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烈圭

서울대 국문학과 및 同대학원 졸업

현재 서강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

저서로는『한국문학사』、『한국신화와 무속연구』 외

李符永

서울대 의학과 및 同대학원 졸업

스위스 C•G•융연구소 교수 및 뉴욕대 객원교수

역임현재 서을대의대 신경정신과 교수

저서로는 『韓國思想의 原泉』『分祈心理學-C•G•융의 人間心性論』외 다수

李相日

서울대 독문과 및 同대학원 졸업스위스 쥬리히대학에서 극문학 및 민족학 수학

현재 성균관대학교 독문과 교수로 재직중

저서로는 『韓國人의 굿과놀이』、『민족심상의 예능학』외 다수.

韓國女性의 傳統像

韓國女性科傳統像

河炫網

張德順

鄭良襯

李符永

金烈圭

李相日

創銀弘

民音社

책 머리에

大字財固의 학술사업이 출범한 1981년 이래 財園은 국내연구가 부진한 분야에 대하여 學術論著지원과 함께 共同硏究 지원에도 중점을 두어 왔읍니다. 이에 財團에서는 인문사회과학 및 자연과학 각 분야를 대상으로 연구대상 분야를 선정하고 공동연구를 지원하게 되었던 바,이중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최초로 지원하게 된 것이〈韓國女性의 傳統像〉심포지움이 었읍니다.

최근 해외에서는 하나의 학문으로서의 女性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업적들이 나오고 있는 줄로 알고 있읍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女性〉이라는 매우 중요한 主題가 이제야 비로소 제몫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는 아직 이 방면의 연구가 활발치 못한 실정임에 비추어,財固에서는 한국의 女性 내지 女性文化에 관한 理解의 폭을 넓히고 또 학문적 체계화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뜻에서 지난 82년 가을에〈韓國女性의 傳統像〉심포지움을지원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심포지움에서는 각 분야의 學者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급변하는 사회구조 속에 韓國女性의 傳統像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검토하고 또 현대라는 상황 속에 드러나는, 原型으로서의 韓國女性像 조명을 위한 활발한 토의가 있었읍니다.

이제 심포지움에서 논의되었던 발표논문들이 한데 묶여져 출간을 보게 됨에, 심포지움에서 원래 의도한 바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평가를 독자 여러분께 부탁드리면서 이를 계기로 이 땅의 女性學 연구가 보다 활발히 전개되기를 희 망하는 바입니다.

1985년 7월

대우재단 이사장 季用熙

韓國女性의 傳統像﹒ 차례

5 책머리에

1 歷史的접근

河注納

11 韓國女性像의 형성

張德順

29 한글문화수호자로서의 女人像

鄭良施

49 閔範類를 통해서 본 한국여성의 傳統像에 대하여

2 學際的 접근

李符永

91 韓國民戰속의 女性原型像

金烈走

103 한국여성의 전통적 종교심성의 원형

季相日

123 놀이 文化속의 버너쿨러 젠더

鄭鎭私

「韓國女性의 傳統像J 심포지움의 象微性과 그 含卷

歷史的 접근

韓國 女性像의 형성

河法網

1

근래에 한국사회의 발전과 한국여성들의 역할이 증대하게 되면서 한국 여성문제는 학문적으로도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학문적 관심은 한국여성에 대한 역사적 검토의 필요성을 제기시켜 주고 있다. 한국 여성문제를 올바르게,그리고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적 내력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한국의 여성상이 어떠한 역사적 과정 속에서 형성되어 왔으며, 또 그 실상은 어떠 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하였다. 역사에는 어느 나라의 역사나 보편성과 특수성이 있듯이,한국의 여성상에도 인류 공통의 보편적 인 여성상과 함께 한국의 특수한 자연·지리·역사적 상황에 따라 형성된 한국적인 여성상이 있다. 필자는 이러한 보편성과 특수성에 유념하면서 한국 여성상의 형성과 관런된 맺가지 문제를 포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한국의 전통사회에는 男好女卑사상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물론 한국사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체로 인류사회에 공통된 현상이었다. 이것은 이미 주지하다시피 남성중심사회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 따라서 동양

사회에 있어서의 남존여비사상의 연원도 아주 오래되었다. 그것은 r周易』의 陰陽思想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天道에 陽이 剛하고 陰이 柔한 것은 人道에 남자가 높고 여자가 낮은 것과 서로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이에 따라 여성의 미덕은 菜順에 있는 것으로 권장하고 유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남존여비사상이 여성상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三國史記』에 보이는 金密試의 普德女王 史論은 그 좋은 예가 될것이다. 즉,〈天逆로써 말한다면 陽이 剛하고 陰은 菜한 것이다. 이 를 人道로써 말하면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 것이다. 어찌 여자가 규방에서 나와 국가의 政事를 결단할 수 있으리오. 신라는 여자를 세워 王位에 있게 하였으니, 참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이다. 이러고 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요행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1)

1) 『三國史記』 卷雪新昌盛本紀替自位主峰末尾〈鵲日臣聞之(······) 以天宮之則陽剛而陰主接以位人戰亂窗世之之則事男國#之而不女亡卑率豈也可.許云姥云摳-出

間房晰國家之故耶乎.新短缺起女子處之

전통사회에 있어서 바람직한 여성상으로서 여성에게 권장하고,또 제도적으로 강요한 것은 柔順과 貞節, 그리고 투기하지 말 것 등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이미 고조선 사회에 여자의 간음을 금하는 法俗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2) 그리고 이러한 法俗은 그 뒤에도 줄곧 존속하였던 것 이다. 우리는 현재 문헌을 통해서 부여 사회에 엄격한 법룰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 즉 『三國志』東夷傅의 夫餘傳에 의하면,用刑이 嚴急하여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몰수하여 노비로 삼았으며, 절도자에게는 12배의 보상을 하게 하였고, 남녀의 간음과 부인의 투기에 대해서는 모두 이들을 사형으로 다스렸다 한다. 그런데 특히 투기를 증오하여 사형에 처한 뒤에 그 시체를 서울 남쪽의 산 위에 버려서 썩게 하였다. 다만 그 여자의 집에서 시체를 가져가고자 하면 牛馬를 바쳐야 한다는 것이었다.3) 이로써 보면

2) r漢密』卷28 地J!lLi!:叫11. <扭過誣銬子去﹒之朝鮮畫畫其民以白義因扭做作樂混朝群民犯黨八錄相設以當時償殺相{路以翹傲相盜名﹒男沒入為其家蚊女子傌僻欲自悶省﹒人五十萬難免為民俗為益之錄取無健是以其民終不相盜無門戶之間蹋人此信不盡辟>이라는 기사가 보인다. 위의 〈犯禁八慷〉 중에 여자의 간음을 금하는 조항은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蹄人貞借不涅辟〉은 문맥상으로 보아서 犯禁八峰와 직접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즉 간음을 금한 法俗의 결과 <姆人貞恬不淫辟〉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실제로 부여 등 한국의 고대사회에는 여자의 간음에 대한 가혹한 처벌 규정이 있었던 것도 하나의 참고가 될 것이다.

3) 『三國志』 卷30 魏8 斑斑傳夫除傳〈周刑既急般人主管死沒其家人為蚊牌竊盜一十二男女當獨人F 管教之尤惜妒己設尸之國南山上至腐爛女家欲得轍牛馬乃典之.)부여 사회의 姑息擇에 관한 구체적인 검토는,,李起自「夫份禹描患鼎J , <史

學志 4,단국대 , 1970참조.

부여 사회에서는 간음과 투기는 살인행위와 맞먹는, 아니 그보다도 더 무거운 중죄로 다스렸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간음과 투기에 대한 가혹한 처벌은 비단 부여에 한한 것이 아니었고,한국 고대사회에 공통적으로 행하여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령 고구려 中川王(248-270) 때에 왕이 長髮美人으로 이름난 貫郡夫人을 가죽자루에 넣어 서해에 던져 죽게 한 것은 姑忌罪에 대한 사형의 구체적인 예 가 될 것 이다.4) 이와 같은 가혹한 처벌 규정은 남녀 중심과 一夫多妻制의 기존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적 여건 속에서의 이상적인 여성상은 유순하며 간음하지 않고 투기하지 않는 여성에 두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4) 『三國史記』卷17 向旬閱本紀中川主4年M..月線管三.

그렇다면 이 시대에 있어서, 실제로 여성의 지위나 여권은 어떠했던 것일까? 열악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대의 역사적 자료들을 찾아보면,오히려 여성의 지위나 여권이 상당히 강대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增屋制와 같은 婚俗도 그러한 예의 하나가 될 것이다. 즉 고구려에서는 남녀가 혼인하면,남자는 여자의 집에 따로 지은 增屋에서 살아야 하였으며,아들을 낳아 그 아이가 장대한 뒤에야 아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즉 상당히 오랜 기간 처가에서 살아야만 하였던 것이다. 5) 그리고 신라에서도 花郞의 기원이 되는 源花는 여자였다. 南毛·俊貞의 에가 그것이다. 이들 두 미녀는 57년(진흥왕 37년)에 源花로 뽑혀 3백여 명의 무리를 거느렸던 것이다.6) 또한 신라의 역사상 세 명의 여왕이 있었던 것도 이 시대에 있어서의 여권의 정도를 알려주는 표징이 될 것이다.

5) r三間志』卷30 鸝會來到傳商旬麗傳〈其俗作絡姻霄面已定女員長作小In令大歷使名堉昆堉草草至女家戶外自名能拜乞縛說女宿如是省再三女父母乃Ie使說小盤中描傍頤錢為至生于巴長大乃將姆獨家.>

6) r三國史記』卷4 新躍本記興興王〈三十七年發蛤擎觀花初君臣病無以知人欲使頓觀蠶遊以觀其行撞車然籤司長而周之遵循笑女二人一目爾毛-目俊貞It健三百蝕人〉云云.

한국사회에서는 고대부터 母系가 유난히 존중되고 있었다. 실제로 母系가 누구냐는 것은 정치적·사회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신라의 신분제도를 통하여 그 구체적인 예를 볼수 있다. 신라 사회에서는 聖骨·的骨 둥 고귀한 신분을 유지하기 위

해서는 父系에 못지않게 母系가 존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처의 혈통도 크게 문제시되었다. 이러한 것은 한국 고대사회에 남존여비사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일반적으로 여권이 상당히 강대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유념할 것은 그러한 여권은 근대 이후 신장된 여권과는 크게 구별해야 하리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고대사회에서 볼 수 있는 여권의 양상은 대체로 씨족사회 이래 유지되어 온 사회적인 述習이 아닌가 한다. 男女有別이 라는 유교적 인 도덕 관념이 보편화되기 이전에는 일상생활에 있어서 남녀의 구별이 없었다. 『三國志』貌出1「東夷博」「韓傳」에는 당시 마한 사회에서는〈長幼와 남녀의 구별이 없는〉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위에서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부터 부인의 간음과 투기를 엄중하게 제재하였음을 살펴본 바 있었다. 이 사실을 존중하고 당시의 상황을 추측한다면 여성의 지위나 여권은 열악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음을 아울러 지적한 셈이다. 그 상호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앞에서 우리는〈長幼와 남녀의 구별이 없는〉마한 사회에 관한 기사를 든 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한 사회에 한정된 것은 아니라고생각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家父長權이 확립되고 유교적段俗이 일반화되기 이전의 한국 고대사회에서는 어느 지역에서나 있을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리고 〈長幼와 남녀의 구별이 없는〉사회적 遺習은 家父長權이 확립되고 유교적 禮俗이 일반화된 뒤 에도 오랫동안 사회 저변에 뿌리 깊이 존속하였으리라 본다. 사회적 습속의 변화란 언제나 용이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父長權을 확립한 새 사회의 주도세 력은 새로운 사회 질서 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고,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나타난 것이 간음과 투기에 대한 엄중한 제재조처가 아니었던가 한다. 대체로 어떤 강력한 법적 제재는 어면 커다란 사회적 물의에 대응해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한국 고대사회에 있어서 부인들의 간음과 투기가 남성 중심의 기존 사회질서에 큰 위협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처럼 가혹한 법적 제재조처를 강구한 것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위에서 말한 양면성이 이 시대에 병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고대의 여성들은 비교적 자유분방한 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생 각된다. 그리하여 때에 따라서는 간음도 하고 투기도 하

는 등,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있는 그대 로 표출하였다. 『三國志』書束與傳에 의하면,고구려나 삼한 사회에서는, 저녁에 남녀가 같이 무리를 지어 노래하고 춤추며, 또는 5월 파종한 뒤와 같은 특별한 날에 는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기를 밤낮을 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위의 商句麗傳에는〈其俗淫〉이라 하여, 고구려의 사회 습속이 淫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三國史記』의 ~南毛﹒俊貞 관계기사에 의하면, 이들 두 미녀는 사랑을 다투어 서로 질투하고 있었는데,하루는 俊貞이 南毛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올 권하여 취하도록 한 뒤에 강물에 던져 죽였 다고 한다.7) 이와 같은 기사는 신라의 젊은 여성들이 평소에 술을 마셨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W那

夫人 관계기사에는 中川王의 왕후 諒氏와 rt那夫人이 서로 투기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王室의 여인들이 그러한 것으로 미루어, 일반 여성들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三國史記』商句ss本紀增地王 3년 (B.C. 17년)條에 의하면,增魂王의 두 繼室인 本®와 雄陷

는 서로 사랑을 다투어 화목하지 못했으며, 마침내 雄飯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 렸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상심한 增部王은 저유명한「黃幻歌」를 지어 노래하였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7) 上街書 참조.

우리는 이러한 몇 가지 史例를 통하여 법적 규제와 역사적 사실의 상호관계를 엿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즉 엄격한 법적 규제는 있었으나,그러한 속에서도 자유분방하고 솔직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던것 같다. 게다가 남녀의 교제에 있어서 적극성을 보여,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사랑을 쟁취하는 여성상올 대할 수도 있다. 신라의 萬明과 고구려의 平問公主의 경우가 그것이다.

먼저 萬明은 신라의 왕족으로서, 길에서 金好玄(金廣位의 아버지) 을 만나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萬明의 집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萬明을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어느날갑자기 벼락이 덜어져 별채를 지키던 사람이 경황이 없는 롬을 타서, 별채를 탈출하여 金野玄을 만나 멀리 지방으로 달아나 부부가 되었던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적극적인 한국 여성상의 한 예를 보게 된다.

음으로 平N公主는 平問王의 딸로서, 婚期가 되자 부왕이 上部의 高氏와 혼인시키고자 하였으나, 부장의 뜻을 어기고 궁중을 탈출하여 불우하게 지내던 溫述과 자기 뜻대로 혼인하였음은 저명한 사실이다.

『三國史記』 溫連傳에 의하면,혼인에 얽힌 사연을 부연하고 있으나, 한마디로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랑을 쟁취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위의 史例에서 한국 고대 여성상의 또다른 일면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萬明과 平阿公主에게서 적극적 이고 정열적인 모습올 보게 되면서,이와 동시에 엄 격하고 성실한 여성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約明이 그의 아들 金r與位을 매우 엄격하게 훈육한 일화를 이미 알고 있으며,平問公主도 남편 溫連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내조하여 큰 인물이 되도록 한 사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約明과 平問公主에게서 바람직한 여성상의 한 전형을 보게 된다.

한편 이와 아울러 한국사회가 삼국시대부터 유교적 윤리규범올 수용하게 되면서 서서히 유교적 여성상도 대두하게 되었다. 金座信의 아내인 智想夫人의 행적을 통해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智招夫人은 太宗武烈王의 세째 딸로서 元述 둥을 낳았다. 元述은 唐軍과의 전투에서 패한 뒤 살아서 돌아와 아버지 인 金炭信에게서 호된 꾸중과 함께 버림을 받았다. 金度I信이 죽은 뒤에 어머니 智想夫人을 만나보고자 하자,智招夫人은〈부인에게는 三從之務가 있으므로 이미 과부가 된 내가 아들을 따르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元述과 같은 놈은 사람의 아들로서 先君(金廣信)에게 아들 노릇을 하지 못했으니, 낸들어찌 그 어미가 되겠느냐〉라고 하며 만나 주지 않았다고 한다. 8) 우리는 위의 기사를 통해서 당시 신라 사회에는 유교적 여성관이 수용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유교적 여성관은 극히 부분적인 것으로서,일반적인 여성상의 형성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것을 고려시대의 상황을 미루어 알 수 있다.

8) 『三國史記』卷43 金使館傳 下 참조.

고려 왕조의 건국 이래, 고려의 집권충은 새 왕조의 정치이념으로 유교를왜택하고, 이를 정책적으로 적극 권장했다. 따라서 前:時代에 비해 유교가 고려의 정치·사회·문화면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그러나 유교적인 가치관이 실제의 여성생활에 큰 변화를 준 것 같지는 않다. 고려 의 여성들은 유교적 인 婦德이 나 유교적 인〈烈〉에 매이지 않았다. 자유분방하게 어느 곳에나 드나들었으며, 사찰 둥에 가서 외박하기 일쑤였다. 內外法도 없어 사대부의 처들이 이권을 위해 권

이처럼 고려 여성들의 생활이 자유분방했다고 해서, 이 시대에 들어 와 남존여비 사상이 없어졌거나 약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남존여비사상에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기에 덧붙여 말해둘것은 남존여비사상이 마치 유교사상에 연원하고 있는 둣이 생각하는경향이 있으나,그것은 잘못이다. 남존여 비사상은 유교 사상의 형성이전에도 이미 있었던 것이다. 다만 유교는 그러한 남존여비사상을그 사상체계 속에 받아들였을 뿐이 었다. 이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있을 것 같다.

고려 사회에도 남존여비사상이 농후했음을 보여주는 史例는 많다. 가령 무인집권기에 祖忠碎가 그의 어머니를 대한 태도도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즉 神宗때에 程忠碎가 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고자 하여 兄인 後忠獻과 의견이 대립되었을 때에 그의 어머니가 技L出碎를 타이르자, 植忠碎는 노하여〈부인이 알 바가 아니다〉하며, 손으로 밀어서 넘어뜨렸다고 한다.10〉또한 고려 후기 忠肅王(1313-1330) 때에 金光賊는 그가 임 종할 때 곁에 있던 아내에게,〈남자가 부인의 손에 죽는 것은 雜가 아니오, 마땅히 여종들과 함께 물러 감이 좋겠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여성의 지위는 현실적으로 상당히 높은 편이 었다. 가령 고려 왕실의 공주가 왕자-»국왕과 近親婚을 할 경우 父姓을 버리고 母姓을 칭하였으며,미家系의 계승이 女孫=外孫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는 유교적인 이념이 고려 사회에 비교적 널리 보급되기는 하였으나,유교적인 가치관에 토대를 둔 새로운 여성상이 형성

운세가의 정안에 출업하는 것도 예사였다. 그리고 『고려圖經』에 의하연, cl 시대의 여성들은남녀의 구별 없이 냇물에서 남자들과 뒤섞여 멱도 감았으며, 쉽사리 이혼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9) 또한 실제로 남 펀이 죽은 뒤에 수절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여성들 의 생활 습속이 고려건국 이후 새로 생긴 것이 아닝을 물롱이다. 고테 이후 달라진 것이 없었을 뿐이었다.

9) f i%뼈圖뾰』 양 22-23 雜 fíi 條.

10) 『高鹿史』 卷129 최충헌전 참조.11) 『高鹿史』 卷110 金台鉉傳附 金光 傳 臨聽聞其龔自男子不絕於姆人之.!F血也﹒可興黛牌迫矣且哥兒母商~疾官以單我也〉

12) 가령 『高鹿史』卷88 先宗后紀縛에 의하면, <大串主后車甫民太經之女로 되어 있다. 太祖의 딸이면서도〈皇甫氏)라 칭한 것은 그 母后인 神靜豆大后蟲甫氏의 性氏를 다랐기 때문이었다. 고려 공주의 稱母姓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는. 고려전기의 왕실혼인에 대하여, 1~4. (梨大史苑) 第7輯 참조.

되지를 못하였다. 고려의 여성 중에는 남편이 죽은 뒤에 여막•수절등 유교적인〈烈〉로서 나라의 표창을 받은 예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수는 이 시대 전체를 통하여 극히 적었던 사실올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고대에서 고려시대까지 여성의 생활은 자유로왔고. 활동적이었으며, 그 지위도 상당히 높았으며, 여권도 강하였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남녀의 평둥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여성 이 남성 보다 천시 당했음은 분명 한 사실이 다. 여기에 그 시대적 인 한계성이 있었음을 밝혀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사회에만 해당된 것이 아니고,전근대사회에 있어서의 공통된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3

한국의 여성상은 고려왕조의 멸망,조선왕조의 건국을 분기점으로 하여 크게 바뀌어진다. 그 변화에 대해서는 정치·사회적 측면과 사상적 측면에서의 검토가 다같이 필요하다.

조선왕조의 건국 이후,여성의 생활과 여권이 前代에 비하여 크게 제약받게 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 이유를 대체로 사상적인 측면에서만 찾고자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조선왕조의 집권세력이 유교적인 사회 질서를 강조하고 확립함으로써.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틀리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완전한 해답은 되지 못할 것이다. 정치적·사회적 측면에서의 검토가 아울러 행하여질 때에 우리는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한 해답을 구할 수 있으리라 본다.

조선왕조의 건국은 고려 왕조가 안고 있던 정치적·사회적 모순과 폐단을 극복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조선왕조의 건국주도세력이 시정해야 하겠다는 사회적 문제 중에는 여성문제도 적 지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그들은 고려 말기 이래의 사회적혼란옥 수습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방종한 행동율 강력하게 규제해야 한다고 생 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러가지 제재조처를 강구하였고, 이를 뒤에『經國方:典』에 明文化하였 다. 즉 同 刑典 禁制條에 의 하면, 부녀 로서 사찰에 을라가는자, 또는 士族의 부녀로서 山水間에서 遊宴하는 자와 野祭·山川·城陳 詞

梅j祭를 친히 거행하는 자 둥은 모두 杖 一百度로 한다고 되어 있다. 이와 아울러 여성의 재가에 대해서도 가혹한 법적 제재조처를 취하였다. 즉『經國大典』 典 諸科條에 의하면, 재가한 부녀의 자손은 文科,生具·進士 시험에 응시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범죄하여 영구히 敍用되지 못하는 자와 賊史의 子 둥과 병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재가는 파렴치범 이상으로 죄악시되고 있었음이 분명 하다.

그런데 실제로 고려말 조선건국초의 상황올 살펴보면, 위에 제시한 제재의 내용들은 당시 한국의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널리 행하고 있던 사례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정도로 극성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부녀들이 사찰에 올라가 남녀가 함께 기거하면서 性道德의 문란 사태가 야기되었다. 또한 山間水曲에서 遊起하거나 野祭와 山川•城洞廟祭 등을 지내면서 여러 가지 추태를 드러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에 든 사례들은 고려 말기에 새로 생긴 것이 아니고, 고대 이래의 사회적 습속의 연속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고려 말기의 정치적 •사회적 기강의 문란이 심한 폐단을 낳게 하였던 것이다.

13) 李偉 和 , 史 』 上 p. 太古 戰

따라서 조선왕조의 집권세력은 조선왕조의 건국 뒤에 추진한 여러 가지 새로운 정치적·사회적 시책 중의 하나로서 여성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 결과 여성문제로 빚어지는 사회적 물의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외출을 억제하고 문란해진 性道松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되도록 여성들은 사회와 외간 남자에게서 격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조처를 유교적 가치관으로써 정당화하고 합리화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조선왕조 5백년 동안 지속되었고 그결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와 등시에 우리 가 주목해야 할 것은 조선시대에 있어서도 가정내에 있어서의 여성의 지위와 그 경제적 지위는 前代와 비교하여 결코 격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가렁 가정내에 있어서의 主嫌=正契의 지위는 대체로 확고하게 보장되고 있었으며, 主부의 재산은 그소생 자녀가 없는 경우 사후에 친정에 귀속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먼저 主正妻의 지위가 어느 정도 보장되고 있었는가물 몇 가지 史例를 중심으로 살펴 두고자 한다. 世宗 차년(1439) II월에 前監牧

官 季中正이 正妻를 소박하여 농장에 버려 두고,牌英을 총애 하여 正英처럼 대우한 일이 적발되어, 司患府의 건의로 季中正이 杖九十의 벌올 받았다.14) 그리고 그 이듬해 인 世宗 22년 6월에는 大臣인 季志的의 처 季氏가 防忌로 여자종을 杖殺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씨는 아들을 낳지도 못했었다. 따라서 어느모로 보나 이혼의 사유가 될 만하였다. 당시 整諫과 議政府에서는 이씨의 처벌=이혼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世宗의 조처는 달랐다. 世宗은〈여자에게는 三不去

가 있으니, 이씨에게 비록 粧忌와 無子의 죄가 있다고는 하나 不去之

務도 있으므로 이혼시킬 수 없다〉고 하면서,正英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게 하였던 것이다.15) 또한 19세기에 달레 는 그의 유명한『朝

鮮敎舍史』序說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例話를 수록해 두고 있다. 즉 조선 후기에 어떤 名門의 양반이 아들 둘을 두고 喪英하여 재혼을 하였다. 그러나 그 후처는 작은 체구에 못생겼으며 게다가 꼽추였다. 첫날부터 소박하여 친정에 둔 채 동거하지 않았다. 명목상의 남편은 뒤에 정부의 요직에 오르게 되고, 그의 두 아들도 모두 고관이 되어 잔치를 벌이게 되었다. 이때 후처는 그 집을 처음으로 찾아가서, 전처의 두 아들과 며느리들의 자기에 대한 영접이 소홀하다 하여 문책하고 벌주고 나서, 그 집 안주인으로서 잔치 일을 현명하게 감독하며 잘 처리 하였다. 왕이 그 사실을 알고, 그 후처를 고관의 正契에게 내리는 外命嫌에 封防하였다는 것이다. 비 즉 王命에 의해 正英의 지위를 보장받았던 것이다.

14) r世宗貫錄』卷的世宗:1l't! II咀甲寬饒15)

15) 間上世宗::Z:l't! 6咀戊子﹒已丑錯.

16) 句A時三咧著-T會祿暉. r朝鮮歇會史序樹,謀求堂. 1966, PP·191- 194 啥,~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여성들이〈七去之惡〉 등의 틀에 매여 쉽사리 이혼당하고, 主婦=正妻의 지위도 박탈당하기 일쑤였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그것은 분명 우리들의 잘못된 생각이다. 위에 든 몇가지 사례가 그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실상 주부의 법적 지위는 확고하였던 것이다.

다옴으로 主婦의 재산은 혼인생활 중에도 그 독자성이 지켜지고 있었다. 조선 초기의 일반적인 사회 습속은 자식 없이 죽은 처의 노비는 그 남편이 그대로 부리기는 하였으나,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노비

는 죽은 처의 친정에 돌려 보내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아내가 죽으면 남편에게 노비를 유산으로 증여하는 경우는 있었다. 그러나 그 경우

에는 객관적으로 타당성이 있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만 되었다.17) 이 처럼 아내의 유산 증여를 신중하게 처리하도록 한 것은 당시 남성 중심의 가족제도상 여성의 재산이 본인의 死後에 그 本族에게 확실히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 었다. 다만 그 소생 자녀가 있을 경우,그 제산은 그들에게 상속되었다.

17) IT太實錄i 卷13 太祖«년 7월 甲成條〈無子患夫麥奴轉 藏無文銳 赤終己身使用 身

後本係許給夫四典成文許給者 從許與傳按 奏爲夫許與者 祖以印俗手寸 取浴®紀 必有班按的'及 然後方許決給> 玄玄.承重子

한편 조선 전기의 여성들은 부모의 재산 상속에 있어서 남자와 동둥하게 均分 상속의 법적 보장올 받고 있었다.『經國大典』에 의하면, 부모의 노비는 承重子에게는 5분의 1을 더 주고,衆子女에게 平分하며,양妾의 자너에겐 7분의 1을, 賤妾의 자녀에겐 10분의 1을 주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그 註에 구체적인 數를 예시하고 있으니, 첫째 備子女의 경우 만약 衆子女에게 각각 노비 5명을 준다면 承m子에게는 6명을 준다는 것이다. 承i子에게 5분의 I을 더 주는 것은 田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서,이는 제사 상속자인 承重子는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되어 있으므로 5분의 1을 더 받았을 뿐이었다. 따라서 이것이 남너 均分相街의 기본정신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다. 둘째 病子女와 良妾子女의 재산상속에 있어서의 비율은, 만약 滿子女에게 각각 노비 6명을 지급한다면, 良妾子女에게는 각각 노비 1명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남녀의 모계 신분에 따라 재산상속에 차이는 있었으나, 동일 모체,가령 다 같은 陶室子女라면 아들과 딸이 라는 성별에 는 관계 없이 재산이 균등하게 상속되었던 것이다.18)

18) 金一英,「朝鮮初期의 5J 女均分相按制에 대하며 J,《架大史?SI 8허, I969 참조.承重子

우리는 위에 제시한 구체적인 몇 가지 史例를 통해서 조선 초기 집권세력의 근본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분명히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가정내에 있어서나 재산 상속상 등에 있어서의 여성의 지위와 권리 등은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한편,고려 말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여성의 사회적 폐단은 이를 단호하게 막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왕조 건국 이래 집요하게 추진된 여성에 대한 강경한 시책은 여성관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우선 貞節의 개넘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는 그 극단적인 예의 하나로서, 이味光의『蓋峰類說』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기사를 들 수가 있다. 立祖 자년 임진왜란 때에 어떤 부인이 계집종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섰다. 마침 강가에 다다라 배를 타야 되 었는데, 혼자의 힘으로는 배에 오를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뱃사람이 그 부인의 손을 잡고 배 에 태우고자 하였다. 이에 그 부인은 크게 통곡하면서,〈내 손이 네 손에 더 럽혀졌으니 어찌 살아 있겠느냐〉하고,즉 貞節을 잃었다 하여 곧 강에 몸올 던져 죽었다는 것이다.9)

19) 『芝錄擷雖』卷15 人街都國壘起峰,

그리고 守節의 개념도 달라졌다. 고려 말기 조선 초기까지에도 수절은 바로 열녀로 간주되 었다. 가령 太宗 5년 12월에 太宗은 세 여성올 열부로 施表할 것을 命하였는데, 그 행적은 모두 남편을 여왼 뒤에 수절 한데 있었다. 왜 냐하면 이 당시 까지만 하더라도 일반 사회 습속은 남편이 죽으면 改錄하였으며,수절하는 것이 극히 드문 예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의 역대 위정자들에 의해 여성들의 수절이 여성 최고의 미덕으로 칭송되고 장려됨에 따라 조선 중기 이후에는 점차 수절이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수절만으로서는 열녀가 되지 못하였다. 수절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열녀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또다른 조건올 갖추어야만 하계 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 滿岩 朴別:源(1737-1805)은「烈女威陽朴氏傳」井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아아 슬프다. 그 꿈節·淸修가 이 와 같으되 그 이름이 當世에 드러나지 않고 煙沒하여 전하지 않는 것은 어먼 일인가. 과부의 수절은 이제는 나라를 통틀어 常經이 되었다. 그러므로 수절하여 죽는 것을 뛰어난 절개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우리는 여기서 한국 여성관의 커다란 변모를 보게 된다. 요컨대 조선시대에 추구하던 이상적인 여성상 역시 유교적인 嫌德을 고루 갖춘 여성으로서 유순하며 貞節올 지키고 투기하지 않으며 검소한 여성이었으나,특히 그 前時代와 다른 점은 여성들의 사회적 접촉 내지는 외출을 억제하고 수절을 제도적으로 강요하여 이를 사회습속화시 킨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있어서도 그 全時代에 걸쳐 여성관이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 역사적 상황에 따라 내적으로는 여성관의 동요와 변모가 생기게 되었다. 내세기 말의 일본군의 침입과 다세기 초의 女眞族의 침입은 한국사회를 황폐하게 만들었으며, 특히 전란중 침략군에 의한 부녀자의 失節은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시켰다. 게다가 異民族의 침략세력 앞에 드러난 집권충의 무능·비겁은 반체제적·반전통적 가치관의 대두를 촉진시켰다. 이와 같은 새로운 상황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여성관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 각한다.

첫째는 수절관의 변화이다. 老峰 季味光은 그 원인을 임진왜란중

의 부녀 失節에서 찾고 있다. 즉〈我國嫌女가 貞倍不淫하다고 일킬어진 것은 오래인데, 이는 대저 英子의 追化이다. 頭年에 天兵(明兵)이 처음 出來하여 한 官德을 겁간하니 그 官想이 이를 부끄러워하여 목매어 죽었다. 官犯으로서도 이러하였으니 貞倍하다 일러 온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왜적과 天兵이 국내에 强溫하여 전후 년 사이에 부녀들이 그들에게 더럽혀진 바 되어 풍속을 이루니 옛날과 같지 못하게 되었다>20)고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잠깐 눈여겨볼 것은 조선 후기의 吹學密들은 대체로 기존의 정치질서와 사회제도 둥의 개혁을 강력하게 주칭•하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여성관에 대해서는 지극히 보수적인 경향올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 다. 위에 든 季味光도 그러하지만,가장 진보적인 攻學者로 알려져 있는 無岩 朴at源도 이 점에 있어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즉 朴別:源은 消나라에 가서 그 나라 학자와의 문답에서 우리나라 미풍양속의 하나로서〈女子不更二夫〉를 자랑삼아 들고 있는 데에2:〉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20) r芝峰穎瞬』您2 踏國留風俗雖.

21) r燕岩錄』卷12 熱向日記太學留館錄秋8月胡10 自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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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 우기의 새로운 사회적 추세는 수절관의 변동을 초래하게 하였으며,이에 따라 여자의 改隊를 긍정적으로 다루는 작품들이 나오기 도 하였다. 가렁 당시 민중사회에 호소력을 가지 고 있었던 「장끼傳」「가로지기 타령」 등이 그것이다. 특히 「장끼傳」의 주인공인 까투리는 아홉 아들 열두 딸을 거느리고 있는데도,남편인 장끼가 죽자 문상와서 청혼하는 다른 장끼를 보고,〈죽은 낭군 생각하면 개가하기 박절하나 내 나이를 꼽아보면 不老不少 중늙은이라. (……)오늘 그대 풍신 보아하니 수절할 마음 전혀 없고〉운운하며,곧 개가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장끼 傳」 등의 작가가 재혼 긍정적인 내용의 작품을 쓴 것은, 표면상 전통적 여성관이 지배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용기있는 작가정신의 발로였다고 하겠지만, 한편 이러한 작가정신은 당시 대두되던 反傳統的 여성관의 보급에 힘입었을 것임에 듣림없다. 즉 당시 사회의 한 단면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 까 한다.

다음에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상의 대두이다. 아마도 조선 후기의 사회경게적 어려움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가령 季德한〔1741-1793)는 그의『士小節고에서,〈향향가 빈곤하면 베 짜기 와 누에치기는 물론,닭과 오리 등의 가축을 기르고, 대추·밤·감·굴 등 을 잘 간수하였다가 때를 기다려 팔아서 가계 에 보템이 되도록 하라〉고 권장하고 있는 것이 다. 이 와 같은 경 향은 조선전기 와는 대조된다. 조선 전기에는 대체로 절약과 검소가 크게 강조되 었을 뿐이 었다. 23)조선 후기의 새로운 역사적 상황은 조선 전기 사회에서 요구하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상 대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상을 필요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22) r轉國女性史J 1 ,跟大出版部, 19戶, pp.442-444 참조.

따라서 이 시 기에는 이러한 적 극적 이 고 능동적 인 여 성 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에 나온 고전소설인『이춘風傳』T朴氏傳J!『鄭器京傳』둥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여주인공이 등장하여 큰 활약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 좋은 예 가 될 것이다. 가령 季春風의 처 金氏의 경우, 그녀는 뒷집 金參判을 직접 만날 뿐만 아니라, 金參判이 평 양감사가 되 었을 때 에 남장으로 그 舍計神將이 되어 평 양에까지 가서 .궁지 에 빠져 있던 남편 季卷風을 구해 주었던 것이다.2물론 남장을 하였다는 데서 당시 여성활동의 한계성 같은 것을 느끼게 되지만, 內外法과 여성의 외출 금지가 강요되고 있었던 조선시대의 사회통념상으로 볼때에 여간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요컨대 조선 후기의 사회변동은 여성관의 변동과 새로운 여성 상의 형성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통해서 우리는 이 시기에 여성들도 남자 못지 않게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자각이 대두하게 되 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생 각한다.

23) r單響風傳J叫i1 ~有社于利且有~

또한 우리는 세기 중엽 이후에 한국사회에도 근대적 인 여성관이 대두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기독교 및 서구근대사상의 전래에 의한 것으로 이 야기되고 있다. 물론 우리 는 그 밀접한 상호 관련성올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일반적으로 그외래적 요인이 강조된 나머지 내재적 요인이 간과되거나 소홀하게 다루어진 느낌이 없지 않다.

우리는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과 내세기 중업부터 시 작되는 동학운동

의 내용을 통하여 그 내재적 요인의 종합적인 파악이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1860년대에 創逆된 동학의 지도자들은 종래의 여성관올 타파하는데 솔선수범 하고 있었다. 제2대 교주 推時꾸은〈내 비 록 嫌人•小兒의 말이라도 또한 배우고 좇을 것을 좇나니, 이는 모든 普은 다天語로 알고 믿음이니라〉하며 인간평등을 부르짖 었으며, 또 스스로 과부와 혼인함으로써 再隊를 죄악시하던 조선왕조 성립 이래의 그릇된 여성관 타파에 앞장서기도 하였던 것이다. 여성의 再家 억제가 조선왕조 성립 당시의 역사적 상황의 소산이라면,그 소임은 이미 그 시기 에 다한 것이다. 그 상황이 달라진 조선 후기 사회에서 까지 고집 되어져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에 대한 일반 민중의 불만과 저항은 크게 고조되어 갔던 것이다.

따라서 동학의 지도자들은 시정해야 할 사회적 폐단의 하나로서 주목하게 되 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내얘년에 동학군이 추진한 弊政改革12개 조항 중의 하나로〈청춘과부의 개가를 허할 것〉을 포함시키고 있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잘 말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같은 해에, 비록 동학운동은 실패로 끝나 버 렸지만, 정부측에서 단행한 甲午改革에〈과부의 재가는 귀천을 무론하고 그 자유에 맡긴 다〉는 조항이 明示되고 있는 데서,여성관의 커다란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조선왕조 성립 이후의 전통적 여성관의 파탄과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와 동시에 근대적인 여성관이 형성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간것이 다. 이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기독교 사상과 근대 선각자의 활동이었다. 특히 開化派의 한 사람으로서 1884년의 甲中政變이 실패한 뒤에 미국에 망명하여 그곳에서 근대문명을 배우고 돌아온 은 여성문제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독립신문》의 논설을 통하여,전통적인 여성관을 격 릴하게 비판하고 남녀평등과 여성 교육의 필요성 을 호소하였다.〈여편네가 사나이보다 조곰도 낮은 인생이 아닌데, 사나이들이 문명개화가 못되어 인정은 생각치 않고 다만 자기의 팔힘만 믿고 압제하려는 것이니, 어찌 야만에서 다름이 있으리요〉〈정부에서 사나이 아해들을 위해서 학교 하나를 짓거드면 계집 아해들을 위해서 또 하나를 짓는 것이 마땅한 일이니〉 운운한 논설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와 전후하여 1886년-1910년 사이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처에 染花•貞位•倍花•崇義•호수돈•保聖•被明•德成•信明•

同德 등 수많은 여성 교육기관이 설립되 었다. 이 것은 당시 한국사회에 근대적 여성관이 뿌리내릴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와 동시 에 이시기에 여성들의 지위향상을 위한 여성단체들이 설립되고 있는 사실도 우리의 주목을 요한다. 그 뒤 여성들에 의한 여성단체들이 더욱 광범위하게 설립되어 각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 었으며, 한편으로는 국내외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은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다음에 그에 관한 문제를 잠깐 살펴 두고자 한다.

1898년에 讀規舍·順成舍 등이 설립되어,여학교의 설립과 여성 교육,여성의 생활개선 및 지위향상을 위해 활동을 벌였으며,1899년에 는 女友舍가 조직되어 男女同權 - 一夫一英의 현대적인 가족윤리의 확립을 표방하였던 것이다. 이 밖에도 많은 여성 단체 들이 1910년까지 계속 설립되어 각종의 여성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처럼 여성에 의한 여성운동의 결과, 여성들의 지위향상과 근대화에 대한 자각이 현저하게 높아지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 시기에 있어서의 여성운동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 시대상황에 따라 여성운동의 방향이 나 목표가 달라진 사실이다. 1910년부터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본격화되자 여성들은 독립운동 내지는 그 후원을 위해 조직적인 활동올 전개해 나갔다. 가령 1913년에 설립된 任J竹舍는 독립운동의 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女子商舍라는 단체를 조직 하였으며, 내내년 4월에 조직된 血誠園愛國嫌人舍는 독립운동으로 투옥된 인사들과 그 가족을 원호하는 한편 上海 臨時政府를 원조하는 것을 그 사업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특히 이 해 6월에 발족한 平壞 邪蘇會長老派의 愛國婦人舍는 排 思想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위한 결사대를 조직하는 등,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정면으로 저항하기도 하였다.

한편 1920년대부터는 여성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어 나갔다. 즉 여성 들의 지위향상과 문화활동·사회 활동·신앙활동 둥을 위 한 여 성 단체들이 속속 설립되고,그 단체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여성운등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1920년 3월에 조직 된 朝鮮女子興學舍는 뒤 에 朝鮮女子留學生親陸會로 개칭하고,잡지《女子界》를 발간하였으며, 이해 4월에는 摩美理士가 朝鮮女子敎育協會를 조직, 여성의 교육과 계몽에 힘쓰는 한편 樓花學因을 설립하였다. 또한 이 해 7월에는 彈故

金明淨은《創造》의 동인이 되었으며, 一葉 金元周와 晶月 羅筋親은 의 동인이 되어, 다른 남자 동인들과 함께 문학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각년에는 金活湖·命理刺I을 중심으로 植友舍가 조직, 友》라는 잡지가 간행되기도 하였다. 이와 아울러 1920년대에는 각 종교를 중심으로 조직적인 여성활동이 전개되었음이 주목된다. 년에 발족된 佛敎女子年舍는 能仁女子學回올 운영하면서 불교의 포교와 교육사업을 병행하였으며,1922년 6월에는 金活此을 중심으로 朝鮮女子基按敎神年舍가 조직되어 선교와 계몽활동을 펴는 한편 월간으로《Y.W.C.A》가 간행되기도 하였다. 또한 天通敎舍 내에도 1919년 3.1운동 이후에 天街敎女子W年舍·天道敎內修幽·天迫敎女性同盟 등이 조직되어 다양한 찰동을 전개하였다. 물론 단체에 따라 그 성격과 찬동노선에 차이는 있었으나, 위에 든 天道敎 여성단체들이 한국근대의 여성 운동에 있어서 상당한 기여를 하였음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24)

24) 1920년대의 천도교 여성단체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T~톨짧 , r 天밟혔女앉 훌훌 앓에 훨 한 一맑究 J, { 햇:re史 훌 훌훌 ij~ ’ 9 觸 , 176 참조.

그리고 이 시기에 새로운 직업여성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스스로의 자질향상과 친목,그리고 권익 옹호를 위한 여성단체 들도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朝鮮松護術協符(1923년 5월)·元山女子勞友舍(1924년 7월)•仁川授米女I祖合(1924년 10월) 등의 결성이 그것이다. 또한 모든 직업 여성을 망라한 단체로서 내26년에 望月供樂部와 朝鮮女性職染組合등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성단체 활동과 함께,각 분야에서 여성 선각자들이 두드러진 광약을 보이 게 됨으로써,새로운 여성 상의 형성 에 박차를 가하게 되 었다. 즉 가정 에 충실한 현모양처와 유교적인 嫌德을 쌓는 것 만이 이상적인 여성상이 아님올 행동으로 보여주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한국의 여성들은 전근대사회의 낡은 가치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그에 따라 근대적 여성상이 점차 형성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돌이켜 보건대 대체로 한국의 여성은 역사적으로 중국이나 일본의 여성에 비해 그 지위는 높았다. 한국사회가 겪어 온 끊임없는 內憂外患은 여성들의 역할을 증대시켜 왔으며, 그것이 여성들의 지위를 다른 나라에 비해 높여 주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우리나라 속담은 한 가정에서 주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컸던가의 일면올 보여주고도 있는 것이다.

5

우리는 이제까지 한국의 역사에 나타난 여성문제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한국의 여성상은 각 시대의 정치적·사회적·사상적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어 왔다. 따라서 고정된 것이 아니라,시대와 사회적 여건에 따라 그 내용에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여성들이 참여하고 기여하는 영 역 은 달랐으나, 대체 로 한국여 성 은 역 사적 으로 일정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대처함으로써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슬기를 보여주었다. 오늘날 한국의 여성 들이 각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우리의 역사적 전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전통적 여성상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따라서 하루속히 망각하고 없애 버려야 할 수치스러운 잔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둣하다. 즉 한국 현대여성상의 형성은 전통적 여성상의 부정과 단절로써 가능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겸허한 자세로서 지난날의 한국 여성상을 되돌아봄으로써 우리가 본받고 또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는 과거 우리의 전통적 여성상에서 적극적이고 정열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엄격하고 성실한 여성상을 보아왔다. 이러한 우리 여성상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새로운 모습으로 계승·발전되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와 가정, 이웃과 사회에 짐이 되고 폐해가 되는 利己的이고 분별없는 행위는 반성함으로써 우리의 역사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현대적 한국 여성상의 형성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한글문화 수호자로서의 女人像

張德順

1 서언

나는 이 글에서 주로 조선시대의 知性女仁에 관해서 이야기할 책임을 맡은 셈이다. 주어진 제목이 한글문화를 지킨 여인들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고루한 가정에서는 여인은 모름지기 글을 멀리하라고 경계했었다. 특별한 환경에 처한 여인들이나 또는 보통여성이 아닌, 좀 奇人的인 여성들만이 공부를 했고, 또 詩도 짓곤 하였다. 특별한 환경이란 것은 학자의 집 안에서 남성들의 어깨 너머로 글을 배운다든가, 또는 조부나 학문이 깊은 할머니,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서 공부할 수 있는 한경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奇人的인 여성이란 천부적으로 文才를 갖고 있어서 자기의 힘으로 공부를 하는 여인이든가 어른들이 말려도 波界에 투신하여 詩•歌•按를 익히는 여인들을 뜻한다. 그러니 내 가 말하려는 여인상은 보편성올 띤 일반여성이 아닌〈특별한 여인상〉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이 글 첫머리에서 이런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이 글의 주제가〈한국여성의 傳統像〉이기 때문이다. 전통적 여인상이 란 보편성을 갖고 있는 여인들이어야 할 댄데 내가 맡은 과제와 관련된 여인은 그렇지가 않다. 요컨대〈問題兒的〉인여인들이 많이 거론될 것이라는 뜻이다. 漢字나 한글을 아는 여인들은 편지질이나 하고 혹은 짧나 노래를 짓는답시고 종이와 붓을 가까이하는 말성꾸러기 여성들인 것이다. 며느리가 친정이나 벗들에게 편지나 자주써보내면 시어머니는 반가와하지 않는다. 장성한 딸이나 과부며느리가 詩經을 읽고 앉았으면 아버지, 시아버지들은 걱정이 태

산 같아진다. 바람이 나서 家風을 어지럽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튼바 한글이 나 漢字를 사용하는 문화적인 여인들이 모두 이런 군상들인 것이다.

2 한글과 여성

한글은 창제 이후 주로 여인들의 사고와 감정을 전달하는 매체로 원용되어 왔다. 그리 하여 예 로부터 한글은〈암글〉,곧〈여 인의 글〉이라고 블리기까지에 이르렀다. 남성사회의 문화가 街字 중심이라면 여성 사회는 한글 중심으로 영 위되었다는 말과 같다.

한국문학사에서 소위 內簡이 라는 것은 여성 들이 주고받는 편지인데 〈內〉는〈內外〉의〈內〉로 여성을 뜻한다. 이는〈談簡〉이라고도 하는데 순한글로 씨어진 편지이다. 그런데 이 한글 편지는 여성만이 쓰고, 또 받는 것은 아니다. 남자가 여인(아내나 딸, 며느리)에게 보내는 편지도 순한글이었는데 이것도 內簡,혹은 惑簡이라고 불렀다. 남성이 참여했다고 해도 여성 중심의 문화교류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液字로 문화활동을 했다. 따라서 편지도 衡字로만 주고받았으나,여성이 개입하는 경우에는 이들도 한글을 사용했던 것이다. 예컨대 왕이 공주나 옹주에게 편지할 때,왕이 왕비나 공주의 서거를 애도하는 제문은 순한글로 지었는데 지금 전하는 것도 있다.1〉또 末時烈 같은 대학자도 출가하는 딸에게 준『戒女안』, 秋史

1) 宜詛가 어느 옹주에게 내린 內 의 예 :

출월 보고도 둔 것윤 그 망이 어품고 날도 융 하니 연팡이 듭 어지거든 내 천 융 l .!L:iZ. 자세 기 벌 하마 . 대캉 용약 σ M 원 )할 일이 있어도 의판 • 의녀 융 들 여 대령하 려 하노라. 훈‘ g 말라. 자연 아니 좋이 하랴. 계 요 폭헨 /입 주얼 기시.

