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仁宗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同대학원 졸업.현재원광대학교강사.李鉉澤원광대학교 불교교육과, 同대학원 졸업.前원광대학교부교수.韓鍾萬원광대학교 교학과, 同대학원 졸업.현재 원광대학교 교수 저서로는 『불교와 유교의 현실관』외 다수.金洛必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서울대 대학원 졸업. 현재 인하대학교부교수.譯書로는 『老莊思想 道敎』
孤雲 崔致遠
孤雲 崔致遠
金仁宗李鉉澤韓鍾萬金洛 金永斗柳泰(논운게재 )民音社책 머리에
고운 최치원의 연구는 그간에 단펀척 로 있어 왔다. 그러나 이번에 大宇財 의 도움을 얻어 고운에 대한 종합척 연쿠의 시도를 하게 되었다.고운의 연쿠는 단순히 고운 개안의 생애와사상올 밝히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羅末 初의 시대와 사상의 경올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고운은 그 일생이 뭄학·철학·청치의 한 영역에 국한할 수 없는 포괄성을 지꾀기 혜운에, 이벤 종함척 연쿠는 생애 ·사상(유·품·도) • 품학 • 정치사회관을 다각도로 추 하였다. 라서 품헌척 자료에 근거하여 자료에서 나타나는 이론파 사상은 무엇이며, 그러한 정신이 당시 사회와 어펜 판계에 있었으며 역사·운학에 끼친 영향은 어떠했었언가를 컴토하려고 노력하였다.그런테 고운사상을 추쿠하는 데 있어서 다음파 갇이 크게 두 방변에서 어려움이 있었음도 고백하지 않올 수 없다.첫째는 자료의 품제였다. 자료 중 『계원펄경칩』 냐라 의從뿔官時節에 代筆판 자료이기 빼뭄에 그것 자체플 순수한 고운의 사상으로 폴 수는 없다는 얼반척 異見올 어행게 극복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냐 그것윤 고운의 親述이기 혜뭄에 자료로 상지않을 수 없였먼 것이다. 그리고 고운의 저술이라고 천해 온 『經 依』은 내용상 성리학적 색채가 많기 품에 그를 흠모한 후인들의 저작이라는 견해가 지배척이어서 자료로 활용하지 뭇한 아쉬움을 낭기케 펀 것이다.
둘째는 사상의 표현이 단펀척이요, 유적이어서 일관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한 사상을 〈이론적 플〉을 가지고 체체적 S로 추쿠한 것이 아니어서 이론척 체계를 세우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는 청이다.그러나 비록 단펀척이고 체계적이지는 않다 하마라도 그 속에는 그가 표현코자 하는 사상야 당져 있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 추론은 후인의 엄 우에 속하는 것 이 라고 自任하고 감히 고운의 사상을 다각도로 추콘해 본 것이다.특히 그의 사상걱 펀력은 유 • 불 • 도 삼교를 하고 있다는 정에서 이벤 종합걱 연쿠는 羅末 의 사상적 성격을 쿠명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고운의 사상이 한국고유의 사상적 맥락을 어떻게 이어 주고 있는가 하는 점을 밝힐 수 있었다는 점을 적어 둔다.이번 연쿠가 이루어지도록 후원해 준 大宇財 에 다시 한 벤 감사드련다.1989 년 5 월연구자 일동孤雲 崔致遠·차례
5 책 머리에金仁宗孤雲의 生涯49 토론 개요李鉉澤53 孤雲의 敎觀81 토론 개요韓鐘萬dmd87 孤雲의 佛鼓觀121 토론 개요金洛必123 孤雲의 道敎觀167 토론 개요金永斗173 孤雲의 文學思想217 토론 개요III 柳聖泰221 孤雲의 政治·社會觀265 토론 개요종합토론 개요271 韓國思想史에서의 孤雲의 위치277 崔孤雲 관계문헌 目緣孤雲의 生涯
金仁宗1 孤雲의 출생과 시대적 배경1 시대적 배경孤雲 崔致遠은 격동과 흔란의 시기 였먼 신라 47대 헌강왕 원년(857) 에 출생하였다. 羅末짧初라는 한 시대걱 상황의 이 시기에 활동한 고운은 신라말 최대의 학자이며 품장가로서 높이 추앙되고 있다. 그의 생애 중 활동기는 대부붐 판칙활동으로 보냈 로주요 활동무대는 정치척 분야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가 남긴 詩文, 證• 記• 表등의 수많은 풍들은 운학 • 역사· 철학 • 종교등의 다망면에 걸쳐 폭넓은 판섬을 보여주고 있다. 츄허 그의 사상 속에는 동양의 三歡인 • 佛• 의 사상이 원융 우애하게 만냐고 있다는 첩에서 주목할 만하다.그러나 이러한 탁월한 학자를 배출했언 당시의 시대척 배경윤 정치 사회척안 연이나 사상척안 연으로 보아 단순한 상황윤 아니었다. 그기· 활약했던 신라와 盧역시 모두 사회척 로 혼란 에 칙연하고 있먼 혜였다.특히 당시 신라의 사회는 왕위 계송애 있어서 子계승의 원칙이 우너짐에 따라 지도층의 켠위가 옐어지연서 왕권의 주싱력이 대단히 약화되었다. 머욕이 진성여왕의 失政이 두드러짐에 라 정치의기강이 안정을 잃고 群技들의 세력이 확장되고 있었다. 이에 지방호족세력들도 가세되면서 농민들은 중앙 및 지방의 이중적인 탄압을 이기지 못하여 각 지방에서 민란이 잇달아 일어났다. 또한 가둠등의 천재지변이 몇 해를 두고 끊이지 않아 흉년이 계속되자 전국 도처에 도적들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중들은 생활고에 시달렀고 사회의 질서 는 혼돈 속에 극도로 복잡다단하였 다.
이러한 지 배 계 층의 약화와 함께 신라사회 에 중요한 문제 로 등장한 것은 골품제도에 의한 인제등용 방법이 사회 지배계충간의 위화감을 일으킨 사실이다.신라시대는 자기가 소속된 계충에 의해 벼슬의 한계가 결정되는 엄격한 골품제도에 의해서 사회를 이끌어가는 시대였다. 眞 들은 현통을 중심으로 官界에 진출하게 되 는데 이 들은 17 관등 중 제 5 위인 大阿換부터 제 1 위인 伊伐於(角干)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겨頭品은 제 6 위인 阿換에까지 밖에 오를 수 없게 되 었다. 이 들은 주로 학문을 기반으로 하여 官界에 진출하게 되나 관직에 많은 제약을 받게 되어 代;에 들어와서 골품제도는 육두품들의 불만의 요인이 되었다.이들은 엄격한 신분제도가 실시되지 않았던 당시의 당에 유학함으로써 새로운 세계에 접하자,당에서 배운 학문적 식견을 토대로 하여 자기가 속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제시하며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이 新羅下代에는 聖切•과 眞외•의 귀족계급의 수가 한정되어 있어서 중앙 진골간에 권덕 다품의 내분이 더욱 격화되고 육두품의 신진세릭이 점차 확대되면서 골품제도의 권위가 대체로 무너지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또한 당시의 신라사회에 직접 간접으로 큰 영향을 끼쳐 왔던 당나라의 사회상도 불안한 상황이었다.羅座關係는 朝與에 의 한 관계 로부터 비 롯된다. 이 는 당의 건국 직후인 볘 년부터 조공에 의한 신라의 대외적인 활동에서 엿볼 수 있다. 년대에 이르러서는 고구려 . 백제를 공격하기 위한 군사동맹으로 양국의 관계 가 진전하게 되 고 득히 9세기초부터 는 높은 수준의 班文化가 전래되는 문화적 교류에 의해 관계가 깊어저 갔다.1〉
1) pp. 625~627.
이러한 관계에 주목하면서 고운이 활동하였던 그 전후 시기의 店朝를 보면 무엇보다도 安史의 亂(755~763)으로 정치 • 경제가 약화되면서 왕권이 권위를 잃던 시기였음을 지적할 수 있다. 또 과거제도에 의한 인재등용 방법이 채택됨에 따라 구귀족이 몰락하고 중하류 신들의 신홍 진사계중들이 관직 에 다수 등장하였다.
당 말업 에 이 르러서는 당쟁과 黃災의 난(875) 등으로 왕권이 더욱 약화되고 통일 정권으로시의 권위를 잃게 되기에 이르렀다.그렇 다면 이 러 한 정 치 • 사회 적 환경 속에 서 당시 의 신라의 문화적 • 사상적인 분위기는 어떻게 형성되었던가. 우선 문화적으로 볼때,당문화의 대량 전래에 의한 문화적 혼란이 야기되 었다. 8세기 중업부터 10세기 초까지 의 羅/산관계 는 더 욱 밀 접 한 관계 를 유지 시 켜가면서 당에 많은 유학생 및 유학승들을 보내게 되었다. 이는 당문화의 우수성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당의 이민족에 대한 개방성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특히 외국인올 위하여 실시되는 究U科가 신라인의 유학열을 고조시켰다. 이는 진골귀족이 골품에 의해 관직에 등용되는 데 반해 육두품들은 당에 유학하여 빈공과에 응시할 수 있었고 귀국 후에는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귀국하면서 다량의 당문화가 전래되었다.한편으로는 국제화된 고도의 당문화를 흡수함으로써 신라문화의 폭을 넓히는 긍정적 의미를 지니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사회 의 고유한 기 풍을 손상시 킴으로써 사대 적 분위 기 로 바뀌 는 역기능도 무시할 수 없었다.또한 사상적으로는 偏 • 佛 . 仙의 三敎가 상호 연관을 가지 고 복합화 과정 이 이루어지 는 것 이 이 시 대의 목징 이었다. 지 식계급충의 증가로 유교에 대한 이해가 증가하면서 이들 유학자들에 의해 정치에 대 한 비 판의식 이 대 두되 었 다. 불교계 안에 서 는 진골귀 족간에 유행했던 학문적이고 체제 불교적인 성격을 띤 第嚴宗에 대하여 그한계성과 모순성을 비판하는 성향이 일어났고 또 새로 성장하는 지방 호족세력들은 선종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2)
2) , 한국사상 . pp.
274"-'276.신라에 의해 삼국통일이 이루어지자 통일에 의해 대두된 평화와 안락적인 성향은 차츰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풍조로 바뀌었으며 이러한 분위기와 관련되어 老E-사상과 逆敎가 새로운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정권 다틈에서 밀려난 귀족의 자손들이나 진골세력에 반발하다가 탄압받은 육두품 이하의 하급 귀족들에 의해 은둔적 사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고운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치 • 사회적 혼란,문화적 혼돈,사상적 복합성이 두드러진 분위기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하었으며,독자적 사상-0: 형성해 나갔던 것이다.2 孤떻의 家系推致述은 座州推氏로서 字는 孤딨 • 海2- • 海夫4》등이라 하며 후세인들이 그를 높이어 偏仙이라고도 불렀다. 그의 溫號는 고려시대에 文 使라 追附되었다.3) 』 六, , < ).
4) 17 1982, p.86. ( 1939, p. 97.6) P.120(I (r相 : • :. 안정하고 있음) • 1956, p.84.기 『 史』원 4 • 캘 5. 宗11 年• 14 年條.고운의 家系에 관해서는『三國史記』에〈史使이 인멸되어 그 世系륜 알지 못한다〉 고 기록하고 있으며,고운이 직접 저술한『技射 在想 의 내용에서도 그의 가계를 언급한 바가 없어 알 수가 없다.
후세에 와서〈「能朝名位감 」나「度州 m氏上系補巡流」에는 a村中突山的爐村提 部比 利를 得姓始祖로 삼고 m孤s을 中始祖로 삼았다〉기 하고 또『典故大方』이 나『m氏族譜』에서는〈度州推氏始祖 推致述〉10〉이라 하여,고운 이후의 가계만을 정리할 뿐 그 이전은 전혀8)
9) 고려대교사학회 p.63.10)언급하지 않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고운이 授한「初月山大넜福寺碑銘述序」에〈……선조께서 절을 이룩할 처음에 큰 서원을 발하셨는데 金純行이 그대의 아버지 逸과 함께 일찌기 이 일에 종사하였다>11)라 적고 있어,고운의 부친 이름이 헌강왕이 하명한 명칭인 쪄逸임을 알 수 있다. 또 위의 내용 가운데 경문왕이 넸福寺를 창건할 당시 고운의 부친이 뱐의 발원문올 작성하는 데 참여한 사실로 보아 그의 부친은 학식 있는 사람으로 추정된다.11) 1972, p. 161.
〈 ).「文 使 孤理先生 巡故 紫衆密 移述m神記念碑文」미에는〈고운선생은 신라 사량부인에 속하나 일찌기 起斗淨相國과 字昌雜勝監도 H野雨!五修記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엄친이 본현(린 옥구)의 知將市로 있을 때에…〉라 하고 있어 府逸은 본래 사량부인에 속하나 벼슬하여 현 옥구지방으로 이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옥구군지"가에는〈우리나라 야사에 따르면 최치원의 아버지는 신라의 무관으로 내초도(일명 새섬) 기지에 수군장으로 주둔한 바 있었다〉고 하고 있다. 이들을 보아 고운의 부친은 중앙행정에 깊이 관여하지는 못하고 단지 그의 학덕으로 타지방의 관료로 있었던 듯하다.
12) 욕구향교 내에 의 군용 천되었다.
I) P.27 1.이러한 고운 부친의 생존년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고운이 당에서 귀국한 후 886년 1원에 헌강왕에 게 옵린『雄死符耕』序에서〈돌아가신 아버지 》라 한 것으로 보아 귀국 전에 이미 타계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러나 고운이 귀국할 즈음에 從弟인 花述이 당으로 집 안 소식을 가지 고 왔을 때 는 부친의 지병이나 사망소식 을 전하지 않고 있어,부친의 타계는 귀국 도중이나 相i述-이 신라를 울발한 후임이 분명하다.
14) P. 287. ( 父).
그 밖의 인물로는 외삼촌(母兄)인 賢俊 이 해인사 승려로 있고 從弟로서는 植述16〉과 仁透가 있음올 알 수 있다. 서원은 고운을 영접하러 당에 왔다 하여 新羅國入推南使錄市의 직명을 당에서 받았다. 仁速는 당에 유학하여 과거에 합격하고 귀국 후에는 執市侍郞 端院學士의 벼슬을 받았으나 고려의 신하가 된 뒤에는 致保라 개명하고 한동하였다.비 특히 按致述과 植仁透 植承社는 羅求三祖》라 하여 신라말기에 문장가로서 명성을 크게 떨치고 있었다.
15) '三国史缸』卷"6,列你第六. 提致zu袋. <俘兄贤俊).
16) 植文昌侯全统.lJ, p.401. <某必练这比阴凉( 迎援束蹄注假药缸因λi佳丽使路眼名).그의 가문 중에서 고운 이전의 인물에 관해서는『삼국유사』에〈新羅의 大夫 角干 祖有德이 私第를 절로 만들고 有德寺라 이름 지 었다. 速孫인 三韓功臣 社i參抑가 眞)形을 걸어 모시고 인하여 碑-I- 세웠다 한다〉20》고 기록하고 있어 최 유덕 이라는 인물이 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또 고운이 授한「太子寺郞空大師碑」에서 보면 원성왕때 郞空大師의 父인 祖保常이 있고『삼국사기』에는〈完山州의 長史推雄과 州助阿浪 正述의 아들 令忠 등이 서 울로 도망하여 와 봉하매王은 곧 推雄에게 級浪의 位와 速含郡 太守의 職을 주었다고 하고 있어 헌덕왕 때 김헌창의 난에 공헌한 推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7) 管野 r新黯贝等夺世畹町搭碑fl) t凭者也就τ <<束1学早饭}> 13-2, 1923.
18) Ii'钢鲜金石跑咒』上,也敖迫蹄, r部印寺郎慧和向自月在光搭碑」判末叫J <徒弟…. 毡仁遥恭敬岱).19) (ì'三四史阻』咎46, <醉聪傅附植承后在仰) , 今西阻.tTi掘出致远仰{萝iHù 史研究), p. 369.20) rr三回迫郁.lJ 3. 搭像有德寺.21) 矿三国史阻』卷10, 您徨王14 年2 月.한현 고운의 후계에 관해서도 『삼국사기』에 〈최후에는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언사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22) 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고운에 있어 칙접적언 가족관계의 출처는 밝힐 수가 없다. 이상의 내용으로서만 고운천후 당시의 가계를 추정해 보연 대략 다음 과 갇음올 알 수 있다.
*突山짧밟村흉 縣代者·利 崔有德( ?).(짧써|崔民得柱始祖)
.•...崔 떠젠r I···•. ••••••••.••••••••••••••••崔 雄 ..•
이러한 용규의 지위는 신라사회에서는 육두품에 속하고 있었다. 그것은 植雄이 級於의 位 얻고 고운 자신도〈나라에 五品이 있어 聖背이 요,眞骨이요,得難이니,得難은 及姓의 얻기 어려움을 말한다. 하!^에 ‘및향하기 는 쉬우나 얻기는 어렵다’고 하였는데 따라서 육두품을 말하는 것이 은 토히 말할 바가 못된다〉 )고 하여 육두품은 얻기 어 렵고 4, 5품은 말할 바가 못된다고 경시하는 것을 보아 육두품이 확실시되고 있다. 하지만 최 유덕이 진골인 角干으로 되어 있는 것은 羅未의 육두품 세력이 강화되고 고려조에 최씨의 세력이 중앙에 진줄하게 되자 최언위가 자신의 가계의 신분을 높이기 위한 으로 보이기 때문에 최씨가 진골이라는 견해는 타당성 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22) 썰 46, 遺傑.
23) p.74. ( £口求상Tiii찌짧 ••••••其四죠品不足합).24) . p.64.25) 記』썰 46,최치원의 출생지 에 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아직 나와 있지 않으며 이에 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제시되어 있다.
첫째,沙染部人의 설이다.『三國史記』植致述條에〈玉京沙染部人世〉라 기록하고 있고 도新羅本紀 補}理/S師今條에〈九年봄에 穴部의 이름올 고치고 이어26)
姓을 賜하니 商M部를 沙染部,그 姓을 植라 하고〉26)라 기록하고 있어 최씨의 脫姓地와 일치하고 있다. 또『座州留氏族譜』27〉에서도 沙染部人이라 하고 있다.
27) <公 .部人 因以 p. 1.
둘째, 木波部人의 설이다.
『三國造 』에〈辰雜에는 穴村이 있었다……四는 紫山珍支村이니 村及은 符伯虎라 하여 처음 花山에 내려와 이가 本波部 按氏의 祖上되었는데……최치원은 本波部 사람이니 지금 度能寺 남쪽과 味存寺 남쪽에 옛터가 植候의 古宅임이 분명하다〉 고 적고 있으며 《文昌候孤民先生造故保存舍報〉〉에서도 이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28) 』 < 王).
셋째,湖南 次將人의 설이다.
後有樂가 編한 1F技印社次序에는〈호남 옥구사람이 다〉고 단정하고 있 . 또 季相맺의「文昌候 植致述의 出生地 小考」에서는 기록 • 유적 • 설화 통해 고증을 하면서〈최치원이 출생한 곳은 지금의 古群山列此의 어느 섬이겠으나 육지거나 육지에 접근한 곳일가능성 이 많다〉 하였고 또한 指三能의「祖孤出傳의 出生評考」에 서는〈울생설화 : 중심으로 형성된 班孤2 他의 내용들을 간추려 보면 경북지 방 설화와 비슷한 내용을 가진 설화가 古群山地方에 전래해오고 있으며, 전북 옥구지 방에는 최고운이 출생 하여 성장한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소설상에 전개되는 무대가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어 다만 우연히 구며 진 허구가 아닐 것으로 믿어 진다〉비고 하여 고운윤 호남 옥구인이라 보고 있디-. 이 밖에 옥구지방에 古群&洞痛32〉(현 고군산도 하나인 內: 에 企將系痛의 혼적이 보임〉이 있고, 三野雨 등 이 지방 여러 곳에서 文廟에 배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29) 徐有 mtt 휩m;.n. p.877. <
30 ) 李相뿔· r文呂 평의 버生i씬小팡J , «(운펴연쿠》창간효, 현광대학교 운러파대 학. 1983, P.20.31) 三 .n 보과 판련하여 월朴炳 土 紀 千 行 . 1985, PP.830"'831.32) 1949, P.l 이 7. 고장 소北의 부펴 」제 1 장. (주 III 운학» 1984.2. PP.S82~S83.33) 文 :., 1982, PP. 177~178. 三 찾아관 수 없으냐, 적-구향교 깎 우축 풍산에 죠그만 단01여기애四 의 내용윤 보아 。l 꿋이 산현사잉활 안 수 있다. (
이상의 세 가지 견해 중에서 지금까지는 대체로 沙染部說올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羅求 최씨의 사회적 진출의 시작으로 본 완산주인 按雄씨이나, 그 이전 선조를 최치원이 振한「雙沒寺成鑑禪師大空塔碑」에는 全州 金馬人35〉이라 하고 있어 호남 옥구인 설도 부인할 수 없는 점이 보이고 있다. 또한 고운이 귀국 후 최초의 지방관직으로서 太山郡太守(현 전북 대 인)36》로 있었다는 점 을 보아 호남옥구인이라는 상관성도 유추해 볼 수 있다.
34) [ 三國 記』 10 , 월쟁王, 14 年3 꺼.
35) [ 右 』上, p.67. 先 族冠 . 附師~ 多 有~志而 . ~及 f파 括四1 今 全 也父日 元花 有之行>. 全 , 』上, 1918, P. 106.36) [ 井 ], m~ {{ , , p.280. 의 와않에 원 오시고 에 re:양합(신라 힌캉땅 2 년에 렐생하었다고 책고 있응).귀국 후 신라 중앙 관직들과의 교류관계가 활발치 않음을 볼 때, 육두품이라는 차벌 때문이라 단정짓는 것보다 오히려 지방인이라는 멸시가 이에 작용되어 있지는 않는가 하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이에 호남 옥구인이라는 설이 설득력 이 있다고 보여진다.
이는 고군산열도에 산재해 있는 설화,유적들이 더욱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옥구 향교에 문창서원이 있는데 이곳에 고운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고운의 독서처로 알려져 있던 仙綠里(지금은 이전하여 옥구향교 내의 光月 山 主的 아래에 있음)의 紫來空가 있고, 현 미성읍에는 文昌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지 금도 문창이 란 . 말이 국민학교 이 름으로 상호로 쓰여지고 있음을 보아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볼 수 있다. 또한〈底我만院에서 최치원 선생을 모시는 이유는 그가 당나라에 유학하기 이전에 어렸을 때륜 이 고장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어렸을 때 성 장한 곳이 文昌槪(內草如里)이 었기 에 고려 현종 11 년 (1020)에 내려진 說號도 文昌候이며 근처에 세워진 문창국민학교도 이에 유래한 것이다 〉 고 하고 있어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마을사람들37) , Pp.I77-178.
은 이곳을 옛부터 문창골이라 불렀으며,이 문창골은 지금의 미성읍 일부륜 가리킨 것이 아니라 내초도 寒" 비못한 그 일대를 문창골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는 일제시대의 간척사업에 의해 유적이 손실되고 이전되어 옛 선조의 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내초도에는 돼지 굴을 비롯한 설화가 고운의 출생지로서 전하고 있어 이도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자료들이다. 이를 보아 고운의 가계는 사량부에 속하나 그의 출생은 호남 옥구인 것으로 보인다. 즉 고운의 부친이 이 곳에서 지방관료로 지내던 시기에 최치원을 얻은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이곳이 중국과의 교역 이 빈번했던 것으로 보아 고운의 부친은 당시 그에게 우수한 중국문화의 습득과 중앙 행 정 관료로의 기 대를 가졌을 것이며 고운의 중국유학에 희망을 걸었을 것이다. 그러기 에 고운을 I2세 어린나이로 중국에 보냈을 것으로 사료된다.乂雇"과 귀국 후의 행적1 唐과 활동0 精敏好學의 시절과 入座고운이 座 하기 전,어린시절에 관한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 다. 그러나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부친의 권유에 의해 당유학을 떠났다는 사실에 의거할 때,그 이전에 고운은 이미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또 부친은 어느 정도 고운이 기본적 인 수학을 마친 것으로 여겨 객지에 보낼 생각을 하였으리라 본다. 당시 신라는 하대로 접어들면서 골품에 의한 차릴제도에 의해 정당한 등용이 힘들었으므로 입당의 유학을 통해서 만이 관계진출이 보장된다는 인식 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이런 점으로 고운의 부친이 어린 나이의 고운을 당유학 보낸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고운의 어린시절을『삼국사기』에는 精敏好學의 시절씨이라 기록하고 있다.38)I i'三[경잊~iIeJl 46, .
及文:玉 8 년 (868),고운은 I2 세에 입당한다. 이때에〈네가 10 년 공부하여 과거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라 하지 말라. 나도 아들을 두었 다 하지 않을 터 이 니 그곳에 가서 부지 런히 공부에 힘 을 다하여라〉비고 한 부친의 엄한 훈계는 고운의 유학생활의 굳건한 지표가 되고 있다.
39) D. p.287. <十年不第 亦不 .
그런데 고운의 입당은 私留學生의 형식이었다. 당시 유학생들의 대부분은〈宿衛學生〉이라는 이름으로 파견되었는데 하대에 들어오면서 육두품 계중의 사회 진출이 점차 제약을 받게 되자 사비 유학생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고운도 이에 속한다.
4°) 圖 』古代 文化社. 1971. P.972,
과거급제와 관직활동
경문왕 14 년 9월 〇依宗 乾符元年, 874) 고운은 그의 나이 18세에 유학한지 6년 만에 禮部侍郞인 速取이 主試하던 資及科에 한 번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 이전 代이 하던 해에는 발해의 鳥度가 장원이 된 것41}을 수치로 여겨 왔다고「與禮部夜尙班街狀」에서 술하면서〈실로 지극히 공정함을 만나 예전의 수치를 씻었다> 고 하며 장원급제에 관한 소감을 말하고 있다.41 ) 上>.
符 3년 (876), 고운이 20세 되먼 헤당에서의 최초의 뼈슬언 지방행정판 격언 宣州 의 칙젝을 맡기1되었다. 이 縣‘라는 칙책은 〈分判率訓) 43) 를 행하는 從九品의 판칙이다, 고운은 〈이 펴슬야 한가롭고 봉급도 많아 펀안히 지낼 수 있었으나 이에 배웅의 시간을 헛되이 하지 않았다) 44) 고 술회하고 있다. 그 결파 公私詩文올 모아서 『中山 ~ (15권)을 내놓았고, 女 의 f 상談)도 이 시기에 지은 것으로 보언다.
42) < 述至公 :>.
43) 49 下, 志짜 39 下, <百 下>,44) p.287. < 公私所 훌之名 >,45) '三 기꽉-되어 있고 회의 때없어도形.w空由民畔月姓名应阳忽踊血
劳f南附件通幽萝永夜何J助也应人孤俯若逢恶用合舆君缸阴洛川种고운이 21세 (887) 되던 겨울에 외국인으로서 각고 끝에 얻은 관직을 내놓고 f표발보li司f斗에 응시하기 위해 입산하게 된다. 그는 잠시 산수에 의지하여 옛글을 열람하고 시에 골몰하면서 학문 넓히기를 기약하고 스스로 탁마하는데만 열중한다. 하지 만 관직 에 나서지 않고 오직 假道만을 좇았기에 녹봉은 남은 것이 없고) 글 읽을 양식까지 모자라는 등 생 활이 곤궁하게 되었다.
46) Ir植丈吕侯全统.!].第二 <段. P.386. <前年各韶胶东尉重阻宏饲SH是居山回到阻且早期至梅克自1家居i 华战俘然除白血不询).
47) 苍毛梢. P.380. <所以来应宦撞但遮西边.. ....).고운은 당시 세력 자인 推南의 前,에게 자기를 받아 줄 것을「初投獻太對啓J,「再獻啓」,「抑:詩啓」등의 간청하는 글을 여러 번 올리었다. 그 글 가운데 < 벽을 기대고 명상에 잠기며 문을 닫고 고요히 앉았으니, 자리는 차거운 창바람이 눈을 헤치고 붓은 말랐는데 벼루 물은 얼음이 되었으며 객사에 들기가 원수보다 싫으니 어디를 향해야 생계를 安頓하겠읍니까;>라 하고 있어 고운의 생관고는 학문을 이루려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고운이 학문탐구의 이상향과 현실적인 괴리감 사이에서 갈등이 깊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3 년 동안의 곤궁한 기 간은 고변이 그를 받아 줌에 의해서 해결이 된다. 이에 대해 고운은〈독릴히 풍부하게 먹을 것을 주시어 아침에 배고픔을 면하게 하니 실로 보잘것없는 주제에 과분한 도량의 은해를 입었다〉라고 고변에 대한 존경과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으며 고운과 그의 친밀한 관계는 고운의 당생활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48) 挂毛判.怨17 , r再献fä:J, P.380. <且如周里其搜杜 寂坐席海而忽凤拥霉lE乾而碗水成永......投客合而万起死路指何l叮而欲安生fit>.
-49) 吐毛抖, P.380. <念以遮别部隅久沈江欲持~血航伴洒朝肌自黯陌悔之材己荷稻梁之础>.從市官職과 귀국 길
商©f의 速府에 들어 간 것은 廣明 元年(880),고운이 24세 되던 해5원이다. 이때는 店 依宗이 甲午年에 즉위하여 연 乾符라 정하였가 7 년째 되 던 해 인 班子年에 廣明으로 고친 해였다.
바로 이해에 黃災의 반란이 일어나 장안 도성을 함락시키는 등 그 세력이 당 전체에 크게 멸쳐 있었으므로 당조정에서는 ra川節度使로 있던 고변을 諸道行密 兵馬都統으로 임명하여 황소를 토벌케 하었다. 이 때 고변은 고운을 불러들여 從市符職을 주고 문서 의 정리 륜 맡게 하였다. 이 에 따라 고운은 軍中의 문서 를 담당하였는바表 • 狀 • • 啓와 生•松[文 등이 모두 고운에 의해 지어졌다.그 중 25 세 때는「樹!黃m出」를 代作하였 다. 이 글 가운데〈오직천하 사람들이 모두 죽이 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아마 지하의 귀 신까지 도 가만히 죽이 려고 의논하였올 것 이이라고 한 내용을 보고 황소가 놀라서 앉았던 의자에서 멸어졌다고 한다. 이때부터 고운의 명성이 년리 알려지게 되었다.50) 文 』 p.339. <不唯天下之 亦地之 己 陰 >.
26세 되던 해 (882) 고운은 황소를 물리쳤다는 공로로〈都統巡官承務郞侍御使 內奉公〉의 작위와 함께 당희종으로부터 紫金魚裝를 하사받기에 이르렀다.
그후 고운의 당에서의 활동은 이방인으로서 대우를 받던 관직에서 벗어 나 보다 중국화의 경 향이 진어진다. 이 것은 종사관으로서의 대작생활 가운데 나온 글 속에서 그가 당인으로서 사고하고 당의 문화륜 자기 의 문화로 생 각하는 경향이 발견되는 것에서 알 수가 있다.이것은 고운에게 있어 큰 갈등이었다. 이러한 갈등이 고운에게 귀국 동기로 작용한 것은 아닐까. 즉 당에서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한계 와 이 에 따른 민족적 자긍의식의 손상 및 고국에 대 한 향수가 귀국을 결심한 동기가 아니 었을까.수향 4년 (884),28 세 되 던 해 에 부모를 뵈 러 귀 국할 뜻을 품자당 희종이 그 뜻을 알고 당의 國;!1를 주어 사신의 자격 으로 귀국케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고운은〈오랫동안 부모 계신 곳을 떠나 있으므로 師M할 것을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가야 할지 있어야 할지 걸정하지 못하겠읍니다>비 또〈머물려 니 가마귀의 정 (房此之情)에 마음이 상하고 떠 나려 하니 太馬의 그리 움(太馬之)을 품게 됩니다〉,2) 또〈지금 곧 떠나가려 하나 .i奸下가 그립습니다. 저의 심정은 감격하여 마음이 뛰고 눈물이 흐름을 이길 수 없읍니다> 등을 걱고 있어 귀국의 기쁨과 청년기를 보낸 당과의 이별을 못내아쉬워 하고 있다. 그러 면서 도〈영 광되게 돌아감은 고금에 견줄 데없고〉또는〈一身의 巡迎가 만리 에 빛납니 〉〈떠 났던 자식은 벼 슬길을 얻었는데 참으로 영광스럽습니 다〉라고 하는 등54〉고운 자신은 입신양명한 둣 자족한 느낌을 품고 있다.
) 全 20, , p.400. ( :以某久別 許令 玉f >.
) 감운 책 , P. -400. (住 之험 之戀>. ’3) 갇운 껴, P. -400. (今將切下任感至>. ) 강윤 책 , P. -400. (一 迎 子倍 於 ).귀국할 즈음에 從弟 按述이 집안 소식을 가지고 와서 신라 사신인 김인규와 같이 고변의 주선으로 배를 준비하여 귀국하게 된다.
그러 나 乳山에 이르러 풍랑을 만나 겨울을 지 낸 뒤 이듬해 봄에 귀국하였 다. 고운은 28세에 推南에서 출발하였 으나 신라에 도착한 것은 다음해 대제,헌강왕 11 년 (885) 봄 3 월이 었다. 고운의 귀국은 16년 만의 일이 었다.귀국 후의 행적귀국 후의 관직고운이 25) 세 되던 해에 귀국하자 왕은 그에게〈侍齡兼 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端한監〉비의 직책을 주었다. 시독과 수병부시랑 지서서 감의 벼슬을 받은 것으로 보아 고운을 다른 유학생들보다 목별히 우대하여 준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翰林學士〉는 당에서 유학하고 들아온 자들에게 의례적으로 주어지는 직책이기 때문이다. 고운은「巡宿術學生前領等入朝狀」에서〈臣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희나라 사람이 중국에서 배우는 것은 오직 禮와 樂이며,더우기 남은55) >.
힘으로써 문장을 공부하고 바른 소리로써 언어를 바로잡아서 문장을 表車올 지어 해외의 臣等을 아뢰게 하고 언어는 情과 船를 통하여 天國의 使行을 받들게 하며 직책을 翰林이라 하여 종신토록 종사하게 합니다6)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한림학사는 왕의 하명을 받아 國짠를 작성하는 임무를 맡는 직책인데 주로 당과의 외교적 교섭을 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운도 역시 한림학사였기에 당에 보내는 국서를 작성하고 또한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여 러 문장들을 짓게 되었는데 記 • 說 • 碑銘 등이 그 일례였음을 알 수 있다.
56) 之狀 M쌓入 Q以 人iN攻 文以除力il!li以 文t\之빼外之之天上之 日O( 林終>.
고운 30세 정월에는 당에서 지었던 私試今溫(5首1卷〉,五言七言今强詩(一百찬), 雜詩賦(30 卷),中山役攻染(1부 5권),枝死,耕供 (1부 20권) 등 28권을 헌강왕에게 올리었다.이는 헌강왕이 특히 글을 좋아했던 까닭도 있으나 고운이 당에서 수학한 역량올 통해 자신의 포부를 펴 보려 는 뜻을 지닌 데도 원인이 있다고 보인다. 그러 나 그러한 기회가 미처 오기도 전에 그해 7원 5일에 헌강왕이 승하하고 바로 이어 동생 인 定康王이 즉위 (886년) 하게 된다. 그후 신라는 점점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그 와중에서 고운도 시기하는 분위기 에 견디 지 못하여 지 방관을 자원하여 태산군(현 전북 대 인)태 수로 부임 하니 그의 나이 30세 때 의 일이었 다.
57) 文 全 桂 p.288.
2) 지방관직의 표류와 정치참여
정강왕 2년,고운 31세 때 11월에는「王紀金氏爲先及兄追福施殺願文」올 지었는데 이 글에〈中和丁未年>1吸月密城太守按致述〉이라 적고 있음이 특이하다. 이를 보면 고운은 中和 4년에 당을 출발하여 중화 5년 3월에 도착하였으므로 당희종이 중화 5년 3월에 중화를 光啓로 고친 것 을 알지 못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3년이 지 나도록 연호가 개칭된 것을 몰랐던 것은 주로 지방 외직에 나갔기에 당59) 사학위 논운. 198~, p.32.
과의 관계 나 신라 조정과의 긴밀한 교류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하지 만 이 보다 앞서 같은 해 정 월과 7 월에 는 정 강왕의 하명을 받아「大華嚴宗佛國寺昆成速郡文殊普菌像故序」와「大華嚴宗佛國寺阿知防備像說井序」,「逆-鑑禪師大空塔碑銘」등의 說과 碑를 지었다. 지방에까지 나가 있는 고운에게 碑와 識을 지으라고 명한 것을 보면 당시에 이미 고운의 필력 이 년리 인정 받았음을 시사한다.그후 정 강왕(886〜8S7)도 즉위한 지 1년 만에 승하하고 왕의 누이 동생인 진성여왕(887~897)이 즉위하였다. 이때의 신라 정세는’왕권이 약화되 고 중앙귀 족이 부패 하는 등 정치 기강이 문란하여 짐 에 따라 지 방 호족세력 이 강화되었다. 이에 농민들은 중앙과 호족의 이중적 수탈에 못이겨 반란을 일으키고 유민이 되거나 群盜의 무리가 되는 등 국운이 어려운 시기였다.그런 가운데 고운은 부성군 태수로 봉직하면서 이러한 상황을 피부로 느껴 가며 정치개혁에의 경륜을 쌓아갔으나 현실적으로는 문필에 전력하였다.그리 하여 그는 32세(진성여왕 2년,888)되 던 해 진성 여 왕의 하명을 받아「初月山大崇福寺碑銘」을 또 34세에는「期怨和尙白月植光塔碑銘J을 지 었다. 이 두 가지 비명은 정강왕 2 년에 지은「智異山雙潔寺成IS禪師大空塔碑銘J과 그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腦陽山保I巖寺符證大師寂照碑銘」과 디불어「四山碑銘」을 이루고 있다.고운은 태산군수에서 31세에 부성군 태수로,비 그후에 大山郡 태수6°〉로,35〜36세에는 대산군에 서 天樹郡 태수61〉로,37세에는 천렁군에 서 다시 부성 군 태 수 》의외직으로만 옮겨 다닌다.59) 료 척혀 있융. 지긍의 충낭 서 산(고운 31세, 887 년).
60) I三記, 밟줬遠降, 大山 (치궁의 쑤여군 흥산연 옐다>.61) 31 , < 風陽名 )(해인사 에게 ( 遺»(천영 문윤 지 즘의 경 1융 함양).62) 三 史 46. ~J~ 6, ’ (걱경군 대수로 있융 시 n 포뽀로 휩에 파견).37세 되 던 해 (진성 여 왕 7년,893) 신라에 서 는 兵-해f寺射5 히철?每를 당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항해 도중 익사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다
시 福城郡 태수 金政을 告英使로,부성군 태수로 있던 고운을 奴正使로 삼아 당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해에 흉년이 들어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각처에 도적이 횡행하여 통행이 위태로와 중지하였다. 그후에 다시 奉使하여 고운이 당에 들어갔다 하나 연대는 알 수 없다고63〉『삼국사기』최치원조에 기록되고 있다.
63) (三因史记. ! 46 , 也致渔佬, <店昭宗丑(l!J二年的峰回使兵部侍郎金此法1泣必部即盖吕统那太守金位~告炎使D'!i致地~1Ã以ll~太守括召s到正使以比就白荒因之蓝眼交午边梗不果行其後致ill亦岱和使如店但不知其成月耳).
진진성여왕 8년 2월(894), 고운이 38세 되던 해 그는 왕에게 당시 의 혼란한 국운을 바로잡기 위한 정책으로서「時務十餘條」를 을리자 왕은 이를 희납하여 아찬이 란 벼슬을 주었다.6사 그러나 국정의 어지러움과 민생의 도탄을 구해 내려는 개혁의지를 담은 그의 時務策은 시행되지 못했으며 애석하게도 그가 제시한「時務十餘條」의내용도 알려져 있지 않다. 고운은 이 시무책이 건의되어 시행되지 않자 실의에 차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4) (三因史自,统黯本但tn 11 ,血型王八年'苦, <公迦附移十除年王那的之以1骂何准).
실의와 은둔
고운은 결국 세상을 떠나 가야산에 은둔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해 연암 박지원은「威陽郡學士被記J에서〈고운이 일찌기 十抑를 올려 임금께 간청했으나 임금이 쓰지 않았다 가야가 天位떼서 백리 가 못되는 곳이 니 그가 초연히 떠 나간 것 이 어찌 郡에 있을 때가 아니 겠는가〉이라고 하고 있 어「시무십여조」를 읍린 때 가 천령 군 태수로 봉직할 당시이고 이곳에서 고운은 세상의 뜻을 버리고 가야산으로 은둔한 것으로 보고 있디-. 하지만 그의 은거 연대는 분명 히 밝힐 수가 없다. 다만 최치원의 마지막 행적을『삼국사기』에서 보면 고운이 천령 군에서 바로 가야산으로 들어 간 것이 아니고 풍류적 생휩:을 해온 뒤 은둔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기류은 다음과 같다.65) 朴趾韶珩街忽1 ,最仨文化社,影印木, P 23. <血2岱上十部ti! ~t主主不能用伽昭之於灭鼠不百里而近则其坦然埋在t在n~萨在那峙耶).
치원이 ®에서 당을 섬기다 고국에 돌아왔을 때는 난세가 되어
서 뜻을 펴기가 어려웠다. 움직 (通))이면 허물을 얻으니 스스로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여 다시는 벼슬에 뜻올 두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노닐었다. 산림 아래나 江海가에 空나 정자를 짓고 송죽올 심으며 글을 읽고 시를 읊으며 지 냈으니 경주의 남산 • 강주의 氷山•映川의 청량사 • 지리산의 쌍계사 • 합포현의 別堅 같은 곳은 모두 그의 놀던 곳이다. 마지막에 식구를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살았다. 母兄인 浮園野後과 定法師와 道友를 맺고 한가하게 쉬면서 여생올 마쳤다 6)
66) B'三댐씻紀.!I. 뾰致패짧. (致펄自西까大}파 가i짧없랩 뽑i젠亂1止Tt!:뾰첼述파b t!U~ 삽 自없不쐐 ~~fti1H.~ mil윌自값 山林之下江海之훤 깡갚 Wf파松竹양l[i~ 史f.I ii永1B. ~ :t'Lfl’tH쩌山태써171< 山映꺼Hi앙행총 찜’윗山옆꿇극툰 合im tr.‘ HIJ 훌f I比않避꽉之所).
고운의 작품올 통해 그후의 행적을 추정해 보면 고운이 바로 가야산으로 들어가 은둔생환을 하지 않았음이 더욱 확실시된다.
40제,진성여왕 10년(西辰,896) 冬「讓位表」41세,효공왕 元年(丁己,897) 6월 1 일 직후에 「謝闕位表」, 7월 5일 직후에「謝恩表」,7월 이 후에 는「謝不許北國居上봉」42세,효공왕 2년(成午, 898) 정월「新羅加®山海印寺結界場記 J신 세,효공왕 4 년(皮中,900) 12 월말「f加山海印寺密安住院壁記」52세, 효공왕 12년 (成K,908)「新羅寺昌郡護國城人角燈樓記」的세,경명왕 8년(甲申, 924)「智燈大師寂照塔碑銘」67)67) 앞의 책 , 효1fI烈. pp.34"-'35.
이상에서 고운의 저작을 보면 그의 은둔은 68세까지 연장되어 나타나지 만(혹자는 후세인의 誤記로 보고 있다),『束國文廟十AK年譜』에서는 42세를68) 은둔시기로 보고 있고,「法山海受空銅像碑文」에 서는 44세695로 적고 있다. 한편「,死雜記」에서는 경애왕 4년인 7
68) fi'짜댐文찌十Aft年짧.!I. 文昌찮年짧, 상仁文{r.f.it. 影태本, 1980, p.8.
69) 후股相, (J!Il잃없훌~~홉 *~ε~~).세(927)에〈종적 을 감추었다〉고 보고 있으나 이 기록 또한 확실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아물든 이러한 저술의 사실성은 고운의 은둔이전의 일임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新羅 f如 山海印寺普安住院壁記」에 보면 < 숨어서 사는 사람은 바르게 살아서 吉하다. 이것은 道를 行하는 법인데 숨어서 사는 사람은 어찌하여 중만 가리키는가〉이라고 은둔에 관한 고운의 시각을 밝히 고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은둔을 단순한 현실도 피기- 아니라 도의 실현의 한 형태로 간주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 나 고운의 은둔생활의 구체적인 모습은 자료가 없어 찾아보기 어렵다. 단지 그가 遊歷했다는 장소의 이름올 통해 풍류적 삶의 혼적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70) 或亦近 ).
慶州 孤山에는 후세인들이 지은 독서 당이 造!虛碑와 함께 서쪽 기슭에 있다.
安東府 才山!1保의 서쪽에 있는 淸抗山은 이곳에 致速峰과 고운이 독서를 하였다는 致이 있다.符理山 雙沒寺에는〈雙林>,〈石門〉이라는 策跡이 남아 있다.染山의 臨鏡速를 植公整라고도 부르고 있다.東榮 海民註는 孤段의 字를 따서 불려졌다 한다. 이곳에 고운이 密를 쌓은 疫跡이 있다.f加®山의 學士整 • 簡月 • 등에 자취가 남아 있다. 71)71) 앞의 껴,
이들의 대부분이 山水가 수려한 곳이어서 고운의 은둔생활의 풍류적 정취를 찾아볼 수 있게 한다.
이 밖에 옥구지방의 전설에는 고군산열도에는 新侍想라는 섬에 月彫山이 있고 이곳에서 고운이 植을 만들고 글을 읽었다는 겨彫述가 있다72〉고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月影整는 馬山에 있다고도 하는데 馬山抑의 옛이름이 文屋郡이고 그곳에 月影寒의 遊故이 있다72) 1982. P.280. 10, ).
고 하여 이능화는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73〉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 나타난 대부분의 공통된 특징으로는 고운이 은둔했다는 자취가 대체로 경상도 일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군산 일대의 유력지들에는 출생담 등이 비중을 두고 있는 반면에 고운의 은둔담은 경상도 일대에서 대부분 이루어지고 있음을 봉 수 있다.73) 和. 考 古 山 孤 條. < 山 月 先生 古詳相同. 末知何 ).
孤要의 交遊關係
지금까지 고운의 생애를 대체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고운의 생애 즘더 폭넓은 시야에 서 파악해 보는 것도 고운을 이해 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여겨저 고운과 교유관계를 가졌던 당시의 인물들을 살펴보기로 한다.고운의 생애에서 가장 활발했던 관동기는 고변의 휘하에 있던 4년간이었다. 고변의 述府에 들어가기 전에는 安詞科에 응시하기 위해 입 산생환을 하였기 에 많은 이 들과 교류 갖지 않은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동안에 고변에게 간청하는 글들이 몇 편 있는 것으로 보아 고운은 그를 당시의 실력자로,존경의 대상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이 러한 고변과의 교류관계는 4년간 종사관의 직책으로 있으면서 더욱 밀접하게 된다. 특히 고변에 대해서는 고운 자신이 생활고에 처해 있을 때 그룰 기용하여 준 은인으로 여기고 있으며 또 종사관으로서 문서들을 代作은 하였으나「機黃」등으로 그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고 있어 여러 글 가운데 존경 하는 마음이 자주 나타난다. 또 고변은 그를 당 희종에 게 특릴히 추천하여 都統巡官 承務郞 侍御使 內奉公의 직위와 紫金魚裝를 받게 해주고 있다.이와 같이 가장 오랫동안 친분관계가 유지된 인물은 고변이었다. 고운은 그-!: 단순한 상관으로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문학적 교류로서 또는 사상적 대화자로서 존경하였다. 그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시로서는 고변의「玉:詩」와 고운의「泳」이 있다. 이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눈이 나부껴 문에 들어윤 때에서 있는 긴 대나무가 구슬 가지로 변한 것올 보았더라천천히 즐겨 높은 다락에 올라가 보니인간의 악한 일 가닥난 길을 다 덮었구나74) , 四部i 63 , 文 版, 1978, p.983.
이에 고운은 화답했다.
오색 붓으로 육춘화를 엮어 내어삼동에 읊조리니 사방에서 추앙하네걸구가 연구보다 나은 줄을 비로소 알았으니이로부터 꽃다운 이름이 謝家를 무색케 했네75)75) 17, P.381.
효色잖~之버7E 三~~W四方않如었]짧句짧맴句從此'Jj 名l1i!값I~이렇듯 고변과의 교류관계와 아울러 그의 代作에 힘입어 幸相. 落師 등의 각계각층의 사람들과도 별도로 私信올 보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등 폭넓은 교류를 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고변 외에 고운이 교류한 인물들은『佳死筆耕고에 잘 나타나 있다. 다음의 목록은 그 내용올 정리하여 본 것이다.
짧/혜交처。退격 t 文핸交淑내용*낀다물中의에성격나타η‘ 난따인)싸 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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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거론한 인물들 중 座主尙안 速明i과 强州尙 張我府와는 시와 문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그들과 고운의 사이는 가까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보다 더욱 가까이 지 냈던 당의 인물로는 羅陳 • 願墨 등이 있었다. 路에 관해서는『삼국사기』열전 최치원조에 처음 西편했을 때 江東詩人 羅陳과 알게 되었는데 陳이 재주를 자부하고 높은 양하여 남올 가벼이 칭찬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치원이 지은 시가 다섯 축을 보여주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羅陳은 풍자를 위주로 한글을 즐겼기 때문에 進士試에 낙방한 특이한 인물이 었다. 이것을 볼 때 그와 고운은 어 디 까지 나 문학적 공감에 바탕한 관계 였음을 알 수가 있다.76) Ii'三댐~ll2JJ 썰 46 , ~빼 6, tt!겠패핸, <맺江끼iS¥A‘웹E강相었I ~강 n才自체 不헬뺨·可A示종rei홉所월용~~흉五뼈).
顧및은 孤段과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으로,고변 휘하의 종사관으로서 근무한 가장 가까운 인물이 었다. 은 문장이 출중하여 문인으로서 이름이 높았으며 고운 자신도〈제가 가만히 同年顧및 校만의「獻相公長啓」1수와 단가 10편을 보건대 학파는 고래가 바다 물결을 뿜는 듯하고 詞絲은 칼날이 强波에 기대인 듯하니, 我頭에 올려 영원히 유전할 것〉이라 하며 그의 박학한 학식과 날카로운 문체 를 예 찬하고 있다.
77) [j'밟文훔候全集JJ, Ii'桂젊·따;하』쌓 17, rat합깝J , P.380. <某쩌앓同年.맺월훌 相公표힘 짧았十T.l 원iT.itJ\ IJ~댄海펴 Z펴jtf.J\IJ 앓J f(\f~{i'jHiiI왔~ 永可流따).
그들의 관계는 고운의「第春則抑和願民友使j와「和願玉侍御IE陽泳菊j의 시78)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로 봄 가을로 화답하면서 우정을 돈독히 하고 문학에 정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운이 신라에 귀국할 때 십년지기인 願民은 송릴시를 주었고 이 에 대해 孤民은 답시를 주고 있는 것을 보아 서로의 관계는 밀접해 있음을 알수 있다. 그들이 주고받은 시의 한 내용을 보면 그들의 친분관계는 더욱 돈독함이 보여진다.
78) 에 수록되어 있다.
내 들으니 바다에 세 마리 금자라 있는데
금자라 머리 위엔 높은 산을 이었고
산 위에는구슬 궁전 자개 대권 황금의 전각이요산 아래는천리 만리 넓은 파도라네그 옆에 한 점 계림이 푸른데자라산 정기로 기특한 이 태어났네열두 살에 배타고 바다를 건너와서문장으로 중국을 뒤혼들었네열여 덟 에 문단을 휩쓸어한 화살로 금문책을 쏘아 뚫었네79)79) Ii'三I쩍없記』껄 46, 列(~J 6, 뾰줬~~¥. $12 써1, li'2JQ업없*~ ~ 22, 雅文, <엔H!J不
立11i ifd효7lJ~J 짧).양때험上三효앓 s?l Y~fJi1,따山~i1~山之上兮n’텀貝때값 s?lm山之下兮千ill.파!II之tJWJ~~-채없林핑 짧山쭈秀生f양 t.~十二~PJ}~ii장꺼t 文arc훌 !lb *l~~휠十I\ti월行i끊훌리~ 一f!Ir써破깅zr~짧신라로 귀국하는 孤에게 지어 준 願民의「送別詩」이고 이에 대해 孤民의「答詩」가 있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단신으로 중원에 들어웠다가스믈여덟 한창 나이에금의한향 고국에 돌아가련다80)80) 李仁老, r 』쩔中23 깨, 大앓때 I ~ι$ 本, 1975, p.127.
&횟1f!t$.之했 n入中헬·짧河列宿之年rd 찮1t.<~정이 밖에 비교적 가까운 관계 에 있었던 인사로서는 强痛 • 民後 •公 등이 있었다.81)
81) r和꿇進土깜村m협中월옆fJ Il'.l送ilJJ r뻐없뼈秀才送別J([(桂짧따햄않』월i 20) , r送吳進土없웹江南J r 빼!ff} U핸秀. ;tj (tr짜文훌』원 12) 의 참 풍이 있마.
이상에서 살퍼 본 당에서의 교유관계는 공무적인 관계와 문학적인 교류로 대별할 수 있다. 특히 문학적인 교류는 고운의 문학세계를확장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문학적 교류를 통해서 유의할 만한 또 다른 내용은 그가 당시의 난숙했던 도가적 풍류를 문학을 통해서 배양했다는 점이다. 당대는 이백 • 두보를 필두로 한 도가적 자연주의적 문학이 절정 에 달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며,뿐만 아니라 고운은 고변을 통해서 종교화된 도교사상을 상당한 부분까지 영향받기도 했다. 물론 그러한 문학적 교양의 배양에는 유교사상의 함양이 필수적으로 포함되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귀국 후의 고운은 시기 질투에 의해 중앙 관직에 있지 못하고 지방 관직으로 옮겨 다니 면서 그의 뜻을 독서와 시로써 대 신하고 있다. 그래서 인지 신라에서 는 관직 인사와의 교류가 적은 듯하며 말년에는 승려들과의 교류가 활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서 는 符光上人이나 金川寺 주지,해인사 승려인 희랑화상과 n後,定또師 등이 있디-. 또한 직접적인 관계가 확실치는 않지만 碑銘을 지으면서 사상적으로 간접적인 교유를 하고 있음올 볼 수 있다.孤雲의 著述과 그 影響1 孤雲의 著述과 그 성격고운은 생애를 통해서 많은 글을 남겼다. 그가 남긴 글들은 문학적 • 사상적 • 역사적인 다방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의 典解인『新)法按』에 있어서도 그의 작품집들이 발견되고 있음을 분 때 그의 작품올 높이 평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면 이러한 고운의 저술은 어떠한 것이 있으며 그 저술의 현존유무 및 저술의 성격은 어떠한가 살펴보기로 한다.먼저 고운의 저술을 기록하고 있는 문헌들이 여 러 곳에 산견된다. 朱代에 授한 중국의 正史인『新/요見대에서는『社究i筆耕<『中山役技供ji r四穴染j! 1 권이 있다 전하고,『삼국사기』에는『신당서』예문지 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으면서 별도로『文染30권이 있어 세상에 전하고비 있다. 그 외에 羅末名備 최치원作이라는「帝王年代照」이 있다고 한다. 또 대각국사 務天이 지은『新編諸宗敎藏總錄고에는「浮石分者傳」과「K奇傳」이 실려 있다.『朝鮮王朝K錄』에는 고운의 문장으로 볼 수 있는 것은『계원필경이 있을 뿐이라 하고 있다. 계원필경고의 S 序에는〈雜詩賦 및 表英染 28권,즉 私試今脫 5수 1권,五言七言今能詩 100수 1권,雜詩賦 30수1권,中山mm 나 부 5 권,技究策耕供 1부 개권〉86)을 헌강왕에게 진상했다고 하며,『海民供』에는〈고운 행적에 치원 46집 1권, 계원필경 20권이 있다〉고 하고『大本技{親經』에는 野首傳이 수록되어 있다. 이 현수전의 원명은「店I福寺故寺主潮經大德法藏和尙傳」이다. 또 『新增東國興地勝雜』에는 가락국의 건국설화가 단편으로「釋利貞傳」과「釋順應傳」에 인용87〉되어 있다.
82) Ii'店也.1i !t: 60 ,志tn .5 0 ,黯文4 ,景仁文化桩,影印本, p.417.
83) Ii'三国史记.1i ,世致~~袋, OJíh营出挡文志云·也敖草草四六ZJ4 一在. 桂苑nu阵二十卷……叉有文集十卷'行淤世).84) rr三因史臼』卷4 ,新Hii本妃m四智血干惊, 85) ii'太宗大王n纷』辛辛24 , 12 年去民6 月.86) [,"世文吕侯金组tD , rr挂苑锥1开序.0 p.287.87) rr萝jt宿束因照地服咒』卷29, r i%~陈主1!/l1治革J.이상에서 고운의 저술올 수록한 문헌을 일람하여 봄으로써 최치원의 저작을 대략 추정해 볼 수 있다. 그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1. 桂 20卷2. 中山役班集3. 四六染4. 帝王年代歷5. 帝王年代땀 6. 浮石好者傳7. 賢首傳8. 私試今設 5 首
9. 五言七言今强詩 100首 10. 雜詩賦 30 首11. 釋利貞傳12. 釋順應傳13. 務十餘條이들 중 『계원필경』만이 현존하고 있으며 『문집』30권은『삼국사기』에 단편적으로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고려 당대까지는 유행했으리라 본다. 또『동문선』에는 시와 몇몇 문장들이 실려 있다. 그 밖에「현수전」이,또 碑銘에 있어서 기록들이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특히 그 중에서『계원필경 J]에 수록된 내용들을 토대로 고운에 관한 기초적 연구가 전개되어 왔던바,이에 그 성격과 내용들을 일람하여 봄으로써 고운 저술의 특징을 알아본다.『계원필경』의 성립은 고변의 종사관으로 문서의 役을 행하고 있을 때,4 년간 힘 써 이룬 1만여 수 가운데 그 중 10 분의 1 도 못되는 글을 모아 명명한 것이다. 이 명칭의〈佳能〉은 당시 고운이고 변과 함께 주둔하고 있 었던 지 방이 계원이었기 때 문이 며〈策想D은 때마침 난리를 만나 융막에 기식하게 되어 거기서 먹고 글을 썼기에 필경이라 제목을 붙이고 있다. 그 내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卷|총수|붐류 l 힘| 쿠 성 文 1 갇의 성격 비 그 l
쌀 l 총수 l 분류 l 휩 l 쿠 성 Xl품의 성격 ,비, 그 L
卷 l좋 | 분류|힘| 구 성 文찮의 성격 그 l
이 상에 서 보면『계원필경1권부터 16권까지 는 고변의 代作을 한 것이 나 17 권부터 20권까지는 고운 자신의 신변이 나 감정을 표현한 글 등의 내용을 신고 있다. 이들 중 자신이 집필한 내용들을 통해서 브면 고운은 관직을 청탁 또는 관찌올 하사받은 데 대한 감사의 글,승진시켜준 데 대한 자신의 심정올 토로한 글,生科를 내리준 데 대한 감사함을 사례하는 글, 당에서의 생활상과 외국인으로서의 외로운 심정 을 소개하고 있고,고운의 교유관계 및 그 사회직 위치 등을 기 록하고 있어,代作을 통한 고운의 외적 인 활동과 아울러 내면적인 인간적 정서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이 밖에 동문선이나『금석문』등에는 고운이 作하거나 授한 내용들이 산견되 어 현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詩 (45 수),賦(I),序(1),表(7),狀(6),啓 (1), 碑銘⑷, 記(4),說 (6),願文(7),傳 (3), 雜錄 (2)이 들 글 중 碑銘 • 記 • 說 • 願文 * 傳 등의 글은 귀국 후에 고운이지은 것들이다. 또한 이들 내용의 성격은 대체로 三敎 수용의 태도를 갖고서 원숙해 져 있 음이 공통적임 을 찾을 수 있 다.이와 같은 고운의 사상적 성격은 특히 귀국 후에는 佛位들과 士人들과의 만남이 주가 되는 것으로 보아서 그 사상적 경향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를 시사해 주는 바 크다.孤雲 생애에 대한 後代人의 평가고운의 사상과 그의 업 적 은 문학 • 종교 •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의 문화에 기여한 바가 크다. 그리하여 이러한 다양한 분야로 부터 그에 관한 평가가 여러가지로 제기되어 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 평가 가운데는 그를 한국 문화의 흐름에 있어서 우뚝 솟은 획기적 인물로 보는 입장도 있는 반면,그의 학문이 박학하기는 하나 고유한 독창성의 면에서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한 후인의평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고려조에 있어서 고운에 관한 평가이다.김부식은『삼국사기』에〈店』整文志에 고운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그 이름이 삼국에 들리기 이와 같았다〉 라고 하고 있다. 즉 김부식은 고운의 문명 이 당에 널리 멸쳤다는 사실에 주목함으로 써 그를 보는 평가기준을 당나라에서 의 평가에 두고 있 다. 따라서 그의 평가는 객관적인 평가라고 보기는 어 렵다.因山에 서 정 지 상 ( ? 〜1135) 이 향를 읊으면서88) Ii'三因史~.D卷46,列傅6 ,植致~~袋.
최고운을 생각해 보니
문장으로 중국 땅을 진동시켰네무명 웃 입고 갔다가 비단 옷 입고 돌아오니나이는 스물아흡이 못되었다세상에서 -君子라 불렀으니이 름이 가지 런하게 辛 • 社와 같네89)89) 四周觅, Ii'柬2支援阻』咎2(二君子是位夸~~ .:i!.毛告哇哇咛) •
라 하여 역시 당에서 의 문명 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
季仁老의『破閑染고에서는〈……중국에 아름다운 이름을 나타낸 이로는 按學士 고운이 앞에서 先唱하였고 異域에 명성을 떨친 이가 대대로 있었다〉9이고 하여 동방문학의 원조임을 말하고 있다. 季蜜報는『東國季相國供』의「店不立按致速列傳說」에서 <……文했列傳에 치원을 위해서 傳을 세우지 아니한 것은 내가 그 의도를 모르겠다 내가 마음대로 생각해 보니 옛사람들은 문장에 있어서는 서로 시기가 있었는데,하물며 치원이 외국 사람으로서 중국에 들어가서 당시의 명인들을 짓밟으니 이것이 중국 사람들이 꺼리는것이라 하겠다〉9니고 하여 고운을 외국인이라 하여 列傳을 두지 않은 데 대하여 지적한 말이다. 이는 그만큼 고운의 문장이 중국인보90) 李仨老, Ii'~阴然』阪.
91) 李登椒, 盯拒因李相因m.!l 卷22.다 뛰어나 있다는 극찬이다.
또 그의 백운소설』가운데서 〈최치원이 당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함에 이르러서야 문장으로 이름이 천하에 울렸다우리나라가 시로서 중국에 울리기는 이 세 분으로부터 비롯하였으니 문장으로 나라를 빛냄이 이와 같은 것이다라고 평하고 있다.이러한 고려조 인사들의 평가는 대체로 고운이 당에서 문명을 멸치고 당에서 인정 받았다는 사신에 공통된디•. 그리고 또한 고려조의 평가는 사상가로서의 고운보다는 문장가로서의 재능을 승상하는 경향에 서 있음이 특징이다.92) $꿇짧, [i'白뭔小짧.!J, r詩짧i깥林J , 한.
들째,조선조에 있어서의 평가이디.
이 시기에 이 르러서는 고운에 대한 평 가의 시각은 다양해 지나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 진디. 하나는 고려 조와 마찬가지로 문학적 측면에서의 평가이며 다른 하나는 사상적인 유 • 불 • 선의 三敎的 입 장에서의 평가이다. 즉 유학게승으로서의 평가와 불교사상의 이해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교사상 전달의 긍정적 시각과 아울러 사대주의의 반민족적 사상이 있다는 비판적 시각도 대두되 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고운이 고대사상의 참된 계승자라고 평하기도 하였다.우선 문장가로서의 평가를 보면 成況(1.139〜1594)의『備齋;•後;活』에서〈우리 나라 문장은 최치원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치원이 당에 들어 가 급제 하여 문명올 크게 떨쳤고 뒤 에 文廟에 배향하였다〉비고하고 있다. 또 傾究f 周世別] (M95〜I5) 은 그의『上辛梅齋파』에서 그분이 구석진 나라에 태어나 문학을 창건한 공이 말할 수 없이 큰즉 선성묘에 배 향하는 데 이 분이 아니 고 누구를 하겠는가〉씨라하고 1T遊淸抗山錄』에서는〈동방 문장의 시조가 되어 문묘에 배향하게 되었던 것이 다〉비라 하고 있다. 이들은 고운의 탁월한 문장가로93) rti. 많, l!'쐐짝짧않』쌀 1, (짜댐文1얀뼈잖lJjt於tt!호~i효 f(i힐入TIi효짜 文名大振쪼今12文附>.
94) 월짧玉월, 국엑 D'Jlll.뭘光生文짜』下, p. S03. (뼈웰찌 1止빼 上후원웰화 ttl文딩않之文함神5'4 ;1t BTJl所行따可뼈흩'it止之lili iTiim於없正之짧 P휠견FJt米때也t<生一R과 l3 文젠화I!);大짧 .nU I2:후5\;~ ;1F WiAi1ii짧P:l:>•95) 국억 『孤떨先生文~.D 下. p. S07. «Jl!짧入大파 數월짜 名파h天下) 찮:m끼tJF얀之뼈를E於12ft文쩌).
서의 재능을 평하면서 고려조에 있어서와는 달리 중국에서의 그의 명성을 나라 안의 공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시각이 돋보인다.
사상적인 면에서 보면, 유학자로서의 고운에 대한 평가는 金宗直문하의 士林派 유생들에 의해 긍정적인 평이 두드러진다. 특히 김종직 (~1492:>의 시에서는 고운을〈닭때 안에 낀 〉96〉으로 말하고 있다. 또한 경주의 西密按院,태인의 武城院,함양의 依洲院,次M의 三雨 등에서 고운을 空祀한 인물로 받들고 있어 그의 유학자로서의 인품을 중시하고 있다.『朝鮮王朝攻錄』에서는 고운에 관한 기록이 빈번하게 나타나 있는데 이 들의 내용은 유학자로서의 사상적 공로와 문묘 또는 서원에 향사한 기록으로 집 약되어 있다. 이는 조선조에서 유교사상을 국가통치의 이념으로 설정하면서 그사상적 연원올 찾으리는 분위 기 와 관련된디.96) 감은 책 • p. S06.
〈 ).그러나 사림파의 긍정적 평가와는 달리 김일손이나 퇴계 이황과 같은 巨偏는 최고운이 불교사상과 밀착했다 하여 비관하고 있다.
池獨 金!犯孫(14的〜1的8)은 『紙頭流錄』에서〈내가 고운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마땅히 지팡이와 짚신을 들고 좇으며 고운으로 하여 금쓸쓸하여 불교도와 한데 어울리지 않게 했을 것〉97이라 하여 유학자로서의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다.97) Ii'뾰文훌훌全짧.11. rm웰光生따웬J. <~某生於Jl!필之時짧執합N而없 不~m앓뼈훌찌~획Mil 킹r~徒).
또 퇴계 이항(1501~1570)은『퇴계집]에서〈최고운 같은 이들은 문장만 숭상하고 더욱 부처에게 몹시 아첨하였다. 그의 문집 가운데 있는 佛疏 따위의 작품을 볼 때마다 몹시 미워서 끊어버리고 싶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그를 문묘에 두어 제사를 받게 하니 어찌 先聖을 욕되게 함이 심하지 않은가>라 하여 문묘에 배향함이 정당치 않음을 비평하고 있다. 이처럼 고운의 불교적 시각이 유학인들의 많은 논평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조선조의 지도이념으로서 억불
98) Ii'退짧짜j. 당行앓 효, 쌓正않t ( ••••••如뾰孤힐從尙文·싼而없까又렐흉見:갯셰1 짧짧짱作未양不짧환而1i1l짧之j엔 與량文앙;1 ~설f~先영겉之양乎).
숭유 정책인 성리학이 갖는 배불적 성격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만중(1637〜1692)은『西油溫策』에서〈최문창은 丈室의 化摩로서 중화에 크게 울렸고〉끼라 하고, 申維第)(1681~?)의『與任正言攻論文대에는〈座未에 이르러 비로소 班阿於의 벼슬로 중국에 배운 한 사람이 있어 서 문득 초조의 달마가 되었다〉하여 불교적 입장을 수용한 면도 엿보이고 있다. 이는 고운이 말년에 불교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이 나,그가 r四山碑銘』『法藏和尙傳』등 碑銘•記他 등을 述하고 있음에서 그의 불교사상 이해의 긍정적 시각을 볼 수 있다.99) , [ 』下, 文林;,if , p. 49""~0. <뾰文 以깃;헐之 大 中 >.
