신라 적석목곽분 연구는 일제시대에 있어서는 주로 내부의 구조와 아울러 묘제의 계통이 한대의 木室훨, 즉 낙랑의 목곽묘에 기본을 두고 支石꿇上에 나타냐는 뱃돌 적석이 합해져서 만들어졌다는 견해가 북무륙로 되어왔다.

광복 후 우리 손으로 많은 고분이 발굴조사되어 이에 따른 자료의 중가로 무럽의 系統에 있어서는 목곽구조의 경우 청동기시대의 토광 목곽요 또는 낙랑 목곽묘에서와 같이 북방목곽묘 전통의 남하에서 재래척인 남방식지석묘의 적석이나 원삼국시기의 뱃돌 목곽의 확대발전과 목곽은 토팡요에서 적석은 지석묘에서, 즉 낙랑의 요소는 없다는 주장, 또 한편으로는 시배리아의 파지리크 (Pazyrik) 고분에서 원류를 두고 있다는 주장과 북방기마민족문화를 배경으로 한 목팍분문화의 직접척이고 돌연한 파급설, 나아가 무덤의 구조면에 있어서 옥곽이 없이 적석되는 경우냐 석실 상면£로 척석한 예가 발견되고 있어 척석목곽분이란 용어 자체를 척석봉토분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더하여 이 요제는 고구려의 적석총에서 원류를 찾아야 한다는 다양한 주장이 있다.

이 밖에 적석목곽분은 쫓椰式, 主副柳式, 單鄭式둥£로 발전되었고 朴• 숍 • 金의 신라왕실 또는 유족의 분묘로 추정되며, 이들 왕실 • 유족 그리고 신라인은 경주를 떠나 살다가도 사후에는 경주로 귀장한 것이라는 견해와 적석목곽분은 마립간시대의 묘제로서 명지의 대형 척석목곽분들은 내물왕 (35 6 -4°2) 부터 지중왕 (5° 0 -5 1 4) 까지, 즉 4세기 중반부터 5세기 초반까지의 왕족 및 그 유족들의 무멈으로서 미추짱흥, 오릉 등 김씨왕콩과 건국자들의 능은 왕권확렵기언 5세기에 새로 보수 • 확장 및 정화되었다는 견해도 었다.포 한편로는 사자의 頭向올 기초로 한 묘곽설치에 있어서 얼출용 기준으로 하여 분석한 결과, 천마총은 자버왕 (45 8 - .79) 의 무법으로, 황남대총은 내물왕(356 -42) 의 무멍으로 추청하고 있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척석목곽분의 개시연대와 소멸연대에 대해셔는 명지에 척색 목팍분이 출현하는 것은 대체로 4세기 전반기로 보고 소멸기는 6세기

중엽으로 보아 약 200- 2 5년간 계속된 묘제로 연구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신라 적석목곽분에 대한 문제가 다소나마 밝혀지게 되였고 나아가 보다 발전적인 연구가 진행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의 주장에 대한 긍정이나 반증을 언급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앞으로 조사연구에 보다 더 고려되어야 할 학설상의 제문제에 대한 몇 가지 사항을 언급함으로써 신라 적석목곽분의 연구가 더 진전되기를 기대하고자 한다.

첫째, 신라 척석목곽분으로 명칭문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적석목곽분이 통용되어 왔고 돌무지덧널무덤으로 개정해서 사용되고 있으나 여기에 반해 반드시 목곽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적석봉토분이라고 부르는 주장이라든지 t혔-꽃의 주체가 목곽내의 목관에 있음?으로 목곽척석분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기실 석실을 갖추고 있는 경우에는 석실분으로 불리고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경우에는 석실내 분묘주체인 관의 존재는 부차적인 측면에서 석실분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木都의 존재를 부차척으로 볼 때 오히려 힘石위에 반드시 흙을 덮어 만든 것이라면 積石封土의 개념으로 稍石封土햄이 보다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골풍제에 따른 신분상의 영역이 확언되어야만 할 것이다.

신라 초기의 왕실세력인 박씨족, 김씨족이 최고신분이었고 그 밑 로 6촌, 6부의 지배세력이 있어 頭品의 신분을 갖게 되었고 골풍제편성시 각 신분집단은 지역적언 구분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고 본다면 이들의 집단묘가 밝혀져야만 보다 진전된 연구가 될 것이다. 이 문제는 신라의 王京에 국한되어야 할지, 나아가 신라지배 영역에까지 확대되어야 할지,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위치가 분명하게 확인된다면 따라서 척석목팍분의 실체가 좀더 밝혀질 것으로본다.

셋째, 척석목곽릎에서 수습되는 금판의 문제가 구명되어야 할 것이다. 皇南大뿔의 경우 왕버묘라고 추정되는 北慣에서는 빼金製의 冠이, 王의 훌로 추정되는 南樓에서는 금동판이 출토된 것으로 볼 때, 오히혀 紀의 경우에 금판, 王언 경우에 金錫冠을 사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나 이 푼제는 지금까지 금관이 나온 무덤올 볼 혜, 얼척으로 단정하기 힘든 사항이다. 아울러 금관의 실사용과 부장용에

대해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넷째, 積石木擺慣을 사용한 최초의 집단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검씨왕조의 성럽에서부터 廣立주시대와 일치된다는 견해가 가장 최근까지의 연구결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調福王부터 智證王까지 4代王, 약 100년간의 기간을 말하는데 이 시기에 왕과 왕족들의 무덤으로 보기에는 전체척으로 많은 문제점이 었다 할 것이다.

다섯째, 표형분의 성격이 좀더 구체척으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외형상으로 나타난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부부묘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고 또 皇南大壞의 경우 남분이 먼저 조성되고 북분이 후에 마련되었음이 밝혀지고 아울러 북분이 여성의 묘라는 것이 수습된 유물을 통해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상위신분자의 묘가 표형분이나 단일 훤묘로 보고 있고 신분이 낮을수록 복잡한 묘역을 구성한다는 것이 연구결과이나 현존하는 경주시내의 표형분 수효가 불과 몇 되지 않고 있음은 마럽간시대의 왕족묘라 할지라도 수효가 너무나 빈약한 것이다. 표형분으로 만들어지는 분명한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여섯째, 기록상에 나타나 있는 園陸보수내용이 좀더 구체적으로 밝혀져야 할 것이다.

三園史記」에 보면 福王19년 (435) , (春 月大風投木二月修 歷代園陸〉을 해석함에 있어 이예부터 歷代王陸을 수리하기 시작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이때 應代王陸의 모두가 수리가 끝났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때까지 눌지왕의 先代검씨왕릉만 수리했다는 것인지를 훈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이것은 명지에 분포되어 있는 봉토의 축조가 쉬운 일운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의 역대왕릉만 해도 18王이 있었고 그에 따른 왕족의 요까지 고려한다면 도저히 단시일에 이루어지기 어려웠올 것이다. 오히려 청월에 큰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는 내용에서 보면 갱월에 기상이변으로 大風이 불어 나무가 뽑혔올 뿐 아니라 圍樓이 부분척 로 피해를 업어 월에 들어 모두 보수를 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리라 여져진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원래 句 式積石 이 경주의 명지에 조성되어 있었던 것울 이 시기에 그 위로 봉토훌 올려서 積石木柳樓이 되었다는 주장이 었기 때뭄이다.

5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때, 신라의 건국을 보면 B.C. 1세기에 해당되고 있고 이때 蘇居-ut I콤西千이 초대 임금으로 추대되고 있다. 기록에 업각한 당시의 배경을 보면, 기원전에 이미 조선의 유민들이 경주를 중심으로- 六村을 형성하고 있었고 B.C.69 년에 계렴숲에서 말이 울고 있어 가보니 말은 보이지 않고 알이 있어 이 속에서 鏡居센가 태어났는데 13 세에 추대되어 즉위하고 성이 박씨가 되었다 한다. 이 시기에 말과 耶生說訴·와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이미 이때부터 신라영역에는 새로운 묘제를 가진 집단이 유입되어 기존의 집단을 지배하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무덤의 기본형태는 같으나 문화의 파급에 의한 물질문명의 발전으로 부장품의 변화를 추측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검씨지배하에서의 왕권확럽에 따라 상정척£로 封土를 대형화하고 나아가 초기의 임금들과 검씨의 임금우덤을 보수했다는 측면에서도 가능성은 있다 하겠다.

앞서 지척한 바와 같이 눌지왕 때의 많l 陸취fi修가 일회성으로 여겨철경우 처음부터 무덤을 대형화했을 확률이 더 높다 하겠다.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 초기지배자의 무덤 역시 처음부터 크게 조성되고 있는 것도 동얼선상에 놓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의문점을 보다 가깝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慶州에 있어서 기록에 나타나고 있는 I 세기에 축조된 무덤, 그리고 미추왕릉 주변의 고분, 月城휩B , 金R 里古樓群. 가운데에서 정멀발굴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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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 농업기술의 연구 현황과 과제

【李賢惠】

1 연구 목적과 의의

역사 연구과정에서 문화변천의 과정과 내용이 어떠하였는가 하는 문제와 더불어 문화변천의 계기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의문이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그리하여 생산기술의 변화, 환경척 특성, 언구의 변화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문화변천의 계기가 집중적으로 검토되고 있으며, 이 밖에 교역의 기능을 통해 그 중요한 계기를 찾으려는 입장도 있다. 이 가운데서 농경기술의 연구는 첫번째의 생산기술의 변화라는 연구범주에 속하며, 문화 변천과정에서 농경체제의 변화가 어떠한 기능을 가지는가를 검토하는 것이 기본 목척이라고 하겠다.

농경기술은 농경작물, 농경형태, 농경담당 계급 등에 관한 문제와 함께 농경품화의 성격올 결정짓는 기본 요소이다. 그리고 농경기술에 대한 연구는 주로 농기구와 농경지의 활용 상태, 물의 관리, 시버법 및 제초 둥에 대한 검토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농업 기술상의 변화를 검토할 경우, 이러한 각 분야에서 나타나는 변화현상에 대해 두루 주목하게 되겠지만, 연구대상 시기와 연구 자료상의 제약에 따라 충첨이 두어지는 분야가 서로 다르다. 예컨대 문헌 기록이 천혀 없거나 극히 미미한 신석기, 청동기시대 그리고 삼국시대 초

기 단계의 농경기솔의 연구는 전척으로 고고학 자료에 의존하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연구대상도 주로 농기구와 농경작물의 분석에 치중하게 된다.

농경 기구와 농경 작물의 분석을 통해서도 여러가지의 사회 경제척인 변화 현상이 나름대로 추정될 수는 있다. 작물과 재배법은 탈라지지 않더라도 새로운 농기구의 도업을 통해 전체 생산량이 중대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며, 때로는 경작기술의 변화, 새로운 농경작물의 확산, 그리고 인구 증가로 인한 인구압의 발생 등 문화 변천의 중요 계기가 농기구의 변천을 통해 칙접적으로 반영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연구 현황

(1) 무문토기문화단계

한국 고대사회의 농경문화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 경향을 살펴보연 두 가지 중요한 특갱이 나타난다. 그 하나는 연구 작업이 주로 농기구의 형태적 변화과정을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냐는 연구 시각이 문화전파론적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연구가 농경문화의 기훤, 전파시기, 전파경로의 규명에 편중되고, 결과척으로 연구 시기도 주로 신석기문화와 청동기문화 단계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한반도의 농경문화에 판한 지금까지의 연구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한반도에서는 신석기 중기에 들어서면서 보습올 이용한 칼이 농사가 실시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l) 그러나 초기 농경 유척인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유척의 현년이나 문화 계통에 대한 해석을 달리함A로써 신석기문화 초기단계부터 화전(火田)농경이 이루어졌다는 견해도 있고, 2) 신석기 초기단계부터 내륙 아시아지방의 신

I) 池 • 安承樓, .半島先史時代出土 具, 圖의 文化, 1983.

죠선 훤시 빛 고대사회의 기슐발천. 1984. P·7, 과학빽과사천훌판사.

석기문화와 유관한 원시농경이 이루어졌다는 주장도 있다.3) 따라서 농경 개시 연대도 기원전 25 00 년, 4) 4년, 5) 50년 6)등으로 견해의 폭이 크다.

그러나 무문토기문화단계가 되면 원시 잡곡농경과는 다른 발달한 농경기술이 도업되고, 점차 田作과 벼농사를 기초로 하는 안정된 농경체제가 확렵되어 나가는 것으로 대개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반면 이 단계의 농경문제 연구상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 온 것은 벼농사의 전래과정에 관한 것으로서, 북방설, 남방설 등으로 의견이 다양하다. 북방셜도 요동반도 경유셜, 7) 산동반도 또는 堆河유역 경유셜8등으로 세분되며‘ 남방설 역시 華南혹은 동남아셜 등으로 갈라진다. 이 밖에 각 설의 타당성을 감안하여 냥방, 북방 두 계통의 전파 가능성을 주장하는 절충설도 었다.9)

이와 같은 연구 시각은 농기구의 분석과정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예컨대 무문토기 단계의 대표적인 수획구언 반월형 石刀에 대해서도 石刀의 기원, 전파 과정, 형태상으로 나타나는 지역적 특성의 지척에서 대개 그치고 있다.I 이 그리고 농경과 관련하여 주목을 받는 有蕭石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 사정은 비슷하다. 경작과정에서 유구석부가 행하는 기능상의 문제와는 별개로 유구석부는 중국 하남지방의 벼농사 내지는 水田경작의 전파 문제와 밀착되어 있다. 11) 이러한 전파론

3) 田村見 t起世 本古代 I. 1980. P.76.

4) 출廷 , 「考古 上으로 본 古朝. 聊園上古史의 1986, p.97. 池 吉外, 前 文. P·75

6) 註 . P·7.

7) 李春 , 「 圖 起 에 관한 小考 (民族文化 究 1973. Choi, Chong-p "The Diffusion Route and Chronology of Korean Plant Domestication" ]ourana/ of Asian Studies , vol. XVI NO.3 198:z, PP.,19-Ho.

8) , 「 本 作 料 , 49, 1968, pp.67 -87

沈 . 國格 의 始 에 판한 山史, 1980, p. 24.

9) 南 : 石毛直道, 日本 作 系 (下). (史林, 1-6, 1968. pp.lll-I12• • 南亞 : 金 . 固巨石文化 流에 판한 연구(I) , 韓園考古 」 10 • 합집· 1981•

철충성 : 金元 「 作起 에 한 . 25 • 26 • 27 합집, 196... PP.30I - 306•

10) 註I 논푼 황초.

ll) 甲元 之. 文化考古 究 1973. p.83.

척 업장과는 달리 형태학적인 변천 과정의 분석을 통해 유구석부의 발생지역을 한반도 중서부 일대에서 구하는 견해도 있다.l2)

) 盧農 , 「有 石 의 住考蔡 , 林大 集 I , 1983,

이처럼 무문토기문화단계에 있어서도 농경기구나 농경작물의 변화가 암시하는 사회 경제척 의미는 물론 농경 기술이나 농경 형태 자체에 관한 구체적인 해명은 거의 시도되고 있지 못하다. 즉 벼농사의 전래과정 못지 않게 벼농사의 개시가 농업 생산력 중대와 잉여산물의 축척 과정에서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가 하는 기본적언 문제 의식과 함께, 한반도의 경우 전체 농경 활동에서 벼농사의 비융이 어느 정도였는지, 지역에 따라 경작 형태가 水田이었는지 아니면 陸格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지에 대한 문제가 차례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단계의 특정적인 .수획구인 반월형 석도 역시 형태척언 차이를 근거로 지역적 특성을 지적하거나, 변천계보의 규명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지역성이 발생하는 배경에 대한 검토가 아쉽다고 하겠다. 예를 들면 반월형 석도로부터 분화 • 발전하여 삼각형 석도가 출현하고, 이것이 한반도 서남부 지방의 대표척인 수획구형식이라연 이러한 변화는 수획방법 또는 수획작물의 구성상의 변화를 시사할 수도 있다. 줄기가 굵고 억센 기장, 조, 수수 등과 그렇지 않은 벼, 짧류의 수획에는 수획구의 상용법과 기능상에 있어 나름대로의 차이가 예상될 수 있다.

유구석부 역시 이것이 수로를 개착하거나, 수전 경작 특유의 목제 농기구 제작에 사용되었다는 확신이 있기까지는 이를 곧바로 수천경작 체계의 실시로 단정지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는 통일한 형태의 기구라고 하여도 사용지역의 기후와 토양에 따라 고유의 기능 이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농업 생산력면에서 농기구와 농경 작물 못지 않게 중요한 문제는 농경지의 활용 상태에 판한 것이다. 개략척이나마 고고학 자료를 통해 농경지의 활용상태와 농업 생산력의 상대척 중대 현상이 추정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무문토기문화단계의 주거지 유척에셔 발견되는 석기의 출토 상태를 살펴보면 후기단계로 갈수륙 수획구언 석도의 수자는 증가하고, 벌목용 대형도끼는 거의 소멸해 가는 .경향울

보인다. 이는 생산 규모는 상대적으로 증대되는 데 비해 개간 작업의 비중이 그만큼 줄어 들면서, 休환기간이 상대적으로 단축되어 간 것을 의미한다.

10년 이상 장기간의 휴경으로 잡초의 뿌리가 깊고 조밀해진 상태에서는 목제삽이나 팽이만으로는 起親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무문토기문화단계에서는 농경문 청동기에 새져져 있는 것처럼 따비와 팽이류의 목제 농기구가 보편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우기 농경문청동기에서 보이듯이 규칙적인 평행선상의 고랑을 타서 작물을 재배하였다면 당시의 경작지 상태는 이미 집약적인 정지 작업과 경작지 판리가 진행된 단계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Boserup에 의하면 1-2년 간격으로 휴경기간이 단축되면 작물의 뿌리가 불에 태우는 것만으로 는 제대로 제거되지 못하며, 팽이와 삽 종류의 농기구로도 이미 효과척인 농경을 기대할 수 없어 쟁기 (wooden scratch plow)가 출현한다고 한다.l3) 이렇게 볼 때 목제의 삽이나 팽이류만이 상용되던 단계에서는 척어도 3년 이상의 휴경기간을 상정할 수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지역별 특성이다. 甲元씨의 연구에서 이미 시사된 바와 같이, 지역별로 기후와 토양조

13) Boserup, Ester, Population and Technological CJumge, 1981, p. 1 註II 甲元훌之논문.

건, 인구의 규모가 서로 다르며, 이에 따라 농경체제나 농업 생산력변에서 개별척인 격차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서북지방처럼 부식토가 두터운 회갈색 삼럽지대에서는 深科을 함으로써, 즉 형북 주의리 니탄층에서 발견된 목제 후치와 같은 심경용 농기구를 개발하여 휴경기간을 더욱 단축시켜 전체척인 농업 생산력을 중대시켜 나갔다고 생각된다. 서남부 지방은 삼각형 석도와 유구석부의 두드러진 출토상태를 통해,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벼농사 재배의 비중이 높았고, 이것이 농업 생산력 중대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으리란 추정이 가능하다.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양대 중심지언 古朝앓사회와 辰國사회의 경제척언 토대는 바로 이 같은 농업기술상의 선진성과 직접척언 판계에 있었다고 생각된다.lS)

1') 李톨훌, 牛빼 賣iii훌훌文化의 훌홉的背혔. .園史맑究J , 6 , 1987, PP.18 -20.

그런데 중부지역의 경기도 흔암리유척에서는 충남 송국리유척과 달리 유구석부 대신 타제 돌도끼가 전체 석기의 27% 냐 차지하여, 육도와 함께 잡곡을 재배하는 밭농사 중심의 농경체제가 영위되고 있었던 것으로 셜명되고 있다. l6) 그리고 곰배팽이로 대표되는 동북지방의 농경 형태는 콩, 활, 조, 기장 등의 밭작물 경작체제의 하나로서, 무문토기 후기단계에 이르도록 화전 경작단계의 생산체계와 생산력 수준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17) 다른 지역에 비해 청동기

16) 崔, 『뭘써 欣岩里先史聚 1986, P·73.

17) 황기벅, 「두만강 유역의 청동기시대 푼화 , 고고민촉논폼첩 , 1970.

후기단계가 되면 함북지방의 청동기 출토상태가 극히 빈약해지는 것도 이 같은 생산력의 한계에 원언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청동기 문화단계의 농경체계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아직도 아주 제한된 범위에 머물러 있다. 각 지역별 농경작물의 비중이나 농업 생산력, 그리고 작물 재배 기술로부터 이들의 사회 경제척인 기능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문제들이 새로운 연구 시각을 요하고 있다.

(2) 原三國時代

이 단계는 정치 문화척드로 다양한 변화가 진행된 시기이다. 그리고 농업 생산력면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예상되는 시기이다. 그럽에도 불구하고 편중된 연구 경향으로 말미암아 서력기원 이후 단계는 철제농기구 보급으로 인한 농업 생산력 중대라는 초보척언 설명에서 그치고 더 이상의 연구가 거의 시도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단계의 정치 사회적 변천과정을 본질척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농업기술 문제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목척을 위해서는 먼저 농기구의 종류, 형태, 보급에 판한 기초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를 토대로 농경 작물과 농업기술상의 변화가 고찰되는 것이 순서라고 하겠다. 그련데 지금까지 이에 판한 연구 업척이나 지식은 거의 천무한 상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다만 앞으로의 연구과정에서 중정척으로 다루어져야 할 몇 가지 문제첨올 갱려하는 선에서 그치고자 한다.

첫째, 철기 보급과 농업기술의 상호관계에 대해 보다 실증척언 검토가 요구된다. 철기가 보급되면서 농기구상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며, 이것이 실제 농업 생산력 증대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가 면밀히 검증될 필요가 있다. 무문토기 후기단계에 이르면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철기가 보급되기 시작한다. 철기가 보급되면 농기구상에도 변화가 예상되고, 이것이 농업 생산력 증대의 중요 지표로 주목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철기가 보급되는 초기단계의 상태를 살펴보면 무기와 공구류에 비해 농기구에 해당하는 철기의 종류는 그리 많지 않으며 수량도 척다. 평북 原 同 출토 유물을 통해 철제 낫, 팽이, 삽, 반달모양 칼 등 戰國系철제 농기구의 존재와 그 유업 가능성이 시사되고 있기는 하나, 구체척언 형태로 확언되는 것은 주로 낫 종류이다. 그리고 전단계의 반월형 석도만큼 보편척으로 발견되는 용구는 낫이라기보다 刀子이다. 낫과 刀子의 상대적인 보급도로 미루어보아 다목적 도구인 刀子가 곡물 수획에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다시 말하면 철기 보급 초기 단계에서는 아직 起힘f광나 除草具상에서 보편적인 변화가 인정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철제 공구 사용으로 목제농기구의 공급이 원활해지고, 수획작업이 효율척으로 진행됨으로써 농업 생산력 자체에 상당한 변화가 진행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 두번째로 제시될 수 있는 문제는 당시의 농경활동 중에서 농업 생산력을 변화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한 요소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의푼이다. 철기가 광법위하게 보급되는 원삼국시대에 들어 와서도 무기나 공구에 비해 실제 고고학 자료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철제 농구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경남 의창군 다호리고붐에서 주걱형 철제 따비가 발견되어 목제 起親具의 일후가 철제로 전환되는 B.C. 세기경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유물올 통해 원삼국기에 이르면 철제 따버류의 기경구가 보편화되었으리란 추측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기척으로 다소 차이가 있으나 원삼국기에 이르면 목제 삽과 같온 기경구의 끝을 보강하는 철편이 발견되고 있어 18) 전단계와

18) 이규태, 용훌군 웅성리 나우꽉푸법과 귀훌우엄. 고고학자료집 1983

P·191, P·193. 元 • 林永珍, 石 號 古 짧告 1986, pp.6-17.

다른 요소가 나타나고 있다. 이는 기본척으로는 아칙 팽이, 삽 중심의 농경기술에 머물러 있었다고 해도 철제 또는 철편으로 보강된 목제 농구와 낫의 활용으로 작업 능률이 크게 향상되었리란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보강 철편은 질이 우수한 繹鐵제풍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그 제작 및 보급 시기에 대해 구체척인 연구가 요구되며, 이를 통해 원삼국기 농경체제의 한 특정이 찾아질 것£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철제 농기구상으로 나타나는 새로운 요소를 모색하는 이같은 입장에서 보면 종래 짧造鐵중한 또는 훌훌造쭈形品등으로 불리어 온 도끼모양 철기를 농기구 즉 팽이로 해석하는 견해에 주목하게 된다.l9) 이 종류의 철기는 날끝의 폭이 좁아 심경도 가능하며 기경구 이외에 토목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크다고 한다. 이러한 쇠팽이를 사용한다면 제초작업의 효율화, 심경에 의한 지력회복 기간의 단축, 그리고 황무지 개간에 의한 절대 경작 면척의 확대 등으로 농업 생산력을 현저하게 증대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까지로는 이 형태의 철기는 거의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3 세기 이전 단계의 자료도 점차 중가하고 있으나, 절대 다수가 4-5 세기 이후의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것이 보

19) 安春培, 昌保三 . 1984, p.6,.

20) 山老圖洞遺鷹 , 山大 校I 物. 1988, p. 29 53.59· 이 밖에 府院洞. 74호훈 둥지의 출토예가 었다.

뼈, 「朝활三園時 原考古 究所• ~古 , 1983. pp.528- 531.

편적인 농기구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원삼국기의 어느 단계부터였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경주 조양동 유척에 대한 자세한 보고서와 함께 이 종류의 철기가 출토되는 유척 중에서 현재까지로는 연대가 가장 이른 경기도 양명군 대심리 유척의 편년에 대한 채검토가 휠요하다. 그리고 이는 양질의 鐘鐵제품 제작이라는 기솔상의 문제와도 밀정한 판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의문은 쇠팽이의 보급이 구체척으로 어떠한 형태의 농경체계와 판련이 있었는가 하는 청이다. 쇠팽이의

원형이 형북 위훤군 용연동 출토 철제초(없)라는 정과 이 지역이 憂, 要충심의 밭농사 지대라는 점에 주목하여 쇠랭이는 밭농사와 밀접한 土木只라는 해석이 있다.2) 그러나 쇠팽이의 주요 분포 지역이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으로 나타나는 사실과 함께 서력기원 후가 되연서 충남부 지역에서 빚化米발견 유적이 한층 증가하는 현상을 어떻게 관련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와 함께 원삼국 시대의 농경기술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문제로 제기될 수 있는 것은 짧혐에 관한 것이다. 즉 원삼국기는 랭이(없)와 삽(뼈) 중심의 농경체계로부터 f껄훨f 이 실시되는 보다 발달한 농경기술 단계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는 점에서 특정척인 농기구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형북 지방에서는 무문토기 후기단계에 이미 목제 후치가 사용되고 있다.22) r삼국유사』에도 3세기 흉禮王대에 짧箱를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23) 짧짧가 쟁기와 따비인지 혹은 단순히 챙기의 일종인지는 불확실하다.

짧箱률 챙기와 따비의 두 종류의 농기구로 해석할 경우, 이 기록은 짧흙 실시에 판한 최초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20。여 년 후의 智證王대 (A.D. ~02) 의 훌실시와는 별개의 내용으로서, 짧의 형태와 발달과정에 대한 새로운 연구 시각을 요하고 있다. 종래 지중왕대의 牛혐 실시 기록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실시되어 오던 牛흙올 국가척 차원에서 장려하는 의미가 있다는 해석 2) 이외에 두 마리 소가 끄는 兩 法에서 소 한마리가 끄는 法으로의 전환을 뭇한다는 해석들이 있다.2) 그러나 도 시대별 지역별 륙성에 따라 복잡한 변화과정을 겪고 있으며, 기능면에서도 다양하게 분화 발전해 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26) 그러므로 짧흙에 관한 기륙들은 이처렴 간단하게 정리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예를 틀면 이 중에는 소가 끄는 후 이외에 훌훌빼롤 개량한 간단한 구조의 사람이

21) 東 ,前 , p. 530.

2:1) 註2) , p75

23) 三 」 , , 王 , 註2。前 P.54

25) 白 , , 1933, P.369.

26) 天 元之 , 中 史 究. 1962, PP.720-780•

끄는 옆종류도 있다. 이 경우 구조나 기능변에서 사람이 끄는 와 동물에 장착하는 행를 웰殺法의 실시라는 범주에서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다· . 이렇게 보면 첼禮王대의 기록은 짧力을 이용하는 장치와는 다른, 사람이 쓰는 멸 발달한 형태의 챙기류의 사용 가능성을 시사하는 자료일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서울시 구의동과 함경남도 안변 용성리 고분출토 철제 쟁기날의 분석과 더불어 U자형 가래날을 출토하는 각 고분의 면년 연구를 통해 그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로든 챙기류가 사용되고 있었다면 이는 농업 생산력을 획기척으로 중대시킬 수 있는 기술상의 일대 변화로서 원삼국 사회와 그 전후 단계간의 문화 변천 과정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기본적언 요소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농경기술에 대한 연구는 문화 변천의 근본 원리에 접근할 수 있는 효과적인 연구 방법론의 하나로서, 그 중요성에 버추어 더이상 특정 사관의 전유물로 방치될 수는 없다. 그리고 농경기술의 변천 계기에 대해서도 외부로부터의 문화전파에 의한 필연척인 수용 과정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인구 증가에 따른 인구압의 발생 등 연구 시각 자체를 심화해 나갈 필요가 있겠다.

상고사 연구현황

고조선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盧泰軟]

그간 행해진 고조선사에 관한 연구의 주요 주제는 고조선 중심지의 위치와 그 영역, 주민구성과 그 문화의 원류, 사회구성과 경제, 단군 신화와 기자전설, 고조선유민사, 고조선사에 판한 역사인식의 변천 둥이다. 이 중 가장 기본적이고 논란이 많았던 것이 위치 문제이다. 이 글에선 이에 판해 살펴보기로 한다.

고조선의 중심지의 위치에 관해선 在遭寧휩說, 걷壞說, 移動說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견해는 이미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어 그후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在遭훌省說에선 고조선의 영역에 대해서 그 西邊을 훌河로 보는 견해와 大鷹河로 보는 설이 있어 왔다. 前者에선 문헌상으로는 山海 」에서 조선의 위치를 列陽의 동쪽이라고 한 데에 대해 列水 河로 비정하였고, 비파형동검문화 분포지역올 고죠션의 영역으로 규청하였다.l) 후자는 미송리형 토기와 비파형통컴이 함께 출토되는 지역의 서쪽 경계가 대롱하 하류라는 데에 주된 근거훌 두고 있다. 고조선의 둥창시기에 대해선 管子」에서의 〈 朝〉에 대한 언급율 管 당대의 사실로 보아 늦어도 B.C.7세기 이천이라고 주장하고, 이 정

) 이지린, 고조션연구 1963, PP·14-37, PP.33 -336.

최택선 • 이난우 편집, 「고조씬 폴확의 혹성파 그 합천 , 고죠션품제 연구논품집 , 976, PP.5 -6.

은 비파형동검문화의 上限이 B.C.8세기 이전으로 올라감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강조하였다. 또 고조선 말기의 영역에 대해서는 그 서쪽 경계인 ·펴水를 대풍하로 보는 견해와3) 난하로4) 보는 시각이 있다.

고조선의 南邊에 대해선, 消川江로 규정한 셜은5) 이 강을 경계로한 출토유물상의 차이를 중시한 견해이며, 예성강으로 보는 입장은 馬韓 및 백제의 北邊언 河가 예성강이었음을 근거로 하였다 6) 前者

3) 이지린, 앞 책. PP·7z -79.

4) 윤내현. 홈古代史新흩 1973. P·7•

) 장주협 편집, 고죠선품제연구. 1973. P.79·

6) 최택선, 이난우, 앞의 책. pp.69-7

에선 대동강유역의 청동기 빛 철기문화유적을 마한의 것응로 설명하려 했고 후자에선 이를 고조선의 候國의 그것로서 지방적 특성을 나타낸 것이라는 풀이로서 淸川江이북의 유물과의 차이성으로 설명했다.

이러한 在選寧省說은 요령성 일대의 청동기문화와 각종 관련된 중국 문헌에 대한 이해를 확충시켰고, 보다 넓은 시각에서 고조선사를 고찰케 하는 데 기여한 바 컸었다. 그러나 이 셜에선 몇가지 기본척인 문제점이 지척될 수 있다. 첫째, 문헌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초기 중심지의 위치를 먼저 비정한다는 접근방식은 문제가 있다. 가령 문헌척 연구를 통해 在選寧省說을 주장하는 이들이 혼히 海經 의 海內北 과 海內經의 조선에 관한 기사를 위치비정의 출발점으로 삼는데, 그 기사가 단편척이고 다분히 추상적이라는 정 외에도, 海經 내의 각 經의 편찬시기와 편찬된 지역 자체가 아칙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어 불확실하다. 곧 고대 중국의 어느 시기, 어느

7) 少南一郞, 「山海 究(7) 現況 (中 文化)2. 1987.

지역 사람의 지리지식을 반영한 것언지가 불분명하다. 자연 그 기사가 어느 시기의 조선의 위치에 판한 언급인지를 단정하기 어렵다. 더욱이 그러한 단편척언 기사에서 보이는 지명을 후대의 여러 시대에 걸친 각종의 기록들올, 심지어 熱河志」와 같이 18세기에 편찬된 책의 기사까지를 원용해 고충해 나감에 따라 자연 그 해석에 자의성이 많다는 올 듣게 되었다.

둘째, 유척과 유물 동의 실물자료에 대한 운제이다. 대동강 유역의

중국계 유물 • 유적은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썩 및 泰• 代의 城의 동쪽 끝을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端 山海關으로 보았는데, 8) 이는 사실과 다르다.

셋째, 남부 만주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 분포지역을 일괄해서 고조선의 영역으로 설정하는 견해는 고대의 문화경역을 곧바로 민족의 분포지역 또는 한 국가의 영역이라고 풀이하는 것인데, 이는 지나치게 단순한 논리라 하겠다. 예컨대 세형동검문화의 분포지역을 단일 국가의 영역으로 볼 수 없음은 좋은 예가 되겠다. 그리고 아칙 域國家 단계에 들어서지 못한 초기 고대국가의 성격을 고려할 때도 그러하다.

在平壞說은 주로 r 및記』와 판』의 「댄짧꽤의 기록을 기본으로하여 위치 파악을 하였다. 파初의 고조선의 서쪽 경계라는 水를 한백경은 청천캉으로, 9) 그리고 정약용은 압록강으로 비정하였다.l 이 그 뒤에도 펴水의 위치 비정에는 앞의 두 견해가 기본이 되었다. 영역에 대해서, 퍼水꽉川江끊의 한 논자는 반도 서북지역과 동해안의 전형적인 세형동검의 출토지를 근거로 하여 반도 서북지역과 동해안의 함경도 연안지대를 포팔하는 것으로 보고 남으로는 한강 부근에 이르는 것으로 추측하였다.Il) 또한 청천강 이북, 압록강 이남지역의 유물의 성격이 요동지역의 그것보다 대통강 유역의 그컷에 가까움을 들어 영역의 北邊을 압록강으로 주장하는 견해도 있었다. l2)

8) 在 省 주장하는 이들은 오두 그렇게 보았다.

9) 百, 園 理 P·15.

10) 丁若 水考 城考」所

11) 도유호, 「진번과 육저성의 위치 고죠선 영역푼제와 판련하여 , 운화유산, pp.6:Z-4.

12) 정찬영, 「고조션의 위치와 그 성격에 관한 몇 가지 문제 (역사과학0) 60-3.

그런데 이 在壞鏡애선 고조선의 영역에 관한 鏡l各」의 기사, 즉 勳에 의해 서쪽의 二千뿔 땅을 상실당하여 備짧i千을 熱과 경계로 삼게 되었다는 기록이 부정되지 않을 수 없다.

在平壞說이 안고 있는 그러한 문제점올 해소하기 위한 시각에서 이동셜이 제기되었다. 이동셜 내에서도 조금씩 다른 諸說이 제기되어 왔다. 즉, 초기 고조선의 중심지는 요하유역이었다가 B.C. 3세기초

훌쩍나라 창수 棄閒의 침공을 받은 이후 형양로 옮기었고, 이곳이 위만조선 王險城이며 낙랑군이 셜치된 지역이라는 주장이 있고, 또한 위만조선 혜까지 중심부가 요하유역이었고 낙랑군도 그 지역에 있었는데, 後漢光武帝 에 낙랑군을 펑양 일대로 옮기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리고 초기 중심지에 대해선 前漢끊來那의 險 縣、을 蓋드로 비정하여 이를 王險城으로 보는 견해와, l5) 구체적인 위치비정은

13) 정찬영,r고초션에 판한 과학토롤희 , (품화휴산) 61-

14) 김석형. 「삼국에 선행한 국가률과 총족들에 대하여J , (역사과학>. 1960 - I, 15) 이지린, 앞 책, p.88.

하지 않고 요하유역일 것이라는 추정만 하는 견해로 나누어진다. 또한 이통한 후의 조선과 그 천의 조선 간의 차이성이라든가, 이동해 온 세력과 토착세력 간의 관계라든가 하는 문제에 대헤선 아직 연구된 바 없다. 이 변은 초기 중심지의 설정문제와 함께 이동셜이 성립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는 부분이다.

이상에서 그간의 諸說들을 살펴보았다. 이렇듯 가장 기본적인 史寶의 문제언 역사지리에 관해 오랜 기간에 걸쳐 논의가 분분하였던 것은 일차척으로 운헌사료의 절대척 부족에서 기인한다. 버단 이 문제 뿐 아니라 사료가 부족한 고대사의 여타 부분에 있어서도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펴서 그 나름의 역사상을 구성할 여백은 널리 펼쳐져 있다. 어느 변에선 그 여백에 고대사연구의 매력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렬수록 비록 얼마 안되는 부분일지라도 사실 자체는 다시금 훈명히 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해석은 이러한 기초적인 사실에 바탕을 둘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고조선의 위치 파악을 위해 필자는 보다 관계자료가 많은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일단 먼저 살펴보는 접근방법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연 닥랑궁 조선현의 위치에 대한 고구려언의 견해를 틀어보자.

5세기말 6세기초 北鏡A 椰道元은 水經에서 말하는 ·핍水의 흐름에 대한 서슐에 의운울 풍고, 당시 북위를 방품하였던 고구려사신에게 이에 대해 질의하였다. 고구려사신은 〈城(고구려 수도)은 때수의 북쪽에 있고 때수는 서쪽A로 흩러 옛 낙량 조선현 즉 漢武帝가 설치한 낙황군의 f台所롤 지냐고 나서 서북방향으로 흐른다〉고 웅답하였다.l6)

16) .遊元, 水 注 14 水像.

(城在 水之 其西流 故樂浪朝 縣樂 良 台 武帝置〉而西北流) 이 시기의 왜수는 대통강을 가르킨다는 데는 이론이 없다. 당시 고구려의 수도는 지금의 평양 동쪽 安짧宮터이다. 그콧에서 서쪽으로 대통강 남안에 土城洞이 있으니, 위의 말은 고고학척 발굴 결과와도 일치한다.

위의 인용한 말 중에서 ( )부분은 聊道元이 부연 설명한 것이라고도 굳이 가정해 볼 수 있다. 즉 이 낙랑군은 後漢代에 移置한 것이고, 前漢代에는 요동에 있었으므로 따라서 王險城도 그곳에 있었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팝』나 r後漢뽑』를 통해서 볼 때 移置의 혼척이나 가능성은 없다. 이 점은 핵 및 棄• 漢代의 長城의 통쪽 끝이 지금의 요하에 미친다는 실물자료로써도 뒷받침된다. 棄• 漢代의 요통군은 요하유역에 있었다.

명양의 낙랑군 조선현은 위만조선의 수도였던 王險城이다. 위만이 고조선의 準王의 수도를 공략하여 점거하였으니, 고조선의 수도도 평양지역엄을 말해 준다. 이는 이 지역 일대에서 B.C.3 세기 이래의 연속척인 성격의 유물이 출토됩에 의해 뒷받침되어진다.

그런데 이 지역 출토의 대표척인 금속무기인 전형척인 세형통검은 그 상한이 B.C.3세기이며 그 분포지역도 청천강 내지는 압록강선을 넘지 못한다.그전 시기의 것인 버파형동검 등도 출토되나 소수에 불과하다. 곧 이 지역에서의 국가의 존재는 B.C.3세기를 념지 못한다. 그런데 r鏡톨各 뿐 아니라 r史記j 에서도, B.C.3세기초 조선이 薰과 충톨을 벌여 서방의 영지를 많이 상실하였다고 했다.l8) 戰圍策」에 기록된 흙棄의 말에서도. B.C.4세기에 조선은 당시 중국언들에게 뚜렷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I8) 곧 B.C.4세기 이전 요통방변에 어

17) 갱찬영, 「좁은 늦단검의 형태와 그 변천. (운화유산) 1962-3. 울무명, 한국갱통단검의 형식 훈휴. 291966•

18) 史, 」

19) 覆」卷29

떠한 형태이든 조선이 존재하였다고 보아야겠다. 이 정에 대해 평양 지방에 시종 중심부를 둔 고조선국가가 강성해져 서쪽으로 요하유역에까지 발천해 나갔다가 B.C.3세기초 薰의 청공에 의해 반도 이남으로 퇴축되었다고 보는 해석이 상정훨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성렵치

않는다. 평양지역에서의 국가의 성럽은 B.C.3 세기초를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B.C: 4세기 이전부터 요하유역에서 반도의 서북지역에 걸쳐 국가단계가 아닌 종족으로서의 〈朝解〉이 분포하고 있다가, B.C. 3세기 초에 킥월에 의해 그 서쪽부분이 병합당하였고, 그러한 뿔의 압박에 자극을 받아 서북지역에서 고조선이란 국가가 비로소 형성되었다고 보는 가정이 있을 수 있겠다. 그때 요동방면에 있던 조선족의 일부가 이주해 왔더라도, 고조선국가의 중심이 되는 본질적인 세력은 서북지역에서 그전 시기부터 토착해 오고 있던 조선족이라는 가정이다. 이는 서북지역의 세형동검단계의 무럽에서의 출토품이 그전 시기 팽이형토기를 쓰던 단계의 고인돌무멈 빛 돌상자무덤의 매장풍속의 전통을 강하게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러한 가청은 r위략j 의 기사를 부정하게 되며, 아울러 미송리형토기의 분포지와 팽이형토기의 분포지간의 차이에 대한 설명을 요하는 바이다. 아무튼 검토의 과제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가정을 할 때에도. B.C.4 세기 이천의 비파형동검문화 단계에선 그 문화의 중심지는 평양지역에 비해서는 요하유역 쪽이다. 따라서 조선 자체에 있어선 전체척으로 볼 때 중심부의 이동이 있었던 것이 된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둘 때, 가장 용이한 가정은 고조선국가가 요하유역에 중심부를 두었다가. B.C.3 세기 이후 형양지역으로 옮기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 역시 천형척인 세형동검의 양식에서 결업부가 새로이 나타나는 점과 세형동검 출토 무덤의 부장품의 綠뾰에서 보이는 서북지역 전통의 강한 계숭척 성격 동의 문제점이 제기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요하유역에서의 고조선의 중심부가 어디이며, 구체적으로 국가가 성렵 • 존재하였음을 규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 등이 문제이다.

요하유역의 고조선의 중심부의 위치에 대해선, 종래 王險城의 위치릎 요동의 蓋으로 보는 셜20)과 요서의 北鎭북방로 보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2l) 이들 견해는 모두 B.C. 108년 漢의 軍이 滾를

20) 이지린, 앞 책 p.88.

21) 엄건상, r고조선의 위치에 대한 고활. 고조선품제 토흔논문칩, 1963.

건너 列口로 침공해 들어왔다는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때의 i每를 오늘날의 海灣으로 보고, 列口즉 列水의 河口를 요하 또는 요하와 대풍하의 합류점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史記朝 」에서 말한 勳海는 반드시 오늘날의 발해만을 지칭한 것은 아니다. 황해의 북쪽 부분을 당시 행l海라고도 칭하였다. 그리고 산동반도에서 水 보낼 때에는 당시 해로상으로 볼 때 오늘날의 漸海灣으로 나아가 요동반도 남단을 돌아 반도의 서북해안으로 내려오게 된다. 따라서 굳이 〈漸海〉를 海핸만을 지칭하는 것이라 하여도, 列口를 요하 하구로 비정할 근거는 없다.

다음 王險 을 지리지」에 대한 應耶의 註에 따라 이를 요하유역의 險폈縣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이 역시 險뼈은 한자의 뭇을 새겨 지은 지명으로 보이는 데 비해 王險城은 아마도 우리말의 을 그대로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따라서 이 역시 논란의 대상이 된다. 요하유역에서 고조선의 중심지를 찾는다면 이는 앞으로의 고고학의 발굴성과와 그 연구에 기대해 보는 바이다.

고조선의 서쪽 경계에 관한 문제는 대롱하 및 요하 상류 일대의 경동기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를 요한다. 이 지역에선 비파형동검이 광범히 출토되고 있으나, 함께 출토되고 있는 청동기의 종류와 양식에 있어선. 지역적인 차이가 많다. 함께 나오는 토기도 그러하다. 三足 와 미송리형토기의 출토지역의 분포는 유의되어 왔다. 근래 이른바 흉家店上層文化를 출토된 청동기 유형에 따라 大井類型, 南山根類型, 十二끓첼子類型으로 나누어 세 개의 지역권을 셜정한 시도도 보이고 있다.22) 아무튼 이 지역의 청동기문화를 지역척 특성에 따라 분

22), 「店上層文化及其族 (考古 87

류해 보고, 이를 상대 문헌에서 보이는 이 지역에 풍장하였먼 여러 종족들과 연결하여, 구체척인 검토를 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연 이 지역뿐 아니라 인근 내몽고 ordas청동기 문화와 그 주민 및 황하유역의 청동기문화와의 상호 비교를 통한 그 성격의 파악이 요망되는 바이다. 곧 한국 청동기단계의 문화와 주민율 동아시아 청동기품화 전체에 대한 시각 위에서 검토하여야겠다. 거기에는 동시에 지역척으로 어디까지를 한국고대사의 연구범위로 설청할 것인가 하는 품

제에 대한 이롱척언 검토가 따라야 할 것이다.

아울러 요하유역을 포함한 요령성지역에 대한 생태학적 연구의 시각이 요망된다. 이 지역의 초기 청동기문화단계에선 해수면이 지금보다 높았고 기후 또한 몇 도가 높았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만약 그러하다면 강우량도 지금과 달랐을 것이며, 자연 그 당시 이 지역의 농업경제와 인간의 삶의 조건도 지금의 그것과는 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생태학적 조건의 변화는 주민의 분포와 이동 등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상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종합적 연구를 통해 고조선의 위치와 그 성격 및 그러한 연구의 궁극척인 목적인 우리 민족사의 원류에 대한 이해가 보다 명료해지리라고 보는 바이다.

낙랑사회의 특성

【權五重】

1 머리말

樂i良휠g과 樂i良社웰에 관한 연구는 분량변에서 결코 척은 수라고 말 할 수 없다. 그러나 기존 연구의 대개는 문헌자료를 토대로 낙랑의 위치를 고증하거나 낙랑유물을 고고학척으로 소개한 내용들로서 한정된 영역에 치우친 감이 있다. 낙랑의 위치를 고충하는 문제는 낙량사 연구에서 기본척인 과제임이 분명하나 북한 학계률 중심으로 하여 제시되고 있는 榮浪웹選寧說은 현재의 상태로는 비학푼척인 의식이 동반된 논리로까지 생각된다. 형양을 중심으로 하여 낙량유풀이 출토되고 있는 한반도의 서북부 일대를 외면한 채 樂浪都遭훌짧이 제기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변 낙랑군에 판한 천연척언 검토가 부족했던 때문이 아닐까 한다. 즉 낙랑군의 실체률 검토함이 없이 그 성격올 중국황제의 직할지이자 지방행갱기구로서 경칙되게 이해한 빼문이라고 본다.

낙랑군이 중국 군현제도에서 유래하였옴은 훈명하다. 또한 낙랑군의 외형 역시 군현체제로서 분식되어 있다. 그러나 낙항군의 혹수한 여건이 주목되지 않으면 안된다. 낙량은 중국의 얼반 짧(內짧)과는 활리 東횟라는 이민족의 주거지에 설치된 군이었다. 군현의 얼반척 성

격이 중국인민을 통치하기 위한 기구임을 생각할 때에 낙랑군이 內那과 동질의 기구였는지 의심스렵다. 더우기 낙랑군은 행정적 중심지와는 먼 거리에 격리되어 있어 中國官府가 유지되기에는 불리한 환경이었다. 그런데도 낙랑군의 역사는 4세기여를 지속하였다. 이 기간중 중국의 변화는 실로 엄청나다. 일시적인 반란이나 정변은 물론이고 왕조의 교체만도 前漢• 新• 後漢• 鏡• 팝으로 이어지는 변화가 있었다.

那과 縣은 지방행정단위로서 원칙상 중앙의 지속적인 관리를 필요로 한다. 낙랑군의 주민, 중국과의 거리, 중국의 시대척 상황들을 고려할 때 황제의 지속척 관리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낙랑군이 오랜 수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일까. 결국 이 문제는 낙량이 어떠한 군이었느냐 하는 성격문제로 귀결된다.

낙랑군의 성격을 규명하는 문제는 한국고대사를 이헤하는 데 있어 하나의 관건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문제는 중국고대사 분야에 있어서도 다음과 갇은 중요성을 갖는다. 첫째, 낙랑군은 중국이 이민족을 지배하기 위해 셜치한 군이었다. 따라서 낙랑군의 실체를 검토함으로써 중국의 이민족 지배형태, 즉 淡代의 중국척 세계질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낙랑군은 행武帝가 來핏 • 南蠻• 西南 의 본거지에 셜치한 여러 군의 하나였기 때문에 낙랑군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이들 諸줬B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낙랑군은 군현이라는 중국인민을 통치하기 위한 지방행정기구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낙랑군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군현제의 변형 여부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사를 전공하는 필자로서 낙랑문제에 판심을 두게 된 것도 위의 이유로 인해서이다. 다음에서는 낙랑이 어떠한 성격의 군현이었는지를 몇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알아보도륙 하겠다.