宗 이 팡이(仁 願 王信)의 셔거 판 애도한 흉文의 예 :

모년 모월 모일에 국짱운 1 싹지천으로 대 앵 양\1) 만써지천에 고하냐니 , 요호 라 현후 돌아가심이 참이냐 거짓 말 야냐 달 이 카고 냥 l 바뀌되 과언이 황 란하야 농혀 쩌 맡지 풋하니 혹 철 없 l 컨수 7r 악악하고 용 용이 동철하니 그 울 아강 l 반 듯함지라 1 고인 l 옐우지만파 고폴지 용용 알렸£냐 파안의 극 몽과 유한응 고긍 에 ( .‘.1 . .쳐. . ) 방 활한 자가 없도마.

오효i4- ~후 의 맑 윤 자품 A 호 얼개 혐 육이 없고 어진 성역요혹 하수 흩 누리 시지 웃하시고.'Ù도가 파히 무갱한지라, 이는 반드시 파언의 철역우 혹 함 융 하 활 1 ul 훼하 사 파언 A 로 하여금 우풍한 한야 되게 하시는도닥.

용 명껴 i -i- 바라보돼 현 후외 역 용 파 외용 용 듣고 훌「 듯하되 이계 청이 악험이 헛

천린고, 과인이 중간 신덕함이 없이 지금까지 무고하시다가 들아가시도 오히려 슬프다 하려 든 하물며 과인의 허물로 육년고초뮨 생각하니 차악한 유한이 여광여뒤로다. 제문이 장황하여 지리하매 그치노라.

가 配所(濟州萬)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그리고 아내의 영전에 바치는 학자의 祭文 둥도 모두 순한글이다. 이러한 자료들도 지금 그대로 남아사 전하고 있다.2)

2) 秋史 金正社가 流配地인 제주도에서 서울에 있는 아내에게 보낸 한글 편지의 예 :

세후 처음으로 양재완 편에 글을 보압고, 그 후 또 인편에 연하와 글원 보오니,인편 없을 대는 없압다가 있으면 또 건포 보오니, 든든하유 가까운대 갑사와 일시 위로되 오며 그 사이 또 달이 넘 었아오니 연하와 편안이둘 지 내오시 압.게서난 이 사이 어떠하암. 관계치 아니라 하오나 관계치 아니하윤 이가 있삽-아마 먼데 사람이라고 숨기난 듯하오며 속미옴은 연하야 자시압. 게서가몸읍보호하야 가난 것이 난 보호하야 주난 것이오니 그리 아오시암. 창녕의 요통이 종시 낫지 못하다 하오니 동동하온 념녀 측냥 없암. 경향 대외 일양이암.지난납 회일 제사 지나오시니, 친천철지한 망극지통 더욱 원동순바하야 즉지에 죽어 모르고 싶으니, 고금천하에 이런 사란이 정니 광경이 어대 있아윤있가•영뉴 나와서 한가지로 지내와암.

나난산이 있다하올 진이 없압. 여기 지내는 모양은 일양 번범은 없아오니 완인하기 어찌 다 이르며, 먹는 것도 그 모양이오니 그리 저리 아니 견대어가암-일것 하야 브낸 찬물은 바른 것 외에난 다 상하여 먹율 길이 없압(下略).

아내 2前에 바치는 祭文의 例. 伊熟(英祖10년,:733〜正祖21년,다97)의 그의 아내 辛氏(A敬夫人) 祭文의 一節이다.

(……) 슬프다. 금인에 어더봄가 우리 딸은 어데 가고 군율 보지 못하나뇨.

옛 해남으로 윤적은 딸이 있어 한가지로 깃거하더니 이제 남중으로부터 오매 신령이 어찌 알리오• 내 목메어 대답지 못하매 다만 눈물만 나리우도다. (……)

다시 앞외-도 바라보니 세 아히 무덤이 누누하도다. 살아 업의(업마?) 슬하를 띠나고 죽으매 엄의 되와 다르도다. 장부의 강한 애 스스로 녹는 줄울 깨단지 못할로다. 옛 내 갈때륜 생각하니 그대 지게앞에서 우더니 이제 내 이에 오매그대 어디로 도라간뇨. 살아서 이 번하야 죽으매 도라오니 한조각 나무신주로다-가던날 산 사람이 어이써 여기 묻렀난고• 이제 내 와 보니 군이 능히 알오미 있는가. 기리 슬품과 설음윤 잇고 깊이 한 우홍(줌) 흙에 감초였도다. 살아서 시로 생각하더니 도라오매 눌로 더브러 의의하리么

나무 그립자 지게에 당해매 의심컨대 그대 오는둣 하도다. 바람잎이 흑 웅직이대 그대 소래륜 듣는둣 하도다. 세해를 경영하야 한귀를 짓지 못하도다. 이제 그대를 위하여 장황이 이룰 지으니 이생에 친이 천속에 믿지 못함인가.

오직 원하나니 그대 신령 내집융 보전하게 도와 능히 외로운 아들로 하여 공 시러공 성 입하게 하고, 다시 모든 아해둘율 도와 벙없이 양솔케 하리로다.

그대 도라기고 내 홀로 있으니 이 생애 무엇이 줄거우리으 다만 도라정: 납율 기다려 그대로 더브러 영고몰 한가지로 하리로다. 신령이 그이를 물을가. 실로 내 충정이로다.

위에 인용한 例文은 모두 남성이 여성에게 보낸 편지, 또는 남자가 여성을 위해 서 지은 祭文이다. 이 글을 쓴 남성둘온 漢學의 대가들이요, 또 편지를 받는 분돌도 한학에 무식한 여성들이 아니아 그러나 여성에게 주는 균이매 한글로썼던 것이다.

한글은 여성의 성세한 강정을 표현하는 데 척합한 표음文字이기도 하지만, 냥성이 여성률외 성정융 l 해하고, 그 정서에 맞도톡 표현하는 떼에도 ;씌절한 글;Xt이다‘ 그러기에 위에 안용한 연지냐 흉文의 표현도 여성당게 성세, 간곡한 떼가 있용응 알톡하여 금l앙 알 수 있다. 휴히 秋史의 연지에서 주옥할 것윤 아내에 대한 호갱파 흔대말야마. 아내를 당신이라기가 거북하니 〈거계〉라고 아내가 있는 장소흉 아내외 ftlW으로 쓴 것안에, 내 il. 어렸올 셰에도 어릎률이 쓰신 영청이라는것융 기억하고 있다. 秋史는 행字암혈로얀 유영한 것야 아니다. 지긍 냥아 있는 한율혐지의 까l필도 대단히 훌륭하다.

온푼에서는 언급하지 않았A냐 여성이 남자에게 &낸 연지도 달자는 한즐l 냐내용응 어혀훈 한품푸가 섞여 있다. 이는 한달펀지릎 &는 여성이 얼마냐 한운지식이 풍J암한가흩 설명해 준다. 그 일혜로 죠선 맡기의 純姐의 한어나언 *王大~가 충청도 암행어사에커l 내란 펀지가 짧따하고 있다. 그 첫어리 갚 여기 안용하여 창고에 야바지하겠다.

충청도 앙행어사

전 교리 신귀조

근해 대 대소가 염희하고 기강이 해야하여 얀요로 걱l씌l지간에 요히려 옐뱅이수하는 일야 있는록 하융며 밖으로 도수신과 수명중에 풋융 망자히 요긍하여 생만에 이해하는 자7}- 없는 풀흩 어쩌 알리요. 너로써 충청도 어사훌 삼나나 에l 요톰.;xJ기 사폭파 강이 종켜융 7}-얀히 강추어 융혜 플 끼 ;<1 지 맡고 척녕 커행하여 죠7}외천혀 않기는 뭇흩 쳐바리지 알고 한가지냐 혹 옹연이 치찰치 풋하커냐 순사업닉하는 자가 있용흑 혹영앙상하는 혜파흩 연치웃할 것야니 얼혹써 이 갤하고 포한 아래 조옐한 것파 장야 상셰 채답하여 써둘지라.

(中략하고이 편지의 末尾는 다옵과 강다. )

효옐파 학이지앵융 툴는 것융 화라셔 계하고 생읍외에 연로도 웰체록 업찰하라.

흥주 흥추 명씩 셔산 한산 육천 제천 보령

한글은 이란 질제생활의 수단에서만 아니라 운학활동에 있어서도 여성의 천유물처렵 되었었다. I펴房을 무대로 한 수필 • 가사, 그리고 궁중을 우대로 한 日記뾰의 이른바 풍중문학(방대한 년픽션 : 안현왕후천 계축일기 r한중록」 등)은 작가가 모두 여성들이었고, 독자충도 여성이 않았다.

그런가 하연 남성들이 지은 한글소설들의 독자는 역시 여성이 철대다수였다는 정도 주옥할 만한 사실이다. 수펙 종을 헤아리는 〈고대소설〉은 한글로 씌어졌는데 거의가 작자마상이다. 그러나 이란 소설들을 지윤 사랍들은 남성이요, 그들은 행字 위주의 생활을 하는 지식안들이었다. 천하는 말에 의하연 〈남산골 샌닝〉들이 중국의 소설(漢字作品)들을 입수하여 이를 우리말로 번역 번안하여 궁중을 비롯한 良

豪의 부녀자들에게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마. 남산 알대에 잘고 있는 이들은 신붐은 양반이나 벼슬올 얻지 못한 가난한 자들로 공부만 하는 지조있는 선비(士〕들안데 조석의 끼기를 위해 한글소설을 썼먼 것이다.

〈남산골 샌님〉뿐 아니라 문학, 특히 소설에 관심을 갖고,또 이 방면의 재능이 있는 남성들이 여성독자를 의식하면서 소설을 창작도 하고, 중국작품을 번역·번안하였던 것이다. 현존하는 樂善齋의 수많은 한글소설들은 이렇게 생산된 것이다. 여성들은 한글소설의 생성·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이니, 역시 한슬문화의 수호자라고 일컬을 수 있다.한글소설의 효시라고 불려지고 있는「홍길동전」의 작가 許,은 당대의 당당한 사대부로서 液詩人으로 국내·중국에까지 알려졌고,한문소설도 여러 편 지어서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한문으로도 자유자제로 詩도 짓고,소설도 창작할 수 있는 許痛이 구태여 한글로「홍길동전」을 지었다는 것도 역시 여성독자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또「구운몽」「사씨 남정기」의 작가 金於꼬도 양반이요,관료로서 한학에 조예 깊은 지식인이었다. 비록 그가 한글로 소설을 지었다 하더라도,그의 문학관이나 사상 둥은 淡字로 서술했다.『西抑溫筆』이 바로 그 책 인데,그의 선각자적 인 國學觀(한글을 써 야 한다는)도 한글이 아닌 한자로 표현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어머니를 위해 서 하뭇밤 사이에 한글소설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尹씨부인은 한문실력도 대단했다. 아들 둘을 모두 어머니가 혼자 가르쳐서 과거에 급제시킨 실력여성이어서,비록 한문으로 소설을 지었다하더라도 능히 읽을 수도 있고, 감상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西能가 어머니를 위해서 한글소설을 지었다는 것은 여성을 의식했기 때문인 것이다. 이는 한글은 곧 여성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올 설명해 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윤씨부인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여기 몇 마디 부연하겠다. 윤氏 부人은 청상과부로 아들 둘(金萬座, 萬ffi)을 대성시킨 훌륭한 어머니이거니와 특히 約!£은 유복자로 길렀고, 형제륜 학문과 德과 엄한 교훈으로 교육한 한국의 대표적인 어머니像으로 존경 할 만하다. 萬ffl은 어 머니의 한평 생을「큐氏行狀」이 란 글에 소상하고도 요령 있게 서술했는데, 이 행장도 한글로 썼던 것이다.

여인의 행상으로 이것과 쌍벽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季氏行錄」이있다. 이는 金約-基의 손자인 金春淨이 그 母夫人의 평생을 한글로 서술한 행장이다. 그러니「못氏行대국」을 쓴 ©해의 從^이 바로 匕If (소春澤의 號)이고, 「季氏行錄」의 주인공 季氏夫人은 바로 못氏夫人의 손자며느리가 되는 셈이다. 季氏夫人은 훌륭한 집안의 며느리로 시조

모.시부모 兩代를 받들고, 아래로 여덟 아들과 세 딸,도합 11자녀를 몸소 길러낸 탁월한 부덕을 갖춘 한국의 대표적 어머니요,며느리像이기도 하다. 이는〈한국女性의 傳統像〉을 이야기하는 이 글에서 더욱 한글과 깊은 관련이 있기에 여기 잠깐 언급해 두는 바이다.

3 因房歌辭와 여성

한글문화의 주역인 여성들이 漢字에 무식했기 때문에 한글에만 경도되 었 다는많을 다시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와 반대의 측면을 고찰해 보려는 것이다. 이미 西而의 자당인 못氏夫人의 漢文실력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지만,조선시대의 이름난 여류 시조시인들이 한문을 몰라서 한글시조를 창작한 것이 아니다. 黃眞伊나 梅窓 같은 波女들은 시조는 물론 漢詩도 남성의 작품에 못지않은 것을 많이 남겨 놓았다. 好:幽堂 金氏나 貞一奸 南氏같은 여인들도 한문에 유식하였으나 주옥 같은 한글수필올 남겨놓았다. 한편 簡®野 許座强나 季玉峰 같은 여 인들의 작품으로는 지금 漢詩만이 전하고 있으나, 이 들이 한글올 폄시 하여 의 식 적으로 한글작품의 창작을 기피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불행히도 그들의 한글작품이 전하지 않는 것뿐이다.

漢字는 힘들고, 한글은 쉬워서 여성들이 한글을 수호·애호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이를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요는 한글문학을 창작한 여류들이 반드시 換字에 무식했었다는 상식을 시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한글문학의 독자 역시 여성이 많았지만,이 여성들이 절대적으로 漢字에 무식해서였다는 상식도 시정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四房歌辭의 발생과 그 발전과정을 살펴보겠다. 間房歌辭는 內房歌辭라고도 하는 여류문학으로 국문학사에 서 詩歌文學의 主脈을 이루고 있다. 이 규방가사는 일반적으로 英祖時代,영남의 소백산맥 문화권을 중심으로 한 四房女人들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문화권을 중심으로 규방가사가 발생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영남지방의 문화의 주류는 士林派에 의해 형성되었고, 이는 말할것도 없이 남성중심, 漢字 위주의 문화였던 것이다. 이 사림파문학은 조선 중기까지 활발한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期黨의 패배로 정치적

질권을 상실한 채 그 문학활동마저 쇠퇴 하기 시작했다. 사림파문학의 쇠퇴는 곧 中人文學의 발흥으로 이행되는 것이 문학사적 추세인대 영남의 경우는 중인계충의 문학활동이 활발하지 못했었다. 사림문학은 완만하게 쇠퇴일로를 걷고 있을 때에, 비교적 시간의 여유가 많은 여인들이 이 사림문학을 이어 받게 된 것이다. 영남지방의 규방여인들은 조선 중기까지 경제적 여유가 있었으므로 換文學 지식의 수준도 비교적 높았었다. 따라서 故:字로도 창작생활을 능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季徵進,季玄逸의 母夫人 張氏(선조31년,1598〜숙종7년, 1681) 같은 여인은 어려서부터 『小學J]『史略』 등을 비롯한 漢학공부문 하여 뒤에「的髮詩」「疏前(時」 등의 換詩를 지어서 지금까지 그 작품이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영남의 여인들은 남성(士林)들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街文學을 받아들여서,그것을 의식적으로 계승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지 문학활동올 해야 하겠다는 충동에서 비롯한 것인데,이 충동이 한글과 영합하게 되면서 규방가사의 창작에 착안했던 것이다. 한글은 여성의 부드러운 감정·섬세한 정서 둥 규방생활에서 일어나는 애환올 쉽고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양반계 층의 부녀자들은 서책을 대할 여가도 있었고, 破閑삼아 筆說을 당겨 놓고 심회를 그릴 만한 실력과 마음의 여유도 있었다. 이들이 況字보다 나은 한글의 효용가치를 인식하면서부터 국문가사의 창작을 시도했던 것이다. 예컨대 이 지방의 학자요, 시인인 이 補의 자당 權氏가 지은「宣飯歌J가 그 좋은 예이다.

또 이곳 부녀자들이 破文學으로부터 국문가사의 창작으로 이행·계승하는 가공의 구실올 한 것은 戒女歌辭라고 할 수 있다. 규방가사발생 초기 에는 주로 戒女를 목적으로 제작된 가사가 많았다.조선왕조의 여성교육은 幽閑貞靜의 嫌德을 함양시키는 데 주력하여 그 교과서로서『內訓』『女四班』『女則j『女落y『女訓』『女範』 등의 단행본을 漢文本, 護解本으로 보급시켰던 것이다. 先菊 朱時烈의 1T戒女안』는 이런 여성교육의 교과서를 바탕으로 하여서 쓴 한글 교재 였었다. 이 밖에도 작자미상의『戒女書』,『女敎傳』 등이 나와 戒女歌辭의발생·발전에 영향을 주었고, 英祖 이후에는 이 가사가 성행하여 부녀교육에 전용되기에 이르렀다. 이 戒女歌辭가 규방가사의 발생·발전의 모태가 된 것이다.

규방가사는 애초에 戒女를 목적으로 했으므로 주로 여성교육올 위한 내용이었는데, 점차 여성들 자신의 생활감정을 표출하게 되었고 또 세태변천에 따른 그녀들의 의식세계를 표현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첫단계의 여성교육인 계녀가사의 내용은〈事兒姑〉〈市君子〉에서 시작하여〈接資容〉〈胎敎〉〈治産〉둥 근 이십개조의 조목을 가사형식으로 서술했다. 우선 이 초기의 예로 鄭氏家 소장의 「誠女歌」를 들지않을 수 없다. 이「계녀가」는 형식이 가사체로 되어 있을 뿐이지,그내용은 先i『戒女密』보다도 더 한문투가 심 하고,따라서 관념적 냄새가 진하다. 예는 註에 인용해 둔다. 3) 삼백句에 달하는 長歌인데 그내용 전체를 통하여 볼 때〈부자집 맏며느리〉,그것도 문벌 좋은 가문의 여인만이 할 수 있는 조건들뿐이다. 결혼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아내〉나〈어머니〉로서의 할 일은 일언반구도 언급한 데가 없다. 오직 마지막 結語에서

皮午至月 念穴日에 桃天之節 되었구나

效®供 資主府에 理所를 맞어보니

理然한 저거동이 幻神에 我促일세

沈ffita弟 君子迎요 功名_ 當貴相이

好-所的望 마쳤으나 立家其人 어찌할고

牌傑은 使令이라 手足과 같으니라:變 이 다르나마 그도 또한 털류이니

살들이 거두어 恩成를 益施하라

(……)

奉我君子 하는道와 敎整子女 하는道는 너이듣기 策促하야 아즉이야 다못한다.

라고 했으니, 이는 『戒女』 事夫條에

여자 지아비 섬기는 중에 투기 아니하는 행실이 으뜸이니 백첩을 두어도 볼만하고 첩에게 어여삐 하기를 자식같이 하고(……)

라고 한 것보다 더 疏隔한 감이 있다. 이 가사는 유교사상에 철저하여『女郡I』이나『女四』에 한 유식한 여성의 작품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가사가평민의 부녀자들에게 전승되면서 여성의 본능, 인간성 존중의 현실적인 문제가 주된 내용으로 변모되어 간다.

가사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이 변모(혁신적 발전이랄까)는 일견〈기형적인 戒女라고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기형적〉이란 말은 종래의 전통적 여성교육관에서 볼 때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좋은 예로「괴똥어미傳」이라는 가사체의 紋市的 작품올 들 수가 있다. 전반부는 작가 자신의 결혼·治家의 경험담이고,후반부는 가공의 주인공「괴똥어미」를 등장시켜 쉬운 말로 해학과 기지를 구사하여 독자에게 흥미를 돋구어 주면서도 여성교육의 구석구석까지 빠짐없이 교훈하고 있다. 일언반구도 허술한 데가 없다. 이 가사는 앞에 든「戒女歌」보다 원씬 평민적이다. 그렇다고 양반적 호흡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니다. 이 가사의 존재가치가 여기에 있는 것으로 여성문학이 양반게충에서 평민충으로 옮아가게 하는 교량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흥미〉있다는 것과 쉬운 우리 말의 구사, 기발한 비유법은 딱딱한 관념적 교훈에서 문학으로 접근할 수 있는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4)

4)「괴동어미 傳」에서 및 귀 절율 인용한다.

-客을 따서 누에치기

전답(田密) 얻어 농사(段市)하기

매公 맞처 힘써 벌면

가산(家産)이 초성(超强)하다.

고은 의복 더져두고공당치마 둘러입고

가지의륜 굵게 길러

채마도 유족하다.

개륜 치며 닭율 처시

장에 나가 팔아다가

저녁에 불켜놓아

새 벅밥을 이 이 하고

알알이 헤어먹고

푼푼이 물아내니

(……)

이상의 것은 전반부의 한 대목이다.

(……)

시집으로 오는날에

가마문에 내달으며

눈읍 던지 휘-!:으며

행동거지 (行政-껸止) 해연 C5S然)하다.

허다 구경 빈객(資客)군이

뉘아니 오면할가

삼일읍 갖지내니

행실더욱 망칙하다.

담에 옵라 사람보기

문얼고 엿보기며

마루전에 춤뱉기며

바람벅에 코물기와

등잔(燈送;)앞에 불끄기며

화못가에 불조기와

어른말씀 깃달기며

어린아해 수수께끼

일가친척 말전주며

이웃 부인 숭보기와

젊은 종년 서 방질과

늙은 종년 노구질이며

아는체 시비하기

전수하여 일삼으며

행주치마 불대기며

고은의복 기류질제사음식 주전부리

탕기대접 일저즐기

비껴서서 이잡기와

물에 누어 낮잠자기

달이 있고 방자(放怒)하기

발이 있고 악담(惡談)하기

허다중에 웃음웃기

서방앞에 옷벗기와

(……)

이것은 후반부〈괴동어미〉의 행실을 묘사한 것이다.

이「괴똥어미傳그과 同a의「쬬婦歌」는 이름은 戒嚴한 것 같으나 내용과 표현은「괴똥어미傳」과 以하다. 언뜻 보기 에 잡졸한 표현같지만 교훈의 효과와 동미유발에 있어서는 사실적 문학에 될씬 접근하고 있다.5)

5) 『幻取j의 一筋을 인용한다.

(……)

온날질쌈 하라면

어느개가 짖는고나

놀가위 잡을적에

원수보둣 눈쌀이야극지극적 뒷통치며

뒤적뒤적 이잡는다.

재사읍식 차릴적에

어른보나 아해보나

이모동이 저모통이

손을 넣어지어내며

남는 찬을 쭉쭉하네

조석(朝夕)에 사람가면

함박조박 두다리며

부엌문에 들락날락

묻는 말도 대답없이

(……)

늦은 아침 다된 후에

눈부비고 인어나면

짓적고도 어렵도다.

다리꼭지 쑥쪽나고

젖통이 벌건하며

허리통이 석자이요

이마릴은 부형이고

치마끈이 넉자이라

뒷통수에 새집짓고

코구멍에 끄림앉아

다음으로 형식은 장편가사이며, 내용은 소설적 구성을 하고 있는 「老處女孤獨間氏傳」을 여성문학사에서 간과할 수 없다. 戒女를 주제로 했지만 앞에서 언급한 가사보다는 비약적인 발전올 했기 때문이다. 天迎의 고아 노처녀가 年晩하기까지 출가할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마침내 단신으로 술병 하나를 들고 적빈한 남자를 찾아가,단간방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시집살이를 하여 成家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대목은 平康公主가 出宮하여 적빈한 〈바보 溫速>의 집으로 가서 溫述과 성혼하여 남편을 출세시키는 모티브와 酷他하다.

이와 같은 결혼에는 정중한 의식도, 화려한 혼수도 없다. 戒嚴한교훈과 전통적 관습에 대한 반역이오, 정통의 파격이다. 이 시집살이에는 고부간의 갈둥이나, 부부 사이의 어색한 눈치 같은 것도 없다. 그리고 夫人之五IS나 七去之惡, 三從之道, 三不去 같은 거추장스런 제 약도 없다. 오직 하나의 인간인 아내로서 인간적인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이에 이르면 戒女歌辭는 양반의 內房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平民歌辭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전환, 발전하게 된 것이다.

소설적 구성을 가진「老處女孤獨間氏傳」이 서정적 가사인「老處女歌」로 이행되면서 노처녀의 恨, 곧 여성의 恨을 노래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전환이다.「老處女孤獨間氏傳」은 그 부제는〈福整禍淫錄〉이라고 붙일 정도로 교훈적인 사명을 면 것이지만,그 전반부의 시집 못 가는 노처 녀 의 웠을 노래 한 것은 뒤에 나오는 노처녀를 비롯한 일반 여성들의 恨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서정적인「老處

女歌」는 이제 戒女라는 목적의식은 완전히 거세되고 말았다. 이여성들의〈恨〉은 규방가사 이전의 여인들이 漢詩로도 혼히 노래했다. 이른바〈四怨〉이 그것이 다. 독수공방하는 여 인들의 원한을 노래하기도 하고,남편의 무능력, 혹은 出征한 남편을 기다리는 恨,그리고 시집살이의 고역 등등을〈湖怨〉이란 주제에 담아서 노래했다. 漢詩의 예를 몇몇 들어 보겠다. 扶安枝로 유명한 梅窓의 詩에「自恨」「四怨」「自傷」「閱中怨」「自恨薄命」등의 詩가 절대 다수에 이르고 있다. 이런 題 외에도「春愁」「秋夜」「秋思」「夜坐」「閑居」 등의 詩들도 결국은 園中의 恨올 노래한 것들이 다. 이는 技女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기생이 아닌 여성, 예컨대 許頭重鮮외 漢詩에도 四怨의 詩가 더러 있다. 결국 여성들이 詩를 옳고,노래를 짓게 되는 동기가 거의 恨·怨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지성여인들의 湖中恨이 淡詩 이후 한글가사로도 많이 불려지게 되었다.

노처녀의 恨도 결국 이러한 間中怨恨의 詩脈이 여성 한글族에게 이어져서 여성시가의 주류를 이룬 것이라고 생 각된다.「老處女歌」의 一節을 註에 인용해 둔다.6) 40세의 노처녀는 좀 과장이지만,은근히 해

6) (……)

답답한 우리부모 가난한 좀양반이

양반인체 도를차려 처사가 불민하야

괴망을 일삼으니 다만한딸 늙어간다.

적막한 빈방 무안이 적료하게

혼자앉아 전전불매 잘못이뤄

혼자 사설 들어보소

노망한 우리부모 날길러 무엇하리

죽도록 날길러서 잡아쓸가 구어쓸가

인황씨적 생긴남녀 복희씨적 지은 가취

인간배필 혼취함은 예로부터 있것마는

어떤처녀 팔자좋아 이십전에 시집간다.

남녀자손 시집장가 떳떳한 일이것만

이내팔자 기험하야 사십까지 처녀로다

(……)

거울다려 하는말이 어화답답 내팔자여

갈데없다 나도나도 쓸데없다 너도너도

우리부친 병조판사 한아버지 호조판서

우리문벌 이러하니 초목군생 다즐기네

두견화 만발하고 잔디닢 속닢난다.

삭은바자 경쟁하고 종달새 돋우뜬다.

춘풍야월 세우시에 독수공방 어이할고

원수의 아히들아 그런말 하지마라

앞집에는 신랑오고 뒷집에는 신부가네

내귀에 듣는바는 느낄일도 하고많다.

녹양방초 저문날에 해는어이 수이가노

초로같은 우리인생 표연히 늙어가니

머리채는 옆에끼고 다만 한숨 뿐이로다.

긴밤의 짝이없고 긴날에 벗이없다.

앉았다가 누었다가 다시금 생각하니

아마도 모진목숨 죽지못해 원수로다

학을 구사하면서 양반. 좋은 문벌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그런데 노처녀를 내세워서 여성 전반의 恨을 노래했다. 이는 곧 여인본연의 자세이기도 한 것이다. 남•녀는 반드시 배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자연을 들어서 비유한 것이다.

「老處女歌」와 비슷한 恨의 노래로「斑婦歌」가 있다. 독수공방의 恨으로서는 쌍벽을 이룬다. 슬픈 여인상의 대표는 청상과부일 것이다. 노처녀는 해학적인 여인상이지만 특히 양반집에 태어나 양반문중에 시집가서 과부가 된 여인의 한탄은 하늘에 사무치고, 땅이 꺼질듯 한숨뿐이다. 긴긴 밤을 달래기 위해〈映燈올 높이 달고 언문古 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으니 역시 한글소설이 유일한 벗이었던 것이다.

7) 「 姆歇」의 一節

(……)

삭발위승(〈倒盤為借〉當) 하자하니

시집도 양방이오 친정도 품관(〈品官)이라.

가문(家門)을 헤아리니

삭발위승 어려워라.

아마도 모진인생 못죽어 원수로다.

도로혀 다풀치고 다시생각 마자하여

영등을 높이달고 언문고담 빗기들고

소현성록 보노라니 화씨석씨 진행이라

열녀전을 들고보니 반첩여도 날과 같다.

오동추야 긴긴밤에 전전불매 잘못들어

난간을 의지하여 혼자말로 하는말이

이팔청춘 늙어가니 어느시절 다시불고

장장추야 긴긴밤에 동리할미 불러다가옛말로 벗을삼아 밤새우자 언약하니

고할맘 흉악하야 청춘소년 백말되면

다시 젊자 못하리라. (……)

여성의 恨을 노래한 가사가 지금 無名氏 作으로 다수가 전하고 있다. 그 제목만이라도 열거하면 대체로 그 내용올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四秀想思曲」「期友만懷曲j「思親歌」「思弟歌」「相思陳情夢歌」「想思回答曲」「怨恨歌」「恨別曲」둥둥이 모두 여성의 作이요,또 여성의 恨을 노래한 것이다. 참고로「恨別曲」의 ᅳ節을 註에 부연해

둔다.8)

8) (……)

인간의 일개여제 당한이별 어이하리.

그러나 자연인정 바래나니 그곳이오

생각하니 군자로다. 작작한 저양류는

우리님과 동성이오 청청한 저도리는

나와함께 동성이라

춘삼월 좋은시절 두나무 서로 향해불빛을 희롱하니 사람이 무엇인대

초록만도 못하는고(……)

(……) 얌전하신 우리군자

심산절을 찾어가서 글공부 하시는가

풍정있는 우리군자 강남풍경 구경가서

시주로 놀아신가 활발하신 우리군자

청루미색 불러놓고 감흥으로 놀아신가

구곡간장 생각나니 천만고 맺처있고

열두시를 생각하니 백천지 지리하다.

(……)

규방가사가 戒女歌辭에 서 출발하여 「괴똥어미전」「노처녀 고독각시전」을 거쳐 마침내 여성들의 일반적인 감정을 노래하는 여성의 노래로 전환하면서 평 민들의 민요, 그 중에서도〈시집살이 노래〉와 쉽게 접맥되어 장편민요의 성격을 띤 규방가사가 여인계층에 성행하게 되었다.

早婚으로 어린 남편에게 시집온 장성한 여인의 시집살이는 오로지 고향의 친정 만을 그리게 하였으니 思親歌類를 발생 케 했고,무능·무표정한 남편에 향한 불만, 시어머니,시누이의 표독한 학대에 대한 반발,시집살이의 지나친 고역 등등이 노래로 표출되면서 여성의 시가, 곧 규방가사는 폭넓게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 하여 규방가사는 戒女에서 완전히 벗어나 개인적인 .身邊蜓息로 변전하게 되어「여자탄식가」「청춘과부가」「수심탄:愁心膜」등 역시 여성의 ‘度을 노래했다. 그리고〈아내〉로서의 烈이나 孝가 아닌 남녀의 사랑으로 발전하여 相思所懷類의 노래 가 많다. 이와 같은 노래들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여성민요인 <婦語〉와도 관련을 맺었고,또 사설시조의 문제와 표현기교와도 횡적인 교류가 있어 규방가사는 내용에 있어서 혁신적인 발전을 한 셈이다.

한문적인 교양에 서 도 완전히 탈피 하여 한글로 종횡두진, 자유자재로 표현하게 되었고, 유교적 교훈과 관넘적인 넋두리에서도 해방되었다.

계절따라 :效春, 花놀이에서 노래를 서로 주고받았고, 틈틈이 창

작한 가사를 두루마리에 써서 간직하기도 하고,편지도 자주 써서 보내고 또 받았다. 이리하여 한글을 생활화하게 되었다. 오늘까지 전하고 있는 山前할 만큼 많은 규방가사 중에는 진솔한 감정의 표현,자연스런 언어의 구사 둥 사실성이 잘 드러나 문학적 향기가 짙은 작품도 많다.

4 開化期의 여성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1800년대 후반에서부터 1910년에 이르는 약4, 50년간의 시기를 게화기라고 부르고 있다. 이 시기의 문학을 개화기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소설,시가의 주제가 개화사상을 고취하는 것 이었다. 세 태변화에 따른 의식의 표현은 역시 개화기를 맞는 부녀자들이 게화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견해를 한글가사에 담아서 발표했다. 이 가사도 규방가사의 범주에 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형식에 있어서 개화기 이전의 가사는 4.5조를 중심으로 字數가 加滅되어 있으나 개화기의 가사는 거의 4.4조를 엄수하였다. 4,4조의 定型으로 長歌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내용도 마음대로 늘릴 수 있었다.

개화기에 당면한 한국인의 지식층은 대개 두 갈래의 의식으로 설명필 수 있 다. 하나는 개 화계 몽에 적극참여하려는 의욕이요, 다른 하나는 무턱 대고 외 래사조를 받아들이는 것올 삼가는,이른바 斤今태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식이 여성들의 시가에도 엄연히 나타났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여류들도 대개 지성적인 계층인데, 이 계층은 과거의 지식계급의 성격에서 변모된 양상을 띠었다. 과거의 지식여성은 문벌 좋은 양반층이 었는데 이 계층은 보수성 이 강하여 특벌한 여인외에는 개화계 동의 일선에 나서 지 않았고, 오히려 평 민여 성들이 개화운동의 선봉에 나서서 신문명에 접하여 지성여성으로 자처했다. 그리고 과거의 지성여인의 한 부류를 형성했던 波族이 역시 개화 일선에 선 남성들과 교게하며 여전히 지성적인 여성으로 활동하게 되었으니, 개화기는 여성사회에도 일대전환을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조선왕조시 대에도 波流는 지성 여성이지만 신분은 천민이 었다. 이런 신분으로 사대부들과 교제하면서 문학과 예술율 창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개화기에도 이와 동궤의 여류들이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문벌도 양반이 아니요, 波流도 아닌 평민충 여성의 출현이다. 과거에는 문벌이 훌륭한 가문에서 어깨 너머로라도 공부한 여성

이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집안의 여성은 아무리 머리가 좋고 총명하여도 서책과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지성의 세계에 발올 들여 놓으려 해도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불가능했다. 기어이 詩나 노래,춤을 즐기려면 技生으로, 다시 말하면 천민으로 전락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개화의 바람이 불고, 常班의 구별이 없이 평등사회가 되면서 부터 이러한 장벽이 무너지고 말았다. 특히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교회가 서고, 외국 선교사들이 출입 하면서 평 민여성들의 출입이 자유로와지게 되었다(오미려 양반의 규수들은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고 교회나 학교의 출입이 부자구•로왔다). 배우고 싶고, 보고 싶었던 학문과 새시대의 문물에 호기심을 갖고 있는 여성,그 중에서도 영리하다고 선교사나 교회의 지도자에게 인정만 되면 돈을 주어 가면서 공부시켰던 것이다. 교회당이나 신학문의 학교에서 듣고 배우는 것이 모두 신기하기만했던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여 외국유학도 하여 선구자적 여성이 된 경우도 많았다. 이에 여성교육자 여성교회의 지도자, 여성언론인, 여류문인,여류음악인,여류화가 둥둥 지성여인을 배출하게 되었다.

개화기의 규방가사는 이러한 여성들의 초창기에 창작된 시가들인데 그 내용은 개화와 守按의 雨面性을 지니고 있었다. 곧 개화의 새 문물에 호기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면과,옛것을 지나치게 경시하는 喪主强性을 경계하는 면이 그것이다. 그러나 새 시대를 맞기 위한 자각과 새 지식의 획득을 위해 노래하는 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여기에 인용하는 것은 최근에 수집•정리하여 출간된『間房歌辭 1』(精神文化硏究院)을 底本으로 했다.

「학지가」: 작자미상, 永) II郡에서 수집된 것.

古今世上을 살펴보면서 영웅호걸 절대가인이 태어난 곳을 찬양하고 자기의 고장 학지촌을 찬양하는 내용의 가사로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당위성을 읊었다.

고금세상 살펴보니 영웅호걸 절대가인

인걸은 지렁이라 난데마다 유명하다

천하제일 낙양성은 인의예지 효우충신

세세왕도 되엇서라 도학초이 어데론고

(……)

시대는 좋다마는 대저천지 조화로서

우리 학지 소년들아 극성 하면 쇠 하나니

창고하다 웃지말고 번화경재 탐치말고

신려 하는 학생들아 수구안민 하자스라

구학도 괄시 말고 침선방직 세사람아아무또록 구식으로 시체너무 보지말고조선사업 이어내어무등히 좋은산수 너희마을 옥이되고

발음을 일기 바다 너희몸이 꽃이되야입신양명 되고보면 예의염치 금침속에

일춘광경 어떻할고 평지신선 여기로다

「권독가」: 작자미상,청도군에서 수집.

본가사는 독서를 권하여 어려서부터 독서를 게을리하지 말고 수양을 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세월은 流水 같으니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지 않으면 풍월 좋은 곳에서도 글을 지을 수 없으니 부지런히 학문수덕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내용의 가사이다.

차차소자 경수하야 권덕가를 경개하라

명심불망 잊지말고 시시때때 생각하라

무정세월 가련하다. 유수같이 가니니라

(……)

시추적우 추량하니 독서기가 이때로다

일절고듬 스승삼아 분골귀구 하자서라

너의부모 조화하고 너의선생 질기그날

어이그리 실어하고 어이그리 노잔말고

일어 일어 한잔전에 너의생각 너가하고

부대부대 잘일너라

「경세가」: 작자미상,울진군에서 수집

을사조약·한일합방 둥으로 나라잃은 민족의 슬픔을 원통하게 여겨우리 가 각성해 야 할 것으로서 문맹을 퇴치하고 서 양문물을 받아들여 개화된 조국을 만들고 독립운동의 선구자가 되자는 내용이다.

백일은 지지하고 녹음은 녹녹한데

청계상 벽장하에 초당에 깊은잠을

세계풍조 깨워내서 미국의 독립 사와

이테리의 건국전올 안상에 피여놓고

세세낭독 하은후에 조국강산 돌아보니

통곡할일 더욱 많다.

(……)

수구가 좋다할까 타국노예 되여서도

완고가 좋으리까 기왕을 후회하고

장내를 염려하며 일심으로 단결하야

독립군을 조직하면 무기가 따로있나

단결이 무기로다. 단결만 굳게하며

대항할자 없나니라 불러보세 불러보세

독립만세 불러보세 독립기를 높이들고

일제히 불러보세

「동뉴상봉가」: 작자미상,경북 달성군에서 수집

본가사는 여자들도 남자와 다를 바가 없는데 팬스레 여자들을 업신여기고 흉올 보니까 억울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다면서,이 억울함을 씻기 위해서라도 쌍육이나 화투노름을 하지 말고 몸을 바르게 가지고 어진 행동을 하며 나쁜 것을 경제하고 좋은 것은 권하여 동류들끼리 격려하고 우애있게 지내 보자는 내용이다.

동글동글 한둥어 리 일태 극이 생겨서라

태극이 찌쳐져서 천황지황 되였서라

(……)

좋을시고 소년동뉴 난초향기 비할손가

백발노인 동뉴들은 장기바둑 희통하니

석실동자 노는곳에 도치자리 석여 있고

(……)

슬프다 우리동뉴 녀자유행 부산법고

원부모 형제되면 동뉴분산 면할소냐

자조자조 반겨만나 담담하기 즐겨보세

변치마세 변치마세 우리정분 변치마세

동류들아 봉우오륜 모섭도다

「부인경유사」: 작자미상,安東지방에서 수집한 것임.금세기의 인간윤리가 무너져 있음을 한탄하고 H織五倫에 따라 언행을 조심하고 근검절약한 생활과 견문을 넓히고 모든 일에 성심을 다해 야 한다는 내용의 가사로 부인들의 생활태도를 계동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러한 광대덕남 부인설유 참괴하다

참괴하고 참괴하다 지식없이 간단하고육십년 견견문문 흥망선악 소연하다

(……)

여러분도 용양하고 내며나리 내의딸을

경계하기 위하여서 부인설운 한번하네

부대부대 허믈말고 한번갓다 읽어보소

재미는 없으나마 짓기는 힘들었소

글러도 내누새오 잘나도 내누새라.요만하면 좋을까

위에 좀 장황히 인용했다. 이 가사들은 최근에 영남지방에서 발굴한 것인데 작자들은 과거 (개화 이전)에 규방가사를 창작했던 여류들이라는 데에 주목이 쏠린다. 이 여성들은 바로 그 전대에 한문으로 문학팔동을 했던 전통을 이어받은 계충들이다. 다소 보수적인 여성이지만 개화의 기운에 접 하면서 조심성 있게 이 에 대처하려 는 태도가 진하게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가사가 개화의 선구적인 신여성들에게로 이어지면 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내용으로 비약하는데 이것이 창가로, 신체시로 발전하여 현대의 여류시인으로 계승되는 것이다. 요컨대 개화기의 여성들은 구습을 단호히 버리지 않고 새시대를 맞아 오직 勸學﹒普世의 전통적 주인의식을 강조했던 것이다.

5 결어

우리 문학의 역사를 2천 년으로 잡는다면 한글의 역사는 5백 년이

다. 그렇다면 한글문화의 수호자인 여성은 한글 이전의 천 오백 년은 非文化界에서 암흑의 생활을 계속했다는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유사이래 한국의 여성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예술생활을 했고, 문화를 창조·계승했던 것이다. 그것이 노래로,춤으로,또는 신앙으로,문화생 활은 계속했었다. 삼국시 대에는 여 왕도 있었고, 귀족충의 여성들은 문학과 예술의 주역도 맡았었다.

한글 이전의 여성이 非文化圈에서만 살았었다면 한글창제 이후의 역사가 증명하는 것처럼 그렇게 세찬 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일부 지식충이기는 하나 한글로라도 문화계에서 생활했기 매문에 한글을 직접, 또 폭넓고 깊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점에 주목하여 雜字文化(이런 표현 어떨런지?)에서 한글문화로 이행하는 여성문화를 규방가사의 발생·발전과정올 살피면서 이야기한 것이다. 여기에서 예로부터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여인상을 부각시켜보려고 했다.

시조• 가사의 창작과 그 계승•발전에 이 바지한 여성들의 전통은 개화기를 거쳐 근대문학·현대문학에로 이 어지고 있다. 현문단에 여류시인이 남성시 인보다 많고, 또 좋은 작품을 풍성 하게 생산하고 있는 것도 우연한 결과가 아니다. 그 문학이 경박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과도한 쇼비니즘에 빠지지 않는 것도 수세기동안 한글문화를 수호·애호한 여성들의 끈질긴 집념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긴 치마·짧은 저고리 위에 걸친 바바리코오트가 어색하지 않게 어울리듯이 한국적인 사고 위에서 건실한 외래지식은 잘 조화되고 있다. 오늘의 여성은 옛날의 漢字文化에 얽매이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서구식 언어나 그 문화의 노예도 아니다. 서양식 응접실을 거니는 행주치마의 여성은 더 돋보이며 우아하다. 한식 온돌방에 앉은 양장의 여인도 잘 어울린다. 요는 主人意識이 뚜렷하기에 외래의 교양·지식도 이에 흡수되어 조화의 결실을 맺게 하였다.

이젠 그들만이 한글문화의 주인이 아니다. 남성들도 그들과 동참하여 한글문화 속에서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閩範類를 통해서 본 한국여성의 傳統像에 대하여

O

鄭良銃

1 서언

조선왕조는 崇備序例을 國是로 하는 家父按制의 봉건국가였다. 그러기에

아낙네란 남편에게 다소곳하여,제 마음대로 휘두를 까닭이 없고 三從의 道가 있으니,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면 지아비를 섬기고, 지아비 세상 뜬 뒤에는 자식을 좇아, 함부로 제 고집대로 할 것이 없다. 아낙네의 명령은 중문 밖을 나가서는 안 되고, 도맡은 일이 란 음식차리는 일뿐이다.

아낙네를 내쫓을 일곱 가지 조건이 있으니,부모에게 不順커나, 아들올 못 낳거나,음란하거 나,시새우거나,못 고칠 병 있거 나,수다스럽거나,손버릇 나쁘면 내쫓는다.1)

1) 孔子回歸人依齡人也是欲無存湖之盤有三從之撞在家從父道人從失失死從于 無 所敢自途也.赦令不出閥門帶在饋食之間爾巴與獨有七袋不顧父母去,無子;E涅去何去看愿接去~宮去竊盜去.

위와 같은, 三從之出와 七去之惡이 적잖이 지배적인 사회환경 속에서 조선왕조의 여성은, 딸로, 아내로 그리고 어머니로서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三從之述와 七去之惡은 말하자면 여성율 규제하는 한굴레였다고 볼 수 있다.〈아낙네는 지아비에게 다소곳하다( 人伏於人)〉는 말은 陽剛 陰柔의 具의 원리로 물이한 여성의 특성을 단적으

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柔順과 究容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는 이〈伏〉이야말로 여성의 특성으로 여겨져 왔으므로 모든 四範類의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限想王活『內訓J] 卷:그 夫嫌革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보인다.

『女敎』에 이르기를, 아내가 비록 남편과 대등하다고는 하지만, 남편은 아내에게는 하늘이라, 별로 마땅히 공경스럽게 섬기기를 아비 섬기듯 해야 하니,제 몸을 낮추고 제 뜻올 굽혀 함부로 잘난척 말며, 오직 순종할 줄 알고, 감히 어기지 못할 것이니, 남편의 가르침과 경계를 聖經같이 알고, 남편 몸 귀히 여기기를 진주나 옥구슬같이 하여, 조심조심 제 분수를 지켜야 할 것이니,어디라고 감히 방자•하게 굴 것인가? 내노라 할 게 오히 려 없겠거니 무엇을 위세할 것인가?

남편이 어쩌다 허물 있거든 간곡히 諫하되 利哲로 풀어, 얼굴은 부드럽게, 말은 순하게 해야 한다. 남편이 만일 벌컥 성내거든, 성미 가라앉기를 기다려 다시 해하여, 비록 매를 맞더라도 어찌 감히 원망하며 한탄할 것인가? 남편의 소임은 마땅히 존귀하고, 아내의 구실은 낮은지라, 어쩌다 치거나 꾸짖는 한이 있더라도 이게 다 분수에 마땅하니, 내 어찌 감히 말대답하며 내 어찌 감히 성낼 것인가?

그를 의지하여 한평생을 늙게 될 것이라,하루가 문제될 수 없다. 조그마한 일이라도 반드시 알게 할 것이니 어찌 감히 저】 怒意대로 하겠는가? 제 주장대로 한다면 사람이 아니다.

(……)시집가는 것을〈돌아가다〉함은, 죽건 살건 그곳을 제 집삼는다는 뜻이니, 어쩌다 소란을 멸게 되면, 마소만도 못하니라. 집안올 일으키고 싶거든 和·順해야 하니, 어떻게 하면 和·順해질 것인가? 역시 공경에 있다.

女敎玄 妻雜玄齊, 夫刀嫌天, 禮常敬市 如其父爲, 卑明下活:, 母妄好大, 推知順從 不敢速背, 附其敎戒,如間聖經, 寶其身强 苦珠與理戰就a守 敢B縱葬. 己尙不有 何物敢侍 夫苦有過 委曲諫之 陳說刺香 和容餘辭 夫苦盛怒 促則復諫 雜被整齡 安敢怨恨 夫職當尊而奏爲卑 成歌成M 刀分之宣, 我爲敢答 我爲敢怒 籍以借老 四一日故, 織榮之必常換間,堅敢병免 콴則非人. (……)應旣s歸, 死生以之,苦是銳統, 馬牛不如, 故家之興 日和順, 何以致術 文在手敬.

이렇둣 부부가 비록 대등하다고는 하지만, 하늘인 남편을 아버지같이 섬겨, 옳은 말로 부드럽게 諫하다가,비록 매 맞고 욕 먹는 일이 있더라도 天好地卑의 分에 따른 의 당한 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에서는〈欲家之興日和與!明何以致j師又在乎敬〉이라 하여 공경 하는 마음으로 和順하여 집안을 일으키라는 것이다.