또한 도교적인 면으로,고운이 생에 가운데 풍류를 즐기며 은둔생찬을 했다는 점에서 후세인들은 그를 備仙, 仙人이라 부르고 있다. 이에 石川 金德齡은〈致速仙〉라 하고 供偏은〈備仙按子遊世〉1이]라 하고 있으며 도교서인 r靑初供』에서도〈入ftn®山不出是得大他〉102)라 하여 가야산에서 정진하고 있음이 도교적인 입장임을 밝혀 주고 있디-. 후대에 와서 이능화의『朝鮮道敎史』에서도 고운이 齋詞를 비록 당에 있을 때 지었다 하나 이 일로 연유해서 가히 고운을 도교인으로서 증명하고 있다 하여 그에 관한 도교적인 평도 긍정적이다.
100) 까댐맺j띤짧랬』썰 23, .
101) rr짜國책j띤짧앞』 30, .102) [j'파꾀잦J], 亞빼亞文{t m:.이 밖에도 고운의 문체 및 사상의 성격에 대한 비난도 나타나고 있디. 成他은 최치원에 의해서 우리나라 문장이 시발이 되었다 하면서도 그의〈四穴文은 語不整〉1w〉이라 비평하였고 季德思:도 그의『尙i住鉛全按교에서 고운의 ©f師文은 중국의 유행에 따른 惡流라 비평하였 다. 丹齋 申系法는 그의『朝鮮上古史』에 서 <김부식 은 김춘추 • 최치원 이래에 雜華主我 結晶이라 최치원은 그 사상이 海이나 당에만 있는 줄 알고 신라에는 있는 줄 모르며 학식은 漢만나 佛典을 관통하였으나 本國의 古己一流도 보지 못하였으니 그 주의는 조선을 가
103) 成 , rrt\Iifil ~Ii!J] 캘 1, < I四六而짧不 ).
져다가 純支邪化하려 했다〉104)고 비평하고 있다.
104) 上古史.. 全 上. p.72.
이는 고운의 문체가 중국 유행에 따른 점과 또 고운과 같은 당유학생들의 사고방식이 김부식의 사대주의 사관으로 이어짐을 볼 때 고운도 市大雜華에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으리라는 비평이지만『규원사화』에서는 이와 반대로 그가 고대정신을 민족정통정신으로 잘게승하였다고도 보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조에 있어서 유 • 불 • 선 및 고대사상 등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나 그의 저술에 관해서는 詩作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일종의 공문서 형식의 代作이거나 祭文•序•記•說 등으로 되어 있어 고운의 주관적 사상의 평가가 힘드리라 보는 면도 있 디-. 이와 관련하여,고운의 자의적인 사상이나 학술적인 기록이 대체로 없음을 볼 때 그의 사상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도 제기된 다. 즉 박학다식한 지식을 지니고 피력한 저술 가운데 유•불•도등 여러 사상을 단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지만 자신의 감정이나 소신을 밝힌 몇 편의 글로써 고운이 일관된 사상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러한 것들에 연유해서 고운은 후대인의 많은 비평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비평은 탁월한 고운의 문장과 중국에 떨친 그의 명성,代作에서 나타난 명철한 실례 등을 통해서 부인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단지 이와 같은 비평들은 조선조의 유학자들의 입장에서 비쳐지는 고운의 E敎의 복합적 성격이 고운이 유학자로서의 순수성을 잃고 있기 때문에 보여지는 비평이라 파악된다.이와 같이 다양한 평가가 나오는 자체는 고운사상의 영 향이 크다는 데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는 한편에 치우칠 수도 없으며 앞으로 연구 진행 에 따라 더욱 정당한 평가가 나와야 할 것이다. 다만 고운의 사상이 대체적으로 한국 문화사상에 있어 분명히 깊은 가치문 지니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孤雲의 生涯」토론 개요
인물을 중심으로 생애를 고찰한다는 것은 보는 입각지에 따라 다양해지 기 때문에 어 려운 일이다.어구나「고운의 생애」는 자료의 빈곤으로 인해서 한정된 생의 단면만을 파악할 수밖에 없어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고운의 생에를 전반적으로 파악하는 데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이러한 문제점과 노 제기된 문제의 토론내용을 정리하여 본다.문제제기 : 고운이 살았던 부조화된 사회의 시대적 배경,자신의 운명을 결정 짓는 신분계급의 제약,이를 벗어 나기 위한 고운의 강인한 의지는 한갓 용트림에 불과한 불우한 생으로 일관한다. 이러한 그의 생을 유학기 • 귀국 후 관직 활동기 • 은둔기로 크게 대별할 수가 있는데 이에 앞서 출생 • 성장 • 결혼 • 자녀 등과 같은 생애의 기본적인 자료가 도출되지 않고 있어 유추에 그친 수밖에 없다- 이런 기본자료 부재의 상황에서 고운의 생애가 올바르게 인식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남는다.토론내용: 고운의 출생지에 관한 설정은 사량부인 • 본피부인 • 호남 옥구인의 설 등으로 주장되어 왔다. 하지만 이는 후세인들의 기록에 의한 것이지 고운 자신은 그의 출생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따라서 그의 출생과 성장지를 알 수가 없어 유추에 의할 뿐이다. 또한 생의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을 결혼도 당에서 하였는지 귀국 후에 하였는지 하는 기록 또한 나타나 있지 않고 있다.고운의 당에서의 생활은 귀국 직전까지 황소의 난 등을 토벌키 위해 부임된 고변 휘하의 종사관직 이어서 그의 생활은 주로 고변의 문필지을 대행하는 군사 업무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의 고운은 당시에는 결혼은 하지 않았으리라 본다. 왜냐하면 당의 시국 수습에 따라 바쁜 직책과 더불어 특히 인륜을 중요시하는 유학에 의한 수학이 몸에 배었기에 결혼은 귀국 후 부모가 계신 모국 땅에서 했으리라 보여진다.
또한 자녀에 대해서도 말년에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으로 들어갔다고만 하고 있어 그들 자손의 활동도 보여지고 있지 않다. 그의 결혼은 귀국 후에서 야 늦게 하였을 것 이므로 고운 자녀 에 관해서 는 기록들이 나타나 있지 않고 있다. 이들 직계손들이 고려 건국 후에 어떻게 활동하였는가도 궁금할 뿐이다.이러한 유추에 의해 고운의 객관적인 생을 더듬어 볼 수 있으므로 그의 생 애 의 크나큰 흐름은 벗 어 나지 않으리 라 본다. 또한 당시 의사회적인 문화 현상과 자신의 신변에 관한 몇 편의 기록 및 내면적 감정의 표출인 시 등을 통해서 고운 생애의 내면적 현상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생에는 올바로 인식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문제제기 : 고운의 은둔에 관한 다양한 시각의 문제이다. 즉 그의 은둔은 유교이념에 의한 정치상의 개혁의지 실현의 좌절인가 또는 불교적 인 개 인적 수양으로서 의 은둔인가, 그렇 지 않으면 산수를 즐기며 풍류자적했던 도교적 생의 초탈적 경지인가가 의문시되고 있다.토론내용: 고운의 은둔 연대는 42세 또는 44세 등의 설들로 다양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진성여왕 당시 시국 건의책으로「시무십여조」를 올렸는데,이를 왕은 반가이 받아들였지만 결국 시행되지 않자 국정이 부패됨을 한탄함과 아울러 시국에의 간절한 희망이 좌절되는 느낌을 가졌음이 분명하였으리라 본다.또한 혼란한 시국 가운데 불교 안에서는 귀족불교의 체계가 점차무너지고 지방 호족세 력 과 선승들과의 교류가 활발해 지고 있었다.특히 신라말의 五敎九山의 선종이 일어 나고 있었기에 고운으로서는 선승들과의 교류 또한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 본다. 목히 당에서도 三敎 융통이 성행하였던 것으로 보아 유학을 근간으로 했던 고운도 이를 순수히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시무책의 실패로 말미 암아 불교적인 내적 수양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리 라 보고있다.
또한 지 방의 명 산대천을 유람하면서 그의 문학적 자질을 발휘하며 풍류적 생활을 즐기고 있음을 보아 그의 은둔은 도교적 입장의 초탈적인 것임을 무시할 수도 없다. 이러한 도교적인 경향은 당에서 고변이 이미 심취되어 있었고 고운이 귀국한 다음해에 고변이 은둔의 도교적 생활을 하였음을 보아 고운도 이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지 않았나 짐작게 하고 있다. 신라에서도 이러한 은둔은 당시 돌락 귀족과 일부 지식계급충들에게 유행이었다. 하지만 고운에 있어 은둔은 풍류적 생활과 더불어 세속적 초탈의 경 지 가 강하게 작용하였으리라 본다.따라서 이들 E敎的 입장의 은둔의 시각은 어느 한쪽에 치우쳤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다만 고운에 있어 내재된 종교적 심성이 극치로 발현되 었다는 점은 분명 하다.문제제기 : 은둔에 관한 또 하나의 문제는 은둔 당시의 사상적 경향에 대한 평가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 등이다. 고운의 생애는 주로 활동기가 당에서나 귀국 후나 관직 활동을 할 때였다. 그렇 지 만 그의 말년에 있어서의 은둔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문학적 • 사상적으로 가장 원숙했던 최고의 경지에서 활동한 시기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의 은둔생활에 대한 사상적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은둔 이전의 생의 차원을 넘어선 사상적인 인식을 극복할 수 없다는 점 이 다. 오히려 미약해 보이 지 는 않을까 하는 의 문이 다.토론내용 : 고운에 있어 생의 변화에 따라 그의 사상적인 경향의변천도 보여지고 있다. 당에서의 학문 견습기는 주로 유학에 의한과거 준비 및 문학적 기 본학습과 4년간의 종사관으로서의 代作활동을 들 수 있다. 이 당시의 저술들은 주로 代作이기에 고운의 뚜렷한 주관적 사상은 보이지 않고 있으나 글의 내용상 주로 유교적인 필치가 돋보이고 있다.
귀국 후의 저술도 주로 왕의 하명을 받아 지은 記 • 讀 • 傳 등의 문장이라 그의 주관적인 사상의 면모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이들 공무적인 내용의 글들이 불교적인 성향과 많은 관계를 맺고있음을 보아 고운의 불교적 관심을 짐작게 하고 있다.또한 은둔한 시기의 저작활동은 전하는 바는 없지만 이 시대의조류인 敎 융통의 성향과 아울러 그의 사상적 원숙을 드러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또한 풍류를 즐기던 그의 제약없는 자연에의 심취의 성향은 문학적인 심미감을 더했을 것임도 분명하리라 보여지기에 비록 기록들은 없으나 그의 사상적인 심도는 부인할 수 없으리라 본다.孤雲의 儒敎觀
李鉉澤孤雲의 儒敎觀 추구의 문제孤段은 그의 저술을 개관해 볼 때 어느 사상을 특별히 내세운 것이 없다. 있다면「殺郞碑序」에서〈風流〉를 말했을 정도이 다.이것은 그가 三敎思想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는 것올 의미하는데, 당시 사상적 경향이 어느 특정 사상에 구애됨이 없이 섭렵하는 풍토가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다.그리 고 그가 유교적 사상이 나 용어 를 구사하면서 도 逆 • 佛의 용어를 자유자재로 활용하였다 하여,이것이 꼭 道 • 佛의 사상을 빌어서 補}敎思想을 표현하려 한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매우 힘들다. 그는 드敎思想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사상에 구애됨이 없이 문장을 授.述 내지는 추구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고운이 備 • 佛 • 仙 三敎를 사상적 命通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그러나 불교나 도교에 대해서는 내용상으로는 三敎思想을 융섭하였다고 하더라도 형식상으로는 분명 히 불교적 이 고 도교적인 저 술이 있다. 예를 들면 불교적인 것으로는「四山碑銘」을 비롯하여「法銳和尙傳」등 20여 가지의 구체적 인 제목으로 써어진 글이 있다.도교의 경 우는『佳究,耕染』제15권의 齋詞 11편이 모두 도교적인 글이다. 그러나 유교에 대한 것은 구체적으로 표제가 정해진글이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도 고운이 備者가 아니라는 평을 듣는지도 모튠 일이다.
다음 장에 고운의 연로서의 자세 나 유교적 사상은 밝혀 지 겠지만 그가 생애의 대부분을 者로 살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신이다. 고운의 예의범절과 실천윤리는 모두 유교사상에 기반을 두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으로 유교적 저술은 남기지 않았다. 다만 여러 문헌 속에서 자유자재로 유교사상을 응용하고 용해시켰기는 한데〈이것이 유교사상이다〉라고 추출하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단지 문헌 속에서 단편적인 단서를 통하여 고운의 유교관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이러한 문제 는 불교나 도교관에 서도 예외 일 수는 없다. 그리고 한 가지 부언할 것은 유교사상을 담은『經學除故그이 라는 저서도 거론되지만 일반적으로 고운의 親述이 아닌 麻出라고 보기 때문에 여기서는 IT經學際故』을 연구자료로서 활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자 金結照씨의 주장대로 r性死按耕』과 함께『經學隊使고이 고운의 친술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備學思想硏究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 다.김철희씨는『經學隊故』의 저자가 明의 학자라는 것을 비관하고고운의 친술이라고 보는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첫째,문체가 그의 모든 저작에 나타난 독특한 耕範文으로 되어있다는 점.둘째,明代의 所作이라면 性理說에 대한 논리에 來油;-의 학설이한마디도 표현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셋째,명나라 학자가 썼다는 근거를 아직 발견치 못했다는 점 등이 다.그러나 이 몇 가지 주장 역시 고운의 저서라는 충분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에 여기서는 연구자료에서 제외시키기로 한다.2 孤雲의 儒者로서의 위치
고운은 備 • 佛 • 道 三敎에 구애 함이 없는 융통한 인물이다. 일생 행적이나 사상편력에서 보더라도 어느 한 사상에만 천착하지 않고 두루 섭렵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그러면서도 그는 竹}者로 자처하였다. 「上太師侍中狀」에서〈이제 致述은 備門의 未學이라〉> 했고,「我除吏部郞別紙」에서는〈오늘에 먼 지방 사람으로서 仲/g의 生徒라 일컫는다〉》하였다. 이외에도 〈재능이 없는 선비 (賊ffi)가 글을 짓다>기 또는〈씩은 선비 (腐ffi)의 備道로(지증대사의 정상을) 들추어 내기가 부끄럽다〉시는 등 偏者임을 자처하였다. 그리고 그는 끝까지 유학으로 입신할 것을 결심하였다.I) Ii'文딛候줄갯.!l(成大大짜文化맑究않, 1972). p.7!. (今훌싫힘門末캘>.
2) 위의 쩍. p. ~94. (今遺A隔尼父깊E徒>.3) r짧헐和(.'녕없짧 J. 위외 져 • P.94.4) r혐1짧져1尙뺑짧J. 위의 껴. P.199.마음으로 千里馬의 수레를 더위잡고 우러러 대권(丹段)에 추창하며,굽어 今을 부러워하고,실로 備宗을 귀히 여기어 경솔히 疾進(천자의 감식)을 더럽히며, 은혜를 바라고 덕을 그리며,지극히 애 많은 심정을 이기지 못한다.5)
5) 近 生 入 狀 . 위의 p.60. < 以 心
宗 i~m f. 任~) t1H 技口 切 之至).여기에서 고운의 偏者로서의 결심이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학 추구 정성의 간절함이 피부로 전달되는 것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처럼 그가 道 • 佛을 자유롭게 섭렵하면서도 付者로 자칭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올 것이다.
그는 수학과정에서부터 유학자로서 시작했다. 따라서 과거에 급제한 것이 나,그후 관직생활이 유학을 떠나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그가 出에 유학한 것 이 12세 때 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엄계하기를 10년 안에 급제 하지 못하면 내 자식이 아니라고까지 강변하였다. 이를 명심한 고운은 哀낏에게 사사한 지 불과 6년 만에 급제 출세의 길에 들어 섰다. 그런데 당시 학제 에 의 하면 孝• 曲I段 •雨雅 • 文選 등 도의와 예 법 그리 고 文字學 • 文常學을 장려 하였 다.
당시 斑制의 학제에서도 禮記 • 存秋左氏傳 • 詩經 • 周易 • 依禮 •尙松 • 按秋公羊m • 投染他을 주요 교과과정으로 삼았다. 이러한 것은 당 유학생들의 귀국으로부터 國學 운영에서 rif制를 모방했을 가능성 이 크다고 보아진다.6) 烈. li' 1m 史. 版部. 1985. pp.54 55.
고운의 경우도 이러한 學制圈에서 수학했음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과거제도가 유교이념에 의하여 시행되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유학을 떠 나서 과거 라는 목표를 설정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과거를 목표하고 경서를 탐독하고 詩賊를 익혔던 것도 聖學(유학) 이었다. 그리고 그는 12세에 당에 유학할 정도로 조숙했음은 믈론 유학에의 정진이 투철하였었다.〈仁風에 흡앙하여 눈이 빠질 듯한 정도〉8〉로 노력했다. 그가 원했던 것은 虛名이 아니 었다. 그가 관직의 길을 걸은 것은 攻路備를 지 향한 것일 뿐 명예를 탐낸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7) li'桂1fi따짧』썰 17. r파I'.t t양J. 앞의 씌 • P.380. <않而갓뿜흉方之짧당 탱뿔代之합힘).
8) 위의 객. p.379. <뿔t윌以R 파).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다만 備道를 좇아서,처음 벼슬해서도 座土를 싫어하고,……浪文(孔子)의 가죽책이 끊어지기를 바라나 接科! (해와 달)의 고삐를 재촉하는 데야 어찌 하리까.9)
9) 위의 책, p.380. <所以未않뀔행 但협個道상tf:而뼈없앨土••••••값쩔尼父之紹짧 無짖윷훌§휴1之~앵).
고운은 孔子가〈학문에 열중하여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도를 즐겨 근심을 잊어버리며,장차 늙어 죽을 날이 올 것도 모르는 사
람〉10)이라고 한 자신의 표현과 같이,또는 <供見,編三絶>했다는 학문에 의 정 신을 본받으려고 한 간절한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그가 공자가 추구하는 바 K者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뜻을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 엿볼 수 있다.10) 『앓짧』칼 7, 않而, (짧않;훌슐 햇以忘표 不었1老之%至긍:.m>.
사람이 能히 道를 넓히는 것이므로 어린 신하는 그 임금이 究與처럼 되기를 먼저하고,세상에는 어진 인재를 기대하므로 도리어 染父 • 許山가 되기를 부끄러워한다.11)
II) 又, 앞의 껴, p. 396.
父 • 許山같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또는 독선적으로 사는 것을 부정하고,장부의 뜻을 染郵과 같이 펴기를 기대한 것이다. 그러므로〈葬拜의 큰뜻을 이루어 길이 국가를 도울 것이오, 父 • 許由같이 조그만 절개를 본받는 것은 마음속에 두지 않겠다〉미는 결심을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큰일을 위 해 서 小節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각오야말로 고운의 본심이었을 것은 명 약관화한 사실이다. 그것은 유학시절에,또는 당에서 환동하면서도 역력했다. 商耕과 같은 이국 將Gill의 눈에 도 고운이〈來_異鄕 勤於傾道〉비하는 것으로 보고 유달리 아꼈던 정올 읽을 수 있다.
12.) 위 의 책 , P.396. <然JtIJ致찮짤之大없 ;k힐훌L흘 꼈jIm之小빼 不介~홉).
13) 위 의 쩌 , p.396. (쩌쩔짧힘).고운은 /선代의 사상적 배경 속에서 수학했지만 기본적 바탕은 유교에 두고 도교와 불교사상도 자연스럽게 섭렵 하 다.〉그러나 그는 竹者임을 잊은 일이 없다. 기본 결심과 목표가 뜻대로 실현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심히 몸부림치는 모습도 보인다.
哲이 折水에 목욕하겠다는 뜻은 다만 헛 말이 되었고,仲由(子路)의 바다에 뜨겠다 함을 기뻐한 말은 마침내 攻市가 아니지
14) 烈, 致遺文 P.17.15) 示延和記狀. 양의 껴, p.388. <末).
만,저는 대통(竹桶)으로 엿보고 寸遊을 치는 자질로서 참으로 예전에는 古煙했었는데 지금은 영광스리워졌다.16)
16) 迎 行 別 . 위의 책. p.395.
물론 이러한 말은 학문하는 겸손과 자기 발전을 비유하고 있지만,그의 의지가 先進에 못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萬卷의 經史를 가리키 면서 三冬의 짧은 해를 한스러워하다가,언 베개 (沈)에 마음이 상하고,외 로운 등불에 그림 자를 짝할〉17〉정도로 經史 탐독에 촌음을 아끼 며 정 진하였 던 것이다、그는 〈詩流으로써 性樂을 기르는 자료를 삼고 안卷으로써 몸을 세우는 근본을 삼아〉 잠간도 경전의 정신을 소홀히 함이 없었던 것을 알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다음과 같은 독백에서도 나타난다.
17) 위의 껴. p.380. r파i야참J. <웹따.쏠之짧잊~ {파三~之상光及;J't피!tt{강매 nIB표f*W).
18) r따깜服따J. 위의 책. p.386. <以之츄짧않환!및之헬 以깜웰행tr.身之本).옛적에 子及이 말하기를〈夫子의 文命은 가히 들을 수 있지만 性 와 를 말씀하시는 것은 들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 다면 孔門의 十哲들도 엿보아 알기가 어려운데,더구나 만리의 먼데 사람이 공자의 경지를 어떻게 측량할 수 있겠는가.19>
19) r췄除없짧f~H!},gUJlIlJ. 위의 책 • P.394. <쉰‘子itS 夫子之文훨 可짜而rm 夫子之다{生멧天道不可찜而때it? ?{\JlIJ至於四科弟子짧뻐尙難i兄j표 ltr.!IH짧}.. !!HJlJ可及).
이 말은 紙仰 정진을 더욱 촉구할 것을 결심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고운은 일찍 이 孔門을 흠앙하여 그 사상의 연찬과 실현을 밤낮으로 잊어 본 적이 없었다. 「謝職狀啓」에2°〉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20) 위의 껴 • P.386. 對日志夫子致公~ ~:l암i比따 up;收之).
저는 일찌기 松論(論語)을 읽다가,仲/E께서 漆離開로 하여금 벼 슬하게 하니, 대답하기를〈벼슬에 나아가는 길은 能히 그 길은 뜻을 잘 익히지 않았으므로 할 수 없다〉하여 夫子는 그 깊은 뜻을 기 삐하였는데,저는 비록 不敏한 것 이 부끄러우나,몰래 이 것을 사모하고 있었읍니다.
이 와 같이 고운은 성인의 학덕을 숭앙하는 齡仰의 높은 이 상을 切保하여 추구하겠다는 결심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정신은 그가 어 린 나이로부터 학문을 시작하면서 다져진 정신이라 하지 않을 수 없 다. 그가 비록 道 . 佛을 자재로 넘나들었다고 하더 라도 주체적 정신이 備에 있었음은 재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고운은 스스로 유학에 정통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獻詩啓」미에서〈비록 太學에서 普-을 사모하여 매양 안연과 염백우의 담장을 엿보았다〉라고 하여,유학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깨우쳐 일단 어느 경지에 이르렀음을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고운이 공자의 덕을 훔모한 것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당시의 詩風에 대해서 열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21) 위의 책, 빼州「李可않大王J , 쌀 4 , P.32’. (월합 i맨*밸~A之~J헤光합子之없 떠E강양t fJlJ 짜x 1'8l切많),
22) 위 의 껴 , p.380,그는 또 평소에 補•冠 • 偏服으로 정 장을 하고 후학을 일깨워 備風을 드러냈다.「山碑銘序」에서 連被은 고운이 유학의 대가임을 말하고 있다.
선생이 을 쓰고 을 입었은즉 반드시 유교를 言로 삼아 그로 말미암아 孔 • 志을 忠帝하였을 것이다.23) 『孤 z~先生文짜JJ , p.898. <光生! 冠 JJIHi5服 必以 §상; ill 따.文=r-以휩r.r孔효파).
이는 고려로부터 文廟에 從祀하게 된 연유륜 말한 것이다. 그리고 雜被은 고운이 야말로 우리 나라에서 三敎를 동를어 관통한,하는
이 낸 위대한 인물이라고 찬탄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면서 유학자들의 옹졸함을 비판한다.
고운은『三國史記』에 의하면 新羅十聖中一人이었다. 고려 현종조에서는 고운을 內史令에 추증하고 先聖廟에 從祀케 하였 고 이 어서 文昌候라는 시호가 주어졌다. 조선조 明宗 때에는〈東方理學의商1>라고 추앙하고 그의 자손을 대대로 보호토록 하는 전교를 내리게 되 었다. 이는 그가 유학자적 인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그가 眞聖女王에게 바쳤다는 유교적 기반 위에서 성립되었다고 하는 시무책이 정치적 이념상으로도 높이 평가되었던 것이라 생각된다.24) 46, 6.
25) 앞의 , r Il1l월先生 , pp.418.......422.3 孤雲의 備敎的 道思想
逆는 동양에 있어서 진리를 표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에 있어서의 진리도 도로써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도는 진리라는 게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26)26) 宋룹r.tI, r뾰致찮떤‘;t!1.UF짧J , 해文ef , ({양f~ 쐐펀» 82-2, p.312.
도의 眞秘(至述는 감각할 수 있는 형체가 없는 것이다. 다만 간절하게 마음으로 정성을 다함으로써 체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27〉이것은 인간이 도를 체험한 것이지 도 자체는 아니다. 고운은 우주를 통한 어떤 감각할 수 없는 주체를 인정하면서,그 주체는 바로 인간의 내면적 성실과 경건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고 했던것이다. 그러 므로〈道는 담담하여 맛이 없는 것 이지 만 그래도 애써서 씹어야 한다> 고 하였다. 인간이 애써서 실현해야 할 도는 본질적으로 인간과 밀접한 연관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운은〈道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사람이
27) r함활i유챔J , 앞의 껴 , p.370. <至파깨無形可fa 而1월뻐.옆폈 짧心則11感必파).
28) r짜方,딴챈없효J , tr빼ffi.(i1힐i팡土끽if 甲紀;승:앓文~.!J, P.313.29) r때찮和f혜훌홉앓J , <꽃월liQ~味然須웰ftk:깡:>.)0) r따‘얻힘1때大호훌빼앓J.道를 넓힐 수 있으나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31)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고운은〈엎드려 先玉의 道를 익힘에 비록 스스로는 부지런히 닦았사오나,우러러 孔夫子의 담장을 쳐다보니 정말 을라가 되옵기힘들다〉52)고 하였다. 선왕은 공자가 숭모해 온 요 • 순•우• 탕 •문 • 무 . 주공을 말한 것이다. 그러 므로 선왕의 도를 계승 발전한 공자의 경계에 통달코자 하는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한때 子及이 공자의 도를 표현하여〈夫子의 담장은 두어길이나 높기 때문에 그 문을 찾아서 들어가지 못하면 그 안에 있는 아름답고 풍부한 것을 알 수 없다고 토로한 일이 있다. 즉 범연한 지견으로 말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라는 것이다.31 ) Ii'넓핍.D, 훼웰公.
32) r上짧없李相公짧 00給얄J , 앞의 씌 , p.72. (싸첨先王之갔i 앓自삐얀 {Ill웹夫=f之엉E뢰했쩔짧).그러나 유교의 도를 형이하적 (인간의 현실〉인 실천적 문제를 떠나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道라는 것은 잠간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니 만일 떠날 수가 있다면 도가 아니다>비라고 한다. 그러나 고운이〈道;는 무엇이 다〉라고 규정한 바는 없다. 하지만 도에 대한 해명의 가능성은 인정했다고 보아진다.
한 사람은 想을 세우고 學한 사람은 말을 세우는 법이니 저 德이란 것도 말을 빌어서야만 일컬을 수 있는 것이요,이 말이 란 것도 被에 의지하여야만 꺾지 않을 것이다.35)33) Ii'앓짧Jl, r子짧J , (夫子之합~w. 不엠1tf'1而入不見켰κI之헛 百’더之파).
이 말은 체득된 덕이라 하더라도 말(文帝)을 빌지 않고는 표할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운은〈文字가 아니면 뭇사람의 눈에 소상하게 밝혀 놓을 수가 없는 것〉36》이라 한다. 하지만 체득된 경지,혹은 도는 言說(文字)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공자
34) Ii'中Atf Jl, I T;'( (값也킹f 不可찌않합tl!. 可양非파il!.) •
35) 앞의 껴 , p.93. (빼心댄컴r .i'rf~ 口핑협i .i'rl1Jl~ 彼낀之~~il而iiJ1iIJ ).짙다i1n~~f~ITii不햄).36) 위의 책, P.138. (非文字不能昭!원2ji월퇴).까지도 그의 門弟子들에게 ‘냐는 말하지 않으련다’ ‘하늘이 무엇올· 말하머 냐’ )37) 하였 다-고 한다.
37) r따칩힘1빼大호흙따없J. 위의 껴. P.129. (합尼父:ll'I뤘子日予값삶캅 天下폼짧).
도는〈無言〉일 수밖에 없는 경계라 하더라도 인간이 그 도를 실천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될 人之道로서 전개되어야 할 과제인 것이다. 고운은〈도가 어찌 너희를 멀리 하겠는가>58)라고 전제한다. 그가〈三皮(皮天命,皮大人,皮聖人之H), 五常〉으로써〈三師,五成〉를 비유하면서〈玉;道를 실친할 수 있는 것,이것이 聖人精神〉이라 >한 것을 미루어 보면,도의 이 념은 결국 현실이념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그는〈가까운 것으로부터 멀리 간다〉에고 말하는데 이는〈군자의 도는 발단이 부부에 게 서 비 롯되 고,그 지 극한 것 에 미 쳐 서 는 천지 에 나타나게 된다〉41》고 하는 中/,If의 말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38) r때찮和셈행앓 J. (파렐파 ifii).
39) 앞의 책 • p.111. (三핏比三압 죠?참均王~tJg짧王道똥符佛心).4°) 위의 책. P.184. (自홉하찮).고운은「添郞碑序」에 서 한국의 고유한 도문〈風流道〉라고 밝히 고있다. 풍류도는 三敎思想을 포함하고 있는데,〈집에 들어와서는 어 버 이에게 효도하고,밖에 나와서는 나라에 충성 하는 것이 後•司座의취지와 내용에 일치한다〉42)고 하여 道가 윤리적 • 실천적 임을 명시하고 있다. 入則孝 出則孝 出則忠은 도 실천의 기본이 다. 그러 므로 유학에 있어서 학문은 사변적 추구가 아니라 도의 실천이요,인격완성 이 다.
41) Ii'中짜.!I. 12웰. (팝子之近造짧후夫짧 ~;tt至tμ 2월후天뼈).
42) r웰뼈휩序J. 앞의 껴. P.212. (댐有玄妙之값 日ll'IAt······톨乃包含三쩌接化양호且~.A찌쭈·於찮 버 nu‘,m於탬 쟁퍼캉之륨iI!.).고운은 다음과 같이 자기 도의 실천 곧 학문의 정 신을 말하고 있다.
수없이 생각해 보아도 학문하는 것만 못합니다. 평생에 노력한 것이 오히리 헛될까 두려워서 출세의 길에 경쟁하지 않고 다만 유교의 도를 따랐읍니 다 오직 도가 장차 없어지는 것을 근심할 뿐 어찌 사람들이 나를 쉽게 알아 주지 않음을 말하겠읍니까.45)여 기 서 고운의 학문에 대 한 가치 관,특히 유락에 대한 학문적 정열과 공자에 대한 幻의 정을 살필 수 있다. 고운에 있어서는 출세만을 위한 학문은 무의 미한 것이 었으며,자신의 사회적 입신보다 는 도의 존폐가 디윽 근본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고운의 학문이 逆學(湖逆)的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씨
공자는〈내가 일찌기 온종일 먹지 않고, 밤이 새도록 자지 않고 생 각하였으나 유익한 것이 없는지라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도다/가고 하여 학문의 중요성을 말한 일이 있다. 이는 이러한 학문의 입장을 고운 자신의 학문하는 자세로 삼고 있음을 의미한다. 군자의 학문하는 자세는〈君子說道 不•供食〉과〈君子裝道 不理貧〉씨하는 것이다. 군자가 우선으로 삼아야 할 것은 도요, 도를 행하는 주체는인간이다.43) r再以'ð J ,平1 ~ ;;Jj , P. 380. (比~t~手思不如原也百年励苦猫恐失之所以米lil宦撞远而迫……唯启迪之掷应坐古人不易知).
44) ~Uffi团, [j'J.It方思想前孜.J), P.30S.45) L"捡;ID.!l , 衍~公. <否1辛格日不众路夜不在以思知盆不如眼也).46) 世玛到1.흉륭하도다. 하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이요,사람이 존중히 여기는 것은 도이다. 사람이 도를 크게 발전시키는 것이요, 도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도가 만일 높아진다면 사람은 저절로 귀하게 된다. 도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덕을 높이는 것이니, 곧 도를 높이며 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오직 法의 첫머리이다. 그러 면 비로소 일반의 감정에 만족히 된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 잡아야 큰 덕이라 이르는 것이니, 이것은 도가 강하며 이름이 크고 덕이 이루어지는 것 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7)
47) r普安住院里记J,剖~ '.lJ. P.78. <你矣哉灭所负彩人人所宗者地人能弘迦迦不这人故迫或给茹人自n矣能助迫者恤娱f:!.欧f础。;自之雏fZ之)'é fit!f位法首方洽彷悄必也正各乃耶大缸fè由边强各大巳成而上).
고운에게 있어서 天 • 人 • 道는 일관된다. 天의 원리를 바로 깨달
아 현실에 실현할 책무가 인간에 있다고 볼 때,인간은 주체자일뿐만 아니라 도의 주권자적 위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人能私道〉요,〈道戒好我 사^攻突>는 天•人•道의 일관된 관계에서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朱哀가〈사람 밖에 도가 없고,도 밖에 사람이 없다. 그러 나 사람의 마음은 께닫는 것이 있고,도의 본체는 함이 없다( ). 때문에 사람이 능히 그 도를 크게 하지만 도는 능히사람을 크게 하지 못한다〉하였고,張子는〈마음은 능히 본래 타고난 성 품을 다하고,사람은 능히 도를 크게 한다. 본래 품격된 성품이 그 마음을 금제할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이념은 고운의 道 사상과 상통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48) Ii'앓짧 JJ , 衛월公, 註, (A外#過휩外1'1;A 1~A心1r짧 而mil짚않m 故A Illi大;t:t합효i꺼, t툴 *~Atι 짧~B 心修짧앉 A않弘m& 뾰不知~;t-t心非i갑弘A&>.
〈人外無道 道外無人〉은 사람과 도가 불가불리의 관계임을 의미함과 동시에 사람이 도 실현의 주체 자임 을 나타내는 것이다. 고운은 도실현에 대하여〈혼연한 至道는 본래 부지 런히 정진하는 데 있다〉 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공자가〈三思而後行〉한다는 말을 듣고〈再術可突〉라 한 말을 수용하여〈비록 세 번 생각하고 삼가하여 행하였으나,한 번 행하는 데 특별한 일이 라도 어그러 지 면 안되는 것 이니,이미 오랫동안 수고해서 아뢰게 되었다>50〉고 결단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즉〈세 번까지 생각하면 사사로운 뜻이 일어 나서 도리어 미혹하게 된다〉비고 경계하여 공자가〈생각이 두 번에 이르는 것이적합하다〉고 가르친 본의를 충실이 따르고자 하는 고운의 정신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49) r下元웹웹J , 앞의 책 , p.370. <끊成至펴· 本在뼈行).
50) r上太않~Il紙王칩까죠J , 위 의 책 , p.402. (짧뼈三恩而行且ali;一맑之때 lEt~lfiI久合횡;양따D.51) Ii'펄짧.il, 公없표, 三,띤而後行, 註, (三찌私,한超ffii反짧총).고운은 학문하는 데 있어서 학문의 본령인 인생문제나 도에 관한 깊은 통찰과 이에 대한 노력이 없는 문장가들을 풍월과 총5®만을 소재로 醉樂만을 일삼는 무리 라고 다음과 같이 공박한다.
다만 述居士(辛太白)와 같이 오직 방종한 글만을 자랑하고,白石山人과 같이 단지 황당한 글짓기에만 힘써서,오직 풍월과 琴齡만을 가지고 멋진 취미로 삼을 뿐,군신과 예 악으로써 큰 규모로 삼지 아니하여,마침내 천만년의 긴 세월로 하여금 흘러내려가게끔 할 것 같으면 모두 大雅 小雅(IE樂의 노래〉의 윤락한 폐단을 슬퍼하게 될 것이다.
52) r割肉1~ i!J示丑~Hl J ,世~坞, p.397. (但凯背l1ß店'土唯持股腿之间白石山人只制荒店之作但以凤月琴~n盼烧不以;(J应随第n宏且这使千年高年所说何管睡大雅小lìffi之情弊) .
학문은 군신과 예악으로 대표되는 도를 행하는 것이 그 본분임을 강조한다.
이제 EH 十三故 보니,행실은 남들에게 뛰어나고,말은 세상의 바탕을 이루었다. 그들은 才子의 붓끝을 놀려 충신의 속마음을 묘사했다. 지금에 살면서 옛도를 행하여 이미 偏家의 종주가 되었다. 나라 조심하기를 내집과 같이 하니 실로 덕 있는 사람의 일이디、하늘도 귀가 있어서 반드시 화를 뉘우칠 것이요,구름은 무심하되 또한 무기를 녹여 없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말 한마디가 이제부터 위태로운 나라를 일으킬 것 이 요,广務的 • 比 • 風 .池 • 頭)가 이에 있어서 正道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53) 钊主1 ~斗, p.398. (今视四十三扭行出人茨宫成世茸弄才子之2匠的到忠臣之岱抱在今行古既1ßr.1d望之宗在国如家回是德f"J之事天有耳而必齿悔t'l vl抵心而亦月刽兵一宫自此贝危邦六在於旗蹄正迫) .
付}道가 실현될 때 하늘도 감동하고,상극 • 대립을 녹일 수 있으며,도 있는 말 한마디가 난세를 광구할 뿐 아니라,문화가 正道로 귀착될 것이라는 뜻이다.
고운은 또〈유교의 좋은 가르침 을 거 양하여,기 린이 音현한 때를 잃지 않고 상고의 風敎를 일으켜서 길이 大同의 교화를 이문다〉비고 聖者의 출현과 가르침을 거양하고,〈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올54) r求化侈大理寺V!u . 平l .!!.l :llJ, p.377. ( .!ìl!lß班之ø苑隔不失峙克贝上古之凤永敖大同之化).
행하는 것을 도라 하고,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을 제어하는 것을 權이라 한다〉비고 도 실현의 묘용을 제시한다.〈때를 잃지 않게 한다〉는 것이나〈떳떳함을 행한다〉는 것은 中之道이다. 또 고운은 도 구현의 원리를 中科之한로 밝힌다. 〈中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和는 천하의 공통된 도리이니, 中과 和를 이룬다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잡고,만물이 제대로 발육된다〉6) 이러한 이상은 천지만물이 木꼼-一盤라고 볼 때 천지의 덕은 곧 성인에게서 실현되는 것이요,성 인은 천지의 中和의 法을 본받아 실현하는 것 이 성 인된 소이로서 學問之極功은 聖人之能市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拜임금이有出를 칠 적에 덕을 라으시자 마침 내 복종하였고, 渴이 토벌을 接로부터 시작하여 은해륜 베푸시자 모두 앞을 다투어 오면서 우리가 살아났다〉. 즉 舞帝의 松政은 민심을 회향케 하고 적을 승복케할 수 있었던 것이다.
55) r除资身WJJ,钊~梢. P.338. <守正侈常曰逍盹危制im日捆).
56) r贺敬年出捷j ,钊~ ~吁, p.289. <中也,者天下之大本和也者天下之遥远敖中和地位需).57) r前温室住江i住我j ,钊阜{坞. p.298. <舜伐有苗t实施而格指卒服ig 征自葛行思I币2在里来~~).도와 덕은 표리관계를 갖는다. 도가 행해지면 덕으로 귀결된다. 고운은〈도는 오직 잡넘 을 씻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한다>5S)고 말한다.〈도를 지키어 허물이 없게 하는 것〉비은 군자의 본분이다.
58) r上应主向ø别抵j. 平I~ 梢. p.393. (边惟游I扭扭以润身).
59) 钊玛利, P.387. <守道而得知恒矣).4 孤堅의 유교적 平等觀
〈天所光者人〉은 중용의〈天命之13性〉이라고 하는 전제에서 보듯이 보편자와 목수자는 불가볼리 의 관계에서 추구되는 것이다. 즉 보편개념 위에서 개체의 목수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편성과 목수성을 상대적으로 추구한다면 平等性은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 다. 근원 (원리)적 평등성올 토대로 하지 않고 현상적 평등만을 주장한다면 沙上樓間에 지나지 않는다.평등관에 있어서 주요한 관건은 천부적 본질 실현이라는 의무이다. 즉 인간은 하늘에 대한 사람 곧 생명을 하늘올 대신해서 실천하는 주체자이 다. 그러므로 천의 보편원리 가 인간을 떠 나서는 실현될 수가 없다는 것이디-. 천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 (天)원리 실현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천이 못하는 것을 대신해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가 사람에게 서 멀지 아니하고,사람은 이 방이 없다. 그러므로 불교를 할 수도 있고,유교를 할 수도 있다.60) r따쩔햄師大갖쩔와짧J.
도를 超在的인 입장에서보다는 내재적인 입장에서 본 것이다. 이러한 도의 내재성 을 인정한다면 도의 실천자인 인간의 구분은 무의미하디-. 다만 차이가 있다면 도를 신천하려는 의지와 노력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도를 실현하려는 의지와 결단이 요구되는 것이다. 고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이 비록 이 몸의 주인이 기는 하나 몸으로 마음의 스승이 되게 할 것이니,너희들이 도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요, 도가 어찌 너희를 멀리하겠느냐. 가령 농부라도 세상의 얽매임올 헤쳐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도사나 교부가 어찌 종자가 있겠는가.61) r때합.켠I尙맑앓J. <心했광초 身맺('F心mi J.!J.不쩍J면 꾀i~H훌而앉Hd캉sa (J1!빼!lig~ ~~nIJ心뼈것 mlW훌k父흉춰걷E 守).
본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도를 하고자 하는 의지와 결단의 문제이다,고운은 말한다.
저 사람의 마시는 것이 나의 갈증을 풀어 줄 수 없고,저 사람의 먹는 것이 나의 주림을 구원하지는 못하는 것이니, 어찌 노력해서 스스로 마시고, 스스로 먹지 않겠는가.62) 앞의 책. <又日겠所댔不혐헬휩 값·所없不앓1t~ 훨%力自11k自~).
천부적 본질은 누구나 동일하다. 그렇 다고 해서 주체성올 도외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선천적 원리의 보편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주체적 자기본질의 회복이 요청된다.
고운은〈衆己하여 南面하고,주장하여 지키는 南宗으로 나가면, 향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65)라 하여 화과 내가 무엇이 다른가고 묻는다. 다르다면 화은 화이 된 자요,나는 내가 된자인 것의 차이라는 주장이다.63) 위의 책 , P.I08. (않E폐파 펴때i젠宗짤{可A홉 짜何A也).
인생이 태어난 대로는 본질 그대로다. 후천적 상황에 의해서 변화된 마음을 바로 회복하는 것은 자기당위의 문제다. 고운에 의하면 공자가 말한〈人之生世直〉을〈直心〉으로 표현하고,〈굽은 것을 버리고 邪'됨이 없기를 생각해야 한다> 고 강조한다. 굽은 것과 께된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生世直〉곧 천부적으로는 누구나 〈商:〉한 그대로다.〈直〉한 대로 회복하게 하는 것이 교화다. 고운은 그 방법을 上古之風을 들어 제시한다.
64) r홉앉和f해f:lJ.J , 위 의 껴 , p.2H. (借웰표 ,면~뼈.••.•.乃파心之m也).
유교의 좋은 가르침을 거 양하여,때를 잃지 말고,상고의 풍을 일으켜서 영원히 대동의 교화를 이룬다. 이
6}) r求化한大월렇행 J , 부l 의 책 , P.377. (훨댐효之휩값 짧不失時克때上古之Ira.永효大l파之化).
상고의 풍은 葬野:의 聖世의 교화를 뜻한다. 유교의 원류를 상고의 풍으로 보고 유교의 가르침 에 失機치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자기 내면의 동질성을 발휘하게 함으로써 원리적 평등에서 사실적 평등을 성취케 하여 영원한 대동을 이룩케 하라는 것이다.
고운은 평 등의 교화를 주장한다. 그에 의 하면〈2JM에 치 우침 이없고(公平),파당이 없어야(中IFJ 임금의 교화가 일어난다〉씨고 하였다. 치우침이 없고 파당이 없는 공평 • 中正한 입장에서 편견 없이 처 사할 때 평 가가 정 당하고,진정한 교화가 홍기 한다는 것이다.66) 위의 책, rr桂짧짧짧』양 3 , P.302. r쐐짧示없令웠相充都흉狀J. (f*以 짜王化乃때).
교회는 성의 여하에 따라서 결과와 평가가 좌우된다는 것이다. 고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投향에 말하기를 사소한 일이라도 삼가지 않는다면 마침내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된다 하였다. 이는 서로 교화를 철저히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니,어찌 한계를 넘어서려 하겠는가. 높은 산은 작은 먼지 라도 다 받아들이 고,개천도 능히 바다에 이르는 것이다.67) r휩安住않짧記J. 위의 씌. P.83. <싼日不암뼈行終핑大젠 kil(j~~!d~ m欲짧때 li없不解않 JIl t,尼注海).
궁극적 포용성과 무한한 잠재적 가능성을 산과 물에 비유하고 있다. 산과 바다는 무수한 대소의 존재들을 포용한디-. 무수한 존재들은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大同平等의 관계로 존재한디、뿐만 아니라 각 개체적 존재가 자기 고유한 기능(본진)을 有照 없이 발휘하도록 보장되 것이다.〈개천의 작은 골도 능히 바다에 이를 수 있다〉고한 말은 기능발휘의 보장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화의 역 할은 각 개체존재들로 하여금 본질에 희향케 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보편과 특수는 동시에 질서를 갖게되는 것이디-. 이것이 큰 산의 포용력이요,게천의 물이 깊은 바다에 이르게 되는 능력이 다. 각기 존재의 질서 속에서 평등과 조화I 이루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한계를 넘어서는 월권은 부정된다. 각존재의 생존과 관동에서 본진적으로 어띠한 모순과 대립도 개재되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중용을 잃지 않는 것이다. 고운은〈光執版中하여 천록을 길이 마치라〉삐고 권고한다. 光執販中은 개인적으로는 자기 존재의 보존원리요,사회적으로는 평등원리 디-. 그러므로 중용을 잃지 않을 때 자신을 보존하고 사회를 안보할 수 있는 大經大法의 실현이 되는 것이다.68) r짧짧좋댐짧」, 위의 책. p.154. <:fe tA앉中天따永왔).
그리고 允執歐中은 位의 {했授心法으로서 神位의 준커플이다. 69) 이것은 양보의 지극한 표현이요, 평등의 극치정올 냐타낸 것이다. 질
69) • [ 序〈 自上古 ga天立 而꾀fr Y f4 自來것:>.
질적인 평등의 관계는 이와 같은 승화된 바탕에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평등의 관계에서는 상대가 대립관계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조 또는 조화의 관계로 발전하는 것이다.
고운이〈여 래와 주공,공자가 출발은 비록 다르지만 그 귀일하는 바는 동일하다〉70)고 하였다. 현실적 인 차이 에도 불구하고 궁극에 이 르러 서는 회 통할 수밖에 없 다는 것이다.70) r贝缸屑1闺碑锦j. 址且』判. p.124. (归来之贝U~甜蜜致wt殊所蹄-j置).
이른바 大道(中道)가 행해지는 사회,평등이 구현되는 사회인 大: 同社舍는 인간의 완성으로 이뤄지는 平天下의 경지이며〈止於至萬〉의 경지이다. 이 경지는 대도의 실현으로만이 이뭐지는 사회이다. 고운은〈도는 사람에게 있다〉고 하는 도의 내재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내재적 자기 동질성인 도를 바탕으로〈사람에게는 국경이 없다〉70는 평등원리를 주장하였다. 無國境한 도에 바탕한 자기 내제성의 실현은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고 하는 결단과 자신의 의지에 귀결된다. 이것이 궁극적인 평등원리이다.
71) 剖~ ;\!j, P.123.
5 孤强의 備敎的 기본정신으로서의 仁思想
고운은 본래 吹路偏學에 관심을 두었다. 그가 12세 어린 나이로 당에 유학한 것은 출세의 큰 포부도 있었겠지 만 기본정 신은 孔門의 부끄럼없는 제자가 되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경서를 탐독하고 詩賦를 익힌 것도 聖學이요, 仁風에 홈앙하여 눈이 빠질 듯할 정도로 정진한 것도 성학이다. 究拜처 럼 되기를 소원하였 지 글줄이 나界-하는 腐備가 되는 것이 그의 본심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空(孔子)의 普을 택하는 뜻을 지키었다〉미고 하면서,그가 실천적인 학문 곧 실천유학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뜻을 명백히 한다. 〈臣은 學을 일으키는 것을 으뜸으로 삼고,어린이를 구하는 것을 임무로 여긴다〉7가고 하였다. 이것은 자기가 학문하는 본의와 자기 학문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72) r珩扭玉凤店江西芮大夫泪;忧j. 钊~坷, p.64. (守立尼挥替之旨).
73) rm宿衍职生首领等λ驯服j. 钊~抖, P. ~9. (臣放以贝早妈先二~ft是!15).고운은 사변적인 것보다는 與路道에 더 관심을 지녔고,궁극저으로는 공자의 근본사상인〈仁;〉에 친저하려 고 노력 하였다.
그는 인을 하는 데는 양보하지 않는다74)고 하여,공자가〈仁에 당해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한 말을 인거한다. 인을 하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므로 겸손할 바가 없는 것이다.만약 선을 하는 것이 밖으로 명성을 얻는 데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인이 아니디、인은 내재적 자기 본질의 발현인 것이지, 외적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양보할 수도 없고 겸손해 할 바도 아니다. 이러한 사상은 道思想에서 추구된 바와 같이 天 • 道와도 깊은 관련을 갖는다. 天 • 道를 중시하는 것은 그 궁극적 본질근거를 찾는 것이다. 중용에 이른바〈天命之制性〉이 그것이다. 천명을 품부했다는 것은 내재적 본질을 규정한 것이디、〈仁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라고 한 뜻이 곧 천명을 보편원리 (性)로 규정한 것과 동일한 의 미 라고 보아진다. 志子가〈仁이란 人이니,합하여 말하면 도라〉76>하고,중용에〈소위 솔성하는 것이 도라〉77)고 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하겠다.74) r善安住院坚扭J. ♀I~ 抖. P.8 1. <允鸥馆仁不前>.
75) [j'盐捂J] . 街旦公. <岔仨不m於即>.76) Ii'孟子.!l . ~心罕句下.77) Ii'中W.!l.인간 본성 을 도외시하고 인을 말할 수는 없다. 디구나 인은 보편원리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인을 구현하는 방법은 개인의 영역을 벗 어 나지 못한다 하더 라도 (그心은 목수성 을 지 양한디-. 고운이〈仁1心은 곧 佛이니 佛을 가리켜 能仁이라 지칭함은 당연하다〉78) 한 주장이 곧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공자에 의거한다. 智說和尙碑約에서〈隊聖(孔子)은 仁에 의지하고 社i에 근거하였다〉7고 하였다. 이러한 의미는 易에〈천지의 큰 덕을 생이라 하고,성인의 큰 보배-1- 位라 한다. 어떻게 하면 位를 지킬 것인가. 亡:으로써 한다〉80)고 한 사상과 통한다. 인은 생명에 대한 사랑이며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공자는 인에 대해서 묻는 典迎에게〈사람을
78) r智盟和向碑~tJ. 导~~ ~. p.168. (仨心即份份自能仨则也),
79) 导~~坷. P.196, <陌娶依仁乃~r.J>,80) Ii'周易J].黯踩下仰-l';t, <天地之大f:l曰生理人之大贺曰位何以守位曰仨).사랑하는 것)이라 하였다. 愛人은 인의 베품을 의미한다.
81) (j'쉽짧Jl. 뻐해.
사람은 이같은 생명에 대한 사랑을 하늘을 대신해서 실천하는 주체 자이 므로 어 떠한 진리가 존재한다고 하더 라도,인간을 떠나서는 또는 인간을 도외시하고는 그 가치가 없다는 것이 仁思想의 또 다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82>
82) Ii'빼후댐|핑土킥~Ef1짧文겨~.n. r짜方,딴젠.짧~J. PP.306~307.
得仁1한다거 나 인을 실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공자가 시퍼렇게 선 칼날은 오히려 밟을 수 있어도 仁하기는 어렵다고 했던 것 이 다. 고운은 또
빈 것으로 갔다가 채워서 돌아오고,어려움을 먼저 한 뒤에 소득이 있었으니, 마치 옥을 캐는 자가 比痛山의 높은 것을 꺼 리지 않고,양를 더듬는 자는 용이 잠든 물 속의 깊은 것을 피하지 아니함과 같다. 83)83) r여설함I뼈大호쩔햄짧J.
고 하였다.〈先難後雜〉은〈먼저 고난을 겪은 뒤에 얻어지는 것을 인이라 한다고 한 논어의 말을 인거한 것인데,程子는〈어 려운 것을 먼저 하는 것은 자신을 이기는 것이니,어려운 것을 먼저 하고 얻는 것을 계산하지 아니하는 것을 仁하다고 한다〉s5) 하였다. 계교로써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극기로써 회복되는 것이 인이 다.B6) 仁하는 데는 누가 알아주고 물라주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거치의 좋고 나쁨에 있는 것도 아니 디-. 고운은〈‘주역에서 말한,세상을 피해 살아도 근심이 없다’는 것과 ‘중용에서 말한,세상에서 알아주지 않더라도 뉘우침이 없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하였다. 인은 人心에 얽매이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人心은 사욕이며 이욕이다. 맹자가〈어찌 반드시 利입니까. 仁務가 있을 따름입니다〉
84) (j'짧짧.n. 짧tι.
8~) 앞의 섹, 홈.86) Ii'싫짧.n. m~t87) r협1짧처l尙짧뽑짧J , 앞의 껴. p.lH. <뀔大£之5Cr엽 며1짜之不悔킹~JIll>.한 것이나,朱子가 人狀之私를 경계한 뜻은 이욕에서 벗어나 인간 본심인 인을 회복할 것을 말한 것이다.
고운도〈紫府는 마음을 닦아야 이 를 것이요,玄關은 힘을 가지고 열 수 없는 것이다〉〈몇化가 오히려 어렵지 않으나 마음 가지기 진실로 어렵다. 그 참과 거짓을 분별하려거든 원컨대 마음 거울 닦고 보소하였다.〈修心〉〈操心〉을 들어 이욕에서 벗어나 본심으로 회복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는〈故而不〉하라고 말한다. 체 공자는 子張이〈故而不任〉의 뜻을 물었을 때〈인을 하고자 하여 인올 얻었는데 또 어찌 탐할 까닭이 있겠느냐〉 하였다. 탐이나 이욕은 인과는 거리가 멀다. 仁心은 보편원리요,사욕이 아니다. 고운은 인간의 본래심을〈直心〉 으로도 표현한다. 인간이 난대로는 곧은 것이 이치이다.비 때문에 삶의 이치도〈生理本直〉의원리를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공자의 一貫之道에서도 이러한 시사를 받는디-. 일관된 행은 본질에〈則>한 행으로서 인에 의한 행이다.맹자에 이르러서 는〈直〉사상이 務理精神으로 발전한다. 사〈直〉으로 표현된 인의 정신이 계승된 의리정신은 맹자에 있어서 정치 이상으로서의 仁政의 전개를 보거니와 고운에 있어서도 인은 一國興仁의 좌표륜 제시한다.88) [j'홉?f!trf훨tJJ 쌀 15, r上元파·첼땅셈J , 우l 의 껴 , p.367. <짧府乃하心可폐 玄돼非ffl力~Pf}).
89) 위의 껴 , P.24. <햇化尙非짧 않心파獨왔 欲양~PIf1i{ W) mil홉心~~).90) r짧삶갖 J , 위의 꾀 , P.35.91) Ii'짧핍 JJ , 짧 8.92) 앞의 씌 , r 흩隊깎1f허쩨 J. p , 243.93) [j'짧짧Jj, 짧也, 94) Ii'효子JJ , 公홉표-r,r句上, i울然之짖~1쌀.……아름다운 음식을 얻어 맛이 々經에 배불렀다. 다투어 千門으로 하여 금 普으로 들어 오게 하고, 능히 一國으로 하여 금 仁에 興起케 하였다.
95) r따쩔,펴師大호협확짧J , < 짧깎則味앉之웹 양않十門入원 뼈令一31J(l C).
普과 仁으로 나라를 흥기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仁政 곧 德
治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지經이 정치의 골간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大學에〈한 집 이 仁하면 온 나라가 仁한 기 품이 일고, 한 집 이 겸 양하면 온 나라가 겸 양하는 기 풍이 일어 난다>고 하여 仁風의 파급효과를 의미하고 있는데,이는 위정자가 가져야 할 정신과 책무의 중함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운은 인의 파급 영향을 다음과 같이 중시한다.96> [j'大职.!l .九骂!.
媒水(東方)의 備生과 版林(店)의 學植에서 보여주어 다투어 觀光(영광은 얻도록 한다는 의미)의 뜻을 격 려 하며,모두 風化에 따르는 마음울 한층 더하게 될 것이니,이는 바로 速尙 가 九流를 환히 알고,四敎륜 稱하게 닦아 잘 인도하는 바람은 闕里(孔子의 고향)에 행하고,깊은 仁은 互鄕(주위 여 러 고을)에 파급되 었으매 온나라가 은헤륜 기리는 것을 알고자 하여,오직 나라를 경륜하고 聖君을 보좌하기를 원하오니, 행여 안개 속에 숨을 것을 생각지말고 빨리 장마비 가 되 라.97)
97) r贝应部蓝向岱J.a战J. 世~判I pp.67"'68. <不使部水由流梅林早植蹄阳目光之志皆t窗箱5化之心斯乃向窑洞细九流和修四敬部嚣凰行於阴里课仁波及是五筋铁知驳回阻思惟颐缸邦位窜去吉思隐密早注1骂霖邦).
四敎(詩 • 3 • m 樂)는 闕里(孔子)의 교육이요,인을 하게 하는 방법 이다. 聖君 곧 仁君을 보좌하는 것은 그대로 仁政을 베푸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유교가 정치사회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 행정에 있는 것이고 보면,고운이「榜郞碑序」에서〈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의 원리가 風流道에 감추어저 있다고 한 뜻이 곧 인에 근거한것임을 알 수 있디、고운은 정치와 濟衆에 인이 근본이 된다고 했을 뿐 아니라,更範(供:商)을 본받는 것이 仁政의 바른 길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치는 인으로써 근본을 삼고,예법은효도로써 으뜸을 삼는다.그 인으로는 대 중을 건져주는 정성 읍 다하고,효도로는 어버이를 높이는 법도를 계우는 것이다. 그 치우침이 없는 것을氏가 남긴 典範,곧〈供 〉을 말함)에 서 본받고,효자가 길이 끊어 지지 않는 것을 周詩(周詩에서〈孝子가 다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뚯을 따름) 에서 따라야 한다. 98)
98) r大梅雨寺醉部J. 剖玛利. p.14 1. <政以仁岱水启以学r.s先仁以维饲泉之脱孝以~f):Vl之典Z是不但然仰於亘缸远不应於1月恃).
정치의 근본을 인에 두어야 한다고 한 것은 공자가 三代政治의 이념을 계승코자 한 뜻과 같은 것이다. 디구나〈世人에게 ‘몸가짐의 按齊’를 어떻게 할지 권면하되,仁과 逆를 갑웃과 투구같이 여겨 야 한다〉99)고 하여 교화와 정치는 다같이 인이 주체가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덕과 인으로써 다스리면 백성의 추대함을 받을 뿐 아니라,100)〈仁한 말은 사람들을 편안케 한다하여 인은 人之安宅102)이 라고 하는 歸仁의 정 신올 표현하고 있다.〈安仁한즉東戶(東人)라 해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거나〈智水仁山〉 》은 인을 추구하는 자들의 정신세계를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99) r郎惑和(~J l吝碑路J. <助俗简身何甲仁缸白翠).
100) r 滋~òj寺碎纯J. 世主l 勾. PP. 150"" 15 1. <且是且仁n民所Hl!).101) ♀~ ~ 习. p.150.<在2则仨者·安人).102) ú'孟子.r .公E泉壶12 句上, <夫人灭之辈辈碍也人之安宅也>.103) rrn位去J,世~判. p.36.104) r民金部即中别辑J. 导1 ~ 坷, P.395.고운은〈仁은 미미한 데까지 미치는 것〉105)이라고 하여,인의 본질은 무한성을 지닌 것이라고 강조하고,인의 정신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 고 그는 인의 정신은 금수에까지 미 친다고 다음과 같이 박애 정 신으로 표현한다.
10') r剧~倪再陈锦州以J . G'毡'苑驾UJM 巷6,剖玛利, p.315. (仁及方三i\l).
先只: ~ 戚若(卫干主}l营管)吐习只1 号对l 唱许五, 民泪;~勃然吐吐社含甚哇王L叶,庭下判吾斗号号~ 71 叶含毛到1 叶丑,判斗3于合斗含~l~(部言l 古i叶…… m 乙(咛λ1-) 01 叶含含才干~主叶习。干哇斗王号兽哇牛~丑,应丁。1 毛告才干骂l~叶唱唱叶七士是什纠正仕斗去l 是外. ~ 717~ 六啬含社号斗卫,毛刮7~ 吐吐刊对l 口l梨叶_. 10G)
106) r刀抵用□ 不뀨逆歌法表_J, S’任究按耕<0 卷 1, 위의 책, p.293.
인은 보편원리다. 인의 감화는 畜까지도 감동케 한다. 그러므로〈君子는 液賊를 대함에도 살아 있는 것은 보고 죽는 꼴은 차마 보지 못하며,그 죽는 소리를 듣고는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푸줏간을 멀 리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107)이같은 처사는 仁心이 금수에게까지 확충된 것올 의미한다. 인의 궁극적 본질에는 상대성을 넘어서〈廣爲仁之術〉108>이 깔려 있는 것이다.
107) (j'孟子.!l,梁思王*句上, <君子之於禽欧也且其生不忍旦其死阳其骂不忍众其固是以君子迫厨店也).
108) 牟l 玛利, 睦-고운은 영원히 의지할 곳은 인이라고 말한다. 〈ㅠ 論에 이르기를 매워서 넉넉하면 벼슬하고,벼슬해서 넉넉하면 배워야 한다 하였으므로 東向의 집을 바라보아 길이 인에 의지할 것을 맹세한다>.109)인에 돌아가는 것이 究境 목적이요,맹세코 의지할 곳이라는 뜻이다. 그는 늘〈 依仁〉110)을 염원하였다.
109) r剧借宅股J, [j'桂苑括tI~.!l卷17 ,钊玛利, P.383.
口的「剧股股~J, [j'桂苑缸t1~.!l卷18 ,导1~ 科, P.386.6 孤雲이 본 仁의 실천규범으로서의 忠孝禮
고운이 추구한 긍정적 현실은 질서 가 있고 인륜을 높이는 도덕사회 였다. 그가 갈구한 삶의 자세는 현실적 인간의 삶이 었고,그 현실은 유교적 현실이요,그 인간은 끝까지 備家的 인간이 었다. 그것은 인륜의 실현에 의한 것이요,法則(紀)을 정립하는 데 있는 것으로서,그 범형을 先代에 두고, 그 정신올 현실에 실현하는 것이었다.그러므로 고운에 있어서는〈반드시 • 拜을 멍에하고,的 • 溫을채찍질하는 자세〉111)틀 떠나지 아니하였다. 특히 葬解의 이상을 체현하고자 하였고,112)법칙은 我範(故나라의 규범)을 중히 여겼다.111) r到温和商盟主经J, u'桂苑司:;: tJ~.!l笔墨1. 钊玛利, P.290. <必可应先舜而殷禹泪).
112) r副加太尉我J. (j'桂苑司tU.!l 卷2, <迫越~日之光~~应注方托舜凤之力)01 ~非虱.JI., r剑波戳黄应徒伴去J (剖~抖,您1) 叫11 ..ci 是〈出~位而陆人方阳二日幸坤雄而兜己更阳弄凤〉号阻茹舜之理飞哇~金日久月深吐习吐。I .::z..~文m 吐吐叫l哇叶剑咛.유교의 사상을 실질적으로 실현하는 주체가 사람이다. 인간의 문제를 중시 하는 것은 실천유학의 본질을 시사하는 것이요, 실천유학은 孝에서부터 시작된다.115) 도는 가장 비근한 데서부터 비롯하고, 그 비롯은 부자관계에서부터 이뤄진다. 그 관계는 친함이 있되 법도가 자연스럽게 적용된다. 그는〈禮는 孝로써 먼저 한다〉〈求로써 숫化를 높이는 고y救.륜 거행한다〉11사고 하여 효를 하되 법도여2) 가 중함을 강조한디-.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J J3) (j'짧語.D, 망而, 有子日條.
J14) r大샘짧좋I챙쩔J , 앞의 꾀, p.141.조상의 덕읍 이어받아 닦음에 있어 성 숙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없애고,조상의 제사를 잘 받듦에 있어,頭器(개구리밥과 흰 쑥)과 같은 잡스런 물이라도 정결히 올림으로써,두터운 은혜가 백성에게 고루 젖게 하며, 덕의 향기가 끝없는 하늘에 높이 사무치도록 한다.115)
115· 위의 씌, P.141. <횡딴갚Ut찍之試克힘짧初훨之i1!£ ~Mli!표썽때於I떻캉 없~i'o"Sll!~Z흥몽>.
JJ6) 위의 책, p.159. <휩없샤志판述파빠 永셀mm 효~jfije).
이것은 효의 극치를 표현한 것인데,유교적 효의 정신이 다만 조상을 모시는 도리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엿볼 수 있다. 즉 조상 받드는 정 신을 己操身의 律로 삼고,제사의 공덕은 은혜로 확충되게 하여 인류에게까지 미치도록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제사의 정신이 절대 (하늘)에까지 上向하는 종교적 차원까지 발전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 고 고운은 #繼#述하는 계승정신을 중히 생각한다.〈先王의 뜻을 잘 계승하고 그 일을 이어 받아 잘 따르며,길이 후손에 좋은 일을 물려 주는 것이 나에게 있을 뿐이다〉n6》라고 하면서〈근심이 없는 이는 그 오직 文玉이신저 ! 아버지는 창안하시고 아들은 계승한다〉7〉고 普繼普述의 모범을 제시한다. 이것은 효가 덕의 근본으로서 百行이 나오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선조의 덕 을 칭송하고 후세에까지 밝게 나타내는 것이 효자효손
JJ7) 위의 객, p.16 1. <섬쪼킹~.;U;야文王父作之子述컴·耶).
의 마음이다>11S)는 것이다. 機志의 정신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그 덕의 확충에 있다.
고운은〈孝로써 위주하여 한결같은 덕 을 닦고,紀으로써 교화하이 온 강토를 즐겁게 하였다〉119)〉고 하여,효가 사회적으로 발현될때는 덕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효는 父慈子로 출발하여 온 강토에 미치는 것이므로〈以孝以忠〉))은 타당한 논리라 할 수 있다. 고운은〈爲子爲忠〉의 책무를 강조한다.118) ♀1 ~ "月. p. 161. <捕捉·先涵之~~ ì而朋者之後世此孝子农·踪之心也).
11的rf~灭自珩同J. li' 屈;苑驾!~tmd 每15. p.366. <孝理而助您一德化成而奋慌~方).120) r突黯~部官肤J. ()'桂苑?在tJHU.!l 毡4 , p.30S.자식이 되고 신하가 된 몸으로서 충성과 효도를 다할 것인즉, 國路의 영광을 받았으면 家風에 모욕됨이 없어야 하겠으므로 손에 3Z符를 잡아 우선 나라의 難을 구원한 다음 마음이 物外에 놀기를 생각한다.121 )
121) r下元珩同J , li'桂苑llU1t组!.!l 卷lS , p.368. <但以虱子ß臣曰忠日孝既lft挺快回路回知3言於2页JM 手组玉符且救庭中之娃志应金盖在唯思st.外之迦).