2 설치배경상으로 본 낙랑군

고대의 중국제국은 영토의 계속척언 확대를 통하여 수렵될 수 있었다. 또한 제국의 수렵 이후에도 중국의 확대는 어느 정도 지속되었

다. 제국의 통치를 위해 고안된 장치가 군현제이며 낙랑군 역시 이러한 체제의 하나로 이헤될 수 있다. 낙랑의 체제가 군현체제라는 사실만을 중시한다면 낙랑군의 설치는 중국의 확대이지만 문제는 중국인이 갖고 있던 〈중국〉이라는 공간개념이다. 닥랑군 셜치 이전 중국인들은 일정한 범위를 〈중국〉으로 설정하였으며, 낙랑지역은 〈중국〉밖 의 공간이었다. 그런데도 중국은 왜 낙랑군을 셜치하였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은 낙랑군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리라고 본다. 이를 위하여는 部설치 이전의 않과 朝활의 판계를 검토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낙랑군 설치 이전의 함 • 뼈群관계는 〈外품〉이라는 용어로서 특정지을 수 있다. 외신은 본래 光葉시대 중국이 잦IJ國으로 분리되었던 시기〈外國之 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나, ’前漢초기 조선에게 적용된 외신은 그 의미가 크게 변화하였다. 조선의 신하를 지칭하는 의미가 아니라 조선왕 자신을 지칭하는 의미로 활용되었다. 先奏의 외신에서와 같은 〈外國之君〉의 존재가 부정됨으로써 外의 歸屬對象이문제가 될 터인데, 그 대상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漢의 황제였다. 한은 조선의 국왕을 외신으로 삼아 황제의 종속적인 위치에 두었던 것이다. 이처럼 외신은 황제에 대해 수직적인 위치이나 外닮園內의 통치절서는 淡의 제도에 의헤 구속되지 않은 것으로 이행되고 있다.”

1) 庫朋信, 「國 周 民族 , (皮 史>1970

즉 외신은 淡과는 다른 제도와 법률을 유지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淡代외신의 위치가 중화척인 세계질서를 구성하는 -分子임을 알 수 있다.

四핏의 君·훌 모두를 外몸으로 삼아 중국척인 세계질서를 구현한다는 것은 漢帝I뭘의 이상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외신제는 일반척이고도 보편척인 제도로 이행될 수 있었겠으나 구체척으로 실현된 외신제의 내용을 보면 그렇지가 않다. 우선은 실시된 시기를 볼 때에 그러하다. 그 시기는 漢武함뼈l 이전£로서 前漢초기에 한한다. 또한 시행범위도 문헌에 의하면 조선과 남월만 확인훨 뿐이다. 외신의 촌채로서 조선과 남월만 확언됨은 사료의 쭈족 때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외신은 제도의 내용으로 보더라도 그 수가 제한척얼 수밖에 없

었다고 생각한다. 우선은 外폼을 冊封하는 형식으로 볼 때에 그러하다. 外많의 지위는 국제상의 조약의 의미를 지니는 〈約〉의 형식에 의해 비롯되었다. 또한 〈約〉은 淡의 f훨節이 파견됨으로써 체결되었다. 南越에는 漢초기의 才士인 陸뀔가 파견되었으며 조선에는 요동태수가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約〉을 통하여 外많에 封된 外핏君長에게는 〈隔똥) (파廠) (入見〉의 의무가 주어지며, 중국은 이러한 外폼의 의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웹物의 공급을 허용하였다.2)

2) 金, 「朝 中園뼈 에 대한 再檢討, (훌山女大훌文集)8. 1980•

이상과 같은 約의 내용 그리고 俠術파견의 예로 미루어 外동의 지위가 중국에 隔足한 外폈君長모두에게 부여되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오히려 선별하여 冊封한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데 이 점은 외신에게 부과된 역할을 검토하노라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외신에 부여된 역할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조선에 당부된 〈保짧外蠻핑〉의 역할과 남월에게 당부된 〈和 白越〉이라는 역할이다. (保 外繼~) • (和集百越〉은 표현만 다를 뿐이지 동일한 내용으로 이해된다. 두 내용 모두 外 國주변의 동족 또는 국가를 보호하라는 내용이다. 주변의 국가들을 보호하는 일은 이민족의 君흘 모두에게 기대할 수 있는 역할은 못된다. 이민족 중에서도 조선과 남월처럼 주변의 종족들을 관리할 만한 역량을 갖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두 국가는 국가적인 역량이나 교통상의 위치로도 來爽와 南 을 각각 대표할 만하였다. 중국은 이러한 형세를 감안하여 까 짧 중에서는 조선을, 南蠻 에서는 남월을 외신국으로 지목하였다고 본다.

외신의 지위를 조선 • 남월과 같이 유력한 外 君長에게만 한정하였다는 것은 않 초기 중국의 이민족 지배가 간접척인 방식에 의존하였음을 시사한다. 즉 중국은 外民이라는 〈中법體〉를 설정함으로써 이민족에 대한 중국척인 세계질서를 판철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중간척인 판리자가 셜정된 제도라는 점에서 외신제는 漢초기 국내에서 실시된 짧圍制의 청신과 통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군국제가 武帝期에 임박하면서 군현제로 전환되었듯이 외신제 역시 무제기에 들어와 변화률 맞게 되었다. 외신제가 채용되었던 지역 모두는 낙랑군의 예에

서처럼 군현체제로 전환되었다.

외신제에 대신하여 군현체제가 자리하게 된 것은 외신제를 통한 중화적언 세계질서의 구현이 용이하지 못했던 때문이었다. 조선의 경우 외신제는 다음과 갇은 이유로 인해 실패하였다. 첫째는 외신제가 지닌 취약성 때문이었다. 외신제는 중간자를 셜정하는 제도이면서도 그 내용은 외신을 구속하는 것이 못되었a며 또한 제도의 유지를 보장할 만한 장치가 결여되어 있었다. 둘째는 외신의 당사국인 조선의 국가척 성격 때문이었다. 조선(衛浦朝함)은 중국의 제국적 질서에 홉수되기를 거부한 중국계 망명인들을 주축으로 하여 성립된 국가로서, 조선이 외신의 위치를 거부하는 데에는 저들의 중국에 대한 배타척 성향 역시 작용하였다. 셋째는 짧썼의 영향 때문이었다. 당시의 조선은 國과 세력변에서 양렵되었던 흉노의 세력권에 홉수되기 용이하였으며, 흉노가 구축한 세계질서는 조선이 외신의 위치를 거부하는 데 배후적인 힘이 되었다.

중국적 세계절서를 보화해 주어야 할 외신을 상실한 중국으로서는 외신제를 보완할 대책을 강구해야만 하였는데 이러한 필요에 의해 출현한 것이 낙랑군이었다. 그러니까 낙랑군은 중국공간을 확대해야겠다는 필요성에 의해 개셜된 w細: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 같은 중국의 의도는 전쟁의 수행과정에서도 나타난다. 기왕에 개시된 전쟁이고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압박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무제는 조선왕이 외신으로 복귀할 뭇을 보이자 전쟁을 종결짓고자 하였다. 이 같은 행동은 파에 있어 조선의 군현화가 최상의 목표가 아니었음을 나타낸다. 그 결과가 낙랑군과 같은 군의 설치로 나타났지만, 설치배경상으로 보건대 조션을 중국화는 의식은 결여되어 있다. 오히려 낙랑군은 파기된 외신관계에 대한 시정책 A로서 그리고 취약성을 지닌 외신제에 대한 보완책으로서 개설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체제상으로 본 낙랑군

조선의 중국화가 목척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기왕에 젤치된 군현이고 보면 군현제의 철저한 척용이 기대됩칙하나 낙랑군의 경우는 그

렇지 않다. 군현이 셜치된 지역이면서도 닥랑은 여전히 핑의 공간으로 차별되었고 求봤과도 같은 국가통치체제의 운용과정에서도 소외되었다. 이 갇은 언식은 단순히 지역적언 차별의 의미뿐만이 아니라 낙랑군의 지배체제와도 연결되고 있다.

낙랑군체제로서 주지되고 있는 것은 군현체제이다. 때문에 군현체제를 논함은 불필요할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낙랑의 군현체제가 內那과는 달리 시대적 추이와 아울러 축소되어 갔으며, 部都렴體 와 결부되어 있었다는 사실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보다 관심을 모으는 내용은 토착언의 사회체제가 군의 설치로 소멸되었는가 아니면 존속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간략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은 주장이 제시된 바 있다. 그 하나는 토착민 사회의 지배세력이 군 셜치 이후 I 세기 정도 존재하였다는 三J:次몇의 설명이며 3) 다른 하나는 낙랑군내에 낙랑왕국이 존재하였다는 孫핍·振의 주장이다.4} 三上次몇의 셜명은 한반도의 서북지역 일대에 산재된 支石

3) 三上次 , 「君 支 橋遊 土 民狀 , 古代來北77史

, 1966• , , 文化, 194, PP·95-99.

꿇의 編年에 의한 것으로서,It는 지석묘문화가 B.C. I 세기말에서 A.D. I 세기초에 끝난다고 보고 이 연대는 토착원주민 호족의 세력이 소멸되는 시기인 것으로 이혜하였다. 낙랑사회에 대한 연구애 지석묘를 활용한 三上次펌의 연구방법은 문헌자료의 절대적 부족에 어려움을 겪는 고대사 분야에 하나의 돌파구를 마련해 준 셈이지만 그의 주장은 척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지석묘의 편년에 대한 정확성 여부는 논외로 하더라도 원주민 호족의 묘제를 지석묘(혹은 箱形石뼈꿇)로만 고정시켜 판단한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가 주목한 기원 전 I세기말, 기원 후 I 세기초의 시기는 낙랑군셜치로 말미암아 원주민사회에 중국문화가 대량 유업되었을 시기인 만큼 중국의 영향으로 원주민집단의 했制가 변화하였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따라서 토착민의 호족세력이 군 설치 이후 I 세기를 고버로 하여 쇠퇴하였올 것이라는 주장에 따르기는 어렵다.

오히려 주목되는 것은 孫뽑泰가 주장한 樂浪王園說이다. 그는 비록 개론의 형태이기는 하나 낙랑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였다.

즉 낙랑군에는 낙랑왕국이 건성되었고 조선인민은 왕국의 통치를 받았다. 낙랑국은 형식상 닥랑군에 종속되었으나 실제 정치에 있어서는 자주독렵하였다. 치1‘과 휩은 국방 • 교역의 필요에 의해 밀접히 제휴하였고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두 집단은 통일한 운명을 맞았다. 낙랑 •대방군은 조선민족의 주권과 영토를 탈취한 지배기관이 아니라 중국과 닥랑 • 대방국 사이의 협력 • 친선기관이다. 이상과 같은 손진태의 견해는 낙랑군체제를 단순히 군현체제로만 이해하였던 기존의 업장과 비교하여 차이가 투렷한 것이었다. 그의 의견에 다소 파장된 면이 없지 않으나 군내에 낙랑왕국이 존재하였다는 견해는 탁견으로서 낙랑사회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樂浪王國說이 제시된 지 4°년이 념도록 학계에서 경청되지 못하였음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손진태의 영찢 j생王國課에도 수정을 요하는 부분이 척지는 않다. 손진태의 견해는 낙랑군에 낙랑국, 대방군에 대방국이 존재하였다는 식의 一 一國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國論은 三園 記」를 전거로 삼은 때문이겠지만, 여기에는 l뼈:의 존재가 망각되어 있다. 손진태의 견해에 의할 경우 군과 왕국의 관계는 그런대로 설명될 수 있겠으나 왕국과 현의 관계를 설명하기는 매우 곤란하다. 낙랑왕국에 다수의 현이 소속되고 縣令(율)이 왕국에게 예속될 리는 없기 때운이다. 또한 현의 分없는 조선의 집약된 힘을 분산한다는 목척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낙랑군내에 낙랑왕국 하나만을 설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낙랑군내의 원주민 사회는 어떠한 상태로 유지되었올까. 이를 확실히 업증할 문헌사료를 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代의 중국문현 중에는 낙랑군과 같이 이민족의 주거지에 설치한 군현이 척지않은 수이기 때문에 이들에 관한 기록을 통하여 낙랑군사회의 상태를 유추하는 일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낙랑군보다 I 년 앞서 西南 지역에 설치된 益싹|那파 詳뺨那의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익주군은 漢의 고지에 설치되었는데 漫國은 續池縣A로 되어 익주군의 중심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 지배자에게는 왕의 지위가 부여되었으며 그 인민윷통치할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 청은 詳狗那에 편업된 夜郞圍역시 마찬가지였다. 國은 夜郞縣으로 편제되었으나 국왕의 지위는 군현제하

에서도 여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5) 또한 西南필의 일종언 哀추 역시 유사한 대우를 받았다. 그 지역은 後淡明帝때 (A.D. 69) 永昌那에 편업됨으로써 哀εF願이 되었다. 그렇지만 국왕의 지위는 계속하여 보장되었으며, 그 세력 한 휠守• 降令과 분갱하여 척들을 살해하고 중국에 반란할 경도로 독자척인 힘을 갖고 있었다 6)

위의 예는 이민족의 본거지에 설치한 군의 예이지만, 기존의 那에 이민족이 이주한 경우도 사청은 통일하다. 後i핏¥n 중국의 北邊에는 烏桓族이 집단적으로 쩔內에 거주하였는데, 중국은 이들을 上용 • 右北平• 遭西• 遭來웹에 분산시격 거주토록 하는 한펀 烏桓族의 펄師에게는 王• 候• 君• 長의 지위를 부여하였다.7) 이상의 예를 보면 이민

5) 116,

6) 響86, 西南

7) 卷90, 樞

족에 대해 토착척인 지배체제를 인정한 행위는 어느 특정지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이민족 통치에 엄하는 중국의 기본입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낙량군의 원주민사회 역시 따南펄나 烏桓의 경우와 유사하게 통치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이를 입증할 중국 正史의 팎은 체의 범위 밖에 있거나(技除• 輪園• 僅) , 체에 면입되었다가 분리된 종족(高句 • )만을 대상흐로 삼아 기록하였기 때문에 낙랑군에 편입된 원주민의 사태를 검토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部에 편업되었다가 분리된 決뻐 • 파滋에 관한 기록을 통하여 단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먼저에 관한 기록 중에는 (붙落各有長帥〉라고 한 내용이 주목된다. 물落에는 대대로 〈長帥〉가 존재하였다는 것인데, 여기서 帥라고 하면 훤주민의 지배자를 가르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측 울落은 단순한 聚落이 아니라 펄帥에 의해 영도되는 사회였던 것이다. 樂帥가 존재한 시기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낙랑군에 편입된 상태에서도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다움으로 束演에 판한 기록을 보면 漢代이래로 候• 君• 三老라는 판칙이 있어 下戶률 통치하였다고 한다. 束滅지역이 낙랑군에서 훈려되는 시기가 後漢初 (A.D. 30) 언바, 이때부터 위의 官號가 사용

되었을 가능성은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관호의 유래에 대해 〈自 來〉라고 한 내용으로 미루어 前漢(파滅가 낙랑군에 편입되었던 시기)시대부터 존재했을 가능성도 배제될 수 없다. 더우기 三老라는 官號는 짧縣體制와 결부된 명칭이다. 三老는 중국에서 椰됩·의 의미이나. 滅• 且와 같은 비교적 단순한 사회에서는 三老를 관직의 의미로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候• 울君역시 군현체제와 상호 모순되는 관호는 아니다. 이 점은 위에서 검토한 따南꿇 • 烏桓의 예로써 알 수 있다. 또한 폐핏後 의 유물로 알려지고 있는 〈夫租滾君〉 印은 둠君이 닥랑군사회에 존재하였음을 전하여준다.8)

이상의 사실로 보자연 낙랑군사회에서는 토착언의 首長인 帥의 존재가 보존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토착인의 國울9)과 이를 지탱하는 官制가 존재하였을 가능성 또한 확인된다. 그 國둠의

8) 敬, 「夫租 君顧印 , (朝 )'46 , 1968•

9) 토착민 사회의 발천단계라든가 사회규모는 끌얼하지 않다. 고구려처럼 국가의 형태로 발천한 사회가 있었는가 하면 , 쳐렵 용학의 단계에 머품 사회도 있었다. 여기서는 이들 사회홉 욕별한 구붐없이 凡稱한다는 의미에셔 이라는 명칭융 사용하였다. 三圖 爽 」에 산견되는 〈園울〉도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園용짧뼈>는 국가 는 물짧의 체제, 흑 토확언 사회의 독자척 지배체제흩 뜻하는 용어로셔 사용하였다.

규모가 쩔이 아닌 이상 손진태의 國說은 수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연 낙랑군에 소속된 園둠은 어느 정도의 규모였을까. 우선 낙랑의 周縣이었다가 後파초기 (A.D-3) 에 분리된 짧來7縣끊파·不耐·來日施• 앓台•펀뼈 돼 않 • 前莫)은 낙랑군내에서 國물의 상태를 유지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 점은 중국이 7腦을 뾰縣의 상태에서 분리시키면서 〈縣中꿇帥〉를 候에 임명하였다는 사실로써 알 수 있다. 월가 존재하는 국읍이 짧聊:어l 만 한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확실한 문헌의 뒷받침이 없어서 그렇지 군현의 구획 자체가 원주민의 국읍에 근거하였음을 볼 때, 국융은 대부분의 현에 존속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 더우기 한대 중국의 이민족 지배방식이 이민족 고유의 체제를 언정하는 입장이고 보연 토착민의 국융은 거의 모든 현에 존속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낙랑군의 속현인 觸縣의 陣의 내용 중에는 국융이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였는지를 시사해 주는 내용이 있어 주목된다. 文의 꺼

행에 보이는 〈屬國〉이라는 내용이 그러하다. 속국의 일반척 의미는 민족에 대한 지배를 위해 셜치한 휠15과 유사한 행정단위를 못한다. 협州益 파싸|지역에는 여러 속국이 개셜되었는데, 여기에는 那守에 준하는 屬園都짧(比二千石)가 파견되어 여러 현을 통치하였다. 속국의 일반적 의미로 보건대. 뿜文상의 〈속국〉은 다른 의미로 이해함이 좋을 듯하다. (속국〉의 字화 그대로 柱웰1縣에 〈소속된 國〉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리라고 본다.뼈의 예로 미루어 낙랑군의 각 健에는 원주민의 國울이 속국의 형태로 존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三國志來 」에서 縣의 위치에 있는 決 를 〈縣〉이 아닌 〈縣 〉으로 칭할 수 있었던 것도 속국이 존재한 때문이라고 본다.

낙량군의 속국에는 王또는 필뻐II로 표현되는 지배자가 있었고 소박한 형태이나마 관제가 마련되어 있었다. 또한 속국의 지배자들은 그 언민을 통치하는 데 있어 자체적언 紀첼에 의존하였다. 낙랑현내의 속국민들이 에 의해 지배되었음은 淡:봐 행忘」에 보이는 〈犯禁六十餘條〉라는 내용으로 알 수 있다. 「지리지」에 의하면 낙랑조선의 犯禁은 셜치로 증가되었는데, 이 내용 중 淡젠의 영향이 있었다손치더라도 (여 조〉는 조선현의 속국민인 토착인 사회가 자체척으로 운영하던 기융임이 분명하다. 토착민의 기율언 倫쑤은 각 縣의 속국이 독자척으로 보유하였다고 보아지는데, 이 점은 『 記平準 」에 南 • 西南 에 설치한 17 을 〈故洛倚 에 의해 통치하였다는 내용으로 시사된다.

이상의 검토에서 보자연 중국은 낙량의 원주민들을 內那의 인민들처럼 직접척으로 통치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원주민들에게는 자치척언 圍물훌없률 허가함으로써 간접척으로 지배하였다. 한마디로 낙량군체제는 중국에서 이식된 군현체제와 토착인 사회에서 유래된 園몹體制가 결합된 이훤척인 체제였다.

4 운영상으로 본 낙랑군

얼반척 로 군현의 운영은 판료조칙과 행정체계에 의존한다. 때문에 굳현의 원활한 유지롤 위하여는 지방관이 지속척으로 파견되어야

만 할 것이다. 그러나 낙랑군의 경우는 지방판의 단철이 산견된다. 지방관의 단절이 있게 된 이유로는 중국과의 거리, 이민족의 주거공간이라는 사실, 樂j良官에 대한 떻職으로의 인식, 중국내의 정치척 상황 등 여러 요인이 지척될 수 있다. 그런 만큼 낙랑군의 운영에서 지방관이 차지하는 비중은 內部의 경우와 비교하여 낮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도 낙랑군은 4세기가 넘는 역사를 유지하였다. 여기에는 選來部• 빼州폐및校잖t양 등 주변 官府의 지원과 협력이 따랐다. l0) 주변 관부의 지원이 닥랑군의 수명을 연장하는 데 기여한 바

10) 輪, 「樂良과 그 周邊의 ·府 , 東亞史의 比, 1987.

크지만 결정적 이유는 될 수 없다. 조선지역에 설치된 4군 가운데 오직 닥랑군만이 장소를 이전함이 없이 오렌 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성은 자연히 낙랑군 내부의 문제로 기울게 된다.

닥랑군의 주민은 중국의 종족차별정책에 의거 漢系주민과 원주민들로 구분된다. 핏 系주민은 중국 패北邊境지역의 鋼民들처럽 군설치 이후된 주민이 아니라 군 셜치 이전부터 조선지역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來波하게 된 경위는 衛浦m뼈의 경우처럽 망명언으로서였다. 망명인으로서의 성향은 중국에 반목하는 컷이었는데 이 점은 조선이 淡의 침략을 받고 낙랑군이 설치되는 데 촉매의 구실을 하였다. 망명인의 성향은 낙랑군 셜치 초기까지 불식되지 않았는데 이 점은 『껏꽉지리지」에 보이는 浪那휠의 선발 記페로서 알 수 있다. 즉 낙랑군은 초기에 많은 漢系주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짧更를 選來에서 선발해야만 할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낙랑군의 屬펄를 끊來웹에서 취하는 조치가 장기화하지는 않았다. 漢系주민들은 정차 군의 통치에 순웅하였고 군의 屬홍職을 담당하는 지배충을 형성하였다. 군현의 屬更職은 한인계 주민이 회소한 束縣같은 지역을 제외하고는 한인계 주민에 의해 전담되었다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한인계 주민은 홉常廣뚫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1961년 壞市貞拍里에서 발굴된 高常홉훌훌의 유물은 그가 현지 주민으로서 夫租縣長職올 수행하였음을 입중한다. 이 같은 사례는 漢代에 판행화된 回避制의 훤척에 위배휩은 물론이다. 낙황군의 경우 회피제의

훤칙이 지켜지지 못한 것은 중앙에서 파견되는 지방관의 缺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처렴 한인계 주민들은 那縣의 屬更職외에 지방관칙을 담당하는 등 지배척인 위치가 확실하였다. 그러나 이 갇은 淡A 系주민의 위치는 낙랑군이라는 좁은 공간으로 한청하였을 경우이지 전체 중국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그렇지 못하였다. 오히려 이들은 〈邊民〉으로서 內那의 주민들과는 차별되었다. 이 점은 淡.代의 관리선발 방식인 內那만을 대상로 실시되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낙랑군의 한인계 주민은 이러한 차별로 말미암아 정치적으로 소외된 생활올 하였을 것이다. ll) 또한 漢代에는 內那으로 와서 거주하는 변민을 본지로 송환하는 조치도 있었다. I2} 이 같은 조치는 邊境을 충실히 한

11) 낙항언로서 王景쳐럽 훌二千石(太守훌훌에까지 숭진한 예가 보이냐, 王 외 갱쭈는 와 被 者의 언연윷 바탕S로 하는 에 의한 것로서 일반화시컬 수는 없다.

12) 後 』下, 光 紀下.

다는 〈첼邊〉의 의미가 컸을 것이나 낙랑군민과 같은 변민들에게는 불리한 조치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같은 조치는 변민의 위치를 고착시켰올 것이며 그 결과로 변민의 소외는 더욱 심화되었으리라고 본다.

낙랑군에는 본국으로부터 從民에 의한 일종의 신진대사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낙랑군민들은 유리된 집단으로 고정될 수밖에 없었다. 원주민과는 구분되고 본국과는 유리됩 로 말미암아 이들 않 系집단의 세력약화는 필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낙랑군에서 대방군이 분리되는 後淡없땀뼈 그 이전부터 한언계집단의 분산과 약화는 푸렷이 나타난다. 그런데도 낙랑군의 역사는 좀더 지속하였다. 韓•滅의 강성과 民의 약화가 지척된 桓 (146 - 147) • 靈帝(167- 189) 말기로부터 I 세기 이상올 존속하였다. 그 이유가 중국의 지속적인 관리에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짧의 뀔初(237- 2 39) • 正始年問(240 - 2 48 )關州 史府의 척극척언 지원이 있었으나 그것은 일시척일 수밖에 없었다. 낙항군의 수명이 오랜동안 연장될 수 있었던 이유로는 漢 系住民의 집단척 형태에 주목해야만 하겠다. 이를테면 이들 那民들은 〈판성화된 주거집단〉이었던 것이다. 췄治패팝紀」에 보이는 낙랑군 최후의 모습은 짧 또는 縣과도 같은 행정단위로는 보기 어렵다.

행정력이 거세된 주거집단, 즉 관성화된 주거집단으로 최후를 맞았다고 생각된다.

이들 집단의 규모는 닥랑군 전역에 미치는 광범한 규모는 아니었다. 원주민은 자체적인 國울에 소속되었기 때운에 낙랑군의 실체는 없의 륭땀域과는 상관없이 소규모의 주거집단으로 변모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주거집단이 오랜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토확화한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토착화란 장기척인 거주만을 뭇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소극적얼지언정 ftA A 系주민에게는 문화척 절충의 혼척이 역력하다. 건강힘앉꽃에서 원주민문화를 대변하는 쩌n形鋼캉 등이 발견되었음은 이를 입증한다. 이와 같은 웹民의 문화척 입장은 원주민과의 긴장을 줄이는 데 공헌하였을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행 A 系주민이 집단의 형세를 오랜 동안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제 낙랑군에 편업된 원주민의 상태를 보도록 하자. 원주민이 국읍에 귀속되었다고 하여 군현의 지배로부터 제외되었던 것은 아니다. 원주민의 인구 동태는 황제에게 보고되었으며 또한 원주민들은 군현에 대해 앓과 租뻐의 의무를 부담해야만 하였다. 다만 부역의 부담이 內 의 인민과는 달리 개별적 • 직접적으로 징수된 것이 아니라 간접척이며 집단적인 형태로 부과되었던 듯하다. 이 점은 南뽑과 西南꽃 지.역의 예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즉 租敵는 켠1’縣‘의 수령과 국융의 首長간의 〈約〉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다.13) 또한 組願의 분량도 중국

13) 後漢 86. 南 • 西南 .

내의 들이 부담한 양에는 미치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렇더라도 조부는 원주민에게 척지 않은 부담이 되었올 것임에 툴렴없다. 後 의 「南짧 • 西南핏따」의 내용이 租圖에 대한 불만으로 얼어난 원주민의 반란 로 얼룩져 있음은 이를 대변한다. 물론 이들의 반란이 있기에는 細更의 중간척 착취가 눈에 픽지만 那의 租圖자체도 훤주민에게는 부담이 되었으리라고 본다.

그렇다고 원주민의 상태를 단순히 착취의 대상으로만은 용 수 없다. 園 體制와 租題를 위한 〈約〉의 행위에서 시사되듯이 훤주민에 대한 지배는 간접척이었£며, 이로 인해 원주민 집단은 어느 청도의 자율성울 누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훤주민의 뿔홍훌훌 창여도 놈에

뜨인다. 不耐• 돼句뼈의 官職으로서 功핍 • 主海그리고 三老등이 보이는데, 이는 那縣짧 의 잔영으로서 원주민의 잃更職참여를 시사하는 내용로 이해된다. 원주민의 縣更職참여는 那의 원주민 사회에 대한 의존을 나타낸다. 이 같은 낙랑군의 운영방식은 원주민들이 가질 수 있는 저항감을 어느 정도 희석시킬 수 있었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이 방식은 낙랑군이 오랜 역사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5 맺음말

이상에서 낙랑문의 설치배경과 체제 그리고 운영변에서 나타나는 낙랑군의 성격을 검토해 보았다. 검토의 결과를 종합할 때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낙랑군의 성격이 언민을 직접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설치된 일반 部과는 판이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중국이 낙랑군을 廢棄치 않고 존속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닥랑군의 역할〉에 대한 기대 때문일 것이다.

문헌에 나타난 낙랑군의 역할로 돋보이는 것은 諸I뭘의 조공 및 이들에 대한 冊封을 주선하는 일과 월짜의 분할을 추진한 점이다. 웹이 조공과 책봉을 주선하였음은 『三國志J r來혔f委f팡」에서 단적인 예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찌爽諸國의 분할은 파-폈뮤의 일원화를 추진하던 조선올 攻滅하고 이 지역에 수다한 那과 縣을 설치하였다는 사실로 업중된다. 여러 屬縣을 보유한 낙랑군의 존재 자체는 중국이 낙랑군에 기대한 역할이 성공척이었음올 시사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낙랑군이 수행한 역할이 과거 중국이 外足인 죠선에게 기대한 역할 그것의 연장선상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에 당#된 〈保塞外뿔爽〉는 東爽諸族의 분리를 회구한 내용이며, (諸 君長欲入見天子 得薰止〉는 東 諸園의 內屬올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전솔한 바와 같이 外물의 경우가 실꽤로 끝났음에 반하여 낙랑군은 후여된 역할올 성공척으로 수행하였다. 이 점에서 낙랑군의 성격옳 충국척언 세계질서훌 구현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로서 정의할 수있옳 것이다. 이 찰은 성격은 南홉 • 西南혔의 주거지에 셜치된 의갱우도 츄사하였리라고 본다.

고구려사 연구의 제문제

----초기의 국가적 발전에 관한 연구를 중심으로---

【金光洙

고구려의 국가적 발전과정은 그간 한국사상 초기국가의 형성 및 그 발달과정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위한 노력에서 여러모로 검토되어 왔다. 그리하여 대략 60년대 이후에는 대체로 그 과정을 部族國家-部族聯盟짧-古代國家로의 단계적 이행으로 체계화하는 가운데 고구려의 국가적 발전에 관하여도 일청한 이해가 이루어져 한동안 통셜화되어 왔다. 즉 고구려의 경우 당초 부족연맹체의 단계에서 태조대왕대를 지나면서 고대국가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다시 소수렴왕대에 이르러 그 체제가 정비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그후 7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그 중 특히 부족국가의 개념에 대해 문제첨이 지척되면서 그에 대신하여 城울國家또는 君융社會등의 용어가 쳐l 시되는 가운데 고구려의 경우도 그에 따른 논의가 있어왔다.

물론 위와 같은 그간의 연구에서 특히 종래의 푸족국가셜은 비륙 그 개념상의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으나 고구려률 포함하여 한국사상 초기국가의 발전과정을 이해함에 있어서 기여한 바 크다. 그것은 당초 그 사회구성에 대한 체제척언 이혜의 바탕 위에셔 그리고 세계사척인 시각에서 초기국가발달사를 체계척으로 이해하고자 함에서 출발된 것으로, 그 결과는 여하튼 청곤방식에 있어셔 중요한 의미흩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구체척언 검토훌 통하여 이쭈어진 태죠

대왕대와 소수렴왕대를 기점으로 하는 그 국가발전의 시기구분도 그 각 단계의 국가개념과 상관없이 앞으로의 연구에 일정한 지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근래 논의되고 있듯이 그것은 또한 재고의 여지가 있음이 발견된다. 그것은 비단 그 용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좀더 근본척으로는 당초 그러한 이해체계가 형성되어 가던 과정에서의 학문척 상황에서 연유하는 것이었다. 주지하는 바와 칼이 그러한 이해는 당초 한국사상 청동기시대의 존재가 부정되던 고고학적 결론과 상고기 한민족에 대한 제기록의 불신이라는 문헌비판의 시각에 크게 침윤펀 속에서 출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고전이나 국내자료에 전하는 상고기 한민족의 오랜 문화적 경험이나 구체적인 사회구성의 면모를 적극 수용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중국문화의 영향론이 크게 대두됨에 이끌려서 오히려 고대국가의 일반척 성향인 고유한 조직능력의 발견에 미진하였던 것이다. 또한 부족이라는 題名내지는 인류학척 방법에 이끌려 族制t띠 검토에 치중한 나머지 국가형성에 기초가 되는 생산력 발전에 따른 사회척 분화와 청치척 구성에 있어서의 정복력의 작용을 흘시한 감이 없지 않다. 그리고 근래의 새로운 견해 또한 실제에 있어서는 대체로 위와 같은 문제점에 대한 감각에서 제기되는 것이라고 이해되지만, 아직은 그 국가의 보면척언 성격 내지 외형척인 개념 규정에 머무르고 있으며, 그에 대한 구체척언 검토는 크게 진전되지 못한 형편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현시점에 있어서 고구려의 국가척 발전과정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의 총더 구체책언 문제점은 아직도 위와 같은 부족국가셜을 성럽시킨 연구파정에서의 결함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와 관련하여 야미 제기되고 있는 새로운 국가의 성격 내지는 개념상의 논란올 일단 제외하고 실제 .연구에 있어서 좀더 유의하여야 할 점올 지척하여 본다면 대략 다음과 같다. 즉 고구려족의 역사척 경험에 판한 검토와 고유의 국가척 조칙내용의 발견 그리고 그 사회척 분화와 청복력의 문제 동A로 다음에 그에 판하여 좀더 구체척으로 언급하여 보겠다.

우선 고구려족의 선헝척인 문제를·보연 주지하는 바,한서 지리

지」현토군조의 고구려현의 존재로 보아 고구려라는 정치적 세력은 이미 기원천 10 7년 이전부터 형성되어 왔다고 하겠다. 그리고 당시 현토군의 속현이 고구려를 포함하여 3 현인 데 비하여 그 호구는 45, 06戶에 221 ,845 口로 뼈뼈로 등분하여도 고구려의 경우 15 , 000여 호에 70,000여 구가 되어 이미 족제척 통제의 선은 넘어선 단계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듯이 고구려의 중심종족을 族으로 볼 때 참흉經후파깅E 짜-에 전하는 바로는 백족이 하나의 세력으로 漢族과 교섭한 것은 01 미 周훤j로 소급된다. 그리고 파子에 전하는바 銷道에 관한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이미 기원전 4세기경에는 농경생활은 물론 일정한 수취제도까지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국가적 성장을 논함에 있어서는 이러한 창구한 기간 동안의 백족의 역사적 경험이 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그 고유의 국가적 조직능력에 관하여 보면 우선 왕권에 있어서 유리왕 또는 태조왕 등의 명칭에서 나타나듯이 고유의 王者칭호가 그 국가발전에 결부되어 창출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즉 유리왕은 이미 다른 글에서 언급한 바 있거니와 〈누리〉즉 에 해당하는 것으로 한어로 표현하자연 새로운 변혁의 主를 의미하는 祖에 해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太祖란 흔히 중국식 왕호로 보고 있으나 실제 중국에 있어서 태조란 왕호는 고구려의 태조왕 이전에는 사용된 예가 없으며 그후에도 처음에는 북방민족의 왕조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그 또한 원래는 고구려척언 명칭으로 한운표기를 함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여러 연구자에 의해 언급되어 온 그 역대 제왕의 훌훌에 나타나는 촉기의 太服王적인 〈解)의 모칭이나 했地名과의 일치 등은 모두 그 왕권의 성격이나 그 변화가 고구려사회의 발전에 따른 자생척인 것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신분척 편성 및 정치척 조칙연을 보면 역시 이미 보고한 바 있거니와 r삼국사기』에 전하는 초기의 姓民眼與나 삼국지 고구려 전에 전하는 大加小加등의 호청은 곧 고유한 지배충의 정치척 그리고 신분척 편성의 방법이었다. 또한 일반척으로 판등으로만 이해되어 왔던 삼국지 고구려전의 官名도 官戰과 官等으로 구분하여 보아야 훨 것임을 보고한 예가 있어 좀더 발달된 관직제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하여 준다. 그리고 部制의 경우도 주지하다시피 오늘날의 族이라는 용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며 그 자체 조직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수서에 전하는바 고구려의 경우 內評과 外評이 있다 함을 보면 부 또한 그러한 고유의 조직방법에 대한 한문식 표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국가적 발달과정을 논함에 있어서는 위에서 예상되는 고유의 조직체계의 복원과 그 성격의 규명이 최우선의 과제라 하겠다. 그리고 그것이 고대적 성격을 띠는 것일진대 더욱 그러하다고 믿어진다.

다시 그 생산력 발달에 따른 사회적 분화의 연을 보면 r삼국지」 「고구려전」에 전하는 바로는 그 풍토가 농업에 적합치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인근 부여에 관하여는 五눴에 적합하다 하였음을 보연 그 농업생산이 이미 안정된 농경생활의 수준에 이르렀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울洛에 짧·民과 下戶가 있었다 함을 보면 그에 따른 사회적 분화도 이미 그와 같이 표현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진척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정치척 구성에 있어서의 정복력의 문제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이름언 朱횡이 普射者를 의미한다든가 大武채III 王의 칭호 등에서 나타나듯이 고구려의 제왕은 초기부터 강한 狂服王의 성격을 띠었음올 알 수 있다. 그리고 r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에 천하는 技餘王弟가 종자 백여인과 더불어 海頭王을 습격하고 그 백성을 취하여 갈사왕이 되었다 함을 보면 당시 지역세력이 단순한 자생적인 집단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유리왕이 그 쫓都하면서 그 장남인 隔明에게 |日都를 맡긴 것이나 삼국지 고구려전에 전하는바 고국천왕(伯固)의 사후 伊헛模가 왕이 됩에 장자인 技奇가 이탈하면서 거느렸던 하호 30。의 예로 볼 때, 그러한 정복과정에서 장악된 戶나 지역은 곧 청복세력의 전리품으로서 그 얼족 내지는 예하에 분배 정거되었먼 것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이미 고구려 초기에는 정치척 권력에 의한 지배체제의 편제가 보다 원활하였다고 보아지며 예컨대 〈加〉세력 또한 많은 경우 청복세력의 家分化에서 생성되어 갔다고 생각훤다.

이상으로 고구려의 초기 국가척 발천과청에 대한 기왕의 연구과정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문제정올 지척하고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

해를 피력하여 봄으로써 앞으로의 연구 방향을 전망하여 보았다. 물론 이러한 의견은 매우 지엽적인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전체 발전 체계에 대한 이론적인 면이나 구체적인 소재에 대한 연구성과에 관하여는 이미 선학에 의하여 거듭 검토 정리되어 온 바라, 이 글에서는 그러한 내용들을 피하여 평소 스스로의 연구에 전제하였던 점만올 거론하여 보았다. 고구려사 연구에 다소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활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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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국가형성사 연구의 동향

【李鐘旭】

1 머리말

이 글은 백제의 국가형성에 대한 주요 연구의 동향에 대하여 알아 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여기서 다루는 시기는 백제가 하나의 초기국가로서 소국을 형성한 때부터 古댔王(234- 286 ) 에 이르기까지이다. 이 기간 동안의 백제사에 대한 연구는 三國史記 百濟本紀」의 해당 자료를 어떻게 명가하는가에 따라 그 모습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실제로 한국사에 있어 백제의 국가형성에 대한 연구만큼 거리를 좁힐 수 없이 명행션을 달리는 견해들이 나온 예도 그리 혼치는 않다. 따라서 백제국가형성사에 대한 주요 연구성과를 검토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믿어진다.

파거 얼본언 학자들은 三園史記 百濟本紀」중 近 古王(346-375) 이후의 기록부터 믿올 수 있다 하여 그 이전의 백제사를 거의 무시하여 왔다. 그에 비하여 李F팅積는 古爾王대부터의 기록을 믿율 수 었다고 하였고 백체의 고대국가 형성시기도 그때로 보았다(1975>' 그럼데 최문에 이르러 F三園史記 百濟本紀」초기기록들도 신맹활 수 있다는 견해가 나왔다(金元龍: 1967. 李鍾旭: 1986). 그러한 판점에

서 千寬宇, 李 旭등이 백제초기의 역사에 대하여 다룬 바 있다(千寬宇: 1976: 1976, 1977). 한편 李끓來, 國의 연구도 그 나름대로 사료 비판을 거쳐 古짧王대까지의 백제사에 대하여 다룬 바 있다. 이러한 연구플은 백제의 국가형성, 초기의 정치적 성장 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인 연구 결과를 보면 백제의 국가형성시기, 정치발전단계, 정치적 성장요인, 왕실 및 귀족세력, 정치조직 등에 대한 문제를 해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문제들에 대한 연구자들의 견해는 좀처럼 간격을 좁히기 어려운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 발표에서는 그 중 백제초기의 국가형성과 정치적 성장 그리고 왕실교체설을 중심으로 최근 7 0년대 이후 발표된 연구들의 동향에 대하여 정리하기로 한다.

2 백제초기의 정치적 성장

백제의 국가형성과 그 정치적 성장에 대한 지금까지의 견해는 크게 셋으로 나누어 정리할 수 있다. 그 하냐는 백제의 건국연대를 古陽王 27 • 28년 (260 • 261) 경으로 보는 李因績의 견해이다(1959). 이 같은 견해는 지금까지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두번째는 三國史記 百濟本紀」의 기록을 대체로 인정하여 백제의 국가형성에 대한 연구를 한 것을 들 수 있다. 19 6。년대 이후 백제의 국가형성과 정치척 발전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이 나왔다. 金元龍은 고고학척 자료에 근거를 두고 『三國.記 百濟本紀」의 초기기록을 믿올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의 건국도 기원전후 세기경이라 하였다(1967) • 그리고 197년대에 들어서서 한국의 초기국가 발전단계에서 받아플여졌떤 부족국가 • 부족연맹에 대한 문제점들이 제기되었다. 그러한 액락 속에서 千寬宇는 초기백제의 성읍국가 형성시기륨 기원천 I세기로 보았고 溫祚王대에 이미 영역국가로부터의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李鍾旭도 그와 같은 견해률 따르며 백제의 초기국가로서의 소국형성파 그 발전에 대 하여 다룬 바 있다 (197 6, 1977).

한편 세번째로는 三園史記 百濟本紀」溫祚王대의 껑체벌천에 대한 기록을 후대의 사실이 소급 기록된 것로 보는 견빼훌옳 률 수

었다. 李 來은 백제의 성읍국가 건국시기는 기원전 I 세기로 보지만 연맹왕국의 성장은 3 세기에 들어선 후라고 하였다 (19 87 ). 盧量國은 十濟의 건국시기는 衛浦朝 멸망 이후로 보고 있으며 한강유역에서의 소연맹체 형성은 세기말, 2세기 초엽이라 하였다(198 7 a ), 權五榮도 백제연맹체의 강화 • 팽창시기를 3 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19 86 ).

여기서 백제초기의 정치적 성장에 대한 문제를 정치발전 단계별로 나누어 정리하기로 한다. 그런데 그에 앞서 정치발전 단계에 대한 명칭부터 통일되지 않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金哲埈은 部族國家• 部族 盟으로, 千寬宇는 地울國家伯濟國) • 域國家로, 칼꿇白은 地 國家白濟國) • 職盟王國(百濟)으로, 國은 小國(十濟) . 小國聯盟(百濟) 등의 단계를 셜정하고 있다. 프빨훌따은 현재 신라국가형성에 대한 정리과정에서 얻어진 小國• 小國聯盟• 小國센合등의 단계를 백제사 연구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와 같은 단계별로 나누어 백제의 정치적 발전에 대한 몇몇 주요 연구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백제소국 형성시의 몇 가지 상황에 대하여 생각하기로 한다. 기원전 세기경 夫餘• 高句 系이주민들 중의 한 세력인 溫祚集團에 의하여 소국 또는 성읍국가로서의 백제가 세워진 것은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이 같은 백제의 국가형성시 닮祚뼈은 한강유역의 선주민을 통합하여 그 위에 지배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여기서는 부여 ·고구려계 이주집단에 대하여 우선 알아보기로 한다. 械-五榮은 고고학척언 자료를 근거로 한강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중부지역의 초기철기문화의 주체는 고구려계 주민들로 구성된 유이민 칩단임올 말하였다 (19 86 ), 그는 고구려계 유이민들이 한강유역에 확산하여 선주민집단을 홉수 • 통합하는 시기를 기훤전후한 때부터 3세기 이전으로 보고 있다. 그중 고구려계 이주민들이 남하한 시기에 대한 견해는 다소 문제가 있지 않나 한다.

현재 三園史記 百濟本紀」에 나오는 溫祚• 佛流說話, 北部解 관계기룩들이 부여 • 고구려계 이주민의 한강유역 청착시기를 알아볼 수 있는 유력한 사료가 된다. 그에 따르면 부여 • 고구려계 이주민의 남하 • 청확시기는 기원전 I 세기 후반이 된다. 그러나 遠君南 가 홈滿朝의 지배에 반향하여 28만의 인구를 거느리고 漢에 의지하자

이 그곳에 파海쩨을 설치한 사건(기원전 128 년)을 보면, 그 무렵 고구려계 주민들 중 일부가 남하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 기원전 10 7년에 현토군이 설치될 떼, 고구려계 주민들이 남하하여 한강유역에 정착하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고구려의 건국주체는 부여에서 이주한 주몽 집단이라고 한다. 따라서 백제 건국세력들도 부여 • 고구려계 주민들로 구성되었고 그들의 한강유역 정착시기도 기원전 2세기말경부터라고 생각된다.

기원전 세기 후반 fi친 i꽤댄함의 右 王때에는 香의 주변에 國들이 있었다고 한다. 랬國은 辰댐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으나 여기서는 國으로 보기로 한다. 부여 • 고구려계 이주민들이 냥하하여 위례성, 미추흘 등지에 소국(성읍국가)들을 세운 시기도 백제건국시기라고 하는 기원전 18년보다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소국들 중에는 溫祚핑때에 의혜 세워진 十濟가 들어 있다. 그후 서쨌는 싸流파 l패에 의해 미추흘에 세워졌던 소국의 民을 받아 들이고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고 한다.

기원전 세기 백제가 소국형성과 더불어 이주전 출신지가 같았던 미추흘의 소국세력과도 일정한 연맹관계를 맺었던 것은 溫祚와 流의 건국셜화출 통해 쉽게 짐작이 간다. 한편 당시 고구려 • 부여계 이주민들이 세운 소국들은 그 정치적 실력기반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약하지는 않았다고 여겨진다. 이미 기원전 1세기 후반에 고구려지역에는 28만의 인구를 거느련 합長이 이끄는 정치세력이 존재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에서 이주한 온조집단도 그와 같은 청치척 지식파 농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衛滿朝tf .옛那縣과의 관계 속에서 군사적인 실력도 축척하였다고 헤아려진다. 이 같은 역사적인 대세를 상기하면 기원전 I 세기 백제도 이웃한 미추훌을 비롯한 소국들과 연맹 또는 병합관계를 맺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온조집단의 소국건설시 十濟라 했고 미추훌의 효올 받아들언 후 百濟로 청했다는 사실과도 부합된다.

한면 盧ill國은 온조집단이 十濟를 세우기 이전의 션주토확세력들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19 87). 그는 三園史記 百濟本紀溫祚王조」에 나오는 기록 중 佛流• 溫祚가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이주활 때 함께 내려온 烏千둥 10 톰을 기록과는 달리 十濟훌 형성한 I개의 션주

토착세력칩단이라 하였다. 그는 나아가 이러한 10 밑의 존재를 사로국 건국시의 6촌장, 가락국 건국시의 9千에 대응하는 10기l 읍락의 장으로 생각하고 온조집단보다 먼저 납하한 세력이라 하였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10 昆을 선주토착세력으로 볼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三國핏記』의 기록대로 10 많은 溫祚를 따라 내려온 집단으로 백제 건국의 주체가 된 세력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이 같은 足의 존재는 準王남래시의 左右핀 이거나 朱훨이 부여를 떠날 때 동행한 의 친우에 해당하는 존재였을 것으로 헤아려진다. 이러한 동행세력의 도움으로 溫祚는 十濟(백제)를 세울 수 있었다. 여기서 國의 주장과는 다른 백제건국시의 선주세력을 찾을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시켜 樞五.榮의 견해를 주목할 수 있다 (19 86 ). 그리고 그러한 선주토착세력 중에는 지석묘를 축조하던 집단들이나 고조선 멸망시의 이주민, 위만조선 존속시의 이주민, 그리고 滅합 南l파가 다스리던 시기나 游쩨縣설치시 고구려로부터 온 이주민들도 생각할 수 있다.

온조집단에 의해 세워진 소국(성읍국가)으로서의 十濟(百濟)는 그 통치영역이 초기국가로서의 사로국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이미 기원전 세기 후반에 의 주변에 랬I행들이 있었다고 한 사실을 상기하면, 백제건국시 그들 여러 나라와 백제의 관계가 어떠한 것이었나 주목된다. 그러한 짧國들 중에는 고조선의 準王이 세웠다고 하는 나라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꿇國의 건국세력들 중에는 고조선계 유이민들이 있고 또 위만조선이 들어선 후의 이주민들도 포함되었올 것이다. 그리고 확인할 수는 없으나, 그보다 선주했던 지석묘 축조시대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도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여하튼 기원전 2세기말 I 세기에 걸쳐 부여 • 고구려계 이주민들이 남하하여 주로 한강유역에 자리잡고 소국들을 세우게 되며 그 남쪽에는 먼저 얼어난 나라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들은 馬陣의 여러 세력을 구성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물론 백제건국초에는 그들도 마한의 통제를 받았으나 기원 전후한 시기에는 그 통제를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소국연맹 또는 연맹왕국에 대한 지금까지의 몇몇 주요 연구 결과훌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三圍史記백제본기」의 초기관계 기혹융 대체로 언정한 견해훌 들 수 있다. 千寬宇는 溫祚王대 백제 (百

國)의 영역은 백제본기 祚王13 년조에 나오고 있듯 北은 ·河(예성강)에 이르고 남은 땐川까지, 서는 서해에 미치고 동은 꿇壞(춘천)에 이른다고 하였다. 따라서 온조왕대의 백제는 단순히 성읍국가의 단계를 념어 영역국가로서도 상당히 성숙한 떼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古爾王대를 백제국가 형성기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197 6 ). 한편 李 旭도 千힐宇와 같이 기원전 I 세기말경 백제는 이미 미추흘의 소국을 병합했고 나아가 한강을 중심으로 경기도 일원의 여러 소국들과도 연맹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본다.훨따이 말하는 소국연맹은 사로국이 진한의 맹주국이 되어 이루었던 연맹체와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다. 진한연맹은 주로 낙랑과의 교역을 위해 대체로 12개의 소국들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나라들 사이에는 기본척으로 정복 • 피정복관계는 성립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은 백제초기 미추흘세력과의 관계에서도 찾아진다. 이 같은 연맹단계를 넘어선 것이 연맹내의 한 소국이 다를 소국들을 병합해 나가는 소국병합단계이다. 그런데 이때에도 모든 소국이 일시에 병합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일부 병합된 소국이 있는가 하면 일부 미병합의 연맹관계에 있는 나라들이 있었다. 백제도 미추흘세력을 병합한 후 점차 주변의 소국들을 병합하면서 또 일부 독립소국들과도 연맹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三國史記』古椰王이전의 기록을 긍정척으로 믿지 않으면서 백제의 국가성장을 논한 견해들을 보기로 한다. 그 중 백제의 고대국가 형성시기를 고이왕대로 보는 李며微의 견해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여기서 金합埈이 온조왕에서 사반왕까지는 미추훌 집단세력이 위례집단과 병럽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 것을 들 수 있다 (19 82 ). 그는 백제 시조설화에 나오는 비류의 미추훌집단과 온조의 위례집단은 어느 시기에 통합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백제가 낙항 • 대방군과 인접하여 있어 그 영향을 받아 국가세력 성장으로 이어지기 어려웠다고 하였다.