Pii은 하늘이요, 그 작용은 乾이며, 陰은 땅이요, 그 작용은 神으로 이것이 곧 남•녀를 뜻하여, 陰인 여성은 系요,卑라. .柔順﹒謙을 그 미덕으로 여 겨 ’남편의 허물을 •諫할 때에도, 혹 매 맞거나 꾸중을 듣더라도,참고,남편의 기분이 물릴 만하면 다시금 利密로 달래어 그허물을 관치도록 하되,성내거나 원망하거나,한탄치도 말라는 것이며,이 모든 것을 다 天竹地卑의 分에 따른 의당한 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딸로서,아내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아낙네의 길은 忍從의 길이기에 여북하면 榮啓期는,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을 그의 三樂중 第그의 樂으로 다행히 여겼겠는가?2)

2) 列子.天짧

孔子 앓 X 山 見 榮 양뼈 뾰 훌 빼;힘 활 而 훌 . ¥ L子 日先生何以 뽑혔 ? 夫生 홈빼 뾰 A 훌 홈 t 멍짧 A- 樂 t!!,. 5 갱 쩔 女 R 훌 홉 f훌 훌 !ß 二 훌 i!?. A生 꺼;용 日 R 껴 꺼;껄 짧柳홈 훌年九캐 꿇 三 業 따.

비록 이렇게 여자로 태어난 것이 남자로 태어남만 못하다고는 하지만,아버지에게,남편에게 그리고 혼자되었을 때는 자식에게 좇아, 일생을 마치게 되는 여자의 길에는, 과연 일방적으로 종속적인 길만이 있었던가? 한번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위의 夫嫌雄에서 맨 처음에〈女敎玄 妻雜玄齊〉라는 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혼히들 男好女卑라 하여 남성은 존귀하고 여성은 비천한 존제로 천시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妻難S齊〉나〈夫刀嫌天〉이라는 귀절에서〈남편은 아내의 하늘〉이 란 말이 가장 중요한 말이 겠으나,〈아내가 비록 대등하다고는 하지만〉이라는 말은〈솟75®키〉이라는 말의 전제가 된다. 인간은 타고나기를 똑같이 타고났다는 생각을 표현한 말로 여겨진다.

이제〈齊〉로 타고난 여성이 어떻게 하여〈不齊〉케 되었는가? 그리고〈不齊〉를〈齊〉로 복귀시킴으로써 여성은 얼마나 자신율 내실화하고 가정 운영의 兩授인 부부의 일원으로서, 그 일익율 어떻게 담당하고 있었던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閏範類의 제작의도

陽과 陰,즉 남성과 여성은 화합에서 각자의 본령을 발휘하며 동시에 相補相助의 관계를 맺게 된다. 이때 남·녀가 균제를 이룬 결합관계를 맺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만남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기에『內訓』의 夫婦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남편이 현명치 못하면 아내를 거느릴 수 없고,아내 가 어질지 못하면 남편을 섬길 수 없다. 남편이 아내를 거느릴 수 없으면 威後는 무너지고, 아내가 남편을 섬길 줄 모르면 의리가 없어지게 된다.

이 두 가지 가 그 用은 한가지다.

夫不賢則無以御婦婦不賢則無以耶夫夫不御的;則成儀腹搜婦不耶夫則義理蜓關方斯二者其用一也.

위의 말에서 우리가 중시해야 할 점은 바로 상호관계이다. 즉 가정이란 남편과 아내가 마음과 힘을 모아 공동경 영하는 보금자리이기에, 균제를 잃은 鼓行的인 관계로는 결코 원만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御嫌할 줄 아는 현명한 남편과 市夫할 줄 아는 어진 아내와의 만남이야말로 균제를 이룬 이상적인 부부의 만남이라 할수 있올 것이다. 그런데

요즘 남성들을 관찰하건대,한갓 아내는 거느리지 않을 수 없고, 威儀란 整齊하지 않을 수 없음만 알아, 아들은 가르쳐 글로써 다잡되,딸은 남편을 섬겨야만 하고, 부부간 예의란 것은 지켜져야 함은 등한히 여겨, 아들만 가르치고 딸은 가르치지를 않으니 또한 피차 計救에 가리움이라.

祭今之君子徒知妻歸之不可不御威儀之不可不整故訓其男坡以傳殊不知夫主之不可不事禮義之不可不存也但歡男而不敢女亦蔽於很此之數乎.

위의 글은, 남성들이 한갓 아내에 대한 統率慾·威儀 세우기만 알아서, 아들은 가르쳐 글로 다잡되, 딸은 안 가르치니, 그것은 아내에 대한 統率慾과 1봤儀 세우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자기네 남성을 남편으

로 섬겨야 하고, 부부간 예의 지킴을 위해서도 여성올 가르쳐야 함을 망각한 처사임을 말한 것이다. 이렇게 아들만 가르치고 딸은 안 가르친다는 것은 부부의 균제된 화합을 깨뜨리는 치우친 생각에서 나온 과오임을 통탄한 내용이다. 특히 남편 섬길 일과 부부간 예의의 존속 필요성을 모른다는 옛 여인의 완곡한 표현에 다시금 감탄케 된다. 이렇게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이것을 다소곳이 남녀의 조화•균형을 위한 본연의 모습에서, 그러나특히 남성을위한 필요성一남편을 섬길 줄 알고 부부간 예의의 존속—으로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은 가정운영의 일익으로서 남편을 섬길 줄 알아야 하고, 부부간의 예의의 존속을 위해서는 반드시 아들이나 마찬가지로 딸에게도 교육을 베풀이야 한다는 것이다. 이만큼 교육의 필요성이 간절하기 때문에

紙에 여덟 살에 비로소 글을 가르치고, 열 다섯엔 학문에 뜻을 둔다 하였으니 유독 딸이 라고 하여 이 에 준하지 않을 것 이 무엇인가 ?jffi 八歲始敎之班 十五而志於學笑 獨不可依此以爲則敢.

하여 마침내는 딸도 아들 가르치는 원칙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외치고 있다. 이것은 여성에 대한 지배욕, 위신세우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반려자의 교육을 등한시하여 마침내는 가정의 균형까지 잃게 한남성에 대한 고즈넉한 힐난이기도 하고, 남녀 智德의 균제를 주장하는 반려자로서의 건실한 進言이기도 하다. 이 내용은 班氏女誠로 四想王居의『內訓』과 四門軟範에도 인용되어 있다.『間門正言』에서도

아동보단 살-1 더 잘 가르쳐야 그 부모 되셔 봇그립지 아니-꿍고남의 집에 격악이 아니 되리라 흐여시니 그 부모가 엇지 명심치 아니 言랴.

라 하여 知育을 통한 심성의 함양을 외치고 있다.『光明寶鑑』序에도

네는 부인이 논어와 효경과 네셔와 소학을 아니 비호리 업사매대의는 통하여 절정의 부인이 만터니 이제는 보는것이 음탕한 스설곳 아니면 요괴로온 말삼이오 한갓 덕성을 표f 이니 비록 일만번을 의논한들 심험의 무어시 유익하리오

하였으니,여성교육의 필요성과 아울러, 특히 여성교육이 중간에 폐해져서 그 密接이 큼을 말한 것이니,심성의 함양을 위한 經典공부의 필요성을 특히 강조한 글이며,秋谷老身으로 이름을 밝힌『닉훈』에서도

디져 스람이 외물에 믈리어 본심을 직히지 못하면 그 남은 것은 빅사가 다 볼 것이 업나니라. 옛적의는 부인도 학문을 하야 의리와 고금을 통하더니 아국에 이르러 언문이 나서 편하고 쉬운 고로 부인이 학문을 폐하고 언문으로셔 셔사통정을 하니 가법과 셰속이 어찌 퇴폐치 아니하리오.

하여 여성교육의 필요성올 같이 주장하되, 특히 조선조에 와서 폐하게 됨을 애달파하고 있다. 한글의 보급으로 經랴의 원전을 읽지 않아 家法·世俗을 퇴폐케 함을 애석히 여기는 것이다. 그러 나 무엇보다도 다부지게 주장한 것은 四惠王居의『內訓』에서이니,그 序文에 천지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타고 五常의 德을 머금고 태어난 인간이 玉·石, 關﹒艾의 구분이 있을리 만무하건만,그 구분을 짓게끔 하는 것은 바로 修身의 잘잘못에 있음3〉을 말하고, 太奴(와 炎®를 총명으로 君夫를 섬긴 여성의 거울로, 迫己와 似﹒單單姬﹒飛燕會을 악녀의 본보기로 들고서는,

3) .R.人之生黨天地之靈合五倫之權理無王若之難而有間艾之具何則在於修身之度米盧矣.

이로 보건대, 治亂·興亡이 비록 남편의 思에 달렸지만, 또한 아내의 잘잘못에도 달렸으니 여자를 교육시키지 않올 수 없다.

由此觀之治亂興亡雖關夫主之瞬間亦槃婦人之賊否不可不敢.

라 하고, 특히 다음과 같이 잇고 있다.

여자들은 그렇지가 않아서, 한갓 길쌈 곱게 짜기 만 제 일로 알고 덕행의 높옴을 아지 못하니,이것이 나의 늘 한스러이 여기는 바이다. 그리고 사람이 비록 타고나기를 淸胡 通幅하게 점지되 었다 하더라도 聖人의 학문을 접하지 못하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귀히 될 것 같으면 이는 원숭이를 씻겨서 갓 씨움과 같다.

女子不然徒甘紡的之組細不知德行之迫玄是余之日恨也且人雖束前通不見理學而一旦迪玖-則是沐猴而冠.

윗글을 통하여,여성들이 기껏 길쌈의 租細 따지기에나 만족하고, 덕행의 높음을 아지 못함을 안타까와하고,아무리 天性이 淸通하더라도 성인의 학문을 접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귀히 됨을,마치 원숭이를 씻기어 갓 꾀움과 같다 비유하면서,후천적인 교육 없이는 제 본심을 놓쳐 버려,마침내는 玉湖의 바탕을 石父로 전락시키는 비참을 저지르게 됨을 말하여 후천적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옥이니 돌이니,또는 湖이니 쑥이니 하는 구별은 남녀의 性에 의한 게 아니고,오직 학문을 통한 修身의 盡·不盡을 말하는 것이다. 그 修身여하에 따라,작게는 자신과 집안,크게는 나라의 홍망을 좌우하게 되니,유순하고 다소곳하면서도, 그런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여성 교육을 걸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균제를 이루어 야 하는 반려의 수양은,또한 집 안에서 자녀교육자로서의 母性의 자질함양 면에서도 큰 비중올 차지하고 있음을 상기하지 않올 수 없으니,여성교육의 필요성은 더욱 강조되는 터이다. 딸의 교육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들의 교육에 있어서도 열 다섯이 되어 바깥 스승을 구하기까지 아들의 교육을 맡는 것도 역시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후천적인 교육의 不及으로 玉湖이 石文로 전락되는 애 달픔을 屋正코자『內訓』四範類는 제작되었던 것이다.

3 四範類에 담긴 교육내용과 실생활에 있어서의 여성의 지위

I 昭蔥王后『內別I』

E 言行2 孝觀3 婚禮4 失姆5 母儀6 數睦7 廉儉

E 宋尤奄『放女t!fJJ

序 I 市父母 2 求夫 3 市明姑 4 陸兄弟 5 訓子 6 奉祭祀 7

接資容 8 策粧忌 9 懷言 :〇 節用 I: 勤職 12 街病 13 衣服故食

나 御奴傑 나 貸受 16 床型·花郞• 何保 다 要戒 18 古普行者 m

in 秋谷老身『內訓』

I 嫌道 2 心志 3 容貌 4 氣象 5 動止 6 言語 7 德行 8 風度

9 職染 10 規換0 •父母·與姑 2 班夫 3 奉祭祀 4 友愛 5 訓子 6 御牌與 7 性品 8 接資客 9 辨惑) 敗

IV. 王佳品正『閏門軌純』

z 女敬總論2 恨紛德3 動女工4 潔飲食3 正婚的6 般內外

7 司五日姑8 敬夫子9 alii子孫10 途妾股I I 和協妹12 迫巫就

13 尚的烈叫民言行

V 內部!﹒均純

1) 皇明仁孝文皇后『內訪Il .fl

序與子婦序z 女或卑弱2 事父母3 司i= y] !di 4 耶夫言和技妹

6 奉祭紀7 訓男女8 母儀9 管家10 待客11 守的12 夫婦13

敬順14 婦行15 母心16 曲從17 立身18 學服19 學位20 早

起21 德性22 修身23 恨言抖動勵25 節儉dfff站起27 歇著

28 訟行29 遷善3支妥

2)『女學敢告』

3) IT'的人耍~.fl

z 禁姑忌2 禁驕慢3 恨言4 奢侈多施芯6 接至1客7 牌僕

ifjlj御

4)『閩中正言』

1 孝 2 友 3 事與姑 4 奉祭祀 5 接第:容 6 御牌,敗

5) 『光明資鑑』

序 I 治心 2 修行 3 抑親 4 陸族 5 對人(특히 夫婦) 6 節用

7 處雜 8 速財 9 辨惑 10 交陳 11 御下 12 對客 13 他患

6) 『要訓補遺』

1 祭祀 2 治心 3 怒 4 强普 5 陸家

7) 『內則』

1 乾剛•神柔 2 七情 3 攻罰이상은 목차만을 열거해 본 것인데,PS惠王居는 왕비가 될 며느리를 위해서, 丈:薄은 시집가는 딸에게,그리고 秋谷老身은 며느리에게 閱門軟範은 두루 天下女性을 위해,끝으로 內訓·婦範은 며느리에게 준 글이다. 四惠王居를 제외하면 閱範類의 저자는 다 남성인 셈이다. 적어도 위에서 든 예에서는.

그리고 그 내용은『小學』『列女』『女敎』『明鑑』둥에서 따온 眼思王居의『內訓』과,이것을 바탕으로 한 內訓婦範,특히『女學斑按』는 『闕門正言』『閱訓J『婦人要成』『三網行攻•』『列女傳』, 범영의『列女

傳』,曹大家의『女戒』둥에서 요긴한 것을 모아 만들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여성의 敎紋교양서는『小學』, 四따와『女誠J3(後街 w四授),『女論語』(唐 送 苦限), 『內訓』(明 仁孝文皇活授),『女範』(明 朱天球m~) 등이 며,조선조 전기 에는『列女傳』『女敎n『明鑑』둥이 있었으나 推繫하므로 그 요긴한 것 만 가려 七帝으로 반든 것 이 바로 昭思主后『內訓』(1475)이고,『女誠』『女論語』『內訓』『女範』둥에서 英祖 때 季德끊가『務解女四만』를 엮었으며,그 나머지 것은 또한『內訓』에서 인용한 것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우선 限忠또居『內訓』을 볼 때, 사람의 속마음의 표현인 언행을 삼갈 것을 첫째로 들고, 다음이 百行之源인 孝를 들었다. 세째로 婚禮를 든 것은 婚禮에서 부부가 생겨나기 때문이며, 네째가 부부니 거기서 자식이 생기고, 그 다음에 어미노릇할 일이 생기기 때문이며,다음이 집 안의 화목을 위해 數陸올 들었다. 王居 紀始을 경계하는 글이고 보니,무엇보다도 청럼검소로 자칫 빠지기 쉬운 사치에서의 구제-I- 위해 이 런 순서로 엮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太荒의『戒女판』는 그 순서가 이와 다르다. 서문에 이어 우선,집에서 어버이에 孝하고, 시집가서 남편 섬기고,그로 인해 맺어진 시부모를 섬기고, 형제 화목할 것을 타이르고,부부 사이에 태어난 자식의 교육과, 조상 제사 받들기, 손님 대접하기 둥 시집가서의 인간관계를 원만히 할 것을 가르친 다음,시새우지 말 것을 누누히 강조하고,말조심·아껴쓰기에 이어 실지로 병간호,옷 짓고 음식 만들기 와 아랫 사람 거느리기, 꾸어 주고받기,무당·화랑·중올 가까이 말라는 경 계를 하고, 다시 중요한 경계로 마무리짓고 옛 어진이의 행실을 적어 거울삼게 하고 域文을 붙였다.

이처럼 위에 든 여러 四範들은 적잖이 여성의 忍從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여,남존여비를 내세우면서도, 남편의 잘못을 바로잡을 책임을 떠 맡기고,게다가 매 맞고 욕 먹 더 라도 유순히 참으라 하고,질투를 최고의 악덕으로 알아 혹 百妾을 얻더라도 그릴 만하게 여겨 걸코 투기치 말라든지,아무리 재능이 있더라도 여자는 女도 이외에 다른 학문이 나 예술분야에는 결코 손대지 말라든지, 요즘의 여성으로서는 당장 에는 납득. 수긍이 가지 않는 대목도 적지 않다. .內訓類에서 가장 꺼리는 여성의 투기란 어찌 보면 남성의 부정에서 비롯되는 상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정결은 다잡지 않고 그로 말미암아 빚어

지는 여성의 투기만을 일컫는 것은,대부분의 四範類가 남성의 손에 만들어져서 적잖이 남성이 바라는 여성상이라는 점에서 오는 맹점임을 그저 넘겨 버릴 수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여성 자신이 아무리 文才가 있더라도 남에게 눈치젠세라 숨기기만 한 점 등도 문제가 된다. 그러나 속이 비었을 때 邪心이 끼어드니 공부로써 본심을 이지게 하고, 아는 것 만으로는 참암이 될 수 없으니 실천으로 참앎을 만들라든지, 위함이 없는——목적이 없는——시혜를 하라든지 등등 심성 수양의 지침서로서의 四範類의 구실은 컸다고 본다.

이렇게 四範類는 여인의 정신생활을 규제하다 못해 억 압까지 하였으나, 역사적으로 볼 때는,우선 封商에 있어서 內命府와 外命府에서 는 남편과 벙행되는 封成을 夫人에게 주어 우선 外命府에서는 鼓敬夫人·與夫人·被夫人 둥둥의 浪位가 私家 여인에게도 그 남편의 判書•參判·參筋S에 대등하게 주어졌고, 이럴 때,여성도 남성처럼 告身式이 있었고, 여성 자신을 위한 印位도 가졌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 까지나 남성에 대하여 종속적인 관계를 지닌_ 封街임은 두말할 것없으니,여성 자신으로서의 능동적인 封稱의 획득이 아님은 말할 것없다.

內命府에서도 대비·왕비·세자빈을 비롯 內人들도 그 封街이 다음과 같이 달랐다.

王:정1품 종1품 정2품 종2품 정3품 종3품 정4품 종4품

粉 與人 I旧儀 被從 附容 被容 四波 被述世子宮: 종2품 종3품 종4품 종5품

皮約 皮波 承微 四訓

등등이 그것이다.

재 산분배 에 있어서도 出藏女에게까지 衆子(맏아들 외의 여러 아들)와 같이 均分하여 주어 경제적인 뒷받침을 하여주었고,혹 수절할 경우에는, 시집 식구의 눈칫밥을 먹지 않게 하였다는 점 등도 잊어선 안 될 여성들의 튼튼한 지위로 볼 수 있겠다.

비록 家父技制의 봉건사회라고는 하지만,孝의 윤리로 역시 好長 行使者로서의 할머니,어머니, 또는 宗婦의 여권은 인정되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렇듯 부부가 대등 균제를 이루었었던 遺風으로 선비의 집안에서는 부부간에 서로 똑같이 경어를 쓰고, 남편에 대하여 여성도 자기률〈나〉로 쓰고 있다든지, 시집간 뒤에도 친정의 姓을 그

대로 지니는 점이라든지 둥둥은 남편의 姓을 따르거나, 남편의 姓에 자기 姓을 덧붙이는 나라의 여성들과는 근본적으토는 다른 지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4 선비의 부인들

남성과 나란히 한 가정을 이루는 두 날개와 같은 여성의 교육은, 균제하게 태어난 천품을 후천적인 교육으로 도야함으로써,교육의 不濟로 인한 부부간의 被行性올 보완 匡正하여,후천적인 不齊를 齊케 하여 여성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 향상시켜 준다. 그리고 어린시절자녀교육의 담당자로서의 母性 교육의 필요성은 위에서 이미 언급한바다.

여성 교육의 억제로 자신의 위세와 우위성을 고집 하려다가, 반려 자의 지적 수준을 저하시키고, 그 손에 잔뼈가 굵어질 자녀들의 앞길이 암담해질 것올 우려하여, 현명한 아버지는 딸의 교육을 등한시하지 않았고,현명한 남편은 知己가 될 수 있는 반려를 자기의 진실한 짝으로 생각했던 것이다.우리의 역사 가운데 女敎의 中衰로 PS惠王居『內訓』이외에는 여성계 에 학술적인 저술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되었지만, 肅·英 이후의松攻한 학문의 홍기로 供制泉 與周의 어머니 令潔閣 冷氏의 詩작품이전하고 餘否 有木의 부인 溫虛閣 季氏가 1FI1 間敢按J1『淸四博物志』自 作詩의 한글對譯, 부친의 묘지명 등 방대한『强虛I뙤稿J륜 저 술하였고, 例西敗 松의 母夫人 師朱堂 季氏는『胎敎新記』를 지었음을 한 에로 들 수 있겠다.供與周의, 그 어머니를 그린「貞敬夫人行狀」에 의하면 다옴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우리 外故 세 분이 모두 남유달리 그 문장과 행실이 뛰어났건만,우리 어머니가 더욱 슬기로와 글을 좋아하고 학식이 여느 사람보다월등하였으므로 湖察公(외조부를 가리킴)이 언젠가 한탄하시기를내가 아들 셋을 두었다만서도 네가 아들 못 된 것이 한이로다 하섰다. 우리 外付祖母 季夫人이 유난히 우리 어머니를 아람치로 사랑하셨건만 늘 말씀하시기를, 계집애로 글 잘하는 사람은 혼히 갈자가사납다는 이유로 말리셔서 우리 어머니가 글울 배울 수 없었다. 다

만 때때로 여러 형제를 따라서 그 읽고 외는 것을 곁에서 듣기만 했을 뿐인데 시집가기 전에 벌써 經안를 널리 섭 렵하여 중국의 上古時代로부터 우리나라 역사의 得失·治亂의 발단과 君子小人 進退의 발자취에 이르기까지 꿰뚫어 밝히 알아 남음이 없었다. 말만 냈다하면 바로 특별나서 남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부모·형제 아닌 다른 이와는 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비치지 않았다.

吾 氏三人皆蔚然有文行,而先批尤聰 好在 誡皮絕,市人. ~.自祭公當歎日吾有三丈夫子猶恨汝不為男.吾外骨祖母李夫人尤鐘愛先 常日女子能文眉宇者多薄命以故樂先批不得學 佳時時從諸兄弟筋,問其所fitt誦未及群已博涉經結自上世以迄建立來符失治亂之前品君子小人進退之跡舉貫穿無造出話輒卓然游人.然非與父母昆弟ZE末,做一及文字.

위와 같은 대목에서, 훌륭한 세 아들을 두고서도 이 딸마저 아들 못된 것을 원통해 하였음을 볼 때,아들보다 더 총명한 딸을,아들과 같이 마음껏 피도록 가르치지 못함을 애달파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무렵 인식으로는 글 잘하면 팔자 사납다는 이 유로 글을 못 배우게 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아들의 교육보다는 딸의 교육을 등한히하는 편임을 부인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렇건만 여러 형제를 따라 어깨 너머로 배운 글이 시집오기 전에 이미 經籍과중국 上古로부터 우리 나라 역사에까지 밝았음을 알 수 있는 동시에,부모나 형제 앞에서는 女I의 틈틈이 학문의 토론도 가능했음올 짐작하게 된다. 대개 손녀의 교육은 할아버지 또는 從祖父가 맡았다고 한다. 혹은 아버지, 또는 어머니에게 배우기도 하였다. 이렇게 정식으로 내어놓고 가르치진 않았지만, 令器間은, 남편과 詩를 주고받아 律時• 哀篇• 硬韻을 당장에 짓지 못함이 없었으며, 數理에도 밝아 독학으로『數理稱 』의 해법과 들어맞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런 것을 다음 글이 증명하고 있다. 역시「貞敬夫人行狀J에 의한다.

아버지가 詩 짓기를 좋아하시되, 늙마에 고을살이 하실 때 더불어 화답할 이 없어, 이에 억지로 어머니께 화답하게 하면,어머니는 오히려 냉큼 짓지 않으시고는〈平灰을 모르는데 어쩌지요?〉함에 아버지가 唐 律詩 한 권을 주시니 열흘이 못되어, 律詩는 長流이고

硬韻이고 당장에 짓지 못할 것이 없었지만, 끝내 성큼 쓰기를 즐겨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께서 우리들에게 명하여 옆에서 글을 훔쳐오게 하시니 전후로 얻은 것이 수백여 편이 었다. (……)다만 수학을 꽤좋아하셔서 언젠가「器學啓蒙」올 본 일이 있었는데, 그「平分法」「約分法」「正負法(+ -」「句設法(三角형의 면적내기:)J「和救法(혼합비례법)」을 보시더니「이다지도 번거롭고 멍청하단 말인가?」하시며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을 써서 셈을 하셨다. 그 뒤 중국인이 엮은『數理稱雜y이란 책을 얻어 보니 똑 들어맞지 않음이 없었다.

先考古為詩蛻放在那巴無可與唱和者乃強屬先批.先批猶不肯日奈不識平仄何. 先考以居律詩一卷與之未浪旬即能作律詩長那回部無不立就然終不肯乎自作字.先考命不會~ll 從銬竊:空前後得數百除篇. (......)nff頗好岱脈管 學啟蒙見其:平分約分正負句股和坡之術曰若是主t 毀且II位耶即自為法以靜之.後得中國人既築數理和j越無不如合契者.

거듭 말하거니와,供與周의 외조부는 다른 세 아들보다 유달리 슬기로운 자기 딸의 賊倍를 사랑하고 아꼈으며,한껏 기껏 길러 주지 못하고 남의 집에 주어 그 슬기를 그만 묻어 버릴 것이 안타까왔던 것이다.

그리고 같은 行狀에

우리집에 시집오신지 십여 년이 되도록 어머니가 글 아는 줄 아는 이가 없었다.

歸我家十餘歲 人未有知先況識안者.

하는 대목에서 그녀의 自守의 굳음과 含承之美를 엿볼 수 있다.그러나 집에서 어깨 너머로 배우고,슬슬 익히고 부모와 형제 앞에서의 연마가 쌓였기에,남편은 그녀의 화답을 强前했을 것이고, 平IK을 모른다고 잡아메는 아내에게 唐律詩 한 권율 주자, 열훌이 못되어 律詩고 長篇이고 硬韻이고 못 쓰는 게 없었다는 대목에서, 그녀의 재주도 재주려니와, 남몰래 길러 준 친정의 蒸陶의 힘과, 남편의 아내에 대한 소망의 한 가닥이 집안 살림의 안정 외에 知·情으로도 통할 수 있는 진정 한 반려를 원하는 게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과, 얼마나 그 마옴이 간절하였으면 唐律詩 한 권을 주어 平K을 익히게까지

하여 자기에게 화답하기를 强屬했던 것일까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역시 집 안살림 이외에도 지성과 정감으로도 통할 수 있는 반려에 대한 남성의 욕구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남성의 소망에 부응할 수 있도록 친정에서는 선비의 딸을 키웠음을 알 수 있다. 바깥 스승을 가려 공공연히 가르치진 않았지만, 남성의 진정한 반려로서,균제를 이룬 아내가 되도록,현모가 되도록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학에 있어서, 正數,好數, 주分,約分,句心,和^!交에 대해자신이 好法을 연구하여 물고, 나중에 보니 중국인의『數理正雜』과꼭 맞아 딸어졌다니,그녀의 수학적인 머리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동시에, 요즘 우리 네의 눈으로 볼 때는,여자였기 때문에 한 아까운 수학자가 묻히고 만 것이 안타깝기 짝이 없다.

恐虛間 季氏(後有本의 부인, 命有染의 형수)는 그 공부가 깊고 아는 게 많아서『級虛間稿고라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으니 그 내용은『尙四博物志』r四四後書』, 명作詩의 한글對譯 및 그 부친의 묘지명 등이다. 집안 살림을 알뜰히 해 나가는 주부로서 자기의 생활경험을 곁들인 여성생활의 百科를 『 f出後書』에 엮었고, 그녀가 친정에서 익힌 학식올 기초로 시동생 命有染룰 가르쳤고, 집 안 살림의 틈틈이 남편冷有本과 더불어 독서와 詩作·저술 둥에 그 여가를 할애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 귀추를 구한즉 이 모두가 我生하는 先務요, 治家하는 要法이라. 진실로 일용에 권치 못할 것이요, 부녀의 마땅히 講究할 바이라. 드디어 이를 써 序를 하여 집안의 딸·며느리들에게 준다.

고『問間繼害』序文에 밝히고 있다. 한편 그의 남편 冷有本은 그의 『左蘇山人文染』卷一「江居雜故」十五首 중 :3째首에서

山妻赤解注蟲魚 經濟村家世不疏

明月遊洲同夢在 迎從整澤續巡害

라 읊고, 그 注에

餘內子抄樹沒書 各分門턴 無非山居日用之要而 而丈:詳於草木鳥 之

性味.余為命去:名日間問:位白鹿代1控告哀輯一家告別之i龍)l}始自控

天隨笠海浪:在故去.

이라하여 부인 强虛閱 季氏가 많은 책을 섭 렵하여 그 중 일상생활에 요긴한 것만 모아 一家판를 이루었기에 陸德裝의『註澤按按』를 본떠서 아내의 저서명을『四閣後2U라 붙여 주었음올 밝히고 있다. 더군다나 r左蘇供』卷- 11張面에서 u張에 걸친「百花酒新熟 普而賦長句」라든지,24張「役松前韻 示內子」에

斗約束指昆華涼若陸春光已發皇

晨2助將翔儀鄭士牛衣對泣笑王章

鈕功節居三單位候姐味花浪百種香

交道豆豆間多快惱1i11心民筒是仙方

이라고 하고 끝에

內子每歲我雜四萬 採百花醜酒以供命

라 덧붙인 것을 보면, 해마다 누에 쳐 길쌍하여 김 필을 짜고,온갖꽃 따다가 百花酒를 빚어 자기에게 이바지함올 느긋히 여겨 그것을 詩로써 아내에게 준 바이니,이로써 그들의 사랑의 표시가 또한 詩로 도 서로 응수됨을 확인한 셈이다.

憑虛l迎李民는 평안감사 季昌器의 딸로 그의 어머니는 刺I倍의 고모였고, 그가 출가한 餘氏맥은 당대의 유명한 실학자의 집 안이 었고, 그, 친정 또한 학문이 깊은 집이 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타고난 재주와 후천적인 친정에서의 교육,게다가 출가한 뒤에는 부부간의 학문상의 球磨로 이러한 깊은 학문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이다. 懸虛閱 季氏는 베 짜고 술 빚고 밥 짓는 틈틈이 이 모든 저술을 해내었던 것이다. 季氏의 부군인 冷有本은 『林閩十六志』로도 유명한 有染의 형으로 아우만큼 벼슬과 학문에서 알려져 있진 않지만,朴別:類은 그의 「館在益集山人J4)이란 글에서, 늘 그가 분개하는〈文必兩漢 詩則盛班〉의 투를 벗어나서 자기 시대 자기의 眞을 쓰고 읊어야 한다는 그의 문학론을 詩로 적어 보낸 것을 보면, 그들이 서로 문학의 세계에서 통했었

4) 『燕巖集』詩 , p.87.

고, 그런 남편과의 정신적인 공감으로 아내 季氏 또한 그런 실학정신에 입각,자기 경험에 의해 아낙네의 살림의 길잡이를 『閏閥;在書』로 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師朱堂 李氏(1775〜내21)는 樹!俗의 어머니로 恐虛閣 季氏에게는 바로 외숙모가 된다. 師朱堂 季氏가『胎敎新記』를 지은 것은 1800년, 그에 대한『音務』가 아들 鄕依에 의해 주석된 것은 그 이듬해였다. 「胎敎新記普務序思」5)에 의하면,被人은 시집오기 전에 이미 경전을 익혔고, 육예와 百家夜를 읽었는데,부군인 木川君 또한 절둥한 학문을 자부하던 터라, 부부가 화락하게 옛 성현의 뜻올 밝히며 曆掠,律民, 紋索에 이르기까지 같이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木川君이 먼저죽자 例俗가 어렸으나 어머니는 덕이 갖추어진 사람이라 그 가르침이 겸손하면서도 모나지 않았고, 法iA 또한 아들의 될 성싶음을 믿던 터였고 또한 被人이『胎敎新記』를 지음에 크고 작고간에 모두가 그 자신이 微驗한 바라, 분명히 믿을 만하여,건성 이론대로 말을 펴나간 글과는 다름올 지적하고,정작그의『胎敎新記』에 대하여 깊이 들어가서는

5) 『 遠文錄』 卷1, pp.1 124-130

의 글은 아비의 행실과 어미의 바름을 내세워, 아기 가진 어미로 하여금 順正항을 따르게 하여 바야흐로 그 감화를 발게 함올 본뜨고 있다. 세상에 그처렵 널리 연주하고 꼼꼼히 변별한 것이 많지 않으나, 기 가 그형게끔 한 것이 아니니, 의로운 회포, 넓은 학식은 옛사랍도 따률 이 없다 하겠다6)

6) 『 遠文錄』 卷1, p.127

고 칭찬하고, 정작 그 〈存心〉에 대한 말을 마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의사를 데려다가 약을 먹으면 병을 낫게 할 수 있거니와, 아들의 용모를 아름답게는 뭇하고, 깨끗이 쓸고 물 뿌린 방에 가만히 있으연 족히 安胎할 수는 있어도, 아거의 바탕을 좋케 할 수는 없다. 아기는 펴흩 하라 되며 피한 마음올 따라 動하니, 그 마음이 바르지 웃하연 생기는 아기도 不正할 것이니, 아기 가진 여자의 도리는

마음먹기를 공경스럽게 하는 데 있다. 혹시라도 사람올 해치거나 짐승이라도 죽이 고 싶은 마음을 먹지 말지니,奸詐·貪務·姑毁하는 생각이 가슴속에 싹트지 말게 한 뒤에야 입으로 망언을 않고, 얼굴엔 부끄러운 빛이 없게 될 것이니, 어쩌다가 잠시라도 공경하기를 잊는다면,이미 그 피는 그릇되느니라.7)

7) 『 園文錄』. pp. 127-128.

至其支官存心也目 延控股縈足以此搞 不足以笑子貌 訊室IPII足以安胎 不足以良子材于自血成 而血因心動 其心不正 則子之成亦不正 且在歸之道 教以存心 母成有害人﹒ 殺物之意.奸詐﹒食竊﹒結盟之念不恆星接芬於胸中然後口無妄言,面無欽包若斯須忘敏巴失之血矣.

申綽의 序와 園의 』胎教新記音接序 」이 붙은 『 胎致新扭句大全』의 부록으로莓誌銘並序,眩,胎致新記~句話解7t~毛有! r胎設新起』(固立圖書館소장본) 참조.

한 대목에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胎敎를 근본으로 삼고 師敎를 차라리 지엽으로 여기는 그녀의 생각은『胎敎新記大全』2張 右에

아비는 생산하고 어머니는 기르고 스승은 가르침이 한가지거니와, 잘 고치는 의사는 병 나기 전에 손올 쓰고,잘 가르치는 사람은 낳기 전에 가르치니, 스승이 十年 가르침이 어미 胎敎 10개월만 못하고,어미 胎敎 개월 이 또한 아비 하루의 생 산만 못하니라.8)

8) 父生之 母有之 師敬之一也. 包聲聲喝治鈴朱病醫教老教於朱生 故師教十年 未若母十月之育 母育十月 朱若父一日之生.

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부인과의 부부에, 도의로서의 우정, 학문상의 반려, 정서의 공감에 의한 知己로서의 귀함을「師朱堂辛氏夫人墓誌銘J 益序에 申神:은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抑公以抗®之重 派道我之交 談討與秘 時味性術 香爲知己.

또한 어머니인 師朱堂 季氏의『胎敎新記』에는, 純廟元年(1801) 突面 3월 자일 突抑란 날짜가 적힌 아들 傾(뒤에 信라 고침)의 敗文과 班午(1810)秋 7월 旣望이란 날짜가 적힌 장녀의 敗文, 그리고 같은 皮午(1810)季秋 初吉이 란 날짜가 붙은 작은딸의 敗이 불어 있어, 어머니의 胎敎에도 불구하고, 어버이의 기대에 어긋난 자녀됨율 슬퍼하고 있으니, 그들이 저렇둣 스스로의 부족올 깨닫고 있는 바로 그 점이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 어머니의 胎敎의 덕으로 빚어진 겸양의 덕이 아닌가 싶다.

이 밖에도 朴問은 그의「仁室高强申氏行狀」에서

내 스스로를 다잡질 못하여 친구와 얼려 詩酒를 즐겼으되 대접할 거리 있는지 없는지를 물은 적이 없었건만,그대는 정성껏 마련하여 내 마음을 기쁘게 하기에만 힘쓰고, 그러고도 혹시나 거스릴세라 걱정했을 뿐 내 가 누구에게 주고자 하면 선뜻 따라,집이 가난하였지만 내겐 내색 하지 않았다.

내 평소에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그대와 鹿車를 끌고 고향에 돌아가 오막살이 엮고 부모님 모시고 어린 것들 어루만지며 평생의 즐거움을 어루어볼거나 하면, 그대 문득 흔연히 바로 제 뜻인 걸요, 제 가 어디 마련해 보죠 하였었지 !

그러기에 내 벼슬해도 그대 기뻐하지 않았고, 벼슬 그만두어도 그대 섭섭해 하지 않았으니(……)정말 생각과 마음이 꼬옥 내 마음과 들어 맞았었는데(……).

하고 애달파하고 있다.

申氏夫人과 朴間이 이렇게 의기가 相合한 것은,그 부인이 심성을 잘 닦아 嫌德이 있었고, 자기를 낮추고 참아가면서 남편을 받아들일 수 있는 관용성을 지니고 있었으며,또한 詩人을 이해할 수 있는 無慾한 아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남편에게는 온갖 어려움을 알리지 않고 홀로 꾸려 나가며,그는 오직 詩作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하고,자칫 여성의 허욕을 채워주다가 타락하기 쉬운 남성을 지켜 준것 또한 가날픈 채 굳건한 여성의 청렴한 心德의 소치라고 여겨진다. 朴別;源의「伯吸衆人季氏遊誌銘」에9)

9) 『燕娘集』 PP.50-51.

容激의 조부가 이름난 정승으로 先王時에 매양 卓茂故市를 들어 增秋하였건만, 그가 벼슬살 때는 한자, 한치만한 것도 자손을 위한 재산으로 기르지 않아 청빈이 뼈에 스며, 그가 돌아가는 날,집에는 열 냥 財産도 없었다.

하니,정승의 집이 이렇듯〈淸寒入骨〉할 수 있었던 것은,어진 남편

의 齊家의 心想이 작용해서임은 말할 것 없거니와,그 남편의 청렴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그 청렴을 마주 생명으로 알아 살아온 선비의 아내 의 마음가짐이 그 남편의 청렴을 떠받들어 밀고 나가게 한 저력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지?

그러기에 시동생 朴別:源은 묘지명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내는 옛사람이 쓰러져 가는 나라의 大夫에 비겼으니,그 기울음을 버티고,엎어질 것을 지탱하여,아침에 저녁을 견딜까 싶지 않은 살림에서도 능히 辭令·制度間에 스스로 서서, 깥끔한 나무새로 제사를 거르지 않고, 넉 넉지 못한 부엌 살림으로나 마,집안의 못거지(잔치, 모임)를 아름답게 하였으니, 어찌 이른바 約明盡淨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두는 자가 아니겠는가?

하여 쓰러져 가는 나라의 大夫에 비기고 마침내는 諸務策의 충성에 그 형수를 비겼던 것은, 그의 문장의 과장으로만 볼 게 아니라,조선조를 버텨 내려온 결백한 선비의 뒤에 숨어 든든하였던 그 선비의 부인의 정신의 고결성을 기리지 않을 수 없음에서 나온 게 아닌가 한다.

希范蔡彭亂은 그의 「宜人聯氏基誌銘」에서

平肢蔡彭服l有賢內佐目宜人前州韓民.

라 하여 자기의 어진 內性임을 대뜸 말하고 이어

男氏常稱之日 是鍾赤壁江山之英云.

이라 하여 장인이 늘 그 딸을 赤壁江山의 영웅의 정기를 일신에 모은듯하다고 칭찬했다는 대목을 보아도,그 아버지의 교육이 어떠하였으며,그것을 받아들인 딸의 영특함 또한 짐작할 수 있다. 그러기에

到民函賞之 說之猶丈夫子 有疑事必咨 雖興起而居 三日必 氏御家般而有法 子弟有過 或數月不敢見 蚊俊有拇雖小不貸宜人必婉容愉色從傍解之 興氏為之歸而從之.

라는 대목에서 그 아버지가 그 딸을 얼마나 기록하게 아들인 양 의지

하여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그녀에게 자문할 정도였음을 알 수 있는 동시에,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부드럽고 온화한 낯빛으로 그 엄한 아버지의 노여 움을 둥칠 만큼 여 자로서 의 유화한 미 덕도 갖추어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남편의 잇달은 출세에 대하여

居人按1不度日 夫子以小技鳴 君Klffi麻.

이라 하여 甲科에 붙고,湖堂·卷切올 거쳐 翰究i에 옮기게 된 것을 자잘구레 한 재주로 세상에 이름 날림을 자기는 두려워한다 하였으니, 그녀가 생각하는 대장부의 정작 할 노릇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남편이 다시금 南宮에 오르고 齡省을 거쳐 秘追에 옮기게 됨을 보고도 〈可以求外突〉라 하여 外職 구하기를 종용했으니, 시국의 변동을 예 측할 수 없으니 불더 미 에 들지 말라는 뜻이 다. 남편이 언젠가 바둑 두는 것을 보고

夫子之於文軍 未之究他. 盡以其我之於松突者移之 夫子不校 我與不朽.

라 하여, 당신과 나를 같이 불후케 할 문장에 대하여 아직 미진한 터에 어찌 그 아까운 시간을 놀음에 허비 하는가 애달파하고 있다. 한때의 심심풀이지 만 그것올 絶禁하는 아내의 태도는 자기를 낮추면서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바 있으니, 남편을 빗나가지 않게,자기 길로 복귀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는 사랑을 느낄 수 있다.

辯齋 季述居도 그의「亡契除被人益•志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0) 『明美堂集』 卷19, PP. 1045-1048.

吾契雜拘拘女士 然通故有識 否每迎市 試拘之 則微言其可否 聲盤中皺 君心以爲#所及 世稱才行不相兼 苦君裝則可調有行而有才者突.

한 대목을 보면,그녀가 얼마나 매사에 조심성 있는 여자이 면서도, 통달·명민하미 유식하여서 남편이 어려운 일율 당할 때마다, 그 可·否:룰 슬며시 말해 주는데 꼭꼭 들어 맞아 남편 자신도 그녀를 따를 수 없다고 여기게끔 하여,세상에 드문 才·行이 겸비한 여자라고 주저

없이 말하게 한 것은 결코 헛 말이 아닐 것이다. 역시 事齊 季班瓦의 「祭亡室文」11)에

11) 『明美堂集』, PP. 790-792.

吾前與友人約婚 君沒之前數月 間友人女有疾 系應君之成雜之世. 微以語君 君日 著家常得佳嫌邪 女雜疾必念 不爾又推尤故 及君沒而友人女赤天 然君之此言 丈夫所不能世.

한 것을 보면, 매사에 의연하여, 며느릿감의 병듦을 듣고도,내 집에 복이 있어 좋은 며느리 얻을 운명 이 라면 그 애 병도 나을 것이고,그렇지 않다면 누굴 탓할 것인가 했다는 것을 보면 남편의 말대로 대장부로서도 하기 힘든 말이다. 그 말이 나오게 한 그 마음이 말하자면 조선조를 버티어 온 저력이 아닌가 한다.

또 그의「先母被人波平못氏行思」12)에는

12) 『明美堂集』, PP. 979-985.

母雜不通書 誠大議重節 知恥 心雖慈 有時剛介過人 常若拙於事 間人言若不晚(……)然內甚晰 凡所不應知者一切不以經心 鼓所當爲鮮有關部.

라 하여 그 어머니가 글을 아는 분은 아니었지만 大我를 알고 절개를 중히 여기고 부끄럼을 알며,마음이 자애롭긴 해도 때로는 남보다 강직 介潔하였으며 늘 일에 拙한 듯하고,남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 듯하였으나, 안으로는 몹시 명철하여, 몰라도 그만인 일에는 신경을 안쓰고, 의리상 꼭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빠뜨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니, 그녀는 바로 사람이 글을 통하여 마음을 트이게 하고 대의를 께닫게 하자는 공부의 요체를,비록 글을 통해서는 아니지만,터득하고 있었음올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녀가 어려운 경전을 척척 읽어내지는 못했을지 물라도,국역을 통하여 大務는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며, 집안에서 자랄 때 몸에 배인 본심의 고귀함을 지니고 있어서 時空에 따라 처변할 줄 알았으리라고 본다.

알아야 하므로 배워야 하지만, 아는 것만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아는 것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비로소 참앎이 되기 때문이다. 선비의 훌륭한 아내는 알면 묵묵히 실천했던 것이다. 그러기에『四中

正言』 (목록에서는〈閣門正言〉,내용에서는 <閨中正言〉이라 있음) 序에

글흐논 남자 부인만 못하니 잇거니와 그러나 넷일을 모르면 슬거워도 그릇할 일이 만흐니(……)

라는 대목을 보면,『閨中正言』을 짓게 된 까닭을 슬거운 여자라도 무지하면 그릇할까 보아 가르치려고 짓는다는 뜻임을 알겠거니와, 글 한답시고 하는 남자의 행실이 글 안한 여자만 못한 이 있다는 말을 남성 자신에 대한 반성과 경각심으로도 볼 수 있고, 겉으로 형식적인 외기에 그치고 실천에 의해 참앞이 못 되는 헛암을 개탄한 것으로 보인다. 걸으로 자기의 암을 자랑할 기회도 명예욕도 가지지 않은 다소곳한 여자의 곧은 마음에는 오히려 실천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내심의 강인한 욕구가 그들의 암을 참알, 실천으로 승화시 킨 게 아닌가 한다.

谷 李班究의「故室端人 遊誌銘」13)에 보면

13) 『蘭各集』 卷十三.

那人有三于一女敬之皆有度而過女特般每躁作并臼輒引與共之夜又鴿燈授女工吃吃不已衣食必偏及家人而後;lt女日忍飢忽女子職也.故女常有的l色年十五未及勞忽符急疾死將飲~古人兒去:衣檻值百結不掩體.

윗글을 보면 아들 딸 할것 없이 법도 있게 가르치되, 특히 딸을 엄하게 다스려 물 걷기, 방아 찧기를 늘 데리고 익히게 하고, 밤이면 등잔을 켜고 부지런히 女工을 가르쳤고,온 식구를 입히고 먹인 뒤에야 말의 차지가 돌아오게 하고서는 배 끓고 추위 견디기는 여자의 구실이라 가르쳤기 때문에, 딸은 늘 주린 빛이 있었고 열 다섯에 시집도 가기 전에 急疾로 죽게 되 었을 때,노닥노닥 기운 누더기 나마 몸을 가리울 수 없었다 하니,선비 집 안의 규모가 깜냥대로만 살고, 허욕이 없어, 딸자식을 수도자같이 키운 이 정신이 줄곧 수백년 사직을 지켜온 참 저 력 이 아닌가 거물 생 각하게 된다.

그렇듯 딸을 엄히 다스린 어머니기에 쌔谷의 「故室攝人益誌銘」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且這終精神不乳 余間將永別 能無假乎 孺人日 生必有死 不煩恨世但老父尙在 始做為不孝目季兒年幼可念也兒與姆脫泣笑日常事雨幼過哀 察其色 無機微祖化意偽然而逝其明誠如此.

죽음에 다다라서의 침착하고도 초연한 그너의 모습,정신이 흩어지지 않아,永;fk이니 슬프지 않으냐는 남편의 물음에 태어났으면 죽는 거야 정한 이치인데 슬퍼할 게 뭐 있어요마는,늙은 아버지께 슬픔을 끼쳐드림 불효이 고, 막내 가 어리니 걸리지요 하며, 아들과 며느리 가통곡하자 웃으면서 누구나 다 그런 걸 월 ! 너무 슬퍼 말라 했다는 의젓한 임종의 모습,죽음에 대해 조금도 슬퍼하지 않는 그 초연한 모습은,지어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니, 그녀의 암이,실천을 통한 참암이, 그녀의 마음을 그토록 통달하고 툭 트이고 의젓하게 만들었던 것임에 다시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북하면,그 점잖은蘭 李述方의 입에서〈其明識如此>하다는 칭찬 아닌 참말이 나왔을 것인가? 그러니 그녀는 가난 속에 살다 가난하게 죽어 갔지만,그 마음만은 남편을 이해했고 남편 또한 그녀의 그런 미덕을 참으로 이해하였으니, 속마음은 이지고 평화롭게 살다 간 셈이다.