효와 충을 다하는 것은 현실에 집 착해 서가 아니 요,충절을 다하고 가풍의 영광을 위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라는 것이 다. 때문에 그는 가풍을 보호하고 국난을 타개 할 제 무가 있 다는 것 이 디. 그러 므로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표현의 차이 일 뿐 광의 로 보면 하나의 정 신으로 일관되 는 것 이디.
고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酷記에 말하기륜 宗廟 • 社段을 지키는 자손으로 그 선조의 普行이 있음을 모르면 뜩똑하지 못한 자손이 요,알고도 전하지 못하면 어질지 못하다 하였고,孝經에 이르기를 立身投名하여 그부모문 드러 냄 이 효도의 끝이라. 122)122) r圆恩爱J . 哇~抖. p.44. < Z己曰子寄:之守宗剧社畏者其先应有普而弗知不昭也知而不终不仨也).
대체 효도란 부모를 섬기는 데에서 시작하여, 다음으로는 임금을
섬기고,끝으로는 제몸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孝經고에서의 주장이다. 효는 百行의 근본이다. 효가 바로 행해지지 않은 곳에서는 모든 일이 이 뭐질 수 없다는 것이 다. 맹자에 의하면〈天子가 不t하면 四海를 보존할 수 없고,제후가 不仁하면 社被을 보존할 수 없 디-. 경 대 부가 :不나II하면 종묘를 보존치 못하고, 士乂이 조t하면 四版를 보존치 못할 것이 다〉대〉고 하였다. 보존치 못하는 것이다 불효에 연유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모든 행위는 효에서 시작해서 효에 귀착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天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효도를 함에 있어서 끝과 시작이 없고 환란이 미치지 않을 자 없는 것이다고 경계한다. 『孝經고에 의하면〈孝는 하늘의 떳떳한 것이며,땅의 옳은 것이며,民의 行實〉이라고 한다. 내〉하늘의 떳떳함과,땅의 옳음과 民의 행위를 일관된 맥락으로 추구함으로써 효의 理想追求는 결국 현실성에서 결과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現吹利故에의 유혹을 물리치지 않으면 예를 다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고운에 의하면〈腺文公의 예를 다하여 복입음은 마침내 능히 몸을 극복함이다〉미》고 하여 효를 다하기 위해서는 이욕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였다. 勝文公이 맹자에게 예를 물었을 때 맹자는〈착하지 아니한가. 어버이의 喪은 진실로 스스로 다할 것이 니,증자가 말하기 를 살아 섬 기 기 문 예 로써 하며, 죽어 징•사 지내기를 예로써 하며,제사를 지내되 예로써 하면 효도라고 이-1- 것이다〉내〉하였다. 생전의 효도나 사후의 효의 법도는 모두가 예에서 시작하여 예에 귀착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유교의 윤너의식은 예에 천저하고,예의 한 표현형식인 祭祀는 필연적으로 子孫繼承의 현실성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고운은〈온 나라 사람마다 원하기 를 자식을 꼭 잘 두어 야 한다고 하는
123) rr~짧J), DR 宗!!J]짧깐, <카JMf11k 헤f잃 中h~lJJ감 終於之,!:f)•
124) rr굶子.'J, 쉴깐i';1:句上, <天子不t 不保四짧 젊않不仁不~(dJ찢 힘大ji不仁不保았I쩨 士m~人不t不保四쩔).125) [j'팡짧』述앓(, 1뻗人rπ(잇次가SE웰원1 , 잖웹i'ffj f}j印~!!때), <自天子mJj~I{!;A ~¥:1l~!ttt mi‘낀不及己컨· 米之1il!1.).126) 위의 껴, 三才깜.127) 앞의 껴 , r 쇄굉킥f l>\~짧 J , p. 1~9. (앓文公짧짧때·표 修않삐己).128) (j'굶子JJ , 앞文公上.이유는 바로 효도를 의미한 것이다〉129)고 주장한다.
129) 앞의 껴· r홉훨껴I f;해빼J. p.263.
이러한 정신은 조상숭배로까지 발전하여 神脈을 찾아 조상을 普多祭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고운은 량떻오쓴에서 〈SI(섧)란 아래로는 땅의 脈 脈》을 재고,위로는 하늘의 마음에 맞추어 반드시 四象을 九原(述地)에 포괄하여 千約代 동안 그 끼친 福을 보전하는 것이다>13°〉고 하였다. 여기에는 碑銘을 세워 선조의 덕을 후세에까지 드러내는 것을 자손된 도리로 여겼다.131) 이러한 효의 사상은 報本정 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m先崇拜의 종교적 차원에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인간 행위의 원리를 忠 孝•禮에서 찾았다. 효의 확충으로서 윤리의식을 천지에 配對시킴으로써 그 당위성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繼志繼述의 의식은 天子로부터 士I街人에 이르기까지 祖先崇拜의 정신으로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위정자의 德治사상으로 전개되었다
1)0) 위의 껴 • r빼협좋빼짧J. P.146. <훌앓if!.휩·뼈짧JtI!!훌 뼈훌乾心~在슐四횡千九IJj(千짧ft~其&rt흩}.
1)1) 위의 껴· P. 161.「孤雲의 觀敎觀」 토론 개요
문제제기 : 이현택 교수의「孤民의 偏敎觀」에 관한 발표에 대해 먼저 김낙필 교수의 질문이 있었디-. 김교수는 고운에 있어서 道에 대한 입 장은 유 • 불 • 선 삼교사상을 융통자재하게 수용함으로세 유교적으로만 표현되었다고는 보기 어려운데 어떻게 도를 유교적으로 일관성 있게 표현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토론내용 : 이 교수는 김 교수의 질문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문제해결에 노력했다.고운은 유 • 블 • 선 중 어느 한 사상에 얽 매 이 거 나 어느 한 사상을 고집 한 사람은 아니다. 그의 사상 전개는 유 • 불 • 선 삼교를 회통적 지평 위에서 자유로이 응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修學의 기초에서부터 추구해 보면 孔門에 근거를 두고 있 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가 추구한 학문의 목적은 사회적 출세에 국집된 것이 아니라 도의 실현,그것도 仲用•를 따르려는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 디-. 그러 므로 그가 道 • 佛의 사상올 자유자재로 인거하고 있다고 해서 도 실현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도의 궁극적 본질에 있어서는 서로 융통되는 것이기 때문에 유교적 도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逆,佛의 주장을 응용한다고 해서 도의 본질을 왜곡할 것도 없고,유교사상을 해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문제제기 :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한종만 교수는 그렇다면 꼭 仲用의도라고 표현하는 데는 무리가 있올 수 있지 않는가? 도의 개념을 추구할 때 유교사상만으로 해명되지 않는 것을 유교관 쪽으로만 구명한다면 명확한 개념 분석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토론내용 :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이교수는 다음과 같이 해명 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난랑비서」에서 삼교사상의 입각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유교는 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의 윤리적 실천주의,도교는 處無爲之市行不普之敎의 無爲®然主務,불교는 諸惡英作 衆:普奉行의 勸萬道化주의라고 분명히 밝혔다. 믈론 궁극적 목적이 야 차이가 없겠지만 실천적 방법에 있어서는 명확하게 해명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고운은 이러한 대전제 아래서 H敎를 자유로 넘 나들었 다고 할 수 있다. 그렇 다고 그가 이나, • 향가 궁극적 으로 서로 다를 게 없 다는 주장은 아니다.그리고 여기서 三敎思想을 자유로 융통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은 H敎冊立의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보아 별로 틀릴 것이 없으리라 본다고 주장하였다.문제제기 : 침홍천 교수는 고운의 문집을 보면 유 • 불 • 도 삼교의 이론을 해박하게 이해하고 다양하게 응용하였을 뿐, 유교의 어떤 사상에 관해 구체적인 理論推究가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발표자는 고운의 備敎M을 체계를 세워 논리적으로 논술하고 있는데,그것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토론내용 : 발표자는 가능하다는 전제 아래서 답변하였다. 김 교수가 이의를 제기한 것과 같이 고운은 어떤 사상을 구체적으로 체계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상연구라는 것은 단편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사유의 내용과 방법을 체계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전제했다. 목히 고운은 F계원필경』20권과「四山碑銘」등에서 단편적이 나마 유교적 표현을 다양하게 쓰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곧 고운사상 추구에 있어서 없지 못할 자료인 것이다. 즉 사상의 연구에 없지 못할 그 현존 자료를 분석 추구하는 것이 곧 고운사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운은 자료상에서 보면 구체적으로 체계화하는 작업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 은 충분히 분석 할 수 있다. 그러 한 분석이 가능하다면 체계화하는 것은 후학들의 노력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사상추구는 체계화된 논문이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어띤 단서가 잡히면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 가를 연구하는 것이 연구자의 사명 이라고 본다.문제제기 또 다른 질문자는 발표자가 고운의 仁사상을 논하면서 仁과 道 동일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왔다. 예를 들면〈仁이 란것은 사람이니,합하여 말하면 道라〉한 것과〈得仁〉또는〈先難後雜〉이라 하는 논리 가 仁을 이 해하는 데 명 확성 보다는 혼란을 가져올 소지는 없는가라고 물었다.토론내용 : 답변에 나선 이 교수는 도를 이해하지 않고는 인을 이해하기 란 곤란하다고 말하면서 고운의 사상이 공자의 사상과 맥을 같이한다고 보는 한 天 • 道를 떠나서 인만을 추구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 예로 天命之記性 • 率性之道를 들 수 있다고 말하였다. 즉 도와 인이 개념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추구되지 않으면 안될 소이이다. 伊川이〈仁은 사람을 말한다. 이것을 합해서 말하면 道라 한다〉한 것과 같은 것이 다. 그러므로 인은 도의 실천없이 得仁될 수가 없는 것이다. 吏己役禮가 이것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先雜後雜도 東己復禮나 得仁과 같이 인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天• 道의 바른 근거를 갖지 못하고는 인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요,내재적 곧 보편원리인 性을 생각지 않고 인을 추구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도와인은 본질상 전혀 무관한 입 장에서 추구될 성질의 것이 아니 다. 목히 伊川이 인을 否仁 • 桃仁으로 표현했던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답변하였 다.문제제기 : 김영두 교수는 윤리의식에서 補}敎에서의 孝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시조는 하늘에 짝하여 제사지내고,先王을 상제에 짝하여 받든 주공의 효성도 어찌 선영을 극락의 나라로 인도하여 모심과 같겠는가〉라고 한 말에서 볼 때 분명 히 佛敎의 父母]梅度가 유교의 효보다는 승하다고 했는데,그것을 備佛의 효의 극치 가 동일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이해를 달리해야 마땅하지 않는가 하고 질문했다.
토론내용 : 답변에 나선 이교수는 그것은 주장의 차이 에서 오는 이해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유교에서 효의 정 신은 하늘에 제사 지낸다고 하는 종교적 의미로까지 확대된다. 뿐만 아니라 #繼普述의 계승정신은 부모 선조의 정신과 경륜을 미래에 실현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효의 사상을 인류사회에 확충함으로써 그 신이 발현되어 나타날 때는 덕으로 화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父母 • 祖先에 대한 효가 이상적으로는 인류애로 발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의 永生父母에 대한 B度 구원의 정신과 整繼普述하여 理想國土 攻現이 성취된다고 하는 차원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늘에 짝하고,상제에 짝한다는 이념 자체가 시공을 초월한 개념 이요,극락의 나라라고 하는 자체 역시 시공을 넘어선 게 념이기 때문이라고 답변하였다.그리고 효는 인과 예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문제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토론자들은 입을 모았다. 왜냐하면 宗廟 • 社段을 지키는 것은 자손의 도리요,선조의 향한 정 신을 계 승하지 못하면 조"t한 것이 될 뿐만 아니라,그러한 정신계승은 예로써 이뤄지기 때문이다. 예는 天地의 節文이요,人,의 儀則이 디-. 모든 일에 예, 곧 법도에 마땅하지 않으면 참다운 도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仁內我外라고 한 것인데,효의 정신은 仁內에 務의 형식은 視에 있다. 맹자가 勝文公이 喪禮를 물었올 때〈착하다,喪祭를 예로써 하면 효라고 이를 것이다〉했던 것이다. 고운이 주장하는 윤리의식은 현실이념올 철저히 하고 있으면서도 불교적 이상을 크게 수용하고 있는 점이 없지 않다.문제제기 : 이제 마지 막으로 平等瓦:識에 대한 토론에 이르렀다. 질문자들은 평등의식과 도와의 이해의 혼돈의 소지는 없는가를 제기했다. 즉〈人無異國爲釋爲備〉라든가,〈道묘遠而……道師敎父 淨有前•平〉라는 개념은 도의 보편성으로도 이해할 수 있고 평등성으로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론내용 : 이러한 문제제기는 의당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도의 개념을 전제하지 않고 평등을 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냐하면 평등의 기 반이 되는 근거가 도 혹은 진리 이기때문이다.고운의 주장에 의 하면〈순은 어 떤 사람이 고,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든가,〈사람은 국경 이 없기 때문에 유교를 하거 나,불교를 하는 데 하등의 거리낄 것이 없다〉또는〈산과 바다의 비유〉에서 초월과 歸一로 말한 것은 타당성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본다.고운은 각 종교를 보는 입장이 無偏(公 ),無被(中正)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편견없이 정견할 때 정당한 평가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 라 종교의 교화가 바로 실현된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中m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모든 것은 그(자기)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토록 하는 데 있고, 그것은 平等調和에 있는 것이라고 말을 맺었다.孤雲의 佛敎觀
韓鐘萬1 孤雲의 佛敎的 입장孤雲( 57〜 )은 일반적으로 備學者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고운은 佛敎에 깊이 관여 한 불교적 사상가라는 견해도 있다.退潔(1501~1570) 는 고운을 평 하여 말하기를〈우리 나라의 從祀의법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이 있으니 저 최고운 같은 이들은 文命만 숭상하고 더욱 부처에게 몹시 아첨했다. 그의 문집 가운데 있는 f弗 따위의 작품을 볼 때마다 몹시 미워서 일찌기 통탄하여 끊어버리고 싶었는데 그를 히1況에 두어 제사를 받게 하니 어찌 聖을 욕되게 함이 심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1) !J~~찢겨Sι, 합行웰죠 싸正덴, <양t.1J?~;.e之~ ~~1未~:X. tmJli!잃徒f헤文J;'(ffii~씹까又흩t4표 JU파中!5~U.t~f'F *tt不深,땐而웬1짧之i!!.!A후文J;;J!.설fit;.先뿔之갚1J! 又E .u~~四앞 웰fj功힘 ~於從후짧f찌 Jlq 未可짧앓1f!.1l¥m덴生上~ r;1i~r,e 先~때之%不以f홉쏠).
金約通(1637~1682)은 말하기를〈按文屋은 丈室의 維摩로서 中華에 크게 울렸고)시라고 하여 고운이 불교인으로서는 維摩居士의 위치였으며 중국에서 크게 멍성을 얻었다고 하였다.
2) Ii'西때파짧』下, <뾰文텀 以갱;혈之쩌t }4: 大~Crpl홉).
速激(1620~1799)은「四山碑始序J에서〈하늘이 우리 선생을 내어 E敎를 통를어 관통하였으니 더할 수 없이 위대하도다. 전해 오는 말에 금방울은 武를 면치고 나무방울은 文을 떨친다 하였으니 선생
은 바로 三敎의 목탁이다〉3)라고 하였다.
3) Ii'llIt ~m致遺先生文~.lJ 한글엔역 , p.897. <天生흉先生흉n三~*홉 N以:bn홍B~취z.~앨振~ 木첼振文先生;tt三~之木햄與~.
金 孫(니64~1498)은 말하기 를〈내가 고운의 시대에 태어 났었다면 마땅히 지광이와 짚신을 들고 쫓아다녀서라도 고운으로 하여금 쓸쓸하여 佛敎徒와 함께 어울리 지는 않게 했을 것이다〉시라고 하였다.
4) ~SB훌, Ii'에야짖先生文쌓.1J, 쌀 5, 힘휠A~~윌, <앉뽕生於n원之時짧훌MtJi훌而從不{I!Dl t깅홉찌홉껴 yq~잊f빼휴f~ 1iE>.
이 상에서 살퍼본 바와 같이 고운은 名偏 또는 大文章家로서의 위치 뿐만 아니라 불교적 사상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M및는 농〒學의 입장이기 때문에 불교를 배척하는 의미에서 고운의 저술에 나타난 好佛의 내용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러 나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고운이 敎i 에 깊이 심취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金萬重이 고운을 중국의 維摩居士라 함은 최고의 경지의 불교인으로 평 가한 것이며 고운의 불교사상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또한 金孫의 평가는 고운이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 다.그리고 의 평가에 의하면 고운은 불교사상가임과 동시에 H敎를 관통한 사상가임을 밝혀주고 있다.이러한 관점에서 여기에서는 고운의 저술에 나타난 불교적 내용을 파헤쳐서 그의 불교관을 정립해 보려 한다.고운의 불교관을 몇 가지 관점 에서 살피기 로 한다.『불망고fo향에 나타난 그의 불교관과「 山碑銘」에 나타난 그의 신라불교관과 p學보다는 心學을 주체로 한 내용은 어떠한 것이며,備敎나 老任보다는 불교가 극치의 경지를 밝혔다는 불교 深述論과,현실에서 불교를 활용해야 된다는 W路佛敎論,그리 고 偏佛一致 또는 三敎一致의 경지는 어떠한 것인 가를 살피 기 로 한다.『法藏和尙傳』의 佛敎觀祖致速의『法藏和尙傳』(『斑大E福寺故寺主潮經大德法親和尙傳』)은 法藏(643세2)의 傳記로시 는 초기 (904에 저술되 었고 내 용도 가장 상세하다. 그리고 비교적 정리가 잘된 것은 淸時代의 街法의『玉祖略記] 法界宗五祖略記』)가 있으나 이는 康照 19년 (1680)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法藏沒後 약 1,000년이 지나서 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玉:祖略記』가 모든 자료를 정밀하게 조사하였다고 하나 그 자료적 가치는 크다고 볼 수 없다. 이에 비해서 고운의『法藏和尙傳J은 초기에 저술된 본격 적 인 法銳傳으로서 그 상세함과 신빙성의 면에서 가장 중요한 법장의 傳記 자료인 것이다.
『法藏和尙他고은〈天技4년 (904)의 봄에 고운이 신라의 가야산 海印寺 화엄원에서 亂을 피하고 병 을 요양하는 동안에 쓴 것이다〉.)典波로 삼은 자료는 명 기되지 않았으나 본문으로 미루어 보면 모든 관계 문헌에서 法藏의 사적을 모아 獨의 방법으로 정리 했으리 라여겨진다.5) Ii'~짧없짧J], 쌓 1.34, P.533. <子빠天낀四필技幹fA웰於FfW t영 tbn OBl山~m뿔!ttl피용~~찮§갚훌훌협).
『法藏和尙傳』은 신라에서 저술(904)된 이후 고려 때 (1092)에 街藏經의 일부로서 離刻되었 다. 6》商能에서 간행 된 級親經이 務天에 의해 來에 전해졌는데『法藏和尙傳교도 그 속에 포함되어 朱에서 유통(1145〉하게 되었다. 이에 朱의 四]證國師 務和가 이 傳에다 間朝陳의 文을 더하여 系(1149)하였다. 이렇게 5^에서 복간된 향이 다시 日 本으로 건너 가 유통되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朱刻福本의『法藏和尙傳』은 商山寺 大藏經 서함 속에 소장되었다. 이 商山寺本을 齊S老師가 轉寫(1670) 하였다. 이 轉萬文은 僧犯 (明麻L 1657〜 1738) 에 의해 再我되 었는데 僧 犯은『法親和尙傳』의 文瓦가 잘 맞지 않는다고 하여 그 일부를 고치고 傳의 앞부분에「新刊:K首國師碑傳敍」를 붙여간행(99) 하였다. 그런데 能華道忠은「新刊賢首碑傳正誤J를 내어賊深이 제멋대로 고친 것을 商山寺本과 대조하여 바로잡았다. 大正藏에는 術賊深本과 M華道忠의 正誤本이 함께 실려 있고『植文昌候全染』의 것은 犬正藏의 것을 필사한 것이다. 그리고『法雜和尙傳』
6) 趙明짧, Ii'짧1m大짧國師와 天台,면想J). PP.82""'83. 大많겠城, fi'~mlJ빼i홉톨~~Jl.p.55.
의 내용을 보면 我强記라고 하는『華嚴經傳記J, 間朝陳이 지은 碑文,胡幽貞券의『感應傳J, 淸浪沒觀의 1T華嚴經隨疏演務妙J] 등이 참고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중 間朝陳의 碑文과 留觀의『演務妙』가 n 回와 13回로 가장 많이 인용되 있다, 7〉
7) 大앓합했, 위의 껴 • PP.98"'99. 호힘따, r뾰致찮의 홉뒀和尙센l 혔없J. «행짧史E까~» 57 앓. pp. 2'" 1'. Ii'월랩佛었全t!tD에 1!.련 것윤 rein양끓의 것。l 며 『랩랩m~先生文~Jl에 씌l 단 것윤 大正앓의 것。I 다.
『法藏和尙傳』은 일반적인 전기 자료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고운의 불교에 대한 견해가 밝혀져 있다. 이를 몇 가지로 살펴본다.
人間生理의 佛敎化고운은 법장의 생애를 기 술함에 있어 법 장의 봉인『按湖』의 直心十我의 내 용에 의 해 十大別해서 傳記를 구성 하였디-. 인간의 한 생애를 佛敎思想의 내용으로 의미 지운 것이디、인간의 생애는 하나의 역사적 사잘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불교사상과 직결시킨다는 것은 인간의 생애를 불교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고운은 불교사상의 어느 부분만을 문제 로 제 기 하는 것 이 아니 라 인간의 생애를 불교화하는 보다 근원적이고 폭넓은 불교사상가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直心十務와 인간 생에를 직결시킨 내용을 살피고자 한다.고운이 直心十述와 인간의 생애륜 직걸시킨 내용은 다음과 같다. 〈華嚴三味M西;心中十務而配펜爲 1. 族姓廣大心 2. 遊學按深心 3. 例染方使心 ‘1. 講演堅固心 5. 傳譯無間心 6. 著述折伏心 7. 修身#巧心 8. 濟俗不-心 9. 垂訓無確心 10. 示滅四]明心〉8》이다.8) 大파文化맑랬홉. Ilt:tt文뭘候全후.!l. p.2·U.
첫째, 族姓과 廣大心을 직결시킨 것이다. 族姓은 곧 인간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인데 탄생 자체를 廣大心으로 본 것이다. 廣大心은 然願해 서 일체법 을 여 여하게 관하는 마음이 다. 9) 인간의 정 신적 탄생을 광대심의 서원으로 본 것이다.
9) 위의 껴 • p. 245.
둘째, 遊學과 按深心을 직결시킨 것이다. 遊學은 求道를 의미하
는 것인데 구도 자체를 매우 깊은 마음으로 본 것이다. 述深心은 서원해서 眞如의 밑바닥까지 다하기를 관찰하는 마음이다. 네 인간의 구도를 진여의 밑바닥까지를 깨치려는 마음으로 본 것이다.
10) 위의 껴 , P.246. (흙深心홉1짧떠如맺짧흉H풍경1.).
셋째, 例染과 方使心을 직결시킨 것이다. 制染은 出家를 의미하는 것인데 출가를 方使心으로 본 것이다. 方使心은 인생의 방향을 잘 선택해서 올바른 방향을 추구하는 마음이다.n) 인간의 출가를 올바른 결정적 관단으로 본 것이다.
II) 위의 쩍, P.247. (方파心推求뼈됐 웰따方댄乎).
네째, 請演과 堅固心을 직결시킨 것이다. 講演은 m學을 의미하는 것 인데 端學을 堅固心으로 본 것이다. 堅固心은 설사 몹시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깊이 관찰하는 마음으로 즐거이 받아서 버리지 않는 마음이다. 미 인간의 講學을 어떠한 괴로움올 당하더라도 즐거이 받아서 버리지 않는 견고심으로 본 것이다.
12) 위의 책, p.249. (뿔固心짧i:1!:짧폼 웰링E협 fjl 心不1'tota1f1).
다섯째,傳,萬과 無間心을 직결시킨 것이다. 傳譯은 譯經을 의미하는 것인데 譯經을 간단없는 마음으로 본 것이無間心은 진리를 관찰하여 未來際가 다하도록 오래 하되 끊일 줄 모르는 마음이다.15〉인간의 을 영원토록 간단이 없는 ⑶fHJ心으로 본 것이다.
여섯째,著述과 折伏心을 직결시킨 것이다. 折伏心은 본마음을 잃어 번뇌가 잠깐 일어날 때는 死索해서 번뇌가 다 없어지도록 하여 본마음이 상속되게 하는 마음이다. 인간의 저술을 모든 잡념을 없애고 참마음이 영원토록 지속되게 하는 折伏心으로 본 것이다.일곱째, :당과 혔巧心을 직결시킨 것이 다. 환巧心은 진리를 黃?觀해서 일에 따라 구애됨이 없이 선교하게 만행을 닦는 마음이다. 인간의 수신을 진리를 깨쳐서 그 일에 따라 관용하는 務巧心으로 본 것이다.13) 위의 씌, PP.2.53"-'254. (앓I펴心잃~tn훨 짧未來際不~;Jt久乎).
14) 위의 쩍, p.261. (折~心행若失장: 쩌댐합첼 DP £1!행혔折~ ~fJ必.mm 1f1).15) 위의 껴, p.263. <힘巧心샘없웹월 不탑짧파 잔갑行乎).여덟째,濟俗과 不그:心을 직결시킨 것이다. 濟俗은 속세를 제도함을 의미하는 것인데 제속을 不;^心으로 본 것이다. 不그心은 일
에 따라 만 가지를 행하고 한결같이 진리를 맛보아 둘이 없음을 융화하는 마음이다.비 속세를 제도함을 的과 俗이 둘이 아닌 한 경지의 不Z心으로 본 것이다.
16) 导lSJ 梢. p.271 . <不二心随事商行贝一味间理融然二乎).
아홉째,垂訓과 無旋心을 직결시킨 것이 디-. 垂訓은 광대한 교육을 의미하는 것 인데 垂訓을 無威:心으로 본 것이다. 無德心은 거리낌없는 마음으로서 본래와 현실이 둘이 아니어서 온전하고 융화되어 본래와 현실이 서로 하나가 되는 마음이다.17) 인간의 교육을 진리와 현실에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게 활용하는 無險心으로 본 것이다.
17) 刽判坞. P.27.5. <然由心理事既金融不二远舍圭理之事互相即λ乎).
열째,示滅과 四明心을 직결시킨 것이다. 示滅은 열반을 의미하는 것인데 示滅을 四明心으로 본 것이다. 四]明心은 원만하고 밝은 마음으로 단번에 法界를 관찰하여 막힘도 없고 걸림도 없는 마음이 다.18〉열반을 막힘도 없고 걸림도 없는 생사해탈의 P 明心으로 본것이 다.
18) 钊SJ 梢. p.277. <圆明心项目法界知障然iI乎).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의 생애를 十大別하여 法藏華嚴의 直心十務에 직결시켜 인간 생애를 불교화한 것이다. 탄생에 불변함올 서원하는 皮心으로 출발해서 출가에 올바른 방향을 결정하는 方使心을 바탕하여 講學에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내는 堅固心으로 극복하며 역경에 영원히 끊임없는 無間心으로 지속하며 著述에 번뇌가 다 끊어지는 折伏心으로 상속하며 修身에 모든 일을 그에 맞게 잘 되게 하는 普巧心으로 처리하며 중생제도에 셨과 俗이 둘이 아닌 不心으로써 제도하며 광대한 교육에 아두 거리낌없이 서로 가 하나가 되는 無,心으로써 교육하며 열반에 막힘도 없고 걸림도 없는 생사해탈의 四!明心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法藏의 H 著인『華嚴三味觀ii은 현전하지 않는다. 다만『華嚴三味章』과『發卷提心章』19〉의 첫머리에『華嚴三味觀』의 내용과 같은 直心十義가 밝혀져 전해 오고 있다. 이렇게 보면『華嚴三味觀」그의 直心十務의 내용은 오직 고운의『法藏和尙傳』에서만이 밝혀져 전해 오고19) !i',大正陆.!l . 您4 .5. p.6.5. li'il!回ful钮11 , 卷103 , P.13.5.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F華嚴드味觀고이라는 저술의 내용이 일부분 이나마『法銳和尙傳J]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華嚴의 植心十務를 인간의 생애에 직결시켰다는 것은 고운이 華嚴學을 깊이 이해하였다고 보아진다. 그래서 고운올 華嚴學에 通燒한 사람일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20)20) 吉津宜奖, r法跟傅研究J,剧泻大磅, <<佛敬厚研究但要>>,纺37 贝, p.180.
그리고 고운의『法藏和尙傳』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완비된 법 장전이 었으나 중국에는 널리 전승되지를 못하고『五祖略記』에서 만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는 일찍부터 유전되어 華嚴宗에 전승되어 왔다. 20 그리고 만약 이『法銳和尙傳』이 중국에 일찍부퍼전승 유포되었더 라면 중국불교사의 색채가 어느 정도 변해졌으리라는 평가가 있다.22)
21) 书吗判, p_18 1.
22) 木材活孝r徨致远摆法陆和向你考J(大僻仰就佛敬研究院主催1981 , tn -i回回原佛敬碍E街合撞在奕奕宵) •2 中國華嚴史의 整理
고운은『法紙和尙쌔』을 통해서 中國華嚴史를 정리하였다.『法故:科]尙행』은 법장의 생애에 대한 단순한 기록만이 아니라 法藏이 관여한 불교의 많은 경론들의 성격을 밝혀 華嚴史를 정리하고 그 경론들의 역할을 밝혀 불교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華嚴思想에 대해서는 符(液의 역할과 法親의 역할올 높이 평가하였다.法親의 저술을 논함에 있어 다음과 같이 밝혔다.처음에 至相寺智賊和尙이 매양 위대한 화엄교가 오랫동안 막혀 중흥하지 못했음을 한탄하다 마침 내 빛난 전통의 .⑶을 계승하고 더욱 聖好의 뜻을 따르기 를 갈망하여 미묘한 指針을 지 혜 롭게 붙잡고 妙宗을 붓끝에 모아 화엄 경 중에서 授玄我妙 5권을 이루었다.그 글은 옥같이 귀하고 그 이치는 금처럼 빛남이라 다듬기는 어렵지만 본질의 大强는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법장스님은 친히 깊은 이치를 엿보았으므로 홀로 國I을 자랑하여 #巧한 재능을발휘하는 데 그 恨器가 매우 예리하였다. 이에 智强의 저술을 본받아 探玄記 2십 통을 찬술하여 英玉으로 몸을 E-嚴하는 꽃을 빛내고 河金으로 갈고 닦는 도구를 이루게 하였는바 옥도 티가 없는데 금이 범연하겠는가.
또한 按字와 探字의 두 말을 음미 하건대 品의 앞뒤에 다한 자씩 기재하였다. 앞에의 授字는 어렵지만 뒤의 探字는 좀 쉽다는 것이다. 그 어렵다는 것은 골라서 모으는 노고요 그 쉽다는 것 은 인용하여 취하기 가 빠름이니 대개 지엄(師)은 列立된 十門에서 수색하였기 때문이요,법장(K)은 한 경전에서만 탐구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25)경) G'-tu文를활全짜.n, p.2 S4.
고운은 지엄과 법장에 의해서 華嚴敎가 크게 중흥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지엄의 按玄記는 列立된 十門에서 수색했기 때문에 어려운 작업이었고 법장의 探玄記는 한 경전에서만 탐구했기 때문에 비교적 쉬운 작업이었 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엄과 법장이 師資관계 로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위대한 일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혹은 열은 데로부터 깊은 데로 나아가고 먼 곳을 가는 데 가까운 데로부터 갔으며 혹은 俗前에 의하여 眞談을 시험하고 비교하였은즉 周i想의 致官條 職名 중에 投人이 있고 採人이 있다. 授人은 열두 가지 我를 맡아 按을 살피고 어두운 이들을 지 도하여 깨우치도록 하는 것이니 그 지엄스님의 迎玄務가 十 分次를 통합시 켜 九部로 종합하여 知見을 나타낸 것과 같고 探人은 임금의 뜻을 선포하여 나라의 政市를 다스리 고 천하를 巡行하여 諸使들에게 미혹하지 않도록 타이르고 만민의 마음을 깨우쳐 바로 王化에 向하도록 하는 것이니 역시 법장스님의 探玄記가 부처님의 뜻율 전하여 통하도록 하고 법의 M를 해하여 1또1피을 깨우치 며衆說을 반영하여 섞이지 않도록 하고 群生의 눈을 열어 주어 부처님의 은혜를 깊이 느끼도록 한 것과 같은 것이다.24)24) 위의 껴, 1J. ~SS.
지엄의 按玄記를 열은 데로부터 깊은 데로 나아가고 먼 곳으로 가는 데 가까운 곳으로부터 힌다는 방법으로 관단하였으며 법장의 探玄記를 俗前에 의하여 談을 시험하고 비교하는 방법이라 관단하였다. 그리고 周禮 裝官條 職名의 按人과 探人의 역할을 按玄記와 探玄記에 직결시켜 의미 지우고 있다. 按人이 十 종의 閑務를 맡아 九政:를 살피는 역 할과 같이 按玄記는 十 分敎를 통합시켜 九部로 종합하여 知見을 開示하는 것과 같고,採人이 임금의 뜻을 선포하여 나라의 政市를 다스리고 만민의 마음을 깨우치는 역할과 같이 探玄記는 부처 님 의 뜻을 전하여 통하도록 하고 群生의 눈을 열어 주어 부처님의 은헤륜 깊이 느끼도록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한 敎化의 始終을 궁구하는 데 있어 玄의 廣略에 의뢰하였은 즉 가히 설 데에 섰다고 할 만하고 정 이 현묘하고 또 현묘한 것 이라 하겠다. 만일 앞의 긴映이 五編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받들어 가지는 데 있어 막연하여 분명 하지 못할 것이요, 혹은 玉縮에만의 지 하고 n物에 의 지 하지 않는다면 음미 하는 데 담담하여 맛이없을 것이 다. 속담에 이르기를〈스승이 밝으면 제자도 野哲하다〉하니 어찌 앞뒤가 이어서 이루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컨대 按玄이라 하는 것은 索將과 같은 말이요,探玄이라 하는 것은 約深과 다른 말이 아니니,숨은 진리를 마음으로 수색하면 十玄의 미묘한 뜻이 노을처럼 터질 것이요. 깊은 것올 힘써 끌어당기면 十玄의 원만한 과목이 달처럼 뚜렷할 것인즉 드디어 부끄러움을 품은 이는 前哲들이요,도움을 받은 이는 後生들이다.25》25) 钊.9.l坞, p.2SS.
探玄記가 授玄記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근거가 박약할 것이며,만약 按玄記만 있고 探玄記가 없으면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按玄記는 사물의 숨은 이치를 찾아내는 역할을 하였고 探玄記는 깊숙한 도리를 찾아서 깨달음을 얻게 하는 역할을 하였으며,이러한 두 역할이 후생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3 佛敎 靈異性의 强調
고운은 지엄과 법장을 학승으로만 보지 않고 述異性을 나타내는 종교적 신비성으로 파악하였다.이 때 지 엄 법사가 民華寺에서 화엄 경 을 강의 하였디-. 법장은 밤에 갑자기 신기한 광명 이 뜰 앞에 나타나 비충을 보고 찬탄하였다.〈與人이 위대한 大敎를 민리 선양하는구나〉하고 이돋날 운화사에 나아가 배례를 드린 다음 여러가지 것을 질문하는데 말이 모두 活文에 나타나자 지 엄은 찬양하였다.26) 위의 책 , p.245.
지엄이 에서 블을 강의하고 있을 때 법장은 밤중에 갑자기 신기한 광명 이 뜰 앞에 나타나 비춤을 보고 이돋날 華寺에 나아가 지엄을 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엄의 불교적 强與性을 고운이 강조한 것은 고운 자신이 불교적 M異性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뒤 段華寺에 서 강의 할 적 에 광명 이 입 으로부터 나와서 잠깐동안에 떼출함을 대중들이 모두 보았다. 또 成 元에 十을 강의할 때 에 향기 로운 바람이 方에서 불어오고 상서 로운 안개가 玉:色이 찬란하여 높이 솟아 홀어지지 않고 공중에 둥쳐 사람에게 쏘였으며,또 하늘이 감동하여 꽃이 공중에서 어지럽게 우박처럼 쏟아졌다. 그 뒤에 佛授記寺에서 새 경전 번역하기를 마친 뒤에 대중들이 법장에게 강의하기를 청하므로 下元날 서문과 해제는 쓰기 시작했고 十 보름 전 3일부터 晩講을 하게 되었는데 華嚴經에〈바다가 段動했다〉는 대목에 이르자 강실과 사원이 갑자기 진동하여 꽉 들어섰던 청중들이 일찌기 없었던 일이라 찬탄했다.27)27) 위의 책, p.247.
법장이 民華寺에서 강의할 때에 광명이 입으로부터 나온 일이라든지,華嚴經 十地品을 강의할 때에 상서로운 안개가 오색이 찬란하게 높이 솟아오른 일이라든지, 하늘이 감동하여 꽃이 공중에서 우박처럼 쏟아진 일이라든지,華嚴經에〈바다가 진동했다〉는 대목에서 강실 및 사원이 진동했다는 일들은 불교의 强異性을 강조하는 것으로 고운의 불교관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스님들이 거듭 經의 뜻올 관별하였는데 譯堂 앞의 마른 땅에 서 百葉速華가 피었다. 대중들은 그것을 보자 상서롭게 여 기고 다투어 姑進하여 修部하였다.28)28) 위의 책 , P.252.
법장스님은 목욕재계하고 웃을 갈아입 었다. 十一而(親音) 道場을 세우고 韻 音 올 모셔 놓은 다음 도법을 행한 지 며철 만에 오랑캐들은 王師 중에서 무수한 神王을 보기도 하고 혹은 m音音菌의 형상이 공중에 떠서 이르시는 것을 보기도 하여 개와 염소메 같은 무리 들이 방황하다가 한달 안에 도망갔다. 29)
29) 위의 씌 , p.264.
법장은 大黑福寺의 주지였는데 이에 應大德 網律師 등 십여 사람으로 더불어 塔所에 이르러 칠 주야 동안 도를 행한 연후에 舍利函을 열었는데 신기한 광명이 휘황하고 찬란하였다. 법장스님이 옛적에 일찍 손가락을 태웠고 이제 다시 간이 부서지는 듯하는 정성 으로 손에 사리를 받쳐들고 서원을 발하여 道俗에게 보였던바 사리가 손바닥 위에서 광명을 놓아 먼 데나 가까운 데가 환히 비치었다. 그 福刀에 따라 하늘의 특수함올 感證하여 어면 이는 도금하여 장식한 듯한 순수한 얼굴을 본 이도 있었고 어떤 이는 얽힌 솜털처럼 기괴한 형상과 위대한 자품과 옥같이 아름다운 풍채와 잠깐 비켰다가 잠깐 작아지기도 하여 클 적에는 몇 자가되고 작아졌을 적에는 몇 치밖에 되지 않음을 보기도 했다.30〉
30) 위의 껴, p.265.
測을 중심한 고승들이 經의 뜻을 관벌하였는데 譯堂 앞에 마른 땅에서 百葉述華가 핀 일이라든지,법장이 도법을 행하여 적을 물리친 일이라든지,법장이 칠 주야 동안 도톨 행한 후에 신기한 광명이 찬란한 일이라든지, 법장이 손가락을 태웠고 손에 사리를 받쳐들고 서원을 발하는 정진을 할 때에 사리가 손바닥 위에서 광명을 발하던 S및14을 고운은 강조하고 있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고운은 지엄과 법장을 學位으로만 보지 않고 불교적 S異性을 나타내는 종교적 신비 성 으토 보고 있 다. 이 는 고운 자신이 불교를 종교적 신비성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四山碑銘」의 新羅佛敎觀고운이 新羅佛敎史에 끼친 영향 중에 가장 큰 업적은「13山碑銘」의 저술이다. 이 碑文에 의해 신라하대 불교사가 밝혀진 것이다.이「四山碑銘」은 大媒福寺碑(座尙北逆度州),雙授寺fi-M禪師碑(度尙南逆河東),聖住寺大加慈和尙碑(忠淸南逆保휀),賊巖寺智證大師碑(度尙北逆M座)를 말하는 것으로 大樂福寺碑는 染福寺의 例建碑이며 나머지 3개 비는 모두 郡師들의 塔碑이다. 즉 大操福寺碑는 왕실이 나 중앙귀족들이 불교사원을 창설하고 있는 한 예이며,眞師强限(774~850)는 신라하대 禪宗 수입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고, 切】^系1尙 찾얽接 (800〜888) 이나,卷】菌匕차師 道:향 (824〜88기은 각각 雨1흉九山派 가운데 聖住山派와 險陽山派의 開山祖들이었던 점에서,「四山碑銘」에 대한 이해는 신라하대 불교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매놓을 수 없는 것이다. 31〉31) 崔柄窟. r衍掘下代周宗九山涯~成立J. ((牌因史研究)) 7饵. p.448. 「大钱踊寺碑文」毛也致远。1 店丘立平叫即因抢即後(88~) 叫1 冠底王~1 命主主 拇遮玲对范况也叫.:2..~01 毡Aj 乓1 号骂毛贝里女王代叫1 01 立叶λHl 叶.r贝垣邵阳碑文J毛贝m~郎慧昭外λ寂吐~l 37 l.i!.哇吐定康王2年间里女王元年(887) 定康王判命.2.~摆街桂英。114.
「大朗忠和向碑」毛朋惑和向提染。1λ在哈2\t!卒气l~型女王4 吐(890) 肉垂女王玛命丘主撰边奄视。l 咛. 二1建1叫知染毛二2.~λí!St社叫1 01 口1 .:2..叫1 :哇哇辟7~~~咛.夺金立之7t 撰边沿边住寺碑斗您st王。l 损边哇深妙寺碑7t .::z. ~ol 吟.「칩1파大師햄文」운 짧[,fEE의 Jn r,;r으jε mit한 것인t111 완성윈 것윤 그 8 년 후안~"l월女王7 년 (893) 이다. 그러냐 그 와가 긴작l 핀 것운 쳐-맺王8 년(차효王元年,924) 이다.
호쩌I당, r었fEU ~깐 ~i효짧 四山휩.考J(1981 , 까4回댐없fJ~~ij!~합 t꾀짧옆필핏뭘).四山없한 lliifd효i윗 三11li-벚F fllI융 말한마.첸쨌山활짧놓 협짧國mi~¥짧 (國~l , 228때, ttl홉'ifuI찌rf!:OH Uii J카在).뿔住좋 大M짧랩師따짧 (댐했, 치l8~ , 忠때 ~$所在).Iil~능석혼 껍1m大t때휩銘(월物, 138 많, 양北뻐않所在).fJJ.月III 셀핍좋짧(않써{市).위의 내 뽑 가운터1 떠쩔짧f1Ii없는 웰 • ~. 싫짧까지 도 웰헬先生의 iJltl호안데 그앓홉흘 애씩하꺼I 여긴 後A듣。1 IW7r 건럼원 800얘 '은 「四山.銘에서 〈지금 이 「四山銘」은 큰 부도의 착업을 기록하는 데 있어서 內싸고} 外단}를 총망라하여 섞어 뽕아서 운장을 이루었다. 그 대귀로 찍을 지운 것이 매우 며요하고, 인용한 것이 옵시 넓지만 한 글자도 내력없는 것이 없어 그 끼친 이릎과 남은 향기를 후안에게 척시어 줌이 많은지라 마땅히 門(門)의 학도들은 영원토록 간칙해야 할 것이다)32)라 하였다. 곧 「四山짧銘」은 풍교의 내용올 충실히 밝혀 후세의 풀교학도들이 영원토록 간칙해야 하는 귀중한 문헌이라는 것이다.
32) [i'Jl[짧뾰쩔遺先生文셋.D, P.898•
李能和는〈「四山碑銘」은 文强도 화려하면서 뜻은 더욱 깊어 실로 의 훌륭한 역사이다〉33〉라 하여 「E3M4?時-02」의 불교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33) 후~和, Ii'훌ij l!¥佛t'dili뽀』下. p.27S.
崔南선은〈「四山碑銘」은 우리 光海主 前後에 滅面老人이라는 이가「孤民災」중에서 뽑아내어「四山碑銘」이라고 이름하여 佛敎學人에게 習하게 하면서부터 드디어 佛敎學人의 課外前本을 이루고, 純祖 述:宗間에 居士 供射誤가 여기 註解를 더하여 流行이 더 넓어졌는데 근래 石頭老師가 다시 滿註本을 만들어서 文務을 알기가 아주 편해졌읍니 다〉라 하였다.
34) 캘南협, IT'행a¥7씁없I씹答mw.!J, 三웰文뼈. P.134.
「四山핍.銘」은 렘뿔女王代 (887-'896) 에 찬술된 것이다. 고운윤 『훨 熾和尙{따』에서 갤 f흐 댔思想을 높이 형가하였지만 「四띠빼·짧」에서는 神
宗의 우위성을 강조하였다.『法藏和尙傳』에서도〈법장스님은 깊이 禪定과 智强에 처하여 代는 다르지 만 마음은 한가지>미라고 하여 神定을 중요시하였다.
3~) Ii'崔文吕侯全然.!l. p.273. (应以~L吕定恐只代同心).
이러한 의미에서「智證大師碑銘」이 신라 禪宗史를 간명하게 기술한 내용이므로 이 내용을 통해서 고운이 불교사의 흐름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를 살펴 고운의 신라불교관을 파악하기로 한다.
삼국이 통일되어 먼저 小乘佛敎가 들어오고 다음에 낫:乘佛敎:가들어와 발전하였디. 그리 하여 我能(推嚴敎쨘 등)이 구름같이 뛰게 되고 律虎(미宗)가 바람같이 오르게 되어 學海의 파도가 용솟음치고 戒林의 何策이 두성하게 되었다.36)36) 钊~ 坞. !l.172.
이렇게 華嚴敎學을 비롯한 여러 敎學과 律宗이 발전하고 있을 때道務 (809 開則~825 死亡)가 중국에 서 神法을 전래 하니 敎學의 입장에서는 部Ui을 비난하였다. 이러한 비난을 고운은 종달새 가 남쪽 바다륜 나는의 대망을 비난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봉의 우위성을 강조하였다.〈禪宗은 하는 수 없이 산중에 들어갔지만 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사람이 산에 가득하고 악인이 변하여 선인이 된 사람이 골짜기에 가득차게 되었으니 道라는 것은 없엘 수 없는 것이어서 때가 되면 저절로 행해지는 것이라〉》하여 禪宗의 발전을 강조하였다.
37) 钊~坷, P.172.
供助>(810 ~826 師國)이 중국에 서 돌아와 왕이 초청하여 경하를 하였 다. 이 禪法은 密他을 顯示하는 것으로〈아침의 凡夫가 저 녁에 聖人이 되니 변함이 점차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되는 것이다. 그 宗施를 고찰하자면 修에 修했으나 修하는 것 이 아니고 說에證했으나 證하는 것이 아니며 고요히 있을 때는 산처럼 서 있으나 그가 움직일 때 는 산골짜기 가 응하니 無爲의 이익이 다투지 않고도 이기게 된다. 이에 東國 사람의 마음이 虛强해졌는지라 능히 禪宗의 利益으로써 해외 (新羅) 사람을 이 롭게 하였는데 도 그 이 로운 바를 말하지 않으니 위대하도다〉〉고 하여 禪宗의 宗起를 높이 평가
3 8) 导l~ 鸣. p.1H.
하며,이 f 去으로 말미암아 東國 사람들의 마음이 신령해지고 또한 이롭게 되였다는 것이다.
無染 등 여러 禪師들을 평하기를 卷提宗으로서 德의 후함은 중생에게 아버지가 되고,道의 높음은 임금에게 스승이 된 사람들이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敎化는 중생세계에 덮이었고 자취는 비석에 전하여지며 禪宗이 신라에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39)39) 刽斗斗. p.176.
〈들창을 내다보지도 않고 大道를 보았으머 산에 오르지 않고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도 上를 얻음이 있었으니 조용히 생각을 쉬고 담담히 맛을 잊게 되었다. 저 언덕에 가지 않아도 이르렀고 이 나라를 엄하게 하지 않아도 다스려졌으니 七野에게 누가 비유되겠으며 十住에 지위를 정하기 어려운 사람은 智證大師 그 사람이다〉써라 하여 智證이 중국에 가지 않고도 /W法을 대성한 사람이기 때문에 七野(伯英, 故齊,)[述仲, 功逸,朱强,少述, 例下忠) 이나 華嚴의 十住를 넘어선 분이 符1證이라는 것이다.
또한 眞進,部師碑銘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40) 钊~判. p_ 176.
佛이 말씀한 心法은 玄하고 또 玄하여 이름으로 이름할 수 없고 說하려 하여도 說할 것이 없어서 비록 달(述)을 얻었다 이르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잊어버려 마침내 바람을 붙잡고 그림자를 포착하기 어려움과 같다.41)
4叶钊~ 主导. P.124.
옛적에 仲用가 門弟子에게 이르기를〈내가 말이 없고자 한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리오〉하였으니 곧 저 淨名(維;히이 침묵으로 써 文;球:를 대한 것과 普述(佛十桃’ 중의 하나)가 비밀히 迎•策에게 전한 것은 혀를 놀리지 아니하고 능히 心印에 맞는 것이니 하늘이 말하지 아니한다고 말하는 것을 어디에 가서 얻으리오. 미묘한 道를 멀리 전하여 우리 고장에 널리 빛낸 이가 어찌 다른 사람이랴. 禪師 (M越:)가 그분이다.42)
42) 剖判判, p.125.
佛敎의 心法올,곧 禪京을 이름할 수도 없고 說할 수도 없는 지극한 경지로 보아 禪法의 극치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유마거사가 침묵으로 문수를 대하는 경지와 佛防가 가섭에게 꽃가지를 들어 말할 수 없는 경지를 전했을 때 가섭이 말이 없이 법을 받는 경지를 禪法으로 보아 禪法을 지극히 玄妙한 경지를 밝힌 京門으로 보는 것이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운은「K山碑銘」을 통해 서 신라하대 불교사를 정리하여 禪宗 우위설을 강조한 것이라 보아진다.
또한「則怨(無染)和尙碑約J에서〈大師의 덕화를 만인이 홈앙한다. 그 누가 大師를 본뜰 만한 인재 양성을 해줄 것이며 그 누가 뜻깊은 無結琴(以心어/心의 法)을 들려줄꼬. 禪의 지경이 비록 간수할 사람이 없다 하여도 속세의 먼지 야 어 찌 들어 오게 하겠는가. 親足山 봉우리에서 潮湖佛을 기다리듯 길이길이 敬材:(新羅) 나라에 있어주오〉 라 하였다.43) 위의 껴. P.122.
神師의 덕화를 만인이 존경한다는 것이며 禪法을 無結琴에 비유하여 神境을 높이 평 가하였다.
해외에서 돌아오매 道는 꺾기 어려워서 멀리 맨은 禪의 흐름이 막힘이 없었구나. 다북쑥(速)은 삼(麻)대에 의지하매 능히 스스로 곧았으며 구슬을 웃 안에서 찾으니 밖에서 빌 것이 없었다. 港然하다. 賢授의 善知識은 十그:因緣이 虛飾이 아니었다. 무엇하러 드림줄 더위잡고 말뚝에 매어달릴 것이며 어찌하여 붓끝을 물에 빨고 먹물을 먹 일 것인가. 저는 간혹 멀리 배워 고생으로 돌아왔으나 나는 능히 고요히 앉아 마음의 施賊을 물리 쳤네. 第:樹를 함부로 심지 말 것이며 他田을 부질없이 가꾸지 말 것이다. 恒沙같이 많은 持經功德을 논하지 말 것이며 浮强 같은 떠돌이 자취의 南北定處를 말할 것 없다.44)44) 위의 책, PP.197"'198.
智證道斑의 禪法을 집 약해서 높이 평가한 내용이다. 禪의 흐름은
막힘이 없이 뻗어 나아간다는 것이며 문자에 매어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며 고요히 앉아 마적을 물리친다는 것이며 瓦樹와 他ffl의분별심을 없애야 된다는 것이며 恒沙같이 많은 持經功德도 논하지 말 것이며 남북의 정처도 말할 것 없다는 것이다. 이는 禪法의 극치 를 찬탄하여 禪宗의 우위성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구슬을 옷 안에서 찾으니 밖에서 빌 것이 없다는 것〉은 초기에는 중국의 神에 의지 하였으나 想3證大師 당시에는 우리 나라의 商!脈이 확립되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 나 三神-師의 碑銘 외에 는 고운의 많은 불교 저술이 거의가華嚴관계의 내용인 것으로 보아 신라하대의 華嚴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용은 金福順의『新羅下代華嚴宗硏究교에 밝혀져 있다.孤雲 佛敎의 特性心學을 主體로 □學을 活用고운은 P 學보다는 心學을 주체로 생각하였다.대사는 有爲로 나가는 속세에서 無爲로 된 비밀 禪宗을 말씀하였으니 소신은 한정있는 적은 재주로 한량없는 큰 행실을 기록하려 하니 약한 수레에 무거운 짐을 신고 짧은 줄의 두레박으로 깊은 우물을 퍼내기 입니다. 혹시 돌이 말을 한다든가 거북이 돌아본다는 神助가 없다면 어떻게 산이 빛이 나고 개울이 아름답게 되겠읍니까. 도리어 숲에게 부끄럼을 당하게 되고 시냇물에게 무안하게 되지 않겠읍니 까. 글을 짓는 것은 사양합니 다.45)45) 위의 쩌. PP.91"'92.
無染和尙의 碑文을 지으라는 왕의 부탁에 대답한 말이다. 禪師는
無爲의 비밀 部!宗 곧 心學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심오한 경지를 문장으로 나타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를 놓아 두는 것이 心學의 뜻에 맞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心學의 깊은 경지를 문장으로 나타내기는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그러나 왕의 권유에 못이겨 文常의 필요성 을 인정 한다.
다시 생각하여 보니 중국에 들어가 배우기는 그 (無染)나 내 나같이 했건마는 스승된 이는 어떠한 사람이며 일꾼되는 것은 어떠한 사람이 었 던가. 그 아니 心學하는 자는 높고 學하는 자는 수고스럽던 것일까. 그러므로 옛날 君子는 배우는 것에 조심하게 되 었다. 아니면 心學한 자는 덕 을 세웠을 것이요, 學한 자는 말을 세웠을 것이니 저 德이란 것도 혹 말을 빌어서 일컬을 것이 요,이 말이란 것도 혹 德에 등대어서 썩지 않을 것이니 가히 알맞게 되었다면 心德이 능히 오늘날에 보여 줄 것이요,썩지 않는 다면 P 學도 또한 옛 날 사람에 게 부끄럼이 없을 것이다. 가히 할만한 것을 가히 할 만한 때에 하게 되니 다시 어찌 감히 寒刻을 사양만 하겠는가.46) 刽抖抖. PP.92-93. (缸惟之西职也彼此{nm之而~前者何人妇在老何人12心职者向口。老-好耶故古之君子惯所职抑心职者立德口职者立宫贝1) 彼f(;f也或愚宫而可耶娃2 也或倚德而不朽可郁则心能遮示乎来者不朽则口亦然惭乎背人需可13於可昂之峙缸括政眩目1乎簇拥) .
이는 則怨無染和尙의 碑文을 지으라는 왕의 명 을 받고 사양하다가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 心學은 神法을 뜻하며 學은 文單을 의미 한다. 心學者는 높고 P 學者는 수고롭다는 것 은 心學이 주체 가되 어 P 學을 활용해 야 된 다는 것 이 다. 그리 고 心學은 德올 세 우고 P 學은 말올 세운다는 것은 心學은 주가 되고 P 學은 종이 되지만 그 각각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德이 란 것도 말을 빌어서 일컬어지는 것이요. 말이란 것도 德에 의지해서 썩지 않는다는 것은 心學과 P 學이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心學과 P 學이 불가분리 의 관계 를 가질 때 心學은 영 원성 을 가질 것이 며 P 學도 존립의 의의 를 갖는다는 것이다.
물러 나와 생각하니 초년에 중국에서 이름을 얻어 命句로써 아름다움을 맛보았으나 미처 거리에 둔 술 항아리를 마시어 취하지 못했으매 오직 진흙 속에서 허우적거림이 부끄러울 뿐이다. 하물며 법은 문자를 떠났으매 말을 부칠 곳이 없으니 혹 말한다면 수레채를 북으로 하여 郵(남쪽에 있음)에 가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국왕의 外護함과 門人의 大願은 문자가 아니 면 뭇사람의 눈에 소상하게 할 수 없으므로 드디어 몸은 雨 (ffi佛)役에 겸하고 힘은 能을 본받으려 하노니 비록 돌(石)이 혹 말을 한다면 부끄럽고 두려우나 M란 것도 여지로 이름한 것이니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 이 그른 것 인가. 붓을 꺾 고 만다는 것을 臣이 어찌 감히 하랴. 앞에 말한 뜻을 거듭 述하여 삼가 銘을 짓는다.47)
47) 위의 껴, PP.137""138.
이는 俗朝!師의 碑文을 지으라는 왕의 명을 받고 물러 나와 생각한 것이다. 고운이 초년에 중국에서 大文章家가 되었으나 心學의참경지를 깨치지 못해서 부끄럽다는 것이다. 법은 문자를 떠나 말붙일 곳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말을 하면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은 문자가 아니면 모든 사람의 눈에 소상하게 밝힐 수 없으므로 문자를 통해서 법을 밝혀야 된다는 것이다.
고운은 部!法이라는 心學과 文章이라는 學을 는함에 있어 學보다는 心學을 주체로 생각하면서 學도 그 역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心學과 學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질 때 각각의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佛敎는 道의 植致를 밝힘고운은 일반적으로 偏學者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退沒도 지적한 바와 같이 고운은 불교를 깊이 이 해하고 있다. 그리고 華嚴學이 나神學의 내용을 밝힌 佛敎思想家이다. 그는 偏敎나 老E보다는 佛敎가 진리의 극치의 경지를 밝혔다고도 한다.沈約의 말에 공자는 發端을 하였고 釋氏는 極致가 된다 하였으니 참으로 그 큰 것을 아는 이 로서 비 로소 더 불어 지 극한 도를 말할 수 있다 하겠다. 佛이 말한 心法은 玄하고 또 玄하여 이름으로 이름할 수 없고 說하려 하여도 說할 수 없어서 비록 달(2D을 얻었다 이르나 달올 가리키는 손가락을 잊어버려 마침내 바람올 매고 그림자를 포착하기 어 려움과 같다. 그러 나 멀고 높은 데로 오르자면 가깝고 낮은 데 에 서 부터 하는 것이 니 여 기서는 글로서 표현한들 두엇 이 손상되 며 "•…48)
48) 위의 껴, Pp. 124", 125. <허;행有죠 孔훌훌;ft웹 뼈쩔共.줬 ~可dfl 짧其大킹6; 始可맺캅호월3훗 至월f뼈m心훌 玄之又玄名不可名없~可짧 앓죠~6- R m或坐志*홍g{~!lJ.1'J웠行nil t~~펄 自훌 取홈何않).
이는 眞街怨限의 碑銘에서 유교와 불교가 서로 뜻이 같다는 것을 밝히 면서 하는 말이 다. 유교가 발단을 하였고 불교가 극치에 이르렀다는 沈約의 말에 크게 공감하여 큰 것을 아는 이는 더불어 지극한 道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沈約의 말에 대한 전적인 공감이다. 그리고 불교의 心法이 지극히 현묘한 경지로서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극치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멀고 높은 데로 오르자면 가깝고 낮은 데서부터 해야 된다는 것은 불교의 극치에 이르자면 유교에서부터 발단을 하여 야 된다는 것이 다.
賊聖(孔子)은 仁에 의지하고 德에 의거하였고 座仙(老子)은 白을 알면서도 黑을 지키었다. 敎는 부질없이 천하의 格式이라고만 일컫고 賊塔成人(佛P£)과는 힘을 겨루기 어려웠다. 十約里밖에서는 西域의 거울이 되었고 一千年 뒤에는 束國의 촛불이 되었다. 親林地斑•은 務山(秘海 동쪽의 산) 곁에 있으며 仙과 偏에 예로부터 奇特한 이 많았다. 거룩할손 明H中(與의 臣下로 東方의 tr職을 맡았음)의 직책을 비우지 않았는데 다시금 佛0을 맞아 空과 色을 분별하였네.49)49) 위의 책 • PP.196"'197. <휠뿔없t乃했였 IlM띠知白I'M약r ,w, 二&從햄天下式짧휠1t1A훌 뼈力十짜필外향西域-千年後웰*~회 JJ)林Jt!!효잦山JlU 짧仙自古多홉홉 可6훌훌애l不않휩 Jl!迎佛日삶~(3).
유교는 仁과 德을 밝혔고 老子는 을 알면서도 黑을 지키었으므로 유교와 도교를 天下의 격식이라고 하였지만 불교와는 힘을 겨루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렇 게 유교와 노자의 역할을 인정 하면서 도 불교의 역 할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불교는 印度의 거울이 되었고 또한 都國의 촛불이 되 었다는 것 이 다. 신라에는 仙과 偏에 기특한 이가 많았지 만 불교를 맞이하여 空과 色을 분별하게 되 었다는 것은 불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인 것이다.
上향께 제사함이 어찌 높으신 혼령 올 항상 즐거운 곳에 받드는 것만 하겠읍니까. 上과 향授;이 잘 화목함이 진실로 드를 받들고 높이는데 있는가 하옵니 다. 하물며 玉菜光(佛防의 光明〉이 비추는 것과 金n에서 保頭이 홀러 퍼지는 것이 西域의 생령에만 한하지 않고 東方世界에 미쳤읍니디..50)50) 钊~勾, p _ 142. <蟹帝~亦容f掌握於常架之知是如验血九规货惟细届三资蚓乃王~光所知照金口1~所流傅蹄私於西土生军爱及於束方世界).
「大染福寺碑銘」에서 유교의 孝와 불교의 孝를 밝히는 말이 다. 先祖륜 위하는 孝에 있어 上帝에게 제사함보다는 好靈을 程樂에 모시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며 친족끼리 화목하려면 佛法借 資를 받들고 높이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 다. 불교는 인도의 토强 구제에만 한하지 않고 故 方 界(轉國)에까지 미쳤다는 것은 물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가령 그(强良)가 神仙을 배움이 시종 여일했더라도 백일 승천하였겠는가. 도중에 그만두었으니 그것은 다만 初의 등에 하나의 허깨비 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 대사가 당초부터 세상에 뛰어났고 중간에는 대중올 제도하였으며 종경에는 몸을 께끗이 하여 마친 것에 비교되겠는가. 盛倍올 아름답게 형용한 것을 옛부터 頭으로 숭상했는데 頭은 渴의 종류라 寂을 두들겨 드러내서 銘을 지으니 그 글은 이러하다. 道를 道라고만 하여도 常逆가 아니라 함은 풀 위에 이슬을 뚫는 것과 같고 佛에 나가야만 與佛이된다는 것도 물 속의 달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道가 떳떳함으로 佛의 을 얻은 이는 海東의 上金(無染)이다.51)
51) 위의 책 • Pp.119"-'120. <假탱仙까뼈혔 폈뼈白日上升去於中止쩌j홉뼈첼上一幻filf찌又짧짧 大I1fjttfδ於뼈 힘~於中~1B於修옷乎, 횟강~~강之形쩔古1펴乎9Ji ~1!H피tιtt1a'i1흥앓 ;fU려日可近j홉7양파 如~~째上앓 JlP 1;'}:~~{;ll Pn1ft水中꺼 화l'iiH~13~Jni,따찌f~上A).
無染의 일생을 평한 것이다. 張良은 神仙도 못되고 더욱 중간에서 그만두었으므로 그것은 다만 학의 등에 허깨비 몸일 뿐이니 大師가 당초부터 세상에 뛰어 났고 중간에는 대중을 제도하였으며 종경에는 몸을 깨끗이 한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디. 이는 미숙한 경지의 仙敎보다는 불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밝힌 것이 다. 그리고 道가 떳떳함으로 佛의 於을 얻은 이 가 海東의 無染火師라는 것이다.
세 가지 敎 중에 佛敎가 그 하나입니디. 그것 의 신묘한 뜻은 玄妙한 造化 밝히고 정미한 말은 널리 凡俗들을 깨우쳐서 권선하는 문올 열고 집착하는 그물을 풀었는지라 중생으로 하여금 귀의하고 例像을 만들어 장엄하여 느낌이 있으면 반드시 통하고,구하면 응하지 않음이 없게 하며 마음의 밭을 개간하여 복을 심고 법바다에 헤엄쳐 재앙을 씻어버리게 하였나니 이 不可思議한 일이 아니겠 읍니까.552)52) 위의 껴. P.377.
大强寺를 중수하려는 疏에서 밝힌 말이다. 補} 佛 仙 三敎 중에서 불교가 그 하나인데 불교의 진리는 신묘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종교임을 강조하고 있다.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고운은 유교나 노장의 역할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그 심오한 진리를 밝혔다는 면에서 불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신라사회의 분위기도 그러하였지만 고운은 어떠한 특정한 종교의 우위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고 드향가서로의 역할을 잘할 수 있는 면을 강조하는 것이라 보아진다. 다만여기에서 불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불교가 진리의 심오한 경지를 밝혔다는 면에 중심을 두어 살펴본 것이 다.
3 西路佛敎를 重視고운은 불교를 관념 적으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불교를 현실생활에 직 결시 켜 생 각하였디-. 자력 으로 생 활하면서 불교를 공부하고 또한 자기만 깨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널리 중생을 제도하여야 한다고 한다.위험함을 편케 여기고 괴로움을 달게 여겨서 E溫는 종이 되고 이 한 마음은 갑이 된다는 데에 둔 것이다. 이러한 중에도 오로지 위독한 병자를 돌보며 고통스러운 사람을 구출한 것올 자신의 임무로 여겨서 큰 추위나 가혹한 더위가 괴롭히고 또는 손발이 얼어 터지기도 하건마는 조금도 게으른 적이 없으니 그의 이름만 들은 사람이면 멀리 앉아서도 존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게 되어 떠 들썩 하게 동방의 큰 보살님 이 되 었으니 30여 년 동안 행사가 이러했다.'3) 위의 씌, p.l02.
加强無染의 생 활을 밝힌 말이 디-. 無染의 생 애 속에 서 이 러 한 중생구제의 면을 강조한 것은 고운이 중생구제를 해야 된다는 뜻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렇게 강조한 것이라 보아진다. 위독한 병자를 돌보며 고통스러운 사람을 구출한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긴다는 것은 중생구제의 불교적 사명을 강조한 것이라 보아진다.
病을 근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空을 깨닫게 하고 어진 사람을 어질게 여 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執濟을 버리게 하였다.~4) 위의 껴, P.191.
智證道想의 중생제도를 높이 찬양한 말이 다. 병든 사람에게 괴로
움을 없애 주고 어진 사람을 존경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偏執을 버리게 하는 것이 불교의 사명 인 것이다.
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날마다 세 번 반성하게 하고 뽑을 짓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홉 가지를 생각하게 하였다.5’) 위의 껴 • p.183.
智證道我의 행적을 밝힌 말이디-. 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날마다 세 번 반성하게 한다는 것은 불교적 실천을 강조하는 것 이 다.
굶주려 부르짖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배부르게 하고 취해서 넘어진 사람으로 하여금 능히 깨어나게 하였으니 마음 공부를힘쓰게 한 것이다. 56)56) 위의 껴· P.181.
굶주려 부르짖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배부르게 한다는 것은 佛敎敎學에 자력을 얻게 한다는 것이며,취해서 넘어진 사람으로 하여금 능히 깨어나게 한다는 것은 禪學을 통해서 스스로의 깨침에 의하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게 한 것이 다.
이것은 대개 밖으로는 君臣을 돕고 안으로는 부모가 하늘에 태어나게 하는 데 이바지하며 목숨을 잇는 사람으로 하여금 仁을 일으키게 하고 노래부르는 이를 상주는 사람(本樂에 마진 사람)으로 하여금 허물을 고치게 하였으니 植越의 我松인 것이다.57) 위의 책· p.187.
밖으로는 君臣을 돕고 안으로는 부모를 生天케 하며 곡식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 인간에게 仁을 일으키게 하고 잘못한 사람은 허물을 고치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孝와 仁을 강조한 것은 불교를 생찰에 직결시키는 뜻이라 보아진다.