다음은 李基파의 견해가 있다 (19 87). 성읍국가로서의 백제의 출발은 기원전 18년보다 앞선 기원전 I 세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연맹왕국의 출현시기는 기원전 I 세기말 • 기원 후 I세기초로 보는 떼에 찬성하지 않고 있다. 그 역시 백제건국세력이 부여족계통으로 고구려 유이민 출신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三園史記 백제본기 옴조왕조」의 마한

정복기사는 온조왕대의 것이 아니고 3 60년 뒤인 近웹古王대의 것이라는 주장을 따르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2세기까지 마한 세력이 건재하였고 웹 토착세력에 대한 닥랑군의 분열정젝이 효과를 거두고 있어 백제의 정복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없었다는 데 근거를 둔 주장이다.

따라서 백제의 연맹왕국 성럽조건은 2세기 후반에 생겼고 그 성링은 3세기에 들어서라고 하였다. 그것은 淡빼縣의 약화가 백제성장에 있어 자극이 되었기 때문이라 했다. 이 무렵 백제는 미추흘의 지방세력과 연맹관계를 맺었다고 하였다. 그는 중국군현과의 대규모 군사적 충돌에서 고이왕이 승리를 거둔 후 백자l 연맹왕국이 비약할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고이왕대의 6화평 . 16관등 설치, 복색제정 등 일련의 정치개혁 내용을 의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고이왕대에 한강하류 중심의 큰 연맹왕국이 수립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近띔핀王대 (346 - 375) 에 이르러 백제는 고구려를 제압하고 마한지역을 병합했다고 보았다. 여기서 李基來이 말하는 연맹왕국의 개념은 단순히 독럽소국들간의 연맹으로서 그 맹주국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소국이 다른 소국틀을 병합한 후의 상태를 뭇하는 것으로 헤아려진다. 그리고 『三國 記』온조왕의 기록 중 일부를 360년 후의 사실로 보는 것도, 뒤에 언급할 바와 같이 백제왕실의 단절설과 판련시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짧파園은 十濟보다 앞서 비류집단이 냥하하여 미추흘에 정착하고 주변의 몇 개 읍락을 통합하여 소국을 형성했다고 보았다. 이들 미추훌의 비류집단과 한강위례지역의 온조집단은 지역연맹체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버류와 온조셜화에 나오는 양자의 관계를 실제 형제는 아니지만 연맹형성올 뜻한다고 보았다. 당시 이들이 연맹을 형성한 이유는 경제척 교환판계와 외척에 대한 공동방어 때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연맹형성시기는 I 세기말 • 2세기초 청도라 하였다. 그는 미추흘 세력올 解民로 보고 그들의 해상활동에 종사하여 얻어진 경제력을 배경으로 연맹의 맹주국이 되었다가 近합古王대에 이르러 夫餘 系로 황실이 교체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고이왕대에 고대국가로서의 기반이 잡혔고 중국군현에 대한 척극척 자세률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같은 짧 國의 견해 역시 三國史記 r백제본기」의 고이왕 이전 기록 중 특히 온조왕대의 기록 가운데 후대의 사실을 소급하여 이루어진 것이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國의 견해에도 문제가 있다. 다음 장에서 언급하겠지만 미추흘의 버류 집단을 해써로 보고 위례의 온조집단을 부여씨로 보는 견해는 그 자체 백제초기 왕명 중 짧를 末字로 가진 용L들이 해써라는 언어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그 성립 여부가 의심스럽다. 그리고 해씨의 미추흘세력이 먼저 연맹장이 되고 원古王대부터 부여씨 온조왕계에서 연맹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견해도 다소 문제가 있다. 신라의 경우 대체로 박씨족, 석씨족, 검씨족으로 이어지며. 왕위를 차지하였다. 이들 신라의 왕실세력은 각기 독럽소국의 지배자들일 수 없다. 그들은 하나의 소국인 사로국내의 지배세력으로 각기 세력우열관계에 의해 왕위를 차지한 것이다. 따라서 많파댐이 말하는 백제왕실의 교체는 신라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더우기 초고왕대의 기록에 그와 같은 왕실교체 사실이 나타나 있지 않고 있어 백제왕실의 교체셜은 따르기 어렵다.

五榮은 3세기 이전 초기백제의 지배세력들은 한강유역을 기반으로 각지에 분산되었던 유이민으로 구성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중국 측이 한강유역의 각 세력집단을 효율적으로 조종하기 위해 대방군을 셜치하자 그 갇은 군현세력에 위기를 느낀 여러 소국이 百濟國을 중심으로 연합전선을 혔다고 하였다. 그는 비류집단올 서부세력으로 보아, 삼국사기의 기록대로가 아니라 3세기 중반 이천에야 그에 대한 통합도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나아가 기원 후 23년 북부 隔의 해임명이나 30년 동부 予의 기사도 3세기 중반 이전 어느 시기로 늦추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86>' 이와 같은 그의 견헤는 盧 國이나 李 來의 견해와 거의 그 성격이 같은 것이다.

權五榮은 한강유역의 고고학척언 자료를 바탕으로 위와 같은 주장올 하고 있으나 고고학적 자료에 대한 편년의 문제, 그 주인공의 셀정문제 그리고 특정 자료가 나타나는 시초와 그 끝올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따라서 문헌자료률 토대로 역사발전의 대세훌 파악하연서 고고학척인 자료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 어떨가 한다. 그러한 예의 하나로 4세기 이후에 축조된 석촌동의 3 ·4호 척씩총윷 그 양식상 교

구려족이 성장하던 압록강 유역의 것으로 보아, 그것이 한강유역 백제최고집단이 압록강유역의 고구려 주민들과 밀접한 문화적, 혈연적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며, 백제건국집단이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 주민 중 일부가 남하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집단이라는 개연성을 더욱 크게 해준다는 견혜를 들 수 있다. 백제의 소국(성읍국가)형성이 기원전 I 세기의 일이라면 석촌동의 3 • 4호 적석총은 그보다 4세기 정도 후에 축조된 것으로 그것을 백제건국 집단이 고구려에서 남하한 집단이란 증거로 삼기는 어렵다. 오히려 기원전 I 세기 고구려의 묘제와 동시기 백제의 요제를 비교하는 노력이 가치가 있다.

한편 李뿔파은 백제국 성장의 연속셜과 단절설에 대한 문제를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198 7) • 그 중 단절설에 대해 그는 比流王이거나 近웹古王은 부여족 남하이동에 의한 정복왕조의 창시자라는 느낌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比流가 流와 동음인 점과 比流의 즉위년이 甲子年(304)으로서 참위셜의 甲子 命說에 업각한 연대라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단절설에 따라 비류 • 근초고왕대의 획기적인 정복사업은 부여족의 정지할 줄 모르는 가속화된 운동력의 일부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李 의 단절설에 대한 견해는 李道 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었다고 한다 (1988. 6. 발표, 한국고대사연구회 ) . 그는 서울지역 기단식적석총의 출현시기를 통해 만주방변에서 남하한 백제건국집단이 4세기경이나 그 직전언 3 세기 후반경에 한강하류에 정착했다는 주장을 하였다. 李i효學역시 三國史記 백제본기」의 초기 기록이 적어도 3세기 후반 이후의 사실을 소급 반영하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근초고왕대의 사실도 용조왕대의 것으로 소급 • 조작되었다고 하였다. 결국 그의 견해도 李꿇東과 마찬가지로 「백제본기」의 초기기록을 믿지 않는데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백제의 국가형성과 그 성창에 대한 문제를 정리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백제의 국가형성은 부여계, 고구려 이주민들에 의하여 기훤전 1세기말 1세기초 무렵 이루어졌다. 곧이어 위례에 위치했던 백제는 초기소국으로 미추훌에 위치한 비류집단의 소국과 연맹관계를 맺게 되었다. 백제는 그밖에 부여 • 고구려계 이주민에 의해 한강유역에 세워진 다른 소국들과도 기원전 I 세기에 이미 연맹관계를 맺었다

고 여겨진다. 그 같은 연맹관계는 독립소국간의 관계로서 연맹내의 경제척 교환, 대외교역, 외적침입방어 등에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기원전후한 시기에 백제는 미추흘세력을 어떠한 형태로건 병합하였다. 이후 한강유역 소국들 중 백제의 정치적 비중이 커지게 되었다. 그 결과 백제는 아직 병합하지 않았던 소국들 사이에서 맹주국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했고 동시에 주변의 다른 정치세력들을 병합해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용되어진 부족연맹 또는 연맹왕국은 단순히 독립소국(성읍국가) 사이의 연맹관계를 뭇하기보다 맹주국에 의한 연맹 체내의 소국에 대한 병합을 뭇한다. 그러나 엄멀한 의미에서 보면 그와 같은 병합 • 피병합 또는 지배 • 예속 관계가 나타난 시기는 연맹왕국단계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소국병합단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편 『三國 記』에서 十濟• 百濟로 나오는 것을 三國志 「 條」에 齊 으로 기록한 것은 무엇인가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伯을 〈맡 • 으뜸 • 어른〉의 의미로 받아들인다연 百濟國이 가지는 정치적 지위도 어느 정도 시사하는 것이 있다고 여겨진다.

3 百濟初期의 王室交替論

197。년대 중반 이후 백제왕실의 교체(대)론에 대한 논의가 크게 일어나고 있다. 그와 갇은 왕실교대에 대한 논의는 백제국가형성과 그 지배세력에 대한 이해라는 측면에서 진행되어 왔다. 그리고 그 교체론도 여러 갈래로 발전되어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여기서는 그와 같은 왕실교체론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지배세력의 변천에 대한 연구결과를 검토하기로 한다.

李基白은 백제왕위계숭에 대한 고찰올 한 바 있다 (1959) • 그 연구는 기본적으로 백제왕위계숭 형태 및 왕족 • 왕버족에 대한 분석이었고, 나아가 시대구분까지 한 바 있다. 따라서 왕설교대론과는 판계가 없는 연구이다. 그러나 李基白은 만일 비류와 온조의 형제훌 칼온 조상으로 만드는 전설이 초고왕과 고이왕 양계의 交立에 현실척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라면 이 양계의 交立은 왕실 자체의 교대훌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상상까지만 가능하게 되는 셈이라고 하였다 (1959, p.10, 주 15). 이후 이 같은 왕실교대의 가능성을 사실이라 주장하는 견해들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먼저 千찮宇의 견혜를 보기로 한다. 百濟I뭘의 시발이 대체로 기원전 1세기라고 보는 그는 三國 記』온조왕대 기록 속에서 朱 溫祚계전숭(위례성)과 優台- 流계전송(미추흘)을나누어보고, 두 지배세력은 왕위계승에 있어 오랫동안 경쟁적 위치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는 8대 고이왕을 5 대 초고왕의 표弟라고 하는 T三國파 의 기록을 母의 弟로 이해하여 고이왕과 초고왕을 별개 세력으로 만들었다. 그는 나아가 고이왕계와 초고왕계가 왕위계승에서 계속 경쟁적 위치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 결과 I 대 온조왕에서 7 대 사반왕까지는 주몽-옹조계의 부여써이고, 8대 고이왕에서 12대 계왕까지는 우대-비류계 우써였고(단 대 비류는 온조겨), 13 대 근초고왕에서 21 디l 개로왕까지도 주몽-온조계이고 22대 문주왕에서 24대 동성왕까지는 비온조계(어쩌연 우대-비류계)이며 t 25 대 무령왕에서 3 1 대 의자왕까지는 주몽-온조계라고 주창하였다. 그는 위례성의 주몽-온조계 전설과 미추흘의 우대-비류계전설이 백제왕위계승에 뿌리 깊게 존속했다고 결론짓고 있다 (1976).

한편 金哲埈은 고이왕을 온조왕의 방계로 보고 있지만 비류계 출신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19 82 ) • 그리고 많파I행은 우대-버류계 설의 문제를 언급하였다. 그는 『三國造 에 나오는 解&王姓이 셜명 안되고 比流의 서제 僅騙운 優民가 아니고 부여씨이며 流의 父優台는 관명이지 언명이 아니라고 하였고 고이왕이 초고왕의 母弟라는 것은 의 弟일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千寬宇의 셜을 비판하였다.

여하튼 千魔宇의 백제왕실 교대론은 그후 李꿇束에 이어지고 있다(1981). 그는 연맹국이 성융국가의 연맹체라고 하는 그 국가의 본질척인 성격 때뭄에 왕실의 교체현상이 거의 필연적으로 나타난다고 하여 그 예로 고조선, 신라, 고구려를 들고 있다. 백제에서도 연맹왕국 이전이나 중앙접권척 귀족국가 성립 이전 과도기적 단계에서 왕설교체의 개연성이 큰데, 사료의 인멸로 언하여 萬iit-系로 수식 • 왜곡 되었다고 하였다. 李基東역시 千魔宇가 말한 고이왕의 계통이 온조의 후예가 아닌 마추훌의 버류계 후예라는 셜은 비판하고 있다. 그는 比

流王• 近肯古王을 부여족 이주민이 세운 정복왕조의 창시자라고 보는 외국인학자들의 견해를 보강하며 근초고왕은 온조계가 아닌 전혀 새로운 세력 출신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와 같은 李판來의 견해는 『三國핏記 벡제본기」초기기사를 불신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백제국 성장에 있어 소위 단절설에 대한 언급을 하였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그는 比流王 또는 近샘古王이 부여족 냥하에 의한 정복왕조의 창시자라는 느낌을 말했다 (19 81 ). 4 세기 부여족 이동에 의한 백제건국에 대한 주장은 최근 李道學에게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근초고왕을 새로운 이주민 세력으로 보는 구체척인 근거는 찾기 어렵다. 따라서 근초고왕 때에 백제왕계가 새로이 시작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E앞과i 國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성럽 이전에는 왕실교체 가능성이 있다고 보며 신라 • 고구려의 예를 들고 있다. 그는 나아가 백제왕계를 이원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부여족내 껴집단 출신 왕명의 末字가 짧 • 짧 • 流라고 추정하고 백제의 2대 王, 3대 己 王, 4대 짚종짧王을 해씨로 보았다. 그리고 나머지는 온조계로 부여씨라고 하였다. 그는 나아가 부여족의 일파언 빠流國계통의 일분파가 냥하 정착하여 流를 시조로 하는 집단을 이루었는데, 이들은 주몽과 연결되는 온조집단보다 이른 시기에 정착하여 부족국가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이에 비류가 연맹장의 자리를 먼저 차지하였으나 古王에 이르러 혜씨(비류계)에서 부여씨로의 왕실교체(세력교체)가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그는 근초고왕이 부여씨이기에 초고왕도 부여써이고 초고왕은 부여써로서 왕실에 오른 첫 왕이라 하였다. 나아가 초고왕은 그러한 이유로 백제사에서 강조되어 근초고왕이란 왕명이 나오게 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재일본 백제계언의 시조나 중시조로 받들어진 인물 중에 초고왕의 빈도가 높다는 데 주목하였다. 당시 해씨에서 부여씨로 왕실이 교체된 것은 양세력의 경제력 우열이 크게 작용했고 부여씨가 따표와 결탁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古 王을 古王의 同母弟로 보고 부여씨로 파악하고 있다. 자연 7대 사반황과 함께 8대 고이왕이 교체는 직계-방계의 교체를 의미한다고 했다 (1983). 哲埈은 고이왕이 원래 ·옹조왕계의 방계로 있다가(혹은 비류계의 춤신언지도 모른다고 보며) 그 계보률 개루왕에 연결시킨 것 같다고 하였다

(1982).

여하튼 위와 같은 짧파國의 백제왕실 교체론은 왕명의 마지막 자가 •留•流인 경우 해씨라는 언어학적 해석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언어학적인 해석에 문제가 있고, 또 그의 논리대로 하면 11대 比流王. 15대 流王등의 따이 해써가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언어학적 해석은 흥미는 있으나 납득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지금까지 백제왕실의 교체론이나 단절설에 대하여 보았다. 그 결과 그와 갇은 견해는 모두 三國史記 三國 의 백제초기 자료의 사료적 가치를 부정하는 데서 나온 것으로 어떤 분명한 근거도 사실상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여기서 백제본기 왕위계승사료를 무시하고 나온 위의 견해보다는 그 자체를 인정하고 그 안에 나타나는 문제점을 찾아내어 백제왕위계송에 대한 문제를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이에 온조왕에서 13대 근초고왕까지의 백제왕위계승에 대한 기록상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각 왕의 재위연대에 대한 문제를 들 수 있다. 온조왕은 46년, 다루왕은 5 년, 기루왕은 4 2 년, 초고왕은 49년간이나 채위한 것으로 나오는 등 왕의 재위기간이 지나치게 긴 것은 문제가 된다. 이 같은 재위기간이 긴 왕들 중에는 누구라고 말할 수 없으나 한 왕의 재위기간으로 되어 있는 동안 실제는 그 이상의 왕들이 재위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두번째. 8대 古 王(234-286) 이 5대 古王(166-214)의 弟이고 4대 蓋 王(128-166)의 아틀로 되어 있는 것과 같은 문제이다 . 이는 고이왕의 父• 뼈 둥 몇 대가 기록상에서 빠진 것으로 보면 어떨가 한다. 그와 같은 현상은 신라의 왕위계송상 칙계 전왕과의 관계를 직결시키려는 경향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실제 신라에서 미추왕과 내물왕 사이에 몇 대가 빠졌다고 생각되는 점과 일치하는 현상이라 여겨진다.

셋째 연맹왕국에서는 왕실이 교체된다는 생각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사실상 연맹왕국의 개념 자체가 문제가 되겠지만 연맹내의 소국들 사이에 청복 • 피청복단계로 넘어간 후에도 왕실교체가 가능할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국들 사이에 독립이 유지되는 상태의 연맹체에서는 맹주국이 바뀌는 현상은 었올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 맹주국이 바뀌는 현상울 왕설교체 현상이라 볼 수 있을까 의심이 간다.

신라의 박씨족, 석씨즉, 검씨족은 하나의 소국인 사로국의 지배세력들로 그들 사이에서의 세력차이에 의해 왕위를 교체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위례지역의 서로 다른 소국들 사이에 왕실이 교체됐고 그것이 백제왕위계승자료에 남게 되었다는 견해는 따를 수 없다. 그 경우 고구려의 뼈(뼈) 사이의 왕위교체문제를 생각할 수 있으나, 그 경우도 고구려 중앙정부의 위치가 변한 것은 아니라 여겨진다.

위와 같이 생각하고 보면 백제왕위계숭은 온조의 후손언 부여씨에서 계속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대-비류-고이를 우씨로 보고 주몽-온조-초고를 부여써로 보는 千 宇의 왕실교체설이나 1대 다루왕, 3대 개루왕을 비류계 헤씨로 보고 5대 초고왕 이후를 온조계 부여씨로 보는 國의 왕실교체론도 따를 수 없다. 그리고 李 京• 李 으로 이어지는 4세기경 부여족 정복왕조셜에 의한 백제왕설의 단절설도 따를 수 없다.

4 맺음말

지금까지 백제초기의 정치적 성장과 왕실교체에 대한 최근의 연구 동향에 대하여 정려하였다. 그 결과 여러 견해가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탈리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견해 차이는 기본적 A로 『三園史記 백제본기」의 초기기록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또는 믿더라도 어렇게 믿느냐에 따라 생겨난 것으로 생각이 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맺음말에 대신하여 r三國史끓J r백제본기」의 초기기록들의 신빙성문제에 대한 지금까지의 견해들을 정리하여 보기로 한다.

먼저 백제본기 초기기록에 대한 의문을 가진 학자로서 얼본인들올 들어볼 필요없이 李휴흙의 견해를 보연 알 수 있다. 그가 고이왕대의 기록부터 믿을 수 있다고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지금까지 우리 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이제 三園史記백제본기」초기기록의 신빙성에 대해 의문을 가진 李基束의 견해를 보기로 한다 (1981 ) • 그는 「백제본기」충 고이왕 이전 왕통계보가 사실을 왜곡 • 조작하였다고 의심하고 었다. 그것온 4

대 개루왕과 8대 고이왕이 부자간일 수 없다는 사실 등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고이왕과 개루왕 사이에 몇 대가 빠진 것으로 보면 그 사료 자체를 벌지 못할 이유도 없다. 또한 그는 단안은 내리지 않았다고 하지만 比流王• 近합古王부자를 부여출신으로 당시 정복왕조의 창시자로 보는 외국학계의 주장을 보강하고 있다. 그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그는 r三國史記J r 백제본기」의 초기기사에는 확실히 문제점이 있고 그것을 엄정하게 비판함이 없이 송두리째 취신하는 입장에서 하는 백제연구사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그는 三國핏記 온조왕조」의 마한정복기사가 3 60년 후인 근초고왕대의 사실이 소급된 것이라는 견해를 따르기도 하였다. 그는 나아가 백제본기 초기기록을 무비판적으로 이용하면 개별 사실에 대한 엄정한 사료비판을 결여한 위에 체계성을 구축하는 것으로 실제와는 동떨어진 공허한 것이 된다고 하였다. 그는 고이왕대의 정치개혁에 대해서도 의문올 가지고 있다.

위와 같은 李잃來의 「백제본기」초기기록에 대한 자세는 어찌보면 매우 신중한 것 같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긍정척인 면에서 사료를 비판하는 것이기보다 부정척인 시각에서 비판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온조왕대의 기사를 3 60년이나 늦은 사실로 볼 경우 그 자체가 역사조작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盧 國은 「백제본기」초기기록이 각 지역에 성립했던 여러 정치체들이 부여씨 왕실에 의해 통합된 후 그들이 가졌던 갖가지 경험이나 所 들이 왕실중심으로 일원척으로 정리되었을 것이므로, 다양하였을 세기의 역사를 단순화하거나 사상시킬 위험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백제본기의 초기기록을 믿지 않고 왕설교대론을 주장한 바 있다

(1983) 그리고 「백제본기」온조왕대의 정복판계 기사를 그 후에 이루어진 정복사실올 온조왕대로 집중시킨 것으로 파악하고 었다 (1987). 이와 같은 盧量園의 사료해석도 엄정한 사료비판을 하는 것 같으나 설제 역사의 실상올 뒤로 끌어내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한편 「백제본기」의 기혹올 긍청척로 보려는 견해들이 있어 여기서 참시 보기로 한다. 李基白은 근초고왕대 이전의 모든 기록이 조착

된 것만은 아니라고 믿으며 후대에 일부 조작되었다 하더라도 그 베일을 벗기고 난 뒤에 역사적 진실을 근초고왕 이전의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1959> 그후 千월宇는 백제본기의 초기기록을 대체적으로 긍정적으로 인정하며 百濟國의 형성과 성장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197 6 ) • 그리고 李웰旭도 「백제본기」의 초기기록 내용을 긍정적으로 인정하여 백제초기의 국가형성 등에 대하여 정리하였다(1976, 1977) • 그리고 「백제본기」초기기록의 신벙성 문제에 대한 견혜를 밝힌 바 있다 (1986).

여기서 『三 記 백제본기」의 초기기록에 대한 회의론자와 긍정론자의 연구결과가 큰 차이가 있지만 그 어느 쪽이 타당한가를 말할 수는 없다. 단지 필자는 긍정론자의 입장에서 백제본기의 초기기록을 보는 시각을 밝혀두고자 한다. 첫째, 「백제본기」의 초기기록에는 철못된 부분이 있다. 그 예로 일찍부터 신라와의 관계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한 千앓宇의 견해도 있지만, 그 자체를 일단 덮어둘 필요가 있지 않나 한다. 그밖에도 이해가 안되는 대목이 있는 예들이 있다. 그 경우 사료 자체가 잘못된 것이거나 현재 우리의 능력으로 그것을 이해 못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둘째, 회의론자들의 경우 온조왕대의 정치척 사건을 후대 사실을 소급 기록한 것으로 보지만 오히려 당시 역사발전의 대세를 통하여 그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거나 반대로 올려볼 수도 있지 않나 한다. 셋째로 백제초기의 역사발전을 늦은 것으로 보려는 견해의 밑바탕에는 낙랑군의 통제를 강조하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낙랑군의 실체를 옳게 이해한다연 백제를 비롯한 한국의 정치세력들도 일쩌기 성장하였음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보고서에서는 백제 국가형성연구의 동향 중 커다란 품제가 무엇인가 보아왔다. 그 결과 백제초기의 역사발전이 늦었던 것으로 보는 회의론자와 그 발전이 「백제본기」의 기록과 같이, 결코 늦은 것일 수 없다는 긍정론자로 크게 갈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재 우리로서는 그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타당성이 있고 합리척인 역사연구인가훌 단갱할 수는 없다. 시간이 지나연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역사 연구의 시각이 발전할 혜 백제초기의 역사도 옳게 해명훨 것으로 믿는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와 같은 문제점울 부각시키는 데 그치그l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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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골품제 연구의 문제

【李鍾旭】

1 머리말

신라의 독특한 신분제인 골풍제는 신라의 전반척언 사회체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때문에 신라사 연구자들은 골풍제 해명에 직접 • 간접으로 많은 관심올 기울여왔다.l) 지금까지의 골품제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네 개의 단계를 거쳐 진전되었다. 1계는 19 20년대에서 1940년대 중반까지의 기간 동안으로, 주로 일본인 학자에 의헤 이루어진 연구가 있다.2) 당시에 골풍제의 중

I) 신라 골풍제 연구의 현황파 동향에 대하여는 다융 논운용 창죠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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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연구자들에 의해 골품제가 밝혀 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5) 4단계에 이르러 골품제의 구조, 개별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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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그리고 정치 • 사회조직과의 관계 등에 대한 문제가 어느 정도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본격적으로 인류학 • 사회학척인 이론을 수용하여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몇 단계의 과정을 거쳐 진행되어 온 신라 골풍제에 대한 연구는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에 신라 골품제 연구의 문제점을 몇 가지 측면에서 정리하여 보기로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골품제 연구가 다소나마 진전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2 골품제연구의 문제점

첫째, 신라 신분제의 명칭문제가 있다. 지금까지 그것을 골품제, 골풍체제 등으로 불러왔다. 이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신라인들이 그들의 신분제를 어떻게 불러왔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三國史記.II 33. 服등 條에는, 6碩品, 5碩品, 49頁品, 平A(百姓) 그리고 村主, 次村主등의 신분이 나오고 있다. 한편 『三國史記 47, 「辦 頭 」에는 〈신라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데 品을 논하고 만일 그 族이 아니면 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어도 능히 넘어셜 수 없다〉고 하는 불만을 말하는 대목이 나오고 있다. 여기서 신라인의 여러 신분을 한마디로 뭘·品이라 한 것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이와 같은 〈論 品〉의 대상은 왕경언뿐 아니라 지방민까지도 해당되었을 것이다. 이 경우 골풍 • 골풍제는 신라의 전국민을 포함하는 신분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골품제는 왕경언의 신분제이며, 지방민의 신분을 포함한 신품제는 골풍체제라고 부르는 견해가 있다. 보고자는 앞에서의 생각을 따라 신라의 신분제는 골품제라 부르고자 한

다. 반면 골풍체제라는 용어는 신라 골품제하의 정치 • 사회 • 경제 • 문화·종교 등 모든 변을 포함하는 사회체제(구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툴째, 신라에는 몇 개의 신분이 있었을까 하는 문제가 있다. 『三國史記 33, 服등 條에 나오는 , 6 品, 5 品, 4頭品, (百性) , 따村主, 次村主등의 신분층은 興德王9년 (834) 당시의 신분층들이다. 그런데 실제 신라에는 뿔맘확分이 있었으나 따德王을 마지막으로 그 신분의 성원이 소멸되어 신분 자체가 없어쳤다. 한편 골품제 편성시에는 4두품 밑애 3두품, 2두품, I두품의 신분이 존재하였으나 그후 언제인가 함쳐져서 (펀姓)의 신분으로 되었다고 여겨져왔다. 이러한 생각이 타당한 것이라면 골풍제는 그 편성시에 8개의 신분층이 있었던 셈이 된다. 그런데 그와 같은 8개의 신분층은 왕경인들의 신분이고 지방민의 신분은 별도로 편성되어 있었다. 여기서 3두풍, 2두풍, I 두품의 구분 이유와 그것이 합쳐진 배경이 무엇이었나 밝혀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지방민의 신분편성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도 궁금한 문제가 된다. 그리고 신라의 왕경이나 지방에는 그 수는 알 수 없으나 골품신분에 속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존재하였던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골품신분을 갖지 못한 집단은 시대에 따라 그 규모와 정치 • 사회적 성격이 달랐을 것이다. 신라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제대로 작용할 때는 주로 유망민, 거지, 범죄자 등이 콜품제 외의 집단이 되었으나, 신라말경에 이르게 되면 지방의 도척떼나 호족세력들도 골품제 외척 집단으로 되었다고 믿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골풍제 외척 집단에 대한 해명도 중요한 의미가 있음에 툴렴없다. 여하튼 신라의 신분수는 변동이 되었고, 골품제에 속하지 않았던 집단이 존재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셋째, 골풍제의 신분편성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문제률 틀 수 있다. 신라 골품제는 역사적인 산물이다. 그것은 국가형성기부터 만들어진 신분제가 시간이 지나며 하나의 독특한 신분저l 언 골풍제로 편성된 것을 뭇한다. 여기서 신라초기의 짱실세력이었던 朴族• 金族이 최고신분을 갖게 되었던 것올 알 수 있다. 그 벌에 6촌 • 6쭈의 지배세력이 있어 頭品의 신분들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신라의 사회 • 정치조직이 발달됨에 따라 그에 관계한 사회 • 청치척

집단들이 점차 신분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렇지 못한 세력들은 그 신분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골품제 편성시 각 신분집단은 지역적인 구분과도 갚은 관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왕경인과 지방민을 구분하였던 사실과 왕경 안에서도 왕궁, 왕도, 6부 등 거주지역에 따른 신분집단의 분포도 어느 정도 달랐다고 생각되는 점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金族• 朴族이 각기 왕경 6부 중 어느 한 부에서만 살았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넷째, 골품신분집단을 구성하는 기초집단을 밝히는 문제가 있다. 골풍제는 하나의 신분제로서 그 안에는 신분을 유지하고 세습하는 일정한 원리가 있었다. 그것은 친족집단과 그 친족집단의 성원권 계숭의 원리로 나누어볼 수 있다. 지금까지 신라인의 친족집단을 씨족(clan), 가계(lineage) 등으로 나눈 연구가 있어 주목된다. 그리고 친즉계 숭의 원 리 로는 부계 , 모계 , bilateral descent, double descent 등의 원리를 주장하는 견해들이 있어왔다. 그런데 그와 갇은 계숭의 원리는 혈연계승, 지위계숭, 재산상속, 신분계숭 등 여러 면으로 나누어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료에 나타나는 몇몇 예만 가지고 어떤 특정한 원리만을 강조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신라인들이 생각하던 신분계숭의 기본적인 원리가 무엇이었나를 밝힐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어떤 사회이건 그러한 계숭원리를 완벽하게 지킬 수도 없었던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부계제사회에서 아들이 없는 경우가 척지 않은 버융로 나오는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라사회의 신분계숭이 부계계송훤리를 따랐다고 하더라도 예외척인 사실들이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다섯째, 골풍제를 유지하던 방법이 무엇이었나 알아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신라 골품제의 엄격성, 중요성이 강조되어 왔으나 그 유지 방법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언도의 카스트 제도는 신성함과 오염됩윷 기준으로 하는 종교척인 원리를 배경S로 편제 • 유지되었다. 신라에서도 성골의 존재를 신성하게 만들고, 지배세력의 지위를 합리화하는데 있어 종교적언 장치로 불교가 받아들여쳤고, 그 힘을 발휘하였다고 플 수 있다. 그리고 골품제 유지를 위한 사회척언 창치로는 사회화, 혼인 동의 방법이 이용되었다. 한편 보다 칙접척인 골풍제 유

지방법 로는 상 • 벌의 시행을 들 수 있다. 골품제 사회체제에 도전하던 세력들에게는 벌을 내리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 자들에게는 상을 주었다. 이와 같이 골품제를 유지하는 여러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되어야 신라 골품제의 성격이 한결 분명해질 것으로 헤아려진다.

여섯째, 골풍제의 운용에 대한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골품제는 정치 • 사회 • 경제 등 여러 면에서 신라인들의 특권과 의무를 부여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신분에 따른 정치적 진출의 차이를 생각할 수 있다. 신라인들은 신분에 따라 올라갈 -수 있던 관등이 달랐고, 차지하던 관직이 달랐으며, 진출하던 관부가 달랐다. 그리고 그에 따른 보수도 차이가 있었다. 이 같은 신분척인 차이는 분명히 신분에 따른 생활기회와 생활양식의 차이도 초래하였다. 이러한 문제들도 혜영되어야 할 것이다.

일곱째, 골품제의 엄격성에 대한 주장의 문제점을 볼 수 있다. 신라의 골풍제는 분명히 엄격하게 유지되었다. 그 결과 개인적 신분의 상송은 거의 없었고 族l짧은 적지 않게 일어났다고 여겨진다. 이 같은 개인의 신분변동은 신라사 전체를 통하여 있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신분층 자체의 변동이 얼어나고 있음도 주목할 수 있다. 성골의 소멸, 3두품 • 2두품 • 1 두풍 들의 통합 둥이 그것이다. 이렇게 보면 신라의 골풍제는 구조적인 면에서도 변동이 있었고 그 안의 구성원 자체의 개인적인 신분에도 유동성이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라 골품제가 엄격하다고 하지만 그것이 화석화된 것이 아니라 역사척인 변동을 겪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골풍제의 엄격성을 정치 • 사회 • 경제척인 특권과 의무에 차이를 분명히 해주는 작용올 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도 시대에 따라 변동되었다고 믿어진다.

3 골품제연구 방법상의 문제점

19 2。년대 이래 골품제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어 왔고 그 결과 어느정도 기본척인 문제들이 해명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사이 골품

제 연구의 시각과 방향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 기본적인 이유 몇 가지가 찾아진다.

첫째, 사료의 부족을 들 수 있다. 三國핏記三國退專 금석문, 고문서 등에 나오는 골품제 관계의 직접적인 자료는 극히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새로운 자료들이 발견될 가능성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여기서 기존의 자료를 보다 척극적으로 이용하여 신라 골품제 해명의 단서를 찾을 펼요가 있다. 그것은 신라 사회체제의 구성원리가 골풍제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이다. 이에 골품제 사회인 신라사에 대한 자료들은 그 모두가 이용하기에 따라 골품제 해명의 자료가 됨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둘째, 골품제 연구의 시각과. 관점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해결을 위하여 비교사적인 관점에서 다른 나라의 신분제를 이해하고 그러한 신분제에 대한 분석의 시각을 얻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사회학 • 인류학 등 인접분야에서의 신분제 연구의 방법에 대한 이혜를 할 필요도 있다. 물론 인접과학에서 다루는 자료나 내용이 신라 골품제 이혜를 위한 자료나 내용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인접과학의 연구성과를 받아들여 골품제 연구에 있어 무엇이 중요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명해야 할 것인가 하는 시각과 방법을 어느 정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인접과학의 시각과 방법을 골품제 연구에 그대로 척용할 수는 없고 또 그러한 분야의 이론이나 방법이 완성된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언접과학의 한계를 이해하며 그 이론이나 방법을 웅용하여야 한다. 그리고 한걸음 나아가 신라의 독특한 신분제언 골품제에 대한 연구를 하여 그 결과를 언접과학의 이론발전에 기여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4 맺음말

지금까지 골품제 연구의 품제점과 연구방법상의 문제점을 몇 가지 들어보았다. 그밖에도 많은 품제가 있음에 툴렴없다. 여기서 결론에 대신하여 신라 골품제연구의 방향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첫째 골풍제의 기원과 편성에 대하여 정리하여야 한다. 그리고 골품제의 구조에 대하여도 밝혀야 한다. 냐아가 각 신분충의 편성원리가 무엇이었나도 해명해야 한다. 또한 신분세습의 방법에 대한 고찰도 필요하다. 둘째로는 골품제의 유지와 운용 그리고 그 기능에 대하여 정리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골품제 운용상의 특성과 골품제 유지를 위한 직접 • 간접의 여러 장치들을 밝히고, 나아가 골풍신분에 따른 여러가지 보수가 어떻게 주어졌나 하는 점도 해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골품제의 기능이 무엇이었나도 연구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셋째로는 골품제의 변동에 대한 헤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골품신분제의 구조적인 변동과 개인적인 신분변동에 대한 문제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신분변동의 시대적 추이도 해명하여야 한다. 또한 골품제의 변동을 막으려는 장치가 무엇이었나도 풀어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끝으로 골품제의 붕괴와 신라의 멸망에 대해서도 다루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제한된 지떤을 가지고 신라 골품제연구의 문제점을 언급하다 보니 미처 다루지 못한 대목이 있고 또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빠진 문제들도 있을 줄 안다. 이에 너그러운 이해와 기탄없는 지척이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加耶史연구의 제문제

【金泰植】

1 머리말

근대척 서술방법에 의한 가야사 연구의 역사는 비교척 걸어서 거의 90년을 헤아리고 있으나, 아직까지 가야사는 체계척으로 성명되고 있지 못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원인은 가야에 대한 사료가·절대척으로 부족하다는 점에도 있고, 또한 연구시각이 처음부터 찰못 셜청되었다는 점에도 있다고 생각된다.

가야에 판한 사료는 年代記的언 것이 없고 다만 三國史꿇」어 있는 신라판계의 단편척언 기사들과 三國遺짧짧洛國記」의 전송기사, 廣뼈土王陣文의 子年條기사, 그리고 日本홈紀 소재의 한반도판계기사 등이 훌어져 있올 뿐이다. 이처렴 가야사의 기본사료가 삼국및 優의 대외관계기사 중에 간헐척 A로 혼입되어 존재하는 데다가, 이률 연구하기 시착한 일본학자들의 주요 관섬사가 왜와 가야의 대외판계사 즉 왜의 任那總營올 밝히고자 하는 점에 있었으묘로, 가야사는 애초부터 그의 자체발전척 측면보다 대외관계척 측면에서 주목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의한 대외관계척 연구는 특허 8세기초 얼본의 천황제충심사판에 의해 왜곡된 r 일본서기』소재기사들율 이용하여 왜의

엄나지배를 史뤘化시키려고 하였으며, 그 이후 최근까지도 일본인학자들의 연구는 그 선업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편 근래에 얼부 국내학자들은 대외관계적 시각을 그대로 지니면서도 앞의 견해들을 부정하여, 왜가 엄나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백제가 가야를 지배한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외관계적 연구들은 6세기 이전의 일본고대사나 가야사 자체가 미처 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그 관계사를 먼저 논하는 성급함을 범하여, 논의의 기반이 빈약하다고 하겠다.

가야사 연구의 주류가 앞서 말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을 때, 단편적으로 가야의 자체발전과정을 논급하는 연구도 꾸준히 있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은 대체로 『일본서기』의 기사들을 터부시하고 삼국사기 • 삼국유사』의 사료만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소량의 기사들에 얽매이고 추정이 극심하여 가야사의 체계적 이해를 꾀하는 데에는 한계성이 있는 것이었다.

한편 근래에 들어 영남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상당이 진전되어, 가야문화의 연모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들이 축척되어 왔다. 그러한 축적에 힘입어 고고학계에서는 가야문화의 자체발전과정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오고 있다. 그러나 그 연구성과들은 기존의 문헌사학자들이 찰못 이루어놓은 지명고증이나 연구추세에 휘말려서, 가야문화의 지역범위를 지나치게 과대한 것으로 오언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므로 가야사의 연구동향을 검토하여 그 문제점을 논하는 이 글에서는, 각 논의의 세세한 논충과정의 우리함을 지쩍하기보다 그 결론을 제시하고 거기에 나타난 근본척언 연구시각의 문제정틀을 지척함으로써 기존 연구를 비판하고, 그에 따라 가야사를 재정렵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여 보고자 한다.

2 대외관계적 연구의 문제점

근대 이후로 가야사에 대한 최초의 학폼척 정근은 일본인들에 의하여 시도되었으며, 이들 중에서 律田左右吉• 今西龍• 앓貝界之遭 등은가야대외관계사의 측면에 중정울 둔 엄나관계 지리고충흩 주로 행하

였다. 그 이전의 몇몇 연구들은 『일본서기』에 대한 國學연구전통에 따라 이른바 떼l 皇팀의 三輪正討등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을 뿐 학술적인 것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폐田은 『일본서기』에 대하여 당시로서는 획기적일 정도의 비판을 가하면서 합리적 셜명을 추구한 사람이며, 그는 「任那 域考」에 서1) 가야 전역에 대한 지명비정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서기』의 서술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부인하고 비판하면서도 일본의 임나지배의 사실성을 굳게 믿었으므로, 任那府屬없을 찾아낸다는 측면에서 거의 모든 가야관계지명을 경상남도 남해안 연변에 배열하다 시피 하는 비합리적인 연구결과를 낳고 말았다.

今西는 가야지방전역에 대한 답사 및 고분 • 산성 등의 분포조사에 다가 운헌고중적 연구를 더하여 지표조사보고서를 내놓고, 2) 거기서 행한 지명비정에 점차 수정을 가하면서 「 羅 域考」및 「己文伴被考」를 내놓았다.3) 그 결과 가야지명은 대개 낙동강의 서쪽, 섬진강의 동쪽으로 한정되어, 대체적인 역사연구의 기초작업은 이루어졌다. 그의 일련의 연구는 지표답사와 문헌고증을 겸비하였다는 변에서 그 이전의 연구들에 비해 높이 살 점이 있었지만, 그것이 당시 史 의 한계성을 념은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貝는 「日本 紀朝蘇地名 」에서방대한 문헌고증을 통하

1) 田左右. 1913. 任那 城考. 朝l歷史 理 究1 : 1964. 田左右吉全 재수혹.

2) 今西 . 1920• 北道善·山 • 達城那• • 星州都• 尙南道 安• 告 1917年度古 告.

3) 今西龍. 1919. 城考史林)4-3 • 4 : 1937. 朝 古史의 究 채수륙. 1922.伴敏 . (史林) 7-4 所.

4) 貝 之進. 1937. 日本 紀朝 名考. 雜考 7상•하권.

여 임나의 지명비정 범위를 경남·경북 및 충남·전북·전남까지 확장시격서, 임나는 경주지방 부근과 부여 • 공주 일대를 제외한 한반도 납부 전역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것은 r 일본서기」에 優의 한반도내 지배영역이었다고 상정된 〈任빼〉의 범위를 넓혀잡기 위해, 그가 문헌 비교 및 언어학척 추단을 거듭함으로써 얻어진 연구결과였다고 여겨진다.

그후 末松保和는 任那興亡史』에서 5) 貼貝의 지명고증에 대부분 의

5)末松保和t 1949. 任뼈훌史. 吉川弘文館.

존하고 한국 • 중국 • 일본의 문헌사료들을 종합하여 학문적 체계를 갖춘 남한경영론을’ 완성시켰으니, 그 셜을 요약하면 다음과 갇다.

첫째로, 『三國志. 委 댐 어 ( 北 狗함國〉이라는 문귀가 있는 것으로 보아 3세기 중엽에 이미 왜인은 변진구야국 즉 엄냐가라를 據有하고 있었으며 委王은 그 중계지를 통하여 諸 國에 辰王보다 더 큰 통제력을 미치고 있었다. 둘째로, 日本 紀功 49년조의 7國 및 4울 平定記파로 보아t 3 6 9년 당시에 委는 경상남북도 대부분을 명정하고 전라남북도와 충남일부를 귀복시켜 任那지배 체계를 성립시켰으며, 또한 그 西方정복지 중에서 제주도를 백제에게 주어 백제왕의 조공을 서약시켰다. 셋째로, 광개토왕비문의 기사로 보아, 왜는 4년 전후해서 고구려군과 전쟁을 통하여 임나를 공고히 하고 백제의 복속관계를 강화하였다. 넷째로, 宋 』에 나오는 俊 王의 對中 交당시의 작호로 보아, 일본은 5 세기에 외교적언 수단으로 왜 • 신라 • 엄나 • 가라뿐만 아니라 백제의 영유 내지 지배까지 宋으로 하여금 인정시키려고 하였다. 다섯째로 479년에는 王 知가 南齊에 사신보낼 정도로 일본의 통제력이 완화되기 시작했 며, 『일본서기』繼암훌天皇代의 기사들로 보아 6세기초에 일본은 백제에게 전남북 일대의 엄나땅을 할양해 주기도 하고 신라에게 南加羅등을 약탈당하기도 하면서 임나가 쇠퇴하였다. 여섯째로, 일본서기 軟明天皇代의 기사들로 보아, 54°년대 이후 백제와 임나일본부는 임나의 부흥을 꾀했으나, 결국 5 62년에 신라가 任뼈官家를 토멸함으로써 임나가 멸망하였다. 일꼽째로, 그후에도 일본은 大和년 (64 6 ) 까지 신라에 대해 쫓쫓羅등 4 둠의 〈任那의 調〉를 요구하여 받아내었다.

즉 優는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올 비롯한 광역을 정벌하여 그 지배 아래 임나를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야에 대한 정복활동을 벌언 優가 일본열도내의 어떠한 세력이고 당시 일본고대문화의 능력이 어느 정도였던가에 대한 규명없이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공허할 뿐만 아니라, 가야사나 일본고대

사의 체계척 설명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金錫亨의 연구에 따르면, 幾內大천 의 험이 吉協지방이나 九州에 미치게 되어 일본열도 통일의 전제가 마련되기 시작한 것은 6 세기 이후에 들어서야 겨우 가능했다고 한다.6) 그렇다면 大和국가가 그로부터 멸리 떨어진 남한을

6) , 1966, 초기조얼판계연구 , 사회과학원출판사 : 1969, r古代朝 --大和 任 , 朝 史 究會 , P·295·

4세기부터 경영했다는 것은 인정될 수 없으며, 이는 일본고대사 자체의 맹점에 대한 올바른 지척이라 하겠다.

한편 왜가 임나를 백 년 동안이나 문사지배를 했다고 한다면 그 지역의 상층문화에 일본문화유물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야 하며, 가야의 토착문화는 그에 의해 대체되거나 변질된 모습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야지역 상층문화의 연모를 보이는 고분발굴자료들에 의하면 거기에 일본의 영향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가야지역에는 4세기 이전의 유물문화가 5. 6세기까지도 연속적으후 계숭하다가 7) 6세기 후반 이후에 들어 갑자기 신라문화로 대체되는 양상이

7) 金훌植, 1986• 後 加耶 圖의 성장기반 고창, ( 史 )11 , pp.26-28

나타난다. 즉 6세기 중엽 신라에 의해 멸망되기 전까지 가야지역에는 독럽세력이 줄곧 성장하고 있었다는 증거만 나타날 뿐이고, 일본에 의해 지배당했다는 증거는 그 문화유물에 반영되지 않았으므로, 문헨 사료에 대한 그의 해석이 크게 잘못되었음이 입중되는 것이다.

!E한 末松은 일본이 가야지역에 셜치했다는 임나일본부의 실태가 무엇이고 그것이 가야지역을 어떤 방식으로 경영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 후의 일본인학자들이 설명해내려고 시도하게 되나 그들 역시 일정한 선업견에 사로잡혀 별다른 진전은 볼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후 三品載英은 일본서 의 사료계통의 原典을 추출하여 분석하는 방법론을 가지고 왜의 임나지배를 고충해내려고 하였으나 연구률 완결짓지 못하고, 다만 그 기사들은 史寶性보다는 說話的측연이 강한 자료라는 것올 확인하였을 뿐이다.8) 三品의 방법론을 이어받은 다

8)' 三 英, 1959, 本 紀 考置」上卷, 吉川弘文館. 1966, 繼 紀〉의 問 ---特히 近 의 所 中心으로 , (日本 紀 究) 2,

음 세대의 학자로서 켜上秀 이 있으며, 그는 자신의 논문들을 모아 任那日本府와 優』라는 연구서를 내놓았다.9) 그도 처음에는 임나일본부를 좀더 확실하게 고중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이 김석형의 本짖 島內分國說이 처음 발표된 11) 이후로는 입장을 바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I2)

9) 井上秀維. 1973. 任 B 本府와 . 樂

10) 井上秀雄• 19S9, 이른바 任 本府에 대하여 . (園史 ) 1973, 윗책에 재수록.

II) 金 . 1963, 삼한삼국의 일본열도내 폼국에 대하여 (역사과학) 1963-1 : 1964, r朝 究年 6(村山正雄 ) 에 日 , 史맑究....

12) 井上秀雄, 1966, 任椰日本府의 行政 . (本 紀 究) 2 : 앞책 에 채수륙.

1969, 古代日本의 이른바 南朝---石田英一郞 에게 하여 . (朝 究) 82 ; 앞쩍에 채수혹.