5 결어

우리의 옛여성들이 교육의 不及으로 不齊게 되었던 부부간의 불균형올 교육으로 되찾아, ᅳ家를 이루는 雨與 중 어엿한 일익의 임무를 다소곳하게 다하여 온 것은,胎敎에서 비롯되는 수도자와 같은 어머니의 규모 있는 存心의 교육의 덕이요, 그렇게 배운 선비의 딸이 선비의 아내되고, 어머니되어 수백년을 이어온 조선조의 저릭이 된 것이며, 이런 存心 위주의 정신교육은 오늘날 우리 여성 들의 속마음에도 면면히 흐르고 있다고 본다.

2

學際的 접근

韓國民譯 속의 女性原型像

—-序論的 此隊

李符永

한국의 여성은 전통적으로 어면 모습을 보여왔는가라는 커다란 명제 속에서 한국의 이야기 속에서는 여성상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밝히는 과제를 맡게 되었다. 이 과제의 두 가지 측면, 즉 한국여인의 전통적 像과 민담 속의 여성상의 발굴은 상당히 이질적 인, 심지어 모순된 관련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전자는 심리학적 의미에서 의식의 여성상을, 후자는 무의식의 여성올 주로 많이 다루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우기 한국의 전동적 여성상이 현대 한국에서 바람직 한 여 성 상으로서 투사되어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전제될 때는 여성상의 학문적, 객관적 부각은 상당한 난관에 부닥치게 되고 학문적 엄정성이 위협받게 된다.

그러므로 저자는 여성상 탐구를 위한 심리학적 작업에 수반되는 문제점올 먼저 제시하면서 민담에 나타난 여성원형상을 무의식적 여성상의 주된 표현으로 다루어 나가고자 한다.

이 논고에서 저자가 취하는 입장은 융 C.G. Jung의 분석 심리학적 입장이 며 민담 속에서 살펴 보고자 하는 것은 주로 女性性의 원형 Arche-typus des Weiblichen이다.

다음에 설명될 방법론적 전제에서 언급될 것이지만 본래 원형상이란많은 類話와의 비교를 통해서 추출되는 것이지반 본 논고에서능 그 첫 접근으로서 한국민담에 나오는 여인상율 중심으로 개관하고 자세한 비교고찰의 작업은 뒤로 미루기로 하였다.

1 「傳統的 女性像」과 여성이해의 심리학적 접근

한국역사 속에 맥맥히 흐르는 한국여성의 변함 없는 모습을 한국여성의 전통상이라 한다면 이런 전통상을 찾는 작업은 실로 수많은 역사문헌을 동원한 비교문화적 작업이 될 것이며 그것은〈한국인이란 어떤 존재인가〉하는 명제를 푸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이것이 너무 엄청난 일이고 보면 이런 작업은 대부분 주관적 직관적 서술의 형태에 머무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없지 않다.

또한 충분히 비교고찰하여 다양한 여성상에서 일관된 특징을 추출해 냈다고 해서 그것이 현대 한국인에게 계승하도록 권장되거나 강요될〈像〉이 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여성은 한국여성이면서 동시에 개성을 지닌 인간이며 그 인간적 성장을 위해 서는 하나의 像과의 동일시는 때로는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석심리학적 견지에서는 이른바전통적 像의 가치를 재음미 할 필요를 제기 하는 것이다. 분석 심 리 학에서는 전통적 像이란 그 집단의 집단적 의식 collective consciousness의 산물이라고 본다. 대대로 의식적으로 키워진 하나의 성격유형이다. 그것은 가정 교육,사회교육, 때로는 지배층의 의도에 따라 장기간을 두고 형성된다. 그러나 이것은 융이 말하는 그 집단의 목수한 문화가 형성되기 이전의 아득한 인류의 역사를 거쳐 태초로부터 전승되고 있고 인간의 정신구조 속에 선천적 유형으로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집단적 무의식 collective unconsciousness의 표상과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무의식의 보편적 像인 원형상은 시간공간을 초월하며 인종과 문화의 차이물 넘어선 원초적 後i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 어느 한 민족, 한 문화권에만 존재하는〈像〉과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문화권에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일정 한〈인격 상〉은 비록 그것이 의도적으로 전승되어 왔다고는 하지만 무의식적인 영향을 받고 있으므로 우리가〈傳統像〉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도 원형상이 혼재되어 있는 경우가 있고 따라서 문화적 족수성을 넘어선 요소나 경향이 거기에 반영되는 수가 있으므로 문제는 간단치가 않다. 이러한 무의식의 원형에 의한 오염은 원형상에 관한 엄밀한 탐구를 통해서 구벌될 수 있는데 그것을 람구하기에 가장 알맞는 자료가 비교적 인위

적인 加筆이나 수식이 적은 민담 Marchen이 라고 보는 것이다.

집단의식의 소산으로서의〈女性像〉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심리학적인 의미의 인격발전에 전혀 관계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정신에서 의식은 중요한 구성요소이며 집단과의 적응관계에서 형성되는 집단정신의 단면으로서의 각종 행동유형, 융의 이른바 외적 인격 persona은 외계와의 적응과정에서 필수적인 조건과 기능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전통상은 한국인의 정신구조의 필요조건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다만 이것은 개체 로서의 한국인의 정신의 전체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왜 냐하면 인간은 외계와의 적응뿐 아니라 내면세계와의 적응을 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외적 인격 persona뿐 아니라 무의식의 내적 인격에 맞추어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며 여기 집단적 무의식이 그 인간의 모든 정신기능의 모체로서 존중되고 관조의 대상이 되어야 할 까닭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우리가 다루는〈女性像〉이 한국여성의 페르조나로서의 여성상인가 보편적 근원적인 여성상인가를 구별하여야 한다. 이것올 알려면 여성과 남성,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몇 가지 분석심리학적 관점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2 〈女性原型〉과 여성상의 양면성

여성원형은 융의 집단적 무의식을 구성하는 많은 원형 가운데 하나로서 인간정신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원형이란 하나의 先驗的條件이며 그 자체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지만 像 imago으로서 나타날 때 우리 는 그 특질을 파악할 수 있다. 女性原型像은 여 러 가지 상징으로 나온다. 인격적인 像뿐 아니라 모든 여성성의 원초적 像 속에서 여성원형상올 발견할 수 있다. 즉, 나무와 바위와 물,대지와 산이 생성상징으로서의 여성원형상일 수 있고 구렁이,곰과 같은 동물상이 여성적 리비도의 상징 일 수 있다.

그런데 남성과 여성은 그들의 무의식에 특유한 성격경향울 가지고 있고 그 나타나는 양상의 특징이 대개 남성에서는 여성적 경향율 여성에서는 남성적 경향을 띠고 있다. 이런 경향은 마치 하나의 인격과 같은 자율성 올 지니고 있다. 남성 의 의식에 대 응하는 이와 같은 무의식적 인격을 융은〈아니마 Anima(Seele)〉,여성의 내적 인격을〈아니

무스 Animus(Geist)〉라고 불렀다1).

1) Jung, e.G.: Die B«zi«hungm zwisc1tm dem Ieh und dem UnluuJII. β ten. Rnscber, Zω'ich , 15)63, p.81.

Jung, e.G.: “Seele und Erde", lung: Gtsammdte W«rke 10, Walter. p.50.

李符來: 『分析心理研-C.G. Jung의 人間心性誼一』,一潮悶,서울, 1982, PP·71-83.

民譯속의 女性에 관해서는 M.L. von Franz: TIu Feminine in Fairytales, Spring, Publication. 1972, New York,참조.

남성은 무의식 속에 여성상을,여성은 그녀의 의식과는 달리 무의식 속에 남성상을 지니고 있고 이 런 원형적 像이 서로 이성에 투사될 때이들은 현실의 이성을 넘어선 그들 자신의 내적 인격상을 보게 된다. 때로는 여성이 남성의 아니마투사상에 맞추어 살고자 하는 경 우도 있고 남성이 여성의 내적 인격,아니무스의 경향에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모든 원형이 누구에 게나 존재 하는 것 이므로 원형상의 투사는 집단적으로 있 어 난다. 이리하여 그 시대, 그 문화의 남성들의 의식 상황에 따라 이를 대상하는 내적 인격의 집단적 투사가 일어 나고 이것이 그 사회의 여성상,여성관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를 정확히 묘사한 것이기 보다 남성의〈마음속의 여성〉이다. 여성은 남성적 특성을 무의식에 지니고 있어 그것의 실현이 인격성숙의 전제 가되는 데도 가부장적 사회의 남성들은 이 것올 곧잘 간과하고 〈여성적인 여성〉만을 이상상으로 삼지만 그것은 바로 그들의 의식에서 소홀히 하고 있는 그들 자신의 무의식의 요소이다.

아니마는 수동성과 감성적 측면, 아니무스는 적극성과 이성과 로고스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는데 이런 측면을 지닌 내적 인격이 잘 통합되어 있는가 안되어 있는가에 따라 부정적,긍정적 아니마 혹은 아니무스라고 하여 이에따라 여성 또는 남성의 성격상의 뉘앙스가 달라진다.

또한 아니마나 아니무스는 원시적 상태에서 통합분화된 상태로 여러 단계를 지 니고 있는데 그것은 아니마의 경우,

1) 생물학적 관계성을 나타내는 에바像에서, 2) 낭만적 미적 형태의 에로스로서 파우스트의 텔레나에 비 길 수 있는 것,3) 通i化된 에로스의 상징으로 성처녀 마리아에서, 마지막으로 지혜의 상징, 아테나像에서 그 표현을 본다.

아니무스는 1) 신체적 힘의 상징으로서 타잔이나 스포츠의 영웅으로, 2) 방향성 있는 활동력으로 사회활동가,정치적 영웅의 모습에서, 3) 말의 힘을 구사하는 정신성의 상징으로 의사, 성직자, 교수의 역

할 속에서, 4) 의미의 상징으로 창조적 매개자, 종교적 내적 체험으로 표현된다.

폰 프란츠 Von Franz 에 의하면 아니 마의 최 고의 경지는 동양에서 는 아마 觀音像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2)

2) M.L. Von Franz: Individuation Proceaa(個性化過程),吋e.G. Jung: Man and His Symbol, Aldus Books (李符余輝; r人間과 轎車.~ .徵J , ~長文盒 J982) pp. J63-238의 아니마와 아니무스 章 참조.

이렇게 볼때 우리가 단순히〈女性의 傳統像〉이니〈女性像〉이니 하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관련 속에서 구성되는지를 알 수 있다.

가령〈申師任堂於〉이니〈알뜰주부상〉,〈효부상〉,〈장한 어머니상〉같은 여성 단체에서 :社을 주는 대상이 되는 여성상은 한편으로는 태르조나로서의 여성像인데 그 형성 과정에는 전통사회의 남성들의 아니 마원형상의 투사가 개 입되 고 또는 이 것은 여성 자신에게도 있는 여성원형에서 산출되면서 시대의식에 의해서 어떤 형으로 굳어져 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韓國女性의 傳統像〉이라 하면 자칫 남성들이 바라는 여성상이 될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3 한국민담과 여성원형상

민담에서 우리는 아니 무스 원형 상도 아니 마 원형상도 모두 만나게 된다. 이것은 모두 여성과 남성의 무의식의 내면적 像이므로 민담에 나오는 여성원형상을 곧바로〈한국인 여성의 모습〉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한 해석이다. 한국여성의 무의식의 진면목올 보려면 오히려 여주인공의 對者로 나타난 남성상을 탐구해야 할 경우가 있다.

전술한 대로 민담은 신화나 전설이 집권세릭이나 시대의식에 따라 변화되는 데 비해서 民間口碑傳承 가운데서 비교적 순수하게 원형상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간주되지만 그러나 이것 또한 전승과정에서 많은 의식적 수식과 수정이 가해지고 있고 의식의 상황, 즉 시대나 문화권의 특성이 표현되고 있다. 민담은 대개 의식상황의 무의식적 代償이라는 형태로 이야기가 전개하는 수가 있으나 때로는 현실상황의 모사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의 이 야기들도 있어 해석과정에서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민담집에는 메르헨Marrchen과 레겐데 Legende(전설)의 구별이

잘 되어 있지 않거나 양자가 혼합된 것들이 있어 시대적 관념이 가미된 것들이 눈에 된다.

특히 孝行설화는 효를 강조하기 위한 교육적 목적이 너무 노출되어 있다. 악한 며느리는 벌 받고들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다른 색시를 얻게 된다는 式의 이야기(임동권 71,144번 설화), 또는 아들이 며느리의 나쁜 마음을 어떻게 돌려 놓았는가. 사나운 아내를 어떻게 길들였느냐하는 둥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의식의 상황을 나타낼 뿐 원형적인 내용은 아니다. 물론 효행을 강조하는 이 야기처 럼 보이지만 상당히 원형적 색채가 짙은 심청전 같은 소설화된 이야기도 있다.

여성상은 한국민담에 참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역할을 하면서 등장하고 있다. 민담에 나오는 여성 상만으로 여성원형상을 말할수 없음은 이미 앞에 설명 한 여성원형의 개넘으로 미루어 짐작될 것이다. 상징으로서의 여성적 像과 인격화된 여성상은 반드시 언제나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자에는 여성의 인격상이 포함되는 수도 있지만 달과 물과 산, 곰, 지렁이 둥 자연의 사상이 모든 여성의 원형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본 논고가 한국여 성의 전통상이라는 주제 아래서 진행 된 것인만큼 인격화된 여성상이거나 이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상을제시 하는 것이 이해에 도움을 줄듯하여 저자는 다음에 한국민담에 나타난 여성인물상을 중심으로 그 몇 가지 특징에 따라 기술하고자 한다. 물론 이런 여성상은 전술한 대로 원형적 요소뿐 아니라 시대적 집단의식적측면이 혼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순전히 교육목적의 효행설화는 여 기에서는 제외시키거니와 그것이 대부분 원형적 측면의 탐구대상과 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1) 太母(die GroBe Mutter) 原型像3)

3) Neumann, E: Die Gro'ps Muller, Walter VerI時, Olt凹, 1974-Hedwig Von Beit (M.L. von Franz): Symbolik du },街rche肘, 6. Aufl., Francke Verlag, Bern, 19缸, pp. 124-174-

옛날 선분대할망이라는 키 큰 할머니가 있었다. 얼마나 키가 컸던지 한라산을 베개 삼고 누우면 다리는 제주시 앞바다에 있는 관탈섬에 걸쳤다한다.

(玄容酸『제주도전설』P.7)

『濟州想傳說』(玄容酸 : 1976, pp.27-30시의 선문대할망은 우주적인 인간상으로서 가히 태모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 巨裝는〈성산봉을 빨래 바구니로 삼고 소섬 을 빨랫 돌로 삼아〉(p. 29) 빨래 를 하고 치마자락에다 흙을 담아 나르다가 흙이 새어 오늘의 소화산을 이루기도 하고 육지에 다리를 놓아주기도 하고 주먹으로 봉우리를 쳐서 움푹 패이게 하거나 오줌을 누어 흙이 떠내려가 섬을 만들기도 하는 둥 우주창생의 어머니였다. 여기에는 좋고 나쁜 인간적인 특색이 없다. 우주창생 역시 어떤 깊은 뜻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실수로, 혹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비인간적, 초인적 인격상이다. 원형상은 특히 제주도신화의 경우 혼히 이러한 거창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4) 玄짤앓 = r 혐써 f&tfS 없 08 , 짧 文文 !l! 220, 서울. '976.

물론 우주창생 이 거파에 의해서만 이 루어 졌다고 믿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단군 이전의 거인에 관한 이야기가 있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心 또한 이런 거신이 중국의 盤固, 북유럽의 거한 위미르Ymir, 고대 인도신화의 푸르사 Purusa, 그리 스신화의 티탄Titan족 등그밖의 많은 민족의 거 신과 상통함은 물론이다.6)

5) : 한국의 신화, 판문각,서울. 1961, p.10.

鄭 燮 : 우리고담 온돌야화의 인용.

6) 三 三 ~: r 中園 古代 빼훌 J , 大安, 東京, 1969. pp.118- 136 참조.

Petericb, E.: G6tter und Heldm der Griechen, Walter, Olten, pp. 17-18.

Petericb, E: 같은 책 , pp.16-17.

Hastings, ]. (ed.) Encycloþaedia 01 Relig , 'o π and EthicI. Vol. X. T&T ClarJc. Edinburgb, '98 pp. 517.

어쨌든「선문대할망」은 무속신화에 나오는 잡승할망, 조방할망, 세경할머니 등 많은 여신들의 원조가 되고 있다. 제주도 무속설화에 의 하면 삼신할망은 連神과 대결하여 技를 다루고 조왕할망은 노일제대라는 남편의 첩 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가 아들의 힘으로 부활되 는 과정을 겪는다. 즉,여신상이 선악의 두 측면으로 갈라져서 이야기의 동적 인 동기를 부여하고 태모상에 표면화되지 않은 숨은 양면성이 여기서 구체화되고 있다.

우주를 이루고 아이를 잘 낳게 하고 어린이를 벙에서 지켜 주는 위대한 모성은 또한 때로는 아이를 그녀의 과보호로, 혹은 무관심과 거절로 상처입히고 창생과는 역으로 파괴와 질식과 오도를 할 위험성올 지니고 있다.

한국민담에는 숱하게 많은 선한 할머니의 이 야기가 전해지며 또한

잔인하고 무서운 할머 니의 이야기도 산견된다.

全北民;評「청실홍실 천생 연분」의 할머니는 絲로 총각의 인연을 맺어 주는 운명의 여신이다. 태모가 세계의 민담에서 곧잘 실 짜는 사람으로 나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할머니는 산 속에서. 궁지에 몰린 주인공에게 여러가지 묘안올 제시하거나 초자연적인【況方을 지닌 물건을 주어 위기를 모면하게 하고 악한 것을 이겨내게 하여영웅설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할머니는 사물을 꿰-器고 모든것을 예견하는 예지기능이며 정신적 위기에서 현명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무의식의 지혜의 힘을 상징한다. 또한 죽은 뒤에도 혼이되어 무덤에서 나와 아이를 보살피는 이 야기 (「할머니의 혼」: 忠南民評,韓相立이 1980 51)처럼 끝없는 慈愛의 표징이다.

7) 짧來 iÆ: r全 ;t t民 뭘 J. 쩔 짧 버版훌 t. 서용. 1979. PP.91-94.

8) Hedwig Von Beit (M.L. Von Franz):같은책 참조.

9) 훨뼈 훌 훌 : fJ없 짧훌빼 J. 훌 활 버厭학, 서용. 1980.

그러나 사람 잡아먹는 할머니도 간혹 우리나라 민담에 산견된다(韓相策 : 충남민담, 38「소금장수」). 뼈로 밑을 닦은 뒤 오만하게 굴다가 주인공이 나중에 산속에서 할머니를 만나 그 이야기를 하자 그 뼈의 주인인 할머니가 그를 잡아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뼈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의도도 있지만 노파의 응징은 무섭도록 냉혹하다.

홍미있는 것은 우리나라 이야기에 그림 Grimm민담이나 러시아민담의〈마귀할멈〉族10〕이 그리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여우가 둔갑해서 할머니가 되어 남의 집 딸을 병들게 한다는 類의 이야기 는 많다(예, 韓相1980. 충남민담,39「백 년 묵은 여우」,©「여우잡은 장작개비」등). 원래부터 마파족이 있는 게 아니고 본래는 동물인데 어면 동물은(예컨대,九尾孤, 구렁이,닭) 특히 요물이 어서 곧 잘 요귀로 나타나 사람모습을 취하는데 이런 동물은 대개 여성요귀로 변한다. 그러니까 요귀의 책임은 사람에 있는 게 아니고 짐승들에게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한국의 문화전통이 키워 온〈좋은 할머니〉의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마귀할멈의 존재를 이렇게 동물의 화신이라는 형태로 암시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요귀는 동물의 변신이라는 관념은 의식올 지배할 수 있는〈요사스러운〉작용이 상당히 의식에서 멀리 멸어진 본능의 깊은 층에서 나오고 있다는 말이다.

10) Von Franz. M. L.: TM Føm;ninø in Fa;ryta/øs, 같은 책

마귀할멈상이 마파라는 인격상으로 나오든 동물의 변신으로 나오든

太母의 부정적 측면들을 대 변하는 파괴적 모성상인데 그러나 그 파괴적인 惡이 고하게도 민담의 주인공으로 하여금 惡을 물리칠 수 있도록 암시하거나 惡을 물리치고 큰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심리학적으로 말하면 개성화의 성취)〈본의 아니게〉유도하는 결과가 된다.11〉

11) Von Franz, M.L.: Shadow and EDiI in Fairy/ales, Spring, ZUrich, 1974.

2) 怨强으로서의 女鬼

원한을 가지고 죽은 자의 넋은 저 승에 서 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들아다니면서 이승의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민간신앙은 우리 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에 퍼져있는 관념이다.

원령 은 한국의 여성상과 부정적 모성상을 말하는 가운대서 한번 살퍼보아야 할 주제이다. 원령으로서의 여귀가 한국민담에 유달리 많으냐,그래서 현실에서 겪었을 한국전통사회의 여성들의 恨이 민담 속에도 나타나고 있는지를 단언할 수는 없 다. 한국의 요귀는 왜 서구의 민담에 나오는 것처럼 마귀할멈이 아니고 모두 젊은 여자들로 나타나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술한 대로 악한 할머니로 나오는 경우도 있으니 꼭 젊은 여자들이 恨이 많아서 요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우가 예쁜 여자로 둔갑해서 선비를 유혹하는 이야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예,「백 년 묵은 여우」韓相器 1980, 3「여우소녀」任東權 1972,「여우물」 玄容驗 :9701「십 년 묵은 닭」:料相器, 1980).

그러나 이런 여우의 둔갑이야기는 여성의 문제를 표현했다기보다 남성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등장한 요괴라고 보고 싶다. 남성으로 하여금 요사스러운 여성의 매력에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 뜻에서 여우여귀는 주인공인 선비의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는 그런 변덕스럽고 간사하고 영악스런 감정의 특징을 표현한다. 점잖은 선비나 관원의 이성적 지적 금욕적 태도에 의해서 햇볕을 보지못한 채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는 미숙하고 파괴적인 他動을 대변하며 여우요귀가 색정적 유혹을 수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이런 설화에 나오는 여우요귀는 분석심리학적 개념의 〈부정적 아니마保〉에 가장 잘 부합된다. 남자주인공의 外面 persona에 가린 내적 인격상인 것이다. 남자들이 그러한 아니마를 현실의 여성에 투사하면 공연히 호들갑떠는 여성을 위험시하게 된다.

어면 설화에는 여우가 총각의 氣를 빨아들여 완전히 사람이 될 뻔

했는데 남자주인공이 如存珠를 여우의 입에서 빼앗아 먹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은 원형의 강력한 에너지가 어떻게 자아의식을 동화해 가는가를 묘사하는 이야기 로서 그 위험성과 함께 이런 아니 마원형 에 내 포된 무궁한 초자연적 능력을 제시하고 있다.

여우가 둔갑한 예쁜 여인이 보수적인 남성심리의 무의식적 내면의 인격상이라 하더라도 민담의 여우미 인같이 부정적 아니 마에 사로잡힌 여성도 실제에 없는 것은 아니다. 〈여우 같은 여자)',〈夜又같은 여자〉라는 말은 우리 나라에 서 도 흔히 쓰는 말이 기 때 문이다.

그러나 여성의 恨은 오히려 阿嫌閣전설이나 용제총화에서 더욱 직접 웅변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아랑은 어느 고을의 원님의 딸이다. 남몰래 사모하던 머슴이 유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죽여 버리고 암장을 한 뒤에 귀신으로 나타나 새 원님이 부임할 때마다 자기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했으나 여 귀의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해 죽이 나갔다. 용감한 젊은이가 자원을 하여 아랑의 귀신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복수를 해주고 모든 일이 무사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12)

12) 崔常壽: 『韓國民間傳說集』, 通文館 . 1958, PP.187-189.

아랑은 원님들 앞에 결코 미인으로 나오지 않고 칼 맞고 살해될 때 의 모습대로 산발하고 피투성이가된 채 나타났다.〈남모르게 암장된〉 사실이 심리학적 의미의〈무의식적 억압〉이라는 현상을 잘 설명해 준다. 이 전설은 여러 각도에서 조명될 수 있는 이야기다. 사회신분 계급간의 갈등, 원님으로 대변되는 지배계충의 무능함을 암시하기도 하고 심리적 상징으로서는 집단의식, 즉 어느 시대 정신이 간과한 정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용감한 주인공이 밤새도록 촛불을 밝히고 아랑의 모습을 보고도 기절하지 않는 점이〈깨어 있음〉,즉〈의식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거니와 이는 이미 필자가 다른 곳에서 언급한 바 있다. 아랑은 고귀한 신분의 여성으로서 감히 아무나 침범해서는 안 되는 존재인데 강제로 침범당하고 죽임을 당했다는 恨을 지닌 귀신이다. 밀양에 아랑각올 세우고 곱고 품위 있는 여인상올 그려서 모시고 해마다 제사룰 지내고 있는 것을 보면 아랑은 분명 남성들의 아니마원형상,영원한 처녀 신의 특징을 지닌 존재 일 듯하지만 좀더 여러 측면에서 깊이 탐구될 필요가 있다. 13)

13) 李 永 : 「怨 傳說과 恨의 心理」. <문학사상>, 1973. 3월호. pp. 360-369.

처녀신의 고귀함을 침범했고 이를 보살피지 못한 무력한 부성적인 격에 대한 응징과 처벌의 성격도 없지 않지만 이 런 아랑의 恨에 비하면「용재총화」의 이야기는 사랑을 거절당한 여자의 恨으로서 매우 인간적이다.

여승과 더불어 약속을 해놓고 기약한 날이 되어도 오지 않아 여승은 뱀이 되 어 주인공의 집뜰과 방으로 나타나지만 주인공이 군졸을 풀어계속 뱀을 죽이자 뱀은 점점 커져 구렁이가 되었고 公은 하는 수 없이 그 구렁이를 궤짝 속에 넣어 두었는데 날이 갈수록 公은 정신이 점점 없어지고 안색이 초췌하더니 죽었다는 이야기다.14)

14) 話 卷之4 供電字組에 관한 이야기.

죽이면 죽일수록 커지는 구렁이는 의식적으로 억제하면 할수록 커지는 노이로제 환자의 불안공포,강박증상과도 같다. 여성의 恨이 이토록 끈질긴 것이며 거절당한 사랑이 분노로 변할 때 그것이 남성에게 미치는 파괴적 영향 또한 적지않음을 우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목격해 오고 있다. 물론 이 설화는 남성심리에 있어서 맹목적인 성적 억압,무의식 속에 잊혀진 콤플텍스가 의식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 어떤 결과를 나타내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성의 원령인 구렁이를 벽장에 넣어 두었다가 매일 한 번씩 문을 열고 구렁이를 노려보는 적극적인 태도를 묘사한 옛이야기도 있다.

대체로 전설이나 奇談 같은 시대의식의 영향을 받은 설화에 비해서 민담에는 원령의 이야기가 그리 흔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민간신앙에서 특히 원귀들을 座神의 자리로 높여서 모신다든가 고대부터 諸王이 모두 疫病을 죽은 자의 한으로 돌린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서〈원한〉을 얼마나 두려워했는가를 알 수 있고 이런 관념은 현재도 의연히 계승되어 내려오고 있으며 특히 결혼 못하고 죽은 처녀총각귀신의 위험성은 어느 다른 나라 못지않게 강했다고 볼 수 있다.

3) 계보와 소녀

부정적 모성상으로서 계모이 야기는 단연 으뜸을 차지할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잘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많이 읽혀지고 이야기된 것들이지만 자세히 보면 이 두 개의 쌍〈악한 어머니와 착한 아이〉의 대극간의 갈등에는 원형적 요소가 깃들여 있다.

민담의 계모를 상징적으로 남성인 아버지의 내 면적 인격의 한 측면, 즉 아니 마의 부정적 측면이라고 볼 수도 있지 만 계모이 야기를 착한

아이의 차원에서 보면 여성의 자기현실과 관계하는 설화이다.

역설직으로 착하고 마음씨 고운 소녀는 계모가 악하면 악할수록 돋보이며 소녀는 계모의 구박을 통해서 보다 높은 자리에 도달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계모는 하나의 入社主!淨者의 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계모 자신은 자기 가 그런 역할을 한다고 생 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순수한 증오와 질시의 화신일 뿐이다.

충남민담「쫓겨난 딸」비의 여주인공은 의붓어머니의 모략으로 부정의 누명을 쓰고 쫓겨 난다. 그녀는 오막살이 초가집에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아들과 결혼하여 구들장을 쓰는데 모두 다 금덩어리임을 발견하여 큰 부자가 되었고 계모는 벼락맞아 죽고 처녀의 아버지는 거지가 된 것을 다시 만나 잘 보살펴 주게 된다.

15) 한상수: 충남민 』『 pp. 166-167.

「반반버들잎아 최공시야 문열어라」16)에는 전실 아이로 남매가 등장하지만 딸이 주로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야기 인데 계모는 으례 도저히 불가능한 것,즉, 겨울에 상치를 가져 오라는 등의 과제를 아이에게 시키고 딸은 초인적 인 능력 을 가진 총각의 도움으로 그 과제를 완수한다. 그러나 계모는 기어이 그 총각을 죽여버린다. 딸은 방랑을 하다가 재생의 약병을 얻고 그를 환생시켰고 이 순간 둘은 하늘에서 내려준 바구니에 태워져 승천하여 해와 달이 되고 계모는 거짓말을 하다가 떨어져 죽는다.「북두칠성이 된 아이들」17)(韓相活, 1980)에도 그이 야기의 귀걸이 하늘에 올라 북두칠성이 되는 것인데 이 설화에서는 주인공이 모두 아들 칠형제이다.

16) 최 : 전게서, pp. 27-32.

17) 한상수(1980): 전게서, pp. 65-66.

이조문학에는 악모는 있으되 악처는 없다는 말도 있듯이18) 계모의 전실딸을 구박하는 내용의 소설류에서 부인들은 남편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전실딸을 미워한다고 한다. 여기 언급된 몇 가지 이야기에서도 계모로 남편에게 질투를 느끼 면서 딸을 구박하고 남편을 헤치려는 의사는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남편을 버리는 경우도 있어 일정치 않다.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경우 남편이 죽도록 밉다는 반응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을 보아도 계모이 야기 는 부부의 관계를 초점 으로 한 이야기라기보다 모녀 관계의 다른 측면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 임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부성들이 전

18) 장덕순: 한국고전문학의 이해, 一志社, 서울, 1973, p.227.

실딸을 무처 사랑하고 있다는 대목은 독일 그림형제의 민담비의 Aschenputtel의 중립적인 父性과 다르다. 어떻게 보면 계모의 질투는 부녀 사이의 지나친 共班關係를 끊어버리고 여성으로 하여금 독립하여 반려자를 만나게 하는 숨은 동기를 지니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쫓겨 난 딸」이나「반반버들잎아 최공시야 문열어라」나 모두 결혼과 浴, 흑은 천상에 서 의 우주적 역할로 문제가 해결되고 있다. 하느님 의 도움으로 하늘의 별이 되거나 달이나 해가 되는,이를테면 하늘의 諸神이

되는 귀결은 그림동화에 잘 나오는 왕자님의 배필이 된다는 귀결과 다른 상당히 한국적 인 문제 해 걸방식 으로서 비단 계모설화에 국한되 지않는다. 예컨대〈해와 달〉설화에서 보는 것처럼 계모 아닌 생모를 잡아먹고 계모 행세를 하는 호랑이에 쫓긴 아이들이 하늘의 도움으로 천상에 올라 해와 달이 되는 이야기이다.20)

19) Killder-ulId Hausmarchell gesammelt durch die Bruder Grimm (C. Helbling hng.) I. Band, Manesse Verlag, Bibliothek der Weltliteratur, PP.172 - 184.

(Aschenputtel)

20) 任來悔: 『햇님 달님』 『韓國勾民E闕』,論文盒, 1972, 서울, pp.89-92.

다른 곳에서도 이 야기했지만 이 설화의 생모를 잡아먹고, 생모 행세하는 호랑이를 우리는 분석심리학적 개념에 따라 모성의 무의식 속에 잠자던 원시적인 남성성,부정적 아니무스가 모성의 의식을 사로잡는 상태 (아니무스 빙의)라고 설명한다. 이런 상태의 모성은〈호랑이어머니〉로서 자식을 글자그대로 잡아먹을 수 있는 모성이다. 이 경우 한국의 민담은 곧잘 구원은 오직 초월적인 것에의 믿음으로써 이루어진다고 가리킨다.

한국의 계모설화는 고부간 갈둥과 시집살이의 入社的 고행의 측면이 서로 상통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것은 입사의 고행올 통한 재생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막상 고부간의 관게를 다루는 이야기들을 보면 내가 아는 한 별로 이런 깊은 뜻이 보이지 않는다.

여성심리를 중심으로 본다면 이런 민담은 한국의 여성에는 계모로 대변되는 악한면과 의붓아이로 대변되는 약하고 어리고 슬픈 그리고 구박을 견디는 양면을 모두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물론 한국여성만의 특성이 아니고 보편적인 유형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계모설화가 반드시 입사의 높은 뜻율 이루는 쪽으로 진행되지 않고 철저한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풀국새」라는 이야기21)(韓相滿 ③ 1980)에서 이쁜이는 계모의 구박을

21) 紛相海(1980) :的獨脅,說話 第3.

받다가 결국 배가고파 풀을 먹고 죽어서 풀국새가 되어 돌아다니고 만다. 증오감이 극에 달하면 떠돌아다니는 외로운 새의 방랑으로 끝난다는 말인가.

4) 英雄少女

카알 케레니 K. K6renyi와 융은 그리스신화에서〈신성한 소녀〉〈신성한 아이〉에 관해 서술하였고 융은 그리스신화의 코레 Kore(소녀), 또는 쿠로이 Kouroi(소년)가 어 린이원형 der Archetypus des Kindes 을 상징한다고 말하면서 영웅료의 몇 가지 조건과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22)

22) C.G. lung und K. KerEnyi: E;n!iihrung ;1J das Wesetl der Mythologie-das g6ttl;che K,,,d/das gottliche Mtidchen, Rhein Verlag, ZUrich, 1951.

한국의 이 야기의 영웅소녀로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소녀는 소설 형식으로 부각된〈沈淸〉일 것이 다. 그보다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심청전의 근원설화의 하나가 되었음직한 민담으로 「지네장터설화」 비가 있다. 심청이나 「지네장터설화」의 주인공인 순이는 모두 자기를 회생하여 큰 일을 하는 영웅소녀이지 만 무기를 들고 말타고 主神을 수행하는 게르만신화의 발규렌 Walkiiren 같은 전쟁의 여신처럼 호전적인 유형이 아니라 인내와 순종과 자기희생의 용기로 큰 뜻을 이루는 동양적인 영웅원형이다.

23) 被偷聽: 「지네장터」,前總會, pp.82-86.

심청전은 효행을 강조하는 교훈적인 뜻을 지니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심청의 출생부터가 벌써 초자연적인 후광에 쌓여 있다. 곽씨부인의 태몽에는 선인옥녀가 학을 타고 내려와 西王母의 딸이라고 고 한다. 심청이 자랐을 때의 모습을 묘사한 것을 보면 조선조의 이상적 여인상이 이러한 것이 아니었던가 짐작된다.

얼굴이 원색이요 효행이 출천한 중 재질이 비범하고 문필도 유려하야 인의예지 삼강행실 百執事可塔하니 天生麗質이라 女中의 군자요 금중의 봉황이요 화중의 목단이라

——(『흥길동전·심청전』(張志破 註解),P. 127) 24)

24) 聲L展監解: 『洪含章傳﹒說清傳』,正音祉,서울, 1973, p. 127.

그러한 심청이 부친을 속이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팔아 절에 받치고 임당수에 몸을 받치러 가는 것은 분명 범상한 효심을 넘어서는

결단이다. 소설에서는 심청은 충분히 죽지 않아도 되는데도 이미 정해진 천명으로 알고 盲父를 버리는 불효를 감행한다. 이 점이 또한 심청으로 하여금 영웅의 계 열에 올릴수 있는 핵심적 조건이다. 이야기는 결국 죽음과 부활의 과정올 겪어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는 절정에서 끝난다. 놀라움과 감동으로서 눈을 뜬다는 것 또한 이야기의 특색이다.

심청은 장님아버지로 대변되는 맹목적이며 유약한 가부장사회의 집단의식에 한 줄기 빛을 던져 주기 위해 이승(의식계)에 나타난 신성한 소녀,심리적 용어로 말하자면 넋 Seele의 원형이다. 그것은 빈곤한 집단의식을 지양하고 이륜 새류게 변화시켜 경직된 의식에 새로운 깨달음,의식성 (눈올 뜨는 것)을 부여하는 무의식의 감정기능올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심청은 스스로 세속의 인연을 끊고 성 인화 Initiation의 과정을 걸어가야만 했다. 울고불고 말리는 맹부는 그녀에게 세속적 부녀의 유대관계를 유지하기를 호소했지만 이 신성한 소녀의 목적은 그것올 넘어서서〈부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었다.

엉거주춤하게 남의 눈치 보고 큰 결심을 하였다가도 주저 앉고 마는 오늘의 시대에 어디에 심청과 같은 비정할이만치 강력한 天召의 결단이 있는가.

「지네장터」 설화의 순이는 소설이 아닌 만큼 그 회생행위가 그렇게 극적으로 고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눈먼 훌아버지(또는 홀어머니, 병든 아버지 등)를 돕기 위해 자기 몸올 팔아 괴물의 祭밥으로 자신율 제 공한다는 점에서 심청전과 같은 핵을 지니고 있다. 이 소녀는 밥찌꺼기로 수채구멍에서 나오는 두꺼비를 길러왔는데 두꺼비가 나서서 그 괴물인 지네와 싸워 둘 다 죽고 순이는 살아나고 마을에는 재앙이 사라졌다는 줄거리다. 무척 수동적이고 은밀한 행위,즉 묵묵히 두꺼비를 기르는 정성이 그녀를 살려낸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영웅원형이냐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영웅이란 칼이나 창을써서 싸우는 사람만이 아니라 정신과 본능의 내적인 힘으로 악을 물리치는 경우에도 불일 수 있는 이름이다. 다만 이 민담에서는 그러 한 악에의 대결이 의식성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실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는 특징 이 있다.25)

25) 李符永: 「歸國民話 속의 英繼原型-<지네장터 啥叫說話〉를 中心으로」 『韓國의 民俗文化』,國原文化財圈,서울, 1974, pp. 183-202.

영웅소녀를 이 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설화는 巫祖傳說「바리 공주」이다.26) 이 설화의 주인공 제七공주는 전형적인 영웅아의 불운을 겪어야 하는데 버림받음이 그 첫째이고 고행과 죽음과 재생의 성인과정이 다음에 이어진다. 여자라고 해서 왕궁의 고귀한 신분사회에서 버림받고 죽도록 고생하고 수행하여 여자의 한을 무상신선과 결혼하여 칠동자를 낳는 것으로 물고,죽음에서 회생시키는 영약을 얻어 병들어 죽은 부왕과 모왕을 죽음에서 살려내어 자기는 지상의 벼슬도 마다하고 만신의 왕이 되었다는 巫祖傳說「바리데기」는 남존여비의 시대적 가치관에 도전한 한국무속의 줄기찬 생명력을 웅변적으로 표현하고 있거니와 맹부의 눈을 뜨게 한 심청과 마찬가지의 시대의식의 창조적 변화의 계기가 결코의도적인 외형적 혁명이나 운동 같은 것으로 이루어지기보다 세속적 가치로부터의 버림받음,고독한 방황을 밑거름으로 한 자기희생과 내면세계와의 협동,자기 실현을 통해서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만신의 왕이 된 바리데기는 이미 여성원형임을 넘어서서 분열되어 죽은 자아기능을 분열의 통합을 통하여 새롭게 살려내는 인간무의 식의 근원적 신생기능인 자기원형상 Selbst이라 할 수 있다. 심청이나 순이의 배경에도 그러한 자기원형상의 작용이 눈에 띈다.

26) 秋葉鐵: r朝鮮巫俗研究』上卷,大臣單說會店 , 東京, 1937, PP.3-60, 「바리공주」.

5) 仙女와 精殺

하늘에는 선녀가 살고 땅에는 정령들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나타나 여러가지 신비스러운 봉사를 한다는 이야기는 여러 나라에 퍼져 있는 이야기 주제이다. 그것은 모두 초자연적인 여성상으로서 세속의 현실세계에서는 좀처럼 향유할 수 없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심청〉이 천상적 속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이승으로 태어났고 이승으로 돌아와 이승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비하면 선녀나 여정령들은 본래 저승의 존재로 늘 저승에의 회귀성향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길래 지상의 남성들은 결국 이런 천상의 여성,정령 미녀들을 놓치고 무척이나 아쉬워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경우가 많다.

「白鳥처녀설화」로서 전세계에 퍼져 있는 선녀의 주제는 우리나라에 도「선녀와 나뭇군」 등 술한 類話 속에 출현하는데 한국의 민담과 외국 類;活-와의 비교와 그 상징성에 관해서는 필자가 다른 곳에서 이미

논급한 바 있다.27)

27) 李符永: 「姆國童話〈仙女와 나뭇군>의 心理學的問題」, 明拉克博士還層紀念文集, Vol. I, ,서울大學大神經捕斜斜, 1965. pp.21-36.

잡힐 둣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는 선녀는 일단 주인공과 결혼을 하지만 결국 남성들의 성급함,방심,인내심 부족, 남자주인공의 어머니의 훼방으로 파국을 겪게 된다. 선녀 Fairy는 여러가지 속성으로 미루어보아 남성들의 무의식적 인격의 하나인 아니마원형상에 부합된다. 그리고「백조처녀설화」는 아니마의 의식화가 남성들에게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세게에서 남성들은 그의 무의식의 선녀적 속성을 실재하는 여성에게 투사하고 때로는 현실의 여성 또한 남성이 투사하는 상에 꼭 알맞게 행동함으로써 남성들을 애타게 하는 수가 있는데〈아니마 여성〉이라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백조처녀설화」는 여성의 이야라기보다 남성심리의 문제를 제시하면서 여성원형상의 不可解, 不可海的 측면을 묘사한 이야기다.

「우렁 속에서 나온 미녀」(按來次,전북민담⑧)의 여주인공은 정령적 여성상의 하나이 고, 그또한참을성 없는 남성주인공과 시어머니의 태 업으로 길국 원님에게 께앗기고 만다. 본래 이 이야기는 원님에게 때앗긴 것을 다시 찾기 위해서 남자가 아내를 찾아나서는 긴 줄거리가 있게 마련이나 전북의 이 민담에는 원님에게 빼앗기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좀더 많은 類話들을 살피보아야겠으나 이 러한 起浴的 여성이 완전히 이승의 사람으로 되려면, 다시 말해서 아니마가 본능의 심층에서 분화되어 의식의 내용으로 소화될 수 있는 모습으로 의식화되기 위해시는 자아가 일정한 시기를 기다리거나 정해진 금기를 지키는 꾸준한 의지가 필요하다는 뜻이 내포되고 있다. 또한 이런 민담에는 선녀와 남자의 어머니, 미인과 남자의 어머니의 대극에서 초속적 여성성과 대지의 모성성 사이의 긴장과 갈등관계가 표현되고 있는데 남자주인공이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 가느냐 하는 것에 그 문화의 목수성이 노슬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상술을 피하겠고 다만 다소의 문화적 차이가 엿보이 기는 하지 만 우리 나라 민담에도 그 類能의 해걸방법 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한마디로 한국적 해걸의 특수성을 단언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아니마의 의식화가 정신세계의 풍성한 발전에 크게 기여 한다는 뜻이 담긴 이야기에「구렁이 아내」(雜織 : 충남민담22)라는 이야기가

있다.

어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정처없이 나그네길을 가다가 우물가에 서 예쁜 여인을 만나 그녀와 함께 살기로 약속하고 사는데 아내가 훌륭한 집을 지어 주어 잘 살게 되었다. 여자는 남자에 게 누가 부르면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 하는 금기를 제시한다. 모든 민담에서 흔히 보듯이 금기는 으레 지키지 못하게 되고 여자의 정체가 구렁이 임이 드러나 여자는 사람이 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남자는 구렁이의 정체를 밝힌 호랑이와의 결투를 돕도록 위임 받는다. 남자가 구렁이 아내를 도와서 결국 구렁이는 호랑이 를 물리치고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호랑이와 구렁이는 모두 하늘에 살다가 벌을 받아지상의 동물로 변해 버린 것이라 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에「能女傳說」이 있다. 여기서 용녀는 정체가 밝혀지자 하늘로 날아가고 만다. 본래는 천상의 존재이나 지상으로 추방된 구렁이는 인간을 해치는 妖鬼로서가 아니라 造化를 부려 재화를 마련해 주는 풍요의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다. 동물이 때로는 해로운 요괴로,때로는 유익한 존재로 나타나는 것은 혼히 볼 수 있는 민담의 주제이다. 이 것은 심리학적으로 인간정신의 기저를 이루는 본능은 의식의 태도여하에 따라서 때로는 긍정적인 측면올, 때로는 부정적인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이 야기다. 동물의 양면성은 바로 본능적 기능의 양면성과 일치된다. 자아의식이 본능을 거부하고 푸대접 하면 본능이 부정적 방향으로 작용하고, 의식이 본능을 받아들일 때 본능은 좋은 방향으로 기능올 발휘하는 것이다. 이때 민담 속의 미인은 용재총화의 죽일수록 커지는 구렁 이라든가 요귀로서의 미인과 다른 역할을 하게 되고 흔히 우리 민담에 귀신의 허구로 나타나는〈산속 깊은 곳의 으리으리한 집〉이 허망한 꿈이 아닌 실재하는 현실이 된다.

「구렁이 아내」의 여주인공은 동물간의 격투라는 원초적 갈등의 문제가 해결되고 자아가 그 갈등의 해 걸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할 때 비로소 이승으로 환생할 수 있다. 즉 의식화된다.

6) 동물의 아내

동물이 미인안으로 변환된 경우와는 반대로 여성이 동물올 남편으로 맞는 경우에도 동물의 중요성과 동물남펀의 초자연적 능력이 제시되고 있다. 전자가 자연의 충동 속에 감추어진 남성의 아니마상을 분화시키는 주제를 표현한 것이라연 후자는 아니우스의 원시적 표현이 분화

발달되어 소화가능한 내용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말해 주며 결국 의식적 인격과 무의식의 내적 인격과의 합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충남민담「용왕의 아들」(韓相壽,1980, pp. 144-152)은 그 한 가지 예이다.

정승의 딸에게 밤마다 찾아와서 놀다가 새벽이면 떠나는 남자가 있었는데 이 사실이 정승에게 발각되어 딸은 짚으로 반든 섬에 실려 강물에 띄워 추방된다. 어느 강변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나 그곳에 묵다가 옥동자를 낳았다. 아이는 자라서 서울에 와서 할아버지를 찾았으나 도리어 죽을 면했다가 강가에서 용궁 사자의 인도로 용궁에 가서 아버지인 용왕을 만나 금은재보륜 얻고 육지에 돌아온다. 이 이야기의 후미는 중국에서 이 아이가 위험한 존재라고 하여 밀사를 보내 죽이려는 것을 용왕 사자의 도움으로 위기를 면하고 나중에 요술병을 가지고 중국을 쳐서 이겼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시작은 정승의 딸인데 이야기가 진행함에 따라 딸은 별로 언급됨이 없이 그 딸이 낳은 아들이 주인공이 되면서 주로 용왕과 용왕의 사자들이 자주 구원자로 등장한다. 강물 속에 사는 용은 생성과 풍요의 상징으로서 모성상이다. 주인공을 돕는 사자들이 모두 여자들이라는 것이 이 영웅아의 성공을 위해서 여성적 상징의 힘이 중요한 역할을 함을 암시하고 있다.

전북민담「구렁덩덩신선비」(社i來次,②)에서는 말3형제 중 막내 가구렁이 신랑의 구혼을 받아들인다. 덕분에 이 막내 딸은 언니로부터 구박받고 구렁이 신랑은 형으로부터 구박받는다. 그러나 구렁이는 결혼한 뒤 일정 시간이 지나자 허물을 벗고 환한 남자로 바권다. 그러나 벗은 구렁이 껍질을 그의 형들이 태워 버려서 신선비는 하늘로 올라가고 말았다. 후미의 결말은 본래 좀더 긴 모험담으로 이어지는 것인데 話者가 여기서 중단하고 말았다는 것이 이 민담의 채록자의 말이다.

어쨌든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막내딸이 남들이 싫어하는 구렁이를 남편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에 있다. 여주인공의 이와 같은 개성적 선택과 아량과 성실한 사랑이 걸보기 에 추한 동물로 하여금 창조적변환을 일으키 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미녀와 야수」28)의

28) Joseph Henderson: 「古代神話斗現代人」, 융: (李符永外揮) 『人間과 無意의 象徵』의 第3 , pp 140-145, 「美女와 野獸」참조.

주제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성의 자기실현 과정에서 부딪히는 로고스적 원리, 즉 아니무스의 분화는 추악한 동물성을 배척하지 않고 따뜻하게 수용하는 자세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진리 가 담겨 있는 이야기다. 추악한 동물성 이란 원시적 미분화된 감정에 오염되어 때때로 폭발적인 감정과 함께 노출되는 여성의 무의식 속의 아직 덜 발달된 남성적 경향을 대변한다.