山백성으로서 들도둑이 된 자가 있어 처음은 감히 교화에 항거했으나 마침 내 능히 대사의 교화에 좇아 감화되 었으니 定水( 定)를 깊이 헤아려서 미리 廣山(地勢로 본 版陽山)에 물을 댄 큰 힘이 아니겠는가. 판올 자른 사람(들도둑을 일음)으로 하여금 我理를 표시하게 하고 能 파는 사람(安錄山과 같은 無 한 도적)으로 하여 금 패心을 제어히-게 하였으니 整心을 개발시킨 것이다.38)
58) 위의 씌, P.188.
智證道述의 교화륜 높이 평가한 것이다. 특히 의리를 지키게 하고 邪心을 제거하게 한 교화를 普心의 개발이라 한 평가는 고운이 불교의 윤리적 관동을 강조한 것이라 보아진다.
은헤를 베푸는 자로 하여금 날로 策w하게 하고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람처럼 따르도록 하였으니 은혜에 대한 보답을 알게 하였다.59) 위의 껴 , P.185.
의를 행함을 강조하고 은헤에 보답함을 중하게 여긴 것은 고운의 불교적 윤리 의식이 강함을 보여 준다.
이는 오직 지헤의 거울이 갈아 놓은 둣하고 戒律의 구슬이 티가 없어서 제도하기를 정진하여 忠炎의 節操를 협화하였고 慈悲의 광명은 효도하고 우애 하는 規範을 융화한 것 이 다. 그러 하기 때문에 神人이 무색할 만한 공을 세웠지만 그 務을 자랑하지 않았나니 君子는 기회를 노리지 않아도 능히 그 어버이를 높이게 마련이다.60)60) 위의 책 , p.263.
法故의 윤리적 실천을 강조한 것이다. 효도하고 우애 하는 규범을 세웠고 큰 공을 세웠지만 그 普을 자랑하지 않는 군자의 도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배움에 게으른 이로 하여금 通巧ii(머리를 노끈으로 묶어 잠을 행)의 뜻을 일으키고 위태로운 데 멸어지게 된 자에게 자비스런 구원의 손길을 입게 하였다.61)
61) 위의 책 • p.271.
배움에 게으른 이로 하여금 머리를 노끈으로 매달아 잠을 깨게하여 배우게 하는 뜻을 일으키고 위태로운 데 덜어지게 된 자에게 자비의 구원의 손길을 뻗친다는 것은 중생제도의 불교적 사명 을 강조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운은 불교의 윤리적 실천을 강조하였으며 중생 제 도라는 불교적 사명 을 높이 평 가하고 있 다.5고운은 佛敎, m敎,道敎라는 三敎에 대해서 어느 목정한 종교의 입장에 서지 않는디-. 일반적으로 알려 진 바와 같이 그는 大付;•敎人이며 앞의 불교 深述論에서 살핀 바와 같이 불교도 깊이 이해하고 있으며 도교에 대해서도 神仙의 행장에 뜻을 두어 대성하기를 바랐다62〉는 것으로 보아 도교에도 깊은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雜郞碑序J에서는 風流道라는 입장에서 H敎를 이해하려는 경향도 보인다. 그러므로 고운의 三敎觀은 三敎가 각각 제 구실을 하면서 서로가 조화를 이루는 三敎益行論이라 여겨진다.62) 위의 껴. p.371.
학자들이 혹 말하기를 佛敎와 偏敎의 敎務 설하는 것 이 흐름이 나누이고 强가 달라서 둥근 구멍에 모난 나무를 박는 것이라 하여 서로 모순되어 각기 한 모뭉이만 고집한다고 한다. 내가 시험 삼아 논하건대 詩를 설하는 자는 文(글자〉으로써 辭(말)를 害하지 아니하고 辭로서 瓦(뜻)을 -否하지 아니할 것이니 禮記에 이른바 말
이 어찌 한 갈래뿐이리오. 대저 각기 마땅한 바가 있는 것이다.
63) 위의 쩍. pp.123"'124. <而핑좀或쩌身짧멧태파之짧값lμ 分파있‘뾰 때앓方빼 互깨커"m 守fii1-없 ‘i:짧짧之tiSt캅흉킹~ 不以호·렬함 不以흙뿔志~m윈l~B보一휩而O ::i하各有所짧).
학자들이 블교와 유교는 흐름이 나누이고 能가 달라서 둥근 구멍에 모난 나무를 박는 것이라 하여 서로 모순되어 각기 한 모둥이만 고집한다고 하였지 만 고운은 불교와 유교는 각각 그 마땅한 바가 있어서 서로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디. 여기에서는 불교와 유교의 관계를 말하였지만 기본원리 면에서 보면 도교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座山의 恐述이 論을 지어 말하기를 如來와 周公 孔子가 출발한 것은 비 록 다르나 들아가는 바는 한가지 이 다. 지극한 이치에 동달함에 있어 능히 들을 겸하지 못하는 것은 物이 능히 겸하여 용남하지 못하는 때문이다. 沈約의 말에 공자는 發端-1-하였고 釋氏는 街致가 된다 하였으니 참으로 그 큰 것을 아는 이로서 비로소 더불어 극진한 도를 말할 수 있다 하겠도다.64)64) 위의 책 , P.124. <故핍쩔앓펴헬캅 쐐如末之맹찌孔훌훌앓흉 所합-j윗 II홉不~~훌· 物不~~~受故也••••.•).
强述의 논을 빌어 불교와 유교가 출발은 다르지 만 돌아가는 바는 하나라는 것을 강조한다. 모든 종교가 하나로 돌아간다는 기본원리가 중요한 것 이 다. 하나로 돌아간다는 인식 이 천저하면 모든 종교는 융합될 수 있을 것이다. 지극한 이치에 있어서는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유교는 發端을 하였고 불교는 極致에 이른다는 沈約의 말에 크게 공감한 것도 바로 이 하나로 돌아간다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 다.
그리고 불교의 心法올 玄之文玄이라고 한 것은 노자의 逆-I- 玄之文玄이라 함과 상통하며 공자의 子飮無言 天何言故라 함을 佛此와 延菜의 姑花微笑로 직결시킨 것은65》말할 수 없는 경지라는 입장에6~) 위의 객, PP.124"'125.
서 상통시킨 것이다.
玉常올 방위로 나눙에 東方에 배치되는 것을 仁이라 하고 三敎의 명칭을 세움에 印度에 나타난 것을 佛이라 한다. 仁:心이 곧佛이 니 佛을 能仁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당연하다. 東國의 유순한 性源을 인도하여 迎昆羅術國의 자비스러운 敎海에 통하게 하니 이는 진실로 돌을 물에 던지 고 비 가 모래를 모으는 것과 같이 쉬운 것이다.66) 위의 껴, p.168. <序日죠?파 分따配뼈(짜)方휴·日仁三었효名짧훔域휩fS 倒t:心nljf힘 센b 텀 fjfi仁JlUtY. 낀~till~* 쩌{호휩 흥쏠설걷¢힘.홉i{E. ~d힐 ~~훌石찮水F함짝중칩~t.~).
東方에 배치되는 것을 仁이라 함과 같이 印度에 나타난 것을 불교라 한다. 유교의 仁心이 바로 佛인 것 이므로 佛을 能仁이 라 한다는 것이다. 能仁이란 仁올 能히 실천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유교의 仁과 佛心은 하나인 것이다. 여기에서 고운의 偏牌一致의 폭이 넓은 사상을 볼 수 있는 것이 다. 그리고 의 유순한 141原이라는 한국과 자비스러운 敎海라는 불교를 직결시키고 있다.
述!策의 참 宗旨를 강연하여 龍과 더불어 德을 견주게 되고 m敎의 좋은 가르침을 거양하여 뱄隊에 때를 잃지 않게 하며 上古의 風을 잘 일으키고 길이 大同의 敎化를 이루어서 무릇 털을 이고 이빨을 머금은 자와 물에 잠기고 공중에 나는 것들이 모두 慈悲를 입 어 모두 능히 解脫케 하려는 것이다. 67)67) 위의 껴, p.377. <해뺑葉之따宗뼈뺑比짧 멸짧꿇之월왔 합不失時3'l~上古之B3. 7k致大同之化凡於~앓승짧 ~~잡캉경t찌 참f.H흥원: 앓t볕R¥!llt).
불교와 유교를 발달시키고 上古의 가르침도 잘 일으키어 大同의 교화를 이루어서 동물까지를 포함한 一切衆生을 모두 해탈케 해야된다는 것이다. 고운은 불교와 유교의 융합뿐만 아니라 상고의 가르침까지도 융화하며 또한 인간의 구제에만 그치지 않고 一技j창보의 구제까지를 생각하고 있다.
곧 우리의 태평는 사람들의 성질이 유순하고 기운은 발생시킴에 적합합니다. 산과 숲에는 고요히 닦는 무리( )가 많아서 仁으로써 벗을 모으며 강과 바다는 朝宗의 형세를 끼어 착함에 순종하는 것이 믈의 흐름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군자의 풍도를 드높이고 불교의 도덕에 감화되어 젖는 것이 마치 붉은 진흙(紫犯) 이 옥새를 따르고 금이 용광로에 있어 만들어짐과 같나이다. 임 금과 신하는 뜻을 三歸(佛法制에 밝히고 관료와 서민은 정성을 广度(穴波羅密)에 기울이며 나아가서는 國城까지도 아낌이 없이 塔廟를 많이 세우셨나니 비록 남섬부주의 바닷가에 있으나 어찌 充率 천상에 부끄러우리오. 뭇 미묘한 것 가운데 미묘한 것을 무엇으로 다 말하겠읍니까. 69)
68) 위의 책 , PP. 142""143. <때양太쭈짧j펀也앉웰갖1J{ ~t읍짧生피林多깜있之웰 以仁t압1Zn:훌훌~월8宗之챔 從깜如하E 故~~첼子之Ii. i'(m월王之컸! ~:i훨iIe從TU ~~짧 而짧君GIl:흩志於三짧 土應짧誠於六뾰 훌乃E생 ~et흩 1Jl!令훌입#I~훌 앓홉lO£niHljfjH훌 휩옆꺼홉B史多天上mkJ>之kP 何名可名).
한국은 졌文T이기 때문에 仁에 배당되어 성질이 유순하므로 유교를 발전시켜 君子의 風道를 높이고 또한 불교를 발전시키는 것이적절하다는 것이다. 모두가 弗• . 했에 귀의하고 이없을 실천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블교와 유교가 원융하게 발전해 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天性이 中華의 風度를 따르고 몸이 지혜의 甘器에 젖으시어 선조 높이 는 도를 받들며 부처님께 귀의 하는 정성을 기울이셨다.69)69)위 의 껴, p.1 59. <~Inz~ 앓 l(Ht 3. 앓값었월 !it#f.펴之앓 뼈힘앓之앓).
中華의 風度라는 유교와 지헤의 甘强라는 불교를 깊이 수련해서 선조를 받드는 유교를 실천하며 또한 지혜를 밝히는 불교를 실천해야 된다는 것이다.
드디어 지혜의 횃불을 얻어서 빛이 玉;乘에 통하고 유익한 말을 얻었으매 맛이 穴經에 배불렀다. 다투어 千門으로 하여금 按으로끝어오게 하고 능히 一國으로 하여금 仁을 興起하게 하였다.
70 ) 위의 쩍· P.l23. <迷씹않필l씨光없표폈 값함께味않六짧 행힘千門入휩 않令一E휠짜仁).
불교의 진리를 깨쳐서 불교 전체를 통탈하고 유교의 ”經을 통딜해서 나라 匕으로 발전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저의 청 을 들어 주시 매 드&가 아울러 행 하는 것이 기쁘고 승려가 기삐 부르짖으매 한 부처님이 세간에 나왔는가 놀래지읍니다.71)71) 위의 씌· P.306. <元갯펀압 짝三&之효行홉呂歐呼셨一圖之或버).
이라는 승려를 僧正으로 천거하여 허락되었을 때에 하는 말이다. 이는 E敎의 병행을 강조한 것이다.
周禮 瓦官條의 職名 중에 投人과 探人이라는 직책이 있는데 이 직책명을 智保의 按玄記와 法成의 探玄記에 직결시켜 의미지우고 있다. 이는 블교와 유교를 통달해 서 불교와 유교의 의미를 일치시킨 것이다.72) 위 의 껴 • P.2SS.
고운은 유 • 불 • 선을 관통하는 궁극적 이 상 또는 근원을 할라고 표현한다. 즉 그는 道라는 개 념 을 근본으로 삼는 道家思想뿐 아니라 유교나 불교에도 다같이 M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경향은 고운에게서 새삼스럽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店代의 사상계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유교는 도교와 궁극적 사유를 공동기 반으로 하는 만큼 유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을 절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으며 불교 또한 스스로〈道의 敎〉라고 칭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운은 유교와 불교의 공통된 귀일처가 있다고 보는 것에서 생각하면 삼교합일적 사고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强述의 말을 빌어 如來와 孔子가 발단과 究究이 비록 다르지만 귀착되는 바는 한가지 법 이 다7}〉라고 하였고 仁心은 곧 佛73) 위의 책· p.124. <如之따때 ¥L짧줬짧~J한짧一짧).
이니 佛을 가리 켜 能仁이 라 함은 당연하다라고도 하였다. 川 이 밖에 그는 佛이 말한 心法은〈玄하고 또 玄하여 이름으로 이름할 수 없고 說하려도 說할 것이 없어서 비록 달을 얻었다 하나 손가락올 혹 잊어버려 마침내 바람을 매고 그림자를 포착하기 어려움과 같디-고 하여 노장철학적 용어를 빌어 불교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수사학적 방편이 라고도 볼 수 있으나 元陳가 노장철학올 수용했던 신라불교의 전통에 서 본다면 何i • 의 상통사상으로 해석 하는 것도 가능하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앞에서 그가 소게했던 强速이란 佛何의 사상적 경 향이 다. 그는 유가인물인 陶制明과 격 의없는 교제를 하여〈虎授의 H笑〉라는 故市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러 한 사실과 고운의 三敎融合을 시사한 언급과 종합하면 三敎合一사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
75) 위의 껴· p.124. <佈짧心양 玄之J(~ 名不可名짧좌可짧 탑j;;HJ꺼 ’월핑2 坐1늦$용헬係.m. ~κ~行00).그러나 고운은 삼교의 무차릴적 동일성 만을 주장한 것은 아니 었다. 예컨대 유교와 불교의 성격에 관해서는〈孔子는 그 단서를 발명했고 釋氏는 그 극치에 다다랐다〉씨고 말한다. 이는 은연중 불교의 가르침이 더 심원함을 암시하고 있으나 유교와 불교의 사상적 특성을 지적한 것으로도 풀이된다. 즉 유교는 비근한 일상생활을 통한 下學處를 밝히 고 불교는 초세간적인 심원한 上述處를 주로 강조했음을 인식한 것으로도 보인다.
76) 위의 껴, p. 124. <孔훌훌其웰 짧훨;l'tf{).
나아가 고운은 유 • 도 家의 공통점 을 파악하면서 자신은 구애없이 넘 나들 수 있다는 신념을 표명한다. 즉 그는〈날로 세 번씩 내몸을 살펴서 몸을 닦는 것을 子의 규모를 힘써 따르고 한마디 말을 마음으로 공경하는 것은 伯陽(老子)의 끼친 교훈을 이행한다〉끼라고 말한다. 이 내용과 삼敎의 병행을 기뻐한다는 술회를 종합하면 그가 삼敎의 개성을 긍정하고 그 병행의 필요성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다.
77) 위 의 껴 • p.344. <身홉三4월 빼꽉잠子之않 心1i4-합 永해{떠쩌之l().
78) 위의 껴· P.306.그런데 고운은〈補: 道:敎는 부질없이 천하의 격 식이라고만 일컫고 賊얍眞人(佛)과는 힘올 겨루기 어려웠다〉고 말함으로써 불교를 더 높이 평가하는 표현올 쓰고 있다. 이는 佛僧의 碑文이라는 목수한 여건의 반영으로 볼 수도 있으나 불교의 진리를 심원하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眞稱禪師의 위대함을 찬양하기 위해 노자에 비유하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79) 위의 책 • P.197.
나라에 현묘한 道가 있으니 風流라 한다. 그 敎를 창설한 내력은 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실은 三敎를 포함하여 究生을 接化하는 것이다. 들어 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 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後'司窓(孔子)의 뜻과 같은 것이요, 無爲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敎 행함은 周柱史(老子)의 宗旨와 같은 것이요, 惡한 일은 하지 않고 普한 일은 받들어 행하는 것은 空乾太子(保述)의 敎化와 같은 것이다.80)
80) rr三댐史잃.0. 쩔 10, 新월本記, <댐有~Jc}之힐 日l!'~ ~敎之끊‘ 따詳仙史1및乃包含三훌t t훌.~흉호 且如入nu*=於흉 버 AU)빙於댐 씬i체冠之룹i!1.lJ흩앓웰之헤I 行不당zit 찌柱史之宗i!1. 융흩~~f\i lf~편i암行엎양太子z{ιi!1.>.
신라에는 고유의 玄妙한 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風流라 하는데 유교,불교, 도교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가정에서 孝하고 국가에 忠하는 것은 공자의 유교와 같고 無爲로 일을 하고 말없이 敎를 행하는 것은 노자의 도교와 같으며 악을 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은 석가의 불교와 같다는 것이다. 이는 유 • 불 • 도가 융합하여 風流道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風流라는 道가 群生을 接化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가르침의 모습이 E敎 각각의 敎旨와 같다는 것으로,이는 고운이 유교,불교, 도교의 각 영역을 인정하면서도 三敎가 병행하는 모습이 風流라는 현묘한 도 속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爲郞碑序」만올 중심하여 보면 風流道 속에 三敎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고운의 전체적인 문헌에 나타난 三敎益行論올 보면 유교,불교, 도교 각각의 영역을 인정하면서 서로 병행 되어야 한다는 뜻이 역력 하다.
지금까지 風流道의 三敎論에 대해「爲郞碑序」만을 자료로 하여 언급한 많은 논의는 고운의 전체적인 三敎述行論의 입장에서 재검토해야 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6 孤雲의 佛敎 및 드敎施行論의 의의이제까지 일반적으로 고운은 유학자이며 대문장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운의 불교관을 살펴보면 유교나 도교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특히 불교를 심원하다고 생각하였음이 밝혀졌다.『법장화상전』은 단순한 법장의 전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華嚴의 直心十에 의하여 인간 생활 자체를 불교화한 것이며 智姑과 法藏의 화엄사적 역할을 검토하여 중국화엄사를 정리하였으며 불교의 학문적 연구에 그치지 않고 불교 을 드러 내어 종교적 신비성을 강조하였다.「四山碑銘J을 통해서는 각 神師들의 禪的 체험을 파헤쳐 신라하대의 神宗史를 정립하였으며 心學과 學의 문제를 논의하여 P 學이라는 문장도 중요하지만 心學이라는 禪的 체험을 주체로 생각하였으며 유교나 노장을 불교와 비교하여 불교가 유교나 노장보다는 차원이 높다는 불교 深述論을 전개하였으며 불교를 이론적인 연구에만 그치지 않고 실천을 통해서 체험하고 생활 속에서 불교를 관용해야 된다는 越佛敎論을 주장하였다.향교에 있어서는 불교와 유교와 도교라는 향에 대해서 어느 특정 한 종교의 입장에 기울어 지지 않고 H敎를 병 행 해 야 된다는 敎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고운은 일찌기 중국에 있을 때에도 길이 大同의 교화를 이루어야 된다는 입장에서 불교와 유교와 도교의 병행을 주장하였다.신라에 돌아와서도「爲郞碑序」를 통해서 風流道를 주체로 하여三敎를 병행해야 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고운의 三敎益行論을 연구함에 있어서는「器郞碑序」만을 자료로 하기보다는 고운의 모든 문헌을 자료로 하여 연구해야 될 것이다.
「孤雲의 佛敎觀」토론 개요
문제제기 :『法1■故和尙傳il을 통해서 고운의 불교관을 찾을 수 있올 것인가.토론내용 : r法飯和尙傳』은 법장의 생애에 대한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華嚴의 直心十述의 내용에 의해서 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불교관을 찾을 수 있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直心十鼓의 원칙에 따라 法商의 생애를 十科로 나누어 내용을 구성하였는데,이를 인간 생활의 불교화로 본 것은 다소 두리한 관점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法藏의 생애를 한 인간의 일생이라 보았을 때 인간의 일생올 화엄의 直心十務化한 것은 고운의 불교관의 기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그리고 智派과 法賊의 역할을 中國華嚴史의 정리로 본 것은 다소무리한 견해라는 의견이 있었으나,紙과 法斑이 中國華嚴史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화엄사의 정리로 볼 수 있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또한 符齡이나 法船의 强異性이 어떻게 고운의 불교관이 될 수 있느냐는 반문이 있었다. 그러나 고운이 이러한 불교 堅異性읍 강조한 것은 그 자신이 불교 述異性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강조한 점으로 이해되어 그의 불교관이 될 수 있다고 의견이 집약되었다.문제제기 :「四山碑銘_J은 여러 禪師들의 傳記인데 여기에서 어떻게 고운의 신라불교관을 찾을 수 있겠는가.
토론내용:「四山碑•銘」은 師들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지만 고운이 선사들의 禪的 체험을 특히 강조해서 구성하였기 때문에 이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고 신라 불교를 평 가하는 내용이므로 여기에서 신라불교관을 찾을 수 있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는 華嚴敎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입장임에도 선적 체험에 대해서는 극치의 찬탄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의 신라불교관은 禪宗 우위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문제제기 : 심학주체론과 불교심원론과 실천불교론과 E敎益行論에대해서 타당성 여부는 어떠한가.토론내용 : 〇學보다도 心學을 주체로 하면서 p 學도 활용해야 된다는 면에서 心學을 주체로 하였다는 점에 의견을 모았고 불교심원론에 있어서는 고운은 오히려 유교나 도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유교나 노장과 불교를 비교할 때 불교를 보다 진리가 심원한 종교라고 보는 점에서 불교심원론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실천불교론에 있어서는 고운이 불교의 실천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는 데 근거하여 실천불교론이 인정되 었다.H敎M行論에 있어서는 고운의 기본 입장이 H敎의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H敎를 하나로 보아 병행해야 된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 를 보았다. 그러 나「爲郞碑序」만을 자료로 하여 風流道 속에 H敎의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이제까지의 논의는 고운의 모든 문헌을 통해서 연구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왜냐하면 고운의 모든 문헌올 살펴보면 H敎의 특성을 중요하게 인정 하면서 병행해야 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운의 H敎益行論은 더욱 깊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孤雲의 道敎觀
金洛必1 연구자료와 접근방법孤理 植致述의 사상은 매우 폭이 넓다. 그는 유 • 불 • 도 삼교의사상을 해 박하게 섭렵했을 뿐 아니라. 우리 나라의 고대사상에도 깊은 통찰을 지녔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다방면에서 접근이 가능하며 도교사상의 경우도 한 분야를 이룬다.특히 그는 우리 나라에서 저술된 道敎史깐에서 道脈을 전술한 인물로 기록할 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도교적 소설에서 주인공으로묘사되는 등 민간들이 나 도교인사들간에 은연중 仙人으로 믿어져왔다. 이러한 면면히 전승된 믿음뿐 아니라 그의 문집에는 비록 중국이 무대이긴 했으나 도교의식에 사용된 기원문,즉 齋詞가 다수남아 있다. 나아가 그의 詩에는 도교적 자연주의와 仙界를 동경 하는 심경이 드러난 것이 많다. 이러한 자료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같다. 海東傳道錄,海東異策,靑部染, 按回史話 등의 道敎史판植孤s傳과 植孤民江山曲佳究筆耕供에 수록된 道敎齋詞 eh山碑銘과 親郞碑序에 실린 老E哲學에 관한 언급孤我의 詩이중 제 1차적 자로라고 볼 수 있는 것은 ③,④,⑤ 등이나 ⑤는 고운의 문학사상을 는의하는 분야로 돌리고 여기서는 먼저 ③과 ④의 자료를 중심으로 그의 도교에 관한 인식 을 검 토하기 로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할 것은 그가 지은 도교 齋詞는 그의 상관인 商耕을 위해 대필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고변의 사상적 영향도 매우 강력했으리라 보여지므로 그 작품을 고운 자신의 고유한 독창적 사상의 산물로는 보기 어렵다는 점이 다. 그러 나 이 자료를 제외하고 고운의 도교관을 논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①,②의 자료는 조선조 이후에 성립된 것이므로 고운의 도교관을 파악할 수 있는 직접적 자료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자료들은 고운이 한국 도교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알려주는 좋은 근거 가 되 므로 이 역 시 간접 적 자료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 각된다. 따라서 여기 고찰에서는 먼저 ③,④의 자료를 검토한 후 ①, ②를 통해 나타난 한국 도교에서의 그의 위치를 밝혀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에 관련된 사항으로서 한국 고대사상의 성격과 고운이 한국 고대사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도 살펴보기로 한다.그런데 도교사상을 검토하려는 경우 선결문제의 하나는 철학적 도가사상과 종교적 도교의 구릴문제 이다. 그러 나 여기서는 양자를구별하지 않고 도교사상에 포함시켜 고찰하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고운 당시에 양자의 구멸의식이 없이 그 사상들을 수용했다는 데도 있지만 폭넓은 사상사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편이 좋다고 보았기 때문이다.齋詞에 나타난 道敎思想1 南詞의 의의와 唐代道敎최치원의 도교사상을 엿볼 수 있는 일차적 자료로서『佳究筆耕染』에 실려 있는 詞 15 수가 있다. 이 글은 그가 당에 있을 때 도교의식인 究?를 거행하면서 지은 기원문으로서 그 당시의 도교사상을 이해하는데 나 그의 도교 인식 을 파악하는 데 소중한 근거가 된다.
그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 는 상관인 고변은 方術과 部金術에 강한 흥미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 관심은 道上인 民用之를 만남으로 써 더욱 깊어진다. 用之는 고변을 이용하여 세속적 권력올 강화하려고 도모하였으며 고변은 그로 인해 큰 희생을 치르었다고 전해진다.1) 그러나 고변의 도교사상에 관한 명확한 자료는 찾기 힘들며 고운이 쓴 齋詞에서도 고변으로부터의 개인적 영향보다는 당시의 일반적 인 도교사상의 영 향이 많은 부분에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1) 宫川向志,向3因宗敌史研究JJ . ~O 101,'! r店* η 白皮使尚W è 方土吕用之j. 同朋舍, 1983, P.357 0] 讲社主.~主!毯。1 店创立2 -t- 叫~ ..!三~.l.l-兮牛令斗苟叫.. 是叫付主云在三阻. r也致迫SJ ;在fa,思想研究j. ({社号址。1 号咛>> ~J]24"J , 电f号链。1 叶刻, 1986, p . 229 01 讲社王.在三阳五牛是.:l.~三五斗兮牛4争斗习〈去在日fJVJ且LZ司号卒二三叫l 哇古;l-.:ïZ.在店朋善于主芮脐~]结替。1 裂主叶守1 号二字七千司吟玛~Z舍~仙服斗咽气r s.l~ 仓7l- ~ .Aào] 3.巳l ..l!.丛..l!.~吟.
齋는 附반經策志의 기록에 의하면 초기에는 r深齋<3 즉 道士의 증서 인 紋을 받을 준비를 하는 수행자가 자신의 죄과를 신령들에게 고백, 참회 하는 예 로 시 작하였다. 그 의식 이 차차 확대되면서 선조의 공양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2)
2) 边散1 , r道敬主t主t~ 忆力、j,卒向出版社. 1983, p.21S.
北周時代에 성립된 도교경전인『無上秘要』에는 당시의 도교의식 전반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大成上元齋,大成中元齋, 太眞下元齋 등의 이름도 거론된다. 최치원문집에 실려 있는 上元齋詞, 中元齋詞,下元齋詞는 바로 上,中,下元齋의 기원문으로 생각된다. 최치원이 振한 齋詞의 내용을 보더라도 개인의 죄과를 고백하는 참회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지만 국태민안을 출원하는 내용이 위주가 되는 것으로 보아 초기의 수행의식으로서의 齋는 아닌 것 같다.
이 화와 유사한 의식에 가 있다. 究는 여러 신령들에게 탄원하여 그 신령들이 최고신에게 탄원하도록 하는 간접적 의식이라면 醜는 직접 최고신에게 기원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그후 이러한 구벌은 엄격히 지켜지지 않은 듯하며 오늘날에는 齋는 死者를 위한 의식으로,醜는 生者를 위한 의식으로 구별되고 있다. 3)
3) 金路짧. r뼈홉핍웹에 대 한 종교학척 고한J. Ii'道왔와 한국사상JJ. 한국도쿄사상엔-r.:f]현, 엉 양사. 1987. P.l09.
고운이 찬한 15수의 齋詞는 직접 최고신에게 탄원을 올리 되 死者뿐 아니라 生者의 평온을 빌며 그 자신의 죄업을 고백하는 수도 자로서의 참회 도 포함하고 있 다. 따라서 醜와 엄밀하게 구별되는 齋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단순한 수행의식도 아닌 복합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활약했던 店代의 도교교단은 어떠한 상황이었던가.
後液에 太平道와 五:斗米道란 민중도교의 모습으로 최초로 교단형태를 띤 도교는 我供의 砲朴子와 貌伯陽의 周易參同契를 통해 심화된 신선사상을 흡수한 후 南北朝時代에 본격적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北M의 窓譜之가 세운 新天師道가 그것으로서 이때 종교의 례, 교단조직,교법의 체계화 등이 이루어진다.그후 도교는 차츰 성행하게 된 불교와 사상적 교섭 관계 를 통해 차츰 정비되면서 江南 지역에 上淸派라는 새로운 도교교단이 등장하는데 여기에 이르러 신앙체계는 일단 완성된다. 店代에 이르러서 는 開祖 季刺이 老子와 同姓인 것이 부각되어 도교가 국교화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太宗代에는 도교가 앞서고 불교를 뒤로 놓는다는道先僧後의 의식이 정착되었다. 이와 아울러 商宗代에는 관리의 등용시 거치는 시험에 道德經을 추가함으로서 도덕경은 지식인의 필수 교양과목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이렇게 도교가 왕실의 보호를 받음에 따라 도교는 국가의 안녕을 비는 일종의 호국종교의 성 격으로 변모하였으나 남북조시 대보다 교학상의 발전이 두드러진 혼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호국적 성격으로 인해 당대의 도교사원,즉 道觀에서는 국가의 태평이나 조상의 명복을 비는 많은 의식이 거행되었으니 고운의 齋詞도 그러한 의 식 에서 봉독된 기원문이었다. 고운의 齋詞에 나타난 의식의 성격은 아래와 같다.黃錄m : 널리 일체중생의 구제를 축원하는 의식三元齋: 1월 15일(上元)에는 天官, 7월 15일仲元)에는 地官, 10월 15일(下元) 에는 水官에 제사드리며 자기의 를 참회하는 의식,이 天 • 地 • 水에 제사드리는 의식은 五斗米道를 세운 張道段으로부터 비롯되는데 그는 참회 의식으로 세통의 문서를 天 .地 • 水에 보고하는 형식을 창안하고 이 문서 를 三官手:;!T라 부른바 있었다.
이 밖에 고운의 齋詞에 보이는 應天節은 왕의 탄생 일로서 구체적으로는 당 18대 倍宗의 생일이다. 究?詞에 나오는 聖神晩成仁哲明孝皇帝란 호칭은 依宗의 존호 가운데 乾符元年(A.D 874) 11월부터 光啓元年(A.D 888) 2월까지의 I2년간에 해 당된다. 그런데 倍宗의 탄생 일은 威通 3 년 (A.D 862) 5 월 3 일이므로 이 기간의 應天節은 A.D 875〜884 사이 의 10회 이 다. 이 중 3회의 齋詞를 고운이 授한 것이다.4) 字组股. r青同研究J. Ii'哇号叶是夸Jl 7毡,电f气占叫补牙叶毯子企. 198'. p.8.
그의 齋詞를 살펴보면 스스로를 道士 또는 臣으로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道士로 호칭하는 것은 도교수행자의 신분으로 왕을 대신하여 국가의 안녕 을 축원하는 경우이며 (胞天節의 경우),臣이란호칭은 절대적 존재인 元始天符 앞에 자신을 낮추는 신앙인의 입장을 나타낸다(元齋,黃紋齋) 따라서 전자의 제문은 공식적 축원의 성격이 강하다면 후자에는 참회와 다짐,축원의 내용이 복합되어 있는 점에서 그 성격이 구별된다.
원래 중국적 사유의 전통에서는 천계의 질서와 인간계의 질서가 상호 관통되어 있다고 믿어졌다. 따라서 天子와 臣民의 관계는 바로 上帝와 인간의 관계와 동일하다고 간주되었다. 고운의 次f詞에서 臣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도 이러한 지상의 질서를 천계에 투명한 데 지 나지 않는다.그런데 이러한 도교적 의례 외에도 그의 문집에는 불교의식에 사용된 제문도 실려 있다. 불교의식 에서 그는 관직자의 이름으로 舍利佛,觀音卷菌 등에게 청원을 올리고 있다.10 이와 대조해 볼 때 도교의 의식에서 그가 臣이란 겸칭을 사용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그의 齋詞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 째 또는 최고신의 덕을 찬양하는 내용,둘째 기원을 올리는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의 보고, 셋째 자신의 게으름과 부덕을 참회하며 새로운 다짐을 하는 각오,넷째 모든 사람에게 널리 은덕을 내려달라는 청원 또는 자신의 수도가 원만히 이루어지도록 護念하이 주시라는 기도 등이다. 이 내용들은 비록 단편적이긴 하지만 도교에 관한 그의 인식을 잘 드러내 준다.
2 齋詞에 나타난 道敎敎學고운의 究 詞에는 도교의 최고신인 元始天於의 이름이 나타나며, 이와 지접적으로 관린된 太上三幻 의 명칭도 보인다.紫抵宮 안에 洞妙齋를 읍리되 사흘 낮과 나흘 밤 경을 읽고 도를 행하면서 本府의 화재를 물리치기 위하여 은헤를 비는 글을 I植無元始天好께 윤리 나이 다.j) Ii'짧文흡찮全~g , r얹火원랩」의 내용, 상t文化깐t~J , 1972, P.370. <於짧핸홉內Gmi꾀i\\ltl>lrt 三B 四흉 협£!行쳐:1 11& ij~깜1감火~ i1fJ렌投홉 上짧s.샀元始天~).
太上三餘과 十方衆聖들이시여 자비로 음덕 을 주시고 소원을 이부게 하시어……6)
6) 강윤 껴, p.359. r下元짝固J , <~ε太上三월十方썼뿔 玄훤見웰 良뼈克짧).
太上三짝.파 十方썼뿔이시여 곡진허 현요한 깅·융올 주시어 간철한 정 성 융 이 루어 주소서 .....• 7)
7) 갇응 껴, P.368. r下元찌詞J. <~ε太上三# 十方았뿔 뼈파玄혈 세!찮;P}£,%).
太上三웰과 十方쨌뿔.둘께서는 곡진히 현묘한 은택올 주시고 ••••••8)
8) 감윤 씌, P.370. r따火밝돼J. <~ε太上三~ 十方썼앓 JIl1 m玄힘>.
元始天於이 도교의 최고신으로 받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남북조시
대 上淸派의 音현 무렵이었다. 北到! 起;1之에 의해 형성된 新天師出에서는 老子가 太上老君으로 신격화되어 최고신적인 위치를 접하고 있었다. 太上老君으로부터 元始天轉으로의 신앙대상의 변화가 언제 이루어졌는가는 분명히 알기 어 려우나 上淸派의 경전인『芽山志』에 元始虛立天濟이 최고신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남북조 말엽으로 추측된다. 元始天免의 위치는 上淸派를 대성한 陶松供에 의해 보다 확고해진다. 그는 도교에서 숭배되는 神들의 체계를 정리한 IT成'쇼:位菜四그라는 저서를 남기고 있는데 元始天特을 정점으로 하고 7 단계로 신을 분류한 것이 다. 그 중 太上老君의 위치는 제 2 단계의 신으로 위치가 정해져 있다.
그런데 上油:派에서는 도교경전의 분류방법인 三洞四補의 체계륜 수립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중 三洞은 洞眞, 洞玄,洞神으로서 후에 는 이 三洞의 설 법교주가 각각 元始天幻:의 化身인 天炎君,巡, 神次감으로 믿어졌다. 즉 元始天與을 三位一協的 신으로 선명하게 된 것이다. 元始天餘은 시간 공간의 한계륜 벗어나 절대 • 영원의 존재로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三身으로 화현하는데 三身이거 처 하는 궁을 각각 上和 이라고 부른다.
앞에서 인용한 바 있었던 太上三務은 이 元始天幻:의 化現인 H#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고운은 元始天竹과 그 화현인 天故石,攻君,神技器에 대한 당시의 도교신앙을 수용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이것은 그의 齋詞를 살펴보면 더욱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제문의 앞에 元始天分을 받드는 신앙을 표현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은言 빌 때는 太上三分과 十方衆聖에 청원하기 때문이다. 이는 元始天分을 걸대로 모시면서 그 화현인 太上三幻:과 들 보다가 까운 神82로 섬기는 도교 목유의 신앙양태문 반영하고 있다.그런데 元始天分이 모든 중생들에게 은혜문 베무는 인격적 신으로 간주되는 경우의 호칭인 반면 그 절대적 초원성을 그대로 파악할 때는 노장사상적 도의 개념도 휩:용된다. 바꾸어 말하면 고운의 務詞에는 인격화된 신의 개념뿐 아니라 종교화되기 이전의 철학적도가사상의 개넘도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그 예이다.
道라 함은 억지로 이름을 붙힌 것이니 본래 탁마의 도리가 끊어진 자리요. 10)10) Ii'뾰文뀐앉全moB. :{iH:文~jt_U沙m 本. 1972, p. 367. (遊本행名固원흉압之훨).
나 지극한 도는 效按興K해서 형상으로 알 수 없지만 정성된 마음이 勤勸恐恐하면 반드시 감통함이 있을 것입 니다.11)
11) 강윤 껴, P.370. (m::.jq!따효 젤홉짧핏껏 ~쉴Inl]앉形可m 而n1J~렐j한\;~ 짧心찌"#짧~W).
다 스스로 약간의 공을 들여도 希값한 진리를 연쿠하기 어렵습니다. 12)
12) 강윤 쩌, P.367. (自월~섣之功훌究%없之남>.
가의 내용은 노자 斑松經의 중심사상인 이름할 수 없는 도, 즉 無名之逆를 의미한다. 0는 도덕경 제 21장의 내용과 관린되며 敏는 도덕경 제 14장의 내용이 다. 여기서 炎란 보아도 보이지 않음을, 布란 들어도 들리지 않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절대적 도가 우리의 감각과 사고를 넘어선 현묘한 영역임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이다.
이 밖에도 齋詞에서 중요하게 인용된〈處其好不居其薄〉은 도덕경 제 38 장의 내 용으로서 이 38장의 내용은 참된 도와 덕이 실천되지 못함에 따라 사회가 타락하는 모습을 밝힌 것이며 궁극적 이상을 無爲®然한 도와 덕의 실천에 두고 있다. 이에 의하면 仁務禮智 등의 유가적 덕목이 제기됨은 도덕의 퇴보€상을 반증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마지막 결론인〈處其保 不居其薄 處其皮 不居其華〉에서 淨와 吹은 덕을,薄이나 華는 주로 鑑나 智를 의미한디. 이 내용을 고운이 인용하고 자신의 삶의 태도가 이러한 자세에 기초하고 있다고 밝힌 것은1가 그가 관직에 몸올 담고 있으면서도 궁극적 가치는 無爲 S 然한 도에서 찾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빈다13) 감은 껴 , P.368.
면〈公供의 神仙傳에 한 이름을 얻고 싶은〉14) 심경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경에서 제시된 도와 은 그의 를 통해 볼 때 고운사상에 제한없이 수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14) 갇운 껴 , P.368. <따I피1Si1~빼上웹십~-홈).
그런데 이러한 도와 덕의 개념은 아직 종교적으로 인격화되기 이전의 천학적 도로서 元始天好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굳이 표현한다면 비인격적 절대 무위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齋詞 자체가 무한한 은덕을 베풀 수 있는 인격적 신렁들에게 축원하는 것이므로 인격화된 신에 대한 신앙이 주체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도가사상적 도의 개넘도 원용되는 것으로 보아고운이 받아들인 도교사상은 道論과 神論이 서로 혼재된 도교교학으로 추측된다.
한편 빠뜨릴 수 없는 것은 元始天分 신앙과 더불어 많은 다신론적 신앙이 고운의 齋詞에 수용되었다는 사실이다. 본래 도교는 많은 민간신앙읍 융합하고 있었으며 원시천존 신앙을 확립한 上淸派에서 도 동시에 다신론적 견해-!: 종합하는 신앙체계륜 형성 하였다. 이 러한 경향은 班代에도 계속되었으며 민중신앙에서는 오히려 원시천존보다 하위인 多神이 더 친숙하였다. 이런 흐름에서 볼 때 고운이 玉:方神에 게 기원을 음리고 산신,토지 신 등에게 제사드린 제문을 남긴 것은13)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대 한 가지 목이한 것은 元始天冷에 대한 제사에서 사용된 臣이라는 호칭이 보이지 않는 점이다. 이것은 신듭의 位格이 서로 다른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상세한 이유는 알기 어렵다. 與쬬位染四에서 밝힌 신들의 위게질서가 당시의 도교의식에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는가가 의문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I ’) 간은 져, pp. 372"-'373, 402.
3 密詞에 나타난 실천론
고운의 齋詞에는 도교 수련에 관한 그의 견해가 포함되어 있다. 그 수련방법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三元(上元,中元, 下元) 致改一氣存思〉라는 표현이다.16)
16) 갇운 껴 t P.370.
三元致敬은 그가 元始天幻:을 비롯한 여러 신들을 지극한 공경심으로 받드는 것을 의미하며 存란를 간직하는 도교 고유의 수련을 뜻한다. 즉 그는 제신에 대한 겸허한 신앙심과 一氣를간직하는 정성스러운 자기수련의 겸행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元致敬에 대해 〈단지 H元節에만 공경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미고 부연하기도 한다. 그의 求化修諸道觀疏에서는 이를 〈三元述敬 一氣稱修〉라고도 표현한다.18)
17) 갇운 껴 t p.369. <짧뽀一있而存.띤 非止三元而致얹).
18) 강윤 껴 t P.378.본래 一를 간지하는 수련은 노자 향의 로 소급된다. 노자에 서 의 推一은 우주와 인간의 근본인 도를 깨 닫고 도와 합일하는 수련을 의미하는데 장자는 이를 守一로 부른다. 장자천학에서 도는 ᅳ氣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守一은 근원적 ᅳ氣를 간직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의미의 氣의 수련은 도교에서 중시되며 신선사상을 집대성한 砲朴子에서 守一은 더욱 그 내용이 구체화된다.
고운이 제시한 一氣存思란 개념은 이러한 道敎史의 맥락에서 볼때 一氣를 간직하는 수련의 전통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본래 도덕경의 推一도 도의 자각을 통한 정신적 초월보다는 一氣를 간직하는 수련의 의미로 해석된 바 있으며 이는 노자사상을 신선사상의 입장에서 해석한 河上公註로부터 비롯된다. 그후 氣의 수련을 중시하는 것은 신선을 추구하는 도교 수련에서 두드러진 목징으로 나타났다.19) 河上公홉에셔는 뼈-의 -울 太和之웬짜jξ 온마.
고운이 말한 一氣存思에서의 存思는 도교적 명상법의 한 명칭으로서 一해을 마음속에 서 관조하는 방법 이 다. 도교 경 전의 집 약판이라 할 수 있는 $安七述H 서는 存思에 관한 다양한 방법 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요점은 정 신과 기운(氣),즉 神氣를 맑게 하자는 데있다. 고운이 一氣存思라고 표현한 것은〈氣를 하나로 만둘고 神을
20) 잊효七월 싼 ·U"'44.
관조함〉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이는 存思라는 도교적 수련법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한 표현으로 이해된다. 즉 存思가 단지 마음을 집중하는 수련에 그치지 않고 一氣를 기르는 데도 중요한 뜻이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店代의 작품으로 알려진 天(;3子에도 存思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存想의 수련법에 관해〈存은 나의 神을간직하는 것이요,은 나의 몸을 생각하는 것〉21〉이라 하여 심신을 아울러 통일하는 방법으로 밝히고 있다. 고운의 一氣存思란 표현이 氣의 수련을 중시한 게넘이라는 것은 아래와 같은 내용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21) 天않子, 存想짜六, (存;rm:~之心‘첼 ~11 ~a之身).
紫府는 마음을 닦아야 이를 것이요,玄關은 힘을 가지고 열 수 없는 것입니다.22)
22) 홉 18의 껴, P.367. (뽕府乃얀心可뀔11 ~rJ!J~JU力(fDR).
마음을 바르고 천일한 데 모아서 일체 기 玄때에에 의 거 하여 ..23)
위의 언급 중에서 나오는 玄 도교 고유의 상징척 표현으로서 인간에 깃든 해 • 氣• 의 三랐를 수련할 예 드러나는 중요 관품이다. 우리나라 근대 선가의 인울안 全갖til원의 『 紹』에서 고운이 玄關을 언급한 것은 이미 玄때을 알아 수련했다는 좋윤 근거라고 보는 것도 그 혜뭄이다. 24) 玄服의 중요성에 판해 도교의 수많윤 경천들이 공홍척A로 캉조하는 반연 玄BM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가에 관해서는 의견이 매우 다양하다. 이 사정에 판헤 住命핏넘라는 천척은 아래와 갇이 밤힌마.23) 갇윤 책 • P.367. (心없正- 1f! to玄때).
24) 全~i'{. L"t쩌햄홈~펴홉.D. !'JJ文1t. 1982, P.56.수많은 들은 오두 이에 관해 품영히 밝히지 않고 교요
25) 짧따山人. !i't호命훌담~, 대 만, 하文앞버版公펴. }강댐 ‘7 년, p.15. (없下꺼t!子iit不합!'JJ릅따월 1?1Q~~ ilIl화千쭉 *울非J1t~••••••如不없此g而~~m 따£앨i水빼m짧).
한 비유와 상징을 사용했는데 수많은 호칭이 玄關이 아님이 없다 만일 이 玄關을 모르고 수도하면 마치 물에서 토끼와 닭을 찾으며 산에서 고기를 찾는 격이 될 것이다.
그런데 고운의 一沈存思의 수련, 또는 玄關의 인식은 그 바탕에 마음을 바르게 닦는 수런이 자리잡고 있다. 앞의 인용문에서도〈마음을 바르고 전일한 데 모은다〉는 표현이 있지만 그의 유명한「黃文」의 서두에 나오는〈守正修常〉26〉이 바로 마음 수련의 원리를 나타낸다. 이러한 바른 마읍이 성실한 뜻으로 이어질 때 옵바른 수 련이 행해진다고 보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대 다수의 민중들은 여 러 신들을 신앙하고 복을 구하는 현세적 기복신앙의 형태를 취했다면 소수의 은자들이 지향한 신선사상은 개인의 자력적 노덕에 의해 신선에 이른다는 이념을 지니고 있었다. 이 신선사상은 다양하게 모색되었던 여러 我生術의 발달로 인해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液代 중엽에는 이미 다양한 종류의 기법이 등장하였다. 중국도교사상 최초로 이 다양한 양생법을 집대성한 인물은 孤끊時代의 我供이디-. 그는 그의 저서 推朴子에서 신선에 이르는 방법으로서 외적인 생명력을 보충받는 外丹法,내적인 생멍덕을 배양하는 胎忠,行氣의 방법,도덕적 선행의 실천들을 제시하고 그 중 外丹法인 金丹의 제조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디.. 포박자 이 래 신선가들은 金丹의 제조와 내적 氣의 수련 두 가지 방향을 동시에 발전시컸는데 斑 말엽에 이르러서는 外丹의 실패사례가 증가함에 따라 점차 내적인 생명력의 확충방향인 內丹法 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최치원이 찰약하던 당시의 신선사상은 그러한 전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인간에 깃들어 있는 생명력을 함양한다는 氣의 수련에도 초기에는 호흡을 통해 천지의 外氣를 얻는 방법 이 위주가 되었으나 당대부터는 인간에 깃들어 있다는 내적 元의 체득이 강조되는 특징읍 보인다. 즉 外氣의 수던이 남북조시대의 초기 도교에서 실행되던 방법이라면 그러한 外氣의 획득은 어디까지나 수련의 기초단게 로 간주되 기 시 각한 것이 당대부터의 경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外氣, 內氣의 구별은 후에 後天氣,先天氣의 구별로 나타난다. 여기 서 주목되는 것은 내적 元氣의 수련에는 보다 고도의 정신적 능릭 이 요청된다는 점이디、따라서 이 경우 도교적 수린은 단순히 욱체적 수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가 조화된 상태에서의 생명릭의 확충이 된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고운이 玄關의 체득을 언급하고 心의 수행을 강조한 것은 그러한 내적 균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당시의 신선사상에서 영향을 반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 바른 마음의 체득에 필요한 덕목으로 고운이 제시한 敬의 수련도 주목할 만한 내용이다. 이 敬의 수련은 후에 來代 성리학에서 두드러지며,成과 표리를 이룬다. 고운의 경우 敬이 元始天特에 대한 지극한 신앙심에 바탕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대 성리학의 敬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물론 고운의 齋詞에서는 敬에 관해 상세한 설명이 없 으므로 그 차이를 명백 하게 드러 내기는 어려운 문제이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할 만한 목징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迫敎史의 흐름에서 보통 서로 공존하지 않는 두 가지 경향, 즉 원시천존에대한 깊은 신앙감과 내적 생명력의 수던이라는 목징적 두 조류가 고운에게서 같이 혼재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인격적 神論과 천학적逆論이 혼재된 그의 도교 이해와 연건된다고 생각된다.그런데 齋詞에서 보이는 고운의 수런관은 단순히 이론적 접근에 그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 자신 신선이 되고 싶은 강한 얼망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갈망이 깊으면서도 주어진 임무 때문에 직접 입출하지 듯하는 안타까운 마음과,임무를 어느 징도 마치 면 신선의 진에 매진하겠다는 각오 아래와 간이 밝힌다.신이 비록 세속의 티끝에 몸을 얽 매었으나 신선의 행장에 뜻윤 두어 대성하기를 바라고 상달하기를 기약할지라27) 갇응 씌 • p• .368.
자식이 되고 신하가 된 몸으로서 충성과 효도륜 다함 것인즉 國故의 영광을 받았으면 가풍에 모욕됨이 없어야 하겠으므로 손
에 玉符를 잡아 국가의 난을 구원한 다음 마음을 金錄에 두어 物外에 놀기를 생각하고 있읍니 다.
그러나 고운이 후일을 기 약하고 수도에 게을리한 것은 아니 었다. 그 스스로 자부하는 바와 같이 도덕경 을 비롯한 여 러 경 전을 통해 도와 신의 본질을 파악하였고 敬神과 一氣存思의 수련에 매진함으로써 五帝과 五色의 유혹을 물리 치 고 제 신의 가호륜 입는 경지 에이르렀기 때문이다. 29)28) 감운 책 I P.368.
29) 감운 책 , P.369.고운의 도교 齋詞와 관련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은 고려 도교의 詞와 齋詞에 끼친 그의 영향이 다. 조선조의 除居正 등이 편찬한『正編東文選』에서는 최치원의 齋詞륜 비롯하여 고려시대의 도교관계 기원문을 다수 신고 있다. 그 자료의 작자는 金(75~1151), 辛!£報(1168〜1241)와 같은 고려조의 대표적 문인들이며 조선조의 경우는 卞皮 (13 的〜1430),해^£ (1352〜M09) 등이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전반적 분위기였던 유•불 •도 삼교의 공존경향을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최치원이 그 선례가 된 것으로 보인다. 靑詞의 체제면을 보더라도 상당한 유사성이 나타난다.
예컨대 김부식이 지은 세 편의「乾治殿 禮밟詞 J 의 구조는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이루어 져 있다.》첫째는 도의 신묘함을 묘사하는 서 론 부분이 고,둘째 는 백성들의 司牧者로서의 임 금이 중책을 실천하는 데 문제가 되고 있는 天災나 외적 등의 침입이 묘사되는 본론 부분이며,셋째는 醜禮를 통해 복을 기원하는 결론 부분이다.30 ) ~짧빼, 註2의 논운, p. Ill.
이러한 기원문이 호소하는 대상은 道 • 上帝 등으로 표현되는 최고 신이며 元始天轉이란 표현은 잘 사용되지 않는 대신 北斗七里이 두드러진 역할로 부각된다. 이러한 사상적 변천과정은 엄밀한 김토를 요청하는 과제이나 전반적 흐름은 최치원의 齋詞와 상통된다. 바꾸어 말하면 고운에게 수용된 도교교학의 세계관의 神論 • 道論 등의 체계가 큰 골격의 변화없이 그대로 계승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후의 詞의 작자들이 지니는 신선에 대한 인식과 최치원의 仙界位恨의 가치의식간에 놓여 있는 거리감은 어짭 수 없이 드러나 있는 것이 사실이다.
孤및에 이르는 신라사회의 仙風앞에서는 고운이 당에서 찰약하던 시기에 지은 究/詞를 검토해 보았다. 다음으로 살펴볼 자료는 그가 신라로 돌아온 후 쓴「四山碑銘」과「探郞碑序」이다. 여기에 포함된 老註哲學觀을 분석하기 위해 서는 먼저 통일신라 말엽에 이르는 신라사회의 사상적 토양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조선조 영 • 정조시대의 사학자인 季稱微는 그의 문집 r修山供』에서 신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신라에서 나라를 다스린 방법에는 이렇다 할 經樂刑政이랄 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른바 변화에 따라 대응하여 나가고 작위함이 없이 자연대로 해나가고 미리 도모함이 없이 같아진 점이 있다 연!!}과 유£/회를 시켜 나라롭 만들어 자신들이 다스리게 한다 하더라도 근본 거기에 더 보댈 것이 없읍 것이다. 유•불•도 삼교가 중국에서 행해지고부터 유교는 眞氏 때에 이미 우리나라에서 행해졌으며 불교 역시 刻1否 무렵에 들어왔고 행해지지 않은 것은 오직 노자의 도뿐이었다. 그러나 노자의 도를 실행한다고 말하지 않았을 뿐 사실 신라는 그 정수륜 터득했던 것처럼 보이 고 이미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신행했었으며 그것도 배우지 않고도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31)31) rr홈山짧』중 史앓펀의 WI;짚짧 Ot~많之m ;r~必짜~~JflJ&之可깜 ifi1 ~m~π없뱉~{t. 自然而所~;/f•••••• fJ1.:老때j/£ Jl,J~댐 ffij 自없 때차以b‘l於M것 핍三았行~‘#뼈 i띠t휠固E 自춰於~a;之U상 ii'IT PJ양꺼;以빼쁨之앓 miλ VtJv. m m不行염rffli老ml~ to자~11 혜2之名而Jt B行於m댐 如.vi I햄之찌 1U찌 훨不쌍 i띠뾰之tI!.).
이 언급은 신라에 원래부터 도가적 無爲 0然의 풍토가 뿌리박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와 유사한 평가는 고려 殺宗이 觀風殿에서 내린 新令 가운데서〈신라가 民物이 안녕한 것은 仙風이 크게 행해진 때문이니 고려에도 선풍을 크게 진작시켜 숭상하라>52)고 한 데서도 발견된다. 신라사회에 중국으로부터 노장사상이 나 成立逆敎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자연을 숭상하고 m樂刑政에 의존하지 않는 문화적 토양이 성 숙되 었 다고 보는 것이다.53)
32)
33) 흰훌힐, ?한국의 도교사상Jl, 동화흔판용사, 1987, p.I53.이러한 도가적 성향 위에 중국으로부터 노장사상이 전래된 것은 대묵과 접촉이 잦아진 法興ZE代부터로 추측되나 확실한 것은 알려저 있지 않다. 그후 成平玉代의 活段,武烈王代의 金仁問의 사적에서 노장사상과 관련된 내용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 두렵에는 노장사상이 지식 인들의 필수적 교양으로 확대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후 의 저서에서는 노장사상을 원용하여 불교를 설명하는 내용이 많다. 예컨대『大乘起位論疏il 및 F別記고에서는 大乘에 관해 〈玄之文玄之乂〈無理之至理〉,〈不然之大然> 등으로 표현하고 있으며『哲染宗要고의 大瓦에서도 열반을 도로 표현하고 있다. 이 밖에 『大怨度經宗要고에서는 般法를 도와 일치시키고 있는 등 그는 폭넓게 노장사상적 개념을 수용하고 있다.씨 그후 聖保王代의 m勸卷m造收記에도 아래와 같은 내용이 보인다.34) $~:7k‘ 「한국운화사상의 광고와 도교J. ~딴푹종교~ 10각1. 원창대 종교운져연주소, 1985.
제자 志誠은 성세에 태어나 영광스런 벼슬을 역임하고 지략도 없이 국사를 屋正하여 겨우 국법을 어기는 일은 면하였으나 본성이 산수를 좋아하고 노자와 장자의 소요함을 사모하고 마음속으로 放宗을 존중하여 번잡을 피하고 玄寂을 바랐읍니 다. 67세로 致仕하고 초야에 돌아가 五千言의 도덕 경 을 읽 으며 名位를 버리
고 깊은 산속에 돌아가 十七地의 법문을 닦고 色空이 다하면 함께 죽으려 하나이다.35)
35) <와子순.짧 生於뿔i止l끊ff §f!Il! 앉양po찌 以I효 11¥{껏껑얻rn!~'JflJ싱I f.Ui7山치( 1J싸Jf:}:원之ifI설tt ;:t::깅i떠宗j안氣협之::ka ~f!1,十:fj'~ 컸王짜i앙파1~낀 g효8 1IJ !j양삐!J,f ttsa표t=r-n之道짧 헬名tfLiiIT入;!(짧 힘十七之홉l’') ~e~펀뼈 (n~).
이 기록에 의거하면 통일신라가 형성될 무렵을 전후하여 법흥왕때 공인되어 국교화된 불교와 노장사상이 서로 상통한다는 道佛一致思想이 대두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逆敎史에서 元明i,務抑,iS Jii 등읍 해으로 간주하는 것도 이러한 도 • 불 융합사상에 연유한다.이러한 도 • 불의 상호 출입현상은 통일신라의 사상적 원동력으로 평가받은 花郞通[稱#,화랑도정신의 정신적 지주가 된 風流道姑여이 지닌 사상적 포용성에 기인한다고 간주된다. 통일신라 후대에 이르러 최치원이 관약한 想康王 두렵에는 불교계에 部!宗思想이대 두되고 귀족사회에는 노장사상과 신선사상이 유행 한다. 신라하대로 쿤어오면서 중앙의 與骨 귀족사회에 향락적이고 퇴페적인 풍조가 만연함에 따라 그러 한 풍토에 반발하는 은둔적 사상 경향과 그에 따른 도교와 노장사상이 광범히-게 퍼지게 되었다. 최치원은 이런 사상적 분위기 속에서 원래 유학자의 신분이 었음에도 禪思想과 도교에 깊은 관심을 기니게 되 었던 것이디 이는 비단 최치원에게 한정된 것은 아니었으며 당시의 문인학자들은 일반적 으로 유교 이 외에 불교나 노장사상,그리고 심지어는 風水地理;保까지도 아무 모순없이 복합하여 이해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 승려들도 동일한 사상적 풍토 속에서 찬동하였다.
36) 않炳않I r신라사에서 온 최:
37) 캔첸웰, 강윤 논운.이와 같이 正史에 나타난 자료 외에도 逆敎史.31륜 공해 검토해 보면 신라에는 仙이 초기부터 면면히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供公宗의 海東異故고에 의하면 시조인 朴始居世는 仙人이며 그 仙風은 述郞 • 南郞 • 永郞 • 安鮮 등 四仙에게로 이어진다.粉公에서도 恒仁成人이 동방 최초의 仙祖로서 첫째,文朴에게 전하고 다
시 永郞에게 전했다고 기록한다.
이 능화의『朝鮮道敎史고에서는 고려 조 辛仁老의 시에 四仙을 을은 시가 있음을 소게 한다. 38)38) 후않혐I. n'뼈향lli:었史JJ. ?F~JN: 액 주. jι성 품화사. 1977. p.31.
四仙은 신라적 나그네 (四仙i代名)
한낮에 신선되어 하늘로 을랐네 (白化奸)천년전 자취를 생각하니 (千收꾜巡跡)삼신산 불사약의 효험이던가(山樂可供)이 四仙 외에도『청학집』과『해동이적』에서는 鼓公,a始仙人, 幼稱子. 大世와 供菜, 玉與府 등이 거론되는데 이 중『청학집』에서 최치원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기록한 선인은 大世와 伏染이 다. 이에관한『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대세는 진평왕대의 인물로서 어려서부터 方外의 영역에 뜻을 두었다. 그가 淡水라는 친우에게 보고 말하기를〈이 신라 산골에서 일생을 마친다면 못 속의 고기와 새장 속의 새 가 창해의 넓음과 산림의 웅장함을 모름과 무엇이 다르리오. 나는 장차 배를 타고 바다 건너 强越 지방에 가서 명산에 들어가 스승올 좇아 도를 닦겠다. 만일 내가 凡骨일진대 신선은 될 것이고 더욱 공부하여 도가 통하면 바람을 타고 우주를 나를 것이니 이는 천하에 기이한 일이며 장관일 것이다. 자네는 나와 함께 가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담수가 즐기 지 않으므로 구친이 란 인물올 만나 벗을 삼고 함께 유력하였다고 한다.39)39) 8'三댐잊!:aB. ~ZJt王條.
이 밖에도 ,쇼可넣2 등 신라의 선풍을 진작시킨 인물이 많은 것으로 보아 최치원이 귀국할 당시에도 그 흐름이 면면히 계승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치원이 말년에 가야산에 운둔한 것은 개인적 취향 탓도 있겠지만 이러한 逆脈과 접맥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한편 도교사상의 주류라고는 볼 수 없으나 넓은 의미의 도교사상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도교적 方術과 풍수사상이 있다.『삼국사기나 삼국유사고의 기록에 의 하면 金故i倍이 神術이 나 奇術을 부려 초인적 능력을 발휘했다고 하며 그의 손자인 金炭도 음양술, 通甲法 등의 방술을 배웠다고 전한다.40)
40)...pt~ 혐I, 앞 38의 껴 , P.8’-
풍수사상은 除陽五行思想 더 소급하면 氣哲學的 감응이론에 바탕하여 형성된 민간신앙으로서 중국의 경우 r成國時代 말엽부터 풍수적 관념이 발생했다고 전해진다. 沒代에 이르러 풍수설의 원리를 정리한 爲法이 편찬되었으며 그후 東꼽의 部我은 葬간,즉『斜}海經』을 저술하였다. 部攻은 특히 抗仙詩의 작자로도 유명한데 이는 신선사상과 풍수이론이 갈등없이 혼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풍수설은 남북조시대에 접어들어 한충 발전하며 최치원이 활약했던 斑代에는 민간에 브편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가 풍수설을 받아들인 것은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며 이는 당뿐이 아니라 신라의 경우도 마찬가지 있다. 우리 나라 풍수사상의 원조라고 일컬어 지는 述,沈이 불교 승려인 것을 고려 하면 신라사회에서 불교와 풍수설이 모순없이 받아들여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치원의 풍수사상 수용은 신선사상 • 불교 • 풍수사상이 큰 갈등 없이 공존했던 사상적 풍토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노장사상 • 신선사상 • 풍수 등은 최치원 당대에 명확히 구별되지 않은 왜 서로 혼재되면서 도교사상의 내포와 외연을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도교사상 자체도 불교나 유교와 확연히 구별되지 않은 채 수용된 것이 당시의 풍토였으며 그모든 것올 자연스럽게 안은 체 포괄적으로 도의 실현읍 추구한 방향이 최치원의 사상적 목징을 힘성한 것으로 생각된다.「賊郞碑序」와「四山碑銘」에 나타난 老哲짠級F삼국사기』의 新羅本紀에서는 화랑정신윤 설명하면서 고운이 지은「按'郞碑序」륜 신고 있다. 비 이 글에서는 우리 나라 고유의 風流立의 성격을 설멍하면서 유 • 불 • 선에 대한 강령적 파악을 제시한다. 이 중 노자의 가르침 은『도덕 경』제 2 장의 내 용을 빌어〈無爲로 일을 처리 하고 不保의 가르침을 편다(虛無爲之市, 行不;之敎)〉로밝히고 있다.
41) Ii'三国史因JJ , 您4 , 衍担:本阻, <固有玄妙之道曰风流段敬之法跺阳仙史n乃包合三段挠化野生且如此用孝於笨出则忠於国~司寇之旨也应括路之事行不宫之敬网佳史之宗也随恩英作级自骂王行笠乾太子之化也).
淡代의 司出選은『사기』老子何에서 도덕경의 내용을 虛無囚應이라는 개넘으로 집약한 바 있 다. 그런데『도덕경 중에서도 제1장과 제2장은 전체의 강령적 성격을 지닌다고 간주되며 이 경우 제1장은 ‘V虛無乂 제2장은〈因應〉으로 풀이 할 수 있다. 즉 제1장은 우주의 본체인 허무의 大植롭 밝혔 다면 제2장은 그 도에 바탕하어 새상에 치하는 실천적 대도륜 밝혔다고 보는 것이다.「난랑비서」에서 최치신이 밝힌〈處無爲之?jf 行不石之敎〉는 虛無大逆의 두위자연함윤 본받아 실천하면 그것이 바로 말없는 천지의 液化에 상통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따라서「난랑비서」의 내용은 신천적 입장읍 중심으로 한 파악이 위주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유교나 불교에 대한 언급의 경우도 마찬가지로서 주로 충효 윤리 또는 환行 실천의 방향에서 거론되고 있다.
42) 少胡田织太, ü老班思想主迦敬Jl . 称北m店, 1942, p.60.
「K3山碑銘」에서도 이러한 실천적 측면을 위주로 하여 단편적이긴 하지만 도가사상에 관해 거론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그런데 이 언급은 도가사상 자체에 관한 고립적 평가로서 가 아니라 유 • 불 • 선에 대한 포광적 인식태도가 제시되면서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도교의 식 에 사용된 資/詞를 통해 드러 나는 도가사상에 대한 언급과는 그 흐름을 달리한다. 이는 齋詞가 逆士의 입장에서 쓴 기원문이라면「四山碑始」은 불교 고승에 대한 예찬문이기 때문에 노정된 차이로 보인다.
예컨대 그는〈閑聖(孔子〉은 仁에 의지하여 덕에 근거하였고 座山(老子)은 白올 알고 黑을 지 켰다〉씨라고 유 • 도가의 특징을 파악한43) i'号吗刽判处1l..Aß -ä:气lJJ .平处, ~U 吐fE扑斗, 1982, p.683. <阳里依仨始祖血仙知
白t:e ~J꽉).
다. 여기서 白올 알고 黑을 지킨다는 것은 도덕경 제28장의 내용중 일부이다.
노자의 無爲는 무능력하여 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有爲를뛰어넘은 단계이다. 그런데 이 무위 는 남성적이거나 적극적인 행사보다는 유약하고 겸허한 여성적 자세와 더욱 가깝다는 것이 도덕경의 사상이다. 그러므로 현상세계를 세밀하게 분석하는 밝은 지혜를 지니면서도(知其白) 혼돈하고 유현한 마음의 깊이를 지켜야(守此)무위자연에 계합할 수 있다는 것이 제 28 장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그가〈知 守其黑〉을 중시한 것은「난랑비서」에서『도덕경』제2장을 중시한 것과 흐름을 같이한다고 말할 수 있다.그런데 고운이「사산비명」과「난랑비서」에서 유•불•도 삼교를 거론할 때 주로 노장천학이 그 소재로 관용되는 것이 눈에 된다. 이것은 그가 종교화된 도교사상을 충분히 인식하고 신선을 흥모했던 사실을 고려하면 이례적이다. 아마 유 • 불간의 사상적 상통점이나 敎述立을 논할 때 노장친학이 디 적절하다고 본 것이 아년까. 이 점은 하나의 의문으로 남진 수밖에 없다.道敎史에 나타난 孤生의 위치逆敎史라 함은 우리 나라에서 전승된 도교의 흐름을 밝힌 재으로서 동양의 전통적 師資相承의 원리에 따라 도교 인물듭의 계옹을 밝히는 것이 주내용이다. 도교사상에서는 射』『,的供ii 등이 있으며 技四史;活도 간접적으로 이에 관린된 다.이 책들은 모두 조선조에 찬술되었다는 공 점을 지니고 있는바이는 偏家의 道統傳技, 佛家의 佛相承의 사상에서 영향윤 받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에 접어문어 유가와 방가에 대비되는 도교의 정체의식이 태동되면서 이 정체의식에 바탕하여 도교의 연원윤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 도교사서가 편찬되 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도교사서는 정식 사서 라기 보다는 도교 인물들간에 구전으로 전해 내리오던 사항을 도교의 안목에서 정리한 내용이 많다. 또한 도교사서가 기존의 전적에 의거하여 자료를 선정하는 경우도 대부분 야담류가 많다. 이러한 야사적 성격은 도교사서의 자료로서의 신빙성을 약화시키고 있긴 하지만 이는 도교가 지닌 通世性과 도교적 전적이 지닌 상징성을 이해하면 수긍이 간디-.