즉 好太王꽤文의 4委펙은, 스스로 왜인을 칭하는 것이 정치적 • 군사척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任那諸國의 호족들의 세력이었으며, 그 중에는 이 지방에 거주하는 어느 정도의 왜인들도 있었는데, 그 왜인들은 원래 높은 문화를 가진 한반도를 동경하여 그 문화의 도업을 위해 필사의 노력 i로 장기에 걸쳐 對.텀해협을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또한 任빼日本府의 명칭은 軟I껴紀1 년 (54 1 ) 에서 5 년 사이에만 보이는데, 그것은 본래 r百濟本記j 어il" 의해 만들어진 용어이고 그 내용도 大和王朝의 ill 光機l뻐이나 남한경영의 거점이 아니었으며, 그 실태는 왜인으로 칭하는 임나의 지방호족이 일본의 중앙귀족이나 지방 호족과 관계를 가진 것에 의헤서 任빼請國의 연합조칙에 파고들어 그 세력을 확대하려고 했던 것이고, 그· 임나일본부는 백제 • 신라의 접촉 지대에 있던 티本府의 祝縣을 통치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학설을 통해, 上은 엄나일본부의 실태로서 〈優 을 자칭하는 加耶의 한 후족세력〉을 상정함으로써 온갖 의혹을 풀어나가려고 시도 했다. 즉 임나일본부는 가야의 한 세력에 의한 독렵소국이었다는 것이므로, 이는 일본언학자의 연구결과 중에서 優王權의 임나지배를 부인한 최초의 것으로서 주목된다.

그러나 그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그 호족세력인 임나일본부의 거처 및 세력범위에 대한 언급이 없는 첨이 품제이다. 구

태여 사료상으로 본다면 그것이 安羅에 있는 것으로 되는데, 안라에는 이미 安雜王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근거지도 없는 日本府세력이 那縣을 두어 영역통치를 하였다고 볼 수는 없으며, 또한 그가 생각하는 多 • 己沈• 沙등지가 日本府의 이라고 명시한 사료는 어디에도 없다. 게다가 그는 임나일본부와 大和王械과의 관계를 부정하면서도 임나일본부가 일본으로부터 파견된 관·료인 本府 • 日本府 과제지호족 출신의 관료인 日本府執 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상호오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

井上의 새로운 혜석은 자신의 깜說을 파격적으로 수정한 것이지만, 여전히 그 임냐지배 또는 간섭의 향수를 떨쳐내지 못하여 기묘한 타협의 않팝를 보여준 것일 뿐이고, 여전히 가야의 자체발전과정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山尾幸久는 「任那에 관한 一試論」에서 13) 末松•井上의 가설들을 홉

13) 山尾幸久. 1978, 任那의 이흘바 한 -- 料의 根 中,으로. 古代來아시아 集」下 , 末松保和 士古積 念

수하면서 『일본서기』의 기사들을 재검토하고 백제사와의 관련성을 첨부하여, 왜왕권에 의한 임나지배의 성격이 5 세기 후반에는 〈직접경영〉이었고 6세기 전반에는 백제왕을 사이에 낀 〈간접경영〉이었다고 주장했다.

즉 우선 5 세기 5。년대부터 7。년대에 걸쳐서 木 '木游致가 임나를 일괄하여 직접 경영하였는데, 木滿혔가 백제 *城王시대에 왜국로 이주하였으므로, 그를 구성원으로 삼게 된 왜왕권은 임나경영의 역사척인 정당성을 계송하게 되었다고 한다. 둘째로 그 이후로 왜왕이 임나에 관리들을 파견하여 安雜國소속의 한 작은 성읍에 왜왕의 신하들이 체류하고 있는 것이 임나일본부의 실태이고, 6세기 전반에 그 優토들을 사실상 움직이고 있던 지는 星싸I • 高樓끼n羅출신의 사랑과 왜인과의 혼혈아였다고 한다. 셋째로 6세기 천반의 임나제국에 대한 정치척 지배는 사실상 백제왕에 의해 행해쳤으나, 왜왕권이 엄나제국 지배체계의 처치에 대하여 역사척인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왕운 왜왕올 교섭 또는 회유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연구결과는 왜왕권에 의한 임나경영의 개시를 5 세기 후반 이후로 늦추고, 또한 6세기 전반 이후로는 엄나경영의 주도권이 백제로 념어갔다고 본 점에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木패致가 임나를 지배하다가 왜국으로 이주하였다는 것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으며, 만일 그런 사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가야 지역 구지배자가 왜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했다고 하여 왜왕이 그 故地의 통치명분을 계승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게다가 그후언 5세기말에 왜왕이 엄나에 관리를 파견한 기사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木滿致망명을 전후한 시기가 곧 왜왕권이 엄나를 직접 경영한 기간이라고 평가한 것은 타당치 않다. 또한 54。년대 없꺼紀에 安 諸優~)이 보이기는 하나 이들이 왜왕권의 입장을 대변한다거나 그 지역 지배의 실권을 행사한 흔적도 나타나지 않으므로, 이를 왜왕권에 의한 간접경영이라고 평가한 것도 타당치 않다.

山尾는 무리한 문헨고증을 하면서까지 임나일본부의 실재성을 입증하고 그 성격을 추정해 보려고 하였으나, 문헌사료를 분석척으로 볼수록 스스로 엄나지배 기간은 줄어들고 그 성격은 일본과의 연관성이 약화되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결론부분에서는 그것이 임나에 대한 직접 • 간접의 경영이었다고 선언해 버린 것이다.

大山誠一은 「所 〈任那日本府〉의 성럽에 대하여」에서 삼국사기』

104> 大 一, 1980, 調〈任뼈日本府〉의 成立에 대하여」上• 中• 下. (古代文化»2-9 • II • 12, 古代 , 京都.

와 일본서기』의 기사를 흔합하여 임나일본부의 성립과정을 중심으로 논하면서 그 전후의 가야사를 정리하려고 하였다. 그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願宗紀3년조로 보아 4 8 7년에 백제는 북부가야를 군사적으로 제압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대가야 중심의 가야통일운동은 완천허 화절하게 되었다. 툴째로, 엄나일본부의 성럽은 6세기초 백제 • 신라양국 때문에 독립을 위협받던 加耶諸園과 在留日系A의 요청에 의거하여 大和王朝가 설치한 것이고, 현실척으로 일본부의 설치에 해당하는 것은 繼體紀 26년(532년으로 고중)에 파견된 近江毛 인데, 그의 사후 宣化朝의 那律官家의造에 의해 大和王朝의 지배체제가 청비

되어 일본부는 명실상부하게 성렵했다. 셋째로, 없明紀에 의하면 일본부의 조직은 大和王朝에서 파견된 日本府柳과 현지의 日系에서 임명되어 실질적으로 일본부를 운영하고 있던 日本府 • 日本府 로 되며, 일본부는 단순한 大和왕조의 출장기관이 아니라 任那諸國의 왕들과 합의체를 구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즉 그에 따르면 임나일본부는 大和왕조의 흠 파견에 의하여 532년 부터 30년간 존속하였으며, 그 성격은 엄나에 대한 지배기관이 아니라 신라 • 백제로부터 가야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합의체의 한 구성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연구결과는 임나일본부 성럽의 시기를 6세기 전반으로 늦춰 잡고 그 원인을 가야로부터의 요청에서 구한 점에 특색이 있으며 그만큼 진전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願宗紀3 년 (48 7) 조의 紀깅했흉說訊는 가야지역과의 연관성이 분명치 않은데, 이를 근거로 해서 북부가야를 백제가 멸망시키고 군사지배하고 있었다고 본 것은 지나친 추단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엄나일본부라는 것은 大和王朝의 돗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가야 재지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므로, 그 소속 인원들을 大和의 派避官으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大和왕조가 가야의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선봉부대를 주둔시킨 것이 임나일본부이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군사동원체제로서 北部의 那 家를 정비함으로써 그것이 명실상부하게 성립되었다는 주장도, 실은 大和王樞이 530년대에 와서야 州지역까지 지방통치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을 그와 판계없는 임나일본부 논의와 강제로 결부시킨 것이 아닐까 한다.

가장 최근의 연구로서 없木英夫는 「加耶• 百濟와 優」에서 15) 엄나일

15) 英夫. 1987. 加耶• 百 와 -(任都日本府. (朝 史 究 文 鍵) 24.

본부의 존렵시기와 그 의의를 극도로 축약해 보여주었다. 그의 셜명운 다음과 같다.

첫째로, 4-5 세기에 왜왕권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은 금석문자료나 중국사료에서는 충명할 수 없고, 일본서기』의 기재내용도 신뢰 할 것은 못된다. 둘째로, (엄나일본부〉는 가야재지 지배층의 요청에

의하여 성립되었 며, 그에 따라 53°년에 왜왕권에서 近江毛 이 군사집단을 이끌고 파견되어 활동한 것이다. 셋째로, 이러한 왜의 安羅진출은 고 이듬해언 531 년에 백제의 逃앉에 의하여 종결되었으며, 백제가 가야의 〈 王〉의 지위를 장악하자 〈在安維 僅)은 백제왕의 통제에 복속하게 되었다.

즉 없木의 연구에 의하면 임나일본부는 단 I 년간 안라에 존속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의 近毛땀파이 大和에서 파견되었다는 증거도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사료상 毛멜·필의 성격은 단순한 탤밑 정도라고 보여서, 단 1년간이라도 가야는 왜의 지배.아래 놓인 적이 없으므로 그런 의미에서의 임나일본부는 가야사에 끼어들 자리가 없는 것이다. 다만 왜의 엄나경영기간을 단 I 년간이라도 설정헤 두고자 하는 일본인학자들의 집요한 선업견에 탄복할 뿐이다.

한편 가야사에 대한 대외관계적 연구의 폐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국내학자들의 연구에까지 작용한 듯하여, 千찮宇는 「復元加耶 」에서 16) (僅의 任뻐지배〉가 아닌 〈 濟의 耶지 라는 시각으로 가야사

16) 千 宇 1977· 1978. 復元加耶史」上• 中• 下. (文 과 知性) a8 • 29 • 3J.

라기보다 耶被支配및의 복원을 시도하였다. 그 요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은 원래 북방 요동지역에 있을 때부터 辰輪에 대하여 附的인 지위에 있었으며, 기원전 세기에는 남하하여 황해도 방면에 있었고, 기원전후한 시기에는 짧.• 竹敵의 북방에서 진한과 함께 〈古之辰國〉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가, 기원후 2세기 중엽에 다시 남하하여 검해지역으로 정착하였다. 둘째로t 3 세기초에 狗뼈國은 급격히 약화되는데 이는 구야국 지배층의 주력이 일본으로 빠져나간 것을 반영하는 듯하며, 가야의 首露下降셜화와 일본의 .天孫降臨셜화가 버슷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셋째로, 『일본서기 l功紀49년죠로 보아, 백제의 근초고왕은 3 6 9년에 군사를 보내 낙통강방면과 전남해안방면을 확보하였으며, 이때 安 (함안) • 卓淳(대구) • 體(고령) 등의 加耶는 百濟關에 편입되었다. 넷째로, 광개토황비품 應子年條의 기사는 40년에 고구려 • 신라의 연합군이 백제와 그 부용인 가야저l국 및 그 원병인 優의 연합세력과 낙동강방변에서 총툴한 것을 전하는

자료이다. 다섯째로, 『일본서기』應때l 紀• 雄略紀• 銀宗紀의 기사로 보아, 5 세기의 임나일본부는 백제가 낙동강 중 • 상류지역으로 진출한 시기에 가야지배를 위해 金 방변에 설치한 백제의 派 軍司令部였는데, r 일본서기」펀찬과정 중에 紀표 일족과 같은 백제계 왜인들에 의해 변조된 것이다. 여섯째로, 繼體紀전반부의 기사로 보아, 6세기초에 백제 무녕왕은 多째(의성군 다인) • 己決(금릉군 개녕) • 팎沙(달성군다사) 등의 낙동강 증 • 상류지역을 다시 정령하여 가야북부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하였으며, 당시 가야의 중심세력은 고령의 大 였다. 일곱째로, 繼體紀후반부 기사로 보아, 527년 이전에 신라가 검해의 南1m짧를 함락시키자 백제도 낙동강 하류방면으로 진출을 기도하여 531년에 州방면에 군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여닮째로, 款H月紀의 기사로 보아 54년대 이후의 임나일본부는 成安방면의 백제군사령부로서, 이는 백제의 주도하에 가야의 제세력을 모아 對 防衛歐緣을 모색하였으나, 562년에 신라의 공격에 의해 고령의 대가야와 함안의 백제군사령부가 모두 최후를 맞았다.

즉 백제는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샤정벌하여 백제권에 편입시켰으며 , 5세기 이후로는 그 콧에 백제군사령부를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가야를 지배하였다는 것이다.

이 연구결과는 일본인학자들과 같이 『일본서기』를 주요 사료로 채돼하였으면서도 優의 임나경영셜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높이 살 만하며, 가야의 早 中心을 검헤로 보고 中心을 고령으로 구분해 본 것은 매우 중요한 업척의 하나라고 하겠다. 또한 531년에 백제군이 安錯德城에 진주한 이후로 562년까지 가야의 대부분이 그 영향력 아래 복속되어 있었다는 점도 사실에 가깡다고 하겠다.

그러나 4세기 중엽 이후 6세기 중엽까지의 전기간에 걸쳐 가야가 백제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고 추정한 점은, 전술한 가야유물문화의 前代계숭적 경향과 어긋난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자료로 볼 때 , 6세기 중엽에 신라가 가야를 정복한 사실은 이 지역의 유물상에 반영되지만, 4세기 중엽에 백제가 가야를 정복한 충거는 나타나지 않는 듯하다. 아칙은 백제토기의 연구가 전반척으로 미홉한 단계여서 확언할 수는 없으나, 당시의 가야와 백제 사이에는 부분척언 교역이 존채하는 데 그친 청도가 아닐까 한다.

또한 사료적 신벙성이 의문시되는 『삼국사기』초기기록과 『일본서기 維略紀」이전의 기록틀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가셜을 세운 점은 해당논거에 대한 한계성이 아닐까 한다. 즉 변한의 함앓집단이 2세기 중엽에 깅헤에 와서 狗 國의 지배층이 되었다가 3세기초에 일본으로 갔으리라는 설명은 그 근거사료가 대체로 부실하다. 5 세기에 백제가 김천방면에 군사령부를 셜치했다는 것도 근거가 빈약할 뿐만 아니라, 〈엄나일본부〉라는 용어는 540년대 이후의 없,. r꺼紀에서야 체계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5 세기부터 소급적용한 정도 무리이다.

한편 새로운 지명고증을 하면서 그 지명의 발음이 비슷하다고 하여동일시하는 구습을 그대로 따른 점도 문제이다. 을 대구에 비정하고,• 己文• 沙를 낙동강 중 • 상류의 仁• 閒寧• 쫓야에 비정한 것이 맞다면, 대구 • 의성 등지의 5- 6세기 유척에서 백제와 연관된 유물이 다량 출토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연 지명고증이 잘못된 것이라는 의성을 피할 수 없다.

최근에 金鉉球는 大和 樞의 對外 、究』라는 저서를 통해서 17)

(7) 金 球, 1985. 大和政樞의 外 川弘文 .

6-7세기 백제 • 신라와 大和政樞의 대외관계 변천과정을 체계척으로 정리하였는데, 이는 당시 외교관계의 특징을 백제 • 大和사이의 兵관계로 파악하여 전보다 한단계 진전된 연구결과를 보여주었다. 그 저서의 한 흘에서는 任뼈의 대외관계와 任뼈日本府의 실체를 논하면서, 일본서기 繼體紀」이전의 기사를 부인하고 軟明紀전반부의 기사만을 이용하는 엄정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 연구결과에서 임나 관계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4세기 후반 近함古王• 近首王代이후로 백제는 임나와 上下째係、를 가지고 있었나, 大和는 엄나와 직접척언 판계를 가지지 않았다. 둘째로, 백제는 임나 • 신라의 국경분쟁지대언 久禮山곤처에 (任那日本縣울〉이라는 直輪領올 가지고 있었으며, 그곳은 백제가 令• 城主를 파견하고 군대를 상주시킨 세력 거점이었다. 셋째로, 6세기 천반 임나일본부의 日系홉 이란 곧 백제의 훌令·城主와 통일언물로서, 이는 백제가 임냐의 직할령에 따견한 日系百濟官健 다. 넷째로, 백제가 日系백제관료인 印빼호觸• 許努톰 등의 군사지휘자블 임

나의 직할령에 배치한 것은, 그곳에 주둔시킨 大和政械으로부터의 兵을 지휘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4세기 후반 이후로 백제는 임나에 직할령을 두고 있었으며, 6세기 전반에는 백제가 그 직할령을 통할하는 기관인 任那府에 系百濟官 와 大로부터의 兵을 배치시켰다는 것이다. 이 가셜은 크게 보아 千寬宇의 연구결과와 비슷하나 왔明紀의 기록만을 이용하여 도달한 결론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고, 6 세기 전반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系百濟염·修및 日兵이라는 개념을 써서 보다 구체화시켰다는 점에 그 특색이 있다 하겠다. 특히 백제 성왕이 大和로부터 兵성격의 군사를 요청했으며, 규모가 크지는 않아도 그 이후 실지로 僅兵이 백제군에 편성되어 활약했다는 점은 인정된다.

그러나 款明紀소재 기사에 나타난 백제 성왕의 언급 중에 先速古王• 首王之 安雜• 짧 • 현필펄 技쌓 初화힘相通.結·親好以짧子弟〉라고 있는 것은, I8) 4셔 기 후반 당시 백제 • 가야 사이의 교류

18) 日本 」권19 軟明天 2년 (541).4월죠、

관계를 업증하는 자료는 될지언정 상하관계나 직할령 설치를 업증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임나일본부는 백제로부터 명령을 받거나 백제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고 오히려 反百濟的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므로, 그에 소속된 日系솜을 백 제 의 令• 城主와 동얼시하기도 어렵다고 생각된다. 또한 그는 久禮山근처에 셜치되었던 백제칙할령을 繼體紀3 년 (5°9) 조의 〈任那日本縣옵〉과 같은 것으로 보고 그 설치시기블 4세기 후반까지 소급시켰으나, 그 물을 동일시할 근거는 어디애도 없으며 이른바 久禮山근처의 백제직할령은 534년 이후에 셜치되었다가 54 1 년 이전에 신라이l 게 빼앗긴 지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 1988, 6세기 천반 加耶南 圖의 소멸과정 고활 , < 古代史)1 , 227-231.

여태까지 가야에 대한 대외판계척 연구의 현황과 그 문제점들을 지척하였는데, 그 전반척인 경향올 개팔하여 보기로 한다.

우션 대외관계척 연구는 그것이 像의 임나경영을 논하든 백제의 가야지배훌 논하든간에, 서술의 주체률 가야에 두지 않았다는 연구시각외 한계성 때뭄에 진정한 가야사라고 볼 수 없다. 또한 그 연구들은

일본서기』를 주요 사료로 채택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武烈紀이전의 기사들은 신뢰하기 어렵고 繼體• 款明紀의 기사들은 대체로 인정하는 경향으로.나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r 일본서기」를 이용하여 6세기초 이전의 가야대외관계사를 논급한 성과들은 기본적인 타당성이 문제된다고 하겠다. 다만 6세기 4。년대 이후로 가야지역이 백제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고 지적한 근래의 연구업적들은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6세기 중엽 당시 임나일본부의 성격에 대해서는 가셜이 분분하여 아직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가야사 및 일본고대사의 재정립과 아울러 다시 조명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3 자체발전적 연구의 문제점

앞에서 서술했듯이 가야사의 연구가 처음부터 일본인 학자들에 의하여 優와의 대외관계척 측면에 중점을 두고 행해져 온 반면에, 해방 이후 국내학자들은 가야의 자체발전적 측면에 주목하는 연구를 해왔다. 그러한 연구들은 대체로 기존의 연구성과를 검토하거나 반론을 펴지 않는 경향을 띠고 있는데, 이는 〈임나일본부〉라는 용어와 얼본서기』자체가 터부시된 때문이 아닌가 하며, 그 때문에 가야사에 대한 논의가 그리 활성화되지 못하였다고 보인다.

李 爾는 『삼국사기』의 초기기록과 일본서기」를 거의 도외시하고 삼국지 •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등의 기사들을 이용하여 韓國史』古 가야관계 의 짤막한 논문들올 몇 개 발표하였는데, 2)그

20} 李西園 」古代寶, pp6-389.

園古代史. 英. PP.305~350.

요점을 정리해 보면 다음파 같다.

첫혜로, 검해의 짧 各園이 千의 통합에 의하여 部族園家로서 성렵한 것은 위만조선시대언 기원천 세기 이전의 일이며, 그 당시 이후로 가락국을 비롯한 주변의 辰小國들은 辰園또는 馬韓의 맹주언 目支園辰王에게 소속되어 있었다. 둘째로, 낙랑이 설치된 이후 어느때부터인지 변진의 일부 소국들은 辰王에게서 벗어나 독립척인 연맹

체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 최초의 맹주국은 上加짧 • 弼烏, • 任那라고도 칭해진 고령의 大加耶였고, 삼국유사』에 인용된 本朝史略」의 기사로 보아 당시에는 大뻐I耶와 합께 金힘찌 검허. 古寧뻐 진주) • 非火 耶(창녕) 阿 耶(함안) 星山 (성주)가 六 II耶聯盟體를 이루고 있었다. 셋째로, 3 세기 전반에 下깨緣• 本耶• 狗國이라고도 칭해진 검해 各國의 中始祖인 首잃가 다시 六끼n耶聯盟을 결성하였는데, 삼국유사 五삐때l條」의 기사로 보아 당시의 맹주국은 金官 耶이 고 그 아래 阿雜 (함안) 古寧耶(진주) • 大 (고령 ) • 山 주) - 耶(고성)가 소속되어 있었다. 넷째로, (任那府〉는 懷國이 諸圍과의 무역관계를 위하여 셜치한 띔렘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이 처음에는 任빼本地(고령)에 설치되어 있다가 교역중심지언狗방면(김헤)으로 옮기게 되었다. 다섯째로, 『삼국사기』의 기사로 보아 금판가야는 532년에 신라에게 투항하였으며 대가야는 562년에 신라에게 멸망당하였다.

사료계통에 따라 서로 상반된 사실을 전하고 있는 문헌기록들을 세밀히 고증하여, 가야사의 전개과정을 이만큼이나마 정리해낸 것은 매우 중요한 업척임에 틀림없다. 특히 加耶가 부족국가 또는 소국들의 연맹체 형태로서 존재하고 있었다거나, 任那 는 優의 商 과 비슷한 성격이었으리라고 지척한 점, 그리고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멸망시기를 구분해서 고중한 점 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椰烏 • 任 가 고령 대가야의 本名이었다고 본 것은, 金廷 도 지척하였듯이 鏡大帥 文의 기록과 배치되므로2 1) 인정할 수

21) 廷 . 1983. 加耶史의 究. (史學 究>37. P·4·

없다. 또한 3세기 전반 이후로는 加耶諾國職盟體의 맹주국이 本 였고, 大加耶는 그 이전의 맹주국이었다고 추정한 점도 문제이다. 首「 話나 大加耶始祖神話의 내용으로 보아 검해냐 고령의 소국이 가야제국 중의 중심세력이었음은 인정되나, 여태까지의 고고학척 발굴 성과로 보아 검혜를 비롯한 가야남부지역에는 4세기 이전의 유물 • 유척이 풍푸하고 고령융 비롯한 가야북부지역에는 5- 6세기의 유물 • 유척이 상대척으로 풍부하므로, 그 발전순서를 뒤집어보아야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 五 耶條」는 기본척로 承기록로서

시대적 관념이 탈색되어 있는 것인데, 이를 지나치게 중시하여 後의 六聯 을 구분해 내려고 한 것도 무리하지 않을까 한다.

전체적으로 보건대 이병도의 연구는 가야사를 자체발전적으로 보는 시각을 제시했으며 가야사의 기본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풍부한 가야후기 관계기사들을 도외시하고 삼국유사』등의 극소량의 사료들에 대해서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했으며, 아직까지는 고고학척 발굴성과가 별로 축적되어있지 않아서 그를 이용하지 못했다는 한계성이 남는다고 하겠다.

그 다음으로 金 埈은 國古代 家發避 」의 〈部族國家와 族I降盟〉이라는 월의 일부분에서 가야의 발전과정을 개괄적으로 서술하였는데, 22)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金 埈. 1964, 聊園古代圖家 速史 , r椰園文化史大系 (民族• 園 史), 고대민족문화연구소, PP.484-487·

첫째로 『삼국유사 洛댐記」의 王 兌 로 보아(제 단계의 셜화) • 대략 3세기 중엽에 流移民인 首 族과 許王 族과의 연결에서 검해지역에 洛國이라는 部族國家가 건설되었으며, 여타 삼한사회도 族長支配力의 강화를 이루고 있었다. 둘째로 『삼국유사 및 본조사략의 五 耶관계기사로 보아, 당시 6가야 중에서 낙동강 중류의 大加耶(上加떼)와 하류의 金官 耶(下))耶)가 가장 강성하여 저마다 영도권을 주장하였다. 셋째로 『繹젠 의 兄弟때係始祖說話로 보아 (처12 단계의 셜화) • 그후 얼마 안 있어서 (5세기초 가락국 제6대 坐知王代) 23) 이 上下때 耶를 주체로 하여 聯盟이 결속되었A며, 이

23) 金哲埈. 1962, 新 上古 系와 그 紀年 , (歷 )17 • 18합 : 197~, 古代 , 지식산업사, 재수록. PP·98- lol •

가야연맹은 562년까지 지속되었으나 신라 中古 王室의 種說과 같은 제3단계적인 셜화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멸망했다.

이 견해는 가야제국의 성장과정을 사회기반 통합단계와 일치시켜, 2세기 이전의 써족사회가 철기문화를 소유한 북방유이민의 파급 풍으로 인하여 족장지배력이 강화되어, 3세기경에는 각지에 검해의 洛園올 비롯한 部族國家들이 형성되고, 그후 大加耶와 金官加耶가 그 중에서 가장 캉성하게 되자 이 둘이 대동하게 결속되어 上下加耶聯盟을 이룩하였으나, 결국 유일의 고대왕권율 이루지는 못하였다고 도식

화한 것이다. 이는 가야의 발전과정을 사회구조연까지 심화시켜 좀더 체계화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이러한 시도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결론에서 3 셰기 이전에는 가야지역에 유력한 정치세력이 등장하지 않았다고 본 정이냐, 고령 대가야와 검해 금관가야가 3세기 이후 6세기까지 동시적으로 대등하게 가야세력의 주체였다고 본 점은 유물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이 지역의 추세와 어긋난다고 보인다. 포한 釋利 』소재의 설화는 大加짜始 많話로서 5 세기 후반에 고령 대가야 중심의 후기가야연맹이 형성되는 것을 반영한다고 보이므로, 24) 그 성격을 二下 연맹설화라기보다는 가야지역의 연맹장교체 셜화로 파악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한다.

이처럼 가야의 자체발전과정에 대한 합리적인 인식을 모색하여도 납득할 만한 연구결과가 나오지 않자, 文隔鉉은 핏의 훌왕察」이란 논문을 통해 25) 충격적인 견해를 발표하였다.

4) 198 ,세기 후반 大加耶의 발전에 대한 究, (陣園 ) 12, pp. 70 -72•

2') 文 • 19. 耶史의 新考 -大加耶間 中心으로. (大邱史 )9.

즉 『삼국지 의 辰狗邱國은 고령 대가야를 지칭하는 것이고, 가야연맹 영도세력으로서의 두 주체인 上加耶와 下加때는 고령 대가야와 함안 安雜加耶이며, 검해세력은 金官國A로서 미약한 小國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觸권떤國즉 任해1 國은 거제도에 었던 가야 소국으로서 일본 國의 國이며, 狗輪國은 九端에 있는 것으로서 井辰狗 國들이 건너가서 세운 나라라는 것이다.

여기서 검해세력을 약체로 본 점이나 혐쩌 , 國을 기존셜과 달라 고령이나 검해에 버정하지 않은 점은 破짧的이긴 하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 r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南加維관계기사나 검해지역 고고학자료률 통해 볼 때. 5 6세기에 검해세력은 그다지 강성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網鳥邱. 나 任那를 고령이나 검해에 비정한 기존 셜들이 그만큼 타당성이나 설득력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狗 園 고령으로 본 것이나 狗 韓圍을 州北端으로 본 것은 무리하다 하겠으며, 역시 그것은 검해지방에 있었으되 고고학자료로 보아 이 지역이 4세기 이전에는 융성하였다고 파악된다. 한편

文 鉉이 그후의 논문 「加耶職盟形成의 經齊的察」에서 26) 金官國을 가야연맹에서 맹주로 군렴하던 강대한 세력이라고 거듭 언급한 것은, 自己說에 대한 묵시적 수정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李基 은 『 國史 , 古代篇」에 27) 가야사에 대한 기존 연구성과들을 검토한 결과 상당히 정리된 인식체계를 보여주었으며, 그 요점을 시대순으로 배열하면 다음과 같다.

26) 文 鉉. 1977. r加耶聯 形成의 경제척 고활. (大邱史 ) 12 • 13 .

27) 李基束. 1982, 加耶諸園의 , .園 古代篇(李基白• 李基 共), 164.

첫째로 A.D. 세기 이전에 城울國家로서의 本가 김해에 성럽되었다. 둘째로 3 세기 중엽의 낙동강 중 • 하류 유역에는 켜·웰 12나라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狗뻐많깅해) • 網,암파國(고령) • 安國(함안) 정도만 그 위치를 알 수 있다. 셋째로 4세기 이후 고총고분의 발생으로 보아 이 당시에 가야지역은 聯뾰王꽤 수준으로 王械이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넷째로 本는 고대 항해왕국으로 번영하여 가야전체의 맹주로 등장하였으며 그때의 호칭이 那였고, 교체시기는 알 수 없요나 그후 大加耶가 가야제국의 맹주로 등장하게 되어 임나는 대가야를 지칭하게 되었다. 다섯째로 532년예 本加Ifl‘國(김헤)과 己 國(대구)이 신라에게 병합되었으며, 562년에 大 國(고령)이 신라에게 병합됨으로써 나머지 가야소국들도 모두 멸망하였다.

이 견해는 千 宇의 r 일본서기」연구성과와 金廷 의 고고학적 연구성과를 대폭 수용하였기 때문에 가야사에 대한 기본골격이 상당히 바로잡아졌다고 보인다. 즉 기원 세기 이전에 本加짜가 성렵했다든가, 가야전체의 맹주가 本끼耶에서 大의 순서로 교체되었다든가 하는 인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명고증변에서의 기존설의 한계성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網鳥馬園을 고령에 비정하고 條己휴國을 대구방면에 버정하고 있다. 우선 미오야마국을 고령에 비정하는 기존셜은 이미 〈미오야마〉와 任那(미마나의 음상사를 중시해서 생져난 가셜인데, 그러면서도 가야전체 맹주의 호칭이 任椰였다고 한다연 3 세기 중엽에 미오야마국 즉 고령세력이 맹주국이었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묘로 타당치 않다. 대구지방을 가야소국의 하나인 탁기탄으로 보는 것도 고고학자료의

성격이나 신라의 발전추세에 버추어볼 때 인정하기 어렵다. 또한 검해지역에는 고령 • 함안 등지와 달리 이렇다 할 고총고분이 분포하지 않는 점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4세기 이후로는 검해세력이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를 本끼II 耶에 의한 가야지역 연맹왕국의 결성시기로 잡은 점이나, 그 이후의 맹주 교체시기를 추정하지 못한 점 등도 한계성으로 남는다고 하겠다.

최근에 李永植은 耶諸國의 國家形成題」라는 논문을 통해, 28)

28) 永植. 1985. 의 園 形成 椰聯盟 〉의 再樓討와 戰爭 分折 中心으로. (白學輪) 32.

기존의 가야연맹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가야의 전챙기사분석을 토대로 하여 그 사회구조 발전단계를 추정하였다.

그 견해에 따르면, 우선 가야사를 시기구분하여 기원전 I 서l 기 중엽부터 2세기말까지를 제I기, 3세기초부터 4세기 중엽까지를 제2기, 그 이후 5세기 후반까지를 제 371. 그 이후 6세기 중엽까지를 제 471로 나누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로 보아 제I기에는 가야제국이 주로 신라를 대상로 전쟁을 수행하였으며, 『삼국사기』에 가야관계가 나타나지 않는 기간 중 제 271 에는 가야제국이 신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고 제 3 기에는 백제의 영향력하에 있었다고 구별하였다. 그리고 대외전쟁의 규모와 양상으로 보아 4세기말 이전의 가야제국은 君長社會에 해당하며, 4세기말, . 5세기초 이후의 大) • 阿짧와 같은 중심세력은 전쟁규모가 만 명 수준을 념고 철제무기로 뽑,딴戰• 守城戰동을 행하는 것으로 보아 都市國家에 헤당된다고 하였다.

이 연구결과는 가야사를 4기로 세분하여 각 분기별 특정을 찾으려 하고, 君끓社뺨 • 都市園家와 같은 준거틀을 척용하여 가야의 발전단계를 논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삼국지 위지 동이전」보다 『삼국사기 j 초기기록을 적극적로 이용하여 논리률 전개했다는 점에서 논거에 대한 불안감을 주며, 팡개토왕비문 廣子年f혔 (4°0) 의 기사를 결정척인 근거로 하여 4세기말, 5세기초 大加耶• 阿羅加耶의 국가단계진업을 주장한 것도 우리한 셜명언 듯하다. 즉 가야제국이 백제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는 제3기에 가야가 국가형성올 이루었다는 논리가 서로 모순될 뿐만 아니

라, 가야제국이 고구려 5만군과 싸워 패한 것으로 보아 가야군도 수만 명 규모일 것이기 때문에 당시의 가야는 국가규모였다는 주장도 어색하다. 게다가 광개토왕비문의 〈任那加웰> • (갖雜않兵>을 각각 대가야 • 아라가야로 보고 고령 • 함안을 도시국가로 인정한 것은 문헌고중에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가야소국들과 같이 발달된 군장사회와 소규모의 도시국가의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문헌적인 측변에서 가야의 자체발전과정을 다룬 연구성과들을 검토하였는데, 이들은 연구시각을 제대로 잡았다는 점에서 높이 명가할 수 있으나, 전반적으로 보아 사료의 부족을 극복하지 못하여 가야의 발전추세를 파악하지 못한 문제정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문헌사료가 부족한 가야사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고고학적 배경설명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를 통해 문헌고증도 수정되어야 할 점이 다분히 있을 것이므로, 고고학계의 가야유적 • 유물의 연구경향을 살펴볼 요가 있다고 하겠다.

가야지역에 대한 고고학척 연구조사는 19 10년대부터 일본인학자들에 의하여 시작되어 일련의 『朝蘇古趙鋼춤.報告』가 출간되었으며, 이에 의해 가야문화에 대한 대강의 윤곽은 드러났다. 그러나 발굴조사한 양에 비하여 보고 • 출간된 것이 척고 그 내용조차 소략했기 때문에 당시의 연구는 오히려 부작용이 더 켰다고 보인다.

일본인들에 의한 발굴자료들을 토기를 중심으로 정리하여, 金元趙은 新 土 의 究에서 29) 4세기 후반부터 6세기까지의 영남지역

토기양식을 물로 나누어 신라 • 가야문화권올 나누어보았다. 즉 경주· 양산 • 달성 • 성주 • 창녕 등 주로 낙동강 來뿜지방의 토기를 신라중심군이라 하고, 검해 ·함안·진주·고령 등 낙동강 띠뿜지방의 토기를 뼈耶群이라고 명명하여, 각 群토기들의 형식올 비교한 것이다. 이는 가야토기의 편년과 문화권에 대한 최초의 연구이면서도 당시의 학계수준으로 보아서는 어렵게 이끌어낸 탁월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全吉姬는 척석목곽분이 출토되는 경주지방올 제외한 경상도지

역의 고분묘제를 종합하여 「 의 究」를 발표하여, 30) 金元龍

30) 全 姬. 1961, r耶 의 究 , ( 大史 ) 3.

의 견해를 묘제의 측면에서 확인하였다. 여기서는 가야묘제 편년의 상한을 4세기말, 5세기초로 잡고 그 하한을 6세기말로 설정한 다음, 그 묘제들의 형식을 수혈식석실분과 횡혈식석실분으로 나누었다. 그리하여 4세기말, 5 세기초 당시에는 가야지역에 보면적으로 수혈식석실분 (式)이 축조되고 있다가, 그후 어느 시기부터 닥동강 동안지방(뀔싸포함)은 연도가 없는 횡혈식석실분 ( 式)이 주류를 이루고 낙동강 동안지방은 그대로 수혈식석실분이 계승되고 있었다고 보았다. 또한 그 말기에는 낙동강 서안지방에 수혈식석곽분 (A式)과 아울러 연도있는 횡혈식석실분 ( 式)이 나타나며, 낙동강 동안지방에는 그대로 1 式의 석실분이 지속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분류를 바탕으로 全吉姬는 몇 가지 견해를 제시하였다. 즉 첫째로 가야의 수혈식묘제는 그 이전의 선행형식인 箱式石稍및 흉훌 式積石小石室에서 출발하고 있다. 둘째로 낙동강 以파지역의 고분은 그 축조법에 있어 신라의 고분인 적석목곽분과 유사점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일찌기 낙동강 以來지역 (성주 포함)이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 갔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셋째로 낙동강 以西지역의 고분은 선행형식을 계숭한 측연이 크고 신라고분보다 오히려 백제고분과 많은 유사점이 있었으며, 더우기 낙동강 以西지역에 축조된 연도있는 횡혈식석실(B2 式)은 백제의 고분에서 유입된 형식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 견해는 묘제의 측면에서 가야고분 편년 및 문화권구분을 하여 얼정한 기준올 제시한 것£로서, 이 지역의 요제에 대한 고고학적인 해석로서는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을 만큼 타당한 결론을 제시하였다고 보언다. 그러나 慶州式척석목곽분을 제외한 수혈식 • 횡구식 석팍분 빛 석실분이 나타나는 경상도지역의 유척들을 모두 加耶의 이름 아래 거론함i로써, 그 이후의 연구에 혼동을 일으키게 되지 않았율까 한다. 고고학 연구자들이 경주 이외의 경상도지역 정치세력틀을 모두 加耶小園으로 단정한 선업견은, 물론 그때까지의 신라 • 가야에 대한 문헌척 역사연구가 불충분하거나 찰못되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하겠다.

한편 국내학자들의 영남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조사가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어 유물자료가 점차 증가함애 따라, 李段昌은 「耶地域土 의 究」등 일련의 연구논문들을 통히) 가야지역의 토기 및 고분묘제에 대한 종합적 이해체계를 마련하였다.

李 昌. 1970, 耶地域土 의 究來江 城出土土 樣相 으로. (新 文化) 2.

• 1981, 新羅• 耶土 年에 때한 짧 , (燒 女子大學校 文集) 23.

, 1982, 耶古 의 年 , ( 園考古 12•

• 1987, 耶土 , 聊固史 , 17(園의 考古 , 국사훤한위현회.

그 연구결과에 따르면, 낙동강 짜때패벌에 가야의 국권이 6세기 전반까지 머물러 있었으므로 3 세기 후반 이후의 낙동강유역 출토토기를 모두 가야토기로 본다고 하고, 안동 • 의성 • 칠곡 • 대구 • 경산 • 현풍·창녕 ·성주 등지의 닥동강 동안지역의 토기양식(來 型)을 〈新戰中心形式系의 가야토기〉라 하고, 고령 • 합천 • 함안 • 진주 • 웅천 • 고성 등지의 낙동강 서안지역의 토기양식(西 )을 〈耶中心形式系의 가야토기〉라고 하였다. 또한 늘어난 발굴자료를 바탕으로 편년을 확대하여, 가야토기 및 고분의 시기를 발생기 (A.D. 100-200) , 전기 (A.D.200-300) , 중기 (A.D. 350 - 550 ) , 후기 (A.D. 55 0 - 6 5 0 ) 로 구분하였다. 그리고나서 발생기에 웅천왜총과 김해 예안리토광묘 7 6호 등을 대응시키고, 전기의 것으로 부산 화명동석곽분 • 오륜대석곽분과 자인 북사동고분군 등을 들었으며, 중기의 것으로 의성 탑리고분과 고령 지산동 44· 45호분 등, 푸기의 것으로 창녕 계성 C지구 고분들을 예로 들었다.

유물면년에 약간의 출업은 있지만, 이 연구는 경주지역을 제외한 방대한 양의 신라 • 가야지역 문화를 체계적으로 시기 및 지역 구분하여 그 결과를 제시한 것으로서 주목된다. 특히 부산 • 검해 • 진해 등 낙동강 하구지역의 土 群을 세기 이전의 始源形式系로 추정한 것도 의미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동 • 의성 • 철곡 둥의 이른바 신라중심형식계의 型土 群을 신라가 아닌 가야와 연관시킨 것은 문제이며, 이는 신라 경주문화의 지역척 파급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어야 하지 않올까 한다.

그와 비슷한 시기의 연구로서 金廷 은 耶史의 究」등을 통하여 32) 가야에 대한 고고학과 문헌사학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32) 廷 , 1977. 와 日本」小 館.

, 1982, 古代園 의 遠 耶, 園考古 報 I2.

’ 1983. 耶史의 究 , 史 37.

, 1987. 加耶의 形成 階 , (갱신푼화연구) 32•

즉 그는 검해 회현리 지구 및 대구 만촌동유적 등을 先 隆代(B.C. 2셔기기원 전후) , 웅천패총과 부산 오륜대석곽묘 등을 加耶時代前 (13세기) , 성주 성산동 2호분과 달성 37호분 및 부산 복천동 호분 등을 耶 代後 (4~6세기)로 구분하였다. 그리고나서 선가야시대의 정치구조를 울落國家로 보고, 가야시대 전기의 것을 落國家職盟 즉 聯盟園家, 가야시대 후기를 耶聯盟 家로 보았다. 그 중에서 가야전기의 맹주국 즉 大加耶는 金海 였으며, 가야후기의 맹주국은 초반에 金海 任 였다가 말기에 검해가 쇠퇴하여 고령의 大耶로 바뀌었다고 하였다. 또한 고고학자료 및 문헌사료를 통하여 가야의 지역구분을 획정하였는데, 의성 • 경산 • 울주 등을 가야에서 제외시키고, 가야의 파%는 조령에서 낙동강구까지의 緣인 문경 • 상주 • 선산 • 대구 • 밀양 • 양산 • 동래이며 그 西뮤는 소백산액과 섬진강의 線 거창 • 함양 • 산청 • 진주 • 하동이라고 보았다.

이 연구결과는 고고학자료와 문헌사료를 결부시켜 가야의 발전단계를 논하였다는 점에 그 의미가 있으며, 그 결과 가야의 발전추세가 대체로 파악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거기서 가야사회를 읍락연맹국가로 보아 가야전기 및 후기 전반의 맹주국을 검해가야로 보고 가야말기의 맹주국을 고령 대가야로 추정한 것은 타당한 견해라고 하겠다. 포한 가야의 융락국가 형성시기를 기원전의 청동기시대 후기로 보아 그 시야를 넓히고, 기원전후 이래 철기시대에 한 단계의 발전을 인정하여 변한연맹국가가 형성되었다 하고, 4세기 이후로는 古樓이 축죠되었으므로 왕권이 더욱 강화된 가야연맹국가로 성장하였다는 발전척 관점도 긍정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변한연맹이라는 것과 가야연맹이라는 용어의 차이가 무엇이며, 그 교체의 시기가 왜 3 세기말, 4세기초언지에 대한 설명올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로 남는다고 하겠다. 즉 기왕에 발전단계를 설정하

였면서도 이를 동타l 적로 연결하지 못하고 정태적로 각 단계별로 유척이름과 문헌사료를 나열하였을 뿐이다. 또한 가야의 와 西 를 명확히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유에 대한 해명이 없어서, 무엇을 기준으로 가야지역구분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일본서기」에 나오는 가야소국의 하나인 휴을 大邱로 비정하면서 이를 〈違句代끼耶 라고까지 이름하는 것을 보면, 지역구분기준으로는 유물자료보다 문헌에 대한 고중을 더욱 중시한 듯하다. 그러나 관모나 토기 등의 유물로 보아 56세기의 대구는 가야가 아니라 신라에 통합된 세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문헌에서 가리키는 곳을 보더라도 탁기탄은 대구방면이 아니라 밀양 • 영산방면의 한 소국이었다고 생각된다.33)

33) 金 植. 1988, 註19의 논문, PP·19:Z-:205·

지금까지 가야에 대한 고고학적인 연구성과 중에서 대표적인 것들을 살펴보았는데, 문헌사료가 부족한 가야사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고고학자료가 그만큼 더 소중하고 그에 대한 연구결과도 값진 것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가야의 지역척 발전추세를 짐작하는 데는 유물자료의 이용이 결정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주부근을 제외한 경상도지방 대부분을 가야지역으로 삼고, 그러한 광범위한 가야문화권내에서 낙동강 동안양식과 서안양식이 차이가 난다는 논리는 문제점이 있다고 보인다.

고고학 연구자들의 이러한 연구경향의 문제점은 기본척으로 문헌사학 또는 한국고대사의 틀이 올바로 짜여 있지 않은 점에서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즉 史가 아닌 任那및의 지명고중의 차원에 머물렀던 貝• 末松등의 연구에서 任뼈와의 관련 아래 언급되는 卓淳• 혼 등의 위치를 大邱• 塵山등지로 고충한 것이 가야사에 대한 그 후의 연구에서 극복되지 않았고, 이 가셜올 암묵리에 천제한 위에서 유물과 유척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였음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한 오해가, 경주를 제외한 경상도지역에 널리 분포하는 수혈식 석곽분의 존재와 연결되어 加耶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로까지 몰고갔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최근 들어 고고학계의 일각에서는 이른바 〈낙동강 東뿜

群의 加지방에서 출토하는 유물을 경주의 것과 개별적으로 양식 비교하여 그 유사성을 지적하며, 이를 신라 경주문화의 지방적 파급이라는 측면에서 다추고 있는데, 34) 이는 매우 주목할 만한 연구경향이라고 생각한다.

34) 圭. 198z• 賣土器成立前夜와 展 . (陣園考古學輯) 12, pp.223-2z8

• 1983. 中 古 의 性格에 대한 약간의 考 . ( 大史學) 7. PP·17-37

元• 申 . 1983, 東薰 洞古 工 本文. pp.u8-17z.

여태까지 가야에 대한 자체발전적 연구의 현황과 그 문제점들을 지적하였는데, 그 전반적인 경향을 개괄하여 보고자 한다.

해방 이후 국내학자들의 연구경향은 우선 가야사를 자체발전척인 시각에서 다루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 공로가 인정된다. 그러나 문헌사학계풍의 연구에서는 f 일본서기』소재의 사료나 고고학자료를 이용하지 못하고, 몇몇 단편적인 기사나 신화류만을 이용하여 가야사를 복원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편년이나 지역발전추세 등의 기본적인 면에서 체계적인 이혜를 갖추지 못하였던 듯하다. 또한 고고학계통의 연구에서는 편년이나 발전추세의 대강을 바로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지명고증의 선입견에 엄매여, 유물자료가 나타내 보여주는 가야문화권의 범위를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넓게 셜정한 오류를 범하였다고 보인다.

가야사 연구의 이러한 문제점은 가야사 및 일본고대사뿐만 아니라 신라사 • 백제사의 연구에도 일정한 제약을 주고 있으며, 특히 신라의 성장기반을 올바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가야사를 재정립하기 위해서는 일본서기 를 포함하여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대한 운헌연구와 유물자료에 대한 고고학연구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즉 任那관계의 지명고중부터 재검토한 뒤에, 가야지역 유물 • 유척의 편년 및 共伴관계나 분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그 의미를 문헌기록이나 셜화들과의 연관 아래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백제사 • 신라사 등의 전체척 맥락 속에서 가야사의 독자척 전개과정을 드러내야 하지 않올까 한다.

4 가야사 재정렵의 모색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가야사 연구의 역사는 제법 걸고 그 성과도 상당히 축적되어 왔으나, 대외관계적 관점에서의 연구이든 자체발전척 관점에서의 연구이든간에 각기 일정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한 불만족감으로부터 출발하여 펼자는 5 세기 후반 大耶의 발전에 대한 究」등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한 바가 었으나, 35) 아직 문

35) 金泰植, 1985, 5세기 후반 大加 의 발천에 대한 究, (園史 ) 12, 셔울대학교 국사학과.

1986, 後 園의 생장기반 고활 , ( 史 ) 11, 휴산사학회.

, 1988, 6세기 전반 加耶南部 圖의 소멸과정 고찰 , (園古代史 ) I , 한국고대사연구회.

제의 해결에 이르기에는 요원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여태까지 발표했던 필자의 견해를 요약하여 소개하고 나서, 가야사의 재정립을 위해서 추구되어야 할 과제들을 열거헤 보고자 한다.