7) 여성심성 속의 부정적 남성성

여성의 무의식에 있는 부정적 아니무스는 더이상 토론할 수 없는 고집으로 나타난다. 이것 아니면 저것,절대로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다. 그것은 민담이나 신화에 나오는 죽음의 악귀,그리스신화의 페르세포네Persephone를 유괴 한 하데 스 Hades와 같은 것이다. 공상적인 생과는 거리가 먼 생각의 거미줄,욕망에 찬 도둑, 살인자, 모든 여성을 죽이 는 冷血沒 속에 부정적 아니두스가 표현되고 있다. 29)

29) Von Franz, M.L.:“Individuation Process" (융: 『人間과 無意識의 象徵』 pp.177-194, .李符永 外 諦. 1982, 集文當).

전술한 이야기 가운데「해와 달」의,어머니를 잡아먹고 아이를 위협 하는 호랑이는 그러한 부정적 아니무스이다. 소녀를 바치지 않으면 마을에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괴물들 역시 여성을 위협하는 무의식의 파괴적인 힘의 표징이다. 물론 이 경우 지네니 큰 구렁이니 하는 괴물은 파괴적인 모성 본능에 더 가깝다. 「地下國大賊說話」의 도둑귀신은 늘 아리따운 신부를 빼앗아 가는 무자비한 괴물인데 부정적 아니무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지하의 도둑귀신이나 소녀회생을 강요하는 호랑이나 모두 이야기 속에서 자기를 처치할 수 있는 암시를 약간씩 홀려 놓는다. 영웅은 괴물의 이 약점을 이용하기도 하고 여러가지 초인적인 힘을 普神들로부터 물려 받아 결국 도둑이나 호랑이,그밖의 괴물을 처치하고 소녀와 결혼하여 도둑귀신이 지닌 많은 보물을 얻게 된다.

부정적 아니무스는 분석심리학적 용어를 빈다면 정신의 전체성, 즉 인간심성에 내재하는 인간정신의 분열을 지양하고 통일시키는 힘을 지닌 全一에의 의지, 자기원형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다. 이것이 민담에 서 여 러 도움을 주는 존재로 등장하는 할머 니, 산신령, 하느님이다. 그러나 때로는 괴물 그 자체 속에 한가닥 자기원형의 빛이 내포되어 있어 괴물이 자기의 비밀을 누설하는 것이다. 마치 괴물은 神의 그림

자,자기원형의 그림자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지하국대적설화」30)는 한국의 경우 반드시 성공적인 결혼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동아시아의 민담이 그러하듯 악귀의 除治가 모두 걸혼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는 아예 결혼은 거론조차 되지 않은 채 모든 것은 원상으로 되돌아온다. 충남민담 「괴상한 도둑」에서 괴물을 除治한 주인공은 이미 괴물에게 마음이 돌아선 아내를 버리고 자기를 도와준 몸종과 결혼한다. 어떤 이야기에 는 아내륜 죽이고 몸종과 걸혼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국적 귀결이라할수 있을지 모른다. 도둑귀신에 대한 美女의 태도는 雨價的이다. 즉, 여성성은 무의식의 폭력에 휩쓸리 는 측면과 휩쓸리지 않는 측면으로 갈라지 고 있다. 따라서 부정적 아니무스의 극복은 이루어지나 어던가 미진한 것이 남는다. 부정적 아니무스의 영향력이 그만큼 여성성올 잠식해 버린다고나 할까.

30) 孫吾泰: 『韓國民銀說話의 研究』, 1954,乙西文化址, 서울, pp.106-13).

8) 여성의 주체성

한국민담에 나타난 여성상은 수없이 많은 유형을 보인다. 과거보러 간 남편을 끝없이 기다리다가 재가 되어 버 린〈기다리는 여인>(「급제를 기다린 처녀」韓相麻,충남민담,1980 65),〈경솔한 여자〉(「송장다리」齡相立: 충남민담41)〈악한 며느리〉(「악한 며느리」任東根144) 경솔한 약속으로 딸올 팔아 버린 방정맞은 어머니(「에밀레종」, 投來次,

전북민담16), 사나운 아내로서의 여인상 (「사나운 아내 길들이기」班來次,전북민담28), 그밖에도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각양각색이다.

그 가운데서 유달리 눈에 띄는 것은 思夫!K與說話이다. 똑똑하고 현명한 아내가 어리석은 남편을 도와 큰 부자가 되거나 남편울 훌륭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들이다.

전북민담「남편 출세시킨 아내」31) 에서 머슴살이 한 노총각과 함께 살기로 한 부인은 남편에게 머슴올 그만두도록 지시하고 돈율 벌게 하고 공부를 시켜 드디어 높은 벼슬올 하게끔 유도한다. 이 민담의 배짱있고 초지일관의 의지와 자립심을 지닌 여인상율 여필종부의 전통적인 순종형 여성과는 정반대의 비인습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쉽게 나태해지고 의존성향이 있는 남편을 질타하면서 그를 훌륭하게 만들어 내는 남편의 인도자와 같은 역 할을 하는 점으로 미루어 볼」

31) 往來法:的舟., pp.304-311.

때 이런 여인은 스스로 남성과 겨루면서 남성을 이기 려는 오늘의 여권운동가와 다르다. 자기의 용기와 대담성과 의지를 자신을 위해 쓰기보다 남편을 강하게 만드는 힘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핏보면 이것이 남성을 통해서 자기의 명예욕을 충족시키는 행위로써 여성 자신의 자립정신과는 거리가 먼,단지 의존적인 남성들의 여성에의 기대를 여성 스스로 충족시켜 주고 있는 태도처럼 보이고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건전한 여성의 아니무스가 남성들 속에 잠자는 창조성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은 보편적인 진리이며 그럼으로써 인류문화에 끼친 여성의 공헌이 높이 평가되는 것이다. 남성에게 남성이 못 보고 있는 것을 보게 하고 그를 보다 높은 경지로 인도하는 것은 여성의 특질이다. 우리는 단테의 神曲의 베아트리체,샤마니즘의 수호신령, 聖어거스틴의 어머니 등 그밖에도 많은 예에서 영혼의 인도자 psychopompos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볼 수 있다. 개인의 심리를 중심으로 볼 때 이런 영혼의 인도자상은 남성 의 心SSeele Anima 여성의 心魂 Geist, Animus와 같은 인간 무의식에 편재 하는 내적인격의 상징이다.

「愚夫賢妻說話J는 여성의 수동적 순종과 남성의 강력 한지도력을 강조한 가부장사회의 남존여 비관념을 代供하는 설화이다. 꿈이 의식의 일방성올 대상하듯,민담은 그 시대의 지배적인 가치관이나 통념의 편향성을 대상적으로 수정한다는 점에서 시대의식을 대상하는 그 시대민중의 무의식의 언어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우부현처설화」의 결말이 반드시 성 공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바보사위와〈구나〉열 번〉(斑來次 : 전북민담33), 「미련한 원님의 판결」(按來次 : 前渴名에서 보는 것처럼 똑똑한 아내의 말대로 하다가 아내의 부재중에 큰 실수를 저지르는 우스운 이야기 도 있다. 남성 자신의 노력없이 일방적으로 여자의 지시를 흉내내는 것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평범한 교훈이 깃들여 있다.

여성의 주체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민담은「내 복으로 산다」(班來次 : 전북민담92)일 것이다.

옛날 어떤 사람이 딸 여럿을 불러 놓고〈너희들은 누구 복으로 먹고사냐?〉고 물었다. 모두 다 아버지 복으로,어머니 복으로 먹고 산다고 했는데 유독 막내딸만은 내 복으로 먹고 산다고 했다가 아버지로부터 쫓겨나 숯 굽는 것으로 먹고 사는 사람에게 시집보내라 해서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에 시집가보니 숯 굽는 이마돌이 金돌이었

다. 그래서 이들은 큰 부자가 되어 잘 살았다.

〈내 복으로 산다〉는 말은 反인습적인 오만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父로 대 변되 는 전통적 관념에서 배척 받고 영웅아의 이야기에서 영웅의 첫 조건인〈세속으로부터의 추방〉을 겪게 된다. 숯장이는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는 깊은 산속에서 불을지필 재료를 만드는 사람이다. 검은 숯을 다루는 때묻은 모습에서 세속의 눈으로는 하찮은 존재이나 의식의 불, 열정의 불을 일으킬 소재가 그의 손에서 가다듬어진다. 그는 무의식이다. 빛을 간직하고 있으나 그것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마음, 그러나 그 속에서 이승에 불을 가져다 줄 준비를 묵묵히 실행하고 있는자인 그는 세속의 눈에서는 죽음이요,어둠이지만 영원한 파멸의 죽음이나 절망의 어둠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지니고 작업하는 자이다. 여성의 마음속에서 살아 있으되 밖에서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혼, 아니무스와 같은 것이다.

여성이 세속적 영화나 인습적 통념에 동일시하지 않고 자신의 어두운 對者와 함께 할 때 불현듯 무의식의 보화가 빛을 발한다. 외향에서 내향으로의 침잠에서 그녀는 세속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오직 각자의 눈으로만 발견될 수 있는 금돌을 확인하게 된다. 숯장이는 하나의 成;人師 initiator, 여성의 자기실현을 돕는 무의식의 내적 인격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보배를 갖고도 보배인지 모를만큼 깊은 무의식성에 빠져 있다. 오직 의식의 손길이 닿을 때, 다시 말해서 무의식의 기능이 의식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작용될 때 무의식은 활기를 띠고 창조력을 발휘한다.

이렇게 무의식에 대한 의식의 적극성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이 충남민담, 「불씨」(韓相壽 53)에도 암시되고 있다.

부지 런하고 착한 이쁜이가 시집을 갔는데 시대인 한생원대에는 할아버지 때 부터 내려오는 불씨가 있었다. 그런데 이쁜이가 시집가서 살림을 하자 그만 불씨가 꺼져 버 렸다. 새 불씨를 담아 놓으면 얼마 뒤 에 또 꺼지곤 해서 틀림없이 자기가 시집살이 하는 것이 생이 나서 누가 한 짓일 것이라 여기고 밤중에 불씨를 지키고 앉았다. 그러자 치렁치렁한 댕기머리에 파란 저고리 회색바지를 입은 여남은 살 되어 보이는 草 이 살금살금 들어와 불씨에 오줌율 누다 들켜서 달아났다. 이쁜이는 소리를 지르며 잡으려 쫓아갔다. 죽어 라고 쫓아갔는데 그 소년은 산마루에 올라서더니 자취를 감춘다. 이쁜이는 손으로 흙을 파들어 갔다. 무릎이 파묻힐 만큼 파내려 갔는데 그곳에 넓은 바위

가 깔려 있고 바위를 젖혔더니 항아리 세 개가 나란히 있는데 금은덩어리가 가득 담겨 있었다고 한다. 하늘이 몇십 년을 불씨를 꺼뜨리지 않은 한생원집에 상을 주려고 한 것이라는 말로 이야기가 끝난다.

초립동이는 무의식의 인도자 psychopompos이다. 그것은 여주인공의 의지를 시험하는 하늘의 뜻이며 여주인공이 어느 만큼 적극적으로 생명의 불올 체방놓는 힘과 대결하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는가를 시험하고 있다. 여성의 자아에 가해진 시련은 결국 시비術神內皮의 자기 Selbst로부터 나온 목적성을 지닌 작용이 었던 것이다.

여기에 비하면「귀신을 이긴 손병사 어머니」(位來次, 전북민담 99)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센 攻擊과 배깡으로 시대의 조상을 억누른 탈바가지귀신을 내쫓는다. 그 귀신은 죽지 않고 원혼이 되어 여주인공이 낳은 아이를 예앗으려 하자 여인은 미런없이 아이를 귀신 앞에 내던진다. 세 번째 아이는 귀신이 오기 전에 밖에 내다두니 학이 와서 아이를 감싸고 그제서야 귀신은 감탄하고 물러선다. 앞의 두 아이는 모두 귀신이 보낸 아이였다고 한다.

손병사 어머니는 귀신의 뜻을 미리 알아차리기나 한 둣이 아이를 버리고 있다.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미련없이 버린다는 것은 세속적 차원에서 있을수 없는 행동이다. 어린이 유기, 어린이의 거절은 현대의 精神方動學에서도 그 아이가 장차 정신장애를 일으키는 대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결정적인 어머니의 과오의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상징적으로 보면 이 이야기는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신의 유아적 측면에 매달리지 않고 회생하는 것이 진정으로 위대한 가능성,장군아들의 출생을 실현시킨다는 뜻이다. 자기가 가장 애착을 느끼고 있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버리는 것〉은 바로 보다 큰 것올 〈얻는 것〉임율 불교설화 같은 곳에서는 곧잘 강조되어 있다.

여성의 자기실현에서 여성은 사회적 여성관, 여성의 사회적 역할, 여성에 관한 집단적 기대, 분석심리학 용어로 여성의 패르조나에만의 지하고 그것이 그녀의 갈 길의 전부인 양 착각하지만 이 것만으로는 자기의 전체를 실현시킬 수 없다. 그것은 자아와 페르조나와의 동일시에 지나지 않으며 그녀가 지닌 인격의 극히 작은 부분을 실현할 따름이다. 그녀는 그의 무의식 속의 내적 인격을 의식화함으로써 비로소 全一에의 길에 접근할 수 있다. 이 런 작업은 왕왕 세속과의 알록, 고독이라는 고통을 수반하는 작업이다.

그런 점에서 사마니즘에서 男샤만이 여성인격으로 전환된다든가 한

국의 무당이 굿거리에서 男服을 껴입는다든가 하는 것은 자기실현의 상징적 표현으로 의미 깊은 현상이다.

한국민담에서는 男服女人의 이야기가 자기실현의 주제에 관련해서 기술되고 있다.

「꽃으로 동생 살리고 왕비 가되어」라는 전북민담(@ 技i來次 1979)에

는 머슴들에 의해 박해받는 남매의 이야기가 있다. 양반이 죽고 남매만 남았는대 재물이 탐난 하인들이 그 남동생올 죽인다. 누나가 남복을 하고 서울에 가 정승집에서 공부하여 장원급제를 했는데 그 집에 서 사위를 삼으려 하여 결국 혼인식을 지내게 되었다. 이때 죽은 사람 살리는 꽃을 발견하여 그 꽃 3개로 동생을 살리고 다시 정승댁으

로 동생과 함께 가서 사실이 야기를 하고 정승집 딸을 동생과 맺어 주고 자기는 할 일 다 했다고 죽으려고 한강에 몸을 던졌으나 왕비를 잃은 임금님의 베 위에 떨어졌다. 그래서 그 임금의 왕비가 되어 잘 살았다고 한다.

남매 이야기로서는 성공적인 귀결이다. 남매상은 남녀 신의 攻 gdttli-che Syzygie32)과 같이 정신적 전체성의 한 표현이다. 그러나 남매는 아직 원초적 본능적 의존관계를 지닌 상태이므로 보다 통합된 전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단 남매의 혈연적 결속이 무너져야 한다. 여기에 한몫하는 것이 부모의 열등한 기능인 하인들로 나오는 무의식의 파괴적 충동이다. 하인들은 세상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소년의 무의식의 그림 자일 수도 있다. 남매의 분리에서 결손된 남성성을 보상하기 위해서 누이는 남성의 역할을 하고 이에 성공한다. 그리고 드디어 새로운 全

一에의 결합이 결혼의 형태로 시도된다. 이를 동해서 누이는 자신이 지닌 본래의 여성성으로 돌아와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고 이 절박한 필요성 속에 해결의 가능성이 생긴다. 즉, 동생을 살릴 수 있는 꽃을 발견하고 그 동안 무의식에 억압되었던 남성적 상징올 재생시키고 정상적인 결혼, 하나의 對極合一이 이루어진다.

32) Jung, C.G.: Awrt, Rascher, Zdrich, 1951, pp. 27-43.

여성의 남성화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의식의 아니무스가 의식화되지 못한 채 있어 자기도 모르게 여성의 의식이 무의식의 남성적 인격에 동화되어 부정적 아니무스에 사로잡힌 상태거나 의식적으로 무의식의 남성적 측면을 실현하여 통합된 지해로 분화시킨 경우이다. 이 민담의 이야기는 후자식] 한하는 여성의 자기실현율 표현하고 있거니와 그 귀결은 심리학적으로 해석하기에는 약간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다만 정신의 全一性,즉 동생의 결혼식이 실현되고도 남아 있는 여성적 에너지가 혈연에의 미련을 포기할 때 보다 높은 경지의 대극합일이 이루어져 4位의 완성된 정신상태에 도달한다는 이야기임에는 틀림 없다. 그러나 다른 類話에서는 누이의 원망이 문제되는 귀 걸을 지니고 있기도 해서 여성의 자기 실현에 수반되는 어려운 문제가 제시되고 있다.

4 결어——여성원형과 현대 한국여성과의 관련성

한국의 여성은 서구의 여성과 어떻게 다른가? 이런 물음에 만족할만하게 해답을 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삼국시대의 여성상,고려, 조선조의 여성,그리고 근대한국을 통를어서 한국의 여성은 여러 다양한 성격 측면과 행동유형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한국여성의 목징올 서구의 현대여성과 비교한다면 어느 정도의 차이점을 추출해내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한국의 여성은 보다 본능적이며 보다 모성적, 정적이며 대결과 자기주장보다는 순응과 수용의 가치를 지키고 있는 편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아직 너와 나의 분리, 주관과 객관의 분리가 되지 않은,다시 말해서 자연과 유리 되지 않은 소박함, 신비적 융합, 주객융합의 세계속에서 살고 있으며 개인적 감정의 분화보다는 가족집단, 여성집단의 공동의 情感을 호흡하며 산다. 흔히 남성의 결혼으로 끝나는 서양의 민담에 비해 사건의 처리가 항상 불분명하고 합리적 견지에서 볼 때 미완결을 보이는 동양의 민담의 결론처럼 항상 여운을 두고 지적인 토론, 논리적 대결, 예·아니오의 한계가 불분명인 채 외적 태도는 부끄러움과 수동과 순응의〈미덕〉에 가려진 채 내적으로는 지적 열등감을 때로는 표현되지 않은 확고한 주체적 확신을 간직하고 있다.

유교적 여성관에서 상당히 탈피한 것 같은해방 이후의 세대에 있어서도 근본적으로는 전술한 여러 내향적 감정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전체적인 성향의 흐름 속에서 때때로 강렬한 굽힐 줄 모르는 지구력과 추진력과 행동력을, 때로는 완고한 집념,격정을 수반한 논쟁이〈치맛바람〉의 이름으로 표면에 나타나지만 그것은 현대 한국 여성의 주된 면모라기보다 권력욕과 지배욕이라는 원시적 모성본능의 극단적 표현이거나 자기개혁의 일시적 몸부림이다.

〈신사임당賞〉,〈알뜰주부賞〉으로 키워진 전통적 여성상이 어느 만큼

한국 현대 여성에 감흥을 주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5월의 여인〉,〈미인대회〉와 같은 서구에서 수입된 여인상과 신라의 원화, 화랑의 전통이 과연 어떻게 習合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미의 여신 비너스와 지혜의 여신 아데나는 고대 로마, 그리스시대의 산물이 었으나 한국에는 모성신에 관한 像은 많으나 처녀의 아름다움과 영원성을 내세울 만한 상징은 그리 적극적으로 키워지지 못한 인상올 준다. 결혼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은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처녀란 죄악이며 처녀총각귀신은 가장 무서운 恨의 權化처럼 여겨졌다. 영원한 처녀의 모습은 조선조의 선비들의 마음속에 詩文을 즐겨 쓰는 재치있고 아름다운 기생에게 투사되어 존속되어 왔을 따름이다. 남성의 아니마는 분열되있었고 지나친 가부장적 체면문화는 그러한 영원한 아니마의’ 구체 회*'작업을 훼방하였고 처첩의 불행한 위계설정은 술한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1960년대 이전--순전히 인상적 판단이지만——한국의 여성은 물질문명의 발전과 벙행 하여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 에 눈을 뜨고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고 자기자신에 자신을 갖게 된 듯하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여성적 매력의 재발견이었다. 性에의 수치감은 자신감이 되어 남성들을 리드했고,남성은 또한 그러한 여성의 가치를 환영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이 떳떳하게 낮에도 손올 잡고 다니게 되었다.

여성은 교육열, 종교적 광신성,경제적 중계인의 일 속에서 자신의 아니무스문 살렸다기보다 발산하였다. 계모임의〈오야〉, 수십억 대를 주물럭거리던〈보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여성들의 출현은 인습적 여성을 대상하는 여성의 무의식의 원형적 配定의 걸과라고도 볼수 있고 상대적으로 유약해진 남성의 규율성에도 이의 출현에 공헌했다.

太母原型은 한국의 근대화와 더불어 급격히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돈, 물질, 대도시, 대기업, 조선소, 대형백화점, 대형호델의 검은 연기와 매연과 빛낄: 현란한 상품의 세계 속에 출현하고 있다. 한국의 남성은 이 또 하나의 모성에 봉사하는 작업에 혼력을 다 바치는 나머지 부인들을 가정에 버려 두지 않을 수 없는 非巡을 겪으면서 영혼의 상실, 자기의 아니마의 상실이라는 심각한 정신적 위기에 처해 있다. 합리적 계산과 외부지향성이라는 일찌기 한국의 전통에 없는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영혼은 때로는 하늘에서 빨어진 천사처럼 무의식적인 원시적 감정영 역에 침잠하고 새로운 환상적 여인상을 만들

어낸다. 이리하여 일찌키 없던 창녀의 미화작업이 한때 영화가륜 집쓰는 현상이 나타난다.

방임된 여성은 한편으로는 물질적 관능적 충족으로,다른 한편으로 는 광신에의 엑스타시로 태모에 대앗긴 영웅남편들의 부재에서 오는 혼 Geist의 공백을 채우고자 한다. 한맺힌 무당의 원혼을 달래는 넋두리와 살풀이는 오늘날 대형교회의 대형집회를 휩쓰는 성령의 거센 폭풍으로 변하였다. 개인적인 만남이어야 할 아니마 아니 무스의 의식화는 이 념에의 자유로운 사고가 금지된 상황에서 대중 신앙집회의 눈물과 호곡을 수반하는 히스테리컬한 공개고백브로 대치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의식의 원형적 작용의 오염으로 어던가 과장과 허위와 감상에 젖은 감정 체험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조용한 자기개혁,내면적 충실을 목적으로 한 소집단활동이 일어나게 된 것도 한국현대의 값진 산물이다.

여성원형상이 한국민담 속에서 충분히 표출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이 논고에서는 현재까지 수집된 수많은 민담과 類話를 총망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단언하기 어렵지만 한국민담에서는아니마 아니무스의 전기한 몇 가지 발전단계에 견줄만한 상들이 그리 만족할 만큼 발견되지 않은 것 같은 인상올 받는다. 여성의 신화가 문학적으로 다듬어진 것이 아닌 탓도 있을 것이다. 종교적 표상, 민속제의, 민속극 등 집단적 무의식의 내용이 표현되고 있는 다른 자료의 원용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 각된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인 주변에서 여성원형은 여러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신화를 우리의 마음속에 간직 하고 있고 동시에 우리가 그 신화의 연출자이며 연기자이기 때문이다.

한국여성의 전통적 종교심성의 원형

金烈圭

1 內外의 의미론

한국여성의 성년은 이른바 출가외인으로 시작되었다. 시집가면 그것으로 딸은 남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출가외인이 란 말은 시집간 딸이 남이라는 관넘을 기반에 깔고서 그것보다 훨씬 다양한 의미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만큼 함축성이 크고 상징도가 높은 말이다.

출가외인에서 出과 外가 서로 호응하고 있다. 한국여성에게 혼례란 〈나가는 일〉이다. 떠나가는 일이다. 지금껏 그녀의 안이자" 속이던 친정에서 나가는 것으로 이 땅의 여성들은 婚事를 치른 것이다. 나가는 것은 원칙적으로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나간 사람은 바깥 사람일 수 밖에 없다. 출가외인이란 말은 그래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 出外는 入內와 원칙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出外는 의미론적으로 入內와 짝지어질 수 있는 말이다. 그것을 의미론적 균형이라 부른다면, 한국여성의 出外는 그 균형을 잃고 있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전통사회 한국여성의 婚事는〈돌아옴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일이 었다. 그것은 제2의 <댓줄 자르기〉에 견주어도 좋을 것이다. 이비유법은 혼례가 成年式이기도 하다는 사실과 기묘한 모순을 빚게 된다. 댓줄이 잘리면 영아일 수밖에 없다. 성년이 되어 혼례를 올리고 도 이 땅의 신부들은 두번째의 새로운 영아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집의 상징적 의미가 母胎일 수 있음을 고려할 때,탯줄자름의 뜻은 아주 굳혀질 수 있게 된다.

이른바 父系社會에서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전통 한국사회의 여성들

은〈단절의 儀越〉와 중복된〈結緣의 儀禮〉인 혼례를 치렀다. 신부는 옛집과 혈족들과의 단절을 겪고서야 비로소 신랑과 합일하게 된다.1)

I) cf. Lucy Mairm, Marriage (a Pelican Origual, 1971). PP.l09ff.

이 단절이 出外로 표현되어 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실제로 전통적인 혼례의 과정이 신부집에서 치러지는 동안,신부가 겪는 절단의 아픔을 菜和시키고 동시에 신부를 단절해서 보내는 가족들의 아픔을 달래는 절차가 마련되 어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東床禮와 新行은 그 대표적인 절차들이다.

하지만, 이 의례적인 季和에도 불구하고 단절의 상처는 오래 남는다. 어쩌면 이 땅 신부들의 牌家살이는 이 原供의 덧남과 치유의 반복내지 악순환으로 엮어져 갔는지도 모른다.

단절의 出外에서 外는 단순한 方位槪念이 아니다. 남이라든가 낯설음 혹은 池處 등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外가 不淨 및 여성과 함께 이 땅 민속신앙에서 3대 不淨올 이루고 있음을 전제한다면 外의 함축성은 한길 심각해진다. 별신굿을 전후해서 마올 사람들은 가려 야하거나 지켜야 하는 일, 말하자면 禁忌의 그물에 갇히게 된다. 그럴 때 바깥의 他處 사람들이 마을.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은 말할나위 없고, 마을 사람일지라도 별신굿을 바로 앞두고 바깥나들이를 하였다가 마을로 돌아을 수 없게 된다. 바깥은 未知고 위험이다. 不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한국의 여러 神話에서, 바말에서 들어온 神일수록 심한 시련을 겪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脫解가 그 좋은 본보기다. 한국민속에서 內外는 前後·左右·上下와 함께 의미로 채워진 대표적 방위에 속하게 된다. 상하의 수직축 하나에 전후와 좌우,그리고 내외의 수평축이 교차하면서 이 땅 민속의 기본적 방위구성이 결정되는 것이다.

東西南北은 地理誌的인 절대의 방위 다. 이 방위에는 인간의 참여 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인간이 어떻게 자리잡든간에 束은 東이고 西는 西다. 지리지적이란 말은 자연적이란 말로 바꾸어도 좋고 절대란 말을 추상이란 말로 대체해도 좋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좌우와 내외는 人文的인 방위다. 사람이 방위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맞서 있는 사람끼리는 좌우가 서로 반대고,안과 밖은 사방이 닫혀진 공간을 사람이 어디다 짓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상하는 지리지적 방위의* 인문적 방위 양쪽에 걸쳐 있다는 점 에서 제3의 방위를 형성 하게 된다. 한국문화에서 左/右는 神聖/世俗의 대립 이외에 上/下의 대립을

함축하고 있다. 금줄이 왼새끼일 때 左는 신성한 방위가 되고 左右談政일 때는 계충적 上下를 함축한다. 그런가 하면 일상생활에서 左/右는 經/正의 대립을 함축하기도 한다. 上/下는 天/地의 대립을 바탕에 둔 여러가지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린 중에서 內/外는 親/刺:·g/他·安全/危險 등을 함축하고 있어서 다른 방위의 축에 비해 가장 진한 인간적 감정으로 채워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이 다시 淨/不淨을 함축하고 있음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이같이 방위의 다른 축들에 비교되어서 內外의 축이 지닌 함축적 의미의 개성이 드러날 때, 신부를 출가외인이라고 했올 때의 그 出外의 문화적 맥락을 짚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한국 성인여성의 전통적인 숙명은 이같은 함축적 의미를 지닌 出外륜 극복하면서 새로운 AP9를 성취하여 가는 과정 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것을 친정이라는 태에서 줄이 잘린 댓줄 要兒成人이 要兒의 꼭지가 완전히 밀어진 완벽한 성인으로 재차 자라가는 과정 이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해도 좋올 것이다. 전통사회의 한국여성은 두 번 胎해한 것이다.

그렇다고 A內가 쉽게 이룩된 것은 아니다. 新行으로 시가에 가는 것만으로 入內가 매듭지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신행은 入內의 단서에 불과하다. 친정에서의 출가외인이 상당한 시일에 걸쳐 시가의 入敗外入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녀들이 종국적으로 성취한 入嫌內人의 상황을 고려할 때,이 入浪外人이 과도기적 상태임을 알게 될 것이다.

出嫁外人->入嫁外人->入嫁內人

出外->入外->入內

이 두 묶음의 표만 가지고도 신행 뒤의 여성생활이 이것도 저것도아닌 엉거주춤한 상태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시가에서의 入外상태는 신행가기까지 친정에서 갖게 되는 入外상태에 대응하고 있다. 혼례를 치른 뒤 신행 까지의 3년 동안,신부는 친정에 머물면서 집 안의 남의 집 식구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앞의 표는

(親庭의) 入外一»出外一<强家의;) 入外—入內 

와 같이 고쳐질 수 있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親庭의) 入外—出外,(牌家의) 入外一>入內

와 같이 고치게 되면 혼례를 계기로 한 여성의 生의 歷程의 對稱的 雨分性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두 개의 入外끼리의 대응과 하나씩의 出外와 入內의 대립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것은 전통한국사회의 여성에 있어 혼례가 격변의 운명적 전환점이 었음을 말해주게 된다.

(시가의) 入外상태는 入外라는 표현이 시사하듯 갈등과 위기에 찬시련의 시기였던 것이다. 시집살이란 말은 이 시기에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그녀들이 안방을 차지하지 못했음은 말할 나위없다. 안방까지 入城하는 동안 그녀들은 안방의 固外에 진을 쳐야 했던 것이다.〈시어머니 죽자 안방차지〉란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워 낙 出外는 出外 그것이 비롯된 곳으로 되돌아감으로써 入內를 갈무리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귀환의 入內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 한국사회의 여성에게 있어 이 귀환의,內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런 뜻에서 그녀들의 出外는 의 미론적 균형을 잃고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균형이 묘하게 채워진 것이다. 出外가 外方에서 入內를 짝하게 된 것이 다. 出外한 外方에서 원칙적으로 入內는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그녀들은 外方에서 안방의 안사람으로 들어 앉아야 했던 것이다. 그것을 非對稱의 의미론적 균형이라 부를 수 있올 것이다.

0---出外「

‘-入內-1 -+出外---入內-+

이 두 가지의 도표는 한국여성의 入內가 모순에 차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바깥에서 이룩한 入內〉란 말 자체가 이미 承居語法이다.

出外와 入內 사이의 이같은 비대칭의 의미론적 균형은 그녀들이 어머니가 되고 시어머니가 되면서 순차적으로 또 계층적으로 성취되어 간다. 外內의 수평적 이동에 下上의 수직적 이동이 수반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들의 경우는 外와 下의 짝에 맞선 內와 上의 짝이 존립

하게 된다. 外下의 상태를 벗고 內上의 상태를 성취해 가는 과정이 곧 그녀들의 시집살이다. 전통사회의 한국여성의 가정내 신분은 수평과 수직의 축이 어울린 이차원적인 이동을 하였음에 비해서 남성들의 가성 내 신분은 상바의 수직 축을 따라 일차원적 으로만 이동한 것 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들은 한 집안에서 남성은 언제나 바깥임을 고려에 넣어야 한다. 물론 남성의 바깥에는 外의 부정적인 함축성은 없다. 한 집안의 內部人이던 남편이 바깥에 자리잡고 워낙 外部人인 아내가 안에 자리잡음으로씨 여기 內外가 交轉되는 특수한 상황이 있게 된다. 결국 가정 내에서의 남녀관계는 內外方位論의 의미론적인 및 가지 국면으로 설명이 가능해지리라는 시사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해사-료- 계기로 해서 이 땅의 여성들이 겪었던 비대칭의 의미론적 균형은 그녀들이 짐져야 했던 삶의 무게에 대해서 말하게 된다. 內上에 걸친 신분적 이동을 성취했을 때, 그녀들의 인생은 이미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무의미한 성취 내지 허망한 성취라고 보여지기도 할 것이 다. 또한 한국여성의 生에 대한 진한 회의주의 내지 허무주의는 바로 이 사실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직도 할 것이다. 전통사회의 이땅 여성들은 할머니가 되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성인일 수 있었던 셈이다. 했兒成人에서 老裝成人으로 옮겨가는 과정올 따라 그녀들은 生의 을 영위해 나간 것이다.

2 여성과 家事的 신앙

비대칭의 의미론적 균형을 이룩해 가는 동안 그녀들이 젊어져야 했던 生의 막중한 무게는 그녀들이 가내수공업자와 농경노동자로서의 구실을 여성 특유의 직분에 더하여 감당함으로써 더욱 가중되었다. 그것은 중류가정의 남편들이 지닌 점잖은 숫사자 내지 숫사슴의 모습과 는 매우 대조적이긴 하지만, 가중된 무게야말로 한국여성으로 하여금 그들 특유의 강인함을 향유하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가정 내에서 현실적인 궂은 일을 도맡은 것이 이 땅의 여인들이었다. 애기 낳아서 기르고, 시부모 봉양하고,남편 뒷바라지하고, 일가친척 간수하였다. 부엌 안팎의 일들은 말할 것도 없다. 거기 더하여 그니들은 밭매는 아내였고 길쌈짜는 며느리들이었다. 女工이란 말은 반드시 밥짓고 빨래하고 바느질하는 데만 국한되지 않았다. 남자들이

맡아함직한 노동들도 女工속에는 포함되어 있었다.

이 程- 속에서 그녀들은 위대한 어머니가 되어 가고 안방마님이 되어 갔다. 出外人이 마침내 外方에서 入內人으로 轉身해 간 것이다. 우리들의 위대한 어머니像은 이 入內人으로서의 어머니 없이 생각할 수 없다. 자기희생과 고난의 刺耐 속에서 저 부드럽고도 강인한 母性像이 정립되어 간 것이다.

세속적으로 그녀들은 갖은 험한 일을 감당해야 했다. 그것뿐만 아니다. 그녀들은 동시에 한 집안의〈兄術﹒司祭者〉로서의 구실을 다하기도 하였다. 家神들을 받드는 일, 祖上强들을 섬기는 일,그리고 술한 自然神들에 이바지하는 일은 물론이고 아픈 가족올 위해,혹은 집안의 우환을 물리기 위해 전통적 治方에 기대어 주술을 행사하는 일까지 그녀들의 大功이었다. 그녀들은 집안 내의 아주 다양하고 복합성 강한 종교인들이었다.

그것은 그녀들이 出外者에서 入內者로 전신해 가는 과성에서 겪었던 心供에 대한 자기구원의 의미를 갖는 한편,세속적인 궂은 일의 담당자로서 지닌 그 강력한 현실지향성과 맺어져 그녀들의 삶을 지탱하는 頭;因이 된 것이다.

제주도를 제외한 本土의 두속신앙에서 女座의 기능이 절대적임은 잘알려져 있다. 그 女强들의 成座過程은 이 땅의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生의 상처를 집약적으로 극화하고 있다. 상처 받기 쉬운 상황 속에서 상처받기 쉬운 여성들이 실제로 상처받은 그 아픔이 신행의 召命이나 愚依를 통해 전형화되는 것이다. 그들이 역사적 상황 속에서 받은 供按 그 자체가 검은 빛 신령의 祖兄 또는 座病으로 수렴되는 것이다. 이 땅의 무속은 여성적 트라우마와 무관하지 않다. 出外와 入內 사이 의 전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비롯되는 고통과 成型 사이에는 상당한 함수관계가 가로놓여져 있는 것이다. 出外라는 단절의 상혼이 치유되는 과정으로서 入內가 가능하지 못하면, 여성의 原供은 따로 비상구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 成座다.

成里는 동시에 가족과 사회를 향한 새로운 관계를 이룩하게 한다. 상처받는 피해자의 자리에서 전향이 일어난다. 이것을 成巫의〈對家

庭的·對社會的 흥정〉이라 볼 수도 있올 것이다.2) 接神 또는 神病을 擔保로 삼아 가정 내의 지위와 사회 안에서의 지위에 걸친 변화를 요구할 수 있게 된다. 제도상의 신분적 상승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2) 男 과 女 의 대립, 계층간의 갈등 등의 조건이 이 경우 고려되어야 한 것이다‘

占卜 卷와 治病者로서 의 권위에 덧붙여 위험한 존재로서의 위협성이 상처 받은 피해자의 처지에 역 전의 계 기 를 마련해 주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보는 사람〉또는〈용한 사람〉이 란 말에는 상당한 정도의 외경감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成述助;機에서 원한은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실제로 强病은 원한의 생리적·정서적 轉移라고 불러도 좋을 일면을 갖고 있다. 맺히고 맺힌 원한이 삶의 전면적 파국을 빚어낼 직전의 상황에서 한피해여성은 接神함으로써 위기를 벗어나는 것이다. 接神,곧 신들림이나 신내 림에 의한 成型는 무당이 된 여성이 자신의 위기를 관리하는 전략이 기도 한 것이다.3) 자기상처의 자기관리 이다.

3) 이 개인적 기능은 앞에셔 지적한 사회적 기능과 相 하여 살펴야 할 것이다.

이미 암시한 바와 같이 座病은 생리적인 원인만으로 야기되지 않는 다. 생리적 요인은 오히려 과소평가되어도 좋을 것이다. 座病은 문화적 微候群을 거느리고 있다. 한 인간와 가정적·사회적 파탄과 무당의 생리적 파탄 사이에는 일정한 병행관계가 존제하고 있다. 무당은 자신의 문화적 微候群,정확하게는 문화적 변조의 微候群으로 표현되는 위기를 관리하는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공동체 위기의 관리자가 된다. 그 위기란 공동체가 겪는 문화적 변조의 微候群인 災厄·흉년.질병 등이다. 병이 생리적 微候群에 머물지 않듯이,災厄 당한 물리적微候群에 한정될 수 없는 것이 두속적 사고방식이다. 우주론적인 어떤 轉移, 사회윤리 내지 가정윤리적인 흡집,사회적·종교적 禁忌의 저촉 등이 질병이며 災厄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계절적인 전환기를 맞아 치러지는 촌락집단 전체의 通過儀式인 별신굿의 주재자가 무당인 연유륜 여기서 추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실제로 별신굿의 난장에서 사회적 피해자들인 상민들의 억압된 사회적·생리적 충동이 발산될 때, 그 현상올 맺힌 것의 풀이라고 본다면 공동체가 무당의 주재하에시 계절적 변조기를 틈 탄 위기를 관리하는 전략에도 解恨의주지가 관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치 무당이 될 한 여성이 자신의 삶의 위기를 接神으로 극복하였둣이, 한 공동체는 好常 사이의 누적된 갈등(사회적 맺힘)과 상민 개인의 누적된 생리적 억압(개인적 맺힘)으로 빚어질 위기를 촌탁 共同祭後의 주재자인 무당을 통해 간접적으로 감염된 집단적 接神 상대 속에서 해결해 나가는 것이 다.

怨일을 몸주로 섬기면서 남들의 맺힘을 푸는 者의 자리에 무당이

자리잡을 때, 한국의 두속에서 원한의 주지가 차지하는 비중의 크기가 가농될 것이다. 죽어 있는 맺힌 者와 살아 있는 맺힌 者 사이의 조정자가 곧 무당인 셈이다.

자신의 위기 관리법과 공동체 위기관리법 사이에 병행 관계가 있음을 시현할 수 있을 때,그리고 죽은 맺힌 者와 산 맺힌 者 사이의 조정자가 되었을 때,무당은 흥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게 된다. 상처 받은 피해자의 처지에서 상징적인 大母神의 자리에로 옮겨 앉올 수 있을 것이다. 그녀들의 홍정은 여기서 대단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만, 여기서 그녀들은 옛날의 신화적 대모신들을 회상하게 되는 것이다.

단절의 原保을 간직한 채, 겪었던 出外가 入內로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이 땅의 주부들은 무당들이 지 녔던 상징적인 大母神像을 자신에다 투사하게 된다. 단절되어 떨어져 나온 놘가 入外의 상태를 멸치고 제대로 시가에로 編入하여 入內의 상태를 얻어내기까지, 그것은 길어진 通過儀秘, 鑛進된 동과의례의 의미를 갖는다. 친정에서 멸어져 나오는 出外가 통과의식 또는 入社式이 갖는 三分節 단위 가운데의 첫 단위 인 絶離라면 入內는 그 마지막 세 번째의 編入내지 入社의 단위가 될 수 있다. 그러기까지 그녀의 전생애는 가운데 단위인 시련에 해당되는 셈이다. 정말 기나긴 통과의례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시가를 제 집으로 삼고 제 집의 종교적 수호자, 믿음의 어머니로 전신해 가는 것이다.

물론, 무속의 상징적인 대모신상과 가정주부들, 특히 안방마님이 지닌 상징적 대모신상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를 설정해 보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그 兩像 사이에서 대비관계가 지적될 수 있음을 간과하고 싶지는 않다. 出外해 온 신부들이 그들을 집 안의 圈外米로 다루는 父系 가정에서 애기를 낳고 시어머니가 되면서 혈연의 지속자로 전신하는 것과 함께, 바로 父系 가정 그 자체의 수호자가 되어 가는 과정과무~속서사시「바리데기」의 서사진행이 서로 사이 에서 보이는 對比性은 이런 뜻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바리데기는 부계 왕권의 상속자가 될 男兒가 아니라는 이유로 버림받는다. 부왕에 의해 버림받는 것이다. 그때 바리데기는 부계 왕권의 부정적 요소로서 出外를 당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부왕이 죽음의 병을 얻어 부계의 왕권 그 자체가 더이상 존속될 수 없는 극단적인 위기에 다다랐을 때, 저승에서 생명수를 진어다가 부왕을 회춘케 한 것이 다름 아닌 바리데기였다.

버림받은 바리데기가 위기에 처한 왕실에 의해 소환당하는 과정까지 를 계산에 넣는다면 바리데기의 생애는 다음과 같은 두 건의 도표로 축약·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l 느 出外

~. ... . }-- -----------을 出外 -------------1 入 內 IL: 入 __ l 션__ _________ _ _____________________ ....:

점선 부분이 버려졌다가 돌아오는 바리데기의 행적이라면 실선 부분은 바리데기 스스로의 뜻에 의해 저승을 다녀오는 행적이다. 두번째 入內가 끝났을 때, 바리데기 스스로 座神이 되고 더 불어 부계 왕권은 회 복되 는 것이다. 버림받고 핍박받은 女兒에 의 해 男系가 회복되는과정에서 그 女兒는 神權을 따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바리데기야말로 이 땅의 무속적 대모신상의 전형임은 말할 나위 없다. 아버지에게 대해서조차,그리고 그 압도적인 男權에 대해서조차 의젓한 대모신이었던 것이다.

전통 한국사회의 종교생활은 및 가지 층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국가적인 관료종교인 유교는 조상숭배와 天逆崇仰올 至商의 이념으로 삼았다. 여기서 여성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관료종교로서의 유교는 가정 내에 전리되어 가부장적 조상숭배로 일관되었다. 물론 국가적 관료종교에서도 순수한 유교적 이 념만이 아니고 도교의 수용 및 자연신앙의 수용 등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도 원칙적으로 여성들은 금기였다. 관료종교는 남성적이었다. 한편,상민들의 민간신앙의 경우에도, 한 촌락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각종 마을굿 역시 남성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마올굿이 유교와 습합되 어 있을 경우, 여성외 금기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에 비해서 가정 내의 신앙행위는 주로 여성들에 의해 관장되어 왔다. 무속신앙도 대체로 여성들을 매개해서 가정 내로 침윤된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신앙행위에 있어 실행되었던 남녀의 性違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심지어 가정 내의 조상숭배도 남상과 여성으로 이분되어 있었다. 이분화현상은 관료신앙과 상민신앙,남성신앙과 여성신앙 그리고 촌락공동신앙과 가정내신앙 둥에도 걸쳐 있었다. 이런 여러 겹외 이분법에 있어서 여성

은 상민신앙 및 가정내신앙하고만 맺어져 있었다. 이에 비해서 남성은 관료신앙, 상민신앙,촌락공동신앙과 맺어져 있었던 만큼 남성의 신앙생활의 권역은 그만큼 넓었던 셈이다. 단순히 권역임이 넓었던 게아니다. 사회적 계층의 차원에서 남성의 종교적 권역은 보다더 우세하고 상위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4)

4) 이것은 유교가 국가종교 내지는 정치종교라는 사실과 有關 한 것이다.

종교생활에 있어서도 한국여성은 가정 안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들의 神涯이 따로 있고 그녀들 특유의 신앙행위에 주술행위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家事的 신앙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민족,이 땅에 살다가 전통적인 여성의 종교는 강하게 가정 집약적 이었다. 그것은 안방마님이 지녔던 대모신상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家事信仰을 배경으로 삼은 대모신상은 전통적 종교심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열쇠 구실을 하게 된다. 가정의 번영 및 가족의 평 안에 대한 보장이 여성신앙의 제1차적 동기가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두엇보다 집, 또 집이었다. 그만큼 현실지 향적이었던 것이다. 그 신앙행위에는 윤리적 기반이 비교적 박약했고 영혼의 구제와 같은 관념이 별반 개입되지 않았다. 무속신앙의 주술행위가 가사신앙의 현실지향성을 강화한 것도 사실이다.

가사신앙의 양대 이념은 吉凶이었다. 吉은 淨, 福,運,財 등과 한묶음이 었고, 凶은 不淨(동티), 禍, 厄, 災 등과 한묶음이 었다. 神强의실질은 凶을 쫓고 吉을 이끌어오는 이른바 强驗 혹은 영검에 있었다. 〈용한 무당〉이라고 할 때의 용하다는 말도 이 영검과 관련되어 있었다.

死靈마저도 이승에 문제가 남았을 때,생존시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남았을 때, 저승으로 가지 못한 채 이승을 떠돈다고 믿어졌다. 저승이 靈의 구원을 보장할 만'한 곳이 아니 었으리라는 추리를 해볼 수 있게 된다. 이 추리는 한국의 전통신앙이 지켜 왔고 또 오늘날에까지 그 영향이 미치고 있는 현실주의에 대한 또다른 해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떠도는 死靈이 곧 怨靈이다. 怨靈과의 직접적 通話者이자 그 銳織者로서 이 땅의 무당들은 그 기능을 다해 왔다. 가정 내의 家族怨變에 대한 類 者 구실이 주부들에 의해 지켜져 왔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무당과 가정주부 사이의 대비성을 지적할 수 있게 된다. 死靈 및

怨級들이 지닌 현실주의가 그 怨通?과의 通交관이거나 怨强의 樹槪端인 무당 및 주부에게 전이될 수 있음은 말할 나위 없다.

3 大母神像

한국여성의 전통적 신앙심성의 원형이 가사신앙 속에서 형성되어 갔을 때, 그 신앙심성의 인격적 吹現은 곧 안방마님다운 대모신상올 기다려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이미 끝나버린 像은 결코 아니다. 오늘날에도 한국인의 심성 및 정서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神像의 원형을 거슬러 上古代神話에서 찾게 되 는 것이다.

대모신상이 오늘에 끼쳐진 사례는 한 詩人의 伊少記的 사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後延柱는 몇 건의 그 자서전적 기술 속에서 그의 할머니, 외할머니 그리고 어머니를 다같이 그가 가진 신비체험과 관련시켜 묘사하고 있다. 바다 너머 (또는 밑)와 이승, 天上과 地上, 地中과 地表의 불연속이 이들 女性血親들에 의해 극복된 사례를 그는 그가 가진 신화적 체험의 전형으로서 회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여성들에 의해서 어린 철의 詩人은 총체적 우주상을 향유할 수 있기도 했던 것이다.

요컨대,이들 女性血親들은 朱堂에게 있어〈대모신〉적 원형을 지닌 존재들이 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그들을 神官이라고 부르고 있기까지 한 것이다. .總一的우주상을 회복시켜 주는 그들은 동시에 주술적인 보호자였던 것이다. 神强들은 그녀들의 몫이었다.