F梅東傳道錄고은 조선조 중엽의 인물인 韓無皮가 저술하였으며 澤堂 季植(158〜1647)에 의해 세상에 유포되었다. i鉛無의 행적은잘알려져 있지 않으나『해동전도록에 기술된 내용에 의하면 사대부 출신으로서 도교 수린 끝에 득도한 인물이라고 한다. 요컨대 조선사회에서 뜻을 펴지 못한 은둔적 인물이었다.44)44) O'lIij 号再!:!三~吐气苦恼山辛驻缸S斗附缸剑1 吐il;j ~吟.
『해동전도록고에는 신라말기에 金可紀,按承前i 및 승리인 慈忠 등 3인이 당에 들어 가 通離權이 란 인물로부터 道脈을 전수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3 인 중 金可紀는 계속 당에 남아 수련을 계속하였으며 祖承雜와 慈忠가 신라로 돌아와 M離權의 도맥을 전했다고 한다.
3인 중 가장 뚜렷한 도교적 인물은 로서 그의 행적이『I技仙傳고에 실려 있다.『紙仙傳』]에 의하면 그는 신라인으로서 입당하여 관직 에 근무하다가 없切등의 도교적 수련을 거 친 끝에 당中 11년(A.D 857)에 登仙했다고 한다.45) D'L'llt七缸』毯103,傅曰部14 , ~fI山傅.
承班酷는 신라말기의 名K으로서 입 당 수학(A.D 890)하였다는 것이『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그를 최치원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후배로 기록하고 있는데『해동전도록』에서는 그가 최치원에게 도를 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慈思는『해동전도록』에 첨가된 辛數役의 부기에 의하면 義油大師(625~702)와 동일인물이 다. 季伴光의『老峰追說J에서도 그를 의상대사로 간주하고 있다.이 이 러한 견해에 따르면 慈患는 통일신라가46) (j'三四史回』岱46,列傅第六,崔承梳倏
47) B'z~江边西』笔~ 18, JHtt 部.형성될 무렵의 인물이므로 金可紀나 꾜承路와 시대적 배경을 달리한다.
3 인의 행적을 고려할 때 시대적 배경 이 나 휩:동영 역이 상이하기 때문에 M離權이 란 인물에게서 동문수학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따라서 일견 불합리하게 보이는 도맥 전수과정울 제시하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3인의 행적이 입당 수학이 란 공통점을 지 니는 것으로부터 중국의 도교에 연원을 대 려는 의도이다. 이때 시대적 배경이 다른 인물을 함께 관련시키는 것은 신선사상이 지닌 초시대적 성격을 드러내기 위한 뜻으로 해설된다. M離權이란 인물은 金代에 성립된 全成敎에서 七大祖師의 한 사람으로 받드는 전설적인 道士이다. 따라서『해동전도록고에서 短!離權에게 연원을 찾는 것은 그 개인을 존중한다는 의미보다는 전진교의 도맥을 계속하려는 의미가 강하다고 생각된다.다음으로 金可紀,植承路,慈忠 등 각각 逆 • m • 佛 등의 다른 영역에서 환동한 인물을 함께 관련시키는 것은 주로 도교가 지니는 三敎合一的 포용성을 드러내기 위함으로 보인다. 이 포용성은 한걸음 나아가 도교를 다른 사상과 더불어 冊立시키리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어쨌든 F해동전도록고에서는 중국의 도교에 연원을 대고 있으며 이 는 IT해동전도록에 첨가된「丹松決」의 내용을 보아도 알 수 있다.「丹設」에서는 도맥의 연원을『周起參同契』의 저자인 刺伯陽과 1T逆德經』을 저술한 老子에까지 소급시킨다.생각컨대 太上老君(老子)은 실로 우리 도의 짜祖로서 도덕경 오천여 언을 저술하셨다. 伯陽人(貌伯F別이 출현함에 이르러 노자의 진전을 이어『參同契』3편을 저술하니 무룻 우리 도의 대지가 이 두 경전에서 다 갖추어졌다.<8>48) !rf}연口앓.!l. 쩨 1 장. <훌원太上老:lS 1(1'£홈m之짜 in mfFiril깅표千&'t! 11 뼈i횟 faιj따A之出以찮夫老£f;z Pll 乃l1l e同三m m-r~m’之않 J~ JlJi二f엉 ':a것).
이 내용과 앞에서 살펴본 도맥전수의 과정을 종합하면 老子一親伯陽一M雜權一金可紀 등 3 인一按致速으로 이어지는 도맥을 설정할 수 있다. 이 흐름에서 전승된 사상은 구체적으로 알기 어려우나 r參同契ii,『黃庭經』,『能虎經』, 『淸淨心印經 등의 道經이 거론되는 것으로 미루어 內丹學 수련의 계통인 것 같다. 內丹學이 란 金丹을 제조하여 복용함으로써 신선이 된다는 外丹과는 달리 인체에 함장된 근원적 생명력 예 i系”,利1)을 수련하여 신선에 이른다는 사상이 다.
앞에서 齋詞의 성격을 살펴보면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 도교사의 흐름 가운데 斑代가 지니는 특징의 하나는 外丹法으로부터 內丹法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內丹法을 밝힌 元經으로 알려진 燃伯版의 周易參同契가 존중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黃庭經교이 나 r能虎經고 등도 參同契가 부각될 무렵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內丹法 계통의 道經이므로『해동전도목』에서는 고운을 을 계승한 인물로 보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관점은 고운이 쓴 齋詞의 사상적 경향에 비추어 보더라도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齋詞에서는 元:J治3저향에 대한 신앙이 표현되어 있는 반면『해동전도록』에서는 元始天好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 점은 유의할 만하다. 이러한 관점,즉 고운을 內丹法 수련 전통의 계승자로 보는 입장은 『和nit異敗』이나『松染J1에서도 공통된다.『해동이 적』은 조선조 本宗 때의 인물 供萬宗에 의 해 저술된 것으로 중국의『列仙傳』이나『神仙傳고을 모방하여 편찬되었다. 後淡 말엽 到向이 편찬한『列仙傳』과 穴朝時代 我供이 지은『神仙傳』은 신선의 실재와 신선사상에 회의적인 대중들에게 신선의 실게를 입증하기 위한 의도 아래 저술되었다. 供萬宗의『해동이적』도 우리나라에 그러한 {(IjA들이 실재했음을 근거지우고 유가나 불가의 전통에 못지 않게 면면히 계승되었음을 밝히 려는 의도로 저술되 었다. 供萬슛$의 또 다른 저 서『현또동고에 서 유 • 불 • 선 삼교의 도통 전수계 통을 기술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의도를 지닌다. 따라서『해동이적J]은 다른 도교사서보다 체제면에서나 전거면에서 비교적 충실한 도교인물사라고 볼 수 있다.『해동이적의 도맥의 특징은 우리 나라 고대의 단군사상에 서 仙脈의 원뿌리 를 찾는 견해이 다. 이는『해동전도록고의 도맥 설정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해동이적고에 실려 있는 경호i改15터 자신의 서문에도 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견해를 천명하고 있는데 그의 知友인 鄭斗鄕의 서문에서도 아래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 동방에는 산수가 웅장하여 君, 典子 이래 服氣抑形하고 바람을 호흡하고 이슬을 마시는 사람들이 반드시 많이 있었을 것이나 우리 민족이 숭상하지 않은 탓으로 잘 전승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物外之士가 심히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49)49) Ii'값짜흉全짜.!J, p. 12~. <짜짜方山水않於六合f1 trl~t 以來!!Hfl f*~ 핑ilI\f£1: ii之~必多옷 不6년tb.不{파 j갚以4t 1~之土펠~之).
『해동이적』에서 게재한 선가인물은 植君을 비롯한 대략 40인으로서 최치원 이전의 인물은 植君, 滿居世,東明玉,新羅四仙,玉寶前,金;能孝와 蘇賊,大世와 供菜,居始,金可紀 등이다. 이 기록에의 하면 단군은 1508년의 수명을 누린 신선으로서 중국의 전설적 황제 伏效에 비견된다.
r해동이적』의 기록에서 주목되는 또 다른 사항은 신라의 시조 菊居世를 仙人으로 간주하는 동시에 신라에 四仙을 비롯한 玉攻商, 金說孝,蘇顯,大世, 染 등의 여러 仙人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최치원 이전에 신라사회에 이미 신선사상의 흐름이 널리 퍼져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들과 최치원과의 교섭 관계에 대해『해동이적』에서는 구체적 언급이 없으나 전편에 흐르는 맥락으로 보아 최치원이 그들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리라고 생각된다.『靑部供』의 저자 起故籍은 조선조 立祖代의 인물로 片民子(辛思割)의 문하에 서 60 여 년간 仙道 수련을 사사받았다. 片民子는 金抑子 등 7 인과 함께 靑松山人(親淡祖〉을 스승으로 받들고 수련하였으므로〈靑潮染>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청학집』에서는 우리나라 선파의 조종을 恒仁眞人으로 간주한다. 植仁의 선맥은 恒雄으로,恒雄의 선맥은 다시 植君으로 계승되었으며 이 흐름은 신라 23仙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 내용에서 특이한 사항은 恒仁과 恒雄을 신화적 인물이 아닌 실재인물로 간주하는 입장인데 유감스럽게도 이 들에 관한 상세한 설명 은 첨 가하지 않고 있다.『청 학집』에서 또 하나 주목되 는 내 용은 恒仁을 동방선파의 조종으로 간주하면서 恒仁의 연원이 중국의 廣成子에 있다고 보는 점이다. IT해 동이적』에 서 는 단군에 관해 언급하면서 광성 자에 관해 1,200여 세를 산 선인으로 기록할 뿐 양자의 관계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만 광성자는 왕위에 있지 않으면서 선인이 되었으나 단군은 왕위에 있으면서 선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보다 위대하다고 평하고 중국의 伏我에 비견한 바 있었디、
廣成子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in住子』에서 보인다. 그 내용에 의하면 광성자는 중국 고대의 성인인 黃帝에게 도를 가르친 인물로 서때 推朴子의『神仙에서는 이에 근거하여 그를 도교의 시원적인물로 설정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도맥의 연원을 광성자에게서 찾는 견해는 砲朴子의 영향이라고 추측된다. 이능화의『朝鮮道敎史』에서는『던京巡說』이라는 古합를 인용하여 植仁에게『始 』와『I못:라는 저서가 있었다고 말하고 이는 1女7帝『◎하향2』과 유사한 것 으로 추측한다.이 견해 는『청 학집』에 서 밝힌 도맥 이 근거가 있다는 입장이다.50) Ii'狂子.!I, 훈11펀.
51) 좋~和, Ii'뺑l¥ttl훌k史J), 훌훌훌股액 주, 햄成文化社, 1977, p.ll.『청학집』에서는 이와 같이 광성자에개서 연원을 찾는 한편 최치원에 이르는 흐름을 아래와 같이 설정한다.
f 훤{君-永郞-뤘德-玉폈짧, 경 E 純南
이상의 세 가지 도교사서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입장으로 요약된다.
첫째,우리나라의 고유한 선맥이 고대부터 실재하였으며 이 흐름이 최치원에 전승되었다(『해동이적』).둘째,도교는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전승되었으며 최치원은 최초로 전승될 시기의 인물이다(해동전도록』).셋째,최치원은 단군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전승되어 오던 선맥을 계승하였는데 더 소급하면 중국의 광성자로 연결된다(『청학집』).이상 세 가지 견해 중 어느 견해가 타당한가를 밝히는 것은 매우어 려운 일이나 그 기록을 모두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 고대로부터 흘러내려온 고유의 선맥도 있었고 중국으로부터 전승된 흐름도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상사적 흐름을 고려하면 쉽게 수긍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세 가지 도교사서 에서 공통적으로 최치원을 거론하는 것은 무슨 의미 인가. 필자의 견해로는 고유의 선맥과 중국에서 전승된 도맥을 접합시킨 인물이 최치원임올 암시한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최치원이 입당유학 후 본국에 돌아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의해서도 간접적으로 뒷받침된다. 이 경우 그 도맥의 성격이 內丹法임은 물론이다.6. 省孤雲傳』과『樹孤雲江山曲』에 묘사된 孤雲의 도교적 인간상『植孤空傳』은 최치원을 모델로 하여 쓰여진 조선조의 소설이다.그러므로 역사적 사실에 바탕한 傳記라기보다는 허구적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최고운전을 살펴보는 것은 고운의 생애나 도교사상의 근거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후세에 비쳐진 고운에 대한 도교적 심상,즉 고운이 조선조의 사람들에게 仙人으로 생각되었던 연유를 확인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고운은 도교적 수련을 통해 仙人이 되려는 갈망을부단하게 지니고 있었으며 그 자신 평소에 상당한 경지의 수련을 한 혼적이 나타난디-. 이러한 축적된 수련에의 의지가 말년에 가야산에 은둔하게 된 원동력 이 되 었다고 볼 수 있다. 가야산에 은둔한 후의 그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고운을 평가하는 후세의 안목은 공통적으로 그를 仙人으로 인식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예컨대 林石川 位齡이 雙沒寺에서 지은 시에서는 아래와 같이 노래한다.32)
52) fiJJ!~회.ooi1k없;jlJJ 썰 30, 映川ms條.
치원은 신선이 러 니 (致述仙사!i)/표연히 세상을 떠 났네 (現然,태世抗)/작은 돌비석에 글자는 있건마는(短碑强有字)/온 산 깊은 골에 무덤은 뵈지 않네 (深洞本無街)/혼탁한 이 세상에 태어 나긴 하였어도(深世身如寄)/청천의 학과 같아 뭇새의 벗이야 되랴(W•天的不群)/되 같은 높은 덕망 어찌 감히 우러르리 (抗山安可仰)/오직청향 맡고 그 덕망 그립니다(能此街河我)
이 밖에도〈備仙植子僧遊世〉라 한 供術,〈仙菊釋子供件個〉이라 한與仲字,〈備仙一去迎者〉라 한 命好仁,〈千古備仙分物色〉이라 한 契W 등에서는 그가〈偏仙〉등으로 불려지고 있다. 備仙이라 함은 유학자인 동시에 仙人이라는 의미,즉 단순히 유학자에 그치지 않음을 뜻한다.,3)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고운은 仙人이되 완전히 세상을 떠난 선인이 아니라 유가적 경세론을 넘나드는 선비적 신선이라고도 풀이할 수 있다.33) S?lWt3, r밟Jl1fJl~~究J , Ii'한국운학의 도교척 죠영 J), JL성 품화사, 1986, p.43.걷용圭:u의 「五州fa文&훌ntmJ 중 「뾰文뀔찮짜없향짧짧」에서 도 그릎 판탤의 싸6lj응 .호는 것이 세인의 용션업칸 지척한마.
조선조에 저술된『최고운전』은 그러한 고운에 대한 심상을 소설화한 것으로 간주된다.『최고운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고운의 생애를 仙人이라는 입장에서 기술하고 있으며 그 작품의 구성에서 바탕으로 하는 세계관도 도교적 우주관올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도교적 우주관은,특히 조선조에 신봉되었던 관점에 의하면, 玉皇上帝가거주하는 天上과 인간의 現世, 그리고 신선들의 仙界와 水府로 구
분된다. 또 이 각각의 공간은 유일의 主幸神 玉皇上帝에 의하여 지배된다. 따라서 소설의 구성은 이 도교적 세계관에 의거한 시간, 공간의 개념에 의해 이루어지며 인간의 현세적 고난이 천상의 섭리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어쨌든 『최고운전]은 그러한 세계관 아래 다음과 같은 줄거리로 구성되어 있다.35)
54) 효찌짧, 앞의 논운. p.4G.
55) 감윤 논품. p.47. li'.짧홉흉"f\Y.D의 i옐文앤 fit원훌~i홉빼』윤 『뾰F.1~f41.nJl~는 꺼l 헤 엔개의 각풍。l 다'.최치원의 아버지 植神이 문창령을 제수받는다.
그 마을의 잇따른 변괴로 아내가 금돼지에게 납치된다.神은 아내에게 매어 논 실을 따라 동굴에 들어가 금돼지를 죽이 고 아내와 전임사또의 부인들을 구출한다.아내가 넉 달 뒤 최치원을 낳는다. 神은 금돼지의 아들로 의심하여 아이를 길에 버 린다.버려진 아이를 天女가 내려와 기른다. 天備가 글을 가르쳐 최치원은 3 세에 대문장가가 된다.하루는 중국의 天子가 후원에서 최치원의 글 읽는 소리를 듣는다. 學士를 보내 글올 겨루게 한다. 學士가 최치원에게 져서 돌아온다. 天子가 달걀을 석함에 넣어 신라왕에게 내용물을 맞추게 한다.이때 최치원은 서울에 올라와 거울을 일부러 깨고 羅永相의집 노복이 된다.羅永相이 왕에게 석함을 받고 고민한다. 최치원의 도움에 의해 그 내용물을 알아 맞추게 된다. 대가로 羅承相의 딸올 얻는다.최치원이 天子의 부름으로 12살에 入店한다.⑯ 중국으로 가던 중 용왕의 아들 季牧을 만난다.⑪ 입당 도중 주막노파와 노인과 여인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天子가 장치한 고난을 극복한다.⑫ 최치원이 과거에 장원급제한다.⑬ 黃m 의 亂을 機::;I?로 평정한다.14) 신하들이 최치원을 시기하여 섬으로 귀양올 보낸다.
⑮ 天子에 의 해 다시 中原으로 올라온다.⑯ 최치원이 공중에 올라가 天子를 크게 꾸짖는다.⑪ 최치원이 :#雜i子를 타고 신라에 돌아온다.⑬ 왕과 대립 하여 가야산에 은거 한다.⑬ 漁夫가 정덕년간 검 단선사와 바둑을 두는 神仙 최치원을 만난다.위의 내용기술에서는 고운을 유교적인〈文〉의 영역에 해박하며 경세론에도 관여 하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昇仙한 仙人,즉 ffi仙으로 묘사한다. 또한 작품의 도처에서 시간,공간을 뛰어넘는 도교적 모티브가 작용하고 있음이 발견된다.이러한『최고운전J의 내용에서 주목되는 또 다른 내용은 고운이 仙人으로 묘사될 뿐 아니 라 중국에 대 항하는 민족 주체 정신의 담지자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창록 교수에 의하면 조선조의 신선소설은 그 성격상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씨 첫째는 修波仙道 소설로서 神仙可學의 입장에서 신선에 이르는 수련의 길을 밝히는 것이 주내용이다. 둘째는 主强仙道 소설로서 민족적 울분을 해소하기 위하여 fill®을 활용 민족적 주체성을 강조하는 설화가 중심이 된다. 세째는 ^伯1활 소설로서 道[•士나 수15士들이 행하는 도교적 方術을 내용의 중심으로 삼는다.3야 챈홉앓. [j'한국신션소션연쿠'Jl. 형 션관판사. 1984, p.21.
이 세 가지 유형 중『최고운전』은 두번째 유형 인 主强仙道 소설에 해당한다는 것 이 다. 이는 조선조 후기 에 편찬된 道敎史按인『按園史話』와 그 흐름을 같이하는 것 인데 그 모델로서 고운을 선택했다는 것 역시『授固史話』와 궤를 같이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유교적 입장에서 최치원을 文廟에 배향한 이유와 비교할 때 좋은 대조가 된다. 유교적 입장에서는 고운이 중국의 유교사상을 우리 나라에 잘 전승했다는 면을 중시한 데 반해『최고운전』에서는 고운을 민족의 주체성을 지키는 주체적 선인의 모습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물론 IT최고운전』의 내용에는 선후 모순된 부분도 있고 그의 역사적 행적과도 일치하지 않는 면이 많으므로 일종의 허구임은 분명하다는 것이 통설이다. 다만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운이 후세인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지켜준 仙人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최고운전』외에 고운을 도교와 관련시키는 작품에『祖孤男江山曲』이 있다. 이『江山曲』의 작자와 유포연대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내용상에서 추측하면『최고운전J]보다 후대에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江山曲』은 일종의 識만의 성격을 면 歌詞雄의 작품으로서 중국과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한 역사의 흥망성쇠를 풍수와 관련시켜 예언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중국에서 況代에 유행했던 圖識은 신비적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未來記로서 국가의 易姓革命이나 內憂外患 등의 사회적 변동기에 흔히 유포되었다. 이 중 때는 固3판,02J 등을 통해 애우 함죽적으로 표현하는 형식올 뜻하며 識은 路微한 글로 미래를 암시하는 것을 지 칭 한다.37)57) 朴향파[, r孤원江山때WfJ'e J , rr추자뼈 1과사송수논운검 JJ , 강화깥판사. 1966. p.291.
우리나라에 이러한 誠維만에 비슷한 秘記가 유포된 것은 삼국시대 말엽부터로 보이며 최치원이 활동했던 통일신라 후반기 무렵에는 중국으로부터 풍수도참설이 상당한 부분 전래되었다. 한국 풍수도참의 원조로 불리는 평[ (827〜898)가 출현한 시기도 그무렵 이다. 그런데 풍수도참설은 주로 은자들에 의해 전승되고 민중등의 바람을 표현한다는 면에서 성 립 당시부터 도교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이해되어 왔다. 識記의 저자로 가탁된 我抑大師가 道敎史쨘에서 仙家 인물로 묘사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58) 많충혈, r고려의 따水圖앓띤‘챈 J , ti'한국철학사 JJ(中). 한국철학연쿠효 I. 1987. P.I0, ’9) 고쿠려말。l 냐 백제말기에도 秘l?C짧가 유쟁댔언 혼껴야 보01 여 쥬혀 고푸려말기에는 神誌秘詞가 재판되었다고 천해진다. 잊없함. r푼대한국의 ~:',1띤뺑 J. 에f국근대 종교사상사 JJ. 원팡대 쏟판국. 198". p.84.
고운을『江山曲』의 저자로 가탁한 것 역시 그가 말년에 仙人이 되었다는 믿음에 바탕한 것으로 보이며 이 점에서『최고운전』과 맥
락을 같이 하고 있다. 그를 誠言과 관련시키는 또 다른 예는〈致林黃葉 稱滿靑松〉이라는 표현을 통해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창업을 암시했다는 설화이 다.
60) Ii'三国史阻J].也致远悻-
『江山曲J]은 한국의 역 사에서 전개되는 흥망성 쇠 의 과정 을 地勢에 연결시키는 내용이 주된 흐름을 이루고 있으며6임 진왜 란을 암시한 부분도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조 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그 내용 가운데에는.秘能山이 도읍지가 되고 起氏가 등극한다는 예언이 포함되어 있고 풍수와 도참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때문에『鄭鑑錄』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다음은『江山曲』의 일부 이 다.
61) 朴迫怨,世~I 是是. p.303.
••• 전략 •••
三大賊을 토멸하고 강산고통 위로하다가(신라의 삼국통일 암시)••• 중략 •••S中消내11 香花風에 흐르는 朴況I保布 반갑도다(고려의 개국 암시〉••• 중략 •••西山을 바라보니 三春桃染 놀라워라(조선의 개국 암시)••• 중략 •••오호라 三角將아 東流來賊 둘러보라(임진왜 란 암시)••• 중략 •••沒校漆夜 잠든 강산 秘1!!:i聲이 젠일인고(계용산이 도유지 임읍 암시)••• 중략 •••아마도 月江玉女 두얼런고 千年金城 述!氏로다(起氏의 둥극 암시)••• 以下略 •••그렇다면 최치원을『江山曲』의 작자로 설정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앞에서 살펴보았던『최고운전』에서는 고운이 민족적 자존감을 지켜줄 주체적 선인으로묘사되고 있다. 이에 비해『江山曲』에서는 그가 역사의 흥망성쇠를 담담하게 기술하면서 거시적 안목을 제시 하려 는 달관된 은자임 을 시사하고 있디-. 이 두 가지 인간상은 약간 거리가 있는 듯이 보이지만 큰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두 가지 관점이 상보적으로 작용하여 고운에 관한 仙人으로서의 이미지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 심상은 我抑이 나 元뿐만 아니라 도교사서에 기록된 여러仙人들에게도 공통되게 각용하였으며 최고운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韓國古代思想과 孤强1 風流道의 성격고운이「想郞碑序」에 서 우리 나라 고유의 風流道가 존재함을 밝힌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風流라 한다. 그 교를 창설한 내역은 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실은 삼교를 포함하여 群生을 接化하는 것이다. 들어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 하는 것은 想司窓의 뜻과 같은 것 이요,無爲로 일을 처리 하고 말없이 교를 행함은 周柱史의 宗旨와 같은 것이요,악한 일은 하지 말고 선한 일은 받들어 행하는 것은 色乾太子의 교화와 같은 것이다.62) 註41 참조.
위 내용에서 는 유 • 불 • 선 삼교사상을 포함하는 넓은 폭을 지닌 사상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풍류도는 단순히 유 • 불 • 선삼교의 결합만으로 그친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이에 관해서는 풍류도에 삼교의 요소 이외에 독창적인 어떤 요소가 있었을 것이라고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이 요소는 문헌적으로 근거지을 만한
것은 아니며 사상사적 흐름을 통해 포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풍류도가 유 • 불 • 선 삼교를 포함한다고 했을 때 주목되는 것은 유 • 불 • 선 삼교가 당시로서는 세계적 보편사상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우리 고유 사상에는 당시의 보편 사상이었던 유•불•선을 수용할 만한 조화력과 창의력이 내포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운이 파악한 유 • 불 • 도와 풍류도의 공통된 요소는 주로 실천적 규범 에 관련된 것들이 다. 이는 花郞이라는 신라사회의 곡수집단의 실천윤리를 설명하기 위해 고운의 「난랑비서」가 저술되었다는 특수성을 감안할 때 수긍이 된다. 사실고운이 제시한 삼교의 요소,즉 忠孝의 윤리나〈諸惡英作 衆萬奉行〉의 사상은 엄밀히 살펴볼 때 유교나 불교의 전체를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이 규정이 주로 실천의 영역에서 거론된 것을 감안하여 형 이상학적 측면으로 유추할 때는 현이상학적 측면에서도 유 • 불 * 선을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 이 풍류도에 있다고 주즉할 수 있다.63) 李힘핸. r한국사상의 훨쥐‘J. 흉익 대 논운점 • 1973, P.7.
그렇다면 風流道와 花郞道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 두 가지 개념은 보통 서로 일치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으나 굳이 구별한다면 풍류도가 인간이 천지와 자연에 의빙하려고 할 때 거기서 생명의 근원을 체감하는 것이라면 이에 대해 화랑도는 자연에서 얻어진 풍류성,즉 생명의 근원을 인간집단에 매개하려는 행위이다. 따라서 풍류도는 인간의 생명의 근원이 그 타고난 자연 속에 있음을 체감함으로써 영원한 생명, 두한한 생명, 절대의 생명에 감응된다고 믿고 스스로 그 생명의 근원에 자기생명을 계합시키려는 사상이다. 이에 대하여 화랑은 풍류적 생명성을 자각한 인간들이 모인 집단으로서 화랑도는 풍류도를 체받아서 인간들간에 또는 국가나 사회에 그 대생명력을 활용하려는 도라고 말할 수 있다.64)
64) 柳炳싫~. r훈연씌l라시다l 의 Ja.流思;t!l..J, rr한국철학사.!J(上) , 한국철학연쿠회, 1987, p.149.
이와 같이 풍류도와 화랑도를 구별해 본다면 풍류도가 보다 근원적인 민족적 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화랑도는 신라사회라는 특수
한 여건 속에서 풍류도를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이념이기 때문이다.
고운이 밝힌 풍류도의 성격 중〈接化群生〉이라는 명제도 음미할만한 개념이다. 이는 모든 생명과 접촉하여 이를 감화시킨다는 의미로서 가깝게는 화랑의 인간상에서, 멀리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私益人間의 이넘에서 그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이에 의거하면〈接化群生〉하는 인간상은 천지의 신명을 잘 받드는 인간,개체를 넘어서서 남과 잘 협동하는 인간,정신과 육체가 조화된 인간,자연적 생명력을 충분히 품부한 인간으로 드러난디-. 따라서 단순히 윤리적 차원에서 남과 공존하는 인격에 그치는 것이 아니 다. 우주적 대생명의 근원과 통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모든 생명과 교감하는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된 인간상이라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인간상을 조성하기 위해서 취해진 화랑들의 가장 중요한 수행방식이 서로 도의 륜 닦는 것 (相任以巡後), 시와 음악을 즐기는 것 (相保以歌樂), 명 산과 대천을 찾아다니 며 즐기는 것 (쪄政山水 無述不至) 등이었다.63)65) 柳쩌짧, 갇윤 논운. P. lS7.
2 風流道의 구현자로서의 孤雲
앞에서는 고운이 언급한 風流道에 관해 살며보았다. 그렇다면 고운은 다만 객관적 입장에서 풍류도륜 거론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풍류도가 고운의 사상적 입 각지로 작용했는가가 문제된다. 필자는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는 입 장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의미있게 받아들이고 싶다. 이 시각은 신라의 풍류도를 유 • 불 • 선 삼교의 사상을 다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종합한 것에 그치지 않고 좀더 높은 차원에서 그것들을 다 살릴 수 있는 별개의 원리 지니고 있다고 보고 고운에게서 그 풍류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최치원은 두말할 것도 없이 유학자다. 그는 신라인으로 腦과 같이 유교의 최고전당인 文廟에 배향된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국가공무원으로 봉공한 일도 있는 전형적인 유교선비다. 그러 나 최치원은 또 불교의 대가다. 신라 때의 고승들의 碑文올 많이 썼고 河東 製沒寺,映川 海印寺 등 절에 많이 출입했다. 동시에 최치원은 도교의 신자다. 그는 備家처럼 집에서 臥席終身하지도 않았고, 佛家처럼 절에서 열반하지도 않았고, 표연히 산중으로 들어가서 사라지고 말아서 신선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는 유교나 불교나 도교에 자유로 출입하면서 그 어느 것에서도 만족을 얻었으며 결코 갈등을 느낀 혼적이 없 . 그는 그가 지은 난랑비 의 서문처럼 유교,불교, 도교 다 포함한 풍류도를 살다가 간 전형적인 신라인이 었다.
66) 추현흉, 홉 72의 논운, p.8.
즉 고운의 생애나 삼교합일적 사상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풍류도 의 구현자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이미 조선조 후기 北/같老人의 저술인『按園史話il에서도 발견된다.
『按園史話』는 민족 본위의 史觀에 입 각하여 우리 나라 역 사륜 서 술한 도교적 역사서로서『삼국사기,삼국유사』와 더 불어 각각 유 • 불도가의 역사의식을 대 표하는 책이다.『규원사화』에 서 는 우주창조과정에서부터 민족의 역사륜 서술하는 신화적 서술방식을 취하는데, 우리나라의 고대부터 존재했던 고유사상의 탁월성을 강조하는 것이 목징 이다. 이 고유사상은 神道로서 이 神道의 전통이 풍류도로 연결된다고 본다. 그리하여 규원사화』에서는 고운이 그러한 우리 고대의 성인의 정신을 잘 드러 냈다고 높이 평가한다.최고운은 자상하고 똑똑하여 글을 배우는 데 있어서도 뭇사람에 뛰어났고 고금의 일에 대해서도 널리 알 뿐만 아니라 글짓는 데도 이름이 뛰어났으니 그 말이 참으로 옛성인의 교훈의 정화물 잘 캐냈다고 할 만하다.67) Ii'짧댐史짧,I), 홉짜永역 , 한무리 , 1986, P.55.
이 내용에서〈고금의 일〉을 널리 안다고 한 말에 주목하면『규원
사화고에서는 고운을 우리 고대의 정신사적 흐름을 잘 이해한 인물로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밖에 근세에 대두된 단군교에서 중요경전인 (T天符을 고운이 번역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도 유의할 만하다. 즉 천부경은 원래 고대문자인 座回文으로 표기되었으나 관독하기 어 려웠으므로 고운이 이를 판독하여 한자로 표기하였으며 그 石刻이 묘향산에서 社延섟란 인물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6s) 근세의 仙家 인물인 全求就의 n治神哲學通編ii에서도 고운은 신선의 경지에 오른 仙人으로서 천부경을 석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69》이러한 견해의 타당성은 문제된다 하디라도 고운을 고대정신의 계승자로 생각한 것만큼은 분명 히 확인할 수 있다.68) 申哲饵, r 吐.:;t..r.}-..
그러나 고운의 친학을 풍류도라고 확증할 만한 확실한 근거 가 있는 것은 아니다.「난랑비서」자체가 한 화랑의 인품을 기술하기 위해 저작된 것일 뿐 자신의 사상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삼교합일사상을 지녔다는 명백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며 더우기 그의 생애가 민족주체를 세우려고 노력한 것이었 다는 견해에 대한 반론도 있다. 따라서 그의 생애에 대한 평가도 아직 일치 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그가 민족 고유사상인 풍류도정 신을 구현했다고 보는 것은 아직까지는 개연적 관단일 뿐이다. 다만 그의 사상이 지니는 포괄성과 그동안 우리의 선현들이 그에 대해 지녔던 인식을 고려하여 조심스러운 추측을 해볼 수는 있다고본다.
3 風流道의 神仙道的 성격앞에서는 고운이「난랑비 서」에서 밝힌 풍류도가 고운 자신의 사상적기 반임과 동시에 우리 고대사상에 뿌리박고 있음을 언급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고대사상의 원천은 어디서 찾을 수 있으며 그 성격은 어떠한가. 이에 관한 일치된 해답은 나와 있지 않으나 대체로 단군신화에서 그 근원을 찾으며 한국고대사상의 고유한 성격은 보동 한철학 또는 윤사상 등으로 개념화되어 이해되고 있다. 이 한철학 또는 분사상이 지니는 성격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규정되는데 그중 본질적 특성으로서 혼히 生氣論的 경향이 지적되고 있다. 즉 君 이래의 고대 한국인은 우주를 일대 생명의 흐름으로 보고 그 생명을 긍정하며 그 생명을 체받아 실현하는 삶의 길을 제시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한〉의 사상은 우주의 생명을 궁극에 있어서 하나로 보게 되고 인간과 하늘,인간과 자연을 동일한 생명적 흐름에서 파악하였다. 한의 사상은 합일적, 통합적,일원적인 세계관으로서 인간과 하늘,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이원론적 관점을 지양하는 경향을 지니기 때문이다.70)
70) 짧훨핸. Ii'한국의 천용척 교육카~I 판J. Ii'천학과 종쿄..!l. 현대종교운제연푸소. 1981. p.83.
특히 단군신화는 기본적으로 천상생명과 지상생명과의 결합과 새로운 인간생명에의 확충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하늘과 땅을 포괄하는 영역은 온통 이른바〈싶£슈의 흐름 the flux of life〉으로 충만한 세계로 이해된다. 생명 그 자체는 하나의 신비의 현상이다. 이 생명의 흐름은 그 所從來와 귀착점을 서로 분벌할 수 없는 두한한 신비에 속한다.
단군신화에서 천지 내지 세계의 의미는 생명적 자연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유물적 자연이 아니다. 또한 자연을 초월하는 어떤 초자연 supernature 이 예상될 수 없는 것이며, 이에 의하면 무슨 제약될 성질의 것 이 아니다. 단군신화에서 는 어떤 초자연적 존재까지 도 포괄하는 생명적 자연관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생명의 자연nature of life 은 궁극적으로 무한 infinite 으로 통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71)71) 좋뼈永. r사상사에서 혼 단궁신화J. Ii'한국사상의 싱층연주.!I. 우석. 1982. p.68.
이 우주적 생명력이 지닌 光明의 속성이 강조될 때,이는 봉사상으로 나타난다. 유사상은 곡히 생명의 원천을 상징하는 太陽光明에대한 믿음으로 구체화되며 사상적으로는 태양과 하늘과 신을 하나로 보는 체계를 형성한다.
72) 홉훌핸, 양의 논운. p.86.•
天쩌:원, 三一펜p~꼼 등 고대품헌으로 추정되는 갱서의 사상을 生成뀐헨으로 해석한 견해도 있다. 이에 의하연 고대 우리나라의 한철학은 始펴을 설정 하는 서 구사상과는 달러 無始U펀、住의 生成哲힘 o 로서 득히 화이트헤드 Whitehead 의 파정철학과 매우 상동펀다는 것이다. 즉 한사상은 이원론이 아니고 바이원척인, 질체척이 아니고 u] 싣체적인, 시원척이 아니고 \11 시원척언 이론이라는 것이다. 73)
73) 깅앙연, [i'한철학.!l, 천망사, 1983.
〈한〉사상을 유과 종합하여 한읽사상이라고 개념화하고 그 목징을 ① 生氣 ② 造化 ③ 人間幻:班의 세 가지 개넘을 통해 규정하는 견해도 있디-. 이에 따르면〈한〉은 무한한 생성력 자체로서 자연적 조화덕 을 통해 만물을 조화시키며 인간화의 과정을 거쳐 그 본래적 본질을 실현한다는 것 다.74)
74) 빼炳쟁, r한국종교액 학에서 본 원-갚교샤상J , r한국품화와 윈흩교사앙.!1, 씬광다l총판국, 1985, p.6S.
한의 가치관은 널리 모든 인간과 만물을 사랑하는 好生之道의 실천을 요체로 하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깟의 개념이 仁을 의미하고 r禮記고에서 英를〈仁함으로써 만물을 살리 는 것 을 좋아한다(仁■好生萬物)〉고 풀이한 것이라든가 홍익 인간의 이넘에서 추론할 수 있다. 목히 최치원의「난랑비서」에서 풍류도의 기본정 신이〈接化群生〉에 있다고 밝힌 것은 고대 한민족의 근본심성과 가치관이 好生齡物的 자혜에 있었음을 말해 준다.〈接化群生〉은〈私益人間〉보다 그 뜻이 더욱 넓은 한국 고유의〈어 짊〉의 표현이요,풍류도의 범생물적인 生生의 자헤를 의미하는 말이다.
초목군생이 나 동물에까지 德化를 베풀어 생을 同樂同保하도록 하는 것을〈接化群生〉이라고 표현한 까닭이다.73)75) 홈~JJt굉!, 앞의 논운, p.l0l.
〈한〉의 사상〈한〉의 가치관은 자아와 타아륜 합일적으로 보는 대아적 인간관과 인생관을 낳게 되었으며,또 현세에 집착하는 소승적, 근시안적,세속적 인간관과 인생관을 탈피해서 현실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대승적,원시안적,초원적인 인간관과 인생관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은 폭히 그들의 致誠의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경험히게 되는 脫我的 경지를 통해서 더욱더 강화되어 나갔던 것이다. 왜냐하면 탈아의 경지는 시간과 공간,인간과 天,인간과 만물,자아와 타아가 미분해된 하나의 海仰상태요,全一的인 海全融相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지와 이러한 세계에서 그들은 우주생명과 직접 교류,교감할 수 있었고 天이나 神의 계시를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76)
76) 홈n JJt핸, 강윤 논운1 p.85.
시러한 天人合一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제시된 수련법이 이른바 한국고유의 선도적 수련법이다. 이러한 수도륜 한마디로 요약하면 숭배의 대상인 天의 속성은 광명과 생명으로서 마음으로 光明理世의 정신을 받으며 몸으로 생명의 힘을 받아들이는 것을 수련해가는 것이다. 이 수련자세는 건전한 생활을 통한 도덕적 삶의 길을 바탕으로 하여 근원적으로 생명력이 충일한 삶을 영위하자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이제 이상에서 살펴본 우리 고대사상과 도교적 사유와의 관계를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 고대사상은 유 • 불 • 선 삼교를 포용할 수 있 는 포괄성을 지니므로 삼교 중 어 느하나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다. 그러 나 그 중에서도 구태여 사상적친화력을 논해 본다면 도교사상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그것은 단군신화 및 고대의 건국신화 등에서 확인되는 현세존중의식,天과 인간의 관계,天人合一의 추구, 자연주의적 가치의식 또는 仙界와 흡사한 神市의 관념 등이 도교적 사유와 상통한것에 근거한다. 그 중 자연주의적 사상에 관해 IT규원사화』의 기록을 인용해 보면 아래와 같다.가락국 房登王 때에 函始仙人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七熱山 招53空에 서 왕을 보고 말하기를〈왕이 자연스럽게 다스려야 백성이 자연스럽게 풍속을 이룰 것이므로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이 옛부터 있는데 왕은 어찌 그것을 체험하여 얻지 않는 것인가〉하니왕이 큰 소를 잡아 정했으냐 살지 않고 폴아갔다. 이것이 옛성안을 알아내는 131 걸이다. 77)
77) Ii'찢國史話JJ, it.5까i永역 , 한푸리 , 1986, P.5'.
위 글에서 우리의 고대 성군의 통치방법을 밝힌 내용은 그대로 도교의 자연주의와 통한다. 이러한 양자간의 상통성으로 인해 중국에서 도교사상이 우리 나라에 전래될 때 크게 환영 올 받았으며 별다른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전개된 도교사상이 불교나 유교에 비해 뚜렷한 형태를 보이지 않는 것도 여기에 기 인한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78) 李않뼈, B£ 38의 껴 , P.H.
그러나 양자가 전적으로 일치한다고는 볼 수 없다. 예컨대『규원사회내에서는 우리 고대사상을 神敎라 하고 중국에서 건너온 仙道와는 다름을 언급하고 있다.79》이 사상적 차이는 간단하게 규명하기 어려우나 두드러진 차이 한 가지만을 지적해 본다면 우리 나라 고대의 신교에는 기 본적으로 天에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 사유가 기본이 된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중국적 선도는 그러한 종교적 신앙감은 희박한 편이다. 물론 후의 종교화된 도교사상에서는 元始天好-을 정점으로 한 신앙체계가 수립되어 있었으나 중국도교사의 흐름을 볼 때 이 경향과 신선사상은 그다지 밀접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
79) Ii'핏園史話JJ. 앞의 쩍, P. -4 1.
그러나 그 차이는 크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고대사상에는 그러한 天에 대한 신앙뿐만이 아니라 仙人이 되기 위한 수련의 전통도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신교에 이 두 가지 게기가 다 포함되었는데 그 중 수련의 측면이 중국적 선도와 상통한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80)
80) 來뀔뼈, Ii'짧國道왔합탱史JJ, 생균-'ll:대 대동품효}옐쿠원, 1987, p. 24.
이 밖에 그러한 동일한 선도추구의 흐름에서도 사상적 차이가 나타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것은 현실인식의 측면으로서 丹齋申來法의 견해이다.
支郡 道敎는 避世의 敎요,與死의 道라. 고로 帝王된 者가 是敎를 信하면 萬乘의 位를 脫施같이 視하고 보 好天을 구하며 土民:으로 표敎 를 信 하면 山에 하여 月을 해하되 갔의 仙I敎:는不然하여 明臨答夫는 大山이로되 暴君(次大王)올 廢하고 外産(公孫度)를 却하였으며 思溫述은 大兄(즉 仙人)이로되 鮮卑를 麻하며 文 신라와 격전하다가 死하였으며 金康信은 國仙이로되 中京에 入하여 國을 위해 기도하고 麗濟를 멸하였으며81)
81) 떼1 朱원. r京댐古代仙&考J. fj'j앙파 申末뽑·全mJJ jIJ~. 단채 신껴l 효선생 기 녕 사엽회 간. 1979. P. 47.
이를 고려하면 우리의 고대사상과 중국에서 전래된 仙道와 사상적 차이가 없진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보아 양자간에는 매우 유사한 점이 많으며 이것은 고운이 풍류도를 :玄:如>:之j資라고 부르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나아가 고운을 우리 고대로 부터 의 풍류도를 전승한 인물로 본다면 고운의 사상이 도교적 경향에 서 있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요약과 결론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을 종합하면 아래와 같다.0 齋詞는 도교의 祭天儀式에 사용된 기 원문이다. 이 고운의 究?詞는 우리나라 최초의 것으로서 그의 도교사상을 알 수 있는 좋은 소제 이다. 우선 그 글에 의해 고운이 元始天詞:을 정점으로 한 도교적 신학이 정립된 후의 도교신학을 받아들인 것을 알 수 있다. 동시에 그의 齋詞 안에는 철학적 道論도 공존하고 있음이 특이하다. 또한 그의 기원문에는 一氣存思라는 內丹學的 수련사상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 수련이 天에 대한 경건한 신앙심에 마탕하여 이루어 진다는 데 특징이 있으며 이 점은 한국 고대사상의 흐름과 상통된다.©「親郞碑序」는 유 • 불 . 선에 관한 고운의 강령적 파악을 드러내 주고 있다• 그 중에 관한 인식은〈無爲之市〉에 처하고〈不言之敎〉를 행한다는 단편적 내용에 그치고 있으나「四山碑銘」등에서 밝혀진 노장철학 이해의 입장과 상통하고 있다. 그 입장은 道 • 佛융합,또는 E敎合一의 견지에서 거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러한 입장이 도출된 배경,즉 座代의 삼교합일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 道敎史,1}라 함은 우리 나라에 전승된 道脈 전수과정을 밝힌 저서,즉 도교인물사를 의 미 하는데『海東傳道錄j]『海東異!Kj『W初地j]등에 서 는 공통적 으로 고운을 핵심 인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고운의 한국도교사에서 지닌 위치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내용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그 내용 중에는 우리나라의 도맥의 연원을 중국에서 찾는 견해와 고조선시대로 소급시키는 견해가 구별되어 있다.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우리나라의 고대사에 관한 인식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인데 양자 모두 고운을 그 전통적 계승자로 보는 것이 특이 하다. 이에 근거 하여 중국에서 유입된 도교사상과 우리 나라 고유의 仙脈이 고운에게 서 융합되 었다고 말할 수 있다.敏 고운이 활약했던 신라사회에는 원래부터 도가적 無爲自然의풍토가 뿌리박고 있었다. 그후 불교가 전래되면서 佛 •道 융합의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며 고운이 활약한 두렵에는 유 • 불 • 도 삼교가 구애 없이 넘나드는 사상적 분위기였다.0『植孤民他대은 조선조의 여러 도교적 고대소설과 같이 도교적 세계관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이 다. 따라서 조선조의 神仙小說의 범주에 포함되므로 조선조의 도교사상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 다. 그런데 그러한 도교적 세계관을 묘사하기 위해 선택한 인물이 고운이라는 사실이 주목을 끈다. 저자는 고운을 신선의 경지에 올랐을 뿐 아니라 민족적 주체성을 지킨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이 고운에 관한 도교적 심상으로 형성되어 후세까지 내려온 것임을 알 수 있다.敏 고운은 우리나라의 고유사상인 風流迫의 존재를 언급한다. 이 풍류도는 三敎를 포함하면서도 그 이상의 독자성을 지니는 것으로평가되며 그 기원은 단군시대로 소급된다. 그런데 고운은 단지 객관적으로 풍류도를 소개한 것만이 아니고 그의 행적으로 볼 때 풍류도를 주체적으로 구현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풍류도의 사상적 특징을 깊이 음미하면 도교사상의 핵심인 신선사상과 매우 상통되는 면이 많음이 발견된다. 그러나 풍류도와 신선사상이 반드시 일치한다고는 볼 수 없으며 풍류도의 사상이 보다 폭넓은 내용을 포함한다. 그러 나 풍류도가 유 • 불 • 선 삼교 중 선교적 요소와 깊은 친화력을 지님은 부정할 수 없으며 고운사상의 주체를 도교적 견지에서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된다.
「孤雲의 道敎觀」 토론개요
문제제기 : 오늘날 도교사상을 학문적 으로 탐구하려 는 경 우 철학적 도가사상과 종교화된 도교사상을 구별하는 방법이 일반화되는 추세에 있다. 그렇다면 고운의 도교사상을 분석하는 데도 이러한 시각이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토론내용 : 도가사상과 도교사상을 구분해서 접근하는 방법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며 특히 철학의 분야에서 순수한 천학적 측면을 탐구하려는 경우 환영받고 있다. 왜냐하면 도가사상은 그 자체가 순수한 될학의 학파로서 우주론, 인간관,실천론 등의 요소가 심원하게 전개된 반면 도교사상에는 풍수,도참,주술,기복 등의 다양한 민간신앙이 포함된 중국적 종교사상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도교사상에 고유한 천학적 요소가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도가사상도 그대로 수용되어 있을 뿐 아니라 神仙思想을 뒷받침하기 위한 자체의 논리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도교사상은 순수한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서 보다 역시 폭넓은 사상사적 탐구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디 적절하다. 그런데 고운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려는 경우에는 양자문 구별하지 않고 일종의 도교적 사유라는 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왜 냐하면 고운의 사유범위나 활동분야가 될학적 영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 문학, 종교 등의 여러 분야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고운이 활동했던 店代나 신라후기의 사상적 토양에서는 도가와 도교의구별의식이 선명하지 않았으며 고운 자신에게서도 이들을 구별했던 혼적을 찾기 어렵다는 것도 이유의 하나이다. 더우기 고운의 글 자체가 도교사상에 관해 체계적인 서술을 하려는 뜻에서 집필된 것이아니 고 도교의식에 사용된 祭文이 라든지 그의 詩文 등에 서 단편적으로 도교사상을 언급하는 것이므로 엄격한 방법론을 적용할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도 있다. 그러 나 그가 유 • 불 등의 다른 사상과 병칭할 때는 주로 노장천학적 요소를 거론하는 반면 도교사상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 데서는 막연하게나마 어떤 시사점은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문제제기 : 고운의 도교사적 위치가 우리 나라의 고대부터 면면히 흘러왔던 仙脈과 중국도교에서 전승된 道脈의 교차점이라고 한다면 그의 도교사상에서 어느 흐름이 주체가 되는가. 또한 우리나라 고유의 선맥과 중국에서 전래된 흐름의 사상적 차이는 어떠한가.토론내용 : 고운이 두 가지 흐름이 만나는 교차점 이 라고 보는 것은 『海東傳道錄』(T海東與-故il『靑初集』『授固史話』등의 道敎史판의 내용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양자의 흐름의 성격이 어떠하며 어떤 차이가 있는가 또는 고운의 도교사상에서 어느 흐름이주체적 역할을 담당하는가에 관해서는 명백한 근거를 찾기 어렵 다. 다만 한국 고대사상에 관한 여러 단편적 자료와 중국도교에 관한 문헌적 자료를 통해 그 문제에 관한 개괄적 해답을 논의할 수 있을 뿐이다. 우선 고운의 생애를 고려해 볼 때 그가 중국에 서 중국도교의 흐름에 접했으며 귀국 후에는 우리나라의 고유한 仙脈에 접합했을 가능성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생애의 전기에는 중국도교가, 후반기에는 고유의 선맥이 주된 의미를 지녔다는 견해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되는 것은 양자의 우주론, 인간관 등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대사상은 보통 神道,한사상,표사상 등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天에 대한 종교적 敬天思想과 집단적 祭天儀式,祭政一致的 경향뿐만 아니라 신선도적 수련의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곡히 君神話를 통해 드러 나는 현세존중의식도 무시할 수 없는 특징이다. 그러나 중국도교는 일찍부터 유교사상에 대한 비관적 반정립으로 대두된 사상이었으므로 초세간적 確逸思想의 요소가 강할 뿐 아니라 신선사상에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깃들어 있었다. 후에 종교화된 도교에서 행해진 제천의식이나 경천사상 등은 유교적 요소 수용한 것이며 神仙思想의 주된 곡징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고운이 접한 중국도교는 은둔적 신선사상과 종교화된 도교교학이 혼재된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그의 글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 쨌든 중국도교와 우리 나라 고대사상간에는 공통된 면도 있고 다른 면도 있으나 공통된 측면의 주된 것은 역시 신선도적 수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신선도적 수련은 성격상 은둔적 경향에서 있으므로 우리 나라 고대사상이 아무리 현세중심적 성향을 지닌다 하디라도 신선도적 전통만큼은 은밀한 전승을 통해 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운이 말년에 은거했던 것도 이 런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그렇다면 고운이 두 가지 흐름의 교차점에 서 있다 하더라도 이는 양자를 종합했다는 의 미보다는 양자에 공통된 선도수련의 흐름을 하나로 만나게 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해동전도록 을비롯한 여러 도교사서에서 밝힌 내용도 이와 같은 해석을 뒷받침한다.그러나 눈을 돌려 우리 나라 고유의 사상을 유•불*선의 삼교륜포함할 수 있는 폭넓은 것으로 보고 고운이 이 고유사상 즉, 風流逆를 계승한 인물이라면 입장은 달라진다. 이 문제는 풍류도의 진면목이 밝혀지고 고운과 풍류도와의 관계가 해명됨에 따라 해결찰 것으로 보이 며 현재로서는 쉽게 단정 할 수 없는 병선이다.문제제기 : 고운이 이해한 成立道敎의 道敎敎學은 우리나라에 어떤영향을 끼쳤는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려시대의 齋詞나 1향詞에 나타난 도교교학적 이해는 고운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 그렇지 많•으면 중국으로부터 직접 전승된 것인가.토론내용 : 고운이 /고代의 교단화된 성 립 도교의 사상과 접 촉한 것은 분명하지만 귀국 후 그가 파악한 내용이 신라사회의 도교인식에 영 향을 주었 다는 혼적은 찾기 어렵다. 당시의 신라사회에는 老jfE思想이나 風水思想 등이 비교적 년리 유포되었으나 元始天取을 정점으로 한 도교적 多神論의 체계는 수용된 혼적이 없다. 고려조에 접어들어 중엽 에 福源宮이라는 도교사원이 건립되기 전까지는 교단도 교가 우리나라에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후 고려조정에서 도교의식을 거행할 때 사용된 齋詞나 靑詞는 고운의,詞와 그 구조가 유사하므로 고운의 간접적 영향올 발견할 수 있다. 이 경향은 조선초기의 도교의식에도 연결되며 조선조 중엽 限格정가 혁파될 때까지 계속된다. 조선후기에 저술된 北出老人의『榜園史話』에서는 우리 나라의 고대사상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神論을 모색하기에 이르는데『규원사화』에서 고운을 한국 고대사상의 전통을 잘 계승한 인물로 보는 것이 이채롭다.
문제제기 : 조선조의 도교소설인『植孤民傳고이 유포될 당시 의 사회적,사상적 배경은 어떠한가.토론내용 :『최고운전이 저작된 시기나 작자는 분명치 않으나 대체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후로 추측하고 있다. 그 시기는 우리나라의 지식층에 사대모화적 정신에서 탈피하고 민즉주체적 의식이 조심스럽게 싹트는 시기였다. 그 분위기는 그 민족주체정신의 근원을 단군사상에서 찾는 경향으로 이어졌는바 그 일환으로 (T최고운전이 저작된 것으로 추측된다.『최고운전』의 내용 중 고운이 중국을 무대로 크게 활약하거나 선인으로서 중국황제를 꾸짖는 내용 등은 민족주체의식의 투영으로 보인다. 최고운의 생에 자체는 그러한 줄거리에 걸맞는 삶은 아니 었으나 작자는 고운을 민족적 자존감을 지킨 인물로서 고대의 선맥을 계승한 인물임올 암시한다. 이러한 의도는『규원사화의 내용과 종합하여 볼 때 더욱 두드러진다.『규원사화에서는 從i族 중심 의 春秋大殘的 역사의식율 비 판하고 위대했던 고대사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민족적 사명을 부각시킨이와 동시에 민족사의 연원을 천지개벽 시대에까지 소급시키는 신화적 구성을 제시함으로써 天孫이라는 자긍심을 고취하고 있다.
이러한 민족의식은 조선초기의「應制詩註」라는 도가적 자료에도 보이는데 이러한 도가적 역사의식이『최고운전』에도 반영되어 있다고 간주되 는 것 이 다. 그런데 최고운전 자체는 고운을 仙人으로 생각하는 데 서 출발히여 저작된만큼 고운을 仙脈의 계승자로 기록한 按敎史갼의 울현을 종합하여 고려할 필요가 있는데 도교사서 의 울현이 조선조 중업 이후로 추정되므로 조선조 후기 에 r최고운전고이유포되었다고 보디라도 역시 무리가 없다.문제제기 : 고운은「裝 郞碑序」에서 風流道의 폭이 유 • 불 • 선 삼교를 포함하는 원융성을 지닌다고 보고 그 구체적 예로서 道家의 無爲의 敎,家의 忠孝,佛家의 普行 실천의 요소를 들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 예로 든 無爲의 敎化 등이 유 • 불 • 선 사상의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는 볼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풍류도가 敎를 포괄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을까.토론내용 ; 유교사상의 전체가 忠孝만으로 귀결되는 것은 물론 아니 디-. 유교사상이 역 사적 으로 전개 되 면서 형 이 상학적,문학적,사회적 여러 내용들이 첨가되므로 이 모든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고리함 때 유교사상을 논할 수 있는 것이 사신이다. 그러 나 후에 첨 가된 여러 요소를 제외하고 원래 유가사상이 지닌 고유한 성에 주목해 본다면 사회 에 옵바른 인륜질서를 수립하는 것을 그 중심 데마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교사상을 충효로 표현하는 것은 유가사상의 고유한 지 향방향을 잘 드러 낸 표현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본다. 마찬가지로 도가사상을 無爲而化의 교화로 표현하는 것도큰 문제는 없다. 단지 불가사상의 강령윤 述行 실천으로 국한시킬것인가의 문제는 논의한 만하다. 왜냐하면 불자는 깨달음읍 통한해탈을 궁극가치로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請惡炎作 衆本行〉이란 파악은 불교 내부에서 제기된 건해이므로 그 견해에 내포된 근거를 좀더 깊이 고리 함 필요가 있을 것이다.우리 고대사상, 즉 풍류도는 엄밀히 말하여 아직 철학적 심화나 사회적 구체화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사상적 토양 그 자체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풍류도와 유 • 불 • 선 삼교사상을 포함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도 유교가 지향하는 건전한 인륜질서의 수립, 도교가 지향하는 자연주의적 무위의 교화,불교가 지향하는 선한 인간본성의 실현 등의 요소가 풍류도에 포함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예를 들어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私益人間 이념의 경우 그 이념의 구체적 표현은 시대적,사회적으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며 단군시대에는 구체적 실현정도가 매우 소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념 이 지향하는 바는 매우 포괄성을 띠고 있는 것이 다. 마찬가지로 풍류도 자체도 매우 소박성을 띠므로 유 • 불 * 도가의 가장 소박한 원형의 상태를 설정해야 소박한 형태의 풍류도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박한 순수 사유형태의 측면에서 볼 때 풍류도가 삼교를 포함할 가능성을 지닌다는 명제는 충분히 성립할 수 있디고 본다.孤雲의 文學思想
金永斗1 文學思想 形成의 배경생트뵈브 Sainte-Beuve 는 한 위대한 작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출신 가족관계를 확인하고 학업과 교육과정에 관하여 기술하며 다시 그의 환경을 알아야 함을 강조했으며1〉또한 데느 Taine 도 문학을 결정하는 3 요인으로 종족,환경,시기 race, milieu, moment의 세 가지를 들었다.2>I) 이상성 , rr운학연구의 망업 당푸당, 1983, p.9.
2) 위외 껴, P. 10.이러한 면에서 볼 때 孤受의 文學思想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학사상 형성의 배경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고운의 문학사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유학 및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시대적 배경과 사상적 배경의 두 가지 면을 중심으로 살퍼보고자 한다.
1 시대적 배경먼저 고운의 문학사상 형성의 배경을 당 유학 및 전 생애의 시대적 배경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고운의 생애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나마『三國史記』本傳,『三國述班』『東國通鑑J1『束史按要』『佳死策耕染j 序 등에 나타니 있 으나 그가 29세(885,斑;炎玉 11 년) 되던 해 3월,17년 만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와 그간 당나라에 있으면서 저술한 글 특히 그를 종사관으로 등용해 준 的,의 막하에 있으면서 대필한 글들을 한데 묶어 斑康또에 게 올린 글인『佳死策排있온』의 유에 자술한 내 용를 중심 으로 문학에 접 근하게 된 배경을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고운이 12세에 집을 떠나 당에 유학차 배를 타려 할 때 그의 부친이 훈계 하기를〈네 가 10년간 공부하여 科班에 급제 하지 못하면우의 아들이라 하지 말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 하지 않을 터이니그곳에 가서 부지런히 공부에 힘을 다하여라〉라고 하는 말씀에 의거,조금도 마음을 놓지 않고 쉴새없이 마치 況나라 孫敬이 새끼줄로 상투를 대들보에 걸어 매고 공부하며,r成國時代의 蘇泰이 송곳으로 무릎을 찔러가며 졸음을 쫓으면서 苦學했듯이 노력하며 오로지부친의 뜻을 받들고자 남보다 백배의 노력을 해서 당에 온 지 6 년만인 18세에 외국인을 과거 에 의 해 등용하던 炎M科에 급제 하게되었다. 고운의 당에 서 의 생 활은 이 후 地方官職과 侍中 的耕의 막하에서 4년간에 걸쳐 주로 文®를 代策하는 책임을 맡는 생활로이 어 지 는데 이 때 쓴 글이 1만여 수가 넘으나 가려내기를 거듭하고 보니 십분의 일도 채 못되지만 한데 엮어 『技幻20권으로 만들어 想康玉에게 바쳤는데 당시 그가 함께 올린 저작으로는私試今盤賦 五首一卷,五言七言今賊詩共一 百奇一卷, 雜詩賦共三 十首一卷,中山役攻染一部 五卷 등이 있었다
짧 JJ rr-. 성 균관대 ,大 파文化흉 f~~. 1972.p p.287'288.
이 중 앞의 세 가지는 당의 東都에 있을 때의 작품들을 모은 것이며 뒤에 있는 中山役坑染一部 표卷은 과거에 급제한 후 처음 관직인 宣州 深水路로 있을 당시의 저작이나 이 네 가지는 현존하지 않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당에 들어갈 때 그의 부친은 십년기 약하고 과거에 급제 하기 를 엄중 훈계 하였고 이 말씀을 명심하여 고운은 入店한 지 6 년 만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資攻科에 급제했으며,급제한 후 약 2년간은 특벌한 직책 없이 詩作 생활올 한 것으로 보인디-.『三國史託』按致述條에 의하면 그후에 空州深水!保J산〉가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고운의 문학은 이국에서나마 과거에 급제 하고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5) rr三랩史記』썰 46, 列씨i 짜六. ·ttH갖~~. ‘4~古~)(1\!J. p.383.
그러나 고운은 한 지방의 賊承1職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은거하며 학문에 믈두하고자 2 년여 되던 해 겨울에 槪射陳을 내어 놓고 더 상위급 과거로서 詩博能文의 인재를 등용하는 博學安詞科에 응시하고자 산에 들어가 학문과 詩作에 전념 했으나 將按|職에 있올 때 모아둔 錄雄이 모두 지출되었으므로 생활의 궁집을 면하기 어려웠다.
이에 그는 당시 정계의 실력자의 한 사람인 推南의 落則I 商®f에게 정성스런 글을 음리 자기를 그의 막하에 받아줄 것을 간청하기에 이르렀다.이때 고운의 형편과 前®f을 대하는 자세 및 당에 온 목적은 그의 「謝職狀啓」一普에 잘 나타나 있다.某는 삼가 생각하건대 짧은 두레박 줄은 물을 길을 수 없고 무딘 창은 굳은 것을 뚫을 수가 없나니 그런고로, 〈能方이 없으면 그만두라〉함은 周任의 말이거니와 스스로 마땅히 힘을 헤아려 행할 뿐 어찌 마음에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겠읍니까. 랬는 깃여3의한 布衣이온데 이전에 約里 밖의 먼 집을 띠나 10년 동안 中國에유학한 것은 오르지 版尾에 급제함과 江推地方의 한 將令이 되고자 했을 뿐입니다. 前年 겨울에 未供卜 그만두고 安詞科에 응시하고자 산에 은거하기를 결심하고 잠깐 은퇴하여 학문이 바다에 이-!: 것을 기 약하고 다시 스스로 務保코자 했으나 路雄은 남은 것이 없고 글 읽을 양식이 모자랐기 때문에 문득 功의 빗자루를들고 季牌의 문에 와서 쓸었는바 太/하相公께서 멀리 어여쁘게 推雄해 주시어 바로 職株에 넣어 주심에 자취는 鄭保에 나아가고 몸은 陶窓에 의 거 하고 있으니 東部의 가난한 근심을 면하고 다만北宮路의 용맹 을 기 를 뿐이 옵니 다.
6) 앞의 책 , (j계 원펀경 』쌀 18, p.386. <갤땀 양代以짧헬不可以않짧행降不可以~jm:lE故不fj~휩·止I쩌任1f휠 自효교力iiiifi ~찮可從心max ;양핏海-찌i衣it 벚킹"fIAi!l!際좋 十年많rJa本옆 止於陽尾科잊I 江ilt-없令王~ j'피年多Ii웰양末앉f 엎R센宏웹sf決居山t1m~~ 땅1m쪼悔}I!自훌웹 iRU:~쩌,~除짝않不원 합‘m~n 꺼~!i강1tfr1 ~갚챔太찮 f相公핍훨!ll!않fil!용·많용l;; U없鄭j댐 身때홉엽짧 3효표까!~之ft 但갚北宮之패>.
이와 같은「謝職狀啓J의 일부 글을 통해서 고운의 당 유학의 목적을 간파할 수 있으며 또한 商©f과의 인연의 전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고운의 商©f에 대한 극진한 공경 의 자세와 해박한 문장력 은 크게 인정받게 되어 鄭陳의 巡官으로 나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商의 막하에 있게 된 인연이 되었다. 당시는 斑朝의 말기로 5E仙玄의 난에 이 어 黃!}I의 난(875) 이 일 나 皮安에 까지 들어 오게 되 자的W은 諸道行密兵馬都統이 되어 황소의 난을 평정할 책임을 맡게되 었다. 고운을 그 휘 하로 블러들였으니 이 때 고운의 나이가 24 세(880) 되던 해 5월이다.7)7) 훌따烈, r않致違文멍맑究J , 고혀예 따사학위논운, 1983, p.30.
이렇게 商의 휘하에 속한 고운은 그 유명한「撤黃」의 글을 쓰게 되었고 이 글로 인해 난의 평정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므로 당 희종으로부터 都統巡官承務郞侍御史 內供本-의 직책과 紫金魚裝를 하사받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이러한 공적을 쌓으면서 商의 휘하에서 軍의 문서를 대필하고 정리하는 서기직 에 4년간 있다가 28세 되던 해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희종은 당의 주어서 사신의 자격으로 귀국하게 했고,商跡은 200관의 돈과 행장을 준비 해 주었다. 이후 고국에 도착한 것은 29세 (885) 되던 해 3 월이 었다. 당시 신라의 想康玉은 고운의 귀국을 환영 하며 侍說兼翰林學士 守兵部侍郞知端按監이 라는 관직 을 내 려 주었으며 고운은 당에서 스스로 쓰거나 商 막하에 서 대 필한 글들을 한데 묶어『技約,耕染』20권과 詩作 등의 글 을 왕에게 올리며 그간 당에서 갈고 닦은 學德과 경륜을 신라를 위해 바킬 결의를 굳혔다. 그러나 이후의 시대는 곧 신라밀 기 인 述康王 11 년(885)으로부터 그 이후의 혼란한 시대로서 끝없는 부패 및 왕위 쟁탈전과 각지에서 농민들의 난이 줄을 이어 일어났다. 그러 자 42세(898, 孝器王 2년)에 가야산에 A山,> 은둔생 팔을. 계속하다가 70 세경 에 세상을 스스로 마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럼 여기에서 귀국 후의 저작활동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해 보기위해 비교적 연대가 확실한 몇 가지를 간추려 본다.8) Jljl원의 가야산 운거성윤 여러가지가 있다.