기원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경남해안지대에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이 지역에서는 사회통합이 진전되어 井辰小國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검해의 지耶國은 그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발전추세가 지속됨에 따라 소국간의 통합이 한 단계 더 진행되어, 2-3세기에 변한지역은 검해의 가야국을 중심으로 :Jf障小國聯盟즉 前j찌끼 聯盟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 세력범위는 경남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하여 낙동강 유역 일대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다가 4세기초 이후 국제관계에 변화에 따라 전기가야연맹은 약화되기 시작하고 4세기말, 5세기초에는 거의 몰락하여, 가야라는 이름은 더이상 역사주체로서의 역할을 못하고 사라지는 듯하였다. 그런 과정중에 성주 • 양산 • 통래 둥지의 세력은 신라세력의 영향권 아래로 이탈해 들어가고, 그에 따라 가야 지역은 낙동강 西뿜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5세기 후반에 들어 옛 가야 지역의 내부에서 재결속의 기운이 일게 되었으며, 이 무렵에 고령지방의 예천 주체세력의 하나였다고 추정되는 伴被國이 가야의 재통합을 새로이 주도하는 세력으로 대두하였다. 이 고령세력은 大加耶始祖神話를 표방하면서 검해세력올

대신한 맹주로 등장하여, 동일한 문화기반내에서 성장하던 소국들을 포팔하는 後 加耶聯 을 이룩하였다. 이들은 그후 다시 역사 위에 나타나서 짧王〉의 이름으로 南齊에 사신을 보내 〈째國將뭘〉의 작호를 받기도 하고, 고구려의 신라 침입에 대해 원병을 보낼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6세기초에는 백제 • 신라와 대등하게 세력을 다투어, 소백산맥-낙동강 사이의 영역에 축성하여 자기 세력권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련 과정중에 대가야가 왜에 대한 무역경쟁의 측면에서 백제에게 패배하자, 대가야는 5 22년에 신라와 결흔동맹을 맺어서 국제적 고립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결혼을 둘러싼 신라의 책략에 의해 후기가야연맹은 내부 분열의 조침이 얼어났으며, 그 결과 國(밀양 • 영산)이 529년 전후해서 신라애게 병합되고 말았다. 이로 언하여 끼n 피j)南部諸 은 대가야로부터 떨어져나와 安짧(함안)를 중심으로 다시 통합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이러한 움직임은 53 1 년 백제의 安짧進 , 53 2년 신라의 南加雖(검해)병합 등으로 실꽤하였다. 게다가 얼마 안 있어 浮國(창원)이 신라에 투항함으로써, 가야남부지역은 신라•백제에 의해 동•서로 분할점령당하고 말았으며, 그 남부지역의 소멸로 인하여 가야는 다시 분열•약화되었다• 540년대 이후 가야제국은 신라 • 백제간의 경쟁 및 힘의 균형을 틈타 대체로 백제의 영도 아래 있으면서 회복의 기블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결국은 562년에 고령 대가야가 신라에게 병합됨으로써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가야사를 크게 둘로 구분한다면, 前 史는 1-4세기 동안 경남해안 및 낙동강유역의 辰12園과 諸小別 의 역사를 말하며, 後폐加耶史는 5- 6세기 동안 고령 이남, 낙동강 西 의 I0여 소국들의 역사를 말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前後 의 가야는 그 문화성격에서 약간 차이가 난다. 우선 전기가야문화는 주로 경냥해안지대의 왜총유적과 토광묘유척에서 출토되는 표짧土器• 古式빼寶土器및 鐵製힘j器類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데, 그 품화의 형성과 발전에는 海運과 鐵훌이라는 두 요소가 중요한 기농율 하였던 것으로 보언다. 또한 후기가야문화는 주로 서푸청상내륙지방의 고총고분유척에서 출토되는 耶土 • 鐵製武 및 甲 類 통해서 쌀펴볼 수 있는데, 그 품화는 신라•백제 등의 외부

문화요소가 아닌 전기가야문화 요소의 계승양식을 띠고 있으연서도, 그 문화성격은 농경에 기반을 둔 在地떠 • 狂服的언 것으로 변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필자의 연구결과를 정리해 보았는데, 아직 본격적인 연구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놓은 가셜이라 문맥이 분명치 못한 부분도 더러 있으리라 생각된다.

우선 4세기 이전의 前및의 경우에, 『삼국유사 가락국기」 및 삼국사기 신라본기」초기기록을 어떻게 처리하여 재구성할 수 있을지가 어려운 문제이다. 그 사료들은 문헌기록애 의하여 남겨진 것이 아니라 구두전승에 의하여 남겨진 것이므로, 시대관념이 어느 정도 탈색된 잔존물이라고 생각되기 예문이다. 또한 『삼국유사 5가야조」및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들도 그런 성격을 내포하고 있을 것이므로, 그 기록만을 통해 전 • 후의 5가야 또는 6가야연맹을 이꿀어내는 것은 타당도가 높지 못하다고 하겠다. 게다가 고고학적으로도 이 시기의 신라·가야문화는 서로 구분이 안될 정도로 비슷하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으므로, 변한 • 전기가야의 문화권을 진한의 것과 구분해낼 수 없는 상태에 있다. 그러나 발굴자료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그 미세한 차이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4세기부터 5세기초에 걸치는 전기가야연맹의 몰락과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日本 紀』 皇信編政49년조의 기사와 廣 土王陣文의 辛 年및 따子年옮 기사가 나타내는 의미를 파악해내야 한다. 그러나 그 기사들은 그 가리키는 바가 엄청나게 큰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자료 훼손의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만을 결정척인 설명근거로 상을 수 없다는 어려움이 남는다. 이 기록들을 보다 척극척으로 해석할 수 있으려면, 고고학자료들올 이용 • 분석하는 방법에 발전이 있어서 종더 정확한 유물편년이 가능해야 할 것이다. 또한 당시의 가야와 백제간의 관계를 살펴기 위해서는, 이 시대의 백제토기형식이 종더 밝혀져야 하지 않올까 한다.

540년대 이후의 일본서기 敎明紀」에 집중척으로 나타나는 任椰日本府〉문제는 가야사 연구의 암초와 갇은 것이어서, 이 품제에 논의를 집중시킨 연구들은 상당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부훈 좌초당하고 만 듯하다. 그리고 그 성격파악이 그다지도 어려운 까닭은 가야사 자

체에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일본고대사가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본고대사를 재정비해야 하며, 그에 따라 고대한일관계 및 임나문제가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가야사에는 이러한 몇 가지 의문점 외에도 허다한 난제들이 산재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단계로서도, 加耶가 맺j良• 優• 百濟 등과 밀접한 교역관계에 있었기는 하지만 왜나 백제에 의해 장기간 동안 무력복속당했던 적은 없고, 가야는 그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문화 전통과 발전과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고 하겠다.

4세기 韓日關係史연구의 문제점

【李基來】

1 머리말

고대에 있어서 한일판계사를 개판할 때, 4세기의 그것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즉 그 이전 시기까지의 두 나라 관계사는 주로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서밖에는 복원할 수 없는 문화척 관계가 주류를 이루는 데 반하여, 4세기 이후의 그것은 문화척 관계와 더불어 그 이상드로 일련의 정치척 교섭관계가 큰 비중을 띠고 대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럽 한얼판계사의 기조가 一 하게 된 배경으로는 4세기에 들어와 버로소 日本列島에 있어서 국가 통일의 기운이 성숙되어 간 사실과 판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정치척인 交涉이라는 측연에서 볼 때 4세기야말로 고대 한일판계사의 출발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긴 韓•日양국의 고대 歷史畵에는 4세기 이전에 있어서 양국간의 교섭 사실에 대해서 전척으로 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같은 역사서의 기록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료비판올 펼요로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韓•日양국간의 정치척 관계의 성렵이라는 정에 초청융 맞추어 4세기 한일관계사률 연구하는 데 있어서 제기되는 몇 가지 품제첨올 추출, 정리해 보려고 한다. 측 혼히 변혁기라고 말해지고 있는

4세기 동아시아세계의 국제정세 속에서 한일관계사에 직접 관련을 맺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생각헤 보고, 다음으로는 三國史記」新 本紀에 자주 등장하는 僅國내지는 僅兵의 성격문제를 검토해 보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 한일관계사 연구의 최대의 쟁점이 되어 있는 것은 『日本판紀』 紀에 보이는 패의 對.합관계 記 일 것이다. 필자가 이 문제에 큰 비중을 두고 다루는 것도 그 같은 이유에서이다. 여러분의 질정을 바라마지 않는다.

2 技餘族의 南下移動문제

서기 4세기 전반기라는 시대가 동아시아세계의 역사상 커다란 변혁이 돌발한 일대 격동기였다는 데 대하여는 뀔論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고구려는 五힘 族이 -훌城을 념어 北中國일대를 폼쌓하기 시작했을 무렵 한반도 안의 中國껴B縣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한편 漢族세력의 長江이남으로의 南選에 의해서 권력의 진공상태에 빠져 있던 選方에 진출을 꾀하다가 群뿌族출신 폈容정권(前랬)의 강력한 저지를 받게 되었다.

이 같은 과청에서 주목해야 될 사실은 그간 族세력의 를 받으면서 국가체제를 유지해 왔던 技餘가 모용씨에 의해서 285년과 346년의 두 차례에 걸친 대공격을 받아서 사실상 해체된 점이라고 생각 된다. 그리고 여기서 발생된 技餘避民들 중의 일부가 한반도 방연으로 남하 이동하다가 한강유역에서 백제에 의해서 홉수된 것이 아닐까하는 점이다. 백제와 부여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治通錯』에서 346년 부여가 모용써의 칭업올 받기 전 磁山에 居하고 있을 때 백제의 청략율 발아서 푸락이 쇠잔해졌다고 기록한 바 있으며, 한편 」에는 345년 모용써정권 아래서 記室 軍으로 복무하고 있던 封格가 容就에게 간언한 내용 중에 고구려와 선버족 출신 宇文部• 段部의 포로뿔아니라 백제국의 포로들이 모용씨의 國都에 많이 살고 있어 이 西境으로 옮기자고 건의한 사실이 보이고 있다. 이로써 미루어본다면 이 시기 백제의 행방은 遭東과 遭西지방에서 포착되는데, 백제는 그간 부여롤 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모용씨와의 무력대결 끝에

상당한 숫자의 포로가 발생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종래 사학계의 일부에서 백제의 요서진출설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화로 간주되어 왔지만, 그것은 어쨌든 백제와 부여세력과의 군사적 접촉은 요동지방에서쁨만 아니라 漢江유역에서도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48년 江上波夫에 의해서 제기된 이른바 騎 民族說은 3 세기말에서부터 4세기 초반에 걸쳐서 동아시아세계를 뒤혼든 민족대이동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그 같은 역사척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나온 일본국가 정복셜이다. 즉 江上은 이 시기 유목민족의 이동 과정에서 〈고구려와 같은〉퉁구스 계통의 북방 기마유목민족의 일파가 한반도로 남하해서 그 남쪽 끝안 金海지방 (國)에 이르러 그콧에 살고 있던 僅A을 정복함과 동시에 辰王드로서의 권력행사를 하다가 4세기초 현해탄을 건너 JL州지방의 小國들을 정복한 다음(이른바 제 1차 정복) • 그콧에 한동안 머물다가 4세기말경에 다시 통쪽의 內지방으로 진출하여 강대한 大和朝廷을 세웠다고 주장했다(이른바 제 2 차 정복).

이 같은 江上의 기마민족설은 지난 4년 동안 일본학계에서 贊反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실정인데, 한편 이 가셜은 4세기 한국사의 전개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도 여러가지 문제점올 제기해 주고 있다. 기마민족설의 기본 골격을 지지하면서 그 내용 중의 일부를 수정 보완해 보려는 입장인 레디아드 (G.K.Ledyard) 는 江上이 말하는바 통구스 계통의 기마유목민족이란 다름아닌 부여족이라고 주장한다. 즉 모용씨에게 격파당한 부여국 유민이 남하이홍하여 한강유역의 백제왕실을 찬탈, 새로운 백제왕실을 세우고, 나머지 일파는 加耶지방을 거쳐 九州지방에 이르러 국가체제를 이룩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4세기 후반에 백제와 일련의 교섭을 가진 것으로 짐작되는 九州의 優정권이란 부여족이 세운 국가로서 혈연으로 따질 때 백제와는 형제관계에 있었다는 논리이다. 이 같은 견해의 당부는 어쨌든 3세기말4세기 전반기 동아시아세계의 변혁에 대한 이해야말로 이 시기 한국사 이해의 기본 전제로서 한충더 심화되어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3 新羅本紀」의 樓園• 優兵관계 記事의 문제

주지하는 바와 같이 『三國史記J r新羅本紀」에는 신라와 候國과의 교섭 혹은 優兵의 신라국경 침범 記판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찮 A의 신라변경 침입기사는 이미 시조왕언 朴居西二F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5세기말 照知織立千때까지 모두 3 0 여 건이 검출 된다. 그 중 3 세기 숍£王朝시대에 왕자출신의 大將뭔으로서 신라의 영토팽창과 조국수호전쟁에 혁혁한 軍져j을 세운 子老의 이야기는 이 왜병과의 투쟁이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신라본기」의 신라 • 왜국 양국간의 교섭과 전쟁애 관한 기사는 4세기에 들어와서도 모두 7 건이 보인다. 이를 시기적으로 개관해 보연양국간에 交맴관계가 성립되었다가 그것이 파탄하여 왜병이 신라국경 안으로 침업하는 것으로 그 양상이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基臨尼師今때는 그간 적대관계로 시종하던 왜국과 교빙하고 (3 00 ) , 다음 解尼令때는 왜국왕의 요청으로 왜국 왕자와 신라 왕족 여성과의 혼인이 성렵되는 데까지 발전했다가 (3 12 ) , 그 말년에 이르러 신라가 왜국와의 거륨된 혼인 요청을 거절함으로 해서 양국간의 국교가 깨지고 (344-34) , 곧이어 왜병이 신라의 도성인 金城으로 침입했다는 것이다 (346 ). 그리고 奈 麻立千때는 왜병이 364년과 393 년의 두 차례에 걸쳐서 신라를 강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같은 왜병의 신라국경 침엽은 廠 土王像 文에서도 볼 수 있으며 (399-400) , 또한 5세기초 朴 上이 신라 왕자 未斯欣을 왜국에서 구출해낸 다음 순국한 설화에서 엿볼 수 있듯이, 당시 신라에서는 왜국에 대한 척개심이 불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이에 대한 연구성과를 보면 왜병의 신라 침입 抗路라든지 침입시기의 계절상의 공통된 특정 그리고 신라 통해안의 관계 地名을 고증하는 둥 초보척언 수준의 연구에 머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신라의 교섭 당사국이었던 왜국의 정체와 왜병의 성격문제 퉁이 보다 척극척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드로 생각된다. 나아가 「新羅本紀」의 판계記專와 뒤에서 언급하게 될 日本홉紀 함功紀」기사와의 상호판련성 문제 풍에 대해서도 깊은 천착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일찌기 일본학계에서는 功紀기사의 내용에 대하여 아무런 사료비판을 가하지 않은 채, 이를 그대로 믿고서 大和朝廷의 南 정복이라는 것을 상정한 다음, 「新維本紀」의 왜병 침입기사가 이 사실을 입증하는 한국측 자료라고 손쉽게 결부시킨 적이 있으나, 뒤에서 보게 되듯이 「떼功紀」기사는 그 자체 여러가지 문제정을 갖고 있는 것이다.

4 功紀」 國관계 記事의 문제

그러나 4세기 한일관계사 연구에 있어서 최대의 난제는 『日本 紀』 「 功 」의 한국관계 기사가 제공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떼l功紀」編政46년(며寅, 246- 3 66 ) 條의 왜국사신의 백제來엠과 이로 인한 백제 • 왜국간의 교벙기사에서부터 同55년 (255-375) 條의 近 古王(同 에는 古王이라 記 됨) 갖去에 관한 기사에 이르기까지의 近함古王때의 백제와 왜국과의 일련의 교섭 기사가 바로 그것인데, 이들 기사는 이 시기 한일관계사 연구의 쟁점이 되어 있다. 특히 同49년( , 249-369) 條에 잇달아 기재되어 있는 왜병의 新 攻破· 기사와 역시 比自休• 南 • 國• 安羅• 卓淳• 등행을 형청했다고 하는 기사, 그리고 왜병이 가야지방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호남지방에 진출했다는 기사와 近 古王父子가 僅將이 있는 곳으로 來會하여 支山과 古沙山에 올라가委將앞에서 왜국에 대하여 폼屬를 서약했다고 하는 기사 둥은 일본학계의 이른바 南韓經營請의 주요한 근거가 되어온 것이 사실이다.이상 「 功紀」의 일련의 對百濟관계 기사는 내용의 줄거리로 본다연 그 자체 일관성을 가진 연속적인 한 뭉치의 기사인 것이 분명하지만 다만 이들 기사가 백제측의 역사서인 百濟記 어l 많이 의거하고 있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r 日本書記J 편자가 얼마만큼이나 충실하게 『百濟記』를 이용했는가 하는 점은 의문이다. 그러므로 종래 한•일 양국의 역사학계에서는 「 紀」기사에 대한 사료비판융 둘러싸고 여러가지 견해들이 제출된 바 있는데, 필자는 이훌 대체로 否 • 肯定論• 修正論의 세 가지 입장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고 생각

한다.

첫째로, 「해l功紀」기사를 전반적으로 믿기 어렵다는 부언론은 일찌기 田左右吉과 池內宏에 의해서 제창된 이래 三品뽕핏이 이를 부연 설명한 바 있는데, 이들은 『日本판紀』의 백제관계 기사의·성격을 전반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종 反l빗法이라 부를 수 있는 연구방법론을 일본학계에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 듯이 보인다. 이에 의하면, 紀의 기사는 후대 및판-의 역사적 근거를 부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避及 조작한 것이라고 한다.

둘째로, 이 갇은 부언론에 대하여 「 紀」기사의 줄거리를 史 로 인정하는 긍정론이 한국사 전문가인 末松保和에 의혜서 제기된 바있다. 하긴 末松도 「떼功紀 49년조의 일부 기사에 대해서는 약간 불합리한 점이 있다고 보고 있으나, 그러나 믿을 것은 취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은 버리는 식으로 하여 이를 일원적으로 정리•도태시킴으로써 사실의 기재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셋째로, 「 紀」의 백제관계 기사는 이를 일부 수정해서 검토한다면 이 시기 百濟史의 복원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는 수정론이 李因爾에 의해서 주창된 이래 千짧宇가 이를 계승 확대시킨 바 있다. 이병도는 「피 폐紀」가 백제의 近웹긴王(34 6 - 375) 예에 해당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입장에서, 同기사는 근초고왕 부자가 지금의 전남지방에 출정하여 꾀範의 나머지 小國들을 經뭘한 역사적 사실을 〈셜화〉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게 해준다고 보고 있다. 한편, 천관우는 이보다 더욱 적극적인 태도로 「떼져 紀」기사를 수정 해석한다. 즉 그는 日本 紀』에 優가 이른바 任那를 지배한 것처럽 기록한 것은 백제의 가야지배를 왜곡 • 변조한 것이라고 보는 기본입장에서 「 功紀」에 왜군의 군사행동드로 되어 있는 것은 실은 백제군의 행동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서, 근초고왕의 백제군은 3 6 9년에 낙동강 일대를 석권했으며, 다시 이 지역을 廷週하여 전남 해안에까지 진격했다고 논단하고 있다.

이상 소개한 것처럼 「神功紀」의 한국관계 기사의 사료비판을 둘러싸고 輸• 日역사학계에는 서로 다른 몇 개의 입장이 있는 생언데, 훨자는 그 중 修正짧의 입장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긍정론은 당시 역사척 대세에서 볼 때 실로 우리하기 쩍이 없는 해석일 뿐이

며, 한편 부정론자들이 이른바 반영법에 입각하여 이 문제의 기사를 엄정하게 비판한 것은 사료비판의 방법상 커다란 진전이라고는 생각되지만, 그러나 이를 웠科玉條로 내세워 「떼져 紀」기사를 총체적으로 부인하는 데는 역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만약 이를 백제를 주체로 한 마한정복 기사로 본다면, 그것은 近뛰古王당시 백제의 마한정복뿐 아니라 가야 여러 나라 빛 신라 그리고 어쩌면 왜국과의 ·접촉을 암시하는 귀중한 사료로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5 맺음말

고대의 한일관계사 연구는 현재 한 • 일 역사학계에서 가장 큰 견헤의 불일치를 보여주고 있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실로 그 중 어떤 문제는 견해의 조정이 전혀 불가능할 정도로 첨예하게 대럽되어 있다. 그러므로, 고대에 있어서 양국간의 관계의 실상을 구명하는 일은 양국 역사학계에 :A 1땀된 공통의 과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필자는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4세기 한일관계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점을 생각해 보았다.

4세기의 한일관계사는 당시 동아시아세계 전체에 걸친 변혁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한일간애 정치적 관계가 성립되었다는 관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그러고 이는 광개토왕릉비문에서 보듯이 4•5세기의 교체기에 삼국 항쟁의 무대에 끼어들고 있는 왜국 내지 왜병의 문제를 구명하는 데 있어서도 그 유력한 단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우리쪽의 문헌 자료는 거의 전무한 형편이며, 한편 일본측의 자료는 그 신빙성이 문제가 되어 있다. 더욱이 당시 백제 • 신라 • 가야와의 교섭 혹은 분쟁의 당사국이었던 왜국의 청체가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어 한· 일 양국관계사를 올바로 구명하기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장차 우리는 이 갇은 난관융 극복해 나감에 있어서 한충 더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활고문현

千 宇, 「復元加耶史(中) . (文 과知性) 29호. 1977.

末松保和, 亡史 , 大八洲 版, 1949, 吉川弘文 , 新版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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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tack Hong(供元 ), RelationshiP Betweeη Korea aη d japan in period: paekche and Yama/o wa, I1simsa, Seoul, 1988.

발해사 연구의 문제점

----발해와 신라의 외교관계를 중심으로

【宋 】말해에 관한 자료는 중국, 일본, 한국의 문헌들에 단편적으로 남아있는데 이 문헌 자료들은 김육불의 『짧판國志효編( I934) 에 대부분 정리되어 있어 발해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문헌자료 외에 고고학척인 조사와 발굴을 통하여 알려진 유척, 유물 중 특히 금석문 자료들도 문헌의 내용들을 보충해 주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댔젤꿇휩試, 貞恐公초강꽁풍힐孝公主짧試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발해 관계 자료들은 아주 단편적인 것들이고, 발해 존립 당시보다 멸망 후에 쓰여진 것이 많으며,쓰여지던 당시 각국의 편향적 입장이 담겨져 있기도 하여 발해의 역사를 제대로 복원하는 데에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게다가 현재 각국의 민족적 입장까지도 게재되어 있어 발해사의 많은 부분에서 각국이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논란이 되고 있는 주요 논점들올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감다.

大祚榮의 出 와 건국집단의 민족 구성올 중심으로 한 건국관계기록의 해석

발해의 사회구조 및 민족구성과 樹!海族(발혜인)의 형성 여부

발혜의 域과 대외교통로의 위치 비정

말해의 경제구조와 사회성격(발전단계)

발해문화의 원류와 성격

발해의 대외관계 특히 당, 신라, 일본과의 관계

남북국시대론을 중심으로 한 한국사와의 관련

이러한 논점들은 각각 독럽된 것이 아니라 서로가 맞물려 있는 것으로 모두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제 버록 발해사 연구 문제점을 다룬다고는 하였지만 이상의 문제들을 모두 거론할 수 없으므로, 여기에서는 발해와 신라의 외교관계를 다루는 데에 한정하도록 하겠다.

발해가 존속하였던 229년간 (69 8 -9그 6) 은 대체로 통일신라의 시기(67 6 -935) 와 일치한다. 그러면서 상당기간 북쪽의 발해와 남쪽의 신라는 동쪽에서 i尼河(현재의 뼈興江으로 추정)를, 서쪽에서 대동강 유역을 양국의 경계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양국 사이에 많은 접촉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자료의 빈약과 연구의 부진 등으로 언하여 비록 일부 교류는 있었지만 양국 관계의 기조는 항상 대렵적이었다는 것이 현재 학계의 일반척 견해로 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우선 양국 관계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틀을 정리하여 위와 같은 견해가 어떠한 맥락에서 형성되었는가를 알펴보고, 기존의 견해에 대한 문제점을 밝히고자 한다. 다음£로 이러한 견해에 문제점이 었다면 앞으로 양국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제시하고, 마지막으로 신라의 발해에 대한 언식에 양면적 측면이 나타나는 원인이 바로 양국 관계의 추이 속에서 설명될 수 있음을 덧붙이도록 하겠다.

발혜의 대외관계에 대한 각국의 연구 경향을 보면, 중국에서는 廣과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고, 얼본에서는 자신들과의 관계에 칩중되어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신라와의 관계는 남한이나 북한에서 활발히 검토되어야 할 것인 데에도 불구하고 아직 본격척으로 거론되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두면서 양국 판계에

대해 단편적으로나마 언급된 연구들을 살펴보겠다.

신라가 교류하거나 다툼을 벌였던 나라인 北國을 발해로 처음 인식한 사람은 安鼎福이었으나, l) 洪奭周는 오히려 양국이 인접해 있었으면서 來國史에 상호 왕래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이 이상하다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2) 그 뒤 불완전하나마 양국 관계에 대한 자료들을 처음 정리한 사람은 끓跳輪이라 생각된다.3) 그는 발해가 고구려의 北境에 있었으므로 조선사에서는 말해를 北꽤, 신라를 南朝로 삼고 있다고 하면서 『삼국사기』에 두 번 나타나는 北國도 북조와 같이 발혜를 지칭한다고 하였다.

그 뒤 검육불은 양국이 영토를 접하고 있어 도로가 통하기 쉬웠을 터인데 어찌 사절이 왕래하지 않았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하고, 더우기 발해의 5 개 교통로 중 南海府는 新짧道라 하였으니 이것은 양국이 왕래하였던 명확한 증거가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이러한 기록들이 전혀 없는 것은 힘史가 흩어져 사라짐으로써 증거될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4) 그러나 『삼국사기』어l 상호왕래하였던 기록이 전혀 없다는 말은 뒤에 輪의 고증을 받아들여 수정하고 있다 5) 아물든 그는 양국의 왕래가 빈번하였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원언을 훼史의 散亡에서 찾고 있다.

19 6。년대에 들어와 박시형은 양국이 서로 대럽척이었다는 인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원래 양국의 사절 교환은 r삼국사기』의 기록보다 더 빈번하였을 것인데, 검부식이 고의척으로 이런 관계기사를 누락시켰다고 주장하였으며, 빈번하였던 사절 교환의 근거로서 짧 의 『古今 國기록을 들었다.이 그 뒤 북한학계가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여 양국 관계를 대럽적으로만 보는 입장에서 탈피하려 하였지만6) 더이상 진전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7)

1) 石井正 , 「朝 161.(1) 避---新짧-李朝. (朝 史究會 文 , 1978, P.72, (註14).

2) , 家. 海i!t家.

3) 維輪, 每園 下比 新 . 1931•

4) , 海國志 . 권 19 考, 19H, P·40•

킴육풀, 위의 책 退, P·38.

6) 박시형, 「빨해사 연구릎 위하여 , (력사과학), 1962-1,

7)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조션전사 1979, PP·311-312. 박시형, 『발해사 1979, p.3·

이상 말해와 신라의 관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인식하려 했던 연구틀을 살펴보았지만, 일본학자들의 사정은 이와 다르다. 일제시대에 일본인 학자들이 발해사를 연구하연서 자신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발해-일본, 당-말해-일본의 관계에 대해 집중척으로 관심을 기울였고 신라와 발해의 관계는 부수적으로만 다루었다. 발해사 연구의 대표적 인물인 鳥山 一의 경우를 보더라도 신라와의 관계는 제 대 王대에 당-말해-신라 사이의 전쟁 (732-733) 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발해와 신라의 대럽관계만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이때 당에서 신라에 보낸 칙서가 以 制 적인 분열정책의 성격을 띠고 있어 이후에도 당의 조종으로 인하여 양국의 대럽관계가 지속되었던 것처럽 생각하게 히고 있다 8) 이 사건과 함께 9세기 후반 이후에 냐타나는 몇 건의 세력경쟁 사건도 양국 사이의 대립관계를 증명하는 자료로서 부각되었다. 최근에 이르러서도 이런 견해에 변화가 없으니, 예컨대 「酒寄雅志」는 말해의 대외관계에 대해 언급하면서 신라와의 긴장관계만을 다루교 었고, 9) 李成市도 古뼈微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양국의 교류 측면을 추구하는 데에 부정척 업장을 표명한 바 있다.lo)

한편 남한에서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양국이 거의 시종일관 대럽적이었다고 생가하고 있다. 李佑成은 양국이 끝까지 대치상태에 잇었을 뿐 한 번도 화합할 수가 없었다고 하면서 당의 離閒 정책에 시종 조종되었던 데에서 주요 원언을 찾았다 11) 이 입장은 그 뒤 님북국시대론을 전개하면서도 변하지 않았다. 12) 한편 韓圭哲은 양국의 교섭 과정과 그 배경올 신라의 입장에서 다루면서도 양국의 대렵척 상황은 끝내 극복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13) 교류의 측면을 이례척인 시건으로 처리하고 있는 듯하다. 반면에 李龍範은 新훌훌道의 존재로 보

8) 山 一, 海史上 風 房. 1968, P·32•

9) 雅志, 「 海園 史的展 園際 系. (朝史 究 文集)16, 1979.

10) 李成市, 「 海史 81t 園家民族-(南北園時代〉 檢 中, (朝i史究 文 )25 , 1988, P.i6.

11) 李佑成, 「三園史紀의 佛成과 王朝의 正統 , 1974 ; , 園古典--- 의 方向과 閒 」제1점 1980, P·45·

12) 이우성, 南北園時代와 崔 遺. (創作과 批評 , 1975 ; 改 . 의 창착과 비명사. 198%, PP.156 - 157·

13) 圭함, 新 와 海와 政治的交涉 程---南北 의 사신 파견옳 중심으로 , ( 史흙究)43, 1983,

아 신라와의 무역이 반드시 이루어졌을 것이나 사료가 남아 있지 않아 그 상세한 상태는 전연 알 길이 없다고 하였다

14> 李 , 「勳海의 成立과 그 文化 , 한국사 3. 당구당, p.93·

2이제까지 기왕의 의견들을 살펴보았듯이 발해와 신라가 시종 대럽척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양국의 교류가 지금 남아 있는 자료보다 더 빈번하였을 것이지만 더이상 알 수 없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이중 남한에서의 일반적 견해는 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견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양국이 오랫동안 서로 국경선을 맞대면서 어떻게 적대관계로만 시종할 수 있었겠느냐는 점이다. 이제까지 시종 적대관계로 보았을 경우 교류관계 기사는 예외적인 사건으로 처리되고 마는 경향이 있었다.

둘째, 이렇게 양국이 적대적이었던 근본 원인으로 당의 기미정책 즉 以꿇制폈 정책을 틀고 있는데, 당이 20。여 년간 지속적으로 이 정책을 구사할 수 있었겠느냐는 점이다. 더우기 안록산의 난을 시점으로 당이 쇠퇴기로 접어든 이후에도 이런 정책이 일관되게 구사되었는지는 의문스렵다.

셋째, 자료적인 측면에서 볼 때 양국의 교류를 보여주는 기사들은 예외적으로 처리하고 유독 대럽 기사들만을 강조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점이다. 즉 『삼국사기』에 보이는 두 번에 걸친 신라의 사신 파견기록, 新 』에 보이는 발해의 주요 대외교통로로서 京南海I府는 신라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기록, 짧때의 『고금군국지 보이는 발해의 搬城府와 신라의사이에 39개 繹이 있었다는 기록, 최치원의 글에 보이는 신라가 대조영에게 제 5품 大阿줬의 벼슬을 주었다는 기록, 國志』어l 보이는 발해가 신라와 結授하려 하였다는 기록 등을 예외적인 사건으로 처리하고, 733 년 발해와 신라와의 전쟁

기록, 신라 말기에 발생하는 爭長사건이나 과거시험에서의 수석 다툼기록 등 대립 또는 경쟁 기사만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느냐는 정이다. 따라서 두 종류의 기사들을 서로 대등하게 취급할 필요가 있다. 특히 『신당서』와 『고곰군국지』의 기록은 양국 사이의 지속적이고 빈번한 왕래를 시사해 주는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기록보다 더 많은 접촉이 있었음을 밝혀주는 귀중한 단서가 된다.

결국 다른 나라들의 예와 같이 양국 사이에 대립 반목의 시기와 친선 교류의 시기를 설정할 필요가 었다. 이제 이러한 필요성을 염두에 두면서 단편적으로나마 남아 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여 양국 외교관계의 추이를 다음과 같이 5시기로 구분해 보도록 하겠다.

x 기는 大祚榮시대 (69 8 -7 1 9) 로서 발해가 당의 세력을 경계하여 신라에 의지하던 예이다. 700년경 신라는 대조영에게 제 5풍 大阿 의 벼슬을 주었다.

2기는 2대왕 大武發시대부터 3대왕 大款 시대 중반경까지 (719-762년경)로서 상호 대럽하던 떼이다. 특히 대무예의 정복사업으로 위협을 느낀 신라는 당과 연결되면서 발해를 견제하였다. 신라는 721년(성덕왕 20) 7월에 발해의 세력 확장에 방비하고자 何 雜道(강풍)의 丁夫 2천 명을 정발하여 북쪽 경계지역에 長城을 쌓았다. 또 733년 당의 요청으로 발해 남쪽올 공격하였고, 당 현종은 이 출병에 보답하기 위하여 대통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 주었다. 신라는 이때부터 적극적으로 북진을 추진하여 748년 大갑城등 14개 짧縣을 두게 되었다. 또 8세기 중반 들어 안록산의 난을 계기로 발해와 얼본이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고, 신라는 762년 5월 발해와의 서쪽 접경 지역에 짝城둥 6개의 성을 쌓아 이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3기는 대홈무 시대 중반경부터 9대왕 大明忠시대까지 (762년경-818) 로서 상호 교류하던 때이다. 이때에 이르러 양국 사이에 상설 교통로가 개셜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교통로를 따라 신라는 여러 번에 걸쳐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발해도 이에 상응하여 사신을 파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단지 두 번의 기록밖에 보이지 않는데, 790년(원성왕 6년)3월에 -吉 伯魚를 북국에 파견하였고, 812년(현덕왕 4년) 9월에 級 正을 북국에 파견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김부식이 저술할 혜에 말해 판계기록을 삭제하다

가15) 잘못 남겨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말해에 파견되었던 당나

15) 이우성, 「삼국사기의 구성과 고려왕조의 청용의식. p.206 창죠.

라 사신 朝彩가 7 6 4년 봄에 발해에서 직접 신라로 갔을 때도 양국 사이의 상설교통로를 이용하였을 것이다.

4 7 1 는 1 。대왕 大仁秀시대부터 14대왕 大f뚫 f암 시대까지 (818-9 26 ) 로서 다시 반목하던 예이다. 발해는 신라의 쇠락을 틈타 당 元和중 (818-820) 에 신라를 공격하여 영토를 차지하였고, 신라는 이를 방어하기 위하여 826년 7 월 午 太守白永에게 명하여 漢山의 북쪽 여러 사람들 I만 명을 정말하여 대동강에 300리나 되는 장성을 쌓게 하였다. 그후 발해에 대한 과거의 우위를 계속 유지하려는 신라와 현재의 실질적 우위를 현실화하려는 발해 사이에 세력경쟁이 빈번하게 얼어나게 되었다. 897 년 당에 사신으로 갔던 말해 왕자 大封짧가 신라보다 윗자리에 앉기를 요구하였고, 869~873 년 사이에는 발헤 烏 않와 신라 李同사이에 당의 科에서의 수석 다툼이 벌어졌는가 하면. 906년에도 신라 彦-握와 발해 오소도의 아들 烏光贊사이에 동일한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5기는 마지막왕 大 시대 (906 -926)로서 발해가 거란의 진출에 대항하고자 신라, 고려와 연계 또는 반목하던 예이다.16) 발해는 거란

16) 이 시기에 대해서는 다음을 창초바랍.

송기호, 「발해 멸망기의 대외관계 ---거란 • 쭈삼국과의 판계훌 충심으로 (聊 史 ) 17, 서용대 국사학과, 1987.

발홍 초기에 거란과 외교관계를 맺어 9 18년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이후 거란의 진출에 위협을 느껴 상호 척대적으로 된다. 그 뒤 거란의 핍박을 경계하여 9 II 년경에는 사신을 신라 둥 주변 여러 나라에 보내어 비밀리에 연계를 맺고자 하였다. 그러나 9 2 5 년 12월 거란 태조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함에 이르러서는 무슨 사정에서 인지 신라가 거꾸로 거란군을 지훤하였다. 그 외에 918-925년 사이에 발해가 고려와 혼인관계 또는 이와 상웅하는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었던 것 같다.

한편 r삼국사기」어l 의하면. 886년 봄에 秋園A(발해인)이 신라의 北 에 들어와 寶露國(f利部)과 黑水園이 신라와 화친하고자 하는 뭇융 전하였고, 9 21 년 2월에는 말갈(발해)의 別部인 훌貼우리가 신라를 공

격한 것을 고려가 물리쳤다고 하는데, 이들은 국가적 차원이 아니라 발해의 지방세력들이 중앙의 통제가 이완된 틈을 타서 개별적으로 신라와 접촉 또는 충돌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 양국의 외교관계의 추이를 개괄하여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더 언급하여야 할 것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자료들은 2기와 471의 상호 대립척언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양국간에 상셜척인 교통로가 개셜되어 빈번한 왕래가 있었음을 고려해 보면 이 사정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가 있다. 현재 말해 자신이 남긴 기록이 없고 신라측의 기록도 삼국사기』등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삭제되어 버렴£로써 양국간의 정상적인 교류에 관한 기록들은 언멸되었고, 단지 외교상 문제가 되었던 사건에 관한 것들만이 단편적으로 살아남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더우기 문제가 되는 사건들은 발해와의 전쟁에서 지거나, 사신 대우 및 과거시험에서 말해에 뒤떨어지는 등 신라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던 사건들임을 고려할 펼요가 있다. 따라서 발해와 신라의 관계를 고려할 때에는 이 점을 충분히 감안하여야 할 것이다.

3

한편 삼국사기, 삼국유사, 崔文昌候全業 入 求法떼禮行記」 동에 나타나는 발해 관계기록들올 자세히 검토해 보면 신라인들이 벌해를 고구려 유민국가로 언식하기도 하고 예로는 말갈국가로 인식히기도 하는 양연성올 띠고 있음올 볼 수 있다. l7)

17) 이에 대해셔는 다읍융 창죠 바람.

송기호, 발해에 대한 신라의 양연척 언식과 그 배경 ( 園史 ) 19. 1988•

신라인들이 발해를 말갈국가로 인식하는 경우 호청변에서 주로 〈벌해말갈). (말갈), (하國〉둥으로 부름으로써 마치 말갈족이 세운 나리언 것처럼 설명하거나, 발해의 원류에 대해서 현래 葉末蘇홉로서 교구려에 옮겨와 알던 말갈 수령 대조영이 세운 나라로서 셜명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고구려 유민국가로 언식하는 경우 호청상 〈발혜), (북국〉등

으로 불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에 대하여 고구려의 옛 장수로 표현하기도 하고, 건국세력에 대헤서도 고구려 유민들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발해를 양면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역사적 배경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대조영 출신의 양연성이다. 그는 말갈 수령의 출신으로 일찌기 고구려에 들어와 고구려언으로 성장하여 장수의 직위까지 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는 발해 사회구조의 이중성이다. 전체척으로 보면 지배계층을 이룬 주류는 촬州로부터 들어온 고구려인들이었고, 일부 영주애서 행동을 같이 한 말잘족도 이에 참여 하였다. 반연에 만주 동부 지역에 남아 있던 대다수의 말갈족들은 피지배 계층을 이루고 있었다.

이상 두 측면은 말해를 말갈국가로 인식하기도 하고 고구려 유민국가로 인식하기도 하는 근본적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말갈국가로 표현하느냐 고구려 유민국가로 표현하느냐는 직접적 계기는 양국 외교관계의 변화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세번째이면서 직접적 배경이 되는 것이다. 즉 양국 관계가 대립적이었을 때에는 자신과 이질적인 존재로서의 말갈국가로 매도하였고, 우호척이었을 예에는 동질적인 국가로서의 고구려 유민국가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양면적 인식들이 후대에까지도 영향을 주어 고려시대의 역사서틀 중에서 r삼국사기 는 발해를 이절적언 국가로 파악하여 우리의 역사법주에 넣지 않았던 반면에 高 經, 歷代年表 , 三國退 . 王 紀』등에서는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 파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과연 그렇다면 거꾸로 문헌들에 남아 있는 발해에 대한 신라인들의 양연척 언식은 발해와 신라와의 관계가 시종 대법척이었던 것이 아니고, 때로는 대럽적이었고 때로는 우호척이었던 엽사척 사실을 반영하는 또 하나의 중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활고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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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金週物의 보존에 대한 현상과 약간의 문제

【李午 】

1 머리말

고고학자들은 땅속에 매장된 고대유물을 발굴하여 고대를 생각한다. 金을 제외한 모든 금속은 발굴과 동시에 급격히 소멸되므로 이를 방지하여 영구적 i로 보존하고 싶은 생각은 고고학자들의 절실한 소망일 것이다.

최근 10수년 동안 금속유물의 과학적 보존처리연구의 성과로 보존 과학의 중요성을 더한층 인식케 되었다고 생각된다.

철제유물의 보존처리 과정중에 합성수지로 진공함침시키기 전의 문제로서 <〉가 있다. 일반적으로 알칼리용액에 담그어 탈영처리하고 있지만 보다 효과척언 方法의 개발이 요구된다. 즉 출토 환경조건에 따라 달염방법울 분류하고, 달염처리에 따른 영향과 알칼리용액 추춤법, 효과적이고 간단한 탈염법 확립과 탈영처리 후 과정인 放처리 개선 등의 재검토가 필요하다.

2 織의

(1) 공기중 부식

철이 부식되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전기화학적인 반응이며 산소, 수분, 전해질에 의해 진행된다.

먼저 철 (Fe) 이으로 되어 용해되는 부위는

반응이 일어난다. 더 정확히 말하면 鐵의 子가 많펀김를 띤 第一織Ion( 二)이 되며 펀子를 갖는다.

이 는 한 개의 전자를 의미한다. 여기에 산소와 수분 그리고 鐵에서 남는 전자(@)는 다음과 갇은 반응이 일어난다.

다시 말하면 산소분자가 물분자를- 분해 하여 펀子의 음전하를 받아 〈水〉라고 하는 음전하를 갖는 별도의 Ion으로 변한 것이다. 이 수산기를 다시 설명하면 대표척 강알칼리인 〈가성소다〉로 화학식은 NaOH이다. 물에 녹으면 다음 반응식과 같이 〈수산기〉를 만든다.

이 러 한 철 Ion이 용출된 부분의 가까이 에 알칼리 성 이 있으면 당연히 양자는 수액 중에서 반응이 일어난다. 이때의 반웅식.은

로 되어 水醒化第-織이라는 물질이 생기는데, 이것이 제일 먼저 생기는 녹인 것이다.

(2) 土짧中의

土壞에는 항상 化物이 존재한다. 이 영화물이 철과 반응하면 Ferric chloride (영화제 켈)로 형성된다.

염화제 철은 물과 반응해서 Ferric Hydroxide(수산화제 철)이 되연서 Hydrochloric acid (염산 : HC) 로 되어 다시 鐵을 공격한다.

이외 부펴1 띈 동물유해에서 언산염을 받게 되면 Ferrous Phosphate(인산제 i 철), Ferric Phosphate(언산제1 철)로 된다. 이 녹은 色을 띠고 있어 으로 착각할 경우도 있다.

3 의

(1) 의

땅속에 있는 물은 염분을 녹여 전헤액으로 된다. 산소가 거의 없는 습한 조건에서 염소Ion은 구리와 반웅하여 Cuprous chloride로 형성된다(백색 Wax와 갇음>.

• (Nantokite: 염화제 I 동)

Cuprous chloride(Cu2CI2 ; Nantokite)는 수분과 반응하여 Cuprous Oxide(Cu20; Cuprite, 척색)와 염산을 만든다.

Cu2CI2+H20 -• CU20+2HCI

(Nantokite: 영화제 x 동)

Cuprous chloride (Cu2Cl2 ; Nantokite) 는 수분과 반응하여 Cuprous Oxide (Cu20 ; Cuprite, 척 색 ) 와 염 산을 만든다.

Cu2C!z + H2 0 -• Cu20 +2H CI

• (Hydrochlorica cid;염산)

염산은 구리와 그리고 산소와 함께 반응하여 Cuprous chloride로 된다.

4C u+4H CI+02 - • Cu2Cl2+2H20

유물표연에서 Cuprous Oxide ( 化 )은 용존 이산화탄소(C02 )와 반응해서 Basic cupric carbonate (염기성 제1동 ; 2CuC03 • Cu(OH)2 ; Azurite)가 된다.

2CU20+2H20+2C02+02- •2 CuC03 - CU(OH)2

• Azurite

출토된 청동 즉 Cuprous chloride는 과량의 산소와 수분이 반응해 염기성 영화제 1동 (Basic cupric chloride; Paratacamite)으로 되며 이것을 보통 청동병 (Bronze Disease) 이라고 한다.

2CuCl2+ 4H 20 +02- • CuClz· 3C u(OH)2+HCI

遊된 염산 (HCl)은 다음과 갇은 몇 가지 반응을 한다.

구리와 반응해서 더 많은 Cuprous chloride를 형성한다.

Cuprous Oxide (Cuprite) 와 반응해 서 더 심 한 Basic cupric chloride(Paratacamite ; Bronze Disease) 로 된다.

2Cu20 +2HCI+2H2 0 +02- •C uCl2-3Cu( OH)2

Basic copper carbonate와 반응해서 Basic cupric chloride가 된다.

2C uC03 -Cu(OH)2+2H CI+2H2 u( OH)2 + 2H 20 +

2C02 • Paratacamite

4 금속유물의 보존처리과정

(1) 보존처리전조사

O 기록카드작성

。x선 촬영에 따른 내부구조 조사

O 기기분석애 따른 材

(2) 騎(녹)의 제거

기계적 방법

O 전해환원 (Electrolytic Reduction)

O 정밀분사가공 (Air Brasive)

O 유리섬유솔 (Glassbristle)

o Vibrotool

。치과용 소도구 등

약품처리방법

o Alkaline Glycerol

o Alkaline Rochelle Salt

o Alkaline Dithionite

。Ammonium thiosulphate

(3) 탈염처리

o Alkaline Sulphate

o Lithium Hydroxide

。Sodium Sesquicarbonate

(4) 탈알칼리처리

O 냉온수교체법

(5) 防처리

o 3% Benzotriaz 이 (BTA)

o 0.3% Dicyclohexly Ammonium Nitrate(DAN)

(6) 操- 定)

。Solvente Drying

O 전기열풍식 건조

(7) 경화처리 --Jo (중량측정)

。20% Ruscoat(진공항침기 이용)

。15% Incralac (진공함칭기 이용)

o Paraloid B72 (진공함칭가 이용)

。Microcrystalline Wax

。15-20% paraloid B72 (0.2% DAN첨가

(8) 접착 및 복원

o Araldite SV427 (Epoxy 계 )

。Cellulose계 접착제

o Microballoons

(9) 마무리 손질

(10) 보존처리 후 조사

O 보존처리방법 기록

。사진촬영

。보관

금속의 보존처리는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 것과 비슷하며 I) 은 찰, 2) -9) 는 치료에 해당된다.

5 보존처리에 사용되는 주요 기계장치

(1) x-선 발생장치

목제품은 대체로 언간의 신체정도의 두께이므로 인체투시에 사용

는 의료용 x-선장치 (약 일반 Volt) 가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유화에는 이 장치의 투과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Contrast( 明)가 없어지므로 이보다 낮은 Volt의 x-선장치가 필요하며 이런 軟x-선 장치는 시중에 판매되고 있다. 포 금속이나 도자기는 의료용 x-선으로는 투과가 불가능하므로 수십만 Volt 공업용 x-선 발생장치가 필요하다.

이 공업용 x-선 발생장치로 금속유물을 투시촬영하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내부구조 및 상감된 문양 둥의 판독이 가능하게 되느로 이 장치는 짧!훨유물의 보존처리에 꼭 필요하다.

(2) 형광x-선 분석장치

이 기계는 유물을 파괴하지 않고 분석이 가능한 이점을 가지고 있다. 필자의 연구소에 셜치된 이 비파괴분석장치는 모든 문화재에 폭넓게 사용되는 중요한 기기 중의 하나이다.

이 형광 x-선 분석은 알고자 하는 재질의 유물에 x-션을 발생시키면 유물에서 그 고유한 제 1차 x-선을 방출한다. 예를 들면 鋼, 주석, 납으로 만들어진 청동불상에 제 I 차 x-선을 투사하면 각각의 원소에 정해진 x-선 파장이 z차 x-선으로 방출되므로 그 파장을 조사하면 어떤 원소가 존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으며 또 그 원소들의 존재량도 알 수 있다. 이때의 z차 x-선은 I 차 x-선보다 파장이 길다.

(3) x-션회절분석장치

형광x-선 분석장치는 금속원소를 알기 위한 목척으로 사용되나 화합물의 성분까지는 알 수 없다. 예를 틀연 청통제품 표면에 청녹이 생성되어 있올 때 이것올 형광x-선 분석을 한다 하여도 결과는 구리(eu)의 존재만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x-선회철분씩장치로 분씩해 보면 이 청녹이 짧化鋼언지 아니면 藍基性릎化鋼인지훌 알 수 있는데, 이렇듯 x-선 회철분석장치는 화합물의 성분까지 죠사가 가농하다.

(4) 정밀분사가공기(Air Brasive)

이 기기는 고압공기 또는 질소가스와 미립자 glass powder를 사용하여 노즐 (nozzle)을 통하여 초음속으로 가스와 Powder가 동시에 분사되는 원리를 이용한 장치로 불필요한 녹 (rust) 또는 오염물질을 제거한다.

이 장치의 특정은

CD 10-5 。μ 의 powder 를 사용하기 때문에 피가공물에 거의 충격을 주지 않는점

고압공기 또는 질소개스의 압력을 필요에 따라서 적절히 조절할 수 있는점

가공시에는 열을 받지 않아 열에 따른 손상이 없다는 점 등이다.

이 방법은 鐵退物의 철녹 빛 이물질 제거와 미술품 세척(cleaning) 에 폭넓 게 사용되고 있다.

(5) 含漫장치

금속제품을 공기중에서 안정시키기 위한 것드로 먼저 금속제품을 진공함침장치 속에 넣어 함침기내의 공기와 금속내에 존재하고 었는 산소 • 수분 풍을 홉출시켜 진공상태를 만든 뒤, 이 상태에서 합성수지 (Ruscoat, Incralac, Paraloid B72 둥) 를 주입 시 켜 잠기 게 하여 금속 내부까지 합성수지를 침수시킨다. 이것을 용기 속에서 꺼내어 수지용액이 굳으면 금속제품은 안정화된다.

6 맺음말

발굴시에 금속유물이 녹으로 형성되어 있더라도 보통 원형은 어느 정도 찰 남아 었다. 그러나 발굴 후 2-3년이 경과하면 유물의 원상옳 알아불 수 없을 청도로 급격하게 부식이 진행되어 유물 본래의 형태훌 파악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발굴과 동시에

부식방지 보존처리를 실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발굴 후 2-3 년이 경과하여 유물의 파손이 진행된 후에 본격적언 보존처리를 한다 하여도 발굴 당시의 형태는 얻지 못할 것이다.

보존처리 후 보관에 대해 대부분의 유물관리 담당자들의 생각은 보존처리가 된 유물은 더이상 부식되지 않고 영구적으로 보존되는 것으로 믿고 있다. 물론 보존처리자들도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은 유물관리 담당자들보다 더 없는 바람일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부식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다는 것을 마음 아프게 생 각한다. 따라서 부식 이 란 용어 가 Corrosion Provention•Corrosion Protection-Corrosion Contr이로 점차 완화되면서 변해온 것을 강이 있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l)

1) 손운택, 금속쭈식학. 남영문화사, 1981, p. 284.