未堂에게 있어 나이 많은 女性血親만이 대모신적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에게는〈서운니〉라는 이름의 요정 같은 소녀 친구가 있었다. 그녀도 어린 未堂을 옥황상제의 세계에 건네준 越媒者였던 것이다. 商話에서 大父神이 노인과 꼬마로 나타나듯이, 어린 後延柱의 시적 경험의 세계에서는 나이 많은 여성과 꼬마 소녀 양쪽으로 이루어진 대모신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운니〉의 경우는 未堂 특유의 경험이라 해도,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렇지 않다. 대모신적 원형을 지닌 존재는 전통사회의 우리들 누구나의 할머니, 어머니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 집안의 무당 구실을 해온 것이 사실인 이상, 그들을〈家族巫〉라고 불러도 좋올 것이다. 공동체의 무당과는 달리 그들올 임기응변의 일시적, 비전문적 무당이었다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사센 눈에서 삼울 내려 주시 던 할머

니, 새벽녘 우물결에 정화수 띠놓고 용왕을 먹이시던 어머니는 우리들의 母性像에서 지울 수 없을 것이다. 未堂은 시적 사상으로 그 모성상을 다소 과장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뿐이다.

한 가정 내에서 조상숭배와 家神崇拜의 兩立을 지적할 때도 대모신상은 얘기될 수 있다. 조상숭배는 유교적 원리에 의한 것이고,남성들에 의해 그 祭般가 주재된다. 이에 비해 가신숭배는 애니미즘이 介在한 샤마니즘적 원리에 의한 것이고, 그 시행자는 여성이다. 제례의 주재자가 애기될 때, 전자에서는 바깥양반인 남성 戶主(大主)가 그 전형이 될 것이고, 후자에서는 할머니 또는 어머니로 이루어지는 안주인이 그 전형이 될 것이다.

家神은 한국 전통사회의 가옥이〈約神殿>이란 사실과 맺어져 있다. 부엌의 조왕신,집안 토지의 터주,가옥건물의 성주,그리고 집 안의 財運을 맡은 업주(인업을 포함한) 등이 주부들에 의해 섬겨지고 있는 家神들이다. 물론 産兒의 神인 삼신도 여성들에 의해 모셔지는 여성을 위한 神이다. 이들 諸神이 집안에서 안주인들에 의해 섬겨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밖에 집 안 바깥의 神들——日月星辰을 비롯해서 연등이 란 이름의 月神, 그리고 能神이란 이름의 풍요의 神 역시 여성들이 섬기는 여성들의 神들이다. 龍神은 집안에서만 섬겨지는 것은 아니고 물깃이나 논두렁 등 바깥 공간에서 여성들에 의해 섬겨진다. 이런 여러 점을 고려할 때, 한 집안에서의 남녀의 구변은 곧 祖上神과 自然神의 대립으로 인식되기도 할 것이다. 여성들도〈조상단지〉란 이름의 조상신을 섬기고 있으나 이 조상은 忌祭祀 때 모셔지는 三代祖또는 五代祖의 祖靈과는 별개의 것이다. 고모 따위의 직계존속이 아닌 현연 가운데 怨靈이〈조상단지〉로 섬겨지는가 하면 때로는 막연히 〈조상님네〉로 관념되기도 한다.

祖上靈을 모시는 남성들에게는 전혀 況術師的이 다. 勝座의 성격이 목히 강하다. 마을 안의 전문적 무당에 대비될 만한 비전문적인 집안의 무당이라고 부를 만한 속성을 여기서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병울 고치고 살을 막고 동티를 물리치기도 하는 것이다.

조상숭배에 이바지하는 남성들이 그들의 신앙대상에 숭앙과 경모를 바치면서 그 대상에 대해 순종적인 데 비해서 여성들은 철저한 현실원리로 그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 전자에 비해서 후자는 보다더 주술적이다.

전통사회의 한국 가정에서 남성호주는 家統을 계승하고 가족을 다

스리는 자리에 있었다. 계승권과 통치권에는 당연히 대표권이 수반되어 있었으나 생계를 지탱하는 경제권 역시 남성호주가 향유하는 권능이었다. 물론 이 三權에 의무나 책임의 荷重이 덧붙여져 있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이것을 통틀어 호주의〈家 術 task-leadership>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유교적인 조상숭배가 家技, 가문 둥에 직접 관련되어 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이에 비해 안주인은 집 안의 안정이나 평화에 관한 지도권올 향유하고 있다. 이것을 列에 따라 social-emotional leadership)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음식의 공급,衣住의 편안은 물론이고 병없고 탈 없이 지탱될 수 있도록 하는 일들이 여성의 어께에 얹혀 있다. 한국여성의 社竹-術紀權은 그들이 지닌 家座的 성격에 의해 더한층 강화되어 있었다고 보여진다.〈굿>이라 불려지고 있는 차원의 규모가 큰 무속적 제의는 무당에게 맡겨져 있으나〈푸닥거리〉나〈비념〉의 차원이라면 이 땅 여성들은 그들이 집안에서〈물이>하는 (兄術師구실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당이 단골인 개인 가정에 와서 굿•푸닥거리•비념 등을 행할 때, 주부는 그같은 종교적 제의의 施給者이면서 아울러 보조자였음도 고려에 넣올 수 있올 것이다.

한국여성의 대모신상은 上古代 왕국을 낳은 어머니들에게까지 소급추적될 수 있을 것이나, 이 경우 씨족의 始祖母 및 신격화될 女座祖들도 이들과 더불어 고려될 수 있올 것이다. 가야의 正見母主 및 신라의 仙桃山 聖母는 아버지 없는〈왕국의 어머니〉로서 한층 돋보이고 있거니와 이들이 둘 다 山神이란 것도 그 대모신다운 면을 강화하고 있다. 전국 각지의 女山神 및 老姑들이 正見母主나 仙桃山 聖母의 또다른 변이들임은 말할 나위 없다. 고구려신화에서 東明王의 母居는 뒷난 왕조에 의해 섬겨질 때, 그 아들과 짝지 어져 神座를 누리게 되나 그 夫神인 解務歡는 이 짝에서 빠지고 만다. 이른바〈母神과 子神의 짝〉을 이에서 지적할 수 있거니와, 이 짝은 대모신상의 또다른 相H문 보여 주게 된다.

物]花가 河泊의 딸로 /消心制에서 유래된 점은 齡居世의 紀인 關英이우물, 그리고 首强王의 紀인 黃玉이 바다에서 유래된 사실, 그리고 또健의 조부인 作帝健의 아내가 우물 및 바다와 짝지어져 숭앙되었다는 사실들과 동일선상에서 고찰될 수 있을 것이다. 물이 대모신의 또다른 상징 임은 잘 알려져 있다. 이둘 正見母主, 仙桃山 聖母 그리고 樹J花는 山神으로서 왕국의 保護神이 되고, 水神으로서 풍요의 神이 되

고〈왕국의 어머니〉라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왕국의 어머니들이 超犬母神이었다면 씨족의 어머니들은 中級의 대모신이고 가정의 어머니들은 가장 작은 대모신이 되는 생이다. 말하자면 가정의 주부들은 왕국의 어머니들인 超大母神의 축소된 후계자로서 존립하고 있는 것이다. 신화에서 例花는 段補을 관장할 뿐만 아니라, 새를 그녀의 使者로서 부리고 아들에게 我馬法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왕국이 있게 된 기틀올 마련하게 된다. 사회-정서적 기능이 例花에 의해 집행되고 있는 것이다.

왕국의 어머니들과 마을 안의 무당들을 후광으로 지니고 있는 이땅의 가정주부들은 거의 압도적이고 일방적인 그 종교적 권능으로 해서 남편들의 家想權과 균형올 잡을 수 있는 社命-情給權을 누려 왔던 것이다. 전통사회에 있어서의 여성지위를 애기할 때,특히 가정 내의 지위를 애기할 때, 여성들이 종교에 기대어 대모신으로서 누렸던 이만만찮은 사회-정서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가정 내의 그것에서 유추될 수 있는 종교상의 양분론적 대립을 국가적 규모에서 애기할 수 있다. 우선 유교라는 국가종교 또는 공적 종교와 사마니즘의 중추가 된 민간신앙의 대립을 들 수가 있다. 국가종교에서 여성은 일방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제외되었다. 그것은 여성이 제례에 참여할 수 없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에 비해서 민간신앙에서는 여자가 전적으로 금기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종교에서는 전적이고, 민간신앙에 서 는 조건부라는 단서가 붙기는 해도 여성이었던 것은 마찬가지다. 죽음, 他塔(外方)와 함께 금기의 삼대 원리였던 여성은 不淨으로서 정성스러움 및 깨끗함과는 상극하고 있었다. 그런 한도 안에서 여성은 어느 정도 신성을 위협하거나 정결함을 오염시키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여성의 근접은 곧 오염이었고 신성의 汚損이었기 때문이다.

여성이 종교적인 국외자 내지 제외자였음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가종교 및 그 가정版이라고 할 수 있는 조상숭배와, 역시 국가종교의 일부인 城陳信仰의 지방관(또는 민속판)이라 할 수 있는 서낭굿에서도 지적할 수 있다. 일부 지방에서는 祭禮나 忌祭祀 때 祭士陳設이며 제례의 과정에서 여성은 배제되고 있고 마을 서낭굿 절차가 운데서 이른바 서낭告祀 부분에는 여성의 참여가 용납되지 않는다. 서낭터에 여성 근접이 禁忌됨은 말할 나위 없다.

이 같이 국가종교에 서 는 전적으로 그리 고 민속신앙에서는 부분적 으

로 여성이 배제 되거나 금기된 사실은 두당이 여성이란 사실과 가정 주부가 家堅的이 었다는 사실 및 그들이 대모신적이었다는 사실과는 상치되어 있다. 한국 종교를 大局的으로, 총체적으로 術服하였을 때 드러나는 여성의 신앙적인 等價性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또한 여성원리가 번식과 생명력의 상징으로 숭상된 사실에 맞서, 여성원리의 현실화인 출산이 不淨으로 간주되어 있었음을 지적한다면 등가성은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출산이 있게 되면 喪故가 일어 날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을굿은 연기되거나 취소되어 왔다. 이에 비해 남성은 단적으로 남성이란 조건만으로 금기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뒷인가 부가적 인 조건이 붙었을 때,남성은 비로소 不淨으로 간주되었다. 이여성의 둥가성은 그들의 대모신상에 祀製을 일으키고 있는 둣이 보임을 굳이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국가종교 내지 공적 종교인 유교에서와는 달리 서낭굿이나 別神굿 등 민간신앙에서는 여성의 금기는 제한적이었다. 신내림을 받기 전의 堂主집,성황터, 堂雨, 그리고 告祀 둥에 관련되어서만 여성은 금기였던 것이다. 서낭고사가 일단 끝나고 신내 림 만 받고 나면 여성들은 아무 제 약 없이 굿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런 점까지를 고려한다면 국가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다시 가정으로 내려오면서 종교상의 여성금기성이 차츰 엷어져 갔음을 지적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가정 단위에서 여성의 대모신적인 자리가 잘 지켜졌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여기서 유교를 기독교나 불교는 자연신앙과 나란히 놓을 때, 본격적으로 종교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한다면 여성이 지닌 등가성은 그 균형이 깨뜨려질 것이다. 그것은 여성의 대모신상의 복권을 시사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방조사회의 통치이념이던 유교에는 波淨도, 초월적 존재도, 신비체험도 없었다. 신이 없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따라서 유교가 사회의 支柱的 이념이었다는 것은 세속원리에 일방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편향되게 조선왕조가 기대어 있었음을 뜻한다. 그같은 사실은 상고대의 왕권신화와 고려의 왕조전설에 용비어천가륜 대비시켰을 때 명확해진다. 구체적으로 삼국사기가 그리고 영웅상(金廣倍)과 용비어천가 그리고 있는 그것(이성계의 선조들) 시이에도 그만한 차이를 확인하게 된다.

이것은 조선왕조가 신성원리나 종교에 거의 감염됨이 없거나 아주

작은 사회였음, 의미하고 있다. 통치자, 관료 그리고 양반사대부들로 구성되는 지도적 계층의 경우,세속원리의 편향성은 사실로서 지적되어도 좋을 것이다. 조선왕조가 서구의 중세사회 또는 아시아 일부의 중세국가와 다른 점이 여기에도 있게 된다. 왕궁에서 가령 歲末과 年初의 淨化後强를 도교를 따라 치른 것은 조선왕조가 세속원리에 편향된 것을 다소나마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왕조 및 공적인 사회가 세속원리로 편향되어 있을 때 비록 에니미즘과 주술의 차원에서이기는 하여도 탈자연적인 세계,신령의 세계와 의 접촉을 지켜 나간 것은 가정에 있어서의 주부들이고 마을에 있어서 의 무당들이었다. 세속원리에 편향된 공적 사회 속에서〈주술-종교인〉일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여성들이다. 현실적인 걸과에 대한 평가를 보류한다고 하면,민속신앙의 주체였던 여성에 의해 지댕된 종교원리는 이론상 세속원리에 치우친 공적 사회의 일방성을 상당히 견제할 수 있는 처지에 있었던 셈이다. 삶과 죽음,현실과 초자연,可親와 不可脫 사이를 다리 놓으면서 세계를 총일적으로 경험하게 하고 그로써 인간에게 세계 속의 안정을 보장하는 종교 고유의 기능이 제대로만 집행되 었다면 여성들에 의해 종교원리가 지켜졌다는 사실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4 오늘날의 爭點

그러나 실제에 있어 여성들이 민속신앙 부분에서 지킨 종교원리가 세속원리에 치우친 공적 사회를 효과적으로 견제하였거나 보완하였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혹 그같은 견제와 보완기능이 있었다면, 그것은 원칙적으로 가정 내 에 제한된 것 이고,기껏 확대한다고 해도 마율의 테두리 안에 제한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조선조사회 전체에 걸쳐 총체적으로 그같은 기능을 발휘한 것이라 보기는 힘들다. 여성들에 의해 지탱된 주술·종교 복합적인 신앙은 걸국 가정 단위의 사적인 것이었다. 이같은 신앙은 비록 통합기능올 다하였다고 해도 사회적 차원에서가 아니고 가정 내 에 국한되 었던 것이다.

상고대사회의 우주적 이고도 국가적 인 차원에 걸친 대모신상은 고려왕조전설에 그 잔영을 끼치다가 조선왕조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가정 내의 대 모신상으로 내 려 앉은 것이다. 대모신의 緩小現象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적 차원의 바리데기가 집 안의 바리데기 로 化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왜소화가 유교에 의해 촉진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모신상은 왜소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실원리의 제약을 받고 있었다. 대모신인 주부들이 지닌〈주술-종교 복합심성〉이 매우 현실주의적이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그들은 수난이나 고통을 받아들이고 견디는,그러면서 그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베버 Weber적인

오늘날, 불교에서나 기독교에서나 여성 신도의 수가 우세 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여러 신홍종교에 있어서도 그같은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종교 전반에 걸친 현저한 여성화 현상은 전통사회의 종교적 원리의 담당자가 바로 여성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할 수 없다. 중세기의 대모신들은 비록 민속신앙의 차원에서나마 종교생괄에 있어 거의 비남성적인 우월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도시의 대형화된 교회의 경우, 그 신도 가운데 85%선에 육박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또 오늘날 불교가 압도적으로 많은 여성신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현대의 일시적인 종교의 여성화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거기에는 강한 전통성 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유교적인 세속원리가 男權的이던 것에 비해 민속신앙의 종교원리가 절대다수의 여성들에 의해 관장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 전통성울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공적인 사회에서 유교적인 세속원리가 남성들에 의해 점유된 데 비해서 가정 내의 신앙생활이 여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중세기적인 양분현상이 오늘날에 영향올 미치고 있는 것이다.

신도의 수에 있어서 만 중세기적 영향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와 민속신앙과의 통합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기독교 신앙현장이 탈민속신앙을 전적으로 이룩하고 있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가령〈방언〉이나〈간증〉이 크게 문제되는 이른바〈心强運動〉은 강하게 무속적인 신비체험과 맺어지면서 한 집안의 종교적 보호자이던 저 대모신상을 여성들 사이에 재현시키고 있다. 현실원리가 매우 우세하되,가정단위, 집안단위로 그 원리가 추구되고 있는 것이다. 민속신앙의 현실원리는 가령 원령의 主旨에 잘 드러나둣, 영적 구제의 기능이 전혀 없는 사후의 내세관에서 비롯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내세적인 영혼의 구원이 뚜렷하게 부각된 불교와 기독교가 수용되고 난 뒤로도 여전히 현실원리는 지워지거나 감소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기독교에게〈theodicy〉가 물어지지 않았고,오직 현실에서의 직접적인 탈고통주의 가 고집 된 것이다. 그 탈고통주의 는 생리적이고 육체적 인 것이 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심령주의〉의 이름 아래 육체 의 안락이 추구되 고 있는 것이다. 〈심령운동〉에서 다루어지는〈질령에서의 해방〉이 강조될 수 있다면〈가난에서의 해방〉또는〈박해에서의 해방〉도 그같은 선상에 놓여져 살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게 된다. 물론 후 양자의 사회적 의미를 생각할 때,그것들을 심령주의적인 질병에서의 해방과 완전하게 동질화시킬 수 없다고는 해도〈천국의 지상실현〉이란 명분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영혼의 구제에보다 는 육체적 현존의 구원에 중점이 두어져 있다는 점 등은 서로 나누어 갖게 되는 것이다. 가령 종교에 연금술의 기적의 돌인〈라피스〉를 요、 구하는 경우와 도깨비 방망이를 기대하는 경우가 있다면 양자는 구별하기 힘들게 된다. 이른바 제 3세계 가 내세우는 해방의 종교가 제 3세계가 있게 한 서구열강의 종교의 변이란 아이러니를 생각할 때, 그리고 그 아이러니가 종교의 토착화란 움직임 속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실향하여 뿌리가 뽑히듯이 도시로 흘러든 이민시민들이 산업사회에서 얼마간의 생활을 얻는 대신,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불운에 허덕일 때, 탈산업화 내지 탈현대화(demodernization)적인 몸부림으로 오히려 산업사회에 매달릴 수 있는 길을 종교에서 구했을 때, 현저하게 세속화된 종교가 그들 앞에 있게 된 것이 다. 불합리로 합리 속에 살아 남고, 異藏으로 機構 속에 存命할 수 있는 원리로서,대형화된 일부 교회를 가능케 한 것이다. 이것은 일부나마 교회나 사찰 자체가

워낙 그랬다기보다 그곳을 찾아드는 신도의 신앙심 리 속에서 그러했고,더러는 부분적으로 종교제도나 기관이 거의 영합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산업사회 복합현상(pluralization)은 이념이나 믿음의 혼돈을 빚고, 정신적이고 영적 인 아노미상태를 빚으면서 종교마저 그 고유한 사회통합의 기능을 수행하기 힘들게 위협한다. 빈번한 改宗이 일어 나고 필경 종교 사이의 떠돌이들이 생기게 된다. 나쁜 의미로 개종 사이의 담이 허물어지고 만다.

교회에서 무속을 믿을 수도 있게 된다. 이 믿음의 표상이 산업사회의 인간적 개별화 내지 單子化와 짝지어지면서 극히 개인중심적인 나만의 믿음,종교의 개벌화와 세속화를 촉진하게 된다. 신이 나 부처는 욕구의 투사로 존재하고 성직자는 억눌려진 욕구의 대상으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방언〉과〈간증〉을 일방적으로 내세우는 심렁운동은 여기서 그 말 붙일 곳을 찾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신앙생활의 현저한 여성화, 그리고 그 여성화가 가정 중심의 믿음의 세속화와 개변화의 선을 따라 진행되어 나가고 있는 현장에서 우리 들은 오랫동안 이 땅의 전통적인 여성들이 주술-종교 복합적인 대모신으로서,가정의 强母요, 보호자로서 존립하여 왔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전통적인 가정단위의 대모신상은 오늘날 여성화 된 믿음심성의 원형인 것이다.

놀이文化 속의 버너쿨러 젠더

李相日

1 도입 : 上下의식과 보완적 버너쿨러 젠터

놀이文化 속의 女性的인 것이 반드시 여성적이어야 할 까닭은 없다. 만약에 한국의 전통적 놀이문화 속에 여성적 경향을 지적할 수 있다면 그것 은 어쩌면 놀이 일반 가운데서 여성역할 담당부분으로서 여성적인 것이 거론되어야한다는 의미 일 것이다.

호이징아(J. Huizinga)가 그의 놀이 文化論에서 여성적 인 것을 언급했다면 그것은 여성적인 것의 필수적인 성립,을 말한 것이 아니라 놀이의 젠더적 역할분담을 말한 것이다.

늘이는 인류의 보편적 문화현상이 다.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처음부터 성이 구별되어서 저마다의 놀이로 발전한 것이 아니다.

놀이는 역사와 더불어 환경에 따라 지역적 토착적 놀이문화로 발전전개한다. 지역적으로 특성을 지닌 문화일 때 놀이문화도 성의 역할분담 내지는 성의 구별을 확연히 한다. 그것을 일러 버너들러 젠더(vernacular gender; 지역환경에 따른 성의 구릴과 역할 분담)라고 하면 이 사회학적·경제인류학적 용어를 빌린 놀이문화의 여성적 인 것에 대한 접근이 어느 정도 가능해질 것이다. 물론 이로써 놀이문화의 여성 전통상이 부각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분명히 일면적이고 관습적인 女性文化의 시각을 열어 줄 수는 있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닫힌 狀況에서 이룩된 여성문화의, 그릴수밖에 없었던 성격형성올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버너물러 젠더의 개념이 우리의 전통문화 내지 민족문화를

해석하는 열쇠가 되고, 그것이 민족문화 속의 여성 놀이문화를 해명하는 열쇠로 적절히 기능할 수 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민족문화의 자생적인 개성에 대해 지극히 맹신적이라서 우리의 전통이나 문화에 대한 외래적인 척도의 평가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러면서 가로되 우리는 결코 자폐的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밖으로 마음올 열면서 안으로 마음을 닫는 이러한 심성에는 열등의식이 깔려 있다. 그리고 가로되 우리는 결코 문화적 열등의식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폐적이지 않고 열둥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다면 그러면 버너물러 젠더의 개념을 풀어 보고 그것으로씨 우리의 전통문화내지는 놀이문화까지 음미해 볼 수가 있게 될 것이다.

민족문화를 형성하는 전통문화권은 상층•양반•귀족문화권과 하층·민중·서민문화권 그리고 기층문화권으로 나누어진다. 흔히 하층문화와 기층문화를 하나로 여기는 경향도 있지만 실제로는 상충과 하충문화를 묶어 표충문화로 간주하고 거기에 대비되는 기충문화를 잠재적 문화형성력으로 간주할 때 기층문화 가운데는 오늘의 우리 사고방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비합리적 요소, 예컨대 字密論的 神話的 思他 등이 문제시된다.

그런 한편에 상층문화를 표층문화로 보고 하층문화와 기층문화를 동물어 표층문화에 대비되는 기층문화로 간주하는 문화론자들도 있다.

민족문화를 거론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상층문화와 하충문화 내지는 표층문화와 기층문화가 이원론적으로 조명되 면서 그 어느 문화권이 민족문화로서 더 어필하느냐가 문제로 제기될 수가 있을 것이다.

시대에 따라서 우리는 양반•귀족문화만을〈문화〉로 기술한 적이 있으며, 또 어느 시기에는 기충문화만을 민족문화의 근원으로 높이평가하였다. 그리하여 총체적 문화에 대한 인식보다는 시류에 따라서 민족문화를 보는 시각이 달라져서 어느 시기에는 상충문화만이 민족문화의 정수로 평가되고 또 어느 시기에는 불변하는 근원적 水脈으로 서 기충문화가 찬양되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문화현상에서도 종교적 측면만이 강조되거나 생활문화 내지 의식구조가 어필할 수도 있고 혹은 물질문화재가 의식에 떠오르거나 민중의 생활상 혹은 민중성이 이념화될 때도 있다.

대체로 우리 가 전통문화라고 했을 때는 民衆 이데을로기적으로 서

민 내지 천민계층의 삶의 방식과 기충문화적 사유와 행위를 혼합시키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전통문화는 바로 민중·민속문화로 간주될 지경이고, 따라서 朝鮮朝의 엄연한 사실이었던 상충문화가 민족적 전통에서 제외된 채 총체적 민족문화마저 民衆勢 일변도로 색칠될 지경에 이르고 있다.

그것은 남성문화 우위론으로 직 결된다. 여성문화에 대한 무시 내지는 무관심이 어느 날 여성문화 우위론으로 바뀌지 말라는 법이 없는 오늘, 가난한 민중을 위하여,수탈당한 대중을 위하여 그들을 억압했던 양반·귀족계급에 뒤늦은 주먹 질을 하는 민중 이데올로기는 여성이데올로기처럼 역사적 과오에 대한 지적 양심의 참회 형식이다. 그렇다고 역사적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민족문화는 上·下의 문화로 이룩된 것이며 左·右 및 男·女 그리고 음양의 대립·보완적인 관계 속에 형성된 민족적 삶의 방식의 전부임을 전제로 해서 이글은 시작된다.

2 놀이의 코스몰로지와 한국 여인들

太初에 늘이가 있었다.

하늘에 佳祀를 드리면서 우리의 조상들은 굿판을 벌였다. 그〈판〉에서는 음식을 차린 祭保床과 歌舞의 놀이판이 으뜸이다.

神聖의 은총을 먹는 聖接차림의 상은신의 능력을 나누어 먹이는 것이다. 원초적인 근원적 찰력과 생명릭을 나누어 먹는 飮福행위는〈神의 먹힘〉으로 일컬어진다.

신성에의 동참을 위해서 配分의 형식을 취하는 祭®床의 음식은 신의 몸체이다. 이 육체를 나누어 먹고 신성올 나누어 받는 이 後性祭位^는 어쩌면 엄숙과 진지함의 가장 극적인 象微영^象이 될 것이다.

떡과 고기와술을 배불리 먹고 歌舞의 놀이판에서 비로소 상징표상이었던 육체는〈움직임〉으로써 살아 있는 生의 歡按룰 표현한다. 신성을 먹은 육체는 신성 그것이고 그것 은 황홀이자 도취이다.

황홀과 도취의 놀이판에는 보편적 인간의 정서가 맴돈다. 아직 거기에는 젠더의 구발이 없다. 하늘에 고사지내는 원시공동체에는 음식을 마련하고 제사를 지내는 역할의 분담이 형성되기 시작하지만 황홀과 도취의 놀이판은 아직 남성·여성으로 나누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는 벌거벗은 알몸의 마음들만이 있다.

그 마음들이 모여 제의를 꾸미고 活願의 기도와 감사의 노래와 豫見의 꿈으로 그 마음들이 달아오른다.

神聖에 바친 경건한 마음이 육체로 옮아 제의 끝에 벌어지는 난장에서는 太初의 카오스상태가 흉내내어지고 字吉例生의 신화와 述國신화 또 靈祖탄생의 거룩한 한때가 재연된다. 재 연은 흉내이며 흉내는 놀이이다.

뿐만 아니라 우주창생으로 연상되는 창조와 풍요와 多産의 기원이 제의적으로 혹은주술적으로 흉내내어지는 겨루기 형식의 兩派競逐數가 놀이의 원형으로 대풀어진다.

이 겨루기 놀이는 말하자면 대립과 갈둥을 기조로 한 드라마의 선행형태이다.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三元論으로 해석된 字密論은 빛과 어둠,하늘과 땅,碎惡, 男女, 陰陽,前後左右, 上下의 관계로 우주를 해석한다. 따라서 이원론에 입각한 대립과 갈등은 대립·갈등의 당사자로서 雨派를 가정하게 되고 이 두패는 빛이나 整과 같은 긍정적 덕목이나 풍요·다산과 같은 긍정 적 결과에 이르는 세력집단 및 어둠이나 惡,혹은 불황·불모의 부정적 상징세릭과의 투쟁을 통해 빛이 이기고 풍요가 찾아드는 類況術의 염원과 맞닿게 되는 것이다.

겨루기의 놀이는, 따라서 놀이이자 제의였으며 그것은 옛 사람들의 과학이었다. 거기에는 현실이 있고 꿈이 있고 과학이 있다. 그런 것이 합일·통합된 놀이는 마침내 목적 의식이 없는 自足的 充滿이다.

歌舞의 놀이는 그 자체로 완결된다. 놀이는 無故性으로 존재한다. 祭儀에 바쳐진 놀이가 아니라 그것은 태초에 이미 존재했고 제의가 그것을 활용한 것이다. 노래하고 춤추는 가운데 神聖은 찬양되고 그保菜을 그리는 天地배關이나 始祖전승 신화를 몸짓으로 되풀이한다.

흉내> 모방의 드라마가 놀이에 덧붙여진다. 흉내는 풍요, 다산을 비는 豫祝행위에 있어서 때어 놓을 수 없는 주술적 의식이었다.

그렇다면 인류문화의 始原에 흉내라는 늘이가 있고 춤과 노래라는 원초적인 油數의 표현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놀이문화의 새벽에 넘실거리던 활성적인 움직임이다. 그것은 生命刀이다.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유연한 움직임을 또 증명하는 놀이, 그 놀이를 主樓한 것은 여성적인 힘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주창생신화는 창조의 신화이며 창조는 잉태와 출산의 생명술에 대한 서사시이다. 풍요제의가 그것을 증명한다. 풍요는 다산과 맺어져 성적인 풍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생명을 잉태한 母强로 육화된다.

大母神,地母神의 신화는 그녀가 어떻게 우주의 핵심이 되고 그리고 차츰 제의의 성역에서 남성신으로 밀려났는가를 증언한다. 태초에 카오스 속에서 생명을 창조하면서 그녀는 춤춘다. 그녀의 춤과 노래가 우주의 창생을 기뻐한다. 그것은 이윽고 그녀의 자손들에 의한 우주찬송의 노래와 춤이 되고 제의가 된다.

따라서 아무리 太陽神처럼 남성신으로 옮겨 앉혀진 제의와 놀이의 공양이라 하더라도 그 원형의 자리에는 地母神의 에로스와 풍요와 다산의 염원이 스며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제의를 계승하고 그 놀이를 전승,그 놀이를 효과적으로 운영한 굿판의 主役은〈무당〉들이 었다. 그들은 바로 고대의 풍요제의를 연회적으로 실천한 연출가들이 었고 연기자들이었다. 비록 宗敎心性의 믿음이 그런 행위의 원동력이 되었다 할지라도 놀이의 기본적 요소로 일컬어지는 換微, 겨루기, 내기, 도취 둥의 연희적 요소가 없다면 굿판의 성립이 어려웠을 것이다.

祭依 속에서 神話的 再演올 꾸밀 때는 어쩔수없이 환상 가운데 몸을 누고 신화적 인물로 행동함으로써 吋血糟的 行為를 꾸밀 수밖에 없다. 司祭는 노는 사람이 되어 자기의 인격을 버리고 다른 인격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흉내는 정신적 황홀상태에 빠짐으로써 일상적인 자기와 분리,다른 세계로 몰입 하게 되는 일링크스illinx(도취, 아찔함)와 복합된다. 그들은 다시 그들이 꾸며낸 주술적 세계에서 행운과 풍년과 건강올 꿈꾼다.

祈陳을 실현시키기 위한 모든 굿은 상상을 형상화시킨〈表現〉그것이고, 그 원초적 표현은 예술의 기원과 연결된 놀이형태인 것이다.

굿의 놀이 를 주도한 주역이 母權社會이면 당연히 女性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수렵사회 농경사회의 家父長的 制度 아래에서 도 면면히 이어져 온〈女性的인 것〉의 힘은 부드러움의 미학으로 굴절되어 宗敎나 藝術의 세계에서라든가 心像의 형식으로 침잠·계승된다.

놀이는 예술에 선행하고 믿음과 어울려 노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놀이문화에는 원래 여성다움의 성격이 강하고 동시에 韓國女性像에서 늘이적 요소의 부각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놀이 문화를 따질 때 한국여성의 기여는 극히 제한되어 있고 여성의 놀이세계는 거의 폐쇄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놀이문화는 왜곡되었고 그만큼 女性像의 정립도 왜곡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남성적인 것에 대한 여성적인 것의 끊임없는 반격과 도전의 역사일 수도 있다.

上古시 대를 거쳐 三國時代 商麗朝에 이 르기 까지 비 교적 느슨했 던 與女關係의 사회적 통념은 그만큼 놀이 문화의 보편적 확산을 가능케 했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놀이일반에 대한 여성의 참여와 기여를 짐작하게 한다.

朝鮮朝에 와서 內外法,남녀 격리법 둥 榮法이 철저해져서『ttT家之訓』에는 非禮幼視라 하여 山空健數도 大座에 들지 못하는 까닭에 儒보으로 하여금 보지 못하도록 하였으므로 항차 婦女들에 대한 규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世宗:3년 7월 突未에 申築은『j段記』에 일러〈嫌人은 出不遊庭하고 無故不出中門〉한다 하여 朝鮮朝의 부녀들이 <術奴前朝弊風하여 每有彩加1嫌禮及盛觀之市하면 爭衆街卷하여 盛張fe!務하고 成溫池側하여 雨面縱親하여 活不活他하니 非推,嫌逆〉라고 개 탄하여 여성들의 M賊조차 금하게 하였다.『經國大典』에 의하면 부녀자들이 절에 가는 것,都城內에서 野祭를 지내는 것과 山間水谷에서 遊改하는 것,산천과 서낭당에 제사를 지낼 때는 < 一目〉으로 규정 시켰다.

이는 유교의 근엄함으로써 姑逆로 삼고 소위 淫風을 막음으로씨 親俗을 지키려고 禁嫌女上寺시킨 것과 마찬가지다. 이 금법은 역설적으로 늘이성향의 성행을 말하는 것으로 양반의 부녀들만 막을 수 있었을 뿐 일반 서민층으로 스며들지 못하여 7월 15일 절에서〈行!£|방金齊하면 城中姑女一-出往山寺하여 供佛E魂者不知爲授千人이니 此是自古以來 己然之俗〉이라 할 만큼 禁法은 무력해졌었다. 그만큼 놀이로 통하는 길은 좁아지고, 좁아진 그 놀이의 길로 들어서고 싶어하는 본능은 그만큼 음으로 그늘되어 그 그림자가 짙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회환경이었던 것이다.

금법이 무력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놀이습속이 끈질기다는 반증인 것이다. 유교문화라는 상충·표충문화,그것은 동시에 남성 문화였다. 그 속에서 도외시되고 억압되 었던 기층문화·민속문화는 여 성 문화였으며 이 여성문화는 끊임없이 복권의 날을 기다리며 어쩌면 문화의 우주론을 저버린 남성문화에 대해 반격의 칼날을 갈고 있었올는지 모

른다. 남성문화는 그것을〈淫風〉의 이름으로 낙인찍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사회적 질서는 놀이의 放逸보다 일의 生産性을 높이 평가한다. 반드시 유교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전제주의적 통치사회 일수록 놀이 문화는 자유방임주의와 혼동되고 그래서 부지런하고 엄숙하고 진지한 사회적 규범인〈일〉을 美德으로 내세운다.

고대사회에서 놀이가 祭儀 속에 포함된 것처럼 놀이는 生産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생 산과 노동에 직 접 관여되지 않는 놀이는 朝鮮朝만이 아니라 어느 시대나 통치계급의 策法에 저촉되어 추방된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 본능인 놀이稱神은 억압에 대해서 변형된 형태로 복수한다. 따라서 놀이의 기원과 본질을 통찰하는 통치자들은 억압된 놀이의 해방을 사회적 장치로 마련한다. 그것이 季節祭儀에 엮어진 媒神歌舞의 형태이며 동시에 歲時行市로 전승되는 大同놀이 혹은 別神祭의〈난장관〉같은 형식이다.

질서 속에 갇혀 열두 달 생산과 노동에 시달린 끝에 活性이 고갈될 즈음해서 正初 단오 가윗 날 같은 계절의 고비에 해방의 놀이가 놀아져 놀이공동체는 정서적으로,심성적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찌기 史解에서 迎技,束盟,舞天 둥으로 불려진 國中大舍가 열리면〈大會述 低必歌舞(……) 行人無斑夜好歌時音不紀〉이었고,〈其民法歌舞(……) 然夜男女쬬相就歌賊〉라 하였다.

그 놀이와 흥과 멋과 신명은 지금도 면면히 洞祭와 별신굿에 이어져 왔고 현대화된 오늘날의 사회구조 속에서도 野遊會 둥에서 타락한 신화적 잔재를 드러 낸다.

3 일과 놀이의 버너큘러 젠더

그것은 한국여성들의 전형적인 꽃놀이 형태의 상춘, 花 놀이에 결들여 진 노래이며 춤사위였다. 남아 있는 놀이형태 가운데 가장 빈번한 도수를 보이는 山遊會에서 우리는 高聲放歌와 酒英과 악기 춤사위들로 자기도취와 예의상실 패거리의식이 되어 오늘의 산야를 난장판으로 어지럽혀 놓는 것을 목도한다. 그러나 일찌기 그런 는 질서속의 놀이 였다——〈무리를 지어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시는 데 밤낮을 쉽이 없었다〉는 馬韓의 축제에서는 수십 명이 함께 일어나 서로 꼬리틀 물고 따르며 땅을 차고 고개를 아래 위로 혼들며 손발이 서로

맞아 움직이는데 가락 장단은 목탁을 손에 들고 陷舞하는 고대 중국의 획확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染園歌舞형식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大同놀이이며 染西油數의 원형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집단 오락은 계절적으로 농사 일이 한가한 때를 골라 놀아질 수도 있지만 그러한 레크리에이션 같은 성격을 무시 하면 노동의 수고를 집단놀이 형식으로 지향시켜 생산성을 높이는 기능을 다할 것이다.

노동력에 있어서 우리의 嫌女들의 힘은 옛부터 潮絲와 細麻字木縮의 생산에서 뛰어났고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데 남성 의 힘에 못하지 않았다.

「舍蘇曲」의 기원에는 근년까지 남아 있는 두레 길씬의 抗麻〈작업〉과〈늘이〉의 혼적이 보인다.

또女' 둘이 거느리는 두 팀이 길쌍올 가르는 겨루기로 밤을 새며 한달을 부지 런히 일하다가 가윗날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내어 같이 노래하고 춤추며 갖가지로 늘았던 그때 가난한 여인이 일어나 노래하는 데 그 舍蘇 會蘇라는 소리가,애절하였다고 한다.

놀이와〈일〉의 대비는 바로 男女의 관계,상하관계, 좌우와 음양과 상통하고 그것은 바로 버너물러 젠더的 設想과 관련된다.

전통사회, 곧 산업화 이전의 사회에는 놀이와 일에 있어서 性의 구릴과 그 역할이 그릴 만한 까닭을 지닌 채 대립·보완적으로 엄존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을 잘못 인식해서 性差別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 근시안적이다. 폐쇄적인 전통사회는 버너물러한,즉 그 지역 고유한 삶의 방식을 지닌다. 강 하나 건너서, 혹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말씨와 풍습과 일의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그 지방 록유한 삶의 방식이 있어서 그것은 그들의 字街論에 입각한 전통적 사회의 논리를 형성한다. 사고와 논리의 기점이 되는 우주론이 남성으로서의 해, 여성의 달, 남성으로서의 하늘,여성의 땅 둥으로 규정될 때 여기에 버너물러 젠더 觀念이 확립되고, 그런 남녀의 대 립·보완관계는 그것이 남녀의 性만이 아니라 상하의 관계, 좌우의 관계,음양의 관계로 확대된 버너물러 젠더적 발상법이 되는 것이다.

지역고유의 성구멸은 전통사회 고유의 이원론적 비유법과 맥락을 같이한다. 성에 따르는 역할의 구별은 오늘날 우리 가 말하는 성차별과 엄연히 구벌되는 것이다. 전통사회의 사유법은 그들의 우주관념에서 파생한 그들 나름의 논리에 의해 형성된 신화적 발상법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그것올 단적으로 시 대에 뒤 떨어진 레 비 브필(Levy-Bruhl)식 고대사유라고 배척만 할 수만도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 의 전통문화, 우리의 민족문화는 그 나름의 논리 를지니고 형성되어 나왔다. 그 논리는 버너물러 젠더적 발상법 에 따라 형성된 것이므로 오늘의 합리주의적 평가로 재단될 수 없는 가치 체계륜 지녔다는 사실이 먼저 중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립보완적인 성의 對사회 적 구조와 마찬가지 로 상하의 구조나 좌우음양의 논리 또한 그 얽히고 짜인 질서는 그 자체로써 아주 논리정연한 것이다. 전통적 성의 구별로 남성과 여성의 세계가 분명해지고 그들이 맡은 일의 영역이 짜임새 있게 분담됨으로써 산업화사회 이전의 전동적 도착적 사회 구조가 그 고유한 생존방식에 따른 문화를 이룩해 나왔다면,그 문화에 참여한 남녀, 상하의 관념이나 음양의 관념도 남녀와 같은 성의 구별과 마찬가지로 전통문화 형성과 그 해석의 키워드가 되는 것이다. 성구별에 의 한 일의 분담이 그들의 우주론에 의해 세밀하고 짜임새 있게 구성된다면, 그 구성의 방식은 지역에 따라 지역 나름으로 달라지고 남녀 역할분담에 따라 달라지고 문화분야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달라지는 구성방식에 대한 이해 가 없음으로써 동서문화의 차이는 커다란 오해와 배척과 무리가 와 닿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크게 동서문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민족문화 속에서도 그러한 갈등을 빚는 것이다. 우리는 제주도의 풍습에서, 영남의 민간신앙에서, 호남의 어법에서, 강원도의 삶의 방식에서 풍토적 토착적 독자성을 발견한다. 그것은 동시에 남녀 사이에, 또 연령충에 따라 독자적 인 문화로 형성되 고 장르에 따라 개멸화되고 독자성을 지닌 문화현상으로 존립하게 되 어 생 활상이 나 사유나 놀이 문화에 그특수성이 가세되는 것이다. 그런 독자성은 문화 속에서 구별되는 분야릴 특성에서 특히 구체적으로 발견될 수 있다. 그것은 衣食住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고방식이나 관념구성, 신앙형태, 행위전승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하여 놀이문화 자체에 있어서도 버너들러 젠더적 발상과 그 결과로서의 형태가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남자의 놀이와 여성의 놀이가 나누어지게 되고 여성의 놀이가 하나의 문화로 정착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과 놀이의 형태로 밀착되기도 할 것이고 지역적 늘이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역사적 소산으로서의 놀이문화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버너 물러 젠더의 역할담당에 따른 놀이 문화에 보편적 인 축

과 획이 있다면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일에 대한 휴식으로 서의 놀이형식이다.

지역이나 역사와 상관없이,그러니까 植i南이나 湖南, 新羅시대나 朝鮮朝만이 아니라 노동은 고달픈 일이고 놀이는 휴식이 었다.

그러나 그고된〈일〉을 大同놀이 형식으로 지양하면서 공동체의식을 강화하고 협동심을 기르며 작업의 능를을 도모한 것이 인류의 지혜이다.

上屬의 통치게급 아래 가난한 민중의 아낙네들은 협동으로 공동작업올 추진하면서 그들의 勞方을 놀이로 달랜다. 수탈당하는 괴로움이 노래에 담긴다. 억압과 한숨, 가난과 무력의 한이 춤사위 가 된다. 특정된 날에 베물어지는 자유와 해방의 시 간,그 자체가 놀이의 시간으로 향유된다.

中國의 投鉛가 발에서 호미질하며 농부들이 함께 노래하는 것을 듣고 저 노래도 腫;犯가 있느냐고 묻자 個語를 씨 곡을 붙인다고 하며 換文으로 옮겨 주는데——옛날이 이와 같았으면 이 몸을 어이 지탱했을까. 愁心이 실이 되어 한 가닥 한 가닥이 얽혀 풀리고, 풀리기를 원해도 그 끝 간 데를 모르겠네——라고 숙종조 季命齡은「樂波松錄」(宜祖31년 戊戌條)에 적고 있다.

生活苦가 수심의 원인이 되어 실가닥처럼 얽혀있는 고뇌를 풀려고 해도 풀리지 않는 이런 상황은 곧 고통과 비애의 순환,그리고 恨의 축적이다.

맺힌 채 풀리지 못한 恨이 늘이로써 물리기로 한다면 그것은 곧 놀이 의 본질인 겨루기(Ag6n), 내기(Alea), 흉내(Mimicry), 그리고 소용돌이(Ilinx)의 요소에 의해서, 그것도 복수적으로 서로 짜여진 놀이의 흥취에 의해서이다. 한은 물려야 하고 풀린 한은 한에 대한 이해와 극복의지로 발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놀이문화의 고갈은 한과 고통에 대한 순화를 망각하였다. 그것은 민족문화의 형성에 있어서 커다란 어둠의 함정이 된다.

恨의 깊이와 넓이를 강조하면서 우리는 恨의 아픔에 대한 이해를 통해 동정이라든가 자비라든가 인간애를 배우고 그 물을 이겨내는 힘율 찾아야 했었다. 恨 속에 매물되어 버림으로써 그 검은 원한과 원령에 시달리게 된 여성적인 정서는 그것이 정서로 끝날 것이 아니라 고통율 극복하는 의지라든가 고통에 무너져내리는 비극의 아름다움, 그리고 억압에의 저항,인간적 생존권의 쟁취와 같은 적극적 사유로

의 의식 전환도 가능했을 것이다.

행복이나 축복만이 능사가 아니라 가난과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환난을 통한 시련의 극복,순화 그리하여 그것을 삶의 이니시에이션으로 간주한 보다 고차원적인 존재로의 환원이 이루어졌더라면,그리고 그것이 놀이의 기능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이 작용했더라면,우리 민족문화는 恨에 찌든 시련기피증이나 현실외면이라는 닫힌 문화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놀이는 동참인 것이다. 놀이는 해방이고 몰입이다. 놀이에〈파이디아 paidia〉와〈루두스 ludus〉의 개념을 적용시킨 사람은 까이요와(R.Caillois)이다. 전자는 해방, 기분전환, 怒意처럼 자유에의 욕구이며 그 자유가 늘이의 불가결한 別;因이 된다.

후자는 어려운 상황에 오히려 즐거움을 느끼는 경우로서 스스로 육체적 고통을 즐길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마저 뿌리치지 않는다. 루두스는 파이디아의 보완 내지 교육의 역할을 해서 파이디아를 살찌게 한다. 대체로 혼자 노는 경우는 아곤보다 루두스가 그 놀이의 원동력이 되는 대신 대동놀이 경우는 파이디아의 개념에 겨루기, 내기, 흉내, 도취의 요소가 작용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농경사회의 계절 순환에 맞추어 分砂방식에 따른 바쁜 나날의 작업이 삶의 기본적 방식이었을 때 다산,풍요를 비는 종교적 행위는 祈福신앙으로서 민중의 삶올 규제한다. 그런 경우〈논다〉는 여가 행동은 휴식과 긴장 사이를 맺는 개 인적 집단적 두 차원에 걸친 카타르시스이자 집단적 협동형식이 아니면 그 사회구조에서 놀이가 연명할 길이 없어진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은 놀이유형의 도표는 다음과 같아진다.

집단적 개인적 휴식 협동 긴장 경쟁

놀이에 의한 개인적 카타르시스와 집단의식의 드높임은 놀이의 일시적 反株序, 소위〈난장판〉의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확정된다. 놀이판의 반질서에서 다시 질서로 돌아와 노동과 생산의 중압이 견디어지는 것이다.

노동과 생산에 대비되는 휴식과 놀이는 단순한 대비가 아니라 그것은 일종의 宇宙論이다.

남녀의 대립이나 갈등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따른 배분, 그리고 그 배분에서 나누어지는 영역의 고유화나 독자성이 문제되어 야 하고 그것이 역사에 의해서 어떻게 달라지고 지역에 따라서 어떻게 달라지는가가 문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역사와 환경에 의해 변형된 것으로 간주된다.

역사와 환경은 무엇인가. 변화의 요인은 바로 단순한 性別의 젠더가 아니라 일이라든가, 작업의 도구라든가, 말이라든가,인사법,의식둥 그 지역 특유한 삶의 방식, 그 지역 고유의 우주론에 맞추어 짜여진 남성·여성의 역할, 상하·좌우·음양의 논리 같은 것에 달려 있다. 전통사회의 토착적인 삶을 누리며 신화와 같은 하나의 效微統御의 세계 전체 가운데서 역할의 분담을 누리 고 있는 남녀의 성·젠더는 삶의 방식이고 上下나 음양의 논리는 그 삶을 지탱시키는 形而上學인것이다. 그런 사회적 논리적 구조가 산업화 이전의 전통사회의 기본이 된다. 따라서 단순히 남녀의 차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봉건적 사고의 잔재로서 밀어제쳐 놓을 것이 아니라 그러한 문화적 맥락을 현대사회의 헛점을 들여다 볼 수 있는 反對槪念 내지는 대립개념으로 설정해 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산업화사회가 잃어버린 내용이 무엇인가가 뚜렷이 부각되고 그것이 놀이문화의 경우에 어떤 여성의 傳統像으로 드러날 것인가 헤아리기 쉬워질 것이다.

단순히 놀이문화에 있어서 남녀의 구별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이 일과 놀이의 반대개넘 내지는 대립개념으로 존재하는 것도 인류문화의 보편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놀이의 우주론이 버너쿨러 젠더로 고정되기 전에는 신성과 세속, 제의절차와 난장벌임, 그리하여 마침내 카오스와 창조라는 字吉創生의 신화적 반복 속에 놀이 문화는 인류문화가 지닌 普遇性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놀이의 남녀 구별이라거나 여성놀이의 독자성 내지는 전통상도, 그러 므로 보편적 인 우주창생 신화로,카오스와 질서 창조의 신화 형태로, 그리하여 세속적 삶에 대한 굿의 제의적 양식에 맞추어 베풀어지는 우주창생신화의 흉내——그것이 흉내라는 의미에서, 곧 놀이임으로 해서 놀이는 보편성을 지닌 태초의 인간적 행위전승인 것이다.