李(jl~때는 『때야 f5l: ~~lH섣』上권에서 38 세 션윤 주장썼고 Ii']l!fi힘웰』에는 서기 896년으혹 되어 있 o 니 40세 入山없。l 되고@fi'짜圖文l퍼十A딸年짧』에서는 898년으후 sci 어 있~니 42세에 배당scI'셰@fi'따댐文웬作찮업JJ(형션출판사, 1981) 에서는 40세 신깥 융마 웠고®r崔종~j용文핑¥f;;eJ(~m烈)에서는 42셰 션로.!!.~마. 0) I}~에도여러 근꺼가있Z나 뀐자도 그의 저슐판동시기 응으혹 마푸에 요아 42씨에 入I1J썼갚것으표본다.述出i王 11, 29세 귀 국
出康王 I2, 正月, 3 세,1T技究按DK 등 28권 玉에 게 本:팬 , 述康王 승하하자 外險으로 나가 大山郡 太守됨放聖女王 1 月,31 세大華F5宗佛國寺 足虛遊郡文殊普K松廣井序大華保宗佛國寺 阿强防佛像說井序王紀金氏爲先考 及亡兄追福施我陳文新羅國故康州智異山雙沒寺敎說國師大空塔碑銘890. 於聖女王 4, 34제,新羅國兩朝國師 敎說大郞怒和尙白 月祝光塔碑銘 (추정임)(「新羅囚 初月山 大쌌福寺碑銘」의 기술 시기도 대체로 진성 여왕代로 추징할 수 있는데 여장 4 년(890, M 세)을 전후해 봄이 시간적으로 타당하다고 봄) 於聖女玉 8, 38세,時務十條 올림眞聖女王 9, 7月,39세, 海印寺妙吉鮮塔記與聖女王 10, 冬, 40제 , 讀位表孝器王 元年,6 치,‘11 세,謝闕位表
" 孝衆王 元年,7 저,신1제, 謝恩表" 孝衆玉 元年,7 처 이후,謝不許北國居上表(이후는 가야산 은거기로 봄)孝衆王 2년,正月,세,新羅他]®山海印寺結界場記9〇〇. 孝器王 4년,12 月,싫 세, 新羅他]阿山海印寺萬安住院壁記孝衆王 8 년,건8세,斑 大賊福寺故主藏經大德法藏和尙傳孝雜王 12 년,11 月,52 세,新羅;사昌郡談國城人角燈被記924. 及-明王(供友王) 1년 6月,68제,想1證大師寂照塔碑供序기(이 밖에도 화엄종 관계의 글이 20여 종 있는 등 많은 저작이 있다)9) 金组烈. r判对毛lfE电h!干J. pp.34.......35号岔五斗。4 丛处在
지금까지 고찰해 본 고운의 당에서의 작품활동과 귀국 후의 작품활동을 분석해 보면 대체로 세 가지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으니, 첫째 당에 서 의 활동시 기인 12세부터 28세까지,둘째 신라에 서 중앙 및 지 방관직에 있으면서의 활동시 기인 29세부터 41세 까지,세째 가야산에 은거해 있으면서의 활동시 기인 42세 부터 70여 세 까지 의 三期로 나눠 그의 전 문학활동 시기를 결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 문학활동은 당 유학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고운이 유학하게 된 배경 및 문학찰동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 시대배경을 고운의 탄생과 입당시기,귀국 당시의 당과 그 이후의 신라정 치 및 사회 상황,은둔기인 신라말기 및 후삼국의 상황등으로 구분해 간추려 본다.고운의 탄생 및 입 당시기의 신라사회를 살펴보자.① 골품제도의 폐쇄적 사회상황을 들 수 있다. 골품제도는 신라귀족사회 유지의 특징임과 동시에 폐쇄사회 구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골품제도는 골품,즉 혈통의 고하에 따라서 정치,사회,제도,생활 등 여러 방면에 특권과 제약이 부여되는 제도로서 왕이될 수 있는 행과 왕족이지만 왕이 될 수는 없는 成骨, 그리고 귀족이지만 제한된 신분에다 제한된 관직을 갖는 A頭品, 頭品,四頭品,또한 평민층이었을 것 으로 보이 는 三頭品,頭品, 一頭品의제도가 얼마 동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중 성골과 진골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위치의 골품이 바로 육두풍이었으며,고운 자신도 육두품 출신이 었다. 당시 신라에는 I7 官等이 있 었는데 육두품은 이 중 제 6 官等인 阿後이 최고직 이 었고 7 管等인 一吉後, 8 官等인 沙後과 9 官等인 級伐沒까지만 할 수 있었으며 이 골품에 따라 복장,,器具,주택 등에 이 르기까지 차벌이 시행되는 성골과 진골 위주의 계급적 폐쇄사회의 한 형태였다.1〇〉그러 므로 능력 있 는 육두풍 중에 는,왕 이 하 5관등까지를 진골만이 할 수 있는 등의 신분적 제약이 따르는 신라사회에 대하여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마음껏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되었으니 그 길의 하나가 당에 유학,과거에 급제하여 명성을 드높이는 길과 성골,진골도 공경을 다하는 승려가 되는 길,또는 뛰어난 문장력에 의하여 존경을 받는 길 등이 있을 뿐이 었다. 실제로 원광과 원효도 육두풍 출신이 었으며 국내에서 문장으로 유명했던 3里합도 육두품 출신이었음이 이를 증명해 준다. 또한 九山禪門의 창시자도 대게 육두품 출신이었고,이들의 비문이 대개 당 유학생들의 손으로 기술되 었던 점도 우연이라고만 할 수 없는 이러한 사회적 배경 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强奇가 補學을 택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 진골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에 대해 호감을 가질 수만은 없었던 실례의 하나로 볼 수 있다.10) 좋앓白, D'~m史줬f 앓J], 一F때때. 1976, PP.70"'71 창호.
11) 뼈짜一, D'~뽑文웬,면.想史앓앓.!l. 지식산엄사, 1978, p.46.이러한 관점에서 고운이 문학의 길올 걷고 또한 문학사상을 형성하게 된 배경도 역시 입신 출세하는 데 필요한 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계원필경집』서문에서 고운 스스로 잘 밝히고 있으며 앞에서 고찰한 당에서의 문학활동과 귀국초기의 문학활동도 대체로 이 러한 성격 에 속한다.미 그러나 이 점에 또한 고운의 고민
12) 위의 책 , p.48과 『뺑,댐文맹파뽀 I JJ, P.247에서 는 고운01 운학어1 힘 쓴 흥 윤
걱rlll 01 경 에 셔 캉~하고 있 다.
과 갈등이 심각했던 것도 간파할 수 있으니 그의「陳術上太財詩」의 내용을 살펴보자.
海內의 누가 海外 사람을 가업게 여기리묻노라, 어느 길이 내가 갈 나루로 통하는가?애초에 代跡을 구했고 利륜 구하지 않았으며어버이를 영화톱게 하고 내 몸 위하지 않았네나그네 길 이벌의 시름은 강 위의 빗소리요고국에 돌아가는 꿈은 햇가의 봄이라濟川이라 다행히도 넓은 恩波를 만났으니원컨대 갓끈의 십년 먼지를 씻어주오13) 양섞 껴, go계원펀경』환 20, p.403. r따!땀上太앉합J , <海內짧않海外A rJlt-ltf可Jr!lJ€펴r!! 깅$:~f,t~非찌t利只f훌5월.t5l不~:!¥경S:~~양愁江上뼈 故E혀 ~1강;'B 필평 원川:$i2l‘앤값E양 flJ1i굉凡t멀十~많).
이와 같은 간절한 하소연의 글에서 고운 심경의 일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② 新植下代 사회의 혼란상을 들 수 있다. 이 점은 물론 말기로 내 려 갈수록 더욱 심화되 었으나 고운의 탄생 필씬 이전인 立德EE(78〇~78.1)대로부터 신라의 멸망을 가져온 경순왕대까지는『삼국사기』에서 부터 下代라고 부를 정 도로1‘이 미 쇠망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 때의 혼란상을 다음 세 가지 로 간추려 본다.첫째,정치적 혼란으로서 무열왕 이후 진골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왕위쟁탈전이 벌어졌으니 37 대 선덕왕이 된 金皮相이 36 대忠器EE을 살해하고 왕권을 찬탈함으로써 왕위가 빈번하게 교체되 게 되었다. 이같은 와중에서 정치 • 경제 • 사회 • 농경 • 軍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대혼란이 일어나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 에는 頭空과 弓痛의 등장을 거쳐 왕건의 고려 건국으로 이어지게 된다.14) Lr"'J국사7) .a, 환 12, 析힐*iC末뀔, <댐A 自협캘로此分~三1t 自훌O至Dl챙二十1\포~1J:之上ft 홉 댁烈王숲All양히1之*1t 自효침至/i{m~쩨之下代>.
이러한 혼란이 시작되는 시기에 대이나 당에 유학하게 된 고운의 착잡한 심경은 그.의 詩句들에 잘 나타나 있다.
둘째,귀국시기의 당과 신라의 상황은 더욱 상처가 깊어 가는 시기 였다. 당은 安史의 亂(755~763) 이후 이미 국위가 몹시 쇠약해 있었으니 지방의 절도사가 군정 • 민정 • 재정의 실권을 쥐고 거의 독립적으로 행세하는 데다가 與民族의 침입과 환관세력의 횡포로 각지 에 서 난이 일어 나던 중 특히 黃災의 亂(875)은 10년간이 나 계속되어 당의 거의 전국토륜 유린하였으므로 난이 평정된 뒤에도 조정은 지배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가 되 었다. 당은그 영 향으로 907년에 본래 黃의 한 武將이었던 절도사 朱全忠(後染太祖)에게 멸망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어지러운 당의 현상을 지접 보고 또한 체험한 고운은 당에 留學하고 이어서 당의 宮職에 있게 됨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결국 이러한 상황과 체험이 귀국에의 결심을 굳히게 했을 것이나,귀국이후 비슷한 신라사회를 보고 또한 무엇을 생각했을까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제반 상황 등에 의해 크게 뜻을 펼 수가 없게 되자 결국 은둔생관로 가게 되었을 것이 다.셋째 , 은둔기인 27,8여 년의 기 간은 후삼국이 각축하며 왕건의 고려가 건국되는 등 각지 가 賊場化되 는 극도로 혼란한 격 변기였다. 이 때 고운은 그의 母兄인 僧何 K後과 함께 海印과에 은거 하며 더욱 心身의 修部과 함께 깊이 학문의 세계에 물입한 것이다. 그것은 그때로부터 기 술한 것으로 보이 는「他I抑山 海印寺 結界場記J 등 의 저술에서 알 수 있다. 68세 (924) 때에 기 술한「油1,務大師寂照塔碑銘J에서는 신라의 神宗史를 간긴하게 정리하기까지 해 당시 신라의 화엄종에 대한 이해와 함께 선종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이 렇게 혼란기요,변혁 기인 시대에 살고 있던 고운은 노년에 이를수록 더욱 종교적 세계에 관심을 깊이 가졌읍 것이며 당시 시국에 대해서도 계속 무관심일 수는 없었을 것이니,그 에 대하여 여러 설이 있지마는『삼국사기』최치원전에 그가 왕건에게〈했林黃葉 街街靑松〉비이란 글을 보냈다 함에 대한 긍정적 이해도 가I ,) Ii'삼국사기』권 46, 외 ..I 훨꺼1, p.384.
지 볼 수 있는 것이다.16)
16) 매하여는 고운 보는 엽장파 고운 수도 있었윤 것는 애장 있다. 핀자는 후자의 입장야다.
2 사상적 배경
고운의 여러 작품 속에는 일상적인 글도 있지마는 특히 字街觀과佛 • 仙 등에 관게되는 심오한 사상을 찾아볼 수 있는 글들이 많다. 몇 가지 예문을 중심으로 살펴본다.옛날에 천지 가 方때으로 分別될 때에 처음으로 淸獨이 나누어져서 융해되어 강이 되고,결정되어 山京이 되었으니…17)17) 앞의 책 I rr겨l 월판갱 』권 20, P. <方分 作江海山….).
여기에서 고운에게는 나름대로의 우주관이 확립되어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r佳姑按耕染』卷 13의 말미에 있는「西州羅城回記」및「求化修大및守:疏」와「求化修諸逆湖疏」18)는 代班이 아닌 고운의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고 보는데 여기에서 고운의 불교와 도교 및 述][의에 관한 관점까지도 찾아볼 수가 있다.이 중「求化修大$赤疏」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18) 취의 팩 I Ii'제원판정』권 16, p.378.
19) 때l 웬판경』권 20 충 1"'16권까지는 i않짧의 대판혹 .!l..는 견해 7t 지배걱야지만 (뼈f국~학작7}용.!I, ~m江外2).. 共·함, 형성출판사I 1981, P. ~3. r최;11 원용J ,뾰원값) 뀐자는 16 얀마 에 있는 「西써뭘햄뼈iIaJ 및 「求{ι~*m 」와 r ;; ~~파웰값」는 고웅의 작품으후 보아야 한마고 생 각한마. r펀州월웠tmreJ의 내용 풍 〈월협 〉관 딴과 <*化 大 〉중 〈今辛迎太 將~~)와 〈次밍太댐탱해n렇t.l~Ji}1첼)01 량 표한, 그라 고 <*化양않-파f3l9t)의 니l용 풍 〈今 太 j훌짧mm킬;첨St ~右公之tp훌 g월휴~; iii; &迎4씨 to 당의 글에.e·1 고운의 작품업월 알 수 있기 빼운。l 마.大 寺에서 기부금을 모금하여 修할 기와, 목재와 丄錢 등을 구입 하고자 합니다. 상고하건대 H敎 중의 하나가 佛敎입니다.
그것의 神妙한 뜻은 玄化를 補神하고 稱微한 말은 년리 風俗들을 깨우쳐서 권선하는 문을 열고 집착하는 그물을 풀었는지라 중생으로 하여금 귀의하고 佛像을 장엄하게 만들어 느낌이 있으면 반드시 通하고 求하면 응하지 않음이 없게 하며 마음밭을 개간하여 福을 심고 法의 바다륜 헤엄쳐 모든 재앙을 씻어버리게 하였나니 이는 不可思談한 일이 아니겠읍니까.20)
20) 앞의 껴, l]'7-1I훨판경A 켠 16, p.377. r求化흰大랬괜않J , <*잊훈 3)L~*.ftmt양짧효木功{Q~ &후夫li꺼1$三않I김fjt- 1t~kP답Jt~ P강 1¥:t化a깜JtqJ3{~凡u.t POg강i파월之f1 1n1QtA 훨之댐f.~Jl g~ !!Z m心띄 ~J띠 1i(1!&iJt: £Q 깨'H효心sm t1끼Z不tE~m 田而til~펴 t&ttl:;파而rJ~ 不可.믿.앙 於£乎효>.
여기에서는 고운이 偏學을 공부했지마는 불교에 대하여도 이미 깊은 관심과 지식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佛市에 적극 동참하고또 太位f에게도 권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고운의 불교에 대한 식견은 그의「四山碑的」에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또한「求化修諸逆觀疏」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紫哲!常에서 城下의 여러 逆湖을 중수하려고 기와, 목재 등의 경비를 모금합니다. 삼가 상고하건대 老子가 苦賊에서 탄생하여 逆-I- 중국에 강연하였으니 근원은 聖朝의 祖上이요 이름은 至逆의 입니다 그러나 에는 부지런히 하는 자가 적고 玄妙한 門에는 잘 닫는 사람이 없읍니다. 맛은 입 속에서 담박하여서 자칫하면 큰 웃음을 이루고 뜻은 눈 밖에 깊어서 누가 上好함을 믿으리까. 그러므로 福庭은 물과 티끌에 파묻히고 仙空은 비와 바람에 무너졌읍니다……21)21) 위의 져, D'제원필경』권 16, pp. 377"'378.下 ~따以&!f: t1 rJii 훌 ilii乃少行f ~r’ f켜띤 M:之양t9 P 中fJJJ/{大笑껄훌갑!I.H~ ~양 0 1:짜 i파
여기에서 迫敎와 仙家에 대한 그의 깊은 식견을 간파할 수 있다. 또한 고운은 당시 당에서 익힌 것으로 보이는 風水:保에도 一家見
이 있었음을 수 있으니 예를 들면 앞에서 든「求化修大民寺疏」중 다음 글이 그러하다.
본 大民寺는 城東의 禪智寺와 두 어깨처럼 마주 솟아 있고 두 날개처럼 가지 런히 벌려 있읍니다. I的保帝의 述普을 끼고 推南玉의 仙宅을 안았으니 壯한 이 樂土는 저 福 에 의지한 것이었읍니다. 22)22) 위의 책, V제원펀경 a 련 16, p.377. (JIIJ며앓束꾀합좋 활꾀훨훌 힘I1=)강짧혔t,;}함之m쉽 혈im王之{띠st::)tf:찰헛土~~H되田).
여기에서는 出米에 성행했던 水 保에 관한 그의 식견과 사상의 一而을 다소나마 파악할 수가 있다.
이상의 및 가지 예에서 고찰함 수 있었듯이 고운은 守1任i浪 및 유• 불 • 선의 사상과 風水思想에도 깊은 조예가 있 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조예로 인해 어디에서나 유 • 불 • 선에 관해 기술한 기회륜 만나면 거침없이 그 능먹을 발휘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고운이 이렇게 다양한 사상채계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은 고운이당에서 공부하고 또한 관직에 있던 시기에 당에서는 유 • 불 • 도의H敎가 혼합적으로 서로 융통,발전함에서 영향받게 된 바가 컸기 때문이다.뿐만 아니라 고운은 실제로 在出時節에 的僧과 逆士들을 찾아다니며 , 佛道와 仙逆롭 열심히 닦았고 또한 귀국 후에도 이들 사상에 심취해 정진했었음을 그의 저술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유 *볼 • 도의 사상에 바탕하여 어느 한 사상에 편벽 되지 않고 이들을 융합 승화시켜 그의 풍부한 문학사상을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다.2) , 文의 시 대 걱 씨 경 , «文» !大, 1983, p'22.
문학이 결국 사상의 표현일진대 고운에 의해서 정립 제시된 우리의 전통사상인 風流道의 정 신은 그대로 그의 문학작품에 반영 되 었으며 이후 우리의 전통문학 수립의 계기가 된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고운이〈東國文宗〉또는 한국 한문학의〈開山始祖〉로 불릴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음을 상기해 볼 수 있다.
2 文學思想고운이 남긴 문학작품들 중 그의 사상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크게 세 가지 작품류를 들 수 있다고 본다. 첫째로『佳死按耕, 둘째로「四山碑約」, 세째로〈詩歌類〉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는 문학사상이 그것이다.1 『佳充班耕集ji에서 본 문학사상앞에서 서술했던 바와 같이『理能班耕染』은 고운이 당에서 的®f의 막하에 있 을 때 대 필한 軍만 및 詩歌와 祭文으로 된 20권의 저술인데 그간 이『佳次i符耕고의 문학성에 대해서는 그것이 대부분 商을 위한 대필로 이뭐지 있으므로 고운 자신의 문학을 이펐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하는 견해도 있었으나,비 20권 중 卷 16의 말미에 실려 있는「西州羅城®記」및「求化修大民寺商U와「求化修;治-道觀疏」등은 앞의 註 15>)에서 근거를 든 바와 같이 고운의 작품으로 볼 수 있음과 동시에 또한 卷 17부터 20까지는 고운 자신의 주변에 있었던 일과 여 러가지 느낌들을 기술한 글들로서 모두 70 普에 이르며 고운 연구에 있어서 가장 도움이 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2.4) 一. 한국운학꽁사 지식산엽사. J982. P.247.
2') 최 원윤 한국운학착 7~용lJ. 챙션펀판사. p.O.그 내용들은 深水 槪射 은퇴 후 생찬에 궁집이 있읍 때에 的助Ml게 관직을 부탁하는 일에 관한 글,관직을 받게 됨에 대한 감사의 글,막료들에게 보낸 사례문과 서신,생찰상 및 그때그때의 심경읍토로한 글, 商授f에게 올리는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계원필경>3의 板本은 지금까지 16종 정도가 나왔는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
이는 古板本이 있으나 연대는 정확히 알 수가 없고 이 밖에 後居正의 序文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조선초기에 간행된 것이 확실하게 보이는 坐帝間本이 있으며 그 외에 14종이 있다. 26)
『계원필경』을 중심으로 고운의 문학사상을 논함에 있어서는 먼저 『계원필경』1권부터 16권 전반부를 商耕의 代按이 지 만 결국 기술하기는 고운이 했으므로 고운의 사상이 깃든 작품으로 보아도 좋으냐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어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든 바와 같이 起一의『.料國文學通史 U에서처럼 고운문학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단정한 예도 있으나 이러한 글에도 고운의 사상이 다소간에 갊아 있다고 볼 수도 있는 면에서 고운사상을 다루는 경우 전반적으로 다뤄질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고운의 문학사상의 경우 전반적으로 사상적인 면에서 참고하여 살피고자 한다. 다만 자료 인거 및 중점적으로 고찰해야한 곳은 권16 중반 이후부터 권20까지로 하고자 한다. 그 이 유는 앞에서 든 바와 같이 그대로 순수한 고운의 글들이기 때문이다. 『계원필경집il에 서 찾아볼 수 있는 사상을 필자는 네 가지로 집 약해 본다. 첫째는 孝行思想이다. 고운의 지 극한 孝行思想은 그가 나세의 어린나이 에 부친의 명 을 받고 入/표하여 20여 년간 머 물며 관직에 나아가고 글을 쓰면서 도 부친에 대한 孝心이 떠 나지 않고 있음에서 볼 수 있다. 그는 r계원필경』서문에서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둘째는 逆의 추구와 平和主花 指向이다.『계원필경』전반과 목히 時부분의 흐름에서〈逆〉에 근저륜 두고 平和主務의 실현에 목표륜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유명한 에 대한 격문도 이러한 사상에 바탕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셋째는 K用文을 쓰되 逆術性과 典街이 되게 한다는 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보인다. 왜 냐하면 그의 전작품에서 이러한 깊이 있는 성격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니 위에서 든 황소에 대한 격문에서도 이러한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넷째는 護國思想을 생각할 수 있다. 그가 귀국하자마자 『게원필경 J을 헌강왕에게 올린 것은 持心으로 인한 일로 보아지
지만 결국은 그의 경륜이 담긴『계원필경 J을 통하여 護國思想을 드러민 것으르 이해할 수 있겠다.
이러한 점에서도 <東國文宗〉으로서의 그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다.2 「四山碑銘」에서 본 문학사상그간 고운에 대한 많은 논문들이 나왔지마는「四山碑銘」올 문학적으로 정근하여 그 사상을 찾아보는 논문은 보기 어렵다.「四山碑 즉「大加怨和尙 e 거液光之塔碑銘」,「成恨神師大空塔碑銘」,「大썼福寺碑銘j,「智I登大師寂照之塔碑銘」등의 내용은 고운의 문학과 심오한 사상을 간접적으로 반증해 주는 객관적 자료라고 볼 수 있다.「四山碑約」의 기술을 시기적으로 보아도 고운이 29세에 당에서 귀국한 2년 후인 자세 때에 奸與山 雙沒얍에 있는「/a浪國師大空塔碑銘」을 시작으로 34세에「大加怨和尙白月植光之塔碑約」을 찬술한 것으로 미뤄보고 있으며 또한 이 무렵에「大쌌福관碑銘」도 찬술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仙|삐山에 입산 후이며 말년인 68세에「智證大師寂照之塔碑 을 찬술한 것으로 봅 수 있으니 더욱 원숙한 경지에서「四山碑約」을 찬술했음을 알 수 있다.고운은 여기에서 종횡무진으로 그의 사상과 문장력을 구사하고 있으니 金石學으르서의 기여도도 말할 수 없이 크며 碑附文尊i의 麻失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四山碑約」의 사상성은 이 객의 다른 장들에서 깊이 고찰되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면도로 구체적으로 논함은 생략한다. 다만 종합적으로 볼 때 여기에서 고운은 〈道〉에 대한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植유 • 문 • 선의 근원으로 보고 있으며,특히「四山碑銘」은 아니지만「保郞碑序J에서〈나라에 立妙한 도가 있으니 風流라 하는데 이는 실로 三敎포함하고 있다.〉는 요지 의 말은 여러가지 면에 서 그 의미가 크다. 족 여기에서 그는 風流道를 유 • 불 . 도보다 우위에 있는 더욱 포괄적이고 원천적인 도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서로 상용된다.
그러나「四山碑銘j은 玉命에 의해 찬술된 것이며 그 중 셋은 位促에 대한 내용이요, 하나는 사찰에 대한 내릭을 찬술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문학작품으로서의 능력발휘 면에서는 문제가 있다고 볼 수도 있으며 또한 고운 자신의 심경을 마음껏 표현할 수 없었다는 면에서도 자기 자신의 문학을 위해서는 불행한 일이라고 본다. 이점에 있어서는『계원필경집』과 상통하는 바가 있으며 그의 문학을 말함에 있어서는 큰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조심스럽게 네 가지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文字 또는 文學의 역할을 밝힌 점에서 이에 대한 그의 사상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즉「的國師大空塔碑約」에하물며 法은 文字를 띠나 있기에 말을 부칠 곳이 없으니 혹 말을 한다면 수레 체륜 북으로 하여 영 (强) 땅에 가려 는 것 이 된다. 그러 나 國玉의 外護함과 門人의 大願은 文字가 아니 면 모든 사람의 눈에 소상히 봄 수 있게 할 수 없으므로 드디어 몸은 付} • 佛에 겸하고 힘은 五:能을 본반으려 하니 ……3030 ) f.m 文吕侯宝t~民~. P.138. <况法睦文字如地指2 苟Et宫之北锁边~练以团主之外
川人之大回~It文字不能昭昭乎萃目边政身徒丽在为炫五倍〉云云.
라고 했는데 여기에시 法이 文字보다 높은, 근원적인 경지이지만 文字가 아니면 기록하고 또한 전달할 수 없으니 결국은 文字에 의지해야 하므로 비문을 찬술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그는 文字, 또는 文의 중요성과 機能에 대한 확실한 사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로는 종교와 철학이,목히 불교의 痛!學이 心學이라면 文字쿤 사용하는 文은 學이라 하며 心學도 學을 의지해야만 하고 또한 心에 의지해야 하니 雨者는 상호 공존의 관계 속에 있음을 제시한 사상에서 단순한 문학관이 아닌 종교와 천학에 바탕한그의 문학관 및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즉어찌 心學-法는 높고 P 學者는 수고롭기만 한가. 그런고로 엣君子는 매우는 바를 삼가했던가. 心學技는 德을 세우고 學者는 말을 세워 글을 이룩하니, 저 德이란 말을 빌어야만 가히 일컬을 수 있고 이 말이란 것도 德에 의지해야만 썩지 않으리니 가히 일천을 수 있으면 마음을 능히 후래 사람에게까지 보일 수 있고 썩지 않으면 말 또한 옛사람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31)
)1) rrm文원않全찌tn. r大nJJ~:fl1센I짜양짧J. Pp, 92-93, <깜心따원칩 딩 ι!~ !i1JllS 1IJ.1iz첼子해’한당!tJIJ心핑 itrll:l J] L;!:lftaf.WJ t1Ilt.i1!!.짧원힘떼可1명 싫 !j" 1k I2 ~1깅i띠不% 可¥웹찌心(;ti l양示乎찌~~ 不.f1j때口亦셨 f끼 'P·ri 人) ~~,
라고 함에서 그의 종교와 철학으로서의 心學에 대한 으로서의 문학사상 및 문학관을 파악할 수 있으며 양자의 관계륜 논함에서 그의 원만하며 탁월한 사상의 깊이를 발견하게 된다.
셋째로 逆의 추구와 三敎合一思想을 들 수 있다. 즉 이러한 사상에 입 각하여「四山碑約」의 전반이 구성되어 있다고 본디-.넷째로 억시 護國思想을 들 수 있다.「四山碑銘」여러 곳에서 玉命을 존중하고 국가의 안위를 기원하며 백성의 안정에 대한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3 詩歌類에서 본 문학사상고운의 詩文은 r枝次네y 외에 대i文逃』r金石文ji 등에도 실리있다. 이 詩文들은 孤段先生文染«述舍에서 발행한 r孤出先生文染j下卷에 망라되어 신려 있다. 여기에 의하면 時 前,賊: I -法,序1性,表 7首, 狀 6 首,啓 1 竹, 碑約 4 竹,記 4 松,雜 6 竹, m文 7 符,他 3 前,雜錄 2ti로 구성되어 있다.이러한 고운의 詩의 내용 및 사상에 대하여는 그간 나와 있는 논문들이 고운에 대한 다른 분야의 연구보다 많이 진척되어 있으므로 이 자료들 중 적합한 및 편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拔倍治는『效國文學作家論J1 (共著) 중「推致述論」에서, 첫째로 고운은 今胞詩와 七言詩 확립 의 공로자이며 , 둘째 로 文을 H大別하여 古文, 街文,白話文으로 나눌 수 있는데 고운은 이 중©f陳文의 결정을 이뤘다고 했다. 斷商文이란 四 또는 이라고도 하며 句調의 기본을 四字 또는 穴字로 하고 對句륜 존중하며 韻文的인 部和륜 존중하고 典故를 많이 원용함으로써 文을 美文으로 만드는 데 주안점 이 있다. 즉 일종의 美文免識의 발로라 할 수 있으며 中國南北朝時代의 齊 染間에 크게 유행하여 出代에까지 이른 문채이다. 셋째로 文學榜式을 확립했으니 한국 淡i文學의 경우 고운에 이르러서야 문학양식이 비로소 확립되었으며 그 이전까지는 창작의 광장이라 볼 수 있는 文士의 文染이 출현한 일이 없었으니 종합화된 양식을 기대할 수 없었음은 물론 양식의 출현도 보이지 않았다. 고운 이전의 작품들은 대체로 산발적이고 종합화가 되지 않았으며 또한 어떤 양식의 제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에 비해 고운은 沒文學의 양식을 의식 하고 안배했으며 종합하여 하나의 文災을 완성했으니 이 점에 있어서도 공로자라는 것이다. 32)
)2) 행업江외 2인, [j'한국운학작가흔.!J. pp.44.....,48.
고운 詩의 내용과 詩風에 대해서도 獻詩와 好他詩로 나눠 고찰할 수 있으니 商에게 바치는 七言紀德絶句詩 三十首와 陳他上太射詩, 師無時獻太對詩, 行次山陽街承太射寄賜衣段令充歸潮級充信物以ii寺해,그리고 등은 1않짧에 속하고 나머지 시는 대체로 서정시에 포함시킬 수 있다. 33)
33) 위의 객. pp.44.....,4S.
金烈은『祖致述의 文學硏究j]에서 고운의 文은 역시 晩斑의 耕强文의 영향이 큼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고운이 당에 유학,동하던 시기가 당의 말기였으므로 그때 한창 유행하던 通f强文에 익숙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며,强文이 科染文으로 필수적이었을 뿐만아니라 表•突•狀•啓 등의 公用文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라서 的耕의 막하에서 代作한 글들도 이 通f强强임을 알 수 있다.
34) p. 155
고운의 문장이 이러할 때 그의 詩類는 어떠한가. 먼저 詩 작품을 파악해 본 후 거기에 담긴 사상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여러 곳에 실린 고운의 시를 파악하는 자료는 몇 가지 原典과 金透烈의「按致
文 究」갈 중심으로 한다.35)
3’) 위의 논운, pp.71 ......78.
1)『계원필경』에 실린 고운의 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形式l 원| 作 nn口 名 |數
2) 人 大江維時 (888~963) 가 /占詩 가운데서 가리아 엮은「千心」上 중 고운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上卷下 A四地部- 웹₩-理퍼降 春폈-山秋Jn 爛-찌뼈햇 願 目
3)『三國史記j] 卷第 32 雜志 第一 樂條에 社i致述의 시라 칭하는金九 • • 大面 • 束推 • 換犯 순으로 된 鄕樂雜餘 五奇가 있다신) 季호報의 『白小說』에도 고운의 시 一聯이 소개되어 있다.이 시는 고운의 친우인 顧民으로부터〈此句 則一興地誌世〉라는 칭찬을 받은 시이며 보통「題興地固」라고도 부른다.F동문선에는『계원필경 J]에 보이지 않는 상당수의 시가 실려있다. 도표로 일목요연하게 정 리 하면 다음과 같다.
썰 l 댈 l /댐 目 |훌|싫|힘l 찮 l 앓 |바 고
22 I山 없-與댔 X 홉7) IJ ’l‘
6) 山梅印寺古isji은 植國大學校 東洋學硏究所에 소장된 木版本인데 이 중에 고운의「寄海印寺僧祈期」이라는 七言絶句의 시 6社가 실려 있다.
7) F新增東國興地勝고"에는 다른 곳에서 보이 지 않는「公山城」이란 七言絶句 1 社와「寄頭源上人」이란 七普律詩 1首가 각각 실려있다.8) 『染類說고에는 社與-山의 한 老僧이 石痛 속에서 찾아낸 고운의 시 16 石 중 전래 된 8首를 실었는데 모두 五言絶句이 나 제 목은 따로 없다. 金꾜烈은 편의상〈遞世詩〉라고 명명했다.36)36) 위 의 논품t p.76.
9) 『小華詩評J(供約宗) 卷之上에는 다른 곳에 없는 法海란 五言律詩 1 首가 실려 있고 辭語安則라고 평했다
10)『孤安:先生文화y (班函述縮)은 여 러 곳의 시들을 한데 모았는데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姑蘇空와 접松尊 두 연의 聯句가 실려 있다또한 고운의 賦 작품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r技强」가 수록되어 있다.11) 『孤强先生文染』(班約植編)에는 시 的首가 실려 있는데 다른대에서 볼 수 없는 石相라는 五言絶句 一普가 실려 있다12) r海民先生略選』에는 또한 유일하게 刻屈菊巖石이라는 五言絶句 一首가 실려 있다.13) 부산 해운대에 세워져 있는〈孤先生銅像〉에는「山僧」이란 시가 새겨져 있다. 傳되어 오던 시를 동상을 세우면서 採錄한것으로 七言絶句이다.
14)『植文昌候全供』은 고운의 전작품을 집대성한 것인데 다른 데에 신려 있지 않던 ①「和辛展長官冬 H 遊山寺」②「汗河役古」③「友人以述杖見忠以炎刀爲答」④「辛표年寄進士與的」⑤「和友人存日 遊野聲」등의 七當律詩 5首가 더 실려 있다.지 금까지 고찰한 고운의 시 를 전부 합하면 126首 정도가 된다. 5그렇다면 이러한 고운의 시에는 어떠한 사상이 갊아 있을까. 먼저 고운 시의 내용을 구명 해 보면서 문학사상올 찾아보고자 한다. 고운의 시를 먼저 내용별로 분류해 볼 때 몇 가지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앞에서도 간략히 언급한 바 있지마는 班倍法는 고운 문학의 특성을 ① 詩世界의 確立 ②,師文의 結晶 ③ 文學樣式의 確立으로 제시한 바 있다. 38)37) 위의 논문, p.78.
38) 앞의 책 • Ii'한국운학작가용.!l. pp.44~48.이 중 고운 詩의 내용과 詩風에 관한 언급에서 고운의 시를 獻詩와 好情詩의 세계로 분류했는데 獻詩의 성격은 고운의「獻詩啓」에서 찾을 수 있다.
다만 다행스럽게 樂國에 노닐어 仁風을 보고 오랫동안 懇誠을 간직하여 歌說을 펴 볼까 한 나머지 문득 紀德絶句詩 30首를 바쳐別紙와 같이 諸封하오니 漢나라 長沙定王의 拙舞가 한갓 스스로 혐의스러울 뿐이요, 換母의 진은 화장이 결국 남의 웃음만 되었는지라 아름다운 功德을 찬양함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도리어 候威를 모독할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聖人께 서는 격 려 하는 誠瓦가 깊으시므로 互鄕商子를 거절하지 않고 배우는 이는 端摩하는 뜻이 간걸하므로 다 鬼谷先生에게 돌아갔아오니 특별히 거치른 글을 용서하시와 받아 보아 주십시오. 39)39) 文全 17. PP.380~381. <但以幸 仁 久誠
欧脉但,)'l,t祀饱饱句踌三十1茵茵封如别定王拙舞边足自跟Itl Wlt钝草草1ß人笑不足凭揭休烈翻在说回缘战然理人以激助黯源不间互绍盒子职者以扭廖志卸货投鬼谷先生伏惟特恕荒黯俯量来咒).
이와 같이 商훼에게 윤리는 獻詩啓를 썼고 또한 이러한 입장에서 「七言紀德絶句詩」三十首와「陳他上太對詩」,「歸無時獻太度f詩」, 「行次山陽街承太射寄賜衣段令充秘3信物證以詩謝」,「石峰」등의 獻詩가 있다.
獻詩 가운데서 紀德詩 30수 중「兵機」를 들어보면,뜻과 사업 을 오직 卷秋(史판)로 단련하여일찍부터 雄心 길러 국가의 적을 평정 하였네三十년간의 天下일은於:王의 留候 (版皮) 에 의 해 걱정 없었던 것과 같네4o)40) p.381. (惟胳志提鲸春秩早苗雄心组因居二十年*天下郁渎旦日扰倚留传).
이에 비하여 奸他詩는 _然風物을 보고 정감을 노래하거나 送別, 答禮하는 시,또는 金九,처頭,犬面,束班,換犯 등 가면樂舞를 노래한 시도 이 서정시로 분류했다. 또한 종교적인 성격의 시도 여기에 속한다.
이에 대하여 金烈은 앞에서 든 바 있는「植致速文學硏究」중고운 시의 내용을 다섯 가지로 구분하였다.첫째,고운 시의 경향은 당에서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시작했으나 詩風은 결국 晩店詩班의 功利派들의 생각과 일치하며 시로써 출세도 하고 귀국 후 한평생을 시를 떠나지 않았는데 족히 은둔생활 속에서 더욱 무르익어 갔으며 羅未의 詩植을 이러한 시풍으로 휩싸이게 했다.둘째,고운시에서는 的詩의 예술성을 찾아볼수있는데 자세히 보면 시대의 추이에 따라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는 성격이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벼슬을 구하고자 商耕에게 옵린「記德詩J 30 首는 오직 벼슬을 얻기 위한 뚜럿한 의도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공리적인 목적시라 할 수 있는 것이다.셋째,說物詩의 新境地를 찾아볼 수 있으니 평범한 사물도 고운의 시 속에 있어서는 전혀 새로운 창조물로 변모되어 무한한 의미를 지니고 재현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계원필경 卷十,「紅菜樹」란 시를 들 수 있다.흰구름 바윗가에 선녀 가 선 듯한무더기 새삼덩굴 그림 같구나어여쁜 그 모습 세상에 있는 줄 알겠으나한가한 情은 그대 같은 이 없을 것이네자고 난 화장에 맺힌 이슬 눈물 혼적인가 의심하고취한 태도는 바람을 맞아 붙들어 주기 바라는 듯쓸쓸한 숲을 대하여 읊으매 문득 서글퍼지니山中에도 오히 려 榮姑를 분별하구나41〉41) 위의 잭. p.40S. <白밍없뽕立仙妹-찮뼈」뻐倚엄S圖1m色iI!‘~於世;f.r lmm흉得i&(훌훌tId휩짧含참짧¥IUft ~¥1m迎lB.~f¥技9양Jl~林효116꽤{양 山中}홉自향찢홉).
넷째,고운의 시 속에 는 이별의 정한이 있다는 것이다. 12세에 고국을 떠나 당에 I6년간 있으면서 고국과 가족을 그리는 마음,당에서 사먼 벗들과의 이릴,귀국 후 쓴 시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 바로 그러하다. 이렇게 고운은 때와 장소에 따라 적절하게 이릴을 묘사함으로써 그 정한을 실감있게 말해 주고 있다.
다섯째,인생의 비애와 은둔을 詩心으로 달랜 고운의 심경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2〉당에서 곤궁하게 지낼 때에는 인생의 비애를 묘사한 시를 읊었고,고국에서 관직에 나아갔으나 뜻을 펴지 못하고 은둔했을 때에는 또한 그때의 상황과 심경에 알맞는 시를 남겼던 것이 다. 이 러한 시들은 그의 문집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이러한 내용 분류는 매우 적합한 것으로 이해된다.42) 양의 껴. r펴 ~1 월운학연푸'J. pp.86"'114 참조.
이에 대해 成樂按는「植致述의 詩稱神 硏究」란 논문에서 고운 시의 세계를 첫째 好情詩,둘째 鑑戒詩,셋째 獻詩,넷째 推賊詩로 구분했다.
첫째,서정시를 다시 名1꿈 • 强5⑯와 이벌 • 비애로 분류할 수 있는 나그네의 외로움 편과 求官 • 謝恩 • 시간. 역사로 분류할 수 있는 삶의 몸부림 편,醉興 • 風流 • • 恨으로 분류할 수 있는 强人의 閑寂 편, 그리고 脫俗과 路遊 . 然과 物象으로 나눌 수 있는 究己의 依I個 편 등 네 가지로 구분했다. 또한 둘째의 鑑戒詩는 誠論詩,淨때寺>'策{弗료考로 분류하여 고찰했다. 43)
43) , r뾰줬違의 잡훌짧;;J/IUf~J, 中央大1핑土멸t1t.원文, 1986, PP.110~187.
또한 그는 고운 시의 총체적 특성을 크게 네 가지로 들었는데 첫째로 이원구조와 부정적 사유,들째로 速防指向과 鬼感,셋째로 韓國 田固詩의 源流,넷째로 個人 好何詩의 확립 등으로 들었다. 44)
44) 위의 논운, pp. 188~237 창초.
이 중 첫째의 이원구조와 부정적 사유에서는 ① 山中과 座世 ② 名利와 始泊 ③ 正과 邪 ④ 除과 陽 ⑤ 理折과 願望 ⑥ 法典와 貧賤등으로 구분 제시했는데 이 가운데 ① 山中과 座世를 이원적 구조로 보았다는 것은 예를 들면 顯源上人에게 보낸 시에서,
종일 머리를 숙여 붓끝을 희롱하는데사람사밤이 입을 다물어 마음을 얘기하기 어렵도다멀리 티끌 세상을 떠 남은 기를 만하지만風他을 즐기어 다하지 않았음을 어이하랴45〉45) Ii'짧文昌찮全WJl, pp. 33~34. <終日低짜弄희H'i! AAtt口짧心웠 i횡R양Im t止앓셰Ul댈奈mm*1좋 00> 코죠.
라는 시에서 티끌 세상과 山中의 관계를 말한다.
이 밖의 많은 시에서도 이와 같은 유형의 이원적 구조와 세상에 대한 부정적 사유를 찾아볼 수 있으나 만년에는 초월적인 경지도 말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이상에서 고운 시가 실려 있는 상황과 내용을 몇 가지로 고찰해 보았다. 그러면 이러한 고운 시에 담겨져 있는 기본사상은 무엇일까. 하나의 문학작품 역시 시대와 상황의 영향을 받는다 해도 결국 은 내부로부터의 사상의 표출이기 때문에 어떤 문학작품에 대하여그 사상을 고찰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필자는 앞에서든 바와 같이『계원필경』과「K山碑銘」에서 문학관과 함께 문학사상을 찾아보았는데 그 중 그의 문학사상은 유 • 불 .선이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보았다. 이러한 점은 고운 시의 세계에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다만 그의 시세계에서는 平和主務 정신과 정신을 더 찾아볼 수 있다는 특징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사상적 성격의 자료들올 편의상 몇 가지 더 들어 고찰해 보고자 한다.偏敎思想的 詩「師無 I今獻太射」오가는 봄 가을이 꼭 信을 지켜따스한 바람 서늘한 비를 실컷 겪었네또다시 大故에 기대게 되니離染을 더럽혀 어찌 할까요脫 • 迎을 피하느라 섬으로 갈 때는江況의 刺 • 究가 부러웠네名品은 黃位과 다름없는데句取을 갖지 못해 섭섭합니다.46) [f뾰文n 않全짜』썰 20, p.403. <秋去깜來않종(11 탤빼없雨뼈혐짧· 파없大따않었l하 久i5얄~1필自5었 深避t:l~N:1J형Xb S양 {t꽤행앓江월 OR}없名品합J(~ ~뼈없t힌짧.Il*합>.
여기에서〈信〉을 말함은 단순한 信務가 아닌 우주적 信임을 알 수 있다.
「法海」배를 푸른 바다에 띄우니긴 바람 ?幻■를 통하였네멧목 탔던 漢나라 使臣이 생각나고不死藥을 구하는 次나라 商子가 생각나네해와 달은 虛空 밖에 있고
하늘과 땅은 太極의 가운데 일세이 지척인 듯하니내 우선 神仙을 찾아보리라47)47) Ii'孤짧짧종~f끓先生文갯:~.!l, pp. 514'"’ 1‘. <빠'fCi후iCJ1따 표.EU힘 mJifL ~없.면‘야fil! lm뺏ti!쫓효:c 8 月첼{可까 월nil太짧中옳.향찜ffl R.홈 f쿄싫;{I씨줬>.
여기에서는〈太極〉을 말함과 동시에 神仙도 말했으므로 도교적 성격의 詩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 부모에 대한 孝의 사상을 강조한「成與」이란 시도 있다. 48)48) 위의 껴, p.516 참조.
2) 佛敎思想的 詩
「牌强門湖苦智光上人」구름가에 송를 지어 놓고서조용히 /禪향에 들기 40 여 년간지광이는 산 밖에 나가본 일 없고붓은 서울로 가는 글 안 쓰네대나무 홈에 샘 물소리 졸졸松窓에 햇빛이 성그네맑고 높은 境地를 읊다 못하여눈감고 眞如를 깨치려 하네49)49) 위의 껴, p.512. <힐랴팎짧링 횟폐四紀따 짧흙w 山步!lUi정入거{lJ 竹했훌훌톨 松홉 B 影쩔i. !Q?::Ill양不앓 많目f홈따如>.
「題 峰 」
굴 부여장고 구릎봉에 옵라 줍어보니온 누리가 모두 명 반 듯하고산들은 칼래 칼래 손바닥에 놓이 너l萬짧는 가슴속이 탁 트이고搭그립자 해(日)가의 눈이요솔잎 스치는 소리는 半空의 바람일세
구름과 놀(ffi)이 옹당 나를 웃을 것이座世로 다시 걸음올 돌리나니50)50) 위의 씌· P.SH. (체훨上힘얻 1f앉t!tW-호 千III分$上짧.짜칩E성中짧彩티쌀땀 압앞天半JD. 짧E3윌笑tt 回步入밍H핍>.
「附 金川寺主」
흰 구름 시냇가에 절(仁雨)을 지으니서른 해 내내 이 住持로세웃으며 가리키노니 문 앞 한 줄기 길이조금만 산 아래를 떠 나면 천 가닥 되네51>51) 위의 껴· p. S20. (白핏짧양빼t:i쩌 三十年깡~t t!:t;~ 횟4업r~ 패一f(R~검 f빼앉11J下:f.r千양>.
위에서 살펴본 불교적인 시 이외에도 상당수의 블교 관계의 시가 있으며 그 내용과 수준에 있어서도 이미 깊은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山」(成「入山詩」)저 중(何)아 산이 좋다 말하지 말게나좋다면서 왜 다시 山을 나오나저 뒷날 내 자취 두고 보게나한번 들면 다시는 안 돌아오리52)52) 쉬의 P. '22. ( >.
이와 같이 후일의 은둔을 예견이라도 한 듯한 내용, 또는 평소에도 입산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한 내용의 시도 있다.
道敎思想的인 詩도교사상이 감아 있 다고 보아지 는 시 가 많은 편이 다. 몇 수를 골라 살펴본다.「性紋」
性海에 물결이 맑아 깊은 恨源을 보았고滿英를 연구하여 道의 문을 열었네글과 글씨가 쌍으로 아름다운 자취를 전하니어찌 다시 五:千금을 쓸 나위가 있으랴 53)53) 앞의 책 , rr계 원핑경 』권 17, p.381. <환않앉없당랬힘 理究땀했돼遊r~ u꾀빼A1~g흥3i!f-~ 何須}l!:f5죠千캅).
이「性紋」은『계원필경』卷 17에 실려 있고,내용 중 첫부분의 〈性海〉란 곧 性品의 경지,性理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므로〈性海에 물결이 맑아 깊은 근원을 보았고〉에서 고운은 이미 깊은 도의 경지를 체험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務突〉란 말도 老子에 보이지 않는 것을 相-라 하고,들을 수 없는 것을 英라 하였으니 곧 우주의 지극히 미묘한 이치를 말한 것이므로 이를 연구하여 도의 문을 열었다함은 이미 玄妙之理를 통달했다는 말이 된다. 또한 글과 글씨가 雙으로 아름다운 자취 를 전한다는 말에서도 도의 陳과 顯의 양면을 가리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뒤이어 있는〈五千言〉은곧 老子의 『道德經』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이미 五千言을 쓸 나위 없다 함은 깊은 통달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한다. 이와 같이 고운은 이미 당에 있을 때에 깊은 性理의 세계를 체험,통달하는 경지에 이르렀음올 알수 있다. 설사 이 시가 商M의 性理에 대한 경지를 말한 것이라 해도 이 미 고운 자신도 이 러한 것을 인식한 경지임을 알 수 있다.
「朝上淸」마음 재계 하기를 게으르게 하지 않고上帝를 받드는 것은어찌 神仙의 道를 닦는 것이랴 사람을 건지기 위함이지天上의 향기로운 비람이 第深에 부니 江南 江北이 길이 봄을 이루리54)54) 위의 책, p.383. <짝心不他自때따 렐j홉양仙값원人天上천없吹혈ro 江m江~tTtl.¥F).
여기에서〈上消•宮〉은 도교에서 말하는 天上의 玉宣上帝를 모신 곳을 말한다. 물론 이 만년에는 도교를 믿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기도 했겠지마는 上帝를 받드는 것이 신선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들을 제도코자 함에 뜻이 있다 함이 인상적이다.
「留別女道士」벼슬길에 쪼들린 座世의 몸이麻姑神仙 알게 되어 기뽑니다이 자리에서 眞心으로 말하자면저 바다는 어느 때나 다 마를까요55)55) 위의 껴, 갱』권 20, p.403. <
麻姑는 옛날 있었다는 女神仙을 말하는데 창해가 세 번이나 榮이 되는 것을 보았고 이제 봉래에 와서 보니 바닷물이 또 얕아지고 있다는 말이 있올 정도로 仙人이 되어 不老표生한다는 의미로서 女道士를 보고 한 말이다. 여기에서 고운의 道士觀을 또한 알 수 있다.
「因이리저리 꽃물결 따라 나부끼 는 그 모습가법게 털옷을 다듬고 나니 정말 믈 위의 神仙이구나자유로이 세상 밖올 드나들고 거침없이 을 가고 오리고량진미 좋은 맛도 아는 체 아니 하고 풍월의 참맛을 지극히 사랑하네아마 南華 늙은이의 나비꿈도 응당 내가 그대를 상대로 조는것과 같으리56)56) 위의 껴, p.404. <않없花휩홉뭘씬 않뼈毛衣m水仙出1)£自由않外찮 往켜H可tti폐中天홈훌~ta*s:不없 ..꺼 ttit~필可합 :1!H망얹E혀 l뼈봐찢i 只F핀如~훨훨따훌).
이 밖에도 신선을 동경하거나 사물을 도교사상과 연결지어 읊은
시가 많다. 특히 언급한 바 있듯이「玄峰類說」에 실리 있는 고운의 작풍으로 보이 는 八奇의 일명「避世詩」는 고운이 가야산에 은거한 후 만년에 지은 것으로 보며 符異山올 배경으로 한 神仙思想이 깃든 작품이다. 이것은 말년의 고운의 仙人的 경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므로 여기에 신는다.
(―) 우리 나라 花開洞은병 속의 벌천지라네利I仙이 옥침을 밀어내니순식간에 千年이 되었네(=1) 일만 골짜기 엔 우뢰소리 울리고—千 봉우리엔 비 맞은 草木 새로와山僧은 세월을 잊고나뭇잎으로 봄을 기억하네비온 뒤의 대나무 더욱 푸른데자리 옮기니 흰 구름이 열리네하 적적해 나를 잊었는데솔바람이 베게 위에 스치네봄에는 꽃이 땅에 가득하고가을에는 낙엽이 하늘에 나는데지극한 道는 文字를 여의고元來의 눈 앞에 있다네시냇물과 달이 처음 나는 곳솔바람이 움직이지 않을 때소쩍새 소리 귀에 들리니그윽한 흥취 알 수 있으리(穴) 산 속의 홍취말은 들었다지만
어느 사람이 이 기를올 알리무심코 달빛을 보며묵묵히 앉아 돌아갈 길을 잊었네(七) 애써서 깊은 뜻 말할 것 있나江이 맑으니 달 그림자 통하고긴 바람은 골짜기에 불며단풍잎은 가을 산을 비웠네(A) 소나무 위 에 담쟁 이 덩 굴 얽 혔 고시내 가운데는 흰 달이 뜨는데돌에 부딪치는 시냇물 소리 요란하고온 골짜기 엔 눈이 날리 는 듯하네57) Ii'쪼짧펴않.!I. 썰 13. 文웰部六.
(-)핑댐 7EDll洞갚中W1:i天{1~A推玉tt Jtt!t값千年(-)때효m훌훌Jt!l 千t$Ff.if5 m 山뼈;s;훌f:I mna菜F왜¥F(:>m et.多竹色~~白!!l oa a홍 ax因忘~t公!l!. tt上來(四)원來7E혐Jt!l~효첼飛天至힐i앓文字元來£目前(효) 해f:IlJJ生J:1~뭘不훌 b lJ훌 子規훌훌入耳뼈III 自應~(六)훌없#;Q1ll {메A없此앓 첼心見f:If5 뭘톨f.t~;S;짧(七)짧담何파짧 江ln f:l WjjJl J죠m生00& wm~ 山홍u、)松上팝I앓結샘中퍼i白月石川따1.-앞 야효多飛짧이러한 고운의 仙人的 경지는 이미 도에 달관된 경지이며 자연과 합일되고 자연에 돌아가는 老子的 _然觀 또는 道觀과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운의 시세계와 사상은 이미 유.불.선의 근원적 경지에 뿌리하고 있음을 고찰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그가 지향하는 국가관과 세게관은 결국 平和主鼓와 S 然主務에 바탕하고 있음이 파악된다. 그의 많은 시들은 거의 이러한 사상과 연관되고 있다.한편 이러한 고운 시의 경향에 대하여 詩風은 晩店詩法을 본받았고 따라서 ① 힘의 시보다는 감상적이요 섬약하다 ② 名利를 구하는 수단으로 詩作을 했다. 獻詩가 그것이다 ③ 典故 투성이의 溫難解詩도 엿보이므로 고운은 波詩史上 금자탑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산문에 비해 시 수준은 떨어진다고 보는 평도 있다. 이에 대하여 필자가 이해하기로는 만년의 시들까지 이러한 대상으로 봄은 무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58) 앞의 껴 • Ii'한국운학작가혼.a. pp. 46~'47.
3 孤雲文의 특징
앞에서도 언급된 바 있지마는 孤民文의 특징을 文强上의 특징과 內容上의 특징으로 분류해 간걸하게 고찰하고자 한다.1 문체상의 특징孤文의 가장 큰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이 晩店 耕範文의 영향이다. 대체로 文을 三大別하면 古文 • 耕附文 • 白話文인데 이 중 孤잃文은師文賊에 속한다. 이 文은 古文이 문장의 뜻을 전달함에 치중한 반면 문구의 字數나 聲律 또는 對偶에 치중하여 四字또는 穴字로 對句와 部文的인 記和를 존중하고 典故를 많이 활용하여 문장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종의 형식에 치중한 논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師文은 朝時代에 틀이 잡히기 시작했으나 中/在代에는 韓念 制宗元 등이 美文에 만 치 중하여 述活에 소홀함은 물론 質朴生動한 표현에 장애가 많아 古文迎照;을 일으켰으므로 이에 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듯했으나 晩店에 이르러 古文迎勤의 氣를 계승하는 자가 없자 그때까지 여전히 科染文으로 위력을 나타내며 公文만 등에 통용되고 있던師文이 다시 관심을 끌게 되었던 것이다.39)59) 짧仁좁. Ii'中댐앓文혔따史.a, ~혐中한t 낀}局. 1978. p.488.
그러므로 店末에는 문체의 경향이 자연히 文 일색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이때 당에서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한 고운이 이
助文의 영향을 받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또한 당과 밀접한 문화적 연관 속에 있었으며 당의 學制를 받아들여 太學制度를 두고 있던 신라에도 이러한 文風이 지배하기 마련이었다. 또한 통일신라 말기에 많은 당 유학생들이 귀국하였고 뒤이어 고운의 귀국으로 신라에도 助文이 유행하게 됨은 당연한 귀추라 하겠다.
이러한 연유에 의해 고운의 문체는 후일 性理學건를 중심한 및멎학자들이 비관도 하고 있으나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보면 고운의 문체에 대한 이해가 바르게 되리라고 본다. 왜냐하면 跡附文이 당시 文四에서나 科與에서나 社交에서나 심지어 公文안에까지 활용되던 시대에 고운 혼자만이 古文强 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고운이 그러한 경향을 무시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고운일수도 없기 때문이 다.그러므로 來 供吹周도 이러한 입장에서 당시 중국글이 例를 전문으로 종사하였으니 시대의 풍조에 따라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에 말한 바 있다.60) , , P.28S. <中之文方 r不짜而).
또한 고운의 만년의 詩文 몇 수를 보면 초월적이고 자유스런 의미 중심의 詩文도 보이므로 跡師文의 부정적 측면과 이러한 문체가 갖는 목성 만으로 고운과 孤文을 전부 평가할 일은 아니 라고 본다.
2 내용상의 특징孤段文을 보면 평소에 개인의 마음을 펴는 것은 시로써 족하고 文은 道륜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라는 생각을 고운이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61〉그러나 만년에 이르기 까지의 내용을 볼 때 고운은 양자를 서로 융통 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의 시 속에도 도가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金烈은 그의「植致述文學硏究」에서 孤段文의 내용상의 목징을 ① 道의 추구와 文學瓦識 ② 與用61) 앞의 논운, r칙 ;tJ원울학연주'J, p.l73.
文의 盤術化 ③ 韓國 碑銘의 典範 등 세 가지로 들고 있다. 62)
62) 위의 논운. PP.I73...... 188 참조.
이러한 孤强文의 특징은 아주 적절하게 표현된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孤五文의 전반에서 세 가지 면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사람이 中國에서 배우는 것은 禮와 樂이며 더욱 남은 時미]으로써 文竹을 공부하고 바른 소리로써 言語를 바로잡아서 문장은 技常을 지어서 海外의 臣節을 아뢰게 하고 言語는 何과禮를 통하여 上國의 使行을 받들게 하렵니다.63)6) Ii'뾰文읍앓全행JJ. P.58.
이러한「巡宿術學生位領等入朝狀」의 내용과 같이 당에 가서 배우되 顧와 樂을 첫째로 하고 文은 그 다음 남은 시간으로 익힌다 함에서도 가장 중요시한 것은 禮와 樂, 즉 도의 올바른 실천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도는 기본적으로 먼저 익혀야 할 길이요, 文은 이를 기록하고 표현하며 전하는 방편이라 할 수 있다. 혹시라도 도를 잃은 文이 있다면 그것은 문학으로서의 가치조차 잃게 될 것이다.이러한 면에서 고운의 文은 도를 주체로 한 文임에 를림없으며 이것이 孤述文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라 본다.이렇게 도를 주체 로 하는 입장에 서 고운은 유 • 불 • 선 드敎[의 벙행도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보았다. 즉 유 • 불 • 선 E敎가 각각 特長이 있고 교리와 의식에는 차이가 있으나 그 근원은〈道〉에 공통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道 주체의 사상은「成鑑和尙碑銘益序」에 잘 나타나 있다.道는 사람을 멀리함이 아니요,사람은 이방인이 따로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東人이 佛敎도 할 수 있고 偏敎도 할 수 있다.64)64) 위의 책 • P.123.
이러한도를 주체로 하는 내용은 孤文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계원필경집』에서 볼 수 있듯이 전반적으로 用文이 면서도 師文의 성격이기 때문에 그대로 곧 裝術文이 되고 있는 것이며, 「四山碑銘」또한 그대로 韓國碑銘의 典範이 되고 있다.한편 필자는 이 세 가지에다가 하나를 추가하여 孤文의 특징으로 게시해야 할 것이 있다고 본디. 곧 孤S文에 의하여 道S識의고양과 民族主强性 및 務心의 발현이다.「授郞碑序」를 보자.나라에 玄妙한 道가 있으니 風流라 한다. 그 敎를 창설한 내 릭은 仙史에 자세히 있으니 吹은 三敎를 포함하여 群生을 接化하는 것이다. 둘어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後司症의 뜻과 같은 것 이요,無爲로 일을 처리 하고 말없이 敎를 행함은 周柱史의 宗旨와 같은 것이며, 惡한 일은 하지 않고 碎한 일은 받들어 행하는 것은 乾太子의 敎化와 같은 것이다.65)65) 위의 책 , p.212. (댐혐玄상之파 日風流짧&之짧 폐詳仙史웰乃包含三값 接~t:f生且如入no~홈於쏠 버깨없於댐 챔펴풍之룹-&1l홉無f훌之ηF 行不릅之敎l돼홉史之흙il!. g惡~n- I:li월*rr 씀乾太子之~il!.>.
이 간단한「技郞碑序」에서 우리 민족이 과거로부터 도를 존중하고 이 도는 유 • 불 • 선 三敎를 포함하며 뭇 群生을 接化하는 것이라는 말 속에서 民吹主脫性, 科心,民族史M의 독자적 확립 등의 여지를 안겨 주고 있는 소중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귀국후에 지은 그의 글들에서는 단편적으로나마 東方民族으로서의 選民好、識까지도 찾아볼 수 있다.
66) 三 , r뿔孤윌빼의 主짧와 합族‘핸앓J, 全北大댐짧國文l}!Q', 1985, P.20.
4 孤雲文學의 비판과 영향
孤文學에 대한 同時代人 및 後來人의 비판과 끼친 영향을 고찰하고자 한다.
1 同時代 및 後來人의 비판고운문학에 대하여는 대체로 두 갈래의 평가가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첫째는 고운을〈東國文宗〉,또는 街文學의〈開山始祖〉로 칭 하는 한편 역 대 詩文選供에서 는 고운의 작품으로 留頭를 장식함을 典例로 받드는 긍정적 평가와,둘째는 退潔가 版評한 이레 주로 일부 備學者들이 孤田文이 達瓦보다는 美文을 존중하는,隨文勝임을 들어 부정적 측면에서 비관함이 그것이다.67)67) .:;1.;含SJ 岳咛叫]叫社甜家SJ l'J 7~号;.r:~An 古!毛告岳丘立是金由烈Sj rIl1tfll立项钊叫苦商家.SJ 醉倒孜J (1) (击位叫叶是岳币, PP. 37^'~~)~ 成锁在SJ r植致越叫自精神研究J (1986,号爷叫叶.(~叶钊每岳. pp. 3~""62) {} 号令~咛.
먼저 고운과 동시대인의 評價부터 살펴본다.
顧民( ? ~894) : 고운과 함께 商의 종사관으로 근무했으며 동년배인 願五은 누구보다도 고운에 대하여 여러가지 면에서 잘 알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고운이 귀국할 때라는 를 지었는데 그 시에서 고운의 평가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내 들으니 바다에 세 마리 금자라 있는데금자라 머리 위에는 높은 산을 이었고산 위에는구슬 궁전,자개 대 권,황금 전각이요산 아래 는천리 만리 넓 은 파도라네그 옆에 한 점 級林이 푸른데자라산 정기로 기특한 이 태어 났네열두 살에 배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文章으로 중국을 감동시켰네열여 덟 에 문단을 휩쓸어한 화살로 金門策을 쏘아 뚫었네68)68) 李歪银, [i'李相固然』毡22,雅文, 店岱不立也致地列仰埠, <~UÐi1íl上三金陆金
紫阳鼠山高高山之上兮珠宫只阴黄金应山之下兮千里离里之洪口傍边一黯罚林扭黯山孕窍生奇特十二~臼涯海来文平感助中E在四十八挺行眩目苑-flti射破金rlJ提>.
이 중〈文命으로 중국올 감동시켰다>(文章惑動中華國)는 내용에서 당시에 고운이 중국에 끼친 문학적 영향올 충분히 고찰할 수 있다. 이때는 당의 말기로서 당에도 季白 • 社南 • 都念 • 白樂天 같은 大家들의 배출이 있었지마는 그 속에서 고운은 고운대로 탁월한 문장의 경지를 인정받올 수 있올 정도의 大家로 평할 수 있는 것이다.
羅路(833~9〇9) : 고운보다 24 세 연상이 며 唐未의 詩人이 다. 날카로운 성격의 소유자였으나『三國史記』植致速條에 의하면,〈이런 까다롭고 도도한 羅路에게 주위 사람이 고운이 지은 詩歌 玉:軸을 전해 주었다> 고 함에서 결국 당시 에 이 름을 떨치 던 羅!:J도 고운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69) [j'三四史臼』毡46,列倍;在六,在致地傅. . <店员才自商不理昨可人示圭fcii所~恃歌五恼>.
다음 後來人의 평가를 본다.
金密試(1075〜1151) :『三國史記』祖致速條에 의하면,『店안』座文志에 고운의 작품이 수록된 것을 먼저 들고서 〈그 名이 上國에 들리기 가 이와 같았다〉라고 크게 평가했다.70) 导1~ ~. <新店也在文洁、去崔致远四六~一在......名田上国阳此).
2) 鄭知常(? 〜 1135) : 金剛山에 있는 括果寺를 노래한 시에서 고운에 관해 말하고 있다.
최고운을 생각해 보니文帝으로 중국 땅올 진동시컸네무명 웃 입고 갔다가 비 단웃 입 고 돌아오니나이는 스물아홉이 못되었네白玉에 파리가 점을 찍듯시세의 取하는 바 되지 못했네지금도 南山에는오직 남긴 채소밭 하나 있네아득한 그의 9세 손이어려서부터 졸병 름에 섞여 있었네불러서 선비의 관을 씌우니
어진 이의 후예임을 알게 되었네또한 i洋腦 선생이 있었으니높이 能 같고 범 같았네方言으로 五經을 강의하니學者들이 孔子에 견주었네세상에서 - 君子라 불렀으니이름이 가지 런하기 辛白과 社市와 같네71)71) Ii'파京雜llC.1J 원 2, 해宇,
이렇게 鄭知常은 고운이 문장으로 중국을 진동시켰다 했고 또한 신라의 商腦과 함께 君子로 불리며 유명한 당의 시인 季白과社市와 같은 관계와 위치라 했다. 鄭知常의 고운에 대한 관점을 잘알 수 있다.
季仁老(1152~1220) : 그의 『破閑染』에서〈寶貫으로 중국에 들어가 과거 에 급제하였고 商®f의 막부에서 일했다. 그때 천하가 소란했는데 편지와 授UD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라고 하며 칭승했다.72) 총仁老, Ii'않해짜』깝 23, <以줬짜入얘1 행뼈짜 썼겹앓합H¥p~天下!l.U~ 빼.i!뻐j훌手).
4) 季蜜報() : 그의『東國辛相國全供』가운데 있는「店不立推致速列傳設!」에서 고운에 대한 특별한 언급을 볼 수 있다.
『店』座文志를 살펴보니 按致速의『四7입] 1 卷과『佳死按耕』20 卷이 실려 있 다. 그 注에 이 르기 를,商麗人으로 資資及第하여 商耕의 推南從市가 되었다고 하였다. 내가 이를 읽어 보니 아닌 게 아니 라,중국인은 갓없 이 고르게 대 하야 外國人이라 하여 가볍게 여기지 않고 이미 文供이 세상에 행하도록 하였고 또한 史記에 이렇게 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文裝列傳에 推致速올 위하여 傳을 세우지 아니한 것은 내가 그 의도를 모르겠다 만약 外國人이라고 해서 傳을 세우지 않았다면 裝文志에 이 미 나타나 있고 또 群銳 장수에 季正己 • 黑齒常之 등이 다 商麗人이나 각각 그 傳올 열거해서 그 일을 갖추어 기록하였는데 어찌 文列傳에만 홀로 班孤民을 위하여 그 他을 세우지 않았는가. 내가 생각해 보니 옛사람들은 文章에 있어서는 서로 시기가 있었는데 하물며 致述이 外國사람으로서 中國에 들어가서 당시의 名人들을 짓밟았으니 이것을 중국인들이 꺼리는 것이라 하겠다.73)
73) 李월Hfl , u짜I쩍추쩌돼全갯~.1l 썰 22( 徐암正, u'끼!文필』캄 lOG) , <앓flit양쪽文~~t원쪼*i앓四六一쌀 又tE?i!節빠二十원 딩 tH:; ?;S !j얻A줬혔及껴l 1흥 ir5IDt itE南從꾀~ I앓원之未양不짧J,t~며之않힘차-外不以外國A1S之짧파 而I뿔令文U!行於1앞 又~史tl!I~t월r ~~於文씬7lJ ~1 不1:s훨웰~I'i立1t NJ t잊커~~JU효t!l.••••••월以外~A깨己J효千志쪼 又於짧i.1 f!G~딩띠李正E뽑랩밤之쩔 tf~':ilZ갚 A{!!. 各列Jtf~V ~;tt낀 HIn핫 奈何於文활 뿔不짧없뭔立J1; ~IH!!. ~以私Al.해之古之A 於文i양不찌不相않‘를 況致遺以外뀔킹1M.강i 入中햄7J~였時之名~~눈近於中댐之~휴·也).