이러한 용어의 변화과정을 볼 때 완전하게 부식을 방지한다는 것은 어려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보존처리가 된 유물은 적합한 온 •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면 이러한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것으로 믿어진다. 급격한 온•습도의 변화와 표변에 먼지 부착 등 금속유물에 악영향을 주는 환경조건하에서 보관하면 보존처리를 실시한 유물일지라도 새로운 부식이 진행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규정된다.

따라서 특수 진열장을 셜계 제작하여 온 • 습도를 조절할 수 있는 시셜을 갖춘다든가 아니면 투명아크릴 진열상자를 제작하든가 폴리에 철렌 비닐봉투 또는 유백색 폴리에철렌 멀며l 용기를 구입하여 건조제(Silicagel)를 충분히 넣어 멀며l 시켜 보관한다연 새로운 부식진행을 막을 수 있는 합리적인 보관판리방법이라 하겠다.

활고문헌

lone Gedy, Henry Hodges, Andrew Oddy, Notes for a short course in conservation, The british museum research lab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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保全事業의 提唱

【李相洙】

「고고학 연구에 있어서 자연과학의 응용」에 관하여 토론케 되었지만 이 학회의 첫 모임이며, 또 이 분야가 행정적으로나 실제 예산뒷받침에 있어서 워낙 미진한 감이 있어 보전사업의 활성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돗에서, 언급하고자 합니다.

근래에 들어서 우리나라에서는 각지방 도처에서 많은 발굴이 시행되고 있다. 이혜 발굴은 그 지역사회의 교육문화의 중추역할을 하는 대학이 대부분 우선척이며, 다음으로 국립박물관이 간흑 참여하는 수가 있다. 여기 발굴을 칙접 주도하는 기판들은 발굴의 이유, 목적과 성격올 찰 숙지하며 깨닫고 있기 때문에 발굴 과정에 대해서는 그리 염려할 것은 없다고 본다. 이러한 발굴로써 고고학 연구에서 미진했먼 부분들의 엄청나고 놀라운 자료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를 크게 2종류로 구붐해 볼 수 있다. 하나는 표출된 유척 (Archaeological Architecture) 이 고 둘째는 출토유물(C비tural Property) 언 데 , 이 들의 항구척 보전이 품제다.

출토된 고고학척 z종류 문화재들은 우선, 발굴 후 짧은 기간 1-2년내에 작성훨 보고서에 수록될 많은 〈쓰임거리〉를 제공하는 수수께끼 같은 성격율 스스로 갖고 있다. 그리고 차후에는 연구실에서 본격척으로 고고학융 위한 그 자체 대상물로서 두고 두고 연구케 되는 영훤한 유물로, 출토지 제 고향올 벗어나서, 그시대의 전시설 진열창에

올려지는 당당한 문물 작풍으로서 소임을 할 것이다.

필자만의 소견일지는 몰라도 이러한 일련의 학문파업을 버유한다면, 어머니와 자식 (母子) • 그리고 그 母子 의 연구로 상정될 수 있다고 본다. 수백 •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잉태하고 있던 어머나유척에서 자식, 유물을 〈낳게 하는 일〉즉 발굴은 순간이지만, 잉태한 어머니의 문화와 동기, 성격 그리고 자식과 또한 그 판계(위에서 언급한 〈댐»를 연구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순간이 아닌, 세대가 바뀌면서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말없이 깨어난 자료, 즉 〈어머니와 자식의 보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현재 우리는, 우리시대의 학문척 홍분, 그리고 성과, 안목의 단계에서 벗어나 다음 세대에서도 그 감격을 느낄 수 있도록 분명한 과학척 물리차원에서 그것을 보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보전 (Conservation) 이 란 개 념 은 Bernard. M. Feilden(1979년 당시I.C.C. Rom 소장) 의 글 “ Introduction to Conservation of Cultural Property" (Paris, UNESCO, 1979) 에서나 우리나라 문화재위원언 李泰寧교수의 「문화재의 보존철학의 발전과 補修의 倫理規.範J (문화재 14호 1981)이란 논조에서 다음과 같이 7가지 범주의 사업으로 보았다.

化 防·惜置(Prevention of deterioration)

保存(Preservation)

補彈(Consolidation)

修(Restoration)

製(Reproduction)

復元(Reconstruction)

許 (Revaluation)

이러한 사업은 진행 중 그 방법론(Conseπation Methodology) 에서 보전은 어떤 개개의 처리에 있어 7개의 범주 중, 하나에만 속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여러 처리과정 단계에서 몇가지 법주의 것이 동시에 활가피하게 수행된다. 그리고 철학척, 섬미척, 과학척, 기술척으로 청연한 그 논리로 부동산품화재 및 동산문화재에 사용된 물철의 부식악화의 메카니즙을 이해하고 미래에 있어서도 그 품화재의 생명옳 연장시키도록 하는 것에 보전학문의 뭇이 있기 때품에 보천 집행자는 그 요건언 섬미척인, 역사척언, 콰학척 그리고 기술척인 각 분야천몸가

들이 모여서, 어느 분야도 치우치지 않는 같은 차원에서 대단히 훈련된 몸에 배 언 지 극한 직 엽 의 식 을 소유한 소위 (Inter-professional) 한개인 입장들 아래서 각기 전문성을 인정, 존중하며 서로 도와서 공헌함으로써 이 사업은 훌륭하게 이룩된다고 주장한다.

필자의 소견으로도 앞으로 보전사업은 지각있는 선구자적 업장의 문화사업 당국들이 관심을 갖는 분야임이 분명할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 학회는 순수한 학문적 동기에서 모인 각 분야별 젊은 학자들이 자못 그 예견되는 성과가 훌륭한 것으로 믿으며 학문적 관련정보교환의 필요성이 고조되는 시기에 척절한 모임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앞으로 학회 회원들의 관심에 따라 보전사업의 견인차 빛 엄정한 충고 자 입장에서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확신한다.

다음 아래의 보전사업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에 관한 도표로 참고하길 바란다.

HOW CONSERVATION WORKS

初期鐵器時代와 原三圍時代

【鄭 元】

종래 청동기 기, 청동기시대 후기로 불리우던 기원전 300 - 0년 사이의 300년간은 근래에 와서 새로이 초기철기시대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특정은 한마디로 단단하고 실용척인 철기의 출현에 의해 세형동검으로 대표되는 청동기는 점차 철기화되어 가고 새로이 정토대토기 및 혹도가 등장하는 시기이다.

점토대토기의 출현은 함께 출토되는 청동유물의 검토에서 대개 기원천 4세기대의 어느 시기일 것으로 생각되었고, 그 형태는 시기가 지남에 따라 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아가리 주연에 돌린 점토대가 단연 원형에서 삼각형으로 바뀌며 또 그릇모양도 最大 이 몸통 아래쪽에서 점차 위로 올라가 화분모양파 버슷하게 된다.

결국 이와 같은 검토대토기의 시기를 초기철기시대라고 할 수 있으나, 기원전 4세기대의 철기는 북쪽 일부지역에만 국한되고 있올 뿔이고, 실제 남부지방에서는 단연 훤형 검토대토기단계에도 아칙 철기가 출토되지 않고 있다. 금후 남부지방에서 이 단계의 유척에서 철기유물이 출토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북쪽으로부터의 수업품얼 공산이 크며, 단면 삼각형 정토대토기단계에 와서야 남부지방에서는 철옳 생산

하고, 철기를 제작하는 명실상부한 초기철기시대로 접어드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단연 원형 점토대토기에서 단연 삼각형 점토대토기에로의 전환시기, 즉, 남부지방에서의 초기철기시대의 시작은 언제좀일까? 그것은 아마 위만조선의 건국시기인 기원전 194년경부터가 아닐까 추정된다. 왜냐하면 위만의 出自는 차치하고라도, 그 자신이 철기문화가 융성한 빡나라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른바 위만조선의 개시가 남부지방에서의 본격적인 철생산 및 철기보급의 칙접척언 계기가 된 것으로 믿어진다. 이러한 사실은 기원전 2-1 세기의 유척인 삼천포 勳島유적에서 남부지방에서의 철생산을 시사하는 板狀鐵 및 철기보급의 보편화를 의미하는 鐵刀子, 뿔로 만든 刀子炳이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다고 하겠다.

2

기원 I 세기부터 3세기까지의 3 00년간은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역사학 쪽에서는 〈三韓時代), (初三國代〉또는 〈三國時代前 〉라고도 하고, 고고학 쪽에서는 〈金海쩨), (金海時代), (禮川文化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외에 삼국시대의 원초기 또는 원삼국시대란 뭇으로 〈原三國時·代〉로 주장하기도 하고, 또 이 무렵을 〈초기철기시대〉로 부르는 학자도 있다.

이와 같이 이 시기를 어떻게 부를 것이냐에 대한 의견이 역사학계와 고고학계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같은 계통내에서도 서로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三陣時代〉라는 것은 중국의 史, 특히r三園志 來寅傳」에 따른 시대명이다. 그러나 三韓은 결국 南韓중심의 시대명이라는 이유 빼뭄에 사용융 기피해 왔다. 그러나 실제로 이 우렵의 유척을 발굴해 보면 훨홉 東寅의 내용과 너무나 찰 얼치하고 있기 혜문에 〈변한시대유척), <진한시대유척), <마한시대유척〉등흐로 찰 활용하면 오히려 유척 또는 시대척 성격이 더욱 부각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고학적으로 이 시기를 〈金海), (金海), (熊川文化〉등으로 부르고 있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고고학에서는 어느 특정한 유척을 발굴조사하여 그 유적의 문화내용이 어느 특정시기의 문화내용을 잘 반영하고 있다면, 이를 표식유적 (type site) 으로 하여 그 유척명을 따라 시대명으로 하는 것은 널리 이용되고 있는 보면적인 방법이며, 이는 유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표식유적, 표식유물을 이용하는 것은 어느 특정한 시기의 문화적 내용과 문화적 계보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오히려 유용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주지하다시피 〈三代〉라는 것은 『三國記 의 초기기록을 그대로 신벙한다는 전제하의 시대명이다. 그러나 실제는 이 시기에 북쪽에 위치한 고구려의 존재를 제외하고는, 왕국 o 로서의 백제와 신라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시기이므로 〈三圍I代〉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데는 많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原三國代〉란 고고학과 문헌사학 양쪽의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검원용 교수가 제창한 시대명£로 현재 학계에서는 상당히 정확되어 있는 용어이다. 이외에 〈土辯 代〉와 같은 토기문화를 기준으로 한 명칭도 없지 않지만, 보다 합리척인 명칭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이미 보편척으로 사용되고 있는 〈原三國代〉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3

발표자는 청동기시대 후기인 기완전 3 00년 사이의 3년간을 초기철기시대로 규정하고, 이때를 원사시대로 보고자 하였으며 앞으로 역사시대의 상한이 여기까지 거슬러올라갈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 하였다.

지금까지 청동 기, 청동기 혹은 무문토기시대 후기, 철기 1기 둥으로 혼란을 일으키고 있던 이 시대률 철기에 주목하여 철기시대로 통얼하여 부르는 것은 매우 합리척이라고 생각한다. 단 운제는 구켜기시대 이후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얼관성 있게 지청되어 오면 材質중성의 시대명과는 달리 〈初期〉라는 단서가 랄련 점이다. 이 뒷시

기에 별도의 철기시대를 설정하지 않으면서 초기철기시대로 명명하는 것은 어색하다. 따라서 鐵器時代의 초기라는 하나의 小I휩예 셜청은 몰라도, 독립된 한 시대를 지칭하는 명청으로는 부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음 초기철기시대가 3 기로 세분될 가능성은 충분하며, 그 중 특히 중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음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시기에 한자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추정되어 왔던 사실이므로, 茶戶 에서의 붓의 출토와 里貝爆에서의 珠 의출토가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다호리 출토 붓이 반드시 한자와 관련되는 유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들이 이때를 역사시대로 꿀어올릴 새로운 조건이 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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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大學敎 館, 勳住居址. 山大學校ttlJ物館遺 調告第13,1989.

전남지방 馬韓小圍比定地에 대한 고고학적인 검토

----千寬宇說과 支石 밀집분포지역과의 대비

【李榮文】

1 서언

전남지방은 우리나라 어느 지역보다도 支石가 가장 밀집분포된 지역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것반도 I 만여기 이상이어서 다른 지방파는 달리 지석묘가 오랜 시일에 걸쳐 축조되었다고 하겠다.

전남지방은 지리척으로 우리나라 서남단에 위치하고 북으로 노령산액과 동으로 소백산맥 A로 가로막혀 있£며 서 • 남으로 바다와 언첩해 었다. 이와 같은 지리척언 환경은 타지방과는 달리 외부로부터의 선진문화를 다양하게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을 한정시켜 독륙한 지석요 문화를 성럽시킬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전남지방의 지석요에 대한 연구는 197。년대말부터 본격척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으며, l) 1983년부터 연차척으로 각 那別지표조사가

I) , 「全南 方所在支石의 式과 , (11) 78, 1978, pp. I-5°·

崔, 「全南 方支石와 階.의 生 , (究) 39, 1981, pp. 1-14·

崔 , 「全南 方支石 의 年 , () H. "4, 19~b, pp. 1-10. 李 文, 「全南 方支石의 性格) :l0, 1987, pp. 79-1I:l·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보다 정확한 지석묘의 분포가 파악되었다. 그 결과 지역별 지석요 분포수가 밝혀졌고 또 일정한 지역에 지석묘가 밀집분포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지게 되었다.

최몽룡은 지석묘사회가 토착농경사회에 바탕을 두면서 그 세력이 파따의 小l웰들로 발전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하였다(주 I 참조). 최근 들어 몇몇 학자들에 의해 고고학적인 성과를 인용하여 지석묘나 청동기를 통해 삼한사회를 이혜하려고 하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2)

이러한 추세에 비추어 필자는 전남지방의 지석묘들이 일정한 지역에 분포권을 형성하고 있는 점에서, 이 분포권과 小國으로 比定된 지역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작업은 전남지방 이외의 지역에서의 ,輪小國들과 支石꿇社會와의 관련성 여부, 支石짧의 하한과 땀합의 상한의 설정, 位置比定地에 대한 논란의 여지, 마한사회를 형성한 사회 • 문화적인 요소 및 그 배경 등 여러가지 선결해야 될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보다는 단지 千찮宇씨가 比定한 馬韓小國들과3’ 지석묘 멀집분포지역을 대비시켜 보고 이들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 • 유척도 아울러 살펴보고자 한다.

2) 惠, 三-形盧過程究. 關, 1984

3) 千. 「. 小園의 置. (東洋 ) 9. 1979

2 전남지방 지석묘 밀집분포

전남지방 지석묘의 분포상은 지리척으로 소백 • 노령산맥이 통과 북으로 가로막혀 있어 크게 영산강유역, 보성강유역, 서해안지역, 남해안지역 등 4개지역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지역군 설정은 지석묘의 분포수와 분포도를 파악해 보기 위한 편의상 구분에 불과하기 예품에 앞£로 지석묘의 형식이나 출토유물, 그리고 주변에서 발견되는 각 유척들의 문화척인 특성을 통해서 상호버교 고찰이 이루어진 후에야 비로서 지역척인 지석요문화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올 것이다.

그러나 훨자는 우선 전남지방에 분포된 지석묘를 지역척으로 구훈

표 l 전남지방 지석묘 분포표

이 표는 지금까지 발표된 조사 보고서와 (文化 i 總 )(全雜南遊, 1987) 을 토대로 작성하였으며, 각 지역별로 조사된 미발표 지석묘 수도 포함된 것이다. 특히 미발표 지석묘는 필자가 조사한 것과 木 大 盛 .洛 敎授의 자료 제공에 의한 것이다.

해 보고 더 나아가 밀집분포된 지역과 千찮宇가 위치비정한 , 韓小國들과") 대비시켜 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조사된 지석묘의 지역별 분포

4) 마한小國들의 位 比定에 대해 三의 新(三», (學報} 第4 卷, pp.31-~7)는 전남지방에서 州南, rMi경! 등 6개 지역을, 千宇 小園의 {立tn 헥誠), 洋學) 9, 1979) 는 지역을 각각 比定하였는데, 本考에서는 논란의 여지는 있£나 비교척 많은 지역을 比定한 千똥宇R 의 見.隔를 따르기로 하겠다.a::는 13 개 小國 素半國, 新國은 未比定하고 不 園은 定的으로 比定하였다. 比定地는 다음과 같다.

표2 全南地方 地域別支石 分布統計表

수는 위와 같다(分布 는 〈1•2 창조».

표 에서 본 바와 같이 분포수는 남해안지역이 가장 많고 영산강, 보성강, 서해안지역 순이다. 지역적으로 인접된 영산강유역과 서해안 유역보다 남해안과 보성강유역이 수적£로 더 많다. 또 군집별 명균분포수도 냥해안지역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보성강, 서해안, 영산강 유역 순이다. 이러한 분포상황에서 영산강유역 • 서해안지역과 보성강 유역 • 남해안지역으로 크게 나눌 수도 있겠다.

이러한 지역별 분포수에서도 일정한 지역에 지석묘가 밀집분포권을 형성하고 있어 주목된다(그렴 이는 그 지역에서 지석묘가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축조되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지역별내에서의 밀집분포권을 설정하고 千寬宇民의 馬韓諸小國의 位 比定를 대버시켜 보면 표 3와 같다.

표 3에서 밀집분포지역은 z。개 지역으로 나누어보았으나 19, 20을 제외하면 18개 지역이 된다. 이들도 분포수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분포는 전남지방의 지석묘 밀집분포지에 따른 운화의 성격을 버교 파악해 볼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모든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언 조사가 이루어진 후에 가농한 것이기에 여기서는 밀집분포된 콧만을 중심드로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폴 토대로 하여 그 문화척인 성격을 언급해 보고자 한다.

(1) 영산강유역

영산강유역의 지석묘 분포상운 명야지대인 岩, 羅州, 하

그립 1 전남지방 지석묘 분포도 (0안의 숫자는 표 3 의 번호임)

류지역에 가장 밀집되어 있고 산악지대인 상류지역으로 갈수록 멀칩 분포 빈도가 낮다. 그러나 和順石川, 威 羅山, 羅州 金川 둥은 영산강 支流나 상류지역에서도 밀집분포된 곳이 었다. 이 지역들 중 靈岩, 威등은 옹관묘 분포지와 동일지역 또는 인정지역임이 주목되고 있다.

전남지방에서 청동기가 일팔로 출토된 지역은I順大里5)와 威草浦里6)의 石格훌훌, 그리고 용범이 일괄로 출토된 靈岩月出山근처 7)일대인데 이콧은 모두 영산강유역이며 그 주변 일대에는 지석묘가 멀집분포되어 있다. 이들 지역은 〈표 3>에서 본 바와 같이 훌훌岩• 和順이 마한의 一小國으로 비정된 지역이어서 지석묘의 밀집분포지와 청동기 출토지역 등이 馬韓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영산강유역은 타지역에 비해 버교척 많이 조사되었는데 그중 光州松岩洞이나 靈岩長川里에서 발견된 떼形住居址는8) 지금까지 충남과 전남지방에서만 발견된 주거지 형태로, 金正基는 이러한 주거지가 마한 문화요소 중 하나일 것이라고 시사한 바 있다.9) 영산강유역의 주거지나 지석묘의 발굴에선 아직까지 石創이 한 점도 출토된 바 없으나, 灌 齊月里, 永*里, 靈岩林里, 長城里, 務安明 山里등에서 10) 石創이 발견된 척이 있다. 그러나 그 출토수는 보성강

5) 趙由典, 「全南 遺 一括出土遺 . 尹 炳 士回甲 1984. pp. 67- 1 °4.

6) 李健. 園立光써 館• 全 南道,1988.

. r物짧新뼈」第186했 (1987. 2. 27) 石石格 에서 細形 4점, 정, 없 청 정, 청, 挑 점, 청동방융, 숫돌, 牛決形玉 둥 26여정이 출토되었다.

7) 林炳 , 「훌岩出土 隔 에 대하여 三佛 元 軟 停年退任紀 考古 鷹. 1987. pp. 121-

.8) 崔흉龍, 光州松岩 住居 . 忠孝 支石 . 全南大훌校f• 1979· 崔盛洛 岩 川 住居址 木浦大 4冊( ) ·6冊, 1986.

9) 正基, 「.벌에서 見된 住居址 (屬•• 百 文化) 3 정 • 1979·

10) 崔 月里의 石 文化 (湖南文化 究) ,정 1973 PP. 1-2 4. 文• 崔仁훌, 方의 先 遺 J. 文化

J. 全南大 校湖南文化 所• 198,. pp. H - 183.

崔 「月出山의 先훌遺 (文化 ) 7, 1975, pp. 6'-78.

先史遺. (土文化) 1984

崔훌훌洛, 「先史遺. 古 , 文化. 木 1986•

표 3 全南地方支石훌훌 分布地域群및 馬韓位置比定地(千寬宇說)

번호 밀집분포지 지석묘 주변발견유적 및 .펀합位 麻考 앞수’ 청동기 뭔比定 國(千찮 宇) I 했훌깜 月出山 주 6II 기 •始 終面 좋R 빨뿔 변(영암 덕진, 신 出土 網활, 創 북, 군서,서호, re 頭 i 뼈 학산, 미암면) ·팎鋼뚫 鎔 Wi 一 括 ill 土 •西 뼈IDi 표川및 -離國 팎휠혜짧 I 팡代 住 居J:I1: •f따 짧岩 ill 土 뻐 l 形훨헨웠 11 •쩌 H 文鏡 z 威 zp 짧山川一帶 347 기 •維 山뼈 핸 iin ill R 잉 S 경?즈F 光山의 언 (나산, 대동, 월 石챔꿇 i 압¥웹~퓨 國( ?) 접지역인짧 야연) 一抱 出土 gI雲新 州 老安面 •뼈 樹面 月山뿔 國( ?) 에 89 7 1 가 出土 網 x (짧州 • 分찌 i 되 어 •짧 山 •月 也폐에 光山으 있음 g 쩔*담훌등 分찌 i 로比定) 3 ¥싫싸 l 쫓{훈 .1lI~ 652 71 •뺨 i 펠土城(쫓{훈) 面-.뺨(다시, 문 ·뚫格꿇 分布地 명, 왕곡, 동강, (홍待, 洞江) 공산면, 나주시) ·짧南面 팎松멜 出土銀創 4 훌훌州 金川一帶 29 2 기 •훌 훌格훌훌 分 ;(p地 (세지, 봉황, 영 앙 금정연). ’*(t l능)(주홉 , 짧화石순川,一 帶도 236 71 ·*道홉씁훌훌 大홉~훨뿔킹 石옳 離~ll 國來 뿜 곡, 도암얼대) 一括出土 (績州) 6 훌훌光那-帶 (흥 32371 莫盧園 全北 홉훌 k 농, 백수, 대마 파언접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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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역에 비해 아주 빈약한 편이다.

영산강유역의 支石輩에서는 유물이 石室內에 부장된 예가 없으며, 또 출토유물도 매우 빈약하다. 鍵岩長川里에선 뻐l形鋼創片과 創把頭椰이 발견된 것 이외에 출토유물은 석기류나 토기 몇 점에 불과하다. 이처럼 유물이 빈약한 것은 타지역 특히 보성강유역의 지석요와는 매우 대조척이라 하겠다.

영산강유역에는 버옥한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先史時代후터 토착 농경생활올 영위할 수 .있었던 지역이며 이를 배경£로 세력집단이 형성되었올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농경을 통한 경제척인 부훌 촉척하였을 것이고, 또 이를 기반으로 지석묘를 그들의 묘제로 채돼하였을 것£로 생각된다.

(2) 서해안지역

서해안지역은 모두 서해에 인접되어 4개의 집중분포지를 보이고 있다. 이콧도 비교적 넓은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곳인데 아직 고고학적인 조사가 제대로 실시되지 않아 그 당시 문화의 성격을 파악할 수 없는 실정이다. 南쇄‘ 公 貝은 철기시대 대규모의 생활유적이지만,ll) 그 주변에서 지석묘가 29기밖에 발견되지 않아 이

11) 盛洛, (濟南 貝 ) 木館 第8m, 1987.

樓과 지석묘와는 무관한 유적엄을 알 수 있게 헤준다. 다시 말해서 지석묘가 철기시대애는 이미 소멸되었던 묘제임을 시사해 준 것이라 하겠다.

일대에는 弘파 • 大 • 白 而에 각각 100기 이상이 군집되어 있으며 직경 15km내에서 3 개의 밀집분포권을 보여주고 있다. 南玉面 일대는 해남만의 남안으로 산이반도를 따라 분포되다가 분지를 이루고 있는 玉 에서 16271 가 집중분포되어 ·있으며 ·海南花山• 縣山面일대에는 珍島古뼈 • 웹內面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다.

서해안지역의 지석묘 밀집분포지역 4곳 중 표3 에서 본 바와 같이 짧光, 海 山, 珍島 內등 3콧이 마한의 一小國으로 比定된 지역이어서 이 지역도 영산강유역과 같이 지석묘와 마한의 小國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엄을 보여주고 있다.

(3) 남해안지역

남해안지역은 짜·패, 寶城潤을 따라 대개 5개 지역에서 밀집분포를 보여주고 있다. 강진만은 江업구로 강변지역보다는 灣의 동안언 七良폐에 18 3 기가 밀집되어 있고, 표興킹1s 일대에는 憶佛山과 天冠山 일대에 그리고 興來江• 過 일대에 밀집분포를 보이고 있다. 島일대에도 7 여기 이상이 분포되어 있다. 이 지역 이외에도 麗川突山, 光隨, 昇 울 등에도 상당수가 붐포되어 있다. 12)

12) 「, (松) 附立中央椰, 1986.

李榮文, 「光關 先史遺 輯告 , 光 文化遺 全

1983. pp. 27-64.

李榮文, 「昇州의 先 昇·州都文化遺地表調. 昇文化院. 1984. pp. 27-24.

이 지역에서 발견된 유척에는 長興 山몇에서 발견된 후기 無文土器주거지 13)가 있으며, 보성강유역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는 有華有漢式石創이 山面차동, 夫山용반리 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또 高興雲 支石에서도 形鎬劍과 有炳式石劍이 출토되어 14) 유물상으로 보성강유역과 유사점이 많다 하겠다. 11합天市언근에는 慶南에서 많이 발견되는 二段炳式石 이 발견되었다. 또 고홍 소록도에서는 점과 石 점, 三角形石鍵점이 발견된 바1 S) 있으며, 보성 봉능리에서는 有華式石 , 鎬片, 石 이 지석묘에서 출토되었다.l6) 또 최근 園 洞과 洞의 支 굴에서 , 管玉20여 점, 석검 등이 출토되었다.

13) 崔慶 • 李榮文, 「 山里無文土 (考古美術) 153. 1982, pp. 2。 -27·

14) 小團夫, 朝활古代遺의 遍@. 六興出版. 1986. pp. 216-217.

15) 緣原末 • 훌田亮짧. (朝 文化홉훌) 1, 餐 . 1947. p.6o. 有光敎 , 1959·

16) • 成洛俊, 水提支石 , 園立光l써博物館, 1984.

이 지 역 중 高興과 長興• 麗水가 馬 一小國으로 각각 比定되고 있는데, 楚鼎國으로 비정된 興南일대에서 833 의 지석묘가 밀집분포되어 있어 ‘輸의 小國과 支石와의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하겠다.

(4) 보성강유역

보성강유역의 지석묘는 중 • 상류지역에 밀집분포되어 있다. 總江의 지류인 보성강유역은 산악지대로 협소한 계곡과 그 주변에 충척평지가 발달되어 있으며 지석묘의 분포상은 루렷이 구분되어 있지 않지만 대개 4개 지역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보성강유역의 지석묘 분포는 城木츄洞面에서부터 시작하여 뚜렷한 지역적인 구분이 없이 寶城白面까지 강을 따라 분포되어 있다. 이 4개 지역 중 福內• 票於面일대는 직경 lokm 이내이나 양지역에서 각각 2997, 28 5 가 분

포되어 있어 별도의 지역으로 셜정할 수도 있다. 이 지역은 주암댐 수몰지역으로 3여기 이상의 지석묘가 발굴조사되어 타지역에 버해 지석묘 성격이 많이 파악된 지역이기도 하다. 이 지역의 지석묘에서는 形網과 網銀등 청동기가 발견되어 지석묘와 초기 청동기문화와의 관련성을 시사해 주었으며 석설구조냐 출토된 각종 유물은 榮山江流域의 지석묘문화와는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또 섬진강 하류지역인 求禮냉천리에서 有華式石創l 이 출토된 바 있는데, 이도 보성강유역의 지석묘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유물임을 말헤주고 있다. 마한의 小國으로 비정된 城福內일대에서 철기시대의 유적이 祝內詩川맺, 文챈 양동리의 구흥상에서 발견된 바 있다. l7)

17) 夢 • 李榮文, 「住 沒 考古分 關흉報告 住岩 圖 文化遺뼈報告. 全南大 校 物t 985-

3 마한소국 위치 비정지의 검토

여기에서는 千월宇가 比定한 펌햄.小國들에 대한 고고학적 유적과 지리적인 환경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순서는 주4의 번호순에 따랐다) •

(1 ) 靈光: 莫 國

짧光은 全南의 西北部로 西海와 접해 있고 명야로 散과 연결된 지역이다. 靈光地方에서는 弘( 10 5 기) , 白빼 (II3 기) , 大馬( 10 5 기)에 집중분포되어 있으나 弘과 白빼는 서해안과 접해 있고, 大馬는 鍵光과 全北大山面과 명야지대로 이웃하고 있다.

靈光일대를 兪昌均은 古뼈國(짧山面)으로, 鄭寅普는 覆新園(都南面南昌里)로 비정한 바 있다. l8) 莫盧園에 대해 鄭寅普는 寶城홉寧으

18) ,맨陣小園比定地의 문헌은 다읍과 같다.

• 申잊浩, 「前後三聊考. 朝史 草. 19

·l6 「朝 園 寅普全 ; 延世大 校出版部1983- • 李 隱, 聊園史」古代觸, . 19

• 倫均, 陣園古代漢字의 究 樓南 , 1983.

로 비정하였다. 영광과 인접된 고창지방에도 등이 버정되고 있는데 고창지방에는 지석묘가 1 , 208기가 밀집분포되어 있다 19)

19) 全北大, 方文化財地表 , 1984.

(2) 長城: 古腦國

城은 전남 북부로 영산강의 지류인 황룡강을 끼고 비교적 넓은 평지가 있으며 전북 정읍과 노령산맥을 경계로 하고 있다. 長城내에는 II5 기의 지석묘가 분포하고 있으나 밀집된 곳은 없다. 城北二面에서 뼈l形銷劍이 출토되었다고 하나2이 출토지와 파樞가 불확실하다.

:10) 江 域의 先史 • 遺 , (歷史學輯) 59집 , 1973. p. 77·

長城일대를 李 는 烏묘國(珍 ) , 兪딛11힘은 臨素半國(森西• 森漢• 來化• 일대)으로 비정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푸렷한 고고학적인 유적이 별로 없다. 長城森西와 인접한 威平月也• 山에는 청동기출토지, 支石 210기, 수섭기가 있다. 또 이콧은 짧光과 노령산맥을 경계로 인접된 지역이다.

(3) 光山• 방면 : 素半國, 新園

臨素半國을 數寅 는 務安으로, 兪 均은 城森深로 비정하고 있다. 千寬宇는 닮雲新國을 짧素半國과 함께 光山이나 雖州방면으로 추정하였다.

鄭寅普는 新國을 ·擬 細技• 靈岩金井일대로, 不斯國을 播南으로 비청하였으며, 兪昌均은 羅싸l 發羅地域을 뿌離園으로, 李因는 播南을 半狗園£로, 發羅를 不網國으로 버정한 바 있다. 光山 洞面地域올 兪昌均은 不쫓園으로 비정하였다.

羅州• 光山地域은 평야지대로 형성되어 있으며 先史時代부터 토착농경이 활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老安永첼里에서는 三角形石刀 가락바퀴, 석검, 有構單 石 등이 출토된 바 있고, 지석요는 羅州市• 待(258기) • 文平에 3877 1, 왕곡 14 , 71 • 동강 • 공산에 268기,

技• 때凰• 靈岩金井(157) 에 29271 등 3개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포이들 지역과 그 언근에서는 헬格짧 분포지가 있으며, 光山新昌里에서는 초기철기시대 가 있다.

(4) 績州: 如來 離國

緣州는 영산강의 支流인 石川邊으로 益形의 명지가 형성되어 있고, 지석묘는 和 과 績 . 遊갑에 236기가 밀집되어 있다. 특히 능주와 인접된 道 大 에서는 청동기가 일팔 출토되었 며, 이콧 주변에도 지석요가 상당수 분포하고 있다. 이 일대에 대해 申 浩와 千字는 如來離I으로, 兪均은 內離國으로 각각 비정하였다.

(5) 珍 內: 楚山

珍島는 海南의 서쪽에 있는 섬인데, 지석묘는 355 71 가 분포되어 있으나 內面에는 31기만 발견되었고 그 인접지역인 古面에 102기가 밀집되어 있다. 古 面과 바다를 사이에 둔 海南화산 (l.p71) • 현산( 123) • 삼산 • 송지에는 326기가 밀집되어 있다.

(6) 靈岩: 一雖國

靈岩은 榮山江하구의 냥해만 동 • 남에 위치하며, 비욕한 명야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月出山주변에서 좁鋼器製作훨험과 빼形編創등의 鋼器가 많이 출토된 지역이며, 西 長川里에서 圖形住居址 둥 집단취락지가 발견된 바 있다. 支石흉도 61171 가 산채되어 있A나 西湖面에 16 9 71 가 밀집되어 있다. 兪읍均은 西 面과 인정된 훌岩쪽에 國을 비정한 바 있고, 一難園 城이나 井물으로 보고 있다.

(7) 海南. 山: 狗 園

海南馬山은 山二面으로 이어지는 조그마한 반도훌 이쭈고 있으며,

靈岩美岩• 三‘때와 웠을 사이에 두고 있다. 지석묘는 馬山(11 6) , 山二(75 71) , 玉良(162 기), ¥쫓씁 (60기)에 4 1 3 기가 분포되어 있다. 狗쫓國을 兪昌均은 陽 平으로 비정하였다.

(8) 寶城福內( ? ) : 不 國

寶城福內는 보성강 상류지역으로 산악지대에 위치하고 있는데, 福內주변에는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폈城江을 따라 文德(225 71) , 福內(229 71) , 펼於( 28 5 7 ]) • 짧白(82 기) 등에 支石꿇 총82171 가 群集되어 있는데, 內 주변에 밀집분포되어 있다. 文德과 인접된 昇州松光面에도 293 71 가 밀집되어 있다. 福內詩川 와 文德~JM同및 陸에서 三國 代의 유적이 발견된 바 있다. 이 小國은 千 宇가 잠정적으로 비정한 곳이며, 었I’혔합, 申 告, 李며폈 등은 福內일대를 牌 離國로 비정하였다(李因積는 全北金 方으로도 봉).

(9) 樂安: 不斯 邱園

樂安은 寶城 橋와 인접되어 있고, 半島목의 북쪽에 해당된다. 이 언근 지역인 보성 벌교 (55 기) • 조성 (16671), 승주 별량 (7기) 동에 지석묘 228기가 분포되어 있으나 조성연과는 10km 이상 떨어져 있다.

樂安을 千 宇• 兪홈均은 不斯 邱國으로 비정하였고 鄭寅普는 演活園 로 보았다.

(10) 團水 池圍

에는 昇州海龍面, 題川꿇村• 검羅• 華짧, 麗川市• 麗水市둥이 있다. 이콧에는 77 671 의 支石활가 분포되어 있는데 麗川市에 가장 멀집되어 있다. 최근 支石養발굴에서 • 錫와 管玉, 小玉그리고 석검 등 석기류가 발견된 바 있다. 이 小國올 鄭寅普는 新安 海로 비정하였는데, 海에서 原三園時代에 속하는 왜총과 발견되고 있다.

(11 ) 長興: 乾 國

興은 江流 興붙 일대와 南海邊 冠山일대로 나뒤어지는데, 長興둠 일대는 江邊을 중심로 명야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일대에 26 9 기가, 冠山일대에 24 2기의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으나 장흥읍 • 안양에 204 7 1, 관산에 202기가 밀집되어 있다.

山 구롱일대에는 초기철기시대의 경질무문토기 주거지가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고 또 주변에 土城흔적이 회미하게 남아있다.

이 小國에 대해서 鄭寅.• 兪昌均은 全北益山으로 버청하고 있다.

(12) 興南陽: 楚熾國

興은 半島로, 남양과 인접한 來江面일대와 過繹面일대에 지석묘가 밀집분포되어 있다. 面퍼位로 지석묘가 밀집된 콧을 보면, 東江(429기) , 南陽(149기) , 過짧 (258기) 등에 집중되어 있으나 위 세 지역은 인접되어 있다. 이 小國에 대해서는 兪읍均도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4 결어

이상에서 支石 密集分布地域과 ,떤韓小園比定地에 대해 살펴보았다. 앞서 말한 대로 이러한 작업은 여러 문제점에 대한 검토와 아울러 이루어져야 함에도 그러하지 못한 점은 앞으로 보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는 전남지방 이외에서는 지석묘 분포지와 마한소국과의 대비가 곤란하다. 지석묘의 하한에 대해서는 B.C.2-1 세기로, 마한의 상한은 B.C.20년 이전 로 올려볼 수 있기 때품에 서로간의 연계 가능성은 있다고 보여지며, 馬韓小園들에 대한 위치 比定地에 대해서는 圍名이같거나 다를지라도 昇州樂安, 寶城福內, 홉興南陽, 和 緣州 둥

의 比定에는 일치하고 있어, 고고학적인 성과를 보완한다면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앞으로 마한을 형성할 수 있었던 사회 • 문화척 배경, 고고학척인 유적 • 유물에 대한 보다 많은 연구와 자료의 증가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 하겠다.

앞서 살펴보았던 것에 대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마한小國으로 비정된 II 개 지역 (2개 지역은 未比定) 중 長城〈古 國〉과 樂安〈不Jtrri.훌邱國〉을 제외하고 모두 지석묘 밀집지역과 일치하고 있다. 이들 지역의 지석묘는 적으면 2-3 0。기, 많으면 6-800기 정도가 된다. 이는 짧岩을 제외한 서해안지역과 남해안의 서부지역은 2-400기 정도이냐 남해안과 보성강 유역은 60。기 이상씩의 지석묘가 밀집분포되어 있다.

靈岩• 鏡州는 청동기가 출토된 지역인데, 이 지역이 마한의 一小國으로 비정되고 있어, 成lfi 雜山일대도 支石짧나 필鎬뿜出土로 볼 때 園으로 비정해도 좋을 듯하다.

전남지방 지석묘의 밀집분포지와 千월宇가 비정한 馬障小國 13개지역 충 未比定한 〈素半國) • <民雲新國〉도 지석묘 분포로 볼 때 지석묘 밀집분포지와 관련이 있다고‘보여져, I I 개 지역이 일치하고 있어 마한小園과 지석묘사회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지석묘 축조집·단과 마한 소국들과 칙접적인 관련 여부는 현재로서는 단정하기 어려우나 대체로 지역적인 면에서 일치하고 있어 지석묘 사회에서 계숭 발전되어졌을 것£로 생각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古代史와 考古學과의 연계작업으로 마한사회에 대한 보다 뚜렷하고 설득력있는 문화내용이 밝혀지고 더 나아가 이를 통한 역사지리척인 측연에서 추구해 나간다면 좋은 결파가 나오리라고 본다.

전남지방의 原三國文化

【崔盛洛】

原三國째는 초기철기시대(B.c. 3 00 - 0 ) 에 뒤이어 서력기원 전후로부터 서기 300년경까지를 말하며, 이를 국사에서는 삼한시대, 부족국가 시대, 성읍국가시대 등으로 불러왔고, 고고학에서는 金海뼈, 薦川期로 불리던 것을 金元龍교수가 삼국시대의 원초기, 原史단계의 삼국시대라는 돗로 原三國 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의 특정을 金海式토기의 등장, 철기의 발달 및 새로운 묘제인 土樓幕 의 발달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있어서 전남지방의 품화률 개콸해 보고 그 문제점을 찾아본다.

2

原三園期에 속하는 유척이 발굴조사된 예는 3개에 지나지 않는다.

먼저 光山 飛觸面新昌里에 위치는 群이 었다. 1963년 서울대 발굴팀에 의해 조사된 것으로 발굴된 4 X28m의 법위내에 총

53 7 1 의 聲格꿇가 발견되었는데 기를 제외하고 모두 合口式養植이 다. 廳植자체를 보면 카、色, 웰色, 白色등으로 良質結土에 石함을 많이 섞어서 거철어 보이고 소성도는 낮아서 단단하지 못하며 물례를 사용하지 않았고 기벽의 두께는 7cm정도이다. 혐은 製과 의 두 형식으로 나뉘고 製은 有짧, 無짧으로 이분되며 有빨i式에도 다시 直 과 됐이 있다. 廳 중에는 좁고 돌출된 바닥을 가졌고, 좁은 바닥에 배가 부른 耶形짧身이거나 口緣部외부에 斷面三角形의 結土 가 돌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출토유물에는 부장품이 鐵片I 점, 偏平鷹 점뿐이고 외부에서 소형토기 수점, 石 I점, 숫돌 I 점, 鐵片2점 등과 鎬 把頭佈I 점이 있을 뿐이다. 이 유척의 연대는 기원전 I 세기로부터 기원후 I 서l 기경에 해당되며 유아나 소아용의 켈E짧用관으로 당시 공동묘지에 1m정도의 땅을 파고 매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海南部里貝壞은 19 8 3 년에 처음 발견되고 1986, 19 8 7년에 각각 발굴조사되었다. 이 유적은 낮은 구풍을 중심으로 그 주변 전체가 貝 인데 그 규모가 길이 300m , 폭 200m에 이른다.

발굴지점의 층위는 꿇土層과 生土層을 제외하면 모두 14개층으로 세분되는데, 아래로부터 3 개층은 정토층으로 청동기시대 후기에 속하는 結土帶口緣片과 三角形石鍵등이 출토되었고, 그 위로는 混貝層인데 質無文土器가 주류를 이룬다. 위로부터 4개층은 꽤각의 밀집도가 높으며 打據文토기가 출토되고 있었다.

대표척언 유물에는 磁無文土짧가 있는데 무문토기와 제작방법은 같으나 경도가 높고 形이 다양하다. 形에는 廳形, ’形, 深 形, 시루, 注口形, 形등이 있고 특정척언 면은 口緣部의 단면이 三角形율 이루는 점이다. 土裝-品에는 방추차, 어망추, 구슬, 원판형토기편 퉁이 었고, 骨角器에는 骨針, 骨織↓ 刀子炳등이 있다. 鐵월훌類에는 鐵 , 鐵刀子, 鐵낚시 퉁이 있는데 鐵쭈는 짧造品이다. 장신구류에는 水 , 玉, 小玉, 貝輪, 土製曲玉이 있고 骨製 머리장식인 뒤꽂이도 있다. 石 類에는 石繼, 三角形石刀, 숫돌, 꿀, 고석 및 홈이 파진 롤이 었다. 그리고 중국의 화폐언 貨 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王 이 세운 新나라의 화펴l 로 A.D.14-4。년간 주조된 것이다.

이곳 顆 里貝 의 연대는 점토층울 제외하면 昆貝層이 형성되는

것이 기원전 I 세기 이후로 생각되며 하한은 기원후 3-4세기까지 내려올 것 같다.

다음은 住岩댐 수몰지구 발굴에서 밝혀진 주거지유적이다. 昇 일대에서 확인된 주거지는 많은 부분이 原三國 에 해당된다고 보여진다. 특히 大~뿔 도롱지구 주거지는 약 13。여기가 조사되어 청동기시대로부터 원삼국기에 걸친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앞으로 자세한 보고서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밖에 昇州山띤유적 등 지표조사를 통해 알려진 이 시기의 유적은 다수 있으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3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전남지방에서는 원삼국기에 해당하는 유적이 조사된 것은 많지 않으나 주거지, 貝壞, 고르게 발굴되어 그 시기의 문화상을 파악하는 데 용이하다고 보여진다.

다음 이들 문화상을 정리하는 데 제기되는 문제점을 알아본다.

먼저, 원삼국기라는 용어의 사용문제이다. 전남지방에서는 철기문화가 기원전 1세기경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원삼국기에 앞서는 초기철기문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철기문화의 시작이 곧 훤삼국기의 시작과 대체로 일치한다. 그리고 하한언 3 00년 전후에 大形 格護가 발생되는 것은 분명하나 그 이후의 문화가 거의 그 이전파 통질성을 며고 있기 때문에 3 0。년의 의미가 척다고 본다. 따라서 전남지방에서는 원삼국기와 그 이후간에 뚜렷한 차이가 없다고 본다면 原三園 (時代)란 용어의 사용은 불합리하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그 시기에 해당하는 뭄화내용 중에서 검해식토기의 사용은 원삼국기의 개시와 함께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硬質無文土器가 사용되다가 나중에 打操文土器가 사용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制에는 土 가 거의 수용되지 않고 格 주휴흘 이루고 었다.

활고문헌

金元 國考古學擔說 (3 판), -志 1986.

金元龍, 新 鍵혐 地 . 考-古A類學 刊第 , 서울大 物館. 1964 .

城江流域의 住居址를 中心으로 한 三國文化. 全南古文化의 現況과 展 , 제2회 全南古文化 심포지움. 1987-

三國 代前 의 全南 方文化. 報63, 1987-

남한지방 무문토기 전개에 대하여

【李淸圭】

1) 남한지방의 무문토기시대 (金元龍의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에 있어 그 후기는 辰國혹은 三韓의 초기로 이미 여러 문화집단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때이다. 고고학적 측면에서 그러한 문화집단團域의 전개과정이 확인될 수 있으리라 보며, 특히 토기문화의 분포 및 전개과정 규명을 통해서 가능한 것으로 이해된다.

2) 남한지방 무문토기의 시간적 변천 혹은 편년올 처음 전지역적 수준에서 논의한 것으로 後顧直(1973- 1) 의 글이 있고, 경기도라는 륙정지역 수준에서는 李白圭(1974- 12) 의 논문이 었다. 두 논문에 의하면 남한지방의 무문토기시대는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고, 전기에는 동북한 및 서북한 지역에서 각기 전파된 공렬토기 및 팽이형 토기문화가 성행하며, 후기에는 남한지역에서 自生한 정토며토기문화가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따악된다.

3) 197。년대 중반 이후 충남 • 천라지방의 松찌힘里式토기 휴척울 비롯한 여러지역에서 조사가 이루어져, 이제는 앞의 시기구훈론만으로 냥한의 무문토기 전개과정에 대하여 충훈히 쩔명할 수가 없게 되었다.

197。년대 중엽 이후 198 7년까지 죠사된 대표척인 유척용 물면 남

한강유역의 欣岩(金元龍· 任孝宰• 崔 , 금강유역의 松里(姜t求• 李健 • 池 吉) , 內秀里(趙由典)와 內용洞( 杰〉, 영산강유역의 松岩洞( 流)과 장천리 ( 盛 各) , 섬진강유역의 大씁里( 龍) , 낙동강 유역의 造永洞( 永和) • 金 二및(李해圭) , 남강유역의 大쩔里(趙由典) , 충남해안의 교성리(李 承) 및 대로리(짧永熙), 전남해안의 獅갑里(崔盛洛) , 경남해안의 勳島(申 澈) , 제주도(李淸圭)등이다.

4) 다음 표는 이러한 조사 성과를 토대로 무문토기를 비롯한 석기 •청동기 등 共伴退物의 형식 및 組合相, 주거지와 무덤형식의 변천 그리고 지리적인 위치와 방사선 탄소연대 등을 검토하여 작성한 것이다. 대체로 남한 무문토기의 상한 연대를 B.C.1 。세기, 하한을 A.D.1세기경으로 하여 7 7 1 로 나누었으며 제 5 기의 개시를 B.C. 300년경으로 하였으나, 정확한 절대연대 및 유척의 시기 소속은 금후 정밀한 검토에 의해 재조정될 수가 있다.

이 표를 작성 하는 데 도움을 받은 최근의 주요논문은 다음과 같다.

李白圭(1986). r한강유역 전반기 민무늬토기의 편년에 대하여 (짧南考古學} :2

崔盛洛(1987) , 전남지방 무문토기문화의 성격 , 三佛金元龍敎 停年紀 論 』

口健二(1986 ) , 朝 無文 椰生土 , (鋼生文化 ) 究) 3

武末純一(1987) , r鋼生土器 無文土器• 三韓土 , 三佛金元龍敬授停年紀念」

5) 이 표에 의하면 지금까지 막연히 전기 형식으로만 알려졌던 토기 형식이 지역에 따라서는 훨씬 후기까지 지속되었으며, 어느 지역에 는 특정의 토기 형식이 전혀 보급되지 않거나 미미한 예도 있음융 알 수 었다.

한현 공렬 빛 팽이형토기는 북한지방에서 다른 갈래로서 남한지방에 확산되었으나, 한강 이남에서는 토기 형식의 복합 • 변천 및 지역척 分布의 양상£로 미루어 후자가 전자에 홉수 • 동화되어 전개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남한지방의 무문토기문화는 크게 공렬 • 팽이형토기문화, 송국리토기문화 그리고 정토띠토기문화의 세 그룹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A) 공렬토기

시기 한강중하류 남한강 낙동강 충남해안 섬진강 제주도 I 기 교하리 z 기 역삼동 흔암리 I 37 ] 영일동 혼암리 z 대형리 해미 4 기 상자포리 흔암리 3 성산 대곡리 상오리 I 5 기 상모리 z 6 기 곽지리 7 기 (B) 팽이형토기 시기 한강중하류 남한강 금 강 낙동강 남해안 제주도 17] 삼거리 27] 가락동 혼앙리 I 3 기 혼암리 a 내수리 47 1 경주 ? 상모리 I 57] 상모 el2 67] 7 기 (C) 뱅이공렬각목토기 시기 남한강 충남해안 금강 낙동강남해안 제주도 I 기 271 3 기 혼암e:j 2 대로리 내곡동 47 ] 혼암리 3 내남연 생산 상오리 I 57) 상모려 2 6 기 7 기

(D) 송국리식 토기

시기 금강 영산강 섬진강 제주도 x 기 271

371 송국리 x 4 기 송국리 2 송암동? 571 송국리 3 장천리 대곡리 I 6 기 신창리 대곡랴 z ? 7 기 ?? (E)점 토띠토기 시기 금강 한강 영산강 낙동강 전남해안 경냥해안 171 27] 37] 4 기 5 기 교성리 수석리 67] ? 신창리 금장 z 리 근 랙 7 기 조영동 군 팎 닐샤

고신라 적석목곽분 연구의 과제

【崔乘鉉】

고신라 적석목팍분은 조사 • 연구의 역사가 80여년에 이르는 동안 우리나라 고고학의 어느 분야보다도 많은 자료의 축적이 이루어져 왔고, 해방 후 7 0년대까지는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고고학척 연구를 주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그 실체규명에 상당한 성과를 이룬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고신라 척석목곽분은 아직 기본척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정셜로 확럽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으며, 그래서 지금까지의 많은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척석목곽분의 연구성과가 신라사 연구에 얼마나 반영되었는가는 회의척이라 평가된다. 더욱이 최근에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고고학연구의 중심이 가야 •백제로 옮겨가면서 고신라 적석목곽분의 연구는 정차 소외되어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도 한 것 같다.