버너 f 러 젠더적인 발상법이 남녀 역할의 분담을 전제로 한 것이고, 전통사회의 우주론에 입각한 삶의 방식으로 체득된 지혜인 한에 있어

서 민족문화 속에 박혀 있는 원초적인〈젠더·性別〉은 座府文化圈의 풍요제의적인 민속행사 내지는 민간 신앙적 종교의식, 소위 述俗으로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이지러진 버너큘러 젠더와 놀이傳統

성을 제외한 버너큘러 젠더적 발상법은 상하의 논리로서 상층문화와 하층문화를 포괄하는 총체적인〈민족문화〉로 대변될 수 있다. 민속문화가 전통문화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 민속문화라든가 향토문화와 같은 좁은 카테고리 속에 맴돌지 않는다면, 그 민족문화는 잠제적인 文化因子와 기충문화권의 原初心性 및 表層문화권의 문화유산을 모두 다 간직한 總體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문화를 엘리어트 T.S. Eliot식의〈삶의 방식〉으로 간주하고 와이스 R. Weiss식 으로 물질적, 정신적 문화재와 문화를 꽃피 우는 망,곧 문화권 그리고 그 문화를 이룩하는 주체로서의 민중의 3대 요소로 분석한다.

우리 전통문화를 말할 때 우리 민족이 만들고 이어나온 민속문화재만 가지고 논의를 끝맺는다면, 그것은 박물관적 민족문화를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물질적인 문화재에 앞서는 것이 눈에 드러나지 않는 무형 문화재이며, 그런 무형 문화재와 더불어 중시해야 할 것은 정신적 자세를 결정하는 문화요인으로서의 의식, 태도, 심성 같은 선험적인 자들이다. 그런 인자들올 내포한 기충문화권의 잠재적인 에너지에 대한 어프로우치는 민족적 판력의 보급을 위해 필수적인 작업인 것이다. 민속·향토문화에 대한 정제적인 투자와 민중문화에 대한 활성화 방안의 강구는 민족문화의 근원에 대한 탐구이며 그것은 기층문화의 문화유산에 대한 가치 부여이다. 그리하여 기층문화권의 근본적인 水脈으로 다가서려는 민족적 각성이 전통적인 것, 민중적인 것, 더 나아가 원초적인 것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나고, 그리하여 전래적인 것의 목수성이 반드시 보편성에 대한 특수성이 아니라 민족문화라는 그 목수성이 그대로 세계문화이며 보편성 자체임을 우리는 이제 알게 되었다. 버너물러 젠더가 토착적, 전통적 사회에 있어서의 성의 역할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 대립·보완관계는 상하, 좌우, 음양외 논리와마찬가지로 일과 놀이와 같은 두 개의 상반되는 개념을 하나외 全證像 속에 짜넣어서 변증법으로 하나의 세계를 광성화시키는 것이다. 민족문화에

도 상하의 대립과 그 보완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남성과 여성의 버너큘러 젠더적 삶의 방식이 전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에 의한 수탈이 그렇게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그럼으로써 민중의 끈질긴 저항의 형태가 역사적으로 그 형태를 뚜렷이한 것이라면 그 대립과 갈등의 변증법은 보완적 상관관계를 맺게 된다.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이 더욱 탄력적으로 조련되는 숱한 시련과 고난과 핍박이 삶의 방식으로 반영되는 민족문화는 그것만으로의 민족문화가 아니라 그 위를 받치는 구조적인 상하관계로서의 상충문화를 포괄했음으로써 진실로 민족문화인 것이다.

놀이판의 반질서에서 돌아와 일의 중압을 견디어내고 생활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버너물러 젠더의 역할이 무시되거나 여성적인 것이 빠져 맺힌 恨이 풀리지 못하면 그 맺힘이 분출구를 찾아 사회구조의 내면에서 유랑한다.

늘이 의 억제에 의한 불가시 적 인 영 향은 난장판의 억센 활력과 생명력을 마멸시키는 결과가 되고 그만큼 건강한 문화의 원천에서 멀어짐으로써 불건전한 사회현상으로 보복받는다.

놀이문화적인 면에서 보면 고대사회의 祭能와 함께 하던 演賊의 歌舞는 특정직업의 계충올 만들어내어 춤과 노래를 파는 遊女를 낳게 하였다. 遊女가 소위 聖犯의 후예일 가능성은 많다.

놀이문화의 억압에서 오는 무의식적, 제도적 보복의 한 현상을 보자. 고려 초업에는 歌技양성 기 관인 敎功이 관립으로 설치될 정도였고 놀이가 베풀어지는 잔치에는 女樂이 사용되 었다. 朝鮮朝에도 중앙과 각 道, 郡, 邑에 교방을 두어 내국관리들의 侍側과 외국사신의 접대에 종사케 하였다. 놀이를 전문으로 한 그런 版女는 끝내 놀이문화의 천대와 함께 라는 이름만 가질 뿐 사사롭게 몸을 팔아 생활해 나가야 했으므로 속칭 三牌,路君子,갈보, 색주가라 일컬어질 지경으로 사회적 핍박이 막심하였다.

놀이 문화와 여성과의 상관관계를 제도적 으로 타락시켜 나간 남성 우위의 정치이념이 놓쳐 버린 커다란 문화적 결함은 노동과 생산과 관련된 集四演數의 축제적 성격이다. 문화의 여러 요소들은 서로 보완된다. 남성적인 +,여성적인 -요소는 빛과 어둠의 요소이며 그것은 보완되어 조화를 이룬다. 남성문화 혹은 빛·합리주의의 일면성이 놓친 커다란 구멍은 어둠,여성적인것,근원적인 것에 대한 망각이다.

풍요제의에서 계절의 고비마다 죽음과 재생, 그리고 다산을 축원하

던 고대심성 가운데는〈豊饒의 現帶〉라 불려지는,기울면 차고 다시 기울다가 넘치고 살아나는〈물_나무一달一女性〉의 象微表象이 있다. 여성은 풍요의 대명사이며 다산의 에로스이며 창조의 신이다.

제의는 곧〈여성의 힘〉을 차용하는 주술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强依가 보여주는 迎神->媒神歌舞->공수->뒷전거리의 과정은〈神을 놀리는〉거리가 주죽이 된다. 신올 즐겁게 만드는,신을 놀이主體가 아니라 놀이 容賊로 만듦으로써 스스로 인간이 주인이 되는 그런 놀이문화는 근원적으로 여성 우위의 문화인 것이다.

그것이 朝鮮朝에 와서 크게 역전되었다. 남녀 격리법이 철저해짐으로써 여성 우위의 놀이문화도 쇠퇴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日常의 외형적 내면적 스트레스를 해소시킬 수 있었던 사회적 메카니즘이 없어지게 된다. 따라서 歲時行市와 마을공동체의 축제에서 풍요제의의 믿음과 주체인 여성이 밀려남으로써 우리는 축제와 놀이가 가장 빈약한 민족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놀이문화의 끈질긴 생명력은 각박한 현실생활의 지속 가운데 삶의 고뇌를 담는 그릇으로서 勞勤諸 형식이 되거나 단편적인 染强해賊형식이 되어 살아 남는다.

——수심이 실이 되어 가닥가닥 얽혀 풀리기를 바라도 끝간 데를 모르겠다는「발노래」(田歌)나「베틀노래」만이 아니라 그것은「수심가」(황해도),「산타령」(호남),「美郡里歌」(영남)로 전승되는데 이런 노래 들은 勞動諸이자「舍蘇曲」처럼 대동놀이 적인 일면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경상도의「미나리노래」는 山遊歌가 바전 것이다. 山을〈되〉, 즉 美요, 遊는〈놀이〉, 즉 奴里, 郡里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것이 山遊行 같은 여성 대동놀이의 벌칭이라면 최근까지도 우리는 여성들의 집단연희적인 잔형을 보유한 것이 된다.

우리의 놀이 =鄕土換樂의 지역적 분포를 조사해 보면 집단 대동놀이의 성격을 띤 놀이형태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 하는 것 이 伏놀이, 천렵,菜水行 등을 포함하는 山遊行(306지역)임을 알게 된다. 쥐불, 달집 태우기,횃불놀이 등(200)과,地神,걸립,걸궁,메구 등의 이름을 가진 段樂(191)이 그 다음을 차지하는 한국인의 오락형태이다. 花煎會를 곁들인 꽃놀이(172),달맞이(146), 백중,풋굿,草宴을 포함하는 호미 씻이(131) 줄다리기(106), 가면극, 人形劇, 줄타기, 소놀이 등 廣大놀이(10) 등이 그 다음 순위가 된다(참고로 다른 순위를 열거 하면 99, 산신·서 낭 . 용신·별신·혈刺*향 등 포함 堂祭

58•豊年祭50•등불놀이•초파일•관등놀이 등 었렀§놀이 47•들개삼•모시두레·두레 길쌈으로 불려지는 共同話44지역).

여성의 놀이로서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는 것은 널뛰기와 그네뛰기이며 특정지역 (영·호남)에 강강수월래,놋다리 밟기,두레,길쌈 등이 보인다. 꽃놀이나 山遊 심지어 그네뛰기 등도 이제는 여성 전유의 놀이가 되지 못하고 路橋,迎月, 탈놀이,燃燈놀이 등도 일반화되었거나 쇠퇴하여 소멸하였고 城돌이 같은 특정지역의 여성 특유한 놀이도 보통놀이와 차이 가 없어졌다.

놀이의 소멸은 歲時行來의 소멸과 연관되어 있고 그것은 계절제의 의 신앙과 직접적으로 맺어져 있다.

역사가 이성적으로 발전할 때는 사회구조가 놀이를 수용하고 놀이문화의 탄력성이 세속문화의 일면성과 경직화를 견제하는 구실을 한다. 놀이의 탄력성은 믿음과 정서이다.

경직과 탄력——그 쫓고 쫓기는 순환의 원리가 가장 조국적인 멋의 개념이다. 우리 는 그런 변증법 에 유념 할 필요가 있다. 놀이가 보여 주는 홍과 멋은 흥겨운 것과 구성진 것의 교묘한 배합이다. 슬픔과 기쁨이 서로 밀고 당기고 맺고 풀어야 비로소 우리 놀이의 신명과 홍의 표현법은 그 다양한 造化를 부린다.

역사가 반동적이 었을 때 문화의 母胎로서의 기층문화·여성 문화 속의 억압된 놀이 정신은 표층문화•남성 우위의 통치체제 아래 忍苦의 세월을 살고 여성 특유의 유연함을 극한으로 확장하면서 살아 남기 위해 스스로를 굴절시켜 연명,목숨을 유지했다. 그리고 어느날 문화의 깊은 바닥에서 다시 부상해 올라을 때 한국의 전통적 늘이문화는 억압에 의한 變容으로써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양면을 드러낸다.

놀이문화에 있어서 여성적인 것은 에化期 이후 현대 산업사회에 이르는 동안에 특수한 개화기를 맞는다. 봉건사회의 소멸과 민주주의 시대의 도래, 그리고 그에 따른 男女同等사상은 상대적으로 버너큘러 젠더적인 역할의 소멸을 가져왔고 동시에 전통사회에서의 가부장적인 권위의 약화와 소멸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봉건 전통사회의 소멸은 억압되었던 것의 해방과 함께 버너물러 젠더의 役割分擔을 무산케 하면서 보편적인 세계, 역할 혼돈의 시대를 예감케 한다.

보편적 세계의 안목과 역할 혼돈은 남성 우위의 빛과 질서의 세계에 대한 반동이며, 이 반동은 상대적으로 어둠과 카오스와 근원의 세계, 즉 여성적인 세게에 대한 인식이 된다. 말하자면 明·暗의 변증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버너쿨러 젠더의 극한적인 형태인 상충문화·남성우위 문화의 약화 속에 그동안 간신히 기충문화권의 민간신앙으로,또는 민속문화라는 이름 아래 비합리적인 것으로 이지러진 채 살아남은 여성적인 것들의 변용과 부상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이지러진 버너큘러 젠더, 곧 토착문화의 성구별이 갖는 창조가 아니 라 잘못된 성차별이 낳은 아픈 상흔이다.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은 서로 대립적이면서 보완적이어야 했다. 상층문화에 대한 기층문화는 남성과 여성처럼 보완관계여야 하는 것이었다.

5 邊境文化로서의 여성놀이문화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민족문화에 있어서 하층문화 담당자로서의 여성,민중,기층문화 담당자로서의 여성적인 것의 비중은 소수의 상층문화 혹은 남성문화 담당자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따라서 민족문화에 있어서 민중적 활성에 대한 버너물러 젠더적 시각의 올바른 설정은 특히 중요하다. 긴 역사와 문화적 환경의 소산으로 간주되는 전통,민족문화는 말하자면 상하의 논리,음양의 형이상학, 버너골러 젠더와 같은 대립 보완적 관계가 형성해 놓은 문화인 것이다.

민족문화가 그 자생적 인 게성으로 인하여 다른 민족문화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것은 남성문화와 여성문화의 경우에 도 해당된다. 자생적인 개성이라고 해서 그 민족문화가 문화적 보편성을 저버릴 수는 없다. 보편적인 의식주의 패턴이라든가 종교 심성의 표상과 제의형식, 그리고 제도의 확립과 사회구성의 원리와 같은 보편적 문화장치들은 지역풍토 환경에 따라서 버너큘러한 지역적 변형올 이룬다. 그럼으로써 文化의 世界性 내지는 國際性에 대해서 문화의 민족성과 민족문화의 특수성이 거론되는 것이다.

놀이문화를 거론하면서 버너쿨러 젠더를 말한 것은 그러한 문화의 토착성 내지는 향토성이 반드시 문화적 변경에서 형성된 잔영이 아니라 그 자체로써 우주론을 지닌 민중의 삶의 반영이며 그들의 논리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민중의 삶을 반영하는놀이문화에 있어서 여성적인 것이 변경의, 중심이 탈의, 지역적인 것으로 남는 까닭은 마치 민족문화가 세계 문화의 변경, 중심 이탈, 지역성으로 간주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민족문화는 그 자체로 세계의 중심이론이 만들어 낸 작은 우주론의 결실인 것이다. 그리고 그 논리는 토착적인 삶을 대변하는 논리(言語)로 구성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세계 문화 속의 한국 전통문화일 뿐 아니라 우리 문화의 논리로 확산된 세계문화의 중심에 자리잡은 한국 문화이다. 변경의 민족문화 내지는 문화의 향토성은 이제 성립되지 않는다. 민족문화의 특수성도 결국 뒤집어보면 문화의 보편성을 우위에 둔 발상법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제는 민족문화가 보편성을 미고 그 우주론과 삶의 방식과 논리를 확대하여 문화의 세계성과 국제성을 민족문화 안에서 소화하게 될 시대이다. 그런 논리로 말하면 세계중심사상에서 토착성·향토성·독자성이 그대로 격상되는 세태에서 놀이문화의 여성적인 것이 남성 놀이문화의 중심사상을 허물어뜨린다. 여성의 놀이문화가 남성의 놀이세게를 근원에서 수용한다. 작은 우주가 세계문화를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민족문화가 스스로 문화의 국제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민족문화라는 작은 문화 속에서 세계 문화혹은 문화의 국제성이 들어와 앉는다는 발상은 기존관념에서 생긴다. 작고 큰 것의 비유가 아니라 크고작은 대소의 관념이 버너쿨러 젠더적 발상법 에 따라 상하의 논리,남녀·음양의 논리 로 바뀌 게 되면 그것은 크고 작은 문제,아래 위의 문제,음과 양의 문제,또는 남성과 여성의 차벌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구별의 문제,역할분담의 문제, 인식의 문제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세계문화에 대한 특수문화의 인식이 대립·보완의 관계로 환원됨으로써 민족문화가 그 나름의 차원에서 새계의 문화를 그 안에 간직하게 되는 것처럼 놀이문화에 있어서 남성우위의 관념도 여성의 늘이세계에 들어와 앉게 되는 것이다.

80년대의 민족문화는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이고 주체적인 민중의 삶의 방식을 뚜렷이함으로써 세계문화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앞에서 이미 말한 대로 버너물러 젠더적 발상법이 현대사회의 모순과 그空洞올 드러내 비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될 수 있다면,민족문화야말로 버너물러 젠더의 성과논리로 이루어지는 산업화사회 이 전의 전통문화이기 때문에 그 문화로써 현대문명의 모순과 갈등을 구제할 수 가 있게 될 것이다. 민족문화를 형성한 전통사회에서는 우리들 모두 가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 흙과 땅,곧 지역 공동체에 밀착해 있었고 인간과 환경은 그 나름의 우주론으로 일체가 되어 있어서 그 신화적 발상도 민간신앙적 종교의식도 민속적 늘이행사들도 자연과 일치하였다. 따라서 민중의식이나 민족감정도 자연 그것이었으므로 내재된 활

력도 부드럽고,부드러운 반큼 싱싱한 생명력으로 충만했던 것이다.

활성적인 민중적 에너지——그것이 민족문화의 근간이다. 거기에는 상하나 좌우나 음양이나 남녀 그리고 마침내 대소의 대립.보완관계의 인자들이 포괄된다. 그러한 고유한 삶의 방식, 그러한 우주론의 구체적 시현이 우리,곧 민중이며 민족이며 바로 한국인이자 인간 그것이다. 우리가 가장 우리 답게 인간답게 표출될 수 있었던 그 세계는 작은 세계이며 민족문화의 우주였지만 큰 세계문화의 우주론올 내포하는 탄력 있는 세계이다.

우리는 문화의 세계성과 국제화를 도모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80년대는 특히 그러한 추세가 강화될 징후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열 린 제계〉를 지향한다. 개 방사회를 모토로 삼아서 민족문화의 폐쇄성을 문제로 삼게 될 때는 개방과 폐쇄의 버너큘러 젠더적인 발상법이 도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놀이문화에 있어서 여성의 전통상을 굳이 수립시킨다는 것자체가 문화의 젠더를 가리는 발상이 되며 따라서 놀이문화의 보편성을 스스로 제한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의 놀이문화 속에 균열을 일으킨 남녀의 차이를 해소시 킴으로써 놀이문화의 보편성으로 복귀하고, 문화의 근원으로 소급함으로써 역사에 의해 왜곡되고 오도되고 균열된 민중심상의 상혼을 치유해야 할 것이다. 朝鮮朝의 놀이문화에 대한 치욕의 역사는 놀이의 원초적 생명력과 활성을 고난과 시련의 세월로 각고하여 단아한 原®像 Urmutter의 形 를 가능케 하였다. 혹독한 內外法이 여성들의 근원적 에로스를 인공적으로 억제시킨 결과 효녀나 열녀와 같은 천편일률적인 형식적 노예도덕을 성립시켰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 한편 完己의 自己形成을 가능케 해서 그 잠재적 능력을 節制 속에 가다듬는 경우를 우리는여성 놀이심성의 창조적 계승으로 보는 것이다.

부정적으로 말하면 억압된 놀이심성이 반동적으로 역류•분출될 때 그것은 무형의 반격형식, 보복형식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놀이의 카오스를 그대로 드러내어 본능적 이기심의 발로,혹은 自己愛를 반영하는 루두스적 놀이심성의 표출이나 향락적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이 오늘날 사회 문제가 되는 퇴폐적 경향들인 것이다.

전통적 놀이문화가 지녔던 자유와 해방과 방일의 보편성이 버너큘러 젠더의 여성문화 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전통사회의 제도적 장치의 소거와 함께 표면에 드러나면서 그것은 억압된 욕구의 해방처럼 인식

된다. 놀이의 활달과 대담성과 무절제한 난장벌임이 집단공동체의 것이 되지 못한 채 개인 레벨에 머물게 되면 그것은 가장 극단적인 부정적 모습이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80년대의 초입에서 역사적 사건이 된 强女人사건과 무수한 福부인사건 그리고 치맛바람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기억한다. 여성의 놀이문화는 인내와 각고의 스포츠정신 속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가족단위의 동물적 생존권 확보의 찰나주의, 향락주의 그리고 혈연·가족주의가 되기도 한다.

大母神의 관대와 자비와 수용의 例造的 母像은 사랑과 슬픔의 原母像이다. 그러한 여인상을 속으로 간직한 한국 늘이문화의 여인상은 한과 고통의 가치를 알고 있다. 그것은 반드시 추방되어야 할 부정적요소가 아니라 인생을 극복하는 이니시에이션으로서 시련을 극복하는 순화와 성숙의 계단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놀이의 발생은 하나의 이니시에이션에서 싹을 텄던 것이다. 제의의 엄숙과 진지와 신성 속에서 그것을 간간이 폭발시킨 인간적인 본능과 자연과 그 싱싱한 건강이 놀이의 본성이 었다. 그것은 질서와 현실과 생활 속에서 시들어 가는 인간성의 활성을 근원에서 회복시키는 축제 의 형식이었고 그래서 근원의 카오스에서 해방과 일탈의 난장관까지 구성하며 잠재된 의식을 충만케 하던 문화형식이었다.

그리 하여 그런 제의와 놀이 의 순환관계 는 고통과 순화라는 삶의 이니시에이션으로서 삶의 시련을 극복케 하는 자연의 메카니즘이었다.

자연과 機制——그것은 보완관계이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의 만남처럼 둘이 만나서 비로소 합일의 하나됨이다. 놀이문화는 대립개념이 될 수 없고 남·여성의 단독 문화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환경이 그러한 버너물러 젠더적 發想法을 놀이 문화에 도입시킨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서 여성만의 놀이문화가 고착·정 립될 수가 없다. 그것은 거짓의 여성문화일 따름이다.

단힌 사회에서 닫힌 젠더의 문화로 계 승된 여성 놀이문화와 그 현대성인 옴산한 사회적 개화는 韓國 女性像으로 정립될 수가 없다.

닫힌 사회의 닫힌 문화현상은 열린 사회의 열린 문화의 변증법으로, 그 대립·보완관계로해서 반드시 열림만이 정당하다거나 닫힘만이 부정되어야 한다는 흑백논리로 치달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필요한 경우에는 폐쇄되어야 하고 개방이 낭비일 때는 열림이 반드시 닫힘보다 낫다고 할 수가 없다. 산업화사회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열린 상태로

닫혀 있다. 닫힌 사회一전통사회一자연一사람다움의 세계가 반드시 열린 사회一산업화사회一인공一비인간화의 세계로 대비될 수가 없다. 산업사회의 도시화·기계화·정보 관리화로 인하여 우리들 인간은 전통사회의 버너쿨러 젠더의 우주론이었던 남성과 여성의 일의 분담 역할을 박탈당한다. 하늘은 이제 더이상 남성일 수 없으며 땅은 여성일 수 없다. 달이 여성이 아닌 것처럼 해도 반드시 남성으로 상넘되지않는다.

남녀의 젠더가 대립·보완관계로 쌓아을렸던 울타리가 제거됨과 동시에 버너큘러 젠더적 발상법의 논리도 의미를 상실해서 반드시 좌우음양의 이원론이 정당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상하나 대소의 대립·보완관계도 유치한 합리주의에 지나지 못하게 된다. 단순한 만큼 자연스런 논리로 구성되었던 버너큘러한 우주론으로 형성되었던 민족문화의 내용이 사라지고 나면 거기 남는 것은 겉모습뿐이고 形故뿐이다. 산업사회에서 우리는 내용올 박탈당한 걸모습만의 우리가 된다. 벌거벗은 남성과 여성, 곧 벌거벗은 우리가 되어 버린다. 신화적 배경을 잃고 공동체의 울타리가 사라진 마당에 종교적 의식이나 민족적 행사는 의미가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가 설 땅을 잃어버린다. 옛 남녀 역할의 분담이 사라지고 상하의 관계나 대소의 구별이 없어져서 이 평등과 민주화의 세게에서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아이도 어른도 아닌,스승도 제자도 아닌, 주인도 머슴도 아닌, 요컨대 모든 사람들이 다 인간적으로 평등해져서 같아져 버 린다. 산업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비인간화가 아니라 오히려〈人間化>이다. 이 비정한 인간화는 전동사회의 인간미 넘치는〈인간화〉와 다른 시과 질서 아래 로보트와 같은 인간의 평등과 민주화를 노린다.

6 結語 : 中性文化시대의 보완적 기능

현대는 버 너물러 겐더 가 상실되어 모든 남녀가〈평균 인간〉이 되어가는 시대이다. 이 세계에서는 남녀가 구벌 없이 같은 일율 해야 하고 상하·좌우·대소는 평준화되어 中道가 선택 된다. 그 획일화의 천학은 대량생산 체제로 통하고 中性의 인간론으로 치닫게 된다. 80년대의 세계가〈中性의 문화〉라는 산업화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를 안은 채 국제화의 시대를 열고 그런 평준화된 세계문화를 지구촌에 범람시킬 때, 그것은 어쩌면 결정적으로 中性의 문화가 되고 비개성의 문화가 될지

도 모른다. 국제화시대의 中않문화에 대한 對抗문화가 바로 민족문화인 것이다.

문화를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민족문화를 한 민족의 전통적인 삶의 혼적으로 간주하는 소극적 자세에서는 세계문화에 대한 대항문화로서 의 민족문화의식이 생겨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민족문화를 보편적 문화에 대한 록수문화로 간주하는 태도에서도 미숙한 문화의식을 감지하게 된다. 80년대의 산업화사회에서 현대문명이 놓친 허구의 그림자를 채워 주는 皮效의 전통적 민족문화는 그 자체 속에서 세계문화의 대립·보완관계의 변증법을 지양시킬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년대우리 민족문화의 位相인 것이다. 역사와 문화를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숙명론은 전통 또한 끊임없는 자기 해체를 통해 발전한다는 역사의식을 눈감으려고 한다. 전통은 토전통적 진보정신에 의해 그전통의 일각이 무너져내리는 가운데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 전통을 배경으로 만들어지는 민족문화 또한 반전통적 진보정신에 의해 그 일부가 끊임없이 쇄신되는 가운데 민족적 삶의 방삭을 남겨 가는 것이다.

반전통적 진보정신은 누구의 것인가. 그것은 그 시대,그 사회의 역사를 꾸며 가는 문화적 주체들의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엘리트라고 부른다. 그 엘리트들이 전통을 계승하고 상속시키는 담당주체들이며 그들에 의해 시대정신이 결정 된다. 시대정신이 그시대의 문화에 특성을 부여하고, 그 시대정신의 계승이 민족문화의 특수성을 결정한다.

그렇게 하여 그 시대, 그 지역적 환경여하에 따라 문화는 저마다의 특색을 갖는다. 여성에 있어서 전통적 놀이문화의 형성과 그 놀이문화에 반영된 전통적 여성상도 그렇게 해서 형성되는 것이고 그것은 또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바뀌어 간다.

우리는 그러한 경우를 놀이의 제의적 발생에서 목도하였다. 난장판을 통한 根源의 回歸형식을 통해서 活性을 되찾던 제의와 더불어 놀이는 카니발적인 축제를 통해 세속과 질서와 생활을 팽개치고 억압되고 잠재해 있던 자유와 해방과 방일로 해서 전도된 가치를 웃고 性의 신선을 찬양하고 민중공동체가 지닌 심상을 펼쳐내 어 질서에 새로운 탄력을 부여 한다.

거기에는 젠더, 곧 성의 구별이나차릴이 없다. 거기에는 놀이의 보편성만이 있다. 그러다가 놀이는 일의 대립 개 념이 되고 놀이와 일이 지녔던 버너큘러 젠더적 前1話-관념과 그 관념의 후®!옳이 깨어져 버

린다.

전통사회의 가부장적 사회체제는 보편적 놀이문화,그 공동체적 놀이 풍습을 젠더로 구별짓고 놀이문화에서도 여성적인 것을 추방하였다. 공동체적 대동놀이는 남녀동참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의절차에서 추방당한 여성적인 것은 놀이일반에서도 간신히 제한된 자기 영역을 지키며 일·勞動으로 호도된 일상적 삶의 질서 속에 여성들의 활성을 가두어 놓아야 했던 것이다.

타율적으로 주어진 제도나 사회적 관념으로 좌우된 여성의 놀이문화는 진정한 의미에서 여성 주체의 놀이문화를 오래 잊어 버렸다.

문화 속의 여성다움을 회복하는 주체적 성찰은 버너큘러 젠더적 발상법으로써 그 역할의 고유한 문화 형성력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지역적,토착적 성의 역할분담과 그 역사전개 그리고 문화형성은 반드시 남존여 비사상만으로 해석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우주론으로 귀걸 된다.

따라서 놀이문화에 있어서도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차이는 시벼의 차이 혹은 그 역할분담으로 옮겨질 수 있다. 남녀·음양·전후 좌우·상하·대 소와 같은 대립 보완의 버너큘러 젠더의 상호관계는 남녀의 조화로운 관계, 혹은 성숙한 관계의 회복에 기여하게 되고 역사의 변증법적인 발전에 대한 이해가 될 것이다.

놀이에 익숙하지 못한 민족은〈여성적인 것〉에 익숙하지 못하고 그것은 결국 人間에 익숙하지 못함을 드러낸다 할 것이다.

「韓國女性의 傳統像」심포지움의 象徵性과 그 含蓄

鄭鎭私

대우제단이〈韓國짠術文化의 拔磁制域매發과 振興을 위한 學術事業의 一環으로「銳國女性의 傳統像」〉**을 주제로 심포지움을 개최하게 된 것은 지극히 免微的이다.

물론〈念述하는 社位權造 속에 한국女性의 傳統像이 存在하는지의 與否륜 檢討하고자〉 한다든지〈現代라는 狀況 속에 드러나는 한국여 성상을 조명해 보고자〉 하는 심포지움의 목적이 갖는 狀況的 象微性을 그 이유로 들 수도 있겠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여성의 문제가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가장 우선하는 최초의 주제였다는 데서 그 象激성이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다시 말하면 의미나 가치에 대한 물음, 삶의 현실성을 서술하고 분석하며 理論化하는 勞作의 분야에서〈女性〉을 시각의 창으로 선택했다는 것은 새로운 인문사회과학이 가능할 수 있는 <다른 地平〉의 전개라고도 일컬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심포지움은 주최자가 겸손하게 찰출하고 있는〈한국여성문화

에 관한 理解의 폭을 넓히고, 이 분야의 學問的 潮系化에 적으나마 도움이 되기를 希望하는〉** 것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여권의 문제나 여성해방의 논리를 포용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집요한 추구가 이루어진 심포지움의 전체과정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 이 글은 「한국여성의 전통상」 심포지움의 종합 요약문임.

** 越皆文

물음이 지닌 이같은 상징성은 심포지움의 구조 자체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심포지움은 두 분야로 대 벌되어 제1부에서는〈歷史的 接

近〉이라는 總强的 과제 아래에서「韓固女性像의 형성 (河松如敎授發題)J, 「한글문화 수호자로서의 女人像(强德顯敎授 發逐!)」, 「閱範知를 통해서 본 한국여성의 傳統像에 대하여(鄭皮銳敎授 發 」 등의 주제가

다루어졌고, 제2부에서는〈學際的 接近〉이라는 표제 아래에서「韓國民i保 속의 女性防型像(辛符永敎授 發題)」,「韓國女性의 傳統的 宗敎心理의 原型(金烈坐敎授 發題))」,「놀이 文化 속의 버너큘러 젠더 (辛相 日 敎授 發通)」 등의 주제가 다루어졌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각 주제가 나타내는 구체적 인 사항보다도 그것이〈接近>을 위한 試論的 특성올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개별적인 주제발표는 처음부터 완결적인 것일 수가 없었다. 다만 試論的인〈접근〉의 가능성과 그〈접근〉으로부터 개진될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의 발견에 보다 역점이 주어졌다. 그러한〈접근〉의 모색이,일반화된 게념으로 말한다면, 통시적 인 방법 (역사적 접근)과 공시적인 방법(학제적 접근)으로 대별되어 전개된 것이다.

심포지움 자체의 구조가 지닌 이러한 상징성이 논의의 전개에서 간혹 개념적인 이해나 논리의 일관성을 둘러싼 혼미를 야기했던 것도 실은 무리 가 아니 다.「韓國女性의 他統像」이 라는 전체 주제 와의 관련에서 각 소주제들의 서술에 대하여 〈앞으로의 여성연구는 전통적인 인간상 아래서 규명되어야(季束越敎授 論評)〉하지 않겠느냐는 제언이나〈이 심포지움은 여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핵심에 대한 반성이라고 해야 옳올 것(起忠貞敎授 論評)>이 라는 평가는 그러한 혼미를 뚫고 나온 발언들이 었다.

그러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歷史的 接近>이 그것이 내포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것을 보다 체계화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물음이 라든가,〈學際的 接近〉이 그 표현처럼 제 학문의 종합적 논구이기보다는 이른바 원형이론의 개별적 전개에 머물렀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문제도 고려될 수 있다. 다행한 것은 그러한 문제들이 논평자들(제I부 朴容玉, 斗波,辛東按, 諸敎授,제2부 鄭成私,任效强, 起忠成, 補敎授)의 예리한 질문과 참석자들의 활발한 토론에 의하여 크게 보완되었다고 하는 사실이 다.

상징은 실재를 드러 내는 모델이면서 동시에 실재를 위한 모델이 되면서 문화를 소통하게 한다. 이번 심포지움은 그러한 의미에서 그 象微性을 如하게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이 심포지움은 물음을 물고 가지 않을 수 없는 力動性k motor dynamics마저도 마련해 주고 있다. 이제 그 내용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주제발표의 내용을 요약하고 이에 대한 논평을 정리한 다음에 발표자의 답변을 첨 가하고 종합적 인 토론내 용을 살피고자 한다.

河松網敎授는「韓國 女性像의 形成」이라는 발제를 통하여 역사적 상황에 따라 한국 여성상이 어떻게 형성되고 또 변화되어 왔는가를 살피고 있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가설을 전제하고 있다. 첫째,전통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열악했다고 이해되고 있는 것이 상식이다. 정말 그랬을까? 둘째, 근대적 여성상의 성립,다시 말해서 여성의 근대화는 개화기 이후 외래사상에 의하여 비롯된 것이 라고 흔히 주장되어 왔다. 과연 그럴까? 이 두 가지 전제를 종합하면서 河교수는 한국사회에서 근대적 여성상이 형성발전되어 온 과정을 살피는 일에서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한국역사 안에 있었던 어떤 내재적 요인에 대하여 우리가 너무 등한하지 않았는가 하는 세 번째 가설을 전제 한다.

이같은 가설을 검증하면서 河교수는 고대에서부터 고려조를 거쳐 조선조에 이르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여성상은 보다 소극적인 게넘으로 정립되어 갔고 여권도 실질적으로 미약해졌다고 결론짓고 있다. 예營 들면 고조선 사회나 삼국시대의 여성에 대한 강한 규제나 금제의 설정은 그것이 단순하게〈柔順하고 與節을 지키는 여성상〉의 반영 이기보다는 오히려 여성의 생활이나 여권의 사회적 실현이〈規制할 만큼〉상대적으로 강했던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婚浴에서 나타나는 均f屋制라든지 신라의 여왕이나 滿花, 身分維持를 위해 모계가 존중된 점 등은 결코 여성의 法、惡한 지위나 여성상의 懷弱함올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분기점으로 이러한 여성의 생활과 여권은 크게 바뀌어진다. 특히 河교수는 조선조 이후의 소극적 인 여성상에 대한 사상적 검토, 즉 유교적 이념에 의한 필연성으로서의 해석이 충분하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여성의 생활이나 여성의 적극성에 대한 정치사회적 규제 가 유교적 가치관으로 합리화되고 또 정당화된 것이라고 역설한다. 다시 말하면 충분히 활성화되어 있는〈女性들로 因한 間題>를 억제하기 위한 조선왕조 건국의 주도세덕이 편 女性施策이 유교적이 념으로 합리화되면서 오백여 년 지속된 결과로 이제까지 전통적으로 이어 온 적극적 여성상은 마침내〈烈〉로써 표현되는 정절이나 수절을여성습속화하면서 이른바 유교적 부덕을 지닌 系順하고,與節율 지키고, 奸!忌하지 않으며, 검소한 여성상올 정 립하는 데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여성에 관한 한 한국사는 그 進展의 모습보다는 퇴행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교수는 가정내에서의 여성의 지위나 역할은 전통적인 적극적 여성상을 여전히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主財産의 死後 親庭歸屬이라든가, 부모재산의 균분상속,七去之惡의 怒意的 적용을 받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보장 등이있었음올 그는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임란·병란 이후역사적인 상황의 변화에 따라 여성들이 능동적 이고 적극적으로 시대에 대처함으로써 전통적인 강한 여성상은 면면히 계승되어 이것이 19세기 말에 일어나는 여권운동과 현대 한국여성들의 상을 형성하는 내재율로써 기능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결국 한국 여성상은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적 조건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고,또한 여성들의 역할이나 寄與領域도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名목的인 현실과는 다른 실진적인 여성적 내재율은 하나의 전통상을 모색할 수 있을 만큼 엄연한 것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교수는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容玉교수는 몇 가지 관見을 제시하면서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는 河교수의 논의 속에서 여성에 대한 관찰이 너무 개념적인 것을 지적한다. 예를 들면 여성의 지위는 사회적 신분과의 관련에서 달라질 수 있다든가,여성의 생애과정에서 출가전의 여성,부부간의 관계에 있어서의 여성,모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여성들의 현실적 차이 가 간과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고대사회에서 여권이나 여성의 생활이 강하다거나 적극적이었다고 하는 일반론이 유추된 사례들에 대한 보다 級密한 검토를 요청한다. 增屋制가 실은 攻及婚의 變形이라든지, 英와 妾의 권리가 달랐든지 하는 것이 그러한 異見의 例로 제시되고 있다.

이와 아울러 朴교수가 제기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는 한국에서의 여권의 역사, 또는 女性地位史라고 할 만한 것이 일반적인 역사발전의 법칙과 정반대로 역류하고 있다는 서술이 과연 稱常한 주장이냐 하는 물음이다. 예를 들어 고려장실의 母系性繼承은 여권의 문제에서 된 것이 아니라 地方豪族勢刀을 擔摩하기 위한 정치적 제스츄어이고,조선조에서는 분명한 妻妾制가 고려시대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부부간의 권리나 처의 권리 등에 대한 확실한 태도를 지니지 못한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물옴이 이를 드러내 주고 있다. 첫는 만약 역사적 사회 상황 속에서 남녀 관계 를 조명 하면서 그 역사적 변천을 살폈다면,

시대가 지날수록 여성의 지위가 나빠졌다고 하는 것과 같은 역류하는 역사의 진전이 라는 주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맥을 함께 하면서 좀 다른 시각에서 權斗換교수도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그는 고대사회의 여성의 적극성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옮겨 오는 과정에서 모계사회적 에토스를 유지하려던 당대적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보수적이고 소극적인 여성의 행동은 아니었던가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둘째로 朴교수는 오늘의 여성상을 정립하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조선조의 유교적 여성상이었다고 지적하면서 조선조 여성상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券繫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고 있다. 그러면 서 유교문화권 속에서의 여성이 삼국시대나 고려조의 불교문화권 속에서의 여성과 비교하여 보다 열악했는가를 묻는다. 유교의 남녀유별은 남녀차벌과는 다른 것이어서 內染과 外菜의 구분이 명백했고 남성의 放從도 아울러 규제했으며, 따라서 유교적 이념이 여성의 정치, 경제,사회적 독립을 보장해 준 것은 아닌가고 묻고 있는 것이다.

발전 혹은 진보라고 하는 역사의 일반적 법칙이라는 입장에서 제기된 이러한 一速의 물음에 대하여 河교수는 현대여성의 적극적인 상을 들어 그 계기적 전승을 살피기 위한 자신의 입장을 전제하면서 원칙적으로 발달사적인 이해에는 동의하고 있다.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명목상의 지위가 아닌 실질적인 지위는 격하되지 않았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河교수는 남성중심의 역사관이 지닌 고정관념 때문인지 모르겠다는 조심스러운 반응을 하면서도 사료에 근거하는 한, 한국의 여성사는 발전사라기보다는 退步史的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답변하고 있다. 시대에 따라 여성활동의 범위가 좁아지고, 그 지위가 상대적으로 나빠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사회에서의 여성의 해방이나 여권의 강화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볼 때 그것은 단지 외래문화의 영향 탓만이 아닌 역사의 내재율로서의 적극적 여성상이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또 유교의 수용이 여성에 미친 영향만 논하였고 불교의 수용에 따른 여성지위 문제는 거의 논급되지 못하였다는 朴교수의 물옴에 대하여, 불교문화권과 유교문화권에서의 여성의 비교는 각 종교의 영향력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같은 기준에서 비교할 수 없는 문제라고 f可교수는 답변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문화보다 유교문화가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미친 영향이 더 직접적이었음을 河교수는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

시대가 지날수록 여성의 지위가 나빠졌다고 하는 것과 같은 역류하는 역사의 진전이라는 주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맥을 함께 하면서 좀 다른 시각에서 權斗換교수도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그는 고대사회의 여성의 적극성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옮겨 오는 과정에서 모계사회적 에토스를 유지하려던 당대적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보수적이고 소극적인 여성의 행동은 아니었던가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둘째로 朴교수는 오늘의 여성상을 정립하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조선조의 유교적 여성상이었다고 지적하면서 조선조 여성상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券繫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고 있다. 그러면 서 유교문화권 속에서의 여성이 삼국시대나 고려조의 불교문화권 속에서의 여성과 비교하여 보다 열악했는가를 묻는다. 유교의 남녀유별은 남녀차벌과는 다른 것이어서 內染과 外菜의 구분이 명백했고 남성의 放從도 아울러 규제했으며, 따라서 유교적 이념이 여성의 정치, 경제,사회적 독립을 보장해 준 것은 아닌가고 묻고 있는 것이다.

발전 혹은 진보라고 하는 역사의 일반적 법칙이라는 입장에서 제기된 이러한 一速의 물음에 대하여 河교수는 현대여성의 적극적인 상을 들어 그 계기적 전승을 살피기 위한 자신의 입장을 전제하면서 원칙적으로 발달사적인 이해에는 동의하고 있다.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명목상의 지위가 아닌 실질적인 지위는 격하되지 않았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河교수는 남성중심의 역사관이 지닌 고정관념 때문인지 모르겠다는 조심스러운 반응을 하면서도 사료에 근거하는 한, 한국의 여성사는 발전사라기보다는 退步史的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답변하고 있다. 시대에 따라 여성활동의 범위가 좁아지고, 그 지위가 상대적으로 나빠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사회에서의 여성의 해방이나 여권의 강화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볼 때 그것은 단지 외래문화의 영향 탓만이 아닌 역사의 내재율로서의 적극적 여성상이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또 유교의 수용이 여성에 미친 영향만 논하였고 불교의 수용에 따른 여성지위 문제는 거의 논급되지 못하였다는 朴교수의 물옴에 대하여, 불교문화권과 유교문화권에서의 여성의 비교는 각 종교의 영향력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같은 기준에서 비교할 수 없는 문제라고 f可교수는 답변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문화보다 유교문화가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미친 영향이 더 직접적이었음을 河교수는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

문화와 무관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 둘째, 오히려 한문학에서 익힌 문학적 충동이 그 적절한 표현의 매체로 한글을 선택하여 여성적인 감정이나 정서 등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글문화가 양반계층의 有閑한 부녀들의 餘技는 아니었다. 한문식의 교양이나 유교적 교훈과 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한문학이 규방가사가 발생하던 초기에는 대체로 戒女를 목적으로 한 것이 많았던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戒女歌辭는 平民嫌女들에게 확대되면서 점차 여성의 본능,또는 인간성을 존중하는 현실적인 문제의 의식세계를 표출해 가면서 흥미를 일게 하고,쉽게 전달할 수 있게 하고, 기 발한 비유법을 구사할 수 있게 함으로써 문학으로의 접근에 진일보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內房歌辭의 발전은 戒女가 아니라 전통적 관습에 대한 飯逆,IE技if의 파격으로 나아가면서 마침내 개화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한글문화의 전통이 開化와 守街의 양면성을 아울러 지니는 勸學, 普世하는 주체의식을 낳기에 이른 것이라고 張敎授는 역설하고 있다.

한글 이전의 시대에서도 결코 비문화권을 살지 않았던 여인상,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문자의 創製에서 오히려 창조적인 문화의 주체 일수 있었던 여인상, 바로 그러한 여인상을 자각하게 함으로써 이제 남성과 더불어 함께 한글문화 속에 살고 있는 여성상을 긍정적으로 소묘하고자 하는 것이 張犯.順교수의 논지라고 할 수 있다.

排i斗換교수의 論評은 한국여성의 전통상을 추출하는 작업에서 文字文化 수호자로서의 여성에다 그 초점을 둔 것 자체에 대한 불만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다. 그는 그러한 여성상의 중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전통상이라 했을 때 그것은 보다 深층的이고 普過的인 것이어야 하리라고 관단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사적인 관점에서의 전통적인 여성상은 오히려 문자에 의하여 전승되는 영역, 곧 問房歌辭에서보다는 구비문학에서 찾아져야 하지 않을까고 반문하고 있다.

권교수는 이러한 물음을 제기 하면서 한자문화를 영위 하면서도 동시에 한글문화에의 접목을 가능하게 했던 여성들은 일반적인 여성들이 아니라〈특출한 문제아적 여성〉들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戒女판를 거쳐 그것이 문학에 이르면서 보편화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에 바탕한 여성상이 생활에 바탕한 전통적인 여성상과는 아직도 거리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더구나, 그렇게 본다면 四房歌辭가 답고

있는 여성상은 당시의 여성상이라기보다는 여가를 즐기기 위하여 창작이나 독서에 몰입했던 여인들에 의하여 投彫된 여성상일 수 있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權斗換교수는 부분적 여성상의 일반화 誤,後에 대한 지적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보다 근본적인 다른 시각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즉여성들에 의한 한글문화수호가 한자문화에서 비롯하는 전통성의 다른 양태의 계승이라고 보기보다는 오히려 기존문화에 대한 거부나 단절의 행위로 나타난 것이고,바로 그렇게 볼 때 한글문화를 여성들이 수호했다는 그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는 비로소 창조적인 여성상올 발견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물음이 그것이다. 여성들이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문화적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防歎하는 자율적인 모습에 더 주목해 주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논평에 대하여 장덕순교수는 자신의 연구가 역사적인 문헌에 한정되어 있음을 전제하면서 구비전승의 자료를 다루어 보면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 심포지움의 계획 자체 가역사적 접근과 이에 대칭되는 이른바 학제적 접근으로 대별되어 있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發제上의 현실적 제약에 대한 이해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强교수는 문헌적인 자료에 근거하는 한 분명히 四房歌辭의 주체적 여성들이 당대의〈問題兒的〉여성들일 수 있음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문학이 담고 있는 여성상이 당대의 여성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고 답변하고 있다. 특히 현대 한국여성의 적극적인 문화담당의 가능성이 어떻게 있올 수 있는가를 주목할 때 한글문화로부터 비롯했다는 이해는 보다 긴 역사적인 안목울 차단할 수도 있음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문화의 단절보다는 계승이 한글문화를 수호하게 한 것이고 바로 거기에서 한국의 전통적 여성상을 張교수는 찾아보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논의된 내용에 의하면 조선조는 한국의 여성상형성이라든가 현존하는 여성상의 역사적 기반이었다고 하는 점에서 각별한 시대가 아닐 수 없다. 이미 河法網교수도 조선조에 이르러 한국의 여성상은 크게 굴절되었음을 지적하고 있고, 張德順교수가 선택한 한글문화 수호자로서의 여성상도 조선조의 역사적 _皮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그 조선조 사회는 유교의 이념을 문화적에 토스로 삼고 있다고 이

해되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조 여성상의 모색은 한국여성의 전통상을 서술하기 위한 작업에서 긴요할 뿐만 아니라, 그 일이 유교적 현실과 의 관련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정 교수의 「備敎社食에 있어서의 韓國女性의 傳統像」에 대한 發題는 이러한 의미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적절한 것이기도 하다.