이와 같이 季호報는 고운이『座任 裝文志에 그의 1四1 卷과『佳約筆想니 20卷은 실려 있으면서도 孤民傳을 별도로 두어 취급하지 않았음을 구체적으로 논박할 정도로 孤玄文을 인정한 것이디-. 그런데 이규보는 고려의 대문호로서 新:石論올 주창하고 종래의 修前i위주의 文風을 비판함과 동시에 우리 문학의 자주성 을 강조한 사람이면서고운에 대하여 이러한 자세를 보인 것은 그만큼 孤民文의 탁월함과 중국에서까지 독보적 위치를 지닌 고운의 인물됨에 감명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규보는 고운으로 인하여 우리 민족과 문학의 위대함을 천하에 공포한 셈이다.
74) 월m烈, r웰낀文맹에 다l 한 짧家의 양f. frl~J (1) , p.42.
5) 季承休(1224~1300) : 그는 (T帝王韻記고에서 <文章으로 어느 누가 中華를 움직 였나. 淸河의 致述이 처음으로 칭찬을 반았네〉)라고 하며 고운에게 격찬을 보냈다.
75) 李jJ{.休, lr팎포fdl l1a.6 썰下, <文웰何A따b 中웰· 해f可~i훨方延앞>.
6) 除居正(1420~1488) : 그는『東人詩話J]에서 季査報의「白黑小說」에 실린 고운의 詩話와 거의 유사한 내용을 들고 있으며 또한『佳
76) 徐합正, Ii'Jt! A않짧』二제.
死,耕J1 序에서 〈우리나라 詩文染으로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은 이 文染으로 開山의 切祖를 삼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또한 東方整究의 근본이 된다고 했다.
77) Ii'对l 毡咀苟』序.
7) 周世別(15~1554) : 그의『上季n每齋立如에서〈按文昌은 文章이神異하고 그 所見이 나 所行이 참으로 百世의 스승이 라 하겠다. 誠正의 說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볼 수 없으나 그가 구석진 나라에 태어나 文學을 例述한 功이 말할 수 없이 큰즉 先聖의 묘에 配空함은 이분이 아니고 누구를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는 고운이 중국에서 천하에 명성을 드러냄으로써 東方文章의 始祖가 되어 文廟에 配球함이 당연함을 강조한 것이다.
78) Ii'号缉孤~先生丈然.!l. P.507.
8) 李保;(1501〜1570) : 향절는 고운을 평하여 말하기를,
저 植孤堅 같은 이들은 文草만 與尙하고 더우기 부처에게 몹시 아첨했었다. 그의 文集 중에 있는 佛疏 등의 작품을 볼 때마다 몹시 미워서 아주 끊어버리고 싶지 않은 적이 없는데 그를 文廟에 配等:해 제사를 받게 하니 어찌 先聖을 욕되게 함이 심하지 아니 한가. 79)79) [j'返~祭.1l. tl"行蜂王, 摆正晤. <如扭扭骂徒向文(t而蹈佛叉毡怨旦集中佛疏f$仰未誓不深思而痛昭之也只享丈朋坐亦厚先型之茜乎).
라고 하여 유학자로서 대표적이고 노골적으로,또 공식적으로 고운올 비 관하였 다. 이 와 같이 조선시 대 대 표적 인 性理學者가 고운을 비평해 버리자 유교 중심의 조선사회에서는 고운을 語仙阿佛之人으로 版下하게 되었고 이러한 경향이 거의 말기까지 이르게 되어 孤受文이 제대로 보존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기도 했다. 이것은 고운이 문학가로서는 훌륭하지마는 여러 면에서 의리와 지조를 생명으로 아는 偏學者의 입장에서 보면 通f師文賊의 孤S•文과 함께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나 원만한 평가라고 보기는 어리운 것이 다.
조선시대 유학자로서 退潔보다 약간 앞선 사람으로 고운에 대하여 약간이라도 비관한 사람은 成供*(1439~1594)과 金哀(64〜18)을 들 수 있다. 成保은〈고운이 중국에서 登第하여 文名을 크게 멸친 사람으로 多:國의 文章 始發이요 文廟에 配空하고 있다〉때고 했다 金託法은〈자신이 고운과 동시대인이라면 지황이와 짚신을 들고 따르며 고운으르 하여금 홀로 블교도와 같이 어을리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 재능과 문장은 인정해도 블교에 정근된 것을 안타깝게 지적한 바 있다.
80) 成但, r阳市Q í!JJJ 程1 , <我回文~始注於也录这袭~λ店登篇文名大纭至今本文口) .
81) 金日~, f洒自先生文jt‘』谷3 缸. <使某生淤JLl ~之峙岔毛式投而在生不使Bl~目均员。白者主3徒云云).9) 辛時光(1563~1629) : 季時光은 그의『老的類說에서 앞서 말한 成의 고운에 대한 비평에 반론을 제기했으니 곧 의 文에어 찌 즈그만 흠도 없을 수 있겠는가. 다만 신라 때에 文民이 덜치 지못하였는데 致述이 시작했으므로〉비 그를 높이 존중하지 않을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82) 辛陈先, g'乏位m~.ll 岱8,艾尔部一,文帘, <……而装这持文亦边摇小提但药E暗文旦采;至而致这但之故~m人2文1:í:者必柄兹这如不可瓮及者耳) .
10) 金萬哲(1637~1682) : 그의『西滿溫에서〈新B가 盛함에 私保가 釋門의 羅强로서 文風을 드날렸고,祖文昌은 丈室의 雄摩로서 中華에 크게 울렸고 照未에 이르러 刷將 社强 諸氏는 孔吉으로 反正케 하였다〉83)라고 하여 주로 불교의 維按와 같은 居士로 불교중심으로 보았으며 설총, 포은,목은과 그 비중을 같이 말하기 도했다. 그러나 고운을 불교 중심으로만 평가하여 말함에는 두리가 있다.
8) 金囚在』下, <衍黯之怪E事弘的以白r~之扭1莱茵「网文且崔文吕以大室之括摩大鸣中华窒淤因来回牧路公因之而反正於孔孟)
11) (l620~1799) : 湖南借 連深 有一은「四山碑銘」단에서,
마침 孤先生의 글을 읽자 머리를 조아리고 큰 소리로〈하늘이 우리 효보을 내시어 H敎:를 통를어 관통하였으니 더할 수 없이 위대하도다. 傳에 금방울은 武를 떨치고 나무방울은 文을 떨친다 하였으니 先生은 바로 三敎의 목탁이시다〉라고 하였다.先生은 東國 文常의 始祖인즉 반드시 性理學에도 능치 못함이 아니겠지만 때를 만나지 못해 보배를 품고 팔지 못했으니 애석하기 이를 데 없다.84)
84) Ii'국역 孤옆先生文핏.!], Pp.897""898. (따乎값m 앓先生所옳文格월댐갑B 갖生했先生찮1t三값 大짧 않以加젓 己찌깨낯之gz헬j/j(~ 木첼振文先生1(;三&之木셀fJilt! 先生줬파國文헬之줬 f핀則未必不뾰{生행之1J! mi迎켜i;j:l; B;lJ 없했而未샘可짧fIj뚫).
라고 했다.
역시 班U保은 的位인지라 다른 사람과는 고운을 보는 눈이 다른 것올 알 수 있다. 고운을 유 • 불 • 선 드空k의 목탁이라 했고 또한 性理學에도 능한 바가 있을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이 다. 餘有樂(17이〜1태5) : 季朝 正祖 때 吹學者인 그는 자신이 편찬한『계 원필경집』序에 서『계원필경』을 가리켜,〈우리 나라의 詩文學이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이 책으로 開山의 始祖를 삼지 않을 수없으니 이 또한 束方 敎:死의 근본이 된다〉85>고 했다. 즉『계원필경』의 文學的,한誌쨘的 가치를 그대로 밝힌 말이라 하겠다.85) Ii'校印桂젊·옆황Ji~. (攻끼f;¥文짜之챔今뻐컴· 不f{J不以:11::~ 13뼈山4¥;.n :11::#따方g흩짚之本*台也).
13) 『朝鮮王朝攻錄』: 打•錄의 고운에 관한 기 록에 의 하면,〈推致述과 推腦은 문장이 나 하고,글의 뜻이 나 알려주는 학문으로 오히려 文廟 配쀼에 참여했다〉a6》했으니 결국 고운의 문장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짐작할 수 있다.
86) Ii'뺑한王행싼훨.E. 효;jIl~웰, 짤 180, j쪼 at三十七年十져 훗흥, (WJrd효 n¥훌以폐i힌엉I)월之횡 1려찜맺힌J~之:$::i;죠).
지금까지 고운 및 그의 문학에 대해 고운과 동시대인 및 後來人의 평가를 간추려 고찰해 보았다. 여기에서 세 사람이 부정적인 면을 언급했음을 보았다. 그러나 대체로 극찬 내지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음올 보았디-.
미처 열거하지 못한 사람이나 저술들도 있으며 여기에서는 대체로 특징이 좀더 있다고 보여지는 인물과 내용을 중심으로 간추려본 것에 불과하다.2 孤雲文學이 끼친 영향
이러한 고운문학이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東國文宗〉이요, 우리 문학의〈開山始祖〉라 하였으니 고운이 후 대체로 네 가지 방향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이러한 고운문학을 긍정적으로 보고 관심을 가지며 중국에 유학하려는 의식의 팽배이다. 실제로 고운 이전에도 座 유학생이 많았지만 고운 귀국 이후에도 계속된 점에는 그러한 요인도 있을 것이다.둘째로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었는데 고운 귀국 이후 通文强의 유행을 들 수 있다. 물론 귀국 이전에도 유입은 되어 있었지마는 귀국 이후 더욱 확산되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며 이러한 美文忘識은 이후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적어도 連瓦를 중시하는 性理學時代 이전까지는 이러한 경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셋째는 이러한 耕師文盤가 형식을 존중하고 美文에 치중하자 유학세력의 팽창과 함께 안으로 의미를 존중하는 備學氣風을,특히 性理學的 氣風을 일으키는 데 자극이 되었을 것으로도 보인다. 앞에서 의 諸家의 평가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중기에 이르러서도 칭송이 계속되다가 成促,金卵孫,季保 등에 의해 비판되면서 孤S文에 대한 평가는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긍정적으로 보기가 어 려웠다는 사실에서 반증해 준다고 볼 수 있다.넷째로는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 고운사상의 여 러 면을 재조명 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음은 결국 현대에 와서도 일종의 고운사상의 영향은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探郞碑序」의 風流道에 대한 언급이나「四山碑銘」에서 강조되고 있는 三敎合一의 정신 등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근본과 융통정신을 제시해 주는 영원한 교훈이 되는 교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운은 이러한 면에서 우리 민족의 선각자이자 영원한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이다.「孤雲의 文學뽑、想」 토론 개요
주제 :孤民文學思想과 그 想務1필자는 위 주제에 대하여 본교 국어국문학과에 재직중이며 시인인 察金判 교수와 두 차례에 걸쳐 토론회를 가졌다. 여기에 토론된 내용을 집약 정리한다.필자는 宗敎思想을 주로 공부하기 때문에 위 주제의 논문을 집필함에 있어서 어떤 틀을 설정하고 전개함이 필요하다고 볼 때, 논문 서 두에서 생트 되브와 데느의 문학을 결정 하는 요인설을 제시한 것은 타당성이 있다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또한 이러한 면에서 논문 목차 등이 잘 짜여서 작성 되었다고 보아지나 200여 매의 제한된 지면에 모두를 충분히 소화하기에는 무리가 있겠다고 보았다.2 그러나 고운의 문학사상을 다룸에 있어 서 그간에 운학하는 사함들만의 천유물처 험 여 겨져 오던 분야를 종교사상을 천공하는 교수가 정필해 붐으로써 품학가의 눈에는 미쳐 보이지 않았먼 부분이 보알 수있다는 청과, 특히 고운운 운학가엄파 동시에 훌륭한 사상 가이기 혜뭄에 그간 미개척이었먼 분야가개척되는장점이 있다. 포 한 하냐의 품학작품 역시 그 작자가 갖는 사상의 표출이요, 사상윤 대체로 곧 종교척안 연을 혀나 성렵될 수 없기 혜운에 이벤의 이러한 칩펄이 앞으로를 위해서도 좋은 계기가 되리라는 것이었마. 품학착풍 또는 품학가들의 사상을 천확해 보는 시도이 기 혜 운이다.3 문학사상이라 함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문학작품에 나타난 사상이요,둘은 문학에 관한 사상인데 여기에서 양자가 상보적 관계가 있기 마련이나 필자는 주로 전자인 고운의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거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운의 문학사상을 찾아보았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어떠한 한계가 있고 어려움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것은『佳死策耕』의 대부분이 代班이라는 점에 고운사상의 한계 를 느끼 게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필자가 밝혔고,그러 나 고운이 귀국하자 헌강왕에 게『계원필경』20권을 바쳤다는 사실은 곧 그것 이외 형으로 보아서는 대필이지마는 내용상으로는 고운의 저술이라는 의미가 갊아 있으므로 사상을 탐구하는 데에 있어서는 포괄적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라는 토론을 가졌다.그러 나 이 점 에 대 하여 그간에 몇 몇 학자들은『계 원필경』1 권〜16권까지는 도외시하는 관점이 있어서 매우 조심스러웠다.
4 그렇다면 한마디로 말해서 고운의 문학사상을 무엇으로 요약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필자는 여섯 가지로 요약 제시했다. ①孝行思想의 모범이디-. 1T孤S先生文染』通刊 序에 서 편집 자가 고운의 문학은 詩 • 한 • 般 • 樂의 四術과 穴經으로서 仁으로 근본을 삼고 후향를 앞세우는 것으로 봉몹를 삼았다고 말함에 서도 밝혔듯이고운이 I2세의 어린 나이에 부친의 명을 받고 A唐하여 관직에 나아가고 귀국하여 갖는 자세는 그야말로〈孝行〉의 典範이 되는 것이디、② 逆의 추구와 平和主務의 攻現思想이다. 「爲郞碑序」에 서 이미〈나라에 道가 있으니 風流라 한다〉한 바와 같이 고운의 전 작품세계의 저변에는 도를 추구함이 깔려 있고 또한 이러한 도에 바탕하여 평화주의를 실현코자 한 것으로 보았다. 유명 한 黃災에 대한 격문도 바로 도를 구심으로 하여 황소를 꾸짖는 내용인 것이다. 그가 귀국하여 時務十條를 냈다 함이나 그 이외의 작품도 항상도 륜 여의지 않고 실현코자 하는 사상으로 짜여 있다고 본다. ③ 攻用文이지만 예술적 가치와 後來에 하나의 典範이 되게 한 점을 들수 있다.『계원필경』이나「四山碑銘」이 모두 실용문이면서도 그대로 예술적 가치와 후래의 전범이 되고 있다. ④ 名利를 버리고자연에 합일코자 하는 사상이 특히 그의 詩文 전반에,또한 후기에 올수록 강하게 깔려 있다. ⑤ 三敎合一思想이다. 그는『계원필경』여러 곳에서도 를 융통하는 있지마는 특히「」에서 하나의 도에 바탕하여 마치 솔의 세 발과 같이 공존관계에 있는 一호임을 여러 곳에서 강조했다. 이러한 삼교합일 사상은 오늘날에도 요청되는 도에 바탕한 그의 사상의 하나이다. ⑥ 護國思想을 들 수 있다. 당에 있을 때에도 국가의 안위를 염원했지마는 귀국 후의 활동에서는 이 점이 강하게 나타난다. 「時務十條」를 냈다함도 이를 뒷받침해 주는 말이요,風流道가 일찌기 있었다 하여 화랑도의 정 신적 근원처를 제시함도 다 그의 호국사상의 발로라 하겠다. 그러나 저물어가는 신라는 고운의 힘만으로 지탱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면에서 그는 해외에 13년간 머물다 귀국했요므로 대국적으로 보는 입장에서 꺼져가는 신라는 어찌할 수가 없기에 고려의 건국에 거는 기대가 있을 수 있다고 보아진디-.
이렇게 요약하는 필자의 견해에 왜교수도 동감했으며 체교수는 고운사상의 결론은〈護國思想〉임을 거듭 강조했다.이러한 고운 문학사상의 의의는 매우 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 본적 으로 그의 모든 사상의 출발이 곧 문학작품에 서 이뭐지고 있기 때문이다.또한 앞으로도 역사적인 문학작품에 대해서는 이러한 형태의 연구가 계 속 필요하다고 결 론지었 다.孤雲의 政治·社會觀
柳聖泰1 政治 ·社會的 배경I 政治的 배경拔孤이 出에 유학을 하기 전후의 시대상을 보면 정치적으로는 安史의 亂(755〜763) 이후 店朝의 권위가 상실되었다. 아울러 科染制度의 실시로 인하여 기존의 상층귀족은 몰락되었다. 이에 중간충과 하류층의 선비층이 정계에 활약하게 됨에 따라 정계에 전환기적 혼란이 초래되어 당나라 문화도 퇴페적 분위기가 만연하였다.그의 在座 修學期(868~884)의 정치풍조를 보면, 이미 晩店期(S3S〜90(5) 에 世界主務의 성 향이 편협하고 배타적인 중국 중심의 國伴主我 경 향으로 쇠퇴 하였다. 동시에 平和主務의 정 신이 요청 되던 때 이기 도 하였 다. 그곳의 지 도충은 출신이 어떠 하든간에 인물 본위에 따라야 한다는 유교적 관념이 팽배하여 권력질서의 유지수단이 변화하던 때 였다.1》그래서 이미 玄宗(A.D. 7:2~756) 이후부터는 宮官들의 득세는 물론 節度使의 득세로 인하여 당나라 조정의 雄令은그 권위가 떨어졌다.I) 뾰根해~. r新짧末젊致遺의 忠젠的뾰格J. 만국다l 학교 대학월 사학과 씌사논품,
이제 고운이 귀국한 신라말기의 상황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대
체적으르 보아 당에서 돌아온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그의 경륜과 포부를 피력하기에는 여러 모로 정치 • 사회적 여건이 용납되지 못했던 시기였다가 그가 귀국한 1년 후에는 5立 또(875~886)이 界평하고 定康王 (886~887)이 즉위하였으나 1 년 만에 또 승하하였 으며, 그 뒤를 이어서 왕의 누이인 眞聖女3£(887~89가이 즉위하기에 이른다.
2) 뾰없~. rll.i1f.Tllt1줬협의 fd:f}tt<껴'f.!딴젠J. «압댐,딴:w.‘》제 18 정 , 행댐띤想맑究습,p.2'6.
이때는 京f代:로서 왕권이 이미 미약하게 되어 i世있於i들이 중앙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면서 土地派供과 아울러 농민을 수탈하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중앙과 지방호족들의 이중적인 수탈에 못이겨 유랑하거나 群盜의 무리 가 되었고 호족들의 私兵 내지는 노예로 전락되었으며 지방은 革賊과 赤按賊이라는 n民反亂軍이 봉기하여 국가에 위협적 존재로 부각되었다.
3) 위의 껴, p.2'6.
이를 종합하면 고운의 유학지 였던 당나라는 물론이고 탄생 지 였던 통일신라까지도 중앙귀족의 권위실추와 科染制 실시에 따른 지방세력의 등단과 함께 왕권의 하락이 몰고 온 정치적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던 정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운이 귀국의 길에 접어든 당시 신라의 정계와 사회는 그가 보기에 긍정적인 현실은 아니었다. 그의 이상적 사회는,즉 바람직한 세상은 질서가 있고 人倫을 높이는 逆德社企였다.시 이처럼 당시의 사회는 그가 갈구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사회가 펼쳐지 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의 혼란은 뇌물이 公行하여 기강이 문란하고 國基가 흔들릴 정도였다.4) 朱mO, r캘훌헬J띤:ID9F했J , 1?9F않압왔.!l 82"'2, 합머월빼文4ι 01f~~, 1982, p.337.
그리하여 고운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너두 속속들이 깨달아 버렸던 것이다.5) 이는 곧 그의 생애를 통해 그가 처했던 사회상황이나 그의 신분적 한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六
5) 李, r핑方at»의 文ffmJ. (j'~댐A4t大;빼 1, r古代의 Aj, 友it. 1972. p.400.
品 신분이라는 구조적 제한으로 인하여 깊은 고뇌와 투쟁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으므로 더욱 그런 모순된 실정을 쉽게 알게 되었던 것이다.
거시적으로 볼 때 당시의 시대상황은 곧 신라말기에서 고려 초기에진입하기 직전이었다. 즉 신라하대 지식계급의 대표자라고 할 만한 고운이 살았던 시기는 신라 고대사회가 해체되고 고려 중세사회의 성립을 눈 앞에 둔 사회적 전환기였다. 그러나 그가 시대적으로 불우한 여건에 처한 인물이 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그의 역사적 공헌과 명성이 알려저 왔음은 무엇 때문인가? 어떠한 이유로 그의 많은 지술이 산실되지 않고 보존되어 왔는가? 이러한 문제 해결의 신마리 는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통해 접근될 것이다. 그 일환으로 고운의 정치 • 사회관올 밝혀보는 것은 그의 사회참여라는 활동상에서 중요한 일면을 담당하리라고 본다.6) 11l꽤황, r新짧없에서 4깊 tl!쪼~l휩J , 체 4 호1 rnm잊댐값앉術f1 m, 大따f~fJ統{빼f£Vf~院, 1981, P.12~.
2 政治的 官活
그가 정치적으로 행해 온 官職活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당나라 中原에서의 관직활동이요,다른 하나는 신라에서 의 관직관동이다. 고운은 소년기로부터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당에서 보냈으므로 거의 店人化될 정도로 당나라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 그의 소박한 포부는,앞서 만리 밖의 집을 떠나 10년동안 중국에 유학한 것은 본래 소망이 다만 版尾에 及第함과 江推지 방의 한 隱令이 되고자 했을 뿐입니다.7) Ii'崔文당찮쏘짜.!l, Jt;<.J:성fIr!大f!;!찮, 大끼i文{t~究院, 1982, Ii'桂짧않횡t~JJ 썽 18,「없‘~~량 었二J , P.386. (맺경i 1I:;!I!없흉 十年i\l[휠 本옆止於Vi~,*m 江f훌-JI; 4혹).
고 했던 언급에 잘 나타나 있다.
다른 육두품 줄신과 다름없이 고운은 당 유학을 통하여 각고의 노릭 끝에 18세 (874, 班 依宗 乾符元年, 甲午)에 당나라의 次及科에 급제하였다.8)이는 禮部侍郞 夜明의 學的 조력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8) 위의 쳐, 젤낄쪼똥따 m, r三本 , p.407. (公至파꽉師力핑 以파따宗따元 ).
그후 20세 때에는 당의 지방행정 관인 宣州深水賊/射를 지냈다.9) 그러니까 그가 급제한 후 약 2년간은 주요 직책을 맡지 않고 다만 그의 저술활동을 위한 실력 쌓는 공부에만 몰두하였다.
9) 三 46, 7'11 때, ’.
그런 후에 고운은 처음으로 시작한 관직활동인 深水i除樹라는 벼슬에 안주하지 않고,그보다 더 높은 직위를 갖추기 위해 당의 他學安詞科에 응시하기로 결심하였다. 인간이면 누구나 지닐 수 있는 자기성취라는 평 범한 인간의 상향적 욕구를 고운은 풍었던 것 이다. 그가 응시를 결심한 때는 그의 나이 21세이며 당시 그는 深水保射의 직 을 사임 하기 에 이 르렀 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당의 조정에서는 그를 承務郞 侍御史內供本의 직위에 迎하는 한편 당의 俗宗은 그에게 紫金魚裝를 하사하였다.10) 고운이 하사받은 紫金魚炎라는 것은 당의 고위고관에게 수여하는 것이 었는데,이는 쇼與I톨位?을 한 주머 니 로서 그 속에 자기의 성명을 새겨 대권의 출입을 자유톱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이 정치활동에 있어서 왕의 신임을 받고 그의 정치적 경륜을 건개해 나갔다.l이 쩌의 져.
倍宗 재임시 (8T5~88.1) 당나라에서 발생했던 대표적 인 난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黃.供의 亂이다. 黃m가 반란을 일으키 자 商跡이 諸道行密 兵馬都統이 되어 黃m륜 토벌할 때 고운을 불러 從市巡官으로 삼아 投記의 책임을 맡겼다.n) 고운이 서기로서 활동할 당시의 그의 정치적 소견과 경륜은 그의 저술인 表 • 壯 • 판 • 啓 등의 기록에 상세하게 밝혀지고 있다.
11) 쉬의 껴.
그후그는 당에서 정치적 활동에 한계가 있음을 느낀 탓언지 귀
국을 결심 하게 됐다. 그리하여 28세 때 고국으로 돌아가려 하자 당의 倍宗은 그의 뜻을 짐작하고 특별히 사신의 자격을 부여 하여 주었 다. 비 여기까지가 당에서 그의 공식적 정치 활동이 라고 말할 수 있다.
12) 위의 책.
만 17년간 당에 서 체류한 후에 고운은 29세의 나이로 귀국하였는데 이때가 신라 述,康王 11년(885)이다. 헌강왕은 당나라 中原에서의 고운의 활동상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 侍說兼 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端監에 임명하였다. 이러한 的林學士의 직위는 신라에서 國子監 習菜을 마치고 돌아온 班/편 유학생들에게 부여하는 직위인 것이다. 그는 신라에 귀국한 직후 그의 직책과 심경을 「述宿術學生首領等A朝狀」에서〈職日翰林,終身從과〉“>라는 문귀로 토로하고 있다.
13) 위의 쩍.
14) [j'짧文昌候全찌!J], p. S8.그는 당나라에서 학문을 배우고 활동할 당시에 지었던 저술작품을 왕에게 올렀다. 그후 그는 35세 때인 891년 (浪聖女王 5년, 辛玄)에 太山郡 (현 泰 t) 太守職에 봉임 하였 고,36세 때인 892년 (眞聖女王 6 년,王子) 大山郡에 서 天樹郡(현 成陽) 太守로 전임 되었다. 그리 고 그의 나이 37세 때인 893 년 (眞聖女王 7년,炎표) 에 密城郡 (현端山) 太守로 다시 전임되기에 이르렀다.
15) [j'三햄史記』짤 46, 列~. ttlfb횡條.
16) 위의 껴.고운은 그의 정치적 경륜이 담겨져 있으리라 추측되는「時務十餘條」라는 개혁정책을 眞聖女王에게 올렸다. 이때가 그의 나이 38세 (聖女王 8년, 甲史 2月,894)이다. 여기에서 그는 나라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향을 제시하였다. 원문이 전해지지 않으므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추측건대 眞骨의 좁은 테두리륜 벗어나 육두품을 포함하는 폭넓은 정치를 지향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구체적으로 는 귀족의 충이 넓어지고 신분보다 학문을 바탕한 인재등응을 주장하였으리라 본다. 아물든 기울어져 가는 신라하대를 바로잡아 보고자 하는 그의 충정이 잘 나타나 있음에 틀림없다. 이에 진성여왕은
고운에게 河技의 벼슬을 내려주어 그의 정치%두을 기속하지 하였다.
17) [j'三댐史記』쌓 11, 여훨王g 年條, <넓致펴進時짧一十除쌓, 王짧納之拜致펴1월>.
그러나 그는 진성여왕 즉위 11년 (897)에 정치의 큰 탄함에 대한 스스로 책임을 느끼고 河沒의 직책을 사임함으르써 정계에서 믈러나게 되었다. 이 는 신분상의 한계 그르 하여금 정치찰등을 더 이상 유지 해 나가지 듯하게 만든 것으르 브인다. 고운의 D居時期는 그의 나이 42세경인데,은거 직전인 년0사 세 대,진성여왕에서 孝器王(헌강왕의 推子,진성여왕의 조카)으르 전위되던 시기에 증앙에서 중대책임을 맡고 왕명 아래 네 편의 表1리틀 지었음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중대책임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은거를 하게 된 그의 의중은 매 우 착잡했으리라고 본다.
18) 벼 현의 뚫는 「뼈位월」μo 새, 896 年) • r해잠정位꿇J (41 세. 6 J1 1 日칙후. 897年) • r쐐엎갖J(41 세, 7 져 3 日後, 897 年.) • r짧不許北댐펌上表J (41 셰, 7 JJ 後, 897 年.).
2 孤雲의 理想的 社會觀
1 心學과 □學을 병행하는 교육사회교육을 통해서 인간의 지혜가 발휘되며 사회의 발전이 지속되고 안정된다. 교육은 사회의 지도자가 주로 담당하여 백성들을 인도하게 된다. 그래서 사회적 지도자로서 지혜 로운 인격 을 함양한 후 그지헤를 베 풀면 이 상적 사회가 전개된다. 이상적 사회를 이루려면향도코자 하는 바 어떠한 목적을 갖고 그 방향으로 추진해 나갈 때 가능하다. 여기에 초점을 맞춰 고운이 바라다본 이상사회의 조건은 크게 네 가지 로 구분해 서 조명 해 볼 수가 있다.우선 心學과 P學이 조화를 이루는 교육사회이다. 고운에 있어 서 心學과 學의 문제는 불교의 p宗과의 관련에서 나온 말이지만 心발은 종교적,은 문학적 교육과 연결되어 있다. 현실사회를 살아가는 데는 바람직한 사회를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실은 등서고금을 통하여 하나의 상식으로 되어 왔다. 신라의 고운 역시 당시 사회에서 通;를 실천하며 살아 가기 위해서 교육의 필요성을 강했그는의 길에 관해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보고 있는데 그것은 곧 과 心學이. 學은 언어 • 문자를 통해 추구해 나가는 학이요, 心學은 심덕을 쌓아 덕행으로 옮기는 학을 말한다. 19) 심덕을 쌓는 心學은 내적 공부와 관련되는 것이라면 언어 •문자를 공부하는 P 學은 외적 공부라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內外派全,즉 종교적 수행과 학문탐구의 병행올 제시했던 것이다.
19) 宋E 댐, r짧종h효띤맨!Uf1eJ. 앞의 껴, p.31S.
20) 좋고, r뾰꿇값의 ;션~mlJ, «때짧宗썼b 제 10 ;갱, 원팡대학교 총고문제안구소, 1985, p. 136.고운이 말하는 心쨘을 여 러 측면에서 조명해 볼 수 있다. 마음을 닦는다는 修心21》이 한 측면이다. 문자 그대로 수양을 통해 마음의 티 끌을 잠제 위 서 고요함을 보전하는 것 이 修心이다. 다음으로마음을 삼가면서 간직하는 i및心22ᄉ 이라는 즉면 이다. 즉 소('⑮에 흘러가는 마음읍 부추겨 바로잡는 것 이 操心의 공부법이 다. 또한 마음이 비뜰어져 왜곡됨을 막는 商心23〉이라는 측면이다. 어디에 편착되어 왜곡됨 을 지 양하고 곧은 마음을 유지 하는 공부법 이 곧 商:心인 것 이 다.
고운은 心學을 이럼게 강조했지만 n 學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데 득징 이 있디-. 이 것은 그가 많은 저작을 남겼다는 역사적 사실에 의해서 입증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n學의 필요성에 대해서,21) Ii'짧文g 찮全씩H, Ii'앓~m:썽t~JJ 쌀 IS , r上元줬양했lU폐J , p.367.
생지 않는다면 學도 옛날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할 만한 것 을 가히 할 만한 때 에 하니 다시 어찌 을 사양만 하겠는가.24)
24) 위의 껴, r四山셈짧 J , r삶했람1꽤따쟁 J , P.93. <不.싼찌口亦겼험乎쉰‘人줬可f.')於可줬之時~a웅ilX~~없걷f~~).
라고 말하고 있다. 學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在Jif 時節에 고운은 商의 종사관으로서 『社死策耕』20卷이라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學의 업적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귀국하여 신라에서 옛성현의 업적을 기리는 碑銘 등을 代作하여 역사적 사료로 높이 평가받는「四山碑銘」등을 남긴 것은 學의 업적을 가일충 남기게 된 셈이디、여기에서 만약 고운이 사회생활에 있어서 學이라는 학문연마의 방법에 등한시하였다면「授郞碑序」와 같은 자료를 접하기가 어 려웠을 것이다.偏家는 詞命學 중심으로 흘렀고 佛家는 禪宗의 不立文字 중심으로 흘렀던 것이 당시의 학문 분위기 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그는 이를 극복하여 詞常學的 學과 不立文字的 心學의 中 주장하였다. 그가 心學만 주장함도 아니요,學만 고집함도 아닌 心學을 병행 하도록 주장한 교육사회 를 주시 할 필요가 있다. 고운은 당시 학풍과 관련하여 心學論과 學論을 말하고 궁극적으로 心學(思想〉學(文)의 中論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學을 말하여 언어 문자의 전개를 현시하였으며,이 에 그 자신도 學者라고 했다. 여기서 그의 이론 주장만이 아닌 실천적으로 보여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덧 붙여 그는 또한 心③하는 노력 을 경 주하여 종교적 실천자의 液容도 보여주었다. 고운사상은 이처럼 學은 心學이 존립함으로써 성립되며 心學도 學이 존립하기 때문에 성립하는 중용적 교육사회 를 주장해 나갔던 것이다.2~) 植一凡. l11l但在致迫.2l 思想究研:J. Ii'束方思想:l.{g 2k.lJ.迫原御承因博士萃甲祀念文报刊行~.u台. 198.3, p.30S.
心學과 學의 관계에 대해서 그의 말을 통해 밝혀보자.〈心學한 사람은 높고 學한 사람은 수고스럽 단 말인가. 그러므로 예로부터 君子는 학문을 배워나가는 데 조심했던 것이 다. 그러 나 心學한 사람은 덕을 세웠을 것이요 學한 사람은 말을 세웠을 것이다〉26)고고운은 말하였다. 그는 心學과 學이 필요불가결한 동반관계로서 서로조화만된다면 바람직한 사회가 형성되어 옛사람에게 부끄럼
26) fj'植丈吕侯圭集Æ, r四山碑路J, r知染和向碑路J. PP.92"'93. <直心早者高口早者房1日放宙之雹子臼所串抑心早者立德口职者立â) .
이 없을 것이라고 했민 것이다.
2 骨品制度 비판을 통한 平等社會신라의 하대에 있어서 사회제도 중 f!•品制度는 백성들의 신분질서 를 규정하는 제도였다. 그리 하여 聖竹 • 骨 기타 穴頭品 • 五頭品 • 四頭品 등 신분구조상의 여러 제약이 합법화되어 있었던 것이 다. 이처럼 신라는 골품제도에 의한 철저한 신분계급의 사회이며 폐쇄적인 농본중심의 사회였다.27) rr찌댐없大系Jl 3 썰.;E珍;';1:. 1976. p. 51.
그런데 고운은 당시 골품제도 아래에서 어느 계충에 속하였는가가 문제로 된다. 그는 육두품 言신에 속한 지식계급이었다. 이 육두품은 진골에 직속되어 있는 次等의 신분인데,왕이라든가 왕비가 될 수 없도록 한계지어진 등급이었다. 벼슬에 있어서도 阿浪 이상으로 승진할 수 없는 블리한 등급으로서 그는 대사회적으로 한정된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분상의 이유로 고운의 기존사회 제도에 대한 반발의식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반발의식이 심화됨에 따라서 귀국 후의 삶은 실의와 좌절로 가득 찼을 가능성이 크다. 고운이 당에서 배운 교육의 내용과 사회적 분위기는 反骨品制的이 었으므로 그가 폐쇄적 골품제도에 대한 비관과 진골 위주의 정치체제에 대하여 반발을 했던 점은29》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당시의 신라하대는 골품제도의 강화로 인해서 차덜대우와 권력투쟁을 일삼게 되었으며,육두품 출신인 고운을 단지 준수한 문사로 여길 뿐 그 이상 높여 예우를 하지 않았던 것도 그 이유로 볼 수 있다.28) 호파烈. r뾰종tl효文멍if究J. 고려 다l 짜교 싸사논운. 1982. p. 18.
29) 뾰없훌. r折짧末111훨退의 ,r.9.;tP.‘的i1:f6J. 앞의 껴 • p.16.고운이 당나라에서 공부한 내용 중에 道學이 소재가 되었다. 그는〈道는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누구에게 나 道가 있으며 따라서 異邦人이 따로 없는 것이다〉씨는 도의 平等原理를배웠다. 이러한 언급은 座人과 新羅人의 평등을 강조하여 민족적
30) Ii'뾰文될힘을全껏JJ. r四山핑젊J. r따섭처I尙없~etJ. P.I23. (夫없不遺/、At!i찢댐>.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사상이었지만,여기에 내재된 평등의식을 확대하면 골품제도에 대한 그의 반발의식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어디에나 도가 있다는 견해는 골품제도로 인한 목권충 옹호에 반발하는 이론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이 사람은 누구에게나 도가 내제하므로 이 방인이 따로 없다고 하는,는리적으로 보편타당한 것 을 고운은 억설하고 있는 셈이다.
31) t찌~[회· r뾰효i휩의 찌!Ax효짧에 {해한 m究J. Ii'행方‘면‘빨!앓효.!I, 1983, p.156.
한편 당에서 수학하고 귀국한 후에 고운은 신라에 서 잠시 국가의 혜택을 입게 되어 벼슬을 하게 되었다. 이는 당에서 그의 文名이 드러난 덕택이지만 그 혜택은 순간에 불과하였다. 부패한 權臣둘의 족벌정치는 한층 악화하여 민생은 도탄에 빠지 고3기 사회는 아수라장으로 변하여 國基가 혼들렸다. 당 유학 후 귀 국한 학생들은 주로 육두품 출신으로 사회상황에 민감했다. 당시 신라의 사회상황은 중앙 진골귀족이 분얼하여 항쟁하고 지 방에 반란이 일어 났는데, 이 사회의 모순을 가장 민감하게 인식하여 그 극복방향을 모색한 계층은 이 육두품 세력이었다.33)
3지 E얄챔짧· r文뀔않 tll줬행의 버生j센 小캉J. 위 의 껴 , P.14.
33) 뾰炳훌· rgrlU없에서 용 tliikl앓J. 위의 혜, p. ~25.頭品의 세력에 의한 그러한 극복책의 노릭은 크게 부각되지 못하였다. 이들 세력에게는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여 진골귀족의 독점적 지배체제를 무너뜨리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이들은 모순을 비 난하다가 탄압당하는 넝 편이 었디. 그리 하여 욱두품출신 자체의 역량부족으로 이들은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세력을 지방호족의 세력이라 생각하여 그 호족들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다.
신라의 하대에는 차츰 골품제도의 블평등으로 인해 야기된 중앙진골귀족간의 내분이 한충 격화되는 가운데 진골귀족은 전반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교체세덕으로서 중앙의 육두품세력과 지 방의 호족세력이 신진세력으르 대두하고 있었다.34》육두품과 지방의 호족세력 중 지방의 호족세력이 그 개혁을 주로 담당하였지만,두 세력은 모두가 공히 당시 신라하대에 나타난 기존 사회제도의 비판을 통한 평등사회를 갈구하였던 것이다. 이는 고운의 사상34) 위의 객, P.125.
에서도 여실히 발견되는 사상적 목징이라고 볼 수 있다.
傳統精神을 계승하는 風流社會신라시대는 유교와 불교,그리고 도교가 立되어 교호 관련을 맺으면서 사상적 분위기를 형성해 왔다. 외국에서 우리나라에 전래된는 이미 페쇄된 • 필가 아니라 상호간의 사상적 교섭을 충분히 거 친 삼교였 으므로 서 로 공존할 가능성 이 많았다. 어느 한 종교가 자기 도그마만을 고집 하기 보다는 삼교가 海一化되어복합적인 경향을 띠어 온 것은 당대의 일반적 목징이 었다. 이러한 사상적 경향에는 우리나라 고유의 풍류도라는 폭넓은 사상이 작용하였다고 간주된다. 36)35) 金洛必. r盐1缸思想斗斡因哲早J. 季刊《京部>> 7}-告立,京细茄阳耻, 1987, p.1-(3.
36) 金盘烈. r在致远文职研究J. 世~坪. P.17..이러한 三敎益存의 사상은 三敎가 하나로 귀일한다는 사상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삼교는 風流道라는 한국 고유사상으로 동화되고 귀일되니 삼교의 이 질감 극복과 동질성 확인에 기여하였다. 즉 우리 는 풍류도를 통하여 고유사상을 견지 하면서도 유교와 불교와 도교를 잘 소화해 왔다. 37)
37) 李恒侈. r斡圆思想~漂流J. Ii'弘大白1~.!l V. 吝电』叫叶立. 1973, p. 14.
그러나 三敎는 상호 동질성을 A有하면서도 달리 각각 나름대로 의 독자성을 견지해 온 것이다. 풍류 속에 삼교가 구비되고 있다는 것은 삼교가 己同一性개》즉 正酷性을 띠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만약 삼교가 각기 정체성이 없다면 어느 한 종교도 아무런 사상의 특성이 없다는 뜻으로서,이는 H敎益存의 타당성에 어떠한 구실도 제공해 주지 못할 것이다.
38) 在一儿. r孤捏捏致i在~思想研究J. 世~ '-月, P.304.
그런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러한 자기동일성의 확인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이미 언급한 바처럼 敎가 서로 혼재해 왔다는 것이다. 유 • 불 • 도가 각각 달리 배타성을 띤 채 그 독자성 만을 강조하였다면 傳統思想이 매몰될 위기는 물론 도도히 音러온 풍류적 사회의 전승은 어려웠을 것이다.
고운이 저슬한 각둥 중「兵奸薄序그에서 널리 알려진 유명한 문 가 있으니 또名亡라 한다 살은 우 불선 삼드를 드항하여 券生을 接公:하는 것이 다•게는 달여서 등류라큰자화되 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내응을 으슉허서 달하면 安支어 대한 려석다 정의를 -그린 글이다. 安는 등류드를 玄之道라 정의하면서 이틀 • 불 • 선 삼그를 통헉서 허석하는 방범을 턱하고 있다. 그리하느 三安S:空은고운 있어서 하나의 건통사상으르 수응되어 이해되었다.
p.211. 1f효 s;;ξfξ 갚乃승三
호서 서슬한 바처럼 풍류도의 천명은 고운미 이투어졌등고상은 그보다 될씬 이건 우리나타 그르트터자 연스럼거 형성목어 은 것이다. 등류드는 우리민즉이 는동화되는 등트 속이서 살아 으며 전公르 형성 은 것러드르£등고드는 우리민즉의 저변에 심어진 우리사상언 것이다
40) 198i. p.145.
그운은 등로드의 실상을 사상적으르 처명하는 t편이 두류도를 空항으르셔 나타나는 등류적 삶이라는 현실을 성찰 되적으르 보주그 있으. 그의 自호하는 등류적 삶의 자시는 그숙 생대증 으스가 경 고드러진다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들연 그는 제숙니 다한 여운이타든가 대착을 벗어 나고자 하였다. 그는 성쏜 쓴비수음돠 여유와 3호을 느끼며,은갖 번다함을 멀리하고 바람 다름처럼 떠들아 소으하는 풍류적 앞을 즐겼던 사이으. 이러V 그의 등록적 삶의 태도는 그가 지은 여러 詩에서 등류를 스저로단 디용이 많이 발견된다.41)
4 至空笑比를 권면하는 誤社
과거로부터 한극은 민족의 고유한 풍속을 소중히 여기며 지켜가는 聲者의 나타이자 東方依之國이라고 불리어 왔다. 고운 역시그러 한 입장에서 우리 나라를 平和風俗을 존중하는 君子國이 라고 밝힌다. 이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고운의 東人瓦識에서 밝히겠지만,그는 특히 束:方이 이런 풍속을 잘 지키는 나라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나라의 풍속은 예의가 바르고 작작하게 여유가 있으며,고요한 풍경과 평화로운 풍속을 따르는 나라라고 했던 것이다.
한 나라가 지 방의 풍속을 바르게 이어 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관건은 그 지역에서 추구하는 정신이 어떠한 것인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고운이 신라사회의 風俗純化를 위해 무엇을 주장했는가를 살피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는 말하기를〈風俗을 純化시키는 데 먼저 할 것은 勸이 제일이 된다〉씨고 하였다. 이는 i뉜民生活의 정서적 • 경제적 안정을 위한 勸段政策‘비을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42 ) rr崔丈昌侯圭然.!], Il桂苑驾UJ~然』各日, P.359. <昨槌级饵祭衙J位充洪~j5Z官), <黯俗所先, 勘应揭段).
43) 在很泳, r皿~挫致j&~耻合改革思想J. 世玛利. p.263.그러면 이러한 권농정책을 고운이 독창적으로 주장했는가,아니면 전부터 전해져 온 것을 고운이 전승하였는가가 문제로 된다. 먼저 농사와 관련된 段家에 대해서 史的으로 알아보자. 段家의 흐름은 원래 段官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百强을 보급하고 段耕을 전개 시켜서 백성의 안정을 도모키 위해 식량을 마련하는 목적 이 있었다. 그러나 그후에 斑官이 아닌 민간의 投;家가 나오자 관료적 꾜官을 원하지 않기도 했다.
段菜의 祖로서는 活段 烈山氏의 아들인 柱 • 神農 • 田祖 • 成 등이 열거된다. 이에는 크게 居段派와 神地派의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活段派는 段官의 출신으로서 농사에 뛰어난 지식을 소유하여 地家를 지도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 파로서 區D3法을 주장한 지도자로는 前滿의 池勝之이다. 神段派는 戰國時代의 전란과 S銳에 고통겪는 농민의 실태를 배경으로 한 민간출신으로서 관료적 此市政治를 부인하고,옛날의 소박한 세상을 이상으로 하여 君臣井耕을 주장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許行의 예이다. 陳相이 굶子를 보고 許行의 일을 일러 말하기를〈어진 자는 백성과 더불어 밭갈아 먹으44) Ii'孟. 子』卷5 , r~文公琅上J , <后程,数民黯稍剧黯五段,五强热而民人'(1).
며, 朝夕을 손수 해먹고 다스린다〉씨고 하여 君子와 野人을 분별합이 없이 君臣井耕과 같은 성격의 野民井別=을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商王보다 保本的 勸段政策이 중국 고대의 배경을 통해 볼때 液 • 唐에 이르러서도 지속되었다. 고운이 유학했던 당나라의 당시 분위기도 권농정책이 펼쳐졌던 것이다. 그래서 고운이 주장한 권농정책도 이러한 흐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45) 위 의 씌 , .
고운은 勸段을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했는데,그것은 兵器를 개조하여 유익한 段器로 만들자는 것이다. 당시의 사회는 전쟁 등으로 인한 무기생산에 국릭을 소모했는데,이러한 무력사용을 위한 병기 대신에 농구를 생산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곧〈영원히 兵器를 녹여 段具를 주조할 것이 라〉 고 말하였다. 이어 그는 다음의 예를 들어 인거하면서 수렵용의 병기 까지 도 사용하는 것 을 금하고 대신 농사의 효울화를 기하고자 했다.〈옛날에 ⑶消!은 사냥하는 기구를 께 앗았으며,溫明는 田 번 (받 관리자) 를 두라고 청하였다〉. 이는 평화롭고 목가적인 사회건설을 더욱 확실히 하고자 하는 의도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46) [?뾰文룹않全mJl, [j'桂1U1lI~싸1싣』썰 1, r~殺행찌l필J , p.292. <永칩’銷千호之웠 훨可잉켜i헐之뿔).
4기 위의 책, [?桂월짧tit와』원 13, r許없짧핸察짧1ft充앉짧짝官J , p.359. <鄭괜께캘~휠A 합3t훌no ~ifll田f!I>.段家의 흐름은 앞서 말한 바처럼 관료적 段官의 필요성 을 부인한 바도 있으나,이에 반해 고운은 특히 권농정책의 일환으로 관리의 재능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우러러는 天時에 順하고 구부려 서는 에 징험 하여 斑夫의 직업을 독려 하려면 반드시 能幹한 관리의 재주에 의지해야 한다.48) 위의 쳐 • P.3S9. ( 之才).
그러한 관리의 예로서 許權이란 자를 언급하고 있다.
만약 백성들로 하여금 전답에 김을 매어 잘 가꾸게 한다면 반드시 공이 있을 것이므로 段時를 맡기고 벼슬을 주니 길이 政市를 좇으려 면 반드시 그 권도를 주어야 할 것이다.49)
49) 위의 책, 59. (若使程而不钮必朋欲则有劝委以n峙假之使Jr:C 永霄促政n可舆H!l) .
이처럼 을 하면 농경사회가 풍년이 들게 되어 풍속순화가 이투어지게 마련이라는 것이 고운의 지론이다. 그가 말하는 풍속을 순화시켜 주는 농경사회의 모습이 다음에 잘 나타나고 있다.
사방의 이 웃은 齊恒公처 럼 받들어 믿고 郡은 信臣처럼 감사하여 서,하는 농부가 들을 덮고 노래와 풍악소리 가 하늘에 들끓게 되었읍니다50) 剖~ ~, (0'桂苑骂! V~接』卷16, r求化rs路边臼~tJ, P. 378. (回民戴臼於桓公人郡恩恩於召父视事; 五号之蔽野跑歌吹之沸天).
이처럼 능부의 경작을 통한 기쁨은 온 벌판에 퍼지는 노래와 풍악을 통해서 나타나며,이는 곧 사회의 풍속을 순화시켜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적 농경사회는 고운이 말하는〈》의 사회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51) 剖抖抖, p.37 1.
3 孤要의 政治觀
治國의 道君王의 道국가를 다스려 나가는 데 있어서 그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君王과官史의 역할이 중요하다. 治國의 道는 나라의 전체를 대표해서 통치하는 군왕의 도와 군왕을 대신해서 현장에서 다스리는 관리의 도가 있는데비 이러한 두 가지 도는 치국을 위한 근본원리인 것이다.52) 在很泳. f 在兹~~ 吐台.卒思想. 世~ , p.262.
중국 고대로부터 군왕들은 나름대로 치국의 도를 밝혀 왔다. 葬임금과 拜임금 사이에 오고간 대화에서 치 국의 도가 다소 밝혀지고 있디、天命이 각자의 몸에 정해져 있다고 하여,舞에게 中府을 취하라고 한 葬임금의 말은 EH海의 곤궁을 벗어 나고자 한 것이다. 결국 이는 곧 치국의 길을 전수한 것으로 순임금은 이러한 말을 成임금에게 전했. 이와 같이 建 • 拜 • 成 등은 정치의 이념이 자치국의 도를 중용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 다.
53) Ii'画面Jl. r宪曰踊-i;ïJ. (扭曰咨雨拜天之.Ja般在商躬允执其中四海困盟天极永修剪亦以命禹).
이제 고운이 밝힌 치국의 길인 군왕의 도가 두엇인가를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그가 탄생한 해인 857 년은 신라의 社段이 기울어가고,제16대 文聖玉이 퇴위함과 동시 에 想安王이 즉위 한 해 였다. 그뒤 그의 나이 5세 때는 出安王이 퇴위하고 及文王이 즉위 하였다. 7년이 지난 그의 나이 12세에는 당에 유학을 하게 되 었는데당시 당의 임금은 我宗이 었고,당에 있을 때인 18세 (874)에는 왕이倍宗으로 전위되었다. 그리 고 그의 나이 19세 때는 신라에 서는 故康王이 퇴위하였다.
그가 귀국한 후 30세 (886년)에는 신라 定康王이 즉위했고,1년후 31세 때 는 於女玉이 즉위 하였다. 그의 나이 41세(897〉에는 考:器王이 퇴위하였는데,바로 그 뒤에 그는 입산을 하였다. 당시그의 나이는 40세,혹은 신2세, 싶세비로 되어 있다. 이처럼 그의 전생애는 여 러 군왕이 차례로 뒤바뀐 정치적 격동기였던 것이다.54) 한글번역 f!l植致远先生文集.!l. p.927.
군왕은 이른바 한 국가의 원수로서 그 국가를 통치하는 권좌의 최고위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만큼 군왕의 역할은 여러 면에 서 막중하다. 고운 역시 군왕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었다. 그가 주장하는 군왕의 도를 살펴 보자. 그가 찬술한「宣散速皮餘尙」3수를 보면 백성들의 기대나 국왕이 할 일은 평화가 제일임을 역설하고 있디. 즉 그는 平和主鼓를 제창하고 있는 것이다.
55) 崔银泳. nn~桂致远判就合i!i卒思想J. 世~坞. P.260.
그러한 평화주의 실현을 통한 임금의 德化는 정의롭게 방편을 활
용하여 호儀가 편만한 사회상으로 나타난다. 그는 이에 대해서 말한다.
聖王께서 征伐을 획책 하심 에,첫째 평화를 중하게 여기심으로 먼곳 사람들이 모두 귀화하며 불의를 행하는 것이 鮮端롭지 못한줄을 알았아온즉,일은 방편(權) 쓰는 것을 위주로 하시고 浪은 치욕 참는 것을 기본으로 하시어 그 말씀이 모두 器應함즉 하옵는데,이는 가 원칙 (經)을 어기지 않으신 때문입니다.56)56) 文 候全 i'桂 以
κ從化自知犯 不 從t 答 ).이러한 평화실현을 위해서 고운은 네 가지의 방법을 제시한다.첫째,백성을 자식처럼 여길 수 있는 자애로움이 군왕의 자세이다. 그의 사상에 의하면 국왕이 백성을 대함에는 자식처럼 여겨야 하며어떠한 상황에서도 국왕이 백성을 친자녀처럼 여기지 않고 함부로 대할 때 존경받는 군왕의 역할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자세를〈聖君如父〉비라 한 것이다. 이는 전통의 偏家的 사고로서 孝 • 忠을 언급함에 있어서 가정과 국가를 동질적으로 파악하는 논리인 것이다.
57) t간없泳, r新짧末힘쪼b효의 .딴:tP.Ei성 M:格J. 앞으l 껴 , p.29.
58) Ii'밟文읍옳全짜.!!, P.307.둘째,幻前을 내림에 있어서 상을 무겁게 주고 벌을 가법게 주는 태도이 다. 고운은 推3球에게 歸順하라는 다음의 글을 밝히고 있다.
幻:주기를 중히 하고 前주기를 가법게 하는 것은 임금으로서 행해야 할 은혜이므로 나의 한폭 글을 보내어 너의 心中에 있는 것을 물어본다.59)59) 위의 책 , '桂l 卷II, p.340. rJ :而乃
之方f之).군왕이 만약 상주기를 가벼이 하고 벌주기를 무겁게 하면 이것은
곧 法家의 폐단처럼 백성을 벌주는 방향으로 치닫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적을 치하하는 일은 인색해지고 삼엄하고 위축된 政射로 전락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일은 군왕의 정치 수완을 무능하고 경직되게 해버리고 만다.
셋째,백성들에게 편먹됨이 없는 政;하를 베푸는 일이 군왕의 자세이다. 그가 말하는 바람직한 君王像을 보면〈뜻밖에 페하께서 은헤는 편벽됨이 없이 만족케 하시고 의리는 허물을 용서하는 데 깊다〉60 고 하는 데에서 발견된다. 그는 또〈임금의 德化는 이에 치우침도 없고 편벽됨도 없어서 補命(총에표시)이 반드시다 務하고 다아름다울 것이다〉고 하였다. 이처럼 편벽됨이 없는 군왕의 자세로 인하여 나타난 걸과는 德化의 선과 미로 발현됨을 언급하고 있다.60) 위 의 씌 • Ii'桂짧짧柳파』쩔 3, r얹i 따1Jnf혼r.f:t~효tM~J. P.30 ‘.
넷째,신하를 잘 관릴하여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한 임금이 군왕으로서 요망되는 자세이디-.〈이른바 신하륜 알아보기는 어진 임금밖에 없고 나를 키워주기는 좋은 친구밖에 없디-〉고 고운은 말한 바 있다. 임금이 신하를 잘못 선택하면 정치를 하는 데 커다란 오류를 범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신하 거느리는 일이 군왕의 중대한 과제이자 기본자세인 것이디-. 과거로부터 임금과 신하 사이의 관계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전개된 예가 얼마든지 있어 왔다는 史吹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62) 위의 껴· i桂짧핸횡unJJ 껄 9, r짧西l쩌휩司호J. P.329. <所때~f효와·핏若뿔君없~~휩·圖때l효 1i.).
2 有史의 道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符吏는 君玉의 책임을 구체적으로 분담하는 임무륜 지니고 있다. 관리는 군왕이 명령한 내용을 전달받아서 국민들과 가까이 접촉하면서 실제로 통치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관리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훌륭한 관리의 필요성을 고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른바 비상한 인재가 있어야 비상한 일이 있고, 비상한 일이 있어야 비상한 공이 있다.63)63) 위의 책 , [j'桂짧첼빠짜』깥 16, r편써|찮값固:l'2 J , p. 376. <1짝쩌꺼非짜之A 然‘後;f:jYF‘쩌之7j~ 1r非’짜之따 X섣後깨i 킹1£체之功>.
백성들을 통어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떤 상황에 따라 그 상황에 맞게 지도력을 발휘함은 물론 일의 진척에 많은 신경을 켜야 한다. 모든 일을 바람직하게 유도하기 위해서 백성들의 행동을 잘 인도하도록까지 관리는 진력하기 마련이. 이러한 책무를 원활히 수행함에 따라서 관리는 승급의 기회가 주어지고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받게 된다.
이러한 관리의 신망이 얻어지기까지는 관리의 직무에 임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순간적 좋은 處功나 統御術에만 의존하면 관리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가 없다. 관리에게는 점진적 노력과 철저한 책임감이 필요하다. 이에 관해 고운은〈官吏가 높은 데에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 君子의 뜻으로 여겼다)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효두가 충성을 하는 데는 오직 적은 일부터 큰 일에까지 철저할 뿐이디》고 하였다.64) 위의 씌, [j'桂짧mvt셋』양 14, r댔않充白tv 짧}힘J , p.36.f. <싹펴自핑 합子m以X뼈;:'1忠>.
65) 위의 책 , rr桂젊웰훨l 씻』양 6, r짧 ~lr~펴·짧상따加f감마J~n빼J!;t J , P.315.또한 고운은 관리의 내적 정신상태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진 地方官이란 옛날에도 드문데 우리의 관할에 속해 있는 고을에서 두루 시험해 본 결과 부지런히 닦고 고요히 다스리는 사람을 지금 얻게 되었다.66)66) 위의 씌 , [j'홉짜딴짜갯3 싼 14, riff앓l짧헌쇄찌앗J , p.361. <古웠짜人퍼짧之r:J1훌훌11m試파b~젠:.II젠. ι'tw人않>.
만약 관리의 정신이 산란하고 맡은 바 책무에 소홀히 할 경우에 매사를 그르치게 된다. 그러므로 고요하고 맑은 정신을 유지 하여 政市를 다스리 는 것이 곧 관리의 나아갈 바라고 고운은 말한 것이다.
이러한 맑고 고요한 정신을 기르는,이른바 心性修을 강조하는 데는 국가의 政市를 바르게 한다는 備家의 平天下的 소명의식이 담겨 있다. 고운은 이러한 교화적 차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관리가 진실로 補致(임금보좌)하는 공을 베풀고 垂衣(저절로 다스림)하는 敎化륜 이루려면 마음을 激間)할 것인즉 이는 古今의 성스런 일이요,述近의 우러를 바입니다.67) 剖叫树, B'桂苑司空耕然』卷7, r史倔2苦涩相公J , P.318. <能施捕获之我1 俯放垂友之化......激涓细油勘郁君之心知二古今盛荣逗ml钦依).
그는 바람직한 관리 를 和 좋지 못한 관리를 海)으로 규정함으로 써 그 구벌기준이 심성의 바름을 근거로 한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시국의 안정을 위해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의 직무상 특히 요민되는 덕망은 백성들을 엄격한 형벌에 의해 다스리는 것 보다는 그들의 공적을 치하하는 것이라 했다.엎드려 생각하옴건대 말을 받아들이고 계급을 界進시키며,고을을 나누어 功을 表後하는 것은 진실로 德望이 時局을 안정시키고 功勞가 백성을 도할 만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68) 위의 책, 17桂: 苑司E仍然』卷3. r$J就加{夺中结贸封肤J. p.304. <伏以价宫选秩旬邑1"Á到固到岱!ß臼峙仍有熙穷西柏).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엄정한 기강을 놓아버리자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포용정신에 바탕하여 信•必部의 정 신이 요청됨을 강조하기도 한다. 백성의 상벌에 관한 엄정성을 잃게 되면 심각할 정도로 통치능력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운은 관리들이 공을 쌓아 교화를 이루려면 반드시 혔을 상주고《爲를 벌주어야 한다고「史館流進相公」에서 언급한 것이다.
고운이 말하는 그와 같은 관리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들은 곧 관리의 이념적인 다음의 세 가지 行이라는 언급에서 기인한다. 첫째로 관리는 인의행을 하는 것이 도리이다. 고운이 이러한 flB향의 이상적 인격의 덕목인 仁務行을 강조한 것은 과거,野.時代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정신과도 통한다. 그가 밝힌 이러한 관리의 행할 바를 보면〈3년 동안 民政을 살필 적 에 仁과 按를 앞세웠고 온 사방이 은혜를 사모함에 도적들이 저절로 멈 추게 되었다69〉고 한다.
둘째로 관리는 정의행을 하는 것이 도리이다.69) 위의 껴, Ii'桂짚썰헬핏』깜 7, f 1r nt잃댈修써싼 二f;iJ. p.320. <三年컸힘, 以仁홉f.SSC 四않fii!얻‘ P¥寂1.£ 自f~).
아랫사람이 이탈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대개 웃사람이 온전한 德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70)
70 ) 위의 씌, Ii'桂짧짧합짜』썰 12, r昭앓成혜J , p.349. <찌知下有홉心휩a上섣쇼짧).
고운은 이렇게 말했는데 이는 관리가 정의로운 행동을 할 정도로 덕 망이 없기 때문에 그 부하들을 통솔하지 못하고 오히 려 잃게 된다는 의미로 확대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러한 고운의 언급을 推根泳은〈관리의 德으로 백성을 다스리되 邪를 버리고 正을 취한다〉川고풀이했다.
7 1) 않根泳, r孤헐뾰致遊의 ffr.l: fr改원,딴젠J , 앞의 껴 , p.263.
셋째로 관리는 奉公行을 하는 것이 도리이다. 고운은 관리로 하여금 務로써 私를 멀리해야 한다고 하여 公을 취할 것이며 私를 취하지 말라고 한다. 그는「謝位表」에서 군자의 用心은 拘公滅私해야 한다고 하면서,〈각자가 말로 떠드는 자는 심히 많은대 公을 위해 몸소 期行하는 자는 적다〉72)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滅私奉公的奉公行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이념적 行을 고운은 관리의 지향할 바 표준으로 삼고 있다.
72) [文全, p.40, 表, r位 , <私n古A之!力口陽行>.
2 理想的 改治親
1) 民本致治한 나라가 평화롭게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정치가 안정 속에 잘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정치끈 관장하는 위정 자들이 普政올 하느냐 아니면 異政을 하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장래가 결정된다. 여기에서 위정자인 군왕과 관리의 백성에 대한 태도가 그 나라의 정치를 좌우하는 관건이 된다. 즉 군왕과 관리가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 그들이 백성을 얼마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의 경중에 따라 그 나라가 평화 아니면 불행으로 전환된다.고운이 그의 저서에서 자주 인용하고 영향을 받은 바 있는 偏家3가『生子고이다. 그런데『子]「요心草j에서는〈백성이 귀한 존재이며 社段은 그 다음으로 귀하며 君은 그 다음이다〉75)고 한 바있다. 그리하여 맹자는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 관리나 人君보다 백성을 우선으로 하는 爲民的 民本政治의 사상을 전개 하고 있다.73) 子 心1i: . (民 失之).
고운의 사상도 맹자의 民木思想을 수용하여 民本政治를 주장했다. 그린데 최고운은 민본을 하는 데 있어서 당시 백성을 어떠한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가? 그는 백성이 스스로 국가의 주체가 되지못한 무지한 대상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신라하대 당시의 백성들은 고운의 입장에서 보면 구제의 대상으로 취급됨 과 동시에 심신간에 고통스런 존재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시대적 사회구조의 문제 등으로 인해 야기되는 것이다. 당시 페쇄적 골품제도가 존립하고 있었음으로 인하여 上保의 귀족과 관료에 의한 大土地所有制가 실시되고 門湖中心의 舍職獨占이 횡행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기아에 짜지게 될 수밖에 없는 여러 요인을 배태하고 있었다. 74)
74) 丁民, 의 小究J. !位文, 女大大,xO科, 1985, P.20.
신분상으로나 생찰상으로 볼 때 백성들 심신간의 상황은 매우 불리한 입장에 있었으므로 그들을 우선 깨우쳐야 한다고 그는 역설하
였다. 이는 백 성 을 고통과 무지에서 벗이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그는〈높은 계풍에 옵려서 미런한 백성을 깨우치게 한다〉75》는 입 장이 다. 이와 같이 무지한 자들을 구제하고자 하여 국민들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인 자 중의 한 사람이 고운이다.
그런데 백성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관리의 힘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능력 있는 관리가 무지한 백성을 께우치도록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해 말한다.75) Ii'文숲D. l:~~ 14, r朱Dn"1 ~J , p.362. (I 以,
지금 九江이 牧이 없으므로 온 고을이 봄을 기다리니 장차 곤궁에 빠진 백성을 살리리면 진실로 능란한 관리들에게 依思해야할 것이다.76)
i76) 위의 쩍, [,i'桂~.'! 쩔 13, r, ll:써f j)!꺼|지 U, p.355. <今以1LlI때%一>.
그런데 고운에 의하면 진실로 능릭 있는 관리는 민심에 귀를 기울일 줄을 아는 자라고 했다. 그리하여 민심에 귀를 기울이도록 주장한 것이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처 럼 민심의 소재가 곧 하늘의 뜻이라고 보았기 때문이 다.
나는 쓰이고 안 쓰임과 나타나고 숨는 것을 오직 임금의 명령에 따를 뿐이고, 시작하고 끝마침과 나아가고 믈러가는 것을 민심에 맞도록 하기를 바랐다.77)77) 위의 책, Ii'桂~9i!4응짧찌t1J 씬t 9, r훤J:II짧公iH將따三펴iJ, p.3.H. <뿔用용行앉 fill쉽帝命t꺼왔去就껏f읍 ~t따>.
이렇게 고운은 말한 바 있다.
민심에 맞도록 함은 민심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I- 파악하고, 민심이 억울해 하는 것이 무엇인가78)륜 알아서 이에 대한 적절한조처를 해주는 일이다. 백성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지 못하고,고통78) 위 의 씌 , [i'桂젊옆짧짜』캄 7, r써차l都統포令公짜二J , P. 317.
스러워하는 바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것은 곧 민심의 정도를 잘 모르는 처사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民!초西d合를 통해 실현되는 이상세계는 어떠한가. 그는 한예를 들어 말한다.바람이 불오는 道路에 길이 水鄕의 福을 짓게 하시어 백성들은 險菜을 즐기고…… 仁就하는 곳에 살고 神仙의 나라를 바라게 하여지이다. 79)79) 위의 책 , (j'桂했뿔짧훨』 IS, ret!火짧웹J. P.370. (道짧生 永作水之l찮 愈홉§ 山~>.
이러한세계는 고운의 民本思想에 바탕한 이상세계의 도래라고 단정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세계에서 바라다본 이상세계는 백성과 別離해서 있지 않다.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짓는 직업 생활을 즐겁 게 하도록 하고,어질고 오래토록 풍류의 신선적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 이상향으로 설정된다.
2) 仁務政治仁務는 맹자의 중심사상으로서 공자의 仁思想에 成가 첨가된 윤리사상이다. 맹 자가 仁務를 주장하게 된 동기 는 揚朱의 爲我說과의,愛說을 타파하기 위해서였다. 즉 揚朱의 爲我說은 타인을 생각하지 않은 이기적 발상이라 보며, 墨의 派愛說은 무차별의 평등을 주장하여 사회질서와 가정도덕을 파괴하는 사상이라고 보아이에 비관을 가한 것이다.이러한 仁務의 윤리관에 바탕하여 정치적 이념으로서 仁鼓를 수용한 정치가 이른바 仁務政治라고 칭해진다. 과거로부터 〈內聖外王〉의 정 신에 바탕하여, 안으로 聖人됨을 이루고 밖으로 국왕의 위엄을 갖추어 內聖 • 外王이 겸해진 정치는 仁政 혹은 仁務政治라고 한다. 이러한 內聖 • 外王의 이상적 정치는 偏家에서 특히 권장해온 정치이다.保家의 정치이념에는 仁과 義가 그 핵심올 이루어 온 만큼,治民에 있어서 우선적이고 근본적인 도는 仁과 述라 해도 큰 무리가 없다. 사상적 흐름을 따라 당시의 고운 역시 백성을 인도하고 국가를 다스리는 治民의 도에는 仁과 務가 우선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80) 그리고 그는 治民의 근본책으로서 仁術에 관해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80) 짧成합, r先횟~t써쫓의 훌k 治,엔H!H1f~J, ({짧E경쟁깝!.I!» 11 삐t , 파땀大양~ ~4E경쟁훌f究所, 1982, p.336. 짧없흙,f1lll암Ul1훨펴의 m:!l~껴t밍센J , 앞의 껴, p.263.