이제 여기서는 그동안 논란의 초첨이 되어 왔£면서도 아칙도 의견의 정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기본척언 품제 또는 척석옥팍폴 연구의 당면과제 몇 가지를 지척해 보고자 한다.

첫째, 고신라 척석목팍분의 기원에 대해서는 내후발생껄과 외후유업설이 맞서 있다. 내부발쟁셜은 척석목팩풀의 구조상 a개의 주체시설이라 할 수 있는 목곽과 척석올 분리하여, 낙랑목곽폴의 폭확과 지적묘의 척석 결합설로부터 시작하여, 토광(폭확)요.의 폭확과 지씌요의

척석 결합설, 토광(목곽)묘의 목곽과 고구려 척석총의 적석 결합셜로 변천되어 왔고, 외부유업셜은 북방 아시아의 목곽분문화가 직접 도래했던 것이 아닐.까 보는 것이다. 아직 시기적 간격이나 전래 루트의 문제가 해명되지 않고 있지만, 얄타이-천산산맥 일대의 (적석)목곽분들과 고신라 적석목곽분 사이에는 구조상의 유사점이 대단히 많고, 고신라 척석목곽분의 출토유물과 매장의례에서 보이는 기마적 성격, 북방계통 유물의 다출 등이 외부유업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척석목곽분의 기원문제는 단순히 한 묘제의 출현과정드로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묘제 사용자 즉 척석목곽분기 신라 지배세력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i로서, 신라사 전개과정의 이해에 큰 영향을 미칠 문제로서 보다 활발한 논의가 요청된다.

둘째, 편년정럽의 문제로 그동안의 여러 연구를 통헤서 상대연대는 어느 정도 가까워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절대연대는 아직도 큰 간격의 견해차가 노정되어 있다. 그런 중에서도 최근에는 대체로 적석목팍분의 출현연대는 4세기대 설과 5 세기초 이후 셜로, 소멸연대는 6세기 셜과 6세기 후반~말 설로 압축되면서 맞서 있는 상태로 앞으로의 보다 정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셋째, 묘장형식의 분류와 그 의미, 묘제내적 변천과정에 대한 문제로, 고신라 척석목곽분의 묘장형식은 그동안의 시기적 차이성을 부언하고 피장자의 신분단위로 해석되기에 이르렀는데, 이에 대해 몇 가지 분류상의 문제점들이 지적되고 있다. 이 문제는 척석목곽분기 신라 사회상의 이해와 관련해서도 여러가지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앞으로 계속척인 검토가 있어야겠다.

넷째, 유물에 대한 연구의 부진을 지척해야겠다. 그동안 척석목곽분의 연구는 대체로 구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고, 유물은 토기 외에는 몇몇 귀금속유물의 단편척인 논의가 있었을 뿐이다. 유물에 대한 보다 정밀하고 다각척인 연구는 고분편년이나 적석목곽분기 문화수준의 이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경주고분 안에서, 그리고 경주고분과 지방고훈의 비교고찰을 통해 당시 신라의 지배질서나 사회구조 대외관계 둥 많은 부분에 기초척언 자료를 제공해 줄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그통안에 발굴된 고분들의 조속한 보고서 발간을 촉구

하며, 치밀한 계획하에 실시되는 발굴조사, 특히 초기고분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고분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일제시대의 것은 차치하더라도 해방 후 발굴된 고분 가운데에서도 아칙 미보고된 고분이 너무 많으며, 특히 소형고분들의 발굴은 거의 미보고상태에 있어 적석목곽분의 다양한 연구를 저해하고 있다.

또한, 신라적석목곽분은 전체적으로 축척된 자료가 많은 편이라 할 수 있지만, 7。년대 후반 이후는 소규모 공사에서 걸리는 폐고분 수습 외에 계획적인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특히 초기고분들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월성근교 고분은 아직 정식 조사된 예가 없다. 따라서 극히 제한된 범위내에서 계획적인 발굴은 약간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외에도 여러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필자 나름대로 현시점에서 철실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문제들을 지척해 보았다. 앞으로 척석목곽분 연구자가 보다 증가되고 이러한 운제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치밀한 분석이 뒷받침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사실에 접근되어 고신라 적석목곽분 연구가 신라사 이해에 청당한 몫을 갖게 되기를 기대한다.

농경의 기원에 관한 제문제

【崔혐강;】

19 6。년대 중반 Binford학파를 중심으로 하여 〈新考古學〉의 이론 발달로 인한 현대 고고학의 가장 큰 과제는 농경의 발생원인이 무엇이었나, 또한 어떤 단계를 밟아서 採集經濟社會(Hunting and Gathering)가 농경사회로 전환하게 되었는지를 셜명하는 것이다. 200만년이라는 긴 언류문화사를 살펴볼 때 인간이 식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사육하게 된 것은 불의 발명과 함께 오늘날의 문명사회를 형성하게 된 가장 핵섬척인 문화요소인 것이다.

언류문화사상 농경문화를 독자척으로 개발한 민족이 있는가 하면 타민족 로부터 영향을 받아 농경을 시작한 민족도 있다. 현재까지의 考古學자료에 의하면 농경문화는 지금으로부터 약I 만년 ~7천년전에 충동의 Zagros와 Levant지역올 선두로 하여 동남아시아의 타일랜드와 양자강유역, 1) 중국의 황하유역, 멕시코 중부의 고원지역, 그리고 페루의 해안지역에서 각각 개발되어 타문화지역으로 점차 전파되었다는 것이 업충되고 있다.2)

* 여기에 언용된 철대연대는 수청된 것이 아념.

1) K. Flannery는 Spirit Cave에서 출토된 식물들이 재배된 혼척이 없다고 주창한다. Flannery, K.V. ‘ The on밍ns of Agriculnπe," Ann!ιa/ Review of Anthropology. vol. 2, 1973, PP.271-310 •

2) F. Wendorf는 。1 집트의 서¥사막지역에서도 농경문화가 B.C.7 200년경얘 톡자척 A로 개벌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상고사를 살펴볼 때 원시농경의 기원과 발달에 관한 연구는 아직도 초보단계에 머물고 있는 설정이다. 이 훈야의 연구가 부진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론이고, 또 한 가지는 先史學연구에서 주파제언 경제양상올 소훌히 다루어 왔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발표된 대부분의 연구는 품화전파주의라는 해묵은 학성에 입각하여 한반도의 농경문화는 대륙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행해졌거나, 또는 대륙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전파되었다고 한다. 이런 종래의 설에 따르면 초기농경문화의 유입£로 언한 한반도의 先史文化는 일시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본인은 이 연구에서 한반도의 초기훨시농경은 중기 빗살무늬토기인들이 변화하는 그들의 환경에 척웅하기 위하여 선택한 하나의 문화요소이며, 이렇게 채돼된 농경문화는 급진척인 변화를 거쳤다기보다 오히려 서서히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올 보여주고자 한다. 이와 더불어 한반도의 농경기원올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중동과 멕시코를 중심으로 농경의 기훤과 전파에 관한 세계고고학의 현황올 소개하고 아울러 영세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반도 농경문화의 발달과청 연구에 대한 문제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1 농경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연구현황

마지막 可期의 종식으로 인한 자연환경의 변화에 바탕울 둔 Child의 〈오아시스이론〉은 현지에서 현대고고학자들과 자연과학의 전문가들에 의하여 공동발굴 조사한 결과 그 타당성올 잃게 되었다. 대체척으로 체계척언 연구가 진행된 중동지역과S) 액시코지역의 발굴에 의하면 後永期에 접어들어 사막이 형성훨 청도로 기후의 변확가 없었다는 것이 충명되었고, 이를 계기로 1960년대 이후푸터 농경의 기

3) Braidwood, R,]., ‘ The Agricultural Revolution," Scientific Americaπ, vol. :103, 1960, PP.130-141.

-4) MacNeish R.S., ‘ Speculation about How and Why Food Production and Village Life Developed in 배e Teotihuacan Valley, Mexico," Archo.e%gy, vol. :14 (4), 1971, PP·307-31'·

원에 관한 이론적 연구가 진행되어 왔으나5) 원인의 규명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6) 중동과 멕시코지역을 발굴한 Braidwood와 Macneish의 이론에 의하면 초기농경이 발생한 콧은 재배된 곡물이 천연적으로 서식하고 있었던 지역이며, 인류의 문화가 성숙단계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에 인간은 심리적으로 안일한 생활을 원하게 되고, 따라서 농경문화를 개발하게 되었다는 문화진화론에 업각하여 농경의 기원설을 전개하였다 7)

한편 사회학자인 Boserup은 Malthus의 인구론을 언용하여 인류문화가 채집경제에서 농경사회로 전환하게 된 주요원인을 인구의 충가에서 오는 압력 때문이라 하였고, 8) 이러한 인구증가이론은 많은 관련 학자들에 의해 수용되어 문화의 주된 변동요인으로 설명되어 왔다.9l 그러나 Boserup의 이론은 현존하는 채집경제사회의 민족지를 검토해 볼 때 많은 문제점이 드러난다. 문화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채접경제인들은 그들이 처한 자연환경에 보다 효율적으로 적응하기 위하여 자연속에 산재한 야생먹이의 양에 비례해 인구수를 항상 적게 조절하여 경제란에 대버하고 있었다.l0) 이에 반해 Binford는 이런 보편척인 〈인구중가셜〉을 부청하고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른 특정지역의 인구증가외 압력설을 주장하고 있다. 1 1) Binford는 초기농경의 기원과 타지역으로의 전파는 각 민족이 참여했던 그들의 생태계에 적응하는 하나의 문화척 수단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12)

Binford의 이론을 좀더 구체척으로 셜명한다면 초기농경이 발생힌

5) Strueve, S. Ed, ehistorie Ag eu/htre , 1970, N.Y.; Natural History Press.

6) Reed, C.A. Ed, 0꺼양ηs of Agriculhtre, 1977, Paris: Mouton.

7) Briadwood 와 MacNeish 앞의 책 •

8) Bo똥rup, E., The Condition of Agriculmral Growth, 196"Chicago: Aldine.

9) Cohen, N.M.,The Food Crisis in Preltistoη~ 1977. New Haven: Yale Univer· sity Press.

10) Lee, R.,‘What Hunters Do for a Living or, How to Make out on ScarE Resources," In R. Lee and DeVore Ed., Man tlte Hunte κ 1968, Chicago: Aldine. PP.30 -48.

II) Binford, L.R., ‘Post·Pleistocene Adaptations." In L.R. Binford and S. Binford Ed., New Perspective in ArcJzae%gy, 1968, Chicago: Aldine. PP.313-342•

12) Binford, L.R., An ArcJzaeologica/ Perspective, 1972, New: Seminar Press P·431•

지역의 자연환경은 다양한 생태계 (ecological mosaic)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인구문제와 관련지어 보면 두 가지 형태의 사회가 존재하게 된다. 첫번째 사회는 인구의 이동아 멀폐되어 종습에 따라 유산 또는 영아 및 노약자 살해 그리고 흔인규제 등의 자율조정체계 (self-regulating system)가 자체내의 인구를 조절하여 천연자원의 양과 평형을 유지하였다. 한편 다른 형태의 사회는 언구의 이동이 개방된 사회로 자연에 산재한 먹이의 양에 버례해서 인구의 밀도가 어느 정도 상한선에 이르게 되면 그중 일부가 타지역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생활처를 마련하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농경의 기원은 인구의 이동이 빈번한 개방사회체제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은 특정지역의 인구증가가 압력을 받아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13) 즉 Binford의 이론

13) Binford, 1968, 앞의 책.

을 중동지역에 적용시킨다면 후벙기로 인한 해수변의 상승은 풍요한 수산자원의 형성을 가져왔고, 이로 인하여 해안지역의 인구가 늘어나게 되자 이에 압력을 받은 해안 지역의 채집경제인들은 서식처를 천연재배곡물이 많은 내륙지방으로 이동하여, 그 풍요한 자원을 바탕으로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또다시 언구는 늘어나게 되고 여기에 압력을 느낀 일부의 사람들이 다시 재배곡물의 천연서식처인 변방지역 (edge zone)으로 거주지를 옮겨 농경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Binford의 이론은 Flannery를 버롯한 많은 그의 후학들에 의하여 지지를 받아왔으나, 고고학척인 면으로 볼 때 아직도 그 명확한 검중이 되지 않고 있다.

中來의 Zagros와 멕시코의 Tehuacan 그리고 Oxaca지역올 십여 년동안 현지조사해 온 Flannery는 그의 연구 결론에서 농경의 기원은 인구의 증가 또는 자연환경의 변천에서 오는 여러가지 기작(mechanism)과 포다른 복합적언 변언들이 작용했으므로 단순히 어떤 특정한 한 가지 요소로 한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l4) 그래서 그는 멕시코의 농경기원 문제를 규명하는 데 체계이론율 도업하였다. 15)

I3) Flannery, 앞의 책 •

15) Flannary, K.V., ‘ Archaeological System Theory and Early Meso·

Amerrica," In B. Meggars. Ed., Anth ,φological Archaeology in the Amen’ca,

Anthropological Society of Washington D.C. 1968. pp.67-87.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보편적인 단일요소로는 각 지역의 농경기원 문제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관계학자들이 여기서 얻은 결론은 각 지역의 자연 및 사회환경에 따라 변인이 다르게 작용했고, 그 중 가장 핵심척인 변인은 정착생활로 인한 인구증가와 자연환경의 변화이다.l6) 이러한 사실은 다음 장에서 논할 한반도의 농경기원을 이해

16) 앞의 책.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현대고고학의 연구결과가 비록 이렇다 할 원인규명을 내세우지는 못하였지만, 농경의 발달과정에 대해서는 색다른 여러가지 사실을 지척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동안 농경문화의 기본요소로 간주되어온 토기, 홉훨웬石쇄(특히 갈돌) , 정착생활 등은 농경문화 이후로 보편화되었지만 농경과는 직접적인 상호관계가 없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 예를 들어보면 오스트레일리아의 채집경제인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z만년 전에 마제석기를 제작하였고, 일본의 죠몬文化에서는 I만1천년 전에 토기를 제작하였으며, 미국의 캘리포니아 인디안들은 지금도 채집경제로 인한 정착생활을 하고 있다. 그외에 中來의 경우를 보더라도 청착생활과 마제석기가 농경보다 先行되었고 그 다음에 토기가 출현하였£며 17) 멕시코의 경우도 농경의 시작으로 정착생활이 이루어졌고 그다음으로 마제석기와 토기가 나타났다.l8)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초기농경문화가 혁명처럼 갑작스럽게 전개된 것이 아니라 서서히 점차적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Macnelsh의 Tehuacan발굴에서도 증명이 되었다.l9) 그 다음에 알게 된 또 한 가지 사실은 채집경제인들도 식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여 곡물재배에 대한 개념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곡물이 처음 재배되었을 때는 그들이 원했다기보다 자연 및 사회환경의 변화로 말미암아 농경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17) Mellaart, 1" The Neolithic of the Near East. 197:>. London: Thames and Hudson, PP.H-35.

18) MacNeish, 앞의 책.

19) MacNeish. 앞의 책.

2 농경의 전파과정

현재 한반도의 농경기원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지리척 전파과정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농경문화를 대륙으로부터 채택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려면 우선 농경이 핵심지역에서 동남유럽과 美파部地域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이를 한반도와 상호 비교해 본다면 한반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來南유럽과 미동부지역은 한반도와 자연환경이 서로 비슷한 지역이지만 농경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두 지역은 서로 대조를 이룬다. 왜냐하면 유럽지역은 이민해 온 사람에 의헤서 농경이 시작되었고 미동부지역은 환경에 척응하는 하나의 수단A로 농경문화가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반도의 초기농경문화 실태가 위의 두 지역 모렐 중 어디에 더 가까운가 살펴보기로 하자.

현재 유럽의 농경에 대헤서는 이민설, 자연전파셜 그리고 자체발생설이 2이 있지만 동남유럽과 中部유럽은 이민에 의한 셜이 가장 유력하

20) Higgs, E.S. and M.R. Jarman, “The Origins of Animal and Plant Husbandry," Papeπ in &onomic Prehistory, Ed. by E.S. Higgs, 1972,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3-1 3-

다. 이 설을 뒷받침하는 중거는 농경문화·전파의 속도이다. 멀리 중동지역에서 발생한 농경문화는 Anatolia 또는 지중해를 거쳐 척어도 B.C.6000년경에는 유럽에서 가장 동남찌역인 그리스에 출현하게 되고 이것은 다시 B.C. 5000 - 55 0。년경에는 동남유럽의 북부지역에서 Starcevo농경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Starcevo문화는 포다시 중부유럽으로 전파되면서 Linear토기문화를 형성한다. 이 Starcevo푼화가 중부유럽의 전지역 o 로 전파되는 데에는 불과 400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고, B.C. 3500년경에는 멀리 덴마크지역까지 이 농경이 전파되었다 21)이런 전파의 속도를 한반도와 버교해 볼 때 너무나 대조척이다.

21) Milisauskas, S., European Prehistolχ1978 , New York: Academic Press, pp. 44-46.

다음으로 특이할 만한 사실은 농경문화를 형성하는 요소들이 한꺼번에 출현한다는 청이다. 즉 유럽의 농경문화는 서서히 발전하는 현상을 보이지 않고 농경, 토기, 마제석기, 토제인형 및 언장 둥과 갱

착생활이 같은 시기에 유업되어 초기농경과정에서 이미 성숙한 농경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22) 다시 거륨해서 논하겠지만 농경의 복합요소가 동시에 출현하는 현상도 한반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지금부터는 한반도의 초기농경 발달과정과 비슷한 현상을 이루는 미동부지역의 농경에 대한 특색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여기에 앞서 먼저 밝혀툴 사실은 미동부지역의 농경문화는 이민사회에 의하여 전파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수단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이다.

멕시코지역에서 발생한 농경문화가 미남부지방에 유업된 이후 통부지역에 이르러 정착되기까지에는 약 4천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이는 미동부의 Archaic인들이 농경에 관한 지식을 터득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들의 윤택한 자연환경에서 오는 이정 (forest efficiency) 과 계절에 따른 효율적인 경제계획성 (seasonality and scheduling) 때문에 본격척인 농경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23) 그래서 말기 Archaic시대에 가서야 비로소 곡물의 재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농경문화가 사회구조에 미치는 영향은 극히 미미했으며 발달과정도 매우 점진적이었다.24)

다음 특색으로는 농경문화의 복합요소들이 한꺼번에 소개되지 않고 각기 시간을 달리하면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토기 대신에 바구니가 먼저 제작되었고 그 다음으로 정착생활, 인구증가, 마제석기, 농경, 그리고 토기의 순서로 시간을 달리하며 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포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재배된 식물의 종류도 모두 같은 시대에 나타나지 않고 각기 그 시기를 달리하고 있으며 옥수수의 재배가 가장 늦은 시기에 행하여졌다는 사실이다.2S) 미신대륙 원주민의 주식가 그들의 주경제생활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암사동의 하층문화 (궁

22} Ammennan, A.J" and ·L.L., .‘Cavalli·Sforza. Measuring the Rate of Spread of Early Fanning in Europe," Man, vo1.6, 1972, pp.674-688.

23} Ford, R.I., Prehistoric Food Production iη North Ame서ca, 1985, Ann Arbor: Mu똥urn of Anthropology.

2~} Yarnell, R.A., “ Prehistoric Plant Foods and Husbandry in North America," Society for American Archeology, Pittsburgh, 1983.

25} Ford, R.I.긴Gar떠'd印e띠n1너띠irng and Fanning Before A.D. 1000 : Patterns of Prehistonc Cultivation North of Mexico," Journal of Ethnobψlogy, vol. I (I) ,1981, PP·6-27·

인 옥수수가 멕시코에 비하여 늦게 경작된 이유는 미동부의 자연환경이 남부지역과 다르기 때문이다. 즉 추운 동부지역에 옥수수가 척응하려면 그 유전인자가 바뀔 때까지 기다려야 되므로 시간이 걸렸다는 말이다.26) 이는 마치 벼의 진화과정에서 장구한 시간이 흐르면서 Indica 형에서 Japonica 형이 분리 • 진화되어 한반도처럼 기온이 낮은 지역에 뒤늦게 전파되는 것과 홉사하다.

끝으로, 미동부 초기농경문화에서는 동,물의 사육이 미약하게 이루어졌다. 개와 철변조가 사육되었는데 이들이 본격적으로 식탁에 오르게 된 것은 후기의 일이다. Harris는 이런 미약한 동물사육이 초기농경문화 발전을 지연시켰다고 말했다

26) Galinat, w.e., ‘ Domestication and Diffusion of Maize," In R.I. Ford. Ed, Prehistoric Food Production in North America, 198" Ann Arbor: Museum of Anthropology, pp.2'J, -278.

지금까지 설명한 미동부지역의 농경발달과정이 여러가지 면에서 볼 때 이민에 의헤서 형성된 유럽지역의 초기농경문화와는 대조적인 연을 보여주고 있지만 다음장에서 논할 한반도의 농경전파 과정과는 비슷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3 한반도의 농경 발달과정

일영 〈빗살무늬토기시대〉라고도 불리우는 한반도의 신석기시대는 농경의 개시와 관계없이 동해안지역의 아가리무늬토기 출현을 기점으로 시작된다.28) 대다수의 유척지가 강안이나 해안에 위치한 관계로 많은 학자들은 신석기인들의 생엽이 어로행위였다고 보고 있다.29) 그러나

28) 國考古 , 사, 1986.p.25·

29) 金貞, r椰國民族文化의 起, 고려대학출판 J972. p.-48.

지금까지 출토된 유물과 유척을 당시의 생태계와 연관시켜 분석해 본다면 서부지역과 동남해안지역은 경제생활면에서 신석기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서부지역인들은 해안에서 가까운 강안에 거주하였으나 야생식물과 열매의 채집을 주로 하였고 수렵과 어로행위는 부수척이었다. 반면에 동부해안지역인들은 어로행위

산1기 와 2기문화)에서 갈돌을 비롯한 마제석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었고30) 동남해안지역에서는 어로도구와 생선의 뼈가 집중적으로 발견된 데 그 근거를 둔 것이다.3l)

30 ) 깅용남, 풍산운화에 대한 연구. 고고 민속논문집 ,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3, PP.~-46.

31) 검용간 • 서국태, r서포항 원시유척 발굴보교 고고 민속논문집 . 과학백과사천출판사.197 , PP·31- 1 35·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초기신석기시대의 암사동, 궁산리, 지탑리, 굴포리인들은 주거지의 형태, 토기의 크기, 출토유물의 양으로 볼 때 정착생활을 한 흔적이 있다는 점이다. 서부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세 가지 형태의 자연환경 (강안의 명야, 야산, 강)의 자원을 효융적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정착생활이 가능했을 것이고 이는 계절에 따라 변하는 식물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소유하였다고 볼 수 있다. 좀더 넓은 안목에서 볼 때 서부인들의 경제양상은 Flannery가 말한 (broad spectrum)모탤과 일치하고 있으며 아울러 그들의 주거양식은 앞에서 설명한 Binford의 개방체계 속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한반도 농경의 기원은 중기신석기시대에32) 와서야 버로소 서부지역인들에 의해 전개된 것이다.

新石 時代 연녕의 근거는 任孝宰, 「방사선 탄소 연대에 의한 한국 신석기 운화의 연년연구 土回甲紀念史 . 1983.Pp·ll

-38.

현대고고학에서 농경의 중거를 암시해 주는 자료로서, 유적지 일대에서 야생으로 분포하지 않는 곡물이 출토되거나, 출토된 곡물이 형태학척으로 야생종과 다를 경우, 전기문화층에선 볼 수 없었던 식물이 다른 음식물의 양에 비하여 갑자기 많이 나오거나, 농경에 관계된 도구가 출토될 때를 든다. 현재 빗살무늬토기시대 농경의 혼척을 말해주는 유물로는 지탑리 z지구와 남경리에서 출토된 조와 수수의 날알, 궁산리의 뿔팽이, 굴봉, 골제, 낫 그리고 지탑리 z지구에서 톨낫, 돌팽이, 돌보습, 톨삽 등이 나왔고 금탄리 I층문화에서는 돌삽, 톨팽이 등이, 용당포에서는 돌팽이, 33) 암사동에서는 돌보습, 돌낫 등이 출토되었다.s‘l 북한학자들에 의하면 위의 농경에 관계된 도구들

33) 검용냥, 앞의 책.

34) 圖中西없의 新石 化-土 年 中心으로. 園考古• 5. 1978• PP.I7-I08.

중 궁산I 기 문화층에선 뿔팽이의 골제굴봉만이 출토되었고 그 다음 문화기언 궁산271 와 3기에서는 돌낫, 돌보습, 툴팽이, 돌삽 등이 나타난다고 하는 것을 보면 농경의 발달과정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이들 중 절대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암사동유물이며 그연대가 B.C. 2765 + 20。년으로 나와 있다.35) 암사동에서 출토된 토기와 농경도구는 지탑리 제 z 지구의 유물과 형태가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탄화된 곡물과 가장 많은 수의 농경도구가 발견된 지탑리 제 2지구 문화는 적어도 H.C. 3000-200 。년의 중기빗살무늬토기시대에 원시농경이 어느 정도 실시되지 않았나 하는 추정을 해본다.

중기빗살무늬시대에 출토된 조와 수수는 북중국 황하유역의 磁山문화와 킹짖추 f힘文化에서 사상 처음으로 재배된 곡물의 種과 통일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농경도구도 山來北辛地域의 大決口문화에서 출토된 유물과 갇은 계보로 간주되므로 36) 한반도 농경의 기원은 北中國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任孝宰, 앞의 책 • 36) 山束北辛遺址 提報告. 考古. 1980, 9-197.

한반도 초기농경문화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주로 농기구의 형태적인 변화과정과 문화전파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종래의 성에 따른 농경문화는 대륙으로부터 이민에 의해서나 또는 자연전파되었다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전파셜은 고고학적으로 출토되는 유물의 변천과정과 현존하는 채집경제사회를 관찰하여 볼 때 큰 모순을 지니고 있다. 만약 한반도의 농경문화가 유럽의 경우처럼 민족의 이동으로 인하여 파급되었다연 성숙된 농경문화가 갑자기 출현하여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어야 했는데, 이와는 반대로 한반도의 원시농경은 서서히 발전되었던 것요로 나타나고 있다. 포 농경문화란 자연척으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한 민족이 변천하는 사회와 자연환경에 척응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이를 수용하는 것이 문화전파의 통례로 되어 있다. 민족지에 나타난 예률 보면 채집경제인들은 언접의 원시농경민들과 서로 교류하면서도 농경사회로 전환하지 않고 그들과 나란히 공존하고 있다.37) 그 이유는 자연

37) Woodburn, J. ‘An Introduction to Hadza &ology,’ In R.Lee And I Devore Ed., 1968. Chicago: Aleline. .

환경의 조건이 좋은 채집경제인틀은 화전농경민들보다 생계를 위하여 힘쓰는 노동시간이 훨씬 적었고 생활도 윤택하였다.38) 또 농경문화가 대륙으로부터 자연적으로 전파 수용되었다연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제기된다. 첫째, 왜 농경이 초기빗살무늬토기시대에 수용되지 않고 후에 전파되었는가? 초기빗살무늬시대의 문화수준도 충분히 농경문화를 수용할 능력이 있었고 또한 중국대륙과의 교류도 있었다. 둘째, 왜 초기의 농경문화가 서부의 일부지역에만 전파되었고 타지역은 계속 채집경제상태로 머물렀는가? 중기빗살무늬시대의 굴포리유적은 토기형태변에서 選寧:ttB域과 같은 문화형태를 나타내고 있지만39) 당시 굴포리문화에선 농경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중서부의 중기빗살무늬토기인들이 원시농경으로 전환하게 된 이유를 규명하기 위헤서는 중석기와 초기빗살무늬토기인들의 문화와 자연환경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중석기문화의 존재여부에 대하여 논란이 오가던 중 긍정척인 자료들이 남해의 상노대도와 욕지도 등에서 서서히 나타났다.40) 말기구석기시대의 수많은 유적지와 굴포리 등지

38) Lee, R., 앞의 책 • 39) r大連市椰 村新石 時代遺址. 考古學報. 198..,Pp·287-329·

40) 손보기, 상노대도의 선사시대 찰렴 1982.

에서 보여주는 문화의 연속성을 생각한다면 많은 수의 중석기유적지가 한반도에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초기중석기언들은 후벙기에 접어들면서 해수면의 상승드로 인하여 형성된 풍성한 수산자원을 채집하기 위하여 해안으로 운집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중석기연구에 관한 세계척언 추세도 그러하거니와 또한 한반도의 경우에서도 중석기유척지가 해안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석기와 초기빗살 무늬토기유척지가 보다 더 많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유적지의 대부분이 계속 상숭했던 해수면에 의해 현재 바닷물 밑에 장격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셜은 일본의 해수면 변천 연구에서도 나타났듯이 B.C.7000-5000 년경에는 해수면의 높이가 현재보다 6-7 미터 청도 낮았다고 한다.41) 이를 한반도의 서해에 척용시켜 본다면 해수면이 얄은 서

41) Fuji, S. and N. Fuji.Postglacial, ‘ Sea Level In the Japanese Islands,’ Journal of Geoscience, vol.xo, 1967.PP.43-51.

해의 경우 당시 선사인들이 현재의 해안선에서부터 바다쪽으로 상당히 벗어나서 생활했음이 드러난다. 수산자원을 이용하여 풍요한 생활을 하던 중석기 내지 초기 빗살무늬토기인들은 토기문화를 소유했을 것이며, 계속 변천하는 헤수연의 상승이나 인구의 증가로 언하여 현재의 강안지역으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 예문에 현재 서부지역에서는 光빗살무늬토기 문화층이 발견되지 않고 전형척언 빗살무늬토기와 마제석기를 겸비하여 정착생활을 형성한 빗살무늬토기문화가 갑자기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강안지역 A로 이주한 초기빗살무늬토기인들은 과거와는 달리 생활처가 해안에서 강안의 벌판이나 벌판을 둘러싼 야산 그리고 강으로 변하게 되었고 그들의 경제체계도 지상자원을 채집하는 데 주력한 것이다.

새로운 생태계에 따른 경제체계의 변화는 도구의 변화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중석기문화라 간주되는 상노대도와 욕지도 하층문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잘돌, 돌도끼, 숫돌, 플, 활촉 등이 초기신석기 유적지인 지탑리 제 1 지구에서 다량으로 출토되었다.42) 이런 생활의 변화는 또한 토기의 형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밑이 납작했던 소형토기들이 江뿜의 모래땅에 세워놓기 편리하게 뾰족한 모양으로 바뀌었고 음식을 장기간 저장하기 위한 대형토기로 변화되었다. 자료의 부족으로 이들이 어떤 종류의 음식을 채집하였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다수의 갈롤과 도토리가 자주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도토리를 중심으로 한 식물성채집이 유행하였고 동물성먹이로는 북작노루가 사냥되었다.43)

앞에서 설명한 세 가지 형태의 자연환경자원을 계절에 따라 척절히 이용한 이들은 채집경제로서도 정착생활이 가능하였고 이로 언하여 언구의 증가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정착생활을 나타내는 충거로는 대형토기, 유물의 양, 주거지의 형태 둥이다. 특히 결정척인 요인은지탑리 유척 I호 집자리의 화덕자리가 확장된 것을 볼 수 있는데,“)이는 오랫동안 한 콧에서 정착생활을 했다는 충거이다. 빗살무늬토기인들은 정착생활로 인한 인구증가 문제률 처음으로 타지역으로 언구

~2) 검용냥, 앞의 책.

~3) 궁산원시 유척 보고 , 과학원출판사, J957, PP.37- 38.

~) 지 탑리 원시 유척 발굴보고 , 파학원 흩판사, J96J, pp.6-7

.

를 분산시키거나 또는 새로운 생산도구의 개발로 해결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므로 한강유역에서는 중기빗살무늬토기시대에 접어들면서 부터 미사리, 동막동 등의 새로운 거주지역이 암사동으로부터 분리되었고, 45) 아울러 마제석기의 숫자도 늘어났으며 형태도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5) 任孝宰, 「미사리 긴급 鋼 , 國 -古 報. . 8, 1981 , pp.l0- 13·

이러한 가운데 후벙최온난기 (post-glacial optimum)의 종식은 생태계의 변화를 가져와 당시 주요식량이었던 북작노루가 현재의 양자강 이남쪽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서부지역의 중기빗살무늬토기인들은 정착생활로 언한 인구증가의 압력과 자연환경의 변화에서 오는 자원의 고갈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문화적 수단으로 북중국대륙에 기원을 둔 원시농경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비록 재배된 곡물이 다른 천연음식물에 비혜 극히 척었지만 조와 수수 재배를 시작한 선사인들이 말기신석기시대(B.c. 2000- 1000) 에는 다시 새로운 농경도구(반월형석도)를 이용하여 벼와 보리를 추가 재배하였고, 청동기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집약적인 농업형태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농경문화는 종래에 생각해 왔던 것처럼 급격하게 전환된 것이 아니라 미동부지역처럼 점차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다음A로 초기원시농경의 기술형태에 대하여 논해 본다연 보습을 이용한 갈이농사가 실시되었다는 이론이 있으나~6) 火田說이 더욱 타당하다고 본다.47) 지탑리에서 출토된 돌보습은 현재 그 기능에 관한 논란이 오가고 있는데애) 무게가 너무 육중하여 水田이나 모래받아 아

,.6) 吉• 安承模. r.半융 先史時代出土곡류와 양具J , r障園의 文化J ,1983. p. 75 및 , 「考古 上으로 본 聊園의 효文化본 生業困 士九國論 1987. pp.

33-·

,.7) 최정필, 벗상무늬 토기시대의 경제양상 : 놓경의 기원을 중심으로J. Pittsburgh大 박사학위논문. 1985,.

8) 검용남, 앞의 책.

니고는 사용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암사동유적지가 모래섞인 토질에 위치하고 있으나 수년씩 건너서 해야 할 휴경을 생각할 때 면척이 너무나 제한되어 있는데다 이러한 모래땅에는 감자나 무우 같은 구근식물재배가 적합한 반면 조와 수수 같은 날알곡물은 찰 자라지

않는다. 언류학적으로 밝혀진 세계농경사를 보아도 초기의 날알곡물재배는 대개가 火田으로 실시되었고 갈이농경은 훨씬 후에 출현하였다. 또한 노동력의 소모에 비례한 수확량도 화전에 비하여 극히 적었다 49) 그러므로 지금까지 발견된 유적지의 생태계를 본다면 소규모

49) Geertz,C.A, gricuitural iη va/uLian. 1963.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16.

형식의 화전농경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이 한반도의 농경기원 문제에 대하여 살펴보았는데 영세한 자료와 지면의 제약관계상 본명제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못하였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발전을 위헤서 가셜은 항상 제기되어야 하고 이렇게 제기된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 신고고학의 한 연구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한반도 농경의 기원을 셜명함에 있어서 필자가 제기한 모텔을 입증하려면 과학적인 발굴작업과 유물분석을 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서부지역 신석기시대의 각 시기 문화층화분과 절대연대 검출, 문화층과 문화층 그리고 유적지와 유적지간의 유물통계를 이용하여 경제양상을 비교하고, 발굴에 있어서 유적지의 IOcm 층위마다 C.V.S.를 채 집 하여 야 한다. 또한 water floatation과 과산화수소를 사용하여 유구의 흙을 분석 (hypo. analysis)해야만 식물성 유물을 찾아낼 수가 있다.

先史農藉에 관한 몇 가지 견해

【安承模】

한반도에 농경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관점에 따라 여러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농경의 존재를 고고학적으로 확실히 충명하기 위해서는 朋에서 起 種• 調理로 이어지는 일관된 생산농구가 출토되거나 재배작물이 발견되어야 한다.

위의 두 조건을 모두 갖추기 시작한 곳이 신석기시대 중서부지방으로서 智搭 지역에서는 피 또는 조로 보이는 곡물이 石箱• 짧 石•石戰 공반되고 山貝爆에서도 뿔로 만든 팽이와 뒤지개, 산돼지 송곳니로 만든 낫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적은 빗살무늬토기문화 전기 후반에 해당하는 유척으로 칼은 시기의 압사동 주거지 C 14 연대를 참조하면 늦어도 기원천 4천년기 전반에는 우리나라에서 농경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은 툴렴이 없다.

그러나 이들 .유척보다 이른 시기의 신석기시대 즉 남해안과 동해안의 隆起文• 아가리무늬토기단계, 동북지방의 西浦項 1 • 2기, 중서부 지방의 빗상무늬토기 초기단계에 농경이 존재하였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본언의 생각으로는 아가리무늬 • 隆起文土器가 만들어진 시기의 남해안과 통해안의 신석기시대 전기에는 농경은 없고 어로 위주의 청제생활이 이루어진 것 같고 동북지방과 중서부지방의 이른 시기 유척에서는 짧石, 팽이 둥이 출토되어 i뱅이농사가 행하여 쳤옳 가능성이 었다. 그러나 石, 뱅이 등이 농경의 칙접척언 충거

가 될 수 없고 식물자원의 이용에 사용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신석기문화가 처음부터 농경이 결부된 것인지는 농경의 자생 가능성과 더불어 앞으로 더 연구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한면 搭 에서 출토된 石짧는 避 의 紅山文化에서 다량 나타나 있으며, 도 황하하류의 大i文口文化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우리나라 초기 농경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초기 농경에 관한 이해도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다른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신석기시대에 사용된 앓具의 용어와 개념상의 훈란도 논의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어 보습으로 불리우는 石짧의 경우 微• 愁로 쓰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石租의 기능에 대한 주장이 엇잘리고 있기 때문이다. 즉 보습을 拖棒에서 발전된 上下판빔의 f센i 土• 網二k用요로 보는 견해와 가축 또는 사람에 의해 지상을 수평으로 끌어당기는 科起具로 보는 견해가 대럽되고 있 며 본인의 생각으로는 현재 제주도에 보이는 주걱형 따비형태의 외날따비와 가장 근접한 기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쨌든 보습을 포함한 科젤들의 과학적인 기능연구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積作은 초기 농업사에서 가장 비중있게 연구되고 있는 분야이나 대부분의 연구방향이 積作의 기원과 系認, 收 具 半月形石刀의 형식분류와 분포 등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앞으로는 구체척인 도작방법 ,積作收의 배경과 원인, 문화체계의 변화 등에 관한 접근도 있어야 할 것이다. 짧作에 사용된 농구로는 半月形石刀와 짧헬文뽑鋼뽑에 보이는 팽이와 따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반면 자귀, 대패날, 끌 등의 木 具가 다량 출토되어 木製 具의 사용가능성이 일찍부터 주장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作이 전래되어진 일본 九의 죠몽말기 • 야요이 초기의 유척에서는 • 敵• 林·등 다양한 종류의 목제농구가 출토되고 있고 논과 水路도 발견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토질이 산성이라 木웹의 보흔가능성이 낮다고 하지만 현재 논드로 사용되고 있는 습지흘 벨굴하여 보면 의외로 당시의 논 혼척이나 水路가 나올 가능성도 었으며 木製않具가 남아 있을 가능성 또한 높을 것 같다.

이외에도 半月形石刀가 格作과 결환되연서 錢과의 특징을 지닌 三角形石刀로 바뀌게 되는데 도角形石刀의 품현원인에 대한 검

토도 좀더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농업기술은 자연환경과 인위환경에 의해 그 성격이 크게 변화되며 양자는 순환적인 복합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초기농업으로 갈수록 인위환경보다는 자연환경이 농업에 미치는 영향이 더욱 커지게 된다. 기후 • 지질 • 동식물상 등을 밝히기 위한 자연환경 연구방법에는 꽃가루분석, 되척물의 유기물 함유량 분석, 혜수면 변동의 고찰, 유척에서 출토되는 동물뼈의 분석 등이 있는데 이러한 연구는 주로 자연과 학의 도움을 얻어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까지 부분적으로 자연환경의 연구가 이루어져 왔으나 특히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자연환경연구는 아직 빈약한 편으로 더욱 많은 연구성과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끝으로 현재까지의 초기농업의 연구가 주로 재배작물의 기원이나 농경도구에 관한 연구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앞으로는 시야를 더 넓혀 농경의 수용능력과 척응, 환경 및 생태의 변화와 농경이 끼친 영향, 농업기술의 발전에 따른 문화체계의 변화, 인구증가와 기술발전의 상호작용 등에 관한 연구도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대한 재검토

【從榮洙】

1 古朝蘇史 究에 문제점

古朝縣은 민족사의 원류로서 언식되었던 까닭에 역사학자나 일반인 모두의 관심 속에 지속척으로 조명되어 왔다. 고조선사 연구 중에서도 단군신화의 연구를 제외하면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대한 품제가 항상 논쟁의 초점이 되어 왔다. 이러한 논쟁의 뿌리는 실학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이며, 최근에 이르러서는 中共學界에 의한 遭來지역의 고고학척 발굴성과와 북한학계의 新說이 무비판척 로 수용됨으로써 그 논쟁의 폭이 보다 확대되고 있는 느낌이다.

지금까지의 고조선사 연구의 쟁점이 되어 온 역사지리척 논쟁올 정리하연, 첫째, 민족 이동기를 거친 후에는 大同江유역이 고조션의 중심지였다는 대동강중심셜, 툴째, 최후까지 遭寧省일대가 고조선의 중심지였다는 요동중섬셜, 셋째, 遭東지역에 있었던 고조선의 중심이 대통강 유역으로 이동하였다는 이통설로 대별된다고 할 것이다.l)

연구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대한 논쟁

x) 輪, 「古朝의 위치와 강역 , 市民 2, 1988, 2 , pp.2-, -36 창죠.

이 이와 같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고조선에 관한 사료가 모호하고 단편적이라는 점과 고조선의 언어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던 중국문헌학자의 고조선의 역사지리에 관한 상반된 주석에 그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나, 그러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우리학계의 안이한 자세에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로 말미암아 처음에는 단순한 위치 비정을 둘러싼 이견이 점차 사관논쟁으로 발전하여 일반인에게 보다 과장되어 전달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냐 과거에 제시된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대한 제학셜은 그 어떤 것이든 주체성을 몰각한 것은 아니었다 2) 물론 과거에 제

2) , 「 통해 본 上古 理隔.季 京. 1987 여릅효, p. 57.

시되었던 견헤가 우리의 궁금증을 모두 풀어주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최근에 이르러 북한이나 만주지역에서의 새로운 고고학적 발굴성과가 계속 알려지고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연구에 따라서는 고조선의 위치나 강역의 문제가 보다 확실하게 구명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남겨진 자료를 자의적으로 확대 해석한다면, 오히려 고조선사는 과거보다 더욱 흔미해질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고조선 위치와 강역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하여는 불필요한 감정적 논쟁을 지양하고, 남겨진 자료를 체계화하는 동시에 엄밀한 사료비판을 통해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2 古朝縣의 발전과 體域의 형성

고조선의 강역변천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고조선의 내재척 사회발전 과정에 따른 새로운 시대구분의 가능성을 살펴보고 자 한다. 왜냐하면 고조선이 우리민족의 상고사 전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운 최초의 국가라고 한다면, 고초선은 형성부터 멸망시까지 통일한 성격을 지닌 국가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척으로 고죠선은 단군조선으로부터 衛滿朝健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거나, 단군조선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였다. 단지 시간적인 표준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삼국유사』의 체계에 따라 위만조선 이전의 조선시대를 고조선으로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제시되었던 君• 箕子• 戰 • 滅 • 術滿 등은 사료척 의미를 지닐 뿐 고조선사를 체계적으로 이허l 하기 위한 사회적 성격을 나타내는 용어는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 이들은 동일한 성격의 용어가 아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개념으로는 생동하는 고조선사회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으며, 고조선의 강역 변천과정도체계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조선에 대한 새로운 시대구분의 필요성을 느낀다. 오늘날의 시대구분은 대체로 그 시대의 사회발전 단계에 의해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는 고조선의 사회발전 단계에 관한 구체적 자료를 많이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고조선을 다스리던 군장의 호칭에 대한 약간의 자료를 갖고 있다. 즉 고조선의 왕호가 시대에 따라 樹君王險(하늘임금)→함(한칸)→王(중국식 왕호)으로 변천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신라의 왕호가 尼빠今• 次次雄→居四千• 廠立千→王으로 변천된 것과 비교된다. 君號가 그 사회의 성격을 모두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으나, 고대사회의 경우 어느 정도는 그 사회의 성격을 대변헤 주는 것A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검토에 의하여 고조선사는 제정일치시대의 君 이었던 단군왕경이 다스리던 城國家代(단군조선)→椰으로 폴리던 정치척 대군장이 지배하던 佛王國l람代(한조선)→중국식 왕호롤 쓰던 樂 爾域國家時代(대고조선)로 그 사회발전 단계에 따른 시대구분이 어느정도 가능하다. 이는 고조선 이후에 등장하는 고대국가인 三國의 발전과정과도 거의 일치한다. 고조선의 강역도 이와 갇은 고조선사의 발전단계에 따른 합리적언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3)

3) 前 秘, PP·37-39 창조.

즉, 고조선은 환상의 국가가 아니라 〈아사달〉로 불리어진 시기로부터 중국의 統-帝園과 정면으로 맞섰던 大古朝앓·시대로 발전한 생동하는 구체적언 실체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 〈아사달〉을 중심으로 한

城 國家11캉代의 고조선의 강역을 大帝國으로 본다든지, 중국의 統一王朝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던 집권국가시대의 고조선을 王險城을 중섬으로 한 소규모국가로 보는 것은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님이 분명해졌다. 앞으로의 고조선의 강역연구에는 이 점이 무엇보다 유의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3 古朝縣의 이동과 짧域의 변동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파악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중국문헌에 산견되는 고조선에 관한 초기사료의 객관적 분석과 합리적 이헤가 필요하다고 믿는다子』를 비롯한 國 海經』등 先策l함代의 문헌에 이미 조선의 위치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들이 보이나 이러한 문헌에 보이는 조선의 위치는 모호하여 정확한 위치를 판단하기는 어렵다.4) 다만 이러한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조선이 중국의 동북부지역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으며, 來과 인접한 水가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만족할수밖에 없다.5)

4)라는 기혹이 있는데, 이 기록올 문자의 순서에 따라 조선이 요통보다 연나라 쪽에 가까운 지역에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연나라 남쪽 경계흘 이루는 강언 II乎~I:: i피가 易水보다 더 남쪽에 었다는 점으로 보아 이는 꼭 지리적 순서에 따라 기술된 기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없원 주장하는 경우 중국의 ;않찌J을 난하 이동애 두는 경우가 일반척이다. 이렇게 되연 조선이 요통보다 연나라에 더 가까우므로 조선이 핵〈나라의 영토 안에 있게 되는 모순이 생긴다. 이러한 모순-블 해결하기 위하여 이 기록에 나오는 요동읍 〈조선의 요동〉으로 해석한다(려지련, r고죠선 연구J , 사회과학원출판사. 1964 빛 尹乃鉉, 國古代史新論J , 一志 . 1986). 그러나 이는 누구나 보아서 알 수 있듯이 모순휩。l 분명하다.

이와 光 시대의 오호한 기록을 통하여 후 위치훌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얼엄을 알 수 있다.

5) 前 稍. p. 경.

代이후의 문헌인 史記 略』등에 이르면 光 헌의 모호한 표현과는 달리 조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나기 시

착한다. 그 중에서도 고조선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하여는 고조선을 계숭한 위만조선 당시의 기록으로 사료적 가치에서 다른 史홉와 비교될 수 없는 『史記 r朝餘 의 기사가 우선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B의 고조선의 위치와 관련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

朝은 옛날 라 사람이다. (A) 라의 전성기에 처음으로 • 꽤群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郵를 쌓았다.

(B) 棄이 랬을 멸한 뒤에는 選파의 (바깥요새)에 소속시켰는데, (C) 파이 건국하여서는 그콧(滾짜 外激의 관할지역)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滾來의 故(옛 요새)를 수리하고 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삼아 현(파나라 候國)에 부속시켰다. (D) 王盧縮이 로 도망갈 때에 滿도 망명하였는데, 동쪽드로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泰의 옛 에 있는 上下鄭에 살면서 점차 과朝群오랑캐 빛 랬 • 짧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E) (고조선의 準王을 쳐서〕王이 되었으며, 王險에 도융을 정하였다. (F)..... • 이 모두 와서 복속하였다. 6)

6) r史記」卷115.

r史記』는 우리의 古記」와 마찬가지로 고조선에 관한 풀도 없는 귀중한 사료로서 고조선연구자들이라면 누구나 보았을 터이지만 이상하게도 체계적인 분석은 매우 드물다. 분석을 하더라도 r史記」의 기사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떳記j 의 기사를 자의척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연구가 찰못된 것임은 명백하다. 특히, 중국의 束方州那이 이치된 南北朝시대 이후의 학자들의 주석을 엄밀한 문헌비판 없이 사용하게 되면 오히려 문제를 해명하기보다는 복장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며, 설학자들 이래 지금까지의 고조선의 강역 연구가 혼미하게 된 것도 모두 이러한 이유에서였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정을 고려하여 최근의 고고학척 성과를 염두에 두고 史記 r朝傳」의 기사를 이와 관련되는 睡鐵 • •鏡略 동의 原史料와 비교 검토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울 것으로 생각한다.