정교수는 유교사회의 가정에서 부녀 교육을 위한 교게이던『병訓]을구체적인 자료로 삼아 이 문제를 살펴보고 있다. 그는 조선조가 유교를 국시로 하는 가부장적 사회이고, 따라서 남녀가 각기 [음양,천지로 상징화되면서 天雄地卑의 분에 따르도록 여성이 규제되어 있으며, 三從之近나 七去之惡으로 여성에게 굴레를 씌우고 있지만,오히려 근원적으로는 남녀평등의 이념이 바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論據로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附忠王® 內訓 卷三 夫婦軍에 있는 〈英雜之齊 夫乃婦天〉이라는 文句이다. 즉〈아내가 비록 對等하다고 하지 만 남편은 아내 의 하늘이다〉하는 句節이다. 鄭교수는〈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라는 주장의 전제가 되고 있는〈비록 대등하다고 하지만〉 하는 표현에서 본래적인 남녀평등의 이념올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夫刀姑天이라든가 天保;地卑는 男女平等올 서술한다기보다는 남녀유별의 설명, 곧 남녀 각자의 본령올 발휘하여 동시에 相補相助의 관계를 맺어야 함을 시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남녀의 본래적인 齊 곧 같음이, 不齊 곧 불균등하게 되는 데 있다. 이런 현실이 문제인 것이다. 『內訓』은 바로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여성이 어떻게 자신을 성숙하게 내실화하고,또 남성과 더불어 사는 가정에서 그 평함의 一양을 담당하게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內訓』이 지닌 여성상은 유교사회가 바라는 像이었음과 동시에 당대의 현실적 요청이기도 한 것이다.鄭良銳교수는 이같은 像을 극명하게 하기 위하여 먼저 모든 四範類가 마련된 의도를 살피고 있다. 그것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는 남성과 均齊를 이루는 반려로서의 수양이고, 둘째는 자녀교육율 담당하는 모성의 자질향상이다. 이를 위한 실천적 명제는 다시 知背을 통한 심성의 商我과 학문을 통한 修身으로 정리될 수 있다. 후천적 교육이 미치지 못하여 옥이나 란이 돌이나 쑥이 되는 애달픔을 固正하려는 것으로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四範類에 담긴 내용을 살펴보면서 鄭교수는 그것이 지닌 부정적일 수 있는 것들을 간과하지 않고 있다. 忍從이나 菜順의 강요,

남편의 잘못에 대한 책임추궁,破植의 染制,女I 이외의 일에 대한 무관심의 요청 등은 그러한 예들이다. 단순한 규제만이 아닌 억압의 현실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병훈』이 지니고 있는 긍정적인 내용들,곧 속이 비었을 때 邪心이 끼어드니 공부로써 본심을 있게 하고, 실천으로 참암을 만들며,爲함이 없는 施惠를하라는 등의 가르침은 앞서 例擧한 부정적 내용들을 오히려 인간적 성숙의 징표로서 수렴하는 심성수양의 지침이게 하는 것이라고 보고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에 대한〈고즈넉한 語難〉이 가능했고,智浪의 均齊를 남녀간에 주장하는 반려 자로서의 <健실한 進言〉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女敎가 중간에 쇠퇴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본래적 均齊思想은 除陽,천지의 相補的 원리를 축으로 하면서 많은 사회제도 속에서조차 실질적인 균제를 이루고 있다. 남편의 직위와 동등한 대우를 아내가 받는다거나 여성이 자신의 印倍을 갖는 일, 出隊女에게도 分財를 하고, 守節의 경우에 생계를 눈치없이 영위케 하는 일, 효의 윤리 를 통하여 長權 행 사자로서의 여권을 인정하며, 부부간에 같이 경어를 쓸 뿐만 아니라 아내가 남편에 대하여 자기 를〈나〉로 呼稱하는 일, 출가 후에도 親庭姓을 지니는 일 둥이 그것이다.

『內別I』에 나타나는 이러한 여성상은 조선조의 많은선비들의 부인에게서 그 실천적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의 학문적 인 성취는 물론 그것을 위한 딸의 교육, 부부간의 학문적인 添磨, 胎敎로부터 비롯하는 교육에 대한 관심,자기를 낮추면서 남편에게 i상하는 예절,흐行을 고루 갖추어 內明하고도 殺然한 태도,기회도 명예도 없이 참암을 실천으로 승화시키는 삶 등이 그것이다.

유교적 이념이 男好女卑의 불평등을 招來한 發源으로 알고 있는 상식적인 이해의 자리에서 보면 鄭良統교수의 주장은 새로운 省察의 계기를 마련하기에 중분하다. 더우기 여성이 자신의 인간됨의 완성을 지향하면서〈깜냥대로 살고 허욕이 없도록 수도자같이 키운 이 정신이 바로 수백년 社樓을 지켜 온 底方일 것〉이며, 이렇게 키워진 딸, 곧 여성이〈남편의 淸應의 밑거름〉이 되고〈자녀의 생애에 말없는 거울〉이 되었다고 하는 鄭교수의 결론에 이르면 여성상이 지니는 문제는 인간상의 문제 로 그 차원을 달리 하면서 불평둥등에서 비롯한 忍從이아니라 均齊에서 비롯하는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인종이 새삼 부각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동 교수는 유교사회의 인간관계는 수평적인 것이 아니라 수직적인 상하관계였음을 강조하면서 異論을 제기한다. 비록 균제를 전제했다고 하지만 전제의 현실성은 전제에 이어진 主文의 현실성에 의하여 埋!沒되어 있음이 역사적인 사실이고 보면 남성과 여성의 구분도 그러한 상하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필연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되리라는 것이다. 더구나 그 여성의 역할은 부계 가족사회에서 의 家系繼承의 한계 안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男女七歲不同席으로 대표되는 독특한 남성문화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또다른 한게 안에서 생겨진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성숙은 본래적인 차원에서 운위되는 것이기 보다는 남성을 위한 여성의 인간적인 성숙으로 표현해 야 정확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季교수의 물음은 『內:洲』에 나타난 여성상이 남성이 바라는 이상적인 여성상이지 인간으로서의 여성상은 아니지 않겠느냐는 질문으로 요약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는 남편의 사회적인 신분에 따라 여성이 동등하게 대우되었다고 하는 사례에서 그 주장을 명백히 하고 있다. 즉 그러한 사례는 남녀평등이라기보다는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여실하게 드러내주는 예라고 논박하고 있는 것이다.

季교수는 유교사회 속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한 적극적인 像은 오히려 祭祀나 接寒:容에서 찾아보는 것이 無理가 덜하리라고 提宮한다. 또한 均齊를 거論하게 된 논거는 陰陽과 天地의 理念的 내용을 혼용하는데서 말미암은 과오는 아닐까고 물으면서, 아예 조선조 사회가 과연 유교적인 이념이 실질적으로 지배한 사회인가를 물어보는 일이 보다 근원적인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辛교수는 內訓이기술하고 있는 理想的 여성상의 설정 與面에는 그러한 여성이 실상 당대에 현존하지 않았다는 것의 反證일 수는 없겠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鄭良統교수는 조선조를 유교지배사회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답변을 유보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均齊의 논거가 되는 음양이나 천지의 개넘에 대해서는 비록 음과 양이 천과 지의 어떤 작용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차이 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용이나 교체하며 사용하기가 불가한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다.

鄭교수는 奉祭祀라든가 接賓容의 유교적 맥락에서의 중요성을 언급

하지 않은 것은 『內訓』의 내용에 의거하는 한, 그것이〈사람답게 되어지는 일〉에 자연스레 포용될 수 있는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성교육의 필요 때문에 생긴 『內訓』에서 찾아볼 수는 인간적인 성숙의 시각으로 보면 논평이 제기하고 있는 물음은 자명해지리라고 보는 것이다.

<歷史的 接近〉을 시도한 세 發題와 아울러 전개된 종합적인 토론에서는 각 주제가 포용하고 있는 사실들에 대한 논의보다는 여성상연구라고 하는 심포지움 자체에 대한 제言과 세 주제가 지니고 있는 歷史解揮의 문제로 초점이 집중되었다.

權斗換교수는 세 발표에서 나타나고 있는 여성과 관련된 용어들이 남성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남성문화의 所産이란 사실이 간과된 채 사용되고 있음에 대하여 우려를 나타냈다. 예를 들면 寒淫이라든가 粧忌라든가 四房歌辭라는 용어들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라 歷史敍述 자체가 남성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을 助案할 때 남성들의 언어,남성들이 기술한 역사에 의해서 여성들의 역량을 평가한다든가 여성들의 예지를 說投한다든가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태도인가를 그는 묻고 있다.

제1부의 주제발표 전체에 대한 季東沒교수의 비판적 언급도 朴교수의 의견과 궤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여성에 대한 동정이나 남성에 대한 抵抗 등의 감정적 차원이 비록 직접적으로 표출되어 있지는 않다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論旨의 분위기를 이룬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그는 남성과 여성이 어떻게 살아왔고,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데 대한 역사적 상황이 그것 자체로 분석되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와의 비교를 통하여 선명해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교수는 도대체 우리의 남성상은 있는가고 묻는다. 그러한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입장에 선다면 女性만의 연구를 지향하는 女性像 연구가 지양되어야 할 까닭은 자명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상에 대한 연구는 인간에 대한 연구를 선행해야 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대한 이해로 종걸되어 야 하며, 그것은 결국 보다 나은 인간의 삶을 위한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연구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辛東 교수는 이같은 접근을 위한 실천적인 방안으로 여성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를 提案하고 있다. 즉 딸, 아내,며느리, 시어머니, 친정

어머니 등의 독특한 가족내적 관계 구조 속의 남성과 여성의 위치나 역할에서 나타나는 여성연구, 사회적 혹은 정치적 위계나 신분, 여성 자신의 성격적 특성에 따른 분석적인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그것이 통합될 때 하나의 像의 서술이 가능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청중의 반응 중에서 경청해야 할 의견 중의 하나는 역사적 접근의 본래적인 소임에 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여성상올 서술하는 일반적인 내용들은 혼히 여성의 현실이 비참했다든가 아니면 역설적으로 미화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 한 발언자는 그렇게 기술될 수 있는 현상보다도 그 현상에 대한 해석이 더 중요하며 그것이 곧 역사적 접근의 의미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비참한 상황이 곧 여성은 비참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발언자는 예를 들어 민족사 형성에서의 여성의 공헌이 어떠했는가를 보는 시각이 이루어진다면 그러한 투시는 여성의 현실이 부정적인 것이 었든 긍정적인 것이었든 그 실제적인 상황이 객관적으로 기술되면서도 하나의 女性史를 서술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서술된 여성사를 동하여 비로소 여성상이 발견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이견이나 제언들은 發題卷들에 의하여 충분히 공감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많은 물음들은 제2부의 學際的 接近에 대한 기대로 옮겨졌다.

제1부의 역사적 접근이 사실 자체의 서술에 관심한 것이었다면 학제적 접근은 사실을 사실이게 한 所以然에 대한 탐색이 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세 발제의 주제들이 각기 정신분석학적인 접근, 종교학적인 접근, 그리고 문화인류학적 접근이라고 언표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성의 문제가 심성,신앙, 그리고 놀이라고 하는 현상을 통하여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비록〈학제적〉이라고 하는 용어에 대한 충분한 이해나 공감이 심포지움 현장에서 처음부터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역사적 접근과의 對稱槪念으로서의 학제적 접근의 성격은 발제를 경청하는 과정 속에서 무리없이 전달될 수 있었다. 반드시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는 할 수 없지만 제2부의 發題者들이 준비된 친고보다도 더 포괄적인 내용들을 발표에 담아 준 것은 제1부와는 다른 특색이었다.

먼저 이부영교수는 여성상의 원형을 심리학적인 접근을 통하여 제시하면서 그러한 女性原型이 한국의 민담 속에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찾아보면서 한국의 여성상을 정리하고 있다. 추교수는 이러한 그의 작업이 다만 여성상을 연구하기 위한 방향과 전제일 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그러한 한계를 될씬 넘어서는 것이었다.그는〈韓國民評 속의 女性原型像〉이 서양과 비교해 볼 때,첫째 본능의 뿌리가 깊어 아직 遊離되지 않은 본능과 하나인 자연에 결합되어 있는 존재,둘째, 이와 같은 맥락에서 언급될 수 있는 것이지만,너무나 모성적인 본능에 치우쳐 있는 존재 로 드러 남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에 이르기 위하여 季교수는 먼저〈像〉의 개념에 대한 조심스러운 정의를 전제한다. 그는 像이란 하나의 주장이며 요청일 수는 있으나 전적으로 보편타당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고 말한다. 예를 들어 남성이 여성을 말하는 것은 남성에 의하여 상상된 여성,곧 남성의 마음이 投射되어 가능한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 남성은 자신의 여성상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한 시대의 여성상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추符永교수는 이를 융 Jung의 이론을 근거로 서술하고 있다. 융에 의하면 인간은 일상적 삶의 토대가 되는 선험적 조건,즉 집단적 무의식을 구성하는 어떤 것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이 곧 원형이고,그 원형이 상을 띠고 나타나는 것이 원형상이다. 그런데 남성과 여성은 각기 자기들의 무의 식 속에 특유한 성격의 원형올 지닌다. 그것이 나타나는 양상의 특징이 남성에게서는 여성적인 경향으로,여성에게서는 남성적인 경향으로 드러난다. 즉 남성의 내적 인격은 여성적 경향인 anima, 여성의 내적 인격은 남성적 경향인 animus로 융은 부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與性을 보면서 현실의 이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인격의 투사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심성적 기제가 집단적으로 일어나면서 목정한 시대, 특정한 문화의 남성들의 의식상황에 따라 그사회나 시대의 이른바 여성상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리학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여성상은 여성의 묘사이기보다는 남성의〈마음 속의 여성〉像일 수밖에 없다.

民譯은 어 떠한 문화적 인 전승물보다도 뚜렷하게 이러한 원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이해에 근거하여 이교수는 韓國民譯에 나타난 여성의 모습을 찾아 한국의 여성상을 추출해내고자 한다. 그러나 한

국의 此評들은 집단적 무의식보다는 시대적 관념이 더 두드러진다. 그렇지만「심청전」,「바리데기」,「지네장터 說話」 등에서는 남성의 anima의 성숙을 표현하는 이 야기라고 볼 수도 있지만 대부분 인간의 자기실현과정을 상징화하고 있다. 즉 이런 民戰들의 여주인공들은 때로는 anima像을,때로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새로운 발전의 가능성을 지닌 생명력,곧 자기원형상올 보여주고 있다고 季교수는 설명한다. 또한「仙女와 나뭇군」「우렁 속에서 나온 美女」라든가「溫中美人J型의 이야기들 속에서는 남성의 anima像의 의식화과정이 잘 나타나면서 한국남성의 모성에의 의존이 그의 감정 성숙에 방해 가된다거나 anima像에의 맹목적인 도취와 의존의 위험성이 경고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여우누이동생」이나「美女로 둔갑한 닭」등의 民 은 부정적 anima를,「해와 달」의 호랑이나「虎願寺 傳說」의 호랑이는 파괴적animus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면 民評에 나타나는 이러한 原型像들을 통하여 한국의 여성상은 어떻게 묘사될 수 있을 것인가? 이부영교수는 융의 anima, animus發展段階說을 들면서 두 가지 사실을 우선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고대 그리스신화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女神像의 여러 단계적 발전이 뚜렷하지 않다고 하는 점이고, 둘째는 그러한 여신상의 정립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女性像은 극히 다양하게 각 발전단계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계제에서 이교수는 民歌을 통한 女性原型像의 論究를 위한 방향을 제시한다. 즉 이러한 이해에 도달했을 때 부닥치는 문제는 한국인이 女性原型의 이 많은 측면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여 이를 자기들의 것으로 동일시하고 있는가를 발견하는 일이고,이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무슨 이야기가 누구에 의하여 많이 읽혔는가가 男女別로 검토되어 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교수는 여성 일반의 특성과 한국여성의 특성을 구분하기 힘든 현실성 에도 불구하고, 한국여성의 非合理性이나 지나친 助;物性, 광신성,교육열 등을 언급하고 있고,현존하는 부정적 animus인 자유부인, 복부인 등등의 여성상이나 부정적 anima인 사이 비啓雜,傾女의 미화 둥의 현상이 지니는 문제도 여성상과의 관련에서 앞으로 숙고해야 할 문제임을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

論議의 전개를〈前提와 方向〉에 한정시킨 試論的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季교수는 새로운 통찰의 가능성을 마련해 주었다. 起!惠貞교수의

반응은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起교수는 이번 심포지움이 여성을 대상화했을 뿐 주체로서 인식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 때문에 불만족스러웠음을 실토하면서 이교수의 발표가 여성에 대한 물음이 인간에 대한 물음,곧 여성을 주체로 포착하고 이해하려는 물음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준 것이라고 평하고 있다. 특히 남성과 여성이 불균형하게 전개되어 가고 있는 현대의 상황에서 이러한 시각은 인간적 성숙의 진정한 의미를 가장 심층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일 수도 있으리라고 언급하면서 이러한 시각에서 앞으로 한국적인 남녀관계, 그리고 그것이 성숙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보다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여성상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데 대한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任敦姬교수는 원형 이론이 가지는 보편성의 탐구가 자칫 문화의 특수성에 대한 손쉬운 일반화에 떨어질 수 있는 위험을 상기 하면서 표충구조와 심층구조가 적어도 서술적 으로는 구별되어야하고,또 구별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그는 예를 들어 인간이 악할 수 있는 가능성은 심충구조에 속하고, 그런 한 보편적이지만 서양의 설화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러한 인간이 늙은 여 인으로 나타나는 데 반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젊은 여인으로 표상화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러한 표층구조가 분명하게 모색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때 발견되는 표층구조의 표상이 결국 한국의 여성원형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물음인 것이다.

鄭鎭私교수는 한국에는 여신상이 발달되지 못했다고 하는 이교수의 언급에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신화적 자료가 충분하지 않은 데 도 원인이 있겠지 만 한국남성의 anima가 레 이 야드 Layard가 주장하는 구분에 의하면 향내적인 anima이기보다는 [허수내영인 anima로 특징지울 수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다.

다시 말하면 anima가 사회적 지평으로만 확대되 었을 뿐이지 이른바 향내적인 보다 靈的 地平이라고 할 수 있는 데로 投射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신상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물음은 동시에 융의 발전단계설보다는 anima나 animus의 그 단계적 표상을 현실과 원형의 로 볼 수는 없느냐고 하는 물음이기도 하였다.

李符永교수는 이러한 질문들에 관하여 다음의 몇 가지로 대답을 정리해 주고 있다. 우선 곡이성과 보편성은 구분될 수 있는 것이지만 어

느 하나를 주장하기 위하여 다른 하나를 버릴 수는 없는 것이라고 그는 답변하고 있다. 또 그러한 입장이 바로 융의 原型理論의 자리라고 설명해 주고 있다. 또한 任교수에 의하여 열거된 마귀할멈이나 처녀귀신 등의 문제는 보다더 관심해야 할 중요한 지적이기는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렇게 단언할 수는 없다는 의견을 피 력하였다. 다음으로 鄭鎖私교수의 물음에 대하여 이교수는 융의 이론을 보다 명확하게 하면서 두 가지로 답변하고 있다. 첫째로,원형올 결코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이 현상학적인 관점에서의 원형이해가 심리학적인 이해와 다름올 지적하면서 원형이란 평장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어 이른바 발전단제에서 나타나는 네 가지가 모두 전체의 네 측면으로 되어 의식의 태도에 따라 내면화되어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向外的인 anima라든가 向內的인 anima라고 하는 것은, 만약 그런 이론이 가능하다면,하나의 입장에서 본 두 개의 현상일 뿐 그것이 융의 이론 속에 수용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의심스럽다고 말하고 있다. 둘째로,여신상의 부재라고 하는 주장은 신화적인 차원에서 언급된 것으로 民譯속에서는 다양한 여성상 속에 여신적인 含蓄을 지닌 것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면 犬母神的인 것에 故當하는 여성상들은 상당히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교수는 그리스신화에서 처럼 美의 神이라든지 智의 神이라든지 하는 뉘앙스를 가진 神들이 神話의 女神들로 정립이 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答辯과 아울러 季符永교수는 현대의 상황에 다시 관심을 옮겨현대화가 지향하는 합리적 경향에서 남성은 anima를, 여성은 animus를 상실한 현상이 각기 돈이 나 물질로, 또는 이른바 宗敎의 聖强運動 둥으로 代供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를 부연해 주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여인상올 오히려 현대의 여성들이 民譯의 어떤 여 인상과 동일시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추적해 봄으로써 그 윤곽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金烈呈교수는〈韓國女性의 傳統的 宗敎心性의 原型〉이라는 發題를 해주었다. 그런데 그는 발제에 앞서 季符永교수의 발제에 이어 학제적 접근의 그〈접근〉을 가늠할 수 있을 매우 시사적인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그 요지는 왕을 둘러싼 전통사회 구조에서 는 실질적 인 남녀구벌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또을〈숫사슴〉,곧 근원적인 남성으로 전제했을 때, 그 주변에서 그를 떠받들고 있는 王紀

나 公主나 宮女들은 그 숫사슴의 anima에 의하여 자신을 지어 간다. 그렇게 되면 다시 그 숫사슴의 anima인 여성들 둘레에 있는 내시나 宮官들은 숫사슴의 anima여성들을 스스로 모방하면서 자신들을 왕의 anima로 만들어간다. 그런데 이러한 모방은 이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른바 官吏들은 王올 모시고 政排를 하면서도 그들 스스로 숫사슴의 anima이기를 바라고 있다. 적어도 間接的으로 王의 anima인 여성들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정에 돌아오면 자신들이 숫사슴으로 바뀌어져 집안의 여성들에게 왕인 숫사슴의 anima여성이기를 요구한다. 말하자면 조선조 오백년이 이러한 순환으로 이어져 온 것이라고 본다면 그 사회 속에서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의 구분은 매우 힘들 수밖에 없다. 金교수는 이러한 난점이 종교의 경우에 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올 뿐만 아니라 현대 우리 사회의 上下關係라는 것도 이러한 式의 조선조 유산은 아닌가고 묻고 있다.

이에 이어 그는 보다 현실적인 상황에로 눈을 돌린다. 우리의 현대사회가 근대화를 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탈근대화의 경향이 또한 증대되고 있다는 사실에 유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를 荷향後cargo cult와 通 ghost dane의 比로 설명하고 있다.

즉 男的 uroboros의 차원인 표충적 동적 사회에서는 발전과 근대화의 물결이 일고 있어 荷物儀禮的 宗敎性을 지니고 있는가 하면 女權(fyuroboros의 사회인 심층적 정적 사회에서는 탈근대화의 성향이 증가하고 있어 그것이 靈舞的 종교성을 지니고 나타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하나의 昏述이기도 하다. 그런데 金교수는 이러한 우리 사회의 昏述가 어떤 내재성이 있으리라고 예상한다. 즉 발전과 근대화가 안고 있는 불안과 혼미 속에서 전체가 살아남기 위한 힘, 또는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근대화를 밑받침하는 것으로서의 탈근대화성향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金烈走교수는 이러한 荷物儀禮와 靈舞의 類型的 대립을 그의 論旨를 전개하는 直接的인 모델로 전제한다. 그러면서 이 모델이 도출될 수 있는 況(源을 탐색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한국여성의 전통적 종교심성의 원형이 될 만한 것으로 지적하는 것은 祖神話의〈바리데기이다. 바리데기는 왕권의 지속에 방해가 되어 추방된다. 그러나 衰退하는 王權 또는 男權은 그 버림받은 바리데기에 의하여 구제되고 이어진다. 버림을 받는가 하면 오히려 그 버림받은 것에 의하여 버린 자가 삶을 지탱해 가게 되는 것이다. 바리데기의 이러한 相値의

병존 ambivalence이 곧 型俗原리理이고 전통적인 여성상일 수 있다고 金교수는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强의 接神,곧 바리데기와의 합일이 지니는 社舍·文化的 구조와 기능에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이러한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천대 받고 천시받는 무당이 천대 하는 사회를 구해 주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金烈至교수는 座女가 삶과 죽음올 매게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특히 죽음의 철학, 죽음의 文學이 없는 조선조의 사회 속에 서 그녀의 역할이 어떻게 備敎社舍를 이어 가는 밑받침 구실을 해냈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삶과 죽음 사이를 조정하는 座女들의 字宙觀은 유교사회 의 功利的 現實主務의 對가 되 면서 자신들을 천대하는 그 사회에서 살아 있는 怨 이 되어 죽음과 삶의 화해를 가능하게 했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쇼교수는 가정생활올 관찰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奉祭祀의 경우,그것을 준비하는 것은 부녀자들이지만 막상 儀禮의 진행에서는 그들이 제외되어 버 린다. 그러나 그 여성들이 없으면 奉祭祀는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남성의 家特權은 嫌女子의 社會·情維權에 의 하여〈걸침〉을 받으면서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성의 이러한 사회·정서권은 約神殿이라 할 수 있는 가정에서 부녀자가 지니고 있는 司祭的기능,곧 家座的 성격과의 맺음을 통하여 雜固해지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神聖原理라 할 수 있는 종교성이 조선조 유교이념 하에서의 공적 사회에서는 거의 탈색되어 있었던 반면에 가정에서는 그것이 부녀자들에 의하여 지속되었고, 또한 그렇게 지속이 되었기 때문에 공적사회의 세속원리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사실은 비단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女性原型像의 역사적인 흐름의 관찰에서도 동일한 궤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金교수는 언급하고 있다. 남성원리와 관계가 없는 여성원리로서의 이른바 大母神이 우리의 역사에서는 1차자료에는 빠져 있는 대신에 2차자료에서 는 나타나고 있음을 그는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의 聖居山 聖母나 斑浴國의 正見母主는 왕국을 세우고 들을 낳아 그를 시조가 되게 한다. 그 과정에서 남성원리는 현저하게 감소되어 있거나 비인격화되어 있다. 그런데도 그같은 사실이 보다 중요한 문헌에서는 탈락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金교수는 义母의 小化 또는 退化現象올 찾아내고 있다. 우주적이고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大母神이

上古代社舍를 거쳐 점차 퇴화되어 가다가 조선조에 이르면서 완전히 가정내의 大母神이 되어 버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大母神像의 喪失올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남성원리와는 상관없는 그 大母神은 그 남성원리의 완성 올 위한 여성원리로 그에 의하여 끊임없이 거절당하면서도 여전히 스스로 연명하고 있다. 金烈吉교수는 바로 이같은 사실에서 우리의 女性像이 지닌 直의 병존을 보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民間倍仰의 禁忌中의 하나가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이 굿을 主幸하는 大母神이 되고, 그 굿을 통하여 불안이 극복되는 것과 같은의 에서 쇼교수는 전통적인 여성상뿐만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종교심성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면 金烈吉교수는 첫째,조선조 사회의 가정내에서의 宗敎上의 양분적 대립, 곧 남성이 祖上神을 섬기면서 集仰과 敬務의 念을 지니고 家#權을 행사하는 데 반하여 여성들은 자연신올 섬기면서 현실원리에 입각한 況術的 행위를 통하여 社位 他錯權을 행사했다는 사실,둘째, 神聖原理에 의하여 감염되지 않았던 유교적 공적 사회는 여성들에 의하여 그 종교원리를 지속했을 뿐만 아니라,그러 한 종교원리로 인하여 역설적으로 세속원리인 유교적인 합리적 공리주의는 지탱할 수 있었다는 것, 세째,上古代로부터 있어온 大母神像은 유교에 의하여 그 緩小化 현상이 촉진되었고 아울러 現吹原理의 制約올 받으면서 脫苦痛主我的 快樂原理를 좇아 또 다른 功利主義, 즉 불합리한 공리주의를 낳음으로써 당대의 현실주의적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植에 이르게 했다는 것 등을 지적하고 있다.

이같은 서술을 바탕으로 하여 다시 金교수는 다음의 세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첫째, 오늘날 종교 전반에 걸쳐 여성화현상이 현저한 것은 傳統社會 종교담당자가 여성이라고 하는 사실에 크게 기인한다는 것, 즉 韓國의 中世紀的 宗敎兩分現象의 전통성 에서 원인을 찾올 수도 있다는 것, 들째, 현대의 여성화된 종교가 철저 하게 현실원리를 살고 있는 것도 되화된 大母神像의 再現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그리고 끝으로 종교가 오늘날 극히 세속화되고 개벌화되면서 이른바 믿음의 漂浪이 이투셔지는 것도 相値의 班存으로서의 여성적인 것이 전체를 지탱하게 했던 원리, 예를 들어 불합리로 합리 속에 살아 남고,異故으로 機松I 속에 存命하게 했던 원리에서 보면 필연적인 현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 땅의 傳統的인 여성들은 況術·宗敎投合的인 大母神으로 가정의 靈媒, 혹은 보호자로 존립해 왔으며, 이 전통적인 家庭탄位의 大母神像이 오늘날 여성화된 믿음심성의 원형이라고 金교수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임돈희교수는 金교수의 이러한 발제내용에 관하여 폭넓은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가 논평을 통하여 제기하고 있는 물음은 대체로 세가지 마項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兩分的 모델의 설정에 관한 것이고,둘째는 대모神의 퇴화에 대한 것이며,세째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宗敎的이라고 한 現代宗敎의 여성화 경향의 지적에 대한 것이다. 이를 좀더 상술해 보기로 한다.

任교수는 兩分論的 모델의 설정에 대하여 몇 가지 예를 들어 異見을 개진하고 있다. 金교수의 發題內容에 따르면 남성은 近代化, 여성은 脫近代化나 傳統의 維持라고 하는 等式으로 단순화될 수 있지만, 오히려 실제에서는 남성은 대가족제도를 중하게 여기는 반면에 여성은 核家族制度를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같은 기준에서의 남녀의 雨分은 현실성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荷物儀禮와 强舞에 의한 類型論的 대비에 대해서도 任교수는 동의하지 않고 있다. 그 두 다른 宗敎性의 포괄적인 표출이 오히려 우리의 종교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양분된 類型間의 알록보다는 束學亂의 경우에서와 같은 근대화와 전통성의 동시적인 換出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남성은 조상올 숭배하고 여성은 家神을 신앙한다는 雨分論에 대해서는 그것이 다만 관점의 차이일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父系家族이라고 할지라도 母性에 기준을 두어 다시 본다면 그것은 子宮家族構造, 즉 母性이 자기의 子宮에서 태어난 자식의 이익만을 구하는 체계 일 수도 있는 것이고, 자기를 중심으로 놓고 보면 祖上崇拜란 자기의 윗세대를 위한 것인 데 반해 嫌女의 家神位仰은 대체로 자기의 아랫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구별될 수도 있으며, 다시 유교의 조상은 請해야 오는 비활동적인 대상인 데 반하여 가신신앙에서 의 조상은 활동적이고 직접적이면서도 응분의 접대를 받고는 물러가버리는 대상이라고 구분할 수도 있다. 문제는 兩分論的 類型化는 시각의 差에 따라 수없이 다양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종교현상에서 우리가 관찰해야 할 중요한 것은 남성이 祭儀룰 담당하느냐, 여성이 執典을 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 하느냐 하는

점이 아니겠느냐고 任교수는 묻고 있다. 祭祀나 굿이나 가족의 복지를 위한 것이기는 마찬가지라고 본다면 남성이 했는지 여성이 했는지 하는 것으로 조상숭배와 가신숭배를 나눌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가족의 종교현상을 둘로 나누는 것은 많은 시사를 해주기는 하지만 가족 자체를 단일한 地位賊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그는 제언하고 있는 것이다.

犬母神像의 衰退에 대해서는 우리의 문화적인 원리가 아예 犬母神像을 만들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고 임교수는 묻고 있다. 時祭나 洞祭가 국가적인 차원으로 발전하지 않은 것이 그 하나의 예일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大母神像의 緩小化過程이 설명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大母神像의 宗敎形態가 어떠했었는가를 원형의 미성숙이라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실증적으로 제시되었어야 하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任교수는 현대종교의 여성화 성향에 관해서는 사회학적 입장에서의 고찰이 더 타당하고 설득력있는 서술을 해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현상이 조선조의 양분된 전통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친족관계의 붕괴로 인한 새로운 인간관계의 모색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더구나 여성이 가족구조 속에서 종교의 대행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사실이 더 명확해진다고 任교수는 말하고 있다. 즉 여성이 더 迷!信的이라든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여성이 모든 사람의 종교행위의 대행자가 되어있어 그녀들이 종교적인 것으로 표출되고 있을 뿐이라고 생 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첨가해서 鄭後t私 교수는 조선조의 유교이 념적 公會가 다만 세속원리에 의해서만 지배된 것일까 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른바 부녀자들에 의하여 지속된 神성原理와 질적으로 대비되는 상이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만 그것은 다른 양태,예를 들면 神顯的인 것이 아니라 聖顯的인 원리로 묘사될 수 있는 다른 신성원리라고 해야 옳지 않겠느냐 하는 의견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金烈至교수는 이러한 여러 질문이나 이견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다시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그는 양분적인 類型論的 接近은 불가피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남녀 가 구분되 는 것은 현상적으로도 심성적으로도 그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 나 그는 자신의 兩分論이 결코 일人 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된 바와 같이 조상신이나 가신의 분열만을 이야기하면서 한국신은 성격이 없고, 그래서 어느 것에나 종속한다는

이론을 전개 하려 는 것이 아니라,어떻게 그 양분된 것으로 서술되는 두 종교성이 두 줄기가 되어 사회를 지탱해 왔고,그들이 통합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려는 것이 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金교수는 祭儀의 목적이 일치하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보면 남녀의 차를 두는 것이 무리한 것이라고 하는 의 견에 대하여는 祭儀의 목적보다는 사제 쪽에 관심을 두는 것이 종교현상의 서술을 위해 보다 타당한 접근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공통의 것이 발견될 때 중요한 것은 差를 잃지 않아야 하고 바로 그 差를 주목하는 일이 보다 긴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大母神의 성격에 관하여 金烈吉교수는 그것이 국가나 사회통합의 차원에서 일관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음올 예시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변천의 역사가 뚜렷하게 보이고 있음을 다시 설명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大母神像이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어떤 문화적 원리,예를 들면 任교수가 언급한 바와 같은 忠보다는 求의 원리가 지배하는 그러한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조선왕조사회에서도 공적인 종교를 통하여 관료나 사제가 되어 국가적인 통합을 이루려 했고, 「용비어천가」에서도 새로운 왕국의 통합성을 설득력있게 노래하고 있으며,그 위에 올라가 고려, 고구려 등에 이르면 왕조의 神聖化를 위한 무속원리의 부착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한다. 大母神의 부재가 아니라 大母神의 왜소화현상을 실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울러 쇼교수는 사회학적 서술의 가능성을 그대로 수긍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우리가 종교현상에 관해 관심하는 한 우선 종교적인 시각에서 그 현상을 서술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회현상으로 보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상에 있어서도 전통적으로 여성들에 의하여 구조적 통합이 이루어진 세계상, 예를 들면 민담의 경험 속에 내재해 있는 할머니, 외할머니, 어머니로 이어지는 여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세계상올 먼저 승인하고 전통사회를 통해 있었던 그러한 것을 오늘날의 여성들도 간접적으로나 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사회학적 인 시 각도 그 然後에 비로소 의미 가 있을 수 있으리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金교수는 유교사회가 완전히 세속원리에 의하여 지배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 만 유교의 상징성이 신성원리에 하는 초월성이나 초자연성을 과연 함축하고 있느냐 하고 되묻는다. 오히려 그러한 것이 조선조의 공적 사회에서

발견될 수 있다면 그것은 유교에서가 아니라 道敎에서 일 것이라고 그는 첨언하고 있다.

「놀이文化와 韓國女性J과의 關係稱造를 밝혀 보려는 이相일교수의 시도는 놀이와 祭儀와의 구조적 연결에 관한 성찰에서부터 비롯한다. 그는 태초에 놀이가 있었다는 호모 루덴스의 입장에서 제의가 지닌 놀이의 상징적 표상올 지적하면서 놀이의 自足的 충만의 속성이나 無 性의 속성이 제의에 의해서 활용되어짐을 서술한다. 이같은 이해의 자리에 서면 예를 들어 굿올 주도하는 여성적인 것의 기능은 여성의 활성적이고 생명적인 상징성과 아울러 놀이를 근원적으로 여성적인 것이라고 운위할 수 있는 논리적 맥락을 확보하게 된다.

그런데 놀이가 이처럼 여성적인 것인 데도 불구하고 조선조에서는 그 놀이문화가 왜곡되었으며, 이와 아울러 여성상도 그렇게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고 이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를 보다 상세하게 역사적 과정을 거쳐 진술하고 있다. 上古代로부터 고려조까지는 놀이 일반에 대한 여성의 참여나 기여가 분명했음에 반하여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놀이문화의 忍辱의 역사라고 할 만한 사태가 지속하고 있음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교수는 놀이란 고통이나 비애, 그리고 恨의 축적을 풀어 준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 놀이의 주체인 여성은 이른바 풍요의 環帶라고 일컬어지는 다산과 창조의 상징적 기능을 가진다. 따라서 祭儀는神을 놀이容盤로 만드는 여성적인 힘을 차용한 주술,곧 여성우위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조에서는 內外法이라든가 부녀자들의 유회는 물론 觀數조차도 금기시함으로써 풍요祭의 믿음이 밀려 나가면서 여성마저도 밀려나 버려 결과적으로는 늘이와 생산성이 분리되고, 늘이의 社會裝固化마저 불가능하거나 굴절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불건전한 사회적 현상, 곧 생산적 동인으로서의 집단연회의 제사적 성격이 미미해져 버리고, 遊女가 출현하여 왜곡된 형태로 놀이와 여성이 지속되어 왔다고 보는 것이다.

놀이의 탄력성을 믿음과 정서라고 한다면 사회구조가 놀이를 수용하는 것은 역사가 理性的으로 발전할 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 반동적 일 때조차도 늘이가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억 압된 늘이정신은 여성 목유의 유연함을 극한까지 확충하면서 스스로 이를 굴절시켜 그 목숨을 유지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그 변용된 놀이

가 부상하면서 두 가지 다른 현상을 빚게 된다. 놀이의 카오스를 그대로 드러내어 본능적인 이기심을 발로하든가 자기애를 반영하는 향락적 형태로 무절제하게 나타나는 부정적 현실을 있게 하기도 하고, 극기의 자기형성을 가능케 해서 그 잠재적 능력을 절제 속에 가다듬는 이른바 놀이심성의 창조적 계승이 가능하게 하는 긍정적 현실을 있게 하든가 한다. 이같은 이해에 근거하면서 季相일교수는 비록 그부정적인 전개가 오늘의 여성문화 속에서 자주 발견되기는 하지만 놀이문화의 비참한 역사를 겪어 오면서 우리는 오히려 놀이의 원초적 생명력과 활성을 고난과 시련의 세월로 醉化시켜 단아한 原母像을 彫 하였다고 결론짓고 있다. 아울러 季교수는 이제까지 여성놀이문화가 타율적으로 주어진 제도나 사회적 이넘에 의하여 좌우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여성주체의 놀이문화형성,다시 확대한다면 문화 속의 여성다움을 회복하는 주체적 성찰의 긴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起혜貞교수는 놀이와 여성과의 관계구조를 밝히려면 남성놀이의 대상으로서의 여성,곧 남성놀이문화에서의 여성상을 찾아보는 것이 보다 직접적 이고 현실적 일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의 견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起교수는 여성적인 것이 억압된 것과 놀이가 억압된 것을 같이 보는 시각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동의를 표하면서도,그러나 여성적인 것과 놀이적인 것은 동일시할 수 없는 구별이 명백해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이러한 발표자의 입장에 선다면 무엇보다도 일과 놀이와의 관계를 서술하는 데서 상당한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의 가장 절실한 문제가 일을 어떻게 늘이처럼 할 수 있느냐, 즉 어떻게 즐기며 살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여성과만 관련지우려 할 때 서술의 논리 가 일관성올 결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사회는 여성적인 것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사회 일 뿐만 아니라 남성적 인 것도 마찬가지로 완전히 개화할 수 있는 상황이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越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논평에 대하여 이相일교수는자신의 접근이 지닌 본래적인 의도를 설명하면서 물음에 대한 답변을 해주고 있다. 물론 놀이는 여성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남성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흔히 여성적인 것의 전통상올 忍從으로 묘사하는 데 그렇게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것만이 아닌 어떤 것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 하는 것이 자신의 문제였다고 이교수는 말하고 있다. 여성적인 것의 역동성, 모성

상에서의 역동적인 것으로 어떠한 것이 있을까 히는 것을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다.

특별히 이 같은 문제의식은 현대의 산업 사회 구조 속에서 여성의 역할이 어떻게 발휘될 수 있을 것인가를 짐작해 보고 싶은 의도와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교수는 놀이와 祭儀의 상관성에 유념하게 되고 우리의 전통상으로 전승되는 굿판의 주제자인 여성상과 아울러 여성과 놀이문화와의 관계를 하나의 가설로 설정하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여성상을 놀이문화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원형접근이론을 위한 하나의 작업가설일 수 있다고 그는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동시에 우리의 역사가 놀이문화로서의 여성문화를 개방시켜 왔더라면 분명히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는 다른 형식의 한국적 잠재 력 이 개발될 수도 있었으리 라는 가정 마저도 포함하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學際的 接近이라고 이름한 제2부의 논의에서는 제1부의 歷史的 接近을 園統한 토론에서보다 더 많은 質疑와 의견들이 개진되 었다. 그것은 이른바 원형접근이 가지는 생소함에도 그 까닭이 있었고, 제1부에서 제기된 전체적인 문제의 발견적 진전의 탓이기도 하였다.

가장 기본적인 질문은 원형이 보편적인 것,또는 일반적인 것이라고 전제할 때 그것이 우리의 독특한 것, 즉 대체로 조선조 중기 이후의 사회조직 속에서 형성되어 지금까지 잔존해 있는 어떤 像을 과연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發제內容과 직접적인 관련을 지어 이미 그러한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보다 이론적인 주장이 아쉬웠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相일교수는 이번 심포지움의’ 목적을 자신은 가부장적 유교문화에서 형성된 여성상이 현대사회에서 되살아날 때 어떤 부정적인 측면에서 부화될 것인가 하는 것을 찾아보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여성적인 것을 원초적인 것, 근원적인 것으로 두고 그것의 억압에 대한 보복이 어떻게 사회현상화하는가를 선명하게 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한 繼起的 變選의 서술만이 아니라 그러한 서술,곧 역사적 접근이 간과할 수도 있을 역사를 가능케 하는 원래적인 것으로서의 원형에 대한 관심이 불가피하고, 그러한 문제의식이 원형적인 접근의 바탕이 되 었다고 설명

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접근의 보편성에만 편향하여 특수성을 부정하는 것이 원형이론의 지향이 아님올 상기시키고 있다.

또 하나의 두드러진 관심은 바리데기에 대한 것이었다. 座祖神,括의 주인공인 바리데기에 대한 관심은 제2부의 이符永,金烈走 두 교수의 發遇에 의하여 자극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동기 는 바리 데 기에 대한 물음을 물은 女性勝衆들이 바리데기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心他的 공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직접적인 것이 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왜냐하면 質疑의 내용이 그러한 推論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선 이러한 관심에서 제기된 첫번째 질문은 극히 우회적인 것이었다. 도대체 여성이 바리데기로 표현되지 않고 聖人이나 君子로 묘사된 경우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그 예가 없는 것일까.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殺身成仁의 典型일 수도 있는 바리데기가 왜 하필이면 王權과의 연결에서 자신의 새로운 正賊를 展開치 않고 천시 당하고 천대받는 무당이 되어야 했느냐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anima나 animus를 운위하는 원형적인 접근에 의해서 새로운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필이면 바리데기가 座祖神으로 화하는 것은 당대의 시대적 특성이나 사회적 정황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다시 원형적인 것의 보편성과 역사적 특수성의 문제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對하여 이符永교수는 바리데기가 현실적인 왕권에 만족하지 建고,그러한 것올 넘어 세속적 원리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는 超越的存在者가 되겠다는 강릴한 희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 座®神話의 바리데기는 오늘날의 천대받는 무당과는 그 근원적인 像이 다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오히려 무속이 역사적인 전승 속에서 座祖神話가 지니고 있는 그러한 초월에의 의지를 脫色시켜 버린데 있다. 그것이 바리데기를 座祖로 하는 그이후의 뭇두당들이 남성지배의 사회에서 얕잡아 보이게 된 원인이며, 그것이 곧 聖人君子가 아니라 바리데기가 된 까닭이기도 하고,나아가 보편성 속에서 만나지는 우리의 특수성이기도 한 것이라고 이교수는 주장한다.동일한 질문에 대하여 이相일 교수는 季符永교수와는 다른 의견율 제시하고 있다. 이相일 교수는 바리데기가 스스로 높아질 수 있었음에

도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에서 볼 때 바리데기는 높아짐올 뛰어넘는 초월적인 차원으로의 높아짐을 바라서 현실적인, 높아질 수 있음을 버린 것이 아니라 현실보다 낮은 또다른 차원에의 낮음에 이르려는 동기에서 높아질 수 있음을 버린 것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즉 문제의 소멸을 염려하여 스스로 기층문화 속에다 자신을 던져 기본적인 문화의 생명력을 유지해갔기 때문에 바리데기는 M祖가 된 것이 라고 이相일교수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두 發題者의 서로 다른 설명이 지닌 포괄성에도 불구하고 바리데기가 座祖가 되어 버린 사실이 시대적인 制約의 필연이 었으리라는 이해는 쉽게 불식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왕권과의 결탁이 싫었으면 어떤 외딴 섬에 가서 유토피 아를 세운다는 투의 결 말에 이를 수도 있 었을덴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座祖가 될 것올 선택한 것은 역시 여성이 지닐 수밖에 삶었던 時代相의 반영이리라고 생각한다는 의견이었다.

金烈규교수는 神活가 지닌 字®性을 인간적인 차원으로 내려서 이야기하니까그러한 가정이 가능한 것이 라고 지적 하면서 유토피아의 건설 등과 같은 모티브가 바리데기 說話의 결말로 이루어 진다면 이미 그것은 신화가 아니라 傳說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金교수에 의하면 傳說은 時代相을 상당히 반영하고 있다. 즉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화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神話의 장르가 지닌 字宙性이 더이상 침해를 받지 않는 자리에서 바리데기가 이해될 수 있기를 그는 요청하고 있다.

마지막 토론자의 발언은 이번 심포지움의 제1부와 제2부의 發題와토론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한 하나의 女性 聽取者의 의견이면서 동시에 심포지움의 내용을 새로운 地平에로 밀어 올리는 극히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는 여성상의 문제를 위한 관심의 초점을 여성의 내면적 성숙에 다 둘 것을 제안하면서 그 구체적인 것으로 여성들의 이니시에이숀 initiation을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通i過儀段를 고통의 象微的 超究;의 계기로 이해하면서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당대의 그 나름의 고통과 아픔이 있는데, 바로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여성이 그것을 어떻게 겪어 가느냐 하는데서 여성상을 찾고 또그럴 수 있는 여성상을 정립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아니 겠느냐고 묻는다. 그는 이제까지 논의된 바 있는 조선조의 여성상을 묘사하는 非

人間的 忍從이라든지 현대의 여성상으로 등장한 福嫌人이라든지, 급증하는 離婚率에서 발견되는 여인상,宗敎에 歸依하는 여인상 등이 그이유야 원초적인 것에서 왔든 시대적인 반영이든간에 당대의 고통으로 등장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이 발언자는 바로 이 계제에서 무당에 대한 각별한 관심올 갖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 냐하면 무당은 않은 사람, 通過祭儀를 거친 사람,그래서 고통을 초극한 성숙한 여인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들이야말로 어머니,할머니로 이어지는 한국여성의 아픔을 대행한 사람이고,유교적 형식주의에서 소거된 우주관과 靈 관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비록 그들의 역할이나 像이 현대인과는 어떤 괴리를 빚을 수밖에 없다할지라도 그들을 통해 한국女性의 傳統像을 발견할 때 우리는 오늘을 사는 女性像을 비로소 논의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는 호소하고 있다.

이틀 동안의 심포지움이 정확한 개념올 구사했고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했으며 그런 것에 바탕한 완벽한 소통이 발표자, 토론자 그리고 참석자들 사이에 이루어 졌다고 판단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 한 것은「韓國女性의 傳統像」이라고 하는 주제가 포용하고 있는 水平內의 온갖 영역올 누구나 함께 遊泳할 수 있었던 사실이다. 역사적인 접근이나 학제적 인 접근이 서로 유리할 수 없음을 확인했고 그 각기의 접근이 담고 있는 주제들이 결코 홀로 표류할 수 없음을 터득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심포지움이 여성에 관한 논의의〈다른 出發〉을 가능하게 했다는 데 있다.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溫情的인 女人論에서 말미암은 온갖 否定的 함축이나 激情的인 女權論에서 말미암은 온갖 否定的 含卷의 한계가 명백히 드러날 수 있었다는 데서 <다른 출발〉이 확언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심포지움의 象微的 性格은 이러한 의미에서 충분히 그 內實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象微의 소통의 현실성을 서술하는 일은 또 다른 과제 이다. 다만 우리는 그 일을 위한 마무리 일을 맡아했고,그래서 그 마무리가 새로운 처음을 여는 비롯함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韓國女性의 傳鏡像

출판등록 1966. 5.19 제 1-142호

우편대체 계좌번호 010041-31-523282

1190 서울 종로구 관철동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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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4-2000, 735-8524(영업부)

·찍은날 ·펴낸날

1985년 9월 1일 1985년 9월 15일

·펴낸이 ·펴낸곳

朴孟浩 民音社

지은이

可 k 효總 §훌德順 鄭良觀 李符永

옳컸 l圭 李相日 鄭鎭弘(논문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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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1,800원

張德順

서울대 국문과 및 同대학원 졸업

현재 서을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

저서로는 『國文學通論』、『韓國說話文學所究』외 다수

鄭良婉

서울대 국문학과 및 同대학원 졸업

현재 성신여대 한문교육학과 교수로 재직중

저서로는 『이조후기 한시연구』、『규합총서』외 다수

河故網

서울대 사학과、연세대 사학과 대학원 졸업

이대교수를 거쳐 현재 연세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

저서로는 『高麗地方制度의 所究』、『救養韓國史』외 다수