王者께서 先祖의 德에 근본하여 子孫의 法을 높임에 정치는 仁을 가지고 근본을 삼고 그 仁으로서는 백성을 건져주는 성의를 다한다.81)
81) Ii'文全2 , r四山. r大좋J , pl"l. ( ~孫1£ 政以仁꼈本••••••仁以推之).
시대를 따라 정치의 핵심이념으로서 어떠한 것을 근본책으로 삼느냐가 그 시대의 요청으로서 변화해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공자와 맹자는 仁務의 정치를 펴서 전통유가의 現攻救濟를한 대 표적 인물이 다. 그리 고 孔굶의 仁政에 반기 를 들고 나온 자들이 노자와 장자이 다. 老E은 有爲的 仁政에 비판하여 無爲의 정치를 주장한다. 다음으로 法家가 등장하는데,이는 備家의 禮治에 대 해 서 法으로 국가를 통치 해 야 한다고 한다. 鄭나라 子産으로부터 시 작된 이 사상은 申不按 • 商,:映 • 術到가 대표학자이 며 후기 에 韓非子가 대표적 法家로서 뒤를 잇는디-. 이들은 術과 法, 勢의 정책으로서 法治를 주장한디-. 法治政治 • 無爲政治 • 仁菜政治 중에 서 고운은 그때의 정황을 고러하여 備家的 입장에 서서 仁務政治를 주창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그가 말한 東人S識에서도 나타나는바,우리나라를 仁鄕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는 조국에 대해 강한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東方을 가리켜 仁鄕이라 하고 東人을 仁人이라 하여 조국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仁按와 慈愛를 강조한다.本國이 집집마다 땅의 務를 숭상하고 온 나라가 하늘의 仁慈함을 앙모하나이다.82〉
82} 위 책 , . , P. 4-1, < , 天,>.
詩에 있어서 그는 유교의 仁도 성품이 유순한 의 太平仁人에게는 물 흐르듯이 융합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四山碑銘」중 특히 「媒福寺碑文」을 통해 나타나 있다. 고운이 말하는 仁鄕은 고착됨이 없이 유순하고 자애로움이 고양된 세계이다. 여기에는 仁鄕에 사는 仁乂들은 자연스럽게 仁한 성품이 갊아져 있는 사람들이다. 누가 억지로 조장한 것도 아니며 강제로 주입시킨 것도 아닌 자연스런 仁政을 지향한 것으로 보인다.
仁務를 통한 治民을 잘한 상세한 예를 다음에서 들고 있다.83) 의 에 판한 . 앞의 , p.157.
樓• 契(與• 拜의 臣) 의 정책으로서 3년 동안 民政을 살필 적에 仁務륜 앞세웠고, 온 사방이 恩惠를 사모함에 도적이 절로 멎게 되었읍니다.
84)文 ~t , Ii桂 卷7, rfil: 二iiJ, p.320. <三以仁 四 1~ 自1&).
여기에 예시된 것처럼 處와 野:의 신하인 役과 契을 그 예로 들어仁務政治 고운이 강조한 것 이다 그리 하여 매우 곤궁하고 위급할 때마다 仁을 행하고 我문 행하는 자들을 고운이 예거하여 仁務政治의 필요성을 말한 것이다.
8S) 위의 , p.345.< 非把子之 唯以行
당시의 백성들은 도득에게 시달리고 또한 가묻과 국가에 바치는 粗稅; 그리고 관료의 부패 등 여러 요인에 의해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와 같이 여러 요인으로 불행에 처한 백성을 구제하여 잘 다스리는 진은 仁政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고운은 보았던 것이다. 어찌면 피곤에 지친 백성을 강제적 정책을 세워 끌고 나가기보다는, 오히려 포용과 관용을 매푸는 竹和政策의 일환으로 仁政을 행
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매우 유효한 정책이었던 것이다. 피곤한 백성을 法治가 아닌 仁政으로 위로하여 -普政을 이루고자 하는 仁者의 여 러 예를 언급하면서86》고운은 내심으로 仁政K現을 위해 노력한 자이었음에 틀림없다.87)
86) 위의 껴, ( 13, , P.356. (많앉c:t以仁뀔 챔§갚찮以점1 앓>.
87) 위의 책 • 2, r示in:r1I파J , p.295. (I令見3홉~tA~~ >.한편 이러한 仁務政治를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방법을 보면 여러가지가 있겠으나,그 내면에 있어서 이념적 주류를 보면 忠孝思想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즉 군왕이 仁務政治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可否間題는 관리와 백성들이 국가를 통치하는 군왕에게 忠과 孝를다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 국가에 있어서 仁務政治가 수행되도록 백성들에게 이념적 충효사상이 요청된다.
충효는 유학에 있어서 실천상 필요로 하는 大德으로서 이는 가족주의에 바탕하여 宗法制를 배경으로 하는 •家의 근본덕목에 속한다. 이에 덧붙여 이것은 君臣의 관계에 있어서 신하가 이행하는 과정상 직무에 충실하고자 하는 규범조항에 속하기도 한다.『述차의 전20권에 나타난 내용이 나「記」•「四山碑始」등 저작에 고운의 충절과 호행의 정신이 내재되어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그 일례로 放聖女王 9년 (895) 에 고운이 授한「沙吉;#:塔記」의 내응은 國泰民安과 愛國與他의 정신이 강하게 들어 있으며,여기에 특히〈護國爲先〉이라고 하여 충효적 정신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처럼 충효의 정신은 바로 국가를 수호한다는 호국의 정신과 밀접한 관던을 맺지 않을 수 없다.군자로서 국가에 입신하는 길을 고운은 충효라고 보았다.엎드려 아뢰옵건대 臣으로서 立身하는 것은 孝逆와 忠誠이요, 죽은이 섬기기를 산사람처럼 하는 것이오니, 만일 부모륜 영광스럽게 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임금 섬기는 성의를 부지 런히 할 것이읍니다.
88) 위의 책 , Ii'fE』 4, r핏많從지V홉 ~j , pP.30S .......,306.
이와 같이 그는 충성과 효도를 국가통치의 중요한 정신적 지표로 간주한 것이다.
고운이 활약했던 통일신라는 備家的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충효를 통한 按의 실현을 주장하는 분위기였다. 그 당시에는 종교적 수행의 차원에서는 불교가 주를 이루었지만 정치적 治國의 차원에서는 유교의 정치이념이 통용되는 게 보통이었다. 그는 이러한 자연스런 흐름을 따라 충효의 정신을 수용한 것이다.89) 』上, , 1987, pp.293""298. 水교수는 여기에서 『조 紀石』윤동한 忠孝剛神- 언급댔고,훌의 ~ 창군의 풀 앓때 그리고 앓뼈의 아같 &今 , 뭔l 日장군의 아플 화랑 캅엽 등의 忠~훌[명.띤:t!l~운 엔급랬다.
충과 효를 고운이 국가 • 가정의 향할 바 귀감으로 삼고 있으며, 나아가 그의 인생의 좌표로 여기고 있다. 충성의 한 귀감이 되는 당시 인물로서 는 충성스럽고 용맹 스런 行/次의 예를 고운은 들고 있다. 이어 그는비 또 다른 인물을 예로 들어 귀감으로 삼고자 하였 다.
90) Ii'센文멈候全씻Jj, f!'옳월짧웰짜』썰 4, r갖힘원行t훌知얹 Hi 파t 써1 꾀I狀j , P.308. <右C!~以武土’한先↑it;)옆핏찌 ‘옆껴~징f 行쩔有之).
대범 나라에 충성 하는 이는 집안을 생 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街나라의 미천한 신하도 자기의 재산을 털어서 변방의 軍합을 공급하겠다고 청하였고,M나라 幻士도 거 족적으로 나라에 힘을 바쳤다는 말이 있다.91)
91) 위의 껴, Ii'桂짧tfttlH없 卷11 , r양웹짧합값~엽迎깜j , p.341. <夫忠於랩홈- 웠以家~ R:.fb.~1~f.i~ =t-i업i~i!JJk갚之짧 짧뼈烈士lIJft~감탱力之합).
이처럼 行被 • 漢代의 微臣 • 親朝의 烈士 등의 예를 들어 충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효도로서 귀감이 될 만한 자의 예를 細과 參强라고 천거하였다. 고운은 이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엎드려 생각하읍건대 황제페하께서 은혜가 온 누리에 흐르게 하시고 孝道로 천하를 다스리오니 특벌히 표창하시고 벼슬을 주시어 몸을 닦아 지식 있는 이를 따르며 부모를 공경 하고 근본을 힘쓰게 하옵소서.
92 ) 위의 책 , Ii'훌짧따훨찌t!J. 섣 4, r찢·짧從까점狀J , p.306. <1ft파휩않下忍流城中쌓휠E天下特웹켈~ 뺨{없~m ~1t얀己從知않以ltd쩨w本).
그런데 그의 정치관을 보면 정치에 孝를 관련시키는데 이유가 무엇인가. 보편적으로 볼 때 정치는 忠, 가정은孝에 관련되는 것이다. 그러 나 儒家的 전통에서 는 그렇지 않다. 忠이 라는 정치질서와 孝라는 인륜질서를 동일한 것으로 보아 온 것이 備家的 사고이다. 그래서 인간이 란 국가(忠)와 가정 (孝) 안에서 의 人이요, 국가와 가정은 人과 처음부터 분리하지 않는 것이 고금의 偏家的 전통이다.이 그리 하여 사적 인 가족질서와 공적인 국가질서를 연결하는 偏家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상대적 군신의 관계를 강화시키기 위해 절대적 親子의 관계로 연결시키는 데 있다. 그리하여 忠臣 • 孝子的 결속올 강화한다.
93) 표宗없, r빼댐뾰많평의 Al십1 없J , 댄짜frill, r끼I洋ArJI때의 함핑的l쩍!!JJ J , 빠[회까t~합웰fT, ~Jl딩trrJ大앨홉, 1987.10.31 , p. S1.
이러한 유교적 흐름을 모를리가 없는 고운도 충과 효를 둘로 보지 않고 있다.〈힘을 다하여 임금의 명을 좇는 것이 효도의 결과이다y시고 했으며,또한〈이미 부모에게 하는 효로써 임금을 섬겼으니 이것으로 벼슬에 居하게 되면 공무를 잘 다스릴 것이다〉고 했다. 이처럼 그는 國과 家,忠과 孝를 하나로 보아 정치의 경륜을 전개한 당대의 한 인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94) Ii'뭘文윌찮全갯.!J, Ii'桂짧 tlUJH,IM 껄 14, r찌~~大夫起t!lJ, P.36.5. <짧力從~~之終也).
95) 위 의 책 , rr桂1iim형tm.IJ 깡 13, rAfj i司짝져l1H刺史J, P. 3.5 9. <~~효줬父뿔짤 꽃찌휩’합Jm~).3) 公道政治
公道政治의 수행을 위해 통치자가 개인적 명예나 이익에 눈을 돌리지 않고 청렴한 자세로 公道에 바탕해서 하는 정치를 할 필요가있다. 이에 나라의 政밝를 관장하는 위정자의 인격은 사적인 이익 추구가 아닌 을 위해서 난세를 극복하는 지헤를 갖수이야한다. 그래서 부규|를 추구하는 쓴체A보다는 위태로운 시기 일수록 사사로움을 버리고 이를 잘 극복해 나가는 公道人을 고운은 원했던 것이다.56)
96) 泳. r l1i .m! 커: 캔致i웰의 J‘ {生格J , 앞의 책 • P.27.
고운은 이러한 公道的 인물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사사로운 利를 멀리하고,97》과다한 욕망을 줄이며 고요하고 담담한 심경을 기르도록 강조한다. 즉 그는 일종의 정신수양의 덕 목까지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수양 덕 목의 하나로서 그가 예시한 것 에는 偏家的 실천론만 아니라 道家的 실천론도 포함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그래서 그는〈大丈夫는 한데 처하고 荷한데 처하지 않으며 한데 살고 華한 데 살지 않는다〉93)라고 道德經』38 장의 내용을 들호 있다. 만약 통치자가 保德을 멀리 하고 화려 한 功을 탐내면 나라의 公道的 기강은 무너지고 말며,그로 인하여 국왕과 관리는 모두 부패하게 되며 백성들은 망국의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고운은 말한다.
97) 후iL힘, r~ IL1윌S2J U전뭘힐f Je J , 굉i土닿 (tf.앓文. 강 ti펌大쩔앉大헬갑, 던합;;It[t정文밍~~.1982, pp.67"'68.
98) B'캔文fill헬쪼깅~~. ?!t9ii강'HMf즈3 쌀 1.5, r下元휩詞二-~iJ , P.363. <大文슷 I셜其따if다不웹;tt;필 판:tti핏而不홈·화행월t.!!‘>.진실로 혹 능히 그칠 줄 알지 못하고 다만 榮華만 탐하고 보면송의 발이 부러진 염려가 있고칼로 밥짓는 위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운이 公道政治의 실현을 주장하게 된 사상적 배경을 추구해 보면 備 • 佛 • 道 三敎를 관통한 폭넓은 식견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것은 그가〈제 몸이 영화류거나 욕되는 데에 깜짝 놀라듯 하라〉빼〉는 노자의 말을 인용한 데에서 나타나고,〈큰 가죽띠를 주어99) 위의 껴, 감흩짧앓웬씌l!1 첼 10, r~f합없公짜二J , P.334. <첩행不짧었1.11:. I!!lik:t'tg훌 께;f:j깅rl빠~Z 짧 ~liJi之따>.
100) 위의 껴, f뿔짧첼짜강생 썰 8, rfiil :J«월혔 1펴핀J , P.326. <때홉若않 I쩌住벚非뭘;원也>.도 하루아침에 세 번 고르고 만다〉101는 F周易J의 내용을 인용함에서 나타난다. 또한 고운이〈벼슬을 받고 사양하지 않다가 끝내는 망하고야 만다〉,기라는 1T詩經J]의 내용을 )근거로 드는 것에서도 그의 식견을 잘 알 수가 있다. 이처럼 그가 인간의 명리와 욕망을 등질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도 유 • 불 • 도 사상을 그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103)
101) 钊斗斗, !1' 怪苑丁i飞机~I~ j 在2 , r甜Jtg立足.tw.加{夺中日封去J. p.297. (且品日或13!.ì;!i,\7搭机三t1之) .
102) 平I~ 抖, p.297. G于云空ff1不;m 至于己j衍亡).103) 把银泳. rIa~比去ili ~ 思想研究J. 世玛利. p.176.이러한 유 • 불 • 도 삼교에 대한 이해는 고운의 풍류적 기질로 순화되는 가운데 디윽 심화되 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詩와 술로 벗윤 삼고 흥을 누린 도연멍을 나도 일찍 알았더 라면 얼마나 좋았으리, 이 세상의 모든 名利를 잊읍 것이 아닌가〉내사라는 말과 같이, 게인의 욕심을 초탈하여 자연과 더 불어 詩想을 찾고 술과 벗숄 삼는 풍류륜 즐긴 데서 그는 명리에의 애착을 극복하였던 것이다.
왜 냐하면 풍류생찰은 필연적으로 安分生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디、安分的 삶은 권세와 명리 초월하는 생관이다. 이에 대해서 고운은 말한다.104) Ií'在文吕侯圭知f, 沽r扣宇晨1主官多日边山寺J. P.207. (仔岳阳公路酒贝世始喝利己忘段).
그 權勢에 아부하는 영광을 버리고 道를 지키고 가난함을 편안히 여겨 한가로움을 사랑하는 즐거움을 넉넉히 얻겠읍니다.
105) 剖判坷. [!'桂苑~fJt ~lI 也19. r甜宋向侍御自J. P.397. (缸他附费之段而守'泊安1主E骂得安DiJ之出) .
나아가 公道政治는 구체적으로 관리를 등용할 때에 공정하게 하는 일도 포함한다. 유히 고운이을 강조한 것은「계때表」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滅私本公의 정신으로 정치를 하는 군자들이 없다고 그는 탄식하면서,는 많고는 적다고 하며106) 당시 관리들의 부패 상을 지적함과 동시에 훌륭한 관리를
106) 钊~坞, 窍r ;.近二J位去J. p.40. (臣阳娃范县返乃君子之用心向公汉江l't i.i川之曰:力口击者吕立躬行在Í'I在).
등용치 못함을 개탄하고 있다.
한편 인재를 등용할 때 주의할 사항은 公道를 벗어난 편당적 등용을 금하라는 것이다. 이에 관해 그는 말한다. 〈엎드려 아뢰옵나니『 經』에 ‘偏이 없고 被이 없어야 임금의 敎化가 일어 난다’ 하였고 폐하께 서 는 才士를 뽑으시어 중요한 책임을 맡기시었다>107)이처럼 그는『서경』을 인용하여 인재등용의 주의점을 말하고 있다. 덧붙여 그는 군왕의 후덕 을 예로 들어 偏傑을 금하라고 한다.다행히도 황제께서 臣의 私曲 없음을 굽어 살피어 엄한 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따로 좋은 인제를 選用하여 중한 직책을 옮겨 맡기었다.108)107) 위의 껴, Ii'佳짧 t흩쟁H~Jl 찔 3. r없Jag 示빠令鄭#섭充都tf狀J. p. 302. <~以깜日옆따삼~ 포~t乃JlI...... 앓下妙원1if才近分끄H잔>.
108) 위의 책 t li'tE1iHlUJtmJl 깥 2. r짧앓tmt용中월J. p. 297. <~잖파랬l찮下떼詳따遊不훌a~ 웰J1H잊才tile移끄Z짧>.그가 이처럼 당파적 인재선발을 금하라고 한 것은「與福寺碑銘」에도 나타난다. 여기에서도 偏槪을 금하라고 했는데,이는 王道가 평탄하려면 치우침이 없고 편당이 없어야 한다는 公道的 정신자세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된다.109)
이렇게 公道政治가 실현되면 누구나가 정당한 노력을 통해 원하는 바의 목적을 실현하게 된다. 부정당한 출세 등은 곧 公道政治와는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에 관해 〈野君이 천하를 다스리 는데는 먼저 侍門(부정출세)을 막아야 하고 오직 어진 선비의 진출길을 방해해서는 안된다〉110〉고 말한다. 어진 선비가 자유로이 진출할수 있는 東方之國을 고운은 강하게 갈구하고 있었다.109) 뾰휩泳. Il!il C딩m뀔滋의 ».t-Qi1.<씌tj딴센J. 앞의 잭 • p.264.
110) Ii'뾰文뀔않全옐.!l. Ii'훌짧훨훨핏』쩔 2, r짧官짧줬{±表J , p. 299. (뿔캅쟁宇必커:'-양용f홉,'') ~土갓'im p흩맨효ti1tftf&).4 東人有識의 고취
1 太平勝地인 東土우리나라는 방위상 동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東方之國 또는 東土라고 불려 왔다. 이러한 東土를 태평하고 살기 좋은 나라라고 하여 높은 자긍심을 심어준 대표적인 인물이 최고운이다. 그는 에 대하여 해석 하기 를〈뿌리〉라고 했으며 어질고 살기 좋은 땅이 라고 하였다. 그는 이 에 관해〈또해에 ‘동쪽을 라 한다’ 하였고 은 ‘英는 뿌리 ’라는 뜻이 다. 어 질고 살리 기 를 좋아하는데 모든 물건은 땅에 뿌리를 박고 나오기 때문이다〉고 밝힌 바가 있다.그는 또 태평함의 의미를 해석하여 仁하다고 한다. 〈雅에 보면 동쪽으로 해뜨는 곳에 이르면 그곳이 태평하다. 大平한 사람은 어질다〉112)고 하여 大平의 의미를 조명한 것이다. 東에서 日出이 되는 원리에 따라 그는 동방의 지역을 器光이 비춰주는 곳이라 함과 동시에,그러한 광명을 통해 仁한 東人의 大平함을 자부하고 있는 것이 다.III) 위의 껴, 記, r海印놓휩1.
한국의 강산을 고운이 찬양하는 데는 愛國愛民의 정신이 그의 내면에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가 獨한「海印寺妙吉鮮塔記J는 愛國攻他을 담은 민족혼의 塔記라고 해도 무리는 아닌데, 그곳에서 도 호국적 愛民의 충절이113〉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는 그가 한국의 땅을 사랑하며 한국의 백성을 사랑하는 강도가 깊기 때문이다.
112) 위의 껴, p.77. <찮쩍雅죠짜至日所出18大2ji 大乎之A仁>.
113) 뽑없~, r.ifrln!커C;:n!값파의 ‘띤想~'.J f4:f6J, 앞의 껴 , PP. 19f"J 20.그는 한국 전반의 땅을 東方의 君子國이라 지칭하고, 이 군자국의 모습을〈바닷물결은 조용하고 天地가 화평하고 四時가 고르며
地財가 또한 풍부하였다〉11고 극찬했디-. 여기에서 목히 地財라는 此水地理的 용어를 써서 束土를 太平勝地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것은 당시에 년리 유포된 風水地理說의 영향으로 보인다.
고운은 나아가 東方이 好生의 원초적 터 전 속에,풍속 또한 양보속에 잘 지켜지고 있음을 근거삼아 東土륜 태평한 곳이라 언급하고 있다.114) !i'也丈吕侯主必.ll. r四山田纯J. r大~~e百寺碑纬J. P.l53. <这使海波岳~@lfj 天吏均1也财现).
人傑(地空)은 好生으로서 根本을 삼고,m俗 또한 瓦强으로서 先務 삼았으니 화락한 太平의 봄이 요,은은한 上古의 敎化이다. 115))
115) 刽玛利. r四山碑路. r智血和向碑~ßJ. p. 168. <地应既好生需本凰俗亦 E 1骂先照玉手大卒之春(Jr.l上古之化).
交强이 先務가 피지 못한 풍속은 투쟁만 일삼아 항상 불안할 따름이 며,사람들의 생관이 매우 곤궁해질 것이다. 그러나 交雜 속에 동방의 나라 한국은 太平勝地이 므로 好生하는 풍속도 겸양과 미덕으로 전해 내려와 전동화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만물을 살리는 好生의 정 신이 東土에 편재되어 있으므로 仁과 孝의 가치관이 당연히 존중된다.
束土에 대한 애정직 감정의 표을 심화시킨 혼적은 그의 여러 저서의 내용 속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곧 그의 조국에 대한 호칭에서 증명되는데,그는 동방을 가리 켜 仁鄕 혹은 君子之鄕,東方世界 또는〈束諸候之外守者 英我大地〉라 하였 디-. 〈이 러 한 동방의 나라에 지헤의 태양이 었으니, 文殊께서 東廟에 강림했음을 알겠다〉117)고 한 고운의 국가의 식은 이른바 자긍심의 표출이 아닐 수 없다. 자긍심 에 찬 그의 東土湖은 곧 이상적 정치관과 연걸되 는 것 이 다. 래냐하면 정치가 이상적으 베풀어질 때 모국에 대한 자긍심이 더욱 발로되고,자긍심의 발출이 이상적 정치로의 확고한 신념 이 되기 때문이다.116) 臼fft囚. r毡王主地~Jf!人n~叫11 11司哇研究J. 世吗祠. P.159.
117) fJ'监丈口民主必.!J. 筒r陋希朗和向二首J. P.33. <今朝豆豆日出扶桑~f号文殊阵束.이제 고운이 바라다본 東土의 이상적 관점 중에서 그 하나인 佛國止觀을 통해 東土의 太平勝地함올 조명해 보자. 그 하나는 佛法의 法印이라는 法界證得이 동방에서 이뭐졌으므로 太平勝地한 단서로 나타난다. 그는 말한다.
진실로 하늘이 佛法을 나타내어 西國을 돌아보고 海印이 東方에 유포되니 의 鄕國에서 法王의 道가 나날이 깊었다. 118)1I8) 위의 책. r四山따싫J. r잠꼬때1씹훨랬J , PP. 168'"169. <껑필天영 펀짤 함 ffl찌퍼in.합子之짧 쌓홉王之j다).
例家에서는 신앙적으로 法界의 證得을 성스럽고 중요하게 여긴다. 이처럼 佛印이 동방으로 내려왔다는 그의 주장은 길하고 성스런 갔土部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도 하나는 불교의 인연사상을 볼 때 密恨이 束土에 심어졌다는 데서 신마리가 생긴디-. 佛家에서는 생명체가 윤회할 때 菜의 종자가 있는데,이것이 표내으로 되면 佛供를 얻어 극락을 수용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整根의 菜종자가 東土에 심어졌음으로 인해서 東土는 太平勝地한다고 고운은 밝힌다.〈세상에서 나서 세상에서 나간 뒤라도 모든 密根은 모두 가장좋은 戶羅의 땅에 의지하라〉하였다. 그런즉 땅의 이름이 서로 들어 맞아야 하늘의 말씀도 찾을 수 있다 산을 他1®라 한 것은 釋述!가 道를 이룬 곳과 같다.119)1I 9) 위의 씌. :lG. r뼈I때山海터1 똥結界챙記J. p.75. <반及出따·諸한펀 강없hi짧F월j벼:?\JlIJ .l:t브낌~{J~ 天‘찜可웰••••••山해뼈따 同쩔i꾀文JPtill之ffr).
그는 佛의 得道處가 如!®라 함과 아울러, 普根의 策종자를 我林의 나라에 뿌림에 대해서 照湖佛을 예로 들어 말한 바가 있다. 그는〈五百年 만의 어진 사람이 좋은지 방을 선택 하였으며 …… 我足山봉우리에서 强湖佛을 기다리듯 길이길이 效林의 나라에 있어 주오〉라 말하였다. 이는 고운의 동방에 대한 입장이 佛國土的임을
120) 한끌It!액. lJIlJI.윌 ttl 조b효先生文짜JJ. r 四山짝t
시사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동방의 이 상적 佛國土稱I에 바탕하여 고운은 동방의 아름다운 나라를 궁극적으로 萬生命이 번성하는 곳이 라 하였다. 즉 이리한 번성을 이루는 봄바람을 동방에서 토해낸 것이라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빛나고 성대하고 또한 실다워 A級의 누리를 비춰주는 것은 새벽태양처럼 고른 것이 없고,기운이 和平하고 또한 포근하여 就物의 成功을 이루게 함은 봄바람처럼 넓은 것이 없다.121)121) 위의 책. p.600. (光盛且n 而有即八位之贸者其均乎盹日氛和且融而有字高物之w者~椰子春凰>.
고 말하여 和風이 동방에서 나온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또 그는 〈우리 대왕의 나라는 태양처 럼 상승하고 달처 럼 왕성하여 물은 순조류고 바람은 온화하다. 어찌 다만 깊이 움추렸던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뿐이랴. 또한 새싹이 무성히 맨어 나서 생기 고 변화하는 것이 동쪽(52〉올 터전으로 하여 출발하는 것이 다〉122〉고 말한디-. 여 기서 한 가지 유추할 만한 사실은 동방의 나라가 곧 佛防의 #根으로 인하여 영 원한 樂園의 터 전으로 화한 것 이 라고 사료되 는 점 이 다. 이러한 낙원의 터전에는 반드시 밝고 예의바른 束A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122) Ii'也文吕侯金然Jl. 阻. r哇!安住院里阻J. p.77. <在大王之团也日开月盛水朋凰和盐唯幽鼓担E在抑亦句萌埋怨生化出应a选>).
2 柔順仁孝한 東人
한국의 사상적 뿌리를 언급함에 있어 고운이 提한「親郞碑序」의 내용을 제외할 수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또한 東方人들에 대한 자부심을 밝힌 선각자들 중에서 고운을 매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심중에는 은연히 유순하고 仁孝한 君子國에 대한 긍지를 가겼으므로 군자국에 태어난 군자의 아들임을 자부하는 마음이 있었다.123)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자긍은 곧 자기주체성을 확123) 拙稿. r缸敖遮玛宗敬回J . 世旦J 坞. p. 161.
인하는 하나의 신념 이 었으며 애국정 신의 요체였다. 이와 같이 조국에 대한 하나의 신념 으로 나타난 東人瓦識은 그의 마음에서 확연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동방의 군자국을 자긍하는 고운의 사상은 選民S識을 강조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124 이러한 그의 자국에 대한 강한 자부심은 타국을 무시하면서까지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고 생각된다.125〉왜냐하면 그는 타국에서 발생한 備•佛•道 三敎를 조화하여 우리 고유의 사상으로 정착시켰기 때문이다.
124) 뾰三때, rllil!ll.잃씨의 主많와 民族;흉합J , f.限짧文쟁» 25 혜, 全北大망앉I 1985, P.314.
(25) r四山와싫」중 「렘짧해1倒따짧」내용의 연부·에는 〈夫파不i장A. At!i!P<‘固쪼以짜/‘之子줬행1펴{찌〉라 하였 다. 0) 는 인도 • 중국 • 한국야 라는 국깅 과 인종캄 걱ξ윈하여 조화한 {7lJo J다.고운은 君子로서 부합될 만한 인격상의 덕목을 다음과 같이 밝힌디.
臣의 本國은 비록 SIS의 離桃와 접경이오나 위릭으로 대하는 것을 쌌尙하지 않고,또 伯英와 被齊의 孤竹國과 이웃되어 본래 河能하고 겸 양함을 바탕으로 하였으니,九成j의 남긴 規範을 빌고 진각 A條의 교훈을 계승하여 말만 하면 반드시 하늘을 被皮하고, 다닐 적에는 모두 길을 양보하니 대개 仁K의 敎化를 받아 君子란 이름에 부합된 것입니다.126)126) [j뾰文됩찮全짜.D, 꿇, r짧位칼J , pp.35"'36. <필以삶댐 앓팅파之짧挑接양 不(.';J않짧 且~YE;之孤竹~i!표 :4>: 1훗J1R~ 셨II없jLf:J之除範If!훌A.之fd1. 펴~!갖天行'W짧路찮짧仁뤘之{ι 짧符켠子之名).
권력을 싫어하고 겸 손하여 敬投心을 갖고 양보와 仁賢의 가르침을 받는 길이 동방의 군자가 될 자격이라는 견해이다. 그리한 군자로 서 곧「四山碑約」에서 無染和尙을 든다.
오직 東風이나 은 모두 東方에 서 나온 것이다 하늘이 이두 가지 남은 경사를 모아서 목수하게 일개의 接性을 내리어 그로하여금 탐■텔에 태어 나게 하여 목히 륜 수립케 한 것은 師 바로 그 사람이다.127)127) 위의 꾀, r四山웰됐J , r料쌓和尙따짧J , pp.95"'96. <推없따떠Jt!!B {J\끼I方I깊出-tl!.則天줬 wi 二f~짧 IE-짤子一웰i1; 1Yt-훌生깜子E경 짧立~포짤휩· 大Mi;}t;A.也».
이처럼 無染和尙이 곧 군자될 자격이 갖추어 天命에 따라 모든 것에 순리대로 응하였으니,군자국에 태어나도록 하늘이 위력을 내리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방의 나라에 대한 지리적인 위치를 玉:常이라는 방위로나눈다면 東方之國은 仁務禮智信 중 어디에 속하여 있을끼、이러한 의 문은 어떤 의미에서 風水地的인 성격을 띠고 있다. 고은은 이에 관해,s常으로 方位를 나능에 東方에 配犯되는 것을 仁이라 하고 三敎에 名稱을 세움에 淨域에 나타난 것 을 佛이라 한다128128) 쉬의 책. r四山학랬J. r뤘짧大師월짧J. p.168. <죠짜分位면젊IJJ핍뭔仁三장立名¥월현~쳐~·B~?>.
고 말하여 동방을 仁位로 놓았던 것 이 다. 이는〔家的 전통의 사유•寒' 반영하고 있는바 仁을 인격의 총체적 측면에 대한 대표개념으로 브는 윤리 관으로 연걸된다.
이러한 동방의 위치에 관한 유학적 견지 위에서 동방의 풍속을 이멓게 보았는가도 자못 궁금하다. 고운은 동방의 풍속이 군자의 나라답게 예의가 있고 여유가 풍족하다고 했다. 그가 직정놓的姑」에서 밝힌 내용을 보면 이 군자국의 풍속은 예의가 바르고 작작하게 여 유가 있 었다고 한다. 유가적 仁과 교 그리 고 j段와 智 • 倍-이 동방의 풍속에 편만되어 있다는 것이 고운의 견해이다.그러면 이제 고운이 밝힌 東人의 성품을 대체적으로 구분해서 밝혀 보고자 한다. 첫째,혔A은 t한 성격을 품수받은 tA이다. 그의 東人好.識은 곧 그가 東人의 성 품을 性찬菜順 또는 從,如流라했으며,도가 사람에게 있고 사람 증에도 東人은 仁시계이라고 피릭 했다.129) 빼자댐. r캔줬웰의 IIi人펀휩에 뼈한 Wf ~J. 앞의 끽. p.159.
들째, 光人은 효와 충을 하나의 생찰지침으로 살아가는 忠孝人이다. 앞에서 서술한 바처럼 고운이 12세 어린 나이에 당에 유학을 떠나기 위해 商船을 타기에 앞서, 그의 부친은 성공하여 훌공한 자
식이 되어 달라는 권면의 말을 남겠다. 고운은 자식된 도리로서 부친의 이러한 당부의 말씀을 당에서 공부하던 중에 잊지 않고 되새기며 나태와 고통을 극복하여 성공의 계기로 삼았다. 이는 곧 고운이 그의 부친에게 효도한 일례이 다. 또한 그는 無染和尙이 효도한 예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렸을 때나 앉을 때에 반드시 合擊과 到n映坐하여 아이들과 놀때에 벽에 손짓 하며, 자갈을 모을 때 에 는 반드시 佛像과 佛塔 모양을 그리고 쌓는다. 그러 면서도 하루도 부모님 陳下에서 떠나지 않았다. 130)130) (j'崔文昌侯全集.!], r四山碑路J , r知染和I向,字路J. P.96. (大田间孩峙行坐必合缪跌到至民主nè~ ß 埋藏沙必换掠像搭而不忍日能膝下).
셋째,東人은 예의를 잘 지키는 禮人이며 군자이다. 기운이 화평한 나라에서 살아 악함이 없고 군자국을 바탕한 예의를 갖춘, 순리를 아는 자이 다.13,) 이는 東方禮儀之國에 사는 예절 바른 東人의 인격을 말해 주는 것이다.
넷째,東人은 온유하여 모남이 없는 菜順人이다. 굳어 있지 않고 부드럽 기 때문에 東人은 道를 실행하는 데 生活化되어 있다고 그는 말한다.131 ) 世三阻, r在孤~傅~主!lli~丰民族;C<&lJ,世~ ~月, p.21.
이 東方國의 사람은 성질이 柔順하고 또 地氣는 着物을 발생시키는 곳이라. 山林에는 수행하는 사람들이 道로서 벗올 모으고 江河가 바다로 흐르듯이 백성들이 佛法을 따랐다.132)
132) (j'崔丈昌侯全集J] , r四山碑铭J , r大出fll1寺碑路J, P.142. (性兹柔周知合理生山林多部默之徒仁台友江海路刷宗之功徒~归流).
그렇기 때문에 東人은 차갑고 모가 난 성격올 배격하며,순박한유순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편 동방인의 이러한 성품의 본바탕은 備 • 佛 • 道 三敎 征一의 조화정신이 내재되어 있어 고운은 유가 신선 聖人들의 교훈을 처세훈으로 받아들여 생활화했다. 유교의 仁 孝 • 務. 禮와 같은 덕을몸소 실천한 고운의 정신은 유교적 사상과 결합되어 있다.
이어 불교적 요소로서 東人의 성품을 보도록 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석가모니는〈처음 동쪽으로 걸어 갔다〉하였으니 마땅히 東方의 稱族이 노력 하여 佛法에 歸依할 것이다. 이것이 지역은 그렇게 되어 있고 하늘이 마련해 준 것이다..133)133) 剖判:Jj. ft!. r些安住院里起J. p.77. <部理始束行之步立乎九甜勉以三蹄地之使然天所假也) .
이것은 혔A이 f弗14을 구유하게 되어 f弗;保:를 이룬다는 것으로서 東人佛性을 확인한 내용이다.
또한 도교적 요소로서 東人의 성 품을 보도록 하자. 고운 자신의 일생 후반기에 나타난 사상은 주로 道敎思想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東方의 仁人은 玄妙之道를 가지고 있는 인격자로 품부되었는 데,134) 고운은 이를 노자의 道思想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다. 노자는 도를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담박무미하다고 하었다.이처럼 고운은 老按思想에도 심취되어 노장의 정신과 같은 경지를 얻고자 하였다.134) 胡来囚. r植致迫~束人grn叫l 朋哇研究J,世~ ~月, p.149.
13S) rr也文日侯垒集JJ. r四山碑路J. r报染和向碑路J , Pp.120"'122. <柴可道路常迦如~间上a.. …·是追捕但味).東人의 이러한 정신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고운은 東人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권장하고 있다.
束으로 흐른다는 말은 대개 約識에서 나온 것인데 바로 저 해뜨는 곳에 整男子의 根器가 자못 익어 가고 있다. 네가 만일 東方人으로서 傳授할 사람이 있거든 인도하여 强水로 하여금 束方의 바다에 故深을 입게 하라136)136司钊~绢. r四山碑简J. r掠染和向碑篇J. p.l01. <束流之~盖出约就徨日出血普男子银殆r~矣若若f~束人可自暖着鼠迫之俘怒水as回於海隅).
이처럼 밝아오는 지혜의 등불을 켜고 넓은 바다와 같은 인격을
갖 추라는 권장사항을 보디라도 그는 東人으로서 東人에 대해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던 것이다. 이처럼 고운에게서 나타난 東人瓦識은 올바른 정치를 통한 이상사회의 건설의 결과로 나타나는 자연스런 한국인의 혼인 것이다.
孤雲의 韓國政治史上의 공헌1 羅未 世波收治의 노력고운은 그의 나이 29세 (885) 에 당나라로부터 귀 국했는데 당시 의신라는 붕괴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지방의 技族勢方이 대두하면서 정권이 난립되었고,국가 정부는 州郡의 貫賦도 거두기 어려워 재정궁핍의 상황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그가 귀국한 후 4년 만인889년(眞聖女또 3년)에 州郡의 M賦를 강제로 수납하니 사방의 도적들이 봉기하여 국가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처럼 혼란한 때에 최치원은 상당한 의욕과 경륜을 가지 고 문란하여진 정치를 바로잡고자 노력 하였다. 137>그가 귀국 후에 지녔던 꿈은 당에서의 수학을 바탕삼아 관직활동에서 치국에 공헌코자 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는 그가 仕進의 길에 올라 時務十條를 올려 정치경륜을 밝힘과 동시에 당시 쓰러져 가는 신라왕국을 固正해 보려는 포부를 가져보았던 시기이다. 138〉137) 뾰빼훨, r줬i F.ll뾰에서 본 -tl!f'd홉J, 앞의 껴, P.126.
138) 朱힐뼈, r뾰줬찮,연想!Qff究J , 앞의 객 , p.337.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그는 그의 정치적 견해를 알아볼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되는「時務十餘條」를 진성여왕에게 올렸다. 지금은 그것이 전해지지 않음으로 인하여 내용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쓰러져 가는 신라하대 를 수습코자 하는 노력 의 산물이 었음에 를림없다. 〈고운이 진성여왕 8년(894) 에「時務十餘條」를 올리자 임금이 기목하게 받아들이고 阿浪의 벼슬을 주었다〉159)고 班故에 기록되어 있
139) [i'뾰文읍候全짜.!I. 孤웹先生짜m, r三댐없本빼J , p.408. (여많王A年公逃H훌훌十flM훌 王g納之以쩔阿값>.
다. 후래의 학자들은 이러한 時務十條의 내용에서 다만 그의 정치경륜을 추출해 낼 수 있으리라는 사실만 언급할 뿐,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그의 정치관이 될 만한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 이다.
그러나 정치적 경륜을 펴보기에는 이미 때늦은 감과 그 자신 정치수완 능력의 한계 때문에「時務十餘條」의 실현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왔다. 고운은 당에서 환국하여 조국을 위해 정치 및 사회찰동에 참여함으로써 정치적 개혁을 실현해 보려는 의지에 차 있었다. 그러 나 그러한 그의 뜻과 포부를 실현하지 못하고 끝내는 은둔을 자청하고 말았다. 그가 세속을 떠나 은둔하게 된 배경은 여러가지 가 있겠으나 중대한 이유는 당시의 사회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는 간격 이 생겨,그의 의지를 피기에는 오히려 자신의 무력 감만표普될 뿐이었기 때문이다.신라 制<템에 대한 수습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운은 신라가 멸망하리라는 예견을 했는지도 모른다. 왜 냐하면 iif帝國이 무너 지는 과정을 몸소 체험한 고운이 볼 때는 당시 신라의 政況은 멸망을 자초하는 상황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난국을 수습해 보려고 온갖 노력을 하였으나 끝내 용납되지 않아 마침내는 정계에서 은퇴하였다.140) 그에게는 은퇴라는 사실이 時運 탓으로 돌리든지, 아니면 능력의 부족 탓으로 돌리든지 아-문든 불운한 운명 이었다.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가 骨品制度의 차벌적 구애가 없었고,公道와 仁政 등의 바람직한 정치의 시대였다면 고운은 그의 일생을 전고 끝까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가 정치 의지륜 실현하고자 했던 갖가지 노력이 결국 불운한 시대 때문이라고 해야 할지,결국 성공을 이루지 못했음은 안타까운 일이 다.
2 商麗建固에의 공헌孝雜이 97년에 퇴위하자 당시 신라의 정세는 쇠퇴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頭空의 後百濟와 弓痛의 泰封勢丈이 강해짐에 비해서 신라의 국토는 경상도의 原新羅 지방으로 축소되었고,지역적축소와 함께 잔존세력의 권력투쟁의 문제가 대두되었. 자연히 强r이나 아니면 痛 혹은 玉述 중에서 결정될 운명에 처한 것이 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 사람이 국왕이 되어야 하는데 고운은 누구에게 관심을 가졌을까? 『三國史記고의「植致述傳」의 기록에는 고운이 IE建에게 편지를 보내었는데〈親林黃策, 松樹的松〉)이란문구가 있어 신라가 망하고 的麗가 새로 일어 날 것을 내 다보고 있었다고 한다.써 당시에 海印寺에서 안기하고 있었던 고운은 지방세력에 관심을 가졌고,목히 그는 公;兵의 丈에 대하여 주목읍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정 말로 왕건에게 서 신을 보냈는지는 확실하지 가 않다. 그렇지 만 그가 왕건의 찬동상한을 알고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고운이 지은 신라,i郡「護國城A作}投記」에 의 하면 孝端玉 12년(90S) 말까지 생존하였 던 것은 분명 하므로,왕건의 환동소식을 직접 듣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보지 않을수 없다1비는 견해가 있다.141) 徐댐표· rr찌m껑펴꼈.n. 원!Zi!!짜꼈. };짜바] -I·-~f-.142) 뾰햄윌· rm짧뾰에서 본 Wif(l쏠J. 앞의 젝. p. J28.143) 한균벤역 • Ii'孤평-t11:I갖i앓先生文m.n. P.7U.
144) ~견해훌· r 줬H월뾰에서 본 .m줬遺J. P.128.한편 신라붕괴의 혼란 속에서도 고운을 비롯한 유학생들의 한동과 사상적 동향은 국가성 쇠와 문화발전에 그 공이 컸다.145)이치럼 육두품의 공이 큰 이유는 그들이 신라하대의 신분 제한에 불만을 풍고 그러한 귀족계급의 붕괴륜 내심으로 은근히 바랐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 육두품의 상당수가 신라말에 이르러 정신적으로 고려왕조의 성립을 오히리 지지하여 새로이 사회를 개편해 보겠다는 의욕을 보였기 때문이다.146) 이러한 시대적 흐름으로 보아 고운은 간접적인 면에서 的麗걘函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본다.
145) 캔없앙· r웰앓 m쪼~i횡의 m:"f1i1'4껴~}~~낀 J. 앞의 껴 • p.2S6.
!46) ~헬댐A物大系.iJ I. r古代의 人4정 J. 시 촬. f핑:!iii!. 1972. P.399.그런데 육두품 출신들은 지식 인으로서 그 학적 이 론의 무기公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항시 중앙세디 에 의해 견제륜 받았다. 학적 지반을 단단히 다진 그들은 당에서 인정 받는 지식 인이 었으나 신라에
서는 중앙권력 구조에 합류되지 못하고 항시 外職과 技術職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건국에 정신적 기반을 제공하는 反新羅지식인으로서 고리에 편승하게 된다.147) 그처럼 고려에 호의적인 고운 중심의 육두품의 지식인들에 있어서 사상적 이념은 고려건국과정에 이념적 배경이 되어148) 왕이 추구하고자 하는 정책에 큰 지침을 마린해 주었다. 이러한 결과는 羅米의 육두품이 오히리 중앙세력의 견제름 받은 것에 대한 반발적 성향에 기인한 것이다.
147) 丁没民, rm致iStS1 f~奇小践性研究J. ~S1 ~, PP.20"'21.
148) 也很泳. rm!!l槌盖在遮且1 m:台改革思想J. 包èS1 ~, P.264.고려건국에 고운이 직접 공헌했는가 하는 문제는 재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고운이 직전 왕건이 건설한 고려에 협조했다고『삼국사기 의「동국통감」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반해서 고운이 고려건국에 직접 기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즉 고운과 왕건의 나이 차이가 20년이나 되어, 고운이 42세에 입산할 때 왕건은 22 세의 청년으로 弓符의 制將에 불과했다. 그리고 왕건이 고리륜 세운 연대는 20여 년 후인 918년149)이 었기 때문에 고운의 기여는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149) 金盟测. r也呈交通立。研究J,吐吗2号, P.l6.
다만 고운이 영향을 직접 주었든지 그렇 지 않았든지간에,그의 계통에 속하는 문인들이 고려건국에 기여하였으므로 적어도 간접적 영향을 준 것만은 사길이다. 그들의 유교적 정치이넘과 종교적 생관천학은 間初의 이넘힘성에 기 여하여 국가의 기 반을 확고히 다지는 초석이 되었다. 이것은 태조 왕건의 골품계도 초월정책,조세제도 감면책,對民政策이나 光京의 과거 제도,成宗의 유학 장려책 에서 크게 반영되었다.
고운이 걸국 고리의 건국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자 顯宗때 고운에게 고려의 건국을 密我組染했다는 공으로 內史令에 追封하고 文昌候의 說號륜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운이 보다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大同社食를 건설하려고 한 정치의지로 해석해야할 것이다. 그와 같은 그의 정치의지로 인하여 고운은 고려시대가 건개되면서 더욱 推好을 받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150) r三囚史妃』毡-4 6 , 到仰,也致培技.
「孤雲의 政治·社會觀」 토론개요
문제제기 : 孤의〈政治 • 社食級〉에 관련해서 인용된 자료는 주로 ir佳次i策耕染』으로 되어 있다. 이 계원필경집고은 고운이 중국 당나라에서 抗®f의 從?]官으로서 4년간 문필력을 동원했을 때 지은 작품이다. 여기에 바탕해서 추출해 낸 고운의〈정치 . 사회관〉은 중국의 정치 . 사회관인가? 아니면 한국의 정치 • 사회관으로도 봄 수 있는가? 중국을 배경으로 해서 저술된『계원필경』의 내용을 한국의 상황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토론내용: ir계원필경』은 고운이 당에 있을 때 고면의 종사관으로서 지은 전집으로 20 권으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그의 名文을 가리넣었으므로 동방의 최고문집이라고 한다. 이 문집은 또한 고운이 회남에 서 귀국하여 이 듬해 中和 6년 정원, 想써王 12 년,즉 당의 光啓 2년 (886) 인 30세 되던 해에 그가 당에 있을 때 지어 신라 임금에게 進獻한 문집이다. 이상에서 볼 때 고운이『계원필경집고윤 당에서 지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나타난 고운의 사상 자체가 중국•위주 혹은 한국 위주의 사상이 라고 어느 한편에 치우쳐 단정하기는 곤란하다. 그가 비록 외국에서 중국읍 공간적 대상으로 삼고 이 문집올 지었다고 해도 정치 • 사회에 관한 그의 견해를 객관걱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정치 • 사회관으로 한정해서 말할 수 없으며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문제제기 : 이른바 정치 • 사회관이라고 할 만큼 고운은 논리적으로 그의 사상을 전개했는가 ? 어느 면에서 그는 주의 • 주장을 체계적으로 하지 않고 그저 생각나는 대로 전개했던 것이 다. 사상가나천학가들의 논변과는 달리 문장가나 문학가들의 문필법과 같은 방법으로 전개한 것과 흡사하다. 만약 이와 같은 논조로 그의 사상을 전개했 다면 고운의 정 치 관•사회 관이 라고 단정 하여 체계화하는 데무리는 없는가?
토론내용 : 물론 고운은 그의 사상을 어 떤 논리 적 방식 으로 주장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유와 고뇌를 통해서 자기의 사상과 감정을 토로하였던 것이다. 그가 무엇을 사유하고자 했으며 어떠한 것에 고뇌를 하였는가라는 문제의식이 그의 여러 저서속에 나타난다. ir계원필경』목히「松[黃m하」에서 평화의지나 사회안정을 갈망하는 내용이라든가,「四山碑銘」에서 불교 자체의 심오한 교리-!: 음미한 사실,덧붙여「機郞碑序」와 詩 등에서 한국적 혼과 풍류적 삶을 갈구한 사신 등에서 그의 사상성을 유추해 낸 수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정치 • 사회관을 추출함과 동시에 체계화할 수 있는 단서가 마린된 셈이다.문제제기 : 고운의 사회관을 조명함에 있어서〈心學과【그學을 중시하는 敎符社命〉라고 했는데,오늘날 통용되는〈敎^好〉과 같은 개 념으로서의 교육사회륜 그가 주장했는가? 다시 말하면 고운이 심학과 구학을 주장하게 된 배경은 불교의 禪宗(心짠)과 敎宗(디學)의 조화륜 주장하는 데 초점 이 맞춰 지 지 는 않았는가 ?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고운이 바라는 바가 교육사회라고 주장하는 것은 논자의 주관에 치우친 판단은 아닌가?토론내용:여기에서 주목할 바는 고운이 주장한 구학이라고 본다. 심학이 종교적 수양과 관련되는 것이라면,구학은 문학적 지식과 관련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四山碑銘」중「無染和尙碑的」에 나타난 고운의 구학에 대한 주장은 심학 못지 않게 구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있어서 교육이란 말은 신라 당시 고운에 있어서 구학과전혀 관린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과거의 교육은 한문공 부,즉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는 것이 당시의 교육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로부터 시행되어 온 과거제도는 구학을 무시할 수가 없었는 데 能 • 文雄 등의 詞V짠 등이 그 당시의 교육과 직접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고운이 말하는 바 교육의 강조는 오늘날의 교육과 관련시켜 해석함도 가능하다고 본디-. 만약 그가 구학을 중요시하지 않고 한학공부를 소흡히 하였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그의 여러 저서는 물론 한국 고유사상을 천명 해 준 중요한「寂郞碑序」에의 자료접 근은 어 려웠을 것이 다. 결국 고운이 밝힌 심학을 통한 내적 수양의 공부와 구학을 통한 의적 지식의 추구가 어우러진 교육사회륜 그는 이상사외로 보았던 것이다.문제제기 : 이상적 사회관 중의 하나가〈fj•品制度의 비관을 통한 平等社舍〉라고 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볼 때 고운은 백성들까지 포함하는 진정한 평등사회륜 갈망했는가 ? 아니면 그 자신의 신분이 ;지頭品이 라는 제 약 때문에 신라의 於竹. 聖竹이 라는 골품제도에 대한 반항에서 나온 주장인가 ?토론내용: 신라의 하대는 聖竹 • irm • 穴頭品 • 五頭品 등 신분의 계 급적 구조가 합법 화되 었 던 시 대 였다. 이러한 골풍제 도는 왕족을중심한 폐쇄적 제약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육두품 이하의 신 분은 관직활동을 하는 데 상당한 제 약이 뒤따랐다. 신분상의 이유로 고운이 속한 육두품은 阿於 이상으로 승진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장애가 따랐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골품제도에 대한 고운의 반발의식은 결국 더이상 정치생찰읍 하도록 허용하지 못하고 은둔의 길로 걷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기정사실화된 골품제도에 대해 그가 노골적인 비판읍 하도록 당시의 사회는 개방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의중에는 골둥제도의폐단을 시정코자 하는 의지가 있었으며,나아가 그는 골품제도의 신분제 약을 타파하여 다같이 평등한 사회를 원했던 것이 다. 그래서 고운은「MM和尙碑銘」에서 도는 누구에게나 감아저 있으며 이 방인이 따로 없다고 했다. 도가 사람에게 차변적으로 분포되어 있거 나, 이 사람 저 사람이라는 서 로 다른 배타적 인 이 방인이 있다면 그가 밝힌 평등사상은 찾아봉 수 없을 것이디、이러한 의미에서 고운은 아무린 신분 제약 없이 누구나 정치간동을 하기 를 바랐던 것이다.
문제제기 : 고운이 的 女王에게 올린「時務十餘條」가 전하지 않는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의 직접적인 정치관이 담겨져 있을 것으로 보이는 이 時務條 모르고 어떻게 정치관의 추출이가능한가 ?토론내용 : 신라는 왕위의 자주적 인 교체로 인한 왕권강화,중앙과 지방호족의 백성에 대한 과중한 조세부여,국가통치 질서의 혼란에 따른 등으로 인하여 국정이 어지러워졌다. 이러한 난국을 수 습해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고운은 진성여왕 8 년(89‘1)에 정치의 급선무인「時務十餘條」를 왕에게 올렸다. 시대의 정황으로 보아 고운이 윤린 時務策의 내용을 추측컨대,과거제에 의한 인재등용,유교적 정치이념의 신천,사회혼란 요인의 제거 등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고운의 정치관을 규명하는 데는〈時務十條〉의 내용이 그 단서의 주류를 이룰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계원필경』에 나타난 그의정치적 견해들은〈時務策〉의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라 고 본다. 이러한 가정 아래에서 그의 정치적 견해들을 체계화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다만〈時務十條〉의 건의내용은 한국적 정치상황에 관련되어 있다는 면에서 이〈時務十條〉가 없이 정치관을 단정해내는 것은 무리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문제제기 : 고운의 정치관에 나타난 여러 정책조항은〈유교적 정치관〉과 크게 다른 점이 없다고 보는데,고운은 유교저 정치관을 답습한 것에 불과한가? 아니면 고운의 독자적 정치관은 무엇인가?
토론내용 :이미 언급된 바처럼 고운이 주장한 정치관을 크게 네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① 人本政治 ② 忠孝政治 ③ 仁述政治 ④公逆政治이다. 윤리의 덕목으로서 인본과 충효,인의와 공도라는 덕 목은 물론 유교의 중심 이 되는 덕 목이 다.당시 의 사상적 흐름은 유교 • 불교 • 도교라는 三敎가 ![]f立되 어 병존한 시대였다. 고운 역시 삼교륜 포함해서 玄妙之逆라는 風流思想을 밝혔다. 삼교의 각자 경향적 기능은 유교는 현실적 정치활동, 불교는 심성적 마음수련,도교는 민속적 기복행위였던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고운이 밝힌 정치관은 당시 삼교 기능상의 흐름으로 보아 유교적 정치관과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고운이 주로 인거 하는 내용의 주류는 유교의 공자 • 맹자와 四出類 등이다. 이는 곧 유교적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고운이 밝힌 정치관에서 고운만의 독목한 주장은 없는가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지만, 시대적 흐름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의문은 다소 해소될 것이다.문제제기 : 한국정치사상의 공헌에 있어서〈羅米 세파수습의 노릭〉이라는 것과〈的能述國에의 공헌〉이라는 조항이 서로 논리상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닌가?토론내용 : 고운은 29세 의 나이로 귀국하여 당시 쓰러져 가는 신라사회를 바로잡아 보고자 노릭하였 던 것 은 사신이다. 그 노릭의증거가〈時務十條〉로 나타났는데,그는 이것을 진성여왕에게 윤려(894) 신라를 E正코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국운이 이미 기울어지게 됨을 알자 당시의 羅末 육두품 含신의 지식인끝은 사상적으로 고려건국의 이념에 기여하게 되었다. 곧 신라시대는 이미 쇠퇴해 가고 새로운 역사의 국면이 전개되었다. 발해는 거란(契丹)에게 망하고 신라는 고려로 바뀌게 되어,고운은 일찍 王比에게 기대를 걸고 詩,〈效林黃葉,則樹뱐松〉이라는 내용을 전해줬다. 이는 낡은 신라를 경주 親休의 누런 잎 (낙업)에 비유하고 새로운 고리를 개성 松樹의 푸른 솔에 견준 내용이 다. 육두품 출신인 고운이 고려건국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이와 같은 고운의 고려건국에의 기여문제에 대해 많은 찬반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羅未 세파수습의 노력〉과〈고리건국에의 공헌〉, 즉 이 두조항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고운의 심중에는 羅朱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미 국운이 기운 이 상,그 자신이 수습능릭 의 한계를 느꼈던 것 같다. 그리 하여 오히려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은근히 바라면서, 기존의 신라 폐단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새로운 고려건국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던것 같다.그러한 의미 에 서 두 조항의 개 넘적 논리의 모순이 라는 문제 보다 는 당시의 국운과 시운에 순응한 고운의 어낄 수 없는 운명이 아니 었는가라고 추측된다.종합토론개요
韓國思想史에서의 孤雲의 위치孤受 社i致述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검토하는 종합토론은 11월 26일에 개최되었다. 원래 이 연구의 목적이 그동안 분학,역사,사회등의 분야에서 단편적으로 탐구해 오던 고운에 관한 연구를 종합하여 폭넓은 사상사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데 있었던만큼 종합토론의 주제를「韓國思想史에서의 孤民의 위치」라고 정했디-. 이것은 그그 자신에게 고유한 사유체계를 지닌 사상가로서 재평가하려는 시도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를 문학이나 천학,정치의 어느 한 영역 에 국한시 킬 수 없다는 의미에서 포괄적 인 개념인 사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사상사의 임무는 문헌적 자료에 근거하여 그 속에 나타나는 관념,이론,이상이 무엇이며 그것들의 당시 사회와의 관계 및 그것들이 역사와 문화에 기친 영향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데 있다. 이러한 과업은 꼭 필요한 과업인 동시에 매우 어려운 작업이기도 하다.이 연구는 우선 고운에 관한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그가 지닌 사상을 재구성함으로써 한국사상사에서의 위치를 살펴보는 데 중점을 두었으므로 그러한 사상사적 연구의 기초작업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종합토론에서 먼저 논의된 것은 그에 관련된 자료,특히 1T佳死符耕集고의 일부를 그의 독자적 사상이 담겨진 문헌으로 볼 수 있는 가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료성격상의 문제는 일반적으로『계원필경집고의 일부를 商耕이라는 고운의 상관을 위한 代로 간주하는 데서 연유된다. 이에 관해서는 참석자 모두가 그 자료를 思想연구에서 제외시킬 수 없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그 자료를 제외시킬 경우에 고운사상 연구의 소재가 매우 축소된다는 현실적 이유 외에도 다음과 같은 사항이 고려되었다.
첫째, 그 자료가 대필이라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 다른 글과 비교해보면 문체의 흐름이나 사상의 성격에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며, 둘째,자료상의 희귀성 때문이다. 故 辛相般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사상사의 문헌자료에 사료로서의 가치등급을 매길 때 사상을 말한 본인의 저서, 문장, 서한,기록 등을 제 1 급의 사료로 한다면 본인의 말을 제자,문인, 친우, 자손들이 직접 듣고 기록한 것을 제 2급으로, 뒷사람들이 간접으로 전해 듣고 기록한 본인의 年譜,行狀,傳記,人物評,言行錄 및 기타 단편적 기록 같은 것을 제 3 급으로,사상의 발생과 시대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에 관한 역사적 문헌을 제 4 급으로 해 야 한다고 한다. 이 기 준에 따르면 우리 나라는 삼국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이후에 있어서도 고려말에 가까워질 때까지 3 급 4 급의 사료밖에 남지 않았고 1 급의 것은 겨우 祖致述,元!的,務和] 등의 및 사람에 불과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r계원필경집』의 내용은 고운이 직접 쓴 글이라는 점에서 아주 귀한 자료임에 블림없으며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이와 아울러 검토된 것은 그의 저서로서 전해진『經學隊使』의 성격문제였다. 이 IT經學隊仕고은 性理學的 색채가 농후하기 때문에 고운의 친저 가 아니 라는 것 이 일반적 인 견해 이 디、이 를 고려 하여 참석자의 대부분은 이를 연구자료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데 동의하였으나,그 내용분석이 고운사상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이는 고운사상 자체의 이해에 도응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조선조의 유림 중 어느 유파에서 고운을 더 받들었는가를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대부분 공감하였으며學政故고에 관한 서지학적,문헌학적 연구와 함께 병행해야 할 연구과제로 남겨두기로 하였다.다음으로 부각된 문제는 고운올 과연 독자적 사+와 논리를 지닌 사상가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즉 그는 단순한 문필가일뿐 깊은 사상을 지닌 인물은 아니라는 의문이었다. 이미 문학의 영역에서는 그의 문학사상,시정신 등을 연구한 바가 있으므로 그의 문학작품의 배경에 자리잡고 있는 문학정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며,그를 철학자로서 문제삼을 때 논의될 만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천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어떤〈주체적〉인〈이론적 를〉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 다. 그러 나 고운의 글은 체계적으로 이론화된 내용이 아니고 대부분 실용적 문서나 서한문, 또는 祭文,碑文 등이어서 그-!: 사상가로 부각시키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 연구자 대부분의 공통된 소감이었다. 그의 글이 지닌 목성은 첫째,그가 偏 • 佛 • 道의 삼교에 관한 언급올 한다 하더라도 그 자신의 독자적 견해를 드러 내기 위함이 라기보다는 그 분야에 관한 해박한 지식올 자랑하려는 수사학적 방편의 느낌이 강하며 둘째,그러한 사상적 편린들은 단편적,비유적이어서 일관성이부족하다는 것으로 지적되었다. 이러한 난점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을 종합할 필요가 있다는 근거는 대체로 다음의 및 가지로 집약되었다.
첫째,유 • 불 • 선에 관한 그의 언급에 비록 새로운 내용이 나 비관적 관점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그가 전통적 삼교에 관한 내용을 어느 정도 파악했는가륜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府代를 전후로 한 유 • 불 • 선의 사상적 흐름을 그가 어 느 입 장에 서 수용했는가를 파악함으로써 유 • 불 • 선이 그의 사상에 어느 정도영향을 미쳤는가를 점검할 수 있다는 것이다.둘째,유•불■선에 관한 단편적 언급 속에서도 어떤 주체적 파악이 나 통일된 흐름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 며, 이 내용은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는 점이 다. 또한 이 러한 유 • 불 • 선에 관한 개면적 인식 에 서 드러 난 독자성 외 에도 유 • 불 • 선의 상호 관련성 에 관한 그의 입장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의 입장은 三敎合一的 시각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는 삼교가 지 향하는 궁극적 이 상이 나 삼교가뿌리박은 근원적 道가 서로 상통한다고 보는 입장읍 의미한다. 이관점은 한국사상사에서 하나의 중요한 기점을 형성하고 있다고 평가된다.셋째, 고운에 대한 후인의 평가를 살펴보면 고려시대에는 주로문필가로서 의 재능에 치중하였지 만 조선시대 이후로는 그의 사상적입 장에 주목하였음을 들 수 있다. 조선시 대에 그는 한국유학의 祖宗으로, 道脈을 전승한 仙人으로,또는 한국의 고대사상을 계승한 인물로 평 가되 었 기 때 문이 다.
이러한 및 가지 사항은 그를 한국사상사의 흐름에서 특히 元晩, 述和I 이후로 주목한 만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점에 참석자가 대체로 공감하였다. 그러나 元晩, 務拙과 고려조의 務天간의 사상적 공백 을 메울 만한 위치설정은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일부의 견해도 제기되었다.고운을 독자적 사상가로 평가할 경우 그의 사상에서 핵심적 테마로 자리잡은 것은 무엇인가에 관해서도 찬발한 논의가 있었다. 이것은 동양의 전통적 핵심사상이었던 도에 관한 추구와 그 실현이라는 명제로 설정할 수 있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중론이었다. 그런데도의 개념과 도의 신현방안의 성격에 관해서는 다소 이견이 있었다. 이견의 쟁점은 고운이 유 • 불 • 선 중 어느 사상에 주체를 두어그의 道論을 전개했는가에 관한 견해 차이 였다. 고운은「四山碑銘」에서는 불교를,逆敎依植의 기원문에서는 도교를,많은 서한문이나 실용문에서는 유교를 주체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이 다. 토론이 진행된 결과 고운사상에서는 어느 한 사상이 주체가 된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그의 생애 자체와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의 관직환동기에는 유교가,귀국 후 佛僧들과의 교우관계가 한발했을 때는 블교가,은거 후에는 도교가 그의삶에서 중요한 의미로 부각되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따라서 이를 무시하고 어느 한 시기의 사상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무리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사상편력에서도 그는 어떤 궁극적 지향의식을 일관해서 의식하고 있었으며 그 지향점은 도의 인식과 실현이었다는 데 참석자들은 공감하였다. 이때의 도는 유•불• 선에 공통된 지향방향이긴 하나 그 구체적 성격을 규정하는 데는 상당히 어려움이 따른다. 어쨌든 이 道論올 정리하는 것이 고운사상을 이해하는 관건이 되며 앞으로도 계속적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그런데 그의 道論을 살펴보려는 경우 그가 단순히 사변적 이론가가 아니 라 관직활동,은둔생활,문학활동 등을 통해 도를 실현하려했던 인물임을 주목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의 삶의 세게가 지닌 이러한 폭은 후에 조선초기의 金時習이나 조선후기의 許逆i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전통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 H敎合一味; 입장이 나 삶은 한국적 인간상의 두드러 진 모델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금번 고운사상에 관한 연구는 그를 사상가로서 부각시키기 위해그의 유 • 불 • 선 삼교관과 문학사상을 검 토하려 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리하여 어럼풋이나마 한국사상사에서 고운이 차지하는 위치가 밝혀지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고운사상을 좀더 폭넓게 탐구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지적한 과제 외에 다음의 및 가지 작업이 더 요청된다고 지적되었다.첫째,韓國古代思想의 정체를 밝힐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고운이 천명한 風流道의 성격을 좀더 깊게 규명하고 풍류도와 고운사상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한국사상의 원류와 그와의 연결을 파악하기 위함이다.둘째,고운의 생애와 그가 살았던 신라사회의 성격이 더욱 규명될 필요가 있다. 고운의 출생지,가계,귀국 후의 관동 및 은거상황등이 모두 신비에 싸인 데다 당시의 신라사회의 성격 억시 미진한부분이 많기 때문이 다. 이 점 은 관련분야에 관한 연구의 진전올 기다릴 수밖에 없는 문제이므로 신라문화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기를기대한다.셋째,고운이 한국사상사나 문화사상에 끼친 영 향을 심도 있게 검토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운사상 자체의 연구가 어느 정도 성취된후의 과제로서 아직은 시기상조로 보인다. 이것은 그의 생애에 대한 엇갈린 평가가 정리되는 것과 아울러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崔孤雲 關係文歡 目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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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雲 崔致遠
출판등록 1966. 5.19 제1-142호우편대체번호 010041-31-523282110-111 서울 종로구 관철동 44-1734-270 3004-24 120314·, 617 31v733-7 010찍음·펴냄 1989년 6월 15일 1989년 6월 30일·펴낸이 ·펴낸곳朴舌法 민음사지은이金仁宗•季雜澤•韓通約洛必·金永斗·柳泰역사학, 何記 KDC.990값 5,000 원
대우학술총서
T茶山級究의現‘況값5,300원丁茶山과 그 時代美萬吉 外/값3,100원丁茶山의 經學季己法 外/값6,500원韓國女性의 傳統像金烈吉 外/값7,800원미국인의 생 활과실용주의季普街 外/값3,400현대과학과 윤리金容驗 外/값6,000원中國의 天下思想認知科學조명한 外/값7,200원1 韓國어의 계통
2 文學社會學김 현/값3,500원9 印度哲學史吉®星/값5,500원金海宗 外/값4,000원10 韓國의 風水思想t 昌碎/값5,000원25 供大容評傳김태준/값5,000원26 歷史主義季敏鏡/값4,500원32 묵자金學主/값6,2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