(1 ) 來方進出과 古朝의 域

의 束方진출과 관련된 r 史記 r朝解f파」의 기술은 사료 (A) 부분에서 보듯이 모호하나, 정밀히 읽어가면 漢의 束故 문맥상 연의 장새임을 곧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鍵略』의 환將棄閒가 古朝 의 서쪽 땅 천리를 빼앗고 국경으로 삼았다고 하는 千은7) 장

7)

새, 즉 요동고새 밖의 자연계선을 의미하며, 千山山眼서쪽의 지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고조선은 연에게 패하여 千山에 이르는 서쪽땅 千뿔를 상실하였으나, 요동반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유일한 자연계선언 천산산맥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r사기 J r조선전」의 사료 (A) 부분에서 연이 복속시켰다는 朝앓은 古朝앓 전체가 아니라 고조선 영토의 일부이며, 이로부터 거꾸로 추정하면 B.C.3 세기 이전 고조선의 강역은 대체로 서쪽으로 大滾河유역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2) 棄의 束方進出과 選東

泰• 행의 동방 진출과 관련하여 종래의 r史記J r조선천」해석은 효帝이후에 설치된 漢짧縣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조선전 기사를 확대 해석하였던 까닭에, 武帝의 동방경략 이전의 사실을 적은 사료 (B) 부분의 〈屬遭束外激〉와 사료 (C) 부분의 〈屬熱〉의 대상을 모두 고조선 전체로 파악하였다.8) 그러나 史記 의 기록은 위만의 출자와 관련하여

8) 陳 朝 .園古 史. 1976•

無• 泰• 漢代에 걸쳐 중국세력의 동방진출의 消長을 셜명한 것이지 조선이 계속하여 중국의 속국이었음을 셜명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족, 조선전의 사료 (B) 부분의 熱의 鄭塞가 셜치된 朝 • 故地를 棄代에 새로이 개척한 遺東外짧에 속하게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판련하여 」과 鏡l各」의 기사를 종합하며 상펴보면, 흡一帝園언 豪은 熱올 멸한 후 薰의 東界였던 요동의 만번한에 있는 천산옳 념어 100리의 고조선 영토를 잠식하고 압록강유역에까지 진출

하여 고조선에 압력을 가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3) 漢帝國과 古朝群의 항쟁

『鐵論」어l 의하면 i햇初에 고조선은 진 • 한 교체기의 혼란을 틈타진의 요동외요를·공격하여 요동지역의 故土일부를 수복하였다.9) 史

9) 卷38 , 備 」鷹의 〈大夫 , 往者四爽, 冠홈, 朝, 之東地.)라는 기륙용 園時代외 이빼하는 경우도 있으나, 가 業에 쩔치되었다는 정율 고려하면 이는 훌初의 사실용 보는 갯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記 조선전」의 사료 (C) 부분에 보이는 〈其遠難守〉의 〈其〉는 고조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文面그대로 진의 요동외요에서 관할하였던 지역을 의미하며, 이는 표현대로 거리가 멀어 후퇴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에 의해 요동외요가 함락되었던 것을 감추기 위한 중국척 표현에 불과하다. 이로써 i껏初의 고조선은 혐뼈의 등장과 진 • 한의 교체라는 동북아의 국제정세를 능동적으로 이용하여 요통지역의 故土를 수복하고 i貝水를 경계로 i핏帝國과 정면 o 로 대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과 한의 국경인 펴水는 조선계지명으로 고조선의 위치 버청을 둘러싼 가장 중요한 쟁점의 하나로 燦河• 大逢河• 絲江• 江• 大同江등의 說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貝水가 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選來故(했의 훌塞)와 棄의 었울來外徵사이의 강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빡의 동방진출시 조선과의 국경선이었던 만번한이 자연계선이라면 펴水는 이와 병행하는 요동지역의 江임이 틀렴없다.

(4) 진번과 고조션의 이동

史記 조선전」의 (A) . (D) . (F) 부분에 보이는 진번기사률 정밀히 분석하면 진번의 이동 사실이 분명히 확인된다. 또한 熱이 짧 •朝활을 동시에 복속시켰다는 정으로 보아, 진번은 조선의 서쪽이나 북쪽에 있었다기보다는 熱의 동방진출로률 경계로 조션의 외곽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번의 이동으로 보아 이예 고조선도 그 중심을 옳켰을 가능성이 높음을 알 수 있다. 즉, 고조선의 중심이 평양지역에 있었다면, 진번이 고조선의 중심부를 지나 황해도 남부로 이동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고조선도 진번과 함께 그 중심을 남쪽으로 이동하였다고 여겨진다.

(5) 險 과 王險城

史記」를 정밀히 분석한 결과 고조선의 초기 중심이 진번과 이웃하여 요동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보다 높아졌다. 이와 관련하여 史記索隱 의 훨 注와 『漢 地理志」의 師古注에 인용된 應의 혈훌 險 에 대한 주석 및 藥浪 朝l除에 대한 讀注와 『後 集에 인용된 應의 주석을 면밀히 분석하면, 고조선의 日都는 避束체의 險滾이며, 사기』의 王險城은 고조선이 이동한 후의 도읍지로서 대동강 북안의 명양일 것으로 생각된다.

, PP·41 -47 창조.

4 古朝蘇의 中心地와 題域의 범위

고조선의 이통과 사료의 한계로 언하여 고조선의 강역을 정확히 추척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나, 중국식 왕호를 쓰던 집권척 영역 국가시대에 이르게 되면 문헌자료상으로도 고조선 강역의 대체적언 윤곽은 알 수 있게 된다. 다만, 이 시대에 이르면 韓國古代史에도 고조선 이외의 정치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고조선의 캉역은 고조선과 병렬되어 나타나는 제정치세력들이 구체척으로 고조선에 부속된 충거를 찾지 못하는 한 고조선의 강역에서 제외하여야 될 것이다.

이러한 점율 염두에 두고 고조선 강역의 범위를 살펴보면 전성기의 고조선온 대체로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大邊河유역에서 東朝와 만나고, 남쪽으로는 대동강 유역을 경계로 辰國과 이웃하고, 북쪽

과 동쪽으로는 滾顆• 技餘• 훨짧 • 關懷과 접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鴻• 棄• 漢의 동방진출에 따라 고조선은 했代에는 千山, 棄代에는 압록강까지 후퇴하였으나, ?횟¥n에는 故土의 일부를 수복하여 遭河이동 千山이서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i貝lj(를 경계로 漢帝國과 대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결과척으로 고조선이 요동지역에서 대동강유역으로 이동하였을 가능성이 보다 높으며 요동지역에 있었던 초기 고조선의 중심은 選河이동 千山이서의 險漫일 것으로 추청되며, 이동 이후의 중심지는 대동강 북안의 평양으로 이해된다.

낙랑의 고고학적 연구를 위한 몇 가지 제언

【孫秉憲】

樂浪올 포함한 漢며꼈fi의 연구에는 문헌사학적 접근과 고고학적 접근 양자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문헌사학적 연구성과를 돌이 격보면 漢四那의 역사지리적 연구(那縣의 治所와 그 臨댔)에 치중된 느낌이며 이들의 사회사척, 문화사척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

또한 한사군의 역사지리척 연구에 있어서도 그 성과가 만족스렵다고 할 수는 없다. 낙랑군의 部治가 명양 시가지에서 대동강을 건너 자리잡고 있는 樂浪土城이었다는 견해를 제외한다면, l) 다른 三那의

1) 륙한 학자를옹 아칙도 낙랑군 東에서 황고 있며 대동강 남한의 浪의 로 보고 었으나 성득력이 약하다.

청확한 위치와 강역에 대하여 아칙도 학자들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의 경우, 낙랑군의 남쪽에 자리한다는 在南說이 在北짧보다 셜득력올 더 얻고 있다 하더라도, 在南說가운데도 그 정확한 위치버청에는 학자틀간에 異이 분분하고, 이러한 상황은 臨, 玄의 경우에도 대동소이하다. 요컨대 한사군의 역사지리척 연구에 있어서까지도 문헌사학척 접근은 벽에 부닥친 느낌이며 이는 원칙적로 근본사료의 부족과 그 내용의 소략, 애매모호함에 기인한다. 이와 철은 문헌사학척 접근에 있어서의 장벽은 漢四都의 역사지리척 연구의 거의 모두가 일제강점기간 동안 이루어쳤으며 종전 이후에는 아

무런 새로운 진척도 없었다는 사실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짧四那특히 樂浪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日帝강정기간 동안은 물론 終!jix 이후에도 꾸준하게 계속되어 팔목할 만한 성과를 올라고 있다_ 19°9년 樂浪土城근처에 있는 의 樓이 발굴되고부터 終戰까지 日 학자들은 樂浪土城과 그 주위에 산재한 고분들을 대상으로 청력척인 고고학 활동을 벌였다. 原田팀에 의하여 토성 자체가 발굴조사되었고 화려한 부장품으로 념리 알려진 石짧里9號慣, 彩훌훌爆을 위시하여 다수의 고분들도 역시 이 기간 동안 발굴되었다 2)

2) 戰까지 이루어진 榮浪遺 에 관한 중요한 발굴보고서는 다용과 강다.

貞외, 「樂浪部降 遺. (古樓關훌特別輪告)4. 192 7-

原田淑A 외, 「樂i良土城址 關효」昭和I (古 告), 흙都. 1938•

小훌顧夫, 良彩慶 . (古鷹關 ) I. 1935.

小楊f吉 本 次郞, r樂(古關告)2 , 1935.

발굴보고서 이외에 終戰 樂良용 대상으로 이쭉한 고고학척 성과훌 종합한 책이 었다.

悔原未治• 田亮, r朝t古文化 2 3. . 1948, 19'9'

井和 良」東京. 1972 •

戰後북한 학자들도 이콧에서의 발굴을 게을리하지 않아 本에 의하여 조사된 樂浪古慣에 필적할 정도로 많은 수의 樂i良古樓이 발굴조사되었으며 그 성과는 주로 고고학자료집 4 5. 6에 집약되어 수록되어 있다. 북한 학자들의 이러한 발굴은 樂浪물철문화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를 풍부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樂浪木椰境의 훌홍制上系續를 밝히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지금 점점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수용되고 있는 평면 플랜 正方形의 낙랑 목곽분은 漢代중국 본토에서 유행하던 묘제가 칙수입되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토착 輩制언 土據로부터 숭계된 양식이라는 견해는 상기한 戰後북한 학자들의 발굴성과에 힘입은 바 크다.3)

3) 예훌 들연 田村, 三上土 東洋史• 考古集 19791 pp. 60' -629-

약술한 바와 같이 낙랑에 대한 고고학척 연구가 간단없이 지속되어 왔다고는 하나, 아칙도 발굴성과의 종합척 고칼을 통하여 해결해야 할 문화사척 과제들이 산척해 있는 실정이다. 종천의 식민주의척 역사연구 시각에서 탈피하여 얻어쳤다고 역설하는, 북한 학자틀의 樂浪

에 대한 몇몇 새로운 견해도 소위 민족주체성에 입각한 주장만이 앞서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기초적 문제들의 사실 규명과 세밀한 증거제시가 부족한 감이 있다.

이에 필자는 낙랑문화를 연구하는 데 우선적으로 제기되는 세 가지 기본문제를 적기하고 그의 해결을 위한 접근방법을 이하 간략하게 피력해 보겠다.

1 낙랑고분 특히 木箱壞• 土塊幕를 대상으로 정치한 편년체계의 확립

삼국이나 까야의 고분과는 달리 낙랑고분의 축조연대는 형식에 따라 그 유행하던 시기가 꽤 명백하.게 구별되는 漢鏡이나 紀年銘文을 가진 가 다수 출토되기 때문에 그 대체적 윤곽이 확실하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기원 1 세기에 집중척으로 축조된 명연 플랜 정방형의 木柳境(북한에서는 귀틀무덤이라 부름)에 한정되는 것이며, 평면 플랜 長方形의 木箱境(북한에서는 나무곽무덤)이나 土擬을 대상으로 한 정치한 편년은 금후의 과제이다.

특히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田村도 지척하였듯이 長方形 聽木箱樓가운데 낙랑군 셜치 이천과 이후에 축조된 무덤들을 구별하여 그 성격 차이를 명백하게 하는 작업이다.4) 이론상으로 이 문제

4) 위 의 논품. p.626.

는 漢鏡, 器, 環頭刀劍등 중국 본토 한문화의 직접척 영향을 받은 유물의 有無나 쫓흉를 살펴봄으로써 쉽게 풀릴 듯싶으나, 아직 이에대한 결정적 연구는 이루어져 있지 않다.

2 낙랑문화와 한대 중국 변방지방 문화와의 비교

얼마전 발표한 「樂浪古樓의 被者」라는 졸고에서 필자는 물론 중국 본토로후터 새로 이주한 族도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겠지만 衛朝 야래의 토확주민이 낙량고분의 대부분올 축조하였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5) 같은 글에서 필자는 또한 內古地方의 고고학척 성과를 종합하여 田廣金이 집필한 논문도 언급하면서 다음파 같은 그의 견해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부장품 가운데 金, 金銷의 物文장식품 청도에서 흉노족의 전통척 기물을 찾을 수 있을 뿐, 代內薰古노 지배층의 고분은 그 구조에 있어서나 그 부장품의 조합에 있어서나 대형 한묘와 차이가 없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한문화의 영향이 푸렷하게 나타난다.8)

5) 輪, 浪古樓의 繹. 園考古學) 17. 18, 198" PP·3- 12•

6) 위의 글은 稍안 上해홉에 있는 운짱용 조곰 바꾸어 천재한 것이마. 창조할 田廣&의 논운윤 {考古學 ) 1983-1, p. 17·

7) 隆廣, 「良文化考古, . 1983, pp. 2-26,.

田廣金의 논문은 분량이 많지도 않요며 漢代에 축조된 內輩古古樓이 주제도 아니므로, 그의 총론적 견해에는 각론이 필요하다. 따라 漢代內古문화를 낙랑문화의 성격규명과 관련하여 비교 검토하기 위하여는 먼저 한대 내몽고지방에서 축조된 고분이나 여타 유척, 유물 전체에 대한 종합척이고 구체적인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낙랑문화와 한대 중국지방 문화와의 비교검토는 內寒古등 중국 塞外邊方地方의 문화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일찌기 趙口는 낙량문화는 중국 본토의 中原華北文化보다는 海方江省등의 中• 華南文化와 보다 밀접한 친연관계가 있다는 견해를 개진하였다.7) 그의 의견은 境幕의 구조, 鏡의 종류와 출토상황, 格材의 상호비교에 기초를 두고 있으나, 그의 주장의 타당성을 올바르게 점검하려면 두지역 고분과 부장품 전체에 대한 좀더 총체척이고 철저한 비교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3 우리나라 여타 지역에서 발견되는 유적, 유물과의 버교연구

낙랑군의 문화사척 의의를 한마디로 요약.한다연, 우리나라의 토확문화가 낙랑군을 통하여 금속공예 , 滾工, 續鍵, 건축, 도예 등 여러 부문에서 한의 발달된 선진 제공업기술올 받아들여 곱속한 발전융

이룩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아직 개괄척이고 인상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필자는 낙랑문화의 영향이 현저하게 보여지며 근래 우리나라 각지에서 다수 보고되고 있는 土짧꿇와 낙랑고분과의 본격척인 비교연구가 이 시점에서 필요하며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의 작업은 닥랑고분과 토광묘와의 묘제를 통한 비교연구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그들 고분에서 발견되는 각종 유물의 개별적이고 구체척언 상호비교에도 착안해야 할 것이다. 더우기 각종 유물의 상호비교에 있어서 우리는 형식, 양식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 鐵 등 동종 유물의 재질분석, 제작기술상의 상호 영향도 고려하여야 함은 물론이다.

고구려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金基興】

주제발표자(검광수)는 종래 한국사연구에 적용되고 있는 고대국가발전단계셜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즉 부족국가-부족연맹체-고대국가라는 통셜은 세계사적 시각에서 사회구성과 연결된 발전단제설 위에 섬으로써 체계적 역사인식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셜이 성렵될 당시의 한국사 연구 수준의 문제점이 척지 않기에 그것틀을 수정 • 보완할 휠요가 있었다. 이에 7。년대 후반 이래 〈부족국가〉라는 용어에 대한 재고가 요구되고 〈성읍국가) (군장사회〉풍의 단계를 국가성렵단계에 셜정할 것이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제안은 아직 명실상부한 내용을 구성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므로 사실 자체를 우선 집중척으로 연구하여 그 결과를 통하여 역사척 발전단계를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리하여 주제발표자는 자신의 연구성과률 중심으로 하여 고구려의 국가형성사 연구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사향을 다음과 같이 지척하고 있다.

고구려족의 역사척 경험 ---국가 성럽전단계 X휩族의 경험

고유한 국가척 조칙내용---姓民題與, 王號, 加의 편성, 部制, 官制

쟁산력발달에 따른 사회분화

초기 王者들의 정복력

이상과 같은 발표자의 발표내용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자칫 국가성립가설에 빠져들어 각 단계를 체계적으로 구명하는 문제가 뒤로 미루어질 수도 었다는 점에 대한 학문적 반성을 제기했다.

그동안 비교적 크게 연구되지 않던 고구려 나름의 사회제도 • 국가제도들의 섬층적 이해가 초기국가 및 집권국가의 성럽을 체계척으로 이해하는 데 요긴한 자료가 됨을 밝혔다.

顆族의 역사적 경험을 강조함으로써 고구려 초기사를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재고했다.

제도 동을 연원적인 변에 주목하여 해석함으로써 자칫 정체성을 강화하는 바 있던 종래의 연구태도에 비하여, 그것이 갖는 당시 사회에서의 역사적 위치를 강조함으로써 보다 발전적인 역사상을 갖게 한 점이다.

여기서 토론자료의 발표를 듣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바는 다음과 칼은 정들이다.

고구려족의 역사척 경험이 마땅히 주목되어야겠지만, 子 등에 보이는 간헐적 기록의 사실성이 일단은 문제이고, 또한 기원전 수세기에 걸쳐 광법위한 지역에 흩어져 살던 銷族의 역사경험을 고구려에 연계시키는 데는 축고가 요청된다.

역사척 경험, 생산력발전의 운제는 문헌사학척 방법뿐 아니라 고고학척 성과를 수용해야 될 문제 라고 본다.

고구려에 관한 초기기사는, 기본척으로 그 신벙성 여부에 대한 검충이 선행되어야 하겠다.

집권국가의 품제는 북한학계의 삼국시대 중세셜이 성럽되는 과정에서 척찮게 동장했던 것S로 아는데, 북한학계의 연구성과도 아울러 검토했으면 한다.

백제 국가형성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점

【梁起錫】

백제 국가형성사 문제는 초기 백제사 규명의 중요한 관건이 되기 때문에 여러 각도에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어 왔으나 아직 이에 대한 일정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를 규명하기 위한 사료로는 三國史記 百濟本紀」의 초기 기사와 三園志 鏡志 束策鼎」의 韓條와 같은 문헌사료를 들 수 있는데, 어느 사료를 取信 하느냐에 따라 백제 국가형성 시기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이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60년대 후반 이후 한강하류 서울 일원에서 발굴조사 된 고고학척 연구성과에 힘입어 백제국가 형성시기를 三園史 百濟本紀」의 건국연대언 B.C. 세기경까지 올려볼 수 있다는 긍정론이 대두되었다. 이로서 일인 판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어 온 허구론율 극복할 수 있게 되었고, 아울러 부진했던 초기 백제사 연구의 새로운 지명올 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李鍾旭도 이러한 긍정론의 입장에서 백제 국가형성 과갱용 살피고 있는데, 발표 주제가 이에 대한 연구동향올 알피고 있어셔 어떤 반혼을 제기하기보다는 백제 국가형성사의 연구에 있어셔 찮고 념어가야 할 몇 가지 문제점올 부각시키는 것으로 토론에 대신하겠다.

첫째, 국가에 대한 명확한 개념 갱의가 있어야 하겠다. 빼제국가의 성립올 말하는· 것언지 고대국가로의 발천과정상의 한 단계훌 논하는 것언지 분명히 구붐되지 못한 상태에셔 업혼되는 경우훌 찾아릎 수

있다. 최근 인류학적 국가이론을 원용하여 국가형성문제에 접근한 결과 국가의 개념이 보다 선영하게 제시되었으나 실제 적용에 있어서 신중해야 한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따라서 국가형성 문제를 다룰 경우에는 그 선후관계를 십분 고려해야 하고, 아울러 동시대의 고구려나 신라의 국가형성시기와도 상호 관련하에서 파악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둘째, 고고학적 연구성과를 원용하는 데 있어서 보다 신중한 자세가 요망된다. 고고학 연구성과의 원용으로 문헌사학의 한계를 극복하여 백제국가 형성시기를 B.c. 세기경까지 올려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론의 경우 실제 백제의 왕도였던 서울 일원의 이 시대를 가늠하는 고분, 성곽, 건물지, 야철지 및 농경문화 등에 대한 체계적이고도 변밀한 고고학적 발굴조사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출토된 유물 • 유척도 이를 뒷받침하기에는 너무 단편적이고 빈약한 느낌을 주고 있다. 또한 4세기경 부여족 남하에 의한 왕실교체설도 다분히 서울 石村洞에 있는 기단식 척석총을 염두에 두고 나온 발상으로 여겨지는데, 이러한 고고학 자료에 대한 편년 설정이나 그 성격 규명에 있어 상이한 해석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셋째, 뭄현학척 입장에서는 三國史記 百濟本紀」와 三國志 志東奏傳」의 기록에 의거하게 되는데, 이 두 史좁에서 제시되어 있는 상야한 업장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문제다. 두 史홉가 편찬되게 된 배경과 성격올 파악하고, 아울러 두 사서에 실려 있는 기사 내용올 연밀히 검토하여 이를 종합· 체계화하는 작업이 절실히 요망된다.

참고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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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甲紀念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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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 百濟政治史 究. 一湖때. 1987.

백제 王姓에 대하여

【沈正純】

최근의 백제사연구에 있어서 技만을 王앞으로 보는 종래의 견해에 의 交替說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하겠다. 크게 대별하여 보면 千찮宇선생의 와 除의 王室交替說, 敎授의 解民와 採除의 王室交替說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백제왕실의 교체에 대하여 논의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두 說에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는 優와 解표說에 대하여 살펴보고, 그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해 보고자 한다.

三國史記』어l 보면 〈系與高句麗同出技餘故以採餘라 하여 技除를 王姓으로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i며, 실제로 「本紀」나 중국의 諸핑웹에 〈技〉자가 생략된 〈除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三國退파』에는 <按處田限籍·日夫 田丁柱 今言技餘 者復上古之名也百濟王姓技 故稱라 하여 王柱으로 技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技는 餘의 〈餘〉字가 탈락한 것이라고 십분 이해한다하더라도, 백제왕성이 技除民이기 때문에 지명을 技餘都으로 하였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技除는 원지명인 夫里와 같이 野의 뭇으로 이해되고 있음과 新 德王代에 百濟王姓인 技餘 따서 夫除이라는 지명을 결코 칭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三國退 는 또한 〈其系與홉句뼈同出技餘故라 하여 블 王姓으로 보고 있다.

이는 위에 말한 의 記파와 』를 비교하여 보면 〈採〉를 〈隔〉로 바꾸어놓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然이 「北앉餘」條에 〈國號北 柳名 以解〉이라 한 것을 연상하여 혐표를 王랐으로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이에 대하여, 좀더 살펴보면, 혐£로 가장 먼저 나타나는 이름은 解파로 溫祚王 1 年에 右柳로 임명되고 있는데 , )라 하여, 이보다 앞서 右꽤로 임명된 바 있는 〈族父音〉이라 한 것과는 표현이 다르다.

그 외애도 解.표가 王族으로 나타난 예는 없으며, 다만 願支王3年 月峰에 ( 解.須쩌內法f左平隔표않兵·官作平皆王減也〉라 하여, 王의 외척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하여는, 이미 李 敎授가 「濟王位繼承考‘」에서 와 解를 王族으로 발표한 바 있으며, 梁敎授는 「펀 典支王 의 政治(變」에서, 以前의 한 중심체제에서 願支王옹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王族(第餘信)과 왕버족인 解세력에로의 지배세력이 전환되었던 일대변혁기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한편, 優표說을 살펴보면 古王27년 3월의 〈以王弟·寫內住平〉의 침E젠가 주목된다. 를 古王의 王弟로 표현하고 있어 優를 王따.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백제의 건국셜화를 보면, 始祚說와 始祖 說i活를 볼 수 있는데, 후자가 좀더 사실적이지 않나 한다. 이는 溫祚王13 년 1월條에 〈王母첼 年六減〉라 하여 에 대한 記판가 있는데, 온조시조설화에는 王母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으나, 비류시조셜화에는 母에 대한 이야기와 〈母親모시고 南쪽으로 가서…〉라는 記가 있어, 위의 記와 연관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류시조셜화를 살펴보변, (流王其父台北技除王隔核 孫... )라 하여, 流王의 父가 俊台임을 알 수 있다. 이는 俊台가 縣t의 孫·인 관계로 佛.民가 아닌 를 칭하였을 것이라는 見解;도 있다.

이로 볼 때, 優는 王柱으로 볼 수 있는 근거플 마련했다 하겠다. 한편, 『三國史節』에는 〈百濟始祖溫祚立〉이라 하여, 民- 姓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撥.가 句에서 百濟가 분리되었음융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日本蠻記.. 紀 14년 조어濟王子

除 (明王子威德王-t發國中兵向高뻐國策百合野· 士. 會明有합顆錯者 播鏡햄二뽑 flU긴尾혐二騎井표騎連휠홈到來問日. 今欲早知與 可以禮問答 名年位i昌代日k生是同 位是휴率年二十九笑〉이라 하여, 昌(徐의 威德王)이 高句 에게 대답한 기록이 있다. 그 記필 중에 〈姓是同姓〉이 高句뼈 王앉과 같은 앉 로 볼 수 있겠으나, 이는 「蓋뱀王國캄」에 실려있는 바의 〈昆與돼句뾰 源出技除〉라는 뭇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한, 이 記핀를 싣고 있는 r 日本판記』와 『北및』등 中國핏料에는 除읍이라 하여 餘 를 칭하고 있다.

近셈古王以後공식적인 對中I웰 관계에 있어서 百濟의 王妙-에 대해서는 〈除IX:)로 통일되어 있다. 이것은 『宋펀J 이후의 「百濟댐」에 보면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러나, 近합古王以前에 있어서의 百濟王姓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史料가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近원古王이전에 있어서의 百濟의 社會樞造가 王樞이 확립된 시기, 즉 王좋로 성장된 이후와 차이가 있어서 그러한 현상이 初뻐 百濟社촬에 #않修되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는 新維王室에 있어서의 三따交立과 비교될 수 있는 현상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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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 宇, 「目支國, {極國究} 24,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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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起, 「百濟願支王代의 政治 , {測西 10, 1982.

國, r百濟. ~, , 1988•

가야사 복원에 있어서 몇 가지 문제점

【趙榮濟】

최근 영남각지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한 古境들이 조사되고 획기적인 자료들이 출토됨으로써 椰史에 대한 관심이 漸i함하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가야관계 사료가 지극히 엉성할 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것 또한 극히 단편적인 내용들뿐이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종합적인 가야사를 복원한다는 것은 많은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고고학척인 접근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사실,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가야고분에 대한 조사는 척지 않게 이루어졌으며 출토자료 또한 엄청난 양에 달한다. 그럽에도 불구하고 이들 자료를 통헤 가야의 역사를 밝히기에는 여전이 많은 문제갱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주지하다시피 고고학척언 자료의 해석에는 수칙척언 고활과 수명척언 관찰이라는 측면이 있는데, 가야고분 연구에 있어서 수직척언 고찰이란 편년과 문화의 자체발전올 추구하는 것이며, 수명척언 판찰이란 토착문화와 주변의 외래품화와의 비교연구가 여기에 해당원다. 따라서 가야고분 문화의 종합척언 이해, 나아가 가야사의 복원이란 출토된 자료의 수직 ·수명척언 판찰이 종합척으로 이루어졌옳 때 가능해지는 것은 두말할 펼요도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가야고분 연구의 실태를 살펴보면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지역적인 가야문화의 실체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버록 洛束江下流域인 山• 金海와 池山洞古慣으로 대표되는 靈의 大 椰문화 등은 그 실상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광대한 椰地域의 고분문화는 아직 미지의 것이 너무 많은 실정이다.

둘째, 꽤 많은 자료가 출토되었지만 이들 자료에 대한 해석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편년에 대한 결정적인 자료가 불행하게도 I정도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자들마다 각양각색의 편년관이 제시되고 엄청난 흔란이 야기되고 있는 점이다. 고분연구자들이 발굴조사 때마다 銘文이 들어 있는 자료를 그토록 기대하는 것도 이 점 때문일 것이다.

셋째, 광범위한 지역에서 출토되면서 각 지역마다 독특한 문화내용을 보여주는 자료들에 대한 양식 또는 형식설정에 대한 노력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쩨기 杯의 透 배치에 근거를 둔 가야토기와 신라토기의 구멸과 같은 양식차가 오늘날 가야문화와 신라문화의 구별에 절대척언 기준이 되고 있는 것처럼 가야지역내에서도 시간에 따른 변화와 동시기에 있어서 지역차를 추출해 내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넷째, 외래문화에 대한 언식이 결여되어 있는 것 또한 커다란 문제점으로 생각된다. 특히 가야사를 연구할 때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백제와 일본문화에 대하여 도대체 백제문화의 실상은 무엇이며 일본고분 출토자료 중 무엇이 가야에서 건너간 것인가를 밝히는 것은 가야의 대외관계사뿐만 아니라 가야사 자체의 발전과정을 이해히는 데도 중요한 부붐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오늘날 한강유역과 충청 • 전라지역의 4- 6세기대 백제문화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 수 없으며 얼본 고훈문확에 대한 국내 연구자가 거의 없다는 것은 커다란 문제라 여겨진다.

이상에서 가야고푼 조사에 창가하고 있는 필자로서 명소 느끼고 있먼 몇 가지 문제점울 깐단하게 지척하였지만, 이외에도 크고 작은 많은 품제점풀이 있율 것으로 생각된다. 여하튼 상기한 몇 가지 문제정

들이 진지한 노력끝에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분출토 자료를 재해석한 가야사의 복원이 극히 위험하다는 것은 분명하며, 한걸음 나아가 이들 자료의 헤석을 곧바로 극히 단편적인 문헌사료와 결부시켜 가야사의 체계를 확립한다는 컷은 노력에 비해 얻는 결과가 의외로 척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섬청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들을 빠른 시일내에 해결하면서 가야사의 실체를 밝히는 선결작업은 연구자들의 고분문화 실.Acr규명에 대한 적극적인 노력과 아울러 정부차원에서의 가야고분 조사에 따른 지속적인 지원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이며, 또한 출토된 자료의 다각적인 해석결과를 고대사학자들과 함께 면밀한 검토를 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활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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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한일관계사 정렵의 과제

【金泰植】

4세기의 한일관계사에 대해서 여태까지 많은 가설이 개진되어 왔으나, 이 모든 것들은 아직 추측의 단계에 머물고 있다고 보인다. 이러한 문제점은 이에 대한 史料상의 제약에서 나온 것이다. 낙랑 • 대방군의 소멸 이후, 4세기의 한일관계사로 언급되어 온 것은 r 日本 紀」의 이른바 1七國 定記事(369) 및 七支刀廠納(372) 의 문제와 「廣 土王陣」의 辛年記事(391 ) 와 任那加羅攻略(400) 의 문제가 그 중심이 된다.

그러나 r 日本뽑紀』의 해당기사는 사료의 신빙성 및 윤색 여부가 문제되고 있며, 「廣開土王 의 해당기사도 사료의 조작여부 및 기사탈락의 문제가 있어서, 그 의미의 해석이 지극히 어려운 형편이다. 이렇게 모호한 사료들에 대한 해석에 의하여 기존의 여러 가셜들이 나와 있다. 즉 이를 任那의 성럽에 대한 기사로 취급하기도 하고(未松保和) , 기마민족에 의한 任那• 흉業聯合王國이 있었다고 보기도 하고 (江上波夫) , 일본열도내 三韓分園들의 소행흐로 보기도 하며(김석형),낙동강 하류 가야의 백제권 편업기사로 추청하기도 한다(천판우>.

이와 같이 전혀 다른 가셜들이 성렵할 수 있었던 배경은 전술한 사료상의 푼제정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큰 요인은 고대 한일관계사의 두 촉언 가야사와 일본고대사 자체가 정렵되어 있지 않다는 청에 었다. 4세기의 고구려 ·빽제 • 신라사는 그래도 어느 정도

의 윤곽이 드러나 있으나, 耶와 日本古代史는 문헌사료의 결법으로 인하여 자체발전과정의 출거리조차 서 있지 못하다.

특히 6세기 이전의 本古代史는 아직 定說이 없어서 문헨에 간혹 나타나는 <1委〉가 州의 f委인지 鍵內의 優인지 또는 기타 지방의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고, 그 정치성장도 및 사회상태에 대해서도 짐작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한편 4세기 이전의 JlnJH)핏에서도 그 구체적 발전과정이 불분명하여 〈任〉또는 〈任 雜〉의 위치 또는 성격에 대해서도 무지한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 그 사료틀만을 가지고 제해석하여 4세기의 한일관계사를 먼저 논한다는 것은 무리하다고 생각 된다.

그러므로 그 해결의 돌파구는 고고학적 연구성과의 축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가야지방과 일본열도의 유물 • 유척의 분포와 편년이 상당히 체계화되고, 그 종합정리에 의해 가야사와 일본고대사가 각기 정립된 연후라야, 그 상호비교에 의하여 加耶·懷의 관계에 대한 윤곽이 형성되고, 그후에 비로소 三國을 포함한 4세기 당시의 古代韓關係史가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해당시기의 고고학편년은, 상대편년상의 대체적인 윤곽은 잡혔다고 해도 한국 • 일본을 막론하고 그 절대편년의 기준을 찾지 못하여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으므로, 그 근거만으로 가야사나 일본고대사를 논하기는 위험스렵다. 그러므로 고고학·고대사 전반에 걸친 학계 전반의 연구축척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러한 한계성은 있지만 계속해서 고고학적 연구성과를 염두에 두연서 가야사와 일본고대사의 정립을 해나가야, 그 대체적 윤곽에 의하여 그를 기반으로 하여 전술한 문헌 사료들의 의미도 재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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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자료를 이용한 가야사 연구의 제문제

【安春培】

1 고고자료의 이용에 따른 제문제

문헌사료가 부족한 고대사연구에 고고자료의 이용이 시도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으로서 사료의 부족으로 벽에 부딪친 것처럼 인식되어 왔던 가야사연구가 고고자료의 이용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듯한 느껑을 갖게 하고 있다. 실지로 최근에 문헌사학자들에 의해서 발표된 가야사관계의 논문들은 내용의 상당부분을 고고자료를 토대로 구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문헌사학자들의 고고자료 이용에는 주의하여야 할 몇 가지 문제점이 었다. 문헌사학자 가운데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서 자신이 직정 고고자료률 분석한 결과를 제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고고자료의 분석이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발굴과 유구의 실측, 그리고 유물의 복원 • 실측 등 고고학척 작업의 전반에 대한 직접척인 창가 경험이 없는 비전공자가 보고서만을 통해서 인지하는 지식윤 실제로 발굴에 임했던 보고서작성자의 생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올 수 있다.

직접 많은 발굴에 참가한 고고학 전공자들일수록 기회만 있S연 다른 사람이 주관하는 발굴현장에 칙접 가보기률 원하고, 보고서가 이미 간행된 경우얼지라도 출토된 유물의 사진이나 도변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설물을 보려고 하거나, 또는 발굴자를 직접 만나서 보고서에 채 싣지 못한 제반사항을 듣고자 여행을 할 때가 많다.

고고자료의 해석은 유물이냐 유구 그 자체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유물의 출토상태 • 공반판계 등 부수척인 것이 더 큰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많고 보고서에 이러한 모든 사항을 완벽하게 당기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은 문헌사학자가 고고학에서의 정설 또는 가설을 수용하여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할 때인데, 이 경우 한국고고학의 현수준과 고고학상의 제설이 지니는 의미를 바로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아직 연륜이 오래지 않은 한국 고고학계에는 형식분류 • 편년 • 시대 구분 등 제분야의 많은 문제를 놓고 여러가지 가셜이 제기되어 있는 상태이고, 새로운 자료가 발견될 때마다 새로운 가설이 등장하거나, 작년에 내놓은 새로운 가설이 금년에 셜자리가 없는 경우도 본다.

어떻게 보면 고고학에서의 정설이란 새로운 자료가 발견될 때까지라는 한정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것이 비단 한국고고학에서의 문제라고 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쉽게 무너지는 고고학척 가설이란 고고학척 논리의 타당성을 무시한 채 전개된 셜이거나 충분한 자료의 등장을 기다리지 않고 한두 예의 자료만을 토대로 펼친 성급한 주장일 경우가 많다.

이같은 현상은 한국고고학에 있어서 한국척 조건에 맞는 이롱고고학이 제대로 확럽되어 있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찌되었든 문헌사학자가 하나의 논고를 작성함에 있어서 고고학척 가설이냐 고고자료를 주축으로 삼는 것은 피하여야 할 일이라고 본다. 문헌사학자는 문헌사료를 중심으로 구축한 골격 위에 고고자료로 보강하는 작업을 수용하고, 고고학자는 고고자료의 해석에 대한 보조수단으로 문헌사료나 역사학의 연구성과률 수용해야지 주객이 전도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2 고고자료의 해석에 따른 문제점

이제까지 한국고고학에 있어서 발굴조사의 대상은 주로 고분이었고, 특히 가야관계의 유척이란 거의가 고분이었고 여기서 얻은 지식은 유구의 구조와 부장유물에 관한 정보이다.

가야사 연구에 있어서 고고자료의 이용은 가야사시대구분, 가야 영역의 파악 가야제국의 위치비정, 임나문제 또는 가야와 주변지역과의 교류문제 등이라고 하겠다.

가야사의 시대구분은 千 宇의 說(초기 A.D. 167- 184- 369. 중기 A.D. 369-500, 만기 A.D. 500-562) 과 金廷의 說(전기 A.D.l세기-3 세기, 후기 A.D.4 세기 -6세기) , 金泰植의 (전기 A.D.l세기 -4세기, 후기 A.D.5 세기 -6 세 71)이 제시되어 있는데, 시대구분문제에 있어서 고고자료의 이용은 가야전기의 상한을 결정하는 문제와 가야후기의 성격을 논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야의 성럽을 고고자료로서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후기가야의 실체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고고자료를 바탕으로 구명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문헌사학쪽에서 볼 때 가야의 성럽 여부란 정치권력의 성장과 밀접한 판계가 있고, 후기가야의 실체라는 것도 주변세력과의 관계같은 정치척 문제가 중성이 된다. 그런데 고고자료를 바탕으로 족척전통이나 문화척 동철성을 밝히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정치권력이나 세력의 실체를 고구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가야영역의 파악이나 가야제국의 위치비청도 문화척 국경 또는 경계가 정치적 국경이나 경계와 얼치하지 않음을 안다면 고고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권역의 셜청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엄나품제 및 가야와 주변지역과의 교섭에 대하여 고고자료률 근거로 정치세력의 진출 • 후퇴 또는 지배 • 피지배관계를 논하는 것은 신중율 기하여야 한다. 어떤 지역에 있어서 외래적 요소률 지닌 고고자료가 발견되었올 때 그것은 척대척인 정복행위에 수반된 파급인 경우보다 우호척언 교류 속에서 이루어진 경우가 많고 후자의 경우에 품확척 파굽은 더욱 활발하고 폭넓게 이루어진다는 것올 인식해야한다.

3 가야사의 연구방향

그렇다면 현시점에서 가야사 연구는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되어야할 것인가?

첫째, 가야사 연구에 있어서 주안점을 가야사회의 발전이나 대외관계에 둔 경우에는 가야사 연구는 문헌사료를 중심으로 골격을 구성하고 인접과학의 연구성과를 이용해서 보강하는 기본척인 원칙이 고수 되어야 한다.

툴째, 이제까지 등장한 제가설에 대한 신중한 검토와 논리척인 비판 그리고 새로운 자료에 의한 보완을 통해서 모두가 긍정할 수 있는 정설을 수립해 나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셋째, 가야사 연구 전반에 있어서 일본학계의 제가설을 반박 • 비판하기에 급급한 후발적 연구자세를 탈피하고 새로운 시각에 입각한 선도적 연구자세를 확립해야 한다

넷째, 가야사 연구에 있어서 고고자료의 활용은 고고학적인 방법에 의한 편년 문화내용의 구명, 주연문화와의- 비교연구 등이 이루어진 연구성과를 이용하는 쪽으로 진전되어야 한다.

발해사 연구의 문제점

----발해와 신라와의 외교관계를 중심으로

【韓圭哲】

우선 한국상고사학회에서 상고사도 아닌 없l海史를 이번 발표에 끼어넣어 불모지의 말해사 연구에 관심을 가져주신 데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발표자는 오늘의 주제를 발해사 중에서도 〈신라와 발해의 외교관계를 중심£로〉라고 제한하고 이것에 대한 연구사와 연구방향 등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토론자 역시 가급적 이 벙위에서 토론을 할까 합니다.

발표자께서는 신라와 발해에 대한 과제로 지금까지 남북국의 관계를 시종 척대 관계로만 취급하였던 점을 극복하고, 교류와 대럽의 기사들은 서로 대퉁하게 취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토론자도 여기에 척극 찬성합니다. 또한 발표자가 양국관계를 교류와 대럽이라는 측연에서 발해사를 다섯 시기로 나눈 것도 대체로 동의합니다. 오늘의 발표자와 같은 심정으로 토론자도, 발표자가 소개해 준 것처럼 83년 「新羅와 勳海의 청치척 교섭과정」이라는 논문을 썼던 척도 있었습니다. 그혜 토론자는 남북국의 교섭시기를 (1) 발해 건국기 (2) 신라 귀족항챙기 (3) 발해 멸망기로 나누어 서술했었는데, 오늘 발표내용과 비교하자연, 발해건국기는 제 1 기 대조영 시대, 그리고 신라 귀족향챙기는 제 3 기의 大 중반경부터 9대 大明忠까지의 시대, 그리고 발혜 멸망기는 제 5 기의 大 讓시대에 해당합니다. 토론자는 그

논문에서 양국의 대결기에 해당하는 제 2 기와 제 4 기는 제외시켰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오늘 토론의 첫번째 문제는 남북국의 교섭과 대럽에 관한 기록의 비중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토론자는 이 문제를 적어도 남북국은 교섭보다 대럽과 갈등의 상처가 더 깊었고, 남북국의 조정은 이것을 끝내 극복하시 못하였다는 점은 인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토론자도 기본척으로 발표자와 뭇을 같이 하는 점은 교섭과 대립의 기사들은 대등하게 취급하여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이러한 인식에서 토론자도 「신라와 발해의 정치적 교섭과정」이라는 글을 썼다고 하였는데, 당시 그 논문이 전제했던 것은 〈남북국은 버록 기록은 남기지 못하였을지라도, 서로의 교섭은 단속척으로 이어왔었고, 또한 얼마간의 운영공동의식도 있었다〉고 지척하였으며· (양국의 정치상황이 오랫동안 적대관계를 지속하여 왔다고 할지라도, 그 사회 • 문화척 전통마저 본래부터 양국이 전적으로 이질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하였으며, 교섭의 증거로는 충분치는 않았으나 新』의 〈新羅道〉를 지적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당시 필자의 능력으로서는 〈新 道〉의 역할 등에 대한 연구를 삽입할 수는 없었습니다. 토론자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갇이 남북간 교섭의 단속성을 인정하면서도 남북국은 교섭보다 대결 위주였고, 대럽의 상황은 끝내 극복하지 못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의 결과론척인 해석이기도 합니다. 남북국이 우호척 교섭위주로 전개되었다면, 어떻게 『三園史記』등에 그 기록이 그토록 남아 있지 않고, 남아 있는 기록들이라고 해보아야 남북국의 대결과 관계되는 기록들이 많겠는가 하는 정업니다. 단순히 이것올 고의이건 실수이건 김부식 등 三園史記 찬자들의 책임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남북국이 우호척 교섭 위주였다면, 발해가 멸망하번 시기에, 비록 신라가 후삼국의 쇠퇴기를 맞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발해의 도움요청에 돕겠다는 약속을 하여 놓고 신라가 발해의 멸망올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 등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업니다. 톡히 최치훤 등 신라의 지식인들이 발해에 대한 시기 내지 척대심올 가지고 있었던 사실들은 남북국의 대결의식이 하루 아청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 알려주는 것이 되고, 발해 멸망 후 발해사의 계숭이 고려에셔 ·이어진

부분보다 거란이나 여진의 역사에 더 많이 계승되었던 이유들은 모두가 이백 몇 년에 걸친 님북국의 역사전개의 결과였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토론자는 남북국의 교섭과 대럽의 기사들에서 밝혀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왜 남북국은 빈번한 교섭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결의식을 극복하지 못하고 대결의 현상고착이라고 하는 반역사적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토론자는 두번째 운제로 남북국의 대립과 교섭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그 첫째는 교섭과 대결 모두는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시대로 설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이고, 그 툴째는 남북국시대와 20세기 말엽의 남북분단 시대가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업니다.

토론자는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시대론을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남북국시대 셜정에 있어서 결코 양국의 교섭기록만이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항쟁과 갈동기록 역시도 남북국시대를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 경험으로 보아, 인접국 사이의 대립과 항쟁은 문화척으로나 역사척으로 그 공통점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이 더욱 치열하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삼국의 항쟁은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역사가 한국사에서 다룰 수 있는 적극적인 단서가 될 수는 있어도 이것이 적대적이었다고 해서 삼국의 역사를 서로의 이철적 종족간의 역사로 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전쟁도 달리 표현하자연, 척극척 교섭의 한 부분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업니다. 반대로 서로간의 우호척인 교섭이 많았다고 해서 결코 동족이었다거나, 운명공동체척 집단이었다고 해석하는 것도 문제가 있을 것업니다. 단지 대결과 교섭을 보는 판점에서 주목하여야 할 점은, 이것들의 원언과 배경이 남북국의 청치 • 경제 • 사회 • 군사 • 문화척 갈둥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전’척으로 당의 기미정책에 연계된 항쟁과 대결이었다고 하는 피상척 해석은 극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북국의 대결이 갖는 의미와 함께 양국의 교섭기록이 갖는 의미도 명확합니다. 우선 남북교섭이 갖는 근본척 한계성은, 나 • 당과의 관계가 버교척 우호척이며 지속척이었던 데 반해, 남북국의 교섭은 얼시척 방편의 우호판계였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발해가 신라에 사

선을 파견했던 예는 그들이 당의 방혜를 받아가며, 건국에 전념하고 있던 예였다든지, 거란의 공격을 받고 멸망의 붕괴직전에 있던 때였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신라 역시 원성왕과 헌덕왕 때 북국에 사신을 파견했던 것은 두 왕들이 모두 신라하대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왕플로서 내정의 위기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원성왕은 당으로부터 책봉도 받지 못하는· 등 대내외적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특정 정치집단의 이해관계로 안헤 북국과의 교섭을 전개하였던 점입니다. 남북국의 교섭기록을 이렇게 해석한다면, 남북국과 남북분단시대가 갖는 대화는 한층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三國史記』에 남아 있는 원성왕과 헌덕왕 때의 북국으로의 사신파견 기록은 결코 김부식 등이 설수로 남켰던 기록이 아니라, 그들이 생각해도 중요하기 떼문에 남겼던 기록이 아니었겠는가 합니다. 단지 〈훌rr羅道〉등의 기록이 없는 것은 그것틀이 신라와 발해의 중앙조청이 중심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주로 민간차원의 경제 • 문화척언 교류였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추측해 봅니다.

오늘 토론의 세번째는 발표자가 남북국의 관계가 때로는 대럽, 때로는 교섭이었다는 충거로 신라인들이 발해를 고구려유민 국가로 인식하기도 하고, 때로는 말갈국가로 인식하기도 하는 양면성을 띠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쉬웠던 점은 발표자는 발혜의 주민구성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라는 점을 미리 밝혔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언급하려고 하면 말갈의 문제를 다·루어야 하고, 오늘의 발표내용과 멀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앞흐로 많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풀든, 토론자가 여기에 한마디 덧붙인다면, (漸 海〉라는 말에 (蘇觸〉이라는 말이 었다고 해서 이것을 신라사람들이 말해를 말갈의 국가로 인식하였다든지, (北園〉이라고 한다든지 말갈이라는 말이 없다고 해서 신라사람들이 말해를 말칼의 국가로 인식하였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구별하여 불혔던 것은 단순히 대결과 우호라는 표현상의 차이에 불과하였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표현이 있었다고 해서 결코 발해를 지배계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계충은 말갈이라고 하는 종래의 발해의 이원척 사회구성이라고 하는 견해률 윗받첨하는 논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업니다. 감사합니다.

저자 약력 (논문게재순)

李泳南충북대 미생물학과 교수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李澈한양대 화학과교수

姜炯台문화재연구소 학예관

李盛周창원대 박물관 연구원

趙由典문화재연구소 유척조사연구설창

李松來노스웨스트 크리스찬대 교수

李 한립대 사학과 교수

尹 香천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

盧泰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영남대 사학과 교수

金光洙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

李鍾 서강대 사학과 교수

植 울상대사학과 교수

李基束동국대 사학과 교수

宋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李午 호암미술관 보존처리실장

李相洙국렵중앙박물판 보존과학실장

元부산대 고고학과 교수

李榮文천남대 박물관 학예연구사

盛洛옥포대 고고언류학과 교수

李 圭제주대 사학과 교수

秉鉉한남대 역사교육과 교수

세종대 역사학과 교수

安承模국렵중앙박물관 학예판

徐榮洙단국대 사학과 교수

孫秉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金基興건국대 샤학과 교수

梁 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

正椰대전공업대 교양과 교수

安春培 휴산여대 역사교육과 교수

陣圭 경성대 사학과 교수

榮 경상대 사학과 교수

대우학술총서 공동연구

韓園上古史

1989년 12월 25일

1991년 10월 30일

圍上古會

民音社

/ 출판둥록 1966. ,. 19 처,1 1-142호

/ 우편대체번호 010041-31-0523282

/ 은행 지로번호 3007783

135-120 서울 강남구 신사동 506 .'-2000-2 15-2003-5 2007 ·2101 (팩시멀려)

값 8 , 000훤

©**園上古史畢. 1989 역사(고고학) KDC/902.

대우학술총서 (인문사회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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